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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리아

아시리아

(Assyria)

고대에 메소포타미아 평야의 북쪽 끝, 오늘날 현대 국가 이라크가 있는 지역의 최북단에 자리 잡고 있었던 나라에 사용된 이름. 기본적으로, 아시리아는 티그리스 강과 소(小)자브 강에 의해 형성된 삼각형 모양의 지역 안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그 두 강은 대체로 아시리아의 서쪽과 남쪽 경계를 이루었다. 한편 고대 아르메니아의 산들은 북쪽 경계가 되었고, 자그로스 산맥과 메디아의 땅은 동쪽 경계가 되었다. 하지만 유의해야 할 점으로, 그러한 경계들은 상당히 유동적이어서, 바빌론이 약해졌을 때는 아시리아가 소자브 강 남쪽까지 뻗어 나갔다가도 아시리아의 국운이 기울고 바빌론의 국운이 성할 때는 아시리아가 뒤로 물러났다. 그러한 변동은 다른 경계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으며, 특히 티그리스 강 쪽 경계가 그러하였는데, 아시리아는 일찍이 그 강의 서쪽으로도 세력을 확대하였다. 물론 아시리아 제국은 그보다 훨씬 더 넓은 지역을 포함하게 되었다.—1권, 954면 지도.

아시리아와 바빌론은 양국의 역사 내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 두 나라는 영토 사이에 국경 역할을 할 만한 실질적인 천연 경계가 전혀 없이 한 지역을 공유하고 있는 인접 국가였다. 하지만 아시리아의 본토 지역은 대부분 고지대로 지형이 일반적으로 험하고 기후가 바빌로니아보다 쾌적하였다. 사람들은 바빌로니아 사람들에 비해 더 정력적이고 공격적이었다. 돋을새김들을 보면, 그들은 건장한 체격에 얼굴빛이 거무스름하고, 짙은 눈썹과 턱수염이 있으며 코가 오뚝한 사람들로 묘사되어 있다.

티그리스 강 서쪽에 있는 앗수르라는 도시는 그 지역 최초의 수도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나중에는 니네베가 가장 중요한 수도가 되었으며, 또한 갈라와 코르사바드도 아시리아 군주들이 때때로 수도로 이용하였다. 아시리아 북부 지역에는 지중해와 소아시아로 가는 무역로가 지나갔으며, 아르메니아와 우르미아 호 지역으로 갈라져 나가는 무역로들도 있었다. 아시리아가 치른 전쟁 중 다수는 그러한 무역로를 손에 넣거나 그 통제권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군국주의 아시리아는 본질적으로 군사 강국이었는데, 이 나라의 업적에 관해 역사에 남아 있는 자취는 끔찍스러운 잔학 행위와 탐욕으로 얼룩져 있다. (1권, 958면 사진) 아시리아의 전사 군주 가운데 한 사람인 아슈르나시르팔은 반역한 여러 도시들에 자기가 내린 처벌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나는 그의 도시 성문 앞에 그 성문 위까지 솟는 기둥을 세우고, 반란을 일으킨 모든 수령들의 가죽을 벗겨 그 기둥을 그들의 가죽으로 덮었다. 나는 어떤 사람들은 기둥 안에 가두고 봉하였으며, 어떤 사람들은 기둥 위의 형주에 못 박았다. ··· 그리고 나는 관리들, 반역한 궁정 관리들의 팔다리를 잘랐다. ··· 나는 그들 중 많은 포로들을 불로 태웠고 많은 사람들을 산 채로 포로로 끌고 왔다. 나는 어떤 사람들은 손과 손가락을 잘랐고, 다른 사람들은 코와 귀와 손가락(?)을 잘랐으며, 많은 사람들의 눈을 뺐다. 나는 산 자들로 하나의 기둥을 만들고, 사람의 머리로 또 하나의 기둥을 만들었으며, 도시 주위에 있는 말뚝들(나무줄기들)에 그들의 머리를 묶어 놓았다. 나는 그들의 소년 소녀들을 불로 태웠다. ··· 나는 이십 명을 산 채로 붙잡아 그의 궁전 벽 속에 가두어 버렸다. ··· 나는 그들[그들의 전사들] 가운데 남은 자들을 유프라테스 사막에서 목말라 죽게 하였다.”—「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고대 기록」(Ancient Records of Assyria and Babylonia), D. D. 루컨빌, 1926년, 1권, 145, 147, 153, 162면.

