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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존을 위한 성서의 투쟁

보존을 위한 성서의 투쟁

제2장

보존을 위한 성서의 투쟁

성서가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명하는 증거의 줄은 많습니다. 각 줄이 모두 튼튼하지만, 모든 가닥을 한데 합치면, 끊을 수 없을 만큼 튼튼합니다. 우리는 이 장과 다음 장에서, 단지 한 가닥의 증거의 줄, 곧 책으로서의 성서의 역사를 검토할 것입니다. 이 주목할 만한 책이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온 것은 진실로 기적에 가까운 일입니다. 독자가 직접 사실들을 살펴보기 바랍니다.

1. 성서에 관한 세부점 몇 가지는 무엇입니까?

성서는 단지 한권의 책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성서는 더러는 짧고 더러는 매우 긴, 66권의 책으로 이루어진 풍부한 내용이 들어 있는 총서로서, 법률, 예언, 역사, 시, 교훈 및 그 외의 대단히 많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출생하시기 여러 세기 전에, 충실한 유대인 곧 이스라엘인들이 이 책들 중의 처음 39권을—대부분 히브리어로—기록하였습니다. 이 부분은 흔히 구약이라고 불립니다. 나머지 27권의 책은 그리스도인들이 희랍어로 기록하였는데, 신약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자체의 내부적 증거와 대부분의 고대 전승에 따르면, 이 66권의 책은, 이집트(애굽)가 지배적인 강국이었을 때부터 시작해서 로마가 세계의 여왕이었을 때까지, 약 1,600년간에 걸쳐서 기록되었습니다.

오직 성서만 보존되었다

2. (ㄱ) 성서가 기록되기 시작했을 때, 이스라엘의 상황은 어떠하였습니까? (ㄴ)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그 밖의 저술물들 중에는 무엇이 있었습니까?

2 3,000여 년 전, 성서 기록이 시작되었을 때, 이스라엘은 중동에 있는 많은 나라 중에서 하나의 작은 나라에 불과하였습니다. 주변 나라들에는 혼란스러울 만큼 다양한 신과 여신들이 있었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여호와였습니다. 그런 시기중에, 이스라엘인이 종교 문헌을 만든 유일한 국민은 아니었습니다. 다른 나라의 국민들 역시 자기들의 종교와 국가적 가치관을 반영하는 저술물들을 만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우가리트어(현재의 시리아 북부 지역에서 통용된 언어)로 기록된,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시에 관한 아카드인의 전설과 라스샴라 서사시들은 분명히 아주 널리 알려졌을 것입니다. 당시의 방대한 문헌 중에는 이집트어로된 「이푸-웨르의 훈계」(The Admonitions of Ipu-wer) 및 「네페르-로후의 예언」(The Prophecy of Nefer-rohu), 갖가지 신들에게 바친 수메르어 찬가들, 그리고 아카드어로 된 예언서와 같은 저술물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1

3. 무슨 사실이 성서를 같은 시기에 중동에서 저술된 그 밖의 종교 문헌들과 차이가 나게 합니까?

3 하지만, 중동의 그런 저술물들은 모두 같은 운명에 처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런 저술물들은 잊혀졌으며, 심지어 그런 것들을 기록한 언어까지도 소멸되고 말았습니다. 고고학자들과 문헌학자들이 그런 저술물들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고, 그런 것들을 읽는 방법을 발견한 것은 근년의 일에 불과합니다. 반면에, 히브리어 성서의 최초로 기록된 책들은 우리 시대까지 보존되었으며, 아직도 널리 읽혀지고 있습니다. 때때로 학자들은 성서의 히브리어 책들이 어떤 면으로인가 고대의 문헌들로부터 유래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처럼 많은 문헌이 잊혀진 반면에 히브리어 성서가 보존된 사실은, 성서를 의미 심장하게 차이가 나게 합니다.

