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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셈부르크’

‘룩셈부르크’

‘룩셈부르크’

‘룩셈부르크’는 면적이 2,585평방 ‘킬로미터’이고 인구가 350,000명으로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들 중 하나이다. 그 나라는 ‘유럽’의 중앙 즉 ‘프랑스’, ‘벨기에’ 그리고 독일 사이에 위치해 있다. 비록 작지만, ‘룩셈부르크’는 독립된 하나의 주권국이다. 고도로 공업이 발달된 나라이다. 그렇지만 무성한 삼림과 굽이치는 언덕들이 있어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또한 ‘룩셈부르크’에는 다행히 헌법이 있어서 종교의 자유, 언론의 자유, 법인을 구성할 자유 등을 보장해 준다.

여러 세기 동안 ‘룩셈부르크’는 ‘가톨릭’의 보루로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가톨릭’ 교회뿐 아니라 ‘프로테스탄트’나 ‘유대’교에 대해서도 정부가 재정적 후원을 해 주고 있다. ‘가톨릭’이 지배적인 ‘룩셈부르크’는 “현재의 입장 고수”라고 주창하고 있지만 오늘날 700명 이상의 ‘룩셈부르크’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대로 각 집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좋은 소식을 널리 알리고 있다. 어떻게 그러한 일이 있게 되었는가? 그 대답은 여호와의 증인의 현대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왕국 소식이 ‘룩셈부르크’에 이르다

이미 1922년에서 1925년까지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서 온 형제들이 ‘룩셈부르크’에서 성서 출판물을 배부하였다. 그 배부는 “도전”이라는 전도지로 시작되어 “교직자들을 고발함”이라는 전도지의 배부로 끝났다. 그 때에는 ‘룩셈부르크’에 여호와의 증인이 한 사람도 살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1929년에 독일 ‘마그데부르크’의 ‘왙취 타워’ 협회는 ‘파이오니아’로서 ‘아우구스트 리이드밀러’ 형제를 ‘룩셈부르크’로 파견하였다. 1930년 여름 그가 ‘프랑스’ ‘로렌’의 한 ‘파이오니아’ 자매와 결혼하게 되자 그 자매도 그 형제와 함께 그 구역에 있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거문고」, 「구출」, 「창조」, 「정부」 등의 서적과 몇 가지 소책자 그리고 「황금 시대」지를 배부하였다. 독일 ‘단찌히’의 한 ‘파이오니아’ 자매가 그 부부와 함께 잠시 동안 일하였고, 다른 ‘파이오니아’로서는 ‘쉬로오더’ 형제가 또한 독일 ‘마그데부르크’에서 ‘룩셈부르크’로 파견되어 왔다.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해 줄 한 가지 훌륭한 도구는 네 부분으로 나누어 제공된 “창조 사진극”이었다. 독일 ‘마그데부르크’의 지부는 창조로부터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 끝까지를 다루어 관람자들에게 하나님의 목적을 알리는 그 특별한 “극”을 상영하기 위해 형제들을 ‘룩셈부르크’로 보냈다. 1930년 그 “사진극”은 ‘룩셈부르크’ 시와 ‘에쉬-슈르-알제트’ 및 기타 여러 곳에서 상영되었다. ‘룩셈부르크’ 시에서는 매일 저녁 300명 이상이 참석하였다. ‘에쉬-슈르-알제트’에서도 역시 크게 성공하였다. 많은 주소를 받았으며 ‘리이드밀러’ 형제 부부가 그 사람들을 방문하였다.

‘가톨릭’의 반대가 시작되다

오랫 동안 ‘룩셈부르크’의 종교에 관한 주도권을 장악해 온 ‘가톨릭’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의 발전을 막기 위해 조처를 취하였다. ‘가톨릭’의 선동을 받아 경찰이 단속을 벌여 사람들로 하여금 “극”을 못보게 하였고, 그것이 금지된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가톨릭’ 신문에 실린 허위 보도들은 그러한 인상을 갖도록 더욱 부채질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극” 후에 개최된 공개 집회에서 얻은 주소를 사용하여 ‘파이오니아’들은 진리에 진정으로 관심을 가진 첫 ‘룩셈부르크’인들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참다운 추종자가 되기를 열망한 남부의 첫 ‘룩셈부르크’인은 ‘프레드 고레스’였다. 그는 자기가 어떻게 활동을 시작하였는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공개 집회가 열린 어느날 저녁 나는 30대 중반인 한 남자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 두 사람은 새로 배운 진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주고 싶다는 점을 서로 이야기하였다. 우리 집에서 그런 대화를 나눈 후 우리는 ‘리이드밀러’ 씨에게 우리의 결심에 관하여 알렸다. 그후 얼마 있지 않아 ‘리이드밀러’ 씨는 「왕국, 세상의 희망」이라는 상당량의 소책자와 함께 얼마의 서적과 증거 ‘카아드’라고 하는 것을 가져 왔다. 내 기억으로는 그 증거 ‘카아드’가 두 가지 언어 즉 한쪽은 독일어, 다른 한쪽은 불어로 되어 있었다. 그 ‘카아드’는 방문의 목적을 언급하고 세상 끝과 지상 낙원에 대한 소망을 간단히 증거하고 있었다.

