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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들을 해방시킬 왕의 나타나심

포로들을 해방시킬 왕의 나타나심

제16장

포로들을 해방시킬 왕의 나타나심

1. 오늘날 자주 보도되는 지역과 도시들에 대하여 말한 ‘스가랴’의 예언은 현재 어떻게 성취되며, 오늘날의 성취를 알아내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까?

오늘날 ‘시리아’, ‘레바논’ 및 ‘가사’ 땅이 ‘뉴스’의 각광을 받고 있읍니다. 이러한 지역에 있는 도시들의 이름이 ‘스가랴’의 예언서 9장에 나와 있읍니다. 그러나 기원전 6세기에 예언자 ‘스가랴’가 말한 내용은 ‘이스라엘’ 공화국과 관련된 오늘날의 이러한 지역에 적용되지 않습니다. ‘스가랴’의 예언은 먼저 문자적으로 통용 기원 1세기에 성취되었지만 그 예언은 오늘날 현 이십 세기에 영적으로 혹은 상징적으로 최종적 성취를 보고 있읍니다. 십구세기 전의 처음 성취를 알아 봄으로써 우리는 오늘날의 영적 성취를 분별할 수 있읍니다.

2. 어느 시대의 지도에 우리는 관심을 돌리고 있으며, ‘하드락’ 땅과 관련하여 언급된 장소들은 ‘유대’ 지방입니까?

2 ‘바사’ 왕조 치세 중의 ‘팔레스티나’ 지도를 보면 ‘시리아’의 수도 ‘다메섹’과 ‘다메섹’에서 약 193‘킬로미터’ 북쪽에 ‘하맛’이 있읍니다. 또한 지중해 연안으로 고대 ‘베니기아’(현재 ‘레바논’)의 도시들인 ‘두로’와 ‘시돈’이 있읍니다. 그리고 ‘블레셋’ 도시들인 ‘가사’, ‘아스글론’, ‘에그론’, ‘아스돗’ 및 ‘갓’이 있읍니다. 그리고 ‘예루살렘’과 ‘사마리아’가 있읍니다. “‘하드락’ 땅”은 어떠한 지도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그 위치와 정확한 경계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언에서는 이 땅을 ‘다메섹’과 연관시키고 있읍니다. ‘베일리’와 ‘터싱햄’에 의한 「성서 세계 지도」(초판 1971년) 199면에서는 “‘하드락’ 땅”을 단순히 “‘다메섹’ 근처 ‘시리아’의 한 지방”이라고 하였읍니다. 「웨스트민스터 성서 역사 지도」 개정판(1956년) 124면은 ‘하드락’ 땅이 “‘하맛’ 북쪽 ‘시리아’의 한 지방”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다메섹’ 북쪽 지방이라는 말이 됩니다. “‘하드락’ 땅”이라는 표현이 이상의 ‘시리아’, ‘베니기아’ 및 ‘블레셋’ 도시 전체를 포함하는 집합적 구역을 의미하는 상징적 표현인지의 여부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도시들은 모두 비‘이스라엘’, 비‘유대’ 도시들입니다.

3. 스가랴 8장의 마지막 귀절들은 9장의 처음 귀절들과 어떻게 대조를 이룹니까?

3 ‘스가랴’ 예언 8장 마지막 귀절들(20-23절)은 열국의 모든 언어와 많은 도시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여호와를 숭배할 것이며 ‘유대’인 한 사람의 옷 자락을 잡고 그와 함께 가서 그의 하나님을 숭배할 것이라고 설명하였읍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그 다음 장(9) 처음 여덟 귀절은 그렇게 하지 않는 데 대한 몇가지 결과를 명쾌하게 알려줍니다. 그러면 그 부분, 스가랴 9:1-8을 읽어 봅시다.

4. 스가랴 9:1-8에 의하면 언급된 지방의 활동에 간섭하는 분은 누구이며, 누구를 위하여 그렇게 합니까?

4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가 ‘하드락’ 땅에 임하며 ‘다메섹’에 머물리니 세상 사람과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눈이 여호와를 우러러 봄이니라. 그 접경된 ‘하맛’에도 임하겠고 ‘두로’와 ‘시돈’은 넓은 지혜가 있으니 그들에게도 임하리라. ‘두로’는 자기를 위하여 보장을 건축하며 은을 티끌같이, 정금을 거리의 진흙같이 쌓았은즉 주께서 그를 쫓아내시며 그의 바다 권세를 치시리니 그가 불에 삼키울찌라. ‘아스글론’이 보고 무서워 하며 ‘가사’도 심히 아파할 것이며 ‘에그론’은 그 소망이 수치가 되므로 역시 그러하리라. ‘가사’에는 임금이 끊칠 것이며 ‘아스글론’에는 거민이 없을 것이며 ‘아스돗’에는 잡족이 거하리라. 내가 ‘블레셋’ 사람의 교만을 끊고 그 입에서 그 피를, 그 잇 사이에서 그 가증한 것을 제하리니 그도 남아서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유다’의 한 두목 같이 되겠고 ‘에그론’은 ‘여부스’ 사람 같이 되리라. 내가 내 집을 둘러 진을 쳐서 적군을 막아 거기 왕래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 포학한 자가 다시는 그 지경으로 지나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눈으로 친히 봄이니다.”

5. 왜 여호와의 노가 ‘다메섹’, “‘하드락’ 땅” 및 ‘하맛’에 머물렀읍니까?

5 기원전 6세기의 고대 ‘시리아’는 거짓 신들을 숭배하였고 회복된 ‘유다’ 땅에 대하여 적의를 품었읍니다. ‘시리아’는 ‘예루살렘’에 재건된 성전에서 여호와를 숭배하기를 거절하였읍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시리아’의 일부로 “‘하드락’ 땅”에 대하여 유리한 말씀이 아니라 경고를 발하시는 데는 이유가 충분히 있었읍니다. 그의 불리한 말씀은 ‘시리아’ 전체의 수도 즉 ‘다메섹’에 머물 것이었읍니다. ‘하맛’ 지방은 ‘다메섹’과 접하였으므로 ‘하맛’에도 여호와의 불리한 경고가 머물 것이었읍니다. 그러므로 ‘시리아’ 전역이 하나님의 은총을 얻지 못하고 있었읍니다.

6. 왜 여호와께서는 ‘베니기아’ 도시들에 대하여 불리한 말씀을 하셨읍니까?

6 ‘베니기아’ 지방도 ‘시리아’와 접경해 있었으며 그 지방도 절박한 재난의 때에 ‘유다’ 땅을 적대하였읍니다. 시편 83:5-8은 여호와의 백성들에 대한 국제적인 음모에 가담한 ‘베니기아’의 도시인 ‘그발’과 ‘두로’를 포함시켜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저희가 ··· 주를 대적하여 서로 언약하니 곧 ‘에돔’의 장막과 ‘이스마엘’인과 ‘모압’과 ‘하갈’인이며 ‘그발’과 ‘암몬’과 ‘아말렉’이며 ‘블레셋’과 ‘두로’ 거민이요 ‘앗수르’도 저희와 연합하여 ‘롯’ 자손[‘모압’과 ‘암몬’]의 도움이 되었나이다.” ‘두로’는 사실 ‘시돈’의 식민 도시였읍니다. 그러므로 스가랴 9:2-4은 그 도시를 언급하여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7. 스가랴 9:2-4은 ‘두로’를 무엇과 연결시키며, ‘두로’가 어떻게 될 것이라고 예언되었읍니까?

