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 전서 6:1-21
각주
연구 노트
종살이의 멍에를 메고 있는 사람들: 직역하면 “멍에 아래 있는 종들”. “멍에”라는 말은 주인의 권위 아래 노예나 종으로 예속된 상태를 가리키는 비유적인 표현으로 자주 사용되었다. (딛 2:9, 10; 벧전 2:18. 용어 설명 “멍에” 참조) 로마 제국에는 노예가 많았으며 그중에는 그리스도인들도 있었다. 예수의 제자들은 노예 제도를 옹호하지도 비판하지도 않았다. (고전 7:20, 21) 예수께서는 사회 개혁을 하려고 하지 않으셨으며 제자들도 “세상에 속해 있지 않”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요 17:14)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왕국에 관해 전파하셨는데, 이 왕국이 모든 형태의 압제와 불공정을 없앨 것이었다.—요 18:36 연구 노트 참조. 또한 미디어 갤러리 “노예가 하던 일” 참조.
계속 자기 주인을 온전히 존중받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여겨야 합니다: 바울은 종의 신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인을 존중하라고 권한다. 종이 어떤 마음가짐을 갖고 있는지는 그의 행동 즉 그가 자기 일을 성실하게 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그가 주인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 가르침이 그의 삶에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지 못했다는 뜻이 될 것이다. 그러한 좋지 않은 태도는 하느님의 이름에 모독이 돌아가게 한다.—골 3:22, 23. 엡 6:5, 6 연구 노트 참조.
믿는 사람을 주인으로 둔 사람들: 여기서 바울은 종과 주인이 모두 그리스도인인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공동 상속자”로서 하느님 앞에서 동일한 신분을 갖고 있다. (롬 8:17)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종의 신분에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영적 형제이기도 한 주인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가 주인을 위해 최선을 다해 일하지 않는다면 주인을 이용하는 셈이 될 것이다. 오히려 그는 자기 형제에 대한 사랑에서 우러나와 더욱 충실하고 부지런하게 일해야 한다. 한편 주인인 그리스도인은 종을 공정하게 대해야 했다.—엡 6:9; 골 4:1.
건전한 교훈: 여기서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가리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예수의 모든 가르침은 성경의 다른 부분과 일치하므로, 넓은 의미로 보면 “건전한[또는 “유익한”] 교훈”이라는 표현은 성경의 모든 가르침을 가리킬 수 있다.—딤후 1:13 연구 노트 참조.
경건한 정성: “경건한 정성”이라는 표현에 대해 알아보려면 딤전 4:7 연구 노트 참조. 또한 딤전 2:2 연구 노트 참조.
논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사로잡혀 있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동사는 문자적으로 “병들어 있다”를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표현은 “논쟁…에 불건전한 열정을 쏟습니다”로 번역할 수도 있다. 이것은 바울이 앞서 언급한,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건전한 교훈”과 대비되는 표현이다.—딤전 6:3 연구 노트 참조.
말에 대한 토론: 직역하면 “말싸움”. ‘논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은 흔히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교리를 퍼뜨리기 위해 사소한 문제에 대해서도 토론을 벌인다. 그러한 토론은 ‘시기와 분쟁을 일으키며’ 심지어 중상(그리스어 블라스페미아) 즉 다른 사람의 명예를 훼손시키는 모욕적인 말로 이어질 수 있다.—골 3:8 연구 노트 참조.
만족할 줄 안다면: 여기서 바울은 경건한 정성을 만족 즉 “자족”과 연관시킨다. 이 특성은 거짓 선생들이 갖고 있는 물질적 야망과 뚜렷이 대조된다. (딤전 6:8) 만족은 하느님의 종에게 기쁨과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준다.—빌 4:11 연구 노트 참조.
경건한 정성: “경건한 정성”이라는 표현에 대해 알아보려면 딤전 4:7 연구 노트 참조. 또한 딤전 2:2 연구 노트 참조.
