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1-26
연구 노트
사도행전: 기원 2세기의 일부 사본들에는 프락세이스 아포스톨론이라는 그리스어 제목이 나온다. 하지만 이 책에 원래부터 제목이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이 책은 누가복음에 이어지는 내용이다. (행 1:1 연구 노트 참조) 사도행전은 모든 사도들의 활동이 아니라 주로 베드로와 바울의 활동을 다룬다. 이 책에는 그리스도인 회중이 어떻게 놀랍게 시작되어 빠르게 성장했는지 알려 주는 종합적이고 믿을 만한 자료가 들어 있다. 그 회중은 먼저 유대인 가운데서, 다음으로 사마리아인 가운데서, 그 후로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발전해 나갔다. (마 16:19 연구 노트 참조) 또한 사도행전은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의 영감받은 편지들이 어떤 역사적인 배경에서 쓰여졌는지 알려 준다.
데오빌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모두 이 사람에게 보낸 것이다. 눅 1:3에서는 데오빌로라는 이름 앞에 “존귀한”이라는 표현이 나온다.—이 표현과 데오빌로에 관해 알아보려면 눅 1:3 연구 노트 참조.
첫 번째 기록: 예수의 생애를 기록한 누가의 복음서를 가리킨다. 누가는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행하고 가르치신 일을 처음부터 모두” 다루었다. 사도행전에서는 누가복음의 끝부분에서 다룬 사건 이후에 있었던 제자들의 활동을 기록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문체와 표현이 비슷하며 두 기록 모두 데오빌로에게 보낸 것이다. 데오빌로가 그리스도의 제자였는지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다. (눅 1:3 연구 노트 참조) 누가는 사도행전의 서두에서 자신의 복음서 끝부분에 나오는 많은 사건들을 간단하게 언급한다. 이것은 사도행전이 누가복음에 이어지는 내용임을 분명히 알려 준다. 하지만 사도행전의 서두에는 누가복음과 조금 다른 표현이 사용되었으며 더 많은 세부점이 들어 있다.—눅 24:49과 행 1:1-12 비교.
하느님의 왕국: 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여호와의 왕국이다. 이 주제가 사도행전 전반에 흐르고 있다. (행 8:12; 14:22; 19:8; 20:25; 28:31) 사도행전은 사도들이 그 왕국에 관해 “철저히 증거했으며” 봉사의 직무를 완수했다는 점을 강조한다.—행 2:40; 5:42; 8:25; 10:42; 20:21, 24; 23:11; 26:22; 28:23.
때나 시기: 이 구절에서는 시간을 가리키는 두 가지 단어가 사용되었다. 여기서 때로 번역된 단어는 그리스어 크로노스의 복수형이다. 이 단어는 길든 짧든 길이가 정해져 있지 않은 기간을 가리킬 수 있다. 시기로 번역된 단어는 그리스어 카이로스의 복수형이다. (카이로스는 “정해진 때”로 번역되기도 한다.) 많은 경우 이 단어는 하느님의 마련이나 시간표 안에서 미래의 기간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며, 특히 그리스도의 임재와 그의 왕국과 관련하여 사용된다.—행 3:19; 살전 5:1. 막 1:15; 눅 21:24 연구 노트 참조.
자신의 관할에: 또는 “자신의 권한 아래”. 이 표현은 오직 여호와만이 자신의 목적을 성취시키기 위해 “때나 시기”를 정할 권한을 가지고 계시다는 점을 보여 준다. 여호와께서는 위대한 시간 엄수자이시다. 예수께서는 돌아가시기 전에, 끝이 올 ‘날과 시간’은 아들인 자신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고 말씀하셨다. 당시에는 아들인 그분조차 그날과 시간을 알지 못하셨던 것이다.—마 24:36; 막 13:32.