7 “‘두로’와 ‘시돈’은 넓은 지혜가 있으니 그들에게도 임하리라. ‘두로’는 자기를 위하여 보장을 건축하며 은을 티끌같이, 정금을 거리의 진흙같이 쌓았은즉 주께서 그를 쫓아내시며 그의 바다 권세를 치시리니 그가 불에 삼키울찌라.”

8. ‘스가랴’가 언급한 ‘두로’는 어느 ‘두로’이며, 왜 그렇습니까?

8 그 말씀으로 볼 때 “여호와의 말씀”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시 ‘두로’와 ‘시돈’으로 대표된 ‘베니기아’ 전역에 대하여도 불리한 선언이었음이 확실합니다. 여기서 ‘두로’라는 이름의 도시는 섬 도시입니다. 왜냐 하면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팔레스티나’ 원정 중에 육지 도시를 파괴하였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29:17-20) ‘두로’의 생존자들은 앞 바다의 도시로 도피하여 그곳에 강대한 도시를 건설하였읍니다. 에스겔 28:1-19의하면 ‘두로’는 그의 이전 친구 ‘이스라엘’에 대해 마귀적인 배반자가 되었으며 ‘시돈’은 ‘두로’와 같은 길을 택하였읍니다. (에스겔 28:20-26) 칠십년 황폐 후 기원전 537년에 ‘유다’ 땅이 회복된 후 ‘두로’와 ‘시돈’은 ‘예루살렘’과 두번째 성전에 대한 마음의 태도를 변경시키지 않았읍니다. 참으로 현명하지 못하였읍니다!

9. ‘두로’는 어떻게 재산을 축적하고 힘을 축적하였으며, 그러나 ‘두로’에 대한 여호와의 예언은 어떻게 이루어졌읍니까?

9 ‘두로’와 ‘시돈’은 이 세상의 지혜를 계속 따르고 세상 지혜를 증가시켜 재산을 축적하고 약탈을 당할 수 있는 금과 은을 이 땅에 쌓는 데 힘썼읍니다. ‘두로’가 해상의 상업국으로 안전을 위하여 구축한 강력한 성벽은 기원전 332년에 희랍의 정복자 ‘알렉산더’ 대왕의 전략을 저항하지 못하였읍니다. 지상의 군대와 많은 배에 탄 해상의 군대가 그때 무력하였읍니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지적 집행 도구를 통하여 ‘두로’의 군대를 바다 속에 던져 넣으셨읍니다. ‘두로’가 바다에 요새를 만들었지만 허사가 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두로’의 막대한 재물을 정복자에게 넘겨 줌으로 ‘두로’를 쫓아 내셨읍니다. 그때 ‘두로’는 불에 삼키워 완전히 멸망되었읍니다.

10. ‘두로’와 ‘시돈’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어떠한 관심을 나타냈으며, 보고에 의하면 ‘두로’에 무엇이 설립되었었읍니까?

10 여러 해 후에 ‘두로’가 재건되긴 했지만, ‘두로’도 ‘시돈’도 그 도시에 대한 “여호와의 말씀”이 성취되기 전에 가졌던 강력한 상업적 위치를 회복하지 못하였읍니다. 통용 기원 1세기에 ‘두로’와 ‘시돈’에서 많은 사람이 와서 예수의 말씀을 듣고 그의 행적을 보았으며 치료를 받았읍니다. (마가 3:7, 8; 누가 6:17; 마태 15:21-29) 마태복음 11:20-22과 누가복음 10:13, 14에 있는 예수의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의 왕국의 소식을 듣고 그에 따라 행동할 마음을 가진 사람이 많았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세째 선교 여행시에 ‘두로’에는 그리스도인 회중이 하나 있었읍니다. (사도 21:2-7) 이 ‘두로’인들은 군대에 의지하거나 지상에 보물을 쌓는 일을 하지 않고 하늘에 보물을 쌓았읍니다.

이교 원수의 교만이 끊어짐

11, 12. (ㄱ) 고대에 어떠한 도시 연맹이 ‘블레셋’을 다스렸읍니까? (ㄴ) 여호와께서는 누구의 교만을 끊으실 것이며, 어떻게 끊으실 것입니까?

11 ‘블레셋’에 대한 경고로 선언된 “여호와의 말씀”은 어떠하였읍니까? 고대에는 ‘아스돗’, ‘아스글론’, ‘에그론’, ‘갓’, ‘가사’ 등 오개 도시 연맹이 ‘블레셋’ 땅을 지배하였읍니다.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블레셋’에 대하여 선언된 이 “여호와의 말씀” 가운데서 ‘갓’은 언급되지 않았읍니다. 스가랴 9:5-7은 계속 이렇게 예언하였읍니다.

12 “‘아스글론’이 보고 무서워하며, ‘가사’도 심히 아파할 것이며 ‘에그론’은 그 소망이 수치가 되므로 역시 그러하리라. ‘가사’에는 임금이 끊칠 것이며 ‘아스글론’에는 거민이 없을 것이며 ‘아스돗’에는 잡족이 거하리라. 내가 ‘블레셋’ 사람의 교만을 끊고 그 입에서 그 피를, 그 잇사이에서 그 가증한 것을 제하리니 그도 남아서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유다’의 한 두목같이 되겠고 ‘에그론’은 ‘여부스’ 사람 같이 되리라.”

13. (ㄱ) 기원전 332년의 ‘두로’의 멸망은 ‘아스글론’과 ‘가사’와 ‘에그론’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입니까? (ㄴ) ‘아스돗’은 어떻게 달라질 것이었읍니까?

13 그러므로 ‘아스글론’ 시는 ‘두로’의 멸망을 보고 무서워할 것이며 마침내 거민이 없게 될 것입니다. 분명히 ‘가사’는 같은 이유로 심한 아픔을 느꼈으며, 그 쓰라린 사건과 그 결과로 ‘가사’의 집권자가 바뀌었고 원래의 왕은 없어졌읍니다. 분명히 ‘에그론’ 시는 공격해오는 적으로부터 ‘두로’가 보호하여 주고 구출하여 줄 것으로 기대하였읍니다. 그러므로 ‘두로’가 기원전 332년에 ‘알렉산더’ 대왕의 칠개월간의 포위 공격 끝에 몰락하였을 때 ‘에그론’도 희망이 좌절되고 수치가 되었으므로 심히 아파하였읍니다. 그러나 네번째로 언급된 도시인 ‘아스돗’은 어떠하였읍니까? 분명히 그 도시의 주민이 달라질 것이었읍니다. 왜냐 하면 “‘아스돗’에는 잡족이 거하리라”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합법적인 원주민은 그 곳에 머물지 못할 것입니다. 나그네들, 외래인들이 그 도시를 점령하고 집권할 뿐 아니라 주민이 될 것입니다.

14.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무슨 잘못을 저질렀으며, 여호와께서는 이것을 어떻게 끊으실 것입니까?

14 그러므로 분명히 “여호와의 말씀”은 ‘블레셋’에게 불리한 경고였읍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매우 교만하였고 여호와의 백성들이 고토로 돌아온 후에도 특히 그들에 대하여 거만하였읍니다. 그러나 그들의 교만은 파멸을 초래하였읍니다. 여호와께서는 상술한 일들을 ‘블레셋’의 4대 도시에 행함으로 “‘블레셋’ 사람의 교만”을 끊으실 것입니다. 여호와의 백성과 비교하여 자랑할 수 있는 ‘블레셋’ 사람이 더는 없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또한 그들의 거짓 종교 숭배도 끊으실 것입니다.

