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바로 가기

차례 바로 가기

예지, 예정

예지, 예정

(foreknowledge, foreordination)

예지란 어떤 일이 발생하거나 어떤 사물이 존재하기 전에 그것에 대해 미리 아는 것을 의미한다. 선견지명이라고도 한다. 이 단어는 성서에서, 전부는 아닐지라도, 주로 창조주 여호와 하느님과 그분의 목적과 관련이 있다. 예정이란 어떤 것을 미리 정하거나 단정하거나 결정하는 것, 또는 미리 정해져 있는 특성이나 상태를 의미한다.

해당 원어 일반적으로 ‘미리 알다’, ‘예지’, ‘미리 정하다’로 번역되는 단어들은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 나온다. 물론 히브리어 성경에도 동일한 기본 사상이 표현되어 있다.

‘예지’는 그리스어 프로그노시스(‘앞’이라는 의미의 프로와 ‘지식’이라는 의미의 그노시스에서 나온 말)를 번역한 말이다. (행 2:23; 베첫 1:2) 관련 동사 프로기노스코는 사람과 관련하여 두 차례 사용되었는데, 특정한 유대인들이 바울과 ‘전부터 알고 지냈다’(그들이 이미 바울을 알고 있었다)고 한 바울의 말에, 그리고 베드로가 자신의 두 번째 편지를 받는 사람들이 ‘미리 알고 있다’고 한 말에 사용되었다. (행 26:4, 5; 베둘 3:17) 후자의 경우에 그렇게 미리 아는 것 즉 예지가 무한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다시 말해서 그 그리스도인들이 베드로가 설명한 미래 사건이나 상태와 관련하여 그 시간과 장소와 상황에 관한 세부점을 전부 알고 있다는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상할 수 있는 일의 개괄적인 윤곽을 알고 있었는데, 그것은 하느님이 베드로와 다른 성서 필자들에게 영감을 주신 결과로 받은 것이다.

‘미리 정하다’ 즉 ‘예정하다’라는 말은 그리스어 프로오리조(‘앞’이라는 의미의 프로와 ‘경계를 표시하다, 경계를 정하다’라는 의미의 호리조에서 온 말)를 번역한 것이다. (“지평선”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horizon]는 ‘경계를 짓는 것’ 또는 ‘한계를 정하는 것’이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호리존을 음역한 것이다.) 그리스어 동사 호리조의 의미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분은 “사람의 아들”로서 자신이 “정해진[호리스메논] 대로 자기의 길을 가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바울은 하느님이 ‘지정된 때와 사람의 거주의 한계를 정하셨다[표시하셨다, 호리사스]’고 말하였다. (누 22:22; 행 17:26) 같은 동사가 인간의 결정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 이를테면 제자들이 궁핍한 형제들에게 구호물자를 보내기로 “결의하였다[호리산]”라고 할 때 사용되었다. (행 11:29) 하지만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미리 정하는 일에 관해 명확하게 언급하는 내용은 하느님께만 적용된다.

알아 둘 요소 하느님과 관련하여 예지와 예정이라는 문제를 이해하려면 몇 가지 요소를 반드시 알아 두어야 한다.

첫째 요소는 미리 알고 미리 정할 하느님의 능력이 성서에 명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여호와께서는 자신이 하느님이라는 증거로서 구원하고 구출하는 일 그리고 심판하고 처벌하는 일을 미리 알고 미리 정할 능력과 또 그런 일을 성취시킬 능력을 제시하신다. 그분이 택하신 백성은 이 사실의 증인이다. (사 44:6-9; 48:3-8) 하느님의 그러한 예지와 예정은 모든 참 예언의 기초를 이룬다. (사 42:9; 렘 50:45; 암 3:7, 8) 하느님은 자신의 백성을 반대하는 나라들에게 그들의 능한 자, 그들의 우상 신들이라고 하는 존재의 신격을 증명해 보라고, 그 신들을 불러서 그와 비슷한 구원이나 심판의 행위를 예언하고 또 그 일을 이룸으로 그렇게 증명해 보게 하라고 도전하신다. 이 점에 있어서 그들의 무능함은 그들의 우상이 ‘바람이요 실재하지 않는 것일 뿐’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사 41:1-10, 21-29; 43:9-15; 45:20, 21.

고려해야 할 둘째 요소는 하느님의 지성 있는 피조물이 누리는 도덕적 자유이다. 하느님이 그런 피조물에게 자유 선택권, 도덕적 자유를 행사할 특권과 책임을 주시어(신 30:19, 20; 수 24:15)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행동에 대해 답변하게 하신다고 성경은 알려 준다. (창 2:16, 17; 3:11-19; 로 14:10-12; 히 4:13) 따라서 지성 있는 피조물은 단순히 자동 장치나 로봇이 아니다. 사람이 도덕적 자유 행위자가 아니라면 실제로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할 수 없다. (창 1:26, 27. 자유 참조) 논리적으로 볼 때, 하느님의 예지(그리고 예정)와 그분의 지성 있는 피조물의 도덕적 자유 사이에 모순점이란 없어야 한다.

고려해야 할 셋째 요소는, 이따금 소홀히 여겨지는 것으로, 하느님의 공의, 정직, 불편부당, 사랑, 자비, 친절을 포함하는 그분의 도덕적 표준과 특성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예지 능력과 예정 능력을 사용하시는 일에 대한 어떤 이해도 그런 요소들 일부만 아니라 전부와 조화되어야 한다. 하느님이 예지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므로, 하느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실 수 있음이 분명하다.—로 4:17.

하느님은 사람들이 할 일을 모두 미리 알고 계시는가?

그러면 이런 질문이 제기된다. 그분은 한정 없이, 아무 제한 없이 예지력을 행사하시는가? 그분은 영적 피조물이든 인간이든 자신의 피조물 모두의 미래의 행동을 전부 예견하고 예지하시는가? 그런 행동을 미리 정하거나 모든 피조물의 최종 운명이 어떠할 것인지를, 피조물이 존재하기도 전에 예정하시는가?

아니면, 하느님이 예지력을 행사하실 때는 선택적으로 그리고 선별적으로 하여, 예견하고 예지하기로 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그렇게 하시지만, 예견하거나 예지하지 않기로 하시는 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가? 하느님이 피조물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실 때는 피조물이 존재하기 전이 아니라 피조물의 생활 행로를 보고 또 시험 아래서 증명한 태도를 본 다음에야 결정하시는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반드시 성경 자체에서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밝혀진 것을 포함하여 하느님의 행동과 그분이 피조물을 대하신 일에 관해 성경에서 알려 주는 지식에서 나와야 한다.—고첫 2:16.

