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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제2부)

독일 (제2부)

독일 (제2부)

양들이 감옥에서 발견되다

형제들은 감옥에 있는 동안 모든 종류의 사람들과 접촉하게 되었으며, 자연히 가능한 한 최대한도로 자기들의 소망에 관하여 그들에게 이야기하게 되었다. 그들의 동료 수감자들 중의 하나가 진리를 받을 때면 그들의 기쁨은 참으로 대단하였다! ‘빌리 렘베케르’는 우리에게 그러한 경험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는 많은 수감자들과 함께 흡연이 허용된 한 방에 감금되어 있었다.

“내 침대는 윗층이었는데, 내 밑에서 잠자는 수감자가 너무 담배를 피우기 때문에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잠자는 동안, 나는 그에게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에 관하여 성서로부터 증거를 할 수 있었다. 나는 그가 주의깊이 경청하는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이 젊은이는 정치 활동을 했었으며, 불법 잡지를 배부한 혐의로 구속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서로 언젠가 자유롭게 되고, 만일 그때까지 생존한다면 서로 방문하도록 노력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다르게 나타났다. 1948년에 나는 한 순회 대회에서 그를 다시 만났던 것이다. 그는 즉시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한 다음, 그 동안의 일을 이야기하였다. 그는 형기를 마치고 석방된 다음, 군에 징집되어 ‘러시아’ 서부 전선에서 복무하였던 것이다. 그곳에서 그는 내가 자기에게 이야기한 모든 것들을 재고해 볼 기회를 갖게 되었다. ··· 마침내 그는 나에게 ‘오늘 나는 당신의 형제가 되었읍니다’라고 말하였다. 그 때 내가 얼마나 감동되었고 얼마나 기뻤었는지를 상상할 수 있겠는가?”

‘헤르만 쉴뢰메르’도 비슷한 경험을 하였다. 어떤 형제가 그에게 다가와서 “나를 알아보시겠읍니까?” 하고 질문한 것도 마찬가지로 한 순회 대회에서였다. ‘쉴뢰메르’ 형제는 “낯이 익긴 하지만, 글쎄, 누구신지 모르겠는데요”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 형제는 ‘쉴뢰메르’ 형제가 ‘프랑크푸르트-프로인게스하임’에서 5년간의 감옥 생활을 하는 동안, 그를 맡고 있던 간수였노라고 자신을 소개하였다. ‘쉴뢰메르’ 형제는 그 감옥의 교직자에게 성서를 한권 구해 주기로 요청하였었지만 거부당하였었기 때문에, 그에게 요청하였었다. 그래서 인정이 있는 사람이었던 그 간수는 ‘쉴뢰메르’ 형제를 위하여 성서 한권을 구해 주었으며, 또한 외로운 감금 상태에서의 소일거리로서 가족의 양말 꿰맬 것을 가져다 주었었다. 그렇다, ‘쉴뢰메르’ 형제는 참으로 기뻐할 이유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 경우에 여호와의 말씀이 비옥한 흙에 떨어진 것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영적 양식이 결핍해지다

독일의 영적 식단은 계속 줄어들었다. 개인이나 집단을 막론하고 조직과의 접촉을 잃고 더는 영적 양식을 얻을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하인리히 비이케르’는 이렇게 보고한다.

“‘나치스’가 권력을 잡을 무렵, 우리 회중에는 30 내지 40명의 전도인이 있었다. 이 체제가 취한 도전적인 입장은 많은 형제들을 ‘그늘 속으로 옮겨’ 가게 하여 무활동이 되게 하였고, 전도인의 약 반수는 더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이것은 우리가 떨어져나간 사람들을 만났을 때, 인사는 하더라도 잡지가 있어도 그들에게 주지는 않는 등, 그들을 상대하는 데 매우 조심해야 함을 의미하였다. 우리는 한 때, 논의 중에 약 14명을 제외하고는 모든 형제들이 한 선거에서 투표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자연히 일부 형제들은 단순히 그들이 여호와의 조직으로부터 떨어져나갔으리라는 의심을 일으키는 어떤 불행한 상황 때문에 영적 양식을 박탈당하는 위험성이 있게 되었다. 이런 일이 ‘쉬테틴’의 ‘그레테 클라인’과 그의 어머니에게 발생하였다. 그 자매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는 여러 형제들의 집에서 작은 집단으로 함께 모이곤 하였다. 우리의 회중 감독자는 나에게 「파수대」를 주어 내가 등사원지를 쓰게 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간뿐, 내가 그렇게 귀중히 여기던 이 특권도 끝나고 말았다. 형제들은 나의 아버지가 진리를 반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 일이 탄로될 것을 무서워하였던 것이다. 우리들 즉 어머니와 나는 「파수대」 한 부조차도 받지 못하였다. 사실상, 형제들은 거리에서 우리를 만나면, 우리에게 인사마저도 하지 않을 정도로 두려워하였다. 우리 두 사람은 조직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되고 말았다. ‘쉬테틴’에서는 성경 연구생들의 회중이 소멸되어 없어지고 말았는데, 이는 비록 아직 자유롭긴 하였지만, 우리에게 인도자와 영적 양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만히 서 있는다는 것은 실제로 후퇴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을 우리는 영적 태도에서 곧 지각하게 되었다. 전쟁이 시작된 후, 나는 정치범 수용소에 있는 우리의 영적 형제들을 위하여 기도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곧 나는 소련과 ‘그리이스’에서 실제 무기를 들고 전쟁을 하고 있는 오빠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였다. 그때, 나는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옳지 않다는 것을 명백히 알지 못했었다. 종종 내 머리 속에서는 하나님의 왕국 하의 새 질서가 설립된다는 것이 도대체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떠오르곤 하였다.

“나 외에도, ‘쉬테틴’ 회중에는 자기들이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모르는 형제들이 많이 있었다. ‘귄테르 브라운’, ‘쿠르트’와 ‘아르투르 비이스만’ 같은 몇몇 젊은이들은 군에 입대하여 육체의 무기를 가지고 참전하고 있었다. ‘쿠르트 비이스만’은 전사하였다. 우리가 그러한 부정적 처지에 있게 된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의심의 여지없이 ‘쉬테틴’ 회중의 인도자가 사람에 대한 두려움의 희생물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

“한편 그 당시 약화된 이러한 형제들은 여호와의 인내, 사랑 및 용서의 실례였다. 내가 후에 알게 된 바와 같이 그들 중의 어떤 형제들은 사업이 다시 시작된 후에 자기들의 행위에 대한 성실한 회개를 나타내고, 여호와의 은총으로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오늘날까지도 전 시간 봉사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면, 사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나와 나의 어머니와의 모든 접촉을 끊고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곳으로 자기 아내와 함께 이사를 간 일이 있는 ‘쉬테틴’의 전 회중 감독자가 있다. 그러나 내가 ‘벧엘’ 봉사를 시작할 때 ‘비스바덴’에서 그 형제 부부를 다시 만나고 또 그들 부부가 고령임에도 전 시간 봉사를 계속하는 것을 볼 수 있었을 때 참으로 기뻤다. 그의 행동 때문에 어떤 형제들은 집단 수용소와 감옥에서 굉장한 고통을 당하였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를 용서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여호와의 자비는 그들로 그렇게 하도록 도왔으며, 또한 그들을 위한 놀라운 본이 되었다.”

‘마그데부르크’와 도처에 퍼졌던 불안정 상태

‘히틀러’가 수상이 된 1933년의 이야기로 되돌아 가면, 우리는 독일 정부가 ‘마그데부르크’의 우리의 건물과 그 곳에 있는 값비싼 인쇄기들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곧 ‘러더포드’ 형제도 인식하게 되었음을 알게 된다. 독일의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는 ‘펜실베이니아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의 종속 기관이며, ‘마그데부르크’의 재산의 많은 비율은 미국으로부터의 원조로 이루어진 것임으로, 그것은 실제로 미국의 재산이라는 것을 담당 관리들에게 증명하기 위하여 굉장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독일 시민인 ‘발쩨라이트’ 형제는 미국의 재산의 환속을 위한 투쟁에서 아무래도 부분적인 효과 밖에는 기대할 수 없으므로, ‘러더포드’ 형제는 ‘스위스’ 지부 감독자인 ‘하벡’ 형제에게 그 분쟁에 개입하여 그의 미국 시민권을 사용해 보라고 요청하였다.

안전을 위하여 ‘체코슬로바키아’로 스스로 이주한 ‘발쩨라이트’ 형제는 이제 자기의 권위가 제한을 받았고 자기의 자존심이 손상되었다고 느끼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독일로 돌아가서, 협회의 재산의 확보 문제를 둘러싸고 진행 중인 협상을 직접 인도하며 믿음의 싸움을 싸우는 형제들을 후원하고자 하는 욕망을 거의 나타내지 않았다. 동시에, ‘발쩨라이트’ 형제와 그의 편을 드는 몇몇 형제들은 ‘하벡’ 형제가 독일 형제들의 유익을 돌보는 데 태만하다고 비난하였으며, 또 다른 사람들은 ‘발쩨라이트’를 위하여 ‘러더포드’ 형제에게 전문을 보내기까지 하였다.

‘러더포드’ 형제는 ‘발쩨라이트’에게 다음과 같이 회답하였다. “‘마그데부르크’로 돌아가서 그곳에 머물면서 최선을 다해 책임을 이행하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모든 진행 상황을 ‘하벡’ 형제에게 알리도록 하십시오. ··· 사실상 당신이 독일로 돌아가도록 허락해 달라는 요청을 할 필요는 없읍니다. 그리고, 당신이 아다시피 당신은 처음부터 그 곳에 머물러 있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나로 하여금 당신의 개인적 안전이 외국으로 도피하는 데 있다고 믿게 하려고 노력하였읍니다.”

1933년은 정규적인 집회 개최와 전파 사업의 수행과 관련하여 아무런 일치도 보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폿디히’ 형제는 그 때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두 집단이 형성되었다. 두려움을 가진 자들은 우리가 불순종적이며, 자기들과 여호와의 사업 양 편에 다 위험한 존재들이라고 주장하였다.” 1933년 8월에 ‘하벡’ 형제가 쓴 편지가 독일 형제들 사이에 널리 배부되었으며, 두려움을 가진 자들은 자기들의 변론 가운데 자기들의 입장의 정당성의 증거로써 이것을 이용하였다. 한편, 협회는 “그들을 두려워 말라”는 제목의 「파수대」 기사를 발행하였는데, 그것은 증가하는 박해와 학대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의 양심의 소리를 청종하여 계속 작은 집단으로 함께 모이며, 전파 사업을 지하로 수행한 형제들의 행동을 지지하였다. 그것은 그들에게 그들의 행동은 하나님의 뜻과 일치 한다는 사실을 나타내 주었다.

‘마그데부르크’의 재산의 환속을 위한 협상은 결렬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러더포드’ 형제는 1934년 1월 5일자로 ‘하벡’ 형제에게 이렇게 편지하였다. “나는 우리가 독일 정부로부터 무엇을 얻을 것이라는 희망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사단’의 조직의 이 날개는 주께서 간섭하실 때까지 우리 백성에 대한 억압을 계속하리라는 것이 나의 생각입니다.”

한편, 다른 편지들이 독일 형제들에게서 ‘러더포드’ 형제에게 도달하였는데, 그것들은 그에게 독일에서의 사업의 상태와 또한 형제들의 영적 태도에 관한 더 자세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그 중의 하나인 ‘폿디히’ 형제의 편지는 “그들을 두려워 말라”라는 「파수대」 기사를 다룬 것이었다. 그 편지는 일부의 형제들이 이 「파수대」를 “때를 따[른] 양식”으로서 받아들이길 거부하고 있다고 설명하였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형제들이 어떠한 형태의 지하 전파 활동도 수행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러더포드’ 형제는 모든 형제들에게 회답을 보냈다. 그 내용의 일부는 이러하다. “12월 1일자 「파수대」에 게재된 ‘그들을 두려워 말라’ 기사는 특히 독일에 있는 우리의 형제들의 유익을 위하여 기록된 것입니다. 어떤 형제들이 주께 대하여 증거할 기회를 찾는데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반대한다는 것은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 위에 언급된 기사는 지상 다른 어떤 곳이나 마찬가지로 독일에도 적용됩니다. 그것은 특히 남은 자 개개의 성원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든지 그들에게 적용됩니다. ··· 이것은 서적의 종, 봉사 지휘자, 추수 사업 인도자 혹은 어느 누구도 여러분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할 권리나 또는 있는 서적을 여러분에게 제공하기를 거절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주를 섬기는 여러분의 활동은 불법이 아닙니다. 왜냐 하면, 여러분은 주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

연합된 활동을 위한 계획이 ‘바젤’에서 세워지다

1934년 9월 7일부터 9일까지 ‘스위스’ ‘바젤’의 공진회장에서 대회를 개최할 마련을 하였다. ‘러더포드’ 형제는 그곳에서 독일에서 온 여러 형제들을 만나보고 그들에게서 직접 이 나라의 실제 상황에 관하여 들어볼 것을 희망하였다. 극도로 불리한 상태 하에서도 거의 천여명의 독일 형제들이 참석할 수 있었다. 그들은 후에 ‘러더포드’ 형제가 그때 형제들이 지금까지 격지 않으면 안되었던 고통을 직접 듣고 얼마나 괴로워하였었는지를 보고하였다.

한편, 그는 심지어 참석한 여행하는 감독자들까지도 전파 사업에 대하여 생각이 일치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그들과 그 대회 후에 독일에서 취할 조치들에 관하여 이야기하였다. 연합된 활동을 위한 계획이 세워진 것이다.

1934년 10월 7일은 그날 활동에 참여하는 특권을 누린 모든 사람들의 기억 속에 특별한 날로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바로 그날 ‘히틀러’와 그의 정부는 그가 보기에는 우스꽝스러운 소수자들인, 여호와의 증인들의 두려움없는 활동을 직면하게 되었던 것이다.

세부점들이 ‘러더포드’ 형제로부터 온 편지에 명시되어 있었으며, 그 편지를 특별 사자를 통하여 독일 모든 회중에 전달하도록 하였다. 동시에 이 사자들은 이 특정한 날에 독일 전역에서 개최될 집회를 위한 준비를 하도록 지시를 받았다. ‘러더포드’ 형제의 편지 내용의 일부는 이러하였다.

“독일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모든 집단들은 1934년 10월 7일, 일요일 아침, 9시에 각자가 살고 있는 도시의 한 적당한 장소에 함께 모여야 합니다. 그리고 참석한 모두에게 이 편지를 낭독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머리이시며 왕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여호와께 그분의 인도, 보호, 구원 및 축복을 간구하는 기도에 함께 참여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즉시 그때까지는 준비되어 있을 편지를 한통씩 독일 정부 관리들에게 발송하십시오. 몇분의 시간을 사용하여 마태 10:16-24을 토의하고, 이 성귀가 말한 대로 함으로써, 여러분은 ‘스스로 생명을 보호’하는 것임을 염두에 두십시오. (에스더 8:11) 그 다음에 그 모임을 폐회하고 여러분은 여러분의 이웃들을 찾아가서, 그들에게 여호와의 이름에 관하여, 그리고 우리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 하에 있는 그분의 왕국에 관하여 증거해야 합니다.

“전세계에 있는 여러분의 형제들은 여러분을 생각할 것이며, 동일한 시간에 여호와께 그와 같은 기도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할 것을 결의한 연합된 선언

물론, 제반 준비는 완전한 비밀 속에서 진행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한 준비와 관계가 있는 모든 형제들은 10월 7일의 활동을 위한 계획에 관하여 자기 아내나 어떤 다른 가족에게도 발설하지 않겠다는 데 동의하였다. 이렇게 조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순간에 여호와의 강력한 보호의 손길이 아니었다면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였을지도 모르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마인츠’에서 있었던 일에 관하여 ‘콘라드 프랑케’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1933년 초에 최초로 체포되어 집단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그러므로, 석방된 후에도 나는 종종 비밀 경찰 앞에 출두해야 하였는데 끊임없이 계속된 체포 활동은 조직된 전파 운동이 계속되고 있다는 증거였으므로, 그럴 때마다, 그들은 내가 이 도시에서의 사업을 조직하는 책임을 맡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추궁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내게로 오는 우편물을 우리의 지역 봉사 지휘자인 ‘프란츠 메르크’ 형제가 알고 있는 주소인, 어떤 엄폐용 주소로 보내도록 마련하였다. 그러나, 모종의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말미암아, 그는 꼭 필요한 교훈들이 들어있는 ‘러더포드’ 형제의 편지를 ‘바젤’에서 결정한 대로, 내게 직접 전달하지 않고, 그것을 우편으로 게다가 내 정규 주소로 그리고 더우기 문자 그대로 ‘마지막 순간에’ 내게로 보냈다. 다행히 나와 밀접히 연합하여 일하던 ‘알베르트 반드레스’ 형제가 그 운동에 관하여 내게 귀뜸해 주었으므로 나는 그 편지에 기술되어 있는 모든 세부점들을 미리 알고 있었다. 10월 7일은 신속히 다가오는 데도, 아직 ‘메르크’ 형제로부터 이 중요한 정보를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는 그의 도움없이 우선적으로 ‘마인츠’ 교외의 한 형제 집에서 집회를 열도록 마련하였으며, 그 집회에 거의 20명을 초대하였다.

“그 집회가 열리기 2일 전에, 우리가 모이기로 한 집이 위험한 장소라는 것이 판명되어 갑작스러운 변경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모든 형제 자매들에게 새로운 주소를 통고한 후에, 이 ‘아파트’ 건물에 살고 있는 한 가족이 굉장한 적의를 나타내었고,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건물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다면 즉시 체포당하게 만들겠다고 위협하였다는 사실이 느닷없이 밝혀졌다. 그러므로, 다음 날 아침, 자기들의 ‘아파트’에서 모임을 갖기로 한 그 건물 소유자인 형제들은 그 집회를 다른 곳에서 열도록 요청하였다. 그러므로, 10월 6일에 모든 형제들을 다시 방문해서 그들에게 다음 날 아침 9시에 집회가 열릴 제 3의 장소를 알릴 필요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어디에서? 다른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고려한 후에 나는, 비록 위험하긴 하지만, 형제들을 나의 협소한 ‘파이오니아’ ‘아파트’로 초대하기로 결정하였다.

“10월 6일 저녁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온 나는 아내로부터 정상 우편 배달 시간이 지나서 저녁 늦게 배달된 한 통의 편지를 받았는데, 그것은 우체국이 그 시간에라도 배달해야 할 속달 우편물이 아닌 보통 편지였는데도 그러하였다. 열어보니 그것은 ‘러더포드’ 형제의 편지였다. ‘메르크’ 형제는 아마 시간 내에 직접 전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우송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러한 배달 방식은 그 편지가—나의 모든 개인 우편물이 그러했듯이—비밀 경찰의 손에 먼저 들어갔었으며, 그런 다음에 분명히 그들은 내가 아직 그 운동에 관하여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줄로 생각하고, 그것을 배달하도록 마련하였다는 증거 같았다. 그들은 내가 그 날 밤에 그 편지의 내용과 일치하게 필요한 마련들을 할 것이며, 따라서 그들은 다음 날 아침 우리 모두가 함께 있는 것을 포착하여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도 우리를 체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사실상, 독일 전역의 경찰관들에게 경고할 시간은 충분하였다. 그러므로 그 다음 날 아침 여러 도시에서 함께 모여있는 여호와의 증인들 모두를 체포하는 것은 간단한 일일 것이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술집까지 딸려있는 건물에 있는 나의 ‘아파트’는 결코 안전한 장소는 아니었다. 내 ‘아파트’ 옆방에 사는 그 건물 소유자인 자매를 제외하고, 이 건물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지독한 반대자들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모일 수 있는 다른 장소가 없었다. 여호와의 도움을 신뢰하고, 나는 더 이상 변경시키지 않기로 하였다. 대부분이 분열된 가정을 가지고 있으며 그 모임의 목적을 전혀 알지 못하는 형제들에게 지나친 근심을 하게 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속으로 나는 또 다시 체포될 각오를 하였다.

“10월 7일 아침 7시, 처음 형제들이 도착하기 시작하였다. 지나친 주의를 끌지 않기 위하여 두 시간에 걸쳐서 모든 사람들이 따로 따로 도착하도록 마련하였던 것이다. 형제들은 한 사람씩 차례로 모습을 보였으며, 비록 그들은 교훈에 따라 그 모임의 진정한 이유를 미리 통고받지 못하였지만, 모두 무슨 일이 있을 것인가 하는 기대에 충만해 있었다. 이 날이 매우 의미심장한 날이 될 것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부분의 경우 남편들이 반대하여 돌보아야 할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있는 자매들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입증하기 위하여 수행하도록 요구된 것은 무엇이든지 행하려는 결심과 자진성을 보임으로써 나를 감동케 하였다.

“9시 10분 전이 되자, 모든 사람이 우리의 단칸방인 ‘파이오니아’ ‘아파트’에 모였다. 나는 어느 순간에라도 비밀 경찰이 큰 차를 몰고 와서 우리 모두를 체포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형제들에게 상황을 설명해 주고 그들이 앞으로 발생할지도 모르는 결과를 두려워한다면, 그 모임에 참여하지 않고 돌아가도록 기회를 줄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나는 그들에게 ‘우리는 앞으로 10분내에 모두 체포될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해 있읍니다. 나는 여러분 중에 아무도 나중에 나에게 그러한 심각성을 미리 알려 주지 않고 여러분을 이러한 상황에 끌어들였다는 비난을 하게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성서 신명기 20장을 펴 보시기 바랍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리고 나는 8절을 읽었다. ‘두려워서 마음에 겁내는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찌니 그 형제들의 마음도 그의 마음과 같이 떨어질까 하노라.’ 이것을 낭독한 다음에 참석자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너무 위험한 상황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누구든지 지금 이 집회의 참여를 중지하고 돌아가십시오.’

“그러나, 아무도, 심지어 반대하는 남편과 어린 자녀들이 있는 자매들도 두려워서 물러나는 것을 생각지도 않았다. 이제 그 다음에 있었던 일들은 필설로 다 설명하기 힘든 것이었다. 9시 정각이 될 때까지 남아있는 몇 분 동안, 온 방안은 축제 전과 같은 침묵이 흘렀다. 참석한 모두는 침묵의 기도를 통하여 문제를 여호와의 보호의 손길에 의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 이제 9시가 되었다. 그리고 나의 뇌리 한 구석에는 ‘비밀 경찰이 이제 어느 순간에라도 뜰에 들이닥칠 것이다’ 하는 생각이 계속 맴돌고 있었지만, 기도로써 집회를 시작하였다. 갑자기 우리 모두는 위험한 입장에 있는 우리 독일 형제들 뿐 아니라 세계 전역의 형제들을 둘러싸고 있는 강한 보호의 울타리가 우리를 두르고 있음을 느꼈다. 여러 나라에 있는 이들 형제들도, 교훈에 일치하게 동일한 시간에 함께 모여 기도로써 그들의 집회를 시작하였는데, 이 모든 것은 ‘히틀러’에게 독일에 있는 그들의 형제들에 대한 비인도적인 학대에 대하여 항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뒤이어 나는 형제들에게 독일의 형제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바젤’에서 한 ‘러더포드’ 형제의 괄목할 만한 연설의 주요점들을 반복하는 연설을 하였다. 그 연설은 변경된 환경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여호와 앞에 그분의 말씀을 연구하기 위하여 정규적으로 모이며, 그분을 찬양해야 할 우리의 책임으로부터, 또는 그분의 증인들로서 봉사하며 공개적으로 그 왕국을 알릴 우리의 의무로부터 벗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리는 성서 증거를 제시해 주었다.”

독일 전역의 여호와의 증인들이 취한 바와 일치하게 이 집단에 속한 모든 사람들도 다음과 같은 편지를 그 날짜로 등기 우편으로 정부에 발송하자는 마련에 대하여 열광적인 동의를 표명하였다.

“수신: 관공리

“성서에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최고의 법률이며, 나아가서 우리는 하나님께 헌신한 그리스도 예수의 참되고 성실한 추종자들이므로, 성서만이 우리의 유일한 지침서입니다.

