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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세계를 통치할 것인가?

누가 세계를 통치할 것인가?

제9장

누가 세계를 통치할 것인가?

1-3. 다니엘이 벨사살 통치 제일 년에 받은 꿈과 환상들에 대해 설명하십시오.

주의를 사로잡는 다니엘의 예언은 이제 우리를 다시 바빌로니아의 왕 벨사살 제일 년으로 데리고 갑니다. 다니엘은 바빌론에서 유배 생활을 한 지가 오래 되었지만, 여호와에 대한 충절은 한 번도 흔들려 본 적이 없습니다. 이제 70대인 이 충실한 예언자는 “침대에서 꿈과 자기 머리 속의 환상들”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환상들로 인해 참으로 무서워하게 됩니다!—다니엘 7:1, 15.

2 “보라!” 하고 다니엘은 외칩니다. “하늘 사방의 바람이 광대한 바다를 요동하게 하였다. 그러자 거대한 짐승 넷이 바다에서 올라오는데, 저마다 서로 달랐다.” 참으로 주목할 만한 짐승들입니다! 첫 번째 짐승은 날개 달린 사자이고, 두 번째 짐승은 곰과 같습니다. 그 다음에 네 날개와 네 머리가 달린 표범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유달리 강한 네 번째 짐승은 철로 된 큰 이빨과 열 뿔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열 뿔 가운데서 “작은” 뿔이 돋아나는데, 그 뿔에는 “사람의 눈 같은 눈”이 있고 “거창한 것들을 말하는 입”이 있습니다.—다니엘 7:2-8.

3 다니엘의 환상들은 다음으로 하늘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옛날부터 계신 분이 하늘 법정에 심판관으로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왕좌에 앉아 계십니다. “그분을 섬기고 있는 자는 천의 수천이요, 그분 앞에 서 있는 자는 만의 만배”입니다. 그분은 짐승들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리신 다음, 그들에게서 통치권을 빼앗고 네 번째 짐승을 멸하십니다. “백성들과 나라들과 언어들”에 대한 지속적인 통치권은 “사람의 아들 같은 이”에게 주어집니다.—다니엘 7:9-14.

4. (ㄱ) 다니엘은 누구에게 믿을 만한 설명을 구하였습니까? (ㄴ) 다니엘이 그날 밤에 보고 들은 것이 우리에게도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4 “나[는], 이 일로 인하여 내 영이 속에서 괴로워하였고, 내 머리 속의 그 환상들로 인하여 무서워하게 되었다”고 다니엘은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한 천사에게 “이 모든 일에 대한 믿을 만한 설명”을 구합니다. 그 천사는 실제로 다니엘에게 “그 일들의 해석”을 알려 줍니다. (다니엘 7:15-28) 다니엘이 그날 밤에 보고 들은 것은 우리에게도 커다란 관심거리가 됩니다. 그것은 “사람의 아들 같은 이”에게 모든 “백성들과 나라들과 언어들”에 대한 통치권이 주어지는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장차 세계적으로 벌어질 사건들의 개요를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의 말씀과 영의 도움으로, 이 예언적 환상들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

바다에서 나온 네 짐승

5. 바람이 휘몰아치는 바다는 무엇을 상징합니까?

5 “거대한 짐승 넷이 바다에서 올라[왔다]”고 다니엘은 말하였습니다. (다니엘 7:3) 바람이 휘몰아치는 바다는 무엇을 상징하였습니까? 나중에 사도 요한도 “바다”에서 일곱 머리를 가진 야수가 올라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바다는 “백성들과 무리들과 나라들과 언어들”—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진 거대한 무리의 인류—을 상징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바다는 하느님으로부터 소외된 인류 대중을 적절히 상징합니다.—계시록 13:1, 2; 17:15; 이사야 57:20.

6. 네 짐승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6 “이 거대한 짐승들, 그것들은 넷이므로 땅에서 네 왕이 일어설 것이다”라고 하느님의 천사는 말하였습니다. (다니엘 7:17) 천사는 분명히, 다니엘이 본 네 짐승을 “네 왕”이라고 밝혀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짐승들은 세계 강국들을 상징합니다. 그러면 어느 강국들을 상징합니까?

7. (ㄱ) 어떤 성서 해설자들은 네 짐승에 관한 다니엘의 꿈 및 환상과 거대한 형상에 관한 느부갓네살 왕의 꿈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ㄴ) 형상의 금속으로 된 네 부분은 각각 무엇을 상징합니까?

7 성서 해설자들은 일반적으로 네 짐승에 관한 다니엘의 꿈 및 환상과 거대한 형상에 관한 느부갓네살의 꿈을 연관시킵니다. 예를 들면, 「해설자의 성서 주해」(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에서는 “[다니엘] 7장은 2장과 유사하다”고 말합니다. 「위클리프 성서 주해」(The Wycliffe Bible Commentary)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 이방 나라가 차례로 지배권을 계승하는 것은 ·⁠·⁠· [다니엘] 2장에서 고려한 것처럼 여기서도[다니엘 7장에서도] 동일하다는 데 일반적으로 의견이 일치한다.” 느부갓네살의 꿈에 나오는, 네 가지 금속으로 상징된 네 세계 강국은 바빌로니아 제국(금으로 된 머리), 메디아-페르시아(은으로 된 가슴과 팔), 그리스(구리로 된 배와 넓적다리), 로마 제국(철로 된 다리)이었습니다. * (다니엘 2:32, 33) 이 왕국들과 다니엘이 본 거대한 네 짐승 사이에 어떠한 일치점이 있는지 고려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자처럼 사납고 독수리처럼 빠르다

8. (ㄱ) 다니엘은 첫 번째 짐승을 어떻게 묘사하였습니까? (ㄴ) 첫 번째 짐승은 어느 제국을 상징하였으며, 그 제국은 어떻게 사자처럼 행동하였습니까?

8 다니엘이 본 짐승들은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그 중 한 짐승을 묘사하면서 다니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첫 번째 짐승은 사자 같은데, 독수리의 날개가 있었다. 내가 계속 보고 있는데, 마침내 그 날개가 뽑히고 땅에서 들려 사람처럼 두 발로 서게 되었으며, 그것에게 사람의 마음이 주어졌다.” (다니엘 7:4) 이 짐승은 거대한 형상의 금 머리로 상징된 통치권과 동일한 통치권, 즉 바빌로니아 세계 강국(기원전 607-539년)을 상징하였습니다. 바빌론은 육식 동물인 “사자”처럼, 하느님의 백성을 포함하여 나라들을 맹렬하게 집어삼켰습니다. (예레미야 4:5-7; 50:17) 이 “사자”는 독수리의 날개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신속하게 공격적으로 정복해 나아갔습니다.—애가 4:19; 하박국 1:6-8.

9. 사자 같은 짐승은 어떠한 변화를 겪게 되었으며, 그러한 변화는 그 짐승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습니까?

9 때가 되자, 날개가 달린 이 독특한 사자의 날개가 ‘뽑혔’습니다. 벨사살 왕의 통치가 끝나갈 무렵, 바빌론은 신속한 정복력을 잃었고 나라들에 대한 사자 같은 지배력도 상실하였습니다. 그것은 두 발로 움직이는 사람보다 더 빠르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갖게 되어 약해졌습니다. “사자의 마음”이 없어진 바빌론은 더는 “숲의 짐승들 가운데” 왕처럼 행동하지 못하였습니다. (비교 사무엘 둘째 17:10; 미가 5:8) 다른 거대한 짐승이 그것을 정복해 버렸습니다.

곰처럼 탐욕스럽다

10. “곰”은 어느 왕조를 상징하였습니까?

