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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우리 형제애의 증거

대회—우리 형제애의 증거

제17장

대회—우리 형제애의 증거

대회는 여호와의 증인의 현대 조직의 정기적인 한 부면이 되었다. 그러나 여호와의 숭배자들이 전국적으로 그리고 국제적으로 모이는 일은 20세기가 되기 오래 전에 있게 되었다.

여호와께서는 고대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에게 매년 세 차례의 절기를 위해 예루살렘에 모일 것을 요구하셨다. 남자들 중 일부는 전 가족을 데리고 갔다. 사실상, 모세 율법은 모든 가족 성원—남녀와 어린이들—이 특정한 행사에 참석할 것을 요구하였다. (출애굽 23:14-17; 신명 31:10-13; 누가 2:41-43) 처음에 참석자들은 이스라엘 국경 내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 후 유대인들이 널리 흩어지자 참석자들이 여러 나라에서 왔다. (사도 2:1, 5-11) 그들은 이스라엘과 아브라함이 자신들의 선조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여호와를 하늘에 계신 위대한 아버지로 인정하였기 때문에 함께 모였다. (이사야 63:16) 이 절기들은 행복한 행사였다. 그것은 또한 참석한 사람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늘 염두에 두며 생활의 일상적인 일들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더 중요한 영적인 일을 잊는 일이 없게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현대 여호와의 증인의 대회들은 영적인 관심사를 중심으로 한다. 진실한 관찰자들에게 그러한 대회는 증인이 그리스도인 형제애의 튼튼한 띠로 연합되어 있다는 틀림없는 증거가 된다.

성경 연구생들의 초기 대회

성경 연구생들이 여러 도시와 나라로부터 모이는 마련은 점진적으로 발전되었다. 전통적인 교회 그룹들과는 달리, 성경 연구생들은 대회를 통해서 다른 곳의 동료 신자들을 속히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러한 대회가 주의 죽음의 연례 기념식과 관련하여 펜실베이니아 주 앨러게이니에서 열렸다. 1891년에, “성서 연구와 주의 기념 만찬을 위한 대회”가 있을 것이라는 특별한 광고가 있었다. 이듬해에, 「파수대」는 “1892년 4월 7일부터 14일까지 ·⁠·⁠· 펜실베이니아 주 앨러게이니에서 열리는 신자들의 대회”를 광고하는 두드러진 표제를 실었다.

일반인들은 그러한 초기 대회에 초대되지 않았다. 그런데 1892년에, 대속에 대한 믿음과 주의 일에 대한 진실한 관심을 나타낸 약 400명이 참석하였다. 그 프로그램은 5일간의 집중적인 성서 연구와 콜포처를 위한 또 다른 2일간의 유익한 교훈을 포함하였다.

그러한 모임들에 처음으로 참석한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하였다. “많은 대회에 가 보았지만, 일어날 때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집과 거리와 집회와 식당과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유일하고 끊임없는 화제인 이와 같은 대회는 처음입니다.” 참석자들이 나타낸 영에 관해서, 미국 위스콘신의 한 남자는 이렇게 편지하였다. “사랑의 영과 형제로서의 친절이 모든 경우에 나타나는 것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1893년에 연례 대회 마련이 변경되었다. 그 해 여름에 콜럼버스 박람회와 관련하여 철도 요금이 할인된 것을 이용하기 위해, 성경 연구생들은 8월 20일부터 24일까지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 모였다. 이것은 그들이 피츠버그 지역 밖에서 최초로 가진 대회였다. 그러나 주의 일에 가능한 한 최대의 시간과 돈을 사용하기 위해, 수년 동안 그 이상의 총회는 열리지 않았다.

그 후 1898년부터, 여러 곳의 성경 연구생들은 제한된 지역에서 사람들이 참석할 수 있도록 지방적으로 솔선하여 대회를 마련하기 시작하였다. 1900년에, 협회가 조직한 세 개의 총회가 있었다. 그러나 미국과 캐나다에서 13개의 지방 대회들도 있었는데, 그중 대부분은 단 하루 동안 열렸으며 흔히 순례자의 방문과 관련하여 열렸다. 그 수는 계속 증가하였다. 1909년에는 이미, 러셀 형제가 북아메리카 대륙의 여러 곳을 특별히 여행하면서 봉사한 대회들에 더하여 적어도 45개의 지방 대회가 그 대륙에서 열렸다. 1일 대회 프로그램의 주요 부분은 일반인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특별히 마련되었다. 참석자 수는 아마도 백 명에서 수천 명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

반면에, 주로 성경 연구생들이 참석한 총회는 진리의 길에 굳게 선 사람들을 위한 교훈을 강조하였다. 그러한 대회를 위해, 대표자들을 가득 태운 특별 열차들이 주요 도시들로부터 왔다. 때때로 참석자 수는 무려 4000명에 달하였으며, 유럽에서 온 대표자들도 약간 포함되었다. 그러한 대회는 영적으로 진정한 새 힘을 주어 여호와의 백성의 열심과 사랑을 증가시켜 주는 때였다. 1903년에 그러한 대회의 끝에 한 형제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가난한 사람이지만—이 대회로부터 받은 유익을 천 달러와도 바꾸지 않겠습니다.”

그 지역에 오게 된 순례자 형제들은 대회에서 연설하였다. 러셀 형제 역시 미국에서 그리고 종종 캐나다에서 지방 대회들과 더 큰 대회들에 참석하여 프로그램 임명을 수행하려고 노력하였다. 그것은 많은 여행을 요하였다. 그중 대부분은 주말 여행으로 행해졌다. 그러나 1909년에, 시카고의 한 형제는 러셀 형제와 함께 이 대회 저 대회로 여행하는 대표자들을 수송할 객차 몇 량을 빌렸다. 1911년과 1913년에, 바로 그 형제는 한 달 이상 계속 미국 서부와 캐나다에 두루 걸쳐 대회 여행을 할 수백 명의 대표자를 수송하기 위해 열차 전체를 빌렸다.

그러한 대회 열차로 여행하는 것은 인상적인 경험이었다. 1913년에, 멀린다 키퍼는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서 열차를 탔다. 여러 해 후에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얼마 있지 않아 우리가 하나의 대가족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그리고 열차는 한 달 동안 우리의 집이 되었다.” 열차가 역으로부터 떠날 때, 그들을 전송나온 사람들은 “다시 만날 때까지 하나님이 함께 하소서” 노래를 부르면서 그 열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줄곧 모자와 손수건을 흔들었다. 키퍼 자매는 이렇게 덧붙였다. “여행중에 멈추는 곳마다 대회가 개최되었는데 대부분은 3일간이었고 우리는 각 대회마다 하루씩 머물렀다. 이렇게 머무르는 동안 러셀 형제는 두 가지 강연을 하였는데 하나는 오후에 벗들에게, 다른 하나는 저녁에 ‘무덤의 저쪽’이라는 제목으로 대중에게 하였다.”

다른 나라에서도 대회의 수가 점증하였다. 그 규모는 대개 상당히 작았다. 1905년에 노르웨이의 첫 대회에 약 15명이 참석하였지만, 그것은 시작이었다. 6년 후 러셀 형제가 노르웨이를 방문하였을 때 일반인을 초대하기 위한 특별한 노력이 기울여졌으며, 그 행사의 참석자 수는 1200명으로 추산되었다. 1909년중에, 그는 스코틀랜드 대회에 참석하였을 때 글래스고에서 약 2000명에게 그리고 에든버러에서 또 다른 2500명에게 “낙원에 있는 강도, 지옥에 있는 부자,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나사로”라는 흥미있는 제목으로 연설하였다.

초기 대회에서 그 끝에, 형제들은 자신들이 애찬이라고 부른 행사를 가짐으로써 그리스도인 형제애의 감정을 반영하였다. 그 “애찬”에는 무엇이 포함되었는가? 한 예로서, 연사들은 주사위 모양의 빵을 담은 접시를 들고 줄을 서 있었으며, 다음에 청중은 줄지어 지나가면서 빵을 취하고 악수하고 “그리스도인 사랑 가운데 우리의 마음을 매는 띠는 복되도다”라는 노래를 불렀다. 그들이 노래를 부를 때 흔히 기쁨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후 그들의 수가 증가하자, 그들은 악수와 빵을 나누는 일을 하지 않게 되었으며 노래와 기도 그리고 흔히 그들의 인식을 표현하는 긴 박수로 대회를 마쳤다.

