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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리아’

‘리베리아’

‘리베리아’

“우리는 자유를 찾아 여기에 왔다.” 이 말은 1822년 4월 25일 대서양을 횡단하여 ‘아프리카’ 서해안의 작은 섬인 ‘프로비던스’ 도에 상륙한 정착자들이 한 말이다. 미국 식민지 개척 협회의 후원하에 강인한 자유인들인 이들 개척자들은 ‘아프리카’의 최초의 흑인 공화국인 ‘리베리아’가 1847년에 설립되는 터전을 닦았다. 크기가 대략 ‘루이지애나’ 주(미국) 만한 이 나라는 ‘시에라리온’, ‘기니아’ 공화국 및 ‘코트디브와르’와 접경을 이루고 있다.

주로 해안 평야에 위치한 상록의 나라 ‘리베리아’에는 코끼리, 표범 그리고 진기한 ‘피그미’ 하마가 서식하는 울창한 삼림 지대가 있다. ‘리베리아’는 고무의 나라이며 손질이 잘된 농장이 전국에 걸쳐 있다. 낮은 산악 지대에서 지상에서 가장 풍부한 철광석이 대대적으로 채광되고 있다.

자유케 하는 진리가 ‘리베리아’에 이르다

공화국이 설립된지 이십년 후인 1867년까지는, 총 13,136명의 정착자들이 주로 미국에서 ‘리베리아’로 이주하여 왔다. 해안 거주지가 수도 ‘먼로비아’ 외곽으로 ‘마노’ 강으로부터 ‘카발라’ 강에 이르기까지 ‘로버어츠포오트’, ‘마아셜’, ‘부캐넌’, ‘그리인빌’ 및 “‘리베리아’의 ‘메릴랜드’”의 ‘하르퍼’ 등지에 생겨났다. 1895년경에, ‘팔마스’ 갑—여기서부터 ‘아프리카’의 불룩한 “턱”이 들어가기 시작한다—의 바로 이 정착촌 ‘하르퍼’에서 「시온의 파수대와 그리스도의 임재의 전령」지를 일단의 성서 연구생들이 연구하였는데, 이것이 ‘리베리아’에서 최초의 집회들이었으며, 알려진 바로는, 서부 ‘아프리카’에서의 최초의 집회들이었다. 처음으로, ‘리베리아’인들이 진정으로 사람들을 자유케 하는 성서 진리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요한 8:32.

어떻게 언제 두명의 연로한 형제들인 ‘헨리 깁슨’ 및 ‘조셉 깁슨’ 형제가 「시온의 파수대」지를 입수하였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가정 성서 연구 모임이 정기적으로 열렸음을, 공화국의 전 대통령 ‘윌리엄 V. S. 터브먼’을 포함한 연륜이 오랜 많은 사람들이 증언하였다. ‘터브먼’은 자신이 소년이었을 때에 그러한 집회가 열렸다고 술회하였다. “여호와의 증인이 ‘리베리아’에 언제부터 있었소?” 하고 조롱하는 사람들은 보통 “대통령의 말씀에 의하면, 우리 집회는 여기에서 약 칠십 오년 전부터 열렸읍니다”라는 말을 듣고 입을 다물었다. 우리 주의 죽음을 기념하는 기념식이 ‘유대’ 달력으로 ‘니산’월 14일에 해당하는 기념일 밤에 해마다 그 집단에 의하여 준수되었다. ‘깁슨’ 형제 두 사람은 십 구세기 말과 이십세기 초에 사망하였으며, 성서 연구 모임은 그 때에 끝났던 것 같다.

그러나 약 이십 오년 후에 여호와의 왕국의 소식이 ‘리베리아’에서 공개적으로 선포되었다. 1926년에, ‘시에라리온’ ‘프리이타운’ 출신 성서 연구생 ‘클로오드 브라운’이 수주간 ‘먼로비아’를 방문하였다. 그는 ‘왙취 타워 협회’의 서부 ‘아프리카’ 지부의 ‘W. R. (“바이블”) 브라운’이 방문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삼주간, 여호와의 왕국의 강력한 해설자 ‘W. R. 브라운’은 ‘먼로비아’에 있는 하원 의사당에서 밤마다 연설하였고 또한 많은 서적을 배부하였다. 가장 저명한 명사들을 포함한 많은 군중이 고무적으로 해설되는 진리의 극적인 설명을 듣기 위하여 모여 들었다.

종파적인 교회 성원들은 “바이블” ‘브라운’의 강연에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그 강연들은 그들의 종교 제도의 기반을 폭로하고 흔들었다. 그의 연설들이 당시의 화제였으며, 연륜이 오랜 사람들은 오십년 후인 지금도 그 연설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바이블 브라운’ 형제가 떠나기 전에 그는 성서 연구반을 조직하였으며, 그 모임은 두번에 걸쳐 대통령에 출마하였던 사람인 ‘포크너’ 씨에 의해 감독되었다. 그 연구반의 충실한 성원 중 한 사람은 ‘프리이타운’에서 “바이블” ‘브라운’과 함께 왔던 ‘리베리아’인인 ‘J. G. 핸스포오드’였다. 교직자들도 때때로 그 연구에 참석하였다.

반대에 직면하다

1929년에 “바이블” ‘브라운’이 ‘먼로비아’로 돌아왔을 때에는 종교적 박해가 격렬해졌다. 1920년대초에 탁월한 ‘리베리아’ 여성들이 오순절 교회 복음 전도자인 ‘재뉴어리’ 여사의 충동적인 교리를 받아들였다. 특히 이들 여성들로부터 정부 최고 직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압력이 왔다. ‘‘브라운’의 가르침이 교회를 붕괴시키고 있다’는 것이 항의 내용이었다. 이번 방문에서 “바이블” ‘브라운’은 단지 한번 강연을 하고는 거주 허락을 받지 못하고 불과 일주일 후에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그는 ‘아프리카’의 다른 곳에 있는 더욱 비옥한 밭으로 갔다.

그러나 성서 연구반은 계속되었으며, 후에 ‘시에라리온’ 출신 증인의 감독을 받게 되었다. 1930년대 초에 경제 상태가 악화되었고, 일부 사람들은 이 형제의 전파 사업이 정부에 대한 선동 행위라고 생각하였다. 그 결과는? 그는 강제로 국경으로 연행되어 국외 추방되었다. 위협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의 열심이 식어졌고 성서 연구반은 해산되었다.

영적 번영이 시작되다

‘파이어스토운’ 회사 덕분에 절실히 필요했던 호경기가 ‘리베리아’에 찾아 왔다. 그 회사는 1926년에 ‘하르벨’에 고무나무를 심기 시작하였으며 칠년 후에는 경작 면적이 6,732만평에 이르렀다. 그러나 ‘리베리아’에서 물질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참으로 중대한 변화는 1940년대 십년 동안에 일어났다. 물질적인 면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을 계기로 ‘리베리아’가 중요시 여기게 되었다. 연합군이 서‘아프리카’에 공군 기지를 설치할 필요가 있었으며 ‘하르벨’의 ‘파이어스토운’ 근처 ‘로버어츠필드’가 선택되었다. 오래지 않아 ‘리베리아’에는 미군들이 쇄도하였으며 그들이 돈과 서양 관습을 도입하였다. 미국 대통령 ‘루우스벨트’도 잠시 방문하였다. 이 방문에 힘입어 무기한 대여가 이루어졌으며 ‘먼로비아’에 현대 항구, 포장 도로, 교량 및 이 나라 최초의 철도가 건설되었다.

전세계 자본가들은 이제 우수한 철광 생산국으로서의 ‘리베리아’의 가능성에 대하여 더 잘 알게 되었다. 다른 고무 회사들은 극동에서의 고무나무 재배에 의존하는 것보다, 서방측에 우호적인 그리고 대서양에서 가기 쉬운 나라에 고무나무를 재배하는 것의 이점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전후에 ‘리베리아’ 사상 유례가 없는 번영이 시작되었다. 생활 수준이 점차 향상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시급히 필요한 교육 및 도로 공사를 촉진하기 위한 정부 기금이 마련되었다.

다행히도, 1946년에 또한 영적 번영이 시작되었다. 그 해에 ‘왙취 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를 졸업한 선교인 ‘해리 C. 비해넌’ 형제가 도착하였다. ‘비해넌’ 형제는 ‘유럽’ 전역에서, 심지어 왕이 보는 앞에서도 ‘피아노’ 연주회를 가진 재능있는 흑인 음악인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봉사에 대한 열심이 놀라왔으며, 그 열성은 주의 “적은 무리”의 일원으로 기름부음받은 사실에 합당하였다. (누가 12:32) 그는 참다운 개척자(‘파이오니아’)로 ‘먼로비아’에 혼자 도착하였다. 즉시, ‘비해넌’ 형제는 호별 방문 전파 사업을 시작하였다. 6개월 못되어 그는 호의적인 많은 사람과 사귀었고, 500여부의 서적을 전하였다. 이 나라의 다른 곳에 진리를 전하기 위하여 그는 덮개가 없는 ‘보우트’를 타고 ‘먼로비아’에서 일직선으로 240‘킬로미터’ 떨어진 ‘사이노우’ 군 ‘그리인빌’까지 갔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사랑이 많은 이 형제는 자기가 뿌리고 가꾼 그 많은 씨가 자라도록 자신이 가꾸지는 못하였다! ‘비해넌’ 형제는 ‘그리인빌’에서 돌아오자 병이 들었으며,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는데, 열대 열병에 희생된 것 같다. 그의 장례식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 중에는 미국 대사관 직원들도 있었다. ‘비해넌’ 형제에 대하여 ‘리베리아’인 신사 한 사람은 “그는 웅대한 목적을 가진 사람과 같이 행동하였다”고 말하였다. 그 목적은 실패하지 않을 것이었다.

선교인들이 사업을 확립하다

1947년 5월에, 배 한척이 해안에 닻을 내렸고 ‘길르앗’ 훈련을 받은 두 선교인 ‘조오지 와킨스’와 ‘윌라 메이 와킨스’가 ‘보우트’에 실려 그들의 임명지인 ‘먼로비아’에 도착하였다. 사십대의 이 부부는 적응성과 끈기를 요하는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전에 ‘아마튜어’ 권투 선수였던 ‘와킨스’ 형제는 건강한 체격을 갖고 있어서 좋았다. ‘호텔’에서 일주간 유숙한 후, 그 부부는 침대도 없는 불편한 집으로 옮겼는데, 후에 그 형제가 침대와 기타 가구를 만들었다.

여기에는 수도가 없었다. 그리하여 우물물을 물통으로 길어다가 십 오분간 끓여야 되었다. 이질을 옮기는 개미 때문에 음식을 잘 간수할 필요가 있었다. 난로는? 있긴 있었는데 솥을 올려 놓은 세개의 돌맹이가 그것이었다. 불쏘시개 나무를 연료로 사용하였다.

모기장과 쓰디 쓴 ‘아타브린’ 약을 사용하여 ‘말라리아’를 예방하였다. 또한 선교인들에게 또 다른 골치거리가 있었는데, 얼마 후 가죽 가방을 열어 보니 흰 개미들이 가방 밑바닥과 가방 안에 든 것을 몽땅 먹어치워 버렸다.

‘와킨스’ 형제와 자매는 두 가지 ‘리베리아’ 문화가 공존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나라 인구의 대부분은 20여 가지 언어와 방언을 말하고 지방 행정관과 족장을 통해 시행되는 토착민들의 관습법의 지배를 받는 20여 부족에 속해 있었다. 한편, 최초의 이주민들의 후예들은 서양의 관습을 이어 받았으며, 더욱 더 많은 종족들이 서양식으로 교육을 받고 있었다. 영어가 공용어이지만, 당시 ‘먼로비아’의 많은 부족민들은 영어를 단지 약간씩 말하였고 대다수는 문맹자들이었다.

일반적으로 지식에 대한 갈증이 컸고 선교인들이 활동한 처음 열 다섯달 동안 천여부의 서적이 배부되었다. 그러나, 많은 교양인들은 “아버지에게 좋은 것은 나에게도 좋다”고 말하면서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이기를 원하지 않았다. 대체로, 어휘와 읽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가장 큰 관심을 나타냈다. 진리에 목말라 하는 그러한 사람들을 가르치는 데 가장 유익한 것은 ‘왙취 타워 협회’의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영문)라는 책에 있는 삽화들이었다.

사람들 대부분의 “집”은 간막이를 한 여러 개의 단칸방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커다란 하나의 가옥에는 아래로부터 고미 다락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방이 스무개 혹은 그 이상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러한 방들은 침소에 불과한 것이다. 이 때문에 증인들이 재방문에서 관심 가진 사람들을 다시 만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사람들은 이사다니는 것이 예사였다! 그 이유는? 일자리가 없거나 더 나은 숙소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한 장애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오래지 않아 ‘J. G. 핸스포오드’ 댁 ‘베란다’에서 집회를 보기 시작하였다. 그는 ‘W. R. 브라운’으로부터 이십여년 전에 진리를 배웠다. 참으로 온유한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기 시작하였다. 엄청난 참을성과 수고의 결과로 1948년 9월에 신기록으로 열 다섯명이 왕국 봉사에 참여하였으며, 그 때에 ‘리베리아’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첫 회중이 조직되었다. 이 때에, 성서 진리를 받아들인 첫 ‘리베리아’ 여인인 ‘레티시아 마르틴’이 좋을 소식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1949년에 그는 첫 ‘리베리아’인 ‘파이오니아’ 즉 전 시간 왕국 선포자가 되었다.

열성스런 노력이 증가를 가져 오다

1949년 5월에 두번째로 선교인 부부 ‘프랭크 포스트’와 ‘태레사 포스트’가 도착하였다. 이 때에는 선교인 집이 번화가인 ‘캠프존슨로드’에 위치해 있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책을 전시하기 위한 전광판이 세워졌다. 그 간판에 이끌려 관심을 나타낸 사람 중에 ‘프랭크 포우엘’이라는 젊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선교인에게 “저것이 우리 아버지의 교회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기름부음받은 추종자의 한 사람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자메이카’에서 사십년 동안 증인이었으며, ‘프랭크’는 어렸을 때에 집회에 몇번 참석하였다. 이제 그는 다시 하나님의 백성과 교제하게 되었으며 전파 사업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1951년에 그는 ‘리베리아’인으로서는 유일하게 ‘런던’의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리는 그리스도인 대회에 참석하여 거기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헌신의 상징으로 침례를 받았다. 그의 아버지의 “교회”가 이제 또한 그의 “교회”가 된 것이다.

전광판에 나타난 책의 제목을 보고 ‘기니아’의 ‘키시’ 부족 출신인 ‘프랭크 송거’라는 사람이 관심을 보였다. 마침내, 그는 ‘사람을 자유케 할 이 진리’에 대하여 선교인에게 질문하였으며, 그와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다. 진리를 깨달은 ‘송거’는 크게 기뻐하였다. 얼마 후, 그의 세 아내 중 한 사람이 사망하였다. 그러나 나머지 두 아내 중 누구를 자기의 한 아내로 택할 것인가? 그가 두 아내에게 성경적으로 단지 한 아내만을 둘 수 있다는 입장을 설명하였을 때, 한 사람은 즉시 자기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또 한 사람 즉 ‘알베르타’는 남편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 가겠다고 말하였다.

‘프랭크’는 이 말을 듣고 기뻐하였다. 그리하여 ‘알베르타’가 ‘마노’라는 다른 부족 출신이지만 그의 아내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가 남았다. 즉, 그 아내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인가? 그 여인은 극히 소심해 보였다. ‘와킨스’ 형제가 그들의 가정을 방문할 때마다 그 여인은 몸을 피하였다. 그 이유는? 그의 남편이 이 선교인에게 약간의 돈을 빚졌는데, ‘알베르타’는 ‘와킨스’ 형제가 빚을 받을 때까지 자기를 담보로 요구할까 봐 두려워하였던 것이다!

얼마 후, ‘알베르타’는 여호와의 훌륭한 증인이 되었으며 영어와 ‘키시’어를 익혔다. 참으로, 충실한 사람에게 진리가 커다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리는 훌륭한 본이었다!

어느날 ‘아이작’이라는 글을 모르는 젊은 형제가 선교인 집에 왔다. 그는 어느 군인에게 전도를 하였는데, 그 사람은 잘 듣고 나서 글을 아는 사람이 자기를 방문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아이작’ 형제는 선교인 집에 있던 ‘포스트’ 자매를 안내하여 ‘리베리아’ 국경 수비대의 악장인 ‘A. G. L. 윌리엄스’ 소령에게 갔다. 60대 중반의 ‘가톨릭’교인인 ‘윌리엄스’ 소령은 서인도 제도 출신이며 직업 군인으로 오랜 경력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보호와 성공을 위하여 “마법”의 능력에 진정한 믿음을 두고 있었다.

‘포스트’ 자매는 즉시 이 사람이 진리를 찾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정기적인 방문이 시작되었으며 마침내 획기적인 변화가 왔다. 즉 신명기 18:10-12은 마귀의 영감을 받는 “마법”에 의지하는 것이 그릇됨을 폭로하였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언에 깊은 감동을 받은 ‘윌리엄스’는 즉시 “마법”과 관련된 모든 것을 버리고 여호와께 믿음을 두었다.

이제 퇴역한 그는 열심히 왕국 봉사를 시작하면서 “소령”이라는 칭호를 “형제”로 대치하고 고위층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하였다. 얼마 후, 신체의 허약으로 인해서 외출을 못하게 되었지만 사람들이 끊임없이 그를 방문하였고 그는 가르치고 성서 연구를 사회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아무도 방문하지 않을 때에는 대문으로 나가서 지나가는 사람을 불러 세워 놓고 좋은 소식을 전파하였다.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서의 생활을 계속한 이 높이 존경받는 친절한 노신사는 1963년에 사망할 때까지 손을 늦추지 않았다.

다섯번째로 온 선교인은 1950년 1월에 도착한 ‘호일 어빈’이었다. 그는 두 사람 즉 ‘스펜서 토마스’와 ‘리치피일드 레미’와 함께 연구하였는데, 이 두 사람은 후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치있는 봉사를 하였다. 처음에 그들의 아내들은 그들을 연구에 참석시키려는 ‘어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레미’의 아내가 연구에 참석하지 않는 이유를 알아내기 위하여 ‘어빈’은 아주 순진하게 “글을 모르십니까?” 하고 질문하였다. 그것이 효과가 있었다! 그는 ‘어빈’에게 자신이 지식인인 척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아내는 연구에 참여하게 되었고 진리를 배웠다. 다음에 ‘토마스’의 아내도 참여하게 되었으며, 두 아내가 다음 해에 침례를 받았다. 열성스런 ‘파이오니아’로서 ‘위니프레드 레미’와 ‘올리브 토마스’는 다른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배우도록 도와 주었다.

1950년에 다른 두 선교인 ‘시르’ 형제와 ‘므로즈’ 형제가 일시적으로 함께 일하다가 동부 ‘아프리카’로 갔다. 5월에 ‘먼로비아’ ‘존슨’ 가 17번지에 있는 더 넓은 집이 선교인 집이 되었으며, ‘포스트’ 부부는 새로운 임명지인 ‘팔마스’ 갑의 ‘하르퍼’ 시로 배를 타고 갔다. 그 때까지, ‘와킨스’ 형제 부부가 ‘자유의 땅’에 도착한지 약 삼년이 흘렀으며, 28명의 전도인과 8명의 ‘파이오니아’가 핵심을 이루고 정기적으로 좋은 소식을 전파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때에 막 시작되고 있던 1950년대에 여호와께 대한 봉사가 어떠한 결실을 맺을 것이었는가?

