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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느님께서 자신의 성전에 계시다

여호와 하느님께서 자신의 성전에 계시다

제8장

여호와 하느님께서 자신의 성전에 계시다

이사야 6:1-13

1, 2. (ㄱ) 예언자 이사야는 언제 성전 환상을 받습니까? (ㄴ) 웃시야 왕은 왜 여호와의 은혜를 잃게 되었습니까?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나는 높이 들린 왕좌에 앉아 계시는 여호와를 뵈었는데, 그분의 옷자락이 성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사야 6:1) 이사야 6장은 그 예언자가 한 이러한 말로 시작됩니다. 때는 기원전 778년입니다.

2 웃시야는 52년간 유다 왕으로 통치하면서 대부분의 기간 대단히 성공적인 통치를 하였습니다. “여호와의 눈에 옳은” 일을 행한 웃시야는 군사, 건축, 농업 분야에서 과감하게 시행한 일에서도 하느님의 후원을 받아 성공을 누렸습니다. 하지만 웃시야가 거둔 성공은 그의 파멸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그의 마음이 거만해지는 바람에 “그는 자기 하느님 여호와께 불충실하게 행하여, 여호와의 성전으로 들어가서 ·⁠·⁠· 분향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주제넘은 행동과 자신을 질책하는 제사장들에게 격노한 행동 때문에 웃시야는 나병에 걸린 상태로 일생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역대 둘째 26:3-22) 이사야가 예언자로서의 일을 시작한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습니다.

3. (ㄱ) 이사야는 여호와를 실제로 보고 있는 것입니까? 설명하십시오. (ㄴ) 이사야는 어떤 장면을 보고 있으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3 이사야가 환상을 볼 때 이사야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사야가 자신의 육안으로 보고 있는 것은 환상임에 틀림없으며, 전능하신 분을 실제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때에도 하느님을 본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 1:18; 탈출 33:20) 하지만 창조주이신 여호와를 환상으로라도 본다는 것은 외경심을 불러일으키는 광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영원한 왕 겸 재판관의 역할을 상징하는 높은 왕좌에 앉아 계신 분은 우주의 통치자이시며 전적으로 정당한 정부의 근원이 되시는 분입니다! 길게 드리워진 그분의 옷자락이 성전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여호와의 최고의 능력과 공의를 드높이게 될 예언자의 일을 하라는 부름을 받게 됩니다. 그 준비 단계로, 하느님의 거룩함에 관한 환상이 이사야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4. (ㄱ) 환상 가운데서 보고 성서에 기록한 여호와에 대한 묘사가 상징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이사야의 환상은 여호와에 대해 어떤 점을 알려 줍니까?

4 에스겔이나 다니엘이나 요한이 보고한 환상들과는 달리, 이사야는 자신의 환상에서 여호와의 모습을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기록들은 모두 하늘 장면에 관한 묘사가 서로 다릅니다. (에스겔 1:26-28; 다니엘 7:9, 10; 계시 4:2, 3) 하지만 이 환상들의 성격과 목적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 환상들은 여호와의 임재를 문자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적인 눈으로는 영적인 것을 볼 수 없으며, 한계가 있는 인간의 정신으로는 영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 환상들은 전해야 할 내용을 인간의 표현으로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교 계시 1:1) 이사야의 환상에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묘사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환상은 여호와께서 자신의 성전에 계시며 또한 그분은 거룩하신 분으로서 그분의 심판은 완전무결하다는 사실을 이사야에게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스랍

