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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례

침례

(baptism)

침례 과정을 가리키는 그리스어는 밥티스마로서 여기에는 물속에 잠기는 것과 거기서 나오는 것이 포함된다. 그 단어는 ‘담그다, 적시다’를 의미하는 동사 밥토에서 파생된 단어다. (요 13:26) 성서에서 “침례를 주다”는 “(물에) 잠그다”와 같은 말이다. 이 점을 보여 주는 실례로서, 「성서, 개정판」(The Holy Bible, An Improved Edition)에서는 로마 6:3, 4을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또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침례를 받은(잠긴) 우리 모두가 그분의 죽음 안에 침례를 받았다는(잠겼다는) 것을 모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죽음 안에 침례를 받음으로(잠김으로)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또한 Ro; ED 참조) 그리스어 「칠십인역」 탈출기 12:22과 레위기 4:6에서는 ‘담그다’에 해당하는 동일한 단어의 변화형을 사용한다. (NW 각주 참조) 물속에 잠기는 사람은 일시적으로 보이지 않게 ‘묻혔다’가 일으켜져 나온다.

본 항목에서는 (1) 요한의 침례, (2) 예수와 그분의 추종자들의 물 침례, (3)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그리고 그분의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는 것, (4) 불로 받는 침례 등 침례의 네 가지 부면 및 관련된 질문들을 고려한다.

요한의 침례 물 침례를 행하도록 하느님께 권위를 부여받은 최초의 사람은 요한—스가랴와 엘리사벳의 아들—이었다. (누 1:5-7, 57) 그가 “침례자 요한”으로 알려졌다는 사실로 볼 때(마 3:1; 막 1:4) 사람들은 특히 요한을 통해서 물 침례에 주의를 기울이게 된 것으로 보이는데, 성경은 그의 봉사의 직무와 침례가 하느님에게서 비롯된 것이지 요한 스스로 창안한 것이 아니었음을 증명해 준다. 천사 가브리엘은 그가 하느님으로부터 말미암은 일을 할 것이라고 예언하였고(누 1:13-17), 스가랴도 요한이 여호와의 길을 준비할, 가장 높으신 분의 예언자가 될 것이라고 성령에 힘입어 예언하였다. (누 1:68-79) 예수께서도 요한의 봉사의 직무와 침례가 하느님에게서 비롯된 것이라고 확증하셨다. (누 7:26-28) 제자 누가는 이렇게 기록한다. “하느님의 선언이 광야에서 스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 그리하여 그는 ··· 와서 ··· 침례를 전파하였다.” (누 3:2, 3) 사도 요한은 그에 관하여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의 대표자로서 보냄을 받은 사람이 일어났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요 1:6.

여러 번역판들의 누가 3:3을 비교해 보면 요한의 침례의 의미를 한층 더 이해할 수 있다. 요한은 와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상징인 침례를”(「신세」), “회개를 조건으로 하는 침례를”(CB), “사람으로 회개하여 죄를 용서받게 해 주는 침례를”(Kx), “죄를 용서받기 위한 회개의 표시가 되는 침례를”(NE) “전파”하였다. “여러분의 죄에서 돌이키고 침례를 받으십시오. 그러면 하느님이 여러분의 죄를 용서하실 것입니다.” (TEV) 이러한 번역문들을 보면, 죄를 씻어 없애 준 것은 침례가 아니라 회개 및 행로의 변화이며 침례는 그 점을 상징하는 것이었음이 명백하다.

그러므로 요한이 베푼 침례는 하느님이 자신의 종 요한을 통하여 특별히 깨끗하게 해 주는 것이 아니고, 각 사람이 율법을 어겨 지은 죄를 회개하였음을 상징하고 공개적으로 나타내 주는 역할을 하였는데, 그 율법은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게 되어 있었다. (갈 3:24) 요한은 그렇게 하여 한 백성이 “하느님의 구원의 수단을 볼” 수 있도록 준비시켰다. (누 3:6) 그의 일은 “여호와를 위하여 준비된 백성을 마련”하는 역할을 하였다. (누 1:16, 17) 그러한 일이 수행될 것이 이사야와 말라기에 의해 예언되어 있었다.—사 40:3-5; 말 4:5, 6.