“초보자인 나와 나의 동료는 어느날 첫 시도를 위해 용기를 내어 우리가 선정한 거리로 나아갔다. 우리는 아무에게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배운 적이 없었다. 그 전에 우리는 그와 비슷한 일을 해 본 적도 없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단단히 마음을 먹고 여호와를 온전히 신뢰하였다. 우리는 내심으로 그분이 우리를 도우실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사실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방법대로 우리를 도우셨다. 우리는 우호적인 태도로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증거 ‘카아드’를 제시하였다. 사람들이 그 ‘카아드’를 읽는 동안 우리는 가방을 열고 우리의 출판물을 보여주었다. 우리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누가 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없이 바로 시초부터 우리 각자가 혼자서 호별 방문을 하였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우리가 대표하고 있는 것이 진리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그 점은 우리들을 강하게 해 주었으며 어떤 일이 있을지라도 자신을 갖게 해 주었다.

“나는 내가 방문한 첫 집에 대해서 잘 기억하고 있다. 나이가 상당히 들었고 의족을 한 어떤 친절한 남자가 즉시 「창조」 책을 받고 성서 한권을 주문하였다. 우리는 우정적으로 대화를 나누었으며, 성서를 전해 주기 위해 가능한 한 빨리 다시 찾아 오겠다고 약속하였다. ···

“첫 집에서의 그런 훌륭한 반응이 주는 즐거움은 다른 집에서 사람들이 회의적이고 심지어 소식을 반대해도 계속할 수 있는 힘을 공급해 주었다. 조금 후 경찰이 나타나서 즉시 우리의 활동을 중지시켰다. 경찰들은 우리의 가방과 그 안에 든 것을 모두 압수하였으며, 조서를 받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하였다. 달리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었겠는가? 물론 우리는 ‘리이드밀러’ 씨에게 그러한 경험에 대하여 불평하였다. 그는 위로해 주며 우리에게 새로운 출판물을 가져다 주었다. 우리는 가방을 새로 사서—이번에는 값싼 보르지로 된 것—다시 시도해 보았다. 우리도 점차 지혜로와 졌으며, 우리의 출판물과 장비를 여러 번 압수 당한 후에는 외투 주머니에 출판물을 감추고 가방없이 호별 방문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하니까 우리가 덜 눈에 띄었다.”

1931년 ‘룩셈부르크’ 시에서 「왕국, 세상의 희망」이라는 소책자를 사용하여 선포 활동을 시작한 사람으로 특히 ‘유진 로이터’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역시 반대는 있었다. ‘로이터’ 형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행상 규제법에 의거하여 ‘리이드밀러’ 형제와 다른 ‘파이오니아’들이 경찰들에 의해 여러 번 호별 방문 전파 활동을 저지 당하였다. 진리의 선포는 특히 ‘가톨릭’ 교직자들에게 육체의 가시임이 분명하였다. 종교의 자유가 헌법에 보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전파를 중단시킬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행상한다는 구실로 증거 활동을 중단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성공할 수 없었다. 저항을 받으니 우리의 열심은 더욱 가열되었다. 법원은 유죄 판결—때때로 무죄 방면되기도 하였다—을 내렸지만 더욱 더 많은 관심자들이 증거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경찰은 행상을 했다는 혐의로 우리를 기소하고 책을 압수하였다.

“‘리이드밀러’ 형제가 3년 동안 활동한 후 당국은 한 가지 중요한 대응 조치를 취하였다. ‘리이드밀러’ 형제를 두 경찰관이 독일 국경까지 호송하여 ‘룩셈부르크’로부터 추방하였다. 우리의 변호사는 우리에게 그 나라의 ‘가톨릭’ 교회를 보호하기 위하여 ‘아우구스트 리이드밀러’를 ‘룩셈부르크’에서 추방한다는 고위 관리들의 말을 전해 주었다. 몇 달 후 경찰은 ‘엠마 리이드밀러’ 자매도 역시 그 나라를 떠나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독일에서 온 세번째 ‘파이오니아’는 추방이 임박하였기 때문에 얼마 후 스스로 그 나라를 떠났다.”

반대자들은 그러한 조처로 전파 활동이 중단될 것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 동안 진리의 씨가 훌륭한 기초를 갖게 되었다는 점을 고려에 넣지 않았다. 얼마 후 처음으로 ‘룩셈부르크’인들이 물 침례를 받을 자격을 갖추게 되었다. 1932년 9월 25일 ‘에쉬—슈르—알제트’의 어떤 개인 집에 있는 목욕탕에서 침례가 베풀어졌다. 이제 ‘룩셈부르크’에서 신권 조직의 기초가 놓여지게 되었으며 아무 것도 그 발전을 막을 수 없었다.

