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바로 가기

차례 바로 가기

세계적 평화와 안전—믿을 만한 희망

세계적 평화와 안전—믿을 만한 희망

제9장

세계적 평화와 안전—믿을 만한 희망

1, 2. 성서에 예언된 어떤 상태로 말미암아 이 땅은 아주 살기 좋은 곳이 될 것입니까?

참으로 평화롭고 안전한 상태가 온 땅에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이 땅은 매우 살기 좋고 재미있는 곳이 될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그런 상태와 거리가 멀지만 성서는 땅이 조만간 인간 가족이 생명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찬란한 거처가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2 과연 성서는 무엇이라고 약속합니까? 그 약속이 이루어질 것임을 우리는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읍니까?

확신케 하는 확고한 근거

3, 4. (ㄱ) 우주를 지배하는 기본 법칙들이 신빙성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읍니까? (ㄴ) 이러한 법칙들을 만드신 분은 누구이며, 그러므로 무엇도 신뢰하는 것이 마땅합니까?

3 우주에는 그것을 지배하는 기본 법칙이 있읍니다. 우리는 그러한 법칙 다수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버립니다. 해가 뜨고 지고, 달이 차고 기울고, 계절이 가고 오는 방식은 인간 생활의 안정성에 기여합니다. 사람들은 달력을 만들고 여러 해 앞서 활동을 계획합니다. 사람들은 해와 달과 행성들의 운동이 믿음직하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읍니까?

4 이러한 법칙들을 만드신 분은 전적으로 신뢰할 만한 분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말씀과 하시는 일에 의존할 수 있읍니다. 성서에는 천지를 창조하신 그분의 이름으로 의로운 새 질서가 약속되어 있읍니다. (이사야 45:18, 19)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다른 사람들을 어느 정도 믿는 것이 보통입니다. 시장에서 식품을 파는 사람, 우편물을 배달하는 사람, 친한 벗들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하여 그리고 그분의 약속의 확실한 성취에 대하여 훨씬, 훨씬 더 깊은 확신을 갖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읍니까?—이사야 55:10, 11.

5.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내용에는 이기적 동기가 전혀 없다는 사실이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믿음을 갖게 해줍니까?

5 인간의 약속은 흔히 신빙성이 없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전적으로 신뢰할 만하며, 그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이지 그분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서 아무 것도 얻으실 필요가 없지만, 자신과 자신의 의로운 길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믿음을 두는 사람들을 기뻐하십니다.—시 50:10-12, 14.

6. 성서는 우리가 어떤 종류의 믿음을 갖도록 도와 줍니까?

6 그리고 또한 성서는 우리의 이지력에 호소합니다. 성서는 맹신이나 경신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사실상 성서는 참된 믿음이란 “바라는 사물에 대한 보증된 기대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의 명백한 증거”라고 정의합니다. (히브리 11:1, 신세)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갖게 하는 확고한 근거를 성서 안에 주셨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을 길러감에 따라, 그 진리가 우리 자신의 생활에서, 그 예언 성취에서 작용하는 것을 봄에 따라, 그 근거가 확고하다는 점은 점점 더 명백해집니다.—시 34:8-10.

7. 미래의 축복들에 대한 성서의 약속들을 검토해 보면서, 그러한 것에 대한 믿음이 무엇을 요구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까?

7 미래의 축복들에 관한 성서의 약속은 인간이 감히 제시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월등합니다. 그러나 그 약속들은 모든 인간 경험에 배치되는 것을 믿도록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그 약속들이 정상적인 인간의 욕망과 상반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웅대한 축복들 몇 가지를 고려해 보고 과연 그러한가를 살펴봅시다.

공원과 같은 거처가 될 지구

8, 9. (ㄱ) “낙원”이라는 말을 우리는 무슨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까? (ㄴ) 그러한 것이 지상에 존재했던 적이 있읍니까? (ㄷ) 온 땅이 낙원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임을 어떻게 알 수 있읍니까?

