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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인들이 세계적 확장에 앞장서다

선교인들이 세계적 확장에 앞장서다

제23장

선교인들이 세계적 확장에 앞장서다

하나님의 왕국을 전세계에 선포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가 되어 온 것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기꺼이 봉사하는 선교인들의 열성적인 활동이다.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가 그러한 목적으로 학교를 세우기 오래 전에도 다른 나라로 파견되는 선교인들이 있었다. 초대 협회장 C. T. 러셀은 외국 밭에서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일을 개척하고 이끌어 갈 자격 있는 사람들이 필요함을 인식하였다. 그는 그러한 목적으로 사람들을 파견하였다. 유럽으로는 아돌프 베버를, 카리브 해 지역으로는 E. J. 카워드를, 동양으로는 로버트 홀리스터를, 남아프리카로는 조지프 부스를 파견하였다. 안타깝게도 부스는 자신의 책략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1910년에 윌리엄 존스턴이 스코틀랜드에서 니아살랜드(지금의 말라위)로 파견되었는데, 특히 그 곳이 부스의 악영향을 받은 곳이다. 그 후 존스턴 형제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더반에 워치 타워 협회 지부 사무실을 개설하는 일에 임명되었고 나중에는 오스트레일리아 지부 감독자로 봉사하였다.

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J. F. 러더퍼드는 더 많은 선교인을 파견하였다. 예를 들어 토머스 월더와 조지 필립스를 영국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트리니다드의 임지에 있던 W. R. 브라운을 서아프리카로, 조지 영을 캐나다에서 남아메리카와 유럽으로, 후안 무니스를 처음에는 스페인으로 다음에는 아르헨티나로, 조지 라이트와 에드윈 스키너, 그리고 뒤이어 클로드 굿먼과 론 티핀 등을 인도로 파견하였다. 그들은 진정한 파이오니아로서 좋은 소식의 전파 활동이 거의 혹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지역들을 개척하고 장차 조직이 성장할 것에 대비하여 굳건한 기초를 놓았다.

또한 선교의 영에 감동되어 스스로 타국에서 전파 활동을 수행한 사람들도 있다. 그중에는 케이트 고어스 자매와 그의 딸 매리언이 있는데 그들은 콜롬비아와 베네수엘라에서 여러 해 동안 열정적으로 봉사하였다. 또 다른 사람 주세프 두스 산투스는 하와이를 떠나 전파 활동 여행을 하다가 필리핀에서 15년 동안 봉사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또한 프랭크 라이스도 있는데, 그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화물선을 타고 출발하여 자바 섬(지금은 인도네시아의 일부)에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일을 개척하였다.

그러다가 1942년에, 전세계 밭 중에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그러한 선교 봉사를 기꺼이 수행하려고 하는 남녀를 훈련시키기 위해 특별히 고안한 과정을 교육하는 학교를 세울 계획이 수립되었다.

길르앗 학교

인간의 관점으로는, 세계 대전의 와중에 외국 밭에서 왕국 전파 활동을 확장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는 것은 비실용적인 것 같아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1942년 9월에 여호와의 증인이 사용하는 두 개의 주요 법인체 이사진들은 여호와께 의지하는 가운데, 특별 봉사를 위해 선교인과 그 외 사람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학교를 설립하자는 N. H. 노어의 제안을 승인하였다. 그 학교를 워치타워 길르앗 성서 대학이라고 부르기로 하였다. 나중에 그 명칭은 워치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로 바뀌었다. 수업료는 부과하지 않기로 하였고, 훈련 기간에 학생들에게 숙식을 협회 비용으로 제공하기로 하였다.

연구 과정 초안을 마련하는 일을 거들도록 초대된 사람 중에는 앨버트 D. 슈로더가 있었다. 그는 브루클린 협회 본부 봉사부에서, 그리고 협회의 영국 지부 감독자로서 이미 많은 경험을 쌓은 사람이었다. 그 학교의 교무 주임 및 강사로서 17년 동안 일한 그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은 그의 적극적인 견해, 헌신적인 자세, 학생들에 대한 따뜻한 관심으로 인해 그에게 이끌렸다. 1974년에 그는 통치체 성원이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통치체 교습 위원회에서 일하도록 임명되었다.

슈로더 형제와 동료 강사들(맥스웰 프렌드, 에두아르도 켈러, 빅터 블랙웰)이 초안을 마련한 5개월 연구 과정은 성서 자체와 신권 조직 그리고 성서 교리, 공개 연설, 야외 봉사, 선교 봉사, 종교사, 하나님의 법, 정부 관리를 대하는 방법, 국제법, 기록 관리 및 외국어에 대한 연구에 역점을 둔 것이었다. 여러 해가 지나면서 여러 차례 학과가 조정되기는 하였지만, 언제나 제일 강조된 것은 성서 자체에 대한 연구와 복음 전파 활동의 중요성이었다. 그 과정의 목적은 학생들의 믿음을 강화하고 학생들이 선교 봉사의 도전에 성공적으로 대처하는 데 필요한 영적 특성을 발전시키도록 돕는 것이었다. 여호와를 전적으로 의지하고 그분께 충성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시 146:1-6; 잠언 3:5, 6; 에베소 4:24) 학생들은 모든 것에 대한 거침없는 대답을 듣는 것이 아니라 연구 조사하는 훈련을 받으며 여호와의 증인이 믿는 신앙의 이유와 그들이 특정한 일 처리 방식을 고수하는 이유를 인식하도록 도움을 받는다. 그들은 일하는 데 적용할 수 있는 원칙들을 분별하는 방법을 배운다. 그리하여 한층 더 성장할 수 있는 기초가 놓이게 된다.

제1기생들이 될 사람들에 대한 초대장이 1942년 12월 14일에 발부되었다. 그 학급을 구성하는 100명의 학생이 뉴욕 주 북부 사우스랜싱에 시설을 갖춘 학교에 등록한 때는 한겨울이었다. 그들은 자진적이었고 진지하였으며 다소 긴장하였다. 수업이 당면 과제였는데도 졸업 후에 어느 지역의 밭으로 파견될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개교일인 1943년 2월 1일에 그 1기생에게 하는 연설에서 노어 형제는 이렇게 말하였다. “여러분은 로마 제국 방방곡곡을 여행하면서 왕국 소식을 선포한 사도 바울과 마가와 디모데와 그 외 사람들이 벌인 활동과 유사한 활동을 할 준비를 한층 더 갖추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강화되어야 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분의 목적을 명확하게 알아야 하였습니다. 여러 지방에서 그들은 이 세상의 높고 강한 자들과 홀로 맞서야 하였습니다. 여러분의 상황도 그와 같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면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힘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왕국에 관하여 별로 증거되지 않은 곳이 많습니다. 그러한 곳에 사는 사람들은 암흑 가운데 있는데 종교로 인해 거기에 갇혀 있습니다. 소수의 증인이 있는 그러한 나라들 중 일부 지역에서 유의하게 된 바와 같이, 선의를 가진 사람들은 기꺼이 귀를 기울이며, 제대로 가르치기만 하면 주의 조직과 연합하게 될 것입니다. 그 밭에 일꾼이 늘어나면 틀림없이 수백, 수천 명을 더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주의 은총으로 그 일꾼은 늘어날 것입니다.

“본 대학의 목적은 여러분을 봉사자로서 성직에 임명받도록 준비시켜 주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미 봉사자로서 여러 해 동안 봉사의 직무를 활동적으로 수행해 왔습니다. ·⁠·⁠· 본 대학 연구 과정의 목적은 전적으로 여러분이 임지에서 보다 유능한 봉사자로 일하도록 준비시켜 주는 데 있습니다. ·⁠·⁠·

“여러분이 수행해야 할 주된 활동은 예수와 사도들이 행한 바와 같이 왕국에 관한 복음을 집집으로 전파하는 것입니다. 듣는 귀를 발견하게 되면 재방문을 하고 가정 연구를 시작하고 한 도시나 읍에서 그러한 사람들을 한데 모아 부회[회중]를 조직하십시오. 부회를 조직하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기도 하겠지만, 여러분은 그들이 말씀을 이해하도록 도와주고, 그들을 강화시키고, 때때로 그들에게 연설하고, 그들이 봉사 모임을 갖고 조직하는 일을 돕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들이 강해져서 스스로 구역을 돌볼 수 있게 되면 여러분은 또 다른 도시로 가서 왕국을 선포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되돌아가서 그들을 지극히 거룩한 믿음 가운데 세워 주고 교리 면에서 바로잡아 줄 필요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주의 ‘다른 양’을 돌보고 그들을 저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요한 10:16) 여러분이 참으로 해야 할 일은 선의를 가진 사람들을 돕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앞장서는 한편 하나님의 인도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

다섯 달 후에 그 1기생들은 전문 훈련을 수료하였다. 사증을 발급받고 여행 계획을 세운 그들은 라틴 아메리카의 아홉 나라로 가기 시작하였다. 길르앗 훈련을 받고 졸업한 지 3개월 후에 최초로 미국을 떠난 선교인들은 쿠바로 가게 되었다. 1992년까지는 110여 개 나라에서 온 6500명 이상의 학생이 훈련을 받은 다음 200개가 훨씬 넘는 나라와 제도에서 봉사하게 되었다.

