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바로 가기

차례 바로 가기

다니엘서—재판받고 있는 책

다니엘서—재판받고 있는 책

제2장

다니엘서—재판받고 있는 책

1, 2. 다니엘서는 어떤 면으로 고발을 당해 있으며, 그 책을 변호하기 위해 제시된 증거를 고려하는 것이 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까?

당신이 법정에 참석해서 중요한 재판을 지켜보고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피고는 사기죄로 고발당해 있습니다. 검사는 피고가 유죄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피고는 오랫동안 정직하다는 평판을 들어 온 사람입니다. 피고측에서 제시하는 증거를 들어 보고 싶지 않습니까?

2 성서 다니엘서와 관련해서 당신은 바로 그와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그 책의 필자는 정직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으며, 그의 이름을 지닌 책은 수천 년 동안 매우 존중을 받아 왔습니다. 그 책은 믿을 만한 역사가 기술되어 있는 책으로서, 필자는 기원전 7세기에서 6세기 사이에 살았던 히브리 예언자 다니엘입니다. 정확한 성서 연대기에 의하면, 다니엘서가 다루고 있는 기간은 기원전 618년경에서 536년까지이며, 기록이 완료된 해는 기원전 536년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책이 고발당해 있습니다. 일부 백과 사전들을 비롯하여 여러 참고 문헌들은 이 책이 날조된 기록이라고 암시하거나 노골적으로 그렇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3. 「신 브리태니카 백과 사전」에서는 다니엘서의 확실성에 관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3 예를 들면, 「신 브리태니카 백과 사전」에서는 다니엘서가 “참된 예언이 들어 있는 진실한 역사서로 일반적으로 여겨지던” 때가 있었음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동 백과 사전에서는 다니엘서가 사실은 “후기에 유대인들이 국가적인 위기에 처해 있던 때, 다시 말해서 유대인들이 [시리아의 왕]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4세 치하에서 심한 박해를 받던 때에 쓰여졌다”고 주장합니다. 이 백과 사전에서 추정하는 이 책의 기록 완료 시기는 기원전 167년에서 164년 사이입니다. 동 백과 사전에서는 다니엘서의 필자가 미래를 예언한 것이 아니라 단지 “과거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언하는 것처럼” 기술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합니다.

4. 다니엘서에 대한 비판은 언제 시작되었으며, 최근 몇 세기 동안에는 무엇이 그와 비슷한 비판에 부채질을 하였습니까?

4 그러한 생각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입니까? 다니엘서에 대한 비판은 새로 등장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일찍이 기원 3세기에 포르피리오스라는 철학자에 의해 시작된 것입니다. 로마 제국의 많은 사람들처럼 포르피리오스도 그리스도교의 영향에 위협을 느꼈습니다. 포르피리오스는 이 “새로운” 종교를 공격하여 약화시키기 위해 15권의 책을 썼습니다. 12권째 책은 다니엘서를 겨냥한 것입니다. 포르피리오스는 다니엘서가 기원전 2세기에 어느 유대인이 날조한 기록이라고 단언하였습니다. 그와 비슷한 공격이 18세기와 19세기에도 있었습니다. 고등 비평가들이나 합리주의자들이 볼 때, 예언—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알려 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다니엘서는 그들이 좋아하는 표적이 되었습니다. 사실상, 다니엘과 다니엘서는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비평가들은 그 책이 유대인들이 바빌론에서 유배 생활을 할 때 다니엘이 쓴 책이 아니라, 여러 세기 후에 다른 사람에 의해 쓰여진 책이라는 풍부한 증거가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 그러한 공격이 무수히 쏟아지자 한 저술가는 「비평가 굴 속의 다니엘」(Daniel in the Critics’ Den)이라는 변호서를 쓰기까지 하였습니다.

5. 다니엘서의 확실성에 대한 질문을 고려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5 비평가들이 확신에 찬 주장을 하는 데는 그럴 만한 증거라도 있습니까? 아니면 증거들은 오히려 다니엘서에 대한 변호를 뒷받침해 줍니까? 여기에는 중요한 점들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 고대의 책의 명성뿐만 아니라 우리의 미래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다니엘서가 날조된 것이라면, 인류의 미래에 대한 그 책의 약속도 공허한 말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다니엘서에 들어 있는 예언이 참된 것이라면, 당신은 틀림없이 그 예언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몹시 알고 싶을 것입니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다니엘서에 대한 공격 중 몇 가지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6. 다니엘서에 나오는 역사에 관하여 이따금 어떠한 비난이 제기됩니까?

6 예를 들어, 「아메리카나 백과 사전」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비난을 들어 보십시오. 다니엘서에 나오는, “[바빌론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시기와 같은] 초기의 역사적 세부점 중 많은 부분이 몹시 왜곡되어 있다.” 정말 그렇습니까? 잘못된 점이라고 흔히들 지적하는 세 가지 문제를 하나씩 차례로 살펴보기로 합시다.

