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진동할 때 있을 축복과 선한 통치권
제7장
세계가 진동할 때 있을 축복과 선한 통치권
1. ‘스가랴’는 자기가 예언을 시작한 다음 달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으며, 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는 어떠한 일을 하셨읍니까?
‘바사’ 제국의 왕 ‘다리오’ 1세 통치 제2년 음력 팔월(‘헤스반’월)에 행한 ‘스가랴’의 첫 예언은 짧으면서도 시기에 적절하였고 자극적이었읍니다. (스가랴 1:1-6) 바로 다음 달에 ‘스가랴’는 ‘유대’ 민족의 장래의 복지를 좌우하는 중대한 일이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목격하였읍니다. 음력 구월(‘기슬래’월) 이십 사일에 “여호와의 전 지대를 쌓”았읍니다. ‘스가랴’의 동료 예언자 ‘학개’는 그 중대한 사실을 기록으로 남겼읍니다. (학개 2:18) ‘예루살렘’에 성전을 재건하지 말라는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취해진 그 행동은 종교적으로 매우 중요하였기 때문에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학개’에게 영감을 주어 다시 예언하게 하셨읍니다.
2, 3. (ㄱ) 기원전 520년 ‘기슬래’월 24일에 행한 ‘학개’의 첫 예언은 누구에게 한 예언이었읍니까? (ㄴ) 학개 2:10-12에는 대화의 첫 부분이 어떻게 기록되어 있읍니까?
2 그 역사적인 날에 ‘학개’의 예언 중 첫 예언은 여호와의 성전이 준공되었을 때에 그 곳에서 섬기기를 바라는 ‘레위’ 제사장들에게 한 예언이었읍니다. ‘레위’인 ‘아론’ 계통의 그 제사장들 가운데는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도 들어 있었읍니다. 그 예언은 그 제사장들 모두에게 교훈을 새겨주었으며, 그 교훈은 지금 사는 우리에게도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학개’의 기록을 읽어보고 어떠한 대화가 있었는지 알아봅시다.
3 “‘다리오’ 왕 이년 구월 이십 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는 제사장에게 율법에 대하여 물어 이르기를 사람이 옷자락에 거룩한 고기를 쌌는데 그 옷자락이 만일 떡에나 국에나 포도주에나 기름에나 다른 식물에 닿았으면 그것이 성물이 되겠느냐? 하라.”—학개 2:10-12.
4. 말라기 2:7에 의하면 그 제사장들은 그 시험적인 질문에 왜 대답할 수 있었어야 하였으며, 그러나 무엇이 그들에게 영향을 주었을지 모릅니까?
4 여기서 말한 “율법”은 예언자 ‘모세’를 통하여 주어진 율법이며 의식상의 문제 및 “거룩한 고기”를 운반하는 자들인 제사장들과 관련이 있었읍니다. 물론 제사장들은 ‘모세’의 율법을 잘 알고 있었어야 하였읍니다. 후기의 예언자 ‘말라기’의 기록에 이러한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대저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이 그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니라.]” (말라기 2:7) 그러므로 제사장들은 ‘학개’를 통하여 그들에게 제시된 질문에 정확하게 대답할 수 있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치적입니다. 혹시, ‘유다’ 땅이 칠십년간 황폐되어 그동안 ‘유대’인들이 ‘바벨론’ 땅에서 포로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그리고 충실한 남은 자들이 그들의 고토로 돌아와 십칠년간 고생스러운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율법에 대한 그들의 정통한 지식이 영향을 받지는 않았읍니까? 제사장들은 과연 어떻게 대답하였읍니까?
5. 그 제사장들은 올바른 대답을 말할 때 무슨 율법을 생각하였었을 것이며, 따라서 부정한 사람은 거룩함을 얻는 일에 관하여 어떻게 생각해서는 안되었읍니까?
학개 2:12) 다시 말하면, 여호와께 희생으로 드렸던 동물의 “거룩한 고기”가 우연히 그것에 접촉한 다른 음식을 거룩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읍니다. 이러한 대답의 근거로 제사장들은 레위기 7:19, 20에 있는 율법을 생각하였을지 모릅니다. “그 고기가 부정한 물건에 접촉되었으면 먹지 말고 불사를 것이라. 그 고기는 깨끗한 자만 먹을 것이니 만일 몸이 부정한 자가 여호와께 속한 화목제 희생의 고기를 먹으면 그 사람은 자기 백성 중에서 끊쳐질 것이[라.]” 이에 따르면, 어떤 이유로 부정해진 ‘이스라엘’ 사람은 (레위 7:21) 자기가 “거룩한 고기”를 먹음으로 그 고기에 접촉하였다고 하여 자기가 그로 인하여 깨끗하여졌다고, 그가 먹은 것이 자신을 거룩하게 해주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되었읍니다. 율법에 따르면 그것은 그릇된 추리입니다.
5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아니니라.” (6. ‘학개’는 다음에 무슨 질문을 하였으며, 어떠한 대답이 나왔읍니까?
6 예언자 ‘학개’는 제사장들의 추리가 그릇되다고 말하지 않았읍니다. 그러므로 이번에는 그가 이와 반대의 답을 요하는 질문을 하였읍니다. “‘학개’가 가로되 시체를 만져서 부정하여진 자가 만일 그것들 중에 하나를 만지면 그것이 부정하겠느냐?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부정하겠느니라.”—학개 2:13.
7. 제사장들이 올바른 대답을 한 것은 그들이 시체로 인하여 부정하여진 사람을 깨끗하게 하는데 관한 무엇을 알고 있었음을 증명하였읍니까?