돋을새김들은 포로들이 코나 입술이 갈고리에 꿰어져 거기에 달린 줄에 끌려가는 모습이나 창끝으로 포로들의 눈을 빼는 모습을 종종 묘사한다. 이처럼 적들에게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고통을 가하는 것은 아시리아 사람들의 전쟁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특징이었는데, 그들은 그러한 행위에 대해 뻔뻔스럽게 자랑하였고 아주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다. 그들의 잔인한 태도가 알려지면, 그들이 공격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공포를 불러일으키고 많은 경우 저항을 약화시킴으로, 틀림없이 그들에게 군사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적절하게도 예언자 나훔은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를 “사자들의 거처”와 “피흘림의 도시”로 묘사하였다.—나 2:11, 12; 3:1.

아시리아 사람들은 어떤 종류의 종교를 신봉하였는가?

아시리아의 종교는 대체로 바빌론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아시리아 사람들은 그들의 국가 신인 앗수르(아슈르)를 최고의 신으로 여기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바빌론을 가장 중요한 종교 중심지로 여겼다. 아시리아 왕은 앗수르의 대사제로 일하였다. 아시리아의 한 궁전의 폐허에서 A. H. 레이어드에 의해 발견되어 현재 대영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 한 인장에는 앗수르 신이 머리가 세 개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삼신(三神)들에 대한 신앙만 아니라 오신(五神) 즉 다섯 신으로 이루어진 신들에 대한 신앙 역시 아시리아인의 숭배에서 중요한 부분이었다. 최고의 삼신은 하늘을 상징하는 아누, 사람과 짐승과 새가 사는 지역을 상징하는 벨, 지상과 지하의 물을 상징하는 에아로 이루어져 있었다. 둘째 삼신은 달의 신 신(Sin)과 태양신 샤마시와 폭풍의 신 람만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람만 대신 별의 여왕인 이슈타르가 나오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왕둘 23:5, 11 비교) 그다음에는 다섯 행성을 상징하는 다섯 신이 있었다. 그러한 삼위일체 신들을 구성하는 신들에 대해 「웅거의 성서 사전」(Unger’s Bible Dictionary, 1965년, 102면)에서는 이렇게 알려 준다. “때때로 이 신들은, 각각의 신을 차례로 다른 신들보다 우월한 위치로 드높이는 것 같은 문구들을 사용한 기도에서 개별적으로 언급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만신전(萬神殿)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다른 하급 신들도 있었는데, 그중 많은 신들은 성읍의 수호신 역할을 하였다. 산헤립(센나케리브)은 암살될 당시 니스록에게 숭배를 드리고 있었던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사 37:37, 38.

니네베의 북쪽 궁전에서 출토된 조각. 왕과 왕비가 가든파티를 즐기고 있는 모습. 수금을 연주하는 사람 앞에 있는 나무에는 정복당한 왕의 머리가 매달려 있다

