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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시대의 사람들에게 활동한 성령

이전 시대의 사람들에게 활동한 성령

제4장

이전 시대의 사람들에게 활동한 성령

1. 성서 자체는 성령이라는 것이 있음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그릇됨을 어떻게 증명합니까?

오늘날의 유물론적인 사람들이 성령이라는 것은 없다고 주장해 봤자 소용없읍니다. 이전 시대의 사람들에게 작용한 성령의 산물이 지금도 전세계에 있읍니다. 그 산물은 그것을 없애려는 인간들과 국가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존속하여 왔읍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불멸의 책 성서입니다. 인간과 악귀들의 흉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 거룩한 책은 인간이 기록한 책 가운데 가장 널리 배포되어 있읍니다. 생명을 걸고 그 책을 옹호할 인간 남녀들이 있읍니다.

2. 필자와 관련하여 왜 성서는 다른 책과 다르지 않습니까?

2 분명히 성서는 다른 모든 책과 다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단순한 인간들이 그것을 기록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성서가 단순한 인간들의 손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것을 아무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떠한 인간들이었읍니까? 그들은 그들 자신의 창작을 기록하였읍니까? 이것이 그 문제와 관계가 있읍니다.

3-5. (ㄱ) 성서는 성서가 어떻게 기록되었는지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ㄴ) ‘베드로’는 베드로 후 1:15-21에서 이것을 어떻게 확증합니까?

3 성서 자체는 성서에 포함된 66권의 작은 책들이 인간들에 의하여 기록되었다고 알려 줍니다. 성서 자체가 그 필자들이 어떠한 사람이었는지를 알려 줍니다. 성서는 또한 그러한 사람들이 기록을 하도록 움직이게 한 보이지 않는 힘이 무엇이었는지도 알려 줍니다. 그들이 기록을 할 때에 그들 배후에 영이 있었읍니다. 그 영은 ‘사단’ 마귀의 영이 아니었읍니다. 왜냐 하면 그는 지금까지 사뭇 사람이 거주하는 온 땅을 미혹하고자 노력을 기울여 왔기 때문입니다. 성서 기록 배후의 영은 현재의 낡은 사물의 질서 배후의 영이 아니었읍니다. 그러나 기록한 사람들이 어떠한 사람들이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기록하도록 움직이게 한 영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하여 참 그리스도교의 순교자 사도 ‘베드로’의 간단한 말에 유의해 봅시다.

4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순교하여] 나의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

5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베드로 후 1:15-21.

6. ‘베드로’가 언급한 그리스도의 변형을 무엇이 확증해 주며, 그의 두 서한이 영감받은 기록이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6 ‘베드로’ 자신은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의 감동”을 받아 기록하고 말한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읍니다. 이 사실 때문에, ‘베드로’는 그와 사도 ‘야고보’ 및 ‘요한’이 목격 증인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팔레스티나’의 한 높은 산에서 그들 앞에서 변형되셨을 때에 보고 들은 바를 충실히 증언하였읍니다. 그리스도의 다른 세명의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 성벽 밖에서 횡포한 죽음을 당하시기 몇달 전에 변형되신 그 일에 대해 기록하였읍니다. (마태 17:1-9; 마가 9:2-9; 누가 9:28-36) 그러므로 ‘베드로’의 증언은 신빙성있는 사람들에 의해 확증됩니다. 성서에서 ‘베드로’의 이름을 지니고 있는 두 개의 서한은 인간이었던 그에 의해 기록되었읍니다. 그러나 이 사실은 그의 서한들이 단순한 인간의 기록임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베드로’의 서한 배후에는 성령이 있었읍니다. 그러므로 그 서한들은 성령의 근원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았읍니다.

7. 베드로 후서 3:15, 16에서 ‘베드로’는 자기가 ‘바울’의 기록을 영감받은 성서의 일부로 분류하였음을 어떻게 나타냈읍니까?

7 ‘베드로’는 두번째 서한에서 사도 ‘바울’의 기록을 영감받은 성서 기록의 일부로 분류하였읍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시오. 그것은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 ‘바울’이 그의 받은 지혜를 따라 여러분들에게 편지한 바와 같습니다. ‘바울’은 모든 편지에서 이런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그 중에는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어서 무식하거나 믿음이 굳세지 못한 사람들은 다른 성경을 곡해하듯이 그것을 곡해하여 마침내 스스로 파멸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 후 3:15, 16. 새번역) 오늘날 단순한 인간(‘바울’)이 그러한 서한들을 썼으며 따라서 그러한 서한들은 인간의 창작이라고 주장하는 비평가들이 있읍니다. 그러한 비평가들은 성경을 곡해하여 “스스로 파멸에 이르”고 있읍니다.

