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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와 그 인근 지역 (1부)

남‘아프리카’와 그 인근 지역 (1부)

남‘아프리카’와 그 인근 지역 (1부)

소란한 도시들과 숲속의 벽촌, 현대적인 주택들과 초라한 ‘아프리카’의 오두막이 흥미있는 대조를 이루고 있는 지방으로 가보도록 하자. 여러 인종들을 볼 수 있다. 수백만명이 영어나 (고대 ‘네델란드’어에서 유래한) 공용 ‘네델란드’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곳에 사는 26,000,000명의 거민 중 다른 사람들은 ‘코사’어나 ‘줄루’어에 능통하다.

여기가 바로 남‘아프리카’이다. 그 면적은 1,220,000평방 ‘킬로미터’이고, 흥미있고 애교가 많은 사람들의 보금자리이기도 하다. 영적인 선한 것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그러한 그들의 욕망은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이 전하는 성서 진리를 통해 충족되고 있다.

먼저 간단히 역사를 살펴보자. 18세기와 19세기에 남‘아프리카’에서는 많은 전투가 있었다. 흑인 “세력”은 중앙 ‘아프리카’에서 남쪽으로 이동해 오고 백인 “세력”은 ‘케이프’로부터 북쪽으로 퍼져 나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서로 충돌하여 무서운 유혈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가장 심했던 것으로는 1899-1902년에 영국인들과 ‘네델란드’ 농부들인 ‘보어’인들 사이에 벌어진 영-‘보어’ 전쟁을 들 수 있다. 그 결과 ‘나탤’, ‘오린지’ 자유주, ‘트랜스바알’, ‘케이프’ 등 네 군데의 식민지가 영국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1910년 그 지역이 한 나라를 형성하게 되었다. 반 세기 후인 1961년 그 나라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되었다. 그것은 백인의 다수표에 의해 그렇게 되었다. 흑인들에게는 ‘아프리카’의 각 부족을 위한 거대한 구역 즉 그들의 “본토”에 살고 있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투표권이 없다.

전국을 대략 살펴봄

그러면 이제 남‘아프리카’ 전체를 신속히 여행해 보자. 그 대륙의 남단에 있는 ‘케이프타운’에서 출발하자. ‘케이프타운’은 그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로 입법부 수도이다. 북동쪽으로 800‘킬로미터’ 이상을 가면 ‘블루움포온테인’이라는 ‘오린지’ 자유주의 수도가 있는데, 그 도시는 그 나라의 사법부 수도로 간주된다. 북동쪽으로 더 가면 ‘프리토리아’가 있는데 그곳은 ‘트랜스바알’의 수도로서 그 나라 행정부 수도이다.

남‘아프리카’의 주된 지형적인 특징은 내륙에 있는 고원이다. 동쪽 해안에 있는 평야로부터 급격히 땅이 솟아올라 높이가 1.500‘미터’ 내지 3,300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산맥을 형성하고 있다. 고원의 경사도는 서쪽으로 갈수록 완만해진다. 한 때는 그 대부분이 ‘아프리카’산 들소, 얼룩말, 영양 및 기타 아름다운 동물들이 큰 떼를 지어 우글거리던 파상형의 초원이었다. 오늘날에는 내륙의 대부분이 농지로서 대부분의 야생 동물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크루거’ 국립 공원과 같은 동물 보호 지역에서나 볼 수 있다. 그러나 북쪽으로 내륙 깊숙히 들어가면 땅이 더 건조해져서 ‘칼라하리’ 사막을 이루고 있다. 북동쪽에는 관목들이 많은 총림 지대가 있다.

‘오린지’ 자유주의 ‘킴버얼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다이야몬드’ 광산이다. ‘트랜스바알’에는 그 나라 최대의 도시이며 일련의 광산촌들 즉 “광맥”의 “여왕”으로 알려져 있는 ‘요하네스버어그’가 있다. 그 광맥을 1886년 그 지역에서 금을 발견함으로써 찾아내게 되었다. ‘요하네스버어그’에서 남동쪽으로 공로(空路) 480‘킬로미터’ 이상을 가면 인도양을 접한 해안에 ‘더어반’이 있는데 그곳에서는 다채로운 ‘사리’를 입은 많은 인도 여인들을 볼 수 있다.

적어도 9개의 부족에 속한 1,250만명의 ‘아프리카’인들이 남‘아프리카’에 살고 있다. ‘코사’족과 ‘줄루’족이 가장 큰 부족인데 그 수는 각각 3백만명 이상이 된다. 그 다음이 ‘바수토’족이고 그 다음이 ‘쓰와나’, ‘쏭가’, ‘스와지’, ‘응데벨레’, ‘벤다’ 및 기타 부족의 순서이다. ‘아프리카’ 인구의 거의 절반 이상이 ‘아프리카’의 각 부족에게 지정된 넓은 구역인 ‘아프리카’인 “본토”에 살고 있다. 일반적으로 그러한 “본토”와 보호 구역의 생활 방식은 아주 원시적으로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로 토벽으로 지은 초가 오두막에 살고 있다. 나머지 ‘아프리카’ 인구는 시 당국이 ‘콘크리이트’와 벽돌로 작은 집들을 지어 놓은 ‘소웨토’ 등의 ‘아프리카’인 지구에 거주하고 있다. 그러한 지구들은 ‘유럽’인들의 도시나 마을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정부의 정책은 각 인종 집단이 별도로 독립하여 발전하게 하는 것이다. 남‘아프리카’는 인종 차별 정책 혹은 인종 분리 정책으로 인하여 심한 비난을 받아왔다.

그리스도교국의 주요 종파 외에도 ‘아프리카’인들은 그들 자신의 종교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교국의 주요 신앙이 그들 사이에 나타나고 있을 뿐 아니라 많은 ‘아프리카’인 교직자들은 규모가 작은 그들 자신의 종파를 만들었다. 그 결과 남‘아프리카’는 세계에서 가장 종파가 많은 곳이 되었다.—적어도 2,000종파나 된다! 그리스도교국의 교회에 나간다고 말은 하면서도 대부분의 ‘아프리카’인들은 아직도 어떤 형태의 조상 숭배를 행하고 있으며 죽은 자들을 두려워하며 살고 있다. 그것은 “본토”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다. 많은 현대적인 ‘아프리카’인들이 최신형 자동차를 몰고 다니면서도 죽은 조상의 영을 달래기 위해서 때때로 염소를 희생으로 바친다.

금세기 초로 돌아가 봄

금세기 초 남‘아프리카’의 인구는 얼마 안 되었고, 생활의 속도는 느렸으며 생활 상태는 훨씬 더 단조로왔다. 그 나라는 영-‘보어’ 전쟁에서 회복되고 있는 중으로서 그 때는 좋은 소식이 이 매혹적인 땅에 이르도록 무르익은 때였다.

1902년에 ‘네델란드’계 신교 교직자 한 사람이 ‘트랜스바알’의 도시인 ‘클레르크스도르프’에서 활동하도록 ‘네델란드’로부터 파견되어 왔다. 그는 「성경 연구」, 영문 「시온의 파수대」 한 부, 「지옥에 관하여 성서는 무엇이라고 말하는가?」라는 소책자를 포함한 낡은 종교 서적이 들어 있는 큰 상자 하나를 가지고 왔다. ‘프란스 에버손’과 ‘스토펠 포우리’는 ‘클레르크스도르프’에서 그 교직자를 만났다. 그들은 그의 도서실을 구경하게 되었는데, 그들이 그 출판물들에 크게 흥미를 느끼는 것을 보고 모아 놓은 책들 중에서 그것들을 가져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이들은 그 출판물들에 담겨있는 진리에 깊은 감명을 받아 새로운 회중을 형성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들은 그 회중을 “볼하이트 반 크리스투스”(그리스도가 충만함)라고 불렀다. 그것은 남‘아프리카’에서의 왕국 소식을 위한 첫 발판이 되었다.

그 두 사람은 집회를 갖기 시작하였으며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 호별 방문 활동을 시작하였다. ‘프란스 에버손’은 1903년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의 초대 회장인 ‘C. T. 러셀’에게 편지를 내어 “순례자” 즉 협회의 특별한 대표자를 남‘아프리카’에 파견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러셀’ 형제는 아직 환경이 그것을 허락지 않지만 가능한 한 속히 그러한 마련을 하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1906년에는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우’에서 ‘더어반’으로 이민 온 두 자매가 좋은 소식을 열심히 전하였다. 얼마 있지 않아 그 도시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진리에 관심을 갖게 되어 1906년말까지는 남‘아프리카’에 「시온의 파수대」 예약자가 40명이 되었다.

1907년에는 ‘조셉 부스’라는 교직자가 남‘아프리카’에서의 왕국 활동 무대에 등장하였다. 영국에서 태어나서 29세 되었을 때 ‘뉴우질랜드’로 이주하였고 거기에서 목양업을 하다가 후에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사업을 하게 되었다. 그는 침례교에 나가게 되었으며 얼마 후 ‘아프리카’에서 선교인으로 봉사하려는 사명감을 느끼게 되어 1892년 선교인으로 혼자 ‘니아살랜드’(지금의 ‘말라위’)에 도착하였다. ‘부스’는 ‘아프리카’인들에 대한 평등 사상과 “‘아프리카’는 ‘아프리카’인에게”라는 사상에 깊이 빠져 들게 되었다. 그는 여러 가지 “산업 선교단”을 세웠다.

1900년경 ‘부스’는 자기가 설립한 대부분의 선교단과 관계를 끊고, 미국에 수차 여행을 다녔는데, 거기에서 제7일 침례교로 개종하였다. 그는 그후 얼마 있지 않아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그 안식일파 조직의 선교단을 세우고자 ‘니아살랜드’로 돌아왔다. 얼마 안있어 그는 제7일 침례교와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그후 그는 제7일 재림교도들과 관련을 갖게 되었고 그들을 위한 선교단을 세웠다. 그는 정부 당국자들의 눈에도 벗어나게 되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아프리카’의 사회적인 변화를 가져오려는 그의 계획을 아주 싫어하였기 때문이다. 1906년에 ‘부스’는 ‘그리스도의 교회’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영국 ‘그리스도의 교회’로부터는 배척을 당하였으나 ‘케이프타운’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 남‘아프리카’ 지부로부터는 어느 정도 호응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부스’는 ‘니아살랜드’에 선교단을 세우는 데 그들을 도왔다. 「인디펜던트 아프리카」라는 출판물에 의하면 ‘부스’는 “종교적인 무임 편승자”처럼 여러 종파를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

1906년말 그 당시 ‘스코틀랜드’에 있었던 ‘부스’는 ‘러셀’ 형제가 저술한 몇 가지 서적을 읽게 되었다. 그는 곧 미국으로 건너갔다. ‘부스’는 ‘러셀’ 형제와 회견하였으며 그것은 아주 흥미롭고 중요한 토론이었다. ‘러셀’ 형제는 ‘부스’의 배경과 ‘아프리카’를 ‘아프리카’인들에게 회복시키려는 그의 계획을 거의 알지 못하였다. ‘러셀’ 형제는 ‘부스’가 이미 ‘니아살랜드’의 관리들과 백인들이 꺼리는 인물이며 그가 자기의 술책을 위하여 이미 여러 종교 조직을 이용했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러셀’ 형제는 넓은 새로운 밭을 개척할 사람을 찾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서 협회는 그가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선교인으로 봉사하도록 ‘부스’의 경비를 얼마 동안 대 주었다.

그 결과 많은 어려움이 생기고 협회의 이름에 많은 욕이 끼쳐지리라는 것을 ‘러셀’ 형제는 전혀 예측하지 못하였다. 어쨌든 1907년초 ‘조셉 부스’는 ‘아프리카’로 돌아가서 ‘케이프타운’과 그 나라의 다른 지방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서신과 인편으로 ‘니아살랜드’ 밭과 긴밀한 접촉을 유지하였고 그곳에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지만, ‘부스’는 ‘니아살랜드’에서는 환영을 못받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상당히 오랫 동안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은 것 같다.

1908년 6월 1일호 「시온의 파수대」에 실린 ‘러셀’ 형제에게 보낸 ‘L. 드비어’의 편지를 보면 어떤 일이 진행되고 있었는지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그 내용을 발췌해 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당신이 저술한 여섯 권의 책에 깊은 흥미를 느끼고 있으며 나와 같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두 형이 있읍니다. 한 사람은 ‘네델란드’계 교회의 교직자인데 그는 독서가일뿐 아니라 사상가이기도 합니다. 그는 퇴직한 명예 교수로서 ‘트랜스바알’의 ‘프리토리아’에 살고 있는데 필요할 때는 전파도 하면서 ‘네델란드’계 교회 신문을 편집 발행하고 있읍니다.

“그리고 ‘부스’ 형제의 벗이자 저의 벗이기도 한 (우리가 살고 있는 교외 주택 지구의 하나인) ‘윈베르그’의 독립 조합 교회의 교역자 ‘J. H. 오르’가 있는데 그는 이미 당신의 저서에 담긴 새로운 진리를 어느 정도 전파하고 있읍니다.

“소식을 듣게 될 것입니다만, 모두가 천년기 소식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저도 그 중 한사람인 아주 아담한 작은 집단—5명은 ‘유럽’인이고, 29명은 원주민—이 유월절 기념을 위해 ‘오르’ 형제의 교회에서 모였읍니다. 그 의식은 세 가지 언어로 진행되었읍니다. 그 시간은 중대하고 인상적인 시간이었으며 우리 생애에서 새로운 기원을 이루는 시간이었읍니다.”

남‘아프리카’에서의 활동에 관한 다른 소식이 1909년 1월 15일호 「파수대」에 실려 있다. 그 보고는 다음과 같다. “원주민들에게 진리를 전파하고 있는 흑인 형제가 세명 있다. 그 중 한사람은 북쪽으로 3,20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자기 고향으로 가서 소식을 전하였다. 젊은 형제이지만 몇 가지 원주민 언어를 말할 수 있으며 영어도 유창하게 쓸 수 있다. 그가 보낸 최근의 보고는 아주 격려적이다. 원주민들이 커다란 즐거움을 주는 좋은 소식 즉 회복의 소식에 대하여 귀를 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쪽으로 3,200‘킬로미터’를 여행하여 자기 고향으로 갔다는 그 ‘아프리카’ 젊은이는 ‘엘리오트 캄와나’이다. ‘캄와나’는 ‘통가’족으로 ‘니아사’ 호 서안의 ‘반다웨’에 있는 (‘스코틀랜드’ 장로교의) ‘리빙스톤’ 선교단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1900년 ‘니아살랜드’ ‘블랜티르’에서 ‘부스’를 만났으며, 2년 후 ‘부스’가 세운 제7일 선교단 중의 하나에서 침례를 받았다. 그는 후에 남‘아프리카’로 와서 얼마 동안 광산에서 일하다가 그후 ‘케이프’에서 ‘부스’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캄와나’는 몇달 동안 ‘부스’와 함께 머물면서 얼마간 가르침을 받고 그의 고국인 ‘니아살랜드’로 돌아간 것 같다. 1909년 7월 1일호 「파수대」에서 ‘부스’는 ‘요하네스버어그’와 ‘프리토리아’의 ‘아프리카’인들에게 전도지를 배부한 것에 대해 기술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고국인 ‘니아살랜드’에서 ‘엘리오트 캄와나’가 전파하는 것을 들은 그 동일한 소식이 이곳에서도 전파되고 있다는 점에 대해 아주 즐거워하고 있다.

“여기에 온지 석달 밖에 안된 어떤 사람은 하루에 ‘엘리오트’가 300명에게 침례주는 것을 보았다고 전한다. 다른 한 사람은 한 곳에 700명의 신자가 있었다고 귀띔해 주었다. 그 외에도 나는 「하나님의 경륜」을 장로교나 성공회보다 더 좋은 것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그 나라의 약 30개 지역에 3,000명 정도는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 그들 모두가 위에 언급한 정도는 아닐지 모르지만, ‘엘리오트’ 형제는 어느 정도 관심을 가진 사람이 9,000명 정도 된다고 보고하였다.”

‘러셀’ 형제는 그 보고의 끝 부분에서 ‘니아사’ 호 ‘반다웨’의 ‘칼빈’파 ‘스코틀랜드’ 선교사들의 선동에 의해 ‘엘리오트 캄와나’가 체포되었다는 아주 최근의 소식도 포함시켰다. ‘러셀’ 형제는, “‘캄와나’ 형제는 작년에 9,126명에게 침례를 주었다”는 간단한 말로 그 보고를 마쳤다.

이 기이한 인물에 대하여는 논평이 없다. 그 당시 미국 전체를 통해서도 침례받은 사람 수가 그보다 훨씬 적었다! 그런데 ‘캄와나’는 어떻게 그러한 일을 해 내었는가? 어떤 방법을 사용하였는가?

“‘왙취타워’ 운동”이 시작되다

사실상 ‘부스’나 ‘캄와나’가 진정으로 큰 ‘바벨론’ 즉 거짓 종교를 떠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성경 연구생이나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이 된 것은 아니었다. ‘왙취 타워’ 협회와 그들과의 관계는 짧았고 피상적인 것이었다. 1900년대 초의 진리와 관련된 사건들을 기억하고 있는 ‘마아저리 홀리데이’ 부인에 의하면 ‘더어반’의 이층 방에서 가진 형제들의 집회를 ‘조셉 부스’가 고의적으로 자주 방해하였다고 한다. 그리스도인 자매 ‘홀리데이’의 말을 들어 보자: “예를 들어 우리가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됨’이라는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 그는 밖에서 ‘율법에서 자유롭게 되지 않음’으로 응수하곤 하였다.”

그러므로 ‘부스’의 영적 도제인 ‘엘리오트 캄와나’가 협회 출판물에 들어 있는 진리에 대해 아주 잘못 생각했으리라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니아살랜드’로 돌아가서 그가 무엇을 전파했는지는 지금에 와서 정확하게 말할 수 없다. 그의 활동의 독특한 특징은 야외에서의 극적인 침례였음이 확실한 것 같다. 그러나 ‘캄와나’가 행한 그러한 침례는 여호와의 종들인 참 그리스도인 침례와 전혀 관련이 없었다. 그가 말한 것이나 그가 사용한 방법이 무엇이든지 간에 ‘캄와나’의 활동은 단지 짧은 기간 즉 대략 1908년 9월부터 1909년 6월까지 계속되었으며, 그때쯤 정부가 개입하여 그를 투옥시켰고 후에 ‘세이셀’ 제도로 추방하였다. 그는 1937년에 이르러서야 ‘니아살랜드’로 돌아오는 것이 허락되었으며 그때 그는 거짓된 “‘왙취타워’ 운동” 단체의 지도자로 계속 행세하고 있었다.

‘캄와나’의 활동 결과로 중앙 ‘아프리카’에서 오랫 동안 아주 혼란스러운 상태가 계속되었다는 것은 아주 유감스러운 일이다. ‘러셀’ 형제의 저서를 약간 사용하는 운동 단체들이 생겨났다. 그러한 단체들은 그들 자신의 사상과 방법을 약간의 진리와 혼합시켰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곁길로 인도되었다. 그러한 단체들이 전부 “왙취타워”나 “왙취타워 협회”라는 이름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사실상 ‘캄와나’가 이끄는 단체가 나중에 “‘왙취맨’ 설교단”이란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여러 해 후인 1947년 그러한 거짓된 ‘왙취타워’파가 아직도 상당한 혼란을 야기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니아살랜드’에서의 왕국 전파 활동을 책임 맡고 있던 형제들은 ‘캄와나’에게 서신을 보냈다. ‘캄와나’는 자기가 쓴 답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니아살랜드’에 사는 흑인들과 ‘유럽’인들은 ‘왙취맨’ 선교단이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와 분리된 별개의 단체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왙취맨’ 선교단(‘음론다’ 선교단)은 풍문과 관련해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실을 살펴볼 때 ‘캄와나’는 결코 참다운 여호와의 헌신한 종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가 거짓된 여러 “‘왙취타워’ 운동” 단체들을 형성하거나 만들어 낸 것으로 보인다. 그 모든 단체들은 1909년에 행한 그의 “불같은” 활동으로 시작된 것 같다. 그 당시 ‘니아살랜드’에 살았던 ‘요하네스버어그’의 ‘아프리카’인 형제 ‘응굴루’는 ‘캄와나’의 활동을 “요원의 불길”에 비유하였다. 그 당시 일자리와 더 나은 보수를 위해 ‘니아살랜드’로부터 이주해 오는 원주민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러므로 그러한 통로를 통해 거짓된 “‘왙취타워’ 운동”이 ‘로디지아’, ‘콩고’ 및 남‘아프리카’로 번지게 되었음이 분명하다.

‘더어반’에서 소식이 전파되다

이제 1906년의 ‘더어반’으로 가보자. ‘마아저리 홀리데이’와 그의 어머니는 ‘몰톤’ 부인의 이웃집에 살고 있었다.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우’에 사는 ‘아아노트’ 자매는 자기의 친 언니인 ‘몰톤’ 부인에게 전도지와 쪽지를 꾸준히 보내오고 있었다. 한편 ‘몰톤’ 부인은 그 전도지들을 ‘마아저리 홀리데이’의 어머니 ‘애그니스 배러트’ 부인에게 전해 주었고, 결국 그 두 사람은 진리를 받아 들이게 되었다. 그때 그곳에는 ‘스코틀랜드’에서 온 ‘테일러’라고 하는 자매도 있었다. 조금 후에 ‘아아노트’ 자매와 그 가족이 ‘글래스고우’로부터 와서 ‘더어반’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홀리데이’ 자매에 의하면 사실상 ‘더어반’에서 활동을 시작한 것은 ‘아아노트’, ‘테일러’, ‘몰톤’, ‘배러트’ 자매 등이었다고 한다. 그들이 진리를 전한 주된 방법 중의 하나는 해변에서 사람들에게 전도지와 쪽지를 전해 주는 것이었다.

‘마아저리 홀리데이’ 자신도 10세 때에 장로 교회에 탈퇴서를 내고, 큰 ‘바벨론’과의 관계를 끊음으로써 자기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그 자매는 1910년에 미국인 흑인 ‘화이터스’ 형제가 ‘더어반’의 작은 집단에 연합하게 되었다는 점도 알려주고 있다. ‘홀리데이’ 자매는 그 형제가 ‘더어반’에서 아주 훌륭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그 자매는 한 가지 아주 놀라운 사건을 언급하고 있다. ‘화이터스’ 형제가 아마 ‘러셀’ 형제에 의해 미국으로 돌아오도록 지시를 받은 것이 분명하였다. 그러나 그 배가 ‘더어반’을 떠난지 얼마되지 않아 그는 ‘부스’에 의해 납치되어 어떤 방에 감금되었다! (‘부스’가 왜 그런 짓을 하였는지 그 이유는 분명치 않다.) 어쨌든 그곳 자매들은 가까스로 ‘화이터스’ 형제가 감금되어 있는 것을 알아 내었고, ‘배러트’ 자매는 그를 풀어주고, 안전하게 보호하여 그가 배를 탈 수 있도록 부두로 데려 가는 데 성공하였다.

1910년까지 상당히 좋은 씨가 뿌려졌다. 그러나 남‘아프리카’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니아살랜드’의 상태는 좋지 않았으며, ‘더어반’에서는 ‘부스’가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장성되고 신뢰할 만한 어떤 사람이 그 넓은 밭의 왕국 활동을 감독하는 것이 절실히 요청되었다.

전환점

1910년에는 남‘아프리카’의 왕국 활동에 새로운 장이 열렸다. 그 때쯤에는 협회와 ‘부스’와의 관계는 끊어졌다. 그해 중간쯤 ‘러셀’ 형제는 아마 30대 초였을 ‘윌리암 W. 존스튼’을 파견하였다. 그는 ‘글래스고우’ 태생의 ‘스코틀랜드’인으로 침착하고 주의 깊고 신뢰할 만한 사람으로서 변덕스럽고 기괴한 ‘부스’와는 아주 대조적이었다. ‘존스튼’ 형제는 ‘글래스고우’에서 수년 동안 장로로 일하였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한 연구생이자 훌륭한 연사였다. 그는 ‘부스’의 이기적인 이용으로 심히 흔들린 ‘아프리카’의 밭에 참으로 필요한 “사람으로 된 선물”이었다. (에베소 4:8, 신세) ‘존스튼’ 형제의 주된 임무는 ‘니아살랜드’로 가서 그곳의 상태를 조사하고 형제들에게 도움을 주어야 하는 것이었다.

1859년 ‘니아사’ 호를 처음 발견한 백인은 유명한 탐험가이자 선교사인 ‘데이비드 리빙스턴’이다. 그후 그 나라는 ‘스코틀랜드’ 장로 교회 및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선교사들에 의해서 백인 정착지로 개척되었다. 1891년에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고 영령 중앙 ‘아프리카’의 일부가 되었다. ‘존스튼’ 형제가 여행할 당시 ‘니아살랜드’의 인구는 약 1백만 정도였고 백인 거주자들도 극소수였다.

‘존스튼’ 형제는 ‘니아살랜드’에서 약 4개월을 지낸 뒤 100여개의 부락에 그만한 수의 교회가 있으며 “이미 있는 진리”에 충성을 약속한 원주민들도 수천명이 된다고 보고하였다. (베드로 후 1:12) 그는 “진리를 굳게 잡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전반적인 영을 보고 크게 실망하였다.

‘존스튼’ 형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모든 교역자들과 선생들을 위해 그리고 돈이 잘 벌리는 직장을 협회에서 마련해 주기 위해 내가 돈을 두둑히 가져왔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러한 그들의 생각을 바로 잡지 않으면 안되었다. ··· 유감스러운 말이지만 개개인 형제들과 만나서 이야기해 보면 거의 언제나 그들과의 대화는 어떤 형태로건 경제적인 도움을 요청하는 것으로 끝나게 되었다.” 그는 ‘부스’의 영향이 “‘니아살랜드’의 활동에서 현저히 나타난다”는 점도 깨닫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매주 안식일을 지키고 있었다. ‘존스튼’ 형제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그 문제와 관련하여 진리를 알리고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였으며 하나님의 은총으로 적어도 그들 중 얼마를 속박에서 구출해 낼 수 있었다.”

안식일에 대한 그들의 문제를 제거한 후, ‘존스튼’ 형제는 어떤 형태로든지 조직을 설립하고자 노력하였으며 몇몇 원주민을 선택하여 가르치는 자로 일하게 하였다. 그는 또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더 깊은 것을 알고자 하는 강한 욕망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남‘아프리카’로 돌아간 후 얼마 동안은 ‘니아살랜드’에 있는 그 사람들 중 얼마로부터 보고를 받았으나 몇년 후에는 연락이 거의 없게 되었다. ‘부스’와 ‘캄와나’에 의해 시작된 운동을 15년 동안이나 거의 방치 상태에 놓아 두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으로 인하여 거짓된 그 지방 특유의 “‘왙취타워’ 운동” 단체들이 생겨나게 되었음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광대한 구역을 관할하는 조그만 지부 사무실

1910년 ‘더어반’으로 돌아간지 얼마되지 않아 ‘존스튼’ 형제는 ‘러셀’ 형제로부터 그곳에 ‘왙취 타워’ 협회의 지부 사무실을 개설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한 사람으로 구성된 새로운 지부는 ‘더어반’에 있는 학교 근처의 작은 방 하나에 불과하였다. 그 방은 사무실로 사용되었으며 때때로 집회 장소로도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 사무실이 관활하는 구역은 광대하였다. 간단히 말하자면, 적도 남부에 있는 ‘아프리카’ 전체가 그 밭이었다. 사실상 그 지부의 관활하에 있는 어떤 구역 즉 ‘콩고’, ‘우간다’, ‘케냐’ 등은 적도 위로 훨씬 넘어가 있다. 또한 인도양 상에 멀리 떨어져 있는 ‘모리시어스’ 섬과 ‘모잠비크’ 연안에 있는 거대한 ‘마다가스카르’ 섬(‘말라가시’ 공화국),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대서양 상의 ‘세인트헬레나’와 ‘기니아’ 만에 있는 ‘상토메’ 도가 포함된다. 그러나 예언자 ‘스가랴’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스가랴 4:10.

노력에는 결실이 있었다

‘화이터스’ 형제와 같은 겸손한 사람들의 활동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 언젠가 그는 ‘더어반’에 있는 어떤 집을 방문하여 「성경 연구」 한 ‘세트’를 전하였다. 그것을 받은 그 부인 자신은 그 책을 읽지 않았으나 그 후에 그 부인의 딸 ‘톰프슨’ 부인이 ‘글래스고우’에 가면서 항해 중에 그 책을 읽었다. ‘글래스고우’에 있는 동안 어떤 사람이 그 부인의 집을 방문하여 ‘차알스 T. 러셀’의 강연을 광고하는 쪽지를 남겨 두고 갔다. ‘톰프슨’ 부인은 강연을 들으러 갔으나 사람들이 너무 많아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형제들이 연주석을 트기로 했기 때문에 ‘톰프슨’ 부인은 맨 앞 자리에서 공개 강연을 듣게 되었다. 그 부인은 그 강연을 아주 재미있게 들었다. 그 지방 자매가 그 부인의 남‘아프리카’ 주소를 적었으며 시간이 흘러서 ‘W. 존스튼’ 형제가 재방문을 하게 되었다. ‘톰프슨’ 부인은 진리를 받아 들였으며 그후 얼마 있지 않아 침례를 받았다. 그 부인은 여러 해 동안 충실하고 활동적인 전도인으로 일해 오다가 1965년 9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 자매의 딸과 두 손녀도 역시 열렬한 증인이 되었다. 그러므로 ‘화이터스’ 형제의 그 방문은 아주 생산적이었다.

