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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론이 무너졌다!’

‘바빌론이 무너졌다!’

제17장

‘바빌론이 무너졌다!’

이사야 21:1-17

1, 2. (ㄱ) 성서 전체에 흐르는 주된 주제는 무엇이며, 하지만 이사야서에는 어떤 중요한 부주제가 나타나 있습니까? (ㄴ) 성서는 바빌론의 무너짐이라는 주제를 어떻게 전개하고 있습니까?

성서는, 주된 주제가 있지만 여러 개의 소주제를 도입해서 전체의 특징을 살리는 규모가 큰 악곡에 비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악곡과 마찬가지로, 성서에도 메시아의 왕국 정부를 통한 여호와의 주권 입증이라는 주된 주제가 있지만, 그 외에도 반복되어 나타나는 여러 개의 중요한 주제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빌론의 무너짐이라는 주제입니다.

2 그 주제는 이사야 13장과 14장에 도입되어 있습니다. 그 주제는 21장에 다시 나타나고, 44장과 45장에 또다시 나타납니다. 한 세기 후에, 예레미야는 그 동일한 주제에 대해 자세히 기술하며, 계시록에서는 그 주제의 대미를 장식합니다. (예레미야 51:60-64; 계시 18:1-19:4) 진지한 성서 연구생이라면 누구나 하느님의 말씀에 나오는 이 중요한 부주제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사야 21장은 도움이 되는데, 그 큰 세계 강국의 예언된 무너짐에 관한 흥미진진한 세부점을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우리는 이사야 21장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성서 주제—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얼마나 깨어 있는지를 검토해 보는 데 도움이 되는 주제—를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가혹한 환상”

3. 바빌론을 “바다 광야”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이며, 그러한 명칭은 바빌론의 미래에 대한 무슨 전조가 됩니까?

3 이사야 21장은 다음과 같은 불길한 어조로 시작됩니다. “바다 광야에 대한 선언이다. 불어 오는 남쪽의 폭풍처럼 그것이 광야에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땅에서 오고 있다.” (이사야 21:1) 바빌론은 유프라테스 강을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펼쳐진 도시로서, 그 동쪽 절반은 두 개의 큰 강인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에 있는 지역에 놓여 있습니다. 바빌론은 실제 바다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바빌론을 “바다 광야”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빌론 지역이 해마다 범람하여 그 일대가 “바다”처럼 광대한 습지로 변하곤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제방과 수문과 운하로 이루어진 복잡한 수방(水防) 체계를 만들어 이 물 광야를 적절하게 관리하였습니다. 그들은 이 수방 체계의 물을 도시 방어 체계의 일환으로 삼아 교묘하게 이용하였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어떤 노력도 바빌론을 하느님의 심판으로부터 구해 주지는 못할 것입니다. 과거에 광야였던 바빌론은 다시 한 번 광야가 될 것입니다. 남쪽의 무서운 광야에서 이따금 이스라엘로 불어오는 사나운 폭풍처럼 재난의 폭풍이 일어 그것이 바빌론으로 불어오고 있는 중입니다.—비교 스가랴 9:14.

4. 계시록에 나오는 “큰 바빌론”에 관한 환상에 어떻게 “물”이나 “광야”와 같은 요소들이 포함되며, “물”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4 우리가 이 책 14장에서 알게 된 바와 같이, 고대 바빌론은 그에 상응하는 현대적 실체가 있습니다. 즉 거짓 종교 세계 제국인 “큰 바빌론”입니다. 이사야서와 마찬가지로 계시록에서도 큰 바빌론을 “광야”나 “물”과 연관지어 묘사합니다. 사도 요한은 광야로 이끌려 가 큰 바빌론을 보게 됩니다. 그는 큰 바빌론이 “많은 물 위에 앉”아 있는데 그 물은 “백성들과 무리들과 나라들과 언어들”을 의미한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계시 17:1-3, 5, 15) 대중의 지지는 언제나 거짓 종교가 존속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해 왔지만, 종국에 가서는 그러한 “물”이 큰 바빌론을 보호해 주지 못할 것입니다. 큰 바빌론은 고대 바빌론과 마찬가지로, 결국 텅 비게 되고 버림받고 황폐될 것입니다.