8. 하나님께 받아 말하고 기록한 인간들에 의해 기록된 성경에 대하여 ‘바울’은 디모데 후서 3:16, 17에서 무엇이라고 말하였읍니까?

8 하나님께 받아 기록하고 말한 인간들이 기록한 성경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문자적으로, 하나님이 호흡하시다 (‘데오프뉴스토스’)]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디모데 후 3:16, 17. 「왕국 행간 번역」 참조.

9. ‘바울’은 그 성경을 여기 저기 언급함으로써 그리스도교의 기초에 대해 무엇을 증명할 수 있었읍니까?

9 ‘바울’ 자신은 그처럼 온전한 즉 유능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읍니다. 그는 고대 ‘히브리’어 성경에 정통하였읍니다. ‘바울’은 영감받은 성경을 여기 저기 언급함으로써 참 그리스도교에 대한 하나님께서 주신 기초를 증명할 수 있었읍니다.—사도 17:3, 신세.

10.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예언을 이루실 것인지 모르지만 성서 예언은 왜 지금까지도 계속 적중되어 왔읍니까?

10 성서에 포함된 예언들이 현 20세기에까지 계속 적중하고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읍니다. 그 이유는 이러한 예언들이 세계 상태의 추세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사사로운 해석을 하려는 단순한 인간들의 예측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와는 반대로, 성서 예언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으며, 이러한 예언들은 그분께 헌신한 사람들을 통하여 주어졌읍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을 진척시키는지를 인간이 모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예언들을 이루십니다. ‘베드로’는 이점을 ‘예루살렘’ 성전에 모인 ‘유대’인 군중들에게 이렇게 강조하였읍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예언자의 입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아야만 한다고 미리 선포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읍니다. ··· 이 예수는 ··· 하나님께서 그의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대로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 하늘에 계실 것입니다.” (사도 3:18-21, 새번역) 성서는 거짓말하시지 않는 하나님의 예언을 수록하고 있읍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을지라도 그것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11. ‘베드로’는 ‘예루살렘’에 모인 백 이십명의 제자들의 회중에게 연설할 때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되어야 함을 어떻게 강조하였읍니까?

11 성서 예언은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므로, 성취되어야만 합니다. 그 사실을 더욱 천명하여 ‘베드로’는 ‘예루살렘’에 모인 그리스도의 약 백 이십명의 제자들의 회중에게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사도 1:15, 16.

12. ‘베드로’와 기타 제자들은 함께 기도하는 가운데 ‘다윗’이 기록한 시편 2:1이 성취되어야 했음을 어떻게 지적하였읍니까?

12 후에, ‘베드로’는 그의 동료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는 가운데, ‘다윗’에 의한 또 다른 예언이 성취되어야 했음을 강조하였읍니다. 사도행전 4:24, 25(새번역)은 이렇게 말합니다. “친구들이 이 말을 듣고 다 같이 하나님께 큰 소리로 부르짖었읍니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신 주님, 주님께서는 우리의 조상이요 주님의 종인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소동하며 백성들이 헛된 일을 도모하는가? 세상 임금들이 일어나고 통치자들이 함께 모여 주님과 그의 그리스도에게 대적하였다.’” (시 2:1) 이처럼 제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은 ‘히브리’어 성경이 이전 시대의 사람들에게 활동한 하나님의 성령의 산물임을 알고 있었읍니다.

13. (ㄱ) 사무엘 하 23:1-3에 의하면, 「‘히브리’어 성경」 가운데서 ‘다윗’이 기록한 부분에 대한 영예는 누구에게 돌아가게 되어 있었읍니까? (ㄴ) ‘다윗’을 통한 예언들이 성취되도록 일을 진전시킨 것은 무엇이었읍니까?

13 여기에서 시편 필자 ‘다윗’의 이름이 직접 언급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그가 「‘히브리’어 성경」의 일부가 된 일들을 말하고 기록한 것에 대하여 어떻게 느꼈을까? 하고 질문해 볼 만합니다. 지금까지 보존되었으며 오늘날 우리에게도 특별한 가치와 중요성이 있는 그의 기록에 대한 영예를 그는 자기에게 돌리지 않았읍니다. 이에 대한 증거로, 사무엘 하 23:1-3에 온 ‘이스라엘’의 이 기름부음받은 왕에 대한 기록이 있읍니다. 인용하면 이러합니다. “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올리운 자, ‘야곱’의 하나님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가 말하도다. 여호와의 신[영]이 나를 빙자하여 말씀하심이여. 그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바위가 내게 이르시[도다.]” 그러므로, ‘다윗’을 통한 그 예언들이 성취되게 한 것은 멀리까지 내다보는 그의 선견지명과 사태를 개인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그의 능력이 아니었읍니다. 예언들이 성취되도록 일을 진전시킨 것은 ‘다윗’ 위에 활동한 하나님의 영과 하나님의 조종이었읍니다.

