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바로 가기

차례 바로 가기

결정에 고착하게 하는 격려적인 도움

결정에 고착하게 하는 격려적인 도움

제2장

결정에 고착하게 하는 격려적인 도움

1, 2. (ㄱ)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을 섬기려는 결정에 우리가 고착하는 중요성을 어떠한 비유로 지적하셨읍니까? (ㄴ) 예수의 충고를 무시하는 것은 왜 현명치 못합니까?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누가 9:62) 효과적으로 밭을 갈고 똑바르게 이랑을 만들려면, 쟁기를 잡은 사람은 시선을 밭의 다른 쪽 끝 일정한 지점에 고정시켜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의 목표에 우리의 눈을 고정시키는 것은 그보다 훨씬,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달이 가고 해가 바뀜에 따라 우리의 생애는 우리가 겨냥하고 있는 목표와 일치한 틀을 드러낼 것입니다.

2 위에 인용된 하나님의 아들의 말씀은, 일단 우리가 우리의 창조주를 섬기기로 서약한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그 결정에 고착하기로 결의해야 함을 알려 줍니다. 세상은 더욱 매혹적인 것같은 행로, 이를 테면, 쾌락, 인기 혹은 재물을 추구하는 행로로 초대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을 동경의 눈으로 뒤돌아 본다거나, 한걸음 더 나아가, 그러한 것이 우리 생활의 초점이 된다면, 우리는 우리가 목표로 하는 상을 잃을 수 있읍니다. 그것은 허무한 인생이 되게 할 수 있읍니다.

3. 우리의 믿음의 기본적인 목표는 무엇입니까?

3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다고 전도서 7:8에서는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택한 행로로 출발하는 것도 필수적인 일이지만, 참으로 중요한 것은 끝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끝까지 충실을 유지하는 일이 크게 강조되어 있읍니다. (마태 24:13) 우리의 믿음의 기본적인 목적 혹은 목표는 구원 즉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베드로 전 1:9.

4. (ㄱ) 충실을 유지하려면 구원에 대한 어떠한 견해가 중요합니까? (ㄴ) 베드로 전서 1:10-12은 예언자들이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마련에 나타냈던 관심에 대해 무엇을 알려 줍니까?

4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충성스러운 제자로서 견디도록 무엇이 우리를 도울 수 있읍니까? 우선, 우리는 우리가 추구하는 구원의 고귀한 가치를 명백히 이해하고 깊이 느낄 필요가 있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까운 동료였으며 사도였던 ‘베드로’의 영감받은 말은 이 점에 있어서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됩니다. 그의 훈계는 우리의 최종적인 구원이 참으로 가치있는 목표라는 것, 그것을 위해서라면 우리가 아무리 혹심한 반대일지라도 모든 반대를 기꺼이 인내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하도록 도와 줍니다. 그러한 목표를 위해서라면 우리가 필요한 경우 기꺼이 일하고, 희생하고, 심지어는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누가 14:26-33) 베드로 전서 1:10-12에서 사도는 이렇게 기술합니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니라].”

예언자들이 예리한 관심을 보인 문제

5. 예언자들은 메시야가 받을 고통에 대해 무엇을 예언하였읍니까?

5 예수께서 지상에 오시기 여러 세기 전에, ‘히브리’ 예언자들은 영감을 받아, 약속된 메시야 즉 그리스도에게 임할 고통을 예언하였읍니다. ‘다니엘’의 예언은 그리스도의 도착의 시기를 명시했으며, 그리스도께서 삼년 반의 봉사 후 사망으로 끊어질 것을 암시하였읍니다. (다니엘 9:24-27) ‘이사야’의 예언으로부터 우리는 메시야가 배척을 당하고 걸림돌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사야 8:14, 15; 28:16; 53:3) 그 예언에 의하면,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백성의 아픔을 지고, 시련을 당하고, 단죄를 받으시지만, 고발자들 앞에서 잠잠하실 것이며, 침뱉음을 당하고, 죄인으로 간주되고, 찔리고, 희생의 죽음을 당하시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입장을 얻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하기 위해 죄를 제거하시게 되어 있읍니다. (이사야 50:6; 53:4-12) ‘스가랴’의 예언은 메시야가 은화 30냥에 팔릴 것을 지적하였읍니다. (스가랴 11:12) 그리고 예언자 ‘미가’는 “‘이스라엘’ 재판자” 그리스도께서 뺨을 맞으실 것을 예언하였읍니다.—미가 5:1.