세계적인 왕국 선포 운동에 착수함

1차 세계 대전 후의 첫 번째 주요 대회는 1919년 9월 1일부터 8일까지 오하이오 주 시더포인트에서(클리블랜드에서 서쪽으로 96킬로미터 떨어진 이리 호 연안에서) 열렸다. 러셀 형제가 사망한 후에, 탁월한 위치에서 조직과 연합했던 일부 사람이 떨어져 나갔다. 형제들은 혹독한 시험을 받았다. 1919년에 대회에 앞서, 부당하게 투옥되었던 협회장과 그의 동료들이 석방되었다. 그래서 열렬한 기대가 있었다. 첫날 참석자 수는 상당히 적었지만, 그날 나중에 더 많은 사람이 특별 열차편으로 도착하였다. 그러자 참석자들을 수용하기로 한 호텔 지배인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R. J. 마틴과 A. H. 맥밀런(두 사람 모두 교도소에서 얼마 전에 석방된 그룹에 속함)이 자진적으로 나섰다. 그들은 자정이 넘도록 방을 배정하였으며, 러더퍼드 형제와 그 외 많은 사람들은 짐을 날라 주고 벗들을 방으로 안내하는 등 호텔 사환 역할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그들 모두 가운데 열정의 영이 번졌다.

약 2500명이 참석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대회는 모든 면으로 예상을 넘었다. 둘째 날에, 강당이 이미 꽉 차서 가외의 회관들도 사용하였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아서, 일부 회기의 장소는 상쾌한 숲이 있는 옥외 지역으로 옮겨졌다. 미국과 캐나다에서 온 약 6000명의 성경 연구생들이 참석하였다.

일요일에 있은 주요 강연에는 적어도 1000명의 일반인도 와서 청중이 7000명은 족히 되는 수로 불어났으며, 연사는 마이크나 확성 장치 없이 노천에서 그들에게 연설하였다. “고난받는 인류를 위한 희망”이라는 그 강연에서, J. F. 러더퍼드는 하나님의 메시야 왕국이 인류 문제들의 해결책임을 분명히 밝혔으며, 또한 (그 무렵 발족되고 있었으며 이미 교직자들의 지지를 받은) 국제 연맹이 하나님의 왕국의 정치적 표현이 결코 아님을 설명하였다. 샌더스키의 「레지스터」(지방 신문)는 그 공개 강연에 관한 상세한 보고와 성경 연구생들의 활동 개요를 실었다. 그 강연 내용의 사본이 미국과 캐나다 전역의 신문사에 보내졌다. 그러나 이 대회에서 나온 광고에는 그보다 훨씬 더 의미 있는 것이 있었다.

대회 전체 중에서 참으로 절정을 이루었던 것은 “동역자들에게 전함”이라는 러더퍼드 형제의 연설이었는데, 그것은 나중에 “왕국을 선포함”이라는 제목으로 발행되었다. 이것은 다름아닌 성경 연구생들을 대상으로 하였다. 대회 프로그램과 대회장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었던 GA라는 글자의 의미가 그 연설에서 분명히 밝혀졌다. 사람들의 관심을 메시야 왕국으로 끄는 데 사용하도록 새로운 잡지 The Golden Age(「황금 시대」)가 발행될 것이라는 광고가 있었다. 행해질 일을 설명한 후에, 러더퍼드 형제는 청중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여러분 앞에 기회의 문이 열리고 있습니다. 그 문으로 속히 들어가십시오. 여러분이 이 활동에 참여할 때 단지 잡지 외판원으로 권유하는 것이 아니라 만왕의 왕이며 만주의 주의 대사로서 사람들에게 황금 시대, 즉 참 그리스도인들이 여러 세기 동안 바라고 기도한 우리 주의 영광스러운 왕국의 도래를 품위 있는 방법으로 알리는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참조 계시 3:8) 연사가 그 일에 참여하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묻자, 열정적인 반응이 있었다. 6000명의 청중은 일제히 일어섰다. 이듬해에는 1만여 명이 야외 봉사에 참여하였다. 전체 대회는 참석자들을 연합시키고 고무시켜 주었다.

3년 후인 1922년에, 또 하나의 인상적인 대회가 시더포인트에서 열렸다. 그 대회는 9월 5일부터 13일까지 9일간의 프로그램이었다. 참석자들이 미국과 캐나다에서 왔을 뿐 아니라, 유럽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모임들이 열 가지 언어로 진행되었다. 매일의 평균 참석자 수는 약 1만 명이었으며, “지금 살아 있는 수백만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연설에는 매우 많은 일반인이 청중 가운데 포함되어 참석자 수는 거의 두 배가 되었다.

성경 연구생들은 자신들이 앞으로 수십 년 동안 연장될 이 곳 지상에서의 일을 계획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이 대회에 모인 것이 아니었다. 사실상 그들은 그 대회가 “교회가 ·⁠·⁠· 하나님의 왕국의 하늘 영역으로 그리고 사실상 우리 주와 우리 하나님의 실제적이고 참된 임재로 구출”되기 전의 마지막 총회가 될 수도 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때가 얼마나 짧게 남았든지 간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그들의 첫째 관심사였다. 그 점을 염두에 두고서, 러더퍼드 형제는 9월 8일 금요일에 “왕국”이라는 인상적인 연설을 하였다.

이에 앞서, ADV라는 글자가 적힌 대형 깃발들이 구내의 여러 곳에 걸려 있었다. 강연중에 연사가 이렇게 강력히 권하였을 때 그 글자의 의미가 분명해졌다. “주를 위하여 충실하고 참된 증인이 되십시오. 바벨론의 흔적이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 나아가 싸우십시오. 소식을 널리 전하십시오. 여호와가 하나님이시며, 예수 그리스도가 만왕의 왕이시고 만주의 주이심을 세상은 알아야 합니다. 오늘은 참으로 중요한 날입니다. 보십시오, 왕이 통치하십니다! 여러분은 그의 전파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왕과 그의 왕국을 광고하십시오, 광고하십시오, 광고하십시오.” 그 순간 길이가 11미터 되는 대형 현수막이 청중 앞에서 펼쳐졌다. 거기에는 “왕과 왕국을 광고하라”[‘ADV’는 ‘광고하다’에 해당하는 영어 ‘advertise’를 뜻함]는 행동을 자극하는 구호가 적혀 있었다. 그것은 극적인 순간이었다. 청중은 열정적으로 손뼉을 쳤다. 대회 관현악단에 속하였던 연로한 파네베커 형제는 바이올린을 머리 위에서 흔들면서 묵직한 독일 어조로 이렇게 외쳤다. “그렇다, 그렇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가?” 그들은 실제로 그 일을 하였다.

4일 후 대회가 아직 진행되고 있을 때, 러더퍼드 형제는 대회 참석자들과 함께 대회장으로부터 72킬로미터 이내의 지역에서 호별 방문을 통해 왕국을 선포하는 일에 직접 참여하였다. 그 일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왕국 선포 활동이 세계 전역에 이르는 데 필요한 강력한 자극이 주어졌다. 그 해에 58개 나라에서 1만 7000여 명의 열정적인 봉사자가 증거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그 대회에 참석하였으며 나중에 통치체 성원이 된 조지 갱거스는 수십 년 후에 시더포인트에서의 그 프로그램에 관해 이렇게 말하였다. “그것은 나의 마음과 생각에 깊이 새겨진 것으로, 내가 살아 있는 한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영적 성장의 이정표

모든 대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 힘을 주며 교육하는 시기였다. 그러나 그것들 중 일부는 수십 년 동안 영적 이정표로 기억되어 왔다.

그중 일곱 대회가 미국과 캐나다와 영국에서 1922년부터 1928년까지 해마다 연이어 있었다. 그 대회들이 의미 심장한 것이었던 한 가지 이유는 강력한 결의문이 채택된 것이었는데, 그 일곱 대회 모두가 다음 페이지의 네모 안에 열거되어 있다. 증인은 비교적 소수였지만, 전세계 여러 언어로 하나의 결의문을 무려 4500만 부나 배부하였고 다른 여러 결의문을 5000만 부나 배부하였다. 일부 결의문은 국제적인 라디오 중계로 방송되었다. 따라서 엄청난 증거가 행해졌다.