5. (ㄱ) 스랍들은 어떤 존재이며, 스랍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ㄴ) 스랍들이 자기들의 얼굴과 발을 가리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5 들어 보십시오! 이사야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스랍들은 그분 위로 서 있었다. 각자 여섯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발을 가리고 있었으며, 둘로는 날아다니곤 하였다.” (이사야 6:2) 성서 가운데서 스랍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곳은 이사야 6장뿐입니다. 이들은 여호와의 하늘 왕좌 주위에서 여호와를 섬기는, 특권과 영예를 누리는 면에서 매우 지위가 높은 천사 피조물들임에 틀림없습니다. 교만한 왕 웃시야와는 달리, 이들은 대단히 겸손하고 겸허하게 자기들의 위치에 있습니다. 이들은 하늘의 주권자가 계시는 곳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한 쌍의 날개로 자기들의 얼굴을 가리고 있고, 거룩한 장소에 대한 경외심에서 다른 한 쌍의 날개로 자기들의 발을 가리고 있습니다. 우주의 주권자를 가까이서 모시고 있는 스랍들이 이처럼 자신의 모습을 철저히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하느님 자신의 영광에 집중되어야 할 주의가 딴 데로 흐트러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불 같은 자” 혹은 “태우는 자”라는 의미를 지닌 “스랍”이라는 표현은 그들의 몸에서도 광채가 남을 시사해 주지만, 이들은 여호와의 훨씬 더 눈부신 빛과 영광 앞에서 자기들의 얼굴을 가리고 있습니다.

6. 여호와와 관련하여 스랍들은 어떤 위치에 있습니까?

6 스랍들은 나머지 한 쌍의 날개를 이용하여 날고 있는데, 틀림없이 자기들의 위치에서 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서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교 신명 31:15) 스랍들의 위치에 관해 프란츠 델리치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스랍들이 실제로 왕좌에 앉아 계신 분의 머리 위로 높이 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것이 아니라 성전을 가득 채우고 있던 그분의 옷 위로 떠 있었을 것이다.” (「구약 주석」[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인 것 같습니다. 스랍들이 “위로 서 있”다는 것은, 그들이 여호와보다 우월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들이 여호와의 시중을 들고 여호와께 순종하며 여호와를 섬길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7. (ㄱ) 스랍은 어떤 임무를 수행합니까? (ㄴ) 스랍들이 하느님의 거룩함을 세 번이나 선포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7 이제 이 특권받은 스랍들이 외치는 소리를 들어 보십시오! “그리고 서로 부르며 말하였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여호와. 온 땅에 그분의 영광이 가득하다.’” (이사야 6:3) 스랍의 임무는 여호와의 거룩함이 선포되도록 하는 것이며, 이 땅을 포함하여 우주 전역에 여호와의 영광이 알려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은 그분이 창조하신 모든 것에서 볼 수 있으며, 머지않아 이 땅의 모든 거주자가 그 영광을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민수 14:21; 시 19:1-3; 하박국 2:14)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하고 삼중으로 선포하는 것은 결코 삼위일체에 대한 증거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거룩함을 삼중으로 강조하는 것입니다. (비교 계시 4:8) 여호와는 더할 나위 없이 거룩하신 분입니다.

8. 스랍들의 선포 결과 어떤 일이 있습니까?

8 스랍들의 수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스랍들은 아마 왕좌 가까운 곳에 여러 무리로 나뉘어 서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아름다운 노래로, 하느님의 거룩함과 영광을 차례로 반복하여 선포합니다. 어떤 결과가 있음을 보게 됩니까? 이사야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하는 말을 다시 들어 보도록 합시다. “부르는 자의 소리에 문지방 축이 흔들리기 시작하였고, 집은 점차 연기로 가득 찼다.” (이사야 6:4) 성서에서, 연기나 구름은 종종 하느님이 임재해 계시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눈에 보이는 증거가 됩니다. (탈출 19:18; 40:34, 35; 열왕 첫째 8:10, 11; 계시 15:5-8) 그것은 우리 인간 피조물이 감히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자격이 없지만 깨끗하게 되다

9. (ㄱ) 환상은 이사야에게 어떤 영향을 미칩니까? (ㄴ) 이사야와 웃시야 왕 사이에는 어떤 뚜렷한 대조점이 있습니까?

9 여호와의 왕좌에 관한 이 환상은 이사야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말하였다. ‘나에게 화가 있다! 나는 잠잠해지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며,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내 눈이 왕이신 만군의 여호와를 뵙다니!’” (이사야 6:5) 이사야는 웃시야 왕과 얼마나 뚜렷한 대조가 됩니까! 웃시야는 기름부음받은 제사장의 지위까지도 가로채서 불경스럽게도 성전의 성소로 침범해 들어갔습니다. 웃시야는 금 등잔대와 금 분향 제단과 “임재해 계신 곳의 빵”이 차려져 있는 상은 보았지만, 승인을 표시하는 여호와의 얼굴을 보거나 그분으로부터 어떤 특별한 임명을 받지는 못하였습니다. (열왕 첫째 7:48-50; 신세계역 참조주 성서 각주 참조) 반면에, 예언자 이사야는 제사장을 무시하거나 성전을 침범해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성전에 계신 여호와에 대한 환상을 보게 되며,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임명을 받는 영예를 누리게 됩니다. 스랍들은 왕좌에 앉아 계신 성전의 주를 감히 쳐다볼 엄두를 못 내지만, 이사야에게는 환상 가운데서 “왕이신 만군의 여호와”를 쳐다보는 것이 허락됩니다.