일부 학자들은 율법하에 행해진 고대의 정결 의식에서(출 29:4; 레 8:6; 14:8, 31, 32; 히 9:10, 각주), 또는 낱낱의 행동들에서(창 35:2; 출 19:10) 요한의 침례와 그리스도인 침례의 선례를 찾아보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그런 사례들에서 침례의 진정한 의미와 유사한 점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처럼 씻거나 빠는 일들은 의식상의 깨끗함을 위한 것이었다. 몸을 물속에 완전히 담그는 것에 가까운 일은 단 한 경우 있었다. 그것은 나병에 걸려 있던 나아만의 경우였는데, 이때 물에 몸을 담그는 일은 일곱 번 행해졌다. (왕둘 5:14) 그렇게 했다고 해서 그가 하느님과 특별한 관계에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나병이 치료되었을 뿐이다. 더욱이 성경을 보면 유대교 개종자들은 침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할례를 받았다. 유월절이나 신성한 곳에서 행해지는 숭배에 참여하려는 사람은 할례를 받아야 하였다.—출 12:43-49.

또한, 요한의 침례는 필시 유대교 분파인 에세네파나 바리새파에서 본뜬 것이라는 일부 사람들의 주장에도 근거가 전혀 없다. 이 두 분파에는 세정식을 자주 행하게 만드는 요구 사항이 많았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러한 것들이 사람의 전통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어긴 사람들의 계명에 불과하다고 알려 주셨다. (막 7:1-9; 누 11:38-42) 요한은 물에서 침례를 베풀었는데, 그 이유는 그가 말한 바와 같이 하느님이 그를 물에서 침례를 베풀도록 보내셨기 때문이다. (요 1:33) 그를 보낸 것은 에세네파도 바리새파도 아니었다. 그의 사명은 유대교 개종자들을 산출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유대인 회중 성원인 사람들에게 침례를 베푸는 것이었다.—누 1:16.

자신의 일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메시아에 앞서서 길을 예비하는 것에 불과하고 자신은 그분의 더 큰 봉사의 직무를 위해 길을 비켜 주게 되어 있었음을 요한은 알고 있었다. 요한이 침례를 베푼 이유는 이스라엘에게 메시아가 나타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요 1:31) 요한 3:26-30에 따르면, 메시아의 봉사의 직무는 증가하게 되어 있었고 요한의 봉사의 직무는 감소하게 되어 있었다. 예수의 지상 봉사의 직무 기간에 예수의 제자들에 의해 침례를 받아서 예수의 제자들이 되기도 한 사람들은 요한의 침례 방식에 따라 회개의 상징으로 침례를 받은 사람들이었다.—요 3:25, 26; 4:1, 2.

예수의 물 침례 예수께서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신 데에는 필시 요한의 침례와는 매우 다른 의미와 목적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예수는 “아무 죄도 짓지 않으셨으며, 또한 그분의 입에서는 속임수를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베첫 2:22) 그러므로 그분은 회개를 상징하는 행동을 취할 이유가 없으셨다. 요한이 예수에게 침례를 베풀지 않으려고 한 것은 틀림없이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번에는 이대로 하십시오. 그리하여 우리가 의로운 일을 모두 이루는 것이 적합합니다” 하고 말씀하셨다.—마 3:13-15.

누가는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실 때에 기도하셨다고 말한다. (누 3:21) 더 나아가 히브리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의 필자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셨을 때(즉, 막 태어나셔서 시편의 글을 읽고 말할 줄 모를 때가 아니라 침례를 받기 위해 자신을 제공하고 봉사의 직무를 시작하셨을 때) 시편 40:6-8(LXX)과 일치하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당신은 희생과 제물을 원하지 않으시고, 저를 위하여 몸을 예비하셨습니다. ··· 보십시오! 오, 하느님, 저는 (두루마리 책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당신의 뜻을 행하러 왔습니다.” (히 10:5-9) 예수께서는 태생부터 유대 나라의 한 성원이셨고, 그 나라는 하느님과 맺은 국가적인 계약, 즉 율법 계약 안에 있었다. (출 19:5-8; 갈 4:4) 그러므로 이 사실에 의거하여, 예수께서는 침례를 받기 위해 요한에게 나타나셨을 때 이미 여호와 하느님과의 계약 관계 안에 계셨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율법 아래서 자신에게 요구된 것 이상의 그 어떤 일을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분은 ‘예비된’ 자신의 몸을 바치는 일과 관계가 있고 율법에 따라 바쳐지던 동물 희생 마련을 없애는 일과 관련이 있는 자신의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해 아버지 여호와께 자신을 제공하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기술한다. “말씀하신 그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는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히 10:10) 예수에 대한 아버지의 뜻에는 왕국과 관련된 활동도 포함되어 있으며, 예수께서는 이 봉사를 위해서도 자신을 제공하셨다. (누 4:43; 17:20, 21) 여호와께서는 그러한 자신의 아들의 제공을 받아들이고 인정하시어 아들을 성령으로 기름부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아들, 사랑하는 자이다. 내가 너를 승인하였다.”—막 1:9-11; 누 3:21-23; 마 3:13-17.