하지만 또 다른 역사적인 대회가 1931년에 오하이오 주 콜럼버스에서 열렸다. 7월 26일 일요일에, 성경 연구생들은 성경적 논증을 들은 후 새로운 이름—여호와의 증인—을 채택하였다. 참으로 적절한 이름이었다! 바로 창조주께 일차적인 관심을 이끌고 그분을 숭배하는 사람들의 책임을 분명히 밝히는 이름이 채택된 것이다. (이사야 43:10-12) 그 이름의 채택으로 인해 형제들은 하나님의 이름과 왕국을 선포하는 사람들로서 이전 어느 때보다 큰 열심을 갖게 되었다. 덴마크의 한 증인이 그 해에 편지에서 이렇게 표현한 바와 같다. “참으로 비길 데 없는 이름입니다. 맞습니다. 우리 모두가 실제로 여호와의 증인이 되어야 하지요.”

1935년에, 또 하나의 인상적인 대회가 워싱턴 시에서 열렸다. 그 대회의 둘째 날인 5월 31일 금요일에, 러더퍼드 형제는 계시록 7:9-17에 언급된 큰 무리를 논하였다. 반세기 이상, 성경 연구생들은 그 그룹의 정체를 정확하게 밝히려고 하였지만 밝힐 수 없었다. 이제 여호와께서 정하신 때에, 이미 진행된 사건들에 비추어 그 그룹은 바로 이 곳 지상에서 영원히 살 전망을 가진 사람들임이 지적되었다. 이러한 이해는 복음 전파 활동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였으며 여호와의 증인의 현대 조직 구성에서 당시에 막 일어나기 시작한 중요한 변화를 성경적으로 설명하였다.

1941년에,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에서 열린 대회는 “충절”이라는 제목의 첫째 날 연설에 참석한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 연설에서 러더퍼드 형제는 지성 있는 모든 피조물이 직면하는 큰 쟁점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1928년에 “백성을 위한 통치자”라는 강연이 있은 후, 사단의 반역으로 제기된 쟁점이 거듭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 “사단의 반항적인 도전에 의해 제기된 첫째가는 쟁점은 우주 지배에 대한 것이었으며 지금도 그러하다”는 사실이 지적되었다. 그 쟁점과 우주 주권자이신 여호와께 충절을 지키는 일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여호와의 종들의 생활에서 동기를 부여하는 강력한 요인이 되어 왔다.

2차 세계 대전중인 1942년에, 전파 활동이 아마 거의 끝나지 않았는가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때, 새로 임명된 워치 타워 협회장 N. H. 노어가 행한 대회 공개 강연은 “평화—그것은 지속될 수 있는가?”였다. 그 강연에서 설명된 계시록 17장에 나오는 상징적 “붉은빛 짐승”에 관한 내용은 여호와의 증인으로 하여금 아직 더 많은 사람을 하나님의 왕국으로 이끄는 기회가 될 2차 세계 대전 후의 기간을 고려할 수 있게 하였다. 그로 인해 여러 해에 걸쳐 235개 이상의 나라로 보급되었으며 아직 끝나지 않은 세계적 운동이 기세를 얻게 되었다.

1950년 8월 2일에 뉴욕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대회중 또 하나의 이정표에 이르게 되었다. 그 행사에서 청중은 New World Translation of the Christian Greek Scriptures(「신세계역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경」)을 처음으로 받고서 놀랐으며 대단히 기뻐하였다. New World Translation(「신세계역」)의 나머지 부분은 다음 십 년 동안 분권으로 발표되었다. 이 현대어 성경 번역판은 하나님의 고유한 이름을 그분의 말씀에서 그 올바른 자리에 회복시켰다. 그것은 원래의 성서 언어로 표현된 것에 충실하기 때문에 여호와의 증인 자신이 성경을 연구하는 데뿐 아니라 복음 전파 활동에도 엄청난 자산이 되었다.

그 대회 마지막 날의 전날, 당시 워치 타워 협회 부회장 F. W. 프랜즈는 “새로운 사물의 제도”에 관해 청중에게 연설하였다. 여러 해 동안 여호와의 증인은 그리스도 이전 시대의 여호와의 종들의 일부가 심지어 아마겟돈 전에도 죽은 상태로부터 일으킴을 받아 시편 45:16의 성취로 신세계의 군왕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연사가 이렇게 질문하였을 때 수많은 청중이 어떠한 영향을 받았을 것인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 오늘 밤 우리 가운데 새 땅의 군왕이 될 많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이 국제 대회는 행복하지 않습니까?” 환호성과 함께 우레 같은 박수가 오래 지속되었다. 뒤이어 연사는 “군왕”으로 번역된 용어의 성서적 용법과 현대 “다른 양”에 속한 많은 사람이 나타내는 충실성의 기록으로 볼 때 지금 살아 있는 일부 사람이 군왕으로 봉사하도록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선택되는 것도 당연하다는 신앙을 갖게 된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또한 그러한 봉사를 맡게 되는 사람들에게 칭호를 붙여 주는 일은 없을 것임을 지적하였다. 그는 이러한 강력한 권고로 연설을 끝맺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함께 신세계 사회로서 꾸준히 전진합시다!”

그 외에도 매우 의미 심장한 연설이 여호와의 증인의 대회에서 많이 있었다. 1953년에, “극한 북방으로부터 공격을 받는 신세계 사회”는 에스겔 38장과 39장에 묘사된 마곡의 곡의 공격의 의미를 흥미 있게 설명하였다. 같은 해에, “영광으로 전에 충만케 함”이라는 연설을 듣는 사람들은 만국에서 나온 귀중한 것 곧 보배를 여호와의 전 안으로 들여올 것이라는 학개 2:7의 여호와의 약속의 성취에 대한 유형의 증거를 바로 눈앞에서 보면서 감격하였다.

그러나 현대의 가장 두드러진 대회는 1958년에 뉴욕에서 열렸는데, 그 때 25만여 명이 “하나님의 왕국은 통치한다—세상의 끝은 가까웠는가?”라는 연설을 듣기 위해 이용할 수 있는 최대의 시설을 가득 메웠다. 123개 나라의 대표자들이 참석하였으며, 그들이 대회 청중들에게 보고한 내용은 국제적 형제애의 띠를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참석자들의 영적 성장에 기여하고 그들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데 사용하도록, 그 비상한 대회중에 출판물들이 54개 언어로 발표되었다.

1962년에, “위에 있는 권세들에 대한 복종”이라는 주제의 일련의 연설은 로마서 13:1-7에 대한 증인의 이해를 바로잡아 주었다. 1964년에,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김”과 “무덤에서 부활로”는 부활 마련에서 분명히 나타난 여호와의 큰 자비에 대한 그들의 인식을 넓혀 주었다. 그리고 대회의 그러한 주요 부분들을 그 외에도 훨씬 더 많이 언급할 수 있다.

해마다 수만 명, 아니 수십만 명의 새로운 사람이 대회에 참석한다. 제공되는 내용은 언제나 전체 조직에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흔히 새로운 참석자들이 참으로 감격스런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그들은 자신들의 전체 생활 행로를 바꾸는 봉사의 기회를 인식하고 붙잡게 될 수 있다.

여러 대회에서 성서의 특정한 책의 의미에 관심이 집중되어 왔다. 예를 들어 1958년에 그리고 다시 1977년에, 그리스도를 왕으로 하는 하나의 세계 정부를 마련하실 하나님의 목적에 관해 예언자 다니엘이 기록한 예언을 검토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는 양장본 서적이 발표되었다. 1971년에 관심을 기울인 책은 ‘열국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는 하나님의 선언을 강조하는 에스겔서였다. (에스겔 36:23) 1972년에는 스가랴와 학개가 기록한 예언이 자세히 고려되었다. 1963년, 1969년, 1988년에는 큰 바벨론의 무너짐과 하나님의 영광스런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를 생생하게 예언하는 계시록의 감동적인 예언을 상세하게 검토하였다.

