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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제1부)

독일 (제1부)

독일 (제1부)

독일은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쳐왔다. 그 국민은 부지런한 일군이며, 권세에 순종한다는 평판을 듣고 있다. 이러한 성품들이 이 나라의 경제 성장의 주요인이었으며, 그러므로 오늘날 6천만 이상의 인구를 포용하고 있는 서부 독일은 전세계에서 산업 대국의 하나로 손꼽힌다. 이 나라는 세계 전역을 상대로 통상을 하고 있으며, 번창 일로에 있는 경제적 요구에 부응하여 최근에는 ‘그리스’, ‘유고슬라비아’,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터키’ 등 여러 나라로부터 300만 이상의 “객원 노동자”를 자국 내로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다.

독일은 다른 면으로도 그 영향을 끼쳐 왔다. 1914년과 1918년 사이의 제 1차 세계 대전 중, 독일 군대는 동쪽으로는 ‘러시아’로, 서쪽으로는 ‘벨기에’를 통하여 ‘프랑스’로 침입하였다. 그 분쟁이 끝나기 전에, 그들은 전세계에서 24개국의 연합국을 상대로 전쟁을 하게 되었다. 독일은 패전하였다. 그러나, 불과 얼마되지 않아서, 동 전쟁의 참전 군인이었던 ‘아돌프 히틀러’가 강자로 부상하기 시작하였다. 1933년, 국가사회당 당수인 그는 독일의 수상이 되었다. 곧 그는 독일 국민을 공포의 시대로 몰아넣었으며; 1939년에는 제 1차 대전보다 훨씬 더 심한 희생과 파괴를 가져온 또 하나의 세계 대전으로 전세계를 끌어들였다.

이러한 모든 일이 발생하는 동안, 교회가 한 일은 무엇인가? 1933년에 ‘바티칸’과 ‘독일’ 당국 사이에 체결된 정교조약에 따라 매 일요일, ‘가톨릭’ 교직자들은 독일 제국 위에 하늘의 축복을 기원하였다. ‘프로테스탄트’ 교직자들은 이에 항의하였는가? 그와는 반대로, 1933년 그들도 일치하여 ‘나치’ 국가에 절대적인 지지를 맹세하였다. 그리고 제 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지 오랜 후인 1941년, 독일 ‘마인츠’의 ‘프로테스탄트’계의 복음주의파 교회는 독일 국민에게 ‘아돌프 히틀러’를 주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였던 것이다.

초기의 종교적 발전

흥미롭게도,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가 자기가 믿는 바 하나님의 말씀과 어긋난다고 생각되는 행위에 항의하여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에 95개조의 반박문을 못박은 것은 이곳 독일에서의 일이다. 그러나 동 종교상의 항의는 곧 정치적인 이익과 혼합되었으며, 이미 20세기가 도래하기 오래 전에 ‘가톨릭’ 교회 뿐만 아니라 ‘프로테스탄트’ 조직들도 스스로가 세상의 일부임을 명백히 나타내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 나라”를 천적 왕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실 때가 가까와 옴에 따라, 세계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독일에서도 하나의 사업이 수행되어야 하였다. (계시 11:15)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에 대하여 진정한 믿음을 두고 있는 사람들을 부르는 사업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참 제자들이 되기 위하여는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여야 함을 인식해야 하였다. (요한 17:16; 요한 1서 5:19) 그 이유는? 그들은 어떠한 인간 정부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유일한 희망으로서 하나님의 ‘메시야’ 왕국을 선포해야 하였기 때문이다. (마태 24:14; 다니엘 7:13, 14) 누가 이 기회를 포착할 것인가?

1870년대에, 미국에서, ‘찰스 테이즈 럿셀’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깊은 관심을 가진 일단의 성서 연구생들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배운 놀라운 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 주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였다. 사업이 진전되고, 성서 서적의 배부율이 확장되어 감에 따라, 현재 ‘펜실베이니아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라고 알려져 있는 법인체를 조직할 필요가 있게 되었으며, ‘럿셀’ 형제가 초대 회장이 되었다.

지구상 끝까지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일의 중요성을 인식한 ‘왙취 타워 협회’는, 1891년 사업 확장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한 ‘럿셀’ 형제의 해외 여행을 마련하였다. (사도 1:8) 동 여행 도중 ‘럿셀’ 형제는 ‘베를린’과 ‘라이프찌히’를 방문하였다. 그러나, 그는 후에 이렇게 보고하였다. “우리는 ··· ‘이탈리아’ 혹은 ‘오스트리아’ 혹은 독일에서 우리가 추수 사업에 희망을 둘 아무런 징후도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돌아온 다음, 몇가지 서책과 ‘팜프렛’을 독일어로 인쇄하기 위한 마련을 하였다. 독일에서 미국으로 이주해 온 사람들 중 협회의 서적을 읽은 사람들이 그러한 서적을 독일에 있는 친척들과 친구들에게 보내서, 그들의 성서 연구용으로 사용하도록 격려하였다.

최초의 독일어 판 「‘시온’의 파수대와 그리스도의 임재의 전령」이 ‘펜실베이니아’ 주, ‘알레게니’(미국)에서 발행된 것은 수년 후인 1897년이었다. ‘찰스 티. 럿셀’이 주필이었으며, 부편집인은 ‘오토 아. 쾨티쯔’였다. 그 무렵에 독일어판 「천년기 새벽」의 첫 3권이 이미 미국에서 인쇄되었다.

독일 및 ‘유럽’의 다른 지역으로의 발송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베를린’의 ‘뉘른베르게르 쉬트라세’ 66에 서적 보관소를 개설하였다. ‘마르가레테 기이세케’ 자매가 이를 관리하면서 「‘시온’의 파수대」 매호 500부씩을 정기적으로 우편 발송하는 일을 돌보았다. 1899년 초에 동 서적 보관소는 ‘베를린’에서 ‘브레멘-베스트팔렌’으로 이전되었다.

느린 시작

1898년도 중, 증가된 노력이 가하여졌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상황은 매우 부진하였기 때문에 협회는 이러한 성명을 발표하게 되었다. “비록 우리가 우리의 친애하는 독자들의 관심과 열의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우리는 지난해의 「파수대」지의 주문량은 기대했던 만큼에 이르지 못하였으며, 따라서 우리는 「파수대」 인쇄를 완전히 중단할 것인가 혹은 두 달이나 석 달에 한 번씩 발행할 것인가를 숙고하고 있음을 그들에게 공고하지 않을 수 없다.” 얼마 동안 「파수대」의 지면은 배로 증면되어 매 3개월마다 한 호씩 인쇄되었다.

비록 별로 뛰어난 결과는 나타나지 않았으나, 기울인 노력이 전혀 헛된 것만은 아니었다. 능률을 높이기 위한 대책의 하나로 1902년 ‘엘베르펠트’(‘부페르탈’)에서 ‘헨닝스’ 형제의 책임하에 하나의 사무소를 개설하였다. 1903년 10월에 ‘럿셀’ 형제는 감독 임무를 대행하도록 ‘쾨티쯔’ 형제를 독일로 보냈으며, ‘헨닝스’ 형제는 특별한 임명을 받고 ‘오스트레일리아’로 파견되었다. ‘쾨티쯔’ 형제는 자기 부모와 함께 독일에서 미국으로 이주했었으며, 1892년 봄에 미국에서 여호와를 섬기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는 한 차례의 짧은 중단 기간을 제외하고는 ‘럿셀’ 형제가 그를 독일로 파견할 때까지 독일어 판 「파수대」의 부편집인으로서 계속 봉사하였다. 그러나—본부의 견해로서는—1903년의 결과도 여전히 불만족스러운 것이었다. 동기간을 다룬 연례 보고는 이러하였다. “독일 지부는 상당히 순조로운 상태하에서 개설되었으나, 우리가 희망하던 바에는 미흡하다. 독일 형제들은 ‘몸’과 ‘추수’ 사업의 단일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 그러나, 밭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며, 하나님께 바쳐진 시간과 돈을 사용할 더 좋은 밭이 있는지의 여부에 대한 인도를 주께 의탁하면서, 1904년에도 맡은 사명을 계속 수행하도록 제안한다.”

독일에서의 그 시기는 좋은 소식을 전파하기가 어려운 기간이었다. 종교 및 정치적 적들이 이미 등장하였었다. 1871년에 독일 제국의 건립과 함께 국가주의가 꽃피기 시작하였으며, 정치가들 뿐만 아니라 종교 지도자들도 이의 고취를 선도하고 있었다. 교회 내에서는 “우리는 미국의 것이 아닌 독일의 기독교를 원한다”는 외침과 그와 유사한 다른 ‘슬로간’을 부르짓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겨우 자라기 시작한 진리의 연약한 싹은 마치 갑작스러운 봄 서리를 맞은 것과 같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기울인 노력이 헛된 것만은 아니었음을 보여 주는 최초의 증거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최초의 회중들

1902년, 한 그리스도인 자매가 ‘슈발츠발트’ 동쪽에 위치한 ‘타일핑겐’으로 이사하였다. ‘스위스’에서 진리를 배운 그 자매는 이제 ‘타이핑겐’ 주민들에게 그것을 전해 주려고 노력하였던 것이다. 이 자매의 이름은 ‘마르가레데 데무트’였지만, 그가 항상 새로운 “황금 시대”에 관하여 이야기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방 주민들은 그를 “골덴(황금) 그레틀레”라고 불렀다. 그러한 활동의 결과, 그는 한 남자와 접촉하게 되었는데, 그는 자기의 여동생 및 두명의 친구와 함께 진리를 찾고 있었다. 그들은 감리교회에서 진리를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자매가 자기들의 집에 남겨주고 간 한 부의 책자를 읽은 후, 그들은 즉시 편지를 써서 「천년기 새벽」을 요청하였다. 그들은 인근 지역 사회 전역에서 경건한 사람들로 알려져 있었고, 바른 행실로 존경을 받고 있었다. 마침내 그 곳에서 최초의 회중들 중 하나가 조직되었으며, 그 회중은 지방 사람들 간에 “천년기 회중”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들 그리스도인 형제들을 지원한 사람들 중에 ‘로사 묄’이라는 한 자매가 있었다. 그는 열심히 모든 이웃 사람들에게 “천년기”에 관하여 전파하였기 때문에, 곧 “천년 ‘뢰슬레’”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현재 89세인 이 자매는, ‘라벤스브뤼크’에 있던 ‘히틀러’의 집단 수용소에서 보낸 8년을 포함하여, 60년 이상 여호와를 섬겨 왔다.

진리의 씨는 ‘콜론’ 동북쪽 산악지대에서도 싹트기 시작하였다. 1900년경에 ‘왙취 타워 협회’의 한 대표자가 ‘스위스’에서 이 지방으로 이사해 왔던 것이다. 그의 이름은 ‘라우페르’였다. ‘베르멜키르헨’에서 그는 80세의 ‘고틀리입 파아스’와 장로이자 교회 이사회의 회원인 ‘오토 브로시우스’ 및 그의 아내 ‘마틸데’를 만났다. 그들은 진리를 찾고 있었는데, ‘왙취 타워’ 출판물을 연구한 다음에 진리를 발견하였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들은 즉시 ‘베르멜스키르헨’의 한 식당에서 집회들을 조직하였다. ‘파아스’ 가족과 ‘브로시우스’ 가족의 많은 성원들이 참석하였으며, 때로는 70내지 80명이 참석하게 되었다. 그 뒤 얼마 후 ‘고틀리입 파아스’는 사망하였다. 그러나, 그는 임종하는 자리에서 「파수대」를 움켜쥐고 “이것이야말로 진리이다. 이것에 고착하도록 하라”고 말하였다.

그 무렵, ‘베스트팔리아’, ‘뤼베케’ 군에서는 여러 지방에서 온 평균 25명의 남녀가 하나님의 말씀을 숙고하기 위하여 함께 모이고 있었다. 그들은 ‘프로테스탄트’ 교회에 속해 있었지만, 열심히 다니지는 않았었는데, 이는 그들이 오히려 불만을 안고 집에 돌아오게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고, 목사가 지옥불에 관하여 설교할 때에는 특히 그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한 이웃 사람이 경매에 참석하기 위한 ‘자아르브뤼켄’으로의 여행 도중 기차에서 불타는 지옥이 없다고 설명하고 있는 책자 한 부를 발견하였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경건한 백성”이라고 호칭하던 자기 이웃 사람들을 위한 책이라고 생각한 그는 집으로 돌아온 다음, 그것을 그들에게 전해 주었다. 그들은 즉시 구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서적을 주문하였으며, 그것을 자기들의 연구 재료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비록 그들이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떠나고, 침례를 받게 되기까지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지만, 그들은 ‘왙취 타워 협회’가 파견한 여행하는 순례자 형제들의 정기적인 방문을 즐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겔렌베크’에 한 회중의 기초가 놓였으며, 그것은 다른 많은 회중의 “어머니 회중”이 되었다.

다른 지역에서도 성장은 계속되고 있었다. 1902년, ‘쿠노프’란 이름의 지주이자, 낙농업자인 한 사람이 진리를 받고 ‘베를린’ 동부 지역에서 회중들의 기반을 닦았다. 이와 거의 동시에, ‘드레스덴’에서는 철도 연변의 한 상점 관리인인 ‘미클리히’ 형제와 그의 아내가 진리를 받았다. 그 곳에서 회중은 급속히 성장하여 1920년대에는 1,000명 이상의 형제 자매를 포용하는 그때까지 생겨난 독일의 회중들 가운데서는 가장 큰 회중이 되었다.

좋은 소식의 전파를 촉진시킴

형제들은 많은 비용이 드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시온’의 파수대」의 견본지를 신문에 삽입하여 배부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한 계획이 얼마나 큰 축복을 받았는지 접수된 몇몇 편지에서 나타나고 있다. 여기 그 한 예가 있다.

“본인은 오늘 ‘틸시테르 자이퉁’지에 삽입되어 온 귀회의 「파수대」의 견본지를 완전히 읽어 보았읍니다. 본인의 관심은 ··· 증가되었으며, 귀회의 출판물들을 통하여 죽음과 지옥의 문제에 관한 좀 더 폭넓은 해설을 듣기를 바랍니다. 본인에게 귀회의 광고지에서 언급한 서책을 보내 주시길 바랍니다. ··· ‘페. 요트.’, 동 ‘프로이센.’”

1905년 4월호 「파수대」는 그 활동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50만부 이상의 「파수대」의 견본지가 배부되었으며, 그것을 계기로 사업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그로 인한 결과에 대하여 기뻐한다. 굶주린 수많은 영혼들이 응답하였으며, 정기적으로 「파수대」를 받는 사람의 수는 1,000명으로 증가하였다.”

하나님의 왕국에 관한 말씀이 가능한 모든 방법을 통하여 씨앗처럼 계속 뿌려짐에 따라, 점점 더 많은 결과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라우페르’ 형제를 비롯한 일부 형제들은 ‘콜포처’로서 일하기 시작하였으며, 그리하여 짧은 기간 내에 많은 구역을 돌게 되었다.

몇몇 사람들이 진리를 탐구하다

‘라우페르’ 형제가 연로한 침례교인 ‘쿠야트’란 한 신사의 집에서 마지막 잡지를 전한 것은 1905년 ‘베를린’ 근교에서 「파수대」지를 배부하며 활동하던 중이었다. 한편 그 신사의 아들인 ‘구스타프’는 얼마전 어떤 침례교 대회에 참석했었는데, 그 대회에서 ‘크라돌페르’란 이름의 침례교 전도사에 대한 단호한 경고의 소리를 듣고 크게 상심해서 돌아와 있었다. 그런데 그 전도사에 대한 그러한 경고 발언이 있었던 것은 그가 얼마 전에 갑자기 영혼도 죽을 수 있다고 가르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에 관심을 갖게 된 ‘구스타프’는 성서를 조사해보기 시작하였고, 동시에 자기 아버지와 친구들에게도 그 문제에 관한 진리를 함께 탐구해보자고 권고하였다. 그러던 중, 1905년 8월, ‘구스타프 쿠야트’는 약 한시간 가량의 여행 시간을 요하는 곳에 떨어져 살고 있는 자기 아버지를 방문하였으며, 그때 그의 아버지는 ‘라우페르’ 형제가 남기고 간 한부의 「파수대」에 그의 관심을 이끌어 주었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그들이 찾고 있던 것이었다. 그것은 “때를 따[른] 양식”이었다.—마태 24:45.

‘쿠야트’는 즉시 여러 부의 「파수대」를 예약하였고, 그 중 5부씩은 다른 사람들에게 빌려 주기 시작하였다. 일정한 시간 후에는 그의 자녀들이 그 낱부의 잡지를 회수하여 또 다른 관심자들에게 빌려 주곤 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 소식을 알게 되었다. 그는 자연히 침례교인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으며, 1905년 섣달 그믐날, “당신은 마귀의 길을 가고 있오”란 말과 함께 그들에게서 제명되었다. 후에 10명 이상의 그의 친척이 침례교를 떠났다.

젊은 ‘쿠야트’는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함께 모이는 일을 폐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엘베르펠트’에 있는 ‘왙취 타워 협회’ 지부로 편지하여 그가 함께 만나서 연구할 수 있는 사람의 주소를 알려달라고 요청하였다. ‘쾨티쯔’ 형제가 알려 줄 수 있는 주소란 19세인 ‘베를린’의 ‘베른하르트 부흐홀쯔’의 주소 뿐이었는데, ‘쿠야트’는 즉시 그와 접촉하였다. 그 당시 ‘부흐홀쯔’는 “구세주 회중”이라고 불리우는 한 집단에 속해 있었다. 고아이자 사소한 범죄로 인하여 직업마저 잃은 그는 유독 자기만이 ‘베를린’에서 진리를 받기에 합당한 유일한 사람일 수는 없다는 생각에 「천년기 새벽」 전권을 막 불태워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쿠야트’는 자기와 함께 그 책들을 연구해 보자고 그를 격려하였으며, 후에는 그로 하여금 ‘콜포처’가 되도록 격려하였다. 얼마 후 ‘쿠야트’는 그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왔다.

이 구역에서의 좋은 소식 전파 사업을 위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하여 ‘쿠야트’는 새 집을 건축하려던 계획을 포기하였다. 그는 집을 지으려던 토지를 팔아서 자금을 마련하여 자기 아버지의 집의 두 개의 방을 집회를 볼 수 있도록 하나의 방으로 개조하는데 사용하였다. 1908년에 이르러서는 20명 내지 30명으로 구성된 한 작은 집단이 형성되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러시아’에 넓은 영지를 소유하고 있는 ‘토르노프’ 공이라는 한 귀족이 진리를 찾기 시작하였다. ‘러시아’의 귀족 사회의 방탕한 생활에 염증을 느낀 그는 ‘스위스’를 경유하여, ‘아프리카’로 가서 그곳에서 선교사로 봉사하기로 결정하였다. 떠나기 전날 저녁, 그는 ‘스위스’의 한 작은 산지의 예배당을 마지막으로 방문하였다. 마침 그가 그곳을 떠날 때, 어떤 사람이 그에게 ‘왙취 타워 협회’의 책자 한 권을 제공하였다. 이제 그는 ‘아프리카’로 향하는 대신, 그 다음 날 이러한 서적을 더 구하러 나서게 되었다. 그것은 1907년경의 일이었다.

1909년, 그는 자기의 가장 훌륭한 복장으로 단장을 하고, 또한 개인 종복을 대동하고 ‘베를린’ 회중에 나타났다. 그는 집회 장소가 너무 간소하며,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전혀 가식이나 거만함이 없음을 보고는 실망하였다. 그의 견해는 그러한 무한한 가치를 지닌 진리는 적절한 외관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들은 것들은 그에게 감명을 주었다. 수개월 후, 자기의 견해를 극복한 그는 다시 찾아왔다. 그러나 이제 그는 종복을 거느리지도 않고 훨씬 수수한 옷차림을 하고 왔기 때문에 그의 외모는 유별나게 보이지 않았다. 후에 그는, 만일 자기가 성서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지 않았더라면 아마 다시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린도 전 1:26-29.

이제 진리를 발견하였음을 확신한 그는 ‘러시아’로 돌아가서 자기의 전 토지를 팔고, ‘드레스덴’에 정착하였다. 기꺼이 검소한 생활을 영위하기로 한 그는 여호와의 봉사에 자기의 모든 부를 바칠 준비가 되었던 것이다.

잘 조직된 강연 여행

1913년, ‘토르노프’ 형제의 배려로 ‘바르멘’의 지부는 3개 반의 강연 여행을 마련하였는데, 그것은 대부분 그의 개인 자금으로 마련한 것이었다. ‘품메른’, ‘골로프’ 출신의 제과업자인, ‘힐데브란트’ 형제도 자기 집을 팔아서 그 비용을 충당하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5명의 형제와 4명의 젊은 자매로 구성된 여행하는 집단이 조직되었으며, 두개의 더 작은 집단으로 적당히 구분되었다.

“보급계” 겸 “출판물 관리자”로서 일한 ‘힐데브란트’ 형제가 3, 4명의 자매들과 선발 여행을 하였으며, 그들 중 두 자매는 오늘날도 고령으로서 왕국 권익을 확장시키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자기들과 또 며칠 후에 도착할 집단을 위한 숙박 문제를 해결한 다음, 그들은 우체국으로 발송된 책자들 및 다른 서적 상자를 찾아서 숙소로 운반해 왔다. 회관의 주소와 강연이 열릴 시간을 책자에 찍은 다음(따라서 책자들은 초대장의 기능도 수행하였다), 그것들을 ‘토르노프’ 형제가 이 목적을 위하여 구입한 가죽 함에 적어도 1,200 내지 1,600부의 큰 책자들이 들어갈 수 있도록 접어서 넣었다. 형제 자매들은 열심히 그것을 배부하였다. 실로 그들은 아침 8:30에는 첫 집에 도착하려고 노력하였으며 정오에 한시간 휴식을 취하고는 보통 저녁 7:00까지 일하였다. 차 한잔을 마시며 쉴 시간도 없었다.

며칠 후에 ‘부호홀쯔’, ‘토르노프’, ‘나겔’ 형제가 뒤따라 왔다. ‘부호홀쯔’ 형제가 연설하였다. 회관은 보통 만원을 이루곤 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주소를 남겨두고 돌아갔으므로, 세 형제들은 그들 모두를 방문하기 위하여 그 다음 날 분주히 일하곤 하였다.

두번째 여행으로 우리의 강연단은 ‘비텐베르크’와 ‘할레’를 지나 ‘함부르크’로 갔다. 세번째 여행은 ‘러시아’ 국경을 거치게 되었는데, 그리하여 제 1차 세계 대전의 발발 전에 좋은 소식이 이 동부 지역에도 전파되었던 것이다.

진리에 굳게 고착함

1908년경에는 ‘시게르란트’에서도 사업이 시작되었다. 현재 90세인 ‘오토 후고 라이’는 일찌기, 1905년, 직장 친구를 통하여 진리를 받았다. 2년 후 그는, 두 자녀와 함께 교회를 탈퇴하고 교회세 납부를 거부한 결과 가압류를 당하게 되었다. 가압류 집행관은 눈에 뜨이지 않는 가구의 뒷쪽에 딱지를 붙이려고 하였으나, ‘라이’ 형제는 모든 사람이 볼 수 있어야 하고, 또 보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항의하였다. 그는 그것을 보게 되는 모든 사람들에게 문제의 진상을 말해 주길 원하였던 것이다. 1908년에 그는 ‘바이덴아우’의 한 목욕탕에서 침례를 받고 ‘시겐’의 회중과 연합하기 시작하였다.

‘헤르만 헤르켄델’은 1905년 기차의 한 객실에서 발견한 책자를 통하여 진리를 알게 되었다. 그는 젊은 학교 선생이었는데, ‘예나’에 있는 대학교에서 공부를 계속하려고 그리로 여행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이 책자의 내용에 큰 감명을 받은 그는 즉시 ‘루터’교를 탈퇴하였다. 그 결과 그는 얼마 동안 학교에서 종교 과목을 교수하는 일을 정지당하였다. 그 뒤 그는 교직에서 해고되었다.

