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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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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는 ‘아시아’ 대륙의 남쪽 반도에 위치해 있다. 이 거대한 나라는 그 크기 때문에 아대륙이라고 불리우는 것이 타당하다.

인도는 지문학상 여러 가지로 구분된다. 북부 산악 지대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히말라야’ 산맥이 있는데 하늘로 치솟은 산꼭대기에는 눈이 덮여 있어 그 웅장한 모습을 과시하고 있다. ‘갠지스’ 강과 ‘브라마푸트라’ 강과 같은 대하의 발원지들이 바로 이곳에 있다.

대평원이 ‘히말라야’ 산맥 앞에 양쪽 끝을 부채 모양으로 하여 펼쳐져 있는데 동쪽으로는 비옥한 ‘갠지스’ 삼각지를, 그리고 서쪽으로는 비가 매우 적은 ‘라자스탄’ 사막을 포함하고 있다. 충적토로 가득한 ‘갠지스’ 계곡은 지상에서 가장 비옥한 지역 중 하나이지만, 세계에서 두번째로 인구가 조밀한 강 유역이기도 하다.

서쪽으로 ‘아라비아’ 해로부터 동쪽으로 ‘벵골’ 만까지 뻗어 있는 것이 ‘데칸’으로 알려진 반도 고원이다. 서쪽 끝은 숨막히게 하는 그 위용으로 유명하다. 내리 쏟아지는 폭포가 있는 장엄한 산꼭대기에 하나님의 창조의 아름다움이 나타나 있다. 이 물은 역사깊은 수로를 따라 흘러 내린다. 녹색의 만화경으로 가득한 가파른 계곡의 ‘파노라마’는 훨씬 아래로 멀리까지 뻗쳐 있다. 서쪽의 이 분수선에서 세개의 중요한 강 즉 ‘고다바리’, ‘크리시나’ 및 ‘코오버리’ 강에 물을 공급해 준다.

인도에는 야생 동물과 가축이 풍부하다. ‘히말라야’ 산맥에는 희귀한 종류의 삵괭이가 숨어 있고 남쪽 살림지에는 근면한 코끼리가 있다. 서부에는, 감소해 가는 ‘아시아’산 사자가 보존되어 있고, 거의 모든 산림지에 표범이 있다. 수효가 줄어 들고 있는 위풍당당한 호랑이가 인도 대부분의 삼림지를 거닐고 있지만, 멸종되어 가던 코뿔소가 이제 북동부에서만 자유를 누리고 있다. 여러 지역에 각종 영양, 들소, 개, ‘하이에나’, 곰, 사슴 및 원숭이가 있다.

가축 가운데서, 물소는 특히 젖을 짜기 위해 사육되고 있다. 농업에서 황소는 아직도 필수불가결한 역할을 맡고 있다. 당나귀도 짐 운반에 이용되고 있다.

국민과 종교

인도 국민은 인류의 약 7분의 1을 차지하고 있으며 주로 일곱 민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2대 민족은 ‘유럽’인의 특성을 지닌 ‘게르만’ 민족(북부 인도에 거주)과, 검은 피부에 체격이 약한 ‘드라비디안’ 민족(주로 남부 지방에 거주)이다.

인도 헌법은 15개의 공용어를 인정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으뜸이 되는 것은 북인도어이며 1억 8천 백만명이 이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 부족과 종족이 사용하는 언어와 방언은 도합 약 872개어이다! 현재, 상업 및 산업계에서는 영어가 계속 통용되고 있다.

‘힌두’교는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이다. ‘힌두’교의 전성기는 ‘페르시아’ 제국이 통용 기원전 6세기에 영토를 인도에까지 확장하였을 때였다. 그 외에 토착 종교는 불교와 ‘자이나’교인데, 이 두가지 모두 기원전 6세기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을 무렵에 발생하였다. 그 후, 통용 기원 15세기에, ‘시이크’교가 창시되었다. 인구의 약 10‘퍼센트’는 회교도인데, 이 종교는 기원 8세기에 인도에 처음 들어 왔다. 인도의 6억 9백만 인구 중 단지 2.5‘퍼센트’만이 그리스도교국의 종교에 속해 있다. 1973년에 인도에는 근 1천 4백만명의 자칭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는데, 이들 중 대부분은 남부 인도 ‘케랄라’에 살고 있다.

참 그리스도교가 인도에 다다르다

사도 ‘도마’가 인도 땅에 참 그리스도교의 원래의 씨를 심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일부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전설에 불과하다. ‘마드래스’ 시 교외에 성 ‘도마’의 산으로 알려진 작은 산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주상에는 신빙성있는 증거가 없다. 그 작은 산에서 사도 ‘도마’가 순교를 당했다는 것이다. 그 언덕 위에는 ‘도마’에게 바쳐진 사당이 있다. 만일 그 전설이 사실이라면, ‘사단’은 매우 성공적으로 왕국 아들들의 좋은 씨 사이에 그의 ‘가라지’를 심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왜냐 하면 배교한 그리스도교는 남부 인도의 그 지역에서 번성해 왔기 때문이다.—마태 13:24-30, 36-43.

그러나 결코 전설이 아닌 실화가 여기 있다. 1905년에 미국에 유학한 과학도 ‘S. P. 데이비’가 ‘왙취 타워 협회’ 초대 회장 ‘차알스 테이즈 러셀’을 만났다. ‘러셀’과 얼마 동안 성서를 연구한 후에, ‘데이비’는 바로 그 해에 고향 ‘마드래스’로 돌아와서 왕국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타밀’어를 말하는 동족에게 전파하여 인도 반도 남단에 있는 ‘나게르코일’ 안팎에 약 40개의 성서 연구 집단을 마침내 설립하였다.

같은 해, 21세의 학생인 ‘A. J. 조셉’이 성서 진리를 찾기 시작했다. ‘조셉’과 그의 부모는 성공회 구역에 속했었다. 그의 부모는 어린 ‘조셉’에게 성서에 대한 깊은 인식을 심어 주었다. 그러나, 그는 의문으로 가득했다. 안식교회 간행물을 읽고 나서, ‘조셉’은 성서에 대한 좀더 명확한 설명을 찾고 있었다. 그는 삼위일체와 유아 세례의 교리에 대해 혼란을 느꼈다. 이에 대해 그의 아버지나, 그가 아는 누구도 만족한 설명을 해 주지 못하였다.

‘조셉’의 아버지는, 남인도에 있는 안식교 운동회장 ‘P. S. 풀리코덴’에게 편지하여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하는 책이 있는가 물어 보라고 아들에게 제안하였다. ‘풀리코덴’은 질문한 ‘조셉’에게 ‘차알스 테이즈 러셀’의 저서인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속죄」를 보내 주었다. 이 책을 보고 젊은 ‘조셉’은 여호와 하나님의 지존성, 여호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그리고 성령의 의미에 대한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성경 연구 ‘시리즈’ 중 이 책을 읽고, 그 책에서 협회 주소를 알게 된 후 오래지 않아서 ‘조셉’은 ‘러셀’의 간행물 모두를 미국으로부터 우송 받았다. 그는 「시온의 파수대, 그리스도의 임재의 전령」지의 정기 독자가 되었다. ‘조셉’은 또한 「성경 연구 월간」과 그와 비슷한 전도지를 배부하기 시작하였다.

1906년 초에 ‘조셉’의 가족은 ‘트라밴코르’ 주(‘케랄라’ 주)의 양념과 고무 거래의 중심지인 상업 도시 ‘코타얌’ 근처에서 살고 있었다. ‘조셉’은 「시대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성경 연구 제1권)을 그의 토착어인 ‘말레야람’어로 열심히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조셉’의 아버지와 그의 조카 ‘우멘’과 젊은 ‘조셉’ 자신은 친구와 친척들에게 성서 진리를 열심히 전하는데 「연구 12」와 “시대들의 도형”을 사용하였다. 벼농사를 짓는 마을들과 ‘코코넛’ 농장 안팎에서 그들은 자기들이 새로 발견한 신앙을 전하기 위해서 모기가 들끓는 논과 안개가 짙은 밀림 지대를 다녔다.

1906년 말에 다가가면서, ‘조셉’은 심각한 폐병에 걸렸다. 의사의 충고에 따라, 그는 자기 고향의 북동쪽 644‘킬로미터’ 가량에 있는 ‘마드래스’ 주의 보다 건조한 기후의 동부 구역에 위치한 도시인 ‘쿠다파’로 옮겨 갔다. ‘벨리콘다’ 구릉과 ‘팔콘다’ 구릉 사이에 끼어 있는 비옥한 강 유역인 이곳에서, 그는 성서를 집중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는 회복되기 전에도, 미국의 ‘러셀’ 형제로부터 받은 전도지를 배부함으로 진리를 열정적으로 전하였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조셉’은 이제 그가 사는 지역의 언어인 ‘텔루구’어도 배웠다. 장마철의 폭우에도, 타는 듯한 태양에도, 도시와 마을에서, ‘조셉’은 왕국 소식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접근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의미깊은 방문

「파수대」지의 열렬한 독자인 ‘조셉’은 1912년 세계를 순방하는 ‘러셀’ 형제가 인도를 방문할 것임을 알았다. ‘마드래스’ 시를 ‘러셀’이 방문하게 되었으므로, ‘조셉’은 ‘러셀’ 형제의 연설을 듣고 직접 회견할 기회를 가졌다. ‘마드래스’에서 ‘러셀’ 형제는 ‘와이 엠 시이 에이’(YMCA) 회관에서 연설하였으며, 그의 계획은 꽉 짜여 있었지만, 그는 ‘조셉’에게 두시간 동안의 회견을 허락하였다. 이 결과 인도에는 성서 진리를 전할 수 있는 진정한 기초가 놓이게 되었다. ‘러셀’과 그의 일행은 또한 인도 전역에서, 종교 도시 ‘베나레스’에서, 역사 도시 ‘러크노우’에서, 그리고 ‘트리밴드럼’, ‘코타라카라’, ‘나게르코일’, ‘푸람’, ‘비자가퍼탐’ 및 상업 항구 ‘캘커타’와 ‘봄베이’에서 연설을 행함으로 미래의 확장의 기초를 놓았다.

‘러셀’이 ‘마드래스’에서 ‘트리밴드럼’에 도착하자, ‘S. P. 데이비’가 철도역에서 ‘러셀’을 환영하였고 전형적인 인도식으로 화환을 씌워 주었다. 총독 대리로 알려진 영국 정부 대표가 ‘러셀’ 형제를 친절히 맞이하고 총독 대리 관저에 머물도록 초대하였다. 그는 협회의 초대 회장이 그 도시의 ‘빅토리아’ 축제 공회당에서 연설하도록 마련하였다. ‘러셀’은 또한 ‘데이비’가 살던 ‘나이아라카드’라는 마을에서도 연설하였다. 그 후 그 마을의 이름은 ‘러셀’의 장소를 의미하는 ‘러셀푸람’으로 개명되었는데, 그 명칭이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그러한 모임이 ‘트래반코르’의 군주의 관심을 끌었으며 그는 ‘C. T. 러셀’을 그의 관저로 초대하였다. 그 ‘힌두’ 통치자는 ‘러셀’에게 매우 정중히 대하고 그의 사진을 요청하였다. 후에, ‘러셀’ 형제의 사진이 그 군주의 관저에 걸려 있었다. ‘러셀’은 또한 그 군주가 성경 연구 6권과 성서를 선사받도록 주선하였다.

남쪽으로 더 내려와 ‘나게르코일’에서 ‘러셀’ 형제는 ‘조슈어 제이컵’ 형제로부터 영접과 화환을 받았다. 그곳에서의 ‘러셀’의 성서 연설은 ‘런던 미션’ 교회 성원들에게 상당한 자극을 주었다. 얼마 후 있었던 일을 ‘제이컵’ 형제는 이렇게 회상했다. “어느날 나는 그 교회 밖에서 연설을 하고 있었는데 한 난폭한 사람이 나를 땅에 쓰러뜨렸읍니다. 내가 다시 일어나서 ‘우리는 우리 메시야의 재림을 선포하고 있읍니다. 우리를 이런 식으로 대하면 안됩니다’ 하고 말했읍니다. 이러한 폭행의 결과로, 우리는 그 ‘런던 미션’ 교회 신도 일부가 진리 안에 들어 오도록 돕는 기회를 가졌읍니다.”

이러한 사건들이 있은지 얼마 후, ‘S. P. 데이비’는 독한 술에 중독이 되었다. 그는 ‘러셀’ 형제가 그에게 준 돈으로 집회를 위한 부동산을 구매했었다. 그러나 재정적인 난관에 빠지자 그는 그 부동산을 지방 종교 전도단에게 매각하였다. 그가 성서 연구반으로 모아들인 사람들은 흩어졌다. 그들 대부분은 그들의 이전 교회로 돌아갔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충실을 유지하였고 ‘조셉’ 형제와 함께 왕국 사업을 수행하였다.

‘트래반코르’가 왕국 소식을 듣다

한편, ‘C. T. 러셀’은 ‘조셉’에게 전 시간으로 좋은 소식을 전하는 사업을 시작하도록 초대하였다.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았고 자기의 능력 한계를 겸손히 인정하였다. 더우기, 지방 관서에서의 그의 세속적인 지위를 포기하는 것은 마음 상태를 드러내는 중요한 결정이었다. 매우 소심한 태도로 그는 ‘러셀’ 형제의 초대에 호의적으로 응하였다. 그는 고대의 ‘예레미야’와 같이 그러한 책임의 짐을 질 수 없다고 느꼈다.—예레미야 1:4-8.

‘조셉’은 도움을 구하였고 도움을 받았다. 미국의 ‘R. R. 홀리스터’ 형제가 인도에서의 사업에 임명되었고 1912년에 도착하였다. 그와 ‘조셉’은 함께, 협회 출판물을 ‘말레야람’어로 번역할 계획을 세웠다. ‘코코넛’ 야자가 많은 ‘트래반코르’ 주 전역에 배부하기 위함이었다.

처음 내 놓은 것은 「성경 연구 월간」에서 뽑은 “시대의 징조”였다. ‘트리밴드럼’ 동남방 16‘킬로미터’ 가량에 있는 쌀 산지인 ‘네이야틴카라’에 있는 ‘데바사하얌’ 형제에게 이 전도지 다량을 공급하도록 ‘홀리스터’는 ‘조셉’을 임명하였다. ‘데바사하얌’ 역시 ‘트래반코르’ 주에서 협회를 대표하고 있었다.

‘조셉’은 황소가 끄는 마차를 타고 여행하면서 전도지를 배포하였다. 서서히 움직이는 마차를 타고 그는 꾸불꾸불한 좁은 길을 따라 푸른 논곁을 지났다. 길은 빈랑 숲속으로 있었으며, ‘조셉’은 윙윙거리는 벌레와 땀이 철철 흐르는 것을 참아가며 자유케 하는 진리를 그리스도교국의 신도들에게 계속 전파하였다. ‘트래반코르’ 주의 많은 강을 건너고 야자수로 에워싸인 초호를 돌아 ‘조셉’은 이 아름다운 지역을 지나 계속 남쪽으로 가며 “생명의 말씀”을 전파하다가 마침내 ‘네이야틴카라’에서 ‘데바사하얌’과 만났다.—빌립보 2:14-16.

‘트래반코르’ 주는 인도 전역에서 문맹자 비율이 가장 낮은 곳이었다. 아마 이 때문에 그리스도교국의 다수 선교단이 ‘말레얄리’인들 가운데서 번창하였을 것이다. 해안의 어민, 평야의 농부, 차 재배자들, ‘티이크’ 나무 목재상, 고무 생산자 등 여러 층에 신도들이 있지만, 선교 계획은 인도 전역 다른 어떠한 곳에서 보다도 이 지역에서 더 많은 자칭 그리스도인들을 생산해 냈다. ‘트래반코르’ 주와 그 인접 주 ‘마드래스’는 성서 진리를 전하는 데 생산적인 밭이어서 우리의 사업은 발전을 보았다. 그러나 ‘조셉’은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홀리스터’ 형제가 인도에 영구적으로 정착하지 않자 더 많은 도움을 요청하였다.

‘러셀’ 형제는 ‘런던’의 ‘A. A. 하아트’와 ‘싱가포르’의 ‘콜포처’인 ‘S. J. 리처어드슨’에게 인도로 가도록 초대하였다. 그러므로, ‘하아트’가 1913년에 도착하면서 그와 ‘조셉’은 ‘네이야틴카라’의 ‘데바사하얌’을 만나기 위하여 여행하였고 세 사람은 사업을 더 발전시키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데바사하얌’은 인내하지 않았으며, 그에게 공급된 간행물을 그가 어떻게 했는가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러나 증거에 의하면 그는 인도의 허다한 독립적인 “복음 전도자들”과 같았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를 따르도록 하였을 뿐이지,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지 않았다. 그가 한 일은 아무 성과가 없었다.

그러나, 북‘트래반코르’ 주의 ‘티러벨라’에서 충실한 ‘조셉’ 형제와 그의 동료 ‘하아트’ 형제는 그 주의 북부를 다니며 증거하기 위한 임시 본부를 설치했다. 그 당시에는, 사업이 주로 전도지를 배부하고 “시대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에 관한 공개 강연을 하는 것이었다. 사업은 잘 발전했으며, 특히 이 북부 지방에서 그러하였다. 한편, ‘리처어드슨’ 형제는 ‘싱가포르’로부터 와서 ‘마드래스’ 시에서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는 주로 글을 아는 사람들 가운데서 그리고 이미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영어를 사용하는 영국계 인도인들 가운데서 전파하였다. 그리하여, 1913년 ‘마드래스’ 시에는 소규모의 성서 연구 집단이 발족하였다.

‘트래반코르’에서 사업은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러나 많은 반대없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소위 “그리스도교” 중심지와 주요 도시에서 공개 강연이 행하여졌다. 오래지 않아, 많은 지역에 작은 성서 연구 집단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곧 제1차 세계 대전이 돌발할 때였다.

전쟁으로 인하여 미국 및 ‘유럽’과의 모든 통신이 단절될 가능성을 고려하여, ‘하아트’와 ‘리처어드슨’은 1914년에 영국으로 소환되었다. 열심과 열정이 가득한 ‘조셉’은 최선을 다하여 단독으로 사업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곧 그는 외부의 도움을 호소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러셀’ 형제는 ‘런던’의 ‘하아트’에게 인도로 돌아가라고 요청하였다. ‘하아트’ 형제는 1916년 7월에 도착하자 곧 인도의 북부 지방으로 올라가 특히 영국계 인도인들에게 영어로 된 성서 연구 보조 서적을 배부하였다. 이들 영국계 후손들은 그들의 신앙과 생활 방식에 있어서 명목상 그리스도인들이었다.

중요한 “최초의 것들”

1916년에 형제들은 인도에서 여호와의 백성의 첫 대회를 마련하였다. 그 대회는 ‘마드래스’ 주 남부의 ‘티러치라팔리’ 시에서 12월에 개최되었다. ‘하아트’ 형제가 “성서 연구생들”의 이 인도 전국 대회를 조직하였다. 최소한 네명의 친구가 ‘실론’ 섬에서 건너 왔고 총 35명이 그 역사적인 모임에 참석하였다.

그 때에 ‘왙취 타워 협회’ 제작 창조 사진극에 대한 ‘슬라이드’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인도의 많은 사람들이 땅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시각적으로 설명한 이 사진극을 구경하였다. 물론 그 당시 전기의 사용은 오늘날과 같이 흔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러한 ‘슬라이드’는 ‘아세틸렌가스’ 발전기에 의해 투사되었다.

“죽은 자들은 어디에 있는가?”와 “우리 주의 돌아오심”이란 제목으로 많은 전도지가 발행되었다. 형제들은 또한 한권으로 된 「시대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책이 ‘말레야람’어로 번역된 것을 크게 기뻐하였다. 많은 정직한 교회 신도들이 영적으로 일깨움을 받고 여러 마을의 성서 연구반에 연합하고 있었다. ‘트래반코르’ 주의 해안 평야를 따라 이러한 작은 성서 연구 집단이 ‘코타얌’, ‘아이마남’, ‘칭가바남’, ‘탈라파디’, ‘미이나돔’, ‘아예르쿤남’, ‘캉가자’, ‘발리야말라’ 및 ‘니이르만쿠지’와 같은 곳에서 생겨 났다. 사실, ‘미이나돔’은 인도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첫 회중이 설립된 곳으로 기록을 세웠다.

반대와 금지령

1917년 「종말을 고한 비밀」의 출판에 이어, 진정한 시련이 시작되었다. ‘A. A. 하아트’ 자신도 그가 시초에 도왔던 그 사업을 반대하기 시작하였다. ‘트래반코르’의 일부 지방 신자들이 「종말을 고한 비밀」로 인하여 걸려 넘어졌고 ‘하아트’의 편을 들었다. ‘하아트’는 ‘트래반코르’의 “성경 연구생들”에게 공개장을 발표하고 자신이 그곳 형제들로 하여금 자신을 지지하고 ‘왙취 타워 협회’를 반대하도록 설득시키기 위해 그곳으로 돌아왔다. 일부 사람들은 떨어져 나갔고 그 나라에서 비슷한 반역을 이끌어 온 미국의 ‘폴 S. L. 존슨’의 인도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그러한 노력은 인도에서 커다란 혼란을 초래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반대가 다른 근원으로부터 발생하였다. 미국의 ‘러더포오드’ 형제와 그의 동역자들이 1918년에 체포되고 선동죄라는 거짓 협의로 수감되었을 때 인도의 각 신문에 그것이 보도되었다. 그 결과, 영국 정부는 인도에 있는 우리의 형제들에게 제재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A. A. 하아트’는 협회에 불충성하게 되었으나, 당시 ‘실론’과 남부 인도에서 전도 여행을 마치고 있었다. 그는, ‘트래반코르’ 주 ‘코타얌’에 있는 ‘조셉’ 형제의 집에 이르렀을 때, 지방 군주로부터 통지서를 받았다. 영국 통치자들의 지시에 근거하여, 그 통지서는 ‘하아트’에게 7일 이내의 출국을 요구하였다. 그는 ‘오스트레일리아’로 갔다. 다음에 ‘왙취 타워 협회’ 서적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재고 서적을 숨기려는 노력이 있었다.

그렇지만, 금지 기간중에도, 왕국 사업은 계속 발전하였다. ‘K. K. 아이프’ 형제가 진리와 접촉하게 된 것은 바로 이 때 즉 1919년이었다. ‘아이프’는 ‘힌두’인으로서 그가 종교 학교에 다닐 때 처음으로 성서를 보았다. 그는 또한 “형제들” 단체와도 약간 연합했었다. 그러나 그가 ‘코타얌’에서 진리를 들었을 때, 그는 “선한 목자”의 음성을 인정하고 그의 생명을 여호와께 “성별” 즉 헌신하였다.—요한 10:14, 15.

‘폴 존슨’의 추종자들이 그가 사는 지역에서 매우 활동적이었는데, ‘아이프’ 형제는 그들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였는가? 그는 이렇게 시인하였다. “‘힌두’교에서 나온 후 그것은 매우 혼돈을 주었다. ‘존슨’파가 나를 속였고 나는 한동안 그들과 함께 행동하였다. 그러나 나는 곧 그들의 가르침의 허위성을 깨닫고 즉시 그들을 버리고 여호와의 백성편에 섰으며 여기에 머물렀다.”

우리의 사업은 금지령하에서 성서만을 사용함으로써 수행되었다. 충실한 형제들의 감소하지 않은 열심으로 공개 강연과 성서 연구 집회가 계속되었다. 1920년에, ‘푸투팔리’의 ‘K. C. 차코’가 “큰 ‘바벨론’”에서 도망하였고 여호와의 편에 섰다. 그가 ‘트라밴코르’에서 참석한 그리스도인 초기 집회에 대하여 그는 “사회자가 자매들을 임명하여 기도 인도를 하는 것이 관례였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시정 조치가 있었을 때, 형제들은 협조하였다.

반대에도 불구하고 진리가 전파되다

1920년에 금지령이 해제되었다. 얼마 후, ‘조셉’ 형제는 ‘J. F. 러더포오드’ 형제에게 ‘말레야람’어로 「시대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을 재인쇄하도록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기금이 제공되었고 1923년에 1,000부가 공급되었다. 이것이 사업에 다시 커다란 박차를 가하였고, 특히 ‘트래반코르’ 주에서 그러하였다.

진리가 파급됨에 따라, 교직자들의 반대도 파급되었다. 성공회 교직자 ‘T. J. 앤드루’는 ‘조셉’에게 영혼 문제에 관하여 공개 토론을 하자고 도전했으며 그 도전은 수락되었다. ‘앤드루’는 ‘토타카드’ 시에 있는 자기 교회 건물을 토론장으로 제공하였으며 광고지로 그 토론회를 광고하였다. 그리하여 일요일 오후에 약 300명이 참석하였다. 주제는 “성경은 분명히 인간 영혼이 불멸이며 영원하고 죽을 수 없다고 가르친다”는 것이었다. ‘앤드루’는 긍정하는 쪽이었고, ‘조셉’은 부인하는 쪽이었다.

먼저 ‘앤드루’가 한 시간 동안 말하였지만, 그가 사용한 유일한 성귀는 고린도 전서 2:11 뿐이었다.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조셉’은 영과 영혼의 차이를 알리는 많은 성귀를 사용하여 대답하였다. 매우 호의적인 반응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토론 후에 ‘조셉’에게 와서 더 듣기를 원하였다. 다음에 ‘트래반코르’ 주 농촌 지대의 중심부에 위치한 이 작은 도시인 ‘토타카드’에 새로운 회중이 형성되었다.

‘조셉’은 이제 인도에 더 많은 전 시간 봉사자를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네 형제가 선택되었다. ‘조셉’의 사촌 ‘K. C. 우멘’ 형제, ‘토타카드’ 출신 ‘마니’ 형제, ‘코타얌’ 출신 ‘K. C. 차코’ 형제, 그리고 ‘탈라파디’ 출신 ‘K. M. 바루기스’ 형제였다. ‘바루기스’는 학교 교사였고 ‘말레야람’어를 매우 깨끗하게 쓸 수 있었다. 여러 해 동안 그는 ‘조셉’ 형제가 ‘말레야람’어로 준비한 원고를 인쇄인을 위하여 다시 썼다. 다섯 형제가 하나의 ‘티임’을 이루어 일했으며 ‘트라밴코르’ 주의 여러 도시와 마을을 여행하며 강연을 하고 성서 연구반을 소개했으며 전도지와 기타 성서 연구 보조물을 배부했다.

이제 ‘조셉’ 형제는 그의 사업을 인도의 다른 지역으로 확장하기를 원하였다. 이보다 약 17년 전에 ‘마드래스’ 주(현재는 ‘안드라 프라데시’) ‘쿠다파’에서 요양중에 있을 때에 ‘텔루구’어를 배웠다. 그는 성서 전도지를 전하고 강연을 하며 옛 ‘하이더라바드’ 주를 여행하기 시작하였다. 여행중에 그는 우연히 ‘텔루구’어 정기 간행물인 「천년기의 빛」이라는 잡지를 보았는데, 그 잡지는 ‘왙취 타워 협회’ 간행물로부터의 발췌 기사를 포함하고 있었다. 여기에 자극을 받고 ‘조셉’은 ‘러더포오드’ 형제에게 편지하여 우리의 서적 일부를 ‘텔루구’어로 발행할 수 있는 권한을 요청하였다. 그 결과로, “죽은 자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전도지 2,000장과 “우리 주의 돌아오심”이라는 전도지 5,000장이 발행되었다. 다음에 ‘조셉’은 당시의 ‘하이더라바드’ 주를 두루 여행하여 이 전도지를 배부하였다. 그는 인도의 기독교 선교단 일람을 입수하였으며 이것을 사용하여 기독교 선교단 본부 대부분을 방문할 수 있었다.

한편, 인도의 다른 곳에서도, 여기 저기에서 성서 진리를 전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지미 제임스’로 널리 알려진 영국 군인 ‘프레드릭 제임스’가 제대하여 자신을 평화의 하나님 여호와께 “성별”하였고 북부 ‘유나이티드 프로빈스’(‘우타르 프라데시’)의 ‘콘포어’(‘칸푸르’)에 정착하였는데, 거기에서 그는 전공으로 일하였다.

고립된 상태에서, ‘제임스’ 형제는 특히 자기의 이전 군인 동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였다. 특히 진정한 관심을 나타낸 한 군인은 ‘잭 네이든’이었다. 영국군 복무중에 그는 목사로부터 ‘제임스’라는 이름을 가진 “이상한 사람”이 주의 돌아오심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네이든’은 ‘지미 제임스’를 쉽게 만나지 못하였다. 마침내 만났을 때, 그들의 첫 토론은 아침 세시까지 계속되었다. 그들은 ‘네이든’의 막사까지 8‘킬로미터’를 걸어 돌아오면서 토론했던 것이다. ‘네이든’은 즉시 그 설명이 그가 찾던 것이었음을 인정하였다. 1921년에, ‘네이든’은 ‘콘포어’에 있는 ‘제임스’의 집에서 있었던 기념 만찬에 참석하였다. 도합 다섯명이 참석하였다. 그 후, ‘잭 네이든’은 그의 동료 군인들에게 전파하고 1923년 영국으로 돌아와서 제대할 수 있었으며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헌신의 생활을 추구할 수 있었다. 그는 현재 ‘캐나다’ ‘온태리오’ ‘터론토’의 ‘벧엘’ 가족의 일원으로 봉사하고 있다.

반대자들이 열성에 직면하다.

1923년 후반기 어느 때에 ‘조셉’은 자기 고향 ‘트래반코르’ 주로 돌아와 ‘코타얌’ 남쪽의 한 마을인 ‘팔람’에서 성서 강연을 하고 있었다. 길가 그늘진 나무 밑에서 ‘조셉’은 많은 사람들에게 연설하고 있었는데 험상궂은 사람이 달려와서 늘어진 수염(그가 전에 허약했었기 때문에 후두와 폐를 보호하기 위하여 의사의 충고에 따라 기른 수염)을 잡고 그 모임을 방해하였다. ‘조셉’ 형제는 실제로 거의 6‘킬로미터’를 끌려가 ‘코타얌’ 변경에까지 가서야 풀려났다. 그러나 그의 열심은 식지 않았다.

이러한 언짢은 광경을 목격한 행인 한 사람은 ‘조셉’의 집에 와서 위로하면서 자기 마을 ‘칭가바남’으로 와서 일주일간 머물면서 성서 강연을 해 달라고 초대하였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 사람은 대나무와 야자수 잎으로 집회 장소를 지었다. ‘조셉’는 그 집회를 광고하기 위하여 광고 쪽지를 인쇄했는데 만 일주일간 약 300 내지 400명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교훈을 받을 수 있었다. 이 우정적인 사람은 진리를 받아들였으며, ‘칭가바남’에 하나의 회중이 설립되었다.

이러한 사건은 대단히 큰 관심을 끌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와 ‘시리아’ 그리스도 교회 및 성공회가 합세하여 진리에 반대하였다. 그들은 증인들을 무신론자들이라고 불렀다. 왜냐 하면 증인들이 삼위일체 교리를 믿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찰스 테이즈 러셀’의 인격을 손상하는 비방 기사를 발표하였다. 그러므로 ‘조셉’은 ‘J. F. 러더포오드’ 저 「교회 하늘에서의 큰 싸움」이라는 소책자를 입수하여 그 지역 일대의 영어를 읽는 교직자 중 그가 아는 사람 모두에게 배부하였다. 이러한 반대는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로부터 왔지, 회교도나 ‘힌두’ 교도로부터 오지 않았음에 유의하라. 그 때에 우리 형제들이 개최한 모든 집회에서 어떤 형태의 적의에 찬 압력과 난폭한 방해가 있었다. 자주 사용된 반대의 술책은 소리를 지르고 북과 깡통을 두드려서 왕국 소식이 들리지 않게 하는 것이었으며, 이것이 성서 진리에 대한 그들의 유일한 반박이었다!

‘코젠체리’는 ‘트래반코르’ 주의 후추 및 생강 재배 지대 내에 위치한 한 마을이며 ‘마르도마’(성 ‘도마’) 개혁 그리스도교파의 요새이다. 창조 사진극을 ‘코젠체리’ 주민들에게 보여 주기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형제들은 편리한 회관을 얻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마침내, 그곳 국영 학교를 사용하도록 허락을 받았다. ‘조셉’은 장비를 가지고 그곳에 가서 ‘아세틸렌 버어너’로 투사기를 조립하고 마침내 ‘프로’를 시작하였다. 갑자기, 분노한 사제의 지휘하에 선동을 받은 종교인들이 현장에 나타났다. 그들은 시끄러운 소리로 우리의 집회를 방해하였다. 경찰의 도움을 구했지만 응답이 없었다.

좀더 남쪽으로 ‘쿤다라’는 ‘제임스’ 2세파의 보루이며 그 신학교도 있다. ‘쿤다라’에서도 적의를 보였다. 위풍당당한 야자수와 무성한 ‘바나나’ 나무의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조셉’ 형제는 “시대들의 도형”을 설명하는 강연을 하고 있었는데, 사제가 이끄는 한 떼의 사람들이 몰려와서 깡통을 두드리고 귀를 먹먹하게 하는 소리로 왈자지껄하면서 연사의 말이 들리지 않게 하였다. 종교적인 무뢰한들이 “시대들의 도형”을 찢어 내렸고 ‘조셉’ 형제에게 소똥을 던졌다. 한 ‘힌두’교인이 무슨 난동인가 알고자 하여 중재하고 사제에게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는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의 반대자들의 본을 따르는 것인가 질문하였다. 그는 경찰을 부르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자 사제는 슬그머니 도망갔으며 군중은 해산하였다.

전진하며 사업을 수행함

‘트래반코르’ 주에서의 우리의 사업은 발전하고 있었다. ‘말레야람’ 어로 된 「시대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이 배포되었고 1920년에는, 「때는 가까왔다」(성경 연구 제2권)가 인쇄되었다.

1924년에 협회의 ‘스위스’ 지부로부터 종이가 입수되었고 「지금 살아있는 수백만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소책자의 ‘말레야람’어판이 발행되었다.

바로 그 해에, ‘러더포오드’ 형제는 ‘조셉’에게 돈을 보내어 토지를 매입하여 ‘미이나돔’에 집회 장소를 짓게 하였는데, 이곳에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회중이 있었다. 야자수가 둘러싼 논과 주렁주렁 열매가 달린 ‘재크’ 나무 가운데 있는 그곳은 아름다운 집회 장소였다.

또한, 1924년에, ‘A. J. 조셉’ 형제는 “주의 돌아오심”, “죽은 자들은 어디에 있는가?”등 제목으로 연설하면서 인도 전역을 열차로 여행하였다. ‘트래반코르’ 주의 ‘코타얌’에서 출발한 이 연설 여행으로 그는 북동쪽으로 가서 마침내 ‘캘커타’에 도착하였다.

다음에 그는 유명한 황마 수도인 ‘캘커타’에서 북서쪽으로 여행을 계속하여 ‘힌두’교의 순례 도시 ‘알라하바드’에 도착했고 거기에서 북쪽으로 방직 공업의 중심지인 ‘콘포어’에 도착하였다. 다음에 그는 ‘타지마할’의 도시 ‘아그라’에 가서 연설하였다. 다음에 그는 북서쪽으로 기서 ‘암발라’의 군사 기지에 이르렀다. 마지막으로, 그는 약 5,798 ‘킬로미터’의 여행끝에 인도 남쪽 깊숙한 곳에 있는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단신으로 그러한 여행을 하는 것은 확실히 훌륭한 일이었지만, 그 일은 여호와의 힘으로 수행되었다. (빌립보 4:13) 이렇게 하여, 인도의 “밭”은 이 거대한 나라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장차 수행할 사업을 위해 준비되고 있었다.

이듬해는 ‘조셉’ 형제 개인에게 비극의 해였다. 그러나 그 자신은 이렇게 말하였다. “1925년에 나의 가족에게 커다란 재난이 닥쳤다. 심한 이질로 나의 자녀 셋이 죽었다. 이것은 나와 나의 아내에게 커다란 충격이었지만, 우리는 부활에 대한 굳은 믿음으로 위안을 받았다. 여호와께서는 담대함과 강함으로 이 재난을 참고 전진하여 사업을 수행하도록 우리 두 사람을 힘주셨다.”

확장이 시작되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열기가 가라앉았을 때, “인도 전역”에 왕국 사업을 확립시키기 위한 제2차 시도가 있었다. 1926년 5월 영국 ‘런던’의 ‘알렉산드라’ 궁에서 열린 “성경 연구생”의 대회에서, ‘조셉 F. 러더포오드’는 영국인 형제로서 인도에 가서 그곳의 왕국 사업을 강화하고 확장할 사람이 있는가 조사하였다. ‘조지 A. 라이트’와 ‘레슬리 셰퍼드’가 선택되었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 ‘레슬리 셰퍼드’는 ‘에드윈 스키너’로 교체되었다.

젊은 독신들인 ‘라이트’와 ‘스키너’는 1926년 7월에 배로 ‘런던’을 떠나 인도의 장마철 폭우가 내리는 가운데 그달 말에 ‘봄베이’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부두에서 ‘A. J. 조셉’과 ‘에이브러햄’이라는 그의 동료의 영접을 받았다. ‘조셉’은 수일간 머물면서 그들에게 인도에서 이미 수행된 사업의 범위와 이룩된 결과에 대하여 직접 설명하였다. 「파수대」의 독자로 알려진 관심자들의 이름과 주소가 입수되었는데, 주로 국영 전신국 및 철도 관계 고용인들인 영국계 인도인들이었다. 이들은 멀리 북쪽으로 ‘쿠에타’로부터 남쪽으로 ‘마드래스’에까지 이르는 인도 전역에 흩어진 단일 가족이거나 소규모 집단이었다. 그러므로 좀더 중심에 위치한 ‘봄베이’의 ‘왙취 타워 협회’ 사무실이 진보된 시설을 가지고 인도 내의 왕국 사업을 지휘하였다.

‘라이트’ 형제와 ‘스키너’ 형제는 ‘봄베이’ 시의 중심부에 있는 ‘라밍튼’ 가의 한 집을 세냈다. 지부 관리 체제가 변경되어 ‘에드윈 스키너’가 새로운 지부 감독자가 되었다. 확장된 지부에 속한 구역은 인도 전역, ‘버어마’, ‘실론’, ‘페르시아’ 및 ‘아프가니스탄’을 망라하게 되었는데, 막대한 인구를 지닌 거대한 지역이었다.

우선 그들은, “지금 살아 있는 수백만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와 “죽은 자들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두개의 공개 강연을 광고하였다. 이 강연을 위하여 그들은 ‘봄베이’에 있는 ‘도비탈라오’에 있는 역사깊은 ‘웰링튼 영화관’을 세냈다. 이 결과 이 모임에 참석하고 이름과 주소를 남긴 일반 대중 일부와 접촉하게 되었다. 관심자가 있게 되었고 지부 사무실에서 소규모 집단이 성서 연구를 위하여 모였다. 이 사람들은 주로 당시 ‘맹갈로르’의 ‘마드래스’ 관구 서부 지역에서 활동하던 독일 ‘바젤 루터란’ 선교단과 연합했던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곳의 지방어는 ‘카나라’어이다. 연설은 영어로 행해졌는데, 상공업에 고용된 ‘봄베이’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언어가 영어였다.

‘라이트’ 형제와 ‘스키너’ 형제의 이웃에 사는 사람들은 마침 영국계 인도인들로서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들은 새로 이사온 두 형제에게 “그리스도인들”이 어디에 집중되어 있는지에 대하여 그리고 특히 영어를 말하는 영국계 인도인 사회에 대하여 친절히 설명하여 주었다. 이러한 지역에 방문이 행하여졌고 「하나님의 거문고」라는 책이 이들에게 배부되었다. 그리하여 형제들은 ‘봄베이’ 시 북부에 있는 ‘파렐’ 구도 방문했는데, 이곳에는 대인도 반도 철도청 소유 작업장과 오락 시설 및 공회당이 있었다.

