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바로 가기

차례 바로 가기

1장

“보라! 이분이 우리 하느님이시다!”

“보라! 이분이 우리 하느님이시다!”

1, 2. (ㄱ) 당신은 하느님께 어떤 질문들을 하고 싶습니까? (ㄴ) 모세는 하느님께 어떤 질문을 했습니까?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당신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생각만 해도 정말 놀라운 일일 것입니다! 우주의 주권자께서 바로 당신에게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당신은 처음에 잠깐 주저하다가 이내 하느님의 말씀에 대답합니다. 그분은 당신의 말을 잘 들으시고, 대답도 해 주시며, 심지어는 무엇이든 편하게 물어보라고 하십니다. 그럴 경우, 당신은 무슨 질문을 하고 싶습니까?

2 오래전에, 바로 그런 입장에 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모세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느님께 한 질문을 들어 보면 당신은 아마 놀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장래나 사람들이 겪는 고난에 관해 묻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이름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당신은 아마 그 질문이 이상하게 느껴질지 모릅니다. 모세가 이미 하느님의 고유한 이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질문에는 틀림없이 좀 더 깊은 의미가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 그것은 모세가 할 수 있었던 가장 의미심장한 질문이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 각자에게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 답을 알면 하느님과 가까워지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러합니까? 모세가 하느님과 나눈 그 특별한 대화를 살펴보도록 합시다.

3, 4. 어떻게 해서 모세는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으며, 하느님과 모세 사이에는 어떤 대화가 오갔습니까?

3 모세의 나이는 80세였습니다.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는 자기 민족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 멀리 떠나 지낸 지 벌써 40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장인의 양 떼를 돌보던 중에 이상한 현상을 목격했습니다. 어떤 가시덤불에 불이 붙어 있는데도 타서 없어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 가시덤불은 계속 불타면서 산 중턱에서 횃불처럼 빛을 내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다가갔습니다. 그런데 불 속에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는 틀림없이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그 후, 대변인 역할을 하는 천사를 통하여 하느님과 모세는 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아마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그곳에서 하느님께서는 주저하는 모세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 사명은 평온한 생활을 정리하고 이집트로 돌아가서,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출하라는 것이었습니다.—출애굽기 3:1-12.

4 그때 모세는 하느님께 무슨 질문이든지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모세는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제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서 ‘여러분의 조상의 하느님께서 나를 여러분에게 보내셨습니다’ 하고 말할 때 그들이 ‘그분의 이름이 무엇이오?’ 하고 물으면,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합니까?”—출애굽기 3:13.

5, 6. (ㄱ) 모세의 질문은 우리에게 단순하면서도 매우 중요한 어떤 진리를 가르쳐 줍니까? (ㄴ) 사람들은 하느님의 고유한 이름에 대해 어떤 잘못된 일을 저질러 왔습니까? (ㄷ) 하느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인류에게 밝혀 주신 것이 매우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5 이 질문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에게 이름이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이 단순한 진리를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성경 번역판에서는 하느님의 고유한 이름을 빼 버린 다음 그 이름을 “주”나 “하느님”과 같은 칭호로 바꿔 놓았습니다. 이것은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진 가장 안타깝고 가장 잘못된 일 중 하나입니다. 사실, 당신이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그 사람의 이름을 물어보지 않습니까? 하느님을 알아 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도저히 알 수 없거나 이해할 수 없는 분, 우리와 동떨어져 있고 이름도 없는 분이 아닙니다. 비록 볼 수는 없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인격체이며 여호와라는 이름을 가지고 계십니다.

6 또한 하느님께서 자신의 고유한 이름을 밝히시는 데는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그분을 알고 그분과 가까워질 기회를 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분과 가까워지는 것은 사람이 살면서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이름만 알려 주신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실제로 어떤 분인지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의 의미

7. (ㄱ) 하느님의 고유한 이름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까? (ㄴ) 모세가 하느님께 그분의 이름에 대해 질문했을 때 그가 실제로 알고 싶었던 것은 무엇입니까?