1909년, ‘헤르켄델’은 이미 회중들을 방문하는 일에 있어서 ‘쾨티쯔’ 형제의 대리로서 일하였으며, 그 해 연말에는, 여행하는 “순례자”의 한 사람으로 협회를 대표하여 여행하는 일과 관련하여 「파수대」에 최초로 그의 이름이 나타났다. 1911년에 그는 돈많은 한 투망 공장 소유자인 ‘얀데르’ 형제의 딸과 결혼하였다. 젊은 ‘헤르켄델’ 자매는 자기 아버지에게 지참금조로 가장 귀중한 신혼 여행을 위한 돈을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들은 그 돈을 ‘러시아’에 있는 독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왕국 소식을 전파하는 데 사용하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바르멘’ 사무소에서는 그들에게 독일어를 사용하는 ‘러시아’ 사람들의 주소를 제공하였다. 그 여행은 수개월간 계속되었고, 또한 참으로 힘든 일이었다. 기차 역으로부터 형제들과 관심자들이 살고 있는 곳까지 가는데 여러 시간이 걸리는 일도 비일비재하였는가 하면, 개인적인 교통 수단도 없었으며, 편지나 전보를 통한 통신도 믿을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역으로 그들을 마중나온다는 것도 좀처럼 희귀한 일이었다. 오늘날 그러한 신혼 여행을 떠날 결혼한 젊은 부부가 몇이나 될 것인가?

제 1차 세계 대전 중 짧은 기간 동안, ‘헤르켄델’ 형제는 ‘바르멘’ 사무소를 감독하는 특권을 맡았다. 그 뒤 전쟁이 끝난 다음 그는 또 다시 여행하는 순례자로서 봉사하였으며, 1926년 순례 여행 도중에 사망하였다.

1908년도 연례 보고가 집계되어, 이제 한 해 동안에 배부된 책자의 대부분이 「파수대」 독자들 스스로 직접 전한 것이며, 신문을 통한 것은 비교적 소수임을 최초로 기록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고무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18세의 한 젊은이가 ‘함부르크’에서 진리에 들어온 것은 후자의 방법에 의한 결과였다. 학교를 마친 다음 그는 성서를 이해하려는 성실한 욕망을 가지고 성서를 매일 읽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수년이 지난 1908년, 그는 “장자권의 매매”란 제목의 책자를 받아들게 되었다. 이 젊은이는 그 책에 매우 흥미를 느꼈다. 직장 동료들의 조롱에도 개의치 않고, 그는 즉시 ‘바르멘’에 소재한 협회로 편지를 써서 6권으로 된 「성서 연구」를 주문하였다.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그는 ‘쾨티쯔’ 형제를 만나는 기회를 갖게 되었는데, ‘쾨티쯔’ 형제는 언제고 ‘바르멘’에 오라고 그를 초대하였다. 그러자, 그 젊은이는 그렇게 ‘바르멘’을 방문하는 때에 자기가 침례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 초대를 수락하였다. 그 일은 그 뒤 1909년에 이루어졌다. 이제 우리의 형제가 된 그 젊은 친구를 역까지 배웅하면서 지부 감독자는 그가 기차에 오르기 전에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해 보지 않겠는가 하고 물었다. 젊은 형제는 준비를 갖춘 다음에 협회에 연락하겠노라고 대답하였다.

이 젊은 형제의 이름은 ‘하인리히 뒌게르’였다. 그는 즉시 자기의 일들을 조절하여 1910년 10월 1일에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였다. 그 뒤 수십년 동안 그는 ‘유럽’의 거의 모든 ‘벧엘’ 집의 거의 모든 부서에서 봉사하는 특권을 누렸다. 정기적으로 그는 협회를 대신하여 여행하였으며, 어려운 시기에는 종종 지부 감독자들을 대신하여 봉사하였다. 현재 그는 86세인데 중단없이 계속된 60년 이상의 전 시간 봉사의 기간이 지난 지금도 영육간의 건강을 즐기고 있다.

‘럿셀’ 형제가 다시 독일을 방문하다

1909년, 사무소를 ‘바르멘’에 소재한 더 넓은 건물로 옮김과 동시에 가일층의 조직적인 진전이 이루어졌다. 이것은 자연히 비용의 증가를 의미하였다. ‘쿠노프’ 형제는 지체하지 않고 자기의 토지를 팔아서 ‘벧엘’ 집을 꾸미는데 그 돈을 사용하였다. 1909년에는 영적 창달 면에서도 많은 진전이 있었다. 2월에 ‘작센’의 형제들은 ‘쾨티쯔’ 형제로 하여금 여러 차례의 공개 강연을 하도록 마련하였다. 6회에 걸쳐서 그는 적어도 250 내지 300명의 청중에게 증거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09년의 가장 괄목할 일은 오랫 동안 기다렸던 ‘럿셀’ 형제의 독일 방문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함브르크’에 잠간 머무른 다음, 그는 ‘베를린’에 도착하여 일단의 형제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들은 즉시 50 내지 60명의 형제들이 끈기있게 ‘럿셀’ 형제의 도착을 기다리는 아름답게 꾸민 대회장으로 갔다. ‘럿셀’ 형제는 ‘아담’이 잃어버린 것의 회복에 관하여 이야기하였으며, 특히 그리스도의 몸의 성원이 될 전망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받게 될 특권을 지적하였다. 함께 간단한 식사를 한 후, 그들은 공개 강연이 행하여질 ‘호헨졸레른’ 강당으로 갔다. 그곳은 만원이었다! 500명의 군중이 “죽은 자는 어디 있는가?”라는 연설을 들었다. 약 100명은 서 있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외의 400여명은 장소가 협소하여 되돌아갔으며, 강당 밖에서 그들에게 책자를 나누어 주었다. 그 후, ‘드레스덴’에서 적어도 900내지 1,000명이 ‘럿셀’ 형제의 두 시간의 공개 강연을 들었다. 여행은 ‘바르멘’으로 계속되었으며, 그곳에서 약 천명이 그의 연설을 들었다. 그 다음 오후에 120명의 형제들이 성서의 집에 모였으며, 그 날 저녁에 약 300명이 성서 질문에 대한 ‘럿셀’ 형제의 답을 듣기 위하여 함께 모였다. 이로써 ‘럿셀’ 형제의 독일 방문이 끝났으며, 그 날 저녁 11시가 조금 지난 후, 그는 ‘스위스’로 향하는 기차를 탔는데, ‘쮜리히’에서 2일간의 대회가 열리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해에 독일 형제들은 자기들의 자원을 사용하여 외부의 도움없이 독일에서의 왕국 사업을 지원할 것을 격려받았다. 그러나 연말 결산 결과, 헌금 총액은 9,841.89‘마르크’에 불과한 반면, 인쇄비, 우편료, 운송료, 신문에 삽입하기 위하여 든 비용, 공개 강연과 여행비, 임대료, 광열비 및 기타 비용의 총액은 41,490.60‘마르크’에 달하게 되어, 31,648.71‘마르크’의 결손이 생겼는데, 그것은 ‘브루클린’ 본부에서 보낸 돈으로 충당되었다. 이러한 사실로 말미암아, ‘럿셀’ 형제는 그의 연례 보고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협회는 진리를 반포하기 위하여 독일에서 굉장한 금액의 돈을 소비하였다. ··· 독일에서 기울인 노력은 다른 나라에서보다 비교적 크다. 헌신한 독일인들의 대다수가 이미 미국으로 이주하지 않은 이상—우리는 상응하는 결과를 기대해야 한다.”

‘럿셀’ 형제는 그의 1910년 세계 여행 도중 약 10시간의 짧은 시간 동안 ‘베를린’에 들려서 그의 도착을 기다리던 200명의 사람들에게 연설하였다.

대략 이 시기에, ‘베를린’ 출신의 전차 차장인 ‘에밀 첼만’이 상당한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어 들이기 시작하였다. 그는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성서를 읽거나 승객들에게 증거하였는데, 때로는 심지어 전차 정류장들 사이를 왕래하는 동안에도 그렇게 하였다. 한번은 읽는 일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다음 정류장을 말하는 대신, 자기가 막 읽고 있던 곳을 “시편 91편” 하고 외쳐서 승객들을 웃긴 일이 있었다. 곧 10명 이상의 동료 전차 차장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집회에 참석하였다. 이 작은, 그러나, 매우 활동적이었던 집단은 ‘베를린’에서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데 큰 몫을 담당하였다. 이 형제들의 일은 오전 5시에 시작되었지만, 본받을 만한 열심을 가진 그들은 종종 두 시간 일찍 전차 정거장으로 가서 가동할 전차 객석에 책자를 나누어 놓곤 하였다.

1911년은 “‘시온’주의와 예언”이란 제목의 ‘럿셀’ 형제의 연설로 특징을 이룬 해였는데 그것은 많은 경우에 청중의 분노를 일으켰다. 예를 들면, ‘베를린’에서는 소요가 일어나서, 약 1,400명의 사람들은 남아서 끝까지 ‘럿셀’ 형제의 연설을 경청한 반면, 거의 100명은 연설 도중 일찍 강당을 떠났던 것이다.

‘럿셀’ 형제는 다시 그의 여행 보고서에 독일에서의 사업의 진행상을 언급하여, 비록 ‘형제들의 수와 그들의 관심은 증가하였지만, 그는 많은 인구 및 바쳐진 노력과 소비한 돈을 고려할 때, 관심자들의 수자에 대하여 실망을 느꼈다’고 기술하였다. 사실상, 그 당시의 상황은 독일에서는 성장의 필수조건들이 예를 들어 미국에서처럼 양호하지 않았음을 지적해 주었다. 독일인의 많은 비율은 ‘가톨릭’교인이었고, 더 많은 부류는 사회주의자에 속해 있었으며, 대다수는 성서에 적대적이었고, 고등 교육을 받은 대다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었다.

‘럿셀’ 형제는 1912년 여름의 ‘유럽’ 여행 중, ‘뮨헨’, ‘라이헨바흐’, ‘드레스덴’, ‘베를린’, ‘바르멘’과 ‘키일’을 거쳤다. 공개 강연 연제로 그는 “무덤의 저쪽”이라는 매우 흥미있는 제목을 택하였다. 그것은 큰 현수막들에 의하여 광고되었는데, 그 위에는 영혼불멸과 지옥불의 교리를 가르치는 몇몇 교회들이 묘사되어 있었다. 전경에는 쇠줄에 감긴 커다란 성서가 그려져 있었는데 그 쇠줄은 한 곳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진 모양이었다. 뒷 배경에는 ‘럿셀’ 형제가 성서를 지적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러한 현수막들은 여러 도시에서 심한 소요를 유발시켰으며, 일부 경찰관들은 그것들을 현수하지 못하도록 금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뮨헨’, ‘드레스덴’ 및 ‘키일’에서는 1,500 내지 2,000명의 청중이 그 연설을 들으러 운집하였다.

그 공개 강연은 ‘베를린’에서도 널리 광고되었다. 특대판 신문 광고로 수 차례 크게 발표하였으며, 도처에 있는 광고판에 우리의 ‘플래카드’가 게시되었다. 그 외에도 모든 주요 신문의 배달 소년들이 그 연설 광고 활동에 동원되었다. 그들은 청색과 흰색의 바지를 입고, 턱걸이를 맨 모자를 경쾌하게 비스듬이 눌러쓰고, 앞뒤에 ‘플래카드’를 걸치고, ‘롤러 스케이트’를 타고 시가를 질주하였다. 이러한 소년들이 등장하게 되면, ‘베를린’의 모든 시민들은 어떤 큰 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 날 오후 일찍부터 거대한 군중이 ‘럿셀’ 형제의 연설을 청취하기 위하여 약 5,000명을 수용하는 그 도시에서 가장 큰 강당인 ‘프리드리히샤인’으로 몰려들기 시작한 것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개관하기 몇 시간 전부터 인근 전체 지역으로 사람들이 쇄도하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미증유의 군중으로 계속 불어났으며, 교통 시설은 더는 군중을 처리할 수 없게 되었다. 재정이 허락하는 사람들은 이륜 마차를 타고 왔다. 다른 많은 사람들은 교통 시설의 부족으로 그곳에 올 수도 없었다. 그 지역은 경찰에 의해 차단되었으며, 여러 가지로 추산한 바에 의하면, 입추의 여지없이 만장을 이룬 강당 문에서 되돌아 간 사람도 약 15,000 내지 20,000명은 되었을 것이다. 열정적인 형제 자매들은 그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강당에 입장할 수 없는 수천의 사람들에게 수천부의 책자 및 다량의 「성서 연구」와 다른 출판물을 배부하였다. 그러므로 ‘럿셀’ 형제는 이번 그의 마지막 ‘베를린’ 방문 중에 감명깊은 증거가 행하여졌음에 만족하면서 돌아갈 수 있었다.

다음 해인, 1913년은 가능한 한 더 많은 정력, 시간 및 돈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해 주는데 바치려는 성실한 욕망으로 특징을 이룬 한 해였다. “민중의 사자(Der Volksbote)”라고 불리우는 주간지에 ‘럿셀’ 형제의 연설들을 실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하기 위한 마련을 하였다. 맹인들을 위하여 점자 서적도 출판되었다. 협회는 또한 배부용 서적을 무료로 형제들에게 공급하려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럿셀’ 형제의 꽉 짜여진 계획은 그에게 1913년에 독일 방문을 허락하지 않았으나, 형제들은 그가 그 당시 협회의 법률 고문이었던, ‘러더포드’ 형제를 파견하였을 때 매우 기뻐하였다. 그의 연설들은 잘 진행되었고, 회관은 가는 곳마다 만원을 이루었다. 번번히 사람들을 되돌려 보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예를 들면, ‘드레스덴’에서는 강당의 좌석이 약 2,000개였는데, 장소의 부족으로 7,000 내지 8,000명은 되돌아갔다. 3,000명이 참석한 ‘베를린’에서의 연설 중에 소동이 일어났는데, 그 때에 난동군들이 너무 소음을 일으켜 ‘러더포드’ 형제의 연설을 통역하던 ‘쾨티쯔’ 형제 자신도 알아듣는 것이 어려웠다. 그 당시에는 확성 장치가 없었으며, 따라서 그러한 어려움 하에서 상황을 제어하는 데에는 강력한 목소리가 요구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쾨티쯔’ 형제는 굉장한 노력을 기울였으나, 그러한 상황을 어찌할 수 없었으며, 그러는 중 그의 폐가 상하여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즉시 한 형제가 단상으로 뛰어 올라가 강한 목소리로 “미국인들이 우리 독일인들을 어떻게 생각하겠읍니까?” 하고 소리쳤는데, 그것이 난동군들을 잠잠하게 한 모양이었다. ‘쾨티쯔’ 형제는 연설을 마쳤으나, 그를 알던 형제들은 그가 그 때 입은 영향으로부터 결코 완전한 회복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 해 연말에 특히 기뻤던 것은 사업 비용이 자진적인 헌금에 의하여 충당되고도 약간의 잉여금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독일의 형제들은 많은 사람들이 ‘추수기의 마지막 해’일 것이라고 생각하던 해인, 또 하나의 열렬한 활동의 해가 앞에 펼쳐져 있다는 확신을 안고 풍성한 축복이 가득찼던 한 해의 끝에 도달하게 되었던 것이다.

1914년—오래 기다렸던 해

이제 수많은 「파수대」 독자들이 수십년 동안 기대해 오던 역사적인 해, 1914년이 도래하였다. 그 해의 상반기는 전해와 다름 없이 조용하게 지나갔다. ‘유럽’에서 긴장의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것이 폭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왕국의 반대자들은 부정적인 발언을 하기 시작하였고, 성급하게도 자못 만족한듯이 “천년기 새벽파”의 패배를 선언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이 여러 해 동안 증거 사업에 참여해 온 사람들의 믿음을 흔들지는 못하였다.

그러는 사이 시간의 바퀴는 계속 돌아갔다. 몇몇 ‘유럽’ 국가에서는 “경우를 대비한” 군사적 책동이 수행되고 있었다. 사물들은 아직도 외관상 평온하게 보였으나, 훈련 중인 군인들의 발자국 소리는 어느 순간에라도 폭발할 태세에 있는 화산의 부글대는 소리같았다. 갑자기 전세계가 숨을 죽였다. ‘사라예보’에서 한 방의 총성이 울렸던 것이다. 세계 전역의 큰 도시에서 신문팔이 소년들이 “호외요! 호외!”라고 외치면서 거리를 누볐으며, 역사가들이 최초로 “세계 대전”이라고 이름지은 전쟁, 그 때까지의 인류 역사상 가장 살인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 전쟁은 마치 청천의 벽력같이 터졌으며, 갑자기 조롱자들은 잠잠해졌다. ‘뤼베케’의 ‘그라벤캄프’ 형제는 자기 아들들에게 “자, 이제 때는 왔다!”고 말하였는데, 전세계의 형제들은 비슷한 생각과 비슷한 말을 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사건들을 기다려 왔으며, 그렇다, 그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선언하도록 여호와의 임명을 받았던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인류를 위한 여호와의 형용할 수 없는 축복들의 전조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제 그들은 그들 자신의 눈으로 뒤를 돌아보고, 그들이 제시한 증거가 어떻게 실증되었는가를 볼 수 있었다. 한 예로 ‘다테’ 형제가 있었는데 1912년에 자기 아내와 함께 침례를 받은 그는 여러 해 후, 자기의 훌륭한 친구이자 형제였던 ‘프리츠 닷슬레르’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1954년 6월 23일, 나의 아내가 죽음의 잠에 들기 두 시간 반 전에, 사랑하는 병든 아내의 곁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보낸 두 시간 동안, 우리는 우리에게 항상 중요한 날이었던 오랜 옛날의 1914년 6월 28일을 회상하였다네. 그 날은 일요일이었고, 우리는 화창한 여름 날씨를 즐기고 있었지. 그 날 오후 우리는 ‘발코니’에서 ‘커피’를 마시며 짙푸른 하늘에 대하여 경탄하고 있었다네. 공기는 맑고 건조하였었지.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았지. 나는 일간 신문에 대해서 말을 꺼냈었네. 지구상 어느 곳에도 긴장이 맴돌고 있다는 내용은 찾아 볼 수 없었고, 모든 곳은 평온하였었지.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해에 그리스도의 통치의 시작의 보이는 징조를 기다리고 있었지. 신문들은 이미 의기양양하였고, 1914년의 세상의 끝을 예언한 참 신자들에 대한 욕설이 담긴 기사들을 계속 게재하였었지. 그러나, 1914년 6월 29일, 월요일, 그 날 아침 일찍, 우리는 일간 신문을 펼쳐들고 ‘‘오스트리아’ 황태자 ‘사라예보’에서 피살’이라고 적힌 표제를 읽었지. 밤새 정치계의 하늘이 어두워진 것일세. 4주 후에 제 1차 세계 대전이 터졌지. 이제 우리의 반대자들의 눈에는 우리가 갑자기 가장 위대한 예언자들로 비치게 되었다네.”

여호와의 계시된 뜻을 행하고자 하는 이들 충성스러운 종들의 자진성은 그들로 1914년이 도래했다가 지나가는 그때에 그들 앞에는 아직도 더 큰 일이 펼쳐져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도록 도움을 주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인도하셨으며, 그래서 그의 목적은 수행될 수 있었다. “창조의 사진-극”을 통하여 수행된 굉장한 증거를 위한 준비 작업이 한 좋은 예이다. 필수 장비, ‘필름’, ‘슬라이드’ 및 지시서가 대전의 발발 조금 전에 독일에 도착하였다. 어떤 부분들은 더 일찍 도착해서 1914년 4월 12일에 이미 ‘바르멘’의 한 대회에서 상영되었고, 5월 31일부터 6월 2일에는 ‘드레스덴’에서 상영되었는데,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항가리’에서 온 형제들 다수가 참석하였다.

대전의 발발 3주일 전에 ‘필름’의 나머지 부분이 독일에 도착하였을 때 협회는 즉시 ‘엘베르펠트’ 시공관에서 그 사진-극을 상영할 마련을 하였다. 그 사진-극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고려할 때, 그 회관은 너무 협소하였으므로 두 차례의 상영을 해야 하였다. 그러나, 대대적인 첫선을 보인 곳은 미쳐 입장하지 못한 관중에게 하루에 두 차례의 상영을 한 ‘베를린’이었다. 동 연속물(4일에 걸쳐서 4부분으로 상영됨)을 1914년 11월 1일부터 11월 23일까지 다섯 차례 상영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그 전쟁은 여러 가지 문제를 몰고 왔으며, 그 중 첫 번째 것은 미국과의 연결이 일시 두절되는 일이었다.

사업의 감독 업무에 관련된 문제들

독일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제 사업의 감독 업무에 관련된 문제들로 특징을 이룬 큰 역경의 시기에 돌입하였다. ‘럿셀’ 형제가 ‘쾨티쯔’ 형제를 독일로 파견하여 이 곳에서의 사업에 감독 업무를 수행하도록 권한을 부여한 지 약 11년 후인 1914년 말, 그는 갑자기 여러 방향으로부터 공격과 부적당하다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이것은 형제들 사이에 불안감을 조성하였고 ‘럿셀’ 형제는 그의 봉사 직위를 면제해 주었다.

독일에서 더 많은 순례자 형제들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럿셀’ 형제는 비록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으나, 「파수대」를 알게 된지 불과 1년 밖에 안되는 전직 감리교 전도사인, ‘콘라드 빈켈레’ 형제를 이 직책에서 봉사하도록 미국으로부터 파견하였다. ‘빈켈레’ 형제는 종들 사이에서 문제가 심각해지기 시작할 무렵 독일에 도착하였으며, 1915년에 그는 독일에서의 사업의 감독 업무를 위임받게 되었다.

그러나, ‘빈켈레’ 형제와 자매는 곧 미국으로 되돌아 갔다. 그들의 송별사는 10월호 「파수대」의 마지막 면에 ‘환경들은 그들의 자원이 극한 상황에 이르게 만들었다’는 논평과 함께 굵은 활자로 찍혀 있었다. 이 “환경들”이란 아마 1915년에 계속 증가하던 어려움들을 말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10월이 되자, ‘럿셀’ 형제는 그 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그것을 타개하기 위하여 필요한 조처를 강구하지 않을 수 없음을 느끼게 되었다. “독일의 성경 연구생들에 대한 ‘럿셀’ 형제의 한 개인 편지”란 제목의 한 편지의 내용은 이러하였다.

“‘브루클린’, 1915년 10월

“친애하는 형제들:

“본인은 종종 기도하는 가운데 여러분을 생각하며, 주께서 여러분을 축복하시길 진정으로 염원해 마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러분에게 직접 간접으로 영향을 주는 전쟁의 환란 중에 있는 여러분을 동정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또한 독일에서의 진리의 권익에 미쳐지는 환란에 관해서도 여러분에 대한 우리의 연민을 표현하기를 원합니다. 서로를 판단하거나 최종적인 판결을 선언함으로써 작별하는 것은 우리의 할 일이 아닙니다. 만일 잘못한 형제가 회개한다면, 우리는 최종적인 판결과 징벌은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시리라’고 말씀하신 주께 맡기지 않으면 안됩니다. 히브리 10:30.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 및 합당한 행실을 위하여 그리고 협회의 대표자들에 의하여 행사되는 영향력을 고려하여, 독일 주재 협회의 새로운 대표자들을 임명하는 것이 필요한 것같습니다. 전쟁은 상당한 불편을 유발시켰고, 우편과 전신 봉사는 비정규적이므로 얼마 동안 ‘바르멘’의 지휘권과 관련된 다소의 오해가 일어났던 것도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하는 ‘빈켈레’ 형제가 최선을 다하였으며, 그러한 상황 하에서 문제들을 올바르게 처리하였다고 믿는 바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빈켈레’ 형제는 미국으로 돌아왔읍니다.

“우리는 독일의 형제들에게 금후로 모든 협회의 업무는 세 형제들 ‘에른스트 하엔델레르’, ‘프리쯔 크리스트만’ 및 ‘라인하르트 블로흐만’으로 구성되는 위원회에 의하여 조정될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

“친애하는 형제들, 본인은 여러분이 모든 면으로 ‘바르멘’의 새 지도체와 협조하고 지지하기를 권면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임으로 사도가 우리에게 훈계한 바와 같이, 몸 안의 분열을 허용치 않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이 마련도 계획대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였다. 왜냐 하면, ‘블로흐만’ 형제는 ‘바르멘’을 떠나라는 압력을 받았으며, ‘하엔델레르’ 형제는 ‘럿셀’ 형제가 독일에 도착하기도 전에 사망하였기 때문이다. 뒤이은 수개월 동안에도 긴장은 멈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1916년 2월 ‘럿셀’ 형제는 ‘하. 헤르켄델’, ‘오. 아. 쾨티쯔’, ‘에프. 크리스트만’, ‘체. 슈톨만’ 및 ‘에. 홰클레’ 다섯 형제로 구성된 “감독 위원회”를 임명하였다.