다른 곳에는 이름이 나오지 않는 왕의 경우

7. (ㄱ) 다니엘서에 벨사살이 언급되어 있는 사실이 오랫동안 성서 비평가들을 즐겁게 해 준 이유가 무엇입니까? (ㄴ) 벨사살이 가공 인물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어떻게 바뀌게 되었습니까?

7 다니엘은 바빌론이 함락되던 당시 느부갓네살의 “아들” 벨사살이 바빌론에서 왕으로 통치하고 있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다니엘 5:1, 11, 18, 22, 30) 비평가들은 오랫동안 이 부분을 공격해 왔습니다. 벨사살이라는 이름이 성서 외에는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고대 역사가들은 느부갓네살의 후계자인 나보니두스를 바빌로니아의 마지막 왕이라고 밝히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1850년에 페르디난트 히트치히는, 벨사살은 필자의 상상의 산물임에 틀림없다고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히트치히가 다소 성급하게 자기의 견해를 피력했다고 느껴지지 않습니까? 아무튼, 이 왕의 이름이 언급된 곳이 없다는 사실이, 특히 역사 기록이 빈약하다고 인정되는 시기에 그랬다는 사실이 과연 그가 존재한 적이 없는 인물이라는 증거가 됩니까? 어쨌든, 1854년에, 점토로 만든 작은 원주(圓柱) 몇 개가 오늘날의 이라크 남부 지역에 해당하는 바빌로니아의 고대 도시 우르의 폐허에서 발굴되었습니다. 나보니두스 왕의 이 설형 문자 기록에는, “내 장자, 벨사르우수르”를 위한 기도문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다니엘서에 나오는 벨사살과 동일 인물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비평가들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8. 다니엘이 벨사살을 통치하는 왕으로 기술한 내용이 참되다는 사실이 어떻게 증명되었습니까?

8 하지만 비평가들은 승복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아무 것도 증명하지 못한다”고 H. F. 톨버트라는 비평가는 썼습니다. 그는 다니엘의 기록에 나오는 아들은 통치하는 왕인 반면 원주에 새겨진 글에 나오는 아들은 어린아이에 불과했을지 모른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런데 톨버트의 주장이 출판되어 나온 지 꼭 1년 후에 설형 문자판이 몇 개 더 발굴되었는데, 거기에는 벨사살이 비서관들과 왕실 참모들을 거느리고 있는 것으로 언급되어 있었습니다. 벨사살은 결코 어린아이가 아니었습니다! 마침내 다른 판들이 발견되어 이 문제에 결말을 지었습니다. 그 판들에서는 나보니두스가 한 번에 여러 해씩 바빌론을 떠나 있었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또한 그러한 기간에는 나보니두스가 장자(벨사살)에게 바빌론의 “왕권을 맡겼다”는 점도 알려 주었습니다. 그러한 시기에는, 벨사살이 사실상 왕으로서 아버지 대신 섭정을 하였습니다. *

9. (ㄱ) 다니엘서에서는 어떤 의미로 벨사살이 느부갓네살의 아들이라고 말했을 가능성이 있습니까? (ㄴ) 다니엘서에서는 나보니두스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암시조차 하지 않았다는 비평가들의 주장은 왜 틀렸습니까?

9 그래도 승복하려 들지 않는 일부 비평가들은, 성서에서 벨사살을 나보니두스의 아들이 아니라 느부갓네살의 아들로 지칭한다는 점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일부 비평가들은 다니엘서에서는 나보니두스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암시조차 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두 가지 반론 모두 조금만 조사를 해 보면 억지 주장임이 드러납니다. 나보니두스는 느부갓네살의 딸과 결혼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벨사살은 느부갓네살의 손자가 됩니다. 히브리어나 아람어에는 “할아버지”나 “손자”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습니다. 따라서 “아무개의 아들”이라는 말이 “아무개의 손자”를 의미할 수도 있고, 심지어 “아무개의 후손”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비교 마태 1:1) 뿐만 아니라, 성서 기록은 벨사살을 나보니두스의 아들로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분명히 남깁니다. 손이 나타나서 벽에 글을 쓰는 불길한 일로 인해 겁에 질려 마음이 조급해진 벨사살은, 누구든 벽에 쓰인 글을 해석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왕국의 셋째 자리를 주겠다고 제안합니다. (다니엘 5:7) 둘째 자리가 아니라 셋째 자리를 주겠다고 제안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러한 제안은 첫째 자리와 둘째 자리는 이미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사실, 그 두 자리는 나보니두스와 그의 아들 벨사살이 차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10. 바빌로니아의 군주제에 대한 다니엘의 기록이 다른 고대 역사가들의 기록보다 더 자세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10 따라서 다니엘서에서 벨사살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몹시 왜곡된” 역사에 대한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다니엘이—바빌론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바빌로니아의 군주제에 대해 헤로도토스, 크세노폰, 베로소스와 같은 고대 세속 역사가들보다 더 자세하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놓치고 있었던 사실을 다니엘이 기록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다니엘이 바로 바빌론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책은 몇 세기 후에 살았던 사기꾼의 기록이 아니라 목격 증인의 기록인 것입니다.