6. 메시야가 당할 고통에 대한 어떠한 세부점이 시편에 예언되어 있읍니까?

6 시편에 있는 진술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분은 가까운 동료에게 배반을 당할 것입니다. (시 41:9) 신민들의 지지를 받는 통치자들이 공모하여 그를 반대할 것입니다. (시 2:1, 2) ‘유대’ 종교 건축자들이 그를 배척할 것입니다. (시 118:22) 거짓 증인들이 메시야에게 불리한 증언을 할 것입니다. (시 27:12) 그분은 처형장에 이르러 감각을 둔화시키는 음료를 제공받을 것입니다. (시 69:21ㄱ) 그를 형주에 다는 사람들은 야수들과 같이 ‘그를 에워 쌀’ 것입니다. (시 22:16) 그의 옷은 제비 뽑아 분배될 것입니다. (시 22:18)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걸” 하고 조롱할 것입니다. (시 22:8) 심한 갈증을 느끼고 그분은 음료를 요청하고 신 포도주를 제공받으실 것입니다. (시 22:15; 69:21ㄴ) 그분은 사망 직전에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외치실 것입니다.—시 22:1.

7. 여러 가지 예언들은 그리스도께서 고난 후에 “얻으실 영광”에 대해 무엇을 밝혀 줍니까?

7 ‘베드로’가 지적했듯이 예언자들은 또한 영감을 받아, 메시야께서 고난 후에 ‘얻으실 영광’에 대하여 말하였읍니다. 하나님의 장엄하신 능력에 의해, 이 충실한 아들은 죽은 자로부터 일으킴을 받으실 것입니다. (시 16:8-10) 그분은 승천하시어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그의 원수들이 하나님의 발등상이 될 때까지 기다리실 것입니다. (시 110:1) 그분은 ‘멜기세덱’의 신분에 상응하는 영원한 제사장의 지위를 차지하실 것입니다. (시 110:4) 그의 아버지,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가 그에게 왕권을 부여하실 것입니다. (다니엘 7:13, 14) 하나님의 기름부음받은 분이 그의 다스림을 반대하는 모든 나라를 분쇄하실 때가 최종적으로 올 것입니다. (시 2:9) 다음에 그분은 온 땅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실 것입니다.—시 72:7, 8; 스가랴 9:9, 10.

8. 예언자들은 자기들이 기록한 내용에 어떻게 예리한 관심을 보였으며, 왜 그러한 관심을 나타냈읍니까?

8 그렇습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예언들은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 혹은 해방시켜 주실 하나님의 마련에서 메시야의 역할에 대한 찬란한 서광을 비추어 주었읍니다. 그분이 고통 가운데서 충실을 유지하시고, 죽으시고, 부활되고 승천하여 영광스러운 영자가 되신 이 모든 일이, 각자가 죄사함을 받고 여호와 하나님과 완전히 화해하여 그분의 아들들이 되는 것을 포함하여 예언된 “과분한 친절”을 받는 데 필요하였읍니다. 예언자들 자신은 메시야를 통하여 구원이 어떻게 올 것인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읍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가 지적했듯이, 예언자들은 자기들이 기록한 내용에 예리한 관심을 보였읍니다. 그들은 부지런히 예언을 검토했으며, 자신들이 영감받아 기록한 것의 의미를 알아내기 위해 그 예언들을 반복적으로 연구하였읍니다. 예언자들은 자기들이 받은 계시에 놀라운 진리가 내포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예언으로부터 최대의 유익을 얻기 위해 자기들의 지적 능력을 최대한으로 사용하였읍니다. 메시야가 오시기까지는 사람들이 예언된 과분한 친절을 받을 수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였읍니다. 그러나, 예언자들이 이해한 정도로도 그들에게 힘이 되었으며 더욱 알아 보도록 하는 자극제가 되었읍니다. 특히 그들은 메시야가 출현하실 때에 존재할 상태에 관심이 있었으며, “어떠한 때”에 메시야가 예언된 고통을 당하시고 다음에 높임을 받으실 것인지에 관심이 있었읍니다.