7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여호와라는 이름에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그분은 되게 하신다”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셨기 때문에 온 우주에서 그 누구와도 비할 수 없는 분입니다. 또한 그분은 자신의 모든 목적이 이루어지게 하시며, 불완전한 인간 종들이라도 그분이 뜻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되게 해 주십니다. 그 점을 생각하면 정말 외경심이 생깁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이름에서 그분에 대해 더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모세는 그분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 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그는 여호와가 창조주이며 그분의 이름이 여호와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은 그때 처음으로 알려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미 여러 세기 동안 그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모세가 하느님의 이름에 대해 질문했을 때 그가 실제로 물어본 것은 그 이름을 지닌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사실상 그는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당신에 대해 무엇이라고 알려 주어야, 그들이 당신을 믿고 당신이 참으로 그들을 구출해 주실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8, 9. (ㄱ) 여호와께서는 모세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셨으며, 그분의 대답은 종종 어떻게 잘못 번역됩니까? (ㄴ) “나는 내가 되고자 하는 것이 되겠다”라는 말씀에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8 그에 대한 답으로 여호와께서는 자신에 대해 한 가지 놀라운 점을 설명해 주셨는데, 그것은 그분의 이름의 의미와 관련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내가 되고자 하는 것이 되겠다.” (출애굽기 3:14) 많은 성경 번역판에는 이 구절이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말을 주의 깊이 번역한 성경들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단지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씀하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여호와께서는 약속을 성취시키기 위해 무엇이 되셔야 하든 바로 그것이 ‘되실’ 것임을 모세에게, 더 나아가 우리 모두에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J. B. 로더럼의 번역판은 이 구절을 적절하게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되겠다.” 성경 히브리어의 한 권위자는 이 구절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상황이 어떠하든 필요한 것이 무엇이든, ··· 하느님께서는 그 필요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 ‘되실’ 것이다.”

9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무엇을 의미했습니까? 그들 앞에 어떤 장애물이 놓여 있든, 그들이 얼마나 심한 어려움에 처하게 되든,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노예살이에서 구출하여 약속의 땅으로 데려오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되실 것이었습니다. 분명 당시에 그 이름은 하느님에 대한 확신을 강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 이름은 오늘날에도 우리의 확신을 강하게 해 줄 수 있습니다. (시편 9:10)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0, 11. 여호와라는 이름은 그분이 융통성이 뛰어난 최고의 아버지라는 것을 어떻게 알려 줍니까? 예를 들어 보십시오.

10 예를 들어, 부모들은 자녀들을 돌볼 때 얼마나 융통성과 적응력을 발휘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단 하루 동안에도, 아버지나 어머니는 간호사, 요리사, 교사, 훈육자, 판사 등의 역할을 해야 할지 모릅니다. 그처럼 수많은 역할을 하기가 버겁다고 느끼는 부모들이 많습니다. 부모들은 어린 자녀들이 자기들에게 절대적인 믿음을 나타내는 것을 보게 되는데, 자녀들은 아빠나 엄마가 아픈 것도 낫게 해 주고, 말다툼도 다 해결해 주고, 부서진 장난감도 고쳐 주고, 머릿속에 끝없이 떠오르는 온갖 질문에도 다 대답해 줄 수 있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일부 부모는 한계에 부딪혀 자신감을 잃거나 이따금 좌절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들은 그 많은 역할을 수행하기에는 너무나도 자격이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11 여호와 역시 사랑 많은 아버지이십니다. 하지만 인간 부모와는 달리, 그분은 자신의 완벽한 표준을 어기지 않으면서도 땅에 있는 자녀들을 가능한 한 최상의 방법으로 돌보기 위해 무엇이든 되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분의 이름 여호와는 그분이 최고의 아버지라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야고보서 1:17) 모세를 비롯한 모든 충실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와께서 자신의 이름의 의미와 일치하게 행동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곧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분이 무적의 사령관, 모든 자연의 힘을 자유자재로 이용하시는 분, 최고의 입법자, 재판관, 건축가, 식품과 물을 공급해 주시는 분, 옷과 신발이 해어지지 않게 보존해 주시는 분이 되시고 그밖에도 다른 많은 것이 되시는 경이로운 모습을 보았습니다.

12. 여호와에 대한 파라오의 태도는 모세의 태도와 어떻게 달랐습니까?

12 이런 방법으로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고유한 이름을 알리셨고, 자신이 실제로 어떤 분인지에 대해 놀라운 점들을 밝혀 주셨으며, 자신에 관해 하신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증명하셨습니다. 분명히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모세는 하느님을 알고 싶어 했습니다. 모세의 그러한 강한 열망은 그의 인생 전반에 영향을 미쳤고, 그가 하늘의 아버지께 가까이 가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민수기 12:6-8; 히브리서 11:27) 안타깝게도 당시의 사람들 중에는 그러한 열망을 가진 사람이 매우 적었습니다. 모세가 파라오에게 여호와라는 이름을 언급하며 말했을 때, 그 거만한 이집트의 왕은 비꼬는 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가 누구냐?” (출애굽기 5:1-3) 파라오는 여호와에 대해 더 알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중요하지 않으며 자기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냉소적인 태도를 나타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러한 태도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태도 때문에 사람들은 여호와께서 주권자인 주라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권자인 주 여호와