14. ‘다윗’ 외에도, ‘이사야’와 ‘예레미야’는 성경 가운데 자기들이 쓴 부분이 자기 자신들의 저작물이 아님을 어떻게 지적하였읍니까?

14 성서 가운데서 자기가 기록한 부분이 자신의 창작물이 아님을 고백한 사람은 ‘다윗’만이 아닙니다. 성서에 들어있는 영감받은 책들을 쓴 다른 예언자들도 자기들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고 솔직히 시인하고 있읍니다. 예를 들면, ‘이사야’는 자기의 대예언서를 이러한 말로 시작합니다.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즉, 환상]이라.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이사야 1:1, 2) ‘예레미야’는 자기의 대예언서를 이러한 말로 시작합니다. “‘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 중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의 말이라.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다스린지 십 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느니라.]”—예레미야 1:1, 2.

성령을 통한 고대의 용맹스러운 행위

15. 성서를 기록시킨 성령은 어떻게 막강한 군부 지도자들의 칼보다 강하였읍니까?

15 성령이 거룩한 기록의 형태로 산출한 것을 보고 경멸해서는 안됩니다. 성서 필자들의 손에서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움직여진 ‘펜’은 ‘시이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아돌프 히틀러’의 칼보다 훨씬 강력하였읍니다. 사실, 성령은 ‘펜’과 ‘잉크’로 기록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극적인 일을 달성할 수 있었읍니다. 고대의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전능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이 강력한 힘을 통하여 여러 가지 용맹스러운 일을 한 것으로 기록에 나타나 있읍니다.

16, 17. (ㄱ) ‘모세’가 홍해 위로 지팡이를 내밀었을 때에, 어디에서 강력한 ‘에너지’가 나와 바닷물을 갈랐읍니까? (ㄴ) 이사야 63:11-14은 어떻게 정확한 대답을 확증합니까?

16 일례로, 성서의 처음 다섯권을 기록한 ‘모세’를 생각하여 봅시다. 기원전 1513년에 그는 홍해의 서해안에 서 있었읍니다. 그는 그의 오른 손에 든 지팡이를 바다 위로 뻗쳤읍니다. 놀랍게도 물이 갈라졌고, 추격하는 ‘애굽’인들이 뒤쫓아 미치기 전에 ‘이스라엘’인들이 건널 수 있었읍니다. ‘모세’에게서 나온 강력한 ‘에너지’가 그 기적을 행하였읍니까? 그럴 수 없었읍니다! 예언자 ‘모세’에게서가 아니라, 모든 강력한 ‘에너지’의 천적 근원이 되시는 분으로부터 나온 저항할 수 없는 힘이 커다란 위험으로부터 도망하는 ‘이스라엘’인들을 막고 있던 물 장벽을 가를 수 있었읍니다. (출애굽 14:21에서 15:21까지) 그러므로, 여호와의 백성이 징계를 받고 곤경을 당하는 오늘날, 그들은 여호와의 고대의 행적을 기억하고 다음과 같이 질문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17 “백성과 양 무리의 목자[‘모세’와 ‘아론’]를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그들 중에 성신[성령]을 두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그 영광의 [힘센] 팔을 ‘모세’의 오른 손과 함께 하시며 그 이름을 영영케 하려 하사 그들 앞에서 [바다의] 물로 갈라지게 하시고 그들을 깊음으로 인도하시되 말이 광야에 행함과 같이 넘어지지 않게 하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여호와의 신[영]이 그들로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 같이 편히 쉬게 하셨도다. 주께서 이같이 주의 백성을 인도하사 이름을 영화롭게 하셨나이다 하였느니라.”—이사야 63:11-14.

18. 마찬가지로, 그 동일한 하나님께서는 현 이십세기에도 멀지 않아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까?

18 ‘이사야’의 예언에 나오는 이러한 귀절들은 ‘모세’의 동족이 고대 ‘애굽’인들의 속박에서 구출된 때를 돌이켜 지적합니다. 그 때, 기원전 1513년 봄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소멸될 수 없게, 비길 데 없이 영화롭게 하셨읍니다. 그러나 이제, 현 이십세기에도, 이 동일한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실’ 때가 되었읍니다. 훨씬 더 웅대한 규모로, 그분은 홍해에서 그분이 행하신 것과 비슷한 구출을 행하실 것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가 “영화롭게” 되는 것을 보게 될 모든 사람은 참으로 행복할 것입니다.

19. 히브리 11:29에 지적된 바와 같이, 발생된 일은 ‘모세’의 어떠한 특성과 일치한 것이었읍니까?