‘스위스’로부터의 감독

1933년 독일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의 활동이 ‘나치스’에 의해 금지되었다. 그리하여 ‘스위스’의 ‘베른’에 있는 지부가 ‘룩셈부르크’에 있는 형제들과 관심자들을 돌보았다. 성서 교훈을 주는 집회 뿐 아니라 법적인 투쟁에 있어서도 그곳으로부터 지시를 받았다. 그리고 전도인들은 조직과 자신들의 영적 강화를 위해 도움을 받았다. 형제들이 공개 연사로서 섬기도록 일정한 간격으로 ‘스위스’에서 ‘룩셈부르크’로 파견되었다. 형제들의 그러한 도움은 얼마 있지 않아 더욱 훌륭한 결과를 가져왔다.

심한 어려움과 반대가 있었지만 1934년에 이미 야외 봉사에 참여하고 있던 15명의 전도인들은 그해에 3,164부의 서적과 소책자를 배부하였다. 북부에 있는 마을에 도달하기 위하여 이들 15명의 전도인들은 자전거를 타고 하루에 130‘킬로미터’를 가야할 때도 있었다. 많은 노력을 기울여 그들은 점차적으로 그 나라에 있는 모든 마을과 도시를 방문하여 전파하였다.

출판물의 배부가 증가되자 경찰 기록 역시 늘어났다. 치안 재판소는 언제나 전원 일치로 “서적 행상을 하였으므로 유죄”라는 판결을 내렸다. 여러 차례 형제들은 그러한 판결에 불복 상소하여 그 사건들은 공소원과 그후 대심원에서 심리되었다. 그러한 상급 법원들도 하급 법원의 판결을 지지하였기 때문에 다시 증인들은 유죄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담대한 그 투사들은 자기들로부터 소식을 듣게 되는 사람들이 점차 두 집단으로 분리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한 집단은 교직자들의 영향을 받아 왕국 증인들에게 비우호적이었고 문전에서 그들을 자주 공격하였다. 그러한 집단의 선동을 받아 어떤 경찰관들은 “한 권의 책이라도 전한다면 높은 나무에다 너희들의 목을 매달겠다”고 하며 왕국 전도인들을 위협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법을 시행하는 어떤 관리들은 사과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도 명령을 받고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해해 주십시오.”

1936년에 왕국 전도인 수는 19명으로 늘어나 세 회중으로 나뉘었다. 그 전도인들 중 얼마가 외국에서 열린 큰 대회에 처음 참석하여 활동을 계속하는 데 필요한 새로운 힘을 얻고 돌아온 것도 역시 바로 그 해였다. ‘스위스’의 ‘루체른’ 대회에서 그들은 처음으로 ‘왙취 타워’ 협회장인 ‘러더포오드’ 형제를 만났다. 그 형제들은 여호와를 위한 그 투사의 담대함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J. F. 러더포오드’ 형제는 독일에서 온 대표자들에게 그들이 돌아가거든 “굴 속에 있는 교활한 늙은 여우”인 ‘아돌프 히틀러’에게 하나님의 왕국이 통치하고 있으며 이 세상의 어떠한 권세도 여호와의 왕을 무너뜨릴 수 없음을 알려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는 ‘히틀러’에게 경례하는 식으로 팔을 들고, “그리스도 만세” 하고 외쳤다. 그러한 모든 경험과 강연들은 ‘룩셈부르크’의 형제들에게 매우 고무적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활동을 계속할 수 있는 담대함을 다시 가지게 되었다.

그들이 활동을 계속하면서 ‘카아드’를 사용하는 외에도 듣는 사람들에게 성서 강연을 틀어주기 위하여 휴대용 축음기를 더 많이 사용하였다. 그 방법은 ‘룩셈부르크’의 형제들에게 많은 즐거움을 가져다 주었다. 전파에서 그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관리들이 그들을 심히 방해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독일의 침공

1940년 5월 10일 ‘룩셈부르크’는 기습 공격을 받았다. 사실상 일순간에 거의 전 ‘유럽’을 수많은 독일군들이 점령해 버렸다. 그에 관하여 깊이 생각할 시간 여유조차 없었다. ‘에쉬-슈르-알제트’ 시에서는 관리들이 모든 거주자들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가지고 즉시 ‘프랑스’ 국경을 향해 떠나라고 선포하였다.

바로 그날 대부분의 여호와의 증인들의 활동은 ‘룩셈부르크’에서 사실상 그쳤고, 전도인들은 목자없는 양같이 흩어졌다. 전도인 각자는 그 후 5년 동안 심한 시련을 당하였다. 인도자로 활동하던 잘 알려진 형제들은 그 지역에서 독일군의 정보원으로 일하던 몇몇 독일 사람들의 밀고로 인해 예비 구금되었다. ‘룩셈부르크’와 ‘트리에르’ 감옥에 몇달 동안 수감된 후 그 형제들은 석방되었으나 전파 활동은 완전히 금지되었다. 그러나 몇년 동안에 걸친 그러한 전쟁의 어려운 시기에도 어느 정도 지하 활동을 할 수 있었으며, 그 결과 몇명의 새로운 제자들이 침례를 받게 되었다. 계속 전파했다는 협의를 받은 두명의 ‘룩셈부르크’ 형제는 심한 시험을 받았다. 증인 가운데서는 그들 둘만이 ‘룩셈부르크’에서 집단 수용소로 보내졌다.

