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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스페인’

‘스페인’

‘스페인’! 하면 무엇이 연상되는가? 투우?, ‘플라맹고 댄스’? 아니면 ‘엘 그레소’와 ‘고야’의 그림들?

‘스페인’이라는 말을 들을 때, 그러한 것들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 나라는 매우 다양하다. ‘스페인’ 사람들의 외모에서는 여러 세기 동안 ‘켈트’족과 ‘무어’족의 침략을 받은 인종적 증거가 엿보인다. 이 나라에는 네 가지 언어 외에도 몇 가지 방언들이 더 사용되는데, 그들을 열거해 보면, ‘스페인’어, ‘바스크’어, ‘카탈라’어, ‘갈리시아’어 등이며, 이 후자는 ‘포르투갈’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상당수의 ‘아랍’어가 남아있는데, 이는 ‘아랍’이 8세기 동안, ‘이베리아’ 반도를 장악하고 난 후 남겨진 ‘아랍’어 단어들이 많은 ‘스페인’ 어휘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스페인’은 한 개의 섬이나 다름없으며, 서쪽으로는 대서양에 접해 있고, 동쪽으로는 지중해에 접해 있다. 이 나라는 3,000‘미터’ 이상 솟아 있는 ‘피레네’ 산맥에 의하여 ‘프랑스’ 및 ‘유럽’의 일부와 분리되어 있다. ‘스페인’의 중부는 고원 즉 ‘메세타’ 고원을 이루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인상적인 ‘피코스 데 유로파’를 포함하고 있는 산맥에 의하여 경계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눈덮인 유명한 ‘시에라 네바다’ 산맥에 의하여 경계가 이루어져 있다. 한 가지 진기한 사실은 ‘스페인’이 ‘유럽’에서는 ‘스위스’ 다음으로 평균 고도가 높은 지역이라는 점이다. 그뿐 아니라, ‘스페인’은 ‘유럽’에서 가장 강우량이 적은 나라이긴 하지만, 비는 주로 북쪽에 온다. 따라서 이 나라가 “햇빛의 나라”라고 불리우는 것도 당연하다. 그리고 매년 북부 ‘유럽’의 관광객들이 이 나라로 몰려들고 있다.

‘스페인’에 살고 있는 성서 연구생에게 인상깊은 한 가지 사실은 기후, 지형 및 음식이 ‘팔레스타인’과 매우 흡사한 점이다. ‘스페인’에는 그 나라 자체의 ‘감람산’들이 있으며, 지금까지도 소와 나귀들이 사용되고 있다. 이 나라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흔히 개를 데리고 다니는 목자들을 보게 되는데, 그들은 목초지를 따라 양과 염소떼를 이끌고 다닌다. 추수 때에는 농부들이 바람부는 타작 마당에서 일을 하며, 밀을 바람에 날려 겨와 분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남부의 일부 도시들에는 ‘데이트’ 종려나무들이 자라고 있으며, 정원들에서나 광장에서는 ‘오렌지’와 ‘레몬’나무들을 볼 수 있다.

‘스페인’의 종교

‘스페인’ 사람들은 본래 종교성이 있다. 비록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제에 대한 신뢰감을 잃었지만, 그들 대부분은 하나님을 믿는다. 1936년 7월부터 1939년 4월까지 계속된 내란으로 일백만명 이상의 인명 희생을 치렀다. 이 엄청난 살상은 살인과 복수에 참여했던 양편 모두에게도 좋지 못한 종교적, 정치적 열매를 맺게 하였다. 공화당(공산주의자-사회주의자-자유주의자) 편은 사제들, 수녀들 및 교회에 충실한 관리들을 살해하고자 하였으며, 국민당 편(‘가톨릭’의 ‘파쇼’주의의 군부 지원을 받은)은 ‘로마 가톨릭’ 교회에 충성을 바치지 않는 사람들을 전국에서 살해하였다.

이러한 내란은 깊은 상처를 남겼으며, 이것은 여호와의 증인들의 전파 사업에 대하여 구 세대가 나타내는 반응에서 아직도 역력하다. 내란 즉 “종교 전쟁”에 참여했던 전통적인 ‘가톨릭’ 교도들은 “오류”가 마구 퍼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며, ‘바티칸’과 정교 협약을 맺은 나라에서는 훨씬 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분열된 여러 분파들(보수파, 진보파, ‘오퍼스 데이’ 등등) 중 어느 것이건 간에 그 교회의 주요 지지자들은 자기들의 물질적 이익과 번영을 그대로 유지하는 데 집착해 온 중산층과 상류층 출신들이다. 그러나 일반 대중들, 특히 도시민들은 교회에 대하여 무관심하며, 교회는 주로 침례식, 결혼식, 장례식, 및 어쩌다가 한번씩 ‘미사’에 참여하는 데 이용하고 있다.

의심할 바 없이, 1962년부터 1965년 사이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이 ‘가톨릭’ 국가 내에서는 종교적 풍토가 바뀌었다. ‘마드리드-알칼라’의 ‘스페인’ 대주교가 1965년 12월 8일에 다음과 같이 말한 바와 같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들과 그 교인들에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역사적이고도 탁월한 새로운 정신, 새로운 인도주의, 새로운 희망 및 새로운 ‘비젼’을 남기고 오늘 폐막되었다.” 이 “새로운 정신”과 “새로운 ‘비젼’”은 종교 및 정치 지도자들로 하여금, 1967년의 종교의 자유에 관한 법을 포함하여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바라지 않는 변화들을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그 법은 여호와의 증인들의 전파 활동에 대한 입장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더욱 관대한 태도를 갖도록 만들었다.

최초로 씨가 뿌려지다

‘스페인’과 그 국민, 지리, 현대 역사 및 종교를 이처럼 간단히 살펴봄과 동시에, 이제 이 나라에서 참 그리스도교가 수행해 온 일을 살펴보기로 하자. 물론, ‘스페인’에서 전파한 최초의 그리스도인 여호와의 증인은 사도 ‘바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미개척지로 가기를 원하였기 때문에 왕국의 좋은 소식을 ‘스페인’에 가서 전할 계획을 세웠다.—로마 15:22-29.

그러나 20세기에는 어떠한가? 1919년 7월 1일호 ‘스페인’어 「파수대」지에는 ‘스페인’에 사는 한 그리스도인 여인의 막내 딸로부터 온 한통의 편지가 실려 있다. 그 편지 가운데서, 어린 ‘마리아’는 “하나님께서 저와 저의 엄마에게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하여 자기 어머니와 함께 ‘파리’로 가게 된 기쁨을 이야기하였다. 우리는 그 자매의 이름을 알지 못하며, 한달 후 ‘스페인’어 「파수대」에 발행된 편지에 언급된 사람의 이름도 모른다. 그 편지는 이웃의 ‘한 ‘가톨릭’교인으로부터 익명의 편지를 받은 ‘마드리드’에 사는 한 자매로부터 온 것이었다. 그 편지의 일부는 다음과 같았다: “부인, 조심하시오. 당신은 올무에 빠져있어요. 누군가가 당신의 행동을 감시하고 있어요. 틀림없어요. 당신은 하느님의 대표자이신 교황과 그의 봉사자들에게 순종하기를 거부하고, 말과 좋지 않은 본으로 그분들이 대표하는 거룩한 봉사를 짓밟고 있는 거예요. 당신이 열을 내어 하는 그 일을 중지하시오.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할테니까요. 조용히 제안하는데, 그 일을 중지하든가 아니면 다른 곳으로 가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신에게는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이오.” 왕국 소식에 관해 불쾌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

하지만, 진리의 씨는 ‘스페인’에서 뿌려지고 있었다. ‘왙취 타워 협회’의 2대 협회장인 ‘J. F. 러더포오드’ 형제는 이 나라에 적당한 발판을 두고 왕국 봉사를 시작해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미국의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에 ‘후앙 무니스’라고 하는 열성적인 ‘스페인’ 형제가 있었다. ‘러더포오드’ 형제는 그에게 ‘스페인’으로 갈 것을 요청하였으며, 1920년 말 아니면 1921년 초에 ‘무니스’ 형제는 자비로 본국으로 떠났다. 그는 ‘스페인’ 북부의 ‘아스투리아스’인이었으며, 자기 누이와 함께 살기 위해 그리로 돌아갔다. 그의 증거 구역은 어디였는가? ‘아스투리아스’에 있는 광산촌이었다.

1923년 4-5월호 ‘스페인’어 「파수대」에 실린 한 편지에서, ‘무니스’ 형제는 그가 한 마을에서 주로 사회주의적 경향을 가진 사람들에게 증거하면서 4일을 보냈다고 설명하였다. 그들은 사회주의에 의한 세계 변화를 주장하였고, 그 형제는 하나님의 왕국을 통한 세계 변화를 주장하였다.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 중 한 사람은 “이 사람과 우리와의 차이는 그에게는 하나님이 있고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없다는 점이다” 하고 결론을 내렸다고 하였다.

약 일년 후 또 다른 편지에서 ‘무니스’ 형제는 다음과 같이 썼다. “현재, 교직자들과 ‘손에 칼을 쥐고 있는 자들’에게 완전히 맡겨져 있는 새로운 정부(‘프리모 데 리베라’ 장군의 군사 독재)하에서, ‘볼찌어다 내가 ··· 너희와 ···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주의 말씀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공포에 질려 버릴 것입니다. ··· 누구든지 정부나 교직자들의 비위를 거스르는 말을 하거나 글을 쓴다면 ··· 그러한 사람은 타당성 여부를 막론하고 투옥됩니다.”—마태 28:18, 20.

‘무리스’ 형제는 장성된 그리스도인들과도 전혀 접촉을 갖지 못한 채 3년간 고독하게 인내해 왔으며, 분명히 얼마간 침체되어 있었다. 그는 격려가 필요하였기 때문에, ‘러더포오드’ 형제는 그에게 편지를 보내, 협회장이 ‘마드리드’에서 연설을 할 허락을 받을 수 있는가 알아 보도록 요청하였다. 그러나 ‘무니스’ 형제는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러더포오드’ 형제가 제의하였던 방문은 연기되었다. 하지만 1924년 5월에 그 두 형제들은 ‘파리’의 한 ‘호텔’에서 만났으며, ‘스페인’ 내의 상황을 토의한 후, ‘러더포오드’ 형제는 ‘무니스’ 형제에게 다른 임명을 주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그로부터 얼마 오래지 않아서, 그는 ‘아르헨티나’로 가라는 편지를 받았다.

이것은 ‘러더포오드’ 형제가 ‘스페인’에서의 사업을 취소시킨 것을 의미하였는가? 결코 그렇지 않았다. 몇 개월 후, 남‘아메리카’에서 훌륭한 성공을 거두고 있던 ‘조오지 영’ 형제가 ‘스페인’으로 임명되었다. 오래지 않아, 전국적인 규모로 증거를 시작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주목할 만한 방문

‘영’ 형제는 1925년 그가 ‘스페인’에 도착한 후 곧, ‘러더포오드’ 형제의 방문을 위한 허락을 다시 한번 신청하였으며, 이번에는 허락을 받아냈다.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에서, 그 다음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공개 강연을 하도록 마련이 되었다. 이처럼 성공을 거둔 이유는 ‘영’ 형제가 영국 대사의 협조를 구하였고, 그 대사는 ‘영’ 형제를 정부 관리에게 소개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며칠이 지난 후, 정부는 그 집회들을 승인해 주었다.

‘영’ 형제는 광고 쪽지를 사용하여 그 강연을 광고하는 일이 허용될 것같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신문에 광고를 냈다. 일요일 오전 11시에 ‘바르셀로나’에서의 집회가 마련되었다. ‘러더포오드’ 일행이 그가 연설하기로 되어 있는 극장에 도착해 보니, 얼마의 기마 경찰관들과 정부가 파견한 특별 감시인이 와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러더포오드’ 형제가 무대 가까이에 있는 대기실로 들어가다가 ‘바르셀로나’ 부지사를 만났는데, 그는 ‘러더포오드’ 형제에게 정중히 인사를 하였다. 이 관리는 연설이 끝날 때까지 남아 있었다. 능숙한 통역이 고용되었는데, 정확을 기하기 위하여 연설을 사전에 번역하여 양편이 즉 ‘러더포오드’ 형제는 영어로, 통역은 ‘스페인’어로 읽었다. 아무런 방해도 없었으며, 그 집회의 결론에서 청중들에게 주소 ‘카아드’에 서명을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주소를 적어 놓고 간 사람은 702명이었으며, 청중은 2,000명이 넘었다. 성경에 관심을 일으키기 위하여 이름과 주소를 적어 놓고 간 사람들을 방문할 수 있었다.

신문 광고를 통하여, ‘마드리드’에서의 ‘러더포오드’ 형제의 연설 역시 주의를 끌게 되었다. 이곳에서의 마련들도 ‘바르셀로나’에서와 같았다.—극장 밖에는 경비하는 군인들이 있었으며, 안에는 ‘마드리드’ 부지사가 임석하였다. 그 역시 강연이 끝날 때까지 연단에 남아 있었다. 좌석 중 하나에는 영국 대사가 앉아 있었다. ‘스페인’ 관리들을 포함하여 기타 주요 인사들이 그 집회에 참석하였다. ‘마드리드’에서는 청중이 약 1,200명 참석하였으며, 그 중에 400명이 자기들의 주소를 제출하였다.

‘러더포오드’ 형제는 자기의 강연을 신문에 게재하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 정부의 승인 없이는 그러한 성질의 내용 중 아무 것도 ‘스페인’ 내에서는 발행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여호와께 감사하게도 그러한 진리의 출판물을 위한 한 가지 길이 열렸다. ‘마드리드’에서의 연설을 마치고 나서, 부지사와 ‘러더포오드’ 형제가 대기실에서 담화를 나누고 있던 때에 대신문사의 경영주가 들어와 연사에게 소개되었다. ‘러더포오드’ 형제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통역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지사님께, 이 강연을 신문에 게재하도록 하는 것이 ‘스페인’ 국민에게 유익할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가를 물어 보시오.” 그 지사는 즉시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런 일에 대하여 아무런 이의가 없읍니다. 게재 못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착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신문 경영주는 특종 기사를 낼 기회를 잡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아무런 어려움없이 1925년 5월 12일자 「인포르마시오네스」지에 그 강연이 게재되도록 마련되었다. 사실, 이 동일한 기사는 후에 소책자로 발행되어 ‘스페인’ 전역에 배포되었으며, 그리하여 격리된 곳들에도 증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1925년 5월, ‘러더포오드’ 형제가 ‘리스본’에서 강연을 하였을 때, ‘후앙 안드레스 베레코체아’라고 하는 한 ‘아르헨티나’인이 처음으로 진리를 접하게 되었다. 그 후 줄곧 그는 열심히 진리를 옹호했고 두 아들 ‘후앙 카를로스’와 ‘알바로’에게도 관심을 갖게 하였다. 내란으로 인하여 ‘스페인’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던 이 가족은 ‘알바로’를 통해 진리를 접하게 되었다. ‘알바로’는 아내와 함께 ‘왙취 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를 졸업하고 1953년에 ‘스페인’에서 봉사하도록 선교인으로 임명되었다.

지부 사무실이 개설되다

‘러더포오드’ 형제의 방문의 성공은 ‘조오지 영’ 형제의 감독하에 ‘스페인’에 ‘왙취 타워 협회’ 지부 사무실을 설립할 생각을 갖게 하였다. 지부 사무실 주소는 ‘마드리드’에 있는 ‘에두아르도 알바레스 몬데로’ 형제의 집이었다. 1925년 8월부터, 이 새로운 지부는 ‘스페인’어 「파수대」의 4‘페이지’ 축소판을 외부 인쇄 공장에서 인쇄하여 배부하기 시작하였다.

1925년은 협회의 ‘마드리드’ 사무실이 열심히 활동을 한 한 해로서, 그들은 「하나님의 거문고」 5,000부, 「지금 살아있는 수백만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10,000부를 발행하였다. 그 밖에도, ‘러더포오드’ 형제의 연설과 「죽은 자는 어디 있는가?」라는 소책자를 포함하여, 247,000부의 소책자를 배포하였다. 그해 말 보고가 알려 주는 바에 의하면, 왕국 소식이 “‘스페인’ 내의 모든 도시들과 마을들, 그외에도 ‘카나리’ 제도, ‘발레아레스’ 제도, ‘모로코’ 내의 ‘스페인 지구’의 주요 도시들에 전파되었다”고 하였다.

이 때쯤(1925-1926년), ‘영’ 형제는 땅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설명하는 “창조 사진-극”, 협회의 환등, 유성 영화 등을 보여 주고 있었다. 또한 1926년 6월에 ‘라디오’ 사용을 포함하여 신권적인 확장이 있었다.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 있는 두개의 가장 큰 ‘라디오’ 방송국에서는 ‘러더포오드’ 형제의 두 가지 강연을 방송하였다. 이 증거는 ‘스페인’ 구석 구석과 인근 나라들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1926년 5월, 영국 ‘런던’에서 주목할 만한 대회가 진행되는 도중 하나님의 백성은 “세계 통치자들에 대한 증언”이라는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영’ 형제는 그것을 ‘스페인’ 신문에 게재하고자 노력하였으며, 그의 노력은 드디어 성공을 거두어, 1926년 10월 3일자 「라 리베르타드」지에 전문이 게재되었다. 지부는 정규 부수 75,000부를 인쇄한 외에 수천부를 더 인쇄하여, 그들을 모든 정부 관리들, 시장들, 주교들 및 추기경들에게 발송하였다.

교직자들의 반대가 실효를 거두지 못함

물론, 이러한 모든 활동이 교직자들의 눈에 띄지 않을리 없었으며, 그들은 자기들의 영향력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얼마의 형제들이 체포되었고 그들의 서적들은 압수당하였다. 어떤 형제들은 직장에서 쫓겨났으며, 또 다른 형제들은 박해로 인하여 그들이 살던 마을에서 이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문을 통하여 그리고 설교단에서, 사람들은 「파수대」를 읽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 사실, ‘팜플로나’의 주교의 포고령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의 출판물을 “이교적이고, 비방적인 것이며, 엄격히 금지된” 것으로 분류하였다. ‘알리산테’ 주에 있는 ‘알코이’에서, ‘프란시스코 코르소’ 형제와 ‘막시모’ 형제 즉 두명의 ‘콜포처’ 다시 말하면 전 시간 전파자들이 체포되어 당국자들 앞에 끌려갔다. 감시를 받으며 며칠을 보낸 후, 그들은 즉시 그 마을을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을 심문한 경찰 책임자는 성경 한 부와 「하나님의 거문고」 한 부를 받았으며, 「파수대」를 예약하였다. 그는 확신있게 ‘코르소’ 형제에게 “당신네들이야 말로 ‘스페인’ 내에서 사람들에게 진리를 말하는 유일한 사람들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1926년 10월 중, 작지만 활동적인 일단의 왕국 선포자들은 ‘스페인’에서 세번째로 큰 도시인 ‘발렌시아’에서 「파수대」 22,000부를 배부하였다. 그곳 교직자들은 형제들이 ‘프리이메이슨’ 결사단원들이며, ‘마피아’단에 속해 있다고 마구 비난을 퍼부었다. 11월에 ‘바르셀로나’ 서남쪽 88‘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로마’의 본원지이며, ‘이베리아’의 고도인 ‘타라고나’에서 6,000부를 배포하였을 때, 박해는 최고조에 달하였다. 떳떳치 못한 방법을 써서, ‘가톨릭’ 학교의 어린 학생들을 시켜 우리의 출판물들을 수거해서, 그것을 사제장이 참석한 가운데 수녀원 마당에서 태워 버렸으며, 그 도시는 그 사건을 공휴일로 만들었다. 하지만 시민 대다수는 매우 분개하였으며, 그 도시의 당국자들은 자유주의자들이었으므로, 상당수가 「파수대」 예약을 하였다.

‘카달로냐’의 국제 도시인 ‘바르셀로나’에서의 반응은 어떠하였는가? ‘콜포처’인 ‘사투르니노 페르난데스’ 형제는 그곳 집단과 함께 일하고 있었다. 그들은 1926년 12월과 1927년 1월에 「파수대」가 금지되기 전 80,000부를 배부하였다. 두 형제는 ‘바르셀로나’에 조그마한 집회 장소를 마련하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허락이 거절되었다. 이러한 반대의 배후 인물은 누구였는가? 다름아닌 그 도시의 실질상의 통치자, ‘바르셀로나’ 주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르난데스’ 형제는 계속하여 한 친구의 집에서 평균 10명의 참석자들과 함께 매일밤 성서 집회를 개최하였다.

그 반대는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리고 우리의 사업은 여호와의 축복으로 계속 진전되었다. 1927년 협회의 지부 사무실을 ‘마드리드’에 있는 ‘프란시스코 코르소’ 형제의 집으로 이전하였다. 그 당시 ‘스페인’어로 책을 생산하는 가격은 매우 저렴하여 ‘스페인’어로 나오는 이전의 4‘페이지’ 「파수대」를 8면 판으로 만들었다. 또한 그 당시 미국 ‘캘리포오니아’ 주 ‘로스앤젤레스’에서 인쇄되고 있던 16‘페이지’ 판 ‘스페인’어 「파수대」를 ‘스페인’에서 구할 수 있었다.

좋은 땅에 씨가 뿌려지다

1920년대에, 왕국 전파 사업은 ‘스페인’의 2대 도시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 집중되었다. 때때로 증거하는 데 약간 색다른 방법이 사용되었다. ‘바르셀로나’에서 ‘콜포처’인 ‘사투르니노 페르난데스’ 형제는 사람들이 다니는 곳에 협회 책들을 진열해 놓고, 길바닥에 「하나님의 시대들의 도형」을 펼쳐 놓은 다음, 관심을 보이는 사람 누구와도 대화를 나누었다. 1927년 그 당시 ‘후앙 페리아고’ 형제가 진리를 배운 방식이 바로 그러한 방법이었다. 그는 ‘페르난데스’ 형제가 지옥불 교리에 관하여 어떤 사람과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는 것을 보고 깊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후앙’ 형제가 서적을 받았으며, 진리의 씨가 심어지게 되었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그의 관심과 여호와께 바치는 봉사의 해가 시작되었다.

재봉사였던 ‘카르멘 티에르라세카 마르탠’의 경우 역시 고려해 보자. 이 자매는 ‘마드리드’에 사는 자기 시숙으로부터 우리의 서적을 받았으나 그에 관해 잊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1927년 10월에 그는 ‘매어리 오닐’이라는 어느 외국인 부인 집에 고용되게 되었는데, 이 부인은 ‘프란시스코 코르소’ 형제의 아내였다. 부언하자면, ‘티에르라세카’라는 이름은 “마른 땅”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카르멘’은 진리의 씨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므로 “마른 땅”이 아님이 드러났다.

그 당시 ‘카르멘 티에르라세카’ 자매의 직업에 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조그마한 방에서 오전 내내 바느질을 하였다. 그리고 점심을 먹고 나서 그 일을 계속하였다. 때때로 나는 4시가 지나면 몇 사람이 찾아오는 것을 보았다. 나는 이야기 소리를 듣고, 그 날이 주인 부부를 위한 방문일이며, 그들이 아마도 ‘파아티’를 갖는가보다 하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조용해지고, 뒤이어 은은하고 가락이 잘 맞는 피아노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합창 소리가 들렸는데, 아름다운 찬송가를 부르는 소리와 같았다. 나는 이전에 그와 같은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짐작이 가겠지만, 성서 연구생들(그 당시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렇게 알려졌었다)이 그리스도인 집회를 가지는 것이었다. 참으로 “우연히도”, ‘카르멘 티에르라세카’는 ‘스페인’어 「파수대」가 만들어지는 바로 그 집에서 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때 ‘조오지 영’은 ‘스페인’을 떠났으며, 우리의 사업은 ‘에두아르도 알바레스’와 ‘프란시스코 코르소’에게 맡겨져 있었으며, 협회는 1930년 12월까지 ‘코르소’ 형제의 집에서 일을 보았다.

1920년대 중 몇 차례의 침례식이 이 나라 여러 곳에서 있었다. 예를 들면, 1927년에 ‘말라가’에 사는 ‘마누엘 올리베르 로사도’는 ‘마드리드’ 사무실에 편지를 보내, 누군가가 와서 자기에게 침례를 주도록 요청하였다. 사실, 1929년까지는 방문을 받지 못하여 침례를 받지 못하고 있다가 ‘프란시스코 코르소’ 형제가 4월 14일에 그 지방의 한 공중 목욕탕에서 그에게 침례를 주었다.

우리에게 있는 기록 중 또 한번의 침례식은 1928년 6월에 있었는데, ‘마드리드’에 있는 일단의 형제들이 그 날 ‘만자나레스’ 강으로 갔다. 거기서 큰 기쁨과 소박한 분위기가 넘쳐 흐르는 가운데, ‘카르멘 티에르라세카’는 한 형제와 함께 침례를 받았다. 부언하면, 이것은 전혀 감정적인 결정이 아니었다. 왜냐 하면 침례받기 이틀 전에 그 침례 지원자들은 ‘에두아루도 알바레스’와 ‘프란시스코 코르소’와 함께 만나 그들이 밟고자 하는 단계의 중요성을 토론하였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업이 활력을 얻다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말라가’, ‘웨스카’ 및 흩어져 있는 여러 도시들에 있는 조그마한 집단들과 야외에서 일하고 있던 10여명의 봉사자들과 더불어, 1929년부터 왕국 전파 사업은 활력을 얻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협회는 적절하게도 ‘뉴우요오크’ ‘브루클린’에 있는 협회 본부에서 보내 준 ‘미일레’ 평판 인쇄기를 사용하여 ‘마드리드’에서 협회 자체의 인쇄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 인쇄기는 1936년까지 잡지들과 소책자들을 생산하였다.

그 당시 우리의 활동 가운데 한 가지 특징은 공개적인 연단에서 좋은 소식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어떤 경우에는 ‘프로테스탄트’ 교직자들이 이러한 목적을 위해 그들의 교회당을 빌려 주기도 하였다. ‘말라가’에서는 네명의 다른 종파의 성원들에게 한 형제가 연설을 하고 난 후, 감독교회의 한 교직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이제까지 오늘밤과 같이 성서를 훌륭하게 설명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없읍니다. 이 사람이 말하는 것은 진리입니다. 우리 모두는 잠을 자고 있읍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와 같은 사람들이 더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프로테스탄트’의 모든 교파들이 다 그렇게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아니다. 침례교회에서는 특별 집회를 갖고 “우리에게서 양떼를 도적질해가고 이 나라를 위험스러운 책자들로 가득차게 만드는” 성서 연구생들을 근절시키자는 결의를 하였다.

1927년 이후, ‘마드리드’에 있는 협회 지부 사무실은 ‘에두아르도 알몬테로 바레스’의 감독을 받았다. 그러나, 1930년 봄에 ‘허버트 F. 개블러’가 ‘리투아니아’에 있는 그의 임지로부터 옮겨와 ‘스페인’ 지부 감독자로 임명되었다. 그 후 곧이어 우리의 집회들이 다른 나라들에서 일반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것과 같이 더욱 조직화되었다. 또 우리의 증거 사업이 이제까지는 비공식적이었는데 반하여, 호별 방문 전파 활동이 곧 훌륭하게 시작되었다.

초기에 ‘카르멘 티에르라세카’ 자매가 호별 방문 전파 활동에 참여하던 일을 상기하여, “나는 여호와께 기도로 그분의 사업을 하는 데 내 자신을 그분 손에 맡겼다”고 하였다. 그 당시에는 이 봉사를 위한 아무런 특별 훈련도 없었기 때문에, 그 일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궁금한 생각이 들지 모른다. 첫 집에서 한 여인이 ‘티에르라세카’ 자매가 제공하는 소책자를 받았다. 그 자매는 이렇게 부언한다: “다음 집에서도 전하였고, 그 다음 집에서도, 또 다음 집에서도 전하였으며 드디어 내가 가지고 나온 8권의 소책자 모두를 전하였다 ··· 내가 느꼈던 불안, 초조, 신경 과민 상태가 사라졌다. 이제 나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으며,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여호와의 친절과 도움에 대하여 그분께 감사를 드렸다.”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의 호별 방문 왕국 전파 활동이 시작된 것이다. 그 후 해가 지나면서 그러한 일은 많은 축복을 가져왔다!

내란 발발 이전의 정치적 배경

1931년 이전 ‘스페인’은 ‘알폰소’ 13세가 다스리던 왕국이었다. 1930년, 이 나라의 군사 독재자 ‘프리모 데 리베라’ 장군이 사임하였고 그를 뒤이어 ‘베렝구에르’ 장군이 집권하였는데, 그의 재직 기간은 1931년 2월에 끝났다. 그 때 왕은 ‘아스나르’ 제독에게 자기의 왕위를 유지시키려는 시도로 신정부를 구성할 것을 위촉하였다. 이 정부는 국민 투표를 실시하였으며, 이로 말미암아 공화국을 원하는 좌파가 주요 도시들에서 승리하였다. 모든 것을 잃었다는 것을 알고 피의 숙청을 피하기 위해 ‘알폰소’ 13세는 이 나라를 탈출하였다. 그리하여, 1931년 4월, ‘스페인’은 공화국이 되었다. 이것은 ‘가톨릭’ 교회에 일대 타격이었으며, 그들은 새로운 정부의 위세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같은 해인 1931년, ‘세구라 Y. 사엔스’ 추기경과 ‘톨레도’의 대주교가 이 나라에서 추방되었다. 1932년에 ‘예수회’가 금지되고, ‘스페인’으로부터 추방령을 받았다. 하지만 실상 그러한 추방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으며, 그들은 숨어서 또는 위장하여 남아 있었다.

이 나라의 분열 상태는 1933년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는데, 그 때 중앙 우익 정부가 권력을 쥐게 되었다. 이 연정은 교직자들을 반대하는 법률들을 폐지시켰으며, 1936년까지 권력을 쥐고 있었다가, 그 해에 의회가 해산되었다. 선거를 치르고 다시금 좌익 공화당, 사회주의 인민 전선 및 공산당이 추세에 따라 승리를 거두었다.

이러한 정치적인 추세는 우리의 사업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공화당이 가장 우세한 도시들에서 형제들은 그들이 종교 서적을 배부한다는 이유로 ‘파시스트’적 교회 첩자로 몰려 도시에서 추방되곤 하였다. 그리고 물론, ‘파시스트-가톨릭’의 본거지들에서는 형제들이 금지된 서적, 성서를 전한다고 해서 ‘프로테스탄트’ 또는 ‘프리이메이슨’ 결사단원으로 취급되었다.

정치적 추세에 따라서, 교직자들의 권력이 깨어져 버리게 되었고 사람들은 보다 큰 종교적 자유를 느끼게 되었다. 이것이 우리의 사업에 어느 정도 유리하기는 하였지만, 대부분의 국민들은 이제 이전의 종교적 기만을 알아차리게 되었고, 모든 종교 심지어 하나님으로부터도 완전히 돌아서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그리스도인 활동은 신속히 발전해 나아갔다.

전환기

‘개블러’ 형제가 ‘마드리드’에 있는 것을 ‘프란시스코 코르소’가 좋아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1931년에 ‘코르소’가 진리로부터 이탈하였고, 결국 자기 아내까지 버렸다. 그리하여 ‘코르소’의 집으로부터 지부 사무실과 인쇄 공장을 옮기는 것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1931년 1월에 사무실과 인쇄 공장이 새로운 집에 설치되었다.

그 해는 하나님의 백성이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이름을 채택한 특기할 만한 해였다. 미국 ‘오하이오’ 주 ‘콜럼버스’에서는 15,000명이 결의문으로 그 이름을 채택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마드리드’에서는 이를 위해 단지 15명이 함께 모였었다.

그 기간에 또 다른 변화들도 있었다. 예를 들면, 1931년 9월호 「파수대」를 기하여, ‘마드리드’판 「파수대」가 중단되었다. 하지만 세개의 십자 모양의 창문으로 강조된 탑 그림이 나오는 표지를 가진, ‘브루클린’에서 발행되는 「파수대」가 계속 도착하였다. “라 토르레 델 비기아”라는 잡지 명칭 위에 성서 연구생들이 오랫 동안 사용해 온 십자가와 왕관 모양이 있었다. 그러나 1932년 1월호로부터는 십자가와 왕관이 제거된 완전히 새로 도안된 표지로 바뀌었다.

이러한 변화의 바람은 ‘마드리드’에 세차게 몰아쳤다. 1932년 주의 만찬시에, 십자가와 왕관 모양을 수놓은 ‘테이블’보도 사라져 버렸다. ‘개블러’ 형제가 “이것은 없어져야 합니다. 없애 버리시오! 없애 버리시오!” 하고 말한 바와 같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늘 옷섶에 달고 다니던 십자가와 왕관도 사라졌다. 그리고 ‘왙취 타워 협회’ 회장들 즉 ‘C. T. 러셀’과 ‘J. F. 러더포오드’의 사진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 역시 ‘마드리드’에 있는 증인들의 집회 장소 벽에서 사라져 버렸다.

영국의 ‘파이오니아’들이 우리에게 도움을 주다

1931년 중, 협회는 ‘런던’과 ‘파리’를 포함하여 여러 도시들에서 일련의 대회들을 개최하였다. ‘개블러’ 형제는 이들 두 대회에서 연설을 하였으며, 거의 처녀지나 다름없는 ‘스페인’ 밭에서 도움을 줄 자진 봉사자들이 많이 필요하다고 설명하였다. 그 결과 세명의 ‘파이오니아’들이 이 도전을 받아들이기로 자원하였다. 그들은 ‘어어니스트 이든’, ‘프랭크 테일러’ 및 ‘존 쿠크’였다.

1932년 7월경, 이들 세명의 영국 ‘파이오니아’들은 ‘비스카야’의 도청 소재지인 ‘빌바오’라는 공업 도시에서 전파 사업을 시작하였다. 이 도는 ‘바스크’어를 사용하는 곳으로서 ‘바스크’ 도라고도 알려진 지역이다. 부언하자면, 이 복잡한 언어의 정확한 기원을 아는 사람은 실제로 아무도 없으며, 이 언어는 ‘스페인’어와도 연관성이 전혀 없다.

그 ‘파이오니아’들은 자기들의 사명을 설명하는 ‘스페인’어 증거 ‘카아드’를 사용하면서 ‘빌바오’에서 증거를 하였고, 많은 서적을 전하였다. 문이 열려 있기만 하면 그들은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한 적극적인 접근으로 하루는 ‘어어니스트 이든’ 형제가 한집에서 30부의 책을 전하였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가? 그는 문 하나가 조금 열려져 있는 것을 보고 밀고 들어가 통로를 따라 내려갔다. 알고 보니 그는 극장 무대에 서서 연습을 방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스페인’어 대신 영어로 훌륭한 증거를 하였으며, 자기가 가지고 온 모든 서적을 전했으며, 나중에 다시 방문하여 더 많은 서적을 전하였다.

‘이든’ 형제는 또한 더욱 충격적인 경험을 하였다. 맵시있게 차려 입은 한 여자가 으리으리하게 가구로 치장하고 침침하게 조명을 한 ‘아파아트’ 내로 그를 안내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 여자는 나를 멋지게 꾸민 방으로 안내하였는데, 거기에는 전부 벌거벗은 12명의 아가씨들이 있었다. 이곳은 고급 매음굴이었다. 그러한 상황을 개의치 않고 나는 그들에게 내가 여기에 온 이유를 설명하고 책을 제공하였다. 그 포주 여인은 책을 한권 받았으며, 몇명의 아가씨들도 소책자들을 받았다.” ‘이든’ 형제는 그러한 이상한 환경하에서 사람들에게 증거를 한 경험이 있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될 것인지 의아해 한다.

‘빌바오’에서 3개월간 전파를 하는 동안, 그 ‘파이오니아’들은 통틀어 서적 459권, 소책자 1,032부 및 「빛과 진리」 509권, 그만한 양의 「황금 시대」(현재의 「깨어라!」)를 전하였다. 사람들이 열렬한 종교인들인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 구역의 대부분은 ‘아파아트’로 이루어져 있으며, 대부분의 문에는 소위 “성심”(聖心) 그림이 붙어 있었다. 흔히 예수와 ‘마리아’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심장을 손으로 바쳐들고, 이러한 끔찍한 광경을 전시하는 사람들에게 연옥으로부터 며칠간의 사면을 주는 장면이 눈에 띈다.

‘마드리드’로 가는 도중

‘빌바오’에서의 봉사를 마친 후, 그 ‘파이오니아’들은 ‘스페인’ 북쪽 해안을 따라 가며 증거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이곳 저곳으로 여행하면서 어떻게 서적을 공급받았는가? 그들은 여러 기차역으로 미리 서적 상자들을 보내 주도록 협회의 ‘마드리드’ 사무실과 마련을 하였다. 그들은 여행을 하면서 그 역들에 들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서적들을 찾았다.

우리의 담대한 ‘파이오니아’들은 북쪽의 비가 많은 산지를 떠나 ‘레온’, ‘팔렌샤’, ‘부르고스’, ‘발라돌리드’, ‘살라망카’, ‘세고비아’, ‘마드리드’ 등의 도시들을 지나 남쪽으로 가면서 봉사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내륙의 ‘카스틸로’ 고원 지대 즉 ‘메세타’에 이르러서는 장관을 이루는 경치에 도취되었으며, 성서의 땅과 매우 닮아 그 생활 양식에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가죽은 포도주를 저장하고 운반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여인들이 질그릇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다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조그마한 감람유 등잔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으며, 많은 곳에서는 자동차와 ‘버스’를 찾아 보기 힘들었고, 교통 수단으로는 나귀와 노새가 이용되었다. 아직도 포도는 남자들이 맨발로 밟아 짜고 있었으며, 소가 곡식과 겨를 분리시키기 위하여 탈곡기를 끌며 타작 마당을 돌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동굴속에서 살고 있었다. 사실, 어떤 지역에서는 지금까지도 그러하다. 그러나 이러한 동굴들은 깨끗하고 멋지게 마련되었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

영국인 ‘파이오니아’들이 ‘마드리드’에 있을 때, 그들 대열에 뜻밖의 사람이 함께 하게 되었다. 그는 ‘도밍고’라고 하는 한 목동이었다. 그는 ‘나바르라’에 있는 멀리 떨어져 있는 마을에서 왔다. 어떻게 그가 ‘마드리드’까지 오게 되었는가? 어느날 양을 치고 있는 중에 그는 길가의 한 도랑에서 「빛과 진리」 한 부를 발견하였다. 그는 너무나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에 그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책들을 주문하였으며, 겨우내 그 책들을 탐독하였다. 그러나 그가 이 새로운 “도”(道)를 발견한 것이 반대를 초래하게 되었으며, 진리에 대한 공격이 퍼부어졌다. (사도 9:2) 그래서 그는 이 책들에 대해 책임있는 사람들에 관해 뭔가 좀 알아 보기 위하여 ‘마드리드’를 향해 떠났다. 그의 고향인 ‘팜플로나’에서 ‘마드리드’까지는 400‘킬로미터’나 되는 먼 길이지만, 그는 그 길을 걸어왔다! 그는 난생 처음으로 자기 고향을 떠났다. ‘마드리드’에 도착하자 그는 협회 사무실을 찾았고, 그 영국인 ‘파이오니아’들과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다. 이것이 진리임을 확신하게 되자, 그는 무조건 전파 사업에 투신하였으며, ‘파이오니아’가 되었다.

진리가 세 방향으로 전파되다

1933년 여름, ‘존’ ‘어어니스트’ 및 ‘프랭크’ 등 ‘파이오니아’들은 각각 방향을 달리하기로 하였다. ‘어어니스트’는 ‘도밍고’를 동반하고 서북쪽으로 나아갔다. 얼마 후, ‘프랭크’는 남‘스페인’ 전체를 임명맡았는데, 이곳은 거의 ‘포르투갈’만큼 넓은 지역이다. 이 아름다운 구역은 ‘안달루시아’ 전 지역을 포함하였으며, ‘웰바’로부터 ‘갈리산테’에 이르는 남해안을 망라하고 있었다. 그 동안, ‘존 쿠크’는 ‘마드리드’ 남방 약 64‘킬로미터’에 있는 고대 도시 ‘톨레도’로 갔다. 그 지방의 ‘로마’식과 ‘비시고딕’식 성벽들, ‘무어’인들의 사원들 및 성문들, 그리고 ‘유대’인 회당들 등, ‘스페인’ 역사를 돌에서 알려 주는 박물관과 흡사하였다.

1930년대 초의 ‘파이오니아’ 활동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그 당시 대중 교통 수단이라는 것은 ‘버스’, 기차, 마차 및 노새 등인데, 소지품은 무엇이든지—닭, 오리, 염소 그리고 때로는 커다란 황새치까지—싣고 다녔다. 한번은 지진이 나서 기차가 선로를 탈선한 적도 있었다. 이러한 모든 것을 고려해서, ‘프랭크 테일러’는 자전거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앞뒤에 튼튼한 짐받이를 달고, 차대 사이에도 상자 하나를 매달았으며, 뒤에 그 당시 전파 사업에 사용하던 축음기를 넣은 가방이 있어서 그것은 참으로 기묘한 장치였다. 후에, 자전거 운전대 위에 장치된 투석기에 돌을 재고 다녔는데, 이것은 ‘알메리아’ 도의 유령 도시들과 폐광 지역을 지날 때 이상하게 움직이는 이 물체를 보고 달려 드는 굶주린 개떼들을 향해 쏘는 장치였다. 한번은 ‘프랭크’ 형제가 뒤쪽에서 공격을 받아 바지를 찢겼는데, 이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단 한벌뿐인 것이었다. 다행히 동정심이 있는 어떤 부인네들이 그에게 바늘과 실을 빌려 주었다. 별 탈없이 그는 행길 가운데 털석 앉아 찢긴 부분을 꽤맸다. ‘프랭크’는 바늘을 돌려 주러 가서, 그 지방 주민들에게 전파하였으며, 그들에게 여러 가지 출판물들을 전할 수 있었는데, 아마도 진정 어린 관심보다는 동정심에서 더 잘 받았던 것 같다.

‘프랭크 테일러’는 그의 전파 활동 중 마을에서나 거리에서 할 수만 있다면 오던 길을 되돌아가지 않는 작전을 썼다. 이렇게 하는 것만이 그가 종종 ‘가톨릭’ 선전을 유포하고 다니는 ‘파시스트’ 첩자라고 붙잡는 분노한 좌익 공화당원들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시우다드 리알’의 ‘빌라만리케’에서는 ‘프랭크 테일러’가 ‘파시스트’ 당원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왜냐 하면, 그가 가지고 다니는 책들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 있는데, 그의 말에 의하면,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가톨릭’을 의미하였고, ‘가톨릭’은 ‘파시스트’를 의미하였”기 때문이다. 여하튼 약 50명 가량의 분노한 공산주의자들이 시장 광장에서 그를 에워싸고 “타도하라! 타도하라!”고 외쳐댔다. 도망가는 것이 불가능하게 보였다. 그러나 한 ‘가톨릭’교인인 여지주로부터 받았던 제안에 따라 ‘프랭크’는 협회 서적인 「위기」라는 책에서 강력한 어투로 되어 있는 한 항을 읽어 내려 가기 시작하였다. 그는 목청껏 큰 소리로 읽고 나서 주모자의 손에 그 소책자를 던져 주며, “당신 자신이 그것을 읽어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는가? 참으로 놀랍게도, 그 군중들 가운데서 싸움이 시작되었는데, 어떤 사람은 그를 지지하는 소리를 지르고 또 어떤 자들은 그를 반대하는 소리를 질렀다. 이러한 혼란 가운데서, 우리의 ‘파이오니아’ 형제는 아무탈 없이 빠져나올 수 있었다.

‘프랭크 테일러’는 이러한 구출에 대하여 여호와께 감사하였다. 그러나 이것으로 그 일이 끝난 것은 아니다. 아침 6:30, 그는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약 2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가 ‘버스’를 타고 떠나는 것을 보고자 광장에 빽빽하게 들어서 기다리고 있는 광경을 보고 대경실색하였다. 그는 자전거에 대하여 몹시 감사하게 생각하였다! 그 때 “그가 저기 있다!”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프랭크’ 형제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정말로, 나는 자전거 ‘페달’을 그렇게 힘차게 밟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마을을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멈추지 않았으며, 다음 마을로 계속 달렸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다행히도, 상태가 항상 그렇게 위험하지만은 않았다. 좋은 소식을 전파할 기회들이 많이 있었으며, 상당 수의 듣는 귀를 가진 사람들이 기꺼이 들었다. 축음기를 가지고 전파하는 봉사가 1930년대 중엽에 시작되었을 때, ‘프랭크 테일러’ 형제는 이 기구를 잘 사용하였다. 사실 그는 소형 축음기를 가지고 있어서 여러 ‘카페’에서 그것을 틀어 주곤 하였다. 그는 그것을 손에 들고 ‘테이블’ 사이를 왔다 갔다 하였다. 녹음 연설이 끝나면 간단한 소개의 말을 하고, 그리스도교 출판물들을 전하였다. 아주 고상한 증거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데는 조심성과 분별력이 요하였다. 왜냐 하면, 종종 “종교나 정치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금지됨”이라고 써있는 광고가 나붙곤 하였기 때문이다.

산지 마을에 찾아가는 일은 실제로 고생스런 일이었으며, 특히 길이 황폐되어 노새떼들만이 다니는 진흙길일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였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대신 어깨에 질머지고 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좀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테일러’ 형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마을로 들어가는 것이 처음에는 참으로 인상적인 일이었다. 그릇들, 야채들, 고기 등이 먼지 길위에 또는 물이 마른 강바닥 위에 그대로 널려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사람들은 길가에 의자를 놓고 그대로 앉아 이발을 하였다. 치과의들도 그런 식으로 차려 놓고 이를 뽑았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이리저리 배회하는 뚱뚱한 사제들이었다. 술집들과 도박장들에서 그들이 담배를 피워 물고 ‘테이블’에 대여섯명씩 둘러앉아 있는 것을 보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들은 전형적인 교직자 차림의 옷을 입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먼지로 덮히고 더러웠다. 성서 서적들이 전해지면, 얼마 안있어 이들 사제들은 그 지면을 거칠게 넘긴다. 그들은 ‘로마 가톨릭’ 검열 표시가 있는지 찾다가 그것이 없으면 즉시 경찰에 연락하여, ‘공산주의자’라는 혐의를 씌우는 것이 다반사였다. 만일 내가 그들의 눈에 띄기만 하면 나는 즉시 체포되었다. 이러한 일이 매우 여러 번 있었기 때문에, 나는 점점 지혜롭게 되었고, 좁다란 거리들을 이리 저리 빠져 다니는 것이 별로 어렵지 않았다. 나는 이러한 일을 ‘숨바꼭질’이라고 불렀다.”

그들이 ‘테일러’ 형제를 마을에서 잡지 못할 경우, 그가 떠날 때 그들은 어김없이 그를 붙잡게 된다. 많은 마을들 변두리에는 세관과 같은 것이 있었고, 그를 잡기 위해 경찰들이 거기서 대기한다. 그렇게 되면 심문을 받노라 시간을 허비하고 질질 끌며 그를 석방시켜 주려 하지 않는다. ‘테일러’ 형제는 그가 영국인이었기 때문에 영국 영사를 만나게 해줄 것을 요구하곤 하였다. 결국 그에게서 아무런 혐의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석방하곤 하였다.

