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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필리핀’

‘필리핀’

‘필리핀’ 공화국은 중국 본토 남쪽, 태평양 상에 진주알처럼 1,854‘킬로미터’나 줄줄이 늘어서 있는 7,083개의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본보다는 작고 영국보다는 큰, 수많은 섬들로 되어 있는 ‘필리핀’은 미국의 두배나 되는 해안선을 가지고 있다. 30개 이상의 훌륭한 항구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빼어난 항구는 ‘마닐라’ 만으로, 해안선이 160‘킬로미터’나 되는 이 항구를 많은 사람들은 ‘아시아’에서 가장 훌륭한 자연항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필리핀’은 적도 바로 북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열대 기후이지만, 상쾌한 해풍이 불어, 연중 평균 기온은 섭씨 26도 내지 29도를 유지하고 있다. 따뜻하고 습기있는 기후에 강우량이 풍부하기 때문에 열대성 초목이 풍부하며, 이 나라에는 전적으로 건조하기만 한 지역은 없다. 전체 군도는 울퉁불퉁한 산지이며, 섬들은 사실상 물 속에 부분적으로 잠겨 있는 산맥의 윗부분들이다. 대부분의 인구는 해안 평야 또는 산맥을 가로지르는 비옥한 골짜기들에 살고 있다. 태평양을 둘러싸고 있는 화산대에 위치해 있는 ‘필리핀’에는 몇개의 활화산이 있는데, 그 중에 가장 장엄한 것은 ‘마욘’ 산이며, 어떤 사람들은 이 산을 가리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게 형성된 봉우리라고 생각한다.

이 나라는 지리적으로 세개의 주요 부분으로 즉 ‘루손’ 섬, ‘비사야스’ 군도, 및 ‘민다나오’ 섬 등으로 구분되어 있다. ‘루손’ 섬은 가장 큰 섬으로서 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그 섬의 “꼬리”는 동남쪽으로 뻗어 있다. ‘필리핀’의 남부에 있는 ‘민다나오’ 섬은 두번째로 큰 섬이다. 이들 사이에 끼어 있는 것이 ‘비사야스’라고 알려진 군도이다.

‘필리핀’을 구성하고 있는 아름다운 섬들은, 친절하고 외향적인 사람들, 주로 ‘말레이’ 후손들인 4,200만의 인구의 본거지이다. 그들은 ‘유우머’감이 있는 사교적인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야기하기를 즐기며,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화제를 나누기를 좋아한다. 그들의 생활의 정취는 음악과 춤을 좋아하는 데서도 나타난다. 가족의 유대는 매우 밀접하나, ‘필리핀’인들은 낯선 사람들에게 매우 친절하며, 그들의 문은 이웃이나 방문객들에게 언제나 개방되어 있다. 도시 밖의 농촌에서의 ‘필리핀’인들의 생활은 한가하다. ‘필리핀’인들의 이러한 모든 특성들은 어떤 면으로 이 섬들에 하나님의 진리의 소식을 급속히 전파하는 데 기여하였다.

기원 16세기 경에는 회교계의 ‘말레이’인들이 ‘필리핀’으로 이주해 옴으로, 이 나라 도처에 ‘이슬람’교가 두드러지게 되었다. 그러나 ‘스페인’이 이 나라를 정복하자, ‘가톨릭’교가 소개되어 널리 퍼짐에 따라 오늘날 인구의 83‘퍼센트’가 ‘로마 가톨릭’ 교인이라고 주장한다. ‘스페인’은 미국의 후원으로 1898년에 야기된 ‘필리핀’ 혁명으로 퇴각할 때까지 300년 이상 이 섬을 통치하였다. 뒤이어 ‘필리핀’인들이 정부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이를 승인치 않았으며 1898년 12월 10일에 ‘파리’에서 ‘스페인’과의 평화 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필리핀’은 미국에 양도되었다. 그리하여 이 나라는 하나의 식민지 지배국에서 또 다른 지배국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미국은 이 나라에 영어 그리고 종교에 관해 보다 자유로운 풍토를 들여왔으며, 그러한 요소들은 20세기 초에 성서 진리의 씨가 심어지고 자라는 데 깊은 영향을 미쳤다. 영어는 교육과 사업의 매개체가 되었으며, 이 나라의 87종의 기존 토어 및 방언에 첨가되었다. 따라서, 현대 ‘필리핀’인은 영어 외에 한 두가지 다른 방언을 할 줄 아는 것이 보통인데, 이것은 여러 인종 집단 사이의 의사 소통을 가능케 한다.

왕국 소식이 ‘필리핀’에 이르다

그리하여 1912년, 유명한 미국의 한 전도자가 ‘마닐라’를 방문하였을 때, 그는 많은 ‘필리핀’ 청중에게 영어로 강연을 할 수 있었다. 그 연사는 다름아닌 ‘왙취 타워 책자 협회’의 회장인 ‘차알스 T. 러셀’이었는데, 그는 당시 세계 일주 강연 여행을 하고 있었다. 1912년 1월 14일 일요일, 그는 ‘마닐라 그랜드 오페라 하우스’에서 “죽은 자는 어디 있는가?”라는 강연을 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왕국 소식이 최초로 ‘필리핀’에 전해졌으며, 이 나라에서의 여호와의 백성의 현대 역사가 펼쳐지게 되었다.

‘러셀’ 형제와 그 일행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많은 광고가 행해졌다. 「마닐라 타임즈」지 1월 8, 11 및 13일자에 실린 유료 광고는 그 강연에 상당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어떤 신문들은 「브루클린 이이글」지나 기타 미국의 신문들에 실린 거짓 비난의 보도들에 근거해서 ‘러셀’ 형제에 관해 헐뜯는 이야기들을 실었다. 어떤 신문들은 그가 돈을 벌고 있으며, 무식한 사람들의 종교적인 열성을 이용하고 있는 순회 전도자인 “사기꾼”이라고 비난하였다. 심지어 어떤 신문들은 그 일행이 예정대로 도착하지 못하였다는 거짓 보도를 하기까지 하였다.

이 모든 적대적인 선전에도 불구하고 그 강연에 관한 관심은 식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이 관심을 불러 일으킨 듯하였으며, 약 1,000명이 참석하였다. 그 집회에서, 누구든 자기 이름과 주소를 쪽지에 써서 제출한 사람에게는 무료 서적을 보내 주겠다는 광고가 있었다.