경건한 정성은 큰 이득이 됩니다: 바울은 앞 문장에 이어 이 문장에서도 동일한 그리스어(“이득”과 “이득의 수단”으로 번역됨)를 사용한다. 5절에서 그는 경건한 정성을 “이득의 수단”으로 사용하여 회중을 이용하려고 하는 타락한 거짓 선생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가르침에 대해 대가를 요구했을 수도 있고, 그 밖의 방법으로 회중의 다른 사람들로부터 물질적 이득을 얻으려고 했을 수도 있다. (딤후 3:6; 딛 1:11. 고후 2:17 연구 노트 참조) 또는 경건한 정성을 나타내는 것이 물질적으로 부유해지는 방법이라고 가르쳤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바울이 말한 훨씬 더 큰 “이득”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경건한 정성을 통해 얻게 되는 영적 유익이다.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사람들도 바울이 여기서 한 말과 의미가 비슷한 말을 자주 했다. 하지만 여러 세기 전에 솔로몬왕은 영감을 받아 이렇게 썼다. “사람은 어머니의 태에서 나올 때처럼 벌거벗은 채 사라져 가리니, 애써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한다.” (전 5:15. 또한 욥 1:21; 시 49:17 참조) 예수께서도 부자에 관한 비유를 들면서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눅 12:16-21) 바울은 이 엄중한 진리를 사용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 탐욕과 물질주의를 피하고 그 대신 경건한 정성을 추구함으로 지속적인 만족을 얻기 위해 노력하라고 권한다.—딤전 6:6, 8-10.
입을 것: 달리 번역하면 “거처할 곳”.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는 문자적으로 “가릴 것”을 의미한다. 이 구절에서는 주로 옷을 가리키는 것 같다. 하지만 다른 형태의 가릴 것이나 거처할 곳, 이를테면 집을 의미할 수도 있다.
부유해지기로 결심하는 사람들: 바울은 돈이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일시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부유해지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을 가리켜 이렇게 말한 것이다. 그들은 탐욕으로 인해 비뚤어지고 잘못된 사고방식을 갖게 된다. 부유하든 가난하든 누구나 부유해지기로 결심하게 될 수 있다.
사람을 멸망과 파멸에 빠뜨립니다: 부를 열렬히 추구하는 사람들은 신체적으로, 영적으로, 감정적으로 해를 입게 될 것이다. “빠뜨리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바닥으로 끌어내리다” 또는 “가라앉게 하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눅 5:7에서 문자적인 의미로 쓰였는데, 고기가 많이 잡혀 배 두 척이 가라앉기 시작하는 것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 구절 즉 딤전 6:9에서 이 단어가 사용된 것을 볼 때, “부유해지기로 결심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를 비참한 상태로 끌어내리는 “유혹과 … 해로운 욕망에 빠지게” 되며 여호와와의 우정이 손상되어 삶이 파멸에 이르게 된다.
돈을 사랑하는: 바울이 이러한 사랑이 “온갖 해로운 일의 뿌리”라고 말했을 때, 그는 당시 잘 알려져 있던 속담을 간접적으로 언급한 것일 수 있다. 그는 돈 자체가 나쁜 것이라고 말하지 않으며, 돈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하다. (전 7:12; 10:19) 위험한 것은 돈에 대한 사랑이다. 5절에서 바울은 일부 거짓 선생들이 돈에 대한 사랑에 빠져 있다는 점을 밝힌다. 따라서 그가 앞서 감독자의 자격 조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돈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구체적으로 말한 것도 당연하다. (딤전 3:1, 3 및 연구 노트) 성경에서는 돈을 사랑하는 것에 또 어떤 위험성이 있는지 알려 준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전 5:10) 더 심각한 것으로, 돈에 대한 사랑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경쟁을 벌이며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완전히 밀어내 버릴 수도 있다. (마 6:24. 눅 16:9 연구 노트 참조) 따라서 돈에 대한 사랑은 온갖 “해로운 일”의 뿌리 즉 원인이다. 그러한 사랑을 가지면 바울이 이 구절에서 언급한 “고통”을 겪게 된다.
많은 고통: “고통”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심한 감정적, 정신적, 영적 고통과 괴로움을 가리킬 수 있다. 그러한 고통을 겪는 원인 중 하나는 양심의 가책일 수 있다. 돈에 대한 사랑은 가룟 유다가 “많은 고통”을 겪게 된 원인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는 그러한 사랑에 사로잡혀 도둑질을 하고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하기까지 했다. (마 26:14-16; 요 12:6) 유다는 한때 충실한 사도였지만 “멸망의 아들”이 되고 말았다.—요 17:12 연구 노트 참조.
온통 자기를 찔렀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사용한 그리스어 동사는 날카로운 무기로 반복적으로 찌르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완전히 꿰뚫는다는 뜻을 담고 있다. 바울이 한 말의 취지는 그리스도인이 돈에 대한 사랑을 중심으로 살아간다면 심각한 해를 입게 된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그는 “많은 고통”을 겪게 된다.