예수의 추종자들의 물 침례 요한의 침례는 예수께서 명하신 침례로 대치되게 되어 있었다. 그분은 ‘모든 나라 사람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침례를 베풀라’고 명령하셨다. (마 28:19) 기원 33년 오순절부터는 이 물 침례만 하느님의 승인을 받는 침례가 되었다. 기원 33년 이후 여러 해 후에 열심이 있는 사람인 아폴로스는 예수에 관하여 정확하게 가르치고 있었지만 요한의 침례만 알고 있었다. 그는 이 점에 있어서 시정을 받아야 하였는데, 바울이 에베소에서 만난 제자들도 그런 시정이 필요하였다. 에베소에 있던 이 사람들은 아마도 요한의 침례의 시효가 끝난 이후에 요한의 침례를 받았던 사람들인 것 같다. 바울이 에베소를 방문한 때는 율법 계약이 말소된 지 약 20년이 지난 때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때 비로소 예수의 이름으로 정확한 침례를 받은 다음 성령을 받았다.—행 18:24-26; 19:1-7.

그리스도인 침례에는 하느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것과 하느님의 계시된 뜻을 행하려고 자신을 제공하겠다는 이성적인 결정이 요구되었다는 사실이 명백히 나타난 때는 기원 33년 오순절 때다. 그때 그 축제에 모였던 유대인들과 유대교 개종자들은 이미 히브리어 성경에 대한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지만 베드로가 메시아이신 예수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나서, 그 결과로 삼천 명이나 “그의 말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침례를 받았”다. (행 2:41; 3:19–4:4; 10:34-38) 사마리아 사람들도 우선 빌립이 전파하는 좋은 소식에 대한 믿음을 나타냈고, 그다음에 침례를 받았다. (행 8:12) 에티오피아 환관도 독실한 유대교 개종자로서 이미 여호와와 히브리어 성경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우선 히브리어 성경 구절들이 그리스도에게 성취된 것에 대한 설명을 듣고 그것을 받아들인 다음에 침례를 받고자 하였다. (행 8:34-36) 베드로는 고넬료에게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느님이] 받아 주”시며(행 10:35)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의 이름을 통해 죄 사함을 받게 된다고 설명하였다. (행 10:43; 11:18) 이 모든 것은 예수께서 “사람들을 제자로 삼아 ··· 내가 여러분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치십시오” 하고 명령하신 바와 일치한다.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제자가 된 사람들이 침례를 받는 것은 합당한 일이었다.—마 28:19, 20; 행 1:8.

예수의 죽음에 대해 공동 책임이 있었고 틀림없이 요한의 침례에 대해 알고 있던 유대인들은 오순절 날에 베드로가 전파하는 것을 듣고 “마음이 찔려”서 “형제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각자 자기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십시오. 그러면 거저 주는 선물인 성령을 받을 것입니다.” (행 2:37, 38) 베드로가 그들에게 새로운 것을, 즉 죄 사함을 받는 데는 회개하고 요한의 침례로 침례를 받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는 것이 필요함을 지적하였음에 유의해야 한다. 그는 침례 자체가 죄를 씻어 없애 준다고 말하지 않았다. 베드로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 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요첫 1:7) 나중에 베드로는 예수를 “생명의 ‘으뜸 행위자’”라고 부르면서 성전에 있던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회개하고 돌이켜 여러분의 죄가 지워져 없어지게 하십시오. 그리하면 상쾌하게 하는 시기가 여호와 자신으로부터 올 것[입니다].” (행 3:15, 19) 여기서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악한 행동을 회개하고 “돌이켜” 그분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죄를 용서받게 해 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는데, 이 시점에서는 침례를 언급하지 않았다.

