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장

마귀와 그의 교활한 행위를 대적하십시오

마귀와 그의 교활한 행위를 대적하십시오

“마귀를 대적하십시오. 그러면 마귀가 ··· 도망할 것입니다.”—야고보서 4:7.

1, 2. 침례받는 사람들을 보면서 누가 기뻐합니까?

여호와를 오랫동안 섬겨 온 사람이라면 크고 작은 대회들에서 여러 차례 침례 연설을 들어 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대회를 많이 참석해 본 사람이라도, 대회장 맨 앞쪽 자리에 앉아 있는 지원자들이 침례를 받으려고 일어서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뭉클해질 것입니다. 일순간 청중은 감동에 휩싸이며 뒤이어 열정적인 박수가 터져 나옵니다. 새롭게 여호와의 편에 선 또 한 무리의 소중한 사람들을 보노라면 눈물마저 글썽이게 됩니다. 정말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끼게 하는 순간입니다!

2 우리는 우리가 사는 지역의 대회에서 일 년에 몇 차례 침례 장면을 보지만 천사들에게는 볼 수 있는 기회가 훨씬 더 많습니다. 사실 천사들은 세계 전역에서 매주 수천 명의 사람들이 여호와의 조직의 보이는 부분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있으니 ‘하늘에서 기쁨’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누가복음 15:7, 10) 그러한 증가를 보며 천사들은 분명 벅찬 감격을 느낄 것입니다!—학개 2:7.

마귀가 “울부짖는 사자같이 ··· 돌아다닙니다”

3. 사탄은 왜 “울부짖는 사자같이” 돌아다니고 있으며, 그가 원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3 하지만 그와는 정반대로, 침례받는 사람들을 보면서 격분하고 있는 영적 피조물들도 있습니다. 그토록 많은 사람이 이 부패한 세상으로부터 돌아서고 있다는 것은 사탄과 그의 악귀들에게 분통이 터질 일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사탄은 여호와를 정말 사랑해서 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심한 시련을 겪으면 어느 누구도 충실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였기 때문입니다. (욥기 2:4, 5 낭독) 따라서 여호와께 헌신하는 길을 택하는 사람이 나올 때마다 사탄은 틀렸음이 증명됩니다. 그런데 사탄이 몹시 수치를 느낄 일이 매주 수천 번씩 일 년 내내 되풀이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울부짖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찾아 돌아다닐” 만도 합니다! (베드로 전서 5:8) 이 “사자”는 우리를 영적으로 삼켜서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손상시키거나 아예 끊어 놓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시편 7:1, 2; 디모데 후서 3:12.

여호와께 헌신하여 침례받는 사람이 나올 때마다 사탄은 틀렸음이 증명됩니다

4, 5. (ㄱ) 여호와께서는 사탄이 할 수 있는 일을 어떤 두 가지 중요한 부면에서 제한해 놓으셨습니까? (ㄴ) 참그리스도인에게는 어떤 보증의 말씀이 있습니까?

4 우리는 포악한 적과 맞서고 있지만 두려움에 휩싸일 이유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호와께서 이 “울부짖는 사자”가 할 수 있는 일을 두 가지 중요한 부면에서 제한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부면에서 그러합니까? 먼저, 여호와께서는 참그리스도인들로 이루어진 “큰 무리”가 다가오는 “큰 환난”을 생존할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요한 계시록 7:9, 14) 하느님의 예언은 결코 어긋나는 법이 없습니다. 따라서 사탄조차도 자기가 하느님의 백성 전체를 어떻게 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임이 분명합니다.

5 두 번째 부면은 고대에 하느님의 충실한 종 한 사람이 말한 한 가지 기본 진리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언자 아사랴는 아사 왕에게 “[당신이] 여호와와 함께하는 한, 그분도 [당신과] 함께하십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역대기하 15:2. 고린도 전서 10:13 낭독) 성서에는 과거에 사탄이 하느님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는 그분의 종을 절대로 삼킬 수 없었음을 증명하는 예들이 숱하게 나옵니다. (히브리서 11:4-40) 오늘날에도 하느님께 가까이 머물러 있는 그리스도인은 마귀를 대적하고 심지어 이기기까지 할 수 있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마귀를 대적하십시오. 그러면 마귀가 여러분에게서 도망할 것입니다”라고 보증합니다.—야고보서 4:7.