메디아 사람 다리우스는 누구였는가?

11. 다니엘에 의하면 메디아 사람 다리우스는 누구였으며, 그에 대해 어떤 이야기가 있습니까?

11 다니엘의 보고에 의하면, 바빌론이 정복되자 “메디아 사람 다리우스”라는 왕이 통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다니엘 5:31) 메디아 사람 다리우스는 아직까지도 세속적인 자료나 고고학적 자료에서 그 이름이 발견된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신 브리태니카 백과 사전」에서는 이 다리우스는 “가공 인물”이라고 주장합니다.

12. (ㄱ) 성서 비평가들이 메디아 사람 다리우스가 존재한 적이 없다고 함부로 단언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메디아 사람 다리우스는 누구였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 점을 암시하는 어떤 증거가 있습니까?

12 일부 학자들은 좀더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해 왔습니다. 아무튼, 비평가들은 한때 벨사살에게도 “가공” 인물이라는 딱지를 붙인 적이 있었습니다. 다리우스의 경우에도 틀림없이 벨사살의 경우와 비슷하게 비평가들이 틀렸음이 증명될 것입니다. 이미 설형 문자판들에 의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페르시아 사람 키루스는 바빌론이 정복되자마자 “바빌론의 왕”이라는 칭호를 자신에게 붙이지 않았습니다. 한 연구가는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합니다. “‘바빌론의 왕’이란 칭호를 누가 가지고 있었든, 그 사람은 키루스에게 예속된 왕이었지 키루스 자신은 아니었다.” 그러면 다리우스는, 바빌론의 통치를 맡은 권세 있는 메디아 관리의 통치명 혹은 칭호였을 가능성이 있습니까? 일부 사람들은 다리우스가 구바루라는 사람이었을는지 모른다는 견해를 제시합니다. 키루스는 구바루를 바빌론 총독으로 임명하였고, 세속 기록들도 구바루가 상당한 권세를 가지고 통치하였음을 확증해 줍니다. 한 설형 문자판에서는 구바루가 바빌론에 부총독들을 임명하였다고 알려 줍니다. 흥미롭게도, 다니엘은 다리우스가 120명의 태수를 임명하여 바빌론 왕국을 다스리게 하였다고 기술합니다.—다니엘 6:1.

13. 메디아 사람 다리우스가 다니엘서에는 언급되어 있지만 세속 기록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은 논리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13 때가 되면, 이 왕이 정확히 누구인지 알려 주는 직접적인 증거가 더 많이 밝혀질 것입니다. 아무튼, 이 점과 관련하여 고고학이 침묵을 지키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다리우스에게 “가공” 인물이라는 딱지를 붙일 수 있는 근거는 되지 못하며, 다니엘서 전체를 날조라고 배척할 수 있는 근거는 더더욱 되지 못합니다. 다니엘의 기록을 현존하는 세속 기록보다 더 자세한 목격 증인의 증언으로 보는 것이 훨씬 더 합리적인 태도입니다.

여호야김의 통치 기간

14. 여호야김 왕의 통치 기간과 관련하여 다니엘과 예레미야 사이에 모순된 점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4 다니엘 1:1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유다여호야김 재위 제삼 년에, 바빌론 느부갓네살예루살렘으로 와서 그곳을 포위하였다.” 비평가들은 이 성구에 문제가 있다고 말해 왔습니다. 여호야김 재위 제사 년이 느부갓네살 재위 제일 년이라고 말하는 예레미야의 기록과 이 성구가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25:1; 46:2) 다니엘은 예레미야와 모순된 말을 하고 있었습니까? 지식을 좀더 얻어 보면 문제는 즉시 명확히 밝혀집니다. 파라오 느고에 의해 기원전 628년에 처음으로 왕이 된 여호야김은 그 이집트 통치자의 꼭두각시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때는 느부갓네살이 기원전 624년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바빌론의 왕좌에 앉기 약 3년 전이었습니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기원전 620년에) 느부갓네살은 유다를 침공하여 여호야김을 바빌론에 예속된 왕으로 만들었습니다. (열왕기 둘째 23:34; 24:1) 바빌론에 살고 있던 유대인에게 있어서 여호야김 재위 “제삼 년”이란, 그 왕이 바빌론에 예속된 왕이 된 지 제삼 년을 의미하였을 것입니다. 다니엘은 바로 그러한 관점에서 기록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다름 아닌 예루살렘에서 살고 있던 유대인의 관점에서 기록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예레미야는 여호야김의 재위 기간이 파라오 느고가 그를 왕으로 임명하였을 때 시작된 것으로 언급하였습니다.