‘러셀’ 형제는 그 당시 ‘필리핀’에 있는 20,000명의 미군 주둔군 사령관인 바로 ‘J. 프랭클린 벨’ 장군에 의하여 소개되었기 때문에, 뒤이어 발행된 「필리핀 프리이 프레스」지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벨’ 소장과 ‘홀’ 장군(‘러셀’과 함께 여행하는 일원으로 10년 전에 ‘필리핀’에 살았던)과 같은 인물이 ‘패스터 러셀’과 그의 주장에 관계한다면, 그것에 아주 심각한 잘못이 있을 수 없다.”

틀림없이 ‘필리핀’에서 좋은 소식을 처음으로 전파하는 이 일은 ‘마닐라’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 강연은 각계 각층의 사람들 사이에 화제거리가 되었다. 또한 배포된 서적 및 그 강연 자체는 진리의 씨를 심고, 강력한 증거를 주었으며, ‘필리핀’에서의 여호와의 백성의 역사에 훌륭한 출발을 하게 하였다.

1920년대의 고립된 접촉

‘러셀’ 형제의 방문에 뒤이어, ‘필리핀’에 오게 된 협회의 대표자는 ‘H. 티니’ 형제였다. 1922년인가 1923년에 그는 ‘필리핀’에서의 선교 사업을 하기 위해 ‘캐나다’ ‘브리티시 콜럼비아’ ‘밴쿠우버’를 떠났다. 그는 이곳에서 약 1년간 부지런히 봉사하여 많은 서적을 배포하고, ‘마닐라’에 하나의 성서 연구반을 조직한 후, 건강의 악화로 ‘캐나다’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성서 연구반은 ‘필리핀’인들에 의하여 계속 되었으며, 그로 말미암아 관심자들이 분명히 계속 증가하였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1920년대 중엽, ‘페트로닐로 살라자’라고 하는 사람이 ‘뉴우요오크’에 있는 협회 본부로부터 계속 책을 받으며 정기적으로 그것을 배부하고 있었다. ‘마닐라’의 ‘산 마르셀리노’ 가에 있는 그의 집에서는 매주 성서반들이 열리고 있었는데, 그의 집문 밖에는 ‘만국 성경 연구회’의 집회 장소라고 알리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이 때에 그리고 193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약 10명 가량의 사람들이 매주 열리는 그 연구에 참석하였으며, 매년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하였다.

여호와의 백성과 그들의 소식과의 접촉이 이루어지게 된 것은 얼마 동안 ‘필리핀’에 배속되는 미군들(또는 그들의 친척들)을 통해서 였다. 아들이 육군 장교였던 팔순 가량의 한 연로한 자매는 ‘필리핀’에 있는 동안 병이 들어 ‘코레기도르’ 섬의 ‘포오트 밀스’에 있는 ‘포우스트’ 군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이 연로한 부인이 성서로부터 들려 주는 이야기에 한 ‘필리핀’인 간호원이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병원에서 퇴원한 후, 이 연로한 자매는 그 간호원 및 약 다섯명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주일에 두번씩 성서 연구를 하였으며, 이 모임은 “이너 서어클”이라고 불렀다.

이 연로한 자매인 ‘애니 D. 배러트’가 미국으로 떠나자, 그 간호원은 성서 연구생들(그 당시 ‘여호와의 증인’들을 부르던 이름)에 관해 더 이상 듣지 못하게 되었는데, 1932년에 와서야 비로소 ‘램퍼트’ 부인이라고 하는 한 미국인 환자가 그에게 「자유」라는 소책자와 「하나님의 거문고」라는 책을 주었다. 이 간호원은 그 책을 다 읽기도 전에, 거짓 종교는 사람들의 정신을 눈멀게 만들기 위해 ‘사단’에 의하여 사용되고 있는 도구라는 말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이 문제를 군목에게 가지고 갔는데, 그 군목은 미국에 있는 성서 연구생들을 잘 알고 있으며, 극심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그들이 성장하고 있는 사실에 관하여 그 간호원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 군목은 그 간호원에게 ‘전 미국에서 이 사람들을 빼놓고는 참다운 그리스도인들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요’ 하고 말해 주었다. 이 말을 듣고 다시 용기를 얻은 그 간호원은 미군 상사인, ‘램퍼트’ 자매의 남편을 통해 우리의 책 세질을 주문하였다. 이 책이 도착하자 그 간호원은 그것들을 자기 친구들에게 배부하였다.

그 간호원 즉 ‘퓨리피케이션 베네트’는 후에 ‘코레기도르’에 있는 군병원을 떠났으며, 결국 ‘마닐라’에 있는 협회 사무실과 접촉하게 되었다. 그는 1935년에 ‘파이오니아’가 되었으며, ‘루손’과 ‘다바오’ 시에서 다음 10년 동안 진리를 전파하는 일에 활동적인 역할을 하였고, 1977년 5월에 사망할 때까지 충실한 ‘파이오니아’로서 계속 봉사하였다.

조직적인 봉사가 시작됨

초기에 접촉을 가진 또 한 사람은 ‘벤 볼린’이었는데, 그는 미군이었으며, 1932년 중국 상해에서 임무 여행 중 쓰레기 통 속에서 「죽은 자는 어디 있는가?」라는 협회 소책자를 발견하였다. 그 소책자는 그의 상관인 중위가 거기에 버린 것인데, 그 중위는 그 소책자를 미국에 있는 친척으로부터 받았으나 관심이 없었다. 후에, 그 중위는 「정부」라는 책과 「왕국, 세상의 희망」이라는 소책자를 받았는데 이것들을 기꺼이 ‘벤 볼린’에게 주었다. 그 해 늦게 ‘벤 볼린’의 연대는 ‘마닐라’에 있는 기지로 돌아왔는데, 그는 즉시 ‘뉴우요오크 브루클린’에 있는 ‘왙취 타워 협회’로 편지를 하여 더 많은 책들을 보내 줄 것과 협회가 ‘필리핀’에 있는 사람을 만나게 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에게 ‘코레기도르’에 있는 ‘램퍼트’ 상사의 주소를 보냈지만, 그가 그들을 만나려고 하던 때에 이미 ‘램퍼트’가 ‘필리핀’을 떠나고 없었다.