유대인들과 관련하여 고통의 기둥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근거로 율법 계약은 폐기되었고(골 2:14), 기원 33년 오순절에 새 계약이 발효되게 되었다. (행 2:4; 히 2:3, 4 비교)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특별한 은혜를 3년 반 동안 더 베푸셨다. 그동안 예수의 제자들은 전파 활동을 유대인들과 유대교 개종자들 및 사마리아인들에게만 국한시켰다. 그러나 기원 36년경에 하느님께서는 베드로를 이방인인 로마 군대 장교 고넬료의 집으로 가도록 인도하셨고, 고넬료와 그의 집안사람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 이제는 이방인들도 물 침례를 받는 것이 용납될 수 있음을 베드로에게 보여 주셨다. (행 10:34, 35, 44-48) 하느님께서 할례받은 유대인들과 맺으셨던 율법 계약을 더는 인정하지 않으시고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재하신 새 계약만 인정하시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육적 유대인이 할례를 받았거나 안 받았거나 간에 자신과 특별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게 되었다. 그들은 더는 유효하지 않은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는, 또는 율법과 관련이 있었던 요한의 침례로는 하느님 앞에 특정한 신분을 얻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께 나아가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물 침례를 받아야만 여호와의 인정과 은혜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칠십 주 (“한 주 동안” 지켜지는 계약의 효력) 참조.

따라서 기원 36년 이후로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누구나 하느님이 보실 때 동일한 신분을 갖게 되었다. (로 11:30-32; 14:12) 할례받은 유대교 개종자들을 제외한 이방 나라 사람들은 율법 계약 안에 있지 않았었고, 따라서 아버지 하느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은 백성이 된 적이 전혀 없었다. 이제 그들 개개인이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제시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물로 침례를 받을 수 있으려면 먼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되어 하느님께 나아가야 하였다. 그런 다음에야 그리스도의 본과 명령에 부합되는 물 침례를 받는 것이 합당할 것이었다.—마 3:13-15; 28:18-20.

그러한 그리스도인 침례는 하느님 앞에서 그들이 갖는 신분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어 있다. 사도 베드로는 노아가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대홍수를 살아남도록 보존해 줄 방주를 지은 일을 들어 설명하면서 이렇게 기술하였다. “그에 상응하는 것, 곧 침례가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지금 여러분을 구원하고 있습니다. (침례는 육체의 불결함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선한 양심을 하느님께 요청하는 것입니다.)” (베첫 3:20, 21) 방주는 노아가 하느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헌신하였고 그다음에 하느님이 맡기신 일을 충실하게 수행하였다는 눈에 보이는 증거 역할을 하였다. 그로 말미암아 그는 보존받았다. 그와 상응하게도, 부활되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근거로 여호와께 헌신하고 그에 대한 상징으로 침례를 받고 하느님의 종들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은 현 악한 세상으로부터 구원받게 된다. (갈 1:3, 4) 그들은 이제 더 이상 나머지 세상과 함께 멸망을 향해 가지 않게 된다. 그들은 그런 상태에서 구원받아 하느님에게서 선한 양심을 부여받게 된다.

유아 세례는 성경적이 아니다 물 침례에 앞서서 ‘말씀을 듣고’ ‘마음으로 받아’들였고 “회개”하였다는 사실(행 2:14, 22, 38, 41), 그리고 침례에는 개개인이 엄숙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볼 때 침례받는 사람은 적어도 듣고 믿음을 나타내고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나이가 된 사람이어야 함이 명백하다. 일부 사람들은 유아 침례를 옹호하는 주장을 편다. 그들은 고넬료, 루디아, 빌립보의 간수, 그리스보, 스데바나 등의 집안사람들처럼 “집안”이 침례를 받은 경우들을 들어 가며 그런 주장을 편다. (행 10:48; 11:14; 16:15, 32-34; 18:8; 고첫 1:16) 그들은 이것이 그런 가족들의 어린 아기들도 침례를 받았음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고넬료의 경우, 침례를 받은 사람들은 말씀을 듣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은 방언으로 말하며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였다. 유아들에게 적용될 수 없는 일들이었다. (행 10:44-46) 루디아는 “하느님의 숭배자”였으며, “여호와께서 그 여자의 마음을 활짝 열어 바울이 말하는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셨다.” (행 16:14) 빌립보의 간수는 “주 예수를 믿”어야 하였는데, 이로 보건대 그의 가족 중 다른 식구들도 침례를 받기 위해서는 믿어야 하였을 것이다. (행 16:31-34) “회당의 주임 관리 그리스보는 주를 믿는 사람이 되었고 그의 온 집안도 믿게 되었다.” (행 18:8) 이 모든 것은 침례에는 유아가 할 수 없는 일들, 곧 듣고 믿고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일들이 관련되어 있었음을 보여 준다. 사마리아에서도 사람들은 “하느님의 왕국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한 좋은 소식을” 듣고 믿게 되었을 때 비로소 “침례를 받았다.” 여기서 성경 기록은 침례받은 사람들이 유아들이 아니라 “남자 여자”였다고 명시한다.—행 8:12.

