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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충실과 관련된 교훈

불충실과 관련된 교훈

제18장

불충실과 관련된 교훈

이사야 22:1-25

1. 포위 공격을 받고 있는 고대 도시 안에 갇혀 있다면 어떤 느낌이 들었을 것입니까?

포위 공격을 당하고 있는 고대 도시 안에 갇혀 있다면 어떤 느낌이 들었을 것인지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성벽 밖에는 강하고 무자비한 적이 있습니다. 다른 도시들도 이미 그 적에게 함락되었다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습니다. 이제 그 적은 당신이 살고 있는 도시를 정복하여 강탈을 하고 더 나아가 주민들마저 강간하고 살해할 결심을 하고 있습니다. 적군은 너무 강하여 정면으로 맞서 싸울 수가 없습니다. 도시의 성벽이 그들을 막아 주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성벽 너머로 바라보니까 적이 포위 공격 탑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또한 큰 돌을 쏘아 방어 시설을 파괴할 수 있는 공성포(攻城砲)도 가지고 있습니다. 공성퇴와 공성용 사닥다리, 궁수와 병거, 수많은 군사들도 보입니다. 실로 두렵기만 한 광경입니다!

2. 이사야 22장에 묘사된 포위 공격이 실제로 벌어지는 것은 언제입니까?

2 이사야 22장에서 우리는 바로 이러한 포위 공격에 관해 읽게 되는데, 다름아닌 예루살렘에 대한 포위 공격입니다. 언제 그러한 공격이 벌어집니까? 방금 묘사한 일들이 어느 한 공격에서 모두 벌어진다고 딱 집어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예언은 아마 예루살렘에 닥치게 될 여러 차례의 포위 공격을 포괄적으로 묘사한 것이라고,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일반적인 경고라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3. 예루살렘 주민들은 이사야가 묘사하는 포위 공격에 어떤 반응을 나타내고 있습니까?

3 이사야가 묘사하는 포위 공격에 직면하여 예루살렘 주민들은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하느님의 계약 백성으로서 여호와께 구원해 달라고 부르짖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오늘날 하느님을 숭배한다고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매우 지혜롭지 못한 태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포위 공격을 당하는 도시

4. (ㄱ) “환상 골짜기”는 무엇을 가리키며, 그러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예루살렘 주민들의 영적인 상태는 어떠합니까?

4 이사야 21장에 나오는 세 가지 심판 소식은 모두 “선언”이라는 표현으로 소개되었습니다. (이사야 21:1, 11, 13) 이사야 22장도 동일한 방법으로 시작됩니다. “환상 골짜기에 대한 선언이다. 도대체 너에게 무슨 일이 있기에, 너 전체가 지붕에 올라갔느냐?” (이사야 22:1) “환상 골짜기”란 예루살렘을 가리킵니다. 그 도시를 골짜기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 도시가 비록 고지대에 놓여 있긴 하지만 더 높은 산들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 도시를 “환상”과 연관짓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많은 환상과 계시가 바로 그 도시에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도 그 도시의 주민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오히려 여호와를 무시하고 거짓 숭배에 빠져들었습니다. 이 도시를 포위 공격하고 있는 적은, 엇나간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 도구인 것입니다.—신명 28:45, 49, 50, 52.

5. 사람들은 아마 무슨 이유로 지붕에 올라가 있는 것 같습니까?

5 예루살렘 주민 “전체”가 자기들의 집 “지붕에 올라갔”다는 점에 유의하십시오. 고대에는 이스라엘 집들의 지붕이 평평했으며, 가족들이 종종 그곳에 모였습니다. 이사야는 이 경우에 예루살렘 주민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 이유를 알려 주지 않지만, 그의 말로 볼 때 그러한 행동을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마 그들이 지붕에 올라간 것은 그들의 거짓 신들에게 호소하기 위해서인 것 같습니다. 이것은 기원전 607년에 예루살렘이 멸망될 때까지 그들이 여러 해 동안 버리지 않는 관습입니다.—예레미야 19:13; 스바냐 1:5.

6. (ㄱ) 예루살렘 내에는 어떤 상태가 만연해 있습니까? (ㄴ) 일부 사람들이 환희에 넘쳐 있는 이유는 무엇이며, 그러나 그들 앞에는 어떤 일이 놓여 있습니까?