하느님의 사람이여: 바울은 디모데를 “하느님의 사람”이라고 부르는데, 이 표현은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이 구절과 딤후 3:17에만 두 번 나온다. 하지만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하느님의 사람”(또는 “참하느님의 사람”)이라는 표현이 약 70회 나온다. 이 표현은 하느님의 예언자들을 비롯해 그분의 특별한 대표자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는데, 예를 들면 모세(신 33:1), 사무엘(삼상 9:6, 10), 다윗(느 12:24), 엘리야(왕상 17:18, 24), 엘리사(왕하 4:7, 9)에게 사용되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 표현을 사용한 것은 디모데가 하느님으로부터 에베소 회중에서 거짓 선생들에 맞서 싸우라는 임명을 받았다는 점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였을 수 있다. (딤전 1:3, 4; 6:2ㄴ-10) 또는 여호와께 온전히 헌신하고 그분의 영감받은 말씀에 따라 행동하면서 살아가는 남자나 여자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했을 수도 있다.—딤후 3:17 연구 노트 참조.
의…를 추구하십시오: 바울은 디모데가 추구해야 할 특성들을 나열하면서 “의”를 가장 먼저 언급한다. (또한 딤후 2:22 참조) 디모데는 이미 헌신한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이었다. (롬 5:1) 하지만 그는 여전히 옳고 그른 것에 대한 하느님의 표준을 따르기 위해 최선을 다함으로 의로운 상태를 유지하려고 노력해야 했다.—용어 설명 “의” 참조. 또한 엡 6:14 연구 노트 참조.
경건한 정성: “경건한 정성”이라는 표현에 대해 알아보려면 딤전 4:7 연구 노트 참조. 또한 딤전 2:2 연구 노트 참조.
추구하십시오: “추구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추적하다; 뒤쫓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될 경우 어떤 것을 이루거나 얻기 위해 애쓰는 것을 가리킨다. 디모데는 바울이 언급한 특성들을 이미 갖고 있었지만, 그 특성들을 계속 기르고 개선해야 했으며 평생에 걸쳐 그 일을 추구해야 했다. 또한 바울은 디모데에게 물질주의의 덫과 같은 악한 것을 피하라고 즉 그러한 것으로부터 도망하라고 권고한다. (딤전 6:9, 10) 바울은 물질주의에 빠지면 해를 입고 경건한 특성들을 기르면 유익을 얻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디모데에게 물질주의를 피하고 경건한 특성들을 추구하라고 권한 것이다.—마 6:24; 고전 6:18 및 연구 노트; 10:14; 딤후 2:22.
믿음을 위해 훌륭한 싸움을 싸우십시오: 여기서 “싸움”, “싸우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명사와 동사는 운동선수가 경기에서 이기려고 힘쓰거나 겨루는 것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눅 13:24; 고전 9:25 연구 노트 참조) 따라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에 밝혀져 있는 그리스도교 진리를 변호하면서 여호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위해 싸워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이 싸움은 참으로 “훌륭한” 즉 고상한 싸움이다.—딤후 4:7 연구 노트 참조.
영원한 생명: 딤전 6:19 연구 노트 참조.
본디오 빌라도 앞에서 증인으로: 복음서 기록에서 알려 주듯이,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빌라도와 대화를 나누는 중에 그에게 증거하셨다. (마 27:11; 요 18:33-38) 하지만 공개적 선언이라는 표현은 예수께서 빌라도와 짧은 대화를 나누면서 그에게 하신 말씀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 수 있다. (롬 10:9 연구 노트 참조) 여기서 바울은 예수께서 재판을 받고 죽임을 당하시기까지 “증인으로” 인내하신 행로 전체를 언급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 분명 디모데는 예수께서 “증인으로” 남기신 뛰어난 본을 생각하면서 에베소에서 자신의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려는 마음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나타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에피파네이아)는 성경에서 ‘어떤 것에 대한 분별할 수 있는 증거’ 또는 ‘권위나 능력을 나타내 보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예수께서 땅에 계시던 때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된다. (딤후 1:10 및 연구 노트) 또한 그분이 왕권을 가지고 임재해 계시는 기간에 일어나는 여러 사건들과 관련하여 사용된다. (예를 들어 살후 2:8 연구 노트 참조) 이 문맥에서 “나타나실 때”라는 표현은 예수께서 하늘에서 영광스럽고 강력한 지위에 계시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는 미래의 지정된 때를 가리킨다.—단 2:44; 7:13, 14; 딤전 6:15; 딤후 4:1.
행복하시고: 예수께서는 여호와 하느님의 축복과 은혜를 누린다는 면에서 권능자로서 더없이 “행복하신” 즉 축복받으신 분이다. (빌 2:9-11) 또한 예수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으로서, “행복하신 하느님”이신 아버지의 기쁨을 완벽하게 반영하신다.—골 1:15; 딤전 1:11 및 연구 노트. 잠 8:30, 31 비교.
