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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회—숭배와 교훈과 격려를 위한 마련

집회—숭배와 교훈과 격려를 위한 마련

제16장

집회—숭배와 교훈과 격려를 위한 마련

회중 집회는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의 중요한 부분이다. 매우 곤란한 상황에서도, 그들은 이러한 성서 권고와 일치하게 집회에 정기적으로 참석하려고 노력한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브리 10:24, 25) 가능한 경우에, 각 회중은 1주일에 세 번, 총 4시간 45분 간 집회를 갖는다. 그러나 집회의 성격과 횟수는 그때그때의 필요에 따라 다양하였다.

제1세기에, 기적에 의한 영의 선물이 나타난 것은 그리스도인 집회의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러한 선물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더는 유대 종교 제도를 사용하지 않으며 자신의 영이 이제 새로 형성된 그리스도인 회중 위에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셨기 때문이다. (사도 2:1-21; 히브리 2:2-4)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집회에서 기도를 드렸고, 하나님께 대한 찬양의 노래를 불렀으며, 예언하는 일(즉 하나님의 뜻과 목적의 계시를 전달하는 일)과 듣는 사람에게 격려가 되는 교훈을 베푸는 일에 역점을 두었다.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목적과 관련하여 놀라운 사태 진전이 있던 때에 살았다. 그들은 그러한 사태 진전을 이해하고 그와 일치하게 일하는 방법을 알아야 하였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가 집회에서 문제를 다루었던 방식은 균형 잡힌 것이 아니었으며, 성서가 알려 주듯이 가장 유익한 방법으로 일을 행하기 위해 교훈이 필요하였다.—고린도 전 14:1-40.

성경 연구생들이 1870년대와 그 후에 함께 모였을 때에도, 그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집회의 특징이 분명히 나타났는가?

초기 성경 연구생들의 영적 필요를 충족시킴

찰스 테이즈 러셀과 펜실베이니아 주 앨러게이니 안팎의 동료들로 이루어진 작은 그룹은 1870년에 성경 연구를 위한 하나의 반을 구성하였다. 그들은 집회를 통해,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사랑이 점차 자랐으며 성서 자체가 가르치는 내용을 점진적으로 알게 되었다. 그러한 집회에서 기적에 의해 방언을 말하는 일은 없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기적에 의한 그러한 선물은 제1세기에 그 목적을 달하였으며, 성서가 예언한 바와 같이 중단되었다. 러셀 형제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발전의 다음 단계는 성바울이 매우 분명히 지적하는 바와 같이 영의 열매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고린도 전 13:4-10) 더욱이, 제1세기에도 그러하였듯이 복음 전파 활동이 긴급하였으며, 그로 인해 그들은 격려받을 필요가 있었다. (히브리 10:24, 25) 오래지 않아 그들은 매주 두 번 정기적인 집회를 갖게 되었다.

러셀 형제는 여호와의 종들이 전세계 어디에 흩어져 있을지라도 연합된 백성이 되는 것이 중요함을 깨달았다. 따라서 1879년에, 「파수대」가 발행되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그 독자들은 러셀 형제나 그의 동료의 방문을 요청하도록 권고받았다. “청강 무료, 연보 걷지 않음”이라는 조건이 명시되었다. 수많은 요청을 받고, 러셀 형제는 매사추세츠 주 린까지 한 달간 여행하면서 들르는 곳마다 네 시간 내지 여섯 시간 동안 집회를 가졌다. 두드러지게 다루어진 제목은 “하나님의 왕국과 관련된 것”이었다.

1881년 초에, 러셀 형제는 아직 자신의 지역에서 정기적인 집회를 갖지 않는 「파수대」 독자들에게 이렇게 강력히 권하였다. “여러분 자신의 가족이나 몇몇 관심자와 함께 자신의 집에서 집회를 개설하기 바란다. 함께 읽고 연구하고 찬양하고 숭배하자. 그러면 두세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주께서 여러분 가운데—여러분의 선생님으로—계실 것이다. 사도 시대의 교회 집회의 특징이 그러하였다. (참조 빌레몬 2).”

집회 프로그램이 점차 발전되었다. 제안은 있었지만, 각 지방 그룹의 상황에 최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각 그룹에 맡겨졌다. 연사가 이따금 연설할 수도 있었지만,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는 집회가 더욱 강조되었다. 성경 연구생들의 일부 반들은 처음에는 집회에서 협회 출판물을 많이 사용하지 않았지만, 여행하는 봉사자인 순례자들은 그것의 사용 가치를 이해하도록 도와주었다.

여러 권으로 된 Millennial Dawn(「천년기 새벽」)의 일부가 발행되자 그것이 연구의 근거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1895년에 연구 그룹들은 새벽 성경 연구회로 알려지게 되었다. * 노르웨이의 한 사람은 후에 그러한 집회를 “낭독·대화 집회”라고 부르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러셀 형제의 책에서 발췌한 내용을 큰소리로 읽었고 사람들이 해설이나 질문을 할 때는 손을 들었다.” 러셀 형제는 참여자들이 그러한 연구를 할 때 여러 가지 성경 번역판과 성서의 난외 참조주와 성서 컨코던스를 사용할 것을 권하였다. 그 연구는 흔히 그룹에 편리한 저녁에 개인 집에서 적당한 규모로 열렸다. 그러한 집회가 현재의 회중 서적 연구의 전신이었다.

러셀 형제는 교리적인 문제를 연구하는 것 외에 더 많은 것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깊은 인식과 그분을 공경하고 섬기려는 욕망으로 감동받게 해줄 정성의 표현도 있어야 한다. 반들은 매주 한 번씩 그러한 목적으로 특별 집회를 마련하도록 권고받았다. 이 집회는 개인 집에서 열렸기 때문에 때때로 “가내 집회”라고 불렸다. 프로그램은 기도와 찬송가와 참석자들의 증언을 포함하였다. * 그러한 증언은 때때로 격려적인 경험담이었으며, 최근에 직면한 시련, 난관, 어려운 문제들도 포함되었다. 어떤 곳에서는 자신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일 때문에 그 집회가 목적에 상당히 못 미쳤다. 개선을 위한 친절한 제안이 「파수대」에 실렸다.

