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프리카’와 그 인근지역 (2부)
남‘아프리카’와 그 인근지역 (2부)
조용한 변화
협회장으로서 25년 동안 충실히 그리고 열심히 봉사해온 ‘러더포오드’ 형제는 이미 1941년말 몹시 앓고 있었다. 그때 그의 나이 72세였으며 여러 해 동안 여호와의 봉사에서 자신을 아끼지 않았다. 1942년 1월 8일에 사망함으로써 그는 지상에서의 왕국 봉사를 마쳤다. 며칠 내에 협회 이사회는 ‘브루클린’ ‘벧엘’에 모여 ‘나단 H. 노워’를 새 회장으로 선출하였다. ‘러더포오드’ 형제의 사망 후 야외에서의 반응은 “러셀” 형제의 사망 후에 형제들이 느낀 것과는 달랐다. 1942년에는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절규는 없었다. 물론 ‘러더포오드’ 형제가 사망했을 때 진리의 적들은 즐거워하였으며 “이제 그들의 인도자이자 대변자가 없어졌으나 그들의 활동은 머지않아 와해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점에 대하여 곧 실망하게 되었다.
‘러더포오드’ 형제가 사망하기 얼마 전인 1941년 8월에 그는 미국 ‘미주리’ 주 ‘세인트 루이스’ 대회에 참석했었다. 그 대회의 주요 내용 한가지는 “어린이들의 날”이었으며 「자녀」라는 새로운 책이 발표되었다. 독특한 그 대회의 특징들은 1942년 4월의 ‘요하네스버어그’ 대회에서도 작은 규모로 재연되었다. 그 때의 참석수는 새 책을 기쁨으로 받아들인 340명의 자녀들을 포함하여 1,700명이나 되었다. 그 대회에서 400명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그들의 헌신을 상징하였는데 그 수는 이전 최고 기록의 두배 이상이었다. 그 대회 조직은 처음으로 6,000명을 먹일 수 있는 식당을 운영하였는데 그것은 아주 성공적이었으며 그들은 훌륭한 교제를 즐길 수 있는 더 많은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모든 형제들은 참으로 많은 격려를 받았고 새로운 힘을 얻었으며 행복을 만끽한 상태로 집에 돌아갔다.
그 대회를 통해 특히 격려를 받은 사람들은 최근에 ‘파이오니아’를 시작한 여러 젊은이들이었다. 1942년에 남‘아프리카’의 ‘파이오니아’ 수는 65명으로 불어났다. 그 중 한사람은 ‘피에트 웬첼’ 형제였는데 그는 ‘케이프’ 주의 작은 마을인 ‘보니베일’에서 진리에 들어왔다. 그는 1941년
12월에 ‘킴버얼리’에서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였다. 1945년에 그는 ‘프란스 뮬러’와 함께 일하게 되었는데 그는 16세로 학교를 갓 졸업하였지만 ‘프리토리아’ 회중과의 활동에서 이미 어느 정도 훌륭한 훈련을 받았고 경험을 쌓은 바 있다. 그 두 형제들은 ‘요하네스버어그’ 남쪽 약 48‘킬로미터’ 쯤 되는 곳에 있는 ‘베리니징’ 시에 임명되었다. 그들은 열심히 활동하였으며 그 중 한 사람은 그 해에 매달 평균 210시간을 봉사하였다.반대자들의 비관적인 예측이 있었지만, 1942년 ‘러더포오드’ 형제의 사망 후 왕국 활동은 늦추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왕국 활동은 더 빠른 속도로 발전하여 그 봉사 연도 말에 ‘조오지 필립스’는 그 전해에 달한 최고 전도인 숫자와 비교해서 26‘퍼센트’가 증가된 1,582명의 전도인 신기록을 보고할 수 있었다. 1931년의 약 100명이라는 소수 집단과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
형제들의 종
새로운 협회장인 ‘노워’ 형제가 활동의 발전을 지도하면서 처음 새로 전개된 것들 중에는 형제들의 종 사업이 있었다. 남‘아프리카’에서는 그것이 1943년 2월에 시작되었다. (지구 활동은 1942년에 끝났다) 형제들의 종은 독신 남자여야만 하였고 그들은 바쁜 일정을 따르기 위해 건강이 좋고 체력이 강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처음에, 작은 곳은 단지 하룻동안 방문하였고 더 큰 회중들은 이틀이나 사흘 동안 방문하였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려운 조건하에서 많은 여행을 하고 밤낮 아주 불편한 시간에 기차와 ‘버스’를 타야 할 필요가 있었다. 하는 일은 회중 기록들을 주의깊이 조사하는 것뿐만 아니라 주로 형제들과 야외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야외 봉사에서 그들을 훈련시키는 것이었다.
1943년에 새로 임명된 형제들의 종들 가운데 ‘게르트 넬’이란 형제가 있었다. 그는 북부 ‘트랜스바알’의 교사로서 1934년에 진리를 알게 되었으며 왕국 전도인으로 아주 열심히 그리고 활동적으로 일하였다. 지구의 종과 형제들의 종으로서 ‘넬’ 형제는 수많은 전도인들—‘아프리카’인 및 ‘유럽’인—을 도와주는 특권을 즐겼으며 많은 형제들은 아직도 그의 충실하고 충성스러운 봉사를 기억하고 있다. 그는 1946년에 공용 ‘네델란드’어 출판물의 번역자로서 ‘벧엘’에 불리움을 받았다.
형제들의 종이 된 ‘아프리카’인 형제로는 ‘토마스 음켈레’가 있었다. 그가 진리의 지식에 이르도록 도와준 사람은 남‘아프리카’의 첫 ‘파이오니아’ 중의 한 사람으로서 정다왔던 ‘물렝가’ 형제였다. ‘물렝가’ 형제는 어느 일요일 오전에 야외에서 활동하다가 한 무리의 남자들이 땅위에서 잠자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을 때 그들은 밤새도록 교회에서 기도하느라고 전날 밤에 잠을 못 잤다고 말하였다. 그때 그들의 교역자 즉 그 당시 “목사” ‘토마스 음켈레’는 ‘물렝가’ 형제에게 가방에 들어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죽은 자는 어디 있는가?」라는 소책자를 받았다. 그 다음 주에 그는 책을 몇권 더
받았고 그 다음 주일에 그는 대회에 참석하였다. 오래지 않아 그는 교회로부터 탈퇴하였고 침례를 받았으며, 그 해에 그는 ‘물렝가’ 형제와 함께 ‘파이오니아’를 하고 있었다. 그후 이미 언급한 대로 그는 형제들의 종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1945년말에 충실한 생애를 마쳤다.새로운 학교가 큰 효과를 가져오다
협회장 ‘N. H. 노워’에 의해 새로이 시작된 마련 중 하나로서 야외에 많은 효과를 가져온 것은 매주 열리는 신권 전도 학교이다. 이 대단히 훌륭한 마련은, 자기들은 공개 강연 연사가 결코 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많은 형제들이 짧은 기간 내에 연단에서 아주 유능하게 되고 야외에서 더 효과적이 되도록 돕는 데 성공적이었다. 남‘아프리카’ 전역에서 형제들은 여호와의 그 새로운 마련을 환영하였으며 열정을 가지고 그 마련을 시행하였다. ‘유럽’인 전도인들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언어 및 교육 부족 등의 많은 장애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인 형제들도 그렇게 하였다.
1943년에 학교 감독자가 된 사람으로 ‘사무엘 메이스’ 형제가 있었다. 1938년에는 그가 공산당원이었다. 그 때쯤 해서 그는 사업에 관한 훌륭한 지식을 얻을 생각으로 「부」라는 서적을 샀다! 또한 ‘사무엘’은 악령들에 의해 시달림을 받았으며 공포 속에서 밤을 보내곤 하였다. 마법사들을 여러 번 방문해 보았지만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파수대」 연구에 참석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의 전체 생활은 변화되고 개선되었다. 무엇보다도 그에게 깊은 인상을 준 것은 다른 종족에 속한 형제들의 사랑이었다. 정치적인 벗들에게서 그가 결코 볼 수 없었던 놀라운 연합을 그들 사이에서 볼 수 있었다. 그는 ‘리이프’에 위치한 ‘아프리카’인 회중의 학교 감독자가 되었고 그 후 ‘파이오니아’를 시작하였으며 순회 감독자로 사용되었다.
신권 전도 학교는 ‘아프리카’인 밭이 더 신속히 발전되도록 도움이 되었다. ‘프리토리아’에서는 ‘헤밀튼 카프위트’에 의해 형성된 작은 집단이 1945년에 가서는 181명이 연합하는 커다란 회중으로 발전하였다. 그 때쯤 해서 정부는 ‘프리토리아’ 시에서 떨어진 원주민 지구로 ‘아프리카’인들을 이동시키기 시작하였다. ‘아프리카’인 회중은 이미 그 규모에 있어서 ‘유럽’인 회중의 거의 두배가 되었다. 그것은 2차 세계 대전 중에 ‘아프리카’인 밭에서 놀라운 발전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전쟁 초에는 수에 있어서 ‘유럽’인 전도인들이 2 대 1로 ‘아프리카’인 전도인들을 능가하였으나 전쟁말에 가서는 상태가 변하여 많은 곳에서는 ‘아프리카’인들이 ‘유럽’인 형제들을 수에 있어서 능가하였다.
1945년에 ‘요하네스버어그’에는 113명이 연합하는 ‘유럽’인 회중이 하나 있었고, 다 합쳐 500명 이상의 ‘아프리카’인 형제들이 연합하고 있는 ‘아프리카’인 회중이 네개 있었다.
‘케이프타운’에서도 역시 확장되고 있었다. 연합하고 있는 ‘유럽’인 형제의 총수는 135명이었으며 ‘케이프타운’의 ‘솔트리버’ 유색인 회중은
138명으로 증가되었다. 바로 그 직후에 유색인 회중이 분회되어 네개의 새로운 회중이 설립되었다.그 때쯤 해서 진리를 받은 사람으로 백색 ‘아프리카’인 ‘니콜슨 마크헤타’가 있었다. 그는 1944년 대회에서 침례를 받았다. ‘마크헤타’ 형제는 1946년에 ‘파이오니아’가 되었으며, 그후 여러 해 동안 그는 순회 감독자로 사용되었다. 영어를 아주 잘했기 때문에 그는 큰 대회에서 빈번히 영어를 ‘세소토’어로 통역하는 일을 하였다. 그는 또한 그의 고국인 ‘레소토’에서 협회 출판물을 ‘세소토’어로 번역하는 특권도 누렸다.
‘니아살랜드’에서의 발전
1940년에 ‘니아살랜드’의 그리스도인 회중수는 60개로 증가되었다. 왕국 전파에 대한 종교적인 반대도 역시 증가되고 있었다. ‘로마 가톨릭’ 사제들은 그 나라가 ‘로마’의 통치하에서라면 우리의 활동이 오래 전에 중지되었을 것이라고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었다. 어쨌든 그들은 교황이 멀지 않아 협회의 활동을 분쇄할 것이며 “‘러더포오드’와 모든 여호와의 증인들을 바다 가운데 몰아 넣”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한 경우에 일어난 일을 보면 거짓 종교 선생들의 음흉한 방법을 알 수 있다. ‘신얀자’어로 나오는 축음기 판을 트는 일이 다섯명의 ‘로마 가톨릭’의 ‘아프리카’인 선생들을 불안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 사람들은 축음기를 가진 어떤 사람이 마을들에 다니면서 ‘아마겟돈’이 와서 모든 ‘유럽’인들이 멸망될 것이라고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다는 고발장을 그 지역 판무관에게 제출하였다. 물론 그것은 백인 관리들의 염려와 적의를 일으키기 위해 고의적으로 행해진 것이었으나 당국자들이 조사한 결과 그 보고서는 거짓임이 판명되었으며 문제는 그것으로 끝났다.
일반적으로 ‘아프리카’인의 생활에서는 미신이 큰 역할을 한다. 그러나 진리는 그러한 정신적인 속박에서 자유를 얻게 한다. 한편 미신의 종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항해서 그들 특유의 무기를 사용하는 일이 많다. 예를 들어 여호와의 증인의 한 회중이 각 마을을 다니며 전파하고 있었는데 그 뒤에 사자 한 마리가 와서 마을 사람들을 희생시켰다. 그 일 때문에 미신적인 사람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사자의 주의를 그들에게 이끌게 하였다고 비난하게 되었다. 물론 ‘로마 가톨릭’의 선생들이 그러한 미신적인 경향을 이용하였음은 물론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과 함께 ‘니아살랜드’에서의 왕국 활동에 대하여 더 많은 압력이 가해졌으나 정부는 계속 공정한 태도를 나타내었다. 그 점은 총독인 ‘H. C. D. 매켄지-케네디’ 경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알 수 있다. “내가 ‘왙취 타워’ 사람들을 알게 된지는 25년이 되었다. 어떤 나라에서는 그들이 박해를 받으며 승인을 받지 못한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이 나라에서는 그들이 법을 준수하는 한 나는 그들의 활동을 중지시키지 않겠다.” 또한 어떤 ‘아프리카’인 관리들은 왕국 소식이 들어 오도록 계속 길을 열어주는 역할을 하였다.
활동이 많이 증가되어 1943년에는 이제 매월 평균 전도인이 2,464명이나
되었고 144개의 회중이 운영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해에 총독과 경찰청장이 새로이 임명되었다. 탁송된 다량의 ‘신얀자’어 「부」 책이 정부에 의해 억류되었다. 1943년 6월에 정부 고시 77호는 모든 협회 출판물의 반입을 전면 금지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 나라에서의 활동에 그리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왜냐 하면 이미 ‘니아살랜드’ 내에 상당량의 재고가 있었기 때문이다.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그 때까지 활동을 하고 있었고 협회의 이름에 욕을 돌리고 있는 “왙취 타워 운동” 단체들의 존재였다. 1937년에 ‘엘리오트 캄와나’는 ‘세이셀’ 군도의 유형에서 풀려났고 이들 거짓된 운동 단체 중 하나의 지도자로서 돌아왔다. ‘윌리 카발라’도 역시 자신을 약간 과시하면서 ‘러더포오드’ 판사의 지도를 받고 있다고 거짓 주장하였다. 상황이 그러했기 때문에 협회가 전도인으로 인정되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신분증을 발부하고 그러한 증명서를 발부받은 사람들의 명단을 정부에 제공한 것은 잘한 일이었다. 그렇게 하여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의 인도를 받는 여호와의 증인들과 비슷한 명칭을 가진 이교적인 운동 단체들과의 사이에 명확한 구분이 있게 되었다.
1944년에는 “여호와의 신세계”라는 표현이 ‘니아살랜드’인들에게 참으로 인기였다. 신세계에 대한 연설을 하면서 한 형제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아담’이 범죄했을 때 그의 자녀들은 아무도 그 동산에서 태어나지 못했다. 모두가 ‘덤불’ 속에서 태어났다. 벗들이여, 우리는 아직도 그 ‘덤불’에 있다. 우리는 아직도 그 동산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마태케냐’(모래 벼룩) 세계를 떠나 온전히 설립된 여호와의 새로운 세계로 들어갈 때가 이제 가까왔다.” 그 나라의 어떤 곳에서는 관심자들이 이곳 저곳으로 여호와의 증인들을 뒤따라 다니며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을 들이 마셨다.
다음 해에는 성서 진리의 강한 열기로 거짓 종교의 습지대가 바짝 말라가고 있었다. 여러 명의 ‘아프리카’인 교직자들은 신세계에 대한 강연을 들은 후 함께 ‘유럽’인 선교사에게 가서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이 이런 것들을 우리에게 숨겨온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늘날 우리는 어린 소녀들이 사람들을 방문하여 그들이 들은 가장 훌륭한 것들을 말해주는 것을 보고 있읍니다! 당신은 전파하라는 교리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는데 이제 그것들은 거짓임이 밝혀졌읍니다. 우리가 일어서서 사람들에게 전파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어리석게 보이고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남‘로디지아’에서의 어려움에 대한 승리
1939년에 남‘로디지아’의 ‘아프리카’인 전도인 수는 약 460명이었는 데 반해 ‘유럽’인 전도인 수는 약 15명이었다. 이 나라의 주요 ‘아프리카’ 언어인 ‘신얀자’어로 첫 소책자가 공급됨으로 인하여 ‘아프리카’ 형제들을 위한 커다란 도움이 베풀어졌다.
‘잭 맥루키’는 자신이 경영하는 금광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동안, 자기
가족을 진리 안으로 인도하여 양육하고 있었다. 그의 집은 가는 기둥과 진흙으로 지은 간단한 집으로서 그 안에는 ‘셍가’—쇠똥을 물에 개어 말려 단단하게 된 것—로 된 바닥이 있었다. 이것이 단단하게 굳어진 후에는 냄새도 없으며, 매일 비질을 할 수도 있다. ‘잭’은 자녀들을 진리 안에서 충실히 훈련시키고 있었는데, 그가 사용하는 한 가지 방법은 성서에서 몇 귀절을 읽어 준 다음, 그들이 이해하였는가 알아보기 위해 질문을 하는 것이었다. 막내 아들인 ‘이안’은 그 당시 아주 어렸었는데도 그렇게 연구하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어려서의 그런 훈련은 후에 그가 ‘파이오니아’와 ‘길르앗’ 학교 졸업 후 선교인이 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다른 ‘맥루키’ 가족이 남‘로디지아’에 등장하게 된 것도 역시 1939년이었다. 그 가족은 ‘버어트 맥루키’와 그의 아내 ‘칼멘’, 그들 사이에서 난 어린 아들 ‘피터’와 이전의 결혼에서 얻은 ‘맥루키’ 형제 그의 두 자녀였다. ‘버어트 맥루키’는 1927년에 처음 진리를 받고 그의 친척들도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많이 도와 왔다. 사실상 ‘맥루키’ “일가”는 중앙 및 남‘아프리카’에서 아주 잘 알려져 있다.
1939년에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남‘로디지아’에 있는 두 ‘맥루키’ 가족들과 다른 전도인들은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다. 정부는 1940년 11월 15일에 협회 출판물의 반입과 배부에 대한 금지령을 내렸다. 심지어 “엠파틱 다이아글롯”이라는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서의 영문 번역판도 금지되었다. 그러한 제한 혹은 금지에 대한 거짓된 근거는 그 출판물이 전쟁 수행 노력에 반대를 조장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케이프타운’ 사무실은 지체하지 않고 영국 국왕, 영국 수상, 식민지 국무차관, 남‘로디지아’의 총독과 모든 의원들에게 호소문을 보냈다. 그 서신을 받았다는 공식 통고는 없었다. 며칠 후에 검찰국원 한 사람이 남‘로디지아’ 정부를 대신해서 ‘케이프타운’에 있는 ‘조오지 필립스’를 방문하였다. 그들은 편지를 쓴 사람의 이력에 대한 정보를 얻고자 하였다.
‘버어트 맥루키’는, 그처럼 출판물이 금지될 때 두려움으로 인하여 차차 약해져서 떨어져 나간 사람도 있으나 그들 대부분은 더 열심히 그리고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출판물을 배부하여 법의 적용도를 시험해 보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계속 활동하였다고 말한다. 그 결과 체포나 기소되는 일들이 있었고 필연적으로 유죄 판결이 있게 되었다. 서적, 성서, 축음기와 판은 몰수 당하고 그후 법원 명령에 의해 소각되었다. 그 사건들 중 얼마는 남‘로디지아’ 고등 법원으로 가게 되었으나 그 당시 전쟁의 압력과 열기로 인하여 판결은 협회에 불리하게 내려졌다.
‘잭 맥루키’에 의하면 그 당시 ‘유럽’인 증인의 수는 약 16명이었으며 그들 대부분이 금지된 서적의 배부로 인하여 한두번은 투옥되었다. 감옥에 두세 차례 가게 된 사람들도 있었다. 또한 그 때쯤 많은 형제들이 전쟁과 관련된 그들의 중립적인 입장 때문에 투옥되었다. 그들은 투옥되어 있는 시간을 선한 증거를 하는 데 사용하였으며 얼마의 형무관들은 형제들이 풀려난 후 증인들과 성서 연구를 하였다.
한번은 ‘버어트 맥루키’의 아내 ‘칼멘’이 체포되었고 통례적으로 25‘파운드’의
벌금형 혹은 3개월의 구금형에 처해졌다. 그 당시 그 자매는 임신 중이었다. 항소는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으나 시간을 늦추게 했으며 그 동안 ‘칼멘’은 딸을 해산하였다. 얼마 후에 여순경이 ‘칼멘’을 체포하러 왔으며 ‘맥루키’ 형제는 자기 아내와 아이가 ‘그웰로’ 감옥으로 끌려가는 불행한 사태를 보게 되었다. 그들은 아이를 남겨둘 수도 있었으나 어머니와 아이가 함께 있는 것이 가장 좋겠다고 판단하였다. 자기 어머니와 함께 감옥에 있는 동안 그 갓난 아이 ‘에스트렐라’는 여자 살인수가 봐주었는데 석달의 형기가 지난 후 그 모녀가 풀려날 때 그 여자는 몹시 흐느껴 울었다.‘버어트 맥루키’ 형제 자신도 몇 차례 투옥되었다. 감옥에서 ‘맥루키’ 형제는 추악한 나쁜 행위로 인하여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과 함께 섞여 있었는데 그는 이전이나 그 후에도 그처럼 상스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하였다. 그렇지만 그 중 두 사람에게서 그는 왕국 소식을 듣는 귀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바로 감옥 내에서 작은 침례식이 거행되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모두 운동을 하러 마당으로 나간 동안 ‘맥루키’ 형제는 그 두 죄수에게 침례를 주었다.
1942년에 남‘로디지아’에 있는 ‘유럽’인 형제들은 「여호와의 증인: 그들은 누구이며 그들의 활동은 무엇인가?」라는 소책자를 발행하였다. 그들은 그 소책자를 총독과 다른 관리들에게 우송하였으며 전반적인 배부도 시작하였다. ‘버어트 맥루키’는 그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사실 그의 아내는 어느날 그 활동을 하다가 다시 체포되었다. 그러나 그 자매에 대한 고소는 기각되었으며 그는 유죄가 되지 않았다.
1943년에는 평균 전도인 수가 1,090으로 증가되었으며, 남‘로디지아’에서 왕국 전도인들의 집단은 신속히 불어나고 있었다. 그 다음 해에는 ‘아프리카’인 형제들을 위해 대회가 마련되었다. ‘불러와요’에서의 ‘아프리카’인 대회에 1,028명이 참석하였으며 ‘음레와’에서는 공개 강연에 47명이 참석하였다. 그 두 곳에서 새로이 50명이 침례를 받았다. 또한 ‘유럽’인 대회도 ‘불러와요’에서 있었으며 최고 참석수는 73명이었다. 그리하여 형제들은 협회가 출판물 보관소 개설 허가를 받게되고 그곳에 공식 대표자가 있게 되기를 학수고대하면서 그 동안 활동을 계속 수행하도록 격려를 받았다.
박해를 직면해서도 열심을 나타냄
1940년에 북‘로디지아’의 ‘코퍼벨트’에서 폭동이 또 다시 일어났으며, 어떤 곳에서는 몇명의 ‘아프리카’인들이 살해되었다. 이번에는 여호와의 증인들을 “속죄의 염소”로 만드는 데 적들이 실패하였다. 주모자는 모두가 ‘로마 가톨릭’교인들이었으나 정부는 그 점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 당시 ‘코퍼벨트’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전 어느 때보다 더 강하고 더 열심이었다.
1940년 12월에 모든 협회의 출판물의 반입과 배부를 금지한다는 정부 발표가 있었다. 형제들의 가정은 수색을 당하였으며, 여러 형제들은 출판물을
소유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가게 되었다. 한 경우에는 ‘깁슨 쳄베’와 ‘라몬드 칸다마’라는 두 형제가 추장들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들의 서적을 불태우지 않는다고 해서 몇 차례 심히 구타당하였다. 그 지방 경찰서장과 행정관의 승인 아래 그러한 사건이 자행되었다. ‘케이프타운’ 지부로 보내는 보고서는 검열관들에 의해 저지되었으며, ‘루엘란 필립스’는 보안대장에 의해 소환되었다. 사실들을 지시하자 그 대장은 조사해 보겠다고 약속하였다. ‘루사카’의 정부 당국과 ‘런던’에 있는 식민국에 항의서를 제출하였다. 정부는 조사 위원회를 임명하였다. 그들은 행정관과 경찰서장을 징계하였고 서적을 강제로 불태우려는 일은 더 이상 없었다.그후 1941년 3월에는 2개월 이내에 모든 ‘유럽’인과 ‘아프리카’인들은 모든 ‘왙취 타워’ 출판물을 가장 가까운 ‘보마’(법원)에 제출하도록 요구하는 정부 고시가 발표되었으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기소하게 되어 있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진정한 여호와의 증인들은 모두 거부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게 되었다. 협회 출판물 보관소가 수색을 당하였다. 보관소의 종인 ‘루엘린 필립스’는 담대하고 굳건한 입장을 취하였고 그가 가지고 있는 출판물을 내어 주기를 거부하였다. 그는 6개월 형에 처하여졌다. 그해 초에도 ‘루엘린 필립스’는 군복무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한달 동안 감옥에 들어갔었다.
그 다음 해에도 사태는 완화되지 않았다. ‘루엘린 필립스’는 군대 문제로 또 다시 체포되었으나 그는 항소하였다. 항소 사건이 심리되기 전에 그는 감옥에서 3개월을 다 보냈다. 그는 그와 관련하여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삼개월 후에 있게된 항소심은 대법원장이 판사로 앉고 수석검사(그 당시 왕의 고문)가 기소를 맡은 당당한 재판이었다. 그 판사는 장을 찾기 위해 여러 장의 종이 쪽지를 끼워 놓은 성경 한권을 내놓았다. 그는 ‘모세’도 전쟁을 한 사람이었는데 여호와의 증인들을 무슨 권리로 전쟁을 거부해야만 하는가를 묻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모세’는 그리스도 전 1,500년전 사람이기 때문에, 그 충실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일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자 성서 질문에 대한 열정이 점점 식어지게 되었고 얼마 있지 않아 성서는 제쳐 놓게 되었다. 사도들이 살아 있다면 그들도 아마 피고석에 앉아 있을 것이라는 점이 지적되자 그 판사가 감동을 받는 것이 눈에 띄게 나타났다.” 그리하여 ‘필립스’ 형제의 형기는 그가 그 때까지 실제로 구금되어 있던 기간으로 감소되어, 그는 자유인으로 법정을 떠날 수 있었다. 1942년 봉사 연도의 12개월 중 8개월 동안을 그는 감옥에 있었다.
박해로 인한 어려움과 식량 부족과 금지로 인한 출판물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활동은 발전하였다. 출판물의 부족에 대처하기 위해서 형제들이 성서 연구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관련된 성귀와 함께 질문과 대답이 마련되었다. 전쟁으로 인하여 자전거 부분품이나 ‘타이어’도 부족하였다. 그것은 숲속의 원시적인 길에서 사용되는 주요 수송 수단을 대부분의 ‘아프리카’인들이 상실하게 됨을 의미하였다. 그렇지만 북‘로디지아’에서의
활동은 놀랍게 발전되고 있었다. 1944년의 평균 전도인 수는 3,062명으로서 1941년에 비해 116‘퍼센트’의 증가를 보였다. 갖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야외 봉사에서 한달에 평균 30시간을 바치고 있었다. 이 때쯤해서 좋은 소식이 인근의 ‘콩고’에도 역시 들어가 있었다.그 때까지도 북‘로디지아’에서는 여호와의 증인들과 터 놓고 연합하는 ‘유럽’인이 없었다. 이유는? 「1943년 연감」은 그 한가지 이유를 암시하고 있다. “우리의 소식에 깊은 인식을 나타내는 많은 ‘유럽’인들도 심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그러한 사실을 공개적 혹은 적극적으로 알린다면 그들의 지위가 위태로울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 관리들을 포함해서 얼마의 ‘유럽’인들이 증인들에게 상당한 친절을 보였다. 사실상 어떤 지역의 판무관은 두 증인이 그의 전임자에 의해 감옥에 잘못 감금되었다고 보상금으로 각자에게 5‘실링’씩을 지불하였다. 다른 한 관리는 자기 차를 돌보는 잡역부로 일하던 사람(그는 우리의 출판물을 소지했다는 이유로 투옥되었다)이 형기를 마친 후에 그를 만나서 다시 데려다가 일하게 하였다! 많은 ‘유럽’인들의 태도가 그처럼 변화된 것은 의심할 것도 없이 형제들이 행실로 훌륭한 증거를 하였기 때문이다. 「1944년 연감」이 이렇게 보고한 바와 같다. “협회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 [노무]단에서 가장 평판이 좋았으며, 농부들과 다른 고용주들이 특히 그들을 구한다고 밝힌 점은 잘 알려진 일이다.”
1945년에는, 1916년경 ‘오린지’ 자유주에서 ‘재피 데론’을 통해 진리를 받게 된 ‘브리저’ 형제 부부가 ‘요하네스버어그’로부터 ‘루안샤’로 이사하였다. 거기서 ‘브리저’ 형제는 그곳의 ‘유럽’인들 사이에서 ‘파이오니아’를 시작하였다. 그는 전 도시를 다 돌았으며 1,000부의 소책자를 전하였다고 말한다. 이곳에서 그는 한 가족 즉 ‘쉬퍼그’ 부인 및 그 딸인 ‘주버트’ 부인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전에 ‘요하네스버어그’에서 그들과 연구한 바 있었다. 오늘날에는 증손까지 이르는 그 가족 전체가 진리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브리저’ 형제는 “‘크리스머스’ 축하를 믿지 않는” 얼마의 사람들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그들과 접촉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남‘아프리카’에서 우리의 활동에 관련을 가졌던 다른 네 사람과 접촉하게 되었다. 그는 그들과 연구를 시작하였으며 그들이 북‘로디지아’의 첫 ‘유럽’인 회중의 핵심이 되었다. ‘브리저’ 형제 부부는 그 지역 내에 있는 ‘아프리카’인들 사이에서도 활동하였다.
‘바로체란드’로 나아가다
1945년에 ‘C. 홀리데이’ 형제(앞서 이 책에서 언급된 ‘M. 홀리데이’ 자매의 남편)를 통해서 남아연방으로부터 좀 더 많은 도움이 베풀어졌다. 그는 ‘케이프타운’ 지부 감독자인 ‘조오지 필립스’에 의해 “여행하는 종”으로 봉사하며 동시에 “‘루엘린 필립스’ 형제를 돕도록” 초대되었다. 북‘로디지아’에 있는 동안 그는 ‘바로 체란드’를 방문하였는데, 그곳은 면적이 738,000평방 ‘킬로미터’로서 ‘빅토리아’ 폭포의 서쪽, 거대한 ‘잠베지’ 강 상류에 위치해 있었다. 한 ‘유럽’인 관심자 그리고 안내인 및 통역자로
일할 ‘아프리카’인 “형제들의 종” 한 사람이 그와 동행하였다.그것은 상당히 어려운 여행이었다. 그들은 먼저 개인 소유의 목재 운반 열차를 타고 ‘마세세’로 가서 그곳에 잠간 머물면서 얼마의 증인들과 모임을 가졌고 회중의 핵심이 될 사람들을 조직하였다. 다음에 그들은 이동 활차를 빌려 타고 여행을 하였는데, 두 사람의 ‘아프리카’인들이 철로를 따라 밀며 정부 ‘트럭’을 탈 수 있는 곳까지 그 여행자들을 데려다 주었다. 정부 ‘트럭’을 타고 ‘카티마 몰릴로’로 가서 그곳에서 다시 갈아 타고 ‘응그웨시’로 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이 일행을 만나서 짐을 운반해 주려고 ‘세난가’에서 걸어 내려온 형제들을 만났다. ‘세난가’로 가는 나머지 대부분의 여행에서는 세 척의 ‘커누우’를 사용하게 되었다. 어떤 지점에서 그들은 하마 때문에 몸이 오싹해지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 거대한 짐승이 ‘커누우’ 한척을 공중으로 들어 올려 ‘홀리데이’ 형제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노젓는 사람이 기술적으로 그의 균형을 유지하였고 노로 그 짐승을 후려쳤다. 그 결과 다행히 하마는 헤엄쳐 가버리고 모두는 안도의 숨을 쉬게 되었다.
‘세난가’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모여 있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그곳에 오기 위하여 8일 내지 9일을 걸어 온 사람들도 있었다. 모든 사람들은 그들을 위해 어떤 것이 마련되어 있는지 아주 예리한 관심과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유럽’인 형제의 첫 방문이었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이전에 백인을 본 일이 전혀 없었다. 그들이 가졌던 비공식적인 대회는 정말 영적으로 생기를 주는 것이었다.
‘무풀리라’ 회중을 방문하는 동안 ‘홀리데이’ 형제는 백인 주택 구역 지배인인 ‘포오드’ 씨를 만났는데 그는 ‘왙취 타워’ 성원들의 선한 행실과 신뢰성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1946년 여호와의 증인의 연감」에 다음과 같이 언급된 관리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공식적인 태도로는 아직 승인하지 않고 있으나, 개인적으로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청결함과 단정함 및 근면성에 분명히 존경심을 보여 준 몇가지 격려적인 예들이 있다. 광산 지구에서 지금 우리와 연합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800명이 모인 모임에 참석하게 되는 일은 보통 있는 일이다)은 ‘아프리카’인들을 직접 다스리는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기 시작하고 있다. 그 한 예로서 ‘무풀리라’ 도시 계획 위원회와 4개월 교섭한 끝에 왕국회관 건립을 위하여 자유롭게 설계할 수 있다는 허가를 받았다. 그렇게 된 것은 우리를 위해서 담대히 이야기를 해 준 몇몇 관리들의 덕분이다.” 그 건물은 북‘로디지아’에서의 첫 번째 왕국회관이었다.
그러므로 박해에도 불구하고 1940년대 전반부에 북‘로디지아’에서 활동은 서서히 발전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남‘아프리카’ 지부 관할하에 있는 다른 나라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바수톨랜드’에서 전파함
1940년대 초에는 ‘프랑크 테일러’ 형제 부부가 ‘바수톨랜드’(지금의 ‘레소토’)를 방문하였다. 그곳 사람들의 관심이 아주 대단하여 여러 곳에서
‘아프리카’인들은 출판물을 구하려고 실제로 그들의 뒤를 따라 다녔다. 그러나 당국이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출판물을 모두 몰수하겠다고 위협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이동하지 않으면 안되었다.1941년 2월에는 ‘바수톨랜드’에서 우리의 출판물 반입이 전면 금지되었다. 이상하게 생각될지 모르지만 그 나라에 여호와의 증인은 한 사람도 없었는데도 금지령이 내렸다. 그러나 금지 기간 중에 왕국 활동이 시작되어 아주 잘 발전하였다. 확성 장치를 한 협회차를 가지고 형제들이 그 나라를 여행하여 협회의 녹음 연설을 방송해 주고 출판물을 배부하였다. 그러나 1942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지부 사무실은 ‘바수톨랜드’에 있는 두 전도인으로부터 보고를 받게 되었다. 그 첫 전도인들 중 한 사람은 ‘L. 라모세나’라는 형제였는데 그는 ‘트랜스바알’ ‘베리니징’이란 소도시에서 근무하다가 처음 진리를 들었다. ‘라모세나’ 형제는 그 소식에 매우 열중하였고 그 소식을 자기 나라에서 전하고 싶은 아주 강렬한 욕망을 느끼게 되어 자기 나라로 가게 되었고 ‘테야테야넹’이라는 곳을 시발점으로 부지런히 증거하기 시작하였다.
