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 전서 15:1-58

15  형제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좋은 소식을 다시 상기시켜 드립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받아들였고 또 그것을 위해 굳게 서 있습니다. 2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좋은 소식을 여러분이 굳게 잡고 있다면, 곧 헛되이 믿게 된 것이 아니라면, 여러분은 그 소식을 통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3  나는 나 역시 전해 받은 가장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 성경 말씀대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과+ 4  그분이 묻히셨다가+ 성경 말씀대로+ 셋째 날에+ 일으켜지셨다는 것과+ 5  게바에게 나타나시고+ 그다음에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6  그 후 그분은 한 번에 500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들 중 일부는 죽어 잠들어 있지만 대부분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7  그 후에 그분은 야고보에게+ 그리고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8  마지막으로, 달을 채우지 못하고 태어난 사람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9  나는 사도들 중에 가장 작은 자이며+ 사도라고 불릴 자격도 없는 사람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회중을 박해했기 때문입니다.+ 10  그러나 나는 하느님의 과분한 친절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그분이 내게 베푸신 과분한 친절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들 중 그 누구보다도 많이 수고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과분한 친절이 한 것입니다.+ 11  나나 그들이나 우리 모두 이렇게 전파하고 있으며 여러분도 이렇게 믿게 되었습니다.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으켜지셨다고 전파되고 있는데,+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어째서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 13  만일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일으켜지신 것이 아닙니다. 14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일으켜지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전파 활동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 15  또한 우리는 하느님에 대한 거짓 증인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죽은 사람이 실제로 일으켜지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일으키신 것이 아닌데도 우리가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일으키셨다고 말함으로+ 하느님을 거슬러 증언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16  죽은 사람이 일으켜지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도 일으켜지신 것이 아닙니다. 17  또한 그리스도께서 일으켜지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도 헛되고 여러분은 여전히 자신의 죄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18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죽어 잠든 사람들도 소멸되어 버린 것입니다.+ 19  우리가 현 생명만을 위해 그리스도께 희망을 두고 있다면 우리는 그 누구보다도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20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으켜지셔서 죽어 잠든 사람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21  죽음이 한 사람을 통해 왔으므로+ 죽은 사람의 부활도 한 사람을 통해 옵니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23  그러나 각각 차례가 있습니다. 첫 열매는 그리스도이시고+ 그다음은 그리스도의 임재 중에 그분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24  그다음은 끝입니다. 모든 정부와 모든 권위와 권세를 없애신 그분은 그때가 되면 왕국을 자신의 하느님 아버지께 넘겨 드리실 것입니다.+ 25  하느님께서 모든 적을 그의 발 아래 두실 때까지 그는 왕으로 통치하셔야 합니다.+ 26  그리고 맨 마지막 적인 죽음이 없어질 것입니다.+ 27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그의 발 아래 복종시키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복종하게 되었다’고 할 때에,+ 모든 것을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신 분은 그 가운데 포함되지 않는 것이 분명합니다.+ 28  그러나 모든 것이 아들에게 복종하게 된 때에는, 아들 자신도 모든 것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분에게 복종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모두에게 모든 것이 되실 것입니다.+ 29  그렇지 않다면 죽은 사람이 될 목적으로 침례를 받고 있는 사람들은 무엇을 하겠다는 것입니까?+ 죽은 사람이 결코 일으켜지지 않는다면 왜 그들이 그렇게 될 목적으로 침례를 받고 있습니까? 30  또 왜 우리는 늘* 위험을 무릅쓰고 있습니까?+ 31  나는 매일 죽음에 직면합니다. 형제 여러분, 이것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여러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만큼이나 확실한 것입니다. 32  내가 다른 사람들처럼 에베소에서 야수들과 싸웠다 하더라도*+ 그것이 나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죽은 사람이 일으켜지지 않는다면 “내일이면 죽을 테니 먹고 마십시다.”+ 33  잘못 인도되지 마십시오. 나쁜 교제는 유익한 습관*을 망칩니다.+ 34  정신을 차려 의를 행하고 죄를 거듭 짓지 마십시오.+ 하느님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더러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러분을 부끄럽게 하려고 말하는 것입니다. 35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일으켜집니까? 그들이 어떤 몸으로 옵니까?”+ 36  비합리적인 사람이여! 당신이 뿌리는 씨는 먼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합니다.+ 37  그리고 당신이 뿌리는 씨는 앞으로 생겨날 몸이 아니라 밀이든 다른 종류이든 단지 낟알일 뿐입니다. 38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몸을 주시는데, 각각의 씨에 고유한 몸을 주십니다. 39  모든 육체가 다 같은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육체가 있고, 가축의 육체가 있으며, 새의 육체가 있고, 물고기의 육체가 있습니다. 40  그리고 하늘의 몸들이+ 있고 땅의 몸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몸들의 영광이 다르고, 땅의 몸들의 영광이 다릅니다. 41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들의 영광이 다릅니다. 사실 별들도 영광이 서로 다릅니다. 42  죽은 사람의 부활도 그러합니다. 썩을 몸으로 뿌려져서 썩지 않을 몸으로 일으켜집니다.+ 43  비천한 몸으로 뿌려져서 영광스러운 몸으로 일으켜집니다.+ 약한 몸으로 뿌려져서 강한 몸으로 일으켜집니다.+ 44  육적인 몸으로 뿌려져서 영적인 몸으로 일으켜집니다.+ 육적인 몸이 있다면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 45  “첫 사람 아담은 생명체가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이 되었습니다.+ 46  그러나 영적인 몸이 먼저가 아닙니다. 육적인 몸이 먼저이고, 그다음이 영적인 몸입니다. 47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며 흙으로 만들어졌고,+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왔습니다.+ 48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들은 흙으로 만들어진 그 사람과 같고, 하늘에 속한 사람들은 하늘에 속한 그분과 같습니다.+ 49  우리가 흙으로 만들어진 그 사람의 형상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형상도 지니게 될 것입니다.+ 50  형제 여러분, 내가 말하는데 살과 피는 하느님의 왕국을 상속받을 수 없고 썩을 것은 썩지 않을 것을 상속받지 못합니다. 51  내가 여러분에게 신성한 비밀을 말해 주겠습니다. 우리가 모두 죽어 잠들 것이 아니라 모두 변화될 것입니다.+ 52  순식간에, 눈 깜빡할 사이에, 마지막 나팔이 울리는 동안에* 그렇게 될 것입니다. 나팔 소리가 나면+ 죽은 사람들이 썩지 않을 것으로 일으켜지고 우리는 변화될 것입니다.+ 53  이 썩을 것이 썩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하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않을 것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않을 것을* 입을 그때에, “죽음이 영원히 삼켜졌다”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55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 있느냐?”+ 56  죽음을 초래하는 독침은 죄이며,+ 죄의 힘은 율법입니다.+ 57  그러나 하느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니 그분께 감사드립니다!+ 58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확고하고+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을 많이 하십시오.+ 여러분은 주와 관련된 여러분의 수고가 헛되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각주