미국의 한 초기 순례자의 아내인 이디스 브레니슨은 그러한 집회를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그 저녁은 여호와의 인자하신 돌보심을 묵상해 보고 우리 형제 자매들과 긴밀한 교제를 가지는 시간이었다. 그들의 경험담을 들으면서 우리는 그들을 더 잘 알게 되었다. 그들의 충실성을 관찰하고 그들이 자신들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을 보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처한 곤경을 해결하도록 도움을 받게 되는 때가 자주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각자에게 복음 전파 활동에 참여할 자격을 갖추어 주기 위한 집회가 더 유익하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어떤 곳에서는 일요일 집회를 다루는 방식이 형제들에게 관심거리였다. 일부 반은 성서를 구절별로 토의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때때로 성구의 의미에 관한 의견 차이는 결코 격려적이 아니었다.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회중의 일부 사람은 반 전체가 집회에 오기 전에 검토할 수 있도록 질문과 참조 지시가 있는 제목별 성서 연구 골자를 개발하였다. 1902년에 협회는 제목 색인을 포함하는 “베뢰아 성서 연구 보조 자료”가 실린 성서를 보급하였다. * 일을 한층 더 간소화하기 위해, 「파수대」(영문) 1905년 3월 1일 호부터 회중 토의를 위한 골자가 발행되었는데, 거기에는 질문뿐 아니라 성서 및 협회 출판물 조사용 참조 지시가 들어 있었다. 그것이 1914년까지 계속되다가, 이 무렵 Studies in the Scriptures(「성경 연구」) 각 권에 대한 연구 질문이 베뢰아 연구의 근거로 사용되도록 발행되었다.

모든 반이 동일한 재료를 사용하였지만, 주간 집회의 횟수는 지방적인 마련에 따라 한 번 내지 네 번 혹은 그 이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 실론(지금은 스리랑카) 콜롬보에서는, 1914년부터 집회가 실제로 1주일에 7일 열렸다.

성경 연구생들은 연구하고 “모든 사물을 증명”하고 자신의 말로 생각을 표현하는 법을 배우도록 격려받았다. (데살로니가 전 5:21, 「제임스 왕역」) 러셀 형제는 연구 재료를 온전하고 자유롭게 토의할 것을 권하였다. 그는 또한 이렇게 주의를 주었다. “성서가 우리의 표준이라는 것과 우리의 보조 자료가 아무리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 해도 그것은 ‘보조 자료’이지 성서의 대용물이 아니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주의 죽음의 기념식

1876년경부터, 성경 연구생들은 매년 주의 죽음의 기념식을 마련하였다. * 처음에는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와 그 인근의 그룹이 한 벗의 집에서 모였다. 1883년에는 이미, 그 지역의 참석자 수는 약 100명으로 증가하였으며, 임대한 홀이 사용되었다. 1905년에 피츠버그에서 예상된 수많은 청중을 수용하기 위해, 형제들은 넓은 카네기 홀을 사용하기로 하였다.

성경 연구생들은 그것이 매주 행하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연례 의식임을 인식하였다. 그들이 그 의식을 거행한 날짜는 예수께서 죽으신 때인, 유대력으로 니산월 14일이었다. 여러 해에 걸쳐, 그 날짜를 계산하는 방법에 얼마의 조정이 있었다. * 그러나 주된 관심사는 그 행사 자체의 의미였다.

성경 연구생들은 여러 곳에서 다양한 규모로 그룹을 이루어 이 기념식을 위해 모였지만, 피츠버그의 형제들과 함께 모일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환영받았다. 1886년부터 1893년까지, 「파수대」 독자들은 가능하면 피츠버그에 오도록 특별히 초대되었으며, 실제로 미국의 여러 지역과 캐나다로부터 그 곳에 왔다. 이로 인해 그들은 기념식을 함께 가질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영적 연합의 띠를 공고히 하도록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미국과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반들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한 장소에 모이는 것이 더는 실용적이 아니었으며, 그들은 자기 고장에서 동료 신자들과 함께 모이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임을 깨달았다.

「파수대」가 지적하였듯이 대속을 믿는다고 공언하는 사람이 많았으며, 그들 중 아무도 연례 기념식에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행사는 그리스도의 “적은 무리”에 참으로 속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이들은 하늘 왕국에 참여할 사람들이다. 예수께서 죽으시기 전 밤에 기념식을 제정하셨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희망을 제시받은 사람들에게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셨다.—누가 12:32; 22:19, 20, 28-30.

특히 1930년대부터, 다른 양의 “큰 무리” 성원이 될 사람들이 분명히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계시 7:9, 10; 요한 10:16) 이들은 그 당시에 요나답으로 불렸다. 「파수대」(영문)는 1938년 2월 15일 호에서 처음으로, 그들도 기념식에 참석하도록 특별히 초대하였다. “4월 15일 오후 6시 이후에, 기름부음받은 자들의 각 부회는 모여서 기념식을 갖고, 그들의 동료인 요나답 반열도 참석하기 바란다.” 요나답 반열은 표상물을 취하는 사람이 아니라 참관자로 참석하였다. 그들이 참석하자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념식 때에 참석하는 사람의 수가 불어나기 시작하였다. 1938년에 총 참석자 수는 7만 3420명이었으며, 표상물인 떡과 포도주를 취한 사람의 수는 3만 9225명이었다. 그 후, 참관자들 중에는 또한 수많은 새로운 관심자와 아직 활동적인 여호와의 증인이 되지 않은 그 외 사람들이 포함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92년, 야외 봉사에 참여한 사람의 최고 수가 447만 2787명이었을 때, 기념식 참석자 수는 1143만 1171명이었으며 표상물을 취한 사람의 수는 단지 8683명이었다. 일부 나라에서는 참석자 수가 활동적인 증인 수의 무려 대여섯 배나 되었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에 대한 깊은 관심 때문에, 여호와의 증인은 매우 곤란한 상황을 직면할 때에도 기념식을 갖는다. 1970년대에, 로디지아(지금은 짐바브웨로 알려짐)에서 전시의 통행 금지로 인해 저녁에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되자, 일부 지역의 형제들은 낮에 어느 여호와의 증인의 집에 모두 모인 다음 저녁에 기념식을 가졌다. 물론 그들은 집회 후에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으므로, 밤새 머물렀다. 남은 저녁 시간은 왕국 노래를 부르고 가외의 새 힘을 주는 경험담을 말하는 데 사용하였다.