예정설 하느님은 예지력을 무한히 행사하시고, 모든 이의 행로와 운명을 미리 정하신다고 하는 견해를 예정설이라고 한다. 예정설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신성과 완전성을 고려할 때 그분은 과거와 현재만 아니라 미래에 관해서도 전지해야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고 추리한다. 이 사상대로라면 모든 일을 극히 세부점까지도 미리 알지 못하는 것은 불완전한 하느님이라는 증거이다. 피조물이 출생하기도 전에 하느님이 미리 예정하신다는 증거로 이삭의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 같은 사례가 제시되고(로 9:10-13), 또 창조가 시작되기 전에도 하느님이 자신의 모든 피조물의 미래를 예지하고 예정하셨다는 증거로 에베소 1:4, 5 같은 성구가 언급되기도 한다.

이것이 바른 견해라면 의당 성경에 나오는 하느님의 특성, 표준, 목적 및 그분이 피조물을 대하시는 의로운 방식을 포함하여 앞서 언급된 모든 요소들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계 15:3, 4) 그래야 우리는 그런 예정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올바로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견해대로라면, 하느님이 천사나 지상의 인간을 창조하기 전에 예지력을 행사하여 그 창조의 결과를 다 예견하고 예지하셨다는 뜻일 것이다. 그중에는 자신의 영자(靈子) 중 하나가 반역할 것과 뒤이어 에덴에서 첫 인간 부부가 반역할 것(창 3:1-6; 요 8:44), 그 반역으로 인한 나쁜 결과가 모두 이 시대와 후대까지 이어질 것도 포함된다. 이렇게 보면 역사에 기록된 모든 악은 (범죄와 부도덕, 압제와 그로 인한 고통, 거짓말과 위선, 거짓 숭배와 우상 숭배는) 창조가 시작되기 전에, 극히 세세한 모든 점까지 단지 하느님의 정신 속에만, 미래에 대한 그분의 예지라는 형태로 존재했었다는 의미일 수밖에 없다.

인류의 창조주가 인간 창조 이래 역사에 존재한 모든 일을 예지할 능력을 실제로 행사하셨다면, 그 후로 빚어진 악이란 악은 모두 하느님이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라고 말씀하셨을 때 고의로 발생하게 하신 셈이다. (창 1:26) 이런 사실로 보면 예정설 개념의 합리성과 일관성에 의문이 제기된다. 더구나 제자 야고보가 알려 주듯이, 무질서와 사악한 것들은 하늘에 계신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땅에 속하고 동물적이고 악귀적인” 근원에서 오는 것임을 고려할 때 그런 의문이 제기된다.—야 3:14-18.

예지력을 무한히 행사하시는가? 하느님이 미래의 모든 사건과 상황을 세세히 다 예지하시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이 불완전하다는 증거가 될 것이라는 주장은 사실상 완전에 대한 독단적 견해이다. 정확히 정의하면, 완전이란 그처럼 절대적이고 총괄적인 범위가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사실상 어떤 것이 완전하다는 것은 그 가치를 판단할 자격을 가진 자가 정해 놓은 탁월한 표준에 온전히 달하는 것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완전함, 완전성 참조) 궁극적으로 어떤 것이 완전한가를 결정짓는 요소는 하느님 자신의 뜻과 기뻐하시는 바이지 인간의 견해나 개념이 아니다.—신 32:4; 삼둘 22:31; 사 46:10.

예를 들어 보자. 하느님의 전능성은 부인할 여지 없이 완전하고 역량이 무한하다. (대첫 29:11, 12; 욥 36:22; 37:23) 하지만 힘이 완전하다고 해서 그분이 어느 때나 모든 경우에 자신의 전능한 능력을 최대한 다 사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분은 분명히 그렇게 하시지 않았다. 만일 그렇게 하셨더라면, 하느님이 대홍수 때와 그 밖의 경우에 노여움과 진노를 강력하게 표현하여 심판을 집행하셨을 때 고대의 몇몇 도시들과 나라들만 멸망된 것이 아니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오래전에 소멸되었을 것이다. (창 6:5-8; 19:23-25, 29. 출 9:13-16; 렘 30:23, 24 비교) 그러므로 하느님은 힘을 쓰실 때 무한한 능력을 마구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의 목적에 따라 통제하며, 합당한 경우에는 자비로 완화시키기도 하신다.—느 9:31; 시 78:38, 39; 렘 30:11; 애 3:22; 겔 20:17.

그와 비슷하게, 어떤 부면에서 하느님이 자신의 무한한 예지력을 선택적으로, 자신이 기뻐하는 만큼만 행사하기로 하실 경우, 확실히 어떤 인간이나 천사도 “당신은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하고 정당하게 말할 수 없다. (욥 9:12; 사 45:9; 단 4:35) 그러므로 이것은 예견하고 예지하고 예정하는 면에서 하느님이 무엇을 하실 수 있는가 하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다. “하느님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마 19:26) 문제는 하느님이 예견하고 예지하고 예정하기에 합당하다고 보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분은 “기뻐하시는 일은 무엇이든 행하시”기 때문이다.—시 115:3.

예지력을 선택적으로 행사하심 예정설 아닌 대안 즉 하느님이 예지력을 선택적으로, 선별적으로 행사하신다는 주장 역시 하느님 자신의 의로운 표준과 일치해야 하며 그분이 자신의 말씀에서 자신에 대해 밝히신 것과 부합되어야 한다. 예정설과는 반대로, 하느님이 당면 상황을 검토하시고 그렇게 검토하신 것을 근거로 결정을 내리신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성구들이 많이 있다.

이를테면, 창세기 11:5-8에서는 하느님이 땅으로 주의를 돌려 바벨의 상황을 조사하시고, 그때 그곳에서 벌어지는 불의한 계획을 무산시킬 행동을 하기로 결정하시는 것을 묘사한다. 소돔과 고모라에 악이 만연한 뒤 여호와께서는 (천사들을 통하여) 조사해 보기로 결정한 것을 아브라함에게 알려 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들이 행하는 것이 모두 그것에 대해 내게 이른 부르짖음대로인지 알아보려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도 내가 알 수 있을 것이다.” (창 18:20-22; 19:1)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잘 알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으며, 아브라함이 이삭을 희생으로 바치려고 하는 순간까지 이른 후에야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나에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줄을 내가 이제 분명히 알겠다.”—창 18:19; 22:11, 12. 느 9:7, 8; 갈 4:9 비교.