8 “낙원”을 의미하는 영어의 “파라다이스(paradise)”라는 단어는 고대에 사용되던 비슷한 단어들(히브리파르데스; 페르시아파이리다에자; 희랍어 파라데이소스), 곧 그 당시 지상에 실존한 것을 지칭한 단어들에서 유래하였읍니다. 이러한 단어들은 모두 아름다운 공원 혹은 공원과 같은 정원이라는 기본 개념을 가지고 있읍니다. 고대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그러한 곳이 많으며 그 중 어떤 공원은 규모가 상당히 큽니다. 그리고 사람은 그러한 아름다움을 선천적으로 좋아합니다. 성서는 온 땅이 그러한 공원같은 정원 곧 낙원이 될 날이 올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9 하나님께서는 첫 인간 부부를 창조하셨을 때 그들에게 에덴 동산을 거처로 주셨읍니다. 에덴이라는 명칭은 “즐거움의 동산” 곧 낙원(樂園)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낙원이 그 한 장소에만 국한되게 되어 있지 않았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창세 1:28; 2:8, 9) 이렇게 하려면 낙원의 경계를 땅 끝까지 확장해야 할 것입니다. 아담하와의 불순종적인 행로는 하나님께서 언명하신 목적을 폐기시키지 못하였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옆에 달려서 죽은 한 남자에게, 그가 그러한 지상 낙원에서 살 기회를 갖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심으로 그러한 목적에 대한 확신을 친히 나타내셨읍니다. (누가 23:39-43) 이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입니까?

10. 계시록 11:18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낙원에 방해가 되는 무엇을 제거하시겠다고 약속하셨읍니까?

10 하나님께서는 다가오는 “큰 환난”에서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심으로써 다가오는 지상 낙원에 방해가 되는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실 것입니다. (계시 11:18) 그렇게 하여 하나님께서는 인간 정부가 결코 하지 못한 일을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상업적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 땅을 더럽히는 모든 자들, 파괴적인 전쟁을 벌이는 모든 자들,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풍부한 선물에 대한 존경심이 없기 때문에 땅을 오용하는 모든 자들을 쓸어버리실 것입니다.

11. (ㄱ) 땅을 낙원으로 회복시키는 것이 인간 경험과 상반되는 것이 아님을 무슨 역사적 사건이 알려 줍니까? (ㄴ) 이 점은 약속된 무슨 축복에 대한 믿음을 강화시켜 줍니까?

11 그러면 온 땅에는 아름다움이 만발할 것입니다. 대기와 하천과 토지는 신선하고 깨끗해질 것입니다. 이처럼 낙원이 회복되는 것은 믿을 수 없는 것도, 인간의 경험에 상반되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 세기 전에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의 유배 생활에서 풀려났을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고토로 돌아가게 해주셨읍니다. 그 땅은 황폐해 있었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과 그들의 일을 축복하셨기 때문에 그 땅은 곧 인근 민족들이 ‘이 땅이 에덴 동산같이 되었구나!’하고 외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아름다운 곳이 되었읍니다. 또한 그 땅은 옥토가 되어서 굶주림과 기근의 위험이 전혀 없게 되었읍니다. (에스겔 36:29, 30, 35; 이사야 35:1, 2; 55:13) 하나님께서 그 당시에 하신 일은 앞으로 자신의 약속들을 성취시키기 위해서 하실 대규모적인 일들을 소규모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그때에 살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간주되는 사람은 누구나 낙원에서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시는 인생의 즐거움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시 67:6, 7; 이사야 25:6.

굶주림과 경제적 속박이 끝남

12. 인생을 참으로 즐길 수 있으려면, 어떤 경제 상태 및 작업 상태가 시정되어야 합니까?

12 굶주림과 국가적 경제 제도에 예속된 상태를 전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읍니다. 만일 수백만의 사람들이 노동을 하고도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밖에 벌지 못하거나, 사람을 거대한 기계 속의 비인간적인 톱니 바퀴와 같이 만드는 무미건조한 일을 한다면 참다운 낙원의 즐거움은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13-15. (ㄱ) 이 점에 있어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려 주는 역사적 실례를 어디서 볼 수 있읍니까? (ㄴ) 그 마련은 각 개인과 가족 생활의 안전 및 즐거움에 어떻게 기여하였읍니까?