이 철도 회관을 빌려서, 우리 형제들은 더 많은 성서 공개 강연을 광고하였다. 이 활동은 결실이 있었다. 그 기회에 ‘조오지 월러’와 알게 되었는데, 그는 이전에 협회 간행물 일부를 읽어 보고 우리의 소식에 대하여 약간 알고 있는 철도 작업장 근무자였다. 다음에 한 종업원의 가정에서 주간 성서 연구가 마련되었다. 이것이 또한 ‘봄베이’ 시에서의 조직적인 왕국 전파 사업의 시초였다. ‘조오지 월러’는 대단히 열심있는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다. 그는 1963년에 사망했는데 끝까지 충실하였다.

내륙으로

1926년에 ‘봄베이’의 지부 사무실에는 두명의 형제만 있었다. 이것은 형제 혼자 광대한 내륙을 담대하게 들어가 증거해야 하며, 다른 한 형제가 ‘봄베이’에 머물면서 지부 책임을 돌보아야 함을 의미하였다. 먼저 ‘스키너’ 형제가 알려진 성경 연구생들을 찾기 위하여 내륙 지방을 답사하기로 하였다. 그는 먼저 열차편으로 ‘마드래스’ 시로 가서 ‘라이트만’ 형제를 만났는데, 그는 ‘로야푸람’ 구에서 아내와 자녀 셋과 함께 매우 가난하게 생활하고 있었다. 소규모 집단이 주간 성서 연구를 위하여 그 집에서 모이고 있었다. 당시 ‘마드래스’에 배치된 영국 군인 한 사람이 또한 관심을 나타내고 있었는데, 그가 매우 친절하게 ‘스키너’에게 숙소를 제공하였다.

사흘 후, ‘스키너’ 형제는 동해안으로부터 이 나라를 횡단하여 서쪽으로 당시 인도의 한 군주가 통치하는 토착주인 ‘트래반코르’ 주의 ‘코타얌’으로 갔다. 바로 여기에서 ‘A. J. 조셉’의 열심있는 활동으로 인하여 왕국 사업이 처음으로 뿌리를 박았다. 이제 왕국 사업은 약간의 박차를 가지고 발전하고 있었다. ‘스키너’는 ‘트래반코르’에 약 일주일간 머물면서 작은 대회를 열었다. 이렇게 하여, 그는 약 40명의 가장 활동적이고 열심있는 형제 자매들을 만날 수 있었다.

더욱 남쪽으로 가서, ‘스키너’는 오늘날 ‘스리랑카’로 불리우는 차재배 도서인 ‘실론’ 섬을 처음 방문하였다. ‘콜롬보’에서 그는 ‘밴 트웨스트’ 형제가 인도하는 약 20명의 성서 연구생으로 이루어진 지방 회중을 돕고자 노력하였다.

또 한 차례의 효과적인 여행

1927년 초엽에 ‘스키너’는 또 한 차례 여행을 했는데, 이번에는 인도 북부 지역에 집중하였다. 「파수대」지 예약자들과 성경 연구생들의 이름과 주소를 가지고, 그는 ‘델리’의 남쪽 수‘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아그라’에서부터 여행을 시작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전신국에서 일하는 영국계 인도인 ‘프랭크 배럿’을 만났다.

‘배럿’은 한 때 인도의 성도 ‘알라하바드’ 시에 배치되었던 열성스런 근무자였다. 수십만명의 순례자들이 주기적으로 그곳에 와서 “거룩한” 강 ‘자머나’ 및 ‘갠지스’ 강으로 더 널리 알려진 ‘간가’ 강의 합류지에서 그들의 ‘힌두’ 신들을 숭배한다. 그러므로 ‘배럿’ 형제는 진열대를 만들고 우글거리는 군중에게 판매도 하고 무료 배부도 할 협회 간행물과 전도지를 진열하였다. ‘배럿’은 솔선하여 ‘아바디 진다기’(“영원한 생명”)라는 제목의 전도지를 ‘힌두스타니’어(‘로마’자로 된)로 번역하였다.

‘스키너’는 ‘아그라’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동부 ‘판잡’에 있는 병영 도시 ‘암발라’ 시로 갔다. 거기에서 그는 체신청 관사에 살고 있는 ‘클레어런스 매닝’을 만나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도록 격려하였다. 바로 그곳에서 지부 감독자는 북부 인도가 1월에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춥기도 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이렇게 보고하였다. “나는 추위 때문에 ‘오우버코우트’를 입은 채 ‘매닝’ 가족과 함께 저녁 식탁에 둘러 앉던 일을 잘 기억합니다. 그 지방의 집들은 벽이 두껍고 천정이 높아 뜨거운 여름철에 대비하였고 1월에는 난방 마련이 없읍니다.”

‘판잡’(“다섯개의 강”을 의미) 내에서 여행을 계속하여 ‘스키너’는 ‘인더스’ 강의 지류인 ‘수틀레지’ 강을 건넜다. 그는 ‘판잡’의 대도시이며 회교도들이 우세한 대학 도시 ‘라호르’에 잠깐 체류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또 다른 전신국 직원인 ‘V. C. W. 하아비’를 만났으며 그의 집에 머물렀다. ‘하아비’는 시민회관을 공개 강연 장소로 마련하였다. 위신을 세우기 위하여 그는 진리에 들어오지 않은 한 영향력있는 변호사를 설득하여 사회자로 삼았다. 후에, ‘스키너’는 같은 길로 ‘봄베이’에 돌아왔다.

왕국 증거를 확장함

1926년 후반에, 일요일 아침 호별 방문 증거가 시작되었다. ‘봄베이’에서 그러한 사업은 왕국 활동에 더 많은 발전을 촉진하였다. 그러나 주된 목표는 서적을 전하는 것이었으며, 분명한 관심을 나타낸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성서 연구를 격려하기 위하여 다시 방문하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 때에도, 개인적인 가정 성서 연구는 사회되지 않았다. 그 대신, 이 사람들은 집단 연구를 위한 일반 집회 장소에 오도록 초대되었다. 형제들은 ‘아마겟돈’이 매우 속히 올 것으로 믿고 인쇄된 왕국 소식을 가지고 가능한 한 많은 구역을 도는 데 노력하였다.

처음 수년간, ‘라이트’와 ‘스키너’는 먼 곳, 특히 “그리스도교”의 중심지를 번갈아 여행하였는데 유일한 목표는 서적을 배부하는 것이었다. 이 일은 언제나 영국계 인도인 “그리스도인들”이 집중되어 있던 철도 부락에서 주로 행하여졌다. 이들 철도 부락은 이삼십 세대 내지 수백 세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숙소는 흔히 철도 “관사”였다. 철도 관계 직원들이 밤에 이 “관사”에 있었다.

‘스키너’는 인도에 도착한지 약 1년 후에, 1926년에 발표된 「구출」이라는 책의 염가본을 10,000부 받았다. 단지 두명의 ‘파이오니아’를 위하여 10,000부의 서적이 온 것이다! 지부 사무실에는 그러한 다량의 서적을 보관할 공간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즉시 더 큰 보관 장소를 구하고자 하였다. 신문 광고를 통하여 ‘콜라바’ 교외에 있는 한 ‘아파아트’와 보관 창고를 세냈다. 그리하여 지부 사무실은 중앙 ‘바이쿨라’ 지역에서 ‘콜라바’ 가 40번지에 있는 남부 교외로 이전하였는데, 이곳이 12년간 본부로서 좋은 역할을 하였다.

「구출」이라는 서적을 받은 후 즉시, ‘스키너’ 형제는 북부 ‘판잡’으로 두번째 여행에 나섰다. 이번에 그는 배를 타고 ‘카라치’로 갔는데, 이 중요한 소맥 거래 항구에서 일주일간 머물렀다. ‘스키너’는 습관에 따라,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을 찾았는데, 이번에도 특히 철도 부락과 영국계 인도인 지역에서 그렇게 하였으며, 그들에게 「구출」이라는 책을 많이 배부하였다.

그는 열차로 ‘인더스’ 삼각주의 ‘카라치’를 떠나 해발 약 1,676‘미터’ 높이에 있고 ‘카라치’로부터 863‘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 영령 ‘발루치스탄’의 수도인 ‘쿠에타’라는 북부 도시로 갔다. 여기에 「파수대」 독자 ‘월터 하아딩’이 있었다. ‘하아딩’은 철도 부락에 사는 철도 제동수였다. ‘하아딩’의 아내는 지방 교회 성원이었으며, 남편이 전파하는 성서 진리에 약간 반대하고 있었다.

‘스키너’는 다소 쾌활한 감리교 목사에게 소개되었는데, 그는 ‘스키너’를 저녁 식사에 초대하였다. 거기에서 ‘스키너’는 감리 교회의 다른 성원들을 만나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왕국과 지상에 회복될 낙원의 희망에 대하여 말할 수 있었다. ‘하아딩’ 자신은 그리스도교국의 이 전초 지점의 ‘광야에서 외치는’ 외로운 음성과 같았다.

아들 중 하나가 죽자 ‘하아딩’ 부인은 진리를 받았고 자녀 모두가 진리를 받았으며 자녀 일부는 전 시간 ‘파이오니아’가 되었다. 그러므로, ‘쿠에타’에서 ‘하아딩’ 가족이 활동하였고, 그들이 후에 ‘라발핀디’, ‘카라치’ 그리고 ‘라호르’로 이사하였으므로, 왕국 사업은 인도의 이곳 북부 지역에서 확립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지역이 후에 “성지”를 의미하는 ‘파키스탄’의 별개 국가가 되었다.

‘라디오’ 방송으로 좋은 소식을 선포함

‘라디오’를 통한 왕국 증거의 확장이 시도되었다. 한 ‘라디오’ 방송국이 1928년에 ‘봄베이’에 설립되었고 왕국 소식을 방송하는 데 사용할 허락을 받았다.

‘스키너’ 형제가 행한 첫 10분 연설을 멀리 ‘콘포르’ 시에 있는 ‘제임스’ 형제가 들었다. 그 후 그는 지부 사무실에 편지하여 그 연설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연설이 몇 차례 있은 후에, 그 방송 시설을 더 이상 사용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정통파 교회만이 종교적인 문제를 방송하도록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이 구실이었다.

여러 가지 언어의 사람들을 만남

열 다섯개의 주요어가 사용되고 있는 인도의 언어 문제를 놓고, 왕국 소식을 더 많은 인도어로 전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모색되었다. ‘트래반코르’ 주에서, ‘말레야람’어를 말하는 형제들은 이미 「시대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을 자기들의 언어로 가지고 있었다. 이제 「하나님의 거문고」 책과 「만민을 위한 자유」 소책자가 ‘말레야람’어로 인쇄되었다.

「세계 고난—그 이유는? 그 해결책」 소책자가 다음에 ‘카나라’어로 발행되어 ‘봄베이’에서 ‘바젤 선교단’ “그리스도인들”에게 배부되었고 남쪽으로 그들의 토착주에서 배부되었다.

해안의 ‘코오피’ 및 백단향 수출 중심지인 ‘맹갈로르’에는 ‘로마 가톨릭’ 및 ‘프로테스탄트’ 인구가 상당히 있었다. ‘맹갈로르’는 막대한 재산과 대학교를 소유하고 있는 독일 ‘바젤 루터란 선교회’ 본부였다. ‘스키너’ 형제는 그곳에 가서 그 자신이 이 ‘바젤’ 선교회의 일원이며 ‘카나라’어로 발행되는 한 소규모 종교 잡지의 편집인인 ‘아이만’ 씨의 접대를 받았다. 그는 ‘스키너’와 성서 제목에 관해 토론한 후, 우리의 「구출」 책을 발췌하여 발행하기로 마련하였다. 이렇게 하여, 교회 성원들이 그들 자신의 언어로 성서로부터 약간의 부가적인 진리를 듣게 되었다. 또한 ‘스키너’ 형제가 ‘바젤 선교회’ 대학 강당에서 공개 강연을 하도록 마련되었다. 강연 끝에 「하나님의 거문고」가 제공되었다. 곧 이 동일한 ‘바젤 선교회’ 성원들이 ‘카나라’어로 된 「하나님의 거문고」의 도움으로 주간 성서 연구를 하도록 마련되었다.

‘트래반코르’에서의 우리의 사업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발전하였다. 형제들은 뜨거운 태양 아래서, 개인적인 안락한 숙소 제공을 받지 못하면서 수‘킬로미터’를 걷지 않으면 안되었다. 1928년에 41명의 활동적인 왕국 전도인들과 열 세명의 ‘파이오니아’로 구성된 열 네개의 토착민 회중이 약 40,000명이 참석한 550회의 공개 집회를 마련하는 데 성공하였다.

참으로, 그 때까지 당시 명칭으로 62명의 “반 사역자”가 있었으며 그들이 여호와의 왕국의 소식을 전파하기 위하여 인도에서 충성스럽게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전국을 돌보는 데 더 많은 일꾼이 필요하였음이 분명하였다. 그러므로, 협회 본부에 더 많은 ‘파이오니아’를 신청하였다. 그 응답으로 네명의 영국인이 영국에서 ‘봄베이’를 향하여 선편으로 떠났다. ‘클로드 굿맨’과 그의 동료 ‘론 티핀’이 1929년 8월에 해안에 도착하였고 이보다 수개월 전에 ‘글라우세스터’ 출신 ‘에워트 프랜시스’와 그의 동료 ‘스테펜 질레트’가 도착하였다. ‘봄베이’의 형제들에게 잠시 소개되고 인도에서 일을 수행하는 방법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들은 후 이들 ‘파이오니아’들은 각기 구역 임명을 받았다.

‘판잡’에서의 약간의 성공

이제 ‘판잡’에서 왕국 소식을 전파하기 위한 더 많은 노력이 있었다. 짧은 항해로 ‘클로드 굿맨’과 ‘론 티핀’은 ‘카라치’에 도착하였다.

다음 경험담은 여호와께서 어떻게 그의 충실한 종들을 돌보시는가를 예시하여 준다. ‘론 티핀’은 가장 싼 숙소에서 약 1주일간 생활한 후에, ‘카라치’에 있는 ‘호텔’의 여주인에게 증거하였다. 그 부인은 서적을 받고 어디에서 유숙하고 있는가 질문하였다. 대답을 듣고 나서 그는 이들 두 형제를 그들이 그 도시에 머무는 한 자기 ‘호텔’에 머물라고 초대하였다. ‘파이오니아’들은 협회로부터 개인적인 수당을 받지 않았으므로 이것은 실로 이 두 형제가 앞에 있는 사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기금으로 품위있게 계속 봉사할 수 있게 한 놀라운 마련이었다.

‘카라치’에서 ‘굿맨’과 ‘티핀’은 북쪽으로 ‘신디’ 성에 있는 사막 도시 ‘하이더라바드’로 옮겼다. 이제 두 사람이 방향을 달리하였다. ‘티핀’은 북쪽으로 ‘쿠에타’로 가서 ‘하아딩’ 가족을 도왔고, ‘굿맨’은 ‘암발라’로 가서 ‘매닝’ 가족을 격려하였다. 그 해 1930년 여름은 극히 더웠으며 영어를 말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히말라야’ 산맥의 해발 약 2,012‘미터’ 높이에 시원한 구릉 피서지 ‘멋수리’로 갔다. 그래서, ‘굿맨’은 열차와 말을 타고 따라가서 그들에게 왕국 소식을 전하였다.

그곳에 있는 동안, ‘굿맨’은 ‘모한다스 K. 간디’가 부유한 상인의 손님으로 ‘멋수리’에 와 있음을 알았다. ‘굿맨’은 이렇게 보고한다.

“간디의 이름은 당시 나에게 그가 인도를 영국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는 데 여념이 없던 매우 논란많은 정치인이었다는 것 외에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이었고 다른 어떤 사람과 마찬가지로 왕국 소식을 크게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구역에서 일하는 동안 나는 그의 임시 거처에 이르렀을 때 개인적인 회견을 요청하기로 결정하였다. 얼마 후 그는 눈에 익은 간단한 수직물 옷을 입고 지팡이를 짚고 나와서 아름다운 그 지역을 자기와 함께 산책하자고 나를 초대하였다. 걸으면서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었고, 나는 가까운 신세계의 상태를 설명하였다. ‘간디’는 이미 우리의 간행물이 자기가 머물고 있는 집 서재에 있으므로 그 간행물을 읽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므로, 인도에 독립을 가져다 준 그리고 “국부”(國父)라고 불리우게 된 그는 암살당하기 17년 전에, 하나님의 정부의 통치를 받아들일 개인적인 기회를 가졌었다.

‘암발라’에서 얼마 동안 일한 후 ‘굿맨’ 은 다시 ‘티핀’과 함께 일하였다. 그들은 함께 ‘판잡’의 ‘라호르’ 주위의 여러 마을로부터 받은 많은 편지에 대한 응답으로 그 도시에 갔다. 이러한 편지를 쓴 사람은 알고 보니 독립적인 교직자였다. 그들은 ‘판잡’어를 몰랐고 그 언어로 출판된 성서 서적이 없었으므로, 이 교직자를 통역으로 삼아 “시대들에 관한 도형”에 대해 연설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많은 군중이 와서 들었지만, 후에 알고 보니 마을 사람들의 주된 관심은 우리 “선교회”가 그들에게 학교 혹은 병원을 세워 주는 것이었다.

‘하우스 카’ 증거

1929년에 인도에서는 ‘하우스 카’가 새로운 봉사의 특징이었다. 두 형제가 타고 서적 공급품을 실은 이 차량에는 가정 필수품이 갖추어져 있었다. 이 ‘하우스 카’로 협회는 이제 왕국 전파 활동을 좀더 시골로 확장할 수 있었고 ‘호텔’과 공공 교통 수단에 의존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이동 선교인 집”에 사는 이들 두 형제는 이 광대한 아대륙 종횡으로 소위 “그리스도교” 중심지를 찾았고 이 사람들에게 구원의 좋은 소식을 전하였다.

많은 경우, 우리의 지방 순회 형제들은 그리스도교국의 선교 중심지를 방문하였고 지방 교직자들의 편안한 ‘방갈로’식 주택에서 그들의 후대를 받기도 하였다. 그 때에는, “큰 ‘바벨론’”과 여호와의 조직과의 뚜렷한 차이가 그렇게 분명히 인식되지 않았다. (계시 17:3-6; 18:4, 5) 그러나, 공개 강연을 듣고 우리의 서적을 읽을 때 차이가 나타났다. 이들 ‘유럽’계 교직자들은 청소년들에게 성서로부터 종교적 교훈을 주는 것보다는, 그들의 학교와 단체에서 성직 교육을 시키는 데 더 관심이 있었다.

그 당시, 때때로 ‘하우스 카’에 의한 도로 여행은 약간 모험이었다. 왜냐 하면 도로는 흔히 우차 길에 불과하였으며, 강에는 교량이 없었기 때문이다. 건기에 강바닥은 다소 말라, 낮은 시내와 긴 모래 땅 뿐이었다. 이러한 강바닥을 건너려면 ‘타이어’에서 얼마간 ‘가스’를 빼고 때때로 차에서 짐을 내리고 낮은 시내를 걸어서 건너며 물품을 운반할 필요가 있었다. 일단 안전하게 건너면, 형제들은 여행을 계속하기 전에 수동 ‘펌프’로 ‘타이어’를 팽창시키고 다시 짐을 실어야 하였다. 우기에는, 두개의 시골 배를 나무 널빤지와 함께 묶음으로 승강장을 만들어 일종의 연락선을 마련하여 그 위에 차나 작은 버스를 옮길 수 있었다. 물론 우차로는 진흙길이 되었다. 위험에도 불구하고, 이전에 가지 못하던 곳에 성서 진리를 전하게 되었다.

그 시절에 한번은, ‘조지 라이트’가 더운 계절이 가까운 때에 ‘유나이티드 프로빈스’(‘우타르 프라데시’)에서 우차를 타고 여행하고 있었다. ‘스키너’ 형제는 ‘콘포르’에서 그와 합류하였다. ‘제임스’ 가족의 손님이 되어 햇볕에 달아 오른 그 집이 너무 더워서 옥외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이들 두 ‘파이오니아’는 ‘히말라야’ 산맥에 있는 해발 1951‘미터’의 중요한 피서지인 ‘나이니탈’까지 362‘킬로미터’의 여행길에 나섰다. 그들은 ‘나이니’의 ‘탈’ 즉 호수에 이르는 좁고 구불구불한 길을 올라갔다. ‘나이니탈’에서 자동차가 통행할 수 있는 길은 호수 주위의 평평한 길 뿐이었지만, 총독의 차만 그 길을 사용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다른 모든 차는 호수 근처 시장에 있는 시영 주차장에 주차하게 되어 있었다.

우리의 형제들은 ‘와이 엠 시이 에이’(YMCA) 숙박소에 투숙하면서 가파른 산 중턱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주택들을 방문하였다. 길이 꾸불꾸불하여 호별 방문 사업이 약간 힘이 들었다. ‘스키너’는 ‘라이트’보다 좀더 젊고 체격이 튼튼하여 좀더 높은 곳으로 다녔다. 한편, 심장이 튼튼하지 않은 ‘라이트’ 형제는 낮은 경사지를 방문하였다. 이곳 사람들의 가정에 많은 서적이 전해졌다.

우리의 형제들은 ‘나이니탈’에서 산악 지대를 거쳐, 결혼한 영국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는 숙영지인 ‘라니케트’로 갔다. 거기에서 우리의 서적 얼마가 배부되었다. ‘라니케트’에서 형제들은 ‘알모라’에 있는 자동차 통행이 가능한 길의 끝에 도착하였다. 거기에서 그들은 ‘히말라야’ 산맥의 숨막히는 아름다움을 지닌 웅장하고 눈덮인 산장을 볼 수 있었다. 이러한 멀리 떨어져 있는 ‘알모라’ 시에서 그리스도교국은 얼마의 종교적 포교를 행하였다. 그러므로 이들 격지의 사람들도 여호와의 건설된 왕국에 대한 증거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격리된 계곡으로

‘네팔’ 근처의 이 고지대에 있는 동안, ‘스키너’와 ‘라이트’는 그리스도교국의 유명한 감리교 감독 ‘스탠리 존스’ 박사가 ‘사드 탈’(일곱 호수)로 알려진 격리된 계곡에 자기의 ‘아시람’ 즉 종교적 암자를 숨기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스키너’ 형제는 이렇게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유명한 미국인 선교사와 회견하기 위해 출발했다. 우리는 구불구불한 자갈길을 따라 자동차로 마침내 그곳을 찾아가 이 산 계곡에 둘려싸여 있는 아주 넓은 대지, 본관과 몇 개의 집으로 이루어진 대지를 발견했다. 본관에는 편리한 가구가 갖추어져 있었으며 넓은 식당 전체에 ‘카페트’가 깔려 있었다. ···

“본관을 방문했을 때, 우리는 ‘스탠리 존스’ 박사에게 소개되었으며, 그는 우리를 친절히 접대하고 우리를 그와 그 ‘아시람’에 거주하는 이십명 정도되는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점심 식사를 하도록 초대하였다. 식사는 순수한 인도식으로, ‘탈리’ 즉 금속 접시에 ‘카레라이스’가 나왔는데, 모두들 바닥에 앉아 손가락으로 먹었다. ‘조오지 라이트’와 나에게는 숫가락이 제공되었다!

“점심 식사 후 이들 선교사들의 활동에 대한 공개 토론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종파적인 각 교회를 대표하는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들이었다. 나는 ‘존스’가 개인주의가 발전의 관건이고 자기 결정이 이들 선교사들의 따를 행동 노선이라는 점을 강조하던 것을 잘 기억한다. 그들의 포교 활동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아무 것도 토론되지 않았다. 식당에서 나온 후 우리는 ‘존스’ 박사를 성서 교리의 토론으로 이끌려 시도했지만 그는 거절하였고 협회 서적을 한 권도 받지 않았다.”

여기에서 ‘스키너’ 형제는 방향을 반대로 돌렸다. ‘라이트’ 형제가 ‘나이니탈’ 지방에서 계속 일하고 있을 동안에, ‘스키너’는 ‘모우터 버스’로 산길을 내려와 ‘카드고담’에 있는 종착역으로 갔다. 거기에서 그는 기차를 타고 ‘러크노우’로 갔고 햇볕 뜨거운 광대한 평원을 횡단하여 그 아대륙의 다른 편에 있는 ‘봄베이’로 돌아 왔다.

‘판잡’ 지방에서의 발전

1931년 초, ‘스키너’ 형제는 ‘판잡’ 지방으로의 또 다른 여행을 시작하였다. 이것은 연중 시원한 계절의 연례행사가 될 것이었는데, 여행은 보통 1월초에 시작되었다. ‘스키너’는 특히 거대한 ‘인더스’ 계곡의 강 유역, 거대한 관개 운하를 따라 촌락이 널려 있는 지역을 택하였다.

‘카네왈’에 거주하는 ‘새뮤얼 샤드’라는 인도인 “그리스도인” 교사는 협회 소책자를 ‘우르두’어로 번역하겠다고 제의했고 ‘스키너’ 형제가 이들 마을을 여행하는 동안, 통역으로 일하겠다고 제의하였다. 전적으로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된 다수 마을을 선택하여 그들은 우선 ‘라호르’로부터 기차로 출발하여, 다음에는 아마 말이 끄는 ‘통가’(2륜마차)를 탔을 것이고, 다음에는 때때로 말을 탔다. 각 마을에서 이삼일을 보냈다.

마을 주민들은 햇볕에 말린 진흙으로 집을 짓고 초가 지붕 혹은 목재 지붕을 만들었다. 내부 설비는 원시적이었다. 한 사람은 ‘차포이’ 즉 다리가 네개 있고 밧줄로 묶은 나무 오두막에서 잤다.

그러나 이러한 방문은 항상 즐겁고 참신한 경험이었다. 이들 농부들은 그들의 사탕수수 농장이나 곡식밭에서 돌아오자마자 성서를 손에 들고 그들의 ‘차포이’ 주위에 둘러 앉곤 했다. 어떤 사람들은 ‘후카’(길이가 2, 3‘피이트’되는 자루가 달린 수냉식 ‘파이프’)를 피웠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의 진리가 그들에게 설명될 때 성귀 하나하나를 찾아 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로마 가톨릭’을 제외한 그리스도교국의 여러 종파에 속한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이었다. 이 지역에는 ‘가톨릭’ 단체가 거의 없었다.

‘라이윈드’, ‘레날라 쿠르드’ 및 ‘오카라’와 같은 좀더 큰 지역에서 공개 집회가 마련되었다. 얼마 후, 일부 사람들은 ‘파이오니아’ 봉사를 자진하였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이 도래하면서 이러한 관심의 대부분은 식어졌다. 그러나 후에 새로운 ‘파키스탄’ 국가가 형성되었을 때 이 지역에 오게 될 ‘길르앗’ 졸업생들을 위한 밭이 준비되었다.

이곳 주민들은 그들의 선교단 지주들로부터 심하게 압제를 받았다. 선교단들은 정부로부터 토지를 희사받아 경작권을 가졌는데, 그들은 그 토지를 경작자들에게 임대해 주었다. 이것은 경작자들이 그 토지의 값이 치러질 때까지 그들의 수확의 일부를 해마다 선교단에 바치며 그 다음에 그 토지는 경작자의 재산이 된다는 이해하에 행하여졌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이론에 불과하였다. 단지 비만 와도, 때로는 심한 가뭄으로, 그들의 농작물의 가치가 줄어들었다. 그 결과 이 사람들은 선교단에 거의 언제나 빚을 졌다.

왕국 소식이 그들에게 전달되자, 그들은 선교단으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하였으나, 그렇게 할 수가 없었거나 그렇게 할 용기가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정착지를 박탈당하였을 때 몹시 고통을 당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타협을 하고 결코 큰 ‘바벨론’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돌발하고 ‘봄베이’의 지부 사무실과의 긴밀한 접촉이 불가능해졌을 때, 한 때 이 지역에 왕국 소식을 전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한 ‘새뮤얼 샤드’도 생계를 위하여 그리스도교국의 조직으로 돌아갔으며 큰 ‘바벨론’의 손아귀에서 사망하였다.

‘파리’에 다녀 오다

협회는 1931년 5월 ‘프랑스’ ‘파리’에서 국제 대회가 열리도록 마련하였다. ‘스키너’ 형제가 그 대회에 참석할 허락을 받았으며 ‘유럽’으로 가는 배표를 살 시간 여유가 없어서 그는 ‘페르시아’ 만을 거쳐, 다음에 육로로 ‘바스라’, ‘바그다드’, ‘이스탄불’을 통과하여 ‘파리’로 갔다.

‘파리’ 대회에서 ‘스키너’는 ‘왙취 타워 협회’ 2대 회장 ‘조셉 F. 러더포오드’와 개인적으로 토의할 수 있는 특권을 가졌다. 인도에서의 사업을 강화하기 위하여 ‘스키너’ 형제는 또 다른 ‘하우스 카’를 구입할 허락을 받았다.

인도 밭의 새로운 일꾼들

‘스키너’ 형제는 영국 ‘셰피일드’에서 그의 가족과 짧은 휴가를 보내는 동안, ‘콜포처’(오늘날의 ‘파이오니아’)인 ‘랜들 호플리’ 형제와 ‘클레어런스 테일러’ 형제를 만났다. 인도에서 여호와를 섬기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받고 그들은 그렇게 하겠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협회의 허락을 받아, ‘호플리’ 형제와 ‘테일러’ 형제 및 ‘콜포처’ ‘제럴드 가라드’가 ‘런던’ 부두에서 항해하여 1931년 9월에 ‘봄베이’에 도착하였다. ‘스키너’ 형제는 그들이 인도 땅을 밟을 때 그들 ‘파이오니아’들을 환영하기 위하여 대기하고 있었다.

‘봄베이’에서 일주일 정도 이곳의 더위와 습도에 익숙해진 후에 그 ‘콜포처’들은 그들의 새로운 임명지로 옮겼다. ‘호플리’와 ‘테일러’는 ‘푸나’로 여행하여 경치좋은 ‘웨스턴갓스’까지 갔다. 곧 그들은 상당한 크기의 이 군사 주둔지의 주민들에게 협회 간행물을 배부하는 데 바빴다.

‘푸나’에서 수개월간 일한 후, 병에 걸리게 되어 ‘봄베이’까지 193‘킬로미터’를 여행하였다. 회복되자 그들은 북서 인도의 ‘신드’ 지방과 또한 ‘판잡’ 지방의 새로운 봉사 임명지로 갔다. 여러 상자의 서적과 취침 도구를 갖추고, ‘호플리’와 ‘테일러’는 열차를 타고, ‘마르와르’ 연락역과 ‘루니’를 경유하여 ‘아라발리’ 구릉 지대 변두리를 지나 ‘하이더라바드’를 통과하고 ‘카라치’에 이르렀다. 사흘간의 삼등열차 여행은 즐거운 여행이 아니었지만 가장 비용이 적게 드는 여행이었다.

‘호플리’ 형제와 ‘테일러’ 형제는 특별한 친절로 그들을 대한 ‘플로렌스 시거’ 댁에서 숙소를 정하고, ‘카라치’의 넓은 지역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였다. 거기에서 그들은 ‘인더스’ 평야를 떠나 북쪽으로 올라가 ‘키르타르’ 산맥으로 갔으며 해발 약 1,676‘미터’되는 ‘쿠에타’에 이르렀다. ‘쿠에타’ 자체는 3,353‘미터’ 이상 높은 산들을 포함한 여러 산이 둘러싸고 있는 평야에 위치해 있다. 여기에서, 평야의 더위와 대조되는 상쾌한 기후를 즐기며 ‘호플리’와 ‘테일러’는 여러 날 동안 즐거이 왕국 전파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곧 우리의 두 형제는 다시 여행길에 올랐으며, 이번에는 영령 인도의 수도이며 역사적 ‘그랜드모굴’의 본부인 ‘델리’로 갔다.

‘델리’는 ‘올드델리’와 ‘뉴우델리’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그 도시는 ‘호플리’ 형제와 ‘테일러’ 형제가 이전에 방문한 도시들보다 훨씬 큰 도시였기 때문에, 그들은 특별히 오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들은 ‘델리’에서 서적을 전하기는 쉽지만 ‘힌두’교인들과 기타 사람들에게 생명이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희생을 통해서만 올 수 있다는 것을 설득시키기는 어려움을 발견하였다.

형제들은 ‘델리’의 여름이 견디기 어렵게 덥다는 것을 발견하고 ‘히말라야’ 산맥 기슭에 있는 ‘나이니탈’ 고원 피서지를 방문하였다. 그곳에 몇개의 ‘유럽’계 학교가 있었고 우리 형제들은 교사들에게 그리고 그 평원의 주민들과 피서차 이곳에 온 부유한 전문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성서의 소식을 전할 수 있었다.

‘나이니탈’에서 사업을 마치고 두 형제는 다음 2년 반 동안 그들을 바쁘게 한 확장된 열차 여행을 시작하였다. 가는 곳에서마다 그들은 이전 ‘파이오니아’들의 습관을 따라, 소위 “그리스도인” 지역을 찾아내고 수백부의 서적과 소책자를 배부하였다. 이러한 방법으로 이 나라의 많은 지역, 특히 ‘유나이티드 프로빈스’의 많은 지역에 소식이 전해졌다. ‘힌두’교의 부도덕한 “신” ‘크리시나’의 출생지라고 하는 ‘마두라’, ‘아크바르’ 황제의 옛 수도 ‘아그라’, 중요한 열차 연락역 ‘러크노우’, 가죽 생산 도시 ‘콘포르’, 회교도와 ‘힌두’교인들에게 거룩한 ‘알라하바드’, 그리고 ‘힌두’교의 “영원한” 도시 ‘베나레스’—이 모든 곳을 차례로 방문하여 여호와의 목적과 조직에 관해 배울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클로드 굿맨’과 ‘론 티핀’이 ‘버어마’의 임명지로부터 인도로 돌아왔다. 그들은 장마철에 내륙항 ‘캘커타’에서 함께 머물렀다. 그들은 수많은 사람들을 보고 인구로 붐비는 이 도시가 어떻게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을까 의아해 하였다. 그들이 아는 한, ‘캘커타’의 주민 중 한 사람도 “도”에 속하지 않았다. (사도 9:1, 2) 그들은 ‘프리이 스쿠울 스트리이트’ 근처에서 세간이 없는 방을 얻고 상자를 의자와 식탁으로, 그리고 바닥을 침대로 사용하였다. 주민의 대다수가 ‘벵골’어만을 알았다. 그래서 ‘파이오니아’들은 영어를 읽을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집중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여 ‘캘커타’에서 사업이 시작되었다.

“왕국, 세상의 희망”

1931년 7월에 성경 연구생들은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새로운 명칭을 채택하였다. 이제 특별 운동으로, 「왕국, 세상의 희망」이라는 소책자가 주요한 나라의 교직자, 정치인, 대기업가들에게 배부되어 이들 지도자들에게 우리의 새로운 명칭을 통지하였다.

이 운동이 마침내 인도에 상륙하였으며 1932년의 상당 부분이 그 왕국 소책자를 인도의 여러 토착어로 번역하는 데 소요되었다. 북부 인도의 ‘파이오니아’들은 ‘판잡’, ‘봄베이’ 및 ‘유나이티드 프로빈스’의 사람들에게 사용할 수 있도록 ‘우르두’어, ‘구아자라티’어, ‘힌두’어로 번역된 소책자를 받고 뛸 듯이 기뻐하였다! ‘트래반코르’와 ‘마드래스’의 형제들은 ‘말레야람’어와 ‘타밀’어로 된 왕국 소책자를 배부하는 데 전념하였다. 한편, ‘파이오니아’들은 영문판 소책자를 교직자들에게 전하는 데 활동적으로 일하였다. 7,320부의 영문판과 14,603부의 지방어 소책자 가운데서, 2,468부는 인도 내의 그리스도교국 교회 지도자들의 손에 들어 갔다. 우리의 번역 활동이 확장되는 것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하우스 카’로 중부 인도를 횡단

‘하우스 카’ 증거 사업도 발전하고 있었다. 이제 인도의 대로와 소로를 누비는 ‘하우스 카’가 두대 있었다. 1932년 8월에, ‘클로드 굿맨’과 ‘론 티핀’은 ‘마라타’ 용사들의 역사적인 수도이며 현재 농산물 교역 중심지인 ‘잔시’까지 파견되어 그 곳에서 ‘하우스 카’ 한대를 인수하게 되어 있었다. ‘굿맨’과 ‘티핀’은 속히 운전을 배우고 영문 서적 및 ‘우르두’어와 ‘힌디’어 소책자 상자들을 포함한 필수품들을 실었다.

이들 담대한 ‘파이오니아’들은 중부 인도를 횡단하며 사업을 개척하였다. 그들은 강을 건너는 데 능숙해졌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거의 어느 곳에서나 멈추었다. 건널 때의 기계적인 순서는 ‘타이어’의 공기를 일부 빼고, ‘매니포울드’의 배기 장치를 분리하고, ‘팬 벨트’를 제거하고, 점화선에 기름을 치고, ‘크랭크’실과 통풍창을 막는 것이었다. 언제나, ‘엔진’의 소리를 듣고 원주민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몰려 왔는데, 어디로선지 모르게 나타나는 것 같았다. ‘삼발푸르’ 시 근처 ‘마하나디’ 강을 건너는 동안 그들은 부러진 ‘메인 스프링’을 최선을 다해 임시 변통으로 수선해서 지탱시켜 놓고 도중의 여러 도시에서 증거하기 위하여 중지하지 않고 ‘커탁’까지 가기로 결정하였다.

‘람푸르’를 통과한 후, 그들은 ‘하우스 카’를 그 도시에서 16‘킬로미터’ 떨어진 밀림 속에 정차시켰다. 이곳에서 밤을 보낼 준비를 하였다. 그들은 차가 도로를 지나가는 소리를 들었는데, 이것은 희귀한 일이었다. 그리고, 후에 그들은 또 한번 차 소리를 들었다. 곧 잠자던 형제들은 커다란 외침 소리에 잠을 깼다. 알고 보니 총경이 이끄는 경호대였다. 이보다 앞서 그 지방 왕족이 지나갔으며 ‘하우스 카’의 불빛을 보았다. 그는 이 지역이 위험한 코끼리와 호랑이가 있는 곳이니 ‘람푸르’로 돌아와 거기 있거나 무장 경호원이 밤새도록 그 “차”를 지키게 하라고 말하였다. 마지 못하여, 형제들은 경호를 받으면서 되돌아 왔다. 다음날 그들은 그 지역에서 일하기로 결정하였다. 모든 사람이 왕족의 이야기를 들었으며 형제들은 거의 유명인이 되었다. 그들은 그들이 가진 거의 모든 서적을 배부하였다. 그리하여 ‘파이오니아’들은 ‘니느웨’의 구역으로 ‘요나’가 얼마쯤 ‘옮겨진’ 것을 상기하였다.—요나 1:17; 2:10; 3:1-3.

그리고 이제, 남쪽으로

‘커탁’은 ‘마하나디’ 강 삼각주에 위치해 있으며 ‘오리사’ 운하 관개 시설의 중심점이다. 우리의 여행자들이 “절뚝”거리고 그들의 절름거리는 ‘하우스 카’를 정지시킨 것은 이 도시에서 였다. ‘하우스카’를 수리하면서 며칠을 보낸 후, ‘봄베이’로부터의 서적 공급품을 받고 물질적 생활 필수품을 채우고 ‘굿맨’과 ‘티핀’은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코모린’ 갑이 있는 방향으로 인도의 동쪽 해변을 따라 내려 갔다.