10 다니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보라! 다른 짐승 곧 두 번째 짐승은 곰 같았다. 그런데 그것이 몸 한편을 들었고, 그 입의 잇새에는 갈빗대 세 개가 있었다. 그들은 그것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일어나서 많은 고기를 먹어라.’” (다니엘 7:5) “곰”으로 상징된 왕은 거대한 형상의 은으로 된 가슴과 팔로 상징된 것과 동일한 것, 즉 메디아-페르시아 왕조(기원전 539-331년)로서 메디아 사람 다리우스와 키루스 대왕으로 시작하여 다리우스 3세로 끝났습니다.

11. 상징적 곰이 몸 한편을 든 것과 그 입에 세 갈빗대가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였습니까?

11 이 상징적 곰은 “몸 한편을 들었”는데, 아마 공격 자세를 취하고 나라들을 정복하여 세계 강국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또는 이러한 자세는 페르시아 왕조가 다리우스라는 메디아 왕 혼자보다 더 우월하게 될 것임을 알려 주기 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곰의 잇새에 있는 세 갈빗대는 곰이 정복해 나아가는 세 방향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메디아-페르시아 “곰”은 북쪽으로 가서 기원전 539년에 바빌론을 점령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서쪽으로 나아가 소아시아를 거쳐 트라키아까지 갔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곰”은 남쪽으로 가서 이집트를 정복하였습니다. 3이란 숫자는 이따금 강렬함을 상징하기 때문에, 세 갈빗대는 또한 상징적 곰의 정복욕을 강조할 수도 있습니다.

12. 상징적 곰이 “일어나서 많은 고기를 먹어라”는 명령에 순종한 결과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12 이 “곰”은 “일어나서 많은 고기를 먹어라”는 말에 응하여 나라들을 공격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바빌론을 삼킨 메디아-페르시아는 여호와의 백성에게 가치 있는 봉사를 할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봉사를 하였습니다! (149면의 “관대한 왕” 참조) 메디아-페르시아는 키루스 대왕, 다리우스 1세(다리우스 대왕), 아닥사스다 1세를 통해서 바빌론의 유대인 포로들을 해방시켰고, 그들이 여호와의 성전을 재건하고 예루살렘 성벽을 보수하는 일을 도와 주었습니다. 결국, 메디아-페르시아는 127개 관할 지역을 통치하게 되었으며, 에스더 왕비의 남편 아하수에로(크세르크세스 1세)는 “인도에서 에티오피아에 이르기까지 ·⁠·⁠· 왕”이었습니다. (에스더 1:1) 하지만 머지않아 다른 짐승이 일어날 것이었습니다.

날개 달린 표범처럼 빠르다!

13. (ㄱ) 세 번째 짐승은 무엇을 상징하였습니까? (ㄴ) 세 번째 짐승의 속력과 그것이 차지한 영토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13 세 번째 짐승은 “표범 같은[데] ·⁠·⁠· 그 등에 날짐승의 날개 넷이 있었다. 또 그 짐승은 머리가 넷이 있었으며, 그것에게 통치권이 주어졌다.” (다니엘 7:6) 이 네 날개와 네 머리가 달린 표범은, 그 상응물인 느부갓네살의 꿈속 형상의 구리로 된 배와 넓적다리처럼, 알렉산더 대왕으로 시작되는 마케도니아 왕조 즉 그리스 왕조를 상징하였습니다. 알렉산더는 표범과 같은 기민함과 속력으로 소아시아를 거쳐 남쪽으로 이집트로, 그리고 인도의 서쪽 국경까지 나아갔습니다. (비교 하박국 1:8) 그의 영토는 마케도니아와 그리스는 물론 페르시아 제국까지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에 “곰”의 영토보다 더 넓었습니다.—153면의 “젊은 왕이 세계를 정복하다” 참조.

14. 이 “표범”은 어떻게 머리가 네 개가 되었습니까?

14 이 “표범”은 알렉산더가 기원전 323년에 사망한 후에 머리가 네 개가 되었습니다. 결국, 알렉산더의 장군 네 사람이 알렉산더의 계승자가 되어 알렉산더의 영토의 서로 다른 부분을 차지하였습니다. 셀레우코스는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를 차지하였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을 지배하였습니다. 리시마코스는 소아시아와 트라키아를 통치하였고, 카산드로스는 마케도니아와 그리스를 차지하였습니다. (162면의 “나뉘어진 거대한 왕국” 참조) 후에 새로 위협적인 존재가 등장하였습니다.

두려움을 갖게 하는 짐승은 달랐다

15. (ㄱ) 네 번째 짐승을 묘사하십시오. (ㄴ) 네 번째 짐승은 무엇을 상징하였으며, 그 짐승은 자기 앞길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어떻게 부서뜨리고 삼켰습니까?

15 다니엘은 네 번째 짐승이 “두려움을 갖게 하고 무시무시하고 유달리 강하였다”고 묘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또 철로 된 큰 이빨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삼키고 부서뜨리며, 남은 것을 발로 짓밟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자기 이전의 다른 모든 짐승과 달랐으며, 열 뿔을 가지고 있었다.” (다니엘 7:7) 두려움을 갖게 하는 이 짐승은 로마의 정치·군사 세력으로 시작하였습니다. 그 짐승은 그리스 사람에 의해 넷으로 나뉘어진 그리스 제국을 점차 점령해 나아갔습니다. 그리하여 기원전 30년이 되자 로마는 성서 예언에 등장하는 그 다음 세계 강국으로 부상하였습니다. 로마 제국은 자기 앞길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군사력으로 정복하여, 마침내 영국과 아일랜드에서부터 유럽의 많은 지역을 거쳐 지중해까지 이르는, 그리고 바빌론을 거쳐 페르시아 만까지 이르는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16. 천사는 네 번째 짐승에 관하여 무엇이라고 설명하였습니까?

16 다니엘은 이 “유달리 두려움을 갖게 하”는 짐승에 관하여 확인하고 싶어서 천사가 다음과 같이 설명할 때 잘 들었습니다. “열 뿔은 그 왕국에서 일어날 열 왕이다. 그들 뒤에 또 하나가 일어날 것인데, 그는 먼저 있던 자들과 다르고 세 왕을 비천해지게 할 것이다.” (다니엘 7:19, 20, 24) 이 “열 뿔” 즉 “열 왕”은 무엇이었습니까?

17. 네 번째 짐승의 “열 뿔”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17 로마는 더욱 부유해지면서 통치 계급의 방탕한 생활로 점점 타락해 감에 따라 군사력도 쇠퇴해 갔습니다. 이윽고, 로마의 군사력이 쇠퇴했음이 분명히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강대하던 제국이 마침내 많은 왕국으로 분열되었습니다. 성서에서는 10이라는 숫자를 종종 완전함을 나타내는 데 사용하므로, 네 번째 짐승의 “열 뿔”은 로마가 와해된 결과 생겨난 모든 왕국을 상징합니다.—비교 신명 4:13; 누가 15:8; 19:13, 16, 17.

18. 마지막 황제가 제거된 후에도 로마는 어떻게 여러 세기 동안 유럽을 계속 지배하였습니까?

18 하지만 로마 세계 강국은 기원 476년에 로마에서 마지막 황제가 제거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교황이 다스리는 로마가 여러 세기 동안 유럽을 정치적으로, 특히 종교적으로 계속 지배하였습니다. 로마는 봉건 제도를 통해서 지배하였는데, 봉건 제도하에서 유럽 주민들은 대부분 영주에게 복종하고 다음으로 왕에게 복종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왕은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였습니다. 따라서 교황이 다스리는 로마를 구심점으로 하는 신성 로마 제국이 암흑 시대라고 부르는 긴 역사 기간 내내 세계사를 관장하였습니다.

