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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들과 임시 거주자들의 모범적인 행실

외국인들과 임시 거주자들의 모범적인 행실

제7장

외국인들과 임시 거주자들의 모범적인 행실

1, 2. 흔히 외국인에 대한 견해는 어떠하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같은 지역에 살면서 그 지역의 주민들과 아주 다르게 보이는 사람은 흔히 불신과 의심을 받습니다. 그의 행실은 원주민들의 행실보다 더 면밀한 주시를 받게 됩니다. 유감스럽게도, 어떤 사람들은 이웃에 사는 외국인 한 사람의 그릇된 행실 때문에 그 인종이나 국적 혹은 부족 전체에 대해 편견을 가지는 경우가 있읍니다. 심지어 정부에서도 외국인들에게만 적용되는 법규를 만듭니다. 어떤 외국인의 행실이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될 때에는 그를 추방할 수도 있읍니다.

2 이러한 모든 사실이 왜 그리스도인의 심각한 관심사가 되어야 합니까? 이것은 그리스도인 생활에 어떠한 영향을 줄 것입니까?

3. (ㄱ) 참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왜 “나그네”입니까? (ㄴ) 불신자들은 그들을 어떻게 보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3 현 세상에서 참 그리스도인들은 “외국인들과 임시 거주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영원한 거처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전 2:11, 신세; 베드로 후 3:13)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들은 성경과 일치하게 생각하고 행동하고자 노력하기 때문에, 불신자들이나, 외면적으로만 그리스도교 신자인 체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탐탁치 않은 “나그네”로 경멸하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세상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수치감을 느낄 필요는 없읍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외국인의 신분은 위엄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비난받을 만한 행실을 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4, 5. (ㄱ) 기원 제1세기에, 사도 ‘베드로’는 왜 그리스도인들을 “흩어진 나그네”라고 불렀읍니까? (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어떻게 보셨읍니까?

4 사도 ‘베드로’는 동료 신자들에게 편지하면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외국인들과 임시 거주자들”로서의 영예로운 신분에 주의를 환기시켰읍니다. 그의 첫째 편지 서두에 이러한 말이 있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임시 거주자들, 신세]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베드로 전 1:1, 2.

5 기원 제1세기에, 신자들은 여기 저기에 흩어져 비그리스도인이 대부분인 사회에서 생활하였읍니다. 그들은 흔히 그들의 이웃 사람들로부터 부당한 경멸을 받았읍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편지에 지적된 바와 같이 그들에 대한 여호와의 평가에 대한 말씀을 읽거나 듣는 것은 그들에게 격려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실제로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었읍니다. 지존자께서는 그들을 그분의 소유, 그분의 백성으로 삼으셨읍니다. ‘유대’인들과 비‘유대’인들로 구성된 그리스도인 회중이 존재하기 오래 전에, 전능자께서는 마침내 지상 도처에 흩어진 종들로 구성된 단체가 있으리라는 것을 미리 아셨읍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영의 작용을 통해 거룩한 목적을 위하여 성화(聖化) 혹은 성별되었읍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대하시는 목적은 그들이 순종적인 자녀가 되어 그분의 뜻을 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주 주권자께서 자기들을 이와 같이 사용하신다는 것을 알고 깊은 감동을 받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지정하신 고상한 목적에 따라 생활하기를 원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6. (ㄱ)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깨끗한 신분을 얻었읍니까? (ㄴ)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는 것에는 무엇이 포함될 수 있읍니까?