두 ‘파이오니아’는 밀림에서 잠을 자고, 강에서 세탁을 하고 길을 따라 증거하며, 서서히 남쪽으로 이동하였다. 그들은 ‘봄베이’에 있는 지부 사무실에 그들이 특정 일자에 어디에 있을 것인지를 알렸기 때문에, 새로운 공급품들이 보내졌다. 이렇게 하여 수천부의 서적과 소책자를 전하였으며 많은 가족들에게 성서에 희망을 둘 기회를 제공하였다.

‘푸리’에서 형제들은 거대한 종교 차량, 무게가 아마 18,144‘킬로’나 되고 ‘힌두’ 우상 ‘저거나우트’가 태워져 있는 차량을 보았다. ‘저거나우트’는 이교신 ‘비시누’와 ‘크리시나’의 예배식 명칭이며 이 우상은 매년 그 도시를 한 바퀴 돈다. 많은 사람들이 굵은 밧줄로 끌 때 그 앞에서 수백명의 신봉자들이 절을 한다. 사람을 자유케 하는 진리를 아는 것은 참으로 큰 축복이다!—요한 8:32.

소리와 그림으로 증거함

1933년, ‘플로렌스 시거’는 ‘봄베이’ 지부 사무실을 방문하고 인도에서 사용하도록 녹음 재생기를 기증하였다. 이 나라에서 최초의 것인 이 건전지용 녹음 재생기는 자체 ‘앰프’와 16‘인치’ 회전반을 가지고 있었다. 이 선물로, 우리 사업의 새로운 특징이 인도에서 시작되었다. 이제 ‘하우스 카’는 확성차로 변모될 수 있었다. 녹음 재생기 사업은 ‘뱅갈로르’에서 시작되었으며 그 해에 그곳에서 작은 대회가 열렸다.

이 ‘하우스 카’는 구원의 소식을 수많은 곳에 전하는 데 무한히 가치있는 역할을 하였다. 수분 내에 두개의 나팔 ‘스피이커’를 ‘하우스 카’ 지붕에 달고 ‘앰프’에 연결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시장에서, 공원에서, 대로에서, 사람들이 있는 어디에서나, 녹음된 성서 강연이 “방송”되었다. 일요일에는, 교회 건물 가까운 곳에서, 교회 신도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 “연옥”, “삼위일체”, “왜 교직자들은 진리를 반대하는가?”와 같은 제목의 연설이 방송되었다. 흔히, 많은 사람들이 차 있는 곳으로 와서 서적을 요청하였다. 교직자들은 흔히 폭력을 선동하였다. 그리고 때때로, 원시적인 주민들은 “음성”의 출처를 알기 위하여 ‘하우스 카’ 위로 기어 오르곤 하였다.

‘하우스 카’ 한대는 영사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격지에 있는 토착 인도인들은 난생 처음으로 새롭고 놀라운 것 즉 창조 사진극을 구경하였다!

이 ‘하우스 카’를 확성차로 사용하기 위하여 ‘조오지 라이트’는 ‘모우터’ 발전기를 샀다. 차 ‘엔진’에 부착시킨 손수 만든 연결 장치로 그는 사진극 ‘슬라이드’를 비치기 위한 전기를 직접 발전하였다. 그 당시 형제들은 그들의 기재를 손수 만들지 않으면 안되었다. ‘라이트’는 흔히 우정적인 철도 감독이 제공한 철도 기관차의 ‘헤드램프’의 전구를 환등기 전구로 사용하였다.

이 무렵, ‘스키너’ 형제는 ‘라이트’ 형제와 함께 ‘유나이티드 프로빈스’를 여행하였다. 한 도시의 학교 강당에서 사진극을 상영하였다. ‘조오지 라이트’는 강당에서 ‘슬라이드’를 보이는 동안, ‘에드윈 스키너’는 차에 앉아서 전압계를 지켜 보고 전구가 터지지 않도록 표준 속도를 유지했다.

밭에서 일하는 용감한 일꾼들

인도 전체 밭에 지방어 서적을 산출하는 장족의 발전이 1930년대 중반에 이루어졌다. 그 때, 여러 가지 소책자가 ‘타밀’어와 ‘우르두’어로 발행되었다. 인도에서의 우리의 사업의 역사상 처음으로, 서적 생산량이 여섯 자리수에 이르렀다. 1934년에 102,792부의 서적과 소책자가 배부되었다.

이 무렵, 키가 크고 야위고 쾌활한 ‘파이오니아’인 ‘재럴드 개라드’는 아홉달 동안 ‘캘커타’ 주민들에게 증거하였다. 그는 주로 더위 때문에 건강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모든 불편을 보상하는 한 가지 경험이 있었다. ‘캘커타’의 사업 지구에서 일하다가, ‘개라드’는 영국 ‘런던’에 있는 한 여호와의 증인의 아들을 만났다. ‘개라드’ 형제는 ‘윌리엄 킹’의 관심을 자극하였으며 그가 진리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개라드’의 그 후 짝은 선장 출신인 ‘반더비이크’ 형제였다. 그는 ‘캘커타’에서 ‘개라드’와 함께 사랑의 본을 보였으며, 사실상 그 곳에서 장질부사로 사망하였다. 그것은 가슴아픈 일이었다. ‘반더비이크’ 형제는 일요일 밤에 사망하였다. ‘개라드’는 월요일 아침에 그의 짝을 매장하고 같은 날 저녁에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간호원 출신인 호리호리한 체구에 활발한 여인 ‘모드 멀그로브’는 ‘봄베이’에서 속히 진리 안으로 들어 왔으며 1935년에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였다. 즉시, 그는 ‘마이소어’ 주의 수도이며 고운 ‘실크’로 유명한 곳인 ‘뱅갈로르’에서 일하도록 파견되었다. ‘뱅갈로르’의 기후는 해발 949‘미터’에 있으므로 영국군의 큰 군대 병영에 알맞았다. 여기에서, 인도의 가장 성공적인 ‘파이오니아’ 중 한 사람인 ‘멀그로브’ 자매는 전 시간 전파 사업을 시작하였다.

1930년대말의 인도

이 때쯤, ‘랜들 호플리’ 형제는 동남부 인도 대부분을 여행하였다. ‘네가파탐’(현재는 ‘나가파티남’)에서 그는 ‘시크’교 출신이며, ‘말레이’에 살 때 참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조오지 푸란 싱’이라는 젊은 ‘파이오니아’와 함께 일하였다. ‘호플리’는 이 젊은 ‘파이오니아’로 하여금 그의 증거 능력을 발전시키도록 도울 수 있었다.

북쪽으로, ‘판잡’ 지방에서, 네명의 인도 ‘파이오니아’와 여섯명의 기타 왕국 선포자들에 의해 훌륭한 일이 많이 수행되고 있었다. 이 비옥한 지방에 열 여섯개 소도시와 마을이 있었는데, 166명의 관심자가 참석하는 정기적인 집회가 마련되었다. 적절한 지도력과 약한 사람들을 강화할 필요성이 뚜렷하였기 때문에 사업에서 인내할 결심과 용기가 필요하였다. 구세군이 그들이 경작하고 있던 땅에서 여덟명을 쫓아냈다. 왜냐 하면 이들이 그 종교 조직과 연합을 중지하고 여호와의 조직과 연합하였기 때문이다. 그럴지라도, ‘판잡’ 지방의 밭은 여전히 광대하고 일꾼은 적었다.

1938년 12월에 ‘오스트레일리아’의 지부 감독자 ‘알렉스 맥길리브레이’가 ‘알프레드 위크’와 함께 인도를 방문하였다. ‘봄베이’ 동남방 129‘킬로미터’의 구릉 휴양지 ‘로나블라’에서 대회가 개최되었다. 침례장으로 사용할 인근 호수의 깊이를 재기 위하여 ‘클로드 굿맨’과 ‘에워트 프랜시스’는 물에 들어 갔으며 수영을 하고 돌아와서 보고하였다. 2주 후 ‘굿맨’ 형제는 장‘티푸스’에 걸려 중태로 입원하였으며 ‘에워트 프랜시스’는 사망하였다. 아마, 오염된 물에서 감염되었을 것이다. 우리의 가장 유능한 ‘파이오니아’ 중 한 사람을 상실한 것은 사업에 분명히 타격이 되었다.

‘맥길리브레이’ 형제가 방문하고 협회의 동의를 얻어 ‘오스트레일리아’ 지부가 인도에 작은 인쇄기를 제공할 마련이 이루어졌다.

1926년부터 1938년까지는 인도에서 막대한 양의 고된 ‘파이오니아’ 활동이 있었다. 머나먼 길의 여행이 있었고 수많은 서적이 배부되었다. 수많은 곳에 증거가 행해졌다. 그러나, 이 모든 활동에도 불구하고 증가는 거의 없었다. 1938년에, 열 여덟명의 ‘파이오니아’와 273명의 “동료 전도인들”이 있어, 도합 300명 가까운 증인들이 전국에서 활동하였다. 이들 충실한 형제들은 광대한 인도 전역의 스물 네개 회중에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형제들은 좋은 소식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자가 될 필요성을 더욱 인식하게 되었다. 점차적으로, 야외 봉사를 보고하고, 재방문을 하고 가정 성서 연구를 사회하는 면에서 사업은 더 잘 조직되고 있었다.

얼마 동안, 협회의 인도 지부 사무실은 ‘콜라바’ 가 40번지에 있는 것보다 더 훌륭한 건물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되었다. 허락을 얻고, ‘봄베이’ 사무실은 ‘봄베이’의 중심 상가에 있는 ‘바스티온’ 가 17번지의 다른 건물로 이사하였다. 그 새로운 건물은, 시설이 더 좋을 뿐만 아니라 협회의 업무를 위해 철도역과 기타 주요한 곳에 가기가 더 쉬웠다. 그러나 지부 사무실의 이전 후 얼마 안있어 제2차 세계 대전이 돌발하였다.

전쟁이 한창이던 동안

전쟁으로 말미암아 제재가 가해졌고 그것은 점차 심화되었다. 그러므로 지부 사무실은 이전 장소로 다시 옮겨졌다. 북쪽으로, ‘신드’와 ‘판잡’ 지방에서, 왕국 사업은 이제 대략 두개의 대도시 ‘카라치’와 ‘라호르’로 제한되었다. 그 지방의 다른 곳에서는 많은 전파가 행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의 ‘파키스탄’인 그곳에서 약간의 진보가 있었다.

당시 인도를 통치하던 영국 정부는 군 징집을 위해 모든 영국인 남자의 명단을 제출하라고 요구하였다. 인도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가이사”의 이 요구에 응하였고 지부 감독자인 ‘스키너’ 형제는 명단을 보내면서 그리스도인 중립의 입장을 명백히 설명하는 편지를 동봉하였다.—마태 22:21; 요한 15:19; 17:14; 디모데 후 2:3, 4.

그 설명의 결과로, 이 국민 병역법 하에 있던 형제들이 병역 면제를 받았다. 물론 영국 정부는 우리의 남자 ‘파이오니아’들이 어떤 국가적 봉사를 수행하도록 하려는 노력이 있기는 하였었다. 그들은 우편 업무를 수행하는 데 이의가 있는가 하는 질문을 받았다. ‘스키너’ 형제는, 우리가 그러한 우편 업무를 반대하지는 않으나 우리의 그리스도인 사업이 하나님의 왕국을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것이며 그 활동을 중지하는 것에 반대한다고 대답하였다. 그 결과, 세속 당국은 ‘파이오니아’들이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하나님께서 주신 봉사를 계속 자유로이 수행하도록 허락하였다.

거짓 종교의 영향을 물리치다

거짓 종교의 나쁜 영향은 1940년에 발생한 사건으로 입증되었다. 한 작은 도시에서, ‘로마’ 가톨릭 군중이 세속 정권으로 하여금 우리가 녹음 재생기를 사용하는 것을 금하게 하려고 노력함으로써 ‘신의에 따라 소란을 조성’하고자 시도하였다. (시 94:20) 세명의 ‘가톨릭’ 사제를 포함하여 150명이 서명한 진정서, 그들의 교회를 모욕한다고 불평하는 진정서가 치안 판사에게 제출되었다. 치안 판사는 그 문제를 조사하고 서명자 150명에게 여호와의 증인을 방해하지 말라고 경고하였으며, 우리의 사업은 계속하도록 허락하였다.

같은 해 또 다른 도시에서 또 다른 종교적 충돌이 있었다. 두명의 인도 ‘파이오니아’가 “자기 양떼”에게 서적을 배부한다는 이유로 한 종교 목사로부터 폭행을 당하였다. 즉시, ‘파이오니아’들은 광고지를 인쇄하여 이 비그리스도인 ‘싸움’에 주의를 이끌고 그 지방 전체에 그 광고지를 배부하였다. 확성차가 와서 몇가지 성서 강연을 행하였다. 그 결과, 일단의 인도인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교국과 그리스도교의 차이를 깨닫게 되었고 왕국 소식을 선포하는 데 활동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배를 타고 격지로

‘트래반코르’의 나무가 늘어선 벽지의 외딴 곳에는 배를 이용하여 좋은 소식을 전파하였다. 일단의 ‘말레얄리’ ‘파이오니아’들이 노젓는 배를 세냈다. 그들은 벽지의 산재한 마을들을 가면서, 천여명의 사람들에게 공개 강연을 행하고 서적을 배부할 수 있었다. 약 600명의 서적과 소책자가 달리는 갈 수 없는 열 여섯개 마을에 배포되었다. 그러므로, 많은 논과 가느다란 야자수가 있는 이 땅에,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효과적인 증거가 행하여졌다.

‘트래반코르’에서 노력을 증가시킴

‘트래반코르’에서의 사업은 1941년경에 절정에 달하였다. 그 때에 「파수대」가 협회 소유 인쇄기에 의해 ‘말레야람’어로 최초로 발행되기 시작하였다. 당신은 협회의 ‘오스트레일리아’ 지부가 1938년에 작은 인쇄기를 제공하였음을 기억할 것이다. ‘파이오니아’ ‘클로드 굿맨’은 ‘말레얄리’ 형제들을 위한 「파수대」지를 인쇄하는 일을 감독하도록 임명되었다.

“나는 인쇄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하였으며 나는 「파수대」 인쇄 언어인 ‘말레야람’어를 알지 못하였다. 첫째 문제는 인쇄에 관한 책을 읽음으로 극복되었다. 둘째 문제는 내가 책에서 읽는 것을 ‘K. M. 바루기스’ 형제에게 설명하면서 손짓으로 극복하였다. 수개월 후에, 우리는 이전의 상업적 회사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우리의 ‘말레야람’어 잡지를 잘 인쇄하고 있었읍니다.” 하고 ‘굿맨’ 형제는 말하였다. 의심할 여지없이, 인쇄기의 도입은 남부 인도에서 왕국 사업을 증진하는 데 분명한 발전이었다.

순전히 환경으로 인하여, 우리의 ‘하우스 카’ 사업은 이제 종결되었다. 전시의 제한으로 휘발유가 매우 부족하게 되었으며, 배급제로 인하여 주행 거리가 제한되었다. 더우기, 협회의 인도 지부 사무실은 외국 지부로부터의 재정적 지원에 있어서 심각한 감소를 겪었다. 그러므로 ‘하우스 카’를 팔고 왕국 활동의 다른 면에 그 돈을 사용하는 것이 여호와의 뜻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인도 전역에서 하나님의 왕국에 관한 증거를 확장하는 데 있어서 이 ‘하우스 카’는 막대한 양의 만족한 일을 수행하였다.

금지령 하에서 좋은 소식을 선포함

1941년 어느날, ‘언더우드’ 형제는 자기의 임명지인 ‘비하르’ 주의 수도 ‘파트나’에서 호별로 전파하고 있었다. 갑자기, 경찰이 현장에 나타나 그를 체포하고 그를 경찰서로 연행해 갔다. 거기에서 경찰은 그가 가방에 가지고 있던 모든 서적을 압수하였다. 다음에, ‘언더우드’가 가지고 있던 특정한 출판물들이 정부에 의하여 공식 금지되었다. ‘비하르’에서 발생한 일은 자동적으로 인도의 모든 주에서 잇따라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정부는 1941년 6월 14일 제21-C호 공고문을 발표하고 협회 출판물 일체를 압수하였다.

‘왙취 타워 협회’ ‘봄베이’ 사무실이 습격을 받고 모든 서적이 강탈되었다. 그러나 여호와의 손은 짧지 않았다. 다량의 서적을 보관할 필요가 없게 되고 ‘브루클린’ 본부로부터의 재정적 도움이 끊어지자, 인도 지부 사무실은 ‘콜라바’ 지역의 더 작고 덜 비싼 곳으로 옮겨졌다. 이제 「파수대」가 금지되었지만, 그 전 기간 동안 한 호도 빠지지 않았다. 여호와께서는 형제들에게 영적 양식이 공급되게 하셨다. 자주, ‘봄베이’ 항에 들어오는 상선들은 여호와의 증인 선원들을 실어 왔으며, 언제나 그들은 지부 사무실에 최근호 「파수대」지를 가져왔다.

다음에 그들은 두려움 없이 그러나 슬기롭게 ‘스텐슬’을 만들고 복사기로 인쇄하여 인도에 흩어져 있는 형제들에게 공급하였다. 후년에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와 「왕국은 가까왔다」 책과 소책자가 등사판으로 발행되고 제본되어 형제들에게 배부되었다. 그 결과, 금지령 전기간을 통하여 여호와의 사랑의 보호로 인하여 많은 성서 연구 마련이 가능하였다.

야외에서, 형제들은 전쟁의 흥분에 영향을 받은 정부 관리들의 방해를 받고 있었다. ‘코타얌’에서는 어느날 경찰의 유개차가 협회 보관소 밖에 와서 작은 인쇄기를 압수하였다. 그것은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경찰의 관리하에 있었다. 북쪽으로 ‘캘커타’에서 우리의 ‘파이오니아’들은 경찰에 접근을 받아 그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서적을 압수당하였다.

숭배의 자유를 위한 청원이 영국 총독 ‘린리드고우’ 경에게 올려졌지만 그는 여호와의 백성에 대하여 마이동풍이었다. 그러나 형제들은 투쟁을 계속할 결심을 하였으며, 「하나님과 국가」라는 소책자가 모든 정치적 입법 기관에 발송되고 많은 그리스도교국 교육 기관에 발송되고, 가능한 한 많은 교직자들이 「신권 통치」 소책자를 받았다.

1942년 1월 충실하고 사랑받은 ‘조셉 F. 러더포오드’가 사망하였다. ‘왙취 타워 협회’의 새로운 회장 ‘나단 H. 노워’는 즉시 모든 지부와 교신하였고 새로운 방법을 통해 그들과 지부와의 통신을 확립하였다. 험악한 전쟁의 분위기 가운데서 본부와 이와 같이 긴밀한 접촉을 갖는 것은 마음을 든든하게 해 주었다.

곧, 새로운 가정 성서 연구 운동이 실시되었으며, 각 왕국 선포자는 각자 자기의 구역을 체계적으로 돌며 관심자의 주소를 적어 두었다가 가능한 한 정기적으로 가정 성서 연구를 사회하기 위하여 다시 방문하였다. 더우기, 인도에서 영어를 말하는 모든 전 시간 일꾼들은 야외 봉사에 매달 175시간을 바치는 특별 ‘파이오니아’로 등록하도록 초대되었다.

북쪽 ‘라호르’에서 ‘페르시아’인 ‘제이컵 포란’은 그의 영국인 짝 ‘클레어런스 테일러’와 함께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였다. 갑자기, 1942년 3월에, 두 사람은 혐의없이 체포되어 수감되었다. ‘테일러’는 석방되었다. 그러나 ‘포란’은 석달 동안 감금되어 있었다. 반복적인 호소와 개인적인 회견을 통하여, 정부 당국이 ‘포란’ 형제가 무슨 죄목으로 투옥되었는지를 말하게 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존슨’이라는 성공회 교직자가 이 ‘파이오니아’에 대한 거짓되고 악의적인 신고를 경찰에 했을 것이라는 강한 의심이 있었다. ‘존슨’의 면전에서 그가 그러한 신고를 했는가 질문하였을 때 그는 그것을 부인하였다. ‘포란’ 형제는 자기의 죄가 무엇이라는 말을 듣지 못했으나, 석방되었을 때 담대하게 같은 구역에서 계속 전파하였다.

또 다른 특별 ‘파이오니아’인 ‘케이트 머어글러’ 자매도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남쪽 구릉 휴양지인 ‘닐기리’ 구릉 지대의 ‘코타기리’에서 그는 7월에 일주일 내에 그 지역을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명령을 통고한 사람은 ‘로마 가톨릭’ 교도인 ‘마드래스’ 성의 총독이었다. 그 이유는 그가 ‘코타기리’에 있는 것이 “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데 불리”하다고 간주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우리의 젊은 자매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기로 결정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전파 사업을 계속 수행하였다. (사도 5:29) 그는 체포되어 18개월 형을 선고받고 ‘마드래스’ 성의 ‘벨로어’에 소재하는 여자 교도소에 단순히 수감되었다. 청원 끝에 ‘머어글러’ 자매는 약 6개월 수감된 후 석방되었다.

얼마 동안, ‘봄베이’ 지부 사무실에 있는 지부 감독자와 그의 동료들은 밤에 거리를 지나는 전쟁 장비의 떨그럭 소리에 시달렸다. 사무실은 영국 ‘탱크’, 야포 및 기타 무거운 군 장비가 보관되어 있는 ‘봄베이’ 군 병기창으로 가는 도중에 있었다. 밤이면 시끄러웠다. 그러므로, 협회로부터의 허가에 의하여 지부 사무실은 다시 이전하였는데, 이번에는 좀더 조용한 ‘바이쿨라’ 구역에 있는 더 넓고 경제적인 건물이 있는 ‘러브레인’ 167번지로 이사하였다. 이곳은 인도에서 다음 18년간 우리 그리스도인 활동의 중추 역할을 해 오다가 1960년에 와서 협회는 ‘봄베이’ 북방 21‘킬로미터’의 ‘산타크루즈’의 교외에 협회 소유 부동산을 매입하였다.

협회 인쇄기가 압수되고 외부 인쇄업자들이 우리를 위하여 일하기를 두려워하여 남부 인도의 ‘말레얄리’ 형제들은 야외 봉사를 위한 서적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성서만 가지고 증거하는 일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소량의 영문 서적이 새어 들어 왔다. ‘로마 가톨릭’의 반대가 증가하여 한 때 ‘가톨릭’ 폭도는 연사에게 소똥을 던지며 공개 집회를 방해하였다. 다음날, 우리의 용감한 형제가 그 같은 마을의 모든 집을 방문하여 생명의 소식을 그들에게 제공하였다.

정부가 우리의 서적을 금지하였을지라도, 우리는 결코 무엇인가를 인쇄하고자 하는 노력을 중지하지 않았다. 1942년에 「희망」 소책자의 견본이 ‘브루클린’으로부터 도착하였다. 이 소책자는 인도 국토 방위법의 범위에서 매우 분명히 떠나 있었으므로, 지부 사무실은 정부에 그들이 이 소책자가 인쇄되었을 때 압수하지 않을 것을 보증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상당한 지체 후에, 중앙 정부는 이 소책자에 예외를 만들기로 동의하였다. 그러나 지방 정부가 원할 경우 그것을 금하는 것을 막지는 않는다는 말을 신중히 부언하였다. 「희망」 소책자는 ‘봄베이’의 ‘유니폼’ 인쇄사가 인쇄하였다. 각 소책자의 뒤에 이러한 말이 있었다. “인도 정부 당국에 의하여 본 소책자는 1941년 6월 14일자 정부 공고문 제21-C호 시행으로부터 면제됨.”

그 당시 하나님의 백성들의 특기할 만한 대회 중 하나가 1943년 1월에 ‘봄베이’에서 개최되었다. 이 삼일간의 대회는 그 때까지 인도에서 가장 큰 영어 대회였다. ‘실론’에서 온 두명을 포함하여 77명이 참석하였다.

열성스런 노력이 결실을 보다

다수의 ‘버어마’ 형제 자매들이 일본의 ‘버어마’ 점령을 피하여 인도의 수도 ‘뉴우델리’에 정착하였다. 장엄한 의식과 넓은 대로 가운데서 여호와의 증인의 작은 회중이 형성되었다. ‘필리스 트사토스’ 자매에게는 ‘델리’의 영국군 본부에서 일하는 친척이 있었다. 어느날 이 친척은 이 자매를 세명의 영국 군인에게 소개하여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다. 이 군인 중 한 사람은 ‘피터 팰리서’였는데. 그는 여호와의 증인이 되어 한동안 영국에서 순회 감독자로 봉사하였고 후에 ‘케냐’의 협회 지부 사무실을 감독하였다. 세 군인 중 가장 나이많은 사람은 영국에 증인 아내를 두었으며 그 아내는 충실히 남편에게 매호 「파수대」를 보내 주었다. ‘델리’ 형제들은 매호 잡지를 ‘봄베이’ 지부 사무실에 보낼 수 있었고, 지부 사무실에서는 인도에 배부하기 위하여 그것을 복사하였다.

동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푸나’에서 ‘파이오니아’ 자매들인 ‘모드 멀그로브’와 ‘에딧 뉴런드’는 열심히 그들의 임명에 고착하고 있었다. 느닷없이, 지방 치안판사는 그들에게 ‘푸나’를 떠나라고 명하였다. ‘봄베이’ 정부에 호소가 있었지만 그 명령은 옹호되었다. 두 ‘파이오니아’는 같은 성의 다른 곳에 임명되었지만, 그들을 떠나게 한 고압적인 조치가 일반에 알려졌다. 한 침례교회 목사 ‘프레드 허스트’는 신문에서 그것을 읽었다. 이에 자극을 받고 그는 ‘왙취 타워 협회’ 서적을 입수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모든 서점을 뒤지다가 마침내 「입증」이라는 책을 발견하였다. 그 책에서 그는 인도의 협회 주소를 알았다. ‘봄베이’ 사무실에 편지한 결과 그는 ‘에드윈 스키너’로부터 개인적인 방문을 받았다. 교직자 ‘허스트’는 즉시 “삼위일체” 교리가 비성경적임을 인정하고 진리에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그의 아내는 그를 격렬하게 반대하였지만, 그의 마음은 건전하였다. 얼마 동안 신중히 생각한 끝에 그는 침례교회를 탈퇴하고 생계를 위하여 ‘오스트레일리아’로 가서 여호와의 매우 활동적인 증인이 되었다.

열성스런 노력이 ‘트래반코르’에서 계속되었고 그곳에서의 우리의 사업은 꾸준히 진보하였다. 사업은 본질적으로 토착 인도인들 사이에서 지방어로 수행되었다. 형제들은 그곳 일일 평균 소득이 8‘아나’로서 대부분이 세상의 물품에 있어서 가난하였다. 1943년에 그것은 미화 약 2‘센트’에 불과하였다. 그들의 가옥은 마른 야자잎으로 만든 오두막으로 되었거나, 홍토(마르면 굳어지는 적갈색 진흙)로 만든 집으로 되어 있었다. 어려운 환경으로 인하여 이 사람들은 생계 유지에 너무 몰두하여 우리의 소식을 위한 시간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어떤 경우, 이러한 환경이 자극이 되어 그들은 유일한 치료책으로 하나님의 왕국을 찾았다.

특별 ‘파이오니아’들은 두드러진 봉사의 기록을 만들고 있었다. 그들은 전국적으로 여기 저기에 한 사람씩 흩어져 있었다. 그들 가운데, ‘조오지 라이트’, ‘클레어런스 테일러’, ‘랜들 호플리’, ‘제럴드 개라드’, ‘제이컵 포란’과 같은 충실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스도교를 믿는다고 공언하지 않는 대다수의 인구는 정신적으로 성서를 반대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참으로 일할 수 있는 구역은 소수였고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성서 연구 활동의 많은 범위를 제공하는 집들이 몰려 있는 것을 볼 수 없었다. 관심을 나타낼 만한 혹은 정신적으로 성서 소식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아내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요구되었다. 보통 섭씨 27도와 46도 사이를 오르내리는 그러한 구역에서 매달 175시간을 야외 봉사에 바치려면, 신체적으로나 영적으로 강건해야 하였다. 그러나, 여호와의 과분한 친절에 의하여 이들 충실한 종들은 일을 잘 수행하였다. 그들은 여러 해 동안 봉사하여 얼마의 결과를 볼 수 있었다. 1943년에는 인도에 37개 회중이 있었고, 총 20명의 ‘파이오니아’와 381명의 전도인이 있었다.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사업은 계속되다

형제들은 ‘뉴우요오크 브루클린’의 협회 본부로부터 접촉이 끊어져 재정적으로 곤란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다시 여호와의 손은 짧지 않았다. (이사야 59:1) 여러 곳으로부터, 헌금이 들어와 사업이 계속되었다.

‘델리’에서 여섯개 교파(성공회, 장로교회, 감리교회, 침례교회, ‘로마 가톨릭’, ‘아메리카’ 교회)에 속한 열 세명의 교직자가 합세하여 여호와의 증인들을 공격하였다. 그들은 “‘델리’에 있는 전 그리스도교인들에게 경고함”이라는 제목의 악의적인 광고지를 발행하였다. 그 광고지 내용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정치적인 이유로 금지되었다는 거짓 비난을 포함하였다. ‘바실 트사토스’ 형제는 비슷한 체제로 같은 제목의 전도지를 발행하여 이에 응수하였는데 그 내용으로는 성서로부터의 직접적인 인용문만을 실었다. 이 전도지는 협회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었지만, 인쇄인과 ‘바실 트사토스’는 기소되었다.

그러한 문제가 있었지만 여호와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왕국을 전파하고 그리스도인 제자를 삼는 그들의 가장 중요한 사업을 중지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1944년 1월에 ‘봄베이’에서 대회가 열렸으며, 이번에는 ‘로마 가톨릭’ 세력이 강력한 지역인 ‘반드라’에서 열렸다. 또한, 소생된 “형제들의 종” 봉사(순회 사업)가 1944년 중에 인도에 소개되었다. 특별 ‘파이오니아’ 중 한 사람인 ‘로널드 티핀’이 영어를 말하는 전도인에게 봉사하도록 그 사업을 위해 훈련을 받고 ‘델리’, ‘캘커타’, ‘봄베이’, ‘뱅갈로르’ 및 다른 네곳의 회중들을 방문하였다. ‘트래반코르’ ‘코타얌’의 보관의 종 ‘A. J. 조셉’이 자기 지방어를 말하는 밭에 있는 스물 여덟개 회중에서 그 사업을 수행하였다.

‘트래반코르’의 형제들을 잘 조직하는 일은 매우 느린 속도로 이루어졌다. 그들 모두가 시계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집회 도착 시간과 그러한 모임의 길이가 정확하지 않았다. 하늘에 있는 태양의 위치 혹은 위장의 느낌이 때때로 주된 시간 측정법이었다. 연구할 때, 형제들은 매우 집중하였기 때문에 연구를 한 시간으로 제한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트래반코르’의 이들 충실한 사람들은 손으로 그들의 모든 「파수대」 연구 자료를 복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정기적인 주간 연구에서 항상 최신의 내용을 연구하였다.

금지령의 해제

이제 인도에서 협회의 서적에 대한 금지령이 해제되는 방향으로 서서히 사태가 진전되었다. 인도에서 한 고위 영국군 장교의 집 보모로 일하는 한 젊은 ‘스위스’인인 ‘마그릿 호프먼’은 협회 출판물을 접촉하고 ‘봄베이’에 있는 지부 사무실과 얼마 동안 통신하였다. 계약 기간이 끝났을 때 그는 침례를 받고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였다. ‘뉴우델리’에서 ‘파이오니아’하는 동안 ‘호프먼’ 자매는 ‘마드래스’ 출신의 의회의원댁을 방문하였다. 이 정치인은 그 자매가 우리의 사업을 설명할 때 귀담아 들었다. 그 자매는 또한 우리의 사업에 대한 정부의 금지령에 대해 언급하였고 그것이 교직자의 충동에 의한 것임을 지적하였다. 이 우정적인 정치인은 의회에서 그에 관한 질문을 제기하겠다고 약속하였다.

한편, ‘바실 트사토스’는 물리요법사였으며, 총독 내각의 식량상 ‘스리바스타바’ 경을 치료하게 되었다. 치료를 해 주면서, ‘트사토스’는 그에게 증거하고, 금지령과 우리의 사업에 대한 교직자들의 태도를 이야기하였다. 그는 또한 ‘봄베이’에 있는 우리의 지부 관리자 ‘스키너’ 씨가 내무상 ‘젠킨스’ 씨와 그 문제를 토의하고자 시도했지만 실패했음을 언급하였다. 반갑게도, ‘스리바스타바’ 경은 이렇게 말하였다. “염려 마시오. ‘젠킨스’ 씨가 며칠 후면 물러나고 나의 아주 좋은 친구가 총독 내각의 그 자리를 이어 받게 되니까요. 그 사람이 들어서자마자 ‘스키너’ 씨 보고 오라고 하시오. 내가 그를 ‘프랜시스 머디’ 경에게 소개하겠소.”

‘스키너’ 형제가 ‘델리’를 방문하여 중앙 정부의 신임 내무상 ‘프랜시스 머디’ 경과 면담할 마련이 되었다. 그 후, 중앙 입법부의 모든 성원들에게 금지령이 내려진 이유에 관해 의회 앞에서 공적인 질문을 제기함으로 우리를 돕도록 청원하였다. 두명의 비그리스도인 의회의원이 우리의 문제를 다루었으며, 자세한 설명을 듣고 열 세가지 질문을 열거하였다. 이러한 질문을 의회에서 제기할 날짜가 정해졌다. ‘스키너’ 형제와 ‘마그릿 호프먼’과 ‘바실 트사토스’가 그 질문이 제기되던 날 방청석에 있었다.

이러한 질문이 제기되는 중대한 순간이 도래하였다. “인도 정부가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의 출판물을 금지해 왔다는 것이 사실인가,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이유가 무엇인가?” ‘프랜시스 머디’ 경이 그 금지령은 안전책으로 내려졌었지만 이제 정부는 그 금지령을 철회하기로 결정하였다.”라고 대답하는 말을 우리 형제들이 들었을 때의 감동적인 기쁨을 상상해 보라. 이 발언은 1944년 11월 21일에 있었으며, 18일 후 12월 9일에 그 금지령은 공식으로 해제되었다. 이제 우리는 협회의 출판물을 수입하고 인쇄하여 당국의 간섭 위협없이 인도 전역에 배부할 수 있었다.

1944년 마지막 주간에 ‘봄베이’ 북동쪽 991‘킬로미터’에 있는 중요한 군사 및 철도 도시인 ‘저벌포르’(‘자발푸르’)에서 대회가 계획되었다. 그곳은 그리스도교국의 ‘센트럴 프로빈스’(‘마디야 프라데시’)를 위한 선교 중심지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교국에게 여호와의 증인들이 더 이상 정부의 금지령 하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리기에 이상적인 곳이었다. 삼년 반만에 처음으로 우리는 당국의 간섭에 대한 두려움 없이 거리와 가정에서 일반 대중에게 서적을 배부하였다.

‘봄베이’에서 반대 가운데서의 확장

그 금지령은 확실히 ‘봄베이’에서의 확장을 막지 못하였다. ‘카운즈’ 형제는 ‘벤자민 소운스’의 주소를 받았다. ‘아아더 카운즈’와 같이 ‘벤자민 소운즈’는 인도의 남서 해안에 있는 남‘카나라’ 출신이었으며 그들 두 사람은 ‘카나라’어를 말하였다. ‘소운즈’는 성서를 약간 알고 있었으며 ‘카나라’어 신문 기자였다. 그러나, 그는 같은 종교 단체인 독일 ‘프로테스탄트 바젤’ 선교단에 속한 스무명의 다른 사람과 함께 ‘봄베이’ 전화국에 고용되었다.

얼마 안있어, ‘소운즈’는 그의 직장 동료들과 이야기하고 있었고 곧 그는 다른 사람들로 자기 집에서 성서 연구에 참여하게 하였다. 한달 후 ‘벤자민’ 자신이 일단의 친구들과 성서 연구를 사회하였고 9개월 내에—1946년 초—그는 침례를 받았다. 즉시, 그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책의 ‘카나라’어 번역을 완성하도록 임명되었다. 원래 그 책을 ‘로스 로벨로’ 자매가 번역하기 시작했었다. 그 후, ‘소운즈’ 형제는 1966년 12월에 사망하기까지 「파수대」를 ‘카나라’어로 번역하는 일을 맡았다. 그의 딸 ‘조우나 소운즈’가 그의 아버지의 뒤를 이어 「파수대」의 ‘카나라’어 번역자가 되었다.

어느날 저녁 ‘봄베이’ 회중의 많은 전도인들이 ‘플로라 파운튼’에서 가두 증거를 하고 있는데, ‘가톨릭’ 청년 폭도가 현장으로 와서 그들의 종파를 광고하는 전도지를 팔기 시작하였다. 어떤 사람이 증인과 말을 하거나 잡지를 받으려고 하면, ‘가톨릭’ 청년이 무례하게 그 사람의 코 밑에 자기 소책자를 내밀며 증인을 실망시키려 하였다.

매주 ‘가톨릭’의 행동 대원들은 그들의 전술을 바꾸었다. 나중의 한 경우에는, 다수의 ‘가톨릭’ 폭도들이 한명의 증인을 에워싸고 그로부터 주의를 이탈시키고자 시도하였다. 그러한 방법들은 증인들을 두려움에 눌리게 한 것이 아니라 담대하게 해 주었다. 형제들은 “왜 교황은 자유를 억압하는가”와 같은 구호를 외침으로 응수하였다. 이것을 보고 행인들은 미소를 던졌으며 반대자들은 불쾌감을 느끼며 서서히 물러가 밭은 증인들에게 넘겨졌다.

전후의 불안

1945년에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 인도의 상태는 급속히 악화되어 전국적인 불안 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막대한 수의 사람들이 직장을 잃었다. 석방된 정치적 피억류자들은 다시 그들의 국가 독립 운동을 재개하였다. 영국이 자치를 허용하는 제안을 하였다는 발표가 있었고 일반 사회 상태는 신속히 전락하여 거의 무정부 상태에 돌입했다. 종교 단체들은 서로 정권 장악을 위하여, 심지어는 존속 자체를 위해서도 투쟁하였고, 마침내 ‘캘커타’와 ‘봄베이’에서 폭력적인 타격이 있었다. 인도 해군과 공군이 폭동을 일으켰다. 우체국 및 전신국의 파업으로 통신이 마비되었다. 기근과 사망이 전국에 번져 수십만명이 위협을 받았다. 1945년중의 상태가 그러하였다.

‘개라드’ 형제는 이 때의 한 사건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백인 반대 폭동중, 우리가 폭도들에게 잡히는 것은 불유쾌한 일이었읍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은 언제나 여호와께 갔읍니다. 나는 처음에 약 50명의 폭도가 나를 죽이려고 위협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들은 내가 전파자였기 때문에 마침내 나를 풀어 주었읍니다. 또 다른 경우에, 우리 세 사람이 양쪽의 폭도들에게 잡혔읍니다. 난동이 시작되기 전에는 ‘뱃속이 거북’하지만, 일단 난동이 시작되면 원하는 바만큼 편안해집니다. 여호와의 영이 두려움을 중화시키는 것 같습니다. 그분을 신뢰하면 됩니다. 할 수 있는 다른 일이 없읍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모든 일이 순조로와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전국이 불만의 도가니에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요동하는 바다 가운데서도, 수적으로 말하여 미미한 한 집단의 사람들은 굳건히 섰다. 그러한 상태에 동요되지 않고 하나님을 숭배하고 그의 왕국에 대하여 전파하려는 결의에 있어서 흔들리지 않고 여호와의 증인들은 열방에게 그의 백성과 함께 기뻐하라고 권하고 있었다.—신명 32:43.