19. 한 역사가에 따르면, 로마는 이전 제국들과 어떻게 비교되었습니까?

19 네 번째 짐승이 ‘다른 모든 왕국과 달’랐다는 사실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다니엘 7:7, 19, 23) 그 점과 관련하여, 역사가 H. G. 웰스는 이렇게 기술하였습니다. “이 새로 등장한 로마 강국은 ·⁠·⁠· 여러가지 면에서 그때까지 문명 세계를 지배했던 어느 위대한 제국과도 달랐다. ·⁠·⁠· [이 제국은] 세계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그리스 사람을 흡수했고, 이 제국의 신민은 이전 어느 제국의 신민보다 함족과 셈족의 특성이 약했다. ·⁠·⁠· 그것은 역사상 그때까지 존재했던 것과 전혀 다른 새로운 유형이었다. ·⁠·⁠· 로마 제국은 일종의 파생물, 미리 계획되지 않은 전혀 새로운 파생물이었으며, 로마 사람들은 자기들도 미처 모르는 사이에 자기들이 거대한 정치적 실험에 참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이 네 번째 짐승에서 또 다른 파생물이 나올 것이었습니다.

작은 뿔이 이기다

20. 네 번째 짐승의 머리에서 파생되어 나온 작은 뿔에 관하여 천사는 무엇이라고 말하였습니까?

20 다니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그 뿔들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는데, 보라! 다른 뿔 곧 작은 것이 그 뿔들 가운데서 돋아나더니, 먼저 있던 뿔들 가운데 세 개가 그 앞에서 뽑혔다.” (다니엘 7:8) 이 파생물에 관하여, 천사는 다니엘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들[열 왕] 뒤에 또 하나가 일어날 것인데, 그는 먼저 있던 자들과 다르고 세 왕을 비천해지게 할 것이다.” (다니엘 7:24) 이 왕은 누구이며, 언제 일어났으며, 어느 세 왕을 비천해지게 하였습니까?

21. 영국은 어떻게 네 번째 짐승의 상징적 작은 뿔이 되었습니까?

21 다음과 같은 사태 진전을 고려해 보십시오. 기원전 55년에, 로마 장군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브리타니아 즉 브리튼 섬을 침공하였지만 영구 식민지로 만드는 데는 실패하였습니다. 기원 43년에,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브리튼 섬 남부 지역을 좀더 영구적으로 정복하기 위한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기원 122년에,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타인 강에서 솔웨이 만까지 성벽을 건축하기 시작하여, 로마 제국의 북쪽 경계를 확정지었습니다. 5세기 초에는, 로마 군단들이 그 섬을 떠났습니다. “16세기에, 영국은 이등 강국이었다. 국가적인 부는 네덜란드에 비해 보잘 것이 없었다. 인구는 프랑스보다 훨씬 적었다. 군대는 (해군을 포함하여) 스페인보다 열등하였다”고 한 역사가는 설명하였습니다. 확실히 영국은 당시 대수롭지 않은 왕국으로서 네 번째 짐승의 상징적 작은 뿔을 구성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에 변화가 있을 것이었습니다.

22. (ㄱ) “작은” 뿔은 네 번째 짐승에 속한 다른 어떤 세 뿔을 이겼습니까? (ㄴ) 그런 다음 영국은 무엇으로 부상하였습니까?

22 1588년에,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영국을 향해 스페인의 무적 함대를 출진시켰습니다. 130척의 배에 2만 4000명이 넘는 병사를 싣고 영국 해협을 올라간 이 함대는 영국 해군에 패하고 역풍과 사나운 대서양 폭풍에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 사건은 “해군력의 우위가 스페인에서 영국으로 넘어간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한 역사가는 말하였습니다. 17세기에, 네덜란드 사람들은 상선대(商船隊)를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로 발전시켰습니다. 그러나 영국은 해외 식민지가 늘어나면서 그 왕국도 압도하게 되었습니다. 18세기에, 영국 사람들과 프랑스 사람들은 북아메리카와 인도에서 서로 싸움을 벌였고, 그 결과 1763년에 파리 조약을 맺게 되었습니다. 이 조약은 “유럽을 넘어서서 세계를 지배하는 유럽 강국으로서 영국이 새로 차지하게 된 지위를 인정해 주는 역할을 하였다”고 저술가인 윌리엄 B. 윌콕스는 말하였습니다. 영국의 우월함은, 기원 1815년에 프랑스의 나폴레옹에 대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둠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처럼 영국이 “비천해지게” 한 “세 왕”은 스페인, 네덜란드, 프랑스였습니다. (다니엘 7:24) 그 결과, 영국은 세계 최대의 식민 강국 및 상업 강국으로 부상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작은” 뿔이 자라서 세계 강국이 된 것입니다!

23. 상징적 작은 뿔은 어떤 면으로 ‘온 땅을 삼켰’습니까?

23 천사는 다니엘에게 네 번째 짐승 즉 네 번째 왕국이 ‘온 땅을 삼킬’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다니엘 7:23) 그 말은 한때 브리타니아로 알려졌던 로마 제국의 속주와 관련하여 참됨이 증명되었습니다. 그 속주가 마침내 대영 제국이 되어 ‘온 땅을 삼켰’습니다. 이 제국은 한때 지구 면적의 4분의 1과 지상 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한 적이 있었습니다.

24. 한 역사가는 대영 제국의 색다른 점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였습니까?

24 로마 제국이 이전의 세계 강국들과 달랐던 것처럼, “작은” 뿔이라고 묘사된 왕도 ‘먼저 있던 자들과 다를’ 것입니다. (다니엘 7:24) 대영 제국과 관련하여, 역사가 H. G. 웰스는 이렇게 기술하였습니다. “이전에는 그런 유의 왕국이 존재한 적이 없었다. 전체 제도의 중추를 이루고 있던 것은, 대영 연합 왕국의 ‘왕을 국가의 수장으로 하는 공화 정치 체제’였다. ·⁠·⁠· 어느 행정 기관도 어느 석학도 대영 제국을 온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제국은 발전되고 축적된 것이 혼합되어 나타난 것으로서, 이전에 제국이라고 불리던 그 어떤 것과도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25. (ㄱ) 최종 단계로, 무엇이 상징적 작은 뿔이 됩니까? (ㄴ) “작은” 뿔은 어떤 의미로, “사람의 눈 같은 눈”과 “거창한 것들을 말하는 입”을 가지고 있습니까?

25 “작은” 뿔에게는 대영 제국 외에도 관련된 것이 더 있었습니다. 1783년에, 영국은 아메리카 대륙에 있는 13개 식민지의 독립을 승인하였습니다. 마침내 아메리카 합중국이 영국의 연합국이 되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로 세계를 지배하는 국가로 부상하였습니다. 미국은 지금도 영국과 강한 유대를 맺고 있습니다. 그 결과 영미 이중 세계 강국이 등장하여 ‘눈을 가진 뿔’이 되었습니다. 실로, 이 세계 강국은 관찰력이 뛰어나며, 기민하게 살핍니다! 이 강국은 세계의 많은 나라에 정책을 지시하고 그들의 대변자 즉 “거짓 예언자” 노릇을 함으로 “거창한 것들을 말”합니다.—다니엘 7:8, 11, 20; 계시록 16:13; 19:20.

작은 뿔이 하느님과 그분의 거룩한 자들을 대적하다

26. 천사는 상징적 뿔이 여호와와 그분의 종들에 대하여 하는 말 및 행동과 관련하여 무엇이라고 예언하였습니까?