15. 다니엘 1:1에 나오는 연대 기록을 공격하는 주장에 허점이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5 그러므로 비평가들이 불일치하다고 주장하는 이 기록은 사실은, 다니엘이 자기의 책을 바빌론에서 다른 유대인들과 함께 유배 생활을 하고 있는 동안에 썼다는 증거만 더욱 보강해 줄 뿐입니다. 그리고 다니엘서를 공격하는 이러한 주장에는 또 하나의 두드러진 결함이 있습니다. 다니엘서의 필자가 틀림없이 예레미야서를 구해서 가지고 있었고 심지어 참조하기까지 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다니엘 9:2) 다니엘서의 필자가 비평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영악스러운 날조자라면, 예레미야서처럼 매우 존중받고 있던 자료와 모순되는 말을 할—그것도 자기 책의 바로 첫 구절에서부터 그런 말을 할—위험을 무릅쓰겠습니까? 절대로 그럴 리 없을 것입니다!

매우 뛰어난 세부점들

16, 17. 고고학적 증거는 다음의 두 가지 사실에 관한 다니엘의 기록의 확실성을 어떻게 뒷받침해 주었습니까? (ㄱ) 느부갓네살이 종교적 형상을 세워 모든 백성이 그것을 숭배하게 한 일, (ㄴ) 바빌론에서 진행된 건축 공사에 대해 느부갓네살이 자랑스럽게 말하는 태도.

16 이제 우리의 주의를 부정적인 면에서 긍정적인 면으로 돌려봅시다. 다니엘서의 필자가 자기가 기록한 시대에 대해 직접 얻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려 주는, 그 책에 나오는 몇 가지 다른 세부점들을 고려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7 다니엘이 고대 바빌론에 대해 아주 세밀한 점까지도 잘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의 기록의 확실성에 대한 강력한 증거가 됩니다. 예를 들면, 다니엘 3:1-6에서는 느부갓네살이 거대한 형상을 세워 모든 사람이 그것을 숭배하게 했다고 알려 줍니다. 고고학자들이 발견한 다른 증거도 이 왕이 백성으로 하여금 국가주의 의식과 종교 의식에 더 많이 참여하게 하려고 시도하였음을 알려 줍니다. 그와 비슷한 예로,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이 자신이 추진한 수많은 건축 공사에 대해 자랑스럽게 말하는 태도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니엘 4:30) 고고학자들은 현대에 와서야 비로소, 바빌론에서 진행된 수많은 건축 공사를 실제로 후원한 인물이 느부갓네살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자랑하는 태도로 말하자면, 느부갓네살은 다름 아닌 벽돌들에 자기 이름을 찍어 놓기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마카베오 시대(기원전 167-63년)에 살았다고 여겨지는 날조자가 어떻게 그러한 건축 공사에 대해서 알 수 있었는지, 그것도 그러한 건축 공사가 있은 지 약 4세기나 지난 후에 그리고 고고학자들이 그러한 사실을 밝히기 오래 전에 알 수 있었는지 다니엘서의 비평가들은 설명하지 못합니다.

18.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의 통치 아래서 각기 다른 처벌 방식이 사용된 것에 관한 다니엘의 기록은 어떻게 정확성을 반영합니까?

18 다니엘서는 또한 바빌로니아의 법과 메디아-페르시아의 법 사이의 몇 가지 주된 차이점도 알려 줍니다. 예를 들면, 바빌로니아의 법에 의해서 다니엘의 세 동무는 왕의 명령에 순종하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불타는 가마 속에 던져졌습니다. 몇십 년 후에 다니엘은 자신의 양심을 범하게 하는 페르시아의 법에 순종하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사자 굴에 던져졌습니다. (다니엘 3:6; 6:7-9) 일부 비평가들은 불타는 가마에 대한 기록을 전설이라고 배척하려고 하였지만, 고고학자들은 고대 바빌론에서 이러한 처벌 방식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글을 실제로 발견하였습니다. 하지만 메디아 사람들과 페르시아 사람들에게 불은 신성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다른 혹독한 처벌 방식을 생각해 냈습니다. 그러므로 사자 굴과 같은 처벌 방식이 있었다고 해도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19. 다니엘서는 바빌로니아와 메디아-페르시아의 법 체계 사이에 존재했던 어떠한 대조적인 차이를 분명히 밝혀 줍니까?

19 또 다른 점에서도 대조적인 차이가 나타납니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이 마음대로 법을 제정하고 변경할 수 있었음을 알려 줍니다. 다리우스는 결코 ‘메디아 사람과 페르시아 사람의 법’을 변경할 수 없었으며, 심지어 자기 자신이 제정한 법도 변경할 수 없었습니다! (다니엘 2:5, 6, 24, 46-49; 3:10, 11, 29; 6:12-16) 역사가 존 C. 휘트콤은 다음과 같이 기술합니다. “고대 역사는, 법이 왕에게 복종했던 바빌론과 왕이 법에 복종했던 메디아-페르시아 사이에 그러한 차이점이 있었음을 실증해 준다.”

20. 벨사살이 베푼 잔치에 관한 어떠한 상세한 기록이 다니엘이 바빌로니아의 관습에 대해 직접 얻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반영합니까?

