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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군왕에 대한 약속

평화의 군왕에 대한 약속

제10장

평화의 군왕에 대한 약속

이사야 8:19–9:7

1. 인류는 카인 시대 이후로 어떠한 일을 겪어 왔습니까?

약 6000년 전에 첫 인간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그 아기의 이름은 카인이었으며, 그 아기가 태어난 것은 매우 특별한 일이었습니다. 그 아기의 부모도, 천사들도, 심지어 창조주께서도 이전에 인간 아기를 본 적이 없습니다. 이 갓난아기는 정죄받은 인류에게 희망을 가져다 줄 수도 있었습니다. 이 아기가 성장하여 살인자가 되었을 때, 참으로 실망이 컸을 것입니다! (요한 첫째 3:12) 그때 이후로 인류는 수많은 살인을 목격해 왔습니다. 인간은 악을 행하기 쉬운 성향이 있기 때문에, 서로 평화를 누리지 못하며 하느님과도 평화를 누리지 못합니다.—창세 6:5; 이사야 48:22.

2, 3.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어떤 전망들이 열렸으며, 그러한 축복들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 카인이 태어난 후 4000년쯤 흐른 뒤에, 또 한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그 아기의 이름은 예수였으며, 이 아기가 태어난 것 역시 매우 특별한 일이었습니다. 이 아기는 처녀에게서 성령의 힘으로 태어났는데, 이러한 출생은 역사상 유일무이한 일이었습니다. 이 아기가 태어날 때 기쁨에 찬 수많은 천사들이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선의를 입은 사람들 가운데 평화.” (누가 2:13, 14) 예수께서는 살인자가 되시기는커녕, 오히려 사람들이 하느님과 평화를 누리며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요한 3:16; 고린도 첫째 15:55.

3 이사야는 예수께서 “평화의 군왕”이라고 불릴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이사야 9:6) 예수께서는 인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제공하셨으며, 그리하여 죄를 용서받는 일이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이사야 53:11)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근거로 하느님과 평화를 누릴 수 있으며 죄를 용서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축복은 저절로 받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골로새 1:21-23) 그러한 축복을 받기 원하는 사람들은 여호와 하느님께 순종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베드로 첫째 3:11; 비교 히브리 5:8, 9) 이사야 시대에, 이스라엘과 유다는 그와 정반대로 행동합니다.

악귀들에게로 감

4, 5. 이사야 시대의 상황은 어떠하며, 일부 사람들은 누구에게로 갑니까?

4 이사야와 동시대의 사람들은 불순종으로 인해 도덕적으로 개탄할 만한 상태에 처해 있으며, 실로 영적 어둠의 구덩이에 처해 있습니다. 심지어 하느님의 성전이 있는 남쪽의 유다 왕국에도 평화가 없습니다. 유다 백성은 불충실의 결과로 아시리아 군대로부터 침공 위협을 받고 있으며, 고난의 때가 그들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들은 도움을 받기 위해 누구에게로 갑니까? 유감스럽게도, 많은 사람들은 여호와가 아니라 사탄에게로 갑니다. 물론, 그들이 직접 사탄의 이름을 불러 그를 불러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고대의 사울 왕처럼 영매술에 빠져 죽은 자와 대화하려고 시도함으로, 자기들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으려고 합니다.—사무엘 첫째 28:1-20.

5 심지어 그러한 행위를 장려하기까지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사야는 그러한 배교 행위를 가리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지절거리고 작은 소리로 말하는 영매나 예언의 영을 가진 자들에게 물어 보아라’ 한다 해도, 어느 백성이든지 자기들의 하느님에게 물어 보아야 하지 않느냐? 산 사람을 위하여 죽은 자에게 물어 보아야 하느냐?” (이사야 8:19) 영매는 “지절거리고 작은 소리로 말하”며 사람들을 속일 수 있습니다. 죽은 자들의 영이 내는 것으로 여겨지는 그러한 음성 효과를 살아 있는 영매가 복화술을 사용하여 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따금 악귀들이 직접 개입하여 죽은 자인 것처럼 가장할 수도 있습니다. 사울이 엔돌의 마녀에게 물어 보러 갔을 때도 바로 그런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사무엘 첫째 28:8-19.