소요 가운데서도 영적으로 살아 있음

‘캘커타’에 있는 어린 회중을 격려하기 위하여 협회는 1946년에 그곳에서 대회를 개최하였다. “평강의 왕”이라는 강연은 ‘캘커타’에서의 최근 끔찍한 유혈로 입은 흉칙한 상처에 부드러운 치료제가 될 것으로 생각되었다. 회교 연맹은 8월 16일을 행동의 날로 선포하였다. 그 날 다수의 ‘힌두’교인들이 ‘캘커타’에서 살해되었고 그들의 재산이 약탈되고 파괴되었다. 그 도시는 가장 잔인한 종교 폭동 중 하나가 발생한 현장이 되었다.

1940년 이래 회교 연맹은 별개의 ‘파키스탄’ 회교국을 위해 선동해 왔다. 저명한 변호사 ‘M. A. 지나’는 북서 인도 설립을 제안하였다. 왜냐 하면 그 지역은 회교도가 우세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신드’ 성과 ‘판잡’ 성에서 ‘힌두’ 교도와 회교도간의 증오감이 자라서 폭발점에 이르렀다. ‘카라치’, ‘라발핀디’, ‘라호르’의 이러한 상태 가운데서, 수명의 ‘파이오니아’들이 왕국 사업을 살아있게 하기 위하여 계속 노력하였다. 그러나, 두려운 상태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마음이 어수선하여졌다. 많은 인도인 전도인들도 전파 운동에서 협회와 연합하기를 중지하였다. 분명히 그들은 원래 재정적 지원이 있기를 바라는 숨은 동기를 가지고 증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파키스탄’이 될 지역의 사업은 감퇴하였다.

‘힌두’교 사상을 간파하기 위하여 노력함

일반적으로 인도의 구역에서 왕국 전도인이 직면하는 첫째 어려움은 생각이 서로 맞설 수 있는 어떤 기초를 놓는 것이다. ‘힌두’교 졸업생에게는 어떤 일이 참일 수도 있고 참이 아닐 수도 있다. 만일 당신이 불이 탄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당신에게 사실이고 또한 그가 만일 불이 타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그에게 사실이다. 그는 당신의 주의깊고 논리적인 논증에 진리라고 동의할 것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에는 그 정반대에 동의할 것이다. 두 가지 다 참이라고 그는 말한다!

힌두교인들은 성서에 대한 피상적인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성경 전체를 존중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참과 오류라는 것이 없다. 모든 것이 참이고 모든 것이 오류이다. 악과 선이 없다. 악은 선이고 선은 악이다. 하나님도 없고 ‘사단’도 없다. 우리가 하나님이고 우리가 ‘사단’이다. 모두가 하나님이다. 당신이 앉는 의자—그것에 생명이 없다고 당신은 생각하는가? 그것은 당신이 그것의 더 높은 사상의 감응 파동을 탐지하지 못하거나 당신의 지성보다 높다고 그가 말하는 그것의 지성과 통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의자도 하나님이라고 그는 말한다!

매우 유익한 방문

바로 이러한 구역에서 소수의 ‘파이오니아’들이 여러 해 동안 분투하여 왔으며, ‘길르앗’ 학교 선교인들이 봉사할 태세를 갖추었다. 1947년 최초의 ‘길르앗’ 선교인들의 도착과 때를 같이 하여, ‘N. H. 노워’ 형제가 인도를 방문하였다. 이것은 1912년 당시 ‘패스터 러셀’이 이곳을 방문한 후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 회장으로서는 처음으로 방문한 것이었다.

1947년 4월 14일 월요일에, ‘노워’ 형제는 ‘M. G. 헨첼’ 형제를 동반하고 비행정을 타고 ‘버어마’ ‘랑구운’에서 떠났다. 그들은 ‘캘커타’ 근처 ‘후글리’ 강에 착륙하였으며, 형제들은 그 두 형제를 강변에서 맞이하였다. 상태는 전혀 조용하지 않았다. ‘힌두’교인들과 회교도들이 전쟁 분위기에 있었으며 도시 일부 지역에는 야간 통행 금지가 있었다. 그들이 낡은 ‘버스’를 타고 ‘캘커타’를 통과할 때 ‘노워’ 형제와 ‘헨첼’ 형제는 이러한 인상을 받았다.

‘처음에 사람들의 옷차림이 우리의 주의를 끌었다. 남자들 대부분은 ‘도티스’를 입고 있었는데, 그것은 몸의 아랫 부분을 감싸고 허리를 맨 무명 옷감에 불과한 것 같이 보였다. 많은 사람들이 머리에 여러 색깔의 ‘푸그리스’를 쓰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의 국적을 암시하는 두건이었다. 어떤 지역에서는 ‘터어키’모가 두드러졌다. 서양에서 사용되는 것과 같은 ‘스커어트’를 입은 잘 차려 입은 ‘힌두’인들을 보는 것은 흥미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긴 꼬리를 늘어뜨렸다. 여자들은 밝은 ‘사리’를 쓰고 있었으며, 금 혹은 은 팔찌와 발목 장식을 많이 하고 있었다. 일부 여자들은 귀고리와 코고리를 하고 있었고, 코 양쪽에 보석을 달기도 하였다. ···

‘다음에 우리는 암소가 보도를 활보하는 것을 처음으로 보았다. 암소는 통행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고 모든 사람들은 암소에게 온전한 행동권을 허용하는 것 같았다. 다음에 우리는 더 많은 암소와 거룩한 황소를 보았다. 이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것이었다. 우리는 암소가 목장에 있는 것 혹은 농가의 안뜰에 혹은 헛간에 있을 것을 보았지만, 암소가 4백만 인구의 도시 대로를 걷게 하는 것, 길가 가게에서 어떤 야채를 먹게 하는 것, 그리고 그저 다른 가게로 가도록 모는 것 혹은 어떤 사람이 떨어뜨린 어떤 것을 먹게 하는 것—이것은 방문한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없던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이러한 동물은 “거룩한” 동물들이었다 ···

‘곧 우리는 왕국회관에 도착하였으며, 열 다섯명의 형제들이 집회를 보았다. 경찰이 발표한 야간 통행 금지로 인해 어떤 사람들은 참석하지 못하였다 ··· 우리는 그들에게 세계의 다른 곳에 있는 그들의 형제들의 사랑과 안부를 전할 수 있었으며, 또한 그들에게 영적 교훈을 줄 수 있었다 ··· 일반적으로 이 대도시의 전역에서 공기는 후덥지근하고 덥고 구중중하였다. 그날 밤에 바람이 살랑거렸지만 춥지는 않았다. ‘노워’ 형제의 연설을 들은 100명의 사람들에게는 쾌적한 날씨였다. 이것은 우리가 ‘캘커타’ 형제들과 가진 마지막 집회였으며 그것은 작별 인사를 의미하였다!’

‘봄베이’ 지부 사무실에서 할 일이 많이 있었다. 그리고 보고는 이렇게 계속한다. “하루 종일 거지의 아우성이 있었고 ‘택시’와 ‘버스’의 경적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거리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있으므로 운전사들은 언제나 계속 경적 소리를 낸다.”

대회는 그 도시의 심장부에 있는 쾌적한 곳에 위치한 ‘봄베이’ 대학교 경제 사회학과 강당에서 좋은 출발을 하였다. 첫날 4월 22일 화요일에 114명이 참석하고 여섯명이 침례를 받았다.

‘힌두’교인들의 종교적 미신을 예시하는 한 사건이 ‘노워’ 형제와 ‘헨첼’ 형제가 둘째날 대회장으로 가는 동안에 발생하였다. 보고는 이렇게 알려 준다. “우리가 대회장으로 가는 도중에 한 사람이 물을 나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그가 근처 우물에서 ‘거룩한’ 물을 펐다는 말을 들었다. 그 우물은 ‘힌두’ 교도들이 거룩한 것으로 간주하였고 그 물을 일부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마시는 물이었다. 얼마 전에 물을 원하는 불촉 천민 한 사람이 그 우물에 물통을 내려 물을 퍼 마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 우물을 ‘더럽’혔다고 해서 폭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것은 물을 깨끗하게 하지 못하였다. 종교가들이 그 물을 다시 ‘거룩하게’ 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거룩한 황소로부터 일곱 동이의 똥거름을 가져다가 그 우물에 던지는 것이었다. 그 후 ‘힌두’교인들은 이 ‘거룩한’ 물을 다시 마실 수 있었고 거룩한 목적에 사용할 수 있었다. 이 우물은 또한 ‘봄베이’에서 ‘콜레라’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라고 한다.”

그 날 아침 회기에서 ‘노워’ 형제는 인도에서의 사업을 요약하고 장래를 위한 제안을 말하였다. 이것은 잘 받아들여졌으며 형제들은 인도의 사업을 재조직한다는 발표를 듣고 기뻐하였다. ‘카라치’, ‘델리’, ‘마드래스’, ‘트래반코르’, ‘캘커타’, ‘실론’ 및 기타 여러 지역에서 온 120명이 참석하였다. 왕국의 좋은 소식을 선포하려는 그들의 결의가 뚜렷하였다.

“만민의 환희”라는 공개 강연에 504명이 참석하였다. 그 내용은 특히 동양 사람들을 위해 준비된 것이었다. 이 대회 끝에 떠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의 방문자들은 소란한 나라 인도를 떠났다.”

전국이 난리 속!

1947년 2월 20일 영국 정부는 1948년 6월자로 인도에 대하여 손을 뗀다는 그 정부의 방침을 선포하였다. 그리하여 정권 이양을 위해 ‘로드 마운트배튼’을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이렇게 되자 회교 동맹은 폭동을 일으켰다. 살인, 약탈, 방화, 전반적인 폭력이 동‘벵골’, ‘판잡’ 및 동북 ‘프론티어 프로빈스’를 휩쓸었다. 그 결과 인도 국민 의회당은 인도 분단책을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따라서 ‘파키스탄’이 떨어져 나가게 되었다.

8월 15일에는 극도의 공포가 엄습하였는데, 이 때 이 나라는 회교 ‘파키스탄’과 ‘힌두’교 인도로 분리되었다. 종교적 광신, 공포, 빈곤 등에 충동을 받아, ‘힌두’ 교도들, ‘시이크’ 교도들 및 회교도들은 닥치는 대로 칼, 도끼, 불 등 아무 무기나 들고 서로 공격하였다. 또한 전례없던 두 방향의 이주 행렬이 생겨났다. 수백만명이 줄줄이 이동하였는데, 회교도들은 인도로부터 ‘파키스탄’으로 빠져 나가고, ‘시이크’ 교도들과 ‘힌두’ 교도들은 ‘판잡’으로부터 인도로 도망하였다. 어느 통신이 보도한 바에 의하면 어떤 이주 대열은 116‘킬로미터’의 장사진을 이루었다고 한다. 또 다른 보도에 의하면 피난민 대열이 400,000명에 이르렀다고 하며, 확실히 이는 기록적이었다. 양쪽 행렬에서는 참상과 기아와 시체가 줄을 이었다. 잔혹한 일들과 살상으로 얼룩진 사악한 보복 행위들이 연쇄 반응으로 일어났다. 이렇게 마구 자행되는 대학살의 와중에서 ‘코우터릴’ 형제는 ‘카라치’에 있는 형제들을 섬기면서 그 구획의 ‘파키스탄’ 쪽에 있게 되었다.

‘코우터릴’ 형제의 다음 임무는 폭동 중심지의 하나인 ‘데라던’에서 순회 대회를 갖는 것이었다. ‘호텔’ 숙박계원은 무시무시한 여행이 될터인데 그 여행을 그만두라고 ‘코우터릴’ 형제를 말렸다. 그러나 그는 “여호와의 뜻이라면 그곳에 가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리하여 나는 ‘카라치’에서 즐거운 며칠을 보낸 후, 출발하였다. 기차는 조심스럽게 ‘물탄’과 ‘몽고메리’를 통과하여 북쪽으로 향하였다. 우리가 ‘라호르’에 이르렀을 때, 상당한 혼란이 있는 것이 역력하였다. 많은 피난민들이 ‘파키스탄’으로부터 피난하고 있었으며, 또 다른 사람들은 인도로부터 빠져 나오고 있었다. 내가 탄 차칸에 있던 한 독실한 회교도는 여러 차례 기도 방석을 깔고 ‘알라’ 신에게 기도를 하였는데 아마도 보호를 해 달라는 것 같았다. 이러한 장면은 내게 제2차 대전중의 영국의 정황을 상기시켜 주었다. 역에 앉아 밤을 샌 후 나는 인도행으로 생각되는 한 기차에 올랐다. 객차는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공포감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탄 차칸에 있는 모든 사람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파수대」를 읽었으며, 내 옆 사람에게도 읽으라고 「깨어라!」를 주었다. 우리가 탄 일등칸은 여섯 사람이 타도록 설비가 되어 있었는데, 이 속에 드디어는 40명이 올라탔다!

“역 구내마다 사람들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이 나라를 여행하면서 나는 낙타, 말, 조랑말, 양 및 염소를 끌고 가는 무수한 피난민 대열들을 보았다. 다행히도 나는 아무도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기차에 실린 무수한 사람들이 대량 학살을 당하고 있었으며, 화물들은 우리보다 더 중요시되었다. ‘엄리처’에서 장대에 긴 칼을 꽂은 무기를 가진 ‘시이크’ 교도들이 여차하면 죽일 태세로 모든 차칸을 수색하였다. 나는 여호와께 당신의 뜻이라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무사하게 보호하여 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분의 말씀인 성경을 계속 읽어 나아가는 동안 나는 정말로 매우 평온감을 느꼈다.

“남자, 여자, 아이들 하며 심지어 염소까지 짐짝과 보따리와 함께 객차 지붕 위에 쌓여 있었다. 한 미국인 ‘퀘이커’ 교도가 내게 미군용 통조림을 하나 주어, 나는 ‘비스켓’과 ‘초콜렛’을 좀 먹었다. 드디어, 우리는 국경을 넘어 ‘사하란푸르’에 도착하였으며, 거기서 「깨어라!」를 읽고 있던 젊은이와 함께 먹을 것을 좀 구했다. 알고 보니 그는 본부로 귀대하고 있던 인도군 회교도 사병이었다. 그는 내게 자기 일생 중 가장 무시무시한 날을 보냈다고 털어 놓았다. 만일 다른 사람들이 그가 회교도라는 것을 알아챘다면 그는 죽임을 당하였을 것이었다. 아마도 그는 그 기차에 타고 있던 유일한 회교도인이었을 것이다.

“다음날 아침, 나는 ‘버스’로 ‘데라던’으로 갔으며, 거기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라는 적절한 강연을 하였다. 그 특이한 지역에서는 ‘시이크’ 교도들과 회교도들이 서로 죽이고 있었다. ‘제럴드 개라드’ 형제와 나는 자매들을 그들의 집으로 안전하게 데려다 주었다. 그 당시에는 야간 통행 금지가 엄격히 시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대회 마지막 회기를 여섯시에 가졌다. 내가 다음에 들른 곳은 ‘캘커타’였는데, 이곳에서는 ‘랜돌 호우플리’ 형제가 형제들의 종이었다. 우리는 ‘초우링히’에 있는 ‘와이 엠 시이 에이’(YMCA) 강당에서 순회 대회를 가졌다. 이곳에서 다행히도 나는 처음으로 ‘벵골’어를 말하는 형제들을 만났다. 이제 ‘트래반코르’까지의 긴 기차 여행이 시작되었다. 이곳 ‘탤러퍼디’에서 ‘말레이’ 형제들은 합창단과 같이 함께 앉아 있던 연로한 형제들 모두와 함께 시작하는 노래를 불렀다 ··· ‘말레야람’어를 말하는 벗들에게 우리가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사실에 관하여 약간의 충고를 줄 필요가 있었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정부의 인구 조사서를 기재할 때 그들의 종교를 ‘러셀파’라고 명기하였다. 어이없는 일이었다!

“돌아가는 길에, 나는 ‘뱅갈로르’에 들렸으며, 거기서 형제들을 만나 순회 대회를 지지하라는 여호와의 초대를 받아들여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도록 그들을 권면하였다. 작지만 행복한 대회를 개최하기 위하여 ‘마드래스’로 가면서, 나는 ‘타밀’어를 말하는 형제들에 대한 깊은 사랑을 배웠다. 나는 ‘마드래스’로부터 ‘봄베이’로 돌아와 ‘마라티’어를 말하는 우리의 선교 임지에 있던 ‘카마이클’ 형제와 다시 연합하였다.”

‘길르앗’으로부터 또 도움을 받다

1947년에 ‘길르앗 학교’ 제8기 졸업생인 ‘호우머 맥케이’와 ‘룻 맥케이’가 인도에 있는 그들의 새로운 고향으로 오게 되었는데, 아마도 그들은 이전 고향인 ‘캐나다’와 매우 대조적인 곳임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오랜 항해 끝에, 그들은 ‘봄베이’에서 동급생인 ‘딕 코우터릴’과 ‘헨드리 카마이클’과 그들을 따라 나온 다른 형제들의 마중을 받았다.

1947년 초 ‘노워’ 형제가 ‘봄베이’ ‘벧엘’ 부억에 서서 살펴본 후 “이건 미국 여성을 몹시 실망시키겠는걸” 하고 한 마디 하였다. 이제 ‘룻 맥케이’가 ‘벧엘’ 요리사겸 집안을 돌보는 사람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여기와 같은 집을 이전에 본 일이 없었읍니다. 부억에는 ‘싱크’가 없었으며, 단지 마루로 물이 흘러 나오지 않도록 ‘콩크리트’로 막아 놓은 모퉁이 벽에 물 꼭지가 달려 있었읍니다. 물은 24시간 계속 나오는 것이 아니었읍니다. 그래서 물이 나오지 않는 여러 시간 동안을 위해서 물을 받아 두어야 하였읍니다. 부엌 난로는 운반할 수 있는 ‘시그리’라고 하는 금속 용기였는데, 거기에 숯을 피웠으며, 한번에 ‘팬’을 하나만 사용할 수 있었읍니다. 냉장 시설이 없었읍니다. 그래서 식품은 매일 장을 봐와야 하였읍니다. 음식을 그대로 놔두면 까마귀 떼가 몰려 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무엇이든 덮어 두어야 하였읍니다. 달걀을 여러 개 잃어 버렸읍니다. 내가 이러한 교훈을 알기 전에는 ‘푸딩’이나 ‘파이’의 가운데를 쪼아 먹히곤 하였읍니다.’

사람들의 형편에 관하여 ‘맥케이’ 자매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처음에 사람들의 가난한 형편과 그들의 생활을 보고 이런 데서 어떻게 일을 해 나아갈 수 있을까 걱정하였읍니다. 실망이 컸읍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진리를 배우도록 그들을 도와야 할 필요성은 그러한 생각들을 몰아 내었읍니다. 우리는 재삼 재사 이러한 낡은 세상 제도를 쓸어 버리는 데는 ‘아마겟돈’ 후의 새 질서만이 진정한 해결책이라고 스스로에게 이야기하곤 하였읍니다.”

‘호우머 맥케이’ 형제는 ‘봄베이’ 지역에서 부분 시간 형제들의 종으로 일하도록 임명되었다. 그의 순회구는 광범위한 지역과 인구를 포괄하고 있었지만 왕국 전도인들은 소수에 불과하였다. 한명의 격지 전도인을 방문하기 위하여 그는 기차편으로 약 15시간 걸리는 ‘봄베이’에서 ‘하이더라바드’까지 792‘킬로미터’를 여행하였다. 또 한번은 ‘봄베이’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아마다바드’에 있는 한 격지 가족을 방문하기 위하여 491‘킬로미터’ 거리를 여행하였다. 그곳에서의 공개 집회에 대한 자기의 경험을 회고하면서, ‘호우머 맥케이’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마다바드’는 인구 일백만이 넘는 거대한 목화 공장이 있는 도시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강연을 위해 건물 하나를 빌렸다. 그러나 우리는 그 주간에 광고를 별로 못하였으며 겨우 집에서 만든 ‘플래카아드’를 그 건물에 걸어 놓았을 뿐이었다. 참석자는 그 관심자 가족 외에 회교도 세 사람 뿐이었다. 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커다란 강당에 나와 7명의 청중 뿐이었다!”

자체 인쇄기로 다시 인쇄하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 협회는 미국으로부터 ‘챈들러 앤드 프라이스’ 평판 인쇄기를 구입할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결국 그것을 ‘봄베이’ 지부 사무실에서 3‘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조그마한 창고에 설치하였다. ‘트래반코르’로부터 ‘말레야람’ 활자를 가져오고 약간의 영어 활자는 구입하였다. ‘클라우드 굿맨’이 기계를 돌리고 ‘K. T. 매튜’가 보조로 일하였다. 이전에는 ‘말레야람’어 「파수대」가 ‘러브레인’ 지부에서 조판되어 상업적 인쇄소에서 인쇄되었다. 이제 우리는 조판과 인쇄 모두를 우리 손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다른 언어로 된 인쇄물들은 전부 상업적 인쇄소에서 인쇄할 수 밖에 없었다.

부언하면, ‘말레야람’어판 「파수대」를 인쇄하고 있던 협회 인쇄기는 원래 발로 ‘페달’을 눌러 움직였다. 이것은 습기찬 여름철에는 무척이나 고된 일이었다. 그리하여 얼마 후 협회는 그 인쇄기에 부착시킬 ‘모우터’를 구입하였으며, 따라서 기계를 돌리는 어려움도 없어지게 되었다.

‘봄베이’에서 새로 발견한 관심자

1949년 어느날 ‘하샤 카아카다’ 1세 형제와, ‘사티아나단’ 형제가 ‘플로라 파운틴’ 근처에서 가두 잡지 봉사를 하던 중 ‘로키 드소우자’라고 하는 남자에게 ‘카나레스’어 잡지를 전하였다. 그의 숙소는 50명의 독신 남자들이 기숙사식으로 거주하고 있는 곳임을 알게 되었는데, 그 건물의 일부는 다른 사람들이 유흥을 즐기려고 오는 남자들의 ‘클럽’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사실상 이러한 ‘클럽’에 속해 있는 회원 모두는 인도 서부의 ‘콜칸’ 해안에 있는 ‘브라마바르’ 지역에서 소위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었다. ‘카아카다’ 1세 형제와 ‘사티아나단’ 형제는 매주 ‘로키 드소우자’를 방문할 때, 그 ‘클럽’의 다른 회원들과 토론회를 가졌다. 차츰 그러한 관심이 정기적인 연구로 발전하여 20명 내지 30명씩 참석하였다.

다른 회원들로부터 반대가 있었다. 일반 ‘홀’에는 종교적 십자가와 촛불과 더불어 커다란 제단이 있었다. 연구를 하고 있던 사람들은 얼마 안있어 하나님께서는 우상 숭배를 미워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그 ‘클럽’에서 십자가를 아주 제거해 버릴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때가 왔다. 그 회원들은 봄철 대청소를 위해 그 건물 내부를 하얗게 칠할 마련을 하고 제단을 내려 놓았다. 그 후 십자가와 제단은 사라지고 다시는 가설되지 않았다. 이 일로 인하여 그 ‘클럽’ 회원 사이에는 동요와 분열이 생겼다. 그리하여 이 문제는 투표로 결정되었다. 근소한 차이로 관심자들은 그것들을 제거하는 것을 승인하였다. 그 ‘클럽’의 회장인 ‘P. P. 루이스’는 ‘로키 드소우자’ 및 상당수의 다른 회원들과 마찬가지로 헌신한 증인이 되었다. 매 일요일 아침 그 ‘클럽’에서는 정기적으로 공개 강연이 행해졌으며, 비거주 회원들의 가족들을 포함하여 40명 내지 50명이 참석하였다. 이렇게 새로이 발견된 관심의 발전은 ‘봄베이’에서의 사업에 진정한 자극제가 되었다.

초기 순회 사업을 회고해 봄

1949년, ‘헨드리 카마이클’은 순회 감독자로서 인도의 길고 넓은 지역을 여행하는 새로운 임무를 시작하였다. 방문을 위한 새로운 지역들이 열렸는데 그 중에는 ‘콜라’ 금광 지대도 포함되었다. 이곳에는 의사인 ‘포냐’와 ‘로버어트 러쉬튼’ 및 그의 가족이 지방 회중과 더불어 일하고 있었다. 이 방문은 여러 가지 면에서 흥미로왔다. ‘카마이클’ 형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콜라’ 금광은 그 이름이 암시하듯이 금광 지대로서, 세계에서 가장 깊은 곳이라고들 하였다. 단선 갱도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깊은 ‘클리포오드’ 갱도를 따라 내려가면, 1981‘미터’까지 내려 가는데, 참으로 아찔하였다. 이런 곳에, 공장들, 소방부, 폭발물 저장고, 궤도 차량을 위한 선로망 등 광산의 운영 규모가 광대함이 실로 놀라왔다. 그러나 나는 지면으로부터 2,743‘미터’ 밑에 있는 ‘히스코트’ 갱도에 내려가 볼 기회가 있었는데 어마어마한 공기 조절 장치가 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의 기온은 섭씨 43도나 되었다. 여기서 나는 암벽에 구멍을 뚫어 볼 기회를 갖었는데, 그곳에서 그들은 금맥을 가로질러 선명하게 절단하고 있었다. ···

“그 해에 한 가지 두드러진 사건은 열 두개 회중과 ‘트래반코르’에 있는 격지 가족으로 구성한 순회구가 하나 이루어진 것이다. 8월에, 우리는 ‘말레야람’어를 말하는 형제들을 위해 번역자로 봉사하던 ‘A. J. 조셉’ 형제와 함께 여러 가지로 교통 수단을 이용하여 966‘킬로미터’, 도보로 129‘킬로미터’를 여행하였다. 고산지에 있는 ‘우푸다라’를 방문한 일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데, 밤이 늦어 도착하였지만 모든 형제들이 연설을 듣기 위해 초가 왕국회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

“‘캉가자’에 있는 회중을 방문하기 위하여, 우리는 ‘버스’을 타고 시골 지방으로 여행을 떠났다. 좌석은 차의 폭을 가로질러 놓여진 나무 ‘벤치’들이었는데, ‘버스’에 더 이상 수용할 수 없을 때까지, 승객들이 염소, 닭 기타 생물들을 포함해서 장보따리를 가지고 양측에서 몰려들었다. (그러나 승차 제한이 없다. 그러므로 여행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면, 발을 붙일 곳 또는 붙잡을 수 있는 곳이면 옆이건 뒤이건 어디든지 매달렸다. 그들은 지붕까지 올라타 마치 낑낑거리는 ‘엔진’이 달린 사람 덩어리처럼 보였다.)

“이것은 우리의 여행의 첫 단계에 지나지 않았다. 어떤 지점에서 우리는 차에서 내려 야자 나무가 한줄로 늘어서 있는 숲을 지나 걸어 갔다. 어두어지자 우리는 종려 이파리를 꽈서 횃불을 만들어 길을 비추었다. 걸어야 할 길이 끝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여러 시간 후 우리는 드디어 당도하였으며,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

“‘트래반코르’의 기후는 무덥고 습기가 많으며, 논과 작은 촌락들이 점점이 산재해 있으며 다양한 야자나무들이 많은 지방이었다. 주민들에게는 실제 돈이 될 만한 것이 많이 없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자기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많이 재배하며, 야자잎을 사용하여 지붕도 덮고 쟁반도 만드는 등 다양하게 사용한다. ‘코코넛’ 껍질을 가지고는 그릇을 만든다. 벼농사를 짓는 농촌은 사방으로 관계용 운하가 뻗어 있으며, 그 위로 야자나무를 베어 걸쳐 놓은 외나무 길이 있다. 이것은 호별 방문 증거를 하는 데 위험을 더해 준다. 공개 강연이 마련되었을 때 야자 숲 가운데 있는 시골길들이 교차하는 지점인 공지로 나를 데리고 갔기 때문에 나는 매우 당황하였다. 그곳에서 나는 참을성있게 기다렸다. 그리고 아무도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형제들이 모여 들었다. 그들이 어떻게 모임 장소를 알았는지 나는 아직까지도 모른다. 결국 약 이삼백명 가량이 연설을 들으러 모였으며 그들은 한 시간으로는 만족해 하지 않았다. 이것은 참으로 커다란 사건이었으며, 그들은 가능한 한 모든 것을 듣고자 하였다. 그들은 거기에 그대로 주저 않거나 쓰러진 나무 위에 또는 땅바닥 위에 앉아 주의깊게 들으며 자기들 성서를 찾아 보았다. ···

“이 ‘트래반코르’ 여행의 절정은 1949년 9월 2-4일에 ‘탈라파디’에서 있었던 3일간의 대회였다. 공개 강연을 하기 위하여 ‘봄베이’에서 ‘스키너’ 형제가 내려 왔으며, 그 강연에 800명이 참석한 것을 보고 우리는 무척 기뻐하였다!”

선교인들이 ‘캘커타’에서 끈기있게 노력하다

‘캘커타’에서 새로이 일하게 된 선교인들은 그 지역에서 사용하는 ‘벵골’어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 지역에서의 왕국 사업을 개시하는 일을 돕기 위하여 1949년에 협회는 ‘만민의 환희’ 소책자를 ‘벵골’어 판으로 발행하였다. 자연히 이것은 그 선교인들이 이곳의 다른 상황에 금방 적응하도록 만들었다. ‘마리이 재비츠’ 자매는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내가 어느날 가두 봉사를 하고 있었는데, 뒤로 돌아서니 거기에 3‘미터’나 되는 거대한 비단뱀을 가지고 있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 뱀은 나를 향해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뱀을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그만 소리를 지르고 거리를 달려 내려가 버리고 말았다.” 그 사람은 다름이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해 떠돌아 다니는 인도 뱀 마술사였다.

‘재비츠’ 자매는 계속 다음과 같이 말한다: “또 한번은 내가 호별 방문을 하고 있을 때인데, 한 부인이 잡지를 달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는 잡지를 계단에 놓아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했다. 그러자 그 부인은 땅바닥에서 잡지를 집어 들었으며, 헌금을 내게 줄 때에도 자기 손이 내 손에 닿지 않도록 돈을 내 손에 떨어뜨려 주었다. 나는 기분이 나빴다. 왜냐 하면 그 여자는 자기가 매우 거룩하기 때문에 내 손의 잡지를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습은 인도의 세습적 계급 제도에서 연원한 것이었다.

“한번은 내가 인도인 ‘그리스도인’과 연구를 시작하였고, 그를 다른 연구에 데리고 간 일이 있다. 가는 길에 우리는 내가 서적을 전해 준 일이 있는 한 남자를 길에서 만났다. 그래서 우리는 멈춰서 그에게 그 책에 관하여 이야기를 하였다. 다음번에 내가 그 인도인 부인에게 연구하러 가니까 그 부인은 다시 나와 함께 나갈 수 없다고 하였다. 내가 그 까닭을 묻자 그는 ‘아시다시피 나는 인도 여자 아닙니까? 나는 거리에서 남자들과 이야기하는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일 수 없어요. 그런 일을 하면 온 이웃 사람들에게 경멸을 당하게 되니까 말이예요’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그 여자는 내게 다시 함께 나가자고 제의를 하였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문제는 극복되었다. 그는 진리 안으로 들어 왔으며, 드디어는 특별 ‘파이오니아’가 되었으며, 이제는 혼자서도 거리를 지나다닌다.”

‘제럴드 재비츠’는 다음과 같이 회상을 한다: “처음에 우리는 생산적인 밭이 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곧 그들의 관심이 피상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듣기는 잘 들어도 믿지는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그들의 철학에 집착하여 있었으며, 처음에는 예를 들어 그들의 ‘카르마’ 사상을 논파하려고 생각하였다. 그들의 ‘갈마’(업) 사상이란 만물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존재하며, 만물 속에는 항상 얼마간 선이 존재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모한다스 간디’의 암살에 관한 매우 구체적인 예를 사용하였다. 분명히 그러한 일은 극악한 범죄였으며, 그러한 일에는 아무런 선한 것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다. 거기에도 뭔가 선한 것이 있는데, 단지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러한 이론에 관하여 그들과 따져 보려는 생각을 포기하고 말았다. 이곳 ‘캘커타’에서 한쌍의 ‘힌두’인 부부가 진리 안에 들어 오긴 했지만, 인도인 ‘그리스도인들’과 연구를 하는 것이 더욱 유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벵골’인 밭에서 더욱 발전을 보다

1949년 후반에, ‘길르앗’ 졸업생인 ‘헨드리 카마이클’은 ‘벵골’로 순회 방문을 떠났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칸크라파라’에서 새로 형성된 회중을 방문하는 동안, ‘캘커타’에서 북쪽으로 126‘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한 촌락인 ‘차프라’를 방문하는 마련이 되었다.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과 선교사들이 ‘차프라’에서 공개 강연을 하지 못하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 60명이 어느 달밝은 밤에 노천 개간지에 모였다. 우리는 석유 등으로 불을 밝혔다. 연설이 끝난 후 연로한 한 ‘벵골’인 부인은 ‘내 평생 교직자들에게 설교를 들어 왔지만, 이러한 것들이 성서에 들어 있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고 말하였다.”

‘카마이클’은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차프라’에서 호별 방문을 하는 동안 나는 두 동료와 함께 길을 떠났는데, 끝마칠 때는 달구지를 끌고 나와 동행하게 된 15명의 사람들과 같이 돌아왔다. 집들은 지면에서 0.6‘미터’ 정도되게 햇볕에 말린 흙마루 위에 세워졌는데, 몰아치는 비가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흙마루를 내려 덮게끔 야자잎으로 급경사지게 지붕을 하였다. 안으로 초대되어 우리는 허리를 굽히고 들어가, 흙마루 위로 오른 다음, 15명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마루 위에 앉았다. 모두는 귀를 기울여 들으며 내가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는 성귀들을 추리하였다. 이 지역에서 나는 여러 차례 성서 진리를 설명하면서 새벽까지 앉아 있곤 하였으며, 그런 다음 더 멀리 떨어져 있는 밭으로 좋은 소식을 전파하기 위하여 이른 새벽에 떠나곤 하였다.”

발전을 간단히 살펴봄

1949년까지, 인도에서는 순회 감독자 한명, 전도인 270명, 특별 ‘파이오니아’ 23명에 29개 회중—‘말레야람’어 회중 13, ‘벵골’어 회중 1, 영어 회중 15—이 있었다.

1950년 1월 26일 신생 인도 공화국이 수립될 그 당시, 협회의 ‘봄베이’ 지부는 ‘소우리’ 교외로부터 ‘러브레인’ 사무실로 인쇄기를 옮기느라 분주하였다. 그 기계는 비교적 새 인쇄기였는데, 그것을 내리다가 나무 받침대가 부러지는 바람에 인쇄기가 땅에 떨어져 그 기계의 중요한 부분이 부러지고 말았다. 여하간, 그 인쇄기는 수리를 한 다음 곧 다시 돌기 시작하였다.

태풍과 사태를 헤치고!

순회 감독자 ‘헨드리 카마이클’이 ‘다아지일링’을 떠나려던 참이었는데, 무시무시한 태풍이 그 지역을 강타하였다. 그 태풍은 이틀간 127‘센티미터’나 내리는 억수같은 비를 몰고 왔었다. 그 비는 무수한 사태를 일으켜 전 지역을 황폐시켜, 마을들을 자취도 없이 휩쓸어 버렸으며, 그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몰사하고 말았다. 사실상 ‘카마이클’ 형제가 묵고 있던 바로 옆집도 사태에 휩쓸려 버리고 말았다. 그가 있던 곳에는 바위와 돌들이 쌓여 물과 모래가 밀려 들었다. ‘다아지일링’이 고립되었으며, 길을 뚫으려면 수개월이 걸릴 것이라는 말을 듣고 ‘헨드리 카마이클’과 ‘파이오니아’인 ‘멜로이 웰스-잰츠’는 그들 힘으로 헤쳐 나아가 보기로 결정하였다. 한편 그들은 순회 여행의 다음 단계에 침례식을 갖도록 계획을 세웠다.

‘카마이클’ 형제는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우선 우리는 산마루를 두르고 있는 오래된 군용 도로를 향해 305‘미터’를 올라갔다. 도로에 다달았을 때, 우리는 충격적인 상태를 목격하였다 ··· 우리는 기를 쓰고 자갈과 나무로 된 언덕들을 넘어 드디어 ‘그훔’에 당도하였다. 거기서부터 허기진 배를 안고 우리는 주 도로를 따라 지친 몸을 이끌며 전력을 다해 헤쳐 나아갔다. 이따금 산사태가 산을 울리며 일어날 때마다 우리 뒤에서 길이 무너져 유실되었다. 한번은 산사태가 우리 중간 지점에서 일어났으나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드디어 우리는 꼼짝 못하고 정지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우리 앞에 12‘미터’ 가량의 폭에 610‘미터’ 깊이의 갈라진 틈이 입을 벌리고 있었고, 으르렁거리는 급류가 그 틈으로 쏟아져 내려 협곡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전의 철교의 잔해물들이라고는 침목에 함께 묶여 있는 두개의 선로 뿐이었다. 그것은 으르렁거리며 쏟아지는 물 가까이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 ···

“우리는 그날 밤 산마루 가에 있는 철로가 오두막에 들어가 몸을 피하고 있었는데, 그 위로는 언제고 무너져 내릴 것 같이 위험한 바위 더미가 있었다.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 뜬 눈으로 밤을 지낸 다음, 우리는 그 한쌍의 철로가 있는 곳으로 다시 갔다 ··· 비가 퍼붓고 있었으며, 바람에 그 선로가 흔들거리고 있었지만, 우리 둘은 결국 반대편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우리의 어려움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왜냐 하면 우리가 ‘소나다’에 도착하자마자 또 다른 깊은 틈을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무런 선로도 남아있지 않았다 ··· 우리는 때로는 벼랑에 등을 아주 조심스럽게 대고, 벼랑턱이 끝날 때까지 조금씩 조금씩 움직여서 914‘미터’ 높이의 벼랑을 기어 올라갔다. 사태가 벼랑턱을 없애 버려서 할 수 없이 올라갈 만한 다른 벼랑턱을 찾아낼 때까지 되돌아 가기도 하였다. 결국 우리는 벼랑 꼭대기까지 기어 올랐으며, 곰이 자주 출몰하는 숲을 통과하였다. 우리는 이틀 낮과 하룻밤을 헤맨 후에 ‘커성’으로 가는 길에 들어섰다. 우리가 도착하였을 때에는 허기지고, 진흙투성이에 발은 부르터 있었으나 안전히 건강한 상태로 돌아왔다. 우리가 도착한 것을 본 ‘가톨릭’ 사제는 그 소식을 마을 사람들에게 퍼뜨렸다. 그러나 우리의 방문 목적은 달성되었다.”

보상이 컸던 남인도 여행

‘스키너’ 형제가 남 인도로 여행하여 남‘카나라’ 및 ‘트래반코르’에 있는 형제들을 방문하도록 결정되었다. 순회 감독자인 ‘헨드리 카마이클’은 중한 수술을 받고 방금 회복되었지만, 이번 여행에는 지부 감독자가 같이 가기로 하였다. 그 두 형제는 연안 기선을 타고 ‘봄베이’를 떠나서 주말에 ‘맹갈로르’에 기착하였다. 거기서 그들은 ‘카나레스’어 「파수대」를 아주 정기적으로 연구하고 있던 14명으로 된 관심자 집단을 발견하였다. 영어를 잘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통역자도 없었다. 그리하여 공개 강연은 ‘스키너’ 형제를 연사로 하고 영어 집회로 광고하였다. 그 연설을 광고하는 기간은 하루 밖에 안되었지만, 놀랍게도 90명이 참석하였다.

