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우펀들랜드’
‘뉴우펀들랜드’
‘캐나다’ 동부 연안에는 ‘뉴우펀들랜드’라는 섬이 있다. 세계에서 열 여섯번째로 큰 이 섬의 크기는 영국의 절반보다 조금 작으며, 인구는 530,000명이 된다. ‘뉴우펀들랜드’는 그 원시적인 야성미 그리고 우뚝 솟은 험준한 바위들, 폭풍우에 씻긴 벼랑이나 무서운 파도 등으로 이루어진 9,600‘킬로미터’의 굴곡이 심한 해안선으로 유명하다. 주민들—주로 유서깊은 어부들과 벌목군들 및 사냥군들—은 영국과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계의 강인한 후예이다. 바다와 바위 투성이의 땅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인내의 시험이었다. 그리스도교국의 여러 종파의 교직자들이 오랫 동안 지배해 왔지만 대부분의 ‘뉴우펀들랜드’인들은 하나님과 그분의 기록된 말씀에 대한 존경심과 연루된 극히 독립적인 정신을 가지고 있다—현대의 여호와의 증인들이 진리의 소식을 뿌리는 데 아주 적합한 밭이다.
충실한 여호와의 종인 40세의 상냥한 자매 ‘에디슨 메이슨’은 1914년에 ‘캐나다’ 본토의 ‘노바스코시아’ 도에서 왕국 소식을 부지런히 전하고 있었다. ‘뉴우펀들랜드’까지는 단지 144‘킬로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자매는 그 섬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 많았다. “그들에게도 소식이 필요하다. 그러한 소식을 들으면 그들은 참으로 행복해질 것이다!” 그 자매는 훌륭한 “창조 사진극”을 그 섬에서 상연하는 문제를 그 지방 형제들과 이야기해 보았다. 그 자매는 창조에서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목적의 개요를 알리는 그 ‘슬라이드’와 활동 사진 및 음향 장치가 ‘뉴우펀들랜드’인들에게 유익할 것으로 확신하였다. 그런 것을 보여 줄 만큼 기회가 아직 무르익지 않은 때였는 데도 그 자매는 그 문제를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그후 어느날 밤 조용히 기도하던 중 자신이 그곳에 가서 혼자 ‘파이오니아’하기로 결심하였다. 그 결심은 원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었다. 여호와께서는 진리에 굶주린 많은 ‘뉴우펀들랜드’인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이 담대한 여인을 사용하실 것이었다. 처음에는 자기가 전하는 말을 귀담아 듣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몇푼의 돈이 생기면 번번이 ‘카터’의 언덕에 있는 ‘스키퍼 기본’의 집으로 마음이 이끌렸다. 이제 그 자매의 말을 들어보자:
“그 연로한 ‘스쿠우너’선의 선장은 하숙집을 경영하고 있었으며 북부의
사람들이 입항하면 그들과 ‘사연을 늘어놓기’ 좋아하였다. ‘외항’에서 수도로 오는 많은 선장들이나 무역상들이 그 집에서 묵었다. 내가 일요일 저녁 같은 때에 식사하러 ‘스키퍼 기본’의 집에 가보면 그러한 많은 사람들이 ··· 그 집 난로가에 모여 있곤 하였다. 보통 ··· 경건한 분위기였기 때문에 나는 그들에게 왕국에 관하여 이야기를 시작하곤 하였다.” 그 사람들 중에는 황량한 북동부 해안에 있는 작은 마을인 ‘캣하버’ 즉 ‘룸스덴’에서 온 젊은 어부 ‘엘리 파슨스’와 ‘웨슬리 하우엘’이라는 두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들은 이야기에 깊은 감동을 느껴 「성경 연구」 몇권을 받게 되었고 그것을 가지고 머나먼 자기들의 고향으로 돌아갔다.‘웨슬리 하우엘’은 그 마을 북부 감리 교회의 예배를 인도하는 평신도였고 ‘메이슨’ 자매로부터 출판물을 받은 다른 집단에 속한 ‘에드가 기본스’는 남부 교회의 예배를 인도하는 평신도였다. 그 두 사람은 이제 그들이 진짜 전파해야 할 것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어느날 교직자가 ‘웨슬리’의 사업소를 특별히 방문하여 통렬한 어조로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이 설교단으로 돌아오는 것은 좋소. 그러나 당신의 새로운 종교는 버리시오!’ ‘웨슬리’는 단호히 거절하였다. 몹시 화가 난 교직자는 ‘당신 가족들이 그 때문에 당신을 저주하게 될 것이요’라고 쏘아 붙이고는 터벅터벅 걸어나가 버렸다.
그와 거의 같은 시기에 성공회 부인 부조회 회장은 자기가 알고자 하던 제목 즉 주 기도문에 관하여 ‘뉴우요오크’ ‘브루클린’ ‘왙취 타워’ 협회 본부에서 온 ‘A. H. 맥밀란’ 형제의 연설 중 결론 부분을 듣게 되었다. 1970년 12월, 그 자매는 91세의 고령으로 사망하기 바로 며칠 전, 먼 옛날인 그날 밤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오렌지 홀’에 사람이 꽉찼으나, ‘웨슬리 하우엘’이 가까스로 우리에게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맥밀란’ 형제는 주 기도문의 의미에 관하여 설명하고 있었다. 나는 엄격한 성공회 가정에서 자랐지만 그 의미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평생을 어두운 토굴 속에 있었는데 그 짧은 순간에 ‘맥밀란’ 형제가 빛을 밝혀 준 셈이었다. 나는 마지막 연설의 일부분만 듣고도 진리를 인식하게 되었다.” 이전의 그 성공회 부인 부조회 회장은 ‘메어리 굿이어’ 자매가 되었다.
발판을 놓음
1916년 ‘맥밀란’ 형제가 ‘캣하버’(‘럼스든’)에 여호와의 백성들의 첫 회중을 조직한 것이 바로 그 때였다. 성서 연구 집단은 12명 이상으로 그 수가 증가되었으며 그 중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폭풍우 속을 뚫고 모래 사장과 거친 해안을 타고 여러 ‘마일’을 걸어서 오는 사람도 있었다.
수도인 ‘세인트존스’에서 혼자 지내던 ‘메이슨’ 자매는 아직도 성서에 대해 충실한 ‘뉴우펀들랜드’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사진극”을 상영하는 일을 계획하고 그것에 대해 기도하고 있었다. 전에 자기가 ‘콜포처’로 일하던 곳의 벗들이 마련해 준 자금과 ‘왙취 타워’ 협회장인 ‘차알스 T. 러셀’이 자기 사재에서 내 놓은 기부금을 사용하여 결국 그
자매는 ‘노바스코시아’의 ‘블랙’ 형제가 협회의 ‘슬라이드’와 영사기를 가져 오도록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1916년 5월 5일 ‘세인트존스’에서 삼 주일간에 걸친 “사진극” 상영이 시작되었다. 그곳에 사는 많은 사람들 그리고 외항과 ‘라브라도’에서 그곳을 방문한 어부와 상인들이 그것을 보려고 왔기 때문에 자리가 비좁았다. 14회의 저녁 상영과 15회의 오후 상영에 구경온 사람 수는 총 10,825명이었다.형제들이 ‘캐나다’와 다른 곳에 있는 자기들의 구역으로 돌아가자 ‘메이슨’ 자매는 ‘럼스든’에 있는 작은 집단을 방문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자매는 멀리 떨어져 있는 그 작은 회중을 위해 강력한 기초가 놓이도록 그 기회를 사용하였다. 후에 활동적인 전도인이 된 상당수의 사람들은 그때 하나님의 목적에 관하여 인식을 갖게 되었다.