선택적 예지라는 것은 하느님이 자신의 피조물의 미래 행동 전부를 무차별로 예지하지 않기로 선택하실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창조 이후의 모든 역사가 이미 예견되고 예정된 것에 따라 진행된 일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진심으로 첫 인간 부부 앞에 악이 없는 땅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전망을 두실 수 있음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이 첫 인간 자녀에게 자신의 완전하고 죄 없는 대리자로서 행동하여 땅을 자손들로 가득 채우고 낙원으로 만들며 동물을 관리하라고 지시하신 것은, 그저 실패하도록 정해져 있는 임무를 그들에게 주신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참으로 사랑에서 우러나와 특권을 부여한 것이자 그들에 대한 그분의 진실한 열망을 표현하신 것일 수 있다. 하느님이 “선악에 대한 지식의 나무”를 통해 시험을 마련하신 것과 에덴동산에 “생명 나무”를 창조하신 것 역시 인간 부부가 죄를 짓고 결코 “생명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없을 것임을 예지하면서도 그렇게 하신 무의미하거나 냉소적인 처사가 아니었다.—창 1:28; 2:7-9, 15-17; 3:22-24.

간절히 바랄 만한 어떤 것을, 그것이 도달할 수 없는 것임을 미리 알고 있으면서도, 누군가에게 제시하는 것은 위선적이고도 잔인한 일로 여겨진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전망은 모든 사람을 위한 목표, 도달할 수 있는 목표로 하느님의 말씀에 제시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듣는 이들에게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좋은 것을 ‘계속 청하고 계속 찾으라’고 강력히 권하신 뒤, 아버지가 빵이나 물고기를 달라고 하는 자녀에게 돌이나 뱀을 주지 않는다고 지적하셨다. 그때 예수께서는 개인의 정당한 희망을 좌절시키는 일에 대한 아버지의 견해를 알려 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악할지라도 자기 자녀에게 좋은 선물을 줄줄 안다면,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는 청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더 좋은 것들을 주시겠습니까!”—마 7:7-11.

그러므로 하느님이 모든 사람에게 유익과 영원한 축복을 받으라고 초대하며 기회를 주신 것은 진실한 것이다. (마 21:22; 야 1:5, 6) 그분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것처럼, 사람들에게 ‘범법 행위에서 돌아서서 계속 살라’고 진심으로 강력히 권하실 수 있다. (겔 18:23, 30-32. 렘 29:11, 12 비교) 논리적으로 볼 때, 그들 개개인이 악으로 죽을 수밖에 없음을 예지하신 하느님이라면 그렇게 권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 (행 17:30, 31; 디첫 2:3, 4 비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바와 같다. “야곱의 씨에게 ‘너희는 나를 헛되이 찾아라’ 하고 말하지도 않았다. 나는 여호와, 의로운 것을 말하고, 올바른 것을 알린다. ··· 땅 끝에 있는 너희는 모두 내게로 돌이켜서 구원을 받아라.”—사 45:19-22.

그와 비슷한 맥락으로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기술한다. “여호와께서는 [다가오는 결산의 날에 대한] 자기의 약속에 관하여 어떤 사람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더디시지 않습니다. 도리어 아무도 멸망되기를 바라지 않으시고 모두가 회개에 이르기를 바라시기 때문에 여러분에 대하여 참으시는 것입니다.” (베둘 3:9) 하느님이 영원한 구원을 받을 사람과 영원한 멸망을 받을 사람 개개인을 수천 년 전에 이미 정확하게 예지하고 예정해 놓으셨다면, 하느님의 그런 ‘참으심’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이며, “모두가 회개에 이르기를” 바라시는 것이 과연 진실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길 만하다. 영감받은 사도 요한은 “하느님은 사랑”이라고 기록하였으며, 사랑은 ‘모든 것을 바란다’고 사도 바울은 기술한다. (요첫 4:8; 고첫 13:4, 7) 하느님이 모든 사람에게 진실로 너그럽고 친절한 태도를 보이며 그들이 구원을 얻기를 바라신다는 사실, 그들이 더 이상 합당하지 않고 더는 희망이 없음을 증명할 때까지 그렇게 하신다는 사실은 이 뛰어난 하느님의 특성과 일치한다. (베둘 3:9; 히 6:4-12 비교)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하느님의 친절한 특성이 당신을 회개로 인도하려 한다”고 말한다.—로 2:4-6.

끝으로, 하느님의 예지로 말미암아 일부 사람들, 어쩌면 수백만 명이 그리스도 예수의 대속 희생의 혜택을 받을 기회가 출생 전에 이미 꽉 닫혀 버려서 자신이 합당함을 결코 증명할 수 없다면, 대속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는 말도 사실일 수 없을 것이다. (고둘 5:14, 15; 디첫 2:5, 6; 히 2:9) 하느님이 편파적이 아닌 분이라는 말은 분명히 헛된 말이 아니다. “모든 나라에서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의를 행하는 사람은 받아 주”시는 분이다. (행 10:34, 35; 신 10:17; 로 2:11) “하느님을 찾”을 기회는 실제로, 진실로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 ‘그분을 더듬어 찾으면 그분을 실제로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실, 그분은 우리 각자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는다.’ (행 17:26, 27) 그러므로 계시록 끝에서 “누구든지 듣는 사람은 ‘오시오!’ 하고 말하십시오. 누구든지 목마른 사람은 오십시오. 누구든지 원하는 사람은 생명수를 거저 마시십시오”라는 하느님의 간곡한 초대는 헛된 희망이나 공허한 약속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계 22:17.

미리 알고 미리 정해진 것 성서 기록 전체에 걸쳐 하느님이 미리 알고 미리 정하신 일은 한결같이 그분 자신의 목적이나 뜻과 연결되어 있다. ‘목적하다’라는 말은 도달하려는 표적이나 목표로서 자신 앞에 어떤 것을 두는 것을 의미한다. (‘목적’으로 번역되는 그리스어 프로테시스의 문자적 의미는 ‘[어떤 것을] 앞에 놓아두는 것, 앞에 차려 두는 것’이다.) 하느님의 목적은 틀림없이 성취되므로, 그분은 결과를, 자신의 목적의 궁극적 실현을 예지하실 수 있고, 그 결과뿐만 아니라 그것을 달성하는 데 적합하다고 보시는 조치도 미리 정하실 수 있다. (사 14:24-27) 그러므로 여호와는 미래의 사건이나 행동에 관한 자신의 목적을 ‘구상하는’ 분 또는 ‘조성하는’ 분(“도공”[렘 18:4]이란 단어와 관련 있는 히브리어 야차르에서 온 말)으로 묘사되어 있다. (왕둘 19:25; 사 46:11. 사 45:9-13, 18 비교) 하느님은 위대한 도공으로서 자신의 목적과 일치하게 “모든 것을 자기의 뜻이 의도하는 대로 움직이시”며(엡 1:11),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 일을 함께 협력하게 하신다.” (로 8:28) 그러므로 하느님은 특히 미리 정한 자신의 목적과 관련하여 “종말을 처음부터 알려 주고, 이루어지지 않은 일들을 오래 전부터” 알려 주신다.—사 46:9-13.

