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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장

유명한 산상 수훈

유명한 산상 수훈

예수께서는 밤새도록 기도하고 나서 열두 제자를 사도로 택하셨기 때문에 틀림없이 피곤하실 것입니다. 이제 낮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사람들을 도우려는 열망과 힘이 있으십니다. 그분은 갈릴리에 있는 산 중턱에서 사람들을 도와주시는데, 그곳은 가버나움에 있는 그분의 활동의 중심지에서 그리 멀지 않을 것입니다.

먼 곳에서 많은 무리가 모여들었습니다. 남쪽에 있는 예루살렘이나 유대 여러 지역에서 온 사람들도 있고, 북서쪽의 해안 도시들인 티레와 시돈에서 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찾아온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분의 말씀을 듣고 병을 고치려고” 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됩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모두 낫게” 하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병든 사람이 모두 나았습니다. 또 예수께서는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사람들” 즉 사탄의 악한 천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들도 고쳐 주십니다.—누가복음 6:17-19.

그런 다음, 예수께서 산 중턱의 평평한 곳을 찾으시자 무리는 그분 주위에 모여듭니다. 예수의 제자들 특히 열두 사도는 그분 바로 곁에 있는 것 같습니다. 모두가 그런 기적을 행하실 수 있는 선생님의 말씀을 간절히 듣고 싶어 합니다. 예수께서는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 매우 유익한 교훈을 베푸십니다. 그때 이후로 이 교훈은 수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주었습니다. 내용이 간단하고 분명하면서도 영적으로 깊이가 있기 때문에 우리도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경험과 그들에게 익숙한 것들을 활용해서 말씀하십니다. 그 덕분에, 하느님의 길에서 더 나은 생활을 하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분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산상 수훈에 어떤 중요한 가르침이 들어 있기에 그 교훈이 그토록 귀중하게 여겨지는 것입니까?

참으로 행복한 사람은 누구인가?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예수께서는 그 점을 아시고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설명하는 말씀으로 교훈을 시작하십니다. 청중이 그 말씀에 온통 주의를 기울이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런데 어떤 말씀은 궁금증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영적 필요를 느끼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하늘 왕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슬퍼하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 의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그들이 배부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하늘 왕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여러분을 모욕하고 박해[할] ··· 때에, 여러분은 행복합니다.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십시오.”—마태복음 5:3-12.

‘행복하다’는 예수의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처럼 유쾌하다거나 흥겹다는 뜻이 아닙니다. 진정한 행복에는 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진정으로 뿌듯한 느낌 즉 삶에서 느끼는 만족감과 성취감이 포함됩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영적인 것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사람, 자신의 죄 있는 상태를 슬퍼하는 사람, 하느님을 알게 되어 그분을 섬기는 사람이 참으로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행한다는 이유로 미움이나 박해를 받는다 하더라도 행복합니다. 자신이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으며 그분에게서 영원한 생명을 상으로 받게 될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은 풍요롭게 살면서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와는 다르게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대조가 되는 표현을 사용하셔서 많은 청중이 생각해 보게 만드십니다. “여러분 부자들에게는 화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자기의 위로를 다 받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배부른 여러분에게는 화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굶주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웃고 있는 여러분에게는 화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슬퍼하며 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여러분을 좋게 말할 때면 화가 있습니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에게 그렇게 했습니다.”—누가복음 6:24-26.

