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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에 대한 순복—보람된 일이다

권위에 대한 순복—보람된 일이다

제6장

권위에 대한 순복—보람된 일이다

1. 왜 우리는 기존 체제에 순복하는 것이 현명하고 유익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읍니까?

기존 체제에 순복하는 것, 복종하는 것이 현명한 일일 수 있읍니다. 완전한 독립이 겉으로는 매력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바람직하지 않으며 비현실적입니다. 이 지상에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무엇이든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읍니다. 우리가 공기, 태양, 식품 및 물에 의존하여 살듯이, 우리가 생명으로부터 유익을 얻고 또 생명을 즐기려면 타인이 필요하며 타인들이 우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 등이 필요합니다.

2. 여호와께서 최고 주권자라는 사실로부터 우리의 생활은 어떠한 영향을 받아야 합니까?

2 정부 체제, 고용주와 고용인 간의 관계, 가족 관계, 그리스도인 회중과의 연합, 사람들 사이에서의 우리의 생활 자체—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의무를 부과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타인들로부터 받는 것에 대해 보답해야 합니다. 사람들에 대한 이러한 책임을 이행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지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창조주이신 그분은 당연하게도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을 베푸시는 최고 주권자이십니다. 사도 ‘요한’은 환상 가운데서 24장로의 이러한 선언을 들었읍니다. “우리 주[여호와]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계시 4:11) 우리가 이처럼 여호와를 지존자로 인정하는 것은 말로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의 모든 관계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임명된 주로 인정한다는 것을 나타낼 수 있읍니다.

“주를 위하여”

3, 4. 우리의 복종의 대상이 되는 ‘인간 창조물’은 무엇이며, 그렇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3 사도 ‘베드로’는 인간 권위에게 복종해야 할 주요한 이유로서 이러한 고결한 견해를 힘있게 제시하였읍니다. 그는 이렇게 기술하였읍니다.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인간 창조물, 신세]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베드로 전 2:13, 14.

4 우리가 복종해야 할 ‘인간 창조물’은 인간이 설립한 다스리는 권위입니다. 그들은 ‘인간 창조물’입니다. 왕들의 지위와 그 밑에 있는 통치자들이나 총독들의 지위를 창조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들이기 때문입니다. 지존자께서는 단순히 그러한 것의 존재를 묵인하시고 관용하셨을 뿐입니다. 왜냐 하면 현 상태 하에서 그러한 것이 유익한 목적을 수행하기 때문입니다. 정부 권위는 하나님의 허락에 의해 존재하기 때문에, 그러한 권위에 순종치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명” 즉 하나님께서 아직 종결시키지 않고 자기의 아들을 통해 천국으로 대치시키시지 않은 마련에 순종치 않는 것입니다. (로마 13:1, 2) 사도 ‘베드로’ 시대에 ‘로마’ 황제 즉 ‘가이사’는 ‘유대’를 포함한 모든 제국 내의 여러 지방의 일을 관리할 총독들을 임명하였읍니다. 이들 총독들은 자기들의 관할하에 있는 지역 내에서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책임을 황제로부터 직접 위임받았읍니다. 총독들은 임무를 수행할 때 “악행자” 즉 강도, 납치범, 절도범 및 난동범들은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 즉 고결한 사람들은 “포장”을 해야 하였읍니다. 즉 그들이 가치있는 사람들임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그들의 신분, 재산 및 권리를 보호함으로써 영예를 부여해야 하였읍니다.

5. 우리는 누구를 위하여 복종해야 하며, 그분이 “주”라고 불리우는 것이 왜 타당합니까?

5 그리스도인들이 복종해야 한다는 권고를 받은 주된 이유는 징벌을 면하거나 표창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를 위하여” 입니다. 이 주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왜냐 하면 사도 ‘베드로’가 이보다 앞서 그리스도를 주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전 1:3)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을 “죽은 자와 산 자의 주”라고 불렀읍니다. (로마 14:9) 그러므로 그분은 어떠한 인간 통치자도 차지한 일이 없는 지위에 계십니다. ‘죽은 자의 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생명으로 회복시킴으로 그들을 그분 앞에 소환하실 수 있읍니다. 주이신 예수의 권위의 범위는 산 사람과 죽은 사람들에 대한 권위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부활 후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하늘과 땅에서 모든 권세가 내게 주어졌읍니다.” (마태 28:18, 신세) 확실히, 우리로서는 인간 통치자들보다 비교가 안될 만큼 더 큰 권위를 가지고 계신 분을 위하여 인간 통치자들에게 순복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6, 7. 어떻게 우리는 “주를 위하여” 인간 통치자들에게 복종합니까?

6 “주를 위하여” 정부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종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로 인정하는 것이 통치자들에 대한 합당한 복종의 동기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이 점에 있어서 완전한 본을 보이셨읍니다. 그분은 정부 권위의 요구에 거역하지 않으셨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거역할 것을 가르치지도 않으셨읍니다. 그분은 이렇게 권고하셨읍니다. “누구든지[권위 아래 있는 사람, 신세]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라.]” (마태 5:41)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마태 22:21.

7 때때로 정부는 국민에게 여러 가지 목적으로 등록을 명하거나 도로, ‘댐’ 혹은 학교 건설 등 지역 사회 건설 사업과 영농 계획에 협조할 것을 요구하는 일이 있읍니다. (누가 2:1-3 비교.) 이러한 모든 문제에 있어서 물론, 그리스도인의 양심이 고려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으로 훈련받은 양심을 거스르는 일이 관련되어 있지 않다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대로 순종과 협조를 보일 때 “좋은 소식”을 증진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읍니다. 특정한 일에 대해 반대 선동을 하거나 어떤 계층의 정부 권위에 대해 공공연한 반항을 하는 것은 매우 온당치 않은 일입니다. 성서의 명령은 “정사와 권세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예비”하라는 것입니다. 호전적이고 거만한 태도는 하나님의 아들의 가르침 및 본과 일치하지 않습니다.—디도 3:1, 2.

“하나님의 종과 같이”

8. 우리는 통치자들에게 합당하게 복종함으로써 어떠한 유익을 얻을 수 있읍니까?

8 권위에게 합당하게 순복하는 것이 참 숭배의 이익을 도모하는 데 이바지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여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기술하였읍니다.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베드로 전 2:15) 그리스도인들은 통치자들의 관점에서 선하고 예의바르고 합법적인 행동을 하는 한편,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 선한 양심을 유지함으로써 칭찬을 받을 수 있읍니다. 그 결과로, 지존하신 분의 종들을 고집세고, 완고하고, 반사회적이고, 선동적이고 파괴적이라고 거짓 비난하는 무지한 사람들이 잠잠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의 칭찬받을 만한 행실은 그들의 명성이 손상을 받지 않도록 막아 주는 최선의 방어가 됩니다.

9, 10. 정부 권위에 대한 우리의 복종은 왜 굽실거리는 노예가 주인에게 복종하는 것과 다릅니까?

9 그러나 통치자들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순복은 그들에 대한 비열한 노예 상태, 전적인 종속을 의미합니까? 영감받은 대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을 이었읍니다.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베드로 전 2:16.

10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는 죄와 사망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었읍니다. (요한 8:31-36)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가 횡사의 두려움까지도 갖지 않게 해 주셨읍니다. ‘사단’ 마귀는 바로 이 두려움을 이용하여 인간을 노예 상태에 있게 했으며, 인간 독재자의 명령을 통해 사람들이 자신의 양심을 거스려 행동하도록 조종해 왔읍니다. (히브리 2:14, 15) 그러나 우리는 자유인들이기 때문에 우리의 양심은 어떤 인간이나 인간 단체의 명령과 위협이 무서워서 굴복하는 일이 없읍니다. 통치자들에 대한 우리의 순복은 자진적이며 최고 주권자 여호와 하나님의 더 우월한 명령에 따라 제한된 복종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인간에게도 하나님의 법을 생각지 않고 무조건 순종하는 비굴한 노예가 될 수 없읍니다. 사도 ‘베드로’가 지적했듯이,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존자에 대한 우리의 숭배와 직접 충돌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정부 권위의 요청에 기꺼이 순복합니다. 그 한계를 넘을 때에는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유대’ 최고 법정에서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한 입장을 취해야 할 것입니다.—사도 5:29.