“우리는 ··· 악한 영의 세력들을 상대로 싸우고 있습니다”

6. 사탄은 어떻게 그리스도인 개개인을 상대로 싸웁니까?

6 사탄은 이 비유적인 전쟁에서 승리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경계심을 늦춘다면 우리 개개인을 희생자로 만들 수는 있습니다. 사탄은 여호와와 우리 사이를 멀어지게 하면 우리를 삼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는 어떻게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려고 합니까? 우리를 집중 공격하고, 개별적으로 공격하고, 교활한 방법으로 공격함으로써입니다. 이제 사탄이 주로 사용하는 이 전략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7. 사탄이 여호와의 백성에게 집중 공격을 퍼붓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7 집중 공격. 사도 요한은 “온 세상은 악한 자의 지배 아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요한 1서 5:19) 이 말은 모든 참그리스도인에게 일종의 경고라 할 수 있습니다. 사탄은 이미 불경건한 인류 세상 전체를 삼켜 버렸기 때문에, 아직까지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오지 않은 여호와의 백성에게 집중적으로 맹공격을 퍼부을 수 있습니다. (미가 4:1; 요한복음 15:19; 요한 계시록 12:12, 17) 그는 자기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줄을 알기 때문에 몹시 화가 나 있습니다. 그래서 공격의 고삐를 더욱 조이고 있습니다. 오늘날 사탄은 우리와 하느님의 관계를 파괴하기 위해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습니다.

8. 사도 바울은 무슨 의미로 우리가 악한 영들을 상대로 “씨름”을 하고 있다고 말하였습니까?

8 개개인과의 싸움. 사도 바울은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우리는 ··· 하늘에 있는 악한 영의 세력들을 상대로 싸우고[“씨름을 하고”, 각주] 있”다고 경고하였습니다. (에베소서 6:12) 바울이 “씨름”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말이 서로 맞붙어 격투를 벌인다는 사상을 전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 용어를 사용해서 우리 각자가 악한 영들과 개별적으로 싸우고 있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따라서 악한 영들에 대한 믿음이 보편적인 나라에서 살고 있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우리가 여호와께 헌신을 하면 비유적으로 말해 씨름장에 들어서는 것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 각자는 적어도 헌신을 한 다음부터는 이 싸움을 피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세 차례나 “굳게 서라”고 강력히 권고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도 이해할 만한 일입니다!—에베소서 6:11, 13, 15.

9. (ㄱ) 사탄과 악귀들이 다양한 “교활한 행위”를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사탄이 우리의 생각을 부패시키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떻게 그의 시도를 물리칠 수 있습니까? (“ 사탄의 교활한 속임수를 조심하십시오!” 네모 안의 내용 참조) (ㄷ) 이제 어떤 교활한 행위를 고려할 것입니까?

9 교활한 계략.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사탄의 “교활한 행위”에 맞서 굳게 서라고 권고합니다. (에베소서 6:11) 바울이 여기에서 사용한 “교활한 행위”에 해당하는 표현이 그리스어 원어에서는 복수형으로 되어 있다는 데 유의하십시오. 악한 영들이 사용하는 교활한 계략은 단지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합니다.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어떤 시련이 닥칠 때는 굳게 서 있었으면서도, 다른 시련을 겪을 때는 굴복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마귀와 악귀들은 우리의 가장 취약한 점을 찾아내려고 우리 개개인의 행동을 면밀히 관찰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갖고 있는 영적 약점은 무엇이든 이용합니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우리는 사탄이 사용하는 방법을 대부분 식별할 수 있습니다. 성서에서 밝혀 주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후서 2:11) 이 출판물의 앞부분에서 우리는 물질주의와 유해한 교제와 성적 부도덕 등의 유혹과 같은 계략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사탄의 또 다른 교활한 행위인 영매술에 대해 고려해 보겠습니다.

영매술—배신 행위

10. (ㄱ) 영매술이란 무엇입니까? (ㄴ) 여호와께서는 영매술을 어떻게 여기시며, 당신은 영매술을 어떻게 여깁니까?