성령: 또는 “거룩한 영; 거룩한 활동력”. 사도행전의 그리스어 원문에는 “성령”이라는 표현이 41회 나온다. 또한 하느님의 성령을 가리키는 “영”(그리스어 프뉴마)이라는 표현도 적어도 15회 나온다. (예를 보려면 행 2:4, 17, 18; 5:9; 11:28; 21:4 참조. 또한 용어 설명 “영” 참조) 이처럼 사도행전은 예수의 제자들이 세계적으로 전파하고 가르치는 활동을 완수할 수 있었던 것이 오직 하느님의 활동력 덕분이었음을 거듭 강조한다.—막 1:12 연구 노트 비교.
땅의 가장 먼 곳까지: 또는 “땅끝까지”. 이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표현은 사 49:6의 예언을 인용한 행 13:47에도 나온다. 그리스어 「칠십인역」은 사 49:6을 번역할 때 동일한 그리스어를 사용한다. 사 49:6에서는 여호와의 종이 “이방 사람들의 빛”이 되어 구원이 “땅끝까지” 미치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 구절(행 1:8)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그 예언을 떠올리게 한다. 이 말씀은 이전에 예수께서 제자들이 자신보다 “더 큰 일”을 할 것이라고 하신 말씀과 조화를 이룬다. (요 14:12 연구 노트 참조) 또한 그리스도인 전파 활동이 세계적인 규모로 수행될 것이라는 그분의 말씀과도 조화를 이룬다.—마 24:14; 26:13; 28:19 연구 노트 참조.
나의 증인: 예수의 초기 제자들은 충실한 유대인으로서 이미 여호와의 증인이었으며 여호와만이 유일하신 참하느님이심을 증언한 사람들이었다. (사 43:10-12; 44:8) 하지만 이제 제자들은 여호와의 증인만 아니라 예수의 증인도 되어야 했다. 그들은 여호와의 목적의 새로운 부면, 즉 메시아 왕국을 통해 여호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일에서 예수께서 수행하시는 중요한 역할을 알려야 했다. 사도행전에는 “증인”(마르티스), “증언하다; 증거하다”(마르티레오), “철저히 증거하다”(디아마르티로마이)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들과 그와 어근이 같은 단어들이 성경에서 요한복음 다음으로 많이 나온다. (요 1:7 연구 노트 참조) 여호와와 예수의 증인이 되어 하느님의 목적에 관해 철저히 증거한다는 사상은 사도행전 전반에 흐르는 주제이다. 제자들이 증거해야 했던 하느님의 목적에는 그분의 왕국과 예수의 중요한 역할이 포함되었다. (행 2:32, 40; 3:15; 4:33; 5:32; 8:25; 10:39; 13:31; 18:5; 20:21, 24; 22:20; 23:11; 26:16; 28:23) 1세기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은 그러한 일들이 실제로 있었다는 점을 확증함으로 예수에 대해 증언했다. (행 1:21, 22; 10:40, 41) 나중에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은 그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 갖는 중요한 의미를 선포함으로 예수에 대해 증언했다.—행 22:15. 요 18:37 연구 노트 참조.
하늘: 이 구절에는 그리스어 우라노스가 3번 나온다. 이 단어는 물질적 하늘이나 영적 하늘을 가리킬 수 있다.
같은 방식으로 오실 것입니다: “오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에르코마이)는 성경에서 여러 가지 의미로 자주 사용된다. 일부 문맥에서는 예수께서 큰 환난 중에 심판을 선고하고 집행하기 위해 심판관으로 오시는 것을 가리킨다. (마 24:30; 막 13:26; 눅 21:27) 하지만 이 그리스어 단어는 다른 경우에도 예수와 관련하여 사용된다. (마 16:28–17:2; 21:5, 9; 23:39; 눅 19:38) 따라서 이 구절에서 “오다”라는 단어가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는 문맥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 천사들은 예수께서 떠날 때와 같은 “방식”(그리스어 트로포스)으로 “오실” 즉 돌아오실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스어 트로포스는 형태나 모양이나 몸이 아니라 방식을 가리킨다. 문맥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예수께서 떠나시는 것을 세상 사람들은 보지 못했다. 사도들만이 예수께서 이 땅을 떠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돌아가신다는 것을 알았다. 이전에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느님의 왕국”의 왕으로 돌아오는 것에 관해 말씀하시면서, 자신이 모두가 분명히 알 수 있는 방식으로 오지는 않을 것임을 밝히셨다. 제자들만이 그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었다. (눅 17:20. 연구 노트 참조) 계 1:7에서도 예수께서 ‘오실’ 것이라고 알려 준다. 하지만 이 구절(행 1:11)의 경우와는 달리, 그때는 “모든 눈이 그분을 볼 것이다.” (계 1:7) 따라서 행 1:11에서 “오다”라는 표현은 예수께서 왕국 권능을 가지고 보이지 않게 오셔서 그분의 임재가 시작되는 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마 24:3.
