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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제3부)

독일 (제3부)

독일 (제3부)

집단 수용소 내의 영적 양식

형제들, 특히 집단 수용소 내에 있는 사람들이 “격리”되어 있던 그 동안에 그들은 성서나 다른 출판물을 구할 길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운동장에서 여러 시간씩 기립해 있어야 할 때나 자기들의 막사에서 약간의 평온함을 즐기는 저녁 시간이 되면, 중요한 「파수대」 기사의 내용을 되새기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이곤 하였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성서 한 권을 획득하게 되면 그들의 기쁨은 충천하였다.

여호와께서는 때때로 재미있는 방법을 통하여 자기 종들의 손에 성서를 넣어 주셨다. ‘렌헨’(‘슈발츠발트’) 출신인 ‘프란츠 비르크’는 ‘부헨발트’에서 어느 날 세상 재소자 한 사람이 자기에게 성서를 갖기를 원하느냐고 물어온 일을 술회한다. 그 재소자는 자기가 일하던 제지 공장에서 성서를 발견했던 것이다. 물론 ‘비르크’ 형제는 감지덕지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프랑케’ 형제도 이러한 이야기를 하였다. 1943년에, 시국의 압력 때문에 부득이 친위대에 입대한 나이가 지긋한 한 친위대 대원이 자기가 비번인 날에 여러 명의 교직자들을 찾아가서 성서를 한 권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들 모두는 이제는 성서를 가지고 있는 것이 없노라고 유감의 뜻을 표하였다. 마침내 그날 저녁 그는 한 교직자를 만났는 데 그 교직자는 자기에게 어떤 특별한 이유로 보관해 두었던 작은 ‘루터’판 성서가 한 권 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는 친위대 대원이 성서에 관심을 나타냈다는 사실을 기쁘게 여겨 그 성서를 그에게 주겠다고 말하였다. 다음 날 아침 이 반백의 친위대 대원은 그 성서를 ‘프랑케’ 형제에게 주었는데, 그는 그것을 자기가 지키고 있는 한 재소자에게 선사할 수 있다는 사실에 분명한 기쁨을 나타내면서 그렇게 했던 것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새로운 「파수대」 기사를 집단 수용소 안으로 몰래 들여오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비르켄펠트’ 집단 수용소에서는 그러한 일이 이러한 방법으로 수행되었다. 재소자들 가운데 건축 지식이 있기 때문에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하여 호의적인 한 민간인과 함께 일하게 된 형제가 있었다. 이 호의적인 사람을 통하여 그 형제는 수용소 밖에 있는 형제들과 연락을 취하게 되었으며, 그 민간인은 곧 그에게 최신호 「파수대」들을 공급해 주기에 이르렀다.

‘노이엔감메’ 수용소에 있던 우리 형제들도 비슷한 기회들이 있었다. 그곳에 있는 약 70명의 형제들 대부분이 ‘함부르크’에서 공습이 있은 후 청소 작업에 동원되었었다. 그곳 ‘함부르크’에서 그들은 성서를 구할 수 있었는데, 한번은 불과 수분 사이에 3권을 발견하였다. 이것을 직접 경험했던 ‘빌리 카르게르’는 이렇게 진술하였다. “‘되벨른’에서 한 자매가 우리에게 전달해 준 가외의 영적 양식에 관해서 말하고자 한다. 이것은 결국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오빠인 ‘한스 얘게르’는 ‘함부르크’ 근처의 ‘베르게도르프’에서 우리와 같은 노동대에 속해 있었으며, ‘글룬츠’ 제철 공장으로 차출되어 일하고 있었다. 고된 노동과 엄격한 감시가 우리의 운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얘게르’ 형제는 편지를 밖으로 밀송하여 자기 누이에게 점심 시간에 자기가 있게 되는 곳이 어디인지를 통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의 누이는 ‘함부르크’행 기차를 타고 우리가 일하고 있는 장소로 주의깊이 ‘길을 더듬어’ 찾아 왔다. 그는 요청받은 잡지들을 우리의 손에 건네주는 데 성공하였으며, 그리하여 친위대의 경비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감독으로 귀중한 잡지들이 발각되는 일 없이 수용소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모든 형제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하였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여러 권의 성서가 수용소 안으로 들어 오게 되었다. 한 형제는 ‘단찌히’에 있는 자기 아내에게 약간의 “‘엘베르펠트’ 새앙 빵”이 먹고 싶다고 편지하였는데, 그 다음 음식물 꾸러미(그 당시 이 수용소의 형제들은 이러한 것을 받을 수 있었다)와 함께 그는 새앙 빵속에 주의깊이 감추어진 ‘엘베르펠트’ 성서를 받았다. 어떤 사람들은 화장터에서 일하는 재소자들과 접촉하였다. 이 사람들은 그곳에서 많은 책들과 잡지들이 불태워지고 있다고 말하였으며, 그래서 형제들은 자기들이 받는 음식물의 얼마와 교환하는 방식으로 성서들과 잡지를 받기로 비밀히 마련하였다.

‘작센하우젠’에서 얼마의 성서가 형제들이 아직 “격리 구역”에 있는 동안에도 그들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격리 구역은 이 경우에 모종의 보호처 구실을 하였는데, 이는 한 형제가 격리 구역으로 들어가는 문을 경비하는 임명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 열쇠도 가지고 있었으며, 그러므로, 문을 채우고 여는 일을 하였기 때문이다. 56명의 형제들을 수용하는 한 방에는 7개의 커다란 탁자가 있었다. 얼마 동안 다른 형제들이 아침 식사를 하면, 그동안 한 형제가 성귀를 다루는 15분간의 해설을 하곤 하였다. 그 다음 이것은 탁자들 사이에서 그리고 거기에 앉아 있는 형제들 사이에서 윤번하였다. 이러한 해설은 후에 형제들이 강제로 운동장에서 여러 시간씩 서 있게 될 때 대화의 주제가 되곤 하였다.

혹한의 1939/1940년 겨울, 증인들은 기도로써 여호와께 이 서적 문제를 탄원하였는데, 보라, 기적이 일어났다! 여호와께서는 보호의 손길을 한 형제 위에 내리셔서 그로 하여금 3부의 「파수대」를 자기의 나무 다리 속에 넣어서 “격리 구역” 안으로 들여 올 수 있게 하셨으며, 이것은 주의 깊은 조사에도 불구하고 가능하였다. 비록 형제들은 자기들의 침대 밑으로 기어 들어가 다른 사람들이 좌우에 서서 망을 보는 동안 손전등의 불빛 속에서 그것들을 읽어야 하였지만, 그것은 여호와의 놀라운 인도의 한 증거였다. 훌륭한 목자로서 그분은 자기 백성들을 버리시지 않는다.

형제들이 “격리 구역”으로부터 석방된 후인 1941/1942년 겨울, 다니엘 11장과 12장을 다루는 「파수대」 7부, 「미가서」를 토의하는 첫 호, 「“그리스도교 박멸 십자군 운동”」(‘Kreuzzug gegen das Christentum’)이라는 제목의 책 한 권 그리고 「통보」(지금의 「왕국 봉사」) 한부가 모두 한꺼번에 도착하였다. 이것은 참으로 하늘로부터의 선물이 아닐 수 없었다. 다른 나라에 있는 형제들과 일치하게, 그들은 이제 “남방 왕”과 “북방 왕”에 대한 명백한 이해를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격리 구역” 밖에 있는 재소자들이 일요일 오후에는 자유 시간을 가졌었고 정치부 막사 대장은 일요일 오후에는 다른 막사로 자기 친구들을 만나러 가곤 하였기 때문에 형제들은 수개월 동안 매 일요일 「파수대」 연구를 사회할 수 있었다. 평균 220 내지 250명의 형제들이 이 연구에 참석하는 동안 60 내지 70명은 수용소 입구로 이르는 모든 길의 망을 보았으며, 언제나 위험이 발생하면 그들은 특정한 신호를 보내곤 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의 연구 도중에 친위대 대원이 나타나서 그들을 놀라게 하는 일은 없었다. 1942년에 행하여졌던 그러한 연구는 참석했던 형제들의 기억 속에 잊을 수 없는 경험으로 지금도 남아 있다. 형제들은 다니엘 11장과 12장의 예언에 관한 놀라운 설명에 큰 감명을 받았으며, 그래서 끝날 때에는, 기쁜 행진조의 박자로, 왕국 노래 가사를 붙인 민요들을 불렀고 그렇게 하여 막사에서 몇 ‘미터’ 떨어져 있는 감시탑 위에서 근무중인 경비병에게 의심의 이유를 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아름다운 노래들을 즐기곤 하였다. 상상해 보라. 비록 감금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자유로운, 여호와의 찬양의 노래를 전심으로 합창하는 250명의 목소리를. 얼마나 놀라운 장면인가! 하늘의 천사들도 함께 노래하였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집단 수용소에 있는 자들에 대한 압력의 경감

비록 ‘나치’ 체제가 완전히 붕괴하기까지는 여러 사형장에서 여호와의 충성스러운 증인들의 피가 계속 흐른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재삼재사 여호와의 증인들은 단지 화장장의 굴뚝을 통해서만 집단 수용소를 떠나게 될 것이라고 악담을 하던 자들의 무기는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전쟁이 제기한 문제도 있었다. 그래서 1942/1943년부터는 여호와의 증인들을 비교적 평온한 가운데 방임해 둔 기간이 있었다.

이제 전면 전쟁으로 돌입한 그 대전의 양상은 전체 여력을 다 기동화하지 않으면 안될 단계로 변모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1942년에 그들은 경제적으로 생산성이 있는 여러 계획에 재소자들을 가능한 한 광범위하게 동원하기 시작하였다. 이점과 관련하여 친위대 간부인 ‘포올’이 자기의 우두머리인 ‘히믈러’에게 보낸 “집단 수용소들의 실태”에 관한 다음과 같은 설명은 흥미있다.

“전쟁은 집단 수용소들의 구조상에 현저한 변화를 초래하였으며, 기본적으로 재소자들의 활용과 관련하여 수용자들의 기능을 변모시켰읍니다.

“전적으로 안보 내지는 교육적 혹은 예방적인 이유로 재소자들을 감금하는 것은 더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대량 살륙은 언급되지도 않았다] 오히려 경제적인 측면에 주안점이 가하여지고 있읍니다. 일차적으로, 전쟁과 관련된 작업(군비 생산의 증강) 그리고, 이차적으로는 평화와 관련된 업무를 위하여 모든 재소자들을 기동화하는 것이 중요한 요인으로 점차 부각되고 있읍니다.

“현재 취하여지고 있는 필수적인 제반 조치들은 집단 수용소들을 과거의 일방적인 정치적 계획에서 경제적인 필요에 부응하는 조직으로 서서히 변화시킬 것을 요구하는 이러한 인식의 결과입니다.”

물론 이러한 변화에 따라 재소자들을 작업에 더욱 활용하려면 그들을 더 잘 먹여야 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이것은 형제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또한 관리들도, 소수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형제들을 군비 공장에 배치하려 하지 않고, 그들을 여러 작업장에서 그들의 직업적 재능에 일치하게 사용하려고 할 만큼 지각을 나타냈다.

한편,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셨다. 그분은 인간들의 마음을—심지어 원수들의 마음까지도—마치 물의 흐름처럼 인도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뚜렷한 예가 ‘히믈러’이다. 수년 동안 그는 오로지 자기만이 여호와의 충실한 종들의 생명 문제를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었지만, 그는 갑자기 “성경 연구생들”에 대한 자기의 생각을 바꾸기 시작하였다. ‘케르스텐’이라는 ‘핀란드’ 태생의 의사인, 그의 개인 주치의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마사지’사인 ‘케르스텐’은 항상 건강이 좋지 많던 ‘히믈러’에게 강한 영향력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그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잔인한 박해를 받고 있다는 말을 듣고 어느 날 ‘히믈러’에게 ‘베를린’ 북방 약 70‘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하르츠발트’에 있는 자기 소유지에서 일할 여인들 몇 사람을 자기에게 맡겨 달라고 요청하였다. 잠시 주저한 후에 ‘히믈러’는 동의하였으며, 후에 그는 ‘케르스텐’의 부가적 요청을 받아들여 한 자매로 하여금 ‘스웨덴’에 있는 ‘케르스텐’의 두번 째 집에서 일할 수 있도록 집단 수용소에서 석방시켰다. ‘케르스텐’이 집단 수용소 내의 참상과 수년 동안 특히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자행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에 관하여 처음으로 듣게 된 것은 이 자매들을 통해서였다. 그는 자기가 시술하는 ‘마사지’가 번번히 이 악한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어서 그로 하여금 그의 살인적인 업무를 수행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크게 낙심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이들 모든 재소자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다소나마 경감시키는데 자기의 영향력을 사용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므로 수만명의 재소자들이, 특히 전쟁 말기에, 학살을 당하지 않은 것은 그의 영향력의 덕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있어서 그의 영향력은 매우 유익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히믈러’가 자기의 가장 가까운 수뇌 친위대 간부인 ‘포올’과 ‘뮐러’에게 보낸 편지에서 볼 수 있다. “기밀”이라는 도장이 찍힌 이 편지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동봉한 것은 본인의 주치의의 농장에서 일하는 열 명의 성경 연구생들에 관한 보고문이요. 본인은 성실한 성경 연구생들의 문제를 모든 각도에서 연구할 기회를 가졌었오. ‘케르스텐’ 부인은 매우 훌륭한 제안을 하였소. 그 부인은 말하기를 자기는 이들 열 명의 여인들처럼 선하며, 자진적이며, 충실하며, 순종적인 사람들을 부려본 적이 없다는 것이오. 이 사람들은 많은 것을 사랑에서 우러나서 한다고 하오. ··· 그 여인들 중의 한 사람이 한때 어떤 손님으로부터 5‘라이히스 마르크’의 ‘팁’을 받은 일이 있었는데 그는 그 가정에 욕을 돌리기를 원치 않았으므로 그 돈을 받았지만, 그것을 ‘케르스텐’ 부인에게 주더라는 것이요. 수용소에서는 돈을 소지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요. 그 여인들은 자기들에게 요구된 어떤 일이든지 자진적으로 하며, 저녁에는 뜨게질을 하며, 일요일에도 그들은 다른 일로써 쉴 틈이 없다고 하오. 여름에는 그들은, 비록 하루에 열 시간, 열한 시간, 열두 시간씩 일할 것이 요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기회를 놓치지 않고 두 시간씩 일찌기 일어나서 바구니에 버섯을 가득히 따오곤 하였다는 것이요. 이러한 사실들은 성경 연구생들에 대한 본인의 개념을 완성시켜 주었오. 그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신념이 강하여,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진적인 사람들이요. 만일 우리가 그들의 신념을 독일을 위하여 일하는데 사용하거나 우리 국민에게 그러한 신념을 넣어줄 수 있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더욱 강하여질 것이요. 물론, 그들이 전쟁을 거부하는 이상, 그들의 가르침은 해로운 것이며, 따라서 우리가 독일에 큰 해를 입히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기 위하여는 그것을 용납할 수 없오.

“그들에게 형벌을 가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요. 그들은 여전이 열정적으로 형벌에 관하여 이야기할 것이기 때문이요. ··· 받는 형벌 하나 하나가 후세를 위하여 공을 세우는 것이라는 것이요. 그러므로 모든 진실한 성경 연구생들은 주저함이 없이 형을 당하는 것이요. ··· 토굴 속에 감금되는 것, 기아의 고통, 얼어붙을 듯한 혹한에 시달리는 하나하나가 공을 쌓는 것이며, 모든 형벌, 모든 구타가 여호와께 공이 된다는 것이요.

“만일 앞으로 수용소 내에서 성경 연구생들과 관련된 문제가 일어난다면, 본인은 수용소 소장이 어떠한 형벌을 선고하는 것도 금하고자 하오. 그러한 경우는 상황에 대한 간단한 설명과 함께 본인에게 보고되어야 하오. 이제부터 본인은 반대적인 조치를 취할 계획이며, 각자에게 ‘당신은 일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먹게 될 것이며 당신은 아무 일도 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할 생각이요.

“이들 선한 마음을 지닌 광신자들의 신앙에 의하면 그렇게 되면 공을 쌓는 것은 중지되며, 그렇소, 오히려 반대로 여호와는 과거의 공을 공제할 것이기 때문이요.

“이제 본인의 제안은 모든 성경 연구생들을 작업에—예를 들면, 전쟁 및 전쟁의 모든 광기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농장의 일 같은 작업에 동원하라는 것이요. 적당히 배치한다면 그들을 경비하지 않아도 될 것이요. 그들은 달아나지 않을 것이요. 그들에게 자유로운 일을 맡길 수 있을 것이요. 그들은 최선의 관리인들이며 일군들임을 증명할 것이기 때문이요.

“그들을 또 다르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케르스텐’ 부인이 제안한 바대로 ‘레벤스보른하임’(‘최상의 인종’을 생산하기 위한 목적으로 친위대가 양육하는 아이들을 키우기 위하여 세운 집)에 성경 연구생들을 보모로서가 아니라, 요리사나 가정부로서 혹은 세탁 일이나 다른 비슷한 일을 하게 하는 것이요. 아직도 남자들이 가옥 관리인으로 일하고 있는 경우에는 강건한 여자 성경 연구생들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요. 본인은 대부분의 경우 그들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확신하오.

“본인은 또한 성경 연구생들을 여러 대가족에 배치하자는 제안에 동의하오. 필요한 능력이 있고 자격을 구비한 성경 연구생들을 찾아내어 본인에게 보고하기 바라오. 그러면 본인이 직접 그들을 대가족들 사이에 배치할 것이요. 그러나 그러한 가정에서 그들은 죄수복 대신 민간인복을 입도록 할 것이며 그들이 머무르는 것은 ‘하르츠발테’에 있는 자유롭지만 연금되어 있는 성경 연구생들과 비슷한 방법으로 마련해야 할 것이요.

“재소자들이 부분적으로 자유를 누리면서 그러한 일에 임명되는 이러한 모든 경우에 우리는 기록이나 서명 따위를 피하고 단지 악수를 하는 것으로 그러한 약정을 체결하기를 원하오.

“이러한 조치를 시작하기 위한 귀관들의 추천과 그에 대한 보고를 보내주기 바라오.”

그리하여, 짧은 기간 내에 상당수의 자매들이 친위대의 가정, 채소 재배 농원, 그들의 소유 농지 및 “레벤스보른하임”에서 일하도록 차출되었다.

그러나 친위대가 기꺼이 여호와의 증인들을 자기들의 집으로 이끌어들인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친위대들은 국민들 간에 그들에 대한 증오가 은밀히 증가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들은 단순히 사적으로 농을 받고 있음이 아님을 인식하였다. 많은 친위대 대원들은 심지어 자기네 가정부들까지도 더는 신뢰하지 못하였으며, 그들이 음식에 독을 넣거나 혹은 다른 방법으로 자기들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수뇌급 친위대 장교들은 이발소에도 가기를 꺼려하였는데, 이는 이발사가 목을 자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래서 ‘막스 슈뢰에르’와 ‘파울 바우에르’가 수뇌급 친위대 장교들을 정규적으로 이발해 주도록 임명되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결코 복수를 하지도 인간 원수들을 죽이지도 않는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용소 밖에서 일하는 이러한 형제 자매들은 자기들의 친척들의 방문을 받는 것이 허락되었으며, 스스로 집으로 찾아가 그들을 방문할 수도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목적으로 수주의 휴가도 얻을 수 있었다. 이것은 결국 형제 자매들이 더 좋은 음식을 먹게 되었으며, 그 결과 그들의 건강은 급속히 개선되었고 기아와 학대로 말미암은 사망자의 수가 감소되었음을 의미하였다.

집단 수용소 내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한 태도가 어느 정도나 유리하게 변화되었는지 ‘라인홀트 뤼링’이 체험한 한가지 경험에서 볼 수 있다. 1944년 2월, 그는 갑자기 일하는 도중에 수용소 사무실로 호출을 받았다. 이곳은 아주 많은 수의 사람들이 학대를 당하였으며 그들로 하여금 여호와께 둔 그들의 믿음을 버리도록 설득시키기 위한 시도가 자행되었던 곳이다. ‘뤼링’ 형제는 맞은 편에 앉아있는 관리들이 자기에게 한 농지를 맡아서 일하는 것과 일군들을 적절하게 지휘하면서 관리하는 일을 하겠느냐고 물었을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모든 질문에 긍정적인 대답을 한 그는 후에 15명의 다른 형제들과 함께 ‘체코슬로바키아’로 이송되어 ‘하이드리히’ 부인의 소유지를 관리하는 책임을 맡았다.

모두 훌륭한 기능공들인, 42명의 형제들로 구성되어 있는 또 한 집단의 노동대가 한 수뇌급 친위대 장교를 위한 집을 건축하도록 ‘오스트리아’의 ‘볼프강’ 호로 이송되었다. 비록 산기슭에서 하는 일이라 쉽지는 않았지만, 형제들은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보다 훨씬 훌륭하게 해냈다. 예를 들면, 이 집단에 속해 있던 ‘에리히 프로스트’는 허락을 받아 집에서 ‘아코디언’을 보내 오게 하였다. 그것을 받은 후 그는 다른 형제들과 함께 종종 허락을 받아 저녁에 호숫가로 나가서 민요를 켜거나 다른 악곡을 연주하곤 하였으며, 형제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일을 감독하는 친위대를 포함하여 호숫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즐겼다.

또한 집단 수용소 내에 있는 형제들에게 영적 양식을 공급하는 일도 계속 점차 쉬워졌다. ‘케르스텐’ 박사가 이점에 있어서 적지않은 역할을 하였는데, 그는 ‘스웨덴’에 있는 자기 집과 ‘하르츠발테’의 소유 농지 사이를 자주 왕래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항상 ‘히믈러’가 그의 소유 농지와 ‘스웨덴’에 있는 집에서 일하도록 위탁한 자매들에게 옷가방을 챙기게 하였다. 그들 사이에는 ‘스웨덴’에 있는 자매가 ‘케르스텐’의 옷가방을 챙길 때에 그 속에 여러 부의 「파수대」를 집어 넣기로 하는 묵계가 성립되었다. ‘하르츠발테’에 도착하면 그는 그곳에서 자기를 위하여 일하는 자매에게 옷가방을 열도록 하였으며, 그 일을 항상 그 자매 혼자서 하게 하였다. 자매들은 이 「파수대」들을 주의 깊이 연구한 후에 그것을 근처에 있는 집단 수용소로 보냈다.

‘하르츠발테’의 ‘케르스텐’ 씨의 소유지는 ‘라벤스브뤼크’의 여자 수용소 남방 약 35‘킬로미터’ 지점과 ‘작센하우젠’의 남자 수용소 북방 약 30‘킬로미터’ 지점이라는 이상적인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 물건이 ‘하르츠발테’로부터 양 수용소로 계속 운송되었기 때문에 양 수용소 내의 형제 자매들에게 영적 양식을 몰래 넣어 주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여러 수용소와 자매들이 일하도록 배치된 친위대 가족들의 개인 가정들과의 사이에는 매우 긴밀한 연결이 유지되었다. ‘일제 운테르되르페르’는 이 흥겹던 시기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우리는 일하던 곳에서 상당한 자유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검열을 당하는 일없이 편지를 친척들에게 부치는 일에 성공을 거두었다. 우리는 또한 외부에서 일하거나 친위대 대원들을 위하여 일하는 신임받는 위치에 있으며, 그러므로 더 많은 자유를 누리는 우리의 형제들과 편지를 교환할 수 있었다. 그렇다. 우리는 심지어 자유로운 생활을 하는 형제들과 접촉하는 일도 성공하였으며, 그리하여 「파수대」를 구할 수 있었다. 이전에 배운 것들과 신입자들이 전해 주는 새로운 진리만으로 생활하던 수년이 지난 후 다시금 「파수대」를 직접 읽을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우리만큼 상쾌한 일이었다. 나는 친위대 장교 ‘포올’의 관할 하에 있는 ‘라벤스브뤼크’ 근처의 한 친위대 농장에 배속되었다. 관리 재소자로서 나는 자매들의 일을 책임지고 있었다. 우리 중의 얼마는 그곳에서 잠을 자기까지 하였으며 더는 수용소로 돌아갈 필요가 없었다. 그러므로 어떤 자매가 전달해준 한 편지에 명시된 마련에 따라, 나는 ‘베를린’에서 온 ‘프란츠 프리체’와 접촉할 수 있었는데, 나는 그를 어느 날 저녁 농장의 한 숲속에서 만났다. 그는 항상 나에게 여러 부의 「파수대」를 공급해 주었다. 이에 더하여 우리들은 다른 방법으로도 영적 양식을 받았다. 두 자매가 한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으며 그들도 「파수대」를 수용소 안으로 들여오곤 하였다. 이러한 방법으로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사랑스럽게 돌보시는 것이 가장 긴요한 때에 바로 그렇게 하셨던 것이다.”