6. 영매술에 의존해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특히 비난받아 마땅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6 여호와께서 영매술 행위를 금지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이 모든 일이 유다에서 행해지고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 아래서는, 그것은 사형에 해당하는 죄입니다. (레위 19:31; 20:6, 27; 신명 18:9-12) 여호와의 특별한 소유인 백성이 그처럼 심각한 범법을 저지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호와의 법과 교훈에 등을 돌리고 “죄의 기만적인 힘에 의하여 완고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 3:13) “그들의 마음은 마치 기름 덩이처럼 무감각해졌”고, 그리하여 그들은 자기들의 하느님에게서 소외되었습니다.—시 119:70. *

7.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이사야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을 본받고 있으며, 그런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입니까?

7 그들은 아마 ‘아시리아 사람들의 공격이 임박해 있는데 여호와의 법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하고 추리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처해 있는 곤경에 대해 신속하면서도 쉬운 해결책을 원하고 있어서, 여호와께서 그분의 뜻을 행하실 때까지 기다리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도, 많은 사람들은 여호와의 법을 무시하고 영매를 찾아가거나, 천궁도를 살피거나, 그 밖의 형태의 신비주의에 의존하여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살아 있는 사람이 죽은 사람에게서 답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그 당시에나 오늘날에나 똑같이 우스운 일입니다. 회개하지 않고 그러한 일을 행하는 모든 사람의 미래는,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쟁이들”과 같이 될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장차 생명을 누릴 전망이 없습니다.—계시 21:8.

하느님의 “율법과 증명하는 것”

8. 인도를 받기 위해 오늘날 우리가 가야 하는 “율법”과 “증명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8 영매술을 금하는 여호와의 법은 그분의 다른 명령들과 더불어 유다에 숨겨져 있지 않습니다. 그 법은 기록으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여호와의 말씀은 완성된 기록의 형태로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서이며, 성서에는 하느님의 법과 규정을 한데 모은 것이 들어 있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어떻게 대하셨는지에 대한 기록도 들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자신의 백성을 어떻게 대하셨는지에 대한 이 성서 기록은 증명하는 것 즉 증언하는 것이 되어 우리에게 여호와의 본성과 특성들에 대해 가르쳐 줍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죽은 사람에게 가서 문의할 것이 아니라 어디로 가서 인도를 구해야 합니까? 이사야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율법과 증명하는 것에게!” (이사야 8:20ㄱ) 그렇습니다. 참된 계몽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기록된 말씀으로 가야 합니다.

9.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이 이따금 성서를 인용하는 것이 과연 그들에게 가치 있는 일이 될 수 있습니까?

9 영매술을 조금씩 해 보는 일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의 기록된 말씀을 존중한다고 공언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러한 주장은 허황되고 위선적인 것입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확실히 그들은 새벽빛이 없을 그런 말에 따라 계속 말할 것이다.” (이사야 8:20ㄴ) 이사야는 여기서 어떤 말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까? 아마 “율법과 증명하는 것에게!”라는 말을 가리키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일부 배교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언급할지 모릅니다. 오늘날 배교자들과 그 밖의 사람들이 성경을 인용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경을 인용한다고 해도, 여호와의 뜻을 행하고 더러운 행위를 피하는 일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그것만 가지고는 “새벽빛” 즉 여호와께서 주시는 계몽으로 인도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

‘빵이 없어서 겪는 기근이 아니다’

10. 유다 백성은 여호와를 배척한 일로 인해 어떤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까?

