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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

‘스리랑카’

‘스리랑카’

인도양의 보석. 당신이 방문하려는 그 섬을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부른다. 당신은 그 섬을 ‘실론’으로 알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1972년 이후로 그 섬은 ‘스리랑카’로 불리워지고 있다.

약 65,000평방 ‘킬로미터’의 면적을 가진 ‘스리랑카’는 여러 면에서 “보석”이다. 열대성 기후에, 해안 주변은 전체적으로 낮은 편이며, 중앙에는 언덕과 산들이 우뚝 솟아 있다. 산지로 가려면 ‘코코넛’ 농장들을 지나게 되는데 많은 산들이 지금은 아름다운 차(茶) 숲으로 덮여 있다.

인종이나 계급 제도, 언어와 종교 등을 고려해 보아도 다양함을 알 수 있다. 그 섬의 삼분의 이에 달하는 중앙 및 남부 지방에 사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아리안’족이라고 주장하며 ‘실론’어를 말하고 ‘테라바다’ 불교를 믿고 있다. 그들은 우호적이고 손님 접대를 잘하는 사람들이다. ‘스리랑카’의 북부와 동부 지역에는 ‘타밀’어를 쓰는 ‘드라비다’족에 속한 사람들이 있는데 대부분은 힌두교를 믿고 있다. 그들은 근면하기로 이름나 있다.

무역에 대한 전망 때문에 한 때는 ‘모로코’에서까지도 회교도들이 왔었다. 일찌기 16세기에는 향료에 관심을 가진 ‘포르투갈’인들이 해안 지방을 점령하였다. 그들과 함께 ‘로마 가톨릭’ 사제들이 들어왔다. 불교인들을 ‘가톨릭’교로 개종시키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어떻게? 그들에게 물질적인 편의를 제공하고 또는 엄청난 폭력을 사용함으로써였다. 오늘날 많은 해안 도시들에는 ‘가톨릭’이 지배적이다.

약 1세기가 지난 후에 ‘네델란드’가 그 “보석”을 점령하였으나 단지 해안 지대만을 차지하였을 뿐이었다. 계속적인 지배를 위해 그들은 ‘말레이’와 ‘자바’로부터 군대를 끌어들였다. 그리하여 또 다른 인종이 섞이게 되었다.

정복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외교적인 수완을 통하여, 영국은 1796년에 ‘실론’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인종과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이 잡다한 면에서 이 “보석”은 또 다른 다채로운 면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사태의 발전에 따라서 ‘실론’은 1948년에 독립하게 되었다.

영국과 ‘네델란드’인들은 그 섬 사람들과의 결혼을 극력 피하였다. 그렇지만 결혼을 하게 된 사람도 많으며, ‘버어거’라고 알려진 그들의 많은 후손들이 그리스도교국의 여러 교회에 속해 있다. 사실 ‘스리랑카’ 인구의 약 10‘퍼센트’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참 그리스도교가 어떻게 이 “인도양의 보석”에 전해지게 되었는가?

좋은 소식이 전해지다

사도 ‘도마’가 ‘실론’을 방문했다는 전설이 있다. (누가 6:12-16) 그러나 열성스러운 그리스도인 여자 두 사람이 1910년에 배를 타고 다니면서 이곳에서 좋은 소식을 전파했다는 것은 전설이 아니다.

그들은 ‘콜롬보’ 항의 선원 감독관 ‘E. W. 드 Z. 반 트웨스트’라는 ‘버어거’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그에게 확신을 주었고 초대 ‘왙취 타워’ 협회장 ‘차알스 테이즈 러셀’이 쓴 「시대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과 기타 서적을 읽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반 트웨스트’는 그가 배우고 있는 새로운 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었다.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 사람들 중에는 ‘웨슬리’파 교역자인 ‘D. N. 피에리스’라는 ‘실론’인이 있었다. 다른 사람으로는 ‘반 트웨스트’의 조수인 ‘H. W. 웬트’가 있었다.

그때쯤 해서 좋은 소식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인 다른 사람들로는 ‘에드리싱헤’와 ‘벱티스트’라는 두 ‘실론’인 “그리스도인”이 있었다. 또한 한 때 ‘캔디’의 ‘퀸스 호텔’에서 말과 마차를 돌보는 마부로 있다가 은퇴한 사람인 ‘체프만’이 있었다. 위생 검사관인 ‘T. E. 카루나틸레케’도 역시 진리를 받아 들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그 모든 활동을 볼 때 증가될 것이 예상되었다.

‘패스터 러셀’이 ‘실론’을 방문하다

1912년초에 그 여러 가족들은 세계 여행의 일부로서 ‘패스터 러셀’이 방문하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 당시 ‘반 트웨스트’ 형제는 병중에 있었는데 ‘러셀’ 형제는 그의 집으로 특별히 여행하여 짧지만 영적으로 세워주는 대화를 그와 나누었다. ‘러셀’ 형제는 낡은 공회당에서 잘 광고된 부자와 나사로에 관한 강연을 하였는데 900명 이상이 참석하였다. 모두가 이해할 수 있도록 그 공회당에서 행한 ‘러셀’의 두번째 강연을 ‘피에리스’ 형제가 ‘실론’어로 통역하였다.

‘러셀’ 형제는 ‘콜롬보’의 강 건너에 소재한 ‘헨달라’의 나환자 요양소도 방문하였다. 그곳에서 책임자인 ‘파르시’라는 사람은 ‘패스터 러셀’이 연설을 하고 ‘피에리스’ 형제가 통역할 때 나환자들이 그 연설을 듣도록 마련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소책자와 다른 출판물들을 요청하였고 기꺼이 받아 들였다. 그곳에 있는 동안 우연히 ‘러셀’ 형제와 ‘피에리스’ 형제는 싱싱한 ‘코코넛’에서 나온 신선한 물을 제공받았다. ‘러셀’은 ‘피에리스’가 먼저 마시도록 권했다. 보는 사람들은 백인이 자기보다 “원주민”에게 먼저 마시게 하는 것을 보고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 생각하였다.

