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바로 가기

차례 바로 가기

29장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1-3. (ㄱ) 예수께서는 무엇 때문에 자기 아버지처럼 되고 싶어 하셨습니까? (ㄴ) 예수의 사랑의 어떤 부면들을 살펴볼 것입니까?

 아들이 아버지를 따라 하려고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아들은 아마 아버지가 걷고 말하고 행동하는 방식을 흉내 낼지 모릅니다. 시간이 흐르면 그 소년은 아버지의 도덕적·영적 가치관까지 그대로 흡수할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아들은 사랑 많은 아버지에 대해 사랑과 존경을 느끼기 때문에 아버지처럼 되고 싶어 합니다.

2 그러면 예수께서는 그분의 하늘의 아버지에 대해 어떻게 느끼십니까? 한번은 예수께서 “내가 아버지를 사랑합니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4:31) 그 누구도 예수보다 여호와를 더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다른 피조물이 창조되기 오래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충성스러운 아들이신 예수는 그러한 사랑 때문에 아버지처럼 되고 싶어 하셨습니다.—요한복음 14:9.

3 이 책의 앞 장들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어떻게 여호와의 능력과 공의와 지혜를 완벽하게 본받으셨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사랑을 어떻게 본받으셨습니까? 예수의 사랑의 세 가지 부면 즉 자기희생적인 태도, 부드러운 동정심, 기꺼이 용서하시는 태도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4. 예수께서는 어떻게 이제까지 사람이 나타낸 가장 위대한 사랑을 보이셨습니까?

4 예수께서는 자기희생적인 사랑과 관련하여 뛰어난 본을 보이셨습니다. 자기희생에는 자신의 필요와 관심사보다 다른 사람들의 필요와 관심사를 앞자리에 두는 비이기적인 태도가 포함됩니다. 예수께서는 어떻게 그러한 사랑을 나타내셨습니까?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친구를 위해 자기 생명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요한복음 15:13)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완전한 생명을 희생하셨습니다. 그것은 이제까지 사람이 나타낸 가장 위대한 사랑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다른 면으로도 자기희생적인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5. 하느님의 독생자가 하늘을 떠난 것이 사랑에서 우러나온 희생이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5 인간이 되시기 전에 하느님의 독생자는 하늘에서 큰 영예와 높은 지위를 누리셨습니다. 그분은 여호와와 수많은 천사들과 친밀하게 지냈습니다. 그처럼 하늘에서 그분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으며 행복하게 사셨지만, “자신을 비우고 종의 모습을 취하여 사람이 되셨습니다.” (빌립보서 2:7) 그분은 “악한 자의 지배 아래 있”는 세상에서 죄 많은 사람들과 함께 사시기 위해 기꺼이 땅으로 오셨습니다. (요한 1서 5:19) 하느님의 아들은 사랑에서 우러나와 정말 큰 희생을 하셨습니다!

6, 7. (ㄱ) 예수께서는 지상 봉사 기간에 어떻게 자기희생적인 사랑을 나타내셨습니까? (ㄴ) 요한복음 19:25-27에는 비이기적인 사랑의 어떤 감동적인 예가 기록되어 있습니까?

6 예수께서는 지상에서 봉사하시는 동안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기희생적인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분은 전적으로 비이기적이셨습니다. 봉사에 온 힘을 쏟으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누리는 안락함까지도 희생하셨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둥지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8:20) 예수께서는 숙련된 목수였기 때문에 시간을 좀 내서 자신을 위해 안락한 집을 지으실 수도 있었고, 멋진 가구를 만들어 팔아서 돈을 어느 정도 버실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물질적인 것들을 얻기 위해 자신의 기술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7 예수께서 자기희생적인 사랑을 나타내신 매우 감동적인 예가 요한복음 19:25-27에 나옵니다. 그분이 오후에 숨을 거두시기 전에 얼마나 많은 점들에 대해 생각하고 염려했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그분은 형주에서 고통을 당하면서도 제자들, 전파 활동, 그리고 특히 자신의 충절과 그 충절이 자신의 아버지의 이름에 미칠 영향에 대해 염려하셨습니다. 사실, 온 인류의 미래가 그분에게 달려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께서는 죽으시기 불과 얼마 전에 어머니 마리아에 대해 염려를 나타내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도 요한에게 당시에는 과부였을 마리아를 친어머니처럼 돌봐 달라고 부탁하셨으며, 그 후 요한은 마리아를 자기 집으로 모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예수께서는 자기 어머니를 신체적으로 영적으로 돌볼 마련을 하셨습니다. 비이기적인 사랑을 정말 감동적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셨다”