사도 바울이 고린도 사람들에게 자녀들은 믿음을 가진 어버이로 인해 “거룩”하다고 한 말이 유아가 침례를 받았다는 증거가 되지는 못한다. 오히려 그렇지 않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너무 어려서 그런 결정을 내릴 능력이 없는 미성년 자녀들에게 일종의 공적이 부여되는 것은 믿음을 가진 어버이로 인한 것이지, 별도의 공적을 부여하는 소위 성스러운 세례 혹은 침례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유아가 침례를 받는 것이 합당하였다면 유아들에게 믿음을 가진 어버이의 공적이 부여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고첫 7:14.

예수께서 “그들[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더는 방해하지 마십시오. 하늘 왕국은 이런 이들의 것입니다” 하고 말씀하신 것은 사실이다. (마 19:13-15; 막 10:13-16) 그러나 그 아이들이 침례를 받지는 않았다. 예수께서는 그 아이들을 축복하셨는데, 그 아이들에게 손을 얹으신 것이 종교적 의식이었음을 보여 주는 증거는 없다. 그분이 이어서 알려 주신 바로 볼 때, ‘하느님의 왕국이 이런 이들의 것’인 이유는 아이들이 침례를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아이들이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고 잘 믿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인은 “악에 대하여는 어린 아기”가 되고 “이해력에는 성숙한 사람”이 되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마 18:4; 누 18:16, 17; 고첫 14:20.

종교 역사가 아우구스투스 네안더는 1세기 그리스도인들에 관하여 이렇게 기술하였다. “이 시기에는 유아 세례 관습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 ··· 이레나이우스[기원 120/140-200/203년경] 시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유아 세례가 있었다는 흔적이 나타난다는 것(적어도 그 이전에 없었다는 것은 확실함), 그리고 삼 세기 중 어느 시기에 비로소 그것이 사도들의 전통으로 인정받게 되었다는 것은 그것이 사도 시대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증거이기보다는 그렇지 않다는 증거가 된다.”—「사도들에 의한 그리스도교 교회의 설립 및 훈련사」(History of the Planting and Training of the Christian Church by the Apostles), 1864년, 162면.

물에 완전히 잠김 앞서 설명된 침례의 정의를 볼 때 침례란 단순히 물을 붓거나 뿌리는 것이 아니라 물속에 완전히 잠기거나 담기는 것임이 명백하다. 성서에 나오는 침례의 사례들은 이 사실을 확증해 준다. 예수께서는 상당한 크기의 강인 요르단에서 침례를 받으셨고, 침례를 받으신 다음에는 “물에서 올라오”셨다. (막 1:10; 마 3:13, 16) 요한은 침례를 주는 장소로 살림 근처의 요르단 골짜기를 택하였는데, “그곳에 물이 아주 많았기 때문이다.” (요 3:23) 에티오피아 환관도 “물이 있는 곳”에 이르렀을 때 침례를 받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 두 사람은 “내려가 물로 들어갔다.” 그다음에 그들은 “물에서 올라”왔다. (행 8:36-40) 이 모든 경우를 보면 물이 발목 정도에 차는 작은 웅덩이가 아니라 많은 양의 물이 있어서 걸어 들어갔다가 나와야 할 정도의 곳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침례가 죽어 묻히는 것을 상징하는 데도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물에 완전히 잠기는 것임을 알려 준다.—로 6:4-6; 골 2:12.

역사 자료들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사람을 물에 잠금으로 침례를 베풀었다는 것을 알려 준다. 이 주제에 관하여 「신 가톨릭 백과사전」(영문, 1967년, 2권, 56면)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초기 교회에서 세례는 물에 잠기는 것이었음이 명백하다.” 「20세기 라루스」(Larousse du XXe Siècle, 파리, 1928년)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물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물에 잠김으로 침례를 받았다.”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그분의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음 예수께서는 요르단 강에서 침례를 받으실 때 자신이 희생의 행로를 시작하는 것임을 아셨다. 그분은 자신의 ‘예비된 몸’이 죽음을 당하게 되어 있다는 것, 자신이 인류를 위한 대속의 가치를 지닌 완전한 인간 희생으로 무고한 상태로 죽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아셨다. (마 20:28) 예수께서는 자신이 죽음 안에 잠기게 되어 있지만 사흘째 되는 날 죽음에서 일으킴 받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마 16:21) 그래서 그분은 자신이 겪게 될 일을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는 것에 비하셨다. (누 12:50) 그분은 봉사의 직무를 수행하시는 동안 그 침례를 이미 받고 있는 것으로 제자들에게 설명하셨다. (막 10:38, 39) 그분은 기원 33년 니산월 14일에 고통의 기둥에 처형당함으로 죽음 안에 잠기셨을 때 죽음 안으로 침례를 온전히 받으셨다. 그분의 아버지 여호와 하느님께서 사흘째 되는 날 그분을 부활시키심으로, 일으키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는 이 침례는 완료되었다. 예수께서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으신 것은 물 침례를 받으신 것과는 분명히 다른 것으로 구별된다. 왜냐하면 그분의 물 침례는 봉사의 직무를 시작하실 때 완결되었고 그분이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는 일은 그때 시작된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충실한 사도들은 요한의 침례로 물 침례를 받은 바 있었다. (요 1:35-37; 4:1) 그러나 예수께서 그들도 자신의 침례와 같은 상징적 침례, 곧 죽음 안으로의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지적하셨을 때 그들은 아직 성령으로 침례를 받지 않은 상태였다. (막 10:39) 그러므로 그분의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는 것은 물 침례와는 구별되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의 그리스도인 회중에 편지하면서 자신의 이해를 이런 말로 설명하였다.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침례를 받은 우리 모두가 그분의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았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로 6:3.