한계가 있는 자유

11. 정부 권위에 대한 어떠한 태도가 그리스도인 자유를 오용하는 것이 될 것입니까?

11 그러나, 하나님의 법에 배치되지 않는 문제에 있어서도 정부를 무시함으로써 마치 정부가 우리에 대하여 아무런 권위도 없는 것처럼 생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한 불경한 행실은 그리스도인 자유를 오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라는 테두리 안에 제한된 것입니다. 그 자유는 합당한 제약을 벗어 버릴 수 있는 면허장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불편할지는 모르지만 생명과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을 경멸하거나 악에 빠져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교통법이나 공해 억제 법, 수렵 제한 법 등의 선한 목적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행실로 나타내야 합니다.

12.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의무가 어떠한 것인지 무엇이 결정합니까?

12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의무가 있읍니다. 이러한 의무의 성격은 여호와 하나님과의 그리고 동료 인간과의 우리의 특정한 관계에 의하여 영향을 받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러한 의무를 지적하고 다음과 같이 훈계합니다. “모든 사람을 존경하고 형제[형제들 전체, 신세]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왕을 존경하시오.”—베드로 전 2:17, 새번역.

13. (ㄱ) 인간은 왜 모두 존경을 받기에 합당합니까? (ㄴ) 우리는 우리의 영적 형제들을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ㄷ) 우리가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의 존경을 나타내야 할 것인지를 무엇이 결정합니까? (ㄹ) 무엇이 하나님께만 합당합니까?

13 인간은 모두 하나님의 창조물이며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예수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사셨읍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인간을 합당하게 존경하고 편벽없이 대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사도 10:34, 35; 디모데 전 2:5, 6) 그러나 “형제들 전체”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받기에 합당한 격식을 차린 존경을 받는 것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우리는 형제들에게 존경 외에도 깊은 사랑과 애정을 나타내야 합니다. 더우기, 지상의 주권자들과 관리들에게는 그들의 지위에 합당한 존경을 나타내야 하지만, 경건한 숭배에 입각한 두려움은 지존하신 하나님에게만 합당합니다. 따라서, 인간에게 돌리는 영예는 항상 여호와 하나님과 그분의 명령에 대한 건전한 고려에 의해 한정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만 속한 영예를 돌리는 칭호가 아니라면 관례적인 칭호로 통치자들을 부르는 데는 문제가 없읍니다. 그러나 죽음의 운명 아래 있는 인간은 그리스도인들의 구주가 아니며 그들을 통해서 모든 축복이 오지도 않습니다. (시 146:3, 4; 이사야 33:22; 사도 4:12; 빌립보 2:9-11)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두려움을 의문시하게 하는 방법으로 통치자를 부르지 않으며 그들의 지위 이상으로 그들을 높이지도 않습니다.

모든 관리가 존경을 받기에 합당한가?

14, 15. (ㄱ) 통치자나 관리의 도덕성은 그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존경 여부에 왜 관련이 없읍니까? (ㄴ) 우리는 사도 ‘바울’이 관리들을 대한 태도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읍니까?

14 통치자들을 존경하라는 성서의 명령에 대해 일부 사람들은 특정한 관리를 염두에 두고, ‘도덕적으로 부패한 사람을 어떻게 존경할 수 있는가?’ 하고 질문할지 모릅니다. 기억해야 할 점은 관리의 도덕성이 그러한 존경의 기초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에게 존경이 요구되는 이유는 그가 대표하고 있는 그리고 그가 행사하는 권위 때문입니다. 만일 합당하게 성립된 권위에 대한 존경이 없다면 무정부 상태가 초래될 것이고, 그 결과는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하여 사회에 피해가 될 것입니다.

15 사도 ‘바울’이 관리들에게 나타낸 태도를 보면, 통치자들에게 나타내야 할 존경의 정도가 그들의 인격에 의하여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고대 역사가 ‘타키투스’는 ‘로마’ 총독 ‘벨릭스’가 “아무 탈없이 무슨 악이든지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한 인물이며, “온갖 야만 행위와 육욕에 빠지면서 노예의 정신으로 왕권을 행사했다.”고 설명하였읍니다. 그러나, ‘벨릭스’의 직책에 대한 존경심에서 ‘바울’은 그에게 이러한 말로 변론을 시작하였읍니다. “저는 각하께서 여러 해 동안 이 나라 전체의 재판권을 행사해 오신 것을 알고 있읍니다. 그래서 저는 기쁜 마음으로 제 자신에 대한 사실을 각하께 해명하겠읍니다.” (사도 24:10, 공동번역) ‘헤롯 아그립바’ 2세가 근친 상간 생활을 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에게 합당한 존경을 나타내어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전하께서는 ‘유대’인들의 관습에 정통하시고 그들이 문제삼는 점들을 잘 알고 계시니 더욱 다행한 일입니다.” (사도 26:2, 3, 공동번역) ‘베스도’ 총독은 우상 숭배자였으나, ‘바울’은 그를 “각하”라고 불렀읍니다.—사도 26:25, 공동번역.

세금을 내는 일

16.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서 13:7에서 어떠한 충고를 받고 있읍니까?

16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에게 권위에 합당한 존경을 보이는 이 외에도, 양심적으로 세금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있읍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생명과 사망에 대한 권한을 포함하여 그의 권위 때문에]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로마 13:7) 세금을 내고 정직하게 소득을 신고해야 할 올바른 이유는 무엇입니까?

17. (ㄱ) 그리스도인들은 납세를 왜 빚을 갚는 것과 동일시해야 합니까? (ㄴ) 그리스도인들은 왜 모범적으로 모든 세금을 내야 합니까?

17 통치하는 권위를 가진 사람들은 국민의 안전과 안보 및 복지에 절대 필요한 공익 사업을 수행합니다. 도로 유지, 법 시행 기관의 마련, 법원, 학교, 보건 시설, 우편 제도 등이 그 예입니다. 이러한 공익 사업에 대해 정부는 보상을 받을 권리가 있읍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공세 혹은 국세를 바치는 것을 빚을 갚는 것에 비기는 것이 합당합니다. 통치하는 권위를 가진 자들이 그 후 세금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책임이 아닙니다. 관리들이 공세 혹은 국세를 오용한다고 하여 그리스도인들이 빚을 갚지 않을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사물의 현 체제하에서는 그리스도인에게 정부의 공익 사업이 필요하며, 따라서 요구되는 것을 선한 양심으로 지불합니다. 개인에게 진 빚을 갚는 경우에, 채무자가 돈을 오용한다고 하여 빚이 탕감되지 않습니다. 이와 유사하게, 정부가 무슨 일을 하든지간에, 그리스도인은 공세와 국세를 바칠 의무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는 소득 신고나 세금이 부과되는 매매 신고에 있어서 모범적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양심적이면, 그와 그리스도인 회중에 모독이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것은 또한 참 숭배에 대하여 호감을 갖게 할 것이며,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영예가 될 것입니다.

고용주와 고용인 간의 관계

18. 주인과 종간에 관한 성경의 원칙을 오늘날 어떠한 상황에 적용할 수 있읍니까?