15. (ㄱ) ‘블레셋’인들의 ‘피 묻은 것’과 “가증한 것”은 어떻게 될 것입니까? (ㄴ) ‘블레셋’의 남은 자들은 어떠한 행로를 취할 것입니까?

15 그들은 거짓 신들에게 숭배를 드릴 때에 여호와와 그의 백성들이 보기에 가증한 희생을 먹었읍니다. 또한 그들이 희생의 식사시에 먹은 동물 희생은 피를 빼지 않은 것이었읍니다. 그러한 가증한 우상 숭배는 중지되지 않으면 안되었읍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이렇게 계속되었읍니다. “그[블레셋] 입에서 그 피[피묻은 것들, 신세]를, 그 잇사이에서 그 가증한 것을 제하리니 그도 남아서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리라.]” 그러한 피묻은 가증한 것을 그 ‘블레셋’의 입과 잇사이에서 어떻게 제할 것인지는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고 가증한 희생과 의식을 겸한 우상 숭배를 버리지 않는 ‘블레셋’인 전체 가운데서 자진적으로 순종적으로 그렇게 할 남은 자들은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 남은 자들은 “우리 하나님께로,” 만군의 여호와께로 돌아올 것입니다. 참으로 이것은 생명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변화일 것입니다! 그러나 스가랴 9:7은 이 남은 자들에 관하여 이렇게 부언하였읍니다. “‘유다’의 한 두목 같이 되겠고 ‘에그론’은 ‘여부스’ 사람 같이 되리라.”

16. (ㄱ) 어떻게 ‘블레셋’의 남은 자들은 “‘유다’의 한 두목같이” 될 것입니까? (ㄴ) “‘여부스’ 사람같이” 된다는 말은 ‘에그론’ 사람들에게 어떠한 사회 계층을 암시하였읍니까?

16 물론 ‘함’족인 ‘블레셋’ 사람들은, ‘셈’족이며 ‘히브리’인인 ‘유다’ 지파의 두목이 될 수 없었읍니다. (창세 10:6, 13, 14, 21-25) 그러나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숭배로 개종한 순종하는 남은 자들은 ‘유다’의 한 두목 같이 될 수 있었읍니다. 즉 남은 자들은 여호와의 선민과 관련하여 탁월한 지위를 가질 것이며 미미하고 하찮은 존재로 간주되지 않을 것입니다. 일족의 두목과 같이 그들에게 책임이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 책임은 ‘유대’인들의 책임보다는 낮을 것입니다. 이것은 ‘에그론’이 “‘여부스’ 사람같이 되리라”는 말로 보아 알 수 있읍니다. ‘블레셋’ 사람들같이 ‘여부스’ 사람들은 ‘함’의 아들 ‘미스라임’을 통한 후손이 아니라 ‘함’의 아들 ‘가나안’을 통한 ‘함’족이며 따라서 ‘가나안’ 사람들이었읍니다. (창세 10:6, 15, 16) ‘여부스’ 사람들은 ‘예루살렘’의 원주민들이었으며, 그 때문에 ‘예루살렘’은 한 때 ‘여부스’라고 불리웠읍니다.

17. ‘에그론’ 사람들의 은총받은 위치는 왜 “‘여부스’ 사람같이” 되리라는 말로 암시되었읍니까?

17 기원전 1070년에 ‘다윗’ 왕은 ‘여부스’ 사람들로부터 그 도시를 정복하고 ‘예루살렘’이라고 불렀읍니다. (사사 1:21; 사무엘 하 5:4-9) 후에, 정복된 ‘여부스’ 사람들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 때에 ‘예루살렘’의 웅장한 성전을 포함한 여러가지 공공 건축 사업에 종사하는 노예로 이용되었읍니다. (열왕 상 9:15-23; 역대 하 8:1-10) ‘여부스’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는 일에 가담하는 것과 고대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모형적 메시야 왕국을 위한 훌륭한 시설을 하는 데 참여하는 것은 참으로 큰 특권이었읍니다! 그러므로 “‘여부스’ 사람같이” 된다는 것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숭배로 귀의한 ‘에그론’과 그 거민들이 보조적이긴 하지만 은총받은 위치에 있게 되었음을 의미하였읍니다.

18. ‘블레셋’ 사람들은 기원 1세기에 그리스도교에 대한 어떠한 경험을 하였읍니까?

18 통용기원 1세기에 하나님의 메시야 왕국의 좋은 소식이 ‘블레셋’인들에게 전파되었읍니다. 우리는 복음 전도자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전파한 일을 잘 기억합니다. 그때 그들은 병거를 타고 “‘예루살렘’에서 [‘블레셋’ 지방의] ‘가사’로 내려가는 길”에 있었읍니다. ‘빌립’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이 ‘에디오피아’인에게 침례를 주고 그와 헤어진 다음 ‘가사’에서 약 54‘킬로미터’ 북쪽에 있는 ‘아스돗’(희랍어로 ‘아소도’, 현대의 ‘이스둣’)에 나타났읍니다. 분명히 많은 ‘블레셋’인들이 ‘빌립’의 전도에 응하였을 것입니다. (사도 8:26-40) 기원 36년에 이태리 백부장 ‘고넬료’가 개종한 후에 ‘블레셋’ 사람들도 개종할 수 있었으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성령을 받을 수 있었읍니다.

19. ‘잡족이 ‘아스돗’에 거하리라’는 예언은 현대판 ‘블레셋’인들에게 어떻게 성취되고 있읍니까?

19 현 이십 세기에 많은 종교가들은 고대 ‘블레셋’인들과 같이 거짓 신들을 숭배하여 왔고 여호와의 백성에 대항하여 싸웠읍니다. ‘블레셋’의 오개 도시 연맹의 으뜸 도시였던 고대 ‘아스돗’의 주민이 잡족으로 바뀌었듯이 오늘날의 이들 실체적 ‘블레셋’ 사람들도 개성이 변하였읍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헌신하고 물에서 침례를 받음으로 더는 이 ‘블레셋’ 세상의 일부가 아니며 이 세상에 대하여 ‘나그네’가 되었고 어울리지 않게 되었으며 부적절하게 되었읍니다. 그들은 고대 ‘두로’와 같이 이기적인 상업주의를 추구하지 않으며 ‘에그론’이 ‘두로’에게 희망을 두었던 것 같이 그것에 의존하거나 희망을 두지 않습니다. 또한 그들은 고대 ‘시리아’와 달리 군대에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피를 갈구하는 현 세상의 신들을 숭배하거나 섬기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우리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를 옹호하는 편에 서 있읍니다.

20. 오늘날의 이들 변화된 ‘블레셋’ 사람들은 영적 ‘이스라엘’인의 남은 자들과 함께 어떠한 몫을 받고 있읍니까?

20 이러한 행로를 고려할 때 이들 변화된 현대 ‘블레셋’인들은 영적 ‘이스라엘’인 혹은 영적 ‘유대’인들의 기름부음 받은 남은 자들과 함께 영적 성전에서 여호와의 숭배를 촉진하는 데 가담할 몫을 받았읍니다. 그들은 “‘유다’의 한 두목같이” 그 성전 활동과 관련한 임무와 책임을 받았읍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들 헌신하고 침례받은 종들은 이미 “큰 무리”로 성장하였으며 계속 증가하고 있읍니다. 영으로 기름부음 받은 남은 자들과 연합한 이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계시록 7:9-17에 예언되었읍니다.