그처럼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의 침례와 그분의 죽음 안으로의 침례를 거행하는 일을 맡으신 분은 여호와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은 예수에게 기름부으심으로 예수로 그리스도 곧 기름부음받은 자가 되게 하셨다. (행 10:38) 그처럼 하느님께서는 예수에게 성령으로 침례를 베푸셨는데, 이는 그분의 추종자들이 그 이후로 예수를 통해 성령으로 침례를 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늘 희망을 가지고 예수와 공동 상속자가 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침례를 받”아야, 즉 기름부음받으신 예수 안으로 침례를 받아야 하였는데, 그분은 기름부음받으실 때 영으로 출생한 하느님의 아들이 되셨다. 그들은 예수 안으로 침례를 받음으로 그들의 머리이신 그분에게 결합되고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회중의 성원들이 된다.—고첫 12:12, 13, 27; 골 1:18.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침례를 받는 이들 그리스도인 추종자들의 행로는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는 그때부터 시험 아래서 충절을 지키는 행로가 되는데, 매일 죽음을 직면하다가 결국에는 충절을 입증하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 사도 바울은 그 점을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설명하면서 이렇게 묘사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죽음 안으로의 침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으킴을 받으신 것과 같이, 우리도 생명의 새로운 상태 안에서 걷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죽음과 같은 죽음으로 그분과 연합하게 되었다면, 또한 확실히 그분의 부활과 같은 부활로 그분과 연합하게 될 것입니다.”—로 6:4, 5; 고첫 15:31-49.

바울은 빌립보 회중에 편지를 할 때 그 점을 한층 더 명확히 밝히면서 자신의 행로를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 “곧 그분의 죽음과 같은 죽음에 나 자신을 복종시키려는 것”이라고 묘사하면서 “그리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내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이른 부활에 이를 수 있는지 알려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빌 3:10, 11)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분의 죽음 안으로의 침례를 받는 사람들에게 침례를 베푸는 분이신 하늘의 아버지 전능하신 하느님만이 그 침례를 완료시키실 수 있다. 그분은 그리스도를 통해 그 일을 하시는데, 그리스도가 하늘의 불멸의 생명으로 부활되어 일으킴 받으신 것처럼 그들을 죽음으로부터 일으키시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하심으로 그렇게 하신다.—고첫 15:53, 54.

사도 바울은 사람들로 된 회중이, 말하자면, 해방자인 인도자 안으로 침례를 받을 수 있다는 것 즉 물에 잠길 수 있다는 것을 예시하는 사례를 들었다. 그는 이스라엘 회중이 “구름과 바다에 의하여 모세 안으로 침례를 받”은 것으로 묘사한 것이다. 그때 그들은 보호해 주는 구름과 양옆의 물 벽으로 둘러싸임으로 상징적으로 말해서 물에 잠겼다. 모세는 하느님께서 자신과 같은 예언자를 일으키실 것이라고 예언하였고 베드로는 그 예언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시켰다.—고첫 10:1, 2; 신 18:15-19; 행 3:19-23.

“죽은 사람이 될 목적으로” 받는 침례란 어떤 것인가?