5. 바빌론은 어떻게 해서 “배신 행위를 하는 자” 및 “탈취하는 자”라는 평판을 얻게 됩니까?

5 이사야 시대에는 바빌론이 아직 지배력을 행사하는 세계 강국이 아닌데도, 여호와께서는 벌써 바빌론이 자기 때가 되면 권한을 남용할 것임을 내다보십니다. 이사야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가혹한 환상이 나에게 알려졌다. 배신 행위를 하는 자가 배신 행위를 하고, 탈취하는 자가 탈취하고 있다.” (이사야 21:2ㄱ) 바빌론은 유다를 포함하여 자기가 정복하는 나라들을 실제로 탈취하고 그들에게 배신 행위를 할 것입니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약탈하고 그 성전에서 강탈해 갈 것이며, 그 백성을 바빌론으로 포로로 잡아 갈 것입니다. 그곳에서 이 무력한 포로들은 배신을 당할 것이고, 그들의 믿음 때문에 비웃음을 당할 것이며, 고토로 돌아가게 되리라는 희망조차 제시받지 못할 것입니다.—역대 둘째 36:17-21; 시 137:1-4.

6. (ㄱ) 여호와께서는 어떤 한숨을 그치게 하실 것입니까? (ㄴ) 어떤 나라들이 바빌론을 공격할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으며, 이 예언은 어떻게 성취됩니까?

6 그렇습니다. 바빌론은 이 “가혹한 환상”에 따라 처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 환상은 바빌론에 고난의 때가 도래할 것임을 의미합니다. 이사야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엘람아, 올라가거라! 메디아야, 포위하여라! 그자로 인한 모든 한숨을 내가 그치게 하였다.” (이사야 21:2ㄴ) 이 배신적인 제국의 압제를 받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마침내 그들이 짓는 한숨 소리가 그치게 될 것입니다! (시 79:11, 12) 어떤 수단을 통해 그러한 구원이 올 것입니까? 이사야는 바빌론을 공격할 두 나라의 이름, 엘람과 메디아를 언급합니다. 2세기 후인 기원전 539년에, 페르시아 사람 키루스가 페르시아 사람과 메디아 사람으로 이루어진 연합군을 이끌고 와서 바빌론을 공격할 것입니다. 엘람으로 말하자면, 기원전 539년이 되기 전에 페르시아의 군주들이 적어도 그 나라의 일부를 점령하게 될 것입니다. * 따라서 페르시아 군대에는 엘람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7. 이사야가 본 환상은 이사야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며, 그 영향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7 이제 이사야가 이 환상이 자기에게 미친 영향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 유의하여 보십시오. “그러므로 나의 허리에 심한 고통이 가득하게 되었다. 해산하는 여자의 경련 같은 경련이 나를 움켜잡았다. 나는 어리둥절하여 듣지 못하고, 당황하여 보지 못한다. 내 마음이 헤매고 다녔고, 전율이 나에게 겁을 주었다. 내가 애착을 가졌던 황혼이 나에게 떨림이 되었다.” (이사야 21:3, 4) 이 예언자는 황혼이 지는 시간, 조용히 묵상하기에 좋은 시간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황혼이 그 매력을 잃어버렸고, 오히려 두려움과 고통과 떨림만 가져다 줄 뿐입니다. 그는 산고를 치르는 여자에게 닥치는 것과 같은 경련으로 고통을 겪고 있으며, 그의 마음은 “헤매고 다녔”습니다. 한 학자는 이 표현을 “내 가슴이 몹시 뛴다”로 번역하면서, 이 표현이 “열병에 걸린 듯 맥박이 불규칙적으로 뛰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주석을 달고 있습니다. 이런 고통을 겪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마 이사야가 느끼는 그러한 감정은 예언적인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기원전 539년 10월 5일에서 6일로 넘어가는 밤에,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그와 유사한 공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8. 예언된 대로,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적들이 성벽 밖에 와 있는데도 어떤 행동을 합니까?

