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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하신 선생님이 창조주에 관해 우리에게 더 분명히 알려 주시다

위대하신 선생님이 창조주에 관해 우리에게 더 분명히 알려 주시다

제9장

위대하신 선생님이 창조주에 관해 우리에게 분명히 알려 주시다

일세기에 팔레스타인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하느님의 예언자들이 여러 세기 전에 예언한 “그리스도” 즉 “메시아”가 올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성서가 하느님의 인도 아래 기록되었기 때문에, 성서에는 미래에 대해 미리 알려 주는 소식이 들어 있다고 확신하였습니다. 다니엘서에 들어 있는 한 가지 예언은 메시아가 일세기 초에 올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었습니다.—누가 3:15; 다니엘 9:24-26.

하지만 그들은 조심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자칭 메시아라고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 24:5)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그러한 사람을 몇 명 언급합니다. 듀다는 추종자들을 이끌고 요르단 강으로 가서, 강물이 갈라질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어떤 이집트 사람은 사람들을 올리브 산으로 데리고 가서, 자기가 명령을 내리면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질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페스투스 총독 시대에 한 사기꾼은 문젯거리들에서 해방시켜 주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비교 사도 5:36; 21:38.

그처럼 미혹을 당한 추종자들과는 대조적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된 일단의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야말로 위대하신 선생님이자 참 메시아임을 알아보았습니다. (사도 11:26; 마가 10:47) 예수는 가짜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복음서 *라고 불리는 네 권의 역사책에서 충분히 확증할 수 있는 바와 같이, 믿을 만한 신임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다윗의 가계에 속하게 될 것이며 놀라운 일들을 행할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모든 일을 성취하셨는데, 그 점은 심지어 반대자들의 증언에 의해서도 확증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는 성서에 언급되어 있는 메시아의 자격을 갖추고 있었습니다.—마태 2:3-6; 22:41-45; 요한 7:31, 42.

예수를 만나 보고 그분이 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관찰하고 그분의 독특한 지혜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선견 지명을 인식한 사람들은 그분이 메시아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봉사의 직무를 수행하는 동안(기원 29-33년), 그분이 메시아임을 뒷받침하는 증거들이 쌓였습니다. 사실, 그분은 단지 메시아에 불과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제반 사실을 잘 알고 있던 한 제자는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 *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요한 20:31.

예수께서는 그처럼 하느님과 친밀한 관계를 누리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창조주가 어떤 분인지 설명하고 밝혀 주실 수 있었습니다. (누가 10:22; 요한 1:18) 예수께서 증언하신 바에 의하면, 아버지와의 친밀한 관계는 하늘에서 시작되었는데, 예수께서는 하늘에서 하느님과 함께 일하면서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모든 것들이 존재하게 하셨습니다.—요한 3:13; 6:38; 8:23, 42; 13:3; 골로새 1:15, 16.

성서는 그 아들이 영계에서 옮겨져서 “사람과 같은 모양으로 계셨”다고 보고합니다. (빌립보 2:5-8) 그러한 일은 통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 아닌데, 과연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과학자들은 우라늄과 같은 천연 원소가 다른 원소로 변할 수 있음을 확증합니다. 과학자들은 심지어 물질이 에너지로 변할 때 생기는 결과까지도 계산해 냅니다(E=mc2). 그러므로 성서에서 영적인 피조물이 변화되어 인간으로 살았다고 말한다고 해서 의심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을 또 다른 방법으로 예를 들어 설명하기 위해, 일부 의사들이 체외 수정을 통해 달성하고 있는 일을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시험관”에서 시작한 생명이 여자의 몸 속으로 옮겨져서 나중에 아기로 태어나게 됩니다. 예수의 경우, 성서는 그분의 생명이 “가장 높으신 분의 권능”에 의해 마리아라는 처녀의 몸 속으로 옮겨졌다고 우리에게 확신시켜 줍니다. 마리아는 다윗 가계 출신이었으므로, 예수는 다윗에게 약속된 메시아 왕국의 영원한 상속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누가 1:26-38; 3:23-38; 마태 1:23.

예수께서는 창조주와의 친밀한 관계와 창조주와 닮은 점에 근거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도 본 것입니다.” (요한 14:9) 그분은 또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들과 또 아들이 기꺼이 계시해 주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누가 10:22) 그러므로 예수께서 지상에서 가르치신 내용과 행하신 일에 대해 배워 알게 됨에 따라, 우리는 창조주의 특성을 더 분명히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를 직접 대한 적이 있는 남녀들의 경험을 사용하여 그 점을 고려해 봅시다.

사마리아 여자

예수와 잠깐 대화를 나누어 본 한 사마리아 여자는 “이 사람이 혹시 그리스도가 아닐까요?”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요한 4:29) 그 여자는 심지어, 가까운 곳에 있는 수가라는 마을 사람들에게도 예수를 만나 보라고 강력히 권하였습니다. 이 여자는 무엇 때문에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까?