수용소에서 믿음의 시험을 받다

그 두 형제 중 하나인 ‘빅토르 브르흐’는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

“‘트리에르’ 감옥에서는 서명을 하도록 우리에게 낯익은 서류가 제시되었다. 내가 서명을 한다면, 그것은 내가 잘못된 교리를 따랐으며, 나의 믿음을 버리고 나에게는 ‘왙취 타워’ 협회 출판물이 하나도 없으며, 그것을 더 이상 배부하지 않고, 그러한 출판물을 가지고 나에게 접근하는 사람은 모두 신고하며, 내가 독일의 모든 법을 존중하겠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될 것이다. 비밀경찰은 온갖 수단을 다하여 우리를 꺾으려고 하였다. 내가 그 서류에 서명하지 않고 그러한 제안을 끝까지 받아 들이지 않자, 1941년 1월 2일 그 비밀경찰은 나를 ‘바이마르’의 ‘부헨발트’ 수용소에 집어 넣었다. 처음에 우리 두 형제는 석달 동안 범죄자 식민지에 이송되어 보잘 것 없는 식사를 하면서 채석장에서 고된 일을 해야 하였다. 나는 다음과 같은 일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우리가 ‘부헨발트’에 도착하자 머리를 박박 깎였으며, 발가벗긴 채로 얼음덮인 길을 건너 목욕탕으로 쫓겨 갔다가는 다시 길을 건너 막사로 오게 되었고, 거기서 옷을 받게 되었다. 그곳에 있는 기다란 ‘카운터’에서 한 죄수로부터 수의를 지급받았는데 짧은 바지로 시작하여 한 가지씩 내주었다. 우리에게 옷을 주고 있는 그 죄수 뒤로 나의 맞은 편에는 다른 죄수가 서 있었다. 그는 수용소 밖에서 어떤 새로운 일이 있었는지 자꾸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비밀경찰이 비밀 탐지를 위해 수의로 변장하는 일이 자주 있다는 말을 감옥에서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묻는 동안 그 점을 생각하고 ‘나에게서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 없게 해야지’라고 결심하였다. 내가 마지막 옷가지를 받았을 때 그는 ‘나에게 이야기해도 괜찮아요. 나도 당신과 같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실제로 ‘자아르브뤼켄’에서 온 ‘에른스트 핫셀’ 형제였다. 그후 나는 그러한 호기심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형제들은 1937년부터 줄곧 수감되어 있었고 조직으로부터 단절되어 있었다. 각자는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을 항상 잘 가다듬어, 식사하면서 매일 토론하는 동안 조금씩 서로 교환하였다.

“몇달 후인 1942년 1월 수용소 관리들은 수감자가 수용소에서 받은 것 외에 다른 ‘스웨터’를 가지고 있다면 동부 전선에 있는 병사들을 위하여 그것을 즉시 내놓으라고 광고하였다. 모든 여호와의 증인들은 전쟁 목적을 위해서는 손수건 하나도 내놓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1942년 1월 15일 그들 모두는 연병장에 몇 시간 동안 서 있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후 그들은 ‘스웨터’들을 가져갔고 벌로서 우리는 야간 작업을 하게 되었다. 투광 조명 아래서 우리는 언덕을 깎아 운동장으로 만들어야 하였다. 섭씨 영하 20도의 추위 아래 꽁꽁 언 땅에서 쉴 시간에 그렇게 한다는 것은 중노동이었다. 구두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버렸기 때문에 우리는 나무로 만든 나막신을 신고 행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그처럼 어려운 시기에도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도와 주셨다. 삼주일이 지나자 그 조처는 너무 성급하게 잘못 취한 조처였다는 말과 함께 우리에게서 앗아간 모든 옷들이 형무소 구내에 놓여 있었는데 잘 세탁되고 손질되어 있었다. ‘베를린’에 있는 관리들이 그러한 조처를 승인하지 않았다. ···

“1943년 봄 우리는 공동 옥사에서 이감되어 정치범들이 수용되어 있는 여러 방으로 분산 수용되었다. 수용소 관계자들은 그러한 방법으로 여호와의 증인들의 저항이 분쇄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와는 정반대가 되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줄 더 좋은 기회를 갖게 된 것이었다.

“1944년 2월에는 ‘루불린’에 기술자들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나도 그 곳으로 파견되었다.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룩셈부르크’인이 아니라 선량한 독일인이 되게 만들려고 했으니 여호와의 증인의 생활을 중단시키려 한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내가 거절하였기 때문에 나는 다시 수용소로 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나의 개인 옷은 전부 벗긴 후 ‘풀라위’에 있는 두번째 수용소로 보내졌다. 이곳 ‘풀라위’의 제재소에서 밤에는 무시무시한 일을 겪게 되었다. 죄수들은 막사에서 간수들과 함께 자게 되었는데 간수들과의 사이에는 단지 나무 간막이 밖에 없었다. 거의 매일 밤마다 유격대와 간수들 사이에 총격전이 자주 벌어졌다.