6 이사야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소란스런 도시, 환희에 넘치는 성읍, 너는 소동으로 가득 찼구나. 너의 죽임을 당한 자들은 칼에 죽임을 당한 자들도 아니고, 전투 중에 죽은 자들도 아니다.” (이사야 22:2) 많은 사람이 그 도시로 몰려드는 바람에 그 도시는 소동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거리에 있는 사람들은 소란스럽고 두려움에 차 있습니다. 하지만 환희에 넘쳐 있는 사람들도 있는데, 아마 자기들이 안전하다고 느끼거나 위험이 지나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 하지만 이러한 때에 환희에 넘쳐 있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 도시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칼날에 죽임을 당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잔인한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포위 공격을 당하는 도시는 외부로부터의 식량 조달이 끊기게 됩니다. 도시 안에 비축된 식량도 줄어들게 됩니다. 굶주린 사람들과 북적거리는 상황으로 인해 전염병이 돌게 됩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기근과 역병으로 죽게 될 것입니다. 기원전 607년과 기원 70년 두 차례 모두 바로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열왕 둘째 25:3; 애가 4:9, 10. *

7. 포위 공격 중에 예루살렘의 통치자들은 어떤 행동을 하며, 그들은 어떻게 됩니까?

7 이러한 위기에 처해서 예루살렘의 통치자들이 앞장 서서 하는 행동은 무엇입니까? 이사야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너의 모든 지배자들은 일시에 도망하였다. 활을 쏠 필요도 없이 그들은 포로로 붙잡혔다. 너의 발견된 자들은 모두 함께 포로로 붙잡혔다. 멀리 그들은 달아났던 것이다.” (이사야 22:3) 통치자들과 용사들은 도망하다가 붙잡힙니다! 그들을 향해 활 한번 당기지 않고도, 그들은 붙잡혀 포로로 끌려갑니다. 기원전 607년에 바로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예루살렘 성벽이 뚫리자 시드기야 왕은 밤에 용사들과 함께 도망합니다. 적은 이 사실을 알고 그들을 추격해서 예리코 평원에서 그들을 따라잡습니다. 용사들은 뿔뿔이 흩어집니다. 시드기야는 붙잡혀 눈이 멀게 되고 구리 족쇄에 채워져 바빌론으로 끌려갑니다. (열왕 둘째 25:2-7) 불충실로 인해 참으로 비극적인 결과를 당하게 됩니다!

재난으로 인한 당혹감

8. (ㄱ) 예루살렘에 닥칠 재난에 대한 예언에 이사야는 어떤 반응을 나타냅니까? (ㄴ) 예루살렘의 상황은 어떠할 것입니까?

8 이러한 예언은 이사야의 마음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게서 너희의 눈길을 돌려라. 나는 울면서 비통해하겠다. 너희는 내 딸 백성이 탈취당한 일로 인하여 나를 위로하겠다고 고집하지 말아라.” (이사야 22:4) 이사야는 모압과 바빌론의 예언된 운명에 대해서도 마음 아파한 적이 있습니다. (이사야 16:11; 21:3) 이제 자기 민족에게 닥쳐오고 있는 재난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자 그가 느끼는 당혹감과 비통은 한층 더 심해집니다. 그는 위안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날은 주권자인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환상 골짜기에서 벌이시는 혼란과 짓밟음과 당황의 날이기 때문이다. 성벽을 허무는 자가 있고, 산을 향한 외침이 있다.” (이사야 22:5) 예루살렘은 미친 듯한 혼란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서 목적도 없이 이리저리 방황할 것입니다. 적이 도시의 성벽을 뚫기 시작하자, “산을 향한 외침”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이 도시의 주민들이 모리아 산에 있는 하느님의 거룩한 성전에서 하느님께 외칠 것임을 의미합니까? 그런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불충실을 고려해 볼 때, 이것은 단지 그들의 공포에 찬 외침이 주위에 있는 산들에 메아리칠 것임을 의미하는 것일 것입니다.

9. 어떤 군대가 예루살렘을 위협하고 있는지 설명하십시오.

9 어떤 적이 예루살렘을 위협하고 있습니까? 이사야는 이렇게 알려 줍니다. “엘람은 땅의 사람의 군마 병거 가운데서 화살통을 집어 들었고, 길은 방패를 드러내었다.” (이사야 22:6) 적군은 전투 태세가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화살통에 화살이 가득한 궁수들이 있습니다. 전사들은 싸움을 위해 방패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병거도 있고 전쟁을 위해 훈련을 잘 시킨 말들도 있습니다. 군대에는 엘람 출신의 군사들도 있고 길 출신의 군사들도 있는데, 엘람은 지금의 페르시아 만 북쪽에 있고 길은 아마 엘람 가까이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한 지명들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서, 침략자들이 매우 먼 곳에서 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히스기야 시대에 예루살렘을 위협하던 군대 가운데는 엘람의 궁수들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점도 알 수 있습니다.