행복하시고 유일한 권능자: 문맥과 여기에 사용된 표현을 볼 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이렇게 말한 것이 분명하다. 앞서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를 언급했다. (딤전 6:14) 여기서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불완전한 인간 통치자들과 대조한다. “권능자”로 번역된 그리스어(디나스테스)는 왕을 가리킬 수도 있고 방백과 같이 왕의 권위 아래 종속된 통치자를 가리킬 수도 있다. 이것은 아버지이신 여호와의 권위 아래 왕으로 통치하는 예수를 묘사하는 데 적합한 표현이다. 예수는 단 7:14의 성취로 하느님으로부터 “통치권과 영예와 왕국”을 직접 받은 유일한 통치자이다. 그러한 통치자는 예수뿐이므로 그분을 “유일한 권능자”라고 부르는 것은 합당할 것이다. 그분은 고대 예루살렘에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통치한 왕들을 포함해 이 땅의 어떤 왕이나 주보다도 우월한 분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그들 모두의 왕이자 주이시다.—계 17:14; 19:16 비교.
홀로 불멸성을 가진 분: 여기서 바울은 예수께서 어떻게 다른 모든 권능자나 왕이나 주와 다르신지 더 설명한다. (딤전 6:15 연구 노트 참조) 여호와께서는 아들 예수를 불멸의 생명을 가진 영으로 부활시키셨다. (롬 6:9; 벧전 3:18) 예수 이전에는 그러한 선물을 받은 왕이나 주가 없었다. 예수께서만 홀로 그런 선물을 받으셨으며, 따라서 그분은 모든 불완전한 인간 통치자보다 우월하시다.—고전 15:53 연구 노트 참조.
가까이 갈 수 없는 빛 속에 거하시고: 예수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신 뒤에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으셨다.” (히 10:12) 그분은 모든 빛과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과 함께 거하신다. (시 36:9) 또한 예수 자신도 살과 피를 가진 인간이 보거나 가까이 갈 수 없는 영광을 가지고 계시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그들이 그분을 다시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지만, 그 일은 그들이 하늘에서 영적 피조물로 부활된 후에 있을 것이었다. 그때 그들은 예수께서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영광을 누리고 계신 모습을 보게 될 것이었다.—요 13:36; 14:19; 17:24.
아멘: 롬 1:25 연구 노트 참조.
현 세상 제도: 또는 “현 시대”. 여기서 바울은 사탄이 통치하는 불의한 세상 제도를 가리켜 이렇게 말한 것이다.—마 13:22; 고후 4:4; 갈 1:4 연구 노트 참조.
현 세상 제도에서 부유한 사람들: 사탄이 불의한 현 세상 제도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흔히 물질을 추구하라는 압력을 받는다. 따라서 바울은 부유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경계를 늦추지 말라고 경고한다. (롬 12:2; 고후 4:4) 예수께서는 앞으로 이 세상 제도가 사라지고 하느님의 왕국이 통치하는 새로운 세상 제도가 들어설 것이라고 가르치셨다. (막 10:30 및 연구 노트; 눅 18:29, 30) 바울도 “오는” 세상 제도에 대해 가르쳤다. (엡 1:21; 2:7) 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오는 세상 제도에 초점을 맞추어 “미래를 위한 훌륭한 기초가 되는 보물을 안전하게 쌓으라”고 권한다.—딤전 6:19.
교훈하여: 또는 “명령하여; 지시하여”.—딤전 1:5 연구 노트 참조.
거만해지지 말고: “거만하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오만하다”로 번역할 수도 있다. 바울은 부유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계속 물질에 대해 균형 잡힌 견해를 가지라고 권한다. 부유한 사람은 자신이 부유하기 때문에 남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부를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으신다.—잠 22:2; 마 8:20; 약 2:5.
불확실한 재물이 아니라 … 하느님께 희망을 두라고: 부유한 사람은 자신이 가진 재물이 진정한 안정을 누리게 해 준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바울은 재물이 사실 믿을 수 없고 불확실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재물은 유혹과 올무에 빠지게 할 수 있으며 (딤전 6:9) 예기치 않게 갑자기 사라질 수 있다.—잠 18:11; 23:4, 5.
