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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반역적인 아들들

아버지와 반역적인 아들들

제2장

아버지와 반역적인 아들들

이사야 1:2-9

1, 2. 여호와께서 어떻게 반역적인 아들들을 갖게 되셨는지 설명해 보십시오.

자녀를 사랑하는 어버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하듯이, 그분은 자녀를 잘 돌보아 주었습니다. 여러 해 동안 자녀의 의식주에 부족함이 없게 해 주었습니다. 필요한 때는 징계도 베풀었습니다. 하지만 한 번도 도에 지나치게 벌을 준 적이 없었으며, 언제나 “적절한 정도로” 벌을 주었습니다. (예레미야 30:11) 따라서 이처럼 사랑 많은 아버지가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을 수 없을 때 느끼는 고통을 우리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내가 아들들을 기르고 키웠건만, 그들은 나를 거역하였다.”—이사야 1:2ㄴ.

2 이 성구에서 언급하고 있는 반역적인 아들들은 유다 백성이고, 비통해하는 아버지는 여호와 하느님이십니다. 참으로 통탄할 일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유다 백성을 양육해 오셨고, 나라들 가운데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도록 키워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후에 예언자 에스겔을 통하여 유다 백성에게 다음과 같이 상기시키십니다. “내가 수놓은 옷을 네게 입히고 바다표범 가죽신을 신기고 고운 아마포로 너를 감싸고 값비싼 옷감으로 너를 덮어 주었다.” (에스겔 16:10) 하지만 유다 백성 대다수는 여호와께서 자기들을 위해 해 주신 일에 대한 인식이 없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반역 즉 거역을 합니다.

3. 여호와께서 하늘과 땅에게 유다의 거역에 대하여 증언하라고 요청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 여호와께서 반역적인 아들들에 관한 말씀을 하시기 전에 먼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시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늘이여, 들어라. 땅이여, 귀를 기울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이사야 1:2ㄱ) 비유적으로 말해서, 하늘과 땅은 여러 세기 전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불순종의 결과에 대해 분명한 경고를 받는 것을 들었습니다. 모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오늘 내가 하늘과 땅을 여러분에게 증인으로 세우는데, 여러분이 요르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정녕 신속히 망할 것입니다.” (신명 4:26) 이제 이사야 시대에, 여호와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늘과 보이는 땅에게 유다의 거역에 대하여 증언하도록 요청하고 계신 것입니다.

4. 여호와께서는 유다 백성에게 어떤 태도를 나타내십니까?

4 상황이 심각할 때는 단도직입적인 접근 방법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 이처럼 절박한 상황에서도 유다 백성에게 단지 그들을 산 주인으로서의 태도를 나타내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 많은 어버이로서의 태도를 나타내신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며, 또한 가슴 뭉클하게 하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사실상,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백성에게 고집 센 아들들로 인해 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아버지의 관점에서 문제를 고려해 보도록 간청하고 계신 것입니다. 아마 유다의 부모들 가운데는 개인적으로 바로 그러한 곤경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며, 그러한 사람들은 여호와께서 사용하신 추리 방법에 따라 유추해 봄으로 감동을 받게 됩니다. 어쨌든, 여호와께서는 이제 유다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시려고 합니다.

이성 없는 짐승보다도 못하다

5. 이스라엘과는 대조적으로, 소나 나귀는 어떻게 충실성을 나타냅니까?

5 여호와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소는 저를 산 사람을, 나귀는 제 주인의 구유를 잘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였고, 내 백성은 이해력 있게 행동하지 못하였구나.” (이사야 1:3) * 소나 나귀는 짐수레를 끄는 데 사용되는 동물로서, 중동 지방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진 동물입니다. 사실, 이러한 비천한 짐승들도 충실성을 나타내며 자기가 어느 주인에게 속해 있는지 잘 알고 있음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유다 백성도 부인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한 성서 연구가가 중동 지방의 한 도시에서 날이 저물 무렵에 목격한 광경을 고려해 보십시오. “가축 떼는 성 안에 들어서자마자 흩어지기 시작했다. 소마다 자기 주인은 물론 자기 집으로 가는 길을 아주 잘 알고 있었으며, 비좁고 구불구불한 길이 미로처럼 얽혀 있어도 잠시도 헤매지 않았다. 나귀들도 곧바로 자기 집 문으로 걸어가서 ‘제 주인의 구유’로 향했다.”