19 그러므로 여호와의 거룩한 활동력의 강력한 ‘에너지’를 과소평가하지 맙시다. 그것은 삼십 오세기 전과 같이 오늘날도 동일하게 강력합니다. 예언자 ‘모세’는 그것의 힘을 과소평가하지 않았읍니다. 그는 기적을 행하는 그 영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믿음을 두었읍니다. 발생된 일은 ‘모세’의 믿음과 일치한 것이었읍니다.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느니라.]” (히브리 11:29) 그러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자기에 대한 믿음을 나타내는 사람들에게 상 주신다는 것이 입증되었읍니다. (히브리 11:6) 충실한 ‘모세’와 영에 대한 민수기 11:16, 17, 24-29에 있는 기록을 더 유의하여 보십시오.

20, 21. (ㄱ)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증명한 그 고대인들은 왜 어느 정도의 성령을 가졌었음이 분명합니까? (ㄴ) 히브리 11:4-7에 믿음을 증명한 어떤 세 사람이 언급되어 있으며, 그 기록은 그들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20 믿음은 “영의 열매” 중 하나입니다. 갈라디아 5:22, 23(신세)을 보면 그러합니다. 분명히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증명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을 얼마간 가져야 합니다. 고대에 믿음을 증명한 남녀의 일부 명단이 히브리서 11장에 있읍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의 일부를 형성합니다. (히브리 12:1) 그 증인들의 명단은 여호와 하나님의 최초로 보고된 증인인 ‘아벨’ 즉 ‘아담’과 ‘하와’의 아들 ‘가인’의 아우에게까지 소급합니다. 기원전 2370-2369년에 있었던 세계적인 홍수 전 시대에 여호와의 증인들이 또 있었읍니다. 대홍수 전 지존하신 하나님의 증인 세 사람의 이름이 히브리 11:4-7나와 있읍니다. 인용하면 이러합니다.

21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22. 제반 사실로 볼 때, 그 세 사람이 각기 어느 정도의 성령을 가졌었다는 것이 왜 분명합니까?

22 ‘아벨’, ‘에녹’, 그리고 ‘노아’는 믿음을 실천하는 면에서 뛰어났기 때문에 그들의 이름이 특별히 언급되었읍니다. 그러나, ‘노아’와 함께 방주에 들어가 세계적 홍수를 생존한 ‘노아’의 아내와 세 아들과 세 자부가 있었읍니다. (베드로 전 3:19, 20) ‘아벨’은 어느 정도의 성령을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왜냐 하면 그는 성령의 열매 중 하나 즉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렛’의 아들 ‘에녹’ 역시 어느 정도의 성령을 가졌었음에 의문이 있을 수 없읍니다. 왜냐 하면 유다서 14, 15이 말하는 바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께서는 ‘에녹’을 사용하여 인간이 말한 것으로서 최초로 기록된 예언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창세 5:18-24) ‘노아’도 역시 여호와의 예언자로 사용되었읍니다. 그는 ‘의의 전파자’였읍니다. (베드로 후 2:5; 창세 9:24-29) ‘노아’가 불경건한 사람들의 세상에서 주목할 만하게 용맹스러운 행동을 하였다는 것을 누가 부인할 수 있읍니까?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의 힘으로 이러한 담대한 행동을 한 것이 아니었읍니다. 그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활동력이 있었읍니다.

23, 24. (ㄱ) ‘노아’가 방주를 건축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특성을 나타내고 계셨읍니까? (ㄴ) 창세기 6:1-3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결정을 하셨으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23 ‘노아’ 시대에 하나님의 영은 또한 인류에 대하여도 활동하였읍니다. 방주를 건축하는 그 기간에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두드러졌읍니다. (베드로 전 3:20) 하나님께서 커다란 자제와 참음을 보이고 계셨으며, 따라서 이것은 고집 센 사람들에게 방주 건축이 진행되는 것을 보고 또한 ‘의를 전파하는’ ‘노아’의 말을 듣고 회개할 기회를 주었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의 활동에 응한 사람은 누구였읍니까? 단지 ‘노아’와 그의 아내와 그들의 아들들인 ‘셈’과 ‘함’과 ‘야벳’ 그리고 그들의 세 아내 뿐이었읍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말하자면, 고전분투해 가며 그들을 위해 무한정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그분의 목적이 아니었읍니다. 창세기 6:1-3은 하나님의 결정 및 그러한 결정을 내리게 한 지적 환경을 알려 줍니다.

24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25. 때가 찼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새 출발시키기 위하여 어떠한 일을 하실 것이었읍니까?