9. 메시야에 관한 예언으로부터 특히 누가 유익을 얻었읍니까?

9 ‘베드로’가 밝힌 바와 같이, ‘히브리’ 예언자들은 메시야에 관한 예언들이 주로 자기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서 보다, 실제로 메시야가 출현할 때에 살게 될 사람들을 위해 기록되었다는 것을 이해하였읍니다. (베드로 전 1:12) 예언자 ‘다니엘’은 자기가 받은 계시에 대해 “내가 듣고도 깨닫지 못”하였다고 시인하였읍니다. (다니엘 12:8) 그러나, 기원 제1세기에 선포된 “좋은 소식”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메시야가 처음 임하신 일에 대해 영감받은 말씀으로부터 온전한 유익을 얻은 사람들이었읍니다. 예언자들은 바로 그 사람들의 유익에 기여하였던 것입니다.—마태 13:16, 17.

10. 우리는 ‘히브리’ 예언자들이 구원에 대해 보인 관심으로부터 어떠한 영향을 받아야 하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10 그러므로, 우리가 예언자들이 예리한 관심을 보였던 사실을 알 때 어떠한 영향을 받아야 합니까? 우리 자신도 구원에 대해 동일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승인받은 종의 신분을 유지하는 것이 생활의 주된 목표입니까? 우리는 참으로 이 문제에 대해 열렬합니까? 확실히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의 충성스러운 제자들임을 증명하는 데 전념할 만한 좋은 이유가 있읍니다. 메시야는 여러 세기 전에 오셨읍니다. 그분의 희생의 죽음은 바로 구원의 기초가 되었으며, 하나님의 약속이 하나도 빠짐없이 성취되는 것을 가능케 하였읍니다. (고린도 후 1:20) 시간의 흐름이 결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의 확실성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확증합니다. (디모데 전 2:3, 4; 베드로 후 3:9) 그러므로,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지존자께서 충실한 사람들을 위해 준비하신 축복을 받기를 기대해야 합니다.

천사들이 관심을 보인 이유

11. 베드로 전 1:12에 의하면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마련에 대해 천사들의 관심은 어느 정도로 강렬하였읍니까?

11 천사들의 본에서 격려를 받아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머물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충실한 천사들 각자는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마련을 직접 필요로 하지 않지만,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웅대한 목적이 달성되는 것에 진정한 관심을 가지고 있읍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기술하였읍니다. “이것[‘히브리’ 예언자들의 관심을 사로잡은]은 ···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베드로 전 1:12) 그렇습니다. 천사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 그리스도의 고난, 그 “후에 얻으실 영광”, 그리고 복음 즉 “좋은 소식”이 인류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 더 알기를 원하였읍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들이 이러한 문제들을 “살펴 보기를 원”한다고 말할 수 있었읍니다. 원 희랍어에서 “살펴 보다”라는 표현은 어떤 물건을 좀 더 면밀히 분석하기 위하여 몸을 구부린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그러나 천사들은 구원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를 신중히 검토하는 일에 왜 그처럼 예리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읍니까? 완전한 영자들인 천사들에게 죄많은 지상 인간들을 위한 마련이 특히 관심을 끌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12, 13. 천사들이 인류의 구원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읍니까?

12 천사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지 않으므로 그들이 지식을 증가시키려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과 계시를 탐구하는 정신으로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인류를 구출하는 마련은 참으로 여호와의 사랑과 공의, 자비 및 지혜의 놀라운 본보기였읍니다. 그러므로, 죄인들인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여호와의 마련에 대한 더 큰 이해를 얻고자 전념할 때 천사들은 그들의 천적 아버지를 더욱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우주 내의 다른 사건을 연구 혹은 검토해서는 분별할 수 없는 특성과 길에 대해 배울 것입니다.—에베소 3:8-10 비교.