8. 예수의 동정심을 묘사하기 위해 성경에서 사용하는 그리스어 단어에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8 예수께서는 자신의 아버지처럼 동정심이 많으셨습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고난을 겪는 사람들에게 깊은 동정심을 가지고 기꺼이 도움을 베푸셨다고 알려 줍니다. 예수의 동정심을 묘사하기 위해 성경은 “불쌍히 여기셨다”로 번역되는 그리스어 단어를 사용합니다. 한 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단어는 사람의 마음 깊숙한 곳까지 영향을 미치는 감정을 ··· 묘사한다. 그 단어는 동정심이라는 감정을 표현하는 그리스어 단어 중 가장 강력한 단어이다.” 예수께서 깊은 동정심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도우셨던 몇 가지 상황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9, 10. (ㄱ) 예수와 사도들은 왜 조용한 곳을 찾아가게 되었습니까? (ㄴ) 예수께서는 사람들 때문에 개인 시간에 방해를 받았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셨으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9 영적인 필요를 채워 주셨습니다. 마가복음 6:30-34의 기록은 예수께서 주로 무엇 때문에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나타내셨는지 알려 줍니다. 당시의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십시오. 사도들은 바쁜 전파 여행을 끝마치고 이제 막 돌아왔기 때문에 흥분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 돌아와 자신들이 보고 들은 일들을 전부 열정적으로 보고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무리가 몰려온 탓에 예수와 사도들은 식사할 틈도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항상 주의 깊이 살피신 예수께서는 사도들이 지쳤다는 것을 알아차리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십시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 북쪽 끝을 가로질러 조용한 곳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소식을 들어서 알게 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는 북쪽 해안선을 따라 달려왔으며 배보다 먼저 맞은편에 도착했습니다!

10 예수께서는 자신의 개인 시간에 방해를 받았기 때문에 화를 내셨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수천 명의 사람들을 보고 동정심을 느끼셨습니다. 마가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분은] 많은 무리를 보고 불쌍히 여기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예수께서는 그들 각자에게 영적인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보셨습니다. 그들은 인도하거나 보호해 줄 목자도 없이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양들과 같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상한 목자가 되어야 할 종교 지도자들이 냉정한 태도로 일반 사람들을 소홀히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요한복음 7:47-49) 그분은 그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으며, 그래서 그들에게 “하느님의 왕국에 대해”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누가복음 9:11) 유의할 점은 예수께서 자신이 가르칠 내용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보기 전에도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분의 부드러운 동정심은 무리를 가르친 결과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무리를 가르치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그분은 손을 내밀어 그를 만지셨다’

11, 12. (ㄱ) 성경 시대에 나병 환자들은 어떻게 여겨졌으며, “온몸에 나병이 걸린” 사람이 예수께 다가왔을 때 그분은 어떤 반응을 보이셨습니까? (ㄴ) 예수의 손길은 그 나병 환자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 것이며, 한 의사의 경험은 그 점을 어떻게 알려 줍니까?

11 고통을 덜어 주셨습니다. 여러 가지 병을 앓는 사람들은 예수께서 동정심이 많은 분임을 느꼈으며, 그래서 그분에게 마음이 끌렸습니다. 그 점을 잘 보여 주는 한 가지 예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를 따라가고 있었을 때 “온몸에 나병이 걸린” 사람이 예수께 다가왔습니다. (누가복음 5:12) 성경 시대에는 감염을 막기 위해 나병 환자들을 격리했습니다. (민수기 5:1-4) 그런데 후에 유대교 지도자들은 나병에 대한 가혹한 견해를 조장했고 그들 자신이 정한 압제적인 규칙을 부과했습니다. a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 나병 환자에게 그들과는 다른 태도를 보이셨습니다. 다음의 성구를 유의해 보십시오. “어떤 나병 환자가 그분에게 와서 무릎을 꿇고 간청하며 ‘원하시기만 하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분은 불쌍히 여기시고 손을 내밀어 그를 만지시며 ‘내가 원합니다! 깨끗하게 되십시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곧바로 나병이 사라졌다.” (마가복음 1:40-42) 예수께서는 나병 환자가 그곳에 있는 것 자체가 법에 어긋나는 일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 사람을 돌려보내지 않고 깊은 동정심을 느껴 다른 사람들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 사람을 만지신 것입니다!