2차 세계 대전중에 강제 수용소에서, 간수에게 발각되면 심한 처벌을 받게 되는데도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해럴드 킹은 그리스도인 믿음 때문에 1958년부터 1963년까지 중공의 교도소에 격리되어 있었을 때,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기념식을 가졌다. 그는 후에 이렇게 말하였다. “형무소 창문을 통하여 초봄에 달이 점점 커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기념식을 행할 날짜를 성의껏 계산하였다.” 그는 까막까치밥나무 열매로 약간의 포도주를 만들고 누룩을 넣지 않은 쌀을 사용하여 떡을 만들어 필요한 표상물을 임시 변통으로 준비하였다. 그는 또한 이렇게 말하였다. “기념식 때에 여호와의 백성의 회중에서 하는 것과 똑같이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드린 다음 강연을 하였다. 그렇게 하여 나는 해마다 이 중요한 식을 통하여 전세계에 있는 형제들과 연합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청소년에게 적합한 곳

초기의 여러 해 동안, 성경 연구생들의 출판물과 집회는 청소년의 요구에 맞게 특별히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청소년들은 집회에 참석할 수 있었으며, 그들 중 일부는 참석하여 열심히 잘 들었다. 그러나 그들을 참여시키려는 특별한 노력은 없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그 당시에 형제들은 그리스도의 신부 성원 모두가 하늘 영광 가운데 그분과 연합하게 될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이해하였다. 「파수대」(영문)는 1883년에 이렇게 설명하였다. “높은 부르심을 받기 위해 훈련받고 있는 우리는 현시대의 특별한 일—‘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준비하는 일—을 돌보지 않을 수 없다. 신부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하며, 결혼식에 앞서서 장식을 마무리하고 있는 바로 지금 이 매우 중요한 당면 활동에 모든 성원의 봉사가 요구된다.”

부모들은 자녀를 영적으로 교육해야 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자신의 책임을 지도록 강력하게 권고받았다. 청소년을 위한 별도의 주일 학교가 장려되지는 않았다. 그리스도교국이 주일 학교를 사용함으로 인해 많은 해가 초래되었음이 분명하였다. 그러한 학교에 자녀를 보내는 부모들은 흔히 그 마련이 자녀에게 종교적 교육을 베풀어야 할 책임을 면하게 해준다는 견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자녀들은 부모를 하나님에 관한 교육의 주된 근원으로 여기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부모를 마땅히 공경하고 순종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1892년부터 1927년까지, 「파수대」는 당시에 많은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 인기가 있었던 “국제 주일 학교 공부”에서 주로 다루어지는 성구에 관한 해설을 싣기 위해 지면을 할애하였다. 그 성구들은 여러 해 동안 회중파 교역자인 F. N. 펄루베와 그의 보조자들에 의해 선정되었다. 「파수대」는 그리스도교국의 신조에서 벗어나 성경을 이해하는 성경 연구생들의 진보된 관점에서 그 성구들을 논하였다. 「파수대」가 그런 면으로 일부 교회에 소개되고 그렇게 하여 진리가 전해지고 일부 교회 성원들이 그것을 받아들이기를 바랐다. 물론 차이점이 분명하여, 프로테스탄트 교직자의 분노를 샀다.

1918년이 되었는데, 기름부음받은 자들의 남은 자들은 여전히 지상 무대에 있었다. 그들의 집회에서 자녀들의 수도 크게 증가하였다. 흔히 어린이들은 부모가 연구할 때 그냥 놀았다. 하지만 청소년도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려면 “공의와 겸손을 구”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었다. (스바냐 2:3) 따라서 1918년에 협회는 회중들이 8세 내지 15세의 자녀들을 위한 청소년반을 마련하도록 격려하였다. 어떤 곳에서는 너무 어려 청소년반에 참석할 수 없는 아이들을 위한 유년반도 있었다. 동시에 자녀들에 대한 부모의 책임이 다시 강조되었다.