20 다니엘 5장에 기록되어 있는, 벨사살이 베푼 잔치에 관한 오싹하게 만드는 이야기도 매우 상세합니다. 아마 그 잔치는 가벼운 마음으로 먹고 거나하게 마시는 일로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포도주에 대한 언급이 여러 번 나오기 때문입니다. (다니엘 5:1, 2, 4) 사실, 그와 비슷한 잔치를 묘사한 부조(浮彫)들은 오로지 포도주만 마시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잔치에서는 포도주가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 같습니다. 다니엘은 또한 이 연회에 여자들—왕의 첩들과 후궁들—도 참석해 있었다고 언급합니다. (다니엘 5:3, 23) 고고학은 바빌로니아의 관습에 대한 이러한 상세한 기록의 확실성을 뒷받침해 줍니다. 잔치에 아내들이 남편과 배석한다는 것은 마카베오 시대의 유대인과 그리스인들에게는 못마땅하게 여겨지는 일이었습니다. 아마 그러한 이유에서, 다니엘서의 그리스어 칠십인역 초기 번역판들에서는 이 여자들에 대한 언급을 빼버렸을 것입니다. * 그런데 비평가들은 다니엘서의 날조자가 「칠십인역」이 만들어진 바로 그 그리스화한 문화에서, 어쩌면 「칠십인역」이 만들어진 바로 그 시대에 살았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21. 다니엘이 바빌론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시대와 그 시대의 관습에 대해 세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가장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21 그처럼 상세한 기록을 고려해 볼 때, 「브리태니카 백과 사전」에서 다니엘서의 필자가 유대인들이 유배 생활을 하던 시대에 관해 “대략적이면서도 부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라고 기술할 수 있다는 것은 거의 믿기 어려운 일처럼 보입니다. 여러 세기 후에 살았던 날조자가 어떻게 고대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의 관습에 대해 그렇게도 잘 알 수 있었겠습니까? 또한 그 두 제국은 기원전 2세기가 되기 훨씬 전에 쇠퇴하였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때에는 물론 고고학자도 없었으며, 그때에 살던 유대인들은 외국 문화와 역사에 대한 지식에 자부심을 느끼지도 않았습니다. 다니엘이라는 이름을 지닌 성서의 책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자신이 기술한 시대와 사건들을 눈으로 목격한 예언자 다니엘뿐이었습니다.

외부적인 요인들은 다니엘서가 날조된 기록임을 증명하는가?

22. 히브리어 성경 정경에서 다니엘서가 분류된 방식과 관련하여 비평가들은 어떠한 주장을 합니까?

22 다니엘서를 공격하는 가장 흔한 주장 가운데 하나는 히브리어 성경 정경에서 다니엘서가 분류되는 방식과 관련이 있습니다. 고대 랍비들은 히브리어 성경을 구성하는 책들을 세 부류—율법서, 예언서, 성문서—로 분류하였습니다. 랍비들은 다니엘서를 예언서가 아니라 성문서(聖文書)로 분류하였습니다. 이것은 다른 예언자들의 책이 수집되고 있었을 당시 다니엘서는 틀림없이 알려져 있지 않았음을 의미한다고 비평가들은 주장합니다. 다니엘서가 성문서로 분류되어 있는 것은 아마 성문서들이 나중에 수집되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것입니다.

23. 고대 유대인들은 다니엘서를 어떻게 여겼으며, 우리는 그 점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23 하지만 성서 연구가들이 모두 고대 랍비들이 그처럼 엄격하게 정경을 구분했다는 데 혹은 랍비들이 다니엘서를 예언서에서 제외시켰다는 데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랍비들이 다니엘서를 성문서로 분류했다고 해서 다니엘서가 후에 쓰여졌음을 증명하는 것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명성 있는 학자들은 랍비들이 다니엘서를 예언서에서 제외시킨 이유를 여러가지로 제시해 왔습니다. 예를 들면, 랍비들은 다니엘서로 인해 감정이 상했거나 다니엘이 외국에서 세속 관직을 맡고 있었다는 면에서 다니엘을 다른 예언자들과 다른 독특한 사람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이든, 참으로 중요한 점은 이것입니다. 즉 고대 유대인들은 다니엘서에 대한 깊은 존중심이 있었으며 다니엘서를 정경으로 간주했다는 사실입니다. 더욱이, 증거가 암시하는 바에 의하면, 히브리어 성경의 정경은 기원전 2세기가 되기 오래 전에 완성되었습니다. 기원전 2세기에 쓰인 몇몇 책들을 포함하여, 정경이 완성된 후에 쓰인 다른 책을 첨가하는 일은 결코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24. 외경인 이클리지애스티커스는 다니엘서를 공격하는 데 어떻게 사용되어 왔으며, 어떠한 사실이 그러한 추리가 잘못되었음을 알려 줍니까?