다음 장소인 ‘코친’에서는 이 지역의 밭을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대회가 마련되었다. 영국 통치하의 ‘코친’은 ‘트래반코르’로부터 분리된 주였는데, ‘트래반코르’ 사람들처럼 ‘코친’ 주의 사람들은 ‘말레야람’어를 사용하였지만, 그들 나름의 회교 군주와 정부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때까지 ‘말레야람’어 밭에서의 대부분의 사업은 남‘트래반코르’에서 행해져 왔었다. 이곳 ‘코친’에서 열린 대회 첫 회기에 210명이 참석하였다. ‘트래반코르’에서는 30내지 40명의 관심자들이 왔었다. 그 대회의 증거 활동에는 110명의 증인들이 참여하였는데 이삼십명의 자매들이 공개 강연을 광고하는 ‘플래카아드’를 들고 도시를 걸어 다니는 것을 본 ‘코친’ 주민들은 대단히 놀랐다. ‘코친’에서는 이전에 그런 일을 본 적이 없었다. 이곳은 ‘로마 가톨릭’교가 깊이 뿌리를 박고 있는 곳이었으며, 주교가 주재하는 도시였다. 그렇지만 공개 강연 최종 참석자 수는 1,022명이었으며, 이 수는 그 당시로서는 인도에서 개최된 가장 큰 대회였다. 놀라운 것은 25명이 침례를 받았으며, 다섯명의 영어를 말하는 남자들의 집단이 회중을 구성하기를 원하였다.

증가를 고려해 봄

선교인들이 전국에 퍼져 있는 것은 안정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인도 형제들이 함께 연합하여 일하는 데 확신을 갖게 하였다.

‘캘커타’에서 ‘힌두’교인들과 몇 건의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다. 이것이 ‘힌두’교인들 밭을 뚫고 들어갈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인가? ‘벵골’ 힌두인들 가운데서 38건의 성서 연구가 사회되고 있었으며, 보고에 의하면 “이것은 시작이다” 하고 알렸다. 그러나 그러한 희망적인 이야기와 더불어 다음과 같은 말들도 있었다. “그들은 예의상”, “영어를 배우기 위하여”, “비교 연구를 위하여 연구는 하지만, 그들의 결심은 자기들의 종교를 절대로 바꾸려 하지 않는다.” 한 보고에서는 대부분의 ‘힌두’교인들의 태도를 나타내 주는 전반적인 진상을 표현하여 “여하한 계시 종교에 대하여도 전반적인 반감이 있으며, 그들은 대속 사상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지 않는 사람들과 하는 연구가 얼마나 되는지 알아 보기 위하여 1950년에 형제들에게 질문서가 보내졌다. 그 결과 인도 전역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아닌 ‘힌두’교인, 불교인 및 기타 사람들과 114건의 성서 연구가 사회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약 일백건의 연구가 시작되었지만, 중단되었다. 이러한 사람들 중 34명이 우리의 집회에 참석해 왔으며 11명이 야외 봉사에 참여해 왔고, 두명이 침례를 받았다. 1951년에, 83건의 성서 연구가 있었으며, 31건이 떨어져 나갔음을 그 대답이 밝혀 주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종파에 속하지 않은 13명이 증거 사업에 참여하고 있었으며, 세명이 침례를 받았다. 결과적으로 증가는 주로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로부터 오고 있었다. 그해에 헌신하고 침례를 받은 새로운 제자들이 59명 생긴 것은 고무적이었다. 이것은 499명의 증인 최고 기록을 달성한 수였다.

‘푸나’에서의 문제

인도에서의 참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는 일은 어떤 종교-정치 운동, 특히 R. S. S. 즉 1948년에 ‘모한다스 K. 간디’를 암살한 집단이라고 전국에 알려진 ‘라쉬트리야 세바 상’(국가의 종들)의 미움을 받았다. 1951년 10월에 그들은 ‘푸나’에서 있었던 순회 대회 기간에 문제를 일으키려 하였다. 10월 14일, ‘스키너’ 형제는 전혀 ‘힌두’인들만 사는 지역에 있는 ‘곡헤일 홀’에서 공개 강연을 하도록 계획이 되었다. 그러나 일단의 반 그리스도교 폭도들이 집회를 해산시켰고, 형제들은 “인도에서 꺼지라!”는 조롱섞인 고함을 들으며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시에 폭행을 당할 위험이 있었다. 경찰도 법과 질서를 회복시킬 수 없었다.

모든 형제들은 ‘푸나’ 왕국회관에 모여 거기서 대회 ‘프로그램’을 마쳤다. 그 후, ‘스키너’ 형제와 ‘카마이클’ 형제는 경찰서로 가서 항의서를 제출하였다. 그 다음 10월 31일에 동일한 ‘홀’에서 또 다른 공개 집회를 열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번에는 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형제들은 또 한 차례 광고 운동을 조직하였고, ‘마라티’어와 영어 광고지 10,000장을 배포하였다. 집회가 시작할 시간이 되었을 때, 두명의 경찰 간부와 약 12명의 경찰관들이 임석하였다. ‘스키너’ 형제가 막 서론을 마쳤을 때, 다시 소란이 일어났다. 경찰이 개입하였지만, 순식간에 수가 불어나 소리를 지르는 거대한 군중이 몰려 들게 되자 모였던 형제들과 관심자들이 위태롭게 되었다.

그러나 자기 집 뒷문이 그 ‘홀’ 마당쪽으로 통해 있는 한 이웃집 사람이 그 소란 속에서, 형제들에게 피신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 주었다. 그리하여 경찰관들이 앞쪽에서 엄청난 수의 폭도들과 대치하여 싸우고 있는 동안, 형제들은 조용히 들키지 않게 빠져 나와 모두 무사하게 피하였다. 후에 여러 신문들은 그 사건을 크게 보도하였으며, 그 중 상당수는 여호와의 백성을 좋지 않게 다루었다. 지부 감독자는 증인들의 헌법상의 권리인 언론 및 숭배의 자유가 침해받은 데 대한 항의서를 ‘봄베이’ 정부의 내무성 장관에게 보내고, 사본을 ‘네루’ 수상 및 ‘봄베이’ 주 검찰총장에게 각각 보냈다.

또 다른 방문이 전망을 밝게 하다

인도에서 있었던 한 가지 두드러진 사건은 1952년 1월에 ‘노워’ 형제와 ‘헨첼’ 형제가 도착했을 때 있었다. 그들이 ‘파키스탄’의 ‘카라치’에서 동료들을 작별하고, ‘헨첼’ 형제는 ‘델리’와 ‘캘커타’로 가고 ‘노워’ 형제는 ‘봄베이’와 남인도로 갔다.

‘마드래스’에서 ‘노워’ 형제는 일단의 선교인들과 상봉하였다. 그 날 오후 4시에 57명의 형제들이 강연을 듣기 위하여 모였다. 6시에는 95명이 공개 강연을 듣기 위하여 왔다.

다음날, ‘노워’ 형제와 ‘스키너’ 형제는 ‘코친’에서 바다를 건너 ‘에르나쿨람’에서 열리는 대회로 향하였다. 이들은 260명의 미소를 짓는 ‘트래반코르’ 형제들의 마중을 받았다. “비록 우리는 통역을 통하지 않고는 그들에게 이야기할 수 없었지만, 그들의 신권적인 사랑은 다른 어느 곳에 있는 여호와의 백성에게서나 볼 수 있듯이 그들에게서도 나타났다”고 ‘노워’ 형제는 술회하였다. 그 대회에 참석하였던 청중들은 ‘말레야람’어로 나온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책을 받고 감격하였다. 저녁에 있었던 공개 집회에는 700명이 참석하였다.

“다음날 우리는 ‘봄베이’행 비행기를 탔으며, 거기서 ‘헨첼’ 형제를 다시 만나 ‘델리’와 ‘캘커타’에서 있었던 그의 경험을 들었다”고 ‘노워’ 형제는 말하였다. ‘델리’에서 ‘헨첼’ 형제는 특히 그 지방 ‘파이오니아’ 형제와 함께 호별 방문 봉사를 하는 동안 상당수의 관심자들을 발견하였다. 그의 첫날 밤 연설을 듣고 형제들은 크게 감사하였으며, 둘째날 공개 집회에는 73명이 참석하였는데 그 때까지 가장 많은 참석자였다.

‘캘커타’에서는 ‘헨첼’ 형제의 방문을 위하여 75명이 왕국회관을 메웠다. 그곳의 작으나 발전하고 있는 회중은 다섯명의 선교인들 즉 ‘재비츠’ 부부, ‘마저리 해드릴’, ‘프로렌스 윌리엄’ 및 ‘조이스 라아크’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노워’ 형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미술품 및 방직품 전시로 유명한 미술관을 공개 강연을 위하여 빌렸으며, 205명이 ‘종교가 인류의 위기를 벗어나게 해 줄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들었다. 여기서도 다시 장차 더욱 발전을 위하여 새로운 관심이 자랄 고무적인 여지가 있었다.”

흥미있게도, ‘노워’ 형제는 다음과 같이도 말하였다. “‘네팔’ 국경 부근에 있는 ‘다아지일링’에서 일하고 있는 한 ‘파이오니아’는 박해로 인하여 중국으로부터 이동해 온 여러 종파에 속한 선교사들이 수백명 이곳에 있다고 말하였다. ‘다아지일링’은 그렇게 큰 도시가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많은 선교사들이 그곳에서 일할 수 있는지 의아해 한다. 그 형제의 설명을 들어 보면, 그들은 별로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 중 얼마는 조그마한 아이들을 함께 모아 놓고 노래나 가르치며, 그 대가로 아이들은 쌀 배급을 약속받는다고 한다. 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식량이며, 그 지역에 양식이 떨어지면 더 많은 수가 몰려온다. 그러나 아이들은 성서에서 가르치는 것에 관하여 아무 것도 배우는 것이 없다. 또 다른 선교사들은 오후에 무료로 차를 차려 놓고, 사람들이 차를 마시러 몰려 오고, 어린 아이들이 노래를 부를 때 사진을 찍는데, 선교사들은 자기들이 ‘성과를 올리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그러한 사진들을 미국이나 기타 지역으로 보내기를 좋아한다. 이것을 근거로 그들은 더 많은 돈을 청구하며, 그리하여 사기 행위를 하고 있다.

“진리는 그러한 사기 행각과 위선을 폭로하기 때문에, 이들 여러 종파주의자들은 여호와의 증인들과 증인 선교인들이 인도에 있는 것을 퍽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그들은 흔히 실직, 치료 거부 또는 자녀 교육 거부 등의 위협을 가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억지로 증인들의 소식을 듣지 못하게 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의 진정한 벗이 누구인가는 곧 백일하에 들어난다. 때때로 정부가 바뀌어 소위 이교도들의 지배를 받게 되면, 가짜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은 좀 더 살기 편한 곳으로 떠나 버린다. 그러므로 사도적 요구 조건들에 따라 생활하지 않는 ··· 그들 위에 그들의 거짓 종교가 인류에게 실망을 안겨다 준 무거운 책임이 돌려져야 한다.”

그 당시 인도에서 계획된 주요 대회는 ‘봄베이’에서 있었다. 그 대회는 1952년 1월 14일에 열렸다. 그 다음 비공식 회기에서, 선교인들은 각 지역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배우라는 권고를 들었다.

‘노워’ 형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대회에서 크게 기뻐한 것은 ‘카나레스’어판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책의 발표였다. 더욱 절정을 이룬 것은 공개 집회였다. 나는 공산주의자들의 망치와 낫이 그려진 협박 편지를 받았었다. 그 편지를 보낸 자는 몇개월 전에 ‘푸나’에서 공개 집회를 방해했던 이전의 소동을 언급하였다. 경찰에 이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며, 784명의 많은 청중이 그 연설을 들었다. 강연 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질문을 해 왔다. 물 침례를 받은 사람도 43명이나 되었음도 빠뜨려서는 안될 점이다.”

덧붙여 이야기한다면, 그 대회에서 침례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 29명은 1949년으로 소급하여 ‘카르카다’와 그의 형, ‘사티아나단’ 형제가 찾은 한 ‘클럽’으로부터 나온 ‘카나레스/콘카니’어를 말하는 형제들이었다. 그 대회 기간에 ‘노워’ 형제는 ‘아아더 카운즈’에게 자기 생각에는 이들 ‘카나레스/콘카니’어를 말하는 형제들 중 6명을 그들의 언어를 사용하는 밭으로 특별 ‘파이오니아’로 보냈으면 한다고 말하였다. ‘카운즈’가 이러한 사실을 그 형제들에 알린 후 얼마 안있어, ‘파이오니아’들인 ‘존 마벤’과 ‘라파엘 루이스’는 ‘봄베이’를 떠나 더 필요한 곳으로 봉사하기 위하여 갔다. 후에 다른 사람들도 뒤따라 갔는데, 그 중에는 ‘루자리오 루이스’도 있었다. 그는 ‘쿤다푸르’로 갔다가 다시 ‘브라마바르’로 갔는데, 거기서 그는 회중을 설립하기 위하여 힘써 일하였다.

‘노워’ 형제가 1947년과 1952년에 방문한 그 짧은 사이에 증가가 있었다. 1947년에는 영국계 인도에 198명의 전도인들이 있었다. 그러나 1951년 11월에 인도에서는 전도인 기록이 514명이었다. 더구나 인도에서는 23명의 선교인들과 18명의 지방 ‘파이오니아’들이 봉사하고 있었다. 협회 본부로부터 온 우리의 방문자들은 이 광활한 땅에서 왕국 선포가 강화될 낙관적인 전망을 가지고 떠난 것은 이해할 말한 일이다.

격려의 원천인 선교인들

종교적 반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52년에는 상당한 증가가 계속되었다. ‘제프리’ 자매가 ‘캘커타’ 선교인 집에 있는 ‘마저리 해드릴’ 자매와 같이 일하기 위하여 ‘봄베이’를 떠나자, ‘마아그리트 호프만’의 새로운 짝은 인도인 ‘파이오니아’ 자매 ‘나스린 맬’ 자매가 되었다.

‘반드라’에서 ‘호프만’ 자매와 ‘맬’ 자매는 매우 빈곤한 어떤 지역에서 봉사하고 있었는데, 오막살이에 살고 있는 가난에 찌든 사람들 가운데서 한 ‘로마 가톨릭’ 사제로부터 심한 반대를 만나게 되었다. 그 사제는 ‘마아그리트 호프만’ 자매가 ‘윌리엄 파아머’ 씨와 성서를 토론하고 있는 오막살이에 이미 들어와 있었다. 그 사제는 완전히 침착성을 잃어 버리고 ‘호프만’ 자매의 손에서 소책자들 얼마를 나꿔 채고 그 자매를 발로 차려고 하였다. 그 사제는 소책자들을 발기발기 찢어 버리고는 폭행을 가하려 하면서 이 사람들은 “자기 양떼”라고 하였다. 삽시간에 이웃 사람들이 삥둘러 모였으며, 그 자매가 다시 근처로 가려 할 때마다 아이들에게는 욕을 하라고 충동을 하였다. 그러나 ‘마아그리트 호프만’은 꾸준함을 유지하였으며, 이러한 일이 벌어진 그 오막살이에 살고 있던 남자는 정규적인 왕국 전도인이 되었다. 그 ‘윌리엄 파아머’ 형제는 옳은 것에 대하여 굳굳함을 지킬 만한 용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 조그마한 오막살이 집단에서 나온 일곱명의 왕국 전도인들은 드디어 ‘로마 가톨릭’의 “감옥”으로부터 해방되는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인도의 수도인 ‘델리’는 선교인 집을 위한 새로운 곳이 되었다. 1952년에 ‘캐나다’ 형제들인 ‘버어나아드 펑크’와 ‘피터 더처크’가 ‘길르앗’ 학교로부터 인도로 왔으며, 곧 수도로 보내졌다. 협회는 ‘조오지 싱’ 형제와 ‘아아더 스터어진’ 형제를 이들과 함께 있도록 ‘마드래스’로부터 옮겨, 작지만 잘 발전하고 있던 이곳 회중과 함께 일하도록 하였다.

새로운 선교인들이 비 그리스도교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를 알게 되는 데에는 그렇게 긴 세월이 걸리지 않았다. 예를 들어, ‘버어나아드 펑크’ 형제의 말을 들어 보면, “‘힌두’인들은 토론을 위해 제시되는 모든 것에 대하여 모호하고 잘 빠져나가는 듯 보였다”고 한다. 그는 또한 책임 회피 경향도 유의하게 되었는데, “어떤 집주인이 우리에게 ‘형’에게 물어 보라고 하면, 그 다음 그 형은 아버지에게 물어 보라고 하며, 그 아버지는 또 집 주인에게 물어 보라”는 식이었다. 더구나 ‘펑크’ 형제가 관찰하게 된 사실은, 그리스도교국의 교회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종교가 물질적 혜택을 베풀 것으로 기대하게 가르쳐 놓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실제 속셈은 다른 데 있으면서도 관심이 있는 체한다”는 점이었다. 그 다음 또 그는, 사회적 관습들이 숭배와 너무나 밀접히 관련되어 있어서, ‘종교를 바꾸는 것은 대부분의 관습을 타파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많은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선교인들은 왕국 소식을 선포하며, 지방의 증인들에게 격려의 원천으로서 꾸준히 인내하였다.

‘브라마바르’에서의 좋은 성과

선교인들의 영향은 ‘브라마바르’에서의 왕국 사업에 또한 고무적이었다. ‘브라마바르’ 지역을 두르고 있는 인도의 ‘콘칸’ 해안에는 작은 섬들이 점점이 산재해 있는 강 어구들이 무수히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섬들 중 많은 곳에는 진리에 관심을 가진 가족들이 있었다. ‘카마이클’ 형제는 자기가 그곳에서 순회 사업을 하며 활동하던 일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이 격지 주민들간의 교통 수단은 긴 장대로 밀고 다니는 가운데를 움푹 파낸 통나무였다. 노천에 모인 수백명의 군중들에게 우리가 연설할 때마다 흥미있는 일들이 있었다.”

그 동일한 순회 방문에 관하여 ‘아아더 카운즈’ 형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브라마바르’와 인접 마을들에 연구들이 있었으며 몇 개의 강 가운데 있는 섬들에서도 관심이 발전하였다. ‘시리아’와 ‘로마 가톨릭’ 배경을 가진 이들 ‘그리스도인들’은 진리를 배우고 있었다. 우리는 그들의 진흙집 안에 석유등을 둘러싸고 앉아 공부를 하고 왕국 노래를 불렀다. 이 마을들 가운데서 상당 수의 ‘그리스도교인’들이 여호와의 증인들이 되었는데, 원래 그들에게 진리를 전해 준 사람들은 ‘봄베이’에 있는 ‘클럽’에서 온 신자들이 된 친척들이었다.”

‘브라마바르’와 인근 지역을 순회 여행하는 동안, 어떤 마을에서 풀로 엮은 ‘매트’로 지은 극장에서 공개 강연이 마련되었다. 130명이 그 강연을 들었는데, 비가 억수처럼 퍼부어 모든 사람이 흠뻑 젖어 버렸다. 이러한 일에도 개의치 않고 그들은 다음날 또 한번의 집회를 광고하였다. 그 때는 300명이 참석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을 방문해 달라고 ‘파이오니아’들에게 자기들의 이름과 주소를 남겨 두고 갔다. 인근 도시에서 공개 강연이 마련되었는데, 심한 반대 때문에 강당을 빌릴 수 없었다. 그리하여 노천에서 모이도록 마련을 하였다. 광고를 하는 동안 온 마을이 떠들석하였으며, 결국 150명이 그 강연을 듣기 위하여 왔다. 또 다시 얼마의 사람들의 이름을 받게 되었으며, ‘카나레스’어를 말하는 ‘파이오니아’들은 그들의 임명지에서 훌륭한 시작을 하게 되었다.

선교인 등록과 관련된 여러 가지 문제들

그 때로부터 인도에 선교인들이 들어 오는 데 점차로 어려움이 증가하였으며, 특히 미국 시민권을 가진 선교인들에게 그러하였다. ‘힌두’교 사회는 대체로 “그리스도교” 선교인들이 있는 것을 싫어하였다. ‘힌두’교의 소수 종파들은 항상 선교 활동을 제한시키라고 정부에 항의하였다. 1953년에는 이러한 움직임이 커지기 시작하였다. 얼마의 국부적인 소란과 방해는 있었지만, 그러나 그것이 여호와의 증인들 전체의 활동에 영향을 주지는 못하였다.

정부는 어떤 그리스도교국의 선교사들의 활동을 조사하도록 제의를 받았으며, 심지어 정치 문제에 간여하는 일처럼 보이는 일에 대하여는 어떤 조치들이 취해지기도 했지만, 여호와의 증인들은 아무런 심각한 방해도 받지 않은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심문들에는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의 활동에 대한 찬반에 관한 많은 토론이 실렸다. 선교 활동 반대 투쟁 주창자들은 선교사들의 활동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반감을 불러 일으키기 위하여 공중 집회들을 조직하였다. 한 신문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을 실었다. “과격파 ‘힌두 마하사바 당’ 총재는 공중 집회에서, 5,000명의 선교사들이 이곳 인도에서 하는 활동은 인도의 결속과 보전에 위협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1952년에는 ‘왙취 타워’ 선교인들이 이 나라에 들어 오는데 한 동안 어려움이 있었다. 입국 ‘비자’를 얻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거친 후, ‘하워드 베네쉬’가 ‘뱅갈로르’에 있는 선교인 ‘몰리 톰슨’과 결혼하기 위하여 왔다. 그들은 ‘뱅갈로르’에 머물렀는데, 그 형제는 인도에 오래 체류할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정부는 그의 체류 ‘비자’를 12개월 이상 더 연장해 주기를 거절하였다. 그리하여 협회는 ‘베네쉬’ 부부를 동‘파키스탄’으로 보내서 그곳에서의 왕국 사업을 발전시키도록 하였다. 그들은 동‘파키스탄’에서의 유일한 증인들이었다.

미국 시민권을 가진 얼마의 ‘길르앗’ 졸업생들이 1953년에 인도에서 선교 사업을 하도록 임명되었다. 그러나 입국 허락이 단호히 거절되었다. 그 이후, ‘길르앗’ 훈련을 받은 영연방 시민권을 가진 사람만 인도에 임명되었다. 왜냐 하면 인도 또한 영 연방이었기 때문이었다.

‘말레야람’ 대회

‘트래반코르’에 있는 ‘에르나쿨람’에 선교인 집이 개설되자, 전 ‘말레야람’ 대회를 열도록 결정되었다. 선정된 대회 장소는 ‘하이래인지’ 고지대에 있는 마을인 ‘우푸다라’였으며, 대회는 순회 감독자인 ‘V. C. 아이티’가 조직하였다. 대회장은 가장 가까운 우체국으로부터 24‘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홍차 농장 건너편에 있었다. 그러나 1953년에 약 20명으로 이루어진 작은 회중이 그곳에 있었다. 지방 형제들은 후추나 생강 또는 기타 양념거리를 재배하면서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스키너’ 형제는 그 대회에 참석하였었으며,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형제들은 ‘팬달’을 세웠다. 그것은 야자나무 잎을 엮어서 지붕을 씌우고 대나무로 기둥을 받친 것이었다. 이 건물에는 벽이 없기 때문에 시원한 바람이 통해서 더위를 쫓을 수 있었다. 그들은 간이 발전기를 빌렸으며, 그것으로 연단 위의 세개의 전깃불과 30‘와트’짜리 확성 장치를 가동시켰다. 반경 8 내지 16‘킬로미터’ 내의 지역에 기치, ‘포스터’, 전단 등을 사용하여 광고를 하였다. 첫 회기는 많은 관심자들을 포함하여 283명의 청중이 참석한 가운데 시작되었으며, 공개 집회에는 522명이 참석하였다. 그러나 ‘팬달’ 밖의 나무에 두개의 ‘라우드스피이커’를 매달아 놓았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멀리서도 들을 수 있었다. 불행히도 공개 집회 시간에 천둥 번개를 치는 폭우가 내렸기 때문에 아마도 얼마의 사람들은 그 집회에 참석치 않았을 것이다. 근처 강에서 27명이 침례를 받았다.

“내게 커다란 기쁨이 된 한 가지 일은 두명의 선교인이 ‘말레야람’어와 씨름한 방법이었다. ‘더글러스 프래저’는 영어로 연설을 하였지만 5분 동안의 서론은 ‘말레야람’어로 하였다. 그는 또한 ‘말레야람’어로 결론을 맺었다. 그의 형제인 ‘도널드’는 두명의 지방 형제들의 도움으로 40분간의 실연을 해 냈는데, 전부 ‘말레야람’어로 하였다.”

신세계 사회 대회

여호와의 증인의 신세계 사회 대회가 1953년에 ‘뉴우요오크’ 시에서 계획되었다. 인도 대표자들도 참석하게 될 것이라는 발표가 있자 인도 형제들 사이에서는 흥분의 물결이 일어났다. 참으로 기뻤던 일은 ‘A. J. 조셉’ 형제가 자기의 막내딸 ‘그레이스’를 그의 인도인 동급생 ‘내스린 맬’과 함께 ‘길르앗 학교’에 보낸 일이었다. 그들이 다른 여러 명의 선교인들과 함께 본국으로 보내지리라고는 전혀 몰랐다. 1953년에 ‘뉴우요오크’ 시에서 있었던 그 유명한 국제 대회에 참석하였던 인도 대표자들 가운데에는 ‘A. J. 조셉’ 형제가 있었다. 후에 그 참석자들은 그들이 듣고 온 좋은 것들을 인도 형제들에게 들려 주었으며, ‘봄베이’에서 반복된 그 대회에서는 그렇게 하였다. ‘봄베이’ 대회에는 358명의 형제들이 참석하였으며, 48명이 침례를 받았다. “‘아마겟돈’ 후의 하나님의 신세계”라는 공개 강연을 듣기 위해 최종적으로 707명이 참석하였다.

확장을 위한 기초

이 대회 직후, ‘그레이스 조셉’ 자매와 ‘내스린 맬’ 자매와 더불어 더 많은 ‘길르앗’ 졸업생들이 도착하였기 때문에 인도에서의 더 큰 확장을 위한 기초가 놓여지게 되었다. ‘트래반코르’의 ‘트리추르’에 두번째 선교인 집이 마련되었다. 이곳 선교인 가족들은 그들에게 언어를 가르친 ‘조셉’ 자매와 함께 ‘말레야람’어 밭으로 임명을 받았다.

더 북쪽으로 ‘아메드나가르’에서 ‘코터릴’ 형제는 ‘오스트레일리아’로부터 새로 온 선교인, ‘퍼시 고스든’과 함께 있게 되었다. 거기서 그들은 함께 ‘마라티’어 밭에서 일하였다. 더 북쪽으로 동‘판잡’ ‘수틀레지’ 강 유역 평야에 있는 ‘줄룬더’에 또 하나의 선교인 집이 마련되었다. 이제 자기 언어로 ‘우르두’ 지역에서 일할 수 있게 된 ‘내스린 맬’을 포함하여 다섯명의 선교인들이 그곳으로 임명되었다. 그리하여 ‘길르앗’ 졸업생 13명이나 더 인도로 오게 된 셈이며, 이들 잘 훈련된 봉사자들이 31명에 달하였다.

한 ‘시이크’ 교도가 진리를 받아들이다

이 때즈음, ‘봄베이’의 ‘새뮤얼 월러’가 공개 강연을 광고하며 가두에서 증거를 하고 있었는데, 한 젊은이인 ‘시이크’ 교도가 길을 멈추고 광고지를 받았다. 이 ‘터어반’을 머리에 두른 ‘시이크’ 교도가 그 강연을 들으러 왕국회관으로 걸어 들어 왔을 때 형제들은 무척이나 놀랐다. 그의 이름은 ‘하지트 싱 대드얄라’였다. 그는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책을 가지고 성서 연구를 하기로 동의하였다.

‘시이크’교의 모든 남자들은 머리를 길게 기르며 절대로 깍지 않는다. 그들은 긴 머리를 뚤뚤 감아 올리는데 그것을 큰 자랑으로 생각하며, 머리 위로 뚤뚤 말아 공을 만들고 그것을 ‘터어반’으로 덮는다. 그러므로, 어느날 이 ‘시이크’ 교도가 머리를 깎아 서양식으로 빗어 넘기고 얼굴을 말끔히 면도하고 ‘봄베이’에 있는 왕국회관으로 들어서자 형제들은 더더구나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히 그는 가르침을 받을 만큼 겸손하였으며, 진리의 행로를 따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타지트 싱 대드얄라’가 여호와께 헌신하고 침례를 받는 일은 쉽지 않았다. 두번이나 그는 아버지 집에서 쫓겨났었고 매를 맞았으며, 만일 그가 그리스도교를 버리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위협을 받았다. 후에 그는 ‘파이오니아’를 신청하였다. ‘대드얄라’ 형제는 점차 발전하여 ‘길르앗’ 훈련을 받을 기회를 얻기에 이르렀다.

인도 증인들의 훌륭한 봉사

밭 전체를 통하여 인도 형제들은 훌륭한 봉사를 수행하고 있었다. ‘델리’에서, 연로한 형제인 ‘애디슨’은 중앙 정부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는 매일 아침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직원들에게 증거를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야유를 받았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알아 보고자 하였다. 얼마 안있어 한 ‘힌두’교인이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고, 집회에 참석하였다. 곧 그는 신권 학교에 등록하였으며, 정기적으로 야외 봉사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줄룬더’에서 열린 순회 대회에서 침례를 받았다. 이 새로운 형제인 ‘R. P. 니감’은 자기 조카인 ‘힌두’교인 ‘I. P. 니감’에게 성서 연구를 하도록 영향을 미쳤으며, 그 역시 정기적으로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다.

남인도에서도 비그리스인들에게 참 그리스도교가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뱅갈로르’ 남쪽 변경에서 농장을 경영하고 있던 젊은 형제 ‘에릭 팰콘’은 자기 농장 인부들에게 진리를 소개하기 시작하였다. ‘팰콘’의 농장에서 일하는 인부들은 대부분 문맹이었다. 그들의 원래 언어는 ‘텔루구’어였다. ‘팰콘’ 형제는 그 언어를 알고 있었으며, 그들에게 참 하나님 여호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이야기해 줄 수 있었다. 거기에는 약 백명 가량의 인부들이 그들의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결국 그 인부들 가운데 약 20명이 여호와께 헌신하고 침례를 받았다. 글을 모르긴 하였지만, 그들은 주말마다 이웃 마을들로 가서 자기들이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왕국에 관하여 배운 점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주었다.

‘푸나’에서 문제가 다시 일어나다

1954년 기념식 때, ‘푸나’에서는 또 다시 문제가 발생하였다. ‘아멘드나가르’에서 선교인으로 일하고 있던 ‘리처어드 코터릴’은 ‘푸나’로 가서 그곳에서 기념식을 마련하도록 임명을 받았다. 그 작은 집단은 토요일에 기념식을 거행하였으며, ‘코터릴’은 다음날 공개 강연을 하기 위하여 머물렀다.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우리가 막 「파수대」 연구를 마쳤는데, ‘마라티’어를 하는 ‘힌두’교도들이 큰 무리를 지어, 이전에 집회를 풍지박산 만든 일이 있던 그들 지도자들의 인솔하에 연설이 시작되기 바로 전에 몰려 왔다. 첫 마디를 말하였을 때, 그들은 ‘‘마라티’어로 말하라! ‘마라티’어로 말하라!’ 하고 외쳤다. 그들은 강연이 영어로 행해질 것이라고 광고되었으며, 우리가 ‘마라티’어 연설을 마련하였고, 또 이 연설들을 여러 차례 ‘푸나’에서 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문제를 일으키기 위하여 밖에 있었다. 우리는 ‘호텔’ 정원에 있었기 때문에 ‘호텔 홀’로 들어가려 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가 그곳에서 강연을 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다음에 그들은 경찰이 ‘멀그로우브’ 자매와 ‘뉴우랜드’ 자매 그리고 나를 경찰서로 연행해 가도록 하였다. 그들의 지도자들 중 하나가 가설된 연단에 서서 ··· ‘우리는 ‘스키너’ 목사를 사랑한다’ 하고 선창을 하면 ‘그러나 인도를 떠나라’ 하고 합창이 뒤따랐다. ‘우리는 ‘코터릴’ 목사를 좋아한다’고 선창한 다음에는 뒤이어 ‘그러나 인도를 떠나라’ 하고 합창을 하였고, 후에 우리는 ‘푸나’의 그 지역 사람들이 여호와의 증인들로부터 책을 받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말을 들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얼마 안있어, ‘코터릴’ 형제와 ‘퍼시 고스든’ 형제는 ‘아메드나가르’로부터 ‘푸나’로 옮겨졌다. 이러한 이동은 ‘푸나’가 큰 국제적인 도시임을 고려할 때 실제적인 조치로 생각되었다. ‘푸나’에서 ‘마라티’어를 말하는 얼마의 가족이 진리에 다소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하였으며, 그 두명의 선교인들은 그곳에 작은 회중을 설립할 수 있었다. 그 해에 협회는 그들의 활동을 돕고 격려하기 위하여 ‘마라티’어판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책을 만들었다.

불가피한 반대

이들 선교인들의 훌륭한 본들로 인하여, 지방 형제들 가운데서의 특별 ‘파이오니아’ 사업이 계속 확장되었다. ‘콘카니/카나레스’어를 말하는 한 형제인 ‘루자리오 J. 루이스’는 특별 ‘파이오니아’가 되어 ‘브라마바르’ 주위의 ‘콘칸’ 해안에 있는 고향 지역에서 봉사하고 있었다. 그의 열성적인 활동은 그 지방 ‘가톨릭’교 지도자들의 눈을 끌게 되었으며, 그들은 자기 교회 신도들을 선동하여 이 형제의 봉사를 방해하였다. 한번은 그들이 이 형제의 조그마한 ‘커누우’를 불태워 버렸다. ‘루이스’ 형제는 ‘브라마바르’의 역류를 따라 증거하는 동안 이 배를 타고 여행을 하였었다. 하여간 그는 자기의 임명을 꾸준히 수행하였으며, 정직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반응을 보였다. 예를 들어, ‘가톨릭’ 교직자들과 지도자들이 그의 활동을 금지시키려고 획책하여 그를 그 지역으로부터 몰아내려 하였다. 그러나 ‘루이스’ 형제는 ‘패이틀’이라고 하는 그 지방 촌장에게 항의하였다. ‘패이틀’은 양편의 이야기를 들어 보기 위하여 ‘가톨릭’측과 ‘루이스’가 함께 모이도록 하였다.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봉사에 관한 ‘루이스’ 형제의 성서적인 설명을 듣고 나서, 그 촌장은 자신이 ‘힌두’교인임에도 불구하고 ‘루이스’ 형제가 계속 머물면서 그의 전파 활동을 계속할 수 있다고 통고하였다.

하지만 이것으로 ‘가톨릭’교인들의 방해가 그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루이스’ 형제를 죽일 계획을 세웠다. 어느날 밤, ‘루이스’ 형제가 그 날 야외 봉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어두컴컴한 밀림길을 걷고 있었다. 그가 한 연못에 이르렀을 때 한 난폭한 자가 그를 갑자기 연못 속으로 밀어 넣어 빠뜨렸다. 그들이 물가로 몰려 들려 하였을 때, 다행히도 누군가가 다가왔으며, 그리하여 공격자들은 흩어져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그 이후부터 ‘루이스’ 형제는 그의 구역을 오갈 때에는 항상 다른 길로 다니곤 하였다.

한 마을에서, 어느 관심자의 난지 열흘된 아기가 죽었다. 그 마을 사람들 가운데서 진리에 관심을 갖지 못하는 가장 공통된 구실 한 가지는 “내가 죽으면 누가 나를 매장해 줄 것인가?” 하는 문제에 있었다. 이 아기의 사망으로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해 추측이 분분하였다.

그 지방 천주교 교회에서는 그들의 묘지에 그 아기를 묻는 것을 허용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루자리오 루이스’는 직접 이 일을 처리하였다. 그는 지방 당국에 가서 여호와의 증인들 자신들의 장례식을 가질 수 있도록 대지 사용 허가를 받았다. ‘루이스’ 형제는 그 장례식에서 훌륭한 연설을 하였으며, 수백명의 사람들이 그 연설을 듣고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부가하여 말하자면, 1954년 부터 22년 동안 ‘루자리오 루이스’ 형제는 94명을 도와서 헌신한 하나님의 왕국 전도인들이 되게 하였다.

여러 가지 장애를 극복함

「종교는 인류를 위하여 무엇을 하였는가?」라는 책은 불교, 회교 및 ‘힌두’교에 관한 여러 가지 중요한 진리를 내포하고 있어서, 그 책은 ‘아시아’ 사람들에게 대단히 적절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비그리스도교 종교에 관하여 그 책에서 말하고 있는 바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1955년에 인도 정부는 형제들이 개인용으로 이 책을 소유하는 것은 허용하였지만, 대중에게 배부하는 일은 금지시켰다. 그들은 함께 이 책을 연구하며 그들의 야외 봉사에서 배운 점들을 사용할 수 있었다.

선교인 활동은 순수한 사회, 교육, 의료 활동으로 제한시키려는 견해와 더불어 외국 선교인들에 대한 전반적인 제한 조치가 내려져 있었다. 그리스도교 선교인들의 활동을 조사하기 위한 정부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1955년에 「그리스도교국과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세상의 빛”은 어느 쪽인가?」라는 소책자 한부를 이 위원회 의장 앞으로 보냈다. 그는 그 소책자의 수령을 알리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리스도교국이 (여러분의 소책자에서 언급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다르듯이,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와 다릅니다. 내가 보기에는 인간의 정신은 종교 제도(절, 교회 및 회교 사원)를 초월하여 존재하여 왔으며, 지금도 새로운 빛을 추구하고 있읍니다. 따라서 인간은 이 세상에서 자기 나름의 경전의 진리와 자비에 의하여 도야된 마음을 가진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 편지를 쓴 사람은 ‘힌두’교인이었으며, 그의 말은 아마도 일반적으로 교육을 받은 ‘힌두’교인들의 보편적인 사상을 반영하는 것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힌두’교 사원에 결코 들어가지 않는다. 그들은 진리를 추구하는 자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 철학에 의존하고 있다.—골로새 2:8.

선교인들 사이에서의 조정

이제 새로운 선교인 중심지가 ‘구자랏’에 있는 ‘아마다바드’에 생겨났다. ‘봄베이’ 시 밖에서 이것은 ‘구자랏’어를 말하는 밭을 개척하기 시작한 일이었다. ‘아마다바드’는 ‘힌두’교, 회교 및 ‘자이나’교 건축물들이 있는 집회 장소로 유명한 도시이다. 이 도시는 목화 및 비단 생산 도시로 성장해 왔으며, 이 곳에서는 또한 ‘레이스’, 보석 및 목각물도 산출된다. 얼마 후 자칭 그리스도교인들이라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구자라티’어를 사용하는 얼마의 가족들이 그곳에서 진리를 받아들였다.

이제 ‘코터릴’ 형제는 순회 봉사에 임명되었으며, 그는 인도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맹렬히 활동하였다. 그는 ‘트래반코르’, ‘뱅갈로르’ 및 ‘마드래스’에 있는 선교인 집들을 방문하기 위해 여행하였으며, 그 다음 ‘캘커타’로 올라가 ‘다아지일링’과 ‘캘림퐁’까지 갔다. 1955년에 ‘히말라야’ 산 등반 시발점인 ‘다아지일링’에서 ‘코터릴’ 형제는 ‘에드먼드 힐러리’ 경과 함께 ‘에베레스트’ 정상에 최초로 오른 ‘셀파’ 인도자 ‘텐징 노어개이’를 만났다. ‘코터릴’ 형제는 ‘텐징’에게 완전한 상태하에서 영원히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운 산들을 즐기는 일들을 이야기하며 증거하였다. ‘텐징’은 우정적인 태도로 반응을 보이며, 「신세계에 대한 신앙의 기초」라는 소책자를 읽어 보겠다고 약속하였다.