그러나, 이 “감독 위원회” 마련도 오래 지속하지 못하였다. 위원회가 재구성된지 불과 수개월 후, 그러는 동안 ‘유럽’으로 돌아와 ‘스위스’, ‘쮜리히’에 거주하게 된 ‘빈켈레’ 형제가 독일, ‘스위스’ 및 ‘네델란드’에 대한 협회의 법적 대표자로서 임명되었으며, 반면에 ‘헤르켄델’ 형제는 편집 업무에 대한 책임을 맡게 되었다.

1914년에 ‘빈켈레’ 형제에 의하여 대치된 ‘쾨티쯔’ 형제는 그 때부터 사진-극의 상영을 맡아왔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조직의 내부적 평화에 기여하기보다는 자기들의 이기적인 욕망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형제들의 공격의 대상이었다. 수년동안 ‘쾨티쯔’ 형제와 함께 일해 온 ‘엘리자베트 랑크’는 한 때 어느 회관에서 사진-극이 상영되고 있는 동안 그가 근처의 한 공원 ‘벤치’에서 수심에 잠겨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한 일이 있다. 그는 명백히 자기에게 마지막 남은 봉사의 특권마저 강탈해버리려는 계획 하에 쓰여진 비난의 편지를 또 받았다고 그에게 말하였다. 그는 독일에서의 사업의 책임자로서 임명되기 전 10여년 동안 ‘럿셀’ 형제 옆에서 일하는 특권을 가졌던 일을 회상하여 말하였다. 그러나, 그는 종종 자기가 그러한 신임을 받을 가치가 있었는가에 대하여 반성하곤 하였다. 그러나, 그는 “만일 내가 나의 24년간의 활동을 통하여 단 한 사람이라도 144,000에 속하기에 합당한 자임을 증명하도록 도왔다면, 나는 144,000분의 1의 일을 수행하는 특권을 가진 셈”이라는 생각으로 자신을 위로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계속적인 공격이 ‘베를린’에서 그가 입은 폐의 상처로 말미암아 이미 매우 허약해진 그의 건강을 좀먹어 들어갔으리라는 것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하여, 1916년 9월 24일, 그는 43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파수대」를 통한 협회의 광고는 그의 “충성스러움”에 대하여 언급하고, “모든 사랑하는 형제들은 그의 열심, 그의 인내, 그의 꾸준함, 그의 강한 믿음 및 의지, 그의 헌신과 충실한 임무 수행을 인식하며 감사한다”고 말하였다.

얼마 후, 독일 형제들은 ‘쾨티쯔’ 형제가 사망한지 약 5주일 후인 10월 31일에 ‘럿셀’ 형제도 그의 지적 행로를 마쳤다는 전언을 받았다. 어떤 사람들은 이에 지나치게 낙담하여 자기들의 행로를 중단하고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대다수는 ‘럿셀’ 형제의 사망의 소식을 그들이 시작한 사업을 계속하는 데 더욱 열심히 자기들의 정력과 시간을 바치게 하는 격려제로 받아들였다.

전쟁은 감독의 직책의 반복적인 변경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1916년 10월부터 1917년 2월까지 ‘파울 발쩨라이트’가 이 직책에서 봉사하였으며, 1917년 2월부터 1918년 1월까지는 ‘헤르켄델’ 형제가, 1918년 1월부터 1920년 1월까지는 ‘엠. 쿠노프’ 형제가 일하였는데, 그 뒤에는 ‘발쩨라이트’ 형제로 대치되었다.

제 일차 세계 대전의 발발은 마귀에게 형제들 사이에 중립 문제에 대한 의문을 야기시키는 기회를 제공하였는데, 그러한 의문은 ‘뒌게르’, ‘바산’ 및 ‘헤스’ 형제들 모두가 징집 연령에 있었던 ‘바르멘’의 성서의 집에서도 나타났다. ‘뒌게르’와 ‘바산’ 형제는 충성의 서약을 하거나 무기를 들지 않을 결심이었으나, ‘헤스’ 형제는 우유부단하였다. 결국 그는 하나님의 왕국에 희망을 두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벨기에’의 전선으로 출정하였다.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후에 ‘뒌게르’와 ‘바산’ 형제에게도 소집장이 발부되었다. ‘바산’ 형제는 즉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으나, ‘뒌게르’ 형제는 면제되지 않고, 오히려 군 사무실에서 기록을 정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것은 그 당시의 그 문제에 대한 그의 이해와 어긋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기꺼이 그 일을 하였다. 그러나, 그가 비상시에는 모병에 응하지 않고 집총도 거부하겠다고 말했을 때, 순례자 형제의 하나였던 ‘발쩨라이트’ 형제는 ‘뒌게르’ 형제와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발쩨라이트’ 형제는 “만일 당신이 그러한 입장을 취한다면 사업에 어떤 결과가 미칠지 인식합니까?”라는 질문으로서 이러한 불일치를 나타내었다.

그들 사이에 만연한 그러한 의문 때문에 모든 형제들이 열국의 문제에 대한 엄정한 그리스도인의 중립의 행로를 따르지 못했다. 상당수의 형제들이 군 복무를 이행하였고 전선에서 싸웠다. 또 어떤 사람들은 전투에 참가하기는 거부하였으나, 군 위생대에서는 기꺼이 복무하였다. 그러나, 확고한 입장을 취한 어떤 사람들은 여하한 방법으로도 참가하길 거부하였고,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한스 흴테르호프’는 그가 취한 입장의 결과로 잔인한 허위극의 대상이 되었었는데 그는 총살 집행 분대 앞으로 끌려가는 중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운동장으로 끌려갔던 것이다. 마침내, 그는 군사 재판에 의하여 2년의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그리스도인 중립이라는 그러한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그러한 의문이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우리는 여호와께서 자비롭게도 계속 그들과 상대하셨다는 사실에 대하여 확실히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불리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계속된 확장

창조의 사진-극은 이 시기의 확장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것은 이제 ‘키일’ 같은 더 작은 도시에서 상영되고 있었는데, ‘키일’에서는 곧 우리의 자매가 된 매우 부자인 한 숙녀가 매우 감명을 받고 즉시 2,000‘마르크’라는 거금을 당시 약 45명 내지 50명이 모이던 회중에 기부하므로, 그들은 더 좋은 회관을 구할 수 있었다.

‘크리스티안 쾬닝게르’로 하여금 관심을 갖게 만든 것은 「시대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이란 책이었다. 모종의 가족적인 우환이 그로 하여금 ‘에텔’이란 이름의 한 저명한 성서 연구생에게 자기를 방문해달라고 요청하게 움직였으며, 그리하여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는데, 이 연구에 그의 아내도 후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들은 다음 단계로 가까운 여러 읍에 살고 있는 다른 관심자들과 「파수대」 독자들의 주소를 요청하였다. 그들은 ‘에텔’ 형제의 집에서 제공되는 연설에 이웃, 친구 및 친지들을 함께 초대하였다. ‘쾬닝게르’ 형제를 비롯한 다른 형제들은 그들의 힘이 닿는대로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연사들을 ‘에쉬바일레르’와 ‘만하임’, 후에는 ‘루드비히샤펜’으로도 초치하였으며, 그 곳에서 그들의 연설은 구두로 또는 신문, 벽보판 및 상점 ‘윈도우’에 게시된 ‘플래카드’에 의해서 광고되었다.

1917년 ‘베를린’ 출신인 ‘벤츠케’ 형제는 그 도시의 경계 밖에까지 진리를 전파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는 책이 가득한 배낭을 메고, ‘베를린’ 서쪽으로 약 50‘킬로미터’에 위치한 ‘브란덴브르크’로 걸어가서 며칠이건 서적을 다 전한 후에야 돌아오곤 하였다. 같은 무렵에 순례자 형제들이 ‘단찌히’ 시를 방문하였으며 ‘루나우’ 형제의 집에서 그곳 회중의 기초를 놓았다.

사업에 중단이 없었다

형제들은 1918년에 관하여 여러 가지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 해가 자기들의 지적 행로의 마지막 해가 될 것이라고 확신해왔으며 그들은 자기들의 친구와 친지들에게 이러한 희망을 되풀이하여 이야기하곤 하였다. 예를 들면, ‘바르멘’의 ‘쉰케’ 자매는 자기의 직장 동료들에게 자기가 언젠가 출근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기가 “본향으로 옮겨”진 때문일 것이라고 설명하곤 하였다. 그러나 자기들의 기대가 성취되지 않고 지나가자 어떤 사람들은 1914년에 일부 사람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실망하여 물러나고 말았다. 다른 사람들은 이제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 의아해 하였다.

아직도 수행되어야 할 일이 있었다. 대부분의 형제들의 마음의 염원은 여호와께 거룩한 봉사를 바치는 것이었음으로 이에 대하여 기뻐하였다. 그들은 독일이 처해 있는 어려운 시대인 지금 전보다 듣는 귀를 더 많이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알게 되었다. 이것은 ‘프리츠 빈클레르’(‘베를린’ 출신)의 경험에 의하여 실증된다.

1919년에 그는 ‘할레’(‘사알레’)에 직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매 토요일이면 ‘게라’의 자기 부모에게로 기차 여행을 하곤 하였다. 어느 토요일, 한 남자와 그의 딸이 한 역에서 기차를 탓는데, 그는 불룩한 배낭을, 그리고 그의 딸은 무엇인지 가득 들어있는 가방을 들고 있었다. 기차가 미쳐 출발하기도 전에 ‘자이츠’의 한 형제인 그 남자는 「시대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 책이 꽉 들어찬 자기 배낭을 열고는 그 책의 첫 면에 있는 “시대의 도표”를 사용하여 여행자들에게 연설을 하였다. 결론에서 그는 그들 모두에게 「성서 연구」의 첫 권을 제공하였다. 몇 정거장을 지난 후 그가 기차를 내릴 때 그의 배낭은 텅 비워졌고, 그의 딸의 가방도 거의 반쯤 비어있었다. 이 경험이 ‘프리츠 빈클레르’로 하여금 한 공개 강연에 참석하게 하였으며, 그것을 통하여 그는 진리의 지식에 이르게 되었다.

추려내는 일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러한 좋은 소식의 전파 방법에 동조한 것은 아니다. 특히 회중에서 민주적으로 선출된 ‘장로들’ 중 어떤 사람들 가운데는 그 사업을 증진시키기보다는 방해하는 일을 더 많이 하는 자들이 있었다. 따라서 형제들에게 그들과 논쟁하지 말라고 경고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그들로 하여금 자기 길로 가게 버려두고, 쓸데없는 논쟁에 잘못 허비될 수 있는 시간을 왕국 전도에 사용하는 것이 더 좋은 것이었다. 「파수대」는 그러한 추려내는 일이 닥칠 것이라는 점에 아무런 의문도 남기지 않았었으며, 그러한 이유로 그리스도인들은 분파와 논쟁을 일으키고, 그들로부터 떨어져나가는 자들을 주의하라는 훈계를 받았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1919년에 이웃 나라들에서 얼마의 변화가 필요케 되었고, 그러한 변화는 독일의 형제들과 사업에 영향을 끼쳤다. 예를 들면, 그 해에 ‘라우페르’ 형제는 사물에 대한 자신의 개념에 따라 일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왙취 타워 협회’에 속한 것이지만, 수년 동안 자기가 관리하던 서적과 잡지의 비축품을 반환하도록 요청을 받게 되었다.

1919년 말엽에 더 큰 문제가 나타났다. ‘럿셀’ 형제는 수년 전에 ‘제네바’로부터 ‘프랑스-벨기에’의 사업을 돌보도록 ‘아. 프라이타그’를 임명하였다. 그의 권한은 영문 「파수대」와 「성서 연구」 ‘프랑스’어 번역판을 인쇄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권한을 오용하였으며, 자기 자신의 서적을 발행하기 시작하였고, 그리하여 형제들 사이에 상당한 혼란을 일으켰다. ‘프라이타그’는 그 직위에서 해임되고, 협회 사무소도 해체되면서, ‘에. 자우그’ 형제가 인도하는 그리고 ‘빈켈레’ 형제의 전반적인 감독을 받는 새로운 사무소가 개설되었다.

그러는 동안, ‘프라이타그’ 지지자들은 별도의 집회를 열고, 독일의 형제들 사이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으며, 그들 중의 얼마는 ‘프라이타그’가 제기한 협회에 대한 비평, 중상 및 거짓 가르침을 전파한다는 비난으로 말미암아 자기들의 명확한 시각을 상실하였다. 이에 필요성을 느낀 ‘빈켈레’ 형제는 1920년 9월에 4면의 회람을 통하여 ‘프라이타그’의 거짓 비난을 논파하고, 독일에서 제기한 많은 질문에 대답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라이타그’가 뿌린 의심의 씨앗은 움트기 시작하였으며, 굳세지 않은 자들 중의 다수가 그를 따르면서 자기들 나름의 회중을 따로 세웠다. 이 집단은 오늘날까지 독일에 존재하고 있다.

큰 봉사 임명을 기대하고

1919년 1월부터 시작하여 「파수대」는 다시 16면판으로, 그리고 표제면(이것은 비용을 줄이기 위하여 전시에는 생략되었었음)을 갖추고 발행되었다. 순례자 사업이 강화되었으며, 4명의 형제가 회중들을 정규적으로 방문하였다. 동시에 그들은 「성서 연구」의 일곱째 권인 「완성된 비밀」 책을 열심히 번역하였다. 이에 더하여 「“바벨론의 무너짐”」이라는 제명의 4면 책자가 준비되었는데, 이것은 그 책의 초록이었다.

치밀한 준비가 진행되었다. 8월 21일부터 시작하여 뒤이은 수개월 동안 책자들과 「완성된 비밀」 책이 홍수같이 배부되었다. 이것은 굉장한 운동이었다. 그러나, 모두가 이 운동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연설하는 것만을 더 좋아하던 ‘선출된 장로들’이 특히 그러하였다. 심지어는 다른 면으로 자진적인 어떤 형제 자매들도 그 책의 내용을 알고 난 다음에는 주저하였다.

1918년에 침례받은 ‘라이프찌히’의 ‘리하르트 블뤼멜’ 형제는, 비록 침례는 받았지만, 자기가 아직 공식적으로는 그리스도교국의 교회의 회원이라는 사실에 별로 생각을 기울이지 않았었다. 그는 “내가 참석하지 않는 한 나는 더 이상 교회에 속하지 않는다”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책자를 읽고, 자기도 다른 사람들에게 ‘바벨론’을 떠나도록 초대하여야 함을 인식한 그는 자기 자신이 교회를 떠난 후에야 이 사업에 정당하게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8월 21일 아침 일찌기, 그는 교회 회원 명부에서 자기 이름을 공식적으로 삭제시켰으며, 오후에는 맑은 양심을 가지고 「바벨론의 무너짐」 책자를 배부하러 나갔다.

그 해 연말, ‘라이프찌히’의 한 대회에서 당시에 독일에서의 사업을 감독하던 ‘쿠노프’ 형제가 사업의 팽창—거의 4,000명의 형제가 이제 활동하고 있었다—에 관하여 말하고, 본부로부터의 교훈을 받는 즉시 독일에서도 「황금 시대」지를 발행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참석자들은 참으로 열광적이었으며, 그들 모두는 그 사업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겠다는 결심을 나타내었다.

추수할 무르익은 밭

불과 수년 동안에 독일은 얼마나 변화하였는가! 제 일차 세계 대전 전에는 비교적 소수만 하나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에 귀를 기울이고자 하였었다. 그러나, 1914년에는 의기양양하여 독일의 영광스러운 미래를 선언하던 ‘카이제르’가 이제 ‘홀랜드’로 망명하였다. ‘프랑스’를 원정차 파병되었던 독일 군대는 본국으로 굴욕적인 귀환을 하였다. 그들의 혁대 장식에 새겨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란 말은 망상에 불과하였음이 증명되었다. 돌아온 병사들은 전쟁의 무익함을 보았으며, 그 전쟁은 교직자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하려고 되풀이하여 애써 설명한 말과 같이 하나님께서 후원하신 전쟁은 아니었던 것이다.

아직 생존해 있는 많은 형제들은 그들로 하여금 진리에 대하여 각성하도록 일깨워 준 것은 전혀 무익하고 의미없는 바로 이 전쟁이었노라고 확증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처럼 무분별한 인간 생명의 멸망과 모종의 관련이 있으리라고 믿기를 거부하였으며, 오히려 그 책임은 이른바 “진중 예배”시에 전투 중에 생명을 상실한 자들에게는 천적 보상이 기다리고 있다고 약속하던 교직자들에게 있다고 그들은 생각하였다. 자기들의 남편, 아버지 혹은 아들이 “영광의 전장”에서 산화하였다는 통지를 받은 사람들은 교직자들이 전파한 대로 그들이 정말로 하늘에 있는가 아니면 혹시 불타는 지옥에 간 것은 아닌가 하고 걱정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에게 있어서 “죽은 자는 어디 있는가?”라는 연설은 아주 시기에 적절하였다. 형제들은 과거에는 전혀 불가능하였던 만큼의 많은 서적을 배부할 수 있었다. 두명의 ‘콜포처’ 자매는 한 달에 평균 400권의 「성서 연구」를 전하였다고 한다. 여호와의 충실한 종들은 기회를 최대로 활용하였다. 비교적 짧은 기간 내에 여러 지방에서 튼튼한 회중들이 자라나게 되었다.

1920년 5월 27일 목요일 ‘베를린’ 시의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는 7개의 큰 강당에서 7명의 연사가 8,000명 내지 9,000명의 진리에 굶주린 사람들에게 “끝은 가까왔다! 다음엔 무엇?”이란 제목으로 연설을 하였다. 1,500명이 방문해 줄 것을 요청할 만큼 관심이 굉장하였으며, 2,500부의 서책 및 다른 서적들이 배부되었다.

이제 사진-극은 참으로 그 본령에 이르게 되었다. 가장 감격적이었던 상영회들 중 하나가 ‘슈투트가르트’의 ‘구스타프-시글레-하우스’에서 천여명의 관중을 상대로 개최되었다. 굉장한 관심이 나타났기 때문에 형제들은 관심자들에게 좌석을 양보하였다. 정상적으로 하자면 전체 ‘프로그램’이 나흘 저녁에 걸쳐서 제공되게 마련이지만, 그들을 위한 동 특별 상영회는 일요일을 이용하여 점심을 위한 단 한 차례의 짧은 휴게 시간을 제외하고는 한꺼번에 연속으로 진행되었다.

사진-극은 사회주의 사상의 보루인 ‘작센’에서도 큰 갈채를 받았는데, 이제 그곳에서는 회중들이 단비가 내린 후에 움터오르는 버섯들처럼 솟아오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회중들 가운데는 어떤 큰 농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기 위하여 정규적으로 집회를 본 100명 이상의 사람들로 이루어진 ‘발덴부르크’의 한 회중이 있었는데, 그 농장 주인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교회 이사회의 회원이었었다.

신권적인 조직화로 향한 중요한 조치들

이 무렵 직접 독일을 방문하기를 원하였으나 입국 허가를 얻지 못한 ‘러더포드’ 형제는 이제 독일에서의 사업을 더욱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방법들과 수단들을 토의하기 위하여 1920년 11월 4-5일에 26명의 독일 형제들을 ‘스위스’ ‘바젤’로 초청하였다. ‘독일 지부’는 해체되었고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 중앙 유럽 사무소”란 명칭의 새로운 사무소가 개설되었으며, 잠정적으로 ‘쮜리히’에 남아있는 동 사무소의 본부를 가능한 한 빨리 ‘베른’으로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한편 주께 온전히 헌신하였으며, 협회장에 의하여 임명되는 한 명의 주 감독자의 지휘를 받게 되는 동 사무소는 ‘스위스’,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독일’ 그리고 ‘이탈리아’에서의 사업의 감독권을 보유하게 되었다. 동시에 위에 언급된 각 나라에는 마찬가지로 협회장의 임명을 받는 지방 감독자를 두기로 하였다. 이 마련의 목적은 중부 ‘유럽’에서의 사업을 통일시키고 이를 가장 유익한 방법으로 수행하기 위함이었다.

‘회클레’, ‘헤르켄델’ 및 ‘뒌게르’ 형제를 포함한 독일에서 온 26명의 형제들과 함께 가졌던 2일간의 그 회의는 특별히 독일에서의 사업을 가장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방법과 수단을 찾아내며, 누가 지방 감독자가 되어야 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여러 해 동안 독일에서 봉사해 온 위원회는 해체되었다. 그 때까지 수년간 사업을 지휘해 온 ‘쿠노프’ 형제가 그 직위를 벗어나서 순례자 사업에 임명되기를 요청하였기 때문에 새로운 감독자를 찾는 것이 필요하였다. ‘파울 발쩨라이트’ 형제가 독일의 지방 감독자로 선택되었으며 중앙 ‘유럽’ 사무소의 주 감독자의 직위에는 ‘빈켈레’ 형제가 임명되었다.

“수백만” 운동

「지금 살아있는 수백만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소책자가 독일에서는 1921년 2월에 발행되었으며, 수년간 계속될 강연 운동을 2월 15일에 시작하기 위한 공식적인 계획을 수립하였다. 가장 유능한 연사들이 연설을 하도록 임명되었으며, 마땅한 연사가 없는 곳에서는 회중이 협회로 편지하여 그러한 연사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거대한 증거 활동의 문이 열렸는데, 그러한 유의 증거 활동은 대부분의 형제들이 1년 전에는 그 가능성을 꿈도 꾸지 못하였던 것이다. 협회의 연례 보고에는 이러한 내용이 명시되었다. “독일에서 지금처럼 많은 관심이 나타난 적은 없었다. 큰 무리가 몰려오고 있으며, 비록 반대가 증가하고 있지만, 진리는 퍼지고 있다.”

‘콘스탄쯔’에서도 이것은 마찬가지였다. 50년 이상 여호와를 섬겨온 ‘베르타 마우레르’ 자매는 “세계는 끝나고 있다—지금 살아있는 수백만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란 공개 강연을 거대한 “플래카드”로 광고하였던 일과 ‘요한 후스’에게 형주에 달아 화형시킨다는 선고를 내린 장소인 그 도시의 최대의 강당에서 개최되었던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후속 연설들이 제공되었고 1921년 5월 15일에는 15명이 침례를 받았으며—이는 ‘콘스탄쯔’ 회중의 시작이었다.

‘드레스덴’에서는 그 강연이 굉장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회중은 3개의 커다란 강당을 빌렸지만, 어떤 경우에는 연설이 제공되기 이미 두시간 전에, 거대한 군중으로 교통이 마비되었기 때문에 전차 왕래가 정지되기도 하였다. 꽉 들어찬 강당에는 더 이상 수용할 수 없었다. 연사들마저도 군중 사이를 헤쳐서 강당에 도달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하여 강연이 반복될 것이라는 약속을 들은 후에야 군중들은 길을 열어 주었다.

‘비스바덴’의 거리에서 ‘엘리자베트 파이페르’ 부인은 “수백만” 연설의 광고 쪽지를 발견하였다. 그는 “말도 안되는 소리! 그러나 도대체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 그러한 것을 믿는지 가 봐야겠군” 하고 혼잣말을 하였다. 그는 연설이 행하여질 고등 학교 강당으로 가서, 그 강당이 이미 만원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들어가려고 헛된 노력을 하는 큰 무리의 사람들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당시 ‘프랑스’인들이 아직 이 나라를 점령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친절하게 안내 일을 맡아 주었다. 그들은 강당이 만원을 이루었음과 그 외의 수백명이 거리에 그대로 서 있는 것을 보고, 연사인 ‘바우에르’ 형제와 상의한 다음, 기다리고 있는 군중에게도 그가 연설을 마친 다음 기꺼이 연설을 해 줄 것이라는 말을 그들에게 전해 주었다. ‘파이페르’ 부인을 포함한 약 3, 4백명은 끈기있게 기다렸다. 그 날 저녁 들은 내용에 큰 감명을 받은 그 부인은 그 뒤에 모든 집회를 참석하였고, 곧 열렬한 자매가 되었다.