정기적인 일요일 연구반들이 이제 ‘콜롬보’에서 이상적인 곳에 위치한 ‘반 트웨스트’의 집 별관에 마련되었다. 그는 그 반들을 사회하였고 그의 한 딸은 조그만 풍금을 치고 다른 딸은 찬송가를 부르는 일을 도왔다.

“새로운 창조”라는 이름이 붙은 「성서 연구」 제 6권을 읽은 후 ‘웬드트’ 부부는 물침례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곳에서 성서 연구생들이 처음으로 침례를 받을 수 있도록 마련하였다. 그 일은 1914년 5월 31일에, ‘카루나틸레케’ 형제의 집 바로 뒤에 있는 ‘네델란드’인이 만든 한 운하에서 있었다.

“사진극”이 ‘실론’에 오다

1917년에 ‘A. A. 하르트’라는 영국 형제가 ‘실론’에서 넉달을 보냈다. 그는 지구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대략 알려주는 “창조 사진극”인 ‘슬라이드’ 사진, 활동 사진 그리고 확성 장치 등을 가져 왔다. ‘콜롬보’와 ‘캔디’ 및 다른 곳에서 상영되었다. 그러한 제공은 매우 인기가 있었으며 사진극이 상영될 때는 언제나 교회가 텅텅 비게 되었다고 한다.

절정은 ‘캔디’에서 있었는데 그곳에서 교직자들은 그 상연을 막으려고 경찰서장에게 진정하였다. 그러나 ‘웬드트’ 형제가 그에게 ‘시나리오’를 보여주자 경찰서장은 이렇게 말하였다. “‘웬드트’ 씨, 저로서는 여기서 잘못된 점을 찾을 수가 없읍니나. 그런데 그 사람들이 그것을 중지시키려고 나를 귀찮게 하고 있읍니다.” “그 사람들” 즉 교직자들이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섬을 떠나도록 ‘하르트’ 형제에게 48시간이 주어졌다.

초기 성서반들을 간단히 살펴봄

1918년에 위생 검사관으로 근무하던 ‘카룬나틸레케’는 납 공장과 계약을 맺고 영국에서 이곳에 온 ‘토마스 왈름슬리’를 만났다. ‘왈름슬리’는 진리를 빨리 깨달았으며 오래지 않아 침례교 및 ‘프리메이슨’과의 관계를 끊었다. ‘웰라와테, 보스웰 플레이스’에 있는 그의 집은 매일 성서반을 위한 한 곳이 되었다.

그렇다. 매일이었다! 매일 성서 연구생들은 다른 집에서 반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 반들은 찬송과 기도로 시작되었고 그 다음 「여호와의 증인의 연감」의 전신인 「일용할 천적 만나」를 낭독하였다. 그후에 연설이 있었다. ‘러셀’ 형제의 연설 중 하나가 낭독되었는데 ‘반 트웨스트’ 형제가 그것을 낭독하였다. 끝날 때는 다시 찬송과 기도를 하게 되었다.

1920년대는 느렸지만 꾸준하였음

1923년에 가서 50명 이상의 사람이 ‘콜롬보’에 있는 지방 조직과 연합하였다. 매일 갖게 되는 반은 계속되었고 약 석달 마다 1일간의 대회가 ‘카루나틸레케’의 집 혹은 ‘웬드트’의 집에서 개최되었다.

일요일 반을 그곳 신문들에 광고하였지만 조직적인 호별 방문 전파는 없었다. 대개 만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전도지를 주고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과 길게 토론하는 식이었다. ‘웬드트’ 형제는 ‘캔디’로부터 때때로 그곳을 방문하였다. 기차 여행에 관하여 ‘웬드트’ 자매는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

“가족이 ‘캔디’로 여행할 때마다 아버지는 객차에 우리의 자리를 잡아 주시고 나서 어디로 가버리곤 하셨다. 아버지는 다른 객차로 가 앉으셔서 승객들과 이야기를 나누셨다. 가능한 경우에는 불교 승려의 곁에 앉아 ‘실론’어 전도지에서 몇가지 점을 그에게 보여주고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 있게 그것을 읽어 달라고 요청하셨다. 승려가 읽을 때 귀담아 듣는 사람이 많았다. (‘웬드트’ 형제는) ‘캔디’에 있는 어떤 친구 집에서 강연을 할 수 있도록 마련하셨는데 보통 그 친구분은 이웃 사람들을 초대하곤 하였다. 아버지는 약 15명의 청중에게 성서를 사용하여 연설하셨으며 죽은 자들에 관하여 연설할 때가 많으셨다 ··· 아버지는 부활이 있을 것임을 강조하였다 ··· 또 천적 몸과 지적 몸에 관하여 그들에게 설명하셨다. 사실, 그들은 그 말을 듣고 놀랐다. 그러나 그들의 대부분은 교직자들의 방해에 직면해서 입장을 취할 만큼 충분한 용기를 갖지 못하였다.”

1926년에 ‘F. E. 스키너’ 형제가 인도에서 방문차 왔다. ‘차프만’ 형제의 딸 ‘앤’은 그의 강연을 광고하는 쪽지를 배부하여 그를 도왔다. ‘앤’은 얼마 동안 ‘콜포처’(오늘날 ‘파이오니아’라고 부름)로 일하였으며 한 동안은 인도에서 온 ‘카티에 머글러’의 도움을 받았다. 그들은 ‘콜롬보’ 남부 지역에서 몇달 동안 활동하면서 많은 출판물을 배부하였다.