10 일종의 악귀 숭배라고 할 수 있는 영매술을 행하면 악한 영들과 직접 접촉하게 됩니다. 점을 치거나 사람들을 주문으로 얽매거나 죽은 자에게 묻는 일 혹은 주술 등이 모두 영매술에 포함됩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여호와께서는 영매술을 “혐오”하십니다. (신명기 18:10-12; 요한 계시록 21:8) 우리 역시 “악한 것을 몹시 싫어”해야 하므로, 우리가 악한 영의 세력을 접하려고 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로마서 12:9) 그것은 하늘의 우리 아버지 여호와에 대한 대단히 혐오스러운 배신 행위입니다!

11. 사탄이 우리가 영매술에 빠지도록 유인하는 데 성공하면 큰 승리를 거두는 것이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를 들어 설명하십시오.

11 재미 삼아 영매술을 접하는 것도 여호와께는 심각한 배신 행위이기 때문에 사탄은 우리 중 일부라도 영매술에 연루되게 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인 한 사람을 악귀 숭배로 돌아서도록 유인하는 데 성공할 때마다 사탄은 또 한 차례의 큰 승리를 거두는 셈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러한 예를 생각해 보십시오. 병사 하나가 설득당해서 아군을 저버리고 적군에게 가담하면 적군 지휘관은 무척 기뻐할 것입니다. 그는 심지어 그 변절한 병사의 이전 지휘관을 치욕스럽게 하려고 마치 대단한 전과라도 거둔 것인 양 그 병사를 내세울지 모릅니다. 그와 비슷하게 영매술에 빠지는 그리스도인 역시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여호와를 저버리고 사탄의 하수인이 되는 것입니다. 사탄이 마치 대단한 전과라도 거둔 것인 양 그 사람을 내세우면서 얼마나 좋아할지 상상해 보십시오! 마귀에게 그런 승리를 안겨 주고 싶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변절자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마귀는 의문을 제기하여 의심이 생기게 한다

12. 사탄은 영매술에 대한 우리의 견해에 영향을 미치려고 어떤 방법을 사용합니까?

12 우리가 영매술을 몹시 싫어하는 한, 사탄은 영매술로 우리를 대적하는 데 성공을 거두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야만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어떻게 생각을 바꾸려고 합니까? 그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일부 사람들이 “선한 것을 악하다 하고 악한 것을 선하다” 하고 생각할 정도로 그들을 혼란시킬 방법을 찾습니다. (이사야 5:20) 그렇게 하기 위해 그는 오랜 세월을 통해 효과가 증명된 한 가지 방법을 즐겨 사용합니다. 바로 의문을 제기하여 의심이 생기게 하는 것입니다.

13. 사탄은 어떻게 의문을 제기하여 의심이 생기게 하는 방법을 사용해 왔습니까?

13 사탄이 과거에 어떻게 그러한 방법을 사용했는지 유의해 보십시오. 에덴에서 그는 하와에게 “하느님께서 정말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욥 시대에는 하늘에서 천사들의 모임 중에 “욥이 아무런 이유 없이 하느님을 두려워하겠습니까?” 하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또한 예수께서 지상 봉사를 시작하실 무렵에는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말해 보시오”라는 말로 도전하였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의 경우에 사탄은 감히 여호와께서 약 6주 전에 친히 하신 말씀 즉 “이는 사랑하는 내 아들이다. 내가 그를 승인하였다”라는 말씀을 무시한 것입니다!—창세기 3:1; 욥기 1:9; 마태복음 3:17; 4:3.

14. (ㄱ) 사탄은 어떻게 영매술과 관련하여 의문이 생기게 만드는 계략을 사용합니까? (ㄴ) 이제 무엇을 살펴볼 것입니까?

14 오늘날에도 마귀는 그와 비슷한 계략을 사용해서 영매술이 과연 악한 것인지 의문이 생기게 만들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시도가 성공하여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의문을 품는 유감스러운 결과가 있어 왔습니다. 그들은 일부 형태의 영매술이 정말 그렇게 나쁜 것인지 의문을 제기하게 되었습니다. (고린도 후서 11:3)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생각을 바로잡도록 어떻게 도와줄 수 있습니까? 사탄의 계략이 결코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하려면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그 대답을 얻기 위해, 이제 사탄이 영매술적인 요소들로 교묘하게 물들여 온 두 가지 분야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두 가지 분야는 오락과 건강 관리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욕구와 필요를 이용한다

15. (ㄱ) 서구에 사는 많은 사람은 영매술을 어떻게 여깁니까? (ㄴ) 일부 그리스도인은 영매술에 대한 세상의 견해에 어떻게 영향을 받아 왔습니까?