어떤 다른 기회에 ‘반드레스’와 ‘바우에르’ 형제가 강연 마련을 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회관들이 꽉 메워지던 과거의 경험들과는 반대로 이날 저녁엔 어쩐 일인지 처음에는 아무도 오는 사람이 없었다. 시작할 시간이 닥쳐옴으로 이들 두 형제는 혹시 누구라도 만날 수 있을까 하고 거리로 나갔다. 그들은 얼마의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연설을 듣는데는 관심이 있으나, 어떤 이유 때문인지 건물 안으로 들어가길 주저하는 것이었다. 그 이유를 묻자 그들은 그 날이 바로 4월 1일이므로 장난꾼들이 만우절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해서 그렇다고 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 반 시간 만에 30 내지 40명이 연설을 듣기 위하여 도착하였다.

‘렘솨이드’의 ‘에리히 아이켈베르크’ 형제는 ‘조링겐’에서 「수백만」 소책자를 배부하는 도중 다음과 같은 흥미있는 경험을 하였다. 그는 자기가 만난 사람에게 이러한 말로써 자신을 소개하였다. “나는 지금 살아있는 수백만이 결코 죽지 않고 평화와 행복 가운데 지상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라는 좋은 소식을 전하고 있읍니다. 이 소책자는 그것을 증명해 줄 것이며, 값은 단지 10‘페니히’입니다.” 그 신사는 그 제공을 거절하였지만, 그의 옆에 서 있던 작은 소년이 이렇게 말했다. “아빠, 왜 안사세요? 관 값은 그보다 훨씬 비싼데요.”

새로운 활동을 위하여 준비된 조직

1919년부터 1922년까지의 전후 기간은 독일의 형제들에게 있어서 진정한 발전과 준비의 기간이었음이 증명되었다.

사업을 내외적으로 강화시키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는 협회는 동 사업의 대(對) 정부 신분을 확립하기 위하여 필요한 법적 조치를 취하였다. 그 결과, 1884년에 미국 ‘알레게니’에서 조직된 ‘왙취 타워 성서 책과 협회’가 1921년 12월 7일에 독일에서 외국 법인체로서 공인되기에 이르렀다.

1922년에 전파된 소식은 주로 “지금 살아있는 수백만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주제에 집중되었다. 협회는 1922년 2월 26일을 전세계적인 “수백만” 강연을 위한 날로 정하였다. 그 날 독일에서는 121개의 상이한 읍에서 그 연설이 행하여졌으며, 약 70,000명이 참석하였다. 두번째의 세계적인 대 증거의 날은 6월 25일이었는데, 그 날 독일에서는 119회의 강연회가 개최되었으며 약 31,000명의 참석자가 있었다. 그 해에 그러한 “세계적 강연”이 두차례 더 행하여졌는데, 독일의 경우 10월 29일에는 75,397명이, 그리고 12월 10일에는 66,143명이 참석하였다. 그리하여 좋은 소식이 수만의 사람들에게 도달하게 되었다.

‘러더포드’ 형제, 다시 ‘유럽’을 방문하다

1922년 ‘러더포드’ 형제는 ‘유럽’을 두루 돌아 광범위한 여행을 하였는데 그 때 그는 ‘함부르크’, ‘베를린’, ‘드레스덴’, ‘슈투트가르트’, ‘카알스루에’, ‘뮨헨’, ‘바르멘’, ‘콜론’, 그리고 ‘라이프찌히’를 방문하였다. ‘함부르크’에서 약 500명의 형제들이 하루 동안의 대회에 참석하였는데, 이는 꼭 8년 전에 있었던 그의 지난 방문 이래 큰 증가를 이룬 것이었다! ‘슈투트가르트’에서는 겨우 1,200석의 강당이 공개 강연을 위하여 사용될 수 있었으므로, 수백명을 문전에서 되돌려 보내야 하였다. 그리고, ‘러더포드’ 형제는 ‘뮨헨’에서는 ‘찌르쿠스 크로네’를 꽉 메운 7,000명의 청중에게 연설하였다. 연설이 시작되기 전에, 일단의 반‘유대’주의자들과 상당수의 ‘예수회’ 사제들이 참석자들 중에 끼어 있으며, 소란을 일으키고, 만일 가능하다면, 대회를 뒤엎을 목적을 품고 참석하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러더포드’ 형제는 “‘만국 성경 연구회’가 ‘유대’인들의 재정적인 지원을 받고 있다는 말이 이 도시[‘뮨헨’]와 다른 곳에서 퍼진 바 있읍니다.” 하고 말하였다. 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것이 사실이다” 등등의 외침이 들려왔다. 그러나 ‘러더포드’ 형제는 확신과 힘이 담긴 연설을 함으로 그의 연설을 끝맺지 못하도록 연대를 빼앗으려고 시도한 난동군들의 입을 막을 수 있었다.

1922년도에 독일에서 있었던 최대의 행사는 6월 4일과 5일에 ‘라이프찌히’에서 열렸던 대회였다. 협회는 그 독일 대회를 위한 적당한 장소로서 ‘라이프찌히’ 시를 선택하였다. 대부분 ‘작센’ 지방에 살고 있는 형제들은 매우 가난하였으며 장거리 여행을 할 비용을 마련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라이프찌히’가 참으로 가장 적합한 장소였다.

월요일 아침에는 ‘러더포드’ 형제와의 질문-과-대답 회기가 계획되었다. 사전에 서면으로 제출한 질문들 중에는 특별한 관심을 끄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백년 전에 ‘라이프찌히’ 근처에서 일어났던 어떤 봉기를 기념하여 1913년에 낙성될 ‘라이프찌히’에 있는 “뵐케르쉴흐트뎅크말”(“열국의 전쟁 기념비”)에 관련된 것이었다. 동 기념비와 관련된 질문은 간단히 말하자면, “‘그 날에 ‘애굽’ 땅 중앙에는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이 있겠고 그 변경에는 여호와를 위하여 기둥이 있을 것이요’란 이사야 19:19은 이 기념비를 가리키는 것인가?”라는 것이었다.

이 보다 3년 전—즉, 1919년에 개최된 ‘라이프찌히’ 대회에서—여러 명의 형제들이 어느 날 아침 이 열국의 전쟁 기념비를 답사한 일이 있었다. 그 날 오후, 훗날에 진리의 악독한 반대자로 탈바꿈을 한 ‘선출된 장노’의 하나였던, ‘알프레드 덱커’ 형제가 한 연설을 했는데, 그는 동 열국의 전쟁 기념비가 바로 이사야 19:19에 언급된 기둥이라고 증명하려고 했었던 것이다. 동 기념비의 건립자인 추밀원의 ‘티에메’ 의원도 이 축전에 초청되었으며, 그와 그의 건축가들은 적절한 설명을 하도록 초대받았었다.

‘러더포드’ 형제는 그 질문에 대답하기에 앞서 우선 이 웅장한 건축물을 답사하였다. 그 후, 대회 참석자들 전체에게 연설할 때, 그는 이사야 19:19이 이 기념비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솔직하게 아무런 꾸밈없이 선언하였다. 그것은 순전히 마귀의 영향하에 있던 한 사람의 불타는 야망으로 말미암아 건립된 것이다. 여호와께서 복음 시대의 끝에 그러한 기념비를 지상에 건립시키실 이유가 없다. 그 거대한 기념비의 부분들 하나 하나는 그 기원이 마귀로부터 유래한 것임과 그의 작품임을 그리고 인간으로 하여금 이 “우매한 기념비”를 세우도록 영향을 준 그의 동맹자들이자 공범자들인 악귀들의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독일의 황제는 한 때 이렇게 말할 수 있기를 바랐었다. “세계를 정복하려는 웅지를 가졌던 ‘나폴레온’의 계획은 완전히 수포로 돌아갔다.—그러나 독일의 황제, 마찬가지로 세계 정복을 착수하여, 위대한 성공으로 그 계획을 완성시킨 자가 지금 여기에 서 있노라. 그러므로 전세계는 그의 앞에 부복할지어다.”

“하나님의 거문고”

이제 독일어로도 발간된 새 책, 「하나님의 거문고」의 신속한 배부를 위한 길을 닦기 위하여, 협회는 오백만부의 “왜?”라는 제명의 ‘팜프렛’을 준비하고 인쇄하였다. 불행히도 「하나님의 거문고」 인쇄를 맡은 인쇄 공장들은 계속적으로 계획 기일을 넘기어, 수차례나 발행 일자의 지연을 초래하였다. 급격히 악화되는 ‘인플레이션’으로 말미암아 협회의 ‘팜프렛’에 찍혀있던 그 책의 가격이 지켜질 수 없었으며, 1923년 1월 초에는 100‘마르크’의 가격이 ‘마가린’ 4분의 1‘파운드’의 값과 같은 250‘마르크’로 인상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러나 「거문고」의 발행비는 이 때에 이미 350‘마르크’에 육박하였다. 형제들 뿐만 아니라 진리의 친구들도 이 책의 내용에 크게 열광하였다.

‘발덴부르크’ 회중에 속한 ‘랑겐후르스돌프’에서, 연설에 아주 재능이 있는 ‘에리히 페테르스’란 젊은 형제는 그 책의 내용과 그것으로 연구를 시작하라는 제안에 크게 감동하여 자기 아버지에게 자기가 친구들과 이웃들을 일 주일에 한번씩 특정한 날 저녁에 집으로 초대하여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거문고」를 토의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 후, 이 저녁 연구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게 되어 일층에 있는 모든 방에 좌석을 마련해야 하였다. 이 젊은 형제는 방들 사이의 문 곁에 서서 여호와의 왕국과 그 축복에 관하여 열정적으로 말하였으며, 그리하여 모두가 그의 말을 듣고 그를 볼 수 있었다. 다른 회중들도 신속히 이 본을 따르게 되었으며, 소위 “「거문고」 연구”가 곧 정규 ‘프로그램’의 일부가 되었다.

최초의 공장

1897년 4월부터 1903년 12월까지는 「파수대」(독일어 판)를 ‘알레게니’(미국)에서 인쇄하였고, 1904년 1월부터 1923년 7월 1일까지는 독일에 있는 세속 인쇄소에서 인쇄하였다. 수십년 동안 협회의 서책들과 다른 출판물들은, 미국에서 직접 보내지 않는 한 세속 인쇄소들에서 인쇄하였다. 때가 되자 비용을 줄이기 위하여 공간이 극도로 제한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장비와 함께, 두 대의 대형 평압 인쇄기를, ‘바르멘’에 설치하였다.

처음에는, 식자와 제본에 경험이 있는 형제가 없었기 때문에, ‘스위스’ ‘베른’의 경험있는 인쇄업자이자 인쇄 기술자인 ‘웅게레르’ 형제가 최초의 자진 봉사자들을 훈련시키도록 ‘바르멘’으로 파견되었다. 그들이 사용하고 있던 보잘것없는 장비에도 불구하고 일을 하려는 그들의 자진성과 훌륭한 인쇄물을 만들어 내려는 그들의 결심은 놀라울 정도였다.

모든 방이 침실 등으로 사용되고 있었으므로,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중간 공간과 가로 세로 각각 20‘미터’ 8‘미터’인 한 재목 창고에 인쇄 기계들을 설치하였다. ‘헤르만 괴르츠’ 형제는 최초로 나온 「황금 시대」지(1922년 10월 1일호)를 가외로 100,000부나 더 인쇄한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손으로 조작하는 기계였기 때문에 각 종이를 직접 두번씩 집어넣어 주어야 하였다. 형제들은 인쇄물의 수요를 따라가기 힘들었으므로 거의 1년간이나 종종 밤늦게까지 일하였다.

일부 사람들이 진리를 배우게 된 경로

때때로 이상한 환경이 어떤 사람들의 관심을 진리로 이끌어 주었는데 ‘아이켈베르크’ 형제의 경우가 그 한 예이다. 어느 날 그는 사진-극의 상영회에 참석하였다. “종교 개혁”에 관하여 말하면서, 연사는 “‘프로테스탄트’교인들은 이제 항의하는 일을 중지하였읍니다”고 말하자, 청중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우리는 아직도 항의를 계속하고 있소” 하고 외쳤다. 연사의 요청에 따라 불이 켜졌으며, 참석한 모두는 이 “용감한” 사람이 누구인가 하고 돌아다 보았다. 그는 바로 다름아닌 두 명의 ‘가톨릭’ 교직자들 사이에 앉아 있는 ‘프로테스탄트’ 교직자였다! 청중은 분개하였으며 그 교직자를 강당에서 추방하라고 요구하였다. ‘아이켈베르크’ 형제는 진리가 교회 조직들 내에서 발견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오이겐 쉬타르크’는 ‘슈투트가르트’에서 상영된 사진-극을 관람하러 갔다. 강당이 3,000명의 사람들로 이미 꽉 찼을 때 영사기에 모종의 고장이 생겼으며, 그 날 저녁에는 수리할 수 없다고 발표하였다. 그리고 다음 날 저녁에 다시 참석해달라고 모두를 초대하였다. ‘오이겐 쉬타르크’는 실망하여 그곳을 나와서 신 사도 교회에 다니는 자기 어머니를 찾아갔다. 두 사람은 성경 연구생들에게 진리가 있을 수 없으며, 그렇지 않다면 그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정하였다. 그 다음 날 저녁 ‘쉬타르크’ 형제는 다시 참석지 않고, 대신 자기 누이를 방문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그가 탄 전차는 강연이 행하여질 강당의 바로 옆을 지나게 되었는데, 강당에 입장하려고 하는 사람이 전날 저녁과 마찬가지로 많이 있는 것을 본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그는 거의 바퀴 밑으로 떨어지다시피 전차를 뛰어 내렸다. 그는 타박상을 입었지만 개의치 않고 일어나서 강당 안으로 들어갔다. 결국 그는 아주 감명을 받아 제공된 성서 연구 보조물을 받았으며, 자기를 방문할 수 있도록 주소를 적어놓고 돌아왔다. 이제 아무도 그가 성서 연구하는 것을 막을 수 없게 되었다.

‘쿠르트 디이쯔네르’는 1915년의 전시에 학교에서 전도사가 그에게 가르쳐 준 노래로 말미암아 종교에 염증을 느끼게 되었다. 그 노래의 가사는 적국들을 멸망시키는 내용을 다루고 있었으며, 독일 군대가 그들을 호수 속으로, 수렁 속으로, ‘베스비우스’ 화산 속으로 혹은 대양 속으로 몰아넣어야 한다고 되어 있었다. 그 후, 1917년에 여러 교회의 종을 떼어 녹여서 수류탄의 고리로 사용하였으며, 어떤 교회 신문은 한 교직자가 큰 종 위에 팔을 뻗치고 축복하는 사진을 발행하였다. 밑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쓰여 있었다. “그리고 이제 나가서 우리의 적들의 몸뚱이를 산산조각 내어다오.” ‘쿠르트 디이쯔네르’는 이제 결정을 내렸다. 그가 여호와의 참 숭배를 식별하고 받아들인 것은 1920년 초였는데, 그는 아직까지도 임시 ‘파이오니아’ 봉사를 때때로 즐기고 있다.

확장 사업에 전념하다

이미 오십여년 전에 봉사에 참여하라는 여호와의 부름을 듣고 그에 응하였던 사람들로서 아직도 우리들과 함께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그 당시 자기들이 “젊고 강건”하던 시절의 활동에 관하여 열심히 이야기한다. 그들은 물질적으로는 가난하였지만, 영적으로는 부하였다.

‘키일’ 출신의 ‘미나 브란트’는 자기가 장거리를 도보로 여행하면서 왕국 소식을 전파하던 일을 이야기하였는데, 당일에 돌아올 수 없을 때에는 건초 더미에서 잠을 자면서 들에서 경야하곤 하였다고 한다. 후에 그는 ‘쉴레스비그-홀스타인’ 주의 최북단의 여러 도시까지 차를 얻어 타며 여행하였으며, 종종 ‘트럭’에 동승하기도 하였다. 이 무렵에 형제들은 큰 확성기들을 갖추고, 오전에는 마을에서 전파한 다음, 오후에는 시장이나 다른 적당한 장소에서 공개 강연을 하는데 그것들을 사용하곤 하였다.

‘에른스트 비이스네르’(훗날 순회 사업을 한 사람임)와 다른 형제들은 ‘브레슬라우’로부터 90 내지 100‘킬로미터’의 거리까지 자전거로 여행하며 전파하였다. ‘에리히 프로스트’와 ‘리하르트 블뤼멜’이 봉사하던, ‘라이프찌히’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왕국 소식에로 향하게 하기 위하여 형제들이 시도한 방법들은 매우 독창적이었다. 얼마 동안 그들은 형제들로 구성된 작은 악단을 이용하였는 데, 그들은 거리를 행진하면서 연주하곤 하였다. 그들을 동반하는 형제들은 길가의 집들을 방문하여 짧은 증거를 한 다음 행진 중인 악단을 따라 쫓아가곤 하였다.

1923년에 관심은 온통 전 시간 전파 사업에 집중되었으며, “우리는 천명의 ‘파이오니아’를 찾고 있다”는 긴급한 부름이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들끓게 하였다. 왜냐 하면, 이것은 그 당시 보고하던 3,642명의 “일군들” 가운데서 네명 중의 하나가 ‘파이오니아’ 부름을 받았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 부름에 대한 반응이 나타났다.

예를 들면, ‘빌리 웅글라우베’는 그 부름이 자기에 대한 것임을 인식하고, “단지 한 해나 두 해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이 직책에서 사용하실 수 있는 한까지”라고 말하면서,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였다. 그는 독일의 여러 지역에서 일하였으며, 후에는 수년 동안 ‘마그데부르크’ ‘벧엘’에서 근무하였다. 1932년에는 외국 밭에서 일할 ‘파이오니아’를 부르는 부름에 응하였다. 그는 먼저 ‘프랑스’로 파견되었다가, 그 다음에 ‘알제리’ ‘코르시카’, 남‘프랑스’로, 그 뒤에 다시 ‘알제리’로, 그 다음에 ‘스페인’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싱가포르’, 그 다음 ‘말레이지아’로, ‘자바’로 그리고 1937년에는 ‘타일랜드’로 갔는데, 그는 1961년에 독일로 돌아올 때까지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그가 ‘파이오니아’ 부름에 응하였을 때 그의 나이는 25세였으며, 이제 77세를 목전에 두고 있지만, 그는 아직도 우리의 가장 자진적이며 성공적인 ‘파이오니아’들 중 하나로 손꼽힌다.

1931년 2월 1일 ‘콘라드 프랑케’가 ‘파이오니아’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는 젊은 시절 일찌기 창조주를 기억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는 현재, ‘벧엘’ 가족 성원으로서 중단없이 계속한 전 시간 봉사의 42년간을 돌이켜 볼 수 있음을 기뻐하고 있는데, 그 중 14년 간은 독일의 지부 감독자로서 일하였었다.

순례 봉사

이십년대에 순례자 형제들의 고무적인 연설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형제들을 세우는 데 큰 몫을 수행하였다. 그 시절의 교통은 아주 제한되어 있었고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순례자 형제들은 봉사해야 할 많은 농촌 구역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농장의 마차가 그들의 교통 수단이 되는 경우도 흔한 일이었다. 때로는 장거리의 도보 여행도 불가피하였다.

‘에밀 히르쉬부르게르’는 한 때 남부 독일에서 연설을 하도록 임명된 일이 있었다. 그가 마침 기차 여행을 하고 있었는데 분명히 ‘가톨릭’ 교직자의 신분임을 나타내 주는 옷차림을 한 여섯 사람과 한 객차를 타게 되었다. 그들은 물론 자기들 사이에 있는 사람이 ‘히르쉬부르게르’ 형제란 사실을 알지 못하고 ‘히르쉬부르게르’ 형제가 할 연설에 대하여 분주히 토론하고 있었다. 그들은 어떤 종교적인 회합에 참석했다가 돌아가는 중으로 ‘히르쉬부르게르’ 형제가 연설을 할 도시에 살고 있는 교직자는 그에게 도전하여 공개토론을 하도록 하라는 조언을 받은 모양이었다. 이 교직자는 공개 대결 시에 어떻게 자기의 논증을 이끌어 가야 “이 성경 연구생”에게 패배하지 않을 수 있을는지에 대하여 자기의 동료들의 제안을 듣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동료들의 어떠한 제안도 그를 만족시키지는 못한 모양이 분명하였다. 한 사람씩 차례대로,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면서 기차를 내렸다. 이제 마지막 사람이 내릴 준비를 하자 걱정이 된 그 교직자는 내리려고 하는 자기 동료에게 은밀한 음성으로 그 문제에 대한 그의 생각은 어떠한가와 또한 그 모임에 가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하는지의 여부에 대하여 물었다. 그러자 다음과 같은 둔탁한 ‘쉬바벤’ 방언의 대답이 퉁명스럽게 튀어나왔다. “글쎄, 만일 자네가 그에게 필적하리라고 생각한다면, 가 보게나.” 그러나, ‘히르쉬부르게르’ 형제는 연설 때에 그를 만나지 못하였다.

창조 극

이십년대 초가 되자 사진-극의 ‘필름’들은 이제 거의 못쓰게 되었다. 그러나, 협회는 몇몇 세속 영화사로부터 ‘뉴스’ 영화 ‘필름’과 성서 영화 ‘필름’을 매입할 수 있었으며, 그중 부적당한 부분은 잘라 버리거나 다른 것을 부가하여 고친 다음, 그것을 상영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5,000 내지 6,000‘미터’의 완전히 새로운 ‘필름’이 편집되었다. 이에 더하여 전에 상영되던 ‘슬라이드’도 「창조」 책이나 ‘왙취 타워 협회’가 발행한 다른 책에서 취한 새로운 그림들이나 시장에서 구한 ‘슬라이드’로 대치되었다. 그때에는 천연색 사진이 없었지만 ‘마그데부르크’의 ‘빌헬름 슈만’이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 흑백 사진에 착색을 하였다. 아름답게 채색된 그림들은 관객들에게 지속적인 인상을 심어 주었으며, 많은 그림들은 여호와의 경이로운 창조에 관한 것들이었기 때문에 영화의 제명을 “창조 극”으로 바꾸었다. 같은 내용의 소제목 하에 1932년 독일어 「연감」은 이렇게 기술하였다.

“이름과 그리고 ‘슬라이드’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초기의 창조 극으로부터 넘어온 것은 하나도 없다. 대본은 ··· 「창조」 책 및 다른 책들에서 발췌되었으며, “창조 극”이란 이름도 마찬가지로 「창조」 책에서 따온 것이다.”

1928년, ‘쉬테틴’에서 상영이 시작되었을 때, 그때까지 직업적 음악가이며 세상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였던 ‘에리히 프로스트’가 무성 영화였던 그 영화를 위하여 음악 반주를 해 주도록 불리움을 받았다. 곧 더 많은 음악가들이 모여 집단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후에 악기를 사용하여 심지어는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와 나무들이 흔들리는 소리까지도 모방하게 되었다. 1930년 여름, ‘뮨헨’에서의 상영시 탁월한 ‘바이얼린’ 주자인 ‘하인리히 루터바흐’가 이 악단을 만났으며, 즉시 함께 여행하자는 초대를 받았다. 그는 기꺼이 수락하였고, 그리하여 완전한 ‘오케스트라’를 구성한 그들은 곳곳에서 갈채를 받았다. 이년 후, 협회는 ‘프로스트’ 형제에게 다른 한벌의 ‘필름’과 ‘슬라이드’를 마련해 주고 동‘프로이센’으로 가서 상영하도록 지시하였다. 그후, ‘루터바흐’ 형제가 그 작은 ‘오케스트라’의 지휘봉을 물려받았다.

1930년, ‘뮨헨’에서 이 영화의 상영이 계획되었다. 이미 과거에 여기서 창조 극이 상영되어 큰 성공을 거둔 전례가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종교 지도자들은 매우 번민하게 되었다. 안절부절한 나머지, 그들은 자기들의 회중에 속한 수백명의 ‘뮨헨’ 사람들에게 대중적으로 광고된 입장권 취급소에 가서 입장권을 구하되 참석하지는 말라고 교사하였다. 그렇게 해서 강당을 텅비게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형제들은 곧 이러한 음모를 포착하였으며, 따라서 반격의 대책을 세울 수 있었다. 결국 그 모든 행동의 결과 말썽꾸러기들 자신들에게 피해가 돌아갔을 뿐이다.