오십년 후에 ‘하르퍼’로 돌아오다

‘깁슨’ 형제들의 사망으로 「시온의 파수대」 연구반이 해체된지 오십년 가량이 지나갔다. 이제 대서양으로 돌출한 그 아름답고 야자수 늘어선 ‘팔마스’ 갑에서 ‘포스트’ 부부는 즉시 관심자들을 발견하였다. 불과 넉달 후에, 열명의 전도인이 야외 봉사를 보고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교인들은 “예언자들”로부터 반대를 받았다. 한 주일에 너댓번 이들 광신적인 종교가들이 흰 옷을 입고 호롱등을 들고, 성가를 부르고 함성을 지르고, 북을 두드리고, 가끔 멈추어 춤을 추어 가며 시가 행진을 하곤 하였다. 그들은 “병 고침”을 굳게 믿는 사람들이었다. 선교인 한 사람이 병에 걸려 병원에 가지 않을 수 없었을 때에 “예언자들”이 선교인 집을 에워싸고 “하나님의 종이 병에 걸려 병원에 가다니? 당신네들은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거짓 예언자들이요!” 하고 조롱하였다. 다음 수주간 이들 거짓 종교가들은 한밤중에 선교인 집으로 와서 소리없이 매우 이상한 거동을 취하곤 하였는데 분명히 마술을 걸어 선교인들을 쫓아내기 위한 의도에서 그렇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포스트’ 부부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이 광신자 집단의 지도자가 어떤 ‘왙취 타워’ 서적을 받았다. 선교인과의 토론 끝에, 이 지도자는 자기의 추종자들에게 그들이 교회의 “성역”에 들어가기 전에 신을 벗을 필요가 더 이상 없다고 말하였다. 성서 연구를 통하여, 이 사람은 자기의 많은 사상이 “마귀의 교리”이며, 참 하나님은 여호와이고 그의 이름을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디모데 전 4:1, 미국 표준역) 이것을 깨달은 그는 즉시 자기 교회의 명칭을 “주의 교회”에서 “여호와의 장막”으로 고쳤다. 이 교회 단체의 수석 “사도”가 ‘먼로비아’에서 이 소식을 듣고 격노하여 교회 명칭을 고쳤다는 이유를 들어 이 빗나간 제자를 법정에 고소하였다. 그에 따른 논쟁으로 교회가 분열되었다. 그곳 지도자가 승소하기는 하였지만, 그 후의 토론과 연구를 통하여 그는 자기의 교회가 “여호와의 장막”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간판이 내려졌다.

그 후 어느날 그는 교인들 앞에서 자기의 거짓 종교를 비난하고 자기가 여호와의 참 백성임을 발견하였다고 선언하여 교인들을 놀라게 하였다. 다음에 그는 증인들을 따라 호별 방문 전파를 하면서 자기가 진리를 발견한 경위를 많은 사람들에게 설명하였다. 이전의 그의 영적 지도자에 의하여 그는 다시 법정에 호출되었는데, 이번에는 “예언자들”의 믿음을 비난하고 그 교회의 성원들을 돌아서게 한다는 혐의를 받았다. 판사는 피고에게 개종한 이유를 질문하였으며, 그는 “나는 이전에는 소경이었으나 이제 눈을 떴읍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감명적인 증언이 있은 후, 그 사건은 각하되었다. 이 ‘윌모트 브라이트’ 형제는 그 후 ‘하르퍼’ 시에서 왕국 전도인으로 일하였다.

1951년에 ‘레미’ 부부가 ‘먼로비아’에서 ‘하르퍼’ 시로 이사와서 새 회중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한 동안 ‘포스트’ 자매는 29‘킬로미터’ 떨어진 ‘플리이보’에 있는 개인 병원에 있었다. 그곳에 있는 동안, ‘포스트’ 자매는 ‘윌리엄 데이비드’와 성서를 연구하였으며, 오래지 않아 그 가족의 다른 사람들이 진리를 배웠다. 그들 중에 세명의 손위의 문맹자 여인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마침내 ‘블론디’ 자매, ‘타아디’ 자매, ‘카아디’ 자매가 되었으며, 그들이 그들의 토착어인 ‘그레보’어로 전파하자 ‘플리이보’에서 사람들의 눈에 자주 띄게 되었다.

이 무렵 연구를 시작한 또 다른 친척은 ‘프랭크 윌리엄’이었는데, 그는 ‘길르앗’ 학교에 참석한 첫 ‘리베리아’ 원주민이었으며, 1958년 ‘뉴우요오크’ 시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성의 국제 대회에서 졸업하였다. 연구를 시작한 또 다른 친척은 ‘제이컵 와’였는데, 그는 체구는 작지만 지식과 말하는 능력에 있어서 예리하였다.

1952년에 ‘디어도르 Y. 모어건’이라는 ‘리베리아’인이 황금 해안(‘가나’)에서 고향으로 돌아와 ‘팔마스’ 갑에 있는 회중과 연합하여 ‘파이오니아’로 일하였다. ‘모어건’ 형제는 1895년에 ‘그레보’족 부모에게서 태어났으며, 그 때에 ‘그레보’족은 ‘팔마스’ 갑에 있는 주민들과 전쟁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새로 태어난 아기는 “전쟁이 있을지어다!”라는 의미의 ‘예다토’라고 명명되었다. 그러나 이제 ‘예다토’가 전력을 기울이는 싸움은 영적 전쟁이었다.

1952년 8월이 되었을 때에는, ‘팔마스’ 갑에 스무명의 전도인과 네명의 ‘파이오니아’가 일하고 있었다. 얼마 후 ‘하르퍼’ 시에 커다란 왕국회관이 건립되었고 ‘플리이보’에 한 회중이 조직되었다. 그 갑의 연륜이 오랜 사람들은 참으로 ‘내가 왔을 때 ‘왙취 타워’가 여기에 있었는데 내가 갈 때에도 그것이 여기에 그대로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할 것이다.

1952년 11월에 이곳의 왕국 사업은 의미깊은 발전을 보았다. 두개의 작은 회중이 모여 ‘리베이아’의 첫 전국 대회가 열렸으며 ‘팔마스’ 갑의 참석자들은 수역 수백 ‘킬로미터’을 여행하여 그 대회에 참석하였다. 그때에 전례없는 열정과 기쁨이 있었다. ‘브루클린 벧엘’로부터 두 형제 즉 ‘N. H. 노워’와 ‘M. G. 헨첼’ 형제가 방문하여 모두는 전례없었던 감격과 기쁨을 누렸다.

지부 사무실이 설립되다

‘먼로비아’ 백년제 기념관에서 행할 ‘노워’ 형제의 “지금은 하나님의 길을 고려할 때”라는 공개 강연을 듣기 위해 400명이 모였다. 왕국 전파 사업이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태도였다. ‘리베리아’의 전체 내륙 지방이 사실상 미개척지였기 때문이다. 미래의 확장을 더 잘 감독하기 위하여 지부 사무실이 설립되었고 선교인 중 한 사람이 지부 감독자로 임명되었다.

‘먼로비아’ ‘존슨’ 가 17번지에 있는 선교인 집은 주름잡힌 함석으로 덮힌 작은 집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건물의 건축이 1953년 2월에 착공되어 10월에 준공되었다. 왕국회관은 150명을 편안히 수용할 수 있었으며 선교인 집에는 침실이 셋 있었다. 현대식 건축 설계는 많은 호평을 받았다. 더 많은 사람들이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으며, “여호와의 증인들이 확고한 기반을 닦았다!”는 것이 일반의 생각이었다.

내륙 지방으로

1953년 5월 말에 친 형제(‘리베리아’인들이 하는 말로는 “한 엄마 한 아빠”에게서 난) ‘존 샤루크’ 형제와 ‘마이클 샤루크’ 형제가 ‘시에라리온’으로부터 도착하였다. 원래 서부 ‘캐나다’에서 온 삼십대초의 이 두 선교인은 이미 ‘아프리카’에서 4년간 봉사하였으며, 그 중 삼년은 ‘나이지리아’에서 지역 감독자와 선교인으로 봉사하였다. 그들은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서부 ‘아프리카’ 특유의 문제들에 대한 실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네명의 선교인이 작은 지역에 몰려 있으므로 ‘존 샤루크’ 형제는 ‘카카타’에서 새로운 일터를 찾았다.

‘존 샤루크’가 ‘카카타’에 정착한 후에 그는 ‘살랄라’에 사는 연로한 ‘토머스 홀먼’을 방문하였고 그 후 그와 매달 며칠씩 보냈다. 두번째 방문에서 이 양같은 사람은 증인이 되고 자기의 결혼 문제에서 필요한 조정을 할 결심을 말하였다. 다음 4월에 침례를 받은 ‘토머스 홀먼’은 ‘카카타-살랄라’ 지방에서 첫 증인이 되었다.

1954년 초에 ‘카카타’의 한 집을 세내어 선교인 집으로 삼았으며, ‘마이클 샤루크’는 그 집에서 형과 함께 생활하였다. 형제들은 엄청난 거리를 걸어서 양같은 사람들을 찾아 한 집단을 구성하였다. ‘마이클 샤루크’는 숲속 길을 걸어 네시간 떨어진 ‘니엔’에서 진정으로 관심가진 몇 사람을 발견하였다. 한동안 그들은 한주일에 두번씩 방문을 받았다. 이것은 걸어서 당일로 돌아오기 위하여 아침에 매우 일찍 떠나야 함을 의미하였다. 이 사람들은 그들을 돕고자 하는 노력을 진정으로 인식하였다. 그 결과 ‘윌리암 보니’, ‘윌리암 모리스’ 그리고 ‘제임스 맬리’가 왕국 선포자가 되었다.

9월 말에는, 일곱명의 왕국 전도인들이 이 산재한 구역에서 보고하고 있었다. 그리고 1955년 2월에는 한 회중이 조직되었다. 그런데 ‘카카타’ 사람들은 좋은 소식에 어떠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는가? 다음을 유의하여 보라. 관심가진 집단과 연구를 마친 후 한 선교인은, 언제 길을 따라 좀더 멀리 가 보겠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곳 사람들이 여호와의 증인을 찾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음 주에 그는 관심자들을 찾아 나서기로 결정하였다. 한 집에서 그는 안으로 초대를 받았는데. “우리는 당신들이 와서 우리와 연구를 하기를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렸읍니다. 우리를 이토록 기다리게 하다니 유감입니다” 하는 점잖은 꾸중을 들었다. 서적이 전해졌고 첫 성서 연구가 그 자리에서 시작되었다. 몇집 지나서 한 여인이 형제에게 “마침내 이쪽으로 오셨군요!” 하고 인사하였다. 왕국 소식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점심 식사가 준비되었다. 다음 집에서 만난 한 여인은 “낯설지 않은 분이군요. 우리는 댁의 사업이 어떠한 것인지 알고 지금껏 기다렸어요” 하고 말하였다 성경 토론을 듣기 위하여 온 가족이 모였다. 사실, 그들은 그들도 여호와의 말씀을 배울 수 있도록 정기적으로 재방문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진리가 ‘하르벨’을 힘있게 격동시키다

1953년 5월에, 지금은 ‘파이오니아’가 된 ‘키시’ 부족민 ‘프랭크 송거’는, 약 30,000명의 종업원을 둔 거대한 ‘파이어스토운’ 재배장에서 가까운 ‘로버어츠피일드’에서 임시적으로 연관공의 일을 하기 위해 ‘먼로비아’를 떠났다. 다음 일요일에 여호와의 영이 그를 감동시켜 종업원들의 합숙소 한 곳에서 증거하게 하였다. 도중에 그는 교회에 가는 같은 부족 출신 한 사람을 만났으며 그에게 여호와의 목적과 새로운 사물의 제도에 대하며 이야기하였다. 바로 그 고무나무 아래에서 ‘하르벨’ 회중의 기초가 놓였다. 이 사람 ‘바요 그본도’가 진리를 받고 연구를 요청하였던 것이다. 첫 연구 후 그는 교회에 가는 일을 중지하였다. 둘째 연구 후, 그는 자기의 세 아내 중 두 사람을 내보내고 나머지 아내와 결혼을 합법화하였다. 그 후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열의와 열심을 가지고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프랭크 송거’는 왕국 소식에 대한 관심이 놀랍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매일, 몇시간 일한 후 그는 합숙소에 가서 증거를 하고 성서 연구를 사회하였다. 소식을 사랑한 사람들은 ‘송거’ 형제를 따라다니며 이곳 저곳에 좋은 소식을 선포하기를 원하였으며, 얼마 후 열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갑자기 이 소규모 집단이 나타나면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와서 들었다. 그들은 참으로 그 소식을 사랑하였다! 그리고 그 소식을 화제로 삼았다! 그들이 한 때 믿음을 둔 부적, 호신패, “마약” 등은 거름더미와 불 속에 던져졌다.

많은 사람들이, 일부다처, 음행 및 간음을 하나님께서 승인하시지 않고 여호와의 ‘아마겟돈’ 전쟁에서 일소하신다는 것을 이해하고 성서의 높은 표준에 순응하였다. (계시 16:14-16) 부족의 법은 일부다처를 허용하고 음행을 눈감았지만, 진리는 맑은 물과도 같이, 이들 양같은 사람들을 그러한 더러움에서 깨끗하게 하였고, 그들은 담대함과 감사함으로 가득하였다. 그들은 진리를 일주일에 한두번 듣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매일 배우기를 원하였으며 또한 배우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기를 원하였다.

‘프랭크 송거’ 형제가 그 곳을 떠났을 때 ‘바요 그본도’가 관심자들을 돌보았다. 이들 연구생들은 그들끼리 하나님의 조직의 방법을 배우고 그것을 실행하였다. 대나무 ‘벤치’를 만들고 고무나무 밑에서 집회를 보았다. ‘프랭크 송거’가 그 곳에서 일하기 시작한지 6개월이 넘지 않아서 열 여덟명이 야외 봉사에 참여할 자격을 갖추었고 60명이 집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이들 집회는 질서정연하였고, 평화와 기쁨의 영으로 가득하여, 다른 사람들이 보고 매력을 느꼈으며, 그들은 여러 부족의 사람들을 연합시킬 수 있는 그리스도교의 힘의 이 훌륭한 전시에 감명을 받았다.

내륙 지방의 다른 많은 도시와 마찬가지로, ‘하르벨’에서도 문맹과 부도덕이 두 가지 커다란 문제였다. 얼마 후, 문맹자들도 이치적인 성경 연설을 익혔다. 처음에 그들은 영어 성서에서 귀절을 지적하면서 귀절 내용을 외우고 반복하였다. 글을 모르는 원주민 여자들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고 집주인들이 깜짝 놀랐다. 주물 숭배와 그리스도교국의 종교적 거짓 교리는 허물어지고 있었다. 그 대신에 참 하나님의 이름과 명성이 올라갔다. ‘파이어스토운’ 재배장은 전국에서 종업원들을 모았으며 이들이 친척과 함께 항상 고향으로 왔다 갔다 하기 때문에 여호와의 증인들과 ‘파이어스토운’에서의 그들의 활동에 대한 이야기가 전국에 퍼졌다.

1954년 6월에 설흔 한명의 전도인이 ‘하르벨’ 회중에 있게 되었으며, 6개월 내에 이 나라에서 가장 큰 회중으로 성장하였다. 이들 대부분이 매일 증거한 결과로, 회중으로서 활동한 첫 해에 전도인 개인들의 야외 봉사 월평균이 39.9시간이었다!

신세계 사회 대회

‘리베리아’에서 다섯명이 1953년에 ‘뉴우요오크’ 시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신세계 사회 대회에 참석하였다. 이들 가운데 ‘아프리카’인으로서는 첫 참석자인 ‘버어니스 클레멘트’가 포함되어 있었다. 갓난 아기가 있었지만 그를 데려감으로써 문제를 극복하였다. 이 대회를 본 이 자매는 ‘파이오니아’가 되려는 결심으로 불붙었으며, 2년 후에 그 욕망이 실현되었다. 그러나 자녀가 일곱이고 남편으로부터 부양을 받을 수 없는 이 자매가 어떻게 ‘파이오니아’ 봉사를 해 낼 수 있을 것인가? 그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하여 빵과 과자를 구워서 팔았다. 밤에 반죽을 만들고 아침 네시에 일어나 굽기 시작하였다. 오후 1시에는 모든 것을 끝내고 좋은 소식을 전파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먼로비아’ 신문들은 ‘뉴우요오크’ 대회에 대하여 상세히 보도하였다. 관심가진 사람들은 대회 보고지에 ‘리베리아’인 참석자들의 사진이 게재된 것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 새로이 봉헌된 왕국회관에서 열린 11월의 국내 대회에서 녹음된 연설들을 들었을 때에 그 거대한 대회의 영의 얼마가 흡수되었다. 공개 강연에 115명이 참석하였다. 그 대회와 완공된 왕국회관은 ‘리베리아’의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새로이 두드러진 위치를 점하였다.

‘시노우’에 좋은 소식이 전해지다

‘포스트’ 부부는 ‘뉴우요오크’ 시에서 열린 1953년 대회에서 돌아와 ‘시노우’ 군 ‘그리인빌’을 새로운 선교 임명지로 받았다. ‘포스트’ 부부는 ‘그리인빌’이 비옥한 밭임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많은 관심자들은 장시간 일하고 밤에 여행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 대부분은 거의 혹은 완전 문맹자였다. 그들을 더욱 빨리 발전시키기 위하여 그는 어떻게 할 수 있었는가?

아침 일찍 연구하는 것이 어떠한가? 관심자들은 그 생각을 좋아하였다. 그래서, 새벽 6시 정각에 평균 열 다섯명이 선교인 집에 와서 성서 연구를 하고 그 다음에 세속 일터로 갔다. 이 마련이 관심자들을 힘주고 그들의 읽는 능력을 발전시키는 데 효과가 있었다.

1954년 6월에 ‘그리인빌’에서 열 두명의 전도인이 회중으로 조직되었다. 이것이 ‘리베리아’의 네번째 회중이었다. 이 지역에서의 관심의 성장은 1954년 기념식 참석자 수로 나타났다. 1953년에는 단지 118명이 참석한 데 비하여, 1954년에는 240명이 참석하였다.

곁들여 말한다면, ‘그리인빌’의 선교인 집은 돌기둥 위에 세웠고 옆으로 함석을 댄 작은 집이었다. 때때로 선교인들은 무엇인가가 집의 벽을 통과하여 지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얼마 후에 안 일이지만, 그것은 같은 지붕 밑에서 평화로이 공존한 기다란 뱀이었다!

“신세계 사회의 활동”

‘리베리아’ 사람들이 여호와의 조직을 인식하도록 돕는 데 참으로 효과적인 도구는 ‘왙취 타워 협회’가 제작한 “신세계 사회의 활동”이라는 영화였다. 여호와의 증인의 세계 본부와 다른 곳에서의 활동을 묘사한 이 영화는 1954년부터 상영되기 시작하였다.