13 이 점에 있어서의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그분이 고대 이스라엘에 대하여 그러한 일들을 처리하신 방법에 나타나 있읍니다. 그 당시에 각 가족은 상속 토지를 받았었읍니다. (사사 2:6) 빚을 지게 되면 자기 토지를 팔 수 있었고 또 자신을 팔아 노예가 될 수도 있었지만, 여호와께서는 한 사람이 다량의 토지를 소유하는 것이나 사람들을 장기간 노예로 삼는 것을 막는 마련들도 하셨읍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셨읍니까?

14 그분은 자신의 백성에게 주신 율법에 들어있는 경제적 마련들을 통하여 그렇게 하셨읍니다. 노예가 된 지 일곱째 되는 해는 ‘해방의 해’였으며, 그 해에 노예가 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유케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매번 50년째 되는 해는 “희년”으로서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는 해였읍니다. (신명 15:12; 레위 25:10) 그때에는 팔아 버린 상속 토지가 본래의 소유주에게 돌아왔읍니다. 노예들은 7년이 차지 않았더라도 모두 해방되었읍니다. 그때는 행복하게도 가족이 재연합하여 경제적으로 새 출발을 할 수 있는 즐거운 때였읍니다. 그러므로 영구적으로 팔 수 있는 토지는 없었읍니다. 사실상, 그 매매 행위는 길어야 희년에는 만료되는 임대 계약에 불과하였읍니다.—레위 25:8-24.

15 이 모든 것은 그 나라의 경제적 안정과 각 가족의 안전 및 평화에 기여하였읍니다. 이 율법을 준수하였을 때, 그 민족은 오늘날 참으로 많은 나라에서 볼 수 있는, 극히 부한 사람들과 극빈자들이 나란히 공존하는 서글픈 현상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받았읍니다. 개개인이 받는 유익 때문에 국가가 강해졌읍니다. 왜냐하면 악화된 경제 상태 때문에 혜택을 받지 못하거나 압제받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솔로몬의 통치중에는 “유다이스라엘이 ·⁠·⁠·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안연히 살았”다고 합니다. (열왕 상 4:25)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소수 혹은 단 한명의 욕구를 위해 일하도록 강요하는 경제 제도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자신의 재능이나 창의력을 다 발휘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법 아래서는 부지런한 사람은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여 모두의 복지와 즐거움에 기여할 수 있었읍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의 새 질서에서 살게 될 사람들이 개인의 긍지 및 존엄성을 어느 정도나 누릴 것인지를 다소 알 수 있읍니다.

16. 생활 조건과 경제 상태에 있어서 하나님의 왕국은 그 백성 모두에게 무엇을 마련해 줄 것입니까?

16 미가서 4:3, 4의 예언은 전세계적으로 놀랍게 성취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 아래 사는 평화 애호자들은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 앉을 것”입니다.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하셨음이니라.” 하나님의 왕국 백성들은 아무도 추한 빈민굴이나 비좁은 셋집에서 살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토지와 가옥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 65:21, 22) 왕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오래 전에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할 것이며, 그분 자신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있으므로 이 일이 이루어지도록 하겠다고 약속하셨읍니다.—마태 5:5; 28:18.

항구적인 건강과 생명

17-19. (ㄱ) 건강과 장수가 인류의 자연적인 욕구임을 어떻게 알 수 있읍니까? (ㄴ) 인간 수명과 초목의 수명에 관한 어떤 사실을 볼 때 인간의 짧은 수명이 이상해 보입니까? (ㄷ)인간 두뇌에 관한 어떤 사실을 볼 때, 사람이 영원히 살도록 지음을 받았다고 믿는 것이 합리적입니까?

17 그러나 질병과 노쇠와 죽음이 장래에 먹구름을 드리우는 한 매우 좋은 이러한 상태들 중 어느 것도 인생을 참으로 평화롭고 안전하게 해주지 못할 것입니다. 이러한 괴로운 일들로부터 구제되기를 바라는 것은 불합리하거나 인간 경험과 상반되는 것입니까? 확실히 이러한 것을 원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과 상반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달성하기 위하여 일생을 바치기도 하고 막대한 양의 돈을 들이기도 해왔기 때문입니다.

