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이 앞에 있다
제3장
낙원이 앞에 있다
1-3. (ㄱ) 지구가 생명없는 영역이 될 때까지 인간이 지구를 오용하도록 허락될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왜 이치적이 아닙니까? (ㄴ) 인간은 창조물을 관찰하고 추리력을 사용함으로, 현 사태의 이유와 하나님의 목적을 알아낼 수 있읍니까? (욥 28:12-14, 28) (ㄷ) 우리는 하나님과 그분의 목적을 어디에서 이해할 수 있읍니까? (ㄹ) 하나님께서 그분의 생각과 길에 대한 기록으로 성서를 주셨다고 믿는 것이 이치적입니까?
전세계적으로 ‘인간이 지구를 거대한 쓰레기 더미로 만들고 있다’는 불평이 높아가고 있읍니다. 지구가 실제로 그렇게 될 것입니까?
2 인간의 탐욕과 폭력으로 인한 손상에도 불구하고, 이 지구는 아직도 아름다움으로 가득차 있읍니다. 예를 들면, 지구에는 녹색의 계곡, 눈덮인 산, 내리 쏟아지는 폭포, 야자수 늘어선 해변, 천태만상의 식물과 동물이 있읍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만드신 분께서 이 화려한 지구가 마침내 생명없는 영역이 될 때까지 인류가
지구 자원을 잘못 관리하고 오용하도록 허락하실 것으로 상상해야 할 것입니까? 건전하게 추리해 볼 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지구를 위하여 무엇을 염두에 두고 계십니까? 눈에 보이는 창조된 물질은 우리에게 지구의 창조자에 대하여 몇 가지 사실을 말해 주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알려 주지는 못합니다. 그것은 미래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 말해 주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무엇 혹은 누가 우리에게 그것을 말해 줄 수 있읍니까?3 그것을 알려면, 창조주 자신의 어떤 계시가 있어야 합니다. 인간이 그분의 목적에 대하여 무지 가운데 있을 필요가 없도록, 전능하신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기록된 형태로 계시하셨읍니다. 그 내용이 성서에 있읍니다. 물론 그 책의 필자는 인간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기록한 내용이 그들 자신의 지혜가 아니었음을 시인하였읍니다. 성서 필자 중 한 사람인 ‘다윗’ 왕은 이렇게 선언하였읍니다. “여호와의 신[영]이 나를 빙자하여 말씀하심이여, 그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사무엘 하 23:2) 확실히 인간 두뇌의 설계자께서 인간이 그분의 생각을 기록하도록 인간의 정신 작용을 움직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읍니다. 성서는 그 자체가 지구의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유일한 고대 서적이므로, 우리는 그분이 땅과 인간에 대해 염두에 두신 것이 무엇인지를 성서 이외의 다른 아무 데에서도 알아낼 수 없읍니다.—디모데 후 3:16, 17.
낙원에 관한 예수의 약속
4. 인류의 웅대한 미래를 지적한 탁월한 분은 누구였으며, 왜 우리는 그 말을 믿어야 합니까?
4 영감받은 한 사람이 약 십 구 세기 전에 한 범법자에게 한 말은 웅대한 미래를 명백히 지적합니다. 그 영감받은 사람은 예수였으며, 그분은 예언자로서 그리고 인간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선생님 가운데 한 분으로 널리 인정되고 있읍니다. 성서는 그분이 약속된 메시야 즉 그리스도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며, 인간으로 태어나시기 전에 영자로서 존재하셨다고 알려 줍니다. (마태 16:13-16; 누가 1:30-33; 빌립보 2:5-7) 행악자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읍니다.—누가 23:43.
5, 6. (ㄱ) 사람들이 누가 복음 23:43에 있는 예수의 말씀을 여러 가지로 이해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행악자에게 하신 예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지침은 무엇입니까?
5 예수 그리스도의 이 약속은 성서 독자들에게 여러 가지로 이해되어 왔읍니다. 많은 성서 번역판들은 예수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인용합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개역 한글판) 이제 구두점을 어디에다 찍느냐에 따라 그 행악자가 바로 그 날 예수와 함께 낙원에 있게 될 것이라는 결론을 얻게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읍니다. 유의해야 할 사실은 희랍어 원본에도 거의 또는 전혀 구두점이 없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번역자가 구두점의 위치를 정해야 합니다. 따라서 그 문장에 구두점을 다음과 같이 찍고 읽을 수도 있읍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렇게 읽으면, 이 말은 미래 어느 때엔가 그 행악자가 예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을 지적하신 것이 됩니다.