21, 22. (ㄱ)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전초가 되는 것은 그 백성들에게 어떠한 유익이 있으며, 왜 그들 사이로 지나다닐 엄한 주인이 없을 것입니까? (ㄴ) 어떻게 여호와께서는 오늘날 영적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에게 이 예언을 성취시켜 오셨읍니까?

21 고대 ‘블레셋’과 ‘베니기아’와 ‘시리아’는 전에 ‘유대’인 포로였던 회복된 남은 자들의 횡포한 원수들이었읍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그 원수들을 다루시는 방법과 그의 선민들을 다루시는 방법을 대조하여 이렇게 계속 말씀하셨읍니다. “내가 내 집을 둘러[전초로] 진을 쳐서 적군을 막아 거기 왕래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 포학한 자가[엄한 주인이] 다시는 그 지경으로 지나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눈으로 친히 봄이니라.”—스가랴 9:8, 신세 참조.

22 만군의 여호와께서 전초로 진을 쳐서 공격하는 적군이 그의 ‘집’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그리고 침공하고는 퇴각하지 못하도록 하실 수 있었읍니다. “전초” 역할을 하는 그분은 노예를 혹사하는 “포학한 사람”이 더는 그들 가운데로 지나며 그들을 노예화하지 못하도록 방지하실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적들이 영적 성전에서의 여호와의 숭배를 반대하여 사상 최대 규모로 모여든 현 “마지막 때”에,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영적 ‘이스라엘’인의 “집”을 보호하여 오셨읍니다. 여호와의 강력한 영으로 강화된 영적 ‘이스라엘’의 여호와의 “집”은 세상적 “포학한 자”가 영적 토지에 왕래하면서 그들의 종교적 엄한 주인이 되려는 모든 노력을 성공적으로 저항하였읍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도들을 본받아 사람들보다 하나님을 통치자로 순종하였읍니다.—사도 5:29.

23. (ㄱ) “내가 눈으로 친히 봄이니라”라는 여호와의 약속은 온 인류 가운데서 그의 백성들의 입장과 관련하여 무엇을 의미합니까? (ㄴ) 오늘날 영적 남은 자들과 동료 숭배자들의 “큰 무리”에게도 어떻게 이것이 적용됩니까?

23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성전에 있는 그의 숭배자들에 대한 적들의 위협과 반대 행위를 잘 알고 계십니다. “내가 눈으로 친히 봄이니라”고 그분은 말씀하셨읍니다. 이것은 조금 전 “경고” 즉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가 ‘하드락’ 땅에 임하며 ‘다메섹’에 머물리니 세상 사람과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눈이 여호와를 우러러 봄이니라 [여호와께서는 세상 사람과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지켜보시는 것이다, 신세]”라는 그의 말씀과 일치합니다. (스가랴 9:1) 그분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도 지켜보십니다. 다시 말하면 그의 선민 외에도 온 인류를 지켜보십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학대한 ‘시리아’, ‘베니기아’ 및 ‘블레셋’ 같은 오랜 적들에 대하여 경고하셨읍니다. 이 “경고”는 예언적이며 오늘날 여호와의 영적 ‘이스라엘’과 동료 숭배자들의 “큰 무리”에게 영적으로 적용됩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의 이들 숭배자들 모두를 다루시는 방법과 현대판 ‘시리아’, ‘베니기아’, ‘블레셋’을 다루시는 방법의 차이는 이미 분별될 수 있읍니다. 온전한 차이는 다가오는 “큰 환난”중에 즉 그분께서 모든 불경건한 원수들 가운데서 그의 충성스런 숭배자들을 완전히 해방시키실 때에 뚜렷이 나타날 것입니다.—마태 24:21, 22; 계시 7:14, 15; 19:11-21.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느니라]”

24. (ㄱ) ‘가사’가 당한 일에 비추어 볼 때 그 도시의 적의의 대상인 ‘예루살렘’에 대하여 어떠한 질문이 생깁니까? (ㄴ) ‘예루살렘’의 함성은 왜 ‘가사’의 함성과 다를 것입니까?

24 ‘블레셋’ 도시 ‘가사’에는 왕이 끓어질 것이지만 ‘블레셋’의 적의의 대상인 ‘예루살렘’—시적 칭호로 ‘시온’—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 것입니까? 그 도시는 ‘가사’같이 탐욕적 상업 주의와 비신권적 군대의 요새가 무너지는 것을 보고 “심히 아파할 것”입니까? 극도의 고통과 소름끼치는 두려움으로 외칠 것입니까? 외칠 것입니다! 그러나 ‘가사’의 외침과 다를 것입니다! 왜냐 하면 여호와께서는 ‘시리아’, ‘베니기아’, ‘블레셋’에 대한 경고를 발한 다음에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 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 [함성을 올리라, 신세]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스가랴 9:9, 10.

25. “‘예루살렘’의 딸”은 왜 함성을 올릴 충분한 이유와 왕의 도래에 대하여 매우 기뻐할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읍니까?

25 그 영광스러운 약속이 성취될 때에 왜 ‘예루살렘’은 크게 기뻐하고 ‘함성을 올릴’ 충분한 이유를 세상에서 가지지 않을 것입니까? 이 하나님의 약속이 예언자 ‘스가랴’를 통하여 주어졌을 때에 ‘예루살렘’에는 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도시에는 ‘바사’의 황제 ‘다리오’ 1세가 임명한 지방 총독 즉 ‘다윗’ 왕가의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이 있었을 뿐입니다. ‘다윗’ 왕국은 약 구십여년전 즉 기원전 607년에 ‘바벨론’인들에 의하여 전복되었읍니다. 그때에 ‘예루살렘’은 완전히 멸망되고 ‘시드기야’ 왕은 ‘바벨론’으로 잡혀 갔읍니다. ‘예루살렘’의 완전한 황폐의 칠십년간은 지나갔지만 비‘유대’ 나라들이 ‘다윗’ 왕권을 짓밟는 2,520년간의 이방인의 때는 기원 1914년까지 계속되지 않으면 안되었읍니다. 그러므로 ‘스가랴’ 시대에 “‘예루살렘’의 딸”은 ‘다윗’ 계통에서 참 메시야 왕 곧 총독 ‘스룹바벨’에 의하여 전영된 메시야가 올 것을 열망하고 있었읍니다.—학개 2:23.

26. 우리는 ‘스가랴’의 예언의 일차적인 성취에 대하여 왜 막연하게 추측할 필요가 없읍니까?

26 거짓 그리스도가 아니라 참 메시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오늘날 우리는 ‘스가랴’의 예언의 일차적 성취에 대하여 막연하게 추측할 필요가 없읍니다. 적어도 세사람의 목격 증인 즉 세금 징수원인 ‘마태 레위’와 ‘예루살렘’ 거민인 ‘요한 마가’와 ‘세베대’의 아들 ‘요한’에 의한 기록이 있읍니다. 또한 제1세기의 역사가이며 소‘아시아’의 의사였던 ‘누가’도 사실을 수집하고 기록하였읍니다. 그 예언 성취는 기원 33년 ‘니산’월 9일 일요일에 있었읍니다. ‘마태 레위’는 이렇게 알려줍니다.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 맞은 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제자들이 가서 예수의 명하신대로 하여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무리의 대부분은 그 겉옷을 길에 펴며 다른 이는 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가로되 이는 누구뇨? 하거늘 무리가 가로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소경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 예수께 말하되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니라.]”—마태 21:1-16.