8 그 운명적인 밤에 어둠이 찾아오는데도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공포 따위는 생각지도 않습니다. 약 2세기 앞서, 이사야는 이렇게 예언합니다. “상을 차려 놓고, 자리를 정하고, 먹고 마셔라!” (이사야 21:5ㄱ) 그렇습니다. 오만한 왕 벨사살이 잔치를 베풀고 있습니다. 천 명의 고관들뿐 아니라 많은 아내들과 후궁들을 위해서도 자리가 정해져 있습니다. (다니엘 5:1, 2) 먹고 마시며 흥청거리는 이 사람들은 성벽 밖에 군대가 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자기들의 도시는 난공불락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 도시의 거대한 성벽과 깊이 파 놓은 해자로 인해 그 도시가 점령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로 보이며, 그 도시의 많은 신들 때문에도 그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처럼 보입니다. 따라서 “먹고 마셔라!” 하는 외침이 들립니다. 벨사살은 취해 있습니다. 그런데 벨사살만 취해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사야가 다음에 하는 말이 예언적으로 알려 주듯, 고관들을 깨울 필요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도 정신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9. “방패에 기름부음을 행”할 필요가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9 “너희 방백들아, 일어나서 방패에 기름부음을 행하여라.” (이사야 21:5ㄴ) 갑자기 연회가 끝나게 됩니다. 방백들은 술에서 깨어 일어나야 합니다! 연로한 예언자 다니엘은 그 장소로 불려 나와서, 여호와께서 어떻게 바빌로니아 왕 벨사살을 이사야가 묘사한 것과 비슷한 공포에 사로잡히게 하시는지 보게 됩니다. 그 왕의 고관들은 메디아 사람들과 페르시아 사람들과 엘람 사람들로 이루어진 연합군이 그 도시의 방어 체계를 뚫고 들어오자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바빌론은 신속히 무너집니다! 그러면 “방패에 기름부음을 행하여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성서에서는 때때로 한 나라의 왕을 가리켜 그 나라의 방패로 언급합니다. 왕이 그 나라의 수호자요 보호자이기 때문입니다. * (시 89:18) 따라서 이사야서의 이 성구는 새로운 왕이 들어서야 할 필요성을 예언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왜 새로운 왕이 필요합니까? 벨사살은 “바로 그 날 밤에” 죽임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방패에 기름부음을 행”할 즉 새로운 왕을 임명할 필요가 생깁니다.—다니엘 5:1-9, 30.

10. 여호와의 숭배자들은 배신 행위를 하는 자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의 성취로부터 무슨 위로를 얻을 수 있습니까?

10 참 숭배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은 이 기록으로부터 위로를 얻습니다. 현대의 바빌론인 큰 바빌론도 고대의 바빌론 못지 않게 배신 행위를 하는 자이며 탈취하는 자입니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종교 지도자들은 모의를 하여, 여호와의 증인이 활동을 금지당하거나 박해를 받거나 가혹한 부당 과세를 당하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예언이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듯이, 여호와께서는 그러한 모든 배신 행위를 보고 계시며, 그러한 행위가 처벌받지 않고 무사히 넘어가게 내버려 두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을 잘못 대표하고 있고 자신의 백성을 학대하고 있는 모든 종교를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계시 18:8) 그러한 일이 가능합니까?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키고 싶다면, 고대 바빌론과 그에 상응하는 현대적 실체의 무너짐과 관련하여 이사야가 한 경고가 이미 어떻게 성취되었는지 살펴보기만 하면 됩니다.

‘바빌론이 무너졌다!’

11. (ㄱ) 파수꾼의 책임은 무엇이며, 오늘날 누가 파수꾼으로 활동해 오고 있습니까? (ㄴ) 나귀 병거와 낙타 병거가 대표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11 여호와께서는 이제 예언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보고합니다. “여호와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가서, 파수꾼을 세워 그가 보는 것을 알리게 하여라.’” (이사야 21:6) 이 말씀은 이 장에 나오는 또 하나의 중요한 주제—파수꾼에 관한 주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모든 참 그리스도인들은 이 주제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께서 추종자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강력히 권하셨기 때문입니다.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은 하느님의 심판 날이 가까웠다는 점과 이 부패한 세상의 위험성과 관련하여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을 알리는 일을 중단한 적이 없습니다. (마태 24:42, 45-47) 이사야의 환상에 나오는 파수꾼이 보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는 한 쌍의 군마가 끄는 병거와 나귀 병거와 낙타 병거를 보았다. 그는 매우 주의 깊이 엄밀한 주의를 기울였다.” (이사야 21:7) 이 각각의 병거는, 훈련을 잘 시킨 군마와 같은 속도로 전투 대형을 이루어 전진해 오는 병거 대열들을 대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귀 병거와 낙타 병거는 두 강국 메디아와 페르시아를 적절하게 대표하고 있는데, 그 두 나라가 연합하여 이 공격을 감행할 것입니다. 더욱이, 역사가 확증하는 바에 의하면, 페르시아 군대는 전시에 나귀와 낙타를 모두 사용하였습니다.