대회들은 다양한 주제—신권 통치의 증가, 깨끗한 숭배, 연합된 숭배자, 담대한 전도인, 성령의 열매, 제자를 삼는 일, 만국을 위한 기쁜 소식,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주권, 거룩한 봉사, 승리의 믿음, 천국 충성, 충절 고수자, 여호와를 신뢰함, 경건한 정성, 빛 비추는 자 등등—를 부각시켰다. 각각의 대회는 조직 및 그와 연합한 사람들의 영적 성장에 기여하였다.

복음 전파 활동에 대한 자극제

큰 대회뿐 아니라 보다 작은 대회들도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일과 관련하여 큰 격려의 원천이 되어 왔다. 연설과 실연이 실용적인 교훈을 베푼다. 야외 봉사 경험담과 최근에 도움을 받아 성서 진리를 알게 된 사람들의 경험담이 언제나 프로그램에 포함된다. 그뿐 아니라, 여러 해 동안 대회중에 계획된 실제 야외 봉사는 매우 유익하였다. 그것은 대회 도시에서 훌륭한 증거가 되었으며 증인 자신들에게 큰 격려의 원천이었다.

야외 봉사는 1922년 1월에 캐나다 매니토바 주 위니펙에서 계획된 대회 활동의 일부가 되었다. 그것은 또한 그 해 나중에 미국 오하이오 주 시더포인트에서 열린 총회중에도 특징을 이루었다. 그 후에는, 하루나 그 일부 혹은 여러 날에 걸쳐 각 날의 일부를 따로 정하여 참석자들이 대회 도시와 그 주변에서 전파 활동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그로 인해 대도시 지역에서는, 증인을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사람들이 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목적에 관한 좋은 소식을 들을 기회를 갖게 되었다.

덴마크에서는 대회에서 그러한 봉사일이 1925년에 처음 마련되었는데, 그 때 400명 내지 500명이 뇌레볼에 모였다. 그 대회에서 야외 봉사에 참여한 275명 중 많은 사람에게는 그것이 첫 봉사였다. 일부 사람들은 염려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맛본 후에 자기 고장의 구역에서도 열정적인 복음 전파자가 되었다. 그 대회 후에 그리고 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덴마크에서 1일 봉사 대회가 많이 열렸으며, 형제들이 주변의 읍들로부터 초대받았다. 그들이 연합하여 봉사의 직무에 참여하고 뒤이어 연설을 듣기 위해 모였을 때 열심이 증가된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와 비슷한—그러나 2일간의—봉사 대회가 영국과 미국에서 열렸다.

더 큰 대회들에서 참석자들의 야외 활동은 흔히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1936년부터, 광고판을 걸치고 광고지를 배부하는 증인들의 질서 정연한 행렬이 대회 공개 강연을 광고하였다. (그러한 광고판을 앞쪽과 등쪽에 하나씩 걸쳤기 때문에 처음에는 “샌드위치 표지”라고 불렀다.) 때로는 천여 명의 증인이 특정한 대회에서 그러한 행렬에 참가하였다. 다른 일부 사람들은 정규 호별 방문에 참여하여, 모두가 와서 프로그램을 듣도록 초대하였다. 증인 개개인이 다른 사람과 함께 봉사하고 수백 명, 아니 수천 명의 증인이 함께 봉사의 직무에 참여하는 것을 보는 것은 매우 격려적이었다. 동시에, 상당한 범위의 지역에 사는 일반인들은 여호와의 증인이 읍에 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증인이 가르치는 것을 몸소 듣고 그들의 행실을 직접 관찰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흔히 대회 연설들은 보이는 청중만이 아니라 훨씬 더 많은 사람이 들을 수 있었다. 러더퍼드 형제가 1927년에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대회에서 “만민을 위한 자유”라는 강연을 하였을 때, 그 강연은 역사적인 일련의 53개 방송국을 통해 국제적으로 수많은 라디오 청중에게 전달되었다. 이듬해에는 미국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로부터, “백성을 위한 통치자”라는 연설이 두 배로 많은 방송국에 의해 방송되었으며, 단파 송신기가 그것을 멀리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있는 청취자들에게 전해 주었다.

1931년에, 주요 라디오 방송망들은 러더퍼드 형제의 대회 연설을 방송하려는 계획에 협조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워치 타워 협회는 “천국—세계의 희망”이라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 미국 전화 전신 회사와 합작하여 163개 방송국으로 이루어진 자체 방송망을 만들었는데, 그중에는 그 때까지로서는 역사상 가장 큰 유선 방송망이 포함되었다. 그뿐 아니라, 세계 여러 지역에서 300개 이상의 방송국이 음반을 사용하여 프로그램을 방송하였다.

1935년에 워싱턴 시에서 열린 대회중에, 러더퍼드 형제는 “정부”라는 제목으로 연설하면서 그리스도의 지배 아래 있는 여호와의 왕국이 조만간 모든 인간 정부를 대치할 것이라는 사실에 주의를 강력하게 이끌었다. 워싱턴 오디토리엄에서 2만여 명이 그 연설을 들었다. 그 연설은 또한 무선과 전화선으로 세계 도처에 전해져, 중앙 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유럽, 남아프리카 공화국, 태평양의 섬들, 동양의 나라들에 도달하였다. 그러한 방법으로 그 연설을 들은 사람의 수는 수백만 명이 족히 되었을 것이다. 워싱턴의 두 주요 신문사는 그 강연 내용을 발행하기로 한 계약을 파기하였다. 그러나 형제들은 워싱턴 시내의 세 곳과 그 도시 주변의 40곳에 확성차를 배치하였으며, 연설이 확성차를 통해 12만 명 가량의 또 다른 청중에게 재방송되었다.

뒤이어 1938년에, “사실을 보라”라는 직설적인 강연이 영국 런던의 로열 앨버트 홀로부터 세계 전역의 약 50개 대회 도시로 전달되었는데, 총참석자 수는 약 20만 명이었다. 그에 더하여, 수많은 라디오 청중이 그 연설을 들었다.

따라서 여호와의 증인은 비교적 소수였지만, 그들의 대회는 왕국 소식의 공개적 선포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전후의 유럽 대회

참석자들에게 있어서, 여느 대회보다 뛰어난 대회들이 있었다. 2차 세계 대전 직후 유럽의 대회들이 그러하였다.

그러한 대회들 중 하나는 증인이 독일 강제 수용소에서 석방된 지 4개월이 채 안 된 1945년 8월 5일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열렸다. 약 2500명의 참석자가 예상되었다. 그들 중 2000명이 숙박을 필요로 하였다. 필요한 숙소를 마련하기 위해, 지방 증인들은 자기 집의 마루에 짚을 깔았다. 사방에서 참석자들은 가능한 모든 수단—배, 트럭, 자전거, 히치하이크—을 사용하여 왔다.

그 대회에서 그들은 웃고 울고, 노래하였으며 여호와의 선하심에 대해 그분께 감사드렸다. 한 참석자가 이렇게 말한 바와 같다. “그들의 기쁨은 속박으로부터 막 벗어난 신권 조직의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전쟁 전에는 네덜란드에 증인이 500명도 안 되었다. 총 426명이 체포되고 투옥되었으며, 그들 중 117명은 박해의 직접적인 결과로 사망하였다. 대회에서 일부 사람들은 죽었다고 생각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어 참으로 기뻤다! 찾다가 찾지 못하여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날 저녁에, 여호와의 증인이 그러한 심한 박해의 표적이 된 이유를 설명하는 공개 강연을 4000명이 주의 깊이 경청하였다. 그들은 고난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일을 계속 추진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이듬해인 1946년에, 독일의 형제들은 뉘른베르크에서 대회를 마련하였다. 그들은 히틀러의 열병장이었던 체펠린비제의 사용을 허락받았다. 대회 둘째 날에, 비밀 경찰의 만행을 직접 체험하였고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여러 해를 보낸 에리히 프로스트는 “시련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공개 강연을 하였다. 6000명의 증인이 참석하였고 그 때 뉘른베르크에서 온 3000명의 일반인이 자리를 함께하였다.

그 대회의 마지막 날은 공교롭게도 그 곳 뉘른베르크의 전범 재판소에서 선고가 공표된 날이었다. 군 당국은 그날 통행 금지를 선포하였지만, 오랜 협상 끝에 여호와의 증인이 나치의 반대에 직면하여 취한 입장을 고려하여 증인이 대회를 평화롭게 마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데 동의하였다. 따라서 그 마지막 날에, 형제들은 “세상의 음모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하지 않음”이라는 고무적인 연설을 듣기 위해 모였다.