‘그리인빌’에서 400명이 어느 목요일 저녁에 그 영화를 보기 위하여 왔다. “혼자 보기 아깝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토요일 저녁에 순회 감독자가 개인 연구를 하고 있는데, 문을 ‘노크’하는 사람이 있었다. “와서 영화를 보여 주세요. 사람들이 모두 기다리고 있읍니다. 준비는 다 되었읍니다. 꼭 오십시오!” 그가 도착해 보니 500여명이 회관을 메우고 있었다. 이번에는 그들이 처음보다 더욱 영화를 즐겼다. “[화면에 나오는] 이 사람들은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하고 있읍니다”라는 말이 여러 번 반복되었다. 한 존경받는 사람과 그의 가족은 이 영화를 보고 깨달은 바 있어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다. 얼마 후 그 아버지는 왕국 소식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또 다른 지방에서, 한 종교 단체의 지도자가 이전에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서적을 불태우라고 신도들에게 충고했었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그는 “신세계 사회가 이런 것인지를 미처 몰랐다”고 말하였다. 그후로 그는 성서 진리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또 다른 관심자는 매우 감명을 받고 “금년이 지나가기 전에 침례를 받고 여호와의 증인이 되어야겠다”고 선언하였다.

‘하르벨’에서 2,000여명의 군중이 두개의 대형 화면에 비친 그 영화를 구경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신세계 사회가 행하고 있는 사업에 놀라움을 표명하였다. 그 후 몇 달 동안, 그곳 회중은 급성장을 보았으며 이 훌륭한 영화는 그러한 발전에 확실히 도움이 되었다.

수도 ‘먼로비아’에서는 이 영화의 첫 상영을 보기 위해 500명이 왔으며, 전도인들은 가정 성서 연구를 하는 연구생들이 그 후로 현저히 증가된 관심을 보였다고 보고하였다. 그 영화는 많은 지역에서 상영되었으며, 1년 이내에 거의 6,000명이 그 영화를 관람하였다.

첫 순회 대회

‘카카타’와 ‘하르벨’에서 회중들이 기능을 수행하게 되자, 이제 1954년 4월 ‘카카타’에서 순회 대회를 마련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흥미롭게도 전체 순회구의 67명 전도인 중 40‘퍼센트’가 이 대회에서 침례를 받았다. 즉 새로운 사람들이 모두 26명이었다! 공개 강연에는 170명이 참석하였다. 또한 순회구 내에 있는 전도인 대다수가 서로 만난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하고 유익한 순회 대회였으며, ‘리베리아’에서 열린 최초의 순회 대회였다.

이 나라의 다른 쪽 끝 즉 ‘팔마스’ 갑 안팎에 있는 왕국 선포자들은 어떠한가? 이들 36명은 바로 다음 달 ‘팔마스’ 갑에서 약 72‘킬로미터’ 떨어진 ‘웨보’에서 열린 그들의 최초의 순회 대회에 참석하라는 초대를 받았다. ‘웨보’로 가는 여행중에는 ‘카발라’ 강을 따라 ‘커누우’를 이용한 여행이 포함되었으며, 이것은 예상보다 위험하였다. 그러나 대회에 참석할 수 있었던 형제들은 65명이 공개 강연을 듣기 위하여 온 것을 알고 즐거워하였다. 이것은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왜냐 하면 ‘웨보’에는 증인은 물론 관심자도 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승리의 왕국” 대회

1955년의 특기할 만한 행사는 협회 ‘브루클린’ 사무실의 ‘M. G. 헨첼’ 형제와 북‘로디지아’(현재의 ‘잠비아’) 지부의 ‘해리 아노트’ 형제의 도움으로 ‘먼로비아’에서 열린 “승리의 왕국” 대회였다. 다시 백년제 기념관이 계약되었다. 참으로 흐뭇하게도, 551명이 “멀지 않은 세계 정복—하나님의 왕국에 의하여”라는 자극적인 공개 강연에 참석하였다. 열 아홉명이 침례를 받았다.

‘헨첼’ 형제가 ‘노워’ 형제와 함께 이곳을 방문한지 불과 3년 후인 1952년에, 이곳에 지부 사무실이 설립되었다. 그 때에 11명의 ‘파이오니아’를 포함하여 53명의 전도인이 있었다. 그들이 그 삼년 동안 봉사한 결과는 어떠하였는가? 기쁘게도 이제 18명의 ‘파이오니아’를 포함하여 162명이 전도하고 있었다. 단지 두 회중이었던 것이, 이제 다섯 회중으로 늘어났다. 참으로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사업을 축복하고 계셨다.

새로운 선교 임명지를 통하여 그리고 자격을 갖춘 지방 형제들을 특별 ‘파이오니아’로 사용함으로써 진리를 임명되지 않은 지역에 이르게 하려는 계획이 그 때에 세워졌다. 우리의 출판물을 ‘바사’어로 번역하는 일도 시작되었다.

‘그방가’로

‘와킨스’ 형제 자매는 1956년 초에 새로운 임명지로 갔다. 그들은 ‘먼로비아’에서 약 201‘킬로미터’ 떨어진 지방의 중심지인 ‘그방가’로 갔다. ‘그방가’의 원주민들은 ‘크펠레’어를 말하였지만,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영어도 이해하였다. 1956년 4월에는 이미 두명의 새로운 전도인이 ‘그방가’에서 야외 봉사를 보고하고 있었다.

1955년에 정부는 내륙 지방의 부실한 도로를 개량하여 좋은 고속 도로로 만들기 시작하였다. 이 도로가 ‘그방가’를 통과하였으며 마침내 ‘리베리아’의 다른 쪽 끝인 ‘팔마스’ 갑과 연결될 것이었다. 그 공사가 시작되었을 때에 건설 회사에서 ‘플리이보’ 출신 ‘윌리엄 데이비드’를 고용하였다. 작업 시간이 끝난 후, 이 형제는 시간을 선용하여 모든 동료 인부들에게 그리고 그 고속 도로를 따라 읍민들과 부락민들에게 전파하였다.

얼마 후, 완강하게 반대하던 한 사람을 포함하여 그의 동료 인부 두 사람이 그와 합세하였다. 도로가 내륙 지방으로 들어감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처음으로 왕국의 소식을 받았다. 참으로, 도로 공사 인부들 중에 있던 형제들이 많은 관심자들을 도와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로 들어서게 하였다.—마태 7:13, 14.

고속 도로가 ‘그방가’에까지 완성되자, ‘와킨스’ 형제가 매달 한번 정도 ‘먼로비아’에 오곤 하였으며, 도중에 관심자들을 방문하였다. 그리하여 이 나라의 주요 고속 도로를 따라, ‘먼로비아’에서 거의 644‘킬로미터’되는 ‘푸투’에 이르기까지 여호와의 이름과 목적이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거기에서 도로 공사가 한동안 중지되었다.

‘와킨스’ 형제 자매는 ‘그방가’에서 많은 듣는 귀를 발견하였다. 그러나 멀리 있는 지역에 더 쉽게 가기 위하여 ‘와킨스’ 형제는 ‘오오토바이’를 구입하였다. 오래지 않아 그는 주위의 모든 도시와 마을에서 낯이 익은 사람이 되었다. 관심자가 많은 한 곳은 ‘세잉베이’ 시였다. 한 “주교”는 이 겸손한 사람들의 영적 조언자였지만, 그는 최근에 돈을 가지고 자취를 감추고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와서 우리를 가르쳐 주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을 너무 사랑합니다.” (‘리베리아’인들은 “매우”라는 말을 그렇게 표현한다.) 이러한 말로 선교인들은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주민 중 아무도 글을 읽을 수 없었으므로, 매주 여러 가지 제목으로 강연이 행하여졌고 다음에는 복습이 있었다. 얼마 후, 이 사람들 중 상당수가 진리를 받아들이고 좋은 소식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하루는 ‘와킨스’ 형제가 한 젊은이에게 죽은 사람을 위한 희망을 설명하는 소책자를 제공하였다. 그 소책자를 반갑게 받은 그 사람은 선교인에게 앉으라고 권하고 그와 함께 그 소책자를 절반 가까이 읽었다. 이 젊은이와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고 진리에 대한 그의 갈망이 충족되기 시작하자 그는 말할 수 없이 기뻐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보이지 않는 임재에 대한 지식을 알고 너무나 감격하여, 실제로 그 제목을 다루는 장의 전체를 암기하였다!

진리의 논리성에 매우 압도된 그는 열심히 연구를 하고 왕국 전파 사업에 전념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이것을 기뻐하지 않았다. 그 아버지는 아들이 출세하여 가족에게 유익을 주기를 바라는 희망에서 아들의 학비를 조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아들에게 재정적 지원을 완전히 끊음으로써 전파 사업에 대한 그의 열심을 식히려고 하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그러한 반응으로 아들은 여호와를 섬기려는 결의를 어느 때보다도 더욱 굳게 하였을 뿐이다.

그 후 이 아들은 열병으로 몹시 아프게 되었고 허약해졌다. 그러나 그는 아들을 그 지방의 점장이에게 보내어 병의 원인을 알아내려는 아버지의 의도를 거절하였다. 아들은 자기의 병이 어떤 조상이나 마법으로 인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버렸다. 그러나 그 젊은이는 어찌어찌하여 먼 곳에 있는 병원에 가게 되었다. 며칠 후, 아버지는 그 때쯤 아들이 죽었으리라 생각하고 시체를 돌려 보내라는 전갈을 보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이 마귀 숭배에 의지하지 않고 회복되고 있음을 알고는, 자기 아들이 섬긴 하나님에게 능력이 있음을 인정하였다. 그 때부터 그 노인은 피에 관한 하나님의 법을 지키기 시작하였다. 이 젊은이가 ‘조셉 라블라’였으며, 그는 1957년 4월에 침례를 받았다. 이듬해 그는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였다.

‘그방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작은 읍에서 어느날 ‘와킨스’ 형제는 그가 소책자를 전한 한 젊은이를 재방문하였다. 형제의 ‘오오토바이’ 소리를 듣고 젊은이의 아내는 “우리를 희생의 제물로 잡아 가려는 의도가 아니고서야 우리같은 사람을 낯선 사람이 찾아 올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하고 생각하고 ‘카사버’ 숲으로 도망하였다. 다음번에 선교인들은 걸어서 도착하였고 무심히 있던 아내를 만났다. 선교인이 우정적으로 인사하자 그 여인은 도망하지 않았다.

통역을 사용하여 ‘와킨스’ 형제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좋은 농지를 맡긴 ‘위대한 추장’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그들이 그 ‘추장’과 그 법을 잘 따르기만 하면 그 농지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불행히도 그 추장을 무시하였고 그 땅을 고통으로 채웠다. 이제 인정많은 ‘추장’은 멀지 않아 말썽꾸러기들을 제거하고 그의 소유를 인식 깊은 사람들에게 주실 것이라고 ‘와킨스’ 형제는 설명하였다.

그 비유를 듣고 이 시골 여자는 처음으로 창조주의 목적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또한 그의 이름이 여호와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 위대하신 천적 ‘추장’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들을 위한 웅대한 미래에 대한 희망은 그 여자의 마음을 뜨겁게 하기 시작하였다.

얼마 후 이 부부는 성서를 연구하고 그리스도인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으며, 진리를 알고 그 여인은 더욱 더 행복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래가지 않았다. 왜냐 하면 남편이 “재물”을 추구하여 다른 곳으로 이사하기로 결정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른 여인에게 관심을 가졌고 아내를 학대하였고, 여호와의 증인과 접촉하는 것을 금하였다. 그러나 그 여인은 굽히지 않았으며, 부모와 마을의 연로자들 앞에서 “여호와께서 나에게 가르쳐 주신 것을 여러분 중 아무도 나의 생애 동안에 가르쳐 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나는 중지할 수 없어요. 나는 이제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있어요!” 하고 선언하였다.

그 여자의 부모는 그 젊은이에게 결혼 지참금을 돌려 주었고, 남자는 “이 여자는 어떠한 사람과도 결혼할 자유가 있음. 나의 이름이 이 여자와 더 이상 관계가 없음” 이라는 해방 증서를 썼다.

버림받은 이 여자는 이제 서둘러 여호와의 백성과 다시 연합하였고 어느 잊을 수 없는 날, 그는 전에 무서워 피한 일이 있던 연로한 선교인을 따라 전파 사업에 참여하였다. 오래지 않아 그는 침례를 받았고 후에 형제와 결혼하였으며, 얼마 후 그는 남편과 함께 특별 ‘파이오니아’가 되었다. 그는 자녀를 낳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이 그리스도인 여자 ‘그방구 우오아’는 영적 의미의 “자녀”를 산출하는 데서 커다란 만족을 얻고 있었다.

‘와킨스’ 형제 자매는 그들의 임명지 ‘그방가’에서 커다란 기쁨을 누렸다. 1957년 4월에는, 열 일곱명의 왕국 전도인들이 그곳에서 야외 봉사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초에 한 회중이 조직되었으며, 그것이 ‘리베리아’의 여덟번째 회중이었다.

선교인들이 ‘보미’ 구릉 지대로

1955년 12월 말에 두 선교인이 예기치 않게 ‘갬비아’로부터 도착하였다. 그들은 원래 남‘아프리카’ 출신인 ‘레네레룩스’와 ‘매튜 피에나르’였다. 우리는 인구가 조밀한 철광 지대인 ‘보미’ 구릉 지대를 그들이 개척하도록 마련하는 것을 기뻐하였다.

‘레네레룩스’는 신속히 ‘리베리아’인들과의 우정적 기초를 놓았다. 그는 종종 관심자들과 함께 부엌에 앉아서 ‘리베리아’식 “갈비”를 먹고 요리하는 방법을 배웠다. ‘리베리아’ 습관의 양식과 이유를 직접 경험하며 배운 것이다. 그는 그들의 특성에 적응하였고 많은 부족민의 신임을 얻었다. ‘리베리아’ 원주민들이 그에게 어디 태생이냐고 물으면 그는 ‘아프리카’ 태생이라고, 대답하곤 하였다. 이러한 대답에 보통 그들은 뛸 듯이 기뻐하였다. 그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아프리카’인이었던 것이다!

몇해 후 ‘레룩스’ 형제는 내륙 지방의 순회 감독자로 임명되었다. 대회가 되었을 때에 그와 몇몇 다른 형제들이 숲속에 가서 식사 준비를 위한 사냥을 하였다. 그들이 잡는 것—원숭이, 고슴도치, 사슴 혹은 너구리—이 결국 맛있는 ‘스튜우’가 되었다.

1956년 10월에 ‘보미’ 구릉 지대의 첫 왕국 전도인들이 야외 봉사를 보고하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3월에는 그곳에 한 회중이 형성되었다. 얼마 후, 두명의 열성스런 자매—‘에스더 브루얼’과 ‘자미마 플라우어스’—가 이 작은 회중에서 ‘파이오니아’를 시작하였다. ‘브루얼’ 자매는 1970년에 사망하였지만, ‘플라우어스’ 자매는 ‘보미’ 구릉 지대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로 계속 봉사하였다.

‘그리인빌’에서 지역 대회가 열리다

1956년 12월까지 전국 대회는 모두 수도 ‘먼로비아’에서 열렸다. 이제 수도 이외의 지역에서의 첫 전국 대회가 열리도록 마련되었다. ‘먼로비아’에서 해안을 따라 내려가 대서양과 접한 곳인 ‘시노우’ 군의 ‘그리인빌’에서 열리기로 되었다. ‘그리인빌’과 수도를 연결하는 도로가 없었기 때문에, 비싼 항공편을 이용하거나, 약간 비정기적인 운항을 하는 작은 선박을 이용해야 하였다.

‘먼로비아’에서 오륙십명의 참석자들을 태우고 떠난 배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유물인 평평한 밑면을 가진 상륙선이었다. 그 이름은 “주니어”호였다. 거의 사흘걸린 그 여행은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많은 전도인들은 이전에 배를 타 본 일이 없으며 선편 여행에 대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배는 물속에 깊이 잠겼으며 뒤집힐 것만 같았다. 냄새나는 석유 ‘드럼’통이 많이 실려 있었으며, 다음에는 비가 와서 모두들 비좁은 방에서 비를 피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거의 모두 배멀리를 했다. (다행히도, 대회가 끝나고 ‘먼로비아’로 돌아올 때에는 참석자들이 큰 배를 탔기 때문에 비교적 편안하였다.)

우리는 대회가 시작되기 두시간 전에 대회장에 도착하였으며 우리 모두는 수면 부족 상태에 있었고 옷이 더러웠고 몸이 불편하고 배고픈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첫날 회기 끝에 모두는 다시 활기를 찾았다. 이러한 교통상의 불편 때문에 이 나라의 246명 왕국 선포자 중 단지 80명만이 이 훌륭한 대회에 참석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리인빌’의 시민들은 좋은 반응을 보였고 190명이 공개 강연에 참석하였다.

공개 강연 참석자 중에는 감독교회 학교의 교장인 교직자가 있었다. 그가 공개 강연에 참석한 선생 중 또 한 사람인 ‘토머스 J. 윌리엄스’를 보자 그는 이튿날 즉시 그를 파면시켰다. 이 관심가진 선생은 결국 진리 안에 들어 왔으며 2년 후에 침례를 받았다.

이번에는 ‘콜라훈’으로!

1956년 6월에 ‘바요 그본도’가 ‘리베리아’인으로서 최초의 특별 ‘파이오니아’로 임명되었다. 처음에 그는 ‘하르벨’에서 사업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1975년 2월에 그와 그의 아내 ‘티티’는 ‘먼로비아’에서 거의 483‘킬로미터’ 떨어져 있고 ‘시에라리온’과 ‘기니아’의 국경이 서로 맞대고 있는 이 나라의 구석진 곳에 있는 새로운 임명지 ‘콜라훈’으로 떠났다. 그들은 방금 특별 ‘파이오니아’로 임명을 받고 ‘하르벨’ 회중에서 온 또 다른 형제인 ‘보보 탐바 세이세이’ 형제와 함께 일하였다.

‘콜라훈’은 ‘그반디’인들 사이에 있는 큰 도시였다. 그러나 여기에도 ‘키시’ 부족민들이 많았으며 성서 진리의 관심자 대부분은 그들 가운데서 발견되었다. 그 해가 끝나기 전에 새로 임명된 또 다른 특별 ‘파이오니아’이며 ‘키시’인 출신인 ‘팔라 닐’이 이제 ‘키시’ 마을에 더욱 더 주의를 돌리고 있는 다른 형제들과 합세하였다. 1957년 12월에 ‘콜라훈’에 작은 회중이 조직되었다. 그러나 ‘키시’ 마을인 ‘타르마’에서 관심자들이 많이 발견되었으므로 한 ‘파이오니아’는 그곳을 임명지로 받았다.

이 지역의 대부분의 마을들은, 마을에서 “표범”이라는 말을 하지 않고 물은 반드시 머리에 이고 다니는 등 미신적인 법규와 금기를 지켰다. 그러나 더욱 더 많은 부락민들이 진리를 배우게 되자 그들은 더 이상 어수룩한 사람들의 법규에 얽매이기를 원치 않았다.

예를 들면 이러하다. ‘타르마’에서는 농장에서 절구를 가져오는 사람들은 그것을 머리에 일 수 없었다. 그것을 땅에 내려 놓고 굴려야 했다. 만일 이 법규를 어기면 그 도시에 사는 여인들이 모두 자녀를 낳지 못한다고 마을 사람들은 믿고 있었다. 만일 여자들의 비밀 사회 숲 근처에서 구한 나무로 밥을 지으면, 배가 불러 죽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절구를 머리에 이고 마을로 들어온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 해산을 하며 그 법규는 허물어진다. 형제들은 금지된 지역 근처에서 땔 나무를 구하여 그것으로 밥을 짓지만 아무도 죽지 않는다. 또 다른 법규가 무너진다!

