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4:1-54
연구 노트
사마리아: 예수 시대에 사마리아는 로마에 속한 한 지역의 이름이었다. 예수께서는 때때로 이 지역을 지나가셨으며, 나중에 제자들은 이곳에 그리스도교에 관한 소식을 전했다. 사마리아의 정확한 경계는 오늘날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지역은 북쪽의 갈릴리와 남쪽의 유대 사이에 있었고, 요르단강에서부터 서쪽으로 지중해 연안의 평야까지 펼쳐져 있었다. 대체로 이 지역은 과거에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요르단강 서쪽)에 속했던 영토와 일치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을 오가는 길에 가끔 사마리아를 지나가셨지만 (요 4:3-6; 눅 9:51, 52; 17:11) 사도들에게 사마리아의 도시들에서 전파하지 말라고 지시하셨다. 그들의 주된 임무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 즉 유대인들에게 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마 10:5, 6) 하지만 그러한 지시는 한시적인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하늘로 올라가기 바로 전에 제자들에게 “사마리아”와 “땅의 가장 먼 곳까지” 좋은 소식을 전하라고 말씀하셨다. (행 1:8, 9) 예루살렘에서 박해가 일어났을 때 일부 제자들, 특히 빌립은 사마리아 전역을 두루 다니며 좋은 소식을 전했다. 후에 사도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령을 받을 수 있도록 그곳에 베드로와 요한을 보냈다.—행 8:1-17, 25; 9:31; 15:3.
수가: 사마리아의 한 도시. 오늘날 이 도시로 추정되는 곳은 나블루스 근처의 아스카르라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세겜에서 북동쪽으로 약 1킬로미터, 야곱의 우물에서 북북동쪽으로 0.7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부록 나6 및 나10 참조) 일부 사람들은 시리아어 시나이 책자본에 “수겜”이라고 표기되어 있다는 점과 몇몇 초기 세속 문헌을 근거로 수가가 세겜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장 신뢰할 만한 그리스어 사본들에는 “수가”라고 표기되어 있다. 또한 고고학자들에 따르면, 이 기록에 언급된 일이 있을 당시에는 세겜(텔발라타)에 사람이 살지 않았다.
야곱의 우물: 이 우물은 오늘날의 비르야쿠브(베에르야아코브)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나블루스에서 남동쪽으로 약 2.5킬로미터 떨어져 있으며, 세겜이 있던 곳인 텔발라타에서 그리 멀지 않다. 이 우물은 깊이가 깊으며 물이 꼭대기까지 차오르는 법이 없다. 19세기에 측정했을 때는 이 우물의 깊이가 약 23미터였다. 바닥에 돌 같은 것들이 쌓여 있으므로 고대에는 이 우물이 훨씬 더 깊었을 수 있다. (요 4:11) 이 우물은 보통 5월 말경부터 가을비가 내릴 때까지 말라 있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이 우물의 물이 빗물과 스며들어 온 물이 모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가 하면 이 우물이 샘이 있는 곳에 만들어져서 자체적으로 물이 솟아나기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구절에 나오는 우물에 대한 연구 노트 참조) 성경에는 야곱이 이 우물을 팠다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야곱이 그 근처에 땅을 가지고 있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창 33:18-20; 수 24:32) 야곱은 많은 식구들과 가축 떼에게 필요한 물을 구하려고 자신이 직접 이 우물을 팠거나 다른 사람을 시켜 파게 했을 것이다. 이웃 사람들이 이미 그 지역에서 다른 물 공급원들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므로, 그들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그렇게 했을 수 있다. 또는 그 지역에 있는 우물들이 말라 버려서 새로 우물을 팠을 수도 있다.
피곤하셔서: 성경에서 예수께서 “피곤하셨다”고 언급하는 것은 이 구절뿐이다. 이때는 낮 12시경이었고, 예수께서는 오전에 유대의 요르단 골짜기에서 그보다 900미터가량 높은 곳에 있는 사마리아의 수가까지 가파른 오르막길을 따라 여행하셨을 것이다.—요 4:3-5. 부록 가7 참조.