1930년대의 여러 가지 변화

하나님의 백성들의 대회가 1931년 인도의 ‘마드라스’에서 개최될 것이라는 소식은 자극적이었다. ‘앤’과 ‘룻 차프만’과 ‘D. N. 피에리스’ 형제와 다른 몇 사람이 참석하였다. 거기에서 그들은 인도에서 좋은 소식을 전파하려고 영국에서 온 몇 형제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 중에는, ‘봄베이’에서 ‘스키너’ 형제와 함께 활동하고 있었던 ‘조오지 라이트’가 있었다. ‘룻 차프만’이 ‘라이트’ 형제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음이 분명하다. 그가 ‘캔디’로 가서 1936년 4월 6일에 그 자매와 결혼하였기 때문이다.

‘조오지’는 ‘콜포처’로서 ‘캔디’를 근거지로 하여 활동하도록 임명되었다. 때때로 인도에서 방문하러 오는 얼마의 형제들이 장기간에 걸쳐 ‘라이트’ 가족과 함께 전파 활동을 하였다. 그러한 활동은 대부분 산간 지방에 있는 홍차 농장에서 수행되었으며, 왕국 선포자들은 그러한 곳에서 수천부의 출판물을 배부하였다. 그러한 훌륭한 활동은 1941년에 ‘조오지’가 사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 직후 ‘룻’은 영국으로 갔다. 그 자매의 아버지인 ‘A. B. 차프만’ 형제는 1933년에 사망하였다.

1930년대에는 ‘반 트웨스트’ 형제가 아주 허약해져서 많은 활동을 하지 못하였다. 그는 1938년 5월 8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웬드트’ 형제는 그 다음 달 62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이제 격지에 있는 가족들이 그들의 가정에서 갖는 성서 토론을 제외하고는 반이 중지되었다. 몇 사람이 약간 전파하였으나 그러한 활동 기록은 전혀 보존되지 않았다. 얼마의 사람들이 매년 갖게 되는 주의 만찬을 위하여 모이려고 노력하였으나 ‘실론’에 있는 그리스도인 조직은 아주 약화되어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을 때는 거의 정지 상태에 있었다.

1940년대의 회복

1941년에 협회 출판물에 대한 금지령이 내렸으며 출판물이 ‘실론’에 들어오는 것이 전혀 허락되지 않았다. 여러 곳을 여행하는 형제들이 조금씩 가지고 들어 왔으며 여객기의 조종사 한 사람이 아주 정기적으로 ‘봄베이’에서 「파수대」를 가져올 수 있었다. 그것들은 몇명의 형제들과 관심자들 사이에 돌려졌다. 1943년에 ‘쥬베날 차프만’(‘A. B. 차프만’의 아들)과 다른 한 형제가 ‘봄베이’ 대회에 참석하여 얼마의 새로운 출판물을 가지고 왔다. ‘쥬베날’은 그 당시 ‘감파하’에서 사설 측량사로 일하였으며, 그곳에서 약간의 전파를 하였다. 또한 그는 ‘실론’어로 된 「치료」라는 소책자를 포함하여 지방적으로 얼마를 인쇄하였다. 1945년에 금지령이 해제되어 협회의 ‘봄베이’ 사무실과 다시 자유로이 접촉할 수 있게 되었다.

1940년초에 인도에서 방문하러 온 형제들이 독실한 ‘로마 가톨릭’교인인 ‘E. L. V. 캠프벨’이라는 기관수와 접촉하게 되었다. ‘비어’—모두가 그를 그렇게 불렀다—는 결국 그의 동료 직원들에게 전파하였고 ‘로빈 투커’라는 기관사와 그의 가족도 역시 관심을 아주 많이 가지게 되었다. 그렇게 활동이 시작되고 있었다. 1947년초 ‘게리 게라드’가 ‘봄베이’에서 ‘콜롬보’를 방문하였을 때 그는 왕국 전파에 참여하도록 19명을 도울 수 있었다. 그 당시 인도하고 정기적인 집회와 전파 활동을 조직할 얼마의 형제들이 절실히 필요하였다.

선교인들이 도움을 주다

1947년 4월 30일 오전 7:00시경에 ‘왙취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 제 8기 졸업생 4명을 태운 열차가 ‘콜롬보’의 ‘마라다나’ 역에 도착하였다. 얼마 있지 않아 4명의 선교인들—‘스탠리 보우데리’, ‘조오지 그리피스’, ‘프랑크 스테빙’과 ‘레이 메티우스’—은 ‘콜롬보’에서 전파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출판물을 잘 받았다. 사실상 선교인들은 ‘실론’에서 보낸 첫 달인 5월 중에 305권의 서책을 전하고 238건의 예약을 맡았다.

선교인 가정은 ‘탈라와투고다’에 있는 셋집이었으며, 선교인들은 교통 수단으로 두대의 자전거와 낡은 ‘모터 사이클’ 한대를 구하였다. 그들은 연구를 사회할 수 있는 영어 사용자들을 많이 만났다. ‘매티우스’ 형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가 도착한 때부터 정기적으로 집회가 개최되었으며 얼마 있지 않아 여호와의 증인의 ‘콜롬보’ 집단(회중)이 형성되었다 ··· 우리는 전파 활동이 매우 수월하다는 것을 알았다. 집주인이 불교인, ‘힌두’교인, 회교도 또는 ‘그리스도인’이건 간에 모두가 우리를 앉도록 초대하였고 우리를 위하여 시원한 마실 것을 가져오게 하였으며 우리가 하는 모든 이야기를 잘 듣고 적어도 얼마의 출판물을 받았기 때문이다 ···