노어 형제는 길르앗 학교가 개설되고 나서 34년 후에 사망할 때까지 선교인 활동에 깊은 개인적 관심을 나타냈다. 그는 매 학기에 진행중인 학급을 가능한 한 여러 번 방문하여 여러 가지 강의도 하고 학생들에게 연설할 다른 본부 성원을 동반하기도 하였다. 길르앗 졸업생들이 외국에서 봉사를 하기 시작한 다음에는 선교인 그룹들을 손수 방문하여 그들이 문제를 극복하도록 도와주고 필요한 격려를 베풀기도 하였다. 선교인 그룹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그는 자격을 잘 갖춘 다른 형제들도 그러한 방문을 하도록 마련함으로써 여하한 임지에서 봉사하는 선교인이든 모두에게 개인적인 관심을 정기적으로 기울일 수 있게 하였다.

특이했던 그 선교인들

그리스도교국의 선교인들은 사람들의 물질적 필요를 돌보는 병원과 난민 수용소와 고아원을 설립하여 왔다. 빈민들의 수호자 역할을 자처하여 그들은 혁명을 부추기기도 하고 게릴라전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와는 반대로 길르앗 학교를 졸업한 선교인들은 사람들에게 성서를 가르친다. 그들은 교회를 세우고 사람들이 찾아와 주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집집을 방문하여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을 찾아내어 가르친다.

하나님의 말씀에 밀접히 고착하는 증인 선교인들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왕국이야말로 인류의 문제들에 대한 참되고 항구적인 해결책인 이유를 설명해 준다. (마태 24:14; 누가 4:43) 그러한 활동과 그리스도교국 선교인들의 활동 사이의 뚜렷한 차이가 1951년에 피터 밴더헤건이 인도네시아의 임지로 가는 여행 길에 부각되었다. 그 화물선에 타고 있던 유일한 다른 승객은 침례교 선교인이었다. 밴더헤건 형제는 그에게 하나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에 관하여 이야기하고자 노력하였지만 그 침례교인은 타이완에 있는 장제스[蔣介石]가 본토에 대한 정권을 회복하려는 노력을 지원하는 일에 지나치게 관심을 쏟고 있음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그렇지만 다른 많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들어 있는 내용의 가치를 인식하게 되었다. 콜롬비아 바랑키야에서 올러프 올슨 형제는 특정한 정치 운동을 열렬하게 지지하고 있던 안토니오 카르바할리노에게 증거할 때 그의 편을 들거나 다른 어떤 정치 이념을 내세우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안토니오와 그의 여동생들에게 무료 성서 연구를 제안하였다. 이윽고 안토니오는 하나님의 왕국이야말로 콜롬비아와 세계 여타 지역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유일한 희망임을 깨닫게 되었다. (시 72:1-4, 12-14; 다니엘 2:44) 안토니오와 그의 여동생들은 하나님의 열심 있는 종들이 되었다.

로디지아(지금의 짐바브웨)에서는 증인 선교인들이 그리스도교국의 종교 제도와 구별되며 전혀 다르다는 사실이 또 다른 방법으로 부각된 일이 있었다. 도널드 모리슨이 어느 그리스도교국 선교인의 집을 방문하였을 때 그 선교인은 증인들이 설정된 경계선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불평하였다. 무슨 경계선을 말한 것인가? 그리스도교국의 종교들은 그 나라를 여러 지역으로 분할하여 각자 자기 지역에서 타종교의 방해 없이 활동하기로 한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이 그러한 마련에 동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예수께서는 왕국 소식이 사람이 거주하는 온 땅에 전파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교국이 그 일을 하고 있지 않음은 명백하였다. 길르앗 훈련을 받은 선교인들은 그 일을 철저하게 수행함으로 그리스도께 순종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선교인들이 파견된 것은 섬김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이 참으로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였음이 여러 가지 면으로 분명하게 나타났다. 기꺼이 (그리고 간청해서가 아니라) 영적인 도움에 대한 인식에서 우러나와 제공되는 물질적 마련을 받아들이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존 에리케티와 허먼 우더드는 알래스카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기 위해서는 사도 바울이 한 것처럼 적어도 얼마의 시간을 내서 손수 일함으로써 자신들의 물질적 필요를 돌보는 것이 바람직함을 알게 되었다. (고린도 전 9:11, 12; 데살로니가 후 3:7, 8) 그들의 주된 활동은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후대를 받으면 그들도 필요한 일을 해줌으로써 도움을 베풀었다. 예를 들어 도움이 필요함을 알게 되어 어떤 사람의 집 지붕에 타르를 칠해 준 적이 있다. 그리고 배를 타고 이리저리 여행할 때에는 화물을 부리는 일을 거들기도 하였다. 사람들은 이 선교인들이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과는 전혀 다름을 이내 알 수 있었다.

어떤 곳에서는 증인 선교인들이 한 나라에서 자리를 잡고 봉사의 직무를 수행하려면 한동안 세속 일을 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예를 들어 제시 캔트웰은 콜롬비아에 갔을 때 모 대학교 의대에서 영어를 가르쳤는데, 그러다가 마침내 정치적 상황이 바뀌고 종교적 제한이 끝나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경험을 여호와의 증인의 여행하는 감독자로서 봉사의 직무를 수행하는 데 전 시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선교인들이 한 나라에 한 달 혹은 몇 달 머물 수 있게 하는 관광 사증을 가지고 출발해야 했던 지역도 많았다. 그 다음에 그들은 떠났다가 다시 들어가야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줄기차게 그 과정을 재삼재사 반복하다가 마침내 필요한 거주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들의 마음은 임명된 나라에 사는 사람들을 돕는 일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들 선교인들은 자신들이 현지 사람들보다 우월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원래 캐나다의 학교 교사였던 존 컷포스는 여행하는 감독자로서 파푸아뉴기니에서 여러 회중과 외딴 지역의 증인들을 방문하였다. 그는 그들과 함께 바닥에 앉아 식사도 하고 방바닥에 펼친 요에서 잠을 자라는 초대를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그는 야외 봉사를 할 때 현지 증인들과 함께 걸어가면서 교제하는 것을 즐겼다. 그러나 증인이 아닌 관찰자들에게 이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국 선교회의 유럽인 목회자들은 현지 사람들과는 멀찌감치 떨어져 지내면서 교구민들과 몇몇 모임 때만 잠깐씩 어울리지, 현지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일은 전혀 없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 증인들의 섬김을 받은 사람들은 선교인들과 그들을 파견한 조직의 인자한 관심을 감지하였다. 포르투갈령 서아프리카(지금의 앙골라)의 유배지에 감금되어 있던 겸손한 아프리카인 주앙 만코카가 보낸 편지에 대한 응답으로 한 명의 워치 타워 선교인이 영적인 도움을 베풀도록 파견되었다. 만코카는 훗날 그 방문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이것이 하나님의 지원을 받는 참 조직임을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다. 다른 어떤 조직도 단지 어떤 보잘것없는 사람이 편지를 보냈다고 해서 보수도 없이 그를 방문하도록 멀리서 선교인을 파견하는 그런 일을 할 것으로 생각되거나 믿어지지 않았다.”

생활 조건과 관습

흔히 선교인들이 파견된 나라의 생활 조건은 선교인의 고향 지방의 생활 조건만큼 물질적으로 발달된 것이 아니었다. 1947년 초에 로버트 커크가 버마(지금의 미얀마)에 도착하였을 때 여전히 전쟁의 상처는 뚜렷이 남아 있었고 전등이 있는 집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선교인들은 많은 나라에서 빨래를 전기 세탁기로 하는 것이 아니라 빨래판이나 강가의 바위에 한 가지씩 놓고 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들에게 성서 진리를 가르치러 간 것이므로 현지 조건에 적응하는 한편 봉사의 직무를 부지런히 수행하였다.

초창기에는 흔히 선교인을 기다렸다가 맞이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선교인 스스로가 살 곳을 찾아야 하였다. 1943년에 찰스 아이젠하워와 그 외 11명이 쿠바에 도착하였을 때 그들은 첫 날 밤을 바닥에서 잤다. 그 다음날 그들은 침대를 구입하고 사과 궤짝으로 장롱과 경대를 만들었다. 선교인들의 각 그룹은 출판물을 배부하고 기부받는 것과 워치 타워 협회가 특별 파이오니아에게 지급하는 소액의 수당을 사용하여 집세를 치르고 식품을 구입하고 그 외의 필요한 경비를 충당하려는 노력을 여호와께서 축복해 주시기를 바랐다.