27. 만일 제자들이 소리치지 않았다면 예언은 어떻게 성취되었을 것입니까?

27 또한 ‘유대’인 의사 ‘누가’는 이러한 세부점을 부가하였읍니다.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누가 19:39, 40; 또한 마가 11:1-18; 요한 12:12-19 참조.

28.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개선하실 때에 어떻게 그는 평화스러우셨고, “겸손”하셨고, “공의로우”셨고, “구원”을 받으셨읍니까?

28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헤롯’ 대왕 곧 기원전 37년에 ‘예루살렘’을 삼개월간 포위 공격한 후에 ‘예루살렘’을 급습하여 함락하고 ‘하스모네’(‘마카베’) 왕, ‘레위’ 지파의 ‘안티고누스’를 폐위시킨 ‘헤롯’ 대왕과는 달리 군마를 타시지 않고 평화스럽게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 하셨읍니다. 예수께서는 스가랴 9:9에 예언된 바와 같이 참으로 “겸손”하셨읍니다. 그는 거짓 그리스도 혹은 거짓 메시야가 아니라 천적 아버지 여호와에 의하여 입증된 메시야이셨으며 “공의로우”셨읍니다. 그는 사실 육체에 있어서 완전하셨으며 죄없고 흠없는 ‘의로운’ 분이었으며 따라서 불의한 온 인류 세상의 죄를 지고 가시기 위하여 자신을 완전한 인간 희생으로 바치셨읍니다. (사도 7:52; 히브리 7:26; 요한1서 2:1) 그의 고대 조상 ‘다윗’ 왕이 적들에 대한 승리를 거둠으로 구원받은 것 같이 그는 참으로 “구원”을 받으셨읍니다. (사무엘 하 22:1-4; 8:6, 14)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개선하실 때에 큰 무리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즉 “‘다윗’의 자손을 구원하소서!” 하고 외친 것은 헛되지 않았읍니다. 칠일 후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를 하늘의 불멸의 생명으로 부활시키심으로 예수를 사망에서 구원하셨읍니다.—히브리 5:7-10.

29. (ㄱ) 영적 제자들과 관련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이방 사람들에게 화평을 전”하셨읍니까? (ㄴ) 그는 그리스도교국 안팎에서 어떻게 모든 전쟁무기를 제거하시며, 그 분이 오늘날의 “큰 무리”에게 화평을 전하는 결과는 무엇일 것입니까?

29 그는 “평강의 왕”이라고 불리울 분입니다. (이사야 9:6, 7) 그의 ‘유대’ 제자들은 ‘에브라임’과 ‘유다’를 포함하여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출신이었으며 그는 그들을 평화로운 형제애로 연합시켰읍니다. 그의 제자들 가운데서 그는 심지어 할례받은 육적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의 적의를 해소시키기까지 하셨읍니다. (에베소 2:11-20) 이러한 방법으로 그는 이미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하셨읍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국은 그의 말을 듣기를 거부하고 오늘날까지 자체 내에서 전쟁을 계속하고 있읍니다. 다가오는 ‘아마겟돈’에서의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의 메시야 왕을 사용하여 전차들과 활과 오늘날 그리스도교국 안팎의 모든 전쟁 무기를 일소하실 것입니다. (계시 16:14-16; 19:11-21) 그분은 인류 가운데서, 모든 나라에서 횡포한 전쟁을 도발하는 모든 자들을 제거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나라에서 나와 여호와의 영적 성전에 있는 평화를 옹호하는 숭배자들의 “큰 무리”에게 승리의 왕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평화 가운데 평화를 전하실 것이며 그들은 보존될 것입니다.—계시 7:14.

30. 이방인의 때가 기원 1914년에 끝난 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예루살렘’의 실체에 어떻게 정식으로 나타났으며, 그러나 그가 받아들여졌는지의 여부에 대하여 어떠한 질문이 생깁니까?

30 기원 1914년에 이방 나라들이 ‘다윗’ 왕계의 메시야 왕권에 대한 ‘예루살렘’의 권리를 짓밟은 이방인의 때인 2,520년 기간이 만료되었을 때 지존하신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메시야 예수를 천적 보좌에 앉히시고 원수 가운데서 통치하고 정복하게 하셨읍니다. (시 110:1-6; 사도 2:34-36; 히브리 10:12, 13) 제1차 세계 대전(기원 1914-1918년) 중에 영적 ‘이스라엘’인의 헌신하고 침례받은 남은 자들은 이방인의 때가 끝나고 지존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하늘에서 통치하는 왕으로 삼으셨음을 공개적으로 선포하였읍니다. 그리하여 여호와의 메시야 왕은 기원 1세기의 ‘예루살렘’으로 전영된 그리스도교국에 특히 임하시고 계셨읍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공언하는 그리스도교국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다스릴 왕으로 그분을 받아들였읍니까?

31. 1918년 12월까지 그리스도교국이 여호와의 메시야를 왕으로 받아들였는지의 여부를 무엇이 증명합니까?

31 그리스도교국이 그의 영적 “형제들”인 기름부음 받은 남은 자들에게 한 일을 볼 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한 것은 메시야 예수 자신에게 한 것과 같습니다. (마태 25:40, 45; 마가 9:37) 이방인의 때가 끝난지 삼년 반 후에 전쟁의 진용을 갖춘 그리스도교국은 그리스도의 영적 형제들인 남은 자들에게 박해와 억압을 가하여 기원 1918년 봄에 최절정에 달하였읍니다. (계시 11:2-10) 그렇게 한 후 먼저 그리스도교국은 1918년 11월 11일에 제1차 세계 대전을 종식시켰읍니다. 기원 제1세기의 ‘예루살렘’을 본받아 그리스도교국은 여호와의 메시야 왕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하였읍니다. 다음 달(1918년 12월)에 그리스도교국은 제창된 국제 연맹을 “지상에 있어서 하나님의 왕국의 정치적 표현”으로 옹호한다고 공적 의견을 표명하였읍니다.

32. 그리스도교국의 행로에 비추어 볼 때 여호와의 메시야 왕을 받아들일 사람이 아무도 없었읍니까? 예언에 의하면 그들은 무엇을 할 것이었읍니까?

32 그러나 만군의 여호와께서 세우신 메시야 왕을 영접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읍니까? 아닙니다. 있었읍니다! 기원 33년 ‘니산’월 9일 일요일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왕으로 입성하는 것을 영접하고 환영한 ‘유대’인 남은 자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기원 1914년에 이방인의 때가 끝났을 때에도 그렇게 한 영적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있었읍니다. 그리스도교국의 이방 정부들의 박해와 억압적 조처로 이들은 흩어졌고 해체되었읍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개선하신지 닷새째 날에 배반당하시고 체포되신 후에 예수의 제자들이 흩어진 것과 같았읍니다. 그러나 종전후 첫해인 기원 1919년에 그들이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소생하고 그의 봉사에 다시 활동적이 되었을 때에 그들은 그해에 제창되고 채택되고 출범한 국제 연맹을 배척하였읍니다. 그들은 그러한 가짜 그리스도의 왕국을 받아들이지 않고 스가랴 9:9의 정신을 받아들여 “크게 기뻐”하였으며 ‘함성을 올리’기 시작하였읍니다. 왜냐 하면 그들의 왕 참 메시야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33. (ㄱ) 기원 1919년 이래 왕을 영접한 이들은 어떻게 그들의 기쁨을 알렸으며 그들의 함성이 들리게 하였읍니까? (ㄴ) 메시야-그리스도는 언제 어떻게 평화로운 나귀를 타시는 일을 그치고 어디로 군마를 타고 가실 것입니까?