하느님이 첫 인간 부부를 창조하셨을 때 그들은 완전했고, 하느님은 자신의 창조 활동의 결과를 다 보고 “아주 좋았다”고 하셨다. (창 1:26, 31; 신 32:4) 그분은 인간 부부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미심쩍게 여겨 걱정하신 것이 아니라 “쉬기 시작하셨다”고 기록은 알려 준다. (창 2:2) 그분이 그렇게 하실 수 있었던 이유는, 그분에게는 전능성과 최상의 지혜가 있으시므로, 미래의 어떤 행동이나 상황이나 돌발 사태도 주권자이신 그분의 목적을 실현하는 데 감당하기 어려운 장애나 바로잡지 못할 문제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대둘 20:6; 사 14:27; 단 4:35) 그러하기에, 이런 식으로 하느님이 자신의 예지력을 행사하기를 제한하면 하느님의 목적이 위태롭게 되고 그 목적이 “선견지명의 부족으로 언제든지 틀어질 수 있으므로, 도덕 행위자들의 돌발 행동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체제가 헝클어질 때 그 체제를 바른 상태로 유지하려고 부단히 힘써야 할 것”이라는 예정설의 주장에는 성경적 근거가 없다. 또한 이처럼 선견지명을 선택적으로 행사한다고 해서, 예정설의 주장처럼, 피조물이 “[하느님의] 시책을 망치고 그분의 생각을 계속 바뀌게 하며 그분으로 하여금 화를 내고 혼란에 빠지게 하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도 아니다. (매클린턱과 스트롱 공편 「백과사전」 Cyclopædia, 1894년, 8권, 556면) 심지어 지상에 있는 하느님의 종들도 실제로 ‘다음 날에 대하여 염려’할 필요가 없다면, 당연히 막강한 나라들을 “물통에서 떨어지는 물 한 방울”로 보시는 창조주께서는 그런 염려를 하신 적도 없고 하시지도 않는다.—마 6:34; 사 40:15.

사람들의 집단에 관하여 특정한 집단, 나라, 인류 대다수가 취할 행로를 하느님이 예지하여 그들의 미래 행동의 기본 행로를 예언하고 그에 따라 자신이 취할 합당한 행동을 미리 정하신 사례들이 나와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예지나 예정 때문에 인류의 그런 집합체나 집단 내의 개개인이 스스로 걸어갈 행로를 선택할 자유를 행사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다음의 예들에서 그 점을 살펴볼 수 있다.

노아 시대의 대홍수 전에 여호와께서는 그 멸망의 조치로 인간뿐 아니라 동물의 생명도 없앨 목적을 공표하셨다. 하지만 하느님이 그렇게 결정하신 것은 폭력과 다른 악을 포함하여 그런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가 만연된 뒤였다고 성서 기록은 알려 준다. 그에 더하여 ‘인간의 아들들의 마음을 아실’ 수 있는 하느님이 검사를 하고 “[인간의] 마음의 생각의 모든 성향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셨다. (대둘 6:30; 창 6:5) 하지만 노아와 그의 가족 개개인은 하느님의 은혜를 얻고 멸망당하지 않았다.—창 6:7, 8; 7:1.

그와 비슷하게, 하느님이 이스라엘 나라에게, 그분과의 계약을 지켜 “제사장 왕국과 거룩한 나라”가 될 기회를 주셨지만, 약 40년 후 그 나라가 약속의 땅 경계에 있을 때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그분과의 계약을 어기고, 한 나라로서 그분에게 버림받을 것임을 예언하셨다. 하지만 이 예지도 사전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국가적으로 거역하고 반역하는 일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데리고 들어가기도 전인 오늘날 나는 그들이 나타내고 있는 성향을 잘 알고 있다.” (출 19:6; 신 31:16-18, 21; 시 81:10-13) 그처럼 분명히 드러난 성향으로 인해 악이 증가하여 초래될 결과를 하느님은 예지하실 수 있는데, 그렇게 예지하신다고 해서 그 상태에 대해 책임을 지셔야 했던 것은 아니다. 마치 질이 낮은 재료를 쓰고 엉성한 기술로 지어진 건물이 쉽게 무너질 것임을 어떤 사람이 예지한다고 해서 그렇게 무너진 것에 대해 예지한 사람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아닌 것과 같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하느님의 원리에 따른 것이다. (갈 6:7-9. 호 10:12, 13 비교) 몇몇 예언자들은 하느님이 예정하신 심판의 표현을 예언하는 경고를 전달하였는데, 그 모든 것은 이미 존재하는 상태와 마음 태도에 근거한 것이었다. (시 7:8, 9; 잠 11:19; 렘 11:20) 하지만 여기서도 개개인은 하느님의 조언, 책망, 경고에 반응을 보일 수 있었으며, 실제로 반응을 보여서 그분의 은혜를 받았다.—렘 21:8, 9; 겔 33:1-20.

역시 사람의 마음을 읽으실 수 있는 하느님의 아들은(마 9:4; 막 2:8; 요 2:24, 25) 하느님에게서 예지력을 받아 미래의 상태와 사건, 하느님의 심판의 표현을 예언하셨다. 그분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이라는 집단에게 게헨나의 심판을 예언하셨으나(마 23:15, 33), 사도 바울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그렇다고 해서 바리새인과 서기관 개개인이 멸망받을 운명이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았다. (행 26:4, 5) 예수는 회개하지 않는 예루살렘과 여러 도시들에 화를 예고하셨지만, 그 도시들에 사는 개개인이 그런 화를 당할 것을 아버지께서 예정하셨다고 하지는 않으셨다. (마 11:20-23; 누 19:41-44; 21:20, 21) 예수는 또한 인류의 성향과 마음 태도가 어디로 갈지를 예지하고 “사물의 제도의 종결” 기간에 인류 가운데 만연할 상태와 하느님 자신의 목적이 성취될 것을 예언하셨다. (마 24:3, 7-14, 21, 22) 예수의 사도들 역시 “적그리스도” 같은 특정한 집단에 대한(요첫 2:18, 19; 요둘 7) 그리고 그런 집단에게 미리 정해진 결말에 대한 하느님의 예지를 보여 주는 예언을 선언하였다.—데둘 2:3-12; 베둘 2:1-3; 유 4.