‘알메리아’ 도에 들어갈 때, ‘테일러’ 형제는 풀 한 포기 없이 바짝 말라 빠진 황량한 사막을 지나야 하였다. 새 한마리 찾아 볼 수 없었고, 하루에 두차례 먼지를 일으키며 지나는 쓸쓸한 나귀의 행렬이 있을 뿐 아무 데도 움직이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알메리아’를 찾아간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었다. 거기서 그는 조그마한 성서 연구 집단을 찾았기 때문이다. 그는 ‘스페인’어 지식이 부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2, 3개월 동안 이들 겸손한 형제들과 우정을 나눌 수 있었다. 그 동안 정치적으로 상황이 점차 악화되어 갔으며, ‘알메리아’의 거리에서는 총격전이 일어났다. ‘테일러’ 형제는 그곳에서 마지막 집회에 참석한 후, 자전거를 타고 자기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머리 위로 흰 손수건을 흔들며 전투 지역을 통과해야 하였다.

‘테일러’ 형제는 1935년 여름에 해안 마을들에서 증거를 마친 후, 그 당시 인구 160,000명이 사는 도시인 ‘무르시아’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천정에 빛이 들어오게 좁은 구멍을 뚫어 놓은 지하실의 저장고를 숙소로 얻었다. ‘사하라’ 사막에서 지중해를 지나 불어오는 이 열풍의 뜨거운 열기가 몰아치는 시기에 적어도 이곳만은 서늘하였다. 그 뜨거운 열기 속에서 전파하는 일이 ‘프랭크 테일러’ 형제에게는 실제로 하나의 시련이었으며, 어떤 때는 심지어 착란을 일으키기까지 하였다.

독일로부터의 도움과 독일에 대한 도움

1930년대 초에 정치적으로 혼란기에 있던 독일의 상태는 여호와의 백성에게 점차 불리해 갔다. 그 결과 12명의 독일인 ‘파이오니아’들이 ‘스페인’에서 봉사하기 위하여 왔다. 그들이 탄 기차가 정부에 대한 반대 폭동이 벌어지고 있는 중에 ‘바르셀로나’ 역에 도착하였기 때문에 일단의 형제들은 실로 곤란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들을 마중하러 가는 ‘어어니스트 이든’ 형제는 그곳 전 지역이 전쟁터로 변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를 피해 그는 우체국 건물로 들어가 총성이 멎을 때까지 두 시간 동안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그가 역으로 가 보니 거기에 독일 형제들이 냉정을 잃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에 진짜 문제가 생겼다. 그들은 영어나 ‘스페인’어를 전혀 할 줄 몰랐고, 그 역시 독일어를 할 줄 몰랐다! 그러나 이러한 사정에도 불구하고 이들 독일 ‘파이오니아’들을 삼개월 동안 훈련시켜 ‘스페인’에서 전파하도록 준비시켰다.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작은 집단들은 독일에 있는 그들의 형제들의 곤경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다른 곳에 있는 동료 신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아돌프 히틀러’에게 전보를 쳐서, ‘나찌’가 증인들을 박해하는 것을 항의하였으며, 만일 ‘히틀러’가 증인들을 그대로 두지 않는다면, 그와 그의 ‘나찌’당에게 어떠한 일이 닥칠 것인가를 그에게 경고하였다.

이 기간 중 우리의 점증하는 활동은 ‘예수회’의 사주를 받은 자들의 반대 활동에 직면하게 되었다. 한 마을에서 ‘파이오니아들’은 “‘유대인-프리이메이슨’ 결사단의 경향을 띤 책들을 배부한다”는 고발을 받았다. 다른 마을에서는 두명의 자매들이 “‘히틀러’주의자들의 성격을 띤 소책자들”을 배부한다는 고발을 받고 투옥되었다. 또 다른 곳들에서는 형제들이 ‘프로테스탄트’로 분류되었는데 무식한 ‘가톨릭’ 대중들이 아는 바로는 이것은 가장 나쁜 이단 또는 이교도들이라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파이오니아들이 자기들의 사명을 계속 수행하다

1934년 말 아니면 1935년 초, ‘파이오니아’들인 ‘존 쿠크’와 ‘에릭 쿠크’는 ‘바르셀로나’를 떠나 해안을 따라 남쪽에서 봉사하려고 이동하였다. 한편, ‘어어니스트 이든’은 ‘바르셀로나’ 도에 있는 도시들에서 계속 전파하였다.

‘존 쿠크’와 ‘에릭 쿠크’는 맨 처음 지중해 해안을 따라 내려가 유명한 ‘로마’의 도시 ‘타르라고나’와 그 곁에 있는 ‘레우스’로 갔다. 북쪽으로 ‘레리다’ 도와 ‘프라델’의 마을로 가면서 ‘쿠크’형제는, 과거에 진리를 배웠으며, ‘바르셀로나’에 있는 자기 하숙에서 그리스도인 집회들을 열도록 허락했던 예약자 ‘살바도르 시에라’를 찾았다.

‘존’과 ‘에릭’은 ‘살바도르’와 함께 인근의 도시들과 마을들에서 며칠 동안 전파한 후에, ‘살바도르’를 동반하고 자전거로 145‘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웨스카’로 갔다. 이 여행은 보람이 있었는가? 실로 그러하였다. 그곳에서 예약자인 ‘네메시오 오루스’가 그들을 뜨겁게 맞이해 주었으며, 진리를 “들이켰다”. 그러나, 그는 이 형제들과 연합하려는 열심과 욕심에서 지혜롭게 행동하지 못하고 자기 아내의 질투심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그의 아내가 형제들을 경찰에 허위 고발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 지방 경찰이 ‘아파아트’로 와서 ‘존’과 ‘에릭’을 체포하였다. 하지만 경찰서에서 그 문제는 해결되었다.

‘존 쿠크’와 ‘에릭 쿠크’는 여러 차례 ‘네메시오’를 방문하였으며, 1935년 4월 17일에는 ‘웨스카’에서 기념식을 거행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살바도르 시에라’도 참석하도록 초대하였다. 그리하여 ‘존’은 ‘네메시오’에게 편지로 이 제의를 하였다. ‘네메시오’에게서 그 제의를 듣고 감격하였으며, 그 행사를 위하여 이미 어린 양을 사서 준비해 놓았다는 회신을 받았을 때 ‘쿠크’ 형제가 얼마나 놀랐겠는지 상상해 보라! 분명히 그의 열심은 칭찬할 만하지만 그의 기념식에 대한 이해는 좀 잘못되어 있었다. 살아 있는 어린 양을 4층에 있는 조그마한 ‘아파아트’ 내에 며칠 동안 두어 두어야 했던 일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 기념식은 거행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추종자들로 이루어진 이 조그마한 집단에게 있어서 그것은 커다란 행사였다. 그것은 사실상 그 당시 ‘스페인’에서의 대회와 거의 다름이 없었다.

‘존 쿠크’는 ‘웨스카’ 도가 적절히 돌아졌다고 생각하였으며, 그와 ‘에릭’은 ‘아라곤’의 도청 소재지이며, ‘스페인’에서 ‘마리아’ 숭배의 중심지인 ‘사라고사’로 향하였다. 1936년 당시, 그 도시에는 인구가 170,000명이었다. ‘에브로’ 강이 ‘사라고사’의 북부를 가로질러 흐르고 있었으며, 남쪽 언덕 위에는 유명한 대리석 원주가 있고 무수히 많은 뾰족탑이 달린 교회 건물인 ‘기둥의 전당’이 있었다. ‘가톨릭’ 전설에 의하면 그곳에 동정녀 ‘마리아’가 기원 40년에 사도 ‘야고보’에게 나타났다고 하는 한편, 그가 ‘팔레스타인’에 아직도 살아있다는 말도 있었다. 이러한 전설은 역사적 또는 성서적 근거가 전혀 없는데도, 여러 세기 동안 ‘라 필라리카’(성모의 기둥)에 대한 맹신이 발전해 왔다.

그 당시 침례를 받는 일은 아주 드물었다. 그렇지만, ‘존 쿠크’는 정당한 근거 없이는 아무에게도 침례를 줄 마련을 하지 않았다. 사실, 세번이나 ‘네메시오 오루스’는 ‘웨스카’로부터 ‘사라고사’까지 72‘킬로미터’를 자전거를 타고 왔었는데, ‘존’은 그에게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하였으며, 그가 침례에 관한 굳은 결심을 하였는가를 확인하였다. 드디어, 1936년 5월에 ‘네메시오’, ‘안토니오 가르갈로’ 및 ‘호세 로마노수’에게 ‘사라고사’에서 가까운 ‘에브로’ 강에서 침례를 줄 마련을 하였다.

그 당시 그 ‘파이오니아’들에게는 융통성이 필요하였다. 만일 어떤 사람이 우리의 책을 원하지만 돈이 없을 경우, 그들은 달걀, 무화과 열매, 집에서 만든 빵 등 음식과 출판물들을 교환하였다. ‘존 쿠크’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보통 날달걀 한개, 빵 한조각 그리고 포도주 한잔으로 끼니를 때우곤 하였다 ··· 그러나 생활은 고생스럽고 단순하였지만, 매우 행복하였다. ‘스페인’과 같은 ‘가톨릭’ 본거지에서 실제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며, 얼마의 참다운 양들을 찾아내는 일이란 말할 수 없이 감동을 불러 일으키는 일이었다!”

‘파시스트’로 오인받음

‘에릭 쿠크’와 ‘안토니오 가르갈로’가 ‘메디아나’ 마을에서 증거하고 있었는데, 한 여인이 그들을 ‘파시스트’ 첩자들이며, 기존 ‘스페인’ 공화당에 반기를 든 자들이라고 고발하였다. 그 여자가 가지고 있는 증거라고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관하여 알려 주는 자기가 받은 소책자 하나뿐이었다! ‘쿠크’ 형제에 의하면, 그 마을은 사실상 100‘퍼센트’ 공산주의자들이었으며, 그 마을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로마 가톨릭’을 가리키는 것이며 따라서 ‘파시스트’라는 것이었다. 어떻게 달리 그들을 설득시킬 방법이 없었다.

처음에는 상당히 많은 여자들이 몰려들었다. 그 다음, 그 마을의 대변인이 ‘쿠크’ 형제에게 그 마을에서 나가라고 요구하며, 그렇지 않으면 경찰에 연락하겠다고 말하였다. 그 형제들은 떠나지 않았으며, 후에 경찰이 도착하였다. 경찰서에서 경사는 주의깊이 소책자들을 조사하였고, ‘쿠크’ 형제와 ‘가르갈로’ 형제에게 심문을 하였다. 결국 그는, 자기가 아무 것도 나쁜 것을 발견할 수 없었지만, 마을 사람들이 고발을 하였으므로 이 문제를 더 조사해 보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는 ‘쿠크’ 형제에게 인근 마을에 있는 경사에게 편지 한통을 가지고 가라고 하면서, 그 사람은 우리의 사업의 합법성을 더 잘 판단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하였다.

‘에릭’과 ‘안토니오’가 마차 바퀴를 따라 그 마을로 가고 있는데, 웃옷을 걸치지 않은 청소년 몇명이 들로 그들을 좇아 달려 오고 있었다. 곧이어, 한 남자와 몇명의 소년들이 형제들의 뒤로 다가왔다. ‘쿠크’ 형제가 보고하는 바에 의하면, 이십명이 넘는 수가 한 지점으로 몰려와서, “두명이 우리의 팔을 잡고, 우리가 ‘파시스트’ 선전원들이라고 비난을 하였다. 내가 빠져 나오려고 하자 한 대담한 소년이 쇠스랑을 내 배에 댔다. 또 하나는 내가 읽으려고 가지고 다니던 영문판 「입증」이라는 책을 끄집어냈다. 그리고는 ‘이봐! ‘이탈리아’인! 이래도 ‘파시스트’ 첩자가 아니란 말야?’ 하고 소리쳤다. ‘안토니오’가 해명을 하려고 하였지만, 그들은 제 정신이 아니었다.”

‘안토니오’의 책가방을 자전거에서 내려서, 책들을 땅바닥에 쏟아 버렸다. 또 한명의 공격자는 ‘에릭’이 등에 짊어지고 있던 책가방을 벗겨내려고 하였다. 그러는 동안 다른 자들은 불을 피우기 위해 나뭇가지를 모으고 있었고 어떤 자들은 책을 찢어 태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에릭’은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만사가 절망적으로 보이던 바로 그때, 우리는 그들의 태도가 달라지는 것을 보았다. 거기 있던 소년들이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우리의 손목을 잡고 있던 힘이 풀어졌다. 뒤를 돌아 보니 모퉁이를 돌아 네명의 경찰이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말할 수 없이 반가운 일이었다! ‘안토니오’의 말대로, 여호와께서는 어떤 일을 어느 선까지만 허용하시다가 그 다음 개입하셨다.”

후에 형제들은 지사 앞에 나아가게 되었는데, 그는 우리의 사업에 관하여 아무런 의심도 없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는 그 당시 존재하던 불안정한 정국에 주의를 이끌었다. 바로 그 점이었다! 이러한 경험은 분명히 ‘스페인’ 국민들이 걷고 있는 불안한 정치적 진로와 조만간 그들을 무시무시한 유혈 사태로 끌어들이게 되는 사태를 알려 주는 것이다.

내란!

1936년 2월에 총선거가 실시되었는데, 2년간의 중앙 우익 통치가 끝나고 좌익 인민 전선이 권력을 쥐게 되었다. 이 마지막 인민 전선 정부의 지배하에서 사태는 붕괴점으로 치닫고 있었으며, 사건들이 계속 터졌다. 7월 13일, 유명한 우익 왕정파 인사인 ‘호세 발보 소텔로’가 암살당하였으며, 이러한 사태는 (‘스페인’ 사람들의 정치적 견해에 따른) 국민적인 궐기 즉 폭동을 유발시켰다. 이것은 7월 17일 ‘아프리카’에서 시발되었으며, 7월 18일 ‘라디오’ 방송으로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에 의하여 설명되었다. ‘스페인’ 내란이 시작된 것이다. 50여개 도 가운데 21개 도는 공화당을 지지하였고, 29개도는 국민 봉기를 지지하였는데,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발레시아’ 및 ‘빌바오’ 등 주요 도시들은 공화당을 충실하게 계속 지지하였다.

이 내란은 일백만명 이상의 ‘스페인’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것은 종교적 및 정치적 복수전이었다. 이 내란이 있던 3년간, 국민은 ‘로스로호스’(공산주의자들) 아니면 거룩한 십자군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신념을 가진 ‘가톨릭’ 집행자들 그 어느 한편에 속해 있는 냉혈 살인자들에 대한 공포 속에서 살았다. 부채들은 악랄한 익명의 고발 제도에 의하여 청산되었으며, 그 희생자는 쓸쓸한 들판에서 세워진 사살대 앞에서 사라져갔다.

그리스도인 활동이 영향을 받다

이러한 사태 발전은 ‘스페인’ 내에서의 우리의 사업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이러한 일을 직접 경험한 ‘카르멘 티에르라세카’ 자매의 목격담을 들어 봄으로써 그 당시 우리 형제들이 느꼈던 일들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자매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마드리드’에서는 한 차례의 공포, 혼란 및 격동이 휩쓸고 지나갔다. 오랜 세월, 교직자들에 의하여 압박을 받았던 사람들을 교회에 대한 적개심에 불타올라, 어떤 교회들은 불탔으며, 형상들을 때려 부수고, 그것들을 길거리로 끌고 다녔다. 그러나 이러한 와중에서도 우리는 존경을 받았으며,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몬타나’ 병영이 우리의 조그마한 집회 장소 근처에 있었다. 이 병영은 유혈 전쟁터로 돌변했으며 그 지역은 군대들에 의하여 점령당하였다. 즉시 외국 형제들은 이 나라를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고, 우리만 남게 되었다. 얼마 있지 않아 ‘갈레 데 카다르소’(지부 사무실이 일찌기 이사하였던 곳)에 있던 모든 협회 재산은 압수당하였고, 우리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곳에 보관되어 있던 수천권의 책들과 소책자들은 빼앗기거나 소각되었다. 진리를 인쇄하려던 종이, 찬양의 글을 인쇄하는 데 사용하였던 기계들, 우리가 성서 연구하기 위하여 앉던 의자들, 사업을 조직하던 사무실, 이 모든 것을 잃어 버렸다. 가슴아픈 일이었다! ··· ‘스페인’에서의 사업은 고요한 바다 밑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이 모든 일은 내게 말할 수 없는 슬픔을 안겨 주었으며, 우리는 우리만 홀로, 참담하고 쓸쓸히 남겨져서 각자 제 힘으로 꾸려 나아가야 하는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하는 입장이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마태 9:36.

내란이 일어나기 바로 전에, ‘존 쿠크’와 ‘에릭 쿠크’는 휴가차 영국으로 떠났다. 1936년경, ‘프랭크 테일러’는 ‘세빌랴’ 및 ‘카다스’ 지방에서의 증거 활동을 마쳤으며, 그의 다음 목적지는 ‘발레아레스’ 제도라고 생각하고 ‘지브로올터’를 거쳐 선편으로 그곳에 가고자 하였다. 그가 ‘라리네아’ 변방 마을에 당도해 보니, 한 때 조용하던 곳이 약탈과 방화를 당하였고, ‘파시스트’들과 그들의 흰 두건을 두른 ‘무어’ 군대들에 의해 함락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테일러’ 형제가 세관으로 가는 공지를 건너고 있는데, 기관총, 소총, 권총들이 실제 우박처럼 총알을 퍼부어 댔다. 그러나 그는 그곳을 건넜으며, 날이 어두운 후, ‘무인 지대’를 건너서 ‘지브로올터’로 갔다. “몇방의 총탄이 내 옆을 지나갔다. 그러나 나는 탈출하였으며, 기쁨의 노래를 불렀다.”고 그는 회상한다.

한편, ‘어어니스트 이든’은 ‘스페인’에서 추방되었다. 그러나 추방당하기 전 얼마 동안 그는 양끝을 ‘브로크’로 막아 놓은 굴속같은 지하 감옥에서 생활하였다. 그곳에서, 그와 한명의 독일인 형제는 매일 한덩이의 빵과 ‘코오피’ 한잔 그리고 한 그릇의 삶은 콩을 급식으로 받았다. ‘이든’ 형제는 “우리는 그곳에서 2개월간 지냈으며, 그 때 받은 그 음식은 체중 조절을 위한 철식으로 추천할 만하다”고 회상한다. 그 나라에서 쫓겨난 후, 험준한 산들을 기어올라간 다음 넘어지고 떨어지고 상처를 입어 가면서 ‘프랑스’쪽으로 내려갔다. 일단 ‘프랑스’에 당도한 후, 이 두 형제들은 헤어졌으며, ‘어어니스트 이든’ 형제는 드디어 영국에 도착하였다.

내란이 발발하였을 때, 미국 시민인 ‘O. E. 로셀리’ 형제는 ‘아프리카’ 서해안에서 떨어져 있는 ‘스페인’ 구역인 ‘카나리’ 제도에서 전파하고 있었다. 그가 험한 도로 변에 흩어져 있는 집들을 찾아 증거하고 있었는데, 두명의 군인이 매복처에서 달려 나와 그를 잡아다 가두었다. 그는 죄수와 같이 12일간을 갇혀 있었으며, 그 후 ‘스페인’으로부터 추방되었다. 그가 저지른 “범죄”는 무엇이었는가? 그는, 그리스도인들은 ‘파시스트’도 공산주의자들도 아니며, 단지 다가오는 주의 왕국에 관하여 증거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설명한 “파시스트의 정체”라는 전단을 배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스페인’ 내에서의 우리의 활동은 내란으로 말미암아 막심한 영향을 입었다. 1936년 7월부터 완전히 고립되고 격리된 11년간의 기간이 시작되었다. ‘스페인’ 증인들 각자는 깜빡거리는 촛불과 같이 되었으며, 질식할 것 같은 영적인 암흑 상태 가운데서 자신의 성실의 불꽃이 꺼지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소수의 사람들은 굴복하였지만, 대부분의 이야기는 이 고통스러운 기간 중 그들을 지탱시켜 준 여호와의 영의 강인한 힘에 대한 증거이다.

고립된 기간 중 시험을 받다

내란 기간 그리고 그 후,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은 여러 가지 시험들을 받았는데, 남자들이 특히 시험을 받았다. 내란초에 공화당이 장악하고 있던 구역에 살고 있었다면, 그들 편에 서서 싸워 줄 것이 기대되었다. 그러나 만일 “반란” 지역에 살고 있었다면, 우익 ‘가톨릭’ 군대를 위해 싸울 것이 기대되었다. 이러한 문제가 1936년에 일어났다는 사실과, 비록 형제들이 그리스도인 중립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는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러한 주제를 다룬 「파수대」로부터 유익을 얻지 못하였었다는 점을 잊지 말 것이다. 그 문제는 1939년 11월에 가서야 영문 잡지에 나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각 형제들은 이런 식으로 성실을 유지해야 한다 또는 저런 식으로 성실을 유지해야 한다고 알고 있었을 뿐, 후에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의심스러운 점들을 해결할 수 있도록 보이는 조직과 연락을 하게 됨으로 알게 된 그러한 명백한 견해를 가지고 있지는 못했다.

그 당시의 문제들을 이해하기 위해, ‘웨스카’에 살고 있던, 어린 세 자녀의 아버지인 ‘네메시오 오루스’ 형제의 경우를 고려해 보자. 내란이 일어난 며칠 후 그는 공산주의자 또는 ‘프리이메이슨’ 결사대의 일원이라는 혐의를 받고 어떤 자들의 방문을 받게 되었는데, 그 방문자들은 군인들이 전쟁에 나갈 때 그들을 성원하도록 그에게 압력을 가하려 하였다. 또 그에게 그 지방 ‘파시스트’단에 가담하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그가 이 모든 일을 거절하자, 마침내 그는 장차 보복을 가할 대상인 “요주의 인물 명단”에 오르게 되었다.

1936년 8월 어느날 밤, ‘네메시오’ 형제는 체포되어, 경찰 수사관에게 심문을 받은 다음, 투옥되었다. 결국 그는 ‘사라고사’ 형무소에 갇히게 되었으며, 거기서 그는 ‘매트레스’도 없는 감방 마루 위에서 담요 한장을 가지고 잠을 자며 12일간을 지냈다. ‘네메시오’는 다른 수감자들에게 증거하였기 때문에, 13일간 독방에 갇히게 되었다. 마침내 1936년 12월 16일, 그는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오루소’ 가족은 ‘안소’로 이사하였는데, 거기서 1937년 겨울, ‘네메시오’ 형제는 군복무를 해야 한다는 통지서를 읍사무실로부터 받게 되었다. 그는 중립을 지키고자 하였으므로 이에 불응하였고, 또 한번 투옥되었다. 그러나 신체 검사에서 군복무에는 부적격하다는 판정이 났으므로 마침내 석방되었다. 그 후 ‘오루소’ 가족은 ‘웨스카’ 도에 있는 다른 마을인 ‘바르비스트’로 이사하였는데, 거기서 ‘네메시오’ 형제는 시계 수리점을 다시 개업하였다. 그 당시 그는 약 10년 동안 하나님의 백성과 전혀 접촉을 갖지 못하였다.

전후 얼마 동안 우리 형제들과 관심자들을 포함하여 ‘스페인’ 사람들은 커다란 고통기를 겪었다. 이 나라 도처에는 식품과 연료가 매우 부족하였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일부 형제들은 그들의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타낼 수 있었다. (요한 13:34, 35) 예를 들면, ‘레리다’의 ‘브라텔’ 마을에 살고 있던 ‘실바도르 시레라’는 얼마의 땅을 경작하여 자기네 식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바르셀로나’에 있는 형제들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였다. ‘바르셀로나’에서는 ‘캐럽’ 열매 다섯개가 1‘페세타’에 팔리고 있었는데, 그 당시 하루 평균 임금은 12내지 14‘페세타’였고, 빵과 ‘올리브’유 등의 기본 상품이 부족하였다. 그러므로 ‘바르셀로나’에 있는 궁핍한 형제들을 위하여 ‘실바도르’ 형제가 식품을 싣고 왔을 때 ‘후앙 페리아고’ 형제에게 얼마나 감사함을 느꼈을 것인지 상상할 수 있다.

새로운 통치자들은 이전의 공화당 정부의 자취를 완전히 일소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우편과 출판물에 대한 엄격한 검열이 있었다. 따라서, ‘나티비다드 바르구에노’ 자매와 ‘클라라 부엔디아’ 자매는 서적을 구하기 위하여 ‘브루클린’에 있는 ‘왙취 타워 협회’로 편지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통신은 헛수고였다. 그들의 편지는 결코 ‘스페인’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검열관들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며칠 후 경찰이 이 자매들의 집을 찾아왔으며, 그들에게 몇가지 질문을 한 다음, 가택 수색을 하였으며, 그들은 이러한 “거짓말”들에 관심을 갖는 일을 버리라고 경고하였다.

그 당시 보내는 모든 편지들은 그 겉봉에 애국적인 문귀를 써 넣도록 요구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 편지는 배달되지 않게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의 중립을 고수하기 위하여 협회에 편지하지 않았다.

또 한 가지 요구 조건은 국가를 듣게 되는 모든 경우에 심지어 ‘라디오’에서 그것이 울려 나올 경우에라도 모든 사람은 그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기립을 하여 ‘파시스트’식 경례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기를 게양하거나 내리고 있는 군 병영 옆을 지나갈 경우 또는 군대 행렬이 기를 가지고 지나가고 있을 경우 동일한 애국적인 행위가 요구되었다. 그런데 어느날 ‘안토니오 부루네트 프라데라’와 ‘루이스 메디나’가 일단의 보병들이 기를 가지고 행군하는 ‘바르셀로나’ 거리를 걷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멈추어 기에 대하여 주목하고 경례를 하였는데, 유독 ‘안토니와’와 ‘루이스’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인솔 장교는 보병대를 정지시키고, 강제로 이 두 젊은이에게 경례를 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들이 거절하자, 그 장교는 그들의 오른 손들을 거머쥐고 경례하는 식으로 치켜 들었다. 그러나 그 중 한 형제가 “우리는 경례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팔을 들어 올려서 당신이 경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화가 난 그 장교는 그들의 팔을 내려뜨리고 나서 권총을 꺼내 그들에게 겨누고 “자 경례를 하겠나 안하겠나?” 하고 소리쳤다. 그 형제들은 다시 거절하였다. 그러자 그 장교는 “너희들이 경례하지 않으면 쏴 버릴 것이다. 아나?” 하고 외쳤다. 형제들은 어떻게 대답하였는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경우에만 당신은 우릴 죽일 것이요” 하고 대답하였다. 이 말을 듣고 포기한 그 장교는 권총을 권총집에 다시 넣고 이 두 젊은이를 체포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성실을 지켰다. 흥미롭게도, ‘안토니오 브루네트’는 그 당시 아직 침례받지 않았었으며, 몇년 후인 1951년 6월에 가서야 침례를 받았다.

‘가톨릭’ 교회가 권력을 잡자, 또 여호와의 증인의 자녀들, 특히 학교 문제와 관련하여 복잡한 문제들이 생겼다. 어떤 공립 학교에서 교육을 받기 위해서는 그 아동이 영세받은 ‘가톨릭’교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영세 확인서를 반드시 받아야 하였다. ‘나티비다드 바르구에노’는 자기 딸들을 교회에서 영세받히지 않았으며, 그들이 학령기가 되었을 때 영세 확인서를 요구하지 않는 학교를 찾지 않으면 안되었다.

게다가 교구 사제는 모든 학생들이 일요일이면 자기 교회에 참석해야 할 것을 요구하였기 때문에 문제가 있었다. 학생들이 그렇게 하는가를 확인하기 위하여 각 학생들에게는 그들이 교회에 갔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푸른 ‘카아드’를 주었다. 그 다음, 매 월요일 아침에 누가 빠졌는가를 알아 보기 위하여 학교에서는 이 ‘카아드’를 조사하였다. 이에 관하여 ‘나티’의 딸들 중 하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물론, 내 ‘카아드’에는 한번도 표를 받은 일이 없었으며, 매 월요일 그러한 ‘카아드’를 가지고 선생을 만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드디어 어느 월요일 아침, 선생은 이렇게 말하였다: ‘이런 상태를 이처럼 계속 내버려 둘 수는 없다. 네가 ‘미사’에 참석하든가 아니면 내가 웃어른들에게 이 문제를 이야기 해야겠다.’” ‘나티’의 딸은 집으로 돌아가 이 문제를 어머니에게 이야기 하였으며, 그의 어머니는 딸에게 하나님께서는 손으로 만든 성전에 거하지 않으신다고 알려 주는 사도행전 17:24을 간단히 가르쳐 주었다. 이 어린 딸은 자기가 ‘미사’에 참석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할 때 그 선생에게 이 성귀를 말해 주었다. 이것이 효과가 있었다. 왜냐 하면 그 선생은 더 이상 월요일마다 하는 조사 때 그를 괴롭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사제가 월요일 푸른 ‘카아드’를 조사하러 왔을 때, 그 선생은 복잡하게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나티’의 딸의 ‘카아드’를 고의적으로 뒤로 빼 돌렸다.

‘토랄바’에서 싹이 튼 씨들

내란과 그 여파는 분명히 하나님의 백성에게 시험이 되었고, 그들에게 여러 가지 문제들을 가져다 주긴 했지만, 뿌려진 진리의 씨들은 계속 열매를 산출하였다. 예를 들면, ‘토랄바 데 칼라트라바’에서는 해가 지남과 동시에 얼마의 열매를 거두게 되었다. 사실, 처음 씨는 ‘호세비센테 아레나스’가 처음으로 진리를 듣게 되었던 1931년에 뿌려졌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비공식적 증거가 행해졌고, 조금씩 조금씩 여러 사람들이 영향을 받게 되었다. ‘왙취 타워 협회’ 출판물들을 읽는 사람들과 더불어 두 가지 사상이 뒤범벅이 된 얼마의 ‘프로테스탄트’들이 있었다. 사실, 그들 중 하나는 ‘마드리드’에서 영국 및 외국 성서 협회를 대표하는 ‘콜포처’로서 활동하고 있었으나, 동시에 우리의 책들을 팔고 있었다. 그 혼란기에, 집회들은 비밀리에 개최되었으며, 그 집회들은 여호와의 증인이라기 보다는 ‘프로테스탄트’에 속한 사람들의 인도를 받고 있었다.

1946년에, ‘토랄바’의 조그마한 시골에는 일단의 성서 연구생들이 협회 출판물을 가지고 성서 연구를 하고 있었는데, ‘스페인’ 내에서는 가장 큰 집단이었다. 그들은 그 연구를 통하여 침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그리하여 인근에 있는 ‘구아디아나’ 강에서 1946년 9월 2일에 침례식을 갖도록 마련하였다. 침례 연설도 없이, 9명이 물에 들어가 침례를 받았다. 그 다음 각자는 강둑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를 올렸다. 2주일 후, 그들은 또 한번의 침례식을 가졌으며, 세명의 형제들이 더 침례를 받았다. 얼마의 여자들도 연합하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여자들은 아무도 침례를 받지 않았다. 또 한 가지 흥미있는 사실은, ‘프로테스탄트’에 속한 자들은 이 집단을 계속 장악하려고 하면서도 이러한 침례식에 절대로 참여하지 않았다.

1946년 9월 26일, ‘그레고리오 푸엔테스’ 형제는 ‘페드로 가르시아’ 형제의 누이와 결혼을 하였다. 참석한 손님들 가운데에는 성서 지식이 많기 때문에 원로 대접을 받는 한 ‘프로테스탄트’인이 있었다. 그는 ‘토랄바’에서 발전하고 있는 이 성서 연구 집단의 목사가 되려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결혼식이 끝난 후, 그는 그들 모두가 주의 만찬을 기념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는 연설을 하였으며, 연설 가운데서 이 만찬을 정기적으로 거행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이 ‘프로테스탄트’ “목자”의 인도에, 참석한 사람 모두는 표상물에 참예하였다. 그는 만찬을 다시 기념하기 위하여 11월에 돌아오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형제들 가운데 일부는 거행된 일에 대하여 확신을 갖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그가 돌아오기 전에 성서와 협회 출판물을 철저하게 조사하였으며, 이 가짜 “목자”를 논박하는 데 필요한 증거들을 찾아냈다. 그가 돌아왔을 때, 그 집단에 속한 아무도 그의 “만찬”을 기념할 준비를 해 놓지 않았다는 것과 더 이상 아무도 그의 지시하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는 실망하였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는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뉴우스’ 보도가 다시 연락을 취할 길을 열어 놓다

1946년의 괄목할 만한 사건은 미국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 시에서 개최되었던 ‘즐거운 백성 신권 대회’였으며, 최고 참석자 수는 80,000명이었다. 물론 ‘스페인’은 참석하지 못한 나라 중 하나였다. 그 때까지 ‘스페인’의 그리스도인들과 나머지 전세계에 있는 하나님의 조직 사이에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으며, 이러한 상태는 내란이 발발한 이후 10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 괄목할 만한 대회는 국제적인 ‘뉴우스’감이었으며, 그 보도 내용은 ‘스페인’ 신문들에까지 실렸다. 그 보도들은 비록 왜곡되고 전부 거짓된 것이었지만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의 통치체와 ‘스페인’ 내에서 활동하는 하나님의 헌신한 백성의 이 작은 집단 사이에 다시 연락을 취할 계기가 되었다.

그 신문은 보도하기를 여호와의 증인들은 1946년과 1948년 사이에 원자탄의 폭발로 인한 세계의 종말을 기대하고 있다고 하였다. 각기 떨어져 있는 세 형제들이 이러한 “뉴우스”를 ‘스페인’ 신문들에서 보게 되었다. ‘마누엘 알렉시아데스’ 형제는 이러한 내용을 ‘마드리드’ 신문에서 읽고는 즉각 이 “예언”에 관하여 질문하는 편지를 ‘브루클린’에 있는 협회 본부로 보냈다. 한편 ‘라몬 세라노’는 그 동일한 ‘뉴우스’를 다른 신문에서 읽었으며, ‘라몬 포르네’에게 알렸고, 그는 협회에 편지하였다. 동시에, ‘토랄바’에 있는 형제들도 이러한 보도를 보고 마찬가지로 협회의 ‘브루클린’ 사무실로 서신을 보냈다. 1946년 대회가 ‘스페인’ 형제들로 하여금 전세계에 있는 여호와의 눈에 보이는 조직과 다시 연락을 취하도록 만드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누가 생각하였겠는가? 사실상, 마귀를 기쁘게 하였을 그 거짓말은 그에게 역효과를 가져 주었다.

‘스페인’에 있는 형제들은 말할 수 없이 기뻐하였다! 그리스도인 서적들이 다시 흘러 들어오기 시작하였는데, 그 가운데에는 「자녀들」, 「신세계」,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및 「왕국은 다가왔다」 등이 있었다. 이러한 책들이 이곳 형제들에게 선물로 보내졌다. 참으로 훌륭한 선물이었다! 영적으로 물이 마른 사막에서 10년간을 방황한 끝에 그들은 다시 진리의 ‘오아시스’를 찾게 되었다.

통치체와 다시 연결을 하게 되다

이러한 연결로 인하여 여호와의 증인의 통치체는 1947년 5월에 ‘스페인’에 있는 집단들을 방문하도록 마련하였다. ‘뉴우요오크’ ‘브루클린’이 ‘왙취 타워 협회’ 본부로부터 ‘F. W. 프랜즈’와 ‘H. C. 카빙튼’이 5월 7일에 ‘마드리드’에 도착하여 ‘마누엘 알렉시아데스’ 형제의 집에 있는 식당에서, 그 날밤 모인 11명의 ‘스페인’ 벗들과 함께 첫 집회를 가졌다.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파수대」 정규 예약을 원하였으며, 최근에 나온 모든 그리스도인 출판물들을 얻기를 원하였다. 그런데 남자들은 모두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으나 그들이 담배를 사용하는 데 대하여 즉시 어떤 언급은 하지 않았다. 다음날, 16명으로 된 한 집단과 함께 두번째 모임을 가졌다.

이 두 모임은 ‘토랄바 데 칼라트라바’에서 이곳에 온 ‘페드로 가르시아’와 ‘그레고리오 푸엔테스’에게 확신을 심어 주었다. ‘토랄바’로 돌아간 그 집단은 ‘브루클린’에서 온 형제들을 이리로 오게 해서 그들을 만나 보도록 초대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하여 의견이 나뉘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상태를 알아 보도록 ‘페드로’와 ‘그레고리오’를 ‘마드리드’로 파견하였던 것이다. ‘모세’ 시대의 충실하였던 정탐군들과 흡사하게, 그들은 괜찮으리라는 인상을 받고, 두명의 미국인 방문자들과 함께 ‘토랄바’로 돌아가겠다고 그 집단에게 전보를 쳤다.

우선, 그들은 ‘시우다드 리알’로 기차를 타고 가야 하였다. 다음에, 그 두 방문자들은 상당히 흔들리고 낡아 빠진 고물 ‘택시’를 타고 ‘토랄바’로 갔다. 몇명의 형제들이 오전 1:35에 도착하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였다.

그날 아침, 그 방문자들은 경찰서로 가서 그들이 체재하고 있음을 등록하였다. 그날 저녁 24명이 모임에 참석하여, 영적으로 매우 격려를 받았다. 그러나 이 조그마한 농촌 마을의 일반 사람들에게 그 방문은 또한 인상적이었다. 예를 들어 ‘비엔베니도 곤잘레스’는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그들이 머무는 것은 특히 그 지방 사람들에게는 진기한 일이었다. ‘프랜즈’ 형제는 이 지방 표준으로 볼 때는 보통 체구였지만, 일종의 ‘솜브레르’ 모자를 쓴 것은 평범한 모습이 아니었다. 그 모자는 높고 테두리가 넓은 것이어서 이 지방에서는 좀체로 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의 모습은 눈에 띄었다.”

일요일에는 ‘토랄바’ 집단과 마지막 집회를 가졌는데, 그 모임에 참석하기 위하여 한 방에 38명이 빈틈없이 꽉 들어 찼다. 회중 조직이 설명되었으며, 두 형제가 그 집단의 일을 돌보도록 임명되었다. 그들은 ‘호세 빈센테아레나스’와 ‘후앙펠릭스 산체스’였다. 이 집단에 모인 거의 전부가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인데 반하여, 그들은 이 방문한 형제들이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어, 이 날 아침에 흡연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들의 질문을 받고 ‘카빙튼’ 형제는 자기 자신의 경험 즉 한때 그는 하루에 50가치 가량의 담배를 피웠으나 왕국 진리에 대한 지식은 그러한 습관이 그리스도인 생활과 병행할 수 없는 것임을 자기에게 알게 해 주었다고 이야기하였다. 이러한 이야기가 있은 후에도 어떤 사람들은 기꺼이 그 습관을 버리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흡연 문제는 그 집단 내에서 계속 문제가 되었다.

이 모임이 있은 후, 이 방문자들이 곧 떠나겠다고 경찰서에 통지하였다. 그러나 그 마을에 한대 밖에 없는 택시가 ‘타이어’에 ‘펑크’가 났기 때문에, ‘마드리드’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16‘킬로미터’나 떨어진 ‘시우다드 리알’까지 그들이 어떻게 갈 수 있을 것인가? ‘프랜즈’ 형제는 후에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밤중에 우리는 마차꾼의 집으로 달려가 그를 깨웠다. 그는 목에 방울을 달아맨 말에 이륜 마차인 ‘타르타나’를 급히 매었다. 몇명의 벗들에게 그곳에서 작별을 고하고, 우리 네명은 마부와 함께 마차에 올랐다. 그 다음 서쪽을 향해 방울 소리와 덜커덕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어둠속을 여러 시간 달렸다. ··· 새벽 3시에 우리는 ‘시우다드 리알’ 기차역에 도착하였다.”

그 방문자들은 기차를 탔으며, 안전하게 ‘마드리드’로 돌아갔다. 그날 늦게, 그들은 ‘마드리드’ 집단과 송별회를 가졌으며, 12명의 참석자들 가운데서 임시 주임 감독자와 「파수대」 연구 사회자가 임명되었다.

다음날, 그 방문자들은 비행기편으로 ‘바르셀로나’로 갔다. 그곳을 방문하는 동안, ‘바르셀로나’ 회중을 조직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봉사 위원회가 임시로 임명되었다. 임명된 사람들은 ‘라몬 포르네’, ‘라몬 세라노’ 및 ‘프란시스코 세라노’였다.

5월 15일 그 방문자들은 ‘바르바스트로’행 기차를 탔다. 그 여행은 10시간이나 걸렸는데, 도중에 기차는 하나의 돌로 만든 손가락들이 하늘을 가리키는 것과 같은 진기한 첨탑 모양의 그 유명한 ‘몬트세랏’ 산을 통과하였다. 이 산꼭대기에는 수도원이 있고 거기에는 “‘몬트세랏’의 성모”상, 일명 “검은 성모”라는 것이 있는데, 여러 세기 동안 그 밑에서 태워진 촛불 그을음으로 인해 그 형상이 검게 변했기 때문에 그러한 이름이 붙었다.

이 방문자들은 ‘바르바스트로’에서 ‘네메시오 오루스’와 그의 가족 및 관심자들의 영접을 받았다. 그곳에서 연 이틀밤 두번의 집회를 가졌으며, ‘네메시오’는 임시 주임 감독자로 봉사하도록 임명을 받았다.

후에, ‘바르셀로나’로 돌아온 그 방문자들은 1947년 5월 18일 약 20여명에게 연설을 하였다. 그 도시를 떠나기 전에 ‘라몬 포르네’가 ‘스페인’ 내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과 그들의 모든 회중 활동을 감독하는 임시 종으로 임명되었다.

왕국 봉사의 새로운 장

1947년 12월 통치체의 다른 성원들이 ‘스페인’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방문하였다. 그 당시, ‘N. H. 노워’ 형제와 ‘M. G. 헨첼’ 형제가 ‘스페인’의 동료 신자들을 영적으로 도울 수 있었다. 그 방문자들을 따라 ‘왙취 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를 졸업한 ‘존 쿠크’가 함께 왔다. 그렇다, 이 형제는 내란이 시작되기 바로 전인 1936년에 ‘스페인’을 떠났던 바로 그 형제였다. 이제 그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의 우리의 사업을 조직하도록 ‘이베리아’ 반도로 임명되었다.

도움이 필요한 곳 중 하나는 ‘바르셀로나’였는데, 그곳에는 개인적인 의견 차이로 분리된 두개의 별개 집단이 활동하고 있었다. ‘쿠크’ 형제가 그곳 공항에 도착하였을 때, 형제들의 두개의 작은 집단들이 그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서로간에는 기꺼이 인사를 나누지 않았다. 약 일주일이 지나자 상태가 매우 어렵게 되었다. 그 형제들은 혼란에 빠지고 실제로 전혀 야외 봉사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곧, ‘쿠크’ 형제는 공동 「파수대」 연구를 조직할 수 있었고 비록 상처받은 감정들이 치료되기 까지에는 오랜 기간이 걸렸지만, 그 때부터 분위기가 서서히 개선되기 시작하였다.

‘스페인’ 내에서의 우리의 사업이 재기되는 중요한 첫 단계는 다시 호별 방문 봉사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제안에 반대가 있었다. “‘쿠크’ 형제, 여기는 ‘런던’이나 ‘뉴우요오크’가 아닙니다. 이곳은 바로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입니다. 여기서는 호별 방문 봉사를 할 수 없읍니다!” 하고 그들은 말하였다. 그러나 ‘존’은 그렇게 생각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이 먼저 시작하였으며, 여기 저기 외딴 집들을 방문하였으므로, 경찰의 수색을 받는다거나 실제로 고발을 당하는 일이 없었다. 다른 형제들은 이러한 그의 본을 따르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곧 재치와 조심성을 가지고 ‘가톨릭’ 성서를 사용함으로써 실제로 호별 방문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스페인’에서는 전후 호별 방문 전파 활동이 조직된 첫해인 1948년에 34명의 왕국 전도인들이 보고하였다.

‘마드리드’에 있는 집단은 ‘바르셀로나’에 있는 집단보다 약하였다. ‘카르멘 티에라세카’와 ‘나티비다도 바르구에노’와 같은 자매들이, 그들 가운데 얼마간의 ‘프로테스탄트’ “독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직의 인도를 밀접히 따르고 있었지만, 그곳에는 인도할 만한 유능한 형제가 없었다. ‘발레카스’ 구역에 있는 ‘마드리드’ 교외의 ‘프로테스탄드’교인의 집에서 집회들이 열리고 있었는데, 그 ‘프로테스탄드’교인은 ‘토랄바 데 칼라트라바’에서 일찌기 ‘주도권을 잡으려’ 했던 사람이었다. ‘존 쿠크’가 도착하기 전에, 이 ‘프로테스탄트’교인은 「파수대」 연구를 사회해 왔었는데, 이 연구가 때로는 거의 세 시간씩 계속되었고, 어떤 때는 그의 해설이 30분이나 계속되었다. ‘존’은 사실상 그 당시 그러한 상태를 개선시킬 수가 없었다. 그 당시 ‘마드리드’에서는 유능한 형제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존’은 ‘마드리드’에서 기차를 타고 ‘시우다드 리알’로 갔으며, 거기서 ‘토랄바 데 칼라트라바’로부터 온 형제들을 만났다. 처음 며칠 동안 만사가 잘 되어 나아갔으며, 경찰의 엄한 감시에도 불구하고 그는 형제들과 함께 몇번의 훌륭한 집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나흘째 되던 날 ‘존’은 병이 나서 눕게 되었다. 열이 있었으며 폐에 이상을 느꼈다. 수분이 많이 필요하였지만 그 마을의 물은 수질이 나빴다. 설상가상으로 그 마을에는 적당한 의사가 없었다. 날이 감에 따라 ‘존’뿐 아니라, 경찰의 의심을 사고 있는 이 “난처한” 외국인을 맡고 있는 형제들에게도 사태가 더 나빠졌다. 결국 ‘존’은 억지로 ‘바르셀로나’로 돌아갔으며, ‘라몬 세라노’와 ‘프란시스코 세라노’가 그를 맞아 자기들 집에서 그가 필요한 간호를 받게 하였다. 한 동안 의사가 하루에 세번이나 왕진을 왔으며, 형제들 마저 그가 죽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쿠크’ 형제는 ‘세라노’ 가족의 간호를 받아 그 시련을 이겨 냈다.

의사는 ‘존 쿠크’ 형제에게 회복을 위해 그 산지에서 몇주일을 보내도록 조언을 하였다. 그러므로 ‘네메시오 오루스’는 ‘바르바스트로’에 있는 그의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도록 그를 초대하였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문제들이 있었다.

‘마키’ 유격 대원으로 오인되어 체포됨

‘바르바스트로’에 머무르는 동안, ‘존’과 ‘네메시오’는 전형적이면서도 특이한 경험을 하였다. ‘네메시오’는 앞서서 ‘비센테’라고 하는 한 관심자에게 이 방문에 대하여 알리는 편지를 보낸 일이 있다. 낡은 ‘버스’가 이 방문자들을 내려 놓았을 때, 불길하게 보이는 영접 위원회—한명의 사제와 중무장한 네명의 경찰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근처에는 순박한 농부 차림의 ‘비센테’가 가방을 싣고 갈 나귀를 데리고 근심 어린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그들이 인사를 나눈 후, 나귀에 짐을 싣고 마을로 통하는 길을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경찰들 중 두명은 그들 앞에 서고 다른 두명은 그들 뒤에서 사제와 함께 따라오고 있었다. 그 형제들은 이들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그들이 마을에 가까이 오자, 경찰 한명이 뒤에서 “서! 손들어!” 하고 소리쳤다. ‘존’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는 이에 관하여 항변하지 않았다. 그들은 무기가 있는가 우리를 수색한 다음, 계속 그 형제의 집으로 가라고 명령하였다. 그 동안, 사제는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으며, 그의 잔꾀는 멋지게 성공하였다.”