13 더우기 천사들은 인류를 ‘좋아합니다.’ (잠언 8:22-31, 신세 비교.) 그들은 인류가 천적 아버지 여호와와 화해하는 것을 보기를 원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천사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읍니다.—누가 15:10.

14. (ㄱ) 우리의 구원에 대한 천사들의 태도로부터 격려를 받고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ㄴ) 우리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충실을 유지하기 위해 사도 ‘베드로’의 어떠한 충고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까?

14 그렇습니다. 우리 자신이 회개했을 때 수많은 천사들이 기뻐했읍니다. 그들은 우리가 끝까지 충실을 유지하는 것을 참으로 보기 원합니다. 사실, 그들은 ‘우리에게 갈채를 보내고’ 있읍니다. 우리에 대해 깊은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있는 천사들의 거대한 무리에 대한 우리의 시각이 흐려져서는 안됩니다. 확실히 우리는 우리에 대한 그들의 기쁨이 계속되기를 바랍니다. 따라서 우리는 ‘베드로’의 이러한 훈계를 청종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활동을 위하여 여러분의 정신을 바짝 차리고, 여러분의 지각을 온전히 유지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드러나실 때에 여러분에게 가져오게 되어 있는 과분하신 친절에 여러분의 희망을 두십시오.”—베드로 전 1:13, 신세.

활동을 위하여 정신을 바짝 차림

15. ‘활동에 대비하여 정신을 바짝 차리라’는 ‘베드로’의 훈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15 ‘활동을 위하여 정신을 바짝 차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도 ‘베드로’의 말을 직역하면 “여러분의 정신의 허리를 동이시오”라는 것입니다. 사도 시대에 남자들은 긴 옷을 입었읍니다. 일을 하거나 달리기와 같은 정력적인 활동에 참여할 때에 남자들은 다리 사이로 옷을 끌어 올려 허리띠로 단단히 맸읍니다. “허리를 동이다”라는 말은 활동에 대비한다는 의미였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신의 허리를 동인다’는 것은 그리스도인 의무를 이행하기 위하여 그리고 우리에게 임할지 모르는 어떠한 시련도 견디기 위하여 대비한 상태로 우리의 정신 기능을 유지하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16. ‘우리의 지각을 온전히 유지한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나타낼 수 있읍니까?

16 우리의 정신력을 하나님께 대한 계속적이고 충실한 봉사에 대비한 상태로 유지할 때 확실히 우리는 ‘우리의 지각을 온전히 유지’할 것입니다. 우리의 사고는 균형잡힐 것이며, 우리는 사물을 올바로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은 우리의 기능에 대한 제어력과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세상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을 반영할 것입니다. (요한 1서 2:16) 우리의 천적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행하는 것이 우리의 생활에서 첫째 자리를 차지할 것입니다.

17. (ㄱ) 신자들에게 주어질 “과분한 친절”은 무엇입니까? (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에게 주어질 과분한 친절에 어떻게 희망을 둘 수 있읍니까?

17 ‘활동에 대비하여 정신을 바짝 차리고 우리의 지각을 온전히 유지하기 위하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에게 주어질 과분한 친절에 우리의 희망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오실 때에 그분의 헌신적인 제자로서 충실을 유지한 천적 희망을 가진 사람들 모두는 하나님의 과분한 친절을 함께 받을 것입니다. (고린도 전 1:4-9) 이들 영으로 출생한 제자들은 그들이 악한 사람들의 손에 당하는 고통으로부터 상쾌한 구출을 받을 것이며, 또한 지상 낙원의 희망을 가진 그리스도인들도 그리스도의 임하심 후에 있게 되는 “큰 환난” 중에 생존하여 땅에서 끝없는 생명을 누릴 전망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우리의 그리스도인 희망이 성취될 것에 항상 대비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자가 될 것을 열렬히 기대할 좋은 이유가 있읍니다. 우리는 이러한 희망이 틀림없이 성취될 것임을 확신할 때 우리의 천적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에게 충성을 유지할 수 있읍니다.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임하셔서 충실한 추종자들에게 내릴 축복에 우리의 눈을 굳게 고정시킵시다.—마태 25:31-46.

