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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배교의 발전

대배교의 발전

제4장

대배교의 발전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니라.]” (에베소 4:5) 사도 바울이 영감을 받아 위와 같은 글을 썼을 때는(기원 60-61년경), 그리스도교 믿음이 하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대단히 많은 교파, 종파, 분파들이 상충되는 교리들을 가르치고 서로 다른 행동 규범을 따르면서도 한결같이 그리스도교라고 주장하는 것을 본다. 기원 33년 오순절에 시작된 하나의 연합된 그리스도인 회중과 너무나도 다르다! 이러한 분열은 어떻게 생겨났는가? 그 대답을 얻으려면, 우리는 통용 기원 1세기로 돌아가 보아야 한다.

처음부터, 대적 사단은 회중 밖으로부터 박해를 가함으로써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의 증언을 잠잠하게 만들려고 하였다. (베드로 전 5:8) 처음에는 유대인에게서, 그 다음에는 이방 로마 제국으로부터 박해가 왔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온갖 박해를 성공적으로 인내하였다. (비교 계시 1:9; 2:3, 19) 그러나 그 대적은 포기하지 않았다. 외부의 압력으로 그들을 잠잠하게 만들 수 없다면, 안에서 그들을 부패케 하려고 하지 않겠는가? 그리스도인 회중이 아직 초기 단계에 있을 때, 그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내부의 적—배교 *—이 있었다.

그러나 배교는 아무 예고도 없이 회중에 슬며시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 회중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추종자들이 미리 경고받을 수 있도록 하셨다.—골로새 1:18.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예수께서는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는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경고하셨다. (마태 7:15) 예수께서는 사단이 그분의 추종자들을 분열시키고 부패시키려 할 것임을 아셨다. 그래서 그분은 자신의 봉사의 직무 초기부터 거짓 선생들에 대해 경고하셨다.

이 거짓 선생들은 어디에서 나올 것인가? 사도 바울은 기원 56년경에 에베소(에페수스)의 감독자들에게 말할 때 “너희 중에서”라고 말하였다. 그렇다. 회중 내에서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나게’ 되어 있었다. (사도 20:29, 30) 그러한 자기 본위의 배교자들은 자기 제자들을 삼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제자들” 곧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끌어”내려고 노력할 것이었다.

사도 베드로도 (기원 64년경) 내부의 부패를 예언하였으며, 그러한 배교자들이 어떻게 활동할 것인지를 설명하기까지 하였다.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으[리라.]” (베드로 후 2:1, 3) 적진 가운데 있는 스파이나 반역자처럼, 거짓 선생들은 회중 내에서 일어나지만, 은밀하게 혹은 위장을 하여 부패케 하는 견해를 침투시킬 것이었다.

예수와 사도들의 그러한 경고는 빈말이 아니었다. 그리스도인 회중에서 내부의 반대는 작게 시작되었지만, 일찍부터 표면화되었다.

‘이미 활동함’

예수께서 죽으신 지 20년이 채 못 되어, 사도 바울은 분열을 일으키고 사람들을 참 믿음에서 돌아서게 하려는 사단의 노력이 “이미 활동”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데살로니가 후 2:7) 일찍이 기원 49년경에, 통치체는 회중들에 보내는 편지에서 “[우리가]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고 지적하였다. (사도 15:24) 이와 같이 회중 내의 일부 사람들은 자기 나름의 반대 의견을 주장하였다. 이 경우는 분명히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킬 필요가 있는가 하는 쟁점에 관한 것이었다.—사도 15:1, 5.

제1세기가 진행되면서, 분열을 일으키는 생각이 독한 창질처럼 번졌다. (비교 디모데 후 2:17) 기원 51년경에는 이미, 데살로니가(테살로니카)의 일부 사람들은 주 예수의 “임재”가 임박했다는 그릇된 예언을 하고 있었다. (데살로니가 후 2:1, 2, 「신세」) 기원 55년경에는 이미, 고린도(코린트)의 일부 사람들은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그리스도교의 분명한 가르침을 배척하였다. (고린도 전 15:12) 기원 65년경에, 또 어떤 사람들은 부활이란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하는 상징적인 것으로서 이미 지나갔다고 말하였다.—디모데 후 2:16-18.

그 후 30년 동안 그리스도인 회중 내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관한 영감받은 기록은 없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편지를 쓸 무렵(기원 98년경)에는, “많은 적그리스도”—“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과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한 사람들—가 있었다.—요한 1서 2:18, 22; 4:2, 3.