‘프랑크 비르크’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여호와께서는 영적 양식에 쉽게 근접할 수 있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분배해 주려고 애쓴 형제들을 축복하셨다. 그 형제는 ‘하르츠발테’ 농지로 옮겨진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그들은 곧 한 군인의 감독 하에 일하는 다른 형제들이 약 10‘킬로미테’ 떨어진 숲속에서 한 건물을 짓고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하르츠발터’ 농지의 형제들은 이미 상당한 자유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 숲에 있는 이들 형제들을 만나 볼 기회를 모색하였다.

‘비르크’ 형제의 보고는 이러하다. “어느 일요일 아침, ‘크레메르’ 형제와 나는 우리의 자전거를 타고 형제들을 찾으러 길을 떠났다. 숲속을 달리던 우리는 한 건물 신축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정지된 땅을 곧 발견하게 되었다. 한 재소자가 정지한 땅을 가로질러 오는 것을 본 우리가 그에게 손짓을 하자 그는 숲을 지나 우리에게로 오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그의 옷에 그려진 엷은 자색의 삼각형을 본 순간 형제임을 알았다. 우리가 그에게 ‘하르츠발테’의 형제들에게서 왔다고 말하자, 그는 우리를 신축 건물 안으로 인도하였다. 우리는 새로운 「파수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함께 앉아서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 후 우리는 그 형제들을 일요일마다 방문하였다. 그들은 ‘프라이부르크’ 출신인 한 준위의 감독하에 있었는데, 그는 형제들을 친절히 대해 주었다. ‘크리스마스’가 되기 직전 나는 그에게 ‘당신과 우리 형제들이 휴일을 이용하여 ‘하르츠발테’ 농지를 한번 방문하면 어떨까요?’ 하고 물었다. 그는 어딘가 자기가 거느리는 사람들이 이발을 할 수 있는 곳으로 가기를 원한다고 사려깊은 대답을 하였다. ‘하르츠발테’의 우리들 가운데 이발사가 있다는 말을 듣자 그는 즉각 동의하였다. 그래서 ‘크리스마스’날 아침 일찌기 이 장교를 동반한 형제들은 농장으로 왔다. 부엌에서 일하는 ‘베를린’에서 온 ‘슐쩨’ 자매가 이 장교를 특별히 대접하였으며, 그래서 우리들 상호간의 교제가 방해받지 않게 하였다. 그 날 저녁 형제들은 그들이 함께 즐긴 축복된 모임으로 기쁨에 넘쳐 귀가하였다. 생각해 보라. 이러한 일이 우리의 적들 가운데서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영적 양식을 모든 집단 수용소에 투입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증가하였다. ‘아우쉬빗츠’에 수감되어 있던 ‘게르트루트 오트’와 18명의 다른 자매들이 친위대 대원들의 가족이 살고 있는 한 ‘호텔’에서 일하도록 차출되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곳에 와서 음식을 먹고 마시곤 하였기 때문에, 오래지 않아서 재소자인 자매들이 창문을 닦는 것을 아직 자유 가운데 있는 자매들이 발견하였다. “우리들도 자매들입니다” 하고 그들은 지나가면서 쳐다보지 않고 낮은 소리로 말하였다. 3주 후에 그들은 화장실에서 만나기로 마련하였다. 그 때부터 외부의 자매들이 정규적으로 찾아와서 그 호텔에서 일하는 자매들에게 「파수대」와 다른 출판물들을 전달해 주었으며 후에 그들은 그것을 ‘라벤스브뤼크’로 보내곤 하였다.

1942년 12월 초, ‘베벨스부르크’에 남아있는 형제들에게 그곳에서 특별한 사업을 돌볼 수 있는 놀라운 기회가 도래하였다. 비록 아직 재소자들로서 대우를 받긴 하였지만, 그들은 상당한 자유를 즐겼다. 전기가 통하는 가시 철망이나 수용소 내에서 그들을 지키는 보초도 없었기 때문이다.

‘엔겔하르트’ 형제는 그 당시 아직 자유로왔으며 근처에 사는 형제들에게 「파수대」를 수용소 안으로 투입시킬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보라는 교훈을 보냈다. 몇 가지 문제를 극복한 후 ‘헤르포르트’의 ‘잔도르 바이에르’와 ‘렘고’ 출신인 ‘마르타 튄케르’는 마치 젊은 부부가 하는 것처럼 주변 지역을 단순히 산책하면서 상태를 조사하였다. 그들은 곧 형제들과 접촉하게 되었으며 그 후로 정규적으로 그들에게 「파수대」를 공급하였다. 맨 처음에는, 그들은 공동 묘지의 어떤 특정한 무덤에서 형제들을 만났으며, 그 다음 번에는, 잡지를 짚가리 속에 숨겨 두었거나 어떤 미리 정한 장소에서 밤중에 직접 형제들에게 그것들을 전달하였다. 매번 전달할 때마다 새로운 장소를 마련하였다. 잡지들을 생산하고 배부하던 ‘엔겔하르트’ 형제와 자매들이 체포된 다음, 아직 자유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영적 양식을 공급하는가 하는 문제가 야기되었다.

이번에 ‘베벨스부르크’의 형제들은 스스로 해결책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은 타자기 한 대를 구할 수 있었으며, 그것을 사용하여 한 형제가 원지를 찍었다. 다른 형제가 나무로 원시적인 등사기를 만들었다. 그들과 아직 접촉을 유지하고 있던 외부에 있는 자매들이 형제들에게 등사 활동에 필요한 공급품들을 제공하였다. 마침내 이곳에서 많은 부수의 「파수대」가 생산되었기 때문에 북부 독일의 넓은 지역에 공급할 수 있었다. ‘엘리자베트 에른스팅’은 항상 50부씩 받아서 자기가 돌보는 구역에 공급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1945년에 그 독재 정체가 붕괴할 때까지 거의 2년 동안, ‘베스트팔렌’과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 형제들에게 「파수대」를 공급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집단 수용소 내에 있는 형제 자매들에게 영적 양식을 공급하는 일은 크게 개선되어 1942년경 ‘작센하우젠’에서는 그것을 하나의 작은 냇물에 비교할 수 있었다. ‘나치’ 체제의 붕괴 직전에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집행을 당하지는 않은 ‘베를린’ 출신 ‘프리체’ 형제는 1년 반 이상 형제들에게 모든 새로운 잡지뿐만 아니라, 다수의 묵은 호, 그리고 그러는 사이에 발행된 모든 종류의 서책과 소책자들을 공급할 수 있었다. 이것은 마치 형제들이 기름진 초장으로 인도된 것과 같았다. 모든 형제들은 매일 저녁 연구할 협회의 출판물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놀라운 변화인가! 그러나 그것뿐만은 아니었다. 조직이 매우 잘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프리체’ 형제는 형제들의 친척들, 다른 수용소 혹은 여러 외국 지부로 편지를 보낼 수 있었다. 그리하여 1년 반 동안에 150통의 편지를 밀송할 수 있었으며 거의 비슷한 수가 수용소로 들어왔다. 발송된 편지들은 형제들의 훌륭한 영적 상태를 증명해 주었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이러한 편지의 사본을 여러 장 만들었으며 어떤 것은 심지어 등사기로 복사하여 외부 형제들과 특히 투옥된 형제들의 친척들을 위한 격려물로서 활용하였다.

수용소 안에서 담대하게 선언된 신권적 연합

‘프리체’ 형제가 체포된 1943년 가을까지 약 1년 반 동안 모든 일이 잘 진행되었다. 가택 수색 도중에 ‘작센하우젠’에 관한 보고들이 발견되었는데, 그것이 그에게로 주의를 돌리게 하였던 것이다. 경찰은 그가 소유하고 있던 「파수대」와 다른 출판물들 뿐만 아니라, 그가 전달하려던 형제들이 보내는 얼마의 편지도 발견하였다. 통신의 왕래가 거의 국제적인 규모로 진행되고 있음을 발견한 경찰은 수용소 간부들의 의무 수행 능력 혹은 자진성에 의심을 품게 되었다. 그러므로 ‘히믈러’는 의심스러운 모든 수용소에 대한 즉각적인 수색을 실시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 운동은 4월 말에 시작되었다. 어느 날 아침 얼마의 비밀 경찰 간부가 ‘작센하우젠’에 도착하였다. 형제들에 대한 전격적인 공격이 잘 계획되었다. 수용소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작업장에서 호출을 받아 운동장으로 가서 서서 일용할 성귀에 관한 심문을 받고 몸 수색을 당하였다. 약간의 출판물이 발견되었다. 그 다음에는 통례적인 태형이 뒤따랐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들의 적들 가운데서도 그들에게 풍부하게 영양을 공급해 주셨기 때문에, 비밀 경찰은 형제들을 위축시키는 데 실패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사명에 대한 명확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신권 통치권에 대한 그들의 연합된 입장을 취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에른스트 젤리게르’는 ‘프리체’ 형제와의 연결 고리로 알려졌으며, 그래서 그에게 특별한 “주의”가 집중되었다. 그는 육적인 상처 뿐만 아니라 영적인 상처도 감싸주려고 노력을 해 왔으며, 그의 겸손한 아버지같은 태도는 이 수용소 내에서 향유한 연합에 크게 기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의 첫 심문의 결과에 크게 당황하였으며, 자기가 생각하였던 바, 그의 “패배”라고 느낀 것을 승리로 전환시켜 주실 것을 여호와께 기도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한 개인만의 시험은 아니었다. ‘힐덴’ 출신인 ‘빌헬름 뢰게르’는 그 때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이제 필요한 것은 ‘전체의 행동 통일!’이었다.” 모든 형제들은 ‘젤리게르’ 형제가 그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일용할 성귀를 돌렸다는 본인의 진술을 확증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젤리게르’ 형제가 수용소로 들여온 서적을 읽었다는 사실과 자기들은 서로 격려하며 자기들의 미래의 소망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계속할 것이라는 사실을 확증하였다.

4일이 흘렀다. 일요일 아침에 ‘젤리게르’ 형제는 수용소 관리부 앞에 출두하였으며 그래서 그들은 조서를 꾸밀 수 있었다. 그는 자기의 경험을 이렇게 묘사한다. “우선 나는 3개의 병실[그곳에서 그는 조수로 일하고 있었다]에서 증거하였다. ··· 그 다음에 기쁨에 충만하여 사자 굴로 들어갔다. 의사 한 사람과 약제사 한 명이 우리가 불법으로 수용소 밖으로 발송한 편지들을 검토하고 있었다. 두 시간의 열띤 토론이 뒤따랐다. 조서가 마무리될 무렵 심문관이 ‘‘젤리게르’, 이제 어쩔 작정인가? 그대는 일용할 성귀를 써서 형제들을 격려하는 일을 계속할 셈인가? 그리고 이곳 수용소 내에서 다른 재소자들 간에 그 소식을 전파하는 일을 계속할 작정인가?’ 하고 물었다. 나는 ‘그렇습니다, 바로 그렇게 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나 뿐만 아니라 나의 형제들 모두도 마찬가지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 두시에 그 심문은 끝났으며 모든 형제들의 이름으로 작성된 선언문이 그들에게 제시되었으며, 그 후 그들 모두는 기쁨에 넘쳐 (수용소 막사에서) 전파 사업을 하였다.”

형제들은 1934년 10월 7일에 한 편지를 통하여 ‘히틀러’에게 여호와의 증인들은 위협에도 불구하고 함께 모이는 일과 전파하는 일을 중단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통고한지 거의 10년이 흘렀음을 기억하였다. 이제 거의 10년이 지난 후 비밀 경찰은 집단 수용소 내외부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의 투쟁 정신은 파괴되지 않았음을 인식하였다. 편지들은 이것을 증거하였다.

비밀 경찰은 이제 다른 집단 수용소에서도 그러한 크게 선포된 ‘신권적 연합’이 풍미하고 있는지를 보기 위하여 다른 집단 수용소들도 조사하였다. 그 다음 수용소는 ‘작센하우젠’의 지부 수용소인 ‘베를린—리히테르펠데’였다. ‘작센하우젠’과 ‘리히테르펠데’ 사이의 연락원으로서 봉사하던 ‘파울 그로스만’ 형제는 후에 그 조사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1944년 4월 26일, 비밀 경찰은 새로운 타격을 가하였다. 그 날 아침 10시에 두 명의 비밀 경찰 간부가 ‘작센하우젠’과 ‘리히테르펠데’ 사이의 연락원인 나를 철저히 조사하기 위하여 ‘리히테르펠데’로 왔다. 그들은 내가 ‘베를린’에 있는 형제들에게 써 보낸 두 통의 불법 편지를 내보였다. 이 편지들은 우리의 운영 방식을 분명히 밝혀 주고 있었다. [우리는 그러한 정보를 포함하는 편지를 쓰는 것이 얼마나 지혜롭지 못한 것인지를 볼 수 있다. 왜냐 하면 조만간에 관리들은 검거를 하거나 수색을 할 때 그것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기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관리들은 그리하여 모든 조직적인 세부 사항들에 관하여 그리고 그에 더하여 우리가 우리의 ‘어머니’로부터 정규적으로 음식을 받았음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뒤범벅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발견한 모든 것이라고는 한 부의 「파수대」뿐이었다. 다른 형제들이 일을 하다가 호출되어 들어오는 동안 나는 문에 서 있어야 하였다. 그들도 수색을 당하였으며 문에 서 있으라는 요구를 받았다. 이처럼 대대적인 경찰의 수색이 오랫 동안 행하여진 일이 없었기 때문에, 이것은 참으로 대사건이었다. 심문 도중에 여러 번 구타를 당하였고 욕설을 들었으며, 소수의 「파수대」와 성귀의 기록들이 발견되었다. ‘작센하우젠’에서의 경험에 관한 광범위한 보고문과 한 권의 성서 그리고 다른 서류에는 그들의 손이 닿지 않았다. 형제들은 자기들이 신권 통치의 이익을 위하여 활동적으로 일하였다는 것과 「파수대」를 읽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우리들은 그 날 밤 11시까지 문에 서 있어야 하였다. 한편, 12명의 주동자들을 ‘작센하우젠’으로 이송하려고 경찰 ‘트럭’이 도착하였다. 이것은 그들이 교수형을 당하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수저와 식기 등을 반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그들을 이송하는 것은 실현되지 않았다. 비록 친척들에게 보내는 사망 통지서가 이미 작성되었지만, 그 다음 날에도 실현되지 않았다. 셋째 날에 놀라운 일이 있었다. 12명의 형제가 처형을 당하지 않고, 오히려 작업장으로 되돌려보내진 것이다.”

‘리히테르펠데’의 형제들은 한 선언문에 서명을 하라는 요구를 받았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였다. “——이래 수용되어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한 사람인, 나——는 ‘작센하우젠’ 집단 수용소에 존재하는 ‘신권적 연합’의 일원임을 고백합니다. 나는 일용할 성귀들과 서적을 받았으며, 나는 그것들을 읽고 회람시켰읍니다.” 모든 사람들은 기쁘게 서명하였다.

비슷한 경찰 수색이 다른 여러 수용소에서도 동일한 결과를 내면서 수행되었으며, 편지들 가운데서 ‘작센하우젠’과 ‘라벤스브뤼크’ 사이에서 연락이 취해지고 있음이 나타났기 때문에 1944년 5월 4일에는 ‘라벤스브뤼크’에서 한 차례의 수색이 실시되었다. 이 수용소에서는 “주동자들”에 대한 혹독한 조치가 취해졌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얼마 후에 각 부서를 책임맡은 우두머리들의 요구가 있자, 그 자매들은 그들의 이전 일로 되돌려 보내졌다. 이것은 독재자의 세력이 이 때쯤에 이르러서는 상당히 약화되었다는 가외의 증거였다.

1944년 동부 전선에서 독일 육군이 당한 참패로 말미암아 수많은 인명의 손실이 있었기 때문에 노인들과 ‘히틀러 유겐트’가 전쟁에 동원되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수감자들에게도 동부 전선에서 자신을 입증할 기회가 제공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관계 위원회들이 수용소들을 찾아다녔으며, 정치범 재소자들에게, 강등당한 ‘디를레반게르’ 장군의 사단에 입대할 기회를 제공하였다. 만일 그들이 그곳에서 자신을 입증한다면, 그들은 자유로운 독일 국민으로 간주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이러한 제의를 하기 전에 엷은 자색의 삼각형을 달고 있는 모든 재소자들은 그들의 막사로 항상 돌려보내졌다. 그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에게서 어떠한 대답이 나올 것인지를 알고 있었으며,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물어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수용소들을 황급히 철수하다

1945년 미국과 영국의 공군이 밤낮으로 퍼부은 그칠줄 모르는 폭탄의 비와 마침내는 공공연한 도주로 변해 버린 독일 군대의 후퇴는 모든 사람에게 제 2차 세계 대전의 끝이 임박하였음을 암시해 주었다. 친위대는 지배자적인 위세를 전시하길 중지하였다. 이제 그들의 위치가 조금도 부러워할 만한 것이 아님을 수십만의 집단 수용소 재소자들이 초조하게 해방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이해할 수 있다. 이들 재소자들의 집단은 예측을 불허하는 그렇다, 일종의 폭발물질이었으며, 따라서 많은 친위대 대원들은 재소자들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러나 ‘히믈러’는 자기 총통의 명령을 계속 준행하여 ‘다하우’와 ‘플로센뷔르크’의 소장들에게 다음과 같은 전문을 발송하였다. “항복은 절대 있을 수 없다. 수용소를 즉각 철수시키라. 어떤 재소자도 산 채로 적의 손에 들어가서는 안된다. (‘하인리히 히믈러’ 서명)” 비슷한 지시가 다른 수용소에도 하달되었다.

이것은 또 다시 수용소에 갇혀 있는 하나님이 충실한 종들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마지막 마귀적인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지나치게 우려하지 않았다. 그들은 개개인에게 어떠한 즉각적인 결과가 닥치든지 여호와께 확신을 두었다.

재소자들을 제거하는 임무를 맡은 친위대 장교들은 이제 해결 불능의 숙제를 직면한 것이다. 친위대 주보에서 일하도록 배치되었던 ‘발테르 하만’ 형제는 친위대 장교들 간에 오고 간 이러한 흥미있는 대화를 무심코 엿들은 일이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 장교들은 ‘가스’를 이용하여 재소자들을 죽이는 문제에 관하여 이야기하였지만 설비가 너무 작고 충분한 양의 ‘가스’도 없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엿들은 것은 화장로용 석유 수송에 관한 전화 통화였는데 이것도 배달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 다음 수용소와 재소자들을 함께 폭파시키는 문제가 뒤를 이었다. 여러 상자의 ‘다이나마이트’가 이미 여러 막사, 특히 병동에 설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계획도 철회되었다. 마침내 30,000명의 재소자들을 철수시키기로 결정을 하였으며, 재소자들에게는 더 큰 수용소—그러한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로 이송한다고 말하자고 모의하였다. 그러나 사실상 그들은 우리를 ‘뤼베크’ 만으로 데리고 가서 몰살시키려는 계획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는 데는 ‘가스’, 석유 또는 ‘다이나마이트’가 전혀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한편, 연합군들은 동서로부터 속도를 증가시키면서 진군해 오고 있었다. 친위대는 이제 자기들 자신의 목숨을 염려하기 시작하여 급기야는 안절부절하기에 이르렀으며, 이러한 상태는 수용소들을 철수시키기로 한 정부의 결정이 밝혀진 후에 특히 그러하였다. 직면한 문제들을 이겨내기 어렵게 되자, 그들은 무작정 재소자들을 거리로 몰아내세우고 극소량의 식량만을 가지고 행진을 시작하도록 강요하였다. “죽음의 행진”이라고 칭해야 마땅한 이러한 행진의 진로를 후에 답사해 본 사람은 누구나 이러한 진로가 한 목적지로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친위대의 목표는 재소자들을 ‘뤼베케’ 만이나 혹은 북방 공해상으로 데리고 가서 그 곳에서 그들을 승선시킨채 적군이 당도하기 전에 침몰시키자는 것이었다.

곧 모든 식량이 떨었졌고, 때로는 한 방울의 물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굶주린 재소자들은 섭씨 4도(화씨 40도)의 평균 기온과 쏟아지는 비 속에서도 하루 종일 계속되는 행진을 수일씩 계속하도록 강요당하였다. 밤이 되면 그들은 숲속에서 빗물로 젖은 땅 바닥에 누울 허락을 받았다. 그들이 요구된 속도에 보조를 맞추지 못하는 사람들은 친위대의 후미 경비대원들에게 무자비하게 사살당하였다. 이러한 행진 중에 있었던 생명의 손실의 정도가 어떠하였는지를 ‘작센하우젠’의 예에서 볼 수 있다. 철수할 때에 살아있던 26,000명의 재소자들 중에서 10,700명이 사살당하여 ‘작센하우젠’으로부터 ‘슈베린’에 이르는 도로 연변에 버려졌다.

‘마우타우젠’을 출발한 소수의 형제들도 위험한 입장에 처해 있었다. 얼마 전까지 산 속에는 거대한 ‘터널’들이 뚫려서 그곳에서 가공할 “V-2” ‘로케트’들이 건조되고 있었다. 어느 날 ‘터널’들 중의 하나를 폐쇄하고 내부에 지뢰를 장치하였다. 그들의 계획은 공습을 가장하여 18,000명의 재소자들을 이 ‘터널’ 속으로 몰아넣고 폭파시키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 수용소의 관리부 당국은 신속히 진군해 온 소련 ‘탱크’들에 의하여 불시에 습격을 당하였으며 친위대 대원들은 재소자들을 버려둔 채 자기들의 생명을 구하기에 급급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멀리 도주하지 못하였다. 불과 며칠 후, ‘나는 사망 증명서를 보기 원할 뿐이다’라고 큰 소리치던 그 유명한 수용소 소장은 재소자들에게 발각되어 밟혀 죽고 말았다. 정치범 재소자들은 이제 선임 재소자, 막사 조장 및 작업 감독으로서 동료 재소자들의 피를 흘린 자들에게 복수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다하우’를 출발한 재소자들의 죽음의 행진은 숲을 지나게 되었으며 보조를 맞추지 못하는 자들은 친위대에 의하여 사살당하였다. 그들의 목적지는 ‘외츠탈레르 알프스’였는데 그 목적지에 도착하는 자들도 모두 사살할 계획이었다. 형제들은 함께 결속하여 서로 도와 줌으로 그들이 ‘바드 퇼츠’에 도착하기 전에 어떤 형제들이 사살당하는 불상사가 없도록 노력하였으며, 그곳에서 그들은 해방되었다. ‘로펠리우스’ 형제가 술회한 바에 의하면, 그들은 ‘바아키르헨’ 숲속에서 눈을 담요로 삼아 마지막 밤을 보냈다고 한다. 날이 밝아오자 ‘바이에른’ 주 경찰이 와서 그들에게 해방되었다는 소식과 친위대는 도주해 버렸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계속 진행하면서 그들은 나무에 걸쳐 있는 무기들은 보았으나, 친위대 대원은 눈에 띄지 않았다.