18 그러므로 항구적인 건강과 생명을 바라는 것은 전혀 불합리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 참으로 불합리한 것은 이것입니다. 즉, 인간이 상당한 지식과 경험과 능력을 갖추어서 가치있는 일들을 할 만한 연령이 되면 늙기 시작하고 결국은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나무들의 수명은 수천년이나 됩니다! 하나님을 닮도록 지음을 받은 인간의 수명은 지성이 없는 일부 초목의 수명의 단 몇 분의 일에 불과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읍니까? 인간이 훨씬, 훨씬 더 오래 사는 것이 이치적이 아니겠읍니까?

19 노쇠 과정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에게 있어서 그 과정은 아직도 대부분 신비에 싸여 있읍니다. 또 다른 불가사의한 사실은 인간 두뇌가 사실상 거의 무한한 양의 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과학 저술가가 말하였듯이, 두뇌는 “인간이 거기에 주입할 수 있는 어떠한 분량도 처리할 만한 완전한 능력이 있으며, 그것의 십억배의 분량도 처리할 수 있”읍니다.55 그 말은 우리의 두뇌가 70년 내지 80년의 일생 동안 주입할 수 있는 정보를 전부 취급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의 십억배도 더 취급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에게 지식에 대한 욕구, 기술을 배우고 일을 성취시키고자 하는 것과 같은 욕망이 있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짧은 수명 때문에 저지당하고 맙니다. 사람의 두뇌 역량이 그토록 막대한데 그 잠재력의 극소 부분밖에 사용되지 못하는 것이 과연 합리적입니까? 성서에서 말하듯이, 여호와께서는 인간이 지상에서 영원히 살도록 지으셨고 인간에게 그 목적에 적합한, 감탄스런 두뇌를 주셨다고 결론짓는 것이 훨씬 더 합리적이 아닙니까?

20. 하나님께서, 사망을 포함한 죄의 영향과 관련하여 인류를 위해 어떻게 하실 것이라고 성서는 알려 줍니까?

20 성서는 인간에게 원래 영원히 살 기회가 있었는데 반역함으로 그 기회를 상실하였음을 알려 줍니다. “한 사람[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로마 5:12) 그러나 성서에는 또한 회복된 낙원에서는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도 들어있읍니다. (계시 21:3, 4; 비교 7:16, 17) 죄의 영향에서 벗어나 있는 영원한 생명이야말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이라고 성서는 말하는 것입니다. (로마 5:21; 6:23) 뿐만 아니라, 성서에서는 하나님의 새 질서의 축복들이 과거에 죽은 수십억의 사람들에게도 열릴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것입니까? 인류의 공통 무덤을 텅 비게 하는 부활을 통해 그렇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확신을 가지고,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올 것이라고 예언하셨읍니다.—요한 5:28, 29.

21, 22. 온전한 건강을 회복하리라는 전망은 왜 기대할 수 없는 허황된 희망이 아닙니까?

21 오늘날 의학은 “기적의 약품”을 생산하고 수십년 전만해도 믿기 어려워 보였을 수술들을 해냅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분께서는 그보다 훨씬 더 놀라운 치료 기술을 발휘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해야 합니까? 확실히 창조주께서는 의로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활기찬 건강을 회복시켜 주시고 노쇠 과정을 역전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이 일을 약품이나 수술, 혹은 인공 기관 없이도 하실 수 있읍니다. 사려깊으시게도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축복들이 기대할 수 없는 허황된 희망이 아니라는 증거를 마련해 주셨읍니다.