얼마 있지 않아 ‘요하네스버어그’에서 진리를 받아 들인 한 형제가 ‘라모세나’ 형제와 함께 하게 되었으며, 그 두 사람은 자전거를 타고 이웃 마을로 가서 좋은 소식을 전파하였다. 그들은 작은 집회를 조직하였고 그 집단은 성장하였다. 일년 후인 1943년에는 전도인이 네명이 되었으며 그것은 100‘퍼센트’의 증가였다!
‘레소토’에서 호별 방문 전파 활동을 하는 것은 대부분의 다른 나라에서 하는 것과 아주 다르다. 집주인이 집안에 있건 집 밖에 있건간에 전도인은 또렷하고 우정적인 목소리로 “평화를 빕니다!”라는 뜻인 “크호트소!”라고 인사하게 된다. 집주인도 “크호트소!”라고 응답할 것이다. 그러면 전도인은 안으로 초대되고, 주인은 자리를 내어 줄 것이며 그들은 서로의 건강에 관하여 묻게 된다. 의례적인 인사가 끝나게 되면 전도인은 이제 그의 임무에 대해 설명을 시작할 수 있다.
‘가톨릭’ 교회와 불란서 선교단이 그 나라에 엄연히 존재해 있고,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종교 중 하나에 속해 있는데도 조상 숭배의 이교 전통을 계속 고수하는 ‘바수토’인들이 많으며, 의식 살인, 소위 약용으로 신체의 특정 부위를 쓰기 위해 사람을 죽이는 일이 최근까지도 행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장애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왕국 전도인들의 그 작은 집단은 성장하였으며 1948년에는 좋은 소식의 전도인이 9명이나 있게 되었다.
많은 추장들이 ‘가톨릭’교인이기 때문에 그들이 왕국 활동을 반대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들 중에도 어떤 사람들은 정직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1951년에 한 ‘파이오니아’가 ‘레리베’에 있는 어떤 추장이 다스리는 촌락을 방문하였다. 그 ‘파이오니아’는 식사에 초대되었다. 두 교직자도 참석하였다. 그 ‘파이오니아’는 추장에게 증거하였고 그 모든 점을 성서로 증명하였다. 그 두 사제는 불쾌감을 느꼈으며 성을 벌컥 내면서 나가 버렸지만, 추장은 즐거워하였으며 그와 연구가 시작되었다.
그후 그 추장은 자기 영역에 있는 사람들도 연구하도록 격려하였으며 그 결과 너무 많은 사람들이 성서 연구를 원하게 되어 그 ‘파이오니아’가 그들 모두를 다 다룰 수 없었다. 활동은 잘 발전되었으며 1951년에는 ‘바수톨랜드’에 다섯개의 작은 회중이 있게 되었다. 그 다음해에는 10명의 ‘파이오니아’외에도 전도인이 평균 53명이나 있었다.‘탕가니카’에 빛이 밝혀지다
더 북쪽으로 가서 ‘탕가니카’의 ‘아프리카’인 형제들 중에서도 활동이 발전하였다. 1936년 이후 여러 해 동안에 ‘탕가니카’로부터 협회의 ‘케이프타운’ 지부에 전달된 산발적인 서신들에 의하면 ‘아프리카’의 이 부분에서도 희미하기는 하지만 진리의 빛이 비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42년에는 158명의 형제들이 어느 정도 활동에 참여하였다. 1945년 「연감」에서 ‘탕가니카’에서 들어온 보고를 보면, 반대가 증가되고 출판물들이 압수되었음에도 매월 평균 75명의 전도인들이 전도인 당 8시간 이상을 야외에서 일했다. 그러한 형제들을 격려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은 서신 밖에 없었는데 협회는 그렇게 하였다. 1945년에는 144명의 전도인으로 이루어진 세 회중 조직이 그 나라에 사는 약 6,000,000명의 거민들에게 증거하고 있었다. 그들의 활동은 주로 구두 증거와 재방문 그리고 연구하는 것이었다. 때때로 인쇄물이 그들에게 전달되었으며 그들은 참으로 즐거워하였다. 그들은 그러한 재료들을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해 잘 사용하였다. 1946년에는 227명의 전도인과 7개의 회중으로 늘어났다. 그 형제들은 거짓 종교 조직으로부터 상당한 반대를 받았으며, 더 엄밀한 감독과 ‘스와힐리’어로 된 출판물을 절실히 필요로 하였다.
1948년 1월에는 ‘시벰바’어를 말하는 형제들의 종 한사람이 ‘탕가니카’ 회중들을 방문하도록 북‘로디지아’로부터 파견되었다. 그는 ‘음베야’ 지역에 있는 8개 회중과 함께 활동하였으며 형제들을 격려하고 세워 주었다. 북‘로디지아’ 변방에 있는 하나뿐인 다른 회중은 또 다른 형제들의 종이 섬겼다. 좋은 결과가 예상되고 있었으며 추장들도 진리에 관심을 나타내고 있었다. ‘탕가니카’도 역시 이제 새로 형성된 북‘로디지아’ 지부의 관할하에 들어갔다. 오늘날에는 ‘케냐’, ‘우간다’, ‘탄자니아’가 ‘케냐’ 협회 지부의 지시를 받는다. 그 지역에서 왕국 활동이 신속히 발전되고 있으며 여호와의 이름에 많은 영예를 돌리고 있다.
새로운 활동이 시작되다
1945년 6월에는 남‘아프리카’에서 공개 강연 운동이 시작되어 야외에 있는 형제들로부터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신권 전도 학교로 말미암아 이제 많은 연사들이 활동하게 되었다. 제공된 골자들은 주요 ‘아프리카’어들로 번역되었으며 그러한 밭에 있는 형제들도 역시 그 새로운 활동을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공개 연단에서 연설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수줍은 형제들도 많았다. 그러한 형제들 중에는 ‘베지니징’에서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던
‘피에트 웬첼’과 그의 짝인 ‘프란스 뮬러’가 있었다. 「통보」(후에 「왕국 봉사」라 불리움)에서 그 활동이 토론되었을 때, 그 두 사람은 자기들은 공개 강연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공개 강연을 하기 위해서 연단에 서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통보」에 있는 조언을 통해 격려를 받고 그들은 연설을 선택하여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연설을 연습하기 위해서 그들은 강변에 있는 한적한 곳을 택하여 서로 충분히 떨어진 거리에 자리를 잡고 조용히 흐르는 “청중”—강물—에게 “연설”하기 시작하였다! 약 한달 동안 그들은 매일 점심 시간 때마다 강으로 가서 실제 청중에게 연설할 자신이 충분히 생길 때까지 연습하였다. 쪽지를 주문하였고 광고를 많이 하였다. 그날이 되었을 때 그들의 공개 강연에 37명이 참석하였고, 그러한 훌륭한 출발에 대해서 참으로 감사하였다.조직이 눈에 띄게 더 강화됨
이전의 여러 해와 비교해 볼 때 1945년은 반대를 받는 일에 있어서 비교적 조용한 해였다. 그러나 몇가지 조그만 사건들이 있었으며 그 중 한가지는 ‘킴버얼리’라는 소도시에서 일어났다. 그곳은 그 지역에서 ‘다이아몬드’ 채광이 시작된 1870년대 이래로 주요 ‘다이아몬드’ 광산의 중심지가 되어왔다.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킴버얼리’ 시 의회는,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시(‘아프리카’인) 지구에 들어가서 그들의 신앙을 유포시키도록 허용해서는 안된다는 요지의 결의문을 통과시켰다. ‘아프리카’인 지구 감독관은 증인들의 여하한 활동도 중지시키고 그들의 집회 장소를 폐쇄시키라는 지시를 받았다. 한 지방 신문은 “‘러셀’파, 지방에서 금지되다”란 표제 아래 그 내용을 보도하였다.
그 지구들의 감독관인 ‘오브리엔’이라는 사람은 지체하지 않고 조처를 취하였다. 형제들이 없을 때 그는 왕국회관을 부수고 들어가서 출판물과 축음기를 압수하고 축음기를 이동하는 데 사용하는 작은 손수레를 부수어 산산조각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렇게 하고 나서 그는 의기양양한 태도로 부서진 조각들을 땔감으로 사용하도록 구경군들에게 주었다. 지부도 역시 지체하지 않고 대응 조처를 취하였다. 48시간 내에 압수한 물품을 돌려주고 수레에 대한 손해를 배상하라고 시 의회에 통고하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법적 조처를 취하게 될 것이었다. 그 결과 시 의회는 손해 배상으로 10‘파운드’를 내놓게 되었으며 ‘오브리엔’은 뒤로 물러나서 압수한 물품들을 왕국회관으로 손수 가져다 놓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모든 일에 대하여 지방 신문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다시 승리를 거두었고 평상시와 같이 지구들에서 교육 활동을 계속 수행하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1945년 5월 ‘유럽’에서는 지리하게 장장 6년여를 끌어오던 전쟁이 결국 끝나게 되었다. 극동에서는 결국 원자탄에 의해 일본의 저항이 분쇄되기까지 얼마 동안 전쟁이 계속되었다. 전반적으로 남‘아프리카’인들은 깊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증인들이 투쟁하여 “금지령과의
싸움”에서 이겼지만 뱀의 “씨”와의 장기간에 걸친 투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계 대전 중에 19개소에서 연합된 선포자 대회를 개최하였다. 남‘아프리카’에서의 왕국 활동 역사상 처음으로 형제들은 미국이나 다른 곳의 형제들과 동시에 좋은 것들을 똑같이 즐길 수 있었다. ‘프로그램’과 새로 발표될 책들은 때에 맞추어 모두 도착되었다.
‘더어반’의 전도인 수는 약 100명으로 증가되었다. 그 작은 집단은 공개 강연을 광고하기 위하여 강력한 활동을 폈다. 50,000매나 되는 강연 쪽지, 2,000장의 특별 초대장, 크고 작은 많은 깃발 외에도 1,000장의 ‘포스터’가 사용되었다. 그 도시는 깜짝 놀랐다. 이 전에는 사람들이 그와 같은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공개 강연 참석수는 900명이었는데 그들 중 약 750명이 일반대중이었다. 그 일련의 대회에 참석한 수는 전국적인 신기록으로서 5,001명에 달하였다.
‘케이프타운’ 지부 사무실의 가족은 이제 14명으로 증가되었는데 아직도 모두가 개인집이나 하숙집에서 생활하였고 식사는 식당에서 하였다. 조그만 인쇄 공장은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으며 1945년에는 그때까지의 최고 기록인 2,562,817부의 인쇄물을 생산하였다. 1943년에 출판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서적은 공용 ‘네델란드’어, ‘줄루’어, ‘세소토’어로 번역되었다.
그러므로 남부 ‘아프리카’의 조직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훨씬 더 강해지고 시초보다 훨씬 더 커졌다. 반대자들의 모든 노력과 출판물의 금지, 종교인들의 “비방” 운동, 불리한 신문 기사, 법정 사건, 경찰들의 수색과 체포 등에도 불구하고 활동은 발전되고 증가되었다. 남‘아프리카’의 회중 수는 115개에서 244개로 증가되어 두배 이상이 되었다. 남부 ‘아프리카’ 전체로는 평균 전도인 수가 (1939년의) 3,179명에서, (1945년의) 12,289명으로 증가되어 286‘퍼센트’의 증가를 보였다. 남아 연방에서의 증가는 더욱 놀라운 것으로서 1939년의 전도인 439명에서 1945년의 2,991명으로 증가되어 580‘퍼센트’의 증가를 보였다!
미래를 위한 건축
전쟁 기간 중의 엄청난 증가를 고려해 볼 때 남, 중앙, 동‘아프리카’에서의 왕국 활동이 앞으로 여러 해 동안 생산적이 될 것이므로 그에 대비해 잘 조직되어야 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1939년에 3,179명이었던 증인이 1946년에는 평균 14,089명으로 증가되었다. 그 당시 남‘아프리카’의 ‘케이프타운’ 지부 사무실의 감독 아래 있는 모든 구역에 약 25,000,000명이 살고 있었다. ‘아프리카’ 대륙의 남반부에 사는 주민의 90‘퍼센트’는 여러 ‘아프리카’ 인종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럽’인(백인)들은 남아 연방에 살고 있었다.
그 후 몇해 동안에 더 놀라운 성장이 있게 되었다. 양같은 자들의 유익을 더 잘 돌보기 위해서 그러한 구역들에 ‘왙취 타워’ 협회의 새로운 지부들이 개설될 것이었다.
여러 지역에서는 아직도 활동에 관해서 많은 오해가 있었다. 몇명의 북‘로디지아’ ‘아프리카’인 형제들이 1946년 10월의 대회에 참석하려고 ‘요하네스버어그’에 가려고 했을 때 출입국 관리들은 그것을 허가해 주지 않았다. 한 사람은 이렇게 물었다. “‘왙취타워’는 파괴적인 활동을 해 오지 않았는가?” 관리들에게 사실을 설명했지만 그 형제들의 입국은 그래도 허락되지 않았다. ‘요하네스버어그’의 ‘아프리카’인 지구에는 이미 수천명이 가건물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곳에는 그들을 위한 충분한 숙박 설비가 없을 것이라는 이유를 제시하였다. 여호와의 증인들 스스로가 방문하는 형제들의 숙소를 돌볼 것이라는 사실을 당국은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1946년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 대회에서 발표된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찌어다」나 「모든 선한 일을 위하여 자격을 구비함」과 같은 출판물들은 약 2, 3개월 후 ‘요하네스버어그’ 대회에서 남‘아프리카’ 형제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러한 간행물들은 여호와의 종들이 말씀의 진정한 선생으로서 자격을 더 잘 갖출 수 있게 하는 데 많은 역할을 하였다. 휴대용 축음기와 녹음된 성서 강연을 사용한 활동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으나 이제는 모든 인종에 속한 왕국의 일군들이 그들의 입을 사용하여 스스로 전파하고 가르치는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울 때였다.
그 당시 ‘아프리카’인 순회 감독자의 한사람인 ‘M. 응굴루’는 그 기간 중에 여러 종교에 속한 꽤 많은 ‘아프리카’인 교직자들이 진리를 받아들였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러한 사람들 중의 하나인 ‘스위스’ 선교단 교회의 ‘베두엘 리크호트소’라는 사람이 있는데 1946년에 ‘응굴루’ 형제가 ‘트랜스바알’ 주 북동부의 ‘그라스콥’을 순회 방문하다가 그를 접촉하게 되었다. 그 사람은 진리가 그에게 제공된 첫날 저녁에 그것을 받아들였는데, 그 다음 순회 감독자의 방문 때에 그는 ‘샹가안’족의 최고 추장의 “마을”(오두막 집단)에서 특별 강연을 하도록 마련하였다. 그로 인해 강력한 증거가 행해지게 되었으며, 후년에는 그 지역에서 커다란 회중이 발전하게 되었다. ‘리크호트소’ 자신은 1947년 1월에 ‘파이오니아’가 되었다.
순회 사업과 대회
그 당시 ‘아프리카’인 순회 감독자의 활동은 때로는 위험하기도 하였다. ‘응굴루’ 형제는 홍수진 강을 건너 가다가 두번이나 빠져 죽을 뻔하였다고 말한다. 오늘날에도 ‘아프리카’인 순회 감독자들이 한 회중에서 다른 회중으로 가려면, 짐을 잔뜩 지고 종종 아내와 자녀를 동반한 채 숲속을 수십리 걸어야 한다.
1947년 2월에 새로운 순회 마련이 시행되었으며, 남‘아프리카’는 14개 순회구로 분할되었다.
어떤 지역에서는 ‘아프리카’인들의 관심이 놀랄 만하였다. ‘아프리카’인 순회 감독자 한 사람은 같은 공개 강연을 같은 날 세번이나 하였다고 말한다! 그는 새로운 회중을 조직하도록 어떤 지역으로 파견되었으며
1947년 8월의 어느 일요일에 공개 강연을 마련하였다. 참석수는 173명이었는데 거의 모두가 새로운 관심자들이었다. 그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강연 후에 참석자들이 돌아가서는 와서 진리를 들어보라고 다른 사람들을 초대하였다. 오후 3시에 나는 두번째 공개 강연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오후 5시에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와서 자기들은 3시에 모인 집단으로부터 진리가 그곳에서 선포되고 있다는 말을 들었으니 그 강연을 다시 해달라고 나에게 간절히 요청하였다. 그래서 그날 오후 6시부터 7시까지 세번째로 강연을 하게 되었다.” 그러한 관심은 놀라운 증가가 있을 것을 알려주는 것이었다.1947년 4월에는 남‘아프리카’의 첫 순회 대회가 ‘더어반’에서 열리게 되었다. 선교인을 위한 ‘왙취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의 제5기 졸업생이며 남‘아프리카’로 온 첫 ‘길르앗’ 선교인인 ‘밀튼 바아트렛’이 그 대회의 지역 감독자였다. 그 도시의 중심지 근처의 시 지구에 하얀 칠을 한 ‘홀’이 ‘아프리카’인 형제들에게 있었다. 그 당시에는 ‘나탤’ 주 전체가 한 순회구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형제들은 상당한 거리를 여행하게 되었다.
‘바아트렛’ 형제는 그 ‘아프리카’인 대회의 지방적인 특징을 다음과 같이 아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아프리카’인 증인들의 태도를 볼 때 감동을 느끼게 되었다. 그들의 옷차림은 아주 깨끗하고 수수하고 단정하였으며 매우 진지하고 열성있는 태도로 진리를 더 많이 배우려고 하였고 야외 봉사에 대해서는 아주 열심이었다. 바로 구내(합숙소 마당)에서 그들은 세발 달린 남비를 걸어 놓고 짐승을 잡아 바로 거기에서 자기들의 음식을 마련하였다. 각 증인들은 ‘에나멜’ 칠을 한 자기의 식기와 ‘에나멜’ 칠을 한 잔과 수저 혹은 국 수저를 가지고 와서 식사하는 데 사용하곤 하였다. 그러나 된 반죽의 옥수수 음식(옥수수 죽)을 먹게 될 때는 그것을 손으로 덩어리로 만들어서 접시 바닥에 있는 약간의 국물에 찍어 입속으로 재빨리 집어 넣었다.”
형제들은 그들의 순회 대회를 참으로 즐겼다. 그 해의 지부 보고서는 125‘킬로미터’를 걸어 순회 대회에 참석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감으로써 전부 5일간을 걸은 ‘줄루랜드’ ‘아프리카’인 형제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지부 감독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러한 많은 벗들의 열심은 참으로 놀랄 만하였으며, 배우고 받은 교훈을 마음에 간직하려는 그들의 간절한 태도는 사람들의 마음을 행복하게 해주었다.”
숙박 문제도 그 형제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담요와 몇가지의 개인 소지품이 든 꾸러미를 가지고 왔으며 어떤 여자들은 등에 어린애를 업었고 서적들과 성경을 넣는 작은 나무 상자를 가지고 왔다. 대회 회기 중에는 그 상자가 종종 의자로 사용된다. 대회장에 오기 위해 여행하는 도중 하루나 이틀밤을 지내야 하는데, 그들은 기꺼이 잠자리를 내주는 우호적인 ‘아프리카’인들을 쉽사리 찾아내게 된다. 한 데서 잠을 자야 할 경우에는 담요를 덮어 몸을 따뜻하게 한다.
때때로 사용할 만한 장소가 없어서 노천에서 대회가 개최된다. 그 밖의 다른 경우에는 기둥을 세우고 방수포를 덮어 임시 건물을 만든다.
옥수수 가루(옥수수 죽)와 고기로 만든 먹음직한 음식으로 요기를 한다. 각자가 식기를 가지고 있으면 좋고 편리하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공동으로 사용하는 한 접시에 담아 함께 먹는다. 수저가 없는 사람들은 칼과 수저보다 먼저 생겨난 손가락을 사용한다!즐거운 방문은 영성을 세워 준다
1948년에는 남, 중앙 및 동‘아프리카’의 왕국 활동에 특기할 만한 일로서 오랫 동안 고대해 오던 협회장 ‘N. H. 노워’의 방문이 있었다. 그것은 남부 ‘아프리카’와 모든 형제들에게 참으로 즐거운 일이었다. 그때에 ‘요하네스버어그’ 근처에다 새로운 지부 사무실, 공장, 집 등을 건축하기 위해 대지를 구입하게 되었다.
1948년 1월 3일부터 5일까지는 남‘아프리카’에서 전국 대회가 개최되는 때였다. 그 대회는 ‘요하네스버어그’에서 개최되었다. 그러나 관계 당국의 요구에 따라 ‘유럽’인 형제들과 유색인 형제들이 한 곳에서 모이고 흑인 형제들은 다른 장소에서 모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형제들에게 장기간에 걸쳐 통고하지 못했는데도 첫 회기들에 약 3,600명이 참석하였고 두번의 공개 강연에는 9,246명이 참석하였다. 전부해서 416명이 침례를 받았으며 그 중 378명은 ‘아프리카’인 형제들이었다. 대회 후에 ‘노워’ 형제와 그의 비서 ‘밀튼 헨첼’은 ‘케이프타운’ 지부 사무실에서 3일을 지내면서 ‘벧엘’ 식구들에게 조언과 격려를 해 주었다.
‘케이프타운’ 지부의 인도를 받는 모든 나라와 구역에서 1948년에 27,000명 이상의 최고 전도인 기록에 달하였다. 그해에 ‘노워’ 형제의 방문 결과 협회의 ‘케이프타운’ 사무실에 보고서를 제출하는 단순한 출판물 보관소가 아니라 직접 사무를 처리할 수 있는 몇개의 새로운 지부들이 ‘아프리카’의 주요 지점들에 조직되었다. 이제 그 전까지는 ‘케이프타운’ 지부의 감독하에 있었던 중앙 ‘아프리카’의 몇 나라에서의 발전을 이 시점에서 고려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제한이 해제되자 왕국 전파가 활발해지다
남‘로디지아’(이제는 단지 ‘로디지아’라고 부른다)에서는 왕국 활동에 대한 제한을 해제하기 위한 투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케이프타운’ 지부는 제한을 해제해 달라고 요청하는 신청서를 꾸준히 발송하고 있었으며 1945년에는 연초에 열리게 되는 각료 회의에서 그 신청서를 고려할 것이라는 확답을 받게 되었다. 다음 해에 가서 결국 제한은 해제되었으며 협회 출판물은 또 다시 ‘로디지아’에서 자유롭게 배부될 수 있게 되었다.
1947년에 ‘버어트 맥루키’의 가정 환경은 다시 ‘파이오니아’ 봉사를 할 수 있도록 자유로와졌다. 아주 놀랍고도 행복하게 그는 1947년 7월 1일 그 당시 남‘로디지아’의 ‘불러와요’에 협회의 출판물 보관소를 개설하라는 임명을 받았다. 왕국 활동을 온전히 행하고 그 나라에서 올바로 대표하기 위한 길고도 힘든 싸움에서 승리하게 된 것은 주로 여호와의
덕분이다! 그해의 최고 전도인 수는 3,000명 선을 돌파하였고 82개 회중이 조직되었다.‘버어트 맥루키’가 그의 친 형제인 ‘잭 맥루키’의 집에서 활동하였기 때문에 그 첫 출판물 보관소는 마치 가족적인 사무를 보는 곳과 같았다. 처음에는 ‘버어트 맥루키’ 혼자서 모든 일을 다 하였다. 그후에 그는 ‘아프리카’인 형제 두 사람을 불러들여 한 형제는 ‘시쇼나’어로, 다른 형제는 ‘신얀자’어로 「파수대」 기사를 번역하도록 하였다. 상당한 기간 동안 그들은 등사기로 그 번역본을 만들고, 손으로 잡지의 지면을 추려서, 접고 철하였다. ‘맥루키’ 형제 자신이 인정한 바와 같이 그 완성품에는 결함이 많았다. 이제 1975년에는 그 잡지들이 ‘일랜쯔포온테인’ 지부에 있는 현대식 윤전기로 아주 질이 좋게 생산되고 있다. ‘신얀자’어 판은 25,000부가, ‘치소나’어 판은 매호당 13,900부가 인쇄되고 있다.
이러한 모든 발전과 개선은 자연히 남‘로디지아’의 왕국 전도인들의 마음에 많은 즐거움과 격려를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노워’ 형제와 ‘헨첼’ 형제가 1948년 1월에 그들을 방문하게 될 것이라는 소식이 1947년 10월에 전해졌을 때 그들 모두가 얼마나 감동을 받았었는지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노워’ 형제가 ‘불러와요’와 ‘소올즈버리’에서 ‘아프리카’인들과 ‘유럽’인들에게 행할 강연을 광고하기 위해서 수많은 쪽지와 수백장의 ‘포스터’와 많은 깃발이 마련되었다. 그 때쯤해서 ‘길르앗’ 학교에서 남‘로디지아’에 처음으로 오게 되는 선교인 ‘에릭 쿡’이 역시 등장하게 되었다.
원주민 관리국이 1948년 1월 16-18일의 대회 기간 동안 ‘하라리’ 지구에 있는 회당을 사용하게 하기로 한 이전의 계약을 취소하였기 때문에 ‘소올즈버리’에서 문제가 생겼다. 그들은 ‘아프리카’인 형제들을 위해서 그 전에 마련된 숙박 시설도 역시 취소해 버렸다. 그래서 1월 13일에 ‘쿡’ 형제는 반대의 근거를 알아보기 위하여 원주민 관리국장과 면담하였다. 그가 협회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고 있으며 협회가 ‘정부에 반대한다’고 믿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쿡’ 형제는 「여호와의 증인의 연감」의 한 부분을 읽어줌으로써 그러한 잘못된 생각을 극복하였다. 그것은 그 관리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기 때문에 ‘하라리’에 있는 회당을 다시 사용하게 하였고 그 대회에 참석할 것으로 예상되는 수천명을 위하여 숙박 시설을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하여 여호와의 증인의 성공적인 대회를 위한 길이 열렸으며 최고 참석수는 6,000명을 넘었다.
그의 짧은 방문 중에도 ‘노워’ 형제는 시간을 내어 관리들을 방문하고 ‘파운드’를 통용하는 나라들에서 ‘달러’의 부족으로 인해 협회 출판물에 부과한 몇가지 주요 제한들에 대해 토론하였다. ‘노워’ 형제는 남‘로디지아’에 공급될 모든 출판물이 무료로 보내질 것이며 따라서 통화 문제는 생기지 않게 하겠다고 말함으로써 관리들이 그 문제에 대해 걱정하지 않게 되었다!
그 방문 중에 ‘노워’ 형제는 그 출판물 보관소가 1948년 9일 1일자로 ‘에릭 쿡’을 지부 감독자로 하는 지부 사무실이 되도록 마련하였다. 그것은
남‘로디지아’의 왕국 활동에서 새로운 장이 시작되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 당시 그곳의 최고 전도인 기록은 4,232명이었다.‘니아살랜드’를 일깨우다
그 당시 ‘니아살랜드’(지금의 ‘말라위’)의 활동 역사에 있어서도 대체로 동일한 양상을 나타냈다. 1946년에 여호와의 증인들은 ‘니아살랜드’에서 자기들의 존재를 분명히 인식시키고 있었다. 전도인 수가 처음으로 3,000명 선을 돌파하였으며 형제들은 참으로 그 나라를 일깨우고 있었다.
공개 강연 운동이 이제 한참 진행 중에 있었고 각지에서 사람들을 깨우치는 데 많은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물론 거짓 종교인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그들의 마을에서 그러한 집회를 갖지 못하게 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였다. 공개 강연을 하려면 촌장들로부터 허가를 받아야 하였다. 그러므로 촌장이 그 지방의 종교 지도자들의 영향하에 있는 경우에는 공개 집회를 개최할 수 없었다. ‘좀바’ 지역에서는 어떤 교회의 집사와 장로들이 촌장에게 그의 촌장직을 박탈하겠다고 위협하였으나 그는 단지 그들에게 그럴테면 그러라고 말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이웃 마을의 촌장은 그의 마을에서 공개 집회를 마련하려고 그에게 접근한 여호와의 증인 두 사람을 실제로 구타하였다. 그 사람은 법정에 서게 되었으나 그는 영향력있는 사람이었고 교인이었기 때문에 지방의 ‘아프리카’인 재판관들은 “그 문제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에 관한 소식을 그 지역 판무관이 들었을 때 그는 그 재판관들과, 반대했던 그 촌장을 호되게 징계하였다.
이제 많은 추장들은 자기 마을에서 강연을 하라고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초대장을 보내기 시작하였다. ‘리줄루’라는 곳에서 공개 강연에 참석하여 죽은 자의 상태에 관한 진리를 들은 한 추장은 그 직후에 몇몇 종교 지도자들이 진행하는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참석한 사람들은 죽은 그 아이가 “지금은 하늘에서 천사가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 연로한 추장은 툴툴대면서 일어서서 그의 옆에 있는 ‘인두나’(촌장)에게 돌아서서 코담배를 좀 달라고 하였다. 그 다음, 열심이 코담배를 들이쉬며 “허허, 우리는 ‘리줄루’에서 죽은 자들이 어디 있는지 들었지. 지금 들은 말은 다 거짓말이야”라고 말하면서 그곳을 나와 버렸다.
여호와의 증인들의 소식이 너무나 강력하였기 때문에 거짓 종교인들은 우리의 말과 방법을 모방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우리도 역시 신세계를 전파하고 있다”고 말하려 하였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교인들을 재방문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몇 주일도 못되어 그들은 그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구두로 그리고 나무에 붙인 게시문들을 통해서 널리 광고된 한 노천 공개 집회에 약 300명의 사람들이 그 강연을 들으려고 ‘망고’ 나무 그늘 아래 모여 있었다. 연사가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한다는 말을 미가 3:11로부터 인용하는 결정적인 순간에 어떤 교직자가 자전거를 타고 그 옆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 교직자는 화가 나서 그 지방 촌장에게 항의하였고 그 촌장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공개 집회를 갖는 것을 중지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물론 형제들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으며 그들은 두번째로 높은 원주민 법정에 항소하였다. 거기에서 그 판결은 번복되었고, 여호와의 증인들을 방해하는 사람은 누구나 5‘파운드’의 벌금을 물게 된다는 경고도 내려졌다. 그 때쯤에는 모든 것이 평온을 되찾았고 약 50명의 관심자들이 활동적인 왕국 전도인으로서 그들의 태도를 고수하였다.
전에 반대하던 많은 촌장들이 우호적이 되고 자기들이 종교 지도자들의 영향을 받았었다고 시인하였다. 어떤 순회 감독자가 ‘로마 가톨릭’교인이기도 한 촌장에게 가서 그 마을에서 공개 집회를 갖겠다고 하였을 때 그는 이러한 말을 듣게 되었다. “당신들이 이곳에서 집회를 개최하겠다고? 자——마을에서 당신들이 집회를 개최하였는데 이제 그곳의 교회는 뒤집어 엎어졌소. 당신들은——마을과——에서 환영을 받았는데 그 두 경우에서도 그런 일이 발생하였소. 이제 당신들이 우리 마을에도 들어 와서 우리가 이곳에 설립해 놓은 교회를 허물어 뜨리려고 하고 있소. 안되요, 어림도 없소!” 그러나 그 다음날 아침에 200명의 형제들이 그 마을을 행진하면서 노래를 불렀다. ‘로마 가톨릭’교인들은 소리지르고 북을 쳐서 소란을 피우려고 하였으나 많은 군중이 형제들과 함께 그 행진에 참가하였으며 모두가 마을 바로 밖에 있는 한 장소로 가서 그곳에서 아주 성공적인 공개 집회를 가졌다.
금지령에 대항하여 싸움
‘니아살랜드’에서의 계몽 활동의 일부는 정부가 억류하고 있는 우리의 출판물을 풀어주도록 요구하는, 1946년 봉사 연도 중에 돌린 진정서를 통해서 수행되었다. 형제들의 그러한 활동적인 운동은 약간 격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 그 영령 식민지에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 진정서에 47,000명이 서명하였으며 당국은 그것을 매우 염려하였다.
‘케이프타운’ 지부는 ‘런던’에 있는 식민지 국무차관에게 1946년 9월 5일자로 강력한 장문의 서신을 보냈다. 그 서신에서는 ‘니아살랜드’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행실은 비난할 것이 없으며 출판물에 금지령을 내린 책임자들은 ‘니아살랜드’에서 활동하고 있는 예수 회원들로부터 강력한 영향을 받았고 영연방에 속한 다른 곳에서는 협회 출판물에 대한 금지령이 이미 해제되었다는 점 등을 지적하였다. 반응은 격려적이었다. 동‘아프리카’ 집단(북‘로디지아’, ‘니아살랜드’, ‘케냐’, ‘탕가니카’)을 구성하는 네 군데의 영령 지구 총독들이 ‘왙취 타워’ 협회와 여호와의 증인들에 관해 공동 추천을 할 수 있도록 식민국에 의해 소집되었기 때문이다. 그 총독들에게 다음의 두 가지 주요점을 기억하도록 요청하였다. (1) 모든 사람들의 숭배의 자유에 관한 원칙 (2) 그러한 지역에서 그 당시 시행되는 것과 비슷한 금지령들이 제국의 다른 모든 곳에서는 철회되었다는 것. 그러나 당국자들은 그 문제를 보류시켰는데 그들은 협회의 출판물을 주의깊이 조사해 보겠다고 말하였다.
하나의 방문이 활동을 촉진하다
1948년 1월 13일에는 ‘니아살랜드’를 위해 아주 특별한 일이 있었다. 네 형제를 태운 비행기 한대가 남‘로디지아’의 ‘소올즈버리’로부터 짧은 거리를 날아와 착륙하였다. 그들은 ‘노워’ 형제와 ‘헨첼’ 형제와 ‘케이프타운’ 지부 감독자 ‘필립스’ 형제 및 ‘니아살랜드’를 돕도록 임명받은 새로운 ‘길르앗’ 졸업생 ‘I. 퍼거슨’ 형제였다. ‘유럽’인과 인도인들을 위하여 ‘블랜티르’ 시청에 집회가 마련되었다. ‘블랜티르’에는 ‘유럽’인이 단지 250명 밖에 없었음을 생각할 때 그 공개 강연을 들으려고 40명이 참석했다는 것은 훌륭한 것이었다. 다음날 그 네 사람은 ‘림베’ 근처의 ‘아프리카’인 대회에 참석하였으며 거기에서 ‘빌 맥루키’가 그 연사들의 강연을 ‘신얀자’어로 통역하였다. 오후의 공개 강연에는 6,000명이 참석하였다. 공개 강연을 하는 데 필요한 설비가 없었기 때문에 ‘프로그램’을 맡은 형제들은 모두가 들을 수 있게 큰 소리로 연설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한번은 비가 억수로 쏟아져서 강연을 방해하였으며 공중은 흩어져서 나무나 근처의 집으로 피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형제들은 그대로 있었고 ‘노워’ 형제는 그의 연설을 끝내었으며 그 동안 그의 머리 위로 우산을 받치고 있었다. 협회장인 한 ‘유럽’인이 비가 오는데도 연설을 마치기 위해 서 있었다는 바로 그 사실은 협회와 연합하고 있는 사람들이 참으로 그들의 복지에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아프리카’인들이 알 수 있게 하였다. 그 지방의 ‘유럽’인들은 그래본 적이 없었다.