우물: 또는 “샘”. 요한은 이 기록에서 수가에 있는 야곱의 우물을 가리키는 데 두 개의 그리스어 단어를 사용한다. 이 구절에 두 번 나오는 그리스어 페게(“우물”)는 대개 샘을 가리킨다. 이것은 야곱의 우물이 샘이 솟아나는 곳에 만들어진 것이었음을 시사하는 것일 수 있다. 약 3:11에서 이 단어는 문자적인 “샘”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요 4:14에서는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그 구절에서도 “샘”으로 번역되었다. 요 4:12에서는 야곱의 우물을 가리키는 데 그리스어 프레아르가 사용되었는데, 이 단어는 우물, 저수조, 수직 갱도를 의미할 수 있다. (삼상 19:22, 칠십인역; 눅 14:5; 계 9:1) 많은 경우, 샘이 솟아나는 곳에 우물을 만들었으며, 그렇게 하기 위해 샘을 정비하거나 더 깊게 파기도 했다. 이 기록에서 야곱의 우물을 가리키는 데 “샘”에 해당하는 그리스어와 “우물”에 해당하는 그리스어가 모두 사용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일 수 있다.—이 구절에 나오는 야곱의 우물에 대한 연구 노트 참조.
제6시: 낮 12시경.—마 20:3 연구 노트 참조.
유대인은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표현은 아시리아 사람들에 의해 정복되기 전에 열 지파 왕국에 살았던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말로 처음 사용되었다. (왕하 17:29) 사실, 사마리아 사람들 즉 열 지파 왕국의 유대인들과 나머지 유대인들을 구분하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앞서 여로보암이 열 지파 이스라엘 왕국에 우상 숭배를 도입했을 때부터였다. (왕상 12:26-30) 아시리아 사람들에게 정복된 후에는,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표현이 사마리아 지역에 남겨진 사람들의 후손들뿐 아니라 그 지역으로 이주한 외국인들도 포함하는 말이 되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자신들이 므낫세와 에브라임 지파의 후손이라고 주장했지만 분명 외국인과 혈통이 섞인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성경에서는 사마리아 지역에 그처럼 여러 민족이 섞여 살게 되면서 사마리아의 숭배가 더 타락하게 되었다고 알려 준다. (왕하 17:24-41) 바빌론 유배 기간이 끝난 후 유대인들이 돌아왔을 때, 사마리아 사람들은 자신들이 여호와께 정성을 바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예루살렘의 성전과 성벽을 재건하는 일을 반대했다. 그리고 아마도 기원전 4세기에 그들은 그리심산에 자기들의 성전을 지었다. 그 성전은 기원전 128년에 유대인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하지만 사마리아 사람들은 계속 그 산에서 숭배를 했다. 1세기에 그들은 사마리아 지역에 거주했는데, 그곳은 로마의 한 행정 구역이었으며 유대와 갈릴리 사이에 있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성경에서 처음 다섯 권의 책만을 받아들였으며 여호수아서도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그리심산에 성전을 지은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 책들의 일부 구절들을 수정했다. 예수 시대에는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표현이 그들의 민족적 배경뿐 아니라 그들이 믿는 종교까지 떠올리게 하는 표현이었으며 그들은 유대인들에게 멸시를 당했다.—요 8:48.
··· 않기 때문이다: 괄호 안에 들어 있는 말은 일부 사본에는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여러 권위 있는 초기 사본들에는 이 말이 들어 있다.
생명의 물: 직역하면 “생수”. 이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표현은 문자적으로, 흐르는 물이나 샘물 또는 샘을 파서 만든 우물에서 길은 물을 의미한다. 저수조에 담긴 고여 있는 물과 대비되는 표현이다. 레 14:5에 나오는 “생수”는 히브리어를 직역한 것이며 “흐르는 물”로도 번역할 수 있다. 렘 2:13과 17:13에서는 여호와가 “생명의 물[직역하면 “생수”]의 근원[또는 “샘”]” 즉 생명을 주는 상징적인 물의 근원으로 묘사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여자와 이야기하실 때 “생명의 물” 즉 “생수”라는 표현을 비유적 의미로 사용하셨지만, 그 여자는 처음에 예수의 말씀을 문자적 의미로 이해한 것 같다.—요 4:11. 요 4:14 연구 노트 참조.