6 예수의 말씀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성서의 나머지 부분과 일치합니다. 예수께서는 돌아가시자 그 날 하늘로 혹은 어떤 중간 장소로 올라가시지 않았읍니다. 그분은 사흘 동안(날수로 사흘) ‘하데스’ * 즉 무덤에 죽은 상태로 계셨읍니다.—마태 27:62-66; 사도 2:24, 27.
7. (ㄱ) 예수께서 행악자에게 그 약속을 하셨을 때 그 당시 사람들은 “낙원”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였읍니까? (ㄴ) 우리는 예수의 말씀을 들은 사람이 천적 낙원에 가는 것에 대하여 알지 못하였음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읍니까?
7 더우기, 그 행악자는 예수께서 언급하신 “낙원”이라는 말을 디모데 후 1:10)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께서 “천국”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지만 그들도 그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였읍니다. (마태 13:24, 31, 33) 후에, 그들은 부활되신 예수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고 질문하였읍니다. (사도 1:6; 또한 사도들의 대화가 나오는 요한 16:17, 18 비교) 그러므로 아직도 그들의 생각은 땅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고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그분의 왕국을 설립하실 것으로 기대하였읍니다. 예수의 제자들 자신도 그 당시 천적인 사물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였는데, 어떻게 그 행악자가 예수께서 지적 낙원 아닌 다른 것에 대하여 말씀하셨다고 상상할 수 있었겠읍니까?
당시 용법과 일치하게 이해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말은 어떻게 사용되었읍니까? 낙원은 정원 혹은 공원이었읍니다. 그 사람은 예수의 제자가 아니었읍니다. 따라서 천적 낙원에 대하여 알지 못하였읍니다. 그 당시 보급되어 있던 성서는 신자들에게 하나님과 함께 영계에서 살 수 있는 기회를 제시하지 않았읍니다. 예수께서 오신 후에야 보이지 않는 하늘에서의 생명의 희망이 지적되었읍니다. (8. 행악자에게 하신 예수의 약속은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히브리’어 성경」과 어떻게 일치하였읍니까?
8 그 행악자에게 하신 예수의 약속은 땅이 만들어진 데에는 목적이 있다는 성서의 진술과 일치합니다. 하나님이 땅을 “헛되이 창조치 아니하시고 사람으로 거하게 지으”셨읍니다. (이사야 45:18; 시 104:5) 여러 세기 동안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땅을 준비하신 하나님께서 일부 사람들이 그것을 인식하지 않는다고 하여 그것을 파괴하거나 황무지가 되도록 방치하실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불합리할 것입니다. 참으로, 땅은 사람들이 살기에 대단히 즐거운 장소가 될 잠재력을 가지고 있읍니다.
낙원같은 “새 땅”이 예언됨
9-11. (ㄱ) ‘유대’인들은 거의 지적 낙원과 같은 것을 경험한 일이 있었읍니까? 언제? (ㄴ) ‘모세’는 어떻게 약속의 땅을 살기에 즐거운 장소로 묘사하였읍니까?
9 예수의 동족 ‘이스라엘’인들이 오래 전부터 지적 낙원에 대한 개념을 알고 있었다는 것은 유의할 만합니다.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 그 땅은 그들에게 낙원같이 보였읍니다. 여호와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그 땅이 그들이 살았던 비옥한 ‘나일’ 계곡보다도 더욱 아름답고 생산적인 곳이라고 이렇게 묘사하셨읍니다.10 “네가 들어가 얻으려 하는 땅은 네가 나온 ‘애굽’ 땅과 같지 아니하니 거기서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 대기를 채소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세초부터 세말까지[연초부터 연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신명 11:10-12.
11 이보다 앞서 ‘모세’는 그 땅을 이렇게 묘사하였읍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로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곳은 골짜기에든지 산지에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들의 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너의 먹는 식물의 결핍함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신명 8:7-9.