그러한 신들과 관련하여 그들이 신봉한 종교는 정령 숭배적인 종교였다. 다시 말해, 아시리아 사람들은 모든 물체와 자연현상은 정령의 작용으로 살아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의 종교는, 전쟁이 그러한 국가적 종교를 가장 이상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주변 국가들에서 성행하던 다른 자연 숭배와 다소 차이가 있었다. (1권, 956면 사진) 그래서 디글랏-빌레셀(티글라트필레세르) 1세는 자기가 벌인 전투에 관해 “내 주 아슈르가 나를 재촉하였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아슈르바니팔은 자기의 연대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를 보호해 주신 내 주들, 위대한 신들인 아수르샤마스의 명령에 따라 나는 민니에 들어가 승리를 거두며 진군하였다.” (「과거의 기록: 아시리아와 이집트의 기념비」 Records of the Past: Assyrian and Egyptian Monuments, 런던, 1875년, 5권, 18면; 1877년, 9권, 43면) 사르곤은 전쟁에 나가기 전에 주기적으로 이슈타르의 도움을 간구하였다. 군대는 그러한 신들의 기치 아래 진군하였는데, 이 기치들은 아마도 장대에 나무나 금속으로 된 상징물을 부착한 물건이었던 것 같다. 희생으로 바친 동물의 간을 살펴보거나 새가 날아가는 방법 또는 행성들의 위치 등을 통해 확인하는 징조들도 매우 중시하였다. W. B. 라이트의 저서 「고대 도시들」(Ancient Cities, 1886년, 25면)에서는 이렇게 알려 준다. “전쟁은 이 나라의 국가적 사업이었으며 사제들은 끊임없이 전쟁을 선동하였다. 사제들은 정복을 통해 얻은 전리품에 의존하여 주로 생활하였으며, 전리품은 항상 일정 비율을 먼저 사제들에게 할당한 다음 다른 사람들에게 분배되었다. 약탈을 일삼았던 이 민족은 매우 종교심이 강하였기 때문이다.”

문화와 문학과 법률 아시리아 사람들은 인상적인 궁전들을 지었으며 그 안쪽 벽에는 전쟁과 평화에 관한 장면들을 상당히 사실감 넘치게 묘사한 조각(彫刻) 석판들을 붙였다. 돌 하나의 무게가 36톤이나 나가는 석회암 덩어리를 조각하여 만든, 사람의 머리가 있고 날개가 달린 수소 상들이 궁전의 입구를 장식하였다. 그들이 만든 원통 인장들에는 정교한 조각술이 나타나 있다. (고고학 참조) 그들의 주조 기술은 그들이 야금술에 대해 상당한 지식이 있었음을 보여 주었다. 그들의 왕들은 수로교를 세우고 관개 시설을 개발하였다. 또한 그들은 여러 나라에서 들여온 초목과 동물들을 키우는 왕실 식물원과 동물원도 만들었다. 많은 경우 그들의 궁전 건물들에는, 잘 설계된 배수 시설을 갖추어서 상당히 훌륭한 위생 상태를 유지하였다는 증거가 있었다.

종교와 관련이 있는 기치들을 앞세우고 전투에 나가는 아시리아의 병거

님루드에서 출토된 벽판. 아시리아의 군인들이 정복한 도시의 신상들을 운반해 가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몇몇 아시리아 군주들이 세운 거대한 도서관들인데, 그러한 도서관들에는 주요한 역사적 사건, 종교 관련 정보, 법률 및 상업상의 문제 등을 설명하는, 설형 문자로 새겨진 점토판 문서, 각주 비문, 원통 비문들이 수만 개나 소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시리아 역사의 한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는 일부 법률에는 그 나라의 특징으로 매우 자주 부각되는 가혹함이 다시 한 번 잘 나타나 있다. 특정한 범죄에 대해서는 처벌로 신체의 일부를 자르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일례로, 노예 여자는 베일을 쓰고도 사람들 앞에 나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으며, 그러한 법령을 어기는 여자는 귀를 자르게 되어 있었다. 결혼한 여인이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있는 마련이 없었다는 증거로, 이렇게 규정하는 법도 있었다. “결혼한 여인에 관해 그 서판에 나오는 처벌 외에도, 남편은 아내를 매질하고 머리털을 뽑고 귀를 찢거나 상처 입힐 수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법적으로 전혀 죄가 아니다.”—「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의 일상생활」(Everyday Life in Babylonia and Assyria), H. W. F. 사그스, 1965년, 152면.

성서 역사와 세속 역사 성서 기록에서 아시리아는 창세기 2:14에 처음 나오는데, 그 성구에서 모세는 원래 “에덴에서” 나온 강에서 갈라진 네 근원 가운데 하나인 힛데겔 강(티그리스 강)이 그 당시에 “아시리아 동쪽으로 흐른다”고 묘사한다.—창 2:10.