이 여자가 예수를 만난 것은, 예수께서 오전 내내 사마리아의 낮은 산지의 먼지가 많이 이는 길을 걷다가 쉬고 계실 때였습니다. 예수께서는 피곤하셨지만 이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셨습니다. 그 여자가 영적인 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관찰하신 예수께서는 “영과 진리로 아버지를 숭배”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춘 뜻 깊은 진리를 전해 주셨습니다. 이윽고 자신이 참으로 그리스도라는 사실, 그 때까지 공개적으로 표명한 적이 없는 사실을 밝히셨습니다.—요한 4:3-26.

이 사마리아 여자는 자기가 예수와 만난 사실이 매우 뜻 깊은 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여자가 이전에 한 종교적 활동은 그리심 산에서 행했던 숭배를 중심으로 한 것이었고, 성서의 처음 다섯 권의 책에만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이스라엘 열 지파와 다른 민족들 사이의 혼혈 후손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상대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태도와는 참으로 달랐습니다!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집의 잃은 양들”에게 가도록 임명받았지만, 이 사마리아 여자에게 기꺼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태 15:24) 그런 면에서 예수께서는, 모든 나라에 속한 성실한 사람들을 기꺼이 받아들이시는 여호와의 태도를 반영하신 것입니다. (열왕 상 8:41-43) 그렇습니다. 예수와 여호와 두 분은 오늘날 세상에 널리 퍼져 있는, 편협한 정신으로 나타내는 종교적 적대감과는 거리가 먼 분들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는 창조주와 그분의 아들에게 이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이 여자에게 기꺼이 가르치신 사실로부터 우리가 이끌어 낼 수 있는 교훈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 당시 이 여자는 자기 남편이 아닌 남자와 살고 있었습니다. (요한 4:16-19)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러한 사실 때문에 그 여자와 이야기하는 일을 못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여자가 자신이 품위 있는 대접을 받는 것에 대해 틀림없이 감사하게 여겼을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만 그러한 경험을 한 것이 아닙니다. 일부 유대인 지도자들(바리새인들)이 예수가 회개한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한다고 비난하였을 때,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지만,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가서, ‘나는 자비를 원하고 희생을 원하지 않는다’고 한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배우십시오. 나는 의로운 사람들이 아니라 죄인들을 부르러 왔습니다.” (마태 9:10-13)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율법이나 표준을 범해 죄의 무거운 짐 아래서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베푸셨습니다. 하느님과 그분의 아들이, 과거에 저지른 행동으로 인해 문제가 생긴 사람들을 도와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참으로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마태 11:28-30 *

사마리아에서 있었던 이 일의 경우, 예수께서 여자에게 친절하게 도움을 베푸는 말씀을 하셨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도록 합시다. 그 점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당시 유대인 남자들은 거리에서 여자와 이야기하는 일을 피해야 한다고, 심지어 자기 아내와도 이야기하는 일을 피해야 한다고 가르침받았습니다. 유대인 라비들은 여자들은 심오한 영적 교훈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하였으며, 여자들을 “천박한 정신”의 소유자로 간주하였습니다. 일부 라비들은 이렇게 말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여자에게 율법의 말씀을 전하느니 차라리 불태워 버리는 편이 낫다.” 예수의 제자들은 그러한 풍토에서 성장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돌아와 보니 “그분이 여자와 말씀하고 계셨기 때문에 ·⁠·⁠· 이상히 여기기 시작하였”습니다. (요한 4:27) 수많은 예 중 하나에 불과한 이러한 기록은 예수께서 자기 아버지의 형상을 반영하였음을 예시해 줍니다. 그 아버지는 남성과 여성을 창조하시고 그들 모두에게 영예를 부여하신 분입니다.—창세 2:18.

후에 사마리아 여자는 자기와 같은 마을에 사는 사람들에게 예수의 말씀을 들어 보라고 설득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실을 조사해 보고 나서 믿는 사람들이 되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 이 사람이 확실히 세상의 구원자라는 것을 [압니다].” (요한 4:39-42) 우리도 인류 “세상”의 일부이므로, 예수는 우리의 장래와 관련해서도 매우 중요한 분입니다.

한 어부의 견해

이제 예수와 친밀하게 지냈던 두 사람의 동료—베드로와 이어서 요한—의 눈을 통해서 예수를 관찰해 보도록 합시다. 이 평범한 어부들은 예수의 최초의 추종자들 가운데 들어 있었습니다. (마태 4:13-22; 요한 1:35-42) 바리새인들은 이들을 “배우지 못한 보통 사람들”, 즉 라비들처럼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멸시받던 땅의 사람들(암하아레츠)의 일부로 여겼습니다. (사도 4:13; 요한 7:49) 그처럼 종교 전통주의자들이 지운 멍에 아래 “수고하며 짐을 진” 많은 사람들은 영적인 계몽을 받기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소르본 대학교의 샤를 기녜베르 교수는 “그들의 마음은 전적으로 야훼[여호와]에게 향해 있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겸손한 사람들을 외면하고 부유하거나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편애하는 일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가르침과 그들에 대한 태도를 통해서 그들에게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를 알려 주셨습니다.—마태 11:25-28.