6. 유다 백성은 어떤 면에서 이해력 있게 행동하지 못하였습니까?

6 이사야 시대에는 틀림없이 그런 광경을 흔히 볼 수 있으므로, 여호와께서 전하신 소식의 요점은 분명합니다. ‘이성 없는 짐승도 제 주인과 구유를 알아보는데, 유다 백성이 여호와를 버린 것에 대해 무슨 핑계를 댈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들은 “이해력 있게 행동하지 못하”였습니다. 마치 자기들의 번영은 물론 자기들의 생존 자체도 여호와께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여호와께서 유다 백성을 여전히 “내 백성”이라고 부르고 계신 것은 참으로 자비의 증거입니다!

7. 여호와의 마련에 대한 인식이 있음을 나타낼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은 무엇입니까?

7 우리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해 해 주신 모든 일에 대한 인식을 나타내지 못함으로 이해력 없이 행동하기를 결코 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 시편 필자 다윗을 본받아야 합니다. “오 여호와여, 내가 마음을 다하여 당신을 찬미하고 당신의 모든 놀라운 일들을 선포하렵니다.” (시 9:1) 여호와에 관한 지식을 계속 섭취한다면 우리는 바로 이러한 일을 하도록 격려를 받을 것입니다. 성서에서는 “가장 거룩한 분에 대한 지식이 곧 이해이다”라고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잠언 9:10) 여호와께서 주신 축복에 대해 매일 묵상하는 것은, 감사하는 태도를 나타내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골로새 3:15)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감사로 자기의 희생을 바치는 자가 나를 영광스럽게 하는 자이니, 정해진 길을 지키는 자, 그에게 내가 하느님의 구원을 보여 주겠노라.”—시 50:23.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에 대한 충격적인 모욕

8. 유다 백성을 가리켜 “죄 많은 나라”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8 이사야는 자기가 받은 소식을 계속 전하면서 유다 나라에 대해 다음과 같은 강력한 말을 합니다. “죄 많은 나라, 잘못이 무거운 백성, 행악하는 씨, 파멸을 초래하는 아들들에게 화가 있다! 그들은 여호와를 버렸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을 업신여겼고, 그분에게 등을 돌렸다.” (이사야 1:4) 악행은 엄청난 무게가 될 정도로 쌓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시대에 여호와께서는 소돔과 고모라의 죄가 “매우 무겁다”고 묘사하셨습니다. (창세 18:20) 이제 유다 백성도 그와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음이 분명합니다. 이사야가 그들을 가리켜 “잘못이 무거운” 백성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사야는 그들을 가리켜 “행악하는 씨, 파멸을 초래하는 아들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유다 백성은 비행을 저지르는 자녀와 같습니다. 그들은 “등을 돌렸”습니다. 다시 말해서, 「신 개역 표준역」에서 표현한 것처럼, 자기들의 아버지에게서 “완전히 멀어졌”습니다.

9.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이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9 유다 백성은 그들의 고집 센 행로를 통해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을 철저히 업신여기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서에 25회나 나오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이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거룩하다는 것은 깨끗하고 정결한 것을 의미합니다. 여호와께서는 더할 나위 없이 거룩하신 분입니다. (계시 4:8) 이스라엘 사람들은 대제사장의 터번에 부착된 빛나는 금패에 새겨진 “거룩함은 여호와께 속한다”라는 글을 볼 때마다 그러한 사실을 상기하게 됩니다. (탈출 39:30) 따라서 이사야는 여호와를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이라고 부름으로, 유다가 지은 죄의 심각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 반역적인 사람들은 자기들의 조상에게 주어진 다음과 같은 명령을 노골적으로 어기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자신을 거룩하게 하고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1:44.