친위대는 모두 죄수들을 제거하라는 정부의 명령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항복이 발표되기 며칠전 그들은 여러 집단의 재소자들을 ‘노이엔감메’로 집결시켜서 그들을 ‘노이쉬타트’ 만에 정박중인 호화 기선 ‘갚 아르코나’호로 이송할 화물선에 승선시켰다. 전장 200‘미터’의 이 배에는 이미 7,000명의 재소자들이 타고 있었다. 친위대는 ‘갚 아르코나’호를 공해상으로 몰고가서 재소자들과 함께 침몰시킬 계획이었다. 그러자 이 배는 아직도 그 깃발을 펄럭이고 있었으며, 그 결과 1945년 5월 3일에 영국의 전투기에 의하여 침몰되었다. 2,000 내지 3,000명의 재소자들이 승선하고 있던 화물선 ‘티일베크’호도 침몰되었다. 약 9,000명의 재소자들이 ‘노이쉬타트’ 만에서 수장된 것이다. 생존자들이 이 사건을 회상할 때, 몸서리치는 이유도 이해할 만하다. 지금까지도 이들 수장된 재소자들의 골격 12내지 17구가 매년 ‘노이쉬타트’ 해안에서 해수욕을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또는 굴착 작업 도중에 발견되곤 한다.

220명의 형제들을 포함한 ‘작센한우젠’의 재소자들에게도 같은 운명이 결정되어 있었다. 죽음의 행진 중 그들은 2주만에 거의 200‘킬로미터’를 답파하였다.

증인들은 위협적으로 닥쳐오는 위험을 일찌기 알아차렸으며, 그래서 자기들의 신발을 수선하였고 소수의 작은 수레를 모아서 가장 허약한 형제들의 보잘 것없는 소유물들을 운반하였으며, 그 위에는 그러한 약한 형제들을 태웠다. 그렇게 하지 않고 만일 이러한 형제들이 전체 행로를 걸어야 하였다면 그들은 필경 10,000명 이상의 사망자들 중에 끼이는 것을 면치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신체가 아직 크게 쇠진하지 않은 형제들은 이러한 방법으로 그들을 끌어주었다. 행진을 계속하는 중에 기력이 진한 형제들이 생기면 그들을 태웠다. 수일 동안의 휴식으로 충분한 힘이 다시 회복되면 그들은 다시 순번을 바꾸어 수레를 끌었다. 이와 같이 이 죽음의 행진 중에도 그들은 모두 하나의 거대한 가족으로서 함께 동행하였으며, 끝까지 여호와의 보호를 향유하였다.

그러든 중 이 행진하는 재소자들의 집단이 ‘뤼베크’까지 단지 3일간의 여행거리를 남겨둔 어느 날 오후, 친위대는 모든 사람들에게 ‘슈베린’ 근처의 한 숲속에서 야영하라고 명령하였다. 수레 여행 도중에 형제들은 작은 집단들을 형성하고 자기들의 담요를 이용하여 고식적인 것이나마 천막을 만들었다. 그리고 바닥은 밤의 한기를 막기 위하여 작은 조각들로 덮었다. 그 날 밤 소련군의 총알이 그들의 머리 위를 나르고 미군이 진격을 계속하는 동안, 이쪽 부분의 독일 군대의 방어선이 붕괴되었다. 그리하여 그 날 밤 갑자기 “우리는 해방되었다!” 하는 외침과 수천번에 걸쳐서 메아리치는 소리가 들려왔을 때 그곳에 있던 사람들의 느낌은 가히 묘사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때까지 재소자들을 통솔하던 약 2,000명의 친위대 대원들은 민간인들처럼 보이도록 비밀히 자기들의 제복을 벗어버렸고 어떤 대원들은 자기 신분을 감추기 위하여 재소자의 제복을 입기도 하였다. 그러나 몇시간 후에 그들 중의 얼마는 발각되어 무참하게 학살당하였다.

이제 형제들은 그들에게 당도한 미군 장교들의 제의를 받아들이고, 그 밤중에 야영을 철거해야 할 것인가?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 문제를 고려한 후 그들은 일출시까지 기다리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피난민들 중의 한 농부가 형제들에게 200‘파운드’의 완두를 제공하였기 때문에 해가 뜬 후에도 몇시간을 더 기다렸다. 그들은 훌륭한 음식을 요리하여 먹었다. 형제들은 얼마나 감사하게 느꼈던가! 거의 두 주일 동안 그들은 길가에서 따 모아 저녁 때 물을 구할 수 있을 때 숲속에서 만들어 마신 약간의 차를 제외하고는 거의 아무 것도 먹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들 중의 아무도 낙오자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였을 때, 참으로 감사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후에 인식하게 된 바와 같이 그들에게는 여호와께 감사드릴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친위대는 전선이 어디인지를 확실히 알지 못하여, 북행 행진 도중에 형제들을 어떤 숲속에서 수일간 억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며칠은 그들이 방어선이 마침내 붕괴되기 전에 ‘뤼베크’에 도착하기에 필요한 만큼의 기간이었던 것이다.

이제 그들은 더는 급히 서둘러 행진을 계속할 이유가 없었다. ‘슈베린’ 근처 이 숲속에서 그들은 병사들이 이동식 사무실 밖으로 내버린 타자기를 사용하여 자기들의 경험에 관한 보고문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 보고문은 몇 시간 동안 자유를 누린데 대한 필설로 표현하기 힘든 느낌과 또한 그들이 “사자 굴”속에 머물러 있던 수년 동안 그들의 정신에 깊은 인상을 남겨 준 여호와의 보호에 대한 감사에 대하여 기록한 결의문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것이 그 결의문이다.

결의!

“1945년 5월 3일

“‘멕클렌부르크’의 ‘슈베린’ 근처 한 숲에 모여 있는 6개국 출신 여호와의 증인 230명은 다음과 같이 결의하는 바이다.

“이곳에 모인 우리 여호와의 증인들은 시편 33:1-4와 37:9의 말씀으로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여호와의 충실한 언약의 백성들과 그들의 동료들에게 충심으로 인사를 보내는 바이다. 여호와라 이름하신 우리의 위대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 대한 말씀을 성취시키되, 특히 북방 왕의 영역 안에서, 그렇게 하셨음을 알게 하자. 장구하고 어려웠던 시험의 기간은 이제 우리 뒤로 지나갔으며 은유적으로 말하건대 불 풀무로부터 보존되고 건져진 자들에게서는 불의 냄새도 나지 않았다. (다니엘 3:27을 보라) 그와는 반대로, 그들은 여호와께서 주신 힘과 능력으로 충만해 있고 신권적 유익을 확장시키기 위한 왕의 새로운 명령을 열렬히 기다리고 있다. 일하고자 하는 우리의 결심과 우리의 자진성은 이사야 6:8과 예레미야 20:11에 표현되어 있다. (‘멩게’역) 주의 도움과 그분의 은혜로운 후원 덕택에, 우리의 성실을 깨뜨리게 하려는 원수의 궤계는, 비록 그가 무수한 폭력이라는 마귀적 책동과 수천의 신체적 및 정신적인 중세기의 종교 재판적 책략 그리고 다수의 감언이설과 유혹을 이용하여 이를 시도하였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책으로 기록한다면 여러 권이 될 이러한 모든 다양한 경험들은 고린도 후 6:4-10; 고린도 후 11:26, 27에 기록된 사도 ‘바울’의 말 가운데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편 124편(‘엘베르펠트’역)에 간략하게 묘사되어 있다. ‘사단’과 그의 악귀적인 대행자들은 다시 한번 거짓말장이임이 낙인 찍혀졌다. (요한 8:44) 그 중대한 문제는 또 다시 여호와께 유리하게, 그분께 영예가 되도록 결정되었다.—욥 1:9-11.

“주 여호와께서는 36명의 선의자라는 풍부한 전리품으로 우리를 축복하셨으며, 그들은 우리가 ‘작센하우젠’을 떠날 때, 자진적으로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라고 선언하였다는, 우리와 여러분에게 기쁨이 되는 사실을 여러분도 알게 되기를 기원한다. 스가랴 8:23이 성취되었다! 우리가 서둘러 출발한 연고로 수많은 신권통치의 친구들이 우리에 가담할 수 없었지만,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우리에게로 돌아오는 길을 발견하게 하실 것이다.

“우리 여호와의 증인들은 여호와께 대한 우리의 온전한 믿음과 그분의 신권통치에 대한 우리의 온전한 헌신을 새롭게 선언하는 바이다.

“우리는 사자 굴에 머물러 있는 동안 그분이 우리를 수천가지 어려움, 갈등 및 고난으로부터 놀랍게 보존하셨고 구출하셨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끝없는 증거들에 대한 우리의 깊은 인식에 비추어 생각하건대 여호와와 그분의 위대한 왕,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가 기꺼운 마음과 즐거운 마음으로 영원히 섬길 수 있도록 허락을 받는 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염원임을 엄숙히 약속하는 바이다. 바로 그렇게 섬길 수 있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는 최대의 보상이 될 것이다.

“우리는 조속한 재연합을 즐거움 가운데 확신하면서 시편 48편의 말씀으로 우리의 결의를 끝맺는 바이다.

“여호와의 성호를 위한 여러분의 동료 종들.”

이와 같이 먼저 여호와께 그분의 과분하신 친절, 그분의 보호, 그리고 또한 자기들의 회복된 자유에 대한 감사를 표현한 후에 형제들은 야영을 철거하였다. 비록 그 해방의 첫날 밤에 900 내지 1,000명의 재소자들이 사망하였지만, 형제들은 전혀 흠없는 상태로 ‘슈베린’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엘베’ 강의 다리들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두달 내지 석달 동안 떠날 수 없었다. 그들은 어떤 군대용 막사에 딸린 여러 외양간을 숙소로 사용하였으며, 그곳에서 그들은 「파수대」를 등사하여 매일 아침 「파수대」 연구를 가짐으로써 앞날의 사업을 위하여 스스로를 영적으로 준비시킬 수 있었다. 동시에 그들은, 비록 환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재소자 제복을 입은 채로지만 다시 야외 봉사를 시작하였다. 마침내 그들은 서쪽으로의 여행을 계속하여 다시 한번 친척들과 접촉하고 왕국 사업을 재조직하는 데 무엇이 수행될 수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성실의 기록

이 보고는 여호와의 백성의 현대 역사의 한 중요한 국면을 다시 상기시키기 위하여 노력해 왔다. 그러나 국가사회주의의 공포의 통치 시대에 독일의 형제 자매들이 경험한 흥미있는 일들의 겨우 일부만을 서술할 수 있었을 뿐이다. 증인들이 참 숭배에 고착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옹호하기 때문에 그들이 당한 일을 모두 보고하려면 참으로 참으로 많은 책이 필요할 것이다. 지금까지 서술된 개개의 경험들이 언급할 가치가 있는 다른 많은 경험들을 대변해 주기를 바라며, 그리하여 인간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찬양과 영예를 받으시기를 기원한다. 비록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 중의 많은 사람들이 여호와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버리는 것을 허락하셨지만, 하나의 집단으로서 그들을 구출하시기 위하여 적당한 때에 조치를 취하신 분도 바로 그분이시다.

1945년에 학정으로부터 자유케 된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 본 사람은 누구나 그들이 얼마나 자주 이구동성으로 시편 124편의 말씀으로 여호와를 찬양하였는지를 기억할 것이다. 그들은 박해가 시작될 무렵에 나왔던 놀라운 「파수대」 기사들을 반영한 것이었으며, 그러한 기사들로서 여호와께서는 그 어려운 시대를 위하여 그들을 준비시키셨던 것이다. 이제 그들은 몸을 멸할 수 있는 자를 두려워해서는 안된다고 하신 예수의 말씀의 뜻이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들은 불 풀무 속으로 혹은 ‘다니엘’처럼 사자 굴 속으로 던지우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여호와께서 더 능하시며, 자기들의 이마를 적들의 것보다 더 단단하게 만드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 외부사람들까지도 이 점을 인정하며, 역사가들이 독일 역사의 이 부분에 관하여 말할 때면 그것이 종종 강조된다. 예를 들면, ‘미하엘 하 카테르’는 자기의 「현대 역사」(Zeitgeschichte), 1969년판, 제 2호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제 3제국’은 내부적인 저항을 야수적인 완력으로 다루는 방법만을 알았을 뿐이다. 그러나 독일 국민들 간의 반항 세력은 극복할 수 없었고, 1933년부터 1945년 사이에 성실한 성경 연구생들의 문제를 타개할 수도 없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1945년에 쇠약해졌으나 기백은 꺾이지 않은 상태로 그들의 박해의 기간을 벗어났다.”

또한 ‘프리드리히 짚펠’의 「독일 교회들의 투쟁사」(Kirchenkampf in Deutschland)란 책의 한 서평에서, 우리는 이러한 내용을 읽을 수 있다.

“집단 수용소들에 관하여 작성된 분석문이나 그것들에 관하여 기록한 회고록에서 성실한 성경 연구생들의 강한 믿음, 근면성, 협조 정신 및 광신적인 순교에 관한 묘사가 없는 것은 거의 없다. 이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투옥되기 전까지 싸워온 투쟁에 앞서 기록된 그리고 그들을 전혀 언급하지 않거나 또는 단순히 쓰는 김에 간단히 언급한 일반적인 반대 서적과는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성경 연구생들의 활동과 박해는 매우 이상하다. 이 작은 종교 집단의 성원들의 97‘퍼센트’는 국가사회주의의 박해의 제물이 되었었다. 그들 중의 3분의 1이 처형, 여타의 폭행, 굶주림, 질병 혹은 노예적인 노동 등으로 죽임을 당하였다. 이러한 박해의 혹독성은 유례가 없는 것이며 국가 사회주의적 이념과 조화될 수 없는 타협하지 않는 믿음의 결과였다.”

독일 제국의 그 패배한 총통은 이제 얼마나 수치스러운 상태로 떨어지게 되었는가! 1944년 12월 31일 ‘괴벨스’는 그를 이렇게 말한 일이 있었다. “만일 세상이 진정으로 그가 세상에게 말해 주고 제공하기를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다면 그리고 그 자신의 백성과 전 인류에 대한 그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를 알았다면, 세상은 즉시 세상의 모든 거짓 신들을 버리고 자기의 백성을 구출하는 것을 자기의 목적으로 삼아온 사람인 ··· 그를 찬양하였을 것이다 ··· 한 마디의 거짓말도 일말의 속된 생각도 결코 그의 입술을 거친 것은 없다. 그는 진리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하나의 신이 되기를 추구하던 이 사람은 자살을 하고 말았다.

또한 그를 신뢰하던 자들도 얼마나 수치스럽게 되었는가—예를 들면, ‘히믈러’가 있는데, 그도 ‘히틀러’를 하나의 신격자로 생각하였고 절조없이 그의 명령들을 수행하였었다. 여러 해 동안 여호와의 충실한 종들의 생활을 그렇게 심히 어렵게 만들어 왔던 장본인이 바로 이 ‘히믈러’였다. 도대체 그는 얼마나 많이 흘린 피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할 것인가? 1937년 그는 ‘리히텐부르크’에서 우리의 자매들에게 “너희도 항복할 것이다. 우리는 너희를 분쇄할 것이다. 우리는 너희들보다 더 오래 지탱할 것이다!”라고 허풍을 떤 바 있었다. 그리고 그는 ‘나치’ 체제가 붕괴한 후 도망을 치다가 ‘하르츠발테’에서 ‘뤼브케’ 형제를 만나서 “자, 성경 연구생, 이제 어떠하십니까?” 하고 물었을 때 얼마나 의기를 상실하였던가! ‘뤼브케’ 형제는 그에게 철저한 증거를 하였으며, 여호와의 증인들은 항상 ‘나치’ 체제의 붕괴와 자기들의 구출을 믿어 왔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히믈러’는 말없이 돌아서 버렸으며, 그로부터 얼마 후 독약으로 자살하였다.

그러나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를 숭배한 사람들은 얼마나 기뻐하였던가! 그들은 우주의 지존하신 통치자께 대한 자기들의 성실을 증명할 특권을 받았던 것이다. ‘히틀러’ 통치 시대에 그들 중 1,687명은 직장을, 284명은 기업을, 735명은 집을 잃었으며, 457명은 자기들의 상업을 계속해나갈 허락을 받지 못하였었다. 129건의 경우에는 재산을 압수당하였고, 826명의 연금 생활자들은 연금 지불을 거부당하였으며, 다른 329명은 기타의 개인적인 손실을 겪었다. 부모들에게서 빼앗아간 자녀들의 수는 860명이었다. 위정자들의 압력으로 말미암아 30건의 결혼이 해소되었고, 진리를 반대하는 배우자로부터의 요청이 있었을 때, 108건의 이혼이 허가되었다. 총 6,019명이 체포되었으며, 어떤 사람은 두번, 세번 또는 더 여러 번 체포되었었으므로, 도합 8,917의 체포건이 기록되었다. 그들은 도합하여 ‘아담’의 창조 이래의 기간의 두배하고도 4분의 1에 해당하는 13,924년 2개월의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총계 2,000명의 형제 자매들이 집단 수용소에 수용되었었으며, 그곳에서 그들은 8,078년 6개월, 즉 평균 4년씩을 허비하였다. 총 635명이 감옥에서 사망하였으며, 253명은 사형 선고를 받았고 그들 중 203명은 실제로 처형당하였다. 얼마나 놀라운 성실의 기록인가!

재건이 시작되다

전쟁 직후에 독일 형제들과 접촉을 가진 것은 ‘스위스 벧엘’의 형제들뿐이었다. 그들은, 심지어는 수용소에서 형제들이 석방된 후에도 여러 회중에 어떤 바람직스럽지 못한 경향들이 존재한다는 말을 듣고 여러 회중 앞으로 다음과 같은 회람을 발부하였다.

“독일에 있는 우리의 사랑하는 모든 동료 종들에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친애하는 형제들이여,

“마침내 여러분은 ‘나치’의 멍에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읍니다!—여러분 중의 얼마는 수년 동안 감옥 혹은 집단 수용소에서 또는 다른 형태의 박해로 괴로움을 당해왔읍니다 ···

“그러나, 주의 이름을 위하여 특별한 고난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은 자들은 아무도 그 일에 대하여 자부심을 갖지 않을 것이며, 순교자의 영광을 입거나 감옥이나 집단 수용소에 있지 않던 다른 사람들 위에 자기를 높이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도 자기의 동료 인간들에게 자기의 고난에 관하여 자랑해서는 안됩니다. 집에 남아 있던 형제들 중의 많은 사람들도 여러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었으며 극심한 압력 하에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은 스스로 자기의 고난을 선택할 수는 없읍니다. 주께서 그것들을 결정 혹은 허락하십니다.

“이러한 이유로 친애하는 형제들이여, 불공평하게 되지 말며, 편을 들지 말며, 또는 우리 자신의 사고 방식에 따라 타협을 하거나 기꺼이 그렇게 하려고 하였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을 정죄하지 맙시다. 주께서 우리의 마음을 판단하십니다. 그분 앞에서는 우리가 펼쳐진 책과 같습니다 ···

“‘라이프찌히’ 출신인 ‘에리히 프로스트’ 형제가 여러분의 구역에서의 일들에 대한 지휘권을 맡도록 위임받았읍니다. 그러나, 협회장의 지시에 따르면, 이 마련은 단지 잠정적인 것입니다. ‘프로스트’ 형제는 협회장에게 전파 사업의 진전에 대하여 가능한 한 정규적으로 보고할 것입니다.

“전파 사업은 협회의 새로운 회장, ‘나단 호머 노워’ 형제의 지휘 하에 과거 어느 때보다 더욱 철저히 조직되었으며 큰 발전을 이룩하고 있읍니다! ···

“‘베른’의 성서의 집 가족 ‘에프. 취르헤르’(서명자)”

‘프로스트’, ‘슈바페르트’, ‘바우에르’, ‘젤리게르’, ‘하인닉케’ 및 다른 형제들은 석방된 후 즉시 협회의 재산의 소유권을 다시 찾아 그곳으로부터 사업을 지휘할 생각으로 노력을 경주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후에 소련 당국의 적대적인 태도 때문에 불가능함이 증명되었다.

한편 지부 감독자로 임명된 ‘프로스트’ 형제는 ‘자아르브뤼켄’의 ‘빌리 마코’, ‘비스바덴’의 ‘헤르만 쉴뢰메르’와 ‘알베르트 반드레스’ 그리고 ‘마인쯔’ 출신인 ‘프랑케’ 형제에게 금지령 하에서 그들이 지방 봉사 지휘자로서 일하던 서부 독일 내의 당해 구역내에서 회중들을 조직하고 돌보도록 요청하였다.

동시에 ‘프랑케’ 형제가 ‘슈투트가르트’ 부근에서 소형판 ‘파수대’를 인쇄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종이를 구입하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슈투트가르트’, ‘프랑크프루트’와 ‘자아르브뤼켄’으로부터 ‘라디오’를 통하여 연설을 하기 위한 마련을 하였으며, 그리하여, 왕국 소식으로 대중의 관심을 이끌었다. 마침내 ‘프랑케’ 형제는 ‘비스바덴’에서 두개의 사무실 방을 그리고 일주일 후에는 동일한 건물 내에서 숙사로 쓸 작은 방을 하나 빌리게 되었다.

1945년 말, ‘프로스트’ 형제는 ‘마그데부르크’에서 ‘슈투트가르트’로 가서 기꺼이 여행하는 종들로서 전 시간 봉사를 시작하거나 ‘벧엘’에서 일하고자 하는 충실한 형제들과 조직적인 문제들을 숙의하였다. 협회가 동부 독일의 ‘마그데부르크’에 등록되어 있기 때문에 서부 독일인 ‘슈투트가르트’에 지부를 개설하는 것이 필요하게 보였다.

곧 ‘프로스트’ 형제는 ‘네덜란드’로 향하여 ‘노워’ 형제를 만나서 처음으로 그와 직접 이야기하였다. 그는 도중에 ‘비스바덴’에 들렸으며, ‘프랑케’ 형제가 그에게 그 빌린 두개의 사무실 방을 보여 주자, 그는 즉시 ‘슈투트가르트’의 계획을 취소하고 ‘비스바덴’에 사무실을 개설하기로 결정하였다. 그것은 그 두개의 사무실 방과 ‘프랑케’ 형제의 작은 숙사가 ‘벧엘’ 집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곧 그곳에서 20명의 형제 자매들이 일과 식사를 하게 되었다.

약 1년 후 ‘프랑케’ 형제는 금지 하에서 구속되어 있는 이유로 ‘비스바덴’ 시 당국에 의하여 ‘빌헬미넨 쉬트라세’ 42에 소재하는 방 두개짜리 ‘아파트’ 하나를 제공받았다. 그래서 ‘프랑케’ 형제뿐만 아니라 ‘벧엘’도 그리로 이사하였다. 두개의 방 중에서 더 큰 것이 ‘벧엘’ 집으로 이용되었다. 여호와의 과분하신 친절로 한 자매가 소유하고 있던 같은 건물 내에서 또 하나의 방을 임차하는 것이 가능하였으며, 이 방은 사무실로 사용되었다. ‘노워’ 형제가 독일 형제들에 대한 그의 첫 방문을 실시한 것이 이곳이었다.