한편 ‘더어반’에서는 ‘존스튼’ 형제가 매주 정기적으로 일요일 밤마다 ‘스미스’가 ‘메이스닉 홀’에서 성서 강연을 하였다. 아직까지 청중은 별로 많지 않았지만 그들 중에 ‘마르달’이라는 ‘노르웨이’ 남자가 있었다. 그의 부인은 독실한 제7일 재림교인이었다. 그 두 사람은 매일 밤 교리에 관하여 토론하였다. 그러나 ‘마르달’ 씨가 토론에서 이기게 되었고 오래지 않아 그와 그의 아내와 아들 ‘헨리’는 ‘존스튼’ 형제의 강연에 정규적으로 참석하게 되었다. 그들은 “공개 성경 연구”라고 불리우는 일요일 아침 집회에도 참석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1911년부터 남‘아프리카’ 내의 ‘아프리카’인들 사이에서 진정한 관심을 뚜렷이 볼 수 있었다. ‘더어반’에서 약 50‘킬로미터’ 떨어져 있었던 한 작은 원주민 지구인 ‘응드웨드웨’의 ‘제레미야 크훌루스’는 ‘케이프타운’에서 그곳에 온 ‘요하네스 쎄인지’라는 남자를 기억하고 있다. ‘쎄인지’는 ‘케이프타운’에서 진리를 알게 되었는데, 자기의 고향인 ‘응드웨드웨’에서 진리를 전파하기를 원하였다. ‘제레미야 크훌루스’의 아버지는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특히 지옥에 관한 새로운 가르침에 관심이 많았다. 그리하여 성경 연구가 시작되었고 매일 저녁에 연구를 하게 되었다. 그 조그마한 집단에 많은 사람들이 연합하였다. 그들은 성서 연구를 위하여 「성경 연구」를 사용하였고, 몇달 후에는 그들이 다른 교회 성원들에게 이미 전파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지방 교직자들은 걱정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웨슬리’파 감리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그 문제를 토론하기 위하여 함께 모였다. 많은 토론이 있은 후 새로이 진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그 사람들은 교회로부터 파문당하였다. 그것이 아마도 남‘아프리카’에서 형성된 참 숭배자들의 첫 ‘아프리카’인 회중이었을 것이다.

1911년에 ‘존스튼’ 형제는 매우 바빴다. 그는 ‘트랜스바알’에 있는 ‘요하네스버어그’와 ‘오린지’ 자유주의 ‘패리스’로 특별 여행을 하였다. 그는 ‘요하네스버어그’에서 여러 사람들을 방문하였으며 그 결과 “성서반” 집회가 마련되었다. ‘패리스’ 공회당에서는 아주 훌륭한 모임이 있었는데 시장이 연사를 소개하였고 부시장이 그의 말을 ‘네델란드’어로 통역하였으며 약 250명의 사람들이 그 연설을 들었다. ‘존스튼’ 형제는 그 당시 전세계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수행하고 있었던 반 확장 사업을 열심히 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얼마 있지 않아 ‘프리토리아’, ‘밸포어’, ‘포오트 엘리자베드’와 ‘응드웨드웨’에서도 집회가 열리게 되었다.

그 수는 적었지만 여호와의 종들은 성서의 중요한 소식을 전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13년 2월 1일호 「파수대」에 실린 1912년도 남‘아프리카’의 활동 보고에 의하면, 그들은 “만민의 설교단”이란 영문 전도지를 28,808매, “만인보”(萬人報)라는 영문 전도지를 30,000매, “만민의 설교단” ‘네델란드’어 전도지를 3,000매 전하였다. ‘줄루’어 출판물이 있음을 알리는 1913년 11월 15일호 「파수대」의 짧은 광고도 역시 흥미있는 것이었다. 좋은 소식은 그곳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도달되고 있었다.

또한 그 당시에는 ‘러셀’ 형제의 설교가 신문에 정기적으로 실려지고 있었다. 1913년 12월 15일호 「파수대」는 대영 제국과 남‘아프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에 있는 약 600개의 신문이 매주 그의 기사를 싣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전세계적으로는 그러한 신문이 약 2,000개나 되었다. ‘존스튼’ 형제는 남‘아프리카’에서 설교를 신문에 내기 위해 출판 대행자를 조직하였으며 1913년말에 가서는 그 나라의 11개 신문이 4개 언어로 설교를 실었다.

1914년이 되다!

여러 달이 지나가고 1914년에 이르렀다. 전세계적으로 그 당시 형제들을 그 해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분명히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남‘아프리카’의 형제들은 연대를 깊이 의식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더어반’에 살았던 ‘미르달’ 가족이 들어있다. ‘헨리 미르달’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1914년 8월 4일이라는 날짜를 잘 기억하고 있다. 그날 신문을 읽고 있던 우리 어머니는 우리 가족에게 ‘자! ‘패스터 러셀’이 자기 저서에서 지적한 대로 전쟁이 일어났다’라고 말씀하셨다.”

영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흥미를 가지고 세계 상태를 주시하고 있었으며, “징조”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 중에는 그 당시 영국 ‘퍼네스’ ‘바로우’에서 ‘콜포처’ 봉사를 하고 있었던 ‘조오지 필립스’라는 16세된 어린 형제가 들어 있었다. 그 당시 ‘조오지’는 남‘아프리카’의 왕국 활동을 발전시키는 데 자기가 큰 역할을 할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니아살랜드’에서 진리에 성실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많은 ‘아프리카’인들 역시 날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독일군은 ‘탕가니카’(그 당시 독일령 동‘아프리카’) 국경을 막 넘어 왔으며 영국군은 국경 수비를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성서 예언이 성취되고 있음을 인식하였다.

「인디펜던트 아프리카」라는 책은 230면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프리카’인들은 그들 나름대로 그 전쟁이 몰고온 불안정을 겪었다. 많은 사람들은 1914년 10월에 세상이 종말될 것이라는 ‘왙취 타워’의 예언이 곧 실현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니아살랜드’의 ‘아키르와’라는 형제가 ‘러셀’ 형제에게 보낸 편지는 그 점을 확증해 주고 있다. (1914년 9월 1일호 「파수대」에 실림) 그 편지에서 특히 이런 점이 지적되고 있다: “성서에 의하면 확실히 우리가 마지막 때에 살고 있읍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서에서 구원자가 오실 것이며, 하나님의 왕국이 올 것이고, 열국이 우리 하나님의 도를 알게 될 것이며 그분이 악한 자를 멸망시키실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그 편지는 계속하여 어떤 특별한 경우에는 그들의 집회에 한번에 수백명씩 참석하였다고 묘사하였다.

“남‘아프리카’의 첫 대회”

그러한 표제 아래 1914년 8월 15일호 「파수대」는 ‘존스튼’ 형제의 편지를 게재하였다. 그는 이렇게 기술하였다:

“만국 성경 연구회가 개최한 남‘아프리카’의 첫 대회는 이제 역사의 일부가 되었으며 참석할 특권을 즐긴 사람들에게 장막을 지나 [하늘에서] 가장 위대한 대회에 이를 때까지 자극제와 고무제가 될 영광스러운 추억을 남겨 주었다.”

그 다음 계속하여 ‘존스튼’은 그 대회가 4월 10일에 ‘더어반’에서 개최되었다고 기술하였다. 사람들은 아대륙(亞大陸)의 각지에서 모여들었다. “경애하는 한 자매는 거의 1,600‘킬로미터’를 여행하였다”고 그는 특별히 언급하였다. 또한 ‘존스튼’은 이렇게 말하였다. “사실 우리는 아주 ‘적은 무리’였다. 가장 많은 참석수는 34명이었다.” ‘존스튼’ 형제의 말은 성경 연구생이 34명 참석하였다는 의미인데 공개 강연에는 약 50명이 참석하였다. 참석수를 생각해 볼 때 총 16명이 침례받은 것은 아주 많은 수였다. 그들은 또한 그 동일한 주말에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식을 가졌는데 표상물을 취한 자가 32명이었다. 그 형제들은 약 57년 후(1971년) ‘요하네스버어그’에서 근 50,000에 가까운 사람이 참석하는 대회가 열릴 것이라고는 거의 생각지 못했다! 그것은 확실히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겠”다는 예언을 생각나게 한다.—이사야 60:22.

근거없는 비난

1915년의 처음 몇 주일 동안 ‘니아살랜드’는 아주 어수선하였다. 그때까지는 이미 영국군과 독일군이 국경에서 심한 전투를 치루었으며 영국군이 승리를 거두었다. 그 전투에서 많은 ‘아프리카’인들이 죽거나 부상당하였는데 더 좋지 않은 일이 뒤따랐다. 1월 23일 ‘아프리카’파의 유식한 지도자 ‘존 칠렘브웨’가 이끄는 ‘아프리카’인들이 심각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그 지방에 사는 몇명의 ‘유럽’인들을 죽였으며 전국적인 반란을 꾀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획책은 ‘아프리카’군과 ‘유럽’인 관리 및 의용군에 의해 신속히 분쇄되었다.

그러나 그후 ‘왙취 타워’ 협회가 그 반란에 모종의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모함이 있었다. 사실상 「대전의 역사」라는 정부 기관지는 ‘칠렘브웨’를 “소위 ‘왙취 타워’파의 ··· 종교적인 광신자”라고 지적하였다. 자세한 수사를 한 결과 ‘니아살랜드’에서 진리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나 심지어 소위 “‘왙취타워’ 운동” 단체 즉 ‘캄와나’의 단체에 속한 사람들까지도 그 폭동에는 직접적인 관련이나 책임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인디펜던트 아프리카」라는 서적은 그 문제에 관하여 증거를 철저히 조사하였으며 324면에서 이러한 결론을 내렸다. “‘칠렘브웨’가 미국 ‘왙취 타워’ 단체와 관련이 없었음은 명백하며 그의 반란 계획을 미국에 있는 그 조직과 연관시키려는 시도는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칠렘브웨’가 ‘부스’의 개종자의 한 사람이었고 ‘부스’가 한때 협회와 약간의 관계를 가진 적이 있기 때문에 진리의 반대자들은 협회를 모함하고 희생시키기 위하여 그러한 사실을 이용하였다. 사실 ‘칠렘브웨’와 그의 부관들은 많은 영향력을 가진 정교회 선교단원들이었다. 그러한 선교단들은 정부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게 되었다.

「인디펜던트 아프리카」란 서적 232면에서는 또한 ‘왙취 타워’ 협회 출판물들이 어떤 ‘아프리카’인들에게 영향을 끼쳐 반란에 참여하게 하였다는 모함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흥미있는 말을 하였다. “그러나 ‘러셀’의 서적 어디에서도 그의 가르침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천년기를 대비하기 위해 그러한 조직의 전복을 촉진시키도록 적극적인 조처를 취해야 한다고 제안하지 않았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이 개입하실 것을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라는 권고를 받고 있다.” (‘고딕’체는 우리가 바꾼 것임)

성장이 계속되다

몇개월 후 ‘더어반’에서 형제들은 또 다른 아주 훌륭한 대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기념식과 또 다시 연관되었으며 47명이 표상물을 취하였다. ‘응드웨드웨’의 ‘줄루’인 반에는 38명이 참석하였으며 ‘요하네스버어그’에서는 15명이, ‘케이프타운’에서는 8명이, ‘더글라스’에서는 6명이, ‘발포어’에는 2명이 참석하였다.

1914년이 오고 또 지나갔다. 세계의 사건들은 독특한 방법으로 예언을 성취시키고 있었지만 활동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아직도 할 일이 많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존스튼’ 형제는 ‘러셀’ 형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작년은 개개인과 반[혹은 회중]에게 계속적인 시험과 시련이 있었던 해였읍니다.” 그러나 1915년도 남‘아프리카’의 활동 보고에 의하면 4,700부 이상의 인쇄물과 75,131부의 무료 출판물이 배부되었고 312회의 집회가 열렸다. 활동은 결코 정지되지 않았다.

창조 사진극

1916년에는 “창조 사진극”이 남‘아프리카’에 도착하였다. 몇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진 ‘슬라이드’, 활동 사진과 확성 장치는 지구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대략 설명해 주었다. ‘케이프’ 주에서 그 “사진극”이 문제가 되었음이 분명하며, 공중의 “종교적인 감정을 상하게” 하기 쉽다는 이유로 그곳의 당국자들에 의해 금지되었다.

그러나 1918년초 ‘존스튼’ 형제의 계산에 의하면 그것의 상영을 위해 18개월 동안에 그 나라 각지로 16,000‘킬로미터’ 이상을 여행했다는 말을 들어볼 때 “사진극” 활동의 범위를 알 수 있다. 그 “극”은 어디에서나 많은 청중을 끌었다. ‘케이프’ 주에서는 허가를 받지 못했지만 ‘더어반’, ‘요하네스버어그’, ‘프리토리아’ 및 ‘트랜스바알’, ‘오린지’ 자유주, ‘나탤’ 등의 다른 여러 지역에서 상영되었다. “극”의 상영 결과 많은 사람들을 모아들이지는 못했으나 광대한 그리고 강력한 증거를 제시하였다.

‘로디지아’와 ‘트랜스바알’에서의 초기 활동

우리는 1916년에 처음으로 ‘로디지아’에서의 왕국 활동에 관하여 조금 듣게 된다. ‘윌리암 W. 존스튼’은 ‘러셀’ 형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로디지아’에서의 활동에 대해 형님이 ‘노우드하우스’ 씨에게 보내는 전갈은 잘 받았읍니다. 나는 구체적인 내용을 요청하는 서신을 그 신사에게 보내고 그의 답장을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그 당시 남‘아프리카’에서의 증거 활동은 도시에만 국한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서부 ‘트랜스바알’의 ‘코스터’라는 작은 마을에는 진리를 열심히 공부하는 ‘자피에 데론’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유능한 변호사인 ‘데론’은 세계의 종교들이 거짓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어느날 그는 신문에서 수십년전 ‘왙취 타워’ 협회에 의해 발표된 1914년에 관한 독특한 예언에 관하여 읽게 되었다. 그리하여 ‘데론’은 출판물을 구하려고 사람을 보내어 「성경 연구」에 속한 서적들을 구하였다. 곧 그는 진리를 알게 되었고, 다른 사람들을 도우려는 강렬한 욕망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종종 교직자들과 토론을 하였으며 문자적인 지옥 불과 같은 그들의 거짓 가르침을 증명해 보라고 그들에게 도전하였다.

‘데론’ 형제는 아주 솔선적이었던 것같다. 한 가지 활동 무대로서 그는 자기 마을을 통과하는 작은 기차에서 매일 정규적으로 증거하였다. 그는 역에서 기차에 오른 후 기관차로부터 시작하여 뒤로 나아가면서 기차가 가파른 고갯길을 서서히 올라가는 동안 모든 승객들에게 출판물을 제공하였다. 기차가 고개 마루턱에 이를 때쯤은 기차에 있는 “구역”을 다 돌고 뛰어 내리도록 시간을 맞추었다. ‘데론’ 형제는 서부 ‘트랜스바알’과 ‘오린지’ 자유주에 널리 알려졌으며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도와 주었다.

북부 ‘트랜스바알’의 아주 광대한 지역에 빛이 비쳐지고 있었으며 많은 출판물이 개인에게서 개인에게로 우송되고 있었다. 그러한 출판물이 북부 ‘트랜스바알’의 작은 마을 ‘닐스트룸’에 사는 어린 두 학생에게 전해졌다. 그 어린 학생 중 하나인 ‘폴 스미트’에 의하면 그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그가 활동하도록 자극을 준 것은 「지옥에 관하여 성서는 무엇이라고 말하는가?」라는 소책자였다. ‘스미트’ 형제 자신의 말을 인용하면 이렇다: “교회의 교리들이 거짓임을 우리 두 학생이 명백한 태도로 알렸을 때 정말이지 ‘닐스트룸’은 마치 태풍이 휘몰아친 것처럼 소란스러운 곳이 되었다. 우리는 두려움 없이 우리의 활동을 수행해 나아갔다. 그 당시 ‘네델란드’계 신교 교회 세 곳과 성공회가 ‘도시의 자유’를 누리면서 평온히 자기들의 활동을 해 왔을 뿐이다. 그러니 지옥에 ‘호스’를 대었을 때 고초의 연기가 올라가는 것을 상상해 보라! 그 마을과 그 지역에서 그 새로운 종교에 관한 소식이 삽시간에 퍼졌다. 물론 어두움의 도구인 교직자들은 악 선전을 하고 박해를 가하는 그들의 잘 알려진 역할을 하였다. 매주 행하는 그들의 설교는 몇달 동안 심지어 몇년 동안 이 ‘거짓 종교’에 집중되었다.”

어려움 가운데서도 영적으로 번영하다

그 당시 집회는 회중이 거수로 선출한 “장로”들에 의해 사회되었다. 집사들에 대해서도 표결을 하였는데, 그들의 하는 일은 창문을 열고, 의자를 정리하며 노래책을 나누어 주는 일 등 일반적으로 보조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 당시의 회중적인 마련이었다.

1916년 10월 31일 ‘왙취 타워’ 협회의 초대 회장인 ‘C. T. 러셀’은 끝까지 활동적으로 충실히 일하다가 사망하였다. 그 소식은 여호와의 백성들에게 슬픔을 가져다 주었으며 당황하게 만들었다. ‘더어반’ 형제들은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절규하였다. 처음에는 슬픈 반응이 있더니 그후에는 시험기가 시작되었다. ‘러셀’ 형제의 개성과 활동이 그 당시까지의 왕국 활동에 참으로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아주 많은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그에게 깊은 애착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사망 후에 있게 된 변화를 좋지 않게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다. ‘미르달’ 형제의 기억에 의하면 ‘더어반’에서는 집회에서 여러 번 말다툼이 일어났고, 한 집단이 협회에 대해 반기를 들어 많은 어려움을 초래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분열과 문제들은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활동은 계속되었으며 하나님의 축복이 분명히 나타나게 되었다.

1917년에는 남‘아프리카’의 협회 지부 사무실이 ‘더어반’으로부터 ‘케이프타운’의 거대한 암석으로 이루어진 ‘테이블’ 산 근처로 이전하였다. 발송 사무의 편의를 위하여 그렇게 하였으며 ‘케이프타운’의 ‘플레인’ 가 123번지에 있는 작은 건물이 다음 6년 동안의 지부 사무실이 되었다.

남‘아프리카’에 있는 형제들의 수는 점차 증가되고 있었다. ‘존스튼’ 형제는 백인 “형제들”의 수가 약 200명 내지 300명으로 추산된다고 보고하였다. 그들 대부분은 네개의 주요 집단이나 회중 즉 ‘더어반’, ‘요하네스버어그’, ‘프리토리아’와 ‘케이프타운’ 회중에 속해 있었고 다른 많은 사람들은 격지 구역에 있었다. ‘응드웨드웨’에는 약 80명의 ‘줄루’인으로 이루어진 잘 발전하고 있는 한 회중이 있었다. ‘뱅크’라고 불리우는 곳에서는 ‘배수토스’의 작은 집단이 모이고 있었고 몇명의 ‘코사’ 형제들이 ‘이스트 런던’에서 모이고 있었다.

한 보고서에서 ‘존스튼’ 형제는 ‘아프리카’ 형제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아주 흥미있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원주민의 언어로 된 출판물이 없지만, 이들 원주민 형제들은 놀라울 정도로 의미있는 진리를 받아들인다. 우리는 단지 ‘이것은 주가 하시는 일이며 우리의 눈에 놀라운 것입니다’라고 말할 뿐이다. 그들 모두가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깊이 존중하기 때문에 영어로 된 책들을 읽고 그 내용을 그들의 언어로 통역할 수 있는 원주민 선생들이 자기들에게 전해주는 진리에 깊은 관심을 보인다. 배운 것이 거의 없으므로 그들은 주의 소식이 제시되면 선뜻 받아 들인다. 그들의 총명과 헌신의 성실성은 자신들의 양심을 위해 고통을 견디는 것으로써 입증되었다. 이 사랑하는 원주민 형제들 거의 모두가 엄숙하게 공개적으로 ‘바벨론’으로부터 추방되었다.—그들이 출생한 선교단 보호 지구에서 쫓겨나고 그들 세계(‘아프리카’인 지구)에서 위험 인물로 낙인 찍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은 조금도 그들을 동요시키지 못하였으며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통받게 된 것을 진정한 즐거움으로 받아들였다.”

‘니아살랜드’에서의 활동은 이미 정부의 반대를 불러 일으켰고, 자기들의 학교와 교회가 텅텅 비게 되었기 때문에 질투를 느낀 선교인들은 그러한 반대에 박차를 가하였다. ‘존스튼’은 이렇게 말하였다. “그 결과 몇명의 지도적인 형제들이 추방되었으며 지금은 ‘모리시어스’의 ‘플랫’ 섬에 억류되어 있다.”

새로운 밭이 열리다

17세기 이후로 ‘스텔렌보쉬’는 교육의 중심지 특히 ‘네델란드’계 신교 교직자들의 훈련을 위한 교육 중심지가 되어 왔다. 1917년 ‘피에트 드 제이거’는 ‘나이제리아’에서의 ‘네델란드’계 신교 선교단으로 가기에 앞서 그 곳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그의 급우 한 사람이 이미 진리를 받아들이고 협회 서적을 공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일은 자연히 교회 권위자들을 염려하게 만들었으며, 그 학생과 대화를 나누며, 그를 데리고 그리스도인 학생회가 매주 개최하는 성서 연구에 참석하도록 ‘피에트 드 제이거’를 임명하였다. 결과는 어떠하였는가? ‘피에트 드 제이거’ 자신이 진리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 일이 그 교회 계통에 일으켜 놓은 놀라움이 어떠했을 것인지 가히 상상할 수 있다. 그후 얼마 있지 않아 ‘피에트 드 제이거’는 영혼과 지옥 및 기타 점들에 관해 교수들과 여러 번 열띤 논쟁을 벌였으며, 얼마 되지 않아 신학교를 그만 두었다.

그후 ‘피에트 드 제이거’ 형제와 ‘네델란드’계 신교의 신학박사 ‘드와아트 스나이맨’ 사이에 공개 토론이 마련되었으며, 1,500명의 학생이 참석해서 그 토론을 들었다. ‘A. 스미트’ 형제는 그 사건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피에트’는 각 논점에 관하여 그 유식한 박사를 꼼짝도 못하게 하였으며, 교회가 비성서적인 교리를 가르치고 있음을 성서로부터 증명하였다. 한 학생은 그 결과를 다음과 같은 몇마디 말로 요약하였다. ‘‘피에트 드 제이거’가 그르다는 점을 내가 모르는지는 몰라도 그는 성서로부터 모든 것을 증명하였기 때문에 나는 그가 옳았다고 맹세할 수 있다!’”

‘케이프타운’에 있는 동안, ‘존스튼’ 형제는 사무실에서 일하는 외에도 많은 시간을 야외에서 보냈으며 어느날은 ‘스텔렌보쉬’ 근처에 있는 ‘프란스혹’이란 작은 마을을 방문하였다. 그곳은 남‘아프리카’의 오래된 마을 가운데 하나이며 원래 1688년 ‘위그노’교 망명자들이 정착하게 된 곳이다. 그곳에는 유색 인종(흑인과 백인의 혼혈 후예)들도 있었으며, 때는 왕국의 씨가 좋은 땅인 그곳에 뿌려지도록 무르익어 있었다. 몇년전 그 지방 유색인 학교 선생이며 머리가 총명하고 지조가 높은 사람인 ‘아담 반 디이멘’의 지도하에 몇사람이 ‘네델란드’계 신교 교회와 관계를 끊고 그들 자신의 종교 집단을 형성하였다. ‘존스튼’ 형제가 ‘반 디이멘’을 방문하여 그에게 출판물을 전한 것은 틀림없이 1917년말 아니면 1918년초였을 것이다. ‘반 디이멘’ 씨는 자기가 볼 서적만 아니라 자기 벗들에게 전해줄 책도 상당히 많이 받았다. 그 벗들 중에는 ‘다니엘스’라는 남자가 포함되었는데 「하나님의 경륜」이란 책 한부가 17세된 ‘G. 다니엘스’라는 그의 아들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어린 ‘다니엘스’에게 그것은 여호와를 섬기는 생활의 시작이었다. ‘반 디이멘’도 역시 진리를 받아들였으며 아주 활동적으로 소식을 전하였다. 그는 ‘케이프타운’ 근처에 있는 ‘웰링톤’, ‘파알’, ‘벨빌’, ‘파로우’, ‘엘시이스 리버’, ‘윈베르그’와 ‘리트리트’ 등지를 방문하였다. 그러한 열성적인 활동을 위해 그는 학교 선생직을 사임하고 좋은 소식의 전 시간 전파자가 되었다. 그 밭에서도 왕국 소식이 이제 좋은 출발을 보게 되었다.

1918년 지부 감독자인 ‘윌리암 W. 존스튼’은 새로운 임명을 받았다. 협회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우지일랜드’의 밭에 영적으로 강하고 훌륭한 형제의 감독이 필요하다고 결정하였기 때문에 ‘존스튼’ 형제에게 그곳으로 가도록 요청하였다. 그의 뒤를 이은 지부 감독자는 ‘헨리 앙케틸’이라는 사람인데 그는 ‘피터마리츠버어그’에서 진리를 받았으며 이전에는 ‘나탤’의 의회 의원이기도 하였다. 그는 ‘에이레’계 사람으로 그 당시는 은퇴한지 몇년이 지났으며, 하얀 머리와 수염을 가진 친절한 말씨를 쓰는 키가 작은 사람이었다. 나이 때문에 그러한 활동이 자기에게 상당히 무거운 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앙케틸’ 형제는 그후 6년동안 자기의 새로운 책임을 충실하고 효과적으로 수행하였다.

시련기에 나타낸 믿음

새로운 지부 감독자 ‘헨리 앙케틸’은 어려운 시기에 그의 일을 맡았다. 미국에서는 협회 임원들이 투옥되어 있었고 증거 활동은 아주 저조하였으며 불충실한 자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 점은 ‘더어반’에서도 아주 분명히 볼 수 있었다. ‘패스터 러셀’의 사망 직후 시작된 논란과 문제는 점점 커져왔으며 자신과 자기의 능력을 과신하는 ‘잭슨’이란 자의 인도 아래 이제 그 절정에 달하게 되었다. 그와 다른 두 사람 ‘피트’ 및 ‘스투브스’가 반대의 주모자들이었음이 분명하다.

1919년에 균열이 생겼으며 많은 사람들, 사실상 대부분의 집회 참석자들이 반대 편에 서게 되었고 그들 자신들이 따로 모이기로 결정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을 “연합된 성경 연구생”이라고 불렀으며 그들 스스로 조직을 세웠다. 그로 인하여 단지 열 두명 밖에 남지 않게 되었으며 그들 대부분은 자매들이었다. 그 당시 ‘헨리 미르달’은 곤란한 입장에 처해 있었다. 어머니는 ‘왙취 타워’ 협회에 대해 계속 충실하였는데 그의 아버지는 반대파에 가담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보고 기도한 후 현명하게도 협회는 주께서 축복을 베푸시는 기관임에 틀림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어머니와 같은 길을 걸었다.

점점 더 많은 공용 ‘네델란드’어 사용자들이 진리의 지식에 이르게 되었다. ‘윌렘 포우리’의 예를 들어보자. 그는 ‘클레르크스도르프’에서 ‘프란스 에버손’과 함께 맨 처음 진리를 받았던 ‘스토펠 포우리’의 조카였다. 사실 그의 아버지는 1906년경 어디에선가 ‘네델란드’어로 된 「시대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 한권을 구하였으며 세상의 종교들이 거짓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윌렘 포우리’는 ‘코스터’의 변호사인 ‘재피 대론’이 교직자들과 토론을 벌였고, 교직자들에게 영혼은 불멸이라는 것을 성서로부터 증명할 수 있다면 그들에게 2,800‘달러’를 주겠다는 특별한 도전을 하였다는 말을 들었다. 그 당시 ‘포우리’는 아직 ‘네델란드’계 신교를 나가고 있었으며 교인들은 세로운 교회를 짓기 위해서 자금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프레디칸드’(“목사”)에게 그 도전을 받아들이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문의해 보았다. 그러나 그는 거절하였고 그것은 ‘포우리’를 실망하게 하였으며 그래서 그는 후에 교회를 떠났다. 1919년경 그가 ‘왙취 타워’ 출판물을 받아서 그것을 열심히 연구한 결과 그것이 진리임을 알게 되었다. 얼마 있지 않아 그는 야외 봉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지옥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여 크게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닐스트룸’의 그 두 학생들을 기억하는가? ‘폴 스미트’와 다른 젊은이는 그들의 가장 친한 벗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았다. 얼마 후 ‘폴’의 친구는 학교 이사회에 의해 직장을 얻게 되었는데 그의 종교를 버리라는 강한 압력을 받게 되었다. 그는 굴복하고 말았다. ‘폴’은 친구를 잃었기 때문에 많은 눈물을 흘렸으나 쉬지 않고 여호와께 기도하였으며 그분의 과분하신 친절로 인하여 그는 진리에 대해서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우연한 증거와 다른 사람에게 출판물을 빌려주는 일을 통해 계속 전파하였다.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조직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으며, 그는 도움과 인도를 위하여 여호와께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얼마 후 그는 ‘피에트 드 제이거’ 형제와 다른 ‘콜포처’ 형제들의 개인적인 방문을 받았다. 그 당시 그러한 개인적인 방문은 참으로 훌륭한 도움이 되었다!

비록 신참자이고 나이도 어렸지만, ‘폴 스미트’는 “천거서”의 형태로 된 여호와의 축복을 받기 시작하였다. (고린도 후 3:1-3) 그의 첫 ‘편지’는 진리를 받아들인 이웃집 농부의 아들이었다. 1922년에 ‘폴’은 ‘보르스터’라는 한 가족과 함께 갓 출판된 「하나님의 거문고」란 서적으로 연구를 시작하였다. ‘보르스터’ 가족은 7명이었으며 ‘스미트’ 가족으로부터 6.5‘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다. ‘폴’은 매주 그 먼 거리를 걸어서 벌판을 지나 그들의 농장으로 갔다. 시간이 흘러 가면서 부모와 한 아들이 증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1924년에 가서 ‘폴’은 ‘닐스트룸’에 열 세명으로 이루어진 훌륭한 한 집단을 조직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그것이 북부 ‘트랜스 바알’에서는 최초의 반 혹은 집단이 되었다.

그러나 중앙 ‘아프리카’인 ‘니아살랜드’에서는 어떻게 일이 진행되고 있었는가? ‘M. 응굴루’는 그 당시 ‘니아살랜드’에서 장로교 교직자로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들어보면 ‘니아살랜드’의 관심자들이 1차 세계 대전 후에 진리를 부지런히 전파하고 있었으며, 그 때쯤인 1920년에 자기가 「지금 살아 있는 수백만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책을 받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는 그 책이 “교직자인 내가 성서를 이해하고 있는 바에 충격을 주었다”고 말하였다.