26 다니엘은 계속해서 자기가 본 환상을 이렇게 묘사하였습니다. “내가 보고 있을 때에, 바로 그 뿔이 거룩한 자들과 전쟁을 벌여 그들을 이기고 있었[다].” (다니엘 7:21) 이 “뿔” 즉 왕에 관하여, 하느님의 천사는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그는 가장 높으신 분을 대적하는 말까지 하며, 지극히 높으신 분의 거룩한 자들을 계속 괴롭힐 것이다. 또 때와 법을 바꾸려고 할 것이며, 그들은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동안 그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다니엘 7:25) 예언의 이 부분은 언제 어떻게 성취되었습니까?

27. (ㄱ) “작은” 뿔에게 박해를 받는 “거룩한 자들”은 누구입니까? (ㄴ) 그 상징적 뿔은 어떻게 “때와 법을 바꾸”려고 하였습니까?

27 “작은” 뿔—영미 세계 강국—이 박해하는 “거룩한 자들”은 지상에 있는 영으로 기름부음받은 예수의 추종자들입니다. (로마 1:7; 베드로 첫째 2:9)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기 전 여러 해 동안, 이 기름부음받은 자들의 남은 자들은 1914년이 “나라들의 지정된 때”가 끝나는 해가 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경고하였습니다. (누가 21:24) 그 해에 전쟁이 발발했을 때, “작은” 뿔이 이 경고를 무시해 왔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습니다. 그 뿔이 기름부음받은 “거룩한 자들”을 계속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영미 세계 강국은 심지어 여호와의 요구 조건(즉 “법”)을 이행하려는 거룩한 자들의 노력을 대적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요구 조건이란, 그분의 증인들이 왕국의 좋은 소식을 세계적으로 전파하는 것입니다. (마태 24:14) 이렇게 하여 “작은” 뿔은 “때와 법을 바꾸”려고 하였습니다.

28.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의 길이는 얼마나 됩니까?

28 여호와의 천사는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라는 예언적 기간을 언급하였습니다. 그 기간의 길이는 얼마나 됩니까? 성서 해설자들은 이 표현이 세 때 반—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합친 기간—을 의미한다는 데 일반적으로 의견이 일치합니다. 느부갓네살이 광기에 시달렸던 “일곱 때”가 7년에 해당하였으므로, 세 때 반은 3년 반이 됩니다. * (다니엘 4:16, 25) 「미국역」(An American Translation)에는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한 해, 두 해, 반 해 동안 그에게 넘겨질 것이다.” 제임스 모팻의 번역판에는 “삼년 반 동안”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동일한 기간이 계시록 11:2-7에도 언급되어 있는데, 그 구절들에서는 하느님의 증인들이 자루천 옷을 입고 42개월 동안, 즉 1260일 동안 전파한 다음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기간은 언제 시작해서 언제 끝났습니까?

29. 예언적 삼년 반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29 제1차 세계 대전은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시험 기간이 되었습니다. 1914년이 끝나갈 무렵, 그들은 박해를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사실상, 1915년을 위해 선택한 연표어는 바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다음과 같은 질문이었습니다. “너희가 나의 잔을 마실 수 있느냐?” 이 연표어는 마태 20:22, 「제임스 왕역」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적은 무리의 증인들은 1914년 12월부터 “자루천 옷을 입고” 전파하였습니다.

30. 영미 세계 강국은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을 어떻게 괴롭혔습니까?

30 전쟁의 열기가 확산되면서,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점점 더 심한 반대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투옥되었습니다. 영국의 프랭크 플랫이나 캐나다의 로버트 클레그 같은 사람들은 잔학한 당국자들에 의해 고문을 당하였습니다. 1918년 2월 12일에, 영국령 캐나다에서는 얼마 전에 발행된, 「종말을 고한 비밀」(The Finished Mystery)이라는 제목의 「성경 연구」(Studies in the Scriptures) 제7권과 「월간 성경 연구생」(The Bible Students Monthly)이라는 제목의 전도지를 금지시켰습니다. 그 다음 달에는, 미 법무성에서 「성경 연구」 제7권의 배부를 불법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어떤 결과가 있었습니까? 가택들은 수색을 당하고, 서적은 압수되고, 여호와의 숭배자들은 체포되었습니다!

31.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는 언제 어떻게 끝났습니까?

31 하느님의 기름부음받은 자들을 괴롭히는 일은 1918년 6월 21일에 절정에 달하였는데, 그 날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 회장인 J. F. 러더퍼드를 비롯하여 여러 명의 탁월한 임원들이 거짓 혐의로 장기 투옥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때와 법을 바꾸”려고, “작은” 뿔이 조직된 전파 활동을 사실상 죽인 것입니다. (계시록 11:7) 따라서 예언된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기간은 1918년 6월에 끝났습니다.

32. “거룩한 자들”이 “작은” 뿔에 의해 멸절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2 그러나 “거룩한 자들”은 “작은” 뿔이 괴롭히는 일로 인해 멸절되지 않았습니다. 계시록에 예언된 대로,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짧은 기간 무활동 상태에 있다가 다시 살아나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계시록 11:11-13) 1919년 3월 26일에,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 회장과 그의 동료들은 교도소에서 석방되었고, 후에 그들에 대한 거짓 혐의도 풀렸습니다. 석방된 직후, 기름부음받은 남은 자들은 더 큰 활동을 위해 재조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면 “작은” 뿔 앞에는 무슨 일이 있을 것이었습니까?

옛날부터 계신 분이 법정을 여시다

33. (ㄱ) 옛날부터 계신 분은 누구입니까? (ㄴ) 하늘 법정에 ‘펴 있는 책들’은 무엇이었습니까?

33 네 짐승을 소개한 후에, 다니엘은 시선을 네 번째 짐승에서 하늘의 장면으로 옮깁니다. 그는 옛날부터 계신 분이 심판관으로서 눈부신 왕좌에 앉아 계신 모습을 봅니다. 이 옛날부터 계신 분은 다름 아닌 여호와 하느님이십니다. (시 90:2) 하늘 법정이 열리자, 다니엘은 “책들이 펴”있는 것을 봅니다. (다니엘 7:9, 10) 여호와께서는 무한한 과거부터 살아 계신 분이므로, 인류 역사 전체를 책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상징적 네 짐승을 모두 관찰해 오셨으므로, 직접 알고 계신 지식에 따라 그 짐승들을 심판하실 수 있습니다.

34, 35. “작은” 뿔과 짐승 같은 다른 강국들은 어떻게 될 것입니까?

34 다니엘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때에 그 뿔이 말하는 거창한 말소리 때문에 나는 계속 보고 있었다. 내가 계속 보고 있는데, 마침내 그 짐승이 죽임을 당하고 그 시체가 멸하여져 타오르는 불에 던져졌다. 짐승들의 나머지는 그 통치권을 빼앗기고, 한 때와 한 철 동안 생명이 연장되었다.” (다니엘 7:11, 12) 천사는 다니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법정’이 열리더니, 그들이 마침내 그의 통치권을 빼앗아 버렸다. 그를 멸절하고 완전히 멸하기 위해서였다.”—다니엘 7:26.

35 위대한 심판관이신 여호와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하느님을 모독하고 그분의 “거룩한 자들”을 괴롭힌 그 뿔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로마 제국과 동일한 일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 뿔의 통치권은 지속되지 못할 것입니다. 로마 제국에서 나온 그보다 못한 뿔 같은 “왕들”의 통치권도 마찬가지 신세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짐승 같은 이전 강국들로부터 유래한 통치권들은 어떻게 될 것입니까? 예언된 바와 같이, 그것들의 생명은 “한 때와 한 철 동안” 연장되었습니다. 그것들의 영토에는 우리 시대까지 계속해서 주민들이 있어 왔습니다. 예를 들면, 이라크는 고대 바빌론의 영토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페르시아(이란)와 그리스 역시 여전히 존재합니다. 이 세계 강국들 가운데 남아 있는 나라들은 국제 연합의 일부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왕국들 역시 마지막 세계 강국이 멸절될 때 함께 소멸될 것입니다. 모든 인간 정부는 “전능자이신 하느님의 큰 날의 전쟁”에서 일소될 것입니다. (계시록 16:14, 16) 그러면 누가 세계를 통치할 것입니까?