7 제사장들이 이렇게 정확한 대답을 한 것은 그들이 “정결케 하는 물”과 관련하여 언급된 여호와의 율법을 알고 있었음을 증명하였읍니다. 바로 이 물을 희생된 붉은 암송아지의 재와 섞어서 시체를 만져 부정하게 된 사람에게 그 잿물을 뿌렸읍니다. 그 율법은 이러하였읍니다. “사람의 시체를 만진 자는 칠일을 부정하리니 ··· 누구든지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만지고 스스로 정결케 아니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막을 더럽힘이라. 그가 ‘이스라엘’에서 끊쳐질 것은 정결케 하는 물을 그에게 뿌리지 아니하므로 깨끗케 되지 못하고 그 부정함이 그저 있음이니라. 이는 민수 19:2-5, 11-13, 21, 22; 히브리 9:13.
그들의 영영한 율례니라. 정결케 하는 물을 뿌린 자는 그 옷을 빨 것이며 정결케 하는 물을 만지는 자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부정한 자가 만진 것은 무엇이든지 부정할 것이며 그것을 만지는 자도 저녁까지 부정하리라.”—8. 이것은 부정함에 대하여 무엇을 예증하였으며, 이것은 여호와의 성전 건립에 대한 사람의 태도에 어떻게 적용되었읍니까?
8 이것은 부정함이 신체적으로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잘 감염될 수 있음을 예증합니다. 거룩한 것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거룩함을 자동적으로 혹은 쉽사리, 노력없이 다른 사람에게 옮길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정한, 오염된 사람은 다른 사람과 단지 교제하거나 접촉하여도 다른 사람에게 쉽게 영향을 줄 수 있읍니다. 그리스도의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린도 전 5:6; 갈라디아 5:8, 9) 여호와의 성전이 소홀히 여겨지는 데 대한 사람의 불결하고 냉담한 태도도 그렇게 될 수 있읍니다. 여호와의 순결한 숭배 및 성전을 통한 그 숭배의 표현에 대한 그러한 냉담과 무관심한 태도가 영적 누룩과 같이 ‘이스라엘’ 온 국민에게 퍼질 수 있었읍니다. 여호와의 성전을 건립한 후에도 후대의 ‘유대’와 ‘예루살렘’의 총독은 이렇게 말할 필요가 있었읍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리지 아니하리라.” 그 곳에서의 숭배는 온전히 받들어져야 합니다.—느헤미야 10:39.
9. 남은 자들이 십칠년전에 돌아온 후 ‘유대’인들의 태도가 어떻게 되었었음이 분명합니까?
9 분명히 ‘예루살렘’ 성전 재건은 ‘유대’인 남은 자들이 그들의 고토로 돌아온 후 십칠년동안 지연되었읍니다. 증거로 볼 때 많은 사람들이 냉담과 무관심을 보였으며 성전 재건에 대한 처음의 열정이 식어졌음이 분명합니다.
10, 11. (ㄱ) ‘유대’인 남은 자들이 그들이 처음에 가졌던 사랑을 버렸음을 무엇이 증명합니까? (ㄴ) 학개 2:14에 의하면 그 나라와 그 행위가 여호와께 어떻게 보였읍니까?
10 제1세기 말의 그리스도인 회중과 마찬가지로 ‘유대’인 남은 자들에게도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계시 2:4, 5) 의문의 여지없이 ‘유대’인 남은 자들은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돌아오’시도록 그분께 ‘돌아갈’ 필요가 있었읍니다. (스가랴 1:3, 4; 예레미야 2:2, 3) ‘유대’인 남은 자들은 ‘바벨론’에서 돌아온 직후 ‘예루살렘’에서 초막절(장막절)을 기념할 때에 임시로 올바른 장소에 제단을 쌓았고 올바른 희생을 그 위에서 드리기 시작하였읍니다. (에스라 3:1-6)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였읍니까? 단지 그것과 성전 기초만 가지고 있는 그 민족이 하나님께 어떻게 보였읍니까? 들어 보십시오.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말할 수 있었읍니다. (11 “이에 ‘학개’가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에 내 앞에서 이 백성이 그러하고 이 나라가 그러하고 그 손의 모든 일도 그러하고 그들이 거기서 드리는 것도 부정하니라.”—학개 2:14.
12. 그러므로 그들이 여호와의 제단에서 드린 희생은 어떠한 영향을 받았으며, 그 점을 고려할 때 그분은 그들을 축복하실 수 있었읍니까?
12 그것은 시체를 만져 부정하게 된 ‘이스라엘’의 경우와 같았읍니다. 희생된 붉은 암송아지의 재를 섞은 물을 뿌려 정결함을 입기 전에 만진 모든 것은 불결하여졌읍니다. 회복된 ‘이스라엘’ 나라는 여호와의 숭배의 전을 경시하는 태도로 인하여 그분이 보시기에 불결하였으므로 그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임시 제단에서 여호와께 드린 희생을 더럽혔읍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여호와께서 영적으로 뿐 아니라 물질적으로 그들에게 축복을 주실 수 있겠읍니까? 도저히 그러실 수 없었읍니다.
정결케해야 할 현대의 필요성
13. 기원전 520년의 ‘유대’인 남은 자들과 비슷하게 그리스도인 남은 자들은 어떻게 부정하였읍니까?