12. ‘이스라엘’ 민족이 포로 생활에서 돌아왔을 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유다’ 땅에 “새 하늘”과 “새 땅”을 두셨읍니까?
12 하나님께서는 예언자 ‘이사야’를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불순종의 댓가로 적들에게 사로잡혀 갈 것이라고 오래 전에 예언하셨읍니다. 그렇게 되면 낙원과 같던 땅은 황무지가 될 것이었읍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언으로 하나님께서는 그 민족을 희망없이 버려 두지 않으셨읍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 내가 ‘예루살렘’으로 즐거움을 창조하며 그 백성으로 기쁨을 삼[으리라.]” (이사야 65:17, 18) 여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유다’ 땅에 ‘예루살렘’을 다시 수도로 하는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약속하고 계셨읍니다. “새 하늘”은 새로운 보이지 않는 하늘이 아니라, ‘유다’ 지파의 ‘스룹바벨’의 손에 맡겨지는 ‘유다’ 땅에 대한 총독의 직책 즉 그 땅에 대한 통치권이었읍니다. “새 땅”은 황폐되었던 그 고토로 복귀한 회개하고 정화되고 징계받은 백성이었읍니다. 그들은 그 땅을 가꾸고 미화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곳에 여호와 하나님의 숭배를 회복하고 ‘예루살렘’의 성전을 재건하였읍니다.—에스라 3:1, 2, 10.
13. 황폐된 땅을 낙원 상태로 바꾸려고 노력한 ‘이스라엘’인들을 하나님께서 도우셨다는 것을 무엇이 증명합니까?
13 ‘유다’ 땅을 이전의 낙원과 같은 상태로 미화하려는 일에 있어서 이사야 35:1, 2) 이와 동일하게, 시편 필자는 그 민족이 하나님께 순종할 때 “여호와께서 좋은 것을 주시리니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 하고 말하였읍니다.—시 85:12.
‘이스라엘’인들은 그들의 복귀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이 지적한 바와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인 도움을 받았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약속하셨읍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피[리라.]” (찬란한 “새 땅”이 앞에 있음
14. “새 땅”에 관한 예언이 오늘날 우리에게 더욱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을 무엇이 보증합니까?
14 “새 땅”에 대한 이러한 예언은 오늘날 우리와 관계가 있읍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온 땅을 어떻게 하실 것인가에 대한 암시입니다. ‘이사야’가 예언한지 여러 세기 후에 사도 ‘베드로’는 당시 알려진 땅에 흩어져 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서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본다고 말하였읍니다. (베드로 후 3:13) 그러므로 장차 있을 다가오는 이 “새 땅” 사회는 고대 ‘유다’의 “새 땅”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지역을 차지할 것입니다.
15. 사도 ‘요한’에게 주어진 환상은 장차 있을 지적 낙원에 대하여 무엇을 알려 줍니까?
15 더우기, 성서 계시록에 기록된 사도 ‘요한’의 환상은 최종적인 성취로 “새 땅” 사회가 온 지구에 거할 것임을 명백히 밝혀 주고 있읍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기술하였읍니다.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리라.]” (계시 21:1-3) “새 하늘”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하늘로부터의 하나님의 통치를 가리킵니다. (마태 5:34) 때가 되면, 인류는 하나님께 대한 참 숭배만을 실천할 것이며, 하나님의 은총과 도움과 보호가 그들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새 하늘”은 아름다운 땅에 사는 인류에게 축복을 내려 줄 것입니다.—시 115:16.
16, 17. (ㄱ) 창세기는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원래 목적이 낙원에서의 영원한 생명이었음을 어떻게 알려 줍니까? (ㄴ) 창세기 3:15에 있는 하나님의 예언은 ‘아담’이 범죄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을 포기하지 않으셨음을 어떻게 알려 줍니까?
16 땅을 위하여 이러한 훌륭한 장래를 하나님께서 목적하고 계시다는 것이 그분이 인류를 다루신 일에 나타나 있읍니다. 성서에 의하면, 첫 사람 ‘아담’은 단지 불순종할 경우에만 죽음이 올 것이라는 말을 들었읍니다. 그러므로 만일 그가 계속 순종하였더라면 그는 결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창세 2:17; 3:19) 그는 계속 살았을 것이고 하나님께서 완전한 인간에게 주신 집으로서의 낙원은 계속 존속하였을 것입니다. ‘아담’의 가족이 늘어감에 따라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낙원을 밖으로 점차 확장시켜 나아갔을 것입니다.