방어를 위한 노력

10. 어떠한 상황 전개가 그 도시에 불길한 전조가 됩니까?

10 이사야는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너의 제일 좋은 저지 평야들에 병거가 가득하게 되고, 군마들이 성문에 정렬하며, 누군가가 유다의 칸막이를 없애 버릴 것이다.” (이사야 22:7, 8ㄱ) 예루살렘 도시 밖 평야에 병거와 말들이 빽빽이 들어차서 그 도시의 성문들을 공격하기 위해 정렬해 있습니다. 없어지는 “유다의 칸막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마 그 도시의 성문을 가리키는 것일 것이며, 성문이 점령당하는 것은 방어자들에게는 불길한 전조가 됩니다. * 이 방어 칸막이가 없어지면 그 도시는 공격자들에게 무방비 상태가 됩니다.

11, 12. 예루살렘 주민들은 방어를 위해 어떤 조처들을 취합니까?

11 이사야는 이제 백성이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기울이는 노력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들이 첫 번째로 생각해 내는 것은 무기입니다! “너는 그 날에 숲의 집의 무기고를 바라볼 것이며, 너희가 틀림없이 ‘다윗의 도시’의 뚫린 곳들을 볼 것인데, 뚫린 곳이 실제로 많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아래 못의 물을 모을 것이다.” (이사야 22:8ㄴ, 9) 숲의 집의 무기고에 무기들이 비축되어 있습니다. 이 무기고는 솔로몬이 지은 것입니다. 이 무기고는 레바논의 실삼나무로 지었기 때문에, “레바논 숲 집”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열왕 첫째 7:2-5) 성벽에 뚫린 곳이 없나 살피게 됩니다. 물도 모으게 되는데, 물은 중요한 방어 수단입니다. 백성이 생존하려면 물이 필요합니다. 물이 없이는 어떤 도시도 버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구출을 위해 여호와를 바라보는 것에 관한 언급은 전혀 없음에 유의하십시오. 오히려, 그들은 자기들의 방책에만 의존합니다. 우리는 결코 그러한 실수를 저지르는 일이 없기 바랍니다!—시 127:1.

12 도시의 성벽 가운데 뚫린 곳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너희가 예루살렘의 집들을 실제로 셀 것이다. 너희는 또한 성벽에 이르지 못하게 집들을 허물 것이다.” (이사야 22:10) 집들을 살펴서, 뚫린 곳을 보수하는 데 쓸 자재를 마련하기 위해 어떤 집들을 허물 수 있는지 알아봅니다. 적이 성벽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백성

13. 백성은 어떻게 급수원을 확보해 두려고 노력하며, 그러나 그들은 어느 분이 계신 것을 잊고 있습니까?

13 “너희는 옛 못의 물을 위하여 두 성벽 사이에 저수지를 만들 것이다. 그러면서도 너희는 이 일을 이루신 위대한 분을 결코 바라보지 않을 것이며, 이 일을 오래 전에 구상하신 분을 결코 보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사야 22:11) 이 성구와 9절에 묘사된 물을 모으려는 노력은, 침공해 오는 아시리아 사람들로부터 그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 히스기야 왕이 취한 조처를 생각나게 해 줍니다. (역대 둘째 32:2-5) 그러나 이사야의 이 예언에 나오는 도시의 백성은 전혀 믿음이 없습니다. 그들은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애쓰면서도, 히스기야와는 달리 창조주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14. 여호와의 경고의 소식에도 불구하고, 이 백성은 어떤 지혜롭지 못한 태도를 나타내고 있습니까?