목전에 다가온 영속할 통치권!

36, 37. (ㄱ) “사람의 아들 같은 이”는 누구를 가리키며, 언제 무슨 목적으로 하늘 법정에 나타났습니까? (ㄴ) 기원 1914년에 무엇이 설립되었습니까?

36 “내가 밤의 환상 중에 계속 보고 있는데, 보라!” 하고 다니엘은 외쳤습니다. “하늘의 구름과 함께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오고 있었다. 그는 ‘옛날부터 계신 분’에게 나아가게 되었으며, 그들은 그를 그분 앞으로 가까이 데리고 갔다.” (다니엘 7:13)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에 계실 때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르심으로, 자신이 인류와 친족 관계에 있음을 나타내셨습니다. (마태 16:13; 25:31) 예수께서는 산헤드린 즉 유대인의 고등 법정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사람의 아들’이 권능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입니다.” (마태 26:64) 따라서 다니엘의 환상에서,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게 오시는 분, 여호와 하느님에게 나아가시는 분은 부활되어 영광스럽게 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일은 언제 있었습니까?

37 하느님께서는 다윗 왕과 왕국을 위한 계약을 맺으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와도 왕국을 위한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사무엘 둘째 7:11-16; 누가 22:28-30) “나라들의 지정된 때”가 기원 1914년에 끝나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윗 왕가의 상속자로서 정당하게도 왕국 통치를 물려받으실 수 있었습니다. 다니엘의 예언적 기록은 이러합니다. “그에게 통치권과 위엄과 왕국이 주어져, 백성들과 나라들과 언어들이 모두 그를 섬기게 하였다. 그의 통치권은 사라지지 않고 한정 없이 지속될 통치권이며, 그의 왕국은 파멸되지 않을 왕국이다.” (다니엘 7:14) 따라서 메시아 왕국은 1914년에 하늘에 설립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통치권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주어집니다.

38, 39. 누가 세계에 대한 영원한 통치권을 받을 것입니까?

38 천사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거룩한 자들이 왕국을 받을 것이[다].” (다니엘 7:18, 22, 27)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거룩한 자들 가운데 으뜸이 되시는 분입니다. (사도 3:14; 4:27, 30) 통치권에 참여하는 다른 “거룩한 자들”은 14만 4000명의 영으로 기름부음받은 충실한 그리스도인들로서,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왕국 상속자들입니다. (로마 1:7; 8:17; 데살로니가 둘째 1:5; 베드로 첫째 2:9) 그들은 죽은 상태에서 불멸의 영으로 부활되어, 하늘의 시온 산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합니다. (계시록 2:10; 14:1; 20:6)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와 부활된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인간 세계를 통치할 것입니다.

39 사람의 아들과 부활된 다른 “거룩한 자들”의 통치권과 관련하여, 하느님의 천사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왕국과 통치권과 온 하늘 아래 있는 왕국들의 웅대함이 지극히 높으신 분의 거룩한 자들인 백성에게 주어졌다. 그들의 왕국은 한정 없이 지속될 왕국이며, 모든 통치권이 그들을 섬기고 그들에게 순종할 것이다.” (다니엘 7:27) 그 왕국 아래서 순종하는 인류는 참으로 놀라운 축복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40. 다니엘의 꿈과 환상들에 주의를 기울임으로 우리는 어떤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까?

40 다니엘은 하느님이 주신 환상들의 이 모든 놀라운 성취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기까지가 그 일의 끝이다. 나 다니엘은 나의 생각으로 인해 계속 몹시 무서워하여 얼굴빛이 변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였다.” (다니엘 7:28) 하지만 우리는 다니엘이 본 것의 성취를 이해할 수 있는 때에 살고 있습니다. 이 예언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켜 주고, 여호와의 메시아 왕이 세계를 통치할 것이라는 확신을 더욱 강하게 해 줄 것입니다.

[각주]

^ 4항 반복되는 설명을 피하고 명확하게 설명하기 위해, 여기서는 다니엘 7:1-14에 기록된 환상들을 성구별로 하나씩 고려할 때 다니엘 7:15-28에 나오는 설명이 되는 구절들과 연관시켜 내용을 전개할 것이다.

^ 7항 이 책 제4장 참조.

^ 28항 이 책 제6장 참조.

어떤 점을 알게 되었습니까?

● ‘바다에서 올라오는 거대한 짐승 넷’은 각각 무엇을 상징합니까?

● 무엇이 “작은” 뿔이 됩니까?

● 상징적 작은 뿔은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거룩한 자들”을 어떻게 괴롭혔습니까?

● 상징적 작은 뿔과 그 밖의 짐승 같은 강국들은 어떻게 될 것입니까?

● “거대한 짐승 넷”에 관한 다니엘의 꿈과 환상들에 주의를 기울임으로 당신은 어떤 유익을 얻었습니까?

[연구 질문]

[149-152면 네모와 삽화]

관대한 왕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의 한 필자는 그를 관대하고 이상적인 왕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성서에서는 그를 하느님의 “기름부음받은 자”, “해 뜨는 곳에서” 오는 “맹금”이라고 부른다. (이사야 45:1; 46:11) 그와 같이 언급되는 왕은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이다.

키루스가 명성을 떨치는 행진을 시작한 것은 기원전 560/559년경이었는데, 그때 그는 아버지 캄비세스 1세의 뒤를 이어 고대 페르시아의 한 도시 혹은 지역이었던 안샨의 왕좌에 올랐다. 당시 안샨에는 메디아 왕 아스티아게스가 종주권(宗主權)을 행사하고 있었다. 키루스는 메디아의 통치권에 반기를 들고 신속히 승리를 거두었다. 아스티아게스의 군대가 변절하여 투항을 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키루스는 메디아 사람들의 충성스러운 지지를 얻게 되었다. 그 후, 메디아 사람들과 페르시아 사람들은 키루스의 지도력 아래 연합된 세력을 이루고 싸웠다. 그리하여 메디아-페르시아 통치가 존재하게 되었고, 그 통치는 때가 되자 에게 해에서부터 인더스 강에 이르기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지도 참조.

키루스는 메디아 사람들과 페르시아 사람들로 이루어진 연합군을 이끌고 먼저 문제가 있는 지역을 평정하러 나아갔는데, 리디아 왕 크로이소스가 자기 영토를 확장하여 메디아 영토를 침범해 들어오던 지역인 메디아의 서쪽 지역이었다. 키루스는 소아시아에 있는 리디아 제국의 동쪽 국경으로 진격하여 크로이소스를 격퇴하고 그가 살고 있던 수도 사르디스를 점령하였다. 그런 다음 키루스는 이오니아의 도시들을 정복하고 소아시아 전체를 메디아-페르시아 제국의 영토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바빌론과 바빌론의 왕 나보니두스의 주된 경쟁자가 되었다.

그렇게 되자 키루스는 강대한 바빌론과 대결할 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이 때부터 그는 성서 예언 성취와 관련하여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여호와께서는 예언자 이사야를 통하여 거의 2세기 전에, 바빌론을 무너뜨리고 유대인들을 속박에서 해방시킬 통치자로 키루스를 지명하셨다. 이처럼 미리 임명되었기 때문에, 성경은 키루스를 가리켜 여호와의 “기름부음받은 자”라고 언급한다.—이사야 44:26-28.