“다음에 우리는 가두 잡지 봉사를 시작하였다 ··· 우리는 잡지를 많이 전하였다 ··· 행상인들 사이에 길에서 잡지를 제공하는 백인들이 있다는 것은 아주 특이한 일이었다 ···

“다음으로 우리는 공개 집회를 시작하였다. 첫 번째 공개 집회는 ‘얼’의 마당에서 개최되었고 우리가 초대한 사람들은 누구나 오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이 많을 것으로 예상하였다. 그러나 단지 20명 밖에 오지 않았다. 우리는 바다와 상인 지구인 ‘포오트’ 근처 아주 넓은 ‘갈레 페이스 그린’에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는 점에 유의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그곳에서 공개 집회를 갖기로 하였다 ··· 나팔 모양을 한 두개의 확성기를 사용하면 넓은 풀밭에 있는 사람들이 들을 수 있었다. 때때로 2, 3백명이 적어도 강연의 일부에 귀를 기울이곤 하였다. 많은 사람들에게 증거하였으며 우리는 소수였지만 우리의 존재를 느끼게 만들었다. 그리고 처음 넉달 동안에 22명의 최고 전도인에 달하였다.”

1948년 3월에 선교인 가정으로 ‘보렐라’의 작은 장소를 빌렸다. 그것은 “멋진” 곳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그것은 ‘콜롬보’에 있었기 때문에 선교인들의 여행 시간을 많이 줄이게 해 주었다.

‘타밀’인 중에서의 발전

‘콜롬보’ 인구의 절반 정도—그 사람들의 대부분이 영어를 알고 있지만—는 ‘타밀’인일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한 사람들 중의 하나인 ‘G. H. G.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이 매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집회에 정기적으로 참석하기 시작하였으며 1952년에 왕국 전파 활동을 시작하였고 1953년 1월 10일에 ‘캘커타’에서 침례를 받았다.

1954년말에 ‘헨리 아브라함’은 그의 세속 직업을 그만두고 바람직한 연금의 혜택도 포기했다. 그 이유는? 특별 ‘파이오니아’로서 여호와를 섬기는 더 큰 특권을 위해서였다. 그 이래 ‘아브라함’ 형제는 많은 영적 자녀들의 “아비”가 되었다.—고린도 전 4:14, 15; 빌레몬 10, 11과 비교.

참으로 세워주는 방문

이제 1952년초로 돌아가 보자. 그해 1월에 ‘왙취 타워’ 협회장 ‘N. H. 노워’가 ‘실론’을 방문할 계획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것은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C. T. 러셀’이 그 섬을 방문한지 40년이 흘렀다.

‘노워’ 형제의 방문 중에 대부분의 집회를 위하여 철도 회관을 사용하였으나 공개 강연을 위해서는 공회당을 빌렸다. 모든 사람들에게 그 강연을 알리기 위해서 형제들은 많은 광고 쪽지를 배부하였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자전거에다 세 부분으로 된 큰 간판을 걸고 ‘콜롬보’ 시내 여기저기로 타고 다녔다. 그것은 참으로 효과적이었다. 철도 회관에서 열린 집회들의 평균 참석수는 약 50명이었는데 반해 비가 쏟아지는데도 불구하고 “종교는 세계 위기를 대처할 것인가?”라는 ‘노워’ 형제의 공개 강연을 들으려고 235명이 모였다.

‘노워’ 형제는 어느 저녁 식사를 위해서 선교인 가정에 가게 되었다. 빨랫줄에 걸리고 모래 더미 위에서 넘어지면서 빗물이 넘쳐 흐르는 좁은 길을 빠져나가 그는 가까스로 선교인 가정에 도착하게 되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그는 “자아, 새로운 선교인 가정이 여러분에게 정말 필요하군요”라고 말하였다.

많은 선교인들이 도착하다

석달 후에 그 선교인들은 ‘콜롬보’ 10, ‘비디얄라 플레이스’ 10/1로 이사하였다. 아담한 이층 집으로서 거기에는 현대식 시설이 있었고 회중 집회를 보는 데 아주 적절하였다.

1951년 9월 20일에 세 선교인—‘해럴드 글루야스’, ‘존 웨슬라 스미스’와 ‘프레드 캐롤’—이 ‘실론’에 도착하였다. 1952년 10월에 ‘길르앗’ 제18기 졸업생인 ‘랄프’ 및 ‘베티 존슨’이 도착하였다. 그 해 12월에 그들의 급우인 ‘차알스’ 및 ‘마리온 보쉬니악’이 그들과 함께 있게 되었다.

이제 선교인 자매들이 가정의 분위기를 살리고 야외에서 ‘실론’ 자매들을 도웁게 되어 전망이 좋았다. 선교인 가정도 그러하였다. 식사나 가정의 전반적인 외양에 있어서 많은 개선이 있었다.

왕국 증거를 확장함

1953년초에는 그 섬의 여러 지방에 있는 얼마의 형제들과 관심자들을 방문하는 계획이 세워졌다. 얼마의 선교인들이 이제 ‘모우터 사이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마을들과 아름다운 ‘정글’로 무리지어 여행하는 그들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맨 처음 머문 곳은 ‘콜롬보’에서 192‘킬로미터’ 떨어진 옛 수도 ‘아누라드하푸라’라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몇 사람은 관심을 가진 ‘루카스’라는 부인 및 그 부인의 이웃 사람들을 방문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저녁에 공개 강연을 마련하였다. 공개 강연은 시장 근처의 풀밭에서 열렸다. 청중 가운데 한 사람이 자진하여 그 강연을 ‘실론’어로 통역함으로써 모두가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다음으로 머문 곳이 ‘트린코말리’였다. 그 지역에서 ‘투커’ 가족과 함께 즐거운 교제를 즐겼다. 그것은 그들이 ‘트린코말리’에서 남쪽으로 9.6‘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차이나’ 만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매일 조금씩 기차 여행을 해야 함을 의미하였다. 그 형제들은 여행하면서 ‘실론’어 및 ‘타밀’어 소책자를 상당히 많이 승객들에게 전하였다. 모두가 집회들을 즐겼다. 그 후에 귀환 여행을 해야 할 때가 되었다.