10 여호와께 불순종하면 결국 정신적 어둠에 처하게 됩니다. (에베소 4:17, 18) 영적인 면에서, 유다 백성은 눈이 멀었고 이해력도 없습니다. (고린도 첫째 2:14) 이사야는 그들의 상태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각 사람은 틀림없이 심한 압박을 받고 굶주린 채 이 땅을 지나다닐 것이다.” (이사야 8:21ㄱ) 이 나라의 불충실 때문에—특히 아하스 왕의 통치 중에—독립된 왕국으로서의 유다의 생존이 위협받고 있습니다. 이 나라는 적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아시리아 군대가 유다의 도시들을 차례로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 적은 생산적인 땅을 황폐시켜 식품이 희귀해지게 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심한 압박을 받고 굶주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형태의 굶주림 역시 이 땅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몇십 년 전에 아모스는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보라! 날이 오고 있다.’ 주권자인 주 여호와의 말이다. ‘내가 그 땅에 기근을 보내리니, 빵이 없어서 겪는 기근도 아니며, 물이 없어서 겪는 목마름도 아니고,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근이다.’” (아모스 8:11) 유다는 지금 바로 그러한 영적 기근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11. 유다는 받는 징계로부터 교훈을 얻을 것입니까?

11 유다는 교훈을 얻고 여호와께로 돌아올 것입니까? 그 백성은 영매술과 우상 숭배에서 돌아서서 “율법과 증명하는 것”으로 돌아올 것입니까?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반응을 다음과 같이 예견하십니다. “그는 굶주리고 스스로 분개하게 되었기 때문에, 자기 왕과 자기 하느님에게 악담하고 틀림없이 위를 응시할 것이다.” (이사야 8:21ㄴ)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인간 왕이 자기들을 이러한 상황으로 인도했다고 해서 그 왕을 비난할 것입니다. 심지어 자기들에게 닥친 재난 때문에 어리석게도 여호와를 비난할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비교 예레미야 44:15-18)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은 이와 비슷한 반응을 나타내어, 인간의 악함으로 인해 초래된 비극적인 일들에 대해 하느님을 비난합니다.

12. (ㄱ) 하느님에게서 돌아섰기 때문에 유다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ㄴ) 어떤 중요한 질문들이 제기됩니까?

12 하느님에 대해 악담을 한다고 해서 유다의 주민들에게 평화가 올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예언합니다. “땅을 바라보리니, 보라! 고난과 어둠, 어두컴컴함, 어려운 때와 캄캄함이 있고, 밝은 빛은 없을 것이다.” (이사야 8:22) 그들은 하느님을 비난하려고 하늘을 향해 눈을 치켜들었다가 이제 다시 땅을 바라보지만 절망적인 전망만 보일 뿐입니다. 하느님에게서 돌아선 것이 재난을 초래한 것입니다. (잠언 19:3) 그러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창세 22:15-18; 28:14, 15) 여호와께서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으실 것입니까? 아시리아 군대나 다른 어떤 군대가 유다와 다윗에게 약속된 왕조를 멸망시킬 것입니까? (창세 49:8-10; 사무엘 둘째 7:11-16)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둠 속에 처해 있도록 영원히 정죄받을 것입니까?

‘멸시당한’ 땅

13. “이방 사람들의 갈릴리”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멸시당하”게 됩니까?

13 이사야는 이제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닥치는 최악의 격변이 될 만한 사건 중 하나를 다음과 같이 언급합니다. “이 땅이 압박을 당하던 때처럼 어두컴컴함이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전에는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당하였지만 후에는 이 땅—요르단 지방의 바닷가의 길, 이방 사람들의 갈릴리가 존중히 여겨졌습니다.” (이사야 9:1) 갈릴리는 북쪽 이스라엘 왕국에 속한 지역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에 의하면, 그 지역에는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포함되며, “바닷가의 길” 즉 갈릴리 바다를 끼고 돌아 지중해로 인도하는 고대의 길도 포함됩니다. 이사야 시대에는 그 지역을 “이방 사람들의 갈릴리”라고 부릅니다. 아마 그곳에 있는 많은 도시들에 비이스라엘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 이 땅이 어떻게 “멸시당하”게 됩니까? 이교도들인 아시리아 사람들이 그 땅을 정복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을 유배시킨 다음 전 지역에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닌 이교도들을 정착시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엄연히 한 국가였던 열 지파 북쪽 왕국은 역사에서 사라지게 됩니다!—열왕 둘째 17:5, 6, 18, 23, 24.