형제들은 반복하여 시장을 방문하였는데, 비록 그는 형제들에게 방들을 아니 건물 한 채를 약속하였었지만, 아직도 그 결과가 나타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 회장의 방문이라는 명분을 이용하여, 모든 담당 관리들, 특히 시장에게 힘주어 그 일을 통고하면서, 미국 국민인 협회장이 그들의 책임을 이행하기 위하여 제공받은 사무실이 어떤 것이냐고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좋겠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히틀러’가 금지령을 내렸던 일, 그리고 자기들이 여러 해 동안 투옥되었던 경험 등을 들어서 관리자들에게 증인들 위에 가하여졌던 불공평에 대하여 그들이 자진적으로 보상을 이행해야 할 책임이 있음을 지적하였다. 시장이 “그렇다면, ‘코올헤크’ 건물의 서쪽날개 부분을 쓰시도록 하시지요”라고 말하였을 때, 형제들은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공군의 막사로 사용하기 위하여 건축된 건물로서 전쟁이 끝나기 전에 완성되지 않은 채 사용되어 왔던 건물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그들이 눈여겨 보아두었던 건물로, 이를 차지하려고 수차례 노력하였으나 번번히 실패했었던 것이다.

이제 이러한 정보에 즐거워하면서 그들은 들뜬 마음으로 ‘노워’ 형제의 방문을 고대하였다. 그의 방문시에 필요한 계약을 체결하였으며, 그는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의 회장으로서 그 계약서에 법적으로 서명하였다.

‘뉘른베르크’ 대회

형제들은 회중들을 재조직하고 종이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회중들에게 영적 양식을 마련해 주기 위하여 바쁘게 노력하는 한편, 큰 대회를 열고자 하는 그들의 염원도 커져갔다. 그러나, 그 당시에 그러한 대회를 조직하는 것은 많은 문제의 해결을 필요로 하였는데, 이는 식량 부족과 숙박 시설의 부족뿐만 아니라, 독일이 4개 군사 지구로 분할되어 있고, 각 지구 사이를 왕래하는 것이 극도로 어려웠다는 사실과 관련해서 그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스트’ 형제는 ‘프랑케’ 형제에게 각 점령 지구에서 적어도 하나의 지역 대회를 열 마련을 하고, 만일 가능하다면 그것들 중의 하나는 미군의 지구 내인 ‘뉘른베르크’에서 개최하도록 하라고 요청하였다.

첫 노력이 실패로 돌아간 후, 한 형제가 개인적으로 ‘뉘른베르크’의 관리들을 찾아갔으며, 결국 그곳에서 한 대회를 개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9월 28일과 29일에 열기 위한 마련이 추진되었다. 군사 정부가 마침내 우리에게 ‘뉘른베르크’의 ‘제펠린비이제’(‘제펠린’ 초원)의 사용권을 제공하였다는 것이 발표되었을 때, 형제들 간의 흥분은 더욱 고조되었다.

이 무렵 ‘뉘른베르크’에서 이른바 “전범” 재판이 진행중에 있었고, 그들은 9월 23일에 선고를 받게 되어 있었다. 이 날짜는 수주일 전에 정해졌고 전세계에 발표되었다.

‘뉘른베르크’ 대회를 여는 것이 가능하게 된 후,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형제들은 그것을 하루 연장하여 월요일인 9월 30일에 끝맺도록 결정하였다. 임시 열차를 재조직하고 대회 제 3일을 위한 다른 것들을 마련한 이후에 ‘라디오’와 신문들은 갑자기 ‘뉘른베르크’의 전범 재판에서 내려지게 될 선고가 9월 30일까지는 공포되지 않을 것이라고 전세계에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문제들이 제기되었는데, 이는 미군 군사 정부가 ‘뉘른베르크’에서 ‘데모’가 일어날 것을 두려워하여 통행금지를 선포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 도시에서 아무도 월요일의 공개 강연에 참석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므로 공개 강연은 일요일 저녁 7:30에 ‘프로스트’ 형제가 “시련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란 제목으로 연설하기로 재계획되었다. ‘뉘른베르크’로부터 가외의 3,000명이 이 연설을 듣기 위하여 참석하였다는 것을 들었을 때, 참석한 6,000명의 형제들의 기쁨은 이루 표현할 수 없었다.

비록 미군 군사 정부 관리들이 처음에는 동일한 날 있게 될 전범자들에 대한 언도 공판 때문에 우리의 대회의 제 3일을 유산시키려고 노력하였지만, 결국 승리는 형제들에게 돌아갔다. 장시간의 협상 끝에 군정 관리들은 자기들의 요구를 철회하였던 것이다. 어떻게 그들이라고 그렇게 여러 해 동안 지금 재판을 받고있는 자들을 저항해 온 여호와의 증인들이 평화 속에서 방해없이 자기들의 대회를 끝맺는 것을 금지할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월요일 아침 “세계적인 음모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하지 않음”이란 연설이 행하여졌을 때, “전후 기간을 위하여 마음을 굳세게 함”이란 주제의 그 대회는 또 하나의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대회에 모인 6,000의 형제들이 어떻게 여호와께서 사물들을 교묘하게 조정하셨는지를 깨닫게 되었을 때, 그들이 느낀 느낌이 어떠하였겠는지를 묘사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생각해 보라. ‘나치’ 독재가 붕괴된 후 인류를 위한 참된 평화의 소식을 가지고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이야말로 한때 ‘히틀러’의 열병장이었던 이 들판에서 함께 모일 수 있는 허락을 받은 최초의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대회 제 3일에 여호와의 증인들을 말살하려고 책동하던 살인적인 제도를 대표하는 자들에 대한 사형이 선고되었다는 사실을 그들이 생각하였을 때, 그들의 반응이 어떠하였을 것인지를 우리가 상상할 수 있겠는가? 동 대회 의장은 “‘아마겟돈’ 전쟁에서의 원수들에 대한 하나님의 백성의 승리의 예고편인 이 날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만도 집단 수용소에서의 9년을 상쇄할 만한 가치가 있다”라고 말하였다. 그의 성명은 신문에 발췌되어 세계 전역에 보도되었다.

외국으로부터의 구호 대책

1947년에는 ‘노워’, ‘헨첼’ 그리고 ‘카빙튼’ 형제가 독일의 형제들을 방문할 수 있었다. 그들의 방문 중 토요일과 일요일인, 5월 31일과 6월 1일을 이용하여 ‘슈투트가르트’에서 대회를 개최할 마련을 하였다. 모든 것이 파괴되어 시내에는 사용할 만한 강당이 없었기 때문에, 인근 교외에서 대회 장소를 마련하였다. 약 7,000명이 참석하였다.

‘노워’ 형제는 이 방문 중에 협회가 식품과 의복의 구호품을 계속 보내야 함을 알게 되었다. ‘스위스’의 형제들은 몹시 궁핍한 실정에 있는 독일 형제들을 돕기 위하여 많은 식량과 의복을 보냈으며, 그리하여 그들의 형제 사랑을 나타냈다. 그러나 ‘노워’ 형제는 그들에 대한 깊은 동정심을 느꼈기 때문에 수주 후에 있게 될 ‘로스앤젤레스’ 대회에 모일 형제들에게 그들의 참상을 이야기하고 그들로 하여금 식품과 의복을 보내도록 격려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러나, 독일 형제들은 자기들의 곤경은 별로 의식하지 않았으며, 그러므로 그들은 ‘노워’ 형제가 자기들 중에 있으므로써 절정을 이룬 이 영적 잔치를 여호와께서 자기들을 위하여 준비해 주신 것에 대하여 기뻐하고 감사하였다.

‘노워’ 형제가 미국 형제들에게 독일에서 자기가 관찰한 바를 이야기하고 그들에게 식품을 보내도록 격려하자, 형제들은 140,000‘달라’의 자진적인 헌금으로 응답하였으며, 이 금액은 ‘케어’ 기구(미국 원조 물자 발송 협회)로부터 독일로 보낼 22,000개의 식품 상자를 사는 데 사용되었다. 그에 더하여 그들은 220‘톤’의 의복—남자, 여자 및 어린이들을 위한 양복, ‘드레스’, 속옷 그리고 신발 등을 보냈다.

발송 중에 있다는 소식이 발표되자마자, ‘벧엘’에서는 신속하고 원활한 배분을 위한 준비가 추진되었다. ‘비스바덴’ 교외의 한 여관 방을 빌려서 그곳에서 의복을 분류하고 분배하였다. 6개월 이상 야외 봉사에 활동한 모든 사람들—즉 단순히 ‘케어’ 꾸러미를 받기 위하여 보고한 것이 아닌 사람들—이 등록되었다. 그들 각자를 기다리고 있는 풍부한 양의 귀중한 식품 상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분배가 시작되자마자, 지부에는 형제들이 보내는 감사의 편지가 산더미처럼 쌓이게 되었다. 형제들이 받은 선물에 대하여 나타낸 인식과 또 그들이 여호와와 기증자들 즉 미국 형제들에게 돌리는 감사의 광경은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자주 어떤 경우에는 일을 멈추고 이러한 편지에 감동하여 눈에 고인 눈물을 닦곤 하였다. 일예로서 한 아버지는 구호품 상자를 열고 내용을 보고는 자기의 12세된 아들과 함께 무릎을 꿇고 형제들로부터 받은 이러한 사랑의 선물에 대하여 기도로써 여호와께 감사하였다.

‘노워’ 형제는 또한 일종의 선물로 거의 150만부의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찌어다」, 「신세계」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책을 독일로 보낼 마련을 하였다. 이러한 서책을 배부하여 들어온 돈으로 기금을 마련하여 지부는 사업을 추진시킬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여호와께서는 독일에서의 사업이 다시금 수행될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것을 돌보아 주셨다.

전후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전진함

1948년은 남부 독일과 ‘루르’ 지방에서 빈약한 식량 사정을 항의하여 일어난 일련의 파업과 함께 시작되었다. 육류와 지방질의 배급은 더욱 감소되었다. UNO에서는 하루에 2,620‘칼로리’의 배급이 필요하다고 선언한 바 있지만, 실제로 구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곳에서는 이 보다 훨씬 낮았다.—불과 1,000‘칼로리’ 혹은 어쩌면 700‘칼로리’ 정도로 낮은 분량이었다. 거의 모든 사람은 기아 선상에서 허덕이고 있었으며, 그 상태는 계속 악화되어, 일반적으로 비통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증인들은 충만한 열의와 열정으로 새해를 시작하였다. 총 38,682명이 참석한 가운데 1월 1일에 각 회중에서 특별 집회가 열렸으며, 같은 달에는 전달보다 2,183명이 더 많은, 27,056명의 전도인이 야외 봉사를 보고하였다. 때는 연례 「파수대」 운동이 시작될 때였으나, 이곳 독일에서 필요한 것은 우리 자신들을 위한 개인용 「파수대」였다. 그것은 난제였으며, 종이의 부족과 기타 모든 어려움들로 말미암아 야기된 비참한 환경을 비추어볼 때 특히 그러하였다. ‘노워’ 형제는 충분한 분량의 「파수대」를 ‘스위스’에서 인쇄하여 독일로 보내서 1월 중에 모든 전도인이 개인용 「파수대」를 가지게 될 뿐만 아니라, 모든 회중에 그 분량 외에 가외로 더 공급하여 「파수대」 연구에 정규적으로 참석하는 많은 사람들도 개인용 「파수대」를 구할 수 있게 하는 마련을 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영적 양식을 공급받았다.

이 당시 독일의 대부분의 도시들은 부서진 돌 무더기 바로 그것이었다. ‘카젤’의 경우가 바로 그러하였다. 이 도시는 거의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철거 작업을 책임진 도시 계획 위원회가 최초로 추산한 바에 따르면, 그 도시에서 돌부스러기만 제거하는데 만도 23년이 소요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대회를 열기로 계획한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이 도시가 대회를 위하여 우리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카알스비이제’, 즉 50개 이상의 커다란 포탄 구멍을 안고 있는 넓은 초원 뿐이었다. 그러나 집단 수용소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형제들은 자주 반복된 관리들의 회의적인 비평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표정으로 일하러 나섰다. 그들은 원시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부근의 파괴된 건물들로부터 약 10,000입방 ‘미터’의 돌과 돌부스러기를 날라다가 포탄 구멍을 메웠다. 이 일은 거의 4주가 걸렸다.

이 4주는 하나의 시험임이 증명되었다. 왜냐 하면, 그들이 막 작업을 시작하자마자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대회가 시작할 때까지 좀처럼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록 소나기가 퍼부었지만 그들은 고된 작업이나 비가 그들의 의기를 꺾게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들에게 이러한 일기 속에 ‘카알스비이제’에서 그러한 대회를 개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할 때 그들은 대회가 시작되기만 하면 일기가 좋아질 것이라고 낙관적인 대답을 하곤 하였다.

신속하게 진행된 준비 작업 중간에 화폐 개혁이 발표되었다. 가장 불유쾌한 불편들이 예상되었다. 6월 21일에 새로운 화폐가 유통되었으며, 삼개 서방 지구의 모든 시민들 각자는 낡은 60‘라이히스마르크’에 대하여 신 화폐로 40‘마르크’를 받았다. 한달 후에 그들은 가외의 20‘도이취마르크’를 받았다. 은행 계정은 ‘라이히스마르크’로 적립되었던 옛 금액의 10분의 1로 감소되었으며, 대부분의 경우에, 잠시 동안 동결되어 있었다.

신 화폐의 가치는 곧 분명해졌다. 갑자기 많은 물자의 매매가 가능하게 되었고, 여러 해 동안 없이 살아온 여러 가지 필수품들을 이제는 상점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형제들은 영적 필요를 의식하였으며, 자기들의 ‘도이취마르크’를 대회 참석을 위하여 기꺼이 투자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카메라’등 가치있는 물건을 팔았다. 여호와의 손은 왕국의 이익을 첫째로 두는 자들을 돕기에 결코 짧지는 않았다. 예를 들면, ‘뮨헨’의 ‘노이페르트’ 자매는 이렇게 보고한다. “나에게는 설탕도 없었고 그것을 살 능력도 없었기 때문에, 내 양봉장은 위험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내게는 ‘카젤’이 더 중요하였다. 그리고 나는 실망하지 않았다. 대회 후 돌아온 나는 벌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으며, 그래서 그 해에 약 2,200‘파운드’의 꿀을 수확할 수 있었다.”

지부로부터 책임있는 형제들이 ‘카젤’에 도착하였을 때, 이사야 12:3의 ‘너희가 기쁨으로 ··· 물을 길으리로다’란 말씀이 그들을 맞아 주었다. 형제들은 이 말씀을 현수막에 써서 그 초원 입구에 걸었던 것이다. 운동장을 더욱 빨리 마르게 하기 위하여 아직도 남아있는 포탄 구멍에서 바쁘게 물을 길어내던 형제들은 ‘너희가 물통으로 ··· 물을 길으리로다’라고 그 성귀를 바꾸어서 그들을 맞이하였다.

17대의 임시 열차가 ‘카젤’로 운행되었으며, 수주일간 퍼부은 비마저 멈춘 금요일 아침, 청청한 하늘에 뜬 태양은 15,000명이 넘는 참석자들 위에 빛을 내려쪼였다. 참석자 수는 둘째 날이 되어 17,000에 이르렀으며, 안내인들이 대회장 주변의 길에 서 있는 ‘카젤’ 시민들을 제외하고도 23,150명을 계수한 공개 강연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카젤’의 신문들은 “‘카알스비이제’에 모인 25,000 내지 30,000명” 운운하는 보도를 하였다.

심지어 시장도 참석하여 형제들에게 짧은 담화를 하였는데, 형제들의 작업이 그에게 크게 인상을 심어 주었던 것이다. 좋은 일기가 계속되었으며, 둘째날 대회장을 방문한 ‘가톨릭’교인인 경찰서장은 형제들에게 “여러분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게 큰 축복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 다음 잠시 멈추었다가 이렇게 부언하였다. “우리들보다도 더 큰 축복을.”

이 대회를 절정으로 이끈 여러 가지 일들 중의 하나는 참석한 각자가 한 부의 「“진리가 너희를 자유게 하리라”」 책과 두부의 「만민의 환희」 소책자를 무료로 받은 것이었다. 또 한 가지는 야외 봉사이다. 형제들은 임시 열차를 타고 부근의 모든 읍, 심지어는 멀리 ‘파데르보른’까지 나가서 활동하였으며, 그리하여 이 주교의 도시를 하루만에 완전히 봉사하였다. 이 대회에서 1,200명의 새로운 형제 자매가 침례를 받았다.

여호와의 백성들의 영적 유익을 첫째로 두려는 자진성의 결과는 평화, 연합 그리고 증가였다. 대회가 있던 달인 7월 중에 33,741명의 전도인이 봉사 보고를 하였으며, 그 수는 8월에 36,526명으로 증가하였다. 그리하여 동 봉사년도는 83‘퍼센트’의 증가로 막을 내렸으며, 회중 수도 증가하여 10월 15일에는 새로운 순회구의 개편이 이루어져서, 이제 70개가 있게 되었다.

최초의 평판 인쇄기들이 ‘비스바덴 벧엘’에 설치된 것도 1948년의 일이다. 동시에 많은 분량의 종이가 원조물자로서 ‘브루클린’으로부터 도착하였기 때문에 대규모로 인쇄를 시작하는 일이 가능하였다. 두대의 인쇄기가 오랫 동안 밤낮으로 가동되었다. 그러나 많은 외부 사람들은 그 당시 그러한 인쇄기를 생산할 수 있는 회사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그러한 인쇄기를 두대나 구할 수 있었는지 매우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기계들은 이전에 백만장자였던 사람의 소유였는데, ‘다름쉬타트’의 폭격 때 크게 상했던 인쇄기였다. 1945년 후 그 사람과 지배인이 돌무더기 속에서 이 쇠덩어리들을 파내서 그 기계들이 원래 만들어진 ‘라인’ 주, ‘요한네스베르크’에 있는 공장으로 가져갔다. 할 일이 있게 된 것을 기뻐한 그 공장에서는 이 기계들을 완전하게 복구시켰다. 한편, 얼마 후 한 때 대인쇄업자였던 이 사람의 아내가 된 그의 비서가 진리를 배우게 되었으며, 그의 영향력으로 말미암아 그 인쇄기들은 협회에 믿을 수 없을 만큼 저렴한 값으로 팔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일이 있기 전부터도 형제들은 ‘카알스루에’의 한 작은 인쇄소를 이용하여 거의 1년 반 동안 매월 약 4내지 6천부의 잡지를 인쇄할 수 있었다. 그곳은 ‘나치스’의 공장이었던 곳으로 미국 점령군은 ‘나치’ 독재에 의하여 박해를 받았던 사람들에게 사용권을 줄 목적으로 접수하였던 것이다. ‘벧엘’ 성원들도 그러한 집단에 속하기 때문에 그 작은 인쇄소는 그들 스스로 관리를 맡는다는 조건으로 형제들이 사용하도록 이관되었었다. 그리하여 ‘에르빈 슈바페르트’에게 관리하는 책임과 우리의 자체 공장에서 일을 계속할 수 있게 될 때까지 그곳에서 「파수대」를 인쇄하는 일을 감독하는 책임이 부여되었다.

한 가지 특별한 문제는 분배하는 일이었다. 비록 전도인의 수는 매월 증가하였지만, 그렇다고 군정 당국이 우리에게 종이 공급을 증가시켜 주지는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매월 새로운 분배 계획을 작성해야 하였으며 그리하여 매 6, 7명의 전도인 당 한부의 「파수대」가 마련되곤 하였다. 이러한 실정이 ‘노워’ 형제가 ‘비스바덴’에서 협회를 ‘펜실베이니아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의 지부 조직으로 확립시키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기울이게 된 이유 중의 하나였다. 그렇게 하면 계속 증가 일로에 있는 연구 재료에 대한 형제들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독일 외부로부터의 신속한 종이 공급이 가능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호별 방문 사업을 위해서도 서적이 필요하였다. 주로 1948년까지 형제들이 사용할 수 있는 출판물은 주로 소책자들로, 양도 극히 적었으며, 그것을 한 두 주일씩 빌려 주곤 하였다.

1949년, 계속 증가된 종이 공급은 인쇄물의 분량을 상당히 증가시키는 것을 가능케 하였다. 1949년 1월 1일호 「파수대」는 40,000부가 인쇄되었는데, 이러한 숫자는 계속 증가하여 4월 15일호는 80,000부에, 5월 1일호는 100,000부 그리고 5월 15일호는 150,000부에 달하였다.

독일의 4개 지구 전역에 걸쳐서 1947년도 기념식에 35,840명이 참석한데 반하여, 1년 후에는 48,120명이 참석하였고 1949년에 기념식에 참석한 사람의 수는 64,537명이었다. 이 활동에 있어서도 때때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예를 들면, ‘괴핑겐’ 근처 ‘홀츠하임’에서는 1948년도 기념식이 경찰의 “보호”하에 열렸다. 왜 그랬는가? ‘오이겐 뮬라이스’ 형제는 이렇게 설명한다. “인근 지역에서의 발진 ‘티푸스’의 발병으로 말미암아 복음 교회에서는 목사가 성찬식을 기념하지 말라는 금지령을 받은 일이 있었다. 우리가 우리의 기념식을 개최하기로 계획했던 학교 교장은 이제 우리가 그 일을 진행하는 것을 금하려고 노력하였다. 보건성이 우리에게 허락을 해 주기는 하였지만, 그 전염병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준수해야할 몇가지 제한 조건을 제시하였다. 그리하여 이러한 제한 조건이 지켜지는가를 확인하기 위하여 한 경찰관이 파견되어 우리의 기념식에 참석하였던 것이다.”

1949년 초에 ‘비스바덴’ 인쇄소는 확장되어, 8대의 인쇄기가 가동케 되었으며 그 중 두대는 밤낮으로 움직였다. 그 해에 약 150만부의 서책이 ‘브루클린’으로부터 발송되어 왔으며, 그 책들을 배부한 결과 새로운 재방문과 성서 연구를 위한 더욱 광범위한 기초가 마련되었다. 전도인의 대열은 다달이 증가하였으며, 1949년 8월에는 43,820명이 보고하였다. 동 봉사년도에는 33‘퍼센트’의 전도인의 증가를 달성하였다.

공산주의 동부 독일에서의 반대

제 2차 세계 대전 끝에 소련에 의하여 점령되어 소련 군사정부의 통치를 받고 있던 동부 독일과 ‘베를린’ 시 동부 지구에서의 사업의 발전상은 전혀 그 양상이 달랐다. 동 군정 관리들 중의 많은 수는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하여, 그들이 ‘나치스’에 의한 야수적인 박해를 견디어 냈다는 것 외에는, 통 아는 바가 없었다. 시초에는 비교적 적은 방해 뿐이었으나, 회중들이 번창하기 시작하고 많은 사람들이 왕국 소식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함에 따라, 소련 군사 정부 당국은 우리의 사업이 자기네가 통제할 수 없는 것 같다고 의심하게 되었다. 종종 우리의 공개 집회에는 군정 당국이 후원하는 공산당의 정치 집회보다 참석자들이 더 많곤 하였다.

지방 소련 군정 관리들은 회중들과 개개의 전도인들의 활동을 공공연히 억제하기 시작하였다. 일부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은 그 기회를 놓칠세라 자기들이 공산주의자들의 좋은 친구들임을 나타내기에 급급하였다. 그들은 형제들이 인류의 유일한 희망으로서 하나님의 왕국을 전파함으로써 당국을 반대하며 동부 독일의 황폐된 경제에 대한 군사 정부의 복구 노력에 일종의 소극적 저항을 하도록 국민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고 중상하였다.