고린도 첫째 15:29에 나오는 문구는 번역판에 따라 여러 가지로 번역되어 있다. “죽은 자들을 위하여”(「개역」), “죽은 자들을 인하여”(「킹」), “그들의 죽은 자들을 위하여”(AT), “죽은 사람이 될 목적으로 침례를 받고 있는 사람들은 무엇을 할 것입니까?”(「신세」)

이 성구에 대한 해석은 매우 구구하다. 가장 일반적인 해석은 바울이 남을 위해 물 침례를 받는 관습, 즉 죽은 사람이 유익을 얻도록 살아 있는 사람이 죽은 사람을 위해 대신하여 침례를 받게 하는 관습에 관해 말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바울 시대에 그런 관습이 존재했는지 증명할 수도 없거니와, 그것은 침례를 받은 사람들은 ‘제자들’로서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인’ 사람들, 몸소 ‘믿은’ 사람들이었다고 명백히 말하는 성구들과 일치하지 않는다.—마 28:19; 행 2:41; 8:12.

리델과 스콧 공편 「희영 사전」(A Greek-English Lexicon)에서는 고린도 첫째 15:29에서 속격과 함께 사용된 그리스어 전치사 히페르의 정의들 가운데 “위하여”, “인하여” 등을 포함시킨다. (H. 존스 개정, 옥스퍼드, 1968년, 1857면) 어떤 문맥에서는 “위하여”는 “··· 할 목적으로”와 같은 말이다. 일찍이 1728년에 야코브 엘스네르는 여러 그리스 저술가들의 글들 중에서 속격과 함께 쓰인 히페르가 궁극적 의미 즉 목적을 표현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경우들을 지적하였으며, 그는 고린도 첫째 15:29에 나오는 문장 구조로는 그런 의미를 지니게 된다고 알려 주었다. (「신계약서에 관한 신성한 고찰」 Observationes Sacræ in Novi Foederis Libros, 위트레흐트, 2권, 127-131면) 이와 일치하게 「신세계역」에서는 이 구절에서 히페르를 “··· 할 목적으로”의 의미로 번역한다.

어떤 표현이 문법상 둘 이상의 방식으로 번역될 수 있는 경우에는 문맥과 일치하는 번역이 정확한 번역이다. 문맥을 따라 고린도 첫째 15:3, 4을 보면 주된 논의 사항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임을 알게 된다. 그다음에 이어지는 구절들에서는 그 믿음이 건실한 것임을 보여 주는 증거를 제시하며(5-11절), 그 부활에 대한 믿음을 부인하는 태도가 가져오는 심각한 결과들(12-19절), 그리스도의 부활은 다른 사람들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킴을 받을 것이라는 보증이 된다는 사실(20-23절), 그 모든 일이 하느님과 지성 있는 피조물 모두의 연합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하는지(24-28절) 등에 대해 논의한다. 29절도 이 논의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임이 명백하다. 그러나 29절에서 논하는 부활은 누구의 부활인가? 그것은 그 구절에서 말하는 침례를 받는 사람들의 부활인가? 아니면 그런 침례가 시작되기 전에 죽은 누군가의 부활인가? 이어지는 구절들은 무엇을 알려 주는가? 30절부터 34절까지 보면 거기서 논의되고 있는 것은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는 미래의 생명의 전망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35절부터 58절까지에서는 그들은 하늘 생명의 희망을 가진 충실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로마 6:3의 이러한 말과도 일치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침례를 받은 우리 모두가 그분의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았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이 성구에서 명백히 알 수 있듯이,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이미 죽은 누군가를 위해서 받는 침례가 아니라, 당사자 자신의 미래에 영향을 주는 그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의미로 “죽은 사람이 될 목적으로 침례를 받”거나 “그분의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았”는가? 그들은 하나의 인생 행로 속에 잠긴 셈인데, 그 행로는 그리스도의 경우처럼 죽기까지 충절을 지켜야 하는 행로로서 그분처럼 불멸의 영의 생명으로 부활될 희망이 있는 행로였다. (로 6:4, 5; 빌 3:10, 11) 이것은 물 침례처럼 신속하게 거행되는 침례가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물 침례를 받으신 지 삼 년 이상 지난 다음에, 자신의 경우에 아직 완료되지 않은 침례, 그리고 제자들은 미래에나 받게 될 침례에 관하여 말씀하셨다. (막 10:35-40) 이 침례는 부활되어 하늘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므로 하느님의 영이 그 사람에게 그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방식으로 작용하면서 시작되는 것임이 분명하고, 죽음으로 완료되는 것이 아니라 불멸의 영의 생명을 얻으리라는 전망이 부활을 통해 실현되면서 완료되는 것임이 분명하다.—고둘 1:21, 22; 고첫 6:14.