12. 이사야의 환상에 나오는 파수꾼은 어떤 특성들을 나타내며, 오늘날 누구에게 이러한 특성들이 필요합니까?

12 따라서 파수꾼은 다음과 같이 보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사자처럼 외쳤다. ‘오 여호와여, 파수대 위에서 제가 낮에 늘 서 있고, 저의 경비 초소에서 제가 밤마다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이제 보십시오, 사람들이 탄 병거를 한 쌍의 군마가 끌고 오고 있습니다!’” (이사야 21:8, 9ㄱ) 환상에 나오는 파수꾼은 “사자처럼” 용감하게 외치고 있습니다. 바빌론처럼 강력한 나라를 상대로 심판의 소식을 외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 밖에 필요한 것이 또 있는데, 그것은 인내입니다. 파수꾼은 자기의 초소에 밤낮으로 머물러 있으면서, 결코 경계심을 늦추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마지막 날의 파수꾼 반열에게도 용기와 인내가 필요하였습니다. (계시 14:12) 모든 참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러한 특성들이 필요합니다.

13, 14. (ㄱ) 고대 바빌론은 어떻게 되며, 그 우상들은 어떤 의미로 부서뜨려집니까? (ㄴ) 큰 바빌론은 언제 어떻게 그와 유사한 무너짐을 경험하였습니까?

13 이사야의 환상에 나오는 파수꾼은 한 병거가 나아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무슨 소식이 들립니까? “그가 말하여 알렸다. ‘무너졌다! 바빌론이 무너졌다. 그 신들의 모든 새긴 형상을 그분은 땅에다 부서뜨리셨다!’” (이사야 21:9ㄴ) 참으로 감격적인 보고입니다! 마침내, 하느님의 백성을 배신적으로 탈취하던 자가 무너졌습니다! * 그러면 바빌론의 새긴 형상들과 우상들은 어떤 의미로 부서뜨려집니까? 메디아-페르시아 침략자들이 바빌론의 신전들에 들어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우상들을 산산조각 내 버릴 것입니까? 아닙니다. 꼭 그렇게 해야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빌론의 우상 신들이 부서뜨려지는 것은, 그들에게는 그 도시를 보호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 폭로되는 면으로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바빌론은 하느님의 백성을 압제하는 일을 계속할 수 없게 될 때 무너짐을 경험할 것입니다.

14 큰 바빌론의 경우는 어떠합니까? 큰 바빌론은 하느님의 백성이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압제를 당하도록 교묘한 공작을 폄으로써, 한동안 효과적으로 하느님의 백성을 유배된 상태로 붙잡아 두었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의 전파 활동은 중지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워치 타워 협회의 회장을 비롯하여 여러 탁월한 임원들이 거짓 고발로 투옥되었습니다. 하지만 1919년에 사태가 놀랍게 역전되었습니다. 워치 타워 협회의 임원들이 교도소에서 석방되었고, 본부 사무실이 다시 업무를 시작하였으며, 전파 활동도 재개되었습니다. 따라서 큰 바빌론은 하느님의 백성을 붙잡아 두는 능력을 상실한 면에서 무너졌습니다. * 계시록에서는 한 천사가 이사야 21:9에 공포된 말을 사용하여 큰 바빌론의 무너짐을 두 번이나 선포합니다.—계시 14:8; 18:2.