안식일에도 갈 수 있는 거리: 이스라엘 사람이 안식일에 여행하도록 허용된 거리를 가리킨다. 이 구절에서는 올리브산에서 예루살렘 도시까지의 거리를 가리켜 안식일에도 갈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고 말한다. 율법은 안식일에 여행하는 것을 제한했지만, 얼마나 되는 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지는 명시하지 않았다. (출 16:29) 후에 랍비들은 유대인이 안식일에 여행할 수 있는 거리를 약 2000큐빗(890미터)으로 규정했다. 그러한 해석은 민 35:5과 수 3:3, 4에 근거한 것이었다. 민 35:5에는 ‘도시 밖 2000큐빗을 측량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며 수 3:3, 4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계약의 궤”로부터 약 2000큐빗의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규정이 나온다. 랍비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안식일에 장막에서 숭배를 드리기 위해 적어도 그 정도 거리를 여행하는 것은 허용된다고 생각했다. (민 28:9, 10) 요세푸스는 올리브산에서 예루살렘까지의 거리를 한 번은 5스타디온(925미터), 다른 한 번은 6스타디온(1110미터)이라고 언급했다. 두 수치가 다른 이유는 시작 지점이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수치가 맞든 두 수치 모두 랍비들이 안식일에 갈 수 있다고 규정한 거리와 비슷하며, 이 구절에서 누가가 한 말과 조화를 이룬다.
열심 있는 사람: 사도 시몬을 사도 시몬 베드로와 구별시켜 주는 칭호. (눅 6:14, 15) 이 구절과 눅 6:15에서 사용된 그리스어 젤로테스는 “열심당원; 열성적인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마 10:4과 막 3:18에서는 “가나내 사람”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는데, 이 표현은 “열심당원; 열성적인 사람”을 의미하는 히브리어나 아람어 표현에서 유래한 것 같다. 시몬이 한때 로마의 통치에 반대하는 유대인 파벌인 열심당에 속해 있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가 열심과 열정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칭호를 얻었을 수 있다.
그분의 형제들: 예수의 이부동생들을 가리킨다. 사복음서와 사도행전과 바울이 기록한 두 편지는 “주의 형제들”, “주의 형제”, ‘그분의 형제들’, “그의 누이들”이라는 표현을 언급한다. 그리고 그 “형제들” 네 명의 이름이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고 알려 준다. (고전 9:5; 갈 1:19; 마 12:46; 13:55, 56; 막 3:31; 눅 8:19; 요 2:12) 예수의 형제들과 누이들은 모두 그분이 기적으로 출생한 뒤에 태어났다. 대부분의 성경 학자들은 예수에게 적어도 네 명의 형제와 두 명의 누이가 있었으며 그들은 모두 요셉과 마리아가 정상적인 출산 과정을 통해 낳은 자녀였다는 데 동의한다.—마 13:55 연구 노트 참조.
