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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소식을 중단 없이 선포함 (1942-1975)

좋은 소식을 중단 없이 선포함 (1942-1975)

제8장

좋은 소식을 중단 없이 선포함 (1942-1975)

“모든 신권 통치 애호자들에게:

1942년 1월 8일에,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 J. F. 러더퍼드는 지상 행로를 충실하게 마쳤습니다. ·⁠·⁠· 주의 증인 모두가, 사람이 아니라 왕 그리스도 예수를 지도자로 삼아 따르고 있고, 완전히 연합된 행동으로 일을 계속 진척시킬 것임을 보고 아는 것은 그에게 기쁨과 위로가 되었습니다.”—러더퍼드 형제의 사망을 알리는 편지. *

러더퍼드 형제의 사망에 관한 소식은 전세계 여호와의 증인에게 잠시 충격을 주었다. 많은 사람은 그가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빨리 사망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사랑하는 형제를 사별하여 슬펐지만—하나님의 왕국을 선포하는—“일을 계속 진척”시키기로 결심하였다. 그들은 J. F. 러더퍼드를 지도자로 생각하지 않았다. 러더퍼드 형제의 사무실에서 일하였던 찰스 E. 왜그너는 이렇게 말하였다. “모든 곳에서 형제들은 여호와의 일은 사람이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는 강한 확신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러더퍼드 형제가 워치 타워 협회장으로서 수행하였던 책임을 짊어질 사람이 필요하였다.

‘주와 친밀함을 유지하기로 결심함’

러더퍼드 형제의 간절한 소원은 여호와의 증인이 좋은 소식을 중단 없이 선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사망하기 여러 주 전인 1941년 12월 중순에, 여호와의 증인이 사용하는 두 가지 주요 법인체의 네 이사를 불러모은 다음 가능한 한 자신이 사망하자마자 두 이사회 전원을 합동 회의에 소집하여 회장과 부회장을 선출할 것을 제안하였다.

러더퍼드가 사망한 지 단지 닷새 후인 1942년 1월 13일 오후에, 두 법인체의 이사회 전원이 브루클린 벧엘에 함께 모였다. 36세 된 부협회장 네이선 H. 노어는 그들이 기도와 묵상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진지하게 구할 것을 며칠 전에 제안한 바 있다. 이사회 성원들은 회장으로 선출되는 형제가 워치 타워 협회의 법적 업무를 담당하면서 조직의 주요 감독자로도 일할 것임을 인식하였다. 여호와의 일을 돌볼 그 막중한 책임을 맡는 데 필요한 영적 자격을 갖춘 사람은 누구였는가? 그 합동 회의는 기도로 시작되었으며, 주의 깊은 고려 끝에 노어 형제가 두 법인체의 회장으로 그리고 30세 된 협회 법률가인 헤이든 C. 커빙턴이 부회장으로 만장 일치로 선출되었다. *

그날 나중에, 협회 총무 겸 재무 이사인 W. E. 밴 앰버그가 벧엘 가족에게 선출 결과를 알렸다. 그 때 참석하였던 R. E. 에이브러햄슨은 밴 앰버그가 이런 말을 하였다고 회상하였다. ‘저는 C. T. 러셀이 사망하고 J. F. 러더퍼드가 그의 후임이 된 때를 기억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는 자신의 일을 계속 인도하시고 번영케 하셨습니다. 이제 그 일이 협회장 네이선 H. 노어를 통해 계속 진척될 것임을 온전히 기대하는 바입니다. 이 일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주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브루클린의 벧엘 가족 성원들은 선출 결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였는가? 그들이 선거 다음날인 1942년 1월 14일자로 쓴 감동적인 편지는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는 그[러더퍼드]가 교체되었다고 해서 주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을 수행하는 속도를 늦추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와 그리고 서로 친밀함을 유지하면서 성문에서 적을 물리치기까지 어깨를 나란히 하여 중단 없이 싸우기로 결심하고 있습니다. ·⁠·⁠· 거의 20년 동안 노어 형제와 긴밀하게 지내 온 ·⁠·⁠· 우리는 주께서 노어 형제가 회장으로 선택되도록 인도하시고 그런 일을 통해 백성을 인자하게 보살피고 돌보셨음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지지하는 편지와 국제 전보가 곧 세계 도처에서 본부로 쇄도하였다.

해야 할 일이 불확실하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J. F. 러더퍼드의 사망을 광고하게 될 「파수대」(영문) 1942년 2월 1일 호에 실을 특별 기사가 준비되었다. 그 기사는 이렇게 언명하였다. “주께서 마지막으로 모으시는 일이 진행되고 있다. 그분께 대한 봉사에서 그분의 계약 백성이 매진하는 것을 어느 것도 한순간이나마 방해하지 못하게 하자. ·⁠·⁠· 이제 전능하신 하나님께 대한 충절을 고수하는 것이야말로 지극히 중요한 일이다.” 여호와의 증인은 좋은 소식을 열심히 계속 선포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그러나 ‘충절을 고수하는 것’은 1940년대 초에 참으로 도전이 되었다. 세계는 여전히 전쟁의 와중에 있었다. 세계 여러 곳에서 전시의 제한들이 여호와의 증인의 전파 활동을 어렵게 만들었다. 증인에 대한 체포와 집단 폭행이 수그러들지 않았다. 협회의 법률 고문인 헤이든 커빙턴은 법적 투쟁을 인도하였다. 때로는 브루클린 본부의 자기 사무실에서, 그리고 때로는 법적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열차로 여행하면서 그렇게 하였다. 빅터 슈미트, 그로버 파웰, 빅터 블랙웰 등의 지방 변호사들과 더불어, 커빙턴 형제는 여호와의 증인이 지방 관리들로부터 제지받지 않고 집집으로 전파하며 성서 출판물을 배부할 수 있는 헌법상의 권리를 확립하기 위해 분투 노력하였다. *

“전진” 신호를 발함

식량과 휘발유의 전시 배급에도 불구하고 1942년 3월 초에, 신세계 신권 대회를 9월 18-20일에 열기로 계획하였다는 광고가 있었다. 형제들이 쉽게 여행할 수 있도록 미국 전역의 52개 대회 도시를 선정하였는데, 그중 다수는 주(主) 도시인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와 전화선으로 연결되었다. 그 외에도 여호와의 증인은 세계 곳곳의 33개 도시에서 거의 동시에 모였다. 이 대회의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우리는 과거나 개인들이 행한 일에 관해 묵상하기 위해 여기 모인 것이 아닙니다’라고 사회자 커빙턴 형제는 개회사 서론에서 말하였다. 뒤이어 그는 이사야 59장과 60장에 근거한 “유일한 빛”이라는 기조 연설을 소개하였다. 프랜즈 형제가 그 연설을 하였다. 이사야가 기록한 여호와의 예언적 명령을 언급하면서, 연사는 정신을 차리게 하는 이런 선언을 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지존하신 권세자께서는 아마겟돈이 오기 전에 무슨 일이 있든 증거 [활동]을 계속하라는 ‘전진’ 신호를 발하고 계십니다.” (이사야 6:1-12) 그 때는 손을 놓고 긴장을 풀 때가 아니었다.