그 방문 중에 ‘노워’ 형제는 정부의 수석 장관 및 경시총감과 대화를 나누어 협회 출판물에 관한 의심과 오해를 씻어 버릴 수 있었다. 정부의 대표자들은 출판물에 대한 금지령을 해제할 수 있는지 전체적으로 문제를 재검토해 보겠다고 약속하였다.
‘노워’ 형제의 방문은 그 나라에서의 활동에 강력한 촉진제가 되었으며 1948년은 ‘니아살랜드’의 왕국 활동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해였다. 이제 전도인 최고 기록은 5,000명선을 넘게 되었고 새로운 자들이 아주 신속히 그 대열에 참가하고 있었다. 1948년까지 ‘니아살랜드’의 전도인 수가 어떤 곳에서는 너무나 빨리 증가되어 증거할 구역을 충분히 확보하기가 어려웠다.
1948년 9월 1일에 ‘니아살랜드’에 지부가 설립되었으며 ‘빌 맥루키’가 지부 감독자로 임명되었다. 그것은 ‘니아살랜드’의 왕국 활동 역사에 있어서 전진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으며 형제들을 더 강화시키게 되었다. 다음 해인 1949년에는 ‘길르앗’ 선교인 학교를 졸업한 두 영국인 즉 ‘피터 브리들’과 ‘프레드 스메들리’가 도착하게 되었다.
북‘로디지아’에서 참 숭배가 발전하다
그 기간 중에 북‘로디지아’(지금은 ‘잠비아’라고 불리움)도 뒤쳐져 있지는 않았다. 점차 발전되는 구리 생산 지역을 중심으로하여 대부분의 증가가 있었다. 이곳 ‘코퍼벨트’에서 조직이 급속도로 확장되고 있었다.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에 대처하기 위해서 더 유능한 종을 생산하도록 출판물 보관소에서 모든 전 시간 봉사자와 그들의 대열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형제들에게 10일간의 교육 과정이 베풀어졌다.그러한 참 숭배의 발전은 사실 그리스도교국의 거짓 목자들을 염려하게 만들었다. 그러한 경향을 저지하려고 한 교직자는 그의 회중 성원들이 여호와의 증인들처럼 사람들의 오두막을 방문하여 사람들을 “교회”로 초대하게 하였다. 그러나 어떤 집주인들은 그들의 더듬거리는 연설을 들은 후 놀라서 그들에게는 “‘왙취타워’ 사람들”과 같은 소식이 없다고 말하면서 좋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한 노력에서 성공하지 못함으로써 교인들은 기가 꺾여 돌아갔고 그들의 회중은 더 이상 증가되지 않았다!
북‘로디지아’에서는 마을 전체가 진리를 받아들인 경우들이 있었다. 여호와의 증인들의 열심에 감동되어 협회 서적을 읽기 시작하고 회중의 주임 감독자를 방문하게 된 ‘뭄브와’의 ‘유럽’인 선교사와 같이 온유한 정신을 보인 그리스도교국의 선교사들도 있었다.
이곳의 증인들은 전도인들을 투옥시키고 성서 연구하는 곳을 파괴하고 집회를 방해하는 정부의 한 관리로부터 여러 해 동안 괴롭힘을 당해 왔다. 그 행정관은 불법 행위로 인하여 벌금형에 처해졌고 공정한 사람이 그를 대신하게 되었다. 출판물 보관소의 감독자는 그 지역을 방문하여 그들의 계간 회의에 참석한 모든 추장 및 고문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 그 결과는? 그 지역 전체에 걸쳐 연구 장소를 설립하도록 허락을 맡았다. 단시일 내에 풀로 지은 조그만 장소들 혹은 더 튼튼한 건축물들이 그 지역 전체에 걸쳐 생겨나게 되었으며 촌장들까지 연구에 정기적으로 참석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들 중 열 네사람은 그들의 추장들에게 진리를 받아들였다고 말하였으며 그 수는 계속 증가되고 있었다.
‘바로체란드’에서도 2,800명의 전도인이 모이는 순회 대회에 참석하려고 그곳에 오게 된 협회의 한 ‘유럽’인 대표자가 ‘바로체’ 최고 통치 회의인 ‘크호틀라’에서 연설하도록 허락을 받고 추장들과 왕의 가족들에게 훌륭한 증거를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옆에 수석 추장을 모시고 그는 보좌로부터 우리의 활동이 왜 다른가 하는 이유와 우리의 소식이 어떠한 것인가를 설명할 수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추장들과 시종들과 왕의 가족들 앞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후에 왕가의 북들이 전통에 따라 힘차게 울렸다.
진리를 받아들인 왕가의 연로한 한 성원은 나이가 너무 많아서 걷지도 못하였지만 매일 나귀를 타고 원주민들이 다니는 삼거리로 가서 그는 그곳을 지나는 사람들을 불러 그들에게 증거하곤 하였다. 반대하는 사람이 창으로 그 나귀를 찔러 죽여서 참으로 슬퍼하였으나 그가 활동을 계속하도록 어떤 전도인이 그에게 나귀를 한 마리 선사하였다.
그 당시 관심자들이 가지고 있는 커다란 문제는 글을 모르는 것이었다. 많은 전도인들은 성귀와 연설을 암기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 후 협회가 마련한 문맹 퇴치반을 통해 그들의 언어를 읽고 쓸 수 있게 되었다.
1947년초에 남‘아프리카’ 지부 감독자는 ‘길르앗’ 학교에서 ‘케이프타운’으로
돌아가는 중에 개인적으로 ‘런던’에 있는 영국 식민국을 방문하여 항의하였다. 그 항의는 성서 출판물의 배부 활동이 유익한 그리스도인 교육 활동임을 알기 때문에 그에 대한 금지 조치를 안타까와하는 40,909명의 서명을 받아 정부에 제출한 진정서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그 진정서에 응하여 북‘로디지아’ 정부는 출판물에 대하여 재검토해 보겠다고 약속하였으며 6월 19일에는 몇 가지 품목 특히 “하나님의 왕국은 가까왔다”와 「다가오는 세계 개혁」 등이 금지 목록에서 제거되었다. 그러나 협회의 기관지인 「파수대」는 아직도 자유로이 배부되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 필요한 영적 양식을 형제들에게 공급하려는 노력을 늦출 수 없었다. 사실상 1947년말에 252개 회중에서 좋은 소식의 전파자가 6,114명이나 되었기 때문에 그 필요성은 다른 어느 때보다 더 컸다.1948년에는 주로 광부들의 수가 증가되어 한 때 길도 없고 ‘말라리아’가 만연하던 ‘코퍼벨트’의 숲속 나라에 약 25,000명의 ‘유럽’인이 살게 되었다. 그들은 본국의 수준과 비교해서 나으면 나았지 결코 못하지 않는 환경에서 살았다. 1975년에 이르기까지 영어를 사용하는 그들에게 좀체로 공개적 전파를 거의 할 수가 없었다.
조직이 도움을 받다
다행히도 그러한 상황에서 북‘로디지아’ 조직은 두 사람의 ‘길르앗’ 선교인인 ‘해리 아노트’와 ‘이안 퍼거슨’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아노트’ 형제는 1948년 1월에 그 나라를 처음으로 방문한 ‘노워’ 형제와 ‘헨첼’ 형제보다 조금 전에 도착하였다.
‘조오지 필립스’를 동반한 ‘노워’ 형제와 “헨첼” 형제는 그들의 방문 중 4일간 열리게 된 ‘루사카’ 대회에서 몇 시간을 보냈다. 그 모임은 한 ‘유럽’인 부인의 소유지에서 개최되었는데 그 부인은 증인들의 반대자들이 압력을 가하더라도 증인들이 그 장소를 사용하도록 해 주겠다는 자기의 약속을 지켰고 또 그 대회에도 참석하였다. 연단 장치가 참으로 아름다왔다. 형제들은 흙으로 연단을 만들었다. 장대들을 땅에 꽂고 풀로 지붕을 만들어 연단을 덮었다. 이번에도 자매들은 연사의 왼쪽에 그리고 형제들은 오른쪽에 있게 됨으로써 청중은 분리되어 있었다. 노래를 듣고 깊은 감명을 받은 ‘노워’ 형제는 녹음을 하도록 요청하였다. 4일간의 대회 기간 중에 「하나님의 왕국은 가까이 왔다」라는 ‘실로지’어판 소책자가 그곳에 모인 3,103명의 청중들에게 발표되었다.
1948년 1월 16일에 ‘노워’ 형제는 원주민 담당 장관과 검찰총장을 만나서 협회는 출판물을 북‘로디지아’로 부치고자 하는데 어떤 출판물에 대해서 금지령이 발효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 관리들은 30일 내지 60일 이내에 금지령이 철회되고 협회 활동에 대하여 더 이상 제한하지 않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음을 그는 알게 되었다. 그 점이 협회장과 그의 비서의 방문의 절정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길르앗’에서 훈련받은 선교인들의 부가적인 도움으로 ‘유럽’인 밭에도 주의를 더 기울일 수 있게 되었다. 1948년 중간쯤에 ‘해리 아노트’는
‘루안사’ 시에 선교인으로서 임명되었고 한 동안 ‘니아살랜드’에 있었던 ‘이안 퍼거슨’은 ‘칭골라’에 임명되었다. 집중적인 호별 방문 전파가 곧 시행되었고 반응은 놀라웠다. 처음 갈게 되는 그 구역은 많은 성서와 성서 출판물을 받아들였고 가정 성서 연구가 신속히 발전하였다. 일년도 채 안되어 두개의 작은 ‘유럽’인 회중이 그 도시들에 설립되었고 ‘무풀리라’와 ‘키트웨’로 전파 활동을 확장하도록 마련되었다.‘길르앗’ 학교 졸업생들의 도착은 발전된 신권 조직의 유익의 일부를 이곳 중앙 ‘아프리카’ 전역에 있는 여호와의 백성들의 회중에 전할 수 있는 훌륭한 기회로 보였다. 임명된 모든 여행하는 대표자들 그리고 ‘파이오니아’로서 여행하는 대표자로 봉사할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축소판” ‘길르앗’ 학교를 즐기도록 ‘루사카’ 지부 사무실로 초대되었다. 순회 감독자들을 위한 그 학교에서는 얼마의 조직에 관한 기본 원리와 ‘길르앗’ 학교에서 그 당시 여러 해 동안 제시된 성서의 가르침이 다루어졌다. 배운 제목들은 성서 주제와 신권적 기록, 신권적 봉사 및 관련된 문제들이었다. 필기 복습이 있었고 저녁 과제로 숙제를 내 주었다. 그들은 독특한 ‘아프리카’의 풍미를 지닌 “졸업식”도 거행하였다.
협회장이 ‘아프리카’의 이 지역을 처음으로 방문한 후 형제들은 자기 언어를 읽고 쓰는 것을 배우는 데 각별한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좋은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데 있어서 더 나은 자격을 갖추라는 격려를 받았다. 곧 지부 사무실은 각 회중에 문맹 퇴치반을 구성하도록 마련하였다. 그러한 집단 교육반을 위한 기초로서 처음에는 교과서를 정부의 교육국에서 구하여 사용하였다. 회중 집회에 이어서 공부를 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대부분의 학생들은 회중의 자매들이었다. “각자가 한사람을 가르치자”는 말은 문맹 퇴치 운동을 더욱 촉진시키기 위한 낯익은 구호였다. 남편들은 자기 아내들을 가르치는 데 시간을 바치라는 권고를 받았으며 이미 글을 알고 있는 다른 사람들은 회중에 있는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데 시간을 내도록 격려를 받았다.
새로운 지부 사무실
1948년 9월 1일에 ‘루엘린 필립스’를 지부 감독자로 하는 지부 사무실이 설립되었다. 그 당시 북‘로디지아’의 232개 회중에는 11,600명 이상의 전도인이 있었다. 「파수대」지에 대한 금지령은 해제되었으나 몇 가지 서적은 아직도 금지되어 있었다.
이제 북‘로디지아’의 새로운 그 지부는 그 당시 ‘벨기에’령 ‘콩고’로 알려진 구역을 포함해서 북쪽과 동쪽의 몇 군대 구역을 책임지게 되었다. 8월 31일까지 그 지역은 남‘아프리카’ 지부의 관할하에 있었다. 그때까지 ‘벨기에’령 ‘콩고’에서 왕국 활동은 얼마나 발전하였는가?
혼란 속에서도 참 그리스도교는 발전하다
‘벨기에’령 ‘콩고’(‘콩고’ 공화국, ‘킨샤사’, 지금은 ‘자이레’라고 불리움)는 면적이 2,340,000평방 ‘킬로미터’가 넘는 광대한 나라로서 ‘텍사스’
주와 ‘알래스카’ 주를 합친 것 보다 더 넓고 인구는 2천 3백만이 넘는다. 그 나라는 ‘잠비아’와 ‘앙골라’의 북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콩고’ 강 유역 깊숙이 위치해 있다는 점이 주요한 지형적 특징이다. ‘잠비아’와 접하고 있는 남동쪽에는 그 나라 경제의 주요 보고인 풍부한 구리광들이 있다. 기후는 전반적으로 무덥고 습기가 많으며 많은 지역은 빽빽한 밀림 지대이다. 그곳은 1885년에 ‘벨기에’의 통치를 받게 되었으며 그 결과 공식 언어는 불어이고 지배적인 종교는 ‘로마 가톨릭’이 되었다.1940년대까지 ‘콩고’에서는 조직적인 왕국 전파 활동이 없었다. 그러나 ‘키타왈라’ 즉 지방적인 거짓된 “‘왙취 타워’ 운동”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레샤트’가 (독일어로) 쓴 「키타왈라」라는 서적은 71면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전체 마을들이 자기들을 스스로 ‘왙취 타워’라고 부르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단순히 그들이 물에 살짝 잠기거나 침례를 받았고 세상의 종말에 관한 여러 가지 개념을 막연하게 받아들이며 그들이 일정한 방식으로 생활하면 이 지상에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상을 주실 것이라 생각하고 있음을 의미할 뿐이다.”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콩고’에서도 “키타왈라”라는 원주민 말은 토착적인 “‘왙취 타워’ 운동” 단체를 언급할 때 자주 사용되었다. ‘키타왈라’는 “타워”라는 말 앞에 접두어 “키”가 붙어 변화된 것으로 보인다. 어떤 사람들은 “왙취 타워”가 원주민 언어로 잘못 전달되었음이 분명한 “와티시타왈라”라는 더 긴 표현을 사용하였다. 잘 모르는 사람들이 그 둘을 함께 연관시킬 수 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없다; “왙취 타워 협회”와 “왙취 타워” (운동) 혹은 ‘키타왈라’가 아주 유사하기 때문이다. 또한 진리의 반대자들은 정부 관리들이 편견을 갖게 하고 여호와의 참 종들에게 곤란을 초래하기 위해 그 유사성을 자주 반복해서 아주 신나게 사용해 왔다!
폭동, 반란, 부족간의 충돌이나 사실상 원주민 중에서 발생하는 색다른 사건은 어느 것이나 편리하게 “왙취 타워” 운동과 자주 연결시켰다. 그 명칭은 공무원들이나 당국자들에게 악취를 풍기게 되었다. 그것이 그러한 지역들에서 여호와의 이름과 그분의 참 조직에 얼마나 욕을 끼치게 하였는지 누구나 상상할 수 있다!
이전에 설명한 바와 같이 그러한 혼란은 20세기 초기에 발생한 ‘조셉 부스’와 ‘니아살랜드’에 있었던 그의 추종자들의 활동에 의해 비롯된 것이었다. ‘부스’는 그의 제자인 ‘엘리오트 캄와나’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의 초기 출판물을 오용하였으며 그로 인해 중앙 ‘아프리카’에 거짓된 “‘왙취 타워’ 운동” 단체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그 가르침이 ‘니아살랜드’로부터 남쪽과 서쪽으로 전파되어 남북 ‘로디지아’와 ‘콩고’에도 퍼지게 되었음이 분명하다.
그후 여러 해 동안 협회는 ‘콩고’ 당국에 사실을 자세히 설명하는 서신들을 보냈다. 그러나 다소간에 관리들은 여러 해 동안 “왙취 타워”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그러한 토착적인 종교 단체들의 활동과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 및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을 계속 연관시키고 있었다. 교회의
영향력과 압력이 그러한 상태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장성된 대표자들을 그 나라에 입국시키려고 협회는 정기적으로 노력을 하였으나 그러한 노력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지도와 도움이 필요하였으나, 여호와의 조직은 절실히 필요한 도움을 베풀 사람을 보내도 좋다는 허락을 얻지 못하였으며 여러 해 동안 당국은 참된 여호와의 종과 토착적인 “‘왙취 타워’ 운동” 단체와 구분할 여유가 없었던지 아니면 구분하기를 원치 않았다.
1948년초에 북‘로디지아’의 출판물 보관소 감독자인 ‘루엘린 필립스’가 ‘벨기에’령 ‘콩고’에 있는 박해받는 증인들을 위하여 중재하고 활동에 대한 금지령이 해제되도록 힘을 써보도록 ‘벨기에’령 ‘콩고’로 파견되었다. 그는 총독과 다른 정부 관리들과 개인적으로 회견을 하여 우리의 활동을 설명하고 우리의 신앙과 원칙이 ‘키타왈라’라고 불리우는 거짓된 “‘왙취 타워’ 운동” 단체의 신앙 및 원칙과 얼마나 거리가 먼가를 알려줄 수 있었다. 그 문제를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1948년 3월 15일자와 4월 7일자로 공식 서한을 당국자들에게 보냈다. 그와 면담하는 중에 총독은 생각에 잠겨서 “그럼 제가 당신을 돕는다면 저는 어떻게 되겠소?”라고 물었다. ‘콩고’는 거의 완전히 ‘로마 가톨릭’ 교회의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에 아주 당연한 질문이었다.
결국 여호와의 백성들의 활동이 공인되었을 때 그것은 참으로 축복이었다. 더 이상의 혼란이 있지 않도록 지부는 “왙취 타워 협회” 대신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공식 명칭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참 증인들을 거짓된 “‘왙취 타워’ 운동” 단체들에 속하는 자들과 분리하는 일이 이제 신속히 진행될 수 있었다. 그 이후로 여호와 하나님의 순결한 숭배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수가 엄청나게 증가하였다.
‘모리시어스’에서의 현저한 발전
1933년에 전 시간 왕국 전도인(‘파이오니아’)들이 성공적인 방문을 한 후 18년이 지나서야 특별한 대표자들이 ‘모리시어스’ 섬을 또 다시 방문하게 되었다. 1952년에 비로소 「여호와의 증인의 연감」은 두명의 ‘모리시어스’인이 제2차 세계 대전 시 군 복무 중 ‘이집트’에서 왕국 활동과 접촉하게 되었다고 알리고 있다. ‘이집트’ 전도인들의 충실한 봉사는 열매를 맺게 되었다. 군 복무 중이었지만 그 두 사람은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케이프타운’ 협회 사무실로 서신을 내어 출판물을 공급받기 시작하였다. 얼마 있지 않아 그들을 통해 여러 명의 동료 병사들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모리시어스’로 돌아와서 곧 그들은 ‘그들의 빛을 비추려고’ 노력하였으며 사실상 1951년에는 ‘케이프타운’ 사무실로 보고를 보냈다.
같은 해인 1951년에는 ‘길르앗’ 학교 졸업생들인 ‘로버트 니스벳’과 ‘조오지 니스벳’이 두 사람의 지속적인 활동을 유지하기 위해 ‘모리시어스’에 도착하였다. 이전에 ‘로버트 니스벳’이 방문한 후 18년 동안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더 이상 집회가 방해 받지 않았고 교육은 크게 개선되었다. ‘말라리아’의 위험성은 크게 줄어 들었고 생활 환경은 향상되었다.
교회가 정치적으로 세력을 상실하게 되었지만 아직도 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그 ‘길르앗’ 학교 졸업생들은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1933년에 있었던 방문을 기억하고 여호와의 조직과 다시 접촉하게 된 것을 매우 기뻐하는 것을 보았다. 어떤 사람은 한 선교인의 방문을 받고 “‘러더포오드’ 판사는 어떻게 지내십니까?”라고 물었다. 그것은 그 섬 사람들이 협회의 상태를 전혀 모르고 있었음을 잘 알려 준다. ‘러더포오드’ 형제는 약 9년 전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1934년 7월 4일호 「황금 시대」 한부와 닳고 많이 읽혀진 18년 된 「하나님의 거문고」 한권을 보여 주었다. 그는 그 잡지를 다시 예약하였으며, 그와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다.
‘로버트 니스벳’ 형제의 보고에 의하면 처음 관심자들 중에는 ‘수벤’ 부인과 ‘바커’ 부인이라는 두 자매와 그들의 가족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첫 회중의 기초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1951년에는 세계적인 전체 보고서에서 남‘아프리카’ 아래에 ‘모리시어스’가 열거되었고 최고 전도인이 8명에 ‘파이오니아’가 평균 두명이었다. 다음 해에 최고 전도인수는 13명으로 증가되었다. 사제들은 아직도 부지런히 사람들에게 전한 출판물들을 꾸준히 수거해갔고 출판물을 받은 사람들을 파문하겠다고 위협하였다.
‘모잠비크’를 잠간 살펴봄
대륙으로 다시 돌아가 잠간 멈추어 ‘포르투갈’령 동‘아프리카’라고도 알려진 ‘모잠비크’에서 상태가 어떻게 발전되고 있었는지 살펴보자. 앞서 언급된 활동을 제외하고는 아직도 ‘유럽’인들 사이에서는 별다른 활동이 진행되지 않았으나 ‘아프리카’인들 사이에서는 발전이 있었던 것같다. 활동은 계속 꾸준히 발전되었는데 특히 북쪽에서 그랬으며 1948년에는 전도인 수가 398명으로 증가되었고 야외에서는 네명의 전 시간 봉사자가 일하고 있었다. 한편 박해도 계속 심해지고 있었으며 어떤 사람들은 체포되고 투옥되어 범죄자 식민지나 노동 수용소로 보내졌다. 남‘아프리카’ 지부로부터 보내지는 출판물은 ‘모잠비크’에 도착되면 즉시 압수되고 있었다.
‘스와질랜드’에서 “도”를 받아들임
‘스와질랜드’라는 조그만 나라는 ‘모잠비크’와 국경이 맞닿아 있고 다른 삼면은 ‘트랜스바알’로 둘러 싸여 있다. 그 나라의 서부는 아름다운 녹 지대이면서도 고산 지대를 이루고 있다. 동부로 가면 그 지방은 주로 평지로서 가시 덤불로 덮혀있고 오랜 가뭄으로 시달리는 때가 많다.
이전 수십년 동안에 ‘스와질랜드’를 방문한 ‘파이오니아’들은 ‘소브후자’ 2세로부터 대접은 잘 받았지만 조직을 세우지는 못하였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조슈아 P. 음흐롱고’라는 사람이 “그 도”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사도 9:2) 처음에 여호와의 증인의 가르침을 알아보려고 한 것은 그가 재학 중이던 학교의 교장 때문이었다. 그 교장은 ‘J. F. 러더포오드’가 지옥불을 믿거나 조상 숭배하는 일을 하지 말도록 사람들을 가르쳤다고 학생들에게 자주 이야기하였다. 그로 말미암아 ‘조슈아’는 여호와의 조직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알고자 원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부에 의해 증인들의 활동이 중지되었고 그들의 출판물에 대해 금지령이 내려져 있다는 말을 듣고 그는 당황하였다. ‘조슈아’는 마침내 ‘요하네스버어그’에서 전도인으로 활동하는 아주머니를 통해서 여러 가지 서적들을 입수하게 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 그와 그의 어머니는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1943년에 아직 학생이었던 그는 물 침례로 자기의 헌신을 상징하였다. ‘맥코피 응굴루’ 형제는 외딴 곳에 있는 이들 전도인들을 방문하던 일을 잘 기억하고 있다. ‘조슈아 음호롱고’는 공부를 마치자 ‘파이오니아’가 되겠다는 욕망을 나타냈으며 ‘응굴루’ 형제는 그렇게 하도록 그를 격려하였다. 과연 그는 그후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였으며 시간이 흘러 새로 형성된 ‘스와지’ 순회구에서 첫 순회 감독자로 봉사하였다.
1947년부터 1950년까지의 4년 동안에 굉장한 발전이 있었다. 그 나라의 전체 전도인은 5명에서 60명으로 증가되었다.
그 기간 중에 ‘스와질랜드’에서는 이상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왙취 타워’ 협회의 출판물에 대해서 내려진 금지령은 계속 발효 중이었다. 그 선언문에 의하면 ‘왙취 타워’ 협회가 출판한 여하한 출판물을 배부하여도 죄가 되었다. 기묘하게도 ‘소브후자’ 왕 자신은 협회 출판물을 거의 다 갖춘 도서실을 가진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협회 출판물에 대한 금지령은 좋은 소식이 외딴 지역에 전파되는 것을 방해하였다. 형제들이나 관심자들이 협회 출판물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발견되면 경찰에 의해 심한 구타를 당하고 학대를 받는 일이 많았다. 그 당시 남‘아프리카’와 보호령들에서 봉사하고 있었던 유일한 지역 감독자인 ‘M. E. 바아트렛’ 형제는 1951년 7월에 ‘스와질랜드’를 두번째로 방문하던 중에 그 법과 처음으로 충돌하게 되었다. 그는 금지된 출판물을 반입하였다는 혐의를 받게 되었다. 그 지역 판무관이자 행정관이었던 사람은 ‘바아트렛’ 형제에게 아주 우호적이었으며 협회 출판물에 대한 금지령을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유쾌한 기분으로 ‘바아트렛’ 형제에게 그가 가지고 있는 “가장 반대를 받을 만한” 잡지를 몇부 달라고 요청하였다. 9월에 그 사건이 최종적으로 심리되었을 때 활동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다른 행정관이 ‘바아트렛’ 형제에게 유죄 판결을 내려 1‘파운드’의 벌금을 물게 하였다.
역시 그 지역 감독자의 방문 중에 일부일처에 대한 성서적인 요구 조건이 형제들과 관심자들에게 명확히 지적되었다. 대부분은 기꺼이 하나님의 온전한 뜻에 따라 자기들의 생활을 변화시켰으나 어떤 주임 감독자는 하나님의 표준을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여 작은 집단을 이끌고 영원한 생명의 말씀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승인을 받기 원하는 사람들은 계속 올바른 원칙을 위해서 굳건한 입장을 취하였다.
금지령하에서도 ‘베추아날랜드’에서 봉사함
남‘아프리카’를 지나 서쪽으로 가면 지금은 ‘보츠와나’로 불리우는 ‘베추아날랜드’에 이르게 된다. 그곳은 대부분이 준사막으로 면적은 약 65만 평방 ‘킬로미터’이며 남‘아프리카’와 남서 ‘아프리카’와 ‘로디지아’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대체적으로 원주민들은 극히 가난하다. 콩, 사탕수수 등등의 재배와 함께 소를 치는 것이 그들의 주된 직업이다. 사냥도 어느 정도 행하여 그들의 식사에 보탬을 주고 있다. 인구는 1970년에 630,000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되었다.
그 지역은 1884년에 영국의 통치를 받게 되었으나 1967년에 독립하게 되어 ‘보츠와나’로 알려지게 되었다. 대부분의 지역은 여러 보호 지역으로 분할되어 있으며 그 지역들에서는 여러 부족의 추장들이 자기들의 부족법에 따라 통치하며 그의 신민들에게 막강한 권세를 휘두르고 있다. 이들 추장들은 일반적으로 여호와의 증인들의 활동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이 무덥고 먼지 투성이인 나라에 진리의 씨가 처음으로 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29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해에 그곳에서 한 전도인이 활동적으로 일하였으나 단지 두달 동안만 그렇게 하였다. 그후 1932년 말경에 남‘아프리카’에서 온 두 ‘파이오니아’들이 그 나라를 방문하였고, 그들은 종교 이야기를 할 수 있되 ‘아프리카’인들에게는 종교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허락을 받았다. 여하간 ‘유럽’인들에게 1,676부의 서적을 전하였다.
1941년에는 그 곳에 여호와의 증인 거주자는 한 사람도 없었는데도 전쟁의 열기 때문에 협회 출판물이 ‘베추아날랜드’로 반입되는 것이 금지되었다. 연로한 ‘카마’ 추장에 의해 통과된 법에 의하면 단지 세개의 종교 집단 즉 ‘런던’ 선교인 협회, 제7일 재림교, ‘로마 가톨릭’교만이 그 나라에서 교회를 세울 권리가 있었다.
노동 계약을 맺고 남‘아프리카’를 왕래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남‘아프리카’의 큰 도시들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지방에서 진리를 듣고 ‘베추아날랜드’로 돌아가서 그들이 들은 좋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또한 ‘로디지아’의 형제들이나 ‘니아살랜드’에서 온 사람들도 ‘프란시스타운’과 같은 곳에서 종종 일하였으며 그곳에서 그들은 진리에 대해 이야기하곤 하였다. 그리하여 1946년에 ‘베추아날랜드’에 평균 16명의 왕국 전도인이 있게 되었다.
1950년대초에 협회는 당국자들에게 우리의 입장을 설명하도록 ‘베추아날랜드’로 대표자들을 파견하였으나 별로 성공적이 못되었다.
1952년에는 그 나라 전체에서 평균 114명이 전파 활동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후 몇년 동안에 계속 증가 되었으나 문제도 많아졌다. 어떤 형제와 자매들은 그들의 결혼을 정부에 정당하게 등록하지 않았으며 새로운 사람들 중에는 아직도 도덕적으로 심한 방종을 행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지부로부터의 편지와 방문하는 감독자들의 도움을 받아 그러한 문제들이 해결되었다. 오늘날에는 조직이 영적 및 도덕적으로 건전하다.
‘세인트헬레나’에서의 현저한 증가
남서 ‘아프리카’ 해안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는 대서양 상의 작은 외딴 섬인 ‘세인트헬레나’로 다시 가보자. 그 섬에 있는 몇명의 전도인들로부터 간헐적인 보고를 받았으며 협회는 가끔 출판물 주문에 응하였다. 그러나 그곳의 증인들에게 많은 도움과 훈련이 필요하였다. 그러므로 1951년 5월에 남‘아프리카’ 지부 사무실은 그 섬에서 얼마 동안 머물도록 ‘J. F. 반 스타덴’이라는 ‘파이오니아’ 형제를 파견하였다.
그 조그만 섬의 우편 업무는 형편없는 처지여서 ‘반 스타덴’ 형제를 마중나온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은퇴한 경찰관 ‘토마스 스키피오’의 아들인 ‘조오지 스키피오’를 만나게 되었다. ‘반 스타덴’ 형제는 그렇게 만난 소감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참으로 그것은 나에게 놀라운 안도감을 느끼게 하였다. 그는 재빨리 나를 자기 아버지에게로 데려 갔는데 그가 바로 내가 만나려던 사람이었다. 그들이 오랫 동안 고대하던 도움에 대해 분명히 즐거워하는 것을 보고 그저 감격스러울 뿐이었다.” ‘반 스타덴’ 형제는 지체하지 않고 약 10명 내지 12명의 작은 집단과 함께 집회를 마련하였다. 처음에 그가 영어로 말하는 것이 아주 어려웠으나 몇 주일 후에는 훨씬 더 유창해졌다. 그들이 개최해 온 유일한 집회는 “노천 예배”로서, 그는 그들이 그 섬 여러 곳에서 그러한 집회를 가졌음을 알게 되었다. 형제들은 ‘바이올린’ 두개와 ‘피아노 아코디언’ 하나로 구성된 자신들의 작은 악단을 가지고 있었는데 노천 예배는 그 악단이 왕국 노래들을 연주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면 그들은 즉흥 연설(일반적으로 개인 증거)을 하였고 다른 형제들도 그에 참여하였다.
적절히 조직되도록 형제들을 돕기 위해서 확실히 많은 일을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반 스탁덴’ 형제는 즉시 모든 집회를 사회하기 시작하였다. 그 지방 형제들은 놀라운 인식을 나타내었으며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지지를 나타냈다. ‘제임스타운’에 사는 한 연로한 부인은 왕국회관으로서 자기 집에 있는 큰 방 하나를 제공하였으며 ‘레벨우드’에 사는 다른 가족도 역시 두번째의 집회 장소로서 자기들의 집을 제공하였다. 그 집회들은 참석한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 결과 처음 나온 얼마의 사람들도 다시는 빠지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은 그렇게 하여 진리를 배웠으며 그후 심지어 개인 성서 연구를 하지 않고도 침례를 받았다.
그러나 집회에 참석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조오지 스키피오’에게 조그만 자동차가 있었는데 그는 그 차에 세 사람을 태우고 가다가 길에서 얼마의 거리를 남겨두고 그들을 내려 놓았다. 그 세 사람은 계속 걸어갔다. 한편 ‘조오지’는 돌아가서 세 사람을 더 태우고 얼마의 거리를 싣고 와서 그들을 내려놓고 다시 돌아간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집회에 올 수 있도록 보통 오전 중의 가장 좋은 시간을 사용하였다. 집회 후에 그들을 집으로 데려다 주기 위해서 같은 과정이 행해졌다. 때때로 그처럼 걷는 일이 비가 쏟아질 때 있게 되어서 그들이 비를
맞고 늦게 집에 도착될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깊은 만족감과 진정한 즐거움을 느꼈다.얼마 있지 않아 ‘반 스타덴’ 형제는 지방 형제들이 그와 함께 호별 방문 활동에 참여하게 하였다. 그는 훌륭한 훈련을 베풀었는데 문간에서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데 그들이 참으로 신속히 유능해지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가 도착한지 석달 후인 1951년 8월에 ‘반 스타덴’ 형제는 침례식을 마련하였다. 적절한 장소를 발견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그들은 연못을 파고 그것을 ‘시멘트’로 발라 물을 채우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연못에 물을 채우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침례식이 있기 전날 밤에 비가 많이 와서 다음날 아침에는 그 못의 가장자리까지 물이 찼기 때문이었다. ‘반 스타덴’ 형제가 침례 연설을 하고 지원자들에게 일어서라고 했을 때 질문들에 대답하려고 26명이나 일어서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나의 즐거움은 정말 넘쳐 흘렀고, 그러한 훌륭한 특권을 위해 나를 보내신 것에 대해 마음 속 깊이 여호와께 감사하였다. 연설 후에 나는 찬물 속에서 26명 모두에게 침례를 주었다.” 침례 후 곧 작은 회중이 ‘제임스타운’에 구성되었다. 몇달 후에는 다른 회중이 ‘레벨우드’에 세워졌다.