개개인에 관하여 집단들에 관한 예지에 더하여 특정한 개인들도 하느님의 예측에 특별히 관련되어 있다. 여기에는 에서와 야곱(앞서 언급됨), 이집트 탈출 시의 파라오, 삼손, 솔로몬, 요시야, 예레미야, 키루스, 침례자 요한, 이스가리옷 유다, 하느님의 친아들 예수가 있다.

삼손, 예레미야, 침례자 요한의 경우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출생하기 전에 예지력을 행사하셨다. 그렇지만 이 예지로 그들의 최종적 운명이 어떠할 것인지를 명시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예지를 근거로 여호와께서는 삼손이 나실인 서원에 따라 살고 이스라엘을 블레셋 사람들에게서 구출하는 일에 착수할 것을, 예레미야가 예언자로 봉사할 것을, 침례자 요한이 메시아의 선구자로서 준비하는 일을 할 것을 미리 정하셨다. (판 13:3-5; 렘 1:5; 누 1:13-17) 그런 특권을 누리는 대단한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그들이 영원한 구원을 얻는다거나, 죽을 때까지 충실할 것(셋 다 충실하기는 하였음)임이 보증된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여러 아들 중 하나의 이름이 솔로몬일 것임을 예언하셨고, 성전을 짓는 데 솔로몬이 사용될 것임을 미리 정하셨다. (삼둘 7:12, 13; 왕첫 6:12; 대첫 22:6-19) 하지만 이렇게 은혜를 받고 성경의 몇몇 책들을 기록하는 특권까지 누린 솔로몬이 말년에 배교에 빠졌다.—왕첫 11:4, 9-11.

마찬가지로 에서와 야곱의 경우에도 하느님의 예지로 그들의 영원한 운명이 정해진 것이 아니라 그 두 아들에게서 나올 민족들 중 어느 민족이 우위를 차지할 것인지가 결정되었다는 즉 미리 정해졌다는 것이다. (창 25:23-26) 또한 이렇게 우위를 차지할 것이라는 예견으로 지적된 것은 맏아들의 권리 즉 아브라함의 “씨”가 나오는 가계에 들게 되는 특권이 따르는 권리를 야곱이 갖게 된다는 것이었다. (창 27:29; 28:13, 14) 이렇게 하여 여호와 하느님은 사람들의 예상과 부합되는 일반 관습이나 절차에 구애되지 않고 특정한 용도로 개인을 선택한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셨다. 하느님이 정해 주시는 특권이 오로지 업적에 따라 분배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하면 그런 특권을 받은 사람은 자신이 그 특권에 대한 ‘권리를 따 냈다’고 생각하고 그런 특권이 ‘자신에게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사도 바울은 한때는 이스라엘만을 위한 특권으로 보였던 것을 하느님이 과분한 친절로 이방 나라 사람들에게 부여하실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할 때 바로 그 점을 강조하였다.—로 9:1-6, 10-13, 30-32.

여호와께서 ‘야곱[이스라엘]은 사랑하였으나 에서[에돔]는 미워하셨다’는 말을 바울이 말라기 1:2, 3에서 인용하였는데, 말라기서는 야곱과 에서의 시대로부터 오랜 뒤에 기록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 쌍둥이가 출생하기도 전에 여호와께서 그런 견해를 가지셨다는 말이 성서에 나온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아기의 일반 성향과 기질 중 많은 부분이 부모 각각의 유전 인자로 말미암아 수태 시에 결정된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확립된 사실이다. 하느님이 그런 인자를 보실 수 있음은 자명한 일이다. 다윗은 “태아 때의 나를” 여호와께서 보셨다고 말한다. (시 139:14-16. 또한 전 11:5 참조) 두 남자 아이에 관해 여호와께서 미리 정하실 때 그런 하느님의 통찰력이 어느 정도로 영향을 미쳤는지는 말할 수 없어도, 아무튼 그분이 에서보다 야곱을 택하신 것 자체가 에서나 그의 자손인 에돔 사람들이 멸망될 수밖에 없다는 말은 아니다. 심지어 저주받은 가나안 사람들 가운데서도 개인들은 하느님의 계약 백성과 연합하는 특권을 얻고 축복을 받았다. (창 9:25-27; 수 9:27. 가나안, 가나안 사람 2번 참조) 한편 아버지 이삭에게 “생각을 바꾸어 주기를” 에서가 눈물로 진지하게 구한 일은 맏아들의 특별한 축복이 전적으로 야곱에게만 있다는 아버지의 결정을 바꾸어 놓으려는 시도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이 점은 에서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물질주의적 태도에 대해 회개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창 27:32-34; 히 12:16, 17.

요시야에 관한 여호와의 예언으로 볼 때 다윗의 후손 중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어야 하였고, 그가 베델이란 도시에서 거짓 숭배를 없애는 행동을 할 것이 예언되었다. (왕첫 13:1, 2) 3세기 후에 그런 이름을 가진 왕이 이 예언을 성취시켰다. (왕둘 22:1; 23:15, 16) 그렇지만 그는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느고의 말”을 청종하지 않아 그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대둘 35:20-24) 따라서 요시야가 특정한 일을 할 것을 하느님이 예지하고 예정하셨지만, 요시야는 여전히 충고를 청종하거나 무시할 수 있는 도덕적 자유 행위자였다.

그와 비슷하게, 여호와는 키루스라는 정복자를 사용하여 유대인을 바빌론에서 해방시킬 것을 거의 2세기나 앞서 예언하셨다. (사 44:26-28; 45:1-6) 그러나 하느님의 예언 성취로 결국 그 이름을 갖게 된 그 페르시아인이 여호와의 진정한 숭배자가 되었다는 말은 성서에 나오지 않으며, 세속 역사에 따르면 그는 거짓 신들을 계속 숭배하였다.