우리가 즐기는 모든 것을 풍부히 주시는: 이 구절과 이어지는 구절에서 바울은 어근이 같은 단어들을 사용하여 요점을 강조한다. 먼저 그는 “부유한 사람들”에게 “불확실한 재물”이 아니라 하느님께 희망을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다음 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느님께서 모든 좋은 것의 근원이시며 그들의 즐거움을 위해 그러한 것들을 “풍부히” 즉 관대하게 주신다는 점을 일깨워 준다. 물론 여호와께서 주시는 것들 가운데 그들에게 가장 큰 기쁨과 만족과 안정을 주는 것은 그분이 베푸시는 영적인 것들이다. (마 6:19-21, 33) 끝으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훌륭한 일에 부유하여” “참생명을 굳게 잡으라”고 권한다.—딤전 6:18, 19.
참생명: 여기서 바울이 사용한 표현은 딤전 6:12에 나오는 표현과 비슷한데, 그 구절에서 그는 디모데에게 “영원한 생명을 굳게 잡으라”고 권고했다. 따라서 바울이 여기서 언급한 “참생명”은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는 것 같다. (요 14:6 연구 노트 참조) 바울과 디모데 모두 생명의 근원이신 여호와의 원래 목적이 사람이 땅에서 영원히 평화롭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게 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창 1:28; 2:15-17) 그러한 삶에 비할 때, 고통과 질병과 사별의 아픔으로 가득한 짧은 삶은 헛되고 좌절감만 가져다준다. (욥 14:1, 2; 시 103:15, 16; 전 1:2) 사람들이 겪는 그런 일들 때문에 삶과 재물은 불확실한 것이 되고 만다. 바울은 “현 세상 제도”에서 살아가는 동료 그리스도인들이 “참생명” 즉 기쁨과 평화가 가득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전망을 소중히 여기기를 바랐다.—딤전 6:17.
그대에게 맡겨진 것을 지키고: 여기서 바울이 언급한 “맡겨진 것”에는 디모데에게 맡겨진 성경 진리가 포함된다. (살전 2:4; 딤후 1:14. 롬 3:2 및 연구 노트 비교) “맡겨진 것”으로 번역된 단어는 은행에 보관된 귀중품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 또한 누군가에게 관리하도록 맡기는 물건을 가리키는 데도 쓰였는데, 그리스어 「칠십인역」에서 그러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레 6:2, 4 [5:21, 23, LXX]) 디모데는 신성한 소식을 다른 사람들이 접할 수 없게 숨겨 두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는 일을 할 때 그 소식을 주의 깊이 정확하게 전달한다는 의미에서 그것을 지켜야 했다. (딤후 2:2) 그렇게 한다면 “헛된 말과 거짓된 ‘지식’”을 가르치는 사람들에 의해 귀중한 진리가 변질되거나 더럽혀지지 않도록 지킬 즉 보호할 수 있을 것이었다.
헛된 말: 직역하면 “헛된 소리”. 여기서 바울이 사용한 그리스어 표현은 “가치 없는 이야기”를 의미한다. 일부 성경 번역판에서는 이 표현을 “헛된 잡담”, “무의미한 논쟁”으로 번역한다. 그러한 말은 하느님의 말씀에 나오는 확실한 진리가 아니라 추측에 근거해 있었다. 그것은 믿음을 키우는 데 있어서 아무 가치가 없다는 의미에서 헛된 것이었다. (딤전 1:6; 딤후 4:4; 딛 3:9) 더 심각한 문제로, 많은 경우 그러한 잡담이나 논쟁은 거룩한 것에 어긋나는 것 즉 속되거나 불경스러운 것이었다. 그러한 논쟁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에 담긴 진리를 제쳐 두고 사람의 생각을 앞세우는 것이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런 말을 멀리하라고 경고했다.—딤전 4:7 및 연구 노트; 딤후 2:16.
거짓된 ‘지식’: 여기서 바울이 언급한 “지식”은 지식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바울은 그러한 지식이 거짓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 지식은 하느님의 말씀에 근거해 있지 않다. 사실 그 지식에는 모순된 이론들 즉 서로 상충되는 사상이나 논증이 들어 있었다. 더 심각한 것으로, 영감받은 기록에 어긋나는 사상이 들어 있었다. 바울은 이 편지에서 디모데에게 거짓 선생들이 하는 분열시키는 헛된 말에 대해 거듭 경고했다. 그들은 자신의 학식을 뽐내고 회중에 영향을 주려고 했다. (딤전 1:4, 7; 4:1-3, 7; 6:3-6) “지식”(그리스어 그노시스)에 대한 거짓된 사상은 그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2세기에, 배교한 그리스도인들로 이루어진 일부 집단은 자신들을 그노시스파(영지주의자들) 즉 “지식을 가진 자들”이라고 불렀다.—요 1:14 연구 노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