말씀의 수호자들

4. 이스라엘 백성이 직면한 무슨 심각한 문제들 때문에, 성서의 보존이 회의적으로 보일 수 있었습니까?

4 분명히,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성서가 보존되리라는 것은 처음부터 당연한 일로 예상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성서를 만든 공동 사회는 매우 어려운 시험과 극심한 억압을 당했기 때문에, 성서가 우리 시대까지 보존된 사실은 진실로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그리스도 이전의 오랫동안, 히브리어 성경(“구약”)을 만든 유대인은 비교적 작은 나라의 국민이었습니다. 유대인은 서로 패권을 잡으려고 다투는 강력한 정치 국가들 가운데서 불안을 느끼며 지냈습니다. 이스라엘은 생존을 위해서, 잇달아 일어난 블레셋, 모압, 암몬 및 에돔과 같은 나라들과 투쟁해야 하였습니다. 히브리인이 두 왕국으로 분열되었던 기간중에, 잔학한 아시리아(앗수르) 제국은 북쪽 왕국을 사실상 완전히 파괴하였습니다. 한편, 바빌로니아(바벨론)인은 남쪽 왕국을 멸망시키면서,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갔으며, 남은 자들만이 70년 후에 돌아왔습니다.

5, 6. 히브리인이 별개의 민족으로 존재하는 것 자체를 위태롭게 한 무슨 시도들이 있었습니까?

5 심지어 이스라엘 민족을 말살하려고 시도한 일에 대한 보고도 있습니다. 과거 모세 시대에, 파라오(바로)는 이스라엘의 새로 태어난 남자 아기를 모두 죽이라고 명령하였습니다. 파라오의 명령이 그대로 시행되었더라면, 히브리 백성은 멸절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출애굽 1:15-22) 훨씬 뒤에, 유대인이 페르시아(바사)의 통치를 받게 되었을 때, 유대인의 원수들은 유대인을 말살하려는 의도가 담긴 법을 통과시키려고 획책하였습니다. (에스더 3:1-15) 그런 계략이 실패한 일을 기념하여 유대인은 지금도 부림절을 지킵니다.

6 나중에, 유대인이 시리아의 지배를 받을 때에도, 왕 안티오코스 4세는 유대 나라를 그리스(헬라)화하려고 매우 열심히 노력하면서, 유대인에게 그리스의 관습을 따르고 그리스의 신들을 숭배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그 왕 역시 실패하였습니다. 주변 대부분의 국가 집단들은 세계 무대에서 하나씩 사라졌지만, 유대인은 완전히 멸망당하거나 동화되지 않고 생존하였습니다. 그리고 성서의 히브리어 성경도 유대인과 함께 보존되었습니다.

7, 8. 그리스도인들이 당한 환난이 어떻게 성서의 보존에 위협이 되었습니까?

7 성서의 두번째 부분(“신약”)을 만든 그리스도인들 역시 억압받는 집단이었습니다. 그들의 지도자 예수는 일반 범죄자처럼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분이 죽으시고 얼마 안 되었을 때, 팔레스타인의 유대 당국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압제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그리스도교가 다른 나라로 퍼져 나가자,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쫓아다니면서, 그들의 선교 활동을 방해하려고 하였습니다.—사도 5:27, 28; 7:58-60; 11:19-21; 13:45; 14:19; 18:5, 6.

8 네로 시대에 이르러, 시초에는 관용적이던 로마 당국자들의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그 사악한 황제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했던 “격렬한 고문”에 대해 타키투스는 자랑삼아 말했으며, 네로 시대 이후로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사형에 해당하는 죄였습니다.2 기원 303년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성서를 정면으로 반대하는 조치를 내렸습니다. * 그리스도교를 없애버리려는 노력의 일환으로서, 그 황제는 그리스도교 성서를 모두 불태우도록 명령하였습니다.3