돌아오는 도중에 산간 도시인 ‘캔디’를 방문하였다. 신속히 ‘퀸스 호텔’ ‘라운지’에서 공개 강연을 갖도록 마련하였다. 약 20명의 ‘캔디’ 거주자들이 참석하였다.

‘실론’ 지부가 설립되다

1953년 11월에 ‘실론’의 신권 역사에서 발전적인 아주 중요한 조치가 취해졌다. ‘왙취 타워’ 협회의 지부 사무실이 ‘콜롬보’에 설립되었다. ‘랄프 존슨’ 형제가 지부 감독자로 임명되었다. 확실히 그것은 그 섬의 왕국 전파 활동을 더 엄밀하게 감독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 새로운 지부 사무실에 분명히 여호와의 축복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매달 전도인 신기록에 도달하여 그 봉사 연도의 평균 전도인은 전해에 비해 50‘퍼센트’가 증가된 66명이 되었다. 또한 기념식에 122명이 참석하여 모두가 참으로 즐거워하였다!

여러 해 동안에 걸쳐 지부 사무실 및 선교인 가정을 여러 번 옮길 필요가 있었다. 오늘날에는 ‘콜롬보’ 5 ‘레이야드 로우드’ 62에 잘 자리 잡고 있다. 그 시설에는 훌륭한 왕국회관도 들어 있고 그 시설은 이전의 어떤 다른 시설보다 더 크고 설계가 잘 되어 있다.

아내의 병으로 인하여 ‘존슨’ 형제가 지부 감독자의 임무를 계속 돌볼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1954년 4월에는 자기 아내와 함께 인도에서 봉사해 오던 ‘더글라스 킹’이 와서 그 임무를 맡게 되었다.

지금까지 회중이 둘 있었다. 하나는 ‘콜롬보’에 다른 하나는 ‘캔디’에 있었다. ‘레이 매티우스’는 얼마의 시간을 순회 감독자로 봉사하도록 임명되었으며 활동을 확장하려고 ‘자프나’와 다른 곳으로도 여행하였다.

1954년 5월에 ‘실론’에서의 첫 순회 대회를 위한 계획이 완료되었다. 그 대회는 ‘콜롬보’ ‘걸 가이드’ 본부에서 열렸다. 그 대회는 참으로 세워주는 것이었으며 공개 강연에 357명의 청중이 참석한 것을 보고 모두가 즐거워하였다.

확장을 위한 시기

제자를 삼는 활동은 발전하고 있었다. 많은 형제들이 그들이 받은 훈련에 대해서 좋은 반응을 나타내고 있었으며 더 많은 회중적 임무를 돌볼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얼마의 선교인들이 새로운 구역을 개척할 수 있음을 의미하였다. 그리하여 1954년 12월에는 ‘존 웨슬리 스미스’와 그의 자매 ‘모이라’(‘길르앗’ 11기 졸업생)가 ‘보쉬니악’ 부부와 함께 바로 그 섬 북부에 있는 ‘자프나’에 새로운 선교인 가정을 개설하였다.

‘이안 캠프벨’이 ‘실론’ 방송사에서 만나게 된 ‘루우 조셉’과 그 여인의 의붓 아들인 ‘유치’가 곧 특별 ‘파이오니아’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후 그들은 ‘루우’의 다른 자녀들과 같이 그 섬 남부에 있는 ‘갈레’로 가서 활동하였다. 그것은 좋은 소식이 ‘실론’의 그러한 끝 부분에서도 전파되는 것을 의미하였다.

1955년 2월에 ‘이안 캠프벨’과 ‘헨리 아브라함’이 ‘바티칼로아’를 향해 출발하였다. 그곳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1951년 83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왕국에 관하여 이야기했다는 ‘이얌필라이’라는 사람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제 두 ‘파이오니아’가 오게 됨으로써 동부에 있는 도에서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언어에 관한 문제들

이 조용한 인도양의 “보석”은 1956년 5월 ‘암파라이’에서 난동이 발생되었을 때에 격한 일면을 보여주었다. 쟁점은? 국어 문제였다. ‘실론’어를 국어로 하자는 운동이 있었으며 ‘타밀’인들은 그들의 언어에 대해서도 동등한 지위를 인정하라고 강력히 요구하였다.

‘암파라이’에서 근무하는 ‘토마스 메도우스’라는 ‘타밀’인은 진리에 많은 관심을 나타내었다. 순회 감독자 ‘레이 매티우스’는 ‘아브라함’ 형제와 ‘캠프벨’ 형제와 함께 그 사람을 방문하려고 ‘바티칼로아’로부터 67‘킬로미터’를 여행하였다. 그들이 성서 토론을 하고 있었을 때 떠들썩하게 소리치는 ‘실론’ 폭도들이 길을 메우고 ‘타밀’인들의 집을 부수고 ‘타밀’인들이 보이기만 하면 그들에게 행패를 부렸다. 한 ‘실론’인 이웃의 도움을 받아—천사의 보호였을지 모른다—그 형제들과 ‘메도우스’ 가족은 피신하였다.