거의 같은 시기에 ‘니아살랜드’에서 진리를 받은 사람으로 ‘쥬니어 피리’라는 젊은 ‘아프리카’인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침례는 비밀리에 행해지지 않으면 안되었다. 1915년의 ‘존 칠렘브웨’ 반란의 결과로 비정통파에 대한 두려움과 의심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아서 특정한 종교 활동을 수행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가 침례받은 후 한 형제는 ‘쥬니어’와 악수하면서 이제부터 그는 위험에 처하여 있지만 계속 충실하게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경고하였다.

‘피리’ 형제는 그곳 침례교 교직자들로부터 심한 반대를 받았는데 그들은 촌장을 설득하여 그를 체포하게 하였고 행정관에게 끌려 가게 하였다. 행정관 앞에서 그는 금지된 ‘존 칠렘브웨’파에 속해 있다는 고발을 받았다. 이 전의 침례교를 떠난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행정관의 질문을 받고 ‘쥬니어’는 자기가 죽은 자에 관한 그 교회의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설명하면서 행정관에게 그의 견해를 물었다. 그 행정관은 “내가 아는 바로는 죽은 자는 무덤에 있다”고 대답하였다. ‘쥬니어’는 그의 말에 동의하면서 요한 3:13을 인용하였다. 행정관은 자기 성경에서 그 성귀를 찾아보고는 좋은 인상을 받았다. ‘쥬니어’는 행정관에게 자기는 ‘존 칠렘브웨’파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국 성경 연구회”라고 부르는 종교에 속해 있다고 분명히 말하였다. 그는 석방되었으며, 따라서 그 지방 침례교 지도자들은 크게 놀라고 실망하였다.

이제 ‘프란쉬혹’에서 유색 집단이 어떻게 행하고 있는가 살펴보기 위해서 ‘니아살랜드’로부터 남‘아프리카’의 ‘케이프’ 주까지 약 3,200‘킬로미터’를 내려가 보자. 그 때쯤 해서는 그 지방의 ‘네델란드’계 신교 교회가 이 새로운 활동적인 집단을 의식하고 있었으며, 그와 관련하여 모종의 조처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젊은 ‘다니엘스’ 형제의 급우이며 유망한 성경 연구생이었던 ‘반 니이케르크’라는 사람은 훌륭한 교사였는데 그와 그의 가족이 ‘네델란드’계 신교 교회를 다시 다닌다는 조건으로 좋은 직장을 제공 받았다. 그들은 그 압력에 굴복하여 “영적 포로” 상태로 돌아 갔다. 그 후 ‘반 니이케르크’가 그 지역을 떠났을 때 ‘다니엘스’에게도 동일한 제안이 주어졌으나 그는 거절하였다. 그 후에는 박해가 가해지기 시작하였으며 박해가 극심했기 때문에 결국 가족은 이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반대자들은 그들을 가만 놔 두지 않았다. 어느날 밤 그들은 그 집으로 몰려 와서 ‘다니엘스’ 가족에게 그들이 그만 두지 않으면 마법을 사용하여 전 가족을 몰살시키겠다고 위협하였다. 그 대답으로 ‘다니엘스’는 시편 23에 근거한 찬송으로부터 인용하여 그들이 여호와의 보호를 신뢰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 후 적의와 반대가 더욱 심해져서 형제들이 밤에 혼자서 밖에 나가는 것이 위험할 정도였다. 그들은 “‘러셀’파”, “‘영혼이 없다’는 ‘반 디이멘’의 무리”, “거짓 선지자” 등과 같은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리웠다. 그러나 형제들은 굳건함을 유지하였다. 그들은 예수께서 자기의 참 제자들에 관하여 말씀하신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란 예언의 성취를 경험하였다.—누가 21:17.

새로운 지부 사무실

이 때쯤 해서(1923년) 지부 사무실이 ‘렐리’ 가 6번지에 있는 새로운 건물로 이동하였는데, 거기에는 1층에 큰 방이 하나 있었다. ‘케이프타운’ 회중이 집회를 위해서 그 공간의 약 95‘퍼센트’를 점유하였고 ‘앙케틸’ 형제는 방 뒤의 조그만 부분을 자기 사무실로 사용하였다. 그 다음 해인 1924년에 그 회중은 다른 곳으로 이사하였다. 앞문 근처를 막아 사무실로 이용하였고 발송실과 창고 및 인쇄실 등은 모두 방 뒤쪽에 있었다. 선반이 만들어졌고 인쇄기가 도착하면 그것을 둘 곳도 마련하였다.

‘요하네스버어그’에서의 발전

이제 몇년 전 ‘존스튼’ 형제가 처음으로 반을 형성하였던 ‘요하네스버어그’에서 일들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살펴 보자. 그 도시에 사는 ‘아이리스 튜티’ 자매는 약 5세 되었을 때 전도지를 사람들의 집문에 놓아두는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그 자매는 사망, 출산, 결혼 및 기타 특별한 일이 있는 여러 “형제”에게 보내는 편지와 ‘카아드’를 마련하던 어머니를 책상 옆에 서서 몇 시간 동안 바라보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튜티’ 자매의 어머니는 형제들의 사랑의 띠를 통해 즐거움과 슬픔 중에도 형제 자매들과 계속 접촉할 수 있도록 ‘러셀’ 형제에 의해 설립된 “‘필라델피아’ 연맹”의 총무였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하였다.

그 당시에는 인종 차별에 관한 엄격한 법이 아직 통과되지도 않은 때였지만 사회적으로 말해서 백인들과 흑인들 사이에는 별로 접촉이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점이 왕국 증거를 막지는 못하였다. ‘에녹 음왈레’라는 한 ‘아프리카’인 형제는 ‘튜티’ 자매의 어머니로부터 도움을 받아 1921년에 진리를 받게 되었으며 그 해부터 그는 야외 봉사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음왈레’ 형제는 얼마 동안 ‘유럽’ 형제들과 함께 연구하였는데, 그 후 「하나님의 거문고」라는 책을 받은 후, ‘아프리카’인 형제들은 그들 자신의 집단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수백만” 운동

1921년 협회는 몇해 동안 계속된 광범위한 공개 집회 운동을 시작하였다. 1918년 2월 ‘러더포오드’ 형제가 처음 행한 “지금 살아있는 수백만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유명한 강연이 남‘아프리카’에서 널리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지부 감독자인 ‘앙케틸’ 형제는 그 당시 전 시간 봉사자였던 ‘피에트 드 제이거’ 형제와 영어를 말하는 ‘패리 윌리암스’ 형제의 도움을 받아 남‘아프리카’의 모든 대도시를 방문하여, 영어와 공용 ‘네델란드’어로 그 강연을 행하였다. 그 결과는 아주 훌륭하였다. ‘케이프타운’의 ‘오페라 하우스’에서 있었던 첫 강연에 2,000명이 참석하였다. 상당히 많은 출판물을 전하였고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한 강연들은 ‘네델란드’어와 영어로 행하였으며, 영어, ‘네델란드’어, 그리고 공용 ‘네델란드’어로 된 「수백만」이란 책을 전하였다. 1921년의 그 광범위한 여행 중에 그 형제들은 남‘로디지아’(지금의 ‘로디지아’)의 ‘불러와요’와 ‘소올즈버리’를 방문하였다.

그 강연을 듣는 청중은 많을 때도 있었고 적을 때도 있었다. ‘패리 윌리암스’ 형제는 이렇게 기술하였다. “영어 강연에 약 80명 정도, ‘네델란드’어 강연에도 그만큼 밖에는 참석이 예상되지 않는 마을들에서 강연하려고 우리는 수백 ‘킬로미터’를 여행하였다.” 1923년 8월 31일자 보고서에 의하면 각각 연사와 ‘콜포처’로 광고된 ‘P. J. 드 제이거’ 형제와 ‘윌리암 다우슨’ 형제는 그 해에 70회의 강연을 행하였다. 그것은 한 달에 평균 거의 6회 행한 것이 되며, 총 참석자는 9,376명이었다. “지금 살아있는 수백만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유명한 제목 외에도 “조만간 있게 될 부활”, “신세계가 시작되다”, “열국이 ‘아마겟돈’으로 진군하다”와 같은 인상적인 제목을 포함한 여러 제목들이 사용되었다. 매 강연시에 제출되는 주소를 사용하여 그들은 2,483세대를 방문하였고 수천부의 출판물을 전하였다.

그리스도교국의 교회들은 그 소식의 강한 열기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1923년의 연례 보고서는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사실상 어떤 마을에서는 한 사도 교회가 우리의 전한 소식의 침투력 때문에 완전히 문을 닫게 되었고 그것은 그 활동에 관여한 모두의 마음을 즐겁게 해 주었다. 언젠가 ‘네델란드’계 교회 신문인 ‘커크보드’의 한 기자는 우리의 교리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네델란드’계 신교 교인들에 대한 만국 성경 연구 회원들의 열성을 칭찬한다고 말함으로써 만국 성경 연구회에 경의를 표하였다.”

‘콜포처’ 활동

‘파이오니아’ 즉 그 당시 알려진 바로는 ‘콜포처’ 활동도 역시 발전하고 있었다. 1923년에 여섯명이 전 시간 봉사를 하고 있었으며 그들은 대부분의 증거 활동을 시골에서 하였고 다른 형제들과 관심자들은 주로 우연한 증거를 하였다. 그러한 전 시간 봉사자로 ‘에드윈 스코트’라는 형제가 있었는데, 그는 1922년 9월 ‘오하이오’ 주 ‘시다포인트’ 국제 대회에서 채택한 결의문을 배부하도록 임명되었다. 그리스도교국 전체에 걸쳐 그 전도지는 3,500만매 정도 배부되었다. 그 충실한 형제는 영어와 공용 ‘네델란드’어 전도지가 든 큰 가방을 등에 지고, 사나운 개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손에 막대기를 들고 다녔다! 그는 남‘아프리카’의 네개 주에 소재한 64개 소도시를 방문하여 6개월 동안에 50,000매를 전하였다. 그 외에도 그 전도지는 남‘아프리카’와 ‘로디지아’의 모든 종파의 교직자들에게 우송되었다. “광고하라, 광고하라, 광고하라, 왕과 그의 왕국을”—이 말은 1922년의 그 유명한 대회에서 ‘러더포오드’ 형제가 외친 구호였으며 남‘아프리카’의 몇 형제들은 바로 그러한 일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1923년초에 얼마 동안 ‘요하네스버어그’ ‘에클레시아’(회중)의 성원이었던 젊은 두 자매가 전 시간 봉사를 시작하였다. 그들은 ‘레니 데론’(‘코스터’의 변호사인 ‘데론’ 형제의 친 누이)과 ‘엘리자베드 애드셰이드’였다. 그들은 교사직을 그만두고 ‘콜포처’ 활동을 같이 시작하였다. 북부 ‘나탤’과 ‘트랜스바알’을 여행한 3개월 동안에 그 두 자매는 3,188부의 서적을 전하여 매월 한 사랑 당 500부씩을 전한 셈이 되었다. 그 자매들 중 한 사람이 보낸 편지가 1924년 1월 1일호 「파수대」에 인용되어 있는데 그 일부를 발췌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제가 각종 기차를 타고 언제나 제일 빠른 속도로 다니던 일이 눈에 선합니다 ··· 때로는 기차가 심히 늑장을 부려 쓸쓸한 기차역에 밤 늦게 도착되는 일이 많았읍니다. 그러나 자신의 약속에 충실하신 주께서는 곤경에 처한 그대로 놔두시는 법이 없었읍니다. 언제나 그분은 어떤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켜 나를 도와 주게 하셨읍니다. 그분의 애정 어린 훌륭한 보호를 깨닫게 되면 믿음이 강화되고 그분에 대한 사랑이 증가됩니다.

“어느날 ‘봉사는 필수적이다’라는 훌륭한 기사를 다시 읽고서 너무 흥분하였기 때문에 저는 잠을 이룰 수 없었읍니다. 결국 저는 일어나 지도를 펴들고 살펴 보니 우리의 여행로에서 갈라져 나간 곳에 위치한 ‘바버어톤’과 다른 몇 군데를 빼놓고 있었읍니다. 그 즉시 우리가 그러한 곳들을 빼놓아서는 안된다고 결심하게 되었읍니다. 나는 그 점을 나의 동료에게 말하였읍니다. 그리하여 내가 맡은 부분을 계속 봉사하는 동안 그 자매가 그곳에 가기로 결정하였읍니다. 그 다음으로 내가 방문한 곳은 아주 작은 곳이었읍니다. 나는 열 여덟집 밖에 방문하지 못하였지만 「성경 연구」 49권과 16권의 「수백만」이란 책 그리고 13권의 「거문고」를 [전하였읍니다.] 나는 그 전날 밤에 아주 조금—단지 세 시간—밖에 자지 못했읍니다. 아주 관심이 많은 얼마의 사람들에게 밤 11:30까지 이야기하였고 그 다음 새벽 2시까지 짐을 쌌으며 오전 5:30분 기차를 타려고 일어났기 때문이죠. 나는 우리의 모든 자세한 경험담과 더불어 우리의 구주가 아주 분명하게 우리를 인도하고 있다는 점을 전하고 싶은데 시간이 제한되어 있군요.” 그것은 오늘날 우리를 위한 훌륭한 본이 아닌가?

‘케이프타운’에서의 중요한 변화

넓은 지역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활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케이프타운’에 있는 ‘앙케틸’ 형제는 이제 나이가 들어 그러한 활동이 힘들었다. 그리하여 협회장인 ‘러더포오드’ 형제는 새로운 지부 감독자를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앙케틸’ 형제는 훌륭하게 활동해 왔으며 어려운 시기에 왕국 활동의 발전에 있어서 “보루를 지켜 왔다.” 이제 남‘아프리카’의 여러 지역에서 더 많은 문제들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앙케틸’ 형제의 뒤를 이을 형제가 그러한 상황에 대처해야 하였다.

1924년에 가서 ‘케이프타운’에서는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협회는 활자 및 필요한 설비와 함께 인쇄기를 발송하였다. 또한 새로운 형제들이 영국으로부터 오게 되었다. 한 사람은 얼마 동안 영국 지부에서 부 지부 감독자로 일하였던 ‘토마스 왈더’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약 30세의 피부가 희고, 건장한 젊은이로서 남‘아프리카’의 지부 감독자인 ‘헨리 앙케틸’ 형제를 대신하도록 파견되었다. 그보다 몇 살 아래인 그의 동료 ‘조오지 필립스’는 키가 크고 금발을 한 ‘글래스고우’ 태생의 ‘스코틀랜드’인이다.

1924년 5월 ‘러더포오드’ 형제가 대회를 위하여 ‘글래스고우’를 방문했을 때 ‘조오지 필립스’가 일요일 오전 회기 사회자로서 일하고 있었다. 연단에 나가기 위해 함께 앉아서 기다리고 있을 때 ‘러더포오드’ 형제는 ‘조오지’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왈더’ 형제를 남‘아프리카’로 파견할 것이라는 저의 광고를 형님은 어제 밤에 들으셨읍니다. 형님도 ‘왈더’ 형제와 함께 가보시겠읍니까?” 그 반응은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였다. 그리하여 짐을 챙기고, ‘글래스고우’에 있는 친지와 형제들에게 인사를 하고, 떠날 준비를 하기 위하여 ‘조오지’에게 2주간이 주어졌다. ‘러더포오드’ 형제는 그에게 이런 말도 하였다. “일년이 될지 그보다 더 오랜 기간이 될지 모릅니다. 그리고 ‘조오지’, 전시에는 휴가가 없다는 점을 기억하시오. 가시는 차표만 드리지, 왕복표는 드리지 않겠읍니다.”

새로이 임명을 받은 그 두 형제가 남‘아프리카’에 도착했을 때 전 시간 봉사자는 6명 밖에 없었으며 40명에 불과한 사람들이 야외 봉사를 조금씩 하고 있을 뿐이었다. 구역은 엄청나게 넓었다. 그 구역에는 남‘아프리카’, ‘바수톨랜드’, ‘베추아날랜드’, ‘스와질랜드’, 남서 ‘아프리카’, 남북 ‘로디지아’, ‘니아살랜드’, ‘모잠비크’, ‘탕가니카’, ‘케냐’, ‘우간다’, ‘앙골라’, 그리고 ‘세인트헬레나’, ‘마다가스카르’, ‘모리시어스’ 등 인도양과 대서양 상의 여러 섬들이 포함되었다.

얼마 있지 않아 손으로 판을 짜게 되는 작은 인쇄기가 ‘브루클린’으로부터 도착하였다. 인쇄공인 ‘케이프타운’에 있는 한 형제의 지도 아래 ‘왈더’ 형제와 ‘필립스’ 형제는 5년 동안에 배울 것을 약 5개월 동안에 마쳤다. 인쇄공은 ‘한자 한자 세심히 봐야한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그들은 이해하게 되었다. 오래지 않아 그 작은 인쇄기로부터 수천부의 쪽지와 전도지와 봉사에 필요한 것들이 나오게 되었다. 그 외에도 공용 ‘네델란드’어와 다른 여러 가지 ‘아프리카’어로 된 출판물들이 마련되었다. ‘오린지’ 자유주에 사는 ‘이삭크 보타’라는 한 농부 형제는 「하나님의 거문고」가 공용 ‘네델란드’어로 번역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 즉시로 인쇄 사업에 보태 쓰라고 1,400‘달러’를 기부하였다.

문제가 터지다

새로운 지부 감독자인 ‘왈더’ 형제가 맨 먼저하게 된 일 한가지는 ‘로디지아’(남북 ‘로디지아’)와 ‘니아살랜드’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었다. ‘아프리카’에서 그 지역의 상태가 불안정하였지만 그러한 지역에 협회의 출판물들은 이미 들어가 있었다.

1920년대초에 ‘로디지아’에서 어떠한 일이 진행되고 있었는지 오늘날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어쨌든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은 상당히 경계를 하고 있었다. 1924년 6월 6일자 「로디지아 헤럴드」지에는 남‘로디지아’에서 개최된 선교사 회의에 관한 긴 기사가 실려 있었는데 그 회의에서는 “‘왙취타워’ 운동”과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에 관한 것이 토론되었다. 사도 ‘바울’의 그리스도인 활동을 방해하려고 ‘여호와의 도를 의곡시킨’ 박수 ‘엘루마’처럼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은 현대의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에 대하여 거짓 비난을 퍼부었다. (사도 13:6-12) 교직자 ‘C. E. 그린필드’는 ‘왙취 타워’ 협회가 “종교적인 공산주의”를 선전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그는 그러한 선전이 소련에서 나오고 있는데 ‘아프리카’에서 그것을 용납해야 하겠는가라고 물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다음과 같은 결의문을 제출하였다: “‘로디지아’ 선교사 회의의 견해로서는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의 가르침은 교회의 참된 종교 및 국가의 법을 파괴하고 있다. 따라서 이곳 원주민들에게 그것이 선전되는 것은 특히 위험하다. 따라서 정부가 그 활동을 감시하고 규제할 것을 요망하는 바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 결의안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였다. (남‘로디지아’) ‘완키 콜리어리’의 간사인 ‘톰슨’이란 사람은 20명 혹은 30명이 ‘무리’지어 연못에서 침례를 받고 있었다고 묘사하였다. 그 운동을 억제하려고 하였더니 개종자 수가 크게 불어나 1,500명에 이르렀다고 보도되었다. ‘그린필드’에 의하면 그 선전은 백인 세력의 타도를 약속하였다고 한다. 몇명의 이견이 있었지만 그 회의에서 그 결의문이 통과되었다.

교활하게도 공산주의 운운하고 공격하는 것은 그 당시 선교사들과 교직자들의 상투적인 술책이었다. 그러나 소련과 공산주의에 관한 언급은 우리가 에누리해서 듣는다 하더라도 ‘왙취 타워’에 속해 있다고 주장한 ‘완키’의 1,500명의 교인들이 우리의 형제들이었는지 아니면 거짓된 “‘왙취타워’ 운동” 단체의 하나에 속한 사람들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그 보도에 의하면 1924년까지는 “왙취타워”라는 이름이 ‘로디지아’에서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고 그 문제를 분명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알리고 있다.

그리하여 1924년말에 가서 ‘왈더’ 형제는 ‘로디지아’로 여행하여 “왙취타워”의 이름으로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보려고 남북 ‘로디지아’의 정부 관리들을 만나 보았다. 그는 관리들의 설명을 통해 우리의 활동에 진정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과 토착적인 운동 단체에 속해 있는 사람들을 구분하기 위한 조처를 즉각 취해야 한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다음 해인 1925년에 ‘유럽’인인 ‘윌리암 다우슨’ 형제가 남‘아프리카’로부터 파견되었다. 그는 남북 ‘로디지아’에서 ‘왙취 타워’ 협회와 조금이라도 관계가 있다고 주장하는 모든 곳을 방문하였다.

그 형제로부터의 보고에 의하면 그 사람들 대부분이 협회 출판물에 설명되어 있는 진리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반면에 성실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으나 그들에게는 장성된 사람으로부터의 도움과 인도가 필요하였다. ‘케이프타운’에 있는 ‘왈더’ 형제는 협회의 이름을 오용하고 있는 토착적인 운동 단체와 즉각 관계를 끊었고, 관련 정부에 그 사실을 통고하였다. 그는, 종교인들이 협회와 연관을 시키고 있는 거짓된 운동 단체에 대하여 협회는 아무런 책임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분명히 밝힌 서신을 ‘로디지아’와 ‘니아살랜드’의 관계 당국에 보냈다.

‘다우슨’ 형제가 ‘로디지아’를 방문했을 즈음에 ‘음와나 레사’라는 사람이 북‘로디지아’의 ‘아프리카’인들 사이에서 공포 분위기를 일으켰다. ‘음와나 레사’(“하나님의 아들”을 의미함)는 ‘니아살랜드’ 출신 ‘아프리카’인이었다. 그의 본명은 ‘톰 니이렌다’로서 ‘콩고’를 거쳐 북‘로디지아’로 오게 되었다. 그가 토착적인 “‘왙취타워’ 운동”의 신봉자였고, 그 자신이 예언자라고 보도되었다. ‘스코트 린드버그’가 쓴 1934년 7월 1일호 「선데이 타임즈」지 기사에 의하면 그는 ‘폭스’라는 사람이 쓴 「순교자들의 책」 한권을 손에 넣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그 책에서 오래 전에 백인들이 “마술사”들을 어떻게 물 위에 띄운 고문 의자에 매달아서 물에 빠져 죽게 하였는지 알게 되었다. 그로부터 그가 깊은 인상을 받았음이 분명하였다. 여러 마을로 여행하면서 그는 원주민들에게 “‘아프리카’는 ‘아프리카’인들의 소유이며 백인들은 추방되어야 한다”고 선전하였다.

그후 ‘니이렌다’는 (현 ‘코퍼벨트’의 남동부인) ‘랄라’의 추장 ‘치윌라’와 친교를 맺게 되었다. 그 두 사람은 왕을 뽑는 선거에서 ‘치윌라’가 이길 수 있도록 ‘치윌라’의 정치적 반대자들을 “마술사”로 몰아 침례를 통해 그들을 물에 빠져 죽게 하자고 모의를 하였다. ‘린드버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후 ‘톰’은 ‘치윌라’의 모든 적대자들의 이름을 들었다. 그는 추장들을 불러 자기는 마술사들을 없애도록 하나님에 의해 보내졌으며 남녀노소 모두가 강에서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미신적인 원주민들은 구불거리는 산골짜기를 따라 물이 세차게 흐르는 강가로 유인되었고 ‘톰’은 길고 하얀 예복을 입고 강 가운데 있는 둥근 돌 위에 서 있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양과 염소를 분리하도록 하나님께서 자기를 보내셨다고 말하였다. 그 후 그는 ‘치윌라’의 충실한 지지자들의 협조를 얻어 각 사람에게 강에서 침례를 베풀었는데, ‘치윌라’의 지지자들은 그 적대자들을 물에 처 넣고 그 머리는 상류를 향하게 하여 그들을 익사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희생된 자들 하나 하나를 바라보면서 서서 찬송을 불렀다. 그리고 ‘음와나 레사’의 흥분에 찬 설교가 밤새도록 숲속에서 메아리쳤다.

“그날 밤 22명의 원주민을 빠져 죽게 한 후 ‘톰’은 국경을 넘어 ‘벨기에’령 ‘콩고’의 ‘카탕가’ 주에 정착하기로 결심하였는데 그곳은 ‘로디지아’ 당국이 그를 붙잡을 수 없는 곳이었다.”

흑백을 밝히고 도움을 줄 필요가 있었다

‘콩고’에서도 ‘톰 니이렌다’는 더욱 악행을 하였고 결국 북‘로디지아’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심문을 받고, 유죄 판결을 받아 원주민 추장들이 보는 앞에서 ‘브록큰 힐’ 형무소 광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러한 사악한 행위가 “왙취 타워”라는 명칭과 연관되어 있었다. 그러나 ‘음와나 레사’는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 혹은 그 당시 여호와의 증인의 호칭인 성경 연구생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었다. 오히려 ‘톰 니이렌다’는 그가 처형되기 전에 “‘로마 가톨릭’교에 입교하였으며 감옥에 있는 동안 면죄를 받았다”고 ‘린드버그’ 씨는 보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왕국의 적들인 그리스도교국 각 종파의 교직자들은 그에 대한 책임을 아무 잘못도 없는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에 돌렸으며 당국과 공중이 우리에 대하여 편견을 갖게 하여 증인들을 그 나라에서 추방시키려고 갖은 노력을 다 기울였다. 그러므로 북‘로디지아’에서 왕국 활동을 수행하기 위해 극복해야 할 엄청난 장애가 있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니아살랜드’에서도 우리의 입장을 밝힐 필요가 있었으며 관심자들은 도움이 필요하였다. 1923년 12월 15일호 「파수대」는 협회 대표자의 다음과 같은 보고를 싣고 있다. “나는 최근에 경찰국장인 ‘메이저’—로부터 방문을 받았다. 그는 훌륭한 사람으로 현대의 ‘가말리엘’이다. 그는 ‘니아살랜드’에서의 우리 활동을 수사해 오고 있었다. 그는 우리에 관해 유포되어 있고 교직자들이 자기에게 전해 준 놀랄 정도로 악랄한 거짓말에 넌더리를 내고 있었다. 그는 변장을 하고 원주민들 사이에서 열리는 우리의 집회에 가 보았다고 말하였다. 그는 모든 인도자들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는 원주민들 사이에 진리가 요원의 불처럼 번지고 있다고 나에게 말하였다.”

여하튼 1925년 협회가 ‘존 허드슨’과 그의 아내를 ‘니아살랜드’로 보내어 사실을 조사하고 조정한 것은 잘한 일이었다. 그의 방문은 유익하였다. ‘존 허드슨’은 ‘니아살랜드’에서 보낸 15개월 동안에 자기는 그 나라의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많은 곳에서 강연을 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는 대부분의 형제들이 진리에 대하여 지식이나 이해가 아주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강연에서 그 형제는 그들이 협회와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그 인도와 지도를 받아들이는 중요성을 인식하도록 돕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쥬니어 피리’ 형제는 ‘허드슨’ 형제가 자기들에게 남편이 집회에서 아내와 함께 앉도록 권고하였다는 점도 이야기하고 있다. ‘아프리카’인들의 부족 생활에서 남편은 아내와 함께 식사하지 않으며 가족이 교회나 종교적인 집회에 갈 때는 남자는 통로 이편에 앉고 여자들은 저편에 앉게 된다. 그러므로 ‘허드슨’ 형제는 그 점에 관하여 훌륭한 충고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M. 응굴루’ 형제가 말한 바와 같이, 어떤 집단들은 스스로 “우리는 ‘케이프타운’에서 온 사람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지 않고, 우리 생각에 옳은 대로 행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허드슨’ 형제의 방문은 협회의 인도를 기꺼이 따르려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의 사이를 갈라 놓게 하였다. 유감스러운 점은 협회의 인도를 따르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계속 “왙취 타워”라는 명칭의 사용을 고집한 것이었다. 그들을 이끈 주요 인물 중의 하나가 ‘윌리 카발라’라는 사람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한 집단의 한 가지 특징은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응굴루’ 형제에 의하면 그러한 거짓된 집단은 세금 내기를 거절하였고 자기들이 하나님의 왕국의 통치자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허드슨’ 형제가 그의 방문에 관한 보고를 한 후 ‘케이프타운’에 있는 ‘왙취 타워’ 협회 사무실은 ‘니아살랜드’의 정부 당국자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것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상기의 협회를 대표하여 저는 ‘니아살랜드’에 있는 우리의 대표자들이 해임되었음을 통고하는 바입니다 ··· ‘허드슨’ 부부를 ‘니아살랜드’로 파견한 이유는 어떤 원주민들의 자칭 ‘왙취 타워’ 교회의 활동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운동 단체를 인정할 수 없읍니다. 그러한 단체는 본 협회의 가르침을 의곡시키고 있으며 대체로 그러한 단체의 추종자들은 우리의 인도나 권위에 순응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단체와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는 바입니다.”

진리에 진정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이제 ‘니아살랜드’에서 한 동안 협회를 대표하는 사람의 인도도 없이 자신들의 힘으로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한편 형제들이 조직의 인도를 온전히 즐기고 있었던 남‘아프리카’에서는 진리가 어떻게 발전하고 있었는가?