‘벤 볼린’은 자기가 이미 받은 책들을 계속 읽고 있었는데, 어느날 ‘마닐라’에 있는 ‘KZRM’ 방송을 듣고 있다가 사람들에게 ‘왙취 타워 협회’의 서적을 읽도록 권하는 협회 사업에 관한 광고를 듣게 되었고, ‘레알타드’ 가에 있는 한 주소를 알게 되었다. 그는 그리로 가서 ‘왙취 타워’ 대표자를 만나게 되었고 여호와의 백성과 연합하기 시작하였다. ‘네알타드’ 가에서 열리는 집회들 외에도, 그 당시에는 ‘마닐라’ 전역에서 상당수의 성서 공개 강연이 마련되었다.

이 때쯤 해서 또 한명의 ‘왙취 타워’ 대표자가 ‘필리핀’으로 오고 있었다. 이 사람은 1929년 이래 ‘하와이’에서 ‘파이오니아’로 일해 온 ‘포르투갈’계의 미국인 ‘조셉 도스 산토스’였다. 그는 1933년에 “그레이트 노오던”이라는 기선을 타고 ‘하와이’를 떠나 세계 일주 여행을 하면서 들리게 되는 주요 도시들마다 내려서는 왕국 소식을 전파하고 서적을 전하였다. 그는 얼마간의 출판물을 가지고 갔었는데, ‘마닐라’에서 사용하기 위해 더 많은 서적을 발송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그 배가 ‘요코하마’에 기착하였을 때, 일본 당국자들은 그가 가지고 있던 서적 전부를 압수하였다. ‘도스 산토스’ 형제와 같은 배를 타고 여행하던 어떤 교직자가 이 배가 도착하기 전에 일본 당국자들에게 전보를 쳐서 그가 공산주의자라는 거짓 고발을 한 것임이 분명하였다.

이 공산주의자라는 거짓 혐의는 ‘마닐라’까지 ‘도스 산토스’ 형제를 따라다녔다. 도착 즉시 그는 협회 책 중 하나를 보고자 하는 세관장 앞으로 즉시 출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930년 11월에 ‘필리핀’ 내에서는 공산당이 공식적으로 조직되었으며, 그리하여 정부는 공산주의자로 의심되는 모든 사람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주간에 책들 중 하나를 읽고 난 세관장은 이것이 공산주의와 관계가 없는 종교 서적이라는 것을 알고 분명히 만족해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정보부에서는 한 비밀 경찰을 시켜서 그 후 몇개월 동안 증거 활동을 하는 ‘도스 산토스’ 형제를 미행하게 하는 한편, 세관의 한 변호사는 이 사업이 공산주의와 관계가 있는가 없는가를 알아 보기 위하여 자기 집에서 성서 연구를 하고 요청하기까지 하였다. 드디어 그들은 이 사업이 순수한 그리스도인 활동이라는 것을 알고 만족해 하였으며, 그리하여 ‘도스 산토스’ 형제는 약 열 사람으로 이루어진 기존 집단과 집회를 가지며 ‘마닐라’내와 그 주위에서의 증거 활동에 자유롭게 연합할 수 있게 되었다.

지부 사무실의 설립

‘브라질’ 및 세계 여러 곳을 여행하려던 ‘도스 산토스’ 형제의 계획은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 회장 ‘조셉 F. 러더포오드’로부터 편지를 받자 갑자기 바뀌어지게 되었다. 그 편지는 ‘도스 산토스’ 형제에게 ‘필리핀’에서의 왕국 사업을 책임지고 또 그곳에 협회의 지부 사무실을 설립하도록 요청하였다. 그는 이를 기꺼이 수행하여, ‘마닐라’ ‘산타크루즈’ ‘리잘’ 가 1132번지에 있는 한 건물을 빌려 최초의 지부 사무실로 사용하도록 마련하였다. 이리하여 1934년 6월 1일에 ‘필리핀’ 지부가 운영되기 시작하였다.

지부 사무실 설립과 더불어, 집회 및 야외 봉사가 더욱 잘 조직되었다. 영어 「파수대」 연구가 매 일요일 저녁에 ‘도스 산토스’ 형제에 의하여 사회되었다. 나중에, ‘태갈록’어 연구가 금요일 저녁에 또 마련되었는데, 여기서는 그 언어로 번역된 소책자들, 예를 들면 「왕국, 세상의 희망」, 「왕국으로 도피하라」, 「위기」 및 「무덤의 저쪽」 등과 같은 소책자들이 사용되었다. ‘마닐라’ 전 지역에 있는 형제들이 이 한 집회에 참석하였다. 그 당시 ‘마닐라’에서의 여행은 어렵지 않았다. 왜냐 하면 그 도시는 오늘날과 같이 붐비지 않았으며, 교통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는 것이 많이 있었다. 전차가 지부 사무실 앞을 통과하였으며, 한번 타는 데 그 당시 미국 돈으로 3‘센트’ 밖에 안되었다. 10‘센타보스’만 내면 근거리 여행을 위해 마차(‘칼레사’)를 탈 수 있었다. 그러나 절약하기를 원하는 형제들은 2‘센타보스’(미화 1‘센트’)만 내면 말이 끄는 ‘카레테라’를 탈 수 있었다. 또는 그냥 걸을 수도 있었으며, 그들은 종종 걸어다녔다.

그러나 그 작은 집단은 성서 연구를 위해서만 모인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도스 산토스’ 형제는 지부 사무실의 일을 돌보는 한편 매일 하루의 절반은 호별 방문 증거를 하는 데 바쳤다. 그리하여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훌륭한 본을 보였다. 그의 증거를 통하여 처음으로 진리를 듣게 된 사람들 가운데에는 ‘아구스틴 다그다그’와 ‘나르시소 삼손’이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아직도 충실하게 여호와를 섬기고 있다.

그 당시에는 증거하는 데 증거 ‘카아드’를 사용하였다. 집주인이 그것을 읽고 나면 그에게 서적을 제공하였다. 그들의 열심으로 인하여 20명 정도의 왕국 선포자들로 이루어진 이 작은 집단은 1934년 한 해 동안에 서적과 소책자 총 23,405부를 배부하였다.