어떻게 그러한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는가? ‘비센테’는 자기 가족에게 ‘네메시오’의 편지를 읽어 주었다. 그러나 ‘가톨릭’교인인 일하는 소녀가 그것을 듣고는 그 사제에게 일러 바쳤다. 그러자 그 사제는 위험한 인물이 ‘비센테’를 방문하기 위해 올 것이라는 사실을 경찰에 밀고하였다. 그 당시 그 지역에는 ‘프랑스’에 본부를 둔 ‘스페인’ 정치 망명자들인 ‘마키’ 유격대원들이 국경을 넘어 습격을 하는 일이 종종 있었으며, 그리하여 그 지방 경찰은 항상 경계 태세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존’과 ‘네메시오’에게 ‘마키’ 유격대 첩자들이라는 혐의를 씌웠던 것이다.

‘비센테’의 집에서 우리의 진실한 입장을 설명하였으며, 경찰들은 떠났다. 그 세사람이 기분 좋게 ‘코오피’를 들고 있었는데, 경찰들이 다시 돌아와 그들을 체포하였다. 무슨 이유였는가? 그들이 불법 집회를 본다는 이유였다 ‘프랑코’의 포고령은 세 사람 이상이 허락받지 않은 집회를 보는 것을 금지시켰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그들은 한밤중부터 새벽 5시까지 그 근처에 있는 경찰서에서 취조를 받았다. 그후, 그 세명은 사용하지 않는 수도원 건물 내에 있는 감방에 갇히게 되었고 네명의 군인과 하사관 한명이 경비를 하였다. 그들은 그 속에서 바닥에 깔린 더러운 ‘매트레스’ 위에서 잠을 자며 며칠을 보냈으며, 식사는 어떤 사람이 ‘그라우스’ 마을에 있는 여인숙에서 가져오도록 어떤 사람에게 돈을 주었다. 그런데 이것이 ‘존’에게는 회복기가 되었던 것같다.

그들 세명은 다시 한번 장교들에게 심문을 받았는데, 그들은 매우 정중하고 점잖았다. 삼일째 되는 날 세명 모두를 석방하라는 전보가 그 도의 도지사로부터 왔다. 결국, 그들은 ‘비센테’의 집으로 돌아가 거기서 계획된 방문을 계속하였다.

‘존 쿠크’는 ‘네메시오’와 3주간을 함께 보낸 후 ‘바르셀로나’로 돌아왔는데, 이곳에서는 사업이 매우 잘 발전하고 있었으며, 약 40명의 왕국 전도인들이 그 사업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 당시 ‘스페인’에서 기념식을 가졌는데, 96명이 참석하였으며, 18명이 표상물을 취하였다. 표상물을 취한 자의 수는 ‘마드리드’에 있는 ‘프로테스탄트’ “형제”의 영향으로 불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경향은 1950년까지만 계속되었으며, 그때 그 “형제”에 대한 사법적인 조치가 취해졌다. 보다 올바로 이해를 갖게 되자 표상물을 취하는 자의 수는 1956년에 세명으로 줄어들게 되었다.

‘스페인’ 내에서, 느리지만 확실하게 모든 일이 발전해 나아가게 되자, ‘존 쿠크’는 ‘포르투갈’로 가야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그는 1948년 8월에 ‘포르투갈’로 갔으며, 1951년 7월까지 그는 ‘스페인’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떠나기 전 8개월 동안 가진 연합은 ‘스페인’ 내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바로 잡는 데 기여하였다. ‘사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권적인 질서가 수립되어 갔으며, 그 열매가 충만하게 되었다.

문제들이 ‘토랄바’에서 일어나다

1948년 3월 18일, ‘호세 비센테 아레나스’와 ‘페드로 가르시아’는 ‘토랄바 데 칼라트라바’의 시장과 경찰서장 앞으로 호출되어 갔다. 이 회견의 목적은 형제들이 집회를 갖는 것과 다른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일을 중지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페드로’ 형제는 대답하기를, 자기들은 권세들을 존경하지만, 집회와 전파 활동은 중지할 수 없다고 하였다. (사도 5:29) 그러나 그것으로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4월 10일, 경찰은 ‘뉴우요오크’ ‘브루클린’ 협회가 보낸 서적짐을 가로채 압수하였으며, 도지사는 그것을 받게 되어 있는 형제들에게 벌금을 부과하였다. 어떤 형제들은 그 벌금을 물었지만, 다른 형제들은 자신들이 아무런 죄를 범하지 않았으므로 벌금 물기를 거부하였다. 후에, 협회는 ‘바르셀로나’로 서적을 보냈고, 그곳 형제들은 그 서적을 ‘토랄바’로 보내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렇다. 이곳에 있는 그 집단은 여호와께 보다 큰 확신을 둘 필요가 있었음이 분명하였다. 그리하여 책임있는 직책에 대한 새로운 임명이 있었으며, 이것은 ‘토랄바’ 집단의 영을 발전시켰다.

‘토랄바’에서 가장 큰 문제는 흡연 습관이었다. 그곳에 연합하고 있던 거의 모든 남자들은 담배를 피웠으나 ‘존 쿠크’ 형제 근처에서는 흡연을 삼가하였다. 그러나 어느날, ‘비엔베니도 곤잘레스’는 ‘존’이 있는 곳에서 담배를 피움으로써 고의적으로 이 문제를 일으켰다. 그 결과, 그 문제가 다시 한번 분명하게 되었으며, ‘비엔베니도’가 말하는 바와 같이 “‘존’의 충고는 일부 사람들에게 그 더러운 악습을 버려야 할 새로운 자극제가 되었다.”

전후 처음으로 ‘발레아레스’ 제도에 씨가 뿌려지다

‘스페인’ 내의 다른 곳에서도 왕국 전파 사업이 발전하고 있었는가? 그렇다, ‘스페인’의 동부 지중해 연안에서 16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곳에 ‘발레아레스’ 제도가 있는데, 이 제도를 이루고 있는 주요 섬들은 ‘말료르카’(마효르카) 섬, ‘메노르카’(미노르카) 섬, ‘이비사’ 섬 및 ‘포르멘테라’ 섬 등이다. 1940년대에 이르기까지 이 섬들에서의 ‘가톨릭’ 독점권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았었다. 그러나 여기에도 변화가 있었는데, 그렇게 되는 데는 ‘마드리드’에 살고 있었지만 ‘말료르카’에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던 희랍 상인 ‘마누엘 알렉시아데스’의 역할이 컸다.

어느날 전신국에서, ‘마누엘’은 그곳 직원 한 사람에게 증거를 시작하였다. 이 사람은 그 소식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자기 아내가 열광적인 ‘가톨릭’교인이었으므로 이 기회에 자기 아내의 그 광적인 신앙 생활을 꺽어 볼 속셈으로 그 소식에 귀를 기울였다. 이와 같이 하여 ‘마누엘 알렉시아데스’는 ‘말료르카’ 동북 해안에 있는 조그마한 마을인 ‘푸에르토 데 폴렌사’에 있는 ‘가톨릭’ 행동대의 회장인 ‘프루덴시아 폰트 데 보르도이’에게 증거할 수 있었다. 그 여자는 우리의 서적 몇권을 받았다.

후에 ‘프루덴시아’는 친구를 방문하고 그에게 소책자를 하나 전해 주었다. 이 친구는 매우 흥미를 갖게 되어 그것을 자기 딸인 ‘마아가리타’에게 주었다, ‘마아가리타’와 그의 어머니, 이 두 사람은 모두 진리에 관심을 나타냈으며, 더 많은 서적을 구하여 ‘프루덴시아’와 함께 성서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놀랍게도 새벽 3시부터 아침 8시까지 연구를 계속하였다! 사실, 한번은 다섯 시간이나 계속되는 연구를 하게 되자, ‘마아가리타’는 자기 방에 숨어 버린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 다섯시간 동안 자기가 꾀를 피운 일을 반성해 보고 이내 자기가 한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그는 여호와께, 자기가 성서는 공부하고 싶지만, 그 여인과 다섯시간 동안이나 하는 것은 원치 않는다고 기도하였다!

1949년, ‘마아가리타’와 그의 어머니는 그들 자신의 연구 시간표를 짰으며, 2년 동안 그들은 이 시간표를 따르는 한편, 자기 이웃들과 벗들에게 비공식적으로 증거하였다. 1953년에 발전을 위한 전기가 시작되었는데, 그때 ‘존 쿠크’가 3일 동안 그들을 방문하였으며, 놀랍게도 ‘팔마 데 말료르카’에서 가진 집회에 26명이 참석하였다.

‘마아가리타’는 이제 26세로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었으므로, ‘존 쿠크’는 연설을 마치고 나서 적극적으로 접근하여 그 집회에 참석한 관심자들과 10건의 성서 연구를 마련하였다. 삼일간의 훈련은 ‘마아가리타’에게 여호와의 조직에 대한 깊은 인식을 심어 주었으며, 또한 ‘파이오니아’ 즉 좋은 소식의 전 시간 전파자로서 봉사하는 일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1953년 ‘존 쿠크’가 ‘뉴우요오크’에서 열린 그리스도인 대회에 참석하였을 때, 그는 ‘마아가리타’에게 ‘파이오니아’ 신청서를 보내 주었으며, 그는 기꺼이 그 신청서를 제출하였다. 여러 가지 면에서 발전함에 따라 ‘마아가리타 코마스’는 그 해 8월에 특별 ‘파이오니아’가 되었다.

그때 쯤, ‘길르앗’ 학교 15기 졸업생인 선교인 ‘폴 베이커’가 이미 ‘말료르카’에서 1년 이상 머물고 있었다. 1952년 3월 25일, 도착한지 얼마 안되어, ‘폴’은 두 가족들과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으며, 이어서 그들과 첫 「파수대」 연구 집회를 조직하였다. 그가 도착한지 2주일 후, 기념식이 되었는데, 그 기념식에 21명이 참석하였지만, 표상물을 취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달 말에 다섯명의 전도인들이 처음으로 야외 봉사 활동을 보고하였으며, 그들은 네건의 성서 연구를 사회하였다. ‘베이커’ 형제는 그가 그 나라에서 추방되던 해인 1957년까지 ‘팔마 데 말료르카’에서 기둥으로 계속 일하였다.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에서의 현저한 발전

이제 살펴볼 여러 해 동안, ‘스페인’의 왕국 전파 사업에 대한 감독에는 얼마간의 변화가 있었다. ‘존 쿠크’ 형제가 도착한지 얼마 안되어, ‘라몬 포르네’가 ‘루이스 부흐’로 바뀌었으며, 그후 얼마 안있어 ‘루이스 부흐’는 ‘아르헨티나’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다음 1950년에 ‘페드로 페레스’ 형제가 이 직책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한 때 무정부주의자였었다. 그리하여 그 당시 존재하던 불안정한 시기에 그는 경찰의 감시를 더욱 심하게 받게 되었다. 물론 그는 모든 정치적 활동들을 이미 그만두었고, 경찰에 이 점을 설명하였다. 하지만, 이 문제에 관하여 ‘페드로’ 형제는 협회에 편지하였으며, 사업을 감독하는 일을 위하여 다른 형제를 임명하도록 제안하였다. 결국, ‘아르헨티나’로부터 온 ‘호르헤 밀라레스’에게 이 특권이 맡겨졌다.

이 시점에서, ‘마드리드’의 상태를 간단히 다시 한번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같다. 이 곳에서 앞서 언급한 ‘프로테스탄트’적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파수대’ 연구를 사회하고 있었으며, 그 잡지에서 말하는 것에 자기 자신의 견해를 혼합시켰다. 사실상, 그 집회가 끝나면 사람들은 담배를 꺼내 피우며 잡담을 한다는 보고가 있었다.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었다!

‘토랄바 데 칼라트라바’에서 온 형제인 ‘페드로 가르시아’ 형제는 ‘마드리드’의 ‘발레카스’ 지역에서 이러한 상태를 알고 난 후 ‘마드리드’로 갔으며, 1949년 12월 16일 그 ‘프로테스탄트’교인을 포함하여 그곳 형제들을 만났다. 이들과 토론을 하고 협회와 연락을 취한 결과, ‘루이스 페이토’와 ‘에울로기오 곤잘레스’가 그 회중에서 책임있는 직책들에 임명되었다.

1950년 4월 1일 기념식에서 ‘마드리드’에서는 실로 극적인 발전이 있었다. 3월 31일, ‘페드로 가르시아’가 ‘마드리드’에 도착하였으며, 우선 그 ‘프로테스탄트’교인과 기념식 문제에 관해 토론하였다. 기념 일자 또는 누구만이 그 표상물을 취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프로테스탄트’교인은 기념식 연설을 하려고 하였다! 다음날, ‘페드로’가 그 연로한 “형제”와 집회 장소에 가 보니 거기에는 20명 가량이 와 있었는데,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누구인가 물어 본 결과, 그들은 이 “형제”가 그 집회에 초대한 ‘프로테스탄트’교인들 및 재림교인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자기 패거리들을 초대함으로써 참석자들을 교활하게 증가시켰다.

‘페드로 가르시아’는 신속히 행동을 취하여 ‘에울로기오 곤잘레스’로 하여금 기념식 연설이 시작되기 전에 그 집단에게 연설을 하라고 제의하였다. 그는 ‘왙취 타워 협회’로부터 받은 편지와 일치하게 그 날짜와 표상물을 취하는 사람들에 관한 문제를 밝혀야 하였다. 이것은 그 ‘프로테스탄트’ “형제”가 예기치 못한 돌발 사건이었다. 그 집회는 혼란 속에 빠지고 말았다. 그 ‘프로테스탄트’교인과 그의 동료들은 나가 버렸으며, ‘페드로 가르시아’는 기념식 연설을 마쳤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그 ‘프로테스탄트’교인의 영향력은 없어지고 말았다. 그는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의 지시를 받기를 거절하였으며, 회중 내에 있는 책임있는 형제들의 임명을 존경하지 않았다. (마태 24:45-47) 결국, 그 집회들은 그의 집에서 보지 않게 되었으며, ‘마드리드’ 근교에 있는 ‘벤타스’에 소재하는 ‘에울로기오 곤잘레스’의 집에서 열리게 되었다.

‘스페인’에서 최초로 ‘파이오니아’들이 임명되다

‘존 쿠크’, ‘켄 윌리엄스’, ‘버나아드 백하우스’ 및 ‘폴 베이커’ 등과 같은 ‘길르앗’에서 훈련받은 선교인들이 도착함과 동시에 ‘스페인’ 왕국 선포자들의 작은 집단 내에 있는 어떤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파이오니아’ 정신이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1949년에는 여섯개의 집단들과 연합되어 있는 이 나라 내의 전도인들이 53명 뿐이었다. 이들로부터 ‘스페인’의 최초의 ‘파이오니아’인 ‘바르셀로나’의 ‘마리아 고메스’가 나왔다.

1950년에, 전도인 93명의 신기록을 달성하였다. 다음해에 이 수는 121명이 되었으며, 다음 1952년에는 145명이 되었다. 이 후년에 ‘스페인’ 밭에서는 전환기를 이룩하였는데, 네명의 특별 ‘파이오니아’가 임명되었다. 이 중에 세명은 ‘스페인’인—‘토랄바 에메칼라트라바’에서 온 ‘막시모 무르시아’, ‘마드리드’에서 온 ‘루이스 페이토’와 ‘마루하 푸냘’이었고, 또 한 사람은 ‘브라질’인인 ‘라이문도 아볼레타’였다. 1977년에 그 수는 ‘스페인’ 지부 산하에서 일하는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591명에 달하였다.

조직을 강화시키는 일

1950년대에는 통치체 성원들의 격려적인 방문이 계속 있었다. 예를 들면, 1951년 7월에 ‘F. W. 프랜즈’ 형제가 ‘스페인’을 다시 방문하였다. 그 방문 중 기억에 남을 만한 일은 ‘마드리드’ 교외에서 가진 노천 집회였다. 그 집회에서 1946년에 침례를 받았으나, 침례받지 않은 사람에 의하여 침례를 받은 ‘토랄바’에서 온 몇명의 형제들은 재침례를 받기로 결정하였다. ‘프랜즈’ 형제가 ‘스페인’어로 침례 연설을 하였으며, ‘존 쿠크’ 형제가 ‘하라마’ 강에서 침례를 주었다. 이처럼 ‘스페인’에서 통치체 성원과 직접 개인적인 접촉을 갖게 된 일은 그 집회에 참석한 28명의 형제들에게 커다란 격려가 되었다.

‘그라나다’에서는 조심해야 하였기 때문에, 형제들은 ‘호텔’방에서 집회를 가졌다. ‘안달루시아’ 지방의 중심부인 ‘그라나다’에는 ‘아랍’계 단체들과 그 문화를 상기시켜 주는 것들이 많이 있었다. ‘F. W. 프랜즈’ 형제는 ‘존 쿠크’ 형제와 함께 ‘아랍’인들 즉 이곳에서는 일반적으로 ‘무어’인들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사람들에 의하여 건축된 ‘알함브라’궁을 방문하였다. 흥미로운 점은, ‘알함브라’ 내에 있는 ‘모자이크’, ‘타일’ 및 벽토 치장 등 모든 것이 우상 숭배를 철저히 배격하는 ‘모슬렘’ 경향을 반영하고 있었다. 어떻게 그러한가? 모든 미술 도안들이 기하학적이며 ‘아라비아’풍의 서예 방식에 기초해 있었다.

이에 부언하자면, 1950년에 ‘아르헨티나’에서 한 형제가 그의 고향인 ‘그라나다’를 방문해서 그곳에 있는 몇 사람에게 진리를 소개하였다. 곧 네 사람이 「파수대」 예약을 하였고, 그들은 일반에게 개방되어 있는 ‘알함브라’궁에서 사실상 토론회인 비공식적인 “집회”를 가졌다. 후에 이 집회들은 ‘그라나다’의 외곽, ‘사크로몬테’에 있는 동굴로 옮겼다. 흥미있게도, 이 조그마한 집단은 매년 ‘사크로몬테’ 언덕에 있는 외딴 곳으로 감으로써 기념식에 유의하였는데, 거기서 해가 질 때쯤 「파수대」 기사를 읽었다. 때가 되자 그리스도인 회중 하나가 ‘그라나다’에 세워졌다.

‘N. H. 노워’ 형제와 ‘M. G. 헨첼’ 형제는 1952년 2월에 다시 ‘스페인’을 방문하였다. 그 당시 ‘바르셀로나’에는 다섯 군대의 「파수대」 연구가 조직되었으며, 장차 ‘스페인’ 내에서의 집회들과 전파 활동을 위한 지침이 세워졌다. 당국과의 불필요한 문제가 생기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크게 조심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집회에 참석하는 인원을 8내지 12명으로 하도록 제안되었다. 그 당시 ‘버나아드 백하우스’ 형제가 회중들 가운데서 순회 봉사를 하도록 임명되었다.

우리의 서적 공급량이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그 당시에 ‘스페인’에는 색다른 마련이 소개되었다. 호별 방문에서 진정으로 관심을 가진 사람을 만나게 되면, 형제들은 그 사람에게 책을 한권 빌려 주어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 다음 그들은 그 사람의 주소를 ‘브루클린’에 있는 협회 본부에 보냈고 협회는 그 사람에게 책을 우송하여 주었다. 그 다음 전도인은 보내 준 그 책에 대한 헌금과 빌려 주었던 책을 도로 받았다. 후에 이러한 마련은 중단되었으나, 얼마 동안 이 방법은 훌륭한 목적을 달성하였다.

‘노워’ 형제와 ‘헨첼’ 형제는 1953년 1월에 ‘스페인’으로 돌아왔으며, 이 기회는 ‘존 쿠크’ 형제가 함께 할 수 있었던 마지막 방문이 되었다.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에서 집회가 마련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였다. ‘마드리드’에서 그 방문한 형제들은 ‘쿠크’ 형제와 ‘백하우스’ 형제와 함께 회의를 가졌는데, 그 때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존 쿠크’를 지부 감독자로 하는 협회의 하나의 지부 산하에 두기로 결정되었다.

그 방문 중, ‘노워’ 형제는 특히 대회를 조직하는 일에서 조심하도록 제안하였다. 그의 생각에는, 대회 규모를 백명이나 그 이상이 한꺼번에 모이는 것보다, 30내지 40명이 야유회를 갖는 규모로 작게 만드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야유회” 대회는 1970년 우리의 사업이 합법화될 때까지 ‘스페인’ 전역에 있는 산과 숲에서 개최되었다. 단지 몇 차례의 경우에만 경찰의 개입을 받게 되었을 뿐이다.

1953년 7월에, ‘존 쿠크’ 형제는 ‘뉴우요오크’ 시에서 개최된 여호와의 증인의 국제 대회에 참석하도록 초대를 받았다. 그 대회를 마친 후, ‘포르투갈’로 돌아가서 ‘뉴우요오크’ 대회의 주요점들을 반복해 주기 위해 ‘리스본’ 근교에서 “야유회” 대회를 개최하였다. 그 다음, 그는 ‘마드리드’행 기차를 탔다. 그러나 그가 ‘스페인’ 국경에 이르렀을 때, 재입국이 허락되지 않았다. 1954년 5월에, 그는 ‘스페인’ 국경을 다시 넘고자 시도하였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의 이름이 “요 주의 인물 명단”에 올라 있었기 때문이다. ‘존 쿠크’는 선교 활동을 위해 다시는 ‘스페인’으로 돌아오지 못하였다. 그러나 왕국 전파 활동의 견고한 발판은 놓였으며 여호와의 성령의 영향 아래 계속 발전해 나아갔다. 하지만, ‘존 쿠크’는 ‘아프리카’에서 선교 봉사를 계속하였고, 지금도 남‘아프리카’ ‘벧엘’에서 계속 봉사하고 있다.

조직화된 박해

‘스페인’ 내에서 전파 사업이 조직적으로 시작됨과 동시에, 박해도 조직적으로 시작되었다. ‘프로테스탄트’ 종파들은 사실상 숨어 있는 상태여서, ‘스페인’ 내에 ‘프로테스탄트’ 교도들이 30,000여명으로 추산되지만, ‘가톨릭’ 교직자들의 비위를 거스르는 아무런 반응을 일으키지 않았었다. 그러나 몇명 안되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활동은 즉각 ‘가톨릭’ 교직자들의 분노를 일으켰다. 결국 그들의 독점권이 도전을 받은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어떤 일을 하였는가? 종교 재판 당시와 같이, 그들은 고발을 하였으며, 국가의 손에 넘겨 지저분한 짓을 하게 하였다.

‘나티 바르구에노’의 딸 ‘나티비다드 퓨날’의 경험을 들어 보면 이러한 박해를 예시할 수 있을 것이다. 1953년 어느날, 17세였던 이 자매는 특별 ‘파이오니아’와 함께 야외 봉사를 하고 있었다. 한 집에 재방문을 갔는데, 한 남자가 나타나서 매우 공격적인 투로 여러 가지 질문을 하였다. 이 사람의 언성이 높아지자, 그의 가족들이 더 나왔다. 마침내 그는 자신이 경찰관이라고 신분을 밝혔다. 그는 이 두 증인들을 ‘가톨릭’ 교회당으로 데려다가 사제 복장은 하지 않았지만, 사제처럼 말하는 사람 앞으로 데려갔다. 거기서 그들은 경찰서로 끌려갔으며, 가방을 수색당하고, 소책자들과 성서를 압수당하였다. 그 두 사람은 상당히 오랫동안 심문을 받았으며, 두번째 심문을 받은 후에 비밀 경찰 민사계 주임 앞으로 이첩되었다. 그들이 그곳에 당도하자 곧 더러운 감방에 갇히게 되었다. ‘나티’는 그곳이 도둑들과 창녀들 및 동성애자들로 들끓는 곳임을 곧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환경 속에서도 기회를 이용하여 증거를 하였다.

그 날밤, 다른 사람들이 잠자리에 든 후, ‘나티’는 어떤 방으로 불리워 가서 다시 한번 심문을 받았다. 처음에는 “친절하게” 질문을 하다가 곧 더욱 구체적인 질문들을 하였으며, 심문하는 그 주임은 누가 이 사업을 지시하는지, 이 사업을 하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그들이 사는 곳은 어디인지 등을 알고자 하였다. 그는 특별 ‘파이오니아’ 방에서 ‘나티’를 포함하여 일단의 증인들이 찍은 사진 한 장과 협회로부터 받은 편지들 및 기타 물건들을 제시하였다.

‘나티’는 계속하여 자기 동료 신자들을 보호하는 식으로 대답을 하였다. 사실, 그는 자기가 외국 형제들의 주소를 모르고 있던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였다. 마침내 심문이 끝났으며, ‘나티’는 공동 감방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다음날, 그는 독방으로 사용되는 조그마한 방에 갇히게 되었다. 거기서 그는 이틀을 보냈으며, 구속 영장없이 그를 구금시킬 수 있는 최대 기간인 72시간이 차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그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몇주 후, ‘나티’는 경찰서 내의 경범죄 즉결 재판소에 출두해야 하였으며, 그가 어떤 사건으로 고발을 당하였다. 이 자매를 고발한 사람은 다름 아니라 처음에 이 문제를 일으켰던 바로 그 경찰관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태가 돌변하였다. 그 경찰관은 “아무런 추문도 없었읍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판사에 의하여 독촉을 받자, 그는 단순히 “그들이 성모 ‘마리아’를 믿지 않기에 제가 분개하였던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결국 이 사건은 기각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이 법정을 떠날 때, 고발하였던 그 경찰관이 ‘나티’와 그의 동료에게 다가와서 “당신들은 다른 사람들과 좀 다른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사과 드립니다” 하고 말하였다.

이것으로 ‘나티’의 투옥 생활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2년 후, 그는 동일한 이유 즉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한다는 이유로 같은 감옥에서 수감 생활을 하였으며, 그의 친 자매인 ‘마루화’ 역시 좋은 소식을 선포한다는 이유로 투옥되었었다. 그는 감옥에 있는 동안 수감자들인 동성애자들과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으며, 쥐들과도 싸워야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투옥을 당하면서도 이 자매들은 계속하여 여호와를 섬겼으며,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열성스러운 노력을 축복해 주셨다.

‘스페인’ 내의 성서

한 가지 기억해 둘 점은, ‘스페인’은 여러 세기 동안 성서에 대하여 무지한 상태로 있어 왔기 때문에, 심지어 1950년대에 와서도, 성서가 위험한 ‘프로테스탄트’ 책으로 생각되었으며, 훌륭한 교육을 받은 ‘가톨릭’ 교도들 외에는 아무도 성서를 읽지 않았다. ‘빈센테 파라모’가 ‘마드리드’에서 한 구두 수선공에게 전파하는 동안 가졌던 한 경험담은 이러한 무지가 어떠한 것인지 알려 준다. 그가 전도를 하자 그 구두 수선공은 이렇게 외쳤다: “하지만 당신은 내가 성서를 모를 줄 알고 성서에 관해 내게 이야기하려고 여기 왔지요! 잘 들어 두시오. 나는 ‘돈키호테’를 일곱번이나 읽었단 말이요!” 물론 ‘돈키호테’는 스페인 작가 ‘미구엘 데 세르반테스’가 쓴 유명한 소설이다.

또 다른 경우, 어느 자매가 한 부인에게 증거를 하면서, ‘스페인’어로 ‘산타 비블리아’인 성서에 관하여 언급하였다. 그 부인은 “사실 나는 교회 달력에 나오는 모든 성자들을 알고 있는데, 이 ‘산타 비블리아’라는 성자는 들어 본 일이 없어요” 하고 외쳤다. 그 여자는 성서라는 ‘산타 비블리아’라는 말과 자기가 믿는 성자들 즉 ‘산타 마리아’ 또는 ‘산타 루치아’ 등과 혼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빌바오’의 ‘베고냐’ 지역에서 온 ‘신포리아노 바르킨’의 경험담을 생각해 보자. ‘베네수엘라’에서 온 그의 사촌이 그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소개해 주자, 그는 사제에게 가서 도서관에서 성서 한 권을 빌려 달라고 부탁하였으며, ‘신포’가 가입하고 있는 ‘가톨릭 행동대’와 함께 성서를 고려해 보겠다고 하였다. 사제의 반응은 어떠하였는가? “성서 아니라도 고려해 볼 책이 많이 있는데 왜 하필 성서를 찾는거지요?” ‘신포’는 이러한 대답에 만족치 않아, 자기의 ‘프로테스탄트’ 성서를 가지고 다른 사제를 찾아 갔는데 그 사제는 이사야 7:14 한 귀절을 찾는 데 거의 반시간이 걸렸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신포’는 그 후 저명한 ‘라디오’ 방송 담당 사제에게, 시편 37편(11절; 마태 5:5 비교)에서 알려 주는 바와 같이, 온유한 사람들이 땅을 차지하리라고 교회에서 가르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질문을 하였다. 그 교직자는 “에, 그것은 온유한 자가 땅에서 더 오래 살 것이라는 뜻인데 ··· 그리고 그 성경 말이요 ··· 그것을 내게 남겨 두고 가겠소 아니면 스스로 태워 버리겠소?” 하고 물었다. 얼마 후, 한 공개 토론 석상에서 ‘신포 바르킨’은 자기의 성서를 능숙하게 사용하였기 때문에 이 ‘라디오’ 담당 사제는 무심결에 이렇게 말하였다: “그 사람들 짧은 시간에 참 잘 훈련시켰는데”

왕국 전파 사업에서 성서를 사용하는 것에 문제가 없지는 않았다. 예를 들면, 어느날 한 소년이 ‘톨레도’에 있는 ‘엔그라시아 퓨날’ 자매의 집을 찾아와 편지 한통을 전달해 주었는데, 그것은 성서에 관해 더 설명을 듣고 싶으니 어떤 집으로 다시 찾아와 달라고 하는 편지였다. 그 자매는 두번이나 그 집을 방문하여 한 여인에게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의 남편이 이야기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엔그라시아’의 아들인 ‘마늘로’가 ‘비센테 파라모’를 따라 그곳을 찾아갔다. 부인이 나왔는데 남편을 부르겠다고 하였다. 그의 남편이 나와서는, ‘마놀로’에게 그가 가지고 있는 책을 보여달라고 하였다. 그 남자는 그 책을 받아들더니, “자네가 이 책을 잘못 사용하고 있으니, 이걸 되찾고 싶거든 내일 교구 사제에게 가 보게”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욕을 하며 ‘마놀로’를 때리면서, 그 두 증인에게 떠나라고 명하였다.

다음날, ‘마놀로’는 자기의 성서를 찾으려고 교구 교회로 찾아갔다. 그곳 사제는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를 공격하고, 몇 차례 그를 때렸다. 그리고는 경찰을 불러 그를 잡아 가라고 하였다. 그들은 또 ‘마놀로’의 어머니 ‘엔그라시아’를 억류하고, 그 두 사람을 5일 동안 감옥에 가두었다. 그들이 감옥에 있는 동안, 경찰은 수색차 ‘엔그라시아’ 자매 집으로 갔다. 그 자매의 10대의 딸인 ‘파스’는 그들에게 자기 어머니가 감옥에 갇혀 있다고 말하였다. 그들은 그 자매가 아직까지 감옥에 있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라서, 즉각 전화를 걸어 그를 석방시키라고 하였다. 법적으로는 영장 없이 최고 3일까지 구금할 수 있는 데 반하여, 이 자매는 5일간이나 억류되어 있었던 것이다.

교직자들과 경찰의 활동이 강화되다

우리의 호별 방문 활동이 활발해지자, 교직자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는데, 특히 ‘바르셀로나’의 대주교로부터의 반발이 심하였다. 그는 자기 교구 내의 공보에 공개장을 실었다. 그러나 그것은 1954년 3월 19-21일에 ‘바르셀로나’ 시의 신문인 「라 반구아르디아 에스파뇰라」지에 전문 게재되었다. 그 공개장은 ‘가톨릭’ 교회의 적으로서 두 반열을 묘사하였는데, 가난한 사람들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베풀면서 그들 가운데서 개종하는 사람들을 얻고자 하는 ‘프로테스탄트’와 집집으로 다니면서 서적, 소책자, 잡지 및 전도지들을 배포하고 있는 또 다른 사람들을 지적하였다. 분명히 후자는 여호와의 증인들을 가리킨 것이었지만, 우리는 이 기다란 공개장 가운데서 단지 한번만 이름으로 지칭되었다.

그 공개장은 당국자들에게 법적 조치를 취해 공개적 선전을 금지시키고, ‘프로테스탄트’ 종파에 의한 개종 사업을 금지시키도록 촉구하였다. 그 공개장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는 신중하게 가라지들을 관용하고 있다 ··· 그러나 가라지가 씨를 뿌리는 것은 용인할 수 없다.” 결론에서, 가톨릭 열성 신자들에게 다섯 가지 권고 사항을 열거하였다. 그 중 마지막 것은 다음과 같다: “법을 이용하라. 이것은 최후 수단이지만, 사건이 발생할 경우, ‘가톨릭’교인들 가운데서 오류와 이교 가르침이 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포기하여서는 안되고, 포기할 수 없는 수단이다 ··· 때로는 이러한 간단한 위협만으로도 그들의 노력을 중단시키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 공개장에는 하나의 회람이 딸려 있었는데, 그것은 그 투쟁을 진정한 십자군 전쟁이라고 묘사하였고, 그 대주교 자신이 “가톨릭의 연합을 위한 그 십자군의 선봉”에 나선 것으로 설명하였다.

‘라디오’ 방송, 학교, 교회 및 ‘가톨릭’ 행동대 등 모두가 여호와의 증인들을 규탄하는 일에 가담하였으며, 사람들에게 증인들을 집안으로 초대해 들인 다음 경찰을 부르라고 권고하였다. 그러나 종교적 독점주의자들은 몹시 두려워하였는데, ‘바르셀로나’ 전체에 약 130명의 전도인들이 활동하는 것에 대해 그러한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선교인들인 ‘알바로 베레코치아’ 형제와 ‘마리나 베레코치아’ 자매는 모두 사제들과 경찰의 눈을 간신히 피하였다. 한번은 ‘알바로’가 순회 감독자로서 ‘파라렐로’ 회중을 방문하고 있었으며, 두명의 전도인들 즉 ‘화킨 비반코스’와 ‘에두아르도 팔라우’ 형제와 함께 증거하고 있었다. 한 곳에서 이들 두 전도인이 재방문을 하고 있었는데, 그 부인이 반대하며 그들 면전에서 문을 쾅 닫아 버렸다. 그때 그 여자는 경찰에 전화를 거는 것 같았다.

그 동안 ‘알바로’는 그 건물 입구를 살피고 있었는데, 그를 향해 두 사람이 뛰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그를 안으로 떼밀고 들어가 벽에 붙여 세워 놓고 거칠게 수색을 한 다음 가방을 빼앗았다. 물론 그들은 비밀 경찰이었다. 그 중 하나가 ‘알바로’를 지키고 있는 동안 또 하나는 이층으로 올라가 총을 겨누며 ‘비반코스’와 ‘팔라우’ 형제를 끌고 내려왔다. 세명 모두 경찰서로 끌려갔다. 그러나 도중에 ‘팔라우’ 형제는 몰래 몇장의 ‘노우트’를 찢어 버렸는데, 그 속에는 다른 사람들을 유죄로 만들 수 있는 이름들이 들어 있었다. 이번에 그 형제들은 경고 처분을 받고 풀려 났으며, 그 문제가 ‘비아 라예타나’에 있는 중앙 경찰 본부에 보고되지는 않았다. 그렇다, 참으로 위기 일발이었다!

‘마드리드’에서도 경찰은 증인들에 대한 반대 활동을 더욱 강화시켰다. 1953년부터 1958년까지 특별 ‘파이오니아’인 ‘막시모 무르시아’ 형제는 짧게는 하룻밤에서 길게는 한달에 이르기까지 11번이나 투옥되었었다. 그 동안, 그는 그 도시에 있는 여러 경찰 내의 춥고 더러운 여러 개의 감방이 어떤지 알게 되었다.

선교인들이 추방되다

경찰의 단속으로 인하여 1954년에 ‘길르앗’ 졸업생인 선교인 중 한 사람이 추방되었다. 그 해 겨울 혹독한 추위 속에서 ‘빌바오’에서 봉사하는 동안 경찰의 눈에 들어남으로써 ‘버나아드 백하우스’는 ‘바르셀로나’로 가 ‘밀라레스’ 가족과 함께 머물러 있었다. 그 때 그는 장‘티푸스’에 걸려 있었고, 그래서 그는 상당히 오랫 동안 그 가족과 함께 머물러 있어야 하였다.

‘스페인’에 있는 많은 ‘아파아트’들의 경우와 같이, ‘밀라레스’ 형제의 집에서도 조그마한 ‘가스’ 난로를 사용하여 물을 데워 쓰고 있었다. 이 ‘가스’ 난로에는 점화용 불이 있는데, 어느 날 모두 잠든 사이에 그 ‘파일러트’ 불이 꺼져 버렸으며, 그 ‘아파아트’ 안은 서서히 ‘가스’가 차기 시작하였다. 어떻게 해서 그 집 딸은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알아채고 비틀거리며 문으로 가서 도와달라고 외쳤다. 구급차가 달려왔고 ‘밀라레스’ 자매와 ‘백하우스’ 형제에게 산소가 공급되었다. 물론 이 사건으로 이웃이 약간 소란해졌고 또 ‘버나아드 백하우스’ 형제를 포함하여 관련된 사람들의 이름들이 신문에 났다.

다음날 비밀 경찰의 한 수사관이 찾아왔으며, ‘백하우스’ 형제는 그의 잘 알려진 종교 활동으로 인하여 ‘환영하지 않는 인물’임을 분명히 지적하였다. 그의 건강 상태 때문에 즉각 추방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회복되자 ‘스페인’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가 ‘포르투갈’로 떠나게 되자 ‘스페인’ 내에는 단지 네명의 선교인들—‘팔마 데 말료르카’에 있던 ‘폴 베이커’, 그리고 ‘바르셀로나’에 있던 ‘켄 윌리엄스’ 및 ‘베레코치아’ 부부 만이 남게 되었다.

한 가지 언급할 수 있는 점은 그 당시 협회 지부 사무실이 이용하던 사서함에도 손이 뻗쳐 있었다. 그곳에 온 편지들을 빼내서 살펴보는 것이다. 그로 인하여 경찰이 한 특별 ‘파이오니아’를 심문할 때, 그들은 그 자매의 편지의 사진 복사본을 내 보임으로 그가 지부 사무실과 통신 연락을 하였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었다. 법률상으로는 모든 통신문은 불가침의 것이라고 하는데도 그 정도였다!

‘팔랑헤’ 출판물의 공격

1954년에 200명의 ‘스페인’ 왕국 전도인들의 전파는 ‘팔랑헤’ 정치 운동의 ‘바르셀로나’ 지부에 이유없는 반작용을 불러 일으켰다. 그 해 10월에 발행된 그 정당의 월간 잡지의 전면 제목은 “이교를 금지시키라! 여호와의 증인들이 악의적인 전복 의도를 띠고 우리집 초인종을 누른다”라고 실려 있었다. 8면과 9면에 실린 그 기사 내에는 우리의 소책자들 두 가지에서 뽑은 내용들과 함께 ‘스페인’어 「깨어라!」 여러 면이 실려 있었다. 이것은 분명히 거기에 실린 야비한 기사들보다 더욱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한 적대 견해를 갖게 했을 것이다. 그 기사에는 “우리 조국에 그 종파의 씨를 뿌리도록” ‘스페인’에 파견된 증인들 가운데 제1급 요인으로서 ‘버나아드 백하우스’ 형제와 ‘존 쿠크’ 형제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었다.

200명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들이 ‘가톨릭’ 교회를 버렸으므로 가짜 ‘스페인’ 사람들이라고 표현되었다. 그들은 또 공산주의 얼간이들이며 성도착자들이라고도 묘사되었다! 기타 비난 기사들이 「디에즈 미누토스」 잡지와 「헤랄도 데 아라곤」지에 실렸다. 그러나 그러한 공격들도 형제들의 열심을 누그러지게 하지는 못했다.

편의상의 고장

‘F. W. 프랜즈’ 형제가 ‘스페인’에 또 다시 온 것은 1955년 8월과 9월경이었다. ‘알바로 베레코치아’와 ‘마리나 베레코치아’ 부부와 함께 그가 방문했던 곳 중 한 곳은 ‘토랄바 데 칼라트라바’였다. 그 방문자들은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그 조그마한 마을에 있는 ‘페드로 가르치아’의 공장 가까이 차를 몰고 간 다음, ‘알바로’ 형제가 자동차의 ‘엔진’을 끈 다음 마치 고장이 생긴 것처럼 자동차를 멈추었다. 그는 차에서 내려 ‘엔진’ 덮개를 벗긴 다음 자동차에 이상이 있는 것처럼 행동한 다음, 마을 사람들에게 가서 근처에 차고나 공장이 있느냐고 물었다. 물론 이렇게 하여 ‘가르치아’ 형제의 집과 공장으로 인도되었다. ‘페드로’는 나와서 ‘엔진’을 살펴본 다음, 큰 고장이어서 차를 차고 안으로 옮겨야 한다고 말하였다. 따라서 자동차를 공장 안으로 들여보낸 다음 문을 닫았다 ··· 그리고 나서 그들은 얼마나 기뻐했는가? ‘페드로’ 형제의 집에서 기다리고 있던 형제들이 방문자들을 둘러싸고 인사를 나누면서 그들과 함께 포옹하였다.

어두어지자, 그 방문자들은 집회가 열리게 되어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그 마을을 지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들에게 주의가 쏠리지 않게 하기 위해 ‘알바로’ 형제와 ‘프랜즈’ 형제는 그 지방에서 흔히 쓰는 ‘베레’모를 쓰고 양 가죽 ‘코우트’를 입었다. 어둠 속에서 그들은 한 자매를 따라 갔는데, 그 자매는 그들을 회중이 기다리고 있는 어느 곡식 창고로 인도하여 갔다. 사실, 그들은 세시간 동안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직도 그들은 연설을 듣기 위하여 두 세시간을 더 머물러 있었으며, 이 방문해 온 형제들과 교제를 나누었다. 마침내, 저녁 식사 후, 이들 세명의 방문자들은 차고에서 “수리된 차”를 꺼내 어두움을 이용하여 앞으로 나아갔다.

이 방문 도중, ‘F. W. 프랜즈’ 형제는 또 ‘팔마 데 말로르카’로 갔다. 이 방문은 8월 30일에 있었으며, 그곳에서 가졌던 집회에 75명이 참석하였다. ‘팔마 데 말료르카’에 그 당시 겨우 32명의 전도인이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 수는 참으로 놀라운 수였다.

체포!

그 다음 주말에는 사실상 ‘티비다브’ 산에 있는 숲속의 한 비밀 장소에서 ‘바르셀로나’ 대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참석 수가 100명을 넘어서 자꾸 불어났기 때문에 ‘알바로 베레코치아’ 형제는 이 마련의 성공과 비밀을 지키는 점에 대하여 염려하기 시작하였다. ‘만레사’에서 온 한 형제가 그에게 경찰이 그 주간에 그의 집을 수색하였으며, 이 대회 마련을 알린 「통보」(현재의 우리의 「왕국 봉사」) 삽입물을 가져갔다는 사실을 전해 주었을 때 그는 한층 더 염려하게 되었다. 또 한 자매로부터 한명의 경찰 수사관이 대회장으로 오는 사람들 가운데 끼어 있는 것을 보았다는 말을 전해 듣고 ‘알바로’는 더욱 경계하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그 사람은 마치 야유회를 가는 차림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베레코치아’ 형제는 어떻게 했으면 좋을 것인지에 관하여 ‘프랜즈’ 형제에게 의논하기로 하였다. 그의 대답은 어떠하였는가? “계속 진행합시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허락하시는 일을 신뢰합시다”라고 말하였다.

기타 ‘프로그램’들 가운데, ‘프랜즈’ 형제의 ‘프로그램’이 그 날 아침 들어 있었다. 그가 연설을 한 후에 ‘안토니오 브루네트’의 아들의 사회하에 경험담 순서가 있었다. 그는 심각한 문제가 일어나기 시작한 ‘사라고사’로부터 온 연로한 ‘마리아노 몬토리’ 형제와 회견을 하였다. ‘폴 베이커’ 형제는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그가 막 그의 경험담을 마쳤을 때, 내가 보니 한 대의 ‘지프’와 그 뒤를 따르는 또 한대의 자동차가 연단 뒤쪽 비탈 밑 밀림을 뚫어 만든 길을 올라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 그 ‘지프’에서 야유회를 가는 차림을 한 네 사람이 내려서 대회가 열리고 있는 지점을 향해 비탈을 날쌔게 올라오기 시작하였다. 곧이어 그들은 청바지에 ‘노타이’ 차림을 한 인솔자인 작달막한 사람과 함께 뛰어오기 시작하였다. 몇명의 형제들도 이제 그들을 보았으며, 다음에 어떤 시위를 할 것인가 하고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이 목소리가 들릴 만한 거리에 이르자, 맨 앞에 있는 그 작달막한 사람은 “아무도 움직이지마, 그렇지 않으면 쏜다!” 하고 큰 소리로 질렀다. 그는 권총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 이것은 참으로 새로운 시위였다. ··· 그 작달막한 사람은 자기 부하들을 요지에 배치시켜 놓은 다음 모든 ‘카메라’를 내 놓아야 한다고 지시하였다. 이 때 우리 가운데 있던 또 다른 공모자들이 나타났으며, 모든 사람들은 이것이 비밀경찰에 의한 검거 계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 가운데 있던 남자들은 ‘바르셀로나’에 있는 경찰서로 ‘트럭’에 실려 갔다. 한꺼번에 모두가 ‘트럭’에 탈 수 없었기 때문에 일부 형제들은 ‘트럭’이 되돌아올 때까지 참을성있게 기다리고 있는 동안 증거를 하였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경찰은 정치 집단을 습격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는 사실을 알아내게 되었다! 그러기 때문에, ‘프랜즈’, ‘베레코치아’, ‘윌리엄’ 및 ‘베이커’ 등 외국 형제들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형제들은 경찰서로 끌려 가게 되었다. 경찰은 지문들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에 관한 자세한 점들을 알아냈다. 대회장에서 그들이 먼저 한 일은 모든 ‘카메라’들을 압수한 일이었으며, 그 ‘카메라’들은 그 날밤 ‘필름’을 뺀 채로 그들에게 되돌려 주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많은 형제들이 찍은 사진을 취하였으며, 나중에 좋지 않는 사진이 외국 신문들에 실리지 않게 했다.

심문을 받는 동안, 형제들은 경찰들 가운데서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기 시작하였다.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가? ‘알바로 베레코치아’의 어머니와 장모는 대회장을 빠져 나와 미국 영사관으로 가서 미국 시민 ‘F. W. 프랜즈’ 형제가 체포되었다는 사실을 보고하였다. 영사는 경찰을 만났으며, 물론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그들은 원치 않았다. 그러므로, ‘알바로’ 형제를 제외하고는 모든 외국인들이 석방되었다.

