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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규모로 함께 건축함

세계적인 규모로 함께 건축함

제20장

세계적인 규모로 함께 건축함

여호와의 증인 가운데 진정한 형제애의 감정은 여러 면에서 나타난다. 그들의 집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그 증거를 보게 된다. 그들의 대회에서는 그러한 형제애가 큰 규모로 나타난다. 그 감정은 그들이 회중의 모임을 위한 적합한 장소를 마련하기 위해 함께 일할 때도 분명히 나타난다.

1990년대가 시작될 무렵, 전세계에 여호와의 증인의 회중이 6만 개 이상 있었다. 그 이전 10년 동안, 매년 평균 1759개의 새로운 회중이 추가되었다. 1990년대 초까지는, 그 비율이 연간 3000여 개로 증가하였다. 그들 모두가 모이기 위한 적합한 장소를 마련하는 일은 엄청난 과제가 되어 왔다.

왕국회관

제1세기 그리스도인들의 경우가 그러하였듯이, 여호와의 증인의 많은 회중은 처음에는 대부분의 집회를 위해 개인 집을 사용하였다.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처음으로 정기적인 집회를 가졌던 소수의 사람들은 목공소를 사용하였다. 그들은 목공소의 하루 작업이 끝난 후 그 장소를 사용하기 위해 빌렸다. 박해 때문에, 스페인의 라코루냐 지방의 한 소규모 그룹은 작은 창고 곧 곳간에서 처음 집회를 가졌다.

더 넓은 공간이 필요하자, 여호와의 증인의 지방 회중들은 집회 장소를 빌릴 자유가 있는 나라에서는 집회 장소를 빌렸다. 그러나 그것이 다른 단체들도 사용하는 건물일 경우에는 집회 때마다 장비를 운반하거나 설치해야 하였으며, 흔히 담배 연기 냄새가 잘 가시지 않았다. 가능한 경우에, 형제들은 사용하지 않는 점포나 2층방을 회중 전용으로 빌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곳에서 임대료가 비싸고 적합한 장소를 구하기 어려워 다른 마련이 필요하였다. 어떤 경우에는 건물을 매입하여 개수하였다.

2차 세계 대전 전에, 소수의 회중은 집회 장소를 그 용도에 맞게 특별히 설계하여 건축하였다. 일찍이 1890년에도, 미국에 있는 성경 연구생의 한 그룹은 웨스트버지니아 주 마운트룩아웃에 집회 장소를 건축하였다. * 그러나 1950년대에 비로소 왕국회관 건축이 광범위하게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왕국회관이라는 이름은 1935년에 당시 워치 타워 협회장이던 J. F. 러더퍼드가 제안한 것이다. 하와이 호놀룰루의 협회 지부 시설과 관련하여, 그는 형제들이 집회를 볼 수 있는 회관을 건축하도록 마련하였다. 제임스 해러브가 그 건물을 무엇이라고 부를 것인지 묻자, 러더퍼드 형제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우리가 하는 일이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일이니까 ‘왕국회관’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 후 가능한 곳에서는, 증인이 정기적으로 사용하는 홀이 “왕국회관”이라고 적힌 간판으로 점차 식별되었다. 따라서 런던 태버내클이 1937-38년에 개수되었을 때, 그 이름을 왕국회관으로 바꾸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전세계 지방 회중의 주요 집회 장소는 여호와의 증인의 왕국회관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여러 가지 건축 방법

왕국회관을 빌리거나 건축할 것인지 여부는 개개 회중이 지방적으로 결정한다. 또한 회중이 건축·유지 비용을 부담한다. 기금을 절약하기 위해, 절대 다수의 회중은 가능한 한 건축 일의 많은 부분을 청부업자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하려고 한다.

회관 자체는 비용과 그 지역에서 구할 수 있는 것에 따라 벽돌, 석재, 목재 혹은 그 외 재료로 지을 수 있다. 나미비아의 카티마물릴로에서는 긴 풀을 엮어 지붕을 이었으며 개미탑에서 나온 (매우 단단하게 굳는) 진흙으로 벽과 바닥을 만들었다. 콜롬비아 세고비아의 증인들은 자체적으로 시멘트 벽돌을 만들었다. 캘리포니아 콜팩스에서는 마운트래슨의 화산암 원석을 사용하였다.

1972년에 집회 참석자 수는 흔히 200명이 넘었으므로, 레소토 마세루의 회중은 적합한 왕국회관을 건축할 필요가 있음을 알았다. 모든 사람이 그 공사를 도왔다. 연로한 형제들도 참여하기 위해 32킬로미터나 걸었다. 어린이들은 물통을 굴려 현장으로 날랐다. 자매들은 음식을 장만하였다. 또한 그들은 콘크리트 바닥 슬래브 타설 작업을 준비하기 위해 발로 땅을 밟아 다지면서 왕국 노래를 부르고 음악의 리듬에 맞추어 발을 굴렀다. 근처의 산에 가기만 하면 얻을 수 있는 사암을 사용하여 벽을 만들었다. 그 결과 약 250명이 앉을 수 있는 왕국회관이 생겼다.

때때로, 인근 회중의 증인들이 건축 일을 지원하였다. 따라서 1985년에 여호와의 증인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흑인 거주 지역인 임발리 읍에서 400명이 편하게 앉을 수 있는 회관을 지을 때, 인근에 있는 피터마리츠버그와 더반의 동료 증인들이 도우러 왔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인종적 동요가 있던 그 당시에 수십 명의 백인, 혼혈인, 인도인 증인들이 그 읍으로 몰려와 아프리카 흑인 형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일하는 것을 보고 이웃 사람들이 얼마나 감탄하였을 것인지 상상할 수 있지 않은가? 그 곳 읍장이 이렇게 단언한 바와 같다. “그것은 사랑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형제들은 자진적인 영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방의 상황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에 제한을 가한다는 것을 회중들은 알게 되었다. 회중 내의 남자들은 부양 가족이 있었으며 보통 주말과 혹 저녁에 잠시 그러한 공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많은 회중에는 건축 일에 숙련된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렇지만 열대 지방에 적합하게 다소 트인 비교적 간단한 건물은 며칠 혹은 아마 수주일 만에 세워질 수 있다. 주변 회중의 증인들의 도움으로, 보다 튼튼한 건물이 대여섯 달 만에 완공될 수 있다. 혹은 한두 해가 걸리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전세계 여호와의 증인은 1970년대에 들어서 새로운 회중이 매일 두세 개 형성되는 정도의 비율로 늘어나고 있었다. 1990년대 초에는 매일 최고 아홉 개의 증가율을 보였다. 새로운 왕국회관의 절실한 필요성을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인가?