때로는 식사를 준비할 때 사고 방식을 바꿔야 하는 일도 있었다. 냉장고가 없는 곳에서는 장보는 일을 매일 해야 하였다. 가스나 전열기에 요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탄이나 장작에 불을 지펴서 요리를 하는 나라도 많았다. 라이베리아에 임명된 조지 왓킨스와 그의 아내 윌러 메이는 자신들의 화덕이 쇠솥을 거는 데 쓰는 세 개의 돌덩이로 이루어진 것에 불과함을 알게 되었다.

물은 어떠하였는가? 루스 매케이는 인도에서 새로 구한 집을 보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이런 집은 이전에 본 일이 없습니다. 부엌에는 싱크대가 없으며, 단지 모퉁이 벽에 수도 꼭지가 나와 있고 부엌 바닥 전체가 물바다가 되지 않도록 콘크리트로 테두리를 둘렀을 뿐입니다. 물은 24시간 계속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물이 나오지 않는 때를 대비해서 물을 받아 두어야 합니다.’

현지 조건에 익숙하지 않아서 임지에서 처음 몇 달 동안은 병으로 고생한 선교인들도 있었다. 러셀 예이츠는 1946년에 쿠라사우에 도착하였을 때 연이어 몇 차례 이질에 걸렸다. 그러나 현지의 한 형제가 선교인들에 대해 여호와께 매우 열렬히 감사하는 기도를 드렸기 때문에 도저히 떠날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브라이언 와이즈와 그의 아내 엘크는 어퍼볼타(지금의 부르키나파소)에 도착하였을 때 건강에 나쁜 혹독한 기후에서 살게 되었다. 그들은 낮 시간에 섭씨 43도나 되는 기온을 극복해야 하였다. 첫 해에 무더위와 말라리아 때문에 엘크는 수주일 동안 몸져 누운 적이 있었다. 그 이듬해에는 브라이언이 심한 간염에 걸려 다섯 달 동안이나 누워 지냈다. 그러나 그들은 이내 온전한 주의를 기울이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성서 연구를 갖게 되었다. 그들은 그 사람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리고 자신들의 임무가 특권인 동시에 여호와께서 장차 자신들에 대해 의도하신 바에 대비시키시는 좋은 훈련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견딜 수 있었다.

여러 해가 지남에 따라, 앞서 개척한 선교인들이나 현지 증인들이 임지에 도착하는 더 많은 선교인을 환영해 주게 되었다. 주요 도시들이 상당히 현대화된 나라에 임명되는 선교인들도 있었다. 또한 1946년부터 워치 타워 협회는 각 선교인 그룹을 위해 적합한 집과 기본적인 가구 및 식품비를 마련해 줌으로써 선교인들이 그러한 염려에서 벗어나서 전파 활동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일 수 있게 해주려고 노력하였다.

여러 지역에서 여행은 선교인들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경험이었다. 파푸아뉴기니에서는 비가 온 후에 진흙투성이라서 신발이 자꾸 벗겨지는 미끄러운 오솔길을 따라 필수품이 든 배낭을 메고 벽지를 걸어다녀야 했던 선교인 자매가 한둘이 아니었다. 남아메리카에서는 안데스 산맥 고지대의 좁은 도로를 버스를 타고 가는 아슬아슬한 경험을 한 선교인이 적지 않았다. 자신이 탄 버스가 도로의 바깥쪽 가장자리를 달리다가 가드레일도 없는 커브길에서 마주 오는 또 다른 대형 차량과 교차할 때 버스가 벼랑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정말 쉽게 잊혀지지 않는 경험이다!

정치적 혁명이 일상 생활의 한 부분이 된 것 같은 지역도 있었다. 그러나 증인 선교인들은, 예수의 제자들은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는 예수의 말씀을 명심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그러한 분쟁에 대해 중립을 지켰다. (요한 15:19) 그들은 불필요한 위험에 노출시킬 만한 여하한 호기심도 억누를 줄 알게 되었다. 흔히 최상책은 상황이 진정될 때까지 대로에 나가지 않는 것이었다. 베트남에서 일한 아홉 명의 선교인은 사이공(지금의 호치민 시)이 전쟁에 휘말려 들어갔을 때 그 도시 한가운데 살고 있었다. 그들은 도시 전역에 폭탄이 떨어지고 화재가 일어나고 수많은 사람이 살기 위해 피난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진리에 굶주린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지식을 전해 주도록 여호와께서 자신들을 보내셨음을 인식하고 그들은 그분이 보호해 주시기를 바랐다.

아시아의 여러 도시의 일부 구역에서는 비교적 평화로울 때에도 선교인들이 봉사의 직무를 수행하기가 어려웠다. 외국인이 파키스탄 라호르의 빈민가의 골목에 나타나기만 해도, 불결하고 단정치 않은 다양한 연령층의 어린이들이 떼지어 몰려들었다. 그 아이들은 소리치고 서로 밀치면서 선교인을 집집마다 쫓아다니고 때로는 전도인의 뒤를 따라 집 안으로 함부로 들어가기도 하였다. 이윽고 온 동네에 잡지 가격이 알려지게 되고 낯선 사람이 사람들을 ‘그리스도교인으로 만들고’ 있다는 말이 퍼지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서는 일반적으로 그 지역을 떠나야 하였다. 떠날 때에 흔히 아이들은 소리소리 지르고 손뼉을 쳤으며 때로는 돌을 빗발치듯 던지기도 하였다.

선교인들은 현지 관습 때문에 얼마간 조정을 해야 하는 경우가 흔하였다. 일본에서는 가정집에 들어갈 때면 신발을 현관에 벗어 놓아야 하였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성서 연구 때에는 낮은 탁자 앞 바닥에 앉는 데 익숙해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주는 데 왼손을 사용하는 것이 모욕적인 행위로 간주된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그 지역에서는—서로 건강에 관해 물어보고, 어디에서 왔고 자녀는 얼마나 두었는지 등에 관한 질문에 대답하는—가벼운 대화를 얼마간 나누기 전에 방문한 이유를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무례한 일임을 알게 되었다. 브라질에서는 선교인들이 집주인을 불러내기 위해서는 대개 문을 두드리는 것이 아니라 대문에서 손뼉을 쳐야 함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레바논에서는 선교인들이 또 다른 종류의 관습에 직면하였다. 아내와 딸을 집회에 동반하는 형제가 거의 없었다. 여자들은 집회에 참석한다 해도 언제나 뒷자리에 앉고 남자들 사이에 앉는 일이 없었다. 그러한 관습을 모르는 선교인들은 첫 집회 때 적지 않은 혼란을 야기하였다. 한 부부가 앞쪽에 앉았고 독신 선교인 자매들은 빈 자리가 있는 곳이면 아무데나 앉은 것이다. 그러나 집회 후에 그리스도인 원칙을 논의함으로써 오해를 말끔히 해소하였다. (비교 신명 31:12; 갈라디아 3:28) 자리 구분은 없어졌다. 집회에 참석하는 아내와 딸이 늘어났다. 그들은 선교인 자매들과 함께 호별 방문 봉사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도전이 되는 새로운 언어

1949년에 마르티니크에 도착한 소규모 그룹의 선교인들은 프랑스어를 거의 할 줄 몰랐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들에게 왕국 소식이 필요함을 알았다.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그들은 호별 방문을 시작하여 몇 개의 성구 혹은 제공 출판물의 발췌문을 읽어 주려고 노력하였다. 끈기 있는 노력으로 그들의 프랑스어 실력은 점차 좋아졌다.

선교인들이 현지 증인과 그 외 관심자들을 돕고 싶은 마음이야 간절하였지만, 도움이 먼저 필요한 쪽은—언어 면에서—선교인 자신들이었다. 토고에 파견된 선교인들은 현지의 주요 언어인 에웨어 문법이 유럽 언어들의 문법과는 매우 다르고, 같은 말이라도 어떤 음높이로 말하느냐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질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라는 단어는 높은 음으로 말하면 귀나 산이나 시아버지나 장인 혹은 부족을 의미할 수 있으며 낮은 음으로 말하면 물소를 의미한다. 베트남에서 봉사를 수행한 선교인들이 접하게 된 한 언어는 여하한 단어에도 여섯 가지 음조를 사용하는데, 음조에 따라서 각기 의미가 달라진다.

페루에 임명된 에드나 워터폴은 스페인어로 증거하려고 애쓴 첫 집이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그 자매는 식은 땀을 흘리면서 한 연로한 여자에게 암기한 제공 연설을 더듬더듬하고 나서 출판물을 제공하고 성서 연구를 제안하였다. 그러자 그 여자는 완벽한 영어로 이렇게 말하였다. “좋습니다. 아주 훌륭합니다. 연구를 해보겠어요. 스페인어를 배우시는 데 도움이 되도록 온전히 스페인어로 하십시다.” 깜짝 놀란 에드나는 이렇게 응답하였다. “영어를 할 줄 아시는군요? 그런데도 제가 이 엉터리 스페인어로 그 모든 말을 하게 하셨군요?” 그 여자는 “유익을 얻으시라고 그렇게 한 거죠”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참으로 그러하였다! 에드나가 곧 인식하게 된 것처럼 한 가지 언어를 배우는 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는 그 언어를 실제로 말해 보는 것이다.