14 이사야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권자인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 날에 부르시어, 울고 애곡하고 머리를 밀고 자루천을 두르라고 하실 것이다. 그러나 보라! 환희에 넘치고 기뻐하며, 소를 죽이고 양을 잡아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는구나.” (이사야 22:12, 13) 예루살렘 주민들은 여호와께 반역한 것에 대해 전혀 뉘우치는 기색이 없습니다. 그들은 회개의 표시로 울지도 않고 머리를 자르지도 않으며 자루천 옷을 입지도 않습니다. 그런 행동을 한다면 여호와께서는 아마 그들이 닥쳐오는 공포를 경험하지 않게 해 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오히려 관능적인 쾌락에 몰두합니다. 오늘날 하느님께 믿음을 두지 않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이와 동일한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죽은 자의 부활이나 미래의 지상 낙원에서의 생활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라고 말하면서 쾌락에 탐닉하는 생활을 추구합니다. (고린도 첫째 15:32) 얼마나 근시안적인 태도입니까! 여호와를 신뢰하기만 한다면 영속적인 희망을 갖게 될 텐데 말입니다!—시 4:6-8; 잠언 1:33.

15. (ㄱ) 예루살렘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에 관한 소식의 내용은 무엇이며, 그 심판은 누구에 의해 집행됩니까? (ㄴ) 그리스도교국이 예루살렘과 비슷한 운명을 당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5 포위 공격을 당하는 예루살렘 주민들은 안전을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귀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밝혀 주셨다. ‘“이 잘못은 너희가 죽기까지 너희를 위하여 속해지지 않을 것이다.” 주권자인 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한다.’” (이사야 22:14) 이 백성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용서가 베풀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죽음이 틀림없이 닥칠 것입니다. 이것은 틀림없이 일어날 일입니다. 주권자인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의 말씀의 성취로, 불충실한 예루살렘에 재난이 두 번 닥칩니다. 예루살렘은 바빌론 군대에 의해 멸망되고, 후에는 로마 군대에 의해 멸망됩니다. 따라서 불충실한 그리스도교국에도 재난이 닥칠 것인데, 그 성원들이 하느님을 숭배한다고 주장하지만 행위로는 사실상 그분을 부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디도 1:16) 그리스도교국의 죄는 하느님의 의로운 길을 조롱하는 세상의 다른 종교들의 죄와 함께 “쌓이고 쌓여서 하늘에까지 닿았”습니다. 배교한 예루살렘의 잘못만큼이나 그들의 잘못도 몹시 커서 속해질 수 없습니다.—계시 18:5, 8, 21.

이기적인 관리인

16, 17. (ㄱ) 이제 누가 여호와로부터 경고의 소식을 받으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셉나는 큰 야망 때문에 어떻게 될 것입니까?

16 예언자는 이제 불충실한 백성에게서 불충실한 개인에게로 주의를 돌립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주권자인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집을 관리하는 그 관리인 셉나에게로 들어가서, “네가 여기에 무슨 관계가 있다고, 또 여기서 누구와 관계가 있다고, 네가 여기서 너 자신을 위하여 매장지를 깎아 팠느냐?” 하고 말하여라. 높은 곳에 그가 자기 매장지를 깎아 파고 있다. 그가 자기를 위하여 거처를 만들려고 바위를 쪼아 내고 있다.’”—이사야 22:15, 16.

17 셉나는 ‘집을 관리하는 관리인’, 아마 히스기야 왕의 집을 관리하는 관리인일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왕 바로 다음 가는 영향력 있는 지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많은 것이 요구됩니다. (고린도 첫째 4:2) 하지만 국가의 일에 첫째 가는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데도, 셉나는 자신을 위한 영광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는 높은 곳에 있는 바위에 자기를 위하여 깎아 판—왕의 것 못지 않게—사치스러운 무덤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것을 보시고 이사야에게 영감을 주시어 그 불충실한 관리인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하십니다. “보라! 남자야, 여호와께서 너를 세차게 내던지실 것이요, 너를 단단히 움켜잡으실 것이다. 반드시 그분이 너를 공처럼 단단히 말아서 넓은 땅으로 보내 버리실 것이다. 거기서 네가 죽을 것이며, 거기서 네 영광의 병거들이 네 주인 집의 불명예가 될 것이다. 내가 너를 네 지위에서 밀어내겠다. 누군가가 너를 네 공적 신분에서 끌어내릴 것이다.” (이사야 22:17-19) 셉나는 자기 본위적인 태도 때문에 예루살렘에 평범한 무덤조차 갖지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공처럼 내던짐을 당해 먼 땅에서 죽게 될 것입니다. 이 예언에는, 하느님의 백성 가운데서 권위를 위임받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경고가 담겨 있습니다. 권한을 남용한다면 그 권위를 잃게 될 것이고, 추방당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18. 셉나 대신 누가 일할 것이며, 그 사람이 셉나의 공복과 다윗의 집의 열쇠를 받을 것이라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18 그러면 셉나는 자기 지위에서 어떻게 쫓겨날 것입니까? 여호와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그 날에는 정녕 내가 나의 종, 곧 힐기야의 아들 엘리아김을 부르겠다. 내가 너의 긴옷을 그에게 입히겠고, 너의 장식 띠를 그에게 단단히 매어 주며, 너의 지배권을 그의 손에 넘겨 줄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집에 아버지가 될 것이다. 내가 다윗의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고, 그가 닫으면 열 자가 없을 것이다.” (이사야 22:20-22) 셉나 대신 엘리아김에게 관리인의 공복(公服)과 함께 다윗의 집의 열쇠가 주어질 것입니다. 성서에서는 “열쇠”라는 표현을 권위, 정부 혹은 권세를 상징하는 데 사용합니다. (비교 마태 16:19) 고대에는 열쇠를 맡은 왕의 고문관이 왕궁의 방들에 대한 전반적인 감독권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며, 심지어 왕을 섬길 만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결정하는 권한까지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비교 계시 3:7, 8) 그러므로 관리인은 중요한 직책이며, 그러한 직책에서 섬기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서든지 많은 것이 요구됩니다. (누가 12:48) 셉나는 유능할지는 모르지만 불충실하기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그를 다른 사람으로 대치하실 것입니다.

