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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기뻐 외쳐라”!

“함께 기뻐 외쳐라”!

제13장

“함께 기뻐 외쳐라”!

이사야 52:1-12

1. 이사야 52장에 나오는 예언의 말씀이 기쁨의 근원이 되는 이유는 무엇이며, 그 예언의 말씀은 어떻게 두 번 성취됩니까?

해방! 포로가 되어 있는 백성에게 이보다 더 기쁜 전망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사야서의 주된 주제가 해방과 회복이므로, 성서 가운데서 시편을 제외하고는 다른 어느 책보다도 바로 이 책에 기쁨의 표현이 더 많이 들어 있다는 것은 하나도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이사야 52장은 특히, 하느님의 백성이 기뻐해야 할 이유를 알려 줍니다. 여기에 나오는 예언의 말씀은 기원전 537년에 예루살렘에 성취됩니다. 그리고 그 예언의 말씀은 “위에 있는 예루살렘”과 관련하여 더 크게 성취되는데,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영적 피조물로 이루어진 여호와의 하늘 조직을 가리키는 말로서 때때로 어머니 혹은 아내로 묘사됩니다.—갈라디아 4:26; 계시 12:1.

‘시온아, 네 힘을 입어라!’

2. 시온은 언제 깨어나며, 어떻게 그런 일이 있게 됩니까?

2 여호와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그분이 사랑하시는 도시 시온에 다음과 같이 외치십니다. “시온아, 깨어나거라, 깨어나거라, 네 힘을 입어라!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아, 네 아름다운 옷을 입어라! 할례받지 않은 자와 더러운 자가 너에게 들어오는 일이 다시는 없을 것이다. 예루살렘아, 먼지를 떨어 버리고 일어나서 자리에 앉아라. 포로된 딸 시온아, 네 목의 줄을 스스로 풀어 버려라.” (이사야 52:1, 2) 예루살렘 주민들이 여호와의 분노를 일으킨 까닭에, 예루살렘은 70년 동안 황폐되어 있었습니다. (열왕 둘째 24:4; 역대 둘째 36:15-21; 예레미야 25:8-11; 다니엘 9:2) 예루살렘은 이제 오랜 기간의 무활동 상태에서 깨어나 자유라는 아름다운 옷을 입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키루스의 마음을 감동시켜 “포로된 딸 시온”을 자유롭게 해 주셔서, 예루살렘의 이전 주민들과 그들의 자손이 바빌론을 떠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참 숭배를 회복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할례받지 않은 자와 더러운 자는 예루살렘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어야 합니다.—에스라 1:1-4.

3.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로 이루어진 회중을 “딸 시온”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이며, 그들은 어떤 면으로 해방되었습니까?

3 이사야가 한 이 말은 그리스도인 회중에도 성취됩니다.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로 이루어진 회중은 현대의 “딸 시온”으로 묘사될 수 있습니다.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 그들의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 이교의 가르침과 배교적인 교리들로부터 자유롭게 된 기름부음받은 자들은 여호와 앞에서 깨끗한 신분을 유지해야 하며, 물론 육체에 할례를 받음으로써가 아니라 마음에 할례를 받음으로써 그렇게 합니다. (예레미야 31:33; 로마 2:25-29) 그렇게 하는 데는 여호와 앞에서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깨끗함을 유지하는 것이 포함됩니다.—고린도 첫째 7:19; 에베소 2:3.

4.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한 번도 여호와께 불순종한 적이 없지만, 지상에 있는 그의 대표자들이 한 어떤 경험이 고대의 예루살렘 주민들이 한 경험과 매우 유사합니까?