그러므로 개인의 출생 이전에 예지된 이런 사례는 하느님의 밝혀진 특성이나 공표된 표준과 모순되지 않는다. 또한 하느님이 개인들로 하여금 각자의 의지와는 달리 행동하도록 강요하셨다는 암시도 없다. 파라오나 이스가리옷 유다 및 하느님의 아들의 경우, 여호와께서 그들 각자가 존재하기 전에 예지력을 행사하셨다는 증거는 없다. 이들 개개인의 경우에 하느님의 예지와 예정과 관련하여 특정한 원칙이 예시되어 있다.

그러한 원칙 중 하나는 하느님이 특정한 상황이나 사건을 일으키거나 허락하여, 또는 그분의 영감받은 소식을 듣게 하여 개인을 시험하신다는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은 자유 선택권을 행사하여 결정을 내림으로 여호와께서 읽으실 수 있는 마음의 분명한 태도를 드러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잠 15:11; 베첫 1:6, 7; 히 4:12, 13) 개인이 반응을 보이는 방식에 따라, 하느님은 각자가 자의로 선택한 행로에서 개인을 틀 잡으실 수도 있다. (대첫 28:9; 시 33:13-15; 139:1-4, 23, 24) 그러므로 “땅의 사람의 마음”이 먼저 특정한 방향으로 향하고 난 후에 여호와께서 그 개인의 발걸음을 인도하신다. (잠 16:9; 시 51:10) 시험 아래서 개인의 마음 상태는 불의하고 반역적인 쪽으로 굳어지거나 여호와 하느님께 불굴의 정성을 다하고 그분의 뜻을 행하는 쪽으로 확고해질 수 있다. (욥 2:3-10; 렘 18:11, 12; 로 2:4-11; 히 3:7-10, 12-15) 개인의 선택이 그 정도에 이르렀으므로, 이제 불공정이나 개인의 도덕적 자유를 침해하는 일 없이 개인 행로의 최종 결과가 예지되고 예고될 수 있다.—욥 34:10-12 비교.

이미 살펴본, 충실한 아브라함의 경우가 이러한 원칙들을 예시한다. 반대의 경우는 이집트 탈출 시 냉담하던 파라오의 경우이다. 여호와께서는 “강한 손에 의하지 않고는” 파라오가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떠나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임을 예지하시고(출 3:19, 20), 맏아들의 죽음을 초래하는 재앙을 예정하셨다. (출 4:22, 23) 종종 하느님이 파라오를 대하신 일에 대한 사도 바울의 설명을 부정확하게 이해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이 미리 정한 목적에 따라 개인의 이전 성향 즉 마음 태도와는 무관하게 개인의 마음을 하느님 마음대로 굳어지게 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로 9:14-18) 마찬가지로 여러 번역판에 따르면 하느님은 자신이 “[파라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겠다고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으로 되어 있다. (출 4:21, 「킹」. 출 9:12; 10:1, 27 비교) 하지만 일부 번역판들은 그 히브리어 표현을 여호와께서 ‘[파라오의] 마음이 대담해지게 버려두시다’(Ro), ‘[파라오의] 마음을 완고해지게 두시다’로 옮긴다. (「신세」) 그런 번역을 지지하여, 로더럼의 번역판 부록에서는 히브리어로 사건의 계기가 된 상황이나 사건 허락이 마치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인 양 제시되는 경우가 흔히 있으며, “심지어 적극적인 명령허락 정도의 의미로만 받아들여지기도 한다”고 알려 준다. 그러므로 탈출기 1:17의 히브리어 원문을 직역하면 산파들이 ‘남자 아이들을 살게 하였다’이지만, 실제로는 그들이 남자 아이들을 죽음에 처하는 일을 하지 않음으로 아이들이 살도록 허락한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히브리어 학자들인 M. M. 칼리슈, H. F. W. 게제니우스, B. 데이비스의 말을 인용한 후 로더럼은 파라오가 관련된 그 성구들의 히브리어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파라오가 자신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도록 하느님이 허락하신 것—그를 내버려 두신 것—그에게 그 자신 속에 있는 악을 행할 기회, 상황을 주셨다는 말이다. 그것이 전부이다.”—「강조된 성서」(The Emphasised Bible), 부록, 919면. 사 10:5-7 비교.

이러한 이해를 확증하는 사실로서 파라오 자신이 ‘자기 마음을 완악하게 하였다’고 분명히 알려 주는 기록이 있다. (출 8:15, 32, 「킹」; “마음을 냉담하게 하였다”, 「신세」) 파라오는 이렇게 자신의 의지를 행사하고 자신의 완고한 성향을 따랐으며, 그러한 성향의 결과를 여호와께서 정확하게 예견하고 예고하신 것이다. 여호와께서 파라오에게 기회를 거듭 주셨으므로 파라오는 결정을 내려야 하였고, 그에 따라 그의 태도는 완악해졌다. (전 8:11, 12 비교) 사도 바울이 탈출기 9:16을 인용하면서 알려 주듯이,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능력을 분명히 나타내고 자신의 이름이 온 땅에 알려지게 하기 위하여 이렇게 열 가지 재앙이 다 내리기까지 사태가 진행되는 것을 허용하셨다.—로 9:17, 18.

하느님은 예언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유다가 예수를 배반하도록 예정하셨는가?

이스가리옷 유다의 배반 행로로 인해 하느님의 예언이 성취되고 여호와의 예지와 그분의 아들의 예지가 실증되었다. (시 41:9; 55:12, 13; 109:8; 행 1:16-20) 그렇지만 유다가 그런 행로를 취할 것을 하느님이 미리 정했다고, 그의 운명을 예정하셨다고 할 수는 없다. 예언들에서 예수와 친밀한 누군가가 그분을 배반할 것이 예고되어 있지만, 그렇게 친밀함을 누리던 자들 중 누가 그렇게 될 것인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다. 여기서도 유다의 행동을 하느님이 미리 정하셨다는 말은 성서 원칙에 어긋난다. 사도가 말한 하느님의 표준은 이러하다. “아무에게도 결코 성급히 그대의 손을 얹지 말고, 남의 죄에 참여하는 자가 되지도 말며, 자기를 순결하게 지키십시오.” (디첫 5:22. 디첫 3:6 비교) 예수께서 12사도를 지혜롭고 올바르게 선택하려고 관심을 기울이신 증거로서 결정을 알리기 전에 밤새도록 아버지께 기도하신 일이 있다. (누 6:12-16) 유다가 배반자가 될 것을 하느님이 미리 정해 놓으셨다면, 이는 하느님이 인도하고 지도하신 일에서 모순점을 드러내는 것이며, 앞서 언급한 원칙에 따르면 유다가 범한 죄에 그분도 참여하신 셈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로 선택될 당시 유다의 마음에는 배반적인 태도에 대한 명확한 증거가 없었음이 분명한 것 같다. 유다는 “유독한 뿌리가 나서” 자신을 더럽히도록 허용한 결과, 빗나가서 하느님의 인도가 아니라 마귀가 인도하는 도둑질과 배반의 행로를 받아들였다. (히 12:14, 15; 요 13:2; 행 1:24, 25; 야 1:14, 15. 유다, II 4번 참조) 그렇게 빗나간 일이 특정한 단계에 이르렀을 때 예수께서는 유다의 마음을 읽으시고 그의 배반을 예고하실 수 있었다.—요 13:10, 11.