해가 지나면서 다른 여러 형제들이 점점 자라가는 집단을 키우고 강화하기 위해서 ‘럼스든’을 방문하였다. ‘클리포오드 로버츠’ 형제가 “본토”에서 왔을 때를 누구나 다 기억하고 있다. 심장 질환으로 고생하던 그 부락의 한 연로한 남자는 방문한 연사의 공개 강연을 위해 ‘오렌지 홀’까지 먼 거리를 걸어올 수가 없었다. 나이든 그 신사는 그 지방의 교회 건물을 사용하도록 마련하여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 그리하여 ‘로버츠’ 형제는 그 건물에서 수백명의 청중에게 연설하였다. 강연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교회 뒤에서 어떤 사람이 “이 사람들이 내 교회를 다 차지했다!”고 고함을 쳐서 연설이 잠시 중단되었다. 끝에 가서 그 연로한 남자는 오래 살아서 교회에서 진리가 전파되는 것을 듣고 싶었었다고 말하였다. 바로 그 날 그의 소망이 실현된 것이었다.
그 당시 협회의 여행하는 대표자들을 “순례자”라고 하였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인 ‘존 컷포오스’ 형제가 1927년에 방문한 것을 그 지방의 ‘죠세핀 파슨스’ 자매는 잘 기억하고 있다. 그 자매는 웃으면서 이러한 재미있는 점을 지적하였다. “‘존’이 하숙집 주인에게 침대를 달라고 하자 주인이 ‘우리 집에는 당신에게 맞는 큰 침대가 없는데요’라고 대답했을 때 그의 기분이 어떠했을지 우리는 이따금 생각합니다. ‘컷포오스’ 형제의 키는 1.8‘미터’가 넘었다.”
‘웨슬리 하우엘’이 그리스도교국의 가르침을 배척했기 때문에 그의 가족이 그를 저주할 것이라는 교직자의 예언을 기억하고 있는가? 그와는 반대로 축복이 있었다. 초기에 성서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들의 자녀들, 손자녀, 증손들 다수가 오늘날 ‘뉴우펀들랜드’에서 ‘파이오니아’의 대열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945년 ‘럼스든’ 남부에서는 약 12명의 활동적인 증인들이 한 회중으로 조직되었다. 같은 해에 ‘럼스든’ 북부 회중은 “쿠퍼 숍”의 이층을 왕국회관으로 개조하였다. 그후 1947년에는 ‘럼스든’ 남부에 첫 왕국회관이 건립되었다. 더우기 ‘스트레이트 쇼어’(배가 정박할 곳이 없어서 그렇게 불렀다)에도 ‘머스그레이브 하버’와 ‘애스펜 코우브’ 회중이 서게 되었다. 그 회중들은 ‘캣하버’ 즉 ‘럼스든’에 있었던 처음 증인들의 육적 및 많은 영적 후손들로 이루어져 있다.
초기의 전파
그러한 초기에 살던 사람들의 전파 활동을 살펴보면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사람들의 사랑과 담대함 그리고 끈기 등을 알 수 있다. 도로도 없었고 단지 좁은 길 몇 군데 밖에 없었다. 1930년대와 1940년대에는 대부분 거치른 바다와 폭풍우 가운데서 배로 여행을 해야 하였다. 배 멀미로 고생하는 증인들이 많았다. ‘웨슬리 하우엘’의 딸들은 다음과 같은 경험담을 이야기한다. “‘웨슬리빌’까지 24‘킬로미터’를 배로 간 후 ‘템플맨’까지 8‘킬로미터’는 걸어서 가곤 하였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는 한 손에 (출판물이 든) 가방을 들고 다른 손에는 축음기를 들고 바위가 많은 길을 올라가고 습기차고 물이 많은 늪지대를 지나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러 번 축음기를 발디딤 돌로 놓고 가방을 들고 찔찔매면서 피곤한 우리의 몸을 늪지대 위로 끌고 가곤 하였다. 연설을 틀어 주기 위해 집들을 방문하면 어린 소년들이 떼를 지어 놀려대며 우리 뒤를 따라 다니는 일이 많았다. 이전에 비웃고 다니던 그 소년들 중 한 사람이 ‘럼스든’에서 감독자가 되었다. 자기 아내와 가족 그리고 그의 연로한 부모도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다. 그 자녀들 중 둘은 전 시간 봉사를 하고 있다.”
그들로부터 앞서 이야기를 들은 ‘에디스 메이슨’ 자매와 그의 동료 ‘휘트모어’ 자매는 그후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1918년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은 귀찮은 성경 연구생들을 자기들의 생각대로 단번에 제거하려고 전쟁의 열기를 이용하였다.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은 이들 여자 선교인들의 경험담을 통해 그들이 당하곤 한 어처구니 없는 상황들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뉴우펀들랜드’는 북미 대륙의 가장 끝에 있는 곳이었으며 거기에서는 ‘마르코니’ 대서양 횡단국이 대서양 및 대양 건너에 있는 연합국들을 위해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마르코니’의 전신 기사를 쏘아 죽이려 했다. 몇달 동안 우리가 ‘스파이’라는 말을 들어왔다. ‘휘트모어’ 자매와 나는 종종 독일의 첩보원이라는 비난을 받았고 우리가 옷밑에 무기를 숨기고 다닌다는 [혐의를 받게] 되었다. 사람들은 우리를 의심하였고 아주 두려워하였다. 그러다가 1918년 9월 1일 ‘마르코니’ 사건의 혐의자로서 우리를 추방하였다.” 그 자매들에게 잘못이 전혀 없었음은 물론이다.
1919년에서 1923년까지 계속 서서히 회중이 증가 되었다. ‘포오트유니온’에는 한 작은 집단이, ‘세인트존스’에는 다섯명이 있었고, 또한 ‘럼스든’ 집단이 있었다. ‘럼스든’에서는 교직자들이 더 이상 방문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들은 양떼를 잃어버렸다. 1924년에는 끈질긴 ‘메이슨’ 자매가 ‘세인트존스’로 돌아왔는데, 이번에는 “뉴우파이 불릿”이라고 부르는 철도와 그 섬의 외항들에 정박하는 배를 이용하여 그 섬 전체에서 활동할 계획이었다.
이제 그와 관련된 그 자매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1924년 여름부터 1925년까지 나는 그곳의 대부분을 여행했다. 때때로 정부의 우편선인
‘수사’, ‘프로스펙트’, ‘클라이드’나 ‘포르티아’호 등을 타고 항해하였다. 나는 배를 탈 때마다 심한 멀미를 하였다. 다른 때에는 항구에서 항구로 이동하는 ‘스쿠우너’선을 탔다. 그들은 밤중 어느 때고 매우 섬찟한 기분이 드는 부두에 나를 내려 놓곤 하였으며, 쓸쓸히 울리는 농무 경적만이 나의 벗이 되었다. 나는 책을 밀가루와 설탕통에 넣고 다녔기 때문에 외딴 곳을 돌고 나서 다음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책들을 다시 포장하고 분류하는 일로 밤을 새는 일이 많았다. ··· 배를 타기 위해서 새벽 4시에 일어나야 할 경우도 많았다.”이번에는 다른 짝인 ‘핼리팩스’의 ‘앤 다우든’ 자매와 함께 ‘메이슨’ 자매는 1926년 여름과 겨울 동안 모든 기회를 사용하여 열심히 왕국 전파를 하였다. 1926년 그 자매는 마지막으로 그 섬을 떠났다. 여러 해 후 백내장으로 그 자매의 다정했던 눈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그 자매는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사람들은 내가 그곳을 좋아한 이유를 묻는다. 나도 잘 모르겠다. 아마 사람들이 진리에 대하여 영적인 눈을 뜨는 즐거움을 보는 것인 것같다. ··· 나는 나의 봉사에서 항상 여호와이 손길을 느꼈으며, 그분의 귀한 이름을 입증하는 데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을 참으로 행복하게 생각한다.” 그 자매가 뿌린 많은 “씨”가 여호와의 영광을 반영하는 건강한 “식물”로 성장하였다!
한 원주민 아들이 돌아오다
때는 1929년 8월 29일이었다. 장소는 거친 대서양을 마주보는 ‘애벌론’ 반도의 동단에 위치한 작은 어촌이었다. ‘베이드 버어드’ 지역 원주민의 한 사람인 ‘잭 키이츠’가 “본토”에서 얼마 동안 지낸 후 자기 고향으로 방금 돌아왔다. 그가 가족과 친척들에게 전파하기 시작하자 그들은 놀랐다. 보수적인 주민들의 귀에는 참으로 생소하게 들리는 신앙이었다.