4 물론,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한 번도 여호와께 불순종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지상에 있는 그의 대표자들—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 중립의 진정한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여 부지중에 여호와의 법을 어기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은혜를 잃은 이들은 거짓 종교 세계 제국인 “큰 바빌론”의 영적 포로가 되었습니다. (계시 17:5) 예속되어 있는 그들의 상태는 1918년 6월에 절정에 달하여, 워치 타워 협회의 요원 여덟 명이 모반죄를 포함한 거짓 혐의로 투옥되었습니다. 그때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조직적인 활동은 거의 중단되다시피 하였습니다. 하지만 1919년에 영적으로 깨어나라는 힘찬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은 큰 바빌론의 도덕적·영적 더러움에서 좀 더 온전히 분리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먼지투성이와 같은 포로 상태에서 일어났으며,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영적 더러움이 허용되지 않는 “거룩한 도시”의 영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5. 여호와께서 자신의 백성을 사로잡고 있는 자들에게 보상금을 지불하지 않고도 자신의 백성을 도로 사실 수 있는 온전한 권리를 가지고 계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5 기원전 537년과 기원 1919년, 두 번의 경우 다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해방시키실 수 있는 온전한 권리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거저 팔렸으니, 돈 없이 도로 사들여질 것이다.’” (이사야 52:3) 고대 바빌론이나 큰 바빌론 모두 하느님의 계약 백성을 노예로 차지할 때 아무런 대가도 지불하지 않았습니다. 돈과 관련된 거래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여전히 자신의 백성의 법적 소유자이셨습니다. 그분이 누군가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하셔야 했습니까? 물론, 그렇지 않았습니다. 두 번의 경우 다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숭배자들을 사로잡고 있는 자들에게 아무런 보상금을 지불하지 않고도 정당하게 자신의 숭배자들을 도로 사실 수 있었습니다.—이사야 45:13.

6. 여호와의 적들은 역사가 주는 어떤 교훈에 유의하지 않았습니까?

6 여호와의 적들은 역사로부터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보게 됩니다. “주권자인 주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백성이 처음에는 이집트로 내려가서 거기에 외국인으로 거주하였는데, 아시리아가 까닭 없이 그들을 압제하였다.’” (이사야 52:4) 이집트의 파라오는 자기 땅에 손님으로 초대되어 거하게 된 이스라엘 사람들을 노예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파라오와 그의 군대를 홍해에 빠져 죽게 하셨습니다. (탈출 1:11-14; 14:27, 28) 아시리아의 왕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위협하였을 때, 여호와의 천사는 그 왕의 군인 18만 5000명을 쳐죽였습니다. (이사야 37:33-37) 그와 마찬가지로, 고대 바빌론이나 큰 바빌론 모두 하느님의 백성을 압제한 결과 초래되는 일을 피할 수 없습니다.

“내 백성은 나의 이름을 알게 될 것이다”

7. 여호와의 백성이 포로가 되어 있는 상태는 여호와의 이름에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7 여호와의 백성이 포로가 되어 있는 상태는, 예언이 다음과 같이 알려 주는 바와 같이, 여호와의 이름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니 이제, 내가 여기서 무슨 관심을 갖겠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다. ‘내 백성이 이유도 없이 붙잡혀 왔다. 그들을 다스리는 자들이 계속 부르짖었다.’ 여호와의 말씀이다. ‘항상 온종일 내 이름이 업신여겨졌다. 그러므로, 바로 그러한 이유로 그 날에 내 백성은 나의 이름을 알게 될 것이다. 말하는 이가 나이기 때문이다. 보라! 바로 나다.’” (이사야 52:5, 6) 여호와께서 이 상황에서 무슨 관심을 가지시겠습니까? 이스라엘이 바빌론에서 노예 생활을 하고 있는데 그분의 관심사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빌론이 여호와의 백성을 포로로 잡아갔고 그들에 대한 승리에 도취하여 부르짖었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행동하셔야 합니다. 그처럼 뽐내는 태도로 인해 바빌론은 여호와의 이름을 업신여기게 되었습니다. (에스겔 36:20, 21) 바빌론은 예루살렘의 황폐된 상태가 여호와께서 자신의 백성을 불쾌하게 여기셨기 때문임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바빌론은 유대인들이 노예가 된 것을 그들의 하느님이 약하다는 증거로 여겼습니다. 바빌로니아의 공동 통치자인 벨사살은 심지어 바빌로니아의 신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벌인 잔치 도중에, 여호와의 성전에서 가져온 그릇들을 사용하여 여호와를 조롱하기까지 하였습니다.—다니엘 5:1-4.

8. 사도들이 사망한 이후로 여호와의 이름은 어떤 대우를 받아 왔습니까?