‘베레코치아’ 형제는 그의 숙소로 끌려갔으며 거기서 집안을 수색당하였다. 그러나 어떤 사정으로 인하여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프란시스코 세라노’ 형제는 경찰의 눈을 피하여 그 날 오후 일찍 자기 집으로 돌아 갔다. 동시에 ‘테레사 로요’ 자매는 오후 회기에 참석하기 위해 그 대회로 가는 도중 ‘프란시스코’의 집에 들렸다가 경찰의 습격에 관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알바로’와 ‘마리나’ 부부의 집 앞 ‘아파아트’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프란시스코’는 그에게 급히 돌아가서 그곳에 있는 기록들을 꺼내다가 감추라고 말하였다. 그는 ‘테레사 카르보넬’의 도움을 받아 이 일을 해 냈다. 그리하여 경찰은 빈 손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들은 뱀같이 지혜로운 “비둘기”들을 상대하고 있었다.—마태 10:16.

이러한 경찰의 공격은 형제들과 관심자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극소수의 사람들이 사람을 두려워하는 일에 희생된 일을 제외하고는 형제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그들 소수의 사람들은 어떤 경제적 보복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여호와의 백성과 교제를 끊었다.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은 그러한 경험을 통하여 강화되고, 힘을 얻게 되었으며, 더욱 굳게 연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업은 늦추어지지 않았다. 1955년 중에 우리는 366명의 전도인 신기록을 수립하였으며, 1956년에는 전해에 비하여 35‘퍼센트’가 증가된 514명의 신기록을 보게 되었다. 특별 ‘파이오니아’들도 12명에서 21명으로 증가되었고, ‘길르앗’을 졸업한 선교인들 수도 네명에서 아홉명으로 증가하였다. 모든 면에서 증가된 활동의 영으로 가득차 있었다.

1955년부터 1957년 사이에, 지부 사무실의 사업은 ‘켄 윌리엄스’와 ‘도메니크 피코네’의 도움을 받아가며 ‘알바로 베레코치아’가 돌보아 왔다. ‘티비다도’ 대회의 습격 사건 이후, ‘알바로’는 계속하여 자기 숙소에서 사무실 일을 해왔으며, 1956년 9월경 사무실은 ‘프란시스코’와 ‘안토니아 로드리구에즈’의 집으로 이전하였다. 한편 서적 꾸러미들을 발송하는 일은 ‘브루네트’의 ‘라디오’ 가게의 조그마한 방에서 취급되었다.

여행하는 감독자의 활동

1950년대 중반, ‘알바로 베레코치아’는 한 동안 순회 감독자로 봉사하였다. 그는 형제들을 영적으로 세워 주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그는 또 얼마의 문제들을 부닥치게 되었다.

예를 들면, ‘바르바스트로’ “회중”이 사라지고 말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가? 그 회중은 서류상으로만 존재하였었다. 조직과 경험 부족으로 인하여 좋은 소식의 전파는 고사하고 여호와의 조직과 연합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전도인으로 계수되었다. 그러나, ‘네메시오 오루스’와 그의 아들들은 분명히 증거를 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었으며, 특히 시계 수리를 위해 이곳 저곳으로 다니면서 장사를 하는 동안 비공식적인 증거를 하려고 노력하였다.

기억에 남을 만한 순회 방문은 ‘알바로 베레코치아’가 ‘토랄바 데 갈라트라바’를 방문한 첫 번째 방문이었다. 그는 ‘마드리드’로부터 기차편으로 ‘마이미엘’까지 갔으며, 밤 10:00에 도착하였다. 세명의 형제들이 기차 역에 나와 있었다. 그러나 그는 ‘토랄바’까지 15‘킬로미터’를 타고 갈 교통편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세대의 자전거를 보게 되었다. 그렇다, 네 사람에게 세대의 자전거가 있었다! 그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들 각자는 차례로 순회 감독자를 자전거 ‘핸들’과 안장 사이의 차대에 태웠다. 그날 밤은 춥고 달도 없는 겨울밤이었으며, 그들이 여행하는 동안, 시커먼 모습들이 시골길을 달리면서 내는 덜그덕거리는 소리와 “짐”을 바꿔 싣기 위해 이따금 숨가쁘게 멈추는 소리가 정적을 깨뜨리곤 하였다.

여행은 고생스러웠지만, 그 여행은 ‘토랄바’에 있는 조그마한 회중에 영적 축복을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한 때는 문맹이었던 목자들이 읽고 쓰는 것을 배운 다음, 여호와께 대한 그들의 봉사를 확장시킬 수 있는 지역으로 이사함으로써 인구 5,000명에 불과한 이 조그마한 고장에 살던 소수의 그리스도인 집단의 영향이 여러 해 동안 ‘스페인’ 도처에 퍼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부언하는 것이 당연한 일로 생각된다.

1950년대—10년간의 ‘파이오니아’ 확장

1950년대 중 많은 왕국 선포자들이 더 큰 봉사의 특권에 가담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전 시간 전도인들의 수가 1950년에 1명이던 것이 1960년에는 102명으로 증가하였다. 그 동일한 기간에 특별 ‘파이오니아’ 수는 하나도 없는 데서 40명으로 증가하였다.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 이 두 도시는 그 기간에 좋은 소식의 전 시간 전파자들을 산출하는 데 두드러졌다.

‘파이오니아’들에 의하여 어떠한 일이 성취되고 있었는가? ‘말라가’ 도에서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고려해 보자. ‘카르멘 노바에스’와 ‘아니타 베르둔’은 ‘프랭크 테일러’가 ‘마누엘 올리버로사도’를 방문했던 1936년 이후, 최초의 ‘파이오니아’들로서 1957년 후반부터 그곳에서 봉사를 시작하였다. 물론, ‘올리버’ 형제는 조직과의 연락이 끊어져 있었으므, 그 ‘파이오니아’ 자매들은 그에 관하여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몇해 뒤인 1964년에 와서야 그가 “재발견”되었다. 하여튼 ‘카르멘’과 ‘아니타’는 열심히 일하였으며, 8개월 내에 15명이 「파수대」 연구에 참석하였고, 6명의 왕국 전도인들이 그들과 함께 야외 봉사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 당시 ‘파이오니아’ 활동이 크게 필요하였는가? 참으로 그러하였다! 예를 들어 보자: 1956년에는 514명의 전도인들이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데 활동하고 있었으나 그들은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발렌시아’ 및 ‘팔마 데 말로르카’에서 주로 발견되었다. 그리하여 50개의 도청 소재지 가운데서 단지 네 곳만이 조직적인 증거를 받고 있었다. 21년 후인 1977년에 ‘스페인’의 50개도 전역에 482개의 왕국회관이 있는 것을 볼 때, 여호와의 손이 ‘스페인’ 밭에서도 짧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수확은 ‘스페인’ 내에서 회중 전도인들, ‘파이오니아’들 및 특별 ‘파이오니아’들의 부지런한 활동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계속 방문으로 격려를 받음

통치체 성원들이 ‘스페인’에 대하여 나타낸 관심을 고려해 볼 때 분명히 여호와의 손이 짧지 않았다. 그들의 방문은 집회에서나 야외 봉사에서 끊임없이 위험을 느끼고 있던 형제들에게 정기적인 고무제가 되었다. 교회가 사용하기를 좋아하는 무기는 “충성자들”이 경찰에 전화하여 형제들을 고발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들의 일반 신도들이 성서로부터 자신들의 믿음을 변호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시인하는 결과가 되었다.

1956년 11월, ‘F. W. 프랜즈’ 형제는 다시 ‘스페인’을 방문하였다. 그는 5일간의 기간을 나누어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 머물렀으며, 두 도시에서 몇몇 집단들에게 연설을 하였다. 1955년의 사건 때와는 대조적으로, 모든 일이 원활하였으며 집회는 방해를 받지 않았다. 이 방문은 엄중히 비밀리에 붙여졌으므로 그가 그곳에 올 때까지 형제들까지도 이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당국자들과의 문제가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1957년 1월에 ‘N. H. 노워’ 형제는 ‘유럽’과 중동을 여행하는 여정 중에 5일간 ‘스페인’에서 머물렀다. 이 방문에 대한 그의 보고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바르셀로나’에 있는 협회를 대표하는 사람들은 매우 정렬적으로 일하고 있으며 형제들을 조그마한 집단 또는 회중으로 조직하였고 이들 집단 모두에 종들을 임명하였다. 내가 ‘바르셀로나’에 있는 모든 집단들에게 연설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었다. 어떤 저녁들에는 다섯시부터 열한시까지 여러 집에서 한 시간씩 다섯 차례나 하였으며, 작은 집단들과 집회를 가졌다. 이들 형제들의 얼굴에 나타난 행복감 그리고 진리를 듣는 그들의 기쁨을 보는 것, 그리고 서로 교제하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었다. ···

“‘바르셀로나’에서 우리 형제들과 매우 즐거운 시간을 가진 다음, 나는 ‘마드리드’로 가서 그곳에 있는 우리 형제들과 하루를 지냈다. 나는 여러 작은 회중들에서 연설을 하였으며, 하루 저녁에 그중 네 회중에서 연설을 하였다 ··· 결코 사라지지 않을 하나의 일이 ‘스페인’에서 지금 시작되었다. 왜냐 하면 그곳 형제들은 열심으로 차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전파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축복하고 계신다.”

더욱 심해진 경찰의 괴롭힘

경찰로부터 괴롭힘을 받던 그 여러 해 동안은 성서 서적을 가지고 다니는 것이 발각되기만 해도 체포되었다. 예를 들어, ‘마드리드’에서 한 자매의 집에서 나오던 네명의 ‘파이오니아’들이 경찰에 연행되어 그 지방 경찰서로 끌려 갔다. 그 ‘파이오니아’들은 그 날 동네에서 전도하지 않았으나 어떤 사람이 그들이 그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그들이 반-‘가톨릭’ 선전문을 배포하고 있다고 고발하였다. 그 경사는 말하기를, 그들이 자기 구역 내에서 이러한 책자들을 가지고 다닌다는 사실은 자기가 보안청에 보고 해야 할 일이라고 하였다.

또 다른 경우는, 한 ‘파이오니아’가 기차 시간표를 알아 보기 위하여 기차역으로 가고 있었는데, 한 경찰관이 그의 신분증을 제시하라고 요구하였다. 그가 신분증을 제시하지 못하자 그의 가방을 조사하여 성서 서적들을 발견해냈다. 이것을 이유로 그는 500‘페세타’의 벌금 아니면 한달 간의 구류에 처하는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한달 간의 구류를 택하였다.

기타 여러 경우에는 반대가 분명히 종교적인 적들로부터 왔는데, 그 예로서 심하게 심장병을 앓고 있던 18세의 ‘파이오니아’ ‘카를로스 루비뇨’의 경우가 그러하였다. 병원에서 수녀들은 끊임없이 그에게 고해를 하고 영성체를 받으라고 괴롭혔다. 사제들은 형상을 가지고 와서 “당신은 죽어가고 있오. 당신의 유일한 희망은 이것에 입을 맞추고, 내게 고해를 하고 영결식을 받는 것이오” 하고 말하였다. ‘카를로스’는 겨우 속삭이듯이 말할 수 있을 뿐이었지만, 그는 그런 일을 거절하고, 그러한 절차가 성서 어디에 명령되어 있는지 보여달라고 요구하였다. 사제는 화가 나서 ‘카를로스’의 어머니에게 돌아서서는 “도대체 무슨 종교요?” 하고 물었다. 그의 어머니는 비록 증인은 아니었지만 즉시 “성서 종교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이 말을 듣고 그 사제는 성큼 성큼 걸어 나가면서, 수녀들에게 ‘카를로스’가 가지고 있던 성서를 태워 버리라고 지시하였다. 그것은 우연히도 「가톨릭 나카르-콜룽가」역이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그 성경을 감추었다가 집으로 가져갔다. 그의 어머니는 거짓 종교의 열매를 충분히 목격하였다.

그렇다, ‘카를로스’는 사망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신념에 충실하였다. 그의 부모가 민간 장례식을 마련하였을 때 다음과 같은 문제가 일어났다. 즉 민간 장례식을 했다고 해서, 그의 아버지는 공무원직을 포기해야 하였으며, 그가 살던 집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몇년 후에 그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 진리를 받아들였으며, 그들의 다른 두 아들들은 계속 충실하게 여호와를 섬겨왔다. 동생인 ‘리카르도 루비뇨’는 그리스도인 성실을 지키기 위하여 감옥에서 6년을 살았다.

형제 자매들이 당하는 어려움 가운데에는 여권을 내주지 않는 일도 포함되었으며, 그리하여 그들은 ‘프랑스’나 ‘모로코’에서 열리는 그리스도인 대회들에 참석할 수 없었다. 문자 그대로 수많은 증인들은 그들이 여호와의 증인으로서 경찰 기록에 올라 있기 때문에 그러한 대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여행을 할 수가 없었다. 오늘날에도 16세가 넘은 젊은 미혼 자매들은 그들이 3개월간의 사회 봉사 과정을 이수하지 않는 한 여권을 얻을 수 없다. 이 과정은 야간에 참석해야 하는데, 그 가운데에는 병원이나 그와 비슷한 기관에서 사회 봉사 활동을 하는 것과 더불어 정치적 및 종교적 교육도 받는 것이 포함된다.

선교인들이 출국 명령을 받다

1955년 9월에 있었던 사건과 수백명이 참석하였던 ‘티비다보’ 대회가 유산된 이후, ‘알바로 베레코치아’ 형제는 경찰이 자신과 아내 ‘마리나’를 국외 추방 조치를 취하지 않을까 염려하였다. ‘마리나’가 2주간의 휴가차 ‘런던’으로 가도록 초대받았을 때인 1956년 여름에 한 가지 시험이 되는 상태가 발생하였다. 그는 ‘스페인’에 영주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바르셀로나’에 있는 경찰서에 출국 사증을 신청해야 하였다.

2시간을 기다린 후에, 사복 차림의 경찰관 하나가 그에게 와서 ‘런던’으로 가려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그는 질문을 퍼부어댔다. “당신은 남편이 믿는 종교를 믿습니까? 당신은 ‘티비다보’에서 일어난 일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 당신도 그 교인이지요? 당신은 그 성서의 우화들을 믿습니까? 당신은 ‘엘리야’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오게 했다는 것을 믿습니까?” 그 자매는 “예”하고 대답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들어보시오. 사실은 ‘엘리아’가 지혜로운 놈이기 때문에, 간교하게 도랑에 휘발유를 채운 다음 불을 붙인 것이란 말이요. 바보 멍청이들만 그것을 기적이라고 믿는거요.” 대화는 그런 식으로 계속되었다. 끝에 가서 그 경찰관은 서류를 가리키면서 “저기에 우리는 당신에게도 매우 불리한 당신 남편에 관한 정보를 가지고 있오” 하고 말하였다. 이러한 모든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리나’는 ‘런던’으로 가는 것이 승인되었다.

1957년 1월에, ‘베레코치아’ 부부는 2년간의 체류 승인을 갱신 신청하기 위해 경찰서에 출두해야 하였다. 오랫 동안 기다린 후, 그들은 사무실로 불려 들어갔으며, 48시간 내에 짐을 꾸려가지고 그 나라를 떠나라는 말을 들었다. ‘알바로’는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겨우 한 가지 허락을 받았는데, 이틀 대신 10일로 연장되었다.

이러한 비상 사태에 처하여 ‘알바로’ 형제는 지부 사무실의 일을 ‘켄 윌리엄스’ 형제에게 일임하였다. 그 다음 ‘베레코치아’ 부부는 기차편을 이용하여 ‘마드리드’로 떠났다. 수백명의 형제들이 역에 나와 그를 전송하였으며, 이것은 참으로 모두에게 섭섭한 일이었다. 일단 ‘마드리드’에 도착해서, ‘알바로’ 형제는 ‘아르헨티나’ 대사관을 찾아가 (그는 ‘아르헨티나’인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였다. 그 대사관의 중재로 ‘스페인’ 당국을 그에게 1개월 연장 체류를 승인하였으며, 그리하여 출국 최종 일자는 2월 18일이 되었다. 그는 ‘포루투갈’행 사증을 받아서 ‘스페인’ 북부 일대로 협회 영화 가운데 하나를 가지고 여행을 할 마련을 하였다.

‘베레코치아’ 형제가 ‘마드리드’로 돌아오자, 그는 ‘포르투갈’이 아니라 ‘모로코’로 가라는 임명장을 받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는 다시 경찰에 출두하여 다른 출국 사증을 받지 않으면 안되었다. ‘베레코치아’ 형제는 그가 이전에 길게 이야기를 나누었던 출국 사증 담당관에게 가는 대신 일반 창구로 가서 자신이 필요한 것을 설명하였으며, 다음날 다시 오라는 말을 들었다. 다음날 다시 가 보니 그의 사증이 또 1개월 연장되었다. 경찰 사무 조직이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은 아님이 분명하였다! 이제 출국 최종 일자가 3월 18일이 되었다. ‘베레코치아’ 형제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남부로 가서 협회 영화를 상영한 후 그 다음 ‘바르셀로나’로 돌아가도록 마련하였다.

함정에 빠져 추방됨

‘알바로’와 ‘마리나’는 ‘바르셀로나’에 도착하여 하숙을 정한 다음 그들이 오랫 동안 유숙하였던 ‘테레사 카르보넬’에 있는 집을 방문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들은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들어가기 전에 그들은 이웃에 사는 그리스도인 자매들에게 최근에 경찰이 왔었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들은 “그런 일이 없이 조용하였다”고 대답하였다. 그 말을 듣고 ‘베레코치아’ 부부는 복도를 지나 그들의 옛 ‘아파아트’로 가서 문을 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거기에 경찰이 있었다!

경찰은 ‘베레코치아’ 부부에게 수갑을 채우려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도망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들은 ‘비아라예타나’에 있는 경찰서로 끌려 갔으며, 격노한 경찰 주임과 마주 앉게 되었다. “우리는 당신에게 48시간 내에 이곳을 떠나라고 말했는데, 2개월이 지나도록 아직도 이곳에 있단 말이요!” 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알바로’가 설명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마드리드’로 전화를 걸었으며, ‘베레코치아’ 부부를 즉시 추방시키라는 지시가 하달되었다. ‘알바로’는 ‘모로코’로 가기 위하여 ‘알제시라스’ 국경을 통과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래서 그를은 ‘바르셀로나’로부터 ‘알제시라스’까지 1,450‘킬로미터’의 먼 거리를 내내 비밀 경찰의 호송을 받았다. 그들이 배에 오르자 그 경찰은 그들의 여권을 돌려 주었다. 그 날은 1957년 3월 11일이었다.

‘스페인’으로 돌아오다!

‘알바로 베레코치아’는 ‘모로코’에서 지부 감독자로 봉사하였다. 몇개월 후, 그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으로 여행을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입국 사증을 얻기 위하여 그는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 있는 ‘스페인’ 영사관으로 갔으며 거기서 사증을 받았다. 이제 그는 국경을 통과하기 위하여 자기 부모와 함께 자동차 편으로 ‘프랑스’를 거쳐 ‘이룬’으로 들어갔다. 국경 경찰은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으며 그리하여 그는 다시 ‘스페인’으로 들어갔다.

그는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 들렸다. 1957년 12월 5일, ‘알바로’는 ‘발렌시아’에 가서 23명으로 된 집단에게 협회 영화 “신세계 사회의 행복”을 보여 주었다. 다음날 저녁 그는 또 다른 그리스도인 집회에 참석하였는데, 도중에 문을 거칠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자 세명의 비밀 경찰이 권총을 들고 들이닥쳤다. 재빨리 신분증을 조사한 후에 일곱명의 형제들을 체포하였다. 그러나 ‘마아가리타 코마스’는 다른 자매들과 함께 떠날 허락을 받았으며, 그는 즉시 영화 장비를 감추기 위하여 나갔다.

일곱명의 형제들은 경찰서로 연행되어 가 심문을 받았다. ‘알바로’의 차례가 되자, 그는 ‘쿠크’ 형제와 ‘백하우스’ 형제 및 기타 형제들을 알고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의 대답이 심문관들에게 만족치 못하자 그들은 화가 나서 그를 때리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전에 추방된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음이 분명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를 여행자로 취급하였다. 오전 3시경 ‘아르헨티나’ 영사가 경찰서로 찾아왔으며 이로 인하여 경찰들은 매우 격분하였지만, 영사 앞에서 그러한 기분을 나타내지 않으려고 조심하였다. ‘알바로’는 그의 여권을 찾으러 다시 내일 오라고 하면서 석방해 주었다.

‘베레코치아’ 형제가 다음날 찾아가 보니 상태가 심각하였다. 그들은 그가 3월에 추방을 당하였었던 사실을 알아냈으며, 그리하여 매우 화가 나 있었다. 그는 체포되어 독방에 갇히게 되었는데 그곳에는 돌로 된 침상과 문에 철장으로 막은 조그마한 구멍이 한개 있을 뿐이었다. 몇시간 후 간수가 와서 그를 다른 방으로 데리고 갔는데, 거기에는 몇개의 짐보따리가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몇장의 담요가 놓여 있었다. “당신의 형제들이 이것을 당신께 보냈오” 하고 그가 말하였다. ‘발레시아’ 회중이 그리스도인 사랑과 염려를 나타내어 음식과 담요 및 기타 물건들을 보내 준 것이다.

얼마 후, ‘베레코치아’ 형제는 또 한차례 심문을 받았다. ‘프랑스’를 경유하여 그를 국외 추방하라는 결정이 내렸다. 그러나 그는 ‘포르투갈’로 보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대한 승인을 받았지만, 그를 호송할 수 있는 두명의 경찰을 확보할 수 있을 때까지 감옥에서 기다려야 한다는 통고를 받았다. 그러한 조치는 ‘알바로’에게 전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영사는 감옥에 간 후 다시는 소식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에 관해서 그에게 경고하였었다. 그리하여 ‘베레코치아’ 형제는 ‘아르헨티나’ 영사에게 이야기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며, 그와 전화로 통화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그 영사는 새로운 사태에 관해 듣고서 자기가 즉시 중재해 보겠다고 말하였다.

‘알바로’는 감방으로 다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 날밤 늦게 그는, 다음날 ‘바르셀로나’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게 되리라는 통고를 받았다. 그는 석방되었지만, 그의 여권을 받으려면 다음날 다시 돌아와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베레코치아’ 형제는 즉시 형제들에게로 가 보았는데 그들은 1,500‘페세타’의 벌금 아니면 30일간의 구류 처분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 모두는 자기들이 아무런 범죄를 하지 않았으므로, 벌금을 내기를 거절하였다.

다음날, 즉 1957년 12월 9일 ‘알바로 베레코치아’는 ‘마드리드’로 비행기를 타고 갔으며, 거기서 ‘포르투갈’의 ‘리스본’으로 갔다. 그리하여 4년간의 즐겁고 축복된 ‘스페인’에서의 선교 봉사를 마치게 되었다. 이제 다른 사람들이 그 봉사를 인도하는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팔마 데 말료르카’에서의 박해

우리의 활동은 사방에서 우리에게 퍼부어지는 반대와 종교적 박해를 받는 불리한 상태하에서 진행되었다. 예를 들면, 1954년에 ‘팔마 데 말료르카’에서 선교인으로 봉사하고 있던 ‘폴 베이커’ 형제는 그가 영어를 가르치고 있던 학교에서의 종교 활동에 관하여 처음으로 경고를 받았다. 어느날 그는 교장실로 불리워 갔는데, 교장은 그에게 은밀히 경찰이 그에 관하여 조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들은 그가 학교에서 종교를 가르쳐 오지 않았는가를 알아내려 하였다. 교장은 좋은 보고서를 제출할 수 있었다. 왜냐 하면, ‘폴’은 재치가 있었으며, 일부러 학과 시간에는 종교에 관한 제목을 이끌어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하간 ‘폴’은 그렇게 경고를 해 준 것에 대하여 감사하였다.

1957년 4월 어느날, ‘팔마 데 말료르카’로 임명된 특별 ‘파이오니아’인 ‘프란시스코 코르도바’가 야외 봉사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 형제들은 그가 그 날밤 집회에서도 보이지 않을 때까지 이것을 별로 유의하지 않았었다. 다음날, 형제들은 그의 숙소를 가 보고 그제야 그가 전날밤에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타 모든 가능성을 생각해 보고 나서, 한 자매가 경찰에 가서 그에 관하여 알아 보기로 결정하였다. 예상대로였다. 그는 함께 봉사하던 형제와 같이 체포되었다. 그들에게 음식은 차입시킬 수 있었지만, 면회는 할 수 없었다.

기념식을 거행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으며, 경찰의 조처가 곧 있을 것같기 때문에 ‘폴 베이커’ 역시 참석치 못할 가능성을 고려해서 여러 집단을 위해 기념식을 마련하였다. 그런데 하루쯤 지나서, 사복 차림의 경찰 한명이 ‘베이커’ 형제가 거처하던 집에 나타났으며, 그를 경찰서로 데리고 갔다. 거기서 ‘폴’은 몇차례 심문을 받았으며, 그 다음 그의 진술서를 받았다. 그는 내용을 확인한 다음 몇 장의 문서에 서명을 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그렇게 한 다음, ‘베이커’ 형제는 감방에 들여 보내지게 되었는데, 거기서 ‘코르도바’ 형제와 또 자기의 야외 봉사 짝을 만나게 되었다. 그 형제들은 그 날밤 “유치장” 내에서 지내지 않으면 안되었으며, 다음날 그들은 판사 앞으로 보내졌다. 흥미롭게도, 그들은 그 사건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경찰관에게 맡겨졌는데, 그는 그들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하였다.

심리는 재판정에서가 아니라 판사실에서 있었으며, 형제들은 판사와 그 경찰관과만 함께 있었다. 재치있게 그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전파 활동을 수행해 왔는가를 설명하였다. 판사는 그들의 가르침이 무해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개종 활동을 함으로써 법을 어겼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그는, 그들이 이미 감옥에서 보낸 시간이 그들에게 적절한 경고 구실을 하였다고 생각하였으며, 그 이상의 형을 선고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앞으로는 더욱 조심성이 있어야 한다고 충고하였다.

한편 그 경찰관은 이와 같은 결과가 있게 된 것을 기뻐하였다. 그러나 그 경찰관은 형제들의 소유물을 찾아가도록 하기 위해 형제들을 감옥으로 데려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경찰관은 형제들을 감방 책임자에게 데리고 가서 그들이 석방되었음을 알렸다. 하지만 다른 경찰관들은 미결점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들을 다시 수감시켰다.

얼마 후, ‘폴’은 감방에서 끌려나와 심문실로 가게 되었다. 거기서 “미결점”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바르셀로나’로부터 ‘폴’에게 소포꾸러미가 하나 왔는데, 거기에는 “라디오”라고 씌여 있었지만, 실은 50부의 「파수대」와 「깨어라!」(‘스페인’어)가 들어 있었다. 그리하여 기타 여러 가지 거짓 혐의에 더하여 ‘베이커’ 형제는 “밀수꾼”이라는 혐의도 받게 되었다!

‘폴’은 만일 이것이 다른 나라로부터 들어온 것이 아니고 ‘스페인’ 본토로부터 온 것이라면 어떻게 금수품이 될 수 있느냐고 호소하였다. 더 나아가서, 예약자들이 자신들의 잡지를 받는 것을 금지하는 법은 없으며, 또 이것은 예약자들을 위한 것이지 공개적인 베포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설명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헛수고였다. 그 결과 또 하룻밤을 감옥에서 보내야 하였다. 그리하여 세 명의 왕국 선포자들은 ‘팔마 데 말료르카’에 있는 도 형무소로 보내져 15일간의 형을 살게 되었다.

이 형무소에서 그들에게 새로운 구역이 열리게 되었다. 그들은 다른 수감자들과 자유롭게 어울릴 수 있었으므로 증거를 할 수 있었다. 기념식 날이 되었을 때, 그들은 마음 속으로 밖에 있는 형제들과 함께 하였다. 그들이 4월 26일 출감하였을 때, 형제 자매들의 조그만 집단이 그들을 맞이하였다. 이 증인들은 두명의 자격있는 형제들 즉 ‘폴 베이커’와 ‘프란시스코 코르도바’가 없는데도 세 개의 집단으로 나누어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떠나라는 권고”가 심해지다

‘베이커’ 형제가 집에 돌아와 보니, 그의 ‘스페인’어, ‘프랑스’어 및 영어로 된 모든 잡지들을 경찰이 가져간 것을 알게 되었다. 다음날 아침, 그가 아침을 먹으러 가 보니, 근처에서 수상한 낯선 사람이 ‘코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니라 그를 살피도록 파견된 비밀 경찰이었다.

특별 ‘파이오니아’인 ‘프란시스코 코르도바’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는 그 섬에서 추방되었으며, ‘스페인’ 본토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1957년 5월 3일, 금요일 ‘폴 베이커’는 ‘팔마’에 있는 영국 영사관에서 ‘질 스미드’와 결혼을 하였다. 그들은 신혼 여행차 그 섬을 가로질러 ‘알쿠디아’로 갔으며, 거기서 배를 타고 ‘메뇨르카’로 갔다. 그들이 어디를 가나 항상 누군가가 그들을 “미행”하였다. 신혼 여행치고는 참으로 맛없는 여행이었다!

5월 말경, ‘폴’은 그의 체류 허가 갱신 신청을 냈다. 경찰 본부를 몇차례 방문한 후, 그는 자기의 체류 허가가 더 이상 갱신되지 않으리라는 통고를 듣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떠나고자 하는 날짜를 통보해야 한다는 말도 들었다. 그는 6월 12일에 ‘바르셀로나’를 떠나 ‘지브로올터’로 가기 위한 배표를 예약하였다.

‘바로셀로나’에 도착해서까지도 ‘베이커’ 부부는 변장을 한 비밀 경찰의 미행을 계속 받았다. 예를 들어, 그들이 뒷골목에 있는 한 ‘호텔’에 투숙한 다음날, 그들이 타고 갈 배의 이름이 씌어진 ‘셔어츠’를 입은 “선원” 하나가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지나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폴’이 매우 위험한 인물로 간주되었던 것이 분명하였다. 물론 이러한 사건들은 ‘베레코치아’ 부부가 최초로 추방당한지 얼마 안되어 일어났었다. 그리고 경찰은 자기들이 “지도자들”을 제거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베이커’ 부부가 ‘스페인’에서의 마지막 날 부두에 이르렀을 때, ‘바르셀로나’ 회중에서 온 얼마의 형제들이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바르셀로나’에 남아있던 네 명의 선교인들—‘켄 윌리엄스’ 형제 부부, ‘도메니크’ 및 ‘엘사 픽고네’—도 나와 있었다. 그 당시 그들의 ‘스페인’ 체류 기간 역시 얼마 남지 않았으며 그들 역시 그 나라로부터 조만간 추방될 것이었다.

1957봉사년도 말경, 그 때까지 ‘스페인’에 계속 남아있던 ‘길르앗 학교’ 졸업생 수는 9명에서 4명으로 줄어들었다. “사무실”은 ‘바르셀로나’에서 ‘마드리드’로 옮기는 것이 현명하게 생각되었다.

‘파이오니아’들이 투옥되다

교직자들은 증인들 중 누구든지 그들의 신도들의 집에 나타나기만 하면 경찰에 통고하도록 자기들의 양떼들을 계속 선동하였다. 그 결과 1957봉사년도 중 13명의 ‘파이오니아’들과 6명의 전도인들이 체포되어, 전파를 하고 성서 연구 집회에 참석하였다는 이유로 2일 내지 36일 동안 투옥을 당하였다.

‘세빌랴’에 수감되었던 ‘파이오니아’들을 예로 들어 보자. 1957년 3월에, ‘마아가리타 코마스’와 ‘마루하 퓨날’은 ‘세빌랴’로 임명되었는데, 그곳에는 이미 특별 ‘파니오니아’들인 ‘호세 루비노’와 ‘마놀로 시에라’가 봉사하고 있었다. 규모가 없는 ‘안달루시아’인들의 성격은 익숙해지기가 매우 어려웠다. 왜냐 하면, 어떤 사람이 성서 연구나 재방문을 위한 마련을 했을 경우 다시 찾아가 보면 그 사람은 후에 다른 계획을 세워 놓았기 때문에 집에 없었다. 또한 흥분하는 기질도 부딪쳐야 하였다. ‘세빌랴’는, 두가지 유명한 “동정녀”상(像) 즉 ‘마카레나’상과 동정녀 ‘에스페란자’상을 사용하는 “마리아” 숭배에 바쳐진 도시이다. 이들 두개의 형상은 마치 경쟁적인 한쌍의 축구 ‘티임’과 같이 각기 추종자들과 신자들을 가지고 있다. 각 “동정녀”의 열광적인 신자들은 특히 이들 보석으로 장식된 형상들을 들고 거리를 행진하는 행렬이 진행될 때 서로 경쟁적으로 자기들의 형상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른다. 이 도시 내에서 가장 큰 교회는 이전의 회교 사원이 있던 부지에 세워져 있는 성당이다. 그 성당의 탑은 ‘라 기랄다’(바람개비)라고 불리우며, 그 탑을 3등분하여 처음 두 부분은 회교식 첨탑이 있는데 반하여, 나머지 한 부분인 꼭대기 부분은 ‘르네상스’식으로 되어 있음을 볼 수 있으며, 분명히 ‘가톨릭’의 영향을 입은 것같다.

‘세빌랴’에 있는 네명의 ‘파이오니아’들은 매일 아침 유명한 황금의 탑 앞에 있는 광장에서 모임을 가졌다. 어느날 자매들은 나타났는데, 형제들은 보이지 않았다. 자매들은 퍽 이상하게 생각하였으나 오후 모임 때까지 기다리기로 결정하고, 멀리 떨어져서 형제들이 오는가 살피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나타나는 기색이 없었다. 다음날, ‘마아가리타’와 ‘마루하’는 형제들의 숙소로 가서 조심스럽게 그들에 관하여 물어 보았다. 그 집에 사는 부인은 경찰이 이틀 전에 와 있었으며, 그들이 형제들을 데려갔다고 설명해 주었다.

그들의 의구심이 이제 분명히 밝혀졌다. 자매들은 경찰이 어느 순간이든지 자기들의 숙소에도 닥칠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날 그들은 미리 내밀 사항들이 적혀 있는 ‘노우트’들이나 서류들은 없애 버렸다. 그 날밤 자매들이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자기들의 숙소로 돌아오자, 안주인이 문을 열어 주었는데 그 얼굴을 보니 방문객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두명의 경찰관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밤인데도 불구하고, 자매들은 심문을 받기 위해 경찰서로 불려갔다. 형제들은 이미 거기에 와 있었으며, 이틀 동안이나 심문을 받고 있었다. ‘세빌랴’의 경찰은 ‘호세 루비뇨’가 이전에 봉사하던 ‘그라나다’ 지구의 경찰로부터 이미 정보를 얻었기 때문에 이곳에서의 심문은 더욱 까다로왔다. 경찰은 ‘그라나다’에 있는 증인들로부터 빼앗은 사진들과 ‘파이오니아’ 형제들의 숙소에서 압수한 서류들을 가지고 있었다. 두명의 형제들을 번갈아 심문하는 도중에 경찰은 책임이 있는 형제들과 그들의 거처를 알아내려고 하였다. ‘호세’와 ‘마놀로’는 따로 따로 감방에 수용되었는데, 그곳에는 돌로 된 침상이 있었으며, 처음에는 몇시간 연속되는 심문으로 잠을 자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자매들도 심문을 받는 동안 곤욕을 치렀다. 경찰이 대답을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유도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자매들은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예를 들어, 자매들이 자기들은 왕국 즉 하나님의 정부를 전파하였다고 말하면, 심문관은 “그러면 모든 기존 인간 정부를 반대한다는 말이지!” 하고 말하였다. 자매들은 자기들의 신앙을 그렇게 해석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왜냐 하면 그것은 여호와의 증인들의 활동을 정치적인 방향으로 몰아가려는 의도였기 때문이다.

심문을 마친 후, 자매들은 항상 토해내고 있는 술취한 여자가 들어있는 매우 비좁은 감방 안으로 들여보내졌다. 그 악취야말로 대단하였으며, 자매들은 그 날밤을 그곳에서 지내야 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한 경찰관이 와서 그들을 불러내며, 이런 식으로 밤을 새게 하지는 않겠다고 말하였다. 그는 그들을 자기 사무실로 데려갔으며, 다음날 아침까지 안락 의자에서 잠을 자라고 하였다. 자매들은 이러한 친절한 교도관을 만나게 해 주신 것과 그 지독한 감방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것에 대하여 여호와께 조용히 감사하였다.

자매들은 음식도 먹지 못한 채 마치 비천한 죄수들 모양 연속적으로 심문을 받으면서 36시간 동안 붙들려 있었다. 하지만 또 다른 한 경찰관은 그들에게 연민의 정을 보이며 ‘코오피’를 가져다 주었다. 마침내 형제들과 자매들은 도 형무소로 옮겨졌으며, 거기서 새로운 시험을 당하게 되었다.

그 형무소에 도착하자, 두명의 ‘파이오니아’ 형제들은 감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삭발을 당했다. 그 다음, 매일 상기식과 하기식 때 성실에 대한 시험을 받았다.

수녀 간수들!

자매들은 형무소에 도착하자 매우 놀랐다. 간수들이 수녀들이었기 때문이다! 접수부에서 수녀 하나가 그들에게 무엇을 훔쳤느냐고 물었다. 이 말은 ‘마아가리타’에게 참을 수 없는 소리로 들렸다! 그래서 그는 “우린 창녀나 도둑질을 해서 여기 오게 된 것이 아니란 말이예요! 우리가 이곳에 오게 된 까닭은 참 하나님의 증인이기 때문이란 말이예요!” 하고 쏘아댔다. 그러자 그 수녀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는 재앙이나 만난 것처럼 속히 움츠러들었다.

이곳 감옥에서는 수녀들이 재소자들에게 매일 ‘우리 아버지’, ‘‘마리아’를 찬송하라’ 등을 부르는 일을 인도하였다. 운동 시간에는 수녀들이 재소자들에게 이야기를 들려 주며, 그들과 함께 춤을 추고 기도문을 암송하곤 하였다. ‘마아가리타’와 ‘마루하’는 증거를 시작하였으나, 이것도 얼마 안가서 재소자들이 다른 재소자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금지시키는 수녀들에 의하여 제지를 당하였다.

자매들의 사건이 고려된 후, 그들 한 사람당 1,000‘페세타’씩의 보석금을 지불하고 석방될 수 있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그들에게는 돈이 없었으며, ‘세빌랴’에는 그들을 도와 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한달 동안 수감 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주로 도둑들, 창녀들, 및 동성연애자들로 이루어진 기타 모든 재소자들과 함께 큰 방에 임명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유쾌한 경험이 못되었다. ‘마루화’와 ‘마아가리타’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옷을 벗고 ‘샤워’하는 일을 거절하자, 그들은 단지 2평방 ‘미터’ 밖에 안되는 체형을 하는 방에서 지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방에는 변소로 사용되는 구멍이 하나 있었고, 또 천정에 조그마한 창문이 하나 있었다. 거기에는 가구도 없고, 침대도 없고, 의자도 없고, 요도 없었다. 간수 중 한 사람은 동정심에서 그들 두 사람이 씻을 수 있도록 물을 가져다 주었다.

음식은 어떠하였는가? 그것은 사실상 먹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하루에 두번씩 자매들은 ‘소다’를 지나치게 넣어 못쓰게 만든 ‘가르반조’콩을 받았다. 그리고 각자 하루에 빵 한쪽씩을 받았다.

감옥에서 한달 째 되는 마지막 날, 네명의 ‘파이오니아’들은 한 사람당 1,000‘페세타’의 보석금을 지불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석방되었다. 그러나 계속 고발을 당할 위험성이 있었다. 사실상, 그들의 사건은 법정으로 비화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그들이 기탁하였던 돈들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특별 ‘파이오니아’들은 경찰에 계속 추적을 당하였기 때문에, 계속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옮기지 않으면 안되었다. 만일 특별 ‘파이오니아’가 자기의 수입 출처를 설명할 수 없거나 그가 세속 직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면, 방랑자 규제법에 걸려 원래의 도시로 돌아가야 하였다.

‘갈리시아’에 진리의 씨가 뿌려지다

‘스페인’ 내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박해를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국 전파 활동은 계속 발전하였다. 이러한 발전을 본 지역 중 한곳이 북부 ‘스페인’의 ‘갈리시아’ 도였다. 이곳에 어떻게 진리의 씨가 뿌려지게 되었는가?

‘헤수스 포세 바렐라’와 그의 아내의 노력으로 ‘갈리시아’에 참 그리스도교의 발판이 이루어졌다. 그들은 ‘우루구아이’의 ‘몬테비데오’에 살고 있는 동안 한 친척을 통해 진리를 알게 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들의 지식도 발전하였고, ‘헤수스’는 자기 누이와 누이의 남편 그리고 ‘스페인’으로 돌아가 살고 있는 자기 아들 ‘호세’에 대하여 책임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57년에 ‘헤수스’와 그의 아내는 친척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전해 주기 위해 고향인 ‘갈리시아’로 돌아가기로 결심하였다. 처음에 그들은 즐거이 받아들여졌으나, 그들이 새로운 종교를 가지고 돌아왔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사태는 험악하게 바뀌고 말았다. ‘헤수스’의 어머니까지도 그들이 타고온 배가 침몰되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하였다. 그의 어머니와 누이는 같은 집에 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와 전혀 상면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헤수스’는 인내하였으며, 편견의 장막은 서서히 무너져 내려 결국에는 성서 연구가 시작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모든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왜냐 하면 그들은 지방 사제가 지배하고 있는 조그만 격리된 마을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제의 영향력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오염될 것을 두려워하여 성서를 만지는 것조차 싫어하였다. 여하간에, ‘헤수스’의 인내는 그 자신의 가족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왔으며, 그가 예상치 못한 지속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진리 안에서 발전함에 따라, 그들은 격리된 시골 지역에 그대로 사는 것이 증거를 하는 데 최선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진리를 받아들이자, ‘댄스 홀’을 개조하여 양계장으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기들의 조그마한 농장과 양계장 그리고 같은 건물에 딸려 있는 잡화 상점으로부터 재원을 마련하였다. ‘헤수스’와 그의 처남인 ‘라몬 바르카’는 그 농장을 돌보며, 상점을 경영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적당한 크기의 구역을 찾기 위하여, 31‘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라 코루나’ 시까지 여행해야 하였다. ‘라몬’의 아내가 정규 ‘파이오니아’가 되고 ‘헤수스’의 아들 ‘호세’가 특별 ‘파이오니아’가 되었을 때, 그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결국 양쪽 가족들은 농장과 상점을 팔고 그들이 회중을 성장시키는 일에 더 크게 사용될 수 있는 도청 소재지로 이사하였다.

지금 돌이켜 보면, 좋은 소식을 전파하기 위하여 ‘우루구아이’에서 돌아온 ‘스페인’ 부부의 부지런한 노력으로 인해 약 20년 전에 시작된 ‘라 코루나’에 약 300명의 전도인들과 ‘파이오니아’들로 이루어진 3개의 회중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괄목할 만한 일이다.

얼마의 사람들이 크게 필요한 곳에서 봉사하기 위해 오다

1957년 7월, 독일 ‘키엘’에서 개최된 한 지역 대회에서는 크게 필요한 곳에서 봉사함이라는 주제의 연설이 있었다. 그 연설은 두명의 젊은 독일인 정규 ‘파이오니아’—‘호르스트 미일링’과 ‘하인리히 니쎈’—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들은 ‘스페인’으로 가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결심을 실천하였으며, 1957년 10월 19일에 기차편으로 ‘바르셀로나’에 도착하였다.

근 57,000명의 증인들이 있는 나라로부터 780명의 증인밖에 없는 나라로 온다는 것은 참으로 대조적인 일이었다. 더구나 ‘스페인’에서는 “성서”라는 말만 사용하여도 대화가 중단되었다. 하지만, 이 형제들이 가지고 있던 한 가지 유리한 점은 ‘스페인’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독일과 독일인들을 매우 좋아한다는 점이 있다.

그러기 때문에, 이들 형제들은 특히 과거 여러 해 동안 왕국 선포자들이 크게 필요로 했던 ‘스페인’ 내에서 봉사하기 위해 주로 독일, 영국 및 미국으로부터 온 증인들의 대열 가운데서 사실상 첫 번째 증인이었다.

우리의 사업이 외국인들에게 더욱 어렵게 된 한 가지 점은 호별 방문 봉사를 할 때, 끊임없이 경계를 해야 하는 점이었다. 만일 외국인이 체포되면 거의 틀림없이 추방을 당하였다. 이로 인하여 대화를 하는 도중 그리고 증거를 마친 후 집주인의 반응을 주의깊게 살펴야 하는 등 가외의 신경을 써야 하였다. 문이 닫힐 때 집주인이 전화를 걸 것인지 아닌지를 간파해야 하였다. 문이 쾅 하고 닫혔는가? 아니면 정중하게 닫혔는가? 또, 급히 그 집을 떠나는 어떤 이웃 사람이 있는지도 살펴야 하였다. 그러한 사람은 아마도 경찰에 전화를 걸 것이었다. 물론 전도를 하고 있는 곳 주변에 경찰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일도 매우 중요하였다. 성서와 우리의 서적들을 은밀하게, 겨울철이라면 ‘레인 코우트’ 속이나 ‘오바 코우트’ 속에 감추고 가지고 다녀야 하였다. 그러나 여름철에는 출판물들을 숨긴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가 않았다. 그래서 어떤 전도인들은 심지어 책들을 여러 쪽으로 쪼개서 집회에서 또는 성서 연구에서 다루어질 부분만을 가지고 다니곤 하였다.

1959년, 크게 필요로 하는 곳에서 봉사하기 위해 영국에서 ‘스페인’으로 온 ‘테일러’ 부부는 ‘스페인’ 서북쪽에 있는 항구인 ‘비고’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로 일하도록 임명되었다. 이곳은 국제적인 항구였으므로, 그가 별로 눈에 띄지 않으리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서 사제들은 이 부부가 호별 방문하는 일에 관하여 ‘라디오’를 통해 교구민들에게 선동을 하고 경고하였다. 그들은 쉽사리 식별할 수 있었다. 자매는 ‘스페인’인으로서 그가 대부분의 말을 하였으며, 남편은 외국인이었다.

얼마 있지 않아서 경찰이 나타나 ‘테일러’ 부부를 체포하였다. 그들은 경찰서로 끌려가 하루 종일 심문을 받았으며, 그 동안 음식을 먹지 못하였다. 그들은 석방될 때 여권을 압수당하였다. 그리고 매 화요일과 토요일에 경찰에 보고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론’은 자기의 이러한 사정을 영국 영사에게 보고하였으며, 그러자 그의 여권은 돌려 받게 되었지만 15일 이내에 그 나라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게 되었다.

결국 ‘론’과 그의 아내 ‘라파에라’는 2년 동안 ‘지브로올터’에서 봉사하게 되었다. 거기서 그들은 자기들이 떠날 때쯤 25명의 전도인들로 구성된 하나의 회중의 기초를 놓을 수 있었다. 드디어 영국 국교회 교직자들로부터 압력이 가해지기 시작하였으며, 1961년 12월에 그들은 크게 필요로 하는 곳에서 역시 봉사하기 위해 이사온 영국인 부부 ‘레이 커컵’과 ‘팻 커컵’과 함께 ‘지브롤올터’를 떠나라는 요구를 받았다.

1962년 1월에 ‘테일러’ 부부와 ‘커컵’ 부부는 ‘세빌랴’로 임명되었다. 그곳에는 이미 4명의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있었으나 근 50만명의 인구에 비하여 전도인은 겨우 21명 뿐이었다. 그리하여 그곳에는 할 일이 많았다. 1963년, ‘론 테일러’는 ‘바르셀로나’에서 순회 봉사를 하도록 임명을 받았다. 그 기간 중에 ‘스페인’ 내에는 순회 및 지역 봉사를 위해 자격을 갖춘 ‘스페인’ 형제들이 부족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외국 형제들이 이 봉사에 사용되었다.