속성 건축법 개발

1970년대 초에 미국에서는 웨브 시에서 모임을 갖고 있던 그룹을 위해 미주리 주 카터빌에 새로운 왕국회관을 건축하는 일을 인근 회중들에 있는 50여 명의 증인이 거들었다. 한 주말에 그들은 주요 구조물을 세웠으며 지붕 작업을 상당히 진행하였다. 여전히 할 일이 많았으며, 그 일을 마치는 데 여러 달 걸렸다. 그러나 그 일의 중요한 부분은 매우 짧은 기간에 완성되었다.

다음 10년 동안, 형제들은 약 60개의 회관을 함께 지으면서 장애물을 극복하였으며 더욱 효율적인 방법을 개발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기초 공사를 한 후 왕국회관 전체를 한 주말에 거의 완공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몇몇 회중 감독자들—모두 미국 중서부 출신—은 그러한 목표로 일하기 시작하였다. 회중들이 왕국회관 건축을 도와 달라고 요청하면, 그 형제들 중 한 명이나 그 이상이 공사에 관해 회중과 논의하였고 공사하기 전에 지방적으로 준비해야 할 일에 관해 자세히 알려 주었다. 무엇보다도, 건축 허가를 얻고 기초와 콘크리트 바닥 슬래브를 타설하고 전기를 공급받고 적소에 지하 배관을 하고 건축 자재의 조달을 위해 믿을 만한 마련을 해야 하였다. 그리고 나서 왕국회관 자체를 세우기 위한 날짜를 정할 수 있었다. 건축은 조립식이 아니라, 부지 위에 기초부터 차례로 짓게 되어 있었다.

실제 건축 일을 누가 할 것인가? 가능한 한, 자진적인 무보수 봉사자가 건축하였다. 종종 전 가족이 참여하였다. 공사를 조직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공사에 기꺼이 참여하고자 하는 숙련공 증인들과 접촉하였다. 그러한 증인 중 많은 사람은 매번 새로운 건축 공사를 열렬히 고대하였다. 공사에 대해 알게 된 그 외 증인들이 참여하고 싶어하였다. 주변 지역으로부터—그리고 더 먼 곳으로부터—수백 명이 건축 현장으로 몰려와서 가능한 한 어떤 면으로든 봉사하고 싶어하였다. 그들 중 대부분은 직업적인 건축자들이 아니었지만, 시편 110:3(「신세」 참조)에서 여호와의 메시야 왕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당신의 백성이 기꺼이 자원’할 것이라고 묘사한 내용에 부합됨을 확실하게 나타냈다.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되기 전 목요일 저녁에, 공사를 감독하는 사람들은 최종 세부 사항들을 계획하기 위해 모였다. 그 다음날 저녁에, 봉사자들은 일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를 이해하기 위해 공정에 관한 슬라이드를 보았다. 경건한 특성이 중요하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형제들은 사랑으로 함께 일하고 친절하고 참을성과 사려 깊음을 나타내도록 권고받았다. 모든 사람이 꾸준한 속도로 일하되 서두르지 말며 거리낌 없이 얼마의 시간을 내어 세워 주는 경험을 누군가에게 알리도록 권고받았다. 다음날 아침 일찍 건축이 시작되었다.

토요일 오전 정해진 시간에, 모든 사람은 당일의 성구 토의를 듣기 위해 하던 일을 멈추었다. 전체 일의 성공은 여호와의 축복에 달려 있다는 것을 잘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도를 드렸다.—시 127:1.

일이 시작되면 신속히 진행되었다. 한 시간 만에 샛기둥을 세웠다. 뒤이어 지붕 트러스를 올렸다. 샛기둥에 판자를 대고 못을 박았다. 전기공이 배선 작업을 시작하였다. 냉난방 덕트가 설치되었다. 캐비닛을 만들어 배치하였다. 때때로 주말 내내 비가 내리거나 날씨가 몹시 추워지거나 지독히 더웠지만, 일은 계속 진행되었다. 숙련공들 사이에 경쟁하는 일이나 경쟁 의식이 없었다.

대개 둘째 날 해가 지기 전에, 멋진 실내 장식과 아마 외부 조경까지 갖춘 왕국회관이 완공되었다. 일을 사흘이나 아마 두 주말에 걸쳐 하기로 계획하는 것이 더 실용적일 경우에는 그렇게 하였다. 공사의 끝에, 많은 봉사자는 피곤하지만 매우 행복한 상태로 첫 정규 회중 집회 곧 「파수대」 연구를 즐기기 위해 남았다.

미국 오클라호마 주 가이먼의 몇몇 사람은 양질의 작업이 그토록 빠르게 진행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품고 시 검사관에게 전화하였다. 그 검사관은 나중에 그 사건에 대해 증인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공사가 제대로 수행되는지 보려면 회관을 찾아가 보라고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숨겨지고 보이지 않을 일까지 정확하게 행하고 있습니다!”

왕국회관의 필요성이 증가함에 따라, 많은 속성 건축법을 개발한 형제들은 다른 사람을 훈련시켰다. 진행되는 일에 대한 보고가 다른 나라들에 퍼졌다. 그러한 건축법을 다른 나라에서도 사용할 수 있을 것인가?

속성 건축이 국제화됨

캐나다에서 왕국회관 건축은 회중의 필요에 훨씬 못 미쳤다. 캐나다의 증인들은 미국의 속성 건축 공사를 조직하는 사람들을 초대하여 공사 방법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처음에 캐나다인들은 그 일을 캐나다에서도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상당히 품고 있었지만 해보기로 하였다. 캐나다에서 그런 방법으로 건축된 첫 왕국회관이 1982년에 온타리오 주 엘미라에 세워졌다. 1992년에는 이미, 그런 식으로 세워진 왕국회관이 캐나다에 306개 있었다.

영국 노샘프턴의 증인들은 자신들도 그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1983년에 있었던 그들의 공사는 유럽 최초의 것이었다. 공사를 감독하고 현지 증인들이 그 일을 하는 법을 배우도록 돕기 위해, 그러한 방식의 건축에 경험을 가진 형제들이 미국과 캐나다에서 왔다. 멀리 떨어진 일본, 인도, 프랑스, 독일에서도 그 외 자진 봉사자들이 왔다. 그들은 보수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진 봉사자로 그 곳에 온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어떻게 가능하였는가? 그러한 공사에 참여하였던 아일랜드 증인 팀의 감독자가 말한 바와 같이, ‘모든 형제 자매가 여호와의 영의 영향력 아래 함께 뭉쳤기 때문에 성공을 거두었다.’