“지난 해에, 하나님의 율법에 상반되게 그리고 우리의 권리를 침해하여 여러분은 여호와의 증인들인 우리가 함께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며 그분을 숭배하며 섬기는 일을 금지하였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 가운데서 우리가 함께 모이는 것을 폐해서는 안된다고 명령하셨읍니다. (히브리 10:25) 여호와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내가 하나님임을 증거하는 나의 증인들이다. 사람들에게 가서 나의 소식을 말하라’고 명령하셨읍니다. (이사야 43:10, 12; 이사야 6:9; 마태 24:14) 여러분의 법과 하나님의 법은 직접적으로 충돌하며, 충실한 사도들의 본에 따라 우리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며, 우리는 그렇게 할 것입니다. (사도 5:29) 그러므로, 본 서한은 우리가 무슨 일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할 것이며, 그분의 말씀을 연구하기 위하여 함께 모일 것이며, 그분이 명령하신 대로 그분을 숭배하며 섬길 것임을 여러분에게 통고하기 위한 것입니다. 만일 귀 정부나 관리들이 하나님을 순종한다는 이유로 우리에게 폭력을 행한다면, 우리의 피는 여러분 위에 돌아갈 것이며, 여러분은 전능하신 하나님께 책임을 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정치 문제에 있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으며, 다만 하나님의 왕이신 그리스도 하에 있는 그의 왕국에 모든 것을 바쳤을 뿐입니다. 우리는 아무에게도 손상이나 손해를 끼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평화 가운데 생활하며, 기회있는 대로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귀 정부와 관리들이 계속 우리로 우주의 최고 법에 불순종하게 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에 이제 할 수 없이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을 순종할 것이며 우리를 모든 압박과 압박자들로부터 구출해 주실 것을 그분께 전적으로 의뢰할 것임을 여러분에게 통고하는 바입니다.”

독일 형제들에 대한 전적인 지원의 표시로 지구상 전역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10월 7일에 함께 모였으며, 여호와께 연합된 기도를 드린 후에, ‘히틀러’ 정부에 다음과 같은 경고 전문을 보냈다.

“귀 정부가 자행한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한 학대는 지상의 모든 선한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하나님의 이름에 불명예를 돌렸읍니다. 더 이상 여호와의 증인들을 박해하는 일을 중단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귀 정부와 귀 정당을 멸하실 것입니다.”

비밀 경찰에게—비록 마지막 순간에—계획 중인 일들이 사전에 탐지되었지만, 놀랍게도 그날 체포된 형제들은 거의 없었다. 다시 ‘프랑케’ 형제의 보고로 돌아가 보자.

“우리가 기도로써 집회를 폐회한지 한 시간 이상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비밀 경찰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이제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첫 사람부터 간격을 두고 하나씩 하나씩 다시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내가 직접 우정 당국에 편지를 전달하기 위하여 인접한 ‘비스바덴’ 시로 자전거를 타고 떠났을 때, 아직 나의 집에는 8명의 형제들이 남아 있었다. 그 편지는 밤중에 쓰여졌으며, 만일 내가 각오했던 것처럼 체포된다면, 형제들이 그것을 우편으로 부치도록 ‘비스바덴’에 보관해 두었던 것이다. 내가 자전거를 타고 정원 문을 나가는데, 한 비밀 경찰 요원이 자전거를 타고 달려왔지만,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래서 다른 8명의 형제들에게 경고하여 그 건물 주인인 ‘다름쉬타트’ 자매의 방에서 숨게 하였다. 그 비밀 경찰 요원이 우리의 ‘아파트’를 수색하면서 내 아내에게 질문한 내용은 비밀 경찰들이 우리의 모임에 관하여 모든 것을 알고 있었음을 암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 나나 혹은 다른 형제들 중에 체포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비밀 경찰이 내게 자기들도 ‘러더포드’ 형제의 편지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한 것은 내가 그들에게 재차 체포된 때인 수개월 후였다.”

그 집회 후 즉시 형제들이 바쁘게 자기들의 이웃을 방문하여 그들의 관심을 하나님의 왕국으로 이끄는 활동을 하고 있는 동안, 독일 국외의 여러 우체국에서는 큰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특히 ‘유럽’ 대륙의 여러 지방 우정 당국자들은 전보의 접수를 거부하였다. ‘부다페스트’에서의 경우가 그러하였다. ‘마르틴 푀친게르’는 그곳에서 열린 모임에 참석하고, 그 전보를 우체국에 가서 발송하도록 요청을 받았다. 그는 이렇게 보고한다. “그 전보는 접수되었다. 그러나, 그 다음 날 나는 체신청으로부터 직접 출두하라는 통고를 받았다. 우리 모두는 비밀 경찰이 나를 구속하여, 국외로 추방하므로써 나의 활동을 중지시키려고 하는 줄로 생각하였다. ··· 그러나, 그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 나는 단지 ‘항가리’ 정부는 그 전보를 송달할 수 없다는 통고를 받았을 뿐이며, 돈은 환불받았다.”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망명생활을 하고 있던 ‘두른’(‘네덜란드’)에서는, 우체국 당국이 처음에는 전보를 발송하길 거부하였으나, 후에 그것을 접수시킨 ‘한스 토마스’에게 그 전보는 발송되어 ‘베를린’ 도착이 확인되었다고 통고하였다.

그러한 편지들 그리고 특히 전보들이 ‘히틀러’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1947년 11월 13일 ‘프랑크푸르트’(‘마인’)의 한 공증인 사무소에서 공증한 ‘카알 에르. 비티히’가 기록한 보고문에서 볼 수 있다.

“선언—사전에 소환받았기 때문에 나는 1934년 10월 7일, 그 당시 제국과 ‘프로이센’의 내무성 장관이었던 ‘빌헬름 프릭크’ 박사를 ‘베를린’, 6 ‘암 쾨니히스플랏츠’에 소재한 그의 장관실로 방문하였다. 나는 ‘루덴도르프’ 장군의 전권 부관이었다. 나는 편지를 받을 예정이었는데, 그 편지의 내용은 ‘나치’ 정권에 대한 반대를 중단하도록 ‘루덴도르프’ 장군을 설유하는 것이었다. 내가 ‘프릭크’ 박사와 대담하는 동안, ‘히틀러’가 갑자기 나타나서 우리와 함께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우리의 대화가 필연적으로 독일에 있는 ‘만국 성경 연구회’(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이 때까지의 처리 방법에 이르렀을 때, ‘프릭크’ 박사는 ‘히틀러’에게 성서 연구생들에 대한 박해를 항의하는 제 3 제국에 대한 항의 전문들을 보여 주면서, ‘만일 성경 연구생들이 즉각적으로 순복하지 않는다면, 가장 강력한 수단을 강구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히틀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신경질적으로 주먹을 불끈 쥐고 ‘이 놈들을 독일에서 전멸시키라!’고 소리질렀다. 이러한 대화가 있은지 4년 후에 나는 ‘히틀러’의 노발대발이 결코 헛소리가 아니었음을 관찰을 통하여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7년 동안 ‘작센하우젠’, ‘플로센뷔르크’, ‘마우타우젠’의 ‘나치스’의 여러 지옥같은 정치범 수용소에 감금되어 있다가 연합군에 의하여 석방되었다. 상기 정치범 수용소 내에서 성경 연구생들만큼 친위대로부터 난폭한 대우를 받은 집단은 없었다. 그것은 끝없이 연속된 신체적 및 정신적 고문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가학성 변태 성욕으로써, 이 세상의 어떠한 말로도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리가 ‘히틀러’에게 편지를 보낸 후에, 체포의 물결이 일기 시작하였다. 가장 심한 타격을 받은 것은 ‘함부르크’로서, 그곳에서는 10월 7일 이후 불과 수일 동안에 142명의 형제들이 비밀 경찰에 의하여 체포되었다.

지하 활동이 조직되다

이제, 10월 7일자 편지를 통하여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계속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겠다는 사실을 ‘히틀러’에게 통고한 우리들은 담대함과 자진성을 구비한 모든 형제 자매들을 조직하고 작은 집단들을 형성하였으며, 전심으로 주의 양들을 먹이며 보살피는 것을 임무로 하는 한 장성된 형제로 하여금 각 집단을 인도하게 하였다.

그리고 전국을 13개 지역으로 구분하였으며, 각 지역마다 훌륭한 목자로서의 자질을 구비한 형제를 지방 봉사 지휘자—이것이 그 당시에 사용하던 칭호이다—로서 봉사하도록 임명하였다. 이들은 관련된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기꺼히 작은 집단들과 접촉하여 그들에게 영적 양식을 마련해 주고, 그들의 전파 활동을 후원하며 그들의 믿음을 세워 주고자 하는 형제들이어야 하였다. 소수를 제외하고, 그 직책에 이 때까지 형제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종들로 채워졌다. 그러나, 그들은 ‘히틀러’가 권력을 잡은 이래, 기꺼이 자기들의 개인적 이익을 왕국의 이익 아래 두려고 해 왔음을 증명한 형제들이었다.

「파수대」 등사 활동과 배부 활동

형제들은 독일 전역 여러 지역에서 「파수대」를 등사해서 배부하였다. 예를 들면, ‘함부르크’에서 ‘헬무트 브렘바하’는 자기 아내와 함께 밤을 새워 만든 「파수대」지를 ‘쉴레스비히-홀스타인’과 ‘함부르크’에 있는 형제들에게 계속 공급하였다. ‘브렘바흐’ 자매는 자기 남편과 함께 겪었던 많은 경험 가운데서 다음과 같은 경험을 이야기해 준다.

“때는 아직 오전이었는데, 초인종이 갑자기 보통 때보다 큰 소리로 울렸다. 문을 열자, 그 곳에는 세 사람이 서 있었다. 나는 누구냐고 물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비밀 경찰’이라고 말하였으며, 세 사람은 이미 ‘아파트’ 안으로 들어왔다. 집안에 숨겨둔 모든 것들을 생각하자, 내 심장은 방망이질을 하였다. 속으로는 두려움에 떨면서, 나는 여호와께 기도하였다.

“인간의 관점에서 본다면, 포장해 놓은 「파수대」들과 그것들을 만드는데 사용한 전체 장비들을 발견해낸다는 것은 아무런 문제도 아닐 것이다. 우리가 기거하던 건물에는 두명의 경찰관의 가족을 포함하여, 여러 세대가 함께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은닉 장소로 사용할 만한 곳이 없었으며, 특히 필요한 재료들—종이, 등사기, 타자기 그리고 ‘잉크’ 및 포장 재료 등은 모두 부피가 큰 것들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다. 보아서는 안될 사람들의 눈으로부터 이것들을 어떻게 감추어야 좋을지도 모르면서—우리는 2주마다 그것들을 필요로 하였다—우리는 지하실 가운데 설치되어 있으며 그리고 그 건물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들어갈 수 있는 감자 창고에 모든 것을 꾸려서 숨겨두기로 하였다. 우리는 「파수대」를 등사하는 일을 마친 다음에는 매번 조심스럽게 모든 장비를 이 창고에 도로 집어 넣고 빈 부대로 덮은 다음, 그 위에다 천장에 닿도록 빈 감자 상자를 쌓아 올렸다. 만일의 경우 수색하는 자들이 와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거나 또는 무관심이나 게으름 때문에 감자 저장고 맨 꼭대기로부터 모든 것을 끌어내려서 뒤져보려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여호와를 신뢰하였다. 그밖에는 아무 도리도 없었다.

“경찰들은 내게 집안에 금지된 서적들이 있느냐고 물었다. 거짓말을 하지 않기 위하여 나는 ‘직접 찾아보라’고 말하였다. 그들은 ‘아파트’를 수색하고, ‘캐비넷’ 문을 열어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감자 창고 속에 감추어 두는 것을 잊고 그냥 ‘캐비넷’ 속에 두었던 타자기를 보지 못하였다. 만일 그것을 발견하였다면 그들은 그것이 「파수대」를 만드는데 필요한 기계임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눈을 감기셨던 것이다. ‘아파트’에서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한 그들은 지하실을 조사해 볼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이제 모든 재료들과 기록들을 발견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내 심장은 더욱 요란하게 뛰었지만 두려움을 숨기려고 노력하였다. 설상가상으로, 등사판 「파수대」가 가득 들어 있는 옷가방이 그 창고 뒷 쪽 맞은 편에 놓여 있었다. 그것은 다음 날 남편이 가지고 여행을 떠나려던 것이었다. 그러나 어찌된 것인가? 잘 들어 보라. 그들은 그 방 가운데 서서 두리번거렸으며, 바로 그 곳에는 그 창고가 있었고 그 창고 뒤쪽에는 「파수대」가 가득 들어 있는 옷가방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들은 마치 갑자기 소경이 된 것 같았다. 아무도 그 창고 속을 뒤져보거나 심지어 옷가방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도 살펴보려고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한 경찰관이 우리의 다락방에 관하여 물었으며, 그곳에서 그들은 오래된 출판물 서너 권을 발견하였는 데, 그것이 그들을 만족케 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돌아갔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여호와의 도움과 그분의 천사들의 도움으로 그들의 눈으로부터 감추어져 보존된 일이었다.”

이러한 등사 활동을 오랫 동안 감쪽같이 계속할 수 있게 해 준 요인이었던 여호와의 인도를 보여 주는 비슷한 경우는 많이 있었으며, 그리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서적들을 공급할 수 있었다.

조직적인 전파 사업

우리와 연합한 모든 사람이 전파 활동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그와 반대로, 어떤 회중에서는 단지 반수만이 그렇게 하였을 뿐이다. 예를 들면, ‘드레스덴’에서 한 때 회중 전도인의 수가 최고 1,200명에 이르렀으나, 금지령 후에 이 숫자는 갑짜기 500명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독일 전역에는 관련된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전파하려는 뜻을 밝힌 사람이 적어도 만명이나 되었다.

처음 방문에서는 단지 성서만으로 전도하는 한편 비밀 경찰의 손을 벗어난 오래된 소책자들과 서책들은 재방문을 할 때 전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증거 ‘카드’를 만들었다. 또 다른 전도인들은 자기들이 아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썼으며, 특별한 기회를 활용하였다. 큰 위험이 내포되었지만, 호별 활동이 계속되었다. 어느 때, 어느 집에서이건 문을 열어 주는 사람이 돌격대 혹은 친위대 대원일 수도 있었다. 한 집을 방문한 다음, 전도인들은 일반적으로 다른 ‘아파트’로 갔으며, 혹은 극히 위험한 경우에는 심지어 다른 동으로 가서 전파하였다.

적어도 2년 동안은 독일의 거의 모든 곳에서—어떤 곳에서는 심지어 더 오랫 동안—호별로 전파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이것이 오로지 여호와의 특별한 도움으로 말미암아 가능하였다는 데는 아무런 의문도 없다.

전파 활동을 위한 소량의 가용 서적은 곧 모두 소비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외국으로부터 서적을 들여오는 가능성을 조사하였다. ‘브레슬라우’의 ‘에른스트 비이스네르’는 그 일이 어떻게 수행되었었는지 다음과 같은 몇가지 흥미있는 점들을 알려 준다.

“‘스위스’에서 ‘체코슬로바키아’를 경유하여 서적들을 우리에게로 발송하였다. 외국 형제들이 그것들을 국경으로 모아 주면 그 곳에서 ‘리이센’ 산맥을 넘어 독일로 반입하였다. 일단의 장성된 자진적인 형제들에 의하여 수행된 이 일은 매우 위험하며 고된 일이었다. 우리들은 심야를 이용하여 국경을 넘곤 하였다. 형제들은 잘 조직되었으며, 커다란 배낭을 갖추었다. 그들은 매일 자기 직업에 종사해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한 주에 두 번씩 그러한 여행을 하였다. 겨울에는 ‘터보건’ 썰매와 ‘스키’를 이용하였다. 그들은 모든 협로와 샛길을 알고 있었으며, 훌륭한 손전등, 쌍안경 그리고 등산화 등을 갖추었다. 조심하라는 것이 지상 법률이었다. 자정쯤에 독일 국경에 도착하면, 그리고 심지어 국경을 통과한 후에도 오랫 동안 한 마디라도 이야기를 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두 명의 형제가 앞장을 섰으며, 사람을 만나게 되면, 즉시 손전등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것은 무거운 배낭을 메고 약 100‘미터’ 후방에서 따라오고 있는 형제들에게 선발대인 두 형제들이 돌아와서 암호—이것은 매주 변경되었다—를 부를 때까지 길가 숲속에 숨으라는 신호였다.

“이러한 일이 하루 저녁에도 서너 번씩 발생하는 수도 있었다. 길이 다시 조용해지면, 형제들은 독일 국경 내에 위치한 어떤 특정한 집으로 서적들을 운반하여 그곳에서 그날 밤이나 혹은 다음 날 아침 일찌기 더 작은 모양으로 포장을 하여, 주소를 쓴 다음, ‘히르쉬베르크’나 다른 근처의 읍의 우체국으로 자전거를 이용하여 운반하곤 하였다. 독일 전역의 형제들은 이러한 방법으로 서적을 받았던 것이다. ··· 열성과 특출하게 숙련된 이들 일단의 형제들은 체포되는 일없이 2년 이상 막대한 양의 서적을 독일로 들여올 수 있었으며, 그리하여 전국에 있는 많은 형제들을 강화시킬 수 있었다.” ‘프랑스’ 국경, ‘자아르’ 국경, ‘스위스’ 국경 및 ‘네덜란드’ 국경에서도 비슷한 마련이 이용되었다.

이점과 관련하여 한 자매가 쓴 편지도 이러한 흥미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당신이 「연감」에서 독일로부터의 보고를 읽게 되면, 당신은 그러한 환경 하에서 어떻게 그렇게 많은 서적을 전하는 일이 가능하였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도 같은 질문을 가지고 있읍니다. 만일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으셨다면 그것은 불가능하였을 것입니다. 많은 형제들은 집을 떠날 때면 언제나 계속 감시를 받곤 하였읍니다. ···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 사실을 알고 계셨으며,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즐긴 풍부한 양식으로 계속 반복하여 강화될 수 있게 허락해 주셨읍니다.”

우리는 금지령이 발표되기 전에 서적을 여러 장소에 숨길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가졌다. 그러나, 그 당시의 일들을 이해하기 위하여, 형제들은 금지하에 있을 때, 서적을 보관하는 일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그것을 여러 형제들 사이에 분배해 두는 대신, 처음에는 큰 보관소에 보관하는 것이 더 안전하리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하려는 경향이 있었는데, 특히 책임있는 형제들은 금지가 단지 일시적일 것이라고 생각하였었음으로 특히 그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보관소들 중의 어떤 것은 30내지 50‘톤’의 서적을 쌓아둘 공간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일부 형제들은 만일 적들이 이러한 대형 보관소를 발견하고 몰수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고 걱정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보관소의 책임을 맡은 형제들은 헌금을 받고 전하든지 혹은 무료로 제공하든지 관계 없이 봉사에 사용하도록 책들을 할당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박해가 계속될 것이라는 조짐과 은닉 장소를 유지하는 것이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해지자, 형제들은 가능한 한 많은 서책과 소책자들을 분배하기 시작하였다. 형제들은 야외 봉사에 참여하여, 그 서적들이 제공할 수 있는 힘과 소망을 원하는 성실한 사람들의 손으로 그것들이 들어가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단순히 문 안으로 밀어 넣거나 문 앞 흙털개 밑에 넣어 두었다.

기념식

우리들은 여호와의 명령과 일치하여, 함께 모이는 일을 폐하지 않을 결심이었기 때문에, 우리들이 기념식 개최에 각별한 염려를 나타내었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한 날이면, 대부분의 경우 비밀 경찰은 때때로 그들의 손에 들어가는 독일 국외에서 인쇄된 출판물이나 등사판 「파수대」를 통하여 기념일의 날짜를 알아내어 특별한 활동을 벌리곤 하였다. 그들의 분노는 기념식과 관련해서 뿐만 아니라 특별한 운동들과 관련해서도 언급되는 기름부음 받은 자들에게 특히 집중되었다. 비밀 경찰들은 그들이 조직의 “우두머리들”이라고 판단하고, 조직을 멸망시키기 위하여는 우선 그들을 궤멸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1935년 4월 17일의 기념식은 특히 마음설레이는 것이었다. 수주 전에 비밀 경찰은 이미 그 날짜를 알았으며, 따라서 모든 산하 관서에 주의를 환기시킬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1935년 4월 3일자 비밀 회람의 내용은 이러하였다.

“금번 착수할 알려져있는 성경 연구생들의 지도자들에 대한 전격적인 공격은 매우 성공적일 것이다. 성공을 거둔 사례가 있다면 1935년 4월 22일까지 보고하기 바란다.”

그러나, “성공을 거둔 사례”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있을 수 없었다. 왜냐 하면, 대다수의 경찰들은 ‘도르트문트’의 한 경찰처럼, 성경 연구회의 지도자들로 믿어지는 사람들의 집에 감시망을 폈지만 집회를 개최한 경우는 하나도 없었다고 보고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지역 내의 성경 연구생들의 지도적이며 활동적인 성원들은 이미 구속되었기 때문에 그러한 모임을 조직할 사람은 아무도 남아있지 않다”고 구실을 붙였다.

그러나, 비밀 경찰은 실책을 저지르고 말았다. 이러한 비밀 회람이 발부된지 잠시 후, 우리는 그러한 비밀 정보에 근접할 수 있는 한 진리의 친구로부터 그 회람의 사본 한통을 받았던 것이다. 지방 봉사 지휘자들은 충분한 시간을 두고 모든 종들에게 경고를 하였으며 발각당하지 않으면서도 우리 주의 교훈에 순종하는 방법에 관한 적절한 조언을 하였다.

그래서, 많은 형제들은 6시가 지난 직후에 함께 모였으며, 그 반면 어떤 형제들은 비밀 경찰이 다녀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른 형제들과 함께 작은 집단으로 모였으며, 그리하여 개중에는 밤중에 기념식을 갖는 형제들도 있었다. 여하튼, 대부분의 비밀 경찰 관서들은 ‘도르트문트’에서 보낸 것과 비슷한 보고를 보냈었던 것이다.

‘빌리 클라이슬레’는 ‘크로이츠린겐’의 형제들은 6시 정각에 기념식을 개최하였다고 보고하였다. 그들은 그 건물을 떠나기 전에 같은 건물 내에 속해 있는 한 형제가 소유하고 있는 상점으로 들어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들은 그 곳에서 설탕, ‘커피’ 및 기타 비슷한 물품들을 구입한 다음, 정규 상점 출구를 통하여 나갈 수 있었다. “곤봉 부대”—‘클라이슬레’ 형제는 그들을 이렇게 불렀다—가 나타났지만, 그 때는 이미 모든 형제들이 상점 속으로 사라진 후였으며, 그래서 그들은 아무런 증거도 포착할 수 없었다. 그러나, 비밀 경찰이 제시한 질문들과 경찰이 말한 여러 가지 내용들은 그들은 「파수대」를 통하여 기념식 날짜에 관한 정보를 입수하였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형제들은 항상 갑작스러운 출현에 대비하고 있었으며, 이렇게 하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그들은 주간 집회에 참석하는 것 뿐만 아니라, 기념식에 참석하는 것도 어떤 저촉되지 않는 일상 활동과 연관시키려고 노력하였으며, 이렇게 하는 것은 종종 그들이 체포되지 않도록 보호해 주었다. ‘밤베르크’ 근처 출신인 ‘프란츠 코올호페르’는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이 특정한 날 첩자들은 누군가 불법 활동을 하는 것을 발견하고 그들을 체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특히 활발하게 여호와의 증인들의 집을 감시하였다. ··· 우리들은 수일 전에 기념식을 위하여 돼지를 기르는 한 형제의 집에서 함께 모이기로 결정하였다. 모두 감자 껍질이나 다른 음식물 찌꺼기를 한 ‘바케츠’씩 들고 오기로 하였다. 비밀 경찰은 어느 순간에라도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은 신속하게 수행되어야 하였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우리들은 그들이 갑자기 나타난다면 그들을 속일 수 있도록 ‘트럼프’류도 가지고 갔다. 그런데 어떤 일이 발생하였었는지 맞춰 보라. 마지막 기도가 막 끝나자마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 때에 우리 4명은 이미 탁자에 둘러앉아 저촉되지 않는 ‘카드’ 놀이를 하고 있었다. 우리가 침착하고 순진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자, 그들은 자기들의 눈을 거의 믿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적시에 우리들을 잡지 못한 이상, 그들은 자기들이 시도했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침례

이 시기에 진리를 배운 사람들로 이러한 극도로 어려운 상황 하에서 침례를 받은 사람들은 적지 않다. 곧 이들 새로 침례받은 사람들 중의 많은 사람들은 감옥이나 정치범 수용소에 투옥되었으며, 이들 중 많은 수는 자기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 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생명을 상실하였다.