“소련군이 접근해 오자 우리는 ‘아우쉬비츠’로 이동되었다. 얼마 동안 ‘아우쉬비츠’에 있었던 형제 자매들은 신임을 받았다. 몇몇 자매들은 그들의 여간수들을 위해서 간수의 호위없이 시내에 나가서 물건을 사오도록 허용되었다. 그로 말미암아 그 자매들은 외부에 있는 형제들과 접촉할 수 있었다. 그들은 특수하고 힘들고 위험한 일을 수행하였다. 그들은 「파수대」 기사 전체를 겉장이 파란 공책에 베껴서 그것을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회람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나도 얼마를 구해서 읽게 되었다. 한 가지 주제를 지금도 잘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흩어진 자들에 대한 위안’이었다.

“다시 소련군들이 진격해 왔다. 그것은 우리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야 함을 의미하였다. 독일 전역으로 미친듯이 쫓겨 다니는 것이었다. 우리 일부는 사방이 막힌 가축 운반용 화차에 빽빽히 실려 이동되었다. 이번 여행 중에 우리가 먹을 음식은 빵 한 덩어리였다. 그 한덩이로 사흘을 지탱해야 하였다. 그러나 이번 경우에도 역시 우리는 여호와의 지혜에 의뢰할 수 있었다. 한 형제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그들이 사흘이라고 일러 준다면 우리는 빵을 6일 동안 먹을 수 있도록 갈라놓는 것이 좋다.’ 사실 여행은 10일 동안 계속되었다. 정지할 때마다 우리는 굶어죽지 않도록 질경이나 (혹은 창질경이), 풀 혹은 철로 근처에 자라고 있는 아무 것이나 걷어 먹었다. 11일째 되어서 우리는 ‘라벤스브뤼크’에 도착하였다. 1,500명 이상이 그 여행의 마지막 며칠 동안에 굶주림으로 인하여 사망하였다. 누구든 죽으면 화차의 맨 끝에 두게 되었고, 시체들이 차곡차곡 쌓여졌다.

“긴급히 만들어진 막사에서 우리는 가시 철사로 다른 죄수들과 격리되어 있었다. 우리는 반 ‘리터’의 채소국과 빵 한 조각으로 하루를 때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또 다시 소련군에 의해 수용소가 심한 위협을 받게 되었다. 그것은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여러 날 동안 행진해야 하였다. 우리 형제들은 항상 함께 있으려고 노력하였다. 49명의 형제와 한명의 관심자가 함께 있었으며 서로 격려하였다. 어느날 밤 이전에 결코 들어본 적이 없는 심한 총격전이 있었다. 동이 텄을 때 놀랍게도 독일인 간수들이 없어져 버린 것을 알게 되었다. 여러 주일 동안 별로 세수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세수를 한 후 우리 50명은 가까운 마을로 가게 되었고 거기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모든 공공 건물은 미국인들이 점령하였음을 보게 되었다.

“그후 우리는 그 마을 외각에 있는 한 목장으로 함께 갔으며 한 형제는 여호와께서 주신 놀라운 해방에 대하여 그분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1945년 5월 3일 ‘루브츠’에서 이러한 일을 보았던 것이다. 며칠 동안 우리는 행진을 계속하다가 결국 형제들 각자가 자기 집으로 가기 위해 점차 흩어지게 되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도와서 어렵고 시련에 찬 시기를 살아남게 하신 것이다. 그분의 도움없이는 그것이 불가능하였다.

“1945년 6월 18일 나는 ‘에쉬-슈르-알제트’에 있는 우리집에 도착하였다. 정말 놀랍고 고맙게도 거기에서 나는 아내와 자녀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들은 내가 도착하기 단지 5일 전에 집에 도착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서로 한마디의 소식도 전하지 못한 채 거의 이년 동안 헤어져 있은 후 있었던 일이다.

“그러한 어려운 기간 전체를 통하여 잠언 3:5, 6의 성귀는 나에게 훌륭한 지침이 되었다. 그 내용은 이렇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전후의 재조직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얼마 전에 ‘벨기에’의 ‘브뤼셀’에 있는 협회 사무실은 ‘룩셈부르크’의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을 감독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전쟁이 끝난 직후 그 사무실은 ‘파이오니아’ 한 사람을 ‘룩셈부르크’로 파견하였다. 그는 ‘룩셈부르크’인으로서 첫 ‘파이오니아’인 ‘에밀 쉬란츠’ 형제였다. 전쟁 중 그는 ‘벨기에’에서 봉사하였다. 이제 그는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형제들을 방문하였다. 회중이 다시 조직되고 활동이 증가되었다. 1946년에는 활동적인 전도인이 30명 있었고, 최고 기록은 39명이었다.

전후에 있게된 여러 가지 조직적인 변화로 말미암아 활동이 급속도로 증가되었다. 증거 ‘카아드’와 축음기를 사용하여 봉사하는 대신 신권 전도 학교에서 받은 훈련을 통해 형제들이 직접 공개 강연을 하고 호별 방문 증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가정 성서 연구 활동도 역시 발전하였고 그로 인하여 많은 증가가 있었다.