10. 어떻게 하면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을 업신여기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10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을 업신여긴 유다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여호와의 거룩함을 본받아야 합니다. (베드로 첫째 1:15, 16) 그리고 “악한 것을 미워”해야 합니다. (시 97:10) 성적 부도덕, 우상 숭배, 도둑질, 술취함과 같은 부정한 행위들은 그리스도인 회중을 부패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행위를 중단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회중에서 제명시키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고 부정한 행로를 따르는 사람들은 결국 하느님의 왕국 정부가 가져다 줄 축복을 즐기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상, 그러한 악한 행위는 모두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에게 충격적인 모욕을 가하는 일이 됩니다.—로마 1:26, 27; 고린도 첫째 5:6-11; 6:9, 10.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병들었다

11, 12. (ㄱ) 유다의 나쁜 상태가 어느 정도였는지 설명해 보십시오. (ㄴ) 유다를 불쌍히 여길 필요가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1 이사야는 이어서 유다 백성에게 그들의 병든 상태를 지적하면서 그들과 추리하려고 노력합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아직도 어디를 맞으려고 자꾸만 거역하느냐?” 사실상, 이사야는 유다 백성에게 이렇게 질문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지금까지 받은 고난으로도 충분하지 않느냐? 반역적인 행동을 계속하여 더 많은 해를 자초할 이유가 어디 있느냐?’ 이사야는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머리는 온통 병든 상태이고, 마음은 온통 힘이 없다.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다.” (이사야 1:5, 6ㄱ) 유다는 병들어 혐오스러운 상태—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영적으로 병든 상태—에 있습니다. 참으로 마음을 어둡게 하는 진단이 나온 것입니다!

12 유다를 불쌍히 여겨야 합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 세기 전에 이스라엘 나라 전체는 불순종할 때 어떤 형벌이 있을 것인지 충분히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러한 경고의 일부로 그들은 이러한 말을 들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의 두 무릎과 두 다리를 악성 종기로 치실 것이니, 당신이 고침을 받지 못하여,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번질 것입니다.” (신명 28:35) 유다는 고집 센 행로로 인해 이제 비유적인 의미에서 바로 그러한 결과를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이 여호와께 순종하기만 했더라면 이 모든 일을 당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13, 14. (ㄱ) 유다는 어떤 부상을 입었습니까? (ㄴ) 고난을 당하자 유다는 반역적인 행로를 재고하게 됩니까?

13 이사야는 유다의 비참한 상태를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상처와 멍과 새로 매맞은 자국들—그것들을 짜내거나 싸매지도 못하고, 기름으로 부드럽게 하지도 못하였구나.” (이사야 1:6ㄴ) 여기서 이 예언자는 세 가지 형태의 부상을 언급합니다. 즉 상처(긴 칼이나 짧은 칼에 입은 것과 같은 자상), 멍(구타당하여 부어 오른 자국), 새로 매맞은 자국(새로 생긴, 치료하기 어려워 보일 정도로 벌어진 상처)입니다. 여기서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상상할 수 있는 온갖 방법이 동원된 모진 처벌을 받아 어디 한 군데 상하지 않은 곳이 없이 만신 창이가 된 사람을 생각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유다는 참으로 처참한 상태가 되어 있습니다.

14 그처럼 비참한 상태에 처하게 되자 유다는 여호와께로 돌아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유다는 잠언 29:1에 묘사된 반역적인 사람과 같습니다. “반복하여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을 곧게 하는 사람은 갑자기 부서지고, 더구나 치료되지도 않는다.” 이 나라는 치료 불가능한 나라인 것 같습니다. 이사야가 묘사한 대로, 유다의 상처는 “짜내거나 싸매지도 못하고, 기름으로 부드럽게 하지도 못하”는 상처였습니다. * 어떤 면에서 유다는, 벌어져 있는데도 붕대도 감지 못한 상처가 온 몸에 난 것과도 같습니다.

15. 어떻게 하면 영적인 병에 걸리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보호할 수 있습니까?

15 우리는 유다의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얻어 영적인 병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신체적인 병과 마찬가지로 영적인 병도 누구나 걸릴 수 있습니다. 어쨌든, 육체의 욕망에 빠지기 쉽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쾌락을 과도하게 추구하고 싶은 욕망이나 탐욕이 우리 마음 속에 뿌리를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악한 것을 몹시 싫어하고 선한 것에 고착”하는 훈련을 쌓을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 12:9) 또한 일상 생활 가운데서 하느님의 영의 열매를 배양할 필요가 있습니다. (갈라디아 5:22, 23) 그렇게 한다면, 유다를 괴롭혔던 상태—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영적으로 병든 상태—에 빠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황폐된 나라