왕국 전도인들의 그러한 모든 활동과 성공은 자연히 반대자들이 조처를 취하도록 자극하였다. 그 지방 성공회 주교로부터 심한 반대를 받게 되었는데 그 주교는 얼마의 관심자들을 진리에서 돌아서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지방의 제7일 재림교 교직자는 ‘반 스타덴’ 형제들에게 토론하자고 도전하였는데 아마 그는 그렇게 한 것을 매우 유감으로 생각하였을 것이다. 얼마의 새로운 전도인까지도 그의 주장의 대부분을 쉽게 논파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지방의 경찰국장이 가장 애를 먹였다. 그 사람은 ‘반 스타덴’ 형제를 계속 위협하였으며 그 섬에서 추방시키겠다고 하였다. ‘반 스타덴’ 형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는 한달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법정으로 끌고 갔는데 단지 자기와 나 밖에 없을 때 그는 나를 심문하면서 나에게 그 활동을 중지해야 한다고 경고하곤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반대가 있었지만 ‘반 스타덴’ 형제나 그곳 전도인들은 결코 중단하지 않았다. 형제들의 훌륭한 경험은 모든 반대와 날씨와 거치른 지형으로 인한 모든 어려움을 보상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예를 들어 어느 날 아침 ‘반 스타덴’ 형제와 ‘조오지 스키피오’ 형제가 어느 집에 가까이 갔을 때 그들은 어떤 남자가 성서를 읽고 있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은 그가 이사야 2장을 읽고 있는 것을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가 4절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문을 두드렸다. 그 호의적인 연로한 남자는 그들을 안으로 초대하였고 그들은 이사야 2:4에서 “화제”를 이끌어 내어 그에게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즉시 연구를 마련하였다. 그 연구는 정기적으로 사회되었고 결국 그 연로한 사람은 자기의 생명을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다.
‘반 스타덴’ 형제가 그 섬에서 보낸 13개월은 매우 바쁜 때였으며 그가
한 주일에 18건의 성서 연구를 사회하게 되었을 때는 특히 그러하였다. 그는 1952년 6월에 ‘세인트헬레나’를 떠나 남‘아프리카’로 돌아와서, 동‘케이프’ 주에서 순회 활동을 하였다. 그의 활동은 훌륭하였다. 그가 ‘세인트헬레나’에 있었던 13개월 동안에 그전에 형성된 작은 두 회중은 41명의 최고 전도인 기록에 달하였다.남‘아프리카’에서의 신권적 증가
이제 남아 연방으로 돌아가서 사반세기 전에 남‘아프리카’의 형제들이 처해있던 상황과 문제들을 어느 정도 생각해 보자. 「‘펑크’와 ‘와그날스’ 표준 참조 백과사전」 24권은 “남아 연방”이라는 제목 아래 1950년 6월의 집단 지역령을 가리켜 “4개의 주요 인종 집단 즉 ‘유럽’인(백인), ‘아프리카’인(흑인), 유색인(일부는 백인), (인도인을 포함한) ‘아시아’인을 특정 지역—그곳에 다른 집단은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에 격리시키기 위한 마련”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전파 활동에 있어서 그것이 형제들에게 문제를 가져올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밝혀진 바와 같이 형제 자매들이 자기 언어로 같은 인종의 사람들 사이에서 활동하는 것이 더 쉬웠다. 물론 그 법의 취지가 한 인종 집단에 속한 사람이 다른 집단의 사람에게 종교적인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막으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성서에서 격려하는 사랑에 찬 그리스도인 연합을 나타내는 점에 있어서, 형제들은 주로 각 인종 집단 내에서 함께 교제를 즐겼고 동시에 그들은 로마서 13장의 원칙에 순종하고 있었다. 좋은 소식이 전파되고 있으며 모든 인종 집단에 속한 사람들이 진리를 배우고 필요한 그리스도인 교제를 즐기고 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여러 해 동안 빌린 집회 장소를 “왕국회관”이라고 불러오고 있었다. 그러나 1948년에 한 ‘파이오니아’가 ‘케이프타운’ 근처의 ‘스트랜드’에서 활동하도록 임명을 받았으며, 그는 남‘아프리카’에서 첫 왕국회관을 건축하기 위해 활동을 조직하는 특권을 즐기게 되었다. 1949년과 1950년에 있었던 일이다. ‘고돈’만(灣)의 전도인인 ‘반데르 비질’ 자매는 그러한 계획을 위해서 자금을 조달함으로써 크게 도움을 주었다. 멀지 않은 ‘케이프타운’ 지부로부터 ‘벧엘’ 형제들이 와서 봉헌식 ‘프로그램’을 도왔다. 지부 감독자인 ‘G. R. 필립스’는 그 건물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많은 왕국회관을 짓도록 형제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그 새로운 회관에 바퀴를 달아 전국으로 그것을 가지고 다닐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말하였다. 그 이래로 ‘유럽’인 및 유색인 회중들에 의해 전국적으로 많은 왕국회관이 건축되었다.
그 여러 해 동안에 점점 더 많은 도움이 ‘아프리카’인 형제들과 자매들에게 베풀어졌다. 1949년 1월 1일은 ‘줄루’인 형제들에게 중요한 날이었다. 그날은 첫 ‘줄루’어 「파수대」가 나온 날이었다. 그 때에는 그 잡지가 ‘케이프타운’ 협회 사무실에 있는 소형 수동 복사기로 인쇄되었다. 오늘날처럼 「인카바요쿨린다」(‘줄루’어 「파수대」)가 그 당시에는 그렇게 산뜻하고 매력적인 잡지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것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줄루’인 형제 자매들에게 적절한 시기에 양식을 공급해 주었다.형제들을 대회로 실어 가도록 특별 열차가 처음 마련된 것도 바로 그 기간 중이었다. 예를 들어 1949년에 ‘요하네스버어그’에서 ‘프리토리아’ 대회로 가는 “J. W. 특별호”에는 750명이 탈 자리 밖에 없었다. 그러나 기차에 1,000명이 타게 되어 초만원이었다. 그들은 약 12부족에 속해있는 ‘아프리카’인들이었지만 단 한건도 불미스러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여행은 철도 관리들에게 상당한 증거가 되었음에 틀림없다. 그처럼 다른 부족들에 속한 ‘아프리카’인들이 어떻게 서로 아주 사이좋게 지낼 수 있었는가? 사람들의 생각을 변화시킨 진리의 힘이 없었다면 ‘아프리카’인들 사이에 흔히 볼 수 있는 부족간의 싸움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각 부족은 자기들이 다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파벌 싸움’이 자주 일어난다.
1949년에는 「신권 조직에 대한 충고」라는 소책자가 나오게 되자 조직이 더 강화되었다. 활동을 더 촉진시키기 위해서 그 당시 그 나라에는 ‘길르앗’ 졸업생이 11명 있었으며, 근 전도인의 10‘퍼센트’가 전 시간 전파 활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 해의 기념식에는 6,766명이 참석하였고 265명이 표상물을 취하였다. 상황은 틀이 잡혔고 활동은 더 큰 발전을 위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케이프타운’에 있는 작은 인쇄 공장은 그해에 6,400,000부 이상의 인쇄물을 생산해 내었다. 그것은 그들의 인쇄량에 있어서 신기록이었으며 그 중에는 약 135,000부의 잡지와 8개 언어로 된 625,000부의 여러 가지 소책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1949년과 1950년에는 문맹 퇴치반이 설치되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수업은 일주일에 3일 내지 4일 동안 진행되었다. 수업은 ‘줄루’어, ‘세소토’어, ‘코사’어, ‘쓰와나’어, ‘세페디’어와 영어로 진행되었다. 학생들이 읽을 수 있으려면 약 30회의 수업이 필요하였다.
원주민들 사이에 만연되어 있는 일부다처제가 많은 ‘아프리카’ 형제들에게 큰 문제였다. 1948년 ‘노워’ 형제가 방문했을 때 일부다처 문제가 ‘아프리카’인 형제들과 토론된 주요 문제의 하나였다. 처음에는 새로운 자들에게서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아내 즉 보통 가장 젊은 아내를 데리고 사는 경향을 볼 수 있었으나 후에 협회는 맨 처음에 아내로 맞아들인 부인과 함께 살고 다른 모두와는 관계를 끊는 것이 성서적으로 합당함을 지적하였다.
41명의 남‘아프리카’인들이 1950년의 ‘뉴우요오크’ 국제 대회에 참석할 수 있었으며 9명은 계속 남아서 ‘왙취 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 제16기의 수업을 받도록 초대되었다. 그러나 그 국제 대회에 참석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같은 해 10월에 ‘리이프’에서 열린 5일간의 “신권 통치 증가” 전국 대회에서 동일한 영적 잔치를 즐기게 되었다. 그 대회는 남아연방과 보호령들, 남서 ‘아프리카’의 각처에서 온 6,000명 이상의 전도인이 참석하였다. 물 침례를 위하여 자신을 제공한 지원자가 855명이나 되었다는 것은 신권 통치 증가의 명백한 증거였다. 공개 강연에는 10,185명이
참석하였다. 형제들을 참으로 감동시킨 한 가지 새로운 출판물은 「신세계역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서」였다.신권 통치 증가의 또 다른 증거는 1951년 봉사 연도 중에 물 침례로 자신의 헌신을 상징한 사람 수가 2,000명이 넘었다는 점이다. 새로운 회중들이 구성되었고 그 당시 최고 9,586명의 전도인들이 활동하고 있던 43개의 순회구를 돌보기 위해서 두번째 지역이 조직되었다.
지부 사무실이 이전하다
남부 ‘아프리카’의 활동 역사상 아주 획기적인 한 가지 사건은 1952년 초에 협회 본부를 ‘케이프타운’에서 ‘트랜스바알’의 ‘일랜쯔포온테인’으로 이전한 일이었다. 1917년 이래로 활동은 그 구역의 최남단에 있는 ‘케이프타운’으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이제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지부를 ‘리이프’(광산 지대)로 이전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남‘아프리카’에서는 인구가 ‘리이프’에 가장 집중되어 있었으며 그 결과 대부분의 형제들이 ‘요하네스버어그’를 중심으로 반경 160‘킬로미터’ 이내에 있었다. 남‘아프리카’ 지부가 남부 ‘아프리카’의 다른 지부들을 위해 인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리이프’는 그러한 활동을 위해 더 중심이 되는 곳이 될 것이며 그러한 나라들로 발송하는 데 드는 철도 운임을 크게 절약되게 할 수 있는 곳일 것이다.
‘노워’ 형제와 ‘헨첼’ 형제가 1948년에 그 나라를 방문했을 때 ‘일랜쯔포온테인’ 역과 우체국 근처의 ‘액티비아 파크’라는 새로운 ‘저미스튼’ 산업 지구에 있는 두 필의 땅을 구입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당시에는 그 지역이 미개발 지역이었으나 그 결정은 아주 현명한 것이었음이 후에 밝혀졌다. 이 새로운 지역은 그 나라 최대의 연락역인 ‘저미스튼’의 중심에서 단지 8‘킬로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으며 남아 연방의 최대 도시인 ‘요하네스버어그’로부터 단지 16‘킬로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고 ‘쟌 스무츠’ 국제 공항에서 단지 8‘킬로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땅을 판 그 지구에 있는 회사가 어떤 기술적인 어려움을 겪게
되어 건축 계획은 지연되었으며 결국 1952년 3월말경에야 이전하게 되었다.그것이 ‘벧엘’ 가족에게 참으로 커다란 변화였음을 알기 위해서 그 변화가 있기 전의 상태가 어떠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케이프타운’ 사무실과 공장에서 일하는 형제들은 하나의 ‘벧엘’ 가족으로 같이 살지 않았다. 사실상 “벧엘”이라는 표현은 ‘케이프타운’ 지부와 관련해서는 별로 사용되지 않았다; ‘케이프타운’ 지부는 보통 “사무실”로 언급되었다. ‘필립스’ 형제 부부는 작은 칸막이 방에서 생활하였고 다른 가족 성원들은 ‘케이프’ 반도 여기저기 흩어져 사는 여러 전도인들과 숙소를 같이 하였다. 근무하기 위해 매일 기차로 16‘킬로미터’를 출퇴근하는 형제들도 있었고 어떤 형제들은 ‘버스’나 도보로 다녔다. 각자는 자기가 묵는 곳에서 아침 식사를 하였다. 숙소가 아주 가깝다면 점심 식사를 위해서 빨리 갔다 올 수 있었다. 집에 갈 수 없는 사람들에게 식당에서 식사하도록 매일 별도로 1‘실링’ 6‘펜스’씩 지불되었다. 저녁 식사는 모두가 집으로 돌아가서 하였다. 그들은 ‘벧엘’ 가족으로서 함께 「파수대」 연구를 하지 못했다.
매일 아침에 가족은 7:45분에 작은 공장에 있는 교대실에서 만났다. 일용할 성귀 토론과 기도를 한 후 그들은 8:00시에 작업을 시작하였다. 시간에 맞춰 그 토론에 임하기 위해서 어떤 성원들은 6시 전에 일어나서 즉시 여행을 시작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일랜쯔포온테인’의 새로운 지부 건물은 ‘액티비아 파크’ 지구에 지어진 최초의 ‘빌딩’들 중 하나였다. 그 건물은 건평이 1,899평방 ‘미터’인 2층 건물이었다. 1층에는 사무실, 공장, 발송부, 세탁장과 ‘보일러’실이 있었다. 가족들은 22개의 안락한 방에서 생활하였다. 그외에 가족들의 편의를 위해 이층에 부엌과 식당과 도서실이 있었다.
새로운 공장에는 많은 부가적인 인쇄 시설이 설치되었다. 새로운 대형 평판 ‘G. M. A’ 인쇄기가 ‘스웨덴’에서 도착하였으며 그 인쇄기에는 ‘케이프타운’에서 이전에 사용되던 종이의 네 배가 되는 큰 종이를 넣을 수 있었다. 또 한대의 ‘라이노타이프’기와 대형 절단기, 제본기 등이 설치되었다. 이제 ‘아프리카’ 언어들로 「파수대」를 인쇄할 수 있게 되었다. ‘줄루’어 「파수대」가 전에는 복사기에 의해 마련되었음을 기억할 것이다. 새로운 인쇄기와 장비가 가동되었을 때 8개 언어의 「파수대」, 3개 언어의 「깨어라!」가 인쇄되었으며 그 밖에도 8개 언어의 「왕국 봉사」 12개호를 인쇄하였다.
격지 구역에서 활동함
1952년은 조직과 형제들을 강화시키기 위한 때였음이 분명하다. 지부도 역시 임명되지 않은 구역에서의 활동을 위해 노력하였다. 형제들과 자매들은 증인들의 어느 회중도 정기적인 활동을 수행하고 있지 않는 약 400개의 마을과 도시에 사는 사람들을 방문하기 위해 수천 시간을 보냈다. 그 결과 10,000명 이상의 관심자의 성명이 지부 사무실로 보내졌으며
그후 각자는 특별한 편지와 견본 잡지들을 협회로부터 받게 되었다.약 20명의 ‘아프리카’인으로 이루어진 한 회중이 이전에 임명되지 않은 구역에 이르렀을 때 숙소를 구하기가 어려웠다. 어떤 농부는 경찰이 발행한 증명서가 없다고 그들을 숙박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경찰서는 멀리 떨어져 있었고 밤은 깊었다. 그 때 그 농부의 고용인 몇 사람이 그 증인들을 그 농장 가까이에 사는 그리스도의 제일 교회 교역자에게 데리고 갔다. 그는 도와주기를 거절하였으며 아주 불친절하였다. 어떤 교인 한 사람이 그 교역자의 태도를 비난하면서, 동정심을 나타내어 근처에 있는 빈집으로 증인들을 데리고 갔다. 그들이 그곳에 가 있자 곧 경찰이 왔다. 그 ‘유럽’인 경찰관은 아주 사려 깊었으며 구역 임명 ‘카아드’를 보여 주었더니 격려까지 해 주었다. 경찰을 부른 것은 그 교직자였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아침에 그 교직자는 완전히 태도가 달라져서 그 전날 밤의 자기 행동을 사과하고 공개 집회를 위해 자기 교회를 제공하였다. 그는 그의 “양떼”를 그 집회에 초대하였다. 그 결과 80명(60명이 처음 온 사람이었다)이 참석하였다. 그후 모든 사람들이 「파수대」 연구를 위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날 출판물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그 교직자도 들어 있었다. 그후 두번 방문했을 때도 매번 그 교역자는 공개 강연을 위해 그의 교회를 제공하였다. 그는 강연 뿐만 아니라 그후에 열린 「파수대」 연구에도 참석하였다. 그 지역에 활동적인 전도인이 단지 한 사람이었는데 그곳에서의 그러한 활동의 결과로 결국 7명이 있게 되었다.
유익한 방문
1952년에는 남‘아프리카’의 활동 역사상 처음으로 총 전도인이 10,000명선을 돌파하였다. 그 해는 남‘아프리카’ 왕국 활동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해였음이 분명하다. 11월에 ‘노워’ 형제와 ‘헨첼’ 형제가 그 나라를 방문하여 그 해를 마무리하였다. ‘노워’ 형제는 잘 자리잡은 훌륭한 대지 위에 벽돌과 치장 벽토로 지어진 멋있는 이층 지부 건물을 보고 매우 즐거워하였다. 숙박 설비가 없었던 ‘케이프타운’의 조그만 사무실과 비교해 볼 때 이번에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그는 알게 되었다. 그는 그 건물을 돌아 다니면서 모든 가족 성원들을 만나 보았다.
며칠 후 ‘노워’ 형제는 ‘필립스’ 형제와 함께 인도양 해변에 위치한 아담한 현대 도시인 ‘더어반’을 방문하였다. 그는 그곳의 인종 분리 규정에 따라 세 군데의 다른 장소에서 강연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유색인 집회에서 그는 15명의 인도인이 참석한 것을 보고 즐거워하였으며 집회 후에 그들 중 몇 사람과 이야기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더어반’에는 인도인들이 상당히 많이 살고 있는데 바로 그 때에 왕국 소식이 그들에게 전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더어반’의 ‘아프리카’인 집회는 그 도시의 남부에 위치한 새로운 지구인 ‘라몬트빌’에서 개최되었다. 그 집회에서 ‘줄루’ 형제들의 노래는
‘노워’ 형제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 집회는 일요일 오후에 개최되었으며 저녁에는 ‘유럽’인 형제들을 위한 집회가 열려 그 도시의 중심지에 있는 한 장소에 435명이 참석하게 되었다.‘요하네스버어그’로 돌아간 직후에 ‘노워’ 형제는 ‘바수톨랜드’, ‘베추아날랜드’, ‘스와질랜드’를 관할하는 영국 고등 판무관의 사무실을 방문하였다. 1941년 이래 그 세 보호령에 협회 출판물을 반입하는 것을 금지해 온 명령과 관련해서였다. ‘노워’ 형제의 방문 당시 그러한 구역들에서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사람들이 400명 이상이나 되었기 때문에 협회는 금지령을 해제하려고 여러 번 시도해 오고 있었다. ‘노워’ 형제는 판무관의 비서실 책임자와 이야기하였고 그의 모든 질문에 답변하였으며 여호와의 증인들이 행하고 있는 훌륭한 교육 활동의 상황을 분명하게 설명하였다. 그러나 금지령은 그후 수년 동안 계속되었다.
바로 이 때 ‘헨첼’ 형제가 도착했고 ‘저미스튼’ ‘유럽’인 회중이 주선한 격려적인 집회가 ‘저미스튼’ 시민 회관에서 개최되었다. ‘리이프’에 있는 많은 형제들이 와서 참석수는 총 725명이 되었다.
12월 8일에 ‘노워’ 형제와 ‘필립스’ 형제는 비행기로 남서 ‘아프리카’의 수도인 ‘윈드혹’으로 갔다. 그곳에 있던 세 선교인들은 그들을 만나게 된 것과 그 나라에서 첫 대회를 갖게 된 데 대하여 여간 기뻐하지 않았다. 정기적인 회기들에 약 10명씩이 모였으나 공개 집회에는 최고로 25명이 참석하였다.
‘일랜쯔포온테인’ 지부로 돌아와서 ‘노워’ 형제와 ‘헨첼’ 형제는 활동을 조직하는 것과 관련된 많은 문제들과 다루어져야 할 문제들에 주의를 기울였다. 협회장은 앞으로 여러 해 동안 활동에 영향을 주게 될 여러 가지 점들에 대해서 지부를 도울 수 있었다. 그는 야외에서 온 여행하는 종들도 만나서 그들에게 많은 충고와 격려를 베풀었다.
대회가 12월 11-14일에 개최되었고 그 대회는 ‘노워’ 형제와 ‘헨첼’ 형제의 방문의 절정을 이루었다. ‘요하네스버어그’에서 우리는 다른 구획들에 앉기는 하지만 한 ‘스타디움’에서 세 인종 집단 모두가 모일 수 있다는 허가를 얻는 데 성공하였다. 모든 ‘아프리카’인 형제들이 남‘아프리카’와 보호령 각지로부터 참석할 수 있도록 16세 이상된 각인을 위해서 통행증과 허가증을 받아야 하는 엄청난 일이 수행되어야 하였다. 언어 문제 때문에 세개의 환영사가 있었다. 먼저는 영어로, 다음에는 공용 ‘네델란드’어로, 마지막은 ‘줄루’어로 하였다. ‘유럽’인 형제들은 흥미있는 딸깍거리는 소리가 나는 그 ‘줄루’어 연설을 들었으며 그 연설이 끝났을 때 그들은 ‘줄루’ 형제들과 같이 진심에서 박수를 보냈다.
‘노워’ 형제는 ‘아프리카’인 형제들에게 연설하면서 그들이 진리를 더 잘 알고 야외에서 더 유능한 전파자가 되기 위해서 읽고 쓰는 것을 배울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였다. 서운하게도 대회가 열린 4일 동안 비가 많이 왔다. 사실 어떤 경우에는 날씨가 너무 좋지 않아서 연단을 사용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대회는 아주 성공적이었으며 모든 인종에 속한 339명의 사람들이 침례를 받았다. 토요일 저녁에는 참석수가
5,441명으로 증가되었고 공개 강연에는 7,267명이 참석하였다. 남‘아프리카’의 형제들은 모두가 행복하였으며 훌륭한 교훈을 받은 것에 감사하였고 더욱 남‘아프리카’에서 왕국 활동을 열심히 하겠다는 각오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1952년 후반에는 남‘아프리카’ 지부의 관할하에 있었거나 혹은 그 때까지도 그 관할하에 있는 그 모든 나라들의 전도인 평균이 총 50,087명으로 증가하였다. 1931년 이후 21년간에 그 당시 100명의 전도인으로 이루어진 “작은 집단”으로부터 엄청나게 증가된 것이다!
신세계 사회 대회
1953년에 ‘양키 스타디움’에서 개최된 신세계 사회 대회에 이어 남‘아프리카’에 9개의 대회—하나는 ‘유럽’인 전국 대회였고 8개는 ‘아프리카’인 및 유색인 지역 대회였다—가 마련되었다. ‘뉴우요오크’에서 행해진 주요 연설들이 남‘아프리카’에서도 제공되었기 때문에 그 대회들에서 형제들은 같은 ‘프로’를 즐겼다. 처음으로 옷깃에 다는 가슴표가 이곳에서 소개되었으며 그 이후로 그것은 남‘아프리카’ 여호와의 증인에 의해 개최되는 모든 지역 및 전국 대회의 특징이 되었다. 그 가슴표들은 쉽게 사귀게 하였으며 형제들간에 행복하고 우호적인 분위기를 더 느끼게 하였다. 그 9개의 모든 대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많아서 “아마겟돈 후—하나님의 신세계”라는 공개 강연에는 모두 합쳐 11,000명이 참석하였고, 634명이 침례를 받았다.
놀랄 만한 마련인 새로운 영화
1955년에 “활동하는 신세계 사회”라는 협회의 16‘밀리’짜리 영화가 상영되기 시작했을 때, 형제들은 그들이 사용하는 출판물의 생산에는 엄청난 작업이 필요함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그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브루클린’ ‘벧엘’과 협회 공장이나 ‘길르앗’ 학교 등을 구경할 수 있었다. 그 영화는 형제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조직에 대한 그들의 인식을 크게 높여 주었다. 그 영화를 통해서 형제들은 ‘일랜쯔포온테인’ ‘벧엘’에 있는 형제들도 역시 여러 가지 언어로 된 출판물을 공급하려고 열심히 일하고 있으며 1955년 8월에 ‘코사’어 「파수대」지가 새로 나올 때처럼 새로운 잡지들이 새로 더 나올 때는 더욱 많은 수고를 하게 된다는 것도 인식하게 되었다.
그 영화는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한 편견을 없애는 데도 많은 역활을 하였다. 일반적으로 ‘유럽’인 지역 감독자들이 들어가기 어려운 얼마의 ‘아프리카’인 지역에서도 영화 상영 허가는 쉽게 나왔다. 지역 감독자들은 발전기를 가지고 다녔으며 그것으로 전기가 없는 많은 외딴 지역에서 영화를 상영할 수 있었다. 많은 ‘아프리카’인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영화류로서는 처음 보는 것이었으며 그 영화의 어떤 장면들은 그들을 놀라게 하였다. 예를 들어 한 ‘아프리카’인 소년은 어떤 방향으로 휙 소리를 내며 가는 기차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그것에 호기심을
갖고 그 다음날에는 그가 사는 땅의 주인인 농부에게 그 기차가 언제 돌아올 것인지 물었다!유색인 형제들의 조그만 순회 대회에서는 200명이 대회장 밖에 운집해 있었다. 더운 여름날 저녁이라 영화를 그 대회장 뒤에 있는 커다란 마당에서 상영하기로 하였다. 아직 너무 환해서 영화 상영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형제들은 왕국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이내 사람들은 아름다운 노래 소리에 마음이 끌리어 즉시 650명이 마당으로 모여 들었다. 그들은 그 영화에 대해 아주 감사하였다.
‘브루클린’에서 다시 방문하러 오다
1955년 10월에는 ‘밀튼. G. 헨첼’이 남‘아프리카’를 다시 방문하였다. 내무부가 그에게 입국 사증을 발급해 주었다가 후에 그것을 취소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가 우리의 대회에 참석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가 도착하기 바로 전날 필요한 사증이 재발급되었으나 어떠한 공개 연설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다급하여 ‘벧엘’에 있는 몇명의 형제들은 필요한 경우 ‘헨첼’ 형제를 대신해서 연설할 수 있게 준비하도록 임명되었다. 그러나 ‘헨첼’ 형제가 도착하여 내무장관과 면담한 결과 “파랑불”이 켜지게 되었고 만사가 원래의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문제가 해결되자 모든 형제들은 매우 기뻐하였으며, ‘헨첼’ 형제 대신으로 마음을 조아리며 급히 연설을 준비했던 ‘벧엘’ 형제 몇 사람도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되었다.
1952년과 마찬가지로 세 인종 집단 모두가 ‘웸블리 스타디움’에 모일 수 있는 특권을 다시 누리게 되었으나 아직도 법에 따라 집단적으로 분리해서 앉게 되었다. 형제들은 그들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의 행진으로 인도되고 있음을 확신케 하는 ‘헨첼’ 형제의 기조 연설을 듣고 참으로 감격하였다. 이 연설이 적들에게는 악취였을지라도 여호와께는 향기로운 것이었다. “하나님의 왕국에 의한 세계 정복이 곧 있게 되다”라는 공개 강연에 총계 10,754명이 참석하였고 407명이 침례로 그들의 헌신을 상징하였다. 모든 새로운 출판물들이 토요일 밤 늦게야 ‘요하네스버어그’에 도착되었기 때문에 그 출판물을 구할 수 있었던 일요일에 그 대회는 더욱 절정을 이루었다.
성의 대회
남‘아프리카’에 있는 모든 증인들의 이목은 1958년 7월 27일부터 8월 3일까지 ‘뉴우요오크’에서 개최된 여호와의 증인의 성의 국제 대회에 집중되어 있었다. 남‘아프리카’로부터 123명의 형제 자매들이 함께 비행기 편으로 ‘런던’으로 갔다가 그 다음 ‘뉴오요오크’로 가게 된 것은 참으로 감동적인 경험이었다.
남‘아프리카’에서는 ‘뉴우요오크’ 국제 대회에 뒤이어 연속적으로 13개의 성의 지역 대회가 개최되었으며 그러한 대회들에서 남‘아프리카’의 밭을 위해 새로운 출판물들이 발표되었다. 그러한 책들 중에는 「낙원을
잃은 때부터 낙원을 찾을 때까지」라는 책이 있었다. 그 책은 형제들이 가족 성서 연구를 사회하고 자녀들로 성서 지식을 얻게 하는 데 아주 도움이 되었다.1958년 10월에 남‘아프리카’ 형제들은 ‘말라위’에 있는 ‘아프리카’인 형제들이 재난을 당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큰 화재가 나서 형제들이 대회 숙소로 지은 큰 건물을 완전히 삼켜 버렸고 그 형제들은 모든 의류와 소유물을 잃어 버렸다. 며칠 안에 남‘아프리카’ 형제들은 3,000‘파운드’의 의류를 모아 ‘말라위’에 있는 그들의 형제들에게 보냄으로써 사랑을 나타내었다.
또 다른 중요한 방문
다음해인 1959년에 ‘노워’ 형제는 남‘아프리카’를 다시 방문하였으며 그의 방문과 일치하게 대회가 마련되었다. 1952년과 1955년에 개최된 대회와 같이 모든 인종들이 함께 모이는 하나의 전국 대회를 갖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정부 당국이 허가를 내주지 않아서 지부는 ‘요하네스버어그’의 다른 지역에서 두개의 대회가 열리도록 마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내탈’과 ‘줄루란드’에서 1,600명의 형제들이 특별 열차를 타고 왔다. 남아 연방 전역과 주변의 여러 나라로부터 형제들이 ‘요하네스버어그’로 쏟아져 들어 왔다. 미리 행한 광고로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수백명의 새로운 사람들이 “하나님의 왕국을 통해 낙원이 될 지구”라는 공개 강연과 다른 회기에 참석하였다.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유럽’인 대회에는 4,541명이 참석하였고, ‘오랜도 커뮤널 홀’에는 12,648명의 ‘아프리카’인들이 모였는데 그 장소가 너무 좁아서 몇개의 대형 천막을 더 치게 되었다. 전부해서 546명이 침례를 받았다.
1952년에 ‘벧엘’이 ‘케이프타운’에서 ‘일랜쯔포온테인’으로 이전하였을 때 남‘아프리카’의 밭에는 평균 8,580명의 전도인이 있었다. 1959년에는 그 수가 14,451명으로 증가되었다. ‘벧엘’은 비좁아지고 가족이 늘어 숙소가 모자라게 되었다. ‘노워’ 형제의 도착에 앞서 지부 감독자는 ‘벧엘’과 공장 확장 계획을 ‘브루클린’으로 보내어 협회장의 승인을 얻었다. 건축 활동은 그의 방문 중에 시작되었다. 그 증축된 건물은 원래 건물보다 더 큰 아담하고 멋있는 건물이었다. ‘벧엘’ 가족을 위한 왕국회관 외에 22개의 침실이 더 늘어나게 되었다. 공장 증축에는 새로운 기계나 새로운 설비를 위한 곳이 포함되었고 다량의 저장을 할 수 있는 저장소도 있었다. 생산되는 수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 모든 것들은 참으로 필요한 것들이었다. ‘일랜쯔포온테인’에 있는 새로운 공장이 가동된 첫해에 740,000부의 소책자와 잡지가 생산되었다. 1959년에는 잡지의 생산만도 거의 2백만부에 달하였다.
그러나 그 기간 중에 남‘아프리카’ 지부의 감독 아래 있는 다른 나라들에서는 활동이 어떻게 발전되고 있었는가? 세개의 영국 보호령인 ‘바수톨랜드’와 ‘스와질랜드’와 ‘베추아날랜드’에서의 활동을 고려해 보자.
‘바수톨랜드’에서의 장애를 극복함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 일반적으로 ‘아프리카’인들에게 장애가 되는 한가지는 조상 숭배와 마법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바수톨랜드’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들의 교직자들은 죽은 추장이나 조상의 “영”을 달래기 위해 사람들과 함께 희생을 바친다. 교직자들과 평신도들이 똑같이 마법사들의 의식을 사용한다.
1953년에는 이전에 ‘네델란드’ 신교 교회 ‘미션’ 학교 교장이었던 ‘조슈아 송고아나’가 순회 감독자로서 ‘바수톨랜드’(지금의 ‘레소토’)에 파견되었다. 그와 그의 아내는 ‘바수톨랜드’에서 아직도 마법의 일부로서 의식적인 살인이 행해지고 있다는 소문이 나 있을 때 그곳에 도착하였으며 외국인들은 그러한 살인의 표적이 된다는 풍문이 돌고 있었다. ‘송고아나’ 형제와 그의 아내는 여호와를 강하게 의지하였으며 그분은 그들을 참으로 보호해 주셨다. 또한 형제들은 그들에게 많은 친절을 베풀었고 잘 대우해 주었다.
‘말루티’ 산맥에서는 한 격지 집단에서 다른 격지 집단으로 여행하기 위해 ‘송고아나’ 형제는 말을 이용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말을 타고 처음으로 ‘모크호트롱’에서 ‘보베테’까지 여행했을 때는 꼬박 하루가 걸렸다. 그들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말타는 데 익숙한 형제들은 아무렇지도 않았으나 그는 지칠 대로 지쳤으며 온 몸이 몹시 아파서 앉아있을 수도 없고 누워 있을 수도 없었다. 돌아가는 길에 그들은 ‘오린지’ 강을 건너야 했는데 그 강은 홍수가 나 있었다. 그와 함께 여행하는 동료들은 어떤 일이 있을 수 있는 가를 그에게 알려 주었다. 즉 강물이 너무 세차면 말은 헤엄쳐 건너가기 위해서 그 탄 사람을 내동댕이 쳐 버린다는 것이다. 그는 말을 잘 탈 줄 몰랐기 때문에 두려워하였다. 그가 탄 말이 물속으로 걸어 들어 갔을 때 그의 불안감은 더 했으나 다행히 모든 말들이 안전하게 건너갔다.
‘말루티’ 산맥에는 눈이 올 때가 많으며 살을 에는 바람이 뒤따르게 된다. 어느날 아침 그들이 깨어 났을 때 온누리가 눈으로 덮여 아름다운 설경으로 변해 있었다. 그들이 구역으로 걸어 가자 그들의 발은 눈 속으로 푹푹 빠져 들어갔다. 그들로서는 처음 당해 보는 일이었다. 몸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서 꼭 불을 피워야 하겠는데 그들에게는 나무나 석탄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별 탈을 당하지 않았다.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 어떤 관심자가 친절하게도 불을 피우라고 마른 쇠똥을 많이 갖다 주었다.
‘바수톨랜드’에서는 1950년대에 꾸준히 발전하였다. 1953년에는 그 나라에 평균 67명의 전도인이 있었는데 1959년에는 그 수가 111명이 되어 81‘퍼센트’의 증가를 보였다.