형제들: 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인 남자를 “형제”로, 그리스도인 여자를 “자매”로 구분하여 언급하기도 한다. (고전 7:14, 15) 하지만 이 구절에서처럼 “형제들”이라는 단어를 남자와 여자 모두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행 1:13, 14) 일반적으로 “형제들”이라는 단어는 남자와 여자 모두가 포함된 집단을 부르는 말로 사용되었으며 남자들에게만 한정해서 쓰는 표현이 아니었다. (롬 1:13; 살전 1:4) 이 단어는 대부분의 영감받은 그리스도인 편지에서 이러한 의미로 사용된다. 앞 구절(행 1:14)에서는 요셉과 마리아가 낳은 예수의 이부형제들을 가리키는 데 그리스어 아델포스의 복수형이 사용되었다.—마 13:55; 행 1:14 연구 노트 참조.
사람들의 수: 직역하면 “이름들의 무리”. 이 문맥에서 “이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오노마)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 단어는 계 3:4(각주)에서도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형제 여러분: 직역하면 “남자들 형제들”. 앞 구절과는 달리 이 구절에서는 “형제들”이라는 표현이 “남자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아네르)와 함께 사용되었다. 가룟 유다 대신 사도가 될 사람을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베드로가 “남자들 형제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을 볼 때 그는 회중의 남자 성원들만을 향해 이 말을 한 것 같다.
거꾸로 떨어져 배가 터지고: 마태의 기록에서는 유다가 “목매어 죽었다”고 알려 준다. 마태는 유다가 자살한 방법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마 27:5) 반면에 이 구절에서 누가는 그 결과를 묘사한 것이다. 두 기록을 종합해 보면, 유다는 절벽 근처에서 목을 매단 것 같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 줄이 끊어지거나 나뭇가지가 부러지면서 아래에 있는 바위로 떨어져 몸이 파열된 것 같다. 예루살렘 주변의 지형이 가파르고 바위가 많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
그가 맡았던 감독의 직책: 또는 “그가 받은 감독자의 임명”.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 에피스코페는 “감독자”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명사 에피스코포스와 히 12:15에서 “주의하다”로 번역된 동사 에피스코페오와 어근이 같다. 베드로는 불충실한 사도 유다 때문에 생긴 빈자리를 채워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 근거로 시 109:8을 인용했다. 그 구절에 사용된 히브리어 페쿳다는 “감독의 직책; 관리; 감독자”와 같은 표현으로 번역할 수 있다. (민 4:16; 사 60:17) 「칠십인역」 시 109:8(108:8, LXX)에서는 히브리어 페쿳다를 번역할 때 행 1:20에서 누가가 사용한 그리스어 에피스코페를 사용했다. 베드로가 영감을 받아 이 구절에서 한 말을 볼 때 사도들이 감독자로서의 직책 즉 임명을 받았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들은 예수께 직접 임명을 받았다. (막 3:14) 따라서 기원 33년 오순절 하루 만에 약 120명에서 약 3000명으로 늘어난 그리스도인 회중에는 처음에 12명의 감독자가 있었다. (행 1:15; 2:41) 그 후에 점점 커져 가는 회중을 돌보도록 다른 사람들도 감독자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사도들이 받은 감독의 직책은 특별한 것이었다. 여호와께서 열두 사도가 미래에 새 예루살렘의 “열두 기초석”을 이루게 할 목적을 갖고 계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계 21:14. 행 20:28 연구 노트 참조.
우리 가운데 활동하시던: 직역하면 “우리 가운데 드나드시던”. 이 표현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일상생활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 셈어 관용구에서 나온 말이다. 이 표현은 “우리 가운데 사시던”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신 28:6, 19; 시 121:8, 각주 비교.