‘잭 키이츠’의 가족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에 깊은 인식을 나타낸 것은 다행이었다. 그 후 그는 그의 사촌 ‘윌리암’에게 증거하기 시작하였다. ‘윌리암’은 “빌리 짐” ‘키이츠’로 더 잘 알려졌으며, 충실한 교인이었고, ‘오렌지’ 교회에서 활동적으로 일한 바도 있었으며, 합창대의 일원이자 깊은 존경을 받는 가장이기도 하였다. ‘빌리 짐’은 주의 깊이 들었으나 모든 것을 그 즉시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는 증거를 원하였으며, 그 증거를 얻게 되었다. 자기가 다니던 교회의 ‘지옥불’ 전통이 한 가지 주요 토론 제목이었다. 그것은 그가 끝없는 고초의 장소를 진정으로 믿기를 원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점이 잘못되어 있다면 그의 교회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교회가 설 땅은 어디인가? 토론은 그 문제의 진리를 밝혀 주었다. 1930년의 바쁜 어로기에 ‘빌리 짐’은 교회에 정기적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는 기회를 내서 쉬곤하였다. 그렇지만 진정한 이유는 그의 생각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리의 씨가 좋은 땅에 뿌려졌던 것이다. (마가 4:8, 20) 그 후 얼마 있지 않아 ‘빌리 짐’은 큰 ‘바벨론’과의 모든 관계를 끊었다.
한편 왕국의 가르침을 선뜻 받아들인 ‘잭 키이츠’의 형 ‘아이삭’은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하였다. 죽기 전에 그는 자기의 장례식을 교직자가 사회하게 하지 말라는 것과 성공회의 묘지에 매장되기를 원치 않는다고 분명히 말하였다. 그 가족은 마을 위의 조그만 땅에 묻기로 결정하였다. 그러한 결정은 교직자 및 그의 측근의 분노를 일으켰다. 그 땅은 “거룩한 땅”도 아니었다! 더우기 교직자는 사망 증명서 발급을 단호히 거부하였다.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장례식은 ‘세인트존스’에서 온 ‘어얼’ 형제가 인도하였고 유골은 ‘거룩하지 않은 땅’에 매장되었다.교직자는 지방 사회의 복지를 염려해서라는 구실로 벌판에 매장한 것에 관해 보건성에 제소하였다. 경찰과 지방 행정관이 와서 그 문제를 조사하였을 때 증거가 제출되었고 모든 것이 제대로 되었음에 그들은 만족하였다. 그러한 일에 앞서 그 교직자는 증인 부모를 가진 그리고 ‘거룩하지 않은’ 땅에서 장사 지내도록 도움을 베푼 사람들의 자녀들을 학교에 나오지 못하도록 선동하였다. 대부분의 학교는 종교 학교였다. 자기에게 사과하는 부모들의 자녀들만 돌아와서 수업을 받도록 허락되었다. 형제들은 그 문제를 ‘세인트존스’에 있는 교육 위원회에 제소하였으며, 그 교직자는 모든 자녀들이 돌아 오도록 허락하라는 명령을 받게 되었다. 그것도 사과할 필요없이 돌아 오도록 허락하라는 명령이었다. 반 아이들은 증인 자녀들을 무시하고 조롱하였으며 교사도 법률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그들을 푸대접하였다. 그러나 그 교직자는 그 사회의 절대적인 우두머리로서의 위신이 크게 추락되었다.
얼마 있지 않아 ‘잭 키이츠’는 ‘뉴우펀들랜드’의 다른 여러 곳에서 전파하려고 때때로 조랑말이 이끄는 짐 마차 혹은 기차나 어선 등을 타고 더 멀리 여행하였다. ‘사람을 낚는’ 일을 계속하기 위하여 그는 때때로 고기잡는 일을 해야 하였다. (마태 4:19) 1939년에 그는 심히 앓게 되어 거의 2년을 ‘세인트존스’에 있는 요양소에서 보내야 했으며 그 후 ‘디어’호로 돌아가 그 곳에서 가정을 이루게 되었다.
‘잭’의 사촌인 ‘빌리 짐’은 후에 ‘베이드 버어드’ 지역에서 ‘잭’이 뒤에 남겨놓은 곳을 맡았다. 자기 아내와 함께 그는 말과 이륜 마차로 여행하면서 듣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성서 연설이 실린 판을 틀어주었는데 그 당시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들었다. ‘호텔’이나 식당이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손님 접대를 잘하였기 때문에 전도인들은 식사할 때쯤 되면 함께 들자는 집주인의 따뜻한 초대를 받아 들이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장장 하루의 야외 봉사가 끝나고 어두움이 바다를 짙은 흑암으로 물들이고 석유 등불이 소박한 집들의 창문에 깜박거리기 시작할 때 그들은 “말은 헛간에 두고 하룻밤 쉬어 가세요.” 하는 친절한 제안을 받아들이곤 하였다. 말이 잠을 자는 동안 ‘빌리 짐’과 그의 아내는 주인과 한 밤중까지 대화를 나누고 날이 새기 전에 약간의 휴식을 취하곤 하였다.
‘빌리 짐’이나 그의 아내 외에도 다른 사람들도 영적으로 자라고 있었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1939년 여름 어느날 ‘세인트존스’에서 한 형제가 침례식을 사회하기 위하여 도착하였을 때, 자신들을 제공한 열심스러운
침례 지원자 여섯명이 있었다. 그들 모두는 5‘킬로미터’ 이상되는 거친 산길을 지나 한 연못으로 가서 거기에서 하나님께 자기들의 생명을 바치는 헌신의 외적 증거를 나타내었다. 그후 ‘베이드버어드’ 사람들의 무관심과 적의로 인하여 왕국 활동을 하는 데 여러 해 동안 인내할 필요가 있었다. 1965년에는 두 사람의 특별 ‘파이오니아’가 회중을 돕도록 임명되었으며 그 결과 전도인들이 훈련을 받게 되었고, 각자가 자기의 야외 봉사를 개선하도록 돕는 ‘프로그램’과 더불어 집회가 훌륭히 진행되게 되었다. 1971년 그 회중은 멋진 왕국회관을 건축하였다.배로 좋은 소식을 전함
그러나 이제까지는 ‘뉴우펀들랜드’의 전파해야 할 구역에 겨우 흔적만 남겨 놓은 셈이었다. 110,000평방 ‘킬로미터’의 넓이에 인구 5,000명이 넘는 곳은 다섯 군데 밖에 되지 않았다. 수도인 ‘세인트존스’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는 인구가 55,000명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인구 대부분이 9,600‘킬로미터’의 거친 해안선에 흩어져 있는 수백개의 작은 촌락과 마을에 살고 있었다. 증인들은 사람들을 접촉하는 데 바다가 가장 적절한 길임을 깨닫게 되었다.
여러 해 동안에 걸쳐 ‘왙취 타워’ 협회는 그러한 활동을 위해 네척의 배를 구하도록 마련하였다. 그 중 첫째 것인 ‘몰톤’호는 부두에서 보면 매끈하고 아름다운, 길이 20‘미터’의 연안 항해선이었다. 그 배를 책임 맡도록 협회가 임명한 ‘F. J. 프란스키’는 다른 형제와 함께 경험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1929년 5월초 ‘지미 제임스’와 나는 ‘캐나다’로부터 ‘뉴우펀들랜드’로 파견되어 협회의 연안 항해선 ‘몰톤’호를 책임 맡게 되었다. ··· ‘뉴우펀들랜드’인들은 손님 접대가 특징인 따뜻하고 우호적인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의 견해에 찬동하지는 않더라도 말을 계속 들어주고 정중하게 대해 주었다. 문을 두드려도 응답하지 않는 그들의 습관 때문에, 처음에는 당황하였다. 그들이 창문 곁에 앉아서 문앞 층계에 우리가 서 있는 것을 보면서도 문으로 오지 않은 때도 있었다 ··· 고립되어 사는 관계로 사람들이 혈족 결혼을 하여 아무도 낯선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고, 같은 가족처럼 다른 사람의 집을 그냥 드나드는 것 같았다. 바다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은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슬픈 사연이 어느 가정에나 다 있는 것같이 보였다. 우리는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많은 사람들을 방문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인 성서의 확실한 진리로 그들을 위로하였다.”