키루스가 기원전 539년에 바빌론을 치러 올라왔을 때, 그의 앞에는 만만치 않은 일이 놓여 있었다. 거대한 성벽과 유프라테스 강에 의해 형성된 깊고 넓은 해자로 둘러싸인 그 도시는 난공불락처럼 보였다. 유프라테스 강이 바빌론을 통과하여 흐르는 곳에는, 구리로 만든 거대한 문이 달려 있는 산처럼 높은 성벽이 강둑을 따라 솟아 있었다. 키루스가 도대체 어떻게 바빌론을 공략할 수 있겠는가?

여호와께서는 100여 년 전에, “그의 물 위에 황폐가 있”을 것이라고 예언하시면서 “그것이 말라 버리고 말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레미야 50:38) 예언된 대로, 키루스는 유프라테스 강의 물줄기를 바빌론에서 몇 킬로미터 북쪽으로 돌려 버렸다. 그러자 그의 군대는 강바닥을 철벅철벅 걸어서 건넌 다음 성벽으로 향하는 비탈을 올라가서 도시 안으로 쉽게 진입하였다. 구리 문이 열려 있었기 때문이다. 먹이를 쏜살같이 덮쳐 채 가는 “맹금”처럼, “해 뜨는 곳에서” 즉 동쪽에서 온 이 통치자는 바빌론을 하룻밤에 점령해 버렸다!

키루스의 승리는 바빌론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오랫동안 기다려 온 포로 상태에서의 해방이 이루어진 것이자 고국의 70년간의 황폐가 끝나는 것을 의미하였다. 키루스가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성전을 재건하도록 허락하는 포고령을 내렸을 때 유대인들은 틀림없이 매우 감격하였을 것이다! 키루스는 또한 느부갓네살이 바빌론으로 가지고 온 귀중한 성전 기구들을 유대인들에게 돌려주었고, 레바논에서 목재를 수입하는 것도 왕명으로 허락해 주었으며, 건축 비용을 충당할 수 있도록 왕의 집에서 자금을 내주었다.—에스라 1:1-11; 6:3-5.

키루스는 자기가 정복한 사람들을 다루는 데 있어서, 일반적으로 자비롭고 관대한 정책을 따랐다. 그렇게 행동한 한 가지 이유는 아마 그의 종교 때문이었을 것이다. 키루스는 아마 페르시아의 예언자 조로아스터의 가르침에 고착하며, 아후라 마즈다—모든 선한 것의 창조자로 여겨졌던 신—를 숭배했던 것 같다. 파르항 메르는 「조로아스터교의 전통」(The Zoroastrian Tradition)이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조로아스터는 하느님을 도덕적으로 완벽한 분으로 묘사하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아후라 마즈다는 원수를 갚지 않으며 공정하다고, 따라서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도덕적이고 공정한 신에 대한 믿음은 키루스의 윤리관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며, 관대하고 공정한 행동을 하도록 고무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 왕은 바빌론의 기후에는 관대함을 덜 나타냈다. 바빌론의 타는 듯이 뜨거운 여름은 그가 견딜 수 있는 정도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 따라서 바빌론은 제국의 왕도(王都)로 그리고 종교와 문화의 중심지로 남아 있었지만, 키루스의 겨울 수도 역할 이상은 거의 하지 못했다. 사실, 키루스는 바빌론을 정복한 후 얼마 안 있어 자기의 여름 수도인 엑바타나로 돌아갔는데, 엑바타나는 알완드 산 기슭 해발 약 1900미터 높이에 있었다. 추운 겨울이 쾌적한 여름과 균형을 이루는 그곳이 키루스에게는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다. 키루스는 또한 자기의 이전 수도인 파사르가다에(페르세폴리스 근처)에 우아한 궁전을 지었는데, 그곳은 엑바타나에서 남동쪽으로 650킬로미터 떨어져 있었다. 파사르가다에에 마련된 거처는 키루스의 휴양지 역할을 하였다.

이처럼 키루스는 용기 있는 정복자이자 관대한 왕으로서의 족적을 남겼다. 그의 30년간의 통치는 기원전 530년에 그의 죽음과 함께 끝났는데, 그때 그는 원정 중이었다. 그의 아들 캄비세스 2세가 그의 뒤를 이어 페르시아의 왕좌에 올랐다.

어떤 점을 알게 되었습니까?

● 페르시아 사람 키루스는 어떻게 여호와의 “기름부음받은 자”임이 증명되었습니까?

● 키루스는 여호와의 백성을 위해 무슨 가치 있는 기여를 하였습니까?

● 키루스는 자기가 정복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였습니까?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메디아-페르시아 제국

마케도니아

멤피스

이집트

에티오피아

예루살렘

바빌론

엑바타나

수사

페르세폴리스

인도

[삽화]

파사르가다에 있는 키루스의 무덤

[삽화]

파사르가다에의 키루스 궁전에 있는 얕은 돋을새김

[153-161면 네모와 삽화]

젊은 왕이 세계를 정복하다

약 2300년 전에, 금발의 20대 장군이 지중해 연안에 서 있었다. 그의 눈은 약 1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한 섬 도시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도시로 들어가는 것을 거절당한 이 분노한 장군은 그 도시를 정복하고 말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었다. 그의 공격 계획은 무엇이었는가? 섬까지 둑길을 만들어 군대를 동원하여 그 도시를 치는 것이었다. 둑길을 만드는 작업은 이미 시작되었다.

그런데 페르시아 제국의 대왕에게서 온 전갈로 인해 이 젊은 장군의 마음이 잠시 교란되었다. 그 페르시아의 통치자는 평화 협정을 맺고 싶은 열망에서 비상한 제안을 해 왔다. 1만 달란트의 금(현재의 가치로 20여 억 달러)을 주고, 왕의 딸들 중 하나와 결혼할 수 있도록 그 딸을 내주며, 페르시아 제국의 서쪽 지역 전부를 영토로 내주겠다는 제안이었다. 그 장군이 사로잡아 간 자신의 가족들과 맞바꾸려는 뜻에서 그 왕은 이 모든 제안을 한 것이었다.

그 제안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거절하느냐 하는 결정에 직면한 이 사령관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3세였다. 그 제안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때는 고대 세계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사실상, 그가 내린 결정의 여파는 중세 시대를 넘어서 우리 시대에까지 동서양에 고루 미치고 있다”고 역사가 울리히 빌켄은 말한다. 알렉산더가 보낸 답을 고려하기 전에, 이 중대한 순간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사건들이 있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정복자가 되기까지

알렉산더는 기원전 356년에 마케도니아의 펠라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왕 필리포스 2세였고, 어머니는 올림피아스였다. 올림피아스는 알렉산더에게 마케도니아의 왕들은 그리스의 신 제우스의 아들 헤라클레스의 후손이라고 가르쳤다. 올림피아스는 알렉산더의 조상은 호메로스의 시 「일리아드」에 나오는 영웅 아킬레스라고 말하였다. 부모에 의해서 그처럼 정복과 왕의 영광을 추구하도록 영향을 받은 젊은 알렉산더는 다른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올림픽 경기에서 경주에 참가하겠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알렉산더는 왕들과 함께 경주를 하는 것이라면 기꺼이 참가하겠다는 뜻을 표명하곤 하였다. 그는 아버지보다 더 큰 일을 하고 공적을 세워 영광을 얻겠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알렉산더는 열세 살 때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사를 받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 덕분에 철학, 의학, 과학에 대한 관심을 발전시켰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가르침이 알렉산더의 사고 방식을 틀잡는 데 어느 정도나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20세기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 많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관은 그리스의 도시 국가에 근거해 있었는데, 그것은 거의 쇠퇴기를 맞고 있었다.” 도시 국가라는 작은 정부의 개념은 중앙 집권적인 위대한 제국을 건설하고 싶은 야심만만한 왕자에게는 별로 호소력이 없었을 것이다. 또한 비그리스인들을 노예처럼 대하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에 대해서 알렉산더는 틀림없이 회의를 품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정복자와 피정복자가 서로 번영하는 동반 관계를 이루는 제국을 머리 속에 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더에게 독서와 학문에 대한 관심을 배양해 주었음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알렉산더는 일생 동안 열렬한 독서가였으며, 특히 호메로스의 글에 특별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알렉산더가 「일리아드」—총 1만 5693행의 시—를 암기하고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받던 교육은 기원전 340년에 갑자기 끝나게 되었다. 그 해에 열 여섯 살의 왕자는 아버지가 없는 동안 마케도니아를 통치하기 위해 펠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 황태자는 얼마 안 있어 군사적 공을 세워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필리포스가 기뻐할 만한 일로서, 알렉산더는 반역한 트라키아 부족인 마에디족을 신속히 제압하고 그들의 주 도시를 기습 점령한 다음 그곳을 자기 이름을 따서 알렉산드루폴리스라고 명명하였다.