또는 “매시간”.
달리 번역하면 “내가 인간적인 생각으로 에베소에서 ~ 싸웠다면”; “내가 인간적인 동기로 에베소에서 ~ 싸웠다면”.
또는 “좋은 품행; 건전한 도덕성”.
또는 “울릴 때”.
또는 “이 멸성인 것이 불멸성을”.
또는 “이 멸성인 것이 불멸성을”.
직역하면 “공허한 것이 아님을”.

연구 노트

좋은 소식을 여러분이 굳게 잡고 있다면: 그리스도교의 “초보적인 교리” 중 하나인 부활 교리가 고린도에서 공격을 받고 있었다. (히 6:1, 2) 일부 사람들은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고 주장했다. (고전 15:12) 바울은 “내일이면 죽을 테니 먹고 마십시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을 언급한다. (고전 15:32) 그는 사 22:13을 인용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그가 한 말은 사후 생명을 부정한 에피쿠로스 같은 그리스 철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의 생각을 잘 보여 준다. (행 17:32. 고전 15:32 연구 노트 참조) 또는 회중 내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개인들의 견해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을 수 있다. (막 12:18) 또 다른 가능성으로,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일종의 영적 부활을 이미 경험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수도 있다. (딤후 2:16-18)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이 ‘좋은 소식을 굳게 잡지’ 않는다면 그들은 헛되이 믿는 사람들이 되어 그들의 희망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 못하게 될 것이었다.—고전 15:12 연구 노트 참조.

게바: 베드로의 이름 중 하나. (고전 1:12 연구 노트 참조)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함께 모인 자리에 나타나시기 전에 베드로에게 먼저 나타나셨는데, 아마도 그가 혼자 있을 때 나타나신 것 같다. (눅 24:34) 분명 베드로는 예수께서 그처럼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나타나신 일로 인해 크게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그때 베드로는 필요한 지침을 받았을 것이며 자신이 예수를 세 번 부인한 것을 그분이 용서해 주셨다는 점도 확신하게 되었을 것이다.—막 16:7 연구 노트 참조.