‘파울 부데르’는 이미 일찌기 1922년 경에 “수백만” 연설에 관심을 가진 적이 있었으나, 1935년까지는 진리와 밀접한 유대를 맺지 못하였는데, 그 해에 한 젊은 소녀가 그에게 「창조」 책을 전했던 것이다. 그 소녀는 그와 같은 직장에 고용되어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에게 그 소녀와 가까이 하지 말라고 경고하곤 하였었다. 그는 자기의 회고록 가운데서 이렇게 기술하였다. “그 때는 1935년 5월 12일이었으며, 이것은 내가 찾던 것이었다. 1935년 5월 19일 나는 교회 회원직을 탈퇴하고 그 젊은 소녀에게 나도 여호와의 증인의 한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고 말하였다. 그 소녀는 매우 기뻐하였다! 이제 그 자매는 ‘콜포처’라는 죄명으로 벌써 6주째 투옥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포르스트’ 회중의 ‘보이테’ 형제 부부와 접촉하였다. 나는 그 회중 안에서 ‘나치스’의 첩자로 고려되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나는 작은 ‘루터’판 성서를 들고 모든 마을을 다니면서 정규적으로 호별 방문을 하였다. 1936년 7월 23일 나는 ‘보이테’ 형제 부부와 침례 연설을 해 준 한 연로한 형제가 참석한 가운데 ‘나이세’ 강에서 침례를 받았다.”

침례는 종종 개인 가정에서 작은 집단으로 행하여졌다. 때때로 옥외에서 베풀어지기도 하였는데, 어떤 때는 지원자가 소수였고 또 어떤 때는 많았다. ‘하인리히 할스텐베르크’는 ‘베제르’ 강에서 있었던 한 침례식에 관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말해 준다.

“1941년에 다수의 관심자들이 침례받고자 하는 욕망을 나타내었다. 이웃의 다른 도시들에도 동일한 욕망을 가지고 있는 많은 관심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우리들은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기 시작하여 ‘데메’의 ‘베제르’ 강에서 적당한 장소를 발견하였다. 모든 것을 심사숙고하여 주의깊이 계획한 후 침례일을 1941년 5월 8일로 결정하였다. 형제들과 침례 지원자들은 아침 일찌기 그곳에 모였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우리들이 마치 수영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이제 아무도 불시에 나타나 우리를 놀라게 하는 일이 없도록 형제들 몇사람으로 하여금 망을 보게 하였으며, 침례의 중요성에 관한 연설을 한 다음 우리들은 여호와께 기도하였다. 그 다음 60명의 침례 지원자들이 강에서 침례를 받았다. 찬 물에 잠기기에는 너무 연로하거나 허약한 사람들은 욕조를 이용하여 따로 침례를 받았으며, 그리하여 그 날 침례를 받은 사람의 총수는 87명이었다.”

인간 사냥이 시작되다

‘알베르트 반드레스’는 1934년 10월 7일 이전부터 지방 봉사 지휘자의 일원으로 일하였으며, 그의 이름은 곧 비밀 경찰에, 특히 그가 일하고 있던 ‘루르’ 지방의 여러 도시에서 줄지어 계속되었던 여러 재판 사건을 통하여 잘 알려지게 되었다. 피고인들은 어디에서 서적을 압수하였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에서 “반드레스”란 이름이 자주 언급되었던 것이다. 비밀 경찰은 그를 체포하기 위하여 백방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지혜롭게 그는 자기의 사진을 가지고 있는 모든 형제들에게 그것을 돌려 주거나 없애버리라고 요청하였다. 그 결과, 비록 비밀 경찰은 그의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몰랐다. 그는 3년 반 동안의 인간 사냥이 계속되도록 박해자들의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이제 지하 활동 중에 있었던 그의 경험에 관하여 ‘반드레스’ 형제 자신의 설명을 들어보자.

“한 때 나는 ‘뒤셀도르프’의 한 형제의 식료품점에서 서너 명의 형제들과 만났다. 우리들은 폐점 시간 직전에 그 상점에 들어갔다가 나온다면 눈에 뜨이는 율이 가장 적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우리가 약 한시간 가량 함께 모여 있을 때에 비밀 경찰이 느닷없이 나타나서 들어오려고 하였다. 나는 때를 놓치지 않고 우리가 토의를 하던 창고를 빠져나와 몇 발자국 떨어져 있는 상점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전등은 이미 소등되었다. 잠시 후 그들은 그 창고로 몰려 들어와서 참석한 모든 형제를 체포하였다. 그들은 그 창고 전체를 수색하였으며, 「파수대」가 가득 들어있는 내 손가방을 발견하였다. 갑자기 한 비밀 경찰이 기쁜듯이 소리쳤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찾던 것이군! 누가 이 손가방의 주인인가?’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제 그는 상점 주인의 숙소는 어디인지 밝히라고 요구하였다. ‘삼층이요’라고 대답하자, 그 비밀 경찰 대원은 ‘밖으로 나가’라고 소리질렀다. 모든 형제들이 계단을 타고 ‘아파트’로 올라가자 비밀 경찰들도 그 형제의 ‘아파트’에서 자기들이 찾던 자를 발견하게 되기를 바라면서 그들의 뒤를 바짝 따랐다.

“나는 조심스럽게 창고로 돌아가서 외투를 입고, 모자를 쓰고, 내 손가방을 들고 나와서 밖의 길거리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급히 떠났다. 그들은 위층에서 돌아와 보자, 원통하게도 새는 이미 새장에서 날아가 버리고 말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때 나는 이미 ‘엘베르펠트-바르멘’으로 향하고 있었다.” ‘반드레스’ 형제는 이렇게 부언하였다. “말로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재미있고 근사하지만, 그것을 직접 체험한다는 것은 또 다른 일이다.”

‘반드레스’ 형제는 이렇게 계속한다. “한 때, 나는 「준비」 책이 가득 들어있는 두 개의 무거운 옷가방을 가지고 ‘본’과 ‘카젤’로 가고 있었다. 그 책들은 ‘트리이르’ 근처의 국경을 통과하여 반입된 것이었다. 나는 저녁 늦게 ‘본’에 도착해서 회중의 종 집의 지하실의 안전한 장소에 그 옷가방들을 은닉시켰다. 그 다음 날 아침 5:30경에 초인종이 울렸다. 그 ‘아파트’를 수색하기 위하여 비밀 경찰이 또 찾아온 것이다. 그 당시 회중의 종이었던 ‘아르투르 빈클레르’ 형제는 내 방의 문을 두드리고 달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왔노라고 귀뜸해 주었다. 도망칠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상황의 진전에 따라 처신하기로 결심하였다. 경찰들은 내 방에 들어와서 내게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라인’ 강을 여행하는 중이라고 말하고 ‘본’의 식물원을 방문하기를 원한다고 간단히 대답하였다. 그들은 내 증명서들을 자세히 살펴보고는, 약간 미심쩍게 생각하면서도 그것들을 내게 되돌려 주었다. ‘빈클레르’ 형제는 경찰서로 그들과 함께 연행되어 갔는데,—‘빈클레르’ 형제가 후에 내게 이야기한 바에 의하면—그곳에서 그 경찰관들 중의 하나가 자기 상관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곳에 또 한 사람이 있더군요.’ ‘그런데 왜 그를 데리고 오지 않았는가? 귀관들은 참으로 어처구니 없군.’ 그러자 그가 ‘왜요? 다시 가서 그를 잡아올까요?’ 하고 물었다. ‘잡아와? 그가 귀관들이 다시 오기를 기다릴 것이라고 생각하나?’ 사실 나는 그들이 그 집에서 사라지자마자 두 개의 옷가방(그들은 이것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중의 하나를 들고 ‘카젤’을 향하여 떠났던 것이다.

“‘카젤’에 도착하자, 회중의 종인 ‘호흐그래페’ 형제는 내게 ‘형님은 여기 머무를 수가 없읍니다. 즉시 떠나지 않으면 안됩니다. 비밀 경찰이 벌써 일주일째 매일 아침 집에 찾아오고 있읍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그가 50‘미터’가량의 간격을 두고 나보다 앞장을 서서 걸어가면서 서적을 둘 장소로 나를 안내하기로 하였다. 우리가 아름다운 밤나무 거리를 따라 겨우 200‘미터’가량 갔을 때 그 회중의 종과 서로 잘 아는 비밀 경찰들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나는 약 50‘미터’ 뒤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경멸적인 웃음을 웃는 것을 보았는데, 그러나, 그들은 그 형제를 멈추어 세우지는 않았다. 몇 분 후, 형제들이 믿음을 강화하기 위하여 사용할 그 서적들은 다시 한번 안전한 장소로 옮겨졌다.

“또 다른 경우에 나는 ‘베츨라르’ 근처인 ‘부르그졸름스’에서 서적이 담긴 두개의 무거운 옷가방을 운반하고 있었다. 시간은 밤 11시였으며, 칠흑같이 캄캄하였다. 거의 아무도 나를 볼 수 없었지만, 그래도 나는 감시당하고 있다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목적지에 도착한 후, 나는 형제들에게 이 옷가방들을 안전한 장소에 숨기라고 말하였다. 다음 날 아침 5:30경 그 읍의 경사가 찾아왔다. 그가 주인 자매를 향하여 ‘어젯밤에 한 남자가 두개의 무거운 옷가방을 들고 이리로 왔오. 당신들이 또 다시 서적을 받은 것임에 틀림 없오. 그것이 어디 있오?’ 하고 말할 때 나는 마침 세수를 할 준비를 하고 그 방 한 가운데 서 있었다. 그 질문에 자매는 ‘남편은 이미 출근하고 없읍니다. 그리고 나는 어젯 저녁에 집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 경사는 ‘만일 당신이 순순히 그 옷가방들을 내놓지 않는다면, 우리가 집을 수색하여 찾아내야겠오. 시장이 같이 있지 않으면 수색을 할 수 없으므로, 나는 가서 시장을 모셔오겠오. 내가 돌아올 때까지 당신은 집을 떠나서는 안되오.’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전체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나는 방 가운데 서 있었는데, 그 경찰의 눈이 왜 저렇게 흐리게 보이는지 그리고 나에게는 왜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는지 이상스러웠다. 그가 마치 갑자기 소경이 된 것 같았다. 그가 시장을 데리러 떠난 후에 나는 즉시 출발할 준비를 하였다. 나는 밖으로 나가서 시장과 경사가 정문을 통하여 집으로 올 때까지 집뒤에서 기다렸다. 그 순간 나는 뒤로 빠져나갔다. 이것을 우연히 본 이웃들은 내가 도망한 것을 분명히 기뻐하였을 것이다. 숲 속에 들어가서 옷입기를 마친 나는 다음 기차역으로 달려가서 여행을 계속하였다.”

다른 지방 봉사 지휘자들도 비슷한 경험들을 하였다.

다른 종류의 시련

1934년부터 1936년 사이에 충실한 목자들은 독일 전역에 있는 형제들을 후원하였으며, 그들로 하여금, 박해에도 불구하고, 집회와 그리고 가능한 한 모든 종류의 봉사에 참여하도록 격려하였다. 한편, 1935년 12월 17일에 ‘할레’에서는 ‘발쩨라이트’, ‘돌링게르’ 및 “탁월한” 형제들로 간주된 다른 7명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그들 중 적어도 반수에게는 이것이 그들의 그리스도인 경주의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그 당시 독일에서 열렸던 수많은 재판석상에서 많은 형제들은 어려운 환경 하에서도 왕국의 이익을 확장시키기 위하여 자기들이 수행한 일들을 숨김없이 인정하였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할레’에서 재판을 받은 이 사람들은 정부가 금지한 일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고 부인하였다. ‘발쩨라이트’는 스스로 답변하라는 재판장의 요구가 있었을 때, ‘바이엘른’ 주에서 금지령이 발표되자마자 자기는 그 곳에서의 사업을 중지하라는 지시를 내렸으며 다른 주에서도 그렇게 하였노라고 말하였다. 그는 아무에게도 금지령을 무시하라고 격려하는 지시를 한 바 없다고 말하였다.

연례 기념식에 관하여 재판장이 질문하자, ‘발쩨라이트’는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형제들이 기념식을 갖기 위하여 함께 모일 계획을 하고 있다는 말을 자기도 들었었다고 답변하였다. 그는 자기는 경찰이 그날 특별한 활동을 할 계획을 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모임에 관하여 그들에게 경고했었다고 말하였다.

자연히, 그 당시에 열렸던 다른 모든 재판에서와 마찬가지로, 군 복무에 대한 피고의 개인적 태도에 관한 문제도 제기되었다. ‘발쩨라이트’는 총통의 설명에 전적으로 만족한다고 선언하였는데, 그 설명이란 전쟁 그 자체는 범죄이지만, 모든 나라들은 자국민의 생명을 보호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러더포드’ 형제는 독일의 형제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독일에 있는 여호와의 충실한 백성에게:

“여러분 위에 가해진 악독한 박해와 그 나라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단’의 앞잡이들에 의하여 자행되는 큰 반대에도 불구하고, 주께서는 아직도 그 나라에 그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고 그분의 왕국의 소식의 전파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수천명을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은 매우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읍니다. 박해자들에 대하여 굳건하며 주께 대한 충실을 유지함에 있어서, 여러분이 나타낸 충성은 전에 독일의 협회 감독으로 일하던 자와, 및 그와 연합한 자들이 취한 행동과 훌륭한 대조를 이루고 있읍니다. 최근에 본인은 ‘할레’에서 이 사람들이 재판석상에서 증언한 내용의 사본 한 통을 받았으며, 그 내용에서 그들 중에 아무도 여호와의 이름에 대한 충실하고 참된 증거를 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하였읍니다. 모든 반대 가운데서도 주의 기치를 높이 받들며 스스로 하나님과 그분의 왕국 편임을 선언하는 것이 이전의 감독이었던 ‘발쩨라이트’에게 특별히 부여된 의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가 여호와께 온전히 의존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읍니다. 재삼 재사 본인은 독일에서 수행할 수 있는 일들에 관하여 그의 주의를 환기시킨 바 있으며 또한 그는 본인에게 자기는 형제들이 증거를 온전히 수행하도록 격려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다 기울이고 있다고 확언하였었읍니다. 그러나, 법정에서 그는 아무 일도 수행하지 않았다고 명확히 선언하였읍니다. 본인으로서는 여기서 그 문제를 더 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금후로 협회는 그와 그리고 그때에 여호와의 이름과 그분의 왕국에 관하여 증거할 기회가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은 자들 누구와도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천명하는 것으로 그치기로 하겠읍니다. 협회는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감옥에서 석방시키기 위하여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주를 사랑하는 모든 분들은 얼굴을 그분, 곧 여호와와 그분의 왕께 돌리고 여러분에게 닥칠지도 모르는 온갖 어려움에도 관계없이 왕국 편에서 충성을 지키며 굳게 고착하도록 합시다.”

이 문제는 1936년 7월 15일호 독일어 「파수대」에서 어떠한 상황 하에서도 여호와의 충실한 증인들이 되기를 성실히 갈망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의 내용으로 취급되었다.

최고 5년간의 금고형을 선고받은 독일의 많은 충실한 형제들과는 대조적으로 ‘발쩨라이트’는 2년 반을, ‘돌링게르’는 2년을 선고받았다. 감옥에서 형기를 마친 후 ‘발쩨라이트’는 ‘작센하우젠’ 정치범 수용소에 수용되었는데, 그곳에서 그는 극히 불명예스러운 역할을 하도록 강요당하였다. 그는 형제들과의 연합을 포기한다는 선언서에 서명하였으며, 그들과의 모든 접촉을 피하였다. 그러한 처신 때문에 그는 약 1년 후에 석방되었지만, 그 동안 그는 여러 가지 치욕을 감수해야 하였다. 왜냐 하면, 기본적으로 말해서 친위대 대원들도 변절자를 미워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바알세불”이란 이름을 붙여 준 것도 바로 친위대 대원들이었으며, 한때 한 친위대 대원은 그에게 모든 형제들—그 당시 그 수용소에는 약 300명이 있었다—앞에 서서 여호와의 증인들과의 연합을 포기하겠다고 서명한 자기의 선언서를 읽도록 요구하였으며, 그는 그렇게 하였던 것이다!

1946년에 이르러서 ‘발쩨라이트’는 진리의 맹렬한 반대자가 되었는데, 그는 자기가 이미 그 재판이 있기 전부터 가지고 있던 적대적인 태도를 반영하는 편지를 배상 당국자들에게 보냈다. 이리하여 그 첫줄이 이미 1920년대에 기록되기 시작했던 독일의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의 한 어두운 장이 끝을 맺었다.

비밀 경찰의 공격—1936년 8월 28일

열정적인 활동으로 풍성했던 2년간은 지나갔다. 이 기간에는 비밀 경찰들이 자기들이 알고 있는 모든 여호와의 증인들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었는데도 불구하고 조직적인 지하 활동에 실제 영향을 별로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들은 우리의 활동에 관하여 점점 더 많은 것을 탐지하게 되었으며 곧 우리들이 수행하는 일들을 잘 알게 되었다. 1936년 6월 24일자로 ‘프로이센’ 주립 비밀 경찰에게로 보낸 모종의 비밀 통보에 따르면 우리에 대한 투쟁을 원활히 하기 위하여 “특별 비밀 경찰 부대”가 조직되었다.

1936년의 첫 반년 동안 비밀 국가 경찰은 여호와의 증인으로 생각되거나, 적어도, 그들에 대하여 호의적인 사람의 주소를 포함하는 방대한 문서를 작성하였다. 이 문서는 대부분 가택 수색 도중에 압수한 「일용할 천적 만나」 책에서 발견된 주소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비밀 경찰들에 대한 특별 교육 과정이 베풀어졌으며, 그들은 「파수대」 연구를 사회하는 것을 배웠으며, 그들은 마치 자기들이 형제들인 것처럼 질문에 대답할 수 있도록 최근호 「파수대」 기사를 주의깊이 연구해야 하였다. 마침내, 그들은 심지어 기도하는 것까지 배워야 하였다. 이것은 모두 만일 가능하다면, 조직 속으로 침투하여 그것을 내부로부터 궤멸시키기 위한 목적이었다.

‘뮌스테르’의 ‘안톤 쾨트겐’이 보고한 바에 의하면, 그는 한 “호의적인” 부인에게 서적을 전한 후에, 즉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고 한다. 그와 동시에, “비밀 경찰들이 바깥 정원에 있던 내 아내에게 말을 걸고 자기들이 형제들이라고 소개하였다. 그러나, 단지 다른 형제들의 이름을 알아내기 위한 목적 뿐이었다. 그러나, 내 아내는 그들의 계략을 간파하고 그들이 비밀 경찰임을 폭로케 하였다.”고 ‘쾨트겐’ 형제는 말을 이었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때에 맞게 비밀 경찰들을 식별해 낸 것은 아니다.

한편, ‘러더포드’ 형제는 ‘스위스’로의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으며, 만일 가능하다면, 독일로부터 온 형제들과 대화해 보기를 원하였다. 1936년 9월 4일부터 7일 사이에 ‘루체르네’에서 대회를 개최할 마련을 하였다. ‘스위스’ 소재 중앙 사무소는 우리에게 독일 전역의 형제들로부터 그들이 체포된 일, 비밀 경찰에 의하여 학대를 받은 일, “독일식 인사”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해고된 일에 관한 보고, 또한 학대의 결과로 형제들이 사망한 경우에 관한 보고 및 기타 많은 보고를 수집하라고 제안하였다. 이러한 보고 등을 대회가 시작되기 전에 비밀히 ‘스위스’로 보내서 ‘러더포드’ 형제로 하여금 그것을 검토해 볼 기회를 갖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1936년 8월 28일에, 비밀 경찰은 총화된 무자비한 공격을 가하여, 여호와의 증인들을 마치 들짐승처럼 사냥하는 운동을 개시하였다. 여호와의 증인들을 체포하는 활동에 밤낮을 막론하고, 그러나 특히 밤중에 모든 기동력을 총동원하였다. 지난 수개월에 걸쳐서 비밀 경찰들이 수집한 모든 정보는 이제 그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결코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공언한 일이 전혀 없던 일부 사람들을 포함하여 의심을 받지 않던 사람들도 거미줄 같은 수사망에 걸려들었다. 그러자 그런 사람들은 자연히 자유를 다시 얻기 위하여 더욱 순순히 여호와의 증인들에 관하여 자기들이 알고 있는 바를 비밀 경찰들에게 말하였다. 비록 그들이 알고 있는 것으로 이야기할 만한 것은 종종 매우 희소하였지만, 이러한 작은 조각의 정보가 비밀 경찰들이 이 때까지 그려온 그림에 세부점들을 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훗날의 심문시에 비밀 경찰들은 그러한 정보가 그들이 수천의 증인들을 체포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종종 자랑하곤 하였는데, 체포된 사람들 대부분은 투옥되었다가 후에는 집단 수용소에 감금되었다.

비밀 경찰의 운동이 마침내 최고의 속력으로 진행되고 있을 때, 그들은 대공세를 취하여 그 당시 독일에서의 전체 사업의 책임을 맡고 있던 ‘빈클레르’ 형제와 대다수의 지방 봉사 지휘자들을 체포하는 개가를 올렸는데, 대부분의 경우, 그들의 이름과 맡은 구역은 이미 알려져 있었다. 비밀 경찰은 이 “운동”의 중요성을 높이 평가하여, 하류 사회의 범죄 요소는 손대지 않은 채 두고, 여호와의 증인들을 공격하는 데 전경찰망을 투입하였다.

비밀 경찰들은 상세한 탐색 활동을 하는 사이에 ‘빈클레르’ 형제와 독일 전역에서 오는 다른 책임있는 종들 사이의 중요한 회합들이 ‘베를린’ 동물원에서 이루어지곤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형제들은 특히 연중 더운 계절에 그곳에서 회합하곤 하였다. 이러한 회합은 그곳에 있는 ‘바르둔’ 형제의 의자 대여점에 의하여 오랫 동안 위장될 수 있었다. 그는 눈에 띄지 않게 도착하는 형제들에게 어떤 형제가 동물원 내 어느 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가를 알려 주고 그들을 토의할 수 있는 안전한 장소로 인도할 수 있었다. 언제든지 위험한 공기가 감돌면 그는 단순히 형제들에게 가서 그들이 “빌린” 의자의 대여료를 수금하면서 그들에게 경고를 해 주곤 하였다. 그러나 이 훌륭한 마련도 오랫 동안 비밀로 유지되지 못하였다. 어떤 방법을 통해서인지 비밀 경찰은 그 내막을 탐지하였으며, 그 정보는 그들의 간교한 공격 계획에 도움이 되었다. ‘클로헤’ 형제 자신도 이에 관련이 있었는데, 그는 가슴조이는 그 당시 ‘베를린’에서의 일들을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나는 ‘루체르네’ 대회를 고대하고 있었다. 나는 이미 ‘스위스’행 ‘비자’를 얻을 수 있었으므로 참석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먼저 나는 ‘라이프찌히’로 가서 ‘프로스트’ 형제와 조직적인 문제들을 토의하기를 원하였다. ‘파울 그로스만’ 형제의 체포로 말미암아 공석이 생겼기 때문에, 나는 지방 봉사 지휘자로서 ‘프로스트’ 형제의 구역을 인계받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프로스트’ 형제를 만날 수 없었으며, 그를 만나기로 한 곳에서 나는 대신 비밀 경찰을 부닥치고 말았다. 나는 처음에 기절할 지경이었다. 그러한 유쾌한 봉사를 막 시작할 수 있게 된 찰라에 형제들과의 연합으로부터 격리당하고 비밀 경찰에 의하여 ‘라이프찌히’로 연행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그는 ‘베를린’으로 이송되었다.]

“한편 비밀 경찰은 우리가 동물원 내에 회합 장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그들은 우리 조직에 관하여 다른 많은 것들을 탐지하였다. 이러한 정보는 위협 취재를 비롯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입수한 것이었다.”