8 이 모든 일은 “위에 있는 예루살렘”에게 어떻게 적용됩니까?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 사이에 배교가 뿌리를 내린 이후로, “하느님의 이름이 [그들] 때문에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모독을 당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로마 2:24; 사도 20:29, 30) 그 점에 대해 말하자면, 유대인들은 미신으로 인해 마침내 하느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기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도들이 사망하고 얼마 있지 않아, 배교한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의 뒤를 따라 하느님의 고유한 이름을 사용하기를 중단하였습니다. 배교로 인해 결국 큰 바빌론의 주요 부분인 그리스도교국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 둘째 2:3, 7; 계시 17:5) 그리스도교국의 억제 불가능한 부도덕과 뻔뻔스러운 유혈죄는 여호와의 이름에 불명예를 가져왔습니다.—베드로 둘째 2:1, 2.

9, 10. 현대의 하느님의 계약 백성은 여호와의 표준과 그분의 이름을 어떻게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까?

9 더 큰 키루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1919년에 하느님의 계약 백성을 큰 바빌론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에서 자유롭게 해 주셨을 때, 그들은 여호와의 요구 조건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 이전의 이교 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는 그리스도교국의 많은 가르침, 이를테면 삼위일체, 영혼불멸, 불타는 지옥에서의 영원한 고초 등의 가르침으로부터 이미 자신을 깨끗하게 하였습니다. 이제 그들은 자신에게서 바빌론의 영향의 흔적을 완전히 제거하는 일에 착수하였습니다. 또한 이 세상의 파벌 싸움에서 엄정 중립을 고수하는 일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일부 증인들이 저질렀을지 모르는 유혈죄로부터도 자신을 온전히 정화하기를 원하였습니다.

10 하느님의 현대 종들은 또한 여호와의 이름의 중요성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1931년에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이름을 채택함으로, 여호와와 그분의 이름을 지지한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선언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증인은 1950년 이래 「신세계역 성경」을 발행함으로 하느님의 이름을 성서에서 원래의 자리에 회복시켰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소중히 여기게 되었고, 그 이름을 땅 끝까지 알리고 있습니다.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 이”

11. 기원전 537년에 있었던 일과 관련하여 “너의 하느님께서 왕이 되셨다”라는 외침이 적절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11 이제 우리의 주의는, 여전히 황폐된 상태로 있을 때의 시온으로 다시 이끌려집니다. 한 사자가 좋은 소식을 가지고 가까이 옵니다.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 이, 평화를 널리 알리는 이, 좋은 일에 관한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 이, 구원을 널리 알리는 이, 시온에게 ‘너의 하느님께서 왕이 되셨다’ 하고 말하는 이의 산을 넘는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사야 52:7) 기원전 537년에, 어떻게 시온의 하느님께서 왕이 되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여호와께서는 항상 왕이 아니셨습니까? 사실, 그분은 “영원하신 왕”입니다! (계시 15:3) 하지만 바빌론의 무너짐, 그리고 예루살렘에 성전을 재건하고 그곳에 순결한 숭배를 회복하라는 왕의 포고령은 여호와의 왕권을 새롭게 표현하는 것이 되므로, “너의 하느님께서 왕이 되셨다”라는 외침은 적절한 것입니다.—시 97:1.

12.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 일에서 누가 솔선수범하였으며, 어떻게 그렇게 하였습니까?

12 이사야 시대에는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 이”로 밝혀진 개인이나 집단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좋은 소식을 전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여호와의 가장 위대한 평화의 사자이십니다. 그분은 지상에 계실 때, 병과 죽음을 포함하여 아담으로부터 유전받은 죄의 모든 영향으로부터 해방되는 일이 있을 것이라는 좋은 소식을 전파하셨습니다. (마태 9:35) 예수께서는 모든 기회를 포착하여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왕국에 관하여 가르쳐 주심으로 더 좋은 일에 관한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일에서 열심을 나타내는 모범을 세우셨습니다. (마태 5:1, 2; 마가 6:34; 누가 19:1-10; 요한 4:5-26) 그리고 그분의 제자들은 그 모범을 따랐습니다.