그 뿐 아니라, 새로운 출판물이 발행될 때는 정부 당국자들과 공공 도서관들에 여러 부씩 발송하였다. 이 역시 열매를 맺었다. 사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지구의 종들”로서 봉사한 사람들 중 두명은 도서관에서 보게 된 서적을 통하여 진리를 배웠다. ‘풀젠시오 드 지저스’는 ‘마닐라’에 있는 국립 도서관에서 「사람들을 분리함」이라는 소책자와 「구원」이라는 책을 빌렸다. 그리고 그 책 안에 찍혀 있는 주소를 통하여 지부와 접촉하게 되었다. ‘살바도르 리와그’는 ‘마닐라’에서 10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카바나투안’ 시에 있는 한 학교 선생이었는데, 그곳에 있는 국립 도서관 분관에서 「창조」 책을 보게 되었다. 그는 이전에 「죽은 자는 어디 있는가?」라는 소책자를 받았었는데, 그것이 그를 종교적 미신과 악귀들의 영향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었다. 그들은 그에게 매일밤 고통을 주었고 잠을 못이루게 하였고, 건강을 해쳤었다. 그러나 그는 「창조」 책과 그 책 표지 안에 찍혀 있는 주소를 발견하고, 더욱 더 배우고자 하는 열성이 생겨 즉시 ‘마닐라’로 여행하여 ‘리잘’ 가에 있는 지부 사무실을 찾았다. 그는 구할 수 있는 모든 서적들을 요청하였으며, 「파수대」와 「황금시대」(「깨어라!」의 전신)를 예약하였다. 1934년 10월에 ‘리와그’ 형제는 좋은 소식의 전 시간 선포자가 되기 위하여 선생직을 사임하였다. 그는 전 시간 봉사를 오늘날까지 계속하고 있으며, 현재는 ‘케손 시티’에 있는 ‘벧엘’ 가족의 일원으로 봉사하고 있다.

지부가 아직 유년 시절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때 하나님의 종들이 그의 조직에 대한 충성심에 관하여 시험을 받았다. 어떤 사람들은 ‘도스 산토스’ 형제의 지부 감독자 임명에 대하여 분개하였으며,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형제들로부터 떨어져 나가 따로 집회를 가졌다. 1930년대 후반에, 적어도 두개의 다른 집단들이 지부에서 떨어져 나가 자신들을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불렀으며, 이들 중 하나는 지방적으로 ‘왙취 타워 벧엘 및 설교단 협회’를 조직하였다. 이러한 일은 혼란을 야기시켰지만, 하나님께서는 진리를 찾는 진실한 사람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지 않으셨으며, 여호와께 충성스러운 사람들은 개인들의 싸움에 말려들기를 거절하고 하나님의 조직에 머물렀다. 흥미롭게도, 의견을 달리하는 집단들은 근본적으로 그들의 강연과 토론에서 협회의 서적들에 있는 내용들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듣던 많은 사람들이 후에 하나님의 참다운 종들과 접촉하게 되었으며 오늘날까지 여호와를 충실히 섬기고 있다.

1935년부터 1939년까지의 ‘루손’에서의 확장

처음에는 사업이 ‘마닐라’ 내와 그 주변에 집중되어 행해졌지만, 여러 지방으로 확장해야 할 필요성이 조만간 나타나게 되었다. 초기 ‘파이오니아’인 ‘파블로 바우티스타’가 1933년과 1934년에 남부 및 중앙 ‘루손’의 여러 지방에서 얼마간 봉사를 하였지만, ‘마닐라’ 밖에서의 확장이 이루어진 것은 주로 1935년 이후이다. 지부 감독자는 ‘필리핀’ 내의 미개척지에서의 증거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도록 격려하였다.

그 당시에 ‘파이오니아’가 된 많은 사람들은 침례받지 않고도 그렇게 하였다. 심지어 지부 감독자인 ‘도스 산토스’ 형제도 1935년 10월에 가서야 침례를 받았다. 1936년에 「부」라는 책이 나와서야 비로소 침례가 ‘필리핀’에서 올바로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그 책 145면에서는 다음과 같은 점을 분명히 하였다. “물에서 침례를 받는 것은 자신을 주의 손에 온전히 맡기는 것을 나타내는 순종의 행동이며, 따라서 침례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로 동의한 모든 사람들이 받아야 할 필수적이고 올바른 것이다.”

‘파이오니아’ 집단이 조직되었으며, ‘루손’ 섬의 여러 지역으로 처음으로 파견되었다. 이들 가운데에는, ‘바우티스타’와 ‘라손’ 가족, ‘살바도르리와그’ 형제들, ‘호세 메디나’, ‘버지니오 크루즈’와 ‘벤자민 삼파나’, ‘엘비라 알린소드’ 자매들, ‘퓨리피게이션 베네트’ 등이 있었다. 그들은 ‘마닐라’로부터 퍼져 나갔으며, 그 당시에는 관심을 발전시키는 것보다는 호별 방문으로 우리의 서적들을 배부하는 데 역점을 더 두었기 때문에, 그 구역을 신속히 돌았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양과 같은 성품을 나타내면 형제들은 그의 집에 머물러 여러 시간 동안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진리를 가르치곤 하였다.

1930년대 후반에 와서는 진리를 배우고 좋은 소식을 선포해야 할 긴급성을 알게 된 다른 사람들이 ‘파이오니아’ 대열보다 많아지게 되었다. 이러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은 ‘이사벨로 태자’가 있었다. 그는 북부 ‘루손’에 있는 자기 집단의 ‘파이오니아’들이, 요구되는 150시간을 훨씬 넘어 250내지 280시간을 매월 야외 봉사에 바치던 일을 상기한다. 대부분의 진리에 새로 들어온 이들 초기 ‘파이오니아’들의 마음을 다한 헌신에 관하여 말하면서, ‘태자’ 형제는 다음과 같이 알려 준다. “우리는 ‘본톡’ 산지의 ‘아브라’ 강을 따라 오르내리면서 증거하는 일에 매주 80내지 100‘킬로미터’를 걸어다녔다.” ‘파이오니아’들에 관해서 말하자면, 어떤 산족들은 껍질을 벗기지 않은 개구리와 같은 별난 음식을 먹었다. 그러므로 왕국 소식을 전하는 전 시간 선포자들은 종종 자기들 양식으로 ‘몰라시스’(일종의 조청)를 가지고 다녔다. ‘태자’ 형제는 말하기를, 그 당시 어떤 가족은 자금이 떨어지자 ‘파이오니아’ 봉사를 계속 할 수 있도록 자기의 농지와 개인 재산을 팔았다고 한다.