10. 이사야가 환상을 보고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0 이사야는 자신의 죄 많은 상태가 하느님의 거룩함과 뚜렷한 대조를 이루는 것을 보게 되자 자신이 몹시 부정한 사람이라고 느끼게 됩니다. 이사야는 두려움에 가득 차서 자신이 죽게 될 것이라고 추리합니다. (탈출 33:20) 이사야는 스랍들이 깨끗한 입술로 하느님을 찬양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하지만 이사야 자신의 입술은 부정하며, 그가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고 또 그들이 하는 말을 듣고 있기 때문에 그 부정함은 한층 더 심하게 느껴집니다. 여호와는 거룩하신 분이므로, 그분의 종들도 그러한 특성을 반영해야 합니다. (베드로 첫째 1:15, 16) 이미 하느님의 대변자로 선택되긴 하였지만, 이사야는 자신의 죄 많은 상태를 깨닫고 충격을 받습니다. 그는 영광스럽고 거룩하신 왕의 대변자에게 합당한 깨끗한 입술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하늘의 반응은 어떠할 것입니까?

11. (ㄱ) 한 스랍은 무슨 일을 하며, 이러한 행동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ㄴ) 우리가 하느님의 종으로서 자격이 없다고 느낄 때 스랍이 이사야에게 하는 말을 묵상해 보는 것이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습니까?

11 스랍들은 비천한 이사야를 여호와께서 임재해 계신 곳에서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이사야를 도와 주기 위해 행동을 취합니다. 기록은 이렇게 알려 줍니다. “그러자 스랍들 중 하나가 나에게 날아왔는데, 그의 손에는 그가 부집게로 제단에서 집어 든 빨갛게 피어 오른 숯이 있었다. 그가 내 입에 대며 말하였다. ‘보라! 이것이 네 입술에 닿았으니, 네 잘못은 사라지고 네 죄는 속하여졌다.’” (이사야 6:6, 7) 불은 상징적인 의미로 정화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스랍이 거룩한 불이 있는 제단에서 가져온 빨갛게 피어 오른 숯을 이사야의 입술에 갖다 대며, 하느님의 은혜와 임명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이사야의 죄가 속하여졌다고 이사야를 안심시켜 줍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참으로 격려가 되는 일입니다! 우리 역시 죄 많은 사람들이며 하느님께 나아갈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의 대속 희생의 가치를 통해 구속을 받았으므로, 하느님의 은혜를 얻을 수 있으며 기도를 통해 그분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고린도 둘째 5:18, 21; 요한 첫째 4:10.

12. 이사야가 보고 있는 것은 어떤 제단이며, 불은 어떤 효력을 발휘합니까?

12 이것이 환상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생각나게 해 주는 것으로, “제단”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비교 계시 8:3; 9:13) 예루살렘 성전에는 제단이 두 개 있었습니다. 지성소의 휘장 바로 앞에 조그만 분향 제단이 있었고, 신성한 곳으로 들어가는 입구 앞에 큰 희생 제단이 있었는데, 이 희생 제단에서는 불이 끊임없이 타고 있었습니다. (레위 6:12, 13; 16:12, 13) 하지만 이 지상의 제단들은 모형적인 것들로서 더 큰 것을 상징하고 있었습니다. (히브리 8:5; 9:23; 10:5-10) 솔로몬 왕이 성전의 낙성식을 거행할 때 제단 위의 번제물을 태운 것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불이었습니다. (역대 둘째 7:1-3) 이제 이사야의 입술에서 부정함을 없애 주는 것은 하늘의 참 제단에서 가져온 불입니다.