“며칠 후 5명의 경찰이 탄환을 장전한 권총으로 무장하고, 갑자기 나타나서 나에게 민간인 복장으로 갈아 입게 하고는, 나를 이끌고 ‘바르둔’ 형제가 공원용 의자를 빌려 주는 금붕어 연못 근처로 갔다. 그러나, 그들은 그 형제를 여호와의 증인의 일원으로 의심하지는 않았다. 이제 나는 비밀 경찰이 입수한 정보대로 계획된 회합을 위하여 결국은 나타날 형제들을 체포하기 위한 ‘미끼’로 이용되게 된 것이다.

“지시받은 곳에 미쳐 앉기도 전에 나는 ‘힐데가르트 메쉬’ 자매가 내게로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그 자매는 내가 오기를 고대하였는데 왜 오지 않았느냐고 의아해하였으며 이제 내가 그렇게 하지 못한 이유를 알고자 하였다. 내 정갱이는 구타당할 때 입은 상처 때문에 매우 통증이 심하였기 때문에 그 자매가 통로의 반대 쪽을 지나가는 순간 내가 갑자기 몸을 구부리고 얼굴을 고통스럽게 찡그리면서 동시에 눈짓으로 동물원 내에 비밀 경찰이 있다는 신호를 그에게 보내도 경찰들은 의심하지 않았다. 그 자매는 이해하고, 순간적으로 주저하더니, ‘바르둔’ 형제에게로 돌아가서, 이러한 새로운 상황에 대하여 알려 주었다. 이것은 ‘빈클레르’ 형제가 매우 위험하게 되었음을 의미하였는데, 잠시 후에 당도한 그는 마음 놓고 빈 의자에 앉았다. 즉시 ‘바르둔’ 형제가 그에게 달려와서 빌린 의자의 요금을 달라고 하면서 동시에 비밀 경찰들이 동물원 안에 있다고 그에게 경고하였다. ‘빈클레르’ 형제는 즉시 일어서서 자기 손가방을 뒤에 남겨두고는 마치 비밀 경찰들의 포위망을 빠져나가듯이 도망쳤다. 그 날 밤 늦게 그는 ‘카씽’ 형제의 ‘아파트’에 나타났는데,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일단의 비밀 경찰에게 즉시 체포되었다는 사실을 나는 후에 알게 되었다.”

그로부터 수일 내에 독일에 있는 지방 봉사 지휘자들 중에 적어도 반수와 수천 명의 다른 형제들 및 친구들이 체포되었다. 이 중에는 ‘게오르그 배르’ 형제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매일 저녁 10시경 나는 여러 감방에서 수감자들이 끌려나가는 소리를 듣곤 하였다. 그로부터 잠시 후에는 그들이 아랫층 지하실에서 구타당하는 소리가 들리곤 하였으며, 그들이 울부짖는 소리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매일 저녁 감방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는 이제는 내 차례구나 하고 생각하곤 하였다. 그러나, 나는 마침내 네째 혹은 다섯째 날 저녁 6시경에 심문받기 위하여 소환되었을 때까지는 아무 일이 없었다. 이번에는 친위대 대원 한 사람이 나를 자기 방으로 끌고 가서 자리에 앉으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는 ‘우리는 당신이 말하고 싶지 않은 것도 많이 있음을 알고 있오’ 하고 말하였다. 그는 일어서서, 휴지통에서 연필을 깎으면서 계속 작은 목소리로 ‘나는 당신을 괴롭힐 생각은 없오. 이리 오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는 내게 자기 책상으로 다가오라고 하고는 몇 장의 타자로 친 종이를 보여 주면서 읽으라고 하였다. 그것은 독일에 있는 모든 여행하는 종들의 명단이었으며, 맨 밑에 내 이름도 있었다. 또한 우리가 방문하는 회중명과 그곳의 형제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주문한 서적, 축음기 및 음반의 양이 적혀 있었으며, 우리가 송금한 헌금과 다른 돈의 액수도 수록되어 있었다. 나는 거의 믿을 수가 없었다. 여기 비밀 경찰의 손에 우리의 지하 조직의 전모가 밝혀져 있는 것이다. 내가 정신을 차리기에는 수분이 걸렸다. 도대체 비밀 경찰이 어디서 이러한 기록들을 얻을 수 있었는가? 하고 나는 자문해 보았다. 만일 내 자신의 활동이 정확하게 수록되어 있지 않았다면, 나는 그 기록의 진실성을 의심했을 것이다. 그 심문을 진행하던 ‘드레스덴’의 친위대 대원이자 비밀 경찰인 ‘바우흐’는 내게 기억들을 끌어모을 시간을 주었다. 자리에 다시 앉을 때의 내 모습은 매우 멍청하였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자 그는 ‘자, 이제 입을 다물고 있을 아무런 이유도 없지 않소’ 하고 말하였다.

“나는 비밀 경찰이 어디서 우리의 기록을 입수하였을까 하는 생각으로 수개월 동안 번민하였다. 후에 나는 우리가 송부한 모든 주문, 보고 및 돈에 관한 기록이 주의깊이 ‘베를린’에 보관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후에 비밀 경찰이 이것을 발견하고 압수했던 것이다.”

담대한 활동이 경찰을 당혹케 하다

1936년 9월 4일부터 7일 사이에 ‘루체르네’에서 개최하도록 주의깊이 계획된 대회는 2주 전에 자행된 대량 체포의 결과로 갑자기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었다. 비밀 경찰도 그 대회에 관한 정보를 입수하였으며, 아마 그것을 참작하여 우리에 대한 운동 일자를 예정하였을 것이다. 적어도 그들은 독일 형제들이 참석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온갖 수단을 다 강구하였다. 이 사실은 1936년 8월 21일자 비밀 국가 경찰의 한 비밀 회람에서 볼 수 있는데, 그 회람은 대회에 참석하는 형제들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러한 사람들의 출국은 금지되어야 한다. 그러한 경우에는 여권을 압수해야 한다.”

실제로, 여행을 계획했던 천여명의 형제들 중 단지 약 300명만이 참석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불법적인 국경 통과를 해야 하였으며 많은 형제들은 귀국하자 체포되었다.

‘러더포드’ 형제는 물론 이 기회를 이용하여 독일로부터 참석한 종들과 그들의 문제에 관하여 토의하였다. 그는 특히 형제들을 영적으로 돌보는 방법에 관심을 나타내었다. ‘하인리히 뒌게르’도 참석했었는데 그는 그 토의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부가적인 내용을 알려 준다.

“이제 지방 봉사 지휘자들이 제안을 하도록 요청되었다. 그들은 ‘러더포드’ 형제에게 나를 독일로 돌려 보내도록 천거하였다. 그들은 나에게 본인으로서 제안을 말해 보라고 요구하였으나, 나는 그들에게 내가 ‘프라하’로 파견된 이상 그렇게 할 수 없으며, 내가 독일로 돌아가길 원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대답하였다. 그렇게 한다면 나는 내 임명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래서 당분간 ‘프로스트’ 형제가 중책을 담당하도록 임명되었다. 그 다음 ‘러더포드’ 형제는 ‘만일 당신이 체포되면 어떻게 하지요?’ 하고 물었다. ‘프로스트’ 형제가 체포되는 경우에는 형제들은 ‘디이치’ 형제가 인계하도록 추천하였다.”

한 결의문이 채택되었으며 약 2, 3천부가 ‘히틀러’에게와 독일 내의 그의 정부 관서로 발송되었다. ‘로마’ 교황에게도 한부를 발송하였다. 대회 조직의 지시에 따라, ‘베른’ 출신인 ‘프란츠 취르헤르’가 1936년 9월 9일에 결의문들을 발송하였는데, 그에게 ‘로마’의 ‘바티칸’과 ‘베를린’의 제국의 수상 관저로의 배달 확인이 통고되었다. 타자로 쳐서 약 3면 반 길이의 동 결의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우리는 ‘로마 가톨릭’의 성직 계급과 독일 및 여타 세계의 모든 지역에 있는 그들의 동맹자들에 의한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한 잔인 무도한 학대에 대하여 강력히 항의하는 바이다. 그러나 그 결과에 대하여는 우리의 하나님 곧 그의 말씀에 따라 온전히 복수하실 주의 손에 맡긴다. ··· 우리는 독일에 있는 박해받는 우리 형제들에게 충심에서 우러나오는 인사를 보내어 그들에게 계속 담대함을 유지하고 전능하신 하나님 여호와와 그리스도의 약속을 온전히 신뢰하도록 권고하는 바이다. ···”

그곳에서 채택된 결의문을 많은 독일 국민들에게 전격적으로 배부하려는 마련을 하였다. ‘베른’에서 인쇄한 300,000부 중에서 200,000부를 ‘프라하’로 보내서, 그곳으로부터 ‘찌타우’ 근처의 국경과 ‘리이젠’ 산맥의 다른 장소를 통하여 반입하였다. 나머지 100,000부는 ‘네덜란드’를 통하여 독일로 들여오도록 하였으나, 불행히도 ‘네덜란드’에서 압수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베를린’과 다른 북부 독일의 몇몇 지방 봉사 지휘자들은 자기들이 사용할 것을 만들지 않으면 안되었다. 배부일은 1936년 12월 12일로 예정되어, 오후 5시부터 7시 사이에 활동하기로 하였다.

후에 접수된 보고에 의하면, 약 3,450명의 형제 자매들이 이 일에 참여하였다. 각자는 20부씩 혹은 최대 40부씩 소지하였으며, 임명받은 구역에서 가능하면 빨리 그것들을 배부하도록 계획하였다. 그것을 단순히 우편함에 집어 넣거나 문밑으로 밀어넣기로 하였다.

한집에 한부씩 배부하였으나, 보통 큰 건물의 ‘아파트’에서도 세부 이상은 남겨두지 않았다. 그 다음 쪽지를 전하는 전도인들은 이웃 거리로 빨리 달려가서 그 곳에서도 그렇게 하였으며, 그럼으로써 가능한 넓은 지역에 배부할 수 있었다.

반대자들이 입은 영향은 참담하였다! 독일에서의 사업의 책임을 맡고 있던 8개월 동안, ‘프라하’의 사무실과 긴밀한 유대를 맺고 있던 ‘에리히 프로스트’는 ‘프라하’를 방문하는 동안에 이 운동에 관한 다음과 같은 보고를 전달하였다.

“결의문의 배부는 정부 당국과 비밀 경찰에 대한 굉장한 타격임이 증명되었다. 그것은 1936년 12월 12일에 갑작스러운 활동을 통하여 배달되었다. 모든 것이 세부적으로 계획되었으며, 모든 충성스러운 동료 봉사자들은 통지를 받았고, 오후 5시 정각에 봉사가 시작되기 24시간 전에 각자의 구역과 결의문 뭉치가 배당되었다. 한 시간 만에 경찰, 돌격 대원 그리고 친위 대원들이 이리저리로 질주하면서 이 담대한 배부자들을 체포하기 위하여 거리를 순찰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체포한 것은 극소수, 전국을 통하여 겨우 12명을 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 화요일 아침 경찰들은 여러 형제들의 집에 나타나서 그들이 그 배부 사업에 참가하였다고 단도직입적으로 비난하였다. 물론, 우리 형제들은 이에 관하여 전혀 모르고 있었으며, 체포된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였다.

“이제, 신문보도에 의하면, 우리의 용기 때문에 분노뿐만 아니라 두려움의 감정도 증가하고 있다. 그들은 ‘히틀러’ 정부에 의한 공포 정치의 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렇게 은밀히, 그리고 그렇게 광범위하게 그러한 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가능하였다는 데 대하여 아연실색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은 국민들을 두려워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경찰에 고발하였지만 경찰관들이나 다른 제복을 입은 관리들이 집들을 방문하여 주민들에게 그러한 쪽지를 받았느냐고 질문하면, 그들은 부인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사실상, 그러한 결의문을 받은 것은 매 건물에서 두 가족이나 기껏해야 세 가족에 불과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경찰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였으며, 집집마다 한 부씩 배부한 것으로 추측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국민들이 우리의 결의문을 받았지만 어떠한 이유 때문에 경찰이 질문할 때 부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며, 따라서 그들은 극도의 혼란과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비밀 경찰들은 8월 28일에 있었던 자기들의 광범위한 운동으로 우리의 사업을 완전히 궤멸시켰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크게 실망하였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우리의 결의문 배부 운동을 실제보다 더 광범위한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적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대열에 심각한 균열을 일으키는데 성공을 거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사업을 완전히 정지시키는 일도 성공할 수는 없었다. ‘러더포드’ 형제를 위하여 수집한 1936년 10월 1일부터 12월 1일까지의 기간을 망라하는, 지방 봉사 지휘자들의 보고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형제들은 자기들의 전파 임무를 계속 수행하였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모든 수자는 대략적인 것임) 3,600명의 봉사자들, 21,521시간, 300권의 성서, 9,624권의 서책 및 19,304부의 소책자. 이것은 아래와 같은 검거의 선풍이 불기 전의 최종 월간 보고[5월 16일부터 6월 15일까지]와 비교할 때 양호한 편이다. 5,930명의 봉사자들, 38,255시간, 962권의 성서, 17,260권의 서책 및 52,740부의 소책자.

「공개장」에 의한 폭로

동 결의문이 배부된 1936년 12월 12일 이후에 행하여진 모든 심문과 재판 중에서 그 활동이 언급되곤 하였다. 관리들은 그 결의문의 성경 내용은 진실이 아니며, 우리는 우리의 주장에 대한 증거를 제시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으며, 그것을 이유로 그들은 많은 형제들을 더욱 괴롭혔다. 그러므로, 책임을 맡은 형제들은 ‘러더포드’ 형제에게 결의문 배부와 같은 방법으로 “전격적인 운동”을 전개하여 「공개장」을 배부하자고 제의하였다. 그것을 통하여 비밀 경찰들에게 그들의 주장이 거짓임을 증명하는 대답을 제시하자는 것이었다. ‘러더포드’ 형제는 찬성하였으며, ‘스위스’의 ‘하벡’ 형제가 1936년까지 수집된 박해에 관한 모든 자료들을 가지고 있었음으로 그에게 「공개장」을 쓰라고 요청하였다.

그 공개장에서 발췌한 다음 항목은 적들에게 제시한 공개적인 대답 가운데서 형제들이 가한 준렬한 논박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명백히 보여준다:

“그리스도인의 인내와 명예를 고려하여 우리는 이러한 비인도적인 만행에 대하여 독일 내외부를 막론하고 일반 대중의 관심을 환기시키는 일을 오랫 동안 자제해 왔다. 우리는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한 상술한 바의 잔혹한 학대가 실제로 발생하였음을 보여 주는 막대한 양의 기록들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한 학대에 대하여 특히 책임이 있는 자들은 ‘도르트문트’의 ‘타이스’ 그리고 ‘겔센키르헨’과 ‘보훔’의 비밀 경찰 소속인 ‘텐호프’ 및 ‘하이만’이다. 그들은 부녀자들까지도 말채찍과 고무 곤봉으로 구타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 ‘도르트문트’의 ‘타이스’와 ‘함’의 비밀 경찰관 한 사람은 그리스도인 부녀들에 대한 학대에서 보인 그들의 가학성 변태 성욕적인 잔혹성으로 특히 악명을 떨쳤다. 우리는 난폭하게 죽임을 당한 여호와의 증인들 18명의 이름 및 기타의 세부적인 사항들을 알고 있다. 예를 들면, 1936년 10월 초에, ‘베스트팔렌’ 주, ‘겔센키르헨’, ‘노이휠레르 쉬트라세’의 ‘페테르 하이넨’이란 이름의 한 여호와의 증인은 ‘겔센키르헨’ 시청에서 비밀 경찰들에게 구타당한 결과 절명하였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제국의 수상 ‘아돌프 히틀러’에게 보고되었다. 동 보고문의 사본이 제국의 장관 ‘루돌프 헤스’와 비밀 경찰 국장인, ‘히믈러’에게도 송부되었다.”

「공개장」이 완성된 다음, ‘베른’에서 그 전문을 ‘알루미늄’ 원판에 기록하여 ‘프라하’로 보냈다. ‘프로스트’ 형제와 긴밀한 협조 하에 지하 활동을 하던 ‘일제 운테르되르페르’는 때때로 그 형제로부터 ‘프라하’로 보고들을 보내고 또 새로운 소식들을 알아 오라는 지시를 받았다. ‘프라하’로 그러한 여행을 하는 기회에 ‘운테르되르페르’ 자매는 얼마 전에 매입한 윤전 등사기에 의하여 「공개장」 인쇄에 사용할 그 원판을 전달받았다. 1937년 3월 20일, ‘운테르되르페르’ 자매는 이 귀중한 보따리를 가지고 ‘베를린’에 도착하였다.

“나는 그 보따리를 받았다.”고 말하고, ‘프로스트’ 형제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그 다음 이 ‘위험한’ 물건을 다른 자매에게 맡겨서 안전한 장소에 은닉케 하였다. 그날 밤 나와 그 귀중한 원판를 운반해온 ‘운테르되르페르’ 자매는 함께 머무르던 곳에서 체포당하고 말았다. 이제 우리는 ‘나치’ 독재의 잔존기간은 자유를 상실한 것이라는 사실은 우리로서 받아들이기 괴로운 일이었지만, 우리가 이 새로운 ‘팜프렛’ 운동의 안전을 확보하였다는 것을 생각할 때 행복하였다.”

그러나, ‘프로스트’ 형제의 생각은 틀린 것이었다. 감옥으로 이송되는 도중 그는 윤전 등사기가 자기가 탄 경찰차 안 바로 자기 옆 자리에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비밀 경찰은 수색 도중에 그것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다른 기계에는 사용할 수 없는 그 원판은 없어져서 다시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 원판을 ‘프로스트’ 형제로부터 받은 사람으로서 그 운동의 세부점들을 잘 알고 있던 ‘이다 쉬트라우스’도 같은 생각을 하였다. 그 자매는 다음과 같이 그 때의 일을 회고한다. “내 가방 속에는 ‘알루미늄’ 원판이 들어 있었으며 나는 그것들을 기계가 설치되어 있는 장소로 운반하고 있었다. 시각은 이미 깊은 밤이었고 캄캄하였는데, 관심자인 그 집 주인은 계단에 서서 이렇게 주의시켰다. ‘즉시 돌아가서 안전한 곳에 몸을 숨기시오. 비밀 경찰이 와서 기계를 압수하고, 형제들을 체포하고 조금 전까지 당신을 기다리다가 방금 포기하고 돌아갔오.’ 그후 어떻게 되었는가? 그 다음 수일 동안에 나는 그 날 저녁에 많은 형제들이 체포되었음을 알게 되었으며, 조직과 관련이 있는 형제를 아무도 만날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이제 능히 여호와의 사업의 이익에 자기 자신들을 더욱 바칠 수 있을 만큼 두려움이 없는 형제 한 사람과 몇명의 자매들을 탐색하기 시작하였다. 내가 비밀 경찰의 요시찰인 명부에 들어 있으며 어느 때라도 체포될 각오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일이 실제로 발생하였을 때 나는 해야 할 일이 충성스러운 사람들의 손에 들어 있음을 기쁘게 생각하였다.”

“공개장”의 원판에 관한 한, ‘쉬트라우스’ 자매의 생각도 틀린 것이었다. 그 기계를 압수당하였고 다른 기계가 없는 한, 그 원판은 무용지물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프로스트’ 형제가 체포되자 ‘루체르네’에서 있었던 ‘러더포드’ 형제와의 토의 석상에서 결정한 대로 ‘하인리히 디이치’가 사업의 책임을 계승하였다. 그의 첫 목표는 이 「공개장」을 출판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렘고’의 ‘쉬트로마이에르’ 형제와 접촉하였다. ‘쉬트로마이에르’ 형제와 ‘클룩후흔’ 형제는 「1936년 연감」을 인쇄한 이유로 6개월을 복역한 후 방금 감옥에서 석방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쉬트로마이에르’ 형제는 협력하기로 동의하였다.

이제 문제는 ‘스위스’로부터 원판을 다시 반입해 들이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지형을 들여왔는데, 우선 그곳의 형제들이 식자를 하여 그것을 만들어서 연판을 만들 수 있게 하였다. 그 다음 이제 ‘스위스’에서 200,000부의 「공개장」을 인쇄하였으나, 그것들을 국경을 통하여 독일로 반입하는 일이 실패로 돌아간 후에 ‘디이치’ 형제는 그 지형을 인수하였던 것이다.

인쇄 문제가 해결된 다음, 그 「공개장」을 1937년 6월 20일에 “전격적인 운동”을 전개하여 배부하기로 결정하였다. ‘엘프리이데 뢰르’ 자매의 보고는 이러하다. “‘디이치’ 형제는 그 운동을 조직하였다. 우리는 한결같이 담대하였고, 모든 것은 놀랍도록 마련되어 있었으며, 각 지방에는 충분한 양의 공개장들이 할당되어 있었다. 나는 ‘브레슬라우’ 근처 구역의 기차역에서 그것들이 든 커다란 옷가방을 가지고 ‘리이그니츠’의 형제들에게 전달하였다. 나는 내 몫도 받아서 지정된 때에 모든 다른 형제들처럼 그것들을 배부하였다.”

「공개장」의 배부는 틀림없이 방심하고 있던 비밀 경찰들에게 타격을 주었을 것이다. 그들은 몇개월 동안 자기들이 조직을 완전히 궤멸시켰다고 자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들의 흥분을 돋구었다. 마치 어떤 사람이 갑자기 개미둑을 쑤셔놓은 것과 같았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광인들처럼, 그들은, 특히 ‘도르트문트’의 ‘타이스’ 같은 사람들은 극도의 혼란 속에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러나, ‘타이스’의 승리의 시간도 그 끝에 다달았다. ‘타이스’는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하여는 자비를 보여서는 안된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이전에 형제였던 ‘분슈’라는 사람의 집을 수색하였다. 그런데, 한편 그 사람은 진리에서 돌아서서 ‘히틀러’의 공군에서 준위로써 근무하고 있었다. ‘분슈’가 귀가하자 그의 아내는 그에게 가택 수색을 당했었노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즉시 그는 ‘도르트문트’의 ‘타이스’를 찾아가서 수색을 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따졌다. 웬 공군 준위 한 사람이 자기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당황한 ‘타이스’는 말을 더듬었다. “당신도 성경 연구생들과 한편입니까?” ‘분슈’는 “나는 그들의 연설의 얼마를 들어 본 적이 있오. 그러나 나는 무엇이든 들을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다 갔었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타이스’ 부인이 끼어들었다. 흥분한 ‘타이스’는 퉁명스럽게 이렇게 말하였다. “만일 이럴줄 알았더라면, 나는 성경 연구생들을 멸절시키려는 시도를 결코 시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주 미칠 지경입니다. 짐승 한 마리를 가두어 놓았는데 거기서 다른 열 마리가 달겨든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도대체 이런 일을 왜 시작했는지 모르겠읍니다.”

이 마귀의 대리인의 양심이 가라앉았다고 상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 반대로, 「그리스도교 박멸 십자군 운동」(「Kreuzzug gegen das Christentum」)이란 책은 “‘갈릴리’ 사람이여, 당신이 승리하였오!”란 소제목 하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끝을 맺었다.

“우리는, 수차 언급된 바 있는 ‘도르트문트’의 ‘타이스’는 자기의 범죄적 행위 때문에 얼마 전부터 극심한 양심의 고통을 당하고 있으며, 마귀들이 서서히 그를 광인으로 만들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수개월 전 그는 여호와의 증인들 150명을 ‘박살내었다’고 자랑한 일이 있다. ‘여호와여, 나는 당신에게 영원한 조소를 선언하오. ‘바벨론’의 왕 ‘만세’’라고 방약무도한 말을 한 것도 바로 그 사람이다.

“그러나, 이제 그는 이 사람들을 높여 보게 되었으며, 그들을 더는 괴롭히지 않겠다고 약속하였으며, 또 무시무시한 형벌을 피하기 위하여 그리고 자기가 격고있는 괴로운 정신적인 고통을 벗어나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자기에게 알려 달라고 그들에게 요청하였다. 그는 ‘위로부터 학대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항상 새로운 여호와의 증인들이 계속 튀어나오기 때문에 자기는 이제 중단하기를 원한다고 말하고 있다. 주님을 적들에게 팔아버린 후의 ‘유다’처럼, ‘타이스’는 회개를 구하고 있으나 그것을 찾을 수 없다. 비록 소수이지만, 비밀 경찰들이나 다른 당원들 중에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꾸준함에 크게 동요되어 자기들의 행위에 잘못을 깨닫고 자기들이 하던 일을 중지한 경우도 있다.”