33 그들은 그들의 기쁨을 전세계에 알립니다. 그들은 그들의 외치는 소리가 전세계에 들리게 합니다. 어떻게? 기원 1919년에 인류 세계가 이전에 알지 못한 최대규모로 하나님의 메시야 왕국을 선포하는 운동을 시작함으로 그렇게 하였읍니다. (마태 24:14; 계시 14:6) 그들은 메시야의 “정권”의 예언된 확장의 범위까지 즉 “바다에서 바다까지 ···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하나님의 메시야 왕국의 좋은 소식을 선포하여 왔읍니다. (스가랴 9:10; 시 72:8) 이미 208개 나라와 섬들이 들었으며, 165개 언어로 그렇게 합니다. 멀지 않아 하나님의 정하신 불변의 때가 오면 그리스도교국과 이 세상 사물의 제도의 다른 모든 요소들은 인류 세계가 이전에 알지 못한, 급속도로 다가오는 “큰 환난”시에 온 땅에서 제거되고 말 것입니다. 계시록 19:11-21에서 메시야-그리스도께서는 평화로운 나귀를 타신 것이 아니라 흰빛 군마를 타고 기원 1914년이래 땅의 영역에서 무단 거주하여 온 모든 반대자들을 제거하기 위한 전쟁터로 돌진하는 분으로 묘사되어 있읍니다.

갇혔던 자들이 요새로 돌아옴

34. (ㄱ) 예수 메시야께서는 갇혔던 자들에게 단순히 자유를 선포하셨을 뿐입니까? (ㄴ) 스가랴 9:11, 12에 있는 “여인”에 대한 여호와의 선언은 어떠한 질문을 일으킵니까?

34 예수 메시야께서는 지상에서 완전한 인간이셨을 때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 전파”하도록 보냄을 받아오셨읍니다. (이사야 61:1; 누가 4:16-21) 그는 자유를 선포하실 뿐 아니라 자유를 선포하신 후에 포로된 자들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스가랴’를 통한 선언은 다음과 같이 이것을 예언하였읍니다. “또 [여인이여] 너로 말할찐대 네 언약의 피를 인하여 네가 너희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 소망을 품은 갇혔던 자들아, 너희는 보장으로[요새로, 신세] 돌아올 찌니라.” (스가랴 9:11, 12, 신세 참조) 여기서 여인으로 불리운 자는 누구이며, “갇혔던 자들”은 누구이며 “보장” 즉 “요새”는 무엇입니까?

35. 여기서 언급된 “여인”은 어느 때에 흘려진 피로 유효하게 된 언약 하에 있읍니까?

35 여인인 것처럼 불리운 자는 고귀한 생명의 피로 여호와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는 조직입니다. 그것은 지적 ‘예루살렘’도 아니며 할례받은 육적 ‘이스라엘’의 지적 나라도 아닙니다. 고대 ‘이스라엘’ 나라가 ‘아라비아’ ‘시내’ 산에서 중보 ‘모세’에 의하여 희생된 동물 희생의 피를 통하여 여호와와 국가적 언약 하에 들어온 것은 사실입니다. (출애굽기 24장) 그러한 동물의 피로 유효하게 된 그 국가적 언약에 의하여 ‘이스라엘’인의 남은 자들은 기원전 537년에 ‘바벨론’ 포로 수용소에서 해방되었읍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지금 예언자 ‘스가랴’를 통하여 말씀하고 계신 것은 먼 장래에,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해방되는 일이 있은지 오랜 후에 있을 해방이었읍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메시야 왕이 나타나신 후에 있을 물없는 구덩이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그 일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기원 33년 ‘유대’인의 유월절이 되기 5일 전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후에 있게 됩니다. 그 유월절 날에 희생의 피가 흘려졌읍니다.

36. 여기서는 누구의 피를 의미하였으며, 피에 의한 언약은 누구와 맺어졌으며, 스가랴 9:11에서 “여인”이라고 불리운 자는 누구입니까?

36 그 피는 누구의 피였읍니까? 메시야의 피였읍니다. 그의 피는 기원전 1513년에 ‘애굽’에서 있었던 첫 유월절 이후 ‘유대’인들이 매년 희생한 모든 유월절 양의 피로 전영되었읍니다. (고린도 전 5:7; 요한 1:29, 36; 베드로 전 1:18, 19) ‘이스라엘’에 의하여 희생된 모든 동물 희생의 피보다 더 고귀한 메시야의 피에 힘입어 새 언약은 유효하게 되었읍니다. 그 언약은 누구와 맺어졌읍니까? 메시야 왕을 배척하고 그를 죽인 지적 ‘예루살렘’ 혹은 육적 ‘이스라엘’과 맺지 않고 마음에 할례를 받은 내적 의미의 ‘유대’인 즉 영적 ‘이스라엘’과 맺어졌읍니다. (예레미야 31:31-34; 히브리 8:7에서 9:15) 여호와와 영적 ‘이스라엘’ 간의 이 새 언약의 중보는 메시야 예수입니다. 그러므로 스가랴 9:11에서 피에 의한 언약 하에 있는 여인으로 불리운 것은 영적 ‘이스라엘’입니다.

37, 38. (ㄱ) 여인의 “갇혔던 자들”은 누구이며, 현 이십세기에 물 없는 구덩이는 무엇입니까? (ㄴ) 물없는 구덩이에는 어떤 더 큰 의미가 주어질 수 있으며, 피는 무슨 언약을 유효하게 합니까?

37 그러면 이 상징적 여인의 “갇혔던 자들”은 어디에 있었읍니까? 현 이십세기, 현 “사물의 제도의 결말”에 이들 “갇혔던 자들”은 영적 ‘이스라엘’인의 기름부음 받은 남은 자들입니다. 금세기의 역사는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이들이 큰 ‘바벨론’의 종교적 속박으로 들어왔고 그의 정치적 군사적 애인에게 속박되었음을 알려줍니다. 그 상태에서 그들은 “물없는 구덩이”에 있는 것과 같았읍니다. 그 곳에서는 영적으로 원기를 회복할 수 없었으며 나올 수 있는 희망도 없었읍니다! 그러나 대속 희생으로 흘린 그리스도의 피에 의하여 이러한 상태에서의 그들의 죄는 용서받았고 여호와의 은총과 올바른 지상의 영적 토지로 회복되어 더는 그들이 포로가 아닙니다. 그러나 물없는 구덩이는 또한 바람직하지 못한 더 큰 상태, 우리의 범죄한 첫 조상 ‘아담’과 ‘하와’로부터 유전받은 죄의 일반적인 단죄와 죽음의 형벌 아래 있는 더 큰 불리한 상태를 상징할 수 있읍니다. 이 영적 남은 자들을 그 상태에서 나오게 하는 데는 참으로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가 필요하였읍니다. 그의 피는 새 언약을 유효케 하는데 적용된 피였읍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3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태 26:28)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니라.”—누가 22:20; 히브리 13:20.

39. 물없는 구덩이에 “갇혔던 자들”은 어떠한 근원으로부터의 희망만 품을 수 있었으며, 여호와께서는 기원 1919년에 그들에게 어떻게 하라고 부르셨읍니까?