재산이 많고, 기뻐서 웃고, 칭찬받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왜 화가 있습니까? 그런 것을 즐기고 소중히 여기다 보면, 하느님을 섬기는 일을 소홀히 하게 되어 진정한 행복을 잃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말씀은 단지 가난하거나 굶주리면 행복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이 예수의 가르침에 좋은 반응을 나타내며 참다운 행복을 누리는 축복을 받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염두에 두고 “여러분은 이 땅의 소금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5:13) 물론, 제자들이 문자 그대로 소금은 아닙니다. 사실, 소금은 일종의 방부제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에 있는 제단 곁에는 소금이 수북이 쌓여 있는데, 이것으로 제물에 소금을 칩니다. 소금은 또한 부패하거나 썩지 않는 것을 상징합니다. (레위기 2:13; 에스겔 43:23, 24) 예수의 제자들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부패하지 않게 도와주면서 방부제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이 땅의 소금”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전하는 소식은 그 소식을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의 삶을 보존해 줄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여러분은 세상의 빛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등불은 통으로 덮어 두지 않고 등잔대 위에 두어야 빛을 비출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권하십니다. “여러분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여러분의 훌륭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십시오.”—마태복음 5:14-16.

제자들이 따라야 할 높은 표준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가 하느님의 율법을 어긴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그분을 죽이려고 모의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터놓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를 폐하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성취하러 온 것입니다.”—마태복음 5:17.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율법을 더없이 존중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할 것을 권하십니다. 사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가장 작은 계명들 중 하나를 어기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 왕국과 관련해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런 사람은 왕국에 결코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 계명들을 지키고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 왕국과 관련해 큰 자라고 불릴 것입니다”라고 그분은 말씀하십니다.—마태복음 5:19.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율법을 어기게 하는 태도까지도 잘못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라는 율법의 말씀을 지적하신 후에,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자기 형제에게 계속 분을 품는 사람은 법정에 넘겨질 것”이라고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5:21, 22) 다른 사람에게 계속 분한 마음을 품는 것은 심각한 잘못이며 심지어 살인을 저지르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평화를 이루기 위해 어느 정도로 힘써야 하는지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당신이 예물을 제단으로 가져가다가 거기서 당신의 형제가 당신에게 반감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두고, 가서 먼저 그 형제와 평화를 이루십시오. 그러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바치십시오.”—마태복음 5:23, 24.

율법에는 간음을 금하는 계명도 있습니다. 예수의 말씀은 이러합니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여러분은 들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여자를 계속 바라보고 정욕을 품는 사람은 마음으로 이미 그 여자와 간음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5:27, 28) 예수께서는 단지 부도덕한 생각이 스쳐 가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계속 바라보는 것’이 심각한 문제임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그처럼 계속 바라보게 되면 흔히 욕정이 생깁니다. 그런 상태에서 기회가 생기게 되면 결국 간음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을 어떻게 방지할 수 있습니까? 극단적인 조처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오른쪽 눈이 당신을 걸려 넘어지게 한다면, 그 눈을 뽑아 던져 버리십시오. ··· 당신의 오른손이 당신을 걸려 넘어지게 한다면, 그 손을 잘라 던져 버리십시오.”—마태복음 5:29, 30.

어떤 사람들은 목숨을 건지려고 심하게 병든 팔이나 다리를 기꺼이 잘라 냅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말씀대로, 부도덕한 생각과 그에 따른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눈이나 손처럼 소중한 것이라도 무엇이든 “던져 버리”는 것은 더 중요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분의 설명은 이러합니다. “온몸이 게헨나에 떨어지는 것보다 지체 중 하나를 잃는 것이 더 낫습니다.” 여기서 게헨나(예루살렘 성벽 밖의 쓰레기 소각장)는 영원한 멸망을 상징합니다.

예수께서는 해를 입히거나 감정을 상하게 하는 사람을 대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조언해 주십니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마십시오. 도리어 누구든지 당신의 오른뺨을 때리거든, 그에게 다른 뺨도 돌려 대십시오.” (마태복음 5:39) 이 말씀은 자신이나 가족이 공격을 당할 때 방어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언급하신 뺨을 때리는 행동은 심한 상처를 입히거나 죽이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욕을 주는 행동입니다. 예수의 말씀은 누군가가 손바닥으로 뺨을 때리거나 모욕적인 말을 해서 싸움이나 말다툼을 하려고 하더라도 보복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 조언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법과 일치합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듣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조언해 주십니다. “계속해서 원수를 사랑하고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렇게 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도 말씀하십니다. “그리하여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을 나타내십시오. 그분은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해가 떠오르게 하십니다.”—마태복음 5:44, 45.