남‘아프리카’에 있는 ‘아프리카’인들을 도움

‘요하네스버어그’에서는 다른 ‘아프리카’인들이 진리를 알게 되었으며, 좋은 소식이 마을이나 광산촌(‘아프리카’인들을 위한 합숙소)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전파되고 있었다. 그 사람들 중에 ‘요담 물렝가’가 있었다. 그는 한 백인 형제가 “창조 사진극”을 가지고 그가 묵고 있는 합숙소에 왔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물렝가’ 형제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그는 「성경 연구」 제1권을 받았고 그후 얼마 있지 않아 ‘요하네스버어그’의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으며 거기에서 그는 다른 ‘아프리카’인 형제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 당시 그 지방에 사는 ‘유럽’인 형제들 몇명이 ‘아프리카’인들을 돕고 있었다. 그러한 사람 가운데 합숙소의 부 지배인인 ‘V. 팟처’ 형제가 있었다. 그는 진리를 받아 들이도록 많은 ‘아프리카’인들을 도와 주었다. 그들 중에는 ‘모잠비크’ 남부에서 온 ‘알비노 음헬렘베’가 있었다. 그는 1925년에 ‘팟처’ 형제의 전파를 듣고 진리와 접하게 되었다. 1925년이 다 지나가기 전에 ‘음헬렘베’는 ‘모잠비크’의 수도인 ‘로우렝소 마르케시’로 돌아 갔다가 그후 자기 고향인 ‘빌라루이자’로 가게 되었다. 거기에서 그는 ‘마라쿠에네’에 소재한 ‘스위스’ 선교단 교인들에게 진리를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음헬렘베’는 크게 성공을 거두었으며 오래지 않아 진리는 ‘모잠비크’에서 강한 힘을 갖게 되었다. 40명 정도가 집회에 참석하였으며 그들 중 얼마는 그렇게 하기 위해서 32‘킬로미터’를 여행해야 할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 왕국 활동은 또 다른 밭에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박해에도 중단하지 않음

남‘아프리카’에서 큰 ‘바벨론’을 주로 대표하는 자들은 ‘네델란드’계 신교 지도자들이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1세기에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과 ‘바나바’에게 한 것과 같이 진리에 대해 자기 입장을 고수하는 사람을 심히 핍박하였고 각 도시에서 그들을 괴롭혔다. (사도 14:2, 5-7, 19) 그와 관련된 흥미있는 일이 ‘오린지’ 자유주에서 일어났다. 1920년대 중반에 한 유명한 변호사와 그의 아내는 ‘보쇼프’ 마을에서 ‘드 제이거’ 형제가 행하는 강연에 참석하였다. 그 지방의 많은 고위 관리들도 그 공개 강연에 참석하고 있었는데 그들 중의 얼마는 그후 연사와 함께 다방으로 가서 성서에 관한 질문을 하였다. 변호사인 ‘데오 데니센’ 씨와 그의 아내는 깊은 감명을 받고 출판물을 받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진리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얼마 있지 않아 그들은 친구나 친척들에게 증거하기 시작하였으며 그것은 그 지방 ‘네델란드’계 신교 교직자들을 분개하게 만들었다. 얼마 후 ‘데니센’ 형제와 그의 아내는 교회를 탈퇴하였다. 1925년말에 가서는 그들의 친척 세 사람과 그들의 벗 열 한명이 역시 탈퇴하였으며 그들의 탈퇴서는 설교단에서 낭독되었다.

‘데니센’ 형제는 ‘오린지’ 자유주의 그 지방에서 유명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가 진리에 대해 확고한 입장을 취함으로써 상당한 물의가 일어났으며 널리 증거도 되었다. 1927년에 그와 ‘보쇼프’에 있는 작은 집단은 우편 활동에 참여하였으며 그 도에 속한 매우 광대한 지역에 “세계 통치자들에 대한 증거”라는 결의문을 포함하여 약 10,000부의 소책자와 ‘팜플렛’을 우편으로 보냈다. 1927년 4월에 ‘보쇼프’ 회중 전체가 ‘요하네스버어그’의 전국 대회에 참석하였으며 ‘데니센’ 형제 부부를 포함하여 그들 중 13명 정도가 침례를 받았다. 같은 그 해에 일요일 오전 호별 방문을 시작한 전세계의 형제들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 그 작은 집단도 역시 그 특별한 봉사를 시작하였다. 많은 염려를 한 그 지방의 거짓 종교 교직자들은 교회에서 일련의 설교를 통해 “‘러셀’주의”를 비난하였다. 그후 두 형제와 세명의 그 지방 교직자들 사이에 공개 토론이 있었다. 그 결과 청중 가운데 있었던 경사 한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받아들였으며 죽을 때까지 진리에 계속 굳건히 머물렀다.

증인들의 성공에 화가 난 ‘보쇼프’의 교직자들은 자기네 집사와 장로들에게 지시를 내려 모든 교인들을 방문하게 하여 ‘데니센’ 형제를 지원하지 말도록 지시를 내렸으며, 그리하여 그의 변호사 활동에 타격을 주었다. 1927년말경 ‘데니센’ 가족은 이사하지 않으면 안되었으며, ‘케이프타운’에서 그리 멀지 않은 ‘웰링톤’ 시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역시 그 지방 교직자들이 박해 공세를 펴서 그 다음 해에 ‘데니센’ 가족은 ‘케이프타운’으로 이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아프리카’인들의 상황이 아주 염려스러웠던 훨씬 북쪽 지방에서는 이제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었는가? 1926년에 ‘조오지 필립스’는 ‘헨리 미르달’과 함께 남‘로디지아’로 여행하도록 ‘케이프타운’ 지부 사무실로부터 파견되었다. 그들은 국경에서 저지를 당하였으며 그들이 ‘아프리카’인들 사이에서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입국이 허락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당국은 앞서 말한 선교인 회의의 결의문을 받고서 조처를 취한 것으로 보였다!

‘필립스’ 형제와 ‘미르달’ 형제가 그 여행에서 사용한 방법은 마을이나 도시로 가서, 장소를 빌리고,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작은 고무인 인쇄기로 광고 쪽지를 찍어서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이었다. 집회에서 그들은 관심자들의 성명과 주소를 기록하고 그후에 「성경 연구」에 속한 서적들과 「하나님의 거문고」를 사용하여 그 뒤따르는 활동을 수행하였다. 그러한 모든 방문을 하는 데 자전거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교통 수단이었다. 그러나 도시에서 도시로 이동하는 데는 기차를 이용하였다. 그들이 새로운 곳에 도착할 때마다 예외 없이 경찰 “접대 위원”들의 환영을 받았다. 범죄 수사대는 ‘왙취 타워’ 협회의 그 두 ‘유럽’인에 대해 계속 감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런 상태로 ‘불러와요’, ‘퀘퀘’, ‘가투마’, ‘그웰로’, ‘소올즈버리’, ‘움탈리’ 등을 방문하였다. ‘움탈리’에서 ‘군’ 부부가 진리를 받았다. 두 형제는 탄광이 있는 ‘완키’도 방문하였다. 그곳에 있는 동안, 그들은 세계에서도 가장 웅장한 광경 중의 하나인, 근처에 있는 아름다운 ‘빅토리아’ 폭포를 구경하였으며 탄광으로도 여행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경찰이 제시한 규칙에 따랐으며, 광산에서 일하는 “왙취타워” ‘아프리카’인들을 접촉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4,200부 이상의 출판물을 전하고 몇 군데에 관심을 불러 일으킨 몇달 동안의 방문을 마치고 그후 그들은 남‘아프리카’로 돌아와서 1926년 12월말에 ‘케이프타운’에서 열린 연례 대회에 참석하였다.

‘케이프타운’에서의 다른 변화

‘케이프타운’의 조그만 지부에서도 일이 그리 순조롭지는 않았다. 지부 감독자인 ‘왈더’ 형제는 이전에 영국 지부에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크다고 할 수 있는 영국이란 밭에서의 활동과 정든 ‘런던’ “장막”의 큰 모임을 주관하는 일에는 익숙해 있었다. 그가 ‘케이프타운’에 도착한 바로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이 전혀 달랐고 너무 그 규모가 작게 보였다. 그가 남‘아프리카’의 지부 감독자로 있던 짧은 기간 동안 어느 정도의 발전이 있었으나 그것이 그에게는 느리게 보였으며 규모가 너무 작은 것이 하나의 시련이었다. 그 나라에서 3년 반을 지낸 후 그는 1927년말쯤 그곳을 떠나게 되었다.

‘러더포오드’ 형제는 지체하지 않고 그의 보조자인 ‘조오지 필립스’를 후임 지부 감독자로 임명하였으며 활동은 계속되었다. ‘필립스’ 형제는 그의 새로운 임무에 대해 충분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었다. 1927년까지 그는 전 시간 봉사를 이미 13년 동안 해오고 있었으며 야외와 사무실 일에 경험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협회에 대한 강한 충성심과 명철한 두뇌와 그칠 줄 모르는 투지력과 함께 여호와의 조직에 대한 깊은 인식이 있었으며 그러한 점들은 앞에 놓인 어려운 시기에 그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이었다.

남‘아프리카’에서의 활동은 곧 가속화되기 시작하였다. ‘필립스’ 형제는 어려서부터 전 시간 봉사를 해왔기 때문에 그의 생애 전체가 ‘파이오니아’로 여호와를 섬기는 즐거움을 다른 사람도 맛보도록 격려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얼마 있지 않아 ‘콜포처’들이 증가되기 시작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들의 활동, 반대를 직면해서 그들이 나타낸 인내와 새로운 구역에 쏟은 그들의 꾸준한 노력 등에 대하여 읽어 볼 때 누구나 성서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비슷한 경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폭력 사건이 터지다

그 당시의 전 시간 봉사자들 중에 ‘피에트 드 제이거’와 ‘헨리 미르달’이 있는데 그들은 지금까지도 함께 일해 왔으나 이제는 강연과 그에 뒤따르는 활동을 하면서 그 나라를 여행하고 있었다. 여러 지방에서 교직자들이 반대하도록 자극하고 설교단을 통해서나 출판물로 공격을 하였지만 폭력으로까지 발전되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그러나 ‘드 제이거’ 형제와 ‘미르달’ 형제가 ‘오린지’ 자유주의 ‘드웨츠도르프’라는 작은 마을에 이르렀을 때 반대는 폭력화되었다. 늘 하던대로 그들은 장소를 예약하고,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작은 고무인 인쇄기로 쪽지를 마련하여 강연을 광고하였다. 그 강연을 위하여 그곳의 극장을 예약했었다. 그런데 강연을 하기로 한 바로 그날 아침 그 주인은 형제들에게 예약을 취소하겠다고 말하였다. ‘네델란드’계 신교 교직자가 그 주인에게 강연을 하게 그냥 놔둔다면 교인들이 그 극장에는 가지 않을 것이라고 통고한 것이다.

그로 인해 형제들은 난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시 당국을 찾아가서 시장 광장에서 공개 강연을 갖도록 허가를 맡았다. 즉시 그들은 새로운 쪽지를 마련하여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신속히 그것을 배부하였고 그날 저녁에 강연을 갖게 되었다. 75명 정도 참석하였다.

강연이 시작된지 그리 오래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연사에게로 몰려 들어 그에게 야유하기 시작하였다. 야유는 점점 심해졌다. 연사 옆에 서 있었던 ‘미르달’ 형제는 갑자기 머리를 되게 얻어 맞고 거의 실신할 지경이 되었다. 다행히도 사복 차림을 한 경찰관이 근처에 있다가 그러한 광경들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 사람들의 뒤에는 ‘네델란드’계 신교 교직자가 일부러 그러한 폭력을 행사하도록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체포되어 다음날 재판정에 회부되어 벌금을 물었다. 태연하게도 그 두 형제는 그들의 강연 여행을 계속하였다.

1928년 “사단을 반대하고 여호와를 지지하는 선언”이라는 주요 결의문이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 대회에서 열광적으로 채택되어 7년에 걸쳐 대회 발표된 일련의 소식을 끝맺게 되었다. ‘디트로이트’의 그 동일한 대회에서 ‘러더포오드’ 형제의 “사람들을 위한 통치자”라는 감동적인 강연이 107개 방송국을 연결한 ‘왙취 타워’ 유선 중계 방송단에 의해 방송되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케이프타운’에서는 작은 집단이 단파 수신기로 그 연설을 들었던 일을 상기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으로부터의 방송 외에도 남‘아프리카’의 유일한 방송 회사인 ‘아프리카’ 방송사를 통해 강연이 방송되게 마련되었다. 1928년에 ‘케이프타운’과 ‘요하네스버어그’와 ‘더어반’에 소재한 그 방송사의 ‘스튜디오’로부터 7개의 강연이 방송되도록 허가를 얻었다. 그리하여 좋은 소식이 먼 외딴 곳에도 이르게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처음으로 왕국 소식을 듣게 되었다.

또한 1920년대 후반에는 호별 방문에서 만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증거하려고 형제들은 전국적으로 우편 활동을 전개하였다. ‘프랑크 스미스’라는 ‘케이프타운’의 한 형제는 모든 농부, 등대지기, 삼림 경비원, 길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다른 사람들에게 50,000부의 소책자를 보내기 위해 필요한 요금을 부담하였다. 그 우편 활동에 있어서 포장이나 주소 기입하는 일 등은 모두 ‘케이프타운’ ‘에클레시아’의 성원들이 하였다. 그 결과 그 특별한 방법으로 보낸 좋은 소식이 고립된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위안과 즐거움을 주고 있음을 알리는 격려적인 편지와 함께 출판물의 주문이 많이 들어왔다. 물론 정통파 종교인들은 다른 때와 똑같은 반응을 보였고 전국적으로 교회 잡지들은 여러 차례 신랄하게 공격을 퍼부었다.

남서 ‘아프리카’에도 좋은 소식이 전해지다

왕국 소식이 남서 ‘아프리카’ 즉 약 824,000평방 ‘킬로미터’에 이르는 사막과 건조한 땅으로 이루어진 광대한 지역에 이르게 된 것은 그 우편 활동을 통해서였다. 서부 해안 전체와 약 145‘킬로미터’에 이르는 내륙에는 거대한 ‘나밉’ 사막이 있다. 인구는 610,000명으로 조밀하지 않은 편이며 그 중 60,000명이 백인이다. 인구의 구성을 살펴보면 ‘유럽’인으로는 남‘아프리카’인, 독일인, 영국인이 있고 ‘아프리카’인들로는 ‘헤레로’인, ‘오밤보’인, ‘나마’ 혹은 ‘호텐톳’인, ‘다마라’족과 ‘부쉬덴’이 있다. 그 외에 초기 백인 정착자들과 ‘호텐톳’인들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자부심을 가지고 자신들을 “바스터”(문자적으로 “트기”)라고 부르는 한 집단이 있다.

증거 활동면에서 보면 1928년에 아직도 그 지역은 전혀 미개척지였다. 그러나 우편 활동이 조직된 그 해에 그 나라의 최신판 주소 성명록을 구하여 거기에 이름이 나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만민의 벗”이라는 소책자 한부씩을 우송하였다. 그러한 왕국씨 가운데 하나가 특별한 방법으로 좋은 땅에 떨어졌다.

그 당시 ‘베른하르드 바아드’라는 사람이 광산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그는 이웃의 한 농부에게서 달걀을 사오곤 하였다. 어느날 달걀이 “만민의 벗”이란 소책자의 처음 몇 ‘페이지’로 싸져 있었다. 그는 그것을 읽기 시작하였으며, 읽어 감에 따라 더욱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계속 읽기 위해서 소책자의 나머지 부분으로 포장된 다른 달걀이 더 공급되는 것을 기다려야 하였다. 그는 출판물을 편지로 주문하였으며 그후 얼마 있지 않아 진리를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다음 해인 1929년에 ‘레니 데론’ 자매가 남‘아프리카’로부터 남서 ‘아프리카’와 ‘윈드혹’으로 파견되었다. 그곳으로부터 시작하여 그 자매는 기차와 우편 마차로 전국의 모든 주요 도시를 다 돌았으며 총 8,000‘킬로미터’를 여행하였다. 그전 해에 우송된 소책자를 받았기 때문에 그에 대하여 감사를 표시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 자매 자신이 전한 것도 굉장히 많았다. 4개월 동안에 그 자매는 영어, 공용 ‘네델란드’어 그리고 독일어로 된 서적과 소책자를 6,388부 전하였다.

‘데론’ 자매가 남서 ‘아프리카’에서 부지런히 일하고 있는 동안 그 자매의 싹인 ‘엘리자베드 애드셰이드’는 남‘로디지아’로 파견되었다. 여러 지방에서 경찰과 행정 관리들로부터 상당히 많은 반대를 받았지만 그 자매는 용감하게 활동을 계속하였으며 그 나라 안의 ‘유럽’인들이 모여 사는 모든 곳을 다 방문하였다.

1929년 왕국 소식은 남‘아프리카’ 지부의 관할 아래 있는 광대한 밭의 아주 넓은 지역에 전파되고 있었다. 그 점에 관하여 1930년 「연감」은 이렇게 지적하였다. “영령 동‘아프리카’의 ‘케냐’ 식민지, 영령 중앙 ‘아프리카’의 ‘탕가니카’와 ‘니아살랜드’ 그리고 ‘벨기에’령 ‘콩고’에 이르는 훨씬 북쪽 지방에서도 우편을 통해 출판물에 대한 주문이 들어오고 있다.”

문제들이 발전을 막지 못하다

이전에 ‘닐스트룸’의 학생이었던 ‘폴 스미트’ 형제가 1920년대 후반에는 ‘프리토리아’에 있었다. 그는 ‘프리토리아’ 집단이 위기에 처해 있었다고 설명하면서 특히 이러한 점을 지적하고 있다. “집단에 발전이 없었고 봉사를 위해 조직하려 했더니 동요가 일어나 두 사람이 떨어져 나갔다. 그 당시 한 장로(‘묄러’ 형제)는 부지런히 책을 쓰고 있었다. 협회가 그것을 승인하지 않았고 나도 그에게 그러한 일을 그만 두라고 호소하였지만 그는 잘못된 행로로 계속 나아갔다. 그 책을 출판한 후 어느 일요일 오전에 그는 얼마의 책을 회관에 가지고 와서 반이 그것을 배부하는 데 협조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나는 그런 일로 충격을 받고 일어나서 협회는 그 출판물을 승인하지 않았으며 누구든지 협회의 방침에 반대하는 사람에 대해서 나는 반대할 것이라고 결연히 말하였다.” 그 결과 장로들은 동요하게 되었고 자기들의 추종자들과 함께 떨어져 나가게 되었다. 남아 있는 사람이라곤 병약한 늙은 한 자매와 ‘스미트’ 형제 부부 밖에 없었다.

바로 그 직후 ‘스테인버그’ 형제 부부가 ‘프리토리아’ 지역으로 이사하였다. 그것은 수가 줄어든 ‘프리토리아’ 집단에게 커다란 격려가 되었으며 ‘스테인버그’ 부부에게도 아주 좋은 일이었다. ‘프리토리아’ 집단은 정결케 하는 어려운 시기를 통과하였으며 그 이후로 꾸준히 계속 발전하였다.

‘프리토리아’에 있는 ‘유럽’인 집단의 문제는 그 정도로 끝났다. 그곳의 ‘아프리카’인들은 어떠하였는가? ‘해밀튼 카프위트’ 형제가 1927년에 ‘불러와요’에서 ‘프리토리아’로 이사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 그곳에 ‘아프리카’인 집회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요하네스버어그’의 ‘아프리카’인들의 집회에 참석하곤 하였다. 그러다가 1931년에 ‘물라우지’라는 형제가 ‘니아살랜드’에서 와서 ‘카프위트’와 함께 하게 되었다. 그 두 사람은 「하나님의 거문고」를 함께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프리토리아’에 사는 ‘아프리카’인 형제들의 집회는 상당한 기간 동안 ‘해밀튼 카프위트’의 집에서 열렸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유럽’인 도시 가까이에 있는 지구 혹은 “마을”의 많은 ‘아프리카’인 회중들은 개인 집에서 모이고 있다. 지금까지도 정부와 시정당국은 ‘아프리카’인들의 왕국회관 건축을 반대해 오고 있다.

1930년 1월 ‘필립스’ 형제가 결혼하였고 그 아내도 지부 사무실 직원이 되었다. 역시 1930년에 ‘루엘린 필립스’와 ‘조오지 스펜스’가 사무실을 보강하기 위해 도착하였다. ‘루엘린 필립스’는 ‘웨일즈’ 태생인데 ‘조오지 필립스’의 친척은 아니었으나 그도 역시 ‘파이오니아’ 봉사에서 훌륭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런던’ ‘벧엘’에서 몇년 동안 일한 바 있다.

‘케이프타운’ 지부가 ‘코사’, ‘줄루’, ‘세소토’어 등 그 지방 언어로 소책자를 생산하기 시작한 것도 역시 1930년대 초기였다. 「하나님의 거문고」가 ‘코사’어로 나왔고 「왕국, 세상의 희망」이 ‘줄루’어로 출판되었다.

동‘아프리카’로 강행

1931년 ‘아프리카’의 또 다른 넓은 밭 즉 영령 동‘아프리카’가 개척되기 시작하였다. 영령 동‘아프리카’란 현재 ‘케냐’, ‘우간다’, (‘탕가니카’와 ‘잔지바르’ 섬과 합해서 이루어진) ‘탄자니아’—이 세 나라가 있는 곳이다. 1930년대 초에는 그러한 나라들이 모두 영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국가주의 운동이 일어나면서 그러한 나라들이 하나씩 하나씩 영국에서 독립하게 되었다. 1962년에 ‘탕가니카’는 영 연방에 포함되는 독립된 ‘탄자니아’ 공화국이 되었다. ‘우간다’도 그 동일한 해에 독립하였고, ‘케냐’는 1963년에 독립하게 되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국적을 가진 사람들과 부족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여러 언어가 사용되는 혼란이 있으나 다행하게도 동‘아프리카’ 전체에 걸쳐 ‘스와힐리’어가 공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종교적으로 볼 때 “암흑 대륙”이라는 명칭은 적절하였다. 원주민의 대다수는 이교 신봉자들이었다. 그리스도교국 즉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선교단이 그 지방에서 여러 해 동안 활동해 왔으나 ‘아프리카’의 다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영과 진리로 숭배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생산하지 못했다. (요한 4:24, 신세) 그러나 영적으로 어두운 그 지역에 참된 진리의 빛이 언제 처음 비치게 되었는가?

그 때쯤 해서 ‘케이프타운’에서는 ‘그레이 스미스’라는 한 새로운 형제가 보조 ‘골포처’ 봉사를 하고 있었다. 그의 형 ‘프랑크’가 먼저 진리를 받았으나 1928년에 ‘그레이’도 역시 진지하게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1929년에 침례를 받았으며 거의 그 즉시로 보조 ‘콜포처’ 봉사를 시작하였다. 그후 그는 ‘프랭크’와 함께 아주 흥미있는 동‘아프리카’ 여행을 하게 되었다.

동‘아프리카’에서 좋은 소식을 전파할 수 있는 가능성을 조사하도록 1931년에 그 두 사람은 ‘케냐’로 보내졌다. 그 당시 ‘케냐’는 영국의 보호령으로서 인구는 약 4,000,000이었고 그 중에 약 25,000명이 ‘유럽’인이었다. 그들은 자동차 한대를 구하여 그것을 유개 운반차로 개조시켰으며 “색슨 캐슬”호를 타고 ‘케냐’의 항구 도시인 ‘몸바사’로 향하였다. 그곳에서 그들은 자기들의 유개 운반차를 타고 640‘킬로미터’를 여행하여 수도인 ‘나이로비’로 갔다. 그들은 그곳으로 40상자의 서적을 보낸 바 있다.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그 여행을 하는 데 8일이나 걸렸다. 그들은 ‘나이로비’에서 봉사하였으며 한달 정도에 그 서적을 모두 다 전했다. ‘고아’계 인도인들에게 서적을 많이 전했는데 ‘가톨릭’ 사제들이 그 출판물의 대부분을 모아서 태워 버렸다.

남‘아프리카’로 들아가는 중에 그 두 형제가 ‘말라리아’에 걸리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그 병이 참으로 무서운 것이었다. ‘다르에스살라암’에서 출항하는 배에 승선하였으나 병이 악화되고 혼수 상태에 빠지게 되자 그들은 도중에 ‘더어반’에서 병원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프랑크 스미스’는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하고 말았다. ‘그레이 스미스’는 가까스로 살아나게 되었으나 병원에서 넉달을 지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1931년말에 그는 ‘케이프타운’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 때쯤 영국에서는 ‘런던’의 한 약품 제조소에 다니던 ‘로버트 니스벳’이라는 젊은이가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그 당시 ‘런던’에 와 있었던 ‘러더포오드’ 형제는 그에게 사람을 보내어 “우리는 ‘케이프타운’에 갈 사람을 찾고 있읍니다. 형님이 가보시겠읍니까?”라고 전하였다. ‘로버트’는 동의하였으며 그 즉시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케이프타운’ 사무실에 도착하여 ‘니스벳’ 형제는 배편으로 동‘아프리카’로 발송하려는 서적을 보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200상자나 되었다! 그는 ‘스미스’ 형제들의 여행과 ‘프랑크’에게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그는 동‘아프리카’로 가라는 임무를 달게 받아 들였다. 그와 함께 ‘데이빗 노어맨’이 같이 가게 되었다! 그들은 임명지로 출발하였다. 그들은 ‘케냐’, ‘우간다’, ‘탕가니카’, ‘잔지바르’의 전체 구역을 다 돌아야 했다. 참으로 광대한 밭이었다!

‘말라리아’에 걸리지 않기 위해 모기장 아래서 잠을 자며, 동‘아프리카’ 우체국 어디서나 원가로 구할 수 있는 ‘키니네’를 매일 다량 복용하며 낮에는 ‘토피’라는 햇빛 가리는 모자를 쓰고 1931년 8월 31일 ‘탕가니카’의 수도인 ‘다르에스살라암’에서 그들은 증거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것은 ‘니스벳’ 형제의 다음 말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얗게 포장된 길로부터 반사되는 태양 광선, 습기와 더불어 찌는 듯한 더위, 방문하는 곳마다 무거운 서적 짐을 지고 다녀야 하는 일 등은 단지 우리가 직면하여야 할 어려움 가운데 몇 가지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젊고 강하였으며 즐거움으로 그러한 일을 하였다.”

2주일도 못되어 열정적인 ‘파이오니아’들은 서적, 소책자를 약 천부나 전하였으며, 그 중에는 서적들의 색깔이 다양해서 “무지개 ‘세트’”라고 불리운 것도 들어 있었다. 이 활동은 교직자들의 분노를 일으켰으며 ‘가톨릭’ 교인들은 자기 가정에 그러한 출판물을 둘 수도 없다고 한 교회법 1399호에 전 교구민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공고문이 ‘가톨릭’ 교회 게시판에 나붙게 되었다. 그 서적들의 대부분은 인도인들에게 전해졌다. 그들에게는 ‘스와힐리’어로 된 출판물이 없었고 ‘아프리카’인들은 교육을 별로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 형제들은 그들 사이에서 활동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다르에스살라암’에서 한 때 노예 시장이었고 해안으로부터 약 32‘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잔지바르’ 섬으로 갔다. 낯선 사람이라면 자칫 길을 잃기 쉬운 좁고 구불구불한 그 도시는 항상 은은한 정향의 향기에 덮여 있었다. ‘잔지바르’는 거의 전세계에 정향을 공급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곳의 인구는 25만명이었으며 그 중에 약 300명은 그 당시 통치자들인 ‘유럽’인이었다. 대부분은 ‘스와힐리’인들이고 약 45,000명은 인도인과 ‘아랍’인들이었다. 그 인도인들에게 많은 서적을 전하였고 ‘아랍’인들에게도 약간 전하였으나 인구의 대부분이 ‘스와힐리’인이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왕국 소식이 이르지 못하였다.

‘잔지바르’에서 열흘을 머문 후에 그들은 배를 타고 신선한 채소와 과일이 풍부하고 기후가 온화한 ‘케냐’ 고지로 가는 도중에 위치해 있는 항구 도시 ‘몸바사’로 향하였다. 그들은 기차로 여행하면서 ‘빅토리아’ 호로 가는 길을 따라 여러 도시에서 활동하였다. ‘빅토리아’ 호에 이르러 그들은 길이 400‘킬로미터’, 넓이 240‘킬로미터’의 그 내해(内海)를 가로 질러 ‘우간다’의 수도 ‘캄팔라’로 갔다. 그들은 그곳에서 많은 서적을 배부하였고 「황금 시대」 예약을 맡았다. 8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밀림에서 한 신사는 「정부」라는 서적을 친구가 열심히 읽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 책을 배부하는 젊은이들을 만나려고 ‘캄팔라’로 왔다. 그는 모든 서적을 한권씩 구하였고 「황금 시대」를 예약하였다.

차로 귀환 여행을 개시하기 전에 40‘킬로미터’ 내륙으로 더 들어가는 다른 마을을 방문하였으며 그들은 ‘아프리카’ 오지에 그처럼 깊숙이 들어와서 처음으로 인쇄된 왕국 소식을 전하는 일을 도왔다는 점에 감격하였다. 그들은 그 도시에서 돌아올 때는 다른 길로 왔으며 ‘나일’ 강의 근원인 ‘리폰’ 폭포를 방문하는 즐거움을 누렸다. ‘몸바사’로 가는 도중에 철로 변에 위치한 몇 개의 도시에서 활동을 계속하였다.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더운 ‘몸바사’에서 증거하고 많은 출판물을 전하고 많은 사람이 참석한 강연을 두차례 마련하였다. 그 다음에 해변에 위치한 한 마을을 더 봉사한 후 ‘린도베리 캐슬’호에 승선하고 약 4,800‘킬로미터’를 항해한 후 남‘아프리카’의 ‘케이프타운’으로 돌아 왔다.

이상의 2회에 걸친 최초의 동‘아프리카’ 여행에서 7,000부 이상의 서적과 소책자를 전하였고, 많은 「황금 시대」 예약을 맡았다. 그 씨들 중의 얼마는 좋은 땅에 떨어졌음이 분명하다. 얼마의 소책자를 받은 한 신사는 ‘케이프타운’에 있는 협회로 편지를 하여 ‘러더포오드’ 판사가 저술한 책과 소책자를 전부 주문하였다. 그는 ‘탕가니카’의 (외딴 지역인) ‘분두’에서 금광을 경영하고 있었다. 또한 헌신적이며 열성적인 ‘파이오니아’들이 많은 경비와 노력과 심지어 생명을 바친 결과 소식이 영령 동‘아프리카’로 들어가게 되었고 왕국 활동이 발전하게 되었다.

그렇다. 1931년 그 당시 남‘아프리카’의 충실한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엄청나게 넓은 밭이 개척되었다. 그 해에 총 68,280부의 서적이 남‘아프리카’의 밭에 전해졌으며, 형제들의 믿음을 강화하기 위해서 8개의 봉사 대회가 개최되었다. 얼마나 되는 사람이 그처럼 넓은 밭에서 그 모든 일을 이루었는가? 남부 ‘아프리카’ 전체에 약 100명의 전도인 밖에 없었다.

여호와의 증인으로서 전진하다!