‘파이오니아’들이 가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러셀’과 그의 일행이 1912년에 ‘필리핀’인들 가운데서 발견한 동일한 열성 즉 하나님의 말씀에 관하여 배우고자 하는 열성을 발견하였다. 비록 1930년대에는 재방문하는 일이 별로 없었지만, 막대한 양의 서적이 배포됨으로 인하여 ‘루손’의 전 지역에 진리의 씨가 심어지게 되었으며, 개인적인 접촉은 없었어도 이들 중 많은 수가 영적으로 굶주리고 있던 사람들의 마음에서 열매를 맺게 하였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바구이오’ 시에 있는 건축 현장 감독이었다. 그의 아내가 한 ‘파이오니아’로부터 「부」라는 책과 몇권의 소책자를 받았다. 그는 즉시 그 책을 읽기 시작하였고, 자기 아내와 함께 그 문제를 밤새도록 진지하게 토론하고 나서, 그들이 읽고 알게 된 진리를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그는 ‘당그와’ 운수 회사에 있는 자기 동료들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하였으며,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듣고 결국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다. 「자녀들」이라는 책이 발간되었을 때, 이 사람은 그 책 한부들 받을 수 있었고, 그것을 사용하여 자기 자녀들에게 성서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는 형제들을 만나 본 일도 없었으며, 단 한번 집회에 참석해 본 일도 없었지만, 4년 동안 다른 사람들과 종교에 관하여 연구하고 토론하였다. 이 형제는 ‘알프레도 에스테파’인데, 후에 형제들과 연합하게 되었고, 1949년에 ‘케손 시티’에 있는 ‘벧엘’에 들어왔으며, 1949년 전쟁중에 자기 가족을 잃고 말았다. 그는 아직도 ‘벧엘’에서 충실하게 봉사하고 있다.

‘파이오니아’들은 서적과 증거 ‘카아드’를 사용하여 2년 이상 봉사한 후 ‘러더포오드’ 형제가 녹음한 성서 연설이 사용되기 시작한 1937년에 부가적인 마련을 받게 되었다. 20‘페소’(10‘달러’)면 휴대용 축음기를 구입할 수 있었으며, 원한다면 매주 1‘페소’씩 할부식으로 지불할 수 있었다. 그 밖에도 ‘마닐라’에 있는 지부 사무실은 좀더 길게 녹음한 공개 연설을 틀기 위해 녹음 재생기를 구입하였다. ‘도스 산토스’ 형제는 소형 용달용 ‘트럭’에 그 녹음 재생기를 싣고 다니며 확성차로 사용하였다. 1939년경 두대의 녹음 재생기와 24개의 축음기가 ‘필리핀’ 전역에서 사용되었다.

‘비사야스’와 ‘민다나오’에 이름

일단 ‘루손’에서의 우리의 사업이 개시되자, ‘살바도르 리와그’ 형제와 ‘호세 메디나’ 형제는 처음으로 ‘비사야스’와 ‘민다나오’에서 왕국 소식을 전파하도록 임명되었다. 그들은 ‘세부’ 시에서 시작하였다. 그들이 그곳에 있는 학생 회관 건물의 아래 층에서 증거를 하고 있는데, 위층에서 예배를 방금 마친 한 장로교 목사가 그들과 열띤 토론을 하게 되었고 마지막에 가서 그 목사는 화가 나서 그들의 책가방을 밖으로 집어던져 버렸다. 그 목사의 “양떼” 중 하나인 ‘플로렌쇼 우도그’라고 하는 사람이 이 광경을 목격하였으며, ‘파이오니아’들이 제시하는 성경적인 논증을 유의해 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파이오니아’들에게 다가와 「누가 세상을 다스릴 것인가?」라는 소책자를 받았다. 후에 그는 ‘파이오니아’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서적을 받았다. 1935년 6월에 ‘플로렌쇼 우도그’는 혼자 남게 되었고, 그 ‘파이오니아’들은 계속 전진하였다. 침례를 받지 않은 전도인으로 봉사하고 있던 그는 지시를 받기 위해 지부 사무실에 편지를 하였으며, 「게시판」(지금의 「우리의 왕국 봉사」) 한부를 받게 되었다. 그 당시 거기에는 그가 만났던 소수의 관심자들 밖에는 없었지만, ‘플로렌쇼’는 그 작은 집단의 봉사 감독자로서 임명되었다.

그 ‘파이오니아’들은 ‘세부’ 시를 떠난 후 계속 나아가 ‘네그로스’ 섬에 있는 ‘바콜로드’ 시로 갔다. 거기서 그들은 ‘마닐라’로부터 세속 직장에서 일하기 위해 그리로 이사온 ‘나르시스 삼손’ 형제를 만났다. ‘바콜로드’ 시에 있는 동안, 이들 세 형제들은 미국 ‘워싱턴 D. C.’로부터 직접 방송되는 ‘러더포오드’ 형제의 “정부”라는 강연의 방송을 듣기 위해 1935년 6월 3일(미국 시간으로 6월 2일) 새벽까지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명료한 그 강연을 듣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한편 ‘마닐라’에서는 지부 감독자와 다른 형제들이 그 방송을 듣기 위해 ‘라디오’ 방송국으로 갔지만 정적(靜的) 방해로 인하여 똑똑히 들을 수 없었다. ‘루손’ 섬에 있는 ‘상 파울루’ 시에서는 또 다른 ‘파이오니아’ 집단이 그 날 아침 그 방송을 들었다. 이것은 ‘필리핀’에 있는 형제들로 하여금 여호와의 백성이 별로 없던 그 당시 전세계적으로 더욱 밀접히 연합시켜 주는 느낌을 갖게 하였다.