협회의 이전

책임있는 형제들은 곧 ‘바르멘’의 공장 시설이 불충분하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분명히 여호와의 영의 인도를 받은 그들의 관심은 토지를 즉각적으로 매입할 수 있게 된 ‘마그데부르크’로 집중되었다. 재빨리 결정을 내려야 하였지만, 협회는 그곳 ‘라이프찌게르 스트라세’에 있는 토지를 매입하였다. 1923년 6월 19일 ‘바르멘’으로부터 ‘마그데부르크’로 공식적인 이전이 수행되었다. 갑자기, ‘프랑스’ 군대가 ‘바르멘’과 ‘엘베르펠트’를 포함한 ‘라인’과 ‘루르’ 지방을 점령하였다. 물론, 이것은 그들이 우체국, 기차역 및 독일인의 은행을 접수하였음과, 그로 말미암아 ‘바르멘’에서 회중들의 관심사를 돌보는 것이 매우 어렵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923년 연례 보고는 이 사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명시하였다. “‘브루클린’ 본부는 어느날 아침 독일 지부가 ‘마그데부르크’로 안전하게 이전하였다는 통지를 받았다. 바로 그 다음 날 아침 신문은 ‘프랑스’인들이 ‘바르멘’을 점령하였다고 보도하였다. 우리는 주께 그분의 보호와 축복에 대하여 감사하는 바이다.”

이제 우리의 자체 공장에서 「파수대」를 인쇄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최초로 인쇄된 것은 1923년 7월 15일호였다. 약 3, 4주 후에 자동 급송 장치를 갖춘 대형 평압 인쇄기가 설치되었으며, 「성서 연구」 제 일권의 인쇄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 뒤를 이어 동일한 인쇄기에서 「하나님의 거문고」가 인쇄되었다.

그러나, 더 많은 장비가 필요하였다. 그러므로 ‘발쩨라이트’ 형제는 ‘러더포드’ 형제에게 윤전 인쇄기 구입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러더포드’ 형제도 필요성을 인식하고 동의하였지만, 한가지 조건을 제시하였다. 그는 수년 동안 ‘발쩨라이트’ 형제가 ‘럿셀’ 형제의 수염과 매우 비슷하게 수염을 기르고 있음을 눈여겨 보아왔다. ‘럿셀’ 형제와 비슷하게 보이길 원하는 다른 형제들이 또 있었으므로, 그의 본은 곧 유행이 되었다. 그러한 유행은 피조물 숭배의 경향을 낳게 될 수 있었으며, ‘러더포드’ 형제는 이것을 금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다음 방문시에 모든 성서의 집 가족들이 듣는 가운데, ‘발쩨라이트’ 형제에게 그가 그 수염을 밀어버린다는 조건하에서 윤전 인쇄기 매입을 허락하겠다고 말하였다. ‘발쩨라이트’ 형제는 상심하였지만, 그 조건에 동의하고 이발사에게 갔다. 그는 그 다음 며칠간은 동료 일군들도 알아볼 수 없는 “이상한 사람”같이 보였기 때문에 몇차례 오인을 받은 경우가 있었으며, 때때로 재미있는 상황이 발생된 일이 있었다.

일년 후에 지하 층에 그 인쇄기의 첫 부분을 설치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고 잠시 후에 나머지 부분이 뒤이어 송달되었다. 이제 매일 400면 서책을 6,000부씩 생산해 낼 수 있는 훌륭한 장비를 갖춘 인쇄소와 제본소가 완성되었다.

1923년과 1924년에 서적 배부량이 크게 증가하였으며,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1925년에 협회는 최초의 건물에 인접한 토지를 매입하였다. 공장 및 제본소의 시설들이 확충되었고 개선되었다. 새로 취득한 토지에 견고한 ‘시멘트’ 건물을 건축하여 일층에 두대의 윤전 인쇄기를 설치할 여유를 남겨두고 제본소와 평압 인쇄기들을 수용하였으며, 이층에는 식자부와 다른 예비 부서들을 그리고 삼층에는 사무실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서적 배부는 계속 증가하였기 때문에 많은 가외 시간의 일이 필요하였다. 1928년에는 두번째 윤전 인쇄기를 구입하였지만, 수요가 굉장하였으므로 형제들은 이개 조로 나누어 각각 12시간씩, 심지어는 일요일에도 기계들을 가동하였다. 이것은 기계들을 중단없이 수년 동안 밤낮 가동했었음을 의미한다. 제본소에서도 물론 비슷하였는데, 그곳의 형제들은 서적들이 인쇄된 다음, 그 일을 마쳐야 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그들은 하루에 10,000권의 서책을 생산할 수 있었다.

이제 새로 매입한 토지에 위풍당당한 대회장을 건립하는 것이 가능케 되었다. 그 건물은 품위있게 꾸며졌으며 약 800석의 좌석이 있었다. 형제들은 그것을 “거문고 회관”이라고 명명하였는데, 이는 의심할 바없이 「하나님의 거문고」 책에 대한 감사함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성서의 집 가족 중 일요일에 외출할 수 있는 사람들은 임시로 54인승으로 개조한 대형 ‘트럭’으로 여행하거나, ‘버스’, 기차, 자동차 혹은 자전거를 타고 ‘마그데부르크’ 시 내외의 구역에 가서 전파 사업에 참여하였다. 그들은 반경 수백 ‘킬로미터’ 내에서 활동하였으며, 여러 회중의 기초를 놓을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는 사이에 성서의 집 일군들의 수는 200 이상으로 증가하였다.

1924년 ‘마그데부르크’ 대회

1924년도 최대의 행사는 ‘러더포드’ 형제가 참석했던 ‘마그데부르크’ 대회였다. 독일 전역에서 약 4,000여명의 형제 자매들이 모였는데, 일부는 자전거로 참석하였다. 전국이 빈곤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은 보잘 것 없는 도시락 밖에는 가지고 떠날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은 여행 비용을 충당할 자금이 없었으며, 수천명은 집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 자전거를 이용한 사람들은 여행하는 데 며칠을 잡아야 하였다. 또한 그들의 숙식을 위한 자력도 빈약하였다. 많은 형제들이 가지고 온 음식이란 주로 마른 ‘빵’뿐이었다. 연설 도중 굶주림의 고통이 심해지면, 형제들은 한 조각의 마른 ‘빵’을 꺼내서 한 입 물어뜯는 것이었다. 이에 크게 감동된 ‘러더포드’ 형제는 즉시 그 다음 날에 약 4,000명의 참석자들 각자에게 두개의 따뜻한 ‘소시지’, 두개의 ‘빵’ 그리고 한병의 탄산수를 무료로 제공할 마련을 하였다. 대회가 개최되고 있는 강당 양쪽 끝에서 ‘소시지’가 가득 담긴 큰 양철통들이 나타났을 때, 참석자들이 얼마나 기뻐했을 것인지를 상상할 수 있다. 형제들은 줄을 서서 배식을 받았다. 식사를 함께 즐기면서 원기를 돋운 그들은 연회에 참석한 손님들 같은 기분으로 강당 내의 자기들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 대회의 환영사에서 ‘러더포드’ 형제는 이미 헌신하였고 물의 침례로써 그것을 상징한 사람은 모두 손을 들라고 요청하였다. 그 많은 손들을 바라보면서 그는 “5년 전에는 ‘유럽’ 전역에도 이렇게 많지는 않았었다”고 부언하였다.

그후 공개 강연 도중 주 강당에서 공교로운 사건이 발생하였다. 어떤 사람의 부주의 때문에 작은 비상용 등이 바닥에 떨어졌는데, 이를 보고 한층 더 부주의한 사람이 “불이야” 하고 소리를 쳐서 사람들을 당황케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모두 강당 뒷쪽에서 발생하였기 때문에 연단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지 못하였으며, 처음에는 난동군들이 이 모임을 뒤엎으려고 하는 줄로 짐작하였다. 소란이 진정되지를 않자, ‘러더포드’ 형제는 ‘오케스트라’에게 연주를 시작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들이 “나는 사랑의 힘을 숭배한다”는 노래로 응답하자, 보라, 강당 내의 수천 명이 노래를 시작하였다. ‘히스테리’의 물결은 곧 진정되었으며, ‘러더포드’ 형제는 더 이상의 중단없이 강론을 계속하였다.

“고발된 성직자들”

이것이 1924년에 전세계적으로 배부하도록 마련된 결의문의 제목이었다. 독일의 형제들은 특히 1925년 봄에 이 활동에 참여하였다. 그것은 교직자들을 사정없이 폭로하는 극히 중요한 결의문으로, 마치 벌집을 막대기로 쑤셔대는 것과 같은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바이엘른’에서 교직자들이 형제들을 공격하고 그들의 사업을 방해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막 서거하여 새로운 선거가 계획되었다. 정치가들은 “‘가톨릭’교인이 감히 대통령이 될 수는 없다”고 말하였으며, 따라서 ‘가톨릭’계인 ‘바이엘른’ 주에서는 ‘로마’에 우호적이 아닌 모든 출판물에 최대의 불신을 나타냄으로써 이에 대응하였다. ‘바이엘른’에서 뿐만 아니라, 독일의 여타의 지역에서도 교직자들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대항하였다.

‘발쩨라이트’ 형제는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그에게 보내진 한 익명의 편지의 내용의 일부분은 이러하다:

“너 양의 옷을 입은 마귀여!

“교직자들에 대한 너의 비난은 곧 너 자신의 몰락일 뿐이다! 네가 미쳐 알게 되기 전에 온 세상은 너의 종말을 볼 것이며, 너의 죽음은 네 추종자들을 무섭게 하여 근신케 할 것이다. ··· 너에 대한 심판은 이미 선언되었다!

“우리는 앞으로 삼주 안에 ‘고발된 성직자들’이란 너희 출판물을 공개적으로 철회할 것을 요구하는 바이다. 만일 이를 이행치 않을 때에는 ··· 너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것은 실없는 위협이 아니다. ···”

그러나 이것이 타협을 할 이유는 물론 되지 않았다. 그와는 반대로, 비록 소수지만 담대한 기름부음받은 남은 자들의 군대는 반격을 개시하였다. “사실인가 혹은 사실이 아닌가?”란 제명의 책자가 배부되어, 대중에게 그 협박에 관하여 보도하였다. 또한 “고발된 성직자들” ‘팜프렛’에 들어있는 비난들이 “사실인가 혹은 사실이 아닌가”라는 질문이 제기되었다. 그 다음에 교직자들의 발언과 종교 잡지에서 취한 발췌문들을 제시하였다.

자포자기한 가운데 ‘폼메른’의 한 교직자는 검사 사무실를 통하여 ‘왙취 타워 협회’와 협회의 역원들을 고발하였다. 그 결과 ‘마그데부르크’에서 재판이 열렸다. 그러나 검사는 심리 도중 결의문 전체를 낭독하므로 그 결의문이 ‘쉬테틴’의 고승회의를 공격하고 있다는 자기 자신의 주장을 논박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법정’의 모든 사람들은 그 결의문이 ‘쉬테틴’의 고승회의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교직자들을 비난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 사실을 간파한 법원 당국은 ‘발쩨라이트’ 형제를 방면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앞으로는 그러한 날카로운 공격의 출판물은 발행하지 말 것을 종용하였다.

‘인플레이션’

전도인들은 이미 1921년 8월에 높은 인쇄비를 감안하여 「월간 성서 연구」를 배부하는 데 검약을 나타내라는 충고를 받은 바 있었다. 지혜롭지 못하게 배부하지 말고, 진정한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에게만 나누어 주라는 것이었다.

1922년 초에 협회는 불가불 그 당시 아직 월 1회 인쇄되던 「파수대」의 1년 예약의 가격이 16‘마르크’로 책정될 것임을 발표하였다. 한달 후에 그것을 20‘마르크’로 인상할 필요가 있었으며, 같은 해 7월에는 30‘마르크’가 되었다. 그러나 뒤이은 수개월간 ‘인플레이션’이 너무 심한 비율로 계속되어, 10월에 이르러 협회는 금후로는 예약을 단지 3개월 단위로만 접수할 것이라고 발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23년의 첫 3개월을 위하여 형제들은 200‘마르크’를 두번째 3개월을 위하여는 750‘마르크’를 지불해야 하였다. 6월 15일 경에 이르러 1년 예약 금액은 3,000‘마르크’가 되었고 한 달 후에는 40,000‘마르크’가 되었다. 8월 1일에 협회는 예약 마련을 전면 중단하고, 낱부를 현금 지불 마련으로만 공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9월 1일경 한부의 값이 이미 40,000‘마르크’가 되었다. 한달 후에는 한부에 1,660,000‘마르크’가 되었으며, 10월 25일경이 되자 ‘인플레이션’은 극도로 악화되어 한부의 값이 25억 ‘마르크’를 기록하였다. 돈은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

‘인플레이션’으로 말미암은 어려운 시대를 이처럼 간단히 고찰해 본다 하더라도 그 당시 얼마나 어려운 환경하에서 주의 사업을 수행해야 하였었는지를 알 수 있다. 사실상, 1923년 마지막 3개월간에는 협회의 출판물의 배부가 거의 완전히 정지되고 말았다. 오로지 여호와의 도움에 의해서만 계속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선출된 장로들’

장로들을 선출하는 민주적인 마련은 1920년대에 사업의 전진을 늦추기에는 다시없는 마련이었다. 그러한 선출의 진행 방식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의견이 구구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적어도 85‘퍼센트’의 ‘V.D.M.’ 질문을 정확하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을 후보자로 할 것을 요구하였다. (‘V.D.M.’은 Verbi Dei Minister, 즉 하나님의 말씀의 전도인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서, ‘드레스덴’에서의 경우가 그러하였다. 그러나 ‘할레’의 형제들은 그러한 독단적인 요구 조건을 세우는 것이 어떠한 어려움으로 인도하는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경험을 하였다. 그 회중에는 사업에 대한 태도는 좋지 않으면서도 회중에서 지도자가 되기를 원하는 형제들이 있었다. 결국 그들은 ‘V.D.M.’ 질문들에 대답하지 못하였으며, 그러한 이유로 회중에서 인도하는 지위를 차지할 자격이 없다는 말을 듣게 되자, 그들은 즉시 자기들이 틀린 대답을 했을 뻔한 문제에 대하여 보충을 해 가지고 왔다. 그들은 그대로 자기들이 바라던 지위를 차지하지 못하게 되자, 반역을 일으켜 회중을 분열시켰으며, 그리하여 당초에 400명이었던 전도인들 가운데 약 200 내지 250명만 남게 되었다.

일부 회중에서는 선거시에 종종 심각한 분쟁이 일어나곤 하였다. 예를 들면, ‘바르멘’에서 1927년에 어떤 후보자들에 대한 선거를 거수 방식으로 하려고 할 때이다. 한 목격자의 보고에 따르면,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사람이 동시에 소리치기 시작하였으며, 형제들은 비밀 투표 방식에 의하여 선거하기로 변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는데, 그것이 당시 여러 회중들이 사용하던 방식이었다. ‘키일’에서는 심지어 경찰의 보호 하에 장로를 선출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일들은 일부 후보자들이 장성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사실상, 그들 중에 어떤 자들은 직접, 간접적으로 왕국 사업을 반대하였다.

예를 들면, 협회가 정규적인 회중적 「파수대」 연구를 격려하였을 때, 이 제안을 반대하고 여러 회중에서 분열을 일으킨 것은 특히 다수의 ‘선출된 장로들’이었다. ‘렘솨이트’에서 봉사 지휘자가 앞으로는 일요일 아침에 야외 봉사에 나오는 사람만 「파수대」 연구를 사회하는 데 사용될 것이라고 말하자, ‘선출된 장로들’ 중의 하나가 의자를 집어들고, 그것으로 그 봉사 인도자를 위협한 다음 40명을 이끌고 회중에서 나갔다. 비슷한 일이 ‘키일’에서도 발생하였는데, 그곳에서는, 성서의 집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회중의 200명의 형제 자매들 중에 50명이 떠나버렸다.

과거를 돌이켜 볼 때, 우리는 확실히 1920년대 후반기는 이곳 독일에서의 추려내는 시기였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때까지 우리와 동행하던 일부 사람들은 왕국의 공공연한 원수들이 되었다. 그들의 이탈은 하나님의 조직에 있어서 아무런 손실도 되지 않았다. 왜냐 하면, 1930년대야말로 계속 충실을 유지한 자들에 대한 진정한 시험의 때이었음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법적 문제들

1924년부터 1926년까지 국세청은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가 엄격히 자선적 성격을 띠고 있음을 고려하여 서적을 전하여 받게 되는 수령액에 대하여 아무런 세금을 부과하지 않았으나, 이 면제 조치가 1928년에 철회되었다. 그 결과 협회는 두 큰 교회 제도의 지도자들이 충동질한 이러한 공격에 관하여 대중에게 「파수대」와 「황금 시대」를 이용하여 공지시켰기 때문에, 굉장한 광고 효과를 거둔 재판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공격이 교회들로부터 왔다는 사실은, 후에 그것의 목적은 ‘성경 연구생들이 그들의 성서 지식을 배부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는 설명과 함께 그들에 의하여 공개적으로 시인되었다. 형제들은 모든 의로운 마음의 소유자들에게 이 부당한 조치를 항의하는 탄원서에 서명하도록 촉구하였다. 그러므로 법원 당국이 1,200,000명의 서명이 연서된 탄원서를 제출하였을 때, 깊은 감명을 받은 것도 무리는 아니다. 법원 당국은 후에 우리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렸다.

굉장한 그 사업의 발전을 중지시키기 위하여 종교 지도자들이 이용한 수단 가운데 하나는 전도인들로 나라의 법과 충돌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일찌기 1922년에 최초의 “불법적 행상 행위와 행상세 납부 거부” 사건이 나타났다. 1923년 다른 법적 사건들이 제기되었으며, 다시 한번 “행상 행위 규제법 위반” 건의 고소가 발생하였다. 이에 대하여 가혹한 형이 선고되었다. 1927년 1,169명의 형제들이 체포되었으며, “행상행위에 관한 법률 위반”과 “면허없이 행상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게 되었다. 1928년에는 1,660건의 재판 사건이 있었으며, 1929년에는 1,694건이 있었다. 그러나, 교직자들은 성경 연구생들을 잠잠하게 하기 위한 무기로서 사용할 수 있는 법조문을 찾아내는 일을 계속하였다. 마침내, 그들은 자기들이 찾던 것을 발견하였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관하여 한 신문(Saarbrücker Landes Zeitung, 1929년 12월 16일자)은 이렇게 기술하였다.

“불행하게도 경찰은 성경 연구생들의 사업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무능하였다. 체포는 지금까지도 행하여지고 있으며 ··· 모두 무죄석방으로 끝나고 말았다. ··· 그러나, 이제 ‘베를린’의 법원은 비슷한 경우에 형의 선고를 옹호하여, 호별 방문으로 및 가두에서 종교 서적을 제공하는 것이 신체적인 노력이 포함되어 있고, 그러므로 일의 성격을 띠는 경우에 그리고 대중이 그러한 것을 주목하는 경우에 일요일과 휴일의 안식을 지키는 것에 관한 치안 법령의 규제를 받는다는 원칙을 세워놓았다.

“다행히 ‘자아르’ 구역의 몇몇 법원 당국도 이러한 판정에 관하여 들은 이래 비슷한 경우에 피고에게 형을 선고할 수 있었다. 이것은 이제 성경 연구생들의 사업을 중단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바이엘른’에서의 활동

이러한 시도는 독일 전역에 걸쳐서 자행되었지만, ‘바이엘른’ 주가 선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여타 지역에서보다도 더 많은 체포 사건이 그곳에서 발생하였다. 얼마 동안 지방 법률을 통하여 그 사업을 잠시 금지하는데 성공하기도 하였다. 1929년 협회는 어느 일요일에 약 1,200명의 전도인들을 전파하도록 보냄으로써 ‘레겐스부르크’의 남쪽 지역에 대한 집중적인 “하루의 공격”을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철도 회사에 의뢰하여 두 대의 임시 열차를 대절하는 마련을 하여, 한 대는 ‘베를린’에서 출발하여 중도에 ‘라이프찌히’에서 오는 형제들을 태우기로 하였고, ‘드레스덴’을 출발하는 두번째 기차는 ‘켐니츠’와 ‘작센’ 주의 다른 도시의 형제들을 태우고 오기로 하였다. 승객들은 약 25‘마르크’의 운임을 각자 지불하였는데, 그것은 그 당시로서는 상당한 금액이었다. 그러나 형제들은 그 정도의 희생은 기꺼이 감수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오직 이 활동에 꼭 참여할 수 있게 되기만을 염원하였다. 왜냐 하면, 원수들이라고 잠자고 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운동을 위한 마련이 추진되고 있는 동안 형제들은 만일 교직자들에게 이 일이 사전에 누설된다면 그들은 이것을 막기 위하여 자기들의 영향력을 이용할 것임을 확신하였다. 그러므로, 형제들은 그것을 비밀로 유지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제들은 약 1주일 전에 교직자들이 그것을 탐지하는 것을 막지 못하였다. 갑자기 철도 당국은 우리에게 두대의 임시 열차를 빌려 주기를 주저하였다. 즉시 관련된 모든 회중은 ‘버스’를 대절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교직자들은 이것에 관해서도 듣고, 다가오는 주말에 ‘작센’ 지방에서 뻗어나간 모든 도로에 많은 수의 경찰을 배치하기로 마련하였다. 이 경찰관들은 성경 연구생들이 가득한 모든 차를 정지시킬 모종의 구실을 만들어 내어 그들을 오랫 동안 지연시켜서 그들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게 하려는 심산이었다.

한편, 철도 회사에서는 우리의 ‘버스’ 마련에 관한 말을 듣고 자기들이 큰 일거리를 놓치고 있다고 생각하여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하여간 두 대의 임시 열차를 운행하도록 허락하기로 동의하였다. 형제들은 즉시 ‘버스’를 취소하였다. 교직자들은 꼭 출발하기 이틀 전에 이루어진 이러한 마지막의 계획 변경을 탐지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이 떼를 지어 모든 공로를 지키고 있는 동안, 두 대의 임시 열차는 ‘라이헨바흐’(‘보그트란트’) 주에서 합류하여 한 대의 임시 열차로 편성하여 새벽 2시경에 ‘레겐스부르크’ 부근 지역으로 진입하였다. 그곳에서부터 시작하여, 기차는 모든 역마다 정거하여 형제들을 몇 사람씩 차례로 내려놓았다. 그들 중 얼마는 자전거를 가지고 왔기 때문에 시골까지 나가서 그곳에서도 봉사할 수 있었다.

모든 형제들은 헌금을 받고 전할 충분한 서적 뿐만 아니라, 무료로 배부할 것도 많이 공급받았기 때문에, 그날 굉장한 증거가 행하여졌다. 형제들은 모든 집에서 무엇이든 남겨두려고 노력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많은 형제들이 체포되어서 그 임시 열차를 타고 집에 돌아갈 수 없었지만, 이 운동에 참여하는 특권을 즐겼던 사람들은 그 뒤에도 그것에 관하여 두고두고 이야기하였다. 또한 우리의 적들도 이 주말을 오랫 동안 기억하였으리라고 생각해도 틀림은 없을 것이다.

은행의 파산

증가하는 실업사태와 경제적 불안정의 와중에서 독일과 중앙 ‘유럽’에서의 사업을 수행하는데 쓰이는 자금의 대부분이 예입되어 있던 은행이 파산하고 말았다. 독일 지부만도 375,000‘마르크’의 손실을 당하였다.

협회는 불가불 회중들에게 1930년 여름에 ‘베를린’에서 계획된 대회를 취소하지 않을 수 없다고 통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편지에서, “생산이 중단”될지도 모른다는 말도 언급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발표는 마치 경종과도 같았다. 비록 많은 수의 형제들이 직업이 없어서, 형제들의 재정 상태는 매우 빈약하였지만, 출판물들이 중단되는 일이 없이 계속 흘러나오게 하기 위하여, 즉시 그들은 ‘베를린’ 대회를 위하여 이미 저축해 두었던 돈과 그들의 한정된 재원에서 조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기꺼이 헌금하였다. 사실상,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결혼 반지와 다른 패물들을 바쳤다.