경제적인 불황이 ‘뉴우펀들랜드’를 엄습하였다.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다. 노후 연금이 일년에 단지 50‘달러’ 밖에 되지 않았다. 인구의 90‘퍼센트’가 고기잡이를 하는데, 일은 고되고 수입은 극히 적었다. 생선 한 ‘퀸탈’(약 50‘킬로그램’)이 5.50‘달러’ 혹은 그 이하로 팔렸다. 죽음이나 세금처럼 고생은 피할 도리가 없었다. 사람들은 성서 출판물에 대한 대가로 손으로 짠 옷이나 벙어리 장갑, 양말, ‘스웨터’, 물개 가죽 제품,
털가죽, 고래뼈나 상아로 만든 장신구, 고기말린 것 등을 주었다. 물론 여러 마을에 ‘몰톤’호가 나타나는 것을 어떤 사람들, 특히 교직자들은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그들은 증인들을 헐뜯었고, 거짓 선지자라 부르며, 교구민들에게 ‘왙취 타워’ 출판물을 읽지 말고 심지어 증인들을 집에 들여 놓지 말라고 하였다. ‘프란스키’ 형제의 일기를 읽어보면 그런 생생한 경험담들을 들을 수 있다.“우리가 ‘프레스크’, ‘보나’, ‘세인트카이런스’, ‘파라다이스’ 등에서 활동하려고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 모든 곳은 자기의 보금자리가 방해받기를 원치 않는 ‘신부’에 의해 경고를 받았다. ‘플랫’ 섬을 방문한 결과는 그 모든 것을 보상받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 항구의 입구는 암초 투성이였다. 그런데 한 어부가 작은 어선을 타고 우리에게 와서 항구 안으로 배를 안내해 주었다. 남녀들이 무리 지어 ‘몰톤’호에 승선하였다. ··· 이전에 우리가 그런 환영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약간의 음악과 연설을 들려 주었고 그들은 자정이 될 때까지 머물렀다. 그 사람들은 진리에 굶주려 있었다. 다음날 그들은 우리에게 많은 꽃을 선물로 주었으며 ··· 비록 그들이 가난하기는 하지만 많은 책을 전해 줄 수 있었고 여러 가지 성서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그 다음, 1930년에 ‘몰톤’호는 다시 항해를 시작하였는데, 이번에는 ‘프란스키’ 형제의 새로운 짝으로 ‘로스 불랜치’ 출신 어부였던 ‘필립 파슨스’가 함께 하였다. 그 형제는 여러 가지 난관에 부닥쳐도 배와 항해술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이것은 참으로 잘된 일이었다. 북부로 여행하여 ‘노틀담’ 및 ‘화이트베이’ 지역의 모든 섬과 해안에서 활동해야 하였기 때문이다. 6월에는 그러한 여행이 손에 땀을 쥐게 하였다. 부빙은 그 위세가 등등하였다. “으르렁거리는 것들”(선원들이 북극에서 떠내려온 거대한 빙산에 붙인 이름)이 햇빛을 받아 거대한 성처럼 반짝거렸다. 그것들 가운데는 네모난 상자가 떠있는 모습이나 뾰족한 첨탑을 가진 성당같은 모양을 한 것들도 있었다. 또한 항해를 위험하게 하는 얼음 조각들이 끝없이 깔려있는 얼음 벌판이 있었다. 난파당하지 않기 위해 ‘몰톤’호의 승무원들은 장대를 부지런히 놀려 커다란 얼음 덩어리들을 막아 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여행은 위험하였지만 전에 소식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 소식을 전파하는 즐거움으로 인하여 풍부한 보상을 받았다. 수천부의 출판물을 전하였다.
증가가 계속되다
‘세인트존스’ 시의 집단은 수적으로 계속 증가하고 있었으며 협회의 여행하는 대표자들이 여러 번 방문하여 유익을 주었다. 예를 들어 1927년에는 ‘M. A. 하울릿’이 방문하였다. 그후에 ‘컷포오스’ 형제가 왔다. 협회의 방송 내용은 ‘노바스코시아’국을 통해 정기적으로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왕국 소식의 선포에 있어서 진정한 담대함이 부족하였다.
회중에 여호와의 영이 흐르는 것을 방해하는 한 가지 요소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1년에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명칭을 받아 들이면서 분열이 있었음이 명백해졌다. 어떤 사람들은 부드러운 “성경 연구생”이라는 명칭을 더 좋아하였다. 그들은 회중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 소수만이 ‘왙취 타워’ 협회의 세계적인 활동을 지지하는 데 굳건한 충성을 나타내게 되었다. “여호와의 조직”이라는 기사를 실은 1932년 8월 15일과 9월 1일호 「파수대」는 나머지 우유부단한 사람들 모두를 제거해 버렸다. 이전에 회중의 “선출된 장로”들 얼마와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 후 그 지방 사회에서 유명하게 되었으며 심지어 교직자들의 호감을 사게 되었다. 이제 소수의 충실한 사람들은 두려움과 냉담한 태도를 가진 사람들의 모든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되었다.이제 서부 해안에 위치한 ‘뉴우펀들랜드’에서 두번째로 큰 곳인 ‘코너브룩’으로 주의가 돌려졌다. 1923년에 ‘메이슨’ 자매가 그곳에서 활동한 적이 있지만 그 후에는 양같은 자들을 찾는 진정한 노력이 행해지지 않았다. 이제 1933년에 ‘얼 시니어’라는 헌신한 ‘뉴우펀들랜드’ 형제가 도로 공사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직장 일로 ‘코너브룩’에 가 있게 되었다. 거기 있는 동안 그는 「죽은 자는 어디 있는가?」라는 소책자를 배부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작은 목공소에서 듣는 귀를 발견하였는데 그곳에서 ‘알프레드 존슨’과 ‘르우벤 바아스’가 같이 일하고 있었다. 그 소책자를 통해서 그들의 눈이 열리게 되었다.
얼마 있지 않아 새로운 연구 집단이 형성되었고 그 후 협회의 ‘캐나다’ 지부에 의해 ‘로이드 스튜어트’가 그곳으로 파견되었을 때 그는 ‘바안스’와 ‘존슨’의 식구들을 주축으로 하여 작은 회중을 조직하였다. 어린 ‘리타 존슨’과 젊은 ‘구스 바안스’는 그러한 초기의 집회에 참석하였다. 그 두 사람은 후에 ‘길르앗’ 학교의 선교인이 되어 ‘뉴우펀들랜드’에서의 왕국 활동을 발전시키는 데 훌륭한 일을 하였다.
그후 ‘잭 키이츠’가 ‘바안스’ 및 ‘존슨’의 식구들과 ‘코너브룩’에서 함께 일하게 되었으며,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활동이 활기있게 진행되었다. 전파를 위한 어떠한 기회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벌목장이나 어촌에서, 강에 통나무를 띄워 이동시키는 사람들 사이에서, 한밤중 기차에서 등등 어디에서나 축음기 연설을 틀었고 성서 진리를 토론하였다. 교직자들의 지배하에 있는 ‘코너브룩’이란 마을에 소동이 일어났다!
또 다시 장사지내는 일에 있어서 거룩한 땅과 관련된 문제가 일어났다. 형제들이 굽히지 않고 죽은 자를 그들 소유의 ‘거룩하지 않은’ 땅에 매장하는 것을 보고 그 지방 사람들과 교직자들은 또 다시 충격을 받게 되었다. 종교 지도자들과 그들의 행위가 의심받고 있는 오늘날에는 그러한 사건들의 온전한 의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교직자들의 말이 법이었으며 교회가 세운 전통에 조금이라도 도전하는 것은 신성 모독죄에 해당되었다.