‘스와질랜드’에서 금지령이 해제되다
‘스와질랜드’의 상황도 ‘바수톨랜드’와 비슷하였다. 그 나라의 추장들은 전반적으로 증인들에 대하여 호의적이었다. ‘스와질랜드’ 형제들은
계속 금지령하에서 활동하였지만 최고 권력자의 호의적인 태도로 인하여 그들이 조심만 한다면 출판물을 배부할 수 있었다. 전도인들은 그들이 출판물을 팔고 있는 것이 아니라 관심자들에게 단지 빌려 주고 있다는 증거로서 관심자들에게 전하는 각 서적에 자기들의 이름을 적어 놓곤 하였다.1958년에 지역 감독자인 ‘데니스 맥도날드’는 ‘고에드게군’(지금의 ‘응흐랑가노’)에 사는 한 명뿐인 헌신한 자매를 방문하였다. 그 자매에게 있어서 협회의 대표자에 의한 방문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그 자매는 공개 강연을 위해서 그 지방의 재판소를 예약하였다. ‘맥도날드’ 형제는 협회의 출판물이 금지되어 있는 나라의 재판소에서 공개 강연을 하는 것이 약간 걱정스러웠다.
지방 정부에 상당한 영향력이 있는 그 자매의 남편은 “청중이 상당”할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였다. 그 일요일 오후에 ‘네델란드’ 신교 교역자 두 사람, 성공회 교역자 한 사람, 지방 행정관, 그 지방 경찰관, 검찰 국장 및 몇명의 관심자를 포함하여 정말 “청중이 상당”하였다. ‘맥도날드’ 형제는 그 사람들이 뭔가 목적이 있어서 참석하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공개 강연은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소망과 대조하여 공산주의의 실패를 폭로하는 것이었다. 강연은 전부 녹음되었고 조사를 위해 수도인 ‘음바바네’로 보내졌다. 그 일이 있은지 얼마 후에 협회 출판물에 대한 금지령이 해제되었는데, 그렇게 되는 데 그 공개 강연의 영향이 상당하였던 것 같다.
“활동하는 신세계 사회”라는 협회 영화의 상영도 역시 편견을 극복하도록 도움이 되었다. 어떤 큰 백인 주택 구내의 ‘유럽’인 지배인은 상영을 허락하기 전에 먼저 그 영화를 보고자 하였다. 7명이 참석한 가운데 비공식적으로 상영하게 되었다. 그 지배인은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자기의 소감을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은 색다르면서도 아주 흥미있군요. 이것은 아주 큰 조직이며 또한 조직이 잘 되어 있읍니다.” 그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깨끗한 숭배를 위해 일하며 정치나 세상적인 일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데 만족하였다. 그는 그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를 준 데 대해서 감사하였으며 그 지역 감독자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은 오늘밤에 이 구내 회관에서 그 영화를 상영하실 수 있읍니다. 경찰관들에게는 당신을 도와주도록 이야기해 놓겠읍니다.” 그날 밤 그 구내 회관에 902명이 참석하였다.
그 기간 중에 ‘스와질랜드’에서는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사람들의 수가 급속도로 증가하였다. 평균하여 1953년의 126명에서 1959년의 289명으로 증가되어서 129‘퍼센트’의 증가를 보였다.
꾸준함이 ‘베추아날랜드’에서 보상받다
1956년에 ‘조슈아 송고아나’는 ‘베추아날랜드’의 순회 감독자로 임명되었다. 그곳 형제들의 얼마는 전파한다는 이유로 이미 추장들로부터
심하게 매를 맞았다. 그 추장은 ‘카마’ 추장이 ‘런던’ 선교사 협회라는 단 하나만의 종교를 들여왔는데 그 형제들이 다른 종교를 그 나라에 끌어 들이려 한다고 비난하곤 하였다. 한 ‘파이오니아’는 그의 전파 활동 때문에 두번 태형을 받고 그의 소떼를 몰수 당하였다. 그러나 추장이 그의 굳건한 입장을 알게 되었을 때 소들은 돌려 주었다.그가 도착한지 2주일 후에 ‘송고아나’ 형제는 다른 두 형제와 함께 체포되었다. ‘크고틀라’(법정)에서 그들은 다른 종교를 끌어 들이고 있다는 고발을 당했다. 형제들에게는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주지 않았으며 ‘크고틀라’의 구성원들은 그들에게 범죄 사실을 인정하라고 요구하였다. 추장과 그의 ‘크고틀라’는 그들에게 대해서 많은 혐의 사실을 늘어 놓은 후에 ‘송고아나’ 형제는 바로 그 다음날 ‘베추아날랜드’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그곳의 거주자인 두 형제에게는 2개월 형이 선고되었다. ‘송고아나’ 형제가 그 지역을 떠나기는 하였으나 그 나라를 떠난 것이 아니라 더 깊숙히 들어갔다. 후에 그는 그 추장이 그의 생각을 바꾸어 그 형제들의 형집행을 보류했다는 소식을 듣고 즐거워하였다.
그 다음 방문했을 때 ‘송고아나’ 형제는 또 다시 체포되었다. 그 ‘크고틀라’에 많은 관심이 집중되었다. ‘런던’ 선교사 협회에 소속된 교역자가 참석하였으며 추장은 ‘크고틀라’를 기도로 개정하도록 그에게 요청하였다. 그들에게는 이미 종교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송고아나’ 형제가 다른 교회를 끌어들이고 있다는 혐의를 또 다시 받게 되었다. 그 ‘크고틀라’는 ‘송고아나’ 형제에게 자신을 변호하도록 허용하였으며 그래서 그는 많은 성귀를 인용하여 그가 전파하는 내용과 전파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지적하였다. ‘런던’ 선교사 협회의 교역자는 성귀는 하나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성서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몇명의 고문들이 형제들을 방면하도록 추장을 설득하였으며 이번의 ‘크고틀라’는 신권적인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1959년에 협회 출판물에 대한 금지령이 해제될 때까지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다. 그러나 형제들은 진리에 대해서 굳건한 입장을 취하였다. 1953년에 100명이었던 전도인이 1959년에는 166명으로 증가되었으며 그것은 참으로 훌륭한 증가였다.
‘세인트헬레나’가 영적 유익을 받다
‘반 스타덴’ 형제의 방문 이후 ‘세인트 헬레나’의 형제들은 단지 우편물과 협회 출판물을 통해서 여호와의 보이는 조직과 정기적으로 접촉하였을 뿐이다. 따라서 1955년 봉사 연도에 순회 감독자와 그의 아내가 그 형제들을 방문하게 된 것은 그들에게 특별한 일이었다. 그 섬에 있는 두 회중과 함께 각각 12일을 보냈으며, 그 달의 활동은 순회 대회로 끝을 맺었다. 공개 강연 참석수는 105명이었고 세명이 침례받았다.
영적인 유익이 ‘세인트헬레나’ 형제들에게 계속 베풀어졌다. 1956년에 “활동하는 신세계 사회”라는 영화가 총계 1,000명의 시청자들을 위해서 8회 상영되었다. 그 영화는 외딴 곳에 사는 이들 형제들이 세계적인
여호와의 조직에 대해 훌륭한 인식을 갖게 해 주었다. 한 남자는 자기의 소감을 이렇게 말하였다. “이런 얘기를 해도 부끄럽지가 않군요. 눈물이 나의 얼굴에 마구 흘러 내렸으며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읍니다.” 그 이유는? “형제들이 사랑 가운데서 어떻게 함께 일하는지를 보고 감동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처럼 활동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읍니까?”1958년에는 “신세계 사회의 행복”이라는 영화가 8회 상영되었고 총계 1,095명이 참석하였다. 그것을 구경한 모두는 세계 각처에서 열린 대회에 많은 사람들이 참석한 깃을 보고 놀랐다.
그러나 1933년에 왕국 씨가 처음 뿌려진 이후 ‘세인트헬레나’ 전도인 중에서는 아무도 외국의 대회에 참석해 보지 못하였다. 이제 1958년에 처음으로 두 형제가 성의 국제 대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뉴우요오크’까지 여행하게 되었다. 교통 시설이 빈약하여 그들은 5월에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으며 11월에야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뉴우요오크’에서 아주 훌륭한 시간을 보냈으며 그 대회에서 배우고 경험한 모든 좋은 것들을 통해 본국에 있는 형제들을 참으로 즐겁게 해 주었다.
‘모리시어스’에서 발전함
1953년에 ‘바코아스’ 회중이 잘 발전하고 있었으며 ‘포오트 루이스’에 다른 회중이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 법에 따라 선교인들은 경찰에 그들의 집회를 신고하였으며 경찰국장은 치안에 방해가 될 수 있는 종교적 논쟁을 일으키지 않는 한 반대하지 않는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경찰들은 그냥 내버려두지 않고 처음에 네 명의 형사가 집회에 와 보았다. 마침 참석한 벗들 중에는 은퇴한 형사 한 사람이 있었고 다른 형사의 친척 몇이 참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 첫 집회는 마치 경찰관들의 재회와 같은 것이었다. 그 관리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조용하고 법을 잘 지키는 사람들이라는 것에 아주 만족한 것같이 보였다.
1955년에 ‘모리시어스’에서의 발전은 계속되었으며 전도인들은 최고 30명에 달하였다. 그후 같은 그 해에 ‘밀튼 헨첼’ 형제가 ‘모리시어스’를 방문하였고, 남 인도양 상에 있는 세개의 섬, 즉 ‘마다가스카르’와 ‘르위니용’과 ‘모리시어스’의 왕국 관심사를 돌보도록 그곳에 협회의 지부 사무실이 설립되었다.
‘마다가스카르’에서의 노력이 열매를 맺다
1933년에 남‘아프리카’의 두 ‘파이오니아’ 즉 ‘로버트 니스벳’과 ‘버어트 맥루키’가 1933년에 ‘마다가스카르’를 방문한 후 22년간의 공백이 있었던 것처럼 보이며 그 동안 그 밭과 관련하여 아무런 활동도 없었다. ‘모리시어스’ 협회 지부 사무실의 지도 아래 활동이 시작되도록 하기 위해 1955년에는 ‘밀튼 헨첼’과 ‘로버트 니스벳’이 그 섬을 방문하게 되었다. 얼마 있지 않아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프랑스’에서 파견되어왔다.
그들은 열심히 일하였고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많은 성서 연구를 사회하였다. 얼마 있지 않아 그곳 전도인들이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1958년에 첫 소책자가 ‘말라가시’어로 번역되었다. 다음해에 그곳에서의 활동에 대한 감독이 불란서 지부 사무실에 이전되었다.‘앙골라’에서 왕국 활동이 시작되다
‘앙골라’에 왕국 씨가 처음으로 뿌려진 것은 1938년이었다. 약 1,230,000평방 ‘킬로미터’의 이 지역은 ‘아프리카’ 서해안에 위치해 있고 남쪽은 남서 ‘아프리카’, 북쪽은 ‘자이레’ 그리고 동쪽은 ‘잠비아’와 접해 있다.
1938년에 ‘케이프타운’으로부터 두 ‘파이오니아’가 그곳을 방문하여 백인들 중에서 활동하였다. 그들은 삼개월 동안에 8,158부의 성서와 서적과 소책자를 전하였고 상당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다음해에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게 되어 관심자들과 접촉을 계속 유지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12년 후인 1950년에 한 ‘아프리카’인 ‘파이오니아’가 ‘모잠비크’로부터 유배를 가게 되었다. 그는 재판도 받지 않은 채 ‘아프리카’ 서부 해안 근처의 적도상에 위치한 ‘상토메’라는 작은 ‘포르투갈’령 섬으로 보내졌다. 그 섬은 ‘앙골라’ 밭에 포함되어 있었다. 6개월도 못되어 13명이 그와 함께 그 섬에서 증거 활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2년 후에 ‘상토메’에 있는 그 작은 집단은 21명의 전도인으로 늘어났다. ‘상토메’와 인근의 ‘프린시페’라는 섬은 면적이 980평방 ‘킬로미터’밖에 되지 않았으며 총 인구는 64,000명이었다. 그곳은 사실상 ‘포르투갈’의 통치하에 있는 ‘아프리카’인들의 범죄자 식민지로서 그들은 고무, ‘바나나’ 및 ‘커피’ 재배장에서 노예로 일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그곳에 있는 왕국 전도인들의 조그만 집단은 그들을 방문하거나 격려해 주는 사람도 없이 어려움 가운데 활동을 수행해야 하였다. 왕국 활동을 위한 전도인들이나 조직이 아직 ‘앙골라’에는 없었다.
그러나 1954년에 남‘아프리카’ 지부는 ‘앙골라’ 최남단에 있는 한 어장에 속한 범죄자 식민지 ‘바이아 도스 티그레스’의 작은 ‘아프리카’인 집단으로부터 서신들을 받게 되었다. 그 편지들을 쓴 ‘후앙 망코카’는 한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앙골라’의 여호와의 증인 집단은 1,000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의 지도자는 ‘시망 곤살베스 토코’이다.” 이러한 놀라운 이야기의 배후에는 아주 흥미있는 사연이 있다.
1943년에 그 ‘시망 토코’는 ‘벨기에’령 ‘콩고’(‘킨샤사’, 지금은 ‘자이레’라고 부름)의 ‘레오폴드빌’에 있는 침례교 선교단 소속 합창대 지휘자였다. 그는 수완있는 성공적인 성가대 지휘자로서 그의 집단은 수백명으로 늘어났다. 그는 ‘왙취 타워’ 협회의 소책자들을 입수하여 그것들을 흥미있게 읽었다. 더 많은 협회 출판물을 구하려고 ‘토코’는 ‘브루클린’에 편지를 썼다. 점차 그는 (그가 스스로 작곡한) 노래나 찬송가에, 그리고 찬양대에 있는 친한 벗들과의 토론에 왕국 가르침을 도입하였다. 그런데 영매술을 하는 ‘시몬 킴방구’의 추종자들이 ‘토코’의 연구
집단에 침투해 들어왔다. 1949년에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가서 이야기해 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으며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레오폴드빌’에서 전파하였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 ‘토코’와 그의 추종자들이 많이 체포되었고 투옥되었다. 투옥되어 있는 동안 ‘토코’는 협회 출판물의 사용을 중단하였고 심지어 성서를 사용하는 것도 그만두었으며 그들이 영매자들의 말을 더 의지함에 따라 ‘킴방구’의 영매술이 진리를 어둡게 하였다. 그 집단의 대부분은 ‘앙골라’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므로 몇 개월을 감옥에서 보낸 뒤 ‘토코’의 추종자가 되는 것을 막무가내로 포기하지 않은 자들은 ‘루안다’로 보내졌다. 그러한 자들이 약 1,000명쯤 되었다.‘앙골라’로 유형 오게 된 사람들 중에는 지식이 있고 영적인 생각을 가진 ‘요앙 망코카’라는 ‘아프리카’인이 들어 있었다. 재판을 받던 날 그는 금지된 ‘아프리카’ 종파인 ‘킴방구’의 신앙과 연관된 “‘왙취 타워’ 운동” 단체에 속해 있다는 혐의를 받았다. 판사는 그가 신앙을 포기한다면 그를 놓아 주려고 하였다. ‘망코카’는 ‘토코’의 어떤 설명 특히 영매술 행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토코’를 통해 알게 된 것 중에 어느 정도 진리가 들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으며 그가 받아들인 것을 포기하면 그것을 잃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는 그가 가진 얼마의 진리를 포기하기 보다는 차라리 투옥되는 길을 택하였다. ‘포르투갈’ 당국자들은 사실상 그 집단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잘 몰랐으며 그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태도가 분명치 않았다. 당국자들은 그들이 정부를 정복하려는 잠재 세력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그렇지만 그 성원들은 악의가 전혀 없는 것 같고 성실하게 보였다. 결국에 그들은 여러 집단으로 ‘앙골라’ 여러 지역에 분산되게 되었다. ‘토코’와 그 집단에 속한 많은 사람들은 ‘커피’ 재배장에서 일하도록 ‘앙골라’ 북부로 보내졌다. ‘망코카’는 다른 집단과 함께 ‘루안다’에 있었다.
‘루안다’에서 ‘망코카’는 성서를 사용할 것과 영매술을 그만 두도록 그들을 설득해 보려고 하였다. ‘살라 라모스 필레몬’과 ‘카를로스 아고스틴호 카디’와 함께 ‘망코카’는 성서 진리를 널리 펴기 위해 활동하였다. 불어로 된 “왕국은 가까왔다”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란 우리의 서적을 자기 아들의 공부용 서적으로 구한 어떤 ‘아프리카’인은 그러한 목적에는 그 책들이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망코카’에게 그 책들을 주었다. 진리를 깊이 인식하고 있었던 그와 그의 몇몇 동료들은 그로 인하여 감동을 받게 되었다. 그후 ‘토코’가 남부로 보내지게 되었으며 도중에 ‘루안다’를 지나게 되었다. 그 때에는 그가 전문적인 영매술사가 되어 있었으며 그의 추종자들에게 성서의 사용을 금하였다. 그의 “킴방구” 추종자들이 그에게 강한 영향을 미쳐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돌아서게 하였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은 ‘망코카’와 그의 집단을 놀라게 하였으며, 석달 동안 그들은 ‘왙취 타워’ 협회와 접촉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달라고 여호와께 열심히 기도하였다.
‘토코’의 추종자들 중 얼마는 ‘망코카’가 가르치는 진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작은 집단을 ‘포르투갈’인 당국자들에게 고발하였고, 그들이 ‘토코’의 거짓 교리 중 하나를 만들어낸 자들이라고 거짓 비난하였다. 그 결과 ‘망코카’와 그의 동료들은 21일 동안 어두운 감방에 투옥되어 있었다. 한 간수가 타자기 한대와 약간의 초를 “몰래 들여 왔다.” 그리하여 촛불 아래서 그들은 비밀리에 협회의 소책자들의 복사판을 사본 형식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바이아 도스 티그레스’ 범죄자 식민지로 이송되었고 4년형이 연장되어 6년을 살게 되었다—그 모든 것이 거짓 혐의로 인해서였다.‘바이아 도스 티그레스’에서 ‘망코카’와 그의 동료들은 얼마의 ‘토코’ 추종자들을 만나서 성서를 연구하라고 그들을 격려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그 집단과의 관계를 끊었다. 그후 ‘망코카’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그는 불어로 된 것을 가지고 있었다)의 어떤 장을 그들 언어인 ‘키콩고’어로 번역하기로 하였다. 그때쯤 ‘토코’의 추종자 하나가 협회의 ‘소올즈버리’ 지부에 편지를 보내어 서반아어로 된 답장을 받았는데 그는 그것을 읽을 줄 몰랐다. 그래서 그는 그 편지를 ‘망코카’에게로 가져 왔다. 그렇게 해서 ‘망코카’는 협회의 주소를 알게 되었고, ‘망코카’와 그 동료들은 불어로 된 편지를 ‘로디지아’ 지부로 보냈으며 그 편지는 남‘아프리카’ 지부로 전달되었다. 이렇게 해서 ‘바이아 도스 티그레스’에 있는 그 집단은 지부와 삼개월 동안 서신 왕래를 하였고 얼마의 출판물도 받게 되었다.
그 특이한 집단에 관한 소식이 ‘브루클린’에 전해지자 그곳 형제들은 곧 영국 선교인 ‘존 R. 쿡’을 ‘앙골라’로 가도록 마련하였다. 그는 이미 ‘포르투갈’에서 몇년을 지냈고 ‘포르투갈’어를 꽤 유창하게 말할 수 있었다. ‘쿡’ 형제는 1955년 1월 21일에 ‘앙골라’에 도착하였다. 그는 맨 먼저 ‘루안다’에 있는 한 변호사와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는 ‘존’에게 ‘토코’ 집단의 “마우 마우”(‘테러’주의자) 집단 혹은 공산주의자의 지원을 받고 있는 자들로 생각되고 있기 때문에 아주 조심하라고 충고하였다.
‘쿡’ 형제가 ‘루안다’와 ‘벵구엘라’ 등의 시가지를 걷다가 독특한 별 모양의 ‘배지’를 단 그 집단에 소속된 사람들을 보고 그들이 장차 형제들이 될 사람들인가 혹은 단지 위장한 공산주의자들인가 생각하게 되었을 때 기분이 이상하였다. 그는 ‘로비토’와 ‘벵구엘라’에서 그들 중 몇 사람과 은밀하게 대화를 나누어 보았으나 그들이 성서를 가지고 있고 여호와라는 이름을 알고 있고 자주 집회를 갖는 것을 알게 된 것 외에는 더 이상 진전이 없었다. ‘루안다’에는 큰 집단이 있었다. 그는 그들과 이야기를 했으며 그들의 위원회와 토론해 보았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토코’의 추종자들이었지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에 진정한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안토니오 비지’라는 한 청년은 예외였는데, 그는 ‘쿡’ 형제의 방문에 대해서 크게 감사를 나타냈으며 다른 사람들이 협회의 잡지들을 예약하도록 도왔다.
그가 받은 첫 인상을 남‘아프리카’ ‘일랜쯔포온테인’ 지부 사무실로 보고한 후에 ‘쿡’ 형제는 ‘바이아 도스 티그레스’에 있는 ‘망코카’와 그의
동료들과 접촉을 시도해 보라는 지시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바이아 도스 티그레스’는 모래로 덮인 해변에 위치한 ‘앙골라’ 최남단의 작은 어촌이다. 그곳은 사실상 범죄자 식민지이기 때문에 외부 세계와 접촉이 극히 드물고 정부의 엄격한 통제하에 있다. ‘존 쿡’은 오랫 동안 그 문제에 대해 고심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는 그 문제를 여호와께 기도로 아뢰었다. 결국 그는 자기의 사명을 설명하고 면담을 요청하는 서신을 ‘루안다’의 총독에게 보냈다. 초조하게 3주일을 지낸 후에야 그는 행정을 맡은 지사의 수석 보좌관인 ‘산타나 고딘호’ 씨를 만나라는 연락을 받았다. 오랫 동안 대화를 나누면서 그 신사는 ‘쿡’ 형제에게 여호와의 증인들의 활동과 신앙에 관하여 여러 가지로 캐물었다. 결국 그는 ‘쿡’ 형제가 ‘바이아 도스 티그레스’로 여행하는 데 동의하게 되었다. 그후 그가 이런 말을 하여 그를 놀라게 하였다. “사실 저희들은 당신에게 비행기 왕복표를 증정해 드리고자 합니다.” 그것은 1920‘킬로미터’의 여행이었다.며칠 후 좌석이 여섯개인 작은 비행기가 햇빛이 쏟아지는 ‘바이아 도스 티그레스’의 작은 촌락 위를 선회하다가 모래 위에 만들어 놓은 ‘콘크리이트’ 활주로에 착륙하였다. ‘존 쿡’은 다른 몇명의 승객과 함께 비행기에서 내렸다. 약간의 어려움이 있었지만 ‘쿡’ 형제는 그 작은 집단과 함께 첫 집회를 갖게 되었다. 그 날은 ‘망코카’에게 있어서 신나는 날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여러 해 동안 기도하고 기다렸는데 마침내 진리를 가르쳐 준 협회와 직접 접촉하게 된 것이다! 그는 제일 좋은 옷을 입고 협회의 대표자에게 긴 환영사를 낭독하였다. 왕국에 관해서 알기를 그렇게도 열망하는 양같은 사람들을 보고 ‘쿡’ 형제는 참으로 즐거워하였다. 그는 매일 저녁에 이들 겸손하고 성실한 ‘아프리카’인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토론하였고, 활동에 관하여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들은 두꺼운 연구 서적을 그에게 보여 주었다. 그것은 그들의 언어인 ‘키콩고’어로 번역된 「왕국, 세상의 희망」과 「마지막 날」이라는 소책자로 된 것이었다. 여러 해 전에 손으로 써서 만든 그 책은 오랫 동안 그들의 주된 교과서의 하나로 사용되어 왔었다. 그들이 ‘일랜쯔포온테인’으로부터 받은 출판물들을 읽고 이미 상당히 정확하게 진리를 깨닫고 있는 것을 보고 ‘쿡’ 형제는 놀랐다.
그 동안 ‘쿡’ 형제는 그곳의 등대에서 등대지기와 함께 묵고 있었다. 그는 관심을 보였고 두 가지 잡지를 예약하였고 성서 한권을 주문하였다. 그는 그때 이렇게 말하였다. “‘쿡’ 씨, 당신은 모든 시간을 ‘아프리카’인들과만 보내십니다. 우리 백인들은 어떻게 됩니까? 우리들을 위해서도 집회를 마련해 보세요.” 그리하여 집회가 마련됐고 고약한 냄새가 풍기는 한 어분 공장에서 개최된 일요일의 공개 강연에 80명—10명의 백인과 70명의 흑인—의 청중이 참석하였다. 그것은 ‘앙골라’에서 열린 첫 공개 집회였다. 그 다음날 ‘쿡’ 형제는 그 작은 집단의 진정한 온정에 아쉬움을 느끼면서 그의 신분을 설명하고 그를 협회의 대표자로 받아들이도록 격려하는 ‘토코’ 집단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휴대하고 일주일에
한번씩 다니는 비행기로 그곳을 떠났다. 그는 그 편지를 가지고 가면 여러 집단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으리라 기대하였다.‘망코카’ 형제는 ‘쿡’ 형제의 방문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이것이 하나님의 지원을 받는 참 조직임을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다. 나는 다른 어떤 조직도 단지 어떤 보잘 것 없는 사람이 편지를 보냈다고 해서 보수도 없이 그를 방문하도록 멀리서 선교인을 파견하는 그런 일을 할 것으로 생각되거나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루안다’로 돌아갔을 때 ‘망코카’의 편지는 그곳의 ‘토코’ 위원회를 감동시키지 못하였다. “자기가 무엇인데 우리 보고 이래라 저래라 합니까? 사실 ‘토코’가 그런 편지를 당신에게 주었다면 달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직접 ‘토코’를 방문해 보기로 하였다.
여행에서 있었던 일과 그가 만나게 된 사람들에게서 받은 인상을 간단히 설명한 보고서를 ‘산타나 고딘호’에게 제출하였다. 이내 그는 면담을 위하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산타나 고딘호’는 그 보고서에 대해 감사하였다. ‘토코’파를 아주 파괴적인 집단으로 보는 것이 공식적인 견해이지만 자기와 다른 사람들은 그러한 견해에 대해 의심하고 있다고 그는 설명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에게로 가서 알아 볼 사람이 있다는 것을 기뻐하였다. 그 다음에 그는 다시 놀라운 제의를 하였다. “‘쿡’ 씨, 이제 또 어디를 가시고자 합니까? 당신이 원하시는 바를 말씀만 하십시오. 우리는 왕복표를 선생께 무료로 증정해 드리겠읍니다.” ‘존’은 ‘앙골라’ 중앙 남부의 중도시인 ‘사 데 반데이라’ 근처의 “숲”에 있는 ‘토코’를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것은 허락되었다.
그 직후 ‘쿡’ 형제는 정부 관리가 보는 앞에서 ‘토코’와 장시간에 걸쳐 두 차례 면담하였다. 아직도 상당히 젊고 키가 훤칠하고 지성인인 ‘토코’는 ‘왙취 타워’ 협회에서 온 사람을 만나서 반갑다고 말하였다. 그와 ‘쿡’ 형제는 성서적인 문제들과 집단 형성에 대해 토론하였으며 그 후에 그도 역시 ‘앙골라’에 있는 그의 모든 추종자들에게 보내는 서신을 써주었는데 그 편지에서 ‘쿡’이 자기가 출판물을 받은 바 있는 ‘왙취 타워’ 협회의 대표자임을 알리고 있었다. 총독의 손님으로 몇 군데를 흥미있게 여행한 후 ‘쿡’ 형제는 아마 이번에는 그 1,000명의 집단이 진리를 더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루안다’로 돌아갔다.
‘루안다’에 돌아 와서 보니 그곳의 ‘토코’ 위원회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들은 “거드름”만 피우고 있었지 누구 하나 맞이해 주려 하지 않았다. 관심을 상당히 보인 사람도 많았지만 적어도 그곳 지도자인 ‘데이빗 동갈라’의 태도는 그러했다. 그러나 ‘루안다’에서 보낸 시간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쿡’ 형제는 많은 증거를 하였고 하루에 예약을 22건까지 맡는 등 훌륭한 기회를 갖게 되었다. 또한 그는 한두 백인 가족 및 ‘토코’ 집단의 성원들과 성서 연구를 하기 시작하였다.
비행기로 새로운 농업 식민지 ‘셀라’에 무사히 갔다 온 후 사태는 급변하였다. ‘산타나 고딘호’가 정부의 행정관 자리를 내 놓게 되었다.
그는 어려운 임무를 수행하는 ‘쿡’에게 진정으로 도움이 되었으며 매우 우호적이었다. 이제 더 이상 무료 여행을 할 수 없었으며 5개월 동안 ‘비자’를 연장해 달라는 신청도 거절되었다. ‘쿡’ 형제는 여호와께서 베푸신 도움에 대해서 그리고 중요한 교제를 즐기고 “처녀” 지역에 좋은 씨를 많이 뿌릴 수 있도록 특권을 주신 데 대해서 그분께 참으로 감사드리면서 1955년 6월에 그곳을 떠났다.왕국 활동은 이제야 시작된 데다가 새로운 밭은 반대와 박해 때문에 거의 말살될 지경이었으나 여호와의 과분하신 친절과 새로운 형제들의 굳건한 충성으로 그 밭은 계속 성장하였다.
담대한 노력이 계속되다
1956년 6월에 ‘바이아 도스 티그레스’에 있는 ‘망코카’와 다른 7명의 새로운 형제들은 용기를 내어 자발적으로 ‘바이아 도스 티그레스’가 위치해 있는 ‘묘사메데스’ 지역의 지사에게 서신을 내었다. 그들이 말한 내용을 발췌하면 이러하다. ‘저희들을 여호와의 증인 협회의 정식 회원으로 인정해 주시옵기를 각하에게 참으로 정중히 요청하는 바입니다.’ 그 형제들은 더 많은 숭배의 자유를 위해 호소하였으나 그들은 더 심한 억압을 받게 되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6년에 그들 중 10명이 침례를 받았다.
한편 ‘상토메’ 섬에서는 몇명의 형제들이 7년간의 형기를 마치게 되었다. 풀려 나서 ‘모잠비크’로 돌아가게 된 사람들 중에는 이전의 주임 감독자도 들어 있었다.
빛이 흐리지 않다
진리의 빛이 ‘앙골라’에서 빛나고 있었으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흐려지지 않을 것이었다. 더우기 ‘유럽’인들의 밭이 그 빛으로부터 유익을 받게 될 것이었다.
1956년 10월 26일에 ‘존 쿡’에 의해 시작된 활동을 더욱 철저히 행하기 위해서 ‘멀빈 패슬로우’와 그의 아내 ‘오로라’가 ‘루안다’에 도착하게 되었다. ‘쿡’ 형제는 ‘패슬로우’ 부부에게 ‘루안다’에 있는 예약자들과 관심자들의 명단을 보냈다. 그러나 개인집으로 우편물이 배달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예약자들의 주소는 사서함 번호였다. 그래서 한 동안 그들은 그 사람들을 찾지 못하였다. 그후 ‘리스본’의 지부 감독자인 ‘브리튼’ 형제에게서 편지가 왔는데 아주 관심이 많은 ‘베르타 테익세이라’라는 부인이 ‘루안다’로 돌아오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 여자는 자기가 도착한 직후 ‘패슬로우’ 부부가 자기를 만나러 방문하자 깜짝 놀랐다. 즉시 그 여자 및 그 가족과 함께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다. 또한 그 여자는 우체국에서 그와 관련된 일을 보고 있었으므로 예약자들의 주소를 알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상당히 많은 예약자들이 아주 적극적인 연구생이 되었다. 몇 주일 안에 그들 모두는 자기 친구나 이웃들에게 전파하게 되었다. ‘패슬로우’ 부부는 매일 저녁에 그리고 오후에
자주 방문해 달라는 초대를 받았다. 6개월 안에 50명 이상의 사람들과 연구를 하게 되었다.그들이 도착한지 오래지 않아서 ‘패슬로우’ 부부는 ‘앙골라’의 다른 지역에 있는 ‘아프리카’인 형제들과 관심자들로부터 편지를 받기 시작하였다. ‘망코카’ 형제는 아직도 ‘바이아 도스 티그레스’에서 부자유스런 상태에 있었지만 ‘패슬로우’ 부부에게 격려의 편지들을 보냈다. 또한 영적인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아프리카’인 형제들도 그들을 방문하였다. 환경상 그리고 그가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패슬로우’ 형제는 그들의 집회에 가지 못했다. 그러나 ‘쿡’ 형제가 있었을 때 많은 관심을 보인 ‘안토니오 비지’가 성서 연구와 훈련을 위해서 정기적으로 그들을 방문하였고 그렇게 하여 그는 다른 ‘아프리카’인 형제들을 도와줄 수 있었다. ‘아프리카’인들도 역시 많은 출판물을 받아 들였으며 그 중 많은 양은 내륙으로 들어갔다.
‘패슬로우’ 부부는 도착한지 몇 개월 후에 그들의 방에서 정기적으로 「파수대」 연구를 갖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한달 쯤 지났을 때 그 방이 비좁게 되었다. 그때 언어 학교를 경영하고 있었던 ‘테익세이라’ 자매가 자기 대학교의 조용한 교실 하나를 제공하였다. 그 자매의 수업은 오후 9시까지 계속되었기 때문에 매주 갖는 모든 집회는 오후 9시 이후에 시작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주의를 덜 끌게 되었다.
편지는 ‘앙골라’ 전역으로부터 계속 오고 있었다. 편지를 쓴 사람들은 ‘아프리카’인들로서 모두가 형제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 때쯤에는 ‘앙골라’가 전쟁 중에 있어서 그 사람들을 만나볼 수가 없었다.
그 직후 ‘센호르 비에이라 곤살베스’ 씨 및 그의 아내와 함께 연구가 시작되었다. 그는 사제가 되려고 6년 동안 공부했었는데 젊은 학생 사제들과 그들의 행동으로 인해 크게 충격을 받아서 정식 사제가 되기 전에 그는 그만 두었다. 그는 신속히 발전하였으며 곧 집회에 나오게 되었으며 그의 벗들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2개월쯤 지났을 때 이미 그는 다른 가족과 연구를 하고 있었다.
‘루안다’에서 8개월을 지낸 후에 ‘패슬로우’ 형제는 몇 사람이 그들의 헌신을 상징하고 싶은 욕망을 나타냈기 때문에 침례식을 마련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바로 그날 ‘포르투갈’로부터 한 형제가 도착하였는데 의외였지만 참으로 기쁜 일이었다. 그는 ‘헨리크 비에이라’ 형제로서 남‘아프리카’로 가는 도중이었다. 그리하여 침례식이 있기 전에 ‘비에이라’ 형제가 연설을 하였고 얼마의 경험담들을 들려 주었으며 그후에 ‘루안다’ 만에서 침례식을 거행하였다.
그 직후 ‘패슬로우’ 형제는 ‘비자’ 기간을 연장시킬 수 없었다. 그는 즉시 그 작은 집단을 돌보는 일을 맡아보도록 ‘곤살베스’ 형제에게 부탁하였다. 그가 그 책임을 맡았을 때 진리에 대해서는 갓난애에 불과하였지만 충실한 그 형제는 약 9년 동안 임무를 계속 수행하다가 역시 그도 체포되고 투옥되어 결국 ‘포르투갈’로 이송되었다.