요한 6:64의 기록에서 일부 제자들이 예수의 특정한 가르침에 걸려 넘어진 경우에 “예수께서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누구이며, 자기를 배반할 사람이 누구인지를 처음부터[“시초부터”, JB] 알고 계셨다”고 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처음”이라는 단어(그리스어, 아르케)가 베드로 둘째 3:4에서 창조의 시작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으나, 이 단어는 다른 때를 가리킬 수도 있다. (누 1:2; 요 15:27) 예를 들어, 사도 베드로가 “성령이 처음에 우리에게 내렸던 것처럼” 이방인들에게도 내렸다고 말했을 때, 그는 자신이 처음으로 제자나 사도가 된 때를 가리킨 것이 아니라 자신의 봉사의 직무에서 중대한 시점 즉 기원 33년 오순절 날에 특정한 목적으로 성령이 “처음” 부어진 때를 가리킨 것임이 분명하다. (행 11:15; 2:1-4) 그러므로 요한 6:64에 관해 랑게의 「성경 주석」(Commentary on the Holy Scriptures, 227면)에서 이렇게 설명한 것에 주의를 기울여 보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처음은 ··· 추상적으로 만물의 처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 그분[예수]이 각 사람을 처음 알게 된 때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며, ··· 그분이 자신의 주위에 제자들을 처음으로 모으신 때도, 메시아로서 그분의 봉사의 직무의 처음도 아니고, ··· 불신이 최초로 몰래 싹 튼[이것 때문에 일부 제자들이 걸려 넘어짐] 때를 가리킨다. 그런 식으로 그분은 자신의 배반자를 처음부터 알고 계셨다.”—P. 샤프 역편, 1976년. 요첫 3:8, 11, 12 비교.

메시아에 관한 예정 여호와 하느님은 메시아가 겪을 고통, 죽음, 뒤이은 부활을 예지하고 예고하셨다. (행 2:22, 23, 30, 31; 3:18; 베첫 1:10, 11) 하느님이 그런 예지력을 행사하여 결정하신 일이 실현되는 것은 부분적으로는 하느님의 능력 행사에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사람들의 행동에 달려 있었다. (행 4:27, 28) 하지만 그러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적대자 사탄 마귀에게 속아 넘어가는 일을 기꺼이 허용한 것이다. (요 8:42-44; 행 7:51-54) 따라서 바울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사탄의 계략을 모르지 않은 것’처럼, 하느님은 마귀가 하느님의 기름부음받은 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대항하여 품을 악한 욕망과 계략을 예견하셨다. (고둘 2:11) 또한 예언된 방식이나 때에 맞지 않게 메시아에게 임하는 어떤 공격이나 획책도 하느님이 능력을 사용하여 제지하거나 막으실 수 있었음이 분명하다.—마 16:21; 누 4:28-30; 9:51; 요 7:1, 6-8; 8:59 비교.

예정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도 베드로의 말 즉 하느님의 희생 제물인 어린양 그리스도가 “세상의[코스무] 기초가 놓이기[그리스어 카타볼레의 변화형] 전에 미리 알려지셨”다는 말을 하느님이 인류 창조 전에 그런 예지력을 행사하셨다는 의미라고 해석한다. (베첫 1:19, 20) ‘기초를 놓는 것’으로 번역되는 그리스어 카타볼레의 문자적 의미는 ‘아래로 던지는 것’이며, 히브리 11:11의 경우처럼 ‘씨를 수태하는 것’을 가리킬 수도 있다. 히브리 4:3, 4에서 알려 주듯이, 하느님이 첫 인간 부부를 창조하셨을 때 인류 세상의 ‘기초가 놓였’지만, 그 후 그 부부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박탈당하였다. (창 3:22-24; 로 5:12) 하지만 하느님의 과분한 친절 덕분에 그들은 씨를 수태하고 자손을 낳도록 허용되었는데, 그 자손 중 하나인 아벨이 하느님의 은혜를 얻고 구속과 구원을 얻을 입장에 있게 되었다고 성서는 구체적으로 알려 준다. (창 4:1, 2; 히 11:4) 주목할 만하게도 예수께서는 누가 11:49-51에서, “세상의 기초가 놓인 때부터 흘려진 모든 예언자의 피”를 언급하면서 이와 병행하여 ‘아벨의 피로부터 스가랴의 피까지’라고 말씀하신다. 이렇게 하여 예수께서는 아벨을 “세상의 기초가 놓인 때”와 연관 지으신다.

메시아인 그리스도는 약속된 씨가 될 분으로서, 이 씨를 통하여 땅의 모든 가족 중 의로운 사람들이 모두 축복을 받게 될 것이었다. (갈 3:8, 14) 그런 “씨”가 처음 언급된 때는 에덴에서 반역이 시작된 후이자 아벨이 출생하기 전이었다. (창 3:15) 이때는 메시아인 그 “씨”의 신분이 분명히 밝혀짐으로 “신성한 비밀”이 계시되기 약 4000년 전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참으로 “오래 지속된 시대 동안 잠잠히 지켜져” 왔다.—로 16:25-27; 엡 1:8-10; 3:4-11.

여호와 하느님은 정하신 때에 자신의 맏아들에게 예언된 그 “씨”의 역할을 이행하고 메시아가 되도록 임무를 주셨다. 그 아들이 창조되기도 전에 또는 에덴에서 반역이 일어나기도 전에 그 아들에게 그런 역할이 “예정”되었음을 알려 주는 것이라고는 전혀 없다. 또한 하느님이 예언을 성취시킬 책임을 맡은 자로 그 아들을 마침내 택하신 것 역시 사전 근거가 없이 이루어진 일이 아니다. 아들을 이 땅으로 보내기 전, 여호와 하느님은 아들과 친밀한 교제를 나눈 기간으로 인해 틀림없이 자신의 아들이 예언적 약속과 모형을 충실하게 성취할 것을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아들을 ‘알게’ 되셨을 것이다.—로 15:5; 빌 2:5-8; 마 11:27; 요 10:14, 15 비교. 예수 그리스도 (시험받고 완전해지다) 참조.