이 땅의 이름은 셈의 아들 앗수르에게서 유래하였다. (창 10:22) 따라서 대홍수가 있은 지 얼마 후, 이 땅에는 처음에 셈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땅은 일찍이 이민족의 침입을 받아, 함의 손자인 니므롯이 아시리아로 들어와서 “니네베르호봇-이르갈라와, 니네베갈라 사이의 레센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큰 도시이다.” (창 10:11, 12. 미 5:6 비교) 창세기 10장에 서로 다른 “언어[들]”이 이미 언급되어 있기는 하지만(창 10:5, 20, 31), 그러한 도시들을 세우는 일이 바벨탑을 세우고 그로 인해 언어가 혼잡하게 된 후에 있었던 것인지의 여부는 명시되어 있지 않다. (창 11:1-9) 하지만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가 바빌론에 뿌리를 두고 발전하였다는 것은 입증된 사실이며, 세속 역사도 그와 일치한다. 후대에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스마엘의 자손들로 이루어진 부족들은 유목 생활을 하며 옮겨 다니다가 아시리아에까지 간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창 25:18.

기원전 1100년에서 900년경 사이의 기간(디글랏-빌레셀 1세의 통치 이후)은 아시리아의 쇠퇴기였는데, 이것이 유리한 상황으로 작용하여 다윗 왕의 통치 때(기원전 1077-1038년) 이스라엘 나라의 영토가 확장되고 또한 솔로몬의 통치 때(기원전 1037-998년) 이스라엘의 세력이 한층 더 확대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그처럼 이스라엘이 팽창할 수 있었던 것은 주로 하느님의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었으며, 따라서 아시리아의 쇠퇴에 의해 좌우된 것이 아니었다.—삼둘 8, 10장; 왕첫 4:21-24.

아슈르나시르팔 2세와 살만에셀(샬마네세르) 3세 아슈르나시르팔 2세의 통치 때에는 아시리아의 침략 위협이 이스라엘에까지 다가오기 시작하였는데, 아슈르나시르팔 2세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무자비한 원정과 잔인한 행동으로 유명하였다. 비문들에서 알려 주는 바에 의하면, 그는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시리아 북부 지역을 침공하였으며 페니키아의 도시들에 조공을 요구하였다. 그의 계승자 살만에셀 3세는 북쪽 이스라엘 왕국과 직접적으로 접촉한 일을 처음으로 기록한 왕이다. 아시리아의 기록에서는 살만에셀이 오론테스 강가에 있는 카르카르까지 진군하여 그곳에서, 그의 주장에 의하면, 동맹을 결성한 왕들과 싸웠다고 알려 준다. 그 전투의 결과는 승패를 결정짓기 어려운 것이었다. 님루드에 있는 살만에셀의 블랙오벨리스크에는 그에게 조공을 바치는 사람들 가운데 예후(기원전 904-877년경)가 언급되며, 예후의 사절이 아시리아의 군주에게 조공을 가져오는 장면을 묘사하는 듯한 돋을새김이 있다.—살만에셀 1번 참조.

아다드니라리 3세와 그의 계승자들 살만에셀 3세의 계승자인 샤마시아다드 5세에 이어 아다드니라리 3세가 아시리아의 왕위에 올랐다. 비문들에서는 그가 다마스쿠스를 공격하고 사마리아의 여호아스로부터 조공을 받았다고 알려 준다. 아마도 기원전 9세기 중엽의 어느 때에(844년경) 예언자 요나는 한 가지 임무를 띠고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로 파견되었는데, 그가 다가오는 멸망에 대해 경고한 결과, 왕을 비롯하여 그 도시 전체가 회개하는 일이 있었다. (욘 3:2-6) 당시 아시리아의 왕은 아다드니라리 3세였을 가능성이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아다드니라리 3세의 뒤를 이은 왕들로는 살만에셀 4세, 아슈르단 3세, 아슈르니라리 5세가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아다드니라리 3세의 아들이었다. 이 시기는 아시리아의 침략 활동과 관련해서는 쇠퇴기에 해당하였다.