15 특히 서구에서는 신비주의나 마법과 같은 형태의 영매술이 점점 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영화, 책, 텔레비전 프로그램, 컴퓨터 게임 속에서 악귀적인 행위들이 재미있고 지혜롭고 무해한 것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갈수록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신비술을 주된 소재로 하는 어떤 영화나 책들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서 팬클럽을 결성할 정도로 심취하는 사람들까지 생겨났습니다. 분명, 악귀들은 신비술의 위험성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보이게 하는 데 성공을 거두어 온 것입니다. 영매술의 심각성을 가볍게 여기는 이러한 추세에 그리스도인들도 영향을 받아 왔습니까? 일부 그리스도인의 경우는 그러하였습니다. 어떻게 그들의 생각이 영향을 받아 왔습니까? 전형적인 예로, 어떤 그리스도인이 신비술을 주된 소재로 하는 영화를 보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영화를 보기는 했지만 영매술을 행한 것은 아니잖아” 하고 말합니다. 그런 식의 생각은 왜 위험합니까?

16. 신비술 행위를 주된 소재로 하는 오락물을 선택하는 것이 위험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16 영매술을 실제로 행하는 것과 그러한 행위를 보는 것은 물론 다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비술 행위를 보는 것이 위험하지 않다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왜 그러합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느님의 말씀은 사탄이나 그의 악귀들이 우리의 생각을 읽을 수 없다고 알려 줍니다. * 따라서 앞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내고 우리의 영적 약점을 찾으려면 악한 영들은 우리의 행동을 면밀히 관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관찰하는 것 중에는 우리가 선택하는 오락도 있습니다. 만일 어떤 그리스도인이 영매나 주문이나 악귀 들린 행동이나 그와 비슷한 악귀적인 주제들을 다루는 영화나 책을 좋아한다는 것을 행동으로 표현한다면, 그는 악귀들에게 일종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약점을 그들에게 알려 주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면 악귀들은 그 그리스도인이 드러낸 약점을 이용하여 비유적인 씨름에서 그를 쓰러뜨리려고 더욱더 맹렬하게 싸울 것입니다. 사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신비술을 주된 소재로 하는 오락물을 통해 처음으로 영매술에 관심을 갖게 되어 결국 실제 영매술 행위에 빠지게 되었습니다.—갈라디아서 6:7 낭독.

17. 사탄은 어떤 교활한 행위로 병약한 사람의 상황을 악용할 수 있습니까?

17 사탄은 오락에 대한 욕구뿐만 아니라 건강 관리에 대한 필요도 이용하려고 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어떤 그리스도인이 치료법을 찾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하는데도 건강이 나빠지기만 한다면 낙담이 될 것입니다. (마가복음 5:25, 26) 그런데 이때가 바로 사탄과 악귀들이 그의 상황을 악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악귀들은 병약한 사람이 절박한 심정으로 “주술” 즉 영매술이 관련된 치료나 시술을 받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1:13) 만일 악귀들의 그러한 교활한 행위가 성공을 거두게 된다면, 그 사람과 하느님의 관계에 악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어떻게 그러합니까?

병에 걸려 있을 때에도 여호와의 도움을 받으십시오

18. 그리스도인은 어떤 진단법이나 치료법을 받아들이지 않아야 하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18 여호와께서는 “주술”에 의지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너희가 손바닥을 펼 때에 나는 너희에게서 내 눈을 가린다. 너희가 기도를 아무리 많이 해도 나는 듣지 않는다”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이사야 1:15) 물론 우리는 기도가 방해를 받게 하거나 여호와의 도움의 손길을 막을 수 있는 일은 일절 하지 않기를 언제나 바라며, 병에 걸려 있는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시편 41:3) 그러므로 만일 어떤 진단법이나 치료법에 영매술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면, 참그리스도인은 그러한 방법을 받아들이지 않아야 합니다. * (마태복음 6:13) 그렇게 할 때 언제나 여호와의 후원을 받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정말 영매술일까?”라는 네모 안의 내용 참조.

악귀들에 관한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을 경우

19. (ㄱ) 마귀는 많은 사람을 속여 자기의 능력에 관해 어떻게 믿게 하고 있습니까? (ㄴ) 참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이야기를 멀리해야 합니까?