그들은 발생하는 일에서 여호와의 손길을 느꼈다. 여호와의 증인은 자신들을 말살하려고 한 정권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선고받는 바로 그 때, 히틀러가 나치 권력을 한껏 과시했던 장소에서 여호와를 숭배하기 위해 모였던 것이다. 대회 사회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아마겟돈 전쟁에서 원수들에 대해 거둘 하나님의 백성의 승리의 예고편인 이 날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만도 집단 수용소에서 보낸 9년을 상쇄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인상적인 그 외 대회들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이 확장됨에 때라, 대회들이 세계 전역에서 열렸다. 그 모든 대회는 참석자들에게 두드러진 특징들을 가지고 있었다.

동광 지대의 중심부에 있는 북로디지아(지금은 잠비아) 키트웨에서는, 1952년에 워치 타워 협회장의 방문중에 대회를 열기로 계획하였다. 대회장은 현재 참볼리로 알려진 곳에 있는 한 광산촌 변두리의 넓은 지역이었다. 버려진 개미탑의 꼭대기를 평평히 하고 초가 오두막을 지어 연단으로 사용하였다. 그 외에 숙소용으로 지은 이층식 초가 오두막들이 바퀴살처럼 주요 청중석으로부터 밖으로 180미터 뻗어 있었다. 성인 남자와 소년들이 일부 오두막에서 잤고, 성인 여자와 소녀들이 다른 오두막에서 잤다. 일부 사람은 참석하기 위해 자전거로 2주일 동안 여행하였다. 다른 어떤 사람들은 여러 날 동안 걸은 다음 구식 버스로 여행을 끝마쳤다.

좌석은 노천의 딱딱한 대나무 의자였지만, 회기중에 청중은 연설을 경청하였다. 그들은 들으러 왔으며,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 2만 명의 청중이 노래하는 모습은 눈물겹도록 아름다웠다. 악기 반주는 없었지만, 목소리의 조화는 매우 훌륭하였다. 그 증인들은 여러 배경과 부족으로부터 나왔지만, 노래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그들 가운데 연합이 분명히 나타났다.

그리고 포르투갈에서 숭배의 자유를 얻기 위한 힘든 노력이 거의 50년 동안 계속된 후, 그 곳의 여호와의 증인이 1974년 12월 18일에 법적 인가를 받았을 때, 어떠한 감정을 가졌을 것인지 상상할 수 있는가? 그 때 그들의 수는 약 1만 4000명에 불과하였다. 며칠 안 되어, 그들 중 7586명이 포르투의 한 경기장 관람석을 가득 메웠다. 이튿날에 또 다른 3만 9284명이 리스본의 축구 경기장에 가득 찼다. 노어 형제와 프랜즈 형제는 많은 사람이 결코 잊지 못할 그 행복한 행사에 그들과 함께 참석하였다.

국제적 모임을 조직함

반세기 이상, 여호와의 증인은 여러 나라에서 여러 도시를 동시에 연결하는 대규모 대회를 열었다. 그들의 국제적 형제애의 감정은 그들 모두가 주 도시에서 나오는 주요 강연을 들을 수 있었던 그러한 행사에서 깊어졌다.

그러나 1946년에 비로소 대규모 국제 대회를 통해 세계 여러 지역의 대표자들이 한 도시에 모였다. 그 대회는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에서 열렸다. 전후 시대의 여행은 여전히 곤란하였지만, 미국 밖의 32개 나라에서 온 302명의 대표자를 포함하여 참석자 수는 8만 명에 달하였다. 회기는 20개 언어로 진행되었다. 복음 전파 활동을 확장하기 위한 목적으로 실용적인 교훈이 많이 베풀어졌다. 대회의 주요 부분 중 하나는 재건과 확장 문제에 관한 노어 형제의 연설이었다. 청중은 협회 본부의 인쇄 및 사무실 시설과 라디오 방송 시설의 확장, 세계 주요 나라들에서의 지부 사무실 설립, 그리고 선교 활동의 확장에 관한 계획을 듣고서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그 대회 직후에, 노어 형제와 헨첼 형제가 논의된 일을 실행하기 위해 세계 일주 여행을 떠날 수 있도록 세부 계획이 세워졌다.

그 후 여러 해 동안, 참으로 역사적인 대회들이 뉴욕 시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렸다. 1950년 7월 30일부터 8월 6일까지 열린 그 첫 대회에서, 67개 나라의 대표자들이 참석하였다. 지부의 종, 선교인, 그 외 대표자들의 짤막한 보고들이 프로그램에 포함되었다. 그로 인해 대회 참석자들은 그 모든 나라에서 수행되는 열렬한 복음 전파 활동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마지막 날에 “우리는 지상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라는 강연의 참석자 수는 12만 3707명으로 증가하였다. 대회 주제는 “신권 통치의 증가”였다. 수적인 큰 증가에 관심이 기울여졌다. 하지만 사회자 그랜트 수터가 힘주어 지적한 바와 같이, 그것은 보이는 조직 내에서 명석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을 칭송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이렇게 언명하였다. “다수의 새로운 힘은 여호와의 영예를 위해 바쳐진 것입니다. 마땅히 그러해야 하며, 우리는 다른 식으로는 그 힘을 보유하지 않을 것입니다.”

1953년에, 뉴욕 양키 스타디움에서 또 다른 대회가 열렸다. 이 때의 참석자 수는 최고 16만 5829명에 달하였다. 그 곳에서 개최된 첫 대회가 그러하였듯이, 프로그램은 감동적인 성서 예언의 검토,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방법에 관한 실용적인 교훈, 그리고 많은 나라의 보고로 가득 찼다. 회기는 오전 9시 30분경에 시작되었지만, 보통 오후 9시나 9시 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끝났다. 그 대회는 만 8일간의 즐거운 영적 잔치였다.

증인의 가장 큰 대회였던 1958년의 뉴욕 대회에서는, 대회 청중을 수용하기 위해 양키 스타디움뿐 아니라 인근의 폴로 그라운드 그리고 스타디움 밖의 초과 인원 지역을 사용할 필요가 있었다. 마지막 날에는 만원이 되어 양키 스타디움의 경기장 바닥까지 사용하도록 특별 허가를 받았으며,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어가서 신발을 벗고 잔디에 앉아 있는 장면은 참으로 감격스런 광경이었다! 공개 강연을 듣기 위해 참석한 사람의 수를 계수해 보니 25만 3922명이었다. 이 대회에서 7136명—성서에 보고된 기원 33년 오순절의 역사적인 행사에서 침례받은 사람 수의 두 배가 훨씬 넘는 수!—이 헌신의 상징으로 물침례를 받았을 때 여호와께서 종들의 봉사의 직무를 축복하신 증거가 한층 더 나타났다.—사도 2:41.

그러한 대회들의 전체 운영은 효율적인 조직 이상의 훨씬 더 중요한 것에 대한 증거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이 백성 가운데 작용하고 있음을 분명히 나타내 주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 근거한 형제 사랑이 모든 부면에서 분명히 나타났다. 많은 봉급을 받는 조직자가 전혀 없었다. 무보수 자진 봉사자들이 모든 부서에 임명되었다. 종종 가족 그룹들로 이루어진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들이 다과부를 돌보았다. 그들은 또한 따뜻한 음식을 준비하였으며, 스타디움 밖의 거대한 천막 안에서 분당 최고 1천 명의 비율로 참석자들에게 배식하였다. 안내인으로 봉사하고 필요한 가설과 요리 및 배식 그리고 청소 등등을 수만 명이 돌보았는데, 그들 모두는 그러한 일에 기꺼이 참여하였다.

참석자들에게 필요한 숙소를 마련하기 위해 더 많은 자진 봉사자가 수십만 시간을 바쳤다. 어떤 해에는, 적어도 대회 참석자의 일부를 돌보기 위해 트레일러 및 천막으로 이루어진 도시가 조직되었다. 1953년에, 증인은 트레일러 도시를 조직하도록 땅을 빌려 준 뉴저지의 한 농부를 위해 무임으로 16헥타르의 곡식을 추수해 주었다. 4만 5000명이 넘는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위생 시설, 조명 시설, 샤워 시설, 세탁실, 간이 식당, 식료 잡화점이 모두 설치되었다. 사람들이 들어옴에 따라, 하루 아침에 하나의 도시가 생기게 되었다. 뉴욕과 그 주변의 호텔과 개인 집들에 수많은 사람이 묵었다. 그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그런데 여호와의 축복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이동하는 대회

이 국제적인 형제애를 나누는 성원들은 다른 나라의 동료 증인에 대해 예리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자기 나라 밖에서 열리는 대회에 참석할 기회를 포착하였다.