수개월 동안 ‘네그로스’ 섬에서 봉사한 후, 이 ‘파이오니아’들은 남쪽 ‘민다나오’로 가서 처음으로 ‘잠보앙가’ 시에 도착하였다. 거기서 ‘필리핀’ 경찰 후보생 중 한 사람인 ‘콘라도 다클란’이 그 ‘파이오니아’들로부터 책들을 받았다. 그러나 연락 방법을 몰라, 후에 그 ‘파이오니아’들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그들이 우편으로 ‘마닐라’ 사무실에 보고할 필요가 있으리라고 추측하고 우편국 근처에 머물러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며칠을 기다리자 마침내 그 ‘파이오니아’들이 와서, 그는 즉시 성서 연구를 도와 달라고 요청하였다. 3개월간 연구하고 나서 이 사람은 ‘잠보앙가’ 강에서 침례를 받았다. 이후 얼마 오래지 않아서 그는 ‘비사야스’에 있는 그 ‘파이오니아’ 집단과 함께 연합하였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 “지구의 종”으로 진리를 전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증거 사업을 확장시키는 일에서의 도움

서적과 축음기를 가지고 호별 방문 증거를 하는 일과는 별도로, 1930년대에 형제들은 ‘필리핀’ 전 지역에서 진리를 선포하는 일에 또 다른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 당시의 ‘필리핀’인들은 공개 강연에 매우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거의 누구나 광장에 서서 특히 종교에 관하여 연설을 할 수 있었으며, 상당한 청중의 주의를 이끌 수 있었다. 그리하여 형제들은 공개 강연을 하고 나서 공개적인 질문을 받는 식의 강연을 하곤 하였다. 지부에서는 추천하지 않는 일이었지만, 어떤 때는 다른 종교 지도자들과 공개 토론이 마련되는 일도 있었다. 성서 공개 토론 형식은 사람들을 진리에 상당히 끌어 들였으며, 지금 증인이 된 많은 사람들은 그 공개 토론시에 처음으로 왕국 소식을 들었다.

예를 들어, ‘잠보앙가 델 수르’에서, ‘리와그’ 형제는 공개 토론에서 한 지방 목사를 만났는데, 그 토론에 시간을 재는 사람이 진리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지금은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다. 1940년대에 와서는 토론식 증거가 사라졌지만, 광장이나 공원에서 연설을 하는 관습은 1950년대까지도 인기가 있었으며, 왕국을 광고하는 이러한 방법은 확실히 이곳에서 여호와의 백성에게 참으로 유익하였다. 좋은 소식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 주는 일에 또 한 가지 크게 도움이 된 것은 지방 언어로 더 많은 서적을 출판하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1935년부터 1939년까지의 기간은 ‘필리핀’ 내에서 왕국 선포자들의 작은 무리들에게는 매우 활동적인 기간이었다. 그 5년 동안 이 섬들 전역에 있는 사람들에게 서책과 소책을 500,000부 가까이 배포하였다. 1939년에는 14개 회중들이 설립되었으며, 159명이 야외 봉사를 보고하였다. 약간의 예외는 있었지만, 이 나라 모든 지방에서 상당히 광범위하게 왕국 증거를 열렬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씨들이 심어져 몇년 후에는 큰 수확을 거두었다.

전운이 감돌자 사업이 강화되다

‘필리핀’에서의 ‘여호와의 증인’들 역사상 한 가지 즐거운 사건이 1940년 3월 21일과 22일에 ‘마닐라 그랜드 오페라 하우스’에서 있었다. 1912년에 ‘러셀’ 형제에 의하여 사용된 바 있는 그 동일한 장소에서 협회의 지부 사무실은 이 나라에서는 최초로 열리는 여호와의 백성의 대회를 마련하였다. 이 나라 여러 곳에 있는 형제들이 참석하였고, “정부와 평화”라는 공개 강연을 광고하였는데, 이 강연은 1939년 6월 25일 ‘뉴우요오크’ 시 ‘메디슨 스퀘어 가아든’에서 ‘러더포오드’ 형제가 행한 강연을 녹음한 것이었다.

‘플래카아드’를 몸에 걸치고 행진을 함으로써 ‘마닐라’ 시민들에게 인상깊은 증거를 하였다. 형제들이 6내지 9‘미터’ 간격으로 걸어가면서, 앞에는 “종교는 올무이며 술책이다”라고 썼고 뒤에는 “하나님과 왕이신 그리스도를 섬기고 생명을 얻으라”고 쓴 ‘플래카아드’를 들고 다녔다. 공개 강연을 광고하는 데 광고 쪽지도 사용되었다. 3월 22일, “정부와 평화”라는 강연이 녹음 재생기로 틀어졌을 때, 300명 이상의 청중이 주의깊이 들었다.

이 최초의 대회에 뒤이어, 사업을 좀더 효과적으로 수행해 나아가기 위하여, 아홉명의 ‘파이오니아’들이 오늘날 순회 감독자라고 부르는 “지구의 종”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 그들은 여행을 하면서 광범위한 지역을 돌았다. 이들 지구의 종들의 임명은 분명히 시기에 적절한 조치였다. 왜냐 하면 그들은 그 후 수년간의 어려운 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기 때문이다.

이들 지구의 종들이 그들의 “지구”(地區)에서 조직적으로 봉사함으로, 우리의 활동은 이전 어느 때보다 신속히 그리고 원활하게 전진하였다. 1940년에는 9개의 회중이 새로 설립되었고, 1941년에는 8개가 더 설립되어, 그 해에 총 회중수는 31개, 전도인은 373명에 이르렀다. 1940년과 1941년에 300,000부의 서책과 소책자들이 배부되었으며, 108,548명이 ‘러더포오드’ 형제의 녹음 연설을 들었다. 1941년 4월 11일 기념식에 621명이 참석하였으며 16명이 표상물을 취하였다.

1940년 1월에, 비좁은 지부 사무실은 ‘마닐라’ ‘리잘’ 가에 있는 같은 ‘아파아트’ 건물 내의 방을 더 빌려서 약간 확장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해도 수요가 점점 증가함에 따라 공간이 충분치 못하였다. 그 당시 ‘도스 산토스’ 형제와 그의 아내 및 두명의 자녀들은 ‘벧엘’에 계속 거주하는 사람들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와서 때때로 도와 주는 사람들이었다. 1940년말경, 좀더 큰 2층 건물을 4,500‘페소’(2,250‘달러’)에 구입하였는데, 그 돈의 거의 절반은 지부 감독자가 지불하였고 나머지는 독일인 관심자로부터 빌렸다. ‘마닐라’ 시 ‘산타크루즈’ 구 ‘나티비다드’ 가 1736번지에 소재한 그 새 건물은 넓고 통풍이 잘 되었으며, 대로인 ‘리잘’ 가의 소음과 먼지로부터도 벗어나 있었다. 아래층은 서적 창고로 사용되었고 사무실과 숙소는 2층이었다. ‘살라’ 즉 커다란 응접실은 ‘마닐라’의 부회(部會)를 위한 집회 장소로 사용되었다.—시 68:11, 흠정역.