25 물질화한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의 그러한 변칙 결혼은 참으로 충격을 주는 것이었읍니다. 그러한 사태 변화는 무한정 계속될 수 없었읍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결정이었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은, 그 때까지 인류에 대하여 참아온 것 같이, 일백 이십년만 더 참을 것이었읍니다. 때가 차면, 그분은 대변동을 일으키실 것이었읍니다! 오랫 동안 행사되어 온 그분의 자제가 거두어질 것이었읍니다. 물질화한 영들과 육체를 가진 여자들간의 결혼은 산꼭대기까지도 덮을 세계적인 홍수로 종말을 고할 것이었읍니다. ‘노아’와 순수하고 더럽혀지지 않은 인간으로 구성된 그의 가족은 거대한 방주에 들어가 무사히 그 대격변을 통과하여 인류를 새 출발시킬 것이었읍니다. 불경건한 사람들의 그 세상은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을 괴롭히거나 근심하게 하도록 허락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은 그들을 묵인하지 않으실 것입니다.—에베소 4:30; 이사야 63:10; 히브리 10:29 참조.

26, 27. (ㄱ) ‘노아’가 방주를 건축한지 8여세기 후에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다른 건축 사업을 후원하셨읍니까? (ㄴ) ‘노아’의 방주는 성막 및 그 뜰과 어떻게 비교되었읍니까?

26 그리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존자들 즉 순수한 인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인류에게 새롭고 의로운 출발을 하게 하셨읍니다. 이러한 목적으로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건축 활동을 후원하셨었읍니다. 8여세기 후에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중요한 건축 사업을 후원하셨읍니다. ‘시내’ 산에서 예언자 ‘모세’에게 주신 율법에서 하나님께서는 성막 건축을 요구하셨읍니다.

27 이 거룩한 회막에서 ‘모세’의 동족 ‘이스라엘’ 민족의 열 두 지파가 그들의 하나님과 정기적으로 만나게 되어 있었고 하나님의 제사장들은 민족 전체를 위하여 속죄 희생을 드리게 되어 있었읍니다. 이 장막과 울타리를 두른 뜰은 ‘노아’의 방주와 같이 거대한 건물이 아니었읍니다. 삼층으로 된 ‘노아’의 방주는 각 층의 넓이가 성막의 뜰 세배에 해당하여 전체적으로 아홉개의 뜰을 수용할 수 있는 크기였읍니다. ‘노아’의 방주의 건축은 많은 공학 기술을 요하였으며, 하나님께서는 그 기술을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공급하실 수 있었읍니다. ‘이스라엘’의 장막은 예술적인 기술을 요하였읍니다.

28. 하나님께서 장막 건축을 그의 영으로 후원하셨다는 것이 출애굽기 31:1-6로 볼 때 어떻게 명백합니까?

28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숭배의 장막이 건축되도록 명하셨기 때문에, 그분은 그 건축을 후원하셨읍니다. 어떻게? 출애굽기 31:1-6에 대답이 나오는데, 거기에서 하나님의 활동력에 대한 언급에 유의하십시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사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하나님의 신[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가지 재주로 공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며 보석을 깎아 물리며 나무를 새겨서 여러가지 일을 하게 하고 내가 또 ‘단’ 지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을 세워 그와 함께 하게 하며 무릇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자에게 내가 지혜를 주어 그들로 내가 네게 명한 것을 다 만들게 할찌니[라].”

이처럼 우두머리 기술자 ‘브사렐’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해 있었읍니다.

29, 30. (ㄱ) 하나님으로부터 온 무엇의 작용으로 인하여 장막 건축이 때 맞추어 완공되었읍니까? (ㄴ) ‘브사렐’과 ‘오홀리압’은 자기들의 수고에 대한 하나님의 승인의 표현을 언제 어떻게 보았읍니까?

29 작업하는 사람들이 배후에서 모든 강력한 ‘에너지’의 근원으로부터 오는 그러한 강력한 힘의 후원을 받고 있었으므로, 모든 기물을 포함한 성막 건축이 완공될 것이 확실하였읍니다. 태음력으로 그해 끝에 모든 물품을 조립하여 장막을 세울 준비가 되었읍니다. 출애굽기 38:22, 23은 이 감동적인 완성 단계를 이러한 말로 알려 줍니다.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사렐’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만들었고 ‘단’ 지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은 그와 함께 하였으니 ‘오홀리압’은 재능이 있어서 조각하며 또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실로 수놓은 자더라.” ‘브사렐’과 ‘오홀리압’에게 태음력으로 새해 첫날(기원전 1512년 ‘니산’월 1일)은 마음을 흐뭇하게 하는 날이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날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회막”이 세워졌으며 ‘브사렐’과 ‘오홀리압’은 하나의 기적을 보았읍니다.

30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더라.]” 이것은 ‘브사렐’과 ‘오홀리압’에게 그들이 일을 훌륭히 하였다는 것과 여호와께서 그것을 승인하셨다는 증거였읍니다. 그분의 성령이 그들을 통하여 일하였던 것입니다.—출애굽 40:1-34.