60여 년 동안, 사도들은 “막는 자”가 되어, 배교의 물결을 억제하려고 노력하였다. (데살로니가 후 2:7; 비교 요한 2서 9, 10) 그러나 그리스도인 회중이 2세기를 맞이할 무렵, 살아 있던 마지막 사도인 요한이 기원 100년경에 사망하였다. 회중에 슬며시 들어오던 배교가 이제는 막힘 없이 마구 들어와 조직적으로나 교리적으로 황폐시키는 영향을 미칠 태세가 된 것이다.

교직자와 평신도

“너희는 다 형제니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마태 23:8, 10) 그러므로 제1세기 그리스도인 회중 내에는 교직자 계급이 없었다. 영으로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의 형제들인 초기 그리스도인 모두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의 제사장이 될 전망을 가지고 있었다. (베드로 전 1:3, 4; 2:5, 9) 조직적인 면에서, 각 회중은 감독자 곧 영적 장로의 회의 감독을 받았다. * 모든 장로는 동등한 권위를 가졌으며, 그중 어느 한 사람도 그들이 돌보는 양 떼를 ‘지배할’ 권위가 없었다. (사도 20:17; 빌립보 1:1; I 베드로 5:2, 3, 「새번역」) 그러나 배교가 모습을 드러내면서, 상황이—급격하게—바뀌기 시작하였다.

초기의 탈선 행위 중에는 “감독자”(희랍어, 에피스코포스)라는 용어와 “연로자” 곧 “장로”(희랍어, 프레스비테로스)라는 용어를 구분하는 일이 있었다. 그래서 그 용어들은 더 이상 같은 직위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지 않았다. 사도 요한이 죽은 지 단지 10년쯤 후에, 안디옥(안티오크)의 “주교” 이그나티우스는 서머나(스미르나)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따르시는 것처럼, 여러분은 모두 주교[감독자]를 따르도록 하시오. 그리고 장로들[연로자의 회]을 마치 사도들처럼 따르시오.” 그러므로 이그나티우스는 각 회중이 한 명의 주교 * 곧 감독자에 의해 감독을 받아야 하며, 감독자는 장로 곧 연로자와 구별되고 그들보다 더 큰 권위를 가진 것으로 인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구분이 있게 되었는가? 아우구스트 네안더는 저서 「초기 삼세기간의 그리스도교 및 교회사」(The History of the Christian Religion and Church, During the Three First Centuries)에서 그 과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2세기에 ·⁠·⁠· 장로들의 대표라는 두드러진 직위가 생겼음이 틀림없다. 그는 특별히 모든 일을 감독하였으므로, 그에게 [에피스코포스]라는 이름이 주어졌으며, 그로 인해 나머지 장로들과 구별되었다.”

그리하여 교직자 계급이 점차적으로 출현하기 위한 기초가 놓였다. 약 1세기 후에,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주교” 키프리아누스는 주교의—장로(후에는 사제로 알려짐 *), 부제, 평신도와 구별되는 하나의 그룹의—권위를 강력하게 옹호하였다. 그러나 그는 한 주교가 다른 주교들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은 지지하지 않았다. *

주교들과 장로들은 교계 제도의 사닥다리를 올라가면서, 회중의 나머지 신자들을 아래쪽에 남겨 두었다. 그로 인해 교직자(지도하는 사람)와 평신도(수동적인 신자의 집합체)의 구분이 생겼다. 매클린톡과 스트롱 공편 「백과 사전」은 이렇게 설명한다. “교계 제도의 아버지 키프리아누스[기원 258년경에 사망] 시대부터, 교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이 뚜렷해졌으며, 곧바로 널리 받아들여졌다. 실제로, 3세기부터 클레루스라는 용어는 ·⁠·⁠· 교직자와 평신도를 구별하기 위해 교직자에게만 거의 전적으로 적용되었다. 로마의 교계 제도가 발전하면서, 교직자는 단지 구별된 신품(神品)이 되었을 뿐 아니라 ·⁠·⁠· 유일한 사제단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마지막 사도가 죽은 지 대략 150년 안에, 두 가지 중요한 조직상의 변화가 회중 안으로 유입되었다. 첫째는, 주교와 장로를 구분한 것이었는데, 그로 인해 교계 제도 사닥다리에서 꼭대기 계층을 차지하는 주교가 있게 되었다. 둘째는, 교직자와 평신도를 구분한 것이었다. 영으로 출생한 신자 모두가 “왕같은 제사장들[“사제들”, 「공동번역」]”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교직자가 “유일한 사제단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베드로 전 2:9.