‘패슬로우’ 형제는 아주 시기에 적절한 조처를 취한 것이었다. 며칠 후
‘패슬로우’ 부부가 시내에서 활동하고 있을 때 갑자기 비밀 경찰차가 그들 옆에 와 서더니 6명의 경찰관들이 와르르 몰려 와서 그들이 중범죄자나 되는 것처럼 둘러쌌다. 그들은 그들의 방으로 끌려갔고 비밀 정보가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구실 아래 ‘오로라’의 요리책을 포함하여 많은 소유물을 압수당하였다. 그들이 재고로 가지고 있던 성서들을 경찰이 내갈 때 ‘패슬로우’ 형제는 “여러분이 그것들을 읽으시면 좋겠읍니다.”고 말하였다. 그 사람은 “그 책들에 축구에 관한 내용이 조금이라도 들어 있나요?”라고 답변하였고 그 말에 그들 모두가 웃었다. 경찰들은 자기들이 단지 ‘루안다’에 있는 주교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어떤 관심자가 자기가 배운 좋은 것들에 관해 주교에게 이야기해 주었음을 ‘패슬로우’ 부부는 후에 알게 되었다.독실한 ‘가톨릭’교인인 영국 영사에게 호소하였으나 그는 돕기를 거절하였다. 그후에 경찰국장이 ‘패슬로우’ 부부를 자기 사무실로 불렀다. 그는 그들에게 일주일 내에 떠나라고 말하였다. 그의 이야기를 통해 그가 ‘패슬로우’ 부부를 중앙 ‘아프리카’의 토착적인 “‘왙취타워’ 운동” 단체와 연관시키고 있음이 분명하였다. 도저히 그에게 이치적으로 설명을 할 수가 없었다.
1957년 6월 27일에 ‘패슬로우’ 부부는 남‘아프리카’ 행 배를 탔다. 경찰의 태도 때문에 그들은 형제들 특히 ‘아프리카’인 형제들에게 전송하려고 나와서는 안된다고 경고하였다. 그러나 사랑의 띠는 너무나 강하였다. 경찰이 어떻게 하든지 개의치 않고 많은 ‘아프리카’인들을 포함한 형제들이 작별 인사를 하려고 나왔다. 배에 오르기 직전 ‘바이아 도스 티그레스’에서 바로 전에 석방된 ‘아프리카’인 형제들 중의 한 사람이 가까이 와서 ‘패슬로우’ 형제의 손에 봉투 하나를 쥐어 주고는 군중 속으로 사라졌다. 그 봉투에는 이별의 선물로서 돈이 들어 있었는데 “빵을 좀 사 잡수세요.”라는 말이 있었다. 배가 서서히 미끄러져 갈 때 ‘패슬로우’ 부부는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를 알도록 얼마의 사람들을 돕게 된 형언할 수 없는 즐거움에 대해 깊은 감사를 느꼈다.
공산주의와 “마우 마우” 활동을 일으키려고 노력해 온 외국인 부부의 무서운 위협을 그 나라에서 제거했으며 “그러한 위협의 제거에 대해 우리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한다”는 보도가 그 다음 날 방송되었다는 소리를 ‘패슬로우’ 부부는 얼마 후에 듣게 되었다. 몇달 후 ‘테러’ 행위자들의 투쟁이 아주 격렬해지자 ‘앙골라’의 신문들은 ‘왙취타워’ 선교인들이 ‘아프리카’인들로 하여금 ‘테러’ 행위에 가담하도록 영향을 미쳤다고 거짓 선전을 하였다. 백인 당국자들에게 대항하기 위해서 선교인들이 ‘아프리카’인들에게 미국 돈을 나누어 주는 것처럼 보이게 한 사진들도 있었다.
그리스도교국의 선교사들과 종교 지도자들이 ‘앙골라’의 ‘테러’ 활동에 많은 관련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렇지 않았다! 여호와의 과분하신 친절로 인하여 ‘왙취타워’ 선교인들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었다. 많은 문제와 반대가 있지만 굳건한 입장을
취하고 ‘앙골라’에 진리의 빛을 비칠 각오가 되어 있는 54명의 형제로 이루어진 작은 조직을 세울 수 있었다.‘패슬로우’ 형제 자매가 떠남으로 갖가지 동요가 있었지만 그후 형제들은 조용히 그리고 충실히 활동을 수행하였다. 그들을 가르칠 장성된 사람이 부족하였으나 형제들은 어려운 환경하에서도 집회를 열고 전파를 계속하였다.
1958년에 지구 감독자인 ‘해리 아노트’가 짧은 방문을 하였는데 그것은 ‘아프리카’인들과 ‘유럽’인들에게 모두 큰 격려가 되었다. 1959년에 그가 다시 ‘루안다’에 지구의 종으로 오게 되었다. 그가 공항에 도착하여 작은 집단의 형제들과 만나고 있을 때 경찰들이 갑자기 나타나서 그들 모두를 체포하였다. ‘아노트’ 형제는 심문을 받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격리되었다. 그의 서류 가방은 철저한 조사를 받았다. 그는 ‘루안다’ 시의 「파수대」 예약자 명단이 경찰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여호와께 기도하였다. 그 귀중한 명단은 ‘아노트’ 형제의 표를 넣은 곳에 들어 있었다. 국제 경찰 책임자가 그 표는 보았으나 그 명단은 보지 못했다. 여러 가지 질문을 한 후에 그 책임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아노트’ 씨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앙골라’에 관한 한 당신은 볼장 다 봤소, 그리고 ‘왙취타워’ 조직도 끝장이요. 끝장, 끝장!”
조금 후 그는 다른 형제들이 있는 건물로 끌려 갔는데 그들 중에 ‘망코카’ 형제도 있었다. 그 국제 경찰관은 ‘망코카’ 형제를 향해 욕을 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네가 어떻게 될지 알아?” ‘망코카’ 형제는 그 박해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는 이미 오랫 동안 인내해 왔읍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그 이상으로 하실 수 있는 일이란 저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저의 믿음에서 돌아서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아노트’ 형제를 건너다 보면서 미소로 격려를 보냈다. ‘아노트’ 형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전혀 생각지 않는 것처럼 보였으며 그러한 환경으로 인해 내가 용기를 잃지 않게 하려고만 하였다. 여러 해 동안 투옥된 후에도 그 ‘아프리카’인 형제가 그처럼 확고하고 담대한 입장을 취하는 것을 볼 때 그것은 참으로 격려적인 순간이었다.”
‘아노트’ 형제는 비행기에 다시 실려 즉각 그 나라를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한편 경찰에서는 회중이 ‘테익세이라’ 자매의 집에서 모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 중 얼마는 조사를 위해서 즉시로 그곳으로 가게 되었다. 그들은 수색을 하였다. 그러나 일층에 있는 문 하나를 열지 않았다. 그 문 뒤에는 약 50명의 형제들과 관심자들이 ‘아노트’ 형제가 와서 강연해 주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에는 ‘아노트’ 형제를 만난 그 형제들에게 심지어 ‘망코카’에게도 실질적인 해는 없었다. 그는 7시간 동안 심문을 받았으며 그 동안 취조관은 그를 투옥시키라는 공식 명령서를 실제로 작성하였다. 그러나 끝에 가서 그 취조관은 그것을 찢어 버리고 ‘망코카’ 형제에게 “‘망코카’, 나가. 그러나 조심해. 네가 집에 가지고 있는 ‘왙취 타워’ 출판물은 내일
모두 내게로 가져와 ··· 제발 그 ‘왙취 타워’ 일은 집어치우고 너와 네 자식이나 돌봐라.”그 사건으로 인하여 그 조그마한 회중의 집회 장소가 변경되게 되었으며 그후 그 ‘아프리카’인들은 스스로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지방 조직은 아직도 규모가 극히 작았다. 1960년에 보고를 낸 최고 전도인수는 단 17명이었다. 그때에 ‘앙골라’는 ‘포르투갈’ ‘리스본’에 있는 ‘왙취 타워’ 협회 사무실의 관할하에 있게 되었다.
다음 해인 1961년에 ‘테러’ 활동이 ‘앙골라’에서 발생하였고 형제들에 대한 심한 박해도 있었다. 그후 9년 동안 ‘망코카’ 형제는 여러 감옥과 노동 수용소를 전전하였다. 그는 각종 일을 많이 당하였으나 어디에서도 조용한 결심과 여호와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로 박해를 직면하였다. 그는 또한 가는 곳마다 증거하였으며 감옥에 있는 동안 많은 ‘아프리카’인들을 도와서 진리에 들어 오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
자기를 돌보지 않는 헌신적인 ‘망코카’ 형제를 포함해서 1971년에 또 다시 많은 형제들이 체포되어 ‘루안다’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러나 적들의 노력은 여호와의 무너뜨릴 수 없는 목적과 무한한 능력과 비교해 볼 때 보잘 것 없는 것이다. 아무 것도, 정말 아무 것도 그분의 왕국 소식이 ‘앙골라’를 포함하여 사람이 거주하는 온 땅에 전파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확장을 위하여 준비함
1960년초에 ‘일랜쯔포온테인’ ‘벧엘’에서는 진정한 확장을 위한 모든 준비가 갖추어졌다. 여호와께서는 앞으로 십년 동안 야외에서 필요한 것들을 미리 아시고 대비하셨다. 이제 확장된 공장에서는 3대가 아니라 5대의 ‘라이노타이프’기가 설치되었으며 일년 후에는 다른 한대가 더 설치되었다. 이미 사용되던 ‘G. M. A’ 인쇄기에 더하여 새로운 ‘하이델베르그’ 인쇄기와 ‘팀슨’ 윤전기—윤전기의 값은 R37,000이었다—가 설치되었다.
1960년에 ‘일랜쯔포온테인’ 공장은 몇 가지 지방 언어의 잡지를 흑백으로 인쇄되는 월간지가 아니라 색도 인쇄를 하는 월 2회 잡지로 출판하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월간지 즉 ‘쓰와나’어 「파수대」가 더 나오게 되었다. 1965년 5월에는 ‘콩고’(‘킨샤사’)를 위해서 특별한 ‘시벰바’판이 인쇄되기 시작하였다. 정기적으로 간행되는 ‘시벰바’판의 정식 명칭은 「‘울루풍구 이와 크와 칼린다’」이다. 그러나 “왙취타워”라는 명칭에 대한 ‘콩고’에서의 편견 때문에 그 특별판의 명칭을 ‘칼린다’(“파수하는” 혹은 “파수하다”를 의미한다)라고만 하였다. 1966년에 다른 남‘아프리카’의 지방어인 ‘스페디’어 「파수대」가 인쇄 목록에 더해졌다. 그리하여 1970년에는 그 공장에서 「파수대」 및 「깨어라!」를 10개 언어로 연중 24개호, 그리고 15가지의 「왕국 봉사」를 인쇄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그 공장은 지방 언어로 된 여러 가지 소책자와 “산더미” 같은 서류와 ‘프로그램’과 쪽지와 ‘포스터’를 인쇄하는 데 계속 바빴다.
1960년에는 ‘바수톨랜드’, ‘베추아날랜드’와 ‘스와질랜드’의 세 보호령에서
협회 출판물에 대한 금지령이 해제되었다. 그리하여 이러한 영적 양식이 그들에게 자유로이 흘러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나라들에서 형제들은 어떻게 하고 있었는가?‘바수톨랜드’에서의 축복과 어려움
‘바수톨랜드’(지금의 ‘레소토’)의 형제들은 월 2회의 ‘몰룰라-쿠아’(‘세소토’어 「파수대」지)에 대하여 참으로 감사하였다. 그 점은 그들의 「파수대」 연구 참석수를 통해 알 수 있다. 1960년에는 135명의 전도인들과 15명의 ‘파이오니아’들이 그 나라의 인구 634,000명의 영적인 필요를 돌보고 있었으며 많은 어려움이 있는데도 발전하고 있었다.
그 당시는 “변화의 선풍”이 영국의 그 작은 보호령에도 미치게 되어 국가주의 정신과 독립에 대한 열망을 자극하였다. 그 점은 1960년에 그들이 획득하게 된 자치 정부의 마련에 의해서 더욱 촉진되었다. 행정 사무는 ‘아프리카’인들이 ‘유럽’인들로부터 인계 받게 되어 “‘아프리카’화” 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자치”와 “독립”이 자유와 번영으로 향하는 신비한 암호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호와의 증인들은 계속 인류의 유일한 참다운 희망으로서 하나님의 왕국을 지적하였다.
‘바수톨랜드’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드문드문 산지에 흩어져 있는 “크라알”이라고 부르는 마을들에 살고 있으며 어떤 마을은 너무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서 걸어서 혹은 조랑말을 타고 갈 수 밖에 없었다. 어떤 경우에는 순회 감독자가 격지 집단을 가는 데 5, 6일이 걸렸다.
‘파이오니아’들은 ‘바수톨랜드’의 구석진 외딴 곳에서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데 훌륭하게 활동하였다. 한 특별 ‘파이오니아’ 부부는 ‘드라켄즈버어그’ 산맥의 일부로서 높이가 3,150‘미터’이고, 바로 “남부 ‘아프리카’의 지붕”에 위치한 ‘모크호트롱’ 지역에 임명되었다. 남편인 ‘필레몬 마페레카’는 단지 한건의 연구를 사회하기 위해서 산을 몇개 넘어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새벽 4시에 출발하여 빨리 걸어가면 오전 8:30에는 그곳에 도착되었다. 보통 그는 바로 그날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 다음날에는 다른 방향으로 갔다. 그들의 노력 위에 많은 축복이 있었다. 2년도 못되어 10명이 그와 그의 아내와 함께 왕국 활동에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바수톨랜드’에서는 좋은 소식의 전도인들이 두세시간을 걸어서 그들의 구역에 이르게 되고 그후 한번의 증거에서 여섯 시간 이상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 도중에 식사를 위해서 돌아오는 것은 실용적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은 하루 종일 활동하고 초저녁에 집에 돌아와서 요리하고 식사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마을이 서로 떨어져 있어서 한 사람이 여섯 시간 활동하는 중에 단지 여섯 집 밖에 가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필요가 있다.
그러한 격지에 있는 형제들은 대회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대회에 참석하려면 많은 노력을 해야 하는데 그 형제들은 참으로 우리의 본이 된다. 한 특별 ‘파이오니아’는 나흘간을 걷고 산을 넘고
홍수진 강을 헤엄쳐서 여호와의 백성의 대회에 왔다. 어떤 자매는 혼자서 사흘 동안 말을 탄 후 온 종일 ‘버스’를 타고서야 대회장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임신 6개월인 다른 한 자매는 산을 넘고 눈을 헤치며 40‘킬로미터’를 걸어서 순회 대회장에 도착하였다. 심지어 새로 헌신한 형제도 자기를 도와 준 특별 ‘파이오니아’와 함께 128‘킬로미터’ 이상의 산길을 걸어서 대회장에 도착하였고 그곳에서 자기의 헌신을 상징할 수 있었다.전파 활동에 참여하고 침례받을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 얼마의 새로운 사람들은 그들의 결혼 생활을 올바로 조절해야 하였다. 한 경우에는 ‘유럽’인 지역 감독자가 대회 전 주일에 산지로 차를 몰고 가서 이미 세 자녀를 가진 한 남자와 그의 “아내”를 데리고 가장 가까운 지역의 판무관을 찾아가 그들의 결혼을 등록함으로써 순회 대회에서 침례받을 자격을 갖추게 하였다.
중립을 유지함
1966년에 ‘바수톨랜드’는 지금 ‘레소토’로 알려진 독립국이 되었다. 그 당시에는 266명의 왕국 전도인들이 있었으며 그들의 절대적인 중립적 입장 때문에 많은 권세자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수도인 ‘마세루’의 지역 대회 중에 한 경찰관과 3대의 ‘지프’를 타고 온 경찰관들이 대회장으로 몰려 들어와서 대회를 중단하도록 명령하였다. 책임있는 형제들은 다음날 아침까지 경찰서장을 만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증인들을 잘 알고 있었으며 어떤 사람이 연단에서 ‘레소토’ 정부가 무너져야 된다고 연설했다는 거짓 비난을 일축하였다. 모임을 중지시킨 그 동일한 관리는 이제 증인들의 보호를 위해서 대회에 경비원을 배치하라는 지시를 받게 되었다! 물론 그들은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으며 형제들은 그 기회를 이용해서 각자에게 철저한 증거를 하였다.
‘레소토’에서 형제들이 그리스도인 중립을 온전히 지킨 것은 정치적인 불안정기와 비상시에 그들에게 진정한 보호가 되었다. 그 기간 중에 추장인 ‘조나단’의 정부를 지지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 작업이 전개되었다. 밤에 반대당 사람들의 초가 오두막을 차단하고 방책으로 막고 불을 질러서 전 가족들을 죽였다고 전해졌다. 여호와의 증인은 한 사람도 그러한 일을 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참 그리스도인들이 중립적인 입장을 고수한 결과 그들에게 약간의 어려움이 있게 되었다. 여러 해 동안 계속된 가뭄으로 인해 ‘레소토’에서는 1970년에 심한 식량 부족을 겪게 되었다. 그러다가 1970년 중에 비가 많이 왔다. 그러나 단지 정부의 지지자들에게만 종자용 옥수수를 나누어 주기로 결정되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중립이기 때문에 그들도 전혀 받을 수 없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형제들이 그 소식을 듣고 ‘레소토’에 있는 그들의 형제들을 돕기 위해서 구제 기금을 마련하였다. 그것은 ‘요하네스버어그’의 전국 대회들의 “첫” 모임들에서 발표되었으며 그러한 대회의 헌금함에 모아진 모든 기부금은 구제 기금으로
사용될 것이라고 제안되었다. 형제들의 반응은 놀라왔다. R1,714가 기부되었고 헌금은 계속 들어왔다. 사실상 사무실은 형제들에게 그들이 “충분히” 기부했다는 것을 알리는 회람을 발송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일주일 내에 ‘오린지’ 자유주의 한 ‘유럽’인 형제가 필요한 종자용 옥수수를 구하여 그것을 ‘레소토’에 있는 우리의 형제들에게 전하였다. 또한 궁핍한 모든 사람들에게는 스스로 필요한 것들을 조달할 수 있을 때까지 식품을 구입하도록 현금을 지불하였다. 그로 인해 ‘레소토’의 형제들은 남‘아프리카’에 있는 ‘유럽’인 형제들과 다른 형제들이 얼마나 그들을 아끼는지를 다른 어느 때보다 더 느끼게 되었으며 그들에 대해 더욱 친밀감을 갖게 되었다.그러한 사랑의 마련으로부터 유익을 얻은 ‘레소토’의 한 자매는 후에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집에 아무 것도 심지어 약간의 옥수수 가루를 사는 데 필요한 10‘센트’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식품을 구하라고 남‘아프리카’의 우리 백인 형제들이 보낸 돈이 도착되었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단지 울기만 하였다. 나와 다른 증인들은 우리의 긴급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었고, 여호와의 마련을 통해서 영적 잔치도 즐길 수 있도록 이 대회에 참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획기적인 특별한 일들
여호와의 조직이 ‘레소토’의 물질적인 기근에서의 구제를 마련하고 있을 때 여호와께서는 진리에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서도 훌륭한 영적 양식을 마련하셨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세소토’어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라는 서적이었다. 그 책은 1970년 중간쯤에 도착되었다. 이 훌륭한 보조서와 6개월 연구 마련으로 눈에 띄게 성장되었다. 그리스도인 활동에 있어서 획기적인 일이 달성되었다.
1972년에 ‘레소토’에서 활동의 발전에 또 다른 획기적인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 나라에서 처음으로 명실상부한 왕국회관을 설립하는 일이었다. 「파수대」 연구에 평균 참석수가 170명으로 증가되고 종종 참석수가 200명을 넘게 되어 수도인 ‘마세루’에 꼭 왕국회관이 필요하게 되었다. 수송비만 들이면 인근에 있는 산에서 마음대로 가져올 수 있는 사암을 벽에 사용하였으며, 경험있는 형제들은 그 돌을 원하는 모양으로 쪼개었다.
모두가 건축을 도왔다. 자매들은 건축자들을 위한 식사를 마련하는 외에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물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3‘킬로미터’ 이상을 걸어서 건축하는 곳으로 날랐다. 아이들도 도와서 물이 든 ‘드럼’통을 굴려 그곳으로 운반해 왔고 어떤 연로한 형제들은 건축 활동에 참여하기 위해서 32‘킬로미터’를 걸어 오기도 하였다. 바닥을 ‘콘크리이트’하려고 땅을 밟아 다질 때 자매들은 왕국 노래를 부르면서 ‘리듬’에 맞춰 바닥이 될 곳에서 춤을 췄다. 오늘날 형제들은 250명이 앉을 수 있는 왕국회관을 사용할 수 있어서 흐뭇해 하고 있다.—튼튼한 건물을 세우는 데 약 845‘달러’ 밖에 들지 않았다.
개발 도상에 있는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에서와 마찬가지로 가끔 국가주의가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전반적인 형제들에게 어려움을 주고 있다. 예를 들어 최근에 우리의 지역 대회가 끝나는 날 폭력 사태가 발생하였다. 한 새로운 형제—이전에는 그 난동을 일으킨 정당에 속해 있었다—가 집에 돌아왔을 때 군인들과 그 지방 재판관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제는 ‘폭동이 일어났을 때 그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하는 점이었다. 그는 그들에게 여호와의 증인들의 대회에 참석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들은 증거를 원하였다. 그 형제가 군인들과 함께 가서 그 대회 ‘프로그램’을 구해 오도록 허락되었다. 전체 ‘프로그램’을 본 후 그 책임자는 그 형제에게 혐의가 없다고 말하였고 전파 활동을 계속하라고 그를 격려하기까지 하였다. 그 마을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놀라서 “당신이 기도 드리는 그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요!”라고 말하였다. 그 형제는 대회에 참석한 것에 대해 깊은 감사를 느꼈다.
최근의 ‘레소토’의 최고 전도인 수는 688명이고 활동은 여호와의 축복 아래서 계속 발전되고 있다. 그러나 인구 대 전도인 비율이 1477:1이나 되므로 분명히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으며 또한 우리는 여호와께서 자기의 시간 계획과 방법대로 활동을 촉진시켜 주실 것을 계속 기도한다.
‘베추아날랜드’에서 금지령이 해제되다
‘베추아날랜드’(지금의 ‘보츠와나’)에서 1960년에 금지령이 해제되었다는 소식이 그 광대한 나라의 어떤 지방에는 늦게 전해졌다. 그러한 지역에서는 어떤 추장들이 아직도 형제들에게 어려움을 주고 있었다.
남‘아프리카’에서 온 ‘유럽’인 지역 감독자의 한 사람인 ‘데니스 맥도날드’는 최고 추장인 ‘세레치 크하마’의 형과 면담을 하고 우리의 활동을 설명하였다. 그는 우리의 활동을 방해해서는 안된다고 명기된, 서명이 들어있는 편지의 사본을 네통 작성해서 ‘맥도날드’ 형제에게 주었다. 그것은 추장들의 태도를 변화시키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되었으며 형제들의 일을 쉽게 해 주었다.
1960년대초에는 대부분의 회중과 격지 집단들이 철로를 따라 있었다. 북서부의 ‘사카웨’와 ‘마운’을 제외하고는 내지에서 거의 활동이 행해지지 않았다. ‘B. 음키스웨’라는 특별 ‘파이오니아’ 형제는 ‘마운’에서 얼마 동안 활동하였다. 식량이 부족하였고 꼬박 일년 동안 설탕이나 우유 없이 옥수수 죽만 먹어야 했지만 그는 자기의 임무에 고착하였다. 그 형제는 ‘쓰와나’어 「파수대」를 잘 사용하였으며 통로를 만들고 새로운 호가 도착될 때마다 그것을 전달해 주었다. 그 잡지를 즐겨 읽는 ‘런던’ 선교단의 한 교역자는 교회에서 그것을 들고 교인들에게 이렇게 격려하였다. “이 잡지를 가지고 있는 ‘왙취 타워’ 사람을 보게 되면 여러분은 그것을 받아서 읽어 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이 볼 잡지를 구하려고 그 ‘파이오니아’의 집으로 왔으며 그는 그들과 연구를 시작하였다.
‘마운’의 북서쪽이며 ‘칼라하리’ 사막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사카웨’의 작은 격지 집단에 있는 사람들은 대회에 참석할 수도 없었고, 그곳의 여왕 혹은 여족장이 순회 감독자가 그 집단을 방문하는 것도 금지하였기 때문에 아무도 침례를 받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 모두가 협조하여 그들 중 한 사람이 약 1,120‘킬로미터’나 떨어진 ‘마할라피’ 대회에 참석하도록 비용을 마련해 주었다. 그 대회에서 그는 침례를 받았다.
순회 활동
순회 감독자가 외딴 곳에 사는 그러한 형제들을 방문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당신은 상상할 수 있는가? 낮의 더위와 밤의 추위 가운데서 모래 밭을 헤쳐 나아갈 수 있는 네바퀴 달린 거대한 ‘트럭’을 타고서 밤낮 960‘킬로미터’ 정도를 여행해야 함을 의미한다. 1964년에 순회 감독자로 일한 ‘아담 마흐랑구’는 그러한 외딴 곳에 있는 사람들을 방문하기 위해서 그가 활동하는 한달 중에 열흘을 ‘트럭’ 위에서 보낼 때가 가끔 있었다.
‘마흐랑구’ 형제는 북부 지방들이 얼마나 미개하고 원시적인가를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내가 ‘사카웨’에서 강연할 때면 그들은 언제나 내가 옷을 입고 있으니 일종의 추장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곳 사람들은 거의 전혀 옷을 입지 않는다. 그는 잘 조직된 공개 집회를 진행시키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먼저 사람들을 함께 모이게 해야 하고 그 다음 강연 중에는 그들을 잠잠하게 해야 하였다. 그들은 앉아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는 일에 익숙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강연이 시작되면 그 때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이웃들과 토론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외딴 곳에 있는 사람들을 방문함으로써 두 사람이 자기의 생명을 하나님께 헌신하게 되었고 총 6명이 그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1965년부터 1966년의 심한 가뭄 중 어떤 경우에는 물이 아주 귀하여 대회에서 얼마의 지원자들에게 침례줄 물도 구할 수가 없었다. 다른 경우로서 ‘프란시스타운’에서도 형제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 당시 지역 감독자였던 ‘피에트 웬첼’ 형제는 그들이 찾아가 본 첫 웅덩이가 말랐었다고 보고한다. 그래서 그는 자기 차에 그 두 지원자를 태우고 32‘킬로미터’를 달려 마른 강바닥에 있는 물 웅덩이에 가 보았으나 그것 역시 말라 붙어 있었다. 8‘킬로미터’를 더 가니 더러운 연못이 하나 있었는데 그 가운데 소들이 서 있어서 시커멓게 보였다. 그러나 그 점이 그 젊은이들을 막지 못하였다. 어쨌든 그것도 물이었으며 그들은 여호와의 뜻을 행하기 위해 그들의 헌신의 상징으로 거기에서 침례를 받았다.
‘보츠와나’에서 증거 활동이 발전되다
‘베추아날랜드’가 독립을 얻었을 때 그 명칭을 ‘보츠와나’로 바꾸었다. 그러한 정치적 변화가 전파 활동에는 영향을 미쳤지만 사람들의 생활 조건에는 많은 변화를 주지 못했다. 새로운 독립 정부는 ‘보츠와나’
시민이 아닌 ‘아프리카’인들에 대해서 매우 까다로왔으며 남‘아프리카’에서 온 여러 명의 ‘파이오니아’들이 국외로 추방되었다.‘보츠와나’에서는 어떻게 증거하는가? 관습에 따라 자기를 소개하는 인사를 하고 동시에 피차간에 상대방의 건강을 물어 보아야 한다. 그 일이 끝나면 모두가 앉을 수 있도록 긴 의자들을 가져오게 된다. 방문한 모든 벗들뿐 아니라 나머지 가족들도 청함을 받게 되는데 20명 정도되는 경우도 자주 있다. 대부분의 가정에는 자기네 성서가 있으며 기꺼이 자신들의 성서를 가지고 와서 찾아보려고 한다.
‘보츠와나’에서는 부모가 자기 아들을 결혼시키기 원한다면, 결혼시키고자 하는 그 소녀를 위해 소년의 부모가 담요 한장과 옷 한벌 그리고 4‘파운드’의 증거금을 지불하는 것이 습관으로 되어 있다. 소녀가 10세 되었을 때 그렇게 한다. 그후 그 소년의 부모는 그 소녀가 결혼 준비가 될 때까지 그를 계속 부양한다. 그 소녀의 의사는 묻지도 않고 그렇게 한다. 15세된 한 소녀가 진리를 알게 되었을 때 그 소녀는 자기의 부모에게 자기를 믿지 않는 자와 부당하게 멍에를 메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 부모는 그 소녀를 위해 이미 지불된 돈을 생각하고 강제로 결혼시키려고 하였으나 그 소녀가 성서로부터 그러한 마련이 잘못임을 부모에게 분명히 지적하였을 때 그 부모는 그 소녀의 뜻대로 하게 허락하였다.
대회를 위한 적절한 장소를 구하기가 어려웠고 임시 건축물들을 세우기 위해서 항상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기 때문에, 형제들은 ‘마할라피에’에 그들의 왕국회관을 짓도록 격려를 받았다. 그들은 그렇게 하였다. 형제들은 스스로 벽돌을 만들고 구웠다. 완성하는 데 여러 해가 걸렸으며 그후 1967년에는 그들의 왕국회관이 대회를 위해 사용되었다.
‘보츠와나’의 ‘부쉬멘’에 관해서, 그리고 그들의 딸깍거리는 언어가 이제서야 문자화되고 있고 활과 화살을 사용하는 사냥군들인 그들 중에서 누가 새 질서 사회의 일부가 될 것인지 궁금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자, 한 ‘부쉬만’ 여자와 동거하고 있는 그 지방의 한 남자가 진리와 접촉하게 되었다.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고 오래지 않아 그들은 합법적으로 결혼하는 것이 필요함을 알게 되었다. 그 남자가 ‘부쉬만’ 여인과 결혼할 것인가? 그렇다. 그는 그렇게 하였고 그들 두 사람은 순회 대회에서 침례를 받았다. 일년도 못되어 그들은 읽고 쓰기를 배웠으며 그들이 사는 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훌륭한 증거를 하기 시작하였고 다른 사람들을 제자로 삼았다.
1972년에 남‘아프리카’에 사는 유능한 얼마의 ‘유럽’인 형제들과 그들의 가족은 ‘보츠와나’로 와서 그곳 형제들을 도우라는 부름에 응하였다. 물론 그것은 얼마의 희생을 의미하였으며, 그곳에서 세속 직업을 갖기만 하면 오랜 기간 그 나라에 머물 수 있었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파이오니아’ 봉사를 중단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과 영국에서 온 얼마의 형제들은 그곳에 있는 형제들을 세워주기 위하여 참으로 훌륭한 일을 수행하였다. 그들 중 얼마는 그 나라 내에서도 더 깊이
벽촌으로 들어갔다. 형제들은 그들이 같이 있게 된 것을 참으로 감사했고 감사하고 있으며 활동은 발전하였다.법적인 문제가 제기 되었으나 해결되다
그후에 충격적인 일이 발생하였다. 새로 공포된 법에 의거하여 정부가 여호와의 증인을 합법적 조직으로 등록하기를 거부함으로써 1973년 7월 20일에는 조직이 불법 단체로 선포되었다. 단지 그러한 “불법” 단체에 소속되기만 해도 최고 7년형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형제들은 변화된 환경 아래서도 활동을 계속할 각오를 하고 있었다. 먼저 금지될 가능성이 뚜렷해지자 지부 사무실에서 일하는 형제들은 충고와 격려를 하기 위해 활동을 감독하는 사람들과 모임을 가졌다. 금지령이 시행되기 직전에 여호와의 과분하신 친절로 두개의 순회 대회가 ‘보츠와나’에서 열려 형제들에게 훌륭한 격려와 교훈을 주었다.
‘보츠와나’ 헌법에 근거하여 정부의 결정에 대해 항의하는 법적인 절차가 즉시 시작되었다. 1974년 2월 20일에 정부가 그 결정을 번복하여 여호와의 증인을 합법적인 단체로 등록한 것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었다. 그 결과 형제들은 단순히 금지령이 있기 전의 상태로 돌아간 것만은 아니었다. 이제 그들은 인근 국가들에서 전 시간 전파자들을 오게 하는 것을 포함하여 등록된 단체들에게 허용되는 특권들을 사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되었다.
1975년 3월 그들은 284명의 전도인 신기록에 달하여 즐거워하였다. 그것은 전도인 당 인구 비율이 2,220명임을 의미한다. 사실 ‘보츠와나’에 해야 할 일이 엄청나게 많이 남아 있지만 여호와의 과분하신 친절로 인하여 그 일이 수행될 것임을 우리는 확신하고 있다.
‘스와질랜드’에서 그리스도인 활동이 전진하다
1960년에 ‘스와질랜드’에서 왕국 활동이 잘 진행되고 있었으며 전도인은 평균 380명이 되었다. 이미 전도인 대 인구 비율은 ‘일랜쯔포온테인’ 지부 관할하에 있는 나라들 중에서 가장 낮았다. 협회 출판물에 대한 금지령은 제거되었고 더 확장될 수 있는 입장에 있었다.
1960년대까지 별로 성장이 없었던 밭은 ‘유럽’인들의 밭이었다. 그때쯤해서 몇명의 ‘유럽’인 전도인들이 ‘브레메르스도르프’(지금은 ‘만지니’라고 불리움)로 이사하였다. 그들 중에는 ‘이안 카메론’이라는 ‘스코틀랜드’인이 있었는데 그가 남‘아프리카’의 처녀와 결혼하기 전에는 ‘일랜쯔포온테인’ ‘벧엘’에서 봉사하였다. 남아 연방에서는 그가 영주권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설립된 하나님의 왕국의 소식을 ‘스와질랜드’에 있는 ‘유럽’인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스와질랜드’에 정착하기로 결정하였다. ‘만지니’에 있는 작은 전도인 집단은 17,000평방 ‘킬로미터’에 달하는 ‘스와질랜드’ 구역 전체를 봉사하기로 하였다. 그것은 재방문을 하거나 성서 연구 한건을 사회하기 위해서 160‘킬로미터’ 이상의 거리를 여러 번 여행해야 함을 의미하였다.
곧 그 소식은 심금을 울려 반응을 일으키게 하였다. 협회는 ‘빅 던킨’과 그의 아내인 ‘아일린’이 ‘스와질랜드’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로 일하도록 임명하였다. 저지대를 가로지르는 물결 모양의 자갈 길 ‘우수두’ 숲으로 난 미끄러운 진흙 길, ‘고오지건’으로 가는 꼬불꼬불한 길, ‘해브럭’으로 가는 가파른 산길 등 모든 길이 그들의 자동차를 찌그러뜨리게 하고 흠을 내었다. 그러나 ‘던킨’ 형제 부부는 꾸준함을 보였으며 얼마 있지 않아 그들은 그들의 노고의 열매로 보상을 받게 되었다. 영어를 사용하는 회중이 형성되었다. 대부분의 성원들은 ‘스와질랜드’에서 진리를 배웠거나 적어도 여호와께 헌신을 한 사람들이었다. 영어를 사용하였지만 그 회중은 사실상 국제적인 성격을 띤 회중이었으며 그 전도인들은 대영 제국의 축소판이었다.