이 우물은 깊습니다: 요 4:6 연구 노트 참조.
우리의 조상 야곱: 사마리아 사람들은 자신들이 야곱의 아들 요셉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많은 유대인들은 그러한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했던 것 같다. 일부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다른 민족의 후손임을 강조하기 위해 그들을 굿 사람들 또는 구다 사람들을 의미하는 히브리어로 불렀다. 굿 또는 구다라는 이름은 기원전 740년에 이스라엘이 유배된 후에 아시리아 왕이 사마리아의 도시들로 이주시킨 사람들이 원래 살던 곳을 가리킨다. 굿 또는 구다는 바빌론에서 북동쪽으로 5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을 것이다.—왕하 17:23, 24, 30.
내가 줄 물: 이 구절에서 “물”과 “샘”이라는 표현은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보다 앞서 예수께서는 이 여자에게 “생명의 물”을 언급하셨다. (요 4:10 연구 노트 참조) 이제 그분은 자신이 주는 물이 그것을 마시는 사람 안에서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성경에서 물은 인류가 완전한 생명을 누리도록 회복시켜 주는 하느님의 마련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사용된다. 이 상징적인 물의 중요한 부분은 예수의 대속 희생이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그분의 말씀을 잘 듣고 그분의 제자가 되는 사람들이 얻게 되는 영적 유익에 초점을 맞추신다. 여호와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 가고” 그 지식과 일치하게 믿음을 갖고 행동하는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전망을 갖게 된다. (요 17:3)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 상징적인 물은 그것을 마시는 사람 안에서 생명을 주는 유익이 솟아오르는 샘이 될 것이다. 그런 사람은 이 “생명수”를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려는 강한 열망을 갖게 된다.—계 21:6; 22:1, 17. 요 7:38 연구 노트 참조.
이 산: 그리심산을 가리킨다. (부록 나10 참조) 그리심산은 히브리어 성경에 4번 언급된다. (신 11:29; 27:12; 수 8:33; 삿 9:7)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견줄 만한 자기들의 성전을 그리심산에 지었다. 그 성전은 아마도 기원전 4세기에 지어진 것 같으며, 기원전 128년에 유대인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성경에서 처음 다섯 권의 책만을 받아들였으며 여호수아서도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성경의 다섯 권의 책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나름대로 수정해서 받아들였으며, 그것이 오늘날 사마리아 오경으로 알려져 있다. 사마리아 오경은 고대 히브리어에서 파생한 그들 나름의 문자로 기록되었다. 사마리아 오경의 본문은 히브리어 성경의 마소라 본문과 약 6000군데에서 차이가 난다. 대부분은 사소한 차이이지만 중대한 차이가 있는 곳들도 있다. 예를 들어 신 27:4의 경우, 성경에서는 “에발 산”에서 돌들을 세우고 회칠을 한 다음 그 위에 모세 율법을 기록해야 했다고 알려 주는데, 사마리아 오경에는 “에발 산”이 아니라 “그리심 산”으로 되어 있다. (신 27:8) 그처럼 산의 이름을 바꾼 이유는 그리심산이 하느님의 거룩한 산이라는 자신들의 믿음을 뒷받침하기 위해서였음이 분명하다.
구원이 유대인에게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또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에는 유대인들이 하느님의 말씀과 순결한 숭배와 구원으로 인도하는 진리를 맡았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롬 3:1, 2) 또한 유대인들에게서 메시아가 나와 아브라함의 “자손”에 관한 하느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다. (창 22:18; 갈 3:16)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말씀하셨을 당시에는, 유대인들을 통해서만 하느님에 관한 진리와, 그분이 요구하시는 것과, 메시아에 관한 세부적인 점들을 알 수 있었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하느님께서 사용하시는 통로였으며, 여호와를 섬기기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이 선택하신 민족과 연합하여 그분을 섬겨야 했다.