맛디아: 이 그리스어 이름은 맛다디아의 축약형인 것 같다. 맛다디아는 “여호와의 선물”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이름 “맛디디야”에서 유래했다. (대상 15:18) 베드로의 말에 따르면, (행 1:21, 22) 맛디아는 예수께서 3년 반 동안 봉사하시던 내내 그분의 제자였으며 사도들과 가깝게 지냈다. 그는 예수께서 전파하도록 보내신 70명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눅 10:1) 맛디아는 사도로 선택된 후에 “열한 사도와 함께 계수되었다.” (행 1:26) 그 이후로 사도행전에 언급되는 “사도들” 또는 “열두 사도”라는 표현에는 맛디아도 포함된다.—행 2:37, 43; 4:33, 36; 5:12, 29; 6:2, 6; 8:1, 14.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히브리어 성경의 여러 구절에서는 여호와 하느님을 마음을 읽으실 수 있는 분으로 언급한다. (신 8:2; 삼상 16:7; 왕상 8:39; 대상 28:9; 시 44:21; 렘 11:20; 17:10) 따라서 이 구절에서 히브리어를 하는 유대인들은 하느님께 기도할 때 자연스럽게 하느님의 이름 여호와를 사용했을 것이다. ‘마음을 아시는 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카르디오그노스테스는 이 구절과 행 15:8에만 나온다. 행 15:8에서는 “마음을 아시는 하느님”으로 번역되었다.—부록 다3 소개; 행 1:24 참조.
여호와: 현존하는 그리스어 사본들에는 이 부분이 “주”(그리스어 키리오스)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부록 다에서 설명하듯이, 이 구절의 원문에 하느님의 이름이 사용되었으며 후에 “주”라는 칭호로 대치되었다고 볼 수 있는 타당한 이유들이 있다. 따라서 「신세계역」 본문에서는 여호와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제비를 뽑았는데: 그리스도 이전 시대에 살았던 하느님의 종들은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여호와의 뜻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제비를 뽑았다. (레 16:8; 민 33:54; 대상 25:8; 잠 16:33; 18:18. 용어 설명 “제비” 참조)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는 예수의 제자들이 제비를 뽑았다는 언급이 이 구절에만 나온다. 제자들은 추천된 두 사람 중에 누가 가룟 유다를 대신할 것인지 결정하기 위해 제비를 뽑았다. 제자들은 이 문제에 있어서 여호와의 인도가 필요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원래 열두 사도는 예수께서 밤새도록 아버지께 기도하시고 나서 직접 임명하신 사람들이었다. (눅 6:12, 13) 따라서 “맛디아가 뽑히기” 전에 제자들이 몇몇 성구들을 검토하고 여호와께 기도하면서 그분이 누구를 선택하셨는지 “알려 주실” 것을 구체적으로 요청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행 1:20, 23, 24) 하지만 기원 33년 오순절 이후로는 감독자나 보조자를 선택하거나 중요한 문제를 결정하기 위해 제비를 뽑았다는 기록이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그리스도인 회중에 성령이 작용하기 시작하면서 그러한 방법은 더는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행 6:2-6; 13:2; 20:28; 딤후 3:16, 17) 감독자를 선택할 때 제비를 뽑는 것이 아니라 생활에서 성령의 열매를 나타내는 사람들을 감독자로 선택했다. (딤전 3:1-13; 딛 1:5-9) 제비를 뽑는 관습은 다른 민족들도 있었다. (더 3:7; 욜 3:3; 옵 11) 예를 들어, 로마 군인들은 시 22:18에 예언된 대로 예수의 옷을 놓고 제비를 뽑았다. 그들은 성경 예언을 성취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개인적인 이득을 얻을 목적으로 그렇게 한 것 같다.—요 19:24. 마 27:35 연구 노트 참조.
함께 계수되었다: 또는 “함께 여겨졌다”. 다른 열한 사도와 동일하게 여겨졌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제 열두 사도가 있게 되었다. 그들은 오순절에 영적 이스라엘의 기초를 이룰 것이었다. 나중에 그리스어를 하는 제자들과 관련하여 문제가 생겼을 때 맛디아는 “열두 사도” 중 한 사람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참여했을 것이다.—행 6:1, 2.