‘길르앗’ 학교로부터 많은 도움이 있게 되다

1958봉사년도 중 ‘봅 클레이’와 ‘클레오 클레이’ 선교인 부부가 ‘스페인’을 떠나 ‘모로코’로 갔기 때문에 이곳에는 단지 두명의 ‘길르앗’ 선교인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1958년 3월에, ‘레네 바스케스’와 ‘엘시 바스케스’ 그리고 두명의 독신 형제들이 처음으로 회중을 정기적으로 순회 방문하기 위해 오게 됨으로 보강되었다.

1958봉사년도에는 ‘스페인’에서 33‘퍼센트’의 증가를 보게 되었다. 처음으로 우리는 전도인 1,000명선을 돌파하였다. 그 때는 1958년 8월로서, 1,006명의 전도인들이 야외 봉사를 보고하였다. 이만한 수자에 도달하기까지는 (1947년 사업이 재개된 이후) 11년이 걸렸다. 그러나 그후 3년 만에 2,000명의 전도인 선에 도달하였으며, 그 다음 2년 만에 3,000명선을 돌파하였다. 1969년에 이르러, 활동적인 증인의 총 수자는 거의 9,000명에 달하였다. 그 때로부터 눈뭉치처럼 증가가 계속되어 ‘스페인’ 지부 산하 구역 내에는 40,000여명의 전도인으로 불어났다.

‘카나리 제도’가 여호와를 찬양하기 시작하다

‘아프리카’ 서해안 근처에 ‘스페인’ 구역인 13개의 섬들로 이루어진 제도가 있다. 이 중 일곱개의 섬—‘테네리페’, ‘라 팔마’, ‘고메라’, ‘히에로’, ‘그랑 카나리아’, ‘란자로테’ 및 ‘푸에르테벤투라’—들이 ‘카나리’ 제도의 주요 섬들을 이루고 있다. 1958년에 총인구는 약 940,000명이었다.

‘스페인’ 내란 이후 이 섬에 진리가 처음으로 이른 것은 언제였는가? 1958년에 한 관심자가 ‘바르셀로나’로부터 이곳으로 이사해 왔다. 그해 9월에 ‘카알 워너’가 순회 감독자로 그곳에 갔으며, 여호와의 증인이 행한 연설로서는 처음으로 강연을 하였다. 참석자는 6명으로서 매우 작은 시작이었지만, 적어도 이것은 시작이었다. 이러한 시작은 도청소재지인 ‘라수 칼마스 데 그랑 카나리아’에서 있었다. ‘카알’은 이곳에 특별 ‘파이오니아’를 보내 주도록 추천하였다. 이러한 일이 즉시는 이루어질 수 없었으나, 다른 근원으로부터 도움이 오게 되었다.

1958년에 미국 ‘뉴우요오크’ 시에서 열린 ‘성의 국제 대회’에서 ‘노워’ 형제는 크게 필요한 곳에서 봉사하는 데 관한 연설을 하였다. 한 ‘덴마아크’인 가족인 ‘그제데’ 부부는 그의 연설을 듣고 그에 따르기로 결심하였다. 그들은 21세 된 아들 ‘존’과 함께 ‘덴마아크’를 떠나 ‘카나리’ 제도에 가서 살기로 결정하였다. ‘존’은 먼저 1959년 2월에 자기 부모를 위해서 형편이 어떠한지 살피기 위해 ‘카나리’ 제도로 갔으며, 동일한 이유로 그곳에 이미 와 있던 미국인 형제 ‘어빈 피플’을 만나 매우 기뻐하였을 것이다. 처음에 그들은 그곳으로 이사해 와 있던 한 관심자 가족과 함께 머물러 있었다.

시초에 이들 형제들은 동일한 문제 즉 언어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이 문제는 우연한 일치로 해결되었다. 어느날 재방문을 하기 위해 어떤 주소를 찾고 있던 그들은 길에서 한 남자에게 길을 물었다. 알고 보니 그는 선생이었으며, 학교를 하나 가지고 있었다. 대화가 시작되었고, 그의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칠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논의하였다. 그 선생은 그들에게 ‘스페인’어를 가르치기로 하고, 그들은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기로 하였다. 동시에 이것은 ‘어빙’과 ‘존’에게 새로운 밭을 열어 주었으며, 결국 한 왕국 전도인 가족인 ‘수아레즈’ 가족을 찾게 되었고, 그 집 딸인 ‘안젤리네스’는 후에 특별 ‘파이오니아’가 되었다.

‘카나리’ 제도에서의 우리의 봉사의 후기 역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또 다른 일이 있었다. ‘마드리드’에서 ‘호세 오르자에스’는 1959년 4월에 ‘필라(필리) 베니토’와 결혼을 하였으며, 다음 달 5월에 그들은 특별 ‘파이오니아’로 그 섬에 와서 봉사하였다.

‘호세 오르자에스’가 ‘라스 팔마스’에 도착해 보니, ‘바르셀로나’에서 처음에 증거를 받았으나 지금은 협회의 서적을 자기 생각대로 풀어서 가르치는 한 절름발이 남자의 인도를 받는 집단이 있었다. ‘호세’가 올바른 절차에 따라 집회를 인도하기 시작하자, 이 사람과 그의 아내는 진리에서 떨어져 나갔다. 이곳에는 여러 차례 반복된 한 가지 전통적인 전례가 있는데, 그것은 다름아니라 한 개인이 자기의 가르침으로 자신이 중요하게 되고 높아지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수많은 경우들에서 그러하듯이, 그런 사람은 자기의 중요성이 인정을 받지 못하게 되자 진리를 버리고 그를 도우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물러나 버리고 만다.

그 동안, ‘존 그제데’의 부모는 ‘덴마아크’에서 도착해 있었다. 이제 그 집단의 활동은 특별 ‘파이오니아’들의 본과 함께 성장하였으며, 1960년 4월에 와서는 6명의 전도인들이 21명으로 늘어났다. 12월에는 29명의 신기록을 달성하였다. 물론, 이러한 모든 활동은 반대자들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들은 1960년 12월에 이 전도인들의 존재를 알아채게 되었다.

성서 연구 집단이 습격을 받다

1960년 12월 24일 밤, ‘라스 팔마스 데 그랑 카나리아’에서는 17명의 형제들과 관심자들이 성서 연구를 위하여 함께 모였다. 그들 가운데에는 ‘호세 오르자에스’, 그의 아내 ‘필리’, 그들 사이에 난 3개월된 딸, 그리고 순회 감독자 ‘살바도르 아드리아’가 있었다. 저녁 8:30분, 다섯명의 경찰관이 주머니 속에 보이지 않게 권총을 휴대하고 ‘아파아트’를 갑자기 습격해 왔다. 한 경찰관은 그 ‘아파아트’의 임차인인 ‘호세 오르자에스’에게 이러한 집회에 권총을 번쩍이며 들어오는 것이 자기의 습관이라고 떠들어댔다.

경찰은 집안으로 뛰어 들어왔을 뿐 아니라, 그곳을 또한 포위하였다. 이것은 마치 평화스러운 성서 연구 집단이 아닌 무정부주의자들이나 비밀 공산주의자들의 모임을 습격해 들어오는 것과 같았다!

모든 경찰관이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범죄자를 다룰 때 맨먼저 하는 일은 무장을 해제시키는 것이다. 이번의 습격에서도 그렇게 하였다. 그들은 모든 성서를 압수하였다! 다음에 그들은 어린이들의 이름을 적고 그들을 집으로 보냈다. 14명의 성인들과 ‘호세’의 아기는 경찰서로 호송되어 갔다. 그 날밤과 다음날 아침까지 어린 아이가 배고파 울어대는 데도 아무런 음식을 주지 않았다. 어머니와 아기는 석방해 달라고 거듭 호소하였지만 무시되었다.

범죄자들을 체포할 때 취하는 또 한 가지 단계는 지문을 채취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14명 모두의 지문을 찍게 했으나 인정상 어린 아이만 제외시켰다. 잠도 재우지 않고 음식도 주지 않은 채 18시간이 경과한 후, ‘호세 오르자에스’와 순회 감독자인 ‘살바도르 아드리아’만 빼놓고 증인들은 석방되었다. 그 두 형제는 돌 침상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지저분하고 어두운 감방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기도하였다. 그 날밤 8시에, 그들은 법정으로 끌려 나가게 되었는데, 그 때까지 그들은 아무 것도 먹지 못하였다. 그들은 24시간 동안 아무 것도 먹을 것을 받지 못하였다. 드디어 밤 11시에 그들은 심문을 받게 되었는데, 이 심문은 3시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심문자들은 판사, 그의 서기 및 검사로 구성되었다. 그 심문은 ‘호세’가 그 ‘카나리’ 제도 안에 그 “종파”의 인도자 또는 “설립자”로 ‘카나리’ 제도에 파견되었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데 주안점이 주어졌다. 그뿐 아니라 여호와의 증인들의 활동은 타도되어야 한다는 점을 암시하였다.

심문이 끝나자 형제들은 그 조그마한, 침상도 없는 감방에 집어넣어졌으며, 그곳에는 이미 세 사람이 마루 위에서 자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그들은 도 형무소로 이감되어, 벌레가 들끓는 감방들 중 독방에 감금되었다. 성서를 넣어달라는 요구는 거절되었다. ‘호세 오르자에스’는 자기 감방에 혼자 있는 동안 묵상할 시간을 가졌다. 그는 29명의 전도인들로 이루어진 이 조그마한 집단이 자기들 위에 임한 이 공격이 있은 후 어떻게 반응을 나타낼 것인지 궁금하였다.

‘카나리’ 제도 뿐 아니라 ‘스페인’ 내의 기타 여러 곳에 영향을 미친 이러한 경찰의 활동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는가? 보통의 경우, 이러한 경우에 경찰 자체의 의사만으로는 경찰이 행동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 하면 그들에게는 보다 중요한 일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경우에 있어서는 이러한 일단의 행동은 교직자들에 의하여 시작되며, 그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의 활동에 관해 주교에게 보고한다. 그들은 또 경찰 동원권을 가지고 있는 지사에게 알린다. 또한 교직체는 내무상에게 알리고 이 내무상은 그 나라 전역에 있는 경찰서에 통지를 한다. ‘라스 팔마스 데 그랑 카나리아’에 있는 평화스러운 성서 연구 집단에 대한 경찰의 습격 및 ‘스페인’ 도처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공격 배후에 이러한 요인들이 작용하였다는 공식적인 분명한 증거가 있다.

‘오르자에스’ 사건의 결과

‘호세 오르자에스’는 심문을 받는 며칠 동안 구류되어 있다가 석방되었다. 그가 석방되어 보니, 성서 연구 집단은 좋은 영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아내와 딸 아기는 그가 없는 동안 잘 돌보아지고 있었다. ‘오르자에스’ 형제는 재산이 없었으므로 보석금을 지불하지 않은 채 석방되었으며, 그는 그의 재판이 열리게 된 1961년 10월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동안, “전체주의적 재판이 ‘스페인’에서 되살아나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은 「깨어라!」가 1961년 9월 8일호 영문과 ‘스페인’어판으로 동시에 발행되었다. 9월 말경, ‘호세’는 경찰서로 다시 출두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이번에는 어떠한 이유로 소환하는가를 궁금히 생각하였다. 그는 곧 그 까닭을 알게 되었는데, 경찰은 그에게 앞서 언급한 「깨어라!」 기사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세상 여론에 그렇게 공개되는 것을 알고 격분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거짓말장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호세’는 땅이 꺼지고 그를 삼켜 주었으면 하는 기분이 들기 시작하였다. 그는 살아나아갈 수 있는지가 의심스러웠다. 왜냐 하면, 격분한 경찰 6명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심문을 받는 동안, 그 기사가 자기에게 보호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갑작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그들의 행동이 또 다른 「깨어라!」에 실리게 되지나 않을까 해서 그에게 손을 대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한번은, 경찰관이 삼개월된 아기에 관한 그 기사 내용은 거짓말이라고 말하였다. ‘호세’는 자기가 그 아이의 아버지였기 때문에 그것은 사실이라고 조용히 말하였다! 그는 큰 시련을 살아서 견뎌냈으며 즐거워하였다. 현재 그는 그들이 더 큰 존경심을 가지고 여호와의 조직을 대하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호세’의 재판은 1961년 10월에 세명의 판사로 된 합의부 앞에서 열렸으며, 그 판사들 중 한 사람이 사회자 역할을 하였다. 그 사건은 신문에 난 일이 없지만, 방청석은 형제들, 관심자들, 변호사들, 의사들 및 기타 많은 사람들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그 법정에서 60명 이상이 방청하였다.

검사는 ‘오르자에스’ 형제가 ‘라스 팔마스 데 그랑 카나리아’에 있는 성서 연구 집단의 “지도자”라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피고측 증인들은 그를 자기들의 지도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더구나 결론에서, 피고인의 변호인은 ‘스페인’의 권리 장전을 인용하였으며 또한 20명까지는 사전 승인 없이도 함께 모일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오르자에스’ 형제에게 씌워진 개종에 대한 혐의에 관하여, 다시금 권리 장전이 인용되었으며, 그것은 12조에서 언론의 자유를 허용하였음을 지적하고, 그 조항을 적절히 강조하여 낭독하였다.

길고도 이치적인 변호, 그리고 피고는 무죄라는 중론에도 불구하고 “유죄” 판결이 내려졌고, 3개월 징역형에 처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은 대법원에 상소되었다.

2년 4개월 후 ‘호세 오르자에스’ 사건은 마침내 대법원에서 취급되었다. 그 동안 우리의 사건들은 1960년 이후, 그리고 1966년까지 그 기세가 식어지지 않은 채 ‘스페인’ 전역을 휩쓴 잔혹한 박해의 물결로 말미암아 계속 관심을 끌게 되었다.

고무적인 판결

1964년 3월 2일, 대법원은 여러 나라에서 온 약 200명의 사람들이 법정을 메운 앞에서 공개 재판을 하였다. 기타 많은 사람들은 판결을 듣기 위하여 건물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결론에서 피고인측 변호사는 1880년 6월 15일자의 집회에 관한 법률이 계속 유효함을 지적하였다. 제2조에서는 공개적 모임이란 20명 이상이 모이는 것을 말하며, 이 수자를 초과할 경우에만 정당한 목적을 위하여 함께 모이는 데 대한 정부의 승인을 요청해야 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변호사는 ‘라스 팔마스’ 내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이 법률을 준수하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더 나아가서 “불법적인 단체들”이란 국가의 안전을 위태롭게 할 범죄를 저지를 목적을 가진 자들로 이해된다고 논리적으로 설명하였다. 그러나 여호와의 증인들의 집회는 성서를 읽고 그것을 설명하는 것에 기초해 있음을 명백히 밝혔다. 또 여호와의 증인들은 국가의 안전을 해치는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이며, 그러한 사람은 여호와의 증인으로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르친다고 밝혔다.

요약해서 말하면, 심문 사건에서 ‘스페인’ 권리 장전 제6조가 공개적으로 위반되었는데, 그 이유는 국가는 “아무도 자신의 종교적 신념이나 자기의 숭배를 개인적으로 행사하는 데 간섭을 받지 않도록” 보장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피고측은 지적하였다. ‘오르자에스’ 형제는 경찰의 간섭을 받았을 뿐 아니라, 17명이 모인 한 집회에서 성서를 가르치다가 발견되었다고 해서 심문을 받고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제 검찰측이 그의 주장을 제시할 차례가 되었다. 피고측이 제시한 변론을 간단히 요약한 후에, 그 검찰은 “본인은 피고의 무죄를 주장하는 일에 동의한다”고 선언함으로써 소요를 일으켰다.

그 재판정의 판결은 어떠하였는가? “우리는 피고 ‘호세 오르자에스 라미레즈’가 본건에서 기소된 불법적인 회합을 가졌다는 범법 사실에 대하여 무죄를 선언하며, 아울러 소송 비용 청구도 기각한다”고 판결하였다.

1964년에 이러한 판결이 내려지자, ‘스페인’ 형제 자매들은 이러한 판결로 인하여 크게 고무되었다. 특히 지난 4년 동안 공격을 받아온 일단의 충성스러운 특별 ‘파이오니아’들의 경우에 그러하였다. 이 판결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집단 성서 연구를 하다가 체포될 경우, 연행과 구금 및 벌금형을 받는, ‘스페인’ 도처에서 자행된 종교적 불관용에 일대 강타를 가하였다. 이 판결은 성서 연구의 목적으로 사적으로 함께 모이는 권리를 옹호하는 선례가 되었다.

무자비한 반대

그러나 내무성은 ‘스페인’ 구역 내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을 근절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1966년 2월 24일자로 모든 지사들에게 또 하나의 회람장을 발송하였다. 최소한 2,500‘페세타’의 벌금을 부과하는 시책이 기대한 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기 때문에 내무상은 법무상과 상의를 하였고, 이러한 추천이 있게 되었다.

“결국, 본인은 각하께 내무상의 명령에 따라 부랑 및 범법 행위로 인하여 체포되어야 할 그 종파의 성원들을 부랑자 및 범법자 법원에 고발하도록 촉구하는 바입니다. 그러면, 그들의 사건을 담당하는 법원들은 조치를 취할 근거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개종 활동을 벌임으로 범하게 되는 범법자들의 기소 및 처벌, 그리고 경찰 당국에 하등 영향을 미치지 않고 형사 재판소가 유죄 선고를 내릴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증인들의 전파 활동을 억제하고, 협박을 통하여 그들의 사업을 중지시키려고 하는 최후의 노력이었다. 사실상, 그것은 “율례를 빙자하고 잔해를 도모하는” 일이었다.—시 94:20.

그리스도인 중립의 유지

종교적 및 기타 반대를 직면하는 일 외에도, 그 당시 ‘스페인’ 치하에 있던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리스도인 중립과 관련된 문제들을 대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요한 15:19) 그들의 개인 성서 연구를 통하여, 그 당시 얼마의 젊은 증인들은 이사야 2:4과 기타 성귀들이 그들에게 열방들의 일과 관련하여 단호히 중립적 입장을 지킬 것을 요구한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한 사람이 그들과 그 문제에 관하여 이야기하였을 때, 그들은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개인적으로 연구한 것에 근거한 그들 자신의 양심적 결정이라고 말하였다. 각자는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선택을 하였다. 한 동안 ‘스페인’ 당국자들은 이러한 중립적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였으며, 이들 형제들 중 일부는 심한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당국자들은 이러한 양심적인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좀더 관용적인 견해를 갖고 있으며, 그들은 좀더 이해심을 가지고 대하게 되었다. 다년간, 이들 시련하에서의 젊은 증인들의 충실함은 다른 사람들에게 격려의 원천이 되어왔다. 우리는 현재 그들이 성실의 길을 따른 경험담의 일부를 기꺼이 이야기하고자 한다.

1958년 2월 ‘마드리드’에서 온 ‘헤수스 마르틴’은 ‘모로케’에 있는 ‘스페인’령 ‘메릴라’에서 군 복무를 하도록 소집되었다. ‘헤수스’는 그리스도인 중립 입장을 고수했기 때문에 심하게 구타를 당하였고, 결국은 ‘로스토로고르도’(뚱뚱하게 살찐 얼굴)라고 알려진 군 형무소에 들어가게 되었다. 거기서 그는 ‘메릴라’ 수비대의 군-민 수석 권한을 쥐고 있던 육군 중장의 심문을 받는 동안 잔인한 학대를 받았다. 또 하나의 “잊혀질 수 없는” 인물은 군 형무소 소장이었는데, 그는 무자비하고, 포학한 사나이였다.

그 감옥에서 8일간을 지낸 후, ‘헤수스 마르틴’은 모욕을 당하는 것 외에도 말채찍으로 계속해서 20분 동안이나 맞았으며 발길질을 당하여 결국에 가서는 의식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한 발길질로도 만족지 않고, 그 대위는 ‘헤수스’의 머리를 땅에다 짖이겼으며, 그의 머리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해서야 그만두었다. 그 대위의 사무실로 부축을 받아 돌아간 다음, ‘헤수스’는 날마다 그 정도의 구타를 당하리라는 말을 들었으며, 그 잔인한 대위는 또 그에게 불구자로 만들겠다는 위협을 하였다.

후에 ‘헤수스’는 지하 감방에서 여호와께 힘과 도움을 달라고 기도하였다. 그 지하 감방으로 내려갔을 때, 이 젊은이는 쥐 밖에는 아무에게도 말을 걸 수 있는 대상이 없었다. ‘헤수스’는 매일 총 끝에 겨누인 채 작업장으로 끌려 나가서는 기를 꺽어 놓을 심산으로 가해지는 맹목적인 일인 곡괭이로 돌을 깨는 일을 8시간씩 하였다.

그러나 매일 구타를 하겠다는 위협은 어떻게 되었는가? 다음날 ‘헤수스’는 그의 상처에 ‘올리브’ 기름을 바르고 머리는 붕대로 감는 치료를 받았다. 그러한 상태로 그는 두번째 구타를 당하였다. 이번에는 구타를 하도록 임명받은 한 하사의 손에 당하였는데, 그 동안 그 대위는 제대로 구타를 하는지 감시를 하였다. 이러한 야만적인 학대를 보고 경비병들과 사병들까지도 분개하였다. ‘헤수스’는 자기가 정말로 이러한 학대를 매일 견뎌낼 수 있을까 의아한 생각이 들자 자신의 결심이 동요를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삼일째 되던 날, ‘헤수스’는 그에게 할당된 돌을 깨는 일을 하도록 불리워 나갔다. 그러나 오전 반나절쯤 되어서 그는 다시 대위의 사무실로 소환되어 갔다. 거기서 그는 군 재판관을 만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 재판관은 그의 사건을 조사하기 위하여 왔으며, 그에게 심문을 시작하였다. 그 재판관은 구타를 당한 흔적인 붕대를 감은 것을 보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물었다. ‘헤수스’는 그에게 말할 경우 보복이 있을 것을 두려워하였으나 그는 사실대로 말하였다. 그 말을 듣고 재판관은 그에게 다시는 구타를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바로 그 전날 그의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진 것이다! 투옥되어 있던 나머지 6년 동안 ‘헤수스’는 다시 구타당한 일이 없었다. 그리고 그는 여호와께서 충실한 사람의 기도를 들어 주신다는 사실을 확신하였다.—잠언 15:29.

‘아프리카’에서 15개월을 지낸 후, ‘헤수스 마르틴’은 ‘스페인’ 내에 있는 ‘오카나’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흥미롭게도, ‘헤수스’는 명령 불복죄로 15년형을 받았고 치안 교란죄로 4년을 받았다. 그의 예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것으로 고려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18개월간의 군복무를 거절함으로써 19년의 형을 살아야 함을 의미하였다! 나중에 그는 ‘로스트로고르도’에서의 명령 불복종에 대해 3년이 추가되었으며, 도합 22년형이 되었다. 덧붙여 말하자면, 그가 받은 15년 형은 ‘스페인’ 내에서 중립 문제와 관련해서는 최장기 형이다.

감옥 내에서의 영적 건강의 유지

‘헤수스 마르틴’은 ‘오카나’에 투옥되어 있는 동안, 여러 가지로 혜택을 받았다. 처음에, 그곳에 있는 형무소 관리들은 그의 형무소 경력을 읽고 나서, 그가 매우 반항적인 수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그가 모범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매우 모범적이었기 때문에 형무소 내의 회계 담당이 되었으며, 재소자들이 형무소 내의 공장에서 일한 데 따라 모든 재소자들에게 임금을 지불하는 책임을 맡았다. 어떤 달에는 그는 임금으로 500,000‘페세타’(약 5,000,000원)를 지불하는 일이 있었다.

‘오카나’에서 한 가지 좋은 점은 ‘헤수스’가 자기 부모의 면회를 받을 수 있는 점이었다. 물론 부모들은 한번에 15분간만 면회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러면 그는 어떻게 자신의 영적인 건강을 유지하였는가? 그가 ‘왙취 타워 협회’의 출판물을 소유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나카르 콜룽가’ 성서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한번은 위경들과 주해 및 나머지 모든 것을 통독하는 데 단지 20일 밖에 걸리지 않았던 것을 상상해 보라!

‘헤수스’는 다른 그리스도인 중립자들도 자신들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으며, 그리하여 이러한 형제들 중 한 사람을 자기의 형무소로 보내 주실 것을 열심히 기도하였다. 고독하게 4년을 지낸 후, 그의 기도가 응답되었다. 왜냐 하면 ‘알베르토 콘티호크’가 그곳으로 보내졌기 때문이다. 그 두 사람은 함께 연구하였으며, 또한 그 형무소 내에서 더욱 공개적으로 전파하였다. 사실, 그들은 자작인 성서 교재로서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제3판”을 마련하였다. 새로 들어온 형제가 그 내용을 기록하였다. 왜냐 하면 그가 그 책 내용을 더 잘 기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면에 ‘헤수스’는 그 내용을 교정하고 조정하였다.

그후, 1961년에 그리스도인 중립을 지키는 세번째 사람인 ‘프란시스코 디아즈 모레노’가 ‘오르카나’ 형무소로 임명되었다. 이 세 젊은이들은 「이 천국의 기쁜 소식」 소책자 한권을 입수하게 되었으며, ‘헤수스’는 그가 일하고 있는 사무실의 ‘타이프라이터’를 이용하여 복사본을 만들 수 있었다. 한 때는 그들이 동료 재소자들과 함께 15건의 성서 연구를 사회하기도 하였다.

이들 그리스도인 중립자들은 위험을 무릅쓰면서도 새로운 성서 서적들을 구입하고자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예를 들어 1963년 9월 24일,—수인들과 포로들에 대하여 ‘가톨릭’ 교회가 중재하는 날인 “은총을 입은 성모” 절기—에 있었던 일을 고려해 보자. 이 날은 특별한 축일이었으며, 이 형무소는 가외의 면회자들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그 날 ‘호세’와 ‘필리 오르자에스’가 그들의 두살된 딸인 ‘에스터 리디아’를 데리고 그 형무소로 면회를 왔다. 그 딸은 ‘헤수스’의 “조카”로 입장이 허락되었으며, 그에게 의복 상자 하나를 주었는데 그 속에는 협회의 두꺼운 표지로 된 책 두권이 들어 있었다. 또 한번의 경우에는, ‘헤수스’의 부모가 그에게 영어판 「범사에 헤아리라」는 책을 전해 주었다. 그러나 형무소 관리는 그의 손에 그러한 책에 들어가게 하는 것은 은행 강도에게 기관단총을 주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면서 ‘헤수스’가 그 책을 갖는 것을 허용치 않았다.

1963년에 ‘오카나’ 형무소에 있는 그리스도인 집단은 ‘안토니오 산체스 메디나’가 들어옴으로 해서 세명에서 네명으로 늘어났다. 그는 이미 다른 곳에서 형무소의 고난을 이겨냈으며, 그가 이들 세명의 증인들과 함께 하기 전에, 30일간의 시험을 견디어야 하였다. 하지만 ‘안토니오’는 대화를 해서는 안된다는 명령을 받았지만 말을 하지 않고 증거를 하는 방법을 알아냈다. 다른 죄수가 진리에 관심을 보이면, ‘안토니오’는 그 재소자가 말을 채우도록 성서 글자 맞추기 ‘퀴즈’(‘크로스워어드’)를 만들어 글자를 채우도록 제안하였다. 여러 가지 ‘크로스워어드’ 문제를 이용하여 ‘안토니오’는 수인들에게 그의 성서를 찾아 보게 하였다.

‘안토니오’가 최초의 30일간의 독방형을 마칠 즈음에 불리한 일이 발생하였다. 전에 ‘사라고사’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그는 형제들에게 한 관심자 수인에 관하여 편지를 썼다. ‘안토니오’는 이 편지를 자기의 침대요 밑에 숨겨 두었다가, 형무소 밖으로 그것을 내 보낼 기회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방을 조사받을 때, 그 편지를 들키고 말았다. 이제 그는 ‘오카나’에서 그 대가를 치러야 하였다. 즉 편지를 쓰고 개종 활동을 한 데 대하여 20일간 체형실에서 지내야 하였다.

‘안토니오’는 “튜브” 즉 춥고, 어두운 감방들이 있는 ‘터널’로 끌려 내려갔다. 거기에는 가구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으며, 단지 세수 대야, 변기, ‘알루미늄’ 접시 및 ‘스푸운’만이 있었다. 밤에 그는 ‘매트레스’ 하나와 더러운 담요 두장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아무 것도 읽거나 쓸 수가 없었다. 그러면 그는 참기 어려운 20일간을 어떻게 견디었는가? ‘크로스워어드 퀴즈’가 그 해결책이었다. 하지만 ‘안토니오’는 종이와 연필이 없었다. 그래서 접시의 손잡이를 떼어 내서 그것을 감방 바닥에 쓰는 도구로 이용하였다. 그는 마루를 대형 성서 ‘크로스워어드 퀴즈’판으로 이용하였다! ‘안토니오’는 성서의 문맥과 인물들을 생각해 내는 데 골똘하였으며, 그리하여 시간이 매우 빨리 지나갔다!

의심할 바 없이 영적인 건강을 유지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길이 있었다. 어제 ‘오카나’에 있는 네명의 그리스도인들은 얼마의 잡지들과 기타 서적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읽는 일은 전혀 비밀리에 해야 하였으며, 책들은 감추어 두어야 하였다. 그러한 목적으로 그들은 장기판을 가지고 있었으며, 위장한 장기판의 밑판에 서적을 숨겨 두곤 하였다.

조심스럽게 가진 집회들

‘오카나’ 형무소에 있는 네명의 그리스도인들은 성서 연구를 위한 집회들을 가질 필요성을 온전히 깨닫고 있었다. (히브리 10:24, 25) 그리하여 마침내 그들은 극도로 조심을 해야 하였지만, 매주 집회를 갖도록 마련하였다.

‘오카나’ 형무소에서는 이층으로 이루어진 침상들이 나란히 열을 지어 있었으며, 각 방에는 80명의 수인들이 들어 있었다. 네명의 증인들은 나란히 자리잡은 두 쌍의 침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맨 위에 누운 한 사람은 들으면서 한편으로 간수가 오는지 살피는 동안, 다른 세 사람은 침상 바닥에 앉아서 최선을 다해 자기들이 맡은 ‘프로그램’을 제공하였다. 다른 재소자들이 내는 소음, 머리 위에 있는 확성기에서 나오는 음악 또는 축구 시합 소리 등 온통 시끄러운 소리로 인하여, 성경 내용을 토론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젊은이들은 계속하여 그러한 토론을 하였으며, 심지어 1962년에는 그러한 환경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드디어 자유—한 사람에게

1964년 여름, ‘헤수스 마르틴’은 다시금 ‘오카나’에 혼자 있게 되었다. 다른 세명의 그리스도인들이 1963년에 떠났기 때문이다. ‘프란시스코 디아스 모레로’는 한 가지 형기를 마쳤으며, 이제 다시 출두해야 하였는데, 이번에는 ‘스페인’령 ‘사하라’에 있는 ‘엘아아이운’으로 가야 하였다. ‘안토니오 산체스’와 ‘알베르토 콘티호크’도 동일한 일을 겪었다. 그러나, 헤어지기 전에, 그들은 한 가지 새로운 지략을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네 사람 모두 조건부 자유를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선한 행실을 하는 경우 형무소에서 복역하는 매 일년 당 3개월의 자유 기간을 허용받았다.

이렇게 노력해 보았지만 세 사람의 요청은 거절되었다. 그러나 ‘헤수스 마르틴’의 탄원은 승인되었다. 그는 25개월 간의 잠정적인 자유 기간을 허용받게 되었으며, 그 다음 다시 군 당국에 출두해야 하였다. 그리하여 1964년 8월에 ‘헤수스’는 6년 6개월간의 형을 살고 형무소에서 나오게 되었다. 그는 어떤 이유에서인가 다시 소집되지 않았다.

침례받지 않고 성실을 지킨 사람

‘오카나’에서 일년을 지낸 후, ‘프란시스코 디아스 모레노’는 그의 두번째 형기를 마치고 1964년 1월에는 세번째 재판을 기다리면서 2개월 동안 일시적인 자유를 얻었다. 그는 ‘사하라’로 가기 전에 자신을 영적으로 튼튼하게 만드는 데 그 기간을 이용하였다. 1964년 4월, ‘프란시스코’는 사막 깊숙이에 있는 ‘라 사히아’라는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알베르토 콘티호크’와 ‘후앙 로드리구에스’는 이미 그곳에 와 있었다. 흥미롭게도, ‘후앙’은 중립 문제로 형무소에서 3년간을 보냈는데, 그는 그 때까지 침례받은 여호와의 증인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께 헌신을 상징하는 침례를 받을 기회를 채 갖기도 전에 성서 진리를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였던 것이다.

‘후앙’이 앞서 감금되어 있던 곳들 중 한 곳에서는 여러 가지 일들 중 그의 중립적인 입장을 꺾기 위해 속임수가 이용되었다. 형무소 교무 담당—보통 ‘가톨릭’ 사제—은 ‘후앙’에게 다른 한 증인이 그를 찾아올 것인데 협회로부터 보낸 최근 지시를 가져올 것이라고 말하였다.

해군 복장을 한 한 젊은이가 자신을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소개하였다. ‘후앙’, 그리고 그 수병 및 사제 이렇게 셋이 막 이야기를 시작하려는데, 그 “여호와의 증인” 수병은 담배를 꺼내서 ‘후앙’에게 피우라고 권하였다! ‘후앙’이 그 “형제”에게 어느 책을 읽었느냐고 묻자, 그 수병은 「푸른 잎사귀」라든가 기타 ‘후앙’이 전혀 들어 본 일도 없는 제목들을 댔다. 다음에, ‘후앙’은 사제가 혼자 있을 때, 앞으로는 증인을 만나게 해 주려면 먼저 그가 진짜 증인인가를 확인한 다음에 만나게 해달라고 말하였다.

‘프란시스코’, ‘알베르토’ 및 ‘후앙’이 ‘엘아아이운’으로 이감하기 전 ‘라사히아’에서 대기하고 있는 동안, 그들은 그 수용소 밖에 있는 한 우물에서 ‘후앙’에게 침례를 주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수용소 밖으로 나가는 허락이 일체 거부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 메마른 사막에서 어떻게 침례를 주기로 하였는가? 그 수용소 내에는 뚜껑이 덮여 있는 커다란 물통이 하나 있었는데, 물을 부어넣기 위한 두개의 구멍이 있었다. 그리하여 ‘바케츠’ 물을 길어 냈다. 하지만 그 안에 있는 물은 겨우 15‘센티미터’ 밖에 없었다.

그러나 1964년 4월 19일 밤, 그들 세 젊은이들은 급수차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들의 ‘텐트’ 안에 모여 있었다. 그렇다. 물 ‘탱크’가 가득 찼으며, 한 사람이 잠기기에 충분하였다. 얼마나 기뻤겠는가! 간단한 성경 연설이 있은 후, 세 사람은 가만히 빠져 나가 모래 사장을 건너 물 ‘탱크’ 있는 데로 갔으며, ‘후앙 로드리구에스’는 침례를 받았다.

‘엘아아이운’에서의 인내

드디어, 사막 가운데 더욱 깊숙이 위치해 있는 ‘하우사’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그러한 여러 가지 경험을 한 후에, 네명의 그리스도인들—‘알베르토 콘티도’, ‘프란시스코 디아스 모레노’, ‘안토니오 산체스 메디나’ 그리고 ‘후앙 로므리구에스’—는 ‘엘아아이운’에 수감되게 되었다. 그곳의 상태는 매우 한정되어 있었다. 왜냐 하면 그 감옥은 감방문들이 철조망과 유리 조각으로 뒤덮인 감옥의 담을 향해 나있는 직사각형의 건물이었기 때문이다. 그 담의 각 모퉁이에는 초소가 있었고, 간수는 자동소총을 들고 경비를 하고 있었다. 감방은 2 x 3‘미터’의 작은 방이었으며, 각 방에는 둘 또는 세명이 들어 있었다. 운동 시간은 매일 아침 저녁으로 한시간 뿐이었다. 그러나 더위는 사막의 다른 어느 곳보다 더 쉽게 견딜 수 있었는데, 이는 이 감옥이 바다로부터 25‘킬로미터’ 밖에 안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며, 이것은 그 기후를 견디는 데 도움이 되었다.

처음에, 네명의 그리스도인들은 전파하고 성서 연구를 사회하며 집회를 볼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프란시스코’는 한 젊은이에게 이야기할 수 있었는데, 그 사람은 살인 교사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30년으로 감형되었다. 어느날 그는 자기 어머니가 자기에게 성서를 보내 주었다고 ‘프란시스코’에게 이야기하였다. 그의 어머니와 숙모는 복음주의파 ‘프로테스탄트’였다. ‘프란시스코’는 재치있게 그의 성서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이름에 관하여 증거하였으며, 관심이 점점 많아지자,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책을 사용하여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다. 몇 주일후, 그 젊은이는 ‘스페인’ 서남부에 있는 ‘카디스’의 ‘산타 카타리나’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그러나 진리는 이미 그의 마음속에서 작용하고 있었다. 그는 계속 발전하였으며, 마침내 침례를 받았다. 그의 어머니와 숙모 역시 이제 침례받은 증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갇혀있는 동안 ‘마르셀리노 마르티네스’는 참다운 진리를 발견하였던 것이다.

‘엘아아이운’ 내의 상태는 다른 제소자들과 15건에 성서 연구가 진행될 정도였다. 그러나 드디어 형무소 당국자들은 제동을 걸고, 증인들을 다른 수감자들과 분리시켜 놓았다. 심지어 운동 시간까지 변경시켜 놓았으므로 다른 수감자들과 함께 할 기회가 없었다. 그들을 “개종”시킬 틈이 없었다.

새로운 묘책의 사용

사 오년 동안 수감 생활을 한 후에도 당국의 태도에 아무런 변화가 없자 수감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입장을 변호할 목적으로 군법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묘책의 일부로, 그들은 자신들이 처한 곤경에 관계 부처에 있는 사람들의 주의를 이끌기 위해 정부 각 부처 장관들에게 서한을 보냈다. 사실상 이들 중립적인 증인들은 종신 징역을 선고받은 데 반하여 유죄 판결을 받은 살인자는 7년의 형을 살고난 후에 다시 거리로 나갈 수 있었다.

법적인 문제들 중 한 가지는 군법회의 내에서는 증인들이 재판 기록에 포함시킬 수 있는 충분한 진술을 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은 점이었다. ‘프란시스코 디아스 모레노’는 그 상태를 변화시키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군법 가운데서 수감자의 최종 진술은 기록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조항을 읽은 일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의 사건이 ‘엘아아이운’ 군법회의에 회부되었을 때, 그는 검사와 변호인측이 그들의 주장을 흥분하여 제시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 다음 그는 일어서도록 불리움을 받았으며, 진술할 것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렇습니다,” 하고 ‘프란시스코’는 대답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는 자신이 준비한 진술서를 읽어내려가기 시작하였다. 몇 차례 재판장은 낭독하는 일을 중단시키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가 ‘프란시스코’의 단호한 태도를 알아차리고는, 그를 의자로 불러 내었다. 그리고 “피고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고 물었다. ‘프란시스코’는 대답하기를, 자기가 바라는 것은 자기의 진술서가 법정 기록에 공식적으로 포함되기를 바랄 뿐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음, 우리가 그 문제를 조사 연구해 보도록 하지 ···” 하고 대답하였다.

‘프란시스코’는, “용서하십시오. 이것은 조사하거나 연구할 문제가 아닙니다. 저의 진술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본 재판은 무효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재판장은 그의 말에 조금도 흠잡을 데가 없는 것을 알고, 누그러졌다. 그리고 ‘프란시스코’의 진술서는 재판 기록에 첨부되었다. 그후 부터 그리스도인 중립자들은 ‘엘아아이운’에서의 매 군법회의 중 그러한 진술을 하는 것이 가능케 되었다.

‘리스코’ 군 형무소 및 그 형무소 소장

그리스도인 중립자들이 구금되어 있는 곳 중 가장 지독한 곳 한 군데는 ‘카나리’ 제도 내에 있는 ‘산 프란시스코 델 리스코’ 군 형무소였다. 그곳 형무소 소장은 악명높은 관리로서, “피사몬동고스”라는 별명이 붙여졌는데 이를 번역하면 “창자를 짓밟는 자”라는 뜻이다. 그는 가학적인 폭행을 즐겨하는 자였다. ‘프란시스코 디아스 모래노’는 잠시 그곳에 가 있었다. 그가 도착해 보니, ‘페르난도 마린’과 ‘후앙 로드리구에스’도 이미 그곳에서 몇개월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프란시스코’는 곧 그 소장을 대면하게 되었다. “네가 여호와의 증인이냐?” 하고 소장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소장님”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너도 조국의 역적이구나!” 하고 소장은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참아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부어댔다. 그리고 ‘프란시스코’를 조사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는 우연히 그의 주머니에 우리 잡지를 한 부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을 빼앗기고 말았다. 상사가 그를 조사하고 있는 동안, 소장은 나갔다가 돌아왔다. 소장은 조사가 느린 것을 참지 못하고 자기가 서둘러 끝내 버렸다. 그러나 그는 ‘프란시스코’가 혁대 밑에 감추어 두었던 잡지들은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부활에 관한 새로운 지식이 들어 있는 「파수대」 몇부가 그 형무소 안으로 들어갔다.

세명의 증인들은 다른 수감자들로부터 분리되어 한 감방에 갇혀 있게 되었으며, 다른 재소자들에게 말을 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운동장에는 흰 선이 그어져 있었다. 다른 수감자들은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감방 창문을 통해서도 형제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이전에 그곳에 9개월간 있는 동안 ‘페르난도 마린’에게 이야기를 걸려고 했던 몇 사람은 심하게 매를 맞은 일이 있었다. 표면상 이렇게 분리되어 있었으므로, 증인들은 나머지 사람들로 인하여 오염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그들이 ‘산 프란시스코 델리스코’에 있는 기간은 그렇게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카디스’ 형무소 회중의 발전

‘프란시스코’는 1965년 10월에 ‘카나리’ 제도에서 ‘카디스’에 있는 ‘산타 카타리나’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그로부터 여러 해 동안, 이 형무소는 여호와의 증인들 사이에서 유명하게 되었는데, 이는 이 형무소 내에 증인들의 수가 늘어나 일백명 가량이 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수감되어 있는 동료 신자들을 격려해 주기 위하여 수백명의 형제들이 면회를 왔다. 1972년 5월에는 이 형무소를 ‘그랜트 수터’ 형제가 방문했으며, 후에는 ‘레오 그린리스’ 형제가 방문하였고, 이들 통치체 성원들은 이 큰 회중에 연설을 할 수 있는 특권을 즐겼다. 사실 이 형무소 회중은 그 도시 내에 있는 어느 회중보다도 큰 회중이었다.

흥미있게도, 해가 지나면서, ‘카디스’에 있는 ‘산타 카타리나’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형제들은 모든 순회 및 지역 대회 ‘프로그램’을 계속 가졌다. 적어도 한번은 그들이 외국 신문사의 대표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증인 수감자들의 하나가 결혼식을 갖기까지 하였다. 이에 대한 보도는 양심적인 거부자들과 관련된 ‘스페인’ 법률의 비열한 처사에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 형무소 내에서 몇건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그러나 최초의 결혼식은 1967년 11월 주례를 맡은 민간인 판사의 임석하에 ‘프란시스코 디아스 모레노’와 ‘마아가리타 메스트레’가 가진 결혼식이었다.

그러나, ‘카디스’에 있는 ‘산타 카타리나’ 형무소에서 아무 문제들이 없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일례를 들면, 종종 증인 재소자들이 피에 대한 하나님의 율법을 굳게 지키기 때문에 먹을 수 없는 피가 든 ‘소시지’가 식사에 나오는 일이 있었다. (창세 9:3, 4) 하지만, 증인들 사이에서 형무소 조직을 잘 발전시켜서, 작업 집단들을 조직하여 형제들은 먹을 수 있는 식품을 살 만한 돈을 벌 수 있었다. 또, 집회, 언어 공부 및 기타 활동을 위한 시간표를 작성하였다. 서신을 통해 증거를 하는 마련을 하여 매월 몇 명씩 차례대로 “임시 파이오니아”를 할 수 있었다. 이러한 모든 마련들은 때때로 희망의 빛이 반짝이다가 꺼져 버리는 그러한 환경 속에서 시간을 빨리 보내게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 여러 해 동안의 그들의 상태의 불확실성은 형제들의 사기에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실망에 익숙해 있었다.

예를 들면, 1970년 3월에, ‘뉴우스’ 보도들은 정부가 양심적 거부자들의 문제를 처리하고 새로운 법적 마련을 통해 그 입장을 규정하기 위한 병역법을 준비하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이 보도는 그 당시 형무소 내에 있는 많은 형제들에게 희망을 갖게 하였다. 그 해 9월에, 그 법안이 ‘스페인’ 의회의 한 위원회에서 토의되었다. 그 위원회는 전례없는 조치를 취하여 그 법률을 승인하지 않은 채 더 검토해 볼 것을 요구하며 정부로 반송하였다. 이러한 보도가 형무소 내에 전달되었으며, 형제들의 기를 꺾는 차가운 소나기가 되고 말았다. 1971년에 다시금, 정부는 의회 내의 국방 위원회 극단주의자들을 만족시킬 만한 더 강한 법률을 제출하였다. 그 의안이 원래 의도한 바와 아주 변해진 것을 알게 되자 정부는 그것이 더 심의되기 전에 철회하고 말았다.

‘바스크’ 지역에서의 최초의 중립 사건

그리스도인 중립자들이 형무소에서 보낸 이 초기의 여러 해에 관한 기록에서 ‘바스크’ 지역의 ‘빌바오’에서 온 ‘아돌포 페나코라다’와 ‘로그로뇨’에서 온 ‘에밀리오 바요’의 성실을 지킨 행로를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이 ‘스페인’ 형무소에서 겪은 일은 여러 해 동안 비슷하였다.

1963년 3월 16일, ‘아돌포 페나코라다’는 ‘부르고스’ 병영에 출두하였다. 그곳은 그의 부친이 35년 전에 사병으로 복무하던 곳이었다. 4일동안 아무런 군복도 받지 않았다. 그 다음 닷새째 되는 날 ‘아돌포’는 자기의 양심적 거부에 관하여 대령과 오랫 동안 토론을 하였다. 마침내, 대령은 자신이 도저히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술책을 바꾸어, ‘아돌포’에게 고함을 치고, 그를 “영창”에 가두도록 명령하였다. ‘아돌포’의 양심적 거부는 그 도시의 군대 역사 및 종교 역사를 자랑거리로 생각하고 있는 ‘부르고스’ 내의 영내에서 화제거리가 되었다. 남자가 ‘부르고스’ 내에서 군복을 입기를 거절하였다는 믿어지지 않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아돌포’에게 이야기를 걸면 처벌을 받으리라는 위협하에, 모든 부대들은 ‘아돌포’에게 이야기를 하지 못하도록 금지령이 내렸다. 여러 명의 장교들이 그의 감방을 찾아와서 그의 견해를 바꾸어 보려고 하였지만, 번번히 그들은 ‘아돌포’가 그들에게 증거한 생각해 볼 만한 점을 가지고 떠났다. 그는 감방 내에 여호와의 이름이 들어있는 하나의 성경 귀절을 보이게 해 놓았으며 그 귀절에는 “두려워 말라. 내가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는 말이 들어 있었다. (이사야 41:10, 13) 여호와라는 이름을 중심으로 많은 대화가 있었다. 그리고 ‘아돌포’는 여호와께 진심으로 신뢰와 확신을 두었다.