13 제1차 세계 대전 후 헌신하고 침례받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기름부음을 받은 남은 자들의 입장도 그와 비슷하였읍니다. 그리스도교국과 그에 부속된 수백가지 종파의 교회는 기원 1914년까지 없었던 가장 유혈적인 그 전쟁에서 죽은 수백만명의 피에 더럽혀졌읍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기름부음을 받은 남은 자들은 그러한 유혈죄와 기타 비그리스도인 행위를 멀리하려고 노력하였지만 전적으로 깨끗한 행실은 유지하지 못하고 어느 정도 잠언 29:25) 그러므로 남은 자들은 전쟁으로 황폐되고 유혈의 죄가 있는 현 사물의 제도를 반대하고 하나님의 건설된 왕국과 그의 신원의 날을 담대히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일을 상당히 주저하였읍니다. 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919년에 여호와의 영적 성전 “성소”에 있는 영적 제사장보의 기름부음을 받은 남은 자들인 그들은 어떻게 생각하였읍니까? 다음과 같이 말한 ‘이사야’와 같이 느꼈읍니다.
공동 책임을 지게 되었읍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남은 자들도 고위층에 있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였고 그 결과 영적으로 손상을 입었읍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14. ‘이사야’는 어떻게 성전에서 자신의 부정함을 말로 나타냈읍니까?
14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이사야 6:5.
15. 기름부음을 받은 남은 자들은 언제 ‘이사야’의 이 성전 환상에 주의를 돌렸으며, 기조 연설에서 어떠한 말로 그렇게 하였읍니까?
15 예언자가 이와같이 예언적으로 부르짖은 것은 그가 성전에 계신 여호와의 기적의 환상을 보았을 때였읍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남은 자들은 1922년에 이 환상에 그들의 주의를 돌렸읍니다. 때는 “이 날(The Day)”이라고 일컬어진 날 즉 ‘만국 성경 연구회’가 ‘오하이오’ 주(미국) ‘시더포인트’ 시에서 두번째로 개최한 국제 대회 중인 1922년 9월 8일이었읍니다. 그 당시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 회장은 “이 날”에, 마태 4:17이 주요 성귀였던 그의 연설의 절정에 이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읍니다.
그러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왜 소식을 전합니까? 듣는 사람이 있기나 하겠읍니까? 주님의 예언자가 대답합니다. “···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로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내가 고하였으며 구원하였으며 보였고 너희 중에 다른 신이 없었나니 그러므로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나는 하나님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이사야 43:8-12.
그러므로 성전 반열의 사람들은 이 시대에 주님의 증인으로 임명되었으며
사람들에게 위로의 소식을 전할, 천국이 임하였다는 소식을 전할 사명을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 따라서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바는 그분의 이름을 높이고 사람들에게 그 분이 주님이심을 알게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읍니다. 또한 이 긴장의 시대에 다른 사람들과 분리되고 뚜렷이 구별된 백성, 그분의 증인의 입장에 서서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는 소식을 두려움 없이 외치는 백성을 이 땅에 두시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임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 1914년 이래 영광의 왕께서는 권능을 잡으시고 통치하십니다. 그분은 성전 반열의 입술을 정결케 하시고 소식을 주어 그들을 보냈읍니다. 왕국의 소식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부족합니다. 그것은 모든 소식중 최선의 소식입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 알려져야 할 소식입니다. 그 소식을 선포하는 것이 주님의 백성들의 의무입니다. ···
··· 주님을 위한 충실하고 참된 증인들이 되십시오. ‘바벨론’의 모든 흔적이 사라질 때까지 싸우며 전진하십시오. 멀리, 널리 소식을 포고하십시오. 세상은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왕의 왕이며 만주의 주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은 모든 날중 최상의 날입니다. 보십시오! 왕께서 통치하십니다! 여러분은 그분의 선전원들입니다. 그러므로 왕과 그의 왕국을 광고하고 광고하고 광고하십시오.—「파수대」(영문) 1922년 11월 1일호 336, 337면.
16. (ㄱ) 입술이 깨끗하여진 사람들은 이제 무엇을 하기를 원하였읍니까? (ㄴ) 기름부음을 받은 남은 자들과 연합한 사람들 모두가 그러한 태도를 나타냈는지를 그 당시 무엇이 알려줍니까?
16 예언자 ‘이사야’가 성전에 계신 여호와의 소식을 선포할 수 있도록 마치 불로 깨끗케 된 것처럼 그의 입술이 깨끗케 되었듯이, 기름부음을 받은 남은 자들 중 다수는 그들의 입술이 깨끗케 되어야 할 필요성을 깨달았읍니다. (이사야 6:6-10) 그들은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조 제사장들로 삼으실 자들을 더 모으는 일에 참여하기를 성실히 원하였읍니다. 그 일에 의해서 144,000명의 제사장보가 완성될 것이었읍니다. 그러나 영적 남은 자 전원이 그 당시에 그러한 태도를 나타낸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바로 그 1922년에 「파수대」(영문) 5월 1일호가 발행되기 전에, 그 간행물의 편집부의 다섯 사람 중 한 사람과 그의 아내는 신권 조직을 떠나 다른 직업을 구하였읍니다. 그 무렵에 비슷한 행동을 한 사람들이 더 있었읍니다. 하나님의 왕국의 선전원이 되어 깨끗하여진 입술을 사용하여 호별 방문을 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적합하지 않았읍니다. 여호와의 성전 성소에 있는 영적 제사장보들에 대한 기타 요구 조건은 그들에게 너무나 무거웠읍니다. 그들은 냉담하였고 무관심하였고 세상적 관심사로 돌아갔기 때문에 부정하여졌읍니다.
17. (ㄱ) 그러한 불결함은 여호와의 신권 조직의 나머지 사람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었읍니까? (ㄴ) 어떠한 태도를 그분은 축복하십니까?