“아직도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많은 일이 있습니다!”라고 그 프로그램의 다음 연설에서 N. H. 노어는 선언하였다. “전진” 신호에 호응하도록 청중을 돕기 위한 것으로서, 노어 형제는 협회의 자체 인쇄기로 인쇄하였고 여호와의 증인이 야외 봉사에서 사용하도록 특별히 고안된 컨코던스를 포함한 성서 제임스 왕역판을 발표하였다. 그 발표는 성서를 인쇄하고 배부하는 일에 대한 노어 형제의 예리한 관심을 반영하였다. 사실상 노어 형제는 그 해 초에 협회장이 된 후 그 번역판의 발행권을 확보하고 컨코던스와 그 외 특징들의 준비 작업을 감독하기 위해 신속히 움직였다. 몇 달 만에 이 King James Version(「제임스 왕역」) 특별판은 대회에서 발표하도록 준비되었다.

그 대회의 마지막 날에, 노어 형제는 “평화—그것은 지속될 수 있는가?”라는 강연을 하였다. 그는 그 강연에서 계시록 17:8을 사용하여 당시에 치열하던 2차 세계 대전이 일부 사람들의 생각처럼 아마겟돈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전쟁이 끝날 것이며 평화의 기간이 시작될 것이라는 강력한 증거를 제시하였다. 하나님의 왕국을 선포하는 면에서 할 일이 여전히 있었다. 대회 참석자들은 협회가 예상되는 조직의 확장을 돌보는 일을 돕기 위해 회중과 함께 일할 “형제들의 종”을 다음 달부터 보낼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각 회중이 6개월마다 방문을 받게 되었다.

텍사스 주 댈러스에 부모와 함께 참석한 머리 기버드는 “그 신세계 신권 대회는 앞일을 위해 여호와의 조직을 굳게 결속시켰다”고 말한다. 그리고 할 일이 많았다. 여호와의 증인은 다가오는 평화의 기간을 내다보았다. 그들은 반대와 박해 속에서도 꾸준히 나아가면서 좋은 소식을 중단 없이 선포하기로 결심하였다!

교육이 증대된 시대

그들은 호별 방문 전파 활동에서 증거 카드와 축음기를 사용하고 있었지만 여호와의 증인 각자가 성경을 사용하여 자신의 희망의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인가? 3대 협회장 N. H. 노어는 향상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C. 제임스 우드워스—그의 아버지는 여러 해 동안 The Golden Age(「황금 시대」)와 「위안」의 편집인이었음—는 이렇게 말하였다. “러더퍼드 형제의 시대에는 ‘종교는 올무이며 속임수’라는 점이 강조되었지만, 이제 세계적 확장의 시대가 열리고 있었으며 여호와의 백성이 이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규모로—성서 및 조직상의—교육이 시작되었다.”

교육의 시대가 거의 즉시 전개되었다. N. H. 노어가 협회장으로 선출된 지 약 한 달 후인 1942년 2월 9일에, 원대한 계획이 브루클린 벧엘에서 광고되었다. 신권 전도 상급 과정—성서 연구와 공개 연설을 특징으로 하는 학교—이 벧엘에 마련되었다.

이듬해까지는 여호와의 증인의 지방 회중에서도 비슷한 학교가 운영되기 위한 기초가 놓였다. 1943년 4월 17일과 18일에 미국 전역에서 열린 “행동하도록 부름” 대회에서, Course in Theocratic Ministry(「신권 전도 과정」) 소책자가 발표되었다. 각 회중은 새로운 학교를 시작하도록 권고받았으며, 협회는 사회자로 일하면서 남자 등록자들이 행하는 학생 연설에 대해 건설적인 충고를 베풀 강사를 임명하였다. 최대한 빠른 속도로, 그 과정의 내용이 번역되어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실시되었다.

그 결과, 이 전도 학교에서 훈련받은 자격 있는 연사들이 왕국 소식을 선포하는 세계적인 공개 연설 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은 자신이 받은 훈련을 나중에 대회 연사로서 그리고 조직의 중책을 돌보는 일에 활용할 수 있었다.

그들 중에는 약 40년 동안 여행하는 감독자로 일한 앤절로 C. 머네라 2세가 있었다. 그는 자기 회중에서 학교에 처음으로 등록한 사람들 가운데 속하는데, 이렇게 말하였다. “이 마련 없이 여러 해 동안 집회에 참석하고 야외 봉사에 나가던 사람들은 이 마련을 개인과 조직의 발전에 있어서 대단한 진전으로 보게 되었다.”

1942년에 브루클린 벧엘에서 시작된 학교 훈련에 관하여, 당시에 희랍어 번역자였던 조지 갱거스는 후에 이렇게 지적하였다. “처음으로 6분간의 연설을 했을 때를 기억한다. 자신이 없어서 내용을 적었다. 그런데 연설하러 일어섰을 때, 청중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머지 생각해 둔 내용을 잊어버려 더듬거리며 중얼중얼 말했다. 뒤이어 원고를 읽어 나갔다. 그러나 손이 어찌나 떨리던지 줄이 오르락내리락하였다!” 하지만 그는 단념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큰 대회의 청중 앞에서 연설하게 되었고 더 나아가 여호와의 증인의 통치체 성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믿음 위에 세워진 학교

1942년 9월 24일에, 교육이 증대된 시대에 한층 더 큰 진전이 있었다. 두 법인체 이사회의 합동 회의에서, 노어 형제는 협회가 뉴욕 시에서 북서쪽으로 410킬로미터 떨어진 뉴욕 주 사우스랜싱의 왕국 농장에 지은 건물을 사용하여 또 하나의 학교를 세울 것을 제안하였다. 이 학교의 목적은 왕국 선포자들을 크게 필요로 하는 외국에서 봉사할 선교인들을 훈련하는 것이었다. 그 제안은 만장 일치로 승인되었다.