14. 어떤 의미에서, 유다의 “어두컴컴함”은 열 지파 왕국의 어두컴컴함만큼 심하지 않을 것입니까?

14 유다도 아시리아 군대로부터 압력을 받고 있습니다. 유다도 스불론과 납달리로 대표된 열 지파 왕국처럼 영구적인 “어두컴컴함” 속으로 잠기게 될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후에” 여호와께서는 남쪽 유다 왕국에 속한 지역과 심지어 이전에 북쪽 왕국이 통치했던 땅에까지도 축복을 가져다 주실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실 것입니까?

15, 16. (ㄱ) “스불론납달리 지역”의 상황이 바뀌게 되는 “후에”란 언제입니까? (ㄴ) 멸시당하던 땅이 어떻게 존중히 여겨지게 됩니까?

15 사도 마태는 예수의 지상 봉사에 대한 자신의 영감받은 기록 가운데서 이 질문에 대답해 줍니다. 예수의 봉사 초기에 대해 묘사하면서 마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나사렛을 떠나신 후에 스불론납달리 지역 바닷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거주하셨다. 그것은 예언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 성취되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말씀하셨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 요르단 건너편, 바닷길을 따라 있는 이방 사람들의 갈릴리여!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죽음의 그늘진 지방에 앉아 있는 사람들, 그들 위에 빛이 떠올랐다.’”—마태 4:13-16.

16 그렇습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후에”란 그리스도께서 지상 봉사를 수행하시던 때입니다. 예수께서는 지상 생애 대부분을 갈릴리에서 보내셨습니다. 그분이 봉사의 직무를 시작하시고 “하늘 왕국이 다가왔습니다”라고 선포하기 시작하신 곳도 바로 갈릴리 지역이었습니다. (마태 4:17) 그분이 유명한 산상 수훈을 하시고, 사도들을 선택하시고, 첫 기적을 행하시고, 부활되신 후에 약 500명의 추종자들에게 나타나신 곳도 갈릴리였습니다. (마태 5:1-7:27; 28:16-20; 마가 3:13, 14; 요한 2:8-11; 고린도 첫째 15:6) 예수께서는 이런 식으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을 존중히 여기심으로 이사야의 예언을 성취시키셨습니다. 물론, 예수께서는 자신의 봉사의 직무를 갈릴리 사람들에게만 한정시키지는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땅 전체에 좋은 소식을 전파하심으로 유다를 포함하여 이스라엘 나라 전체가 ‘존중히 여겨지게’ 하셨습니다.

“큰 빛”

17. 어떻게 갈릴리에서 “큰 빛”이 비칩니까?

17 그러면 마태가 언급한 갈릴리의 “큰 빛”이란 무엇입니까? 이것 역시 이사야의 예언에서 인용한 표현입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썼습니다. “어둠 속에서 걷고 있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습니다. 짙은 그늘의 땅에서 살던 사람들, 그들 위에 빛이 비쳤습니다.” (이사야 9:2) 기원 1세기가 될 때까지, 진리의 빛은 이교의 거짓 교리에 가려져 있었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자기들의 종교적 전통을 고수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무효케” 만듦으로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들었습니다. (마태 15:6) 겸손한 사람들은 “눈먼 인도자들”을 따르며 압제를 받고 어리둥절해하고 있었습니다. (마태 23:2-4, 16) 메시아인 예수께서 나타나시자 많은 겸손한 사람들의 눈은 놀라운 방법으로 열렸습니다. (요한 1:9, 12) 지상에 계시는 동안 예수께서 하신 일과 그분의 희생으로 인한 축복을 이사야의 예언에서는 적절하게도 “큰 빛”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요한 8:12.

18, 19. 그 빛에 좋은 반응을 나타낸 사람들에게는 크게 기뻐할 만한 어떤 이유가 있었습니까?