17 ‘아담’이 범죄한 후에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땅에 대한 자신의 목적을 포기하지 않으셨음을 ‘아담’의 후손들에게 암시하셨읍니다. 그분은 인류의 해방자가 될 후손 즉 “씨”를 산출하실 것을 창세 3:15)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위하여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아담’이 자식을 낳도록 허용하셨읍니다. 그들은 이 약속을 그들의 희망으로 삼고 살 수 있었읍니다.
약속하셨읍니다. (18. (ㄱ) “씨”에 관한 이 약속이 이 지상의 인류에게 중요할 것임을 그 후의 어떠한 계시가 지적하였읍니까? (ㄴ) “씨”는 누구일 것이었으며, 그는 어떠한 권위를 가질 것이었읍니까?
18 후에, 미래의 낙원에 관한 이 희망은 “씨”가 ‘아브라함’의 후손 계열을 통해 나올 것이며 ‘천하 만민을 축복’할 것이라는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계시에 의해 보강되었읍니다. (창세 22:18) 약 팔백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다윗’ 왕에게, ‘다윗’의 후손이 영원히 보좌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읍니다. (사무엘 하 7:12, 13, 16) 모든 것이 그 계열의 이전의 역대 왕보다 우월한 ‘다윗’ 계통의 한 아들을 지적하였읍니다. 이분은 ‘다윗’의 보좌를 영원히 차지할 메시야(“기름부음받은 자”를 의미)가 될 것이었읍니다. (시 45:6, 7; 갈라디아 3:16) 사도 ‘바울’은 ‘다윗’ 계통에서 지상에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에게 이 예언을 적용시켰읍니다. ‘바울’은 그에 관하여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다고 말하였읍니다. 그 말은 하나님이 영원토록 그리스도의 보좌의 기초이며 후원자이심을 의미합니다.—히브리 1:8, 9.
19. 시편은 “씨”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낙원이 영원히 존속할 것임을 어떻게 보증합니까?
19 여러 세기에 걸쳐 기록된 시편 전체에 땅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가 “영영”하고 “영원 무궁”할 것이라는 말이 반복되어 있읍니다. (시 9:7, 8; 10:16, 17; 29:10; 145:21) 이 모든 예언은, 하나님께서 죽은 자로부터 일으키시고 하나님 다음 가는 높은 지위로 높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에 의해 성취됩니다. (에베소 1:20-22) 사람들이 이 낙원에서 영원히 살 것임을 시편 37:29은 이러한 선언으로 밝혀 줍니다. “의인이 땅을 차지함이여 거기 영영히 거하리로다.”
낙원이 되기 전에, 땅이 깨끗하여 짐
20. 평화를 저해하는 모든 요소를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제거하실 것을 보증하는 어떠한 예가 있읍니까?
20 그러나 이러한 질문이 생깁니다. 생활의 즐거움이 감소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어떻게 땅에 항구적인 평화를 조성하실 것입니까? 사람이 나쁜 입주자를 추방함으로써 자기 집을 깨끗이 하듯이, 하나님께서도 땅에서 나쁜 요소를 제거함으로써 새로와진 땅에 레위 18:24-27.
항구적인 평화를 가져 오실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소유하고 있던 부패한 ‘가나안’ 민족들을 추방하여 ‘이스라엘’이 그 땅을 평화로이 소유할 수 있도록 하심으로써 고대 ‘이스라엘’을 위하여 이 일을 하셨읍니다.—21.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바라지만, 현재 전혀 의로운 상태를 보는 것이 왜 불가능합니까?
21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땅에 평화와 의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기를 원하고 있읍니다. 그러나 강력한 종교, 정치 및 상업 요소들이 지배하고 있는 현 사물의 제도는 사람들을 속박하고 있읍니다. 사람들이 의를 행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땅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의 좋은 소식은 유력한 종교 제도들의 교직자들, 증대하는 무신론 및 보도와 선전 수단에 의해 반대를 받고 있읍니다. 이방인들은 ‘헛된 생각을 가지고 살며 그들의 지각은 어두워졌고 그들 속에 있는 무지와 그들 마음의 완고함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에서 멀리 떨어졌’다고 성서는 설명합니다.—에베소 4:17, 18, 새번역; 또한 요한 3:19 비교.