13, 14. (ㄱ) 성경에 여호와께서 가지고 계신 칭호들이 많이 나오는 이유는 무엇이며, 그러한 칭호 가운데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 14면 네모 참조) (ㄴ) 여호와께서만 “주권자인 주”라고 불릴 자격이 있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13 여호와는 융통성과 적응력이 매우 뛰어나신 분이므로, 성경에 나오는 그 많은 칭호를 가지고 계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그러한 칭호들이 그분의 고유한 이름만큼 중요하지는 않지만, 그분의 이름의 의미에 대해 더 많은 점을 가르쳐 줍니다. 예를 들면, 그분은 “주권자인 주 여호와”라고 불립니다. (사무엘하 7:22) 성경에 수백 번 나오는 이 위엄 있는 칭호는 여호와께서 어떤 지위를 가지고 계시는지 알려 줍니다. 그분만이 온 우주의 통치자가 되실 권리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14 여호와는 유일한 창조주이십니다. 요한 계시록 4:11에서는 이렇게 알려 줍니다. “우리 하느님 여호와여, 주께서는 영광과 영예와 능력을 받으시기에 합당합니다. 주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으며, 그것들이 주의 뜻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게 되었고 또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장엄한 표현은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적용될 수 없습니다. 우주에 있는 모든 것은 여호와 덕분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의문의 여지없이, 여호와는 주권자인 주이자 만물의 창조주로서 영예와 능력과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입니다.

15. 여호와께서 “영원하신 왕”이라고 불리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5 여호와께만 적용되는 또 하나의 칭호는 “영원하신 왕”입니다. (디모데 전서 1:17; 요한 계시록 15:3) 이 칭호에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한계가 있는 우리의 정신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사실이지만, 여호와는 과거에도 언제나 존재하셨고 앞으로도 언제나 존재하실 것이라는 의미에서 영원하신 분입니다. 시편 90:2에서는 이렇게 알려 줍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당신은 하느님이십니다.” 따라서 여호와는 시작이 없으신 분입니다. 그분은 항상 존재해 오셨습니다. 그분은 합당하게도 “옛날부터 계신 분”이라고 불리십니다. 우주에 있는 다른 그 누구나 그 어떤 것이 존재하기 전부터 영원토록 존재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다니엘 7:9, 13, 22) 주권자인 주가 되실 그분의 권리에 누가 정당하게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겠습니까?

16, 17. (ㄱ) 우리가 여호와를 볼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이며, 그것이 놀라운 일이 아닌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보거나 만질 수 있는 물질보다 여호와의 존재가 훨씬 더 분명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16 하지만 파라오처럼 하느님의 권리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한 가지 이유는 불완전한 인간이 눈에 보이는 것을 지나치게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권자인 주를 볼 수 없습니다. 그분은 영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분입니다. (요한복음 4:24) 또한 만일 살과 피를 가진 인간이 여호와 하느님 바로 앞에 서게 된다면 살아 있지 못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친히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 얼굴을 볼 수 없다. 나를 보고도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출애굽기 33:20; 요한복음 1:18.

17 이 말씀은 놀라운 것이 아닙니다. 아마 모세는 여호와를 대표하는 천사를 통해 그분의 영광을 일부만 보았을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그 후 얼마 동안 모세의 얼굴에서 “빛이 났”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의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보기도 두려워했습니다. (출애굽기 33:21-23; 34:5-7, 29, 30) 그러므로 한낱 사람은 온전한 영광 가운데 계신 주권자인 주를 직접 쳐다볼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분을 보고 만질 수 없다고 해서 그분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바람, 전파, 생각 같은 것을 볼 수 없지만 그것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또한 우리가 만지거나 볼 수 있는 것들은 시간이 흐르면 썩어 없어지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여호와는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흐른다 해도 시간의 흐름에 관계없이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보고 만질 수 있는 물질보다 하느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이 훨씬 더 분명한 사실입니다. (마태복음 6:19) 그러면 하느님은 다른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한 막연한 힘에 불과합니까? 혹은 강력한 힘이 있지만 아무 감정도 없고 우리에게 관심도 없는 존재입니까? 그 점에 대해 살펴보기로 합시다.