정복을 계속해 나아감

기원전 336년에 필리포스가 암살되자, 스무 살의 알렉산더가 마케도니아의 왕좌를 물려받았다. 기원전 334년 봄에 헬레스폰트 해협(지금의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해 아시아로 들어간 알렉산더는 3만의 보병과 5000의 기병으로 이루어진 소규모지만 능률적인 군대를 이끌고 정복 원정을 시작하였다. 그의 군대에는 공학자, 측량사, 건축가, 과학자, 역사가들이 따라다녔다.

알렉산더는 소아시아(지금의 터키)의 북서쪽에 있는 그라니쿠스 강에서, 페르시아 사람들을 상대로 한 첫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 해 겨울, 그는 소아시아 서쪽 지역을 정복하였다. 이듬해 가을, 페르시아 사람들과의 두 번째 결정적 전투가 소아시아의 남동쪽에 있는 이수스에서 벌어졌다. 페르시아의 대왕 다리우스 3세는 약 50만 대군을 이끌고 알렉산더와 대결을 벌이러 그곳에 갔다. 과신한 다리우스는 또한 어머니와 아내를 위시하여 다른 가족 성원들도 데리고 가서 자기들이 승리를 거두는 장관을 목격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페르시아 군대는 기습적이고 맹렬한 마케도니아식 공격에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알렉산더의 군대는 페르시아 군대에 처절한 패배를 안겨 주었고, 다리우스는 가족을 알렉산더의 손에 버려둔 채 도망하였다.

알렉산더는 도망가는 페르시아 군대를 뒤쫓지 않고, 지중해 연안을 따라 남쪽으로 행군하면서 강력한 페르시아 함대가 사용하던 기지들을 정복해 나갔다. 하지만 섬 도시인 티레는 이 침공에 저항하였다. 티레를 정복하기로 결심한 알렉산더는 포위 공격을 시작해서 일곱 달 동안 계속하였다. 포위 공격 도중에 다리우스로부터 앞서 언급한 대로 평화를 위해 예물을 제공하겠다는 제안이 들어왔다. 다리우스가 내주겠다는 것들이 매우 매력적이었기 때문에, 알렉산더가 신뢰하는 고문관인 파르메니오는 ‘내가 알렉산더라면,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젊은 장군은 ‘내가 파르메니오라도 그렇게 하겠소’라고 그 말을 그냥 받아넘겼다. 알렉산더는 협상을 거절한 채 포위 공격을 계속하여, 기원전 332년 7월에 자만심에 가득 찬 그 바다의 여왕을 무너뜨렸다.

알렉산더는 자기에게 항복한 예루살렘에는 해를 끼치지 않고 남쪽으로 진군하여 가자를 정복하였다. 페르시아의 통치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이집트는 알렉산더를 구출자로 환영하였다. 알렉산더는 멤피스에서 아피스 수소에게 희생을 바쳐 이집트의 제사장들을 기쁘게 하였다. 그는 또한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창건하였는데, 그 도시는 후에 학문의 중심지로서 아테네와 쌍벽을 이루게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그의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 후 알렉산더는 북동쪽으로 향하여, 팔레스타인을 거쳐 티그리스 강으로 나아갔다. 기원전 331년에, 알렉산더는 니네베의 허물어져 가는 폐허에서 그리 멀지 않은 가우가멜라에서 페르시아 군대와 세 번째 주요 전투를 벌였다. 이곳에서 알렉산더의 4만 7000명의 병사는 최소한 25만 명은 되는 재조직한 페르시아 군대를 압도적으로 물리쳤다! 다리우스는 도망하였고, 후에 자신의 백성에게 살해당했다.

승리로 의기양양해진 알렉산더는 남쪽으로 향하여 페르시아의 겨울 수도인 바빌론을 점령하였다. 그는 또한 수사와 페르세폴리스에 있던 수도들도 점령하고 페르시아의 막대한 보고(寶庫)를 탈취하였으며 크세르크세스의 거대한 궁전을 불태워 버렸다. 마침내 엑바타나에 있던 수도마저 그에게 함락되었다. 이 대단히 빠른 정복자는 그 후 페르시아의 나머지 영토를 정복하여, 동쪽으로 현대의 파키스탄이 있는 인더스 강까지 나아갔다.

페르시아의 속주인 탁실라와의 접경 지대에서 인더스 강을 건넌 알렉산더는 만만찮은 호적수인 인도의 왕 포루스와 맞닥뜨렸다. 알렉산더는 그를 상대로, 기원전 326년 6월에 네 번째이자 마지막 주요 전투를 벌였다. 포루스의 군대에는 3만 5000명의 병사뿐만 아니라 200마리의 코끼리도 포함되어 있어, 마케도니아 병사들이 탄 말들은 겁에 질렸다. 격렬하고 유혈이 낭자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알렉산더의 군대가 이겼다. 포루스는 항복을 하고 동맹자가 되었다.

마케도니아 군대가 아시아로 들어온 지도 8년 이상이 흘러, 병사들은 지치고 고향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포루스와의 격렬한 전투로 인해 기력이 쇠진한 병사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였다. 알렉산더는 처음에는 내키지 않았지만, 병사들의 소원을 들어 주기로 하였다. 그리스는 실로 세계 강국이 되었다. 정복된 지역에 그리스 식민지가 세워짐에 따라, 그리스어와 그리스 문화가 그리스 제국 전역에 퍼지게 되었다.

방패 뒤의 참 모습

여러 해에 걸친 정복 기간 내내 마케도니아 군대를 하나로 결속시켜 준 역할을 한 것은 알렉산더의 인간성이었다. 전투가 끝나고 나면 알렉산더는 으레 부상병들을 찾아 다니며 상처를 살폈고, 병사들의 용감한 행위를 칭찬하며 그들의 공적에 걸맞은 포상금으로 그들에게 영예를 부여했다. 알렉산더는 전투에서 사망한 병사들에게는 화려한 장례식을 치러 주었다. 사망한 병사들의 부모와 자녀들에게는 모든 세금과 온갖 의무를 면제해 주었다. 전투 후의 기분 전환을 위해서, 알렉산더는 여러가지 시합과 경기를 마련해 주었다. 한 번은,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병사들에게 휴가를 주어 겨울 동안을 마케도니아에서 아내와 함께 보낼 수 있도록 마련해 주기까지 한 적도 있다. 알렉산더는 이러한 행동 때문에 병사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알렉산더가 박트리아의 공주 록사나와 결혼한 것과 관련하여, 그리스의 전기 작가 플루타르크는 이렇게 기술한다. “그것은 사실 애정 문제에 불과한 일이었지만, 동시에 그가 추구하고 있던 목적에도 기여하는 것 같았다. 알렉산더가 정복당한 사람들 가운데서 아내를 선택하는 것을 보는 것은 정복당한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으며, 또한 인간 가운데서 가장 절제력이 강한 그조차도 유일하게 빠지지 않을 수 없었던 정열 가운데서도 그가 합법적이고 영예로운 방법으로 록사나를 얻을 수 있을 때까지 자제하는 것을 보는 것은 정복당한 사람들로 하여금 알렉산더에게 더없이 강렬한 애정을 느끼게 해 주었다.”