이로 인해 다른 사태 진전이 있었다. The Golden Age(「황금 시대」)는 1920년에 “청소년 성서 연구”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는데, 거기에는 질문과 함께 대답을 찾을 수 있는 참조 성구가 들어 있었다. 같은 해에 The Golden Age ABC(「황금 시대 ABC」)가 발행되었다. 그것은 부모가 자녀에게 기본적인 성서 진리와 그리스도인 특성들을 가르치는 데 사용하도록 만든 삽화가 풍부한 소책자였다. 뒤이어 1924년에 W. E. 밴 앰버그 저, The Way to Paradise(「낙원으로 가는 길」)이라는 제목의 책이 나왔다. 그것은 “청소년 성경 연구생”을 위한 것이었다. 한동안 그것이 청소년을 위해 집회에서 사용되었다. 그뿐 아니라, 미국의 “청소년 증인”에게는 자체적인 야외 봉사 마련이 있었다. 스위스에서는 청소년 그룹이 13세에서 25세까지의 사람들을 위해 “여호와의 청소년”이라는 연합체를 구성하였다. 그들은 베른에 자체 사무실을 가지고 있었으며 「여호와의 청소년」(Jehovah’s Youth)이라는 특별 잡지를 편집하여 그 곳에 있는 협회 인쇄기로 인쇄하였다. 이들 청소년은 자체적으로 집회를 가졌으며, 취리히의 폴크스하우스에서 1500명의 관중 앞에서 한 바와 같이 성서 드라마를 상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로 인해 여호와의 종들의 조직 내에 하나의 조직이 발전하고 있었다. 그것은 연합에 기여하지 않았으며 1936년에 중단되었다. 1938년 4월에, 협회장 J. F. 러더퍼드는 오스트레일리아를 방문하던 중에 어린이반이 성인을 위한 대회와 별도로 열리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즉시 어린이 모두를 주대회장에 한데 모으는 마련을 하였다. 이것은 그들에게 큰 유익을 주었다.

같은 해에, 「파수대」는 회중 내의 청소년을 위한 별도의 반에 대해 전반적인 문제를 검토하였다. 그 연구 내용은 부모에게 자신의 자녀를 교육할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다시 강조하였다. (에베소 6:4; 비교 신명 4:9, 10; 예레미야 35:6-10) 그 내용은 또한 성서에는 청소년반을 통해 청소년을 분리한 선례가 전혀 없음을 설명하였다. 오히려 청소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부모와 함께 참석하게 되어 있었다. (신명 31:12, 13; 여호수아 8:34, 35) 연구 내용에 대한 가외의 설명이 필요할 경우에는 부모가 집에서 설명해 줄 수 있었다. 더 나아가, 그 기사들은 그러한 별도의 반을 마련하는 것이 좋은 소식을 집집으로 전파하는 일에 사실상 방해가 됨을 지적하였다. 어떻게 그러한가? 교사들이 그러한 반들을 준비하고 사회하기 위해 야외 봉사에 빠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청소년을 위한 별도의 반들이 모두 폐지되었다.

바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 가족이 회중 집회에 함께 참석하는 것이 여호와의 증인의 관례로 되어 있다. 부모가 자녀를 준비시켜 적절한 방법으로 참여하도록 도와준다. 그뿐 아니라, 부모가 집에서 청소년을 교육하는 데 사용하도록 훌륭한 출판물이 연이어 마련되었다. 그러한 출판물 중에는 1941년의 Children(「어린이들」), 1971년(영문판 발행 연도)의 「위대하신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들음」, 1976년의 「청소년기—보람있게 사용해야 할 시기」, 1978년의 「나의 성서 이야기 책」, 1989년의 「청소년은 묻는다—질문과 효과있는 대답」이 있다.

모두가 활동적인 복음 전파자가 되도록 준비시킴

「파수대」 창간호가 발행된 이래, 그 독자들은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좋은 소식을 선포해야 할 특권과 책임이 모든 참 그리스도인에게 있음을 정기적으로 일깨움받았다. 회중 집회들은 여호와에 대한 사랑과 그분의 목적에 대한 지식을 세워 줌으로써 그들이 이 활동에 대해 마음과 정신의 준비를 갖추도록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특히 1922년에 오하이오 주 시더포인트에서 열린 대회에 뒤이어, 야외 봉사에서 수행되는 일과 그 봉사에 효과적으로 참여하는 방법이 크게 강조되었다.

야외 봉사와 직접 관련이 있는 내용이 담긴 한 장의 접지인 Bulletin(「회보」) *당시에 캔버스라고 불린 간단한 증거 내용을 실었는데, 사람들에게 증거할 때 그 증거 내용을 기억하고 사용하게 되어 있었다. 1923년의 대부분의 기간에는, 왕국을 광고하기 위한 연합된 노력의 자극제로서 매월 첫 수요일 밤의 기도·찬양·증언 집회의 절반이 야외 봉사에 관한 증언에 할애되었다.

늦어도 1926년에는, 야외 봉사를 논하는 월간 집회들이 봉사자 집회라고 불렸다. 그러한 봉사에 실제로 참여하는 사람들이 대개 그 집회에 참석하였다. 그러한 집회에서, 다른 사람에게 증거하는 데 사용되는 방법들이 논의되었으며 앞으로의 활동이 계획되었다. 1928년에는 이미, 협회는 회중들이 매주 그러한 집회를 갖도록 강력히 권하고 있었다. 그 후 4년 동안 회중들은 증언(혹은 선포) 집회를 봉사회라고 불리게 된 집회로 대치하기 시작하였으며, 협회는 모든 사람이 참석하도록 격려하였다. 60여 년 동안, 회중들은 이 주간 집회를 열어 왔다. 연설, 청중 참여를 포함하는 토의, 실연, 회견 등을 통해서, 그리스도인 봉사의 모든 부면과 관련하여 구체적인 도움을 베풀고 있다.

이러한 형태의 집회는 20세기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예수 자신이 제자들을 전파하도록 보내시기 전에 그들에게 자세한 교훈을 베푸셨다. (마태 10:5-11:1; 누가 10:1-16) 그 후 그들은 봉사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경험한 일들을 말하기 위해 모임으로써 서로를 세워 주었다.—사도 4:21-31; 15:3.