17 그러한 종류의 불결함, 영적 성전에 계신 참 하나님의 전적 숭배에 대한 전념의 부족은 신권 조직의 나머지 사람들에게 오염 요소입니다. 그 결과로 여호와께서는 축복을 내리지 않으십니다. 그의 순결한 숭배를 추진하는데 마음을 다하여 전념하면 하나님께서는 은혜와 그분의 약속하신 축복을 회복하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중요한 사실을 ‘학개’의 질문을 받은 제사장들에게 다음과 같이 계속 말씀하시는 가운데 강조하셨읍니다.
18. ‘학개’가 예언한 이날 이전에 남은 자들의 경제적 상태는 어떠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이제 그들을 이 날부터 왜 축복하실 것입니까?
18 “이제 청컨데 너희는 오늘부터 이 전 곧 여호와의 전에 돌이 돌 위에 첩놓이지 않았던 때를 추억하라. 그 때에는 이십석 곡식더미에 이른즉 십석 뿐이었고 포도즙 틀에 오십그릇을 길으려 이른즉 이십 그릇 뿐이었었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 손으로 지은 모든 일에 폭풍과 곰팡과 우박으로 쳤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이키지 아니하였었느니라. 너희는 오늘부터 이전을 추억하여 보라. 구월 이십 사일 곧 여호와의 전 지대를 쌓던 날부터 추억하여 보라. 곡식 종자가 오히려 창고에 있느냐?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학개 2:15-19.
번영으로 돌아오는 날
19. ‘기슬래’월 이십 사일부터 ‘유대’인 남은 자들은 무엇에 있어서 여호와를 시험할 수 있었으며, 그 분의 율법 언약에 근거하여 그들은 무엇을 기대할 수 있었읍니까?
19 이제 때는 아홉째 달(‘기슬래’월) 이십 사일이었으며, 그때까지는 가을 비가 증가되었을 것이며 산꼭대기에는 약간의 눈도 에스라 3:8-12) 그 기념할 만한 날로부터 ‘유대’인 남은 자들은 여호와께서 즐거운 약속을 이행하시는가에 대하여 여호와를 시험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가뭄도, 곰팡이도, 농장물을 해치는 우박도 옛일이 될 것이며 기본 식량이 부족하지 않을 것이었읍니다. 그리고 성서 역사를 읽어 보면 그러한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기록이 없읍니다. 그들이 과감하게 성전 공사에 고착하여 전을 완성시킴에 따라 여호와께서도 자신의 약속에 충실히 고착하셨읍니다. 그분께서 그의 예언자 ‘모세’의 중보로 맺은 율법 언약 가운데서 약속하신 대로 그들이 마음을 다하여 그의 숭배에 전념할 때 그분은 그들에게 주신 땅에서 물질적 번영을 누리도록 보상하실 것이었읍니다.—신명 28:1-14.
보였을 것입니다. 그 날 충실한 ‘유대’인 남은 자들은 성전 기초를 전혀 다시 놓는 것처럼 새로이 기초 공사에 착수하였읍니다. (20. 기름부음을 받은 남은 자들은 여호와의 참 숭배를 위한 사업을 재개하는 보상으로 무슨 번영을 누릴 것을 기대할 수 있었으며, 그러한 번영은 어떻게 나타났읍니까?
20 당시 성전 의식이 강한 ‘유대’인 남은 자들에게 일어난 일이 기원 1919년 이후로 영적 제사장보들의 기름부음을 받은 남은 자들에게 일어난 일을 전영하였다면 당시 ‘유대’인 남은 자들에게 그러한 일이 반드시 있었을 것입니다. 여호와의 참 영적 성전의 성소에서 제사장의 책임을 다시 이행하기 시작한 것은 1914-1918년 제1차 대전 중의 시련과 고난을 살아남은 그리스도의 제자들 즉 기름부음을 받은 남은 자들에게 전환점이 되었읍니다. 그들은 천적 상속을 바라보는 영적 ‘이스라엘’인이므로 ‘학개’ 시대의 육적 ‘이스라엘’ 사람들과 같이 그들의 충실함에 대한 보상으로 물질적 축복을 기대하지는 않았읍니다. 영적 제사장보들인 기름부음을 받은 남은 자들이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기대한 것은 영적 번영이었읍니다. 그들은 실망하지 않았읍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그들의 시험은 헛되지 않았읍니다. 여호와의 영적 성전에서의 참 숭배를 촉진하는 기름부음을 받은 남은 자들의 사업은 세상으로부터 반대가 심하고 계속되는 재난의 타개책을 몰라 세상 나라들이 고민하는 가운데서도 번영하였고 확장하였고 결과는 더욱 풍성하였읍니다.
21. 충실한 남은 자들의 그러한 영적 번영의 기록을 어디에서 볼 수 있으며, 이것은 여호와의 약속에 관하여 무엇을 증명합니까?
마태 24:14, 신세; 28:18-20; 사도 1:8; 히브리 2:17에서 3:1) 현대 역사의 지울 수 없는 기록은 거짓말 하실 수 없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축복의 약속을 그대로 이행하셨다는 사실을 강력히 입증합니다. 우리가 그분을 섬기는 일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여호수아 23:14; 시 138:2; 고린도 전 15:58.