「공개장」의 배부는 비밀 경찰에게 큰 근심을 갖게 하는 원인이 되었으며, 즉시 그들은 수사망을 폈다. 불과 며칠만에 어떤 실마리를 계기로 그들을 직접 ‘렘고’로 그리고 그 「공개장」을 인쇄한 ‘쉬트로마이에르’와 ‘클룩흐훈’ 형제에게로 수사망을 좁히게 되었다. 비밀 경찰은 그들이 적어도 69,000부를 인쇄하였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다. 그 두 형제는 3년간의 금고형을 선고받았으며, 그들이 형기를 마친 후에 비밀 경찰은 “교정불능”이라는 낙인을 붙여, 보호 구금이라는 이름 하에 그들을 억류하였다.

지방 봉사 지휘자들의 대다수가 체포되었기 때문에 자매들이 빈 자리를 채워서 ‘디이치’ 형제와 회중들 사이에 연결을 유지하도록 요청을 받게 되었다. 이들 중에 ‘엘프리이데 뢰르’가 있었는데, 그 자매는 ‘프로스트’ 형제와 ‘운테르되르페르’ 자매가 체포된 다음에 ‘디이치’ 형제와 접촉하려고 노력하였다. 그 자매는 ‘뷔르템베르크’로 여행하여 수소문한 끝에 ‘슈투트가르트’에서 ‘디이치’ 형제를 찾았다. ‘디이치’ 형제는 그 자매로 하여금 형제들과 연결을 유지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익히도록 그 자매를 동반하였다. 또한 ‘네덜란드’에서는 이동식 무선 송신기를 설치하여 1937년 가을 중에 이를 가동하기 위한 광범위한 준비가 진척되었다. 비밀 경찰은 이 낌새를 알아차리고 ‘디이치’ 형제에 대하여 격노하게 되었는데, 그들이 그의 이름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는 ‘반드레스’ 형제처럼 매우 교묘하게 도망하곤 하였다.

비밀 경찰이 ‘디이치’ 자매를 체포하여 악명높은 ‘도르트문트’의 ‘쉬타인’ 파출소로 연행한 것은 대략 이 시기일 것이다. 그들은 그 자매에게 남편이 숨어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자백하도록 강요하였지만, 그 자매는 말하길 거부하였다. 그 자매는 너무나 심한 학대를 당하였기 때문에 그 이후로 다리 하나가 다른 쪽보다 더 짧아지고 말았다. 이에 더하여, 그 자매는 석방된 후에도 수주 동안 ‘알코올’을 적신 붕대로 전신을 감싸고 있지 않으면 안되었다.

1937년 ‘파리’ 대회의 여파

‘파리’에서 열린 1937년도 대회에, 그 전 해에 개최되었던 ‘루체르네’ 대회의 경우와 같이 ‘러더포드’ 형제가 참석하기로 계획되었다. 이번에 독일로부터 단지 소수의 형제들만이 참석할 수 있었다. 적들은 형제들의 대열에 큰 간격을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소수의 참석할 수 없었던 사람들 중의 하나인 ‘리펠’ 형제는 후에 ‘뢰라하’와 그 근교에서만 하더라도 40명의 형제 자매들이 투옥되었으며, 그중 10명은 교수형, 독‘가스’에 의한 사형 혹은 총살형을 당하였거나 또는 굶어죽거나 집단 수용소의 “의학 실험”의 결과로 사망하였다고 말하였다.

‘파리’에서 또 하나의 결의문이 채택되었는데, 이를 통하여 다시 한번 여호와와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하에 있는 그분의 왕국과 관련한 우리의 명백하면서도 깨뜨릴 수 없는 입장을 천명함과 동시에 독일에서 자행되고 있는 야수적인 박해에 대하여 공중의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책임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경고하였다.

독일의 마지막 지방 봉사 지휘자마저 부재한 2주 동안에도 사태의 흐름은 계속되었다. ‘디이치’ 형제와 약 15명의 형제 자매들이 봉사 상의 문제들을 토의하기 위하여 회합하는 주간 모임에 늘 참석하던 ‘뢰르’ 자매가 체포되었다. 그 일은 이렇게 발생하였다.

그러한 회합은 대체로 아침 9시경에 시작하여 종종 오후 5시까지 계속되었으므로, 형제 자매들은 점심 식사는 함께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고 말하였다. 그래서 ‘뢰르’ 자매가 식사 준비의 요청을 받았다. 안전을 위하여, 형제들은 매주 모임 장소를 변경하였으며, 그리하여 한 장소에서 그 다음 장소로 식사를 준비하는데 사용하는 커다란 솟을 옮길 필요가 있었다. 비밀 경찰이 최근에 검거한 형제들로부터 알아냈는지 혹은 어떤 다른 방법으로 탐지하였는지 아무도 알 수 없지만, 하여간 그들은 ‘파리’ 대회 직전의 마지막 모임이 어디서 있었는지를 알아냈다. 비밀 경찰은 이 ‘아파트’를 계속 감시하였으며, 그 다음 회합이 열리기 약 3, 4일 전에 ‘뢰르’ 자매가 솟을 가지러 왔을 때, 비밀 경찰은 그 새로운 모임 장소까지 그 자매를 미행한 다음 즉각 체포하였다. 비밀 경찰은 곧 자기들이 새로운 모임 장소만이 아니라 ‘디이치’ 형제의 비밀 은신처도 발견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파리’ 대회 후 그는 곧바로 ‘베를린’으로 돌아왔으며, 가능한 위험성을 조사해 보지 않고 그 ‘아파트’로 갔다. ‘디이치’ 형제는 함정에 빠져서 현장에서 체포되고 말았던 것이다. 자연히 이제 더 작아진 여행하는 종들의 집단과의 회합은 시간과 장소에 있어서 변경이 있지 않으면 안되었다.

‘디이치’ 형제는 지하 활동을 통하여 수년 동안 지치는 일 없이 봉사하였으며 위험을 직면해서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4년형을 선고받았지만, 대다수의 형제들과는 달리, 형기를 마친 후에 집단 수용소에 수용되지 않았다.

1945년, 사업이 재조직되기 시작하였을 무렵, 그는 “형제들의 종”으로서 회중들을 섬기기 시작한 최초의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는 후에 자기 자신의 이론을 발전시키기 시작하였으며, 여호와의 조직으로부터 떨어져나갔다.

그러면, 다시 1937년으로 돌아가 보자. 또 다시 형제들의 대열에 위험스러운 간격들이 생기게 된 후 ‘반드레스’ 형제는 적어도 미봉책으로나마 그 간격들을 메꾸어 형제들로 하여금 영적 양식을 계속 공급받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프랑케’ 형제가 체포된 다음, 그는 그의 구역을 인수하였지만, 그는 봉사 지휘자가 없는 다른 구역에 대하여도 책임감을 느끼고 ‘바드 크로이츠나하’ 출신인 ‘아우구스테 슈나이더’ 자매에게 ‘바드 크로이츠나하’, ‘만하임’, ‘카이제르 슬라우테른’, ‘루드빅스하펜’, ‘바덴-바덴’ 및 전 ‘자아르’ 구역의 형제들에게 영적 양식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아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처럼 극도로 위험하던 시기에 여행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모든 형제들처럼, 그 자매에게도 또 하나의 이름이 주어졌는데, 이제부터 그는 “파울라”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반드레스’ 형제는 적들이 ‘작센’ 지방에서 특별히 광분하고 있음을 깨닫고, ‘프라이부르크’의 ‘헤르만 엠테르’에게 이 구역을 돌보아 달라고 요청하였다. 9월 3일에 그들 두 사람은 ‘드레스덴’으로 여행하였다. ‘반드레스’ 형제가 전에 그곳에 온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비밀 경찰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로써 3년 동안이나 계속된 한 인간 사냥이 끝났다!

9월 중순경 ‘반드레스’ 형제와의 마련에 따라, “파울라”는 서적이 가득 들어있는 두 개의 커다란 옷가방을 들고 ‘빈겐’의 기차역에서 마음을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한 신사가 그에게 다가와서 “안녕하십니까? ‘피울라’! ‘알베르트’는 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나와 함께 가야 하겠읍니다.”라고 말하였다. 저항하는 것도 무용지사였다. 그 사람은 비밀 경찰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부언하였다. “당신은 ‘알베르트’를 기다릴 필요가 없오. 우리는 이미 그를 체포하였으며 그의 돈도 몰수하였기 때문이오. ··· ‘반드레스’ 씨가 당신이 두개의 커다란 옷가방을 들고 이곳에 있을 것이라는 것과 당신이 ‘파울라’라는 것을 말하였오!” 비밀 경찰이 어디서 이 정보를 입수하였는지는 오늘날까지도 신비한 일이다. 그러나 모 형제가 어떤 사실을 자백하였다고 주장하여 형제들 사이에 신뢰감을 붕괴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그러한 “배반자”들을 멀리하게 하는 것은 비밀 경찰의 상투 수단이었다.

종신 억류 계획

이러한 일련의 체포로 독일 형제들에게 있어서 한 중요한 시대가 끝을 맺었다. 잘 조직된 활동의 기간이 지나간 것이다. 이제 모든 것은 투쟁이 새로운 국면으로 돌입하였음을 지적하였다. 비밀 경찰의 목표는 이제 여호와께 고착할 만큼 담대한 개개인을 궤멸시켜서 조직을 와해시켜야겠다는 것이다.

1937년 5월 12일에 ‘뒤셀도르프’의 비밀 경찰에 의하여 공개된 한 회람에 의하면 성경 연구생들은 차후로 사법 영장 없이 단지 혐의만으로도 집단 수용소에 수감시키게 되었다. 또한 성경 연구생들은 법원이 지정한 금고형의 형기를 복역한 후에 자동적으로 집단 수용소에 수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결정은 1939년 4월에 더욱 엄격해지고 확대되었다. 이제부터는, 여호와와 그의 조직과의 연합을 중지하겠다는 선언문에 기꺼이 서명하는 사람들만이 석방되게 되었다. 많은 형제들은 심지어 그 선언문에 서명할 것인지의 여부를 결정할 기회마져 받지 못하였다.

‘에쎈’의 ‘하인리히 카우프만’은 형기를 마친 후 민간인 복장으로 나서자, 한 형무관은 그에게 보호 구금에 처하여진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우선 그들은 그가 1년 반 동안을 와보지 못한 그의 집으로 그를 호송하고는, “당신은 신앙을 철회하고 ‘히틀러’를 따르기를 원하는가?”고 물었다. 동시에 그들은 그에게 그 집 열쇠와 20‘파운드’의 식품 뭉치를 보여 주면서, 그의 아내도 ‘라벤스브뤼크’ 집단 수용소에서 풀려보내 주겠다고 약속하는 것이었다. ‘카우프만’ 형제는 그 제의를 거절하였다.

‘에른스트 비이스네르’가 보고한 바와 같이 때때로 형제들을 기만하려는 시도가 자행되었다. 형기가 만료되기 조금 전, 그의 앞에는 종이 한 장이 제시되었다. 기재되어 있는 내용이 매우 일반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자세히 읽어본 후, 그는 서명을 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기만적인 수작이었다. ‘비이스네르’ 형제에게 그 종이 밑부분에 서명을 하라는 것이었으며, 그 종이의 반은 공란으로 남아 있었다. 비밀 경찰이 나중에 ‘비이스네르’ 형제가 좋은 양심을 가지고는 도저히 서명할 수 없는 다른 내용들을 부가할 것이라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즉시 그들의 흉계를 간파하였으며, 그들이 미쳐 중단시키기도 전에, 그는 타자로 기재된 선언문 바로 밑에다 서명을 하였다. 그 결과 그는 서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석방되기는 커녕 오히려 형기만료 3주 전에 비밀 경찰로부터 즉시 집단 수용소로 이송될 것이라는 통고를 받았다.

집단 수용소들—입을 크게 벌린 무저갱

「현대 역사」(「Vierteljahresheft für Zeitgeschichte」), 1962년 판 제 2호에서 ‘한스 로트펠스’는 이렇게 기술하였다. “집단 수용소에 수용되는 것이야말로 성실한 성경 연구생들이 국가사회주의자들의 치하에서 겪은 고통 기간의 최종적이며 가장 어려운 국면이었다. ···”

대다수에게 위안이 된 것은 그곳에는 박해의 열기에 단련된 이미 앞서 구속된 형제들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사랑에 찬 돌봄을 경험하는 것은 위로가 되었으며 “신입자” 각자의 마음을 소생시켜 주었다.

그러나 언제나 우리의 형제들의 굳건함이 들어 나게 되고 또 정부에 보고될 때마다, 정부에서는 어떻게 하면 형제들에게 고난을 가중시킬 수 있을까 하는 것만을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얼마 동안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수용소에 새로 도착하면, 여러 가지 다른 야수적인 고문 방법들 외에도, 으례 쇠채찍으로 25대씩 맞곤 하였다. 노예같이 힘든 노동은 아침 4:30부터 시작하였으며, 그 때에 수용소의 종이 울려서 모든 사람들을 깨웠다. 잠시 후, 침구를 정리하고, 세면을 하고, ‘커피’를 마시고, 점호를 하는 등, 떠들썩해지는데—이 모든 것은 구보로 해야 하였다. 아무에게도 정상 속도로 움직이는 것이 허락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은 점호를 하기 위하여 행진한 다음 각각 여러 노동대에 끼어 일하러 나갔다. 이제 뒤따르게 되는 것은 정말 극적인 일들이었다. 자갈, 모래, 돌, 장대, 막사 짓는 데 쓰이는 모든 부분품을 운반하는 일로서, 이것은 하루 종일 계속되었으며, 모든 것을 구보로 해야 하였다. 재소자들에게 끊임없이 소리치면서 그들을 인내의 한계점에까지 혹사하는 공사 감독들은 ‘히틀러’가 제공할 수 있는 가장 악랄한 자들이었다.

예수께서도 비슷한 일들을 격으셨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위로와 격려가 되었으며, 그들에게 인간 이하의 학대 하에서도 인내할 수 있는 힘을 주었다.

때로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변화를 준다는 구실로, “집형식”이 행하여지곤 하였다. 형제들은 종종 굶기를 강요당하였다. 피곤한 형제가 앉아서 음식을 먹는 대신 운동장에서 4내지 5시간씩이나 계속 주목을 한채 서 있도록 강요당하는 것은 참으로 힘든 시험이었으며, 단지 한 형제의 상의의 단추가 떨어졌다거나 혹은 다른 사소한 규율 위반 때문에 이러한 일이 자행되곤 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잠자리에 들도록 허락을 받았지만, 또 배고픔이 허락하느냐가 문제였다. 그러나 밤은 항상 잠자기 위한 시간만은 아니었다. 종종 한 사람 때로는 서너 명의 악명높은 “막사장”이 밤중에 나타나서 재소자들을 괴롭혔다. 이러한 일들은 때때로 공중이나 막사의 서까래에다 대고 쏘아대는 연발 권총의 소리로써 시작되었다. 그런 다음 재소자들은 잠옷을 입은 채로 ‘막사’ 주의를 뜀박질하거나 그 위로 기어오르도록 강요당하였으며, 이것이 그 “막사장”들이 원하는 한 계속되었다. 그러한 학대하에서 연로한 형제들이 가장 괴로움을 당하였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으며,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그로 말미암아 목숨을 잃었다.

1938년 3월에 집단 수용소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한 전면 통신 금지가 실시되었다. 이것은 9개월간 계속하였는데, 그 기간에는 형제들은 자기 친척들과 연락을 하거나 받거나 할 수 없었다. 심지어 이 금지령이 철회된 후에도, 각 여호와의 증인들은 자기 친척들에게 한 달에 단지 다섯 줄의 편지만을 쓸 수 있다는 제한은 3년 반 내지 4년간—어떤 수용소에서는 심지어 그보다 더 오래 사실상 남아 있었다. 문안은 미리 준비되어 있었으며, 그 내용은 이러하였다. “당신의 편지를 받았읍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나는 잘 지내고 있으며, 매우 건강합니다. ···” 그러나 때로는 “나는 잘 지내고 있으며 매우 건강합니다”는 식의 편지보다 사망 통지서가 먼저 도착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편지의 빈 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도장이 찍혀 있었다. “본 재소자는 전과 다름없이 성경 연구생임을 고집하고 있으며, 성경 연구생들의 거짓 가르침을 배척하기를 거부하고 있음. 이러한 이유로 본 재소자에게는 통례적인 통신의 특권이 거부되고 있음.”

“사각형”이 적수를 만나다

집단 수용소의 생활은 하루 하루가 불안으로 가득차 있으며, 왕왕 이것은 수용소 소장 자신에 의하여 조장되곤 하였다. 한 동안 ‘작센하우젠’의 소장은 ‘바라노브스키’란 사람이었는데, 깡마른 체격 때문에 재소자들은 그에게 “사각형”이란 별명을 붙였다.

그는 새로운 재소자들이 도착할 때마다 늘 자기가 직접 접견하고 그들에게 그의 “환영사”를 말하였다. 그것은 대체로 이러한 말로써 시작되었다. ‘나는 본 수용소의 소장이며 “사각형”이라고 불리운다. 너희들 모두 이제 잘 들어라.—너희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먹여주겠다.—머리에 한 방, 가슴에 한 방, 배에 한 방씩 말이다! 너희들이 원한다면, 너희들은 너희 목을 자를 수도 있고, 너희 동맥을 까벗길 수도 있다! 너희들이 원한다면, 전기 울타리로 뛰어들 수도 있다. 내 부하들은 훌륭한 사수들이라는 것을 명심하라. 그들은 너희들을 즉시 천당으로 보내 줄 것이다.’ 그는 여호와와 그분의 이름에 조롱을 퍼붓는 기회를 결코 놓치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한 금지가 시작할 무렵 ‘딘슬라켄’에서 23세 된 한 젊은이가 진리를 배웠다. 그의 이름은 ‘아우구스트 디크만’이었다. 비록 그는 아직 침례를 받지 않았지만, 비밀 경찰은 그를 체포하여 재판에 회부하였다. 형기를 마친 후 그는 비밀 경찰의 압력에 못이겨 “선언서”에 서명하였는데, 그는 이것이 자기로 하여금 그 이상의 박해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었으면 하는 희망에서 그렇게 하였음에는 의문의 여지도 없다. 그러나, 그는 1937년 10월 형기를 마친 후 즉시 ‘작센하우젠’으로 이송되었다. 그곳의 형제들은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서로 즐겁고 고무적인 토론을 벌리곤 하였으며, 이제 그들과 함께 있게 된 그는 자기가 약함 때문에 적들과 타협하였음을 깨달았다. 그는 회개하였고 자기가 서명한 성명서를 취소해달라고 요청하였다.

한편 그의 친 형인 ‘하인리히’도 ‘작센하우젠’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아우구스트’는 성명서에 서명한 사실, 그러나 한편, 그것을 취소해달라고 요구한 사실에 관하여 그에게 이야기하였다.

그 다음 수주가 신속히 흘러갔다. 1939년 하반기에 제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그 수용소 소장 ‘바라노브스키’는 자기 계획을 착수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아우구스트 디크만’의 아내가 자기 남편에게 ‘딘슬라켄’의 자기들의 집으로 발부된 그의 모병 지원서를 보냈을 때 그 기회를 이용하기로 작정하였다. 전쟁이 터진지 3일 후에 ‘디크만’은 “정치부”로 호출받았다. 점호가 시작되기 전 ‘아우구스트’로부터 이러한 새로이 전개된 상황에 관하여 통고를 받은 ‘하인리히’는 그에게 이제 전쟁이 터졌음으로 무슨 일이든지 각오를 해야 한다고 경고하였다. 그는 자기가 하기를 원하는 일에 대하여 온전히 자신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아우구스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들은 내게 무엇이든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겠지. 나는 다시는 서명과 타협을 하지 않겠어.”

그 날 오후 심문이 행하여졌지만, ‘아우구스트’는 형제들에게로 돌아오지 않았다. 후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그는 그 모병 지원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훌륭한 증거를 하였다. 수용소 소장이 ‘히믈러’에게 이 경우를 통고하고, 형제들과 전 수용소 재소자들이 목도하는 가운데 공개적으로 ‘디크만’을 처형하도록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는 한편, 그를 토굴속 독방에 감금했던 것이다. 그 소장은, 실제로 죽음을 당한다면 많은 수의 여호와의 증인들이 서명을 할 것이라고 믿었다. 이제까지는 대다수가 그렇게 하기를 거부해 왔지만, 단지 위협만이 가하여졌을 뿐이었던 것이다. ‘히믈러’는 ‘디크만’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졌으며 처형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회답하였다. 이제 “사각형”이 자기의 ‘대대적인 쇼’를 벌릴 길이 열린 것이다.

때는 금요일이었다. 무시무시한 정적이 수용소 전체에 맴돌고 있었는데, 갑자기 일단의 지휘부대원들이 나타나서 잠간 사이에 운동장에 사살장을 설치하였다. 이것은, 물론, 갖가지 풍문을 낳았다. 평시보다 한 시간 일찌기 작업을 중단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을 때, 흥분은 더욱 고조되었다. ‘파울 부데르’는 지금도 자기들의 노동대가 귀로 행진을 하고 있을 때 한 친위대 대원이 그에게 웃으면서 “오늘은 승천일이다! 당신들 중의 한 사람이 오늘 천당엘 가게 될꺼다”라고 말하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하인리히 디크만’이 소속돼 있던 노동대가 들어서자, 선임 재소자가 그에게 다가와서 지금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그가 모른다고 대답하자, 그 선임 재소자는 그의 동생 ‘아우구스트’가 총살당할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러나 긴 대화를 할 시간이 없었다. 모든 재소자들에게 뜰로 행진하여 나오라는 명령이 발표되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총살형 집행 분대가 설 장소 바로 앞에 배치되었다. 모든 눈이 이 지점으로 고정되었다. 친위대 경비대원들이 행진해 들어 와서, 보통 때보다 4배의 안전 예방 조처를 취하였다. 총들을 덮고 있던 덮개가 젖혀지고 곧 사용할 실탄이 총에 장전되었다. 친위대 대원들은 높은 담벽위에 걸쳐 앉아서 발생되는 일들을 바라보고 있었는데—그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전 대원들이 이 유혈의 구경거리를 주목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정문은 튼튼한 철봉으로 건조되었는데, 야단스러운 일들을 좋아하는 친위대 대원들이 마치 포도송이처럼 그 위에 올라서거나 매달렸다.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은 더 잘 보기 위하여 빗장위로 올라가기도 하였다. 그들의 눈은 호기심 뿐만 아니라, 피에 대한 굶주림으로 가득차 있었다. 모두는 곧 발생케 될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부 사람들의 얼굴에서는 모종의 공포의 빛이 비치고 있었다.

서너명의 상위층 친위대 간부들의 호송을 받으며, 앞으로 손을 묵인채 ‘아우구스트’가 인도되어 들어왔다. 모든 사람들은 마치 이미 전쟁을 이긴 사람같이 침착하고 태연한 그의 모습에 감동되었다. 약 600명의 형제들이 주목하고 있었으며, 불과 몇 ‘미터’ 떨어진 곳에 그의 친 형인 ‘하인리히’가 서 있었다.

갑자기 ‘마이크로폰’이 켜지면서 확성기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재소자들은 본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는 “사각형”의 목소리였다. 즉시 조용해졌다. 약간 천식기가 있는 숨소리를 내면서 그 괴물은 이렇게 계속하였다.

“1910년 1월 7일에 태어난 ‘딘슬라켄’ 출신인 수인 ‘아우구스트 디크만’은 자기는 ‘하나님의 왕국의 시민’이라고 주장하면서 군 복무 이행을 거부하고 있다. 그는 인간의 피를 흘린 자는 자기의 피를 흘리게 된다고 말하였다. 그는 자기 자신을 사회로부터 이탈시켰으므로 ‘히믈러’ 친위대 대장의 지시에 따라 처형될 것이다.”