현지의 건축 규정상 그러한 공사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일 때에도, 증인들은 시 관리들에게 세부 사항을 설명하면 흔히 그들이 기꺼이 협조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북극권 북쪽의 노르웨이에서 속성 건축 공사가 있은 후, 신문 「핀마르켄」은 이렇게 경탄하였다.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이 말 외에는 지난 주말 여호와의 증인이 한 일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마찬가지로 뉴질랜드 북 섬의 증인들이 이틀 반 만에 매력적인 왕국회관을 세웠을 때 현지 신문의 제1면에 “기적에 가까운 공사”라는 표제가 실렸다. 그 기사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 일을 하는 과정에서 가장 믿어지지 않는 부면은 아마도 조직적으로 아무런 잡음 없이 작업을 하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왕국회관을 필요로 하는 장소가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해서 극복할 수 없는 장애가 되는 것은 아니다. 벨리즈에서는 벨리즈 시에서 60킬로미터 떨어진 섬에 모든 자재를 운반해야 하였는데도 속성 건축 공사를 하였다. 한 주말에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포트헤들랜드에 에어컨 시설을 갖춘 왕국회관을 세울 때, 거의 모든 자재와 노동력을 160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으로부터 들여와야 하였다. 봉사자들은 본인의 여비를 부담하였다. 그 공사에 참여한 사람들 중 대부분은 포트헤들랜드 회중의 증인들을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였으며, 그들 중에는 그 곳의 집회에 계속 참석할 사람도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런 식으로 사랑을 표현하였다.

증인의 수가 적은 곳이라 해서 그러한 회관 건축 방법을 사용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85년에 트리니다드에서 약 800명의 증인이 자진하여 토바고로 가서 84명의 현지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가 스카버러에 회관을 짓도록 도왔다. 래브라도 구스베이에서 17명의 증인(대부분 여자와 어린이)은 언젠가 자체 왕국회관을 가지려면 분명히 도움이 필요하였다. 1985년에, 캐나다의 다른 지역들에 사는 450명의 증인은 그 일을 하기 위해 세 대의 비행기를 빌려 구스베이로 갔다. 이틀간 열심히 일한 후, 그들은 일요일 저녁에 완공된 회관에서 봉헌식을 가졌다.

현재 모든 왕국회관이 속성 건축 방법으로 세워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방법으로 세워지는 왕국회관의 수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

지역 건축 위원회

1986년 중반에는 이미, 새로운 왕국회관이 필요한 정도가 크게 가속화되었다. 그 지난해에 전세계에 2461개의 새로운 회중이 구성되었는데, 그중 207개는 미국의 회중이었다. 일부 왕국회관은 서너 개 혹은 심지어 다섯 개 회중이 사용하였다. 성경이 예언한 바와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으는 일을 참으로 가속화하셨다.—이사야 60:22.

인력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왕국회관을 건축하는 모두가 이미 습득된 경험으로 유익을 얻을 수 있게 하기 위해, 협회는 그들의 활동을 조정하기 시작하였다. 처음 1987년에 미국은 60개의 지역 건축 위원회가 나누어 관할하였다. 모든 위원회는 해야 할 일이 많았으며, 얼마 안 되어 일부 위원회는 공사들을 1년치 이상 계획하였다. 그 위원회에서 봉사하도록 임명된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영적 자격을 갖춘 남자들 곧 하나님의 영의 열매를 행사하는 면에서 모범이 되는 회중 장로들이었다. (갈라디아 5:22, 23) 또한 그들 중 많은 사람은 부동산, 토목 공사, 건축, 경영, 안전 및 관련 분야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회중들은 새로운 왕국회관 부지를 선정하기 전에 지역 건축 위원회와 상의하도록 권고받았다. 한 도시에 하나보다 많은 회중이 있을 경우에는 순회 감독자(들), 도시 감독자 및 인근 회중 장로들과도 상의하도록 권고받았다. 왕국회관을 대폭 개수하거나 새로 건축하기로 계획하는 회중은 해당 지역 건축 위원회에서 일하는 형제들의 경험 그리고 협회가 마련해 준 지침으로부터 유익을 얻도록 권고받았다. 이미 그러한 공사를 자진적으로 도운, 약 65개 직종의 형제 자매들로부터 필요한 기술진을 모으기 위한 마련이 그 위원회를 통해 조정되게 되었다.

절차가 다듬어짐에 따라, 특정 공사에 투입되는 봉사자의 수를 줄일 수 있었다. 건축 현장에서 수천 명이 지켜보거나 봉사한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200명 이상이 현장에 있는 경우도 드물었다. 봉사자들은 전체 주말을 그 곳에서 보낸 것이 아니라, 자신의 특정 기술이 필요할 때만 현장에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가족과 함께 그리고 자기 회중과의 활동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지방 형제들이 특정 형태의 일을 웬만한 시간 내에 할 수 있을 경우에는 속성 건축 그룹을 보다 절실히 필요한 부면의 일을 위해서만 부르는 것이 보다 실용적일 때가 많았다.

전체 공정은 놀라운 속도로 진행되었지만, 속도가 주된 고려 사항은 아니었다. 더 중요한 것은 지방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설계된 검소한 왕국회관을 질 높게 건축하는 것이었다. 비용을 최소화하면서 그 일을 이루기 위해 주의 깊이 계획하였다. 안전—봉사자, 이웃 사람, 행인, 왕국회관을 사용할 사람들의 안전—에 우선 순위를 두도록 조처를 취하였다.

그러한 왕국회관 건축 마련에 관한 보고들이 다른 나라들에 전해짐에 따라, 그것이 해당 지역에 유리할 것이라고 여기는 협회 지부들은 필요한 세부 사항을 제공받았다. 1992년에는 이미, 협회가 임명한 지역 건축 위원회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독일, 멕시코, 스페인, 아르헨티나,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일본, 캐나다, 프랑스와 같은 나라들에서 왕국회관 건축을 도왔다. 지방 상황에 맞는 건축 방법이 채택되었다. 왕국회관을 건축하는 데 다른 지부의 지원이 필요한 경우에는 협회 본부를 통해 그러한 지원이 마련되었다. 세계의 일부 지역에서는 새로운 회관이 며칠 만에 세워졌으며, 다른 곳에서는 수주일 혹은 아마 수개월 만에 세워졌다. 주의 깊은 계획과 조정된 노력으로, 새로운 왕국회관을 마련하는 데 드는 시간이 분명히 단축되었다.