여러 가지 사태들이 발생하여 어떤 선교인 집들은 비어 있게 되었다. 예를 들어 그 당시 ‘칸푸르’에 임명되어 있던 ‘내스린 맬’은 중한 병에 걸리게 되어 대수술을 받지 않으면 안되었는데, 그는 회복되지 못하고 말았다. ‘내스린 맬’이 죽자 그것은 선교인 밭에 타격을 주었다.

조정을 하는 문제

1955년 7월, ‘뉴우요오크’ 시 ‘양키스타디움’에서는 ‘길르앗’ 학교 제25기생들이 졸업하였다. 그 졸업생들 가운데에는, 전에 ‘봄베이 벧엘’에도 있었고 ‘트래반코르’에서 ‘파이오니아’도 한 일이 있던 ‘맴무틸 에이프렘 체리아’가 있었다. 그와 그 학급의 다른 졸업생들이 인도로 임명을 받았다.

1955년 11월 17일, ‘준 리델’과 ‘브렌다 스태포오드’가 ‘봄베이’에 도착하였을 때, 거리에서 폭동이 일어나 총격과 ‘버스’에 불을 지르는 소란한 일이 있었다. 물론 이러한 일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문제를 소홀하게 만들지 않았다. ‘리델’ 자매(지금은 ‘준 토우프’ 자매)는 자기의 초기 인상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오랜 항해 끝에, 배가 마침내 부두에 닿고, 우리는 부두에 내려 섰을 때, 더위는 마치 담요처럼 우리를 휘말았다. 갑자기 우리는 아름다운 한 부인을 보게 되었는데, 그는 내가 처음보는 아주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렇다, 그것이 바로 ‘사리’라는 옷이었다. 그 부인은 마치 인도의 왕비처럼 보였다. 그는 우리에게 손짓을 하며 부르고 있었으며, 그리하여 우리가 그에게 다가가 말을 하자, 그는 자기가 ‘애그네스 캐므라니’ 자매라고 밝혔다. 우리가 그의 차를 타고 가는 동안 그는 우리에게 진리 안에 있는 자기 남편도 전에는 ‘힌두’ 교도였다고 하였다. 그 남편은 영화 배우이며, ‘코메디언’이었으나, 이제 그는 우리가 처음 보는 일들에 대하여 나타내는 표정을 보고 재미있어 하였다 ···

“밤에 ‘재칼’이 우는 소리가 들리므로, 우리는 호랑이들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재빨리 창문들을 닫았다. 그 첫 번째 주간에 ‘캐므라니’의 집에 강도가 들었다. 강도에 폭동 사건까지 겹쳐 처량한 생각이 솟구쳤다.

“그 다음, 또한 가난과 질병과 더위, 더구나 철학적인 ‘힌두’교적 정신 상태는 만일 내가 인도에서의 이 임명을 감수해 나아가려면 여호와의 영에 의존하는 길 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점점 더 깨닫도록 하였다. 그분께서는 자기를 섬기는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관심을 늘 나타내심으로 항상 피난처가 되어 오셨다. 이 나라에서 증거하는 일은 매우 가치 있는 일이었다. 나는 이 일을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이곳에는 다른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착한 사람들이 있으며, 사람들이 여호와를 섬기도록 도와 주는 일에 얼마간 참여하는 일은 부족한 경험을 충분히 메꾸어 주었다.”

‘스태포오드’ 자매와 ‘리델’ 자매는 ‘모스’ 자매와 ‘해드릴’ 자매와 함께 있도록 ‘칸푸르’로 임명되었다. 그들이 1,347‘킬로미터’의 기차 여행을 시작하였을 때, 너무나 신경이 곤두서서 문과 창문을 모두 꽁꽁 걸어 잠갔다. ‘스태포오드’ 자매(지금은 ‘브렌다 노리스’ 자매)는 이 불안에 찬 여행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기차가 ‘잔시’ 역으로 들어가 멈추기 위하여 속력을 늦추자, ‘준’과 나는 역에 있는 행상으로부터 얼마간의 ‘바나나’를 사기로 하였다. 나는 용감하게 기차에서 내려 ‘바나나’를 사고 있는데, 갑자기 기차가 속력을 내며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나는 속히 기차를 따라 달렸다. 그러나 내가 빨리 뛸수록 기차는 더 빨리 움직이는 것 같았다. ‘준’은 기차 창문에서 나에게 어서 달리라고 독려하면서 미친 듯이 손을 흔들어 댔다. 그런데 그 기차가 예기치 않게 출발을 했던 것처럼 예기치 않게 멈추어 섰다. 그 기차는 다른 선로로 노선을 바꾸고 있었다. 나는 결국 전혀 낯선 땅에 버려지게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게 되자 안도감이 나를 감쌌다! 그러나 발길을 돌려 되돌아 오자 내가 역을 뛰어갈 때 놀라서 나를 바라보던 모든 사람들을 지나가야 하였으므로 몹시 부끄러웠다!”

‘맹갈로르’로 파견

협회는 새로운 선교인들인 ‘크리스찬슨’과 ‘노리스’를 ‘맹갈로르’에 있는 협회 본부와 더불어 ‘카나레스’어 밭에서 왕국 사업을 시작하도록 마련하였다. 그들 역시 적응하는 데 얼마의 문제거리들을 부닥치게 되었다. 최근에 영국계 ‘네팔’ 자매인 ‘조이스 웨버’와 결혼을 한 ‘헨드리 카마이클’ 형제는 새로 온 두 명의 선교인들을 ‘맹갈로르’로 데리고 가서 적당한 집을 찾아 그들을 자리잡게 해 주라는 임명을 받았다. ‘카마이클’ 형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우리가 무시무시한 상피병을 앓고 있는 상당히 많은 ‘맹갈로르’인들을 만나게 되었을 때 그들의 놀라고 근심에 찬 표정을 나는 결코 잊을 수 없다.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 네명 중 한명은 그 병에 걸려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그들에게 모기장에서 자면 이런 병에 걸리지 않을 수 있다고 알려 주자, 그들은 안심을 하게 되었다.”

‘맹갈로르’에서 집을 구하고, 가구를 갖추느라 두 주일을 보냈다. 그동안 세명의 형제들은 ‘호텔’에 유숙하였다. 후에 ‘노리스’ 형제는 다음과 같이 시인하였다. ‘그 두주일 동안 우리는 어리벙벙해 가지고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그동안 우리는 낯선 환경과 이상한 광경들에 익숙해지려고 하였다. 상피병은 내가 처음으로 본 끔찍한 것이었다. 우리는 두주일 동안 매일 아침 이러한 것을 목격하게 되었는데, 왜냐 하면 상피병을 앓고 있는 한 ‘힌두’교 승려 거지가 우리가 묵고 있는 ‘호텔’로 매일 돈을 구걸하기 위해 왔기 때문이었다.

‘‘맹갈로르’에서 우리가 처음 식사를 할 때, ‘웨이터’는 자기가 ‘승려’ 계급’에 속하였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어깨에는 약간의 줄을 두르고 더러운 허리 옷을 입고 있었다. 그는 조잡한 나무 ‘테이블’ 위에 커다란 ‘바나나’ 잎사귀 세개를 펴 놓고 그 위로 물을 뿌렸다. 이것을 보고 우리는 그 잎사귀들을 닦는 줄로 짐작하였다. 다음에 그는 상당히 많은 양의 밥을 가지고 와서 ‘바나나’ “접시” 가운데 그것을 퍼 놓았다. 그 다음 여러 가지 그릇에서 ‘카레’로 요리한 여러 가지 야채 덩어리들을 떠서 부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과 저것이 어떻게 다른지 몰랐다. 어느 것이나 다 몹시 매웠다! 수저가 아무 것도 없었으므로 우리는 손가락으로 퍼먹었다. 그러나 곧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지고 코에서는 콧물이 쏟아지며 혀는 타는 듯해서, ‘크리스찬슨’ 형제와 나는 서로 바라보며 우리가 도대체 뭘 먹고 있는가 하였다.’

적응해야 할 문제들은 많이 있었지만, 선교인들은 꾸준히 인내하였다. ‘노리스’ 형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는 우리의 임지에 자리를 잡고, 약 30명 가량의 ‘카나레스’어를 말하는 전도인들로 이루어진 회중과 두명의 특별 ‘파이오니아’ 즉 ‘하샤 카아카다’ 2세와 ‘라파엘 루이스’와 함께 일을 하였다. ‘하샤 카아카다’ 2세는 우리에게 ‘카나레스’어를 가르쳤다. 곧 나는 영어를 전혀 모르는 ‘소안’ 여사와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다. 매주 금요일 우리는 함께 앉아 ‘카나레스’어판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책을 서서히 진행해 나아갔다. 이것은 그 언어를 배우는 데 내게 크게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내가 다른 임지로 옮겨 가게 되었을 때, ‘소안’ 여사는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카나레스’ 형제들에 대하여 진정한 사랑을 배양하였다.”

‘타밀’어 밭에서의 발전

협회가 ‘타밀’어 「파수대」를 월간으로 인쇄하기 시작한 1956년에 인도와 전세계에 있는 ‘타밀’어를 말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왕국 사업이 장족의 발전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이제 인도의 토착어판 「파수대」로서 네번째의 것이었다. 다른 토착어판으로서는 1927년부터 인쇄되는 ‘말레야람’어 「파수대」, 1953년부터 나오는 ‘우르두’어 「파수대」, 1954년부터 나오는 ‘카나레스’어 「파수대」가 있었다.

유능하고 신뢰할 만한 번역자를 확보하는 것이 항상 큰 문제로 남아있었다. ‘타밀’어판을 위하여는 부양해야 할 두명의 어린 자녀를 데리고 있는 한 과부 자매가 ‘마드래스’에 있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하여, ‘릴리 아아더’는 학교 선생으로 있었다. 협회는 그 자매를 특별 ‘파이오니아’로 임명하였다. 그 때부터 ‘아아더’ 자매는 번역일과 ‘마드래스’에서의 실제적인 ‘파이오니아’ 봉사를 위해 전 시간을 바칠 수 있었다. ‘릴리 아아더’ 자매는 여호와 숭배에서 꾸준히 인내하였으며,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훌륭하고 신뢰할 만한 봉사자로 발전하였다. 그의 딸 ‘라트나’는 ‘여호와의 정신적 단속’을 받으며 성장하여, 특별 ‘파이오니아’가 되었고, 특별 ‘파이오니아’인 ‘리처어드 가브리엘’과 결혼하였다. 그들 셋은 그 때부터 협회의 ‘타밀’어 출판 사업과 ‘마드래스’에서의 ‘파이오니아’ 봉사에 함께 일하였다.—에베소 6:4, 신세.

‘릴리 아아더’ 자매는 1956년경부터 여러 해 동안 ‘타밀’어를 말하는 형제들의 발전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알려 준다. “우리가 처음 전파 사업을 시작하였을 때, 우리에게는 우리의 토착어로 된 책이 아무 것도 없었다. 우리는 ‘타밀’어로 왕국 소식을 전파하기가 매우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타밀’어로 증거를 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교국에서 사용하는 어휘 밖에는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타밀’어 밖에 모르는 집은 그냥 지나쳐 버렸다. 나 자신은 교직자의 딸이었으므로 더욱 그러하였다. 우리는 우리의 옛 어휘들을 모두 내버리고 ‘타밀’인들에게 진리의 순결한 말씀을 설명할 수 있을 때까지 새로운 신권적인 어휘들을 배웠다. ‘타밀’어 「파수대」는 우리 모든 ‘타밀’ 형제들이 그렇게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여러 해 동안 나는 형제들이 점차적으로 「파수대」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낱말들을 익히고 자유롭게 효과적인 증거를 하기 시작하는 것을 보게 되는 특권을 누려 왔다. 그 결과 우리는 여호와의 축복의 증거로서 ‘타밀’ 형제들의 수가 증가되는 것을 보아 왔다.”

변화의 시기

신생 인도 공화국은 인도 국경내에서의 조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방대한 국가 재조직 계획이 1956년에 착수되었다. 이전 구획들 중 많은 부분들이 재조정되어 어떤 작은 구획들은 병합하여 확장되었고, 다른 큰 구획들은 축소되어, 어떤 곳의 이름들은 바뀌어지게 되었다. 여러 주들을 재조직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언어였다. 예를 들어 ‘트래반코르’ 주와 ‘코친’ 주에서는 모두 ‘말레야람’어를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이 두 주들과 ‘말레야람’어를 말하는 ‘마드래스’ 주의 구역을 합해서 새로운 주 이름인 ‘케랄라’라는 명칭하에 병합되었다. ‘카나레스’어를 말하는 ‘마드래스’ 주의 어떤 구역은 그 주로부터 분리되어 ‘카나레스’어가 주어인 ‘마이소르’ 주와 합병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어떤 구획 특히 이러한 변화들을 주로 느끼고 있던 변경 지방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 원망을 샀다. 이러한 원망은 급기야 폭동과 총격으로 발전되었고, 그 당시 ‘봄베이’에서 일어난 폭동들의 원인이 되었다. ‘봄베이’ 시는 ‘마하라시트라’ 주에 귀속되었는데, 이것은 ‘구자라티’어를 말하는 사람들의 큰 원성을 샀다. 그들은 분노하여 ‘봄베이’ 거리에서 폭력적인 폭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결국 상태들은 안정을 되찾게 되고 사람들은 새로운 주 구성에 점차 적응하게 되었다.

새로 생긴 ‘케랄라’ 주에서, ‘로마 카톨릭’ 사회는 우리의 전도인들에게 생산적인 밭이었다. ‘K. T. 바아기스’ 형제는 ‘트리밴드럼’에 살고 있는 ‘조셉’이라는 젊은이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자기 가족들로부터 반대를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진리를 위하여 굳건한 입장을 유지하였다. 그의 부모는 그를 ‘로마 가톨릭’ 사제 교육을 받도록 ‘포르투갈’령 ‘고아’에 있는 ‘가톨릭’ 학교에 보내고 싶어하였다.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조셉’은 ‘트리밴드럼’으로 돌아왔으며, 거기서 그는 ‘K. T. 바아기스’ 형제가 일하고 있던 회사에 직장을 갖게 되었다. ‘바아기스’ 형제는 이 21세된 청년에게 성서에 관하여 재치있게 이야기하였고, 그가 ‘로마 가톨릭’만이 유일한 진리를 가르친다 믿고 있었기 때문에 갖게 된 많은 이의들에 대하여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자기의 질문들이 성서적으로 해답되자, 그는 가정 성서 연구를 하기로 동의하였다. 곧 그는 자기가 진정으로 진리를 배우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으며, ‘가톨릭’ 교리상의 여러 가지 오류들을 알 수 있었다. ‘조셉’은 이전에 ‘트리밴드럼’에 있는 “성 ‘마리아’회”의 일원이었었는데, 이 조직은 여호와께 대한 그의 성실성을 꺾으려고 하였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는 곧 침례를 받았다.

격려적인 방문

1956년에 인도는 ‘브루클린 벧엘’로부터 온 대표자인 ‘F. W. 프랜즈’의 방문을 즐겼다. 그는 세계 일주 봉사 여행을 하였는데 그 여정에는 인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파키스탄’에 있는 검역소에서 초조하게 8시간을 기다린 후에, ‘프랜즈’ 형제는 드디어 지체없이 다음 9일 내로 그의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12월 24일 월요일 오전 중 ‘프랜즈’ 형제가 ‘뉴우델리’에 있는 ‘스테픈 스미스’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크게 놀랐다. ‘델리’에 있는 선교인들과 지방 형제들은 그 날 저녁 6:40에 ‘팔람’ 공항에서 그를 맞을 채비를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미 그 도시에 와 있었는데, 형제들 대부분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리하여 순서가 뒤바뀌어 ‘프랜즈’ 형제가 ‘팔람’ 공항에 나가 있는 우리의 인도 형제들을 만나러 그곳으로 갔다. ‘프랜즈’ 형제가 한 관심자의 차를 타고 와서 환영하는 무리들을 만났을 때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인도인들의 관례대로, 한 어린 자매가 이 큰 아대륙에 온 것을 환영하는 전통적인 환영의 뜻으로 장미와 국화로 만든 향기로운 화환을 그의 목에 걸어주었다.

다음날은 “크리스마스”였다. 인도에서, ‘힌두’교인들은 그리스도교 종파들을 따라서 12월 25일을 특별하게 만들어 서로 ‘카아드’를 교환하며 소위 ‘크리스마스’ 정신을 나타낸다. ‘델리’에 있는 형제들은 공휴일을 이용하여 잡지 활동을 하였다. 모두 합하여 28명의 형제 자매들이 그날 아침 야외 봉사에 참여하였으며, ‘프랜즈’ 형제와 ‘스미스’ 형제는 함께 봉사하는 동안 차례로 증거를 하였다.

그 다음 형제들은 ‘공익 법인 대회장’에 모였다. 오후 4:40, 훌륭한 저녁 식사를 마친 후 85명의 청중은 “우리 시대의 신세계 평화—그 이유는?”이라는 제목의 ‘프랜즈’ 형제 연설을 들었다. 청중들 가운데는 ‘힌두’ 교도, ‘시이크’ 교도, 회교도 및 자칭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연설 후에 연사는 청중들과 자유롭게 어울려서 청중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자세한 점들을 즐겁게 토론하였다.

그것은 1일간의 대회였다. 그리하여 다음날 ‘프랜즈’ 형제는 ‘델리’의 명소들 얼마를 관광하였다. ‘벌라 맨더’라고 하는 현대 사원에 전시된 것들은 ‘브라마’, ‘비시누’, ‘시바’ 및 여신 ‘듀가’ 등 ‘힌두’ 신들이었다. ‘산스크리트’에 있는 현관 오른쪽에는 ‘힌두’어와 영어로 다음과 같은 글이 써 있었다. “‘비시누’라고 알려진 그는 실제로는 ‘루드라’이며, ‘루드라’는 ‘브라마’로서, 본체는 하나이나 세 신 즉 ‘루드라’, ‘비사누’ 및 ‘브라마’로서 활동한다.” 그리스도교국의 삼위일체 교리와 너무나 놀랍게 닮았다!

‘프랜즈’ 형제는 다음에 ‘캘커타’로 갔으며, 거기서 이틀간의 대회가 계획되었다. 그 대회를 광고하기 위하여 200매의 ‘포스터’와 5,000매의 광고지를 사용하였다. 이틀간의 대회 프로그램 가운데에는 하루 아침 야외 봉사를 할 기회와 ‘벵골’어 회기가 있게 되었다. ‘프랜즈’ 형제는 그 때 통역을 통하여 69명의 ‘벵골’어를 말하는 형제들에게 연설을 하였다. 그는 여호와의 조직과 그 조직의 신권적인 전파 방법을 헐뜯는 자들의 말을 듣지 말아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왕국 선포에서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라고 호소하였다.

대회 둘째날, 10명의 지원자들이 침례로서 자신들을 바쳤는데 그들 가운데에는 ‘벵골’인이 셋, ‘힌두’인이 셋, ‘비하리’인이 한명, 그리고 영국계 인도인이 세명 있었다. 그날 저녁 ‘캘커타’에서는 처음으로 가장 많은 청중이 미술관을 가득 채웠으며, 261명이 “우리 시대의 신세계 평화—그 이유는?”이라는 강연을 매우 주의깊게 들었을 때, 대회 참석자들은 매우 기뻐하였다. 마지막 회기에 135명이 계속 남아 ‘프랜즈’ 형제의 연설을 들었으며, 그 때 그는 정결함과 순종과 충실함을 가지고 조직 내에 머물러 있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다음날 아침, 49명의 형제들은 ‘버어마’ ‘랭구운’으로 떠나는 ‘프랜즈’ 형제를 배웅하기 위하여 ‘덤 덤’ 비행장으로 나갔다.

우리를 세워 준 또 다른 방문

‘F. W. 프랜즈’ 형제가 ‘델리’와 ‘캘커타’를 방문하는 동안’ ‘N. H. 노워’ 형제는 ‘봄베이’를 방문하고 있었다. 그 도시에서 가장 훌륭한 강당인 ‘코워지 제행거 경 홀’은 이미 ‘철도 승객 연합회’가 회합을 위하여 계약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연합회 총무는 그들 회합 일자를 변경하기로 동의하여 ‘노워’ 형제가 ‘봄베이’에 체류하는 동안 우리가 그 ‘홀’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연합회 회원들에게 세째날 회합이 취소되었다는 것을 통지하기 위한 우편료만 우리가 부담하였다.

그 대회가 있기 전 수주 동안 특별한 광고 활동을 하였으며, 그 당시 우리가 인도에서 개최했던 대회로서는 최대의 청중 즉 1,080명이 그 강당을 빽빽히 채움으로써 형제들은 매우 큰 보상을 느끼게 되었다. 강연 주제는 “우리 시대의 신세계 평화—그 이유는?”이었다.

‘노워’ 형제는 1956년 인도를 방문한 일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스키너’ 형제나 나는 우리의 사업을 돌보기 위한 왕국회관, 지부 사무실 및 조그마한 인쇄소를 건축할 수 있는 적합한 장소를 찾아내기 위하여 ‘봄베이’ 여기 저기를 여행해야 하였다 ··· 곧 우리는 좋은 장소를 갖게 되어 우리 자신의 숙소를 건축할 준비를 하고 ‘러브레인’에 있는 현재의 장소에서 옮겨 가게 될 것이었다 ··· 대회 결론에서 이러한 사실이 발표되자, 형제들은 뭔가 새로운 것이 인도를 위하여 건설된다는 것을 알고 열광적으로 기뻐하였다. 왜냐 하면 이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사는 이 큰 나라에 확장하는 활동을 위한 또 하나의 증거였기 때문이다. ···

“인도 형제들은 인도에서는 처음으로 그들 자신의 식당을 운영할 수 있게 되어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잘 수행하였다. 지부에 있는 형제들은 일찍 일어나 대회장으로 가서 많은 사람들이 식사하도록 일을 시작하였다.”

영적 공급품의 증가

1957년 ‘벵골’어 「파수대」 첫 호가 인쇄되어 나왔다. 그 때부터 ‘캘커타’와 같은 도시들 그리고 ‘칸차파라’ 변두리에 있는 도시들과 지역들에 있는 ‘벵골’ 지역에 사는 형제들은 그들의 영적 양식과 제자를 삼는 일을 위하여 정기적으로 공급품들을 받았다.

1957년에 협회는 ‘타밀’어 「파수대」를 매호 2,100부씩 생산하여 ‘세일론’, ‘버어마’, ‘싱가포르’, ‘피지’, ‘모리시어스’, 남‘아프리카’ 및 ‘수리남’ 등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우편으로 발송하였다. 그러나 ‘타밀’어판 「파수대」를 등사를 하는 대신 활자로 인쇄하는 마련이 이루어졌다.

인도의 ‘파이오니아’들이 그들의 봉사에 고착하다

이제 인도의 ‘파이오니아’들이 수행하고 있던 봉사를 고려해 보자. 한 격지 ‘파이오니아’가 성서 연구를 위하여 ‘힌두’인 남자를 만났을 때 희귀한 일이 있었다. 관심자인 그 ‘힌두’인에게는 인도 방방곡곡을 거의 다 순례한 ‘힌두’ 수도승인 동생이 있었다. 그가 잠시 그의 형과 함께 살기 위해 왔을 때, 자기 형이 성경 연구를 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 역시 성서를 읽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자기 형과 ‘파이오니아’ 형제를 상대로 많은 것을 토론하였다. 그 ‘파이오니아’는 다음과 같이 편지하였다. “놀랍게도, 여러 해 동안 향유나 ‘크리임’을 발라 본 일이 없는 그 길고 더러운 틀어올린 머리와 수염이 사라져 버렸읍니다. 그는 ··· 자기 형과 함께 「파수대」 연구에 참석하였읍니다.”

성의 대회

인도에서는 21명의 대표자들이 1958년 ‘뉴우요오크’ 시에서 열린 여호와의 증인의 성의 국제 대회에 참석하였다. 거기에는 인도에서 온 네명의 ‘길르앗’ 졸업생 즉 ‘노엘 힐스’, 제럴드 시든’, ‘얼라이스 아이티’ 및 ‘사라 매튜’가 있었다.

인도 자체의 성의 대회는 1958년 10월 27-30일에 ‘봄베이’에서 열렸다. 이곳 증인들은 인도 전역에서 오는 형제들을 위한 숙소를 찾기에 분주하였다. 여호와의 축복으로 이전에 인도의 회교 군주가 쓰던 비어 있는 궁전을 얻게 되었다. 그곳에서 65명의 형제들은 자신들의 침구를 사용하며 대리석 바닥 위에서 잠을 잤다. 회교 자선 단체에서는 최근에 지은 4층짜리 ‘호스텔’ 중 두개의 층 전체를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거기에는 50명의 형제들이 들기에 충분한 공간이 있었다.

대회 회기는 일곱 가지 언어로 있었다. “하나님의 왕국은 통치한다—세상 끝은 가까왔는가?”라는 공개 강연에는 총 1,009명이 강당을 메워 우리는 크게 기뻐하였다. 또한 이 대회에서 45명의 새로운 형제 자매들이 물 침례를 받음으로써 여호와께 자신들의 헌신을 표상하였다.

일천명 이상의 전도인들!

이 때까지 인도에서는 40명의 ‘길르앗’ 졸업생이 여러 임명지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곳에 있는 그들의 형제들과 연합하여 부지런히 일해 왔으며, 1958년은 모두에게 커다란 즐거움을 가져왔다. 전도인 수가 인도 역사상 최초로 1,000명을 돌파하였다! 1958년 우리의 월 평균 전도인 수는 실제로 1,091명이었다. 처음으로 천명의 왕국 전도인 수에 도달하는 데 53년이 걸렸다.

이제는 일천명 이상의 전도인들이 인도 전역에 퍼져 있으며, 또한 1958년 기념식 참석수에 나타난 바와 같이 관심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천명이나 있었다. 그리하여 이 나라에서 지역 및 순회 사업을 강화시키는 것이 절실하였다. 이것은 또한 조직을 전체적으로 강화시켜야 할 것이었다.

이 때쯤, ‘포우프’ 자매는 제7일 안식일파 학교 선생으로 있는 의사 부인인 ‘K. 피터스’ 여사와 성서를 연구하고 있었다. 일단 진리를 확신하게 되자, 그의 교회의 유명한 ‘유럽’인 목사들 중 하나가 방문해 왔어도 그를 돌아서게 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충돌이 있은 후, 그 교직자는 ‘포우프’ 자매에게 “당신은 가장 훌륭한 인도인 일꾼들 중 한 사람을 빼앗아 갔다”고 말하였다. 정말로 ‘피터스’ 자매는 극히 열성적인 증인이 되었다. 그가 일찌기 받은 교육의 얼마는 협회 출판물을 ‘힌두’어로 번역하는 데 훌륭하게 이용되었다.

인도에 발전이 있게 되자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소식에 호응하였으며, 대부분의 경우, 이 사물의 제도의 구습을 깨끗이 벗어 버리는 데에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떤 사람들은 필요한 변화를 할 수 없었으며,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옛 행로로 되돌아가 버렸다. 1952년 제명 처분의 타당성이 밝혀진 이래, 인도 증인들 가운데서는 제명 건수가 그렇게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나 1959년 한해 동안에 열 네명이 제명 처분을 받음으로 여호와의 조직을 깨끗하고 순결하게 보존해야 할 필요성이 지부 사무실의 주의를 크게 이끌게 되었다. 그 때까지 81명이 제명 처분을 당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조직을 더욱 강하게 만들기 위한 길을 닦아 주었다.

개선이 필요한 상황

지역 및 순회 봉사를 수행하는 데 일정한 방침이 없었다. 예를 들어, 순회 대회는 편리할 때만 열렸다. 회중들은 순회 감독자들에 의하여 정기적으로 방문되지 않았다. 방문은 이 삼일간이었고, 순회 감독자가 긴 연설을 하는 특별 집회가 주가 되었다. 그러나 순회 감독자의 방문을 야외 봉사 활동으로 증가시키기 위한 기회라고는 보지 않았다.

그 당시 상태에 관하여 여행하는 임명을 받고 있었던 ‘해딘 샌더슨’ 형제는 보고하기를 ‘케랄라’에 있는 한 회중에는 백명이 넘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그들 대부분은 침례를 받았고 정기적으로 집회를 참석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전도인으로 보고하는 사람은 16명뿐이었다. “당신은 ‘러셀파’입니까?” 하고 질문을 받으면, 대부분은 “예”라고 대답하곤 하였다. 형제들은 하늘의 해 위치에 따라 집회에 참석하였다. 정한 시간에 집회를 시작하는 일이 없었다. 어떤 회중에서는 집회를 시작하기 전 5분 동안 종을 울리곤 하였다. 그러고도 형제들이 모두 도착할 때까지 집회를 시작하지 않곤 하였다. 그 지방 종교적 습관에 따라 형제들은 이쪽에 앉고 아내들과 딸들은 저쪽에 앉았다. 그러므로 가족들은 집회에서 함께 앉지 않았다.

‘샌더슨’ 형제는 또 보고하기를 순회 대회는 매우 즐겼지만 ‘프로그램’에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형제들은 회기 후에 연단에 함께 모여, 대중 영화 음악에 성서 가사를 붙여 노래 부르는 습관이 있었다. 공개 강연 사회자는 항상 긴 서론을 하였다. 어떤 형제는 연사를 소개하기 전에 20분 동안이나 연설을 하였다.

‘샌더슨’ 형제가 지역 봉사차 여행하는 동안 성서 원칙을 가르치는 것 뿐 아니라 조직상의 자세한 점들도 강조하였다. 순회 감독자들이 훈련을 받은 다음 다른 감독자들이 도움을 받았다. 자진성은 있었는데, 방법을 몰랐다. 정기적인 회중 방문이 계획되었고, 아울러서 체계적인 순회구 방문도 계획되었다. 이제 처음으로 각 순회구가 6개월에 한번씩 대회를 갖게끔 순회구들이 계획되었다.

1959년 12월부터 인도에는 8개의 순회구가 있게 되었다. ‘샌더슨’ 부부의 여행은 아주 힘들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마드래스’ 선교인 집에 우리들 짐을 두고 있었으나 숙소는 없었다. 우리는 그 도시를 지날 때 다음 6개월 동안 필요로 하는 것들을 챙겨 가곤 하였다. 일요일에 우리는 ‘뱅갈로르’에서 열린 대회에서 봉사를 하고, 다음 주 화요일에는 2,679‘킬로미터’나 멀리 떨어져 있는 ‘다아지일링’으로 가도록 계획되었다. 그리로 가는 여행에는 기차를 다섯번 갈아 타야 하였다.” 그 당시 하나의 지역 범위는 ‘트리밴드럼’으로부터 ‘봄베이’와 ‘아마다바드’를 지나 ‘델리’, ‘다아지일링’ 및 ‘캘커타’로 가서, 다시 ‘마드래스’로 내려갔다가 ‘뱅갈로르’를 다시 지나 ‘트리밴드럼’으로 되돌아가는 장장 6,437‘킬로미터’나 되는 거리였다.

새로운 지부 건물

한동안, ‘봄베이’에서는 의미심장한 발전이 있었다. 인도 내의 증인수의 증가로 인하여 야외에서 일하는 형제들을 돕기 위해 개선된 시설들을 수용할 새로운 지부 건물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59년 11월 ‘봄베이’ 중심지로부터 북쪽으로 20.9‘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산타크루즈웨스트’의 명랑한 주거 지역에 건물을 세우기로 계획이 되었다. 그 부지 자체는 38 × 27‘미터’ 넓이였다. 계약자들은 1959년 11월 2일부터 건축 공사를 분주히 수행하였다. ‘시멘트’를 구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공급품들은 통제되고 배급을 주었다. 협회는 필요한 전량의 ‘시멘트’를 확보할 수 있었지만, 여러 가지 수속 절차를 밟아 느린 과정을 거쳐 겨우 성공하였다.

다음 12개월 걸려 그 건물이 완성되었다. 그 건물은 ‘콘크리이트’ 골조에 벽돌로 쌓은 이층 건물이었다. 앞쪽 전면에는 돌을 붙여 그 건물의 아름다움과 중후감을 더하게 하였다. 한쪽 끝에는 회색 대리석 판을 붙인 현관이 있고, 계단 양쪽에는 화단을 만들었다. 입구 ‘로비’에는 접수실이 만들어졌는데, 낙원이 된 땅을 그린 그림이 깊게 새겨진 유리판을 끼워 그 방은 아름다왔다. 일층에는 식당, 부엌, 일반적인 창고 시설, 지부 사무실 등이 있었다. 이 건물에는 또한 6개의 침실과 1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채광이 잘되는 넓은 왕국회관이 있었다. ‘테라스’ 지붕 위에는 노천 집회를 할 만한 적합한 장소가 있었다. 전체 건물은 낙원같이 아름다운 정원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우리는 건축이 시작된지 만 12개월만인 1960년 11월에 그 건물로 이사하였다. 이 새 지부 건물은 다음 달인 12월, 지구 감독자인 ‘G. D. 킹’ 형제가 인도를 방문하였을 때 여호와께 봉헌되었다. 연사 중 하나였던 ‘스키너’ 형제는 인도에서 왕국 사업이 시작된 초기부터 그 당시까지의 성장에 관하여 설명하면서 이러한 성장을 스가랴 8:23의 예언과 관련시켰다. 봉헌식 연설에서 ‘킹’ 형제는 이렇게 훌륭한 새 건물을 주신 분이신 여호와께 감사를 표하고, 이 건물은 그분의 뜻을 수행하기 위하여 전적으로 바쳐진다고 하였다.

여러 언어 집단들에게 이르다

한 ‘파이오니아’는 형제들이 종종 언어 문제들을 어떻게 극복했어야 하는가에 관하여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도에는 여러 가지 언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때로는 실제 문제가 어떤 것인지 명확한 개념을 전달하기가 어렵다. 이 ‘파이오니아’는 보통 사용하지 않는 언어를 쓰는 한 마을에서 ‘타밀’어를 말하는 ‘가톨릭’ 신자들 가운데서 상당한 관심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파이오니아’의 원래의 말은 ‘카나레스’어였으나 그는 영어도 알고 있었다. 이들 ‘타밀’인들과 성서 연구를 사회하는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그 ‘파이오니아’는 한달에 두번씩 ‘타밀’어와 ‘영어’를 다 알고 있는 지방 사람 하나와 함께 갔으며 그들은 영어책을 보조서로 사용하여 가정 성서 연구를 사회할 때 협조하였다. 한 자매는 다음과 같이 편지하였다. “지난 화요일 우리 연구에 와 보셨더라면! 우리 열 두명이 참석하였었는데, ‘카나레스’어, ‘마라티’어 그리고 영어를 말하는 사람들이었읍니다. 한 형제는 토론된 것을 ‘카나레스’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다른 형제는 같은 내용을 ‘말레이’ 사람들에게 그리고 나는 ‘마하라시트리아’인들에게 ‘힌두’어로 설명하였읍니다. 정말로 행복한 집단이었읍니다!”

형제들이 제자를 삼는 기술을 발전시킴에 따라서 서적 공급이 더 필요하게 되었으며, 특히 인도 토착어들로 된 책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60년에 협회는 ‘말레야람’어 「깨어라!」를 발행하기 시작하였으며, 그것은 인도어 「깨어라!」를 위하여 하나의 효시적인 발전이었다. 1961년에 ‘마드래스’에서 ‘타밀’어 「깨어라!」가 발행되었다. 그 당시 협회는 6개의 토착어—‘말레야람’어, ‘카나레스’어, ‘타밀’어, ‘우르두어’ 및 ‘벵골’어—로 「파수대」를 공급하고 있었다. 1959-1961년 사이 즉 3년 사이에 공급된 다른 인도 토착어 출판물들(대책과 소책)이 9개 언어로 배포되었다. 이들 방언들은 ‘벵골’어, ‘구자라티’어, ‘힌두’어, ‘카나레스’어, ‘마라티’어, ‘텔루구’어, ‘타밀’어, ‘말레야람’어 및 ‘우르두’어였다. 그리하여 협회는 왕국 소식을 가지고 인도인들에게 솔선해서 찾아가도록 격려하기 위해 진정한 노력을 기울였다.

약 55년 동안 ‘A. J. 조셉’ 형제는 ‘말레야람’어 협회 수석 번역자로 일해 왔었다. 그러나 그는 최근 수년 동안 노령으로 쇠약해져 왔다. ‘조셉’ 형제의 건강은 점차적으로 나빠져 번역 활동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1961년에 77세 때에 이 책임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도움이 된 천국 전도 학교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실시한 1961년 인구 조사에 의하면 인도의 인구는 439,000,000이 넘었으며, 그 수의 24‘퍼센트’가 문맹으로 나타났다. 그 당시 우리는 인구 대 증인 비율이 303,129대 1이었다. 더구나 인도인의 97‘퍼센트’는 임명되지 않은 지역에 살고 있었다. 이것은 인도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전 인구의 3‘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하는 4,392,347명 가운데서 전파하고 있었음을 의미하였다! 확실히 ‘일꾼이 적었다.’—누가 10:2.

실로, 형제들로 하여금 그들이 좀더 노력을 기울이고, 전파 사업의 질을 향상시키도록 형제들이 자격을 갖추게 힘써 훈련시키는 일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협회는 1961년 12월에 인도에 천국 전도 학교를 시작하였다. 영어를 말하는 25명의 학생들로 된 첫 학급은 순회 감독자, 특별 파이오니아, 선교인 및 회중 감독자들로 이루어졌다. ‘봄베이 벧엘’에서 생활하며 일하면서 학생들은 지부 조직에서 하는 일들을 보았다. 그들은 그러한 경험을 감사히 생각하였다.

천국 전도 학교 제2기 졸업생들은 특히 깊은 인상을 받았는데, 학생들 중 얼마는 그들의 고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곳으로 가도록 새로운 임명을 받았다. 이제 새로운 구역들이 개척되기 시작하였다. ‘M. A. 체리아’ 형제, ‘M. C. 조셉’ 형제 및 ‘P. J. 매튜’ 형제는 ‘봄베이’로부터 4,023‘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아샘’ 지방의 ‘실롱’으로 특별 ‘파이오니아’로 보내졌다.

이들 세 형제들은 ‘실롱’에서의 처음 두달 동안 200건 이상의 예약을 맡았다. 물론 얼마 되지 않아서 종교 지도자들은 경계하게 되었다. 한번은, 어느 지방 신학교에서 온 ‘로마 가톨릭’ 사제가 자기 학생들을 데리고 ‘체리아’ 형제, ‘조셉’ 형제 및 ‘매튜’ 형제와 회견을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회견이 마련되었다. 그 사제를 곤경에 빠지게 한 첫 번째 문제는 삼위일체 교리였다. 누가 보더라도 분명히 형제들이 그 토론에서 이겼다. 왜냐 하면, 이틀 후에, 한 학생이 ‘P. J. 매튜’ 형제에게 와서 “당신이 우리 ‘신부님’을 당황하시게 만들었는데, 그분은 우리 교수님이란 말이요” 하며 그 형제를 치려고 위협하였다. 그 당시 교회 강대상에서는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한 무수한 경고가 발하여졌다. 그러나 그러한 사태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많은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다.

1963년 초에, 그리고 12개월 이상, 인도에서 있었던 제2차 천국 전도 학교로부터 68명의 학생들이 유익을 얻었다. 그들은 공평하게 세 언어 집단으로 즉 ‘카나레스’어, 영어 및 ‘말레야람’어 집단으로 나뉘어졌다. ‘R. J. 매실라매니’ 형제는 다섯 가지 인도 언어를 말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 세 학급을 가르칠 수 있었다. ‘말레야람’ 학급은 ‘케랄라’ 주에 모였으며, 다른 두 학급은 ‘봄베이 벧엘’에 모였다.