15, 16. 이사야의 민족은 어떤 의미로 “타작당한 자들”이며, 그들에 대한 이사야의 태도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15 이사야는 자신의 민족에 대한 동정심 어린 어조로 이 예언의 소식을 끝맺습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타작당한 자들, 내 타작 마당의 아들아, 내가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느님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보고하였다.” (이사야 21:10) 성서에서 타작은 종종 하느님의 백성을 징계하고 정련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하느님의 계약 백성은 ‘타작 마당의 아들들’이 될 것입니다. 타작 마당에서는 밀이 겨와 강제로 분리되어, 정제되고 쓸 만한 낟알만 남게 됩니다. 이사야는 이러한 징계가 행해지는 것을 고소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미래의 ‘타작 마당의 아들들’에 대해 동정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평생을 외국에서 포로로 보내게 될 것입니다.

16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생각나게 해 주는 유익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 회중에서 일부 사람들은 잘못을 범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을 잃기가 쉬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징계를 받는 사람들은 종종 징계에 대해 불쾌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 자신의 백성을 정련하시기 위해 그들을 징계하신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징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겸손하게 징계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멸시하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우리가 징계를 받을 때에도 그것에 반항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징계를 하느님의 사랑의 표현으로 받아들이도록 합시다.—히브리 12:6.

파수꾼에게 물어 봄

17. 에돔을 “두마”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17 이사야 21장에 나오는 두 번째 예언의 소식에서는 파수꾼의 역할이 두드러지게 부각됩니다. 그 소식은 이러한 말로 시작됩니다. “두마에 대한 선언이다. 사람이 세일에서 나에게 외친다.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소?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소?’” (이사야 21:11) 이 두마는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성서 시대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도시가 여러 개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 어느 도시도 아닙니다. 세일은 에돔의 별칭인데, 세일에는 두마가 없습니다. 그런데 “두마”는 “잠잠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앞서 있었던 선언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지역도 그 미래를 암시하는 이름을 받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의 적으로서 오랫동안 앙심을 품어 온 에돔은 결국 잠잠하게 될 텐데, 즉 죽음으로 인해 잠잠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일부 사람들은 염려가 되어 미래에 대해 물어 볼 것입니다.

18. “아침이 오고, 밤도 올 것이오”라는 선언이 고대 에돔에 어떻게 성취됩니까?

18 이사야서를 기록할 당시, 에돔은 강력한 아시리아 군대가 지나가는 길에 놓여 있습니다. 에돔에 사는 일부 사람들은 그들에게 닥친 압제의 밤이 언제 끝날 것인지 간절히 알고 싶어합니다. 그들은 어떤 대답을 듣습니까? “파수꾼이 말하였다. ‘아침이 오고, 밤도 올 것이오.’” (이사야 21:12ㄱ) 상황 전개로 볼 때 에돔에 좋은 전조가 아닙니다. 아침의 여명이 지평선상에 나타날 것이지만, 그것은 잠깐 나타났다가 환영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아침을 바짝 뒤쫓아 신속히 밤—압제의 어둠이 또다시 닥친 때—이 찾아올 것입니다. 에돔의 미래에 대한 참으로 적절한 묘사입니다! 아시리아의 압제는 끝나겠지만, 바빌론이 아시리아의 뒤를 이어 세계 강국이 되어 에돔 사람들을 대량 살육할 것입니다. (예레미야 25:17, 21; 27:2-8) 이처럼 주기적으로 압제를 당하는 일이 되풀이될 것입니다. 바빌로니아의 압제가 끝나면 페르시아의 압제가 뒤따를 것이고, 그 다음에는 그리스의 압제가 뒤따를 것입니다. 그 후 로마 시대에는 헤롯 집안 사람들—원래 에돔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권세를 잡을 때 잠깐 “아침”이 나타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아침”은 오래 가지 못할 것입니다. 마침내 에돔은 영원히 잠잠하게 되어 역사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두마라는 이름은 결국 에돔에 아주 적절한 이름이 될 것입니다.

19. “당신들이 물어 보려거든 물어 보시오. 다시 오시오!”라는 파수꾼의 말은 무슨 뜻일 수 있습니까?