39 그러므로 영적 ‘이스라엘’과 맺은 새 언약의 피의 적용으로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갇혔던 남은 자들을 죄와 사망의 단죄의 “물없는 구덩이”에서 내보내셨읍니다. (히브리 12:24) 종교적 큰 ‘바벨론’은 이들 “갇혔던 자들”에게 아무런 희망도 제시하지 않았읍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메시야의 인자한 약속을 신뢰할 때만 “희망”을 품을 수 있었읍니다. 큰 ‘바벨론’의 영적 포로 상태에 있는 이들에게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기원 1919년에 “소망을 품은 갇혔던 자들아, 너희는 보장[요새, 신세]으로 돌아올찌니라” 하고 부르셨읍니다.—스가랴 9:12.

40. (ㄱ) 그 하나님의 부름은 “갇혔던 자들”이 어떻게 하라는 의미였읍니까? (ㄴ) 갇혔던 자들이 돌아가야 할 요새는 무엇입니까?

40 그 하나님의 부르심은 “소망을 품은 갇혔던 자들”이 큰 ‘바벨론’에서 나오라는 의미였읍니다! (계시 18:1-4) “보장” 즉 “요새”라는 말은 다음과 같은 사무엘 하 5:7-9의 말을 상기시켜 줍니다. “‘다윗’이 ‘시온’ 산성[요새, 신세]을 빼앗았으니 이는 ‘다윗’ 성이더라 ··· ‘다윗’이 그 산성[요새, 신세]에 거하여 ‘다윗’ 성이라 이름하[니라.]” 그러나 ‘다윗’ 왕의 수도는 확정되어 ‘시온’ 산보다 많은 지역을 포함하게 되었으며 그것이 ‘예루살렘’이라고 불리우게 되었읍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은 그 자체가 강력한 요새일 뿐 아니라 그것이 대표한 것도 “요새”였읍니다. 그것은 무엇을 대표하였읍니까? 하나님의 메시야 왕국을 대표하였읍니다. 왜냐 하면 그곳의 인간 왕은 거룩한 기름으로 기름부음을 받아 통치자가 되었지만 이 기름부음 받은 통치자는 “여호와의 보좌”에 앉았기 때문입니다.—사무엘 하 5:1-3; 역대 상 29:23, 신세.

41. (ㄱ) “갇혔던 자들”이 이처럼 돌아오는 일은 기원전 537년에 있었던 무슨 일로 전영되었읍니까? (ㄴ) “갇혔던 자들”은 기원 1919년에 왜 왕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읍니까?

41 기원전 537년에 ‘바벨론’ 포로의 남은 자들은 ‘유다’ 땅으로 돌아가 ‘예루살렘’ 시를 재건하고 그리하여 지적 요새로 돌아갔읍니다. 그들의 행동은 영적 ‘이스라엘’의 현대 남은 자들의 행동의 모형이었읍니다. 여호와의 부름에 순종하여 기름부음 받은 남은 자들은 기원 1919년에 큰 ‘바벨론’에서 나와 영적 “요새”로 돌아갔읍니다. 하나님의 요동할 수 없는 메시야 왕국보다 더 확고한 요새가 어디 있겠읍니까? ‘예루살렘’이라는 지적 요새가 여호와의 메시야 왕국을 대표한 것과 마찬가지로 영적 요새는 하늘의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참 메시야의 왕국 곧 여호와의 왕국을 상징합니다. 고대 ‘예루살렘’은 그 왕국에 대한 하나님의 권리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왕국에 관한 그 하나님의 권리를 이방 나라들이 짓밟는 이방인의 때는 기원 1914년에 끝나고 즉시 메시아 왕국이 하늘에 탄생되었읍니다. (계시 12:1-9) 그러므로 기름부음 받은 남은 자들은 기원 1919년에 해방되자마자 요새같은 그 왕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읍니다. 그들은 기원 1914년부터 그 왕국을 선포해 왔었읍니다. 그들은 그들의 왕국 전파 사업을 공전의 규모로 새로 시작함으로써 돌아왔읍니다.

42. 영적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오늘날 여호와께서 여인에게 “내가 오늘날도 이르노라. 내가 배나 네게 갚을 것이라”고 하신 약속의 성취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읍니까?

42 기름부음 받은 남은 자들이 ‘요새로 돌아오’는 데는 훌륭한 이유가 있었읍니다. 왜냐 하면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여인에게 말하는 것처럼 영적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계속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오늘날도 이르노라. 내가 배나 네게 갚을 것이라.” (스가랴 9:12) 그리고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읍니까? 그렇습니다. 오늘날 해방된 영적 ‘이스라엘’인의 기름부음 받은 남은 자들은 과거를 돌이켜 볼 때 그들은 자기들이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큰 ‘바벨론’과 그의 세상 애인들의 손에서 당한 고통은 그들이 현재 올바른 영적 토지에서 현재 즐기는 영적 축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래로 특히 그러합니다! 그들이 받은 축복은 그들의 해방자 만군의 여호와의 손에서 그들이 기대한 이상이었읍니다. 그것은 “배”나 되었읍니다. 그들은 참으로 넘치는 축복을 받고 있읍니다!

일곱째 세계 강국에 대한 영적 전쟁

43. 스가랴 9:13-15에서 여호와께서는 영적인 공격전에서 그의 백성들을 어떻게 사용하실 것입니까?

43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그의 백성, 그의 숭배자들이 장래에 공격을 당할 것을 내다 보셨읍니다. 그는 어떠한 조처를 취하실 것입니까? 공격도 하고 방어도 하실 것입니다. 자신의 공격 활동에 대하여 그 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내가 ‘유다’로 당긴 활을 삼고 ‘에브라임’으로 먹인 살을 삼았으니 ‘시온’아 내가 네 자식을 격동시켜 ‘헬라’ 자식을 치게 하며 너로 용사의 칼과 같게 하리라. 여호와께서 그 위에 나타나서 그 살을 번개같이 쏘아 내실 것이며 주 여호와께서 나팔을 불리시며 남방 회리바람을 타고 행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들을 호위하시리니 그들이 원수를 삼키며 물맷돌을 밟을 것이며 그들이 피를 마시고 즐거이 부르기를 술취한 것 같이 할 것인즉 피가 가득한 동이와도 같고 피 묻은 제단 모퉁이와도 같을 것이라.”—스가랴 9:13-15.

44. 하나님의 승리의 백성들의 기쁨은 무엇을 통하여 얻은 기쁨과 같을 것이었으며, 그러므로 그들은 다가오는 어떠한 세계 강국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읍니까?

44 그 상징적 전쟁에서 여호와의 숭배자들은 승리할 것입니다. 왜냐 하면 그들은 그들의 마음이 술취한 것같이 즐거이 부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 104:15) 그러므로 ‘스가랴’ 시대에 회복된 ‘이스라엘’인들은 ‘헬라’(희랍) 자식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었읍니다. 그 당시 ‘알렉산더’ 대왕은 희랍을 세계 지배의 위치에 이끌어 올려 다섯째 세계 강국이 되게 하였읍니다.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바벨론’은 이제 세째 세계 강국의 자리에서 물러 났읍니다. ‘메대-바사’가 당시에 네째 세계 강국으로서 땅을 지배하고 있었읍니다. 기원전 332년에 희랍이 다섯째 세계 강국으로 군림하여 ‘유다’ 땅을 다스리기 전이었읍니다.

45. (ㄱ) 기름부음 받은 남은 자들은 희랍 세계 강국에서 갈라져 나온 무엇과 영적 전쟁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읍니까? (ㄴ) ‘시온의 아들들’은 지금까지 어떻게 이겼읍니까?