22. 하나님께서는 의를 행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무슨 일을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읍니까?
22 현 사물의 제도는 말하자면 어둡게 하는 휘장으로 땅을 덮었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휘장을 제하시겠다고 약속하셨읍니다. 예언적으로 그분은 “그 가리워진 면박과 열방의 그 덮인 휘장”을 걷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읍니다.—이사야 25:7.
23. (ㄱ) 땅을 깨끗이 하기 위하여는 왜 전쟁이 있어야 합니까? (ㄴ) 누가 그 전쟁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23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천적 왕으로서 성서에서 말하는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시에 현 사물의 제도를 종결시키실 것입니다. (계시 16:14) 의를 행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은 그 전쟁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읍니다. 왜냐 하면 그 전쟁은 동료 인간을 해치는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을 가려서 제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들 악한 사람들은 그들의 이기심과 탐욕을 통하여 “땅을 망하게 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들 자신이 멸망되어야 합니다.—계시 11:18; 베드로 후 2:9.
24. 평화와 행복을 이루려면 동료 인간을 반대하는 일을 고집하는 탐욕적인 사람들을 제거하는 외에 다른 방도가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압제하는 사물의 제도를 멸망시키겠다고 약속하셨읍니다. 이와 아울러, 하나님께서는 또한 동료 인간을 미혹하고 사기하고 억압하는 일을 고집하는 사람들을 시 72:4; 103:6) 그러한 “입주자들”이 하나님의 지적인 “집”에 남아 있는 한, 평화와 행복이 그것을 성실히 원하는 사람들에게 있을 수 없읍니다. 다른 방도가 없읍니다. 낙원이 이루어지려면 그 댓가로 이들 탐욕적인 자들이 제거되어야 합니다. 그 법칙은 “악인은 의인의 대속이” 된다는 것입니다. 잠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의인은 환난에서 구원을 얻고 악인은 와서 그를 대신하느니라.” 즉, 환난을 일으켜 온 악인이 징벌을 받음으로써 의인은 재난에서 구제됩니다.—잠언 21:18; 11:8.
일소하실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25, 26. (ㄱ) 성서는 땅을 깨끗케 하는 일을 무엇에 비깁니까? (ㄴ) 깨끗해진 땅의 항구성에 대하여 어떠한 질문이 생깁니까?
25 거짓 종교, 정치, 상업 및 물질주의가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는 현 세상 제도를 이처럼 제거하면 불공평과 압제가 사라질 것입니다. 성서는 여기에 사용되는 대행 기관을 대폭풍에 비깁니다. “보라. 나 여호와의 노가 발하여 폭풍과 회오리바람처럼 악인의 머리를 칠 것이라. 나 여호와의 노는 내 마음의 뜻하는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쉬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말일에 그것을 완전히 깨달으리라.”—예레미야 23:19, 20.
26 그 때에 하나님의 다스림은 땅에서 이의없이 받아 들여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다스림은 불순종으로 되돌아가 후에 낙원이 파괴되는 일이 없이 항구적인 행복을 초래할 것입니까? 하나님의 다스림의 효력이 인간의 다스림보다 훨씬 우월할 이유가 다음에 우리의 주의를 이끌 제목입니다.
[각주]
^ 6항 ‘하데스’라는 이 단어와 그 동의어인 ‘히브리’어 ‘스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알려면 본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 발행 「현 생명이 인생의 전부인가?」 참조.
[연구 질문]
[23면 삽화]
‘바티칸’ 사본 1209호에 있는 누가복음 23:42, 43의 희랍어 성귀, 행 대 행으로 우측에 직역해 놓았음
committed and he was saying Jesus
remember me whenever
you might come into the kingdom
of you and he said to
him Amen to you I am saying today,
with me you will be
in the paradise and
[27면 삽화]
믿음의 사람들은 땅을 다스릴 하늘의 하나님의 정부를 바라보았다
[28면 삽화]
하나님께서는 땅으로부터 해를 끼치는 모든 자들을 일소하실 것이다
[29면 삽화]
깨끗해진 땅에는 행복이 영원히 존속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