12 예수의 손길이 그 나병 환자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상상이 되십니까? 그 점에 대해 알 수 있는 한 가지 예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나병 전문가인 폴 브랜드 박사는 자신이 인도에서 한 나병 환자를 치료한 경험을 소개했습니다. 박사는 그 환자를 진찰할 때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그를 앞으로 어떻게 치료할지 통역을 통해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나병 환자가 울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뭘 잘못 말했나요?” 하고 박사가 물었습니다. 통역자는 그 젊은 남자에게 그가 우는 이유를 물어본 다음 박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게 아니라 박사님이 어깨에 손을 얹어 주셔서 눈물이 난 거랍니다. 여기 오기 전까지 여러 해 동안 자신을 만져 준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답니다.” 예수께 다가온 나병 환자에게 그분의 손길은 훨씬 더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 한 번의 손길 덕분에, 그를 사회와 단절시켰던 나병이 치료된 것입니다!

13, 14. (ㄱ) 예수께서는 나인이라는 도시에 거의 다 오셨을 때 어떤 행렬과 마주치셨으며, 그 젊은이의 죽음이 특히 안타까웠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예수는 동정심에서 우러나와 나인의 과부를 위해 어떻게 하셨습니까?

13 사별의 아픔을 없애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별의 아픔을 겪는 사람들에게 깊은 동정심을 느끼셨습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7:11-15의 기록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의 지상 봉사 기간이 절반 정도 지났을 무렵, 그분은 나인이라는 갈릴리의 도시로 가고 계셨습니다. 그 도시의 성문에 거의 다 왔을 때 예수께서는 한 장례 행렬과 마주치셨습니다. 그 죽음은 특히 안타까운 것이었습니다. 죽은 젊은이는 외아들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과부였습니다. 그 과부는 아마 전에도 남편의 장례 행렬을 따라간 경험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아들마저 죽었는데, 그 아들은 아마 그를 부양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 여자를 따라가고 있는 행렬 가운데는 애곡하는 사람들과 비가를 연주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레미야 9:17, 18; 마태복음 9:23) 하지만 예수의 시선은 슬픔에 잠긴 어머니에게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아마 그는 아들의 시신을 옮기는 운구대 가까이서 걷고 있었을 것입니다.

14 예수께서는 아들을 잃은 그 어머니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그 여자에게 따뜻한 어조로 “그만 우십시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요청받지 않으셨는데도 운구대로 가까이 가서 그것을 만지셨습니다. 그러자 운구대를 메고 가던 사람들이 멈추어 섰으며, 아마 나머지 사람들도 걸음을 멈췄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권위 있는 목소리로 생명 없는 시신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젊은이, 당신에게 말하는데, 일어나십시오!” 그러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마치 깊은 잠을 자다가 깨어난 것처럼 “죽은 사람이 일어나 앉아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다음 성경에는 이러한 매우 감동적인 장면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를 어머니에게 넘겨주셨다.”

15. (ㄱ) 예수의 동정심에 관한 성경의 기록들은 동정심이 행동과 어떤 관련이 있음을 보여 줍니까? (ㄴ) 이 면에서 우리는 어떻게 예수를 본받을 수 있습니까?

15 우리는 이러한 기록들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각각의 경우에, 동정심이 행동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유의해 보십시오. 예수께서는 다른 사람들의 곤경을 보고 불쌍히 여기지 않으실 수 없었으며, 그처럼 동정심을 느끼고 행동하지 않으실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분의 본을 따를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좋은 소식을 전파하고 사람들을 제자로 삼을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 일을 하는 가장 중요한 동기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일을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겠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에 대해 예수처럼 동정심을 느낀다면, 그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22:37-39) 고통을 당하고 있거나 사별의 아픔을 겪고 있는 형제 자매들에게는 어떻게 동정심을 나타낼 수 있습니까? 우리는 기적으로 질병을 치료하거나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솔선해서 관심을 표현하거나 실용적인 도움을 베풂으로 동정심을 행동으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에베소서 4:32.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16. 예수께서는 형주에 달려 있을 때에도 어떻게 기꺼이 용서하려는 태도를 나타내셨습니까?

16 예수께서는 또 다른 중요한 방법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완벽하게 본받으셨습니다. 그분은 “기꺼이 용서”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시편 86:5) 그분은 형주에 달려 있었을 때에도 기꺼이 용서하려는 태도를 나타내셨습니다. 손과 발에 못이 박혀 수치스럽게 죽임을 당하면서도 예수께서는 무엇에 관해 말씀하셨습니까? 자신에게 형을 집행하는 자들에게 벌을 내려 달라고 여호와께 청하셨습니까? 그와는 반대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누가복음 23:34. b

17-19. 예수께서는 자신을 세 번 부인한 사도 베드로를 용서하셨다는 것을 어떻게 나타내셨습니까?