열두 제자에게: 여기에 언급된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일은 요 20:26-29에 기록된 일을 가리키는 것 같다. “열두 제자”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고 해서 유다가 그 자리에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근거는 없다. “열두 제자”는 사도들 중 한두 명이 빠지더라도 사도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지칭하는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요 20:24; 행 6:1-6 비교) 예수께서 그처럼 나타나신 일은 분명 제자들이 두려움을 극복하고 그분의 부활에 대해 담대하게 증거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분은 한 번에 500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는데: 예수의 제자들은 대부분 갈릴리에 있었으므로, 예수께서 “500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다는 바울의 이 말은 마 28:16-20에 나오는 사건을 언급한 것일 수 있다. (마 28:16 연구 노트 참조) 이 사람들 가운데는 부활되신 예수를 갈릴리에서 만나게 될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들은 여자들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마 28:7)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 대부분은 바울이 영감받아 고린도 전서를 쓴 때인 기원 55년에도 여전히 살아 있었다. 따라서 바울은 예수의 부활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그분이 부활되셨음을 직접 증언할 수 있는 목격 증인들이 살아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죽어 잠들어 있지만: 행 7:60 연구 노트 참조.

야고보: 예수의 양아버지 요셉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아들인 야고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야고보는 예수께서 부활되시기 전에는 그분에게 믿음을 두지 않았던 것 같다. (요 7:5) 바울은 여기서 예수께서 야고보에게 개인적으로 나타나신 일을 언급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 일을 통해 야고보는 자신의 형이 참으로 메시아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을 것이다. 야고보는 믿는 사람이 되었으며, 아마도 예수의 다른 이부동생들이 개종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행 1:13, 14.

달을 채우지 못하고 태어난 사람 같은: “달을 채우지 못하고 태어난 사람”으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갑작스럽게, 충격적으로, 적절하지 않은 때에 태어난 아이를 가리킬 수 있는 단어이다. 바울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부활되신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자신이 개종한 일을 묘사하면서 이 단어를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하지만 바울이 사용한 이 말은 몇 가지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개종이 자신에게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예기치 못한 충격적인 일이었다는 의미로 이 표현을 사용했을 수 있다. 그는 당시 일시적으로 시력을 잃기까지 했다. (행 9:3-9, 17-19) 바울은 자신이 적절하지 않은 시기에 비유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났다는 (즉 개종했다는) 뜻으로 이렇게 말했을 수도 있다. 자신이 앞 구절에서 언급한 사람들과는 달리, 예수께서 이미 하늘로 올라가신 뒤에 개종했다는 것이다. 바울은 자격이 없는데도 특권을 받았다는 것을 인정하며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어 말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라면 이어지는 고전 15:9, 10에서 그가 한 말과도 조화를 이룬다. 바울이 사용한 표현이 어떤 의미이든, 그는 부활되신 예수를 직접 본 경험을 소중히 여겼음이 분명하다. 그 경험을 통해 그는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되셨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행 22:6-11; 26:13-18.

나는 하느님의 과분한 친절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이 여호와를 섬기면서 무엇을 이루었든 그에 대한 영예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점을 겸손하게 인정한다. 그는 이 구절에서 하느님의 “과분한 친절”을 세 번이나 언급함으로 그 점을 강조한다. (용어 설명 “과분한 친절” 참조) 이 구절에 나오는 나는 그들 중 그 누구보다도 즉 다른 사도들보다도 많이 수고했다는 바울의 말은 그가 이처럼 과분한 친절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과 연관 지어 이해해야 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자신을 선택하여 사도가 되게 하신 하느님의 자비에 대해 깊이 감사하고 있었다. (딤전 1:12-16) 그는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고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육지와 바다로 엄청난 거리를 여행하면서 좋은 소식을 전하고 많은 회중을 세웠다. 그는 봉사를 수행하면서 훗날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의 일부가 된 14통의 영감받은 편지를 기록했다. 또한 여호와께서는 바울을 축복하셔서 그가 방언을 하고 환상을 보게 해 주셨으며, 죽은 사람을 부활시키는 것과 같은 다른 기적들도 행할 수 있게 해 주셨다. (행 20:7-10; 고전 14:18; 고후 12:1-5) 바울은 자신이 수행한 모든 봉사와 이러한 축복들을 여호와께서 주신 과분한 친절로 여겼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고: 이 사람들의 가르침이 옳다면, 땅에서 다시 살 희망을 가지고 죽은 사람들은 영원히 죽은 채로 있게 될 것이었다. (마 22:31, 32; 요 11:23, 24. 고전 15:2 연구 노트 참조) 또한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도 하늘에 올라갈 수 없을 것이었다. 하늘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먼저 죽은 뒤에 영적 피조물로 부활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고전 15:35-38. 고전 15:36, 38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은 만약 부활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아무런 목적도 없는 헛된 것이 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고전 15:13, 14) 따라서 그는 여기서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에 초점을 맞추어 부활 희망을 강력하게 변호한다.

부활: 마 22:23 연구 노트 참조.