18 그 빛에 좋은 반응을 나타낸 사람들에게는 기뻐할 만한 이유가 많이 있었습니다. 이사야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이 이 나라의 인구를 많게 하셨습니다. 이 나라를 위하여 당신이 기쁨을 크게 하셨습니다. 수확할 때에 기뻐하듯이, 전리품을 나눌 때에 기뻐하는 사람들처럼, 그들이 당신 앞에서 기뻐하였습니다.” (이사야 9:3) 예수와 그분의 추종자들의 전파 활동의 결과로, 정직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나아와 영과 진리로 여호와를 숭배하고 싶은 열망을 나타냈습니다. (요한 4:24) 4년도 채 안 되는 기간에,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습니다. 기원 33년 오순절 날에 3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남자의 수가 오천 명쯤 되었”습니다. (사도 2:41; 4:4) 제자들이 열성적으로 그 빛을 반사하자,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의 수가 계속 크게 늘어났으며, 제사장들의 큰 무리가 믿음에 순종하기 시작하였”습니다.—사도 6:7.

19 풍성한 수확을 거두고 기뻐하는 사람들처럼, 또는 군사적으로 큰 승리를 거둔 후에 값진 전리품을 나누어 가지며 기뻐하는 사람들처럼, 예수의 추종자들은 그러한 증가에 대해 기뻐하였습니다. (사도 2:46, 47) 때가 되자, 여호와께서는 그 빛이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도 비치게 하셨습니다. (사도 14:27) 따라서 모든 인종의 사람들은 자기들에게도 여호와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에 대해 기뻐하였습니다.—사도 13:48.

“미디안의 날에 하신 것과 같이”

20. (ㄱ) 미디안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이스라엘의 적임을 드러냈으며,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가하는 위협을 어떻게 끝내 버리셨습니까? (ㄴ) 미래의 “미디안의 날”에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백성의 적들이 가하는 위협을 어떻게 끝내 버리실 것입니까?

20 이사야가 다음에 한 말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메시아가 한 활동의 결과는 영구적입니다. “그들 짐의 멍에와 그들의 어깨 위의 몽둥이, 그들을 부리는 자의 막대기를, 당신이 미디안의 날에 하신 것과 같이 산산이 부수셨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9:4) 이사야 시대가 되기 여러 세기 전에, 미디안 사람들은 모압 사람들과 공모하여 이스라엘을 꾀어 죄에 빠지게 하였습니다. (민수 25:1-9, 14-18; 31:15, 16) 그 후에도, 미디안 사람들은 7년 동안 이스라엘 마을들과 농장들을 습격하여 강탈함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습니다. (재판관 6:1-6) 하지만 그때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종 기드온을 사용하셔서 미디안 군대가 참패를 당하게 하셨습니다. 그 “미디안의 날”이 있은 후로, 여호와의 백성이 미디안 사람들의 손에 또다시 고통을 당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재판관 6:7-16; 8:28) 가까운 장래에, 더 큰 기드온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여호와의 백성의 현대 적들에게 치명타를 입히실 것입니다. (계시 17:14; 19:11-21) 그렇게 되면, “미디안의 날에 하신 것과 같이”, 인간의 용감한 행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여호와의 능력에 의해서 완전하고 지속적인 승리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재판관 7:2-22) 하느님의 백성이 압제의 멍에 아래서 고통을 당하는 일이 다시는 없을 것입니다!

21. 이사야의 예언은 전쟁이 장차 어떻게 될 것임을 알려 줍니까?

21 하느님의 능력을 전시하는 것이 전쟁을 미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활되신 예수께서는 평화의 군왕으로서, 자신의 적들을 섬멸하심으로써 영원한 평화를 가져오실 것입니다. 이사야는 이제 군사 용품들이 완전히 불에 소멸되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바닥을 울리며 저벅거리는 자의 모든 장화와 피 속에 뒹군 망토가 불의 먹이처럼 태워지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9:5) 행진하는 군인들의 장화가 저벅거리며 지나갈 때의 바닥의 울림이 다시는 느껴지지 않을 것입니다. 전투에 단련된 전사들의 피로 얼룩진 제복이 다시는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전쟁이 더는 없을 것입니다!—시 46:9.

“놀라운 조언자”

22. 이사야서에 보면 예수에게 어떠한 복합적인 예언적 이름이 주어집니까?