19 서구권에 사는 많은 사람이 사탄의 능력의 위험성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데 반해, 세계의 다른 지역들에서는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 지역들에서 마귀는 많은 사람을 속여 자기를 실제보다 더 강력한 존재로 믿게 하고 있습니다. 악한 영들에 대한 두려움이 먹고 일하고 자는 일상생활의 매 순간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한 악귀들이 어떤 강력한 일을 했다는 이야기도 매우 많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신이 나서 그런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거기에 매료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이야기를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옮겨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참하느님의 종들은 두 가지 중요한 이유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20.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부지중에라도 사탄을 위한 선전 활동을 하게 될 수 있습니까?

20 첫 번째로, 악귀들이 어떤 대단한 일을 했다는 식의 이야기를 남에게 옮기는 사람은 사탄에게 득이 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러합니까? 하느님의 말씀에서는 사탄이 강력한 일을 할 수 있다고 분명히 말하지만, 또한 그가 “거짓 표징”과 “속임수”도 사용한다고 경고합니다. (데살로니가 후서 2:9, 10) 사탄은 속임수의 대가이기 때문에 영매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정신에 어떻게 영향을 줄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들이 사실이 아닌 것들을 믿게 할 수 있는지 잘 압니다. 이를테면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뭔가를 보고 들었다고 진심으로 믿으면서 그 경험을 실제 사실인 양 이야기할지 모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의 이야기는 계속 되풀이되면서 부풀려집니다. 만일 어떤 그리스도인이 그런 이야기를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옮긴다면 그는 “거짓의 아버지”인 마귀가 시키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탄을 위한 선전 활동을 하는 것입니다.—요한복음 8:44; 디모데 후서 2:16.

21. 우리는 무엇을 우리 대화의 주제로 삼으려고 해야 합니까?

21 두 번째로, 과거에 악한 영들을 실제로 접한 일이 있는 그리스도인이라 하더라도 동료 신자들을 재미있게 해 주려고 그런 일에 대해 거듭거듭 이야기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 그러합니까? 우리는 “우리 믿음의 수석 대표자이며 완성자이신 예수를 열렬히 바라보라”는 권고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2:2) 그렇습니다. 사탄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의 관심의 초점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땅에 계실 때 어떻게 하셨는가 하는 점은 유의할 만합니다. 그분은 사탄이 무슨 일은 할 수 있고 무슨 일은 할 수 없는지 많은 이야기를 하실 수 있었지만, 제자들을 재미있게 해 주려고 악한 영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왕국 소식에 초점을 맞추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와 사도들을 본받아서 “하느님의 장엄한 일들”을 우리 대화의 주제로 삼으려고 해야 합니다.—사도행전 2:11; 누가복음 8:1; 로마서 1:11, 12.

22. 우리가 계속 어떻게 할 때 ‘하늘에서 기쁨’이 있을 것입니까?

22 사실 사탄은 영매술을 비롯해서 다양한 교활한 행위를 동원하여 여호와와 우리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악한 것을 몹시 싫어하고 선한 것에 고착한다면, 모든 형태의 영매술을 배척하겠다는 우리의 결의를 약화시킬 기회를 마귀에게 허용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4:27 낭독) 마귀가 더는 존재하지 않을 때까지 계속 우리가 “마귀의 교활한 행위에 맞서 굳게 서” 있다면 ‘하늘에서 기쁨’이 얼마나 크겠습니까!—누가복음 15:7; 에베소서 6:11.

^ 16항 사탄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반항자, 중상자, 속이는 자, 유혹하는 자, 거짓말쟁이 등과 같은 호칭들에는 그가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살필 수 있다는 암시가 들어 있지 않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여호와는 “마음을 살피시는” 분으로, 예수는 “사람의 가장 깊은 생각과 마음을 살피는” 분으로 묘사된다.—잠언 17:3; 요한 계시록 2:23.

^ 18항 더 많은 점을 알려면, 「파수대」 1994년 12월 15일호 19-22면에 나오는 “이 건강 진단은 합당한가?” 기사와 「깨어라!」 2001년 1월 8일호에 나오는 “성서의 견해—어떤 치료를 받을 것인지에 대한 결정이 중요한가?” 기사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