이탈리아에서 조지 프레디아넬리는 이탈리아어를 말해 보려고 하였는데, 자기는 이탈리아어 표현(실제로는 영어 단어를 이탈리아식으로 말한 것이었음)이라고 생각하고 말하였는데도 상대방이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그는 회중에서 하는 연설을 전부 다 써서 원고를 가지고 연설을 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다수의 청중이 잠들어 버리곤 하였다. 그래서 그는 원고를 없애고 즉석 연설을 하면서 청중에게 자기가 곤경에 처하면 도와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로 인해 청중은 깨어 있게 되었고 그는 발전하게 되었다.

초창기 길르앗 연구 과정에는 선교인들이 새로운 언어를 시작할 수 있도록 스페인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포르투갈어, 일본어, 아라비아어 및 우르두어 같은 언어 과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여러 해가 지나면서 가르치는 언어 수는 30가지를 넘게 되었다. 그러나 여하한 학급의 졸업생도 전원이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곳으로 가게 되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나중에 이러한 언어 수업은 임지에 도착하여 집중적으로 개인 지도를 받으면서 언어를 공부하는 마련으로 바뀌었다. 새로운 선교인은 처음 한 달 동안은 하루 11시간씩 언어 학습에 전적으로 몰두하였다. 그 다음 달에는 시간의 절반은 집에서 언어 공부를 하는 데 바치고 나머지 반은 배운 지식을 야외 봉사에서 사용하는 데 바쳤다.

그러나 관찰에 의하면 야외 봉사에 그 언어를 실제로 사용하는 것이야말로 발전하는 주된 비결이었으므로 그 마련은 조정되었다. 임지에 도착하여 처음 3개월 동안, 현지 언어를 모르는 새로운 선교인은 자격 있는 교사와 함께 하루에 네 시간을 보내며 바로 시초부터 현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왕국에 관하여 증거함으로써 배우고 있는 내용을 적용해 보게 되었다.

많은 선교인 그룹은 언어에 대한 이해력을 증진시키기 위해 팀을 이루어 공부하였다. 그들은 매일 아침 식사 때 새로운 단어를 몇 개 혹은 무려 20개나 검토하고 나서 야외 봉사에 그 단어들을 사용하려고 노력하곤 하였다.

현지 언어를 배우는 것은 주민들의 신뢰심을 얻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되어 왔다. 일부 지방에는 외국인들에 대한 상당한 불신감이 존재한다. 휴 코미캔과 그의 아내 캐럴은 아프리카의 다섯 나라에서 독신으로도 봉사해 보았고 부부로서도 봉사하였다. 그들은 아프리카인들과 유럽인들 사이에 흔히 존재하는 불신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현지 언어로 말하면 그러한 불신감이 신속히 해소된다. 더욱이 동족에게서는 좋은 소식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도 우리의 말에는 기꺼이 귀를 기울이고 출판물을 받고 연구를 한다. 우리가 그들의 언어로 이야기하려고 노력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코미캔 형제는 영어 이외에 다섯 가지 언어를 배웠고 코미캔 자매는 여섯 가지를 배웠다.

물론 새로운 언어를 배우려고 할 때는 문제도 겪게 마련이다. 한 형제는 푸에르토리코에서 집주인에게 성서 소식이 담긴 음반을 틀어 주겠다고 제안하다가 그 사람이 “코모 노!”라고 말하면 축음기를 닫고 다음 집으로 가곤 하였다. 그에게는 그 말이 영어의 “노(싫습니다)”라는 말처럼 들렸는데, 상당한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그 표현이 “좋지요!”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반면에 선교인들은 때때로 집주인이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것을 알아듣지 못하고 그만 계속 증거하였다. 그로 인해 유익을 얻은, 동정심 많은 집주인도 소수 있다.

또한 웃음을 자아내는 상황들도 있었다. 싱가포르의 레슬리 프랭크스는 머리(케팔라)를 가리켜 코코넛(켈라파), 그리고 털(람부트)을 가리켜 목초(룸푸트)라고 말하지 않도록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됨을 알게 되었다. 사모아의 한 선교인은 원주민인 상대방의 아내에 관하여 정중하게 묻는다는 것이 그만 잘못 발음하는 바람에 “당신 수염은 어떠하십니까?” 하고 묻고 말았다. (그에게는 수염이 없었다.) 에콰도르에서 버스 운전사가 갑자기 출발하자 버스 안에 서 있던 졸라 호프먼 자매는 그만 균형을 잃고 어떤 남자 무릎 위에 내려앉고 말았다. 당황한 그 자매는 사과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 페르미소”(허락해 주신다면)라는 말이 나오고 말았다. 그 남자는 상냥한 어조로 “아가씨, 괜찮습니다”라고 대답하였고 다른 승객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그렇지만 선교인들이 부지런히 노력하였기 때문에 야외 봉사에서 성과가 나타나고 있었다. 1950년에 일본에 온 로이스 다이어는 “최선을 다하시오. 그리고 실수를 저지른다 해도 무엇인가 하도록 하시오!”라고 말한 노어 형제의 조언을 기억하고 있다. 그 자매는 그 조언대로 하였고 다른 많은 선교인도 그렇게 하였다. 그 다음 42년 동안, 일본에 파견된 선교인들은 그 곳의 왕국 선포자가 몇 안 되는 수에서 17만여 명으로 증가하는 것을 보았으며 그 성장은 계속되어 왔다. 여호와의 인도를 구하고 나서 기꺼이 노력한 보람은 참으로 풍성한 것이었다!

새로운 밭은 개척하고 그 외의 밭은 발전시킴

수십 개 나라와 제도에서, 길르앗 훈련을 받은 선교인들은 왕국 전파 활동을 개척하거나, 다른 사람에 의해 한정된 증거 활동이 이루어진 곳에 필요한 박차를 가하는 일을 하였다. 소말리아, 수단, 라오스 및 전세계 여러 제도에서 좋은 소식을 전파한 최초의 여호와의 증인은 선교인들이었음이 분명하다.

니카라과, 도미니카 공화국, 볼리비아, 에콰도르,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감비아, 라이베리아, 에티오피아, 베트남, 일본, 캄보디아 및 홍콩 같은 곳에서는 일찍이 전파 활동이 어느 정도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나라들에 길르앗 학교를 졸업한 최초의 선교인이 도착하였을 때 활동을 보고하는 여호와의 증인은 아무도 없었다. 선교인들은 가능한 한 더 큰 도시들을 먼저 집중적으로 봉사하면서 전국을 체계적으로 봉사하였다. 그들은 과거의 콜포처들처럼 그저 출판물만 전하고 이동한 것이 아니다. 선교인들은 끈기 있게 관심자들을 재방문하였고 그들과의 성서 연구를 사회하였고 그들을 야외 봉사에서 훈련시켰다.

길르앗 학교를 졸업한 선교인이 도착하기 전에는 왕국 선포자가 단지 열 명 정도(어떤 경우에는 그 미만)였던 나라들도 있었다. 그중에는 과테말라, 베네수엘라, 아이티, 콜롬비아, 푸에르토리코, 남서 아프리카(지금의 나미비아), 모리셔스, 부룬디, 세네갈, 아이보리코스트(지금의 코트디부아르), 케냐, 실론(지금의 스리랑카), 싱가포르, 중국 및 여러 제도가 있다. 선교인들은 야외 봉사에서 열정적인 본을 세우고 현지 증인들이 능력을 발전시키도록 도왔으며 회중을 조직하고 형제들이 인도할 자격을 갖추도록 도왔다. 많은 경우에 그들은 이전에는 전혀 돌보지 못한 지역에서 전파 활동을 개척하는 일도 하였다.

이에 힘입어 증인 수는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대부분의 그러한 나라들에서 활동적인 여호와의 증인은 현재 수천 명에 달한다. 그중에는 여호와의 찬양자가 수만 명, 아니 10만 명이 넘는 나라도 있다.

열심히 듣는 사람들이 있었다

일부 지역에서 선교인들은 기꺼이 그리고 열심히 듣는 사람들을 많이 발견하였다. 길르앗 첫 학급 졸업생들인 테드 클라인과 그의 아내 도리스는 1947년에 버진아일랜드에 도착하였을 때 성서를 연구하고 싶어한 사람이 너무나 많아서 자정이나 되어야 하루의 봉사가 끝나는 경우가 흔하였다. 클라인 형제가 샬럿아말리의 마켓 광장에서 처음으로 공개 강연을 하였을 때 참석자 수는 1000명이나 되었다.