그후 ‘토마스 메도우스’는 아주 신속히 발전하여 두달 이내에 야외 봉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퇴직한 후 그는 특별 ‘파이오니아’가 되었다. 덧붙여 말하자면 난동이 있었던 날 밤 그를 방문하고 있었던 ‘힌두’인 친구도 진리를 받아들였고 1956년 12월에는 여호와께 자기의 헌신을 상징하였다. 그도 결국에는 특별 ‘파이오니아’가 되었다.

언어와 관련된 폭동이 1958년 5월에 다시 일어 났으며 많은 잔학한 행위가 자행되었다. 그러나 모두가 무사한지 알아보기 위하여 매우 긴장된 상황 속에서 그들이 돌아 다녀 보았을 때 형제들 중에서는 사랑에 찬 배려가 베풀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계속 중립을 지키고 당국자들에게 협조하였기 때문에 우리 형제들은 단 한사람도 해를 입지 않았다.—요한 17:16.

도움이 된 또 하나의 방문

‘실론’에서의 즐거운 신권적 행사들 중에는 1956년 12월 31일부터 1957년 1월 3일까지 ‘노워’ 형제가 두번째 방문한 일이 있었다. 그의 방문과 때를 같이 해서 대회가 계획되었으며 “우리 시대에 신세계 평화”라는 공개 강연이 광범위하게 광고되었다. 예를 들어 네개의 커다란 깃발을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 세워 두었으며 한 운수 회사는 무료로 백개의 ‘포스터’를 ‘버스’에 붙일 수 있게 해 주었다. ‘콜롬보’ 시의 공회당에 있었던 강연에 435명의 위엄있고 정중한 청중들이 참석한 것을 보고 물론 모두가 다 즐거워하였다.

계급 제도를 살펴봄

1958년 1월에 ‘헨리 아브라함’, ‘이안 캠프벨’ 및 ‘쉐일라 캠프벨’은 ‘길르앗’ 학교 제31기 교육을 받기 위해 떠났다. 그들은 ‘실론’ 자체의 첫 ‘길르앗’ 졸업생들로 그해 9월에 돌아왔다. ‘캠프벨’ 부부는 ‘콜롬보’에 있는 선교인 가정에서, ‘아브라함’ 형제는 그 당시 ‘헤럴드 글루야스’ 형제 부부가 봉사하고 있었던 ‘자프나’의 선교인 가정에서 활동하였다.

‘자프나’와 관련해서 ‘글루야스’ 자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심지어 소위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사람들 사이에까지 계급 제도가 얼마나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가를 우리는 이곳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한번은 우리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인 한 관심자의 집에서 (‘왙취 타워’ 협회의) 영화를 상영하게 되었는데 다른 한 ‘그리스도인’은 말하기를, 자기 친척들이 아마도 더 높은 계급에 속하기 때문에 자기가 참석하면 그들을 불쾌하게 만들 것이므로 자기는 참석할 수 없다고 하였다. 성서 연구가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진행될 때 어떤 이웃 사람들이 오는 일이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의자를 사용하는데 자기들은 마루 바닥에 앉음으로써 자신들의 상상적인 낮은 신분을 계속 유지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성의 대회

1958년 여름에 ‘뉴우요오크’ 시에서 개최된 여호와의 증인의 성의 국제 대회는 웅대한 그리스도인 행사였다. 그러나 ‘실론’의 형제들은 1958년 10월 23-26일에 ‘콜롬보’에서 그들 자신의 성의 대회를 가졌다. 모두는 영적 양식과 새로운 출판물들 특히 「낙원을 잃은 때부터 낙원을 찾을 때까지」라는 서적으로 인해 감동을 받았다. 쉬운 말로 되어 있고 그림이 많아서 그 출판물은 제자를 삼는 활동에서 가치있는 도구가 되었다.

「낙원」 책을 공급 받은 후 단지 2개월 동안에 1,044부를 전하였다. 아마 그러한 훌륭한 보조서를 가졌기 때문에 성서 연구 활동이 그 해에 38‘퍼센트’ 증가하였을 것이다.

‘I. R. 데이비드’ 형제는 1958년 성의 대회에서 야외 봉사에 참여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1960년 4월 30일 ‘자프나’ 대회에서 침례받았으며 얼마 있지 않아 가정 성서 연구를 15건이나 사회하고 있었다. 한 건은 ‘카삼’이라는 사람과 하는 연구였는데 그는 ‘실론’에서 참 숭배를 받아들인 첫 회교도인이 되었다.

내부에 문제가 생기다

‘실론’에 있는 여호와의 백성들은 영적 번영과 연합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 약간의 내부적 문제가 생겼다. ‘사단’은 부도덕한 행위를 조장하는 그의 교활한 장기를 이용할 기회를 포착하였다. 1961년에는 활동의 발전을 위하여 약간의 변화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선교인인 ‘C. A. 타레하’ 형제가 순회 활동을 하도록 임명되었다. 12월에 ‘킹’ 형제 부부는 거의 전파 활동이 행해지지 않은 ‘누와라 엘리야’의 홍차 밭들이 있는 높은 곳에 새로운 선교인 가정을 개설하였다.

1962년 1월에 ‘레이 매튜스’가 지부 감독자의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러한 사태 발전은 개인들이 필요 불가결한 요소가 아님을 모두가 깨닫도록 도움이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을 의뢰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며 의지해야 한다.—시 37:5; 잠언 28:25.

‘헨첼’ 형제의 방문

새로운 많은 형제들은 ‘뉴우요오크’ ‘브루클린’의 ‘왙취 타워’ 협회 본부 성원을 만나본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1962년 2월 9일부터 14일까지 ‘밀튼 G. 헨첼’이 ‘실론’을 방문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모두가 아주 기뻐하였다. (그가 두번째 방문한 것은 약 11년 후인 1973년이었다.) 그의 방문과 때를 같이 하여 연합된 숭배자 지역 대회가 2월 8-11일에 열리도록 계획되었다.