그러한 변화는 사도 시대에 회중을 다스리던 성경적 방법에서 탈선한 것이었다. 그러나 배교의 결과는 조직상의 변화뿐이 아니었다.

이교 가르침의 침투

그리스도의 순수한 가르침은 기록에 나타나 있다. 즉 성경에 보존되어 있다. 예를 들면, 예수께서는 여호와께서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며 인간 영혼은 멸성이라고 분명히 가르치셨다. (요한 17:3; 마태 10:28) 그러나 사도들이 죽고 조직 구조가 약화되는 것과 더불어, 이교 교리가 그리스도교에 침투하면서 그러한 명백한 가르침이 부패되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는가?

한 가지 주된 요인은 그리스 철학의 교묘한 영향이었다. 「신 브리태니카 백과 사전」은 이렇게 설명한다. “주후 2세기 중반부터 어느 정도 희랍(그리스) 철학 훈련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지적 만족을 위해 그리고 학식 있는 이교도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자신들의 믿음을 철학 용어로 표현할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일단 철학적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자, 오래지 않아 그리스 철학과 “그리스도교”가 불가분의 관계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결합의 결과로, 삼위일체와 영혼불멸 같은 이교 교리들이 오염된 그리스도교로 스며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은 그리스 철학보다 훨씬 이전에 시작된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실제로 더 오래 된 문화로부터 그런 가르침을 받아들인 것이다. 고대 이집트와 바빌로니아 종교에 그러한 가르침의 흔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교 교리가 그리스도교에 계속 침투하면서, 다른 성경적 가르침들 역시 왜곡되거나 버려졌다.

왕국 희망이 시들다

예수의 제자들은 약속된 예수의 “임재”와 왕국의 도래를 계속 주의 깊이 살펴야 함을 잘 알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왕국이 천년 동안 땅을 다스릴 것이며 땅을 낙원으로 변모시킬 것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마태 24:3, 「신세」; 디모데 후 4:18; 계시 20:4, 6) 그리스도인 성서 필자들은 1세기 증인들에게 영적으로 계속 깨어 있고 세상과 분리되어 있으라고 권하였다. (야고보 1:27; 4:4; 5:7, 8; 베드로 전 4:7) 그러나 일단 사도들이 죽자, 그리스도의 임재와 그분의 왕국의 도래를 바라는 그리스도인들의 기대가 시들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한 가지 요인은 그리스의 영혼불멸 교리에 의해 초래된 영적 오염이었다. 그 교리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자리잡으면서, 천년기에 대한 희망은 점차 버림받았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신약 신학 신 국제 사전」(The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New Testament Theology)은 이렇게 설명한다. “영혼불멸 교리가 들어와, 죽은 자의 부활과 새 창조에 관한 희망을 포함하는 (계시 21 f.) 신약의 종말론[“최후의 사건들”에 대한 가르침]을 대신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영혼이 사후에 심판을 받고 현재는 다른 세계처럼 생각되고 있는 낙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배교한 그리스도인들은, 몸은 죽어도 영혼은 살아 남으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의 축복은 틀림없이 영계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낙원을 땅에서 하늘로 옮겼다. 그들은 구원받은 영혼이 죽을 때 하늘에 이른다고 믿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임재와 왕국의 도래를 주의 깊이 살필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모두 죽을 때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

그러나 또 다른 요인은 사실상 그리스도의 왕국의 도래를 주의 깊이 살피는 것이 무의미한 일로 보이게 만들었다. 「신 브리태니카 백과 사전」은 이렇게 설명한다. “파루시아가 늦추어지는 것 [같아 보임]으로 말미암아 초기 교회의 절실한 기대가 약해지게 되었다. 이러한 ‘탈(脱)종말론’[“최후의 사건들”에 관한 가르침의 약화] 과정중에, 제도화된 교회가 기대의 대상인 하나님의 왕국을 점차 대치하였다. 교직 계급 제도로서 가톨릭 교회가 형성된 것은 절실한 기대의 쇠퇴와 직결되어 있다.” (사체로는 본서에서) 그러므로 천년기 축복이 땅에서 하늘로 옮겨졌을 뿐만 아니라 왕국이 하늘에서 땅으로 옮겨진 것이다. 이러한 “재(再)배치”는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기원 354-430년)에 의해 완성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유명한 저서 「신국론」(The City of God)에서 이렇게 기술하였다. “현재도 교회는 그리스도의 왕국이며 하늘 왕국이다.”