18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정부 권위와의 관계 외에도, 적절한 복종을 요구하는 또 다른 관계가 있읍니다. 예를 들면, 직장에서는 감독관 혹은 상급자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기원 제1세기 ‘로마’ 제국내에 노예 제도가 보편적이었을 때,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노예 혹은 종이 다수 있었읍니다. 적절하게도, 하나님의 말씀은 주인에 대한 그들의 의무를 설명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주인과 종 사이의 행동 법칙을 고용주와 고용인 간의 관계에 적용할 수 있읍니다.

19. ‘베드로’는 그리스도인 종들에게 무엇이라고 충고하였읍니까?

19 사도 ‘베드로’는 종이나 하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하였읍니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베드로 전 2:18-20.

20. (ㄱ) 종은 어떻게 “두려워함으로” 복종할 것입니까? (ㄴ) 어떠한 상황 때문에 그리스도인 종이 고통을 당했을지 모릅니까?

20 이러한 충고를 청종하는 데 요구된 것은 무엇이었읍니까? 그리스도인은 종으로서의 책임을 이행하는 동안, 자기가 좋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에 대한 올바른 두려움 혹은 관심을 나타내야 하였읍니다. 주인이 분별이 없거나 가혹한 혹은 무리한 요구를 할 때라도 이러한 두려움을 나타내야 하였읍니다. 주인은 잘된 일에 대해서도 흠을 잡는 사람일지 모릅니다. 주인은 그리스도인 종에게 하나님의 법에 위배되는 일을 하라고 요구했을지 모릅니다. 그리스도인 종은 자기의 경건한 양심의 명령에 충실히 순종하기 때문에 주인을 위해 도둑질 혹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부당한 고통을 당했을지 모릅니다. 또한 때때로, 신체적인 학대와 폭언의 대상이 되었을지 모릅니다.

21. 종이 학대를 참을성있게 견디면 어떠한 선한 결과가 있을 수 있읍니까?

21 ‘베드로’의 충고와 일치하게, 그리스도인 종은 가혹한 주인에게도 대항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양심적으로 자기의 일을 계속할 것이며, 참을성있게 학대를 견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왜냐 하면 그것은 그리스도교를 잘못 반영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참 숭배가 종에게 선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보고 알 것입니다. 그리하여 종이 학대를 받아가면서도 어떻게 그러한 칭찬할 만한 자제를 나타낼 수 있는가를 알아 보기 위하여 그리스도교를 조사해 보아야겠다는 자극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만일 종이 주인에게 잘못을 행해서 주인으로부터 심한 징계를 받는다면 사람들은 그가 처벌을 조용히 참을지라도 칭찬하지 않을 것입니다.

22. 그리스도인 고용인은 직장에서 어떻게 처신하기를 원할 것입니까?

22 오늘날 직장에서 특별히 견디기 어려운 입장에 직면하는 그리스도인은 다른 일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언제나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다른 일자리를 구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떠한 계약하에서 혹은 바람직하지 않은 조건하에서 계속 일해야 할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그의 입장은 무리한 요구를 하는 주인으로부터 떠날 수 없던 기원 1세기의 하인의 입장과 별로 다르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다른 어떤 사람에게 고용되어 있는 한 그는 일을 훌륭히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며 그가 당하는 그리고 성경적인 수단에 의해 막을 수 없는 학대를 참을성있게 그리고 불평없이 견딜 것입니다. 그는 또한 고용주를 계속 합당한 존경과 사려깊음으로 대할 것입니다.

격려가 되는 예수의 본

23, 24. (ㄱ) 우리가 옳은 일을 하고도 학대를 받을 때 누구의 본이 우리에게 격려가 될 수 있읍니까? (ㄴ) 이분은 어떤 일을 직면하셨으며, 어떻게 처신하셨읍니까?

23 분명히, 불공평을 참는 일은 누구에게나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완전한 본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분의 본은 진정한 격려가 될 수 있읍니다. 사도 ‘베드로’는 학대받는 그리스도인 종들을 위로하면서 이러한 말로 예수의 본을 지적하였읍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니라.]”—베드로 전 2:21-23.

24 이와 같이 이 사도는 그리스도인 종들에게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제자로 불리움을 받은 이유 중 하나는 부당한 고통을 받는 동안 그분과 같은 정신을 나타내게 하기 위함이라고 상기시켰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특히 인간으로서 지상에서 보내신 그의 생애중 마지막 날 많은 고통을 인내하셨읍니다. 그분은 손바닥과 주먹으로 맞으셨고 침뱉음을 당하셨고, 채찍(몸에 상처를 내기 위하여 아마 납이나 뼈나 가시를 끼운)으로 맞으셨읍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극악한 범죄자처럼 형주에 못박히셨읍니다. 그러나 그분은 이 모든 모욕을 감수하셨고, 그렇게 학대하는 사람들을 욕하거나 위협하지 않으셨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인생 행로가 순결했다는 것을 아셨지만, 자신의 무죄를 스스로 증명하려 하지 않았읍니다. 그분은 자기의 하나님이신 아버지께서 자기를 위하여 의로운 심판을 내려 주실 것을 확신하고 아버지께 자신의 문제를 맡기셨읍니다. 우리도 역시 전능자께서 우리가 경험할지 모르는 모든 불공평을 주목하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읍니다. 우리가 고통 가운데서도 계속 참을성있게 견딘다면, 그분은 불공평을 시정해 주실 것입니다. 확실히, 만일 하나님의 죄없는 아들이 기꺼이 학대를 견디셨다면, 그분의 추종자들인 우리는 우리가 죄있는 사람들임을 인정할 때 더욱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있읍니다.

25.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통으로부터 어떻게 유익을 얻었읍니까?

25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통은 실제로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이며, 그것은 그분을 본받아야 할 부가적 이유가 됩니다. 사도 ‘베드로’의 다음 말에 그 점이 강조되어 있읍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베드로 전 2:24, 25.

26, 27.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받으신 고통으로부터 우리가 어떠한 영향을 받아야 합니까?

26 우리는 죄인들이기 때문에 생명의 선물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성서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알려 줍니다. (로마 6:23)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에 대한 형벌을 기꺼이 받으셨으며, 우리를 위하여 흠없고 불평없는 양같이 희생적으로 죽으셨읍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형주에서의 수치스러운 극도의 형벌을 참으심으로써 믿는 사람들이 죄로부터 해방되고 의로운 생활을 시작하는 것을 가능케 하셨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당하신 고난을 생각할 때 우리는 감동을 받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에 대한 깊은 인식을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생활 모든 면에서 예수를 본받아야 할 것이며, 이 가운데는 그분과 같이 의를 위해 학대를 기꺼이 당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읍니다. 우리가 불공평을 당할 때마다 우리 주께서 경험하신 고통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27 그러한 것을 깊이 생각해 보면 그분이 우리를 위해 고통을 당하신 목적에 어긋나게 행동하지 않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본에 순응하는 중요성이 우리의 머리에 새겨질 수 있읍니다. 우리의 죄 많은 상태에서 우리는 인자한 목자의 인도를 받지 못하는 방황하는 양떼의 상태에 비길 수 있는 딱한 처지에 있었읍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죄인으로서 위대하신 목자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희생과 그것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기초로 화해가 이루어졌읍니다. (골로새 1:21-23)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영혼의 감독이신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목자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자한 관심과 보호와 인도를 받게 되었읍니다. (베드로 전 5:2-4) 그러므로, 사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에 대한 인식을 나타낼 때 의를 위하여 아무리 많은 고통을 당할지라도 견디기에 벅차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통은 우리가 그분을 위하여 당할지 모르는 어떠한 학대보다도 훨씬 더 큰 고통이었읍니다!

신자들과 함께 일하는 경우

28, 29. (ㄱ) 사도 ‘바울’은 믿는 주인을 섬기는 그리스도인 종들에게 어떠한 충고를 주었읍니까? (ㄴ) 왜 그러한 충고가 필요하였읍니까?