여호와의 증인의 건축 활동은 왕국회관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일단의 회중이 연례 순회 대회와 특별 대회일에 모일 때는 더 큰 시설이 필요하다.

대회 회관의 필요성을 충족시킴

오랫동안 순회 대회를 위해 여러 종류의 시설이 사용되어 왔다. 여호와의 증인은 시민 회관, 학교, 극장, 무기고, 경기장, 경마장과 같은 시설을 빌렸다. 소수의 지역에서는 매우 훌륭한 시설을 싼 값에 빌릴 수 있었다. 장소를 청소하고 음향 장비를 설치하고 연단을 세우고 의자를 수송하는 데 흔히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었다. 때로는 마지막 순간에 취소되는 경우도 있었다. 회중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안성맞춤인 장소를 찾는 것이 더욱더 어려워졌다. 어떻게 할 것인가?

역시 해결책은 여호와의 증인이 자체 건물을 갖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려면 적합한 건물을 개수하고 새로운 건물을 지을 필요가 있었다. 미국의 그러한 첫 대회 회관은 여호와의 증인이 1965년 말에 개수하여 사용하기 시작한, 뉴욕 롱아일랜드시티의 한 극장이었다.

거의 그와 동시에, 카리브 해 과들루프 섬의 증인들은 자신들의 필요에 맞게 대회 회관을 설계하였다. 그들은 가능하면 여러 곳에서 순회 대회를 갖는 것이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읍에는 충분히 큰 시설이 없었다. 그래서 증인들은 강철 파이프와 알루미늄 지붕으로 된 이동식 건물을 설치하였다. 그것은 700명을 수용할 만한 것으로서 비교적 평평한 부지를 구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세울 수 있었다. 그들은 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정도가 될 때까지 그 회관을 거듭거듭 늘려야 하였다. 대회 때마다 30톤의 자재를 운반하고 설치하고 분해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그 대회 회관은 13년 동안 매년 여러 차례 설치했다 해체했다 하였다. 마침내 이동 회관을 위한 땅을 구하기가 어려워져 땅을 사서 영구적인 대회 회관을 세울 필요가 있게 되었는데, 지금 그 대회 회관은 순회 대회와 지역 대회를 위해 사용된다.

여러 곳에서, 대회 회관 공사는 기존 건물을 활용하였다. 영국 서리 주 헤이스브리지에서는 50년 된 학교 시설을 구입하여 개수하였다. 그 시설은 아름다운 시골의 11헥타르의 땅에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다. 스페인에서는 이전 극장과 회사 창고를,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직물 공장을, 캐나다 퀘벡에서는 무도장을, 일본에서는 볼링장을, 한국에서는 창고를 개조하여 사용하였다. 그 모든 것은 대규모 성서 교육 센터로 잘 사용될 수 있는 매력적인 대회 회관으로 개조되었다.

그런가 하면, 기초부터 차례로 건축한 완전히 새로운 대회 회관도 있다. 영국 사우스요크셔 주 헬러비에 있는 회관의 독특한 팔각형 설계 그리고 자진 봉사자들의 노동으로 대부분의 일이 수행되었다는 사실이 구조 공학 연구소의 기관지에 기사화되었다. 캐나다 서스캐처원 주 새스커툰의 대회 회관은 1200명을 수용하도록 설계되었지만, 실내 벽을 끌어당겨 설치하면 그 건물을 나란히 붙은 네 개의 왕국회관으로 사용할 수 있다. 아이티의 대회 회관(미국에서 조립 부품을 만들어 발송함)은 실내에 앉은 사람들이 계속 우세풍—아이티의 뙤약볕 더위를 식혀 주는 반가운 것—을 받아 시원하도록 양쪽이 트였다. 파푸아뉴기니 포트모르즈비의 회관은 실내에 적정 인원보다 많은 인원을 수용하기 위해 벽의 여러 부분을 문처럼 열 수 있는 방식으로 설계되었다.

소수로 이루어진 일단의 감독자가 다른 모든 사람의 지지를 기대하면서 대회 회관 건축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대회 회관을 건축하기 전에, 협회는 그 필요성과 사용 예정량에 관해 주의 깊은 분석을 하게 한다. 단지 공사에 대한 지방적 열정뿐 아니라 그 분야의 전반적 필요도 고려한다. 형제들이 지지할 의향과 능력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 회관을 사용할 모든 회중과 문제를 토의한다.

따라서 일이 착수되면, 그 지역의 여호와의 증인은 마음을 다해 그것을 지원한다. 공사마다 증인들이 직접 자금을 조달한다. 재정적 필요를 설명하지만, 헌금은 자진적이며 익명으로 한다. 사전에 주의 깊은 계획을 하지만, 공사는 이미 왕국회관을 건축하면서 얻은 경험과 흔히 다른 지역의 대회 회관 공사에서 얻은 경험으로부터 유익을 얻는다. 필요할 경우, 일부 공정은 청부업자들에게 맡기기도 하지만, 대개 열정적인 증인이 대부분의 일을 한다. 그래서 비용을 절반으로 줄일 수 있다.

자진하여 시간과 재능을 바치는 기술자들 및 그 외 사람들이 노동력을 제공하므로, 전체 공사는 보통 빠르게 진척된다. 일부 공사는 1년 이상 걸릴 수 있다. 그러나 1985년에 캐나다 밴쿠버 섬에서, 약 4500명의 자진 봉사자가 단지 9일 만에 2300제곱미터 되는 대회 회관을 완공하였다. 그 건물에는 또한 200개의 좌석이 있는 지방 회중용 왕국회관이 포함되어 있다. 뉴칼레도니아에서, 정부는 1984년에 정치적 불안 때문에 통행 금지령을 내렸지만, 일시에 최고 400명의 자진 봉사자가 대회 회관을 짓는 일을 하였다. 그리고 그 회관은 단지 4개월 만에 완공되었다. 스웨덴 스톡홀름 근처에서, 쿠션을 댄 900개의 오크재 의자를 갖춘 아름답고 실용적인 대회 회관이 7개월 만에 건축되었다.