수도로 나아가다
‘코너브룩’에서 그러한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는 동안, 협회의 ‘캐나다’ 지부는 ‘뉴우펀들랜드’에서의 왕국의 유익을 돌보기 위하여 아주 헌신적인 부부를 ‘세인트존스’로 파견하였다. 그들은 ‘레이’ 및 ‘베티 질리스피’였다. 출판물 보관소가 세워졌고 그 지역에서 확성 장치를 갖춘 차가 사용되기 시작함으로써 그 당시 ‘왙취 타워’ 협회장이던 ‘J. F. 러더포오드’의 강력한 목소리가 어디에서나 많은 사람들에게 방송되었다. 마음이 어수선해진 교직자들이 증인들에 대하여 폭력을 선동하던 그 소란스러웠던 때와 관련하여 한 가지 흥미있는 일이 발생되었다.
‘‘벨 아일런드’에서 ‘질리스피’ 형제가 확성 장치를 한 차로부터 판을 틀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에게 돌을 던지기 시작하였다. 선동을 받아 한 어린 소년이 몇개의 돌을 던졌다. 그가 던진 돌 한개가 축음기에 명중하여 그것이 멈추게 되었다. 그날 밤 그 소년은 우울하고 마음이 상해서 집으로 돌아갔다. 여러 해 동안 그 문제로 인하여 자주 괴로와 하였다. 여러 해가 지난 어느날 한 ‘파이오니아’가 이제 성장한 남자가 된 그 소년을 방문하였고 그와 연구를 시작하였다. 연구 후 그는 오랫 동안 자기 마음을 억눌러 온 일을 고백하여 마음을 가볍게 하고 싶었다. 그는 자기의 죄와 슬픔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용서를 구하였다. 그 사람은 후에 증인이 되었다.’
1930년대는 ‘뉴우펀들랜드’에 있는 여호와의 백성들에게 어려운 시기였으며 특히 ‘세인트존스’에서는 분노가 자주 폭발되고 말다툼과 돌 던지는 일이나 싸우자는 도전이 빈번히 있었다. 미국에서 폭도들로부터 폭력을 경험한 바 있는 ‘어네스트 엘리스’ 부부가 그러한 분위기 속에 있게 되었다. 그들은 여러 가지 도전을 직면하였다. 예를 들어 어느날 오전 ‘엘리스’ 형제가 그 도시의 동단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사제들의 선동을 받은 여자들이 자기 가족들과 함께 그를 공격하여 그의 성서와 서적들을 갈갈이 찢어 놓았다. ‘어네스트’는 그대로 서서 경찰을 부를 수 있을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그 문제를 법정으로 몰고 갔으며 공정한 판사는 그 공격자들에게 중벌을 가하여 시민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엘리스’ 형제는 그 동일한 지역에 가서 다시 평화와 위안의 소식을 전하였다.
‘세인트존스’에 있는 동안 ‘어네스트’는 ‘프린스톤’이라는 외항에서 ‘세인트존스’에 도착하는 사람들을 위해 중개 역할을 하는 이웃 사람을 알게 되었다. ‘어네스트’와 이야기를 나눈 후 그 사람들은 여호와의 증인이 되어 ‘프린스톤’으로 돌아갔다. ‘뉴우펀들랜드’의 그 지역에서 일으켜진 관심은 강력하였다. 후에 그 지방은 ‘길르앗’ 학교 졸업생인 몇명의 선교인을 배출하였다.
또한 ‘엘리스’ 형제는 허가를 얻어 ‘뉴우펀들랜드’ 만국 성경 연구회를 형성하려고 노력하였다. 그 때는 1940년초였다.
지방 당국자의 입장에서는 지금까지 ‘어네스트 엘리스’에 대해서 충분히 참아온 셈이었다. 외국 종교를 전파하는 외국인이라고 하여 그를 추방하려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어네스트’가 형제들을 고무시켰으므로 당국은 뜻하지 않게도 끝까지 자기들의 입장을 고수하려는 ‘뉴우펀들랜드’인 대표단의 강력한 항의를 받게 되었고, 그 결과 ‘어네스트’는 계속 머물러 있게 되었다. 그러한 결과를 가져오게 한 한가지 중요한 요인은 그를 위한 탄원서에 놀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서명하였다는 점이다. 심지어 얼마의 “적”들까지도 체구가 작은 그의 투지력을 높이 평가하였기 때문에 그 탄원서에 서명하였다. 그후 2차 세계 대전의 위협이 있고, 그를 추방하려는 또 다른 시도가 성공할 것으로 보이자 ‘왙취 타워’ 협회는 그를 미국으로 소환하였으며, 반대자들은 그를 그 나라에서 추방하는 데서 맛보고자 하던 회심의 미소를 결코 맛보지 못했다.1939년에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졌다. 엄격한 검열로 인하여 우편을 통해 「파수대」를 받아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졌다. 그러나 ‘세인트존스’ 외각의 ‘포오트페퍼럴’에 주둔하고 있던 미국 병사 한 사람이 관심을 갖게 되어 그 잡지를 예약하게 되었다. 그의 우편물은 별 문제없이 도착되었기 때문에 결국 형제들은 그 잡지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들은 등사기를 사서, 전 ‘뉴우펀들랜드’에 있는 예약자 일백명에게 그러한 방법으로 공급해 주었다. 그러나 어려움은 증가해 갔다. ‘뉴우펀들랜드’ 태생이 아닌 의의 열성적인 투사들은 직접적인 추방은 아니었을지라도 떠나라는 압력을 받게 되었다. 그 후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코너브룩’으로 돌아간 어린 ‘거스 바안스’가 이제 성인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 ‘르우벤’은 항상 인정많고, 진리에 대해 확고하였으며 좋은 소식의 전파에 전념하였다. 그는 ‘거스’에게 관련된 중요한 쟁점과 ‘뉴우펀들랜드’에서 모든 관심자들을 함께 긴밀히 연합시키고 ‘뉴우펀들랜드’에 전국적인 규모로 조직을 설립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말하곤 하였다. 그는 “그 일을 할 수 있을 만큼 내가 젊다면 좋겠는데”라고 가끔 말하였다.
그러므로 자기 아들이 와서 남은 생애를 ‘파이오니아’ 봉사에 바칠 것을 결심했다고 말하였을 때 연로한 ‘르우벤’은 참으로 행복하였다. ‘거스’는 그해 겨울에 ‘세인트존스’까지 갈 기차표와 몇 가지 장비를 사는 데 충분한 돈을 저축하였다. 그는 자기의 계획을 ‘뉴우펀들랜드’ ‘패사디나’에 있는 다른 젊은이에게 이야기했더니, 그도 같이 가자고 하였다. 그리하여 1940년 봄, ‘거스 바안스’와 ‘허버트 도우’는 수도에 도착하였는데 ‘거스’의 호주머니에는 5.27‘달러’ 밖에 들어 있지 않았다. 그 후 10년 동안 문제들과 어려움이 많았지만 그는 결코 물질적으로 그 이상 가난해 보지 않았다.
어려운 시기
출판물 보관소에서 ‘바안스’와 ‘도우’ 형제는 곧 추방될 입장에 있는 ‘캐나다’인 ‘파이오니아’ ‘다우걸 맥크레이’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그들에게 정부가 모든 협회 출판물들을 금지할 것이기 때문에, 보관소에 있는 축음기 판들과 책들이 압수될 지경에 있다고 말하였다.
그 형제들은 한 가지 계교를 생각해 냈다. 그들은 대부분의 출판물과 판을 ‘하우엘’ 형제의 ‘스쿠우너’에 실어서 ‘럼스든’으로 가게 하였다. ‘프린스톤’과 작은 다른 장소로도 많이 보냈다. 당국자들이 보관소를 습격했을 때 그들은 이미 시기를 놓친 것이었다. 선반들은 사실상 비어 있었다.