13. (ㄱ) 사도 바울은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 이의 산을 넘는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표현의 의미를 어떻게 확대시킵니까? (ㄴ) 사자들의 발이 ‘아름답다’고 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3 사도 바울은 로마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사야 52:7을 인용하여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그는 “전파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듣겠습니까?”라는 질문을 포함하여 생각을 자극하는 일련의 질문을 제기합니다. 그런 다음 이렇게 말합니다. “‘좋은 일에 관한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사람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고 기록된 바와 같습니다.” (로마 10:14, 15) 이와 같이 바울은 이사야서의 원문에 나오는 “이”라는 단수형 표현 대신 “사람들”이라는 복수형 표현을 사용함으로 이사야 52:7을 확대 적용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평화의 좋은 소식의 사자들입니다. 그들의 발은 어떤 면에서 ‘아름답’습니까? 이사야는 마치 전령이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유다의 산지에서 예루살렘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멀리서는 도저히 사자의 발을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여기서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사자 자신이며, 발은 바로 그 사자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1세기의 온유한 자들에게는 예수와 그분의 제자들이 아름답게 보였던 것처럼, 생명을 구원하는 좋은 소식의 내용에 유의하는 겸손한 사람들에게는 현대의 증인들이 반갑기 그지없는 존재들입니다.

14. 여호와께서는 현대에 어떻게 왕이 되셨으며, 이 일은 언제부터 인류에게 선포되었습니까?

14 현대에는 언제부터 “너의 하느님께서 왕이 되셨다”라는 외침이 들렸습니까? 1919년부터입니다. 그해에 미국 오하이오 주 시더포인트에서 열린 대회에서 당시 워치 타워 협회 회장인 J. F. 러더퍼드는 “동역자들에게 전함”이라는 제목의 연설로 청중을 감동시켰습니다. 이사야 52:7과 계시록 15:2에 근거한 그 연설은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 활동을 시작하라고 격려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아름다운 발’이 “산”에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이, 후에는 그들의 동료인 “다른 양들”이 열심히 나가서 여호와께서 왕이 되셨다는 좋은 소식을 전파하였습니다. (요한 10:16) 여호와께서 어떻게 왕이 되셨습니까? 그분은 1914년에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새로 설립된 하늘 왕국의 왕으로 즉위시키심으로 자신의 왕권을 새롭게 표현하셨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1919년에 “하느님의 이스라엘”을 큰 바빌론에서 해방시키심으로 자신의 왕권을 다시 한 번 표현하셨습니다.—갈라디아 6:16; 시 47:8; 계시 11:15, 17; 19:6.

“너의 파수꾼들이 목소리를 높인다”

15. 기원전 537년에 목소리를 높이는 “파수꾼들”은 누구입니까?

15 “너의 하느님께서 왕이 되셨다”라는 외침은 반응을 불러일으킵니까? 그렇습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잘 들어라! 너의 파수꾼들이 목소리를 높인다. 일제히 그들이 기뻐 외치고 있다. 여호와께서 시온을 다시 모으실 때에 그들이 눈을 맞대고 볼 것이기 때문이다.” (이사야 52:8) 기원전 537년에, 예루살렘에 문자적으로 파수꾼이 서서 처음으로 돌아오는 유배자들을 맞이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 도시는 70년간 황폐되어 있었습니다. (예레미야 25:11, 12) 따라서 목소리를 높이는 “파수꾼들”은, 시온의 회복에 관한 소식을 먼저 듣고 그 소식을 시온의 나머지 자녀들에게 전할 책임을 갖게 되는 이스라엘 사람들임에 틀림없습니다. 기원전 539년에 여호와께서 바빌론을 키루스의 손에 넘기시는 것을 본 그 파수꾼들은 여호와께서 자신의 백성을 해방시키실 것이라는 생각에 일말의 의문도 갖지 않게 됩니다. 이 파수꾼들은 자기들의 외침에 호응하는 사람들과 함께 일제히 기뻐 외치며 다른 사람들에게 그 좋은 소식을 들려줍니다.

16. 파수꾼들은 누구와 “눈을 맞대고” 보고 있으며, 어떤 면에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16 깨어 있는 파수꾼들은 여호와와 친밀한 개인적 관계를 맺어, 비유적으로 말해서 그분과 “눈을 맞대고” 봅니다. 다시 말해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봅니다. (민수 14:14) 그들이 여호와와 그리고 서로 간에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연합을 돋보이게 해 주며, 그들이 전하는 소식이 지니고 있는 기쁨을 주는 특성도 돋보이게 해 줍니다.—고린도 첫째 1:10.