28 그러나 기원 제1세기의 그리스도인 종 모두가 까다로운 주인으로부터 학대를 받은 것은 아닙니다. 당시의 기존 사회 구조 때문에 일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종이 있었읍니다. 종과 주인이 하나님의 아들의 제자일 때 양측은 그들의 영적 관계를 올바로 인식해야 하였읍니다. 사도 ‘바울’은 믿는 주인을 섬기는 종들에게 이렇게 교훈하였읍니다.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경히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임이니라.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디모데 전 6:2.

29 왜 이러한 충고가 필요하였읍니까? 믿는 종은 그리스도의 공동 후사였으며, 그러므로, 믿는 주인과 영적으로 동등하였읍니다. 따라서, 종은 이러한 영적으로 동등한 신분이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세속적 관계를 무효화하고 그러한 관계에서의 주인의 권위를 폐기했다고 추리하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었읍니다. 그러한 태도를 가진다면 쉽사리 종은 주인을 이용하게 되고 최선을 다하여 의무를 수행하지 않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충고는 종들이 회중의 다른 성원들과의 형제 관계에서 이끌어냈을지 모르는 그릇된 결론을 시정해 주었읍니다. 그들에게는 주인과의 그러한 관계 때문에, 그들의 의무를 잘 이행해야 할 더욱 강력한 이유가 있었읍니다. 그리스도인 형제를 위하여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그들의 특권이었으며, 이것은 그들에게 큰 기쁨이 되었을 것입니다.

30. 그리스도인은 오늘날 신자의 감독 아래서 일할 때 왜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까?

30 오늘날도 그와 마찬가지로, 만일 어떤 그리스도인이 믿는 감독관 아래서 일하거나 신자에게 고용되어 있다면, 최선을 다하고자 원해야 할 것입니다. 그의 노동으로부터 유익을 얻는 것은 그의 형제입니다. 만일 그가 일을 잘 하지 않거나 어슬렁거린다면, 그는 이 형제를 실망시키고 짜증나게 할 것입니다. (잠언 10:26) 그것은 그가 사랑해야 할 형제에 대한 사랑이 아닐 것입니다!—요한 1서 4:11.

31. 그리스도인 주인들은 어떠한 충고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까?

31 반면에, 그리스도인 주인 혹은 고용주는 자기들에게도 주인 즉 그리스도께서 계시다는 것을 무시해서는 안되었읍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 앞에서 책임이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에 입각하여 종들 혹은 일꾼들을 대해야 하였읍니다.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읍니다.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찌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찌어다.”—골로새 4:1.

32. 우리는 우리를 위해 일해 주는 신자들에 대해 어떠한 책임을 가지고 있읍니까?

32 더우기, 그리스도인 형제가 의사, 변호사, 전기공, 목수, 연관공, 수리공 등의 자격으로 우리를 위해 일해 줄 때, 우리는 그들에게 공정한 대가를 지불하기를 원할 것입니다. 우리가 수입의 상당액을 돈이 많이 드는 오락 혹은 사치품이나 휴가 여행에 사용하면서 그리스도인 형제에게 주어야 할 돈의 지불일을 연기함으로써 우리의 영적 관계를 이용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 아니겠읍니까? 상업 거래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동료 신자들에게 그들이 받을 권리가 있는 것을 주기를 원해야 하지 않겠읍니까? 그렇게 하여 우리가 형제들의 생계를 도울 수 있다면 참으로 좋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특별한 친절이 베풀어질 때, 우리는 이것을 감사하고 우리의 동료 신자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우리를 더 높이 평가하거나 특혜를 베풀 의무가 있지 않다는 것을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이 모든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천적 머리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으로 모든 일을 하기 원한다는 것을 나타낼 수 있읍니다.

아내로서의 복종

33. (ㄱ) 그리스도인 아내들에게 어떠한 교훈이 주어졌읍니까? (ㄴ) 베드로 전서 3:1에서, “마찬가지로”라는 표현에 어떠한 의미가 있읍니까?

33 부부는 머리에 대한 복종을 요하는 또 다른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아내의 복종을, “마찬가지로”를 의미하는 희랍어 표현으로, 불리한 환경에서의 복종에 대한 이전의 교훈과 결부시킵니다. 인용하면 이러합니다.

“아내된 자들아, 이와 같이[마찬가지로, 신세]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베드로 전 3:1, 2.

34. 사도 ‘베드로’는 어떠한 상황에서 아내가 복종해야 한다고 격려하고 있으며, 왜 이것은 쉽지 않은 일일 수 있읍니까?

34 여기에서 그리스도인 아내들은, 바로 불리한 상황에서 복종해야 한다는 격려를 받고 있읍니다. 남편이 하나님의 말씀의 원칙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그리스도인 아내의 생활은 역경에 직면할 수 있으며, 남편은 아내를 가혹하고 무정하게 대하게 될 수 있읍니다. 그렇다고 하여 이것이 그리스도인 아내로 하여금 가장인 남편을 무시해도 된다는 구실이 될 수 없읍니다. 그러므로, 남편의 요구가 하나님의 법과 충돌하지 않는 한, 그리스도인 아내는 남편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기를 원할 것입니다.

35. 아내는 어떻게 “말로 말미암지 않고” 남편을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읍니까?

35 사도 ‘베드로’가 지적했듯이, 그리스도인 아내의 훌륭한 행실은 남편이 신자가 되게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읍니다. 그러나, 아내가 이와 같이 “말로 말미암지 않고” 남편을 얻는 것은 아내가 남편과 성경적인 생각을 말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칭찬받을 만한 아내의 행동이 말보다 강력한 설득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되면 남편은 자기 아내의 행실이 순결하거나 언행에 있어서 깨끗하고 자기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36, 37. 디도서 2:3-5에 의하면, 그리스도인 여자는 모범적인 아내가 되기 위하여 무엇에 유의해야 합니까?

36 사도 ‘바울’이 여자들에 대해 기술한 내용은 그리스도인 아내에게 요구되는 사항을 좀 더 자세히 이해할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는 ‘디도’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읍니다.

“이와 같이 나이 많은 여자들도 거룩한 봉사를 하는 자답게 행동하고 남을 비방하지 않고 술의 종이 되지 않고 좋은 것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젊은 여자들이 깨우침을 받아 남편을 사랑하고 자녀를 사랑하고 신중하고 순결하고 집안 일에 힘쓰고 어질고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을 받지않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디도 2:3-5, 새번역.

37 이 충고에 의하면, 여자는 자기의 전체 생활 행로를 여호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을 나타내는 방식으로 처신하고자 양심적으로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세워 주고 격려하는 데 자기의 혀를 사용하고자 노력할 것이며, 비방이나 해로운 험담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먹고 마시는 일에 있어서 확실히 중용이 바람직합니다. 아내이면서 어머니로서 그리스도인 여자는 사랑에 있어서 모범이 되어야 하며, 영양이 풍부한 음식을 마련하고 가정을 깨끗하고 유쾌한 장소로 만드는 데 있어서의 주부의 역할을 수행해야 할 것입니다. 남편과 자녀에 대한 사랑에는 가족의 관심사를 기꺼이 자신의 관심사보다 앞세우는 것이 포함되어 있읍니다. 남편이 보기에 아내로서의 의무를 심히 등한히 한다는 증거가 없어야 합니다. 남편이 보기에 불신자들과 비할 때 자기 아내는 참으로 모범적이라는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단장에 대한 균형잡힌 견해

38. 베드로 전서 3:3에는 단장에 대한 어떠한 충고가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38 단장에 대한 아내의 올바른 견해 또한 중요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인 아내가 화려한 단장으로 매력있게 하는 것을 가장 중요시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였읍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라.]” (베드로 전 3:3) 기원 제1세기에, 여자들은 그들의 긴 머리를 거문고형, ‘트럼펫’형, 화관형 및 왕관형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 복잡하고 시선을 끄는 모양으로 꼬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바쳤읍니다. 또한, 그들은 매우 화려한 의상과 많은 금사슬과 반지와 팔찌로 단장하였읍니다. 그리스도인 여자가 몸단장에 그처럼 과도한 관심을 쏟는 것은 부적절하였읍니다. 왜냐 하면 그러한 단장은 그 여자의 주된 인생 목표가 여호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인상을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우기, 주로 외모와 유행을 위해 사는 여자들은 흔히 교만과 시기와 우월감에 희생되기 쉬우며, 생각과 마음의 평온을 잃고 욕구불만과 초조감이 생기게 됩니다.