‘부르심을 받고 택함받는’ 자들에 관한 예정 또한 “부르심을 받은 이들” 즉 “택함받은 자들”인 그리스도인과 관련된 성구들도 있다. (유 1; 마 24:24) 이들은 ‘하느님의 예지를 따라 택함받은’ 자들이며(베첫 1:2),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택함받은’ 자들, ‘하느님의 아들로 입양되기로 미리 정해진’ 자들(엡 1:3-5, 11), ‘구원을 얻도록 처음부터 선택되고, 바로 이것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자들(데둘 2:13, 14)로 묘사되어 있다. 이 성구들을 이해하려면 이 성구들이 특정인들에 관한 예정을 가리키는지, 사람들의 집단 즉 하늘 왕국에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할 공동 상속자가 될 사람들로 된 “한 몸”(고첫 10:17)인 그리스도인 회중에 관한 예정을 가리키는지를 알아야 한다.—엡 1:22, 23; 2:19-22; 히 3:1, 5, 6.

이 성구들에 나오는 말씀이 특정인들의 영원한 구원을 미리 정하는 일에 적용된다면 당연히 그 사람들은 결코 불충실해지거나 그 부르심과 관련하여 실패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들에 대한 하느님의 예지가 부정확할 리도 없고, 특정한 것을 위하여 그들을 미리 정한 일이 실행되지 않거나 틀어질 리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의 성구들을 기록하도록 영감을 받은 바로 그 사도들이 알려 주듯이, 그리스도의 대속 희생의 피로 “사신” 바 되고 “거룩하게” 되었으며 “하늘의 거저 주는 선물을 맛보고, 성령에 참여하는 자가 되고, ··· 오는 사물의 제도의 권능들을 맛보고도” 일부 사람들은 회개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떨어져 나가서 멸망을 자초할 것이다. (베둘 2:1, 2, 20-22; 히 6:4-6; 10:26-29) 사도들은 한결같이, 그들의 편지를 받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강력히 권하였다. “여러분에 대한 부르심과 택하심을 스스로 확실히 하기 위하여 더욱더 전력을 다하십시오. 이런 것들을 계속 행하면, 여러분은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두려움과 떨림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계속 이루어 나가십시오.” (베둘 1:10, 11; 빌 2:12-16)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은(고첫 1:1) 자신이 개인적으로 영원한 구원을 받도록 예정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 자신이 ‘하느님이 위로 부르시는 상을 얻으려는 목표’에 도달하려고 힘껏 노력하고 있으며(빌 3:8-15) ‘어떻게든 승인받지 못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고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고첫 9:27.

또한 그런 자들에게 제시된 “생명의 면류관”은 시련 아래서도 죽기까지 충실해야만 부여되는 것이다. (계 2:10, 23; 야 1:12) 하느님의 아들과 함께 누릴 왕권의 면류관을 잃을 수도 있다. (계 3:11) 사도 바울은 자신을 위해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다는 확신을 표현하였는데, 이는 그 자신의 행로의 끝이 가까웠고 “달려갈 길을 끝까지 달렸”음을 확신하였기 때문이다.—디둘 4:6-8.

한편, 앞서 언급한 성구들을 집단에, 그리스도인 회중 즉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거룩한 나라” 전체에(베첫 2:9) 적용되는 것으로 보면, 그 성구들은 (그런 집단을 구성하는 특정인들이 아니라) 그런 집단이 산출될 것임을 하느님이 예지하고 예정하셨음을 의미할 것이다. 또한 그 성구들은 때가 되면 그 집단의 성원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는 사람들 모두가 따라야 할 ‘본’을 하느님이 규정하셨음을, 미리 정하셨음을 의미하고, 이 모든 일을 자신의 목적에 따라 그렇게 하셨음을 의미할 것이다. (로 8:28-30; 엡 1:3-12; 디둘 1:9, 10) 또한 하느님은 그런 자들이 수행할 것으로 기대되는 일과 세상이 그들에게 가져올 고통 때문에 그들이 시험받을 것을 미리 정하셨다.—엡 2:10; 데첫 3:3, 4.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는 일’을 언급하는 성구들에 관하여는 이름을 참조하기 바란다.

운명론과 예정설 그리스인과 로마인을 포함하여 고대의 이교 민족들에게 있어서 개개인 모두의 운명 특히 수명은 흔히 신들이 미리 정해 놓은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스 신화에는 세 여신 즉 생명의 실을 잣는 클로토(실을 잣는 자), 수명을 결정하는 라케시스(몫을 분배하는 자), 시간이 다 차면 생명을 끊는 아트로포스(요지부동인 자)가 사람의 운명을 지배하는 것으로 나온다. 로마 신들 가운데서도 비슷한 삼신을 볼 수 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기원 1세기)에 따르면, 바리새인들은 운명 사상을 하느님에 대한 자신들의 신앙이나 사람에게 부여된 도덕적 자유와 조화시켜 보려고 하였다. (「유대 전쟁사」 The Jewish War, II, 162, 163 [viii, 14]; 「유대 고대사」 Jewish Antiquities, XVIII, 13, 14 [i, 3]) 「새 샤프·헤르초크 종교학 백과사전」(The New Schaff-Herzog Encyclopedia of Religious Knowledge)은 이렇게 기술한다. “아우구스티누스[기원 4, 5세기] 이전에는 그리스도교에서 예정설이 이렇다 하게 진전된 적이 없었다.” 아우구스티누스 이전의 이른바 초기 “교부들” 즉 유스티누스, 오리게네스, 이레나이우스 같은 사람들은 “절대적 예정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며, 자유 의지를 가르친다.” (헤이스팅스의 「종교·윤리 백과사전」 Encyclopædia of Religion and Ethics, 1919년, 10권, 231면) 그들은 그노시스파를 반박할 때, 사람의 도덕적 자유가 “인간성을 구별 짓는 특징, 도덕적 책임의 기초,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사람이 선택할 수 있게 해 주는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신념을 늘 표현하였으며, “인간의 자율과 속박하지 않는 하느님의 뜻”에 대해 말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새 샤프·헤르초크 종교학 백과사전」, S. 잭슨 편, 1957년, 9권, 192, 19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