베드로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나타내는 예수의 태도를 직접 경험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따라 봉사의 직무에 참여한 직후에 그의 장모가 열병을 앓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오셔서 그의 장모의 손을 잡자 열병이 떠나갔습니다! 오늘날 의사들이 일부 치료 과정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도 이 치료 과정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열병이 그 여자에게서 떠났습니다. 예수의 병 고치는 방법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병들어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치료하신 것은 예수께서 그러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신 증거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참으로 사람들을 돕고 싶어하셨으며, 그분의 아버지도 그러하십니다. (마가 1:29-31, 40-43; 6:34) 베드로는 예수와 관련된 체험을 통해서, 창조주께서는 각 사람을 돌볼 만한 가치가 있는 소중한 사람으로 여기신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베드로 첫째 5:7.

후에,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여인의 뜰에 계셨습니다. 그분은 보고의 헌금통에 헌금하는 사람들을 관찰하고 계셨습니다. 부자들은 주화를 많이 넣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예리하게 주의를 기울이시다가, 한 가난한 과부가 가치가 아주 적은 주화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을 비롯한 몇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여러분에게 말하는데, 이 가난한 과부는 보고의 헌금통에 돈을 넣는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남은 것 가운데서 넣었지만, 그는 궁핍한 가운데서 자기가 가진 모든 것,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기 때문입니다.”—마가 12:41-44.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서 좋은 점을 찾으시며, 개개인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셨다는 것을 당신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일이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당신은 생각합니까? 예수의 모범을 통해서 여호와가 어떤 분인지를 인식한 베드로는 후에 시편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여호와의 눈은 의로운 사람들 위에 있고 그분의 귀는 그들의 간구로 향[합니다].” (베드로 첫째 3:12; 시 34:15, 16) 당신에게서 좋은 점을 찾기를 원하면서 당신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실 창조주와 그분의 아들에게 당신은 마음이 끌리지 않습니까?

예수와 2년쯤 교제한 후에, 베드로는 예수가 메시아임을 확신하였습니다. 예수께서 한번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합니까?” 하고 물으신 적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대답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러면 여러분 자신은 나를 누구라고 합니까?” 하고 질문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자신 있게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보고 당신은 아마 이상하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분은 그러한 사실에 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명하셨”습니다. (마가 8:27-30; 9:30; 마태 12:16)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사람들 가운데 몸소 계셨으므로,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단지 소문에 근거한 결론을 내리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이 논리적이지 않습니까? (요한 10:24-26) 요점은, 우리의 창조주께서도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믿을 만한 증거를 직접 조사해 봄으로 그분에 관해 알게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사실에 근거한 확신을 갖기를 바라십니다.—사도 17:27.

당신이 예상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예수의 동족 가운데 일부는 예수가 창조주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풍부한 증거가 있는데도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자기의 지위나 정치적 목표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던 많은 사람들은 이 성실하지만 겸손한 메시아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봉사의 직무가 끝나 갈 무렵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보냄을 받은 이들을 돌로 치는 자여, ·⁠·⁠· 내가 얼마나 자주 너의 자녀를 모으려 하였던가! 그러나 당신들은 그것을 원하지 않았소. 보시오! 당신들의 집이 당신들에게로 버린 바 될 것이오.” (마태 23:37, 38) 이 나라의 상황이 이렇게 변하자, 모든 민족을 축복하려는 하느님의 목적을 실현시킬 중요한 단계가 되었습니다.

곧 이어 베드로와 다른 세 명의 사도는 예수께서 “사물의 제도의 종결”에 관해 상세한 예언을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 예수께서 예언하신 것은 기원 66-70년에 예루살렘에 대한 로마의 공격과 멸망이 진행되는 동안 일차적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역사는 예수께서 예언하신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확증해 줍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예언하신 일들 중 많은 부분을 실제로 목격하였고, 그것이 베드로가 쓴 두 권의 책인 베드로 첫째둘째에 반영되어 있습니다.—베드로 첫째 1:13; 4:7; 5:7, 8; 베드로 둘째 3:1-3, 11, 12.

예수께서는 봉사의 직무를 수행하시는 동안 자기 주위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참을성 있게 친절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나 악은 주저하지 않고 정죄하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베드로가 창조주를 더 온전히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며, 우리가 창조주를 더 온전히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예수의 예언을 성취시키는 다른 일들도 보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여호와의 날의 임재를 ·⁠·⁠· 깊이 유념”해야 한다고 썼습니다. 베드로는 또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약속에 관하여 어떤 사람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더디시지 않습니다. 도리어 아무도 멸망되기를 바라지 않으시고 모두가 회개에 이르기를 바라시기 때문에 여러분에 대하여 참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베드로는 ‘의가 깃들여 있을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격려적인 말을 하였습니다. (베드로 둘째 3:3-13) 우리는 베드로처럼, 예수를 통해 반영된 하느님의 특성들을 인식하고 미래에 대한 그분의 약속에 신뢰심을 나타냅니까?