24 모순되게도, 후에 첨가되어 그처럼 배척당한 책 중의 하나가 다니엘서를 공격하는 주장을 펴는 데 사용되어 왔습니다. 예수 벤 시라크가 쓴 외경인 이클리지애스티커스(일명 시라크의 아들 예수의 지혜서)는 기원전 180년경에 기록된 것 같습니다. 비평가들은 그 책에 나오는 의로운 사람들의 긴 명단에서 다니엘이 빠져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좋아합니다. 그 당시 다니엘은 틀림없이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었을 것이라고 그들은 추리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학자들 간에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점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동일한 명단에는 에스라와 모르드개(두 사람 다 유배 생활 이후의 유대인들에게 위대한 영웅으로 비쳐진 인물), 선한 왕 여호사밧, 올바른 사람 욥도 빠져 있으며, 모든 재판관 중에 사무엘의 이름만 언급되어 있습니다. * 의로운 사람을 총망라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도 없는, 정경도 아닌 책에 나오는 명단에서 그러한 사람들이 빠져 있다는 이유로 그러한 사람들을 모두 가공 인물이라고 배척해야 합니까? 상식을 벗어난,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다니엘서의 확실성을 뒷받침해 주는 외부의 증언

25. (ㄱ) 요세푸스는 다니엘의 기록이 참됨을 어떻게 증언하였습니까? (ㄴ) 알렉산더 대왕에 관한 요세푸스의 기록과 다니엘서는 알려진 역사와 어떤 면에서 부합됩니까? (두 번째 각주 참조) (ㄷ) 언어학적 증거는 다니엘서의 확실성을 어떻게 뒷받침해 줍니까? (26면 참조)

25 이제 다시 긍정적인 면에 주의를 기울여 보기로 합시다. 히브리어 성경 가운데 다른 어떤 책도 다니엘서만큼 확실성이 잘 증명된 책은 없음을 시사하는 증언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유명한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가 다니엘서의 확실성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알렉산더 대왕이 기원전 4세기에 페르시아와 전쟁을 벌이던 중에 예루살렘에 왔으며, 예루살렘의 제사장들은 그에게 다니엘서의 사본을 한 부 보여 주었습니다. 알렉산더는 제사장들이 자기에게 지적해 준 다니엘의 예언에 나오는 말씀이 페르시아 정벌을 포함한 자신의 군사 원정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결론을 스스로 내렸습니다. * 이러한 일이 있었던 것은, 비평가들이 주장하는 바 다니엘서를 “날조”하는 일이 있기 약 한 세기 반 전입니다. 물론, 비평가들은 그러한 기록을 한 요세푸스를 공박해 왔습니다. 그들은 또한, 요세푸스가 다니엘서에 나오는 예언 중 일부가 성취되었다고 말한 점과 관련해서도 요세푸스를 공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가 조지프 D. 윌슨이 언급한 것처럼, “[요세푸스]는 그 문제에 대하여 세상에 있는 모든 비평가보다 더 많은 점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26. 사해 두루마리는 다니엘서의 확실성을 어떻게 뒷받침해 주었습니까?

26 다니엘서의 확실성은 이스라엘에 있는 쿰란의 동굴들에서 사해 두루마리가 발견되었을 때 한층 더 뒷받침되었습니다. 1952년에 발견된 것들 가운데는 놀랍게도 다니엘서의 두루마리와 단편들이 여러 개 있었습니다. 그 중 가장 오래 된 것은 추정 연대가 기원전 2세기 말까지 거슬러올라갔습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이른 시기에도 다니엘서는 이미 잘 알려져 있었고 널리 존중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존더반 성서 도해 백과 사전」(The Zondervan Pictorial Encyclopedia of the Bible)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다니엘서가 마카베오 시대에 기록되었다고 추정하는 일은 이제 그만두어야 한다. 그렇게 추정하면, 다니엘서가 기록된 때부터 그 책이 마카베오를 추종하는 종파의 서재에 사본 형태로 등장할 때까지 도저히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설정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27. 다니엘이 바빌론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잘 알려져 있었던 실재 인물이라는 가장 오래 된 증거는 무엇입니까?

27 그런데 다니엘서의 확실성을 증명해 주는 훨씬 더 오래 되고 한층 더 신뢰할 만한 증언이 있습니다. 다니엘과 동시대에 살았던 사람으로 예언자 에스겔이 있었습니다. 에스겔 역시 바빌론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에 예언자로 일하였습니다. 바로 그 에스겔서에서 다니엘의 이름을 여러 차례 언급합니다. (에스겔 14:14, 20; 28:3) 이러한 언급을 볼 때, 다니엘은 심지어 기원전 6세기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이미,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인 노아와 욥과 나란히 언급될 만한 자격이 있을 정도로 의롭고 지혜로운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장 위대한 증인

28, 29. (ㄱ) 다니엘서의 확실성에 대한 모든 증거 중 가장 설득력 있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ㄴ) 예수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8 하지만 마지막으로, 다니엘서의 확실성에 대한 모든 증인 가운데서도 가장 위대한 증인에 대해 고려해 보기로 합시다. 그분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께서는 마지막 날에 대한 설명 가운데서 “예언자 다니엘”과 다니엘이 한 예언 한 가지를 언급하십니다.—마태 24:15; 다니엘 11:31; 12:11.