17, 18. (ㄱ) 현대의 파수꾼 반열은 어떻게 목소리를 높여 왔습니까? (ㄴ) 파수꾼 반열은 어떤 면에서 일제히 외쳐 왔습니까?

17 현대의 성취에서, 파수꾼 반열인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은 이미 하느님의 보이는 조직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외부 사람들에게도 목소리를 높입니다. (마태 24:45-47) 1919년에는 기름부음받은 자들의 남은 자들을 모아들이라는 외침이 있었고, 그 외침은 1922년에 오하이오 주 시더포인트 대회에서 “왕과 그의 왕국을 광고하고, 광고하고, 광고하십시오”라는 호소로 한층 더 강화되었습니다. 1935년 이후로는, 양 같은 자들의 큰 무리를 모아들이는 일에 주의가 기울여져 왔습니다. (계시 7:9, 10) 최근에 와서는 여호와의 왕권을 선포하는 일이 한층 더 강화되었습니다. 어떻게 그러하였습니까? 2000년에는 약 600만 명의 사람들이 230여 개 나라와 지역에서 여호와의 왕권에 관하여 말하는 일에 참여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파수꾼 반열이 가장 중요시하는 도구인 「파수대」지는 그 기쁜 소식을 130여 개 언어로 울려 퍼지게 하고 있습니다.

18 이 연합시키는 활동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겸손과 형제 사랑이 필요합니다. 외침이 효과적으로 울려 퍼지기 위해서는,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과 그분의 대속 마련과 그분의 지혜와 사랑과 왕국을 부각시켜 동일한 소식을 전파해야 합니다. 전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여 일함에 따라, 여호와와의 개인적인 유대가 강화되어 그 기쁜 소식을 일제히 외치게 됩니다.

19. (ㄱ)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이 어떻게 즐거워하게 됩니까? (ㄴ) 여호와께서는 어떤 면에서 “자신의 거룩한 팔을 드러내셨”습니까?

19 하느님의 백성이 기뻐 외침에 따라 그들이 거하는 곳마저도 즐거워하는 것같이 보입니다. 예언은 이렇게 계속됩니다.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아, 즐거워하며 함께 기뻐 외쳐라. 여호와께서 자신의 백성을 위로하셨고, 예루살렘을 도로 사셨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모든 나라들의 눈앞에서 자신의 거룩한 팔을 드러내셨다. 모든 땅 끝이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보게 된다.” (이사야 52:9, 10) 바빌론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이 도착함에 따라, 애통해하는 것 같던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띠게 됩니다. 이제 여호와의 순결한 숭배가 회복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35:1, 2) 여호와께서 이 일에 관여하고 계심이 분명합니다. 마치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는 일에 전념하기 위해 소매를 걷어 올리시는 것처럼, 그분은 “자신의 거룩한 팔을 드러내셨”습니다.—에스라 1:2, 3.

20. 현대에 여호와께서 자신의 거룩한 팔을 드러내심으로 인해 어떤 일이 있었으며, 앞으로도 어떤 일이 있을 것입니까?

20 이 “마지막 날”에, 여호와께서는 계시록의 “두 증인” 즉 기름부음받은 남은 자들을 다시 살리기 위해 자신의 거룩한 팔을 드러내셨습니다. (디모데 둘째 3:1; 계시 11:3, 7-13) 이들은 1919년 이래 영적 낙원으로 들어오게 되어, 지금 그 영적 토지를 수백만에 달하는 자기들의 동료인 다른 양들과 함께 누리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결국 “하르-마게돈”에서도 자신의 거룩한 팔을 드러내시고 자신의 백성에게 구원을 가져오실 것입니다. (계시 16:14, 16) 그러면 “모든 땅 끝이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보게” 됩니다.

한 가지 긴급한 요구 조건

21. (ㄱ) “여호와의 기구를 나르는” 사람들에게는 무엇이 요구됩니까? (ㄴ) 유대인들은 왜 허둥대며 바빌론을 떠날 이유가 없습니까?