31, 32. (ㄱ) 그 장막은 얼마 동안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었읍니까? (ㄴ) 성령이 ‘솔로몬’의 성전 건축과 완공을 후원하였다는 것이 어떻게 분명합니까?

31 이 회막은, ‘솔로몬’ 왕이 기원전 1027년에 ‘예루살렘’에 성전을 완공하고 하나님의 숭배를 위하여 그것을 봉헌할 때까지 485년간 존속하면서 그 목적을 이루었읍니다.

32 ‘다윗’의 아들 ‘솔로몬’에 의한 이 성전 건축 사업도 하나님의 영의 후원을 받았읍니다. ‘다윗’은 영감에 의하여 이 새로운 건물의 건축 설계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역대 상 28:11-19은 이렇게 알려 줍니다. “이 위의 모든 것의 식양[건축 설계, 신세]을 여호와의 손이 내게 임하여 그려 나로 알게 하셨느니라.” 이 장엄한 성전이 ‘예루살렘’의 ‘모리아’ 산에서 봉헌되었을 때,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숭배하기 위한 그 새로운 건물을 승인한다는 것을 보이셨읍니다. “그 때에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한지라.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역대 하 5:13, 14.

33. 그러므로 하나님의 순결한 숭배를 후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33 그러므로, 성령이 여호와의 순결한 숭배를 후원한다는 이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확신해야 합니다. 성령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께 대한 깨끗한 숭배를 실천하고 옹호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강력히 활동합니다. 특별히 선택된 사사들이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기간에 이에 대한 실례가 있었읍니다.

사사가 다스리던 때의 성령의 활약

34. 성령이 어떻게 사사 ‘옷니엘’을 통하여 작용하였읍니까?

34 ‘이스라엘’인들은 순결한 숭배에서 떠났을 때 ‘시리아’ 왕의 압제를 받게 되었읍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이제 무슨 일이 있었읍니까? “여호와의 신[영]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에 여호와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그 손에 붙이시매 ‘옷니엘’의 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니라. 그 땅이 태평한지 사십 년에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죽었더라.”—사사 3:9-11.

35. 사사 ‘기드온’의 경우에 성령은 어떻게 작용하였읍니까?

35 세월이 흘러 상황이 변하자 그들은 그분의 백성 즉 ‘이스라엘’을 구출하기 위한 또 다른 사사를 일으켜 달라고 여호와께 간청하기에 이르렀읍니다. “때에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동방 사람들이 다 모여 ‘요단’을 건너와서 ‘이스라엘’ 골짜기에 진을 친지라. 여호와의 신[영]이 ‘기드온’에게 강림하시니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 ‘아비에셀’ 족속이 다 모여서 그를 좇[으니라.]” (사사 6:33, 34) 여호와께서는 이 믿음의 사람을 사용하여, 그의 백성에게 놀라운 승리, 후에 성서 역사에 언급된 승리를 주셨읍니다.—이사야 9:4-6; 10:26; 시 83:9-12; 히브리 11:32, 33.

36. 성령은 사사 ‘입다’를 통하여 무엇을 수행하였읍니까?

36 재삼 재사 여호와의 거룩한 활동력은, 역사상 유명한 일을 하는 데 그분이 사용하신 믿음의 사람들을 위하여 작용하였읍니다. 압제받던 ‘이스라엘’인들이 전쟁에서 공격적인 ‘암몬’ 사람들과 대면할 때가 되었읍니다. “여호와의 신[영]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입다’가 ‘길르앗’[을] ··· 지나서 ··· ‘암몬’ 자손에게 이르[니라.]” 승리를 거두어 여호와께 찬양을 돌리기를 열망한 ‘입다’는 자기에게 희생이 큰 서약을 하였읍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를 사용하여 ‘암몬’ 사람들을 참패시키셨읍니다.—사사 11:29에서 12:7.

37.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인들을 ‘블레셋’인들의 손에서 구원하기 위해 누구를 일으키셨으며, 무엇을 통하여 그렇게 하셨읍니까?

37 여러 해 후, ‘블레셋’인들은 ‘이스라엘’인들을 심히 압제하였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삼손’이라는 특이한 사람이 출생하게 하셨읍니다. 그는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데 앞장 설 사람이었읍니다. 그러한 목적으로, 하나님의 활동력은 그를 후원하였읍니다.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신[영]이 비로소 그에게 감동”하였읍니다. 그러므로, ‘삼손’이 지상에서 산 사람 중 최강의 힘을 보여준 것은 그 자신의 체력에 의한 것이 아니었읍니다.—사사 13:5, 25.