이러한 방해는 ‘마그데부르크’의 협회 사무실에서 일하는 형제들이 동부 ‘베를린’에 있는 소련 군사 정부 본부로 접근하도록 촉진하였다. 처음에는, 그들의 노력이 일반적으로 시행되어 온 “아무 것도 금지하지 않고, 아무 것도 허락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라 다루어졌다. 그러나 형제들은 마침내 정부로부터 여호와의 증인들이 합법적으로 활동하고 있음을 확증하는 증명서를 얻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방해가 일어나는 곳에서 이러한 서류를 제시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는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다른 관리들은 본부는 멀리 있고, 그곳에서는 자기들이 지배자라고 느끼는 것 같았다.

종전 후, 종래의 독일 제국의 수도였던 ‘베를린’은 4개의 연합 승전국에 의하여 부분적으로는 독립을 유지하며 부분적으로는 연합 정부의 행정하에 있게 되는 네개의 지구로 분할되었다. 그러던 차에 1948년에 시작된 경제 개혁 이후에 소련 군대가 ‘베를린’의 서방 지역들에 대한 봉쇄를 단행하자 분쟁이 격화되었다. 서방 연합국들은 통제의 대상이 아닌 공중 회랑에 대한 자기들의 권리를 사용함으로써 그 봉쇄를 돌파하였으며, 그리하여 세 지구의 시민들에게 “공중 가교”를 구축함으로써 생활 필수품들을 공급하였다. 협정이 체결되고 소련 군대가 봉쇄를 풀 무렵, ‘베를린’은 확정적으로 분단된 도시가 되었으며 동부 ‘베를린’은 공산주의 통치 하에 그리고 서부 ‘베를린’은 독일 연방 공화국과의 유대 하에 있게 되었다.

1948년 ‘라이프찌히’에서 지역 대회를 개최할 계획을 하였지만, 소련 군정 관리들은 허가를 내 주길 거부하였다. 그리하여 ‘베를린’의 영국 지구에 아름답게 자리잡은 ‘발트뷔네’(숲의 무대)를 사용하기로 계획하였다. 관련된 어려움에는 끝이 없었다. 화폐 개혁과 악천후 뿐만 아니었으며,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독일 전역으로부터 수천명이 봉쇄된 ‘베를린’ 시로 들어올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위태로운 정치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우리는 그 도시로 임시 열차를 운행할 허락을 받았으며, 첫날에 거의 14,000명이 운집하였다. 셋째날에는, 16,000명 이상이 참석하였으며 일요일 오후 공개 강연에는 25,000명 이상이 참석하였다. 침례로써 자기들의 헌신을 상징한 새로운 전도인들의 수는 1,069명이었다. 여호와께서는 두 진영 사이의 분쟁 바로 초점에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기름진 것들이 베풀어진 식탁을 준비하신 은혜로운 주인이심을 증명하셨다.

공산주의 동부 독일 내의 ‘마그데부르크’에 소재한 협회의 재산 상태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었는가? ‘바르트투름 쉬트라세’ 17-19에 있는 건물들은 1945년 종전 직후에 환속(還屬)되어 이미 95‘퍼센트’가 복구되었으며, 한편 ‘라이프찌게르 쉬트라세’ 16에 위치한 한 건물의 90‘퍼센트’도 수리되었다. 우리 형제들이 파괴된 건물들을 재건하였으며, 보수없이 봉사를 자진하였다. 1949년 6월 24일의 ‘작센’ 주 정부의 결정에 따라, ‘푸흐스베르크’ 5-7와 ‘바흐트투름 쉬트라세’ 1-3에 소재한 재산의 나머지도 협회로 돌아왔다. 그 달에 ‘마그데부르크’의 지부 사무실의 관할 하에 있는 동부 독일 내의 전도인의 총수는 16,960에 달하였다.

성서 진리의 수요는 굉장하였다. 여행하는 감독자들의 보고에 따르면 종종 전도인 수가 30내지 40에 불과한 회중에서 공개 집회에 100내지 150명이 참석하곤 하였다. 큰 도시에서는 강연의 참석수가 천여명에 달한 일도 비일비재하였다. 많은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으며, 한 회중에서는 전도인 당 연구 평균이 3.8이었다. 여행하는 감독자들은 여행하는 것이 항상 쉽지는 않았다. 개중에는 낡아빠진, 그것도 빌린 자전거를 이용하여 여행한 형제들도 있었으며, 그러한 자전거의 어떤 것은 고무 ‘타이어’도 없이 단지 쇠 테두리 뿐이었다. 그들은 장거리를 여행해야 하였다. 그리고 또한, 배급표 문제도 있었다. 한 순회 감독자는 그가 “전도인”임을 표시하는 노동 사무소가 발급한 증명서를 연장받지 못하였는데, 이는 그가 배급표를 받지 못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고 보고하였다.

다른 한 순회 감독자는 이렇게 보고하였다. “매 강연 때마다 참석자들 중에는 몇명의 첩자들이 끼어 있었다. 한때 형제들은 민간인 복장을 하고 나타난 한 남자에 대하여 안심을 할 수 없었다. 강연이 시작되기 전에 나는 그에게 다가가서 ‘실례합니다. 경찰관님, 지금 시간이 어떻게 되었나요?’ 하고 물었다. 그는 대답해 주었으며, 내가 자기를 부른 호칭에 놀라는 것같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민간인 복장을 한 경찰관임을 알게 되었다.”

소련인들과 독일인 공산주의 관리들의 적의는 계속 증가하였다. 동부 독일에 살고 있는 형제들을 위하여 지역 대회를 다시 한번 1949년 7월 29일부터 30일까지 ‘베를린’ ‘발트뷔네’에서 개최하기로 계획하였다. 이 대회는 몰려들고 있는 박해란 구름의 그림자 아래서 열렸지만, 온전한 마음으로 여호와 섬기기를 계속하려는 우리 형제들의 결심을 나타내 주었다. 가능한 한 조용히 그리고 번잡한 일 없이 준비가 진행되었다. 동부 독일에서는 종교적 자유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공격이 이미 여러 건 발생하였다. 예를 들면 ‘작센’ 주에서는 한 순회 대회가 마지막 순간에 취소되었으며, 폭동의 결과로 얼마의 증인들이 부상을 당하였다.

우리는 8량의 임시 열차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런데, 출발하기 불과 수시간 전에 열차들이 취소되었을 때 약 8,000명은 이미 승차권을 위하여 100,000‘도이취-마르크’를 지불한 후였다. 철도 당국은 2주일이 지나도록 승차권 대금 환불을 거부하였다. 수천명의 증인들은 역에서 그 임시 열차를 기다렸으나, 취소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뿐이었다. 경찰은 ‘베를린’으로 향하는 모든 도로를 봉쇄하였고 대회로 가는 사람을 찾아내려고 모든 자동차, ‘버스’ 및 ‘트럭’을 수색하였다. 그러나 대회 첫날 저녁에 적어도 16,000명이 참석하였다. 일요일의 공개 강연에는 33,000명 이상이 참석하였다. 적들의 사악한 공격과 노력은 그들에 대하여 거대한 증거가 되는 방향으로 작용하였을 뿐이다.

우리를 향한 독재적인 조치들은 곧 알려지게 되었으며, 신문 기자들에게는 아무런 초대장을 보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증인들이 ‘베를린’에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는 공산주의자들의 시도에 관한 선풍적인 기사들을 취재하려고 다수의 기자들이 나타났다. 토요일 저녁 지부 감독자, ‘에리히 프로스트’는 대회에 모인 수천명에게 결의문을 낭독하였으며 그것은 ‘베를린’의 미국 지구 방송국(RIAS)을 통하여 보도되었다. ‘프로스트’ 형제는 이러한 말로 그들의 담대한 입장을 약술하였다. “‘볼세비키’주의는 다른 제도보다 훌륭한가? 공산주의자들은 자기들이 ‘히틀러’가 시작한 것을 완성시켜야 한다고 믿고 있는가? 우리는 ‘나치스’를 두려워하지 않은 것처럼 공산주의자들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베를린’ 지역 대회에서 통과된 결의문은 ‘작센’ 주에서의 종교적인 봉사에 대한 비민주적이며 비헌법적인 금지와 제한 그리고 그러한 목적으로 사용되는 방들을 압수한 데 대한 날카로운 항의를 포함하고 있었다. 동 결의문은 3월 3일자의 한 부수적인 서한과 함께 ‘베를린’ 주재 소련 독일 군사 정부 수뇌부로 발송되었다. 또한 동서부 ‘베를린’ 그리고 동서부 독일에 있는 4,176명의 공공 관리 또는 일간지, ‘라디오’ 방송국, 신문 통신사 등등의 관계자들에게도 사본을 송부하였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의 이목은 공산주의자들의 만행과 참 그리스도인들의 꾸준함에 쏠리게 되었다. 그 대회 한 달 후인 8월에 동부 독일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전의 기록보다 568명이나 더 많은, 새로운 전도인 최고수에 도달하였다!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한 운동의 불길은 계속하여 더욱 범위를 넓혀갔다. 종교의 자유는 더욱 더 제한을 받았다. 성서 연구를 사회하는 데 대한 금지령이 발표되었으며, 경찰관들이 종교 예식을 해산시켰고, 형제들은 그들의 종교 때문에 국가 혹은 지방 공무원 직에서 해고되었다. 참 종교적 자유의 보장을 탄원하는 탄원서가 1950년 2월 18일에 ‘도이치’ 민주 공화국 정부에 제출되었다. 그 결과는 더 많은 수의 종교 예식의 비헌법적인 해산, 서적의 압수 및 몇몇 지도적 전도인들의 체포 사건들 뿐이었다. 1950년 6월 27일, 동부 독일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주 수상 ‘오토 그로테볼’을 수신인으로 한 또 하나의 탄원서를 정부로 송부하였다. 그 뒤 공산주의의 무자비한 공격이 맹습해 왔다.

1950년 8월 30일 이른 아침, 두명의 소련인 관리의 지휘하에 공산주의 경찰력이 ‘마그데부르크 벧엘’로 휘몰아쳐 들어왔다. 그들은 한 사람을 제외하고 모든 형제들을 체포하였는데, 그들은 그 한 형제를 “집지키는 자”로 남겨둔 것이다. ‘마그데부르크’의 ‘왙취 타워 협회’에 금지령을 통고하는 내무부로부터의 편지는 8월 31자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9월 3일까지는 경찰은 이 홀로 남겨진 형제, “집지키는 자”에게 이 공한을 전달하지 않았다.

‘벧엘’에 있었던 자매들의 목격담은 그 8월 30일 아침에 발생한 일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아침 5시경 경보가 울렸다. 나는 재빨리 옷을 입었다. ··· 아래 층으로 내려가기 위하여 문을 연 나는 두명의 경찰관과 마주쳤는데 그들은 나에게 방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런 다음 한 경관이 들어와서 옷장을 열라고 말하였다. 나는 그가 신분증을 제시할 때까지 거부하였다. 그들은 모든 것을 찢어버렸다. ···” 어떻게 경찰이 ‘벧엘’ 집으로 들어왔는가? 다른 자매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저 23호실의 창문을 내다보고 한 경관이 정문을 기어오르는 것을 목격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 날 밤 경비원은 그들에게 문을 열어 주길 거부하였다. 내 판단으로는 그 집단은 적어도 25내지 30명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들 중 아무도 제복을 입고 있지 않았다.”

그 당시 ‘마그데부르크 벧엘’에서 봉사하고 있었으며 지금도 ‘비스바덴 벧엘’에서 충실히 봉사하고 있는 ‘벤데르’ 자매는 자기 경험을 이렇게 진술한다. “1950년 8월 30일 아침 4시와 5시 사이에 동부 독일 경찰이 ‘벧엘’ 집으로 몰려 왔다. 모든 사람은 자기들의 방에 머물러 있어야 하였지만, 오전 10시가 될 무렵 나는 일층 ‘발코니’에서 화재 시에 사용하는 탈출구를 통하여 내려가서 우리의 소유지와 이웃의 소유지 사이의 울타리를 기어서 통과하여 경찰의 눈에 뜨이지 않게 ‘벧엘’을 빠져 나왔다. 거리에서 경찰을 보았지만, 태연히 그 이웃 집을 나와서 협회의 기록의 일부가 보관되어 있는 한 형제의 집으로 갔다. 나는 이것들을 가지고 나왔으며 한 형제가 나를 ‘베를린’으로 태워다 주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얼마의 기록들을 구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모든 서적들은 압수되었으며 협회의 ‘트럭’과 함께 반출되었다. 부엌에 보관되어 있던 식품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자매들만이 자기들의 배급표를 소지할 허락을 받았다. 한 목격자는 이렇게 보고한다. “한편 그들은—우리가 보고 있는 동안—형제들을 둘씩 조용히 데리고 갔다. ···”

박해의 물결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경찰이 한 형제를 체포하러 왔을 때, 그는 ‘나치’ 집단 수용소에서 착용하도록 강요당했던 줄진 “얼룩말 옷”을 입고 그들을 맞이하였다. 어처구니없는 재판들이 행하여졌으며 다시 한번 여호와의 증인들의 사업은 지하로 후퇴하게 되었다.

‘로타르 바그네르’는 1950년에 장기간의 금고형을 선고받은 형제들 중의 하나였다. 그는 7년간의 독방 감금 기간 중에 어떻게 자기의 성실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를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묘사한다.

“1950년 8월 30일 나는 ‘메클렌부르크’, ‘플라우’에서 체포되었으며, 1950년 10월 4일에 ‘베를린’의 ‘도이치’ 민주 공화국 고등 법원에 의하여 15년의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그 후 1956년 ‘항가리’의 소요로 말미암아 10년으로 감형되었다.

“그 10년(그리고 그 형기로부터 삭감되지 않은, 조사받는 동안 구류되어 있던 6주)을 나는 ‘브란덴부르크 괴르덴’ 형무소에서 보냈다. 그곳에서 나는 1960년 10월 3일에 석방되었다.

“이 기간 중에 나는 독방에 감금되어 7년을 보냈다. 첫 3년 동안에 내가 바깥 세계와 가졌던 유일한 접촉은 15행으로 된 타자 용지의 반 만한 크기의 편지 하나 뿐이었는데, 나는 매월 그러한 편지를 쓰고 받을 허락을 받았으며—그러한 허락은 편지의 내용을 경찰이 승인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었다. 1958년까지 사역은 특권으로 간주되었으며—그러므로 나는 일을 하도록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1958년부터 그것은 형벌의 일종으로 간주되었으며—그 이후 나는 일을 해야 하였다.

“누구든 그렇게 여러 해 동안 독방 감금에 처해지게 되면 다른 여러 가지 괴로움 중에서도 대항하여 싸우지 않으면 안될 한 가지 주된 적을 만나게 되는데—그것은 시간이다. 시간은 정복되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이 시간 문제를 해결하였다. 연합이란 힘을 주며, 이것은 시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도합 15년에 달하는 수감 기간 전체를 하나의 단위로 고려한다면, 이러한 분량의 시간으로 말미암아 압도되게 마련이다. 왜냐 하면 그것은 우리의 상상이 미치지 못하는 분량이며 이러한 광대한 기간의 시간은 괴물처럼 당사자를 마주치게 되기 때문이다. 시간을 지배하며 복종시키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 세상의 통치자들이 자기들이 지배할 수 없는 다수의 민중을 다스리려고 노력할 때 그들은 종종 분할하여 통치하라! 는 원칙을 따른다.

“시간과 관련하여 나는 그 원칙을 적용하였다. 즉 나는 시간을 분할하였다. 나는 몇년 혹은 몇개월로 그렇다, 심지어는 몇주 혹은 며칠로도 따지지 않고, 기껏해야 몇시간으로 따졌다. 아침에 7시쯤 일어나면 나는 오늘 무엇을 할까? 가 아니라 9시까지 무엇을 할까? 하고 자문하였다.

“그러자 갑자기 모든 것이 다르게 보였다. 한두시간이 두렵지는 않았다. 나는 그 정도는 쉽게 지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또 다른 문제가 남아있었다. 즉 무엇으로 그 시간을 채울 것인가? 하는 것이다. 종이와 연필을 구할 수도 없었다. 꼭 해야 할 유일한 일이라고는 감방을 청소하는 것과 식사하는 것 뿐이었다. 이 두 가지 일을 가능한 한 철저히 그리고 천천히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하루 온 종일을 채울 수는 없었다. 자연히 개인 연구로부터 국제 대회, 호별 방문 봉사에서 공개 강연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의 신권적인 봉사를 가능한 한 광범위하게 몰두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하루 중에는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는 시간이 한두 시간쯤 남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으며, 부주의, 실망 혹은 낙담으로 인하여 하루 종일 힘들여 쌓아놓은 모든 것을 쉽게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시간은 가장 위험하였다.

“어느 날 나는 하나의 ‘시계’를 발견하였는데, 그것은 여러 해 동안 이 위험스럽고 비생산적인 시간을 유용한 방법으로 사용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나는 식사 시간까지 아직도 두시간이 남아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감방 안에서 앞뒤로, 앞으로 다섯 발자국 그리고 뒤로 다섯 발자국을 걸었으며 그렇게 하는 동안 왕국 노래들을 불렀다. 내가 30번째 노래를 끝마쳤을 때 문이 열리고 식사가 들어왔다. 나는 노래의 가사에 집중했었으며, 시간의 흐름을 깨닫지 못했었던 것이다. 그것은 여러 해 동안 단조로움과 낙담을 경험하는 일로부터 나를 구해 준 하나의 발견이었다. 수주일 동안 나는 왕국 노래의 보고를 완성시키는 일에 집중하였다. 가사를 정확하게 알 수 없을 때에는 나는 단순히 한두 소절을 지어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세상 노래의 곡조를 사용하여, 그러한 곡조에 신권적인 가사를 지어 붙여서 왕국 노래들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나의 수집 목록 속에는 모두 번호를 붙인, 내가 부를 수 있는 100곡의 왕국 노래가 들어 있게 되었다. 한 노래는 정확하게 4분이 걸렸으며, 따라서 나는 일정한 시간을 보내려면 정확하게 몇 곡의 노래를 불러야 하는지를 계산할 수 있었다. 그 여러 해를 지나는 사이 나는 매일 적어도 2시간씩 노래를 불렀으며, 그것은 왕국 노래 30곡을 부르는 시간이다. 그리하여 나는 다른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 종일 노래만 불러도 되는 가능성을 지니게 되었다. 우리의 왕국 노래들은 격려적이며 세워 주는 사상을 참으로 풍부하게 포함하고 있다! 노래의 가사들을 골자로 사용한다면 쉽게 각 노래를 가지고 연설을 짤 수도 있으며—이는 영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일 없이 시간을 채울 수 있는 부가적인 가능성을 지니는 것이다. 참으로 우리의 왕국 노래들은 때를 따른 양식이다.

“나는 여호와의 영의 도움으로 그분의 조직으로부터 단절되어 있던 그 십년 동안 내가 영적으로 강함을 유지할 수 있었음에 대하여 여호와께 깊이 감사한다. 나는 우리에게 어떤 영적 양식이 어떤 때에 어떤 가치가 있을 것인지를 우리는 알지 못함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영적 양식에 대하여 합당한 인식을 나타내도록 모든 사람을 격려하고 싶다. 우리가 제때에 정규적으로 영적 양식을 섭취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홀로 처하게 될 특별한 어려움이 있게 되는 시기에 우리로 하여금 여호와께 신뢰를 두고 그분의 편에서 확고하게 인내하도록 도움을 줄 것이다.”

1955년 9월 1일부터 1961년 8월 31일까지 협회는 서부 독일에 아름다운 지부를 유지하였었으며, 그러한 마련은 이 분할된 도시의 특별한 상황에 더욱 훌륭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가능케 해 주었다. 그것은 또한 서부 ‘베를린’과 동부 독일 사이에 긴밀한 조직적인 연결을 유지하는 훌륭한 마련임이 증명되었다.

동부 독일과 동부 ‘베를린’과 서방측에 살고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 사이의 이러한 유대는 증인들이 직접적으로 어찌할 수 없었던 1961년에 일어난 사태의 변화로 말미암아 불리한 영향을 입었다. 전쟁 직후부터 점점 증가하는 피난민들의 물결이 일반적으로 그 체제의 정책에 대한 불만 때문에, 동부 독일을 떠나서 서부 ‘베를린’과 서부 독일로 밀려들었다. 동부 독일 당국은 자국의 국민들이 국외로 여행하는 것을 허락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피난민들로서 비밀히 “녹색 국경”을 넘어갔다. 당국은 국경의 통제를 증가하고, 기차 안에서 그리고 거리에서 사람들을 검문하고 또한 “공화국을 탈출하는 일”에 대한 더욱 엄격한 법들을 통하여 이러한 피난민의 흐름을 막아보려고 노력하였다. 서방측으로 넘어가는 비교적 편리한 길은 ‘베를린’의 동부 지구를 통하는 것이었다. 1961년 상반기에 이르러서는 피난민의 흐름이 매월 20,000명으로 증가하였으며 7월에는 30,000명을 능가하기에 이르렀다. 총계 300만 이상의 주민들, 즉 전체 인구의 6분의 1이 동부 독일에 있는 자기들의 재산과 소유물을 버리고 피난민으로서 서부 ‘베를린’과 서부 독일로 탈출하였다.

자기들의 구역을 더 이상 탈주하는 일을 막기 위하여 공산주의 당국은 가혹한 조치를 취하였다. 1961년 8월 13일 아침 일찌기 그들은 그 도시의 동부 지구와 서부 지구 사이의 50‘킬로미터’ 길이의 경계선을 따라 그리고 세 서방측 지구와 동부 독일 사이의 120‘킬로미터’ 길이의 경계선을 따라 ‘시멘트’와 철조망으로 장벽을 구축하기 시작하였으며, 공지(空地)로 닦은 “죽음의 구역”과 자동 경보 장치를 설치하고 사살 태세를 갖춘 경비병을 배치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서부 ‘베를린’ 주위의 올가미를 단단하게 조여든 것이며 통제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그 도시의 양 지역 사이를 왕래하던 빈번한 교통을 갑자기 차단시켰다. 동부 독일에 살고 있는 증인들은 더는 서부 ‘베를린’으로 여행함으로써 서적을 구하거나 그곳의 지부와 통신을 할 수 없게 되었으며, 그들은 서부 독일에서 열리는 대회에 참석할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서적을 구하는 것은 전에도 쉽지는 않았다. 서적을 동부 독일로 반입하는 것을 공산주의 당국은 금지하였으며 따라서 그것은 형벌을 받을 만한 일이었다. 경계선에서 행하는 검문시에 형제들에게서 협회의 성서 서적이 발견되면, 그들은 장기간의 옥고를 치를 각오를 해야 하였다. 그러므로 그러한 여행은 강한 믿음과 여호와께 대한 온전한 신뢰를 필요로 하였다.

1950년에 박해가 시작된 때부터 1961년에 “베를린 장벽”이 구축된 때까지 동부 독일 당국은 2,897명의 여호와의 증인들을 체포하였으며, 그들 중에 674명의 자매들을 포함한 2,202명은 법정으로 끌려갔으며 도합 12,013년의 금고형 즉 일인당 평균 5년 반 형을 선고받았다. 투옥된 동안 37명의 형제들과 13명의 자매들은 학대, 질병, 영양실조 및 고령으로 말미암아 사망하였다. 12명의 형제는 애초에 종신 금고형을 선고받았지만, 후에 이것은 15년으로 감형되었다.