13. 여호와께서는 무슨 질문을 하시며, 누구를 포함시켜 “우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13 이사야와 함께 다음의 말씀에 귀기울여 봅시다. “나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여호와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까?’ 그래서 내가 말씀드리기를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십시오’ 하였다.” (이사야 6:8) 여호와께서 이러한 질문을 하시는 것은 이사야에게서 반응을 이끌어 내시기 위한 것임이 분명합니다. 이 환상에는 다른 인간 예언자가 등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틀림없이 이사야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되라고 초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까?” 하고 질문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단수 인칭 대명사 ‘나’를 사용하시다가 복수 대명사 ‘우리’를 사용하심으로, 여호와께서는 이제 자기 곁에 적어도 한 존재가 더 있음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그분의 독생자, 후에 인간 예수 그리스도가 되신 분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 사람을 만들자”고 말씀하셨을 때에도 하느님께서는 바로 이 아들에게 말씀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창세 1:26; 잠언 8:30, 31) 그렇습니다. 하늘 법정의 여호와 곁에는 그분의 독생자가 계십니다.—요한 1:14.

14. 이사야는 여호와의 초대에 어떻게 응답하며, 그는 우리에게 어떠한 모범을 세워 놓습니까?

14 이사야의 응답은 주저함이 없습니다! 전해야 할 소식의 내용이 무엇이든 그는 즉시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십시오” 하고 대답합니다. 그 임명을 받아들이면 자기에게 어떤 이득이 있을 것인지도 묻지 않습니다. 그의 자원하는 영은, ‘사람이 거주하는 온 땅에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할 임명을 받은 오늘날의 하느님의 종들 모두에게 훌륭한 모범이 됩니다. (마태 24:14) 반응을 나타내지 않는 태도가 널리 퍼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이사야처럼 자기들의 임명에 충실하게 고착하며 “모든 나라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일을 완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임명이 가장 높으신 분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임을 알고 있는 이들은 이사야처럼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사야가 받은 임명

15, 16. (ㄱ) 이사야는 “이 백성”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이며, 그들의 반응은 어떠할 것입니까? (ㄴ) 그들이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이사야에게 잘못이 있기 때문입니까? 설명하십시오.

15 여호와께서는 이제 이사야가 전해야 할 말이 무엇이며 그에 대해 어떤 반응이 있을 것인지를 다음과 같이 개략적으로 알려 주십니다. “가거라. 너는 이 백성에게 말해야 한다. ‘너희는 거듭거듭 듣기는 하여도, 이해하지는 말아라. 거듭거듭 보기는 하여도, 지식을 얻지는 말아라.’ 이 백성의 마음을 무디게 하고, 그 귀를 반응이 없게 하며, 그 눈을 봉하여라. 그리하여 그들이 눈으로 보지 못하게 하고 귀로 듣지 못하게 하며, 그들의 마음이 이해하지 못하게 하고 그들이 실제로 돌아와서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여라.” (이사야 6:9, 10) 이 말씀은 이사야가 유대인들을 퉁명스럽고 무뚝뚝하게 대하며 불쾌하게 물리쳐 버림으로 그들이 계속 여호와와 좋지 않은 관계에 머물러 있도록 하라는 뜻입니까? 결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이사야가 남달리 친근감을 느끼는 그의 동족입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말씀은, 이사야가 얼마나 충실하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든 간에, 그 백성이 여호와의 소식에 어떤 반응을 나타낼 것인지를 알려 줍니다.

16 잘못은 그 백성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그들에게 “거듭거듭” 말하겠지만, 그들은 그 소식을 받아들이거나 이해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다수가 고집 세고 반응이 없는 태도를 나타낼 것입니다. 마치 완전히 눈멀고 귀먹기나 한 것처럼 말입니다. 이사야는 그들에게 반복해서 감으로, “이 백성”으로 하여금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없음을 드러내게 할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전달되는 이사야의 소식—하느님의 소식—에 정신과 마음을 닫고 있음을 나타낼 것입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의 태도도 이와 똑같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이 하느님의 왕국이 다가오고 있다는 좋은 소식을 전파할 때, 매우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17. “언제까지입니까?”라는 이사야의 질문은 어떤 취지로 하는 질문입니까?