여러 해에 걸쳐 ‘아돌포’는 여러 장교들로부터 여러 가지 흥미있는 말들을 들어 왔다. 예를 들어, 연대장의 부관인 중위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하였다. “‘아돌포’, 틀림없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처럼 생각할거야. 우리는 자네를 보고 놀랐네. 우린 자네를 무척 못살게 굴어왔지. 우리가 심하게 하면 할수록, 자네는 더욱 더 미소를 띠고, 친절한 말을 하고 ··· 자넨 나에게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생각하게 해 주었지.”

얼마 후, ‘아돌포’는 완전히 신뢰를 받게 되어, 그의 감방 문을 열어 둔 채로 버려 두었으며, 많은 군인들이 그에게 와서 성서에 관한 질문을 하곤 하였다. 군인 한 사람은 “나는 성서를 연구하고 싶소. 당신이 참다운 종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오” 하고 말하였다.

경비병 하나는 성서를 읽고 싶었기 때문에 성서를 읽으려고 ‘아돌포’의 감방 안으로 들어오곤 하였다. 동시에 그는 누군가가 와서 그들을 놀라게 할 경우를 생각하여 ‘아돌포’에게 감방 밖의 “경비”를 보게 하였다. 수감자가 보초 근무를 한 것이다!

‘로그로노’에서의 그리스도인 중립

1963년 9월, ‘아돌포’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거기서 그는 동시에 심의를 받게 된 ‘에밀리오 바요’를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이미 서로 아는 사이였다. 2년 전에 그들은 ‘로그로노’에서 경찰의 습격을 받았던 증인들 가운데 끼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밀리오’는 21세가 되자, ‘나바라’ 도에 있는 ‘투델라’ 영내에 출두하였다. 그 날은 우연히도 1963년 3월 16일로서 바로 그날 ‘아돌포’도 ‘부르고스’에 출두하던 날이었다. 다음날 ‘에밀리오’는 군복 착용을 거부하였으며, 신병들과 ‘미사’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토굴속에 갇히게 되었으며, 그 속에서 첫 10주간을 보냈는데, 거기에는 사실상 아무런 빛도 없었고 밖으로 나와 운동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의 침상은 매일 아침 걷어갔다가 밤에 다시 들여보내졌으며, 그는 아무에게도 말을 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어느 대위의 친절로 인해서 그는 낮에 앉아 있도록 의자를 하나 받았다.

그 첫 10주가 지나자, ‘에밀리오’는 군사 재판을 받기 위해 ‘부르고스’로 이송되었다. 여행하는 그 날, 그는 한 민간 교도관과 함께 수갑이 채워졌지만, 10주 동안 말을 못하던 일을 보충하게 되었다. ‘에밀리오’는 기차안에서 한손이 묶여진 채로 할 수 있는 대로 그의 성서를 사용하여 증거하였다. 교도관은 수갑이 채워진 손을 숨기려고 했지만, ‘에밀리오’는 자꾸 손을 내밀어 그가 그리스도인 신앙 때문에 사슬에 묶였다는 것을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하였다.

‘아돌포’와 ‘에밀리오’의 군법회의는 따로따로 열렸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3년 하고 하루의 징역 언도를 받았다. 11월에, 그들은 ‘부르고스’ 민간 형무소로 이감되었으며, 거기서 그들은 가지각색의 민간 범죄자들과 섞여 지내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아돌포’가 처음에 도착하자, 형무소 소장은 그에게 “난 너희들을 알고 있지, 난 너희 수법을 알고 있단말이다. 여기서 만일 개종 활동을 했다간 체형실에서 썩어 없어질 줄 알라” 하고 단호히 말하였다. 다행히도 며칠 후, 그 소장은 전근이 되었으며, 얼마 안있어 ‘에밀리오’와 ‘아돌포’는 전파 활동으로 그 형무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물론, 그들이 가지고 있던 유일한 서적은 ‘가톨릭 나카르 콜룽가’ 성서였으며, 그것으로 충분하였다. 그 주간에 그들이 전도한 모든 말은 일요일 ‘미사’ 때 교무담당의 귀에 들어갔다. 그러나 형제들은 이미 새로운 소장과 다른 재소자들의 존경과 칭찬을 받고 있었다. 그러므로, 교무담당은 그들이 전파하는 일을 막을 수 없었으며, 그들에게 아무런 해도 가할 수 없었다. 소장은 그들로부터 매우 깊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에, ‘마드리드’에서 그리 멀지 않은 ‘미라시에라’에 있는 더 자유로운 형무소로 이감되도록 추천하였다.

‘에밀리오’와 ‘아돌포’는 1964년 1월에 이 새로운 형무소로 향해 출발하였다. 가는 길에 그들은 ‘아빌라’와 ‘카라반첼’에 있는 형무소들을 경유해야 하였다. 마침내 그들은 ‘미라시에라’에 있는 형무소에 도착하였다.

‘미라시에라’ 형무소에서의 생활

‘미라시에라’ 형무소는 주로 외국인들을 위해 ‘샬레’식 집을 짓는 건설 회사를 위하여 일하는 신임받는 수감자들이 사용하는 일단의 오두막으로 되어 있었다. 사실 수감자들은 작업 시간중에는 외부인들과 섞여 일하므로 상당히 자유스러웠다. ‘아돌포’와 ‘에밀리오’에게 있어서 이 휴식 기간은 금방 지나갔다. 꼭 7개월간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그 기간은 한 숨 돌릴 수 있는 기간이었다. 작업은 과중하였고, 거의 육체 노동을 하지 않은 채 형무소에서 근 1년간을 보낸 이들 젊은이들에게는 매우 힘이 들었다.

‘아돌포’와 ‘에밀리오’는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증거를 하였으며, 그들은 좋은 결과를 얻었다. 예를 들어, 한 사람과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는데, 후에 그는 침례받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이에 부가하여, 그들은 곧 「파수대」 연구를 조직하였으며, 아직 기차길로 사용되지 않는 한 ‘터널’ 입구에서 그 모임을 가졌다. 네 사람은 기차길 위에 앉아 이 흥미있는 연구를 하였다.

얼마 후, ‘아돌포’와 ‘에밀리오’는 ‘살레’ 안에서 좀더 가벼운 일을 맡게 되었다. 이 기회에 그들은 그 집의 소유자들 중 일부에게 증거를 할 수 있었다. 일요일마다, 그들을 방문해 온 일단의 형제들에 의하여 또한 훌륭한 증거가 되었다. 간수들과 재소자들은 여호와의 증인들 가운데 존재하는 사랑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요한 13:34, 35.

‘아프리카’로

‘미라시에라’에서의 그들의 징역형이 만료됨으로써, ‘아돌포’와 ‘에밀리오’는 한 달 동안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러나 ‘스페인’령 ‘사하라’에 있는 ‘엘아아이운’으로 돌아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자유롭게 된 그 한달 동안 그들은 동료 신자들과 교제하며, 영적으로 튼튼하게 되는 일에 전념하였다. 영육으로 기운을 차린 그들은 9월 말경 ‘아프리카’에 있는 새로운 형무소를 향하여 길을 떠났다.

‘아돌포’와 ‘에밀리오’가 ‘엘아아이운’에 도착하자, 그들은 이미 그곳에 세명의 그리스도인 중립자들—‘프란시스코’, ‘알베르토’ 및 ‘후앙’—이 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을 만나 볼 길이 없었다. ‘아돌포’와 ‘에밀리오’는 이 새로운 상황 속에서 어떠한 문제들이 일어날 것인가 알고 싶었고, 특히 그들이 결정해야 할 어떠한 문제들이 있는지 자세히 알기 위하여 그들 세명이 동료 신자들을 간절히 만나고 싶었다.

‘엘아아이운’에서, ‘아돌포’와 ‘에밀리오’는 ‘하우사’로 이감되었다. 그곳에는 ‘안토니오 산체스’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들은 적어도 그로부터 뭔가를 알아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도착하였을 때는 그는 이미—몇 시간 전에—떠난 후였다.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베니토 에게아’라는 수용소 이발사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사람은 최근까지 ‘안토니오 산체스’와 함께 성서를 연구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얼마의 도움이 되는 지식을 알려 줄 수 있었다. 그들은 이감이 결정될 때까지 그와 함께 성서 연구를 계속하였다. ‘엘아아이운’으로 가게 되었는가? 아니었다. 그들은 남쪽으로 1,00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빌라 시스네로스’로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아직 발을 디딘 일이 없는 군 기지였다. 그들은 새로운 밭을 갈기로 하였다. 그런데 그 수용소 이발사에 대하여는, 그는 후에 침례를 받았으며, 여러 해 동안 특별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였다.

폭우 속에서 그들을 호송하는 ‘트럭’들은 1964년 12월 21일에 그 사막을 가로질러 떠났다. 그 불편한 여행은 며칠이 걸려서야 끝났다. 그들이 ‘빌라 시스네로스’ 병사에서 첫날밤을 지내고 눈을 떴을 때, 한 군인이 동성 연애 관계로 인한 질투로 다른 군인을 살해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들이 옮겨온 곳이 바로 그러한 세계였다. 이제 그들은 형제들로부터 그리고 여호와의 지적 조직으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었으며,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아무에게도 상의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열심히 하나님께 인도를 구하였다. 2,000내지 3,000명의 군인들 가운데서 민간인 복장을 하고 다니는 사람들은 이들 뿐이었다.

‘에밀리오’와 ‘아돌포’는 그들이 항상 올바른 결정을 한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노력하였으며, 1965년 2월에 그들의 중립적인 입장은 분명히 공개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전 부대가 작전을 위하여 부대를 떠나도록 명령이 하달되었으나 두명의 형제들은 그에 응하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중위가 그들을 병사에서 끌어내어 밀어뜨리고 발로 차고 하였으며, 다음에 그들을 대열의 맨 마지막에 세웠다. 그 다음, “앞으로 가!” 하는 구령이 떨어졌다. 전 부대가 떠났지만 움직일 줄 모르는 두 사람 즉 ‘아돌포’와 ‘에밀리오’만이 뒤에 남게 되었다. 다행히도 대위는 그들을 민간인 식으로 다루었으며, 그들을 병사에 있는 경비들에게 넘겨 주었다.

그로부터 얼마 안있어, ‘아돌포’와 ‘에밀리오’는 징계 소대에 맡겨지게 되었다. 실제로 담당 군인들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수감자들을 처리할 수 있었으며, 심지어 사형을 시키고 아무런 문책을 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경례 자세를 취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형제들은 거절하였다. 경비병들은 그들에게 욕설을 퍼부어댔으며, 담당 하사관은 그들을 때리기 시작하였다. 결국 ‘아돌포’는 눈에 멍이 들고, 무수한 상처를 입게 되었다.

‘아돌포’와 ‘에밀리오’는 한 달 동안 징계 소대 내에 있었다. 그들은 그 막사 내에서는 아무 것도 할 일이 없었으므로, 매일 아침 해뜰 때 약 3‘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곳으로 끌려 갔다. 거기서 그들은 돌을 깨고 모래 구덩이를 파야 하였다. 음식이 불충분하고, 종종 그리스도인으로서는 먹을 수 없는 음식들이 있었으므로, 매우 배가 고팠고 지쳐 버렸다. 때때로 그들의 상태는 경비병들에게 연민의 정을 불러 일으켰으며, 그리하여 그들이 얼마간 잠을 잘 수 있는 근처 동굴로 가서 더위를 피하도록 허락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경비병들의 대다수는 포악했으며, 수감자들에게는 그들의 허락없이 아무 말도, 아무런 행동도 못하게 하였다.

그 해 4월에, ‘아돌포’와 ‘에밀리오’는 징계 소대에서 끌려 나왔는데, 그들이 ‘빌라 시스네로소’에서 신경전을 얼마나 견딜 수 있을는지 의심스러웠다. 육체적인 형벌만이 아니었다. 신경의 긴장 역시 큰 벌이었다. 하나님께 성실을 지키고, 이렇게 고조된 군대 분위기 속에서 중립적 입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투쟁을 해야 하였다. 7월이 되자 그들의 기도는 응납되었으며, 그들은 ‘하우사’에서 군복 입기를 거절한 데 대하여 또 한차례의 군법회의를 받기 위해서 비행기편으로 ‘엘아아이운’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들이 ‘엘아아이운’에 도착하자 그곳에는 그리스도인 중립자들이 7명이 되었다. 그들은 1965년 당시, 그 일곱명 중 첫 사람이 1970년에 가서야 석방될 것임을 그리고 그들 중 네명이 1973년까지 형무소에 그대로 있을 것임을 전혀 알지 못하였다.

1966년 1월에 그들 일곱명의 집단은 헤어지게 되었다. 네명은 ‘카디스’에 있는 ‘산타 카타리나’ 형무소로 이감되었으며, 다른 세명은 ‘발레아릭’ 제도에 있는 ‘마혼’ 군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그리하여 ‘아돌포’와 ‘에밀리오’는 함께 형무소 생활을 한지 3년 만에 헤어지게 되었다. ‘에밀리오 바요’와 ‘안토니오 산체스 메디나’는 ‘마혼’으로 보내졌으며 1966년 4월에 도착하였다. 그 후 곧 그들은 ‘훌리오 벨트란’과 함께 지내게 되었다. 그들은 3개월 동안 여행하는 중에 ‘카디스’, ‘비칼바로’, ‘마드리드’ 및 ‘사라고사’를 경유하였다.

그 두명의 형제들이 ‘사라고사’에 도착한 때는 4월 4일이었으며, 바로 그 다음날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념일이었다. 그들은 그 기념식을 거행할 계획을 시작하였지만, ‘바로셀로나’로 떠날 준비를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기차 여행 중, 그들은 경비병들에게 허락을 받아 포도주를 조금 샀으며, 다음 차례의 경비병들이 금지시킬 것을 생각하여 그것을 숨겨 두었다. 저녁 6시쯤 되었을 때, ‘에밀리오’와 ‘안토니오’는 경비병들에게 그들이 성서의 한 제목을 토론하면서 특별한 기념식을 가질 때가 되었다고 설명하였다. 그 경비병들은 그것을 허락하였으며, 이렇게 하여 그 형제들은 45분간의 연설을 하며 그 기념식을 거행하였고, 경비병들과 증인들과 함께 수갑을 찬 두명의 수인들이 그 연설을 들었다. 처음에 그들이 탄 차칸에는 사람들이 없었는데, 그 연설이 끝날 때쯤에는 네 다섯명이 듣고 있었다. 그 연설은 기차가 ‘바르셀로나’ 역에 당도했을 때 끝났다.

양심적으로 믿음에 고착함으로 커다란 증거를 하게 됨

매번 이들 수감된 그리스도인 중립자들의 성실성을 깨뜨리려는 시도가 가해졌다. 예를 들어, ‘에밀리오 바요’와 ‘안토니오 산체스 메디나’가 ‘마혼’에 도착해 보니 또 한명의 형제 즉 ‘프란시스코 디에스 페르레르’가 이미 얼마 동안 그곳에 와 있었다. 흥미롭게도, 그는 ‘베르나르도 리나레스’ 하사와 매우 친해졌는데, 그는 이 하사가 그와 친해진 다음 하나님께 대한 그의 성실성을 깨뜨리도록 임명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성실성을 깨뜨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반면에, ‘프란시스코’와의 오랜 우정, 그리고 후에는 ‘에밀리오’와 ‘안토니오’와의 우정을 맺게 된 ‘베르나르도 리나레스’ 자신이 결국 여호와의 증인이 되고 말았다. 1967년 7월에, 그는 그 형무소 소장에게 자기도 군복을 벗을 것이며, 그 양심적 거부자들과 함께 하겠다고 말하였다. 그의 결심을 돌이키려고 해 보았지만, 모든 것이 헛수고였다. 그는 체포되어 군법회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말료르카’ 지구 사령관은 ‘베르나르도’의 복무 약정을 취소시킴으로써 이 사건은 더 이상 악화되지 않았다. 그는 제대하였으며, 여호와께 대한 활동적인 봉사자가 되었다.

이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스페인’ 형무소 내에서는 영적인 성장과 발전이 있었다. 예를 들어 보자: ‘카디스’에 있는 집단은 계속 성장하였으며, 그리하여 그들의 영성도 발전하였다. 훌륭한 발전이 이룩되었으며, 형제들은 ‘스페인’ 내에서 우리의 사업이 공식적으로 합법화되기 2년 전인 1968년 8월 5일에 그 형무소 내에서 왕국회관을 봉헌하기까지 하였다.

우리가 이름을 언급한 몇 형제들은 1970년대 초에 석방되었다. ‘알베르토 콘티호크’는 11년간의 형무소 생활을 마친 후 1970년에 석방되었다. 그는 네 차례에 걸쳐 총 19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프란시스코 디아스 모레노’는 총 26년의 형기 중 11년 6개월 19일을 마치고 석방되었다. ‘후앙 로드리구에스’는 11년의 영어 생활을 마치고 1972년 5월에 석방되었다. 그리고 기타 얼마의 형제들도 1974년 2월에 석방되었다. 그들 가운데에는 12년간의 형을 마치고 나온 ‘안토니오 산체스 메디나’, 11년의 형을 마치고 나온 ‘아돌포 페나코 라다’와 ‘에밀리오 봐요’, 그리고 10년의 형을 치르고 나온 ‘페르난도 마린’이 있었다.

물론, 기타 ‘스페인’ 내의 많은 형제들이 그리스도인 중립자들로서 면옥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의 낭비가 아니었다. 왜냐 하투 달리는 여호와의 증인들과 그들의 믿음 및 그들의 성실성에 관하여 들을 수 없는 ‘스페인’ 내의 커다란 지역들에 증거를 하는 구실을 하였기 때문이다. 군사 지역 및 형무소 지역에 커다란 증거, 이 나라 전역에 영향을 미친 증거가 행해졌다. 이들 그리스도인 중립자들은 ‘스페인’ 내의 무수한 병영들과 군 형무소 및 민간인 형무소에 수감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성실성과 중립에 대한 기록이 이 나라의 군사 기록과 사법 기록 가운데 기재되었으며, 이것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공의로우며 평화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의 원칙들에 충성스럽다는 증거가 되었다.

1958년 이래로, 825명의 형제들이 도합 3,218년의 형을 받았으며, 그 중에서 ‘스페인’의 군 및 민간 형무소에서 1,904년의 복역을 하였다. 이러한 성실의 기록에 대한 가장 적절한 논평은 아마도 ‘가톨릭’ 저술자 ‘헤수스곤잘레스 밀바르’가 한 말일 것이다. 그는 “‘가톨릭’ 교도들을 위한 본”이라는 제목하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담대한 여호와의 증인들의 기록을 인정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수치를 느끼게 하는 일이지만 그들의 기록은 바로 그것이다. 이 점에서 그들은 분명히 우리에게 복음의 이상을 세워 주었다. 이들 용감한 사람들은 복역 기간이 몇달이고 몇년이고 연장되어 자유를 잃게 되거나, 산상수훈의 아홉 가지 복의 정신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사회의 ‘바리새’인적인 조롱을 받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의 선구적인 ‘가톨릭’교를 크게 부끄럽게 만들어 주는 사실은, 그토록 조롱과 박해를 받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이러한 그리스도인 덕성을 나타내는 점에서 우리를 앞섰으며, 우리 가운데서 매우 단호한 사람들만이 그들의 피로 얼룩진 행로를 걸어감으로써만 감히 그 동일한 길을 갔다는 점이다. 우리가 정직하고 신실하다면, 자기 방위를 하는 데까지도 무력 사용을 허용하지 않으신 주님의 정신을 그들이 우리보다 더 잘 이해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 중립자들에게 영향을 준 최근의 발전

‘스페인’ 내에서 이들 그리스도인 중립자들을 위해 최근에 어떠한 사태 진전이 있었는가? 1973년에 양심적 거부에 대한 형벌로 주어지는 단일 기간의 복역 기간을 3년 1일에서 최고 8년까지로 제한시키는 한 법안이 통과되었다. 이로 인하여 군 조직에 가담하는 일을 거절함으로써 그리스도인 중립을 지키는 동일한 범법을 반복하는 데 대하여 선고가 끊임없이 연속되는 이전의 처리 방식이 중지되었다.

이 법률의 즉각적인 혜택으로, 3년 이상 복역을 해 온 모든 사람들이 석방되었으며, 그 결과 114명의 형제들이 자유를 얻게 되었다. 후에, 1976년 7월 30일, ‘후앙 카를로스’ 국왕은 일반 사면을 선포하였으며, 그 결과 또 204명의 형제들이 석방되었다. 그들은 즉시 “거룩한 봉사” 지역 대회에 참석할 수 있었고, 거기서 그리스도인 중립의 경험담을 통해 모인 무리들을 격려할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예기치 못한 기쁨이었다!

‘스페인’에는 그리스도인 중립자들이 아직도 투옥되어 있는가? 1976년 가을에 양심적 거부자들로 신고한 사람들의 모병에 대한 유예 처분이 있었으며, 1976년 12월에 군복무에 대한 종교적 거부자들에게 현재의 18개월의 군사 훈련을 3년간의 다른 봉사로 “대치”시키는 법령이 포고되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젊은 증인들의 견해는 어떠하였는가? 150명 이상의 젊은 형제들은 양심에 근거하여 군 복부를 거절하고 나서 군복무 의무 대신으로 인정되는 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위선적인 일이라는 그들의 소신을 나타내었다. 이로 인하여 그들은 현재 구금 상태에 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대치 복무를 이행하기를 거절함으로써 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대기하고 있다.

군 당국자들의 반응은 강경하고 강압적이었으며, 그리하여 1977년 6월에 상당수의 우리 형제들은 8년의 최고형을 선고받았다. 1977년 7월에 형성된 새로운 정부가 이러한 가혹한 선고를 감해 주고 더욱 이치적이고 공정한 법률을 시행하기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인지는 두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잘 조직하다

이제까지 이들 그리스도인 중립자들의 경험을 고려해 보았으므로 과거로 돌아가 1959년의 이야기를 시작해 보도록 하자. 그 당시 몇 가지 발전이 사업의 진전을 위해서 좀더 나은 조직을 하는 데 우리에게 도움이 되었다.

1959년 4월에, ‘왙취 타워 협회 브루클린’ 본부에서 온 ‘M. G. 헨첼’은 지구 감독자로 ‘스페인’을 방문하였다. 그는 그 당시 ‘스페인’ 협회의 지부 사무실의 책임자로 있던 ‘레이 두신베레’에게 훌륭한 조언을 하였다. ‘헨첼’ 형제는 순회구를 하나에서 넷으로 증가시키고, 형제 자매들의 영성을 세워 주기 위하여 4개월마다 순회 감독자가 방문할 것을 추천하였다.

그 당시 ‘스페인’에는 두명의 자매들을 포함하여 ‘길르앗’ 출신 선교인들이 일곱명 있었다. 선교인들 중 네명은 순회 감독자로 봉사하고 있었다. 같은 봉사년도 중에, ‘빌바오’에서 이전에 열렬한 ‘가톨릭’ 신자였던 ‘신포리아노 바르쿠인’이 ‘스페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순회 감독자가 되었다. 그 해 봉사년도 말(1958-1959년), 5개의 순회구 내에는 30개의 회중에 1,293명의 전도인들이 연합하고 있었다.

사실, 그 당시 한 회중 내에 있는 조그마한 각 집단은 그 집단 내에서 모든 집회들을 가지면서 그 자체가 하나의 조그마한 회중과 같은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순회 감독자는 각 집단들을 방문해야 하였다. 만일 집단이 두개뿐이라면, 그 방문은 일주일 걸렸다. 그러나 집단이 셋이나 넷이라면 그 방문은 2주일이 걸렸다. 후에 어떤 회중들은 10개의 집단으로 늘어나, 순회 감독자는 그 모든 집단들을 섬기기 위하여 한 회중을 방문하는 데 5주간이 걸렸다.

‘헨첼’ 형제의 1959년 지구 방문은 ‘스페인’ 형제들을 위한 새롭고 특별한 한가지 조치와 관련이 있었다. ‘스페인’ 대회가 바로 남부 ‘프랑스’에 있는 국경 너머인 ‘페르미그낭’에서 열렸으며, 많은 형제들이 재정적으로 도움을 받고 참석할 수 있었다. 남부 ‘스페인’에 사는 형제들을 위해서는 ‘모로코’의 ‘탄지에르’에서 또 하나의 대회가 열렸다.

고난기에 활동적인 조직을 유지하는 일

지금 고려하는 여러 해 동안, ‘스페인’ 내의 여호와의 백성은 고난과 박해를 당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에게는 영적 건강을 유지하기 위하여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왕국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성서 출판들이 필요하였다. 그러므로, ‘마드리드’에 있는 여러 주소로 많은 책꾸러미들이 보내졌다. ‘마드리드’에는 우리 서적들을 두는 비교적 큰 보관소가 있었으며, 그곳으로부터 많은 책들이 발송되었는데, 지부 “사무실”이 ‘마드리드’로부터 1960년에 ‘바르셀로나’로 이전하게 되자 한명의 ‘길르앗’ 출신이 그 일을 책임 맡았다.

지부의 모든 사무는 암호로 전달되었고, 형제들과 자매들은 지부 사부실이 어디에 있는지 결코 알지 못하였다. 그 ‘길르앗’ 형제가 일을 하던 곳은 ‘쿠에바’(동굴)라고 알려졌다. 그 이유는? 우리의 서적 은닉처는 문방구점 지하실이었기 때문이다. 그 지하실—“동굴”—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뚜껑문을 제치고 사다리를 이용해야 하였다. 그러나, 서적 짐을 실제로 꾸리는 일은 ‘카운터’ 뒤에 있는 좁은 방에서 하였다. 그 조그마한 방속에서 책장과 작업대를 갖춘 발송실을 마련하였다. 그 형제는 그 속에서, 겨울 철에는 종종 살을 에이는 듯한 추위 속에서 여러 시간 작업을 하곤 하였다. 대단히 조심을 하였기 때문에 손님들은 한 외국인이 그 속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손님들이 근처에 있을 때는 말도 할 수 없었고 눈에 띄어서도 안되었다. 그는 순회 감독자의 임명을 받은 1964년까지 이 일을 하였다.

그러나 그 어려웠던 때에 지부가 옮겨다니던 일을 들어 보자. 1948년부터 1957년까지 ‘스페인’ 내에서의 사업은 주로 ‘바르셀로나’에 있는 여러 주소에서 지시를 받고 수행되었다. 한 주소를 오랫 동안 사용하는 것은 경찰 단속에 위험이 있었다. 지부 서류들은 옷 가방 크기로 보관되어 있었으며, 그리하여 어느 순간이든지 급히 치울 수 있게 하였다. 여러 형제들이 큰 위험을 무릅쓰고 자기 집을 사무실로 이용하도록 허용했기 때문에, “몰래 줄행랑을 치는” 이런 마련이 가능하였다.

‘레이 두신베레’가 1957년에 지부 감독자의 책임을 맡게 되었을 때, 활동의 중심지는 ‘마드리드’로 옮겨졌다. 그러나 1960년에, ‘마드리드’에서의 경찰의 압력으로 인하여 지부는 다시 한번 ‘바르셀로나’로 옮기게 되었다. 처음에 지부는 한 형제의 집에서 운영되다가 나중에 선교인들이 세를 얻어 개인 ‘아파아트’로 이전하였다. 1961년 봄, ‘바르셀로나’ 외곽의 ‘산 후스토 데스베른’에 있는 정원이 딸린 한 집을 찾아내었다. 한 가지 덧붙여 말할 것은, 이 집을 사용하는 동안, ‘레이’의 아내 ‘제안’이 폐결핵에 걸리게 되어, ‘두신베레’ 부부는 할 수 없이 1963년에 ‘스페인’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산 후스토 데스베른’에 있는 그 집은 이러한 목적으로 2년 동안 사용되었다. 그 다음 형제들이 경계를 할 만한 일이 일어났다. 전기 회사에서 왔다고 하는 두 사람이 전기 시설을 조사하겠다고 하였다. 그들은 각 방의 전등들을 조사하였다. 이것이 경찰의 술책이라는 증거가 없었지만, 그런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지부는 다시 옮기게 되었으며, 이번에는 ‘바르셀로나’에서 약 16‘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산 쿠가트 델 발레스’에 마당이 달린 외딴 별장으로 이전하였다. 그러나 1967년, 그 집에 도둑이 들어, 돈을 도둑질해 간 것은 별문제로 하고라도, 그곳의 사무실 상태를 보고 말았다. 그리하여, 속히 장소를 바꾸는 것이 적절하다고 결정하였다. 이틀 걸려서, 지부는 조심스럽게 ‘바르셀로나’에 있는 한 ‘아파아트’로 이전하였는데, 그곳은 1971년 11월까지 ‘벧엘’ 집과 지부 사무실로 사용되었다. 1971년에 ‘벧엘’ 직원 13명은 ‘스페인’의 여호와의 증인의 협회의 현재 주소인 ‘바르셀로나’ ‘칼레 파르도’ 65번지에 있는 새로운 지부 건물로 이전하였다.

7년 동안 지부의 일은, 모든 일이 지부 본 건물로 집중시키지 않기 위하여 세개의 다른 장소에서 동시에 수행되었다. 그러면 회중들과 협회는 상호 어떻게 연락을 취하였는가? 몇개의 ‘바르셀로나’에 있는 주소들이 우편물 수신을 위하여 이용되었으며, 이들 모두는 몇몇 형제들이 일하는 중앙에 위치한 한 시장과 연결되어 있었다.

우리는 또 서적들을 인쇄하고 발송하는 일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우리의 인쇄물 중 어떤 것은 등사기를 이용하였다. 1960년경, 발송부는 ‘바로셀로나’에 있는 ‘프란시스코 세라노’의 한 ‘아파아트’ 바깥 뜰에 세워진 한 창고로 이전되었다. 그 창고가 겨울에는 무섭게 추웠기 때문에 ‘네베라’(냉장고)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그 이름은 후에 발송부가 그 도시에 있는 낡은 ‘고딕’식 지구에 있는 한 자매의 ‘아파아트’로 이전된 후까지도 여러 해 동안 발송부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지부의 중심 사무실의 위치는, 그것이 어디에 소재하든 관계없이, ‘카스틸로’(성)라고 알려졌다.

“식품” 공급이 보장되다

그 당시, 우리의 성서 서적들을 함법적으로 수입하는 일은 불가능하였다. 그리하여 서적이 부족한 것이 우리의 큰 문제 중 하나였다. 그러나 충실한 사람들은 “때를 따라” 먹여질 것이라는 예수의 약속은 참되었다. (누가 12:42) 다른 나라들로부터 들어오는 관광객들은 ‘스페인’으로 서적들을 가지고 들어오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주로 사용된 주소 중 하나는 ‘바르셀로나’에 있는 ‘칼레 메넨데스 이 펠라요’에 있는 선교인 사무실이었으며, ‘에릭 비버리지’가 1965년부터 1971년까지 책임을 지고 있었다. 새로운 선교인들 중 많은 수는 처음 몇개월간 그 집에서 머물면서 ‘해이즐 비버리지’ 자매를 선생으로 ‘스페인’어를 배웠다. 또한 두명의 오랜 ‘길르앗’ 졸업생인 ‘디모데 디크몬’과 ‘주디스 디크몬’이 ‘바르셀로나’에 있는 새로운 선교인 집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한 동안 그곳에서 봉사하였다.

그 ‘바르셀로나’ 집에는 서부 ‘유럽’과 미국 각지에서 서적을 가지고 오는 관광객들이 찾아왔다. 이웃들이 비록 그 ‘아파아트’에 외국인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나라에 그토록 많은 친구들을 가지고 있을 수 있는지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자동차 번호판에는 종종 그 방문자들의 국적이 적혀 있었다.

흥미롭게도, 한번은 ‘프랑스’에서 온 한 형제가 그의 무거운 옷가방을 들고 문자 그대로 비틀거리고 있었다. 물론 그 속에는 책들이 들어 있었다. 그가 떠날 때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하여 그는 그 옷가방을 들고 여전히 비틀거리면서 거리를 걸어갔다—그러나 그 속은 비어 있었다!

후에, ‘스페인’ 형제들은 서적을 가질러 ‘프랑스’로 가곤 하였다. 그리하여 ‘베르미그낭’에 있는 여러 개의 특정한 주소들을 가지고 일주일간의 여정이 마련되었다. 어떤 형제들은 자가용으로 갔으며, 다른 형제들은 기차와 ‘버스’편을 이용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특히 1월부터 3월 사이에 강화되었는데, 그 때 그들은 연감을 받으러 갔다. 형제들은 그들의 영적 양식을 얻는 데 결의가 대단하였다.

1966년부터 1970년까지 우리의 서적들 중 일부를 생산해내기 위하여 여러 외부 인쇄소들을 이용하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1970년 7월에 우리의 사업이 합법화되었고, 따라서 1971년 1월부터 수입 허가를 얻어 정상적인 방법으로 우리의 출판물을 수입하였다. 이러한 마련을 통해 잡지를 포함한 다량의 서적을 수입하는 일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현재는 한번에 15‘톤’ 내지 20‘톤’가량의 ‘콘테이너’에 실려 들여온다!

‘네베라’(냉장고)라는 말을 기억하는가? 그것은 어느 창고로부터 ‘아파아트’로 옮긴 발송부를 부르는 말이었다. 오랫 동안 그곳은 매우 규모가 작았다. 1970년에, 장소를 바꾸는 것이 가능케 되었다. ‘바르셀로나’에 있는 2층건물 창고를 세내었다. 그곳 아래층에는 약 20‘톤’의 서적을 쌓을 만한 공간이 있었고, 위층에는 작업대와 한 ‘톤’ 정도의 서적이나 잡지를 둘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이 곳은 매일 많은 햇살을 받을 수 있는 곳이어서 구 ‘네베라’와는 상당히 대조적이었다. 그리하여, 이 새로운 장소는 ‘엘 솔라리움’이라고 불렀는데, 그 이름은 “태양의 집”이라는 뜻이다.

1972년, 새로운 ‘벧엘’ 건물이 완성되었으며, 일층은 발송부로 정해졌다. 그리하여 우리는 적어도 수백 ‘톤’의 서적을 둘 수 있으며 동시에 충분한 작업을 할 수 있는 공간을 갖게 되었다. 1972년 6월에 최초의 서적 ‘콘테이너’가 도착하였을 때, 그것은 거리에서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으며, 이웃 사람들도 무슨 일인가 눈이 둥그래졌었다. 많은 사람들은 처음으로 ‘로울러램프’를 보았다. 이것은 27‘미터’ 길이의 것으로서 ‘콘테이너’에서 상자들을 꺼내어 발송실 저쪽 끝에다 부릴 수 있을 정도로 길었다. 그 당시에는 ‘콘테이너’가 도착할 때 노동력이 매우 부족해서 대부분의 사무실 직원들이 동원되어 그 짐을 부렸으며, 그렇게 하는 데 거의 두시간이 걸렸다.

간단히 살펴본 이러한 점들은 여호와께서 언제나 영적인 면으로 충분히 마련해 주셨음을 명백히 알려 준다. ‘스페인’에서는 여러 해 동안 그리스도인 서적을 구하기가 어려웠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호와의 손은 짧지 않았으며, 그분은 계속하여 영적 양식을 적절한 때에 풍부히 우리에게 축복해 주셨다.

종교 재판의 정신이 고개를 쳐들다

‘스페인’의 종교 재판이 있었던 당시에 범람했던 종교적 불관용의 정신이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과 관련하여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다. 무엇보다도, 증인들은 ‘가톨릭’ 국가 내에서는 심각한 혐의인, ‘프리이메이슨’ 비밀 결사단이라거나 또는 그 단체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고 있다는 거짓 비난을 받았다. 1958년부터 1960년 사이에 ‘그라나다’의 경찰은 그러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추적해 내는 일에는 결사적이었다.

예를 들어, 1958년 10월에 ‘그라나다’로 임명된 특별 ‘파이오니아’인 ‘마누엘 물라 기메네스’에게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고려해 보자. 1960년 10월 5일, ‘마누엘’은 막 성서 연구 사회를 마친 후, 한 길 모퉁이에서 얼마의 동료 신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한 비밀 경찰이 그를 끌고 가서 그의 책가방을 열어 보라고 하였다. 자연히 그 경찰은 그 속에 들어 있는 성서 서적을 발견하였으며, 전도하지 말라는 경찰의 명령을 어겼다는 혐의를 받게 되었다. 다른 형제들의 이름을 적고 나서, 그 경찰관은 ‘마누엘’에게 자기를 따라서 경찰서로 가자고 하였다. ‘마누엘’은 그 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상기한다: “내가 그에게, 당신이 나를 체포하는 유일한 근거는 내가 길에서 몇명의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 뿐인데, 내가 체포되는 이유를 알고 싶다고 하자, 그는 매우 화가 나서 ‘내가 당신을 체포하는 것은 이 ‘뱃지’하고 당신 머리에 온통 구멍을 뚫어 놓을 수 있는 이 권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권총을 꺼내 내게 겨누었다. 이러한 일이 ‘그라나다’에서 가장 중심지에 있는 거리 한 복판에서 있었다.”

‘마누엘’은 경찰서로 끌려갔으며, 성서를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쳤고, “소책자들을 배포하였으며, 가톨릭 종교를 고의적으로 헐뜯는 방법으로 성귀들을 낭독했고, 교리들과 의식들 및 절기들을 부당하게 어겼으며, 이 나라의 전통을 폐지시킬 것을 주장”하였다는 죄목으로 고발되었다.

‘마누엘’은 그가 50,000‘페세타’(833‘달러’)의 보석금을 지불할 수 있을 때까지 형무소에 구금되어 있어야 한다는 선고를 받았다. 그는 그러한 엄청난 보석금을 지불할 수 없었으므로, ‘마누엘’은 43일간 구금되어 있었다. 20일 동안 그는 독방에 갇혀 있었으며, 그의 종교를 다른 아무에게도 이야기하면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위협을 받았다.

수감자들에게 영적인 위안을 주도록 되어 있는 형무소 교무담당(‘가톨릭’ 사제)은 ‘마누엘’에게는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 사제는 형무소 도서실에 하나 밖에 없는 성서를 치워 버렸으며, 다른 수감자가 ‘마누엘’에게 복음서 한권을 주웠을 때, 그는 이것마저 그에게서 빼앗아가 버렸다. 간수는 ‘마누엘’에게 계속 고함을 쳤으며, 다른 어떠한 수감자들에게도 가하지 않는 학대를 하여 못살게 만들려고 하였다. 이러한 모든 일을 교사하는 자는 누구였는가? 다름아닌 바로 그 형무소 교무담당자였다.

그러한 박해는 ‘그라나다’ 도처에서 있었지만, 그곳에서의 우리의 사업을 중단시키지는 못하였다. 1960년 11월 18일, ‘마누엘’이 석방되었을 때 그는 협회 지부 사무실에 편지를 보냈는데, 그 일부를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제가 지금 자유롭게 되었음을 여러분께 알리게 되어 기쁘며, 여호와께 감사합니다. 또 나와서 보니, 회중이 훌륭한 신권적 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것도 기쁜 일입니다. ··· 이 회중의 한 연구 사회자는 그 동안 조직적인 방법으로 모든 일을 인도할 수 있었읍니다.” 흥미있는 점은, 그 집단 연구 사회자가 후에 ‘그라나다’ 회중의 한 감독자가 된 점이다.

선교인이 체포되다

1960년 3월에, 한 선교인이 ‘마드리드’에 있는 ‘우세라’ 회중에 순회방문을 하였으며, ‘파트리시오 헤레로’는 그에게 그 도시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빌라베르데’ 격지 구역에서 봉사하는 일을 도와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한 구역에서는 외국인이 의심을 받을 수 있었지만, 이미 성서에 관심을 나타낸 사람들과 성서 연구를 시작하는 일이므로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 선교인이 ‘빌라베르데’에 발을 들여 놓자마자 문제가 시작되었다.

‘파트리시오’는 조심해서, 그 순회 감독자가 도착하였을 때 ‘버스’ 정류소에 가까이 가지 않았는데도, 후에 사제의 그 지방 ‘스파이’ 중 하나가 그들이 함께 재방문을 가기 위해 걸어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 두 형제는, 심장 질환이 있어 침상에 누워있는 한 여자와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막 떠나려고 하는 때에, 선교인은 창문을 통해 그 ‘아파아트’ 입구에 한떼의 여자들이 빙 둘러 모여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 형제들은 그 집주인의 건강 상태를 악화시키고 싶지 않았으므로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밀 경찰이 그 두명의 증인을 찾아내려고 매 집문을 두드리며 찾고 있었다. 드디어 재방문이 진행 중인 그 ‘아파아트’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집주인은 네살된 딸에게 문에 나가 보라고 하였다. “여기 책가방을 든 두 남자가 왔니?” 하고 퉁명스럽게 경찰이 물었다. 그 네살된 아이는 순진하게도 “우리 엄마 친구들만 있어요”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경찰은 떠나 버렸다.

그 재방문은 떠나는 것이 안전해 보일 때까지 계속되었다. 분명히 경찰은 ‘버스’ 노선을 살피고 있었을 것이므로, 그 형제들은 ‘마드리드’까지 철길을 따라 걸어서 돌아가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철길에 도착해 보니 경찰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철길과 도로를 지키면 조만간 자기들이 추적하고 있는 사람들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선교인이 말을 하기도 전에, 그들은 “당신은 외국인이지요?” 하고 물었다. 그는 키가 1.8‘미터’가 넘었으므로 그의 키를 보고 알아낸 것같았다.

그 형제들이 경찰서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문이 휙 열리며, 머리를 끄덕이고 그렇다고 하는 한 남자가 보였다. 그가 바로 고발을 하였던 사제의 ‘스파이’였으며, 이제 그 형제들은 신원이 명백히 밝혀지고 말았다. 그 다음, 경찰은 그들이 원하는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책략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두명의 형제들은 그들이 성서를 함께 이야기하였던 그 여자의 이름을 대 주지 않기로 단호히 결심하였다.

경찰 심문—가치있는 경험

경찰이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얻어내지 못하자, “우락부락한” 다른 경찰관이 완력과 위협으로 정보를 알아내려고 애를 썼다. 그는 형제들이 폭탄을 장치하기 위하여 ‘빌라베르데’로 왔다는 혐의를 씌우고, 그들이 어디에 갔었는지 말을 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유죄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주장을 되풀이했고, 선교인은 계속해서 자기가 미국 대사관에 연락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요구는 결코 허락되지 않았다.

강경한 수단으로도 원하는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다음에는 기만적인 술책을 쓰기 시작하였다. 또 다른 비밀 경찰이 들어와 “거친” 경찰관에게 비열하고 상스러운 방법을 사용한 일에 대하여 야단을 치기 시작하였다. 물론 이 모든 것은 그들의 술책의 일부였으며, 그리하여 “거친” 경찰관은 투덜거리며 물러나고 말았다. 다음에 새로 온 경찰은 ‘감언이설’을 늘어놓기 시작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사실상 최근에 이 주위에 모종의 폭발물에 대한 위협이 있었으며, 우리가 관심을 갖고 있는 일은 여러분의 이야기를 확인하는 데 있읍니다. 왜냐 하면 우리가 여러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는 여러분이 말한 그 심장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릅니다. 만일 성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친구를 방문하는 일만 하였다면, 즉시 석방될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되지 않는 결백한 일만 하였다고 말을 하고는 혐의를 벗어나게 할 만한 사실을 제시하기를 거절하는 태도가 뭔가 의심스럽다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장시간의 부드러운 대화를 나눈 후, 진상을 밝히기 위하여 이 “친절한” 경찰관 하나만 형제들이 방문했던 그 집으로 ‘파트리시오’와 함께 갈 것과 또 그가 집주인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합의하였다. 그 경찰관은 그 여자가 정말로 심장병을 앓고 있는지 확인하기로 하였다.

이 두 사람이 떠나자 마자, 그 선교인은 급히 ‘마드리드’에 있는 비밀 경찰 본부로 끌려갔다. 그는 ‘파트리시오’가 돌아와 그들의 이야기를 확인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항의하였지만, 경찰은 무심하게도 그 역시 곧 ‘마드리드’로 데려올 것이라고 대꾸하였다. 경찰의 거짓말과 기만은 실효를 거두었으며, 그들을 믿었던 형제들은 그들의 함정에 빠지고 만 것이다. 그것은 이 선교인에게 잊을 수 없는 교훈이 되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들이 방문하였던 그 부인은 경찰에 의하여 심한 박해를 받았으며, 경찰은 그 부인에게 경찰이 수색하는 동안 형제들을 그의 집에 고의적으로 은닉시켜 주었다는 혐의를 씌웠다. 두려움 때문에, 그 부인은 더 이상 재방문 오는 것을 거절하였다.

비밀 경찰국에 있는 경찰이 알고자 하는 주요 정보는 그 선교인의 지방 주소였다. 그의 종교에 대하여는 한 마디도 묻지 않았다. 또 그의 책가방도 들여다 보지 않았다. 들여다 보았더라도 그 속에는 ‘가톨릭’판 성서가 한권 들어 있었을 뿐이다. 여하간, 그후 오래지 않아서, 그 선교인은 다시 보고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그 나라를 떠나라는 말을 들었다. 그는 그러한 제의를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는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만일 그가 자의로 떠나지 않는다면 강제 추방을 당할 것이라고 하면서 “그러한 경험은 당신이나 우리나 다 매우 바람직한 일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경찰국장은 말하였다.

추방을 시키는 이유가 무엇인가 질문을 받고, 그 경찰국장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한 사람이 어떤 나라에서 추방되는 데에는 세 가지 이유 즉 정치적, 사회적 “또는 종교적” 이유가 있다고 말하였다. 그 경찰국장은 말하기를, “당신도 알다시피, ‘스페인’ 내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들—‘가톨릭’ 교도들과 불신자들—만이 있는데, 우리는 그 밖의 어떠한 것도 관용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 결과 1960년 6월 6일, 이 선교인은 ‘프랑스’ ‘페르미그낭’으로 갔으나 그가 “자의로” 떠났기 때문에, 언젠가 ‘스페인’으로 돌아올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그는 3개월 안에 ‘스페인’으로 돌아 왔으며, 그는 몇년 동안 지부 감독자로 봉사하였다. 그 심문 경험은 매우 큰 가치가 있었으며, 후에 그것은 경찰의 질문을 받을 때 대답하는 방법을 형제들에게 알려 주는 한 봉사회의 ‘프로그램’의 기초가 되었다. 그것은 기만적인 경찰의 술책에 대하여 그들을 대비시켜 주었으며, 왕국 관심사나 그들의 동료 신자들을 배반하게 만드는 올무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데 그들에게 도움이 되었다. 이제 그들은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훈계를 실제로 적용할 수 있게 되었다.—마태 10:16.

‘길르앗’ 학교 초대

여러 해 동안 상당수의 ‘왙취 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 졸업생들이 ‘스페인’에서 봉사해 왔으며, 우리는 그들의 훌륭한 활동으로 인해 축복을 받아 왔다. 그러나 1958년을 돌이켜 볼 때, ‘파이오니아’인 ‘호세 세후도’가 ‘스페인’ 형제로서는 최초로 ‘길르앗’ 학교에 참석하였다. 그는 ‘아르헨티나’에서 봉사하도록 임명되었다.