그리스도께서 일으켜지지 않으셨다면: 부활 희망은 그리스도인 믿음의 기초를 이루는 “초보적인 교리” 중 하나이다. (히 6:1, 2) 예수께서 부활되지 않으셨다면 그분은 대제사장으로서 해야 할 매우 중요한 일, 즉 하늘에서 자신의 대속 희생의 가치를 여호와께 바치는 일을 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 (히 9:24)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느님의 주권, 그분의 이름과 왕국, 인간의 구원을 비롯해 성경의 기본적인 몇몇 가르침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시 83:18; 마 6:9, 10; 히 5:8, 9.

우리는 하느님에 대한 거짓 증인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부활을 부정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되는지 더 설명한다. 바울과 그의 동료 전파자들은 예수를 부활시키신 분이 여호와 하느님이라고 말했으므로, 부활이 거짓이라면 그들은 예수의 부활에 대해서뿐 아니라 여호와 하느님에 대해서도 거짓말을 한 셈이 된다.

여러분은 여전히 자신의 죄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부활을 부정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되는지 계속 설명한다. 그리스도가 부활되지 않았다면 하느님께 대속의 가치가 지불되지 않은 것이 된다. 만약 그렇다면 불완전한 인간들은 구속이나 구원을 받을 희망이 전혀 없이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것이 된다.—롬 3:23, 24; 고전 15:3; 히 9:11-14.

소멸되어 버린 것입니다: 부활 희망이 거짓이라면, 사망한 그리스도인들, 심지어 순교당한 그리스도인들도 자신들이 부활될 것이라는 거짓 희망에 속아 영원히 소멸되어 버린 것이 된다.

우리는 그 누구보다도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을 믿었기 때문에 많은 것을 포기했으며 박해와 어려움을 인내하고 의연하게 죽음을 맞았다. 부활 희망이 근거가 없는 것이라면 그리스도인들은 그 누구보다도 불쌍한 사람일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부활되신 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어떤 부정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는지 나열하면서 마지막으로 이 구절에 나오는 말을 한다. (고전 15:13-19) 하지만 바울은 그러한 결론이 전혀 타당성이 없다고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그가 이어지는 20절에서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으켜지셨습니다.”

죽어 잠든 사람들의 첫 열매: 예수께서는 기원 33년 니산월 16일에 부활되셨다. 그날은 유대인 대제사장이 첫 곡식 수확물의 첫 열매 중 일부를 여호와 앞에 바치는 날이었다. 대제사장은 보리 수확의 첫 열매를 흔들었는데, 그것은 그 땅의 첫 열매 중 첫째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레 23:6-14) 그 곡식단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최초로 하늘에서 영원히 살도록 부활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했다. 예수를 “첫 열매”라고 부른 것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하늘 생명으로 일으킴을 받을 사람들이 더 있을 것임을 시사하는 것이었다.—고전 15:23.

첫 열매: 용어 설명 참조.

그리스도의 임재 중에: 임재라는 표현은 예수의 몇몇 제자가 ‘그분의 임재의 표징’에 관해 질문하는 내용이 나오는 마 24:3에서 처음 사용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란 그분이 현 세상 제도의 마지막 날이 시작될 때 메시아 왕으로 보이지 않게 즉위하셔서 왕으로서 와 계시는 상태를 가리킨다. “임재”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파루시아이다. 많은 번역판에서는 “오다”라는 동사를 사용해서 이 단어를 번역하지만,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곁에 있음”을 의미한다. 그분의 임재는 단지 그분이 오시거나 도착하시는 순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정 기간 동안 계속되는 일이었다. 마 24:37-39에서 “노아의 날 ··· 홍수 이전 시대”를 “‘사람의 아들’의 임재”에 비한 것을 보면 파루시아에 그런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빌 2:12에서 “함께 있을 때”로 번역된 표현에도 파루시아가 사용되었는데, 바울은 이 단어를 “떨어져 있을 때”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용했다. (고전 16:17 연구 노트 참조) 따라서 여기서 바울은 영으로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의 형제들이자 공동 상속자들 즉 그분께 속한 사람들이 하늘 생명으로 부활되는 일이 예수께서 하늘에서 하느님의 왕국의 왕으로 즉위하시고 얼마 후에 있을 것이라고 설명한 것이다.

끝: 또는 “완전한(성취된) 끝”. (마 24:6 연구 노트 참조) 여기서 “끝”(그리스어 텔로스)은 천년 통치의 끝을 가리키는 것 같다. (계 20:4) 그때 예수께서는 겸손과 충성을 나타내셔서 “왕국을 자신의 하느님 아버지께 넘겨 드리실” 것이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천년 동안 통치하면서 그 목적을 온전히 달성했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여호와와 인류 사이에 이 보조 정부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와 죽음이 완전히 사라지고 인류가 구속을 받은 상태일 것이므로, 예수께서 구속자 역할을 하실 필요가 더는 없을 것이다.—고전 15:26, 28.