알렉산더는 또한 다른 사람들의 결혼도 존중해 주었다. 다리우스 왕의 아내가 자기 포로가 되었지만, 알렉산더는 그가 정중한 대우를 받도록 해 주었다. 그와 유사한 일로, 두 명의 마케도니아 병사가 어떤 타국인들의 아내를 학대한 사실을 알게 되자, 그들이 유죄라면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알렉산더는 어머니 올림피아스와 마찬가지로 종교심이 매우 강했다. 그는 전쟁 전후에 희생을 바치곤 하였으며, 특정 징조들의 의미와 관련하여 점쟁이들의 의견을 듣곤 하였다. 그는 또한 리비아에서는, 암몬의 신탁을 전하는 사람의 의견을 들었다. 그리고 바빌론에서는 희생, 특히 바빌론의 신 벨(마르둑)에게 바치는 희생과 관련하여 칼데아 사람들의 지시대로 행하였다.

알렉산더는 먹는 습관에 절도가 있었지만, 결국 과도한 음주 습관에 빠지게 되었다. 포도주를 한 잔 마실 때마다 장광설을 늘어놓으며 자기의 공적을 자랑하곤 하였다. 알렉산더의 비행 가운데 가장 심했던 것 하나는, 술에 취해 격노해 있던 중에 친구 클리토스를 살해한 일이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자책감에 몹시 시달려 사흘이나 침실에서 나오지 않고 식음을 전폐하였다. 마침내, 친구들이 설득하여 다시 먹게 할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영광에 대한 알렉산더의 갈망은 다른 바람직하지 못한 특성들이 돌출되게 하였다. 그는 거짓 고발을 쉽사리 믿기 시작하였으며, 극히 가혹한 처벌을 내리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면, 필로타스가 자기 생명을 해하려고 기도한 일에 연루되었다고 믿게 된 알렉산더는 필로타스는 물론 자기가 한때 신뢰했던 고문관인 필로타스의 아버지 파르메니오까지 처형되게 하였다.

알렉산더의 패배

바빌론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알렉산더는 말라리아 열병에 걸리게 되었고, 그 병으로부터 결코 회복되지 못하였다. 기원전 323년 6월 13일, 겨우 32년 8개월의 삶을 산 후에, 알렉산더는 가장 만만치 않은 적인 죽음에 굴복하였다.

인도의 어떤 지혜자들이 한 다음과 같은 말이 들어맞았다. “알렉산더 왕이여, 사람마다 바로 우리가 서 있는 요만큼의 땅밖에는 차지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활력이 넘치고 무자비하다는 것말고는 다른 사람들과 다름이 없는 당신은 집에서 멀리 떠나 고생을 사서 하면서 온 땅을 헤집고 다니며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 당신도 죽게 될 것이고, 당신이 차지할 땅이라곤 당신의 묘지로 쓸 정도의 땅밖에 안 될 것입니다.”

어떤 점을 알게 되었습니까?

● 알렉산더 대왕은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 마케도니아의 왕좌를 물려받은 후 얼마 있지 않아, 알렉산더는 어떤 원정을 시작하였습니까?

● 알렉산더가 달성한 정복 사례 중 몇 가지를 설명하여 보십시오.

● 알렉산더의 인간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할 수 있습니까?

[157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알렉산더가 정복한 지역들

마케도니아

이집트

바빌론

인더스 강

[삽화]

알렉산더

[삽화]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제자 알렉산더

[전면 삽화]

[삽화]

알렉산더 대왕을 묘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메달

[162, 163면 네모와 삽화]

나뉘어진 거대한 왕국

알렉산더 대왕의 왕국과 관련하여, 성서는 그 왕국이 깨어지고 나뉠 것이나 “그의 후손에게 돌아가지도 않”을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다니엘 11:3, 4) 그와 일치하게, 기원전 323년에 알렉산더가 갑자기 죽은 지 14년 내에, 그의 적자인 알렉산더 4세와 그의 서자인 헤라클레스가 모두 암살당하였다.

기원전 301년쯤에는, 알렉산더의 장군 네 사람이 자기들의 사령관이 세운 거대한 제국에서 권력 기반을 확고히 다지고 있었다. 카산드로스 장군은 마케도니아와 그리스를 지배하게 되었다. 리시마코스 장군은 소아시아와 트라키아를 받았다. 셀레우코스 니카토르 1세에게는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가 돌아갔다. 그리고 프톨레마이오스 라고스 즉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을 통치하였다. 그리하여 알렉산더가 세운 하나의 위대한 왕국에서 네 개의 그리스 왕국이 생겨나게 되었다.

네 개의 그리스 왕국 중에서, 카산드로스의 통치가 가장 단명하였다. 카산드로스는 권력을 잡은 지 몇 해 후에 그의 남성 혈통이 끊겼으며, 기원전 285년에 리시마코스가 그리스 제국의 유럽 지역을 장악하게 되었다. 4년 뒤, 리시마코스는 셀레우코스 니카토르 1세와 싸우다가 전사하여, 그에게 아시아 영토의 주된 부분에 대한 지배권을 넘겨주었다. 셀레우코스는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의 태조가 되었다. 그는 시리아에 안티오크를 창건하여 그 도시를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 셀레우코스는 기원전 281년에 암살당하였지만, 그가 세운 왕조는 기원전 64년까지 계속 권력을 잡았는데, 그 해에 시리아는 로마의 장군 폼페이우스에 의해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알렉산더의 제국에서 나뉜 네 왕국 중에서 가장 장수한 것은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기원전 305년에 왕의 지위에 올라 이집트를 다스리는 마케도니아 왕 즉 마케도니아 파라오 중 첫 번째 사람이 되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를 수도로 삼고, 즉시 도시 개발 계획에 착수했다. 그가 추진한 가장 위대한 건축 공사 중 하나는 유명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건축 공사이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 웅대한 공사를 감독하도록 그리스에서 아테네의 저명한 학자 데메트리오스 팔레레오스를 데려왔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기원 1세기에 그 도서관은 100만 개의 두루마리를 소장하고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기원전 30년에 로마에 함락될 때까지 계속 이집트를 통치하였다. 로마는 그때 그리스를 대신하여 세계를 지배하는 강국이 되었다.

어떤 점을 알게 되었습니까?

● 알렉산더의 거대한 제국은 어떻게 나뉘었습니까?

● 셀레우코스 왕조는 언제까지 계속 시리아를 통치하였습니까?

●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은 언제 끝나게 되었습니까?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알렉산더 제국의 분할

카산드로스

리시마코스

프톨레마이오스 1세

셀레우코스 1세

[삽화]

프톨레마이오스 1세

셀레우코스 1세

[139면 도해와 삽화]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다니엘의 예언에 나오는 세계 강국들

거대한 형상 (다니엘 2:31-45)

바다에서 올라온 네 짐승 (다니엘 7:3-8, 17, 25)

기원전 607년부터 통치한 바빌로니아

기원전 539년부터 통치한 메디아-페르시아

기원전 331년부터 통치한 그리스

기원전 30년부터 통치한 로마

기원 1763년부터 통치한 영미 세계 강국

마지막 때에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는 세계

[128면 전면 삽화]

[147면 전면 삽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