21 종교적, 정치적, 사법적, 사회적 적대자들은 이러한 피할 수 없는 사실을 알게 되었읍니다.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의 영적 번영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려면 1919년 이후로 「파수대」 여러 지면에, 그리고 1927년 이후로 매년 「연감」에 실린 연례보고를 읽기만 하면 됩니다. 그 보고를 읽어보면 여호와의 대제사장,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대로 “이 왕국의 좋은 소식”을 온 땅에 전파하고 모든 나라의 사람들을 제자로 삼는 일이 세계적으로 확대되어 왔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통치체가 깨끗한 숭배를 받든 데 대한 상
22, 23. (ㄱ) ‘학개’의 마지막 예언은 누구에게 전달되었으며, 그것은 무엇에 대한 여호와의 기뻐하심의 표현이었읍니까? (ㄴ) 그 예언에서 여호와께서는 무엇의 기능을 정지시키겠다고 약속하셨으며, ‘스룹바벨’에게 어떻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읍니까?
22 기원전 520년 음력 유월(‘엘룰’월) 초 하루에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이 ‘학개’에게 임하였을 때에 그 예언은 ‘유다’ 총독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에게 그리고 “대제사장 ‘여호사닥’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전달되었읍니다. (학개 1:1) 거의 넉달 후에 ‘학개’의 영감 받은 마지막 예언은 ‘바사’의 ‘유다’ 도 총독 ‘스룹바벨’에게만 전달되었읍니다. 그는 예언자 ‘학개’와 ‘스가랴’를 통한 여호와의 격려에 순종하였고 이제 총독인 그의 지휘하에 여호와의 ‘예루살렘’ 성전 기초 공사는 오해한 ‘바사’ 왕이 잘못 내린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힘차고 용감하게 다시 시작되었읍니다. (에스라 4:17-24)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보고 기뻐하셨읍니까? 기뻐하셨읍니다. 그분은 그러한 표현으로 직접 총독 ‘스룹바벨’에게 소식을 보내셨읍니다. 기록은 이러합니다.
23 “그달 이십 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학개’에게 임하니라. 학개 2:20-23.
가라사대 너는 ‘유다’ 총독 ‘스룹바벨’에게 고하여 이르라. 내가 하늘과 땅을 진동시킬 것이요 열국의 보좌를 엎을 것이요 열방의 세력을 멸할 것이요 그 병거들과 그 탄 자를 엎드러뜨리리니 말과 그 탄 자가 각각 그 동무의 칼에 엎드러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스알디엘’의 아들 내 종 ‘스룹바벨’아,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너를 취하고 너로 인을 삼으리니 이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24. ‘스룹바벨’은 그 ‘기슬래’월 이십 사일에 담대한 행동을 함으로 누구의 승인을 받았으며, 이것이 왜 중요하였읍니까?
24 ‘바사’ 왕 ‘다리오’ 1세 통치 제2년 음력 구월(‘기슬래’월) 이십 사일에 총독 ‘스룹바벨’은 강대국 ‘바사’ 제국을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담대한 행동을 취하였읍니다. 그러나 그것은 만군의 여호와께 순종하는 선하고 올바른 행동이었읍니다. 이제 그는 예언자 ‘학개’를 통하여 만군의 여호와의 승인의 표현을 받았읍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비난이나 반대가 무슨 문제이겠읍니까? 그는 권위의 최고 근원이신 ‘이스라엘’ 나라의 신권 통치자의 승인을 받았읍니다. 인간 통치자보다 신성 통치자이신 이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신권 통치자는 하늘과 땅을 진동시켜 제거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하늘과 땅을 형성하는 영들과 인간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선포된 목적을 좌절시키고 반대하는 데 성공할 수 있겠읍니까? 그럴 수 없었읍니다! 악귀들과 인간들이 모두 합세하여도 그분을 대항하여 승리할 수 없읍니다. 그 분은 그들 모두를 진동시키실 수 있읍니다.
25. 하늘과 땅의 진동에 수반해서 어떠한 일이 일어날 것이며, 만군의 여호와 같은 분이 이에 대하여 자세히 말씀하시는 것이 왜 적절합니까?
25 우주 주권자께서 이처럼 하늘과 땅을 진동시키시는 일에 수반하여 일어나는 일 혹은 결과는 무엇입니까?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열국의 보좌를 엎을 것이요, 열방의 세력을 멸할 것이요, 그 병거들과 그 탄 자를 엎드러뜨리리니 말과 그 탄 자가 각각 그 동무의 칼에 엎드러지리라.” (학개 2:22) 자신을 만군의 여호와라고 부르시는 하나님께서 인류 세계의 군대와 싸우실 것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것은 참으로 적절합니다! 공격과 방어를 위한 그러한 무장한 군대는 과연 “열방의 세력”을 형성합니다. 현 이십 세기의 나라들은 그러한 이론을 기초로 전진하고 있으며 모든 나라가 무장을 갖추고 있고 일부 나라는 현대 과학이 고안할 수 있는 가장 가공할 만한 무기를 보유하고 있읍니다. 그러나 아무리 무력을 강화하고 군대를 고도로 훈련시킬지라도 그것이 열국의 보좌 혹은 행정 중심지를 영구적으로 안정시킬 수 있다는 희망은 되지 않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그러한 “세력”을 소멸하실 수 있읍니다.
26.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의 원수들이 그 분을 대항하여 싸우도록 혹은 그분이 그들을 대항하여 싸우기 위하여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실 필요가 있는지의 여부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읍니까?