17 이사야는 다음과 같은 염려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내가 말씀드렸다. ‘오 여호와여, 언제까지입니까?’ 그러자 그분이 말씀하셨다. ‘도시들이 실제로 허물어져 폐허가 되어 주민이 없고, 집마다 땅의 사람이 없으며, 토지마저 못쓰게 황폐될 때까지이다. 여호와가 실제로 땅의 사람들을 멀리 쫓아내어, 버려진 상태가 이 땅 가운데 매우 광범위해질 때까지이다.’” (이사야 6:11, 12) “언제까지입니까?”라는 이사야의 질문은, 반응이 없는 백성에게 언제까지 계속해서 전파해야 하는가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사야는 동족을 염려하는 마음에서, 그들의 좋지 않은 영적 상태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지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이 이 땅에서 언제까지 불명예를 당할 것인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시 74:9-11 참조) 그러면 이처럼 무분별한 태도를 나타내는 상황은 도대체 언제까지 지속될 것입니까?

18. 이 백성의 좋지 않은 영적 상태는 언제까지 계속될 것이며, 이사야는 그 예언이 완전히 성취되는 것을 살아서 볼 것입니까?

18 슬프게도, 여호와의 대답은, 하느님께 불순종할 때 있게 될 결과, 즉 하느님의 계약에 진술된 결과를 전부 다 겪게 될 때까지 이 백성의 좋지 않은 영적 상태가 계속될 것임을 알려 줍니다. (레위 26:21-33; 신명 28:49-68) 이 나라는 파멸에 이를 것이며, 이 백성은 추방될 것이고, 그 땅은 황폐될 것입니다. 이사야는 웃시야 왕의 증손자인 히스기야 통치 때까지 계속하여 40여 년간 예언을 하겠지만, 기원전 607년에 예루살렘과 그 성전이 바빌로니아 군대에 멸망되는 것까지 살아서 보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사야는 그 국가적 재난이 일어나기 100여 년 전에 사망할 때까지 계속해서 자신의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할 것입니다.

19. 그 나라는 나무처럼 잘리겠지만, 하느님께서는 이사야에게 무슨 보증을 해 주십니까?

19 유다를 “못쓰게 황폐”되도록 만들어 버릴 멸망은 반드시 오게 되어 있지만, 상황이 절망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열왕 둘째 25:1-26) 여호와께서는 이사야에게 다음과 같이 보증해 주십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곳에 분의 일이 있을 것이요, 그것은 큰 나무처럼, 거대한 나무처럼, 또다시 태워 버릴 것이 될 것인데, 그것들을 잘라 버려도 그루터기는 있다. 거룩한 씨가 그 그루터기가 될 것이다.” (이사야 6:13) 그렇습니다. “십분의 일 ·⁠·⁠· 거룩한 씨”가, 잘라 버린 거대한 나무의 그루터기처럼 남아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보증—이사야의 민족 가운데서 거룩한 남은 자가 발견될 것이라는 보증—은 의문의 여지 없이 이사야에게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 나라는 땔감으로 쓰려고 잘라 버린 큰 나무처럼 불태움을 당하는 일을 또다시 겪겠지만, 상징적인 이스라엘 나무의 매우 중요한 그루터기만큼은 남아 있게 될 것입니다. 그 그루터기는 여호와에게 거룩한 씨 즉 자손이 될 것입니다. 때가 되면, 그 씨는 다시 싹을 낼 것이며, 그 나무는 다시 자라게 될 것입니다.—비교 욥 14:7-9; 다니엘 4:26.

20. 이사야의 예언의 이 마지막 부분은 첫 번째로 어떻게 성취되었습니까?

20 이 예언의 말씀은 성취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유다 땅이 황폐된 지 70년 후에,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남은 자들이 바빌론에 유배되어 있다가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성전과 예루살렘 도시를 재건하였으며, 그 땅에 참 숭배를 회복시켰습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이 하느님께서 주신 고토로 돌아와서 이루게 된 회복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주신 이 예언의 두 번째 성취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었습니까?—에스라 1:1-4.

그 밖의 성취

21-23. (ㄱ) 이사야의 예언은 1세기에 누구에게 성취되었으며, 어떻게 성취되었습니까? (ㄴ) 1세기의 “거룩한 씨”는 누구였으며, 어떻게 보존되었습니까?