그 후, 이웃 사람들이 숯을 구하러 특별 ‘파이오니아’의 집으로 오곤 하였다. 그는 한 연로한 여인에게 “금지 구역에서 해 온 나무에서 난 숯인데 두렵지 않으세요?” 하고 질문하였다. 그는 “염려마세요. ··· 그런 따위 생각은 모두 버렸거든요!” 하고 대답하였다.

어떤 족장들은 기회만 있으면 하나님의 종들을 괴롭혔지만, 사람들은 여호와의 조직으로 모여들었다. 그 결과로, 1958년 8월에 ‘타르마’에 한 회중이 조직되었다.

종종 원칙에 대한 충성이 물질적 혜택의 상실과 관련될 때 진리에 대한 이 새로운 형제들의 사랑이 시험을 받았다. 순회 감독자가 ‘릴리오니’ 마을을 방문하였을 때, 사람들이 수군대고 있었다. 누가 죽었는가?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그보다 더 나쁜 일이 있었다. 세 아내를 거느렸던 일부다처자가 두 아내를 내보내며 온전한 자유를 주었던 것이다. 더우기, 그는 그들을 아내로 살 때 지참금으로 지출한 300‘달러’를 요구하지 않았다. 전례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한 장본인은 ‘데이비드 사아’였으며, 그는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던 것이다.

‘데이비드 사아’는 정기적으로 그리스도인 집회에 참석하였으며, 그의 가족을 돌보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가족도 그와 함께 다녔으며, 끝의 아기는 어머니의 등에 업혀 따라 다녔다. 이보다 앞서는 촌장직을 사임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그리스도 예수에 의한 하나님의 왕국을 섬기기를 원합니다. 나는 사람이 두 가지를 섬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읍니다. 촌장으로 있으면 나는 하나님의 왕국과 조화되지 않는 일을 해야 할지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은총을 상실할 수 있읍니다. 일반 노동자가 되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의 승인을 받는 것이 나에게는 더 좋습니다.”

이 외로운 형제는 마을 사람들이 산에 대고 죽은 조상들에게 간청하고 공경하는 제사를 드릴 때 함께 행동하지 않았다. 다음에 농사철이 왔다. 사람들은 모두 그들의 논에 평상시와 같이 부적 단지를 넣기 시작하였다. 논을 보호하고 풍작을 바라는 희망에서이다. 우리 형제는 그 일도 하지 않았다. 모두들 그가 미쳤다고 말하였다. 누가 그를 보호하겠는가? 쌀 한톨 얻지 못할 것이라고 모두들 말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만일 여호와께서 나를 축복하시어 많은 쌀을 주시기를 원하시면 그렇게 하실 것이고, 그렇지 않을지라도, 모르는 신에게 제사를 드리거나 의지할 수는 없읍니다.”

여러 달이 지나 벼를 추수할 때가 되었다. 누구의 논에서 가장 많은 수확이 있었는가? 우리의 형제 ‘데이비드 사아’의 논에서였다! 여호와께 찬양이 돌아갈찌어다! 마을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다른 지방의 사람들도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하러 왔다. 그들은 “과연, 여호와는 당신을 축복하실 수 있구려. 제사도 안드리고 논에 부적 단지도 넣지 않았는데 아무 해를 입지 않다니? 당신의 벼를 보니 놀랍구려! 우리는 그 모든 일을 했는데도 더 나을 것이 없지 않소?” 하고 말하였다.

사람들의 태도는 달라졌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적의를 가지고 대하지 않았다. 한 때 반대하던 ‘사아’ 형제의 아우도 이웃 마을에서 증인을 만나 여호와에 관하여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에 깊은 존경을 보였다.

‘키시’ 지방에서의 발전

1958년 7월에 ‘바오 그본도’와 ‘팔라 닐’에 즐거운 일이 있었다. 그들은 ‘뉴우요오크’ 시에서 열리는 성의 국제 대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특별 ‘파이오니아’ 임명을 떠났다. 그 후, 그들은 32기 ‘길르앗’ 학교에 참석하였다.

‘그본도’와 ‘닐’은 1959년에 ‘길르앗’에서 돌아오자마자, 그들이 필요한 ‘키시’ 지방으로 임명되었다. ‘닐’ 형제는 새로운 지역인 ‘림바바’로 파견되었다. 1960년 중반에 또 한 회중이 조직되었다.

1960년 10월에 ‘키시’와 ‘반디’ 지역에 있는 세 회중을 위한 순회 대회가 열렸다. 삼년간의 전파 활동 후에, 55명의 전도인과 10명의 ‘파이오니아’가 있었다. 그러나 관심자들이 많다는 것은 공개 강연에 291명이 참석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알 수 있었다. 스물 두명이 그 대회에서 침례를 받았다.

이 기간중에 ‘타르마’의 형제들은 그들 자신의 왕국회관 건립을 마련하고 있었다. 종족 당국자들은 건축을 중지 혹은 방해하고자 시도하였지만 효과가 없었다. 일년 동안 한 형제는 나무를 자르고 톱으로 켜서 판자를 만들었으며, 나머지 형제들은 그 형제의 벼를 심고 돌보고 추수하여 주었다. 다음에 판자를 차도까지 멀리 운반하여 팔았다. 그 돈으로 ‘시멘트’와 물결 모양 골이진 함석을 샀고 건축 현장까지 머리에 이고 운반하였다. 자진자들은 기초를 놓고 다음에 약 오십명의 전체 집단이 진정한 열심을 가지고 건축을 시작하였다. 불과 약 사일 후에 완공을 보았다. 놀란 관찰자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의 말은 힘이 있다” 하고 감탄하였다.

문맹 퇴치

문맹은 ‘키시’ 사람들과 ‘그반디’ 사람들 사이에 커다란 문제였다. 전체 마을에서 글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도 있었다. 그러나 좋은 소식에 대한 관심은 어디에서나 좋았다. 예를 들면, 50명이 사는 한 마을은 자기들에게 와서 가르쳐 줄 사람을 부탁하였으나 보낼 만한 자격있는 사람이 없었다. 글을 읽을 수 있는 형제들에게는 이미 가르쳐야 할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키시’ 형제들과 ‘그반디’ 형제들이 자기들의 언어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을 배우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였다. ‘반디’어로 「요한복음」이 발행되어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리베리아’에는 ‘키시’어로 된 성경 부분이 없는 것 같았다. 후에 알게 된 것이지만, ‘기니아’에서 사용되는 ‘키시’어로 성서의 많은 부분이 발행되어 있었으며 그 언어는 ‘리베리아’에서 사용되는 ‘키시’어와 약간 달랐다.

당시 순회 감독자로 봉사한 ‘르네레룩스’의 도움으로, 형제들은 그들 자신의 ‘키시’어와 ‘그반디’의 입문서를 창작하였다. ‘키시’ 입문서는 ‘먼로비아’의 문공부에서 우리를 위하여 인쇄하여 준 삽화가 들어 있는 훌륭한 책이었다. ‘그반디’어 입문서는 ‘왙취 타워 협회’ 지부 사무실이 등사판으로 인쇄하였다. 이러한 보조 서적을 받은 후에, 형제들은 열심히 읽기 공부를 시작하였다. 1962년 8월까지는, 47명의 ‘키시’ 형제들과 ‘그반디’ 형제들이 그들의 언어를 읽을 줄 알게 되었다! ‘키시’ 사람들은 야외 봉사에서 사용할 수 있는 ‘키시’어 전도지와 「이 천국의 기쁜 소식」 소책자를 받게 될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러한 간행물의 원고가 협회의 ‘브루클린’ 본부에 보내져 인쇄될 수 있게 하였다.

‘카카타’에서의 기 문제

1957년에 ‘카카타’에 회중이 약 2년간 기능을 수행한 후에 성실의 시험이 있었다. 한 공립 학교에서 어느 날 아침, 교장은 “여기에 여호와의 증인으로서 기에 경례하지 않을 학생이 몇명인가?” 하고 질문하였다. 여덟명의 학생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교장과 선생들은 격분하였다. 그들은 그 학생들을 군대에 넘겨 스물 다섯대의 채찍질을 가하고 다음에 경례하게 하도록 시장을 설득시키려고 하였다. 시장은 이렇게 말하면서 거절하였다. “이 나라에는 내가 이렇게 하도록 권한을 주는 법이 없읍니다. 여러분이 그들의 동기가 사악하고 정부를 반대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는 한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법이 이 나라에는 없읍니다. 그러나 그것이 순수하게 종교적이라면, 헌법은 모든 사람에게 숭배의 자유를 허락합니다.”

그러자 학교 당국은 즉시 형제들을 퇴학시켰다. 친척들과 친구들 및 그 지방의 거의 모든 사람이 그들을 비난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들은 교육을 거절하는 바보들이야. 고생문이 훤하다. 너희들은 취직도 못하고 이 나라에서 아무 쓸모도 없어.” 퇴학당한 학생들 대부분은 ‘파이오니아’를 하였다. 후에 그들 중 세 사람—‘존 로버어츠’, ‘새뮤얼 브라운’ 및 ‘차알스 데이비드’—은 특별 ‘파이오니아’가 되었다.

“생명을 주는 지혜” 대회

1957년 이 전국 대회는 12월 18일부터 22일까지 ‘팔마스’ 갑의 ‘하르퍼’에서 열렸다. ‘팔마스’ 갑에서 그런 대회는 처음이었으며, 이 나라 291명의 형제 중 약 90명의 형제들이 참석할 수 있었다. 전년도에 ‘그리인빌’에서 열린 대회와 비슷하게, ‘먼로비아’에서 참석자들은 배편으로 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대형 독일 화물선이 빠른 철야 여행으로 그들을 갑판에 싣고 수송해 주었다. 참석자들은 노래를 불렀고, 갑판에서 「파수대」 연구를 가졌으며, 알맞은 시간에 대회 도시에 도착하였다.

‘팔마스’ 갑의 야자수 늘어선 해안이 잘 보이는 새로운 신축 행정부 청사가 여호와 하나님의 “생명을 주는 지혜”를 듣는 훌륭한 장소가 되었다. 여덟명이 침례를 받았다. 공개 강연에 166명이 참석하였으며 그후에 협회의 최신 영화를 구경하기 위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와서 참석자는 228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참석자들이 어떻게 ‘먼로비아’로 돌아갈 것인가? 모든 것은, 때맞추어 그 해안으로 오는 배가 마침 있느냐에 그리고 그 배가 실제로 갑판 선객을 태울 것인가에 달려 있었다. 형제들은 대회중에, 그 일을 여호와의 손에 맡기고 이에 대하여 걱정하지 않았다. 이렇게 하는 데는 참으로 믿음이 필요하였다. 왜냐 하면 ‘팔마스’ 갑에서 발이 묶인 사람들이 여러 주일 동안 배를 기다리는 예가 많기 때문이다.

공개 강연이 시작되기 직전에 해안으로 배의 희미한 윤곽이 보였다. 대회 회기가 끝났을 때는 운송 회사와의 타협이 이루어져 있었다. 월요일에 참석자들은 갑판장의 의자와 줄 사다리로 원양 항해선에 올랐다. 화요일 오후 늦게 모두 ‘먼로비아’로 돌아왔다. 이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로 간주되었다! 특히 ‘팔마스’ 갑의 주민들은 여호와께서 확실히 그분의 백성을 위하여 일하셨음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

누가 장례를 치러 줄 것인가?”

많은 사람들은 좋은 교회 장례식을 보장받는 외에는 별다른 이유없이 종파적인 교회에 다니는 것 같았다. 물론, 그들이 내야 할 돈을 지불하지 않으면 교회의 종은 그들을 위하여 울리지 않을 것이며, 그들을 위하여 교회 장례식이 없을 것이다. 가족들은 흔히 죽은 친척을 위하여 그 고인이 못다 치른 돈을 지불하도록 심한 압력을 받았다. 교회들은 신도들이 우리와 교제하는 것을 방해하는 데 이 관습을 내세워 “만일 당신이 여호와의 증인이 되면 아무도 당신의 장례식을 치러 주지 않을 것이요!” 하고 말하였다.

여러 해 동안 우리 형제들이나 벗들 중에 죽는 사람이 없었다. 상황이 이러한 데다가 우리가 새로운 사물의 제도에서 결코 죽지 않는다고 전파하자, 사람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죽지 않는 것이 사실이요?” 하고 질문하였다. 사람들은 조직에서 장례 마련을 해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우리와 교제하기를 꺼려하였다. 일부 형제들이 실제로 죽자 많은 외인들은 정규 장례식을 위하여 관이 왕국회관으로 옮겨지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표명하였다. 장례 행렬 맨 앞에서 구슬픈 음악을 연주할 악단을 고용하는 일반 관습을 따르지 않고 형제들 모두가 장지로 가는 대로로 향하여 갈 때 왕국 노래를 부르면서 관을 따라 갔다. 이 광경을 본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우리 성원을 장례식을 치러 주며 요금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시체 옆에서 밤샘도 하지 않고 이튿날 새벽까지 찬송가를 부르지도 않으며 술을 마시지도 않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교직자들은 보통 그러한 경우에 기꺼이 응하며 가족들이 그들이 아무리 가난할지라도 음료와 다과를 제공하게 되어 있다. 술이 많으면 많은 사람들이 올 것이고, 술이 적으면 “참 시시한 밤샘이었어!” 하는 불평이 대단하다. 그러한 경우에 사람들이 과음을 하고 부도덕한 일, 격렬한 시비, 싸움, 심지어는 살인 사건이 발생하는 예는 아주 흔하다.

증인이 죽으면, 고인이 밤샘을 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유가족이 진리 안에 있지 않을 경우 밤샘 문제로 커다란 논란이 생기는 예가 많다. 몇년 전에 열성스런 한 형제의 아내가 사망하였을 때, 그는 밤샘을 하려는 가족의 결의를 강력히 반대하였다. 그의 태도에 가족이 큰 감명을 받았기 때문에, 그 형제 자신이 사망하였을 때 가족은 자진적으로 밤샘을 하지 않기로 합의하였다. 이 일 자체가 그 형제에 대한 진정한 존경심의 훌륭한 표시였다.

경건한 결혼을 고수함

사업이 확장됨에 따라, 결혼 관계를 다루는 서류 제출이 필요하게 되었다. 특히 원주민 관습법에 따라 결혼하는 사람들의 경우에 깨끗하지 못한 점이 있었다. 부모들이 흔히 그들의 딸을 위하여 터무니 없는 결혼 지참금을 요구하였기 때문에 정부는 지참금이 여하한 경우에도 40‘달러’를 넘어서는 안된다고 규정하였다. 또한, 등록시에 당해 관청에서 증명서를 발행하도록 법률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대부분의 관청이 결혼을 등록시키거나 증명서를 발행하지 않았다. 지참금 문제를 충족시키고 결혼에 합의하는 문제는 남편에게 그리고 여자의 가족에게 맡겨졌다. 많은 사람들은 실제로 “시험 결혼” 마련에 따라 살았고, 그 경우 남자가 5‘달러’ 정도의 소액을 부모에게 지불하면 딸과 동거하는 특권을 얻는데, 이것은 지참금 전액이 지불되고 정식으로 여자가 남자에게 넘겨지기까지이다. 어떤 경우에는 자금이 필요한 긴급 사태가 발생할 경우 갑자기 지참금을 요구할 수 있기 위하여 지참금 전액을 원하지 않는 가족들도 있었다. 또 어떤 경우, 가난한 사람들은 여러 해에 걸쳐 조금씩 조금씩 지참금을 지불하였다.

형제들은 즉시 지참금을 완불하고 결혼 증명서를 받도록 충고를 받았다. 지방 관서에서 증명서를 발행하지 않을 경우에는 형제와 그의 아내가 결혼 선언서를 작성하여 제출하였다. 후에, 내무성은 모든 지참금 결혼에 대하여 증명서를 신속히 발행하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러한 증명서는 “큰 부인” 증명서라고 불리웠다. 만일 어떤 남자가 주장하기를 다른 남자가 자기의 큰 부인을 범하였거나 데려갔다고 하면, 그 죄에 대한 벌금은 100‘달러’이었다. 그러나, 고발자는 그가 자기의 둘째 아내가 아니라 큰 아내라는 것을 증명하는 “큰 부인” 증명서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여호와의 백성은 결혼 증거 서류의 옹호자라는 명성을 얻었기 때문에 ‘먼로비아’의 내무성에 단지 여호와의 증인만을 위한 특별 등록부가 있다. 이 나라의 어느 곳에 있는 형제이든지 증명서를 받을 수 없을 때에는, 지참금을 지불하였다는 증거를 제출하기만 하면 증명서를 받을 것이다.

좋은 소식을 전파하기를 원하는 관심자들은 흔히 결혼하지 않고 동거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많은 결혼이 행하여지기 시작하였다. 1957년에 결혼에 관한 우리의 견해가 ‘하르벨’의 화제거리였다. 어느날 오후에는 지역 감독자가 일곱쌍의 결혼 서약을 들었으며 ‘먼로비아’의 한 신문은 그것을 기사화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직접 보기 위하여 왔다. 사실, 242명이 그 의식을 구경하였다!

전진, 강화!

1958년 1월에 처음으로 ‘리베리아’ 전역에서 300명의 전도인이 보고하였다. ‘콜라훈’에서, ‘바요 그본도’가 격지읍을 여러 번 방문한 후에, 그곳 관심자들은 참으로 여호와의 증인이 되기 위하여 그들도 좋은 소식을 선포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나가서 그 지역 일대에 있는 사람들에게 증거하였다. 후에 한 위원회가 몇 ‘킬로미터’ 떨어진 왕국회관으로 여행하였으며, 놀란 형제들에게 하나님의 새 질서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데 186시간을 바친 스무명의 명단을 주었다!

성의 대회

1958년의 절정은 ‘리베리아’ 형제들이 ‘뉴우요오크’ 시에서 개최된 성의 국제 대회에 참석할 기회를 가진 것이었다. 1953년에는 그곳에서 개최된 신세계 사회 대회에 도합 다섯명이 참석하였었다. 이번에는 몇명이 참석할 수 있을 것인가? 스물 두명이었다! ‘먼로비아’의 주요 신문에 참석자 일행의 커다란 사진이 게재되었다. 후에, 이곳 여러 신문에 이 대회에 관한 아홉개의 별도 기사가 게재되었으며, 참석자들이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그들을 길에서 붙잡고 이 훌륭한 행사에 대하여 질문하곤 하였다.

1959년 2월 28일부터 3월 3일까지 ‘리베리아’ 국내에서 개최된 성의 대회에 대한 관심 또한 열렬하였다. 2월 마지막 주간에 참석자들이 단체로 도착하기 시작하였다. 내륙 지방에서 온 일부 참석자들은 참으로 많은 우정적인 형제 자매들을 만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처음으로 현대 도시를 구경하고 놀랐다. 열 세명으로 된 한 전도인 집단은 9일간에 걸쳐 ‘팔마스’ 갑에서 322‘킬로미터’를 도보로 여행하였으며 도중에 그들의 성서 서적을 모두 전하였고 도합 450명의 청중에게 열 다섯 차례 공개 강연을 행하였다.

토요일 오후에 대회가 시작되자마자 국무성의 한 관리가 접근하여 국제 연합의 한 기관이 대통령으로부터 그 건물을 우리의 대회의 마지막 날인 화요일까지 사용하기로 허락을 받았다고 말하였다. 이튿날 대통령은 이 결정을 확인하였다. 그래서 우리의 대회는 한 축구장으로 옮기지 않으면 안되었다.