22 메시아가 되기 위해 태어난 분은 기적에 의해 출생하였을 때 예수라는 이름을 받았는데, 그 의미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다”입니다. 하지만 그분에게는 다른 이름들도 있는데, 그분의 중요한 역할과 높여진 지위를 대충 짐작하게 해 주는 예언적 이름들입니다. 그러한 이름 중 하나는 임마누엘인데, 그 의미는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입니다. (이사야 7:14, 신세계역 참조주 성서 각주 참조) 이사야는 이제 또 다른 예언적 이름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한 아이가 우리에게 태어났고, 한 아들이 우리에게 주어졌는데, 그의 어깨 위에 군왕의 통치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름은 ‘놀라운 조언자’, ‘위력 있는 하느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군왕’이라고 불릴 것입니다.” (이사야 9:6) 이 복합적인 예언적 이름에 담긴 풍부한 의미를 생각해 보십시오.

23, 24. (ㄱ) 예수께서는 어떤 면에서 “놀라운 조언자”이십니까? (ㄴ) 오늘날 그리스도인 조언자들은 어떻게 예수의 모범을 본받을 수 있습니까?

23 조언자란 조언을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에 계실 때 놀라운 조언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성서에서 우리는 이러한 말을 보게 됩니다. “무리는 그분의 가르치는 방법에 크게 놀랐다.” (마태 7:28) 그분은 감정 이입을 사용하시는 지혜로운 조언자로서, 인간의 본성에 대한 비범한 이해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분의 조언은 견책이나 호된 책망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교훈이나 사랑에 찬 충고로 이루어져 있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예수의 조언은 언제나 지혜롭고, 완벽하고, 절대 오류가 없기 때문에 놀라운 것입니다. 예수의 조언을 따르면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됩니다.—요한 6:68.

24 예수의 조언은 단순히 그분의 명석한 정신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가르치는 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나를 보내신 분에게 속한 것입니다.” (요한 7:16) 솔로몬의 경우처럼, 예수의 지혜의 근원도 여호와 하느님이십니다. (열왕 첫째 3:7-14; 마태 12:42) 그리스도인 회중에서 가르치는 사람들이나 조언하는 사람들은 예수의 모범을 통해, 언제나 하느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교훈을 베풀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잠언 21:30.

“위력 있는 하느님”이자 “영원한 아버지”

25. “위력 있는 하느님”이라는 이름은 하늘에 계신 예수에 대해 어떤 점을 알려 줍니까?

25 예수께서는 또한 “위력 있는 하느님”이자 “영원한 아버지”이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분이 “하느님 우리 아버지”이신 여호와의 권위와 지위를 찬탈하고 계시다는 뜻이 아닙니다. (고린도 둘째 1:2) “그분은[예수께서는] ·⁠·⁠· 장악하려고 곧 하느님과 동등하게 되려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빌립보 2:6) 그분은 전능하신 하느님이 아니라 위력 있는 하느님이라고 불립니다. 예수께서는 자기가 전능하신 하느님이라고 생각하신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자신의 아버지가 “오직 한 분의 참 하느님” 즉 숭배받으셔야 할 오직 한 분의 하느님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 17:3; 계시 4:11) 성경에 나오는 “신”이라는 말은 “위력 있는 자” 혹은 “강력한 자”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탈출 12:12; 시 8:5; 고린도 둘째 4:4) 예수께서는 이 땅에 오시기 전에 “하느님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신”이었습니다. 그분은 부활되신 후에 하늘에서 훨씬 더 높은 지위를 다시 갖게 되셨습니다. (요한 1:1; 빌립보 2:6-11) 또한, “신”이라는 명칭에는 부가적인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재판관들은 “신”이라고 불렸는데, 예수께서도 친히 한 번 그렇게 부르신 적이 있습니다. (시 82:6; 요한 10:35) 예수께서는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는”, 여호와에 의해 임명받은 재판관이십니다. (디모데 둘째 4:1; 요한 5:30) 확실히, 그분에게 위력 있는 하느님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적절한 일입니다.