이 건물을 구입한지 얼마 안되어 새로운 ‘벧엘’ 성원이 들어왔다. 그의 이름은 ‘나르시스 델라빈’인데, 그는 남부 지방에서 지구의 종으로 봉사해 왔었다. 1941년에 지부 직원으로 두명의 자매들이 더 들어 오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도스 산토스’ 형제와 자매의 두 자녀를 빼고도 ‘벧엘’ 직원이 모두 다섯명이 되었다. 이 봉사자들 중 아무도 수당을 요청하지 않았는데, 그들은 야외 봉사에 참여할 때 전하는 서적 헌금으로 그들의 필요가 충당되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마닐라’에서의 생계비는 매우 저렴하였다. 예를 들면, ‘프라이’한 달걀, ‘롤’빵 그리고 ‘코오피’를 함께 먹는 한 끼의 아침 식사의 값이 10‘센타보스’(미화 5‘센트’)도 안되었다. 그러므로 ‘필리핀’의 ‘벧엘’ 봉사자들이 그들의 개인적인 필요를 위해 소액의 수당을 받기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영적인 성장과 번영을 누리는 가운데 전쟁 기운이 감돌기 시작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유럽’에서 발발하였으며, 1941년 7월에 일본 제국 군대들이 사실상 ‘필리핀’을 포위하였다. 적에 대한 두려움은 어떤 사람들로 하여금 여호와의 백성이 간첩이거나 공산주의자들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였으며, 이러한 일은 이 나라에 있는 형제들의 작은 집단에 얼마간 압력을 가져왔다.

‘라 유니온’의 ‘발라오안’에서, 일단의 ‘파이오니아’들이 그 도시에서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인가를 받지 않았다고 해서 체포되었다. 다른 ‘파이오니아’들이 그들의 언론 및 종교의 자유를 박탈하는 그러한 부당한 처사에 대하여 항의하자, 그들 역시 체포되었으며, 공산주의자라는 혐의를 받았다. 그 형제들은 자신들을 변호하기 위하여 협회의 ‘재판 양식’이라는 소책자를 이용하였으며, 일주일 후, 그들은 ‘라 유니온’ ‘산 페르난도’에 있는 그 지방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감옥에서 일개월을 보낸 후, 무료 변론을 맡은 한 자유를 사랑하는 미국인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그들은 석방되었으며, 혐의도 벗게 되었다.

다른 지방에서도, 형제들은 추축국들을 위해 일하는 “오열” 또는 간첩이라는 고발을 받았다. 종교 신문들은 협회의 목적이 인간 정부들을 붕괴시키고 전복시키는 것이라는 거짓 비난을 더욱 부채질하였다. 그러한 부당한 비난은 ‘루손’ 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민다나오’와 ‘비사야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비난은 때로는 형제들에게 육체적인 고통을 초래하였다.

두번이나 지부 사무실은 정보부 대표자들의 방문을 받고 ‘여호와의 증인’들의 활동에 관하여 조사를 받았다. 그들은 얼마의 책을 읽고 나서, 이 사업이 아무런 정치적 관련성이 없으며 순수한 그리스도교 사업이라는 것을 인정하였다. 그 대표자들 중 사람은 지부 감독자에게 “당신네 사업과 관련하여 정부 관리들로부터 어떠한 오해를 받는 사례가 있게 되면, 그 사실을 정보부에 알려 주도록 하시오” 하고 조언을 하였다.

점차 전쟁이 임박해지자 또한 국가주의 감정이 증가하였으며, 공립 및 사립 학교에서 기숭배 의식을 의무화하는 데 많은 논란이 있었다. 1939년초에 어떤 ‘여호와의 증인’ 자녀들이 기에 경배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퇴학 처분을 받았으며, 어떠한 표상물에 대해서도 그들이 종교적인 이유로 거절하기 때문에, 이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신문에서는 그들을 특별히 취급하였다. 드디어 그 당시 법무장관인 ‘호세 아바드 산토스’에 의하여 제기된 발의 즉 기 의식을 강력히 의무화한다는 회람이 모든 학교에 발송되었다. 의심할 바 없이 이 조치는 미국 대심원이 ‘여호와의 증인’에 대하여 판결할 때인 1940년 6월 ‘고비티스’ 사건의 결과에 의해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다.

전쟁이 ‘필리핀’에 미치다

이러한 모든 상황은 일본 공군이 ‘필리핀’ 시간으로 1941년 12월 8일 오전 2시가 조금 지나 ‘하와이’의 진주만을 공습하였을 때 극도로 악화되었다. 몇시간 후에 한차례의 공습이 남부 ‘민다니오’에 있는 ‘다바오’ 시에 있었으며, 같은 날 정오에 대만에서 출격한 일본기들에 의하여 ‘루손’ 섬에 있는 ‘클라아크’ 및 ‘이바’ 미군 기지들이 폭격을 당하였다. 전쟁이 ‘필리핀’까지 미쳤다.

첫 공습이 있은지 며칠이 지나서, 협회의 ‘필리핀’ 지부는 “근계, 사업이 마비됨. 형제들은 ‘슬퍼하는 모든 자를 안위’하기로 결심하였음.”이라고 한 전보를 ‘브루클린’ 본부로 보냈다. 이 통신을 마지막으로 이곳 지부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뉴우요오크’에 있는 협회 본부와 통신이 두절되었다.

진주만이 공습을 받은지 4일 후, 오전 약 10시 경, 두명의 경찰 간부가 ‘나티비다드’ 가에 있는 지부 사무실에 와서, 지부 감독자를 심문하기 위해 데리고 갔다. 악질적인 종교인들이 당국자들에게 지부 감독자는 ‘필리핀’ 내의 일급 오열이라고 거짓 보고하였다. 같은 날 몇 시간 후에 또 지부 사무실에 있던 세명의 ‘필리핀’ 형제들이 동일한 경찰관에게 잡혀가 구금되었다. 본서에 도착하자 그들은 지문을 찍고 범죄자들처럼 사진을 찍혔다. 그리고 나서 다음날 심문을 받았다. 심문 중 그들이 만일 유도 심문에 직접 대답하기를 거절하면 구타를 당하곤 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다음, 그 세명의 형제들—‘나르시소 델라빈’, ‘아구스틴 다그다그’ 및 ‘멜코르 마니낭’—은 ‘아즈카르라카’ 가(지금의 ‘C. M. 렉토’ 가)에 있는 ‘올드 빌리비드’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지부 감독자인 ‘도스 산토스’ 형제는 그 당시 이미 거기에 있었으며, 그는 ‘필리핀’ 형제들과 격리당하였다. 그들은 이틀 동안이나 아무 음식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엔그라쇼’ 형제가 그들을 위해 얼마간 마련해 왔다.