9. 만약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을 말살하려는 운동이 성공했더라면, 무슨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9 이런 억압 및 민족 말살 운동은 성서의 보존에 실질적인 위협이 되었습니다. 만약 유대인이 블레셋인과 모압인의 길을 갔더라면, 혹은 처음에는 유대 당국자들이, 다음에는 로마 당국자들이 그리스도교를 없애버리려고 한 노력이 성공했더라면, 누가 성서를 기록하고 보존했겠습니까? 다행스럽게도, 성서의 수호자들—처음에는 유대인, 다음에는 그리스도인—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으며, 따라서 성서도 보존되었습니다. 하지만, 성서의 보존에 관련된 것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성서의 충실도에 영향을 미칠 만한 또 다른 심각한 위협이 있었습니다.

틀리기 쉬운 복사물들

10. 성서는 원래 어떻게 보존되었습니까?

10 앞서 언급한, 결국은 잊혀진 고대의 저술물들 다수는 돌에 새기거나 견고한 점토판에 각인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서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성서는 원래 파피루스 혹은 양피지—훨씬 더 손상되기 쉬운 재료—에 기록되었습니다. 따라서, 원 필자들이 쓴 사본들은 매우 오래 전에 사라졌습니다. 그러면 성서가 어떻게 보존되었습니까? 수많은 복사물이 공들여 손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인쇄술이 출현하기 전에는 책을 복제하는 데 보통 그런 방법을 사용하였습니다.

11. 손으로 사본을 복사하는 경우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이 불가피합니까?

11 하지만 손으로 복사하는 데에는 위험이 따릅니다. 유명한 고고학자이자 대영 박물관의 문헌 관리 책임자인 프레더릭 케년 경은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아직까지는 인간의 손과 뇌가 기다란 저술물 전체를 절대로 과오 없이 완벽하게 복사할 수 있었던 적이 없다. ·⁠·⁠· 잘못이 끼어 드는 것은 기정 사실이었다.”4 일단 사본에 잘못이 끼어 들면, 그런 사본이 장차 복사물을 만드는 근거가 됨으로써 잘못이 반복되었습니다. 오랜 기간에 걸쳐서 많은 복사물이 만들어지면서, 인간의 수많은 과오가 끼어 들었습니다.

12, 13. 누가 히브리어 성경의 원문을 보존하는 책임을 맡았습니까?

12 수많은 성서 복사물이 만들어진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런 복제 과정에 의해 성서가 전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바뀌지 않았음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선 히브리어 성서 곧 “구약”의 경우를 고려해 봅시다. 기원전 6세기 후반, 유대인이 바빌로니아에서의 포로 생활로부터 돌아왔을 때, 소페림 곧 “서기관”으로 알려진 일단의 히브리어 학자들이 히브리어 성서 원문의 관리인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책임은 공적, 사적인 숭배에 사용하기 위해 성경을 복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소페림은 고상한 동기를 지닌 전문가들로서, 그들이 한 일은 질적인 면에서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13 통용 기원 7세기에서 10세기 사이에, 소페림의 후예들은 마소레트였습니다. 마소레트라는 이름은 “전통”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본질적으로는 그들 역시 전통적 히브리어 원문을 보존하는 책임을 맡은 서기관들이었습니다. 마소레트들은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서 일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서기관은 적절하게 확실성이 증명된 사본을 주(主)원문으로 사용해야 했으며, 어떤 내용도 기억에 의존해서 기록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서기관은 기록하기 전에 철자를 하나하나 점검해야 하였습니다.5 노르만 K. 고트발트 교수는 이렇게 보고합니다. “그들이 주의를 기울여서 자신의 의무를 수행했다는 점은, 새로운 사본을 모두 교정을 보아서 결함이 있는 복사물은 즉시 버려야 한다고 되어 있던 랍비의 요구 조건에서 나타난다.”6

14. 무슨 발견으로 인해 소페림과 마소레트의 성서 원문 전달의 정확성을 확증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습니까?