때로는 그러한 대회 회관의 건축 허가를 얻기 위해 법정에서 끈질긴 노력이 필요하였다.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주 서리의 경우가 그러하였다. 땅을 구입하였을 때 건축 규제법의 규정은 그러한 숭배 장소의 건축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1974년에 건축 계획을 제출하자 서리 지역 위원회는 P-3 지구에만 교회와 대회 회관을 건축할 수 있다고 규정하는 세칙을 통과시켰는데, 그 지구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전에 79개의 교회는 아무런 어려움 없이 그 도시에 건축되었다. 문제가 법정에 회부되었다. 여호와의 증인을 지지하는 판결이 거듭 내려졌다. 편견을 가진 관리들의 방해가 마침내 제거되자, 자진 봉사자들은 매우 열정적으로 공사하여 약 7개월 만에 회관을 완공하였다. 고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 노력한 느헤미야의 경우처럼, 그들은 일을 이루도록 ‘하나님의 손이 자신들을 도우’셨다고 생각하였다.—느헤미야 2:18.

미국의 여호와의 증인이 뉴저지 주 저지시티의 스탠리 극장을 구입할 때, 그 건물은 그 주의 사적 등기부에 올라 있었다. 그 극장은 형편없이 파손된 상태였지만, 대회 회관으로 사용할 만한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증인들이 필요한 수리 작업을 하려고 하자, 시 관리들은 허락하려 하지 않았다. 시장은 그 지역에 여호와의 증인이 거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며, 그 건물에 대해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관리들의 불법적인 권위 행사를 제지하기 위해 법적 소송이 필요하였다. 법원은 증인을 지지하는 판결을 내렸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그 도시 주민들은 투표로 시장을 물러나게 하였다. 그 회관에 대한 공사는 신속히 진척되었다. 그 결과 4000여 명이 앉을 수 있는 아름다운 대회 회관이 생겨났다. 그 회관은 그 도시의 실업가들과 주민들이 한결같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시설이다.

지난 27년 동안, 세계 여러 곳에서 여호와의 증인은 매력적이고 실용적인 대회 회관들을 성서 교육 센터로 사용하기 위해 건축하였다. 그러한 회관의 수가 이제 남·북아메리카, 유럽, 아프리카, 동양 그리고 많은 섬에서 계속 증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일부 나라—이를테면 나이지리아, 이탈리아, 덴마크—에서, 여호와의 증인은 지역 대회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더 크고 영구적인 노천 시설을 짓기도 하였다.

하지만 대회 회관과 왕국회관은 여호와의 증인이 하나님의 왕국 선포를 증진하기 위해 추진하는 유일한 건축 공사가 아니다.

전세계의 사무실, 인쇄 공장, 벧엘 집

1992년에는 세계 전역에 99개의 워치 타워 협회 지부가 있었는데, 각 지부는 세계적인 밭의 해당 지역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을 조정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한 지부 중 반 이상이 성서 교육 활동을 증진하기 위해 여러 종류의 출판물을 인쇄하고 있었다. 그 지부들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집”을 뜻하는 벧엘이라는 집에서 큰 가족으로 거주한다. 여호와의 증인의 수와 전파 활동이 확장하기 때문에, 그러한 시설을 늘리고 새로운 시설을 건축할 필요가 있었다.

조직의 성장이 매우 빠르기 때문에 흔히 20건 내지 40건의 그러한 지부 확장 프로그램이 동시에 진행되어 왔다. 그래서 대규모 국제 건축 프로그램이 필요하였다.

엄청난 양의 건축 활동이 전세계적으로 행해지고 있기 때문에, 워치 타워 협회는 뉴욕 본부에 자체 건축 기술 설계부를 두고 있다. 다년간의 경험을 가진 건축 기술자들이 세속 일을 그만두고 왕국 활동과 직접 관련된 건축 공사를 전 시간 지원하기로 자진하였다. 뿐만 아니라, 경험을 가진 사람들은 건축 기술, 설계, 제도 일에서 다른 남녀를 훈련시켜 왔다. 그 부서를 통해 일을 조정함으로써, 세계 특정 지역의 지부 건축에서 얻은 경험이 다른 나라의 공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유익을 줄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일의 분량이 많아지자 동양의 공사들을 위한 건축 설계를 지원하기 위해 일본에 지역 건축 기술 사무소를 개설하는 편이 유리하게 되었다. 그 외 지역 건축 기술 사무소가 유럽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운영되는데, 그 성원들은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다. 그러한 사무소는 본부와 긴밀히 협조하여 일하며, 그러한 봉사로 인해 특정한 건축 현장에 설계 인원이 덜 필요하게 된다.

일부 공사는 규모가 비교적 작다. 1983년에 타히티에서 건축한 지부의 경우가 그러하였다. 거기에는 사무실 공간, 창고, 여덟 명의 자진 봉사자를 위한 숙소가 포함되었다. 또한 1982년부터 1984년까지의 기간에 카리브 해의 마르티니크 섬에 세워진 4층 짜리 지부 건물의 경우가 그러하였다. 그러한 건물은 다른 나라들의 대도시 거주자들에게는 비상한 것으로 보이지 않을지 모르지만 일반인의 관심을 끌었다. 신문 「프랑스-앤틸리스 제도」는 마르티니크의 지부 건물이 “건축상의 걸작”으로서 “훌륭한 작업에 대한 큰 사랑”을 반영한다고 단언하였다.

규모로 볼 때 대조적인 것으로서, 1981년에 캐나다에서 완공된 건물들 중에는 바닥 면적이 9300여 제곱미터인 공장과 250명의 자진 봉사자를 위한 숙소 건물이 포함되었다. 같은 해에 브라질 세사리우랑게에서 완공된 워치 타워 구내에는 건평이 거의 4만 6000제곱미터 되는 여덟 채의 건물이 포함되었다. 그 건축은 트럭 1만 대분의 시멘트, 석재, 모래, 그리고 에베레스트 산 높이의 두 배에 달하는 콘크리트 파일을 요하였다! 1991년에 필리핀에서 새로운 대형 인쇄 공장이 완공되었을 때, 11층 숙소 건물도 마련할 필요가 있었다.

나이지리아에서 점증하는 왕국 선포자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1984년에 이지에두마에서 대규모 건축 공사가 착수되었다. 공장, 넓은 사무실 건물, 연결된 네 동의 숙소 건물, 그 외 필요한 시설을 포함하게 되어 있었다. 미국에서 공장의 조립 부품을 완전히 만들어 발송하기 위한 계획이 세워졌다. 그러나 뒤이어 형제들은 최종 기한 내에 수입하기가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 직면하였다. 그 기한을 넘기지 않고 모든 것이 건축 현장에 무사히 도착하였을 때, 증인들은 자신들에게 공적을 돌린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축복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였다.