6 물론, 신자들이 택하심을 받고 성별된 백성이 된 것은 그들 자신의 공로 때문이 아니었읍니다. 그들 개개인은 죄인들이었으며 깨끗해질 필요가 있었읍니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얻’었다고 말하였읍니다. 이것은, 예를 들면 사람의 시체를 만짐으로 의식적으로 더럽혀진 ‘이스라엘’ 사람이 깨끗하게 하는 절차를 밟은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다시 깨끗하게 되려면, 깨끗하게 하는 물이 그 사람에게 뿌려져야 했읍니다. (민수 19:1-22) 이와 비슷하게, 그리스도의 속죄 희생의 유익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되었으며,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깨끗한 양심을 가지게 되었고, 기도로써 거리낌없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읍니다. (히브리 9:13, 14; 10:19-22) 또한, ‘이스라엘’인들이 여호와와의 언약 관계에 들어왔을 때, ‘모세’는 사람들에게 희생물의 피를 뿌렸읍니다. (출애굽 24:3-8)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얻’는다는 말은 또한 이들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로 하고 그분이 흘리신 피에 의해 유효케 된 새 언약 안으로 들어왔으며 이제 그들이 이 언약의 유익을 함께 나누게 되었다는 사실에 주의를 이끌 수 있읍니다.

7. “외국인”으로서의 우리의 신분은 우리에게 어떻게 처신할 것을 요구합니까?

7 기원 제1세기의 신자들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헌신한 제자들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존귀한 신분을 가지고 있읍니다. 현 세상에서 그들은 모범적인 “외국인”과 “임시 거주자”로 처신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의 회중에 모독을 가져옵니다. 그러므로 모두는 사도 ‘베드로’의 이러한 충고를 마음에 간직할 필요가 있읍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외국인들과 임시 거주자들, 신세]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베드로 전 2:11.

8. 우리는 무엇에 너무 집착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8 우리는 지나가는 현 사물의 제도에서 “외국인과 임시 거주자들”이므로, 인간의 현존하는 체제내의 어떠한 것에도 너무 집착해서는 안됩니다. 지적인 결연, 슬픔, 기쁨, 재물은 모두 영구적인 것이 아닙니다. 시기와 우연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며, 사람의 환경은 하루 아침에 극적으로 바뀌어질 수 있읍니다. (전도 9:11)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이러한 충고를 청종하는 것이 참으로 현명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온전히 이용하지 못하는 사람들같이 하십시오. 이 세상의 사태는 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세.]” (고린도 전 7:29-31) 우리가 항상 변하는 환경과 관계의 산물인 희로애락에 완전히 빠진다면, 우리는 지존자와 그의 아들께 더 가까이 나아가기 어려울 것이며, 우리 자신에게 심각한 손실이 있을 수 있읍니다.

9, 10. (ㄱ) 세상 사람들이 재물을 가장 중요시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재물에 대한 우리의 견해는 왜 불신자들의 견해와 달라야 합니까?

9 인류 대다수가 처해 있는 입장은 우리가 ‘세상을 온전히 이용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명백히 설명해 줍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알지 못하고 있거나 그러한 다가오는 의로운 새 질서에 대해 진정한 믿음이 없읍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현재의 생활에만 관심을 집중합니다. 그들에게는 미래에 대한 확고한 희망이 없읍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매일 생활에 필요한 것에만 전념하고 가능한 한 세상으로부터 많은 것을 얻는 데 몰두합니다. (마태 6:31, 32) 그들은 좋은 옷, 빛나는 보석, 값비싼 장식품, 아름다운 가구 혹은 화려한 집을 마련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읍니다. 그들은 재물로써 다른 사람들을 위압하기를 바라고 또 그렇게 하고자 노력할지 모릅니다.—요한 1서 2:15-17.

10 이와는 반대로, 그리스도인은 자기 앞에 영원한 장래가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일상 생활에 지나치게 몰두하여 영원한 장래가 달려 있는 창조주를 위한 시간이 별로 없게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참 종들이 돈으로 살 수 있는 많은 것들을 적절히 즐길 수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건전한 즐거움과 유익한 재물이라도 그것이 우리 생활의 초점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자신이 현 제도 내에서 “임시 거주자”라는 것을 진정으로 인식할 때 그러합니다. 우리가 자산을 낭비하거나 소홀히 여기지는 않지만, 단순히 임대 ‘아파아트’에 세들어 있거나 기타 도구나 장비 등 필요한 물품들을 빌려 쓰는 믿음직한 사람들과 같은 식으로 재산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 사람들은 이러한 것을 잘 돌보기는 하지만 그것이 영구적인 소유물인 양 완전히 집착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생활은 현 제도 내의 어떠한 것도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설립하시는 약속된 새 질서를 향해 전진하는 “외국인”이며 “임시 거주자”라는 사실을 우리가 인정하고 있음을 반영해야 합니다.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11. 우리가 제어해야 할 육체의 욕망 가운데는 어떠한 것들이 있읍니까?