한편 기원 313년경,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통치중에 그리스도교가 법적 승인을 받았다. 그 무렵에는 그리스도교의 상당 부분이 이미 사고 방식 면에서 배교해 있었다. 종교 지도자들은 기꺼이 국가의 공직을 맡으려고 하였으며, 처음에는 국가가 종교의 일을 통제하였다. (오래지 않아 종교가 국가의 일을 통제하게 된다.) 이와 같이 하여 그리스도교국이 시작되었다. * 그 일부(가톨릭교)는 시간이 지나자 로마의 공식 국교가 되었다. 이제 “왕국”은 세상 가운데 있을 뿐만 아니라 세상의 일부가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전파하신 왕국과 얼마나 다른가!—요한 18:36.

종교 개혁—참 숭배로 돌아가는 전환점이었는가?

억눌린 밀 가운데서 무성하게 자라는 가라지처럼, 로마 교회는 교황의 다스림 아래 여러 세기 동안 세상사를 지배하였다. (마태 13:24-30, 37-43) 교회는 점점 더 세상의 일부가 되면서, 1세기 그리스도교에서 점점 더 멀어졌다. 여러 세기에 걸쳐 “이단” 분파들이 교회 내의 개혁을 요구했지만, 교회는 계속해서 권력을 남용하고 부를 축적하였다. 그러다가 16세기에,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 곧 종교적 반란이 맹렬한 기세로 일어났다.

마르틴 루터(1483-1546년), 울리히 츠빙글리(1484-1531년), 장 칼뱅(존 칼빈)(1509-64년) 같은 종교 개혁가들이 여러 문제와 관련하여 교회를 공격하였다. 루터는 면죄부 판매와 관련하여, 츠빙글리는 교직자 독신제와 마리아 숭배와 관련하여, 그리고 칼뱅은 교회가 원래의 그리스도교 원리로 돌아가야 할 필요성과 관련하여 교회를 공격하였다. 그러한 노력은 무엇을 이루었는가?

확실히, 종교 개혁은 어느 정도 좋은 일을 이루었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성서를 보통 사람들의 언어로 번역한 것이다. 종교 개혁의 자유 정신은 보다 객관적인 성서 연구와 성서 언어에 대한 이해의 증가를 가져왔다. 그러나 종교 개혁은 참 숭배와 교리로 돌아가는 전환점이 되지는 못하였다. * 그 이유는 무엇인가?

배교의 영향력은 그리스도교국의 기초까지 깊이 침투해 있었다. 그래서 여러 프로테스탄트 그룹들은 로마 교황의 권위로부터 벗어나기는 했지만, 로마 가톨릭 교회의 몇몇 기본적 오류들, 즉 참 그리스도교를 버린 결과로 생긴 특징들을 그대로 지녔다. 예를 들어,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운영 방식은 약간 달랐지만, 지배하는 교직자 계급과 지배를 받는 평신도로 나눈 교회의 기본적 구분은 계속되었다. 또한 삼위일체, 영혼불멸, 사후의 영원한 고초 같은 비성경적 교리들도 계속되었다. 그리고 로마 교회처럼,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은 계속해서 세상의 일부로서 정치 제도 및 수뇌부 통치 계급과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기대—예수의 임재와 그분의 왕국의 도래를 주의 깊이 살피는 일은 어떻게 되었는가? 종교 개혁 후 여러 세기 동안, 교회들은—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모두—세속 권력에 깊숙이 개입하였으며, 그리스도의 왕국의 도래에 관한 기대는 몰아내려고 하였다.

주의 깊이 살피도록 자극한 일들

그러나 19세기에, 종교적 분위기로 인해 그리스도인이 주의 깊이 살피도록 자극하는 일들이 있게 되었다. 교직자들과 성서 학자들의 성서 연구 결과로, 영혼불멸, 사후의 영원한 고초, 예정론, 삼위일체 같은 가르침이 재검토되었다. 그에 더하여, 일부 성서 연구생들은 마지막 날에 관한 성서 예언들을 면밀히 검토하였다. 그 결과로, 여러 그룹의 사람들이 주의 약속된 재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하였다.—마태 24:3.