22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아들이 지상에 계시던 동안에 그에게 능력을 주시어 병을 고치는 강력한 일들을 하게 하셨읍니다. 이러한 일들은 어떠한 허약함이나 기형 혹은 질병도 하나님께서 다 고치실 수 있다는 확증을 줍니다. 온 몸에 문둥병이 퍼진 한 사람이 자기 병을 고쳐 달라고 예수께 간청하였을 때 예수께서는 불쌍히 여겨 그 사람을 만지시면서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읍니다. 그러자 역사 기록이 알려 주듯이,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해졌읍니다. (마태 8:2, 3) 예수께서는 이와 같은 일들을 여러 증인들이 훤히 보는 가운데 행하셨읍니다. 역사가 마태는 이렇게 기술합니다. “큰 무리가 절뚝발이와 불구자와 소경과 벙어리와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두매 고쳐 주시니 ·⁠·⁠· 무리가 보고 기이히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마태 15:30, 31) 요한 복음 9:1-21을 직접 읽어 보고 그러한 병 고침에 관한 역사 기록이 얼마나 사실적이고 생생한지 보십시오. 이러한 사건들이 참됨을 의사 누가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증거하였읍니다.—마가 7:32-37; 누가 5:12-14, 17-25; 6:6-11; 골로새 4:14.

23, 24. 하나님의 왕국하에서 죽은 자들이 되살아날 것이라고 믿는 것이 불합리한 것이 아닌 이유는 무엇입니까?

23 비슷한 이유로 죽은 자들의 “부활이 있으리라”는 성서의 약속도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사도 24:15) 어떤 사람이 죽은 뒤 여러 해 후에도 그 사람의 목소리, 외모 및 행동 등을 필름이나 비디오테이프를 통해 재생할 수 있읍니다. 그렇다면, 인간을 창조하신, 인간의 원자 및 분자 구조를 정밀하게 아시는 분께서는 그보다 훨씬 더한 일도 하실 수 있지 않겠읍니까? 사람이 만든 컴퓨터는 문자적으로 수십억 점의 정보를 축적하고 통제할 수 있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외경감을 주는 우주에는, 각기 수십억 개의 별들을 지닌 은하가 수십억 개나 됩니다. 별의 총수는 수조, 아니 수천조도 훨씬 넘습니다! 그런데도 시편 147:4에서는 “저가 별의 수효를 계수하시고 저희를 다 이름대로 부르”신다고 말합니다! 확실히, 그처럼 엄청난 기억력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께서 개개인의 성품을 기억하셔서 그들을 생명으로 회복시키시는 것은 간단한 일일 것입니다.—욥 14:13.

24 이 점에 있어서도 여호와께서는 그처럼 놀라운 희망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켜 주는 역사적 예들을 마련해 주셨읍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에게 능력을 주셔서 자신이 땅에 대한 의로운 통치를 하는 동안 대규모적으로 행할 일을 소규모적으로 보여 주게 하셨읍니다. 예수께서는 흔히 여러 사람들이 훤히 보는 가운데, 죽은 사람들을 부활시키셨읍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근처에서 부활시키신 나사로라는 사람은 죽은 지 상당히 여러 날 되어서 그의 시체가 부패하기 시작했을 정도였읍니다. 확실히 부활 희망에는 확고한 근거가 있는 것입니다.—누가 7:11-17; 8:40-42, 49-56; 요한 11:38-44.

그만한 인구를 감당할 있는 지구의 수용 능력

25, 26. 죽은 사람들이 부활되면 그 모든 사람이 살 장소가 과연 있을 것입니까?

25 죽은 자들이 부활됨으로 생길 그 많은 인구가 안락하게 살 공간이 지구에 충분할 것입니까? 땅의 인구는 5,000여년이나 걸려서 1800년대 초에 10억에 달하였읍니다. 오늘날의 인구는 약 50억에 달합니다.

26 그러므로 오늘날 살아 있는 사람 수는 지금까지 살았던 총 인구 수의 상당한 부분이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전 인류 역사에 걸친 총 인구 수를 약 15,000,000,000명으로 추산합니다. 땅의 육지 면적은 145,700,000,000,000평방 미터가 넘습니다. 그것은 한 사람당 약 10,000평방 미터가 배당될 만한 면적입니다. 그만한 면적이면 식품 생산을 위한 토지가 있을 뿐 아니라 수풀과 산, 그리고 기타 경치 좋은 지역이 들어설 수 있으며 결코 낙원이 비좁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성서에 의하면 현재 살아 있는 사람 모두가 생존하여 그 새 질서에서 살게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알려 줍니다. 사실상,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습니다. 그분은 또한 세계 멸망이 닥치면 여호와의 뜻을 행하지 않는 사람들은 “영원한 끊어짐”을 당하게 되어 있다고도 지적하셨읍니다.—마태 7:13; 25:46.