미국 ‘오하이오’ 주 ‘컬럼버스’ 대회에서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명칭을 채택하였다는 감동적인 소식이 흘러 나와 1931년을 장식하게 되었다. 그것은 작지만 활동적인 남‘아프리카’ 집단을 포함하여 전세계의 여호와의 백성들에게 많은 즐거움을 가져다 주었다. 많은 형제들은 하나님의 고귀한 이름을 사용한다는 생각에 위압감을 느꼈으나 그것은 남부 ‘아프리카’ 전역에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는 특권을 더욱 인식하도록 그들에게 도움이 되었다. 남부 ‘아프리카’에서의 왕국 활동과 그 발전은 또 다른 전환점에 이르렀다.

1930년대 초에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성서적인 명칭에 의해 고무받은 남부 ‘아프리카’ 형제들은 대단한 열심과 결의로써 전진하였다. 점점 더 많은 영적 무기와 신권적인 도구들이 마련되고 있었으며, 1932년의 가장 강력한 도구로는 확실히 「왕국, 세상의 희망」이라는 특별한 소책자를 들 수 있다. 모든 나라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 소책자를 열심히 전하고 있었으며 구역에 있는 모든 교직자들, 정치가들, 대기업가들을 방문하는 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이전에 개인적으로 접촉할 수 없었으나 이제 그들에게도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물론 정부의 고위 관리들이나 의원들은 대개 접촉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형제들은 그 해의 특정한 때에 의원들이 입법 수도인 ‘케이프타운’으로부터 행정 수도인 ‘프리토리아’로 이동하는 기회를 이용하였다. 그 신사들이 여행을 떠나기 전 ‘케이프타운’ 역에서 대기하는 바로 그 시간에 형제들이 그들에게 가서 그 특별한 소책자를 제공하였다. 약 1,600‘킬로미터’에 이르는 장도이므로 그들이 그 출판물의 내용을 읽고 그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1933년에 사용하게 된 또 다른 도구로는 ‘러더포오드’ 형제의 녹음 연설이 있었다. ‘아프리카’ 방송사는 녹음된 그 강력한 소식을 ‘케이프타운’, ‘요하네스버어그’, ‘더어반’에 있는 세개의 주요 방송국에서 한달에 한번씩 방송하는 데 합의하였다. 그렇게 하여 그 소식은 남‘아프리카’, 남‘로디지아’ 및 ‘아프리카’ 대륙 북쪽으로 3,200‘킬로미터’나 더 들어가야 하는 북‘로디지아’의 많은 가정—그리고 분명히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도 역시—이르게 되었다. 그 강연들을 듣고 출판물을 더 쉽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일년 후에는 종교 방송 자문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그 위원회는 기성 종교의 교직자들로 이루어졌으며 그들은 왕국 소식이 방송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열성적인 전도인들을 중지시킬 수는 없었다. 사방 수 ‘킬로미터’ 경내에서 큰 ‘네델란드’계 신교 교회가 주요 건물을 이루는 작은 마을들에서 농부들은 성찬식(공용 ‘네델란드’어로 ‘나그마알’이라고 부르며 ‘만찬’을 의미한다)을 거행하는 일요일 같은 때에 교회 광장에 함께 모이곤 하였다. 그들은 천막과 황소를 맨 마차에서 야영을 하곤 하였다. 형제들은 종종 그들에게로 갔으며 그 결과 많은 토론이 있게 되었다. 특히 공용 ‘네델란드’어를 말하는 형제들은 진리의 무기를 사용하는 영적 싸움을 좋아하였다. 후에 그러한 충돌에 대해 증거 집회에서 아주 즐겁게 이야기하게 되었다.

‘프레드 루딕’은 ‘파이오니아’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북‘트랜스바알’에서 심한 ‘말라리아’열을 앓게 되었다. 몇몇 ‘아프리카’인들이 그를 돕고 야생 과일로 약을 만들어 준 결과 병이 낫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경우에 ‘루딕’ 형제의 짝인 ‘시드니 맥루키’에게 있어서는 그렇게 순조롭지를 못했다. 그 형제는 장‘티프스’에 걸렸다. ‘프레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약 75‘킬로그램’이 나가던 키가 건장한 그 친구가 몇 주일도 못되어 40‘킬로그램’으로 빠지더니 사망하고 말았다. 우리는 그를 (‘케이프’ 주) ‘트랜스키이’ ‘칼라’의 산지에 매장하였다.” 그리하여 남부 ‘아프리카’의 왕국 활동을 발전시키는 일에 여호와의 충성스러운 종 한 사람이 자기 생명을 또 바치게 되었다.

‘루딕’ 형제는 얼마 동안 북‘트랜스바알’의 ‘부쉬벨트’에서 봉사하였으며 그곳에서 ‘뮬러’ 형제와 그의 가족을 포함한 격지 집단과 함께 활동하였다. 1930년대 초기에 ‘뮬러’ 형제는 북‘트랜스바알’ 전역과 심지어 북‘케이프’에서 참으로 많은 활동을 하였으며 진리의 지식에 이르도록 많은 사람들을 도왔다.

‘프레드 루딕’은 여러 가지 곤경을 겪었으며, 그 중 한번의 경우는 ‘가톨릭’ 선교단을 방문한 때였다. 거기서 그는 사제를 만나 방문한 목적을 설명하였더니, 그 사제의 얼굴이 점점 더 싯뻘겋게 달아올랐다. 갑자기 그 사제는 그 건물로 뛰어 가더니 총을 가지고 돌아와서 ‘루딕’ 형제에게 겨누었다. 그러나 ‘프레드’는 침착하게 바로 돌아서서 차를 향해 걸어 왔으나 등골이 오싹하였다.

그 때쯤 ‘루딕’ 형제는 자전거를 “졸업하고” 나무 바퀴살을 가진 1928년형 ‘피아트’ 차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와 ‘뮬러’ 형제는 그 차로 거치른 총림 지대의 넓은 지역을 돌았다. 종종 그들은 밤에 사자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면서 나무 아래서 잠을 자야 하였다. 매우 거치른 도로로 여행하고 계속 ‘펑크’나는 ‘타이어’를 수선하며 야외에서 고된 하루를 보내고 나면 사자고 무엇이고간에 나무 토막처럼 잠에 골아 떨어져 버렸다. 그 차의 ‘브레이크’마저 속을 썩였다. 한번은 위험한 ‘수트판스 베르크’ 고개를 넘어 가는 동안 그들은 생가죽 끈으로 앞바퀴 살을 붙들어 매고 가파른 곳을 내려 갈 때는 그 줄을 세게 잡아 다녀야 했는데—고무 타는 냄새가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한 경험을 한 후 두 형제는 행복하게도 ‘뮬러’의 농장으로 돌아 오게 되었으며 그 곳에서 ‘뮬러’ 자매와 자녀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게 되었다. 그 자녀들은 가정에서 이미 훌륭한 훈련을 받고 있었으며 그들 중 몇은 후에 전 시간 봉사를 하게 되었다. 그 중 두 사람이 아직도 남‘아프리카’ 지부 사무실에서 봉사하고 있으며 그 중 하나인 ‘프란스 뮬러’는 현 지부 감독자이다.

‘세인트헬레나’가 증거를 받다

그처럼 격려적인 활동이 ‘트랜스바알’에서 진행되고 있는 동안, ‘파이오니아’들은 ‘아프리카’ 서부 해안에서 약 1,900‘킬로미터’ 떨어진 대서양 상의 조그마한 점과 같은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여행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섬은 면적이 120평방 ‘킬로미터’ 밖에 되지 않으며 인구는 5,000명이 채 못되고 대부분이 유색 인종으로 매우 가난하다. 외딴 이 섬은 1815년부터 1821년까지 ‘나폴레옹’의 유형지로서 안전한 장소로 생각되었다. ‘나폴레옹’의 유배 당시 그 섬은 영국에 속해 있었다.

동‘아프리카’ 여행 후 심히 앓다가 이제 회복된 ‘그레이 스미스’는 또 다시 진정한 개척자적인 노력을 하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세인트헬레나’ 방문 준비를 갖추었다. 이번에는 이전 지부 감독자인 ‘헨리 앙케틸’의 아들 ‘할 앙케틸’이 같이 가게 되었다. 그들은 상당히 많은 출판물을 가지로 갔으며 그 섬 전체를 돌면서 약 1,000부의 출판물을 전하였다.

그 방문 결과 ‘토마스 스키피오’라는 경찰관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왕국 소식 전파를 시작하게 되었다. 경찰관 생활로부터 퇴직하였을 때 60세였던 ‘스키피오’는 ‘파이오니아’가 되었고 채소를 재배하여 자신을 부양하였다. 그의 아들 ‘조오지 스키피오’는 그후 그 섬에 생겨난 회중의 첫 주임 감독자가 되었다.

아버지인 ‘스키피오’ 형제는 맨 처음부터 왕국의 좋은 소식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 줄 책임에 대해 깊은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기 친척이나 섬에 사는 다른 사람들에게 담대히 그리고 널리 증거하였다. 일년 후 몇 사람이 그와 함께 증거 활동을 하게 되었으며 축음기와 판에 실은 성서 강연이 사용되자 곧 그는 그 장비를 구하였다. 그후 여러 해 동안 그 장비는 기꺼이 들으려는 사람들에게 그가 증거해 주는 아주 효과적인 수단이 되었다.

1935년에는 그 섬의 유일한 도시인 ‘제임스타운’에 6명의 작은 전도인 집단이 있게 되었다. 그 작은 전도인 집단의 충실한 활동은 결실을 맺게 되었고 그 결실은 점점 늘어갔다. 음식점을 경영하던 한 새로운 형제도 축음기를 구하였고 기회 있는 대로 그의 단골들에게 판을 틀어 주었다. 1939년에는 두 집단이 조직되었는데 하나는 ‘제임스타운’에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나폴레옹’이 감금된 바 있었던 ‘롱우드’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게 되었다.

남‘아프리카’로 돌아 오다

그처럼 ‘세인트헬레나’를 아주 성공적으로 방문한 후 1935년에 ‘스미스’ 형제는 남서 ‘아프리카’로 가기로 결정하였다. ‘스미스’ 형제는 그 여행에 자기 아내와 한 아들을 동반하였다. 그들은 새로운 축음기 한대와 몇 개의 판을 갖춘 유개 운반차를 가지고 있었다.

단 5개월 동안 그들이 13,000부 정도의 서적과 소책자를 전하고 「황금 시대」 예약을 70건이나 맡은 것을 보면 참으로 훌륭한 기회였음이 분명하다. 교직자들 즉 주로 ‘루터’교와 ‘가톨릭’, ‘네델란드’계 신교의 교직자들은 그러한 일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떤 곳에서는 ‘네델란드’계 신교 교직자가 허가 없이 서적을 판매한다고 ‘스미스’ 형제를 고발하였으나 그 지방 행정관은 단순히 웃어넘기고 그 자신도 얼마의 출판물을 받았다.

이번에도 진리의 씨 얼마는 좋은 땅에 떨어졌다. 남부에 사는 ‘아브라함 드 클레르크’라는 사람은 출판물 얼마를 구하여 읽고 거의 그 즉시로 진리를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자기가 새로 발견한 신앙에 고착하였으며 최선을 다하여 자기 가족을 가르쳤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노력을 축복하셔서 그의 아내와 자녀들 몇이 진리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남서 ‘아프리카’의 초기 증인들 중의 한 사람인 “움”(아저씨) ‘아브라함’은 1960년대 후반에 사망할 때까지 여호와를 계속 충실하게 섬겼다.

1930년대의 ‘스와질랜드’

이제 우리는 남‘아프리카’의 동부로 건너가서 또 하나의 다채로운 나라인 ‘스와질랜드’를 방문해 보자. 그 나라는 삼면은 ‘트랜스바알’로 둘러 싸였으며, 동쪽은 ‘모잠비크’와 국경이 맞닿아 있다. 면적은 약 17,400평방 ‘킬로미터’이며 인구는 약 420,000명으로 그중 ‘유럽’인은 수천명 밖에 되지 않는다.

1930년대초에 ‘파이오니아’들이 ‘스와질랜드’를 방문하여 그 나라에 훌륭한 증거를 하였다. 그들은 소도시에 살고 있는 ‘유럽’인들을 방문한 외에 ‘스와지’ 나라의 최고 우두머리인 왕 ‘소브후자’ 2세도 방문하였다. 그 사람은 증인들에게 크게 호의를 나타냈으며 자기 마을에 오는 것을 충심으로 환영하였다. 그는 자기의 호위병인 100명의 전사들을 모아 훌륭한 음악과 ‘왙취 타워’ 협회장 ‘J. F. 러더포오드’의 녹음 연설을 듣게 하였다. 그곳에 갔었던 ‘F. 루딕’ 형제는 약 50명의 아내에게 둘러 싸여 있는 그 왕에게 증거하는 것은 아주 특이한 경험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또 다른 경우에 ‘로버트’와 ‘조오지 니스벳’도 역시 그 왕에게 증거하였다. ‘러더포오드’ 형제의 녹음된 연설 몇 가지를 듣고 나서 그 왕은 아주 기뻐서 그 축음기와 판들과 확성기를 사고 싶어 하였다. ‘파이오니아’들을 참으로 당황하게 하는 일이었다! 결국 그들은 많은 출판물을 남겨 놓는 것으로 그 왕을 만족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모리시어스’와 ‘마다가스카르’에 이름

1933년 남‘아프리카’ 지부는 경험있는 두 ‘파이오니아’를 ‘모리시어스’와 ‘마다가스카르’(‘말라가시’ 공화국)로 보낼 것을 결정하였다. ‘로버트 니스벳’과 ‘버어트 맥루키’는 ‘아프리카’ 동부 해상에 있는 그 두 섬을 방문하라는 마음이 동하는 임명을 받았다. 그들은 먼저 ‘모리시어스’로 갔다.

‘더어반’을 떠나 ‘모리시어스’로 가기 전에 그들은 사람들이 주로 불어를 사용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불어를 배우는 데 얼마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그들의 목적지에 막상 도착해 보니 대부분의 거민들은 일종의 불어 방언인 ‘크레올레’를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파이오니아’들은 그 사람들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들은 ‘파이오니아’들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사실 ‘니스벳’ 형제의 문제는 더 컸다. 그는 ‘스코틀랜드’ 억양이 심했기 때문이다. 한번은 집주인이 그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그 말은 알아 들을 수 없으니 죄송하지만 영어로 말씀해 주세요!”

그 섬에서 영향력과 세력을 주로 행사하고 있는 것은 ‘가톨릭’교였기 때문에, 얼마 있지 않아 그 두 형제들이 어려움을 직면하게 되었다는 것은 놀랄 바가 아니었다. 교직자들의 선동으로 경찰에 고발하는 일이 있었고 경찰은 형제들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남‘아프리카’로 해외 전보를 쳤다. 경찰은 형제들의 전파하는 권리는 옹호하였으나 허가 없이 모임을 갖는 것은 금지하며 그들에게는 그러한 허가를 내주지 않겠다고 경고하였다. 또한 지방 신문인 「가톨릭 생활」지는 이들 두 “거짓 선지자”에 관하여 경고하였다. 그런 일로 인하여 그들이 전하는 서적 수는 감소 되었지만 장래의 “양들”을 찾는 그들의 즐거움과 결의가 감소되지는 않았다.

그 두 ‘파이오니아’들이 ‘모리시어스’를 방문하고 있을 때 한 사제를 그 섬의 새로운 주교로 임명하려고 영국으로부터 ‘로마 가톨릭’의 추기경 ‘힌슬리’가 그 섬을 방문하고 있었다. 그 섬은 그 특별한 행사를 위하여 그곳에 온 ‘가톨릭’ 고위 인사와 사제들로 가득하였다. 그 행사는 그 ‘파이오니아’들에게 「왕국, 세상의 희망」이라는 소책자를 제공할 수 있는 훌륭한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힌슬리’ 추기경에게 그 소책자를 제공한 것은 ‘로버트 니스벳’이었으며, 그는 소란을 일으키지 않고 그것을 받았다. ‘버어트 맥루키’는 새로 임명된 주교인 ‘제임스 빈’에게 전하려고 했는데, 그는 조용히 그 소책자를 받아서는 그것을 갈갈이 찢어 쓰레기통 속에 던져 버렸다!

그 당시 ‘모리시어스’ 섬의 교통비는 아주 쌌으며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쌌을 것이다. 예를 들어 기차로 섬을 일주하고 다시 ‘버스’와 기차로 한 바퀴 돌아도 0.35‘달러’ 정도 밖에 안들었다. 그러한 방법으로 그 ‘파이오니아’들은 그 섬의 모든 곳을 다 돌았다. 불어로 된 출판물 외에도 그들은 중국어와, ‘타밀’, ‘우르두’, ‘힌두’ 등의 여러 가지 인도어로 된 소책자를 전하였다. 한번은 인도어 신문의 편집자가 ‘로마 가톨릭’ 교직체의 잘못을 두려움없이 폭로한 「황금 시대」의 긴 기사를 흥미있게 읽었다. 그 편집자는 그 기사를 연재물 형식으로 싣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끝나기도 전에 경찰이 개입하여, 그것이 미칠 수 있는 결과에 대해 그 편집자에게 엄한 경고를 하였으며 그로 인해 그는 그러한 내용을 게재하는 일을 중단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제들로부터 많은 반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두 ‘파이오니아’들은 자기들의 임무를 완수하였다.

그들이 ‘모리시어스’를 방문한 결과 그 섬에 널리 증거가 되었으며 그들은 얼마큼 비공식적인 증거를 계속한 작은 집단을 남겨 두게 되었다. 그들의 노고가 맺은 그러한 결실을 보고 ‘니스벳’ 형제와 ‘맥루키’ 형제는 참으로 행복하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들의 ‘마다가스카르’ 방문은 어떻게 되었는가?

‘아프리카’ 남동 연안에 있는 그 거대한 섬(세계에서 네번째로 크다)은 길이가 약 1,600‘킬로미터’나 된다. 동해안은 계절풍의 영향을 심히 받기 때문에 강우량이 아주 많다. 그러나 그 섬의 다른 부분은 아주 건조하여 그 나라의 식물계는 사막 지대의 식물에서 풍부한 열대성 식물 지대의 식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마다가스카르’에는 아주 복잡한 혈통을 가진 약 600만의 인구가 살고 있다. 아주 일찍부터 ‘아랍’인들과 ‘힌두’인들은 ‘마다가스카르’에 통상 거류지를 설립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래로 ‘포르투갈’인들, 불란서인들, 영국인들이 모두 그 섬을 식민지화하려고 손을 뻗쳤다. 결국에 그 섬을 소유하게 된 것은 불란서인들이었으며 1896년에 그 섬은 불란서 식민지가 되었다. 그 이래로 불란서 문화와 불어가 그 섬과 그 섬 주민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 점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왕국 소식을 가지고 그곳을 처음 방문하였을 때인 1930년대에 ‘가톨릭’교가 우세하였음을 의미한다.

‘로버트 니스벳’과 ‘버어트 맥루키’는 1933년에 배로 ‘마다가스카르’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그들이 상륙한 주요 항구인 ‘타마타브’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신속히 그 구역을 돌면서 많은 출판물을 전하였고 그 다음에는 내륙에 위치한 수도 ‘타나나리브’로 이동하였다.

‘타나나리브’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자기 언어로 된 협회 출판물 얼마를 가지고 있는 희랍인 상점 주인을 한 사람 알게 되었다. 그는 그 출판물을 ‘뉴우요오크’ ‘브루클린’에 있는 친척으로부터 받았었다. 이로 말미암아 그 형제들은 아주 많은 격려를 받았으며, 기쁘게도 이 친절한 희랍인이 자기 가게 위에 있는 방의 숙박 설비를 그들에게 무료로 내주었다.

‘니스벳’ 형제와 ‘맥루키’ 형제는 이번 방문에서 집단이나 회중을 세우지는 못했다. 물론 그들은 언어에 커다란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왜냐 하면 극소수만이 영어를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가지고 있는 모든 출판물을 다 전할 때까지 ‘타나나리브’에 있가다, 그 후 남‘아프리카’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많은 진리의 씨가 그 섬에 뿌려졌다.

‘모잠비크’에서의 초기 활동

아직까지 별로 손을 대지 않은 또 다른 넓은 밭은 ‘모잠비크’라고 하는 ‘포르투갈’이 소유하고 있는 곳이었다. 면적은 약 780,000평방 ‘킬로미터’로서 주로 평평한 저지대이다. 그 인구는 이제 6,650,000명으로 그 중 소수만이 백인이다. 수도는 남‘아프리카’의 국경에 가까운 최남단에 위치한 ‘로우렝소마르케시’라는 주요 항구이다. 또 다른 주요 항구 도시는 더 북쪽으로 수백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베이라’이다.

종교의 자유가 있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여러 세기 동안 ‘가톨릭’ 교회가 종교계를 지배해 왔으며 도시들에는 많은 군소 ‘프로테스탄트’ 종파들이 활동하고 있다. 농장에서는 강제 노동이 사용되고 있었으며 그 때문에 ‘아프리카’인 노무자들은 아주 적은 급료를 받았다. 또한 ‘아프리카’들에 대한 형벌은 가혹하였다. 밝은 면으로는 ‘포르투갈’령 동‘아프리카’에 공식적인 인종 차별이 없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유럽’인 전용”이라는 표지라든가 교통 기관, 은행, 상점이나 다른 곳에서 인종적 차별은 없다. 그들에게 있는 구분은 “미개한” ‘아프리카’인들과 그들이 ‘아시밀라도스’라고 부르는 즉 “개화된” ‘아프리카’인들 사이에 있는 ‘아프리카’인 자신 내에서의 구분이다. 어떠한 ‘아프리카’인이라도 “미개한” 자라는 자기의 신분으로부터 높아져서 법적인 절차를 통해 “개화된” 사람이 될 수 있다. 피부색이 어떠하든지간에 모종의 시험들을 통과하여 “흑인”이 아니라 “백인”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아프리카’인은 그 지방의 심사부에 신청하여 그가 ‘포르투갈’어를 알고, 그리스도인 신앙(‘가톨릭’)을 가지고 있으며, 어느 정도의 재정적인 능력이 있고, 서구식으로 기꺼이 살고자 함을 입증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그가 백인들의 생활 방식을 채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는 허가증을 요구할 권리가 있으며, 그의 자녀들은 자유롭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갖게 되고 그는 선거권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그는 군복무를 해야 하며 높은 소득세를 내지 않으면 안된다. 단지 극소수의 ‘아프리카’인들만이 자격을 갖출 수 있다.

1925년 왕국의 씨는 지구상의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아프리카’인들 중에서 좋은 땅을 발견하게 되었고 몇년 동안 방해없이 꾸준히 자라게 되었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에 당국이 「파수대」 예약자들을 조사하기 시작하였으며 상당수가 체포되었다. 남부 ‘모잠비크’에서 체포된 사람들은 감옥에서 ‘니아살랜드’에서 내려온 다른 형제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 모두는 상당히 큰 집단을 이루게 되었다. 2년내지 3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서 그들은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그 결과 어떤 사람들은 ‘상토메’ 범죄자 식민지에 12년 동안 유배당하였고 다른 사람들은 10년 동안 ‘모잠비크’ 북부에 있는 노동 수용소로 보내지게 되었다. 선고에서 그들은 한 장소에 같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렇게 하면 ‘그들의 가르침은 매우 강력해서’ 그 지역이 ‘그 가르침으로 망쳐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선고를 받은 집단 중에 ‘마랑구아나’라는 형제가 있었다. 그에 의하면 북부에서 자기가 일한 곳 가운데 하나는 ‘안토니오 에네스’라는 작은 항구 근처에 있는 큰 ‘코코넛’ 농장이었다고 한다. 어느날 경찰서장이 둘러 보러 왔다가 그를 조사하였는데, 그는 성서 연설을 준비하고 있다가 발견되었다. 그 서장은 그 사실을 범죄자 식민지 소장에게 보고하였으나 그 소장은 그것이 아무런 해도 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경찰서장은 ‘마랑구아나’ 형제를 구타하였으며 그를 4개월 동안 감옥에 집어 넣었다. 여러 해 후에 형기를 마치고 ‘마랑구아나’ 형제는 ‘빌라 루이자’로 돌아갔다. 그곳의 왕국 전파 활동은 정지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그가 돌아온 것은 그 지방의 관심자들이 생기있는 출발을 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며 그 활동은 잘 발전하였다.

그와 같이 남부 ‘모잠비크’의 ‘아프리카’인 밭에서는 훌륭한 출발이 있었다. 그러면 ‘유럽’인들은 어떠하였는가?

처음으로 ‘유럽’인이 ‘로우렝소마르케시’에 도착하여 ‘포르투갈’ 백인들에게 약간의 증거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29년이었다. 그 사람은 ‘헨리 미르달’로서 ‘에디스 톰프슨’과 결혼하기 위해서 ‘파이오니아’ 봉사를 그만 두게 되었다. 그 두 사람은 계속 활동하였으나 그 당시 때때로 상당한 어려움을 느꼈다. 그러나 1933년 협회는 그 때쯤에는 이미 열성스러운 ‘콜포처’인 ‘레네 데론’과 결혼한 ‘피에트 드 제이거’를 파견하여 ‘모잠비크’에 있는 ‘유럽’인의 밭을 돕게 하였다. ‘드 제이거’ 형제 부부는 그곳에 있는 모든 ‘유럽’인 구역을 돌았으며 영어와 ‘포르투갈’어로 된 출판물을 많이 전하였다.

1935년에 다른 두 ‘파이오니아’가 ‘로우렝소마르케시’를 방문하였으나 사실상 그들은 잠깐 체류했을 뿐이다. 그 ‘파이오니아’들은 ‘프레드 루딕’ 형제와 ‘데이빗 노르만’ 형제였다. 그들은 ‘미르달’ 가족과 함께 있게 되었다. 여기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우리가 활동한지 5일째 되던 날 우리가 두 사람의 점잖은 방문객처럼 앉아서 광장에서 차를 들고 있는데 ‘데이빗’ 형제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프레드’, 그 쪽 말고 저기 왼쪽을 봐. 약 반시간 전부터 두 사람이 우리를 주시하고 있어’ ··· 바로 그날 우리가 집에 왔을 때 ‘에디스 미르달’ 자매는 이렇게 말하였다. ‘비밀 경찰이 당신 두 사람을 이곳에서 자주 감시하고 있어요.’ 그 자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차의 ‘사이렌’이 골목에 요란하게 울려 퍼지더니 곧 이어 우리는 죄수 호송차에 실리게 되었다. (그 차는 죄수를 체포하거나 호송하는 데 사용되는 차다.)”

그 두 형제는 ‘센호르 테이크세이라’라는 고위 관리 앞에 끌려 가게 되었는데 ‘데이빗 노르만’은 담대하게도 전체 음모의 배후에 주교가 있음을 알고 있다고 말하였다. 그 말은 아픈 데를 찔렀기 때문에 ‘테이크세이라’는 펄펄 뛰면서 다음과 같이 고함을 질렀다. “당신네들이 이곳 시민이라면 여기서 바로 ‘마데이라’ 도로 추방했을 것이요. 그러나 당신들은 남‘아프리카’ 시민들이기 때문에 나는 당신들을 즉각 국외로 추방시키겠소.” 바로 그 날 그 형제들은 앞과 뒤에 모두가 총검으로 완전 무장을 한 경찰을 가득 실은 차들의 감시를 받으며 ‘로우렝소마르케시’를 떠나 국경으로 향하였다. 국경에 도착하자 아직까지도 얼마의 출판물을 가지고 있었던 그 형제들은 경찰 경비원들에게 증거하고 그들에게 출판물을 전한 뒤 주위에 있는 모두에게 악수를 하고 작별 인사를 하였다!

1937년에 ‘모잠비크’ 주교의 또 다른 활동이 있었다. 그 해에 ‘미르달’ 형제는 경찰서장과 면담하도록 소환되었는데, 그 서장은 주교로부터 고발을 받았다고 말하였다. 그 고발 내용은 그 나라에서 배부되고 있는 협회 출판물이 사람들로 하여금 무장 봉기를 일으키고 혁명을 유발시킬 것이라는 것이었다. ‘미르달’ 형제가 해명을 하려고 노력하였으나 그 관리는 들으려고 하지 않고 그가 출판물을 계속 배부한다면 즉각 국외로 추방될 것이라고 통고하였다.

그러나 ‘미르달’ 형제는 항의하였다. 그는 경찰의 결정에 관해 호소하기 위해 총독과의 면담을 마련하였다. 그 총독은 친절하긴 하였지만 그 문제를 자기의 보좌관인 ‘센호르 마노’에게 맡겼다. 우연히도 ‘마노’는 아주 이지적인 사람으로서 명목상으로는 ‘가톨릭’교인이었으나 교회의 교리 중 많은 것에 동의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협회의 출판물을 주의 깊이 읽어 보고 그 출판물이 혁명을 조장한다는 비난은 거짓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센호르 마노’는 그 책들로부터 깊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에 그는 더 이상의 규제를 하지 않겠다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여호와의 증인들을 제거하려는 그 주교의 계략은 실패하였다.

그 동안 ‘미르달’ 형제의 고용주들은 그가 국외 추방될 가능성 때문에 매우 염려하였다. 그들의 태도 때문에 ‘미르달’ 형제는 사직원을 제출하였다. 그러나 사표를 받아들이는 대신 그 회사는 결국 그를 ‘요하네스버어그’ 근무처로 전근 시키도록 결정하였고, 그후 1939년에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로우렝소마르케시’로 ‘유럽’인 ‘파이오니아’들을 파견하려는 또 다른 시도가 1938년에 있었다. ‘데이빗 노르만’이 다시 왔는데 이번에는 영국에서 최근에 도착한 새로운 짝 ‘프랭크 테일러’ 형제와 함께 왔다. 그러나 그들이 도착한지 며칠도 안되어 다시 경찰이 개입하였다. 그들은 그 두 ‘파이오니아’가 활동을 중지하여야 하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즉시 추방될 것이라고 지시하였다. ‘케이프타운’ 지부는 그 ‘파이오니아’들에게 남‘아프리카’로 돌아오도록 하는 한편 많은 ‘포르투갈’어 출판물은 ‘미르달’ 가족에게 남겨 놓으라고 권고하였다.