죽음의 정적이 운동장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동안 “사각형”은 계속하였다. “본인은 한 시간 전에 ‘디크만’에게 그의 가련한 생명은 6시에 끊어지게 될 것이라고 통고하였다.”

한 관리가 다가와서 다시 한번 그가 생각을 바꾸었는지 그리고 징집 통지서에 서명하려 하는지의 여부를 죄수에게 물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였다. 그러자 “사각형”은 “소용없는 일”이라고 대답하였다. ‘디크만’에게로 돌아보면서 그는 “이 돼지같은 놈아, 돌아서” 하고 외친 다음 발포 명령을 내렸다. ‘디크만’은 뒤에서 저격을 당하였다. 뒤이어 한 상급 친위대 간부가 걸어나와서 그의 머리를 쏘아 피가 그의 볼로 흘러내리게 만들었다. 한 하급 친위대 사병이 그의 수갑을 푼 다음, 네명의 형제가 지시를 받아 그를 검은 관에 넣어 시체실로 운반하였다.

다른 모든 재소자들은 이제 해산하여 자기들의 막사로 돌아가도록 허락을 받은 반면, 여호와의 증인들은 계속 남아있어야 하였다. 이제 “사각형”이 자기의 주장을 실증할 시간이 되었다. 그는 성명서—신앙의 배척 뿐만 아니라 병사가 되겠다는 의사를 나타내는 선언문에 서명할 준비가 된 사람이 누구냐고 크게 힘주어 물었다.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그러더니 두 사람이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러나 성명서에 서명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약 1년 전에 서명한 것을 취소해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사각형”에게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격분한 그는 운동장을 떠났다. 예상한 바와 같이 그날 저녁과 뒤이은 수 일간 형제들은 매우 괴로움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굳건함을 유지하였다.

‘디크만’의 처형은 그 다음 수일 동안 ‘라디오’를 통하여 몇차례 방송되었는데, 이는 아직 자유로운 다른 증인들을 위협하려는 속셈이었음이 분명하다.

3일 후에 그의 형 ‘하인리히’가 “정치부”로 불리어 갔다. 두 명의 고위층 친위대 요원이 그의 동생의 처형이 그에게 미친 영향을 조사하기 위하여 ‘베를린’에서 왔던 것이다. 그 자신이 진술한 바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대화가 진행되었다.

“‘그대는 그대의 동생이 어떻게 사살되었는지를 보았겠지?’ 나는 ‘보았다’고 대답하였다. ‘그것으로부터 무엇을 배웠는가?’ ‘나는 여호와의 증인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러면 다음에는 네가 총살당할 차례이다.’ 나는 몇가지 성서 질문에 대답할 수 있었는데, 마침내 한 친위대원이 ‘알고 싶은 것은 무엇이 기록되어 있는가가 아니라 네 생각이란 말이야’ 하고 소리쳤다. 그리고 조국을 수호해야 할 필요성을 내게 납득시키려고 노력하는 동안 그는 계속 이러한 말들을 퍼부었다. ‘다음 번에는 너를 총살해야겠군 ··· 다음에는 네 목이 굴러떨어질꺼야 ··· 다음에는 네가 꺼꾸러질 차례군.’ 마침내 다른 친위대 요원이 ‘소용없는 일일세. 어서, 기록을 끝맺게’ 하고 말하였다.”

다시 한번 서명하도록 ‘디크만’ 형제 앞에 성명서를 제시하였다. 그는, “만일 내가 여기다 서명을 함으로써 이 국가와 정부를 승인한다면 내가 내 동생의 처형을 동조하는 셈이 됩니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읍니다.” 하고 거부하였다. 그러자 “그렇다면, 이제 네가 얼마나 더 오래 살 것인지 손꼽아 볼 수 있겠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거의 전례없이 지독하게 여호와께 조롱을 가하고 도전을 한 “사각형”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는 그 후 단지 몇차례만 수용소에 모습을 나타내고는 그 후에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재소자들은 ‘아우구스트 디크만’의 처형 얼마 후에 그가 갑자기 극심한 병을 앓게 되었다는 사실을 탐지하였다. 그는 다시는 여호와와 그분의 증인들을 조롱할 기회를 갖지 못한채 5개월 후에 사망하였다. “나는 여호와와 싸움을 시작하였다. 우리는 나와 여호와 중에 누가 더 강한지를 보게 될 것이다.”라고 “사각형”은 1938년 3월 20일에 형제들을 “격리 구역”에 수용시키면서 말한 일이 있었다. 그 싸움은 결판이 난 것이다. “사각형”이 패배하였다. 그리고, 우리의 형제들은 수개월 후 “격리 구역”으로부터 석방되었으며, 어떤 경우에는 어느 정도의 구호 물자도 받곤 하였지만, 그 반면 “사각형”은 중병에 걸렸으며 한 관리가 그에게 문병을 갔을 때, 그는 성경 연구생들이 “내가 자기네 사람을 총살시켰기 때문에 내가 죽기를 기도하고 있다”고 울먹였다는 풍문이 수용소 전체에 계속 퍼졌다. 그가 죽은 후, 그의 딸이 자기 아버지의 사인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언제나, “성경 연구생들이 내 아버지의 죽음을 기도하였다”라고 대답하곤 하였다고 한다.

‘다하우’

‘뢰트’의 ‘프리드리히 프라이’ 형제는 ‘다하우’의 “격리 집단”에서 당한 학대에 관하여 이렇게 보고한다. “그 굶주림, 그 추위, 그 고통은 가히 묘사할 수 없다. 한 때 한 장교가 구두발로 내 배를 걷어차서, 심한 통증을 일으키게 한 일이 있다. 또 다른 경우에 계속 당한 구타로 말미암아 내 콧날이 기형이 되었기 때문에, 지금도 나는 호흡에 장애를 느낀다. 한 때 한 친위대 사병이 내가 배고픔을 가라앉히기 위하여 작업시간 중에 두어 웅큼의 마른 빵 부스러기를 먹는 것을 목격하였다. 그는 구둣발로 배를 걷어차서 나를 땅에 엎어뜨렸다. 그러한 벌로도 미흡했던지 내 팔을 뒤로 묶어서 3‘미터’ 높이의 장대에 매달았다. 이러한 변태적인 몸자세와 체중은 혈액 순환계에 파열과 심한 통증의 원인이 되었다. 한 친위대 사병이 내 두 다리를 잡고 앞뒤로 흔들면서, “아직도 여호와의 증인이냐?”고 소리쳤다. 그러나, 내 이마에서는 이미 죽음의 땀이 솟아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나는 이 일로 말미암아 지금까지도 신경의 경련이 일어난다. 나는 주께서 손과 발에 못이 밖힌 채로 겪으신 마지막 몇 시간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다하우’에는 “크리스마스” 직전에 거대한 ‘크리스마스 트리’가 세워졌고 전기 촛불들과 다른 형태의 장식물들로 장식되었다. 100명이 넘는 여호와의 증인들을 포함한 45,000명의 재소자들은 평온한 며칠 간을 즐길 수 있기를 희망하였다. 그러나 어떠한 일이 발생하였는가? ‘크리스마스 이브’인 저녁 8시, 모든 재소자들이 자기들의 막사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수용소 내의 ‘사이렌’들이 울리기 시작하였으며, 그러므로 재소자들은 가능한 한 빨리 운동장으로 뛰어나가야 하였다. 친위대 악단의 연주 소리가 들렸다. 완전 무장한 친위대 5개 중대가 행진해 들어 왔다. 친위대 장교들의 수행을 받은 수용소 소장이 재소자들에게 자기들은 이 날 저녁 자기들 나름의 특별한 방법으로 그들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기념하길 원한다는 간단한 연설을 하였다. 그런 다음 그는 자기 손가방에서 한 통의 명단을 꺼내서 거의 한 시간 동안이나 지난 수 주 동안 벌을 받도록 추천된 재소자들의 이름을 읽어 내려 갔다. 받침대를 꺼내다가 설치해 놓고 첫 재소자를 그 위에 붙들어 매었다. 그 다음 쇠채찍을 든 두 명의 친위대 대원이 그 받침대 좌우에 서서 악대가 “고요한 밤”을 연주하는 동안, 그 재소자에게 채찍질을 시작하였으며, 모든 재소자들도 따라서 노래를 부르라는 요구를 받았다. 동시에 25대의 채찍질을 당하는 그 재소자는 큰 목소리로 그 수자를 헤아리도록 강요당하였다. 매번 새로운 재소자를 받침대에 불들어 맬 때마다 새로운 두 명의 친위대 대원이 나서서 형벌을 가하였다. “그리스도교 나라”가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참으로 합당한 방법이었다.

그러한 학대를 직면하여 우리 형제들은 강한 믿음, 하나님의 말씀의 주의 깊은 연구에 의하여 강화된 믿음이 필요하였다. 연구를 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며 어떻게 당사자로 하여금 그러한 시험에 대하여 무비한 상태에 처하게 하는지를 ‘헬무트 크뇔레르’는 경험하였다. 그에게서 그 자신의 경험담을 들어보자.

“내가 ‘다하우’에서 겪은 최초의 며칠은 매우 힘들었다. 20세인 나는 신입자들 중에서 가장 연소자였다. 나는 일요일에도 작업을 해야 하는 특별 노동대에 배속되었다. 나를 감시하는 감독은 나를 특히 구박하였다. 나는 전혀 익숙지 않은 가장 힘든 일들을, 구보로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나는 번번히 쓰러졌지만, 매번 그들은 나를 허리에까지 차는 지하실 물속으로 운반하여 내 머리 위로 물을 퍼부어서 소생시키곤 하였다.

“내 육체는 거의 완전히 지칠대로 지쳐버렸다. 이러한 상태는 매일같이 계속되었으며, 이것이 수주 동안, 그렇다, 심지어는 수개월 동안 계속될 수도 있음을 안 나는 자포자기할 지경에 이르렀다. ··· 그러나, 어려움이 너무 컷기 때문에 나는 마침내 수용소의 간부들에게 가서 나는 더 이상 만국 성경 연구생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선언하는 선언서에 서명을 하였다. 내가 그러한 서명을 한 것은 집에서 연구를 충분히 하지 않은 결과였다. 내 부모님들도 연구를 너무 하지 않았으며, 자녀들인 우리들은 그들로부터 그릇된 교훈을 받을 뿐이었다. ··· 나는 첫째로 그 선언문에는 여호와의 증인들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고 단지 성경 연구생들에 관한 말뿐이기 때문에, 둘째로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여 밖에 나가서 여호와를 더 잘 섬기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적들을 속이는 것도 나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선언서에 서명을 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얼마 후 ‘작센하우젠’에서 장성된 형제들이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인 성실의 의미를 인식하도록 도와 주었고, 그의 믿음을 세워주었다.

‘마우타우젠’

비록 많은 사람들이 ‘다하우’에서도 독‘가스’로 또는 다른 잔인한 방법으로 죽임을 당하였지만, ‘마우타우젠’이야말로 정규 살인용 수용소였다. 수용소 소장 ‘치일아이스’는 자주 자기는 사망 증명서를 보는 데만 관심이 있을 뿐이라고 말하곤 하였다. 사실상, 6년이란 기간에 그곳에 있던 두 대의 현대식 화장로(爐)에서 210,000명이 화장되었는데, 이것은 하루 평균 100명이라는 수자이다.

재소자들이 작업을 하게 된다면 그것은 대체로 채석장으로 동원되는 것이다. 그곳에는 무자비한 친위대가 “낙하산 강하자들의 벽”이라고 명명한 가파른 벼랑이 있었다. 수백명의 재소자들은 이 벼랑으로 떠밀려 떨어져서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 그들은 죽거나 빗물이 가득찬 구덩이에서 익사하였다. 의기를 상실한 많은 재소자들은 자의로 그 심연 속으로 뛰어들기도 하였다.

관심을 끄는 또 다른 것은 이른바 “죽음의 계단”이라는 것이다. 그 계단이란 차례로 쌓아놓은 다양한 높이의 186개의 받침대의 더미를 말하는 것이다. 재소자들이 무거운 돌을 어깨에 메고 꼭대기로 올라간 다음에 친위대 대원들은 그들을 걷어차거나 자기들의 총 개머리 끝으로 그들을 때려서 계단 아래쪽을 향하여 뒤로 넘어지게 하여 대량으로 미끌어뜨리는 일을 즐기곤 하였다. 이것은 많은 죽음을 초래하였으며 사망자의 수는 위에서 떨어지는 돌로 말미암아 증가되었다. ‘프랑크푸르트’의 ‘발렌틴 쉬타인바하’는 종종 120명의 집단이 아침에 함께 나가서 저녁에는 약 20명만이 겨우 살아서 돌아오곤 하였다고 술회하였다.

여자 집단 수용소

집단 수용소들은 남자들 뿐만 아니라 여자들을 위해서도 세워졌다. 그중 하나가 일찌기 1935년에 ‘하노버’ 근처 ‘모링겐’에서 개설되었다. 1937년에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한 압력이 강화될 무렵, ‘모링겐’ 수용소는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12월에 다수의 자매들을 포함한 약 600여 재소자들이 ‘리히텐부르크’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우리의 자매들을 설득하여 그들로 굳건한 행로에서 돌아서게 하려는 노력이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에, “형사대”가 조직되었다. 그들의 감독들은 그들에게 극소량의 음식을 주었고 계속 형벌을 가할 이유를 찾기에 혈안이 되었다. 수용소 소장은 그들에게 ‘만일 너희가 살아남기를 원한다면, 내게 와서 서명을 하라’고 말하였다.

‘일제 운테르되르페르’는 우리의 자매들로 하여금 그들의 성실을 깨뜨리게 하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그들이 사용한 한 가지 방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어느 날 ‘켐니츠’에서 온 ‘엘리자베트 랑게’ 자매가 소장에게 불려갔다. 그 자매는 결연히 선언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하였으며, 그리하여 이 옛 성의 지하실에 위치한 한 감방에 수감되었다. 옛날 성들과 토굴들에 관하여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상상할 수 있듯이 이것은 극히 고생스러운 일이었다. 그 감방들이란 빗장을 지른 작은 창이 하나씩 있는 굴을 말하는 것이다. 침상은 돌로 된 것이었으며, 수감자는 대부분의 시간을 이 차겁고 딱딱한 ‘침대’ 위에 짚으로 만든 깔개도 없이 누워있도록 강요당하였다. ‘랑게’ 자매는 지하실의 이 굴속에서 독방 감금을 당한 채 반 년을 보냈다. 비록 그 자매가 육체적으로는 고통을 당하였지만, 그것이 충성을 지키려는 그의 결심을 동요시키지는 못하였다.”

우리의 자매들의 건존함을 파괴시키기 위하여 이용한 또 다른 방법은 힘든 육체 노동이었다. 그러한 목적으로 많은 자매들이 ‘라벤스브뤼크’로 끌려갔다. 첫 집단이 도착한 것은 1939년 5월 15일이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곧 뒤이어 도착하였다. 그 수용소는 곧 950명의 여인들을 포함할 만큼 커졌는데, 그들 중 약 400명은 여호와의 증인들이었다. 그들 모두는 보통 남자들을 필요로 하는 일인, 가장 힘든 건축과 청소 작업에 차출되었다. 잔악하기로 특히 유명한 신임 수용소 소장은 자매들로 하여금 힘든 육체 노동을 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굴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자연히 그러한 학대는 많은 죽음을 초래하였다. 그리고, 또한, 전 집단이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는데, 이곳의 수용소도 ‘마우타우젠’처럼 대량 살육을 위한 특별한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연로하거나, 건강이 나쁘거나 혹은 “최상의 인종”을 생산할 수 있는 여성으로서의 친위대 대원들의 표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여인들은 죽임을 당하였다. ‘베르타 마우에레르’는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이렇게 말해 주었다.

“우리는 선택 위원회 앞에 벌거벗고 서도록 강요받았다. 그런 다음 즉시 첫 집단이 ‘아우슈비츠’로 떠났다. 비록 누구나 ‘아우슈비츠’는 더욱 견디기 힘든 곳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 중에는 더 견디기 쉬운 수용소로 이송되는 중이라고 속임을 당한 자매들도 끼어 있었다. 두번째 집단을 구성한 여자들도 같은 말을 들었다. 이 집단 가운데에는 많은 수의 약하고 병든 자매들이 들어 있었다.” 곧 그들의 친척들은 그들의 사망 통지서를 받았다. 대부분의 경우 ‘순환계 질병’이 사인으로 기재되었다.

자매들에게 시험이 될 수 있었던 또 다른 일에 대하여 ‘바드 크로이츠나하’의 ‘아우구스테 슈나이더’는 이렇게 보고한다.

“어느 날 한 재소자가 내게 와서 ‘‘슈나이더’ 부인 나는 여기를 떠나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그 여자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묻자 그의 대답은 이러하였다. ‘남자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재소자들을 위한 유곽을 세우는 중이래요. 우리는 요청을 받았으며, 약 20 내지 30명의 여자들이 자원하였대요. 우리에게는 좋은 옷이 배급되며 화장도 하게 되지요!’ 그에게 그것이 어디에 있게 되느냐고 묻자, 그는 ‘남자 수용소 내에’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일어난 일은 도저히 묘사할 수도 없다. 그러나 어느 날 한 친위대 간부가 내게 ‘‘슈나이더’ 부인, 당신은 남자 수용소 내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듣게 될 것이오. 내가 꼭 당신에게 한 가지 알려 주고 싶은 것은 여호와의 증인들은 아무도 그 일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이오’ 하고 말해 주었다.”

‘라벤스브뤼크’는 여자 집단 수용소들 중에서도 가장 악명높은 곳이 되었다. 제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을 때, 그곳에 있던 자매들의 수는 약 500명으로 증가하였다.

어느 날 수명의 자매들이 갑자기 자기들의 감방에서 호명을 받아 전체 건물을 청소하는 일에 동원되었는데, 이는 ‘히믈러’가 감사차 방문할 것이라는 뜻을 비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날은 지나가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자매들은 잠자리에 들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베개 역할을 하는 신발을 벗고 있었다. 그러나, 추위 때문에 그들은 옷을 입은채로 잠을 자곤 하였다. 그들은 따뜻함을 유지하기 위하여 가능한 한 함께 가까이 누워 잤다. 때때로 그들은 위치를 바꾸었으며, 그래서 물론 더 춥게 마련인 바깥 쪽에 누구나 한번씩 누워 자곤 하였다. 갑자기 복도에서 큰 소리가 들리면서 감방 문들이 열리기 시작하였다. 우리의 자매들은 이제 독일에서 생사를 결정하는 그 사람 앞에 서게 되었다. ‘히믈러’는 자매들을 흠잡으려는 듯이 살펴보고, 그들에게 몇가지 질문을 하였는데, 그는 그들이 한치라도 양보하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동일한 날 저녁 ‘히믈러’와 그의 수행원들이 떠난 후, 다수의 재소자들이 호출을 받아 나갔으며 다른 재소자들은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을 수 있었다. ‘히믈러’는 여인들을 위하여도 ‘강화된’ 형벌을 도입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옷이 벗겨진 둔부에 25대씩 쇠채찍질을 당하였다.

한 자매는 많은 자매들이 담대하게 자기들의 문제를 직면하던 그 담대함에 관하여 이렇게 이야기한다. “내 막사에는 진리를 받아들인 한 ‘유대’인 여자가 있었다. 어느 날 밤 그도 부르는 소리에 잠을 깼다. 나도 그가 일어나는 소리를 듣고 일어나서 위로의 말을 해 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나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고 있어요. 나는 부활의 놀라운 소망에 관하여 배운 것이 매우 기뻐요. 나는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예요’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는 담대하게 걸어나갔다.”

분열이 어려움을 가중시키다

외부의 형제들로부터 단절되어 있는 수용소 재소자들은 영적 양식에 큰 기갈을 느꼈다. 새로운 사람들이 도착하면 형제들은 「파수대」에 무엇이 발행되었는지를 알아내려고 묻곤 하였다. 어떤 때에는 지식이 정확하게 전달되었지만, 어떤 때는 그렇지 않았다. 심지어는 성서를 사용하여 자기들이 구출될 날짜를 정해 놓으려고 하는 형제들도 있었으며, 비록 그러한 주장은 논거가 빈약함에도 불구하고 일부 사람들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이러한 “지푸라기들”에 매달렸다.

이러한 때에 기억력이 특출한 한 형제가 ‘부헨발트’에 수감되었다. 배운 것들을 기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 주는 그의 능력은 처음에는 형제들에게 격려의 원천이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는 “‘부헨발트’의 경이”라고 우상시되었으며, 그의 진술은, 심지어는 그의 사견까지도 최종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1937년 12월부터 1940년까지 그는 매일 저녁 한 가지씩 도합 약 1,000번의 연설을 하였으며, 이중 많은 것들을 등사할 수 있도록 속기를 하기도 하였다. 수용소 내에는 연설을 할 수 있는 연로한 형제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그 형제 하나 뿐이었다. 그와 온전히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왕국의 적들”이며 “‘아간’의 가족”으로 취급되었으며 “충실한 자들”은 그들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거의 400여 형제들이 이 마련에 동조하였다.

이렇게 “적들”이라는 오명을 쓴 사람들도 그들의 힘껏 왕국의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기꺼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쓴 형제들이었다. 그들도 죽는 한이 있더라도 성실을 증명하겠다는 결심 때문에 수용소에 수용된 사람들이었다. 개중에는 성서 원칙을 온전히 적용시키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도 ‘부헨발트’ 내에 들어온 영적 양식으로부터 유익을 받을 수 있도록 책임있는 자들과 접촉하려고 하면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을 “위신의 손상”이라고 생각하였다.

지금도 여호와를 섬기고 있는 ‘딘스라켄’ 출신인 ‘빌헬름 바아텐’은 어떻게 자기가 개인적으로 영향을 받았었는지를 이렇게 말한다. “나도 제명을 당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너무나 영적으로 동요되고 실의에 빠졌기 때문에 어떻게 그러한 일이 가능한가 하고 자문하곤 하였다. ··· 나는 종종 무릎을 꿇고 내게 징조를 보여달라고 여호와께 기도하였다. 나는 속으로 시국을 탓해야 할 것인지 그리고 여호와께서도 나를 제명하셨는지의 여부를 물었다. 나는 성서를 가지고 있었으며, 희미한 불빛 속에서 그것을 숙독하면서 이것은 나에게 하나의 시험으로 닥친 것이라는 생각을 함으로써 크게 위로를 받았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벌써 파멸되고 말았을 것이다. 이렇게 형제들로부터 끊어진다는 것은 굉장히 고통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인간의 불완전성과 자기 자신의 중요성에 대한 과장된 견해는 하나님의 백성들 간에 분열을 낳았으며, 일부 형제들에게 혹심한 시련이 되게 하였다.

“살아남”으려는 지나친 염려

타협하지 않으리라는 결심을 굳게 하고 수용소에 수감된 사람들 중에는 후에 “살아남”으려는 지나친 염려로 말미암아 여호와와 형제들에 대한 사랑을 흐리게 한 자들도 있었다. 만일 어떤 부면의 활동을 감독하는 수용소 조직의 한 책임을 맡게 되면, 그는 더는 힘든 노동으로 자기의 힘을 완전히 소모시키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위험하였다. 많은 경우에 이것은 그에게 친위대와 긴밀하게 일해야 하며, 재소자들을 더 못살게 굴고, 재소자들—심지어는 자기 형제들까지도—신고하여 벌을 받게 해야 함을 의미하였다.

‘마르텐스’라는 이름의 한 형제가 ‘베벨스부르크’ 수용소에 있는 동안 그러한 위치에 있게 되었다. 처음에 그는 250명의 성경 연구생들을 감독하였다. 그는 친위대의 눈에 매우 훌륭한 “선임 재소자”로 보이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였다. 시간이 지나, 정치범들과 다른 죄수들이 수용소에 부가되었다. ‘마르텐스’는 자기 지위를 잃기를 원치 않았으며, 그래서 그는 친위대의 이익을 옹호하였고 그들의 방법을 채용하였다.