21 이사야가 예언자로서 한 일은, 약 800년 후에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실 일을 전영하였습니다. (이사야 8:18; 61:1, 2; 누가 4:16-21; 히브리 2:13, 14) 예수께서는 이사야보다 훨씬 위대한 분이지만, 이사야와 마찬가지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늘의 아버지에 의해 보냄을 받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행하러 왔습니다.”—히브리 10:5-9; 시 40:6-8.

22 예수께서도 이사야처럼 자신에게 임명된 일을 충실하게 수행하셨으며, 이사야 시대와 동일한 반응에 직면하셨습니다. 예수 시대의 유대인들도, 예언자 이사야가 전파했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소식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사야 1:4) 예수의 봉사의 직무의 한 가지 특징은 예를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그들에게 예를 사용하여 말씀하십니까?” 하고 질문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여러분에게는 하늘 왕국의 신성한 비밀을 이해하는 것이 허락되나, 그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나는 그들에게 예를 사용하여 말합니다. 그들은 보아도 헛되이 보며, 들어도 헛되이 들으며, 또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되고 있으니, 그 예언은 이러합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결코 깨닫지 못할 것이며, 보기는 보아도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이 백성의 마음이 무디어졌고, 그들은 귀로 들어도 반응이 없으며,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서는 일이 없게 하며, 그리하여 내가 그들을 고치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마태 13:10, 11, 13-15; 마가 4:10-12; 누가 8:9, 10.

23 예수께서는 이사야의 말을 인용하셔서 그 예언이 자신의 시대에 성취되고 있음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 백성이 전반적으로 가지고 있던 마음의 태도는 이사야 시대의 유대인들의 태도와 유사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소식에 눈멀고 귀먹은 태도를 나타냈으며, 이사야 시대와 마찬가지로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마태 23:35-38; 24:1, 2) 기원 70년에 티투스 장군 휘하의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을 공격해 와 그 도시와 성전을 허물어뜨렸을 때 그러한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예수의 말씀에 귀기울여 그분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마태 13:16-23, 51) 예수께서는 이 사람들에게 “예루살렘이 진을 친 군대에게 둘러싸이는 것을” 보거든 “산으로 도피”해야 한다고 알려 주셨습니다. (누가 21:20-22) 그리하여 믿음을 나타내고 “하느님의 이스라엘”이라는 영적 나라를 형성한 “거룩한 씨”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갈라디아 6:16.

24. 바울은 이사야의 예언을 어떻게 적용시켰으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24 기원 60년경에, 사도 바울은 로마에 가택 연금되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유대인들의 중심이 되는 자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과의 모임을 마련하여 “하느님의 왕국에 관하여 철저히 증거”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소식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자, 바울은 이것이 이사야의 예언의 성취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사도 28:17-27; 이사야 6:9, 10) 그러므로 예수의 제자들도 이사야와 비슷한 임명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25. 현대의 하느님의 증인들은 무엇을 분별하였으며, 어떤 반응을 나타내고 있습니까?

25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여호와의 증인들도 여호와 하느님께서 자신의 성전에 계시다는 사실을 분별하고 있습니다. (말라기 3:1) 여호와의 증인들도 이사야처럼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십시오” 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악한 사물의 제도에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경고의 소식을 열심히 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지적하신 바와 같이, 눈과 귀를 열고 보고 들어 구원을 받는 사람은 비교적 소수에 불과합니다. (마태 7:13, 14) 마음을 기울여 잘 듣고 “고침을 받”는 사람들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이사야 6:8, 10.

[각주]

^ 23항 유대인의 반란에 대응하여, 케스티우스 갈루스 휘하의 로마 군대는 기원 66년에 예루살렘을 둘러싼 뒤 그 도시를 성전 벽까지 침공해 들어갔다. 그 후 그들이 퇴각하자, 예수의 제자들에게는 기원 70년에 로마 군대가 돌아오기 전에 페레아의 산간 지방으로 도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연구 질문]

[94면 삽화]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십시오.”

[97면 삽화]

‘도시들이 허물어져 폐허가 되어 주민이 없을 때까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