죽음이 없어질 것입니다: 또는 “죽음이 멸망될 것입니다”. 직역하면 “죽음이 무효가 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죽음과 그로 인한 결과가 없어지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다. 그처럼 죽음이 없어지려면 바울이 이 장에서 강력하게 옹호하는 가르침과 일치하게, 죽은 사람들이 부활을 통해 살아나는 일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요 5:28) 하지만 죽음이 완전히 없어지기 위해서는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죄의 흔적도 모두 제거되어야 한다. 따라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희생을 통해 “죽음을 초래하는 독침”인 죄가 없어질 것이라고 설명한다. 부활과 대속이라는 두 가지 수단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멸망시켜 무효가 되게 하신다. 이 장의 뒷부분에서 바울은 “죽음이 영원히 삼켜졌다”고 말한다.—고전 15:54-57.

복종할 것입니다: 아들이신 그리스도 예수는 겸손하게 아버지께 통치권을 돌려 드리고 여호와의 최고 주권에 복종하실 것이다. 그렇게 하심으로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통치가 정당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하실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하심으로 자신이 천년 통치를 성공적으로 끝낸 후에도 지상에서 사람으로 살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겸손하다는 것을 나타내실 것이다.—빌 2:5-11; 히 13:8.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모두에게 모든 것이 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통치권을 아버지께 돌려 드리고 나면, 여호와께서는 다시 모든 창조물을 직접 다스리시게 될 것이다. 완전해진 인류는 에덴에서의 반역이 가져온 모든 해를 바로잡을 보조 정부인 메시아 왕국을 더는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대속이나 중개자나 제사직도 더는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인류는 여호와의 아들딸로서 큰 자유를 누리며 아버지와 직접 의사소통하게 될 것이다. (롬 8:21) 바울이 영감받아 기록한 이 내용은 예수께서 ‘모든 정부와 모든 권위와 권세를 없애시고 왕국을 자신의 하느님 아버지께 넘겨 드리신’ 후에 있을 일이다.—고전 15:24.

죽은 사람이 될 목적으로 침례를 받고 있는: 고린도 전서 15장에서 바울은 부활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는 점을 논한다. 여기서 바울은 영으로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처럼 충절을 지키는 가운데 죽음을 맞는 인생행로 안으로 침례를 받는다고 즉 잠긴다고 말한다. 그 후 그들은 예수처럼 영의 생명으로 부활될 것이다. 이 침례에는 예수께서 겪으셨던 것과 비슷한 시련을 겪는 것이 포함되며, 많은 경우 그분과 같은 죽음을 당하는 것이 포함된다. (고전 15:30-34) 그리고 충실한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부활되어 하늘에서 살게 될 희망이 있다. 따라서 이 침례는 예수께서 막 10:38에서 언급하신 침례와 바울이 롬 6:3에서 언급한 침례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막 10:38; 롬 6:3 연구 노트 참조.

될 목적으로: 이 표현은 그리스어 전치사 히페르를 번역한 것이다. 히페르는 문자적으로 “위에”를 의미하지만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의미가 있기 때문에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는 문맥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 일부 성경 번역판에는 이 부분이 “죽은 사람을 위해 침례를 받는”이나 그와 비슷한 표현으로 되어 있다. 그러한 번역 표현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이 구절이 살아 있는 사람이 죽은 사람을 대신하여 침례를 받는 것을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 어디에도 그러한 침례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바울 시대에 그러한 침례가 행해졌다는 증거도 없다. 또한 죽은 사람을 대신하여 침례를 받는다는 것은 성경의 여러 구절들에서 알려 주는 점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성경에서는 침례를 받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소식을 “기쁘게 받아들여” 개인적으로 “믿게 된” “제자”들이었다고 알려 주기 때문이다.—행 2:41; 8:12; 마 28:19.

에베소에서 야수들과 싸웠다 하더라도: 로마인들은 흔히 범죄자들을 원형 경기장에 넣어 야수를 상대하게 했다. 학자들은 바울과 같은 로마 시민은 그러한 처벌을 받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일부 로마 시민들이 야수에게 던져지거나 야수와 싸워야 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역사적 증거가 있다. 바울이 고린도 후서에 기록한 내용이 경기장에서 문자적인 야수를 상대해야 했던 경험을 묘사한 것일 수 있다. (고후 1:8-10) 바울이 문자적인 야수에게 던져진 것이라면 그는 하느님의 개입에 의해 구출되었을 것이다. (단 6:22 비교) 이 경험은 바울이 봉사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겪은 많은 “죽을 고비” 중 하나였을 수 있다. (고후 11:23) 일부 학자들은 여기서 바울이 야수라는 표현을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한 것이며 에베소에서 야수 같은 반대자들을 만난 일을 묘사한 것이라고 생각한다.—행 19:23-41.