14 소페림과 마소레트의 원문 전달은 어느 정도나 정확하였습니까? 1947년까지는 그런 질문에 대답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빠진 부분이 없는 상태로 접할 수 있는 가장 오래 된 히브리어 사본이 통용 기원 10세기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947년에, 사해 근처의 동굴들에서 대단히 오래 된 몇몇 고대 사본의 단편들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에는 히브리어 성서의 일부 책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다수의 단편은 그리스도 시대 이전으로 소급하는 것이었습니다. 학자들은 원문 전달의 정확성을 확증하기 위해서 그런 단편들을 기존의 히브리어 사본들과 비교해 보았습니다. 그처럼 비교해 본 결과는 어떠하였습니까?

15. (ㄱ) 「이사야」서의 사해 두루마리 사본과 마소레트 원문을 비교한 결과는 어떠하였습니까? (ㄴ) 사해에서 발견된 일부 사본에서 원문상의 차이가 어느 정도 나타난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무슨 결론을 내려야 합니까? (각주 참조.)

15 발견된 사본 중 가장 고본에 속하는 것은 빠진 부분이 없는 「이사야」서인데, 그것의 원문이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마소레트 성서의 원문과 비슷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밀러 버로스 교수는 다음과 같이 기술합니다. “[최근에 발견된] 성 마가의 이사야 두루마리와 마소레트 원문간의 차이의 대부분은 복사상의 실수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런 것들을 제외하고는, 중세기 사본들의 원문과 전체적으로 놀랍게 일치한다. 훨씬 더 오래 된 사본이 그와 같이 놀랍게 일치된다는 사실은 전통적인 원문의 일반적인 정확성에 대해 확실한 증거가 된다.”7 버로스는 이렇게 부언합니다. “천년 동안에 원문이 그처럼 거의 변경없이 보존되었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

16, 17. (ㄱ) 우리가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경 원문의 온전함을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프레더릭 케년 경은 희랍어 성경의 원문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증언하였습니까?

16 그리스도인들이 희랍어로 기록한 성서 부분인 소위 신약의 경우, 복사자들은 고도의 훈련을 받은 전문 소페림이라기보다는 재능있는 비전문가에 가까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당국자들의 처벌 위협 아래서 일하면서도, 자신의 일을 심각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두 가지 점에서,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원문이 원래의 필자들이 기록한 것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성서의 히브리어 부분의 경우보다도 원본이 기록된 시기에 훨씬 더 가까운 때로 소급하는 사본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요한 복음의 한 단편은 2세기 전반의 것으로서, 요한이 자신의 복음서를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와 불과 50년도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둘째로, 보존된 사본의 수가 대단히 많다는 점은 원문의 온전함을 증명하는 강력한 증거가 됩니다.

17 이런 점에 관해서, 프레더릭 케년 경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습니다. “성서 원문이 본질상 확실하다는 점은 아무리 강하게 단언해도 지나치지 않다. 신약의 경우는 특히 그러하다. 신약의 사본의 수, 그것으로부터 옮긴 초기 번역본의 수, 그리고 교회의 아주 오래 된 저술가들이 그것으로부터 인용한 글의 수가 대단히 많기 때문에, 모든 의심스러운 구절들의 진본(真本)이 그런 고대 권위자들 중의 누군가에 의해 보존되었음이 거의 확실하다. 세상에 있는 고대의 다른 어떤 책도 그렇다고 할 수 없다.”10

사람들과 언어

18, 19. 성서는 어떻게 원래 기록된 언어로만 국한되지 않았습니까?