당시에 31세였던 앨버트 D. 슈로더는 교무 주임으로 임명되었으며 새로운 학교를 조직하는 위원회의 사회자로 일하였다. “이 놀라운 새 임명을 받고 우리는 뛸 듯이 기뻤다!”고 그는 말한다. 강사들은 즉시 바쁘게 일하였다. 단지 4개월 내에 교육 과정을 짜고 강의를 준비하고 도서를 수집해야 하였던 것이다. 현재 통치체 성원으로 일하는 슈로더 형제는 “그 그리스도인 상급 교육은 20주 과정이었으며, 성서가 주된 교과서였다”고 설명한다.

추운 겨울날인 1943년 2월 1일 월요일에 뉴욕 주 북부에서 첫 학급이 100명의 학생으로 시작되었다. 이것은 참으로 믿음의 기초 위에 세운 학교였다. 2차 세계 대전의 와중에서, 선교인들을 파견할 수 있는 지역은 세계에서 몇 군데밖에 없었다. 하지만 선교인을 사용할 수 있는 평화의 기간이 있을 것이라는 온전한 확신을 가지고 선교인 지망생들을 훈련시켰다.

전후의 재조직

1945년 5월에 유럽에서 2차 세계 대전의 총성이 멎었다. 넉 달 후인 9월에는 전투가 태평양에서 중지되었다. 2차 세계 대전은 끝났다. 협회장이 “평화—그것은 지속될 수 있는가?”라는 강연을 한 지 3년 남짓 된 1945년 10월 24일에, 국제 연합 헌장이 발효되었다.

유럽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에 관한 보고는 이미 조금씩 알려지고 있었다. 전세계 형제 자매들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로, 왕국 선포 활동은 전쟁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꾸준히 진척되어 있었다. 「파수대」(영문) 1945년 7월 15일 호는 이렇게 보고하였다. “1940년에는 프랑스에 400명의 전도인이 있었는데, 지금은 1100명이 왕국 소식을 전하고 있다. ·⁠·⁠· 1940년에 네덜란드에 800명의 전도인이 있었다. 그중 400명이 독일 강제 수용소로 끌려갔다. 남은 사람들이 왕국 소식을 전했다.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그 나라에 현재 2000명의 왕국 전도인이 있다.” 활짝 열린 자유의 문은 이제 유럽뿐 아니라 전세계에서 좋은 소식을 한층 더 선포할 기회를 갖게 해주었다. 하지만 먼저 재건하고 재조직하는 일이 많이 필요하였다.

전쟁의 참화를 겪은 나라들에서 여호와의 증인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조사하고 싶은 열망에서, 협회장은 비서인 밀턴 G. 헨첼과 함께 1945년 11월에 영국, 프랑스, 스위스, 벨기에, 네덜란드, 스칸디나비아를 여행하면서 형제들을 격려하고 협회 지부 사무실들을 시찰하였다. * 그들의 목적은 전후의 재조직이었다. 필요로 하는 형제들에게 서적 공급품 그리고 식량과 의복을 발송하는 마련을 하였다. 지부 사무실들이 재설립되었다.

노어 형제는 전파 활동의 진척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 지부를 잘 조직할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의 타고난 조직력이 전세계 협회 지부 시설을 확장하는 데 십분 발휘되었다. 그가 회장이 된 1942년에는 지부 사무실이 25개였다. 1946년까지는, 금지령과 2차 세계 대전의 장애에도 불구하고 57개 나라에 지부가 있게 되었다. 1976년에 이르기까지, 다음 30년에 걸쳐, 지부의 수는 97개로 늘어났다.

가르치는 자로서 자격을 구비함

전쟁 후 얼마 안 되어 세계 여행을 통해, 협회장은 여호와의 증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로서 자격을 더 잘 구비할 필요가 있음을 알았다. 더 많은 성서 교육과 아울러 야외 봉사에서 사용하기에 적합한 도구도 필요하였다. 그러한 필요가 전후 기간에 일찍이 충족되었다.

1946년 8월 4-11일에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에서 열린 즐거운 백성 신권 대회에서, 노어 형제는 “모든 선한 일을 위해 준비함”이라는 연설을 하였다. 그가 이러한 질문을 하였을 때 청중은 모두 호기심을 가졌다. “성서 66권 각 권에 대한 지식을 갖는다면 아주 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성서의 각 권을 누가 기록하였는지, 각 권이 언제 기록되었는지, 어디서 기록되었는지를 우리가 안다면, 성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기대가 고조되는 가운데 뒤이어 그는 이렇게 공표하였다. “형제 여러분, ‘Equipped for Every Good Work’(「‘모든 선한 일을 위해 준비함’」)이라는 제목의 새로운 책에서 그 모든 지식과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발표에 이어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 새로운 출판물은 회중에서 열리는 전도 학교의 교재로 사용할 것이었다.

여호와의 증인은 성경 지식의 깊이를 더해 주는 출판물을 갖추게 되었을 뿐 아니라 야외에서 사용하기 위한 뛰어난 보조물도 받았다. 1946년 대회는 「깰 때이다」 첫 호의 발표로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이 새로운 잡지가 「위안」(전에는 「황금 시대」로 알려짐)을 대신하였다. 또한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책이 (영문으로) 발표되었다. * 후에 여행하는 감독자로 일한 헨리 A. 캔트웰은 이렇게 설명한다. “얼마 동안 우리는 새로운 관심자의 성서 연구를 사회하는 데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책, 즉 기본적인 성서 교리와 진리를 다루는 책을 절실히 필요로 했다. 이제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의 발표로, 우리는 필요했던 바로 그것을 갖게 되었다.”

그러한 귀중한 교재를 갖게 되어, 여호와의 증인은 한층 더 빠른 확장을 기대하였다. “재건·확장 문제”라는 제목으로 대회 참석자들에게 연설하면서, 노어 형제는 여러 해 동안의 세계적 전쟁중에도 증거하는 일에서의 노력은 결코 정체되지 않았음을 설명하였다. 1939년부터 1946년까지, 왕국 선포자들의 수는 11만 명 이상 증가하였다. 성서 출판물의 점증하는 세계적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협회는 브루클린에 공장과 벧엘 집을 확장하기로 계획하였다.