내일이면 죽을 테니 먹고 마십시다: 여기서 바울은 사 22:13을 인용한 것인데, 그 구절은 불순종하던 예루살렘 주민들의 태도를 잘 보여 준다. 그들은 예루살렘이 멸망될 위험에 처했을 때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쾌락에 탐닉했다. 바울이 그 구절에 나오는 표현을 인용한 것은 그 표현이 부활 희망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잘 보여 주기 때문이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에피쿠로스학파를 비롯한 일부 학파에 속한 사람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으며 현재의 삶에 몰두했다. 하지만 바울이 지적한 것처럼 부활은 확실히 일어날 일이며 그리스도인들이 자기희생적인 삶을 계속 살아가야 할 충분한 이유와 동기가 된다.—고전 15:58.

나쁜 교제는 유익한 습관을 망칩니다: 또는 “나쁜 친구는 좋은 품행(도덕성)을 망칩니다”. 이 말은 바울 시대에 흔히 사용되던 표현이나 격언이었던 것 같은데, 성경의 다른 구절들에 나오는 기본 원칙을 담고 있다. (잠 13:20; 14:7; 22:24, 25) 바울은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에 나오는 부활 교리를 부정하는 사람들과 부적절한 교제를 하지 말라고 권고하기 위해 이 말을 인용한 것이다. (고전 15:3-8. 고전 15:12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은 부활을 비롯해 확고한 근거가 있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배척하는 사람들과 교제하는 것이 믿음에 해가 되며 좋은 습관과 생각을 “망칠”(그리스어 프테이로, “타락시키다; 파괴하다”를 의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행 20:30; 딤전 4:1; 벧후 2:1) 고린도 회중에는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교제 대상을 지혜롭지 못하게 선택한 결과였을 수 있다.—고전 1:11; 5:1; 6:1; 11:20-22.

정신을 차려: 여기서 바울이 사용한 그리스어는 문자적으로 “(취한 상태에서) 깨어나다”를 의미한다. 고린도의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을 부정하는 것과 같은 배교적인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기 때문에, 영적으로 볼 때 마치 술 취한 사람처럼 방향 감각을 잃고 혼란스러워하는 상태 즉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바울은 그들에게 정신을 차리라고, 다시 말해 부활에 대한 가르침을 명확하게 이해하여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벗어나라고 권고한다. 그들은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 있다가 영적으로 병에 걸리거나 죽음에 이르기 전에 신속히 그렇게 해야 했다.—고전 11:30.

먼저 죽지 않으면: 바울은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이 영적인 몸으로 부활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육적인 몸이 묻히는 것을 씨가 뿌려지는 것에 비한다. 씨는 심어지면 일단 분해된다. 그런 의미에서 씨는 죽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후에 씨와는 형태와 모습이 전혀 다른 식물이 된다. (요 12:24 비교) 그와 비슷하게, 하느님의 아들과 함께하는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하늘에서 썩지 않을 것과 죽지 않을 것을 입도록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그리스도인은 먼저 죽어야 한다. 고전 15:42-44에서 바울은 뿌려진다는 표현을 비유적인 의미로 네 번 사용한다. 그는 영으로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육적인 몸을 포기하고 부활을 통해 영적인 몸을 얻게 되는지 묘사한다.—고전 15:38 연구 노트 참조.

하느님께서는 ··· 몸을 주시는데: 여기서 바울은 계속해서 영으로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이 부활되는 것을 씨에서 싹이 트는 것에 비한다. (고전 15:36 연구 노트 참조) 그는 조그마한 밀의 씨와 그 씨에서 자라는 식물의 모습이 전혀 다르다고 말한다. 그 씨는 ‘죽어서’ 하나의 새로운 식물이 된다. (고전 15:36, 37) 그와 비슷하게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도 먼저 인간으로서 죽는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자신이 정하신 때에 그들을 완전히 새로운 몸으로 다시 살리신다. (고후 5:1, 2; 빌 3:20, 21) 그들은 영적인 몸으로 부활되어 영계에서 살게 된다.—고전 15:44; 요1 3:2.

별들도 영광이 서로 다릅니다: 고린도의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살과 피를 가진 존재인 인간이 죽은 뒤 부활되어 다른 종류의 몸 즉 영적인 몸을 갖게 된다는 것을 믿기 힘들어했다. 따라서 바울은 몇 가지 생생한 예를 드는데 그중 하나로 별을 언급한다. 1세기에 사람들은 하늘을 보면서 별들의 밝기와 색깔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바울이 한 말의 요지는 별들을 그처럼 다양하게 창조하신 하느님이라면 당연히 사람을 부활시켜 영적인 몸을 주실 수 있다는 것이다.