26. 예수를 “영원한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6 “영원한 아버지”라는 칭호는 사람들에게 지상에서의 영원한 생명이라는 전망을 주실 수 있는 메시아 왕의 권능과 권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요한 11:25, 26) 우리의 첫 조상 아담이 물려준 유산은 죽음이었습니다.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께서는 “생명을 주는 영이 되었습니다.” (고린도 첫째 15:22, 45; 로마 5:12, 18) 영원한 아버지이신 예수께서 앞으로 영원히 사시는 것처럼, 순종하는 인류도 예수의 아버지 직분이 가져다 줄 유익을 영원히 즐기게 될 것입니다.—로마 6:9.

“평화의 군왕”

27, 28. “평화의 군왕”의 신민들에게는 현재와 미래에 어떠한 놀라운 유익이 있습니까?

27 인간에게는 영원한 생명 외에도, 하느님과의 평화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평화가 필요합니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평화의 군왕”의 통치에 복종하는 사람들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가지치는 낫을 만들”어 왔습니다. (이사야 2:2-4) 그들은 정치적·지역적·인종적·경제적 차이를 이유로 증오심을 품지 않습니다. 그들은 한 분이신 참 하느님 여호와에 대한 숭배로 연합되어 있으며, 회중 안팎에서 자기들의 이웃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합니다.—갈라디아 6:10; 에베소 4:2, 3; 디모데 둘째 2:24.

28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면,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에 평화를 세우실 것인데, 그 평화는 전세계에 편만한 것이 될 것이며, 굳게 세워진 것으로서 영구적인 평화가 될 것입니다. (사도 1:7) “다윗의 왕좌와 그의 왕국 위에서, 군왕의 통치의 풍부함과 평화가 끝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부터 한정 없는 때까지 공의와 의로 그것을 굳게 세우고 지탱시키려는 것입니다.” (이사야 9:7ㄱ) 평화의 군왕으로서 권위를 행사하실 때에도, 예수께서는 포학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분의 신민들은 자유 의지를 박탈당하지 않을 것이며 강제로 복종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분은 모든 일을 “공의와 의로” 성취하실 것입니다. 참으로 새 힘을 주는 변화입니다!

29. 영원한 평화라는 축복을 누리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9 예수의 예언적 이름이 내포하고 있는 놀라운 의미들을 생각해 볼 때, 이사야가 자신의 예언의 이 부분을 끝맺는 말은 참으로 가슴 설레게 합니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바로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룰 것입니다.” (이사야 9:7ㄴ) 그렇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열심을 가지고 행동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어떤 일이든지 마지못해서 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약속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온전히 성취시키실 것임을 우리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평화를 누리기를 갈망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여호와를 온 마음을 다해서 섬겨야 합니다. 여호와 하느님과 평화의 군왕 예수처럼, 하느님의 종 모두가 “훌륭한 일에 열심인”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디도 2:14.

[각주]

^ 6항 많은 사람들은 시편 119편이 히스기야가 왕이 되기 전에 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을 때 쓴 것일 가능성이 있다.

^ 9항 이사야 8:20에 나오는 “그런 말”이라는 표현은, 이사야 8:19에 인용된 영매술과 관련된 말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 경우라면, 영매술을 장려하는 자들이 유다에서 계속 다른 사람들을 부추겨 영매에게 물어 보게 할 것이며 그리하여 여호와로부터 계몽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이사야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 13항 일부 사람들이 제시하는 의견에 따르면, 솔로몬 왕이 티레 왕 히람에게 준 갈릴리의 20개 도시에 아마 비이스라엘 사람들이 거주했을 것이다.—열왕 첫째 9:10-13.

[연구 질문]

[122면 지도와 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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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

게네사렛 평야

갈릴리 바다

마가단

디베랴

요르단 강

가다라

가다라

[119면 삽화]

카인과 예수의 출생은 둘 다 매우 특별한 일이었다. 예수의 경우에만 행복한 결과가 있었다

[121면 삽화]

빵이 없어서 겪는 굶주림이나 물이 없어서 겪는 목마름보다 훨씬 더 심한 기근이 있을 것이다

[127면 삽화]

예수께서는 그 땅의 빛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