조지프 맥그래스와 시럴 찰스는 1949년에 타이완의 아미족 구역으로 파견되었다. 그들은 초가 지붕과 흙 바닥으로 된 집에 살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 곳에 간 것은 사람들을 돕기 위한 것이었다. 아미족의 일부 사람들이 워치 타워 출판물을 받아 읽어 보고 그 내용에 만족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 주고 있었다. 이제 선교인들이 그 곳에 간 것은 그들이 영적으로 발전하도록 돕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진리에 관심 있는 사람이 600명이라고 들었는데 이 마을 저 마을을 다니면서 개최한 여러 집회에 참석한 사람 수는 총 1600명이나 되었다. 이들 겸손한 사람들은 기꺼이 배우려고 하였지만, 여러 가지 사물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부족하였다. 형제들은 그들을 참을성 있게 가르치면서 한 번에 한 가지 제목을 논하였는데 각 마을에서 한 가지 제목에 대한 문답식 토의에 여덟 시간 이상을 바치는 일도 종종 있었다. 집집으로 증거하는 일에 참여하고 싶어한 140명을 훈련시키기도 하였다. 그것은 선교인들에게 실로 즐거운 경험이었다! 그러나 튼튼한 영적 발전이 있으려면 아직도 훨씬 더 많은 일을 해야 하였다.

약 12년 후에, 길르앗 훈련을 받고 일본에서 봉사하던 선교인 하비 로건과 그의 아내 캐슬린이 아미족 형제들을 한층 더 돕도록 임명되었다. 로건 형제는 그들이 기본적인 성서 교리와 원칙 그리고 조직의 일을 이해하도록 돕는 일에 많은 시간을 바쳤다. 로건 자매는 아미족 자매들과 매일 야외 봉사를 같이 하였으며 그 다음에는 그들과 기본적인 성서 진리를 연구하려고 노력하였다. 그 후 1963년에 워치 타워 협회는 세계 일주 대회와 관련하여 28개 국에서 온 대표자들이 쇼펑 마을에서 현지 증인들과 함께 모임을 갖도록 마련하였다. 이 모든 것에 힘입어 더 큰 발전을 위한 튼튼한 기초가 놓이기 시작하였다.

1948년에 두 명의 선교인 해리 아넛과 이언 퍼거슨은 북로디지아(지금의 잠비아)에 도착하였다. 당시에 그 곳에는 아프리카 원주민 증인 회중이 이미 252개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동광업과 관련하여 그 나라로 이주한 유럽인들에게도 주의를 기울였다. 그 반응은 가슴 설레는 것이었다. 많은 출판물을 배부하였다. 성서 연구를 하는 관심자들은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 해에 활동적으로 야외 봉사를 하는 증인 수는 61퍼센트 증가하였다.

많은 곳에서 선교인이 성서 연구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대기자 명단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었다. 연구가 사회될 때 때로는 친척, 이웃 및 다른 벗들도 참석하였다. 개인적인 성서 연구를 하기 전인데도 왕국회관에서 열리는 집회에 정기적으로 참석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일부 나라에서는 선교인들이 대단한 노력을 기울였는데도 수확은 매우 한정되었다. 현재 1억 1500만이 넘는 인구가 주로 모슬렘이거나 힌두교인인 동파키스탄(지금의 방글라데시)에는 일찍이 1953년에 워치 타워 선교인이 파견되었다. 사람들을 돕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1992년까지는 그 나라에 있는 여호와의 숭배자는 42명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지역에서 봉사하는 선교인들이 볼 때 참 숭배의 편을 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각별히 소중하다. 그러한 사람이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동료 증인들에 대한 인자한 도움

선교인의 기본적인 일은 복음 전파 활동, 즉 하나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활동에 개인적으로 참여함에 따라 현지 증인들에게도 많은 도움을 베풀 수 있었다. 선교인들은 야외 봉사를 함께하도록 그들을 초대하였고 어려운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에 대한 제안들도 알려 주었다. 선교인들을 관찰함으로써 흔히 현지 증인들은 봉사의 직무를 더 조직적으로 수행하는 방법과 더 효과적으로 가르치는 방법을 배우게 되었다. 한편 현지 증인들은 선교인들이 현지 관습에 적응하도록 도와주었다.

존 쿠크는 1948년에 포르투갈에 도착하였을 때 체계적인 호별 활동을 조직하는 조처를 취하였다. 많은 수의 현지 증인들은 기꺼이 응하기는 하였지만 훈련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알마다에서 처음으로 자매들과 봉사하러 나간 일 중 하나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 그들 여섯 사람이 모두 한 집에 들어갔던 것이다. 여섯 여자가 무리 지어 문전에 서 있고 그중 한 사람이 호별 방문 연설을 하는 것이 어떠했겠는가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들이 조금씩 틀잡히면서 진전되기 시작하였다.”

선교인들의 용감한 본에 힘입어 리워드 제도의 증인들은 담대해져서, 활동을 훼방하려고 하는 반대자들을 겁내지 않게 되었다. 한 선교인이 나타낸 믿음은 스페인 형제들이 가톨릭 파시스트 독재 치하에 살고 있던 때인데도 호별 봉사를 시작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2차 세계 대전 후에 일본에서 봉사한 선교인들은 재치를 나타내는 면에서 본이 된다. 그들은 일본 천황이 신격을 포기한 다음에 국교의 실패를 반복적으로 들추어낸 것이 아니라 창조주를 믿을 수 있는 설득력 있는 증거를 제시한 것이다.

선교인들을 관찰하는 현지 증인들은 선교인들이 당시에는 깨닫지 못한 여러 가지 면으로 깊은 감명을 받는 경우가 흔하였다. 트리니다드에서는 선교인들이 겸손을 나타내고 곤란한 상황을 기꺼이 참고 무더운 날씨에도 열심히 여호와의 봉사를 수행한 일화들이 여러 해가 지난 지금까지도 화제가 되고 있다. 한국의 증인들은 정부에서 몇몇 긴급한 “인도주의적” 경우를 제외하고는 선교인들에게 재입국 허가를 내주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을 떠나 가족을 방문하는 여행을 10년 동안이나 포기한 선교인들의 자기 희생적인 영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길르앗 학교 수업 초기와 그 후에 대부분의 선교인들은 여호와의 보이는 조직의 본부 운영을 가까이서 살펴볼 수 있었다. 그들에게는 종종 통치체 성원과 교제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있었다. 나중에 선교 임지에서 그들은 현지 증인들과 새로운 관심자들에게 조직의 운영 방식과 그에 대한 자신의 인식에 관하여 목격담을 이야기해 줄 수 있었다. 조직의 신권적 운영에 관한 깊은 인식을 심어 주는 것은 흔히 성장하는 데 중요한 요인이었다.

선교인들이 파견된 지역 중 많은 곳에서는 그들이 도착하였을 때 회중 집회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필요한 마련을 하였고 집회를 사회하였으며 다른 사람들이 이 특권에 참여할 자격을 갖출 때까지 대부분의 집회 프로그램을 다루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다른 형제들을 훈련시킴으로써 형제들이 책임을 맡을 자격을 갖추게 하였다. (디모데 후 2:2) 최초의 집회 장소는 대개 선교인 집이었다. 나중에는 왕국회관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미 회중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집회를 보다 흥미있고 교육적인 것이 되게 하는 데 선교인들은 기여하였다. 그들의 잘 준비된 해설은 올바른 인식을 불러일으켰으며 곧 다른 사람들이 따라야 할 본보기가 되었다. 길르앗 훈련을 활용함으로써 형제들은 공개적으로 연설하고 가르치는 일에 훌륭한 본을 세웠으며 현지 형제들이 그 기술을 배우도록 돕는 일에 기꺼이 시간을 바쳤다. 또한 사람들이 느릿하게 생활하는 관습이 있고 특히 시간 관념이 없는 나라에서는, 선교인들은 집회를 제시간에 시작하는 것의 가치를 인식하도록 참을성 있게 도왔으며 모두가 제시간에 참석하도록 격려하였다.

선교인들이 관찰한 바에 의하면 일부 지역에서는 여호와의 의로운 표준에 고착하는 일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북돋워 주는 도움이 필요하였다. 예를 들어 보츠와나에서는 일부 자매들이 아기가 해를 입지 말라고 아기에게 여전히 줄이나 구슬 목걸이를 걸어 주는 것이 관찰되었는데 그러한 관습이 미신과 마법에서 유래한 것임을 온전히 인식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포르투갈에서는 분열을 야기하는 상황들이 있었다. 참을성과 인자한 도움, 필요할 경우에는 확고함을 나타냄으로 인해 영적인 건강이 좋아지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핀란드에서 감독하는 위치에 임명된 선교인들은 현지 형제들이 문제들을 성서 원칙에 비추어 추리함으로써 하나님 자신의 생각과 일치한 결론에 도달하도록 훈련시키는 일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바쳤다. 또한 아르헨티나에서 선교인들은 형제들이 계획표의 가치, 기록 방법, 서류들을 철하는 일의 중요성 등을 배우도록 도왔다. 독일에서는 강제 수용소에서 생존을 위해 투쟁한 결과로 일부 부면에 대해 상당히 엄격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충성스러운 형제들이 하나님의 양떼를 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한 방법을 더 온전히 본받도록 도왔다.—마태 11:28-30; 사도 20:28, 「신세」 참조.