오래지 않아 그는 형제들이 함께 일용할 성귀를 고려하거나 함께 기도하는 것을 금하기에 이르렀다. 곧 그는 그들의 몸을 뒤졌으며 일용할 성귀가 발견되는 사람들에게는 고무 ‘호스’로 태형을 가하였다. 어느 날 아침 서너 명의 형제들이 함께 기도하고 있을 때, 그가 뛰어들었다. 그리고 소리쳤다. “당신들은 수용소의 규칙을 모르오? 당신들 때문에 내가 고통을 당하게 되기를 원한다고 생각하오?” 이처럼 자기들의 목표에서 눈을 돌린 극소수의 사람들 때문에 다수의 충성스러운 형제들이 많은 가외의 고난을 당하였다.

굶주림의 문제

제 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자 가용 식량들은 전선으로 보내졌다. 집단 수용소 내의 식량이라고는 대부분 보통 동물의 사료로만 사용되는 순무우였다. 모든 것이 너무나 사랑이 결여된채 마련되었기 때문에, 재소자들은 종종 돼지라도 먹지 않을 음식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구미에 맞는 음식이 아니라 단순히 연명 그 자체였다. 많은 사람들은 굶어 죽었다. “나의 최대의 시험은 굶주림이었다.”라고 말하는 ‘쿠르트 헤델’ 형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내 키는 188‘센티미터’이며 정상 체중은 104.3‘킬로그램’이였다. 그러나 1939/1940년 겨울에는 내 체중이 단지 40‘킬로그램’밖에 되지 않았다. 남는 것이라곤 가죽과 뼈 뿐이었다. 이러한 나의 체구에도 불구하고 나는 작은 사람들보다 더 많은 음식을 배급받지 못하였다. 나는 종종 너무 고통스러워서 주먹으로 배를 누르곤 하였는데, 마침 한 형제가 문제를 기도로써 여호와께 고통을 인내하도록 도와주실 것을 간구하라고 충고하였다. 나는 곧 그러한 상황에서 기도가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를 인식하게 되었다.” 또 다른 한 형제는 배고픔의 고통을 이겨나가기 위하여 종종 자기 입에 모래를 퍼 넣었다고 술회하였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형제들과의 연합은 말할 수도 없는 위로가 되었다. 그렇다, 형제들이 자기 자신도 아사 지경에 있으면서도 자기들보다 더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자기들의 보잘 것 없는 빵 배급의 일부를 나누어 주는 것은 매우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종종 그들은 빵 부스러기에 불과한 것이지만 어떠한 이유 때문에 먹을 것을 아무 것도 받지 못하거나 거의 아무 것도 걸치지 못하고 혹한 속에서 운동장에서 벌을 받는 사람들의 벼개 밑에 감추어 주곤 하였다. 원수에게 거의 “파멸”될 단계에 이른 형제들이 장성한 형제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격려의 말을 듣는 것은 마치 상처에 떨어지는 기름 방울과 같고, 도저히 견딜 수 없다고 느끼는 순간에 새로운 힘을 주는 격려의 말은 참으로 마음을 달래 주었다! 그리고 연합된 기도는 참으로 강력한 것이었다! 빈번히, 저녁 때, 막사의 문이 잠기고 수용소 내 전체가 조용해진 시간, 그들은 기도로써 연합하여 문제들을 여호와께 제시하였다. 그러한 문제들은 때때로 그들 모두와 관계된 것이었고 때로는 개개인 형제들의 문제인 경우도 있었다. 언제든지 여호와께서—아주 흔히 그렇게 하신 것 처럼—즉시 문제를 개선시켜 주시면, 이것은 또한 그 다음 날 연합된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이유가 되었다. 혼자서 이겨낼 수 없는 상황에 있어서 형제들은 다시 한번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깨닫곤 하였다.

타협한 자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종종 어떤 형제들로 하여금 선언서에 서명을 하도록 하기 위하여 가장 야비한 술책마저 불사하던 친위대가 만일 그들이 실제로 서명을 하면 흔히 그들을 미워하며 전보다 더욱 심하게 괴롭히곤 하였다는 사실은 흥미있는 일이다. ‘카알 키르쉬트’는 그러한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어느 누구보다도 여호와의 증인들이 집단 수용소 내에서는 교활한 기만의 대상이었다. 그러한 방법으로 여호와의 증인들을 선언서에 서명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하라는 반복적인 요구를 받았다. 개중에는 서명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들 대부분은 석방되기 전에 1년 이상 기다려야 하였다. 그 동안 그들은 종종 친위대로부터 위선자 혹은 비겁자라는 공개적인 욕설을 들었으며, 수용소를 떠날 허락을 받기 전에 그들은 형제들의 주위를 이른바 ‘명예로운 산책’을 하도록 강요당하였다.”

‘빌헬름 뢰게르’는 어떤 형제가 자기 아내와 딸이 면회 왔을 때 서명하였지만, 그렇게 한 일에 대하여 형제들에게는 말하지 않았던 일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몇 주 후 그는 석방될 준비를 하고 있으라는 통고를 받았다. (그런 사람들은 이름이 호명될 때까지 문에 서 있어야 하였다.) 이 형제는 문에서 하루 종일 서 있었으며 그 날 저녁에도 그곳에 계속 서 있다가, 막사 안의 형제들에게로 돌아오지 않으면 안되었다. ‘크니틀레르’란 매우 무서운 대위가 시행한 저녁 점호를 마친 다음, 그는 이 형제에게 막사로 가서 발 받침대를 가져오라고 한 다음 운동장에 행진해 들어오는 형제들이 보도록 그 위에 올라 서라고 강요하였다. ‘크니틀레르’는 이제 그 형제에게 우리의 주위를 이끈 다음, 우리 모두를 날카롭게 바라보면서, ‘이 겁쟁이를 보아라. 그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서명하였다!’라고 말하였다. 물론, 친위대는 우리 모두가 서명하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은밀히 가지고 있는 존경심은 서명한 사람에게서는 사라졌다.”

‘디이트리히카이트’ 자매는 선언서에 서명한 두 자매를 기억하고 있다. 그들이 돌아올 때, 그들은 ‘디이트리히카이트’ 자매에게 자기들은 굶어죽는 것이 두려워서 서명하였노라고 말하였다. 친위대는 “이제 너희들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부인하였다. 이제 어느 하나님을 섬기겠는가?” 하고 그들에게 물었다는 사실도 숨기지 않았다. 그 두 자매는 곧 석방되었다. 그러나 소련 군대가 이 나라를 침공하였을 때 그들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재차 체포되어 소련 군인들에 의하여 투옥되었으며, 그곳에서 그들은 실제로 굶어 죽었다. 다른 경우에, 서명한 한 자매는 대전의 마지막 수일 사이에 소련 군인들에게 강간을 당한 다음 그들에 의하여 살해당하였다.

선언서에 서명한 형제들 다수는 군대에 징집되어 전선으로 보내졌으며, 그곳에서 그들 대부분은 목숨을 잃었다.

비록 서명한 형제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들을 여호와의 보호 밖에 처하게 하였다는 충분한 증거가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들을 “반역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해심있고 장성된 형제들에 의하여 자기들이 한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도록 도움을 받은 많은 사람들은 석방되기 전에 자기들의 서명을 취소하였다. 회개하고 여호와께 다시 한번 자기들의 충성을 입증할 기회를 달라고 간구한 이들 중의 많은 형제들은 ‘히틀러’ 정부가 붕괴된 후에 자발적으로 전도인의 대열에 합세하였고 회중 전도인들로서 봉사를 시작하였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파이오니아’, 감독자, 심지어는 여행하는 감독자들로 일하는 등, 모범적인 방법으로 여호와의 왕국의 이익을 증진시켰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 주를 부인하였던 ‘베드로’가 다시 그의 은총 안으로 회복된 경험으로부터 위로를 받았다.—마태 26:69-75; 요한 21:15-19.

반역

어떤 사람들은 적들이 이용한 교활한 방법으로 말미암아 혹은 인간의 약함 때문에 일시적으로 영적 균형을 상실한데 반하여, 어떤 자들은 반역자로 전향하여 형제들에게 많은 고난을 준 경우도 있었다.

‘율리우스 리펠’은 이렇게 보고한다. 1937/1938년에 “‘드레스덴’ 출신 형제인 ‘한스 뮐러’가 ‘베른 벧엘’에 찾아와서 독일 내의 형제들과 접촉하려고 하였는데, ‘많은 형제들이 체포된 후임으로 지하 조직을 재건하는 것’이 자기 의중에 있는 목표인 체하였다.

“나는 당연히 협조하고자 하는 의사를 밝혔으며, 몇몇 다른 형제들도 그러하였다. 애석하게도, 그 당시 우리는 이 ‘뮐러’ ‘형제’가 독일에서 비밀 경찰과 함께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마음을 놓고 우리는 ‘베른’에서 계획을 세우고 우리의 일을 시작하였다. 나는 ‘바덴’ ‘뷔르텐베르크’를 맡기로 하였다. 1938년 2월에 나는 국경을 넘어 독일로 들어와서 아직도 자유로운 형제들과 접촉함으로써 활동을 재조직하려고 시도하였다. 2주 후에 나는 체포되었다. ··· 비밀 경찰은 우리의 활동에 관하여 모든 세부점까지 알고 있었는데, 이것은 나중에 비밀 경찰에게 넘기려는 목적으로 지하 조직 재건에 협조한 이 배반한 거짓 형제를 통하여 알아낸 것이었다. 이 ‘형제’는 1년 후에 ‘네덜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같은 일을 자행하였다. ···

“1939년에 나는 형무소 ‘트럭’을 타고 ‘코블렌츠’로 이송되었는데, 그곳에서 ‘슈투트가르트’에서 함께 지하 활동을 하던 3명의 자매의 재판에서 증언하게 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비밀 경찰 요원이 법관들에게 그들이 어떻게 엄폐용 주소와 가명, 그리고 조직의 구조 같은 우리의 사업에 관한 모든 세부점들을 알게 되었는지에 관하여 진술하는 것을 직접 들었다. 한때 우리가 복도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 이 동일한 비밀 경찰 요원은 내게 만일 우리 대열에 무용지물만 없었던들 그들이 우리의 활동의 내막을 그렇게 쉽게 알아차릴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나는 그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 때때로 나는 감옥의 형제들에게 이 반역적인 ‘형제’에 관하여 경고할 수 있었지만, ‘하벡’ 형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그 경고를 무시하였다. 이 ‘뮐러’에게 수백명의 형제가 투옥된 데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흐름은 계속되다

비록 적들은 반복해서 하나님의 백성의 대열에 새로운 간격이 생기게 하였고, 아직도 자유로운 형제들의 수를 감소시켜 나갔지만, 형제들에게 영적 양식을 공급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는 사람들은 항상 존재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생명의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하였다. ‘뮐러’가 ‘드레스덴’에서 그의 비열한 일을 계속하고 있는 동안, 형제들 사이에 「파수대」 배부 제도를 재건한 형제들 중의 하나가 ‘루드비히 키라넥’이다. 그는 체포되어 2년의 금고형을 선고받을 때까지 이 일을 수행하였다. 그 후, 감옥 문을 나서자마자 ‘키라넥’ 형제는 그 일로 되돌아갔다.

많은 자매들은, 더욱 가혹해진 전시 법률에 따라 만일 발각된다면 자기들의 생명을 상실할 수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지만, 기꺼이 형제들의 체포로 말미암아 비게 된 자리를 대신 채웠다. 「파수대」를 배부하는 일을 하던 사람들 중에는 예를 들면, ‘홀츠게를링겐’의 ‘노이페르트’ 자매, ‘슈투트가르트’의 ‘피스테레르’ 자매 및 ‘마인츠’의 ‘프랑케’ 자매가 있었다. ‘키라넥’ 형제는 이 자매들에게 저촉되지 않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보내곤 하였는데, 그 자매들은 이 편지를 다리미질하여 그가 ‘레몬’즙으로 기록한 비밀 소식들, 즉 그들에게 어디에서 「파수대」를 받을 것이며 얼마나 받을 것인지 등에 관하여 알려 주는 내용을 읽을 수 있었다.

때때로 ‘키라넥’ 형제는 ‘슈투트가르트’로 왕래하였는데, 그곳에서 ‘마리아 홈바하’가 비서로서 그를 위하여 일하였다. 그는 그 자매에게 독일에서의 사업에 관한 보고를 구술해 준 다음, 그가 받아 쓴 그 보고서를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책임자인 ‘네덜란드’에 있는 ‘아르투르 빈클레르’에게 보냈다. ‘홈바하’ 자매는 이러한 편지들도 ‘레몬’즙으로 썼으며, 그리하여 중요한 정보가 정당한 수권자가 아닌 자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게 하였다.

이 지하 활동이 적어도 1년간이나 기능을 발휘한 것은 오로지 여호와의 인도의 혜택이었다. 그분은 종종 이상한 방법으로 자기 백성을 인도하셨으며, 그리하여 그들이 때에 따라 영적 양식을 공급받도록 하셨다. ‘뮐러’는 곧 이 전체 조직적 마련을 비밀 경찰에게 팔아넘기기에 적절한 시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관련된 모두가 수일 만에 체포되었다. ‘드레스덴’에서의 재판에서 ‘키라넥’ 형제는 사형 선고를 받았고 다른 사람들은 장기 금고형을 언도받았다. ‘키라넥’ 형제는 1941년 7월 3일, 처형되기 수 시간 전에 자기 친척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나의 사랑하는 형, 형수, 부모님, 및 다른 모든 형제들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에게 영예를 돌리십시오! 저는 여러분이 이 편지를 받게 될 때에는 더는 살아있지 않을 것이라는 가슴아픈 소식을 전해드리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읍니다. 너무 슬퍼하지는 마십시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저를 죽은 자로부터 일으키시는 것은 간단한 문제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렇습니다, 그분은 무슨 일이든지 하실 수 있으시며, 그분이 저로 하여금 이 쓴 잔을 마시도록 허락하시는 이상, 그것은 확실히 어떤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제 약함 속에서도 그분을 섬기려고 노력하였고 또 그분이 끝까지 저와 함께 해 주셨다고 확신하고 있음을 알아 주십시오. 저는 제 자신을 그분께 맡겼읍니다. 저의 사랑하는 여러분, 이 마지막 몇 시간 중에 저는 여러분을 생각하고 있읍니다. 낙담하지 마시고 오히려 침착성을 유지하십시오. 이것은 여러분이 제가 감옥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계속 걱정을 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낫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어머님과 아버님, 저는 두분께서 저를 위하여 해 주신 모든 훌륭한 것들에 대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오로지 말을 더듬으며 두 분께 감사의 말씀을 나직히 외칠 따름입니다. 부모님께서 제게 베풀어 주신 모든 은혜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보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부모님을 보호하시고 축복하시는 것이 소자의 기원입니다. 그분의 축복만이 부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형님, 저는 형님이 ‘사자 굴’로부터 저를 구출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셨다는 것, 그러나 그것이 허사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읍니다. 저는 오늘 저녁 관대한 처사를 바라는 청원이 기각되었다는 것과 저의 선고가 내일 아침에 집행될 것이라는 통고를 받았읍니다. 저는 아무런 탄원을 하지도, 또 사람의 손에서 자비를 구하지도 않겠읍니다. 그러나 저는 저를 도우려는 형님의 선한 뜻을 인식하고 있으며, 형님이 저에게 베푸신 모든 훌륭한 것들에 대하여 심중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감사를 형님과 형수에게 전하는 바입니다. 연민의 정이 담긴 여러분의 편지는 저에게 큰 도움이 되었읍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인사와 ‘키스’를 보냅니다. 그리고 저는 특히 ‘카알’을 생각하고 있읍니다. 우리가 다시 만날 때까지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라며, 저는 비록 멀리서나마 여러분을 포옹합니다. [서명] ‘루드비히 키라넥’.”

‘브루흐살’에서 ‘프라이’ 자매와 「파수대」를 등사하는 일을 한 ‘율리우스 엔겔하르트’는 독일 남부에서 ‘키라넥’ 형제와의 긴밀한 협조하에 일하였었다. ‘키라넥’ 형제가 체포될 경우에는 그가 그 일을 계속하기로 계획하였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뮐러’는 그 형제마저 비밀 경찰에 팔아 버렸으며, 그리하여 그들은 그의 고향 ‘카알스루에’에 있는 그의 은신처를 발견하였다. 그러나 ‘엔겔하르트’ 형제는 항상 자매들에게 ‘우리가 우리의 머리밖에 더 잃을 것이 있읍니까?’라는 말로써 그들을 격려하였으며, 그는 그의 자유를 최대한으로 이용하려는 굳은 결심을 하였다. 비록 비밀 경찰 요원이 그를 체포하였지만 갑자기 그는 경찰이 그를 저지하지 못할 정도로 재빠르게 뛰어나가 계단을 달려내려가서 거리의 군중들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에쎈’에서의 저항과 박해 1933-1945」(「Widerstand und Verfolgung in Essen 1933-1945」)라는 책에는 비밀 경찰의 문서철에서 발췌한 ‘엔겔하르트’ 형제의 활동상에 관한 세속 역사가들의 이러한 흥미있는 진술이 들어있다.

“‘키라넥’, ‘뇌른하임’ 및 다른 사람들의 체포로 말미암아 불법 출판물의 배부가 결코 중단되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서남부에서 활동하던 ‘엔겔하르트’는 ‘카알스루에’의 그의 과거 근거지에서의 피체 경험으로 위협을 받은 1940년에 부득이 ‘루르’ 지방으로 도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에쎈’에 잠시 머무른 다음 그는 ‘오베르하우젠-쉬테르크르아데’에 있는 한 불법 은거지를 확보하여, 그곳에서 1941년 초부터 1943년 4월까지 27개호의 「파수대」를 한호에 240부씩 그리고 후에는 360부씩 생산하였다. ‘루르’ 지방으로부터 그는 ‘뮨헨’, ‘만하임’, ‘쉬파이에르’, ‘드레스덴’ 그리고 ‘작센’ 주의 ‘프라이베르크’에 근거지를 마련하였으며, 전국을 상대로 재정 담당자로 봉사하였다. ··· 1944년 9월 18일 ‘함’의 상급 법원에서 ‘엔겔하르트’의 활동과의 유대하에 집회를 개최하며, 정규적으로 「파수대」를 배부하던 ‘에쎈’ 집단 성원들에게 장기 금고형이 선고되었다. ··· 많은 사람들은 사형을 당하였다.”

‘크리스티네 헤트캄프’도 우리에게 ‘엔겔하르트’ 형제의 활동에 관한 격려적인 보고를 해 준다. “침례까지 받은 제 남편은 전향하여 악독한 반대자가 되었다. ··· 나는 어머니의 집, 우리 집 그리고 오빠의 집에서 돌아가면서 있었던 집회에 한번도 빠지지 않았다. 우리 집에서 집회를 볼 수 있었던 것은 남편이 월요일에 집을 나가서 토요일까지 자기 누님의 집에서 머무르곤 하였기 때문이다. 그 시누이는 시외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살고 있었다. 시누이의 가족은 열성적인 ‘나치’ 가족이었으며, 남편은 우리의 기백을 당해낼 수 없었기 때문에 그곳으로 피하곤 하였던 것인데, 그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거의 3년 동안 그가 출타한 기회를 이용하여 우리 집에서 「파수대」를 인쇄하였다. 우리와 3년 동안 같이 살던 한 형제(‘엔겔하르트’ 형제)가 먼저 타자기로 원지를 치면 그것으로 등사판 「파수대」를 만들어 냈다. 후에 그는 나의 어머니와 함께 ‘베를린’, ‘마인츠’, ‘만하임’ 등지로 그 잡지들을 신뢰할 만한 사람들에게 전달하였으며, 그 잡지를 받은 사람들은 그것들을 더 세분하여 배부하였다. ‘엔겔하르트’ 형제와 어머니는 전체 마련의 책임을 맡고 있었으며, 나는 요리와 세탁을 하였다. 어머니가 투옥되셨을 때, ‘마인츠’와 ‘만하임’으로 「파수대」를 전달하는 일을 내가 인계받았다. ··· 1943년 4월, 어머니는 두번째로 체포되셨으며, 이번에는 영원히 석방되지 못하셨다. 그로부터 얼마 후 그렇게 오랫 동안 책임자로 일하면서 지하 활동을 인도하던 ‘엔겔하르트’ 형제도 체포되었다.”

후에 ‘헤트캄프’ 자매의 딸, 그의 형부, 언니, 동서 및 숙모가 체포되었다. 그들 모두는 1944년 6월 2일에 재판을 받았다. ‘엔겔하르트’ 형제와 ‘헤트캄프’ 자매의 어머니를 포함한 7명의 다른 피고들은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 얼마 후 그들 모두는 참수형을 당하였다.

그 이래 독일 내의 상태는 계속 더욱 혼란해졌다. 어디에서 「파수대」가 등사되었지를 분명히 규명하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등사판 「파수대」의 생산은 계속되고 있었다.

죽기까지 충성함

제 3제국 시대에 자행된 수많은 사형집행은 박해의 역사에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비공식 보고에 의하면 적어도 203명의 형제 자매들이 참수형이나 총살형을 당하였다. 이 수자는 아사자나, 질병 및 다른 잔인한 학대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들은 포함하지 않은 것이다.

사형 선고를 받은 한 형제에 관하여, ‘배르’ 형제는 이렇게 보고한다. “모든 재소자들과 형무관들 중에 그에 대하여 놀라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는 열쇠 제조자였으며, 형무소 전역에서 수선하는 일을 하였다. 그는 전혀 낙담하거나 슬퍼하는 기색도 없이 자기의 일상 업무를 수행하였다. 오히려 바쁘게 일하는 동안 그는 여호와께 대한 찬양의 노래를 부르곤 하였다.” 어느 날 정오 경에 그는 작업실에서 호출을 받아 나가서 그 날 저녁에 집행을 당하였다.

‘배르’ 형제는 이러한 말로써 보고를 계속한다. “내 아내는 한 때 ‘포츠담’ 형무소에서 모르는 한 자매를 본 일이 있었다. 형무소 운동장에서 내 아내가 그 자매의 옆을 스치듯 지나갔던 것이다. 그 자매는 내 아내를 보자 수갑을 찬 양팔을 들고 기쁨이 찬 인사를 보냈다.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그의 표정에는 아무런 고통스러운 기색이나 슬퍼하는 기색이 없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우리 형제 자매들이 나타낸 이러한 침착함과 평화로움은 그들이 감방에서 인내해야 했던 어려움들을 생각할 때 더욱 그 진가가 크게 나타난다.

우리의 형제 자매들은 자기들이 가야 했던 고난의 길을 직면한 가운데서도 태연함을 유지하며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었고 또 사실상 때로는 기뻐하기까지 한 반면, 증인이 아닌 다른 사람들은 종종 좌절감이나, 죽음에 대한 강한 두려움에서 강제로 억제당할 때까지 소리를 부르짖곤 하였다.

그러나, ‘울름’ 출신인 ‘요나탄 쉬타르크’는 그러한 두려움에 굴복하지 않았다. 사실상, 그가 비밀 경찰에 의하여 체포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17세에 불과하였으며, 아무런 법적 수속도 거치지 않고 ‘작센하우젠’으로 송치되어 그곳에 있는 사형수 막사에 수감되었다. 그의 죄는? 예비 군사 활동 수행 거부란 것이었다. ‘베를린’에서 온 ‘에밀 하르트만’은 ‘요나탄’이 사형수 막사에 감금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비록 심한 형벌을 받을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그리로 찾아가서 이 젊은 형제와 대화를 하고 그를 강화시켜 주곤 하였다. 그들 둘에게 있어서 이러한 짧은 방문은 매우 격려가 되었다. 비록 자기 자신이 죽음을 직면하고 있었지만, 그는 부활의 놀라운 소망으로 자기 어머니를 위로하였다. 도착한지 꼭 2주만에 수용소 소장에 의하여 사형장으로 인도되어 간 ‘요나탄’의 마지막 말은 “여호와를 위하여 그리고 ‘기드온’을 위하여”라는 것이었다. (‘기드온’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영한 여호와의 충실한 종의 한 사람이었다.)—사사 7:18.

‘빌헬름스하벤’의 ‘엘리제 하름스’는 자기 남편이 선고를 받은 후에 변절하라는 요구를 일곱번이나 받았으며, 그가 거부하자, 아내인 자기에게 남편의 생각을 바꾸도록 최선을 다하여 설득하겠다면 남편을 면회하도록 허락해 주겠다는 제의를 받았었다고 술회한다. 그러나 그 자매는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남편이 참수형을 당하였을 때, 오히려 남편이 여호와께 충성을 끝까지 유지해 온 것과 그가 더는 불충실하게 하려는 압력하에 있지 않게 됨을 기뻐하였다. 한편 그 형제의 아버지인 ‘마르틴 하름스’가 세번 째로 체포되어 ‘작센하우젠’에 수감되었다. 그의 아들이 1940년 11월 9일에 처형당하기 직전에 아버지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편지는 참으로 감동적이다.