상징적인 두 개의 걸이 못

19, 20. (ㄱ) 엘리아김은 어떻게 자기 민족에게 축복이 될 것입니까? (ㄴ) 계속 셉나를 의지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될 것입니까?

19 마지막으로, 여호와께서는 상징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셉나에게서 엘리아김에게로 권세가 옮겨 가는 것을 묘사하십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엘리아김]를 오래 지속될 곳에 걸이 못처럼 박으리니, 그가 자기 아버지의 집에 영광의 왕좌처럼 될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 집의 모든 영광, 자손들과 딸린 자들, 온갖 작은 그릇들, 대접류의 그릇들과 온갖 큰 항아리 그릇들을 그에게 매달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다. ‘그 날에는 오래 지속될 곳에 박혀 있는 걸이 못[셉나]이 제거되리니, 그것이 잘려서 떨어지겠고, 거기에 걸려 있는 짐도 끊어져 버릴 것이다. 여호와가 그렇게 말한다.’”—이사야 22:23-25.

20 위 성구들에 첫 번째로 언급된 걸이 못은 엘리아김입니다. 그는 그의 아버지 힐기야의 집에 “영광의 왕좌”가 될 것입니다. 셉나와는 달리, 그는 아버지의 집에 즉 아버지의 명성에 욕을 돌리지 않을 것입니다. 엘리아김은 집안의 그릇들, 즉 왕을 섬기는 다른 사람들에게 오래 지속되는 버팀대가 되어 줄 것입니다. (디모데 둘째 2:20, 21) 그와 대조가 되는, 두 번째로 언급된 걸이 못은 셉나를 가리킵니다. 그는 안전해 보일지 모르지만 제거될 것입니다. 계속 그를 의지하는 사람은 누구나 몰락할 것입니다.

21. 현대에는 누가 셉나처럼 대치되었고, 그 이유는 무엇이었으며, 누구로 대치되었습니까?

21 셉나의 경험이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는 것은, 하느님을 숭배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봉사의 특권을 받는 사람들은 그 특권을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여호와께 찬양을 돌리는 데 사용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지위를 남용해서 자신을 부유하게 하거나 개인적인 명성을 얻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교국은 오랫동안 자기가 임명받은 관리인,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대표자라고 주장해 왔습니다. 하지만 셉나가 자기 영광을 추구하느라고 자기 아버지에게 불명예를 돌렸듯이, 그리스도교국의 지도자들도 자기들을 위하여 부와 권력을 쌓느라고 창조주께 불명예를 돌려 왔습니다. 그러므로 1918년에 ‘하느님의 집에서 시작되는’ 심판의 때가 도래하였을 때 여호와께서는 그리스도교국을 제거하셨습니다. 새로운 관리인—“충실한 관리인, 곧 슬기로운 사람”—으로 일할 사람이 누구인지 밝혀졌으며, 그가 지상에 있는 예수의 집안을 관리하도록 임명되었습니다. (베드로 첫째 4:17; 누가 12:42-44) 이 복합적인 반열은 다윗의 집의 왕궁 “열쇠”를 맡을 자격이 있음을 증명해 왔습니다. 이 반열은 믿음직스러운 “걸이 못”처럼, 서로 다른 온갖 “그릇들”에게 신뢰할 만한 버팀대임을 증명해 왔습니다. 그 그릇들이란, 영적 양식을 위해 그 반열을 의지하면서 서로 다른 책임을 맡고 있는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킵니다. 또한 “다른 양들” 역시, 고대 예루살렘의 “성문 안에 있는 외국인 거주자”처럼, 현대의 엘리아김인 이 “걸이 못”에 매달려 있습니다.—요한 10:16; 신명 5:14.