세계 전역에서의 급속한 확장

그러나 왕국 선포 활동의 성장은 매우 급속하여, 한 나라에서 지부 시설이 크게 확장된 후에도 비교적 짧은 기간 안에 건축을 다시 시작할 필요가 있는 경우가 흔하였다. 몇 가지 예를 고려해 보자.

페루에서 훌륭한 새로운—사무실 공간, 22개 침실과 벧엘 가족 성원을 위한 그 외 기본적인 시설 그리고 왕국회관을 갖춘—지부가 1984년 말에 완공되었다. 그러나 그 남아메리카 나라에서 왕국 소식에 대한 반응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컸다. 4년 후에 기존 시설을 두 배로 늘릴 필요가 있었는데, 이번에는 내진 설계를 사용하였다.

1979년에 콜롬비아에서 새로 넓은 지부 시설이 완공되었다. 그것은 향후 여러 해 동안 충분한 공간이 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7년 내에 콜롬비아의 증인 수는 거의 두 배가 되었으며 이제 그 지부는 콜롬비아뿐 아니라 인근의 네 나라를 위해서 「라 아탈라야」(「파수대」)지와 「데스페르타드!」(「깰 때이다」)지를 인쇄하게 되었다. 그들은 1987년에—이번에는 확장을 위한 더 넓은 땅이 있는 곳에서—건축을 다시 시작해야 하였다.

1980년중에, 브라질의 여호와의 증인은 왕국 소식을 공개적으로 전파하는 일에 약 1400만 시간을 바쳤다. 그 숫자는 1989년에 거의 5000만 시간으로 급증하였다. 더 많은 사람이 영적 굶주림을 달래고 싶어하였다. 1981년에 봉헌된 대규모 지부 시설은 더는 충분치 않았다. 이미 1988년 9월에, 새로운 공장을 위한 정지 작업이 진행되었다. 이 공장으로 인해 기존 공장에 있던 것보다 면적이 80퍼센트 더 넓은 바닥을 갖게 되었으며, 증가된 벧엘 가족을 돌보기 위한 숙소 시설도 물론 필요하게 되었다.

독일 젤터스/타우누스에서, 워치 타워 협회의 두 번째로 큰 인쇄 시설이 1984년에 봉헌되었다. 5년 후에, 독일에서의 증가 그리고 독일 지부가 출판물을 인쇄하여 대주는 나라들에서 증거 활동을 확장할 기회 때문에, 공장을 85퍼센트 이상 늘리고 그 외 지원 시설을 부가하기 위한 계획이 진행되었다.

일본 지부는 1972년에 도쿄에서 누마즈의 새로운 대규모 시설로 이전하였다. 1975년에 또다시 큰 확장이 있었다. 1978년에는 이미 에비나에 또 다른 땅을 구입하였으며, 누마즈의 공장보다 세 배 이상 큰 공장을 짓는 일이 신속히 시작되었다. 그 공장은 1982년에 완공되었다. 그것도 충분치 않아, 1989년에는 이미 더 많은 건물이 추가되었다. 단 한번의 건축으로 충분히 크게 지을 수도 있지 않았는가? 그렇지 않다. 일본의 왕국 선포자의 수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던 정도로 거듭거듭 배가되었다. 그들의 대열은 1972년의 1만 4199명에서 1989년의 13만 7941명으로 급증하였으며, 그중 많은 사람이 봉사의 직무에 전 시간을 바쳤다.

세계 다른 지역에서도 비슷한 현상을 볼 수 있다. 인쇄 시설을 갖춘 큰 지부 건물들이 건축되고 나서 10년 내에—때로는 수년 내에—큰 확장에 착수할 필요가 있었다. 특히 멕시코, 캐나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한국의 경우가 그러하였다.

실제 건축 일은 누가 하는가? 그 모든 것이 어떻게 달성되는가?

수많은 사람이 돕고 싶어하다

스웨덴에서, 아르보가에 지부 건물을 건축할 때 그 나라의 1만 7000명의 증인 중 약 5000명이 자진하여 그 일을 도왔다. 대부분은 단지 자진적인 보조자였지만, 일이 올바로 진행되게 하는 데 필요한 고도로 숙련된 전문가들도 충분히 있었다. 그들의 동기는 무엇이었는가? 여호와께 대한 사랑이었다.

덴마크의 한 측량소 관리는 홀베크에 새로운 지부 건물을 짓는 일이 여호와의 증인에 의해 행해질 것이라는 말을 듣고 염려를 나타냈다. 그렇지만 자진하여 도운 증인들은 필요한 공법을 모두 알게 되었다. 하지만 청부업자에게 그 일을 맡겼다면 더 낫지 않았겠는가? 완공된 후에, 그 읍의 건축부 전문가들은 구내를 돌아보고 훌륭한 작품—오늘날 영리적인 일에서는 보기 드문 것—에 대해 평하였다. 앞서 염려를 나타냈던 관리는 미소를 지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아시다시피 그 당시 저는 여러분의 조직이 어떤 조직인지 몰랐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인구 중심지는 널리 흩어져 있다. 그래서 1978년부터 1983년까지 잉글번에 지부 시설을 짓기 위해 자진적으로 일한 3000명 중 대부분은 적어도 1600킬로미터를 여행해야 하였다. 그러나 자진 봉사자 그룹의 버스 여행에 대한 마련을 일원화하였으며, 경유지의 회중들은 휴게소에서 형제들에게 후하게 음식을 대접하고 그들과 교제하였다. 일부 형제는 그 공사에 참여하기 위해 집을 팔고 상점 문을 닫고 휴가를 하고 그 외 희생을 하였다. 숙련공 팀이 콘크리트를 타설하고 천장을 달고 울타리를 세우기 위해—그들 중 일부는 여러 차례—왔다. 자재를 기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한 공사에 종사하는 자진 봉사자들 중 대다수는 숙련되지 않았지만, 그들 중 일부는 적은 훈련으로 큰 책임을 맡았고 훌륭한 일을 하였다. 그들은 창문을 제작하고 트랙터를 운전하고 콘크리트를 혼합하고 벽돌을 쌓는 법을 배웠다. 그들은 같은 종류의 일에 종사하는, 증인 아닌 업자들보다 분명히 유리하였다. 어떤 면으로 유리하였는가? 경험 있는 사람들이 지식을 기꺼이 전수해 준다는 면에서 그러하였다. 다른 사람이 일거리를 빼앗지 않을까 우려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든 사람에게 충분한 일거리가 있었다. 그리고 질 높은 일을 하려는 강한 동기가 있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 그 일을 하였기 때문이다.