일요일 오전 회기는 우리가 ‘안토이넷 터브먼 스타디움’을 사용할 준비가 완료되기까지 협소하기 짝이 없는 왕국회관에서 열렸다. 마침내, 오후에 장소가 개장되었고 커다란 기쁨 속에 대회는 새로운 장소로 옮겨졌다. 이에 앞서 대회 청소부는 솔과 비를 민첩하게 사용하여 좌석을 신속히 청소하였다. 의자가 부족하였지만 형제들은 ‘시멘트’ 계단에 손수건, 자리 및 천을 깔았다. 다섯 시간 동안의 전체 ‘프로’ 중 청중이 비상한 주의를 기울인 것도 그들이 대회 장소를 갖게 된 감사의 표시인 것 같았다.

그 날 월요일 저녁이 되자 ‘스피이커’와 ‘앰프’에 딸린 ‘퓨즈’만을 제외하고 운동장 내의 ‘퓨즈’가 모두 나갔다. 지부 감독자는 그 때에 연설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는 ‘스타디움’에 있는 악취 풍기는 모든 딱정벌레 떼에게 에워싸이게 되었다. 벌레들은 ‘스타디움’에 있는 유일한 불 즉 연사의 연대 위에 있는 불로 몰려 왔던 것이다. 그의 연설은 강조하랴 성가신 벌레를 막으랴 온통 몸짓 투성이였다. ‘브루클린 벧엘’에서 방문한 ‘노워’ 형제가 다음 연사였는데 그는 그 광경을 보고 방충제를 자신에게 넉넉히 뿌린 다음 연대와 ‘마이크’를 원고에 겨우 불빛이 비출 정도의 어두운 곳으로 옮겨 놓았다. 이렇게 하여 그는 벌레의 공격을 상당히 피하였다. 그의 연설이 끝났을 때는 다시 전기불이 들어왔고 청중은 관람석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화요일 저녁 우리는 원래의 대회장인 백년제 기념관으로 돌아 왔다. 거기에서 ‘노워’ 형제는 518명의 청중에게 “하나님의 왕국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낙원”이라는 강연을 하였다. 그는 더 많은 형제들이 읽고 쓰는 것을 배울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낙원을 잃은 때부터 낙원을 찾을 때까지」 라는 새 책은 많은 사람들이 단지 모든 그림의 의미만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모든 말을 읽도록 하는 훌륭한 자극제였다.

기록적인 수인 69명이 이 대회에서 침례를 받았다. 더우기, 이 모임은 ‘리베리아’ 증인들에게 매우 고무적이어서 1959년 봉사 연도 말에는 연속 여섯번째 신기록인 415명의 전도인이 보고하였고 그 수는 전년도 평균에 비해 42‘퍼센트’의 증가였다!

읽기를 배움

대회 후 읽기 문제에 이전 어느 때보다 많은 강조가 주어졌다. 회중에서 학급이 조직되었고 정부의 성인 문맹 퇴치국을 통하여 교과서가 구입되었다. 일부 노인들은 배우기가 어려웠지만, 상당히 정확한 집계에 의하면, 1962년에 끝난 5년 기간 동안에 총 109명이 회중의 읽고 쓰기반에서 읽기와 쓰기를 배웠다. 왕국 전파 사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데 이것이 커다란 도움이 되었음은 명백하다.

읽기에 대한 더 큰 관심은 1959년 한 순회 감독자의 이러한 보고에 나타나 있다. “내가 넉달 전에 이곳에 왔을 때 나는 일곱살 가량된 ‘메리’를 만났읍니다. 당시 그가 영어를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는 그와 말을 할 수가 없었읍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전도인이며, 성경 연설을 훌륭히 해내고 서적도 전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읽을 줄 압니다. 그는 광고 쪽지를 받아서 앞의 제목 뿐만 아니라 뒷면의 설명도 읽는 것을 보는 것은 즐겁고 놀라운 일이었읍니다.”

전도인 수가 삼년 동안에 두배가 되다

1961년 8월까지 ‘리베리아’의 전도인 수는 놀랍게도 620명이 되었다! 정확히 삼년 전, 1958년에는 301명이 야외 봉사를 보고하였다. 1958년의 기념식 참석자는 510명이었는데, 2년 후에는 1,396명으로 증가하였고, 1961년에는 경이롭게도 1,710명이 참석하였다.

1960년까지는 이 나라가 세개의 순회구로 나뉘어져 있었고, 대회는 전도인들이 먼 거리를 여행할 필요가 없도록 여러 곳에서 개최되었다. 사람들은 이러한 대회가 부족과 종족을 초월하는 것임에 유효하였다. 한 백인 순회 감독자는 이렇게 썼다. “어느날 밤에 오순절 교회 신도 한 사람이 나에게 와서 ‘여기에서 내가 보는 것은 이전에 내가 결코 보지 못한 광경입니다. 백인이 흑인 가정에 유숙하고 함께 교제하고 식사하는 것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선교사들이 있읍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와서 전파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의 가정에 와서 먹고 교제하고 잠자는 일은 결코 없읍니다. 우리는 종종 당신들을 비평하려고 하지만,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것이 한 가지 있읍니다. 즉 당신네들이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참으로 진리의 길입니다!’”

1958년부터 1961년까지의 3년 기간 동안에, 전도인 수는 두 배가 되었다. 그러므로 회중 수는 아홉에서 열 여덟으로 증가하였다. 더우기, 격지 집단수는 스물 혹은 그 이상이었다. 1962년 말에는 ‘리베리아’에서 일하는 ‘길르앗’ 학교 졸업생이 열 두명이었고, 그들 중 네명은 이 나라 출신이었다.

반대가 가중되다

특히 ‘콜라훈’ 근처의 ‘키시’ 말을 하는 지역에서는 족장들이 여호와의 증인들의 열성스러운 활동을 자기네들의 권력과 권위에 대한 위협으로 생각하였다. 형제들과 관심자들은 더 이상 부족 “주술”법을 지키거나 조상들에 대한 합동 제사에 돈을 지불하지 않았다. 양심적인 이유로 그러한 일에 응하지 않자 그들은 체포되어 부당한 처벌을 받았고, 최고 족장들에게 그리고 그 지방 최고위 행정관들에게 진정하기도 하여 그들은 일부 문제를 ‘먼로비아’의 내무장관에게 상신하였다.

솔직히 말해, 때때로 지방 관습의 문제를 필요 이상으로 문제 삼았기 때문에 긴장을 고조시킨 데에는 형제들에게도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었다. 일부 새로운 사람들은 그릇되게도 부락 노역을 거부하였다. 또한, 언제나 합당한 존경심과 온유함으로 당국의 질문에 대답한 것이 아니었다.—디도 3:1, 2.

‘림바바’ 지방에서 형제들은 그들끼리의 별도 사회를 이루기라도 하려는 듯이 그들의 집을 서로 가까이에 짓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그들을 성가신 부락의 법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수 있지만, 자치 단체를 형성하기 위한 행동으로도 간주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순회 감독자 ‘레네레룩스’는 긴장을 완화시키고 우리의 의도를 올바로 전달하기 위하여 그 지방의 관리들과 오랫 동안 토의할 필요가 있었다.

“선동적인 가르침”?

1963년 1월 중순에 ‘리베리아’ 상원은 공화국 내에서의 애국적 행사와 관련된 법을 수정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 법은 매일 기에 경의를 표하도록 규정하고 국가 및 그와 비슷한 노래를 부르는 것을 구체화하였다. 위반시에는 엄중 처벌을 받게 되어 있었다.

이와 거의 때를 같이 하여 정부 기관지인 「리베리아 시대」 1963년 1월 18일호는 제1면에 “정부, 선동적 가르침을 단속키로”라는 기사 표제를 대서특필하였다. 그 기사는 부당하게도 여호와의 증인들이 기에 대한 불경과 국가를 부르는 것을 금함으로써 국가에 대한 불충성을 가르친다고 주장하였다. 그 기사의 일부를 인용하면 이러하였다.

“최근에, 검찰총장의 말에 따르면, 국내 일각에서 이러한 이상한 교리의 가르침과 영향으로 하나의 사태가 발전되고 있었으나 정부는 그것이 표면화되기 전에 그것을 조사하였다.

“이러한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일련의 조치가 취해졌다. 대통령은 어떠한 개인이나 조직이 ‘종교 혹은 기타 신앙을 가장하여’ 국민이나 외국인으로 하여금 기나 국가를 무시하도록 선전하거나 가르치거나 영향을 주는 행위 혹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떤 사람에게 혹은 집단의 사람들에게 정부의 권위와 국가의 법에 대한 불경을 심어주는 행위를 선동죄로 규정하는 법을 승인하였다.”

다음에, 이러한 것들을 가르치는 조직이 해체하지 않으면 그 조직은 금지될 것이라는 법무성의 한 관리의 말이 인용되었다.

바로 그 날 이 신문의 대표자는 이러한 주장에 대한 우리의 대답을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리베리아’의 잘 알려진 그리고 높이 존경받는 시민이며 원래 ‘자메이카’에서 온 ‘G. 헨리 리케츠’ 형제가 한 서한을 제출하였다. 이 답신은 기 의식이 종교 행위이며(기 자체가 거룩한 것으로 간주되므로), 따라서 하나의 숭배 형식을 구성한다는 우리의 견해를 명시하였다. “가이사”에게 속한 것을 “가이사”에게 바친다는 우리의 입장을 변호하여 미국 대심원의 의견을 포함하여 여러 출처로부터 인용문을 열거하였다.—누가 20:25.

이 답신이 「리베리아 시대」지에 게재된 날 아침에, 지부 감독자는 ‘길르앗’ 학교 38기에 참석차 ‘뉴우요오크’ 시로 떠났고 그의 보조자인 ‘존 차럭’이 지부 사무실 책임을 맡았다. 한편, 검찰총장은 우리 형제들 대표단을 만나기를 거부한 후 대통령과 만날 약속이 이루어졌다.

‘리케츠’ 형제의 편지가 게재된지 나흘 후에, 법무성은 그 형제가 종교적 신앙을 가장한 선동적인 “가르침과 영향력”과 관련된 혐의로 구속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더 나아가서, 그들은 ‘리케츠’가 “여호와의 증인들은 단순히 그들 자신을 위하여 어떠한 나라의 기에도 절하기를 거부할 권리를 요구한다”고 말함으로써 국가의 권위에 도전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리베리아 시대」에 게재된 그 문제에 관한 사설의 제목은 “위험한 교리”였다.

‘터브먼’ 대통령과 검찰총장을 만나려는 노력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 때의 국내 분위기는 긴장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음모가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1월 초에 이 나라는 ‘토고’ 의 ‘실바누스 올림피오’ 대통령이 ‘리베리아’를 공식 방문하기 직전에 총격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그의 사진이 ‘먼로비아’ 전역에 나붙었고, 결코 실현되지 못한 그 방문을 위해 여러 가지 준비가 있었다.

이에 부가하여, 한 고위 군장성이 수감되고 ‘리베리아’의 국방장관이 해임되었다. 이 나라의 손꼽히는 명문교인 ‘리베리아 대학교’와 ‘커팅튼 대학’에 공산주의 씨가 뿌려지고 있다고 보도되었다. 전국에 행한 ‘라디오’ 방송에서, ‘터브먼’ 대통령은 만일 그러한 가르침이 즉각 근절되지 않으면 이들 학교를 폐쇄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정부를 전복하려는 전반적인 음모에 대한 이러한 의혹은 여호와의 증인들과 그들의 의심받는 “선동적인 가르침”에 대한 관용의 정신을 촉진하지 않았다.

‘콜라훈’에서 타격이 가해지다

1963년 2월 중순에 ‘콜라훈’에서, ‘터브먼’ 대통령은 행정 회의를 소집하였으며, 그 회의에서 행정 장관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한 불평을 털어 놓고 심지어 특별 파이오니아 ‘바요 그본도’가 그의 정부와 통치를 수립하고자 노력하고 있다고까지 주장하였다. 둘째 날 늦게, 대통령은 모든 증인들을 불렀다. 약 40명의 형제들이, 몰수된 두채의 집에 대해 ‘그본도’에게 보상하는 문제를 ‘터브먼’ 대통령이 토의할 것으로 생각하고 출두하였다.

그 회합에서, ‘바요 그본도’에게 “당신들 여호와의 증인들이 자체의 정부와 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사실인가?” 하고 질문이 있었다. 이에 대해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하나님의 왕국을 옹호하며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추종자들에게 그 왕국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읍니다. 동시에 증인들은 그 나라의 기존 정부를 인정하고 있읍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성서의 법과 원칙에 순종하며 그에 따라 생활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정부의 법에 순종하고 그것을 존중합니다.”

그러나, 증인들은 이제 밖으로 나가서 기에 경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긴장된 순간이었다. 많은 정부 관리들과, 사법부 요원, 전국의 족장, 교직자, 군대, 다수의 외국 외교관들이 참석해 있었다. 이러한 이름있는 사람들 앞에서 대다수의 형제들은 경례하기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고무 곤봉을 가진 군인들이 그들을 공격하였다. 그 후, 군인들은 형제들을 경례하도록 다시 데려왔으며 그들의 팔을 올리기 위하여 옆에 서 있었다. 확실히 이것은 자진적인 경례로 간주될 수 없었다.

다음에, 일부 족장들이 “말썽의 주동자는 ‘바요’이다.” 하고 주장하였다. 그 후 즉시 ‘바요 그본도’를 ‘리베리아’의 ‘시베리아’인 악명높은 형무소인 ‘벨옐’에서의 5년형에 처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그본도’는 매우 심하게 구타당하여 걷지를 못하였다.

후에, ‘바요 그본도’와 다른 사람들이 석방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석방되기 전에 국기 의식이 또 한번 있었다. 그 때에 있었던 일은 나중에서야 알려졌지만, 형제들이 심하게 구타당하고도 경례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었다.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나중에 알게 될 것이다.

‘차럭’ 형제는 대통령에게 형제들을 석방시켜 준 데 감사하는 무선 전보를 보냈다. 그들이 석방된 이유는 단지 그들이 경례를 했고 앞으로 국가의 법을 지키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라는 대답이 왔다. 대통령은 강제 경례를 지적한 것인가, 아니면 형제들이 실제로 경례를 하였는가? 우리가 ‘그방가’에서 지역 대회를 개최하였을 때 더 많은 사실을 알게 될 것이었다.

체포와 국외 추방

‘콜라훈’에서의 사건으로 다른 사건들이 잇따랐다. ‘로우어부캐넌’에서 ‘리치피일드 레미’ 형제는 이 나라의 장관으로부터 회의에 불리움을 받았다. 여기에서 그는 모든 활동을 폐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와 대리 지부 감독자는 그 문제 때문에 법무장관에게 갔으나 그는 그들의 말을 듣지도 않고 만나는 것도 거절하였다. 그러므로 ‘레미’ 형제는 ‘터브먼’ 대통령이 감리교회 대회에 참석하고 있을 ‘로우어부캐넌’으로 돌아왔다. 거기에서 ‘레미’ 형제는 기에 관한 우리의 견해에 대하여 대통령과 오랫 동안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결과로 ‘레미’ 형제의 체포와 국외 추방이 명령되었다. ‘레미’ 형제는 ‘시에라리온’인이었기 때문이다.

‘레미’ 형제는 군인들에게 구타당하였고 사흘이 넘도록 음식을 공급받지 못하였다. 그가 ‘먼로비아’로 연행되었을 때 그는 바닥에 인분이 덮여 있는 지하 감옥에 던져졌다. ‘시에라리온’ 대사에게 진정이 있었고 그리하여 중재의 손길이 있었는데, 특히 그가 그 나라의 수상의 사촌이라는 사실이 알려진 후에 그렇게 되었다. 일주일간 비인도적인 대우를 받은 후 그 형제는 병원으로 옮겨겼고 그의 추방이 연기되었다.

‘그방가’ 대회

1월 말에 ‘리케츠’ 형제가 체포된 후에, 법무성은 1963년 3월 8-10일에 ‘그방가’에서 열리도록 계획된 여호와의 증인의 종교 대회에 이의가 있는가에 대한 문의를 받았다. 법무성은 이의가 없다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그 대회에 대한 계획이 추진되었다. ‘그방가’는 그 나라의 내륙 중앙에 위치해 있었다.

대회 주간 초에 ‘M. G. 헨첼’ 형제가 도착하였다. 그와 ‘차럭’ 형제는 우리의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 ‘터브먼’ 대통령과의 회견을 마련하기 위해서 미 대사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마침내 회견이 3월 11일 월요일 오전 10시로 정해졌다는 소식이 접수되었다. 그래서, 두 형제는 ‘그방가’로 갔으며 지방장관 ‘새뮤얼 B. 쿠우퍼’의 집에서 유숙하도록 안내되었다. 이 관리는 우정적이었고, 협조적이었으며, ‘콜라훈’에서의 사건에 영향을 받지 않은 것 같았다.

대회를 준비할 때에, 형제들은 열심히 일하였으며, ‘프로그레시브’ 가의 끝에 있는 넓은 지역을 깨끗이 치웠다. 그들은 간막이 좌석들을 만들었다. 영어, ‘크펠레’어, ‘키시’어 및 ‘바사’어 회기가 있을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토요일 저녁에 ‘헨첼’ 형제는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는 문제에 관한 시기에 적절한 연설을 행하였다. (로마 13:1) ‘리케츠’ 형제가 그 전날 석방되어 일요일 아침에 도착하였다. 형제들은 즐거움을 나누었다. 그들은 이것이 모든 증인들을 한 데 모으고 기 문제로 시험하는 데 참여케 하기 위한 계획의 일부임을 알지 못하였다.

일요일에는 ‘그방가’로부터 온 많은 관심자를 포함하여 약 400명이 참석하였다. 그 날 아침에 토론된 일용할 성귀는 야고보 5:10이었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형제들아, 주[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그 성귀는 참으로 적절함이 증명되었다!

오전 10:30, 모인 그리스도인들이 “믿음과 선한 양심을 유지함”이라는 연설을 듣고 있을 때에, 인근 부대의 ‘워너’ 부관이 ‘쿠우퍼’ 지방장관으로부터의 편지를 가지고 대회장에 왔다. 그 편지의 일부 내용은 이러하였다. “여러분 신도들의 충성에 대한 일반 대중의 생각을 지워 버리기 위하여 본인은 다음과 같이 지시합니다. 즉 이 편지를 받자마자 여러분은 여러분의 대회에 온 신도들 모두를 부대 구내로 행진케 할 것이며 거기서 ‘리베리아’ 공화국의 기에 대한 충성을 표시할 것입니다.”

‘M. G. 헨첼’ 형제와 다른 두명의 형제는 그 지방장관을 만나기 위하여 대회장을 떠났다. ‘헨첼’ 형제는 미 대사관을 통하여 마련된 월요일 아침 약속대로 그가 대통령을 만날 때까지 어떠한 행동도 보류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지방장관은 이를 거절하고 군인들의 인솔하에 대회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부대 구내로 가도록 명하였다. 형제들은 대회장으로 돌아와서 급히 ‘스펜서 토머스’와 ‘프랭크 윌리엄스’를 ‘먼로비아’로 보내어 영국 및 미국 대사관에 그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관련된 이 사건에 대하여 알리게 하였다. 군인들이 여호와의 증인 모두를 수송하기 위하여 ‘바리케이트’를 치고 있었지만 두 형제는 성공적으로 빠져 나가 ‘먼로비아’로 갔다.