22. (ㄱ) 관리인인 셉나를 대치한 것은 왜 시기 적절한 일이었습니까? (ㄴ) 현대에는, “충실한 관리인, 곧 슬기로운 사람”을 임명한 것이 왜 시기 적절한 일이었습니까?

22 엘리아김이 셉나를 대신하게 된 것은, 산헤립과 그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위협하였을 때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충실한 관리인, 곧 슬기로운 사람”이 봉사하도록 임명된 것은 마지막 때인데, 그 마지막 때는 사탄과 그의 군대가 “하느님의 이스라엘”과 그들의 동료들인 다른 양들에게 최종 공격을 감행할 때 그 끝에 다다르게 될 것입니다. (갈라디아 6:16) 히스기야 시대와 마찬가지로, 그 공격은 의의 적들의 멸망으로 끝날 것입니다. 아시리아가 유다를 침공했을 때 예루살렘의 충실한 주민들이 살아남은 것처럼, ‘오래 지속될 곳의 걸이 못’인 충실한 관리인을 버팀대로 의지하는 사람들 역시 살아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국의 믿을 수 없는 “걸이 못”에 매달리지 않는 것은 얼마나 현명한 일입니까!

23. 셉나는 결국 어떻게 되며, 그 일로부터 우리는 어떤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까?

23 셉나는 어떻게 됩니까? 이사야 22:18에 기록되어 있는 그에 대한 예언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알려 주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가 자신을 높이다가 수치를 당하는 면에서는 그리스도교국과 유사한 점이 있지만, 그는 징계로부터 교훈을 얻은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그는 그리스도교국과는 전혀 다른 태도를 나타냅니다. 아시리아 사람 랍사게가 예루살렘의 항복을 요구할 때, 히스기야의 새로운 관리인 엘리아김은 대표단을 인솔해서 랍사게를 만나러 나갑니다. 그런데 셉나가 왕의 비서관으로서 엘리아김 곁에 있습니다. 셉나는 여전히 왕을 섬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사야 36:2, 22) 하느님의 조직에서 누리던 봉사의 지위를 잃는 경험을 하는 사람들에게 참으로 훌륭한 교훈이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몹시 불쾌해하며 분개하는 것이 아니라, 현명하게도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어떤 지위를 허락하시든 그 지위에서 계속 그분을 섬깁니다. (히브리 12:6)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리스도교국에 닥칠 재난을 피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은혜와 축복을 영원토록 누릴 것입니다.

[각주]

^ 6항 기원 66년에,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하던 로마 군대가 철수하자, 많은 유대인들은 환희에 넘쳤다.

^ 6항 1세기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기원 70년에 예루살렘에 기근이 몹시 심해서 사람들은 가죽, 풀, 건초 등을 먹었다. 보고된 한 가지 사례를 보면, 어떤 어머니는 자기 아들을 구워 먹었다.

^ 10항 또는, “유다의 칸막이”는 그 도시를 보호해 주는 다른 것을 가리킬 수도 있는데, 이를테면 무기가 비축되어 있고 군사들이 주둔해 있는 요새 같은 것을 가리킬 수도 있다.

[연구 질문]

[231면 삽화]

시드기야는 도망하다가 붙잡혀 눈이 멀게 된다

[232, 233면 삽화]

예루살렘에 갇혀 있는 유대인들의 전망은 암울하기만 하다

[239면 삽화]

엘리아김은 히스기야에 의해 ‘오래 지속될 곳의 걸이 못’이 된다

[241면 삽화]

셉나처럼, 그리스도교국의 많은 지도자들도 부를 쌓음으로써 창조주께 불명예를 돌렸다

[242면 삽화]

현대에는 충실한 관리인 반열이 임명되어 예수의 집안을 관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