하나님의 순종적인 자녀임을 증명함

18. 어떻게 우리는 우리가 ‘순종적인 자녀’임을 나타냅니까?

18 이러한 희망과 일치하게, 우리는 ‘순종적인 자녀’로서의 태도를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다음에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라.]” (베드로 전 1:14) 천적 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자녀로서 우리는 그분의 요구 조건에 즐거이 순복하고, 이것이 올바른 길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전에 익힌 방식에 따라 생활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몰랐기 때문에 우리의 죄의 욕망을 충족시켰고, 이기적으로 우리 자신의 권익을 첫째로 두어 다른 사람들을 해쳤거나, 재물, 인기 혹은 권력을 얻는 것을 중심으로 생활을 영위해 왔었을지 모릅니다. 주로 우리는 우리 주위 사람들의 태도 및 언행과 일치하게 우리의 생활을 틀잡았읍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지 않는 그러한 인생 행로가 허무하고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고 있읍니다.

19. ‘모세’의 율법에 예시되어 있는 바와 같이, “거룩”함에는 무엇이 포함되어 있읍니까?

19 생활의 풍요함을 즐기려면, 우리는 거룩하고 깨끗하고 순결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천적 아버지를 본받는 것이 공식적인 숭배에만 국한되어야 합니까? 사도 ‘베드로’가 무엇이라고 말했는지 유의하여 보십시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베드로 전 1:15) 다음에 그는 레위기 19:2에 있는 이러한 말씀을 인용했읍니다.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베드로 전 1:16) 「레위기」에 있는 이러한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인들에게 공식적 숭배와 그들의 일상사에서 요구하신 바를 설명하는 가운데 나타납니다. 거룩한 행실에 대한 이러한 요구 조건 가운데 일부를 열거하면, 부모에 대한 합당한 존경, 정직성, 귀머거리와 맹인 및 기타 신체 불구자들에 대한 사려깊음, 동료 인간에 대해 원한을 품지 않고 사랑을 나타내는 일, 중상과 거짓 증언을 삼가는 일, 공의를 행하는 일 등입니다. (레위 19:3, 9-18) 그러므로, 여호와의 관점에서 거룩하라 혹은 순결하라는 요구 조건에는 생활의 모든 면이 관련되어 있읍니다.

“두려움으로 지내라”

20. 우리는 심판에 대해 무엇을 염두에 두어야 하며, 이것이 우리의 행실에 어떻게 영향을 줄 것입니까?

20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헌신에 따라 생활해야 할 또 다른 강력한 이유는 사도 ‘베드로’의 그 다음 말에 나와 있읍니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베드로 전 1:17) 우리는 천적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우리를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결코 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 심판은 외모에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며, 편벽되지 않을 것이고, 우리의 실제 인격과 일치할 것입니다. (이사야 11:2-4)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지존자를 우리의 아버지로 인정한다면,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승인하실 수 있고, 우리에게 유리한 심판을 내릴 수 있는 방법으로 처신하기를 원할 것입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건전하고 경건한 두려움을 반영하는 생활 행로를 추구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21.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사는 것을 나그네 생활로 본다는 것을 어떻게 나타냅니까?

21 또한, 우리는 이 세상과 이 세상이 제공하는 것들이 일시적이라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읍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나그네”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마치 이 세상이 영원히 계속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 세상의 것에 애착을 두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 때 호화로왔던 고대 ‘앗시리아’, ‘바벨론’ 및 ‘페르시아’의 왕궁이 이제는 누구에게도 아늑한 거처가 되지 못하고 폐허가 되어 있읍니다. 어떠한 건축 사업도, 어떠한 현대 기계 공학의 산물도, 어떠한 미술 작품도, 어떠한 조각도 인간이 만든 단 하나의 물품도, 영원히 변함없이 존속할 수 없읍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이 세상에 살아야 하며, 이 세상으로부터 “떠날” 수는 없읍니다. (고린도 전 5:9, 10) 그러나 우리는 현 사물의 체제내에서 ‘정착’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우리는 훨씬 더 좋은 것, 하나님이 만드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를 기대합니다. (베드로 후 3:13)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인생 행로는 ‘나그네 생활’이며 우리의 태도와 언행이 그 점을 나타내야 합니다.—히브리 11:13-16 비교.