39. 아내는 왜 자신의 외모에 무관심해서는 안됩니까?

39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인 아내가 전혀 외모에 관심을 두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도 화려한 옷차림이 합당치 않다는 비슷한 충고를 할 때,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라고 말하였읍니다. (디모데 전 2:9)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아내가 옷차림과 몸치장, 신체적 외모에 소홀히 함으로써 남편에게 보기 싫은 모습을 보이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더우기 성서는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고린도 전 11:7) 분명히, 게으르고, 머리를 빗지 않은 여자는 남편에게 영예나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그는 남편의 모습을 다른 사람들 앞에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만일 남편이 자신의 외모에 적절한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이라면 단정치 못한 아내의 외관은 남편을 불쾌하게 할 수 있읍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아내의 옷차림과 단장은 정숙한 혹은 품위있는, 그러면서도 잘 어울리는 것을 선택하는 좋은 분별력을 반영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합니다.

“조용하고 온유한 정신”

40. (ㄱ) 그리스도인 여자는 어떠할 때 참으로 아름답습니까? (ㄴ) “조용하고 온유한 정신”을 무엇과 혼동해서는 안됩니까?

40 그러나, 그리스도인 아내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마음 상태에 있읍니다. 사도 ‘베드로’는 현명하게도, 단장은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조용하고 온유한 정신, 신세]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라고 말하였읍니다. (베드로 전 3:4) 이 “조용하고 온유한 정신”은 겉치레에 불과한 외면적인 상냥함과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예를 들면, 여자가 말씨는 부드럽고 가장의 의사에 말로는 온유하게 순복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반역적이고 교활하여 남편을 지배하려고 할 수 있읍니다.

41. 여자는 자신이 “조용하고 온유한 정신”을 자기의 영구적인 단장의 일부로 삼고 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읍니까?

41 진정으로 “조용하고 온유한 정신”을 소유하고 있는 여자의 경우에, 이 겸손한 정신은 그의 진정한 내면을 반영합니다. 여자가 이러한 “정신”을 자기의 영구적인 단장의 일부로 삼고 있는지 여부를 어떻게 알 수 있읍니까? 이렇게 자문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때때로 남편이 무정하거나, 억지를 부리거나 자기의 책임을 회피할 때 무슨 일이 발생하는가? 나는 가끔 발끈 화를 내고, 격분하고, 그의 태만에 대해 신랄하게 비난하는가? 아니면, 보통 내적으로 평온을 유지하고자 노력하고 논쟁적인 대결을 피하는가?’ “조용하고 온유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 여인은 표면상으로 평화로와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활화산과 같이 폭발 직전에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고, 참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외적으로 뿐 아니라 내적으로 평온하고 한결같은 기질을 유지하며, 보는 이들로 하여금 그가 나타내는 내적인 힘과 친절한 처신으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게 합니다.

42. 베드로 전서 3:5, 6에 의하면, 누가 “조용하고 온유한 정신”을 가지고 있었읍니까?

42 그러한 “조용하고 온유한 정신”이 그리스도 이전 시대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자들의 특징이었읍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 사실을 지적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읍니다.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베드로 전 3:5, 6.

43. ‘사라’가 하나님께 희망을 둔 ‘거룩한 여자’였다는 것을 무엇이 증명합니까?

43 그리스도 이전 시대의 “거룩한 부녀” 중 한 사람인 ‘사라’는 여호와께 희망과 확신을 두었읍니다. 아쉬워하는 마음으로 ‘소돔’을 뒤돌아 보다가 멸망을 당한 ‘롯’의 아내와 달리, ‘사라’는 기꺼이 ‘우르’ 땅의 안이한 생활을 포기하고 남편 ‘아브라함’을 따라 평생 장막에서 거주하였읍니다. ‘아브라함’과 함께 그는 하나님이 다스릴 영구적인 거처를 바라보았읍니다. (히브리 11:8-12) 확실히 ‘사라’는 재물과 안이한 생활을 지나치게 중요시하지 않았읍니다. 그는 영적 견해를 나타내는 생활을 하였읍니다. ‘사라’는 하나님께서 부활시에 자기에게 풍부한 상을 주시리라는 것을 인식하였읍니다. 이와 동일하게, 그리스도인 여자들은 오늘날 현명하게도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생활의 주된 목표로 삼고 있읍니다.—잠언 31:30 비교.

44. ‘사라’가 남편을 깊이 존경했다는 것을 무엇이 증명합니까?

44 아름다운 ‘사라’는 자기의 남편을 깊이 존경하였읍니다. 기대하지 않은 방문객이 찾아왔을 때 ‘아브라함’은 자기의 충실한 반려자에게 서슴치 않고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22‘리터’)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고 말하였읍니다. (창세 18:6) 바로 그 날 ‘사라’는 ‘아브라함’을 ‘주’라고 불렀읍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듣지 않을 때 마음 속으로 그렇게 불렀으므로, 이것은 분명히 그가 마음으로 남편에게 순복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창세 18:12.

45. ‘사라’의 개성이 약하지 않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읍니까?

45 그러나, ‘사라’는 개성이 약한 여자가 아니었읍니다. ‘사라’는 ‘애굽’인 여종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이 자기의 아들 ‘이삭’을 “희롱”하는 것을 보았을 때, ‘아브라함’에게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고 강력히 제안하고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고 말하였읍니다. 그러나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부당하게 요구하거나 명령한 것이 아니라 강력히 호소한 것이었음이, ‘사라’의 요구를 여호와께서 승인하신 사실에 나타나 있읍니다. 전능하신 분께서는 ‘사라’가 올바른 정신으로 호소했음을 주목하시고, ‘아브라함’에게 그 제안을 따르도록 지시하셨읍니다.—창세 21:9-12.

46, 47. (ㄱ) 강력한 견해를 표명하고 솔선력을 사용하는 여자는 자신이 순종적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읍니까? (ㄴ)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자는 어떻게 처신해야 합니까?

46 이와 마찬가지로 순종적인 그리스도인 여자는 결단력이 없거나 의지가 약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개인적인 명확한 견해를 표명할 수 있으며 가족의 행복에 중요한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솔선할 수 있읍니다. 그러나 그는 남편의 희망과 감정을 염두에 두고, 그것이 물건을 사거나 집을 단장하거나 기타 집안 일을 할 때 지침이 되게 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만일 특정한 일을 하거나 특정한 물건을 살 때 남편의 견해를 확실히 알고 있지 않다면, 사전에 상의함으로써 문제를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으로 아내의 의무를 이행함으로써 남편을 기쁘게 할 수 있고 남편으로부터 험잡히는 일이 없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아내는 보통 가족 가운데서 영예롭고 존귀한 지위를 얻습니다. 그러한 여자는 잠언 31:11, 28에 묘사된 유능한 아내와 같은 입장에 있게 됩니다. “그런 자의 남편의 마음은 그를 믿나니 ··· 그 자식들은 일어나 사례하며 그 남편은 칭찬[하느니라.]” 아내가 현명하게 처신하고 가족의 복지를 위태롭게 하는 일이 없을 것을 확신하는 남편은 현명치 않은 행동을 제어하기 위해 허다한 규칙을 만들 필요를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 사이에는 훌륭한 이해가 있을 것입니다. 가사를 돌보는 데 있어서 그는 자기의 능력과 솔선력을 최대한으로 사용하는 것을 특권으로 여길 것입니다.