하느님은 영이십니다: 여기서 그리스어 프뉴마는 영적 존재를 가리킨다. (용어 설명 “영” 참조) 성경은 하느님과 영광스럽게 되신 예수와 천사들이 모두 영이라고 알려 준다. (고전 15:45; 고후 3:17; 히 1:14) 영은 사람과는 매우 다른 형태의 생명을 가지고 있으며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영적 존재는 “육적인 몸”보다 훨씬 고등한 “영적인 몸”을 가지고 있다. (고전 15:44; 요 1:18) 성경에서 하느님을 얼굴, 눈, 귀, 손 등이 있는 분으로 묘사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사람들이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이해하도록 돕기 위한 비유적인 표현이다. 성경은 하느님께서 인격체로서의 특성을 가지고 계시다고 분명히 알려 준다. 또한 그분은 물질계가 아닌 영계에 존재하시며,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아버지께 간다”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 (요 16:28) 히 9:24에서는 그리스도께서 “하늘 그 자체에” 들어가셔서 “우리를 위해 하느님 앞에 나타나 계신다”고 알려 준다.
영[으로] 숭배해야 합니다: 용어 설명 “영”에서 알려 주듯이, 그리스어 프뉴마는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이 단어는 하느님의 활동력 즉 성령을 의미할 수도 있고, 사람이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게 만드는 힘 즉 정신 태도를 의미할 수도 있다. “영”이라는 단어에 여러 가지 의미가 있기는 하지만 그 공통점 중 하나는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는 점이다. 요 4:21에서 예수께서는 더는 사마리아의 그리심산이나 예루살렘 성전 같은 물리적인 장소를 중심으로 아버지를 숭배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느님은 물질로 이루어진 분이 아니며 인간이 보거나 만질 수 없는 분이므로, 문자적인 성전이나 산을 중심으로 그분을 숭배할 필요가 없었다. 다른 성경 구절들에서 예수께서는 하느님께서 받아들이시는 숭배를 드리려면 “돕는 자”라고도 불리는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고 알려 주셨다. (요 14:16, 17; 16:13) 따라서 ‘영으로 숭배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아 숭배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 영의 인도를 받으면 하느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적용함으로 그분과 일치한 생각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영으로’ 숭배한다는 예수의 말씀에는 진실한 마음과 열정적인 정신 태도로 하느님을 섬기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진리로 숭배해야 합니다: 상상이나 통념이나 거짓에 근거한 숭배는 하느님께서 받아들이시지 않는다. 하느님께서 받아들이시는 숭배를 드리려면, 사실에 근거해 있고 그분이 자신과 자신의 목적에 관해 성경에 밝혀 놓으신 진리와 일치하게 숭배해야 한다. (요 17:17) 그러한 숭배는 하느님의 말씀에 밝혀져 있는 “보이지 않는 실체”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히 9:24; 11:1. 또한 이 구절에 나오는 영[으로] 숭배해야 합니다에 대한 연구 노트 참조.
저는 ··· 메시아가 오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모세 오경만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히브리어 성경의 나머지 책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여호수아서는 예외였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모세 오경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모세보다 더 큰 예언자인 메시아가 올 것이라고 기대했다.—신 18:18, 19.
메시아: 그리스어 메시아스(히브리어 마시아흐의 음역 표현)는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 두 번(이 구절과 요 1:41)밖에 나오지 않는다. 마시아흐라는 히브리어 칭호는 히브리어 동사 마샤흐에서 나온 것으로, 마샤흐는 “(액체를) 바르다”, “기름부음을 하다”를 의미한다. (출 29:2, 7) 성경 시대에는 제사장, 통치자, 예언자에게 기름을 붓는 의식이 있었다. (레 4:3; 삼상 16:3, 12, 13; 왕상 19:16) 그리스도(그리스어 크리스토스)라는 칭호는 “메시아”에 해당하는 표현으로,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 500회 이상 나온다. “그리스도”와 “메시아”는 둘 다 “기름부음받은 자”를 의미한다.—마 1:1 연구 노트 참조.