29 그런데 다니엘서가 마카베오 시대에 기록되었다는 비평가들의 이론이 옳다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그 날조된 기록에 속으신 것이거나,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으로 마태가 인용하고 있는 말씀을 예수께서 전혀 하신 적이 없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느 쪽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마태의 복음 기록을 신뢰할 수 없다면 성서의 다른 부분은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마태의 기록에서 그 문장을 빼버린다면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다음에는 어떤 어구들을 또 빼버릴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것으로, 가르치고 ·⁠·⁠· 사물을 바로잡[는] ·⁠·⁠· 데 유익합니다.” (디모데 둘째 3:16) 그러므로 다니엘이 사기꾼이라면, 바울 또한 사기꾼일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속으셨을 가능성이 있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다니엘서가 기록될 때 그분은 하늘에서 살고 계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심지어 이렇게 말씀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존재하기 전부터 내가 있었습니다.” (요한 8:58) 지금까지 살았던 모든 사람 가운데서 다니엘서의 확실성에 대해 문의해 볼 만한 분이 있다면, 가장 적합한 분은 다름 아닌 예수일 것입니다. 그러나 문의해 볼 필요도 없습니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그분의 증언은 더 이상 확실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합니다.

30. 예수께서는 또한 어떻게 다니엘서의 확실성을 증명하셨습니까?

30 예수께서는 또한 침례받으실 때 다니엘서의 확실성을 증명하셨습니다. 그때 그분은 메시아가 되시어, 다니엘서에 나오는 햇수로 69주에 대한 예언을 성취시키셨습니다. (다니엘 9:25, 26; 이 책 11장 참조) 다니엘서가 그 책에서 주장하는 때보다 훨씬 뒤에 기록되었다는 이론이 옳다고 해도, 다니엘서의 필자는 여전히 약 200년 앞서서 미래에 일어날 일을 알고 있었던 셈입니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날조자에게 영감을 주어 거짓된 이름으로 참 예언을 하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 충실한 사람들은 예수의 증언을 진심으로 받아들입니다. 세상의 모든 전문가들과 모든 비평가들이 하나로 뭉쳐 들고일어나서 다니엘서를 배척한다 하더라도, 예수의 증언은 그들의 생각이 틀렸음을 증명해 줄 것입니다. 그분은 “충실하고 참된 증인”이시기 때문입니다.—계시록 3:14.

31. 많은 성서 비평가들이 다니엘서의 확실성을 여전히 확신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1 많은 성서 비평가들은 심지어 예수의 증언을 듣는다 해도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주제를 철저히 검토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무리 많은 증거가 쌓여도 과연 비평가들을 납득시키기에 충분하겠는가 하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옥스퍼드 대학교의 한 교수는 이렇게 기술하였습니다. “‘초자연적인 예언이란 있을 수 없다’는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편견이 남아 있는 한, 이의에 대답해 주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결과도 얻을 수 없다.” 따라서 비평가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 때문에 눈이 멀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이 선택한 결과이며, 그로 인해 스스로 손해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32. 다니엘서를 연구함에 따라 무슨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까?

32 당신의 경우는 어떠합니까? 이제 다니엘서의 확실성을 의심할 이유가 전혀 없음을 알게 되었다면, 당신은 새로운 발견을 위한 흥미진진한 항해를 떠날 준비가 된 것입니다. 당신은 다니엘서에 나오는 이야기들이 감동적이며, 예언들은 정신을 빼앗아 갈 정도로 흥미진진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다니엘서의 각 장을 살펴봄에 따라 당신의 믿음이 더욱 강해질 것이라는 점입니다. 당신은 다니엘의 예언에 면밀한 주의를 기울인 것에 대해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각주]

^ 4항 일부 비평가들은, 고대의 일부 비정경들이 가명으로 쓰여진 것처럼, 다니엘서의 필자도 다니엘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고 말함으로써 날조했다는 비난을 완화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성서 비평가인 페르디난트 히트치히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다니엘서의 경우, 다른 필자가 기록했다 해도, 가명을 사용하는 일반적인 경우와는 차이가 있다. 그런 경우에도 이 책은 날조된 기록이며, 그렇게 한 의도는 독자들을 위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어디까지나 독자들을 속이기 위해서이다.”

^ 8항 바빌론이 함락될 때 나보니두스는 외유 중이었다. 따라서 그 때에는 벨사살을 왕이라고 기술하는 것이 적절하였다. 비평가들은 세속 기록에서는 벨사살에게 왕이라는 칭호를 공식적으로 부여하지 않는다고 트집을 잡는다. 하지만 고대의 증거는, 그 당시 백성들이 심지어 총독도 왕이라고 불렀을지 모른다는 점을 알려 준다.

^ 20항 히브리어 학자 C. F. 카일은 다니엘 5:3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칠십인역」은 이 구절에서, 그리고 23절에서도, 마케도니아 사람과 그리스 사람과 로마 사람들의 관습에 따라 여자들에 대한 언급을 빼버렸다.”