38. ‘삼손’은 포효하는 사자와 마주쳤을 때 어떻게 하였으며, 그는 ‘블레셋’인들이 부당한 수단으로 그의 수수께끼를 풀었을 때 어떻게 사태를 해결하였읍니까?

38 한 때, ‘삼손’이 혼자 걷고 있을 때에, 갑자기 자기 앞에 ‘갈기있는 젊은 사자가 자기를 맞아 포효하고 있었’읍니다. 맨손으로 ‘삼손’이 어떻게 하였읍니까? “‘삼손’이 여호와의 신[영]에 크게 감동되어 손에 아무 것도 없어도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음 같이 찢었[더라.]” 그 직후 ‘블레셋’인들은 ‘삼손’에게 커다란 피해를 입히기 위하여 속임수로 그의 수수께끼를 풀었읍니다. 오히려 ‘블레셋’인들에게 화근이 되었읍니다. 다시 “여호와의 신[영]이 ‘삼손’에게 크게 임하시매 ‘삼손’이 [‘블레셋’에 있는] ‘아스글론’에 내려가서 그곳 사람 삼십명을 쳐 죽이고 노략하여 수수께끼 푼 자들에게 옷을 주[니라.]”—사사 14:5-19.

39. ‘이스라엘’인들이 ‘삼손’을 새 밧줄로 결박하고 ‘블레셋’인들에게 넘겼을 때에 무슨 일이 있었읍니까?

39 ‘삼손’이 결박되어 악의적인 ‘블레셋’인들에게 넘겨졌을 때에 새로운 밧줄도 ‘삼손’에게는 별로 튼튼하지 못하였읍니다. “여호와의 신[영]의 권능이 ‘삼손’에게 임하매 그 팔 위의 줄이 불탄 삼과 같아서 그 결박되었던 손에서 떨어진지라. ‘삼손’이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손을 내밀어 취하고 그것으로 일천명을 죽이[니라.]”—사사 15:11-15.

40, 41. 어떻게 ‘삼손’은 자기가 ‘이스라엘’ 사사로 있을 때보다 죽을 때에 더 많은 ‘블레셋’인들을 죽였읍니까?

40 거짓 신 ‘다곤’을 숭배한 ‘블레셋’인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삼손’을 통하여 행하신 최대의 공적은 마지막에 행해진 일이었읍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이 지치거나 약해지지 않음을 증명하였읍니다.

41 ‘들릴라’라는 여인에게 배반당하고 복수심에 불타는 ‘블레셋’인들에 의해 실명한 ‘삼손’은 ‘블레셋’의 ‘가사’에 있는 ‘다곤’ 신전의 두 기둥 사이에 섰읍니다. 급소를 찌를 수 있는 바로 그 장소에서 “[‘삼손’이] 집을 버틴 두 가운데 기둥을 하나는 왼손으로 하나는 오른손으로 껴 의지하고 가로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사사 16:23-30.

42. ‘삼손’의 이름은 히브리 11:32-34에서 누구와 함께 열기되었읍니까?

42 ‘삼손’은 하나님의 영의 열매인 하나님께 대한 그러한 믿음을 가졌던 고대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열기되었읍니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히브리서」의 필자는 11장에서 그렇게 질문하고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였느니라.]”—히브리 11:32-34.

여호와의 기름부음받은 자

43. ‘사무엘’이 ‘베들레헴’에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은 직후에, 그와 관련하여 어떠한 변화가 있었읍니까?

43 「히브리서」의 필자가 언급한 유명한 한 이름은 ‘베들레헴’의 ‘이새’의 아들 ‘다윗’입니다. ‘다윗’은 십대 목동 시절에 예언자 ‘사무엘’에게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모두 다스릴 장래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읍니다. 그가 기름부음을 받은 직후에 무슨 일이 있었읍니까?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여호와의 신[영]이 [당시의 통치하던 왕] ‘사울’에게서 떠나[니라.]” (사무엘 상 16:13, 14) 마침내 불충실한 왕 ‘사울’은 자포자기하여 영매술자에게 가서 가능하면 죽은 자와 대화하게 해 달라고 하였읍니다. 그 직후 그는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죽었읍니다.

44. 하나님께서는 ‘사울’ 왕이 전쟁에서 죽은 후에 ‘다윗’에게 어떻게 하셨읍니까?

44 ‘다윗’은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아 위임된 왕권을 행사하기 시작하였읍니다. ‘다윗’이 확고히 숭배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능력을 부여하여 그가 공적을 세우고 심지어는 약속의 땅 전체를 정복할 수 있게 하셨읍니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영감을 주시어 예언을 말하고 기록하게 하셨읍니다. 그는 참 예언자였읍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였읍니다.—사도 1:16; 4:24, 25.

45. 그 모든 믿음의 공적에 대한 찬양이 누구에게 돌아가며, 스가랴 4:6에 있는 말에 대한 증거로,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무슨 사건을 축하하였읍니까?