1961년 초, ‘살바도르 아드리아’와 그의 아내 ‘마아가리타 코마스’는 ‘토랄바 데 칼라트라바’에 있는 집단을 순회 방문하고 있었다. 우체부가 상당히 두툼한 편지를 전달해 주었고, ‘살바도르’는 한옆으로 가서 혼자서 그 편지를 읽었다. ‘마아가리타’는 곧이어 “‘길르앗’ 초대야!” 하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이러한 날이 올 것을 기대하며, 그들은 여러 달 동안 영어를 공부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한대 얻어맞은 기분을 느꼈다. ‘살바도르’만 10개월의 특별 과정에 초대를 받은 것이다. 즉시 ‘마아가리타’의 머리에 ‘스페인’ 사람들이 상투적으로 하는 말인 ‘미 고소 엔 군 포소’ 즉 ‘나의 기쁨이 우물 속에 빠져 버렸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 해 여름, ‘아드리아’ 부부는 ‘파리’에서 열린 하나님의 백성의 국제 대회에 참석하였다. 거기서 그들은 우리의 사업이 아직 시작되지 않은 ‘스페인’ 내의 어떤 구역들에 큰 필요성이 있다는 연설을 듣게 되었다. ‘마아가리타’는 남편이 ‘길르앗’에 가 있는 동안, 자기를 그러한 구역 중 한곳으로 임명해 주도록 요청하기로 결심하였다. 대회 끝에, 그들은 ‘M. G. 헨첼’과 이야기를 하였는 데, ‘헨첼’은 ‘마아가리타’에게 영어를 완전하게 할 수 있도록 3개월 동안 남편과 함께 ‘런던’에 갈 수 있는데, 만일 영어를 잘 할 수 있게 된다면, ‘살바도르’와 함께 ‘길르앗’에 초대받게 될 것이라는 말을 해 주었다. ‘마아가리타’는 흥분과 놀라움으로 거의 기절할 뻔 하였다.

이렇게 되어, ‘아드리아’ 부부는 ‘스페인’으로 돌아가는 대신 ‘런던 벧엘’로 가서 3개월간 머물게 되었다. 거기서 그들은 영어 공부를 마쳤으며, 1961년 11월에 ‘뉴우요오크’ 시로 떠났으며, 거기서 ‘길르앗’ 학교에 참석하였다. 후에, ‘아드리아’ 부부는 ‘스페인’ 부부로서는 최초로 ‘길르앗’ 훈련을 받고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오늘날 ‘스페인’ 내에는 여러 곳에서 69명의 ‘길르앗’ 학교 졸업생들이 봉사하고 있다. 그들의 활동은 크게 감사히 여겨지며, 그들은 ‘스페인’의 형제 자매들에게 격려의 원천이 되고 있다.

경찰이 ‘갈리시아’를 공격하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여러 해 동안 박해를 받아온 또 한 지역은 ‘갈리시아’이다. 1960년 말경, ‘프란시스코 코르도바’와 그의 아내 ‘마아가리타 로카’는 1958년 이후 ‘라코루나’(‘갈리시아’)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로 개종사업을 해 왔다는 죄로 각자 1,000‘페세타’(약 20‘달러’)의 벌금을 물었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호별 방문 전도를 하지도 않았으며, 그 지역의 어떤 시민에 의하여 고발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경찰이 단지 그들을 반대하는 데 앞장섰던 것이다. 벌금에 대한 그들의 항의는 묵살되었다.

이 기간 중에, 우리의 집회는 ‘호아네’에 있는 한 농장에서 열리고 있었는데, 극도로 조심해야 하였다. 그 농장에는 상점 하나가 딸려 있었기 때문에, 밤낮으로 고객들이 드나들었다. 그리하여 우리의 집회는 ‘가르시아’ 지방의 전형적인 좁은 직사각형의 건물인 ‘호르레오’의 바깥에 있는 곡식 창고에서 열렸다. 집회는 밤 10시나 11시에 시작되었으며, 밤중까지 계속되곤 하였다. 누가 들어오거나 나갈 때마다 불을 껐기 때문에, 근처 농장에 있는 어떠한 사람도 드나드는 것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하루 종일 들에서 일을 한 후에,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어떤 사람은 22‘킬로미터’의 거리를 자전거를 타고 왔다. 특별 ‘파이오니아’인 ‘코르도바’와 ‘헤수스 아레나스’는 그 집단을 방문하고 집회들을 인도하기 위하여 77‘킬로미터’의 여행을 해야 하였다.

1961년 12월에, 경찰이 그 농장에 나타났는데, 그 때 ‘라몬 바르카’와 그의 아내 ‘카르멘’ 그리고 그 자매의 남동생 ‘헤수스 포세’는 집안일을 하고 있었다. 경찰은 아무런 합법적인 수색 영장도 없이 그 농장에 있는 집안을 수색하고 ‘나카르 콜룽가’ 성서를 포함하여 그들이 찾아낸 책들을 압수하였다. 그 세명의 증인들은 구속되었고, 인근의 ‘카르발로’ 시로 가서 10시간 동안 심문을 받았다. 이틀 후, 그들은 지방 판사 앞에 서게 되었는데, 그 판사는 그들이 집에서 개인적으로 자신들의 종교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발표하는 여하한 일도 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3주 후, 그 재판의 결과로 한 사람당 500‘페세타’씩의 벌금에 처하게 되었다. 그 벌금은 내지 않았다. 우리의 방침은 벌금을 무는 대신 모든 벌금에 대하여 상소하기로 하였으며, 그리하여 법률을 통해 공정한 대우를 얻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경찰 서장은 도지사에게 보내는 그의 보고서 가운데서, 그 가족의 행동은 “모든 면에서 훌륭하고, 아무런 불미스러운 점이 없”다고 하였으며, 또 ‘라몬 바르카’는 “정숙한 사람이며 제도에 잘 순응하는 사람으로 경찰이 분류”한 사람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는 부언하여, 그 세 사람이 여호와의 증인이긴 하지만, ‘가톨릭’ 신앙이 깊이 뿌리 박힌 우리 지역 내에서 개종 활동이 수행되었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증인들이 아마도 “그들의 집에서 성서에 대한 주해서들을 개인적으로 읽는 정도에 그쳤”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 부부가 도청 소재지인 ‘라코르나’에 있는 한 증인을 자주 방문하는 것이 눈에 띄였다. 그리하여 수수께기같은 “‘스페인’의 영적 연합”을 위협하는 범죄를 범하였다고 추정하였다.

압수당한 성서 연구 재료에 관하여, 그 경찰 관리는 “그들이 그것을 자기들의 벗들이나 언급된 그 종파의 장래의 성원들에게 배포할 것으로 생각된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여기에 추측된 가능성있는 행동이 기소의 근거였다. 경찰이 수색하는 중에, 얼마의 주소들이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틀림없이 그들의 개중 활동 중에 방문을 한 곳”인데, 하지만 “이러한 활동이 별 반응을 불러 일으키진 못한 것같다”고 그 경찰서장은 결론을 지었다. (‘고딕’체로 바꾼 것은 우리가 한 것임)

이렇게 비교적 호의적인 보고에도 불구하고, 벌금이 부과되었다. 공식적인 통고문에서 그 이유에 관한 실마리를 찾아 볼 수 있다. 도지사는 자신이 취한 조치를 합리화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최고 경찰 본부에서 보낸 새로운 보고서를 고려했을 뿐 아니라, 처벌을 받은 이들 세 사람이 속해 있는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종파의 활동에 대하여 경고한 ··· 내무상의 비밀 회람 내용도 고려하였다.” 이 비밀 회람이란 1961년 3월에 발행한 것으로서, 지사들에게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최소한 2,500‘페세타’의 벌금을 부과하라는 지시였다. 그리하여 그 도지사의 관점에서 볼 때, 그는 겨우 500‘페세타’의 벌금으로 증인들을 가볍게 석방시켜 주는 것이었다.

이 사건은 대법원에 상소되었으며, 비공개리에 검찰측과 변호인 측의 출석하에 고려하기로 결정되었다. 1964년 6월 27일, 그 법원은 세명의 피고인들에게 “‘스페인’ 영적 연합”을 위협하는 범죄를 저질렀다고 유죄 판결을 내렸다. 동 법원은, ‘스페인 권리 장전’이 개인적으로 비‘가톨릭’ 종교를 믿는 일을 승인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는 하였지만, 그들은 그 세 사람의 증인들이 개종 활동을 하였고, 국가의 영적인 (‘가톨릭’)의 연합을 침해하였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증거가 충분하다고 결정하였다.

‘코르도바’의 중년층의 정신 상태

박해의 또 다른 초점은 ‘코르도바’였는데, 이 도시는 그 당시 인구 약 200,000명을 가진 남부 ‘스페인’의 ‘안달루시아’ 지방에 있었다. 이 도시는 ‘무어’인들이 여러 세기 동안 지배해 왔었기 때문에 강력한 ‘무어-아랍’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가장 유명한 건물 중 하나는 ‘가톨릭’ 숭배 장소로 바뀌어진 회교사원이다. 이 건물은 세계에서 가장 넓은 종교 건물 중 하나로서 길이 180‘미터’, 폭이 130‘미터’의 넓이이다. 이 건물 안에는 19개의 본당이 있으며, 이 건물의 많은 ‘아아치’들은 850개의 기둥들이 받치고 있다. 이 동일한 도시 내에는 종교적 관용이 있은 후부터 ‘유대’인 회당이 하나 있어 왔다. 그러나 1960년대의 ‘코르도바’는 매우 달랐다!

1960년대 초에 ‘코르도바’에서 박해를 받고 있던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 가운데에는 특별 ‘파이오니아’들인 ‘마누엘 물라’와 ‘안토니오 모리아나’가 있었다. 그들은 1961년 2월에 ‘코르도바’에 임명되었다. 어느날 두명의 경찰관이 와서 우리의 오래된 서적 얼마와 함께 그들을 경찰서로 데려 갔다. 경찰서에서 형제들은 심문을 받았다. 그러나 경찰은 그들로부터 이용할 만한 아무런 정보도 얻어내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형제들을 때리기 시작하였는데, 처음에는 손으로 때리다가, 나중에는 고무 곤봉으로 등과 다리를 때렸다. ‘마누엘’은 결국 눈에 시퍼런 멍까지 들었다. 그렇지만 경찰은 이렇다 할 만한 아무런 정보도 알아내지 못하였다.

그 ‘파이오니아’들은 경찰서에서 감옥으로 옮겨졌으며, 거기서 그들은 4일간 갇혀 있었다. 그 다음 그들은 ‘안토니오’에게 2,000‘페세타’ 그리고 ‘마누엘’에게는 5,000‘페세타’의 벌금을 10일 내에 납부해야 한다는 통지를 받았다. ‘마누엘’은 그 도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잠시 후 그는 ‘바르셀로나’로 돌아가 새로운 임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을 치르고서도, ‘안토니오 모리아나’는 1962년 5월까지 ‘코르도바’에서 그의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여기에 언급된 이 경험담은 단지 대표적인 것에 불과하다. 사실상, 상당수의 ‘파이오니아’들이 경찰의 압력으로 인하여 ‘코르도바’ 시에서 추방당하였다. 그러나 실상은 경찰 자체가 여호와의 충실한 종들의 적들인 교직자들의 압력하에 있었다.

‘코르도바’ 시에서의 체포 및 추방의 계속적인 위협으로 인한여 그곳에서의 우리의 사업은 그 당시 ‘스페인’ 내의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극도로 조심스럽게 수행되고 있었다. 호별 방문에서 우리의 책 중 아무 것도 제공할 수 없었고, 가지고 다니지도 못하였다. 사람들이 진정한 관심을 나타낼 경우 재방문에서 책들을 전하였다. 거리에 나가 호별 방문하는 대신, 여기 저기 한집씩 그 구역 전체를 돌았으며 어떤 집들을 차례로 방문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한 방법을 썼기 때문에 경찰은 구역이 봉사되고 있을 때에도 증인들을 찾아내기가 매우 어려웠다.

또한 전파 활동에는 ‘가톨릭’ 성서만을 사용하였다. 그것마저도 여호와의 증인들의 손에 들어가면 위험한 무기라고 생각되었다. 그리하여 교직자들은 가능한 대로 압력을 가하였으며, 증인들과 연구를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찾아내도록 당국자들에게 촉구하였다. 때때로 경찰은 그들의 자의적인 도구가 되었지만 또 어떤 때는 마지 못하여 그러한 일들을 하였다. 물론 그러한 일은 그 도시나 도에 따라 달랐다. ‘코르도바’에서는 그들이 자진적인 도구 노릇을 하였다.

수치스러운 공격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한 가장 수치스러운 공격 가운데 하나가 1962년 중반에 ‘코르도바’ 도의 남부에 있는 ‘루세나’ 근처의 ‘로스 라스트레스’ 농장에서 있었다. 그곳에 사는 ‘몬탈반’ 가족은 진리를 받아들였으며, 인근 농장에 있는 자기 이웃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하기 시작하였다. 얼마 안 있어 그리스도인 집회들이 조직되었으며, 20명 내지 30명이 참석하였다.

5월 28일, 매우 상스러운 경사 하나가 다른 경찰 한명과 함께 ‘몬탈반’의 농장으로 왔다. 그 경사는 그 집의 가장이 누구냐고 묻고, 그 농장에서 성서 연구를 중지하지 않는다면 그를 감옥에 쳐 넣겠다고 위협하였다.

4일 후인 6월 1일에, 경위 한 사람, 경사 한 사람 그리고 두명의 경찰관이 그 농장에 다시 나타났다. 그들은 경찰 활동에 관한 “익명의 항의”에 관해 뭔가를 거칠게 이야기하였다. 이들은 성서를 연구하기 위하여 그 농장에 왔던 사람 모두의 이름을 대라고 요구하였다. 그들 대부분은 그 가족의 친척들이었다. 지혜롭지 못하게도, 그리고 경험이 없었던 관계로 그 이름들을 알려 주었다. 다음 조치는 농장을 수색하는 일이었는데, 경찰들은 수색 영장도 없이 그렇게 하였다. 그들은 다음에 다른 농장으로 갔으며, 성서 연구를 하고 있던 그 농장 주인이 집에 없었는데도 그의 농장을 수색하고, 우리의 출판물 얼마를 가져갔다.

이 사건에서, 그 가족 중 침례를 받은 유일할 사람인 ‘후앙 몬탈반 오르테하’는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하고 축첩 생활을 한다고 비난을 받았는데, 이는 그가 ‘스페인’에서 ‘가톨릭’ 의식을 받아들이지 않고 영국법에 따라 ‘지브로올터’에서 결혼을 했기 때문이다. 경위는 자기의 방문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고 그들 모두가 그것에 서명하도록 제시하였다. 또 다시 그들은 경험이 없었으므로 그 함정에 말려들고 말았으며, 그들 28명은 그 진술서에 서명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다음과 같은 말을 첨가할 것을 주장하였다. “우리는 성서가 하나님의 영감받은 말씀이며 성서에는, 그것을 전파해야 하고 모든 민족에게 구원의 증거를 제시하기 위하여 그것을 알려야 하며, 그 다음에 끝이 올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성서를 연구한다. 마태 24:14.”

6월 15일, ‘코르도바’ 지사는 이 가난한 시골 사람들에게 총 40,000‘페세타’(666‘달러’)의 벌금을 매겼다. 12명이 벌금을 부과받았는데, 내무상의 회담에서 지시한 최소 2,500‘페세타’로부터 그들 중 4명에게는 최고액인 5,000‘페세타’의 벌금이 부과되었다. “여호와의 증인의 종파에 가담하도록 개종 활동을 함으로써 ‘스페인’의 영적 연합을 위협”하였다는 상투적인 혐의가 그들에게 씌워졌다.

이 관심자들의 집단은 상소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아버지인 ‘안토니오 몬탈반’과 그의 아들 ‘후앙’은 도청 소재지인 ‘코로도바’로 가서 그들을 변호해 줄 변호사를 물색하였다. 그 도시에 있는 변호사들은 눈에 날까봐, 아무도 기꺼이 변호를 해 주려 하거나 그들을 도와 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알고 있는 제한된 법률 지식에 따라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총 벌금액의 3분의 1을 공탁시키고 12명의 피고인들 모두를 위해 상소하였다. 그러나 다른 10명을 위해 상소를 하려면 그들에게 공증인이 서명을 한 법적 인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아무도 그들에게 알려 주지 않았다. 이러한 전문적인 절차상의 문제로, 지사는 그들 10인의 상소를 기각하였으며, 공탁되었던 돈은 내 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 도시에 직접 갔던 아버지와 아들의 상소만이 효력이 있었다. 그 두건의 상소는 지사와 내무상에 의하여 기각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법적 효력이 있었으므로 대법원으로 넘겨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두건의 상소의 최종 결과는 형제들과 종교적 표현의 자유에 패배를 안겨다 주었다.

이 박해 기간중의 침체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코르도바’에 네 개의 회중에 350명의 전도인이 있으며, ‘로스 라스트레스’ 농장에서 멀지 않은 ‘루세나’에 한 회중을 포함하여 그 도내에는 또 8개의 회중이 있다는 사실은 격려적인 일이다.

계속되는 박해에 대처함

‘스페인’ 내의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에 대한 계속적인 박해는 경찰 당국자들이 1959년부터 1966년 사이에 내무상으로부터 받은 회람장들 때문이었다. ‘코르도바’, ‘산 세바스찬’, ‘하엔’, ‘카스델론 데라플라나’ 및 ‘무르시아’ 등에 있는 ‘파이오니아’들 및 ‘시우다드 리알’에 있는 다섯명의 전도인들은 체포, 구금 및 벌금형을 받았다. 대부분의 경우, 최소의 벌과금인 2,500‘페세타’가 요구되었지만, 자진적으로 지불되는 일은 없었다. 대법원에 상소되는 경우 사전에 벌금을 기탁해야 하였는데, 재판에서 질 경우에는 그 벌금은 자동적으로 몰수되었기 때문에 그러하였다. 반면에, 그 사건에서 이길 경우, 그 벌과금을 기탁하도록 법률이 요구하는 최소한의 기간에 비하여 그것을 도로 찾아내는 데는 보통 더 오랜 기간이 걸리긴 했지만, 그 금액은 되돌려 받을 수 있었다.

법적인 도움을 받는 일은 쉽지 않았다. 예를 들어, 두명의 특별 ‘파이오니아’들인 ‘프란시스카 로페스’와 ‘프란시스카 알마르자’에게 일어났었던 일을 고려해 보자. 1960년대에 ‘팔렌시아’의 도청 소재지에서 봉사하는 동안, 여러 차례 그들은 전파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중한 벌금형에 처하여졌다. 한번은 그들의 사건을 상소하기 위해 변호사를 고용하였지만 그가 상소를 하지 않았다. 그 변호사의 태만으로 인하여 그 두명의 ‘파이오니아’ 자매들은 30일간의 구류를 살아야 하였다.

그 특정한 변호사와 관련된 문제는 ‘스페인’ 내에 널리 퍼져 있는 상태—변호사들이 여호와의 증인들을 기꺼이 변호해 주고자 하지 않는 점—를 잘 예시해 준다. 한 두 사람은 선한 의도로 시작을 했지만, 증인들을 변호해 주면 그들의 직업에 이롭지 못하다는 위협을 받게 되면, 그들의 태도는 하룻밤 사이에 변화되었다. 이와 대조적인 한 가지 참신한 예외적인 경우는 ‘에두아르도 아후리아’ 변호사가 행한 여호와의 증인들을 위한 담대한 변호였는데, 그 변호사는 증인은 아니었지만, 법에 의한 정의 구현을 위해 참으로 헌신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무수한 사건에서, 심지어 대법원에서까지도 여호와의 증인들을 대변해 주었다.

대법원에서의 승리

‘스페인’에서의 여호와의 증인들이 대법원까지 끌고간 법적 투쟁에서 승리를 거둔 사례는 여러 차례 있었다. 그러므로 그곳에서의 승소를 한 일에 관하여 얼마간 이야기하고자 한다.

1963년, 경찰 수사관들이 ‘프란시스코 알론소 발레’와 그의 아내 ‘에스페란자’의 소유인 ‘말라가’에 있는 “몬테 카를로” 하숙으로 찾아왔다. 그들은 승인받지 않은 집회를 열었다는 혐의를 받았다. 가택 수색을 받았으며, 8세와 4세의 두 어린 아이들까지 포함하여 그들은 지문을 찍었다. 그 집회에 참석하였던 ‘페르난데스’ 형제는 그가 일하는 이발소에서 몹시 들볶음을 당하다가 결국은 직장을 잃고 말았다. 이러한 경찰 수사의 결과로, 혐의를 받은 네 사람은 각각 500‘페세타’씩의 벌금형을 받았으며, 두번째인 ‘페르난데스’에게는 2,000‘페세타’의 벌금이 부과되었다. 그는 그전 해에도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이유로 벌금형을 받았는데, 벌금을 무는 대신 15일간 구류를 살았었다.

이 다섯 사람의 사건은 내무상에게 상소되었다. 그러나 증인들은 그들의 활동을 통해 “‘스페인’의 영적인 연합을 위협”하였다고 생각된다는 이유로 그 상소는 기각되었다. 그리하여 그 사건은 대법원으로 올라갔다. 1966년 10월 20일 동 법원은 ‘말라가’ 지사의 판결을 번복시켰다. 그 판결은 성서에 대해 설명을 하는 사적인 모임은 일반적으로 공인된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개종 운동으로 간주될 수 없다고 설명하였다. 더 나아가서, 20명 이상이 그 모임에 참석하였다는 사실이 증명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그 모임은 승인받지 않은 집회로서 법률에 저촉되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집회를 갖는 문제와 관련하여 이것은 괄목할 만한 승리였다.

1964년부터 1967년까지 3년간, 대법원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동 법원에 상소한 50여건 가운데서 38건을 옹호해 주었다는 사실은 흥미있는 점이다. 패소한 대부분의 사건들은 전파 활동을 논한 것이었는데, 이 활동은 그 판사들에게는 그들이 그 당시 존속하던 법률을 범하는 것으로 간주한 비‘가톨릭’ 종교적 신앙을 공개적으로 공표하는 것이었다.

1964년 6월 10일, 두명의 젊은 자매들인 ‘산티아하 산체스’와 ‘에가르니타 가르시아’가 그들의 고향인 ‘토랄바 데 칼라트라바’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는 중에 체포되었다. 그들은 ‘시우다드 리알’에 있는 경찰서로 끌려갔으며, 거기서 저녁 8시부터 새벽 4시 30분까지 심문을 받았다. 그들 모두는 “여호와의 증인 종파에 속하여 있기 때문에” 그리고 “이미 언급한 종파를 위한 개종 활동을 행하기 위하여 이 도청 소재지로 여행을 하였다”는 이유로 2,500‘페세타’(42‘달러’)의 벌금에 처해졌다. 그 자매들이 심문을 당하던 같은 날 밤, 세명의 “혐의자들”이 더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으며, 결국 그들도 각각 최소의 벌과금인 2,500‘페세타’의 벌금형을 받았다. 이 벌금형에 대하여 내무상에게 상소하였으나 그는 그 벌금형을 확정하였다. 마지막 단계는 대법원에 상소하는 것이었다.

대법원에서의 문제는 어떤 사람이 심문을 받는 중에 그가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인정하는 것 그 자체가 유죄가 되는 근거인가 아닌가 하는 점이었다. 동 법정에서는 말하기를, “개인적인 심문과는 별도로” 경찰 진술서는 “직접적이든 조회를 통하여서든, 증거 역할을 할 수 있는 어떠한 활동이나 노력 또는 문서나 증인 없이 작성되었다”고 하였다. 판사들은 경찰 조사가 “부정확할 뿐 아니라” “어떠한 경우이든 추측의 근거가 되는 사실이 참이라고 간주되기 위하여는” 증거가 필요한데 그 증거가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고 인정하였다. 그리하여 동 법원은 “심문을 통해서는 심증만 굳힐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공개적인 개종 활동에 대한 혐의에 관하여, 동 법원은 “어떠한 경우에도 증거가 없으며, 진술서는 증거를 얻으려 하지도 않았다”고 언급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그 다섯명의 혐의자들은 무죄 방면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벌금으로 기탁해 놓았던 금액을 하나도 찾지 못하였다.

유죄 판결이 확정된 사례에 비하여, 법적인 승소를 거둔 사례는 극히 드물었다. 그러나 구금, 벌금 및 임명지에서의 추방 등에도 불구하고, ‘파이오니아’들은 열렬히 그들의 전파 활동을 계속하였으며, 사도들의 본을 충실하게 따랐다. (사도 5:27-29) 회중 전도인들은 종종 박해로 인하여 영향을 받았지만. ‘파이오니아’들은 그러한 공격을 정면으로 부닥쳤으며, 그들이 회중에서의 교제와 집회를 통한 격려를 받을 수 없는 격리된 임명지에서 종종 그러하였다.

호두 속에 든 진리

우리는 특히 여기서 투옥되어 있는 동료 형제들의 영적, 육적 필요를 위하여 일부 형제들이 돌보아 온 한 가지 비상한 방법에 관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 모든 일은 1961년 12월 7일에 시작되었는데, 그 때 ‘펠릭스 로프’는 ‘오비에도’에 있는 한 작은 집단의 연구를 사회하고 있었다. 아무런 경고도 없이, 두대의 경찰 차가 습격해 왔다. 그리하여 집안은 수색당하였고, 성서와 성서 서적들은 압수당하였다. ‘펠릭스’와 ‘큐바’ 형제인 ‘세르지오 크루스’ 형제가 투옥되었다. 다음날 그들의 아내들은 경찰서에 출두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2일 동안 심문을 받은 후, 그들 역시 투옥되었다. 네명 모두 사진을 찍히고, 지문 채취를 당하였으며, 그 다음 재판을 받기 전 10일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다. 지사는 그들 네명에게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종파를 위하여 ‘오비에도’에서 비밀리에 개종 활동”을 하였다는 이유로 도합 17,000‘페세타’(283‘달러’)의 벌금에 처하였다. 여하한 잠정적인 자유도 용인되지 않았다.

그 네명의 증인들이 투옥되어 있는 동안, 밖에 있는 형제들은 그들의 물질적, 영적 필요를 인식하였다. 그리하여 어느날 신뢰받는 한 수감자가 ‘펠릭스’에게 음식꾸러미 하나를 전해 주었다. ‘펠릭스’는 그 수감자에게 얼마를 나누어 준 다음, 절반을 ‘세르지오’에게 보냈다. 조금 후, 그 수감자가 돌아와서 말하기를 “보십시오. 호두 속에 뭔가 들어 있읍니다!” 하는 것이었다. 바로 그 속에 “범사에 헤아리라” 책장들이 들어 있었다! ‘펠릭스’는 급히 자기가 가지고 있던 호두를 깨 보니, 그 하나하나 속에 그 책장들이 들어 있었다. 형제들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호두를 깬 다음, 그 속을 파내고, 책장을 접어서 속을 채운 다음, 그 껍데기를 풀로 붙였던 것이다. ‘펠릭스’와 ‘세르지오’는 그 책장들을 도서실에서 빌려 온 책들 속에 감추어 놓은 다음, 들키지 않고 그것들을 읽을 수 있었다.

그 달 말경, ‘펠릭스’와 그의 아내 ‘마리아’는 1,13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그들의 고향인 ‘바르셀로나’로 이송되었다. 그들의 여정은 여섯개의 더럽고 지저분한 형무소를 거치면서 11일이나 계속되었다. 그동안 ‘펠릭스’는 일반 범죄자들과 함께 수갑에 채워져 있었다. ‘바르셀로나’에 도착해서도 그들의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왜냐 하면 심문이 더 계속되었으며, 그들은 끝까지 일시적인 자유도 얻지 못한 채 37일간을 여러 형무소에서 보냈다.

증인 자녀들도 고통을 받다

박해를 받던 그 여러 해 동안, ‘스페인’의 여호와의 증인들의 자녀들 역시 반대와 기타 고난을 겪었다. 예를 들면, 1961년 10월 20일, 모든 자녀들이 ‘토랄바 데칼라트라바’(‘시우다드 리알’)의 중학교 ‘미사’에 참석하도록 열을 지어 세워졌다. 그 지방의 한 증인의 아홉살된 아들인 ‘후앙 가르시아’는 열에서 빠져 나와서 자기가 그전에 한 것처럼 선생에게 자기는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어서 ‘미사’에 참여할 수 없다고 설명하였다. 선생은 그에게 그의 책을 챙겨 가지고 학교를 떠나 다시 돌아오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후앙’의 아버지는 학교를 찾아가 그 선생에게 설명을 해 보려 하였다. 그러나 그 선생은 ‘가톨릭’ 학교 내에 비‘가톨릭’ 학생을 용납할 수 없다는 자기의 주장을 되풀이하였다. ‘후앙’의 아버지는 이 마을에는 비‘가톨릭’ 학교가 전혀 없으며, 법률은 모든 자녀의 교육을 보장하고 있으므로, 종교적 원칙 문제로 자기 아들을 퇴학시키는 것은 부당한 처사라고 지적하였다. 하지만 그 선생은 물러 서려 하지 않았으며, 그 아이를 다시 학교에 받아들이기를 거절하였다.

시장은 이 문제를 고위 당국자들에게 상신하였으며, 1962년 2월에 그 선생은 ‘후앙 가르시아’를 학교에 다시 받아들이라는 요구를 받게 되었다. 그러한 일이 있는 동안, ‘후앙’은 이러한 아량이 없는 태도로 인하여 3개월 동안이나 학업을 받지 못하였다.

이와 비슷한 사례가 몇 ‘킬로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또 하나의 조그마한 도시인 ‘카르리온 데 칼라트라바’에서 일어났다. 그곳에서는 선생이 10세의 ‘펠릭스 앙굴로’를 구타하고 그를 강제로 ‘미사’에 참석시켰다. 그 다음에 그는 그의 형과 누이 동생과 함께 학교에서 퇴학당하였다. 이러한 사건은 ‘토랄바’ 사건이 해결된지 3개월 후에 일어났다.

또 다른 사례는 ‘후아니토 벨몬테’ 즉 ‘호세 벨몬테’의 열 한살된 아들과 관련하여 ‘만레사’에서 일어났다. 선생은 모든 아이들에게 일어서라고 한 다음 국기에 경례하라고 명령하였다. ‘후아니토’는 일어나기는 했지만 절을 하지는 않았다. 선생은 그를 때리기 시작하였으며, 강제로 그의 손을 올려 경례하도록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다음에 그 소년은 학교를 떠나 다시 돌아오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출애굽 20:4-6; 시 3:8; 요한 1서 5:21.

‘후아니토’의 아버지 ‘호세’는 기에 절하는 것은 학교 교육을 받는 데 필요 조건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며 그 선생에게 이치적으로 이야기하려고 하였다. ‘호세’는 또 기가 계양되어 있을 때 폭행과 구타를 하고 ‘후아니토’를 학교에서 퇴학시키는 고압적인 행동을 취한 선생보다 자기 아들이 더 존경을 나타내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 선생은 이야기하기를 거절하고 그 아버지의 면전에서 문을 꽝 닫아 버렸다.

이 사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선생은 그 아버지와 아들을 기에 대한 불경 혐의를 씌우고 또 집에서 불법적인 성서 집회들을 가졌다는 이유로 경찰에 고발하였다. 경찰은 그들의 임무상, 그에게서 진술을 듣기 위하여 그 형제의 직장으로 가서 그를 체포하였다. 그 결과 ‘호세 벨몬테’는 그의 아들이 기에 대하여 불경스러운 행동을 범하였다는 이유로 ‘바르셀로나’의 지사에 의하여 5,000‘페세타’의 벌금에 처하게 되었다.

10대들이 박해를 받다

1962년 10월에, ‘헤수스 라포르타’라는 16세된 정규 ‘파이오니아’는 ‘스페인’의 동부 지중해 연안에 있는 ‘카스텔레온 데 라 플라나’로 이사하였다. 그의 ‘파이오니아’ 짝은 ‘플로렌티노 카스트로’였다. 그들은 그곳에 도합 다섯명의 왕국 선포자들로 된 집단을 구성하였으며, 전파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자연히 이러한 활동은 교직자들과 그 지방 경찰의 주의를 이끌게 하였다.

1963년 7월경, 그 지역 내에서의 전파 활동은 ‘카스텔론’에서 뿐 아니라 이 ‘오렌지’가 많이 나는 지역 전체에 산재해 있는 인근 마을들에 조그마한 신자들의 집단들을 만들어냈다. 7월 5일, ‘플로렌티노’가 체포되었으며, 3일 후에, 경찰은 ‘헤수스 라보르타’를 그의 하숙에서 찾아내었다. 이들 두 사람은 불법적인 선전과 개종 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30일 동안 구금되었다.

1963년 12월에, ‘헤수스’는 특별 ‘파이오니아’가 되었으며, 한편 그의 14세된 누이 동생이 ‘카스텔론’으로 와서 그와 함께 살게 되었다. 1964년 4월 2일, 경찰은 그가 없는 사이에 그의 집으로 강제 침입하여 수색 영장도 없이 그곳을 샅샅이 뒤져 성서와 성서 서적들 및 그 집 열쇠를 가져가 버렸다. 경찰은 그 집을 습격하였을 때, 정규 ‘파이오니아’인 ‘플로렌티노 카스트로’를 그곳에서 발견하였으며, 그를 체포하였다. 그들이 수색을 하고 있는 동안, 17세인 정규 ‘파이오니아’ ‘후앙 페드로 루이스’가 집으로 돌아왔으며, 그도 체포되었다. 이들 두 형제들에게 부과된 벌금에 대하여 항소할 시간적 여유가 충분히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20일간을 감옥에서 보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의 집을 습격당한지 약 1주일 후, ‘헤수스’는 그를 찾고 있던 경찰에 의하여 검거되었다. 그는 5,000‘페세타’(83‘달러’)의 벌금에 처하였지만, 즉시 상소를 하였다. 그러나 ‘헤수스’는 8일 동안 갇혀 있게 되었으며, 그 동안 그의 10살된 누이 동생은 보호자도 없이 혼자 남아 있게 되었다.

당국자들은 이들 젊은이들에게 박해를 가하는 데 무자비하였으며, 1964년 9월에 다시 공격을 가하여, ‘플로렌티노 카스트로’와 ‘후앙 페드로 루이스’를 다시 체포하였다. “여호와의 증인의 ‘프로테스탄트’ 종파”의 “사상을 선전하고 개종 활동”을 하였다는 이유로, 그들은 각각 5,000‘페세타’의 벌금에 처하였다. 그리하여 15개월 사이에 ‘플로렌티노’는 동일한 죄목으로 세 차례나 벌금에 처하여졌다.

‘헤수스’에 대한 벌금건에 대한 상소가 1966년 2월 4일에 대법원에서 청취되었으며, 변호인측은 피고에 대한 증거나 증명이 전혀 제시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그들에 대한 아무런 고소도 없었다. 검찰측은 ‘헤수스’에 대한 이전의 평판과 그가 개종 활동에 참여하였다고 알려진 경찰 진술을 들어 주장하였다. 대법원은 유죄 판결을 내렸으며, 여호와의 증인으로 알려지게 되면 누구나 유죄가 될 위험한 판례를 세워 놓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 판결은 앞서 언급한 ‘시우다드 리알’에서의 유리한 판결로 같은 해 11월에 상쇄되었다.

1966년에, ‘플로렌티노’는 ‘파이오니아’로서는 아니었지만 ‘카스텔론’에서 계속 봉사하고 있었다. 3월 22일 밤 12시 15분에 두명의 경찰이 그의 직장으로 와서 그를 체포하였다. 경찰서에서 심문하는 도중, 그들은 그에게서 그 집단의 다른 형제들에 관한 정보를 알아내려고 두번이나 구타를 하였다. ‘프로렌티노’는 그의 직장에서 잡혀 갔으므로 그가 부랑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한데도 그 나라의 부랑자에 대한 규제법에 의해 고발되었다. 그러나 구속된지 6일 후에 동 혐의에 대한 근거가 없다는 것이 분명하였기 때문에 ‘마드리드’로부터 그의 석방 명령이 하달되었다.

이러한 심한 박해가 계속된 그 여러 해 동안, ‘카스텔론’에서의 발전은 느렸다. 그리하여 1966년 3월경—‘파이오니아’들이 4년간 활동한 후—그 지역에는 왕국 전도인들이 겨우 13명 뿐이었다.

1967년에 종교적 자유 법이 통과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카스텔론’ 경찰은 계속하여 여호와의 증인들을 괴롭히고 있었으며, 그리하여 1970년 4월에, 그들은 16명의 어른들과 5명의 어린이들이 성서를 공부하기 위하여 함께 모여 있던 한 개인집을 습격하였다. 경찰은 수색 영장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성서 연구를 방해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형제들이 스스로 경찰서에 출두하리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떠났다. 경찰서에서 그들은 불법적인 집회를 가졌다는 이유로 고발되었으며, 그 고발은 그 지방 판사에게 넘겨졌다. 그 문제는 새로 구성된 종교 자유를 위한 위원회에서 검토되도록 조처되었다. 이렇게 하여 경찰이 더 이상 개입할 여지가 없게 되었으며, 어떤 면으로는 그 위원회가 종교적 자유를 보장할 수 있다는 증거였다.

1970년 ‘카스텔론’ 회중은 놀랍게 번창하였다. 4월에 그들은 79명의 전도인들을 보고하였으며, 6월에 그 수는 108명으로 증가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안있어, 인근 ‘부르리아나’와 ‘발 둑소’에 집단이 형성되었다. 그 다음 여호와의 증인의 협회가 합법화되자, ‘카스텔론’은 그 자체의 왕국회관을 세운 첫 번째 회중이 되었다. 2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좌석이 있는 이 회관은 1971년 봄에 지부 감독자에 의하여 봉헌되었다. 경찰에 의하여 괴롭힘을 받던 9년이란 세월이 지난 후 얼마나 큰 변화인가! 이곳 경찰이 내무상의 명령과 회람 내용을 충실히 따랐지만 그 내무상이 여호와의 증인들을 박멸시키고자 한 8년간의 노력이 완전히 실패하였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또 다른 예가 있었다.

‘알메리아’ 내에서의 체포 사건들

그 당시, 경찰은 ‘스페인’의 남부 해안에 있는 ‘알메리아’ 시를 위시하여 도처에서 괴로움을 주었다. 젊은 특별 ‘파이오니아’인 ‘에서테르 실라스 에반젤리오’와 ‘안나 마리아 토레그로사’는 1962년 3월에 그곳에서 일하도록 임명되었다. 4월에 순회 감독자 ‘엔리케 로카’와 그의 아내가 그 ‘파이오니아’들을 방문하여 그들이 세를 든 ‘아파아트’에 머물러 있었다.

어느날 아침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에스테르’는 누구냐고 물었다. “경찰이요!”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경찰이라구요?” 하고 ‘에스테르’는 큰 소리로 반복하였다. 그것은 순회 감독자와 그의 아내에게 경고하는 소리였지만 경찰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였다. 재치있게 ‘에스테르’는 즉시 행동을 취하였으며, 경찰에게 수색 영장을 가지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에스테르’는 그들을 따라 경찰서까지 가야 하였다. 물론 그들이 경찰서에 있는 동안 ‘엔리케’와 그의 아내는 떠났다. 사실 ‘로카’ 형제는 너무 급히 떠나느라고 그의 침대를 정리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경찰이 안으로 들어왔을 때 좁다란 ‘싱글’ 침대와 마루 위에는 그가 누워 잤던 ‘매트레스’가 그의 벗어 놓은 ‘파자마’와 함께 그대로 눈에 띄였다!

경찰은 ‘에스테르’에게 그곳에서 누가 잤느냐고 물었다. “내가 잤읍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럼 왜 잠자리가 둘이요?” 하고 경찰이 물었다. ‘에스테르’는 “저 ‘매트레스’는 매우 편하기 대문에 침대에서 자다가 불편하면 저 ‘매트레스’에서 잠을 자거든요” 하고 농담조로 넘겨 버렸다. 경찰은 그 소리를 듣고 한바탕 웃고 나서 더 이상 물어 보지 않았다.

그 자매들은 밤낮 4일간 경찰서에 구치되어 있었다. 그들은 계속해서 심문을 받았으며, 흔히 이 심문은 따로따로 행하여졌다. 그 심문은 결코 미숙한 것이 아니었다. ‘에스테르’는 강한 불빛 밑에서, 그에게 질문 공세를 펴는 경찰관들에게 둘러 싸여 있었다. 이 자매는 매우 멍청한 사람처럼 행동하여 종종 그들에게 두서가 없는 대답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의기양양하게 그에게 모순점을 지적하였을 때, 그는 “모순이라구요? 어제 내가 서명한 것을 가져다 줘 보세요” 하고 말했다. 그들은 그것을 읽어 보라고 그에게 주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매우 주의깊게 읽었으며, 그리하여 동일한 잘못을 다시는 범하지 않았다. 이 자매는 연기한 것처럼 그렇게 바보는 아니었다. 그들이 그에게 난처한 질문을 하였을 때, ‘에스테르’는 잠간 정신을 차릴 시간을 달라고 하였다. 그는 그 시간을 도움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데 사용하였다.—사무엘 상 21:12-15과 비교.

한 친절한 재판관

다음에, 그 ‘파이오니아’들은 재판정으로 끌려가 거기서 판사에 의해 심리를 받았는데, 또 하나의 진술서에 서명을 해야 하였다. ‘스페인’ 법원 절차에 따라, 경찰에 의하여 진술서가 작성된 다음, 피의자는 법원에 나와 판사에 의하여 심리를 받게 되며, 그 다음 판사는 그 사건에 대하여 판결을 한다. 만일 죄상이 밝혀지면 판사는 유죄 판결을 내린다. 또 한 가지는 행정적 절차로서, 사건이 지사에 의하여 판결이 내려질 수 있는데, 지사는 경찰 보고에 나타난 증거와 피의자의 진술서에 근거하여 판결을 내린다. 여호와의 증인들과 관련된 대부분의 사건들은 후자의 방식에 따라 판결되었다.

그 자매들이 판사를 위해 한 진술서에 서명을 하자, 판사는 그들에게 몇 가지 더 질문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친절한 태도로 그렇게 하였다. 그 판사는 그들에게 두려워할 것 없다고 말해 주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진술서에 서명을 하였으니, 그들에게 불리한 조치가 더 이상 취해지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에스테르’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법원 관리들과 경찰관들을 포함하여 거기에 있는 약 14명의 사람들에게 증거를 하였다. 그가 말을 마치자 놀랍게도 판사는 그들에게 마음대로 가라고 하였으며, 경찰이 수색중에 압수해 온 그들의 물건들도 가져갈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자매들이 복도로 나오자, 상황이 달라졌다. 두명의 정복을 입은 경찰관이 다가와서 미해결인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그들에게 경찰서까지 같이 가자고 하였다. ‘에스테르’와 ‘안나 마리아’가 경찰서에 가 보니, 지사가 그들 한 사람 당 2,000‘페세타’씩의 벌금을 부과하였다는 통지를 받았으며, 납부하지 않을 경우 형무소로 가야 한다는 통고를 받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형무소로 가게 되었다.

형무소에서 그들 앞에는 새로운 구역이 열려졌는데, 그들은 재소자들, 관리들 및 그곳에 파견되어 있는 수녀들에게 전파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수감자들에게 증거할 기회를 발견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수녀들은 온갖 수단을 다하여 그러한 접촉을 못하게 막았다. 오락 시간이 되면 모든 수감자들은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지만, ‘에스테르’와 ‘안나’만은 예외로 감방에 갇혀 있어야 하였다. 하지만 이것이 장애가 되지는 못하였다. 왜냐 하면 그 자매들과 이야기하고 싶은 다른 수감자들은 그들의 감방 창문 밖에 있는 무화과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 그들과 이야기하였기 때문이다. 그 자매들 역시 침대를 감방 벽에 바짝 붙이고 그 위로 올라가 계속 증거를 하였다. 수녀들이 근처에 있어서 이야기를 할 수 없을 때는, 그 자매들은 왕국 노래를 부르곤 하였으며, 이것을 보고 다른 수감자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슬퍼하는데 그들은 어떻게 저토록 행복할 수 있단 말인가?’ 하고 놀라와하였다.

한달 동안 감옥에 갇혀있던 것은 예상치 못한 면으로 ‘에스테르’에게 유익하였다. 그 동안 성서를 읽을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제공하였다.

‘그라나다’에 있는 특별 ‘파이오니아’, ‘미구엘 길’은 그 자매들을 도울 수 있는 변호사를 구하기 위하여 ‘알메리아’로 파견되었다. 그 변호사는 그들의 사건을 다룬 판사에게 이야기를 하였으며, 그 판사는 그 처녀들이 겪고 있는 조치에 대하여 매우 분개하여 그들을 만나러 형무소를 찾아갔다. 그러나 그들이 대화를 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는 구실—그것은 거짓말이었다—로 그의 면회는 허용되지 않았다. 그는 그들을 만나겠다고 계속 고집하였으며, 그리하여 마침내 그들을 면회할 수 있었다. 그 판사는 그 자매들에게 온갖 친절한 도움을 베풀어 주었으며, 그들의 가족들에게 염려하지 말라는 편지까지 써 보내 주었다. 그는 또 그들이 석방되면 만나 보고 싶다고 말하면서, 석방되는 대로 그들의 선한 사업을 계속하라고 격려해 주었다. 이러한 친절한 중재로 말미암아 ‘에스테르’와 ‘안나 마리아’는 커다란 격려를 받았다.

드디어, 그 자매들이 석방되는 날, 그들은 자기들을 마중나온 ‘미구엘 길’을 보고 무척 기뻐하였다. 한 가지 덧붙여 말할 것은, 모든 증거로 보아, 그들이 감옥에 들어가게 된 것은 그 도시의 ‘프레스카데리아’ 구역의 사제의 사주에 의한 것이 분명하였다. 그가 바로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일으켰으며, 그 자매들을 경찰에 고발하였던 장본인임에 틀림없다.

물론 이 사건이 ‘알메리아’에서 경찰과 부닥쳤던 유일한 사건은 아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매우 괄목할 만한 사건이었는데, 왜냐 하면, 그 도시에서 한 판사가 그러한 친절을 베풀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 여러 해가 지나는 동안, ‘알메리아’에 있는 회중은 성장하였다. 1972년, 시장과의 몇 가지 어려운 문제들을 겪은 후, 그곳 형제들은 그들의 왕국회관을 봉헌하였다. 오늘날 그 도시에 있는 회중에는 124명의 전도인, 8명의 정규 ‘파이오니아’ 및 두명의 특별 ‘파이오니아’가 있다.

‘말료르카’에서의 계속적인 투쟁

본토에 있는 여호와의 백성이 경험한 몇 가지 사실을 살펴본 지금, ‘말료르카’ 도에서의 그들의 활동을 고려해 보도록 하자. 1961년 ‘말료르카’ 내의 형제들의 상태는 매우 좋지 못하였다. 서적 짐을 받은 모든 형제들이 감시를 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방에 서적을 넣어 가지고 거리를 걸어가는 증인들은, 만일 그들이 경찰의 검문을 당하게 될 경우 일주일 “구류”를 살게 될 위험을 안고 있었다. 그 해 6월에, 형제들은 끊임없는 경찰의 가택 수색을 당하고 있었다.