공개 연설 훈련에 관해 말하자면, 초기에는 그것이 정기적인 회중 집회에서 행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늦어도 1916년에는 공개 연사로서 얼마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자체적으로 반을 열고, 아마도 한 장로가 그들의 연설을 듣고 연설 내용과 방법을 개선하도록 충고하는 사회자로 참석할 수 있다는 제안이 있었다. 회중의 남자들만 참석한 그 모임은 나중에 예언자들의 학교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 당시의 일들을 되돌아보면서, 그랜트 수터는 이렇게 술회하였다. “내가 이 학교에서 받은 건설적인 비평은, 나의 아버지가 나의 연설을 듣기 위해 한 집회를 참석한 후에 개인적으로 나에게 준 비평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발전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형제들은 연설 지침서와 다양한 연설 골자를 개인적으로 편집하고 인쇄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러한 예언자들의 학교는 폐지되었다. 그 당시에 특별히 필요했던 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회중의 모든 성원이 호별 방문 복음 전파 활동에 온전히 참여하도록 준비시키는 일에 온전한 관심이 집중되었다.

이 점증하는 국제 조직의 각 성원이 간단한 증거를 하고 성서 출판물을 제공할 뿐 아니라 효과적으로 연설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도록 준비시킬 수 있었는가? 그것이 1943년부터 여호와의 증인의 각 회중에 개설된 특별한 학교의 목적이었다. 그것은 1942년 2월부터 여호와의 증인의 세계 본부에서 이미 시행되고 있었다. 매주 교훈이 베풀어졌으며, 학생들은 연설을 하고 그에 대해 충고를 받았다. 전체 회중이 참석하고 다루어질 내용을 준비하고 복습에 참여하도록 격려받았지만, 처음에는 남자들만 학교에서 연설하였다. 1959년에 자매들도 사람을 대하는 상황에서 성서 제목들을 논하기 위한 훈련을 받도록 등록할 수 있는 특권을 받았다.

이 학교의 효과에 관해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워치 타워 협회 지부는 이렇게 보고하였다. “이 대단히 훌륭한 마련은, 자기들은 공개 강연 연사가 결코 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많은 형제를 짧은 기간 내에 연단에서 아주 유능하게 되고 야외에서 더 효과적이 되도록 돕는 데 성공적이었다. 남아프리카 전역에서 형제들은 여호와의 그 새로운 마련을 환영하였으며 열정을 가지고 그 마련을 시행하였다. 일부 사람의 언어 및 교육 부족 등의 많은 장애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였다.”

신권 전도 학교는 여호와의 증인의 회중들에서 여전히 중요한 집회다. 등록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모두 등록되어 있다. 청소년과 노인, 새로운 증인과 경험이 많은 사람이 모두 참여한다. 그것은 계속적인 교육 프로그램이다.

일반인이 보고 듣도록 초대됨

여호와의 증인은 결코 비밀 결사가 아니다. 성서에 근거한 그들의 신앙은 누구나 구할 수 있는 출판물에 전부 설명되어 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일반인이 집회에 참석하여 실제 상황을 직접 보고 듣도록 초대하는 데 특별한 노력을 기울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을 개인적으로 교육하셨지만, 또한 무리가 들을 수 있는 장소—해변, 산허리, 회당, 예루살렘의 성전 지역—에서 공개적으로 말씀하셨다. (마태 5:1, 2; 13:1-9; 요한 18:20) 그러한 본에 따라 일찍이 1870년대에, 성경 연구생들은 벗과 이웃들과 관심을 가진 그 외 사람들이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에 관한 강연을 들을 수 있는 집회를 마련하기 시작하였다.

일반인에게 편리한 장소에서 그러한 강연을 마련하기 위한 특별한 노력이 기울여졌다. 이것은 반 확장 활동으로 알려졌다. 1911년에, 충분한 능력을 갖춘 연사들이 있는 회중은 연사를 주변의 읍과 마을로 파견하여 공회당에서 집회를 여는 마련을 하도록 권고받았다. 가능한 경우에 그들은 일련의 여섯 가지 강연을 마련하였다. 마지막 강연에 이어서, 연사는 정기적으로 모일 정도로 성서 연구에 대한 충분한 관심을 가진 사람이 청중 가운데 얼마나 되는지 질문하였다. 그러한 강연이 첫 해에 3000여 회 행해졌다.

1914년부터, “창조 사진극”도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형제들은 입장료를 받지 않았다. 그 때 이후에, 그들은 다른 활동 사진과 슬라이드 상영도 사용하였다. 1920년대부터 워치 타워 협회가 라디오 방송을 대대적으로 사용함으로 인해 사람들은 성서 강연을 자신의 집에서 들을 수 있었다. 그 후 1930년대에는 J. F. 러더퍼드가 행한 강연들을 녹음하여 수천 번의 공개 모임에서 들려 주었다.

1945년에는 이미, 신권 전도 학교에서 훈련받은 많은 공개 연사가 있었다. 그 해 1월에, 잘 조정된 공개 집회 운동이 시작되었다. 협회는 시기 적절한 일련의 여덟 가지 강연의 골자를 준비하였다. 광고지와 때로는 광고판이 광고를 위해 사용되었다. 회중의 정규 집회 장소를 사용하는 것에 더하여, 형제들은 회중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구역에서 그러한 공개 집회를 마련하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회중의 모든 사람은 집회를 광고하고 개인적으로 집회를 지지함으로써 그리고 새로운 참석자를 환영하고 그들의 질문에 대답함으로써 참여할 수 있었다. 이 특별 활동의 첫해에, 미국에서 1만 8646회의 공개 집회가 열렸는데, 총참석자 수는 91만 7352명이었다. 이듬해에는 공개 집회의 수가 미국 밭에서 2만 8703회로 증가하였다. 그리고 캐나다에서는 그러한 집회가 1945년에 2552회 마련되었는데 이듬해에는 4645회 있었다.

여호와의 증인의 대부분의 회중에서, 이제 공개 집회는 정기적으로 예정된 주간 집회의 일부이다. 그 집회는 강연의 형태로 진행되는데, 강연중에 주요 성경 구절들을 읽고 검토할 때 모두가 그 구절들을 찾아보도록 격려받는다. 이러한 집회는 회중과 새로운 참석자 모두를 위한 영적 교훈의 풍부한 원천이다.