17 예수의 용서를 잘 보여 주는 훨씬 더 감동적인 예는 그분이 사도 베드로를 용서하신 일일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깊이 사랑했다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밤인 니산월 14일에 베드로는 그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저는 감옥이든 죽음이든 주와 함께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불과 몇 시간 후에 베드로는 예수를 안다는 사실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베드로가 세 번째로 부인했을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성경은 이렇게 알려 줍니다. “주께서 돌아서서 베드로를 똑바로 바라보셨다.” 베드로는 자신이 얼마나 심각한 죄를 지었는지 깨닫고 크게 상심해 “밖으로 나가 몹시 울었습니다.” 그날 예수께서 결국 죽으시자, 사도 베드로는 ‘주께서 나를 용서하셨을까?’ 하고 염려했을 것입니다.—누가복음 22:33, 61, 62.

18 베드로는 오래지 않아 그 답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니산월 16일 아침에 부활되셨고, 아마 바로 그날 베드로를 개인적으로 찾아가셨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24:34; 고린도 전서 15:4-8) 예수께서 그토록 강하게 자신을 부인한 베드로에게 그처럼 특별한 관심을 보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는 회개한 베드로에게 그분이 아직도 그를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신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안심시켜 주기 위해 또 다른 일을 하셨습니다.

19 얼마 후 예수께서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때 예수께서는 (자신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에게 자신을 사랑하는지 세 번 물으셨습니다. 세 번째로 질문을 받았을 때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여, 주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께 애정을 갖고 있다는 것을 주께서 아십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을 읽으실 수 있는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자신에게 사랑과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그의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그분의 ‘어린양들을 먹이고 돌보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21:15-17) 이전에 베드로는 전파하라는 사명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5:10) 그런데 이제 예수께서는 그에게 큰 신뢰를 나타내셔서 또 다른 중요한 책임 즉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맡기셨습니다. 얼마 후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활동을 수행할 때 베드로가 중요한 역할을 하게 해 주셨습니다. (사도행전 2:1-41) 베드로는 예수께서 자신을 용서하셨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신뢰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았을 때 틀림없이 마음이 놓였을 것입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있습니까?

20, 21. 우리가 온전히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20 여호와의 말씀인 성경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 참으로 감동적인 점들을 알려 줍니다. 우리가 예수의 사랑에 감사한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라”고 강력히 권합니다. (에베소서 3:19) 이미 살펴본 것처럼, 예수의 생애와 봉사에 대한 복음서의 기록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 많은 점을 가르쳐 줍니다. 하지만 온전히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려면 그분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배우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이 필요합니다.

21 “알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는 “경험과 행동을 통해”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예수께서 하신 것과 같은 방법으로 사랑을 나타낼 때, 다시 말해 다른 사람들을 위해 비이기적으로 자신의 시간과 활력을 사용하고, 동정심에서 우러나와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주고, 마음으로부터 사람들을 용서할 때, 진정으로 그분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경험을 통해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예수께서 여호와를 완벽하게 본받으셨으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더 온전히 본받을수록 우리의 사랑 많은 하느님 여호와와 더 가까워질 것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a 랍비들은 아무도 나병 환자에게 4큐빗(약 1.8미터) 이내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규칙을 만들었다. 그리고 바람이 불 경우에는 나병 환자에게서 적어도 100큐빗(약 45미터) 떨어져 있어야 했다. 「미드라시 라바」(Midrash Rabbah)에서는 한 랍비가 나병 환자들에게서 몸을 숨겼고 또 다른 랍비는 나병 환자들을 멀리 쫓아내기 위해 그들에게 돌을 던졌다고 알려 준다. 따라서 나병 환자들은 사람들에게 배척당하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멸시받고 환영받지 못하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다.

b 일부 고대 사본에는 누가복음 23:34의 처음 부분이 빠져 있다. 하지만 권위 있는 다른 많은 사본에 이 표현이 나오기 때문에, 「신세계역」을 비롯한 많은 번역판에는 이 표현이 들어 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처형한 로마 군인들에 대해 말씀하신 것 같다. 그들은 예수가 실제로 어떤 분인지 몰랐기 때문에,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또한 그분은 자신의 처형을 요구했지만 나중에 그분을 믿은 유대인들을 염두에 두셨을 수 있다. (사도행전 2:36-38) 물론, 그 처형을 선동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가 어떤 분인지 알면서도 악의적으로 행동한 것이기 때문에 훨씬 더 큰 죄가 있었다. 그들 중 다수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었다.—요한복음 11:45-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