예수가 죽은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사도들과 마지막 밤을 보내면서 사도들과 함께 특별한 식사를 하셨습니다. 그러한 식사 때면 유대인 집주인은, 샌들을 신고 먼지가 이는 길을 걸어왔을 손님들의 발을 씻겨 줌으로써 후대를 나타내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예수에게 그 일을 해주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겸손하게 일어나 수건과 대야를 들고 사도들의 발을 씻기기 시작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차례가 되자, 그는 예수에게서 이러한 봉사를 받기가 부끄러웠습니다. 베드로는 “저의 발은 절대로 씻지 못하십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당신을 씻어 주지 않는다면 당신은 나와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라고 응답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곧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이렇게 덧붙여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요 또 선생임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의 발을 씻어 주었다면, 여러분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합니다. 내가 여러분을 위하여 본을 세운 것은 내가 여러분에게 행한 대로 여러분도 그렇게 행하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3:5-17.

수십 년 후에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를 본받으라고, 발을 씻는 의식으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지” 않고 겸손하게 섬기는 면에서 그렇게 하라고 강력히 권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또한 예수의 모범이 “하느님께서는 거만한 사람들을 대적하시지만, 겸손한 사람들에게는 과분한 친절을 베푸”신다는 점을 증명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베드로는 창조주에 관해 참으로 훌륭한 점을 배웠습니다! (베드로 첫째 5:1-5; 시 18:35) 하지만 베드로는 더 많은 사실을 배웠습니다.

그 마지막 식사 후에, 사도였지만 도둑이 된 유다 이스가리옷이 무장한 사람들의 무리를 이끌고 예수를 체포하러 왔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체포하려 하자 베드로가 응수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칼을 뽑아 무리 가운데 있는 한 사람에게 부상을 입혔습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잘못을 다음과 같이 시정해 주셨습니다. “칼을 제자리에 도로 꽂으십시오. 칼을 잡는 사람은 모두 칼로 망할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 사람을 만져 낫게 해주셨습니다. (마태 26:47-52; 누가 22:49-51) 확실히, 예수께서는 자기 아버지를 본받아, “계속해서 여러분의 적들을 사랑하”라는 자신의 가르침과 일치하게 사셨는데, 그 아버지는 “악한 사람들에게나 선한 사람들에게나 해가 떠오르게 하시며, 의로운 사람들에게나 불의한 사람들에게나 비를 내리시”는 분입니다.—마태 5:44, 45.

압박감이 심한 그 밤이 지나가는 동안에, 유대인의 최고 법정에서 예수께서 받은 공판은 서둘러 끝마쳐졌습니다. 예수께서는 신성 모독이라는 그릇된 죄명으로 고발되어, 로마 총독에게로 끌려가서, 처형되도록 부당하게 넘겨졌습니다.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은 예수를 조롱하였습니다. 예수는 잔인한 학대를 받았고, 마침내 기둥에 못박혔습니다. 그러한 학대의 많은 부분은 여러 세기 전에 기록된 예언의 성취였습니다. 심지어 고통의 기둥에 달려 있는 예수를 지켜 보던 군인들까지도 “확실히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이었다”고 인정하였습니다.—마태 26:57-27:54; 요한 18:12-19:37.

이러한 사태 진전은 틀림없이 베드로를 비롯한 여러 사람에게 ‘그리스도가 죽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불러일으켰을 것입니다. 그들은 후에 가서야 그 점을 이해하였습니다. 그들이 이해한 한 가지 사실은, 그러한 일들이 이사야 53장의 예언을 성취시켰다는 점인데, 그 예언에서는 그리스도가 유대인만 아니라 온 인류를 해방시켜 줄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습니다.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그분은 친히 기둥에 달려 자기 몸으로 우리 죄를 지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에 대하여 끝나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분의 매맞은 상처로 여러분은 낫게 되었습니다.’” (베드로 첫째 2:21-25) 베드로는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진리의 의미를 이해하였습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고 또 자기 영혼을 많은 사람들과 교환하는 대속물로 주려고 온 것입니다.” (마태 20:28)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인류를 아담으로부터 유전받은 죄 많은 상태에서 도로 사기 위해, 완전한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생명의 권리를 포기하셔야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서의 기본적인 가르침—대속—입니다.