45 이전 시대의 그 사람들이 행한 모든 놀라운 공적에 대한 찬양은 무궁무진하며 강력한 ‘에너지’를 가지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한 공적 가운데는 「창세기」에서 「말라기」에 이르는 영감받은 ‘히브리’어 성경의 서른 아홉권의 기록이 포함됩니다. 「스가랴」 예언서에는, 기원전 607년에 ‘바벨론’인들에 의해 파괴된 성전을 ‘예루살렘’에 재건하는 책임을 맡았던 총독 ‘스룹바벨’에게 주어진 격려적인 말이 있읍니다. 그 성전 재건자가 들은 말은 이러하였읍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영]으로 되느니라.” (스가랴 4:6) 군사력이나 다른 물질적인 힘보다 더욱 강력한 것의 지지를 받은 총독 ‘스룹바벨’과 그의 동역자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적의 반대를 과감히 맞서고 기원전 515년에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성전을 완전히 재건하고 그것을 경축하는 특권을 누렸읍니다.

우리 시대의 공적의 예고

46. 성령을 통한 그러한 인간의 공적들은 어떠한 면에서 단순한 역사적 사실 정도가 아닙니까?

46 ‘스룹바벨’은 통용 기원전 오백여년경 영감하에서 그러한 격려적인 말을 들었읍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찌기 예언자 ‘스가랴’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에게도 의미심장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 하면 우리는 여호와를 초인적인 강력한 ‘에너지’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전 시대의 남녀들에게 주신 자기의 성령의 활동으로 이루신 용맹과 믿음의 공적들은 단순한 역사적 사실 정도가 아닙니다. 그러한 것들은 또한 그분께서 그분의 메시야 즉 그분의 기름부음받은 자 시대 이후로 우리 세대에 이르기까지 달성하실 공적들의 예고이기도 하였읍니다.

47, 48. (ㄱ) 예언된 메시야는 어떻게 비범하게 출생한 사람에 의하여 소개되었읍니까? (ㄴ) 메시야의 선구자는 모태에서부터 무엇으로 충만하게 되어 있었으며, 그는 무엇을 할 것이었읍니까?

47 예언된 메시야는 역시 비범하게 출생한 또 다른 사람에 의하여 십 구세기 전에 소개되었읍니다. 그의 출생은 그의 부모의 정상적인 생식력에 의하지 않았읍니다. 그 부모는 당시 자녀를 출산할 나이가 지났었읍니다. 유일한 아들, 아버지이며 제사장인 ‘사가랴’가 ‘요한’이라고 이름지을 아들을 출산하기 위하여 그들의 생식력이 회복될 필요가 있었읍니다.

48 몹시 고대되었던 그 아들의 출생에 대하여 천사 ‘가브리엘’은 성전에 있는 ‘사가랴’에게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누가 1:5-17; 또한 말라기 4:5, 6 비교.

49. 그러므로, 참 메시야는 스스로 소개할 것입니까, 아니면 소개를 받을 것입니까? 어떻게?

49 그러한 선구자에 의해 소개된 참 메시야는 메시야라고 자처하고 자신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선포하고 일단의 추종자들을 끌기 위하여 자신을 선전하고 다닌 어떤 야심적인 사람이 아닐 것이었읍니다. (이사야 42:2-4) 오히려 그는 하나님께서 보내시고 하나님의 지지를 받는 사람에 의하여 메시야를 찾는 사람들에게 정식으로 소개될 것이었읍니다.—이사야 40:3-5; 요한 1:6, 7.

50. 요엘 2:28-32은 메시야가 도래한 후에 무슨 일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읍니까?

50 메시야가 도래한 후에 요엘 2:28-32의 감동적인 예언이 성취될 것이었읍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신[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영]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51. (ㄱ) ‘요엘’의 예언에 비추어 볼 때에, 지금은 우리가 어떠한 질문들을 해 볼 절호의 때입니까? (ㄴ) 왜 지금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까?

51 지금은 다음과 같이 질문해 볼 절호의 때입니다. 여호와께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받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부어지는 것의 추진력으로 그러한 사람들은 예언을 해야 합니다. 그들의 예언은 그것이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있어야 하며 그것의 도래를 예언해야 하므로 시기에 매우 적절합니다. 그러한 예언에 청종하는 사람들은 피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살아 남는 자’ 가운데 들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기원 1914년 이후의 우리 시대의 모든 상황으로 판단한다면, 우리 앞에 있는 “여호와의 날”은 참으로 “크고 두려운 날”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피하기를’ 원합니까? 그것이 우리의 욕망이라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바로 그분의 영이 다가오는 새 질서 배후에 있기 때문입니다.

[연구 질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