일련의 깨끗한 숭배 대회 중 첫 대회가 1951년에 영국 런던의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렸을 때, 40개 나라의 증인이 참석하였다. 프로그램은 참 숭배의 실용적인 면과 봉사의 직무를 천직으로 삼는 일을 강조하였다. 영국으로부터, 많은 증인이 다음 두 달 동안 아홉 개의 대회가 열리게 되어 있는 유럽 대륙으로 여행하였다. 이 중 가장 큰 대회는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에서 열렸는데, 24개 나라에서 온 4만 7432명이 참석하였다. 형제들의 따뜻한 성의가 프로그램 끝에 나타났는데, 관현악이 연주되기 시작하였고 독일 형제들은 자리를 함께하기 위해 외국에서 온 동료 증인들 위에 하나님의 보호가 있기를 비는 작별 노래를 자진적으로 불렀다. 손수건을 흔들었으며, 수백 명이 이 웅대한 신권 잔치에 대한 개인적인 인식을 나타내기 위해 무리를 지어 경기장을 가로질러 갔다.

1955년에, 더 많은 증인이 대회 때에 외국의 그리스도인 형제들을 방문할 계획을 하였다. (각각 700명의 승객을 태운) 두 척의 전세 선박과 42대의 전세 비행기로, 미국과 캐나다의 대표자들이 유럽으로 갔다. 독일에서 발행된 「성조기」(The Stars and Stripes) 신문 유럽판은 증인들이 쇄도한 것을 가리켜 “2차 세계 대전중에 연합군이 침공한 후 미국인이 유럽을 두루 다니는 가장 큰 집단 이동일 것”이라고 묘사하였다. 그 외에도 중앙 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대표자들이 왔다.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은 증인이 로마와 뉘른베르크에서 대회를 열지 못하게 하려고 노력하였지만, 그 두 대회와 그 외 여섯 대회가 여름에 유럽에서 열렸다. 참석자 수는 가장 적은 로마의 경우가 4351명이었으며, 가장 많은 뉘른베르크의 경우가 10만 7423명이었다. 1만 7729명의 또 다른 그룹이 당시 서베를린의 발트뷔네에 모였다. 당시 동독의 형제들은 그 곳에 가는 데 위험이 다소 적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믿음 때문에 투옥된 경험이 있거나 당시에 투옥되어 있는 가족 성원을 가지고 있었지만, 여전히 믿음 안에서 확고하였다. 대회 주제—“승리의 왕국”—는 참으로 적절하였다!

이미 많은 국제 대회가 있었지만, 1963년에 있었던 대회는 전례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세계 일주 대회였다. 미국 위스콘신 주 밀워키에서 시작된 그 대회는 뉴욕으로, 다음에는 유럽의 4개 주요 도시로, 그리고 중동을 거쳐, 인도, 버마(지금의 미얀마), 타이, 홍콩, 싱가포르, 필리핀, 인도네시아, 오스트레일리아, 타이완, 일본, 뉴질랜드, 피지, 한국, 하와이로 이동한 다음, 다시 북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갔다. 도합 161개 나라의 대표자들이 참석하였다. 총참석자 수는 58만 명을 넘었다. 약 20개 나라의 583명은 대회와 함께 이동하여 이 나라 저 나라를 다니면서 세계 일주를 하였다. 특별한 여행을 통해 그들은 종교적으로 관심이 있는 장소를 볼 수 있었고, 현지 형제 자매들과 함께 호별 방문 봉사도 하였다. 그 여행자들은 자신들의 경비를 부담하였다.

라틴 아메리카의 대표자들은 대부분의 국제 대회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1966-67년에는 그들이 대회를 개최할 차례가 되었다. 참석자들은 예레미야에 관한 성서 기록을 생생하게 묘사한 드라마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그 드라마는 모든 참석자로 하여금 그 기록이 우리 시대에 의미하는 바를 인식하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 대대적인 성서 교육 운동이 라틴 아메리카에서 수행되는 배경을 방문객들이 직접 보았을 때 그리스도인 사랑의 띠가 강화되었다. 방문객은 동료 신자들의 강한 믿음으로 인해 깊은 감동을 받았다. 참석자 중에는 극복하기 어려운 것처럼 보이는 장애—가족의 반대, 홍수, 소유물 상실—를 극복한 동료 신자들이 많았던 것이다. 참석자들은 경험담을 듣고 큰 격려를 받았는데, 일례로 우루과이의 한 연약한 특별 파이오니아 자매의 경험담이 있었다. 회견에 응한 그 자매는 이미 80명을 그리스도인 침례에 이르도록 도왔는데, 그중 많은 사람이 등단하였다! (1992년 현재, 그는 105명을 침례받도록 도왔다. 그는 여전히 연약하지만 여전히 특별 파이오니아다!) 또한 초창기 길르앗을 졸업하고 여전히 임지에서 일하는 선교인들을 만나는 것은 참으로 격려적인 일이었다! 그러한 대회는 세계의 그 지역에서 수행되는 일에 훌륭한 자극제가 되었다. 그 나라들 중 많은 나라에서, 지금 여호와의 찬양자의 수가 그 당시 수의 10배, 15배 혹은 20배나 된다.

수년 후인 1970-71년에, 아프리카에서 열린 국제 대회에서 외국 증인들이 형제들과 교제할 수 있었다. 그러한 대회 중 가장 큰 것은 나이지리아 라고스에서 열린 대회였다. 그 곳에서는 모든 시설을 토대부터 지어야 하였다. 따가운 햇볕으로부터 참석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대나무로 하나의 도시—청중석, 숙소, 간이 식당, 그 외 부서—를 건설하였다. 그렇게 하는 데 10만 개의 대나무 장대와 갈대로 엮은 3만 6000개의 큰 돗자리가 필요하였는데, 형제 자매들이 그 모든 것을 준비하였다. 프로그램은 17개 언어로 동시에 진행되었다. 참석자 수는 12만 1128명에 달하였으며, 3775명의 새로운 증인이 침례받았다. 수많은 부족 그룹의 대표들이 참석하였으며, 참석자 중 상당수는 서로 전쟁을 벌였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 형제애의 띠로 연합해 있는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었다!

대회 후에, 외국 대표자 중 일부는 버스를 타고 최근의 내란으로 대파된 지역을 보러 이그볼란드로 갔다. 방문객들이 지방 증인들로부터 인사와 포옹을 받을 때 그것은 이 읍 저 읍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사람들이 거리로 달려나와 구경하였다. 흑인과 백인 간의 사랑과 연합의 그러한 전시는 그들이 전에 결코 볼 수 없었던 일이었다.

일부 나라에서 여호와의 증인은 한곳에 함께 모일 수 없을 정도로 수가 많아졌다. 그러나 때로는 몇몇 대규모 대회들이 동시에 열렸으며, 뒤이어 다른 주일에도 더 많은 대회가 있었다. 1969년에, 그런 식으로 마련된 대회에서 느낄 수 있는 연합은 주요 연사의 일부가 여러 대회를 비행기로 왔다갔다하면서 그 모든 대회에서 일하였기 때문에 강화되었다. 1983년과 1988년에,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여러 대규모 대회들이 심지어 국제적으로도 통치체 성원의 주요 연설의 전화 송신을 통해 연결되었을 때에 그와 비슷한 일치성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여호와의 증인 가운데 연합의 참된 기초는 그들 모두가 여호와를 유일하신 참 하나님으로 숭배하고, 그들 모두가 성서를 지침으로 삼고, 그들 모두가 동일한 영적 급식 프로그램으로부터 유익을 얻고, 그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지도자로 받들고,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영의 열매를 생활에서 나타내려고 하고,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왕국을 신뢰하며, 그들 모두가 왕국의 좋은 소식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일에 참여한다는 데 있다.