예상되었던 세계 평화 기간이 시작되었다. 세계적인 확장과 성서 교육의 시대가 순탄하게 전개되었다. 여호와의 증인은 즐거운 백성 신권 대회에서 좋은 소식을 가르칠 자격을 더 잘 구비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확산되는 왕국 선포

세계적인 확장을 기대하여 1947년 2월 6일에, 협회장과 그의 비서 밀턴 G. 헨첼은 7만 6916킬로미터에 걸친 세계 봉사 여행을 떠났다. 그 여행에서 그들은 태평양의 여러 섬들,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동남 아시아, 인도, 중동, 지중해 지역, 중·서부 유럽, 스칸디나비아, 영국, 뉴펀들랜드를 방문하였다. 1933년 이후 처음으로 브루클린에 있는 협회 본부 성원이 독일 형제들을 방문할 수 있었다. 그 여행에 대한 보고가 1947년도 전체에 걸쳐서 「파수대」(영문) 여러 호에 실렸기 때문에 전세계 여호와의 증인들은 두 여행자의 활동을 지켜볼 수 있었다. *

“그 때는 우리가 아시아와 그 외 지역에 사는 형제들을 잘 알고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는 첫 기회였다”고 현재 여호와의 증인의 통치체 성원으로 일하는 헨첼 형제는 설명한다. “우리는 선교인을 파견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처하게 될 상태와 그들에게 무엇이 필요할 것인지를 알아야 했다.” 그 여행에 이어, 길르앗 훈련을 받은 선교인들이 외국 임지에 줄지어 끊임없이 도착하여 왕국 선포 활동을 앞장서서 추진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인상적이었다. 다음 5년(1947-52년)에 걸쳐, 전세계 왕국 전파자 수는 20만 7552명에서 45만 6265명으로 두 배가 넘게 되었다.

신권 통치의 증가

1950년 6월 25일에, 북한군이 남한을 침략하였다. 마침내 16개 나라에서 군대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주요 나라들이 적대 관계에 들어가게 되자, 여호와의 증인은 자신들의 세계적 연합뿐 아니라 여호와의 축복으로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 줄 국제 대회에 함께 모일 준비를 하였다.—이사야 60:22.

신권 통치 증가 대회는 1950년 7월 30일부터 8월 6일까지 열기로 계획되었다. 이 대회는 그 때까지 여호와의 증인이 한 장소에서 개최한 대회로서는 단연 최대였다.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 태평양의 여러 섬—도합 67개 나라—에서 약 1만 명의 외국 대표가 뉴욕 시 양키 스타디움에 모였다. 12만 3000명 이상이나 되는 공개 강연 최고 참석자 수 자체가—단 4년 전의 즐거운 백성 신권 대회에 최고 8만 명이 참석한 것과 비교할 때—증가를 보여 주는 인상적인 증거였다.

여호와의 증인이 경험하는 증가의 의미 심장한 한 가지 요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쇄하고 배부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1950년 8월 2일에 하나의 이정표에 이르게 되었다. 그날 노어 형제는 현대어로 된 「신세계역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경」 영문판을 발표하였다. 대회 참석자들은 이 새로운 번역판이 마태 복음부터 계시록까지의 본문에서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를 237회 회복시킨 것을 알고 감격하였다. 연사는 이러한 고무적인 호소로 강연을 끝맺었다. “이 번역판을 가지고 가십시오. 그것을 통독하십시오. 그것을 연구하십시오. 그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주십시오.” 나머지 분할 부분들이 다음 10년간에 걸쳐 계속 나왔다. 그래서 마침내 여호와의 증인은 다른 사람에게 열정적으로 제공할 수 있는, 전체 성서의 정확하고 읽기 쉬운 번역판을 갖게 되었다.

대회 도시를 떠나기 전에, 대표자들은 컬럼비아 하이츠 124번지에 있는 새로운 벧엘 본부와 크게 확장된 애덤스가 117번지의 인쇄 공장을 견학하도록 초대받았다. 전세계 증인들의 재정 지원으로 건축된 그 새로운 시설들은 1946년 클리블랜드 대회에서 광고되고 전폭적인 승인을 얻은 대규모 확장 프로그램의 완성물이었다. 당시에 여호와의 증인은 브루클린뿐 아니라 전세계에서 앞으로 얼마나 큰 확장이 있을 것인지 알지 못하였다. 끊임없이 증가하는 왕국 전도인 대열을 돌보기 위해 더 많은 그리고 더 큰 인쇄 공장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강화된 호별 방문 봉사 훈련

1953년 7월 19-26일에 뉴욕 시에서 열린 신세계 사회 대회에서, 여호와의 증인 자신들을 위해 그리고 특히 호별 방문을 통한 왕국 선포에 사용하도록 새로운 출판물들이 마련되었다. 예를 들어, 7월 20일 월요일에 “Make Sure of All Things”(「‘범사에 헤아리라’」)가 발표되자 참석한 12만 5040명은 우레 같은 박수를 보냈다. 간편한 야외 봉사 도구인 이 416면 포켓용 서적은 70가지 주요 제목 아래 4500여 개의 성구를 모았다. 이제 여호와의 증인은 호별 방문 전파 활동에서 제기되는 질문들에 대한 성경의 답을 쉽게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수요일 오전에 “모든 종의 주된 일”이라는 연설을 하면서, 노어 형제는 여호와의 증인의 발전하는 교육에서 한층 더 진전된 마련—모든 회중에서 실시하게 될 광범위한 호별 방문 훈련 프로그램—을 광고하였다. 경험이 많은 전도인들은 경험이 적은 사람들이 정기적이고 효과적인 호별 방문 왕국 선포자들이 되도록 도우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 원대한 프로그램은 1953년 9월 1일에 시작되었다. 훈련 활동에 참여한 여행하는 감독자 제시 L. 캔트웰은 “이 프로그램은 전도인들이 더 효과적으로 일하는 데 참으로 도움이 되었다”고 말하였다.

1953년 7월 이후 몇 달에 걸쳐서, 동일한 대회가 다섯 대륙에서 열렸으며 동일한 프로그램을 현지에 맞는 형태로 제공하였다. 이렇게 하여 강화된 호별 방문 봉사 훈련이 전세계 여호와의 증인의 회중들에서 시작되었다. 같은 해에 왕국 선포자 수는 51만 9982명의 신기록에 달하였다.