대속이란 말에는 어떤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까? 대속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당신에게 컴퓨터가 있는데, 누군가가 심어 놓은 에러(혹은 바이러스)만 아니었다면 완벽했을 프로그램에 그것을 심어 놓는 바람에 전자 파일 중 하나가 손상되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것은 아담이 하느님에게 고의적으로 불순종했을 때 즉 죄를 지었을 때 아담이 한 행동의 결과를 잘 예시해 주는 것입니다. 이 예를 좀더 진행시켜 봅시다. 손상된 전자 파일을 어떤 식으로 복사한다 해도 복사된 파일은 손상된 파일의 영향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황이 완전히 절망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특수 프로그램을 사용해서, 당신의 파일이나 컴퓨터를 손상시키는 에러를 찾아내어 제거할 수 있습니다. 그와 유사하게, 인류도 아담과 하와로부터 “바이러스” 즉 죄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없애기 위해 외부로부터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 5:12) 성서에 의하면, 하느님께서는 예수의 죽음을 통하여 그처럼 죄를 깨끗이 없애는 마련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사랑에 찬 마련으로서, 우리는 그 마련으로부터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고린도 첫째 15:22.

베드로는 예수께서 하신 일을 인식하였기 때문에 “육체로 남아 있는 시간을 더는 사람의 욕망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그렇게 산다는 것은 베드로에게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타락한 습관이나 부도덕한 생활 방식을 피하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을 행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 문제를 일으키려고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행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이 더 풍요로워지고 더 뜻 깊은 것이 됨을 알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 첫째 4:1-3, 7-10, 15, 16) 베드로의 삶이 바로 그러하였으며, 우리도 “선을 행하면서 자기의 영혼을 충실하신 창조주께 ·⁠·⁠· 맡”긴다면 바로 그러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베드로 첫째 4:19.

사랑을 인식한 제자

사도 요한은 예수와 친밀한 교제를 나눈 또 다른 제자였으며, 따라서 우리가 창조주를 더 온전히 이해하도록 도와 줄 수 있습니다. 요한은 복음서 한 개를 썼고, 또한 세 개의 편지(요한 첫째, 둘째, 셋째)도 썼습니다. 그 중 한 편지에서 요한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통찰력 있는 견해를 제시하였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하느님의 아들이 오셔서 우리에게 지적 능력을 주시어 우리로 참되신 분[창조주]을 알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참되신 분과 결합해 있습니다. 그분은 참 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십니다.”—요한 첫째 5:20.

요한이 “참되신 분”에 대한 지식을 얻은 것은 “지적 능력”을 사용하는 것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요한은 창조주의 특성과 관련하여 어떤 점들을 식별하였습니까?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는 사람은 하느님과 결합하여 머물러 있[습니다]”라고 요한은 썼습니다. 요한이 그렇게 확신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랑은 이 점에 있으니, 곧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 보내”셔서 우리를 위한 대속 희생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요한 첫째 4:10, 16) 요한도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우리를 위해서 자기 아들을 보내어 죽게 하신 일에 나타난 하느님의 사랑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요한은 예수와 매우 가깝게 지냈기 때문에 예수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근처의 베다니에서 있었던 일은 요한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친구 나사로가 몹시 아프다는 보고를 받고 베다니로 가셨습니다. 예수와 사도들이 도착했을 때 나사로는 이미 죽어서 적어도 나흘이 지나 있었습니다. 요한은 인간 생명의 근원이신 창조주께서 예수를 후원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나사로를 부활시키실 수 있을 것입니까? (누가 7:11-17; 8:41, 42, 49-56) 예수께서는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오라비는 살아날 것입니다.”—요한 11:1-23.

요한은 그 때 나사로의 또 다른 누이 마리아가 예수를 만나러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예수께서는 “영으로 신음하고 괴로워하셨”습니다. 요한은 예수의 반응을 묘사하기 위해, 마음을 쥐어짜는 듯한 깊은 감정이라는 의미를 가진 그리스어 단어(한국어로 ‘신음하다’라고 번역한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요한은 예수께서 “괴로워하”시는 모습, 즉 내적인 동요를 일으키며 깊은 슬픔에 잠기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무관심하거나 냉담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요한 11:30-37) 분명히, 예수께서는 깊고 부드러운 감정을 가지고 계셨으며, 그러한 사실은 요한이 창조주의 감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그와 비슷하게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한은 예수의 감정이 적극적인 행동으로 이어질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께서 “나사로, 나오시오!” 하고 외치시는 것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나사로가 나왔습니다. 나사로가 살아나서 무덤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 일은 틀림없이 나사로의 누이들과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다른 사람들에게 참으로 큰 기쁨을 가져다 주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예수에게 믿음을 두었습니다. 예수의 적들은 예수께서 이처럼 부활을 행하셨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지만, 그 부활에 관한 소식이 퍼지자 예수뿐만 아니라 “나사로도 죽이려고 상의하였”습니다.—요한 11:43; 12:9-11.