모든 건축 현장에서, 일부 증인은 건축 “가족”의 핵심을 이룬다. 1979년부터 1984년까지 독일 젤터스/타우누스에서 공사하였을 때에는 대개 수백 명이 봉사자의 핵심을 이루었다. 그 외 수천 명은 다양한 기간 그들과 함께 일하였으며 주말에는 많은 사람이 합세하였다. 자진 봉사자들이 도착할 때 충분한 일거리가 있도록 주의 깊은 계획이 있었다.

사람들이 불완전한 이상 문제들이 있을 것이지만, 그러한 공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성서 원칙에 근거하여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인 방법으로 일하는 것이 능률보다 중요함을 알고 있다. 일본 에비나의 건축 현장에는 생각나게 하는 것으로서, 안전모를 쓴 봉사자의 그림이 그려진 대형 표지판이 있었는데 각 안전모에는 하나님의 영의 열매—사랑, 즐거움, 평화, 오래 참음, 친절, 착함, 믿음, 온유, 자제—중 하나가 일본 글자로 씌어 있었다. (갈라디아 5:22, 23, 「신세」 참조) 작업장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차이를 보고 들을 수 있다. 브라질의 지부 건축 현장을 돌아본 한 기자는 자신의 소감을 표현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무질서라든가 협조 정신의 결핍이란 찾아볼 수 없다. ·⁠·⁠· 이러한 그리스도인 분위기가 브라질의 일반 건축 공사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과는 다른 분위기를 조성한다.”

세계 본부의 끊임없는 성장

워치 타워 협회 지부들이 성장하는 한편, 세계 본부 시설을 확장할 필요도 있었다. 2차 세계 대전 후, 뉴욕 주의 브루클린 및 그 외 장소들에 있는 공장과 사무소가 10회 이상 크게 확장되었다. 인원을 수용하기 위해, 크고 작은 여러 건물을 건축하거나 매입하여 개수할 필요가 있었다. 1990년 8월과 1991년 1월에 브루클린에 또다시 큰 확장이 있을 것이라는 광고가 있었다. 뉴욕 시 북쪽에서 1989년에 시작된 대규모 워치타워 교육 센터—상주 직원과 학생을 포함하여 1200명을 수용하도록 설계됨—의 건축이 계속되고 있는데도 그러하였다.

1972년 이후 브루클린의 세계 본부 그리고 그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뉴욕의 다른 지역과 뉴저지에 있는 시설들에서 건축 일이 중단된 적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정규 건축 봉사자의 수가 수백 명이나 되었는데도 그들만으로는 일을 해낼 수 없음이 분명해졌다. 그래서 1984년에 계속적인 임시 봉사자 프로그램이 제정되었다. 1주일 이상 머물면서 지원하도록 자격 있는 형제들을 초대하는 편지가 당시 미국의 8000개 회중으로 보내졌다. (오스트레일리아를 포함하여 일부 지부들에서 비슷한 프로그램이 이미 잘 시행되고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2주일 동안 머물 수 있는 사람들이 자진 봉사하도록 초대되었다.) 봉사자들은 숙식을 제공받지만 여비는 자신이 부담하며 노임을 전혀 받지 않는다. 누가 응할 것인가?

1992년까지는, 2만 4000건이 훨씬 넘는 신청이 들어왔다! 그중 적어도 3900건은 두세 번째, 아니 열 번째나 스무 번째 다시 참여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신청이었다. 대부분은 장로나 봉사의 종 혹은 파이오니아—영적으로 훌륭한 자격을 갖춘 사람들—였다. 그들 모두는 자신의 기술을 요하는 일이든 아니든 간에, 필요한 일은 무엇이든 자진하여 하였다. 일은 흔히 힘들고 불결함이 따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왕국 권익을 증진하는 일에 그런 식으로 기여하는 것을 특권으로 여겼다. 일부 사람들은 그러한 봉사가 세계 본부에서 수행되는 일을 특징짓는 자기 희생 정신을 더 잘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들 모두는 벧엘 가족의 아침 숭배 프로그램과 주간 가족 「파수대」 연구에 참석함으로 풍부한 상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국제 자진 봉사자

급속한 확장의 필요가 늘어감에 따라, 국제 자진 봉사자 마련이 1985년에 시작되었다. 그것은 국제적인 건축 협조의 시작이 결코 아니었지만, 이제는 본부가 그 마련을 주의 깊이 조정하게 되었다. 참여하는 모든 사람은 자진하여 자기 나라 밖의 건축 일을 돕는 증인들이다. 그들은 숙련된 봉사자들 그리고 가능한 한 어떤 면으로든 돕기 위해 남편과 동행하는 배우자들이다. 그들 중 대부분은 자신의 여비를 부담하며, 아무도 자신의 일에 대해 노임을 받지 않는다. 그들 중 일부는 보통 2주일에서 3개월까지 단기간 머무르면서 일한다. 아마 완공될 때까지 1년 이상 머무르는 장기 자진 봉사자들도 있다. 처음 5년 동안 30개 나라에서 온 3000여 명의 여호와의 증인이 그 일에 참여하였으며, 자신의 기술이 필요할 때마다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하고 싶어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왕국의 권익을 그런 식으로 증진하기 위해 자신의 시간과 힘과 자산을 바치는 것을 특권으로 여긴다.

국제 자진 봉사자들은 숙식을 제공받는다. 대개 편리한 설비는 극히 적다. 현지의 증인들은 방문한 형제들의 일에 대해 매우 감사하며, 자신의 집이 아무리 초라할지라도 가능한 한 그들을 기쁘게 맞아들인다. 식사는 대개 공사장에서 한다.

외국 형제들은 일을 도맡아 하기 위해 그 곳에 간 것이 아니다. 그들의 목표는 현지 건축 팀과 함께 일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나라에 사는 수백 명, 심지어 수천 명이 주말을 이용하여 혹은 한번에 1주일 이상 도우러 오기도 한다. 아르헨티나에서는 다른 나라에서 온 259명의 자진 봉사자가 수천 명의 현지 형제들과 함께 일하였는데, 그들 중에는 날마다 일한 사람도 있었고 수주간 일한 사람도 있었으며 주말에는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일하였다. 콜롬비아에서는 830여 명의 국제 자진 봉사자가 다양한 기간 도움을 주었다. 또한 200명 이상의 현지 자진 봉사자가 그 공사에 전 시간 참여하였고 주말마다 또 다른 250명 이상이 도움을 주었다. 총 3600명 이상의 개별 인원이 참여하였다.