11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생활하는 데 성공하려면 현 세상에서의 우리의 생활 환경이 하루 아침에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우리는 또한,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는 성서의 권고를 명심할 필요가 있읍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개인의 지체 속에 있는 그릇된 갈망 혹은 욕망입니다.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사도 ‘바울’의 편지는 이러한 그릇된 욕망이 유발하는 죄가 어떠한 것인지를 밝혀 줍니다. 그 사도는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한다고 말한 후, ‘육체의 일’로서,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갈라디아 5:16, 19-21.

12, 13. (ㄱ) 육체의 욕망은 어떻게 ‘영혼을 거스려 싸’웁니까? (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깨끗한 신분을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2 우리는 유전받은 죄의 결과로, 육체의 일에 빠져 ‘육체의 욕심을 이루게’ 하는 강력한 압력을 받을 수 있읍니다. 그러한 불경건한 갈망은 영혼 전체, 사람 전체를 지배하여 죄의 욕정에 빠지게 하는 침략군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도 ‘바울’은 그와 같이 개인 속에서 생길 수 있는 투쟁을 잘 알고 있었읍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경우를 지적하여 이렇게 기술하였읍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로마 7:18, 19) 이러한 투쟁 때문에 ‘바울’은 ‘자기의 몸을 쳐서 복종케 할’ 필요가 있었읍니다. ‘그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되지 않기’ 위해서 였읍니다.—고린도 전 9:27.

13 이와 비슷하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깨끗한 신분을 유지하고 그분의 축복을 받기를 갈망한다면 우리는 어떠한 그릇된 욕망도 제어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죄의 경향을 자극하고 촉진할 오락과 독서, 교제 및 환경을 통해서, 고된 투쟁을 더욱 고되게 할 이유가 어디 있읍니까? 더욱 중요한 점은,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적극적인 단계를 밟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독자적인 힘으로는 성공할 수 없고 우리 헌신한 형제들의 격려와 하나님의 영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고 권고하였읍니다. (디모데 후 2:22) 만일 우리가 성령의 도움으로 그렇게 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릇된 욕망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막는 데 성공할 수 있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정신을 참되고, 의롭고, 순결하고, 사랑할 만하고, 고결하고, 칭찬할 만한 것에 계속 고정시킴으로써 육체의 욕망을 저항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승인을 받는 길에서 이탈하지 않을 것입니다. (빌립보 4:8, 9) 우리는 다른 사람을 성공하도록 도운 후에, 우리 자신이 낙오자가 되는 결과에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선한 행실은 다른 사람들이 참 숭배를 받아들이도록 도울 있다

14. 우리가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는 것을 보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떠한 유익이 있을 수 있읍니까?

14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면 또 다른 바람직한 유익이 있읍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기술하였읍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베드로 전 2:12.

15. 그리스도인들은 기원 제1세기에 어떠한 비난을 받았읍니까?

15 제1세기에 그리스도인들은 흔히 ‘악행을 한다’는 오해를 받았읍니다. 예를 들면, 그들은 다음과 같은 비난을 받았읍니다. “이 사람들은 ··· 우리 도시에서 치안을 방해하고 있읍니다. 우리 ‘로마’ 사람으로서는 받아들일 수도 없고 실행할 수도 없는 잘못된 풍속을 전하고 있읍니다.” (사도 16:20, 21, 새번역) ‘이 사람들이 천하를 어지럽혔읍니다.’ ‘그들은 ‘가이사’의 법령을 어기는 행동을 하며 예수라는 또 다른 왕이 있다고 말합니다.’ (사도 17:6, 7, 새번역) 사도 ‘바울’은 “염병 같은 자요 온 천하에 있는 모든 ‘유대’ 사람들을 소란하게 하는 자”라는 비난을 받았읍니다. (사도 24:5, 새번역) ‘로마’에 있던 ‘유대’인들 가운데 유력한 사람들이 ‘바울’에게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우리 모두가 이 종파에 대하여 아는 것은 이 종파가 좋다고 말하는 이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사도 28:22, 새번역.