18 성서 기록에 사용된 원래의 언어 역시 장기적인 면에서는 성서의 보존에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처음 39권은 주로 이스라엘인의 언어인 히브리어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어는 널리 알려진 적이 없는 언어입니다. 만약 성서가 그 언어로만 머물러 있었다면, 성서는 유대 민족과 히브리어를 읽을 줄 아는 소수의 외국인들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원전 3세기에,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사는 히브리인들을 위해서, 성서의 히브리어 부분을 희랍어로 번역하는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희랍어는 당시 국제어였습니다. 따라서, 비유대인들도 히브리어 성서를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 성서의 두번째 부분이 기록될 시기가 되었을 때에도, 희랍어는 여전히 매우 널리 통용되는 언어였기 때문에, 성서의 나중 27권은 희랍어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희랍어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곧바로 성서의 히브리어와 희랍어 부분은 모두 초기 몇 세기 동안의 일상 언어 곧 시리아어, 콥트어, 아르메니아어, 그루지야어, 고트어 및 에티오피아어와 같은 언어로 번역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로마 제국의 공식 언어는 라틴어였기 때문에, 라틴어 번역본은 “공인된 번역판”을 의뢰해야 할 정도로 많은 수가 만들어졌습니다. 이 번역본은 기원 405년경에 완성되어, 「불가타역」(라틴어 “불가타”는 “대중적인” 혹은 “일반적인”이라는 뜻)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20, 21. 무엇이 성서의 보존에 장애물이 되었으며, 그런 장애물들을 극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20 살펴본 바와 같이, 성서가 통용 기원 초기의 몇 세기까지 보존되어 내려오는 데는 많은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성서를 만든 사람들은 적대적인 세상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멸시받고 박해받는 소수 민족에 속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성서는 복사 과정에서 쉽사리 심하게 왜곡될 수 있었지만, 왜곡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성서는 특정한 언어를 말하는 사람들만 접할 수 있게 될 위험에서 벗어났습니다.

21 성서를 보존하기가 그토록 어려웠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서 자체가 이렇게 알려 줍니다.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라.]” (요한 1서 5:19) 이런 점으로 볼 때, 우리는 세상이 진리를 공표하는 일에 대해 적대적일 것으로 기대할 수 있으며, 사실 실제로 그러하였습니다. 그러면, 그와 같은 어려움을 직면하지 않은 그 밖의 많은 문헌은 잊혀지고 말았는데, 유독 성서가 보존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서는 그 질문에 대해서도 답합니다. 성서는 이렇게 알려 줍니다. “오직 주[여호와, 신세]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베드로 전 1:25) 성서가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어떤 인간의 힘도 성서를 없앨 수 없습니다. 그리고 현 20세기에 이르기까지, 그 말씀은 참되었습니다.

22. 통용 기원 4세기초에 무슨 변화가 있었습니까?

22 하지만, 통용 기원 4세기에, 결과적으로 성서에 새로운 공격을 가하고 유럽 역사의 진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성서 복사물을 모두 없애려고 시도하고 난 지 겨우 10년 만에, 제국의 정책이 변경되어 “그리스도교”가 합법화되었습니다. 12년 후인 기원 325년에, 한 로마 황제는 니케아 “그리스도교” 공의회를 주재하였습니다. 그처럼 호의적인 사태 진전으로 보였던 일이 성서를 위험에 처하게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다음 장에서 대답을 알게 될 것입니다.

[각주]

^ 8항 본 출판물에서는 전통적인 “주후” 및 “주전”이라는 용어 대신, 보다 정확한 용어인 “기원”(통용 기원) 및 “기원전”(통용 기원전)을 사용한다.

^ 15항 사해에서 발견된 모든 사본이 기존의 성서 원문과 그처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일부는 원문상의 차이를 상당히 많이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런 차이들이 원문의 본질적 의미를 왜곡시켰다는 뜻은 아니다. 아메리카 가톨릭 대학교의 패트릭 W. 스케헌에 의하면, 대부분은 “나름대로의 완벽한 논리에 근거해서 [성서 원문을] 개정”했음을 나타내며, “따라서 형태는 확장되었지만 본질은 원래대로 남아 있다. ·⁠·⁠· 기본적인 태도는 신성한 것으로 간주되는 원문에 대한 분명한 공경심으로서, 원문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여 (우리의 식으로 말하자면) 성서가 성서를 설명하게 하는 태도다.”8