‘헨첼’ 형제의 사랑스런 충고는 훌륭한 것이었다. 사람들에게 돈이 없다면 사람들이 가진 어떤 것과도 출판물을 교환하라고 한 그의 제안도 훌륭한 것이었다. 그 후 전도인들이 쌀, ‘코코넛’, 달걀, 비누, 옷 등을 가지고 야외 봉사에서 돌아오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었다. 출판물과 교환해서 어떤 것을 줌으로써 사람들은 출판물의 가치를 더 느끼게 되었을 것이다.

왕국회관 건축

1960년대초에 ‘모라투와’ 회중 형제들은 ‘실론’의 여호와의 증인들로서는 처음 갖게 되는 왕국회관 건축에 열심이었다. 그 당시 주임 감독자이던 ‘B. L. 우딩’ 형제는 유산을 상속 받았으며, 고향인 ‘뉴우지일랜드’를 방문하는 데 그 돈을 사용할 것으로 예상할 만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모라투와’ 회중 왕국회관을 짓고자 하는 그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그것을 사용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자기 재원으로부터 기부를 내고 소유물을 팔아서 도움을 베풀었다.

1963년 5월 4일 그 왕국회관 봉헌식에 200명 이상이 참석하였다. ‘라트말라나’의 ‘갈레로우드’에 위치한 그 건물은 잘 알려졌기 때문에 우편 엽서에 주소를 “‘라비니아’산, 왕국회관”이라고만 써도 들어 왔다.

“영원한 기쁜 소식” 대회

‘실론’ 사람들에게는 ‘뉴우델리’가 1963년의 “영원한 기쁜 소식” 세계 일주 대회의 계획된 노정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실론’에서는 109명이 갈 수 있었으며 그 중 32명은 ‘파이오니아’였다.

한 가지 중요한 문제는 ‘실론’과 인도를 다니는 연락선을 내린 후 기차와 연결이 되는가 하는 것이었다. 세관장은, “3등 승객들에겐 기차와 연결이 안됩니다. 항상 여기서 기다렸다가 다음날 가게 됩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형제들은 책임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여호와께 기도하였다. 어떤 일이 있었는가? 자, 세관원들은 형제들 일행을 별도로 취급하였으며, 그들이 그것을 거의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대만원인 열차에 올라 타게 되었다. 그들은 계속 여행을 하게 되었다!

모두는 대회 ‘프로그램’으로부터 크게 유익을 얻었다. 그리고 여러 나라에서 온 동료 신자들과 교제하는 것은 참으로 훌륭하였다. 대표자 몇명은 ‘뉴우델리’에서 침례 받았으며 그 해의 ‘실론’의 침례자 총수는 43명으로서 최고 기록을 세웠다.

제자를 삼는 일이 발전되다

‘C. A. 타레하’ 형제는 지부 감독자 ‘레이 메튜스’가 ‘길르앗’ 학교 제39기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상적인 일에 익숙해지도록 1963년 11월에 지부 사무실로 불리움을 받았다. 최근에 ‘길르앗’에서 돌아온 ‘멜로이 캠프벨’과 ‘A. 나나순데람’ 형제는 그 때쯤 ‘자프나’ 선교인 가정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65년 2월에 ‘매튜스’ 형제가 ‘길르앗’에서 돌아온 후 그리스도인 활동에서 지방어를 사용하는 문제가 더 강조되었다. ‘실론’어나 ‘타밀’어로 교육을 받은 젊은 세대에게 다른 방법으로는 도달할 수가 없었다. ‘실론’의 왕국 선포자들이 제자를 삼는 일에 더 훌륭한 자격을 갖추도록 모든 회중 집회에서 그러한 언어를 더 많이 사용하라는 격려를 받았다. 물론 지방어로 된 그리스도인 출판물들이 이미 사용되고 있었다. 예를 들어 1965년 8월에 ‘타밀’어로 된 「파수대」가 처음 출판되었고 1958년 3월에는 첫 ‘실론’어판이 나오게 되었다.

1967년 12월에 지역 대회 ‘프로그램’의 거의 모든 부분이 ‘실론’어와 ‘타밀’어로 통역되었으며 그 제공도 높은 수준이었다. 대회 조직도 여러 해 동안에 걸쳐 매우 효율적이 되었으며 모든 부서가 기능을 잘 발휘하였다. 덧붙여 말하자면 ‘실론’ 사람들은 오후에 차를 마시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모든 대회에는 차 마시는 시간이 꼭 있어야 한다. 차와 함께 아주 많은 과자와 ‘샌드위치’를 들게 된다.

특히 한 출판물이 제자를 삼는 사업에 있어서 두드러진 발전을 가져왔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라는 책이다. 적은 양의 탁송 화물이 도착된 1968년 12월까지는 이미 세개의 장이 ‘타밀’어 「파수대」에 실렸다. 바로 그 달에 445건의 가정 성서 연구 최고 기록에 달하였다.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진리」 책을 사용한 6개월 성서 연구 마련이 이곳에서도 시행되었다. 곧 보고들은 새로운 자들이 그 연구 마련에 신속한 반응을 보이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지상의 평화” 대회

1969년에 선교인들과 소수의 다른 전도인들은 “지상의 평화” 국제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국외로 여행하였다. 사망으로 두 사람의 선교인(‘B. L. 우딩’과 ‘프랑크 스테빙’)을 잃었지만, ‘런던’ 대회 후에 47기 ‘길르앗’ 졸업생인 ‘아더’와 ‘그위네스 모리스’가 ‘콜롬보’에 도착하게 되었다.