그와 동일한 국제적인 분위기는, 자기 나라 고유 의상을 입은 ‘스와지’인들이 이국적인 옷을 입고 진열장을 들여다 보고 있는 ‘히피’와 미국 평화 봉사단원들의 옆을 스치고 지나가고 있는 ‘음바바네’의 거리에서도 분명히 느낄 수 있다. 가게 안에서는 ‘포르투갈’인 사업가가 단정하게 옷을 입은 ‘아프리카’인 공무원을 접대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한 상황 때문에 전도인들은 여러 언어의 출판물들을 가지고 다녀야 할 때가 많다.
한번은 순회 감독자와 그의 아내가 ‘포르투갈’인들의 철로 변에 있는 마을에 갔었는데 사람들이 그들의 말을 이해하지는 못하였지만 그들은 열심히 왕국 소식을 전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그곳의 언어로 된 잡지를 제공할 수 있었다. 두번째 집에서는 어린 소녀가 통역 역할을 하여 자기 어머니가 그 방문자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주의깊이 들은 후에 그 어머니는 책을 한권 받았다. 그들이 떠나기 전에 그 어린 소녀는 “제가 같이 가서 당신을 위해 이야기해 드리죠”라고 말하였다. 그 소녀는 정말 그렇게 하였다. 다음의 다섯 집에서 그 소녀는 소식을 설명하였고 순회 감독자와 그 아내를 위해 통역하였다. 매번의 제공 끝에 그 소녀는 전도인들을 향해서 “하나 원합니다”고 말하였다. 즉 집주인이 서적을 한권 원한다는 의미였다. 그날 아침에 그 작은 소녀의 도움으로 6권의 서책을 전하였다.
그리스도인 중립을 나타내다
세계적인 식민지 자유화 운동과 일치하게 ‘스와질랜드’도 역시 독립을 위해 준비하고 있었고 사람들이 더욱 국가주의적이 되었다. 선거날이 되었을 때 어떤 투표소에서 추장은 큰 소리로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모두가 투표하기 전에 말하겠는데 이 마을에 투표를 거부하는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와 같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계속 투표를 거부하면 한 사람씩 나오게 하라.” 그곳에 있는 격지 전도인들은 담대한 입장을 취하였다. 그로 인해 관심자 한 사람도 역시 격려를 받아 증인들과 함께 같은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투표가 의무적인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 중립적인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조치는 없었다.
1967년 9월의 독립 기념식이 있기 직전에, 여호와의 증인들은 다른 인종 집단에 속해 있어도 서로 연합되어 있음을 훌륭하게 나타내었다. ‘스와질랜드’의 영어를 사용하는 (‘유럽’인) 회중은 동‘트랜스바알’ 순회구에 속해 있었고 그래서 전 순회구가 ‘스와질랜드’에서 대회를 갖도록 마련되었으며, ‘아프리카’인 형제들도 참석하도록 초대되었다. 장소가 비좁았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형제 사랑을 나타낼 기회가 되었다. 대회장 내에 ‘유럽’인 형제들이 많이 들어온 반면 ‘아프리카’인 형제들이 얼마 들어오지 못했다는 점이 알려지자 ‘아프리카’인 형제들을 위해 자리를 양보하자는 말이 돌았다.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후에 ‘아프리카’인 순회 감독자는, ‘유럽’인들은 밖에 서 있는데 반해 너무 많은 ‘아프리카’인 형제들이 안에 있다고 염려를 나타내었다. 652명의 청중이 영어와 ‘줄루’어 공개 강연을 들었다.
그 나라가 독립된 후에 많은 여호와의 백성들은 그들이 중립 문제에 있어서 어떠한 위치에 있는가를 나타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한 지역의 추장은 어떤 ‘파이오니아’에게 정치적인 모임에 참석하도록 요청하였다. 그 형제가 참석을 안하자 그의 불참에 대해 해명하도록 추장 앞에 불리워 갔다. 그는 그리스도인으로 중립을 취하는 자기 입장을 설명하였다. 추장은 그를 추방시키겠다고 위협했으나 자기가 방문하려고 하는 왕 ‘소브후자’ 2세에게 먼저 그 문제를 이야기해 보겠다고 말하였다. 왕 ‘소브후자’ 2세는 그 추장에게 여호와의 증인들은 어떠한 정당에도 속하지 않는 평화를 애호하는 중립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좋겠다고 충고하였다.
국가주의적인 정신은 ‘움크와쇼’ 법과 같은 여러 가지 부족적인 습관이 다시 부활되게 하였다. 그 부족적인 법은 처녀들에게 1971년 8월까지 2년 동안 ‘움크와쇼’의 착용을 요구하였다. ‘움크와쇼’란 목에 두르는 일종의 장식으로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약혼한 처녀는 붉은 색과 검정색이 배합된 것을 두르고 다른 모든 미혼 처녀들은 파랗고 노란 것을 착용하였다. 그 기간 중에 모든 처녀들은 성관계를 못하게 되어 있었다. 예외로서 이미 약혼한 사람들은 그 지방의 추장에게 R1.00을 내면 그들의 애인과 관계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한 마련은 그곳의 ‘시단다’ 왕비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시행되었다. 그것은 피조물 숭배이고 돈을 받고 음행을 묵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여호와의 증인들은 ‘움크와쇼’ 기간을 지키거나 그들의 목에 ‘움코와쇼’ 두르기를 거절하였다. 그것이 단지 부족법에 불과하였고 그 나라의 법에 의해 강제 시행될 수는 없었지만 우리 젊은 자매들이 확고한 입장을 취하였기 때문에 그들 중 얼마는 어려움을 겪었다. 한 경우에 부모들이 진리 안에 있지 않은 한 젊은 소녀는 ‘움크와쇼’를 착용하지 않았다고 열흘 동안을 구치소에서 지냈다. 그러나 그 소녀가 다니는 학교 교장이 그 소녀를 석방하도록 요구하여 석방되었다.
여호와의 증인의 자녀들은 부모의 적절한 훈련을 통해서 여호와 앞에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숭배의 중요성을 인식하도록 도움을 받았다. 야고보 1:27) 교가를 부르고 기도하는 것이 일종의 거짓 숭배임을 인식하기 전까지는 많은 자녀들이 그에 참여해 왔다. 그후 어떠한 종교 의식에도 참여하지 않는 자녀들이 점점 더 많아졌다. 그리하여 많은 자녀들이 심하게 구타당하였고 상당수가 그들이 다니던 학교로부터 퇴학당하였다. 그런 일이 있었을 때 그 형제들은 자기 자녀들을 개인적으로 가르치거나 다른 학교로 보내기 시작하였다.
(어려움 가운데서도 축복이 풍부하게 내리다
‘줄루’어 「진리」 책은 ‘스와질랜드’ 형제들에게 축복을 가져다 준 또 하나의 도구이다. 이전 어느 때보다 더 명확히 진리를 이해하도록 그 책이 자기들에게 도움이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책이 성실한 사람들로 하여금 성서의 진리를 배우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에 이르도록 돕고 있음이 분명하다.
1972년에 이곳 형제들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마지막 지역 대회가 된 대회를 개최하였다. 그 대회 후에 헌법이 폐지되었고 어떠한 대규모의 모임을 가지려면 반드시 경찰의 허가를 얻어야 되었다. 증인들이 ‘스와질랜드’에서 1974년 10월에 종단으로 등록되었는데도, 이제까지 경찰은 형제들에게 지역 대회 허가를 내주기를 단호히 거부해 왔다. 순회 대회를 개최하는 데도 역시 어려움이 있었다. 순회 대회를 개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여러 회중의 정기적인 집회 장소에서 개최하는 작은 모임으로 분산하는 것이다.
전도지 활동은 열광적인 반응을 얻게 되었고 첫 전도지를 배부하게 된 1974년 2월에는 750명의 전도인 신기록에 달하였다. 우리의 형제 자매들은 매우 열심이었으며, 1974년 봉사 연도에는 전도인당 한달 평균 시간이 14시간 가까이 되었다. 사실상 ‘스와질랜드’에서 이제 철저한 증거가 행해지지 않은 곳은 별로 없다.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왕국 선포 때문에 화가 난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은 우리의 활동을 금지시키려고 시도하였다. 1975년 4월 2일 교직자들은 왕 ‘소브후자’ 2세 앞에 나가서 여호와의 증인들은 사람이 죽었을 때 슬퍼하지도 않으며 죽은 사람들을 불경하게 취급한다고 비난하였다. 그 때에 우리의 형제들은 단지 소수밖에 참석해 있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 왕은 더 많은 사람이 참석하여 그 문제를 자세히 토론할 수 있도록 1975년 5월 3일에 또 다른 모임을 갖도록 마련하였다. 그 모임은 ‘로지다’에서 열렸으며 옥외 집회였다. 참석한 모두는 몇 그루의 나무 아래 앉았다. 왕 자신은 그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농무장관이 사회자로 일하였다. 발언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손을 들었으며 사회자가 요청하면 일어나 ‘마이크’ 있는 데로 가서 말할 수 있었다.
누가 죽으면 실제로 여호와의 증인들은 어떻게 느끼는가를 우리의 형제들 중의 한 사람이 처음에 이야기하려고 했을 때 그는 계속 저지를 당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날의 회합에서 다른 형제들 몇명이 발언할
수 있었다. 형제들과 자매들의 수가 많았다. 사실 증인들의 수는 나머지 사람들보다 훨씬 많았다. 어떤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은 마귀에게 졌다고 하면서 우리가 시체를 발로 차고 관을 무덤에 던져 넣는다고 거짓 비난을 하였다. 사회자는 자기가 원하는 사람만 발언하도록 지정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거짓 비난을 논박할 기회를 얻기가 어려웠다. 그 모임은 오전 10시경부터 저녁 6시까지 계속되었다. 해질 때쯤 되어서 반대자들은 상(喪)에 관한 문제에 대하여 증인들을 정죄할 수 없음을 깨닫고 그들은 기에 절하거나 국가를 부르는 것을 거절하거나 군복무를 거부한다는 등 다른 문제들을 끄집어 내었다. 그 때쯤에는 해가 지고 있었으므로 사회자는 다른 문제들은 추후에 토론될 것이라고 말하였다.어떤 의원들과 특히 교직자들은 ‘스와질랜드’ 전역에서 행해지고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을 억제하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다. 여호와께서 자기의 뜻을 온전히 성취시키실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문제를 여호와의 손에 맡기고 있다.
남‘아프리카’에서의 조직적인 발전
회중 감독자들을 위한 천국 전도 학교가 1961년 하반기에 남‘아프리카’에서 시작되었으며 형제들과 왕국 활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네명의 강사가 전국을 여행하였고 왕국회관이 교실로 사용되었다. 거리가 멀기 때문만이 아니라 어떤 지역에 사는 ‘아프리카’인들이 잠시라도 다른 곳에 가있는 것을 제한하는 정부의 인구 이동 통제 정책 때문에 그러한 일이 필요하였다. 그러한 수업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그분의 조직을 통한 여호와의 그러한 인자한 마련에 대하여 깊이 감사하였다.
1961년 5월에 남아 연방은 공화국이 되었다. 그때 이후로 이전 어느때 보다도 국가주의적인 영이 이곳에서도 더 강화되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참 숭배를 행하는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았으나, 뒤에 이 책의 보고 내용을 통해 알게 되겠지만, 나중에는 여호와의 왕국에 충성하는 사람들에게 참으로 시험이 되었다.
1961년 10/11월 중에 세 주요 인종 집단을 위해 열린 연합된 숭배자 전국 대회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들의 연합과 그리스도인 중립을 훌륭하게 나타내었다. 이곳의 ‘유럽’인 대회가 시작되는 날은 총 선거일과 같은 날이었다. 그 대회를 위한 ‘팜플렛’(어느 정부가 연합을 가져 올 것인가?)은 ‘일랜쯔포온테인’ 공장에서 인쇄되었으며 수만명이 그것을 배부하였다. 그 결과는? 그 공개 강연에 이곳 역사상 가장 많은 수가 참석하였다! 그 세 대회의 총 참석수는 22,551명이었다. 대회장 내의 여러 인종 집단 사이의 연합된 평화스러운 관계는 외부의 소란한 정치적 분열과 참으로 대조적이었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일랜쯔포온테인’에서는 몇 가지 조정이 있었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인 형제들이 ‘벧엘’에서 번역자 및 속기사로 봉사하도록 불리움을 받았다. 그 ‘아프리카’인 속기사는 서신들을 ‘줄루’어, ‘코사’어나 ‘세소토’어로 번역하여 타자하였다. 그리하여 형제들은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나 문제들에 대해 특별한 충고를 받았다. 다른 지방어 번역자들의 대부분도 ‘벧엘’로 들어 오게 되었다. 이제 방문객들이 ‘벧엘’에 오면 ‘유럽’인 자매들은 청소하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유럽’인 형제들은 문지기나 세탁부—남‘아프리카’에서는 “원주민”이 하는 일로 생각되는 활동—로서 봉사하고, ‘아프리카’인 형제들은 타자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남서 ‘아프리카’에서의 선교인의 노력
한편 남서 ‘아프리카’에서는 어떤 일이 발생되고 있었는가? 1950년에 세명의 선교인이 그곳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윈드혹’에서 시작하여 점차 그 지역의 다른 곳으로 들어갔다. 1951년에 그 중 두 사람이 북쪽으로 가서 구리 광산인 ‘트추멥’ 마을에서 “잃어버린 양” 둘을 발견하고 몹시 즐거워하였다. 그들은 한 때 조직과 접촉을 가진 바 있었기 때문에 도움을 받아 이내 야외 봉사에 활동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남쪽으로 64‘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그루트포온테인’에서 그들은 독일에 있을 때 진리와 접한 일이 있는 ‘보구쉬’ 형제 부부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제 조직과 다시 접촉하게 되어 그들은 다시 봉사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오트지와롱고’에서 두명의 전도인을 더 찾았다. 그들은 남아연방에서 이사 온 사람들이다. 그리고 여러 해 동안 「파수대」를 예약해 보던 한 아버지와 아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두 사람은 아주 신속히 발전하여 헌신하는 데 이르게 되었다.
1952년말 그 나라의 전도인 수가 29명으로 껑충 뛰었을 때 그 세 선교인들은 틀림없이 많은 즐거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국외로 이동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여러 해 동안의 활동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그후에 온 한 선교인이 이렇게 말한 바와 같다. “이곳에는 진리의 씨가 많이 뿌려졌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열린 전국 대회들에 우리가 참석하면 ‘윈드혹’에서 연구를 시작했던 증인들의 영접을 받게 된다.”
1953년에 다섯명의 선교인들은 이미 그곳에 있던 세 선교인의 따뜻한 영접을 받았다. 그 선교인들은 ‘윈드혹’에 자리를 잡게 됨으로써 다른 세 형제들은 북과 남으로 더 나아가 임명을 수행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몇 주일이 지나자 그 새로운 선교인 각자는 8건에서 10건에 이르는 성서 연구를 갖게 되었으며 그 후로 활동을 계속 활발하게 되었다.
그러나 계속 한 가지 문제가 남아 있었다. 즉 좋은 소식을 어떻게 ‘아프리카’인들에게 효과적으로 전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초기 선교인들 중의 하나인 ‘조오지 코에트’는 ‘윈드혹’의 ‘아프리카’인 지구에 있는 ‘아프리카’인들 가운데서 얼마쯤 활동하였으나, 당국자들이 교직자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그가 그 지구로 들어가는 허가를 취소하였다. 남‘아프리카’로부터 ‘아프리카’인 ‘파이오니아’들을 오게 하려고 하였으나 당국자들은 거절하였다. 1959년에 지역 감독자가 그 지구에 들어가기 위해
원주민 행정관에게 허가를 신청하였으나 그는 냉정하게 거절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그 주일의 일요일에 그 읍사무소의 사무장에게 가서 그 지구에 들어갈 허가를 요청하였다. 그것이 수락되어 “신세계 사회의 행복”이라는 영화를 216명의 ‘아프리카’인들에게 보여 주었으며, 그들은 고마와하였다.1953년 이래 ‘딕 왈드론’은 ‘아프리카’인 지구에 들어갈 수 있는 허가를 얻으려고 여러 번 노력해 보았으나 실패하였다. 그 후 ‘딕 왈드론’과 ‘코랄리 왈드론’은 아기가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임무를 그만둘 것인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머물러 있기로 결정하였다. 그 후 ‘오스트레일리아’에 있는 ‘코랄리’의 어머니가 몹시 아프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제 ‘왈드론’ 가족은 남서 ‘아프리카’의 ‘윈드혹’을 떠나 ‘오스트레일리아’로 돌아가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출발하려고 하는 그 주일에 ‘아프리카’인들과 유색인들 사이에서 활동하도록 허가가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 허가를 얻으려고 7년간을 기다렸는데 그것을 되돌려 보낼 것인가? ‘왈드론’ 형제는 배 예약을 취소시켰고, 그의 아내와 딸만 호주로 가게 되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넉달을 지내고 돌아왔다. 그 동안 ‘딕 왈드론’은 ‘아프리카’인들과 유색인들에게 증거하는 데 많은 시간을 바칠 수 있었으며 훌륭한 결과를 맺었다. ‘아프리카’인과 유색인들을 위한 첫 순회 대회의 공개 강연에 100명이 참석하였다.
‘아프리카’인들에게 전파함
모든 ‘아프리카’인들에게 전파하기 위해서 얼마의 출판물을 번역하고 출판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러한 일을 맡을 만한 교육을 받은 ‘아프리카’인 형제들이 없었다. 얼마 전에는 초기 선교인들의 지도 아래 소책자들이 세속적인 번역자들에 의해서 ‘나마’어, ‘콱니야마’어, ‘헤레로’어로 번역되었다. 출판되고 배부되었지만 그러한 소책자들은 번역이 너무나 모호하고 부정확하여 성공적이 못되었다. 세속적인 사람들을 다시 사용한다 해도 더 엄밀한 감독을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딕 왈드론’은 정확히 번역하기 위한 노력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연구를 하고 진리의 지식을 약간 가진 학교 선생들을 주로 사용하였는데 각 문장이 제대로 되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나는 그들과 같이 앉아서 함께 일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나마’어는 어휘가 제한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처음에 ‘아담’은 완전한 인간이었다’는 점을 전달하려고 노력하였다. 그 번역자는 머리를 긁으면서 ‘완전한’이란 말이 ‘나마’어에는 없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옳지’ 하며 ‘처음에 ‘아담’은 익은 복숭아 같았다’고 번역하였다.” 문젯점들이 있었지만 결국 「신세계에서의 생명」이라는 소책자가 ‘헤레로’어, ‘나마’어, ‘응동가’어와 ‘콰니야마’어로 번역되었다.
‘어윈 쉬나이드’ 형제와 그의 아내 ‘게르트루트’ 및 그들의 딸 ‘카린’은 1956년에 독일에서 ‘스와코프문트’라는 해안 도시로 오게 되었다. 그들의
친척들은 그러한 이주에 대해서 우려를 표명하였다. 그리고 그들 자신도 아무 것도 확실히 예상할 수 없었다. 어떤 이상한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인가? 어떤 기묘한 소리를 내는 언어를 배워야 할 것인가? 그러한 “암흑” 대륙에서 어떠한 위험을 직면하게 될 것인가? 그들은 ‘왈비스’ 만에 상륙하였고 많은 언어 중에서도 독일어를 말하는 백인들을 만나게 되었다! 사실상 그들의 새로운 고향인 ‘스와코프문트’는 건축 양식, 습관 및 주로 사용하는 언어에 있어서 독일식의 작은 마을이었다. 후에 그들의 다른 가족들이 도착하여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다른 관심자들에게 도움을 주었으며 이제 회중을 형성할 수 있었다.‘케이프’ 주의 유색인 형제들이 어업 관계로 그 구역으로 이사하기 시작하였으며, ‘아프리카’인들 사이에서 특히 ‘왈비스’ 만에서 좋은 소식을 전하는 데 많은 역할을 하였다. 이들 ‘아프리카’인 중 많은 사람들은 노동 계약을 맺고 북부의 ‘오밤보랜드’와 같은 그들의 고국으로부터 와서 단지 일이년 정도 지내게 된다. 그후에 그들은 돌아가야 한다. 그리하여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얼마의 협회 출판물을 받아서 그후 그것을 ‘오밤보랜드’로 가지고 갔다. ‘오밤보’인의 한 사람인 ‘필레몬 칼롱겔라’는 ‘왈비스’ 만에서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였고 ‘오밤보랜드’로 돌아가서 전파할 수 있었다. 그는 사실상 그곳에서 잠시 특별 ‘파이오니아’로 일하였다.
‘호텐톳’인으로 처음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
남서 ‘아프리카’에서 맨 먼저 진리를 받아들인 유색인은 ‘엘라 크라이튼’이다. 그 여자는 ‘나마’(‘호텐톳’)어도 유창하게 말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 여자야말로 첫 ‘호텐톳’인이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도와줄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경애하는 연로한 ‘호텐톳’ 형제 “오우파”(할아버지) ‘조드’만큼 다양한 생활을 자랑할 만한 사람도 별로 없다. 어린 소년이었을 때, ‘호텐톳’ 전쟁 당시 독일인들에게 포로가 되어 ‘윈드혹’에서 일하며 생애의 대부분을 보냈다. 그 전쟁은 1890년경에 끝나게 되었다. “오우파”는 교육을 별로 받지 못했지만 자기 언어인 ‘나마’어 뿐만 아니라 독일어와 공용 ‘네델란드’어도 읽고 쓰고 말할 수 있다. ‘엘라 크라이톤’ 자매가 그와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을 때 “오우파” ‘조드’는 70대 후반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는 교회의 기둥이었으며 그가 큰 ‘바벨론’에서 물러나자 적지 않은 소란이 일어났다. 그 나라 여러 곳의 교역자들이 그의 이전 종교로 돌아오도록 그를 설득하려고 그의 집으로 모여 들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를 움직일 수 없었다. ‘엘라 크라이톤’의 도움을 받아 그는 그들의 모든 공격을 저항할 수 있었다. 친척들이 울면서 호소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오우파” ‘조드’는 진리를 발견하였던 것이다.
최근의 발전
여호와께서는 인종 및 국적에 있어서 아주 다양한 그 나라에서 그분의 사업을 촉진시키고 있다. 1973년말에 가서 그분께서는 ‘르호봇’ 지역에
있는 ‘바스터’족에게 증거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다. 그 때까지 여호와의 증인 중 아무도 왕국 소식을 전파할 목적으로 그 지역에 들어갈 허가를 얻지 못하였다. 약 50만명의 ‘아프리카’인 “제한 구역”이 있는 그 지역의 북부에 활동을 위한 작은 발판이 놓이기 시작하였다. 지금은 네 개의 전도인 집단이 ‘오밤보랜드’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국경 바로 너머에 살고 있는 한 특별 ‘파이오니아’가 임시 순회 감독자로서 정기적으로 그들을 섬기고 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제한 구역”에 있는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 모든 기회를 포착하고 있지만 비교적 광대한 그 지역에 전 시간 봉사자들을 보낼 수 있는 문이 활짝 열리기를 그들은 바라며 기원하고 있다.1947년에 남서 ‘아프리카’에서 진리를 선포하던 외로운 한 사람의 목소리로부터 훌륭한 확장이 있게 되었다. 그 하나의 목소리는 이제 1975년 3월에는 최고 322명의 왕국 전도인으로 증가되었다. 북부에 있는 구역들을 더 활짝 열게 하는 것이 여호와의 뜻이라면 우리는 밭의 그 부분에서도 역시 온전한 수확이 거두어질 것을 기대할 수 있다.
충실한 자들이 특권을 즐기다
남‘아프리카’에도 남서 ‘아프리카’의 “오우파” ‘조드’와 마찬가지로 훌륭한 본이 되는 연로한 전도인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 중 얼마는 바로 ‘파이오니아’ 대열에 있다. 그들은 여호와의 봉사에서 많은 특권을 즐겼다. 그러한 연로한 충성자들 중 한 사람인 ‘아프리카’인 자매 ‘애니 모셀레바’는 가장 연로한 특별 ‘파이오니아’였다. 1966년에 18년간 ‘파이오니아’ 봉사를 한 후 91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연로했기 때문에 그 고장 사람들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았으며 다른 전도인들이 실패하는 곳에서도 훌륭하게 성공하였다. 그 자매는 ‘파이오니아’를 하는 동안 수 많은 사람들이 진리에 들어오게 하였다. 단 일년 동안에 그 자매는 8명이 진리에 대하여 확고한 입장을 취하도록 도왔으며 13건의 가정 성서 연구를 사회하였다.
남‘아프리카’의 다른 충실한 본으로 ‘조오지 필립스’ 형제가 있다. 1927년부터 그는 지부 감독자로 일했으며 여호와께 대한 그의 충성과 그가 세운 본으로 인하여 형제들은 그를 깊이 사랑하고 존경하게 되었다. 그는 항상 충성스럽게 여호와의 조직을 지지한 끈기있는 형제로서 진리의 진정한 투사였다. 그는 그러한 초기 시절과 어려웠던 1940년대의 활동을 이끌었다. 그는 남‘아프리카’의 조직이 소수의 전도인에서 1966년의 20,000명 이상으로 증가되는 것을 보았다. 1966년 7월말에 ‘벧엘’을 떠나야 하였지만 ‘필립스’ 형제의 마음은 아직도 전 시간 봉사에 있었으며 얼마 후 그는 ‘케이프타운’ 근처의 ‘스트랜드’에서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게 되었다.
‘필립스’ 형제로부터 지부를 떠 맡을 만한 아주 유능한 형제 즉 전 ‘잠비아’ 지부 감독자였던 ‘해리 아노트’가 있었는데 그는 그 전 해에 ‘잠비아’로부터 자기 아내와 함께 추방되었다. 남‘아프리카’에서 여러 해
동안 지구 감독자로 일한 바 있기 때문에 그는 그곳 형제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다. 형제들은 ‘아노트’ 형제를 온전히 신뢰하였으며 2년 동안 지부 감독자로 봉사하다가 예상하던 첫 아이를 낳게 되어 그도 봉사의 특권을 그만 두게 되었다.1968년 6월부터는 ‘프란스 뮬러’ 형제가 지부 감독자로 활동해 오고 있다. 1960년 이후 그는 지부 감독자의 보조로 봉사해 왔으며 봉사부에서 일해 왔었다. ‘뮬러’ 형제는 1959년에 자기 아내와 함께 ‘벧엘’로 불리움을 받기 전에 전국에 걸쳐 순회 및 지역 감독자로 활동하였다.
지부 감독자가 그처럼 자주 바뀌었지만 활동에는 불리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모든 것이 계속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여호와의 사업은 어떤 개인에 의존해 있는 것이 아니며 여호와께서는 그분에 의해서 기꺼이 사용되려는 사람은 누구나 사용하실 수 있다는 점이 다시 한번 모든 형제들에게 분명히 입증되었다.
「진리」 책이 양 같은 자들을 돕다
1968년 지역 대회들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라는 서적이 발표되었고 6개월 성서 연구 마련이 소개되었다. 독특한 상황이 발생되기 시작하였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전해지는 출판물의 양이 급증하였다. 재방문과 성서 연구가 증가되었다. 「진리」 책을 사용하게 되었을 때 지부의 발송부는 이전에 결코 볼 수 없었던 일을 경험하게 되었다. 1960-1967기간 중에는 매년 평균 약 90,000부의 서적을 발송하였다. 그러나 1968년에는 125,000부 이상으로 껑충 뛰었다. 그후 1969년에는 공용 ‘네델란드’어 「진리」 책이 나왔고 그 해 말에는 ‘줄루’어, ‘코사’어와 ‘세페디’어 「진리」책이 발표되었다. 1970년 봉사 연도 중에 지부는 447,000부 이상의 서적을 발송하였다.
많은 지방어로 된 「진리」 책을 사용해서 가능한 한 그 나라의 광대한 지역에 있는 많은 농부들에게 도달하려고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대부분의 그러한 농장들은 여러 ‘마일’씩 떨어져 있어서 차로 갈 수 밖에 없었다. 협회의 지부 사무실에서는 그러한 농장 구역들을 지도에 자세히 표시하였고 농장 구역을 신청하도록 회중들을 격려하였다. 반응이 좋았다. 어떤 회중들은 그들이 있는 곳에서 320‘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는 구역을 받아 들였다. 왕국의 좋은 소식을 그러한 농부들에게 전파하기 위해서 수천 ‘킬로미터’를 여행하였다. 한 자동차 집단은 약 520 평방 ‘킬로미터’를 돌면서 농장을 100군데나 방문하였고 「진리」 책을 90부 전하였다. 진리에 굶주린 사람들이 많이 발견되었고 서신이나 그 형제들의 재방문을 통해 도움을 받았다.
남‘아프리카’ 내의 ‘포르투갈’인 밭
‘앙골라’에 관한 이야기 가운데서 우리는 ‘헨리크 비에이라’가 남‘아프리카’로 가는 도중에 ‘루안다’를 방문하였다고 이야기하였다. 그는
‘요하네스버어그’에 자리 잡았으며 그곳의 한 회중에서 봉사하였다. 그러나 ‘비에이라’ 형제가 ‘포르투갈’에서 이민 온 유일한 사람은 아니었다. 남‘아프리카’의 번영과 직장을 구할 수 있는 훌륭한 기회들 때문에 수천명의 ‘포르투갈’인, 희랍인 혹은 다른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유럽’으로부터 오게 되었다. ‘리이프’에 약 80,000명의 ‘포르투갈’인이 살고 있다고 추산된다.1965년에 가서 ‘비에이라’ 형제와 그의 아내는 이들 ‘포르투갈’ 이민자들 중에서 이미 훌륭한 관심을 발견하기 시작하였다. 그들 중 극소수만이 영어를 배운 사람들이며 따라서 그 사람들이 왕국 소식을 받아들이도록 돕는 데 ‘포르투갈’어를 말하는 얼마의 증인들이 필요함을 느끼게 되었다. 1966년 1월에는 11명의 ‘포르투갈’인 전도인 집단이 ‘요하네스버어그’에 형성되었다. ‘요하네스버어그’에서 ‘포르투갈’인들 모두가 한 장소에서 거주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전도인들은 한두 가족을 찾아서 증거하려고 오전 전체를 보내는 일이 많았다. 그들이 어떤 일요일에는 전혀 발견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작은 집단은 아주 급속도로 성장하였으며 1967년말에 가서는 약 50명의 전도인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회중이 되었다.
그후 ‘요하네스버어그’나 그 근처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포르투갈’인 밭에서 꾸준한 성장이 있었다. 남‘아프리카’의 다른 도시들에도 ‘포르투갈’인 이민자들이 있다. 그러므로 오래지 않아 ‘더어반’, ‘포오트 엘리자베드’, ‘케이프타운’과 ‘블로엠포온테인’에 ‘포르투갈’인 형제들의 집단이 있게 되었다.
때때로 그 ‘포르투갈’인 형제들은 고국을 방문하게 되는데, 그럴 때면 주로 ‘포르투갈’의 ‘가톨릭’ 도시들과 마을들에 있는 그들의 가족과 벗들에게 증거할 목적으로 그렇게 한다. 예를 들어 새로운 한 형제와 그의 아내는 휴가 때 ‘포르투갈’에 갔는데 그들은 자기들 가족에게 어떻게 증거를 시작할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주 놀랍고도 기쁘게 자기들 가족 중 한 사람이 이 부부에게 증거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참으로 행복한 가족적 재연합이 되었을 것임에 틀림 없었을 것이다!
남‘아프리카’의 희랍인 밭
1969년초에는 ‘리이프’에 있는 약 30,000명의 희랍인들의 유익을 돌보기 위해서 ‘요하네스버어그’에 조그만 희랍인 회중을 형성하였다. 그 당시 단지 24명의 희랍인 형제들이 야외 봉사 보고를 내고 있었다. 그러나 단지 16개월 후에 그 회중은 5명의 정규 ‘파이오니아’와 매달 서너명의 임시 ‘파이오니아’를 포함하여 62명의 전도인으로 성장하였다. 그것은 중요한 봉사의 밭에서 또 하나의 훌륭한 출발이었다.
희랍인들은 96‘킬로미터’ 이상에 달하는 지역인 ‘위트워터스랜드’ 전역에 산재해 있다. 그러므로 전화 번호부와 영어 및 공용 ‘네델란드’어를 사용하는 회중들의 도움으로 희랍인 회중은 모든 희랍인의 “주소 구역”을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요하네스버어그’에 희랍 회중을 형성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몇 군데의 다른 장소에 심지어 멀리 떨어진 ‘더어반’에까지 작은 희랍인 집단이 설립되었다. 희랍 정교회의 종교적 속박의 무거운 멍에 아래 있었던 그 사람들은 신속하게 진리를 인식하며 지체하지 않고 결정을 내린다. 거의 성서 연구를 시작할 때부터 그들은 집회에 참석하고 벗이나 친척들에게 증거하기 시작한다.국제적인 면모를 띤 대회들
그들 외국인들이 모두 함께 모이기 때문에 남‘아프리카’의 대회들은 참으로 국제적인 풍미를 지니게 된다. 지역 대회나 전국 대회에서는 그러한 형제들을 위한 특별 ‘스탠드’가 있어서, 그들을 위해 그들의 언어로 ‘프로’가 제공된다.
“국제 대회”에 관해서 이야기하자면, 1969년의 “지상의 평화” 국제 대회들은 남‘아프리카’의 신권적 역사에서 이전의 모든 대회를 능가하였다. 먼저 기대가 있었다. 그 다음에 실제 대회가 있었는데 그때 500명 이상의 남‘아프리카’ 형제들이 ‘런던’ 대회에 참석하였으며 상당히 많은 수가 ‘뉘른베르크’의 큰 대회를 포함한 ‘유럽’의 다른 대회들에 참석하였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그들의 첫 국제 대회는 아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대표자들에게 1969년의 “지상의 평화” ‘런던’ 대회는 평생의 감동거리였다. 그들 중에는 이곳으로부터 처음 국제 대회에 참석하게 된 ‘아프리카’인 형제들이 있었다. 그들 중 10명은 협회가 대회 여행 기금을 사용해서 보낸 전 시간 봉사자들이었다. 그들은 그 경험을 통해 참으로 감동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비행기 여행은 물론이고 비행기를 가까이서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가장 인상적인 것은 신기한 비행기 여행이 아니었다. 그 대회에서 받은 영적 음식이 가장 인상적이었고 유익하였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또한 그 ‘아프리카’인 형제들은 비행기에 탄 백인 형제들로부터 받은 사랑과 환대 그리고 남‘아프리카’라는 나라에서는 법으로 금지되어 있는 일 즉 영국에 있는 동안 백인 형제들의 집에서 그들과 같이 지낸 일 등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 ‘레소토’의 ‘니콜슨 마크헤타’는 대회 ‘프로’말고 가장 인상 깊은 것이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에 대해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유럽’인 형제들의 집에서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조직으로부터 받은 가정 생활에 관한 교훈을 그들이 적용하는 것을 보는 일이었다.”