한편 ‘바안스’와 ‘도우’ 형제는 전쟁 중에는 왕국 활동을 거치른 해안을 따라 먼 곳의 외항들에 국한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거스 바안스’는 다음과 같은 점을 인정하였다. “나를 선원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조수와 폭풍, 해도와 ‘컴퍼스’, 파도와 요동하는 위험한 바다 등에 관하여 나는 아무 것도 몰랐기 때문이다.”
9.3‘미터’ 길이의 협회 발동선이 차비를 다시 갖추는 데는 많은 독창력과 결단력이 요구되었다. 장래에 대한 부푼 희망으로 그들은 그 배를 “제1왕국 호”라고 불렀다. ‘프린스톤’의 형제들은 훌륭한 격려의 근원이었다. 거기에서 ‘봅 모스’가 승무원의 한 사람이 되어 그들이 지금 착수하고 있는 일에 대한 확신을 갖도록 도움을 주었다. ‘바안스’ 형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맨 첫날의 우리 항해 활동은 작은 배가 무섭게 파도 속으로 잠겨 들어가는 거친 항해였다. 우리가 처음 방문한 ‘살베지’라는 항구에는 열성적인 성공회 지지자들이 살고 있었다.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곧 우리는 돌 팔매질을 당하고 독일의 ‘스파이’라고 해서 항구에서 쫓겨났다. 사실상 그 마을에 사는 어떤 사람은 우리가 “‘히틀러’는 결코 지지 않는다”라는 축음기 판을 틀고 있다고 경찰에 신고하였다. 우리는 곱게 물러나 더 조용한 다른 곳에서 활동하였는데 온종일 경찰이 우리를 쫓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우리가 해안에 상륙했을 때 ‘봅’과 나는 헤어져서 한 사람은 이쪽으로 가고 다른 한 사람은 저쪽으로 갔다. 나중에 서로 만나려는 생각에서였다.
‘결국 예상 시간을 훨씬 지난 후에야 나는 그를 만나게 되었다. 내가 인적이 드문 도로변의 한 곳을 돌았을 때 거기서 ‘봅’이 그의 위로 우뚝 서 있는 키 큰 경찰관을 위하여 판을 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판이 ‘러더포오드’ 형제가 ‘아마겟돈’에서 마귀의 편에 있는 모든 자들을 열거하는 부분에 도달하였다. 강력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마겟돈’에서 마귀의 편에 있을 자들은 모든 국가의 육해군과 경찰력, 경찰력, 경찰력 ···”—그 판은 계속 한곳에서 맴돌고 있었다. ‘봅’은 얼굴이 새빨개졌고 나는 최악의 사태를 예상하고 도망칠까 생각하고 있는데, 그 우스운 광경을 보고 그 경찰관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댔다. 사실상 그 후부터 그는 우리의 친한 벗이 되었다.’
‘거스 바안스’는 자기 이야기를 계속 이렇게 들려주고 있다. ‘신경과민이 되고, 바다를 무서워하게 된 승무원들이 ‘데드 멘즈 베이’ 입구에 있는 위험한 ‘캣하버’(지금의 ‘럼스든’)의 해안에 가까와 졌을 때 많은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지형에 복잡해서 낯선 사람은 그 마을로 들어가는 길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바위 있는 데서 헤매고 있었다. 그때 한 척의 큰 어선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참으로 안도감을 느끼게
되었다. 우리를 환영해준 친절하고 잘 생긴 그 어부는 ‘엘모어 하우엘’이라는 사람이었는데, 그 후 여러 해 동안의 활동 중 우리에게 아버지와 같았다. 이곳 ‘럼스든’에서는 벗들이 우리의 식량을 대주고, 우리를 격려해 주었으며, 얼마의 낡은 장비를 대치해 주고, 우리의 배에 필요한 양식을 마련해 주었으며, 북부에 있는 몇 군데 만(灣)으로 우리가 갈 수 있게 하였다. 그들은 1915년 이래로 진리를 추구해 온 ‘하우엘’과 ‘파슨스’ 형제 뿐만 아니라 ‘메이슨’ 자매와 ‘맥밀란’ 형제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였다.’겨울이 되자 배를 사용하여 계속 활동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래서 방법을 바꿔서, 축음기와 성서와 출판물을 썰매에 싣고 가는 방법을 택하였다. ‘거스 바안스’는 자기가 한달에 서적을 500권이나 전한 때가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반면에 그들은 “스파이”라는 비난도 받았다. 그로 인해 적어도 한번은 북극광을 바라보며 썰매 위에서 오그리고 한 데서 잠을 자야 하였다. ‘거스’가 밖에서 하룻밤을 지났기 때문에 “상태가 일변하였다.” 말하자면 그 지방 사람들이 그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가 “독일의 ‘스파이’”가 아님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 당시 당국자들은 ‘불법적인’ 출판물을 압수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였기 때문에 증인들의 집을 습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많은 출판물들을 소수의 사람들만이 접근할 수 있는 안전한 장소에 숨겨 놓았으며, 따라서 때때로 회중과 ‘파이오니아’들은 전한 서적을 보충해 가면서 왕국 활동을 수행할 수 있었고 가정을 처음 방문할 때는 성서만 사용하였다.
1941년 초봄 ‘거스 바안스’와 ‘봅 모스’는 ‘프린스톤’으로 돌아와 또 한번 여름철 항해를 위해 배를 준비하면서 몇 주일을 보냈다. 그것은 그곳 집단의 「파수대」 연구와 「구원」이란 책의 매주 서적 연구가 잘 조직되도록 도움이 되었다. ‘거스’는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 “그해 봄 그곳에 있는 동안 나는 우리의 활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포오드’와 ‘빌 프린스’라는 두 젊은이와 종종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당시 나는, 우리가 나눈 그 초기의 대화로부터 그 두 소년이 감동을 받아 ‘파이오니아’가 되고 나중에 ‘길르앗’ 학교를 나와서 선교인으로 파견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하였다.”
훌륭한 “제1왕국 호”를 사용하여 두번째 갖게 된 여름 항해는 정말 흥미있었다. 지금까지 몇해 동안 전파해 온 ‘모스’ 형제와 ‘바안스’ 형제가 이제 ‘럼스든’에서 침례를 받았다. 그후 그들은 ‘루이스 포트’로 향하였다. ‘거스 바안스’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렇게 말하였다. ‘배에 물이 새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루이스 포트’에서 몇 ‘마일’ 떨어져 있는 작은 마을에 입항하였다. 우리는 그곳에서 새는 곳을 수리하기로 결정하였기 때문에 그날 아침 일찌기 출판물과 식량을 숲속으로 가지고 가서 비를 맞지 않도록 방수포로 덮어 놓았다. 그러나 우리—“지붕에 ‘스피커’ 장치를 한 이상한 배, 아마 독일의 ‘스파이’들”—가 와 있다는 소식이 삽시간에 퍼졌다. 일단의 ‘캐나다’ 군인들이 우리를 갑자기 포위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우리를 감시하면서 ‘루이스 포오트’로 끌고 갔는데, 그곳에서는 난감해진 죄수들을 보려고 마을 사람들 전부가 나와 있었다. ··· 나는 책임자를 보자고 요청하였다. 그 제안이 거절되자 나는 대위에게 ‘캐나다’군과 독립국인 ‘뉴우펀들랜드’ 사이에 맺은 협약에 비추어 볼 때 그의 부하들은 시민 생활을 간섭하고 있는 것이며 지방 경찰의 권위를 침해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나서 나는 ‘뉴우펀들랜드’ 경찰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하였다. 얼마 있지 않아 경찰들은 의심을 풀게 되었고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게 되었다. 우리는 감추어 둔 출판물을 찾아내고는 훨씬 북쪽에 있는 반도를 향해 곧 떠났다. 그후 경찰들과 세관원들이 우리를 자주 방문하였으나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금지문 조차 갖고 있지 않았으며 따라서 그들은 우리를 간섭하지 않았다. 흥미진진하던 그 여름 동안 수천부의 출판물을 전한 뒤 가을이 되었을 때는 ‘코너브룩’으로 돌아왔다.’1941년말 ‘거스 바안스’와 그의 동료는 ‘세인트존스’로 돌아와 보관소에서 지내면서 아주 작은 연구 집단을 다시 세우고자 노력하였다. 물질주의와 두려움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졌다. ‘아마 활동이 끝났을지도 모른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분명히 어떤 사람들이 그것을 원하였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그러던 중 1942년 1월 8일 ‘러더포오드’ 형제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앞에 어떤 일이 놓여 있었는가?