고귀한 값이 치러졌다

22, 23. 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게 영원히 은혜를 입었다고 느껴야 할 것입니까?

22 사도 ‘베드로’는 우리가 여호와의 거룩하고 헌신적인 종으로 계속 생활할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여 이렇게 기술하였읍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무익한, 신세]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베드로 전 1:18, 19) 죄와 사망이 단죄로부터 해방되도록 속전이 치러졌으므로, 우리에게는 대속의 마련을 해 주신 여호와 하나님에게 의무가 있읍니다. 우리를 죄에서 대속하기 위해서 막대한 양의 은이나 금이 치러졌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는 우리를 위해 그러한 큰 물질적 희생을 한 분에 대해 막대한 은혜를 입었다고 느끼지 않을 것입니까?

23 그렇다면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게 얼마나 더 큰 은혜를 입었읍니까! 치러진 대속의 가치는 상실되거나 도난당하거나 파괴될 수 있는 물질적 보배보다도 훨씬 더 가치있는 것입니다. 그 가치는 오늘날 지상에 있는 은과 금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죄없는 아들의 고귀한 피가 대속물로 치러진 고귀한 값이었읍니다. 그것은 영원히 살 수 있는 권리를 가진 분의 생명의 피입니다. 따라서 고귀한 명분으로 생각되는 일을 위해 생명을 바친 사람들의 것보다 월등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말한 바와 같이, 이러한 속가를 치르는 것은 또한 우리가 ‘조상의 전통으로부터 받은 망령된 행실에서 우리를 구출’하는 기초가 되었읍니다. 어떻게 그러하였읍니까?

24.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전의 우리의 행실은 어떻게 “무익”한 것이었을 것입니까?

24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에 의해 대속되었다는 사실 즉 사신 바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면 우리는 우리의 이전 생활 행로를 버린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혹은 그분의 목적에 대한 지식이 없을 때 우리의 생활은 영속성이 없는 것을 획득하는 것에 중점을 둔 점에서 “무익”하고 헛되고 허무했었읍니다. 과거의 우리의 행실은 우리 자신에게도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그리고 감정적으로 해로왔읍니다. 더우기, 우리의 부모와 선조들은 성경을 몰랐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생활 표준과 원칙들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심지어 하나님께 불명예를 돌리는 종교 생활을 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행실면에서 우리의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았을지 모르는 “유전” 즉 전통도 목적있는 생활을 영위하도록 인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마태 15:3-9 비교.

25. 베드로 전서 1:10-19에 있는 말씀은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충실을 유지하도록 어떻게 강력한 격려가 될 수 있읍니까?

25 확실히, 사도 ‘베드로’의 말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헌신한 제자로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려는 우리의 서약에 고착하도록 하는 진정한 격려가 됩니다. 우리는 결코 ‘히브리’ 예언자들과 천사들이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계시에 나타낸 예리한 관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의 확실성,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의 희망이 실현될 일, 여호와의 거룩하심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우리의 모든 행실이 깨끗해야 할 중요성 그리고 현 세상에서의 우리의 생활이 나그네 생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도록 합시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대속되었다는 사실을 결코, 결코, 망각해서는 안됩니다!

26. 이 세상이 제공할 수 있는 것과 우리가 여호와를 섬기는 데서 얻는 것은 어떻게 비교됩니까?

26 지존하신 분을 섬기는 데서 오는 축복에 비하면, 이 세상의 화려한 것들은 사실 쓰레기에 불과합니다. (고린도 전 7:29-31; 빌립보 3:7, 8) 돈이 아무리 많아도 깨끗한 양심, 현재의 의미있는 생활 그리고 행복한 삶을 누릴 확실한 장래를 살 수 없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충실한 봉사는 그러한 축복을 가져다 줍니다. 이것을 우리 인생의 주된 관심사로 삼을 만한 얼마나 강력한 이유들입니까!

[연구 질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