여호와의 증인의 집회에 처음 참석하는 사람들은 흔히 예기치 못한 흐뭇한 경험을 하게 된다. 짐바브웨에서 한 탁월한 정치가는 왕국회관에서 진행되는 일을 살펴보기 위해 그 곳에 갔다. 그는 난폭한 기질을 가진 사람이었으며, 일부러 면도를 하지 않고 머리도 빗지 않은 채 갔다. 그는 증인들이 자신을 내쫓을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그러나 증인들은 그에게 진정한 관심을 나타내었으며 가정 성서 연구를 권하였다. 이제 그는 겸손하고 평화로운 그리스도인 증인이다.

여호와의 증인의 집회에 참석한 후 감동을 받아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고 말하는 사람이 수백만 명이나 된다.—고린도 전 14:25.

모이기에 적합한 장소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개인 집에서 집회를 가졌다. 일부 지역에서는 유대인 회당에서 연설할 수 있었다. 에베소에서 사도 바울은 2년 동안 학원에서 강연을 하였다. (사도 19:8-10; 고린도 전 16:19; 빌레몬 1, 2) 마찬가지로 19세기 후반에, 성경 연구생들은 개인 집에 모였고, 때로는 교회 예배당에서 연설하였으며, 빌릴 수 있는 그 외 홀을 사용하였다. 그 후 몇 안 되는 경우에, 그들은 이전에 다른 종교 단체가 사용한 건물을 구입하여 정기적으로 사용하였다. 브루클린 태버내클과 런던 태버내클의 경우가 그러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집회를 위해 지나치게 장식된 건물을 필요로 하지 않았고 원하지도 않았다. 얼마의 회중은 적합한 건물을 구입하여 개조하였으며, 새로운 회관을 지은 회중도 있었다. 1935년 이후 왕국회관이라는 이름이 점차 그러한 회중 집회 장소를 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왕국회관은 보통 보기 좋은 모습이지만 허식적으로 화려하지는 않다. 건축 양식은 지방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건물의 목적은 실용을 위주로 한다.

연합된 교육 프로그램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영적 성장과 활동은 회중에 따라 상당히 다양하였다. 회중들은 그리스도교국과 구별시켜 주는 일정한 기본 신앙들을 공유하였다. 하지만 형제들 중 일부는 여호와께서 백성을 먹이시는 수단을 깊이 인식한 반면, 다른 일부 사람들은 문제들에 대한 강한 개인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의 의견에 쉽게 흔들렸다.

예수께서는 죽으시기 전에 자신의 추종자들이 “다 하나가 되”기를—하나님 및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서로 연합할 것—을 기도하셨다. (요한 17:20, 21) 이것은 강요에 의한 연합이어서는 안 되었다. 그 연합은 감수성이 풍부한 마음에 호응을 일으키는 연합된 교육 프로그램의 결과다. 오래 전에 이렇게 예언된 바와 같다. “네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니 네 자녀는 크게 평강할 것이[라.]” (이사야 54:13) 그 평화를 만끽하기 위해, 모두는 여호와께서 보이는 의사 전달 통로를 통해 베푸시는 점진적인 교육으로부터 유익을 받을 기회를 필요로 하였다.

여러 해 동안 성경 연구생들은 성서와 함께 여러 권으로 된 「성경 연구」를 토의의 근거로 사용하였다. 거기에 실린 내용은 참으로 “때를 따라” 나오는 영적 “양식”이었다. (마태 24:45) 그러나 하나님의 영의 인도에 따른 계속적인 성경 검토로 인해, 여호와의 종들이 더 많은 것을 배워야 하고 영적으로 깨끗하게 해야 할 것들이 여전히 많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말라기 3:1-3; 이사야 6:1-8) 더욱이 1914년에 왕국이 설립된 후 많은 예언이 빠르게 연달아 성취되고 있었으며, 그것은 모든 참 그리스도인이 참여해야 할 긴급한 일을 지적하였다. 그러한 시기 적절한 성경 지식이 「파수대」 기사들을 통해 정기적으로 공급되었다.

회중 내의 모든 사람이 그러한 기사들로부터 유익을 받는 것은 아님을 알게 된 얼마의 여행하는 협회 대표자들은 정기적인 주간 집회에서 회중이 모두 「파수대」를 연구할 것을 본부 사무실에 건의하였다. 그 건의가 회중들에 널리 알려졌으며, 「파수대」 주기사 연구에 사용하기 위한 “베뢰아 질문”이 1922년 5월 15일 호부터 잡지에 정기적으로 실리게 되었다. 대부분의 회중은 그러한 연구를 매주 한 번 혹은 더 많이 가졌지만, 그들이 실제로 잡지 내용을 연구한 정도는 다양하였다. 어떤 곳에서는 사회자가 많은 것을 말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연구가 두 시간 혹은 더 오래 걸렸다.

그러나 1930년대에 조직은 민주적인 절차를 신권적인 것으로 바꾸었다. 이것은 「파수대」 * 연구에 대한 견해에 큰 영향을 주었다. 협회가 공급하는 연구 재료의 내용을 이해하는 일에 더 큰 관심이 기울여졌다. 집회를 개인적 견해를 표현하는 기회로 삼고 야외 봉사에 참여할 책임을 거부한 사람들은 점차 떨어져 나갔다. 참을성 있는 도움으로, 형제들은 연구를 한 시간으로 제한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 결과 더 많은 참여가 있었으며, 집회가 더욱 생기 있게 되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를 위한 표준으로 삼는 연합된 영적 급식 프로그램에 근거한 진정한 연합의 영이 회중들에 충만하게 되었다.