21 바빌론에서 나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달해야 할 한 가지 요구 조건이 있습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떠나거라, 떠나거라, 거기서 나오너라, 더러운 것은 아무것도 만지지 말아라. 여호와의 기구를 나르는 자들아, 그 여자 가운데서 나와서, 자기 자신을 깨끗하게 지켜라. 너희는 허둥대며 나오지도 않고, 도망쳐 가지도 않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 가시며,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너희 뒤를 지켜 주는 분이 되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사야 52:11, 12) 떠나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빌론의 거짓 숭배의 얼룩이 묻어 있는 것은 모두 바빌론에 두고 떠나야 합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서 가져온 여호와의 기구를 나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깨끗해야 하는데, 단지 겉모습이나 의식상으로만이 아니라 주로 마음이 깨끗해야 합니다. (열왕 둘째 24:11-13; 에스라 1:7) 또한,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가시기 때문에 그들은 허둥댈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피에 굶주린 추격자들이 그들을 바짝 뒤쫓기나 하는 것처럼 정신없이 달아날 필요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그들의 뒤를 지켜 주십니다.—에스라 8:21-23.

22. 바울은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이 깨끗해야 할 필요성을 어떻게 강조합니까?

22 깨끗함을 지키는 것에 관한 이사야의 예언은 주로 “위에 있는 예루살렘”의 자손에게 성취됩니다. 바울은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지 않는 사람과 맞지 않는 멍에를 메지 말라고 권고할 때 다음과 같이 이사야 52:11의 말씀을 인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 가운데서 나와 따로 있고, 더는 더러운 것을 만지지 말라’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고린도 둘째 6:14-17) 바빌론에서 나와 고향으로 향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그리스도인들도 바빌론식 거짓 숭배를 철저히 피해야 합니다.

23. 오늘날 여호와의 종들은 어떻게 깨끗함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합니까?

23 1919년에 큰 바빌론에서 도망 나온, 예수 그리스도의 기름부음받은 추종자들이 특히 그렇게 해야 하였습니다. 그들은 거짓 숭배의 온갖 흔적에서 자신을 점진적으로 깨끗하게 하였습니다. (이사야 8:19, 20; 로마 15:4) 그들은 또한 도덕적 깨끗함의 중요성을 점점 더 깊이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항상 높은 도덕 표준을 고수해 왔지만, 1952년에 「파수대」지는 회중을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해 부도덕한 사람들을 징계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는 기사들을 실었습니다. 그러한 징계 조치는 잘못을 범한 사람 자신이 진심으로 회개해야 할 필요성을 깨닫게 하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고린도 첫째 5:6, 7, 9-13; 고린도 둘째 7:8-10; 요한 둘째 10, 11.

24. (ㄱ) 현대의 “여호와의 기구”는 무엇입니까? (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여호와께서 계속 그들 앞에 가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뒤를 지켜 주기도 하실 것임을 확신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4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양들의 큰 무리와 함께 영적으로 더러운 것은 아무것도 만지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들은 깨끗하게 정화된 상태 때문에 “여호와의 기구”—호별 방문 봉사나 성서 연구 봉사를 비롯한 여러 가지 형태의 그리스도인 활동을 통한 신성한 봉사를 위해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귀중한 마련—를 나르는 자가 될 자격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오늘날 깨끗한 신분을 유지함으로써, 여호와께서 계속 그들 앞에 가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뒤를 지켜 주기도 하실 것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깨끗한 백성으로서 그들에게는 ‘함께 기뻐 외칠’ 풍부한 이유가 있습니다!

[각주]

^ 3항 “위에 있는 예루살렘”과 지상에 있는 그의 기름부음받은 자녀들과의 관계에 대해 더 자세하게 논의한 내용을 보고 싶으면, 이 책 제15장 참조.

[연구 질문]

[183면 삽화]

시온은 포로 상태에서 자유롭게 될 것이다

[186면 삽화]

1919년부터, ‘아름다운 발’이 또다시 “산”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189면 삽화]

여호와의 증인은 일제히 말한다

[192면 삽화]

“여호와의 기구를 나르는” 사람들은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깨끗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