그 동안에 우호적이고 동정적이었으며 사람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던 그 충독은 ‘포르투갈’ 정부에 의해 좌천되어 인도 ‘고아’라는 작은 ‘포르투갈’ 식민지로 전근을 가게 되었다. ‘로마 가톨릭’교인인 과격한 관리가 그를 대신하게 되었다.

이제 ‘모잠비크’에서의 ‘미르달’ 가족의 체류 기간이 다 되어 간다는 것을 아는 협회는 전국에 있는 정부 관리들 각자에게 출판물을 우송하라고 제안하였다. ‘미르달’ 가족은 ‘포르투갈’어 출판물의 겉봉을 만들었고 그 나라를 떠나기 바로 전날 그들은 여러 우체통에다 수백개의 그 소포를 부쳤다.

‘모잠비크’에 있는 ‘유럽’인들의 밭에는 뚜렷한 관심을 일으키지 못했으나 ‘아프리카’인들의 밭에서는 박해에도 불구하고 꾸준한 발전이 있었다. 1940년에 가서 ‘모잠비크’에 있는 ‘아프리카’인 전도인 수는 38명이라는 신기록에 달하였다. 그들은 네개의 다른 장소에서 집회를 가졌다.

‘니아살랜드’에서의 조직화

1925년에 ‘허드슨’ 형제가 ‘니아살랜드’를 방문한 후 협회에 계속 지도를 구한 극소수만이 ‘케이프타운’에 있는 사무실과 연락을 유지하였다. 그러다가 1933년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성실한 관심을 가진 핵심적인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리하여 ‘니아살랜드’에 ‘유럽’인 대표자를 주재시키겠다는 신청을 하였다. 그 신청서는 총독에 의해 호의적으로 받아 들여졌다. 그리하여 1934년 5월에는 남‘아프리카’ 지부의 감독 아래 그 나라 ‘좀바’에 출판물 보관소가 개설되었다. ‘케이프타운’ 사무실이 판단할 수 있는 바로는 그 때 ‘니아살랜드’에서 성실한 관심을 가진 사람이 약 100명이 되었다. 그 밭에서 활동을 조직하도록 남‘아프리카’로부터 ‘버어트 맥루키’가 파견되었다.

그의 목적지는 ‘리차드 칼린데’의 집으로서 그는 약 한달 정도 그 집에서 묵었다. 그 ‘아프리카’ 형제는 그가 ‘니아살랜드’에 있는 동안 그의 가까운 동료가 될 것이었다. ‘맥루키’ 형제가 활동을 시작하자마자 그는 심한 ‘말라리아’를 앓게 되어 병원에 두 주일 동안 입원하였다. 회복된 후 그는 ‘니아살랜드’에서 협회 출판물 보관소로 사용할 방 두개를 구할 수 있었다. 그는 하나는 사무실로 사용하고 다른 방은 숙소로 사용하였다.

그가 첫째로 해야 할 주된 임무는 소위 “‘왙취 타워’ 운동” 단체들이 조성한 혼란된 상태를 바로 잡는 것이었다. 그 일은 그가 예상했던 만큼 어렵지는 않았다. 한 가지는 ‘니아살랜드’의 경찰서장이 거짓된 ‘아프리카’인들의 운동 단체가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와 관련이 없다는 점을 인정하였다. 또한 ‘케이프타운’ 지부는 ‘버어트 맥루키’ 형제에게 그 입장을 다룰 명백한 지침 혹은 방침을 지시했었다. 그는 ‘니아살랜드’ 각지에 있는 집단을 차례로 방문하였다. 간 곳마다 강연을 한 후 ‘칼린데’ 형제가 통역 역할을 하였고, 「왕국, 세상의 희망」이라는 소책자에 나오는 결의문을 낭독하곤 하였다. 그 결의문은 성서적 명칭인 여호와의 증인과 관련이 있었다. 그 결의문에 찬동하는 모든 사람들은 거수하여 그것을 나타내도록 요청되었다. 대부분이 그들의 손을 들었으나 후의 사건들이 증명한 것처럼 불성실한 사람들이 많았다.

‘맥루키’ 형제는 때때로 회중들을 더 방문하였으며 이렇게 하여 많은 사람들은 거짓된 “‘왙취 타워’ 운동” 단체들과 그 지도자들을 지지하지 않도록 도움을 받았다. 몇 회중은 다져진 길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맥루키’ 형제는 그러한 활동을 하면서 여러 가지 흥미있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때때로 지방 형제들은 그의 차가 집회 장소까지 이를 수 있도록 숲 속으로 수십 리의 길을 닦았다. 아주 외딴 곳에 있는 한 집단은 ‘커누우’로밖에 갈 수 없었다. 그것은 악어들이 득실거리는 물길로 수십 리를 가는 아주 위험한 여행이었다. ‘맥루키’ 형제는 ‘커누우’가 동요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그 중앙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었으며 ‘아프리카’ 형제들은 교대로 노를 저었다. 그는 형제들이 숙소와 음식을 마련해 주고 영적인 것에 대한 인식을 나타낸 점에 깊은 감사를 느꼈다.

‘맥루키’ 형제는 ‘니아살랜드’에 있는 ‘유럽’인 사이에서도 활동을 하였는데 한번은 ‘카롱가’라는 곳을 방문하였다. 그곳에 가려면 차로 아주 험준한 꾸불꾸불한 도로를 따라 ‘리빙스턴’ 산을 내려가야 했기 때문에 천천히 차를 뒤로 빼고 그 다음에 앞으로 나가는 식으로 길을 지나가기 위해 차를 정지시키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가 접촉한 사람들 중에는 희랍어로 된 출판물을 받은 두 희랍인이 있었다. 후에 그 중 한사람은 침례를 받았다.

1934년 11월에 남‘아프리카’에서 온 두 ‘파이오니아’는 ‘포르투갈’령 동‘아프리카’를 지나 ‘니아살랜드’로 여행하였다. 그들은 ‘좀바’, ‘블린티르’, ‘림베’와 기타 여러 곳에 있는 소수의 ‘유럽’인들에게 증거할 수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그 여행에서 그들은 700권의 서적과 소책자를 전하였다. 그곳에 사는 ‘유럽’인들 사이에서 조직적인 호별 방문이 행해지기는 그 때가 처음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리하여 마침내 튼튼한 신권 조직이 ‘니아살랜드’에 설립되고 있었다. 야외 봉사 보고도 역시 받게 되었으며 1934년의 평균 전도인수는 28명이었다. 그후 얼마 있지 않아 ‘맥루키’ 형제는 ‘케이프타운’ 지부 사무실에서 일하도록 소환되었다. 그의 동생 ‘빌 맥루키’가 1935년 3월 17일 ‘니아살랜드’에 있는 출판물 보관소를 맡게 되었으며 그곳에서 여러 해 동안 충실하게 봉사하였다.

‘니아살랜드’의 많은 관심자들 사이에 신권 조직이 설립되어 감에 따라 야외 봉사에 참여하고 보고를 내는 수가 아주 신속히 증가되었다! 전도인수는 1934년의 28명에서 1935년에는 340명으로 증가되었다! 한편 그곳에서 반대도 역시 늘어 갔으며 그리스도교국 선교사들 중 얼마는 형제들의 활동을 방해하도록 정부의 관리들을 선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1934년 11월에 소책자 하나와 「황금 시대」 잡지를 그 나라에서 금지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증가는 계속되어 1937년에 가서 회중수는 48개로 증가되었으며 전도인 신기록은 1,319명에 이르렀다.

그후 얼마 있지 않아 몇개의 연설이 ‘신얀자’어로 녹음되었으며 ‘아프리카’인 형제들은 그에 깊은 감사를 나타내었다. 많은 회중들은 확성 장비를 사기 위하여 서로 협조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낚시단을 조직하여 ‘니아사’ 호로 갔고 그들이 잡은 고기를 시장에 내다 팔아 그 얻은 돈을 “축음기 기금”에 보탰다. 북부의 어떤 곳에서는 형제들이 거대한 나무를 사서 벤 다음 물에 띄워 자기들의 마을로 보냈다. 마을에서 그들은 그 나무 둥치 속을 파내어 ‘커누우’를 만들었다. 그것을 팔아, 그 돈으로 그들은 축음기를 살 수 있었다. 그렇게 하려면 몇달 동안 전도인들이 열심히 일해야 하였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축음기를 사서 왕국 활동을 더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하였다. 그 해에 「부」(富)라는 책이 ‘신얀자’어로 발행되어 회중에 훌륭한 영적 양식을 공급하였다. 그 결과 출판물 보관소의 종은 이전에 결코 볼 수 없었던 형제들 사이의 연합이 있게 되었다고 보고할 수 있었다.

영령 동‘아프리카’에 다시 노력을 기울임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영령 동‘아프리카’를 1931년에 ‘그레이’ 형제와 ‘프랑크 스미스’ 형제가 방문하였고, 그후에 ‘로버트 니스벳’과 ‘데이빗 노르만’이 방문하였다. 그러한 방문 중에 많은 출판물이 전해졌으며 널리 증거되었다. 그러나 이제 또 다시 방문할 때가 되었다.

동‘아프리카’에서의 세번째 활동은 1935년에 남‘아프리카’에서 온 네명의 ‘파이오니아’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그들은 ‘그레이 스미스’와 그의 아내 그리고 ‘니스벳’ 친형제 두 사람 즉 ‘로버트’와 ‘조오지’였다. 이번에 그들은 생활을 위한 설비로서 침대, 부엌, 음료수, 여분의 휘발유 통 그리고 모기를 막기 위한 걷을 수 있는 철망 등을 온전히 잘 갖춘 3/4‘톤’짜리 운반용 차량 두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기동력이 있었기 때문에 어떤 때는 키가 3‘미터’나 되는 풀이 완전히 덮혀 있는 이전에 증거할 수 없었던 곳에도 갈 수 있었다. 그들은 황무지에서 자는 일이 종종 있었으며 밤에 울부짖는 사자나 평화로이 풀을 뜯는 얼룩말과 기린, 불안하게 하는 코뿔소나 코끼리의 모습 등 풍부한 야생 동물과 더불어 ‘아프리카’ 심장의 고동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었다.

‘탕가니카’에 이르러 그들은 헤어졌다. ‘스미스’ 형제와 그의 아내는 얼마 동안 ‘탕가니카’에 있었고 ‘니스벳’ 형제들은 계속하여 ‘나이로비’로 갔으며 그후 거기에서 ‘스미스’ 부부는 그들을 만나게 되었다. ‘탕가니카’에 있는 동안 ‘스미스’ 부부는 체포되어 남‘아프리카’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스미스’ 형제는 “날 때부터 영국 시민”이라고 이서되어 있는 남‘아프리카’의 여권을 소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 ‘나이로비’로 가기로 결정하였다. ‘케냐’의 ‘나이로비’에 도착하자 그 부부는 즉시 경찰관들에게 가서 280‘달러’를 공탁하고 체류 허가를 받았는데 남으로 돌아갈 때 그 돈은 돌려 받았다.

그들은 ‘우간다’로 나아갔다. ‘캄팔라’에 도착하여 그들은 그곳이 경찰의 감시를 계속 받게 되는 적대적인 곳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총독이 내린 추방 명령으로 인하여 ‘우간다’를 떠나기 전에 그들은 많은 출판물을 전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나이로비’로 돌아가게 되었고 거기에서 다시 한번 ‘니스벳’ 형제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곳에서도 당국자들로부터 반대를 받았으나 서적을 3,000부 이상 그리고 소책자를 약 7,000부 전하였고 「황금 시대」 예약을 여러 건 맡게 되어 훌륭한 증거를 하였다. 추방 명령에 대하여 강력히 항의하였으나 당국자들로부터 만족할 만한 설명은 없었다.

그러한 활동을 하던 중 ‘로버트 니스벳’이 장‘티푸스’에 걸려서 ‘나이로비’ 병원에 남게 되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돌아오기 시작하였다. ‘스미스’ 형제와 ‘조오지 니스벳’ 형제는 ‘잔지바르’에 들어가려 하였으나 허가가 나오지 않아 그들은 남‘아프리카’로 돌아왔다. ‘로버트 니스벳’은 몸이 완쾌되었으며 그후 1955년에 ‘모리시어스’의 첫 지부 감독자가 되었다. 그의 형제인 ‘조오지’는 ‘모리시어스’에서 얼마 동안 선교인으로 봉사한 후 남‘아프리카’로 보내졌고 1958년 남‘아프리카’ 지부에서 봉사하기 시작하였다.

“암흑 대륙”을 개척한 이들 ‘파이오니아’들은 실로 그러한 활동에 수반되는 가진 역경과 위험을 직면할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6명의 ‘파이오니아’들 중에서 4명이 흑수열, ‘말라리아’, 장‘티푸스’로 말미암아 병원에 오랫 동안 입원하게 되었다. 그들의 노력을 통해서 엄청나게 많은 출판물이 배부되었으며 1950년대에 ‘길르앗’ 학교 졸업생들이 시작하게 될 영적 건축 활동을 위한 기초가 놓여 지게 되었다.

남‘로디지아’에서 발전이 계속됨

1929년에 ‘애드셰이드’라는 ‘파이오니아’ 자매가 혼자서 남‘로디지아’(지금의 ‘로디지아’)를 마지막으로 방문하였는데 그 자매는 당국으로부터 많은 방해를 받았었다. 그 다음에 남‘아프리카’에서 온 ‘파이오니아’들이 방문하게 된 것은 1932년 5월이었다. 그들은 두대의 차에 타고 온 네명의 ‘파이오니아’들 즉 ‘피에트 드 제이거’ 형제 부부와 ‘로버트 니스벳’ 형제와 ‘로널드 스내샬’ 형제였다. 그들은 토요일 오후에 국경에 도착하였는데 그때 관리들은 정구 경기를 하고 있었다. 그 형제들은 자신들이 만국 성경 연구생 협회를 대표하고 있다고 말했는데 아마 빨리 가서 그들의 경기를 계속하고 싶어서였던지 관리들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실제로는 자신들이 ‘왙취 타워’ 협회의 대표자들에게 입국을 허락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곧 문제는 터졌다. ‘불러와요’에서 단지 며칠 동안 활동한 후에 그 ‘파이오니아’들은 검찰국 본부와 경찰서에 불려가서 긴 진술서를 쓰지 않으면 안되었다.

며칠 뒤 총독의 명령에 따라 그 형제들은 48시간 내에 떠나라는 지시를 받았으며 이의는 인정되지 않았다. 그들은 법률에 대한 경험이 있는 우호적인 사람과 상의하였으며 그의 조언에 따라 항소하겠다고 고집하였으며 결정이 날 때까지 떠나기를 거부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호소문을 총독에게 전해 주도록 검찰국장에게 제출하였다. 바로 그 다음날 영국과 남‘아프리카’의 신문들은 그 사건에 관한 기사를 실었다. 1932년 5월 30일자 「케이프 타임즈」지는 이렇게 보도하였다. “‘불러와요’ 발, 토요일. 선교 활동을 수행할 목적으로 3주일 전에 남‘아프리카’로부터 이곳에 도착한 4명의 ‘유럽’인들은 당국자들에 의해 ‘탐탁지 않은 거주자 혹은 방문객’들로 생각되어 다음 월요일까지 이 식민지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다.

“당국자들은 그 선교인들이 전할 것으로 생각되는 교리를 승인하지 않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편 그 형제들은 ‘런던’ 지부와 접촉하였으며 협회는 ‘런던’으로부터 남‘로디지아’ 고등 판무관에게 전문을 보냈다. 그 결과 결정이 변경되어 그들이 ‘아프리카’인들 사이에서 활동하지 않는다면 6개월 동안 체류할 수 있다는 허락을 받았다. 이제 그것은 남‘로디지아’의 ‘유럽’인들에게 훌륭한 증거를 하게 되는 세번째 기회였다. 그 경우 눈에 띌만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는 기록은 없으나 개인적인 증거와 「구출」이라는 서적, 「왕국, 세상의 희망」이라는 소책자가 그 나라의 거의 모든 통치자들에게 전해졌다.

그들이 체류해 있는 동안 ‘P. 드 제이거’ 형제는 ‘로디지아’의 수상인 ‘모팻’ 씨를 그의 농장으로 특별히 방문하였다. 그들은 매우 우정적인 대화를 나누었음이 분명하다. 그 결과 ‘드 제이거’ 형제는 당국자들에게 서신을 내어 ‘아프리카’인들 중에서의 ‘왙취 타워’ 협회 활동이 적절한 감독을 받도록 ‘유럽’인 대표자 파견 허가를 신청하였다. 그 때가 1932년 10월이었다. 이미 ‘케이프타운’ 지부 사무실은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 남‘로디지아’ 정부의 식민 차관에게 1932년 9월 14일자로 서신을 발송하였다. 그러나 ‘케이프타운’ 지부와 ‘드 제이거’ 형제의 연합적인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지방 교직자들의 선동을 받고 ‘로디지아’ 당국자들이 그 나라에 여호와의 증인들을 들여 놓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케이프타운’ 지부는 그 문제를 그대로 두지 않고 1932년 10월 ‘로디지아’ 식민 차관에게 다른 장문의 서신을 보냈으며 그 편지에서 그 문제에 대해 아주 강력하게 이야기하였다. 답은 신속히 왔으나 아주 간략하였다. “본 정부는 여러분에게 전한 이전의 결정을 재고할 수 없음. 따라서 귀 협회의 어떠한 대표자라도 본 식민지에 이주해 오는 것을 금함.” 다른 시도로서 일년 후인 1933년 11월 ‘로디지아’의 내무장관에게 편지를 보냈으나 같은 반응이었다.

‘케이프타운’ 지부는 지체하지 않고 계속하였으며, 왕국 활동의 조직과 인도를 위해 협회의 특별 대표자의 파견 허가를 요청하는 장문의 편지를 ‘소올즈버리’의 당국자들에게 몇년 동안 매년 보냈다. 정부 쪽에서도 정기적으로 허가를 거부하는 편지를 보내왔다. 1934년에 ‘니아살랜드’ 당국이 출판물 보관소의 개설과 ‘유럽’인 형제가 그곳에서 활동을 조직하도록 허락한 사실 및 1936년에 북‘로디지아’에서도 비슷한 마련이 있게 되었다는 사실은 ‘케이프타운’ 지부 사무실이 그러한 싸움에서 사용할 훌륭한 투쟁 수단이 되었다. 1938년에는 두번 신청을 하였음이 분명하며, 두번째 신청에 대한 답으로서 국무장관이 보낸 1938년 11월 16일자 편지는 다음과 같이 되어있다. “본 정부는 북‘로디지아’와 ‘니아살랜드’에서의 승인 결과를 더 두고 관찰하기 전에는 귀 협회를 승인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과 더 나아가 이 식민지의 인근 국가에 그 출판물이 적합하지 않는 한, 본 정부가 귀 협회의 승인에 동의하지 않을 것임을 본관은 여러분께 통고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남‘로디지아’에서 왕국 활동을 확장시키려는 노력은 단지 ‘케이프타운’ 지부와 남‘로디지아’ 정부 사이의 정기적인 서신 교환 외에 또 다른 형태를 띠게 되었다. 1935년 10월 25일자 「남‘로디지아’ 정부 관보」에는 전파 활동의 규제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두개의 법안이 실렸다. 그 한 가지 법안은 원주민 교직자와 선생들에게 증명서를 발급함으로써 원주민들 사이에서의 종교 활동을 규제하기 위한 “원주민 교직자 규제령 1936”이라고 불리웠다. 많은 토론과 논쟁이 있은 후 그 법안은 법으로서 통과 되지 못하였다. “선동 규제령 1936”이라고 한 다른 법안은 선동적인 발언이나 신문, 서적, 영화, 축음기 판 등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뒤따르는 토론과 논쟁을 통하여 그 법안이 특히 협회의 활동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 아주 분명해졌다. 그것이 법이 되기 전부터 선동에 관한 그 법안이 왕국 활동을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무기라는 것이 너무나 분명했기 때문에 ‘브루클린’ 협회 사무실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협회장 ‘러더포오드’ 자신이 남‘로디지아’의 수상과 모든 의원들에게 그들이 취하고 있는 위험한 행로에 대해 경고하는 서신을 보냈다. ‘케이프타운’ 지부는 그 편지 25,000부를 인쇄하여 그것을 남‘로디지아’의 인명록에 나오는 모든 ‘유럽’인들에게 보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선동에 관한 그 법안은 법률로 정해졌으며 그 후 곧 협회 출판물 가운데 14개가 선동적이라고 선언되었다(대책이 7권 그리고 소책자가 7권). 시험하기 위해 그 당시 남‘로디지아’의 회중들을 방문하고 있던 ‘카붕고’라는 ‘아프리카’인 형제에게 즉시 책들을 우송하였다. 그 책들은 ‘불러와요’에 도착하자 세관 관리들에 의해 압수되었다. 협회는 대응하여 그것을 내주도록 신청서를 제출하였다. 그 사건은 1937년 5월에 남‘로디지아’의 고등 법원에서 심리되었다. 협회측 변호인 ‘비들’ 씨(후에 ‘로디지아’의 대법원장)는 그 출판물을 주의깊이 연구하였다. 그 사건이 심리되기 전 이틀 동안 남‘아프리카’ 지부 감독자인 ‘조오지 필립스’ 형제와의 토론에서 그가 그 내용을 잘 알고 있음이 나타났다. 그 서적들의 장점은 법정에서 여러 날 동안 충분히 토론되었다. ‘케이프타운’에서 올라온 ‘필립스’ 형제는 법정에서 변호인 옆에 앉아 적절한 성귀를 찾아내고 토론 중인 출판물로부터 발췌한 내용에 관해 올바로 설명하도록 그를 돕는 특별하고 흥미있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심리 후 판사인 ‘저스티스 J. 허드슨’은 판결을 내리기 전에 자기가 그 책들을 읽어 보겠다고 암시하였다. 그의 판결은 1937년 9월 23일에 내렸다. 그 판사는 변호인측의 주장에 대한 찬반 양론을 논한 뒤 다음과 같이 그의 의견을 요약하였다. “이 서적들은 모두 지상에 있는 모든 정부들의 조직과 행정에 있어서 기본적인 결함을 시정하는데 주의를 환기시키려고 훌륭한 믿음에서 저술한 출판물이라고 규명할 수 있다 ··· 따라서 본관은 그 출판물의 어느 것도 선동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협회를 위한 중요한 승리였다. 그러나 정부는 그에 대하여 항소를 제기하였다. 그 사건은 1938년 3월 15일 남‘아프리카’ 최고 법원 상고부에서 심리하게 되었다. 1938년 3월 22일 ‘N. J. 드 웻’ 판사에 의해 판결이 내려졌는데 그것은 남‘로디지아’ 법원의 판결을 지지하는 것이었다. ‘로디지아’와 남‘아프리카’의 신문들은 그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사실상 「불러와요 크로니클」지는 법원의 견해 전문을 인용하였다. 그리하여 훌륭한 증거가 되었으며 협회 출판물은 풀려나게 되었다.

형제들 사이의 활동은 잘 증가되고 있었다. 1938년에 왕국 선포자들의 수는 321명으로 증가되었고 20대의 축음기가 야외에서 사용되고 있었다. 그 당시 집단 조직 즉 회중 수는 34개였다.

1938년초 협회는 ‘유럽’인들의 밭에서 활동하고 격려하기 위해서 두 사람의 ‘유럽’인 대표자를 보내겠다고 또 다시 허가를 신청하였는데 이번에는 “남‘로디지아’의 원주민들 사이에 어떠한 출판물도 배부하거나 공개 집회를 갖거나 혹은 어떠한 선전도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도착 전이나, 도착 즉시 각자가 제출한다는 조건으로” 허락되었다. 그러므로 전세는 협회에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지만 싸움이 끝난 것은 결코 아니었다.

1938년에 협회가 파견한 두 ‘파이오니아’는 ‘로버트 니스벳’과 ‘파이오니아’ 봉사에 전혀 새로운 남‘아프리카’인 ‘짐 케네디’였다. 국경에 있는 ‘베이트 브리지’의 초소에서 그들은 당국자들에 의해 저지되었으며 심문을 받고 결국에는 6개월 동안 그 나라에서 체류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그들은 ‘유럽’인들에게 활동할 수 있는 아주 훌륭한 시간을 가졌으며 그들이 가는 곳마다 출판물을 많이 전하였다. 금광 지구인 한 곳에서 그들은 하루에 200권 가까운 서책을 전하였다. 물론 경찰들은 그들을 계속 감시하였으며, 그들은 지방 경찰서에 항상 보고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거의 모든 곳에서 사람들은 그들에 관해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것 같았으며 그들의 방문을 기대하고 있었다. 농부들은 대개 우호적이고 손님 접대를 잘하였으나 몇몇 경우에는 그들이 “왙취타워”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화를 내었다.

‘불러와요’에서 그들은 ‘맥그리거’라는 형제를 만났는데, 그는 ‘스코틀랜드’에서는 진리 안에 있었으나 영적으로 냉담해지게 되었다. 그는 그 ‘파이오니아’들로부터 많은 격려를 받고 얼마 후 활동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그 ‘파이오니아’들은 약 12년 전에 ‘조오지 필립스’와 ‘헨리 미르달’과 접촉한 바 있는 ‘군’ 가족도 만나게 되었다. 그들도 역시 무활동 상태에 있었으나 그 두 ‘파이오니아’에 의해 영적으로 재생되었다. 그리하여 1938년에 그들은 ‘불러와요’에 집단 하나를 조직할 수 있었다. 그것은 남‘로디지아’에서 ‘유럽’인 첫 연구 집단이었으며 약 17명이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맥그리거’ 형제가 ‘로디지아’에서 협회 대표자로서의 역할을 하였으며 보고를 수집하고 그 나라에서 왕국 관심사를 돌보는 데 유용한 일을 많이 하였다.

북‘로디지아’에서 어려움을 직면함

증인들이 남‘로디지아’에서는 싸움에 이기고 있었다. 그러나 1925년에 ‘음와나 레사’가 문제를 일으켰던 이웃 나라 북‘로디지아’(‘잠비아’)에서는 그들이 어떠하였는가?

‘음와나 레사’의 사건이 있었던 이후 여러 해 동안은 어려웠다. 여러 집단의 관심자들이 철로변에 있는 대부분의 주요 마을에서 발견되었다. 그 철로는 남부 국경의 ‘리빙스턴’에서 ‘코퍼벨트’ 지역과 ‘코퍼벨트’에 인접한 ‘콩고’ 국경에 이르기까지 뻗어 있었다. 그러한 집단들은 ‘뉴우요오크’ ‘브루클린’ 협회 사무실이나 ‘케이프타운’ 사무실과 우편을 통해 어느 정도 접촉해 온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통신의 범위는 출판물 주문과 기부로 제한되어 있었다. 서신을 주고 받는 한 사람은 집단 인도자로 인정되었고 그 집단과 연합하는 사람들은 그를 그렇게 받아 들였다.

세속 당국자들의 계속적인 공격과 조직적인 인도의 부족으로 대부분의 집회는 가정에서 보는 작은 집단으로 제한되었다. 그렇지만 열성을 가진 성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제한된 재료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계속 연구하였다.

인도를 구하는 한 젊은이로 ‘톰슨 캉갈레’라는 사람이 있었다. 1931년에 20대 초기였던 ‘톰슨’은 세계적인 불황으로 ‘읍와나 음쿰와’ 광산이 폐쇄된 후 직장을 구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키트웨’에 있는 ‘응카나’ 광산에서 새로운 직업을 갖게 되었다. 얼마 있지 않아 그는 광산 노무자로 구성된 두개의 축구 ‘팀’을 감독하도록 임명되었다. ‘고울 키이퍼’인 한 젊은이가 그 사람과 숙소를 같이 쓰고 있었다. 어느 일요일에 그 젊은이는 우연히 여호와의 증인의 집회에 참석하였고, ‘포켓’판 「성경 연구」 한권을 가지고 돌아 왔다. 그 책의 내용을 이해하려는 그 젊은이의 결의에 자극을 받은 ‘톰슨’은 그러한 집회에 가서 스스로 살펴 보기로 하였다. 그가 참석한 집회에서 「하나님의 거문고」의 사용이 특히 강조되었으며 ‘톰슨’도 한권 구하였다. 그는, 자기가 그 새로운 책의 내용을 열렬히 받아들였으며 얼마 있지 않아 “하나님의 사업을 하는 데 전념하게 되었고” 그 해에 물침례의 지원자로서 자격을 갖추게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톰슨 캉갈레’ 형제는 1937년 10월 13일에 ‘파이오니아’ 봉사에 들어 갔으며 형제의 종과 지역의 종(순회 및 지역 감독자)으로 봉사하였고 북‘로디지아’ 지부 사무실로부터 임명을 받고서 ‘탕가니카’와 ‘우간다’ 지역에 좋은 소식을 전하였다.

그러나 ‘캉갈레’ 형제가 진리와 접촉하기 전 몇해 동안을 돌이켜 볼 때 전파 활동이 북‘로디지아’에서 심한 반대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1927년부터 1934년에 이르기까지 북‘로디지아’에서의 활동을 감독하기 위해 영구적으로 ‘유럽’인 대표자들을 파견하려는 협회의 모든 노력은 거부되거나 무시되었다. 그 기간 중에 행한 맨 마지막의 두 차례 신청중 한번은 1932년 10월 12일에 있었고, 다른 한번은 1934년 9월 20일에 있었는데, 나중 것은 접수되었으나 진지하게 고려했다는 회답은 없었다. 그 후의 사건들을 통해 볼 때 활동을 전적으로 억압하려는 음모가 그 때 시작되고 있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 때까지는 「하나님의 거문고」와 몇 가지 소책자 등 협회 출판물 얼마가 ‘신얀자’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하나님의 거문고」는 관심가진 ‘아프리카’인들에 의해 그들의 연구에서 교본으로 사용되었다. 「1935년 여호와의 증인의 연감」에 나온 불완전한 보고에 의하면 두 개의 ‘로디지아’에 있는 소수의 전도인들이 1934년에 11,759부의 출판물을 배부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활동은 거짓 종교인들과 정치적인 요소의 분노를 일으켰으며 그들은 토착적인 운동 단체에 속한 사람들의 신앙과 비행을 협회의 대표자들에게 돌렸으며 법률에 의한 악행을 선동하였다.—시 94:20.