여호와를 국제적으로 찬양하도록 조직됨

여호와의 증인의 수는 수십 개 나라 각각의 인구를 능가할 정도로 증가해 왔다. 증인의 대회들이 가장 좋은 결과를 이루기 위해서는 주의 깊은 많은 계획이 요구된다. 그러나 대개 여러 지역의 증인들이 어디에 참석할 것인지에 관해 간단히 요청하기만 하면 모든 사람을 위해 충분한 자리를 확보할 수 있다. 지금 종종 국제 대회를 계획할 때, 통치체는 가고 싶어하며 갈 수 있는 입장에 있는 증인의 수뿐만 아니라 이용할 수 있는 대회 시설 규모와 참석할 지방 증인의 수 그리고 대표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숙소의 총수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각 나라에 최대 수를 할당할 수 있다. 1989년에 폴란드에서 열린 세 개의 “경건한 정성” 대회를 계획할 때 그렇게 하였다.

그 대회에 폴란드에서 약 9만 명의 여호와의 증인과 수많은 새로운 관심자가 참석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또한 영국, 캐나다, 미국으로부터 많은 사람이 참석하도록 초대받았다. 이탈리아, 프랑스, 일본에서 온 수많은 대표자들이 환영을 받았다. 스칸디나비아와 그리스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적어도 37개 나라의 대표자들이 참석하였다. 프로그램의 일부는 폴란드어나 영어 연설을 무려 16가지 언어로 통역할 필요가 있었다. 총참석자 수는 16만 6518명이었다.

그 대회에 참석한 증인의 큰 그룹은 구소련과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 왔으며, 그 외 동유럽 국가들로부터도 상당한 규모의 그룹이 참석하였다. 호텔과 학교 기숙사로는 모든 사람을 수용할 수 없었다. 폴란드 증인은 후대를 나타내어 마음과 집을 개방하였으며, 가지고 있는 것을 기꺼이 나누어 주었다. 146명으로 이루어진 한 회중은 1200여 명의 대표자를 위한 숙소를 제공하였다. 그 대회에 참석한 일부 사람에게 있어서, 15명 내지 20명보다 많은 수로 이루어진 여호와의 백성의 큰 모임에 참석해 보기는 그 때가 처음이었다. 그들이 운동장에 수만 명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그들과 함께 기도하고 일제히 소리 내어 여호와께 찬양을 드리는 노래를 부를 때 그들의 마음에 깊은 인식이 솟아났다. 그들이 회기와 회기 사이에 함께 교제할 때, 언어의 차이로 인해 마음에 있는 것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때가 많았지만 따뜻한 포옹이 있었다.

대회가 끝날 때, 그들의 마음은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주신 여호와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득 찼다. 바르샤바에서는, 사회자가 작별의 말을 하자, 청중은 갑자기 손뼉을 치기 시작하였는데 그 소리가 적어도 10분 동안 줄어들지 않았다. 마지막 노래와 기도가 있은 후에, 박수가 다시 시작되었으며 청중은 관람석에서 오랫동안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이 행사를 위해 여러 해를 기다렸으며 그것이 끝나는 것을 아쉬워하였다.

이듬해인 1990년에, 당시 동독에서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40년간의 금지령이 해제된 지 5개월도 안 되어, 또 하나의 감동적인 국제 대회가 베를린에서 열렸다. 4만 4532명의 참석자 가운데는 65개 나라에서 온 대표자들이 있었다. 일부 나라에서는 소수만 왔으며, 폴란드에서는 약 4500명이 왔다. 그러한 대회에 참석할 자유가 결코 없었던 사람들의 깊은 감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전체 청중은 여호와께 찬양을 드리는 노래를 함께 부를 때 기쁨의 눈물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 해 나중에,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그와 비슷한 대회가 열렸을 때, 13만 4406명의 국제적인 청중을 수용하기 위해 두 개의 큰 운동장이 필요하였다. 뒤이어 아르헨티나에서 대회가 있었는데 그 곳에서 또다시 국제적인 청중을 수용하기 위해 두 개의 운동장이 동시에 사용되었다. 1991년이 시작되면서, 그 이상의 국제 대회들이 필리핀, 타이완, 타이에서 진행되었다. 또한 그 해에 여러 나라에서 간 수많은 청중이 동유럽—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그리고 지금의 크로아티아—에서 열린 대회들에 참석하였다. 그리고 1992년에는 28개 나라의 대표들이 러시아에서 최초로 열린 참으로 국제적인 여호와의 증인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페테르부르크에 모이는 특권을 가졌는데, 그들의 수는 4만 6214명이었다.

정기적으로 영적인 새 힘을 주는 기회

여호와의 증인이 여는 모든 대회가 국제적인 모임은 아니다. 그러나 통치체는 1년에 한 번 주요 대회를 마련하며, 동일한 프로그램이 전세계에서 여러 언어로 베풀어진다. 그러한 대회들은 매우 큰 규모이어서 여러 곳에서 온 증인들과 교제를 나누는 기회가 되기도 하고, 더 작은 규모로 여러 도시에서 열려 새로운 사람들이 참석하기 더 쉽고 수많은 소도시에서 일반인이 여호와의 증인의 넓은 단면을 가까이서 잘 볼 수 있게 되기도 한다.

그뿐 아니라, 1년에 한 번 (20개 가량의 회중으로 구성된) 각 순회구는 영적 교훈과 격려를 주는 2일 프로그램을 위해 모인다. * 또한 1987년 9월 이후, 특별 대회일이라는 세워 주는 1일 프로그램이 1년에 한 번 순회구별로 준비되고 있다. 가능한 경우에는, 협회 본부 성원이나 자국의 지부 성원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 파견된다. 여호와의 증인은 그러한 프로그램을 매우 소중히 여긴다. 많은 지역에서는 대회장이 멀지 않으며 가는 데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한 여행하는 감독자는 어느 연로한 부부가 짐바브웨의 순회 대회를 참석하기 위해 여행 가방과 담요를 가지고 76킬로미터를 걸었던 일을 기억한다.

이제는 대회중의 야외 봉사가 그 모든 대회의 한 부면인 것은 아니지만, 증인이 야외 봉사를 다소 덜 중요시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대회장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지금 그 지방 증인의 방문을 정기적으로—어떤 경우에는 수주일마다—받고 있다. 대회 참석자들은 비공식 증거의 기회를 깨어 살피며 그들의 그리스도인 행실은 또 다른 면으로 강력한 증거가 된다.

참 형제애의 증거

관찰자들은 대회에서 증인 가운데 형제애가 분명히 나타나는 것을 쉽사리 알 수 있다. 그들은 증인 가운데 편파적인 태도가 없으며 서로 처음 만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진정한 온정이 분명히 나타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1958년에 뉴욕에서 열린 성의 국제 대회 때에, 뉴욕의 「암스테르담 뉴스」(8월 2일자)는 이렇게 보도하였다. “온갖 계층과 세계 전역의 흑인과 백인과 동양인이 어느 곳에서나 즐거운 표정으로 자유롭게 뒤섞여 있다. ·⁠·⁠· 120개 나라에서 온 숭배하는 증인들은 평화스럽게 함께 생활하며 숭배하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얼마나 쉬운 일인지를 미국인들에게 보여 주었다. ·⁠·⁠· 대회는 사람들이 함께 일하고 생활하는 방식에 대한 빛나는 본이다.”

더 가까운 1985년에 여호와의 증인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더반과 요하네스버그에서 동시 대회를 열었을 때, 참석자들 가운데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모든 주요 인종·언어 그룹뿐 아니라 다른 23개 나라의 대표자들이 포함되었다. 7만 7830명의 참석자들 가운데 화기애애함이 역력히 나타났다. 한 젊은 인도 여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아름다운 광경이군요. 혼혈인, 인도인, 백인 및 흑인이 모두 함께 어울려 있는 것을 보고서 인생관 전체가 바뀌었습니다.”