썩지 않을 몸: 또는 “썩지 않을 것”. 그리스어 아프타르시아는 썩거나 부패할 수 없는 것, 소멸되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썩을 수밖에 없는 멸성인 몸으로 하느님을 충실하게 섬기다가 죽은 뒤 부활되어 썩지 않는 영적인 몸을 받는다. (고전 15:44) 그들이 받는 “썩지 않을 몸”은 본질적으로 부패하거나 소멸되지 않으며, 아마도 스스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몸일 것이다.—고전 15:53 연구 노트 비교.

육적인: 여기 사용된 그리스어 프시키코스프시케에서 나온 말인데, 프시케는 「신세계역」에서 “영혼”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이 표현이 “영혼적인”으로 번역된 「왕국 행간역」[Kingdom Interlinear]과 비교) 이 구절에서는 영적인 몸과 대조되는 땅의 피조물의 몸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어, 죽을 수 있고 우리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질적인 것을 의미한다.—용어 설명 “영혼” 참조.

첫 사람 아담은 ··· 마지막 아담은: 이 구절의 앞부분에서 바울은 창 2:7(“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을 인용하면서, “첫”과 “아담”이라는 단어를 덧붙인다. 이 구절의 뒷부분에서 그는 예수를 “마지막 아담”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고전 15:47에서 바울은 아담을 “첫 사람”, 예수를 “둘째 사람”이라고 부른다. 첫 사람 아담은 자신의 아버지이자 생명을 주신 분께 불순종했지만 마지막 아담은 그분께 온전히 순종했다. 첫 사람 아담은 자손들에게 죄를 퍼뜨렸지만 마지막 아담은 자신의 인간 생명을 속죄 제물로 바쳤다. (롬 5:12, 18, 19) 후에 여호와께서는 예수를 영의 몸으로 부활시키셨다. (벧전 3:18) 예수께서는 아담과 마찬가지로 완전한 인간이셨다. 따라서 여호와께서는 공의에 대한 자신의 표준을 지키시면서, 예수의 희생을 아담의 후손들을 도로 사기 위한 “상응하는 대속물”로 받아들이실 수 있었다. 이 대속 희생으로 인해 인류는 첫 사람 아담이 잃어버린 생명의 전망을 되찾게 될 것이었다. (딤전 2:5, 6) 따라서 예수를 “마지막 아담”이라고 부르는 것은 합당한 일이었다. 이 표현은 그분의 뒤에 또 다른 아담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시사한다.—눅 3:38; 롬 5:14 연구 노트 참조.

생명체: 또는 “산 영혼”. 여기서 바울은 창 2:7을 인용한 것인데, 그 구절에서는 히브리어 네페시가 “살아 있는”을 의미하는 히브리어와 함께 사용되어 “생명체”(또는 “산 영혼”, 각주)로 번역되었다. 히브리어 네페시는 문자적으로 “호흡하는 생물”을 의미한다.—용어 설명 “영혼” 참조.

하늘에 속한 그분: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 예수를 가리킨다.—고전 15:45.

깜빡할: “깜빡할”로 번역된 그리스어(리페)는 아주 빠르게 움직이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눈을 깜빡이거나 힐끗 보는 것을 가리킬 수 있다. 이러한 표현이 사용된 것을 볼 때, 마지막 나팔 소리가 나면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즉시 부활되어 하늘에서 불멸의 생명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살전 4:17; 계 14:12, 13.

죽지 않을 것: “죽지 않을 것”에 해당하는 그리스어(아타나시아)는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고전 15:53, 54; 딤전 6:16에 세 번 나온다. 이 단어는 기본적으로 “죽음에 굴복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생명이 끝이 없고 멸할 수 없는 특성을 지닌 것을 가리킨다. 죽을 수밖에 없는 몸으로 하느님을 충실히 섬긴 그리스도의 기름부음받은 제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영적 피조물들보다 더 나은 몸으로 부활된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에게 “멸할 수 없는 생명”을 주심으로 그들을 얼마나 신뢰하는지를 놀라운 방법으로 보여 주신다.—히 7:16. 고전 15:42 연구 노트 참조.