성서에서는 예수를 가리켜 ‘창조주의 존재 자체의 정확한 표상’이라고 묘사합니다. (히브리 1:3) 따라서 예수의 봉사의 직무는 병과 죽음으로 초래된 처참한 상황을 원상 복구시키고 싶어하는 예수 자신과 그분의 아버지의 간절한 욕망에 대한 풍부한 증거를 제시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성서에 기록된 몇 건의 부활에 국한된 일이 아닙니다. 사실, 요한은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실 때 그 자리에 함께 있으면서 그 말씀을 들었습니다. “기념 무덤에 있는 모든 사람이 [아들]의 음성을 듣고 나올 시간이 오고 있[습니다].” (요한 5:28, 29) 요한이 여기서 묘에 해당하는 일반적인 단어 대신에 “기념 무덤”이라고 번역된 단어를 사용하였음에 유의하십시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기억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확실히, 광대한 우주의 창조주께서는 우리가 사랑하는 죽은 사람들의 선천적인 특성과 후천적인 특성을 포함하여 그들 개개인의 모든 세부점을 기억하실 수 있습니다. (비교 이사야 40:26) 그리고 단지 기억할 수 있는 능력만 있으신 것이 아닙니다. 창조주와 그분의 아들은 기억하고 싶어하십니다. 부활의 놀라운 전망과 관련하여 충실한 욥은 하느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강건한 사람이 죽으면 다시 살 수 있겠습니까? ·⁠·⁠· 당신[여호와]은 부르시겠고, 저는 당신에게 대답할 것입니다. 당신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당신은 그리워하실 것입니다.” (욥 14:14, 15, 「신세」; 마가 1:40-42) 우리의 창조주는 숭배받기에 합당하신 참으로 훌륭한 분입니다!

부활된 예수—의미 깊은 삶의 열쇠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은 예수가 죽으실 때까지 가까이서 예수를 지켜보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요한은 그 때까지 있었던 부활 중에 가장 중요한 부활에 대해 기록하였는데, 그 부활은 우리가 영구적이고 의미 깊은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확고한 기초를 놓는 사건이었습니다.

예수의 적들은 예수를 일반 범죄자처럼 기둥에 못박아 처형하였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을 포함하여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예수께서 여러 시간 고통을 당하는 동안 예수를 조롱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기둥에서 몹시 고통을 당하고 있으면서도 자기 어머니를 보시고 요한을 가리켜 “여자여, 보십시오! 당신의 아들입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쯤 마리아는 틀림없이 과부가 되어 있었을 것이며, 마리아의 다른 자녀들은 아직 예수의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 따라서 예수께서는 노쇠해 가는 어머니를 돌보는 일을 제자인 요한에게 맡기셨습니다. 이 일 역시 창조주의 생각을 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창조주께서는 과부와 고아들을 돌보라고 권고하셨습니다.—요한 7:5; 19:12-30; 마가 15:16-39; 야고보 1:27.

하지만 예수께서 죽으셨는데 어떻게 “천하 만민이 복을 얻”을 수 있게 하는 “씨”의 역할을 할 수가 있었습니까? (창세 22:18) 예수께서는 기원 33년 4월 어느 날 오후에 죽으심으로, 자신의 생명을 대속을 위한 근거로 내놓으셨습니다. 감수성이 풍부하신 예수의 아버지께서는 무고한 아들이 겪는 심한 고통으로 인해 틀림없이 고통받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죄와 죽음의 속박에서 인류를 해방시키는 데 필요한 대속의 값은 그러한 방식으로 마련되었습니다. (요한 3:16; 요한 첫째 1:7) 대단원의 막을 내리기 위한 토대가 놓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목적을 이루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다시 살아나셔야 하였습니다. 그러한 일이 실제로 일어났으며, 요한은 그 일의 목격 증인입니다. 예수께서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째 되는 날 일찍이, 몇몇 제자들이 무덤에 갔습니다.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여러 사람에게 나타나실 때까지, 제자들은 그 일로 인해 당혹스러워하였습니다. 마리아 막달라는 “내가 를 보았습니다!” 하고 보고하였습니다. 제자들은 그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후에 제자들이 문을 잠근 채 방에 모여 있을 때 예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그들과 대화를 나누기까지 하셨습니다. 여러 날 후에, 500명이 넘는 남자와 여자가 예수께서 정말로 살아나셨다는 사실의 목격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그 사실이 의심스러운 사람들은 이 믿을 만한 목격 증인들을 만나서 그들의 증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부활되셔서 영적인 피조물로서 창조주처럼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증거가 매우 풍부하고 신빙성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예수께서 부활되셨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보다는 죽음을 택하였습니다.—요한 20:1-29; 누가 24:46-48; 고린도 첫째 15:3-8. *

사도 요한도 예수의 부활에 대해 증언한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았습니다. (계시 1:9) 그러나 그는 유배 형을 받고 있을 때 특이한 상을 받았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일련의 환상을 보여 주셨는데, 그 환상은 우리에게 창조주에 대해 더 분명히 알게 해주고, 미래에 어떤 일이 있을 것인지도 계시해 줍니다. 그 내용을 상징적인 표현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 계시의 책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조만간 적들을 완전히 정복할 승리의 왕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적들 가운데는 죽음(우리 모두의 적)과 사탄이라는 타락한 영적 피조물도 포함되어 있습니다.—계시 6:1, 2; 12:7-9; 19:19-20:3, 13, 14.