디글랏-빌레셀(티글라트필레세르) 3세 성서에 이름이 나오는 최초의 아시리아 왕은 디글랏-빌레셀 3세인데(왕둘 15:29; 16:7, 10), 열왕기 둘째 15:19에는 “”로도 나온다. 역대기 첫째 5:26에는 그 두 이름이 모두 사용되었으며, 그 때문에 과거에는 그들을 별개의 왕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 왕 명부에는 그 두 이름이 같은 인물을 가리키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일부 학자들은 이 왕이 원래는 풀로 알려져 있었는데 아시리아의 왕위에 오르자 디글랏-빌레셀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는 설을 제시한다.—풀, II 1번 참조.

디글랏-빌레셀 3세가 북쪽 이스라엘 왕국의 영토에 쳐들어온 것은 이스라엘의 므나헴 통치 때(기원전 790-781년경)였다. 므나헴은 그에게 은 천 달란트(660만 6000달러)를 주었으며 그리하여 아시리아 사람들이 물러가게 하였다. (왕둘 15:19, 20) 하지만 나중에 이스라엘 왕 베가(기원전 778-759년경)는 시리아 왕 르신과 협력하여 유다 왕 아하스(기원전 761-746년)를 대적하였다. 시리아와 이스라엘이 함께 가하는 그러한 위협이 아시리아 왕의 힘에 의해 반드시 제거될 것임을 알리는 이사야의 예언에도 불구하고(사 7:1-9, 16, 17; 8:3, 4), 아하스는 디글랏-빌레셀이 그 연합 세력을 공격해서 유다에 가해지고 있는 압력을 제거하도록 하기 위해 그에게 뇌물을 보내는 지혜롭지 못한 행로를 택하였다. 이 아시리아 군주는 그에 응하여 이스라엘 왕국의 북쪽 지역에 있는 여러 도시들과 아울러 길르앗과 갈릴리와 납달리 지역을 점령하였다. 통치 초기에 디글랏-빌레셀은 정복한 지역에서 나중에 반란이 일어날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그곳 주민들을 이주시키는 정책을 펴기 시작하였는데, 이번에는 이스라엘 사람들 중 일부를 강제 이주시켰다. (대첫 5:6, 26) 그에 더해, 유다는 이제 아시리아에 예속된 위치에 있게 되었으며, 유다의 아하스는 역시 아시리아 사람들에게 함락된 곳인 다마스쿠스로 가서 디글랏-빌레셀에게 충성과 경의를 표한 것 같다.—왕둘 15:29; 16:5-10, 18; 대둘 28:16, 20, 21. 사 7:17-20 비교.

살만에셀(샬마네세르) 5세 살만에셀 5세는 디글랏-빌레셀 3세를 계승하였다. 이스라엘의 왕위를 찬탈한 호셰아(기원전 758-740년경)는 처음에는 아시리아의 요구에 굴복하여 조공을 바쳤다. 하지만 나중에 그는 이스라엘을 아시리아의 멍에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이집트와 함께 모반을 꾀하였으며, 살만에셀은 사마리아 도시를 삼 년 동안 포위 공격하여 결국 그 도시를 함락시키고(기원전 740년) 이스라엘을 유배하였다. (왕둘 17:1-6; 18:9-11; 호 7:11; 8:7-10) 대부분의 참조 문헌들에서는 살만에셀이 사마리아 정복을 끝내기 전에 죽었고, 그 도시가 마침내 함락되었을 때에는 사르곤 2세가 왕이었다고 알려 준다.—다만 사르곤; 살만에셀 2번 참조.