27. 땅은 그 모든 사람들을 위한 충분한 식품을 생산할 수 있읍니까?

27 그러나 이 땅은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살 만큼 충분한 식품을 생산할 수 있읍니까? 과학자들은 심지어 현 상태하에서도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터론토 스타아」지에서는 이렇게 지적하였읍니다. “국제 연합 식량 농업 기구(FAO)에 의하면 이미 전세계에서 재배되는 곡식량은 지상의 모든 사람이 매일 3,000칼로리를 섭취할 만한 양이다. 그만한 열량이면 ·⁠·⁠· 최저 허용 수준을 50퍼센트나 웃도는 것이다.”56 장래에 관하여, 그 신문에서는 오늘날의 상태하에서도, 현 세계 인구의 두배의 필요도 충족시킬 만큼 충분한 식량을 생산할 수 있다고 설명하였읍니다. 또한 기억해야 할 것은,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백성이 땅의 농업적 잠재력을 올바로 활용하게 감독하실 것이라는 점입니다. 시편 72:16에서는 이렇게 보증하기 때문입니다. “산 꼭대기의 땅에도 화곡이 풍성하[리로다.]”

28. 사람들이 영원히 사는 데도 땅이 조만간 초만원이 될 위험이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8 유의해야 할 것은 원래 최초의 인간 부부에게 언명된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그들은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여’ 에덴의 한계를 지구 끝까지 넓히라는 지시를 받았읍니다. (창세 1:28) 분명히, 이 말씀은 사람이 땅에 넘치는 것이 아니라, 안락한 정도까지 땅을 채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정복된’ 땅은 여전히 본래의 인간의 공원같은 거처와 똑같은, 세계적인 공원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명령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기에 그분의 방법대로 인구 증가가 통제될 것임을 시사합니다.

항구적인 행복을 위한 확실한 기초

29.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는 자신의 행복에 어떠한 영향을 줍니까?

29 그러나 설사 아름다운 환경 속에서 물질적으로 부유하고 흥미로운 일들을 하고 건강을 누린다 해도 항구적인 행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날 다수의 사람들이 그러한 것들을 누리고 있는데도 여전히 불행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이기적이고 다투기 잘하고 위선적이고 밉살스러운 사람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새 질서에서 항구적인 행복이 이루어지는 데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전세계 사람들의 태도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사랑과 존경심, 그리고 그분의 목적들을 행하려는 그들의 욕망은 영적인 번영을 가져올 것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물질적 번영은 불만족스럽고 공허한 것이 됩니다.

30. 하나님의 새 질서에서 사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평화와 안전에 기여하는 사람들 뿐일 것임을 어떻게 알 수 있읍니까?

30 그렇습니다. 주위에 친절하고 겸손하고 우정적인 사람들, 정말 사랑하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 우리에 대해서도 그렇게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유쾌한 일입니다. (시 133:1; 잠언 15:17)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있으면 반드시 이웃에 대한 참다운 사랑도 생기게 마련이며, 그러한 사랑이 그분의 의로운 새 질서에서 인생을 매우 즐겁게 해줄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받는 은혜를 입을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께 대한 그리고 동료 인간에 대한 사랑이 있음을 증명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우리의 이웃, 벗 그리고 직장 동료들이라면 참다운 평화와 안전 및 항구적인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요한 1서 4:7, 8, 20, 21.

31.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의 새 질서에서 살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지금 어떻게 해야 합니까?

31 참으로 그처럼 웅대한 전망이 당신 앞에 열려 있읍니다! 그러므로 실질적으로 지혜로운 행로는 그 전망을 붙드는 데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 보는 것입니다. 지금은, 당신의 생활을, 다가오는 “큰 환난”을 통과하여 살아남을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과 일치시켜야 할 때입니다.—베드로 후 3:11-13.

[연구 질문]

[98면 삽화]

온 땅이 낙원으로 변모될 날이 곧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