‘브루클린’ 본부와의 접촉
‘바안스’ 형제는 그 중요한 질문에 대한 답을 전도인들이 어떻게 얻을 수 있었는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아셨으며 마치 거의 기적과도 같이 1942년 2월 1일호 「파수대」가 내 손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것은 적절한 때에 적절한 일이었다. 그 “마지막 추수”라는 기사는 여호와께서 어떻게 거대한 “고기잡이와 사냥 활동”이 행해지도록 하셨는가를 알려주었다. ‘뉴우펀들랜드’ 형제들은 문자적인 고기잡이와 사냥에 관하여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 기사는 앞에 놓인 활동을 위해 그들을 잘 준비시켜 주었다. 형제들은 할 일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들은 그것을 할 각오가 되어 있었으나 협회의 도움과 교훈이 그들에게 필요하였다. 그러나 검열과 금지된 환경을 고려할 때 어떻게 할 것인가?’
‘포오드 프린스’가 자진하였다. 얼마 있지 않아 그는 상선 겸 여객선으로 사용되는 배에 고용되었다. 그는 독일의 잠수함들이 여러 배를 침몰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사명을 잘 알고 있었다. ‘뉴우펀들랜드’의 형제들에게는 항해에 적합한 좋은 배와 출판물, 그리고 왕국 활동의 증진을 위한 다른 자료를 구하는 데 도움이 필요하였다. ‘브루클린’에서 그는 협회장 ‘N. H. 노워’의 사무실에 있는 ‘밀튼 헨첼’에게 그 상황을 설명하였으며 모든 문제가 즉각 돌보아질 것이라는 확답을 얻었다.
배에 할 일이 있었기 때문에 ‘포오드’는 만찬을 위해 머무를 수 없었으나 그는 그 다음날에 돌아왔다. 과연 출판물과 축음기 판을 넣은 짐이 그를 위해 준비되어 있었다. 그 여행은 본국에 있는 그의 형제들을 위하여 귀중한 화물을 운반해 간 여러 주요 여행중의 첫 번째 여행에 불과하였다. ‘노워’ 형제로부터 온 편지를 통해 ‘거스 바안스’는 더 나은 배를 구입하도록 자금이 사용될 것을 알았다. 단지 600‘달러’를 주고 ‘바안스’ 형제는 길이 12.6‘미터’ 되는 아름다운 ‘요트’를 샀다. 그리하여 오래지 않아 “소망”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왕국 선박이 좋은 소식의 전파에 사용되었다.
그 활동 계획은 ‘포트-옥스-바스케스’로부터 ‘플라센티아’ 만에 이르는 남쪽 해안에서 활동하는 것이었다. 통관항인 ‘버지오’에서 세관원들과 기마 경찰들이 “소망”호에 승선하였다. 그들은 출판물이 금지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치를 취하기를 원하기는 하면서도 주저하면서 ‘세인트존스’로부터 지시를 기다리기로 결정하였다. “소망”호의 한 승무원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날 밤 안개가 많이 끼어 있었고 해안은 어두움 속에 덮여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밑이 평평한 작은 배로 모든 출판물과 ‘레코오드’판들과 장비들을 실어다가 어떤 한적한 곳에 숨겨 놓기로 하였다. 그들은 감시인을 배치해 두지 않았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자정쯤 되어 짙은 안개로 오도 가도 못하기 때문에 연안 항해선이 항구 밖에서 정박하기 위해 기적을 울리며 가는 소리를 들었다. 우리는 재빨리 우리의 나침판과 해도를 사용하여 그 증기선의 불빛을 발견할 때까지 안개 속으로 배를 저어갔다. 줄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갑판을 따라 걸어간 후 가까스로 사무장을 만나 그에게 우리가 적재하기를 원하는 화물이 있다고 말하였다. 그는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이기로 하였으며 그 즉시 우리는 밑이 평평한 우리의 작은 배를 비우고 우리의 모든 신권적인 장비를 약 110‘킬로미터’ 떨어진 해안으로 보냈다. 우리의 예상대로 아침에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압수하려고 관리들이 왔다. 그들은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우리를 항구에 무한정 억류시키려 했으나 우리는 정부에 항의를 하였고, 그 결과 우리를 풀어 주라는 명령이 내렸다.
‘몇 주일 후 다소간 무턱대고 우리의 출판물을 보내 놓은 항구에 도착하였다. 그곳의 한 상인은 호기심에서 짐 하나를 열어 보게 되었는데 우리가 도착했을 때 「적」이란 서적을 온전히 즐기고 있었다. 사실상 우리가 출판물을 포장하여 기록해 놓은 모든 관심자들의 이름과 주소로 우송할 수 있도록 그는 편의를 제공해 주었다. 그 동일한 연안 항해선이 다시 돌아갈 때 그 배는 ‘버지오’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지점으로 보내는 수백권의 서적과 소책자가 든 아담한 상자들을 운반하였다.
‘그 다음에 강풍과 거친 파도가 밀어치는 가을이 왔다. “소망”호는 ‘뉴우펀들랜드’의 남단인 ‘부린’ 반도 연안에 있었다. ‘엡워스’로 가는 도중 항상 “소망”호에 붙어 다니던 “스파이”와 “밀수군”들이란 오명을 제거하는
데 큰 역할을 하게된 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여기에서 ‘거스 바안스’의 항해 일지를 살펴 보자! ‘우리가 음침한 해안을 따라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를 항해하고 있을 때 조난 당한 사람이 쏘는 총소리가 들렸다. 배를 몰아 결국 열 세명—대부분이 부녀자와 아이들—을 태우고서 표류 중에 있는 배에 가까스로 신호를 보냈다. 그들은 표류되어 무섭고 추운 대양으로 쓸려가게 될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었다. 여러 시간 동안 그들은 구조를 요청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들을 구출할 수 있었고 따끈한 마실 것을 주고 그후 그들의 고향인 ‘코르빈’ 항으로 배를 끌어다 주었다. 그곳 마을 전체가 ‘가톨릭’교를 믿고 있었으나 이제 그 사람들은 우리의 벗이 되었으며 우리는 그들에게 왕국 소식을 말해 줄 수 있게 되었다.’확장을 위한 자유
‘왙취 타워’ 협회 출판물에 대한 수입 및 배포 금지가 1945년 3월에 해제되었다. 그 때는 참으로 ‘뉴우펀들랜드’에서 왕국 관심사를 크게 확장시킬 때였다. 75,000부의 출판물을 보내주도록 ‘브루클린’ 본부에 주문하였다. 또한 이전의 보관소에 지부 사무실이 설립되었고 ‘왙취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의 졸업생들이 주요 도시에서 봉사하도록 임명되었으며, 순회 및 지역 감독자들이 회중을 방문하고 반년마다 열리는 고무적인 대회를 조직하도록 임명되었다. 그리하여 조직이 더 굳건히 연합되었다.
얼마 있지 않아 지부 건물이 확장되었고 1946년 6월 6일에는 ‘세인트존스’ ‘페니웰’가 239번지에 있는 더 큰 새로운 장소를 구입하였다. 새로이 도착한 선교인 가운데 한 사람인 ‘차알스 클레몬스’는 지부 감독자로 임명되었다. 선교인들은 가장 큰 두 도시 즉 ‘세인트존스’와 ‘코너브룩’에서 집중적으로 일하도록 마련되었다. “소망”호는 외따로 떨어진 해변의 마을에 왕국 소식을 계속 전하였다. 그러나 여러 해가 지나가면서 그 섬의 사방을 향하여 도로가 생겼다. 다른 편리한 마련도 생겨나서 바다를 통한 전파는 그 중요성이 감소되었다. 얼마 있지 않아 남부와 ‘라브라도’ 해안을 제외한 거의 모든 촌락들은 육로로 갈 수 있었다.