여러 나라에서 개최된 대회에 참석한 대부분의 ‘실론’ 대표자들은 그 지방의 “지상의 평화” 대회가 개최된 12월까지는 돌아왔다. 그 대회에서 10명의 새로운 제자들이 침례를 받았다. 그들 중의 얼마는 「진리」 책에 의한 6개월 성서 연구 마련에 의해 참 그리스도교를 받아 들였다.

어려움 가운데서 성장함

1970년 4월에는 292명의 전도인 신기록에 달하였다. 그러나 그 섬의 인구가 12,490,000이므로 아직도 각 전도인은 평균해서 42,774명에게 증거해야 하였다. 그들이 사람들에게 전파를 계속함에 따라 어려움이 증가하였다.

1971년 4월에는 무력 혁명의 위협과 전국에 걸친 ‘테러’ 행위자들의 활동 때문에 통행 금지가 시행되었다. 형제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막 기념하려고 하는 4월 9일에 갑자기 24시간 통행 금지령이 내려졌다. 그로 인해 집회를 열기가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얼마의 가족 집단들은 충실히 집에서 기념식을 가졌다. 성서적인 마련과 일치하게 그 해에는 하나님의 백성의 모든 회중이 한달 후에 기념식을 갖도록 마련되었다. (민수기 9:9-13과 비교) 아직도 통행 금지령이 오후 9:00시부터 시행되고 있어서 여행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작은 집단으로 그렇게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어려움이 있었는데도 총 참석수는 615명이나 되었다.

인내의 열매

여러 해 동안 문제들이 있었지만 전도인들은 좋은 소식의 선포를 위해 꾸준히 노력해 왔다. 그러한 꾸준함은 결실을 맺었다. 사실상 성서 진리에 반응을 나타낸 거의 모든 사람들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는다는 많은 사람들도 협회 서적들을 보며, 그 예로서 이전에 불교나 ‘힌두’교를 믿었던 얼마의 사람들이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다.

거짓 숭배에서 참 숭배로의 변화는 상당한 변화를 의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보자. ‘힌두’교를 믿는 원주민 의사 한 사람이 몇년 동안 ‘자프나’의 집회에 참석하였다. 자신이 ‘힌두’교를 그만 둔 ‘나다라자’ 형제가 참을성있게 그 사람과 성서 연구를 하였다. 그 의사가 왕국회관에 처음 왔을 때, 그의 옷은 너저분하였고, 이마에는 힌두교의 “거룩한” 재가 묻어 있었으며, 그의 한쪽 귀에는 붉은 ‘하와이’ 무궁화가 달렸고 그가 한 시약 때문에 그의 머리털과 수염은 대부분 다 뽑혀 있었다. 그러나 매 주일 그곳에 와서 아들을 자기 옆에 데리고 앞쪽에 꼿꼿이 앉아 있었다. 점차적으로 진리의 힘이 나타났다. 그의 옷은 깨끗해졌고, 재와 꽃은 사라졌으며, 머리도 정상으로 길렀으며, 수염은 아주 깎아버렸다. 그는 집안에 있는 가족 사당을 부수어 버렸으며, 다른 절차들도 밟아 여호와께 자신의 생명을 헌신할 수 있었다. 비록 그는 영어를 몰랐지만, 자기가 침례를 받은 후 ‘코팔란’ 형제라고 받아들여진 것을 알고는 함박같은 왕국 미소를 형제들에게 보냈다. 그는 신속히 발전하여 1967년 11월에 특별 ‘파이오니아’가 되었다. 그의 아내와 자녀들 모두도 왕국 선포자가 되었다.

증가는 즐거움을 가져온다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물가 상승과 빈약한 소득으로 인하여 생활 필수품을 구하기가 어렵다. 또한 ‘버스’와 기차 요금이 비싸기 때문에 형제들이 전파 활동이나 집회 또는 대회에 참석하기 위한 여행을 하는 데 어려움을 주고 있다. 물론 이들은 전도인들이 가능한 한 여행하지 않을 수 있는 지역에 순회 대회가 열리도록 하려는 노력에 대하여 감사하고 있다.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지만 여호와께서는 계속 성장하게 하시며, 그 때문에 형제들은 참으로 즐거워하고 있다. 지난 봉사 연도 중에 그들은 529명의 왕국 선포자 최고 기록에 달하였으며 1975년 기념식에는 1,377명이 참석하였다. 8월의 “하나님의 주권” 지역 대회에 912명이 참석하여 그들은 즐거움을 느꼈으며 또 다른 대회가 아직도 열리게 되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계속 자라게 하시기 때문에 그들은 이제 그 섬에 있는 14개의 회중들이 발전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앞을 바라보고 있다.—고린도 전 3:5-9.

더 많은 사람들이 ‘파이오니아’ 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것도 역시 그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다. 아직도 얼마의 형제들이 특별 ‘파이오니아’가 되고 새로운 구역으로 가서 회중 설립을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아직도 ‘스리랑카’에서 좋은 소식을 듣지 못한 사람들이 족히 천만명은 넘기 때문에 그러한 일은 꼭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1세기에 예수의 추종자들은 반응을 보인 ‘유대’인들을 그분의 제자로서 모아들였다. 마찬가지로 여러 해 동안 ‘스리랑카’인들은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아 왔다. 그러나 해야 할 일이 많이 있으며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계속 즐길 것이란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활동을 즐거움으로 열심히 행하고 있다. 이곳의 밭은 아직도 “희어져 추수하게 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며, 왕국 전파와 제자를 삼는 활동에 있어서 앞으로의 전망이 참으로 기대할 만하다—요한 4:34-38.

[223면 삽화]

1958년말의 ‘스리랑카’의 행복한 ‘파이오니아’들

[225면 삽화]

1967년 이후 사용되어 온 ‘콜롬보’의 지부 사무실 겸 선교인의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