언어의 차이가 문제가 될 수 있지만, 국제 그룹이 함께 일하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손짓, 얼굴 표정, 좋은 유머감, 여호와를 영예롭게 하는 일을 이루고자 하는 욕망이 일의 진행에 도움이 된다.

조직의 두드러진 성장—그로 인한 더 큰 지부 시설의 필요성—은 건축 기술자의 수가 제한된 나라들도 때때로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서로를 기꺼이 돕는 여호와의 증인 가운데는 그것이 장애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국적, 피부색, 언어에 따라 나뉘지 않은 세계적 가족의 일부로 함께 일한다.

파푸아뉴기니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에서 온 자진 봉사자들이 노동부의 요청에 따라 각각 한 명의 파푸아뉴기니인에게 기술을 훈련시켰다. 현지의 증인들은 그런 식으로 자신의 시간과 힘을 바치는 한편, 자신과 가족의 필요를 돌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기술을 배웠다.

엘살바도르에서 새로운 지부가 필요하였을 때, 현지의 형제들은 326명의 외국 자진 봉사자와 함께 일하였다. 에콰도르에서 공사가 있자, 14개 나라에서 온 270명의 증인이 에콰도르의 형제 자매들과 함께 일하였다. 일부 국제 자진 봉사자는 동시에 진행되는 여러 공사를 도왔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술을 필요로 할 때마다 유럽과 아프리카의 여러 건축 현장을 오가면서 일하였다.

1992년까지는, 국제 자진 봉사자들은 현지의 건축반을 지원하기 위해 49개 지부로 파견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그러한 프로그램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지원을 베풀 수 있었다. 따라서 필리핀의 지부 건축 공사를 돕는 약 60명의 장기 국제 종 그리고 단기간 돕는 230여 명의 외국 자진 봉사자의 노력으로부터 유익을 받으면서, 일부 필리핀 사람은 동남 아시아의 다른 지역의 시설 건축을 기꺼이 지원하였다.

여호와의 증인은 지금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일과 관련하여 필요성이 있기 때문에 건축 일을 하고 있다. 여호와의 영의 도움으로, 그들은 아마겟돈 전의 남은 기간에 가능한 한 최대로 증거하고자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신세계가 매우 가까웠음을 확신하며, 조직된 백성으로 생존하여 하나님의 메시야 왕국의 통치 아래 있을 신세계로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이 건축하여 여호와께 봉헌한 훌륭한 시설들 중 다수가 아마 아마겟돈 후에도, 유일하신 참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참으로 땅에 충만할 때까지 그 지식을 보급하는 중심지로 계속 사용되기를 바란다.—이사야 11:9.

[각주]

^ 8항 그 집회 장소는 “새 빛” 교회로 알려졌다. 거기에 연합한 사람들은 워치 타워 출판물을 읽은 결과 성서에 대한 새로운 빛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322면 삽입]

인근 회중의 증인들이 일을 도왔다

[323면 삽입]

건축 일은 자진적인 무보수 노동으로 행해졌다

[324면 삽입]

영적 특성이 강조되었다

[326면 삽입]

질 높은 건축, 안전, 최소 비용, 속도

[328면 삽입]

이동식 대회 회관!

[331면 삽입]

법정에 호소함

[332면 삽입]

국제적인 대규모 확장

[333면 삽입]

봉사자들은 공적을 자신들이 아니라 여호와께 돌렸다

[334면 삽입]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던 비율로 성장함

[336면 삽입]

그들은 본부의 건축을 돕는 것을 특권으로 여겼다

[339면 삽입]

그들은 국적, 피부색, 언어에 따라 나뉘지 않은 세계적 가족으로 일한다

[320, 321면 네모와 삽화]

왕국회관을 속성으로 건축하기 위해 함께 일함

매년 수천 개의 새로운 회중이 구성된다. 대부분의 경우, 증인들이 새로운 왕국회관을 직접 건축한다. 이 사진들은 1991년에 미국 코네티컷에서 왕국회관을 건축하던 중에 찍은 것이다

금요일 오전 7시 40분

금요일 정오

토요일 오후 7시 41분

일요일 오후 6시 10분, 주요 작업이 끝났다

여호와의 축복을 위해 그분을 의지하며, 시간을 내어 그분의 말씀의 교훈을 토의한다

모두 기꺼이 함께 일하는 무보수 자진 봉사자들

[327면 네모와 삽화]

여러 나라의 왕국회관

여호와의 증인이 사용하는 집회 장소는 대개 수수하다. 깨끗하고 편안하고 주변이 매력적이다

필리핀

일본

콜롬비아

프랑스

파푸아뉴기니

노르웨이

페루

한국

아일랜드

레소토

[330면 네모와 삽화]

여호와의 증인의 대회 회관

정기적인 대회를 개최하기 위해, 일부 지역의 여호와의 증인은 자체 대회 회관을 건축하는 것이 실용적임을 알게 되었다. 건축 일의 많은 부분은 현지 증인이 담당한다. 1990년대 초에 사용된 대회 회관을 몇 개만 소개한다

영국

베네수엘라

이탈리아

독일

캐나다

일본

[338면 네모와 삽화]

절실한 필요를 충족시키는 국제 건축 프로그램

조직의 급속한 성장으로 인해 세계 전역에서 사무실, 공장, 벧엘 집을 계속 확장할 필요가 있었다

국제 자진 봉사자들이 현지의 증인들을 지원하는 장면

스페인

많은 자진 봉사자가 경험은 적어도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건축 방법이 사용된다

푸에르토리코

숙련된 일꾼들이 기꺼이 봉사한다

뉴질랜드

그리스

브라질

내구성 있는 자재의 사용은 장기적인 유지 관리비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

영국

참여하는 사람들이 나타내는 개인적 관심을 통해 질 높은 일이 수행된다; 그것은 여호와께 대한 사랑의 표현이다

캐나다

이러한 공사는 즐거운 기회다; 지속적인 벗 관계를 많이 맺게 된다

콜롬비아

봉사자들에게 안전 방책 그리고 하나님의 영의 열매를 나타낼 필요성을 상기시켜 준 일본의 표지판

[318면 삽화]

처음으로 왕국회관이라고 불린 하와이의 건물

[319면 삽화]

많은 초기 왕국회관은 빌린 건물이거나 단지 점포의 2층방이었으며, 소수의 회관은 증인이 건축한 것이었다

[329면 삽화]

두 개의 초기 대회 회관

뉴욕 시

과들루프

[337면 삽화]

뉴욕 세계 본부에 새로 도착한 임시 건축 봉사자들

각 그룹은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과 질 높은 일을 수행하는 것이 일을 빠르게 하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일깨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