‘율례를 빙자하여 잔해를 도모함’

그러한 악행은 1935년 5월 3일 열렬한 ‘로마 가톨릭’교인인 법무 장관 ‘핏제럴드’가 주재하는 입법 회의를 통해 안출된 북‘로디지아’ 형법 수정안에 의해 도모되었다. 그 법은 “1935년 법령 10호”로서 알려지게 되었다. 그 법은 ‘왙취 타워’ 협회의 출판물을 대상으로 한 것이 분명하였다. ‘핏제럴드’ 씨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 법은 선동적인 신문을 팔거나 배부하는 것을 범법으로 규정한다. 또한 그 법은 특정한 관리들이 소포에 선동적인 재료가 들어있는지 조사할 목적으로 우체국에 있는 소포를 조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주 중요한 점은 그 법이 공포됨으로써 영지 내로 어떠한 신문이나 서적 혹은 문서의 반입을 금지할 권한을 총독에게 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또한 그들이 다른 사람들의 권고를 듣고 조치를 취하였음을 인정하였다. 그 권고는 ‘빅토리아’ 폭포에서 개최된 선교사 회의의 권고였음이 분명하다! 그 입법 회의에 참석한 자유를 사랑하는 어떤 사람들은 그 법안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그 법은 통과되었고 ‘코퍼벨트’에서 갑자기 터진 1935년의 폭동은 여호와의 증인들을 치기 위해 그들이 바로 기다리던 기회를 가져다 주었기 때문에, 그 법은 적들이 가진 유용한 도구가 되었다.

여호와의 증인들의 적들은 처음부터 증인들을 “희생을 위한 제물”로 만들 결심을 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폭동이 일어났을 때에 ‘로디지아’에 여호와의 증인들은 350명 밖에 없었다. 북‘로디지아’에서의 활동을 다른 나라들에서 행해지는 방법과 동일한 식으로 전개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그 ‘아프리카’인 증인들은 전파 활동 및 깨끗한 그리스도인 생활의 필요성을 논하기 위해서 5월 10-12일에 ‘루사카’에서 비공식적 대회를 개최하였다. 의심할 것 없이 ‘루사카’ 대회가 5월말경에 발생한 ‘코퍼벨트’의 난동 사건과 모종의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남북 ‘로디지아’ 전역에서 검찰국원들이 여호와의 증인들을 수색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6월 5일 ‘루안사’에서 6명의 증인들이 체포되어 삼일 동안 감금되어 있었다. 그후 그들은 혐의가 없었기 때문에 풀려났다. ‘응돌라’에서는 국립 병원에서 잡역부로 일하던 한 사람은 그가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이유로 그의 직장을 잃었다. 정부 관리들의 선동에 따라 전국에 걸쳐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그와 같은 일이 행해졌다. 북‘로디지아’ 정부의 총리에게 보내는 1935년 7월 1일자 서한에서 ‘케이프타운’ 지부 감독자는 그러한 모든 거짓된 비난에 대해서 여호와의 증인들을 옹호하였으며 그에게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한 박해가 중단되도록 필요한 조처를 취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난동 조사 위원회에 의해 조사되고 두권의 서적으로 간행된 증거에 의하면 단 한사람의 여호와의 증인도 그러한 폭동에 관련된 일이 없음이 증명되었다. 반대로 ‘응돌라’ 지구 판무관 ‘J. L. 케이스’ 씨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여호와의 증인들과 ‘왙취 타워’ 조직 자체는 그러한 난동에 가담하지 않았다.”

명백한 증거에 의하면, 주로 ‘가톨릭’교인들이며 여호와의 증인들을 심히 반대하던 ‘아웸바’인들이 그 난동의 배후에 있었고, 주된 원인은 인두세(人頭税)의 증가 및 그것의 시행 방법이었음이 밝혀졌다. ‘론 엔텔로우프’ 구리 광산(‘루안샤’)의 지배인은 “난동 원인을 누구에게 물어보아도 항상 세금의 증가를 지적하는 것 같다”고 말하였다.

1935년 7월 8일에 시작된 위원회의 심문이 있기 바로 전 ‘왙취 타워’ 협회의 ‘케이프타운’ 지부는 북‘로디지아’에 ‘유럽’인 대표자를 한 사람 파견할 수 있도록 허가를 끈질기게 요청한 것에 관하여 답장을 받았다. 1935년 6월 24일자 북‘로디지아’ 정부의 공문은 다음과 같다: “본 정부는 ··· 이 나라에 있는 여러분의 신도들의 감독과 규제를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그러한 활동에 대해 어떠한 반대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피에트 드 제이거’를 파견하기로 결정하였으나, 북‘로디지아’ 정부는 “좀 더 원로급 협회 임원”을 원한다고 말하면서 그에 반대하였다. 그는 단지 조사하고 보고서를 제출하기 위해서 파견되는 것이며 결국에는 영국계 인사가 책임을 맡게 될 것이라는 점이 납득되자, 그들은 동의하였다. 그러나 ‘왙취 타워’ 협회와 여호와의 증인들이 거짓 비난 때문에 조사 위원회의 조사를 받게 되고 정부는 그들의 “파괴적인 특성”을 찾아내기 위해 우리의 어떤 서적으로부터 특별히 선택된 몇 군데의 “발췌문”을 제출하였기 때문에 협회를 위하여 증거를 제시하도록 때를 맞추어 ‘드 제이거’ 형제를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소위 파괴적이라는 “발췌문”에 관하여 설명함으로써 훌륭한 증언을 하였기 때문에 정부 관리인 ‘J. L. 케이스’ 씨 조차도 성서로부터의 발췌문이 파괴적이 아닌 바와 같이 그러한 발췌문도 파괴적이 아님을 인정하였다.

그 위원회의 조사 내용이 1935년 10월 2일에 출판되었다. 요약하면 그것은 다음과 같다. “본 위원회는 ‘무풀리라’ 난동의 직접적인 원인은, 저녁에 광산 경찰이 세금이 전반적으로 15‘실링’까지 오를 것이라고 갑자기 소리친 데 있었음을 알게 되었고, ‘응카나’와 ‘루안샤’에서의 난동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은 원주민들에게 무력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 보라고 도전한 것과 ‘무풀리라’에서 파업이 성공하였다고 거짓 선전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여호와의 증인들의 반대자들은 ‘왙취 타워’ 협회에 관한 다음과 같은 설명을 듣고 고소해 쾌재를 불렀다. “본 위원회는 ‘왙취 타워’의 가르침과 출판물이 세속적인 권위자 및 영적 권위자들 특히 원주민 권위자들을 모독하며 그것이 위험스러운 파괴적 활동이며 최근의 난동에 있어서 중요한 한 가지 배경적 요소임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바로 원하는 것이었으므로 1935년 10월 4일 총독 ‘허버트 영’은 “1935년 법령 10호”에 의해 그에게 부여된 권한을 이용하여 원주민들에 의해 널리 사용된 유일한 ‘신얀자’어 서적 「하나님의 거문고」와 절판된지 10년이 된 다른 서적을 포함하여 우리의 서적 전체를 금지하였다! 결국 ‘J. F. 러더포오드’가 저술한 소책자 둘을 제외하고 전부 금지된 것이었다.

위원회의 보고서와 잇따른 우리 출판물의 금지에 대하여 신문들은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그 대부분은 편파적인 것이었고 불리한 것이었으나 ‘케이프타운’ 지부는 모든 경우에 진리를 변호하였다. 한번은 1935년 10월 16일자 ‘응돌라’에서 발행되는 「북‘로디지아 어드버타이저’」 특별호를 통해 훌륭한 증거가 있었는데 그 신문은 위원회에 제출한 협회의 증언, 진술서, 서신 등을 전부 실었다. 그 호에서 편집자는 사람들에게 자기 사무실에 있는 금지된 서적들을 와서 보라고 초대하였다. “우리는 우리 사무실에 참조를 위한 전체 자료를 비치해 놓고 있다. 그것들을 참조하기 원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곳에서 그것들을 볼 수 있다 ··· 두려워하지 말라. 와서 관련된 모든 진술을 살펴보고 스스로 판단해 보라.” 위원회의 보고서가 출판되자마자 설명서와 함께 「정부」 및 「편협」이라는 소책자가 북‘로디지아’에 있는 모든 ‘유럽’인들의 손에 전해졌다.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다

「북‘로디지아—어드버타이저’」지는 북‘로디지아’의 행정에 모순점이 있다는 점에 주의를 환기시키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동의하건 안하건간에, 1933년의 ‘니아살랜드’ 총독은 이 사람들을 환영해 놓고, 북‘로디지아’ 총독이 된 그 사람(동일 인물)이 상당기간 주저한 후에야 그들을 허용한다는 것은 이 나라 행정에 근본적으로 잘못된 점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2개월 후, 총독은 아무런 정당한 사유도 없이 그들에게 이 나라에서 떠나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것도 소위 ‘토착적인 ‘왙취 타워’’라고 하는 것에 속한 원주민들의 비행 때문이 아니라, 정부가 이전에 그들을 이 나라에 들어오도록 허락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근거로 그런 요구를 하고 있다.”

동 신문 편집자는 “‘응돌라’의 ‘유럽’인 거주자들이 ‘드 제이거’ 형제의 체재에 대해 정식으로 항의하였고 그의 활동이 혼란된 영향을 주는 것 같기 때문에” 두달 후 북‘로디지아’ 정부가 그 형제의 소환을 협회에 요청한 점을 지적하고 있었다. 그에 대한 답변으로 ‘케이프타운’ 지부는 “전체적인 상황을 충분히 검토한 후” 북‘로디지아’ 정부가 ‘유럽’인 대표자를 파견하도록 허가해 주었으며 북‘로디지아’에서의 ‘드 제이거’ 형제의 임무는 그곳의 활동을 영구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예비적인 조처에 불과했음을 지적하였다. 협회가 ‘유럽’인 대표자로 ‘루엘린 필립스’를 파견하기로 제안한 것이 그 때였으며 그들은 그가 활동을 영구적으로 관리하고 이번에는 북‘로디지아’의 새로운 수도인 ‘루사카’에 즉각 출판물 보관소를 개설하기를 바랐다. 협회는 “그 문제가 고려 중에 있으며 때가 되면 여러분에게 결정이 통지될 것입니다”라고 한 통지를 받았다. “귀국에서 ‘L. V. 필립스’가 우리의 대표자로서 활동하기 위해 본인이 파견을 위한 준비를 완료해도 좋은지 문의”하는 북‘로디지아’ 국무장관에게 보내는 1935년 11월 25일자 서신에서, 지부 감독자는 그 문제를 다시 끄집어 내었다. 그 회신은 이러하였다. “귀하는 당분간 확정적인 대답을 들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한편 진리의 담대한 투사인 ‘드 제이거’ 형제는 ‘응돌라’에 계속 남아 있었으며 우리의 출판물을 금지한 법의 효력을 시험해 보기 원하였기 때문에 1935년 10월 21일자 그 지방 신문 편집자에게 그러한 서적 두권을 제공하였다. 그 결과 그는 포고령 위반 혐의로 유죄가 되어 ‘응돌라’의 행정관에 의해 2‘파운드’의 벌금을 물게 되었다. 그 사건을 북‘로디지아’의 고등 법원에 항소하였다.

그 항소 사건이 아직 계류 중일 때 여호와의 증인과 ‘왙취 타워’에 대한 문제가 영국 하원에서 제기되었으며 그때 ‘더틀’ 씨는 “여호와[의] 증인들과 ‘왙취 타워’ 운동 단체의 지지자들이 북‘로디지아’에서 정당하게 활동할 수 있는 보장”을 요구하였다. 식민지 국무 차관인 ‘J. H. 토마스’는 “앞으로의 정책에 관하여 북‘로디지아’ 총독과 협의 중에 있다”고 말하였다.

‘케이프타운’ 지부 사무실은 다음과 같은 전문을 식민지 국무차관에게 즉각 보냈다. “각하가 장래의 정책을 결정하기 전에 북‘로디지아’에서의 우리 활동에 관한 진술서를 제출할 기회를 삼가 요청함. 각하에게 항공편으로 부치겠음.” 바로 같은 날 북‘로디지아’에서의 우리 활동을 분쇄하려는 음모를 자세히 설명하면서 선교사 회의로부터 시작하여 ‘음와나 레사’ 사건과 ‘코퍼벨트’ 난동 사건을 이야기하고, 활동을 지도하고 성실한 ‘아프리카’인들을 돕기 위해서 ‘유럽’인 대표자를 두려고 투쟁한 점을 언급한 장문의 편지를 그에게 보냈다. 그 서신은 ‘아프리카’인 증인들이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박해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그리고 나서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본인은 각하에게 다음 사항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북‘로디지아’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해 행해지고 있는 부당한 차별 대우를 종식시킬 조처를 취해 줄 것; 출판물에 대한 금지를 철폐해 줄것; 우리의 성실한 신자들이 자신의 양심의 지시에 따라 방해 받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을 숭배할 천부의 권리를 행사하도록 허락해 줄 것.”

그것은 기대하던 결과를 가져왔다. ‘케이프타운’ 지부 감독자는 1936년 3월에 북‘로디지아’ 각의로부터 이러한 편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총리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본관은 ··· ‘루사카’에 출판물 보관소를 설립하도록 ‘P. J. 드 제이거’ 대신 ‘L. V. 필립스’를 여러분의 대표자로서 파견하도록 초대하는 ··· 바입니다. 귀하가 식민지 국무차관에게 보낸 12월 11일자 서신에 관해서는, 거기에 제기된 문제들을 식민지 국무차관이 주의깊이 고려했음을 알리는 바입니다. 총독 각하는 이미 ‘유럽’인 대표자의 북‘로디지아’ 입국이 허용되도록 이미 추천하였으며 국무장관도 이제 그 제안을 승인하였읍니다.” 오랜 투쟁 끝에 차지한 훌륭한 승리였다!

또 다른 투쟁이 계속되다

그러나 숭배의 자유를 위한 투쟁이 끝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우리의 출판물은 아직 금지되어 있었고 항소 사건은 계류 중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건은 1936년 5월 20일에 고등 법원에서 심리되었고 판결은 6월 18일에 내려졌다. 그 판결은 상소를 기각하였다. ‘드 제이거’ 형제는 추밀원에 항소를 하려고 허가를 신청하였다. 1936년 9월 15일 ‘로디지아’의 고등법원은 항소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숭배의 자유를 위한 싸움에서 협회는 백방으로 손을 썼다. 그 사건이 추밀원에서 심리되도록 하기 위해서 북‘로디지아’의 협회 변호사와 협조하여 도움을 베풀도록 ‘런던’의 변호사와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결국에 가서 ‘런던’ 추밀원의 법사 위원회가 그 사건의 심리를 거부하고 말았다.

1936년 1월 남‘로디지아’의 의원들에게 보내는 협회장 ‘J. F. 러더포오드’의 특별 편지 사본이 북‘로디지아’의 의원들과 총독과 신문사에도 보내졌다.

1936년 남‘아프리카’의 여호와의 증인들도 「황금 시대 425호」 50,000부를 아주 활동적으로 배부하고 있었으며 동일한 내용을 담은 특별 출판물 20,000부가 ‘로디지아’에서 배부되었다. 거기에는 조사 위원회가 그들의 보고서를 출판한 후 그 위원장인 ‘앨리슨 러셀’에게 보내는 협회장 ‘러더포오드’ 형제의 아주 강력한 서신을 비롯하여 북‘로디지아’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무죄를 증명하는 사실들이 설명되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진리를 압제하려는 반대자들의 음모를 충분히 알게 되었다.

다른 임무를 수행하다

북‘로디지아’에 출판물 보관소를 설치하려는 협회의 노력은 마침내 성공하였다! 그 보관소는 1936년 7월 16일 ‘루사카’ 경찰서 바로 맞은 편에 개설되었으며 ‘루엘린 필립스’ 형제가 보관소의 종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엄청난 임무가 남아 있었다. 그것은 토착적인 “왙취타워 운동” 단체들의 영향과 감독 부족으로 인한 바람직하지 않는 모든 요소를 조직에서 제거하고 성실한 사람들에게 건전한 성경 교리를 가르치며 합당한 기초 위에 사업을 조직하는 것이었다.

‘루엘린 필립스’ 형제가 맨 처음 한 일은 여러 주요 장소를 방문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곳에서 정부 관리들과의 마련에 따라 그는 ‘왙취 타워’ 협회와 관련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 보았다. 그는 어떤 점을 발견하였는가?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대부분이 ‘요나’ 시대의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니느웨’ 사람들과 같음이 아주 명백해졌다. 많은 사람들은 성실하였다. 어떤 교만한 사람들은 협회가 여타 다른 종교적인 조직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상당한 자치권을 인정하였다고 생각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유다’가 말한 바와 같이, ‘경건치 아니하며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그들이 ‘불의 침례’라고 부르는 아내들을 공유하는 것과 같은) 색욕거리로 바꾸’는 자들이었다.”

토착적인 “왙취타워 운동” 단체들로 인한 혼란 외에도 금지령에 의한 출판물의 부족과 대부분의 형제들이 글을 모른다는 것도 문제였다. 비성서적인 부족 관습이 많이 있었다. 예를 들어 여자는 집회에서 남자들과 분리해서 앉았다. 또한 ‘아프리카’인은 자기 아내를 자기 자녀들의 어머니, 요리사, 정원사, 짐 나르는 사람, 가정을 부양하는 책임 분담자로 생각하였다. 아내를 진정한 반려자나 “그의 보충”으로 생각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창세 2:18, 신세.

그 외에도 대부분의 형제들은 그들이 배우고 있는 진리를 일상 생활과 관련시키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형제들은 우리의 출판물을 읽었고 1914년에 왕국이 하늘에 설립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것이 몇년 전이었는가 물으면 그들은 몰랐다. 많은 사람들은 세상의 정부들이 ‘사단’의 지배하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정부들과의 합당한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숲속의 작은 마을에 격리되어 있고 외부 세계와의 접촉이 별로 혹은 전혀 없었기 때문에 협회 출판물에 나오는 많은 것들은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많은 마을 사람들이 정부와 가지는 유일한 접촉은 지방 판무관과 그들 원주민 재판소를 통한 것이었다. ‘아프리카’인이 종교와 갖게되는 유일한 접촉은 지방의 ‘미션 스쿠울’ 뿐이며, 그들 자신의 물물교환 외에 사업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라곤 지방의 무역상 뿐이다. 그러므로 협회의 출판물에서 종교, 정치, 그리고 상업이 세상적인 세력으로서 토론될 때 그 형제들이 생각하는 것은 ‘미션 스쿠울’, 지방 판무관 그리고 무역상이었다.

실제적인 왕국 전도인 수를 다시 조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매우 자진적이긴 하였지만, 이해 부족과 생활 방식으로 인하여 성서적으로 활동에 참여할 자격을 갖추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출판물 보관소의 마련하에서 온전한 첫 봉사 연도 보고에 의하면 1937년에 월 평균 전도인이 756명이었고 신기록은 1,081명이었다. 지방의 감독자들로서 활동하고 먼저 출판물 보관소에서 교리적, 도덕적, 조직적 문제들에 관하여 자세한 내용을 훈련받은 ‘파이오니아’들이 그 형제들을 방문하였다.

그러한 방문을 하는 형제들에게는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데 여호와께 대한 진정한 사랑이 필요하였다. 그들은 많은 어려움을 견디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그 나라를 횡단하는 철로가 하나 밖에 없었고 그것으로부터 ‘코퍼벨트’로 가는 지선이 없었기 때문에, 어떤 마을은 철로변에서 1,60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 형제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자전거로 여행하거나 건조하고 덥고 위험한 시골길을 수백 ‘킬로미터’ 걸어서 산재해 있는 관심자 집단으로 가야 하였다. 더우기 새로운 회중이 운영되게 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많은 인내와 사랑이 필요하였다. 어떤 때는 조직적인 면모가 갖추어지는 데 적어도 두달은 새로운 회중과 함께 머물러야 하였다. 그들은 주의 조직에서 “우두머리”가 되려는 어떤 사람들의 경향에 대해서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한 경향은 그 사람들로 하여금 협회의 마련을 받아들이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노고는 축복을 받았다. 1939년에 가서 ‘파이오니아’가 7명이고 전도인이 평균 1,191명으로 증가되었으며, 1940년에는 2,378명의 신기록에, 88개의 회중이 운영되고 있었다.

남‘아프리카’의 조직이 강화되다

북부 지방에서 그러한 싸움이 계속 진행되고 있는 동안 ‘요하네스버어그’에 있는 ‘아프리카’인 형제들은 훨씬 더 작은 규모이지만 그곳의 “왙취타워 운동” 단체의 나쁜 요소에 대한 싸움에서 이기고 있었다.

또한 ‘케이프타운’의 지부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1933년 3월에 협회는 남‘아프리카’의 지부 사무실이 ‘케이프타운’에 있는 더 큰 건물로 이사하도록 마련하였다. 그 지부 사무실은 많은 사무실이 있는 큰 건물 6층의 방 둘로 된 ‘보스톤 하우스’ 623호와 ‘프로그레스’ 로(路) ‘프로그레스 쳄버’라는 인근 건물의 지하실 창고로 이루어졌다. 그 지하실 창고는 작은 인쇄기와 출판물의 보관, 발송 업무를 위해 사용되었다. 그 당시 얼마 안되는 인쇄물은 ‘필립스’ 형제 그리고 ‘케이프타운’ 지방 형제에 의해 다루어졌다. 이 새 시설은 중심지에 위치하였고 더 편리하였으며 약 20년에 걸쳐 남부 ‘아프리카’의 신권 조직의 중심지가 될 곳이었다.

2년 후인 1935년에 인쇄 기술이 있는 한 형제가 ‘케이프타운’ 지부의 인쇄 활동을 돕도록 ‘러더포오드’ 형제에 의해 파견되었다. 그 형제는 ‘앤드류 잭’이라는 사람으로 자격 있는 인쇄공이었을 뿐더러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의 ‘발틱’ 제국에서 전 시간 봉사를 해 왔다. 그곳에서 활동이 금지된 후 추방되어 그의 고국인 ‘스코틀랜드’로 돌아가게 되었다. 남‘아프리카’에 도착하자 ‘앤드류 잭’은 곧 더 많은 활자와 다른 인쇄 장비를 구하도록 마련하였으며 오래지 않아 한 사람이 돌리는 하나의 기계로 이루어진 작은 공장은 전속력으로 가동되게 되었다. 1937년에 비로소 자동 인쇄기가 설치되었다. 그 인쇄기는 지난 38년 동안에 수백만 매의 쪽지와 서류를 생산해 내었으며 오늘날에도 남‘아프리카’의 ‘일랜쯔포온테인’ 지부에서 계속 잘 돌아가고 있다.

음향 장치를 사용하는 생산적인 봉사

회중이 손으로 들고 다니거나 협회가 제공한 확성기 단 차에 장치되어 ‘러더포오드’ 형제의 강력한 연설을 틀게되는 축음기가 야외에서 엄청난 일을 수행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프리토리아’에서는 회중이 그 도시의 바로 중심지인 ‘처치 스퀘어’에서 매주 일요일 저녁 강연을 방송할 수 있는 허가를 얻었다. 얼마 후 시 의회에 항의가 제출되었고 형제들은 광장으로부터 축음기를 철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그 문제는 곧 극복되었다. ‘스미트’ 형제에게는 그 광장이 내려다 보이는 ‘아파트’에 살고 있는 친구가 있어서 그 ‘아파트’의 열린 창문으로부터 일요일 저녁 ‘프로그램’이 방해없이 계속 방송되었다.

1930년대 중반에 확성 장치한 협회 차 한대를 ‘로버트 니스벳’ 형제가 끌고 다녔는데, 그는 그 차를 가까운 ‘줄루랜드’ 구역에 사는 ‘아프리카’인들 사이에서 널리 사용하였다. 그곳은 북부 ‘나탤’의 광대한 지역으로서 여러 해 동안 ‘줄루’인의 고토였다. 특히 북부 ‘나탤’의 제당 공장과 탄광에서 많은 ‘아프리카’인들이 모여 확성 장치를 한 차에서 제공되는 음악과 연설을 들었다. 그 결과 많은 출판물을 전하게 되었다. 사실상 그후 「부」라는 서적을 주로 전하게 되었을 때 ‘니스벳’ 형제의 집이기도 한 그 차는 “이모토 요부체비”(“「부」차”)로 알려지게 되었다.

1935년에 모든 나라에 있는 형제들은 계시록 7장에 나오는 “큰 무리”에 관한 새로운 빛에 감동하였으며 기름부음받은 자가 아닌 사람들은 지상에서 행복한 가운데 영원히 사는 전망을 생각하고 즐거워하였다. “다른 양” 반열에 대하여 더 많이 이해하게 되고 그 이래로 “큰 무리”에 대해 더 많은 주의가 돌려지게 되면서 그들의 수는 곧 증가하게 되었다.—요한 10:16; 계시 7:9.

‘리이프’로 알려져 있는 광산 지구에서 활동하는 동안 ‘아이리스 튜티’라는 ‘파이오니아’는 확성 장치를 한 유개차로 봉사하는 특권을 가졌는데 그 자매는 그 점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아주 아담한 검정색의 번쩍번쩍 윤이 나는 차였으며, 꼭대기에는 확성기가 있었다. 각 판벽에는 ‘왕국 소식, 하나님과 왕인 그리스도를 섬기라’라는 말이 있었고 뒷문에는 ‘J. F. 러더포오드’의 최근 강연을 알리는 아마포 깃발이 붙어 있었다. 그 차는 ‘요하네스버어그’와 ‘리이프’ 전역에서는 ‘성경 차’로 잘 알려졌다.” ‘리이프’에 소재한 여러 회중들은 그 차의 사용 계획을 세웠다. 주말에는 계획이 아주 꽉 차 있었다. 그 차는 넓은 지역을 다니면서 소년원, 병원, 시장 광장, ‘요하네스버어그’ 시청 계단 등을 포함한 여러 곳에서 녹음 연설을 하는 데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기 바로 전 얼마 동안, 정치적으로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을 때 맨 나중 언급한 장소에서 틀었던 강연은 “‘파시즘’ 혹은 자유”였다. 그날 저녁 그곳에는 특히 청중이 많았다. 강연이 진행되면서 함성과 고함이 터져 나왔다. 전도인들에게 병과 도마도가 던져졌다. 급거 출동한 경찰들이 도착하였을 때 폭도들은 장비를 막 공격하려던 참이었다. 경찰봉을 휘둘러 경찰들은 전체 지역에서 그들을 몰아내고 형제들의 주위에 비상선을 친 후 형제들이 짐을 싸고 위험 지구에서 벗어나도록 도와 주었다. 그 형제들은 그분의 보호에 대해서 여호와께 아주 감사하였다.

그 당시 확성 장치를 한 차들이 그 나라 각지를 다니면서 강력한 확성기로 많은 사람에게 전파하는 등 훌륭한 활동을 하였음이 분명하다. 1937년에 계속 사용되는 확성 장치를 한 차가 다섯대 있었으며 각 차에는 ‘파이오니아’ 두 사람이 타고 다녔다. 그 외에도 그 나라 각 지방에서 대형 축음기 12대가 사용되고 있었다. ‘러더포오드’ 형제의 특별한 호소가 있은 후 휴대용 축음기를 사용하는 활동이 참으로 열렬하게 시작된 것도 같은 해였다. ‘케이프타운’ 지부는 공용 ‘네델란드’어, ‘신얀자’어, ‘세소토’어, ‘코사’어 그리고 ‘줄루’어로 부지런히 녹음을 하였다.

1938년에는 협회가 30개 언어로 된 출판물을 취급하고 있었으며 80군데 회중을 설립하였다. 「부」라는 서적, 「폭로함」이라는 소책자나 다른 것과 같은 그 당시 주요 출판물들은 ‘가톨릭’ 교직체를 노골적으로 공격하였으며 그들 종교 지도자들은 염려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신문들은 그 나라를 휩쓸고 있던 ‘러더포오드’ 판사의 쪽지나 소책자들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경고하였다. ‘가톨릭’ 신문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공개 집회를 갖지 못하도록 그들에게 장소를 빌려주지 말라고 제안하였다.

‘파이오니아’들이 끈기 있게 노력하다

1938년에는 남‘아프리카’의 ‘파이오니아’가 총 30명에 이르렀으며 그들 중에는 이미 언급된 바 있는 ‘요하네스버어그’의 ‘아이리스 튜티’가 있었다. 한번은 ‘튜티’ 자매가 어떤 집 문에 이르기 위해서 긴 계단을 올라가야 하였다. 그 자매가 꼭대기에 도달했을 때 어떤 여자가 세차게 문을 열었다. 그 여자는 화가 치밀어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큰 소리로 욕하면서 ‘튜티’ 자매를 계단 바로 아래로 밀어 버리고 문을 꽝 닫아 버렸다. ‘튜티’ 자매가 일어나서 흩어진 물건들을 집어 들었을 때 울고싶은 심정이었으나 기도가 최선의 해결책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마침 바로 다음 집에서는 한 남자와 그의 아내가 참으로 친절히 대해 주었다. 그들은 ‘튜티’ 자매에게 차를 대접하였으며, 자기들은 이웃집에서 있었던 일을 보았고 특히 그 여자가 자기 교회 교역자의 아내였기 때문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말하였다. 그것은 아주 생산적인 방문이 되었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그 부부는 여호와의 침례받은 증인이 되었다.

다른 전도인들과 더불어 그 ‘파이오니아’들은 광맥대를 따라 있는 광산들이 출판물을 전하는 데 아주 생산적인 밭임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갱도 입구에 서서 흑백인 광부들이 교대하고 나올 때 출판물을 제공하곤 하였다. 광부들의 차림은 ‘헬멧’에 조명등을 달고 지하 갱도의 점토가 그대로 묻어있는 채였다. ‘아프리카’인 광부들은 자기네 언어로 된 출판물을 구하는 데 아주 열심이었으며, 때때로 ‘파이오니아’들은, 사람들이 자기 차례를 기다리며 줄 서 있는 것을 보곤 하였다. 그들은 집에 있는 자기 가족이나 자녀들에게 보내기 위해 성서나 서적을 구하려고 열심이었다. 여러 해 후에 ‘튜티’ 자매는 ‘요하네스버어그’에서 자기를 알아보는 작은 집단의 ‘아프리카’인들을 만나게 되는 즐거움을 가졌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은 크게 미소 지으면서 “나 기억해? 나 성서 사고, 또 지금 성서 집회 가”라고 소박하게 말하였다.