미국에서, 윌리엄 밀러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보이는 형태로 1843년 혹은 1844년에 있을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독일의 신학자 J. A. 벵겔은 1836년이 그 연대라고 하였다. 영국의 어빙파는 처음에는 1835년, 다음에는 1838년, 1864년, 그리고 1866년을 기대하였다. 러시아의 메노파는 처음에는 1889년, 다음에는 1891년을 기대하였다.

계속 주의 깊이 살피는 그러한 노력은 많은 사람들이 주의 재림에 관한 전망과 관련하여 깨어 있도록 도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주의 깊이 살피면서 기울인 그러한 노력은 실망으로 끝났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그들은 사람을 너무 많이 의지한 반면 성경을 그다지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과 수십 년 후에, 그 그룹들은 대부분 사라지고 말았다.

한편, 이 시기에 다른 사태 발전이 인간의 희망과 기대에 영향을 주었다.

“개화”와 산업화 시대

1848년에,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The Communist Manifesto)을 발표하였다. 그들은 종교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무신론을 옹호하였으며, 마르크스는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표면상으로는 모든 종교를 반대했지만, 실제로는 국가와 그 지도자를 따르는 종교 혹은 숭배를 조장하였다.

약 10년 후인 1859년에,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Origin of Species)이 발표되었다. 그 책은 그 시대의 과학 및 종교의 사고 방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진화론은 창조에 관한 그리고 첫 인간 부부의 불순종으로 인해 죄가 들어온 일에 관한 성서 기록의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창세 1-3장) 그 결과로, 성서에 대한 많은 사람의 믿음이 침식되었다.

한편, 산업 혁명이 시작되어 힘차게 추진되고 있었다. 중시되는 것이 농업에서 공업과 기계 생산으로 바뀌었다. 증기 기관차의 개발로 (19세기 초) 미국 전역에 철도망이 확대되고 있었다. 19세기 후반에는 전화(1876년), 축음기(1877년), 전등(1878-79년)이 발명되었고, 행 단위로 활자를 주조하는 라이노타이프(1884년)가 사용되게 되었다.

인류는 신속한 수송과 통신이 역사상 가장 크게 발전한 시대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러한 유익은 상업과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도 사용되었지만, 종교 분야에서도 사용될 수 있었다. 바로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세계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소규모 성경 연구생 그룹이 미미하게나마 활동을 개시하게 되었다.

[각주]

^ 4항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경에서, 명사 “배교”(희랍어, 아포스타시아)에는 “버림, 떠남 혹은 반역”이라는 의미가 있다. (사도 21:21, 「참조주 신세」 각주) 그 곳에서 그 단어는 일차적으로 종교적 변절, 즉 참 숭배에서 떠나는 일이나 참 숭배를 버리는 일과 관련되어 있다.

^ 17항 성경에서 “감독자” 그리고 “연로자” 혹은 “장로”라는 용어는 다 같은 지위를 가리킨다. (사도 20:17, 28; 디도 1:5, 7) “연로자”는 그러한 임명을 받은 사람의 장성된 특성을 그리고 “감독자”는 그 임명에 따르는 책임—그가 돌보도록 위탁받은 사람들의 권익을 보살피는 일—을 가리키는 말이다.

^ 18항 “주교”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 비숍(bishop)은 희랍어 단어 에피스코포스(“감독자”)에서 유래하였는데, 그 과정을 거슬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중기 영어로는 비스숍(bisshop), 고대 영어로는 비스케옵(bisceop), 통속 라틴어로는 비스코푸스(biscopus) 즉 후기 라틴어 에피스코푸스(episcopus)의 변형, 희랍어로는 에피스코포스(e·piʹsko·pos).

^ 20항 “사제”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 프리스트(priest)는 프레스비테로스(“연로자” 혹은 “장로”)에서 유래하였는데, 그 과정을 거슬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중기 영어로는 프레()스트(pre(e)st), 고대 영어로는 프레오스트(prēost), 통속 라틴어로는 프레스테르(prester) 즉 후기 라틴어 프레스비테르(presbyter)의 축약형, 희랍어로는 프레스비테로스(pre·sbyʹte·ros).