세계적인 확장의 필요를 충족시킴

1950년대 중반에, 조직의 급속한 증가를 돌보도록 또 다른 마련이 있었다. 10여 년 동안, N. H. 노어는 지부들의 운영을 시찰하기 위해 세계를 여행하였다. 이 여행은 각 나라에서 활동이 적절히 감독되게 하고 여호와의 증인의 세계적 연합을 강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노어 형제는 선교인들과 전세계 지부 봉사자들에 대해 깊은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어디를 가든지 시간을 내어 그들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과 필요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봉사의 직무에 관해 그들을 격려하였다. 그러나 1955년에는, 77개의 워치 타워 협회 지부가 있었으며 길르앗 훈련을 받은 1814명의 선교인이 100개 나라에서 봉사하고 있었다. 노어 형제는 그 일을 혼자서 다루기에는 벅차다는 것을 깨닫고 지부와 선교인 집을 방문하는 그 중요한 일에 다른 사람을 포함시키는 조처를 취하였다.

세계를 10개 지구로 나누고 각 지구에 여러 개의 협회 지부가 포함되도록 마련하였다. 브루클린 사무실의 자격 있는 형제들과 경험 많은 지부 감독자들이 지구의 종(지금은 지구 감독자라고 함)으로 임명되어 그 일을 위해 노어 형제로부터 훈련받았다. 1956년 1월 1일에, 이 첫 지구의 종들이 지부들을 방문하는 이 새로운 봉사를 시작하였다. 1992년 현재, 통치체 성원을 포함하여 30명 이상의 형제들이 지구 감독자로서 봉사하고 있다.

성의(聖意) 교육

1958년 여름에, 중동에 전운이 감돌았다. 국제 관계의 긴장 속에서도, 여호와의 증인은 성의에 대해 한층 더 교육을 베풀 국제 대회에 모이기 위해 준비하였다. 또한 그 대회는 한 도시에서 열린 대회로서는 최대 규모가 될 예정이었다.

7월 27일부터 8월 3일까지 성의 국제 대회를 위해 123개 나라에서 온 최고 25만 3922명의 참석자들이 뉴욕 시 양키 스타디움과 폴로 그라운드를 가득 메웠다. 뉴욕의 「데일리 뉴스」 1958년 7월 26일자는 이렇게 보도하였다. “여호와의 증인이 몰려와 스타디움을 가득 채우고 있다. 여덟 대의 특별 열차, 500대의 전세 버스, 1만 8000대의 합승 자동차 그리고 두 대의 전세 선박과 65대의 전세 비행기가 성원들을 실어나르고 있다.”

길르앗 훈련을 받은 선교인들은 그리스도교국에 속한 교회들의 신앙과 교리들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성서 진리를 가르칠 때 직면하게 되는 도전을 협회 본부에 알렸다. 바로 참 성서 가르침을 설명하면서도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출판물이 있다면 참으로 좋을 것이다! 7월 31일 목요일 오후에 참석한 14만 5488명은 노어 형제가 새로운 책 「낙원을 잃은 때부터 낙원을 찾을 때까지」(영문)를 발표하자 기뻐하였다.

노어 형제는 모두가 야외 봉사에서 그 새로운 책을 사용할 것을 강력히 권하였다. 그는 또한 부모가 자녀에게 성서 진리를 가르치는 면에서 그 책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제안하였다. 많은 부모는 그 제안을 마음에 새겼다.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 근처의 작은 읍에서 성장한 교사인 그레이스 A. 이스텝은 이렇게 지적하였다. “어린이층에 속한 사람들은 모두가 「낙원」 책을 만지작거리며 성장해 왔는데, 집회에 그 책을 가지고 가고, 같이 노는 꼬마들과 함께 보고, 글을 읽을 나이가 되기 오래 전에도 단지 그림만 보고 전체 성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배운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름진 양식이 마련되었다.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는 감동적인 연설의 결론에서, 노어 형제는 “Your Will Be Done on Earth”(「“당신의 뜻이 땅 위에서 이루어지이다”」)라는 제목의 새로운 책을 발표하여 청중의 가슴을 설레게 하였다. 다니엘서에 대한 상세한 연구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새로운 출판물은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이루어져 왔으며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독자들에게 알려 주었다. “여러분은 이 책을 무척 좋아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연사는 단언하였다. 17만 5441명이나 되는 청중은 우레 같은 박수로써 성의에 대해 더 깊은 인식을 갖게 해줄 이 새로운 도구를 받게 된 것에 대해 기쁨을 표시하였다!

결론에서, 노어 형제는 전세계 조직에 유익을 가져다 줄 또 하나의 특별 교육 프로그램을 발표하였다. 노어는 “교육 활동은 사양길에 접어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척되고 있습니다”라고 언명하였다. 그는 전세계 협회 지부의 감독자들을 위한 10개월 훈련 과정을 브루클린에서 마련하기로 계획하였음을 설명하였다. 또한 전세계 많은 나라에서 여행하는 감독자들과 회중 감독자들을 위한 1개월 훈련 과정이 계획되었다. 이 모든 교육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우리는 더 높은 수준으로 이해하여 여호와의 말씀에 표현된 그분의 생각을 더 깊이 파악하기를 원합니다.”

이 훈련 프로그램을 위한 연구 과정에 관한 작업이 즉시 시작되었다. 일곱 달 후인 1959년 3월 9일에, 새로운 학교인 천국 전도 강습 제1기 학급이 길르앗 학교의 본거지인 뉴욕 주 사우스랜싱에서 시작되었다. 거기서 시작된 일은 새로운 학교가 회중 감독자들을 훈련시키는 데 사용됨에 따라 곧 세계 도처로 파급되었다.

“믿음에 굳게 서”도록 강화됨

1960년대에, 인류 사회는 종교적·사회적 변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교직자들은 성서의 여러 부분을 신화나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취급하였다. “하나님은 죽었다”라는 관념이 점점 더 인기를 끌었다. 인류 사회는 성적 부도덕의 늪에 점점 더 깊숙이 빠졌다. 「파수대」와 그 외 출판물 그리고 대회 프로그램을 통해, 여호와의 백성은 그 소란한 10년중에 “믿음에 굳게 서”도록 강화되었다.—고린도 전 16:13.