16. (ㄱ) 비난에 대한 참 그리스도인들의 최선의 방어는 무엇입니까? (ㄴ) 이것이 반대자들에게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읍니까?

16 그러한 비난에 대한 최선의 방어는 선한 행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법을 잘 준수하고, 충실히 세금을 납부하며, 어떠한 “선한 일”도 기꺼이 행하며, 개인적인 일을 부지런히 행하고, 행위가 정직하고 동료 인간에 대한 진정한 관심을 보이면, 그들에 대한 갖가지 비난이 거짓으로 판명됩니다. (디도 2:2-3:2) 그렇게 한다면, 그리스도인을 반복적으로 비방하던 사람들도 그들의 잘못을 이해하도록 도움받아 참 숭배를 받아들이게 될 수도 있읍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심문하실 때에, 이전에 그리스도인들을 비난하던 사람들도 지존하신 분을 영화롭게 하는 즉 찬양하는 사람들 가운데 끼게 될 것입니다.

17. 선한 행실은 보는 사람들에게 건전한 영향을 주므로, 우리는 무엇을 심각히 고려해야 합니까?

17 그리스도인의 곧은 생활이 강력하고도 유익한 영향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이웃에 대한 우리의 관심의 정도를 심각하게 생각하게 합니다. 확실히 우리는 이웃 사람들의 곤경에 대해 외면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물론, 우리가 이웃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정중한 사람이 되는 것은 단순히 “현명한 처신”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본적인 것입니다. 산상수훈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충고하셨읍니다. (마태 7:12)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기회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찌니라.” (갈라디아 6:10)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로마 12:18) “개인을 대하든지 뭇 사람을 대하든지 언제나 선을 추구하시오.”—데살로니가 전 5:15, 새번역.

18, 19. 베드로 전서 3:8과 일치하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떠한 태도와 행동을 나타내야 합니까?

18 분명히,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에는, 동료 신자들과 함께 집회에 참석하고, 성서 진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등 중요한 요구 사항을 이행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이 아닙니다. (마태 28:19, 20, 신세; 히브리 10:24, 25) 우리는 또한 우리의 태도와 행동에 있어서, 우리 개개인의 인간성에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을 본받으라는 명령을 받고 있읍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기술하였읍니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라.” (베드로 전 3:8) “마음을 같이” 하려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해야 합니다. (고린도 전 1:10) 우리의 생각은 우리를 위해 생명을 바침으로써 사랑을 표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과 특히 일치해야 합니다. (요한 13:34, 35; 15:12, 13)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들은, 세계적인 그들의 사랑과 연합으로 볼 때 분명하듯이, “마음을 같이” 하고 있지만, 우리 각자는 이렇게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진정으로 이러한 연합과 사랑의 정신에 기여하고 있는가? 어떻게 그리고 어느 정도로?’

19 만일 참으로 우리의 영적 형제들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친절하고 너그러울 것입니다. 문제를 토의하고 해결책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면, 우리는 계속 원한을 품는 일이 없을 것이며 문제를 조성했을지 모르는 그리스도인 회중 성원을 고의적으로 피하는 일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충고와 일치하게, 우리는 세상에서 보편적인 무정하고 불친절하고 교만한 사람이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가 “체휼” 즉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해 동정심을 가지고 있고 우리의 영적 형제들에 대해 따뜻한 사랑을 가지고 있으며, “불쌍히 여기”며 자신을 높이는 일이 없이 “겸손”하며, 기꺼이 다른 사람들을 섬긴다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역력해야 합니다.—마태 18:21-35; 데살로니가 전 2:7-12; 5:14 비교.