26 성서 역사상 네째 세계 강국으로 등장한 ‘바사’ 제국은 이백년 남짓하게 견고한 위치를 유지하였읍니다. 그 나라의 말과 병거와 그 탑승자들은, 그리고 군사로 동원된 코끼리까지도, 희랍의 ‘알렉산더’ 대왕에 의하여 자기 나라가 멸망되는 것을 막지 못하였읍니다. 말과 병거들과 그 탑승자들은 보이지 않는 만군의 여호와를 직접 대항할 수 없읍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지상의 군대와 싸우시기 위하여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실 필요도 없읍니다. 보이지 않는 곳으로부터 그 분은 보이지 않는 능력을 발휘하실 수 있고 공포감으로 혹은 당황하게 하여 혹은 그들 사이에 심한 반목을 일으켜 그들끼리 싸우게 하실 수 있읍니다. 그분은 모든 적들을 무정부 상태에 빠지게 하실 수 있읍니다. 그 분은 이전에 그렇게 하셨으며, 또 그렇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읍니다. 총독 ‘스룹바벨’은 그러한 전례를 알고 있었읍니다. (사사 7:19-22; 역대 하 20:22-24) 그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들의 원수들끼리 무기를 들어 치게 하심으로 다시 한번 그들의 계략을 좌절시키실 수 있다고 믿을 수 있었읍니다.
27. 하늘과 땅과 나라들의 진동은 여호와의 손에 있는 인장 반지와 같은 ‘스룹바벨’에게 어떠한 영향을 줄 것이었읍니까?
27 그러나,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숭배의 전을 재건하는 데 그리고 그 안에서 깨끗한 숭배를 드리는 데 전념하는 그의 충실하고 순종적인 백성을 진동시키는 것이 그 분의 목적이라고는
말씀하시지 않았읍니다. 총독 ‘스룹바벨’이 왕 ‘다리오’ 1세로부터 공식 허가를 받기도 전에 성전 건축 공사를 추진한다고 하여 ‘바사’ 황제에 의하여 실각되지는 않을 것이었읍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오른 손에서 인장 반지를 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일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늘과 땅은 진동하고야 말것입니다! 중무장을 한 나라들도 진동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총독 ‘스룹바벨’의 지위는 견고할 것이며 요동하지 않을 것이었읍니다.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다음과 같은 말씀은 그와 같이 강력한 보증의 말씀이었읍니다.28, 29. 여호와께서 인장 반지에 대하여 ‘스룹바벨’에게 하신 약속과 왕 ‘여호야긴’ 즉 ‘고니야’에 대하여 선언하신 말씀은 어떻게 반대적이었읍니까?
28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스알디엘’의 아들 내 종 ‘스룹바벨’아,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너를 취하고 너로 인을 삼으리니 이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학개 2:23.
29 이 하나님의 예언은 예언자 ‘예레미야’가 영감을 받아 ‘여호야긴’(혹은 ‘여고냐’, ‘고니야’)에 대하여 한 말과 정반대였읍니다! ‘여호야긴’은 기원전 618-617년에 ‘예루살렘’에서 석달 열흘 동안 통치한 사람이며 ‘스룹바벨’의 조부였읍니다. (역대 상 3:17-19; 역대 하 36:9, 10) ‘예레미야’는 ‘여호야긴’을 ‘고니야’라고 부르면서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너 ‘고니야’가 나의 오른 손의 인장 반지라 할지라도 내가 빼어 네 생명을 찾는 자의 손과 너의 두려워하는 자의 손 곧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과 ‘갈대아’인의 손에 줄 것이라. 내가 너와 너를 낳은 어미를 너희가 나지 아니한 다른 지방에 쫓아내리니 너희가 거기서 죽고 너희 마음에 돌아오기를 사모하는 땅에 돌아오지 못하리라. 이 사람 ‘고니야’는 천한 파기냐? 좋아하지 아니하는 그릇이냐? 어찌하여 그와 그 자손이 쫓겨나서 알지 못하는 땅에 들어 갔는고? 땅이여, 땅이여, 땅이여, 여호와의 말을 들을찌니라.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이 사람이 무자하겠고 그 평생에 형통치 못할 자라 기록하라. 이는 그 자손 중 형통하여 ‘다윗’의 위에 앉아 ‘유다’를 다스릴 사람이 다시는 없을 것임이니라.”—예레미야 22:24-30.
30. (ㄱ) 인장 반지는 그것의 소유자에게 얼마나 귀중하였읍니까? (ㄴ) ‘여호야긴’의 공직은 왜 존경을 받아야 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왜 그를 배척하셨읍니까?
30 ‘스룹바벨’의 조부에 대한 하나님의 이 명령으로 볼 때 인장 반지라는 것이 고위층에 있는 사람에게 매우 귀중하였음을 인식할 수 있읍니다. 그 반지에는 그것의 소유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으며 공식적 업무에서 공문서 인증의 표시로 그 문서에 소유자의 서명 대신 사용되었읍니다. (창세 38:18-26; 41:42; 열왕 상 21:8) 그러므로 만일 ‘스룹바벨’의 조부 ‘여호야긴’ 왕이 여호와의 오른 손의 인장 반지와 같았다면 그는 여호와께 매우 귀중한 존재였을 것입니다. 사실 그는 기름부음을 받아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었으며 따라서 그는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되었고 비록 삼개월 열흘 동안에 불과하였지만 ‘예루살렘’에서 “여호와의 보좌”에 앉았었읍니다. (사무엘 상 24:6, 10; 애가 4:20; 역대 상 29:23, 신세) 이러한 이유로 ‘여호야긴’이라는 사람은 사람들로부터 특별한 존경을 받기에 합당하였으며 또 존경을 받았읍니다. 그러나 그는 여호와와 공적 관계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버지 ‘여호야김’과 같이 악한 길로 계속 갔기 때문에 여호와를 불쾌하시게 했읍니다. 분노하신 여호와께서는 그를 폐위시키고 추방하여 ‘바벨론’으로 사로 잡혀가 거기에서 투옥되게 하셨읍니다.