1963년에 세계 도처에서 열린 일련의 대회에서, “‘영원한 기쁜 소식’의 책은 유익하다”라는 연설은 비평가들의 맹공격에 맞서 성서를 변호하였다. 연사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성서 비평가들은 단순한 인간들이 이 책을 썼음을 구태여 지적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서 자체가 정직하게 그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그러나 이 책이 인간이 쓴 여느 책과 다른 이유는 성서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디모데 후 3:16, 17, 「신세」) 이 감동적인 연설에 이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것으로 유익하다’」 책이 (영문으로) 발표되었다. 그 새로운 출판물은 성서 각 권을 검토하는 내용을 실었는데, 각 권의 필자와 기록 시기·장소 그리고 확실성의 증거와 같은 배경을 알려 준다. 뒤이어 성서 각 권의 요약이 나오며, 그 다음에 “왜 유익한가”라는 부분이 나온다. 이 부분은 성서의 특정한 책이 독자들에게 어떻게 큰 가치가 있는지를 알려 준다. 여호와의 증인의 계속적인 성서 교육에 있어서 가치 있는 도구인 이 출판물은 발표된 지 약 30년이 지난 지금도 신권 전도 학교 교재로서 사용되고 있다! *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해서 1960년대의 성혁명에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다. 사실상, 매년 수천 명—총수에 비하면 적은 비율—이 제명당하였는데, 대부분 성적 부도덕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백성이 1964년에 열린 일련의 지역 대회에서 직접적인 교훈을 받은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캐나다 서스캐처원 태생의 여행하는 감독자 라일 루시는 “공복(公僕)의 조직을 깨끗하고, 순결하게 유지함”이라는 강연을 기억한다. 루시는 “명쾌한 연설에서 도덕관에 관한 직설적이고 솔직한 표현으로 문제들이 분명히 설명되었다”고 말하였다.

그 강연의 내용은 「파수대」 1965년 3월 15일 호(영문판은 1964년 11월 15일 호)에 실렸다. 무엇보다도 그 호는 이렇게 기술하였다. “소녀들이여, 자기 몸을 더러운 공중 수건으로 만들지 마십시오. 그리고 상징적 ‘개’와 같은 음탕자들의 더러운 손을 씻게 만들지 마십시오.”—비교 계시 22:15.

그러한 솔직한 교훈은 여호와의 증인이 한 백성으로서 왕국 소식을 계속 선포하는 데 어울리는 깨끗한 도덕 상태를 유지하도록 돕기 위한 것이었다.—비교 로마 2:21-23.

‘이 1975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증인들은 인류 역사 6000년이 지나면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가 뒤이어 있을 것이라고 오랫동안 믿어 왔다. 그러나 인류 존재의 6000년 기간이 언제 끝날 것인가? 1966년에 열린 일련의 지역 대회에서 (영문으로) 발표된 「하나님의 아들들의 자유 가운데서의 영원한 생명」 책은 1975년을 지적하였다. 바로 그 대회에서 형제들은 그 새로운 책의 내용을 검토하면서 1975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매릴랜드 주 볼티모어에서 열린 대회에서, F. W. 프랜즈는 결론 연설을 하였다. 그는 이러한 말로 연설을 시작하였다. “연단에 올라오기 바로 전에 한 청년이 와서 ‘이 1975년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고 말하였습니다.” 뒤이어 프랜즈 형제는 그 새로운 책의 내용이 1975년경에 아마겟돈이 끝나고 사단이 감금될 것임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관해 많은 질문이 있었음을 언급하였다. 그는 이러한 요점을 말하였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언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지금부터 1975년까지의 기간에 발생될 사건에 대하여 확정적인 말을 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동료 여러분, 중요한 점은 이것입니다. 곧 때는 짧다는 것입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때는 다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1966년 이후 여러 해 동안, 여호와의 증인 대다수는 그 교훈에 담긴 영과 일치하게 행하였다. 그러나 이 제목에 관해 다루는 내용이 또 있었는데, 지나칠 정도로 단정적인 내용도 있었던 것 같다. 「파수대」 1980년 7월호(37면)는 그 점을 시인하였다. 그러나 또한 여호와의 증인은 여호와의 뜻을 행하는 일에 주로 집중해야 하며 연대에 지나치게 신경 쓰거나 구원이 빨리 이루어졌으면 하는 기대를 지나치게 가져서는 안 된다는 주의를 받았다. *

일을 가속화하기 위한 도구

1960년대 후반에, 여호와의 증인은 기대감과 긴박감을 가지고 좋은 소식을 선포하고 있었다. 1968년중에 왕국 전도인의 수가 203개 나라에서 122만 1504명으로 증가하였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이 지식을 얻고도 그에 따라 행하지 않으면서 여러 해 동안 성서를 연구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제자를 삼는 일을 가속화하는 방법이 있었는가?

1968년에 새로운 성서 연구 보조서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가 발표됨으로 그 점이 대답되었다. 이 192면 포켓용 서적은 새로운 관심자들을 염두에 두고 준비되었다. 이 책은 “당신의 종교를 검토해 보는 것이 왜 현명한가?”, “우리는 왜 늙고 죽는가?”, “죽은 자는 어디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왜 오늘날까지 악을 허락하셨는가?”, “참 종교를 알아 내는 방법”, “행복한 가정을 세워 나감”과 같은 제목을 다루는 흥미 진진한 22개의 장을 실었다. 「진리」 책은 성서 연구생이 고려되는 내용에 관해 추리하고 그것을 자신의 생활에 적용하도록 격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새로운 출판물은 6개월 성서 연구 프로그램과 관련하여 사용하게 되어 있었다. 「천국 전도」 1968년 10월 호는 이 새로운 프로그램이 어떠한 역할을 할 것인지를 이렇게 설명하였다. “「진리」 [책을] ·⁠·⁠· 매주 완전히 한 장을 연구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모든 집주인과 혹은 이 책의 모든 장을 그렇게 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하도록 노력하라. ·⁠·⁠· 6개월의 집중적 연구가 끝나 집회에 동반하려는 양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아직 회중과 연합하지 않는다면, 그 때는 진실로 진리를 배우기를 원하고 발전하고자 하는 다른 사람과 공부하는 데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성서 연구에서 기쁜 소식을 제공[할 때] 관심자로 6개월 안에 행동하게 하는 방법[으로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삼으]라.”

그런데 관심자들은 행동하였다! 단기간에, 6개월 성서 연구 프로그램은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1968년 9월 1일부터 1971년 8월 31일까지 세 봉사년도 기간에, 총 43만 4906명이 침례를 받았다. 이것은 그 이전의 세 봉사년도 기간에 침례받은 사람 수의 두 배가 넘는 수이다! 여호와의 증인들 사이에 기대감과 긴박감이 있던 때에 나왔으므로, 「진리」 책과 6개월 성서 연구 운동은 제자를 삼는 일을 가속화하는 면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마태 28:19, 20.