일부 선교인들의 일에는 정부 관리들을 상대하고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에 대한 법적 인가를 신청하는 일이 포함되었다. 예를 들어 아내와 함께 카메룬에 임명된 졸리 형제는 거의 4년간에 걸쳐서 법적 인가를 받으려고 반복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프랑스인 및 아프리카인 관리들에게 자주 이야기하였다. 마침내 정부가 바뀌면서 법적 인가를 받게 되었다. 그 무렵은 이미 증인들이 카메룬에서 활동한 지 27년이나 되었고 그 수는 6000명이 넘은 때였다.

여행하는 봉사의 도전에 응함

일부 선교인들은 여행하는 감독자로 봉사하도록 임명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에는 특별한 필요가 있었다. 2차 세계 대전중에 그 곳 형제들은 왕국 권익을 위해 바치던 노력의 일부를 지혜롭지 않게 세속 일에 바쳤다. 오래지 않아 이 점은 시정이 되었고 1947년에 노어 형제의 방문중에 왕국 전파 활동을 첫째로 두는 것이 중요함이 강조되었다. 그 후 순회 및 지역 감독자로 봉사한 길르앗 졸업생들의 열정, 훌륭한 본 및 가르치는 방법 등은 현지 증인들 사이에 진정한 영적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한층 더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한 여행하는 봉사에 참여하려면 흔히 기꺼이 대단한 노력을 기울이고 위험에 맞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월리스 리버런스의 경우 볼리비아 볼칸의 외딴 지역에 사는 어느 전도인 가족을 찾아가는 유일한 방법은 해발 약 3400미터 높이에 있는 바위투성이의 황무지를 가로질러 침낭, 식품, 물, 출판물 등을 짊어지고 뙤약볕 아래 왕복 90킬로미터를 걸어서 여행하는 것이었다. 닐 캘러웨이는 필리핀의 여러 회중을 섬기기 위해서 시골의 초만원 버스를 자주 타야 하였는데 그러한 버스들은 사람만 태우는 것이 아니라 동물과 농산물도 함께 싣는 것이었다. 리처드 코터릴이 인도에서 여행하는 감독자로 활동하기 시작한 때는 종교적 증오심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살해당하던 시기였다. 그가 폭동 지역에 사는 형제들을 섬기도록 되어 있었는데, 기차표 판매원은 그를 말리려고 하였다. 그 여행은 대부분의 승객에게 악몽 같은 여행이었지만, 코터릴 형제는 형제들이 어디에 살든지 혹은 어떤 언어를 사용하든지 그들을 깊이 사랑하였다. 여호와를 신뢰하는 가운데 그는 이렇게 추리하였다. “여호와의 뜻이라면 그 곳에 가도록 노력하겠다.”—야고보 4:15.

다른 사람들이 전 시간 봉사에 참여하도록 격려함

선교인들이 열정적인 영을 나타낸 결과로, 그들에게 가르침받은 많은 사람이 그들을 본받아 전 시간 봉사를 시작하였다. 168명의 선교인이 봉사해 온 일본의 경우 1992년의 파이오니아 수는 7만 5956명이었는데 이것은 일본 전도인 중 40퍼센트 이상이 전 시간 봉사의 한 분야에 참여한 것이다. 한국의 비율도 비슷하였다.

인구 대 증인 비율이 상당히 좋은 나라에서 많은 전 시간 봉사자가 길르앗 학교에서 훈련을 받도록 초대를 받은 다음 다른 곳에서 봉사하도록 파견되었다. 선교인 중 많은 수가 미국과 캐나다 출신이었고 영국 출신이 약 400명, 독일 출신이 240명 이상,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이 150명 이상, 스웨덴 출신이 100명 이상 되었다. 그 외에도 네덜란드, 뉴질랜드, 덴마크, 핀란드, 하와이 및 기타 나라 출신도 상당수에 이르렀다. 선교인의 도움을 받은 일부 나라들도 나중에는 다른 나라에서 봉사할 선교인이 될 만한 사람들을 배출하였다.

성장하는 조직의 필요를 충족시킴

조직이 성장함에 따라 선교인들은 한층 더 책임을 맡게 되었다. 상당수의 선교인들은 자신의 도움으로 발전한 회중에서 장로나 봉사의 종으로 봉사해 왔다. 많은 나라에서 선교인은 최초의 순회 및 지역 감독자였다. 더 큰 발전으로 협회가 새로운 지부 사무실을 세우는 것이 바람직하게 되면 다수의 선교인들은 지부 운영과 관련된 책임을 맡게 되었다. 어떤 경우에 언어에 능통하게 된 선교인은 성서 출판물을 번역하고 교정하는 일을 도우라는 요청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특히 보람을 느끼는 때는 자기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한 사람들, 혹은 자신들의 상당한 도움에 힘입어 영적으로 발전한 형제들이 그러한 책임을 맡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되었을 때다. 예를 들어 페루에서 활동한 한 부부는 자기네와 연구를 한 일부 증인들이 특별 파이오니아로서 봉사하여 새로운 회중을 강화하고 새로운 구역을 개척하는 일을 돕는 것을 보고 흐뭇해하였다. 스리랑카에서는 한 선교인이 연구를 사회해 준 가족 중에서 그 나라의 지부 위원회의 한 성원이 나왔다. 그 외의 많은 선교인들도 그와 비슷한 기쁨을 맛보았다.

또한 선교인은 반대도 직면하였다.

반대에 직면하여

예수께서는 자기 추종자들에게 자신이 박해를 받은 것처럼 그들도 박해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요한 15:20) 선교인들은 대개 외국에서 온 사람들이므로 어떤 나라에서 심한 박해가 일어난다는 것은 흔히 추방을 의미하였다.

1967년에 소냐 하이도스티안과 그의 부모는 시리아 알레포에서 체포되었다. 그들은 다섯 달 동안 투옥되어 있다가 소유물은 놔둔 채로 추방당하였다. 독일 출신의 마르가리타 쾨니거는 마다가스카르에 임명되었지만 여기저기서 연이어 추방당함으로 인해 케냐, 다호메이(베냉) 및 어퍼볼타(부르키나파소)의 새로운 임지로 옮겨다녀야 하였다. 도머닉 피코니와 그의 아내 엘자는 전파한다는 이유로 1957년에 스페인에서, 1962년에는 포르투갈에서, 1969년에는 모로코에서 추방당하였다. 그러나 각 나라에서 추방령을 예방하려고 애쓰는 동안 좋은 결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관리들에게 증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모로코에서는 세퀴리테 나쇼날의 관리들, 대법원 판사, 탕헤르의 경찰 서장, 탕헤르와 라바트의 미국 영사들에게 증거할 기회가 있었다.

선교인들을 추방했다고 해서 일부 관리들이 기대한 것처럼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이 중지된 것은 아니다. 흔히 이미 뿌려진 진리의 씨가 계속 자라난다. 예를 들어, 부룬디에서는 1964년에 네 명의 선교인이 봉사의 직무를 수행한 지 수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정부는 그들을 강제 출국시켰다. 그러나 선교인 한 사람은 관심자 한 사람과 계속 서신으로 연락을 주고 받았는데, 그 관심자는 자신이 26명과 성서 연구를 하고 있다고 알려 왔다. 그 얼마 전에 부룬디로 이사한 한 탄자니아인 증인도 부지런히 전파 활동을 하였다. 점차 그들의 수는 늘어나서 마침내는 수백 명이 왕국 소식을 또 다른 사람에게 전해 주게 되었다.

어떤 곳에서 관리들은 추방령을 내리기 전에 폭력을 써서 모두를 자신들의 요구에 굴복시키려고 하였다. 1963년에 라이베리아 방가에서는 군인들이 그리스도인 대회에 참석한 남녀 노소 400명을 둘러쌌다. 군인들은 그들을 연병장까지 행진시키고 위협하고 구타하고는 모두에게—국적이나 종교적 신념을 가리지 않고—라이베리아 국기에 경례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 그룹 중에는 미국에서 온 밀턴 헨첼도 있었다. 또한 캐나다에서 온 존 샤룩을 비롯하여 선교인도 몇 명 있었다. 길르앗 졸업생 한 명이 타협하였는데 그는 그전에도 타협한 적이 있었다(그러나 그는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틀림없이 그로 인하여 대회에 참석한 일부 다른 사람들도 타협하게 되었다. 누가 진실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고 누가 사람을 두려워하여 올무에 걸렸는지가 분명하게 나타났다. (잠언 29:25) 그 후 정부는 외국에서 온 모든 증인 선교인들에게 그 나라를 떠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같은 해 나중에 내려진 대통령 명령은 그들이 돌아오도록 허락하였다.