전파의 자유를 위해 도움이 되는 또 다른 것이 이제 필요하게 되었다. 왕국 관심자를 더 잘 돌보기 위해서 비영리 법인을 형성하기로 하였다. 1946년 7월 18일에 ‘룩셈부르크’ 여호와의 증인의 역사상 중요하고 획기적인 사건이 있었다. 1946년 10월 23일자 「암츠블라트 메모리얼」지에 법인 등록 공고가 발표되었다. 이 법적 단체는 형제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브루클린’ 본부의 형제들을 통해 격려받음

1947년에 ‘룩셈부르크’ 여호와의 증인의 역사에는 또 다른 큰 사건이 있었다. 커다란 대회가 처음으로 그곳에서 개최되었다. ‘F. W. 프랜즈’ 형제와 ‘그랜트 수터’ 형제가 그 대회에서 형제들에게 성서적인 교훈을 해 주었다. ‘브루클린’ 협회 본부로부터 형제들이 ‘룩셈부르크’를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당시에 아주 어린 소녀였던 한 자매는 후에 그 때의 소감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그 형님들이 우리와 같이 부엌에서 식사하시던 일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그 형님들이 종종 아주 크고 훌륭한 장소에서 연설을 해 왔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룩셈부르크’에서 그 형님들이 연설하게된 장소는 시끄러운 ‘보울링’장 옆에 위치해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점은 이 두 형님들이 철저한 증거를 하는 데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았으며, 그분들은 조금도 불평하지 않았다. 1947년 6월 11일 오전에 ‘브뤼셀’에서 온 형제가 불어로 침례 연설을 하였고 여섯 명의 형제가 침례를 받았다. 우리에게는 그것이 큰 사건이었다. 그날 저녁에 ‘프랜즈’ 형제는 독일어로 공개 강연을 하였는데 그 주제는 ‘만민의 환희’였으며 123명이 참석하였다. 형제들은 격려를 받고 그 해부터 순회 대회와 같은 더 큰 집회를 계속 조직하게 되었다.

“그 첫 번째 큰 대회가 크게 성공적이었기 때문에 그 후부터는 형제들이 담대하게 조직하여 큰 대회를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광고하였다. 자전거를 탄 형제가 네명 내지 여섯명이 한조가 되어 양편에 ‘플래카아드’를 달고 시내를 이리저리 돌아 다녔다. 모든 거리를 다 돌았다. 다른 형제들은 대회를 알리는 광고판을 지고 거리를 걸어 다녔다. 때때로 우리는 돌로 맞기도 하였으며 거의 언제나 욕설을 듣게 되었다.”

1949년 3월에는 처음으로 ‘길르앗’ 졸업생인 ‘넬슨’ 형제와 ‘큐밍스’ 형제가 ‘룩셈부르크’로 파견되었다. 그들은 좀 작은 편인 ‘룩셈부르크’의 조직을 크게 강화하였으며, 그들의 인도로 가두 잡지 봉사가 시작되었다. 그러한 활동은 여호와의 왕국을 더 널리 광고되게 하였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는 증거 활동을 중단시키려고 크게 부심하였다.

1951년 8월 24-26일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열린 전후 ‘유럽’에서 최초로 개최된 대규모 국제 대회에 협회장 ‘나단 H. 노워’ 형제가 참석하였다. ‘룩셈부르크’의 대표자들 역시 참석하였다. 후에 ‘노워’ 형제가 형제들에게 연설하기 위하여 ‘룩셈부르크’에 들렸을 때, 그것은 커다란 증거가 되었으며 오늘날에도 형제들은 그에 관해 이야기를 한다. 이번에는 훌륭한 장소를 빌릴 수 있었으며 그 전날 밤에 형제들이 노력하여 모든 것을 다 마련하였다.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마지막 순간까지 그 장소를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형제들은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우리 앞서 그 장소를 사용한 두 사람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이 협회의 협회장은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은데 알 수가 없는데”라고 말하였다. 그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된 한 전도인은 즉시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 애쓰실 필요 없읍니다. 협회장은 저기 연단 앞에 있는 사다리 위에서 망치와 못으로 휘장을 달아매고 있읍니다.” 그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일반적으로 ‘가톨릭’에서 인간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는 얼마나 대조적인가! 그리고 다음날 사람들은 ‘노워’ 형제가 자신의 강연을 광고하기 위해서 수도의 거리에서 다른 형제들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대회의 연단에서 제안받은 활동에 그도 직접 참여하는 것을 볼 때 그것은 참으로 훌륭하고 즐거운 일이었다!

‘노워’ 형제의 그 짧은 방문은 전반적인 활동과 그 특별한 모임을 위해서 큰 축복이 되었다. 그의 강연을 듣기 위해 205명이 참석하였는데 그 때까지의 ‘룩셈부르크’ 역사상 가장 큰 신권적 모임이 되었다. 그러한 모든 사실들은 조직의 내부를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며 같은 해에 야외 봉사에서 113명의 전도인이 활동함으로써 처음으로 전도인 수가 100명 이상이 되었다.