^ 24항 그와는 대조적으로, 사도 바울이 영감을 받아 기록한, 히브리 11장에 언급된 충실한 남녀들의 명단은 다니엘서에 기록된 사건도 언급하는 것 같다. (다니엘 6:16-24; 히브리 11:32, 33) 그러나 사도 바울의 명단도 의로운 사람을 총망라하고 있지는 않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을 포함해서 그 명단에 이름이 나와 있지 않은 사람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존재한 적이 없는 인물임을 증명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 25항 일부 역사가들은 이 일은 알렉산더가 페르시아 사람들의 오랜 우방이었던 유대인들을 매우 친절하게 대했던 이유를 설명해 준다고 말해 왔다. 당시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의 모든 우방을 멸하기 위해 원정 중이었다.

어떤 점을 알게 되었습니까?

● 다니엘서는 어떠한 비난을 받아 왔습니까?

● 다니엘서에 대한 비평가들의 공격이 근거가 희박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 다니엘의 기록의 확실성을 뒷받침해 주는 무슨 증거가 있습니까?

● 다니엘서의 확실성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연구 질문]

[26면 네모]

언어 문제

다니엘서는 기원전 536년경에 기록이 완료되었다. 이 책은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기록되었으며, 그리스어와 페르시아어 단어도 약간 나온다. 이처럼 여러 언어가 섞여 있는 것은 성경 가운데서도 특이한 경우이지만 유일한 경우는 아니다. 성서 에스라서도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기록되었다. 그런데도 일부 비평가들은 다니엘서의 필자가 이러한 언어들을 사용한 방식은 그 필자가 이 책을 기원전 536년보다 훨씬 후에 기록하였음을 증명한다고 주장한다. 널리 인용되고 있는 한 비평가의 말에 따르면, 다니엘서에 그리스어 단어가 사용된 것을 보면 다니엘서가 훨씬 뒤에 기록되었다는 점을 틀림없이 알 있다는 것이다. 그 비평가는 히브리어도 다니엘서가 훨씬 뒤에—기원전 2세기나 되어서야—기록되었다는 점을 뒷받침해 주고 있고, 아람어도 적어도 그러한 추정을 가능하게 해 주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모든 언어학자가 다 그러한 주장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일부 권위자들은 다니엘서에 사용된 히브리어는 에스겔서나 에스라서에 나오는 히브리어와 비슷하며, 이클리지애스티커스와 같은 훨씬 뒤에 기록된 외경에 나오는 히브리어와는 다르다고 말해 왔다. 다니엘서에 사용된 아람어에 관해서는, 사해 두루마리 가운데서 발견된 두 개의 문서를 참조해 보기로 하자. 그 문서들도 아람어로 기록되어 있으며 기원전 1세기나 2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다니엘서가 날조되었다고 여겨지는 때와 시간차가 별로 많이 나지 않는 때에 기록되었다. 그러나 학자들은 이 문서에 나오는 아람어와 다니엘서에 나오는 아람어는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지적해 왔다. 따라서 일부 학자들은 다니엘서는 비평가들이 주장하는 것보다 여러 세기 전에 기록된 책이라는 견해를 피력한다.

다니엘서에 나오는 “문제가 되는” 그리스어 단어들은 어떠한가? 이 단어들 중 일부는 페르시아어이지 결코 그리스어가 아님이 밝혀졌다! 여전히 그리스어라고 여겨지고 있는 단어들은 오로지 세 가지 악기 이름뿐이다. 이 세 단어가 들어 있다는 사실이 과연 다니엘서가 훨씬 뒤에 기록되었다고 추정할 만한 확실한 근거가 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고고학자들이 알게 된 사실에 의하면, 그리스 문화는 그리스가 세계 강국이 되기 여러 세기 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더욱이, 그리스 문화와 언어가 널리 영향을 미치고 있던 기원전 2세기에 다니엘서가 기록되었다면, 다니엘서에 그리스어 단어가 겨우 세 개만 들어 있었겠는가? 결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훨씬 더 많은 단어가 들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언어학적 증거도 다니엘서의 확실성을 여실히 뒷받침해 주고 있다.

[12면 전면 삽화]

[20면 삽화]

(위) 느부갓네살이 자신이 추진한 건축 공사에 대해 자랑하는 내용이 들어 있는 비문

(아래) 나보니두스 왕과 그의 아들 벨사살의 이름이 나오는 바빌로니아의 신전에서 발견된 원주

[21면 삽화]

나보니두스 연대기에 의하면, 키루스의 군대는 전투 한 번 제대로 해 보지도 않고 바빌론에 입성하였다

[22면 삽화]

(오른쪽) 나보니두스가 통치권을 장자에게 맡겼음을 알려 주는 “나보니두스의 운문 기록”

(왼쪽) 느부갓네살이 유다를 침공하였음을 알려 주는 바빌로니아의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