31. 기원전 537년에 ‘스룹바벨’이 ‘유다’ 도의 총독이 된 것은 여호와께서 예레미야 22:30에서 ‘스룹바벨’의 조부에 대하여 하신 말씀과 왜 모순된 것이 아니었읍니까?
31 그러나 이것은 어찌된 일입니까? 팔십년 후 즉 기원전 537년에 ‘여호야긴’의 손자 ‘스룹바벨’은 ‘바벨론’의 포로 생활에서 해방되어 ‘바사’의 ‘유다’ 도의 총독이 되어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되었읍니다. (에스라 1:1에서 4:3) 그것은 여호와께서 예레미야 22:30에서 ‘스룹바벨’의 조부에게 하신 말씀과 모순되지 않았읍니까? 모순이 아니었읍니다. 포로로 잡혀간 ‘여호야긴’에게는 ‘예루살렘’에서 ‘다윗’의 보좌에 앉을 아들에 있어서만은 여전히 “무자”하였읍니다. 사실 나중에 이름을 ‘시드기야’로 고친 그의 삼촌 ‘맛다니야’가 그를 계승하여 ‘다윗’의 보좌에 앉았지만 ‘바벨론’인들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기원전 607년에 보좌에서 물러나고 말았읍니다. ‘다윗’의 보좌는 무너졌으며 실제로 지적 ‘예루살렘’에 다시는 놓이지 않았읍니다. (에스겔 21:25-27) 그리하여 ‘예루살렘’ 혹은 그것이 상징한 하나님의 메시야 왕국이 이방 나라들에게 짓밟히는 2,520년간의 이방인의 때는 기원전 607년에 시작되었읍니다. 예언된 대로 ‘여호야긴’의 여러 아들들 중 아무도 ‘다윗’의 왕손으로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보좌에 앉지 못하였읍니다. 그의 손자 ‘스룹바벨’은 ‘다윗’의 왕좌가 아니라 왕 ‘고레스’의 임명을 받은 총독의 자리에 앉았읍니다.
32. ‘스룹바벨’은 어떻게 여호와의 손에 있는 살아 있는 인장 반지와 같이 행동하였으며, 그는 왕이었던 그의 조부와 반대로 왜 여호와께 귀중하였읍니까?
32 ‘스룹바벨’은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에 공적 지위에 있어서 조부보다 낮았지만 그는 여호와 보시기에 만군의 여호와의 오른 손에 있는 인장 반지처럼 매우 귀중한 존재였읍니다. 그 이유는 ‘여호야긴’ 왕이 여호와께 매우 귀중하지 않고 버림받은 이유와 반대였읍니다. 즉 그는 여호와의 계명을 계속 지키고 성전에서의 여호와의 깨끗한 숭배에 전념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살아 있는 인장 반지와 같이 공적으로, 여호와의 거룩한 이름의 영광과 찬양을 위하여 여호와를 섬겼읍니다. 만군의 천적 사령관께서는 왕 ‘여호야긴’을 배척하신 것과는 반대로 그의 충실한 손자 ‘스룹바벨’을 “택”하셨읍니다. 우주의 신권적 주권자께서는 하늘과 땅과 세상의 모든 군대화한 나라들을 진동시킬지라도 총독 ‘스룹바벨’은 진동시키지 않을 것이며, 보이는 신권 조직 내의 존귀한 봉사의 지위에서 그를 제거하시지 않을 것이었읍니다. 그분께서 예언자 ‘스가랴’를 통하여 ‘스룹바벨’에 관하여 후에 하신 말씀(4:6-10)은 이것을 확증하였읍니다.
그 예언의 더 넓은 의미
33. (ㄱ) ‘학개’의 예언의 완전한 성취는 기원전 6세기에 총독 ‘스룹바벨’과 함께 왜 끝나지 않았읍니까? (ㄴ) ‘스룹바벨’의 실체는 누구의 총독입니까?
33 이 예언은 통용 기원전 6세기에 ‘바사’의 ‘유다’ 도 총독 마태 1:1-16; 누가 3:23-27) ‘스룹바벨’의 이 실체는 이제 여호와의 지상에 있는 보이는 신권 조직 즉 영적 ‘이스라엘’의 기름부음을 받은 남은 자들의 천적 총독이십니다. (갈라디아 6:16; 로마 2:28, 29; 계시 7:4-8) 사실이 증명하는 바에 의하면 이들은 1919년에 큰 ‘바벨론’의 영적 속박에서 회복 되었읍니다. ‘유대’인 포로의 고대 남은 자들과 같이 그들은 ‘바벨론’적 거짓 종교 세계 제국에서 해방되어 영적 성전에 계신 여호와의 깨끗한 숭배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읍니다.
‘스룹바벨’에게 완전히 성취되고 끝났읍니까? 분명히 그렇지 않았읍니다! 그는 더 큰 어떤 분의 모형이었읍니다. 누구의 모형이었읍니까? 그의 존귀한 후손, 성서 기록에 있는 그의 족보의 끝에 나오는 분 즉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었읍니다. (34. 그 분은 어떻게 여호와의 성전과 관련된 일의 주창자이십니까?
34 ‘스룹바벨’의 실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적 ‘이스라엘’의 천적 총독으로서 여호와의 성전과 관련된 이 일의 주창자이십니다. 그분은 그의 기름부음을 받은 제자들이 그 성전 성소에서 영적 제사장보로 봉사할 장소를 갖도록 조정하십니다.—요한 17:17-19.