그러나 1940년대의 순회 감독자들은 여행하는 데 아직도 어려움을 겪어야 하였다. 예를 들어 ‘조오지 스토우버’는 위험하였던 한 여행에 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돌아오는 길은 쉽지 않았다. 그 나라는 겨울철이어서 약 50‘킬로미터’를 걷는 동안 기온은 섭씨 영하 29도 이하로 떨어졌다. 첫날 밤 나는 삼림 속의 야영지에서 몇 사람과 함께 보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야기할 기회를 가졌다. 그 다음날 나는 나머지 여정을 떠났다. 나는 호수를 가로질러 가기 시작하였다. 내가 건너편에 이르기 전에 눈보라가 쳐서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게 길을 막아 버렸다. 나는 손가방을 눈 위로 내려놓고 그 위에 앉아서 기도로 인도를 구하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확신을 가지고 나는 가방을 들고 몇 발자국을 간 후 호수의 다른 방향에서 오는 새로운 길을 눈속에서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 나의 유일한 희망은 그 길이 나를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해 주리라는 것이었다. 어두워지고 있었다. 얼마 있지 않으면 길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때 내가 고개를 들고 앞을 바라보자 기쁘게도 마을의 불빛이 보였다. 여호와의 돌보심과 보호에 대해 나는 그분께 참으로 감사하였다.’1946년 ‘거스 바안스’와 ‘포오드 프린스’는 전후 첫 ‘길르앗’ 선교인 훈련 학교 국제반에 초대되었다. 그후 두 사람은 ‘뉴우펀들랜드’로 돌아와서 ‘바안스’ 형제는 순회 활동을 계속하고 ‘프린스’ 형제는 “소망”호의 사용을 감독하였다. 그 배는 1955년 12월 퇴역하게 되기 전까지 왕국 관심사를 위해 많은 일을 하였다. 여러 해의 활동 기간 중에 격지에 사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으며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활동적인 왕국 전도인이 되었고 확장되고 있는 회중들에 연합하였다.
1946-1947 봉사 연도는 ‘뉴우펀들랜드’의 형제들에게 괄목할 만한 해였다. 8명의 ‘파이오니아’와 38명의 전도인들이 총 25,000부의 출판물을 전하였다. 그러나 1947년의 가장 큰 즐거움은 ‘노워’ 형제와 ‘헨첼’ 형제가 특별한 환영을 받으며 방문하였던 여름의 대회였다. ‘왙취 타워’ 협회장이 그 섬을 방문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때 널리 광고된 강연 제목은 “만국의 영원한 통치자”였다. ‘노워’ 형제 자신도 “소망”호를 타고 광고하는 즐거움에 참여하였으며, 확성 장치의 도움을 받아 곧 있을 강연에 관하여 ‘세인트존스’ 항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광고하였다.
‘뉴우펀들랜드’인들 사이에서는 ‘바니’와 ‘에바’로 더 잘 알려진 ‘차알스’와 ‘에바 바니’가 ‘코너브룩’ 지역 즉 널리 흩어져 있는 지역의 선교인으로 임명되었다. 그들은 도착해 보니 원래의 집단은 다 떠나고 단지 관심자 두 가족만 남아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전파 활동도 지부 사무실에 전혀 보고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후 선교인들이 근처에 있는 언덕을 오르내리면서 봉사한 6년 동안에 큰 변화가 있었다. ‘바니’ 부부가 떠날 때에는 여호와를 찬양하는 번영하는 회중이 ‘코너브룩’에 있게 되었다.
1945년 가을 ‘뉴우펀들랜드’에서의 임명 수행을 위해 첫 집단과 함께 도착한 다른 선교인 부부 ‘월터’와 ‘그레이스 키이니츠’는 이제까지 그 섬에서 30년을 지냈다. 1962년에 그들은 ‘아르헨티나’와 그 주변의 촌락들에서 활동하라는 임명을 받았는데 거기서는 주로 그곳에 주둔해 있는 미해군들에게 증거하였다. 특히 상당히 많은 부인들이 왕국 소식을 받고 그후 미국으로 돌아갔다.
1952년경에는 21개의 회중과 315명의 전도인들이 ‘뉴우펀들랜드’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그 해에 ‘M. F. 래이틴’이 지부 감독자로 임명되었다.
해가 지나가면서 새로운 회중들이 설립되었고 왕국 소식 전파에 더 많은 노력을 하였다. ‘길르앗’에서 훈련받은 선교인인 ‘버나아드’와 ‘엘리자베드 머얼러’가 애쓴 결과 1952년에 새로운 회중이 ‘보나비스타’에 설립되었다. 1953년 다른 회중이 ‘조우 배츠 암’에 형성되었다. 1955년에는 역시 ‘스티픈빌’, ‘머스그레이브 하버’ 그리고 ‘마운트 펼’에
회중이 세워지게 되었다. ‘길르앗’ 졸업생들의 활동 결과 1957년에는 ‘포오트-옥스-배스케스’와 ‘엡워스’에 그리고 1958년에는 ‘노리스포인트’에 회중이 세워졌다. 그리고 그후 몇해 동안에 ‘루이스포오트’, ‘해피밸리’, ‘베이로버츠’와 ‘웨이브리지’에 다른 회중들이 세워졌다. ‘세인트존스’ 시에서도 역시 중요한 일이 발생되어 왔다. 회중이 커져서 1963년에는 몇 개의 집단을 만들게 되었다.더 필요한 곳으로 가족들이 이사함으로써 ‘뉴우펀들랜드’에서는 훌륭한 결과를 보았다. 그 결과 1964년에 ‘라브레이도’ 시에, 1967년 ‘카아보니어’에 그리고 1968년에 ‘쇼얼하버’에 다른 회중이 형성되었다. 특별 ‘파이오니아’들의 부지런한 노력으로 1969년에는 ‘스프링데일’과 ‘베이버어트’에 다른 새로운 회중이 생겨났다. 그 이래로 신권적 증가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 들어오고 있다.
‘뉴우펀들랜드’에 있는 여호와의 백성들의 기록을 돌이켜 볼 때 우리의 마음은 참으로 여호와께 대한 감사로 가득차게 된다. 1916년 ‘맥밀란’ 형제에 의해 첫 회중이 조직될 때부터 1974년에 이르기까지의 기록을 보면 이미 전 ‘뉴우펀들랜드’의 마을과 촌락과 외항에 3,600,000부의 책자들이 배부되었다. 그 활동에 300만 시간 이상이 소비되었다. 관심자들을 먹이기 위하여 1,000,000건 이상의 재방문이 행해졌다. 어떤 결과가 있게 되었는가? 자, 단지 지난 25년 동안에 1,180명 이상의 사람들이 자기 생명을 하나님께 헌신하고 그것을 물 침례로 상징하였다! 1975년 5월에는 1,131명의 전도인 신기록을 보고하였다. 아직도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조직에 이끌리고 있다. 왜냐하면 1975년 3월 27일 주의 만찬 기념식에 2,041명이 참석하였기 때문이다.
이곳 외딴 곳에 사는 겸손한 사람들에게 진리가 도달된 점에서도 여호와의 손길을 느낄 수 있으며 이제는 그들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게 되었다. (사도 11:19-21과 비교) 좋은 소식이 먼 곳까지 전파되었다. 우리의 하나님께서 아직도 왕국 선포라는 자신의 웅대한 사업에 ‘뉴우펀들랜드’의 형제들을 기꺼이 사용하고 계시는 점을 인식할 때 그것은 고무적이다. 그리고 그들 자신은 그러한 놀라운 은총을 받게 되어 행복해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