‘반드시 효과가 있을 것이다. 여호와의 마련이다’

여러 해 동안 여호와의 증인의 회중들은 영적 자격을 갖춘 한 사람이 협회로부터 회중의 종 곧 “감독자”로 임명받고 그 외 임명받은 “종들”의 보조를 받도록 조직되었다. * (디모데 전 3:1-10, 12, 13, 「신세」) 이 사람들은 양 떼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섬겨야 하였다. (베드로 전 5:1-4) 그런데 회중들을 제1세기 그리스도인 회중들의 구조에 더욱 일치시킬 수 있었는가?

1971년에 세계 도처에서 열린 일련의 대회에서, “민주 정체와 공산주의 한복판에 있는 신권 조직”이라는 연설이 제공되었다. 7월 2일에, F. W. 프랜즈는 뉴욕 시 양키 스타디움에서 연설을 하였다. 그 연설에서 그는 충분한 자격을 갖춘 사람들이 있을 경우에는 제1세기 회중들에 감독자가 한 사람만이 아니라 더 많이 있었음을 지적하였다. (빌립보 1:1) 그는 이렇게 언명하였다. “회중의 감독자들의 집단은 ·⁠·⁠· ‘장로의 회’를 구성하였을 것입니다. ·⁠·⁠· 그러한 ‘연로자회[즉 집합체]’의 성원들은 모두가 동등하였고, 같은 공적 신분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그들 중 아무도 회중에서 가장 중요한, 가장 탁월한, 가장 강력한 성원이 아니었습니다.” (디모데 전 4:14) 그 연설은 대회 참석자 모두의 관심을 참으로 자극하였다. 이 지식은 전세계 여호와의 증인의 회중들에 무슨 영향을 미칠 것인가?

이틀 후에 N. H. 노어의 결론 연설에서 그 점이 대답되었다. 1972년 10월 1일을 기하여, 전세계 회중들의 감독 체계가 조정되리라는 것이었다. 회중의 종 곧 감독자가 더는 한 사람으로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 한편 1972년 10월 1일에 이르기까지 여러 달 동안, 임명을 위해 각 회중의 책임감 있고 장성한 사람들이 장로의 로 일할 사람들의 이름(그리고 봉사의 종으로 일할 사람들의 이름)을 협회에 추천하게 되어 있었다. 한 장로가 사회자 *로 임명될 것이지만, 모든 장로가 동등한 권위를 갖고 결정하는 책임에 동참할 것이다. 노어 형제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이러한 조직의 조절은 회중의 운영을 하나님의 말씀과 더 부합하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며, 확실히 그것은 여호와로부터 더 큰 축복을 가져올 것입니다.”

대회 참석자들은 조직상의 조절에 관한 이 지식을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한 여행하는 감독자는 감동되어 “반드시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여호와의 마련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오랜 경험을 가진 또 다른 증인은 “그것은 장성한 사람은 누구나 책임을 맡으려고 하게 만드는 자극제가 될 것입니다”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자격을 갖춘 많은 사람이 이제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하고 그 직분에 임명될 수 있었다. (디모데 전 3:1) 따라서 더 많은 형제들이 회중 책임을 맡는 면에서 귀중한 경험을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지만, 그들 모두가 앞으로 여러 해 동안 쇄도하는 새로운 사람들을 돌보는 데 필요하게 되었다.

또한 대회에서 제공된 내용에 따라, 통치체와 관련해서도 얼마간의 명쾌한 이해와 조절이 있게 되었다. 1971년 9월 6일에, 통치체의 사회자 직책이 통치체 성원들 가운데서 알파벳순으로 윤번할 것이라는 결정이 있었다. 몇 주 후인 1971년 10월 1일에, F. W. 프랜즈가 한 해 동안 통치체 사회자가 되었다.

이듬해인 1972년 9월에 회중에서 책임의 첫 이동이 시작되었으며, 10월 1일까지는 대부분의 회중에서 윤번이 완료되었다. 다음 3년 동안, 여호와의 증인은 인상적인 증가를 경험하였다. 75만 명 이상이 침례를 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1975년 가을을 앞두고 있었다. 1975년에 관한 기대가 모두 실현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세계적인 전파 활동에 대한 그들의 열심과 그들의 세계적 연합에 영향을 줄 것인가?

또한 능동적인 성품과 뛰어난 조직력을 가진 네이선 H. 노어가 수십 년 동안 조직 내의 교육을 진흥시키고 사람들에게 성서를 보급하고 그것을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데 주된 역할을 하였다. 통치체가 보다 면밀한 감독을 하는 것으로 바뀐 것은 그러한 목적에 무슨 영향을 미칠 것인가?

[각주]

^ 4항 「파수대」(영문) 1942년 2월 1일 호, 45면; Consolation(「위안」) 1942년 2월 4일 호, 17면.

^ 8항 1945년 9월에, 커빙턴 형제는 (펜실베이니아)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 부회장으로 더는 일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는 당시에 이사회 전원과 역원들에 대한 여호와의 뜻인 것으로 이해된 사항, 즉 그들은 영으로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이어야 한다는 사항에 따르고자 하는데 자신은 “다른 양”에 속함이 분명하다고 설명하였다. 10월 1일에, 라이먼 A. 스윙글이 이사로 선출되었고, 10월 5일에, 프레더릭 W. 프랜즈가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46 Yearbook of Jehovah’s Witnesses[「1946 여호와의 증인의 연감」], 221-4면; 「파수대」[영문] 1945년 11월 1일 호, 335-6면 참조).

^ 12항 제30장, “좋은 소식을 변호하고 법적으로 확립함” 참조.

^ 33항 상세한 여행 보고가 1946년도 「파수대」(영문)에 실렸다.—14-16, 28-31, 45-8, 60-4, 92-5, 110-12, 141-4면 참조.

^ 38항 몇 년 안 되어, 이 성서 연구 보조서는 전세계에 알려졌다. 1952년 4월 1일자로 개정되었으며, 54개 언어로 1900만 부 이상 인쇄되었다.

^ 42항 140-4, 171-6, 189-92, 205-8, 219-23, 236-40, 251-6, 267-72, 302-4, 315-20, 333-6, 363-8면 참조.

^ 66항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것으로 유익하다’」 책은 1990년에 개정됨.

^ 73항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기사들이 「파수대」에 실렸다:“남은 때를 현명하게 사용함” (1968년 8월 1일 호); “영원한 장래를 생각하며 섬기라” (1974년 9월 15일 호); “우리에게 ‘그 날과 그 때’를 알려 주시지 않은 이유”와 “‘그 날과 그 때’를 모르므로 우리는 어떤 영향을 받는가?” (1975년 8월 1일 호) 이보다 앞서 1963년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것으로 유익하다’」는 이렇게 기술하였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아직도 미래에 속한 일자들을 추측하는 데 성서 연대기를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마태 24:36.”