동부 독일의 형제들은 “베를린 장벽”이 가져온 새로운 상황에 따라 재빨리 조정하였다. 그들에게 필요한 영적 양식을 공급하기 위하여 다른 방법들이 이용되었으며 그들은 큰 열심을 가지고 자기들의 그리스도인 봉사를 계속하였다. 공산주의 당국이 이를 예상하지 않았음은 분명하였다. 그들은 조직 안으로 첩자들을 침투시켰으며, 그들은 여호와의 증인으로 알려진 사람들을 방문하여 자기들이 변화된 상황에 따라 사업을 조정하는 일을 돕도록 협회에 의하여 파견된 형제들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형제들은 잘 훈련되어 있었으며, 그들은 즉시 그러한 사람들이 첩자들임을 식별하였다.

수년이 지나는 동안 체포되어 언도를 받은 형제들의 수는 급격히 하락되었다. 1963년에는 단지 15명 그리고 1964년에는 9명의 여호와의 증인들이 새로이 검거되었으며, 그 반면에 같은 두해 동안에 96명과 48명의 형제들이 오랜 형기를 마친 후에 석방되었다. 1964년 여름에 여러 해 동안 투옥되어 있던 4명의 형제들에게 예기치 못한 놀라운 일이 발생하였다. 애초에 종신형을 선고받았던 그들이 갑자기 석방되어 서부 독일로 보내진 것이다. 그들은 한 대회의 때에 맞게 도착하였다. 그들은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수일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들은 쓸쓸한 동부 독일의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으며 자유 가운데서 형제들과 함께 모일 수 있게 되는 것을 단지 꿈속에서만 그리고 있었을 뿐이다. 이제 그들은 자기들의 마음 속에 감추어져 있던 이 염원의 놀라운 성취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그 형제들 중에 두 사람, ‘프리드리히 아들레르’와 ‘빌헬름 엔겔’은 ‘마그데부르크’의 ‘벧엘’ 가족 성원이었다. ‘프리드리히 아들레르’는 1950년, 사업이 금지되기 두달 전에 체포되어 투옥되었으며, ‘빌헬름 엔겔’은 1950년 8월 30일에 ‘벧엘’이 몰수당할 때 체포된 사람들 중의 하나이다. ‘엔겔’ 형제는 허약한 건강으로 인하여 ‘베를린’ 지구 경계선에서 적십자사로 인도되었다. 그는 즉시 병원에 입원되었으며 그곳에서 수주일 후에 사망하였다. 이 형제들은 이미 ‘히틀러’의 독재 하에서 9년간 수감되었던 경험이 있었으며 그리하여 자기들의 믿음 때문에 도합 23년간의 수감 생활을 격었던 것이다. ‘프리드리히 아들레르’는 다시 ‘벧엘’ 봉사를 시작하였으며, 이번에는 ‘비스바덴’에서 근무하였다. 일찌기 1920년대에 순례자 형제로서 봉사하기 시작한 그는 장구하고 파란많은 전 시간 봉사에서의 생애를 돌이켜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장기간의 수감 생활로 허약해진 그는 1970년 12월에 그의 지적 행로를 마쳤다.

1964년 11월 공산주의 당국은 동부 독일 형제들에게 새로운 타격을 가하였다. 이 일이 있기 얼마 전에 모든 시민들에 대한 군 징집이 시작되었다. 젊은 형제들은 군복무를 거부하였지만, 그들의 문제는 일반적으로 심중히 다루어졌으며 그들의 태도는 존경을 받았었다. 그러나 이제 돌연히 142명의 형제가 이른 아침의 어두움의 차폐물 속에서 체포되었다. 그들의 경우를 다루는데 있어서의 이러한 예기치 못한 변화는 이들 젊은 형제들에게 믿음의 시험이 되었다. 그들은 노동 수용소에 처하여졌다. 당국은 처음에 그들로 하여금 군복무를 대신하는 것의 일종인 “건설군”으로서 일하게 하려고 노력하였지만 이것을 그들은 하나같이 거부하였다. 형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확고함을 유지하였으며, 그러한 위압적인 시도도 감소하였다. 이제 그들은 아침 4시부터 저녁 9시까지 철도 건설에서 중노동을 강행해야 하였다. 일을 하지 않을 때에는 그들은 여호와의 증인들 가운데 책임있는 사람들은 서방측 간첩이라는 교육을 받았다. 대부분의 젊은 형제들은 사업에 금지령이 내려진 이후에 진리를 알게 된 형제들이다. 그러나 당국은, 공산주의적, 무신론적 사상을 이용한 대대적인 세뇌 공작에도 불구하고 이들 젊은이들이 두려움없이 참 그리스도교의 원칙들을 옹호하는 입장을 고수하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1965년에 우리 형제들에 대한 국가 안보 담당 부처에 속한 첩자들과 비밀 정보원에 의한 사찰과 방해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그들은 많은 가정을 수색하였으며, 거리에서 형제들을 세워놓고 심문하였다. 비밀 도청 시설들을 자동차와 가정에, 그렇다, 심지어는 형제들의 침실 안에까지 장치하였다. 당국은 형제들에게 그들의 움직임 하나 하나가 모두 자기들에게 알려지고 있다는 인상을 주려고 노력하였다.

물론, 당국은 형제들의 거짓없는 대화를 “청취함”으로써 여러 가지 세부 사항들을 긁어 모으는 일에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심문을 행할 때 비밀 경찰은 자기들이 우리의 사업에 관하여 모은 정보가 “자본주의 세계”에서 받은 것들인 것처럼 꾸몄으며 그리하여 그곳의 형제들 사이에 모종의 경솔함이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들고자 하였다. 그렇게 하여 그들은 통치체와 협회 사무실에 있는 형제들에 대한 의심과 불신의 씨를 심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형제들은 이것으로 인하여 교란되지 않았으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들은 자기들 주위에 둘러쳐져 있는 간첩의 망이 얼마나 빈틈이 없는 것인지를 더 잘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1965년 11월 어느 날 아침 특히 분명히 나타났다. 그날 아침 일찌기 전국에 걸쳐서 8명씩 집단을 이룬 관리들이 형제들의 가정을 점유하여 여러 시간 수색을 하였다. “주동자”로 생각되는 15명의 형제가 체포되었으며 기소당하여 재판을 받을 때까지 9내지 13개월 동안 감금되어 있었다. 1966년에 그들은 평균 7년 이상, 최고 12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들 형제들이 마치 극악한 범죄인들처럼 다루어지고 있는 동안, 비밀 경찰은 실형을 선고받은 그 형제들이 해온 것처럼 좋은 소식을 전파하고 작은 집단으로 함께 모여 여호와를 숭배해 온 다른 사람들을 사냥하기에 혈안이 되었다. 그들은 그 형제들에게 만일 그들이 자기들의 활동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고 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제출한다면—이것은 국가 안보의 목적 때문이라는 것이다—그들이 계속 작은 집단으로 함께 모이며, 성서 서적을 소유하며 다른 나라의 형제들과 접촉을 유지할 수 있게 해 주겠다고 제의하였다. 그러나 형제들은 당국의 불성실한 제의를 거절하였다. 한 관리는 이렇게 불평하였다. “우리는 당신들의 지도자를 제거해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는 당신들의 사업을 시야에서 놓쳐버리는 데 성공하였을 뿐이다.”

1969년 약 4년간의 수감 생활 후에, 1965년의 운동 중에 검거되었던 15명의 형제들 중에서 14명이 갑자기 석방되었다. 대다수는 서부 독일로 추방되었다. 그 집단의 마지막 한 사람은 1970년 9월까지 전단적으로 1년간 더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다.

그때 이래 비밀 경찰은 자기들의 전략을 바꾸었으며, 지금은 정규 경찰력과 다른 국가 기관을 사용하여 형제들에게 어려움을 주고 있다. 어떤 지역에서 경찰은 형제들이 전파하거나 집회를 볼 때 평화를 교란시켰다는 혐의로 그들에게 고액의 벌금형을 선고해 왔다. 그러나 많은 형제들은 종교적 자유에 대한 헌법상의 보장에 호소하고 평화를 교란당하였다는 증인을 대질시켜 줄 것을 요구함으로써 이러한 벌금형을 취하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한 증인들이란 물론 존재하지도 않았다.

다른 지방에서는 당국은 형제들을 자기들의 집에서 축출하여 수준 이하의 주택으로 보냄으로써, 또는 그들에게 저임금의 세속 일을 제공하고 젊은 형제들에게는 여러 가지 직업을 위한 특수 훈련을 받을 기회를 박탈함으로써 그들에게 압력을 가하려고 노력하였다.

1961년에 “베를린 장벽”이 구축된 때, 동부 독일에서의 사업이 외부 세계로부터 밀폐된 이래, 수천명이 좋은 소식을 듣고, 진리를 배웠고, 헌신하였으며 침례받았다. 그들은 여호와의 영은 인간이 쌓은 장벽이나 요새에 의해서 억제될 수 없다는 사실의 산 증거이다. 그러므로 23년 이상을 금지령과 큰 어려움 하에서 일하며 생활해 온 동부 독일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다윗’ 왕 처럼 “내가 ···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시 18:29.

성공적인 전파 운동들

서부 독일에서는 이 기간에 왕국 소식을 대중의 관심에로 재삼 재사 전달하는 일이 현저하게 수행되었다. 1949년 「파수대」 운동은 정규적인 마련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가정에 영적 양식을 공급해 주기 위한 기초를 닦았다. 「파수대」 연구에 참석하는 모든 사람들과 모든 관심자들에게 「파수대」 연예약을 제공하기로 하였다. 우리는 목표에 달하였는가? 1949 봉사년도에 59,475건의 연예약을 받았는데, 이는 그때 이래 지금까지 우리가 결코 도달하지 못한 최고 수자이다!

가두 잡지 봉사는 하나님의 왕국의 귀중한 소식을 대중의 목전에 제시하는 또 다른 방법이었다. 이 활동도 교직자들의 눈에는 가시 같았다. ‘가톨릭’계의 ‘바이엘른’에서는 여러 법률과 교통 법규를 통과시켜서 잡지 가두 봉사를 금지시키려는 시도가 자행되었다. 어떤 종교 단체들은 자기들이 방해를 받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1954년 ‘바이엘른’ 주와 ‘헤세’ 주 당국이 모든 경찰관들에게 여호와의 증인들에 의하여 수행되는 전도봉사는 법적 제한의 대상이 아니라는 성명을 발표하였을 때, 그들은 잠잠해졌다.

1956년 여름인 7월과 8월을 이용하여 모든 임명되지 않은 구역에 왕국 소식을 전달하기 위한 특별 운동이 계획되었다. 형제들은 미증유의 열성을 가지고 일하였으며, 최소한 모든 임명 되지 않은 구역의 80‘퍼센트’를 봉사하였다. 좋은 소식의 전도인의 방문을 받지 않은 사람이라곤 서부 독일에는 극소수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다음 경험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종종 반대가 있었으며, 특히 농촌 지대에서 그러하였다. “마을 전체가 몹시 떠들썩하였다. 젊은 사람들이 집집으로 우리를 따라다녔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를 즉시 쫓아버리게 할 목적으로 우리를 소개하곤 하였다. 전체 마을에서 단 한부의 서책도 전하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일주일 후에 동일한 회중이 같은 구역 내에 있는 다른 마을에서 봉사하였다. 전도인들은 기차역에서 만나서, 함께 일용할 성귀를 토론하고, 증거할 때 사용할 서론을 토의하였다. 그때 한 남자가 전도인들에게 가담하여 듣기 시작하였다. 그는 여호와의 증인의 한 사람이 문간에서 하는 것과 같은 증거를 받았다. 그 형제가 끝맺자, 그 외인은 자기 지갑을 꺼내면서 “그 책들을 갖고 싶다”고 말하였다. 알고 보니, 이 사람은 일주일 전에 단 한부의 책도 전하지 못한 그 마을에 사는 사람이었다. 교직자들이 아직도 마을 사람들 위에 어느 정도 영향을 행사하고 있는 농촌 지대에서 볼 수 있는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두달 동안에 지난 해의 같은 기간보다 166‘퍼센트’의 서책 그리고 60‘퍼센트’의 잡지를 더 전하였다.

그러한 운동들 외에도 책자들과 소책자들로 특징을 이루는 다른 활동들이 있었다. ‘뉴욕’에서 열린 1958년 “성의” 국제 대회에서 한 감동적인 결의문이 채택되었다. 12월에 이것을 세계 전역에 배부할 계획이 수립되었으며 50개 언어로 7,000만부가 인쇄되었는데, 독일에서는 700만부를 인쇄하였다. 이러한 전도지는 간단한 소개의 말과 함께 집주인에게 직접 전해 주었다. ‘가톨릭’계 지방의 사제들은 배부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자 마을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였다. 그러나 열렬한 활동의 4주가 지나자, 기뻐하고 즐거워할 이유가 다분히 나타났다. 그때야말로 새로운 사람들을 야외 봉사에 참여시킬 훌륭한 기회임으로, 대부분의 회중들은 10내지 50‘퍼센트’의 전도인의 증가를 보고할 수 있었으며, 전국적으로는 11.6‘퍼센트’의 증가를 수립하였기 때문이다.

“학자의 혀”를 받음

자진적인 일군들의 수가 계속 여호와의 조직으로 넘쳐 들어옴에 따라, 여호와께서는 ‘충성된 종’ 반열을 통해서 노소를 막론하고 그들 모두에게 필요한 훈련을 베풀 마련을 하셨다. 그 결과 여호와의 종들은 “학자의 혀”를 갖기에 이르렀다. (이사야 50:4) 이것은 증가에 공헌해 왔다. 세상도 이 훈련이 증인들에게 미친 영향을 주시해 왔다. 예를 들면, 한 신문은 11세인 ‘잉고 뤼케르’가 ‘레크링하우젠’의 낭독 경연 대회에서 우승한 것을 이렇게 보도한 바 있다. “놀랄 사람들은 외부인들 뿐이었다. 기본적으로 그의 우승을 막을 방법은 없었기 때문이다. 11세인 ‘잉고 뤼케르’는 지난 3년간 이 경연 대회를 위한 유리한 요인들을 쌓아 왔다. 여호와의 증인의 전도 학교에서 ··· 동 경연 대회는 그와 그리고 한 어린 소녀—그도 그 전도 학교에 참석하고 있다—와의 사이에서 마지막 선까지 막상막하로 계속 되었지만, 그가 ‘요셉’ 학교에서 가장 훌륭한 낭독자였던 것이다.” 한 순회 감독자는 ‘뢰라흐’의 회중을 방문한 후에 이렇게 기술하였다. “화요일 저녁에 특별한 일이 일어났다. 자매들이 임명받은 연설을 제공할 때 한 연로한 자매가 벼란간 연단으로 다가왔다. 그 자매는 아무런 원고도 없이 손에 성서만을 들고 유창하게 토론을 이끌어갔을 뿐만 아니라, 연설의 제반 규칙을 지켰다. 우리가 그 자매에게 나이를 묻자, 그 자매는 수주일 전에 90세가 되었노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진보적 훈련의 훌륭한 마련의 일환으로, 회중의 감독자들을 위한 고등 과정의 훈련을 마련해 주기 위하여 1960년 11월 13일에 천국 전도 학교의 첫 학급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현재 ‘비스바덴’ ‘함부르크’ 그리고 ‘뮨헨’ 등 3개 학교로 확장되었다.

1948년—그리고 그후 20년간

좋은 소식의 선포자의 수의 현저한 증가를 기록한 해가 있었던 반면 전혀 증가가 없었던 해도 있었다. 1948 봉사년도는 83‘퍼센트’의 증가로 막을 내렸다. 월간 시간 평균은 매 전도인 당 16시간이었다. 뒤이은 수개년 동안의 증가는 다음과 같다; 1949년 33‘퍼센트’ 증가, 1950년 23‘퍼센트’ 증가, 그리고 1951년 26‘퍼센트’ 증가.

한편 경제적인 긴장과 어려움은 계속되었으며 실업자의 수도 1950년 2월 중순에는 200만 이상으로 급등하였다. 1952년 9월 말경 실업자의 수는 아직 1,249,000명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때부터 실업률은 감소하기 시작하여, 처음에는 서서히 그 후에는 급격히 하락하였다.

또 다른 변화도 명백히 나타났다. 활동하는 회중 전도인 수는 해를 거듭할수록 계속 증가하였지만, 좋은 소식의 전 시간 전파자의 수는 보조를 맞추지 못하였다. 그 반대로, 1955년에 전도인 수는 1950년보다 21,641명이나 더 많아, 거의 두배나 되었는데 반하여, ‘파이오니아’는 200명이나 더 적었다. 이러한 추세의 최저점에 이른 것은 1956년으로, 1950년에는 총 전도인의 4.4‘퍼센트’가 전 시간 봉사에 참여하고 있던 반면, 그 비율은 이제 1.6‘퍼센트’로 하락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독일은 풍요의 나라로 변모하였다. 완전 고용이 이루어졌고 “경제적인 기적”이 널리 갈채를 받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여호와의 증인들과 연합하고 있는 사람들의 일부의 생각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1963년 4월부터 7월까지 전도인 수와 야외 봉사에서 바친 시간 수가 감소하였다. 7월에는 4월보다 전파 사업에 참여한 전도인 수가 6,000명이 적었으며 바친 시간도 40,000시간 이상이 더 적었다.

물론 대부분의 형제들은 봉사를 계속하였으며 그들의 사업에 대한 축복을 즐겼다. 1965년부터 1967년까지 침례받은 사람은 9,325명이었지만, 1967년의 전도인 평균은 1965년보다 단지 400명이 더 많았을 뿐이며, 한편 전도인 최고수는 437명이 더 적었다! 일부 전도인들이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욕망에서 자기들의 손을 늘어뜨리고 열성을 늦추면서 세상이 제공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욕망에 자리를 비워주었음이 분명하였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무활동이 되었다. 게다가, 예로서 1964 봉사년도에는 569명이 대부분 부도덕으로 제명되었다. 복귀를 요청한 사람은 불과 95명 뿐이었다.

1968 봉사년도에 이르러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물질주의에 대항하여 추진한 힘찬 싸움은 전과 같은 높은 손실을 막아 주었다. 모든 부면에서 훌륭한 증가가 이루어졌다. 이제 466명의 특별 ‘파이오니아’가 일하게 되었고, 정규 ‘파이오니아’의 수는 2,651명으로 상승하였으며 동 연도 중 어느 때에는 전 시간 전파 사업을 수행한 사람의 수는 7,163명이라는 최고수에 도달하였다. 아무런 증가를 기록하지 못한 3년간의 기간이 지난 후 마침내 동 봉사년도는 3‘퍼센트’의 증가란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다시 한번 전진이 시작되었다.

1968년 7월 4일부터 8월 11일까지 우리는 11개의 지역 대회를 개최하였다.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 책이 발표되었다. ‘브루클린’ 사무실의 도움으로 우리는 모든 전도인들에게 개인용과 함께 배부용으로 가외의 5부씩을 더 제공할 수 있었다. 8월의 운동 중에 신기록인 139,471부의 서책이 전해졌다. 그 책의 수요는 지대하였다. 1973년 3월말까지 ‘비스바덴’ 공장에서 우리는 독일어로, 2,900,115부 그리고 다른 네 언어로 1,715,338부를 인쇄하였다. 그것이 지닌 효과와 푸른 색깔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곧 그 책에 “청색 폭탄”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이 책의 효율성과 관련된 흥미있는 경험담들을 이미 그 바로 다음에 열린 순회 대회에서 들을 수 있었다. 한 자매는 이렇게 진술하였다. “우리가 「진리」 책을 받았을 당시에 나는 손에 들어온 그 책이 얼마나 가치있는 성서 연구 보조서적인지를 거의 깨닫지 못했었다. 나는 즉시 호별 봉사 도중에 우리 마을 사람들에게 이 책의 도움으로 성서의 원칙을 짧은 시간 내에 배우는 데 관심이 있는지의 여부를 묻기 시작하였다. 그러든 중, 여동생과 함께 교회의 합창대를 이끄는 어떤 매우 종교심이 강한 부인이, ‘성서를 잘 알게 되는 것이 저의 염원입니다. 그러나 그런 기회가 전혀 없었는데 댁에서 기꺼이 도와 주시겠다니 기쁘군요’ 하고 말했을 때 나의 놀람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는 그 말을 거의 믿을 수가 없었다. 이제 그 부인은 두달째 정규적으로 연구해 왔으며 놀랍게 발전하고 있다. ··· 매우 저명하고 부유한 부인 한 사람도 마찬가지로 기꺼이 연구하려고 하였다. 지난 주에 그 부인은 나에게 ‘이 책은 참으로 이해하기 쉽더군요. 저는 그렇게 이해하기 쉬운 책은 결코 읽어본 적이 없었읍니다.’ 하고 말하였다. 이제 하나의 연쇄 반응이 시작되었다. 열성이 가득하여 나는 이웃을 도와 주려고 그 부인을 찾아갔다. 한 여인이 이 달에 연구를 시작하였으며 4명 이상이 새로 책들이 발송되어 오기를 기다리고 있으며 우리는 편리한 시간을 위하여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 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읍에서는 요즈음 여호와의 증인들과 성서를 연구하는 것이 하나의 유행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1969년에 성서 연구 수가 47,691로 증가하였다는 사실로 나타난 바와 같이 성서 연구를 시작하는 것이 이 새 책으로 인하여 더욱 쉬워지게 되었다. 동 연도 중에 6,678명이 침례받았는데, 이는 1955년 이래 최고수이다. 1970년 5월에 우리는 86,222명의 전도인에 도달하였는데, 이는 연속 제5차 전도인 신기록일 뿐만 아니라 전 월인 4월보다 5월에 더 많은 전도인이 있었던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해 10월 우리는 또 하나의 신기록에 도달하였는데, 이번에는 86,489명의 전도인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1968년의 전도인 수에 비하여 7,718명이란 전도인의 증가를 의미한다. 이러한 신속한 증가는 그분의 지상의 종들에 대한 여호와의 축복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확실히 「진리」 책은 이러한 증가를 이룩하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다.

대회들이 증거 사업에 크게 기여하다

대회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알리며 독일 내의 왕국 전도인들의 수를 증가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9,000명이 참석한 ‘뉘른베르크’에서 열렸던 종전 후의 첫 대회로부터, 1948년 ‘카젤’ 대회, 100,000명 이상이 참석하는 현대의 대회에 이르기까지, 많은 조직적인 변화가 이루어졌고, 문제들이 해결되었으며 새로운 고안들이 개발되었다.

1951년 8월 24일부터 26일까지 ‘프랑크푸르트’/‘마인’에서 24개국으로부터 온 대표자들이 “깨끗한 숭배” 대회를 위하여 모였다. 그러나 34,542명의 대표자들이 금요일 아침에 대회를 시작할 수 있기 전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여러 시간을 소비해야 하였다. 어떠한 성격의? 그 도시에 있는 한 큰 취사장에서 우리의 식사를 요리해 주기로 약속했었는데 대회 시간이 가까움에 따라 그들은 그렇게 하기를 점점 더 꺼려하였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협회는 각각 300‘리터’ 용량의 51개의 대형 ‘가스’, 석탄 및 증기용 솥을 구입해서 자체 취사장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모든 솥을 ‘가스’용으로 전환시키기 위하여 필요한 재료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들 모두를 증기용으로 변경시켜야 하였다. ‘파이프’들을 조립시키기 위하여 며칠간의 용접이 필요하였고, 또 그 ‘파이프’들은 큰 어려움을 거쳐서 고물상들을 찾아다니며 가까스로 구입한 것이다. 어떤 솥의 벽은 종이처럼 얇기 때문에 땜질을 해야 하였다. 그 다음에는 어디에서 필요한 증기를 얻는가 하는 것이 큰 문제였다. 우리는 ‘프랑크푸르트’의 철도 회사와 협상하여 측선에 주차시켜둔 사용하지 않는 기관차의 사용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기관차는 저압 수증기를 생성시키지 못하는 것이었으며, 따라서 우리가 그 압력을 원래의 증기의 24분의 1로 감축시킬 방법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마침내 그 문제가 해결되었으며, 증기가 들어오게 되어 15분 내에 증기용 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각종 신문들은 우리가 성취한 일에 대하여 경탄을 금치 못하였다. 그러한 신문들의 보도와 우리 형제들의 열성적인 전파 활동은 ‘노워’ 형제의 “종교가 세계 위기를 대처할 것인가?”란 공개 강연을 듣기 위하여 47,432명이 참석하게 하는 데 공헌하였다.