예수께서는 산상 수훈의 이 부분을 이런 말씀으로 요약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여러분도 완전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5:48) 예수께서는 사람이 모든 면에서 완전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느님을 본받으면 원수까지 포용할 만큼 사랑을 넓힐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을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여러분도 계속 자비로운 사람이 되십시오.”—누가복음 6:36.

기도와 하느님을 신뢰하는 마음

예수께서는 산상 수훈을 계속하시면서 듣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권하십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예수께서는 위선적으로 신앙심이 깊은 체하는 행위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자비의 선물을 베풀 때에, 위선자들이 ··· 하듯이 미리 나팔을 불지 마십시오.” (마태복음 6:1, 2) 자비의 선물은 남몰래 베푸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 다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합니다.” 오히려 그분은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은 기도할 때에 자기 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뒤에, 보이지 않는 곳에 계시는 당신의 아버지께 기도하십시오.” (마태복음 6:5, 6)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 앞에서 절대로 기도하지 말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예수 자신도 공개적으로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하지 말라고 하시는 기도는, 듣는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어 찬사를 이끌어 내려고 하는 기도입니다.

그분은 “기도할 때에, 이방 사람들이 하듯이 같은 말을 되풀이하지 마십시오” 하고 교훈하십니다. (마태복음 6:7) 예수의 말씀은 같은 문제를 놓고 반복해서 기도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암기한 문구를 “되풀이”하며 판에 박힌 기도를 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다음, 예수께서는 일곱 가지 청원이 담겨 있는 모범 기도를 알려 주십니다. 처음 세 가지는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고, 그분의 왕국이 오며,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청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통치권과 그분의 목적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먼저 그런 문제를 언급한 다음에 개인적 청원을 해야 할 것입니다. 즉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죄를 용서해 달라고, 인내할 수 없는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고, 악한 자에게서 구출해 달라고 청하는 것입니다.

소유물은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합니까? 예수께서는 무리에게 이렇게 권하십니다. “더는 자신을 위해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십시오. 땅에서는 좀이 먹고 녹이 슬며 도둑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갑니다.” 정말 맞는 말씀입니다! 그런 보물은 없어질 수 있으며 또 실제로 없어집니다. 그런 보물을 쌓는다고 해서 하느님 앞에서 더 가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어서 예수께서는 “자신을 위해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십시오” 하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생활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일을 첫째 자리에 둠으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누리는 좋은 신분과 영원한 생명이라는 상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예수의 이런 말씀은 정말 참됩니다. “당신의 보물이 있는 곳에 당신의 마음도 있을 것입니다.”—마태복음 6:19-21.

예수께서는 이 점을 강조하는 예를 드십니다. “눈은 몸의 등불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눈이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면 온몸이 밝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눈이 시기하면 온몸이 어두울 것입니다.” (마태복음 6:22, 23) 눈은 제 기능을 다할 때 우리 몸의 환한 등불과 같습니다. 그러나 눈이 그렇게 되려면 초점이 잘 맞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초점이 맞지 않으면 삶에 대한 잘못된 가치관을 갖게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 아니라 소유물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우리의 “온몸이 어두울 것”이며, 어쩌면 그늘지거나 어두운 것에 이끌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 다음, 예수께서는 설득력 있는 예를 드십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중히 여기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습니다.”—마태복음 6:24.

예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 가운데는 필수품에 대해서 어떤 견해를 가져야 하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하느님을 섬기는 일을 첫째 자리에 둔다면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보증하십니다.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십시오. 새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거나 창고에 모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새들을 먹이십니다.”—마태복음 6:26.