그 결과, 은행이 파산하기 전에 수립되었던 사업을 확장하기 위한 계획들이 방해를 받지 않고 추진되었으며, 심지어는 연기되지도 않았다. 1930년 봄에 우리의 기존 토지와 경계를 이룬 가외의 토지를 더 매입하였다. 새로 매입한 토지에 서 있던 낡은 건물을 철거하였고, 형제들은 가능한 한, 많은 그 자재를 사용하여 각각 2명씩 수용하는 72개의 방과 넓은 식당으로 이루어져 있는 새로운 큰 ‘벧엘’ 건물을 건축하였다.

많은 재판 사건들

1930년에 또 다른 434건의 재판 사건이 야기되었다. 그것은 이미 계류중인 사건들과 함께, 이제 1,522건이 법원 판결을 기다리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1930년에는 우리의 종교적 적들이 우리를 범법자들로 몰아세우기 어렵게 되었다. 왜냐 하면, 모든 경찰관들에게 보내진 내무부 4월 19일자 회람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동 연구회는 현재로서는 순전히 종교적인 목적을 추구하며 정치적인 활동은 하지 않는다. 앞으로는 형사 소송, 특히 제국의 행상 행위에 관한 법률 위반에 관한 소송 제기는 피하길 바라는 바이다.”

‘파리’와 ‘베를린’ 대회들

1931년 ‘러더포드’ 형제는 또 다시 ‘유럽’ 여행을 계획하였다. 대회가 ‘파리’에서는 5월 23일부터 26일까지, 그리고 ‘베를린’에서는 5월 30일부터 6월 1일까지 열리도록 계획되었다. 독일의 빈곤한 경제 상태를 감안하여 ‘러더포드’ 형제는 남부 독일과 ‘라인’ 지방의 형제들을 ‘파리’로 초대하기 위한 마련을 제안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베를린’으로 여행하는 것보다 그리로 가는 것이 비용이 덜 들기 때문이다. ‘콜론’, ‘바젤’ 그리고 ‘스트라스부르크’로부터 떠날 임시 열차가 조직되었다. 형제들은 이 마련을 매우 감사하였으며, 결국 ‘파리’에 모인 약 3,000명 중에서 1,450명은 독일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베를린’ 대회는 ‘스포츠 파라스트’에서 개최되었다. 우선,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그리고 또한 거의 1,500명은 ‘파리’로 갔기 때문에, 참석자가 많으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전혀 예상치 않았던 수인 거의 10,000명이 참석한 것을 보는 것은 말할 수 없이 기쁜 일이었다!

기회있을 때마다, 형제들 사이에서 세상의 종교적 관습을 제거하려고 노력해 온 ‘러더포드’ 형제는 이미 이전 대회에서 자기 복장으로서 사소한 혁명을 일으킨 일이 있었다. 그는 ‘유럽’의 형제들이—여기에는 ‘독일’도 포함된다—대회에서 검은 색을 특히 즐겨 입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치 거짓 종교 조직들의 관습처럼, 남자들은 검은 양복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장례식에서는 심지어 ‘실크 해트’까지 쓰고—검은 ‘타이’마저 매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본 ‘러더포드’ 형제는 극히 연한 색의 양복과 검붉은 ‘타이’를 사서 함께 착용하였다. 그가 이러한 복장을 하고 독일에 온 후로 많은 형제들은 자기들의 검은 색 옷을 벗어버리기 시작하였다.

이제 ‘베를린’ 대회에서 그는 많은 수의 자기 자신의 사진과 ‘럿셀’ 형제의 사진이 우편엽서나 사진의 형태로—그 중 어떤 것은 틀까지 해서 팔리고 있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대회장을 둘러싼 복도의 여러 탁자 위에 이 사진들이 놓여있는 것을 발견한 후 그는 바로 다음의 자기 연설에서 그것들에 관하여 언급하면서, 참석한 사람들에게 그것들을 사지 말라고 촉구하였으며 책임있는 종들에게 분명한 말로써 사진들을 틀에서 제거하여 없애버리라고 요구하였다. 이는 그 후에 그대로 이행되었다. 그는 피조물 숭배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피하길 원했던 것이다.

‘베를린’ 대회와 관련하여 ‘러더포드’ 형제는 자연히 ‘마그데부르크’에 있는 지부를 방문하였다. 이전의 방문들처럼 이번 방문도 생기를 주고 해방시켜 주는 바람과 같음이 증명되었다. ‘러더포드’ 형제의 방문 직전에 방마다 그의 사진과 ‘럿셀’ 형제의 사진을 걸어 놓았다. 이제, ‘러더포드’ 형제가 그것들을 발견한 즉시 모든 사진이 제거되었다.

‘러더포드’ 형제는 수년이 경과하는 동안 몇 가지 다른 변화가 일어났음을 파악하였다. ‘러더포드’ 형제 뿐만 아니라, ‘벧엘’에 있는 많은 사람들도 ‘발쩨라이트’ 형제가 안고 있는 위험성을 인식하였다. 그가 훌륭한 조직자이며 독일에서의 사업이 그의 인도 하에 장족의 발전을 이룩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큰 잘못은 그 굉장한 발전이 여호와의 성령보다는 자기 자신의 개인적 능력의 덕택이라고 생각하는 데 있었다. 어느 날 ‘벧엘’ 식사 시간에 ‘발쩨라이트’는 ‘벧엘’ 가족에게 더는 자기를 세상 사람들 앞에서는 “형제”라고 부르지 말라고 요구하였다. 그러한 경우에는 자기를 “소장님”이라고 부르라는 것이며, 그는 심지어 자기의 사무실 문에 “소장”이라고 쓴 패를 달아 놓았다.

이 시기에 여호와께 대한 ‘발쩨라이트’의 성실은 또 다른 방향으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었다. 그는 분명히 항상 박해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독일 사무소의 책임있는 지도자로서 그는 “고발된 성직자들” 결의문 배부와 관련하여 피소된 바 있었다. 물론 그가 무죄석방된 것은 사실이지만 판사가 그에게 앞으로 우리의 서적에 그러한 강한 진술을 포함시키는 일을 피하도록 종용하였을 때, 그는 이 충고를 따르기로 결정하였음이 분명하였다. 왜냐 하면, “브루클린”으로부터 온 ‘파수대’ 혹은 다른 출판물에 나오는 표현들과 진술들이 자기에게 너무 강하게 보이면, 그는 “물을 섞”곤 하였기 때문이다.

물질주의적인 욕망도 자라기 시작하였다. ‘발쩨라이트’는 시를 써서 ‘파울 게르하르트’란 가명으로 「황금 시대」지에 게재하기를 즐겼으며, 이제 그는 책을 하나 써서 ‘라이프찌히’에서 출판하였다. 이 책은 그 뒤에 회중들이 배부할 서적 목록에 부가되었으며, 올바른 상황을 알지 못하는 회중들은 그것을 주문하였고, 그리하여 ‘발쩨라이트’ 형제에게 상당한 재정적 이득을 안겨 주었다. 그는 또한 전체 가족의 유익을 위해서보다는 자기 자신이 사용하려고, 한 때 ‘벧엘’에 정구장을 만들기도 하였다.

‘러더포드’ 형제의 방문 중에 봉헌식을 갖도록 기일 내에 새로운 건물을 완성하기 위한 시도의 일환으로, ‘발쩨라이트’ 형제는 ‘벧엘’의 일군의 수를 165명에서 1930년 12월 말에는 230명으로 증가시켰으나 그는 이에 관하여 정직함을 나타내지 않았다. ‘러더포드’ 형제가 그렇게 많은 수를 승인하지 않을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발쩨라이트’는 50명의 형제들을 “전도 여행”차 파견하여 눈에 띄지 않게 할 마련을 하였다. 돌아왔을 때,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길 원하는가 아니면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길 원하는가 하는 질문을 받았다. 많은 형제들은 관련된 것은 여호와의 사업이지 인간 개인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 기회에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였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분개하여 떠나버렸다.

박해가 증가되다

1931년, 다시 한 번 ‘바이엘른’ 주의 관리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싸움을 선도하고 나섰다. 정치적인 소란에 적용되는 1931년 3월 28일자, 비상령을 잘못 적용함으로써, 그들은 돌연히 성경 연구생들의 서적을 금지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한 것이다. 1931년 11월 14일, ‘뮨헨’에서 우리의 서적들은 압수당하였다. 4일 후, ‘뮨헨’ 경찰 당국은 ‘바이엘른’ 주 전역에 적용되는 성명서를 발표하여, 성경 연구생들이 배부하는 모든 서적에 금지령을 내렸다.

자연히 형제들은 즉시 항소를 제기하였다. 1932년 2월 상부 ‘바이엘른’ 정부는 동 금지령을 옹호하였다. 즉시 ‘바이엘른’ 주 내무부에 상소하였으나 당국은 “근거 없음”을 이유로 1932년 3월 12일자로 동 상소를 각하하였다.

그러한 법원 판결과 관련하여 ‘마그데부르크’ 경찰국장은, 1932년 9월 14일, 우리를 변호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만국 성경 연구회’는 순전히 성서적 및 종교적 문제에만 관여하고 있음을 증언하는 바이다. 동 연구회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정치 활동을 한 일이 없으며, 국가에 적대하는 아무런 경향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달이 가면 갈수록 심지어 독일의 다른 여러 주에서도 어려움은 계속 증가되었다. ‘파울 쾨헤르’는 6명의 특별 ‘파이오니아’와 함께 이틀 저녁에 걸쳐 단축된 사진-극을 상영하기 위하여 ‘심메른’에 간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상영 도중에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프’를 들고 있는 ‘다윗’이 화면에 나타나고 그의 시편들 중의 하나를 낭송할 때 회관 전체가 소란스러워졌기 때문이다. 참석한 거의 모두가 ‘히틀러’의 돌격대에 속한 자들임이 즉시 밝혀졌다.

‘자아르’ 지방에서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1931년 12월 그곳에서 정부에 호소하여 경찰관들에게 사업을 방해하지 말라고 지시하도록 조치하였다. 마침내 그러한 지시가 시달되었는데 이에 격노한 교직자들은 매주 강대상에 서서 성경 연구생들에 대하여 경고의 소리를 외쳤다. 적대감정이 점차로 증대하였으며, 1932년 말엽에는 2,335건 이상의 법원 사건이 계류중에 있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1932년은 서적 출판에 관한 한, 그 때까지 최고의 해임이 증명되었다.

1933년 1월 30일, ‘히틀러’는 제국의 수상 직위를 차지하였다. 2월 4일 그는 경찰에게 ‘대중의 질서와 안전을 위협하는’ 서적을 압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법령을 발표하였다. 동 법령은 또한 집회와 출판의 자유를 제한하였다.

남은 자들의 감사 증거 기간

그 해의 기념일은 4월 9일에 해당되었으며, 그것과 관련하여 4월 8일부터 16일 사이에 “남은 자들의 감사 증거 기간”이 계획되었다. 「위기」 소책자를 사용하는 범세계적인 증거 활동이 계획되었다.

그러나, 독일 형제들은 이 8일간의 증거 기간을 평화 속에 끝맺을 수 없었다. 「위기」 소책자를 사용한 그 운동은 ‘바이엘른’ 주에서는 4월 13일에 금지령을 몰고 왔다. 뒤이어 ‘작센’ 주에서는 4월 18일에, ‘튀링겐’에서는 4월 26일에, 그리고 ‘바덴’에서는 5월 15일에 금지령이 내려졌다. 독일의 다른 주들도 그 뒤를 이었다. 그 당시 ‘마인츠’에서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고 있던 ‘프랑케’ 형제는 60명이 좀 넘는 회중이 10,000부의 소책자를 배부하기 위하여 가지고 있었다고 보고하였다. 형제들은 그것을 배부하기 위하여 기민하게 행동해야 함을 인식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시간을 조직하며 그 운동 기간 처음 3일 동안에 이미 6,000부를 전하였다. 그러나 네째날 많은 형제들이 체포되었고 가택 수색을 당하였다. 그러나, 형제들은 이러한 행동을 예상하고 나머지 4,000부의 소책자는 안전한 장소에 감추어 두었기 때문에 경찰은 겨우 몇부의 소책자를 발견할 수 있었을 뿐이다.

체포된 모든 형제들은 당일로 석방되었다. 즉시 그들은 한 운동을 마련하였으며, 그러므로 회중의 모든 참여할 수 있는 형제들에게 4,000부의 소책자를 분배하였다. 그 날 저녁 그들은 약 4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도시인 ‘바드 크로이쯔나흐’로 자전거를 타고 가서 그곳의 주민들에게 나머지 소책자를 배부하였으며, 얼마는 무료로 주었다. 그 다음 날 이 운동은 적절한 것이었음이 증명되었다. 왜냐 하면, 한편, 비밀경찰은 성경 연구생들에게 알려져 있는 모든 사람들의 집을 수색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10,000부의 소책자 모두는 이미 배부되었다.

‘마그데부르크’에서, 정부 관리들은 그 소책자의 표제 그림(한 용사가 피방울이 떨어지는 칼을 들고 있는 모습)은 용납할 수 없다고 통고하고 그것을 제거하라고 요구하였다. 번번히 타협할 뜻을 비쳐온 ‘발쩨라이트’ 형제는 즉각적으로 그 소책자에서 천연색 표지를 제거하라고 지시하였다.

그 기간은 마음졸이는 증거 주간이었다. 적들은 날이 가면 갈수록 무자비한 힘으로 타격을 가하려는 결심을 더욱 더 노골적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므로, 보고가 집계되어 전년도의 14,453명에 비하여, 24,843명이 기념식에 참석하였음을 알게 된 것은 고무적이었다. 그 증거 기간에 활동한 전도인들의 수도 19,268명으로서, 1년 전의 「왕국」 소책자 운동 중에 활동한 12,484명과 대조를 이루어, 마찬가지로 즐거워할 이유가 되었다. 8일간의 운동 기간에 2,259,983부의 「위기」 소책자가 배부되었다.

비밀 경찰이 ‘벧엘’ 집을 수색하다

‘나치스’들은 그들이 4월 24일에 협회 사무실과 공장을 점령했을 때, 우리를 공산주의와 연루시키는 어떤 종류의 재료라도 발견하기를 희망하였다. 그러한 경우에, 그들은 공산주의자들 소유의 건물에 대하여 이미 행한 바와 같이, 새로운 법률을 적용하여 전재산을 몰수하고, 그것을 국고에 귀속시킬 수 있을 것이었다. 건물을 수색한 다음, 경찰은 어느 날 저녁 정부 관리들을 불러서 그들은 유죄를 증명할 만한 아무 것도 발견치 못했다고 말하였다. “무엇인가 꼭 찾아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명령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는 노력은 실패하였고 4월 29일에 재산은 형제들에게 되돌려졌다. ‘브루클린’ 사무실은 같은 날 미국 정부를 통하여 (미국 법인체 소유인) 재산의 불법 점유를 항의하였다.

1933년 6월 25일의 ‘베를린’ 대회

1933년 여름에 이르러 여호와의 증인들의 사업은 대부분의 독일의 제주에서 금지령 하에 있게 되었다. 형제들의 집은 정규적으로 수색당하였고 많은 형제들은 체포되었다. 영적 양식의 흐름은 비록 한번 뿐이긴 하지만 부분적으로 방해를 받았으며, 많은 형제들은 얼마나 오랫 동안 사업을 계속하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를 궁금히 생각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회중들은 매우 단기간의 통고를 받고 6월 25일에 ‘베를린’에서 열릴 대회에 초대를 받았다. 여러 가지 금지령으로 인하여 많이는 참석할 수 없을 것이라고 예상되었기 때문에, 회중들은 적어도 한명이나 수명의 대표자들을 파견하도록 격려를 받았다. 그러나, 결국, 7,000명이 그곳에 참석하였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3일씩 걸려서 왔는데, ‘버스’ 회사들은 금지된 조직이라고 ‘버스’ 대절을 거부하였으므로, 어떤 사람들은 전체 거리를 자전거를 타고 왔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트럭’을 이용하였다.

‘노워’ 형제와 함께 협회의 재산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하여 어떠한 대책을 세울 수 있는지를 살피기 위하여 며칠 전에 독일에 온 ‘러더포드’ 형제는 ‘발쩨라이트’ 형제와 함께 대회 대표자들에게 제시하여 채택케 할 선언문을 준비하였다. 그것은 우리가 수행하고 있는 전파 사업에 ‘히틀러’ 정부가 개입하는 것을 항의하는 내용이었다. 제국의 대통령으로부터 모든 고위 정부 관리들에게까지 선언문을 한 통씩, 만일 가능하다면, 등기 우편으로 보내도록 하였다. 대회가 시작하기 며칠 전에 ‘러더포드’ 형제는 미국으로 돌아갔다.

참석한 많은 사람들은 “선언문”에 대하여 실망하였는데, 이는 여러 가지 점에서 그것이 형제들이 희망했던 바와 같이 강력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 때까지 ‘발쩨라이트’ 형제와 밀접하게 일하던, ‘드레스덴’에서 온 ‘뮈체’ 형제는 후에 그가 원래의 원고를 약화시켰다고 비난하였다. ‘발쩨라이트’ 형제가 정부 기관들과의 어려움을 피하기 위하여 협회의 출판물들의 뚜렸하고 분명한 언어에 물을 탄 것은 이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많은 수의 형제들은 단지 그 이유 때문에 그것을 채택하기를 거부하였다. 사실상, 전에 순례자 형제의 하나였던 ‘키페르’라는 형제는 그것의 채택을 제의하라는 요청을 거절하였으며, 다른 형제로 대체되었다. ‘발쩨라이트’ 형제는 후에 ‘러더포드’ 형제에게 그 선언문이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고 통지하였지만, 사실이 그러했다고 정당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대회 참석자들은 지쳐서 집에 돌아갔으며, 많은 사람들은 실망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2,100,000부의 “선언문”을 집으로 가지고 가서, 그것들을 배부하며 책임있는 직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발송하는 사업을 민첩하게 수행하였다. ‘히틀러’에게 보낸 한 부본에는 편지가 한 통 첨부되어 있었는 데, 그 내용의 일부는 이러하다.

“‘왙취 타워’ 협회의 ‘브루클린’ 본부는 현재와 과거를 통하여 항상 독일에 대하여 극히 우호적이었읍니다. 1918년에 미국의 본 협회 회장과 7명의 이사회 성원들은 회장이 미국에서 그가 편집하는 두 잡지를 독일에 대한 전쟁 선전에 사용하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80년의 금고형의 선고를 받은 바 있읍니다.”

비록 그 선언문은 약화되었고, 또 많은 형제들은 그것을 채택하는 데 온 마음으로 동의할 수는 없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정부는 격노하였으며, 그것을 배부한 사람들에 대한 박해의 물결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마그데부르크’ 사무실이 또 다시 점령되다

‘베를린’에서 채택된 선언문의 독일 전역에서의 배부 운동이 ‘프로이센’에서 시작된지 만 하루만에 금지된 것은 ‘히틀러’의 경찰이 행동을 개시하였다는 한 가지 신호였다. 6월 27일에 전 경찰관들은 ‘모든 지방 집단들과 사업처를 즉시 수색하고 국가에 적대적인 어떠한 자료든 압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던 것이다. 하루 후인, 6월 28일, ‘마그데부르크’의 건물이 30명의 돌격대원에 의하여 점령되었는 데, 그들은 공장을 폐쇄하고 건물 위에 만자기(卍字旗)를 게양하였다. 경찰관들의 공식 명령에 의하면, 심지어 성서를 연구하고 협회의 재산에 대하여 기도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6월 29일에 이러한 조치가 ‘라디오’를 통하여 독일 전국에 보도되었다.

‘스위스’ 지부 감독자인 ‘하르벡’ 형제가 저지하려고 정력적인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총 65,189‘킬로그램’ 무게의 서적들, 성서들 및 그림들이 8월 21일, 23일 그리고 24일에 25대의 ‘트럭’에 실려 협회 공장으로부터 반출되어 ‘마그데부르크’ 근교에서 대중이 보는 앞에 불태워졌다.

그것들의 인쇄비는 약 92,719.50‘마르크’에 달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여러 회중에서 압수되어 불태워졌거나 다른 방법으로 파훼된 많은 양의 출판물이 있었는데, 예를 들면, ‘콜론’에서는 적어도 30,000‘마르크’ 상당의 출판물이 파훼되었다. 「황금 시대」는 1934년 6월 1일호에서 파괴된 재산(가구, 서적, 기타)의 총가치는 2내지 3백만 ‘마르크’라고 보도하였다.

만일 ‘마그데부르크’로부터 대부분의 서적을—어떤 경우에는 배로—옮겨서 다른 안전한 장소에 보관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더라면, 손실은 더욱 막중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여러 해 동안 많은 양의 서적을 비밀 경찰의 눈과 손으로부터 감추어 둘 수 있었다. 이 중 많은 서적이 뒤따른 수년간의 지하 전파 활동에 사용되었다.

미국 정부가 개입한 결과, ‘마그데부르크’ 협회 건물은 10월에 협회로 반환되었다. 1933년 10월 7일자 환속 증서에는 비록 어떠한 활동을 수행하는 것이나, 서적을 인쇄하거나 또는 집회를 개최하는 것은 계속 금지되나 “협회의 재산은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도록 온전히 환속되었다”라고 기술되었다.

“세상과 벗함”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은 부끄러움없이 ‘히틀러’에 대한 그리고 여호와의 증인들을 박해하는 그의 노력에 대한 지지를 공공연히 나타내었다. 한 신문(Oschatzer Gemeinnützige, 1933년 4월 21일자)에 보도된 바에 의하면 ‘루터’교 목사 ‘오토’는 4월 20일, ‘히틀러’의 생일을 축하하는 ‘라디오’ 연설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작센’ 주의 독일 ‘루터’ 교회는 새로운 상황과 화해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여 왔으며, 다시 한번 고대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힘이 전국에서 역사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 민중의 정치 지도자들과의 가장 긴밀한 협조를 시도할 것입니다. 이러한 협조의 첫 결과들이 오늘 ‘성실한 성경 연구생들의 만국 성경 연구회’와 ‘작센’에 있는 그 세포 단체들 위에 내려진 금지령에서 이미 보고되고 있읍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통한 이 얼마나 훌륭한 전환점입니까! 이제까지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셨읍니다.”

지하 활동의 시작

비록 ‘나치스’가 득세한 첫해에는 지하 증거 활동이 실제적으로 조직되지 않은 상태에 있었고, 작은 집단의 모임들이 모든 곳에서 열리고 있지는 않았지만, 비밀 경찰은 형제들을 체포할 새로운 구실을 발견하였다.

형제들이 최초로 구속되고 그들이 가택 수색을 당한 후 즉시, 객관적인 사고를 지닌 사람들은 그러한 조처들은 더욱 혹심한 박해 운동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회의석상에 앉아서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전혀 무의미한 일일 것임을 알았다. 유일한 합당한 길은 진리를 위하여 투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많은 수는 주저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확실히 자기 백성에 대한 이러한 박해를 금하는 어떤 일을 하실 것이기 때문에 기다리는 것이 최선책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집단은 주저하는 가운데 시간을 낭비하며, 자기들의 어떤 행동으로 문제를 악화시키지 않으려고 하는 데만 급급한 반면, 다른 전도인들은 사업을 계속하기로 결심하였다. 담대한 형제들은 비록 이렇게 하는 것이 체포와 심한 박해로 인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즉시 자기들의 가정에서 작은 집단으로 집회를 보기 시작하였다.

어떤 곳에서 형제들은 이웃 나라에서 항상 몇부씩 몰래 들어오는 「파수대」 기사를 등사하기 시작하였다. ‘켐니츠’ 출신인 ‘카알 크라이스’가 그러한 최초의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원지에 쓴 다음, 그는 그것을 ‘슈바르첸베르크’의 ‘보샨’ 형제에게로 가지고 가서, 거기서 등사하곤 하였다. 그 때 특히 활동적이었던 사람들 중에 ‘힐데가르트 히겔’과 ‘일제 운테르되르페르’가 있었다. 금지령이 포고되자마자,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기들의 사명을 수행하는 데 아무 것도 자기들을 막지 못하게 하리라고 결심하였다. ‘운테르되르페르’ 자매는 ‘모토싸이클’을 한대 사서 ‘켐니츠’와 ‘올베른하우’ 사이를 왕래하면서 형제들에게 등사된 「파수대」를 전달해 주었다. 가까이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불필요한 주의를 끌지 않기 위하여 자전거를 타고 방문하곤 하였다.