행상이 아니라 전도인이다

1952년과 1953년에는 또 다시 조직과 관련된 주요 법정 사건이 있었다. 얼마의 전도인들—그 중에 미성년자도 들어 있었다—이 ‘피쉬바흐’에서 전파 활동을 하다가 경찰에 의해 저지를 당하였고, 그에 대한 공식 보고도 있었다. 그들은 행상 금지법을 위반한 혐의를 받고 있었다. 그 사건의 심리에서 한 어린 전도인은 세명의 판사 앞에서 자신을 잘 변호하였기 때문에 그 소녀는 무죄가 되었다. 그러나 나이든 전도인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들은 나이가 더 들었기 때문에 동일한 재판에서 유죄가 되었다.

다음 해인 1953년에는 그 판결로 인하여 하나님의 백성에게 유리한 주요 변화가 있게 되었다. ‘룩셈부르크’ 공소원의 심리에서 협회의 변호사는, 전부가 동일한 전파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메르쉬’의 재판에서 그 집단의 일부는 무죄가 되고 다른 일부는 유죄로 판결된 것은 비이치적임을 판사들에게 명백히 지적하였다. 그러한 모순은 검사마저도 형제들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게 만들었다. 그 검사는 고등법원에서, 판매라는 말에는 경제적인 이득을 통해 판매자가 생활하는 것이 포함되는데 여호와의 증인들의 경우에는 노소를 막론하고 그렇지 않음으로 그 활동에 “판매”라는 말이 적용될 수 없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면 이번에는 그 결과가 어떠하였는가? 1953년 3월 26일의 공판에서 지방법정은 다음과 같이 판결하였다.

“최근 ‘룩셈부르크’ 법원이 두 공소자들의 행위를 판매 혹은 팔거나 주문 맡기 위한 제공으로 볼 수 없다고 판결한 사실들을 고려해 볼 때 결국 본건에 있어서도 행상에 관한 1. 1. 1850 법률을 위반했다고 할 수 없다. 그러한 이유로 1심 판결을 파기하며 피고 두 사람에게 무죄를 선고하는 바이다.”

대부분의 경찰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승리를 가져다 준 그 중요한 결정을 존중하였으며 그 이래로 더 이상의 법정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다. 형제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오늘날 ‘룩셈부르크’에서 종교의 자유를 누리는 데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

수도의 시정 당국이 증인들에게 ‘파라데플랏츠’에 있는 ‘클레르클 빌딩’의 시민 연회장 사용을 증인들에게 허용한 것도 거의 같은 때인 1952년이었다. 그 조치는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는 정부의 허가에 의하여 ‘가톨릭’교인들만이 그것을 사용해 왔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한 당국의 태도는 계속 호전되었으며 더욱 관용을 베풀게 되었다.

지부가 설립되다

1955년에는 조직 내부를 강화하기 위한 다른 획기적인 일이 있었다. 그해 가을 ‘노워’ 형제는 ‘룩셈부르크’에 잠간 머문 후 ‘룩셈부르크’에 ‘왙취 타워’ 협회의 새로운 지부를 세우기로 결정하였다. 그렇게 하면 그 나라가 더 이상 ‘벨기에’ 지부의 감독을 받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한 변화는 활동을 크게 증가시켰다. 1957년 봉사 연도 중 여섯개의 활동적인 회중이 이미 형성되었고 230명의 전도인 신기록에 도달했다. 잡지 배부수는 1955년의 16,157부에서 1956년에는 47,174부로 증가되었다.

‘룩셈부르크’처럼 조그만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사물을 작은 규모로 보기가 쉽다. 따라서 1958년 ‘뉴우요오크’ 국제 대회에 참석한 16명의 ‘룩셈부르크’ 대표자들이, 조직이 참으로 크다는 것을 알고 놀란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들은 믿음이 강화되어 돌아갔으며 그곳에 있는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알려 주어야 할 점들이 많았다.

1960년에 ‘노워’ 형제가 ‘룩셈부르크’를 다시 방문하였다. 그때는 ‘룩셈부르크’ 시가 시립 극장을 사용하도록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허락하였으며 7월 14일의 공개 강연에 502명이 참석하였다. 지방의 증인들이 나타낸 믿음과 인내와 더불어 그러한 모든 점들은 1961년에 전도인이 303명으로 증가되도록 도움이 되었다.

그 다음 해에는 ‘룩셈부르크’ 형제 11명이 독일 ‘비스바덴’의 협회 지부에서 열린 천국 전도 학교에 초대받았다. 그 학교는 그들의 훈련에 많은 도움이 되었으며 그 결과 조직이 더 발전하게 되었다. 그들이 자기 회중으로 돌아갔을 때 더 훌륭한 방법으로 왕국 관심사를 돌볼 수 있게 되었다.