19 파수꾼은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이 전하는 짧은 소식을 끝맺습니다. “당신들이 물어 보려거든 물어 보시오. 다시 오시오!” (이사야 21:12ㄴ) “다시 오시오!”라는 표현은 에돔 앞에 “밤”이 끝없이 이어질 것임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습니다. 아니면, 그 표현은 “돌아오시오”라고 번역할 수도 있으므로, 그 나라의 운명을 피하고 싶은 에돔 사람은 누구나 회개하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야’ 한다는 뜻을 예언자가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경우이든, 파수꾼은 더 물어 봐도 된다고 초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20. 이사야 21:11, 12에 기록된 선언이 오늘날의 여호와의 백성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0 이 짧은 선언은 현대의 여호와의 백성에게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 우리는 인류가 영적으로 눈멀고 하느님으로부터 소외된 어두운 밤 속으로 깊이 들어와 있으며, 그러한 상태로 말미암아 결국 이 사물의 제도가 멸망될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로마 13:12; 고린도 둘째 4:4) 밤이 깊은 이때에, 인류가 어떤 방법으로인가 평화와 안전을 가져올 수 있다는 희망의 빛이 조금이라도 비친다면, 그것은 환영처럼 지나가는 새벽의 여명과도 같은 것이라서, 뒤이어 한층 더 어두운 때가 닥치고 말 것입니다. 참다운 새벽이 다가오고 있는데, 그것은 이 땅을 통치할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의 새벽입니다. 하지만 밤이 지속되는 동안, 우리는 파수꾼 반열의 인도를 따라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하며 이 부패한 사물의 제도가 끝날 때가 가까웠다는 사실을 용감하게 선포해야 합니다.—데살로니가 첫째 5:6.

사막 평원에 밤이 찾아오다

21. (ㄱ) “사막 평원에 대한 선언”이라는 말은 무엇을 표현한 어희일 수 있습니까? (ㄴ) 드단 사람들의 대상은 무슨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까?

21 이사야 21장에 나오는 마지막 선언은 “사막 평원”에 대한 것입니다. 그 선언은 이러한 말로 시작됩니다. “사막 평원에 대한 선언이다. 드단 사람들의 대상아, 사막 평원의 숲에서 너희가 밤을 지낼 것이다.” (이사야 21:13) 여기에 언급된 사막 평원은 아마 아라비아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이 선언은 여러 아랍 부족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막 평원”에 해당하는 단어는 이따금 히브리어로 그와 매우 유사한 단어인 “저녁”이라는 말로도 번역됩니다. 일부 사람들은 이것은 어두운 저녁—고난의 때—이 이 지역에 곧 찾아올 것처럼 표현한 일종의 어희(語戲)라는 견해를 피력합니다. 이 선언은 유명한 아랍 부족인 드단 사람들의 대상(隊商)을 주인공으로 한 야간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이 대상들은 교역로를 따라 사막의 한 오아시스에서 다음 오아시스로 옮겨 다니며 향료와 진주와 그 밖의 귀중품들을 가지고 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그들이 자주 왕래하던 길을 떠나서 숨어서 밤을 지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보게 됩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22, 23. (ㄱ) 어떤 무거운 짐이 아랍 부족들을 짓누르려 하고 있으며, 그들에게 어떤 영향이 미칠 것입니까? (ㄴ) 이러한 재난은 얼마나 신속히 닥칠 것이며, 누구의 손에 의해 닥칠 것입니까?

22 이사야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너희는 목마른 자를 맞이하기 위하여 물을 가져가거라. 데마 땅의 주민들아, 빵을 가지고 도망자를 대하여라. 칼 때문에, 뽑힌 칼 때문에, 당겨져 있는 활과 치열한 전쟁 때문에 그들이 도망하였다.” (이사야 21:14, 15) 그렇습니다. 이 아랍 부족들도 전쟁의 무거운 짐에 짓눌리게 될 것입니다. 그 지역에서 물이 가장 넉넉한 오아시스 가운데 한 곳에 위치한 데마도 불행한 전쟁 난민들에게 물과 빵을 가져다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고난이 언제 닥칠 것입니까?