1953년의 대행사는 물론 ‘뉴욕’에서 열린 “신세계 사회” 대회였다. 독일로부터 참석할 수 있었던 284명의 형제들은 참으로 열광하였다! ‘뉴욕’ 대회와 때를 맞추어 독일에서는 서부 독일의 형제들을 위하여 ‘뉘른베르크’에서, 그리고 일주일 후에 ‘베를린’과 동부 독일에서 온 형제들을 위하여 ‘베를린’에서 각각 하나씩 2개의 대회를 열었다. ‘뉘른베르크’에서는 대대적인 숙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38개의 천막과 1,000개 이상의 개인 천막이 마련되었다. 개인 집에서 방을 얻기 위한 노력이 행하여졌는데, 이러한 노력은 그 도시의 교직자들에게 문제들을 제기해 주었다. ‘뉘른베르크’의 「복음 교회 신보」(Nürnberger Evangelischen Gemeindeblatt)는 “여호와의 증인의 대회에 대한 조심”이란 표제의 기사를 게재하였다. 그 내용의 일부는 이러하다. “훌륭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일부 복음 교회 회원들이 방문하는 여호와의 증인들을 위하여 무료 숙소를 제공하였다는데서 특별한 문제가 야기되었다. 그렇게 한 사람들은 대부분의 경우에 교회 역원들로부터 그러한 초대를 취소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러나 결국은 자기네 자신들이 피해를 입었을 뿐이다. 이러한 일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더욱 기꺼운 마음으로 우리에게 숙소를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교직자들에게는 참으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2년 후 대규모의 “승리하는 왕국” 국제 대회가 같은 도시의 같은 장소 즉 ‘제펠린비이제’에서 열렸다. 62개국이 대표자를 파견한 그 대회는 매우 감동적인 대회였다. 특별한 연단이 거대한 ‘제펠린비이제’를 제압하였다. 그 석재 연단은 길이가 300‘미터’이며 이 기다란 연단을 가로지른 75층계의 계단은 300‘미터’란 전체 길이에 서 있는 144개의 기둥으로 되어 있는 하나의 넓은 방으로 인도하였다.

‘호텔’과 개인 가정에서 구한 숙소 외에도 거대한 천막 도시가 있어서 37,000명을 위한 대대적인 숙소를 제공하였다. 각각 600명을 취침시킬 수 있는 거대한 천막이 세워졌다. 큰 부대에 짚을 넣어서 요로 삼았다.

금요일 아침에 대규모의 침례식이 행하여져서 4,333명이 물의 침례로써 헌신을 상징하였다. 동부 독일에서 4,000명 이상이 참석하였으므로, 이들 새로운 형제들 가운데는 그곳에서 온 얼마의 형제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금요일 저녁 참석자들은 ‘뉘른베르크’나 ‘베를린’ 대회에 참석한 동독에서 온 모든 여호와의 증인들을 그들이 돌아오면 체포하겠다고 위협하는 공산주의자들이 관리하는 ‘라디오’ 방송을 들었다. 그러나 수천의 증인들은 그러한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널리 광고된 ‘노워’ 형제의 연설에 참석하였는가? 한 잡지(‘Neue Illustrierte’ 8월 20일자)는 “한때 ‘히틀러’가 ‘여호와의 증인들’을 다 쓸어버릴 것이라고 선언하던 ‘제펠린비이제’가 만원을 이루었다”고 기술하였다. 그리고 사실상, 107,423명이 “세계 정복은 가깝다—하나님의 왕국에 의하여”란 주제를 경청하였다. 2만 이상의 ‘뉘른베르크’ 주민들이 참석했던 것이다. 협회장이 폐회사를 시작하자 비—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청중은 자리에 머물러 있었으며 ‘노워’ 형제가 끝마칠 무렵 비도 중지하였다. 그러자 참석했던 사람들이 결코 잊지 못할 일이 발생하였다. 거대한 무지개가 하늘에 나타났던 것이다. 얼마나 자극적인 광경인가! 고별사를 할 때 ‘노워’ 형제는 손수건을 흔들었으며, 형제들의 답례에 의하여 전체 잔디밭은 흰꽃들이 나부끼는 들판의 모습으로 변모하였다. 많은 사람들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믿음이 강화됨을 얻고 더 많은 봉사를 위하여 준비를 갖춘 수천의 참석자들은 귀향의 여행을 시작하였다.

그 다음 큰 국제 대회가 1961년 독일의 최대의 항구인 ‘함부르크’에서 열렸다. 여기서도 적지 않은 두통거리가 있었다. 주된 문제는 대회장이었는데, 그것은 ‘함부르크’의 최대 시립 공원에 위치한 한낱 거대한 잔디밭(80,000평방 ‘미터’)에 불과하였다. 대회는 초반부터 비를 동반하였으며 그 초원은 곧 진흙 밭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비는 맨 첫날부터 끝날까지 계속 내렸다! 그러나 매일 수천만의 사람들이 대회장으로 밀려들어 우산의 천개 아래서 ‘프로그램’을 듣는 광경은 참으로 고무적이었다. 사실상, 비와 진흙도 대회에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으며, 참석했던 신문 기자들과 사진 기자들은 이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함부르크 조간 신보」(‘Hamburger Morgenpost’)는 “그들 거의 모두는 진흙과 빗속에서도 행복한 표정이었으며, 이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들은 화려하게 옷을 입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들 가운데는 다수의 젊은이들도 있었다. ···”고 보도하였다. 한 경찰관은 대회 본부 사무실의 한 대표자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비록 이것이 ‘함부르크’에서 개최된 최대의 대회이지만, 우리는 모든 것이 원활히 진행되리라는 데 대하여 아무런 우려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우리 없이도 쉽게 해 나아가리라는 것을 알고 있읍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번 기회가 우리 경찰관들에게 훌륭한 훈련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러분 중에 같이 있다는 점에 대하여 아무런 이의가 없기를 바랍니다.”

동부 독일의 형제들 수천명이 참석했던 이번 대회는 그들이 대회를 참석한 마지막 기회였다. 수일 후에 “‘베를린’ 장벽”이 구축되었으며 철의 장막은 더욱 굳게 닫혀진 것이다.

비로 말미암아 그 공원의 잔디밭이 엉망이 되었지만, 대회가 끝난 후 형제들은 전체 지대를 표토로 덮고 잔디를 다시 심었다. 이제 공원은 전보다도 더 아름답게 되었으며, 이는 관리들과 ‘함부르크’ 시민들에게 유익이 되었다. 공원의 초원이 다시 꾸며진 것과 우리의 형제들이 우중에도 꾸준함을 나타낸 것을 보고 ‘함부르크’ 주민들은 깊은 감명을 받았다.

1963년 “영원한 기쁜 소식” 대회가 세계 일주를 하는 도중, 독일, ‘바이엘른’ 주의 수도인 ‘뮨헨’에 기착하였다. ‘테레시안비이제’가 우리의 “왕국회관”의 역할을 하였다.

대회 그 자체는 물론, 준비 작업도 사업가들과 관리들을 포함한 모든 ‘뮨헨’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대회장에서 일하도록 배치된 한 경찰관은 한 형제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여기 있기를 좋아합니다. 편안한 느낌이 드니까요. 나는 여러분의 성실성과 솔직성을 좋아합니다. 이것은 2년전에 이곳에서 열렸던 성체 대회와는 정반대입니다.” 솔직한 평을 하는 정직한 관찰자들은 종종 이러한 성격의 비교점을 이야기하곤 한다. 그리고 그러한 감동은 오래 지속한다. 3년 후에 한 사업가는 어떤 형제에게 말하기를 ‘뮨헨’의 어떤 큰 백화점에서 일하는 자기의 동료 일군들이 알게 된 바에 의하면 ‘뮨헨’에서 큰 대회가 열릴 때마다 언제나 물건을 훔쳐가는 일이 증가한다고 하더라고 이야기하였다. 그래서 우리의 대회 기간 중에도 그들은 그러한 일의 증가에 대비하였었지만, 대회가 그들에게 전혀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게 되자 그들은 놀랐다는 것이다. 그들은 참으로 이상하게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에 있었던 다른 모든 대회와 마찬가지로 이 “영원한 기쁜 소식” 대회도 여호와의 이름, 그분의 목적 및 그분의 백성들을 알리는 데 공헌하였다.

모든 민족의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이 전파되어야 한다

독일은 좋은 소식이 전파되지 않으면 안될 세계적인 밭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마가 13:10) ‘왙취 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는 선교인들을 훈련하여 이 세계적인 밭의 여러 부분으로 보내는 데 매우 성공적이었다. 독일로 보내진 첫 ‘길르앗’ 졸업생인, ‘필립 호프만’은 1949년에 도착하였다.

1951년, 그외의 4명이 뒤이어 도착하였다. 지금 과거를 돌이켜보면서 그들은 종종 자기들이 ‘벧엘’에 처음 나타났을 때, ‘프로스트’ 형제가 어떻게 느겼을 것인가를 재미있게 이야기하곤 한다. 그는 ‘노워’ 형제에게 일을 돕도록 ‘길르앗’ 졸업생들을 독일로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그가 그들 4명을 대하였을 때, 그들 모두는 20대 초였기 때문에 그에게 마치 어린 아이들같이 보였을 것이다. 그 후 수년 동안 결국 총 13명의 외국 선교인들이 독일로 임명을 받았다. 이들 중 11명은 아직도 여러 나라에서 전 시간 봉사에 매진하고 있으며(한 자매는 20년의 충실한 봉사를 마친 후 1972년 자기 임명지에서 사망하였다) 이들 11명 중에서 9명은 아직도 ‘벧엘’이나 여행하는 봉사를 통하여 독일에서 바쁘게 일하고 있다. 그들 중 3명은 1956년 번역부가 ‘베른’으로부터 ‘비스바덴’으로 이전되었을 때 ‘스위스’로부터 왔으며 그들은 아직도 그 직책에서 봉사하고 있다.

‘알리스 베르네르’는 이 오래된 종들의 집단에 속해 있다. 이 자매가 어떤 흥미있는 경력을 지녀왔는지 간단하게 그 자신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1924년 1월에 ‘스위스’에서 ‘파이오니아’로서 전 시간 봉사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약 6개월 후 나는 ‘쮜리히’ ‘벧엘’로 불리움을 받았다. 우리는 곧 ‘베른’의 새 ‘벧엘’ 집으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몇해가 흐르는 동안 여러 상이한 부서를 거쳤다. 1932년 새로운 임명에 따라 ‘파리’로 갔는데, ‘프랑스’의 당국자들은 나에게 영주 ‘비자’를 내 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때때로 나는 그 나라를 떠나서 ‘벨기에’에서 얼마 동안씩 ‘파이오니아’ 봉사를 해야 하였으며 그러므로 ‘파리’에서는 단속적인 봉사를 하였다. 이러한 방법으로 나는 약 3년간 ‘파리’에 머물러 있었다. 1935년에는 협회도 ‘브뤼셀’에서 있었던 만국 박람회에 참가하였으며, 나는 그때 서적 판매대에서 봉사하는 특권을 즐겼다. 그곳에서 나는 ‘베른’으로 다시 불리어 가서, 1946년에 ‘길르앗’ 제 8기 학급에 참석하라는 웅대한 부름을 받을 때까지 10년간 그곳에서 다시 일하였다. 그 후 다시 ‘스위스’로 돌아가서 또 10년 동안의 즐거운 봉사를 즐긴 후에 우리들 3명은 독일로의 새로운 임명을 받았다. 나는 여호와께서 나로 하여금 그분께 대한 봉사 가운데서의 훌륭한 기회들로 충만했던 행복하고 부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해 주신 선하심에 대하여 여호와께 감사드리길 원한다.” ‘베르네르’ 자매는 매일 번역하는 일을 수행함으로써 여전히 ‘벧엘’ 가족 성원들에게 격려가 되고 있다.

독일로 파견된 선교인들은 많은 독일 형제들로 하여금 ‘길르앗’ 학교에 참석하고 선교 사업으로 들어가기를 원하게 만든 일종의 자극제였음이 증명되었다. 지금까지 183명의 ‘길르앗’ 졸업생이 독일에서 배출되었다. 이들 중에 29명은 특별 ‘파이오니아’, 여행하는 전도인 혹은 ‘벧엘’ 가족 성원들로 다시 고국으로 돌아온 반면 나머지 다른 사람들은 지구 전역에 산재하는 새로운 집으로 보내졌다.

‘길르앗’ 학교에 참석하는데 관심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영어 지식을 향상시키도록 돕기 위한 특별한 마련이 있게 되었다. 1973년 봄에 이르러 독일 내에 16개의 영어를 사용하는 회중들이 있었고, 450명의 전도인과 130명의 전 시간 종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길르앗’을 위한 준비 중에 있는 사람들은 이 회중들로 임명되었으며 그곳에서 그들은 집회에 참여하고 영어를 사용하는 구역에서 야외 봉사에 참여할 수 있게 하였다. 1967년에 ‘비스바덴’에서 최초의 영어 회중이 형성된 이래 약 250명이 침례를 받았다.

지난 몇해 동안 약 95명의 독일 출신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유럽’이나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서 특별 ‘파이오니아’ 봉사를 계속하도록 그러한 곳으로 파견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필요한 외국어 지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외국 밭에서 기꺼이 봉사하고자 자진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도움이 필요한 나라에서 봉사할 수 있기 위하여 기꺼이 특별한 노력을 기울여 새로운 언어를 배웠다. 예를 들면, 4명의 특별 ‘파이오니아’들은 ‘아프리카’ ‘차드’로 파견되기 전에 ‘비스바덴 벧엘’에서 일주일 동안 ‘프랑스’어를 집중적으로 교육받았다. 그들은 여전히 그 곳에서 그 언어를 계속 배워야 하였지만, 그들은 곧 자신들을 이해시킬 수 있었고 작열하는 ‘아프리카’의 태양 아래서 자기들의 봉사를 계속할 수 있었다.

근년에 이르러 다수의 사람들이 다른 나라로부터 독일로 이주해 왔다. 번창 일로에 있는 경제 때문에 정부는 외국 노동자들을 끌어들이기로 결정하였으며 많은 액수의 임금을 제공하여 많은 “객원 노동자”들을 유치하였다. 1962년에 이미 ‘이탈리아’, ‘유고슬라비아’, ‘그리이스’, ‘터키’, ‘스페인’ 및 ‘포르투갈’ 출신인 700,000명이 이곳에 고용되어 있었는데, 대부분의 그러한 나라에서는 전파 사업이 큰 어려움 하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해 왔을 뿐이다. 이들은 우리의 새로운 활동 분야를 형성하였으며 계속 팽창하였다. 1972년 9월의 통계는 2,352,392명의 외국 노동자들이 독일에 고용되어 있음을 보여 주었다. 이들 중에, 예를 들면 474,934명은 ‘유고슬라비아’ 출신이고 511,104명은 ‘터키’ 출신이다.

많은 형제들은 이 사람들이 왕국 소식을 듣고 이해하도록 돕기 위하여 기꺼이 외국어를 배웠다. 이들 객원 노동자들 간에 진리에 대한 굶주림은 참으로 컸으며 많은 흥미있는 경험들을 하게 되었다. 한 순회 감독자는 얼마의 ‘스페인’어 서적들을 구하여 비교적 짧은 시간에 100부 이상의 소책자와 6부의 서책을 전하였다고 보고한 바 있다. 그는 “내가 소책자를 제공한 ‘스페인’인들 대다수는 내가 가지고 있었던 15종의 상이한 소책자들 전부를 받았다”고 말하였다.

외국어 회중들이 곧 조직되기에 이르렀으며 그 첫째 것은 1962년 5월 1일에 ‘뮨헨’에 시작된 희랍어 회중이다. 1973년 5월에 이르러서는 두개의 순회구로 구분된 1,560명의 희랍어를 사용하는 전도인들이 있게 되었다. 첫 ‘스페인’어 회중은 1964년에 ‘프랑크푸르트’에서 그리고 첫 ‘이탈리아’어 회중은 ‘콜론’에서 조직되었다. 1973년 여름, ‘스페인’어 순회구에는 660명의 전도인이 있었고 ‘이탈리아’어 순회구는 1,000명의 전도인과 45명의 전 시간 종들을 보고하였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들이 독일에서 희구하던 “경제적 낙원”은 훨씬 더 가치있는 “영적 낙원”으로 변하였다.

진리를 배운 후 우리의 새로운 많은 형제들은 자기들의 친척들과 이웃들에게 진리를 전해 줄 욕망이 충만하여 자기들의 고국으로 돌아갔다. 예를 들면, ‘시칠리아’ 출신인 한 형제는 1965년 10월에 ‘콜론’에서 침례를 받았다. 12월이 되어 그는 자기 가족들을 방문하러 갔으며 자연히 그들과 친척 및 친지들에게 진리에 관하여 이야기하게 되었다. 1966년 4월 말 그는 여권에 도장을 받기 위하여 독일로 돌아와야 하였다. 그러나 그는 진리에 매우 깊은 관심을 가진 사람을 4명 발견하였기 때문에 즉시 고향으로 돌아가서 그들과의 연구를 계속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보고하였다. 그의 목표는 그곳에서 회중 서적 연구를 시작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 마을에서는 전파 사업이 전혀 행하여지지 않았었으며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도 약 100‘킬로미터’가량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벧엘’ 가족이 보아온 확장

‘비스바덴’ 소재 ‘왙취 타워 협회’ 지부는 독일 전역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이 수행하는 사업의 결과로 계속 분망함을 유지해 왔다. 자기들에게 서적을 공급해 주는 곳이 이곳이기 때문에 형제들은 이곳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많은 수의 사람들이 ‘벧엘’ 집과 공장을 구경하러 온다. 응접계에서 일하는 형제에게 물어보면, 특히 공휴일이면, 수천의 방문객들이 어떻게 ‘벧엘’ 집과 공장 구경을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한때 4,000명 이상이 온 일이 있다. 앞 길에서는 51대의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외국 형제들도 우리를 방문하러 오곤 한다. 수년 전 어떤 신사가 ‘벧엘’을 구경한 후 성서 연구를 시작하라는 격려를 받게 되었다. ‘벧엘’에 있는 한 형제와의 사이에 서신의 교환이 시작되었으며, 얼마 후 진리를 받아들인 이 신사는 침례를 받고, 전 시간 봉사에 참여하였으며 지금은 순회 감독자로서 봉사하고 있다.

‘벧엘’에서 실제로 생활하면서 일하는 사람들은 여러 해 동안 많은 축복을 향유해 왔다. 그들은 협회의 시설들이 확장되는 것, 새로운 일이 시작되는 것, 특별한 활동이 준비되는 것을 보아 왔다—그리고 이러한 활동의 중심에 참여하는 것이 그들의 특권이었다. 때로는 다른 사람들도 요청을 받아서 도움을 베풀었다.

예를 들면, 1951/52년 겨울, 지부 시설을 확장시키기 위한 부가적인 새 건물의 건축이 시작되었다. 이 일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그리고 바람이 부나 형제들을 하루 종일, 때로는 밤중까지 바쁘게 만들었다. 약 20명의 형제들이 ‘벧엘’로 초대되어 일손을 빌려 주었다. 정규 업무 시간이 지난 저녁 때에, 수많은 ‘벧엘’ 가족 성원들도 건축 공사에 참여하였다.

이제 ‘베른’의 ‘스위스’ 지부로부터 윤전 인쇄기가 도착하였을 때, 참으로 기쁨은 충천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보통 윤전 인쇄기가 아니었다! 이것은 1928년에 ‘마그데부르크’ 지부에서 서적을 인쇄하는 데 사용하던 최초의 윤전 인쇄기이다. ‘나치’가 금지령을 내린 후 이것을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로 반출했다가 수년 후에 ‘나치스’의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그곳에서 ‘베른’으로 운반해 왔었다. 이제 이것은 또 다시 독일 지부로 되돌아 왔으며, 지금도 그것은 오랜 연륜에도 불구하고, 서적들 또는 시간당 7,000부의 잡지를 인쇄하기 위하여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기뻐할 또 다른 이유는 1953년 1월 8일호 32면판 독일어 「깨어라!」지의 출현이었다. 그 호부터 동 잡지의 배부가 독일에서 시작되었다. 이것은 잡지 사업에 대한 형제들의 열심을 증가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비스바덴’의 ‘벧엘’ 집은 계속 확장되었다. 1956년에는 50,530명이란 전도인 최고수에 도달하였으며 그들은 약 130만부의 서적을 배부하였다. 그 다음 봉사년도에는 최고수가 56,883이었다. ‘노워’ 형제는 1956년 11월말 24시간 미만의 비행기 여행차 ‘비스바덴’에 도착하였다. 그 이유는? 1957년 5월 1일자 영문 「파수대」에 발행된 그의 보고문 가운데서 그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또한 그 방문의 목적은 확장 문제를 타개하기 위함이었다. 우리의 ‘벧엘’ 집과 현 공장은 너무 작으며, 그래서 우리는 형제인 한 건축가를 초치하였다. 그와 함께 우리는 하루 종일 더 큰 공장과 ‘벧엘’ 집을 설계하는 일을 하였다. 협회는 ‘비스바덴’ 시 당국으로부터 얼마의 토지를 매입할 수 있었으며, 상당한 토론을 거친 후 시 당국자들은 우리에게 한 가로의 위치를 변경시키는 것을 승낙하였다. 그리하여 우리가 새 건축물을 현재의 건물에 잇닿게 하고, 가로를 우리의 신 건물 뒤로 내는 일이 가능케 되었다. ··· 그 건물은 현재 건조되고 있는 몇대의 새 인쇄기를 수용하기에 충분할 만큼 넓을 것이며 천정이 높기 때문에 머리 위로도 많은 공간이 있을 것이다.”

전통적인 “상량식”(한 건물의 뼈대가 완성된 후에 갖는 의식)을 갖고 주연을 여는 대신에, 인부들과 건설 관계관들을 위하여 맛있는 식사를 준비하여 ‘벧엘’ 식당에서 대접하였다. 우리의 형제들이 그들을 위하여 시중들었으며 그들은 흰 식탁보를 덮은 식탁에 자리잡고 앉았다. 그들은 동 건물의 목적, 여호와의 증인들의 전반적인 활동상, 그리고 동 건축 공사의 재정 분야는 어떻게 처리되었는가에 관하여 설명하는 연설을 들었다. ‘벧엘’ 가족 성원들이 음악 ‘프로그램’을 마련하였다. 대부분의 빈객들은 여호와의 증인들과 그들의 활동에 관해 전혀 새로운 견해를 갖게 되었다. 대접받은 맛있는 음식과 모두를 동일하게 대우하는 그 방법은 그 후 수년 동안 ‘비스바덴’의 건설계 인사들 사이에 한 가지 토론의 재료가 되었다. 끝으로 그들은 각각 한부의 서책과 소책자를 선물로 받았다. 편견 때문에 그 저녁 식사에 참석하지 않은 인부들 중의 얼마는 그 다음 날 찾아와서 자기들이 책 선물만이라도 받을 수 있겠는가 하고 물었다. 그들이 그 식사를 빠뜨린 것은 그들 자신의 잘못이었다. 이제 선물 출판물의 도움으로 영적 양식을 섭취하는 것은 자기들에게 달려 있는 일이다.