또 다른 주석가는 다음과 같이 부언한다. “온갖 불확실한 점에도 불구하고,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원문의 대부분이, 거의 3천년 전에 살았던 일부 저자들을 포함하여 그 저자들이 실제로 사용했던 단어들을 분명히 적절하게 표현한다는 중대한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원문상의 와전을 이유로 구약이 우리에게 알려 주는 소식의 타당성에 대해 하등의 심각한 의심을 품을 필요가 없다.”9

[연구 질문]

[19면 네모]

잘 확립된 성서 원문

성서 원문이 얼마나 잘 확립되었는가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온 다른 문헌들—그리스와 로마의 고전 저술물—과 비교해 보기만 하면 된다. 사실, 이런 문헌의 대부분은 히브리어 성경이 완성된 후에 기록된 것이다. 그리스인이나 로마인에 대한 민족 말살 시도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으며, 그들의 문헌은 보존 과정에서 박해를 직면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F.F. 브루스 교수의 다음과 같은 논평에 유의하기 바란다.

“카이사르(가이사)의 「갈리아 전쟁기」(Gallic War: 주전 58년에서 50년 사이에 쓰여진 것임)는 현존하는 사본이 여럿이 있지만, 만족할 만한 것은 아홉개나 열개뿐으로, 가장 오래 된 것도 카이사르 시대로부터 900년 정도가 지난 것이다.

“리비우스(주전 59년-주후 17년)의 로마사는 142권 중에서 35권만 보존되었다. 이것들은 중요성이 조금이라도 인정되는, 스무개도 채 못되는 사본을 통해 알려진 것인데, 그 중에서 단지 하나, 곧 III-VI권의 단편을 포함하고 있는 사본만 4세기까지 소급하는 것이다.

“타키투스(주후 100년경)의 「역사」(Histories)는 열 네권 중에서 네권 반만 보존되었다. 그의 「연대기」(Annals)의 경우는 열 여섯권 중에서, 열권은 전체가 두권은 부분적으로 보존되었다. 타키투스의 두 가지 위대한 역사 저술물 중에서 현존하는 부분의 원문은 전적으로 두개의 사본에 의존하고 있는데, 하나는 9세기의 것이고 하나는 11세기의 것이다. ·⁠·⁠·

“투키디데스(주전 460-400년경)의 역사서는 여덟개의 사본을 통해 알려진 것인데, 가장 오래 된 것이 주후 900년경에 속하는 것이며, 소수의 파피루스 조각이 그리스도교 시대가 시작될 무렵에 속하는 것이다.

“헤로도투스(주전 488-428년경)의 역사서도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오래 된 사본도 원본보다 1,300여 년 후의 것이라는 이유로 헤로도투스나 투키디데스의 작품의 확실성이 의심스럽다는 식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는 고전 학자는 한 사람도 없다.”—「책과 양피지」(The Books and the Parchments), 180면.

위에 언급된 내용을, 성서의 다양한 부분의 사본이 수천개에 달한다는 사실과 비교해 보기 바란다.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경의 사본들은 원래의 책이 기록된 때로부터 백년 이내로 소급한다.

[13면 삽화]

히브리인은 작은 나라의 국민으로서 더 강한 나라들로부터 끊임없이 위협을 받았다. 이 고대 조각물은 아시리아인이 일부 히브리인을 포로로 끌어 가는 장면을 묘사한다

[14면 삽화]

인쇄술이 출현하기 전에는, 손으로 성경을 복사하였다

[16면 삽화]

네로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사형에 해당하는 죄로 간주하였다

[21면 삽화]

「이사야」서의 사해 두루마리에 대한 연구는 이 책이 1,000년이 넘는 기간 동안에 사실상 변하지 않았음을 증명하였다

[23면 삽화]

성서를 없애려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