^ 80항 제15장, “조직 구조의 발전” 참조.

^ 82항 연사는 또한 1972년 10월 1일부터 각 회중의 장로의 회 안에서 사회자 직책이 매년 윤번할 것임을 설명했다. 이 마련은 1983년에 조정되었다. 그 해에 각 장로의 회는 협회의 임명을 받아 장로의 회의 사회자로, 정해지지 않은 기간 일할 주임 감독자를 추천하도록 요청받았다.

[92면 삽입]

체포와 집단 폭행에도 불구하고 전파함

[94면 삽입]

‘세계적 확장과 이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규모의 교육’

[103면 삽입]

비평가들의 맹공격에 맞서 성서를 변호함

[104면 삽입]

‘동료 여러분, 중요한 점은 이것입니다. 곧 때는 짧다는 것입니다’

[106면 삽입]

“장성한 사람은 누구나 책임을 맡으려고 하게 만드는 자극제”

[91면 네모]

N. H. 노어의 배경

네이선 호머 노어는 1905년 4월 23일에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베슬리헴에서 태어났다. 그는 16세 때 성경 연구생의 앨런타운 회중과 연합하게 되었다. 1922년에 그는 오하이오 주 시더포인트에서 열린 대회에 참석하였으며, 거기서 개혁파 교회를 탈퇴하기로 결심하였다. 이듬해인 1923년 7월 4일에 브루클린 벧엘의 프레더릭 W. 프랜즈가 침례 연설을 한 후, 18세인 네이선은 펜실베이니아 동부의 리틀리하이 강에서 여러 사람과 함께 침례를 받았다. 1923년 9월 6일에, 노어 형제는 브루클린의 벧엘 가족 성원이 되었다.

노어 형제는 발송부에서 힘을 다해 부지런히 일하였으며, 오래지 않아 타고난 조직력을 인정받게 되었다. 협회의 공장 감독인 로버트 J. 마틴이 1932년 9월 23일에 사망하자, 노어 형제는 그의 후임으로 임명받았다. 노어 형제는 1934년 1월 11일에 만민의 설교단회(현 뉴욕 법인 워치타워 성서 책자 협회) 이사로 선출되었으며, 이듬해에는 그 협회의 부회장이 되었다. 1940년 6월 10일에, 그는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펜실베이니아 법인)의 부회장이 되었다. 1942년 1월에는 그 두 가지 협회와 영국 법인체인 만국 성경 연구생회의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 후 여러 해 동안 노어 형제의 측근이며 믿음직한 고문으로 일한 사람들 가운데 프레더릭 W. 프랜즈가 있는데, 그는 노어보다 연상이었으며 그의 언어 지식과 성서 학자로서의 배경은 조직에 큰 가치가 있는 것으로 일찍이 알려졌다.

[93면 네모]

격려적인 전망

1942년 9월에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에서 신세계 신권 대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협회의 총무 겸 재무 이사인 연로한 W. E. 밴 앰버그가 대회 연설을 할 때 기뻐하였다. 밴 앰버그 형제는 자신이 참석한 첫 대회가 1900년에 시카고에서 있었는데 “큰”—약 250명이 참석한—대회였다고 술회하였다. 해를 거듭하면서 갖게 된 다른 “큰” 대회들을 열거한 후에, 그는 이러한 격려적인 전망으로 끝을 맺었다. “이 대회 *는 지금 우리에게 크게 보입니다. 그러나 이 대회는 제가 과거에 참석한 대회들에 비해 크듯이, 미래에 주께서 전세계 방방곡곡으로부터 사람들을 모으실 때 있게 될 대회들에 비해 매우 작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각주]

^ 115항 최고 2만 6000명이 클리블랜드에 참석하였으며, 미국 전역에 흩어져 있는 52개의 대회 도시들에 총 12만 9699명이 참석하였다.

[96면 네모와 지도]

N. H. 노어의 봉사 여행, 1945-56

1945-46: 중앙 아메리카, 남아메리카, 북아메리카, 유럽, 카리브 해 지역

1947-48: 북아메리카, 태평양의 섬들, 동양, 중동, 유럽, 아프리카

1949-50: 북아메리카, 중앙 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카리브 해 지역

1951-52: 북아메리카, 태평양의 섬들, 동양, 유럽, 중동, 아프리카

1953-54: 남아메리카, 카리브 해 지역, 북아메리카, 중앙 아메리카

1955-56: 유럽, 태평양의 섬들, 동양, 북아메리카, 중동, 북아프리카

[지도]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105면 네모]

“오늘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1968년에 발표된 책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는 여호와의 증인이 관심자들과 성서를 연구하는 데 널리 사용되었다. 시기 적절하게 준비된 이 책은 수십만 명의 생각 있는 사람들이 성경에 관한 정확한 지식을 얻는 데 도움이 되었다. 1973년에 미국의 한 독자로부터 이러한 내용의 감사 편지가 들어왔다. “오늘 품위 있는 한 여인이 우리 집을 찾아와서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라는 책을 주었습니다. 방금 그 책을 다 읽었습니다. 하루에 190면을 읽기는 난생 처음입니다. 1967년 6월 29일에 하나님을 믿는 것을 중지하였는데, 오늘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95면 삽화]

뉴욕 주 사우스랜싱의 길르앗 학교

[97면 삽화]

노어 형제는 여러 차례 세계 여행을 하였다(사진은 쿠바를 방문하는 장면)

[98면 삽화]

노어 형제는 모든 증인이 집집으로 전파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영국

레바논

[99면 삽화]

협회장으로서, 노어 형제는 35년 이상 프랜즈 형제와 밀접히 일하였다

[100면 삽화]

1950년대 중엽의 펜실베이니아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 이사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라이먼 A. 스윙글, 토머스 J. 설리번, 그랜트 수터, 휴고 H. 리머, 네이선 H. 노어, 프레더릭 W. 프랜즈, 밀턴 G. 헨첼

[102면 삽화]

1958년에, 123개 나라의 대표자들이 성의 국제 대회를 위해 양키 스타디움에 모였다

[107면 삽화]

여호와의 증인의 봉사 훈련을 위한 출판물

[107면 삽화]

야외 봉사용 출판물의 일부

[107면 삽화]

여호와의 백성을 영적으로 강화시키기 위해 단단한 양식을 제공한 서적들

[107면 삽화]

조사 연구 보조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