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월 7일
알바니아
수십 년 간의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100년 동안 알바니아에서 전해진 좋은 소식
2022년은 알바니아에서 여호와의 증인이 활동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나쇼 이드리지는 여호와의 증인이 된 최초의 알바니아인들 중 한 명이었습니다. 1920년대 초에 미국에서 살고 있던 그는 당시에 만국 성경 연구생이라고 불리던 여호와의 증인과 성경을 공부했습니다.
이드리지는 1922년에 알바니아로 돌아왔습니다. 이드리지 외에도 미국에서 성경 연구생이 된 알바니아인들이 진리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타나스 둘리는 알바니아에서 초창기에 성경 연구생이 된 사람들 중 한 명입니다. 그는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1925년에 알바니아에는 세 개의 회중이 조직되어 있었고, 격지에 있는 성경 연구생들도 있었습니다.”
그 시기에 「하나님의 거문고」 그리고 「바람직한 정부」(The Desirable Government)와 같은 몇몇 출판물들이 알바니아어로 번역되었습니다. 「파수대」(영문) 1925년 12월 1일호에서는 다음과 같이 보고했습니다. “상당수의 [알바니아어] 출판물이 사람들에게 전해졌으며, 알바니아 사람들은 진리를 깨닫고 크게 기뻐하고 있습니다.”
알바니아 형제들의 열심 있는 증거 활동이 얼마나 잘 알려졌던지, 사람들은 그들을 “복음 전파자”를 뜻하는 운질로러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1930년에 침례받은 나쇼 도리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1935년에, 우리는 여럿이 전세 버스를 이용하여 컬취러에서 전파하였습니다. 그 후 퍼르메트, 레스코빅, 에르세커, 코르처, 포그라데츠, 엘바산을 포함하는 더 광범위한 알바니아 전파 여행이 계획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념식을 지키기 위해 기념식이 있기 직전에 티라나에서 여행을 끝마쳤습니다.”
1939년에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정권이 알바니아를 점령하고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을 금지했습니다. 중립 문제가 대두되었고, 우리 형제들은 그리스-이탈리아 전쟁 a에서 무기를 들기를 거부했습니다. 전쟁 기간 동안 15명의 형제들이 징역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니코딤 쉬티 형제는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고 그 뒤로 아무도 그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갈 무렵인 1944년에 공산당이 알바니아를 장악했습니다. 박해는 계속되었고, 많은 형제들이 투옥되고 고문당했습니다. 일부 형제들은 노동 수용소로 보내져 가족들과 멀리 떨어져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 시기에 알바니아는 세상과 단절되어 있었습니다. 1959년 「여호와의 증인 연감」에서는 이렇게 보고했습니다. “이 나라의 통치자들이 알바니아의 형제들을 신세계 사회의 다른 성원들로부터 격리시켜 놓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하느님의 성령이 그들에게 작용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1967년에 알바니아는 세계 최초로 무신론 국가임을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 남아 있던 소수의 증인들은 조심스럽게 신앙생활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공산주의가 붕괴된 후, 1992년 5월 22일에 여호와의 증인은 법적 인가를 얻었습니다. 활동이 금지된 지 50여 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현재 알바니아에는 5550명의 증인들이 89개의 회중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극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말씀이 위력 있게 자라 가고 힘을 떨친” 것에 대해 기뻐합니다.—사도행전 19:20.
a 그리스-이탈리아 전쟁은 1940년 10월 28일부터 1941년 4월 23일까지 그리스와 이탈리아 사이에 일어난 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제2차 세계 대전 때 발칸반도에서 일어난 최초의 전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