1938년에 「파수대」는 약 20개 언어로 발행되었다. 모든 것이 먼저 영어로 나왔다. 대개 여러 달 혹은 아마 1년 동안은 다른 언어로 받아 볼 수 없었다. 번역하고 인쇄하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인쇄 방법의 변화로, 「파수대」를 여러 언어로 동시에 발행할 수 있게 되었다. 1992년경에는 이미, 66개 언어 중 하나를 이해하는 회중들이 동일한 내용을 동일한 시간에 연구할 수 있었다. 따라서 전세계 여호와의 증인의 절대 다수는 매주 동일한 영적 양식을 함께 나눈다. 남·북아메리카 전역과 유럽의 대부분과 동양의 여러 나라와 아프리카의 많은 지역에서 그리고 지구 전역의 수많은 섬들에서, 여호와의 백성은 동시에 마련되는 영적 급식을 즐긴다. 그들은 함께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고 있다.—고린도 전 1:10.

여호와의 증인의 회중 집회 참석자 수는 그들이 집회를 진지하게 받아들임을 지적해 준다. 이탈리아에서는 1989년에 활동적인 증인이 약 17만 2000명이었는데 매주 왕국회관 집회 참석자 수는 22만 458명이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한 가톨릭 통신사는 이탈리아인의 80퍼센트가 가톨릭 신자이지만 약 30퍼센트만 어느 정도 정기적으로 교회 예배에 참석한다고 말한다. 비율의 관점에서 볼 때, 브라질의 상황도 비슷하다. 1989년 당시 덴마크에서, 국민 교회는 성원이 인구의 89.7퍼센트라고 주장하였지만, 2퍼센트만이 매주 한 번씩 교회에 참석하였다! 덴마크의 여호와의 증인 가운데, 매주 참석자 수는 그 당시에 94.7퍼센트에 달하였다. 독일에서, 알렌스바흐 여론 조사소가 실시한 한 여론 조사는 1989년에 연방 공화국에서 루터교인의 5퍼센트와 가톨릭교인의 25퍼센트가 정기적으로 교회에 참석한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여호와의 증인의 왕국회관에서는 매주 참석자 수가 증인의 수보다 많았다.

참석자들은 참석하기 위해 종종 큰 노력을 기울였다. 1980년대에 케냐에서 70세 된 한 여자는 매주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10킬로미터를 걷고 강을 건넜다. 한국어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에 사는 한 교포 증인은 정기적으로 버스와 열차와 보트를 탈 뿐 아니라 걷기도 하면서 편도 세 시간씩 여행하였다. 수리남에서, 수입이 적은 한 가족은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매주 버스 요금으로 하루 품삯을 쓴다. 아르헨티나에서, 한 가족은 성서 연구를 위한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50킬로미터를 여행하였으며 가족 수입의 4분의 1을 사용하였다. 병으로 인해 도무지 회중 집회에 참석할 수 없을 경우에는 종종 전화선으로 연결하여 듣거나 프로그램을 테이프에 녹음하여 듣는 마련을 한다.

여호와의 증인은 영적 격려를 위해 함께 모이기를 폐하지 말라는 성서 교훈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히브리 10:24, 25) 그리고 그들은 지방 회중에서 열리는 집회만 참석하는 것이 아니다. 대회 참석도 연례행사 프로그램의 중요한 부분이다.

[각주]

^ 11항 후에 이 집회는 “성경을 상고”함으로 칭찬받은 제1세기 베뢰아인들을 본받는 것이라는 의미로 베뢰아 성경 연구회라고 불렸다.—사도 17:11.

^ 12항 그 내용 때문에, 그 집회는 기도·찬양·증언 집회라고도 불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도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찬송은 포함되지만 경험담은 없는 단순한 기도 예배 모임을 석 달마다 한 번씩 가질 것을 권하였다.

^ 14항 1907년에 베뢰아 연구 보조 자료는 개정되었고 크게 확대되었으며 새로워졌다. 도움이 되는 자료가 1908년에 300면 가량 더 부가되어 인쇄되었다.

^ 18항 이것은 때때로 유월절 실체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념식이라고 불렸다. 예수께서는 유월절 양으로 전영되었으며 따라서 고린도 전서 5:7에서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라고 불렸다. 고린도 전서 11:20과 일치하게, 이 기념식은 또한 주의 만찬이라고 불렸다. 때때로 그것을 “연례 만찬”이라고 부름으로써, 그것이 연례 기념식이라는 사실에 주의를 이끌었다.

^ 19항 「파수대」(영문) 1891년 3월 호, 33-4면; 1907년 3월 15일 호, 88면; 1935년 2월 1일 호, 46면; 1948년 2월 1일 호, 41-3면 비교.

^ 37항 1900년 이전에도, Suggestive Hints to Colporteurs(「콜포처를 위한 제안」)이라는 제목의 팜플렛이 그 특별 봉사를 위해 등록한 사람들에게 보내졌다. 1919년부터, 처음에는 「황금 시대」 배부와 관련하여 그리고 후에는 다양한 온갖 형태의 복음 전파 활동과 관련하여 야외 봉사를 촉진시키기 위해 「회보」가 발행되었다.

^ 61항 Zion’s Watch Tower and Herald of Christ’s Presence(「시온의 파수대와 그리스도의 임재의 전령」)이라는 이름은 1909년 1월 1일에 The Watch Tower and Herald of Christ’s Presence(「파수대와 그리스도의 임재의 전령」)으로 바뀌었다. 1931년 10월 15일자로, 그 이름은 The Watchtower and Herald of Christ’s Presence(「파수대와 그리스도의 임재의 전령」)이 되었다.