정부 관리들이 선교인들에 대해 적대적인 조처를 취한 것은 흔히 교직자들의 압력 때문이었다. 때때로 그 압력은 은밀한 방법으로 가해졌다. 또 어떤 때는 누가 반대를 조장하는지가 자명하였다. 조지 코이비스토는 콜롬비아 메데인에서 야외 봉사를 하려고 나간 첫날 오전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갑자기 떠들썩한 학생 폭도가 나타나서는 돌과 진흙 덩어리들을 마구 던지는 것이었다. 집주인은 전에 그를 본 적이 없는데도 그를 급히 집 안으로 들이고는 나무 덧문을 닫고 바깥에 있는 폭도의 행동에 대해 줄곧 사과하였다. 경찰이 나타나자 학생들을 내보낸 교사를 탓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외치는 사람이 있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사제 때문이에요! 사제가 확성기로, 학생들을 내보내서 ‘프로테스탄테들에게 돌을 던지’게 하라고 방송했거든요.”

경건한 용기와 더불어 양떼에 대한 사랑이 필요하였다. 엘프리데 뢰어와 일제 운터되르퍼는 오스트리아의 가스타인 계곡에 임명되었다. 짧은 기간에, 영적 양식에 굶주린 사람들에게 많은 성서 출판물이 배부되었다. 그러나 그 때 교직자의 반응이 나타났다. 교직자들은 어린 학생들로 하여금 길에서 선교인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선교인보다 앞서 가서 집주인들에게 소식에 귀기울이지 말라고 경고하도록 충동질하였다. 주민들은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러나 끈기 있게 사랑을 나타낸 결과 몇 건의 좋은 연구가 시작되었다. 성서 공개 강연이 계획되었을 때 부목회자가 집회 장소 바로 앞에 도전적으로 서 있었다. 그러다가 선교인들이 사람들을 환영하러 밖으로 나가자 부목회자는 사라졌다. 그는 경관 한 사람을 데리고 돌아왔는데 집회를 방해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실패하였다. 오래지 않아 그 곳에는 훌륭한 회중이 하나 형성되었다.

에콰도르 이바라의 인근 마을들에서 운 라운홀름과 줄리아 파슨스는 사제가 선동한 폭도에 한두 번 직면한 것이 아니다. 선교인들이 산안토니오에 나타날 때마다 사제가 소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그 선교인 자매들은 아툰타키라는 다른 마을에서 집중적으로 봉사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하루는 그 지방 보안관이 와서는 흥분한 목소리로 라운홀름 자매에게 빨리 그 마을을 떠나라고 재촉하였다. “사제가 당신을 반대하는 데모대를 조직하고 있는데, 나에게는 당신을 방어해 줄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라고 그는 소리쳤다. 그 자매는 생생한 기억으로 이렇게 회상한다. “군중이 쫓아오고 있더군요! 무리의 앞에는 흰색과 노랑색이 섞인 교황청기가 휘날리고 있었고 사제는 ‘가톨릭 교회 만세!’, ‘프로테스탄트를 타도하라!’, ‘성모 마리아 동정 만세!’, ‘고해 성사 만세!’라는 구호를 외쳤습니다. 군중은 사제를 따라 한마디 한마디씩 매번 구호를 되풀이했습니다.” 바로 그 때 두 남자가 증인들을 그 지방의 ‘근로자의 집’으로 피신하도록 초대하였다. 거기서 선교인들은 무슨 일인지 궁금해서 보러 온 사람들에게 증거하기에 바빴다. 그들은 가지고 있던 출판물을 전부 전하였다.

특별한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고안된 과정들

길르앗 학교에서 첫 선교인들을 파견한 이래 여러 해 동안 여호와의 증인 조직이 맛보아온 성장 비율은 경탄스러운 것이었다. 1943년에 학교가 개설되었을 때에는 증인이 54개 나라(1990년대 초의 지도 구분 방식에 따르면 103개 나라)에 12만 9070명에 불과하였다. 1992년까지는 전세계 229개 나라와 제도에 447만 2787명의 증인이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이 성장함에 따라 조직이 필요로 하는 것도 달라지게 되었다. 한때는 소수의 회중과 연합해 있는 100명 미만의 증인을 돌보던 지부 사무실들이 이제는 수만에 달하는 증인의 활동을 감독하고 있고 그중 다수의 지부는 복음 전파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공급하기 위한 출판물을 현지에서 인쇄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변화하는 필요에 부응하여, 길르앗 학교가 개설된 지 18년 후에 협회 세계 본부에서는 워치 타워 협회 지부 사무실에서 특별히 무거운 책임의 짐을 지고 있는 형제들을 위하여 10개월 훈련 과정을 마련하였다. 그들 중에는 앞서 길르앗에서 5개월 선교인 과정을 수료한 사람들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그들 모두가 자신들의 활동을 위한 전문 훈련을 받음으로 유익을 얻을 수 있었다. 성서 원칙과 일치하게 여러 가지 상황을 다루고 조직과 관련된 필요를 충족시키는 방법에 관하여 논의한 것은 연합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그러한 과정의 특징은 전체 성서를 한 구절 한 구절 분석하면서 연구하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는 또한 종교사 고찰, 지부 사무실·벧엘 집·인쇄 공장 운영 등과 관련된 세부 사항 훈련, 야외 봉사를 감독하고 새로운 회중을 조직하고 새로운 밭을 개척하는 일에 관한 교훈도 다루어졌다. 이러한 과정들(맨 나중 것은 여덟 달 과정으로 줄어들었음)은 1961년부터 1965년까지 뉴욕 브루클린에 있는 세계 본부에서 실시되었다. 다수의 졸업생은 원래 자기들이 봉사하던 나라로 되돌아갔다. 다른 나라의 활동에 가치 있는 기여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다른 나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1976년 2월 1일부로, 성서 예언과 일치하게 기대되는 한층 더 큰 확장에 대비하기 위하여 협회의 지부 사무실들에서는 새로운 마련이 시행되었다. (이사야 60:8, 22) 각 지부를 감독하는 일을, 더는 보조자를 둔 단 한 명의 지부 감독자가 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체는 각 지부 위원회에서 일하도록 세 명 이상의 자격 있는 형제들을 임명하였다. 더 큰 지부들은 그 위원회 성원을 일곱 명이나 둘 수 있었다. 이 모든 형제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뉴욕 브루클린에서는 다섯 주간의 길르앗 특별 과정을 마련하였다. 전세계 도처에서 온 지부 위원들로 이루어진 14개 학급이 1977년 말부터 1980년까지 세계 본부에서 그러한 전문 훈련을 받았다. 그것은 업무를 일원화하고 정비하기 위한 좋은 기회였다.

길르앗 학교는 전 시간 봉사에 다년간 경험이 있고 외국 임지에 기꺼이 가려고 하고 또 갈 수 있는 사람들을 계속 훈련시켰지만 사용될 수 있는 사람은 더 많았다. 훈련을 촉진하기 위해 다른 나라에도 길르앗 분교를 개설함으로써 학생들이 영어를 배워야만 입학 자격을 갖추게 되는 일이 없게 하였다. 1980-81년에 멕시코의 길르앗 문화 학교에서 훈련받은 스페인어권 학생들은 중앙 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에서 자격 있는 봉사자의 절실한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독일에서도 1981-82년과 1984년에 그리고 1992년에 길르앗 분교 학급이 실시되었다. 그 곳의 졸업생들은 남아메리카, 동유럽, 아프리카 및 여러 섬나라로 파견되었다. 1983년에는 인도에서도 또 다른 학급이 개설되었다.

열정적인 현지 증인들이 왕국 증거 확장에 선교인들과 동참함에 따라 여호와의 증인의 수는 급속히 늘어났으며 그로 인하여 더 많은 회중이 형성되게 되었다. 1980년과 1987년 사이에 전세계 회중 수는 27퍼센트 증가하여 총 5만 4911개에 이르렀다. 일부 지역에서는 집회에 참석하고 야외 봉사에 참여하는 사람은 많은데 대부분의 형제들의 연륜이 상당히 짧았다. 영적인 목자와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봉사하면서 복음 전파하는 일을 인도할 경험 있는 그리스도인 남자들이 절실히 필요하였다. 이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 도움이 되도록 1987년에 통치체는 길르앗 학교 성서 교육 프로그램의 한 부문인 봉사 훈련 학교를 개설하였다. 이 8주 과정에서는 성서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각 학생의 영적 발전에 개인적인 주의를 기울인다. 조직 및 사법상의 문제들과 더불어 장로 및 봉사의 종의 책임을 고려하고 공개 연설에 대한 특별 훈련을 받게 된다. 선교인을 훈련시키는 정규 학급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이 학교는 다른 시설을 사용하며 여러 나라에서 개최되어 왔다. 졸업생들은 현재 여러 나라의 절실한 필요를 충족시키고 있다.