당신과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이 메시아 즉 그리스도임을 직접적으로 밝히신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그분은 여자에게, 심지어 유대인이 아닌 사마리아 여자에게 그렇게 하셨다. (요 4:9, 25)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경멸하고 그들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많은 유대인 남자들은 여자를 멸시했다. 또 다른 경우에도 예수께서는 그처럼 여자들에게 존중심을 나타내셨다. 그분은 부활된 자신의 모습을 처음으로 보는 영예를 여자들에게 주셨다.—마 28:9, 10.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직역하면 “나는 있습니다”. 그리스어 에고 에이미. 일부 사람들은 이 표현이 「칠십인역」에 나오는 출 3:14의 번역 표현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 표현을 근거로 예수가 하느님과 동일한 분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출 3:14에 나오는 표현(에고 에이미 호 온, “나는 존재자이다; 나는 존재하는 자이다”)은 요 4:26에 사용된 표현과 차이가 있다. 또한 에고 에이미라는 표현은 「칠십인역」에서 아브라함, 엘리에셀, 야곱, 다윗과 같은 사람들이 한 말을 번역할 때도 사용되었다. (창 23:4; 24:34; 30:2; 대상 21:17)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에고 에이미라는 표현은 예수가 아닌 다른 사람이 한 말을 번역할 때도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이 표현은 요 9:9에서 예수께서 고쳐 주신 남자가 한 말을 기록하는 데 쓰였다. 그 말은 단순히 “내가 그입니다”라는 뜻이었다. 가브리엘 천사와 베드로, 바울 같은 사람들도 이 표현을 사용했다. (눅 1:19; 행 10:21; 22:3) 분명 그들은 출 3:14의 표현을 사용한 것이 아니었다. 또한 공관 복음서의 평행 기록들을 비교해 보면, 막 13:6과 눅 21:8에 나오는 에고 에이미(“내가 그다”)가 마 24:5에 나오는 “내가 그리스도다”라는 말을 줄여서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여자와 말씀하고 계신: 모세 율법에 담긴 정신과는 반대로, 유대인의 전통은 사람들이 보는 데서 남자가 여자와 대화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예수 시대에는 그러한 전통이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 같다. 이 점을 고려해 보면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자와 말씀하고 계신 것을 보고 심지어 그분의 제자들조차 “놀랐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탈무드에 의하면, 고대 랍비들은 학자가 “길가에서 여인과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또한 미슈나에 따르면 한 랍비는 이렇게 말했다. “여자와 많이 이야기하지 말라. ··· 여자와 많이 이야기하면 해를 입게 되고 율법 연구를 소홀히 하게 되며, 결국 게헨나를 상속받게 된다.”—아보트 1:5.
수확 때가 오려면 아직도 네 달이 있어야 한다고: 보리 수확은 유대력으로 니산월(3월/4월)에, 유월절 무렵에 시작된다. (부록 나15 참조) 따라서 예수께서 이 성구에 나오는 말씀을 하신 때는 4개월 전인 기슬레우월(11월/12월)일 것이다. 이때는 비가 더 많이 오고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하는 때였다. 그러므로 수확이 이미 진행되고 있다는 예수의 말씀은 비유적인 의미였던 것 같다. 그분은 문자적인 수확이 아니라 사람들을 모아들이는 비유적인 수확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었다.—요 4:36.
희어져: 곡식이 익었다는 의미이다. 그리스어 레우코스는 흰색뿐 아니라 연노란색을 비롯한 다양한 밝은 색깔을 가리킬 수 있다. 예수께서 이 단어를 사용하신 것은 곡식이 익어서 수확할 때가 되었다는 의미였다. “수확 때가 오려면 아직도 네 달이 있어야” 했으므로,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주위의 밭은 보리가 싹이 난 지 얼마 안 되어 아마 녹색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밭이 희어져 수확하게 되었다고 하신 것은 문자적인 수확이 아니라 영적인 수확을 염두에 두신 것임이 분명하다. 일부 학자들에 따르면, 밭을 보십시오라는 예수의 말씀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무리를 가리켜 하신 말씀일 수 있으며, 밭이 “희어졌다”는 말씀은 그들이 입고 있었을 흰옷을 두고 하신 말씀일 수 있다. 또는 그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께서 전하시는 소식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의미로 밭이 “희어졌다”는 표현을 사용하신 것일 수 있다.—요 4:28-30.