요한은 자기가 전하는 묵시의 소식 끝부분에서 땅이 낙원이 될 때에 관한 환상을 받았습니다. 한 음성이 그 때 편만하게 될 상태를 이렇게 묘사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친히 [인류와] 함께 계실 것이다. 그분은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죽음이 없고, 애통과 부르짖음과 고통도 더는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린 것이다.” (계시 21:3, 4) 하느님의 목적이 이루어짐으로써,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성취될 것입니다.—창세 12:3; 18:18.

그 때가 되면 생명은, 아담이 창조되었을 때 아담 앞에 놓여 있던 것에 비길 만한 “참된 생명”이 될 것입니다. (디모데 첫째 6:19) 인류는 창조주를 찾고 창조주와 자신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더는 더듬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자연히, ‘그런 일이 언제 이루어질 것인가? 그리고 우리에게 관심을 가진 창조주가 오늘날까지 악과 고통이 존재하도록 허락하고 계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떠오를 것입니다. 다음 장에서 그러한 점들을 고려해 봅시다.

[각주]

^ 5항 마태마가요한은 모두 목격 증인이었다. 누가는 문서 기록들과 직접 들은 증언들을 학자와 같은 태도로 조사하였다. 복음서들은 솔직하고 정확하고 신뢰할 만한 기록의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사단법인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 발행, 「모든 사람을 위한 책」 16-17면 참조.

^ 6항 코란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마리아의 아들로서 그의 이름은 메시아 예수이니라 그는 현세와 내세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수라 3:45) 한 인간으로서, 예수는 마리아의 아들이었다. 그러면 아버지는 누구였는가? 코란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그랬듯이 예수에게도 다를 바가 없도다.” (수라 3:59) 성경에서는 아담을 가리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누가 3:23, 38) 아담이나 예수에게는 인간 아버지가 없었으며, 그들은 인간 여자와의 성관계를 통해서 태어난 사람들이 아니었다. 따라서 아담이 하느님의 아들이었던 것처럼, 예수도 하느님의 아들이었다.

^ 15항 예수의 태도는, 시편 103편이나 이사야 1:18-20에 묘사되어 있는 것과 같은 여호와의 태도와 일치한다.

^ 25항 우리는 그 예언을 마태 24장마가 13장누가 21장에서 읽을 수 있다.

^ 45항 그들 중 적어도 두 사람은 나중에 제자가 되어 격려의 편지를 썼는데, 성서 야고보유다에서 그 기록을 읽을 수 있다.

^ 47항 로마 군대의 한 고위 장교는 다음과 같은 베드로의 목격 증언을 들었다. “여러분은 ·⁠·⁠· 유대 전역에 두루 퍼진 화제를 알고 있[습니다] ·⁠·⁠·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셋째 날에 일으키시고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 그분은 우리에게 명령하시어, 하느님께서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심판관으로 정하신 분이 바로 자기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전파하고 철저히 증거하게 하셨습니다.”—사도 2:32; 3:15; 10:34-42.

[150면 네모]

예수께서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는 것에 관한 서로 비교가 되는 기록들을 대조해 보면 아마 재미있을 것이다. (마태 8:14-17; 마가 1:29-31; 누가 4:38, 39) 의사 누가는 베드로의 장모에게 “고열”이 있었다는 의학적인 세부점을 포함시켰다. 베드로의 장모를 비롯하여 다른 사람들을 치료하는 예수의 능력은 어디서 나왔는가? 누가는 “[예수께서] 병 고치는 일을 하도록 여호와의 권능이 거기 있었다”고 인정하였다.—누가 5:17; 6:19; 9:43.

[152면 네모]

역사상 가장 훌륭한 교훈

힌두교 지도자인 모한다스 간디는, 이 가르침을 따르면 “우리가 전세계의 ·⁠·⁠·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저명한 인류학자인 애슐리 몬터규는, 사랑의 심리학적 중요성과 관련해서 현대에 발견된 사실들은 단지 이 교훈의 “타당성을 확인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썼다.

이 두 사람은 예수께서 하신 산상 수훈을 언급한 것이다. 간디는 또한 이렇게 말하였다. “산상 수훈의 가르침은 바로 우리 모두를 위해 베풀어진 것이다.” 한스 디터 베츠 교수는 최근에 이렇게 말하였다. “산상 수훈이 미치는 영향력은 일반적으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는 물론 심지어 서구 문화의 경계까지도 훨씬 뛰어넘는다.” 그리고 이 교훈은 “특별히 보편적인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고 그는 덧붙여 말하였다.

비교적 짧으면서도 매우 호소력 있는 이 연설문을 읽어 보지 않겠는가? 마태 5장에서 7장까지와 누가 6:20-49에서 그 내용을 읽을 수 있다. 이 가장 훌륭한 교훈에서 배울 수 있는 몇 가지 중요한 점을 여기에 소개한다.

행복을 얻는 법—마태 5:3-12; 누가 6:20-23.