16. (ㄱ) 이사야는 유다 땅의 상태를 어떻게 묘사합니까? (ㄴ) 이 말은 아마 아하스 통치 때에 한 말일 것이라고 일부 사람들이 말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우리는 이사야의 말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16 이사야는 이제 의학적인 추리를 사용하여 유추하게 하는 일은 그만 하고, 유다 땅의 상태로 주의를 돌립니다. 이사야는 마치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평야를 내려다보고 있듯이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땅은 황폐되고, 너희 도시들은 불에 탄다. 너희 토지—그것을 바로 너희 앞에서 낯선 사람들이 삼켜 버리고, 그 황폐는 낯선 사람들이 무너뜨린 것과 같다.” (이사야 1:7) 학자들 가운데는, 이 말이 이사야서의 서두 부분에 나와 있긴 하지만 아마 이 예언자의 생애 후반부, 어쩌면 악한 왕 아하스 통치 때에 한 말일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학자들은 웃시야가 통치하던 때는 매우 번영하던 때라서 그처럼 황량한 묘사가 어울릴 만한 때가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물론, 이사야서가 연대순으로 편집된 것인지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황폐에 대한 이사야의 말은 예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위의 성구에 언급된 말을 하면서 이사야는 십중팔구 성서의 다른 곳에도 나오는 표현 기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미래의 일을 이미 일어난 일인 것처럼 묘사함으로 예언이 틀림없이 성취될 것임을 강조하는 기법입니다.—비교 계시 11:15.

17. 황폐에 대한 예언적 묘사가 유다 백성에게 뜻밖의 일로 여겨져서는 안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7 어찌 되었든, 유다의 황폐에 대한 이 예언적 묘사는 이 고집 세고 불순종적인 백성에게 뜻밖의 일로 여겨져서는 안 됩니다. 여호와께서는 이미 여러 세기 전에, 그들이 반역을 할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경고해 주셨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 땅을 황폐되게 할 것이며, 거기에 사는 너희의 적들은 그로 인해 크게 놀라 바라볼 것이다. 나는 너희를 나라들 가운데 흩어 버리고, 칼집에서 칼을 뽑아 너희를 뒤쫓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땅은 정녕 황폐한 곳이 되고, 너희 도시들은 황량한 폐허가 될 것이다.”—레위 26:32, 33; 열왕 첫째 9:6-8.

18-20. 이사야 1:7, 8에 기록된 말씀은 언제 성취되며, 이때 여호와께서는 어떻게 “조금이나마 남겨 두”십니까?

18 이사야 1:7, 8에 기록된 말씀은, 아시리아가 침공해 들어와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유다도 광범위하게 파괴하며 고난을 당하게 할 때 성취되는 것 같습니다. (열왕 둘째 17:5, 18; 18:11, 13; 역대 둘째 29:8, 9) 그런데 유다는 완전히 멸망되지는 않습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딸 시온은 포도원의 초막같이, 오이밭의 원두막같이, 봉쇄된 도시같이 남아 있다.”—이사야 1:8.

19 모든 것이 황폐되어도, “딸 시온” 즉 예루살렘만큼은 그대로 서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은 포도원의 초막이나 오이밭의 원두막같이 매우 약해 보일 것입니다. 19세기의 한 학자는 나일 강을 따라 여행하면서 그와 비슷한 초막들을 보고서 이사야의 말이 생각났는데, 그는 그 초막들을 가리켜 “북풍을 막기 위해 쳐놓은 울타리 같은 것에 불과하다”고 묘사하였습니다. 유다에서는 수확기가 끝나면 이 초막들을 해체하여 철거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엇이든 거침없이 정복해 버리는 아시리아 군대 앞에서 예루살렘은 한없이 나약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래도 살아남을 것입니다.

20 이사야는 예언의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맺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살아남은 사람들을 조금이나마 남겨 두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소돔과 같이 되었을 것이며, 고모라와 비슷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사야 1:9) * 아시리아의 위력에 대항할 수 있도록, 여호와께서는 마침내 유다를 도와 주실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와는 달리, 유다는 멸절되지 않을 것입니다. 유다는 살아남을 것입니다.