“경애하옵는 아버님 전”

“소자가 아버님을 마지막으로 뵈온지 만 2년이 되는 날인 12월 3일까지는 아직도 3주가 남았군요. 아버님께서는 형무소 지하실에서 일하고 계셨고 저는 형무소 운동장에서 걸어나오고 있었을 때, 아버님께서 보여 주신 자애로운 미소가 아직도 제 눈에 선합니다. 그 이른 아침에는 우리가 미처 저의 사랑하는 ‘리스헨’(그의 아내)과 제가 그 날 오후에 석방되리라는 것도 저의 사랑하는 아버님께서 비통하게도 동일한 날에 ‘베흐타’로 그리고 후에 다시 ‘작센하우젠’으로 이송되시리라는 것도 상상치 못했었지요. 제가 아버님과 함께 그 ‘올덴부르크’ 형무소 면회실에 있었던 그 마지막 순간의 일들, 제가 아버님을 끌어 안고 제 힘이 자라는 한 어머님과 아버님을 돌봐드리겠다고 약속드린 일 등은 제 기억 속에 아직도 지울 수 없는 깊은 자국을 남겼읍니다. 제가 드린 마지막 말씀은 “아버님 충성을 유지하세요!”란 것이었지요. ‘자유 속에서의 노예 생활’의 21개월이 지나는 동안 저는 약속을 지켰읍니다. 9월 3일에 제가 구속되었을 때, 저는 그 책임을 아버님의 다른 자녀들에게 이양하였읍니다. 그 동안 저는 아버님을 자랑스럽게 생각해 왔으며 또한 주께 충성하는 가운데 아버님께서 자신의 짐을 져 오신 그 행로에 대하여 경탄을 금치 못하였읍니다. 그리고, 이제 저도 죽기까지, 그렇습니다, 죽음을 만날 때까지 뿐만 아니라, 죽음을 당할 때까지 주께 대한 저의 충성을 입증할 기회를 받았읍니다. 저는 이미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 밤낮으로 매어 있읍니다.—자국들(편지지 위에 난 것들)은 수갑 때문에 생긴 것들입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 온전히 승리를 획득하지는 못하였읍니다. 충성을 유지하는 것은 여호와의 증인에게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는 아직도 저의 지적 생명을 구하므로 참된 생명을 상실할 수 있는 기회가 놓여 있읍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에게는 심지어는 교수대를 직면해서까지도 자기의 언약을 깨뜨릴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저는 아직도 싸우는 중에 있으며,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나를 위하여 하나님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내게 주실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도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에는 싸워서 쟁취해야 할 승리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읍니다. 그 싸움은 물론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주께서 제게 죽음을 직면해서도 지금까지 서 있을 수 있는 필요한 힘 뿐만 아니라 저의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기쁨을 주신 것에 대하여 전심으로 주께 감사드립니다.

“아버님, 아버님께서도 아직 갇혀있는 몸이시며, 이 편지가 아버님께 도달할 것인지 조차도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만일 아버님께서 자유로와지신다면 지금의 아버님처럼 계속 충실함을 유지하십시오. 아버님께서도 아시는 바와 같이 누구든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왕국에 합당치 않기 때문입니다. ···

“아버님께서 다시 집에 돌아가시게 되면, 저의 사랑하는 ‘리스헨’을 각별히 돌보아 주십시오. 자기의 사랑하는 자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그것은 그에게 특히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저는 아버님께서 그렇게 하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미리 아버님께 감사드립니다. 아버님, 영으로 아버님께 말씀드리거니와 제가 충성을 지키려고 노력한 것처럼, 충성을 유지하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또 다시 서로 만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저는 아버님을 생각할 것입니다.

“소자 ‘요한네스’ 올림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밖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격려의 말

사형수들만이 밖에 있는 형제들로부터 격려를 받은 것은 아니다. 밖에서 자유를 누리고 있는 형제들은 종종 감옥에 있는 형제들로부터 더 큰 격려를 받곤 하였다. ‘켐프텐’의 ‘아우슈네르’ 자매는 이 사실을 확증한다. 그 자매는 1941년 2월 28일에 자기의 21세된 아들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는데, 그것은 19세가 되는 자기 동생에게 쓴 이러한 간단한 글이 들어 있었다. “나의 사랑하는 동생. 지난 편지에서 나는 너에게 한 책을 소개한 일이 있는데, 네가 내 말에 유의하였기를 바란다. 이것은 틀림없이 네게 유익할 것이기 때문이다.” 2년 반이 지난 후 ‘아우슈네르’ 자매는 이 막내 아들로부터 한 통의 작별의 편지를 받았다. 그는 자기 형이 편지한 것에 유의하였고 죽을 때까지 충실하게 그의 뒤를 따랐던 것이다.

동부 ‘프로이센’, ‘스툼’ 출신인 두 형제 ‘에른스트’와 ‘한스 레발트’도 비슷한 방법으로 서로 격려하였다. ‘에른스트’는 군사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후, 사형수 감방에서 ‘쉬툼’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자기 동생 ‘한스’에게 이러한 편지를 보냈다. “사랑하는 ‘한스’, 만일 너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기도의 힘을 기억해라. 하나님의 평화가 내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나는 아무런 두려움도 없다.” 얼마 후 그의 동생도 같은 입장에 있게 되었으며, 비록 그 당시 그의 나이가 19세에 불과했지만, 그는 사형을 당하였다.

배우자에게 충성의 시험이 됨

아주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사랑하는 배우자들에게 성실을 흔들리지 않도록 격려한 것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감동적이다. ‘프랑크푸르트’/‘오데르’ 출신인 ‘회네’ 자매는 자기 남편이 징집 영장을 받았을 때 철도역까지 그를 배웅하고는 다시 만나지 못하였다. 그 자매의 마지막 말은 “충성을 지키세요”라는 것이었는데—‘회네’ 형제는 죽기까지 그 말을 잊지 않았다.

많은 경우의 형제들은 신혼 생활 중이었으며, 여호와와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그들의 사랑이 그렇게 강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틀림없이 사랑하는 자들과의 의사 전달이라는 유대의 단절을 견디지 못하였을 것이다. 지금까지 32년 이상을 미망인으로 생활해 온 두 자매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베풀어 주신 도움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소란했던 시대를 회고하고 있다. ‘쉬파이에르’ 근처 ‘노일로스하임’ 출신인 ‘뷜레르’와 ‘발르라이히’ 자매는 금지령이 처음으로 내려질 무렵에 결혼하였으며, 그때 진리를 배웠다. 1940년에 두 자매의 남편들은 징집 통고를 받았으며 병역을 거부하여 구속되었다.

‘발르라이히’ 자매는 ‘만하임’ 지방 징병소를 찾아갔는데, 그곳에서 두 형제가 군사 재판을 받도록 ‘비스바덴’으로 송치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발르라이히’ 자매는 남편의 생각을 바꾸도록 설득하라는 조건으로 남편의 면회 허락을 받았다. ‘뷜레르’ 자매도 동일한 조건으로 남편의 면회를 허락 받았다. 두 자매는 즉시 ‘비스바덴’으로 갔다. ‘뷜레르’ 자매의 보고는 이러하다.

“나는 그 재결합이 얼마나 슬픈 것이었는지 거의 설명할 수도 없다. 그는(남편) “당신이 왜 왔오?” 하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영향을 주려고 노력하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대답하였다. 그는 나를 위로하며, 성서적인 충고를 주고 소망이 없는 나머지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말고 우리의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전적으로 신뢰하라고 말하였다. ··· 형무소까지 우리를 동반한 한 젊은 법원 서기가 재판이 있을 화요일까지 ‘비스바덴’에 머물라고 조언하였다. 만일 우리가 머무른다면 틀림없이 방청이 허락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화요일까지 머물렀다. 우리는 밖에서 기다리다가 우리의 남편들이 마치 전문적 범죄자들인양, 장전한 무기를 가진 두 명의 군인에게 끌리어 거리를 지나가는 것을 목격하였다. 참으로 사람들과 천사들의 구경거리였다. ‘발라이히’ 자매와 나는 그 뒤를 따라갔다. 우리는 법정에 참석할 수 있었다. 재판은 거의 한 시간 가량 계속되었으며, 두 명의 죄없고 용감한 사람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그 후 우리들은 일 층에 있는 한 방에서 약 두 시간 가량 그들과 함께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법원을 떠나는 우리들은 마치 길 잃은 두 마리의 양처럼 ‘비스바덴’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그 두 젊은 자매는 남편들이 1940년 6월 25일에 “여호와 만세!”를 입술로 외치며 총살형을 당하였다는 통지를 받았다.

부모들과 자녀들이 여호와를 첫째로 두다

법원 당국이나, 지방 검사들 및 변호인들의 관심 뿐만 아니라, 대중의 관심의 초점이 되었던 한 사건은 ‘파데르보른’ 출신인 두 ‘쿠세로브’ 형제들과 관련된 것이었다. 집에서 받은 여호와의 길에 대한 훌륭한 교훈에 기초를 굳게 한 그들은 두려움없이 기꺼이 자기들의 생명을 포기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어머니도 그들의 죽음을 이웃에 사는 다른 사람들에게 부활의 소망에 관하여 더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로 이용하였다. 세째 형제인 ‘카알’은 3개월 후에 체포되었으며, 한 집단 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석방된 지 4주 후에 사망하였다. 이 가족 성원들은 모두 13명이었는데, 12명이 투옥되어 도합 65년의 형을 선고받았으며, 그 중 46년을 복역하였다.

부모들 뿐 아니라, 자녀들도 왕국의 이익을 자신의 이익보다 앞에 둔 ‘쿠세로브’ 가족의 경우와 비슷한 것은 ‘쉬데르브라뤂’의 ‘아펠’ 가족이다. 그들은 그곳에서 한 작은 인쇄소를 경영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발생하였는지 ‘아펠’ 자매의 말을 들어 보자.

“광범위한 검거 선풍이 독일 전역에 휘몰아친 1937년에 남편과 나는 10월 15일 저녁 늦게 네 자녀를 남겨둔채 연행되어 갔다. 여덟사람(비밀 경찰과 경찰관들)이 집에 들어와서 지하실로부터 다락방에 이르기까지 집 전체를 수색하였다. 그 다음에 우리를 연행했던 것이다. ··· 우리가 언도를 받은 후 남편은 ‘노이뮌스테르’로 그리고 나는 ‘키일’의 여자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 1938년 일련의 특사로 우리는 석방되었다. ···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우리는 무엇이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는지를 알았다. 남편은 중립을 지킬 결심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박해에 관한 성서의 진술에 그들의 주의를 환기시켜 주었다.

“가능한 한, 우리들은 자녀들을 위한 충분한 의복을 예비해 두었으며 그래서 그들이 의복 문제에서는 어려움을 당하지 않도록 마련하였다. 남편은 징병관에게 참전할 수 없는 성서적인 이유를 설명한 후 자기의 개인적인 일들을 정리하였다. 우리는 매일 우리의 모든 문제를 기도로써 여호와께 고하였다. 1941년 3월 9일, 아침 8시에 초인종이 울리면서 두 명의 군인이 남편을 연행하러 왔다. 그들은 밖에서 기다리면서 남편에게 우리와 작별 인사를 하도록 15분의 여유를 주었다. 아들 ‘발테르’는 이미 학교에 가고 없었다. 다른 세 자녀들과 우리의 인쇄소에서 일하던 ‘헬레네 그린’ 자매를 즉시 ‘아파트’로 오라고 불렀다. 남편의 마지막 요청은 우리에게 ‘충실한 자, 충성스러운 자, 두려움에 영혼을 빼앗기지 않는다’는 노래를 부르자는 것이었다. 목이 매여 소리가 나오지 않았지만, 우리는 노래를 불렀다. 기도를 마친 후, 군인들이 들어와서 남편을 데리고 갔다. 그것이 자녀들이 아버지를 본 마지막 기회였다. 그는 ‘뤼베크’로 연행되어 갔으며, 그곳에서 한 고위 관리는 그에게 군복을 입도록 종용하려고 장시간 설복력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여호와의 변할 수 없는 법은 남편의 심장에 확고히 뿌리밖고 있었기 때문에 돌아선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

“1941년 7월 1일 이른 아침이었다. 경찰관들이 우리의 차를 공산주의자의 소유물로 압수한다는 것과 인쇄소를 폐쇄한다는 한 통의 편지를 내게 보여주었다. 그 다음에 그는 내게 또 다른 편지를 넘겨 주었는데, 그 내용은 ‘1941년 7월 3일 오전에 자녀들을 데리고 시청으로 출두할 것, 의복과 신발을 지참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큰 타격이었다.

“그리하여 7월 3일에 두곳의 소년의 집에서 관리인들이 우리의 자녀들을 데릴러 왔다. 각각 15세와 10세인 두 딸, ‘크리스타’와 ‘발트라우트’의 책임을 맡은 여인은 내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수주일 전부터 내가 댁의 자녀들을 키우게 된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리고 내가 잘 조직된 가정의 자녀들을 데려와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그 때부터 통 밤잠을 자지 못했읍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군요.’

“어떤 이웃 사람들은 억제하지 못하고 이러한 처사에 대하여 부당하다는 의사를 나타냈고, 관계 당국은 즉시 회람을 돌려서 ‘누구든 ‘아펠’ 건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사람은 선동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동 조치의 시행에 대비하여 자녀들을 데려가는 문제를 감독하도록 3명의 경찰관이 파견되었다. ··· 자연히 관리들은 남편에게도 그의 사업과 자녀들과 관련하여 취해진 조치를 통고하였다. 그들은 이것이 그를 약하게 만들 것으로 희망하였던 것이다. 그는 부정직하며, 곤경에 있는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않는 파렴치한 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남편은 나에게 사랑이 넘치는 편지를 써서 자기가 그 다음 날 아침 일찌기 일어나서 무릎을 꿇고 가족을 보호해달라고 여호와께 기도드린 일에 관하여 말하여 주었다. ···

“그들이 자녀들을 데리고 간 바로 그날 나는 ‘베를린-샤를로텐부르크’ 군사 재판소로부터 출두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나는 검사 앞으로 인도되어, 남편이 군복을 입도록 영향을 주도록 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성서적인 이유를 그에게 말하자 그는 화를 내며 “그렇다면 그의 목을 쳐야겠오!” 하고 소리쳤다. 그래도 나는 남편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초인종을 눌러 한 군인을 불러서 나를 일층으로 데리고 내려가게 하였다. 그곳에는 차가운 눈초리와 비난으로 나를 맞는 서너명의 장교가 있었다. 내가 떠날 때 그들 중 한 사람이 나의 뒤를 따라와서, 내 손을 잡고 ‘‘아펠’ 부인, 언제나 지금처럼 굳건함을 유지하십시오. 부인은 올바른 일을 하고 있읍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가 남편과 이야기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베를린’에 있는 동안 ‘나치스’는 이미 우리의 사업체를 매도해 버렸다. 나는 매매 계약서에 서명하도록 강요받았다. 그들은 내가 서명하지 않는다면 집단 수용소에 수용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내가 서너 번 ‘베를린’으로 남편을 방문한 후에, 그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를 ‘변호’한 변호사는 ‘당신의 남편은 석방될 수 있는 황금같은 기회를 받았었으나 그는 그 기회를 이용하기를 거부하였다’고 말하였다. 그 말에 대하여 남편은 ‘나는 여호와와 그의 왕국을 위하여 결정을 내렸으며, 그것으로 문제는 끝난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1941년 10월 11일, 내 남편은 사형을 당하였다. 처형되기 수시간 전에 허락을 받아 쓴 그의 마지막 편지에서 남편은 이렇게 말하였다. ‘나의 사랑하는 ‘마리아’, 그리고 나의 네 자녀, ‘크리스티나’, ‘발테르’, ‘발트라우드’와 ‘볼프강’, 당신과 자녀들이 이 편지를 받을 때는 이미 모든 일이 끝났을 것이며, 나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승리를 쟁취하였을 것이요. 그리고 승리자가 되는 것이 나의 소망이요. 충심으로 나는 당신과 자녀들이 하나님의 왕국으로 축복된 발걸음을 들여놓기를 바라오. 충성을 유지하시오! 내일 아침 나와 같은 길을 갈 세명의 젊은 형제들이 여기 내 옆에 있소. 그들의 눈은 빛나고 있오!’

“얼마 후 ‘쉬데르브라룹’의 우리 집을 비우라는 강요를 받았다. 가구들은 다섯 군데로 나누어 보관해 두었다. 나는 혼자서 한푼도 없이 어머님의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내 아들 ‘발테르’는 소년의 집 당국에 의하여 퇴교 당하여 ‘함부르크’로 보내졌는데, 그곳에서 그는 인쇄술 견습 교육을 받았다. 1944년 그는 불과 17세였는데도 징집을 받았다. 이 일이 있기 전에 그는 참으로 놀라운 방법으로 「하나님의 거문고」 책을 소유하게 되었으며, ‘함부르크’에 폭격이 계속되는 밤을 이용하여 자기 다락방에서 이 책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그는 여호와께 헌신하기를 원하기에 이르렀다.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은 후 그는 1943/1944년 정초에 ‘말렌테’로 갈 수 있었는데, 그곳의 한 어두컴컴한 세탁소에서 한 형제가 비밀히 그에게 침례를 주었다. ···

“그는 은밀하게 나와 연락을 취할 수 있었으며, 나는 그가 올 때까지 서너 시간을 ‘함부르크’의 길거리에서 기다렸다. 나는 어떠한 환경 하에서도 자녀들을 만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격려가 되도록 나는 우리의 운명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작센하우젠’에 있는 형제들이 보낸 편지를 받았음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에른스트 셀리게르’ 형제는 밤에 수용소가 조용해진 다음 여러 민족 출신인 수백명의 형제들이 함께 여호와께 무릅을 꿇고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에 관하여 언급하곤 하였다고 편지하였던 것이다. 그 뒤 내 아들은 강제로 동부 ‘프로이센’으로 끌려가 군 부대에 배속되었다. 살을 에는듯한 추위 속에서 그들은 그의 의복을 벗기고 그의 앞에 군복을 놓아두었지만, 그는 그것을 입기를 거부하였다. 이틀 후에야 그는 따뜻한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확고함을 유지하였다.

“‘함부르크’에서 우리는 작별을 고하였었다. 그는 나에게 자기도 아버지가 가신 길을 따를 것이라고 말하였다. 약 7개월이 지난 후, 그의 나이를 실제보다 더 많은 것처럼 서류를 위조한 후, 재판을 받을 기회도 없이 처형당하였다. 법적으로 그는 아직도 적령 미달이었고 미성년이었다.

“‘쉬데르브라룹’의 경찰관 한 사람이 나를 찾아와서 나에게 동부 ‘프로이센’에서 보내온 경찰 보고를 읽어주었다. 나 자신은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다. 내 아들이 아주 어렸고 전쟁 끝이 매우 가까왔으므로 정말로 그가 자기 아버지가 간 길을 따라가야 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었지만, 벅찬 마음의 고통을 누르고 여호와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나는 이제 ‘여호와여, 그가 당신을 위하여 전장에서 쓰러졌음을 감사하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후 1945년에 격변이 닥쳤다. 기쁨 속에 나는 남은 세 자녀들을 내 품속으로 맞아들였다. 관계자들은 가장 어린 두 아이들을 소년의 집에서 데려내다가 지난 3년 동안 어느 노동 사무소 소장과 함께 생활하게 하였는데, 그의 집에서 그들은 국가사회주의 양육을 받게 되었다. 나는 14개월마다 한번씩 그들을 방문하여 서너 시간씩 그들과 이야기할 허락을 받았지만 언제나 다른 사람이 배석해 있곤 하였다. 그러나, 내 두 딸은 한때 나에게 조심스럽게 성서 한권을 감추어 놓고 있다고 귓속 말을 해 주었다. 그들끼리만 있을 때, 그들 중 한 아이는 누가 오는지 문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다른 아이는 몇 귀절을 읽곤 하였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나의 기쁨이 어떠하였겠는가?

“이제 1945년에 충실한 형제들이 감옥에서 돌아오기 시작하였다. ‘플렌스부르크’에서는 주로 동부로부터 오는 많은 형제 자매를 태우고 한 척의 배가 도착하였다. 이 때에 집중적인 활동의 한 기간이 시작되었다. 내가 현재 남편인 ‘요셉 샤르네르’ 형제를 알게 된 것은 그곳에서였다. 그도 9년간의 자유를 강탈당하였던 것이다. 참으로 우리 두 사람은 어려운 시대를 통과하였으며, 그리고 우리 두 사람은 우리의 여생을 있는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는 데 바치려는 동일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

사형수 감방 안에서도 제자를 삼음

심지어 사형수 감방 안에서도 제자를 삼을 수 있었다는 말은 믿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마쏘르스’ 형제는 1943년 9월 3일자로 자기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러한 경험을 이렇게 말하였다.

“1928/30/32년 중에 나는 ‘프라하’에서 ‘파이오니아’ 봉사를 했었다오. 강연도 하였고 그 도시 전역에 걸쳐서 서적 운동을 하기도 했었오. 그 무렵 나는 정부에 소속된 ‘안톤 링케르’란 이름의 한 정치 강연원을 만났었오. 나는 그에게 장시간의 이야기를 했었오. 그는 성서와 몇 권의 서책을 받았지만 자기는 가족을 돌보고 생계를 이어나가야 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을 연구할 시간이 없다고 말했었다오. 그러나 그는 자기 친척들이 비록 교회는 다니지 않지만 모두 매우 종교성이 강하다고 말했었오.

“그 후 1940/41년 경이었오. 어느 날 상례대로 새로운 짝이 내 감방으로 배치되었다오. 그러나 그는 매우 기가 죽어 있었는데, 누구든 처음에는 다 그러하다오. 자기 뒤에서 감방 문이 철거덩하고 닫기자 그제서야 그는 불현듯이 자기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깨달은듯 했오. 그는 ‘나는 ‘프라하’ 출신으로 이름은 ‘안톤 링케르’라고 합니다’라고 자기 소개를 하였오. 나는 그를 즉시 알아보고, ‘‘안톤’, 그렇소, ‘안톤’, 당신은 나를 모르시겠읍니까?’ 하고 물었지요. ‘글쎄요, 낯이 익기는 합니다만 ···’ 그는 곧 내가 1930/32년경에 자기 집에서 성서와 몇 권의 서책을 전한 일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냈지요. ‘무엇이라구요! 신앙 때문에 여기 수감되었다구요? 이해할 수가 없군요. 교역자들 가운데 당신처럼 하는 사람은 아무도 보지 못하였읍니다. 도대체 당신이 믿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고 ‘안톤’은 물었오. 이제 나는 그에게 진리를 알려 주게 되었지요.

“‘그런데 왜 교직자들은 이러한 것들을 우리에게 말해 주지 않지요?’ 하고 그는 감탄하였오. 그리고 ‘이것이야 말로 진리입니다. 이제 나는 이곳에 오게 된 이유를 알겠읍니다. 사실인즉 내가 이 감방에 들어 오기 전에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로 보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었읍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자살할 생각이었지요. ···’ 하고 그는 말하였오.

“주가 흐르고 달이 지나갔오. 얼마 후 ‘안톤’은 내게 이렇게 말하였오. ‘내가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내 아내와 자녀들도 진리를 알게 도와 주시길 바랍니다. 그래야만 나는 평화롭게 죽을 수 있겠읍니다.’ ··· 어느 날 그는 자기 아내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는 데, 그 내용은 이러하였오.

“‘··· 만일 당신이 수년전에 그 독일인에게서 사신 성서와 책들을 읽어 보실 수만 있다면 우리는 얼마나 기쁠지 모르겠어요. 모든 것은 그 책들의 내용대로 이루어졌읍니다. 이것이 진리인데도 우리는 이것을 위하여 시간을 내지 않았었읍니다.’”

[153면 삽화]

벌거벗은 신입자들로 차있는 ‘마우타우젠’ 집단수용소 입구 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