포로가 되다!

군인들이 ‘트럭’에 실려 왔다. 그들은 평화로운 대회를 어지럽히고 남녀 노소 모두를 한 데 모았다. 그리하여 약 400명이 도시 중앙을 통과하여 부대 구내로 갔다. 걸어가면서 그들은 왕국 찬양의 노래를 불렀다.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몰려왔다. 외국인들은 사진을 찍었다. ‘아프리카’인들은 놀란 눈으로 구경하였다. 군인들은 “조용히 해! 노래하지마!” 하고 소리쳤다.

부대 구내에 도착하였을 때 모두 깃대를 중심으로 둥글게 늘어섰으며, 외국 증인들이 앞에 섰다. 두번에 걸쳐서 부관은 자기가 원하는 바를 설명하였다. 아무도 경례하지 않았다. 그러자 부관은 “모두 감금시켜” 하고 명하였다. 군인들이 이제 형제들의 소지품—‘펜’, 안경, 가방을 포함하여—을 빼앗아 갔는데, 이 모든 일이 공적으로 행하여졌다. 그러나 후에, 돈, 시계 및 보석은 군인들이 약탈해 갔다. 네개의 창문없는 방이 증인들로 꽉찼다. 그 중 일부는 사실상 변소였다. 나머지 증인들은 위병소와 나란히 있는 담을 둘러친 작은 곳에 들여 보내졌다. 그들은 그 날 일요일 오후 약 6시까지 왕국 노래를 부르며 거기에 있었다.

그 때 군인들이 세대의 ‘트럭’에 실려 인근 부대로부터 도착하였다. 다음에 형제들은 돌격 자세를 취한 군인들이 옆에서 감시하는 가운데 구내로 다시 이끌려 왔다. 다시 기 앞에 섰지만, 단지 두 세명만이 타협하였다. 나머지는 발길에 채이고 주먹으로 맞고 ‘라이플’ 총에 맞으며 대로를 건너 들판으로 끌려 갔다. 이 가운데는 임신부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그들의 비명은 상당히 멀리까지 들렸을 것이다.

구두, ‘자켓’, ‘셔어츠’, 머리에 쓰는 것—이 모든 것을 벗기운 채 밤새도록 똑바로 앉아 있도록 강요되었다. 그들은 잠을 자거나 머리를 조금 기대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물은 어린이들과 아기들만을 위해서 허락되었는데, 이들 중 일부는 인근 진료소로 옮겨졌다. 거친 자갈이 깔린 땅 바닥에 앉아 있는 것은 견디기 어려웠다. 그러나, 혹시 어떤 사람의 머리가 꾸벅이면 군인이 즉시 때리며 깨웠다. 그 긴 밤 내내 군인들은 “너희들 여호와가 지금 어디 있나?” “하나님(God)이란 말에도 ‘G’자가 붙고 정부(Government)라는 말에도 ‘G’자가 붙어 있으니 ‘G’는 모두 같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총을 주었는데 너희 하나님은 무엇을 주었는가?” 등 모욕적인 말을 그치지 않았다.

월요일 아침의 타협자들

새벽에 분위기가 긴장되었다. 군인들은 그 날이 끝나기 전에 손으로 경례하면 모든 사람이 행복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두세명의 어린이를 제외하고는 증인들 가운데 아무도 일요일 아침부터 먹지 못하였으며 아무 것도 마시지 못하였다. 대령이 그들에게 그 날 아침 매우 호된 일이 있을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눈을 부라리면서 그는 “우리는 오늘 아침에 당신들이 경례하는 것을 보고야 말겠소” 하고 말하였다.

게양대로 가는 도중, 구두, 양말, 상의를 벗으라는 명령이 있었고 어떤 군인들은 시계를 손목에서 강탈해 갔다. 의식이 시작되었을 때, 경례하기로 결정한 사람들은 앞으로 나와 깃대 가까이 서라고 하였다. 놀랍게도, ‘콜라훈’에서 온 60명이 경례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길르앗’ 졸업생 ‘바요 그본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분명히 그의 행동이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콜라훈’에서 온 사람들은 왜 경례하였는가? 지방장관은 ‘콜라훈’에서 온 형제들을 따로 뽑아내고 그들이 ‘콜라훈’에서 경례했음을 상기시켰다. 만일 그들이 이번에 경례하지 않으면 그들 모두를 ‘벨옐’로 보내겠다고 말하였다. 후에, ‘와킨스’ 형제가 ‘그본도’에게 그가 ‘콜라훈’에서 경례했는가 질문하였다. “그렇소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나를 죽였을 것이요” 하고 그는 대답하였다. 분명히 군인들은 그를 계속 구타하여 마침내 그가 타협하였지만, 그는 그것을 말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그 때에 있었던 사실이 마침내 알려지게 되었다.

‘그방가’에서 경례하지 않은 증인들은 다음에 짐승처럼 들판으로 끌려갔다. 많은 사람들은 ‘라이플’ 총에 맞았으며, 특히 머리를 맞았다. 당시 약 임신 8개월이었던 ‘로우어부캐넌’의 ‘로다 브라운’ 자매는 두번이나 쓰러져 땅에서 딩굴었다. 또 다른 자매인 ‘먼로비아’ 출신 ‘이다 지지’ 자매는 아기를 등에 업고 있다가 쓰러져 아기를 깔고 넘어졌다. 아기가 죽은 것 같이 보였지만, 후에 병원에서 살아났다. 일곱살 밖에 안된 어린이들도 군인들에게 구타당하였다.

증인들은 얼마 동안 앉아 있은 후에 태양을 쳐다보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군인들은 증인들이 이글거리는 태양을 쳐다보는가를 확인하기 위하여 증인들의 눈을 감시하였다. 약 반시간 동안 이 비인도적인 처사를 인내한 후에, 증인들은 구내의 나무 그늘에서 쉬는 것이 허락되었다. 다음에 군인들은, ‘헨첼’ 형제를 포함한 일부 증인들에게 대로에서 약 400‘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기생충이 우글거리는 냇물에서 물을 길어오도록 강요하였다. 선교인인 ‘뮤리얼 클링크’ 자매는 냇물로 들어가서 머리에 물을 길어 오도록 강요되었다. 군인 한 명이 다음에 그의 배를 잔인하게 찼다. 일부 군인들이 강간하겠다고 위협하였다. 물이 증인들 있는 곳에 다다랐을 때 군인들은 물통을 뒤엎고 물컵을 구두발로 밟으며 “경례 안하면 물도 없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군인들은 그들이 강물 얼마를 마시도록 허락하였다. 24여시간만에 처음으로 마시는 물이었다!

당국은 결코 음식을 주지 않았다. 24여시간 동안 먹지 못하게 한 후에, 두 세명의 증인들이 대회장에 가서 그곳에 남아있는 쌀로 밥을 지으라는 허락을 받았다. 밥이 증인들에게 왔을 때 일인당 약 네 숫갈 정도씩 배당되었다.

처음 스물 네시간 동안 단지 일부 여자들만이 변소에 가는 것이 허락되었다. 월요일이 되어서야 남자들이 그날 늦게 변소에 갈 수 있는 기회를 허락받기 시작하였다.

오후 6시 기 의식에서 ‘워너’ 부관은 증인들에게 장교들이 경례를 유도하기 위해 행할 연설을 통역하도록 촉구하였는데, 두 세명의 증인들이 통역하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 같이 보였다. 그러나, 통역자들은 그 기회에 군인들이 알아 듣지 못할 말로 형제들이 충실함을 유지하도록 격려하지 않고 단순히 군인들이 하는 말, ‘경례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모두가 경례할 것이며 당신들도 경례해야 할 것이다’ 하는 말을 전달하였다. 그 말을 듣고 통역들 외에 약 백여명이 충성을 타협하였다. 이 가운데는 감독자 몇명과 특별 ‘파이오니아’ 몇명도 포함되었다. 기 앞에 서 있는 동안 일부는 의식을 잃고 쓰러졌는데 분명히 두려움에서 그렇게 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후에 타협하였다.

다음에 타협자들은 구내에 있는 풀밭에 있게 되었고, 비타협자들은 돌 투성이의 자갈길에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둘째날 밤 그들은 똑바로 앉아 있어야 하였다. 한동안 새로운 잔학 행위가 있었다. 각자 손을 머리 위로 들고 있어야 하였으며 그렇지 않으면 ‘라이플’ 총에 맞을 것을 각오해야 하였다. 장교들은 세상적 친척들에게 충실한 사람들과 이야기하도록 권하였다. 그들은 “자식들을 생각하시오” 혹은 “우리를 보아서도 이렇게 할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일부 사람들은 그러한 압력에 굴복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의 성실은 무너졌다.

이제 충실한 사람들의 집단은 타협한 사람들보다 적었다. 그날밤 확고함을 유지한 사람들은 다소 이상한 방법으로 약간의 구출을 받았다. 왜냐 하면 군인들의 관심은 혼란 상태에 있는 타협자들의 ‘그룹’에 자주 돌려졌기 때문이다. 참으로 여호와의 영이 그들을 떠난 것이 분명하였다.

“일찌감치 그렇게 할 일이지, 왜 첫날 경례하지 않았는가?” “이제 나의 하나님이 너희 하나님이다” 하고 굴복한 사람들에게 모욕적인 말을 하는 군인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타협자들을 조롱하는 한 군인은 “왜 너희들은 너희 형제들을 실망시켰는가?” 하고 말하였다. 또 한 군인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제 보니 군인들에게도 두 종류 즉 용감한 자들과 비겁한 자들이 있듯이 그리스도인들도 두 종류가 있군. 너희들은 단지 밥만 먹기 위해서 대회에 왔군 그래. 너희들 경례한 사람들만 아니었다면 지금쯤 너희 모두가 해방되었을텐데.” 타협자들의 집단도 그 날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3월 12일 화요일

아침에, 군인들이 교대되었다. 이들은 더욱 잔인해 보였다. 두 세명이 더 타협하였고 나머지는 들판으로 끌려 와서 ‘라이플’ 총 개머리와 짧은 채찍으로 다시 맞았다. ‘M. G, 헨첼’ 형제는 ‘라이플’ 총 개머리에 맞아 거의 실신하여 쓰러졌다.

이제 태양이 그들의 맨 머리 위에 내려쬐고 있었다. 한 선교인은 일사병에 걸렸다. 또 한 사람 ‘레네레룩스’는 후에, “머리를 섭씨 260도 되는 가마솥에 넣고 있는 것 같았다”고 말하였다.

3월 12일 화요일 아침에, 외국인들은 석방을 강력히 요청하였다. 부관이 알아 보기 위하여 떠났다. 그는 조금 후에 돌아 왔으며, 오전 11:00경에 근 30명의 외국인들이 석방되었다. 그들 모두는 온갖 잔인한 처사에도 불구하고 성실을 유지하였다. 떠나기 전에 ‘헨첼’ 형제는 남아있는 ‘리베리아’ 증인들에게 수분간 이야기하였으며 그들은 함께 기도하고 힘을 얻었다.

대회장은 수라장이었다. 모든 여행용 가방은 총검에 찔려 열려져 있었고 귀중품은 도난되었다. 전기 시설등은 부서져 있었다. 석방된 증인들은 ‘리베리아’ 그리스도인들이 아직 억류되어 있는 곳으로 돌아와 청량 음료, 음식, 돈 등을 주었다. 그러나 지방 장관은 곧 그것을 중단시켰다. 후에, 그는 ‘리베리아’ 형제들에게 그들이 매우 호된 고난을 당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군인들은 형제들이 죄수들임을 표시하기 위하여 십자가 형으로 남자들의 머리에 두 줄로 면도를 하였다. 이 “면도”는 깨진 유리병으로 행하여졌다. 그 날 저녁 기 의식에서 약 십이명이 더 타협하였다.

‘조셉 라블라’ 형제는 후에 군인들이 머리를 밀면서 “이 사람들은 진짜 여호와의 증인들이다” 하고 말하였다고 술회하였다. 그리하여 부지중에 군인들은 그들을 크게 격려하였던 것이다.

화요일 밤은 가장 어려웠다. 머리를 민 것은 증인들에게 그들이 죄수들이며 그들이 ‘벨옐’로 보내질 것을 기대할 수 있음을 상기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남자들은 ‘셔어츠’를 벗도록 강요되었고 여자들은 추위를 막기 위하여 아무 것도 몸에 두르거나 머리에 쓰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단지 ‘셔어츠’만을 입은 전 시간 ‘파이오니아’ 증인 ‘모우세스 앤더슨’은 의식을 잃을 때까지 한 발로 서 있었다. 다른 몇몇 사람들도 의식 불명 상태로 들어갔다.

증인들은 서로 사랑스러운 염려를 나타냈다. 가능할 때면, 그들은 서로 대화하며 격려하고 성귀를 인용하고 성실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을 간구하였다. ‘앤더슨’ 형제가 의식을 잃고 쓰러졌을 때 그 집단에 속한 다른 증인들이 개인적인 위험도 생각지 않고 그를 돕기 위하여 뛰어 왔다. 그들은 맥박을 느낄 수 없었으며 사망하지 않았나 우려하였다. 그의 몸은 매우 차가왔다. 그들은 그에게 옷을 덮어 주었고 군인들로 하여금 그를 응급실로 데려 가게 하였다.

전체 집단은 놀라운 믿음과 용기를 나타냈다. 그들은 일요일 아침 이후 사실상 아무 것도 먹지 못하였으며, 많은 물을 먹지 못하였으며, 토요일 밤 이후 잠을 자지 못하였으며, 뜨거운 태양과 습기와 추위에 노출되었다. 그러나, 기도, 상호 격려 및 성경에 기초한 생각의 도움을 받아 그들은 확고함을 유지하였다.

수요일 아침—시련이 끝나다

형제들이 다시 기 앞에 섰을 때 형제들은 확고함을 유지하기로 결심하였다. ‘로다 브라운’ 자매는 임신 8개월인데도, ‘라이플’ 총으로 잔인하게 다리를 맞고 쓰러져서 “우리는 이 정도예요. 원하는 대로 해 보라 그러세요. 나는 경례하지 않을 테니까요” 하고 말하였다. 단지 한 사람, ‘나이지리아’ 출신 ‘아폴로스 에네’만이 경례하였는데, 그의 야망은 ‘리베리아’를 통하여 미국에 가는 것이었다.

그 의식 직후에 ‘쿠우퍼’ 장관은 증인들에게 그들이 석방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타협자 ‘에네’는 그 순간 땅에 쓰러져 통곡하였다. 그는 ‘먼로비아’로 돌아가 병에 걸렸으며 1963년 4월 24일에 사망하였다.

충실한 사람들은 그들이 기소될 것이며 그들의 재산은 압수될 것이고 십년 징역에 처해질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남자들은 모두 ‘그방가’를 떠나기 전에 삭발을 당하였다. 외국 형제들 외에도, 근 100명의 ‘리베리아’ 증인들이 ‘그방가’에서의 그 박해를 받는 동안 성실을 유지하였다. 그들은 무식한 사람들과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을 포함하여 여러 층이었다. 충성스러운 사람들은 충실히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이었다.

어린이들은 박해를 받으면서 매우 좋은 행동을 보였다. 그들은 왕국회관 집회중에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을 배웠기 때문에 땅 바닥에 여러 시간 동안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 때에 형제들이 물질적으로 상실한 것은 6,000불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었다. 그러나 ‘리베리아’ 회중들에게 더 큰 손실은 일곱명의 회중의 종(주임 감독자)과 아홉명의 특별 ‘파이오니아’가 타협한 것이었다. 이것은 몇 개의 회중과 약 십여개 격지 집단이 해체될 것을 의미할 것이었다. 타협한 많은 다른 사람들은 진리에 상당히 새로운 사람들이었고 관련된 문제에 대한 깊은 인식을 가지지 못하였다.

한 충실한 형제는 해방된 후에, 더 많은 박해를 모면해서가 아니라 충실을 유지하였기 때문에 감개무량한 행복감을 느꼈다. 그는 “아마겟돈을 통과한 후의 느낌도 이러할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마음은 소망으로 가득찼다.

연로한 ‘홀만’ 형제도 충실을 유지하였다. 시련중에, 그는 졸도하여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가 돌아왔을 때 형제들은 그를 보고 참으로 기뻐하였다. 왜냐 하면 그들은 그 형제가 죽은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머리도 죄수들과 같이 두줄로 밀어졌다. 그는 후에 이렇게 말하였다. “그 모든 일을 당하면서 내가 살아남은 것이 매우 기뻤읍니다. 나는 죄수와 같이 나의 머리에 표를 받는 것도 부끄럽지 않았읍니다. 나는 그것을 나와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읍니다 ··· 나는 칠십 평생 동안에 죄수가 된 일이 없었으며, 만일 내가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지금 죄수라면 나는 행복합니다.”

선교인들이 추방되다

‘그방가’에서의 사건 후에, 형제들은 불확실한 상태에 있었다. 정부가 그들에 대하여 어떠한 부가적인 조치를 취할 것인지는 상상될 수 있을 뿐이었다. ‘에드나 기어리’ 자매는 기에 경례하기를 거절하였기 때문에 재무성에서의 직책에서 해고되었고, ‘도로시 시이먼’ 자매는 교사직을 상실하였으며, ‘제이컵 와’ 형제는 ‘리베리아’ 대학교에서 면직되었다. 어린이들은 증인이기 때문에 여러 곳에서 학교에 다닐 수 없게 되었다.

마침내 1963년 4월 18일 정부는 모든 선교인을 포함한 27명의 외국 증인들에게 출국을 명하였다. 선교인들은 법무성으로부터 이러한 서신을 받았다. “당신들이 ‘리베리아’의 법을 고의적으로 무시하고 ‘리베리아’ 기에 악질적으로 그리고 반항적으로 경례하기를 거부하고 합당한 경의를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에 이에 이 편지를 받는 때로부터 2주 내에 출국하도록 명합니다. 이 명령을 이행하지 않을 때에는 당신들을 추방하겠읍니다.”

이들 외국 증인들이 ‘리베리아’ 기에 경례했더라면 그들의 본국의 입장으로는 그들이 본국의 시민권을 거절한 것으로 간주되었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러한 사태 변화가 있자, 많은 ‘리베리아’ 형제들은 그들이 잘 알려진 ‘먼로비아’와 기타 지역에서 떠나 다른 곳으로 갔으며, 일부 형제들은 ‘시에라리온’으로 여행하였다. 왕국회관 집회가 중지되었으며, 여러 곳에서 더 작은 규모로 모임이 있었다. ‘리베리아’인이며 ‘길르앗’ 졸업생인 ‘프랭크 윌리엄스’ 형제는 선교인들이 떠나기 전에 얼마의 훈련을 받았으며 그리하여 협회의 지부 사무실의 일을 계속 수행할 수 있었다. ‘그방가’의 ‘조셉 라블라’ 형제는 순회 사업을 계속하면서 전국의 형제들을 방문하고 격려하였다.

3월에 단지 258명만이 야외 봉사를 보고하였고 4월에는 314명이 보고하였다. 증인들의 수가 반으로 줄었다. 근 200명이 그들의 믿음을 타협하였다. 상당수의 특별 파이오니아(그들 중 다수가 타협하였다)가 그들의 임명지로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격지 전도인들이 증거를 중지하였다. 일부 작은 회중에도 이러한 일이 있었다. 두려움 때문에 ‘그방가’에 가지 않았던 어떤 전도인들은 증거 활동을 중지하였다.