^ 20항 세월이 흐르면서 로마 주교는 베드로의 계승자라고 주장하며 최고의 주교이자 교황으로 여겨지게 되었다.—사단법인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에서 1990년에 발행한 「하나님을 찾으려는 인류의 노력」 270-2면 참조.

^ 22항 흥미롭게도, 네안더 박사는 이렇게 기술한다. “구약 시대에 보이는 제사직이 특별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국한되었듯이, 신약 시대에도 그러해야 한다는 그릇된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 그리스도교 제사직과 유대인 제사직을 그릇되게 비교하는 것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감독직이 장로직 위에 오르게 한 계기가 되었다.”—「초기 삼세기간의 그리스도교 및 교회사」, 헨리 존 로즈 역, 제2판, 뉴욕, 1848년, 111면.

^ 31항 이러한 견해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죽을 때 하늘로 간다는 잘못된 생각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러나 성서는 단지 14만 4000명만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도록 부르심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계시 7:4-8; 20:4-6) 그 외의 수없이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왕국 아래 지상 낙원에서 누릴 영원한 생명의 희망을 가질 수 있다.—마태 6:10; 계시 7:9, 15.

^ 33항 이 출판물에서 사용하는 “그리스도교국”이라는 용어는 성서의 참 그리스도교와 상충하는 명목상의 그리스도교를 가리킨다.

^ 37항 종교 개혁과 그것이 이룩한 일에 관한 더 자세한 설명은 「하나님을 찾으려는 인류의 노력」 책 13장 “종교 개혁—하나님을 찾으려는 노력의 새로운 전기” 참조.

[33면 삽입]

그리스도인 회중은 아직 초기 단계에 있을 때, 배교로 인해 위협을 받았다

[34면 삽입]

내부의 반대는 작게 시작되었다

[37면 삽입]

배교자들은 천년기 축복을 땅에서 하늘로 옮겼을 뿐만 아니라 왕국을 하늘에서 땅으로 옮겼다

[36면 네모와 삽화]

플라톤과 “그리스도교”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기원전 428년경에 출생)은 자기의 가르침이 결국 배교한 그리스도교로 흘러 들어갈 것임을 알 리가 없었다. 플라톤이 “그리스도교”에 기여한 것은 주로 삼위일체 및 영혼불멸 가르침과 관련되어 있었다.

하나님과 자연에 관한 플라톤의 사상은 그리스도교국의 삼위일체 교리에 영향을 미쳤다. 「신 백과 사전」(Nouveau Dictionnaire Universel)은 이렇게 설명한다. “플라톤의 삼위일체는, 그 자체가 좀더 고대 사람들의 시대에 속하는 더 오래 된 삼위일체 사상들을 재정립한 것에 불과한 것이며, 합리적인 철학적 삼위일체로서 바로 그것의 특질들이 기초가 되어 그리스도교 교회들이 가르치는 삼위격 즉 신성한 세 위가 생겨난 것 같다. ·⁠·⁠· 신성한 삼위일체에 대한 이 희랍 철학자의 개념을 ·⁠·⁠· 고대의 모든 [이교] 종교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2권, 1467면.

영혼불멸 교리에 관해 「신 가톨릭 백과 사전」(New Catholic Encyclopedia)은 이렇게 알려 준다. “영혼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고 수태시에 몸에 주입되어 사람이 살아 있는 완전한 개체가 된다는 그리스도교의 개념은 장기간 발전된 그리스도교 철학의 열매이다. 오직 동양에서는 오리게네스[기원 254년에 사망], 또한 서양에서는 성 아우구스티누스[기원 430년에 사망]로 인하여, 영혼은 영적인 실체로서 또한 그 본질에 관해 체계화된 철학적 개념으로 확립되었다. ·⁠·⁠· [아우구스티누스의] 교리는 신플라톤파의 철학에서 (얼마의 결점을 포함하여) 많은 영향을 받았다.”—13권, 452, 45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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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타고의 “주교” 키프리아누스는 주교를 장로, 부제, 평신도와 구별되는 하나의 계급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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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도 교회는 그리스도의 왕국이며 하늘 왕국이다”(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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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 쟁점으로 교회를 공격한 종교 개혁가들

마르틴 루터

장 칼뱅

울리히 츠빙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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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은 실제로는 국가 숭배를 조장했다.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은 그 시대의 과학 및 종교의 사고 방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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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기 기관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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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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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전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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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의 라이노타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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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음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