그러한 형제애의 감정은 미소 짓고 악수하고 서로를 “형제”, “자매”라고 부르는 것 이상으로 표현된다. 예를 들어, 1963년에 전세계적으로 “영원한 기쁜 소식” 대회가 준비되고 있을 때, 여호와의 증인은 다른 사람이 대회에 참석할 수 있도록 재정적으로 돕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협회는 기꺼이 그 기금이 세계 전역의 형제들에게 유익하게 사용되게 할 것이라는 광고를 들었다. 간청하는 일이 없었으며, 업무비 지출도 전혀 없었다. 전액이 명시된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한 방법을 통해, 8179명이 대회에 참석하도록 도움을 받았다. 중앙 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의 모든 나라에서 온 참석자들은 도움을 받았다. 중동과 극동에 사는 많은 사람과 아프리카의 수천 명처럼 도움을 받은 수많은 사람은 전 시간 봉사를 여러 해 동안 수행한 형제 자매들이었다.

1978년 말경에,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대회를 열 계획이 있었다. 쿡 제도의 증인들은 그 사실을 알고 참석하고 싶어하였다. 그런데 그 섬들의 경제 형편상 각자가 여행하는 것은 상당한 비용이 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뉴질랜드의 사랑 많은 영적 형제 자매들은 약 60명의 섬사람을 위해 왕복 여행 요금을 기부하였다. 그들은 마오리인, 사모아인, 니우에인, 그리고 백인 형제들과 함께 영적 잔치에 참석하게 되어 참으로 행복하였다!

1988년에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린 “하나님의 공의” 지역 대회의 끝에 있었던 일은 여호와의 증인 사이의 영이 어떠한지를 잘 나타내 주었다. 나흘 동안 그리스, 스페인, 아랍, 영국, 이탈리아, 포르투갈, 프랑스 대표자들이 동일한 프로그램을 자기 언어로 즐겼다. 그러나 마지막 회기 끝에, 4만 5000명의 참석자 모두는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형제애와 목적의 연합을 감동적으로 전시하는 데 동참하였다. 그들은, 각 그룹이 자기 언어로, 함께 이렇게 노래하였다. “노래하세, ·⁠·⁠· ‘여호와의 통치하심, 땅 ·⁠·⁠· 기뻐하라.’”

[각주]

^ 76항 그러한 드라마가 다음 25년 동안 대회에서 70가지 더 상연되었다.

^ 89항 1947년부터 1987년까지, 순회 대회가 매년 두 번씩 열렸다. 1972년까지는 3일 대회였는데, 그 후 2일 프로그램이 제정되었다.

[255면 삽입]

‘사랑의 영과 형제로서의 친절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256면 삽입]

대회 열차—전원 승차!

[275면 삽입]

많은 봉급을 받는 대회 조직자가 아니라, 무보수 자진 봉사자들

[278면 삽입]

흑인과 백인 간의 연합

[261면 네모와 삽화]

일곱 가지의 의미 심장한 대회 결의문

1922년에, “세계 지도자들에 대한 도전”이라는 제목의 결의문은 그 지도자들에게 인간이 이 땅을 다스릴 지혜를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든지 아니면 평화, 생명, 자유, 끝없는 행복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여호와로부터만 올 수 있음을 인정하든지 하라고 요구하였다.

1923년에,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대표한다고 사칭하는 조직으로부터 긴급히 떠나야 할 필요성을 다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경고”가 있었다.

1924년에, “교직자들을 고발함”은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의 비성경적인 교리와 관습을 폭로하였다.

1925년에, “희망의 소식”은 세상을 인도하는 빛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인간의 가장 큰 필요를 충족시켜 주지 못한 이유와 하나님의 왕국만이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하였다.

1926년에, “세상의 통치자들에 대한 증언”은 그 통치자들에게 여호와께서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땅의 정당한 왕으로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알렸다. 이 결의문은 통치자들이 영향력을 행사하여 사람들의 정신을 참 하나님께로 돌림으로써 재난이 사람들에게 임하지 않게 할 것을 강력히 권하였다.

1927년에, “그리스도교국의 사람들에 대한 결의문”은 인류를 압제하는 경제적·정치적·종교적 연합체를 폭로하였다. 이 결의문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국을 버리고 여호와와 그리스도께 맡겨진 그분의 왕국에 확신을 둘 것을 강력히 권하였다.

1928년에, “사단에 대항하고 여호와를 지지하는 선언”은 여호와의 기름부음받은 왕 예수 그리스도께서 조만간 사단을 감금시키시고 그의 악한 조직을 멸하실 것임을 분명히 밝혔으며, 의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여호와의 편에 설 것을 강력히 권하였다.

[272, 273면 네모와 삽화]

일부 큰 대회의 특징

수백 명의 열정적인 대표자가 배로, 수천 명이 비행기로, 수만 명이 자동차와 버스로 도착하였다

충분한 숙소를 찾고 배정하는 데는 훌륭한 조직과 많은 자진 봉사자가 필요하였다

이러한 8일의 대회중에, 따뜻한 음식—수만 명분—이 참석자들에게 정기적으로 배식되었다

1953년에 트레일러 및 천막 도시가 4만 5000여 명의 참석자를 수용하였다

1958년에 뉴욕에서, 7136명—기원 33년 오순절 이후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수—이 침례받았다

1953년 뉴욕에서, 여러 나라의 인사말 표지가 전시되었으며 회기가 21개 언어로 진행되었다

[256면 삽화]

1917년에 캐나다 매니토바 주 위니펙에서 열린 만국 성경 연구회 대회에 참석한 대표자들

[258면 삽화]

1919년에 오하이오 주 시더포인트에서 연설하는 J. F. 러더퍼드. 그는 모두가 「황금 시대」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왕국을 선포하는 일에 열심히 참여할 것을 강력히 권하였다

[259면 삽화]

1922년에 시더포인트에서 열린 대회. “왕과 왕국을 광고하라”는 외침이 있었다

[260면 삽화]

조지 갱거스는 1922년에 시더포인트 대회에 참석하였다. 그 후 약 70년 동안 그는 하나님의 왕국을 열심히 선포하였다

[262, 263면 삽화]

오하이오 주 콜럼버스에서 열린 1931년 대회에서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이름을 열정적으로 받아들인 대표자들

[264면 삽화]

1950년에 N. H. 노어가 「신세계역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경」을 발표하는 장면

[264면 삽화]

성서 예언의 성취에 관한 F. W. 프랜즈의 연설은 대회의 주요 부분이었다 (뉴욕, 1958년)

[265면 삽화]

여러 해 동안 야외 봉사는 모든 대회의 두드러진 부분이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1939년(아래); 스웨덴 스톡홀름, 1963년(삽입 사진)

[266면 삽화]

J. F. 러더퍼드가 1935년에 워싱턴 시에서 연설하였을 때, 그 소식은 무선과 전화선으로 여섯 대륙에 전해졌다

[268면 삽화]

1946년에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에리히 프로스트는 “시련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열띤 강연을 하였다

[269면 삽화]

1952년에 N. H. 노어의 방문중에 북로디지아 키트웨에서 열린 노천 대회

[270, 271면 삽화]

1958년에 뉴욕에 있는 두 개의 큰 운동장을 가득 메운 25만 3922명의 청중이 “하나님의 왕국은 통치한다—세상 끝은 가까웠는가?”라는 소식을 들었다

폴로 그라운드

양키 스타디움

[274면 삽화]

그랜트 수터, 1950년 양키 스타디움의 대회 사회자

[274면 삽화]

존 그로(앉아 있는 사람), 1958년에 조지 카우치와 대회 조직을 논의하는 장면

[277면 삽화]

1963년에 세계 일주 대회가 열렸는데, 약 20개 나라의 대표자들이 세계 일주를 하면서 대회에 참석하였다

일본 교토(아래 왼쪽)는 27개 대회 도시 중 하나였다 한국에서 대표자들이 친분을 맺는 장면(중앙) 뉴질랜드에서 마오리인이 인사하는 장면(아래 오른쪽)

[279면 삽화]

17개 언어 그룹을 동시에 접대한 대회, 그 행사를 위해 지은 대나무 도시에서 (나이지리아 라고스, 1970년)

[280면 삽화]

세 개의 대규모 대회가 1989년에 폴란드에서 열렸는데, 37개 나라에서 온 대표자들이 참석하였다

수천 명이 호조프에서 침례받았다

바르샤바에서 청중은 매우 오랫동안 손뼉을 쳤다

T. 재라스(오른쪽)가 포즈나니에서 참석자들에게 연설하였다

구소련의 대표자들(아래)

호조프에서 프로그램의 일부가 15개 언어로 통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