47 성서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자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 아내는 근면하고 다른 사람들을 돕는 면에서 솔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사실상 남편의 ‘그늘에서’ 사는 여자가 아닐 것입니다. (잠언 31:13-22, 24, 27 비교.) 이것은 기원 제1세기에 특별한 명단에 오를 자격이 있는 그리스도인 여자들에 대한 묘사로 볼 때 분명합니다. 인용하면 이러합니다. “과부로 명부에 올릴 자는 나이 육십이 덜 되지 아니하고 한 남편의 아내이었던 자로서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기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좇은 자라야 할것이[니라.]” (디모데 전 5:9, 10) 선한 행실의 기록이 “한 남편의 아내”였던 시절까지 소급한다는 점에 유의하십시오. 그러므로, “조용하고 온유한 정신”을 단순히 솔선력과 근면의 부족으로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와 같은 정신을 나타내는 데서 오는 유익

48. 그리스도인 아내는 어떻게 더욱 하나님의 아들과 같이 될 수 있읍니까?

48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모든 제자들이 따를 본’이시므로, 그리스도인 아내는 어려운 상황하에서 좀 더 그리스도와 같이 되고자 노력하기를 원할 것입니다. (베드로 전 2:21)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말과 행동을 정직하게 평가해야 합니다.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고려하고 더 나은 아내가 되는 데 필요한 여호와 하나님의 영의 도움을 그분께 계속 간구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정신”을 더욱 온전히 지니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 전 2:16, 신세) 그의 진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분명히 나타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마음에 드는 어떤 사람의 훌륭한 특성과 칭찬받을 만한 행위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가 더욱 그와 같이 되고 싶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49-51. (ㄱ) 아내가 성서의 원칙을 적용하는 것이 왜 언제나 현명합니까? (ㄴ) 성경에 충실히 고착할 때 어떠한 훌륭한 유익이 있을 수 있읍니까? (ㄷ) 그리스도인 여자는 어떠한 “두려운 일”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49 남편이 무정하거나, 고집을 부리거나 책임을 회피할 때라도, 아내는 성서의 원칙을 적용하는 것이 그러한 상황하에서도 최선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을 확신할 수 있읍니다. 남편이 그릇된 결정을 내릴 때마다 그것을 크게 문제삼고, 순종하라는 성경의 충고를 무시하는 아내에게는 유익이 없읍니다. 사람은 잘못했을 때에도 자신을 변호하려는 경향이 있읍니다. 그러므로, 만일 남편이 그릇된 판단을 할 때마다 ‘중대한 이의’를 제기한다면 아내는 자기가 원하는 것과 반대의 반응을 얻게 될 수 있읍니다. 남편은 아내의 조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아내의 말을 더욱 무시하려고 결심할 수 있읍니다. 반면에, 만일 아내가 죄많은 사람들이 잘못 판단하는 일이 전혀 없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이해한다는 것을 보인다면, 남편은 다음 번에 아내의 생각을 훨씬 더 많이 참작하는 경향이 있게 될 것입니다. 남편은 문제를 처리할 때 자존심을 너무 내세우지 않을 것입니다.

50 그리스도인 아내가 친절하고 부드러운 방법으로 남편을 격려한다면, 남편은 자신의 처리 방식을 심각히 검토해 보고 자신의 생활을 시정해 나아가기 시작할 수 있읍니다. 진보가 더딜지 모르지만, 아내는 분명히 즉각적인 유익을 얻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읍니다. 어떠한 유익입니까? 남편과 공공연히 대결할 때 있게 될 큰 감정적 긴장감, 괴로움 및 불쾌감을 피하는 유익입니다.—잠언 14:29, 30.

51 아내가 언행에 있어서 성경에 고착한다고 하여 반드시 불신자 남편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내는 자기의 행로가 ‘하나님을 참으로 기쁘시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만족감을 가질 수 있읍니다. 주부로서의 훌륭한 책임 이행은 하늘에 쌓아지는 보물과 같은 선한 행실의 기록이 됩니다. 그 보물은 푸짐한 상으로서 하나님의 축복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마태 6:20) 하나님 앞에서 훌륭한 신분을 유지하는 중요성을 인식함으로써 그는 계속 ‘선을 행할 것’이며, 어떠한 “두려운 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이기 때문에 받을 수 있는 어떠한 모욕이나 위협이나 반대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두려움에 굴복하여 여호와와 그분의 아들과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체험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통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이 경건한 믿음의 여자였던 순종적인 ‘사라’의 딸임을 증명합니다.

“지식을 따라”

52. ‘베드로’가 그리스도인 남편들에게 충고할 때 “마찬가지로”라는 희랍어 표현을 사용한 데에는 어떠한 의미가 있읍니까?

52 남편과의 관계로 인하여 아내에게 특정한 의무가 있듯이, 아내와의 관계로 인하여 남편에게도 의무가 있읍니다. 사도 ‘베드로’는 남편들에게 이 점을 상기시켰는데, 그는 “마찬가지로”라는 희랍어 표현을 사용하여, 아내들에게 준 이전의 충고를 남편들에 대한 교훈과 결부시켰읍니다. 인용하면 이러합니다.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마찬가지로, 신세]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니라.”—베드로 전 3:7.

53. 남편은 무엇을 따라 아내와 동거해야 합니까?

53 기혼자인 영감받은 사도가, 남편이 아내와 동거 혹은 함께 생활할 때 “지식”을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먼저 “지적”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마가 1:30; 고린도 전 9:5) 확실히, 남편은 아내를 잘 알기를 원할 것입니다. 즉, 아내의 감정, 힘, 한계, 호불호를 알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점은, 그리스도인 남편으로서의 자기의 책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편은 자기의 아내 및 하나님께서 주신 아내의 역할을 참으로 알아야 ‘지식에 따라 아내와 동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54. 머리 직분을 행사하는 데는 무엇이 요구됩니까?

54 성경은 남편이 아내의 머리라고 알려 줍니다. 그러나 남편은 절대적인 머리가 아닙니다. 왜냐 하면 그는 가사를 처리하는 데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 직분에 순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라고 성서는 알려 줍니다. (고린도 전 11:3) 사도 ‘바울’은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고 기술하였읍니다. (에베소 5:25)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그리스도인 회중을 대한 방식은 남편들이 가족의 책임을 이행하는 데 있어서의 본이 됩니다. 예수께서는 확실히 회중에 대한 머리 직분을 행사하실 때 포학하거나 잔인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셨읍니다. 그분은 심지어 회중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기까지 하셨읍니다. 그러므로, 머리 직분이 남편에게 있다고 하여 남편이 아내를 지배할 권리는 없으며, 아내는 낮고 비천한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남편은 사랑의 표현으로 자신을 희생할 책임이 있으며, 자신의 개인적 욕망과 취향보다 아내의 복지와 관심사를 기꺼이 앞세울 위치에 있읍니다.

55. 예수 그리스도께서 본이시므로, 그리스도인 남편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55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남편들에게 완전한 본이시므로, 남편들은 그분께서 제자들을 어떻게 대하셨는가를 잘 아는 것이 좋습니다. 더욱 중요한 점은, 남편들이 가족 책임을 이행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의 본에 순응하고자 노력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돌보는 데 있어서 지상에 계신 동안 행하신 많은 일들 중 얼마를 고려하여 보십시오.