인격을 가지고 계신 하느님

18. 에스겔은 무슨 환상을 받았으며, 여호와 가까이에 있는 “생물”들의 네 얼굴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18 우리가 하느님을 볼 수는 없지만, 성경에는 하늘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 주는 흥미로운 성구들이 나옵니다. 에스겔 1장이 그 한 가지 예입니다. 에스겔은 여호와의 우주 조직의 하늘 부분을 보여 주는 환상을 받았는데, 그 환상에서 그는 거대한 하늘 수레를 보았습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여호와 주위에 있는 강력한 천사들에 대한 묘사입니다. (에스겔 1:4-10) 이 “생물”들은 여호와 가까이에서 일하는데, 그들의 모습은 그들이 섬기는 하느님에 대해 중요한 점을 알려 줍니다. 각 생물은 네 얼굴을 가지고 있는데, 수소와 사자와 독수리와 사람의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얼굴들은 여호와의 탁월한 성품의 기초를 이루는 네 가지 주요 특성을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요한 계시록 4:6-8, 10.

19. (ㄱ) 수소의 얼굴 (ㄴ) 사자의 얼굴 (ㄷ) 독수리의 얼굴 (ㄹ) 사람의 얼굴은 각각 어떤 특성을 상징합니까?

19 성경에서 수소는 흔히 힘을 상징하는데, 그것이 적절한 이유는 수소가 대단히 힘이 센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사자는 흔히 공의를 상징합니다. 공의를 나타내려면 용기가 필요한데, 사자는 용기 있는 동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독수리는 예리한 시력으로 유명한데,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아주 조그만 물체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독수리의 얼굴은 멀리 내다보실 수 있는 하느님의 지혜를 잘 상징합니다. 그러면 사람의 얼굴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사람만이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고 하느님의 가장 중요한 특성인 사랑을 본받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1:26) 성경은 여호와의 성품 가운데 능력, 공의, 지혜, 사랑을 자주 강조합니다. 따라서 이 특성들을 가리켜 하느님의 주요 속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 여호와의 성품이 변했을까 봐 걱정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렇게 대답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0 성경에서 하느님에 대해 알려 준 것은 수천 년 전이므로, 그 후로 하느님이 변했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성품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여호와이다. 나는 변하지 않는다.” (말라기 3:6) 여호와께서는 기분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하시는 분이 아니시며, 상황이 어떠하든 언제나 최고의 아버지라는 것을 증명하십니다. 그분은 각각의 상황마다 우리를 돕는 데 가장 적절한 특성을 나타내십니다. 하느님의 성품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성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하느님이 하시는 모든 일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분은 능력과 공의와 지혜를 나타내실 때에도 사랑을 가지고 그렇게 하십니다. 사실, 성경에서는 하느님과 그분의 사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특별한 점을 언급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요한 1서 4:8) 하느님이 사랑을 가지고 계신다거나 사랑이 많다고 말하지 않는 점에 유의하십시오. 그런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사랑이시라고 즉 사랑 그 자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본질적인 특성인 사랑은 그분이 하시는 모든 일의 동기가 됩니다.

“보라! 이분이 우리 하느님이시다!”

21. 여호와의 특성에 대해 더 잘 알게 되면 어떤 확신이 생길 것입니까?

21 어린아이가 들뜬 마음으로 자기 아버지를 가리키면서 “우리 아빠야!” 하고 친구들에게 자랑스럽게 소개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까?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도 여호와에 대해 그처럼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이유가 많습니다. 성경에서는 충실한 사람들이 “보라! 이분이 우리 하느님이시다!” 하고 외치게 될 때가 올 것임을 예언합니다. (이사야 25:8, 9) 여호와의 특성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될수록, 우리에게 최고의 아버지가 계시다는 확신이 더욱 강해질 것입니다.

22, 23. 성경에서는 하늘의 아버지가 어떤 분이라고 알려 주며, 그분이 우리가 가까이 오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22 일부 엄격한 종교인들과 철학자들의 가르침과는 달리, 하느님은 차갑고 무관심한 아버지가 아닙니다. 하느님이 그처럼 냉정한 분이라면 우리는 그분에게 마음이 끌리지 않을 것이며, 성경도 하늘의 아버지가 그런 분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에서는 그분을 가리켜 “행복하신 하느님”이라고 말합니다. (디모데 전서 1:11) 그분은 사람들의 행동에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성경 기록에 따르면, 사람들이 여호와께서 주신 유익한 지침을 어겼을 때 그분은 “마음으로 슬퍼하셨습니다.” (창세기 6:6; 시편 78:41) 하지만 우리가 그분의 말씀에 따라 지혜롭게 행동하면 그분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잠언 27:11.

23 우리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그분에게 가까이 오기를 바라십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더듬어 찾아 실제로 발견’하라고 권합니다. “사실, 그분은 우리 각자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17:27) 그러면 어떻게 보잘것없는 인간이 우주의 주권자인 주께 가까이 갈 수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