21. 바빌론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후에도, 여호와께서 “조금이나마 남겨 두”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21 북쪽 왕국이 멸망된 지 100여 년 후 유다는 다시 위협을 받게 되었습니다. 유다 백성은 아시리아를 통해 베풀어진 징계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참 하느님의 사자들에게 비아냥거리고 그분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그분의 예언자들을 조롱하였”습니다. 그 결과, “여호와의 격노가 그 백성에게 닥쳐서 더는 고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역대 둘째 36:16) 바빌로니아의 왕 느부갓네살이 유다를 정복하였는데, 이번에는 “포도원의 초막같이” 남은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예루살렘도 멸망되었습니다. (역대 둘째 36:17-21)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조금이나마 남겨 두”셨습니다. 유다는 70년 동안 유배 생활을 인내해야 하였지만, 여호와께서는 그 나라가 존속하도록, 특히 약속된 메시아를 산출하게 될 다윗 가계가 존속하도록 보호해 주셨습니다.

22, 23. 1세기에, 여호와께서 “조금이나마 남겨 두”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22 이스라엘은 1세기에,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백성으로서 마지막으로 위기를 겪었습니다. 예수께서 자신이 바로 약속된 메시아임을 드러내셨을 때 그 나라는 그분을 배척하였고, 그 결과 여호와께서도 그들을 배척하셨습니다. (마태 21:43; 23:37-39; 요한 1:11) 이것으로 여호와께서 지상에 특별한 나라를 두시는 일은 끝났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사야 1:9이 또다시 성취될 것임을 밝혀 주었습니다. 그는 「칠십인역」을 인용하여 이렇게 썼습니다. “또한 이사야가 전에 말한 바와 같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기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소돔과 같이 되었을 것이며 고모라와 같이 되었을 것이다.’”—로마 9:29.

23 이번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믿음을 둔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맨 처음에는 믿는 유대인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후에 믿는 이방인들이 믿는 유대인들에게 가세하였습니다. 그들은 함께 새로운 이스라엘, 즉 “하느님의 이스라엘”을 형성하였습니다. (갈라디아 6:16; 로마 2:29) 이 “씨”는 기원 70년에 있었던 유대인 사물의 제도의 멸망을 살아남았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이스라엘”은 오늘날에도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이스라엘”에는 현재 나라들에서 나온 수백만 명의 믿는 사람들이 가세하고 있는데, 이들은 ‘모든 나라와 부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 아무도 셀 수 없는 큰 무리’를 형성하는 사람들입니다.—계시 7:9.

24. 인류 최대의 위기를 살아남고 싶다면, 누구나 무엇을 주의 깊이 고려해야 합니까?

24 머지않아 이 세상은 아마겟돈 전쟁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계시 16:14, 16) 이 전쟁은 아시리아나 바빌로니아가 유다를 침공했을 때보다 더 큰 위기를 가져오며, 심지어 기원 70년에 로마가 유대를 황폐시켰을 때보다도 더 큰 위기를 가져올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남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계시 7:14) 그러므로 이사야가 유다에게 한 말을 주의 깊이 고려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이사야의 말은 그 당시의 충실한 사람들에게 생존을 의미하였습니다. 이사야의 말은 오늘날의 믿는 사람들에게도 생존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각주]

^ 5항 이 문맥에서 “이스라엘”은 두 지파 유다 왕국을 가리킨다.

^ 14항 이사야의 말은 이사야 시대의 의료 관행을 반영하고 있다. 성서 연구가인 E. H. 플럼트러는 이렇게 말한다. “벌어져서 곪는 상처를 ‘봉합하’거나 ‘짜내’는 것은 고름을 제거하기 위해 첫 번째로 취하는 조처였다. 그 후 히스기야의 경우처럼(이사야 38장 21절) 상처를 습포로 ‘싸매’었으며, 그런 다음에는 자극성 있는 기름이나 연고를 사용하여 헌데를 깨끗이 하였는데, 아마 누가 10:34에 언급된 경우처럼 기름과 포도주가 사용되기도 하였을 것이다.”

^ 20항 C. F. 카일과 F. 델리치 공저 「구약 주석」(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이 예언자의 말은 여기서 일단 끝난다. 이 예언자의 말이 여기서 두 부분으로 나뉘게 된다는 사실은, 원문의 9절과 10절 사이에 간격을 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처럼 간격을 두거나 행을 바꾸거나 하여 원문의 크고 작은 부분을 나누어 놓는 방식은, 모음 부호나 악센트 부호를 붙이는 방식보다도 더 오래 된 관습으로서 가장 오래 된 전통에 근거한 것이다.”

[연구 질문]

[20면 삽화]

소돔과 고모라와는 달리, 유다에는 주민이 영원히 거하지 않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