‘요한 쾰블’ 형제는 등사된 500부의 「파수대」를 ‘뮨헨’에서 만들도록 마련하였으며, 그 다음 이것을 그곳과 또한 ‘바이엘른 발트’의 광범위한 구역에 살고 있는 형제들에게 배부하였다.

‘함부르크’에서 즉시 솔선한 사람은 ‘니데르스베르크’ 형제였다. 그는 다발성 경화증으로 주저앉기 전에 수년 동안 순례자 형제로서 일했었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였다. 이제 이 시험 기간 중에 형제들은 그를 방문하는 일을 즐겼다. 왜냐 하면, 그렇게 하는 것은 그들의 믿음이 강화되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형제들에 대한 그의 사랑은 즉시 그로 하여금 그들이 또 다시 영적 양식을 정규적으로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도록 움직였다. 그는 자기 집에서 「파수대」를 등사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헬무트 브렘바흐’에게 원지 쓰는 법을 가르쳐 주었으며 등사기 조작법도 알려 주었다. 그 다음, 자기가 없어도 일이 수행될 수 있음을 확인한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쉬레스비히 홀스타인’ 지방 서부 해안에 있는 회중들을 방문하여 그들을 격려하고 그들에게 「파수대」를 보내줄 마련을 하기 위하여 여행을 계획하고 있노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다시 한번 그는 형제들과 잡지들을 발송하는 방법을 토의하고 그들과 암호를 만들었는데, 그들은 그가 보내오는 그 암호로 기록한 편지의 내용을 보고 각 회중에 몇부씩 보낼 것인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건강이 허약함에도 불구하고 ‘니데르스베르크’ 형제가 집을 떠난 것은 1934년 1월 6일이었다. 큰 노력을 기울이고 지팡이를 사용해야만 걸을 수 있었지만, 그는 여호와를 의뢰하고 떠났다. 몇몇 회중을 방문한 다음 그의 첫 암호 서신이 ‘함부르크’에 도착하였으며, 등사된 「파수대」가 발송되기 시작하였다. 그가 ‘멜도르프’ 부근에 도착할 무렵, 그 고장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한 형제가 사망하였다. 이웃 회중들로부터 많은 형제들이 장례식에 참석할 것이었기 때문에, ‘니데르스베르크’ 형제는 장례식 연설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는 여러 달 동안 아무런 집회도 참석할 수 없었던, 이들 장례식에 참석한 형제들을 강화하려는 자기의 목적에 따라, 그 기회를 이용하여 힘찬 연설을 하였다. 예상했던 바와 같이, 대단히 많은 형제들이 참석하였는데, 그들은 그 연설로 크게 격려를 받고 자기들의 임명된 구역으로 돌아갔다.

물론, 다른 사람들 심지어는 비밀 경찰들도 참석하였다. ‘니데르스베르크’ 형제의 연설 후 그들은 그의 이름과 주소를 밝히라고 요구하였지만, 그를 체포하지는 않았는데, 이는 시기를 고려하여 그렇게 하려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는 여행을 계속할 수 있었다. 이제 점차 여행하는 것이 힘들게 되었다. 그는 ‘헨쉬테트’의 ‘토데’ 형제의 집에 도착하자 마자 갑자기 심한 두통을 앓다가, 얼마 후 뇌일혈로 사망하였다. 이처럼 그의 정력은 마지막까지 형제들을 세워주는 영적 양식을 공급하도록 마련하는데 사용되었던 것이다. 2주일 후 비밀 경찰은 그를 체포하기 위하여 ‘함부르크-알토나’에 있는 그의 집에 나타났다.

독일에서 생산된 등사판 「파수대」에 더하여 ‘스위스’, ‘프랑스’, ‘체코슬르바키아’, 그리고 심지어 ‘폴랜드’에서 얼마를 독일로 보냈는데, 그것들의 모양은 여러 가지 형태였으며, 종종 크기도 변경되곤 하였다. 처음에는 ‘요나답’이라는 제목을 게재한 많은 「파수대」 기사가 ‘스위스’, ‘쮜리히’로부터 발송되었다. 비밀 경찰이 이 방법을 알아낸 후에 독일의 모든 우체국에는 동 제목을 게재한 모든 봉투를 압수하고 그 잡지의 수취인들에 대하여 적절한 조치를 취하라는 지시가 하달되었다. 대부분의 경우에 이로 말미암아 그들은 체포되고 말았다.

그 후, 「파수대」의 제목과 또한 그것을 포장하는 방법은 실제로 매호마다 바뀌었다. 대부분의 경우에, 예를 들면, “세번의 축제들”, “오바댜”, “투사”, “때”, “성전 가수들” 및 기타 등등의 「파수대」 기사의 제목이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보통 단지 한번씩만 나타나곤 하였다. 그러나 이것들 중에 얼마도 비밀 경찰의 손에 들어갔었는데, 그러한 경우에는 독일 전역의 모든 경찰서에 회람되어 그 특정한 잡지가 금지된 것임을 그들에게 통고하곤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 이러한 정보는 너무 늦은 것이었는데, 이는 그 때쯤엔 완전히 색다른 형태와 완전히 색다른 제목의 또 다른 「파수대」가 이미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격노한 비밀 경찰은 여호와의 증인들은 자기들보다 전략에 있어서 한걸음 앞서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금 시대」의 경우도 비슷하였다. 얼마 동안 그것은 금지된 잡지 목록에 포함되지 않았었다. 후에, 그것이 공식적으로 금지된 다음에는, 일반적으로 외국 형제들이, 특히 ‘스위스’에서 독일의 형제들에게 개인적으로 보내주었다. 그 잡지를 발송하는 사람은 항상 주소를 손으로 쓰고 매번 다른 사람이 쓰게 하였다.

이러한 공급원을 봉쇄하려는 비밀 경찰의 시도가 더욱 실패를 거듭함에 따라 그들은 차차 형제들을 더욱 난폭하게 대하였다. 때로는 아무런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형제들의 집을 수색한 다음에는 으례 그들을 체포하였다. 경찰서로 끌려온 형제들은 대부분의 경우 모종의 유죄 고백을 짜내려는 시도하에 무자비한 고문을 당하곤 하였다.

“자유” 선거

민중을 위협하기 위하여, 그리고 특히 여호와의 증인들을 공격 목표로 삼아 그들로 하여금 타협하도록 강압하기 위하여 사용된 또 다른 무기는 소위 “자유” 선거란 것이었다. 투표하도록 강제로 끌려가기를 거부한 사람들에게는 “유대인”, “조국의 반역자” 그리고 “악당”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오샤츠’(‘작센’ 주) 출신인 ‘막스 슈베르트’는 그를 선거일에 투표장으로 데리고 가려는 선거 관계자들에 의하여 다섯 차례의 방문를 받았다. 그의 아내도 같은 목적을 지니고 찾아오는 여자들의 방문을 받았다. 그러나, ‘슈베르트’ 형제는 방문자들에게 매번 자기는 여호와의 증인의 한 사람이며 여호와를 위하여 투표하였으므로, 그것으로 충분하며 따라서 다른 사람을 위하여 투표하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설명하였다.

그 다음 날, 그는 그 문제 때문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는 철도 승차권 관리인이었으므로 사람들과의 끊임없는 접촉이 불가피하였다. 그날 그들은 그에게 “‘히틀러’ 만세”를 강조하는 인사를 하였다. 그는 “안녕하십니까?” 혹은 그와 비슷한 말로써 그러한 인사에 응답하였다. 그러나, 그는 심상치 않은 “공기”를 느꼈으며, 점심 때 자기 아내와 그 점에 관하여 토의하면서, 그에게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준비하라고 말하였다. 그 날 오후, 근무를 마친 후인 약 5시경에 경찰 한 명이 와서 그를 데리고 국가 사회당 그 지방 책임자의 집으로 갔다. 문앞에는 두필 말이 끄는 작은 마차가 서 있었다. ‘슈베르트’ 형제는 그 가운데 올라서라는 강요를 받았으며, 여러 명의 돌격 대원들이 그를 둘러싸고 앉았고, 각자의 손에는 불타는 횃불이 들려 있었다. 앞에서는 한 사람이 나팔을 들고, 뒤에서는 또 한 사람이 북을 들고 섰고, 그들은 모든 사람들이 행렬을 볼 수 있도록 교대해 가며 경보를 울렸다. 그리고 마차에 있는 두명의 돌격대원이 “나는 악당이고 조국의 반역자이다. 나는 투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쓴 커다란 표지를 들고 있었다. 곧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어 그 행렬 뒤를 따르면서 그 표지에 기록된 말을 계속 합창하였다. 그 말을 외친 다음에는 “그는 어디로 보내야 할까요?”라고 질문하였다. 그러면 군중 속에서 어린이들이 “집단 수용소로요!” 하고 합창을 하곤 하였다. ‘슈베르트’ 형제는 인구가 약 15,000명인 그 도시 거리를 두시간 반 동안 끌려다녔다. 그 다음 날 ‘룩셈부르크 라디오’ 방송국은 그 일을 보도하였다.

일부 형제들은 공무원이었다. 그들이 “독일식 인사”를 하지 않고, 선거와 정치 ‘데모’에 참여하지 않기 때문에, 정부는 1934년 여름 이래, 그들을 공무원 직책에서 축출하고자 성경 연구생들을 전국적으로 금지하는 법령을 통과시킬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렇게 하는 데에는 단순한 지방 주법보다는 그들의 활동을 금지하는 국가적인 법률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1935년 4월 1일 그러한 법률이 통과되었다. 그러나, 일부의 어떤 관청에서는 자기들의 자체 권한으로 이미 행동을 취했었다.

‘루드비히 쉬틱켈’은 ‘포르쯔하임’ 시의 재무관이었다. 1934년 3월 29일 그는 시장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는데, 거기 명시된 내용은 이러하였다. “본관은 귀관을 직위로부터 해고할 목적으로 귀관에 대한 형사 소송을 제기하는 바입니다. 귀관은 1933년 11월 12일의 국회의원 선거에 투표하기를 거부한 혐의로 피소되는 것입니다. ···” ‘쉬틱켈’ 형제는 장문의 편지로써 자기의 입장을 설명하였으나, 실질적인 판결은 이미 통과되었기 때문에, 그는 8월 20일에 파면 통지를 받았다.

그들의 목표는 여호와의 증인들을 그들의 일자리에서 해고하고, 그들의 직장에서 몰아내며, 그들의 사업체를 폐쇄하고, 그들이 자기들의 직업을 수행하는 것을 금하는 등, 그들의 생계 수단을 강탈하자는 것이었다.

‘마인츠’의 ‘게르트루드 프랑케’는 1936년에 그의 남편이 다섯 번째 체포되고, 더는 그를 석방할 생각이 없다는 비밀 경찰의 말을 들은 후, 이것을 체험하였다. ‘프랑케’ 자매는 방면된 후, 그는 약 5개월간 투옥되어 있었다—일자리를 구하기 위하여 직업 소개소를 찾아갔다. 그러나, 그는 투옥되었던 경력이 있기 때문에, 아무도 고용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침내 한 ‘시멘트’ 공장이 마지못해 그를 받아들였다. 이주일 후 그는 자기의 승락도 없이 독일의 노동 전선에 등록되었으며, 그 부과금이 그의 급료에서 인출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조직의 정치적 목적을 인식한 그는 즉시 그 직업 소개소로 가서 자기가 어떤 방법으로도 인정하지 않는 조직을 위하여 돈이 자기의 급료에서 인출된 사실에 대하여 항의하고, 그 문제를 처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 결과 그는 즉시 해고되었다. 다시 그가 그 직업 소개소에 갔을 때, 그 소개소측은 그에게 일자리를 구해 주지도 혹은 어떤 종류의 실업 원조를 제공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가 노동 전선에 가입하기를 거부하는 이상,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는 것은 그의 문제라는 것이었다.

청소년들이 당한 시련

많은 경우에 여호와의 증인의 자녀들은 교육을 받을 기회마저 박탈당하였다. ‘헬무트 크뇔레르’ 자신의 말로 그의 경험을 들어보자.

“독일에서의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이 금지된 바로 그 무렵에, 저의 부모님들은 여호와께 대한 그분들의 헌신의 상징으로 침례를 받았읍니다! 저에게 결정해야 할 때가 닥친 것은 제가 13세 때였으며, 금지령이 발표될 무렵이었읍니다. 학교에서는 종종 기 경배와 관련된 결정을 내려야 하였으며, 그럴 때마다 저는 여호와께 대한 충성과 헌신을 지지하는 결정을 하였읍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고등 교육을 받기 위하여 진학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으므로, 저는 ‘슈투트가르트’에서 견습생으로서 상업을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그 과정에는 매일 기 게양 의식이 행해지는 상업 학교에 한주에 두번씩 참석하는 일이 포함되어 있었읍니다. 저는 다른 급우들보다도 키가 더 컸기 때문에, 기 경배를 거부할 때마다 저는 불필요한 관심을 끌게 되었읍니다.

“선생이 교실에 들어올 때 학생들은 일어서서, ‘‘히틀러’ 만세’란 말로 인사를 하고, 오른 손을 올리도록 요구되어 있었는데, 저는 그것을 하지 않았읍니다. 자연히 선생의 관심은 저에게만 집중되었고 이러한 장면이 종종 벌어지곤 하였읍니다. ‘‘크뇔레르’ 이리로 나와! 왜 너는 “히틀러 만세”란 인사를 하지 않는가?’ ‘그것은 제 양심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뭐야? 이 돼지같은 놈아! 저리 가—이 더러운 놈!—저리 더 가란 말이야. 수치스러운 일이다! 이 반역자!’ 등등. 저는 그 후, 다른 반으로 옮겨졌읍니다. 저의 아버지가 교장에게 이야기하였지만, 그 결과 다음과 같은 별난 대답을 들었을 뿐입니다. ‘당신이 믿는 당신의 하나님이 당신에게 빵 한 조각이라도 줄 수 있오? ‘아돌프 히틀러’는 그렇게 할 수 있으며, 그는 그것을 증명하였오.’ 이 말은 국민은 그를 경애하고 ‘‘히틀러’ 만세’란 말로써 인사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크뇔레르’ 형제의 견습 기간이 끈난 후 제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으며 그는 군 복무 소집을 받았다. 그는 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는 1940년 3월 17일에 군 복무 징집을 받았읍니다. 장시간 저는 어떤 일이 발생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읍니다. 저는 모병소에 출두한 다음에 복무 선서를 거부한다면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총살형을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읍니다. 사실상, 제게는 집단 수용소에 감금되는 것보다 차라리 이것이 좋았읍니다. 그러나, 제 생각대로 되지는 않았읍니다. 저는 군사 재판에 넘겨지지 않고 ‘빵’과 물의 배급을 받고 수감되었읍니다. 5일 후에 비밀 경찰이 와서 심문실로 저를 끌고가서 장시간 심문을 계속하였는데, 거기서 온갖 협박이 다 가하여졌읍니다. 그날 밤 저는 감옥으로 돌아 왔읍니다. 저는 매우 행복하였읍니다. 아무런 두려움도 없었으며, 기쁨과 미래에 대한 그리고 어떻게 여호와께서 다시 한번 저를 도우실 것인가에 대한 기대 뿐이었읍니다. 삼주 후 고위 비밀 경찰들이 와서 제게 한 통의 명령서를 읽어 주었는데, 그 내용은 국가에 대한 적의적인 태도와 금지된 만국 성경 연구생들을 위하여 활동할 위험성 때문에 저를 보호 감금에 처한다는 것이었읍니다. 그것은 ‘집단 수용소’의 수용을 의미하였읍니다. 그러므로, 결국은 제가 희망했던 것과는 정반대가 되고 말았읍니다. 6월 1일 다른 죄수들과 함께, 저는 ‘다하우’ 집단 수용소에 수용되었읍니다.”

‘크뇔레르’ 형제는 ‘다하우’에서 뿐만 아니라, ‘작센하우젠’에서의 생활도 경험하게 되었다. 그는 후에 다른 많은 재소자들과 함께 영국 해협의 ‘앨더니’ 섬으로 이송되었다. 극적인 여행을 거치면서 ‘오스트리아’ ‘쉬타이에르’로 옮겨왔는데 마침내 그곳에서 그 형제 및 그와 함께 수용되었던 사람들은 1945년 5월 5일에 석방되었다. 비록 ‘크뇔레르’ 형제가 가장 어려운 상황하에서 수년간 충성을 지켰다는 사실은 그가 여호와께 이미 헌신한 사람임을 증명해 주지만, 그렇게 심한 박해를 받은 그가 그 때까지 아직 물의 침례로써 그러한 헌신을 상징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그 당시의 소란이 어떠하였었는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와 함께 귀향한 소수의 생존자들 가운데는 9명의 다른 형제들이 있었는데, 집단 수용소에서 4년 내지 6년씩 충성스럽게 인내한 그들 모두는 이제 ‘파사우’에서 침례받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자녀들이 부모들로부터 격리되다

‘쉬트렌게’ 형제 부부는 그 소란스러웠던 시기에 여호와의 증인들이 법적 권리의 보호를 받기가 얼마나 어려웠는가를 나타내는 경험을 하였다. ‘쉬트렌게’ 형제는 체포되어 3년간의 금고형을 선고받았으며, 그래서 이제 자녀들과 함께 외로히 남겨진 ‘쉬트렌게’ 자매는 전력을 다해도 헤어나기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는 이렇게 진술한다.

“제 아들은 학교에서 애국주의적인 노래를 부르고 애국주의적인 시를 암송해야 하였읍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자기의 종교적인 신념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그는 거부하였읍니다. 그의 담임 선생은 두 어린 소년들을 시켜서 마치 포로를 다루듯이 교장인 ‘한네베르크’ 모씨에게로 그를 인도하였는데, 그 교장은 그에게 손가락이 피가 나고 붓고 멍이 들게 하겠다고 말하면서 지독한 욕설을 퍼부었읍니다. 그 교장은 그를 계속 위협하였으며, 아버지를 다시는 못보게 될 것이라고 협박하였읍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이 열살짜리 어린이에게 군에 가는 것도 거부하겠느냐고 질문하였읍니다. ‘귄테르’는 성서를 참조하여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는 말을 하였읍니다. 그러자, 그 교장은 ‘귄테르’의 담임 선생에게 ‘그 아이를 관례대로 처벌하시오’ 하고 지시하였읍니다. 그 뒤에 그 교장은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면서, 경찰에 연락하여 그들로 하여금 5분 후에 그를 집에서 데려다가 감화원에 수용시키게 하겠다고 말하였읍니다. 제 아들이 집에 믹 도착하자마자 경찰이 큰 차를 몰고 저희 집 앞으로 달려왔읍니다. 몇명의 경찰이 요란스럽게 들어오려고 하였지만 저는 문을 열어주기를 거부하였읍니다. 얼마 후에 경찰은 저희 이웃 집으로 물러가서 저를 유죄화할 수 있는 증거를 제공하라고 요구하였읍니다. 그러한 유죄의 증거를 제시할 수 없었던 그는 오랫 동안 억압을 당하여 마침내 우리가 매일 아침 노래를 부르고 기도를 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시인하고 말았읍니다. 그러자, 경찰은 사라졌읍니다.

“다음 날 아침 10:30경, 경찰이 다시 찾아왔읍니다. 제가 문을 열지 않으려하자 비밀 경찰들은 ‘이 나쁜 성경 연구생아! 문열어!’ 하고 소리쳤읍니다. 그리고 그들은 근처에 살고 있는 자물쇠 제조업자를 데리고 와서 문을 부수고 들어왔읍니다.

“연발권총을 제 가슴에 들이대고 한 비밀 경찰 요원이 ‘아이들을 내놓지’ 하고 소리쳤읍니다. 그러나 저는 아이들을 꼭 끼어안았으며, 아이들도 보호처를 찾아 제게 매달렸읍니다. 그들이 강제로 우리를 떼어놓으려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우리는 도와달라고 목청껏 소리쳤읍니다.

“창문은 열려 있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집앞으로 모여들었으며, ‘나는 말할 수도 없이 고통스러운 산고를 거쳐서 내 자녀들을 낳았단 말입니다. 이 아이들을 당신들에게 넘겨줄 수는 없읍니다. 차라리 나를 먼저 죽이시오’라고 내가 외치는 절망의 소리를 들었읍니다. 그리고 나서 흥분이 지나친 나머지 저는 기절하고 말았읍니다. 정신을 차린 후 저는 세시간 동안 비밀 경찰의 심문을 받았읍니다. 그들은 제게서 남편의 유죄 증거를 끌어내려고 하였읍니다. 저는 몇차례 간헐적으로 기절하였었으므로 그럴 때마다 그 심문은 중단되곤 하였읍니다. 한편 저희 집 앞에 운집한 군중은 계속 증가하였으며, 그들은 차차 웅성거리면서 발생되고 있는 일들을 동의하지 않는다는 자기들의 뜻을 나타내기 시작하였읍니다. 마침내, 비밀 경찰은 자기들이 기도했던 바를 성취하지 못하고 다시 물러갔읍니다. 이제 그들은 비밀히 아이들을 빼앗아 가려고 획책하였읍니다. 며칠 후, ‘엘빙’의 특별 재판소에 출두하도록 저를 소환한 것은 이러한 계획을 추진하기 위한 것임이 명백하였읍니다. 같은 날에 제 자녀들도 그들을 보호하도록 임명받은 후견인에게 출두하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최악의 경우를 상상하고 하루 전에 두 아이를 데리고 그 후견인을 방문하였읍니다. 그는 15세된 제 딸은 노동 수용소로 보내지며, 10세인 ‘귄테르’는 국가사회주의 노선에 따라 그를 훈련시킬 가정에 맡겨질 것이라고 말하였읍니다. 거부한다면 둘 다 감화원에 수용될 것이라는 것이었읍니다. 흥분한 저는 ‘말씀해 보세요. 우리가 지금 소련의 치하에 살고 있읍니까, 아니면 아직도 독일에 살고 있읍니까?’ 하고 다그쳤읍니다. 그 말에 그는 ‘‘쉬트렌게’ 부인, 나는 당신이 방금 말한 것은 무시하겠읍니다. 나도 종교적인 가정에서 태어났읍니다. 나의 아버님은 목사였읍니다!’라고 대답하였읍니다. 제가 제 딸만이라도 어떤 견습 교육이라도 받게 해달라고 요청하자, 이 후견인은 ‘더 이상 나는 당신과 다투고 싶지 않습니다. 한 명의 성경 연구생을 상대하느니 차라리 20명의 다른 아이들을 상대하겠오’라고 대꾸하였읍니다.

“여호와와 그분의 약속에 대한 제 믿음을 변호하기 위하여 ‘엘빙’ 법정에 출두하게 되어 있는 날인 토요일이 도래하였읍니다. 자신을 강화하기 위하여 그리고 다시 한 번 제 심장에 맺힌 한을 쏟아내기 위하여, 저는 먼저 투옥된 남편을 찾아갔읍니다. 그가 인도되어 들어오자 저는 그의 품 안으로 쓰러지면서 흐느끼고 말았읍니다. 지난 며칠 사이에 일어났던 모든 슬픔과 끔찍한 사건들이 제 속에서 다시 한번 솟아올랐읍니다. 남편은 8년의 금고형을 선고받았으며, 자녀들은 제게서 격리되었고 게다가 각각 분리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기력을 잃고 인내의 한계에 다다랐읍니다. 그러나, 남편의 말은 천사의 말과 같았읍니다. 남편은 ‘욥’의 경험들과 그의 고난들, 그러면서도 깨어지지 않은 여호와께 대한 그의 충성, 그래서 심지어 그가 모든 것을 상실한 후에도 하나님께서 악행을 하신다고 비난하지 않던 일들을 서술하여 저를 격려해 주었읍니다. 남편은 그가 또한 여러 차례의 심문과 재판으로 말미암은 혹심한 시험 후에 여호와로부터 어떻게 풍부한 축복을 받았는지를 이야기해 주었읍니다. 이것은 저에게 새로운 힘을 주었읍니다. 이제 저는 머리를 들고 제 자녀들이 어떠한 열심을 가지고 여호와와 그분의 왕국과 자기들의 믿음에 대하여 선생들과 다른 고위 관리들 앞에서 증거하였는지에 관한 자랑스러운 말을 듣기 위하여 법정으로 향하였읍니다. 그 ‘독일 법원’은, 제가 국가사회주의에 입각하여 자녀들을 양육하지 않았고, 그들과 함께 여호와를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다는 이유로, 제게 8개월의 금고형을 언도하였읍니다.”