1959년 1월 여러 부서가 새 건물 속으로 이사해 들어 갔다.

한편, 공장 감독자인 ‘귄테르 퀸츠’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계속 서적, 잡지 및 기타 인쇄물을 생산하기 위한 더 낳은 장비를 접수하였다. 1958년에 우리는 전에 ‘스위스’, ‘베른’에서 사용되던 제본기들을 받았다. 그래서 일당 5,000부까지 서책을 제본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수년이 지나는 동안 ‘노워’ 형제는 이미 약 50여년씩 사용되어 온 이러한 기계들의 대부분을 대치하도록 허락해 주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1973년에 이르러서는 서적 생산을 크게 증가시키는 것이 가능하였다.

생산실에 있는 형제들은 한 때, 1966년의 마지막 수개월 동안에 61,622부의 「바벨론」 책, 500,796부의 「하나님이 거짓말하실 수 없는 사실」과 98,885부의 「연감」을 인쇄해 냈으며, 만일 차례로 쌓아올린다면, 이는 하늘로 15‘킬로미터’가량 치솟는 탑을 만들 수 있는 수자임을 계산해 낸 일이 있다. 그것은 가슴설레이는 업적이 아닐 수 없었다. 생산 활동은 종종 회중들에게 필요한 서적을 마련해 주기 위하여 최고의 속도로 진행되었다. 1968년 봄, 22명의 가외의 일군이 「사람은 진화되었는가 혹은 창조되었는가?」 책을 완성시키는 데 도움을 주도록 ‘벧엘’로 임시로 불리움을 받았다. 제본부에서는 2개조로 나뉘어 일을 하였으며 매일 10,000권의 서책을 생산하였다. 그것들은 즉시 회중들로 발송되었으며, 그리하여 이 새 책이 5월 운동 기간 중에 사람들로 하여금 동 제목에 대한 진리를 배우도록 돕기 위하여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한 부지런한 활동은 보상을 받았다. 즉 우리는 1963년 이래 최고 수자인 136,525부의 서책을 전하였던 것이다.

1968년에 ‘노워’ 형제는 ‘비스바덴’을 두차례 방문하였다. 그의 첫 방문은 6월에 있었으며, 우리 공장에서 사용할 한 대의 새로운 윤전 인쇄기와 세대의 제본용 기계의 매입이 진행 중이라는 그의 발표에 가족은 기뻐하였다. 얼마 후에 이 기계들 중의 두대가 설치되어 가동되기 시작하였다. 11월의 방문 중에 ‘노워’ 형제는 우리가 공장에서 하고 있는 일의 양을 증가시키기 위한 광범위한 마련을 하였다. 형제들은 2개조로 일하기 시작하였으며, 약 15내지 20명이 밤에 일하였다. ‘노워’ 형제는 영적 상태를 유지하는 일의 중요성에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켰으며, 그리하여 다른 방법으로 집회에 참석할 수 없는 야간조의 형제들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의 특별 회중이 조직되었다. 그들의 집회는 낮에 개최되었다. 서책의 생산은 가속되었으며 우리는 ‘네덜란드’, ‘덴마크’, ‘노르웨이’ 그리고 ‘스웨덴’의 형제들을 위한 서책을 생산하는 일도 인수하게 되었다. 새로 들어온 기계들을 통하여 약 20,000부의 서책이 2개조로 매일 생산될 수 있었다. 최고의 속도로 진행됨과 동시에 미증유의 최고수에 도달한 생산 활동과 함께, 1969년은 또 하나의 바쁘고 생산적인 한 해였다.

“때는 생각보다 늦은가?”가 1969년 4월 8일자 독일어판 특별호 「깨어라!」의 제목이었다. 회중들로부터의 주문이 계속 쏟아져 들어 왔으며, 점점 더많은 잡지를 인쇄해야 하였다. 사실상, 우리의 공장에서 10,241,250부가 인쇄되었다. 양(兩)조의 형제들은 심지어 기꺼이 시간 외의 일을 하였다. 왜냐 하면, 잡지들 외에도 막대한 양의 서책을 생산해야 하였기 때문이다. (1969년 봉사년도 말에 이르러서는 3,343,304부의 서책으로 1966년에 비하여 6배를 기록함) 우리의 기계들은 실제로 24시간 가동되었다. 수개월 동안 우리들은 2개 조로 일하고, 2개 조로 식사하고, 2개 조로 잠을 잤다. 그 기간은 매우 바빴지만, 또한 매우 기쁘고 행복한 기간이었다.

‘파이오니아’ 부서에서 일하는 형제는 1,959명의 정규 ‘파이오니아’ 외에도 11,454명의 임시 ‘파이오니아’가 4월에 활동하였음을 알게 되었을 때 매우 기뻐하였다.

1969 봉사년도 중 약 4천만 부의 서적—잡지, 서책 및 소책자—이 생산되었다. 다른 서적들 외에도 약 2,000‘톤’의 잡지와 서책을 발송하는 것은 물론 비용이 많이 드는 일이었다. 이러한 비용을 삭감하기 위하여 우리들은 1959년 12월 3일부터 우리의 자영 ‘트럭’을 이용하여 서적을 배달하기 시작하였다. 맨 처음부터 동 부서에서 일해 온 ‘알베르트 캄’ 형제는 이렇게 말한다. “도처의 사람들은 우리의 ‘트럭’에 실려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관심을 가지고 알려고 한다. 경찰, 주유소 주유원들, 세관 관리들, 심지어는 우리가 멈추어 서서 방향을 물어보는 사람들도 그렇다. 우리가 그들에게 ‘트럭’에 「파수대」와 「깨어라!」지가 가득 들어 있다고 말하면 그들은 한결같이 놀란다. 대화 도중에 우리가 5대의 대형 ‘트럭’과 2대의 약간 작은 ‘트럭’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그 모든 ‘트럭’들 위에는 잡지가 가득 실려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면, 그들의 얼굴에서 놀라는 표정을 읽을 수 있다. 종종 훌륭한 증거를 할 수도 있다. 우리가 2주 후에 다시 돌아올 때에도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파수대」를 싣고 다시 온 것이라는 사실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비스바덴’은 중앙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그래서 우리의 ‘트럭’들은 독일 내에 11개의 노선을 가지고 있다. 약 750내지 950‘마일’의 거리에 이르는 장거리 노선도 있다. 각 ‘트럭’은 연간 약 70,000내지 80,000‘킬로미터’를 달린다. ‘비스바덴’에서 인쇄된 서책이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벨기에’, ‘스위스’ 및 ‘오스트리아’로도 배달된다.

공장을 최대의 속도로 가동하는 한편, 1969년도 중에 가외의 건축 공사가 수행되었다. 구 건물의 고미 부분을 13개의 침실로 개조한 것이다. 그 공사는 임시적인 마련으로 자기들의 시간, 힘 그리고 능력을 ‘벧엘’에서 사용하는 것을 행복으로 여기는 형제들에 의하여 수행되었다. 침대, 옷장 등등의 그 방들을 위한 가구가 우리의 목공소에서 제작되었다.

이러한 건설 공사에도 불구하고 ‘벧엘’ 집은 여전히 협소하였다. 1970년 5월 ‘노워’ 형제가 ‘브루클린’의 공장 감독자 ‘라슨’ 형제와 함께 약 일주일간 우리를 방문하였다. ‘벧엘’ 집과 공장에 대하여 전반적인 검토를 하는 동안 ‘노워’ 형제는 확장하는 것이 사업의 이익에 합치되는 길이라고 판단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1969년 가을에 새로운 지부 감독자로서 봉사하기 시작한 ‘리하르트 켈시’ 형제에게 굉장한 분량의 일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주 건축 공사를 위하여는 한 회사와 계약을 하였으며, 반면에 내부 공사는 형제들이 하기로 마련하였다. 목공소에서는 ‘페르디난트 라이테르’가 새로 마련한 방안에 비치할 가구를 만들기 위한 모든 준비를 갖추었다. 이것은 그에게 결코 새로운 일이 아니었다. 왜냐 하면, 일찌기 1947년에 그는 현재의 구 건물의 앙상한 뼈대에 창문과 문틀을 만들어 다는 일에 참여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동안, 그는 더 연로해졌지만, 80세의 고령(가족 중에서 두번째로 가장 연로한 형제임)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직도 강건하며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여 훌륭한 본을 세우고 있다. 젊은 형제들은 “‘라이테르’ 형님을 따라가기가 어렵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이러한 확장은 참으로 필수불가결하였다. 1971년 4월에 89,706명의 새로운 전도인 최고수에 도달하였으며, 기념식에 145,419명이 참석하였다. 6월에 우리는 1954년 이래 최고의 시간 평균을 기록하였다. 1971 봉사년도 말까지 우리는 1,900만 부의 성서, 서책, 소책자 및 잡지를 전하였다. 그것은, 평균, 서부 독일과 서부 ‘베를린’의 매 가족 당 한 권의 성서 연구 보조물을 의미하는 것이다.

1972년 2월 11일은 기념할 만한 날이었다. 그 이유는? 아침 10시에 첫 독일어판 「신세계역 성경」이 ‘브루클린’으로부터 도착하였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쁨은 참으로 충천하였다! 즉시 5월과 6월에 성서 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마련이 이루어졌다. 회중들은 자기 구역 내에 있는 신문사에 그에 관한 ‘뉴스’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신문 기사들은 모든 사람의 관심을 「신세계역」으로 이끄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한 기사들의 표제의 얼마를 살펴보면 이러하다. “새로운 성서 번역판을 구하려고 몰려들다”, “성서 운동을 전개하려는 96,000명의 전도인들”, “여호와의 증인들 매 가정에 성서를 전달하다.” 심지어는 종교계의 신문들과 잡지들도 반응을 보였으며 산하 교회 회원들의 관심을 이 성서로 이끄는 데 그들 나름의 방법으로 기여하였다. 예를 들면, 「복음 교회 신보」(Evangelische Gemeindeblatt)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1백만부라는 희대미문의 다량의 독일어 번역 초판이 인쇄되었다. 독일에서의 ‘루터’판 성서의 수요는 연간 약 500,000부 가량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금후 수년간의 그들의 성서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계획을 세운 것이 아님은 확실하다. 그들의 통례적 열성으로 그들은 광범위한 운동을 전개하는 데 이 새로운 출판물을 사용할 것이 예상된다. ··· 가격이 5‘도이처-마르크’에 불과한 동 성서에 대하여, ··· 매입자들은 성서 연구를 하도록 격려받으며 판매자들은 매입자의 가정에서 그러한 연구를 사회해 주겠다고 제의한다.” 「가톨릭 일요신문」(Katholische Sonntagsblatt)도 동일한 기사를 게재하였다. 「신세계역」의 공개와 배부 운동은 참으로 1972 봉사년도의 절정이었다.

1973 봉사년도 초에 이르러서는 서부 독일과 서부 ‘베를린’에 95,975명의 좋은 소식의 선포자가 있었으며,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서적 생산은 신기록에 도달하였다. 동 봉사년도 중에 ‘비스바덴’ 공장에서 17종의 새로운 서책이 인쇄 및 제본되었는데, 이 중 얼마는 독일에서 다른 일부는 ‘스칸디나비아’ 제국과 ‘네덜란드’에서 사용할 것들이었다. 당신은 총 생산량이 집계되었을 때 ‘벧엘’ 가족이 느낀 흥분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단 1년 동안에 3,500,000부 이상의 서책이 생산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훌륭한 결과는 이러한 출판물을 받은 사람들의 생활에서 나타났다. 예를 들면 12세된 한 어린이는 배운 내용에 크게 감동을 받아 자기 어머니 그리고 자기와의 연구를 사회하는 증인에게 자기들 야외 봉사에 데리고 가달라고 요청하였다. 그 증인은, 물론, 우선 그가 교회 회원 명부에서 이름을 삭제하고 큰 ‘바벨론’으로부터 나와야 한다고 설명하였다. 그 다음 날 아침 학교 휴계 시간에, 그 문제의 긴급성을 느낀 그 소년은 시청으로 달려가서 필요한 서류를 작성하였다. 그런데 담당 관리는 지금 그 문제를 취급할 수 없음으로 후에 다시 와야겠다고 말하였다. 그 날 오후 방과 후에 그는 그 사무실로 갔다. 또 다시 그 관리는 그를 되돌려 보내려고 하면서, 그의 어머니가 그 서식에 서명을 하지 않으면 안되며, 그러므로 후에 다른 때에 다시 와야겠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 소년은 그 관리에게 자기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서 지금 오도록 요구하라고 재촉하였다. 그 관리는 전화를 걸었지만, 단순히 이 문제를 처리하기 위하여 언제든 편리한 때에 그 소년과 함께 오라고 제안하였을 뿐이다. 그러자 그 어린이는 그 전화에다 대고 큰 소리로 “아니예요, 어머니, 지금 당장에 오세요” 하고 항변하였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는 자기 작은아들을 데리고 와서 서류에 필요한 내용을 기입해 넣고 서명을 하였다. 그런 다음 그 어머니는 “기왕 온 김에, 우리도 탈퇴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였다.

협회의 사무실에서 형제들은 동 연도 중에 접수된 보고들을 면밀한 주의를 가지고 살펴보았다. 기념식을 위하여 서부 독일에서는 150,313명이 그리고 서부 ‘베를린’에서는 7,911명이 참석하였다. 달이 지남에 따라 침례자 수도 현저하게 증가하였다. 7월에 이르러서는 전 연도의 동 기간의 3,812명에 비하여 5,209명에 이르렀다. 1973 봉사년도 말이 되어, 여호와의 편에 선 새로운 사람들의 총수는 6,472명에 달하였다. 그 무렵 98,551명이 서부 독일과 서부 ‘베를린’에서 인류의 희망으로서 하나님의 왕국을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데 참여하고 있었다.

지상의 평화—그러나 하나님의 왕국에 의해서만 실현됨

과거 1939년, ‘아돌프 히틀러’는 연례 제국의 당의 날을 위한 표어로서 “평화”를 선택한 바 있다. 이 “제국의 평화의 당의 날”을 위하여 기념 주화와 특별 우표를 발행하였다. 그러나 대전의 발발로 말미암아 동 기념식은 취소되었다. 30년 후인 1969년 8월 ‘뉘른베르크’의 ‘제펠린비이제’에서, 다시 말하면, 30년 전에 “제국의 평화의 당의 날” 기념식을 개최하려던 동일한 장소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지상의 평화” 국제 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서는 총 130,000명이라는 수의 대표자들에게 숙박 시설을 마련해 주었다. 이 일을 가능케 하기 위하여 1년 전에 증인들은 60,000평방 ‘미터’가 넘는 천막을 빌렸으며 그래서 그들은 48개 대형 천막을 칠 수 있었다. 약 1년 반 전에 그들은 또한 ‘뉘른베르크’ 시 당국에 요청하여 동 시내에 있는 모든 학교 및 체육관들을 빌려서 기숙사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그 전해 초가을에 식당을 위한 예비 작업이 착수되었다.

대회가 시작되자, 78개국으로부터 온 대표자들이 참석하였다. 대회 ‘프로그램’ 그 자체도 독일어 뿐만 아니라, 희랍어, ‘크로에이시아’어, ‘네덜란드’어, ‘슬로베니아’어 및 ‘터키’어로 제공되었다. 세계 전역에서 온 사람들이 이곳에 함께 모였으며 그들은 평화 속에 함께 생활하면서, 그리스도인 형제 우애의 따뜻한 유대를 만끽하였다.

‘나치’당 지도자들이 한때 “천년 통치”를 꿈꾸던 거대한 석재연단에 서서 ‘노워’ 형제는 150,645명의 청중에게 “다가오는 천년 평화”라는 공개 강연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청중들에게 사람들이 실현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하여 꿈꾸라고 격려하지 않았다. 그는 영속적인 평화를 인류에게 실현시킬 유일한 수단, 즉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수중에 있는 하나님의 왕국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그는 성경을 사용하여 그 평화의 시대의 도래가 임박하였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하나님의 승리를 위한 준비

하나님께서 자기의 모든 적들에 대하여 승리하실 때가 바로 우리 목전에 있다는 것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여호와의 증인들은 1973년에 “하나님의 승리”란 주제를 특징짓는 일련의 국제 대회를 계획하였다. 이 중 두 대회가 독일에서 개최되었으며, 최소한 75개 나라에서 대표자들이 참석하였다. ‘뒤셀도르프’의 ‘라인’ 운동장에서 “하나님의 승리—그것은 고난받는 인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연설이 행하여진 마지막 날, 그곳에 참석한 청중은 67,950명이었다. ‘뮨헨’의 ‘올림피아 파르크’에서 열린 5일간의 대회에서 행하여진 동일한 연설에 78,792명이 참석하였다. 총 참석수는 146,742명이었다!

50년전에 ‘히틀러’가 그의 “맥주 ‘홀’ 소동”으로 정권을 얻으려는 시도를 한 것은 ‘뮨헨’에서의 일이었다. 이제 그와 그의 체제는 사라졌으나, 수가 나날이 증가하는 여호와의 증인들은 계속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왕국의 승리를 강조하고 있다.

1972년 ‘올림픽’ 경기에서 여러 나라의 운동 선수들이 힘을 겨룬 것도 ‘뮨헨’에서의 일이다. 그 경기는 “평화의 축제”라고 불리웠지만, 온 세계가 기억하는 바와 같이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가장 생생하게 남아있는 것은 세상의 국가주의적 갈등을 반영하여 일어난 그 유혈 사건이다. 그것을 회상하면서, 모 기자는 한 신문(Münchner Anzeiger)에서 이렇게 기술하였다. “‘하나님의 승리’ 대회 시작 하루 전날 이 경기장의 빈 관람석에 서서 이곳에서 일하는 봉사자들(도합 7,000명이 있었다)의 자진성에 감동을 받은 나는 자동적으로 1972년 9월 5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에 폭력과 살인이 운동장들에서 난무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자기들의 신념에 따라 동료 인간들 속에서 선하고 숭고한 것을 분기시키려고 노력하는 이들이야말로 신자들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경기를 하면서 각자가 자기 혹은 자기 나라가 다른 사람이나 다른 나라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그곳 ‘올림피아 파르크’에 모인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평화를 주시는 하나님”이신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 행하”고 있다. 그들을 여러 나라로부터 이 대회로 오게 한 것은 그분께 대한 사랑이며, 그들로 하여금 연합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며 그 이름이 모든 수치를 씻고 입증될 날을 고대하며 바라보도록 움직인 것은 그 동일한 사랑이다.—미가 4:5; 로마 15:33, 신세.

이 대회에서 각자가 하나님께서 악인들에 대한 심판을 집행하시고 자기 종들에게 상을 주실 “날”, 하나님의 승리의 “날”인 “여호와의 날의 임재를 ··· 항상 유의하”는 것이 중요함이 강조되었다. (베드로 후 3:11, 12, 신세) 만일 그들이 “여호와의 날”이 도래할 때 하나님의 은총을 즐기고자 한다면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방하여 개별적으로 세상에 대한 승리자임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됨을 기억하도록 도움을 받았다. (요한 16:33) 그들은 자기들 자신을 세상의 주형에 틀잡혀져서 세상의 방법대로 일을 하도록 방임하거나, 개인적인 무관심이나 세상의 반응에 대한 두려움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에서 물러서게 만들도록 허락해서는 안된다.

이제 하나님의 승리가 매우 가까와진 만큼, 대회를 마친 여호와의 증인들은 지금이 자기들의 전파 활동을 늦출 때라는 느낌을 가지고 돌아간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그들은 남아있는 시간을 온전히 사용하도록 격려받았으며, 그들은 일하는 데 사용할 장비를 공급받았다. “인류에게 때는 거의 찼는가?”라는 제목을 실은 전도지의 집중적인 국제적 배부를 위한 계획이 성안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천년 왕국은 가까왔다」라는 자극적인 제목의 새 책을 공급받았다. 그들은 또한 「참다운 평화와 안전—그 근원은 무엇인가?」 책을 받았는데, 그 책은 모든 지성있는 피조물이 직면하는 문제인 우주 주권이란 중대한 문제에 주의를 집중해 준다. 이미 그들은 이 책의 지식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다. 끝이 오기 전에 이 고난에 찬 세상에 어떠한 상태가 진전되든 관계없이 여호와의 증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일, 그분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일에 매진하기로 결심하였다.

여러 해 동안 독일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여타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아왔다. 그들에게 그러한 시험이 닥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악인들의 손에서 박해를 당하셨음을 알고 있으며 그들도 동일한 것을 기대하고 있다. (요한 15:20)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 문제를 분명히 이해한다. 그들은 ‘사단’ 마귀가 여호와의 주권의 정당성에 도전해 왔음을 알고 있다. 그는 여호와를 섬기는 자들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 이기적으로 개인적인 이득을 생각하여 그렇게 한다고 공공연히 비난해 왔다. ‘사단’은 압력 하에 처하여지면 여호와의 주권의 충성스러운 지지자임을 증명할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추단해 왔으며, 하나님과 사람의 원수인 그는 자기에게 자신을 노예로 바친 사람들을 사용하여 그 문제에 대한 자기의 주장을 증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누가 22:31.

그와는 반대로, 여호와의 증인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과 미래에 대한 자기들의 모든 소망은 여호와의 과분하신 친절로 말미암은 것임을 인식한다. 자기들의 창조주에 대한 진정한 사랑에 감동된 그들은 개인적인 희생이야 어떠하든 간에 그분께 대한 자기들의 성실을 증명하는 것을 특권으로 여긴다. 불경건한 세상과 타협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직장과 가정을 상실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자녀와 배우자를 잃는 일을 인내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쇠채찍으로 의식을 잃도록 구타당하거나, 굶어 죽거나 혹은 총살형을 당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일에도 승리자가 된 것은 누구인가? 마귀는 아니다. 그의 능력 안에 있는 세상도 아니다. 오히려 승리자는 오직 참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께 믿음을 둔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이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하나님의 모든 자녀, 신세]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 누구뇨?” (요한 1서 5:4, 5) 물론 그들 중의 얼마는 하나님의 적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하늘의 왕국에서 그와 함께 공동 후사가 될 희망을 가졌고 그의 임재시에 살아있던 그들은 “순식간에 홀연히” 불멸의 천적 생명으로 부활되었다.—즉 세상에 대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고린도 전 15:51, 52) 하나님의 새 질서에서의 지적 생명의 소망을 가진 자들은 거짓말하실 수 없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왕국의 의로운 통치 하에서 생명으로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임시적인 휴식의 잠을 자고 있다. 수천의 더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사단’과 그의 보이는 대행자들의 잔악한 공격을 견디어 살아남았다. 이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살아있고 아직도 좋은 소식을 전파하여, 아직도 여호와께 대한 자기들의 충성을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앞날에 어떠한 시험을 직면하게 되든지 관계없이 그 충실한 행로를 계속하자는 것이 그들의 결심이다.

이 보고문을 읽은 모두가 이를 통하여 충실한 인내를 계속하도록 격려받게 되기를 기원한다. 사도 ‘바울’의 이러한 영감받은 말을 유의하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승인받은 상태, 신세]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라].” (로마 5:3-5)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여러분의 응답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여러분의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일로 삼으면서, 이제 매우 임박한 하나님의 승리에 온전히 확신을 두도록 움직이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172면 삽화]

‘작센하우젠’ 집단 수용소

친위대 막사

점호 광장

독방 건물

격리 구역

[173면 삽화]

‘가스’실

사형장

이 잡는 곳

[191면 삽화]

‘비스바덴’에서 ‘왙취 타워 협회’가 구입한 건물

[217면 삽화]

1973년의 ‘비스바덴’ ‘왙취 타워 협회’ ‘벧엘’ 집과 인쇄 공장

[223면 삽화]

‘뒤셀도르프’에서 열린 “하나님의 승리” 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