문제가 언제 터질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예를 들어, 한번은 ‘안토니오 몰리나’와 ‘가브리엘 바쿠에르’가 ‘팔마 데 말료르카’에서 전파를 하고 있는데 한 집주인이 그들을 들어오도록 초대하여 그와 함께 「이 천국의 기쁜 소식」 소책자를 고려하고 있었다. 처음에, 그 사람은 자기 안경을 가질러 갔다 왔으며, 다음에 그의 아내가 우유를 사러 갔었다. 몇분 후, 그 여자는 “우유”—두명의 사복 차림의 경찰관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그 경찰관들은 그 형제들에게 질문하기 시작하였다. ‘안토니오’와 ‘가브리엘’은 그들의 신분증을 보여달라고 하였다. 결국, 그 두 사람은 경찰 간부들임이 밝혀졌다. 이 “우유”는 정말로 시큼하였다! 그뿐 아니라, 그 집주인도 경찰이었다. 그 형제들은 심문을 받고 나서 형무소로 보내졌으며, 거기서 그들은 15일간을 갇혀 있었다.

‘팔마’에 있는 여호와의 백성의 경우, 상태가 몹시 좋지 못하였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야기하기만 하면 그들을 올무에 빠뜨리려고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어디에나 ‘스파이’들과 적들이 있는 것같았다. 예를 들어, 1962년 5월 27일, 세명의 자녀를 둔 아버지인 ‘펠릭스 룸브레라스’와 여러 차례 체포된 일이 있는 ‘마누엘 물라’의 아내 ‘카탈리나 포르테사 메 물라’가 진리에 관심을 나타내는 한 부인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중에, 그 집 건너편에 살고 있는 한 경찰관이 자기 집에서 나와 계단을 내려갔다. 그 증인들이 그 집을 떠날 때, 그 경찰관이 그들을 체포하기 위하여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들은 각각 1,000‘페세타’의 벌금에 처하여졌다.

1963년 11월 14일, ‘자이메 사스트레’와 ‘안토니아 갈린도’가 호별 방문 전파를 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들은 모르고 한 경찰관에게 성서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던 것이다. ‘자이메’의 아내가 그 경찰에게 가서 자기 남편의 행방을 물었을 때, 그들은 그가 구금되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였다. 그러나 그 자매는 지사 사무실로 가서, 비서를 통해 자기 남편이 경찰서에 붙잡혀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리하여 그 자매는 남편에 관해 알아 보려고 그리로 갔으며, 다음번 그의 남편이 잡히게 되면 3개월의 형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 다음 그 경찰관은 잠을쇠를 채운 후, 열쇠를 던져 버렸다. 그 자매에게 남편을 면회하는 일이 허용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자매와 그의 남편 모두에게 벌금이 내려졌다. 그리고 그들의 항소는 지사에 의하여 기각되었다.

1963년 12월 25일, ‘잉카’ 회중의 다섯명의 형제들은 임명되지 않은 ‘페트라’ 시에서 증거하고 있었다. 그 형제들은 ‘잉카’로 돌아가는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그 날 아침 그들이 만난 일이 있는 한 광신적인 사람이 그 역에 잠간 나타났다가 가 버린 것을 알게 되었다. 그로부터 얼마 있지 않아 경찰관이 하나 나타나 그 형제들 모두에게 경찰서로 자기를 따라오라고 하였다. 그들은 수색을 당하였고, 성서를 포함하여 모든 책들을 압수당하였다. 형제들은 모두 진술서를 작성해야 하였으며, 다음에 그들은 석방되었다. 뒤이어 그들 중 네명은 벌금형에 처하여졌다.

대법원의 판결

1965년 12월 10일, 대법원은 ‘말료르카’ 사건 몇 가지를 한꺼번에 판결하였다. 그리하여 대법원은 ‘펠릭스 룸브레라스’와 ‘카탈리나포르테사 데 물라’, ‘하이메 사스트레’와 ‘안토니아 갈린도’ 및 ‘페트라’에서 체포되었던 ‘잉카’의 네명의 형제들의 사건에 대한 판결을 하급법원에 송달하였다.

이 모든 사건들에 대한 일괄적인 판결은 증인들 자체가 그들의 종교를 개인적으로 갖는 것이 금지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적극적이고 의식적인 개종 활동을 하는 자들로서 스스로를 공개적으로 나타냈으며, 선전과 가정들을 수차 방문하는 일을 통하여 공개적인 활동을 하였으며, 그로 말미암아 그들은 분명히 금지된 한계를 범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 상소는 기각되었으며, 그 모든 사건은 패소하였다.

당국자들이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하여 적대적인 입장을 취한 것이 분명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종들에 대한 위협과 빈번한 구속 조치를 사용하여 그 존재를 말살시키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다. ‘잉카’에 있는 한 형제는 자기가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한 경사를 찾아갔었다. 대화 도중, 그 경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까지는 우리가 당신들에게 아무런 해를 가하지 않으려 했오. 그러나 이제 우리가 받은 지시는 당신들을 ‘근절시키라’는 것이오. 이 지시를 따르지 않는다면 내가 이 경찰복을 벗어야 할 판이오. 그러니 난 당신들 모두의 동태를 똑똑히 살필 것이요. 우리는 지사로부터, ‘잉카’ 내에 있는 집들을 찾아가서 모든 주인들에게 당신들이 찾아오면 우리에게 알리도록 경고하라는 지시를 받았오. 당신들을 발견하는 대로 수갑에 채워 즉시 구금시키라는 지시를 받았단 말이오.”

교직자들의 책임

물론, 이러한 박해의 배후에는 ‘가톨릭’ 교회가 있었으며, 그 교직자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학대를 받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였다. 예를 들어, 1962년 9월 18일, ‘말료르카’의 주교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좋은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알도록 도와 주신 것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선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거짓으로 만들고 있는 자들이 누구인지 알도록 도와 주신 데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그들을 보십시오! 감옥에 들어가 있으며, 박해를 받고 있고 형벌을 받고 있읍니다. 이제 ‘가톨릭’교를 돌아 봅시다. 이것이 계속 참 종교라는 사실에 대하여 우리는 다시 한번 하느님께 감사하는 바입니다.” ‘가톨릭’의 독점에 대하여 하나님께가 아니라 지사에게와 경찰에 감사를 표해야 하였을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을 반대하여 열광적으로 투쟁한 사람은 ‘잉카’ 시의 ‘크리스토 레이’ 교구 사제였다. 그 역시 증인들을 반대하는 ‘라디오’ 방송을 하였으며, 하나님의 백성을 비방하는 기사를 출판하였다. 그뿐 아니라, 그는 집집으로 다니면서 여호와의 증인들이 전한 책들을 수집하여 태워 버렸다. 10년 후 이 모든 일과는 상반된 이상한 결과가 나타났다. ‘루이스 살라사르’는 1971년에 ‘잉카’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는데, 우연히 이 사제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는 안으로 초대되어 성서 제목에 관해 간단히 이야기를 나눈 후, 그 사제는 자기가 과거에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하여 취한 반대 행동에 대하여 용서를 빌고 싶다고 하였다. 그는 이제야 자기의 잘못을 깨닫게 되었으며, 자기의 적그리스도적 태도를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 사제는 ‘살라사르’ 형제에게, 자기가 서가에 협회의 책들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서 계속하여 “만일 이 세상에 선한 사람들 즉 성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여호와의 증인들 가운데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박해로 인하여 강화됨

‘말료르카’에서의 그 박해를 받는 기간에 여호와의 백성들은 오히려 강화되었다. 1972년 12월 ‘말료르카’ 내에 500명, ‘이비사’ 섬에 26명 및 ‘메노르카’ 섬에 40명의 전도인들이 있었다. 오늘날 ‘말료르카’에는 950명의 전도인들이 있으며, ‘이비사’에는 61명, ‘메노르카’에는 91명의 전도인들이 있다. 흥미있게도, 전국의 평균이 인구 908명당 전도인 1명이 있는 데 비하여 ‘팔마’에는 인구 385명당 전도인이 1명이 있다.

‘스페인’ 전국을 통하여,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눈에 보이는 조직으로 인해 1958년부터 1967년 사이의 그 특별히 어려웠던 기간에 자기의 백성을 도와 주셨다. 그 기간 중, 주요 도시들 대부분에는 어떤 형태로든 박해가 있었다. 여기에 소개된 이야기들은 ‘파이오니아’들과 전체 여호와의 증인들이 당한 학대 가운데 얼마의 예에 불과하다.

기타 여러 사건들 가운데서 ‘후엘바’와 ‘갈리칸테’에서도 몇가지 사건들이 발생하였다. ‘만레사’(바르셀로나)에서 1962년에 함께 성서 연구를 했다는 이유로 14명이 체포되었으나 나중에 그 혐의가 풀렸다. ‘사라고사’에서는 특별 ‘파이오니아’인 ‘막시모 물시아’와 그의 아내가 1960년에 15일 동안 투옥되었었으며, 한 미국인 가족이 그들의 집에서 성서 집회를 열도록 허용하였다고 해서 사제와 경찰로부터 괴롭힘을 받았다. 1961년에 선교인이 ‘카알 워어너’의 추방 사건을 포함하여 이러한 사건들을 열거하려면 끝이 없다. 그렇다. 박해 사건은 부지기수이며, 그 10년간 ‘스페인’ 전역에서 계속 괴롭힘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어려움들은 형제들의 믿음을 강화시켜 주었으며, 여호와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을 계속하도록 도와 주셨으며, 그 결과 증가가 계속되었다.

교직자들—‘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양쪽—의 반대는 결코 중단된 일이 없었다. 물론, 그들은 여러 해 동안 내무상의 적극적인 협조를 받았다. 정부가 종교 자유법을 준비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속셈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명백한 증거로서, 우리는 내무성 내의 총무국장이 발행한 1966년의 회람 제5호를 인용할 수 있다. 1966년 2월 24일자의 그 공문은 모든 지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는데 그 일부는 다음과 같다.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하는 종파의 성원들이 전국에서 벌리고 있는 불법적인 개종 활동을 억제하는 데 있어서 좀더 적극성을 띨 필요가 있다. ··· 그 이유는, 현재의 벌과금 부과 방법으로는 그러한 활동을 중단시키는 데 충분한 효과를 거둘 수 없기 때문이다. ··· 따라서, 본인은 지사 제위께 그러한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는 앞서 언급한 그 종파에 속한 모든 성원들을” 부랑자 단속 경우로 취급하여 법원에 고발하도록 “내무상의 지시에 따라 촉구하는 바이다.” 18개월 후, 종교 자유법이 발효되었으며,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한 일반적인 태도가 보다 호의적이 되고, 또한 관리들의 태도 역시 그 새로운 법으로 인하여 유연하게 되었다.

저명한 법률 학자가 법적 투쟁을 분석하다

극심했던 박해 기간 중 여호와의 증인들이 치룬 투쟁은 그 나라 법조계에서 뚜렷한 증거 역할을 하였다. 많은 변호사들과 판사들은, 법적 그리고 종교적 자유를 얻기 위해 가능한 모든 사건을 대법원에 상소하는 우리의 집요한 노력으로 인해, 하나님의 백성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과거에 ‘살라망카’ 대학교의 법대 교수였으며, 현재는 ‘사라고사’ 대학교에 있는 저명한 ‘스페인’ 법률학자 ‘로렌소 마르틴-레토르틸로’에 의해서 언급되었다. 1970년에 그는 ‘종교의 자유와 공공 질서’라는 한 법률 논문을 출간하였다.

대법원이 ‘스페인’ 내에서의 개인의 종교적 표현에 관한 정의를 내리고, “‘스페인’의 영적 연합”이라는 말을 해석하게 한 많은 사건들을 분석한 78‘페이지’에 달하는 논문으로 그것은 대법원에 제출되었다.

이 법률학자는 자기가 고려한 사건의 피고인들과 관련된 연구 결과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기의 행동은 공공 질서를 위반하는 것으로서 제재와 기소의 대상이 된다. 성서 또는 다른 종교 경전을 설명하기 위해 집회를 갖는 일; 그 종교를 선전하는 책을 소유하는 것; 그 종교를 선전할 목적으로 벗들이나 모르는 사람들의 가정을 방문하는 일;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여행을 하거나 사람들을 접촉하는 일 등등. 그러므로 그것은 여러가지 집회들과 관련해서 발생하는 종교 축제 행위 ··· 또는 종교적 전파 행위와 같은 일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의 사건들이 매 ‘페이지’마다 참조되어 있지만, 이 논문의 제3장은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한 특별 규제 범위”라는 구체적인 제목이 붙여졌다. 그 일부는 다음과 같다: “법률을 10년간 연구하고, 종교적 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공공 질서라는 구실의 정부의 규제 조치를 관찰한 사람의 주의를 끄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 고려된 거의 모든 사건들에 있어서, 관련된 사람들이란 하나의 종교 집단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행정적 판결에 대하여 항소를 한 사람들은 특히 모든 사건들에 있어서, ‘여호와의 증인’ 성원들이다.”

이러한 결론에 이른 ‘마르틴 레토르틸로’ 씨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제기한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자신들의 종교 활동을 수행한 비‘가톨릭’ 종교 가운데 유일한 집단인가? 정부는 이 집단을 특별한 위험성, 중대성, 활동 또는 기타 어떤 환경상의 이유로 특별한 주목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 알다시피, 이러한 질문들은 현재 내가 해결할 수도 없고, 해결하려고도 하지 않는 질문들이다. ··· 그러나 연구 기간 중 그리고 종교 문제와 관련해서, 규제 조치가 단호한 신앙 고백을 하는 종교 단체의 성원들에게 집중되어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몹시 당황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마르틴 레토르틸로’ 씨가 자신의 분석을 통해 도달한 이러한 기본적인 결론 중 한 가지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공적인 박해를 받는 이유는 그들의 적극적인 개종 활동, 양심적 병역 거부자로서의 그들의 입장 및 그들의 일부 출판물들이 ‘스페인’ 정부를 비난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여호와의 증인들은 사실 정치 문제에 있어서 중립이다. (요한 17:16) 여하간에,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는, 만일 ‘프로테스탄트’ 종파가 공적으로 박해를 받지 않는다면, 그들은 분명히 공개적인 전파 활동을 하지 않는 것이며, 그들이 그리스도인 중립을 유지하지 않는다는—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다인 추종자들에게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두 가지 조건들임—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천국 전도 학교의 유익

박해가 심하던 그 여러 해 동안, 영적인 도움과 인도를 주기 위한 온갖 노력이 수행되었다. 따라서 1961년 12월 ‘스페인’의 협회 지부 사무실은 천국 전도 학교의 첫 번째 학급을 마련하였다. 물론, 그 학교는 다른 나라에서와 같이—한달 또는 그 후에는 두 주간—열릴 수 없었다. 그와는 달리, 천국 전도 학교는 2개월 동안 밤에만 가져야 하였다. 처음 두 학급은 ‘바르셀로나’에서 열렸다. 그리고 주의를 끌지 않기 위하여 그 학급은 12명 내지 15명의 학생들로 구성되었다.

1962년부터 1968년 4월까지 347명의 종들과 ‘파이오니아’들이 천국 전도 학교에서 훈련과 교훈을 받았다. 천국 전도 학교가 ‘바르셀로나’에서 열리고 있는 동안 지부 사무실 직원들은 개인적으로 그 감독자들과 사귈 수 있었으며, 그들의 문제들을 들을 수 있었다. 또한 그 강습에서 다섯명의 ‘벧엘’ 성원들이 강의를 맡았다. 현재까지 ‘스페인’에서는 1,342명이 천국 전도 학교에 참석하였다.

대회로 인하여 고무받음

그 “지하” 활동 기간 중, 우리는 순회 대회를 개최하기 위한 특별한 마련을 통하여 영적 양식을 계속 받았다. 일시에 모든 형제들이 함께 모이는 것이 위험하였으므로, 특별한 절차를 이용하여 대회 ‘프로그램’들을 한 순회구 내에 있는 모든 회중들에 전달할 수 있었다. 감독자들은 ‘프로그램’ 사본들을 받고, 다음에 대회에 참석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 대회 참석자들은 100명 내지 200명선을 유지하였다. 더구나 대회 장소는 지혜롭게 선택되었으며, 보통 숲속, 산 또는 해변과 같은 야외를 택하였다. 또한 동네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라면 개인 집도 이용되었다. 여하튼 참석하는 감독자들은 ‘프로그램’을 주의깊이 따라 보고 ‘노우트’를 하였다. 후에 그 대회 ‘프로그램’은 그들의 회중에서 반복되었다.

그 대회 장소가 경찰의 눈에 발견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는 깊은 주의를 기울여야 하였다. 1969년에 한 순회 대회가 진행되는 동안 문제가 일어났는데, 그 때 ‘세빌랴’ 경찰이 한 개인 집의 뜰에서 큰 모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경찰차와 ‘트럭’이 들이닥쳤다. 약 250명의 형제들과 관심자들이 참석해 있었다. 모든 남자들과 독신 자매들은 심문을 받기 위해 경찰서로 연행되어 갔으며, 책들은 모두 압수당한 다음 결코 돌려 받지 못하였다. 10명의 형제들은 4일간 갇혀 있었다. 체포된 사람들 중 하나는 호기심 때문에 참석하였던 한 자매의 반대하는 남편이었다. 그는 그 형무소 내에서의 형제들의 행실에 깊은 감명을 받고 석방되자 마자 연구를 시작하였으며, 침례받은 형제가 되었다. 이 경찰의 습격은 전세계에 알려지게 되었고, 아마도 그로 인해서 형제들에 대한 법적인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던 것같다.

해외에서 개최된 지역 대회들에 참석하다

이 박해 기간 중, 지역 대회에 관하여는 어떠하였는가? 형제들은 어떻게 그러한 ‘프로그램’으로부터 유익을 얻었는가? 매년 특별 열차와 ‘버스’를 전세내서 형제들은 그러한 대회들에 참석하기 위해 ‘프랑스’, ‘이탈리아’, 또는 ‘스위스’로 여행하였다.

예를 들어, ‘스페인’ 형제들은 1969년에 ‘로마’에서 열린 한 대회에 참석하게 되어 기뻐하였다. 그들 중 대부분은 전에 ‘가톨릭’ 신도들이었기 때문에, 교황청 “뒷뜰”이라고 할 수 있는 곳에서 그들이 대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흥분이 되었다. 물론 역설적인 상태는 “교황보다 더 철저한 ‘가톨릭’ 나라”라는 ‘스페인’ 내에서 대회를 열 수 없다는 사실이 있기는 했지만! 부언한다면, ‘로마’에 있는 동안 일부 ‘스페인’ 증인들은 한 때 초기 그리스도교와 관련이 있었던 ‘카타콤’을 방문하였다. 이것은 매우 흥미를 끌었는데, 이는 ‘스페인’ 형제들이 그 때까지도 박해자들을 피해 숨어서 비밀리에 집회를 보는 “카타콤” 시대에 있었기 때문이다.

1970년 7월, 여호와의 증인들은 ‘스페인’ 내에서 법적 인가를 받았으며, 그리하여 ‘스페인’ 내에서 대회들을 개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1971년 지역 대회는 ‘프랑스’의 ‘툴루스’에서 개최되도록 이미 계약이 체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스페인’ 내의 ‘콜레라’의 위협으로 인하여, ‘프랑스’ 당국은 ‘스페인’ 대회 인가를 거절하였다. 그리하여 ‘바르셀로나’에서 적합한 대회 장소를 찾기 위한 즉각적인 조치가 취해졌다. 여러 가지 커다란 난관을 겪은 후, 오래되고 지저분한 두개의 ‘바르셀로나’ 투우장을 빌릴 수 있었는데, 하나는 ‘라스 아레나스’라는 곳이었다. 시간이 없었으므로, 형제들은 정말로 그 투우장을 청소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였다. 사실 그 투우장 관리인은 말하기를, 자기는 30년 동안 이 투우장이 이토록 깨끗한 것을 본 일이 없었다고 하였으며, 그는 형제들의 정신을 보고 탄복하였다.

그러나 다음에 “폭탄”이 터졌다. ‘바르셀로나’ 지사가 경질되었는데, 새로운 지사는 절차상—행사가 있기 만 10일 전에 허가를 신청하지 않았다는 사실—의 이유로 그 대회 개최를 허락해 주기를 거절하였다. 이러한 소식은 대회가 시작되기 하루 전에 그 투우장에서 봉사하고 있는 형제들에게 전해졌다. ‘스페인’ 내의 먼 지역에 살고 있는 많은 증인들은 이미 대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오고 있었다. 그들은 ‘바르셀로나’에 도착하여 그러한 섭섭한 소식을 듣게 되었다. 하지만 전형적인 ‘스페인’ 사람들의 융통성을 살려, 그들은 그 여행을 관광 여행으로 치고, 지방 왕국회관들과 ‘벧엘’ 및 기타 명소들을 관광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기들의 여행으로부터 얼마의 영적 유익을 얻었다. 후에, 여러 곳에서 대신 대회들이 개최되었으며, 도합 20,176명이 참석하였다. 이들 대회에서 483명이 침례를 받았다.

그 후 여러 해 동안 우리는 그리스도인 대회들을 개최하는 데 여러 가지 어려움들을 당하였다. 하지만 여호와의 도움으로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러한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었다. 지금껏, 1970년대 중에 여러 가지 놀랍고 영적으로 세워 주는 대회들이 개최되었다.

지난번 1973년에 ‘스페인’ 내에서는 국제 대회를 열 만한 적절한 대회장을 얻을 수 없어서 ‘스페인’ 형제들은 해외로 나가지 않으면 안되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시 한번 비행기, 기차 및 ‘버스’를 전세내고, 자가용을 이용하여 19,000명 이상이 ‘벨기에’에 있는 ‘부뤼셀 세계 박람회장’의 대규모 대회장에 모였다. 이 “하나님의 승리” 국제 대회는 ‘스페인’ 증인들에게 기쁨이 되었는데, 그들은 ‘프랑스’, ‘플란더스’, ‘포르투갈’어를 말하는, 여러 나라에서 온 31,000명의 형제들과 함께 어울릴 수 있었다. 참으로 감동적인 일은, 1,273명의 새로운 ‘스페인’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헌신의 상징으로 침례를 받은 사실이었다!

그 이후, 지역 대회들은 ‘살라만카’, 기혼’, ‘사바델’, ‘알메리아’ 및 ‘에스테포나’ 등에 있는 축구 경기장 그리고 ‘바르셀로나’, ‘마드리드’ 및 ‘마르벨라’ 등에 있는 투우장을 포함하여 ‘스페인’ 내의 여러 도시들과 지방에서 개최되어 왔다. 대회 때마다, ‘스페인’ 형제들은 가치있는 경험을 얻게 되었으며, 1978년에는 ‘바르셀로나’에서 국제 대회가 개최되었고, ‘스페인’ 형제들은 여러 나라에서 온 동료 신자들, 특히 과거 수십년 동안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및 ‘벨기에’ 등에서 자기들에게 후대를 해 준 형제들을 열심히 섬겼다.

여호와의 증인이 1970년에 합법화되다!

1967년에 종교 자유법이 통과되기 전 여러 해 동안, 여호와의 증인은 ‘스페인’ 내에서 그들의 조직을 합법화시키기 위해 노력해 왔다. 1956년에 최초의 시도를 하였는데, 그 때, ‘바르셀로나’ 지사에게 승인을 얻기 위해 탄원서 및 정관을 제출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진전이 없었다. 1965년에 또 한차례의 시도가 있었는데, 그 때 ‘노워’ 형제는 ‘스페인’ 정부에 탄원서를 제출하여, 협회와 여호와의 증인이 합법화되기 위해 어떠한 절차를 밟아야 하는지 문의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아무런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1967년 6월 28일, 의회에서 장시간의 토론과 법률 및 종교 전문가들의 장기간의 준비를 거쳐서 종교 자유 법안이 채택, 통과되었다. 비록 그 법이 종교적 자유를 허락하는 것이긴 하지만, 또한 종교를 통제하는 역할도 하였다. 왜냐 하면 그 법은 ‘로마 가톨릭’을 제외한 각 종교가 법무상의 검토를 받도록 그 종단 자체를 공개하도록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그 법은 성원들의 엄격한 통제 및 수입원과 지출에 대한 명세서를 포함하여 매년 회계 보고를 제출하도록 마련하였다.

‘프로테스탄트’ 종파들은 그 법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법적 승인 신청을 지연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정부는 1968년 5월까지 등록 기간을 연장하였다. 하지만 ‘왙취 타워 협회’는 아마도 첫 번째로 등록 신청을 하였을 것이다. 즉 1967년 12월 12일에 신청서를 제출하였다. 1969년 5월 31일자 법무부 일람표에 의하면, 등록된 첫 번째 종교 단체는 개혁 장로교로서 그 종단의 숭배 장소 한 곳과 등록된 교직자 한명이 1968년 5월에 인가를 받았다. 그 일람표에는 105개의 종단—‘브레드린’,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르몬’, ‘유대’교, 오순절교, 성공회, 침례교, 안식교, 하나님의 성회, ‘에반젤리칼’, 회교 등—사실상 모든 종교들이 열기되어 있었는데, 여호와의 증인 하나만 빠져 더욱 이채를 띠었다. 여호와의 증인의 법적 승인은 1970년 7월 10일까지 기다려야 하였다. 그 때 인가된 종교들에 관한 두번째 일람표가 나왔는데, 여호와의 증인은 131번째였다. 그러나 드디어 ‘스페인’에서 여호와의 증인이 법적 인가를 받은 것이다!

최근의 일람표는 1975년 12월 15일에 발표되었는데, 거기에는 238개의 종단이 들어 있다. 이 마지막 책자는 83면으로 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각 종단이 소재하는 도시들 및 읍들이 기재되어 있으며 또한 숭배 장소들도 나와 있다. 여호와의 증인은 그 일람표 가운데 총 37‘퍼센트’의 면을 차지하고 있는데, 말할 필요도 없이 ‘스페인’ 내에서는 ‘가톨릭’ 교회 다음으로 가장 큰 종교로 나와 있다.

합법화됨에 따라서 즉시 왕국회관을 개설하고, ‘벧엘’집을 위한 적합한 장소를 얻기 위한 계획이 추진되었다. 첫 번째 왕국회관은 ‘바리오 델 필라르’에서 1970년 12월 19일에 봉헌되었으며, 현재는 ‘마드리드’의 한 번화한 지역에 새로운 건물을 세울 계획이다.

1971년 2월에, ‘노워’ 형제가 ‘스페인’을 방문하여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서 도합 14,000명의 참석자들이 모인 공개적인 청중 앞에서 연설하였다. 그는 자기가 이렇게 많은 ‘스페인’ 형제들에게, 그것도 ‘스페인’ 내에서 실제로 연설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노워’ 형제는 그 방문 기회를 이용하여, 지부 사무실로 사용할 만한 건물들을 검토하고 현재 지부 사무실과 ‘벧엘’이 위치해 있는 ‘바르셀로나’의 ‘칼레 카르도’ 65번지에 소재하는 6층 건물을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일단 그 건물을 사들인 다음, 그 건물을 개조하는 작업을 조직하였다. ‘바르셀로나’ 회중에서 자진 봉사자들을 초대하였으며, 목공, 벽돌 쌓는 일, 미장일, 칠일 등의 기술이 있는 ‘파이오니아’들을 불렀다. 그 건물은 원래 공장으로 설계되어 지어졌으나 사용된 일이 없는 새 건물이었다. 그리하여 내부에는 간막이 벽도 없었고, 아무런 시설도 없었다. 따라서 협회 건축 기사는 아무런 시설물이 없는 상태에서 ‘노워’ 형제의 제안에 따라 각 층을 설계할 수 있었다. 형제들은 16명의 봉사자들을 유숙시킬 수 있는 ‘벧엘’집과 사무실을 완전히 시설하는 데 13개월 동안 일하였다.

1972년 6월 2일, ‘노워’ 형제는 이 새로운 ‘스페인’ 지부 건물을 봉헌하였으며, 다음날, 그는 ‘바르셀로나’에서 제일 큰 ‘라 모누멘탈’ 투우장에서 13,350명의 형제들에게 특별 강연을 하였다. 이번 방문과 그 투우장에서의 연설이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으며, 이것은 또한 여호와의 백성에 대한 반대를 고조시켰다. “상류 사회”의 어떤 인물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이러한 승인을 받은 사실을 불쾌하게 생각하였으며, 그들은 이 깃털이 새로 난 종교의 “날개를 잘라 버리라”고 종교 자유 위원회에 압력을 가하였다. 그 이후, 우리는 지역 및 순회 대회 장소를 사용하는 허락을 받아내는 데 얼마간의 어려움을 당하였다.

합법화됨에 따라,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왕국회관들이 개설되었다. 1970년 12월부터 1977년 5월까지 법무부에 의하여 482개의 왕국회관이 인가를 받았다.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및 ‘발렌시아’와 같은 대도시들에서는 세가 비쌌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회관들은 재정적 짐을 나누어지기 위해 보통 여러 회중들이 함께 사용한다. 현재 ‘바르셀로나’ 시내에만 16개의 왕국회관이 있으며, 이 회관들을 50개의 회중이 사용한다. 또한, ‘바르셀로나’ 도 내에 있는 92개 회중들은 75개의 왕국회관을 사용하여 그들의 집회를 보고 있다. ‘마드리드’에서는 46개 회중이 25개 회관을 사용하고 있다. 우리는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에 대하여 그리고 이러한 훌륭한 집회 장소들에 대하여 여호와께 감사하고 있다.

메시야 왕국이 ‘안도라’에서 전파되다

이제 우리는 ‘스페인’과 ‘프랑스’ 국경 사이에 끼어 있는 조그마한 산간의 한 공국(公國)에 관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스페인’ 변경에는 ‘세오 데 우르겔’이라는 마을이 있다. ‘안도라’의 중심 인물은 ‘프랑스’ 대통령과 이곳 주교이다. 이 이중 통치권은 ‘가톨릭’의 ‘세오 데 우르겔’ 주교의 세력과 ‘프랑스’의 ‘획스’ 백작 군대 사이의 유혈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1278년에 수립되었다.

오늘날 ‘안도라’에는 32,500명의 인구가 있으며, 그들 대부분은 끊임없이 밀려드는 관광객을 상대하는 상점들과 ‘호텔’들에서 일을 한다. ‘안도라’ 내의 물가는 ‘스페인’이나 ‘프랑스’에서보다 훨씬 싸다. 그러므로 상업이 주된 활동이다. 일부 지방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양치는 일, 농업 및 연초 재배를 하고 있지만, 이러한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수는 점점 줄어들고 있으며, 전체적인 분위기는 물질주의이다.

일찌기 간헐적인 증거가 행해지긴 했지만, 1962년에, 한 ‘스페인’ 가족이 ‘바르셀로나’에서 ‘안도라’로 이사하기로 결정하였으며, 그곳에서 조직적으로 전파를 시작하였다. 그 가족은 ‘마누엘 에스카밀라’ 가족이었다. 그들은 경제적 및 건강상의 문제가 있었지만, 7년간 ‘안도라’에 머물러 있었으며, 그 조그마한 그리스도인 집단은 조금씩 조금씩 그곳에서 발전을 하였다.

맨 처음 관심을 나타낸 사람은 ‘로세 보르나’였는데, 그는 ‘바르셀로나’에 사는 자기 숙모에게서 증거를 받았으며, ‘안도라’에 종종 찾아오는 ‘프랑스’ 자매로부터도 권유를 받았다. ‘에스카밀라’ 가족은 집회를 갖기 시작하였으며, ‘로제’를 포함하여 4명이 참석하였다. 문제들이 급속히 생기기 시작하였는데, ‘로제’는 직장을 잃고 하숙에서도 쫓겨났다. 그 다음, 그는 진리에 대하여 호감을 나타내지 않는 자기 약혼자에 대하여도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는 진리를 택하였으며, 약혼은 파기되었다. 그러나 얼마 안있어, ‘바르셀로나’에 있는 형제들은 그와 약혼하였던 그 남자에게 증거할 수 있었으며, 그는 진리를 받아들였고, 1964년에 그와 ‘로제’는 모두 침례를 받았다. ‘마누엘 에스카밀라’가 자기 가족과 함께 1969년에 떠나게 되었을 때, 이 형제 즉 ‘미구엘 바르베’는 그 집단의 책임자가 되었다. 1971년 11월에, 그와 그의 아내는 ‘안도라’와 ‘세오 데 우르겔’ 구역을 돌보도록 특별 ‘파이오니아’로 임명되었다.

‘프랑스’와 ‘스페인’에는 종교적 자유가 있지만, ‘안도라’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이 왕국회관을 개설할 허락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은 흥미있는 점이다. 현재 ‘안도라’에는 84명의 전도인들로 이루어진 발전하는 하나의 회중이 있다. 그들이 왕국회관을 개설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러한 일에 방해를 놓는 ‘세오 데 우르겔’ 주교의 보수적인 영향 때문이다. 하여간 그곳에서 봉사하고 있는 두명의 장로들에게는 무거운 짐이긴 하지만, 그곳 형제들은 개인 가정에서 계속 집회를 보고 있다.

‘모로코’에 있는 ‘스페인’령(領)들

‘모로코’의 북부 지중해 연안에는 두개의 ‘스페인’령—‘탕헤르’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세우타’와 동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메릴라’가 있다. ‘스페인’군은 이 영토에 수비대로 주둔하고 있었다. 전에 ‘바르셀로나’에 있었던 ‘리카르도 구티에레스’와 ‘콘수엘로 구티에레스’는 전도인이었지만, ‘세우타’에 왕국 전도인들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전도인에서 특별 ‘파이오니아’ 봉사에 직접 임명되었다. ‘리카르도’는 군인으로 한번 이곳에 왔던 일이 있으며, ‘프랑스’어와 약간의 ‘아랍’어를 할 줄 알았다. ‘스페인’어와 더불어 이들 두 가지 언어는 ‘세우타’에서 통용되는 언어들이다.

‘구티에레스’ 부부는 7세된 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임명을 받아들였으며, 그들은 1969년 1월부터 ‘세우타’에서 봉사하기 시작하였다. 6년간의 가치있는 봉사를 하였으며, 충실한 본을 세운 ‘콘수엘로’는 암으로 사망하였다. 그들은 현재 31명의 전도인들과 3명의 특별 ‘파이오니아’가 있는 현재의 ‘세우타’ 회중의 기초를 놓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 회중은 또한 왕국회관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북‘아프리카’ 전체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집회 장소로서는 유일하게 합법적인 것이다.

‘메릴라’에는 ‘유대’인과 ‘모슬렘’ 및 ‘스페인’인 사회가 있다. 따라서 1970년에 그곳에 임명된 ‘파이오니아’들은 봉사하는 데 흥미있는 구역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 그들은 호별 방문 봉사를 막으려고 하는 경찰들과의 문제를 직면하였다. 그러나 ‘스페인’ 협회 지부 사무실이 법적 조치를 취한 후 그들은 더 이상 괴롭힘을 당하지 않게 되었으며 압수되었던 모든 서적들도 돌려 받았다.

그 때부터, 그 수비대 주둔 도시에 지배적인 군인 정신을 대처해 나가는 데 있어서 여러 가지 문제들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53,000명의 ‘메릴라’ 인구 가운데서 20명의 왕국 선포자들이 나왔다.

인구는 ‘스페인’인들과 ‘아랍’인들이 섞여 있으며, ‘스페인’인들은 줄어들어가고 있는 반면 ‘아랍’인들은 늘어간다. 특별 ‘파이오니아’들은 그곳에서 훌륭하게 일하고 있으며, 이 보고서를 쓰고 있는 당시 ‘모슬렘’ 여신도들과 몇건의 성서 연구가 진행되고 있었다.

검열이 누그러지다

1970년에 여호와의 증인의 협회가 법적인 인가를 받음에 따라서, 우리의 모든 출판물을 정부의 검열관들의 손에 제출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대부분의 출판물의 배포가 승인을 받은 반면, 「읽기와 쓰기 학습」 책과 한때 「범사에 헤아리라」 책과 같은 일부 책들은 금지 품목 가운데 들어 있었다. 일년 동안, 「파수대」와 「깨어라!」 전 호 중 절반 이상이 공중에 배포하는 일을 금지당했다. 그러나 협회는 법적으로 몇 건을 상소하였으며, 현재 우리는 일년 이상 아무런 제지를 받는 일 없이 계속해오고 있다. 틀림없이 여러 가지 분야에서의 전체적인 통제의 이완이 이곳에서의 우리의 입장에도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월간인 「우리의 왕국 봉사」—이곳에서는 「누에스트로 세르비치오 테오크라티코」(「우리의 신권적 봉사」)라고 부름—는 현재 60,000부 나가고 있다.

통치체 성원들의 방문

지난 몇년 동안 여러 통치체 성원들의 격려적인 방문을 받았으며, 이러한 방문에 대해 ‘스페인’ 형제들은 크게 감사하게 생각하였다. 1974년에 ‘N. H. 노워’ 형제와 ‘F. W. 프랜즈’ 형제가 함께 ‘스페인’을 방문하였으며, ‘바르셀로나’의 한 투우장에서 큰 무리의 형제들에게 연설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날짜가 12월 25일의 종교적 명절과 같다고 하여 당국자들은 허가를 해 주지 않았다. 신속히 계획이 변경되었으며, ‘바르셀로나’에서 21‘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곳에 대회 회관으로 구입하려고 고려중인 한 사용되고 있지 않는 공장에서 마련된 특별 모임에 모든 ‘파이오니아’들과 장로들을 초대하였다. 5,000명 이상이 메운 가운데 사업의 전세계적인 확장에 관한 ‘노워’ 형제의 연설을 들었으며, 다음에 ‘프랜즈’ 형제의 시편 91편에 대한 해설에 주의가 집중되었다. 만 일년 후, 1,300석에, 식당, 침례장이 갖추어진 훌륭한 대회장으로 변모된 그 동일한 건물을 봉헌하기 위해 ‘레이몬드 프랜즈’ 형제가 초대되었다.

그 바로 전인, 즉 1975년 11월에 한 대회 회관이 ‘F. W. 프랜즈’ 형제에 의하여 ‘마드리드’에서 봉헌되었다. 그 건물은 전에 극장으로 사용되던 것이었다. 또 다른 방문으로서는 1974년에 ‘M. G. 헨첼’ 그리고 1976년에 ‘L. K. 그린리스’ 형제의 방문이 있었다. ‘헨첼’ 형제는 ‘바르셀로나’의 한 투우장에서 22,417명의 형제들에게 연설하였다. 이제까지 있었던 단일 집회 참석수로 최고를 기록한 것은 ‘L. A. 스윙글’ 형제의 방문이었는데, 1977년 5월 1일 ‘바르셀로나’의 ‘라스 아레나스’ 투우장에 27,215명의 청중이 참석한 것이었다. ‘스윙글’ 형제는 또 ‘마드리드’와 ‘카나리’ 제도에서 열린 집회에서도 연설하였으며, 따라서 그의 네 차례의 연설의 총 참석수는 45,617명에 달하였다.

신문과 ‘라디오’에 의한 보도

많은 경우, 신문은 증인들과 그들의 대회를 취급하는 데 공정하고 불편부당하였다. ‘마드리드’의 「엘파이스」 신문은 한 변호사인 ‘훌리오 리코테’ 형제와의 회견에 근거하여 증인들의 가르침과 역사를 위해 한 면 전체를 할애하였다. 여러 기자들이 증인들을 변호하는 기사를 썼는데, 1976년 11월 12일자 「수르」지에 기고한 ‘가톨릭’교인의 경우는 다음과 같다: “증인들은 그들의 해석면에서 오해를 받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을 지탱시켜 주는 그 굉장한 믿음을 부인할 수 없다. 종파가 아닌, 이 종교 내에는 거짓말, 음행, 또는 도적질 등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이 세가지 죄악이 침투할 여지가 없다. 참으로 세상은 이러한 면에서 증인들로부터 배워야 한다!” “‘산탄데르’ 주교와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제하에 「호하 델 루네스 데 기혼」지(1976년 6월 21일자)에 실린 또 다른 기사는 다음과 같다: “뜻밖에도 여호와의 증인들은 ··· 대부분의 ‘가톨릭’교인들보다 더 깊이 있고 신중한 성서 지식들을 가지고 있다.”

군복무에 대한 양심적 거부와 수혈 거부 문제로 인하여, 증인들은 종종 ‘뉴우스’감이 되어 왔다. 고 ‘프랑코’ 장군의 사위인 저명한 ‘스페인’의 한 외과 의사는 수혈 문제를 토론하기 위하여 의학 문제에 대한 그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다른 한명의 의사와 사제와 함께 증인들을 초대하였다. 그 ‘프로’에 참여한 형제들 가운데는 그 문제에 대하여 우리의 입장을 훌륭하게 변호할 수 있는 변호사가 있었다. 또 한번의 경우에는, 한 ‘바르셀로나’ 라디오 방송국이 회견과 청취자로부터의 질문을 다루기 위하여 증인 대표자들을 초대하였다. 이 두번의 방송은 정말로 대중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구실을 하였다.

‘텔레비젼’의 경우는 ‘가톨릭’ 교회가 이 보고서를 쓰는 지금까지도 정부가 통제하는 ‘텔레비젼’ ‘채널’들을 거의 완전히 독점하고 있다. 어떤 사제들은 증인들을 공격하기 위하여 그러한 보도 기관을 이용하고 있다.

‘스페인’의 왕비가 깊은 인상을 받다

1976년 중, 한 대학 ‘서어클’에서 훌륭한 증거가 행해졌다. 이러한 기회는 ‘마드리드’ 대학교의 의과 대학생인 한 여호와의 증인이 일부 동료 학생들에게 증거함으로서 생기게 되었다. 이들 학생들 중 일부는 재학생들과 졸업생들을 위해 조직된 ‘동시대 인문학 학회’ 내의 다른 연구들에도 참여하고 있었다. 그 결과, “새로운 인간과 그의 장래”라는 주제로 강연해 주도록 여호와의 증인들이 초대되었다. 두명의 증인이 그 제목에 관하여 강연을 하고 새로운 인간성의 여러 가지 면들과 땅과 관련된 여호와의 목적에 관하여 설명하였다. 이 연설로 인하여 후에 여호와의 증인들의 가르침에 관한 아홉 차례에 걸친 일련의 강연을 해 달라는 초대를 받게 되었다. 학생들 중에는 ‘스페인’의 ‘소피아’ 왕비가 끼어 있었는데, 왕비는 그 연설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듣고 ‘노우트’를 하며 매 강연 후 있게 되는 토론에 온전히 참여하였다. 영혼과 지옥에 관한 강연이 있은 후, 왕비는 자기가 이제까지 야기된 여하한 질문에 대해서도 대답을 하는 데 저러한 지식과 능력을 가지고 성서를 사용하는 사람을 본 일이 없었다고 말하였다. 왕비는 “무슨 제목에 대해서도 당신들은 성서의 대답을 가지고 있는 것이 보인다”고 말하였다.

이 강연들은 매우 큰 감동을 불러 일으켰으며, 마지막 강연인 “피, 의학 및 하나님의 율법”은 동 연구 과정이 끝났는데도 불구하고, 그 제목에 대한 왕비의 특별한 관심 때문에 행해지게 되었다. 병리학자인 한 형제에 의해 행해진 이 마지막 강연에는 몇명의 교직자들과 의사들이 참석하였으며, 훌륭하고도 명백한 증거가 주어졌다.

‘벧엘’의 확장

처음부터 ‘칼레 파르도’ 65번지에 있는 원래의 지부 건물은 앞으로의 확장을 위해서는 충분치 못하였다. 그러나 1970년에는 어느 정도의 종교적 자유가 허용될 것인지 불확실하였으므로, 소규모로 시작하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 후, 협회는 같은 ‘블럭’ 내의 한쪽 모퉁이에 있는 세개의 ‘아파아트’를 더 사들였다. 그리고 이 ‘아파아트’들은 15명의 ‘벧엘’ 가족들의 숙소로 이용되고 있다. 1975년에 협회는 또 두 ‘블럭’ 떨어져 있는 커다란 창고 시설물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서적 보관이 심각한 문제가 되어 있던 발송부에 도움이 되어 왔다. 이제 우리는 2년간 전파 활동을 하기에 충분한 양의 재고품을 보관할 수 있게 되었으며, 따라서 야기될지도 모를 일들로서 대비해야 할 일이란 파업이나 전쟁들인 것이다.

‘아프리카’ 서해안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카나리’ 제도에 있는 회중들의 필요를 보다 잘 돌보기 위해 협회는 ‘산타쿠르즈 데 테네리페’에 창고 하나와 ‘아파아트’를 구입하였다. 그리하여 여섯개의 주요 섬들에 있는 25개의 회중들은 그 서적 보관소로부터 서적과 잡지를 받는다.

많은 일이 앞에 놓여 있다

‘스페인’에는 아직도 수행되어야 할 일이 매우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 계산으로는 약 백만명 정도가 아직도 정기적으로 좋은 소식을 듣지 못하고 있는 것같다. 특별 ‘파이오니아’ 수가 늘어나고 있으며, 현재 600명 이상이 주로 ‘엘스트레마두라’, ‘안달루시아’, ‘갈리시아’ 및 ‘아스투리아스’ 등에 있는 가장 크게 필요로 하는 구역들에서 전파하고 있다.

어떤 경우, 그러한 곳에서 꾸준히 일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인내와 용기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1976년 6월에, ‘예클라’라는 마을에서 한 자매가 그의 광적인 남편에게 살해되었는데, 그 전에 그 남편은 자기 아내와 형제들을 위협한 일이 있었으며, 그곳에서 일하는 특별 ‘파이오니아’에게 폭행을 가하기까지 하곤 하였었다. 이 살인 사건은 왕국회관 봉헌식이 있은지 9일만에 일어났다. 후에 일단의 폭도들이 몰려와서 왕국회관의 유리창들을 깨뜨리고, 건물 정면에 붉은 ‘페인트’를 뿌리고는 문에다 형제들을 거짓 비난하는 “‘파시오나리아’의 자식들”(한 유명한 여성 공산주의자인 웅변가)이라는 문귀를 써 놓았다.

그 후 얼마 안있어, 한 젊은이가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는데, 알고 보니, 그는 이 마을의 ‘깡패’단의 일원이었다. 하지만, 그는 진리를 받아들였으며, 자신의 인생 행로를 바꾸고, 침례를 받았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진실한 변화를 보고 놀라와하는 많은 그의 친구들과 친척들에게 증거가 되었다. 예를 들면, 어느날 또 한 명의 젊은이가 집회에 찾아와서, 이전에 지독한 악당이었던 자기 친구 하나(전에 깡패였으나 지금 침례를 받은 젊은이)가 현재는 양보다 더 온순한 사람이 되었는데, 증인들이 그에게 어떻게 했는지 알고 싶다고 하였다. 지금은 연구를 하며, 집회에 참석하고 있는 이 두번째 젊은이는 왕국회관에 붉은 ‘페인트’를 뿌렸던 그 ‘깡패’단의 일원이었다.

‘바울’이 ‘로마’에 있는 형제들에게 “언제든지 ‘서바나’[스페인]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다고 편지한지도 약 1923년이 지났다. (로마 15:24) ‘바울’은 현재 하늘에서, 이 친절하고 쾌활한 나라에 있는 20세기의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들 가운데 분명히 존재하는 영적 낙원을 보고 틀림없이 기뻐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사물의 제도에 시간이 얼마나 더 남아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여호와의 뜻이라면, 이곳 ‘스페인’에서 더욱 증가할 것을 기대하고 있으며, 또 더 큰 확장을 가져오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다. 통치체는 ‘바르셀로나’ 근처에 새로운 ‘벧엘’집과 공장을 위한 복합 건물을 건축하는 일을 승인하였다. 이로 인하여 우리의 잡지를 ‘스페인’ 내에서 인쇄하게 되었으며, 앞으로의 발전을 위해 대비케 되었다.

현대 ‘스페인’에서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의 활동을 통해 성취된 이 놀라운 결과에 대하여 찬양과 감사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가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118면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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