20. 베드로 전서 3:9의 충고를 따르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20 더우기, 우리는 동료 신자들에게만 이해심과 동정심과 친절을 나타내서는 안됩니다. (누가 6:27-36) 사도 ‘베드로’는 이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악을 악으로 갚거나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축복’하라고 권고하였읍니다. (베드로 전 3:9) 이것은 우리를 해하고 욕하는 사람들을 칭찬하거나 애정을 쏟으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행로를 바꾸어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기를 바라고 그들에게 계속 친절하고 사려깊게 대한다면 최선의 결과와 최대의 정신적 평화와 행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보복하지 말아야 할 이유

21. 여호와의 본은 우리가 보복하지 않도록 어떻게 도움이 됩니까?

21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의 희생을 근거로 우리 죄를 자비롭게 용서해 주셨으므로, 우리도 우리의 원수들을 친절하게 동정심을 가지고 대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말씀하셨읍니다. (마태 6:15)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영구적인 축복을 받으려면 우리도 기꺼이 다른 사람들을 축복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냉대받는 일을 허락하십니다. 그 한 가지 이유는 우리가 너그럽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 동정심이 있다는 것을 증명할 기회를 갖게 하기 위함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러한 말로 그러한 취지를 설명하였읍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를 욕하는 사람들을 축복하도록]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 전 3:9) 이 말은 우리의 천적 아버지께서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해하기를 원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분은 다만 우리가 죄많은 세상에서 사는 죄많은 사람들의 문제를 겪는 것을 막기 위해 개입하지 않으셨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친절하고 동정적이고 너그러움으로 참으로 하나님과 같이 되기를 원하는지를 나타내게 하였읍니다.

22. 시편 34:12-16은 보복 정신을 피하라고 어떻게 격려합니까?

22 ‘베드로’는 언행에 있어서 보복하지 말라고 계속 격려하면서 시편 34:12-16을 인용하여 이렇게 기술하였읍니다.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베드로 전 3:10-12.

23, 24. (ㄱ) 우리가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ㄴ) 우리가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 어떻게 유익합니까?

23 ‘베드로’의 이 말은 모든 사람을 친절하게 대하는 것만이 참으로 합당한 생활 방식이며, 가장 가치있는 생활 방식임을 강조합니다. ‘생명을 사랑’하고 그 생명을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으로 인식하며, “좋은 날”—삶의 목적과 의의를 느끼게 하는 날들—보기를 원하는 사람은 동료 인간의 행복을 촉진함으로써 이것을 나타냅니다. 그는 자기의 혀를 억제하며,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거나 욕하고, 속이고 사취하는 데 혀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는 모든 악을 피하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선을 행하기를 원합니다. 평화를 찾고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그는 공격적이거나 호전적이 아니며 다른 사람들과 그리고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선한 관계를 촉진하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로마 14:19.

24 다른 사람들이 행복과 평화를 얻도록 도움으로써 생명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는 사람과 가까이 사귀는 것을 사람들은 좋아합니다. 사람들은 그를 필요로 하고, 만나고 싶어하고, 소중히 여긴다는 것을 언행으로 나타냅니다. 그 결과 그의 생활은 결코 공허하거나 무의미하지 않을 것입니다.—잠언 11:17, 25.

25. 왜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한 보호와 도움을 받을 것을 확신할 수 있읍니까?

25 사람들이 그의 친절을 항상 고맙게 여기는 것은 아니지만, 그 사람은 여호와의 인자한 보호를 받을 것이 틀림없읍니다. 지존하신 분의 눈은 의로운 사람들을 감찰하시고, 그분의 귀는 항상 그들의 말을 들으시므로, 그분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시고 즉시 도우실 수 있읍니다. 그분은 참으로 그들이 “좋은 날”을 보도록 하실 것입니다. 왜냐 하면 그들이 나타내는 경건은 “지금의 생명 뿐만 아니라 장차 얻을 생명까지도 약속”해 주기 때문입니다. (디모데 전 4:8, 새번역) 반면에, 악을 행하는—다른 사람들의 평화와 행복을 도모하지 않는—사람들은 하나님의 승인을 받을 것을 기대할 수 없읍니다. 하나님의 ‘얼굴’은 그들을 불리한 심판으로 노려 보십니다. 아무 것도 그분의 눈을 피하지 못합니다.