56, 57. (ㄱ) 하나님의 아들은 어떻게 제자들의 영적 복지에 대한 진정한 관심을 보이셨읍니까? (ㄴ) 예수의 본에 비추어 볼 때, 남편은 어떻게 자문해 볼 수 있읍니까?

56 하나님의 아들은 자기의 추종자들의 영적 복지에 진정한 관심이 있었읍니다. 그분은 추종자들이 중요한 문제를 이해하는 데 더딜 때에도, 그들에게 참을성을 보이셨읍니다. 그분은 시간을 내어 문제를 명백히 설명해 주셨고 자신의 가르침을 참으로 이해하도록 도와 주셨읍니다. (마태 16:6-12; 요한 16:16-30) 그들이 상호 관계에 대해 올바른 견해를 갖는 데 어려움을 보일 때, 예수께서는 겸손히 다른 사람들을 섬겨야 할 필요성을 반복하여 지적하셨읍니다. (마가 9:33-37; 10:42-44; 누가 22:24-27) 그분은 그들과 보낸 마지막 밤에 그들의 발을 씻겨 주심으로 겸손에 대한 가르침을 강조하셨으며, 그들에게 본을 보이셨읍니다. (요한 13:5-15) 예수께서는 또 제자들의 이해의 한계를 참작하시고 그들이 당시에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이상의 지식을 전달하지 않으셨읍니다.—요한 16:4, 12.

57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남편은 이렇게 자문해 볼 수 있읍니다. ‘나는 나의 아내 및 자녀들의 영적 복지에 어느 정도의 관심을 보이는가? 나는 그들이 참으로 성서 원칙을 이해하도록 돕는가? 그릇된 태도와 행동을 보았을 때, 나는 그것이 그릇된 이유와 시정해야 할 이유를 명백히 설명하는가? 나는 그들의 능력 한계를 참작하고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도록 조심하는가?’

58. 남편은 가족의 신체적 필요를 고려하는 면에서 어떻게 예수의 본을 따를 수 있읍니까?

58 하나님의 아들은 또한 육적인 관점에서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주의깊이 관찰하셨읍니다. 사도들이 전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자기들의 활동을 보고했을 때 그분은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라고 말씀하셨읍니다. (마가 6:31) 이와 비슷하게, 남편은 아내와 자녀들이 틀에 박힌 규칙적인 생활에서 벗어나 오락과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시간을 갖도록 마련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59, 60. (ㄱ)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어떻게 확신과 신임을 두셨읍니까? (ㄴ) 이것은 남편이 머리 직분을 행사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읍니까?

59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머리 직분을 행사하실 때 복잡한 여러 가지 법규를 나열함으로써 회중 성원들을 압도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그들에게 생활 문제를 다룰 때 합당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기초로 참으로 중요한 명령과 지침을 주셨읍니다. 그분의 희생적인 사랑과 아울러, 제자들에 대한 확신과 신임은 사실상 그들이 같은 사랑으로 응답하며 그분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게 하는 “강력한 자극제”였읍니다.—고린도 후 5:14, 15; 또한 디모데 전 1:12; 요한 1서 5:2, 3 비교.

60 이와 비슷하게, 남편이 아내를 신뢰하는 것은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읍니다. 아내가 자기의 책임을 이행하는 데 있어서 솔선력을 사용할 자유가 없게 되면 그는 곧 자기의 일에서 기쁨을 상실할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지식과 재능과 능력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압박감을 느낄 것이며, 그 결과 욕구 불만에 빠질 수 있읍니다. 반면에, 남편이 일부 중요한 문제를 아내의 좋은 판단력에 맡긴다면, 아내는 남편을 기쁘게 하는 방법으로 일을 처리하는 데서 기쁨을 느낄 것입니다.

연약한 그릇으로 알아 귀히 여기라’

61-63. (ㄱ) 성경에서는 남편이 아내를 어떻게 대해야 한다고 알려 줍니까? (ㄴ) 남편이 참으로 아내를 존귀하게 여긴다면 어떠한 일을 피할 것입니까? (ㄷ) 중요한 가족 문제에 대해서는 남편이 기꺼이 어떻게 해야 합니까? (ㄹ) 최종 결정을 내릴 때 단순히 표현된 말만 참작하는 것은 왜 부족합니까?

61 남편은 아내의 인간성과 아내에 대한 성경적 책임에 대한 지식에 따라 동거할 때, 또한 아내를 ‘더 연약한 그릇으로 알아 귀히 여길’ 것입니다. 여자들의 신체적 구성이 남자들의 경우보다 일반적으로 더 많은 제약을 주기 때문에, 아내는 “더 연약한 그릇”입니다. 그러나 아내는 가족 가운데서 존귀한 혹은 고귀한 신분을 가지고 있읍니다. 사도 ‘바울’의 다음과 같은 말은 남편이 아내에게 어떻게 영예를 돌릴 수 있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몸 같이 할찌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느니라].”—에베소 5:28, 29.

62 일반적으로 남편은 자기가 한 일을 깎아 내리지 않으며, 자신을 무능하게 보이게 하려고 하지 않으며, 자신의 몸을 학대하지 않으며, 자기의 휴식과 오락의 필요성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남편은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평판을 듣기를 원치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고귀한 신분으로 보이기를 원합니다. 남편이 참으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는 아내의 약함을 무시하지 않으며, 아내를 경시하지 않으며, 기타 방법으로 아내가 자신을 비천하게 생각하게 하지 않습니다. 그는 아내에게도 자신에 대해 바라는 것과 같은 고귀한 가치를 부여하고 사려깊음을 보일 것이며, 아내에게 그가 도움이 되고 있고, 고마운 존재이고 필요한 존재임을 느끼게 할 것입니다.

63 아내에게 가정에서 존귀한 위치를 지니게 하려면 남편이 조용하고 이치적인 방법으로 가족 문제를 기꺼이 토의하여 아내의 생각과 견해를 알아 보아야 합니다. 아내는 자신의 견해를 거리낌없이 표현할 수 있어야 하며, 심각한 문제를 토론할 때 자신의 이야기를 남편이 일축하지 않고 적절히 참작할 것임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사 13:21-23; 사무엘 상 25:23-34; 잠언 1:5, 6, 8, 9 비교.) 더우기, 남편은 표현된 말 이상에 주의깊은 관심을 보일 필요가 있읍니다. 어조나 얼굴 표정 혹은 열정이나 자발성의 부족으로 더욱 깊은 내적 감정이 나타날 수 있읍니다. (잠언 15:13 비교.) 자기의 아내를 알게 된 남편은 그러한 것을 무시하지 않을 것이며 불필요한 분노감을 일으킬 수 있는 어떤 일을 무분별하게 추진하지 않을 것입니다.

64. 남편은 언제 아내에게 굴복하지 않을 것이며, 이것은 왜 유익합니까?

64 물론, 가장으로서, 남편은 가족 전체의 이익이 손상을 받을 것으로 확신하는 일이라면 아내의 요구에 굴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민수 30:6-8 비교.) 그는 자기가 진정으로 옳다고 믿는 것은 아내의 감정적 반응이 어떠하든지 옹호해야 할 성경적 의무를 가지고 있음을 인식합니다. 남편이 자기의 더 나은 판단을 덮어 두고 아내의 요구에 응한다는 것은 가장의 지위를 남자에게 주신 하나님을 영예롭게 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나중 문제가 가족에게 곤란을 초래한다면, 이것은 남자에게 아내에 대한 악 감정을 갖게 할 수 있읍니다. 반면에, 남자가 올바른 길이라고 확신하는 것에 고착한다면 가족에게 유익할 것입니다. 만일 그의 결정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내려졌고 성경 원칙과 일치하다면, 아내는 그 결정이 현명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며 남편이 그 결정에 고착한 것을 기뻐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남편에 대한 존경심이 깊어질 것이며 아내와 온 가족의 행복이 증진될 것입니다.