미디어
사건은 시간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다
1. 올리브산의 베다니 근처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땅의 가장 먼 곳까지 이르러” 그분의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시다 (행 1:8)
2. 오순절에 제자들에게 성령이 부어지자 그들이 여러 언어로 증거하다 (행 2:1-6)
3. ‘아름다운 문’이라는 성전 문에서 다리가 불구인 사람이 고침을 받다 (행 3:1-8)
4. 사도들이 산헤드린 앞에 서서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께 순종해야 한다”고 말하다 (행 5:27-29)
5. 예루살렘 밖에서 스데반이 돌에 맞다 (행 7:54-60)
6. 제자들이 흩어지고 빌립이 사마리아로 가서 전파하기 시작하다.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로 보내지고 그곳의 침례받은 사람들이 성령을 받게 되다 (행 8:4, 5, 14, 17)
7. 빌립이 예루살렘에서 가자로 가는 길에서 에티오피아 환관에게 전파하고 침례를 주다.—“복음 전파자 빌립의 활동” 지도 참조 (행 8:26-31, 36-38)
8. 예수께서 다마스쿠스로 가던 사울에게 나타나시다 (행 9:1-6)
9. 예수께서 아나니아에게 ‘곧은길’이라는 거리로 가서 사울을 도와주라고 말씀하시다. 사울이 침례를 받다 (행 9:10, 11, 17, 18)
10. 요파에서 도르가가 죽자 제자들이 요파에서 가까운 룻다에 있던 베드로에게 와 달라고 말하다. 베드로가 요파에 도착하여 도르가를 부활시키다 (행 9:36-41)
11. 요파에 있는 동안, 베드로가 깨끗하게 된 동물에 관한 환상을 보다 (행 9:43; 10:9-16)
12. 베드로가 카이사레아에 가서 고넬료를 비롯한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들에게 전파하다. 그들이 믿고 성령을 받고 침례를 받다 (행 10:23, 24, 34-48)
13. 시리아 안티오크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다 (행 11:26)
14. 헤롯이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감옥에 넣다. 천사가 베드로를 감옥에서 풀어 주다 (행 12:2-4, 6-10)
15. 바울이 바나바와 요한 마가와 함께 1차 선교 여행을 시작하다.—“바울의 1차 선교 여행” 지도 참조 (행 12:25; 13:4, 5)
16. 안티오크에서 할례 문제로 논쟁이 벌어지자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그 문제를 가져가다. 모임이 끝난 뒤에 바울과 바나바가 안티오크로 돌아가다 (행 15:1-4, 6, 22-31)
17. 바울이 2차 선교 여행을 시작하다.—“바울의 2차 선교 여행” 지도 참조
18. 바울이 3차 선교 여행을 시작하다.—“바울의 3차 선교 여행” 지도 참조
19. 바울이 예루살렘에 있을 때 성전에서 소동이 일어나다. 바울이 체포되고 안토니아 요새의 계단에서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다 (행 21:27-40)
20. 바울을 죽이려는 음모가 밝혀지자 군인들이 바울을 안디바드리로 데려가다. 바울이 카이사레아로 호송되다 (행 23:12-17, 23, 24, 31-35)
21. 바울이 페스투스 앞에서 재판을 받다. 카이사르에게 상소하다 (행 25:8-12)
22. 바울이 로마로 떠나다.—“로마로 가는 바울의 여정” 지도 참조
이 짧은 영상은 동쪽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가면서, 오늘날의 에트투르(성경에 나오는 벳바게가 있었던 곳으로 여겨지는 마을)를 지나 올리브산의 한 봉우리까지 이어지는 경로를 보여 준다. 베다니는 벳바게 동편, 올리브산의 동쪽 경사지에 자리 잡고 있다. 예수와 그분의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있을 때 베다니에서 묵곤 했는데, 오늘날에는 그곳에 아랍어로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는 뜻의 엘아자리예(엘에이자리야)가 있다. 예수께서는 분명 마르다와 마리아와 나사로의 집에 머무셨을 것이다. (마 21:17; 막 11:11; 눅 21:37; 요 11:1) 그분은 그 집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 영상에 나오는 것과 비슷한 경로를 따라가셨을 것이다. 기원 33년 니산월 9일에 어린 나귀를 타고 올리브산을 넘어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는 아마도 벳바게에서 출발하여 그 길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가셨을 것이다.
1. 베다니에서 벳바게로 가는 길
2. 벳바게
3. 올리브산
4. 기드론 골짜기
5. 성전 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