여러 언어로 전파함

‘룩셈부르크’가 조그만 나라이지만 그곳에는 30개국 이상에서 온 외국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왕국 전도인들이 호별 방문에서 여러 가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전도인들은 그러한 여러 가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서도 왕국 관심사를 증진시키려고 노력해 왔다. 예를 들어 꾸준히 집중적으로 방문한 결과 1963년 11월에는 12명의 전도인을 가진 ‘이탈리아’어 회중을 ‘룩셈부르크’ 시에 조직할 수 있었다. ‘벨기에’ 지부의 협조를 얻어 1967년 11월에는 ‘이탈리아’어 순회 대회가 ‘룩셈부르크’에서 처음 개최되었다. 참석 수는 342명이었다.

그와 관련하여 ‘룩셈부르크’의 공식 언어가 불어인 점은 흥미있다. 그러나 주민들은 ‘켈트’어에서 기원하였고 그 인근 국가들의 언어에서 나온 단어들이 혼합된 ‘룩셈부르크’ 방언을 말하고 있다.

불어를 사용하는 인근 ‘벨기에’에는 아직도 독일어를 사용하는 여러 마을과 소도시로 구성된 작은 지역이 있다. 몇명의 전도인이 그들 중에서 활동하고 있으나 그들 자신의 언어로 좋은 소식을 들을 기회가 그들에게 더 필요하였다. 1965년 봄에 ‘룩셈부르크’ 지부가 그 사람들을 돌보도록 결정되었다. 그해 10월에는 22명의 전도인으로 이루어진 회중이 독일어 사용 지역인 ‘오이펜’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1970년 5월중에는 그 지역에서 순회 대회를 조직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반대자인 ‘사단’ 마귀는 ‘룩셈부르크’ 지부의 인도 아래 훌륭한 활동이 진행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사단’ 마귀도 역시 여러 가지 면에서 활동해 왔다. 1965년은 형제들에게 시련기였다. 형제들 사이에 오해나 논쟁 혹은 다른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사단’이 항상 사용해 온 술책이었다. 1965년에 그러한 일이 형제들 사이에 많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약간의 조직적인 변화가 있게 되었다. ‘안톤 레톤자’가 몇달 동안 임시 지부 감독자로 일하였다. 그후 ‘알버트 스타이만’이 ‘룩셈부르크’로 파견되어 지부 감독자 겸 지역 감독자로 임명되었다. 그 시련기 동안 대부분의 형제들은 굳건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시편 127:1의 성귀를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느니라.]” 여호와의 조직은 정결함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 그 나라에서 8년 동안 봉사해 온 한 특별 ‘파이오니아’는 그때에 관하여 영적인 의미로 “전국이 새로운 활기를 되찾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훌륭한 잔치 즉 첫 국제 대회가 1965년을 장식하였는데 그 영적인 연회에 3,835명의 대표자들이 참석하였다.

1968년 6월 5일 ‘노워’ 형제는 협회가 지부 사무실과 선교인 숙소로 사용하도록 수도에서 아주 훌륭한 자리에 위치한 건물을 구입하도록 마련하였다. 그 건물은 증거하고 활동을 더 증가시키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아주 매력적인 왕국회관을 마련하기 위해서 개조도 하였다. 그러한 건축 계획에 자극되어 다른 많은 회중들도 자신들의 왕국회관 건축을 진지하게 고려하게 되었다.

종교적인 대조

‘가톨릭’ 교회는 이 나라에서 이전에 행사하던 권세와 영향력을 대부분 상실하였지만 여호와의 숭배자들에게서는 영적 번영과 축복을 볼 수 있다. 그들의 방문을 받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손은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성서의 확실성이 교직자들 사이에서 의문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록셈부르크’ 시의 한 교직자는 성서가 단순히 자기의 종교적 견해를 표현한 사람들의 기록이라고 주장하였다. 교회 참석자들이 감소된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왕국 소식의 전도인들은 성서를 옹호하고 있으며 여호와의 봉사에 더 많이 참여하려는 열망을 나타내 왔다. 예를 들어 1975년 6월에는 ‘룩셈부르크’에서 790명의 왕국 전도인의 신기록에 달하였다.

거슬러 올라가 1958년에 한 정부 관리가 협회의 지부 사무실을 방문하였는데 여호와의 증인들의 발전을 보고 놀랐다. 그는 그 당시에 증인들이 ‘룩셈부르크’에서 두번째로 큰 종교라고 은밀히 말하면서 재정적으로 그 활동을 지원해 주도록 정부에 요청하라고 제안하였다.

물론 증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천산의 생축”과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의 소유자이신 여호와를 신뢰한다. (시편 50:10, 12) 1975년 3월 27일 주의 만찬 기념식에 1,519명이 참석한 사실을 보아도 하나님께서 계속 그들을 증가시키고 계심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 사람들이나 다른 사람들 중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호와의 봉사에 그들과 함께 참여하게 될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사업이 다 마칠 때까지 ‘룩셈부르크’에서 좋은 소식을 계속 전파하기로 굳게 결심하고 있다. 자신들이 즐기고 있는 그러한 말할 수 없는 특권과 풍부한 축복에 대해서 그들은 인자하신 천적 아버지 여호와께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