급우들의 배척을 받다

‘카알스루에’의 12세된 ‘빌리 사이츠’ 형제는 다른 종류의 경험을 하였다. 그 자신의 말은 이러하다.

“현재까지 내가 격어야 했던 시련은 이루 말할 수도 없었읍니다. 동료 학생들은 학교에서 나를 구타하였으며, 우리가 도보 행진을 할 때, 혹시 내가 함께 가도록 허락된다 하더라도, 나는 외톨이로 걷지 않으면 안되었으며, 나는 학교 친구들에게 말을 할 수도 없었읍니다. 이것은 지금도 그러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나는 더러운 개처럼 미움과 조롱을 받았읍니다.’ 나는 유일한 위안은 하나님의 왕국이 곧 도래할 것이라는 사실이었읍니다. ···”

1937년 1월 22일, ‘빌리’는 퇴학당하였는데, 그 이유는 “독일식 인사 거부, 애국가 부르기 거부 및 학교 의식 참여 거부”라는 것이었다.

기도하고 노래부른다는 이유로 유죄 판결을 받다

‘포킹’ 출신인 ‘막스 뤼프’도 여호와의 증인들로 하여금 강제로 그들의 성실을 파괴하게 하려고 얼마나 조직적인 시도가 행하여졌는지를 체험하였다. 그의 생계 수단이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건물을 바꾸기 위한 목적으로 설정하였던 저당이 취소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즉시 채무를 변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의 전 재산은 1934년 5월에 경매에 붙여지고 말았다.

“박해가 거기서 끝난 것은 아니었다”라고 ‘뤼프’ 형제는 말을 잇는다. “그 반대로, 정치 지도자들의 선동으로 나는 거짓 고발를 당하여 법정에 끌려갔다. 그들은 나를 고발할 마땅한 근거가 없었기 때문에, 가정에서 금지된 기도를 하고 노래를 불렀다는 이유로 ‘뮨헨’의 한 특별 재판소에서 6개월의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나는 1936년 12월 31일부터 복역하기 시작하였다. 세째 아이를 낳을 때를 기다리고 있던 내 아내는 12‘라이히스 마르크’ 가량의 임대료 외에는 아내 자신과 아홉살과 열살인 두 아이들을 위한 아무런 보조도 받지 못하였다. 마침내 아내가 아이를 낳을 때가 되었다. 우리들은 내가 필요한 일들을 돌볼 수 있도록 형기 복역을 수주 동안 유예시켜 줄 것을 탄원하였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나기 약 1주일 전에 우리의 탄원은 ‘부당하다’고 거부되고 말았다.

“3월 27일 나는 아내가 사망하였다는 통고를 받았으며, 필요한 일들을 처리하도록 3일간 방면되었다. 비록 내 아내는 병원에 당도하기 전에 운명하였지만, 아이를 출산한 다음에 아내를 옮겨간 그 병원으로 즉시 달려갔다. 내가 여호와의 증인임을 아직 모르고 있던, 의사와 간호원 한 사람은 ‘당신의 아내는 건강하였고 그에게 원인이 있었던 것은 아니니 그 의사와 산파를 고발하시오’ 하고 강권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러자면 수속이 복잡하겠는데요’ 하고 힘없이 대답하였을 뿐이다. 집에 당도한 나는 침실에 누워있는 죽은 아이와 아홉살과 열살의 다른 두 아이를 발견하였다. 그때의 심경은 누구나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다시는 이 아이들을 보지 못할 터인데, 아무도 돌보아 줄 사람없이 아이들을 외로이 남겨두고 가야한다는 말인가?”

‘뤼프’ 형제의 빙부모는 그의 아내의 시체를 ‘포킹’으로 보내라고 하였는데, 그 곳에서는 직계 가족 외에는 아무도 묘지에서 발언을 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뤼프’ 형제 자신이 자기 아내의 장례식 연설을 하였는데, 참으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주시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제 아무도 돌보아 주는 사람없이 두 자녀를 떼어놓고 떠나야 한다는 생각은 ‘뤼프’ 형제로서는 도저히 견디기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는 형 집행의 유예 기간을 몇 시간 남겨놓고, 비록 자기 빙부모가 여호와의 증인들은 아니지만, 한 자녀를 그들에게 맡기고, 다른 한 자녀를 ‘스위스’ 국경 근처에 살고 있는 형제들에게 데리고 갔다. 마침내, 그는 극적인 국경 탈출을 하여 ‘스위스’로 넘어갔는데, 그곳에서 그는 자기 자녀와 함께 난민 보호소에 수용되었다.

성실을 파괴하기 위하여 처음에는 징벌, 그 다음에는 “친근”을 가장하다

당국자들의 계산과 일치하게 부모들로부터 분리된 어린이들 중에는 얼마 동안 믿음이 약해졌으며, 또 실제로 ‘나치스’의 진영으로 끌려 들어갈 위험에 처하게 된 어린이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마이센’ 출신인 ‘호르스트 헨셸’이 있는데, 그는, 1943년 12세일 때 자기 아버지와 함께 침례를 받았다. 그는 이렇게 기술한다.

“내 어린 시절은 기복들로 가득찼었다. 나는 ‘히틀러 유겐트’(‘히틀러’ 소년단)를—적어도 그렇게 하는 것이 가능한 한—탈퇴하였으며, 나는 행복하였고 강하였읍니다. 학교 생활의 필수적인 요구 조건이었던 ‘히틀러’ 인사를 하기를 거부할 때 구타를 당하곤 하였지만 부모님들로부터 힘을 얻은 나는 제 자신이 충성을 유지하였음을 깨닫고는 기뻐하곤 하였다. 그러나 신체상의 형벌이나 또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에서 ‘히틀러 만세’ 하고 말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다음에는 눈에 눈물이 가득하여 집에 돌아가던 일, 그리고 우리가 함께 여호와께 기도하던 일 및 그렇게 하고 난 다음에는 원수의 공격들을 저항할 수 있는 담대함을 갖게 되곤 하던 일들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런 다음에도 같은 일들이 또 발생하곤 하였다.

“하루는 비밀 경찰이 와서 저희 집을 수색하였다. ‘당신도 여호와의 증인이요?’ 하고 어깨가 널찍한 친위대 대원 한 사람이 어머니께 질문하였다. 긍정의 대답을 하는 것은 곧 조만간 체포되는 것을 뜻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지만, 문틀에 기대서서 ‘그렇습니다’라고 단호하게 대답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실제로 보고 있는 듯이 눈에 선하다. 2주 후에 어머니는 체포되셨다.

“어머니가 하루만 지나면 만 한 살이 되는 나의 어린 여동생을 분주하게 돌보고 계실 때, 경찰이 체포 영장을 휴대하고 들이닥친 것이다. ··· 그때 아버지는 집에 계셨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 아버지의 보호를 받았다. ··· 2주 후에 아버지도 체포되고 말았다. 아버지가 부엌 난로 앞에 웅크리고 앉아서 불을 응시하고 계시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나는 학교로 가기 전에 있는 힘을 다하여 아버지를 꽉 껴안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돌이켜 나를 바라다보지 않으셨다. 나는 종종 아버지가 싸우시던 힘든 투쟁을 생각하곤 하였으며 오늘날까지도 하나님께서 아버지에게 나를 위한 그러한 훌륭한 본을 보이도록 필요한 힘을 마련해 주셨던 일에 대하여 여호와께 감사하고 있다. 내가 집에 돌아와 보니,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는 군 복무 이행 명령을 받고 거부 의사를 설명하기 위하여 읍 징집 동원 위원회에 가셨던 것이다. 아버지는 즉각 체포되셨다. 조부모님과 다른 친척들—이분들은 모두 여호와의 증인을 반대하였으며, 그중 어떤 분들은 ‘나치’ 당원이었다—은 필요한 조치를 취하여 나와 한 살 된 어린 여동생의 보호권을 확보하여 저희들이 소년의 집이나 혹시 감화원으로 보내지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이미 21세가 된 둘째 누님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꼭 2주 후에 체포되었는데, 그로부터 3주 후에 ‘디프테리아’와 성홍열로 말미암아 감옥에서 사망하였다.

“어린 여동생과 나는 이제 조부모님들과 함께 있게 되었다. 나는 어린 여동생의 침대 앞에서 무릅을 꿇고 기도하던 것이 기억난다. 나는 성서를 읽을 허락을 받지 못하였지만 어떤 이웃 사람으로부터 한 권을 몰래 구해서 읽을 수 있었다.

“진리 안에 있지 않던 할아버지는 한번 감옥으로 아버지를 찾아가셨다. 할아버지는 대단히 분개하고 크게 노하여 집에 돌아오셨다. ‘그런 고약한 놈, 그런 몹쓸 놈같으니라구! 도대체 어떻게 제 자식마저 돌보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손과 발이 사슬로 결박된 채 인도되어 나온 아버지에게 할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자녀들을 위하여 징집에 응하게 하려고 노력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계속 충성을 지키셨으며, 그러한 제의를 단호히 거절하자 한 관리는 할아버지에게 ‘이 사람에게 자녀가 열이 있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그러한 말이 할아버지 귀에는 거슬리게 들렸겠지만, 내게는 아버지가 충성을 유지하고 있으며, 여호와께서 그를 돕고 계시다는 증거의 소리로 들렸다.

“얼마 후 나는 아버지로부터 한통의 편지를 받았다. 그것은 그의 마지막 편지였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어디 투옥되어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내게로 편지를 한 것이다. 나는 다락 침실로 들어가서 서두를 읽었다. ‘네가 이 편지를 받거든 기뻐해라. 내가 지금까지 인내하였기 때문이다. 두 시간 후면 나에게 형이 집행될 것이다. ···’ 나는 그때 오늘날처럼 그 말뜻의 깊이를 파악하지 못하였지만, 그래도 슬펐고, 그래서 울었다.

“이러한 모든 결정적인 사건들을 직면하여 나는 비교적 강함을 유지하였다. 의심할 여지 없이 여호와께서 내게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필요한 힘을 주셨던 것이다. 그러나 ‘사단’이 사람을 자기의 올무 속으로 유혹해들이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며, 나는 곧 이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내 친척 중 한 사람이 나의 선생을 찾아가서 나에게 끈기있게 대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갑자기 그들 모두는 내게 매우, 매우 친근하게 대하였다. 심지어 내가 ‘‘히틀러’ 만세’ 하고 인사하지 않아도 선생들은 내게 벌을 주지 않았으며, 내 친척들은 나를 특히 친근하고 상냥하게 대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결국은 이렇게 되고 말았다. 즉,

“나는, 아무도 내게 강요하지 않았는데도 그리고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기 불과 몇 달 전이었지만 스스로 ‘히틀러 유겐트’에 가입하였던 것이다. ‘사단’은 가혹한 수단으로 성취할 수 없었던 일을 아유적이며 교활한 수단으로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외부로부터의 혹심한 박해가 우리의 충성을 시험할 수 있지만, 다른 각도에서 닥쳐오는 ‘사단’의 야비한 공격들도 잔인한 공격보다 결코 덜 위험하지는 않다고 나는 지금 말할 수 있다. 지금 나는 어머니께서 감옥에 계시는 동안 어떠한 어려운 믿음의 시험을 겪어야 하셨는지를 안다. 나는 죽을 때까지 굽히지 않은 아버지의 충성과 헌신을 확증해 주는 그분의 마지막 편지를 받았었으며, 그것은 내게 많은 힘을 주었다. 그 반면, 어머니는 아버지의 죽음의 고통에 대한 무언의 증거인, 핏자국이 아직도 선명한 그분의 의복가지를 받으셨다. 훗날, 이 모든 일들도 어머니로써 견디기 힘든 어려움이었지만, 그러나, 그 기간 중에 어머니에게 가장 어려웠던 시험은 내가 여호와를 섬기길 중단하였음을 나타내는 내 편지들이었노라고 어머니는 내게 말씀하셨다.

“전쟁은 신속히 끝났다. 어머니는 집에 돌아오셨으며, 나로 하여금 헌신의 길로 돌아 서도록 도우셨다. 어머니는 계속 여호와의 사랑과 그분에 대한 헌신 가운데서 나를 양육하셨다. 과거를 돌이켜 볼 때, 나는 오늘날의 많은 젊은 형제들이 오늘날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비슷한 문제들을 가지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나의 어머니는 나로 하여금 헌신의 행로에 머물러있도록 돕기 위한 싸움을 결코 중지하지 않으셨다. 여호와의 과분하신 친절의 덕택으로 나는 이제 22년 동안 전 시간 봉사에 머물러있는 특권을 즐겨왔으며, 그 기간 중에 6년 4개월간은 나의 부모들처럼 동독의 감옥에서 감금된 생활을 하였다.

“나는 종종 내가 그렇게 풍부한 여호와의 축복을 받기에 합당한 무슨 일을 과거에 하였는가 하고 자문하곤 하였다. 지금 나는 오로지 부모님의 기도의 덕택이라고 믿고 있을 따름이다. 그분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통하여 세워놓으신 그리스도인 행실의 본 이상의 더 훌륭한 본을 세워놓으실 수는 없었다.”

정확한 수자는 훨씬 더 높겠지만, 자녀들을 부모로부터 빼앗아 간 경우가 알려진 것만도 860건이나 있었다. 그러한 비인도적인 만행을 고려할 때, 시간이 흐르는 사이에 당국자들이 단순히 부모 중 한 편이 “유전병”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자녀를 낳는 것이 불가능하게 만들 정도로 깊히 관여하게 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면 그는 법의 규정 하에서 단종 수술을 받아야 하였던 것이다.

심문에 사용된 방법들

심문에 이용된 무자비한 책략들 중의 하나는 심문이 진행되는 동안 결혼 배우자나 다른 가족 성원들을 고문하여 괴롭히는 것이다. ‘에밀 빌데’는 그 방법의 잔학성을 이렇게 설명하였는데, 그는 감방에 갇혀서 자기 아내가 문자 그대로 고문을 당하여 죽어가는 소리를 듣도록 강요당하였던 것이다.

“1937년 9월 15일” 하고 그는 말문을 열었다. “아침 일찍 5시경, 두 명의 비밀 경찰관이 찾아와서 우선 자녀들을 심문한 다음, 우리 집을 수색하였다. 그 뒤 내 아내와 나는 경찰서로 연행되어 가서 즉시 수감되었다. 우리의 첫 심문은 약 10일 후에 행하여졌다. 나는 내 아내도 같은 날에 최초의 심문을 받게 된다는 말을 들었는데, 사실이 그러하였다.

“오후 1시경에, 나는 한 여인이 큰 소리로 울부짓는 것을 들었다. 그는 구타를 당하고 있는 것 같았으며, 울부짓는 소리가 점점 더 커지고 그 소리가 더 명확하게 들려옴에 따라 나는 그것이 내 아내의 소리임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초인종을 울려 그 여인, 즉 내 아내가 구타를 당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대답은 네 아내가 아니라, 나쁜 행실 때문에 구타당해야 마땅한 어떤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 날 오후 늦게 그 비명은 다시 시작되었으며, 너무나 격렬해진 소리에 참지 못한 나는 다시 한 번 초인종을 울린 다음, 내 아내에게 자행되고 있는 학대에 대하여 항의하였다. 비밀 경찰은 계속 내 아내가 아니라고 부인하였다. 그 날 밤 1시경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또 다시 종을 울렸더니 이름을 알 수 없는 그 경관은 ‘한 번만 더 초인종을 울리면 네 아내가 당한 것과 똑같이 너도 당하게 될께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뒤이어 감옥 전체가 조용해졌는데, 이는 그들이 아내를 신경과 병원으로 데리고 갔기 때문이다. 10월 3일 아침 일찌기 비밀 경찰의 수비대장인, ‘클라신’이 내 감방으로 와서 아내가 신경과 병원에서 사망하였다는 말을 전하였다. 나는 그의 면전에다 대고 내 아내가 죽은 것은 그들의 책임이라고 말하고 아내의 장례식날 비밀 경찰을 살인 혐의로 고발하였다. 이것은 비밀 경찰이 오히려 나를 명예 훼손죄로 고발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것은 내가 받은 최초의 재판에 더하여 또 다시 재판을 받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 재판이 열렸을 때, 두 자매가 특별 심문 도중에 일어서서 ‘우리는 ‘빌데’ 부인이 “이 악마들아, 너희가 나를 때려 죽이는구나” 하고 부르짓는 소리를 들었다’고 증언하였다. 그러자, 판사는 “그러나 그들이 그 광경을 목격한 것은 아니다. 단지 소리를 들었을 뿐이다. 본인은 피고에게 일개월간의 구류를 선고한다”라고 응수하였다. 사망한 후의 내 아내를 목격한 몇몇 자매들은 그가 목과 얼굴이 채찍으로 맞은 굵은 자국들로 심히 일그러져 있더라고 확증하였다. 나는 그의 장례식의 참석 허락을 거부당하였다.”

다른 경우에는 형제들을 최면하기 위한 시도가 진행되었다. 어떤 형제들은 약을 섞은 음식을 받아먹고 얼마 동안 발언에 대한 제어력을 상실하였다. 자백을 강요하기 위한 시도의 하나로 어떤 형제들은 밤새도록 손과 발을 등뒤로 묶이어 있기도 하였다. 개중에 어떤 형제들은 그러한 가혹한 형태의 고문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에, 비밀 경찰은 여호와의 증인들의 사업이 어떻게 조직되고 수행되는지에 관한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다.

우정적인 관리들과 고용주들

비록 관리들이, 새로운 체제 내의 모든 지도자들의 특징을 이루며, 이른바 ‘총통의 강령’에 기초하였다는 ‘새로운 강력하고도 야비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지만, 개중에는 감옥 안팎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을 대할 때 자기들이 아직도 동료 인간들에 대한 연민의 정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임을 나타내는 경찰관들도 간혹 있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카알 괴링’은 “독일식 인사”를 하는 것과 노동 전선 기구에 가입하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메르세부르크’의 ‘로이나 아르바이츠’라는 사설 철도 회사에 재직하다가 해고되고 말았다. 직업 소개소에서는 그에게 직장을 알선해 주기를 거부하였으며, 복지사무소도 그에게 어떤 종류의 보조도 제공하기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자기 백성들의 필요를 아시는 여호와께서는 그 문제를 인도하셨으며, 그래서 ‘괴링’ 형제는 곧 ‘바이젠센펠스’의 제지 회사에 취업하게 되었다. 그 회사의 중역인 ‘코르넬리우스’ 모씨는 부근에 살고 있는 직장에서 해고된 모든 형제들을 고용하였으며, 그들의 양심에 어긋나는 것은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후에도, 비록 많지는 않지만, 그 사람과 같은 다른 고용주들이 또 나타났다. 그리하여 상당수의 형제들이 비밀 경찰의 손아귀로부터 구출되었다.

또한 ‘히틀러’ 정부에 의하여 사용되는 폭력적인 방법을 속으로는 결코 동조하지 않는 판사들도 있었다. 특히 처음에는, 많은 판사들이 형제들에게 서명을 해도 해롭지 않은 서류, 즉 단순히 그들이 어떠한 정치 활동에도 개입하지 않겠다고 명시하는 서류를 제시하였었다. 형제들이 이 서류에 머뭇거릴 필요없이 서명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많은 형제들이 자유를 박탈당하는 일이 없도록 구해 주었다.

가택 수색은 종종 모든 관리들이 겉보기처럼 그렇게 여호와의 증인들을 미워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나타내 주었다. ‘폿디히’ 형제 부부는 자기들의 가정이 수색당할 때 이것을 경험하였다. 어느 날 그들은 ‘네덜란드’에 살고 있는 ‘폿디히’ 자매의 친 언니로부터 다른 출판물들과 「파수대」지들을 포함한, 우편물을 방금 받은 후였다. 그러나 그들이 미쳐 그것들을 펴보기도 전에 초인종이 갑자기 울리기 시작하였다.

‘폿디히’ 자매는 “빨리, 모든 것을 찬방에 집어 넣고 문을 닫아요” 하고 소리쳤다. 그러나, 이것이 주의를 끌지도 모르므로 그는 마지막 순간에 가서 문을 열어놓기로 결정하였다. 한편 비밀 경찰 요원이 돌격대 대원 하나를 대동하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면 여기서부터 시작합시다” 하고 그는 말하였다. 그 말로서 그는 문이 열려있는 찬방을 뜻한 것이었다. 그때 ‘폿디히’ 형제의 어린 아들이 갑자기 “한참 동안 찾아보시면 찬방에서 무엇인가 발견하게 될꺼예요”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 비밀 경찰 요원은 웃으면서 “자, 그렇다면, 다른 방으로 가 봅시다”라고 응답하였다. 결국 전체 수색에는 소득이 없었다. 사실상 ‘폿디히’ 형제와 그의 가족은 그들이—적어도 그 비밀 경찰 요원은—아무 것도 발견하기를 원하지 않는듯한 인상을 받았다. 그 돌격대 대원은 수색이 철저히 수행되지 않았다고 생각하였음인지 수색을 계속하길 원하는 것 같이 보였다. 그러나, 비밀 경찰은 그를 견책하고, 더 뒤져보지 못하게 하였다. 돌아가다가 갑자기 그는 혼자 돌아 와서 ‘폿디히’ 자매에게 귓속말로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폿디히’ 부인, 내 말을 들으시오. 그들은, 당신 자녀들이 ‘히틀러 유겐트’에 가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을 데려갈 것입니다. 그러니 단지 눈에 띄지 않게 하기 위해서만이라도, 당신 자녀들을 어디로 보내시오.” “그리고 그들 두 사람은 돌아갔으며, 우리는 ‘네덜란드’에서 온 우편물을 평온 속에서 읽을 수 있었다”라고 ‘폿디히’ 형제는 기술한다. “우리는 많은 새로운 것들과 그리고 다시 한 번 그 속에 포함되어 온 「파수대」에 대하여, 여호와께 감사드렸다.”

기지

물론, 비밀 경찰들이 수색을 할 때, 눈이 멀어버린 것처럼 보이거나 또 그들이 형제들의 번개같이 민첩한 행동에 따라 빈번히 속임을 당하는 경우도 수없이 많이 있었는데, 그런 일들은 여호와의 보호와 천사의 도움을 분명히 예시하는 것이다.

‘마르크트레드비츠’의 ‘코르넬리우스’ 자매는 이러한 경험을 이야기하였다. “어느 날 또 다른 한 경찰관이 수색하러 나타났다. 우리는 몇부의 등사판 「파수대」를 포함한 몇권의 출판물을 집에 가지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그것들을 식탁 위에 놓여있던 빈 ‘커피’ 주전자 속에 집어넣는 수 밖에 다른 방도를 생각할 수 없었다. 모든 곳을 뒤져본 다음에 이 은닉처를 발견한다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바로 그 순간 내 여동생이 의외로 우리 ‘아파트’를 들렸다. 나는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여기, 네 ‘커피’를 가지고 가라’고 말하였다. 그는 처음에는 약간 어리둥절한듯 하더니, 그러나, 내 말뜻을 이해하고는 그 ‘커피’ 주전자를 가지고 즉시 나가버렸다. 그리하여, 그 서적들은 위험을 벗어났으며, 경찰들은 자기들이 속았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코르넬리우스’ 형제 부부가 말한 그들의 5세된 아들 ‘지이그프리이트’에 관한 이야기인데, 그 어린이는 그때 아직 학령기가 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독일식 인사”나 다른 비슷한 것들과 관련된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부모들이 그를 진리 안에서 양육하였기 때문에, 자기 부모들이 읽은 다음에는 항상 숨겨두는 그들의 서적이 매우 중요하며 비밀 경찰이 그것을 발견하도록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느 날 두명의 경찰이 뜰을 지나 자기들의 집으로 오고 있는 것을 본 그는 즉시 그들이 숨겨둔 서적을 찾으려고 할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들이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하도록 자기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깨달았다. 그는 아직 학교에 다닐 나이가 아니었지만, 자기 형의 책가방을 열고 속을 비운 다음, 서적들을 대신 채워 넣었다. 그는 이제 그 가방을 등에 메고 거리로 나갔다. 그리고 그는 경찰들이 허탕을 치고 돌아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집으로 돌아와서 그 서적들을 본래 있던 자리에다 다시 숨겨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