그러면 그 산과 들에 피어 있는 백합은 어떠합니까? 예수께서는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했다”고 지적하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신다면 여러분은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습니까?” (마태복음 6:29, 30) 예수께서는 이렇게 지혜로운 권고를 하십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면서 결코 염려하지 마십시오. ···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는 그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왕국과 그분의 의를 계속 첫째로 구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이 그 모든 것을 여러분에게 더해 주실 것입니다.”—마태복음 6:31-33.

생명을 얻으려면

사도들을 비롯하여 진실한 사람들은 누구나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식으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처한 상황 때문에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많은 바리새인은 비평적이라서 남을 가혹하게 판단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듣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훈계하십니다. “더는 판단하지 마십시오. 그래야 여러분도 판단받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판단하는 대로 여러분도 판단을 받을 것입니다.”—마태복음 7:1, 2.

지나치게 비평적인 바리새인들의 인도를 따르는 것은 위험합니다. 예수께서 예를 들어 말씀하시는 바와 같습니다. “눈먼 사람이 눈먼 사람을 인도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예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비평적인 눈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심각한 잘못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형제여, 내가 당신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소’ 하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위선자여! 먼저 자신의 눈에서 들보를 빼내십시오. 그러면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어떻게 빼낼지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누가복음 6:39-42.

이것은 제자들이 아무런 판단도 하면 안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권하십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마십시오.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십시오.” (마태복음 7:6) 하느님의 말씀의 진리는 진주처럼 귀중합니다. 어떤 사람이 이 귀중한 진리에 대한 인식을 전혀 나타내지 않음으로 동물처럼 행동한다면, 제자들은 그런 사람을 떠나 진리를 잘 받아들이는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다시 기도를 언급하면서, 꾸준히 기도해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계속 청하십시오. 그러면 받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기꺼이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질문으로 그 사실을 강조하십니다. “여러분 중에 아들이 빵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 여러분이 악할지라도 자녀에게 좋은 선물을 줄 줄 안다면,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야 청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것들을 얼마나 더 기꺼이 주시겠습니까!”—마태복음 7:7-11.

그다음에 예수께서는 유명한 행동 규범이 된 원칙을 제시하십니다. “무엇이든지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것을 여러분도 사람들에게 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다른 사람을 대할 때 그런 적극적인 권고를 마음에 새기고 적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렇게 하기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교훈하시는 바와 같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십시오. 멸망에 이르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널찍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반면에, 생명에 이르는 문은 좁고 그 길이 비좁아서 그것을 찾아내는 사람이 적습니다.”—마태복음 7:12-14.

제자들을 생명에 이르는 길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거짓 예언자들을 주의하십시오. 그들은 양의 탈을 쓰고 여러분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스러운 이리들입니다.” (마태복음 7:15) 예수께서 지적하시듯이, 좋은 나무인지 나쁜 나무인지는 그 열매로 알아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짓 예언자인지 아닌지는 가르침과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제자가 되려면 뿐만 아니라 행동이 따라야 한다고 설명하십니다. 예수를 주라고 부르면서도 하느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다면 어떠합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들에게 분명히 말할 것입니다. ‘나는 당신들을 전혀 알지 못하오!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여, 내게서 물러가시오!’”—마태복음 7:23.

예수께서는 산상 수훈을 이렇게 끝맺으십니다.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입니다. 비가 쏟아지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몰아쳤으나 집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반석 위에 기초를 놓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7:24, 25) 집이 왜 무너지지 않았습니까? “땅을 깊이 파 내려가서 반석 위에 기초를 놓”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6:48) 그러므로 예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말씀대로 ‘행하려고’ 힘써야 합니다.

반면에, “이 말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어떠합니까? 그는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습니다. (마태복음 7:26)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면 그런 집은 주저앉고 말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산상 수훈을 하면서 가르치시는 방식에 놀랍니다. 그분이 종교 지도자들과는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 중 다수가 그분의 제자가 되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