많은 사마리아인이 그분을 믿게 되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자를 만나신 일은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많은 사마리아 사람이 그 여자의 말을 듣고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 초기의 영적 수확은 주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지만, 영감받은 성경 말씀이 알려 주는 것처럼 사마리아인들을 포함하는 더 큰 규모의 수확이 곧 있을 것이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전파하신 덕분에 이 사마리아인들 중 많은 사람이 나중에 빌립이 전파했을 때 좋은 반응을 보였을 수 있다.—요 4:34-36; 행 1:8; 8:1, 14-17.
세상의 구원자: 이 표현은 이 구절과 요1 4:14에만 나오며, “세상” 즉 인류 가운데서 믿음을 나타내는 사람들을 예수께서 죄로부터 구원하실 것임을 보여 준다.—요 1:29; 3:17 연구 노트 참조.
고향: 직역하면 “아버지의 고장”. 이 그리스어 단어는 마 13:54; 막 6:1; 눅 4:24에도 나오는데, 그 구절들에서는 예수의 고향인 나사렛을 가리킨다. 하지만 이 문맥에서는 갈릴리 지역 전체를 가리키는 것 같다.—요 4:43.
갈릴리 가나 ··· 가버나움: 가나(키르베트카나)에서 가버나움까지 가는 길은 거리가 약 40킬로미터이다.—요 2:1 연구 노트 참조.
왕의 신하 한 사람: 또는 “왕의 어떤 시종”. 그리스어 바실리코스는 혈통이나 직무상으로 왕(바실레우스)과 관련이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 구절에서는 갈릴리의 분봉왕이던 헤롯 안티파스의 시종 즉 궁정 신하를 가리키는 것 같다. 헤롯 안티파스는 일반적으로 “왕”이라고 불렸다.—마 14:9; 막 6:14 연구 노트 참조.
내려오셔서: 가버나움으로 간다는 의미이다. 고대에는 키르베트카나(성경에 나오는 가나가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 요 2:1 연구 노트 참조)를 지나 갈릴리 바다 해안으로 내려간 다음, 해안을 따라 가버나움까지 이어지는 길이 있었다. 가버나움이 해수면보다 200미터 이상 낮은 곳에 있었으므로, 이 구절에서는 “내려온다”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제7시: 오후 1시경.—마 20:3 연구 노트 참조.
미디어
동영상에 나오는 것은 그리심산(1), 야곱의 우물로 전해지는 곳(2), 에발산(3)이다. 예수께서는 그리심산 근처에 있는 야곱의 우물에서 사마리아 여자와 대화를 나누셨다. (요 4:6, 7) 그리심산은 사마리아 지역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다. 그리심산의 정상은 지중해보다 850여 미터나 높이 솟아 있다. 현재 그리심산과 에발산 사이의 비옥한 세겜 골짜기에는 나블루스라는 도시가 있다. 그리심산에는 사마리아 성전이 세워졌는데, 그때는 아마도 기원전 4세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성전은 기원전 128년에 파괴되었다. 사마리아 여자는 그리심산을 염두에 두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 같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숭배를 드렸는데, 선생님네 사람들은 숭배를 드려야 하는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 예수께서는 참숭배를 드리는 데 물리적인 장소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 그 여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당신들이 아버지를 숭배할 때가 옵니다.”—요 4:20, 21.
성경 시대에는 곡식을 수확할 때 줄기째 땅에서 뽑기도 했지만 일반적으로는 줄기를 낫으로 베었다. (신 16:9; 막 4:29) 수확하는 일은 대개 공동 작업으로서, 익은 곡식을 여러 사람이 함께 밭에서 거두어들였다. (룻 2:3; 왕하 4:18) 솔로몬왕, 예언자 호세아, 사도 바울을 포함한 여러 성경 필자들은 중요한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곡식을 거두는 일을 비유로 들었다. (잠 22:8; 호 8:7; 갈 6:7-9) 예수께서도 사람들에게 친숙한 이 일을 비유로 들어, 제자 삼는 일에서 천사들과 제자들이 하게 될 역할을 설명하셨다.—마 13:24-30, 39; 요 4:35-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