유익한 행로

26. ‘베드로’의 말에 의하면, 우리가 세상의 부패한 행위로 돌아가는 것을 보기 원하는 사람은 누구일 것입니까?

26 선한 행실로 인한 유익한 결과를 항상 염두에 두는 것은 세상의 타락한 행실에 빠지게 하는 압력을 저항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러한 목적으로 다음과 같이 강력히 격려합니다.

“여러분은 이방 사람들이 하고 싶어하는 일을 행하여 방탕과 정욕과 술취함과 환락과 연회와 무분별한 우상 숭배에 빠져 살아 왔읍니다. 그것은 지나간 때로 충분합니다. 그들은 여러분이 자기들과 같이 그런 지나친 방종에 끼어 들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겨 여러분을 비난합니다. 그들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분에게 사실을 바른 대로 고해야 합니다.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진 것은 그들이 육체로는 인간으로서 심판을 받았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베드로 전 4:3-6, 새번역.

27. 왜 우리는 결코 세상의 부패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까?

27 그리스도인은 이전에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모르던 시절에 죄의 정욕과 욕망을 충족시키는데 얼마의 시간을 보냈든지 간에, 그것으로 족하며, 결코 무절제하고 부도덕한 생활로 돌아가기를 원치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욕망만을 충족시키는 생활이 얼마나 공허하고 무의미한지 그리고 그 생활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것인지를 결코 잊기를 원치 않습니다. (로마 6:21) 세상에 만연한 저속하고, 음탕한 오락, 외설적인 춤, 광적이고 정욕을 자극하는 음악은 우리에게 매력이 아니라 혐오감을 느끼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러한 것을 멀리하기 때문에 이전의 친구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참는 것이 쉽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광적인 ‘파아티’와 자유 분방한 생활에 가담한다면 확실히 아무런 유익이 없읍니다. 세상적인 생활을 한다면 많은 것을 상실할 것입니다. 악을 행하는 모든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자기들의 행동에 대해 심문을 받아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그분을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자로 임명하셨기 때문입니다. (디모데 후 4:1) 이 심판은 확실하기 때문에, “복음” 즉 좋은 소식은 “죽은 자”들 즉 영적으로 죽은 자들에게 전파되었읍니다. 그들은 회개하고, 전환하여, 그리스도의 속죄 희생을 자기들에게 적용시킴으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생명으로 돌아올 필요가 있었읍니다.

28. (ㄱ) 그리스도인들은 왜 ‘육체로는 인간으로서 판단’을 받는 일이 있을 것입니까? (ㄴ) 그러한 판단을 받을지라도 왜 우리는 불안해 해서는 안됩니까?

28 회개하는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고귀하며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영원히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이 세상 사람들은 참 그리스도인들이 창조주 앞에서 가지고 있는 선한 입장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보고, “육체” 즉 외모에 따라 판단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를 좋지 않게 판단한다고 해서 불안해 해서는 안됩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으로 살아있다’고 즉 영적 생활을 하고 있다고 보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이 언제나 지존하신 분의 명령과 일치한다면, 지존자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보실 것입니다.

29. 우리가 선한 행실을 유지해야 할 어떠한 좋은 이유들이 있읍니까?

29 우리는 현 제도에서 “외국인과 임시 거주자”로서 선한 행실을 유지할 참으로 좋은 이유가 있읍니다. 지존자께서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친절하고 자비롭게 대하셨으므로,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사려깊고 동정적이며 너그러워야 합니다. 우리의 칭찬받을 만한 행실은 우리의 하나님을 호의적으로 반영하며 다른 사람들이 그의 종이 되도록 자극할 수 있읍니다. 선한 행실을 유지해야만 우리는 계속 여호와의 축복을 맛보며 마침내 영구적인 거처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현재에도 참으로 유익하고 미래를 위하여는 참으로 웅대한 약속이 있는 또 다른 생활 방식이 있을 수 없읍니다.

[연구 질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