자중심을 유지하는 법—마태 5:14-16, 37; 6:2-4, 16-18; 누가 6:43-45.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법—마태 5:22-26, 38-48; 7:1-5, 12; 누가 6:27-38, 41, 42.

결혼 생활에서 문제를 줄이는 법—마태 5:27-32.

염려에 대처하는 법—마태 6:25-34.

종교적 사기를 알아내는 법—마태 6:5-8, 16-18; 7:15-23.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법—마태 6:9-13, 19-24, 33; 7:7-11, 13, 14, 24-27; 누가 6:46-49.

[159면 네모]

행동하는 사람

예수 그리스도는 속세를 떠나 소극적으로 은둔해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예수는 결단력 있게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예수께서는 “목자 없는 양처럼 찢겨지고 내던져”진 사람들을 돕기 위해 “마을들을 순회하고 다니시면서 가르치셨다.” (마가 6:6; 마태 9:36; 누가 8:1) 오늘날의 많은 부유한 종교 지도자들과는 달리, 예수는 부를 축적하지 않았다. 예수는 “머리 둘 곳이 없”었다.—마태 8:20.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영적으로 고치고 먹이는 일에 집중적인 노력을 바치셨지만, 사람들의 신체적 필요도 무시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병든 사람, 장애가 있는 사람, 악귀 들린 사람들을 고쳐 주셨다. (마가 1:32-34) 두 번의 경우, 그분은 자신의 말씀을 열심히 듣는 수천 명의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셨다. (마가 6:35-44; 8:1-8) 기적을 행하는 동기도 사람들을 염려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다.—마가 1:40-42.

예수께서는 성전에서 탐욕적인 상인들을 내쫓을 때도 단호하게 행동하셨다. 그분의 모습을 보았던 사람들은 시편 필자가 한 이러한 말을 상기하였다. “당신의 집에 대한 열심이 나를 삼킬 것입니다.” (요한 2:14-17) 예수께서는 위선적인 종교 지도자들을 정죄하실 때에는 가차없이 말씀하셨다. (마태 23:1-39) 또한 정치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가하는 압력에 굴복하지도 않으셨다.—마태 26:59-64; 요한 18:33-37.

예수의 활동적인 봉사의 직무에 관한 기록을 읽어 보면 당신은 감동을 받을 것이다. 그 기록을 처음으로 읽는 많은 사람들은, 이 행동하는 사람에 대한 마가의 짧으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기록부터 읽기 시작한다.

[164면 네모]

예수께서는 그들이 활동하도록 감동시켰다

사도들의 활동 책에서, 우리는 베드로와 요한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예수의 부활에 관해 어떻게 증거했는지에 대한 역사 기록을 볼 수 있다. 그 책의 상당 부분은, 그리스도교를 격렬하게 반대했던 사울 즉 바울이라는 총명한 법학도와 관련된 일을 기술한다. 부활된 예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다. (사도 9:1-16) 예수께서 하늘에 살아 계시다는 반박의 여지가 없는 증거가 나타나자, 바울은 그 후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철학자들과 통치자들을 포함하여 유대인과 비유대인들에게 열심히 증거하였다. 그가 그처럼 교육을 많이 받은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게 말한 내용을 읽을 때 우리는 깊은 감명을 받게 된다.—사도 17:1-3, 16-34; 26:1-29.

수십 년 동안, 바울은 소위 신약 즉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 들어 있는 많은 책을 기록하였다. 대부분의 성서에는 목차 즉 책들의 목록이 들어 있다. 바울은 그 중에 로마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로부터 히브리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까지 14권의 책을 썼다. 이 책들은 그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은 진리와 현명한 지침을 제공해 주었다. 이 책들은 예수의 가르침과 활동과 부활의 목격 증인인 사도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을 직접 만나 볼 수 없는 우리에게는 훨씬 더 가치가 있다. 바울의 기록은 당신의 가정 생활은 물론 직장 동료나 이웃 사람을 대하는 일에도 도움이 될 뿐 아니라, 당신의 삶이 참된 의미를 지녀 당신에게 만족을 가져다 주도록 당신의 삶을 이끌어 가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음을 당신은 알게 될 것이다.

[146면 삽화]

과학자들은 체외 수정을 한다. 창조주께서는 자기 아들의 생명을 옮겨서 인간이 되게 하셨다

[148면 삽화]

예수의 말씀을 듣고 예수께서 사람들을 대하시는 방법을 본 많은 사람들은 그분의 아버지를 더 잘 알게 되었다

[154면 삽화]

예수께서는 사도들의 발을 씻어 주심으로, 창조주께서 높이 평가하시는 겸손의 본을 세우셨다

[157면 삽화]

컴퓨터의 에러(혹은 바이러스)를 컴퓨터에서 제거할 수 있다. 인류는 유전받은 불완전성을 제거하기 위해 예수의 대속을 필요로 한다

[163면 삽화]

목격 증인들은 예수께서 (이 사진과 같은) 무덤에 안치되었다가 사흘째 되는 날 부활되신 것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