지구 감독자가 발전을 촉진시키다

지구 감독자의 연례 방문은 인도의 밭과 지부를 ‘뉴우요오크’에 있는 ‘왙취 타워 협회’ 세계 본부와 더욱 긴밀한 연합을 맺게 하였다. 지구 감독자로서 ‘M. G. 헨첼’ 형제는 산악의 나라인 ‘아프가니스탄’을 경유하여 (중동 여러 나라를 돌고) 인도로 오게 되었다. 1962년 2월 3일, ‘헨첼’ 형제는 이곳 지부를 방문하기 위하여 ‘봄베이’에 있는 ‘산타크루즈’ 공항에 기착하였다.

‘헨첼’ 형제의 방문 시기에 맞추어 마련된 지역 대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인도 전역으로부터 형제들이 ‘봄베이’로 왔다. 남쪽 ‘케랄라’ 여러 지방에서 온 사람들은 생전 처음 현대 도시를 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북쪽에서 왔다. 한 가족은 ‘히말라야’에 있는 ‘네팔’로부터 줄곳 여행하였다. 그들의 나흘간의 여행은 눈쌓인 곳으로부터 시작하여 열대의 더운 지방에서 끝났다.

대회의 한 회기에서, ‘헨첼’ 형제는 770명의 대회 참석자들에게, 마귀는 하나님의 백성을 성경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하려고 애를 쓰기 때문에 성서 지식을 취해야 할 중요성에 관한 연설을 하였다. 그는 또한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룰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빌립보 2:12) 또 한번은 ‘헨첼’ 형제가 전세계에 있는 우리 형제들의 사업을 알려 주는 아름다운 천연색 환등 사진을 보여 주었다. 여호와께서 어떻게 전세계에 자신의 이름이 알려지게 하시는가를 듣는 것은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이것은 의심할 바 없이 대회에 모인 모든 형제들로 하여금 여호와의 지적 조직에 충성스럽게 고착하고자 하는 결심을 강화시켜 주었을 것이다.

대회 참석자들은 영어를 포함하여 9가지 언어를 사용하였다. 강당은 여러 개의 언어 구획으로 나뉘어졌으며, 영어 연설은 이들 각 구획으로 확성기를 통하여 전달되었다. 각 통역자들은 그것을 듣고 각각의 언어로 통역을 할 수 있었다. 이 대회는 인도 여호와의 증인의 연합된 조직 발전에 참으로 또 한 단계를 진척시켰다.

‘헨첼’ 형제의 지구 방문 결과로 얼마간의 유익한 조정이 이루어졌다. 지부에서의 조직적인 책임을 훈련받은 인도 형제들을 갖게 된 것은 선교인들이 이 나라를 떠날 경우 유익할 것이었다. 인도에서 선교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이 머물게 하는 데 점점 더 어려움이 많아져 갔다.

출판의 장애를 극복함

그러나 새로이 발전하는 국민 정부로 인하여 여호와의 백성의 발전하는 무리는 일을 해 나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국내 생산품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수입품에 규제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최근에 정부 수입 무역 통제 관정의 인도 토착어 출판물을 수입할 수 없도록 공식 규제로 인하여 협회의 영어 출판물의 수입도 금지시키려 하였다. 그들이 영어 출판물에 대한 통제는 완화시켰지만, 영어 출판물 수입량을 상당히 제한시켰다. 결과적으로 1962년 이후, 협회의 지부 사무실은 영어 출판물에 한해서 일년에 한번 수입 면장을 신청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이러한 장애를 해소하기 위하여, ‘노워’ 형제는 인도 지부가 인도 내에서 여러 가지 토착어 출판물을 인쇄하도록 허락하였다. 형제들이 그렇게 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가운데 또 다른 장애 즉 충분한 양의 신문 용지를 확보하는 문제에 부닥치게 되었다. 신문 용지 수입 역시 통제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의 허락없이 신문 용지를 사는 것이 불법이 되었다. 신문 용지 구입은 협회의 배포 필요량에 따라 제한되었다. 이것은 우리가 잡지 배부수를 증가시키려고 할 때 커다란 문제가 되었다. 여러 가지 공식 절차를 취할 필요가 있었지만, 인도 지부는 야외에서 봉사하는 형제들에게 계속 토착어 출판물을 공급할 수 있었다.

‘고아’에서도 발전이 시작되다

‘포르투갈’령 ‘고아’는 인도 정부에게 있어서 ‘육체의 가시’ 같은 존재였다. 1961년 인도군이 ‘고아’로 쳐들어가 ‘포르투갈’ 통치자들을 몰아 내었다. 1962년에 인도군은 물러가고 ‘고아’에 민간 정부가 다스리도록 하였다.

‘고아’에 ‘파이오니아’들을 보내려고 노력하였지만, 처음 수개월 동안은 허락 없이는 아무도 들어갈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그 제한 조치가 풀린 후에도 ‘고아’인이 아니면 들어가기가 어려웠다. 여하간, 협회는 특별 ‘파이오니아’들인 ‘베네딕트 디아스’와 ‘그레타 디아스’를 ‘고아’의 ‘살세테’ 지방에 있는 ‘마가오’로 보내는 데 성공하였다. ‘고아’는 견고한 ‘로마 가톨릭’ 근거지였기 때문에 처음 몇년 동안은 발전이 느렸다. 그러나 ‘루자리오 루이스’ 형제는 그 지방의 관심자들이 발전하는 회중이 될 때까지 그들을 세워 줄 수 있었다.

여행하는 감독자들을 위한 도움

인도의 확장하는 순회구들로 인하여 여행하는 감독자는 때때로 회중들과 격지 집단들 사이를 여행하는 데 하루를 바쳤다. 어떤 곳에서는 이들 형제들과 그들의 아내들은 방의 여유가 없는 매우 가난한 증인들과 함께 지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또 어떤 곳에서는 ‘호텔’들이 침구는 없고 방만 제공하곤 하였다. 침구가 있어도 이미 사용되었거나 빈대가 들끓곤 하였다. 그리하여 이제 협회는 순회 감독자들과 그들의 아내들에게 침구와 ‘시이트’와 ‘베개’, ‘수건’, ‘플라스틱’ 양동이, 대야, 비누까지 공급하였다. 이러한 마련들로 인하여 여행하는 형제들에게는 장거리 기차 여행시에 많은 짐 꾸러미를 가지고 다녀야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불편 정도는 참을 만하였다. 왜냐 하면 그들은 이러한 살림 도구들을 돌볼 수 있었고, 편한 잠을 자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그들의 동료 신자들을 섬기는 데 좀더 잘 일할 수 있게 하였다.

‘안다만’ 제도와 ‘니코바르’ 제도로

인도의 여호와의 백성들은 그들 지역의 바깥 쪽에도 왕국 소식을 전할 기회를 철저히 찾고 있었다. 1963년에 ‘마리암마 에노스’ 자매는 ‘포오트블레어’에 있는 ‘안다만’ 제도와 그 인근 지역에 진리의 씨를 뿌리기 시작하였다.

‘안다만’ 제도와 ‘니코바르’ 제도는 ‘벵골’ 만에 있는 바다에서 솟아 올라와 있는 해저 산맥의 산지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으며 ‘버어마’와 ‘수마트라’ 사이에 805‘킬로미터’ 가량 뻗어 있다. ‘텐 디그리’ 해협이 이 제도를 두 집단으로 나누고 있다. ‘안다만’ 제도는 239개의 크고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니코바르’는 19개의 섬으로 되어 있다. 수도는 남‘안다만’에 위치해 있는 ‘포오트블레어’이다.

‘안다만’ 제도와 ‘니코바르’ 제도의 115,133명의 주민 대부분은 인도로부터 왔으며, ‘파도우크’ 나무와 ‘티이크’ 목재 산업, 고무 나무, 후추, ‘코오피’, ‘코코넛’ 및 ‘캐슈 넛’ 재배로 살아간다.

1964년경 이 섬에 사는 형제들을 격려하고 훈련시키기 위하여 순회 감독자를 보낼 만큼 충분한 전도인들이 있었다. ‘포오트블레어’를 처음 방문할 때, ‘로버어트 매실라매니’ 형제는 ‘마리암마 에노스’ 자매의 남편과 같은 채석장에서 일하는 세명의 ‘힌두’인들을 소개받았다. 그들 모두는 성서 진리에 예리한 관심을 나타내었다. 이전에 이들 중 한명은 ‘힌두’교 신 ‘시바’에게 헌신하였다. 서약을 지키기 위하여 그는 머리와 수염을 길게 기르고 있었으며, 그것을 ‘힌두’ 사원에서 깎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종교적 열심도 그 당시 그의 도박벽을 막지 못하였다.

‘매실라매니’ 형제가 호별 방문을 하다가 침례 교회로부터 나온 ‘텔루구’ 말을 하는 두명의 남자들을 만났다. 한 사람은 그 지방 교회의 대표였고 또 한 사람은 회계였다.

‘매실라매니’ 형제가 두번째로 그 ‘안다만’인을 방문하였을 때 그 교회 대표인 ‘아시르바담’ 씨는 진지한 관심을 나타내었다. 그와 그의 가족들은 그 교회를 그만두고 후에 헌신하고 침례받은 증인이 되었다. 계속되는 방문으로 회계였던, ‘솔로몬 라주’도 같은 교회의 다른 가족들과 함께 그 교회를 그만두고 침례를 받았다. 얼마 후 이전에 ‘힌두’교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포오트블레어’ 회중 성원이 되었다.

‘델리’에서 열린 “영원한 기쁜 소식” 대회

틀림없이, 1963년 전세계를 일주했던 여호와의 증인의 “영원한 기쁜 소식” 대회는 인도에서 성장하고 있는 여호와의 조직에 발전을 가져 오는 요인이 되었다! 전세계를 돌고 있던 583명의 대회 대표자들이 이 국제 대회에 참석하였다.

세계 일주 대회 중 ‘뉴우델리’ 대회에 관하여 ‘에드윈 스키너’는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일단의 형제 자매들이 방문객들을 도와 주고 그들이 방역, 입국 및 세관 수속을 밟는 일을 안내하기 위하여 공항에 있는 세관 구내에 들어갈 허락을 받았다. 또한 우아하고 다채로운 ‘사리’나 또는 북부 인도 지방의 ‘살와-카미스’를 입은 인도 자매들은 모든 대표자들에게 화환을 걸어 주고 전통적인 인도의 인사말인 ‘나마스테’(‘당신께 인사 드립니다’)라고 인사를 하였다. 밤이건 낮이건 나흘 동안 매 비행기가 도착할 때마다 똑같은 식으로 인사를 받았다.

“대표자들은 27개국으로부터 참석하였다. 한 작은 집단은 ‘아프가니스탄’의 ‘카불’로부터 육로로 험난한 ‘카이버’ 산지를 건너 ‘파키스탄’을 지나서 인도로 들어왔다 ··· 110명의 또 한 집단은 ‘실론’으로부터 왔는데, 그들은 인도 본토와 ‘실론’ 사이를 갈라놓고 있는 ‘‘아담’의 교량’이라고 하는 곳을 배를 타고 건넌 다음 ‘델리’까지 2,304‘킬로미터’의 거리를 기차를 타고 여행하였다. 잠을 자는 시설이나 ‘에어컨디셔너’ 장치도 없으며 원시적인 변소만이 달린 삼등 객차를 타고 인도 내로 2,300‘킬로미터’의 철도 여행을 해 보는 것은 대단한 경험이었다. 그러나 형제들은 즐거웠다.

“남인도에 사는 형제들도 큰 무리를 지어 ‘델리’까지 1,600‘킬로미터’가 넘는 장거리 기차 여행을 하였다. 그들에게는 이것이 외국 여행과 같았다. 그들 생애 중 처음으로 다른 언어를 말하는 사람들의 소리를 들어 보고, 이색적인 옷을 입고, 다른 모양의 집에서 그리고 자기들 고향인 ‘케랄라’나 ‘마드래스’와는 전혀 다른 지방에서 사는 사람들을 보았다. 많은 사람들은 다른 나라로부터 오는 자기 형제들을 만나 보기 위해 푼푼이 모은 돈을 사용하였다.”

대회장에 관하여도 ‘스키너’ 형제는 이렇게 말하였다. “대회는 인도 국위를 선양하는 집인 인상적이고 아름다운 과학관에서 열렸다. 이 훌륭한 건물에는 1,069명을 수용할 수 있는 화려한 강당이 있었다.

“‘카페트’가 깔려 있고, 냉방 장치가 되어 있는 강당으로 일단 들어서면 참석자들은 편안한 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각 의자에는 각각 책상이 달려 있었고, 또 선택 ‘스위치’와 음량 조절기가 부착된 ‘이어폰’ 장치가 되어 있어서, 그것으로 각자는 연단에서 하는 연설 외에 네 가지 언어로 통역되는 연설 중 한 가지를 선택해 들을 수 있었다. 강당의 절반 가량은 ‘카나레스’어, ‘말레야람’어, ‘타밀’어 및 ‘우르두/힌두’어 강연을 듣는 인도 대표자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마라티’어를 사용하는 형제들에게도 연단에서 직접 통역을 해 주든가 또는 별도의 방에서 통역을 해 주었다.”

세계 일주를 하고 있는, 583명의 방문객들은 정부 소유의 320개의 방이 있는 훌륭한 ‘아소카 호텔’에 묵었다. 5일 동안 식사 때는 주로 모두 대회 가슴표를 달고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로 식당이 꽉찼다. 그들이 하도 따뜻하게 이야기를 나누기 때문에 어떤 ‘호텔’ 직원들은 “이 ‘테이블’에 앉아있는 형제들” 또는 “저쪽에 있는 저 형제가 당신에게 이야기하고 싶어합니다” 하고 일러 주는 일이 있었다.

그리스도교국의 한 종파에 속한 사람이 그 ‘호텔’ 지배인에게 이 모든 “여호와의 백성”들과 어떻게 지내고 있느냐고 묻자, 그 지배인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들은 이 ‘호텔’에서 내가 겪어 본 사람들 가운데 가장 수양이 잘 된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방만 있다면 그분들 한 천명 정도 기꺼이 모시겠읍니다.” 그는 부언하기를, “우리는 때때로 이분들 583명 전체를 모시는 것보다 일반 사람 50명을 모시기가 더 골치 아픕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면, 대회 ‘프로그램’은 어떠하였는가? 그것은 참으로 영적으로 유익하였다. 예를 들면, “신세계 사회 내의 충실한 여자들”이란 제목의 연설에서, ‘F. E. 스키너’ 형제는 인도에는 충실하고, 유능하고 장성된 그리스도인 여자들이 많이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많은 여자들에게는 가정에서 노예와 같이 무거운 짐이 지워져 있으며, 연구를 할 만한 시간이나 격려를 거의 받지 못하고 있다고 그는 지적하였다. ‘스키너’ 형제는 남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자기 아내와 같은 회중을 돌보신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자기 아내들을 돌보라고 호소하였다.—에베소 5:21-33.

‘델리’ 대회의 절정의 날은 8월 8일, 목요일이었는데, 그 날 ‘프로그램’에서는 결의문 낭독이 이채를 띠었으며, 참석한 901명의 대표자들은 그것을 열렬히 채택하였다. 감동을 일으킨 연설 가운데 하나는 ‘노워’ 형제가 행한 “하나님께서 온 땅의 왕이 되실 때”라는 공개 강연이었다. 심한 비가 온 저녁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강연에 350명의 낯선 사람들을 포함해서 1,296명이 참석하였으며, 이 수는 인도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이 처음 보는 가장 큰 참석수였다.

‘F. W. 프랜즈’ 형제는 “당신은 어느 하나님의 증인인가?”라는 강연을 하였다. 이사야 43, 44장에 관한 이 강연은 청중 가운데서 여러 해 동안 여호와의 증인들과 연합해 왔지만 결코 헌신을 하지 않던 한 ‘힌두’인을 전향케 하였다. ‘프랜즈’ 형제가 이교 숭배자들이 어떻게 나무를 베어서, 그 일부는 그 스스로 자신이 엎드리어 절을 하며 섬기는 신을 새기는 데 사용하고 또 그 나머지는 자신이 몸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불을 때고, 빵을 굽는 데 사용하는가를 설명하자, 그 ‘힌두’인은 그러한 모든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깨닫게 되었다. 바로 그 날 저녁 그는 자신의 헌신을 여호와께 나타내고 다음날 침례를 받았다.

이 대회의 44명의 침례 지원자들 가운데에는, 부모들의 반대를 받으면서도 굳굳하게 자신의 행로를 유지해 온 자기 오빠 ‘조오지’를 지켜 보아온 ‘알라하바드’의 ‘애나벨 라티우스’가 있었다. 이 자매는 야외 봉사에 나가는 것을 금지당하였었다. 인도에서는 사람에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겠다고 여자가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일은 보기 드문 일이었다. 그러나 ‘라티우스’ 자매는 할 수 있는 대로 야외 봉사를 수행해 왔다. (사도 5:29) 어려운 일이 있었지만 그는 대회에 참석하였고, 헌신을 하고 침례를 받았다.

야외 봉사에서의 새로운 경험들

세계 일주를 하는 여행자들이 가장 즐거웠던 한 가지 일은 야외 봉사였다. 방문해 온 형제들 대부분은 종종 영어로 증거할 수 있었다.

한 ‘유대’계 미국 형제는 어느 ‘힌두’인 신사와 성서 토론을 하고 있었는데, 그 신사가 말을 가로막고 이렇게 말하였다. “그렇지만 이 소식은 우리보다 서양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고 평등을 믿습니다. 흑백인을 차별하는 사람들은 바로 당신네들입니다. 왜 내가 당신네 성전을 읽어야 한단 말입니까?” 이 형제는 재치있게, 자기는 미국의 대표도 아니고, 또는 어떤 소위 그리스도교 나라의 대표도 아니고, 성서 원칙을 따르는 사람들의 집단의 대표라고 지적하였다. 그는 또 성서에서는 하나님께서 편파적인 분이 아니라는 점을 가르치며, 어느 나라에 살고 있든지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분께 가납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는 점을 보여 주었다. (사도 10:34, 35) 소위 그리스도교 나라들이 이러한 원칙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성서를 무가치하게 만들지는 않는다는 점을 그는 설명하였다. 오히려 성서에는 모든 나라의 사람들을 위한 지혜가 들어 있다고 하였다. 그 ‘힌두’ 신사는 이러한 이야기를 납득하였으며, 특히 이 형제 자신이 ‘유대’인으로서 차별 대우가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되자 얼마의 책을 기꺼이 받았다.

견식을 넓혀 주는 여행

방문객들은 또한 마련된 여행을 계속해 나아감에 따라 상당히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퍼붓는 비 속을 걸으면서 방문자들은 인도의 ‘몬순’ 기후가 어떤 것인지 체험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기분은 상쾌하였으며, 그 모든 것을 즐겼다. 흠뻑 젖은 우산을 가지고, 젖은 비옷에 젖은 구두를 신고 만원 ‘버스’를 비비고 타고는 진짜 인도 장거리를 가 보았다. 여기서 그들은 손과 잘린 다리로 기어가는 어려서부터 불구가 된 거지들, 인력거들, 우마차들, 보행자들, 자동차들, 항상 눈에 띄는 소들을 보았다. 이 모든 것이 혼잡하고 좁은 거리를 비비고 다닌다. 연기가 가득찬 조그마한 차집들과 식당들이 어디에나 여기저기에 있으며, 허리께까지 벗은 남자들이 맨손으로 숯불에 맛있는 ‘채파티스’나 인도인들 구미에 맞는 기타 음식들을 만들고 있다.

인도인들에게 우유를 공급하는 물소 한마리가 여왕과 같이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걸어 내려 왔다. 길 모퉁이에는 한 남자가 소화전 앞에서 쪼그리고 조용히 앉아서 목욕을 하고 있다. 그 다음 그 복잡한 속으로 남자들로만 된 회교 장례 행렬이 지나가는데, 그들은 들 것에 뉘어 있는 시체를 번갈아 가며 운반하였다. 회교도들은 시체를 매장한다. ‘힌두’인들은 노천에 장작을 쌓아 놓고 그 위에 시체를 화장한다.

주부들에게 팔려고 길가에 진열해 놓은 야채를 한 마리의 암소가 먹고 있다. 외국 대표자들에게 진기한 것 한 가지는 ‘성우(聖牛)’에 관한 이야기였다. 사원 종복들은 그들의 의식에 사용하기 위하여 소의 오줌을 모으며 심지어 그들이 마시는 ‘성수’에도 그것을 몇 방울 떨어뜨린다. ‘힌두’ 교도들 뿐 아니라 배화교도들도 그러한 일을 한다.

“영원한 기쁜 소식” 대회는 인도에서의 왕국 사업의 발전을 위한 이정표가 되었다.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으로부터 ‘뉴우델리’로 온 형제들은 특히 축복을 받았는데 그들은 자기들 나라에서는 대회를 즐길 만한 충분한 전도인이 없기 때문이었다. 인도 형제들도 다른 나라에서 온 동료 종들과 만나 그들과 함께 일하게 된 것은 독특한 경험이었다. 국경이 없는 새 질서 사회에 존재하는 얼마나 훌륭한 연합의 증거였는가!

여러 가지 면으로 도움을 받음

형제들에게 도움이 되고 교육이 된 한 가지 훌륭한 것은 「파수대」에 실리는 충실한 그리스도인들의 인생 경험담이었다. ‘A. J. 조셉’ 형제의 이야기가 1964년 1월 15일호(영문)에 실렸다. 그리스도의 기름부음받은 추종자 중 하나라고 하던 ‘조셉’ 형제는 1964년 12월 18일 8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는 실로 인도에서의 왕국 사업을 세워 나아가는 데 공헌하였으며, 이곳에서 조직이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해서 이천명 이상으로 성장한 것을 보았다. ‘조셉’ 형제가 1905년에 참 하나님 여호와를 찾기 시작한 때로부터 59년이 지났다. 참으로 이 비그리스도교 나라에서의 발전은 느렸다. 그러나 1964년에 인도 전역에는 신권 조직의 뚜렷한 윤곽이 세워져 있었다.

1968년에 ‘뱅갈로르’에 있는 ‘라자 벤카타라마 홀’에서 있었던 지역 대회 때, 얼마의 지방 ‘힌두’교 광신자들이 그 대회를 망쳐 놓으려고 하였다. 토요일 밤 그들은 공개 강연 광고판을 소똥으로 더럽혀 놓았으며, 일요일에는 출입구와 벽을 그렇게 해 놓았다. 형제들은 아침 회기가 시작되기 전까지 이것들을 말끔히 청소해 놓았으므로 대부분의 형제들은 이런 일을 알지 못하였다. 신문 광고를 잘하였기 때문에, 주 정부는 이 대회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사찰계 형사인 ‘데니스’를 임명하여 회기 전체에 참석한 후 그 대회에서 발표된 점들에 관한 온전한 보고서를 정부에 제출하게 하였다.

‘데니스’ 형사는 대회 감독자인 ‘혼갤’ 형제에게, 자기가 보고해야 할 주요점은 이 대회에서 어떠한 전환이 있었는지, 어떤 특정한 사회나 종교가 비판되었는지 또는 어떤 정책들에 관하여 토론되었는지 하는 점이라고 알려 주었다. 마지막 날, ‘혼갤’ 형제는 그 형사에게 어떠한 생각을 갖게 되었는가 하고 물어 보았다. ‘데니스’는 자기가 보고 들은 것, 모든 부서들이 원활하게 운영되는 것 그리고 형제들의 자진적인 협조 등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말하였다.

그 다음 ‘혼갤’ 형제는 천진스러운 태도로 ‘데니스’에게 어떻게 보고 할 작정이냐고 물어 보았다. 그 형사의 대답은 이러하였다. “내게 곤란한 문제가 바로 그 점입니다. 이 보고서는 여당의 장관에게 보내지게 될 것인데, 만일 주 의회에서 어떤 반대당 의원이 여호와의 증인들의 대회 주제를 끄집어 낸다면, 장관은 대회에 관한 구체적인 자료를 그들에게 주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만일 보고서에 모든 연사들이 ‘계시록을 찾아 보십시오. 또는 마가복음 또는 시편을 찾아 보십시오.’ 하고 말했다고 한다면, 장관이나 반대 의원들은 보고서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내 보고서는 간단히 작성하여 단순히 불온적인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고 설명할 것입니다.”

1968년에 있었던 일련의 대회에서 가장 두드러졌던 점은 네개의 대회 총 참석자가 3,132명이었으며, 침례를 받은 수가 122명이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 당시 인도 내의 총 증인 수 즉 2,337명과 비교할 때 유의할 만한 점이다. 그리하여 조직이 인도 내에서 계속 성장할 실제적인 가능성이 나타났다.

1964년부터 1968년까지의 대회들은 효과적인 조직 운영면에서 인도 형제들을 훈련시켰다. 그리고 1968년 ‘뱅갈로르’ 대회에서 전체 대회 운영을 보면 대회 감독은 ‘빅터 혼갤’이 맡고, 대회 의장은 ‘프래브해카 손스’가 맡아 인도 형제들의 감독하에 진행된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었다. 더구나 몇년 동안 ‘케랄라’ 대회는 전적으로 우리 인도 형제들의 손으로 운영되었다. 확실히 튼튼하고 연합된 그리스도인 조직이 인도 내에서 분명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파이오니아’ 대열에서의 성장

여호와께서 전 시간 전파자의 필요에 그의 백성들이 호응하도록 움직이심에 따라 매년 ‘파이오니아’들이 증가되었다. 1965년부터 1970년까지 179명의 ‘파이오니아’(특별 ‘파이오니아’ 66명 및 정규 ‘파이오니아’ 113명)가 증가되었으며, 1970년까지 총 375명의 ‘파이오니아’들이 생겼다. 분명히 ‘파이오니아’들은 인도에서의 야외 활동에 기간을 이루어, 성서 연구 사업이 상당히 발전하여, 1970년에는 매주 평균 3,024건의 연구가 사회되었다.

그리스도인 중립이 시험이 되다

1965년 인도와 ‘파키스탄’간의 선전 포고 없는 전쟁으로 인한 혼란기에, 수는 비록 몇 안되었지만, 여호와의 백성은 불안정한 수백만명의 인해(人海) 가운데 등대불과 같이 그들에게 안전한 지역인 하나님의 조직을 알리고 서 있었다. 도시들에서는 등화 관제로 인하여 저녁 집회를 갖기가 어렵게 되는 등 얼마간 불편을 겪었다. ‘봄베이’ 주민들은 오후 8:00까지는 집으로 돌아가야 하였으며, 그 시간 이후에는 통행이 허용되지 않았었다. 48일에 걸친 그 전쟁중 왕국 사업은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알라하바드’에서 ‘노리스’ 형제는 전도하는 중에 호별 방문 기록을 하였다고 해서 ‘파키스탄’ 첩자라는 고발을 받았다. 그는 광적인 애국자들에게 구타당하였으며, 그들은 폭도들을 모아 이 선교인에게 만일 경솔한 짓을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위협을 하였다. 경찰이 와서 그 선교인을 체포하고, 오히려 공격자들은 도망가게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 지방 경찰 책임자는 “그 사람들이 지나치게 애국심을 나타냈다. 우리는 그들에게 그들 마음대로 법을 다루지 말라고 주의시켰다”는 말로 그 사건을 흐지부지 처리하였다. 하지만 하나님 백성은 당황하지 않고 생명을 구하는 그들의 중요한 사업을 계속 수행해 나아갔다.

두 나라 사이의 적의가 증가해 갔기 때문에, 양 정부에서는 엄격한 애국주의적 방침들이 시행되었다. 그러한 방침들로 인하여 우리의 학교 다니는 자녀들에게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모든 학교에서는 애국가를 부르는 의식을 채택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그리스도인 중립 문제에 부닥치게 되었다. 상당수의 경우에 의식에 참여하는 일에 불참하는 것이 거부되었다. 몇몇 증인 자녀들은 학교로부터 퇴학을 당하였으며, 다른 자녀들은 자퇴하고 말았다. 형제들 중 얼마는 그들이 배운 성경적 충고에 따라 행동하였으나 반면 어떤 부모들은 그러한 충고를 무시하는 듯하였다.

1965년 ‘케랄라’ 주에 있던 지역 감독자는 여호와의 증인의 그리스도인 중립에 관하여 몇명의 교장 선생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여행하는 감독자 ‘펑크’ 형제는 우리의 자녀들이 다니고 있는 한 학교의 교장 선생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교장은 상당히 귀를 기울여 들었으며, 여호와의 증인들을 애국 행사로부터 면제해 주는 일을 승락하였다. 그러나 다음 시험기 때에는 그 교장이 없었으며, ‘로마 가톨릭’을 믿는 선생은 우리 자녀들이 그 날 아침 애국 조회 때 참석치 않았다고 하여 시험을 치르지 못하게 하였다. 그 고등학교에 다니는 자녀들의 부모들은 탄원서와 함께, ‘케랄라’ 주의 ‘칸지라팔리’에 있는 그 지방 교육청으로 해명서를 보냈다. 그러나 별 좋은 결과를 가져 오지 못하였다. 나이가 든 자녀들 중 이제 세속 교육을 받을 기회를 빼앗긴 어떤 아이들은 ‘파이오니아’가 되어 생명을 위한 그들의 교육을 계속 추구하며, 다른 사람들도 동일한 일을 하도록 도와 주는 일을 해 나아 갔다.

‘뉴우델리’에서 인도 대법원에 근무하던 한 변호사는 「인도의 법조계」라는 한 잡지를 발행하고 있었다. 이 변호사는 1965년 6월 8일호 「깨어라!」(영문)지에 실린 “기, 맹세 및 하나님”이라는 기사를 전부 전재하는 허락을 협회로부터 받았다. 이것은 분명히 인도의 법 전문가들 앞에 이 논란많은 기 문제를 제기시켰으며, 이 문제에 대한 여호와의 증인들의 성서적 입장을 분명히 밝혀 주었다.—출애굽 20:4, 5; 요한 1서 5:21.

출판 활동이 확장되다

인도의 국어인 ‘힌두’어로 「파수대」를 발행할 준비가 되자 출판 활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여러 가지 수속 절차를 밟아야 하였기 때문에 공식 인가를 얻는 데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 첫째로 그 잡지가 발행되는 ‘란치’ 시의 시장 앞에서 협회 대표자가 선언을 해야 하였다. 그러고도 몇 주 동안 일이 진행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결국 1965년 11월에 인쇄 허가를 받았다. ‘힌두’어 「파수대」 첫 호는 1966년 1월에 인쇄되었는데 1,500부를 찍었다.

1966년초 어느날, 특별 ‘파이오니아’인 ‘조오지 그레고리’는 ‘세쿤데라바드’에 있는 약속한 지점에서 전도인들을 만나기 위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인도의 성서 공회 지배인이 그의 사무실을 떠나는 것을 목격하였다. ‘그레고리’ 형제는 재빨리 그에게 다가가서 「신세계역」 성경을 제공하였다. 그 지배인은 몇권의 소책자와 함께 그 책을 선뜻 받았다. 며칠 후 ‘그레고리’ 형제는 성서 공회 지배인으로부터 「신세계역」을 세권 더 주문하는 편지를 받았다. 성서를 전달해 주면서, ‘그레고리’ 형제는 성서 공회가 ‘텔루구’어 성경 개정판을 준비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텔루구’어 번역 집단은 「신세계역」에 대하여 깊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은 개역판에 그것을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지방 주교는 「신세계역」이야말로 자기가 이제까지 읽어 본 영어 번역판 가운데 가장 훌륭한 성서라고 했다고 전해졌다.

그 주교와 지배인은 함께 다음 공개 강연을 들으러 왕국회관을 찾아왔다. 그들은 다음날 ‘텔루구’ 번역 위원회가 그들의 작업을 하는 동안 참석하여 달라고 ‘그레고리’ 형제를 초대하였다. ‘그레고리’ 형제는 그렇게 하였으며, 그들에게 「신세계역」 네권을 더 전하였다.

여러 가지 방해에도 두려워하지 않음

인도 형제들이 특별 ‘파이오니아’ 봉사에 점점 더 많이 자원하게 된 것은 기쁜 일이었다. 왜냐 하면 선교인들이 인도에 들어 오는 일이 더욱더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인도를 떠나는 선교인들을 대치하는 경우에만 선교인들이 들어 올 수 있었다. 1965년부터 1970년까지 인도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선교인 수가 감소되었다.

얼마 후에는 정부가 이 나라에 선교인들을 대치하는 허가도 취소해 버렸다. 이제 더 이상 외국 선교인들이 들어 올 수 없게 되었다!

선교 봉사에 이러한 방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인도에서의 사업은 발전하였다. 인도 형제들이 영적으로 성장하게 되었으며, 특별 ‘파이오니아’ 봉사 및 감독의 직책을 맡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1965년부터 1970년 사이를 예로 들면, 상당수의 인도 형제들이 순회 감독자들로 임명되었으며, 그 중에는 이전에 ‘힌두’교인이었던 사람이 둘이나 있다. 이제 인도에서 자국인 순회 감독자들을 생산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장성된 신권 조직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또 하나의 증거였다.

축복이 된 「진리」 책

1968년 훌륭한 성서 연구 보조서인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 책이 나왔다. 이 책을 ‘힌두’어, ‘카나레스’어, ‘말레야람’어, ‘타밀’어 ‘텔루구’어 및 ‘우르두’어로 출판하는 일에는 번역하고 검토하고 교정을 보고 조판을 하며 인쇄하는 등 방대한 일이 수반되었다. 인쇄는 외부 인쇄소를 이용하여 했으며, 지부 사무실은 이 일을 인쇄일이 진행되는 도시에서 봉사하는 특별 ‘파이오니아’들을 통하여 감독할 수 있었다. 모든 번역자들은 영어와 인도어 그리고 진리에 대한 훌륭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이었다.

지부 사무실에서 멀리 떨어져 수행되는 이 전체 사업을 감독하는 일은 마치 안개가 낀 기상 상태하에서 관제탑이 ‘레이다’로 여러 대의 비행기에 지시를 내리는 것과 같았다. 하여간, 여호와의 과분하신 친절로 이 작업은 완수되었다. 드디어 많은 가정 성서 연구들이 여러 가지 토착어로 된 「진리」 책을 가지고 관심자들과 사회되었다.

예를 들어 보자. 40명으로 된 한 집단이 ‘말레야람’어 「진리」 책을 가지고 연구를 시작하였다. 지방 사제가 이 소식을 듣자, 그는 설교단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은 주정꾼들이고 싸움을 좋아하는 자들이라고 규탄하였다. 그러자 한 여인이 일어나서 다음과 같이 소리를 질렀다. “그건 거짓말입니다. 내 아들은 당신 교회에 다닐 때는 술 주정꾼이었으나 여호와의 증인과 연구하고 있는 지금, 그 아이가 술병 대신 성경을 들고 다니는 것을 보시지 않습니까?”

또 다른 경우에, 한 ‘로마 가톨릭’ 신자가 일주일 간 「진리」 책을 읽었다. 전도인이 재방문을 갔을 때, 그 ‘가톨릭’ 신자는 “이 책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즉시 연구가 시작되었다. 그들은 영과 진리를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라는 제목에 이르렀다. (요한 4:24) 다음 주 그 전도인은 그 집 벽에 있는 모든 종교적인 그림들이 제거되고 대신 그 자리에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라는 간단한 성귀가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여호수아 24:15.

짧지만 도움이 된 방문

그동안, ‘노워’ 형제는 극동까지 봉사 여행을 하고 ‘브루클린’으로 돌아가는 길에 인도와 ‘유럽’을 들렀다. 1968년 5월의 이 방문에서 ‘노워’ 형제는 주로 지부 사무실을 조사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1960년 인도 지부 건물이 지어진 이후 처음으로 이 건물을 보고 기뻐하였다. 그러나 그는 또한 ‘봄베이’에 있는 노천 극장에서 형제들에게 연설도 하였다. “너는 잊지 말찌니라”라는 제목의 그의 강연에 600명 이상이 참석하였다.

‘노워’ 형제의 방문은 또한 그 당시 인쇄 문제 및 운영비에 관하여 토론할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파수대」는 ‘벵골’어, ‘힌두’어, ‘카나레스’어, ‘말레야람’어 ‘마라티’어, ‘타밀’어, ‘우르두’어 등 모두 일곱 가지 언어로 발행되고 있었다. 「깨어라!」는 ‘말레야람’어와 ‘타밀’어 즉 두 가지 언어로 발행되고 있었다. 협회가 인쇄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가능치 못하였기 때문에 모든 인쇄는 외부의 상업적인 인쇄소에서 하였다.

‘노워’ 형제는 인도에서 제조되는 “브라드마” 부각기와 그에 딸린 인쇄기를 구입하는 것을 승인하였다. 이것은 잡지 발송을 신속히 처리하게 하였으며, ‘파이오니아’와 회중 주소철을 더욱 효과적으로 유지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 당시 지부에 있는 창고 시설은 불충분하였기 때문에 ‘노워’ 형제는 지부 차량을 위해 바깥에 차고를 짓도록 승인하였다. 그리하여 본 건물에 딸린 기존 차고는 서적을 쌓아 둘 수 있는 부가적인 적재 공간으로 이용될 수 있었다.

우리의 사업의 효과를 분석해 봄

여호와의 순결한 조직이 인도 내의 거짓 종교의 혼란된 성장 가운데서도 더욱 두드러지게 부상되고 있는 증거는 그 나라의 거대한 종교 성원 중 어떤 사람들에게 조용히 그리나 효과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끊임없이 물이 떨어지면 바위를 뚫듯이 끊임없는 여호와의 조직의 활동은 왕국 소식을 저항하는 굳은 마음을 뚫어 놓았다. 대부분의 ‘힌두’인들은 성서 연구로 여호와의 예언하신 목적을 별 뜻없이 조사해 보았다. 그리스도교국의 거짓 교리들과 악귀의 작용은 진실한 ‘힌두’교인들의 머리에 많은 편견을 갖게 하였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점차로 진리에 반응을 나타내었다. 1969년에 인도의 전체 전도인들 중 6‘퍼센트’는 이전에 ‘힌두’인들이었다.

특별 ‘파이오니아’인 ‘부다파티’ 형제는 ‘하이더라바드’에서 일하는 동안, 다음과 같은 경험을 하였다. “한 ‘힌두’교인 집을 방문하였을 때, 그 집 아버지와 네 자녀는 장차 올 의로운 새 질서에 대한 전망에 감동하여 깊은 관심을 나타내었다. ‘텔루구’어 소책자를 기꺼이 받았으며 재방문 때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다.

“기사인 그 아버지는 얼마 안있어 그 연구에 또 한 가족을 참여시켜 매주 도합 10 내지 12명이 참석하였다. 그들이 ‘텔루구’어 「진리」 책을 받자 우리는 속히 그 책을 시작하였다. 그 책은 단순하고 솔직하기 때문에 발전이 빨랐다. ‘힌두’인들이었기 때문에 가족들의 반대가 있었고 그 연구를 중지시켜야 하였다. 그러나 튼튼한 기초가 놓여졌으며, 그 가족은 그러한 압력을 잘 견디었다. 그들은 6‘킬로미터’나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곧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바벨론’적 종교와의 모든 관계를 끊었으며 좋은 소식의 정기적인 전도인들이 되었다.”

인도에서 9개월 이내에 한 ‘힌두’ 가족을 이렇게 만든다는 것은 대단한 업적이다. 물론 이러한 일이 성취된 데 대한 영예는 여호와께 돌아가야 한다.

한편, 1969년에 인도의 왕국 전도인들의 93‘퍼센트’는 이전에 그리스도교국의 여러 종파에 속하였던 사람들이었다. 사실상 1969년에 인도의 여호와의 증인 중 상당 수는 이전에 ‘로마 가톨릭’교인들이었다. 한 예를 들면 ‘케랄라’ 주 ‘멜루카부마톰’에 한 젊은 학생 사제가 있었다. 그는 ‘로마 가톨릭’교의 사제가 되기 위하여 신학교에서 7년간 수학하였다. 그러나 그 여러 해 동안 그는 부당하고 불의한 많은 일을 관찰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는 ‘로마 가톨릭’교가 진리가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따라서 신학교를 그만 두었다. 여호와의 증인인 그의 숙모가 그를 방문하였는데 그 숙모가 성서에 대하여 이해하고 있는 지식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숙모는 ‘하이레인지’에 있는 홍차 농장, ‘헤븐벨리’의 자기 집으로 그를 초대하였다.