[237면 삽입]

개인적인 참여를 요하는 집회

[238면 삽입]

정신적인 철학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감동시키는 표현들

[246면 삽입]

가족 모두가 함께 집회에 참석하도록 권고받는다

[252면 삽입]

연합케 하는 영적 급식 프로그램

[253면 삽입]

증인은 집회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239면 네모와 삽화]

초기 회중들

1916년에는 이미, 전세계에 약 1200개의 성경 연구생 그룹이 있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더반, 1915년(맨 위 오른쪽); 영국령 기아나(가이아나), 1915년 (중간 오른쪽); 노르웨이 트론헤임, 1915년 (아래 오른쪽); 캐나다 온타리오 주 해밀턴, 1912년 (맨 아래); 실론(스리랑카), 1915년(아래 왼쪽); 인도, 1915년(위 왼쪽)

[240, 241면 네모와 삽화]

노래로 여호와를 찬양함

고대 이스라엘인들과 예수께서 숭배 때 노래를 사용하였듯이, 현대 여호와의 증인도 그렇게 한다. (느헤미야 12:46; 마가 14:26) 그러한 노래는 여호와께 대한 찬양과 그분의 일에 대한 인식을 표현하는 한편, 정신과 마음에 성서 진리를 새기는 데 도움이 된다.

여러 해에 걸쳐 여호와의 증인은 여러 가지 노래책을 사용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점진적인 이해와 일치하게 가사를 조정하였다.

1879년: Songs of the Bride(「신부의 노래」)

(그리스도의 신부의 소원과 희망을 표현하는 144곡의 찬송가)

1890년: Poems and Hymns of Millennial Dawn(「천년기 새벽의 시와 찬송가」)

(151수의 시와 333곡의 찬송가, 악보가 없이 발행됨. 대부분은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이었다)

1896년: 「파수대」 2월 1일 전체에 Zion’s Glad Songs of the Morning(「시온의 아침의 기쁜 노래」)가 실림

(11곡을 위한 가사, 악보 포함; 성경 연구생들이 작사함)

1900년: Zion’s Glad Songs(「시온의 기쁜 노래」)

(82곡의 노래, 한 성경 연구생이 대부분을 지음; 앞서 나온 모음집을 보충하기 위한 것)

1905년: Hymns of the Millennial Dawn(「천년기 새벽의 찬송가」)

(1890년에 발행된 333곡의 노래, 악보 포함)

1925년: Kingdom Hymns(「왕국 찬송가」)

(80곡의 노래, 악보 포함, 특히 어린이용)

1928년: Songs of Praise to Jehovah(「여호와께 드리는 찬양의 노래」)

(337곡의 노래, 성경 연구생들이 지은 새로운 찬송가와 이전 찬송가를 섞은 것. 가사에서 거짓 종교 정서와 피조물 숭배를 배제하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1944년: Kingdom Service Song Book(「왕국 봉사 노래책」)

(62곡의 노래. 그 당시의 왕국 봉사 필요에 맞춘 것. 작사자와 작곡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1950년(영문판 발행 연도): 「여호와께 드리는 찬송」

(91곡의 노래. 이 노래책은 보다 현대적인 주제를 사용하였으며 옛 표현을 쓰지 않았다. 18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1966년(영문판 발행 연도): 「마음의 음악에 맞추어 노래함」

(그리스도인 생활과 숭배의 모든 부면을 다루는 119곡의 노래. 세속적 근원이나 거짓 종교 근원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진 음악은 삭제되었다. 전곡을 관현악으로 연주한 것이 음반으로 제작되어 회중 집회에서 반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선정된 일부 곡은 합창으로도 녹음되었다. 1980년부터, 개인이 고무적인 음악을 집에서 즐길 수 있도록 관현악으로 편곡하여 녹음한 “왕국 멜로디”가 제작되었다)

1984년(영문판 발행 연도): 「여호와께 찬양의 노래를 부르라」

(225곡의 왕국 노래, 세계 전역의 여호와의 헌신한 종들이 전적으로 작사하고 작곡함. 노래 반주용으로 음반과 카세트가 제작되었다)

초기의 가내 집회에서, 성경 연구생들은 찬양의 노래를 포함시켰다. 얼마 안 있어 노래는 그들의 대회의 한 부면이 되기도 하였다. 일부 사람은 성서관에서 여러 해 동안 시행된 바와 같이 아침 숭배와 관련하여 아침 식사 전에 노래를 한 곡씩 불렀다. 1938년경에는 지방 회중에서 대부분 노래를 부르지 않게 되었지만, 1944년에 노래 부르는 일이 재개되어 지금까지도 여호와의 증인의 회중 집회와 대회의 뜻 깊은 부면이 되고 있다.

[삽화]

칼 클라인이 1947년에 대회 관현악단을 지휘하는 장면

[242면 그래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념식

활동적인 증인

참석자 수

11,000,000

10,000,000

9,000,000

8,000,000

7,000,000

6,000,000

5,000,000

4,000,000

3,000,000

2,000,000

1,000,000

1935 1945 1955 1965 1975 1985 1992

[243면 삽화]

해럴드 킹은 중국 교도소에 격리되어 있었지만 기념식을 계속 가졌다

[244면 삽화]

독일의 청소년 성서반, 1930년대 초

[244면 삽화]

스위스에서 1930년대 중엽에, 증인 청소년들은 이 잡지(아래)를 발행하였으며 수많은 관중을 위해 성서 드라마(중앙의 아래)를 상연하였다

[247면 삽화]

「회보」(1919-35), Director(「지휘자」)(1935-36), 「통보」(영문판은 1936-56), 그리고 지금 100개 언어로 발행되는 「우리의 왕국 봉사」—이 모든 것은 여호와의 증인의 연합된 야외 봉사를 위한 정기적인 지침을 전해 준다

[248면 삽화]

봉사회의 실연들은 증인들이 야외 봉사의 직무를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된다 (스웨덴)

[249면 삽화]

신권 전도 학교에서 아버지에게 연설함으로써 경험을 얻는 케냐의 어린 증인

[250면 삽화]

1992년에는, 여호와의 증인의 회중들을 위한 성서 연구 재료가 66개 언어로 동시 발행되었으며, 더 많은 언어가 계속 추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