영적인 이유

65. 그리스도인 남편이 “지식을 따라” 자기의 믿는 아내와 동거할 어떠한 영적 이유가 있읍니까?

65 그리스도인 남편이 자기의 믿는 아내와 “지식을 따라” 동거하고 아내를 존귀하게 여길 강력한 이유가 있읍니다. 그 이유는 단순히 더욱 평화로운 가정 생활에서 오는 유익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동료 신자들에게 더욱 큰 이유를 지적하였읍니다. 그는 남편들이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라고 지적하였읍니다. 예수께서는 자기의 희생적 죽음을 통해 인간 남녀에게 죄와 사망의 단죄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열어 주셨읍니다. 그러므로, 아내는 남편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그리스도 앞에서 승인받은 입장에 있을 수 있읍니다. 따라서, 남편은 여자를 하나님 앞에서 자기보다 가치가 낮은 열등한 사람이라는 착각에 근거하여 아내를 대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심각한 이유가 있읍니다.

66. 부부 사이의 문제를 성경적으로 다루지 않는다면, 왜 영적으로 심각한 해가 있읍니까?

66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중을 대하신 본에 따라 부부 사이의 문제를 처리하지 않는다면, 부부 양쪽이 영적으로 손상을 받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도가 막힐 수 있읍니다.’ 자주 다투고, 화를 내고, 원한을 품고, 가혹하거나 부당한 행동을 하는 가정에서는 기도로써 하나님께 호소하기가 어렵습니다. 단죄받고 있다는 마음 속의 느낌 때문에, 거리낌없이 하나님께 말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 1서 3:21, 신세) 또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기도가 응답되게 하기 위한 요구 조건을 제시하셨읍니다. 자비가 없고, 다른 사람들의 죄를 기꺼이 용서하지 않는 사람들의 기도는 듣지 않으실 것입니다. (마태 18:21-35) 생활을 하나님의 명령에 일치시키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의 기도만 응답이 있읍니다. (요한 1서 3:22)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중을 대하신 본을 결혼 생활에서 따르지 않는 부부는 자기들의 문제를 해결해 나아가는 데 하나님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읍니다. 반면에, 성경의 충고에 충실히 순종한다면 틀림없이 하나님의 승인과 축복이 있읍니다. 확실히,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머리 직분에 순복하는 데서 오는 훌륭한 상입니다.

그리스도인 회중 내에서의 순복

67. 마태복음 23:8-11에 따르면, 그리스도인 회중 내에 어떠한 태도가 있어야 합니까?

67 그리스도인 회중 내에서 그리스도의 머리 직분을 인정해야 할 중요한 이유가 있읍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은 개개 성원들의 상호간의 태도와 행실에 영향을 줍니다. 예수 자신의 말씀에 근거해 볼 때, 그분의 회중은 형제애로 연합되어야 합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종, 왕국 행간 번역]가 되어야 하리라.”—마태 23:8-11.

68, 69. (ㄱ) 회중은 형제애로 연합된 단체이므로, 어떻게 무례한 행동이 있어서는 안됩니까? (ㄴ) ‘디모데’는 회중 성원들을 대할 때 무엇을 염두에 두어야 하였읍니까?

68 그러므로 회중 내에서 아무도 지배자로 군림할 수 없읍니다. 회중 내에서 장로와 가르치는 자로 봉사하는 사람들은 겸손히 형제들을 섬기는 면에서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본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회중은 남녀 노소가 형제애로 연합된 단체이므로, 회중의 개개 성원들은 자연스러운 예의에 어긋나는 무례한 행동을 해서는 안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충고하였읍니다. “나이 많은 이를 책망하지 말고 오히려 아버지를 대하듯이 권하시오. 젊은이들에게는 형제를 대하듯이 권면하고 나이 많은 여자들에게는 어머니를 대하듯이 권하시오. 젊은 여자들에게는 지극히 순결한 마음을 가지고 자매를 대하듯이 권면하시오.”—디모데 전 5:1, 2, 새번역.

69 사도가 이러한 말을 기록했을 때, ‘디모데’는 삼십대였던 것같습니다. 그는 임명된 장로로 봉사하면서도 자신이 아직 연소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라는 충고를 받았읍니다. 만일 연로자에게 시정이 필요하다면, ‘디모데’는 그를 거칠게 대할 것이 아니라 아버지 앞에 선 아들과 같은 존경하는 태도로 호소해야 하였읍니다. (창세기 43:2-10에 기록된 바와 같이 ‘야곱’의 아들들이 ‘야곱’에게 존경하는 태도로 호소한 것과 비교.) 또한, 나이많은 여자들에게는 어머니에게 하듯 사려 깊음과 친절을 보여야 하였읍니다. 젊은 사람들에게도 ‘디모데’는 무례하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친형제를 대하듯 해야 하였읍니다. 남자들은 이성에 대해 강렬한 매력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디모데’는 적절하게도 “지극히 순결한 마음을 가지고 자매를 대하듯이” 젊은 여자들을 대하기 위해 조심해야 하였읍니다. 이것은 젊은 그리스도인 여자들을 대할 때 그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순결하고, 깨끗해야 함을 의미하였읍니다.

70. (ㄱ) 회중 내에서 합당한 행실을 유지하기 위하여 왜 순종적인 정신이 필요합니까? (ㄴ) 순종적인 정신을 유지하는 데 무엇이 도움이 될 수 있읍니까?

70 우리는 회중의 다른 성원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우리의 위치를 지키고 자연스러운 품위와 예의에 벗어나는 행동을 하지 않기 위해 겸손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합당하게도, 사도 ‘베드로’는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라고 충고하였읍니다. (베드로 전 5:5) 젊은 남자들은 연로한 사람들, 특히 회중의 임명된 장로들과 협조하고자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젊은이가 자기의 친 아버지를 대할 때 상상할 수도 없는 태도로 연로한 사람들에게 말하거나 행동하는 것은 분명히 온당치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젊은이가 순종적인 정신을 유지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연로한 형제들의 칭찬할 만한 특성과 충실한 봉사 기록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유익할 수 있읍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그들에 대한 사랑과 인식을 깊게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읍니다.—히브리 13:7, 17 비교.

71. ‘낮은 정신으로 우리 자신을 동이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71 물론, ‘베드로’는 젊은이들에게 단순히 연로자들에게 순복하라는 격려로 그치지 않았읍니다. 그는 이어서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고 말하였읍니다.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는 원어의 표현은 자신의 낮은 정신을 끈으로 맨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읍니다. 그 “낮은 정신”은 종이 허리에 두르는 앞치마 혹은 옷과 같아야 하였읍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격려한 정신은 기꺼이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유익하게 하는 정신입니다. 우리가 회중내의 모든 사람을 존경과 경의로 대하며, 그들에게 합당한 고귀한 가치를 부여한다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이러한 행로는 여호와의 축복과 은총을 초래합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신다고 부언했기 때문입니다.—베드로 전 5:5.

72. 합당하게 복종할 때 어떠한 상이 있읍니까?

72 참으로 성경과 일치하게 순복할 때 풍부한 상이 있읍니다. 그것은 결코 나쁜 입장을 더욱 악화시키는 일이 없을 것이며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선한 양심을 갖게 할 것입니다. 정부 권위, 고용주, 감독관 혹은 믿지 않는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은 참 그리스도교의 가치에 대한 선한 증거가 될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제자가 되고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도록 도움이 될 수 있읍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행로를 따른 데 대해 여호와께서 풍부한 상을 주실 것을 확신할 수 있읍니다. 그렇습니다. 권위에 합당하게 복종하는 것은 현재 우리가 가장 가치있는 생활을 영위하는 데 필수적인 부분입니다.

[연구 질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