그러한 경험은 ‘아프리카’인 형제들에게 여호와의 증인들이 전세계적으로 정말 동일하다는 점을 증명해 주었으며 그들은 다른 ‘아프리카’인 형제들에게 이야기해 줄 재료를 많이 가지고 돌아왔다. 그들로 하여금 그러한 경험을 할 수 있게 한 그들의 동료 그리스도인들의 관대함에 대해 깊은 감사를 드렸다.
“지상의 평화” 국제 대회의 대표자들은 영적인 음식을 참으로 많이 즐겼기 때문에 그들은 1969년 12월 31일부터 1970년 1월 4일까지 개최될
남‘아프리카’의 “지상의 평화” 전국 대회들에서 다시 동일한 ‘프로’를 즐길 것을 고대하였다. 또한 참으로 청중도 많았다. 세개의 공개 집회 참석자 총수는 45,821명이었고 1,294명이 침례를 받았다.‘세인트헬레나’에서의 훌륭한 발전
1969년 7월의 ‘런던’ 국제 대회에서 남‘아프리카’의 어떤 형제들은 ‘세인트헬레나’에서 온 ‘조오지 스키피오’와 그의 딸을 만나게 되었다. ‘스키피오’ 형제는 ‘세인트헬레나’와 같은 작은 섬에서 매년 동일한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것이 참으로 믿음과 인내의 시험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구역에서 잘 활동하였고 우리의 출판물을 잘 배부하였기 때문에 집주인에게 성서를 가져오라고 하면 「신세계 역」을 가지고 나오는 일은 보기 드문 일이 아니다. 「진리」 책이 나와서 1969년에는 성서 연구 평균이 전도인 당 1.2건으로 증가되었다. 얼마 동안 진리를 공부해 온 상당수의 사람들이 도움을 받아 분명한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그 책은 또한 무활동 전도인들이 다시 활동하도록 도움을 주었다.
그들의 수가 계속 늘어나면서 왕국 선포자들의 합창 소리는 ‘세인트헬레나’에 더 크게 울려 퍼지고 있다. 1975년 봉사 연도 중에 99명의 최고 전도인에 달하였다. 이제 구역이 매 전도인 당 평균 51명이 될 정도로 줄어 들었다. 그런데도 아직도 훌륭한 관심을 볼 수 있다.
‘아센션’ 섬 사람들이 좋은 소식을 듣다
‘세인트헬레나’의 북서쪽 1,120‘킬로미터’쯤 되는 곳에 있는 그 섬으로부터 1965년에 처음으로 보고를 받게 되었다. ‘B. 테일러’ 자매가 보고한 것인데 그 남편은 무선 통신 회사에 근무하고 있었으며 그 회사에 의해 그곳으로 파견되었다. 약 88평방 ‘킬로미터’인 그 섬의 당시 인구는 단지 300명을 넘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혼자서만 활동하는 것이 그 자매에게는 참으로 도전이었다. 그러나 그 자매는 그것을 받아들였고 매달 평균 23시간의 봉사와 3건의 성서 연구를 하였다.
1968년에 가서 그 섬의 인구는 2,000명으로 증가하였다. 그 해에 ‘태일러’ 자매는 방문을 위해 영국에 갔다. 그리하여 ‘세인트헬레나’에서 ‘조오지 스키피오’가 와서 관심자들을 돌보게 되었다. 그는, “이 섬 사람들은 목자 없는 양과 같다”고 말하였다. 많은 관심이 있는 것을 보고 ‘스키피오’ 형제는 그의 가족을 전부 ‘야센션’ 섬으로 이사하게 하였다. 그렇게 한 것은 활동에 큰 도움을 주었다.
한 경우에는 어떤 사람이 몇 주일 동안 저녁 9시 후에 일을 교대하기 때문에 10시에 가정 성서 연구를 사회해야 하였다. 매우 더웠기 때문에 그들은 밖에 있는 ‘베란다’에서 연구를 하였으며 그곳에 있으면 이웃 사람들이 그들을 볼 수 있었다. 그로 인해 이웃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받게 되었다. 그 사람이 발전하여 자기가 진리를 배우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제 저는 왜 더 많은
사람이 여호와의 증인이 아닌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읍니다. 그들은 이웃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 가족은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으며 그것을 즐겼다. 화요일 서적 연구에서 때가 아주 긴급하며 사업이 아직도 행해져야 한다는 것을 들은 후 그 사람은 그 다음날 그의 모든 동료 근무자들에게 증거하기 시작하였으며 연구를 하기 위해서 한 사람이 성서와 서적을 요청하는 것을 보고 매우 즐거워하였다.‘스키피오’ 형제와 그의 가족은 9개월 후에 ‘세인트헬레나’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편지로 얼마의 성서 연구생들과 계속 접촉하였다. 그 관심자들 중 한 사람은 젊은이였는데 오전 근무 중 휴식 시간에 그 ‘파이오니아’ 집에 와서 물 한잔을 달라고 하였다. 그 다음날 그는 다시 와서 물 한잔을 달라고 하였고 잠시 그곳에 서 있다가 그 ‘파이오니아’의 아내에게 팔 성경이 있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즉시 그에게 한권을 전했으며 그를 서적 연구에 초대하였다. 그는 스스로 책 한권을 구해 왔다. 그 ‘파이오니아’의 13살난 아들이 그와 연구를 시작하였고 그는 꾸준히 발전하게 되었다.
‘스키피오’ 형제가 떠난 후에 그 젊은이는 진리에 대해 굳건한 입장을 취하였다. 그의 고용주가 군 건물이나 교회 건물에 ‘페인트’칠을 하도록 그에게 요청하였을 때 그는 거절하였다. 그의 현장 주임도 온갖 방법으로 설득하려 했지만 그의 생각을 변화시킬 수 없었다.
지난 3년 동안 우리는 ‘아센션’ 도로부터 야외 봉사 보고를 전혀 받지 못했다. 그 섬에 한명 있는 전도인도 영국으로 정기적인 여행을 했으므로 보고가 비정기적이었다. 그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우리는 확실히 모르지만 아마 여호와께서는 아직도 그곳에 있는 ‘우리 안으로’ 들어와야 할 양 같은 자들을 알고 계실 것이다.—미가 2:12.
피에 관한 하나님의 법을 지지함
때때로 피에 관한 문제가 남‘아프리카’에서 대두되었다. 실례를 들어 보자. 임신 6개월 된 한 ‘아프리카’인 자매가 갑자기 출혈하기 시작하였다. 병원에서 의사들은 수혈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마쉬’ 형제 부부는 그들의 성서적인 입장을 설명하였지만 의사들과 간호원들은 조롱할 뿐이었다. 매 30분마다 그 자매는 검사를 받았다. 그후 한 간호원이 그 자매에게 자기는 태아의 심장 고동을 들을 수가 없으며 아이가 모체 내에서 죽은 것 같다고 하였다. 이제 그 의사는 “죽은” 태아를 재거하기를 원하였으나 수혈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자매는 태아의 운동을 아직도 느낄 수 있다고 이야기했지만 의료진들은 그 아이가 죽었다고 주장하였다.
‘마쉬’ 형제 부부는 그 병원을 나와서 다른 병원으로 갔다. 도중에 그 형제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끝까지 충성을 지키라고 자기 아내를 격려하였다. 다른 병원에 도착하자 그들은 피에 관한 자신들의 입장을 설명하였으며, 야근 당직인 간호원은 그들에게 그러한 요지의 진술서에 서명하도록
요청하였다. 진찰 결과 그 아이는 아직도 살아 있음이 판명되었다. 치료를 받고 우리의 자매는 급속도로 회복되었으나 검사를 받으러 2주일에 한번씩 병원에 가야 하였다. 의사는 피없이 제왕 절개 수술을 해 주겠다고 하였다. 해산할 때가 되자 그 자매는 입원을 했다. 그러나 의료진이 수술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그 자매는 쌍동이를 정상 분만하였다. 그 형제 부부는 여호와의 법을 끝까지 지킨 것을 참으로 행복하게 느끼고 있다.인도인 밭이 생산적임이 입증되다
남‘아프리카’에는 상당히 많은 인도인들이 있으며 최근에는 그들 중에서 진리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제 ‘트랜스바알’과 ‘나탤’에는 몇개의 인도인 회중이 있다. 이전에는 그 사람들 중의 얼마는 힌두교인이었고 얼마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회교도였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영과 진리로 여호와를 숭배하는 데 있어서 남‘아프리카’의 나머지 여호와의 종들과 연합하고 있다.
재차 확장되다
남‘아프리카’와 인근 구역에 사는 형제들은 ‘왙취 타워’ 협회장인 ‘N. H. 노워’가 다시 방문하기를 여러 해 동안 기대해 오고 있었다. 그는 1959년에 남‘아프리카’를 마지막으로 방문하였으며 그 해에 그는 지부 숙소를 증축하도록 마련하였다. 다시 ‘벧엘’ 시설을 확장할 때가 되었고 1970년에는 가족이 68명이 되어 그 시설이 수용 능력의 한도에 달하였다. 1970년 6월 「왕국 봉사」에 전국 대회를 위해 지역 대회들이 취소되었다고 발표되자 ‘브루클린’에서 누군가 방문하리라는 희망이 고조되었다. 그러나 「왕국 봉사」에서 “‘노워’ 형제가 오게 되다”라는 발표가 있은 것은 11월에 가서였다. 형제들은 매우 기뻐하였으며 아무 것도 1971년 1월 7-10일에 열리도록 계획된 “선의자” 대회들에 참석하는 것을 막지 못하였다.
남‘아프리카’의 인종 분리 정책 때문에 그리고 여러 인종 집단들이 별개의 지구들에 살고 있기 때문에 세개의 다른 대회가 마련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유럽’인들은 ‘밀너’ 공원 ‘쇼우 그라운드’에, 유색인들은 유색인 지역의 ‘유니온 스타디움’에, ‘아프리카’인들은 수십만명의 ‘아프리카’인들이 살고 있는 ‘소웨토’의 거대한 복합지에 소재한 ‘모폴로’ 공원에 모였다.
‘모폴로’ 공원은 아무런 시설도 없고 측면에 나무들이 서 있는 단지 넓은 공원이었다. 그러므로 ‘아프리카’인 형제들은 많은 ‘유럽’인 형제들의 도움을 받아 30,000명이 앉을 좌석을 만들고 여러 부서를 짓는 거대한 작업에 착수했다. 그들은 예상되는 군중에 맞춰 수세식 변소도 세웠다. 그곳을 방문한 시의 관리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여러분이 하는 일을 보고 놀랐읍니다. 자! 여러분은 도시를 두개나 건설하였읍니다.” 그들은 그 공원의 ‘줄루’어 및 ‘세소토’어 구역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한 대회들에서 처음으로 시도되어 크게 성공을 거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일단의 연기자들이 ‘드라마’의 연기를 무언극으로 하게 하고 대사는 ‘스타디움’의 다른 구역에서 두 언어로 동시에 나오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오랜 시간 동안 작업을 해야 하는 엄청난 과제였다. 그러나 그들의 언어로 ‘드라마’의 훌륭한 교훈으로부터 유익을 얻게 된 모든 형제들은 그에 대해 깊은 감사를 드렸다.
‘노워’ 형제는 다른 ‘프로그램’들에서 자기가 맡은 부분에 시간을 대어 맞추기 위해서 한 대회에서 다른 대회로 계속 바쁘게 좇아 다녔다. “이것이 그 도이다”라는 그의 즉흥 연설에 대해 형제들은 특히 감사하였으며 오랜 후에도 형제들은 그것을 통해 받게 된 훌륭한 충고에 대해서 계속 이야기하였다. 공개 강연은 웅장한 절정을 이루었다. 유색인 대회에 2,770명이, ‘유럽’인 대회에는 12,252명이, ‘아프리카’인 대회에 33,757명이 참석하여 총 48,779명이 참석하였다! 그 당시 남‘아프리카’에는 단지 약 22,000명의 증인 밖에 없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것은 놀라운 참석수였다.
매우 격려적인 폐회사에서 ‘노워’ 형제는 모인 형제들에게 ‘일랜쯔포온테인’ 협회 공장과 사무실과 ‘벧엘’ 가정을 확장할 계획을 이야기하였다. 그는 전도인들이 어떻게 도울 수 있는가도 설명하였다.
‘벧엘’ 가족들 자신도 ‘노워’ 형제의 지부 방문에 대해서 깊이 감사하였다. 그는 가족의 대부분이 젊은이임을 관찰하게 되었다. 거의 그들 모두는 헌신한 부모들에 의해 양육되었으며 그들은 ‘벧엘’에 있는 것을 행복하게 생각하였다.
‘일랜쯔포온테인’ ‘벧엘’ 가정에는 얼마의 나이든 사람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80세인 지금도 온 종일 활동하는 ‘앤드류 잭’이 있다. 이전에 “형제들의 종”이었던 ‘게르트 넬’은 지금 71세이지만 아직도 「파수대」를 공용 ‘네델란드’어로 번역하고 있다. ‘일랜쯔포온테인’에 있는 가족은 연합해서 함께 살고 일하므로 행복하다. 가족 중에는 14명의 ‘아프리카’인 형제와 자매들이 들어 있다. 그 성원들이 여러 가지 다른 배경에서 나왔는데도 가정 내에 사랑과 연합의 따뜻한 영이 있다. 영어가 ‘벧엘’ 가정의 공식 언어이지만 그 가족은 여러 언어—‘줄루’어, ‘세소토’어, ‘코사’어, ‘쓰와나’어, ‘세페디’어, 독일어, 희랍어, 공용 ‘네델란드’어, ‘포르투갈’어—로 사람들을 섬기고 있다. 남‘아프리카’에 있는 형제들뿐만 아니라 ‘콩고’(‘킨샤사’, 지금은 ‘자이레’라고 불리우고 있음), ‘모잠비크’, ‘로디지아’, ‘잠비아’에 있는 형제들을 위해 기쁨으로 섬기고 있다. 즉 그들을 위해 인쇄를 한다.
‘노워’ 형제가 ‘일랜쯔포온테인’의 건물 확장의 규모와 형제들 자신이 증축 공사를 할 것임을 밝혔을 때 그 반응은 놀라왔다. 기부금이 사무실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돈을 빌려 주겠다는 제안이 너무 많아서 협회의 지부 사무실은 형제들에게 충분하다고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 그 나라에 ‘시멘트’가 귀하였기 때문에 형제들은 잠언 3:9, 10.
그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시멘트’를 구할 수 있을지 궁금하게 생각하였다. 바로 그때 한 인도인 형제가 그들에게 전화를 걸어 ‘시멘트’ 500부대(각각 50‘킬로그램’)를 기부하겠으니 꼭 받아달라고 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협회를 위해 수송하도록 그들의 ‘트럭’을 제공하였으며 한 형제는 그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벽돌을 64‘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수송해 왔다. 한 ‘아프리카’인 ‘파이오니아’ 자매는 15입방 ‘미터’의 건축용 모래를 배달해 주도록 한 회사에 돈을 지불하였다. 참으로 형제들은 왕국 사업의 확장을 위해서 기꺼이 물질적인 것을 제공하였다.—건축을 위한 전체 기간 중에 많은 자격 있는 건축자와 목수와 전기 기사와 다른 기술자들이 자발적으로 활동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몇달 동안 와서 일하였다. 주말에는 근처 회중들에서 온 수백명의 형제들이 도왔다. 그 반응은 놀라왔다. 청소하는 데 많은 도움이 필요한 건축 활동의 후반에는 그 일을 돕는 사람들이 200명 정도가 되는 때도 있었다. 형제들은 참으로 즐겁게 함께 일하였으며 평화와 연합의 아름다운 영을 그들 모두에게서 뚜렷이 볼 수 있었다.
거의 모든 일을 형제들이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세속 회사가 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즉 설계자, 기술자, 전기 기사, 연관공, 목수 등이 모두 헌신한 형제들이었으며 기꺼이 건축 활동에 참여하였다. 또한 그러한 건축 계획은 여러 인종에 속한 형제들이 왕국 봉사에서 함께 일할 수 있는 훌륭한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인종 분리법 때문에 일반적으로 그들은 각자가 자기의 사회와 언어 집단에 따라 따로따로 모이지만 이곳에서는 ‘아프리카’인, 유색인, 인도인 및 백인 형제들이 이 세상이 결코 성취하지 못한 연합 가운데서 함께 일하고 있었다.
형제들의 관대함이 어느 정도인지 알기 위해서 일층에 ‘콘크리이트 슬라브’를 하던 날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살펴보자. 도우려는 형제들이 많이 있었다. 사실상 너무 많아서 어떤 형제들은 다른 일을 하도록 임명되었다. 아직 어두울 때지만 오전 6:00시에 일이 시작되었으며 그날 오후 4:30까지 184입방 ‘미터’의 ‘콘크리이트’를 부어 ‘슬라브’를 완료하였다. 형제들은 행복하였고 그들 사이에 놀라운 영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노동력을 바치는 것 외에 재정적으로도 기부를 하였다. 그날 일을 마쳤을 때 ‘스라브’하는 데 든 비용이 줄잡아 R3,300정도는 들었는데, 일하는 형제들이 헌금한 돈을 합쳐보니 그 금액보다 더 많았다! 참으로 놀라운 영이었다!
각처에서 지원을 해 주었다. ‘세인트헬레나’ 섬에 있는 어린 두 자매들로부터 마음을 흐뭇하게 하는 서신을 한통 받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였다. “친애하는 형제들, 이 금액을 건축 기금을 위한 기부로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산드라’와 저는 ‘나일론’ 실로 가방을 하나 만들어서 1‘파운드’를 받고 그것을 팔았읍니다. 저는 아홉살이고 ‘산드라’는 여섯살입니다. 그리스도인 사랑을 보냅니다.”
건축 활동은 건축 설계 허가가 나온 1971년 5월 6일에 시작되었다.
10월에 가서 지부 감독자는 12월말까지 건축을 완료하도록 형제들을 재촉하였다. 어떤 형제들은 “서두르는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묻곤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일을 꾸준히 계속하였고 12월말에 가서 건축 공사는 거의 완료되었다. 마지막 손질이나 ‘페인트’칠 등만 남았다. 1972년 1월 30일 일요일에 그 일이 끝났으며 ‘벧엘’ 가족 중 더 연로한 많은 성원들은 ‘벧엘’ 가정의 새 건물에 있는 새롭고 아름다운 17개의 침실 중 얼마로 이동하였다. 이제 공장은 836평방 ‘미터’ 이상이 더 넓어지게 되었다.1971년 1월 31일 월요일 아침에 지부 감독자는 몇 시간 후면 협회장 ‘N. H. 노워’와 ‘브루클린’ 공장 감독자인 ‘M. H. 라슨’이 남‘아프리카’를 방문하려고 ‘잔 스무츠’ 공항에 도착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참으로 뜻밖의 소식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참으로 훌륭한 방문이었다. ‘노워’ 형제와 ‘라슨’ 형제는 그 건물을 보고 즐거워하였으며 2월 2일 수요일 저녁에 새로운 건물의 봉헌식을 위해 참석한 577명의 형제들도 즐거워하였다.
여호와의 백성들이 자신을 즐거이 바쳤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성취되었다. (시 110:3) 이제 그들은 헌신한 사람들의 손으로 건축되었고, 그것도 상업적인 회사가 그 공사를 했을 경우의 비용의 절반 정도 밖에 들이지 않은 아름다운 건물을 가지게 되었다. 그분의 헌신한 종들 사이에 나타난 자진성에 대해 모두는 여호와께 찬양을 드리고 있다.
중립 문제가 다시 대두되다
1972년에 남‘아프리카’에서는 젊은 형제들의 중립 문제가 아주 열띤 논쟁거리가 되었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이전에는 군복무에서 면제되었으나 ‘아프리카’의 많은 정치 활동 때문에 이제 젊은 백인 남자들은 모두 군사 훈련을 받게 되었다. 젊은 형제들이 그런 일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가 수용소에 90일 동안 감금되어 있도록 선고되었으며 그들이 제복 착용을 거부했기 때문에 속옷만 입고 그곳에 감금되어 있곤 하였다. 그러나 90일이 다 차기도 전에 제복을 입으라고 다시 요구되었으며 그들이 거부하면 90일형이 더해졌다. 젊은 형제들은 무한정 감옥에 있을 것 같이 보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문제가 점점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공정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증인을 옹호하는 발언을 하였으며 의회에서까지 그러하였다. 결국에는 법이 개정되었다. 이제는 군사 훈련을 거부하는 형제는 누구나 1년 동안 가 수용소에 감금되도록 형을 받게 되고 그후에는 군복무에서 면제된다. 이전에는 중립을 지키는 그리스도인들이 독방에 감금되었으나 이제 그들은 가 수용소의 한 구획에 있게 되었으며 그곳에서 그들은 ‘럭비’장과 다른 일반 운동 경기장에서 비군사적인 활동을 하는 외에 그들 스스로 정원을 가꾸는 일도 얼마간 하고 있다.
궁핍한 형제들을 도움
1972년 10월 13일 남‘아프리카’의 신문들은 ‘말라위’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한 박해와 그들이 ‘잠비아’로 피신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도하였다. 남‘아프리카’ 지부는 ‘잠비아’ 지부에 연락을 취하여 남‘아프리카’ 형제들이 어떤 방법으로 도와 줄 수 있는지 문의하였다.
현지 상황을 살펴본 후 ‘잠비아’ 지부는 남‘아프리카’로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말라위’ 피난자들에게 비를 막을 수 있는 은신처가 절실히 필요함. 귀 지부는 군용 천막, 두툼한 ‘P. V. C’나 합성수지로 된 ‘시이트’감, 삼베 ‘시이트’나 그와 비슷한 것을 구할 수 있는지? 수입면장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전화로 알려 주기 바람. 약 7,000명 정도됨.” 10월 18일에는 남‘아프리카’ 여호와의 증인의 회중들에게 호소문이 보내졌다. 반응은 신속하였고 아주 훌륭하였다. 전국 각지로부터 돈과 의류가 ‘일랜쯔포온테인’ 협회 사무실로 쏟아져 들어 왔다.
군에서 방출한 방수포를 1,000장 이상 구입하였다. 그 중에는 작은 구멍이 나있거나 찢어진 것이 많이 있어서 그것들을 수선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주말인 10월 21, 22일에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전개되었다. 의류를 적재한 자동차와 운반용 차와 ‘트럭’들의 기다란 행렬이 ‘벧엘’에 도착되었다. 의류를 남자용, 여자용, 소아용으로 구분하기 위해 발송부에 두 구획을 설치하였다. 좋은 물건만 포장하였다. 밖에서는 약 150명의 형제 자매들이 방수포의 터진 곳에 베를 대고 꿰메는 일을 하고 있었다. 10대 이상의 공업용 재봉틀이 쉴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진하였기 때문에 상당수가 돌아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누구나 ‘잠비아’ ‘신다 미살레’의 ‘캠프’에 있는 형제들을 위해 무엇인가 하기를 원하였다.
일요일 아침에 자진적으로 제공한 두대의 ‘트럭’이 도착되었다. 10월 23일 월요일 오후에는 948장의 대형 방수포, 의류를 넣은 157개의 대형 상자 및 나무 상자, 1,111장의 담요, 밧줄, 망치, 톱, 삽 등을 실은 두대의 대형 ‘트럭’이 ‘신다 미살레’의 ‘캠프’를 향해 출발하였다. 두대의 ‘트럭’은 약 34‘톤’에 달하는 짐을 운반하였다. 남‘아프리카’의 형제들은 ‘말라위’ 형제들을 위하여 열렬히 기도하는 외에 그러한 방법으로 도울 수 있음을 참으로 즐거워하였다.
그 주말에 그 ‘트럭’들이 ‘잠비아’에 도착하였다. 한대는 ‘루사카’에서 짐을 내린 뒤에 남‘아프리카’로 돌아왔다. 다른 ‘트럭’은 ‘잠비아’ 형제들이 소유한 다른 5대의 작은 ‘트럭’들과 같이 ‘잠비아’ 형제들이 선물한 식품과 기부금 및 기증한 물품을 싣고 ‘캠프’로 향하였다. 형제들이 기부한 모든 것을 운반하기 위하여 ‘캠프’로 세 차례나 여행을 해야 하였다.
‘트럭’들이 ‘캠프’에 도착되었고 남‘아프리카’와 ‘잠비아’의 동료 신자들이 덮을 것과 의류와 식품을 보냈다는 소식이 ‘말라위’ 형제들에게 전해지자 기쁨의 눈물이 줄줄 흘러 내렸다. 이것은 요한 13:35에 있는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하신 예수의 말씀이 참되다는 구체적인 증거였다.
얼마 있지 않아 형제들은 ‘말라위’로 돌려 보내졌다. 그후 더 심한 박해 때문에 그들은 ‘모잠비크’로 도망하였다. ‘모잠비크’의 ‘캠프’에 있는 그 형제들에게 여러 ‘트럭’에 해당되는 의류와 식품을 전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 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므로 남‘아프리카’ 형제들은 각각 10‘킬로그램’ 짜리 소포들을 만들고 각 소포에 R4.44의 우편 요금을 들여 우편으로 의류를 보내기 시작하였다. 약 16‘톤’의 의류가 그러한 방법으로 보내졌다. 그 외에 형제들은 식품을 구입하도록 돈을 기부함으로써 ‘캠프’로 피신한 ‘말라위’ 형제들을 위해 그들의 진정한 사랑을 나타내었다. 남‘아프리카’의 많은 형제들이 ‘캠프’로 보낸 개인적인 기부 외에 ‘말라위’에 구호품을 보내는 데 142,000‘달러’가 사용되었다. 남‘아프리카’ 형제들은 ‘말라위’ 형제들이 ‘모잠비크’로 왔을 때 그들을 위하여 일할 수 있었음을 기뻐하였으며 그들에 대한 사랑스런 관심은 계속되고 있다.
즐거운 국제적인 행사
남‘아프리카’의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1973년은 국제 대회의 해였다. 무엇보다도 약 1,000명의 남‘아프리카’인들이 국외로 여행하여 ‘유럽’, 영국, 미합중국의 국제 대회에 참석하는 일이 있었다. 그들의 열광은 ‘요하네스버어그’에서 열린 그들 자신의 국제 대회를 위한 열심을 북돋는 데 도움이 되었다. 처음으로 남‘아프리카’에서 국제 대회가 열리게 되었으며 ‘유럽’과 세계의 다른 여러 곳으로부터 많은 방문객들이 올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형제들은 세개의 대회를 갖도록 계획하였는데 하나는 백인 형제들을 위한 것이었고 하나는 유색인과 인도인 형제들을 위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아프리카’인 형제들을 위한 것이었다. 전체 기간 중에 모두가 함께 모이는 대회를 갖도록 허가를 얻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일요일 오후의
한 회기만 그 세 대회를 합칠 계획을 하고 있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첫째로 ‘요하네스버어그’의 ‘아프리카’인 대회 개최에 대한 허가가 나오지 않았다. 따라서 다섯 군데에 ‘아프리카’인들의 대회가 계획되었다. 그것은 패배가 아니라 여호와의 백성들을 위한 축복이 되었다. 참석하지 못할 많은 ‘아프리카’인 형제들이 가까운 대회에 갈 수 있는 경비는 담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점들이 또 있었다. 그 나라에서의 군대 문제로 인해서 내무부는 여호와의 증인들을 좋지 않게 보고 있었다. 그 결과 여호와의 증인의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오는 많은 방문객들에게는 ‘비자’를 내주지 않았다. 그 중에는 미국 지부 감독자 ‘밀튼 헨첼’과 협회의 재정 비서인 ‘그란트 수터’도 들어 있었다. 남‘아프리카’ 형제들은 몹시 실망하였다.
그래도 그 대회들은 하나님의 승리였다! 많은 ‘유럽’ 형제들이 관광객으로 입국하여 남‘아프리카’ 형제들과 훌륭한 교제를 즐겼다. ‘요하네스버어그’ 지역의 ‘아프리카’인 대회는 ‘요하네스버어그’ 동쪽 32‘킬로미터’ 쯤에 있는 ‘베노니’라는 도시로 이동되었다. 1974년 1월 6일 일요일 오전 9:00시에 ‘프로’가 시작되어 12시에 끝났다. 사전에 모든 준비를 하였으며 12시와 3시 사이에 ‘요하네스버어그’의 두 대회 및 ‘베노니’ 대회에 모인 모든 형제들이 마지막 전체 회기를 위해 ‘란드 스타디움’으로 가게 되었다. 세 곳에서 한 군데로 즉 ‘란드 스타디움’으로 순조롭게 이동되는 것에 모두가 놀랐다. 그들은 차와 ‘버스’와 기차를 타고 ‘란드 스타디움’이 꽉 찰 때까지—참석수는 총 33,408명이었다.—줄을 이어 계속 그곳으로 몰려 들었다. 서 있는 사람이 많았다.
그곳의 여호와의 증인들이 그들의 ‘아프리카’인, 유색인, 백인, 형제들 모두가 여호와의 숭배에 함께 연합되어 있는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인종 차별이 없었다. 영어를 아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앉을 수 있었고 그 형제들은 그러한 기회를 이용하여 다른 인종에 속한 형제들과 함께 앉았다. ‘줄루’어 사용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줄루’어 구획에 그리고 ‘세소토’어를 말하는 사람은 ‘세소토’어 구획에 앉을 수 있었다. 공용 ‘네델란드’어 및 ‘포르투갈’어 구획도 있었다. 그것은 참으로
“중다한” 잡족이었으며 모두는 참으로 행복하였다. 사실상 그들은 너무나 즐거워서 많은 박수 갈채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형제들이 그렇게 행복해 본 일이 없었으며 그때가 “잊을 수 없는” 오후였다고 묘사하는 사람이 많다.어떻게 그런 일이 있게 되었는가? 하나님의 인도 아래 그리고 그런 점을 깨닫지 못했으나, 그들은 국제적인, 각 인종이 모이는 대회들을 위해서 마련되어 있는 ‘요하네스버어그’의 한 ‘스타디움’을 예약하였다! 그 한번의 회기를 위해서는 허가가 필요치 않았다. 모든 “하나님의 승리” 대회의 공개 강연 참석자 총수는 56,286명이었고 1,867명이 침례를 받게 되었다.
유례 없는 격지 구역 운동
1974년은 왕국의 좋은 소식의 전파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해였다. 증인들은 남‘아프리카’의 광대한 농토와 ‘아프리카’인들의 “고토”에 사는 사람들에게 이르려고 노력하였다. 그러한 곳 중에는 증거를 전혀 받아보지 못한 곳도 있다. 그러므로 격지 구역 운동 중에 그러한 모든 사람들에게 이르도록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도시 회중들은 수백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구역 임명을 기꺼이 받아 들였다. 농장에 있는 모든 ‘아프리카’인 마을들과 각 ‘유럽’인 농가가 표시된 특별한 지도를 구하였다. ‘유럽’인 회중들은 ‘아프리카’인 거주자들에 대한 증거를 포함하여 모든 농장을 도는 일을 하였다. ‘유럽’인들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아프리카’인들이 사는 곳에서는 ‘유럽’인 전도인들이 작은 ‘카세트’ 녹음기를 사용하여 그 사람들의 언어로 미리 녹음된 연설을 틀어주었다. 출판물의 수요가 많아져서 그 운동 기간 중에 거의 모든 대책이 바닥이 났다. ‘아프리카’인 회중들은 ‘유럽’인들이 들어갈 수 없는 “고토”에 집중하였다. 석달 동안의 그 운동 기간에 수십만 부의 잡지 외에도 140,000부의 대책과 92,000부 이상의 소책자를 배부하였다. 얼마의 특별 ‘파이오니아’ 집단은 격지 구역 운동 기간 중 그들에게 임명된 모든 농장에 가기 위해서 14,400‘킬로미터’ 이상을 여행하였다.
1974년 봉사 연도말에는 4,055명의 침례자 신기록과 평균 14‘퍼센트’가 증가된 28,397명의 최고 전도인을 보고하게 되어 그들은 흐뭇하였다. 「왕국 소식」 전도지 배부는 그러한 활동을 더욱 촉진하였다.
계속적인 하나님의 축복의 증거
왕국 전파 활동은 꾸준히 발전되고 있다. 자, 1975년 6월초까지 그 봉사 연도 중에 2,462명이 이미 침례를 받았다. 그 지부가 책임맡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르기 위해서 1974년중보다 더 광범위한 격지 구역 운동이 계획되었다.
그 동안 잡지 생산은 ‘일랜쯔포온테인’의 공장, 숙소, 사무실들이 비좁아 다시 확장해야 될 정도로 증가되었다. 이 보고서를 작성할 때 그 확장 계획이 세워지고 있었다. 식당, 부엌과 세탁실을 두배로 하고, 공장을
1858평방 ‘미터’ 더 늘리고, 372평방 ‘미터’의 새로운 사무실 건물을 짓고 커다란 새로운 왕국회관을 포함한 증축 계획을 세우고 있다.형제들은 여호와께서 축복하시는 모든 증거를 보고 기뻐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적들로부터 반대를 기대해야 함을 알고 있다. 현재 그들은 종교적인 노래를 부르지 않고 거짓 종교 조직의 기도에 참여하지 않고도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아프리카’인 학생들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서 ‘요하네스버어그’의 최고 재판소에 제기한 법정 사건으로 부산하다. 많은 ‘유럽’인 증인 자녀들도 퇴학 당하고 있으나 이유는 다르다. 군대식 행진, 기에 대한 경례나 국가를 부르는 것에 참여하기를 거절하기 때문이다. 그 문제들의 결과가 어떠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여호와의 인도를 신뢰하고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일에서 계속 전진할 각오가 되어 있다.
‘존스튼’ 형제가 사용하던 조그만 사무실에서 1910년에 한 사람으로 출발한 처음 지부를 생각해 보고 오늘날의 훌륭한 ‘벧엘’ 및 ‘로디지아’, ‘잠비아’, ‘자이레’, ‘케냐’, ‘말라가시’와 ‘모리시어스’에 생긴 새로운 지부들과 그것을 비교해 보면 참으로 큰 차이를 느끼게 된다! 1924년에 ‘브루클린’에서 보내 왔고 ‘필립스’ 형제에 의해 설치된, 수동식 소형 평판 인쇄기를 생각하고 왕국 잡지들과 기타 서적들을 굉장하게 생산해 내는 기계들로 가득찬 이곳의 인쇄 공장을 구경해 보면 그것이 참으로 확장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별개의 가정들에서 거주하던 21명으로 이루어진 1951년의 조그만 ‘벧엘’ 가족을 생각해 보고, 연합되어 있는 행복한 110명의 형제 자매들로 이루어진 오늘날의 가족을 고려할 때 참으로 많이 성장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931년에는 이곳 지부 사무실의 관할하에 있는 모든 구역에 단지 100명의 전도인 밖에 없었는데 오늘날에는 그 동일한 지역에 좋은 소식의 전도인들이 140,000명 이상이 있음을 생각할 때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함으로 가득하게 된다! 과거에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과 같이 오늘날 그분이 하시는 일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라고 한 시편 필자의 말을 그들이 인용하는 것은 적절할 것이다!—시 118:23.
[164면 삽화]
1952년의 ‘일랜쯔포온테인’ ‘벧엘’
[210, 211면 삽화]
남‘아프리카’ ‘일랜쯔포온테인’에 있는 ‘왙취 타워’ 협회 사무실과 인쇄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