죽음이 영원히 삼켜졌다: 여기서 바울은 기원전 8세기에 이사야가 기록한 말을 인용함으로,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죽음이 없어질 것임을 하느님께서 이미 오래전에 약속하셨다는 점을 보여 준다. 사 25:8의 히브리어 본문에는 “그분[하느님]이 죽음을 영원히 삼켜 버리실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바울은 이 말을 인용하면서 문자적으로 “승리 안으로”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표현(여기서는 “영원히”로 번역됨)을 사용했다. 일부 성경 번역판에서는 이 표현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여 “승리가 죽음을 삼켜 버렸다” 또는 “죽음을 삼키고 승리를 얻었다”라고 번역한다. 하지만 이 그리스어 표현은 일부 문맥에서 “영구적으로; 영원히”라는 의미로 쓰일 수 있다. 이 표현은 「칠십인역」에서도 “영원히”를 의미하는 히브리어를 번역하는 데 사용되었는데, 그러한 예로 사 25:8; 애 5:20이 있다. 따라서 고전 15:54에서 이 그리스어 표현을 “영원히”로 번역할 만한 분명한 근거가 있다. 바울이 그 구절에서 인용한 성구의 히브리어 본문 표현이 특히 그 점을 강력하게 뒷받침한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 있느냐?”: 바울은 여기서 호 13:14을 인용한 것이다. 호세아의 예언은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시기에 부활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었다. 하지만 바울이 여기서 호 13:14을 적용한 방식을 보면 이 예언이 죽은 사람들이 부활되고 무덤(스올 또는 하데스)이 힘을 잃을 때에 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바울은 「칠십인역」의 표현을 부분적으로 인용한 것인데, 「칠십인역」에는 “죽음아, 너의 형벌이 어디 있느냐? 하데스야, 너의 독침이 어디 있느냐?”라고 되어 있다. 바울은 이 수사적인 질문을 사용함으로 죽음이라는 적에게 (고전 15:25, 26) 사실상 이렇게 말한 셈이다. “죽음아, 너는 다시는 승리를 거두지 못할 것이다! 죽음아, 너의 독침에는 이제 아무런 힘이 없을 것이다!”

독침: 그리스어 켄트론은 전갈과 같은 동물의 독침을 가리킬 수 있다. 그 단어는 계 9:10에서 사용되었는데, 그 구절에서는 상징적인 메뚜기들이 “전갈처럼 꼬리에 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한다. 이 구절(고전 15:55)에서는 그 단어가 죽음이라는 적이 수많은 인류에게 가져오는 괴로움과 고통을 가리키는 비유적인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고전 15:26) 죽음은 독침을 잃어 아무런 공격도 할 수 없는 전갈처럼 될 것이다. 영으로 기름부음받은 자들이 부활되어 하느님의 왕국을 상속받고 불멸성을 얻으면 죽음은 그들에게 아무런 힘도 행사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고전 15:57; 계 20:6)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 중에 하느님께서는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죽음의 독침을 완전히 없애실 것이다. 그때 수많은 사람들이 부활되고 죽음은 비유적인 의미에서 “불못”에 던져질 것이다.—계 20:12-14; 21:4; 요 5:28, 29.

죄의 힘은 율법입니다: 또는 “율법은 죄에게 힘을 줍니다”. 모세 율법은 많은 행동과 심지어 태도까지 죄로 규정함으로 무엇이 죄가 되는지 분명히 밝혀 주었다. (롬 3:19, 20; 갈 3:19) 그런 의미에서 율법은 죄에게 힘을 주었다. 그로 인해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이 죄 많은 상태에 있으며, 그 죄에 대해 하느님 앞에 책임이 있고, 메시아를 필요로 한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롬 6:23.

그러므로 ··· 확고하고 흔들리지 말며: “확고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굳게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을 가리킨다. 골 1:23에서도 그 단어는 “확고하다”로 번역되었으며, “기초 위에 굳게 세워지다”와 짝을 이루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하느님과 그분의 약속에 대해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굳건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을 가리킨다. (벧전 5:9) “흔들리지 않다”로 번역된 그리스어도 비슷한 의미를 담고 있으며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어려움을 겪거나 믿음에 공격을 받을 때에도 그리스도인에게는 배가 움직이지 않도록 단단히 고정시켜 주는 “닻”과 같은 희망이 있다. (히 6:19) 바울은 “확고하다”에 해당하는 표현과 “흔들리지 않다”에 해당하는 표현을 함께 사용함으로 고린도의 형제들에 대한 자신의 바람을 표현했다. 그는 그들이 “주의 일”에서 자신들의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음을 확신하는 가운데, 희망과 믿음을 단단히 붙잡겠다고 굳게 결심하기를 바랐다.

주의 일을 ··· 주와 관련된: 이 문맥에서 그리스어 키리오스(“주”)는 여호와 하느님을 가리킬 수도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킬 수도 있다. 여기서 “주”가 여호와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는 이유는 바울이 그리스도인 봉사의 직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동료 일꾼입니다”라고 말하며, 그 봉사의 직무를 “여호와의 일”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고전 3:9; 16:10; 사 61:1, 2; 눅 4:18, 19; 요 5:17; 롬 12:11) 또한 예수께서는 영적인 수확 활동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여호와 하느님을 “수확하는 주인[또는 “주”, 그리스어 키리오스]”이라고 부르셨다. (마 9:38) 하지만 바울이 예수께서 지상에 계실 때 앞장서서 수행하신 활동 즉 봉사의 직무를 염두에 두고 이 표현을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마 28:19, 20) 여기서 키리오스가 가리키는 대상이 누구이든, 그리스도인 봉사자들은 좋은 소식을 전하면서 주권자이신 주 여호와와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일하는 큰 특권을 누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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