이처럼 워치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에서 베푸는 확장된 훈련은 급속히 성장하는 국제적 조직의 변화하는 필요에 부응해 왔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선교인들이 나타내는 영은 예언자 이사야가 나타낸 영과 유사하다.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특별한 봉사를 할 기회를 일깨워 주셨을 때 그는 이렇게 응하였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사야 6:8) 이처럼 기꺼이 응하는 영에 감동된 수많은 젊은 남녀가 정든 환경과 친척을 떠나 그들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하나님의 뜻을 증진시키기 위해 봉사하였다.

많은 선교인이 가족 상황 때문에 생활상의 변화를 겪었다. 선교인이 된 다음에 자녀를 갖게 된 다수의 선교인은 임명된 나라에 머물면서 필요한 세속 일을 하고 회중과 함께 활동할 수 있다. 여러 해 동안 봉사한 다음 연로한 부모를 모시기 위해, 혹은 다른 이유로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던 선교인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할 수 있는 데까지 선교 봉사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을 특권으로 여겼다.

선교인 중에는 선교 봉사를 평생의 천직으로 삼아 온 사람도 있다. 그러기 위해서 그들은 예외 없이 도전적인 상황에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콜롬비아에서 오랫동안 선교 활동을 즐겨온 올러프 올슨은 “첫 해가 가장 힘들었다”고 시인하였다. 그것은 주로 새로운 언어로 자신을 충분히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떠나온 나라에 관해 계속 생각했더라면 행복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나는 몸과 정신이 모두 콜롬비아에서 살면서 진리 안에 있는 이 곳의 형제 자매들을 벗으로 삼고 내 생활을 봉사의 직무로 가득 채우기로 결심하였다. 그러자 곧 임지는 내 고향이 되었다.”

그들이 임지에서 꾸준히 일한 것은 물질적 환경이 꼭 마음에 들었기 때문은 아니다. 버마(지금의 미얀마)와 인도에서 1947년부터 1986년에 사망할 때까지 봉사한 노먼 바버는 자신이 느낀 바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여호와에 의해 사용되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이라면 여하한 곳도 좋은 곳이 되게 마련이다. ·⁠·⁠· 솔직히 말해서 열대의 기후는 내가 살기에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기후가 아니다. 열대 사람들의 생활 방식 또한 나 개인이 선택하고 싶은 그런 생활 방식이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소한 문제들보다 고려해야 할 더 중요한 것들이 있다. 참으로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베풀 수 있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특권이다.”

그러한 견해에 공감하는 사람은 그 외에도 많다. 그리고 그러한 자기 희생 정신은 끝이 오기 전에 이 왕국의 좋은 소식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사람이 거주하는 온 땅에 전파될 것이라는 예수의 예언이 성취되는 데 크게 기여해 왔다.—마태 24:14.

[각주]

^ 16항 「파수대」(영문) 1943년 2월 15일 호, 60-4면.

[523면 삽입]

여호와를 전적으로 의지하고 그분께 충성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이 강조됨

[534면 삽입]

재치 있는 유머 감각이 도움이 되었다!

[539면 삽입]

참을성과 인자한 도움, 필요할 경우에는 확고함을 나타냄

[546면 삽입]

‘참으로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베푼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특권이다’

[533면 네모]

길르앗 학급

1943-60: 학교 소재지는 뉴욕 주 사우스랜싱. 35개 학급에서, 95개 나라 출신의 학생 3639명이 졸업하였는데, 그들 중 대부분이 선교 봉사에 임명되었다. 그 학급들에는 미국에서 봉사하는 순회 및 지역 감독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1961-65: 학교 소재지는 뉴욕 브루클린. 5개 학급에서 학생 514명이 졸업하여 워치 타워 협회 지부 사무실이 있는 나라들로 파견되었다. 대부분의 졸업생에게 관리 업무가 맡겨졌다. 그중 네 학급은 10개월 과정이었고, 한 학급은 8개월 과정이었다.

1965-88: 학교 소재지는 뉴욕 브루클린. 각기 20주 과정의 45개 학급에서 2198명의 학생이 훈련을 받았는데, 그 대부분이 선교 봉사를 위한 훈련을 받았다.

1977-80: 학교 소재지는 뉴욕 브루클린. 지부 위원들을 위한 길르앗 5주 과정. 14개 학급이 개최되었다.

1980-81: 멕시코 길르앗 문화 학교; 10주 과정; 3개 학급;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72명의 졸업생이 라틴 아메리카에서 봉사할 준비를 갖추었다.

1981-82, 1984, 1992: 독일에서 열린 길르앗 분교; 10주 과정; 4개 학급; 독일어를 쓰는 98명의 학생이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왔다.

1983-84: 인도에서 열린 학급들; 영어로 실시된 10주 과정; 2개 그룹; 학생은 46명.

1987- : 8주 과정의 봉사 훈련 학교가 세계 여러 지역의 주요 장소에서 개최됨. 1992년에는 그 졸업생들이 35개가 넘는 타국에서 이미 봉사해 오고 있었다.

1988- : 학교 소재지는 뉴욕 주 월킬. 이 곳에서 현재 선교 봉사를 준비시켜 주는 20주 과정이 실시되고 있다. 이 학교는 뉴욕 패터슨에 워치타워 교육 센터가 완공되면 그 곳으로 이전할 계획이다.

[538면 네모]

국제적 무리의 학생들

길르앗 학교에 참석한 학생들은 수십 개 국적을 대표한 사람들로서 110여 개 나라 혹은 지역에서 학교에 왔다.

최초의 국제적 무리는 1945-46년의 제6기 학급이었다.

비(非)이민용 학생 사증 마련하에 외국 학생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허락해 줄 것을 미국 정부에 신청하였다. 그에 대하여 미국 교육국은 길르앗 학교를 전문 대학에 준하는 교육을 베푸는 교육 기관으로 인가해 주었다. 그래서 1953년 이래 전세계 미국 영사들이 가지고 있는 인가된 교육 기관 목록 가운데는 워치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가 올라 있다. 1954년 4월 30일 현재, “법무 장관의 인가를 받은 교육 기관”이라는 제목의 출판물에 이 학교가 들어 있다.

[522면 삽화]

길르앗 학교 제1기생들

[524면 삽화]

길르앗 학생들과 함께 성막의 특징을 토의하는 앨버트 슈로더

[525면 삽화]

길르앗 학교의 계단식 원형 강의장에서 강의하는 맥스웰 프렌드

[526면 삽화]

길르앗 졸업식은 영적으로 중요한 행사였다

·⁠·⁠· 대규모 대회에서 (뉴욕, 1950년)

·⁠·⁠· 학교 캠퍼스에서(사진은 1956년에 N.H. 노어가 학교 도서관 앞에서 연설하고 있는 모습)

[527면 삽화]

뉴욕 주 사우스랜싱의 길르앗 학교 캠퍼스의 1950년대 모습

[528면 삽화]

알래스카에서 봉사하는 허먼 우더드(왼쪽)와 존 에리케티(오른쪽)

[529면 삽화]

파푸아뉴기니에서 가르치는 일에 시각 보조물을 사용하는 존 컷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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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감독자와 함께한 아일랜드의 선교인들, 1950년

[530면 삽화]

동양에 있는 선교 임지로 가는 도중의 졸업생들, 1947년

[530면 삽화]

일본의 일부 선교인들과 동료 봉사자들, 1969년

[530면 삽화]

브라질의 선교인들, 1956년

·⁠·⁠· 우루과이, 1954년

·⁠·⁠· 이탈리아, 1950년

[530면 삽화]

길르앗 훈련을 받고 자메이카에 파견된 네 명의 최초의 선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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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즈베리(지금의 짐바브웨 하라레) 최초의 선교인 집, 1950년

[530면 삽화]

맬컴 바이고(길르앗, 1956-57년)와 그의 아내 린다 루이스. 그들은 함께 말라위, 케냐 및 나이지리아에서 봉사하였다

[530면 삽화]

로버트 트레이시(왼쪽)와 제시 캔트웰(오른쪽) 및 두 사람의 아내들—1960년에 콜롬비아에서 여행하는 봉사를 한 선교인들

[532면 삽화]

코트디부아르 선교인 집에서의 언어 수업 장면

[535면 삽화]

1947년에 미국령 버진아일랜드에서 성서 진리에 열심히 귀기울이는 사람을 많이 발견한 테드 클라인과 그의 아내 도리스

[536면 삽화]

하비 로건(앞줄 가운데), 1960년대에 왕국회관 앞에서 아미족 증인들과 함께 찍은 사진

[540면 삽화]

길르앗 훈련을 받은 지역 감독자 빅터 화이트가 1949년에 필리핀에서 연설하는 장면

[542면 삽화]

부르키나파소에서 가정 성서 연구를 사회하고 있는 마르가리타 쾨니거

[543면 삽화]

1958년 이래 선교 봉사를 해온 운 라운홀름은 에콰도르에서 사제가 선동한 폭도에 직면해야 하였다

[545면 삽화]

봉사 훈련 학교

1987년에 미국 펜실베이니아, 코라오폴리스에서 열린 첫 학급(위)

1991년에 맨체스터에서 열린 영국에서의 세 번째 학급(오른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