외국 형제들이 더 이상 없는 5월에는 두려움과 불확실성이 더욱 분명하였다. 150명 이상이 활동했던 ‘콜라훈’ 지역에서는 최소한 반수가 타협하였다. 그러나 4월 후에, ‘시에라리온’ 지부 사무실이 이 지역을 관할하게 되었으며 그 지역에서 활동하는 사람들로부터의 보고가 ‘먼로비아’로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최근에, 이 지역은 ‘리베리아’ 지부 사무실의 감독하로 돌아왔다.)

이러한 요인들은 5월에 단지 164명의 왕국 전도인들만이 봉사 보고를 낸 이유를 설명해 준다. 그 달에, 충실한 형제들과 타협자들이 모두 함께 연합하여 함께 식사하고 함께 모든 일을 한다고 불평하는 새로운 형제의 편지가 접수되었다. 더구나, 그는 따를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다고 말하였다. 이러한 관찰에 일리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6월에는 단지 100명만이 야외 봉사를 보고 한 것을 보아 그것을 알 수 있다.

‘터브먼’의 회신

선교인들에게 ‘리베리아’ 출국 명령이 내려졌을 때에, ‘노워’ 형제는 ‘터브먼’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러한 조치를 개탄하고 재고를 촉구하였다. 1963년 4월 17일자로 된 이 편지는 1963년 7월 22일호 「깨어라!」(영문)에 게재되어 많은 관심을 끌었다.

1963년 8월 14일에, ‘터브먼’은 대통령 재선을 공식 수락하는 연설을 행하였다. 그는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하여 자세히 말할 필요를 느꼈으며 그는 미국, 영국, ‘캐나다’로부터 ‘리베리아’의 견해에 항의하는 여러 사람들로부터 이미 받은 편지들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그의 연설 가운데서, ‘터브먼’ 대통령은 또한 이렇게 말하였다. “하나의 종파로서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 나라에서 환영받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보는 앞에서 행하여지는 의식에서 기가 게양되거나 내려질 때 모든 사람들은 경례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그 의식으로부터 떠나 있을 것을 요구하는 법에 그들이 순응해야 할 것입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환영받는다는 표현은 형제들에게 커다란 격려가 되었다. 곧 왕국회관은 집회를 위하여 다시 개방되었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형제들은 더욱 공개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전도인들의 활동은 증가하기 시작하여 8월에는 116명이, 9월에는 153명이 보고하였다. ‘그방가’에서의 잔학 행위에 대한 완전한 보고가 1963년 8월 8일호 「깨어라!」지에 게재되었고, ‘먼로비아’와 세계 각국의 ‘리베리아’ 대사관에 편지가 쇄도하자 더욱 더 관심이 불러 일으켜졌다. ‘리베리아’는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행한 비인도적인 행위를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의 형제 한명이 ‘그방가’에서 사망하였다는 소문이 나돌자 대통령은 그가 직접 이 보고를 조사하겠다고 말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그방가’에서의 사건 후 다섯달만의 일이었다.

다른 나라들로부터의 견해 표명에 부가하여, 영향력있는 많은 ‘리베리아’인들이 동정적이 되어 증인들에게 숭배의 자유를 허락하는 쪽으로 기울어졌으며 일부 사람들이 자행한 폭력 행위에 대해 반감을 느꼈다. 마침내, 11월 말에 ‘터브먼’ 대통령은 ‘왙취 타워 협회’ 본부에 있는 ‘M. G. 헨첼’ 형제에게 전보를 보내어 12월 4일에 기 경례 문제와 ‘리베리아’에서의 선교인 활동에 대해 토의하기 위해 ‘먼로비아’의 여호와의 증인 대표들을 만나겠다고 동의했다.

대통령과의 회견

‘M. G. 헨첼’ 형제 외에, 그 대표 가운데는 ‘클링크’ 형제, ‘차럭’ 형제, 그리고 협회의 ‘나이지리아’ 지부의 ‘우드워드 밀스’ 형제가 포함되었다. ‘헨첼’ 형제는 ‘리베리아’인들에게 성서를 가르쳐서 그들이 단순히 “주여, 주여” 하고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할 수 있게 하는 데 우리가 관심을 두고 있다고 설명하였다. (마태 7:21) 또한, 무신론적 공산주의에 대한 최선의 방어책으로 성서 교육이 지적되었다. 다음에 그는 세금을 바치고 로마서 13장에 언급된 “위에 있는 권세들”에 대한 복종에 관한 우리의 견해를 알리는 간행물들을 선사하였다.

‘클링크’ 형제는 ‘리베리아’인들이 복음 전도에서 얻은 실용적 유익, 많은 사람들이 경험한 도덕적 영적 진보 및 그들이 전파 활동에서 받은 가치있는 훈련에 대하여 말하였다. ‘차럭’ 형제는 정부의 문맹 퇴치 운동에 협조한 문맹 퇴치 결과에 대해 말하였고, ‘밀스’ 형제는 ‘나이지리아’에 있는 증인들의 훌륭한 그리스도인 명성에 대하여, 당시 그 나라에 37,000명이 있었으나 아무 난관이 없다는 점에 대하여 말하였다.

‘터브먼’ 대통령은 약 반시간 동안 주의깊이 들었다. 그는 우리의 사업이 “시온의 왙취 타워”와 같은가 질문하였다. 이것이 우리가 이전에 사용하던 이름이라는 것을 알고, 그는 그가 어렸을 때에 자기의 고향 ‘팔마스’ 갑에서 1890년대에 「시온의 파수대」를 사용하는 성서 연구반이 있었다고 설명하였다. 그는 ‘깁슨’ 형제들을 언급하였고 당시 그 집단과 연합했던 ‘시튼’ 씨라는 사람을 언급하였다.

다음에 ‘터브먼’ 씨는 ‘J. W. 피어슨’이라는 오순절 교회 교직자가 처음에 기 경례법을 제안하였다고 설명하고, 처음으로 그 법을 범하여 체포된 사람은 그 목사의 80세된 아버지였다고 재미있게 말하였다. 대통령은 다시 자기의 8월 14일 연설을 언급하고 숭배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에 대한 강한 신념을 재다짐하였다. 그는 유쾌하게, 얼마 전에 지방 순찰중에 여호와의 증인 한 사람이 자기와 말하였다고 이야기하였다. “그는 나에게 전도하더군요. 나는 그의 말을 들었어요. 여호와의 증인, 그들은 성서를 아주 잘 알아요. 그는 나를 개종시키려고 하였지만 나는 그에게 ‘나는 이제 개종하기에는 너무 나이를 많이 먹었다’고 말했지요.”

다음에 대통령은 ‘콜라훈’에서 있었던 일을 이러한 식으로 이야기하였다. 그 지방 장관은 그에게 그 지역의 여호와의 증인들 일부가 장관의 권위에 순복하거나 인정하기를 거부했다고 보고하였다. 이들은 지역 사회에서 분리되어 그들이 법적 승인없이 빼앗아 점유한 땅에 불법으로 가옥을 건축하였다. 촌장이 이 그릇된 행동에 대해 답변을 듣기 위해 그들을 소환하였을 때 그들은 여호와의 증인으로서 촌장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출두하기를 거절하였다. 그래서 지방장관은 군인들과 함께 가서 불법적으로 건축한 집을 철거할 대통령의 허락을 받기 위해 편지를 썼다. ‘터브먼’ 씨가 그 문제를 직접 조사하기 위하여 ‘콜라훈’에 도착하였을 때 관련된 사람들이 권위를 무시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그들이 기에 경례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토지를 불법적으로 차지하고 촌장을 무시하고 정부의 대표자의 권위를 인정하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처벌을 받았다고 말하였다.

‘그방가’에 대하여 대통령은 그 사건이 “불법 행위”였으며 죄를 범한 사람들은 적절한 처벌을 받았다고 말하였다. “나는 이 사건에 대하여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하고 ‘터브먼’ 씨는 분명히 말하였다. 그는 ‘헨첼’ 형제가 그곳에 있었으며, 그 시련을 겪었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는 다시 한번 “미안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계속하여, ‘터브먼’ 씨는 ‘리베리아’를 떠나도록 요구된 선교인들이 다시 오는 것을 환영하겠다고 말하였다. 기 경례 문제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 법은 모든 사람이 그 의식에서 기를 올리거나 내릴 때에 존경을 표시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존경”이라는 말은 해석에 달려 있다. 의식과 함께 기를 올리거나 내릴 때 내가 참석한다면 나는 경례하지 않는다. 나는 부동 자세로 서서 모자를 벗는다. 나는 법의 해석자가 아니지만 시민들이 군대식 경례를 해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다음에 대통령은 여호와의 증인들의 사업이 공화국 전역에서 방해받지 않고 계속 수행되도록 허락하는 대통령 명령을 발해지게 하겠다고 다짐하였다. 약속대로 수일 후에 대통령 명령이 있었다. 그 명령의 일부는 다음과 같았다. “국민 여러분, 여호와의 증인들은 어떠한 사람으로부터도 방해받지 않고 선교 사업과 종교적 숭배를 수행하기 위하여 그 나라의 어떠한 지역에도 자유로이 다닐 수 있는 권리와 특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인권, 그들의 재산, 그들의 양심의 명령에 따라 하나님을 자유로이 숭배할 수 있는 권리에 있어서 법의 보호를 받을 것이며, 한편 의식에서 기가 올려지거나 내려질 때에 부동 자세를 취하여 국기에 경의를 표함으로 공화국의 법을 지킬 것입니다.”

신문들은 이 문제에 관한 이러한 평화로운 해결에 호의적인 논평을 하였다. 일반 대중 다수가 처음으로 돌아온 두명의 선교인에게 축하의 뜻을 전하며 여호와의 증인들이 돌아온 것을 기뻐한다고 말하였다.

다시 강화됨

학교 당국은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기 앞에서 부동 자세를 취함으로 경의를 표할 수 있는 권리를 허락하는 대통령 명령에 대해 알았으며, 대체로, 이것이 여호와의 증인 자녀들에게도 적용되었다. 일부 학생들은 전학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간섭을 받지 않게 되자 흩어진 회중을 강화하는 긴급한 사업에 주의가 기울여졌다. ‘리베리아’ 전역에서 집중적인 증거가 행해질 수 있도록 여호와께서 사태를 조종하신 것이 분명하였다.

말할 필요도 없이, 형제들은 선교인들이 돌아오는 데 대해 기뻐하였다. 다음 수개월 동안 ‘케냐’로 재임명된 ‘레네레룩스’ 형제만을 제외하고 모든 선교인이 돌아왔다. 첫 선교인들이 되돌아 온 1963년 12월에 216명의 왕국 선포자가 야외 봉사를 보고하였으나, 1964년 8월에는 그 수자가 307명이 되었고, 6명의 본토 특별 ‘파이오니아’와 14명의 정규 ‘파이오니아’를 포함하여 307명이 되었다.

‘그방가’ 사건을 체험한 형제들은 분명히 성실 문제에 무엇이 포함되어 있는지를 더욱 깊이 인식하였다. 이전에는 “형제, 여기에서는 그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을거야. ‘리베리아’는 달라” 하고 말하는 경향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정신을 실제 박해의 현실성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방가’에서 발생한 일에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었다. 따라서, 두려움이 그들을 압도하였고 그들은 굴복하였다.

타협한 사람들 중 상당수가 경건한 슬픔을 나타냈다. 그들은 진정한 회개의 만족한 증거와 관련된 문제에 대한 적절한 인식을 보였다. 1964년 봉사 연도 말에는 협회의 ‘리베리아’ 지부 관할하에 있던 타협자 115명 중 69명이 복귀되었다. 타협자 나머지는 당시 ‘시에라리온’ 지부의 관할하에 있던 ‘콜라훈’ 지역에 살고 있었다.

“영원한 기쁜 소식” 대회

1964년 4월에 1963년 “영원한 기쁜 소식” 대회 ‘프로’에 따라 ‘먼로비아’의 새로운 현대식 시청 강당에서 4일간의 대회가 열렸다. 아름다운 장소에서, 여호와의 백성은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승리를 축하하기 위하여 모였다. 확실히 참 숭배는 ‘리베리아’에서 그리스도인의 무리를 파괴하려는 ‘사단’의 시도에 대하여 승리하였다. ‘그방가’에서의 호된 시험 이래 처음으로 이제 만난 형제들의 재회는 참으로 즐거웠다. 여호와께 대한 즐거운 확신의 영이 넘치고 있었다.

그러나 “세계 주권 다툼에서 승리할 자는 누구인가?”라는 공개 강연 초대에 대중이 응할 것인가? 모두는 전국에서 왕국 전도인으로 보고하는 사람들의 수의 두배인 520명이 참석한 것을 알고 기뻐하였다.

분명히, 교직자들은 여호와의 조직에 내리는 은총의 증거를 보고 ‘이를 갈았’을 것이다. 믿을 만한 소식통으로부터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수사국 선동 서류철에 세명의 탁월한 교직자가 서명한 결의문이 있었다. 거짓 비난으로 가득한 그 결의문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사람들에게 기에 경례하지 말도록 그리고 국가를 부르지 말라고 가르침으로 국가의 권위를 침식했다는 이유로 여호와의 증인들을 금지하도록 정부에 촉구했다. 더우기, 그 결의문은 우리 조직이 사실상 정치 조직이지 종교 조직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그 세명의 교직자는 이제 사망하였으나 여호와의 증인들은 계속 존속하고 있다!

영성을 강화하기 위한 단계

‘그방가’ 사건은 좋은 소식을 선포하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성실을 유지하는 것과 여호와께 전적 헌신을 드리는 것에 관련된 것이 무엇인지를 잘 이해하고 있지 않았음을 드러냈다. (출애굽 20:4-6; 시 3:8; 요한 1서 5:21) 그 때문에 전도인이 될 만한 사람들에게 야외 봉사에 참여하도록 허락하기 전에 다른 문제와 아울러, 이 문제를 토론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러므로, 침례받기 전에 많은 연구가 요구되었다. 물론, 이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 헌신하는 사람들의 수가 감소되었지만, 영성은 강화되었다.

1964-1969년의 5년 동안 단지 93명만이 침례를 받았다. 형제들 특히 ‘파이오니아’들은 가능한 한 읽고 쓸 수 있는 사람들과 연구하도록 격려를 받았다. 왜냐 하면 그들이 문맹자보다 다른 사람들을 더 잘 가르치고 일반적으로 더 오래 “머무는” 능력을 보이기 때문이다.

‘먼로비아’에서의 확장

이제 ‘나이지리아’로부터 자격있는 특별 ‘파이오니아’를 받아들일 길이 열렸다. 이들 중 첫 사람인 ‘이소노드 아키비’는 이곳에서 얼마 동안 순회 감독자로 봉사하였다. 또 한 사람인 ‘에녹 에시오니에’는 1965년에 도착하여 처음에 ‘팔마스’ 갑에서 봉사하였고 그 후 한동안 순회 사업을 하였다. ‘캐나다’로부터 ‘노어먼’ 가족이 왔고 다음 삼년 동안에 여섯명의 선교인이 더 왔다.

1968년에 더 많은 선교인이 도착하면서, ‘먼로비아’의 급속히 성장하는 ‘싱코르’ 지역에 또 하나의 선교인 집을 세 낼 필요가 있게 되었다. 1969년초에 ‘싱코로’, ‘올드로우드’에 새로운 훌륭한 장소를 세냈다. 이 건물은 선교인들의 거실과 지부 사무실을 수용할 수 있었다. 1970년에 ‘로건타운’ 지방에 세째 선교인 집을 얻었다. 그리하여 1970년대 초에는 ‘먼로비아’(인구 약 100,000명)의 세개의 인구 밀집 지역에 선교인 집이 각각 하나씩 있게 되었다.

여러 해 계속되는 기 문제

여러 해를 두고 기 문제는 학교에서 주기적으로 대두되었다. 1965년에 세명의 학생이 ‘먼로비아’의 감리교 직영 학교에서 퇴학당하였다. 그들 세 사람은 ‘베벌리 노어만’과 ‘케네드 노어만’ 및 ‘레오나 윌리엄스’였다. 열 세살된 ‘레오나’가 자기의 믿지 않는 아버지에게 그 사실을 말하자 그는 그 소녀를 때리고 이튿날 아침 학생들 앞에서 기에 경례하게 하겠다고 위협하였다. 설득도 해 보고, 위협도 해 보고, 또 한차례 때리기도 하였지만 소용없었다. 후에 그 소녀는 다른 학교에 계속 다닐 수 있었다.

한번은, 네명의 증인 학생이 강한 등나무 지팡이로 각각 스물 다섯대씩을 맞았고 또 한 학생은 맹세를 복창하지 않는다고 퇴학당하였다. 그러나, 기 경례가 중요 문제가 되지 않자 학교들은 좀 더 관용을 베푼다는 것이 밝혀졌다.

1968년 6월 25일에, 「리베리아 시대」지는 “여덟명의 학생이 기에 경례하기를 거부하다”라는 제목의 제1면 기사를 게재하였다. 감독 교회 사재이기도 한 ‘새뮤얼 F. 데니스’ 문교 차관은 그러한 거부 행위를 “비애국적”이라고 비난하였다.

지부 감독자는 정부가 증인 학생들에게 좀더 이치적인 태도를 보이기를 바라는 희망에서 문교 차관과 몇 차례 토론하였다. 학생들에게 숭배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은 기에 경례하는 사람들에게도 기에 대한 존경심을 심어 주는 것과 반대되는 영향을 초래할 것이라는 점이 지적되었다. ‘리베리아’의 입장이 계몽된 정부의 원칙과 반대된다는 다른 많은 논증이 제시되었다.

문교 차관은 이 모든 것을 ‘터브먼’ 대통령과 토의해야 하였고, 다음에 협회 지부 사무실 대표들이 그 결과를 통지받았다. 외국 거주자들의 후손들로부터 정권을 장악하고자 시도한 저명 인사를 포함한 장기간에 걸친 반역죄 재판 후에 기 문제가 다시 한번 발생하였음을 언급할 수 있다. 과거에, ‘먼로비아’에서 정부에 대한 부족의 반역에는 ‘리베리아’의 기의 신성함을 모독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리베리아’ 대학교에서 일부 학생들은 정부와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비난하였다. 그 경멸의 한 가지 방법은 기에 매우 불경한 방법으로 경례하는 것이었다.

문교 차관은 정치 단체들이 이기적인 목적으로 이 관용을 이용할지 모르는 우려만 아니라면 정부는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학교의 기 의식중에 부동 자세를 취할 수 있는 권리를 허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학교에서 종족주의자들의 통치를 지지하는 자들이 여호와의 증인들이 경례하지 않는 것을 보고 자기들도 경례하지 않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요구하면서 정착자들이 정한 기에 경례하기를 거절하리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설명은 정부의 입장을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형제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아무런 정치적 의도가 없음을 정부가 만족하게 여기고 있다는 확증을 받았다. 그러나 그러한 환경하에서는 경례하지 않을 수 있는 권리가 학교에 다니는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적용될 수 없으리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다음에, 문교부는 공화국의 기에 경례하지 않는 학생은 학교에서 퇴학시킬 것이며 “그러한 불충성의 행위”를 허락하는 학교장과 선생들도 해임될 것이라는 통지서를 발행하였다. 그 공문은 또한 이렇게 말하였다. “기에 대한 경례는 숭배 행위가 아니라 국가 및 구성된 권위에 대한 충성과 존경의 표시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기를 거절하는 것은 범죄 행위요 선동 행위로 간주될 것이다.”