교직자들을 직면함

1930년대 후반에는 왕국 소식이 ‘케이프’ 주 동부의 아주 보수적인 곳에도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그곳은 ‘이스트 런던’의 북쪽 약 60‘킬로미터’쯤 되는 곳에 있는 ‘킹 윌리암스 타운’ 근처에 있었다. 그 지방의 많은 농부들과 거주자들은 19세기 중엽에 그곳에 정착한 독일인들의 후예였다. 그 결과 그 지역에서 가장 우세한 종교는 ‘루터’교인데 ‘키엑’이라는 사람이 왕국 전도인으로부터 출판물을 받게 된 것은 ‘루터’교 교직자의 집에서 어떤 건축 공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키엑’은 그가 읽은 내용을 즐거워하였으며 더 많은 것을 주문하고 얼마 있지 않아 그 소식을 그의 친척과 친구들에게 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들 대부분은 그가 돌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의 친척 중 몇 사람이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1938년에 그들은 약 100명의 교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세명의 ‘루터’교 교직자와 ‘키엑’ 사이에 공개 토론을 마련하였다. 토론 중 ‘키엑’은 성서의 다른 귀절들과 함께 시편의 얼마를 없애버린 ‘히틀러’ 통치하에서 사용된 독일어 성서를 내놓았다. 그것은 그 교직자들을 약간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강력한 성귀들이 성서로부터 낭독되었을 때 그들이 느낀 바와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한번은 교역자 한 사람이 책상 위에 있는 협회 출판물을 실제로 던져 버리면서 말하기를 “빌어 먹을 책들!”이라고 말하였다. 그 사건의 결과로 이미 관심을 가지고 있던 교인 6명이 진리를 확신하게 되었고 그들은 여호와의 편에 섰다.

그후에 아주 흥미있는 일이 있었다. 1938년에 남‘아프리카’의 내무장관은 “마땅치 않다”는 이유로 「부」라는 서적과 몇권의 소책자의 반입을 금지하였다. 1938년 3월 남‘아프리카’ ‘블루움포온테인’에 있는 최고 법원이 협회 출판물은 선동적이 아니고 파괴적인 의도가 없다고 판결한 사실이 있는데도 그렇게 하였다. 「부」라는 서적과 다른 출판물이 ‘파시즘’, ‘나치즘’, ‘가톨릭’ 교회 사이에 있었던 묵계를 명확히 알리고 있음을 기억하는 것이 좋다. 그 출판물의 금지에 있어서 정부가 조치를 내리도록 어떤 ‘루터’교 교직자들이 조종하였음이 후에 밝혀졌다. 그러나 그후 얼마 있지 않아 그 동일한 교직자들은 2차 세계 대전 중 그 나라에서 ‘나치즘’을 지원하는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감금되었다.

협회는 출판물을 금지한 결정에 대해 항의하면서 내무 장관에게 호소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의 생각을 바꾸지 않았으며 아무런 해명도 없었으며 법원에 호소하는 것도 허락지 않았다. 결국 ‘케이프타운’ 지부는 “항의”라는 제목이 붙은 4면 ‘팜플렛’을 발행하였다. 거기에는 굵은 글씨로 다음과 같은 표제가 들어 있었다. “남‘아프리카’의 종교적인 불관용, 성서 연구 서적인 「부」를 금지.” 그 ‘팜플렛’에는 ‘케이프’ 주 동부의 독일 ‘루터’교 교직자들이 그러한 금지를 선동하였으며 1938년 6월의 금지된 성 및 범죄 잡지 명단 속에 「부」라는 서적이 포함되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들어 있었다. 영어와 공용 ‘네델란드’어로 된 그 ‘팜플렛’은 전국에 널리 배부되었고 「부」라는 서적의 많은 주문을 받게 되었다.

지구(地區) 사업이 시작되다

같은 해인 1938년에 지구 사업이 조직되었다. 그리하여 협회의 여행하는 대표자들이 회중과 격지의 전도인들을 방문하여 그들에게 교훈과 격려를 주었다.

남‘아프리카’의 첫 지구의 종 한 사람은 ‘프랑크 테일러’였는데 그의 아내 ‘크리스틴’은 영국으로부터 새로이 도착했었다. ‘크리스틴’은 ‘아프리카’인들 사이에서 활동하는 것은 특이한 일이지만 흥미있는 경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그의 남편은 못걸이와 ‘스커트’만 걸친 ‘줄루’ 여인에게 자기 아내가 처음으로 소책자를 전했을 때 그 아내의 얼굴 표정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여인은 소책자를 위한 기부로서 자기의 곱슬 머리로부터 “티키”(3d)라고 부르는 동전을 내 놓았다.

지구 사업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프랑크’와 ‘크리스틴’은 ‘이스트 런던’으로 가게 되었는 데 거기에서 그들은 ‘키엑’ 가족과 ‘호르만’ 가족과 ‘샨크네크트’ 가족 등 관심가진 가족으로 이루어진 작은 집단과 함께하는 즐거움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킹 윌리암스 타운’의 독일 ‘루터’ 교회에서 떨어져 나왔다. 시간이 흘러 가면서 ‘이스트 런던’의 ‘유럽’인 회중이 그 새로운 사람들로 구성되게 되었으며 그들 대부분은 아직도 살아 있으며 오늘날에도 활동적이다.

왕국 활동이 활기를 갖게 되다

1939년 1월에는 처음으로 「위안」지를 공용 ‘네델란드’어로 발행함으로써 남‘아프리카’ 지부는 한 걸음 더 발전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파이오니아’를 하면서 협회 서적을 공용 ‘네델란드’어로 번역해 오던 ‘피에트 드 제이거’는 이제 전 시간 공용 ‘네델란드’어 번역자로 일하도록 ‘벧엘’로 불리움을 받았다.

그것은 지부의 작은 인쇄부에서 일하는 ‘앤드류 잭’에게 더 많은 일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왜냐 하면 활자를 손으로 뽑아서 원문을 조판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남‘아프리카’에서 인쇄된 첫 협회 잡지였다. 그 때까지는 지방 ‘아프리카’어로 발행되고 있는 잡지는 없었다.

그렇다. 남부 ‘아프리카’에서의 왕국 활동은 이제 참으로 신속히 발전되고 있었다. 1939년에는 남‘아프리카’에서 555명의 전도인 신기록을 이루었다. 그들 중 180명만이 ‘아프리카’ 흑인들이었음은 유의할 만하다. 남‘아프리카’의 월 평균 전도인은 439명이었다. 남‘로디지아’는 473명, 북‘로디지아’ 1,198명, ‘니아살랜드’ 1,041명, ‘포르투갈’령 동‘아프리카’ 17명, ‘세인트헬레나’ 11명이었다. 그것은 ‘케이프타운’ 지부의 관할하에 있는 모든 구역의 밭에 총 3,179명의 전도인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리고 그 해에 그들은 1,042,078시간을 전파 활동에 바쳤다. 1935년 “큰 무리”에 관한 것이 명확하게 밝혀진 이래 증가가 훨씬 빨라졌고 많은 새로운 사람들이 그들의 입장을 굳게 지키고 있었던 것을 알리는 것이다.

전쟁이 왕국 전도인들을 자극하다

1939년 9월 ‘히틀러’가 ‘폴란드’를 전격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을 때 세계는 이전에 알지 못하던 폭력과 고통의 시대로 접어 들었다. ‘나치-파시스트’의 전쟁 무기들에 의해 나라들이 차례로 점령되어 감에 따라 ‘유럽’에서의 왕국 활동은 크게 타격을 받았다. 새로운 수상 ‘잰 스머츠’의 인도 아래 남‘아프리카’는 독일에 대항하여 싸웠으며 많은 남‘아프리카’인들이 ‘아프리카’와 ‘이탈리아’의 북부 전투에 참가하였다.

남‘아프리카’는 주된 전투 지역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다른 여러 나라에 만연되어 있던 전쟁 상태로부터 그리 큰 고통을 받지는 않았다. 시간이 흘러 가면서 어떤 식품이 부족하게 되고 기타 제한이 있게 되었다. 그러나 1940년에 가서 남부 ‘아프리카’에서의 왕국 활동은 이전에 결코 볼 수 없던 성장과 확장기에 들어갔다. 전쟁이 몰고온 굉장한 사건들은 많은 사람들의 안정감을 뒤흔들어 놓았으며 그들의 정신을 성서 예언의 성취로 이끌게 만들었다.

그 때까지 공용 ‘네델란드’어로 된 「위안」지는 크게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그러므로 ‘케이프타운’의 ‘왙취 타워’ 지부는 그 때가 공용 ‘네델란드’어 「파수대」지를 발행할 때라고 판단하게 되었다. 1940년 1월에 「통보」(후에 「왕국 봉사」라고 부름)는 잡지를 통한 새로운 활동 즉 가두 활동, 호별 방문 활동, 잡지 통로 등에 대해 설명하였다. 많은 잡지가 필요할 것이 분명하였다. 접지기와 함께 주조 식자기가 설치되었다. 또한 인쇄에 경험이 있는 ‘더어반’의 한 형제가 작은 인쇄부에서 일하는 ‘잭’ 형제를 돕게 되었다. 그리하여 1940년 6월 1일자로 공용 ‘네델란드’어 「파수대」가 ‘케이프타운’ 지부에 의해 처음 생산되었다.

그 첫 호가 발행된 시기는 가장 적절하였으며 여호와의 지도 아래 그렇게 된 것이 분명하였다. 1940년의 처음 몇개월은 ‘유럽’에서의 전쟁이 관련되는 한 아주 조용하였으나 ‘히틀러’의 기갑 사단이 서부 ‘유럽’을 기습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그 때까지는 공용 ‘네델란드’어를 말하는 남‘아프리카’ 형제들은 ‘네델란드’에서 오는 ‘네델란드’어 「파수대」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5월에 ‘네델란드’에 있는 협회 지부가 갑자기 문을 닫지 않으면 안되었고 공급품이 끊기게 되었다. ‘케이프타운’에 있는 형제들은 그러한 일이 진행되고 있음을 몰랐다. 그러나 ‘네델란드’어 「파수대」의 출판이 중지된 정확한 때에 새로운 공용 ‘네델란드’어 「파수대」 번역판이 그 빈 자리를 메꾸게 되었다!

형제들은 잡지 활동을 즐겁게 열심히 하였으며 그 결과로 매월 잡지 배부 수가 17,000부로 증가되었다. 활동을 지하에서 하지 않는 다른 나라에서와 같이 잡지 가방이 거리에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전도인들은 구호를 외치게 되었다.

1940년 봉사 연도 말에 ‘필립스’ 형제는 ‘케이프타운’의 자기 사무실에서 ‘러더포오드’ 형제에게 전도인의 현저한 증가를 보고할 수 있었다. 남‘아프리카’의 전도인 신기록은 881명이었고 평균 656명으로서 그것은 전년도 평균과 비교하여 50‘퍼센트’의 증가였다. 전쟁은 남‘아프리카’에 있는 왕국 전도인들을 참으로 자극하였다.

‘가톨릭’의 적의가 금지를 가져오게 하다

남‘아프리카’ ‘가톨릭’ 교회의 주요 간행물인 「사던 크로스」지는 1940년 10월 2일호에서 ‘캐나다’에서 발생한 일에 주의를 이끄는 주 기사를 싣고(‘캐나다’에서 1940년 7월에 왕국 활동이 전면적으로 금지되었다.) 다음과 같은 적의에 찬 선언을 하였다. “국가나 교회 권위에 대한 충성을 저주하는 이 사람들(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은 원주민이 인구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남‘아프리카’ 같은 나라에서는 훨씬 더 위험하다. 정부는 이곳에서 그들의 선전이 확대되는 것을 규제해야 할 것이 분명하다.” 그후 즉시 예약자들의 「파수대」와 「위안」지가 검열관들에 의해 압수되기 시작하였으며 지부 사무실이 그 이유를 알려고 서신을 내었을 때 당구자들은 어떠한 설명도 하기를 거부하였다.

그 모든 일의 배후에 ‘가톨릭’ 교회가 있다는 점이 알려졌기 때문에 「사던 크로스」의 ‘가톨릭’ 공격에 대한 답변으로 특별호 「왕국 소식」이 마련되었으며 남‘아프리카’ 방방곡곡에 200,000매가 신속히 배부되었다. 그후 잇따라 여호와의 증인들과 그들의 활동에 관한 사실을 설명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각 의원들과 재판관들에게 그리고 신문사에 그 사본들을 보내었다. 의원들과 재판관들에게는 1939년 11월 1일호 「파수대」의 그리스도인 중립이라는 제목을 다룬 기사의 사본 역시 보내졌다. 얼마 후 경찰은 그 기사를 실은 모든 「파수대」를 압수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수상에게 호소를 하였는데 답변은 연방 관리청장으로부터 받았다. 특히 그 답변서에는 이러한 말이 있었다. “여러분의 의도가 최선의 것이었고 최선의 것이라 하더라도 성공적인 전쟁 수행을 위해 정부가 취한 조처를 여러분이 방해하도록 허용될 수는 없읍니다. 귀 협회가 이 나라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러한 견해를 받아들이도록 변화시키는 노력에서 성공한다면 적들은 적극적인 저항을 받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부가 가만히 앉아서 여러분에 대해 아무런 조처를 취하지 않을 것을 여러분이 기대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지부가 취한 그 다음 조처는 정부에 보내는 탄원서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 탄원서는 협회의 출판물을 압수한 것에 대해 불만을 호소하였으며 그러한 그리스도인 출판물을 풀어주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 나라에서 숭배의 자유를 회복시켜 주도록 정부에 정중히 요청하였다. 10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연방 각지에 살고 있는 ‘유럽’인 50,000명의 서명을 얻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파수대」와 「위안」지가 정부에 의해 금지되었다는 공식 발표가 있었다.

더 나아가 정부는 잡지가 도착하면 그 짐 전부를 압수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얼마 있지 않아 ‘왙취 타워’ 협회 출판물의 반입이 전면적으로 금지되었음이 분명해졌다. 맨 먼저 압수된 소책자는 「신권 통치」였다. 잇따라서 여섯 내지 일곱개의 서적짐이 모두 같은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그 압수 이유는 그러한 출판물들이 “못마땅한 것”으로 간주되었다는 것이었다.

그 모든 것은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과 또한 전쟁의 긴박한 상황으로 인한 것이었다. 금지된 많은 출판물이 여러 해 동안 아무런 어려움없이 그 나라로 반입되는 것이 허락되었기 때문에 지부 사무실은 압수된 출판물을 찾기 위한 조처를 취하였으며 그 결과 법정 소송이 있게 되었다. 그 사건은 ‘케이프타운’의 최고 재판소에서 심리되었다. 상황이 ‘왙취 타워’ 협회에 대해 심히 불리하게 보였지만 그 재판에 참석한 형제들은 판사가 공정한 태도를 나타내고 그 금지를 내린 장관은 그의 조처에 대한 이유을 제시해야 하며 더 자세한 설명을 듣도록 면담이 허락되어야 한다고 판결하는 것을 보고 감격하였다.

법적 투쟁은 얼마 동안 계속되었으며 그러한 투쟁이 꼬박 일년 계속된 후인 1942년 4월에 가서야 그 출판물들이 못마땅한 근거들이 제시되었다. 그러한 점에 답변하도록 지부에 14일이 주어져 그렇게 하였으며 그와 동시에 ‘필립스’ 형제는 법원 판결과 일치하게 직접 설명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시하였다. 그러나 법원은 그러한 설명을 하거나 듣는 데 있어서 시간 제한을 두지 않아 여러 달이 그냥 지나갔다. 그 문제가 해결된 것은 2년이 지나서였다.

1941년 8월 중에 ‘케이프타운’ 지부 사무실에서 보내지는 모든 우편물이 검열관들에 의해 압수되었다. 지부는 그 사실을 몇 주일 뒤 야외에서 활동하는 형제들의 서신들을 받아 보고서야 알아 차렸으며 항의서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그런 사실은 인정됐지만 해명은 없었다. 협회가 전쟁 수행 노력에 영향을 주는 서신을 왕래하고 있다는 당국의 의심은 아주 부당함이 드러났다.

1941년 9월 내무장관은 긴급 조치에 의거하여 남‘아프리카’에 있는 협회 출판물을 모두 압수하라는 명령을 발하였다. 그것이 지부에 미친 결과는 참으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것이었다. 오전 10시에 검찰국원들이 명령을 집행하려고 도착하였다. 그들은 협회가 가지고 있는 모든 출판물을 몽땅 실어가려고 ‘트럭’들을 동원하였다. 그러나 지부 감독자는 깨어 있었다. 그는 명령서를 재빨리 조사해 보고 그 명령이 긴급 조치와 조화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신속히 조처를 취하였으며, 검찰국 관리들을 협회 사무실에 기다리게 해 놓고, 친히 내무 장관에 의한 출판물 압수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려 주도록 최고 재판소에 긴급히 요청하였다. 그의 신청은 성공적이었다. 12시에 금지 명령을 받아내었으며 경찰들은 그들의 빈 ‘트럭’에 기어 올라 돌아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5일 후 그 장관은 협회의 소송 비용을 보상한 후 그 명령을 철회하였다. ‘케이프타운’ 지부에 있는 ‘벧엘’ 식구들이 그 중요한 승리에 얼마나 기뻐했을 것인지는 누구나 상상할 수 있다!

투쟁이 계속되다

우리의 싸움은 계속 되었다. 공용 ‘네델란드’어 「위안」지는 수입을 규제하는 관세법에 의거하여 금지되었다. 그 잡지가 남‘아프리카’에서 인쇄되고 출판되기 때문에 그것은 잘못임이 분명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잡지를 배부한다는 이유로 ‘크룬스타드’에서 한 ‘파이오니아’가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 사건은 항소되었으며, 최고 재판소는 그 판결을 파기하였다. 그후 1941년 9월 12일 「정부 관보」는 금지령을 철회했다고 발표했다. 신권 통치의 또 다른 승리였다.

그러한 감동적인 조처의 대부분은 신문에 모두 보도되었으며, 그 결과 왕국 소식과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이 공중에게 참으로 잘 알려지게 되었다. 전반적인 공중에게 그 문제에 대해 밝힐 필요를 인식하였기 때문에 지부는 「왜 왕국 소식을 억제하는가?」와 「여호와의 증인: 그들은 누구이며 그들의 활동은 어떠한가?」라는 특별한 두 소책자를 발행하였다. 1941년 10월 중에 영어와 공용 ‘네델란드’어로 된 그 소책자들이 아주 널리 배부되었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수행하는 활동에 대한 그런 광범위한 해명 활동이 매우 필요하였는데, 이는 많은 신문들이 그들에 관하여 의곡된 보도를 하였고, 그들이 “오열”이나 “나치스”라는 풍문과 비난이 널리 퍼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력한 일간지의 하나인 「이스트 런던 데일리 디스패치」지는 협회장 ‘J. F. 러더포오드’에 대한 중상적인 공격 기사를 실었다. 그 편집자가 해명서 게재를 거절하였기 때문에 문서 비방 송사를 제기하였으며 신문사를 걸어 5,000‘파운드’의 손해 배상을 하도록 고소하였다. 형제들의 결심이 단호함을 알고 그 편집자는 재빨리 물러서서 사과문을 싣고 그 모든 소송 비용을 물었다.

금지령에 대한 반응

어떤 출판물들에 금지령이 내려진 데 대한 형제들의 반응으로 그들도 금지된 출판물을 집에 감추어 두었다. 그들은 “뱀같이 지혜”로왔다. (마태 10:16) ‘요하네스버어그’에서는 경찰이 전도인들의 집을 여러 차례 수색하였으나 늘 수사 계통에 있는 관심자들이 그런 수색에 대해 미리 알려 주었다. ‘프리토리아’에서는 그 당시 학생이었던 ‘프란스 뮬러’가 자기 부모의 지시를 받고 자기 집 낮은 마루 아래에 있는 통로에 출판물 상자를 차곡차곡 넣어 두었다. 그들은 그 귀중한 책을 거기에 두면 아주 안전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 모든 일로 전도인들이 야외에서 가지고 활동할 출판물이 줄어들게 되었다. 그러나 지방적으로 인쇄된 「자녀」라는 책과 같은 출판물이 아주 많이 사용되었다. ‘케이프타운’의 한 흑인 형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공급품이 제한되었다. 그러나 그 점이 활동을 늦추지는 않았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서적을 빌려 주고 그들과 연구를 시작하라는 말을 들었다. 우리는 그렇게 하였고 우리의 성경 연구가 급속히 증가되는 것을 보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 기간에 진리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전도인 신기록은 1,253명으로 증가하였으며 그들은 열심히 활동하였다. 그 해에 ‘요하네스버어그’ 대회 참석자 수는 약 800명으로 증가하였으며 186명이 침례를 받았다. 많은 새로운 회중들이 조직되어 그 수는 1940년의 127개에서 1941년의 172개로 증가하였다.

미국에서 오는 「파수대」 잡지는 금지 목록 가운데 들어 있었지만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시게도 영적 양식을 공급하셨다. ‘케이프타운’의 형제들은 그들의 인쇄기로 인쇄할 자료가 부족해 본 적이 없었으며 “편리한 양식”이라는 이름으로 보내지게 되었다. 전쟁 중에 자기가 예약한 「파수대」를 한 호도 빼지 않고 받아서 자신이 그것을 읽은 후에 항상 ‘케이프타운’ 사무실로 그것을 보냈던 사람 중의 하나로 ‘J. J. 밴 질’이라는 형제가 있었다. 그의 잡지들은 “‘나탤’, ‘크란스콥’, 남‘아프리카’ 경찰경사 ‘반 질’”이라는 주소로 우송되어 왔기 때문이다.

결국 승리하다!

남‘아프리카’에서 하나님과 왕국 활동에 대항한 싸움은 확실히 성공적이 아니었다. 1941년부터 금지령을 철회하고 우리의 출판을 풀어 놓기 위한 싸움은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1943년말쯤 되어 지부에 있는 출판물 재고는 극히 적었으며 형제들은 압수된 출판물이 풀려 나도록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이 발생되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내무장관이 임명되었다. 지부 감독자는 금지령의 철회를 요청하는 또 다른 서신을 검열 관리관에게 보냈다. 새로운 장관에게 개인적인 면담을 요청하면서 그 서신의 사본을 보냈다. 이전 장관은 그러한 면담에 동의하였으나 실제로 응하지는 않았다.

1944년 1월 면담이 이루어졌고 장관은 압수된 짐들을 풀어주고 잡지에 대한 금지령을 철회하며, 압수된 다른 출판물들도 풀어 주겠다는 데 동의하였다. 그는 모든 출판물이 파괴적이라고 선언한 긴급 조치에 의거하여 발하게 된 명령도 철회할 것을 약속하였다. 일주일 후 지부는 그 모든 점을 확인하는 서류를 받게 되었으며 며칠 후 거대한 양의 출판물(약 1,800상자)이 지부 사무실에 전해졌다. 그렇지만 그것은 삼년동안 억류된 후에 있은 일이었다. 지부에 있는 형제들과 야외에서 일하는 형제들은 그 일에 대해서 참으로 행복해 하였다. 그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서 참으로 놀라운 승리였다!

다른 곳에서의 서적 금지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에 대영 제국의 여러 지역과 다른 여러 나라들에서는 정말 유행처럼 서적이 금지되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오래 전에 예언자 ‘다니엘’을 통해서 예언하신 바와 같다. 즉 ‘작은 뿔’(영연방은 그 일부였다)은 ‘스스로 높아’지고, “진리를 땅에 던지”고 하나님의 거룩한 것들에 대해 “범죄”하고 있었다. (다니엘 8:9-12) 그러한 일은 남부 ‘아프리카’에 있는 세 군데의 영국 보호령—‘바수톨랜드’, ‘베추아날랜드’와 ‘스와질랜드’—에서도 있게 되었다. 협회 출판물에 대한 공식적인 금지령은 1941년 2월에 내려졌다. 그 금지령은 그것을 제거하려는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1960년까지 유효하였다. 「흠정역」마저도 만약 그것이 ‘왙취 타워’ 협회에 의해서 발행될 경우는 금지되었다. 1941년에는 그 세 나라에 한 사람의 여호와의 증인도 없었는데 그러한 일이 발생되었다.

좋은 결과를 가져온 남서 ‘아프리카’에서의 여러 해

다사다난하던 1939년에 남서 ‘아프리카’의 활동 역사에는 새로운 장이 펼쳐졌다. 그 지역에는 아직 집단이 구성된 적이 없었으며 그 넓은 밭은 개방된 채로 있었다. ‘파이오니아’ 부부인 ‘배리 프린슬루’와 그의 아내 ‘조안’은 그 구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가서 증거하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배리’는 ‘트럭’을 한대 사서 그것을 집으로 사용할 수 있는 차로 개조하였다. 그는 전쟁으로 인해 휘발유가 부족될 것을 정확하게 예견하고 그 차에 ‘가스’를 사용하는 기계 장치도 역시 설치하였다. ‘요하네스버어그’에서 남서 ‘아프리카’로 가기 위해 그들은 ‘칼라하리’ 사막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도로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이전에 지나간 차나 나귀가 끄는 짐수레가 남긴 자국을 따라가야 했는데 어떤 때는 그것마저 완전히 흔적조차 없어진 경우도 있었다.

그들은 결국 ‘윈드혹’에 도착하였으며 그곳에서 더 북쪽으로 나아가서 전파하고 출판물을 전하였다. 한 동안 경찰들은 그들을 추적하면서 그들이 전한 출판물들을 수집하였다. 결국 그들은 체포되었으며 면허없이 판매한다는 죄가 그들에게 적용되었다. 그들은 협회의 충고에 따라 그 사건을 연기시켰으며 남‘아프리카’에서 발생한 비슷한 성격을 가진 몇 가지 사건들의 결과를 기다렸다. 몇 주일 후 ‘프린슬루’ 형제는 법정에 출두하게 되었고 유리한 판결이 내려졌다.

‘요하네스버어그’의 대회 조직이 그들에게도 전달되었으며, 약 1,600‘킬로미터’의 힘든 여행을 해야 하지만 그들은 참석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다. 남서 ‘아프리카’에 있는 대부분의 강은 특별히 심한 비가 내릴 때만 물이 흐르게 되는 건조하고 모래가 많은 골짜기에 불과하였다. 그러한 강 하나를 건너려고 하는 데 차가 꼼짝달싹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날 밤 그 강에 홍수가 나서 그들의 집으로 사용하는 그 차가 수백 ‘미터’ 하류로 쓸려 내려 가고 말았다. 그들은 다음날 아침에야 그곳에서 차를 찾아냈는데 두동강이 나 있었고 차대는 모랫 속에 깊숙이 파묻혀 있었다. 그들은 건져낼 수 있는 것만 건져낸 후, 그들이 당한 재난과 또 대회에 참석할 수 없어서 유감이라는 점을 협회에 통지하였다. 그러나 그 직후 그들은 지부 감독자로부터 선물을 받았으며 그 선물이 “며칠간의 휴일”을 위한 것이라는 설명이 담긴 전문을 받았다.

대회 후 그들은 돌아와서 집으로 사용되는 그 고장난 차를 수리하려고 그 근처에 야영하였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요하네스’를 통역으로 사용하여 ‘오밤보’ 농장 인부들에게 증거하였다. ‘요하네스’는 구역을 여행하는 데 그들을 동반하도록 고용한 ‘부쉬’인이었으며 그는 진리를 받아들인 맨 첫 번째의 ‘부쉬’인일 것이다. ‘부쉬’인들은 주로 활과 독화살로 사냥하여 살아가는 사막에 거주하는 유목민들이다. ‘아프리카’ 남부의 ‘아프리카’인 중에서 가장 작으며 그 크기는 중앙 ‘아프리카’의 ‘피그미’족에 비교할 수 있는데, 이들 사냥군들은 그들의 생활 습관에 있어서 극히 원시적이다. 그들은 접근하기 어려운 곳에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언어는 어휘가 제한되어 있고 딸깍거리는 음향이 계속 흘러나오기 때문에 그들과 다른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은 아주 어렵다. 그러나 그들 중 얼마는 농장 인부가 되었다. 출판물의 금지와 전반적인 상황으로 인하여 결국 협회는 ‘프린슬루’ 부부를 남‘아프리카’로 소환하였다.

그러므로 ‘파이오니아’들이 1929년, 1935년 및 1942년에 남서 ‘아프리카’로 가서 많은 출판물을 전하였지만 실제적인 밭의 경작은 없었으며 열매도 별로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러나 1950년은 남서 ‘아프리카’의 활동 역사에 있어서 전환점이 되었다. 이제 협회는 ‘길르앗’ 학교를 졸업한 네명의 선교인들 즉 ‘조오지 코에트’, ‘프레드 헤이허스트’, ‘거스 에릭슨’ 그리고 ‘로이 스테픈스’를 파견하였다. 1950년초에 선교인 가정이 ‘윈드혹’에 설립되었다.

그 형제들이 단지 출판물을 전하는 데 집중하지 않고 주의 “다른 양”을 찾고 먹이는 데 집중하였지만 그런데도 그들은 출판물을 참으로 많이 전하게 되었다. (요한 10:16) 동시에 그들은 남아 연방으로부터 인근의 ‘아프리카’인 지구로 이사온 다섯명의 ‘아프리카’인 형제들과 접촉할 수 있었으며 그들을 한 집단(회중)으로 조직하였다. 또한 한 선교인은 그 ‘아프리카’인 지구에서 25건이나 되는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다. 아무리 보아도 그 구역 특히 ‘아프리카’인들 사이에서의 활동은 증가될 좋은 전망을 가지고 훌륭한 출발을 하게 된 것이다.

[69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남부 아프리카

자이레(벨기에 콩고)

우간다

케냐

탄자니아(탕가니카)

앙골라

잠비아(북부 로디지아)

말라위(니아살랜드)

로디지아(남부 로디지아)

모잠비크

남서 아프리카

보츠와나(베추아날랜드)

스와질랜드

남아프리카

요하네스버그

더어반

케이프 타운

레소토(바수틀랜드)

[83면 삽화]

‘케이프타운’의 사무실에서 손으로 조판하고 있는 ‘조오지 필립스’

[87면 삽화]

‘줄루’인 가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