하느님의 목적 안에서 사람의 위치 유의해야 할 점은 사람이 물 침례를 받으면 여호와의 뜻을 행하는 그분의 종이 되는 특별한 관계에 들어가게 된다는 점이다. 각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그 사람 자신이 아니다. 각 사람을 어떻게 사용하고 그 사람을 그분의 목적의 테두리 안에서 어디에 둘 것인지를 결정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예를 들어 과거에 이스라엘 나라 전체는 하느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었는데, 그들은 여호와의 재산이었다. (출 19:5) 그러나 레위 지파만 신성한 곳에서 봉사를 행하도록 선택받았고, 그 지파 중에서도 아론 가문만 제사직을 구성하였다. (민 1:48-51; 출 28:1; 40:13-15) 여호와 하느님께서 왕권은 전적으로 다윗의 가계 내에서만 확립되게 하셨다.—삼둘 7:15, 16.

그와 비슷하게 그리스도인 침례를 받는 사람들도 하느님의 재산이 되어서 그분이 적절하다고 보시는 바에 따라 사용하실 그분의 종이 되는 것이다. (고첫 6:20) 하느님께서 일을 그처럼 인도하신다는 예가 계시록에 나오는데, 거기에는 최종적으로 “인장이 찍힌” 사람들의 명확한 수, 곧 14만 4000명이 언급되어 있다. (계 7:4-8) 그러한 최종 승인이 있기 전에도 하느님의 성령은 인장 역할을 한다. 그 인장은 인장이 찍힌 사람들에게 하늘에서 받게 될 그들의 상속 재산에 관하여 미리 주어진 증표가 된다. (엡 1:13, 14; 고둘 5:1-5) 또한 그런 희망을 가진 사람들은 이런 말씀을 듣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이 기뻐하시는 대로 지체들을 각각 [그리스도의] 몸에 두셨습니다.”—고첫 12:18, 27.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또 다른 무리로 주의를 이끄셨다. “나에게는 이 우리에 들지 않은 다른 양들이 있습니다. 나는 그들도 인도해야 합니다. 그들은 내 음성을 들을 것이며,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 아래 있을 것입니다.” (요 10:16) 이들은 “적은 무리”에 속한 자들이 아니지만(누 12:32), 그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여호와께 나아가 물 침례를 받아야 한다.

계시록에 기록되어 있는, 사도 요한이 본 환상도 이와 일치한다. 환상은 “인장이 찍힌” 14만 4000명을 요한에게 보여 준 다음 그의 눈을 “아무도 셀 수 없는 큰 무리”에게 향하게 한다. 이들은 “‘어린 양’의 피에 자기들의 긴옷을 씻어 희게” 한 것으로 나오는데, 이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희생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음을 알려 주는 것이다. (계 7:9, 14) 그래서 그들은 호의적인 인정을 받아 하느님의 ‘왕좌 앞에 서’게 되지만, 하느님께서 “인장이 찍힌” 14만 4000명으로 선택하시는 자들은 아니다. 이어서 이 “큰 무리”에 관하여 환상에서 지적되는 바와 같이, 그들은 하느님을 밤낮으로 섬기고 그분에게서 보호와 돌봄을 받게 된다.—계 7:15-17.

불로 받는 침례 다수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침례자 요한에게 나아왔을 때 요한은 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불렀다. 그는 장차 오시는 분에 관하여 이야기하면서 “그분은 여러분에게 성령과 불로 침례를 베푸실 것”이라고 말하였다. (마 3:7, 11; 누 3:16) 불로 받는 침례는 성령으로 받는 침례와 같은 것이 아니다. 불의 침례는 일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오순절 날 나타난 불의 혀일 수도 없는데, 그때 제자들이 불 속에 잠긴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행 2:3) 요한은 자기 말을 듣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구분하는 일이 있을 것인데, 밀은 모아들여지고 그 후에 겨는 꺼질 수 없는 불로 태워 버려질 것이라고 하였다. (마 3:12) 그는 불이 축복 혹은 상이 될 것이라고 지적한 것이 아니라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지 않았기’ 때문에 불이 있게 되는 것으로 지적하였다.—마 3:10; 누 3:9.

예수께서도 자신의 임재 중에 악한 자들에 대한 심판 집행이 있을 것을 예언하실 때 불을 멸망의 상징으로 사용하시어 이렇게 말씀하셨다. “소돔에서 나오던 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비 오듯 내려 그들 모두를 멸하였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그 날에도 그와 같을 것입니다.” (누 17:29, 30; 마 13:49, 50) 그 외에도, 불이 구원하는 힘이 아니라 파괴하는 힘을 상징하는 경우로는 데살로니가 둘째 1:8, 유다 7 및 베드로 둘째 3:7, 10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