이러한 토의가 진행되던 기간중 “하나님은 거짓말하실 수 없다”는 협회의 최근 영화를 대통령 관저에 있는 사설 극장에서 ‘터브먼’ 대통령을 비롯한 초청객들에게 상영할 허락을 요청하는 것이 현명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것은 관람자들에게 우리의 소식이 전적으로 성서에 기초하였고 미래에 대한 우리의 희망이 여호와의 설립된 왕국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상깊게 전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었다.

‘터브먼’ 대통령은 비록 내키지는 않으면서도 그 영화 상영에 참석하였고 분명히 그 영화를 즐겼다. 후에 그는 모든 것이 성서가 말하는 대로였다고 말하였다. 그는 지구가 낙원이 될 것이고 사람들이 이곳에서 영원히 살 것임에 감명을 받았다. 형제들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하여 약간 설명할 수 있었고 ‘터브먼’ 씨에게 협회의 최근 간행물들을 선사할 수 있었다. (베드로 후 3:13) 이 영화 상영이 기 문제에 대한 결정을 변경시키지는 못하였지만, 그 영화는 대통령으로 하여금 온 땅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과 그들의 입장을 좀더 명백히 이해하게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방가’ 사건의 재연?

1968년 8월 24일 기의 날에, ‘마노’ 강의 여호와의 증인의 두 자녀가 학교에서의 기 찬양 의식에 참석하지 않았고 그로 인하여 일주일간 정학 처분을 받았다. 그들이 학교로 돌아왔을 때, 학교장은 그들에게 기에 경례하라고 명령하였고, 그들은 이를 거절하였다. 그 학생들을 단순히 퇴학시킨 것이 아니라, 그 지방 교육국장은 경찰에게 증인들의 가정과 직장으로 가서 그들 모두를 경찰관서 구내로 데려 오라고 명령하였다. ‘경례하지 않으면 형무소에 보내고 직장에서 해고시키겠다!’고 그는 말하였다.

그리하여 여덟명의 활동적인 증인이 모였으며 경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한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거절하였다. 경례한 한 사람은 진리에 매우 새로운 사람이었고 침례받지 않은 사람이었다. 나머지는 두 시간이 넘도록 그들이 지칠 때까지 돌과 잡동사니가 있는 형무소 구내를 맨발로 뛰게 하였다. 이 시련중에 열 여섯살된 한 학생은 굴복하여 타협하였다. 마침내, 다섯명의 형제와 56세된 자매 한명이 감방에 갇혔다.

그 소식이 ‘먼로비아’에 전해지자 내무장관을 찾아가 만났다. 그는 지방 교육국장과 관련자들을 ‘먼로비아’로 불러 보고를 들었다. 그러나 형제들은 ‘터브먼’ 대통령이 ‘알제리아’에서 19일 후에 돌아온 후에야 석방되었다. 그 기간중에 그들은 여러 가지 모욕을 당하였으며 친척들로부터의 커다란 압력과 당국으로부터의 갖은 위협을 견디어야 하였다. ‘나이지리아’ 출신 ‘C. W. 휴’는 확고함을 유지하도록 격려하는 데 훌륭한 본을 세웠다. 거의 언제나 몸이 아픈 연로한 ‘메리 윌리엄스’ 자매는 놀랍게도 갇혀 있는 동안 하루도 몸이 아프지 않았다.

‘텔레비젼’으로 방영된 성서 ‘드라마’

성서 ‘드라마’가 공연된 지역 대회는 이 나라에서 하나님의 조직에 대한 많은 편견을 타파하였다. 1967년에 대회 ‘드라마’ 하나 전체가 ‘리베리아’에서 ‘텔레비젼’으로 방영되었다! 그것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인들을 다룬 ‘드라마’였다.

한시간 짜리의 그 ‘드라마’ 공연이 훌륭하게 방영되었다. 대사 하나, 동작 하나도 생략되지 않았다. 영국인 ‘프로그램’ 감독은 크게 기뻐하며 형제들의 균형과 훈련에 대하여 칭찬하였다. 사람들의 반응으로 판단해 볼 때, 수천명이 그 ‘드라마’를 시청하였음이 분명하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더 많은 ‘드라마’를 언제 공연하느냐고 질문하였고 매우 호의적인 말을 하였다. 우리에게 친절한 말을 거의 하지 않던 한 사람은 “나는 사람들이 왜 여러분을 미워하는지 모르겠소!” 하고 말하였다.

“지상의 평화” 대회

1969년에 ‘뉴우요오크’ 시에서 열린 “지상의 평화” 국제 대회는 많은 ‘리베리아’ 형제들에게 처음으로 진정 커다란 대회를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여 주었다. ‘리베리아’로부터 도합 41명이 1969년 국제 대회에 참석하였다. 얼마는 ‘뉴우요오크’, ‘런던’ 및 ‘뉘른베르크’에 참석하였다. 일곱명의 특별 ‘파이오니아’가 도움을 받아 참석하였다. 예를 들면, 그러한 도움으로, 특별 ‘파이오니아’ ‘대니얼 타’는 협회 본부 및 ‘뉴우요오크’와 ‘런던’에서 열린 대회를 빛나는 눈으로 구경할 수 있었다. 즐거움에 가득하여 그는 “여호와께서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들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신다!”고 말할 수 있었다.

12월에 ‘먼로비아’의 시민 회관에서 열린 ‘리베리아’ 국내 “지상의 평화” 대회에는 1,252명이 공개 집회에 참석하였다. 그 달에 단지 582명이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데 참여하였으므로 그 참석자 수는 참으로 훌륭한 것이었다! 45명이 침례를 받았다. ‘프로그램’은 참으로 실용적이고 감동적이어서 몇몇 참석자들은 “이 대회는 참으로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켰다!”고 외쳤다.

“선의자” 대회

참으로, ‘리베리아’에서 여호와의 백성이 개최한 가장 예외적인 대회는 1970년 말에 있었다. 주 대회인 영어 회기는 ‘먼로비아’의 새로 장식되고 ‘에어콘디셔너’가 장치된 백년제 기념관에서 12월 3일부터 6일까지 열렸다. 왕국회관에서 여러 가지 지방어 회기가 있었다.

대회가 시작되기 수일 전에 “미국 증인들이 대회에 참석할 것이 예상된다”는 신문 기사 표제는 기대를 자극하였다. 이 대회는 ‘리베리아’ 최초의 진정한 국제 대회가 될 것이었다. 신문 기사가 난지 이틀 후에, 최초의 두 해외 참석자가 ‘텔리비젼’ 회견을 하였다.

12월 2일 수요일 아침에 기대가 즐겁게 실현되었다. 그날 ‘왙취 타워’ 4번 여행단에 속한 55명의 여행자들이 도착하여 공항에 나온 많은 형제들로부터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이 나라에서 가장 좋은 ‘버스’가 우리의 손님들을 ‘먼로비아’로 실어가기 위하여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먼저 ‘파이어스토운’ 재배장을 구경하였다. 많은 방문객들은 최신형 자동차와 호화 주택 및 고층 건물을 포함하여 ‘먼로비아’의 많은 지역이 꽤 현대화된 모습을 보고 놀랐다.

방문자들의 유익을 위하여, 그 날 오후 기념관에서 특별 ‘프로’가 제공되었다. 이 가운데는 ‘리베리아’에서의 우리의 사업의 역사를 알리는 연설, 선교인들의 회견, ‘리베리아’의 부족민의 네 가지 기본적인 종족에 대한 설명이 있었는데, 각 종족을 대표하는 형제들이 고유한 의상을 보여 주고 부족의 특성을 설명하였다. 다음에, ‘밧사’와 ‘크펠레’ 전도인들이 “농장에서의 생활”이라는 제목으로 다채로운 공연을 보여 주었는데, 여러 가지 ‘리듬’과 노래로 어떻게 논이 준비되고, 씨가 뿌려지고 논매기가 진행되고, 새들이 쫓아지고, 추수되고, 마침내 절구에 찧어지고 요리 준비가 되는지를 묘사하였다. 방문한 각 자매에게는 염색한 종려잎 실로 공교롭게 짜고 끝에 닭의 깃털을 댄 ‘리베리아’ 고유의 부채가 선사되었다. 형제들은 종려 열매의 딱딱한 씨앗 알맹이로 만든 반지를 받았다.

다음에 그곳 왕국회관에서 ‘아프리카’와 ‘레바논’식 호화 연회가 있었다. 여행자들은 ‘잘라프’ 쌀, 감자 ‘그리인’ 요리, ‘바나나 프라이’, 생강 맥주 등 맛있는 요리를 먹었다. 발효한 ‘카사아버’로 만든 진짜 ‘푸푸’ 요리가 나왔다. ‘아프리카’에서의 첫날이 끝나자 한 여행자는 “여행을 더 이상 계속하지 않을지라도 충분히 우리는 보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리베리아’ 형제들은 야외 봉사에서 이튿날 아침 여행자들과 함께 증거하는 기쁨을 누렸다. 그들은 말하자면, 세상과 달랐지만, 형제애의 정신으로 참으로 연합된 느낌을 가졌다.

이 대회중에, 62명이 대서양에서 침례를 받았다. 침례 희망자들의 배경은 참으로 여러 가지였다! 한 사람은 유명한 변호사였고, 또 한 사람은 평화 봉사단과 함께 ‘리베리아’에 온 미국인 여인이었다. 믿음 때문에 최근에 학교에서 퇴학당한 ‘간타’ 출신의 아름다운 17세 소녀 ‘네이니’도 있었고, 진리 때문에 분노한 남편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심한 구타를 당하고 마침내 집에서 쫓겨난 젊은 여인 ‘앤젤린’도 있었다. 또한 이전에 ‘프로테스탄트’ 교회 목사였던 77세의 ‘베클즈’도 있었다.

‘왙취 타워’ 4번 여행단이 그 날 금요일 아침 떠나자, 제2진이 도착하였다. 2진은 7년 전 ‘그방가’에서 충실하게 인내한 ‘M. G. 헨첼’을 포함하여 40명의 증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는 머리와 목에 총개머리로 맞은 심한 타격으로부터 회복되었으며 그 날 금요일 오후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숭배한다”는 적절한 제목으로 연설하였다. 오후 회기 끝에, ‘그방가’의 들에 있었던 수십명이 앞으로 나와 그들의 충실한 형제와 악수하고 인사를 나누었다. 고통에 대한 회상이 있었고 군인들이 여러 형제들에게 들려 준 욕설 몇 가지를 기억하고 웃음을 나누었다. 그 자리에는 또한 그 박해를 견디고 훌륭한 왕국 증인들이 된 행실이 좋은 자녀들도 있었다. 그 재회는 계속 확고함을 유지하도록 격려와 결의의 말로 가득한 독특하고 즐거운 기회였다.

이튿날 아침, ‘헨첼’ 형제와 이 제2진이 탄 비행기가 이륙하자, 또 다른 비행기가 착륙하였다. 한 남자와 여자가 다른 승객들과 함께 나타났으나 급히 비행장을 건너가고 있었다. 그들은 낯익은 사람들이었다. 바로 ‘노워’ 형제 부부였다! 그들의 비행기는 ‘프리이타운’에서 ‘아크라’로 가는 도중이었으며, ‘리베리아’에 잠깐 체류하여 즐거운 교제 시간이 약간 있었다.

다시, 기 문제

1963년 이래, 기에 경례하는 문제에 대한 여호와의 증인의 입장을 설명하기 위한 많은 노력이 있었다. 재삼재사, 이것은 ‘라디오’와 ‘텔레비젼’ 방송 및 회견 제목이었다. 마침내 정부는 성인들이 기 의식중에 경의를 가지고 서 있는 것이 무방하다고 판결했으나, 학생들에 대한 배려는 없었다. 따라서, 많은 증인 학생들이 퇴학당하였다. 많은 공정한 시민들은 이러한 아동들에게 교육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증인 학생들이 학교에서 퇴학되고 어떤 ‘리베리아’ 그리스도인의 근면함의 결과로 이 문제에 대한 대통령과의 토론이 있게 되었다.

여러 해 동안, ‘스펜서 토머스’는 건축 기사로 ‘리베리아’ 정부에 고용되어 일하였다. 그가 일을 훌륭하게 해냈기 때문에 그는 개인적으로 ‘터브먼’ 대통령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얼마 후 가장 중요한 건축 공사는 의례 그의 감독을 받게 되었다. ‘터브먼’ 대통령의 사후, 그의 후임인 ‘윌리엄 R. 톨버어트’는 ‘리베리아’ 전역에 걸쳐 여러 곳에서의 건축 및 수리 계획을 세웠다. 그는 이 건축 공사를 누가 지도하기를 원하였는가? 물론 ‘토머스’ 형제였다! ‘토머스’ 형제는 대통령 앞에 소환되어 이 임명을 받았을 때, 정중히 사절하였다. 그 이유는? 그는 자기가 ‘리베리아’를 떠나는 단계에 있으며 자기 가족은 이미 떠났다고 설명하였다. 왜 ‘리베리아’를 떠나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토머스’ 형제는 그의 자녀가 기 문제 때문에 좋은 교육을 받지 못하는 애로를 이야기하였다.

다음에, 1972년 4월에, ‘톨버어트’ 대통령은 여섯명의 여호와의 증인 대표단을 환영하였다. 그들은 정부의 재고를 탄원하였다. 토론중, 대통령은 ‘리베리아’ 태생 증인에게 많은 질문을 던졌다. 침착하고 조용한 태도로 설명하는 그 형제의 말을 듣고 감동한 대통령은 “어디에서 그러한 훈련을 받았소?” 하고 질문하였다. 기쁜 마음으로 그는 신권 학교에 영예를 돌렸다. 두 자매는 그들의 자녀들을 잘 교육시키기를 원하는 부모로서 그러나 또한 순결한 숭배의 원칙으로 자녀들을 교훈하도록 하나님께 책임을 지고 있는 부모로서 어려움을 설명하였다. 그 후 기 경례 문제에 대한 10페이지에 달하는 자세한 서류가 대통령에게 제출되었으며, 그는 그것을 편견없이 검토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 서류는 기 경례로부터 사람들을 면제하는 것은 “독점권 혹은 특혜”를 허락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러한 면제는 헌법이 보장한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방해나 훼방을 받지 않고 양심의 명령에 따라 하나님을 숭배할 수 있는 천부적이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존중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대통령이 이 점에 관한 법적 의견을 요청하였을 때, 법무성은 그 문제를 검토하도록 변호인단을 임명하였다. 그들의 조사 결과는 이 문제에 있어서의 여호와의 증인의 권리를 지지하였고 법무성은 이 의견을 존중하였다. 그러나, 어떠한 결정에 대하여도 발표가 없었고 그 문제는 사실 다시 대두되지 않았다.

계속된 성장

1973년에는, 격지에서의 왕국 전파 사업이 훌륭하게 성장하여 새로운 회중들이 구성될 필요가 있게 되었다. 그해 말에는 이 나라에 22개 회중이 있었다. 이 커다란 성장을 돌보기 위하여 더 많은 일꾼이 필요해졌다.

1973년 12월 5-9에 열린 “하나님의 승리” 지역 대회는 여러 가지 면에서 특별하였다. 참으로 기쁘게도, 외국으로부터 88명의 형제 자매들이 그들의 서‘아프리카’ 여정의 일부로 이 대회에 참석하였다. 지방 형제들은 논에서의 일을 묘사하는 다채로운 희극을 연출하였다. 자매들은 벼를 쌀이 되게 하는 과정—벼를 말리고, 절구에 찧고 키질하고 다음에 쌀을 분리하는—을 묘사하였다. 그 동안 그들은 일할 때 ‘리베리아’ 농부가 부르는 고유한 노래들을 불렀다. 마지막으로, 이곳에서 재배하는 과일과 야채의 식욕을 돋구는 전시가 있었다.

우리는 ‘터브먼 스타디움’을 미리 오래 전에 예약을 했었지만, 일요일 오후 4:00에 축구 시합이 계획되었다는 통지를 금요일에 받았다. 그것은 우리의 공개 집회와 같은 시간이었다. 공개 강연은 일요일 아침 11시로 변경되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시간에 올 수 있을 것인가? 그 때 ‘브루클린 벧엘’에서 온 ‘윌리엄 잭슨’ 형제는 2,225명이 참석한 가운데 그의 연설을 끝냈는데, 그것은 공개 강연 참석자 수의 신기록이었다. 이 대회에 의해 행해진 훌륭한 증거와 외국의 그리스도인 방문객들이 이 행사에 참여한 것은 참석한 모두가 여호와의 봉사에 더욱 온전히 참여하도록 크게 자극하였다.

1974년 4월 7일 일요일은 ‘리베리아’의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가장 즐거운 날이었다. 939명의 전도인들이 그날 주의 만찬에 참석하도록 가능한 많은 사람들을 초대하는 데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좋은 반응이 있었는가? 전국적으로 3,310명이 우리와 함께 우리의 여러 왕국회관에 모여 많은 감사의 표현이 여호와께 올라갔다. 그 봉사 연도 말까지 1년간 160명의 새로운 사람들이 침례를 받았다. 여호와의 지지를 받으며 일치된 노력을 기울인 훌륭한 해였다!

낙관적으로 앞을 바라봄

‘와킨스’ 형제 부부가 선교인으로 이곳에 도착한 것은 1947년 5월이었다. ‘와킨스’ 부부는 ‘리베리아’에 우리의 왕국 전도인 수가 1,000명에 도달하는 것을 오랫 동안 고대하였다. 마침내, 그것은 28년 후에 이루어졌다. 1975년 5월에 1,027명의 전도인들이 야외 봉사를 보고하였다. 우리는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겠”다는 말과 관련된 기쁨의 얼마를 알게 되었고, 참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였다!—이사야 60:22.

1976년 1월에는 전도인 수가 1,060명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아직 증거를 받지 못한 격지 구역에서 사업을 시작할 길을 찾고 있다. 우리는 더 많은 왕국 선포자들이 특별 ‘파이오니아’ 사업에 참여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기를 바란다. 이렇게 되면 이러한 필요한 곳에 보낼 일꾼들이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진보의 두 가지 장애물 즉 문맹과 부도덕의 경향을 극복하기 위하여 계속 노력하고 있다. 전도인 중 거의 24‘퍼센트’가 아직 읽지 못하며 다른 15‘퍼센트’는 읽는 데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 지난 5년 동안에 130명이 부도덕으로 인하여 제명되었다. 그러나 충실한 사람들은 사업을 계속 수행하고 있으며 그들에게는 할 일이 많다.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 회교도, 상당수의 물활론자들이 ‘리베리아’의 1,670,000명의 인구를 형성하고 있다. 지난 29년 동안에 소위 “그리스도인” 밭은 잘 개척되었다. 그러나, 견고한 회교도 지역에서 수행되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또한, 물활론자 인구의 대부분에게 아직 소식이 이르지 못하였다. 그들 대부분은 “삼림지” 전역에 있는 작은 마을과 소도시에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전파하고 가르치는 사업은 주로 인구가 집중되어 있는 곳에서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산출됨에 따라, 우리는 점차적으로 다른 지역에서도 좋은 소식을 듣게 되기를 바란다. “자유의 땅”으로 일반적으로 일컬어지는 이 나라의 많은 주민들이 진정한 자유와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주는 진리를 받아들이기를 우리는 계속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