35. ‘스룹바벨’이라는 이름은 그 의미에도 불구하고 천적 총독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용하는 것이 어떻게 적절할 수 있읍니까?
35 ‘스룹바벨’이라는 이름이 “‘바벨론’의 씨”를 의미한다고 해서 그를 총독으로서의 천적 예수 그리스도에 적용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읍니다. 그 분이 큰 ‘바벨론’에 계신 적이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 중의 시련과 박해를 살아 남은 기름부음을 받은 제자들인 남은 자들은 대전 중 큰 ‘바벨론’과 그의 정치적 애인들에게 종교적으로 속박되어 있었읍니다. 그들에게 한 것이 곧 그분께 한 것과 같다는 법칙을 적용시킨다면 더 큰 총독 ‘스룹바벨’(기름부음을 받은 남은 자들로 대표된)은, 실제로 ‘바벨론’에서 태어났고 따라서 “‘바벨론’의 씨”라고 불리울 수 있었던 고대의 ‘스룹바벨’과 흡사하게 큰 ‘바벨론’에 계셨읍니다. 그는 ‘유브라데’ 강 유역에 요한 8:32) 지상의 보이는 신권 조직은 총독인 그분의 선한 통치권의 혜택을 받고 있읍니다.
있던 고대 도시보다 더 큰 ‘바빌론’에서 영적 ‘이스라엘’의 기름부음을 받은 남은 자들을 인도하여 내시고 진리로 그들을 자유케 하셨읍니다. (36. 천적 총독은 귀중함과 용기에 있어서 어떻게 고대 ‘스룹바벨’과 비교되며, 오늘날 지상에 있는 누가 그 분을 본받고 있읍니까?
36 ‘스룹바벨’과 같은 이 총독은 여호와 하나님께,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진 오른 손의 인장 반지같이 극히 귀중합니다. 그는 그의 천적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데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읍니다. (마태 6:9, 10; 요한 12:28; 17:6-12) 그는 고대 ‘스룹바벨’과 같이 두려움이 없으십니다. 총독 ‘스룹바벨’은 강화되어 성서 역사상 네째 세계 강국인 ‘바사’ 제국에 도전하였었읍니다. 오늘날 영적 ‘이스라엘’의 천적 총독께서는 성서 역사상 일곱째 세계 강국 즉 영·미 양대 강국도, 여덟째 세계 강국 즉 세계 평화와 안전을 위한 세계 기구인 1972년 현재 132개 회원국으로 구성된 국제 연합도 두려워하지 않으십니다. (계시 17:7-17) 영적 ‘이스라엘’의 기름부음을 받은 남은 자들은 그들의 천적 총독과 같이 그러한 세계 강국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두려움 없이 세계적인 규모로 여호와의 영적 성전에서의 깨끗한 숭배를 위하여 일합니다.
37. ‘스룹바벨’의 실체는 용도와 귀중함에 있어서 어떻게 여호와의 손의 인장 반지와 같습니까?
37 고대의 인장 반지는 그것의 소유자의 이름을 찍고 그렇게 하여 그 문서가 참으로 그 사람이 작성하였고 그 문서가 그의 뜻이나 목적 혹은 교훈을 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데 사용되지 않았읍니까? 그렇습니다. 마찬가지로 ‘스룹바벨’의 실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만군의 여호와에 의하여 예언과 약속을 성취하는데 사용되고 있으며 그렇게 하여 그 기록된 선언들이 참으로 절대 불과오한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으며 하나님의 진리라는 것을 증명하는데 사용되고 있읍니다. 또한 이러한 방법으로 여호와의 이름과 말씀이 여호와께 공식 인장 반지처럼 귀중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입증되고 있읍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그리스도인 고린도 후 1:20.
제자들]가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38. 더 큰 ‘스룹바벨’은 오늘날의 하늘과 땅과 나라들의 진동을 보고도 왜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그는 어떻게 여호와의 숭배자들에 대한 선한 통치권을 유지하실 것입니까?
38 기원 1914년에 이방인의 때가 종결된 후로 상징적 하늘과 땅은 진동되어 왔읍니다. 인류 세상 나라들은 진동하고 있으며 세상적 사물의 제도를 안정시키지 못하고 있읍니다. 진동시키는 일을 하시는 분은 만군의 여호와이십니다. 그 분이 고대의 총독 ‘스룹바벨’에게 말씀하신대로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억제할 수 없는 그 진동은 현재 매우 임박한 “큰 환난”에서 격동의 절정에 이를 것이며 그 직후 ‘사단’이 무저갱에 감금될 것입니다. (마태 24:21, 22) 그러나 더 큰 ‘스룹바벨’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진동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으십니다. 그에게 주어진 천적 총독의 지위는 요지부동합니다. 그의 왕국은 “진동치 못할 나라”입니다. (히브리 12:28) 그 왕국이 제거되기는 커녕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그 왕국을 사용하여 오늘날의 큰 ‘바벨론’과 세계 열강을 제거하실 것이며, ‘아마겟돈’에서 있을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에서 그 군사적 “세력”을 멸하실 것입니다. (계시 16:13-16; 17:12-14; 19:11-21) 그 후에 그 왕국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적 성전에 있는 그의 모든 생존한 숭배자들을 축복하여 그들이 영원히 선한 통치권의 혜택을 받게 할 것입니다.
39. 오늘날 여호와의 숭배자들인 우리는 왜 행복합니까?
39 참 성전에 있는 우리 숭배자들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거짓 숭배자들의 세상이 진동하고 있는 이 때에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축복과 여호와의 천적 총독의 선한 통치권의 혜택을 즐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연구 질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