45 그러나 다니엘 8:8-25에 의하면 희랍 제국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 자라서 여섯째 세계 강국이 되고 다시 상징적 ‘작은 뿔’인 영미 이중 세계 강국인 일곱째 세계 강국이 될 것이었읍니다. 영적 ‘이스라엘’의 기름부음 받은 남은 자들은 바로 이 그리스도인 강국이라는 일곱째 세계 강국과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으며 특히 양차 세계 대전 중에 그러하였읍니다. 그것은 세상의 정치 국가의 투쟁에 대한 중립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으로 그리고 국가주의적 인간들보다 하나님을 통치자로 순종하기 위한 노력으로 싸우는 영적 전쟁이었읍니다. (사도 5:29-32) 영적인 ‘시온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그리고 여호와의 메시야 왕국에 대한 그들의 충실함으로 이겼읍니다. 이 말은 지금까지 할례받은 육적 ‘유대’인들의 ‘시온주의’ 운동에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46. 여호와께서는 그의 기름부음 받은 남은 자들을 어떻게 활과 화살처럼 사용하시며, 그의 화살은 어떻게 빠르게 나가며, 그는 상징적 “나팔”을 어떻게 불며 그는 무엇을 “용사의 칼”로 사용하십니까?

46 일곱째 세계 강국이 1918-1919년에 국제 연맹을 “지상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왕국의 정치적 표현”으로 제창하고 추진할 때 기원 1914년에 하늘에 건설되었고 고대 ‘시온’으로 상징된 여호와의 메시야 왕국은 인간이 만든 모조품을 반대하는 입장에 있었읍니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왕국을 “용사의 칼”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천국의 아들들”(‘시온’의 영적 아들들)은 전세계적으로 왕국 소식을 선포하며 그 왕국 소식이 또한 영적 칼과 같습니다. (마태 13:38, 43; 에베소 6:17) 고대 ‘유다’(활)와 같이 그리고 ‘에브라임’(화살)과 같이 여호와께서는 기름부음 받은 남은 자들 중 더 나이 많은 편을 사용하여 메시야 왕국의 원수들에 대한 주권자이신 주 하나님의 심판의 소식을 선포하는 데 화살과 같은 새로운 남은 자들을 밀었읍니다. 여호와의 상징적 “화살”은 왕국 선포에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선포하는 데 “번개같이” 빠릅니다. (이사야 61:1, 2) 여호와께서는 그의 거룩한 말씀인 성서에 대한 현대의 설명을 통하여 영적 “나팔”을 불어 그의 기름부음 받은 남은 자들을 영적 전쟁으로 부르십니다.

47. (ㄱ) 특히 언제부터 여호와께서는 그의 백성들 위에 나타나셨으며, 어떠한 면으로 그분은 그들을 호위하셨읍니까? (ㄴ) 그들은 어떻게 상징적인 “물맷돌”을 밟아왔으며, 그들은 무엇을 보고 포도주를 마신 것처럼 즐거움으로 가득합니까?

47 여호와께서는 그들 위에 나타나 계십니다. 왜냐 하면 그들은 기원 1931년 이래 특히 그 분의 이름으로 즉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으로 불리웠기 때문입니다. 그는 메시야 왕국의 원수들에 대하여 “남방 회리바람을 타고” 가시듯이 가실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 ‘이스라엘’인의 충실한 남은 자들은 그분이 호위하고 그들의 믿음과 영적 상태와 하나님께서 주신 그들의 영적 토지를 보존하실 것입니다. 원수들은 회복된 남은 자들에게 어리둥절하게 하는 많은 방해물을 던지지만 그러한 상징적 “물맷돌”이 날아와도 남은 자들은 기가 죽어 활동을 중지하는 일이 없읍니다. 그들은 사실 그러한 “물맷돌”을 밟아 아무 성과없이 무로 돌아가게 합니다. 성전 동이가 동물 희생의 피로 가득하고 희생의 구리 제단 옆에 그 피를 뿌려 그 모퉁이를 적신 것처럼 여호와께서 원수들의 생명의 피를 멸망으로 부으시면 호위를 받은 남은 자들도 즐거움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원수들의 피는 마치 마셔도 무방하고 마음을 즐겁게 할 수 있는 포도주와 같을 것입니다.

48. 여호와께서는 그의 헌신한 백성들을 다루실 때 어떻게 돌보시겠다고 약속하셨으며, 그들은 무슨 돌과 같이 빛납니까?

48 여호와께서는 영적 ‘이스라엘’인의 남은 자들을 습격하는 용사같은 분이 아니고 그들을 돌보는 평화로운 목자같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절정에 이르셨읍니다. “이 날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의 양떼같이 구원하시리니 그들이 면류관의 보석같이 여호와의 땅에 빛나리로다. 그의 형통함과 그의 아름다움이 어찌 그리 큰지 소년은 곡식으로 강건하며 처녀는 새 포도주로 그러하리로다.”—스가랴 9:16, 17.

49, 50. (ㄱ) 여호와께서는 언제부터 그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자들을 영화롭게 하셨읍니까? (ㄴ) 어떻게 여호와께서는 자기 양떼의 구원자로 행동하시며, 이들은 그 분께 얼마나 고귀합니까?

49 ‘스가랴’ 시대에 그것은 마음을 강하게 하는 예언이었읍니다. 오늘날 일곱째 세계 강국과 다른 모든 군사화한 사물의 제도의 “마지막 때”의 끝에 가까운 오늘날 이 예언은 성취를 보아 왔으며 현재 웅대한 절정에 다가가고 있읍니다.

50 「파수대」(영문) 1926년 1월 1일호 “누가 여호와를 영화롭게 할 것인가?”라는 주요 기사가 발행된 이래 여호와께서 영적 ‘이스라엘’인의 기름부음 받은 남은 자들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전세계적으로 뚜렷이 선포되어 왔읍니다. 그 분께서 오래 전에 예언자인 “하나님의 사람”을 통하여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리라고 말씀하신 그대로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는 남은 자들을 그 분은 과연 영화롭게 하셨읍니다. (사무엘 상 2:30) 그 분은 인류 사상 최악의 전쟁인 제2차 세계 대전(기원 1939-1945년)시에 박해와 위험을 당할 때에 그들을 구원하셨읍니다. 왜냐 하면 중동에서 양떼가 목자의 아낌을 받듯이 이들 영화로운 영적 ‘이스라엘’인들은 그 분께 아낌을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면류관의 보석은 그 면류관을 쓴 사람에게 참으로 고귀하며, 그의 모습은 그 광채로 인하여 위압 감을 느끼게 합니다! 영적으로 말하여 “자기 백성의 양떼”인 그들은 왕관의 번쩍이는 보석과도 같이 참으로 고귀합니다. 그 분은 앞으로 원수의 최후의 공격에서 그들을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51. 남은 자들에게 비친 여호와의 정신적 영상은 어떠하였으며, 비유로 말하면 그 분의 어떠한 마련 때문에 그들은 영적으로 번영하여 왔읍니까?

51 여호와께서는 그들에게 참으로 선하심을 보이셨읍니다! 그들에게 비친 그분의 정신적 영상은 참으로 아름다웠읍니다! 그 분은 풍부한 곡식처럼 그의 계시된 거룩한 말씀에서 나오는 풍부한 영적 양식으로 그들을 먹이셨읍니다. 그들의 마음은 새 포도주를 마신 것처럼 즐거워졌읍니다. 이 모든 것 때문에 그들은 지금까지 영적으로 번영하여 왔읍니다.

[각주]

[연구 질문]

[260면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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