이전에 신학도였던 이 사람이 거기 머물러 있는 동안, 그 당시 순회 감독자였던 ‘V. P. 에이브러햄’이 그 회중을 방문하여 이 젊은이를 만났고 그를 그 지방 집회에 참석하도록 하였다. 얼마나 차이가 있는가! 그 젊은이가 즉시 증인들 사이에 충만한 진정한 사랑과 연합을 목격하게 되었다. 깊은 인상을 받고 그는 ‘멜루카부마톰’으로 돌아와 협회 출판물을 가지고 열심히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다. 특별 ‘파이오니아’인 ‘A. D. 새뮤얼’이 그 연구를 사회하였으며, 집회는 32‘킬로미터’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 열리는데도 그 젊은이는 정기적으로 집회에 참석하였다. 곧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며, 자기의 친구들, 친척들 및 이전의 신학교 당국자들에게 이 새로운 숭배의 길에 관하여 알리기 시작하였다.

정직성과 과단성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의로운 숭배자들의 조직이 인도에 세워지고 있었으며, 참다운 그리스도인 원칙에 대한 그들의 성실성이 알려지게 되었다. ‘안드라 프라데시’의 ‘가잘라콘다’에서 이 점을 알려 주는 한 예가 있었다. 그 곳에는 여호와의 증인의 작은 회중이 하나 있었다. 한 자매는 어느 학교 교사였는데, 그 학교에서는 출석부를 허위 기록하는 것이 상례였다. 교사들이 왜 이러한 일을 하였는가? 학교 당국자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게 하기 위함이었다. 우리 자매는 자기 기록을 허위 작성하는 일을 거절하였으며, 그리하여 그는 정확한 기록을 한 이유를 해명하도록 교장 앞으로 불리워 갔다. 왜냐 하면 그렇게 하면 학교 평균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었다. 그 자매는, 만일 그가 부정직한 학교 관습을 따르지 않는다면 다른 학교로 전속시키겠다는 위협을 받았다. 우리 자매는 성서로 훈련받은 양심과 그리스도인 정직성에 충실히 고착하였다. 그 자매는 학교 당국자들에게 실제로 그리스도교에 대한 자신의 이해가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였다. 그들은 분명히 깊은 인상을 받은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 자매는 그 학교에 그대로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도에 연합된 그리스도인들의 튼튼한 조직의 출현에 대한 또 하나의 증거는 ‘마드래스’ 시에 있는 형제들이 그들 자신의 왕국회관을 건축하기 위하여 기울인 담대한 노력이었다. ‘마드래스 시 공익 사업부’의 한 민간 기사인 ‘F. P. 안토니’ 형제에게 대지를 구입하여 건물을 세우는 일에 대한 감독 직분이 맡겨졌다. ‘마드래스’ 근교 ‘베퍼리’에 있는 ‘브릭 킬른’ 가에 적합한 대지를 구입하였다. 만족스러운 설계를 한 다음, 150명 정도 좌석이 들어갈 만한 훌륭한 새 왕국회관이 건축되었다. 그후 회중은 급속히 발전하여 인도에서 가장 큰 회중으로 성장하였다. 드디어는 그 회중을 둘로 분회하였으며, ‘마드래스’ 시에는 네개의 회중이 있게 되었다.

“지상의 평화” 대회

이 대회는 ‘봄베이’, ‘마드래스’ 및 ‘코친’에서 열렸다. 열 네개의 주에서 500명의 형제들이 ‘봄베이’로 왔으며, 어떤 형제들은 북쪽 ‘히말라야’ 왕국인 ‘시킴’으로부터 먼 길을 무릅쓰고 왔다. ‘봄베이’는 인구가 흘러 넘치는 곳이어서 숙박 장소를 얻는 것이 문제였다. 대회장 바로 건너편에는 ‘로마 가톨릭’계 여학교가 있었다. 교장은 대단히 협조적이어서 학교를 기숙사처럼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으며, 그리하여 80명의 형제들이 그 곳에서 숙박을 하였다. 또 다른 예기치 않던 일이 회교 군주의 ‘방갈로’에서 마련되었는데, 한 형제의 어머니가 그곳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30명이 묵을 수 있는 숙소를 그곳에 얻을 수 있었다. 그 다음 ‘봄베이’에 사는 ‘잭 드실바’ 형제는 자기 친구를 설득하여 친한 손님들을 위해 마련한 고급 ‘아파아트’를 형제들이 사용하도록 허락을 받았다. 그곳에서 또 다른 30명이 유숙하였다. ‘봄베이’ 대회는 다섯 가지 언어로 진행되었다. 놀랍게도 ‘요나’에 관한 성서 ‘드라마’를 하는 동안 인근 수도원으로부터 10명의 ‘로마 가톨릭’ 수녀들이 왔었다.

이 일련의 대회인 ‘마드래스’ 대회는 넓은 ‘뮤지엄 극장’에서 개최되었으며, ‘텔루구’ 회기는 별도의 방에서 진행되었다. 주 대회장에 있는 ‘타밀’어를 말하는 형제들을 위하여 모든 것이 통역되었다. 대회장 밖 마당에 식당용으로 ‘팬달’ 즉 초가 오두막을 세웠다. 공개 집회 참석자는 814명이었으며, 42명이 물 침례를 받았다.

세번째 대회이자 마지막 대회는 현재 ‘케랄라’ 주의 서해안 인도 해군 기지가 있는 포구 즉 ‘코친’에서 있었다. 이곳의 대회는 ‘네루 기념관’에서 개최되었다. 형제들 수백명은 대회장에서 자게 되어 기뻐하였다. 그러한 마련은 싸고 편리하였다. 심지어 ‘코친’ 시장까지도 숙박 문제에 협조해 주었다. 그는 보통 관리들을 위해 마련해 놓은 정부 소유 ‘방갈로’를 형제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집주인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는 전도인들에게는 모두 무료 숙소를 임명하였다. 많은 집주인들이 대회에 참석하였으며, 대회가 끝났을 때 그들은 그리스도인 손님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작별 인사를 하였다.

공개 강연에는 1,253명이 참석하였으며, 153명의 ‘파이오니아’들이 있었다. 43명이 또한 침례를 받았다.

‘시킴’ 사람들에게 이르다

산악 지대인 ‘시킴’ 왕국은 ‘왙취 타워 협회’ 인도 지부하에 있다. ‘포우프’ 형제는 이 험난한 지대에 있는 ‘시킴’ 형제들에게 가기 위한 그의 초기 여행 중 한번의 경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주요 교통 수단은 기차인데, 그것이 보통 더 좋았다. 종종 가파른 길에는 ‘지이프’나 ‘버스’로 돌아 올라가지 않으면 안된다. 이곳 도로에 적합한 차량들이 필요한데, 흔히 그런 것이 없다 ··· 그 결과 여행자들의 신경과 침착성이 몹시 시험을 받는다. 그러한 경우가 ‘히말라야’의 산지를 통과하여 ‘다아지일링’으로 가는 여행시에 있었다. 그때 그 ‘지이프’는 1‘마일’쯤 달리고 나면 앞바퀴가 몹시 불안하게 떨리곤 하였다. 이 때문에 차가 조정을 못할 정도가 되지 않도록 급 ‘브레이크’를 밟지 않으면 안되었다. 한쪽은 가파른 낭떠러지인 좁은 산간 도로의 급경사진 길을 간신히 빠져 나온 후 우리는 경찰 검문소의 정지 지점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면밀한 조사를 받고, 운전대에 결함이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왜냐 하면 운전대는 앞 바퀴들에 딸린 기계 장치 앞에서 좌우로 120도가 회전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 심각한 결함이 그 운전사에게 지적되자, 그는 ‘문제 없다’고 주장하였다. 우리는 장장 80‘킬로미터’나 되는 산간 도로를 굴러 떨어지지 않고 완전히 빠져 나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운전사의 말이 옳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몹시 걱정이 되어 그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시킴’ 국경 가까이 방문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비록 우리는 입국은 할 수 없었지만 형제들이 항상 인근의 ‘다아지일링’에 있는 우리를 방문하기 위해 시간을 내었다. 때로는 이른 아침 문에서 조심스럽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문을 열어 보면, 그들은 우리를 위해 달걀, ‘오렌지’, 야채 등을 그들의 감사의 표시로 선물로 가져 오곤 하였다. 비용과 교통편을 얻게 되면 그들은 ‘시킴’으로부터 22.5‘킬로미터’의 거리를 왔으며, 때로는 걸어서도 왔다. 그 주간 중 그들은 연로한 가족들이 무사한가 알아 보기 위하여 같은 방법으로 마을로 돌아갔다가 돌아오곤 하였다.

“이 점을 더욱 이채롭게 만드는 일은 관련된 가족들이 이전에는 ‘힌두’ 교도들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한 가족 성원의 열성스러운 인도로 인하여 다른 가족들이 크게 격려를 받았다. 지금은 형제가 된 그 가족의 열성스러운 한 성원은 진리의 소리를 듣고 좋아하였다. 그는 낙원에서의 평화를 찾아 돌아가는 길을 찾고 있는 ‘시킴’의 이 외진 산악 지대에 사는 다른 사람들을 훌륭히 돕고 있다.”

‘시킴’은 주로 ‘히말라야’에 위치해 있으며, 불교가 국교이다. 약 7,299평방 ‘킬로미터’인 산악 지대는 삼림으로 덮여 있다. 거대한 침엽수의 지역이 북쪽 ‘시킴’의 눈덮인 지역까지 뻗쳐 있다. 난초 무리가 이 조그마한 ‘히말라야’ 나라의 다채로움을 더해 준다. 산허리마다 철쭉 무리가 온통 덮여 있다. 고산 지대의 꽃들이 높은 계곡과 고객길에 깔려있다. 이 아름다운 절경 속에서, 대부분이 불교인 아니면 ‘힌두’교인인 약 194,000명의 인구 가운데 좋은 소식을 선포하고 있는 여호와의 왕국 전도인들이 22명 있다.

“좋은 소식”이 ‘네팔’에 이르다

세계에서 유일한 ‘힌두’교 독립국인 이웃 나라 ‘네팔’ 역시 인도의 신권 활동 영역 내에 들어와 있다. 이 나라는 ‘히말라야’ 서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이 나라는 북쪽으로는 ‘티벳’, 동쪽으로는 ‘시킴’, 남쪽과 서쪽으로는 인도에 둘러싸여 있다. ‘네팔’ 인구는 약 1,200만 가량이다. 이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에베레스트’ 산이 있는 나라로 유명하며, 또한 세계에서 가장 강인한 인종인 ‘구르카’족의 산지로도 유명하다.

얼마 전, ‘네팔’인인 ‘A. B. 요잔’ 형제의 가족이 인도 ‘칼림퐁’으로부터 ‘네팔’의 수도인 ‘카트만두’로 이사하였다. 비록 개종이 금지되어 있고 따라서 야외 봉사가 제한되었지만, 이 가족은 이 나라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왕국에 관한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데 탁월한 일을 하였다. ‘요잔’ 형제의 세속 직장 관계로 그는 정부 관리들, 심지어 왕실 사람들과도 가까이 접촉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그리스도인 출판물들이 왕족들에게 전해졌다.

조직적인 발전

1971년은 신권 조직의 새로운 면을 위한 기초가 인도에 놓여졌다. 널리 일곱개의 지역에서 열린 “하나님의 이름” 지역 대회를 통하여 초기 그리스도인 회중을 주관하던 사도적 마련이 설명되었다. “민주 정체와 공산주의 한 복판에 있는 신권 조직”이라는 연설에서 현재 회중들이 자격을 갖춘 영적 장로들의 회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라는 것이 설명되었다. 민주주의 나라인 인도에 가장 강력한 공산주의자들이 활동하는 지역인 ‘케랄라’에서 열린 대회에서 이러한 강연이 행해진 것은 참으로 적절한 일이었다!

이 대회는 하나님의 사업이 이 나라에서 처음 시작된 바로 그 지역에서 이제까지의 여호와의 백성들이 가졌던 대회 중 가장 큰 대회였다. ‘코타얌’ 시에는 대회를 열 만한 큰 강당이 없었기 때문에 거대한 경찰 열병식장을 얻었다. 그곳에 ‘코코넛’ 야자 나무 가지로 커다란 지붕을 만들었다. 이 덥고 열대성 기후 가운데서 2,259명이 장차 그리스도인 회중이 다스려지는 방법에 관하여 연설을 들었다.

1972년 초에 인도에서의 순회 사업은 철저히 재조직되었다. 방문하는 감독자들은 기록과 수자에 덜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그 대신 야외 봉사에서 형제들을 격려하고, 회중의 영적 상태를 세워 주는 데 역점을 두게 되었다.

1972년 9월에, 인도의 회중들은 장로의 회에 의하여 감독을 받게 되었다. 이것은 회중을 영적으로 공고하게 하는 데 커다란 발전이었다. 인도의 대부분의 회중들은 열정적으로 이러한 마련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 마련은 지방적인 문제들을 다루는 데 있어서 비교적 영적 장성의 수준이 낮고 경험이 부족함을 밝혀 주었다. 얼마간의 두드러진 난제는 어떤 임명된 형제들이 좋지 않은 동기를 가지고 있거나 또는 영적인 자격이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연로자 마련은 또한 회중에 영적 도움의 필요성을 예리하게 알려 주었다. 예를 들어, 도합 247개의 회중(한 두명의 형제들만이 살고 있는 곳을 포함하여)에서 1976년 중반까지 121명만이 장로로 임명되었다. 따라서 416명의 임명된 봉사의 종들 중 많은 수가 대리 감독자로 봉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의심할 바 없이, 인도 내에서의 전반적인 영향은 감독의 수준을 올려준 것이었다. 이것은 또한 연로자 마련이 시작된 이후 몇 해 동안 인도에서의 여호와의 백성 수에 있어서 22‘퍼센트’의 증가를 가져오는 데 기여하였다. 그리나 더욱 중요한 것으로, 새로운 조직상의 발전은 하나님의 사업이 어떤 개인에 의존해 있지 않다는 점이라는 사실을 밝혀 주었다. 그와는 반대로 형제들을 섬기는 상호 의존하고 연합된 한 몸과 같은 임명된 장로들과 더불어 회중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주의가 쏠리게 되었다.

미개발 지역이 개발되다

인도 최북단에 있는 미개발 지역이 개척되어 거의 이르기 힘든 지역들에까지 진리가 들어갔다. 북회귀선 안에 있는 인도의 이 지역은 일곱개의 별도의 구역들로 이루어져 있다. ‘티벳’과 중국과 국경을 이루고 있는 북쪽은 ‘아루나첼 프라데시’가 있다. 남쪽으로 ‘버어마’와 연접되어 있는 곳에는 우선 ‘라가랜드’가 있고 그 다음 ‘마니푸르’가 있다. ‘마니푸르’ 남동쪽에는 ‘미조람’과 ‘트리푸라’가 있다. ‘방글라데시’와 ‘브라마푸트라’ 계곡 사이에는 ‘메그할라야’가 있다. 마지막으로 ‘브라마푸트라’ 강이 두 발을 벌리고 있는 그 사이에 ‘아샘’이 있는데, 이 지역은 ‘벵골’과 인도 일부를 가로지르는 “병의 목”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이 지역은 ‘히말라야’ 산맥의 동쪽 끝부분에 있는 주로 산지로 되어 있으며, 표고는 해발 792 내지 1,463‘미터’에 달한다. 이곳은 솟아오른 봉우리들, 굽이치는 강들, 폭포들, 산간 호수들, 푸르른 계곡과 초원으로 장관을 이룬다! 계곡들에는 수십 부족들이 거주하고 있다. 각 계곡마다 그들 나름대로의 방언을 가진 다른 부족들이 살고 있다. 어떤 부족들은 여가장 제도를 고수하고 있다. 또 어떤 부족들은 최근까지도 사람의 머리를 베어 간직하는 사람들이다. 이제 이 부족들이 처음으로 하나님의 왕국 소식을 듣기 시작하였다.

여러 해 동안 왕국 전파 사업은 ‘아샘’의 ‘실롱’에 근거지를 둔 특별 ‘파이오니아’들에 의하여 수행되었다.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진리가 전파되었다. ‘바수마타리’ 형제는 ‘실롱’에서 진리를 배웠고, 후에 친척들과 자기 마을의 사람들에게 자기가 새로이 발견한 ‘보배’를 전해 주기 위하여 자기의 밀림 마을인 ‘디그할동’으로 떠났다. (잠언 2:1-5) 200‘킬로미터’나 되는 이 여행을 하는 데 기차를 타야 했고 다음에는 ‘버스’를 이용하고 그 다음에는 우마차, 마지막으로는 밀림을 걸어서 통과해야 하였다.

‘바수마타리’ 형제는 곧 분주히 일을 시작하여 간단한 왕국회관을 짓고 정기적인 그리스도인 집회들을 갖기 시작하였다. 후에 여행하는 한 특별 ‘파이오니아’는 ‘바수마타리’ 형제의 집에 18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들은 여러 가지 성서 질문들을 하였다. 그 특별 ‘파이오니아’는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12명은 이미 ‘루터’ 교회를 탈퇴하고 회관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석하고 있읍니다. 16년 동안 ‘루터’교 교직자로 일해 왔으나 이제 그 종교와의 모든 관계를 끊어버린 70세의 한 노인을 만났을 때 저는 무척 격려를 받았읍니다. 그 결과 그는 자기의 생계 수단을 박탈당하였지만, ‘나는 “큰 바벨론”에서 나왔으며, 이제 하나님의 조직 안으로 들어왔다’고 외쳤읍니다.” ‘디그할동’에 있는 회중은 이제 ‘아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이웃 마을들에 좋은 소식을 전파하고 있다.

진리는 또한 ‘메그할라야’ 주에 있는 ‘카시’ 산지에도 전파되고 있다. 이곳에서는 여가장 제도가 부족들 사이에 지켜지고 있어서 머리 직분은 아내에게 지워져 있으며, 아들 딸들은 어머니의 성을 따른다. 그러나 ‘카시’의 한 여인이 진리를 받아들였고, 그의 생활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는 장로교회에 속하였었으나, 결혼 승인없이 20년 동안이나 한 남자와 살아오면서 7명의 자녀를 낳았다. 그런데도 그들의 교직자는 이를 묵인하고 있었다. 이제 진리를 알게 된 후 이 ‘카시’ 여인은 자기 짝에게 이 문제를 의논하였다. 이 여인이 남자에게 자기들의 결혼을 합법화해야 하고 남자가 집안의 머리가 되어야 한다고 제의하는 말을 듣고 그 남자는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처음에 그는 이러한 책임들을 지는 것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결국 자기의 입장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결혼을 법적으로 등록하였고, 그 여인과 자녀들은 남자의 성을 따르게 되었다. 곧 이 ‘카시’ 여인은 침례를 받았으며, 그와 그의 자녀들이 집회에 참석하고 ‘카시’ 산지에 사는 다른 사람들에게 왕국의 소식을 전하는 데 참여하는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격려적이다.

‘방글라데시’에서의 부가적인 책임

1971년 12월로 소급해 보면, 그 때 인도는 인접국 ‘파키스탄’과 전쟁 상태에 있었다. 12월 3일 두 나라 사이의 적의가 폭발되었을 때, 인도군은 동‘파키스탄’을 침입하였다. 3일 후 신생국 즉 ‘방글라데시’가 탄생되었다. 13일 전쟁은 1971년 12월 16일에 끝났으며, ‘방글라데시’는 ‘파키스탄’으로부터 분리되어 인도의 동맹국이 되었다. 1973년 ‘왙취 타워 협회’ ‘봄베이’ 지부 사무실은 ‘방글라데시’에서의 사업을 감독하도록 요청을 받았다. 우리가 알고 있기로는, 그곳에 왕국 전도인이 한명도 살고 있지 않았으며, 단지 그 지역에 우리의 잡지 예약자가 몇명 있었다. 이들 예약자들에게 편지를 보냈지만 한 사람만이 성서 연구에 적극적인 관심을 나타내었다. 인도 ‘파이오니아’들이 거주 허가를 받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인도의 특별 ‘파이오니아’인 ‘P. 싱’ 형제와 ‘P. 몬돌’ 형제가 한정된 기간 동안 ‘방글라데시’로 파견되었다.

“하나님의 승리” 대회들

1973년 9월에 ‘마드래스’에서 열린 인도의 “하나님의 승리” 전국 대회는 작은 국제 대회와 같았다. 9개국으로부터 형제들이 참석하였으며 회기는 9개의 인도 방언과 영어로 열렸다. 이 대회는 인도 사상 최대의 대회였다! 공개 강연 참석자는 3,225명이었다. 이 대회에서 175명이 침례를 받았으며, 인도에서 단일 대회에서 침례받은 자 수로는 가장 많은 수였다.

‘애버츠베리’라고 하는 우리 대회장에서는 그달 초에 ‘명망높은 결혼식’이 있었으며, 그 결혼식을 위해 임시 건물이 세워졌다. 그러나 운동장은 거의 엉망인 채로 남겨져 있었다. 대회 전에 얼마 안되는 형제들에게 해야 할 일은 엄청나게 보였다. 하지만 대회 감독자인 ‘버어나아드 펑크’ 형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 대회가 있기 꼭 일주일 전에 인도의 수상인 ‘인디라 간디’ 여사가 ‘마드래스’를 방문하였으며, 바로 그 대회장에서 그가 연설하도록 마련되었다! 그리하여 구석구석이 말끔히 정돈되어 ‘하나님의 승리’ 대회에 때맞추어 ‘면모가 일신’하게 되었다!”

「왕국 소식」 전도지가 훌륭한 역할을 하다

‘마드래스’ 전국 대회가 있은 직후, 대단한 열성으로 왕국 소식 전도지가 배포되었다. 이 활동은 새로이 자격을 갖춘 사람들이 전파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하도록 도움을 주는 데 크게 자극이 되었다. 이 전도지 배부가 그토록 훌륭한 결과를 가져오리라고는 아무도 몰랐다. 여하간 이 활동으로 인하여 상당히 많은 일이 성취되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남 인도에 있는 ‘마듀라’에서 한 남자는 정규 호별 방문 배부 때 전도지를 한부 받았다. 그는 멀리 떨어진 곳에 살고있는 자기 아버지를 방문하러 갈 때 그 전도지를 가지고 갔다. 그는 그 지방 교직자로 있는 자기 아버지에게 이 전도지가 관심거리가 되리라고 생각하였다. 사실 그러하였다! ‘솔로몬’은 지부 사무실에 더 자세한 점들을 편지하였으며, ‘타밀 나두’에 있는 ‘마듀라’ 회중에 여러 가지 지시가 보내졌다.

한번은 감독자이며 특별 ‘파이오니아’인 ‘알렉산더’ 형제가 ‘솔로몬’을 찾아가 보았다. 그는 ‘버스’로 갈 수 있는 데까지 간 다음, 약 10‘킬로미터’의 거리는 쨍쨍 내려 쪼이는 불볕 속을 걸어서 드디어 그를 만났다. 즉시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다. 몇개월 후, 1975년 ‘마듀라’에서 열린 “하나님의 주권” 지역 대회에서 ‘솔로몬’ 형제는 침례를 받았다. 실로 전도지 배부가 가져온 훌륭한 결과였다!

본부의 확장

1973년에 인도 협회 지부 건물은 증가하는 전국적인 활동과 ‘봄베이’ 시 대회 사정으로 인하여 확장시킬 필요가 있었다. 인도의 노련한 건축 기사 중 한 사람이 새로운 건축 설계를 하였다. 더 필요한 곳에서 봉사하고 있던 ‘캐나다’ 형제인 ‘프랭크 쉴러’ 형제의 감독하에 1973년 12월 8일 건축 공사가 시작되었다.

노천 ‘테라스’ 위에 지붕이 씌워졌으며, ‘테라스’ 자체는 ‘봄베이’의 아름다운 대회 회관이 되었다. 이것은 인도의 최초의 대회 회관이었으며, 안락하게 600명의 형제들을 수용할 수 있었다. 대회 회관은 또한 두개의 ‘봄베이’ 회중들을 위한 왕국회관으로도 사용된다.

이러한 건축으로 말미암아 협회는 이전 왕국회관을 개조하여 가외의 ‘벧엘’ 숙소도 만들고 적절한 사무실 공간도 얻게 되었다. 원래의 일층 사무실은 잡지 및 예약부 그리고 가외의 창고로 이용되었다.

1974년 6월 15일이 그 건물의 “봉헌식 날”로 정해졌다. 이것은 건축 사업을 수행해 나아가는 데 자극제가 되었다. 설계에 따라서 확장 시설을 마쳤고 봉헌식은 예정된 대로 거행하였다.

‘시킴’이 인도와 합병하다

1974년 9월 인도 의회는 ‘시킴’을 인도 연방과 합병하는 문제를 협의하였다. 그 당시, ‘시킴’에는 21명의 여호와의 증인들이 있었다. 그 나라와 인도와의 정치적 연관성으로 볼 때, ‘시킴’의 야외 봉사 보고와 인도의 보고를 합치는 것이 적절하게 생각되었다.

‘겅톡’에서는 그리스도인 활동이 활발하다. 그 곳에는 네명의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회중과 함께 봉사하고 있다. ‘시킴’ 내의 다른 회중들은 ‘청붕’과 ‘삼동’에 있다.

1976년에 영국 ‘런던’에 사는 ‘시킴’인 형제이자 장로인 ‘로버어트 라이’ 형제는 자기 아내와 함께 ‘청붕’에 왕국회관을 지을 기금을 가지고 ‘시킴’까지의 먼 거리를 무릅쓰고 여행을 해 왔다. 2개월 안에 그들은 60명 가량을 수용할 수 있는 실용적인 건물을 완성하였다. 이 일을 마친 다음 ‘라이’ 형제 부부는 ‘런던’에 있는 그들의 집으로 돌아갔다.

1975년—인상적인 한 해

실로 1975년은 인도의 형제들에게 감동적인 한 해였다. 그 해 초에 우리는 두명의 통치체 성원 즉 ‘N. H. 노워’ 형제와 ‘F. W. 프랜즈’ 형제의 기억에 남는 방문을 즐겼다. 이 방문하는 형제들의 연설을 듣기 위해 인도 각처의 먼 지방에 있는 증인들이 ‘봄베이’로 여행해 왔다. 영적으로 격려가 된 그 이틀간 948명의 형제들이 새로이 확장한 지부 건물 구석구석에 꽉 찼었다. 무엇보다도 ‘노워’ 형제는 젊은이들이 회중 내에서 책임을 지기 위하여 발전하도록 권면하였다.

다음에 감동적인 사건은 3월 27일에 있었던 주의 만찬이었다. 인도에서는 처음으로 참석자가 10,000명선에 이르는 기록을 세웠다. 이것은 실로 이곳의 4,531명의 증인들에게 할 일이 많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 주었으며, 또한 여호와의 봉사에 힘써 일하도록 그들에게 자극이 되었다.

피 문제

그동안 야외에서 일하는 형제들은 성서 원칙에 고착하는 데 필요한 인식을 더욱 강력히 발전시키고 있었다. 예를 들어 보자: ‘뱅갈로르’ 근처의 ‘낙원 농장’ 회중의 한 특별 ‘파이오니아’인 ‘무니야마’ 자매는 심한 복부 종양이 생겨서, 상당한 피를 잃고, 몸이 매우 약하게 되었다. 그가 수혈을 거절하자 교회 소유의 그 병원에서는 그 자매를 받기를 거절하였다. ‘무니야마’ 자매는 다른 병원으로 옮겼지만, 거기서도 피 없이는 수술하기를 거절하였다. 그 당시 사태가 심각하였다. 그러는 동안 ‘뱅갈로르’의 ‘맬’ 형제는 친척되는 그 첫 번째 병원의 외과 과장을 설득시켜 ‘무니야마’ 자매를 받도록 하였다. 그 의사는 피없이 수술을 하였으며, ‘무니야마’ 자매는 회복되었다. 이 사실은 그 병원을 경영하는 교회 당국자들에게 굉장한 증거가 되었으며, 전체 병원 직원들도 여호와의 증인들을 존경하게 되었다. 이제 ‘무니야마’ 자매는 자기의 ‘파이오니아’ 임지로 되돌아가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의 소식을 전하고 있다.

증거를 확장함

왕국 전파 사업은 멀리 떨어져 있는 북동부의 구역들에서도 발전하고 있다. 예를 들면, ‘마니푸르’에 있는 ‘임팔’에서 특별 ‘파이오니아’인 ‘K. V. 조이’는 ‘탕클 나가’ 부족의 한 십대를 만났다. 이 젊은이는 즉각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지만, 동료 불교인들로부터 압력을 받고 나서 회의가 생겨 하던 연구를 중단하였다. 그러나 ‘그레이스’라고 부르는 이 ‘나가’인 젊은이는 후에 학교 교과서에서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를 발견하게 되었으며, 또한 어떤 통속적인 “그리스도교” 관습들이 이교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 책으로부터 배우게 되었다. 그는 ‘조이’ 형제와 성서 연구를 다시 시작하였다.

이제 종교적인 사회의 압력이 심각해졌다. 그 젊은이는 이렇게 말한다. ‘나의 부족 마을 지도자들은 내가 찾은 새로운 종교를 버리고 침례 교회로 되돌아 가든가 250‘루피’의 벌금을 내야지, 그렇지 않으면 부족의 관례대로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내게 위협을 하였다. 나는 이러한 위협을 무시하였으며, 얼마 후 나의 형 ‘안감’, 사촌 ‘나르싱’과 나는 그 교회를 탈퇴하였다. 1975년 나는 여호와께 대한 나의 헌신의 상징으로 침례를 받았다. 그 후 얼마 안있어 ‘안감’과 ‘나르싱’도 침례를 받았으며, 그들은 우리 마을에 그대로 남아서 최근까지 사람의 머리를 베어 간직하는 사람들인 우리 부족들에게 진리를 전하였다. 지금까지도 우리 마을의 어떤 집 앞에는 과거의 영광의 잔재의 표시로서 인간 두개골을 걸어 놓고 있다.’

인쇄된 하나님의 진리가 또한 북동부 여러 부족들의 지역에 배포되고 있다. 1973년부터 1975년 사이에 약 17명의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그곳에서 4,769부의 서책들과 그 두배에 해당하는 잡지들을 배부하였다. 이들 특별 ‘파이오니아’의 대부분은 인도에서 가장 많은 증인들이 집결해 있는 멀리 떨어져 있는 ‘케랄라’ 주로부터 왔다. 남인도로부터 온 이들 ‘파이오니아’들은 1,931‘킬로미터’나 멀리 떨어져 있는 낯선 구역에서 봉사하기 위하여 기꺼이 자기들의 고향을 떠났다. 새로운 언어를 배워야 하고 전혀 다른 습성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서 일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은 그들에게 외국 임지나 다름이 없었다. 수년 내에 진리가 전파되었고, 그곳 부족들로부터 나온 50명의 그 지방 사람들이 침례를 받았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네 방언으로 서적들을 번역할 수 있게 되었다.

더욱 더 많은 봉사자들을 확보할 수 있게 됨에 따라 협회는 이제까지 왕국 전파에 관하여는 “미개척” 지역인 대도시들에서 일을 시작하였다. 예를 들면, 선교인 집을 ‘비하르’ 주의 ‘파트나’에 개설하였다. 그곳에서 ‘알포오드’ 가족이 봉사하였다. ‘바바라 알포오드’와 그의 네명의 자녀들은 인도인이었는데, ‘캐나다’로 이민을 가서 거기서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나중에 ‘조세핀 알포오드’가 ‘길르앗’ 학교에 참석하였으며, 인도로 임명을 받았다. 그리하여 어머니인 ‘바바라 알포오드’와 그의 자녀들 모두는 ‘파트나’ 시에 있는 선교인 집에서 봉사하기 위해 기꺼이 인도로 돌아왔다.

출판 사업의 발전

인도에서는 대부분의 주들이 그 지방 언어에 따라 구분되어 있어서 각 주에는 그 나라의 언어가 있었다. 어떤 언어의 책은 그 언어가 사용되는 곳에서 인쇄해야 하였다. 우리는 훌륭히 인쇄를 해 낼 수 있고 또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인쇄를 감독할 수 있는 그런 장소를 찾아 내야 하였다. 대부분의 경우 ‘파이오니아’들은 좋은 책을 생산해 내는 방법을 훈련받아야 하였으며, 이러한 훈련은 지부 사무실로부터의 편지로 하였다. 인쇄 과정 중에는 무수한 편지들이 오갔다. ‘파이오니아’들은 또한 인쇄 업무를 정확하게 감독할 자격을 구비하기 위하여 그들 자신의 언어에 관한 지식을 발전시켜야 하였다. 이와 같이, ‘봄베이’ 지부 사무실은 ‘원격 조정’ 제도를 통하여 열 한 군데에서 하는 인쇄 조직을 운영하였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이러한 마련은 또한 상업적인 인쇄소들에게 협회가 요구하는 높은 수준의 서적들을 생산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일도 포함되었다. 여러 곳에서 이들 인쇄업자들은 자기들의 인쇄 수준이 높아진 것은 협회 책들을 인쇄하는 일을 돌보는 ‘파이오니아’들의 주의깊은 감독에 주로 기인하였다고 생각하였다.

여호와의 종들은 오랫 동안 성서 진리를 인도의 여러 언어로 인쇄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 왔다. 1912년 초, ‘왙취 타워 협회’의 초대 회장 ‘C. T. 러셀’은 우리의 소책자들이 ‘힌두’어, ‘구자라티’어, ‘말레야람’어, ‘텔루구’어, ‘마라티’어 및 ‘타밀’어 즉 여섯 가지 주요 인도 언어로 번역되도록 마련하였다. 1976년 초에 인도의 지부 사무실은 인도 내의 밭에 20가지의 다른 언어들로 된 책자들을 공급하고 있었다. 지난 5년 동안 이 나라에서 636,677권의 서적이 인쇄되었으며, 이것은 그 이전 5년간에 비하여 500‘퍼센트’ 이상 증가한 양이다. 「파수대」는 일곱가지 언어로 만들어지고 있으며 앞으로 두 가지 언어가 더 나오게 될 것이다. 「깨어라!」는 두 가지 인도어로 발행되고 있다. 집지들은 이 나라로부터 73개국으로 발송되고 있다. 이 모든 출판 활동을 위하여 지부 사무실 밖에서 일하는 사람들 외에도 번역, 인쇄 및 발송을 위해 50여명 이상이 일을 한다.

인도 정부의 최근 정책으로 인하여 서적 수입은 극히 제한되어 왔다. 5,000‘달러’ 상당의 서적들을 수입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신청해야 하였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이것이 깎이어 1,250‘달러’어치로 줄어 들었다. 1975년에 우리는 6,250‘달러’어치의 서적 수입 면장을 신청하였다. ‘브루클린’으로부터 6,250‘달러’어치의 수입을 허락하는 면장을 받았을 때 우리는 말할 수 없이 기뻐하였다! 인도에 영적 양식을 풍부히 공급하는 일에서 여호와의 축복은 계속되어 왔다.

지역 대회들은 꾸준한 성장을 알려 주다

해가 지남에 따라 지역 대회들이 정기적으로 개최되어 왔으며, 인도 전역에서 더욱 강화된 증거를 받는 도시들의 수도 증가해 왔다. 대회들은 여호와의 목적에 관심을 나타내는 사람들의 수가 꾸준히 증가해 왔음을 나타내 준다. 예를 들어 1975년에는 15개의 “하나님의 주권” 지역 대회들이 이곳에서 열렸으며, 243명이 침례를 받았고, 공개 집회 참석자 수는 6,061명이었다. 그 당시의 인도의 왕국 전도인 수는 4,300명이었다.

이들 대회에서 제공할 성서 ‘드라마’를 만드는 일로 지부의 일이 많아졌다. 조그마한 지부 사무실에서 또는 지부 감독하에 열 가지 언어로 ‘드라마 테이프’를 만들기 위해 무척이나 많은 일을 하였다! 먼저 대회 원고들을 번역해야 하였다. 다음에 각자는 녹음을 위해 성서의 인물들을 맡기 위해 훈련을 받아야 하였다. 지부 사무실에서는 네 가지 언어의 ‘드라마’만 준비한다. 나머지 ‘드라마’들은 야외에 있는 형제들이 준비하였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능력도 부족하였고, 모든 배역에 알맞는 적절한 형제 자매들을 찾아내기가 어려웠다.

녹음실은 매우 허술한 가정집이었다. 종종 형제들은 새벽 한시가 되어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녹음을 시작하지 못하곤 한다. 한번은, 인근 연못에서 개굴개굴 울어대는 개구리 소리를 조용하게 만들기 위해 두명의 형제로 하여금 그 연못에 돌을 던지도록 임명한 적도 있었다. 한번의 지역 대회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데 6개월 동안 애를 써야 한다. 그러나 자기네 언어로 열리는 대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나타내는 감사는 그러한 수고를 드릴 가치가 있게 한다.

새로운 지부 운영

다른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1976년부터, 인도에서의 왕국 전파 사업의 감독은 사회자가 윤번하며, 한명의 영구 조정자가 있는 지부 위원회가 맡게 되었다. 이러한 마련은 점점 많아져 가는 일과 어떠한 야기되는 문제들을 처리하는 데 특히 발전적인 조치로 생각되었다. 이것은 지방 형제들에게 감독의 책임을 더욱 넓혀 주고, 위원회 성원이 야외 활동을 좀더 면밀히 살펴보게 함으로써 야외에서의 문제들을 광범위하게 파악하도록 해 주었다.

하나님과 함께 장차 수행할 일을 위한 기초

이 세대 내에 일어날 놀라운 사건들을 예리하게 내다 보면서 인도, ‘네팔’, ‘방글라데시’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여호와의 눈에 보이는 조직과 밀접히 연합함으로써 앞에 있는 시련에 대비하고 있다. 인도에서의 최근 전도인 최고 기록은 4,687명이었으며, 1976년 4월 14일에 있었던 그리스도의 죽음 기념식에는 11,204명이 참석하였다. 인도에서는 단지 1명의 참다운 그리스도인만이 예수의 기름부음받은 추종자들임을 나타냈다.

인도는 넓이와 인구가 무척이나 광대하지만 여호와의 설립된 왕국에 관한 증거를 받고 있다. 1912년 이래 인도의 무수한 사람들 가운데서 성서 진리가 선포되어 왔다. 이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해 주기 위하여 수많은 성서들과 기타 그리스도인 출판물들, 확성 장치를 한 자동차로 행한 공개 강연 운동, 축음기 봉사, 성서 소식을 호별 방문으로 전하는 일, 재방문 및 성서 연구 등등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하여 힘써 노력해 왔다. 매우 다른 기후 조건, 건강의 위험, 기타 여러 가지 역경에도 불구하고, 수백만의 사람들은 성서의 구원의 소식을 들을 기회를 받았다. 수천명의 사람들이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다.

인도에서는 여러 가지 다른 언어 지역들에 사는 흩어져 있는 격지 전도인 집단들로부터 밀접히 짜여지고 연합된 그리스도인 복음 전도자들의 연합체에 이르기까지 신권 조직의 점진적인 성장을 경험해 왔다. 거짓 종교의 냉담과 이따금 일어나는 광신자들의 폭발, 두차례의 세계 대전중의 금지령, 정치적인 투쟁 및 기타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었음에도 이러한 결과를 이룩하였다. 이 모든 상황 속에서도 여호와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셨으며, 우리는 그분의 증인으로서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 됨을 깊이 감사하는 바이다.—고린도 후 6:1.

[47면 삽화]

1930년대에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데 사용된, 녹음 재생기를 장치한 ‘하우스 카’

[96면 삽화]

‘봄베이’ 소재 지부 사무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