사르곤 2세 사르곤의 기록에서는 이스라엘 사람 2만 7290명을 유프라테스 강 상류 지역과 메디아로 강제 이주시킨 일에 대해 알려 준다. 또한 그가 블레셋으로 원정을 가서 가드와 아스돗과 아스두딤무를 정복하였다고 기술하는 내용도 있다. 바로 이 원정이 진행되고 있을 때 예언자 이사야는 아시리아 침략자들에 대한 보호책으로 이집트나 에티오피아를 신뢰하는 것이 헛됨을 경고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사 20:1-6) 바빌론과 시리아에서 사람들을 사마리아로 데려와서 그곳에 다시 사람이 살게 한 것은 아마도 사르곤의 통치 때 처음 있었던 일인 듯하다. 나중에 이 아시리아 왕은 이스라엘의 제사장 한 사람을 유배지에서 다시 돌려보내 “그 땅의 하느님의 종교”를 가르치게 하였다.—왕둘 17:24-28. 사마리아 2번; 사마리아 사람 참조.

산헤립(센나케리브) 사르곤 2세의 아들인 산헤립은 히스기야 제14년(기원전 732년)에 유다 왕국을 공격하였다. (왕둘 18:13; 사 36:1) 히스기야가 그의 아버지 아하스의 행동으로 인해 받게 된 아시리아의 지배에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왕둘 18:7) 그러자 산헤립은 유다 일대를 공격하였으며, 46개 도시를 정복한 것으로 전해진다. (사 36:1, 2 비교) 그런 다음 그는 라기스에 있는 자신의 진영에서 전갈을 보내, 히스기야에게 금 30달란트(약 1156만 달러)와 은 300달란트(약 198만 2000달러)의 조공을 요구하였다. (왕둘 18:14-16; 대둘 32:1. 사 8:5-8 비교) 그만한 금액의 조공을 바쳤는데도 산헤립은 자기의 대변자들을 보내 예루살렘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였다. (왕둘 18:17–19:34; 대둘 32:2-20) 그 후 여호와께서 산헤립의 군대 18만 5000명이 하룻밤에 몰살되게 하시자, 이 거만한 아시리아 왕은 퇴각하여 니네베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왕둘 19:35, 36) 나중에 그는 그곳에서 두 아들에 의해 암살되었으며 또 다른 아들인 에살-핫돈이 대신 왕위에 앉게 되었다. (왕둘 19:37; 대둘 32:21, 22; 사 37:36-38) 이러한 사건들은—아시리아 군대가 몰살된 일만 제외하고—산헤립 각주 비문과 에살-핫돈 각주 비문에도 기록되어 있다.—1권, 957면 사진·삽화.

에살-핫돈(에사르하돈) 므낫세의 통치 때(기원전 716-662년), 여호와께서는 아시리아 군대의 대장들이 그 유다 왕을 포로로 잡아 바빌론(당시 아시리아의 지배를 받고 있었음)으로 끌고 가도록 허락하셨다. (대둘 33:11) 일부 학자들은 이 일이 에살-핫돈이 이집트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었던 때에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비문들에서 유다의 메나시(므낫세)는 에살-핫돈에게 조공을 바치는 사람들 가운데 한 명으로 이름이 나온다. 므낫세는 나중에 예루살렘으로 회복되었다. (대둘 33:10-13) 에스라 4:2을 볼 때 북쪽 이스라엘 왕국으로부터 사람들을 이주시키고 또 그리로 사람들을 이주시키는 일은 에살-핫돈의 시대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던 것 같으며, 이사야 7:8의 예언에 언급된 “육십오 년”이라는 기간도 그러한 사실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아하스 1번; 에살-핫돈 참조.

아슈르바니팔 에살-핫돈은 죽기 전에 자기의 아들 아슈르바니팔을 아시리아의 황태자로, 또 다른 아들 샤마시슘우킨을 바빌로니아의 황태자로 임명하였다. 나중에 샤마시슘우킨은 자기 형제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며, 아슈르바니팔은 그 반란을 진압하고 바빌론 도시를 약탈하였다.

아슈르바니팔은 제국의 영토를 최대로 넓힌 인물이었다. 그는 이집트에서 일어난 반란을 평정하였고 테베 도시(노-아몬)를 약탈하였다. 이제 아시리아 제국의 경계는 엘람 지역을 포함하였고, 메디아의 일부 지역을 포함하여 아라라트에 이르렀으며, 서쪽으로는 소아시아의 길리기아까지 이르렀고, 시리아와 이스라엘(하지만 예루살렘은 아니었음)을 가로질러 아래로 이집트와 아라비아에 이르렀고, 바빌로니아를 포함하게 되었다. 그는 에스라 4:10에 나오는 “크고 존귀한 아스납발”인 것 같다.—아스납발 참조.