23 이사야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품꾼의 햇수에 따라 앞으로 일 년 안에, 게달의 모든 영광이 끝에 이르고 것이다. 궁수 곧 게달 자손의 용사들의 가운데서 남아 있는 자는 얼마 안 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하느님 여호와가 말한다.’” (이사야 21:16, 17) 게달은 매우 유명한 부족이라서 이따금 모든 아랍 부족을 대표하는 데 사용되기도 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이 부족의 궁수들과 용사들의 수가 줄어들어 남은 자들만 있게 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언제 그렇게 하실 것입니까? 품꾼이 삯을 받는 기간만큼만 일하듯이, 더도 아니고 “앞으로 일 년 안에”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이 정확히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아라비아를 정복한 데 대한 영예를 요구한 아시리아의 통치자 두 사람은 사르곤 2세와 산헤립입니다. 그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예언된 대로, 이 교만한 아랍 부족들을 대량 살육하였을 것입니다.

24. 아라비아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되었을 것이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24 하지만 우리는 이 예언이 정확하게 성취되었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이 선언을 끝맺는 말만큼 그 점을 강력하게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느님 여호와가 말한다.” 이사야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바빌론이 아시리아를 제압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나 그 후 그 바빌론이 하루 저녁 방탕한 주연을 즐기던 중에 권세를 잃게 될 것이라는 점은 있을 법하지 않은 일처럼 여겨질 것입니다. 강력한 에돔이 결국 죽음으로 잠잠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나 부유한 아랍 부족들에게 고난과 궁핍의 밤이 찾아오게 될 것이라는 점도 그에 못지 않게 믿기 어려운 일처럼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오늘날 여호와께서는 우리에게 거짓 종교 세계 제국이 멸망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가능성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확실히 일어날 일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25. 우리는 어떻게 파수꾼의 모범을 본받을 수 있습니까?

25 그러므로 우리는 파수꾼과 같이 되도록 합시다. 높은 파수대에 서 있는 것처럼 깨어 있으면서, 지평선상에 임박한 위험을 알리는 무슨 표징이라도 보이는지 면밀히 살피도록 합시다. 오늘날 지상에 남아 있는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인 충실한 파수꾼 반열과 밀접히 연합하도록 합시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을 그들과 함께 용감하게 외치도록 합시다.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통치하고 계시며, 하느님으로부터 소외된 상태에 있는 인류의 길고 어두운 밤을 머지않아 끝내실 것이며, 뒤이어 참다운 새벽을 가져오실 것이라는 즉 지상 낙원에 대한 천년 통치를 시작하실 것이라는 점에 대한 압도적인 증거가 있음을 외치도록 합시다!

[각주]

^ 6항 페르시아 왕 키루스는 때때로 “안샨의 왕”이라고 불리었는데, 안샨은 엘람에 속한 한 지역이나 도시였다. 이사야 시대—기원전 8세기—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페르시아는 잘 몰랐을지 모르지만, 엘람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사야가 여기서 페르시아 대신 엘람이라는 이름을 언급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일 수 있다.

^ 9항 많은 성서 주석가들은 “방패에 기름부음을 행하여라”는 말이 고대에 군사들이 전쟁에 나가기 전에 가죽 방패에 기름을 먹여 대부분의 화살이 스치고 지나가도록 하던 관습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말을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유의해야 할 점은, 그 도시가 함락되던 밤에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전쟁 준비를 위해 방패에 기름을 바를 시간은 고사하고 싸움을 해 볼 만한 시간도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

^ 13항 바빌론의 무너짐에 관한 이사야의 예언은 매우 정확해서, 일부 성서 비평가들은 그 예언이 사건이 일어난 후에 기록된 것임에 틀림없다는 이론을 내세워 왔다. 그러나 히브리어 학자 F. 델리치가 지적하듯이, 예언자는 영감을 받아 수백 년 앞서 사건을 예언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그러한 억측은 필요하지 않다.

^ 20항 「파수대」지는 발행되기 시작한 후 59년 동안, 이사야 21:11을 표지에 부각시켜 실었다. 동일한 성구가 워치 타워 협회의 초대 회장인 찰스 T. 러셀이 마지막으로 집필한 교훈의 주제가 되기도 하였다. (옆 면 사진 참조)

[연구 질문]

[219면 삽화]

“먹고 마셔라!”

[220면 삽화]

파수꾼은 “사자처럼 외쳤다”

[222면 삽화]

‘제가 낮에 늘 그리고 밤마다 서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