제국의 몰락 바빌로니아 연대기 B.M. (대영 박물관) 21901에서는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가 바빌론 왕 나보폴라사르 제14년(기원전 632년)에 나보폴라사르와 메디아 사람 키아크사레스의 연합군의 포위 공격을 받아 함락된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알려 준다. “[그들은] 그 도시를 폐허 둔덕들과 (잔해) 더[미들]로 [바꾸어 놓았다].” (「고대 근동 문헌」 Ancient Near Eastern Texts, J. B. 프리처드 편, 1974년, 305면. 대괄호와 소괄호는 원문에서) 그처럼 포학한 아시리아 제국은 수치스러운 종말을 맞았다.—사 10:12, 24-26; 23:13; 30:30-33; 31:8, 9; 나 3:1-19; 습 2:13.

같은 연대기에 의하면, 나보폴라사르 제14년(기원전 632년)에 아슈르우발리트 2세는 하란을 수도로 삼아 아시리아의 통치를 지속시키려고 하였다. 그 연대기는 나보폴라사르 제17년(기원전 629년) 항목에서 이렇게 알려 준다. “두우주월(月)에 아시리아 왕 아슈르우발리트(와) [그를 도우러 온] 이[집]트의 대[군]은 (유프라테스) 강을 건넜으며 하란을 정복하기 위해 [진군을 계속하였다].” (「고대 근동 문헌」, 305면. 대괄호와 소괄호는 원문에서) 사실, 아슈르우발리트는 하란에서 쫓겨난 후 그곳을 다시 정복하려고 한 것이었다. 이 기록은 열왕기 둘째 23:29에서 파라오 느고가 행한 일에 관해 기술하는 내용과 일치한데, 그 일로 인해 유다의 요시야 왕이 죽음을 맞았다. (기원전 629년경) 그 성구에서는 “이집트파라오 느고유프라테스 강가로 아시리아 왕에게 올라왔”다고 알려 주는데, 아마도 그를 돕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느고가 와서 돕고자 했던 “아시리아 왕”은 아슈르우발리트 2세였을 것이다. 그들의 하란 원정은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아시리아 제국은 막을 내렸다.

아시리아 왕”이라는 칭호는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될 당시(완공된 때는 기원전 515년) 아시리아 땅을 지배하였던 페르시아 왕(다리우스 히스타스피스)에게도 사용되었다.—라 6:22.

예언 속의 아시리아 아시리아는 기원전 1473년경에 발람이 한 예언에 등장하였다. (민 24:24) 아시리아는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미가, 나훔, 스바냐, 스가랴의 예언에서 여러 차례 언급되어 있다. 또한 호세아의 예언 전체에 걸쳐 곳곳에 아시리아가 북쪽 이스라엘 왕국을 황폐시킬 것에 관한 경고가 나온다. 배교한 이스라엘과 유다는 그러한 이교 국가들을 의지하면서, “마음이 없는 아둔한 비둘기”같이 이집트와 아시리아 사이에서 종종 갈팡질팡하는 태도를 나타내어 자주 질책을 받았다. (렘 2:18, 36; 애 5:6; 겔 16:26, 28; 23:5-12; 호 7:11) 그러한 행로로 인한 비참한 결과도 생생하게 묘사되었다. (겔 23:22-27) 또한 아시리아 사람들이 비천해질 것과 유배된 이스라엘 사람들이 고토로 돌아올 것도 예언되었다. (사 11:11-16; 14:25; 렘 50:17, 18; 겔 32:22; 슥 10:10, 11) 그리고 결국에는 아시리아 땅과 이집트 땅 사이에 평화로운 관계가 존재하게 되고 그들이 하느님의 은혜 가운데 이스라엘과 연합하여 “땅 한가운데서 축복”이 될 때가 올 것도 예언되었다.—사 19:2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