그 후, 이 4명의 형제들 모두는 ‘트럭’에 실려 ‘마닐라’에서 남쪽으로 약 25‘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리잘’ ‘문틴루파’에 있는 국립 감화원으로 보내졌다. 거기서 그들은 다시 지문과 사진을 찍히고, 머리 꼭대기를 십자형으로 깎였는데, 아마도 이것은 반역자라는 것을 나타내는 듯하였다. ‘도스 산토스’ 형제는 다시 다른 수감자들로부터 별도로 떼어졌다. 그는 독방에 갇히게 되었으며, 햇볕을 쪼이는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델라빈’, ‘다그다그’, 및 ‘마니낭’ 형제들은 정부 전복을 꾀하는 반정부 운동 단체 단원들인 몇명의 ‘사크달리스타스’와 함께 큰 감방에 수감되었다. 그 형제들은 이 사람들에게 담대히 증거하였다. 1941년 12월말경, ‘사크달리스타스’들 모두에게 만일 그들이 이제부터 정부를 지지하고 그들의 정치적인 신념을 포기한다면 석방될 것이라는 통고가 있었다. 그 세명의 형제들은 즉시 간수들에게 자기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이며 정부에 대한 반역자들이 아니며 따라서 포기해야 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였다. 이러한 단호한 주장의 결과 그들은 ‘사크달리스타스’와 별도로 수감되었으며, 더 나은 대우를 받게 되었고, 그 날밤 늦게 ‘도스 산토스’ 형제와 함께 석방되었다.

‘마닐라’ 북쪽 약 20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판가시난’의 ‘산 파비안’에 있는 ‘페드로 나바로’ 형제와 기타 몇명의 형제들이 야외 봉사에서 사용할 서적을 받으려고 ‘마닐라’로 자전거를 타고 오는 도중 진주만 공습 소식을 들었다. 돌아가는 도중 그들은 미군들(USAFFE—미극동 공군)이 도로와 해안을 따라 깔려 있고 일반 민중들은 산으로 피신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판가시난’에 도착하자마자 이들 형제들도 자기들의 집을 떠나 ‘판가시난’ ‘산 자신토’, ‘로봉’ 산으로 가족들을 데리고 갔다.

1941년 12월 14일, 이들 형제들 중 17명이 체포되었다. 그들은 ‘필리핀’군 당국자들로부터 그들이 전파하는 왕국이 일본 정부를 가리키는 것인가 또는 여호와는 일본인들의 신의 이름인가 등의 질문을 받았다. 형제들은 왕국은 하나님의 왕국을 가리키며, 여호와는 전 우주의 하나님이라는 점을 분명히 대답하였다. 그 다음, 상사가 나무 둥치에 미국기와 ‘필리핀’기를 나란히 펴놓고 ‘나바로’ 형제에게 그의 짧은 내복을 제외한 모든 옷을 벗고 무릎을 꿇은 다음 그 기들에 입을 맞추라고 명령하였다. 그가 가만히 서 있자, 그들은 그가 쓰러질 때까지 다른 형제들 앞에서 무참하게 구타를 하였다. 그에게 일어서라고 하고는 즉시 다시 때려 쓰러뜨렸다. 그 형제는 저녁부터 새벽 1:30분까지 잠간의 사이만을 두고는 네명의 군인들로부터 돌려가며 구타를 당하였다. ‘나바로’ 형제는 그러한 심한 구타를 받아 갈비뼈 하나가 부러졌다.

이러한 무자비한 광경도 이를 지켜 보고 있던 형제들에게 군인들이 기대하였던 두려움을 갖게 하지는 못하였다. 이들 증인들 역시 타협을 거절하였기 때문에 구타를 당하였고 담배불로 지짐을 당하였으며, 손가락 사이에 총알을 끼운 다음 매우 세게 함께 비틀림을 당하였다. 다음날 그 17명은 ‘마나오악’ 공동묘지로 끌려갔으며, 총살을 당하리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총살은 시키지 않았으나 관리들에 의하여 다시 심문을 받기 전까지 그들은 오전 8시부터 오후 3시까지 아무 것도 가리지 못한 채 열대의 태양 아래 있게 되었다. 그후, 그 형제들은 ‘다구판’ 형무소로 끌려갔으며, 이 삼일 후에 석방되었다가 하루 후에 다시 체포되어 ‘판가시난’의 ‘타유그’에 수감되었다.

‘나바로’ 형제와 그의 삼촌이 함께 사슬에 묶여 광장에서 정기적으로 구타를 당하고 있는 동안, 그 증인들은 더욱 심한 학대를 받은 후, 군 ‘트럭’에 실려 ‘마닐라’로 이송되었다. 그 당시에는 일본군이 교량이나 도로를 빈번히 폭격하였기 때문에 공습이 있을 때마다 군인들은 길옆에 엎드리곤 하였지만, 그들의 총은 형제들을 겨누었으며, 그들은 형제들이 도로 위에서 폭격을 당하기를 바라면서 ‘트럭’에 그대로 놓아두곤 하였다. 그러나 형제들은 살아 남았고, ‘마닐라’에 도착하자, 미극동 공군 본부에서 조사를 받았으며, 거기서 그들은 혐의가 풀려 석방되었다.

석방된 형제들은 며칠간 ‘마닐라’에 남아있으면서 형제들과 접촉해 보려고 하였지만, 그들이 처음으로 지부 사무실로 가 보았을 때, 지부는 문이 닫혀져 있었다. 다음날 그들이 다시 가 보자 국립 감화원에서 석방되어 방금 도착한 ‘도스 산토스’ 형제를 만나게 되어 무척 기뻐하였다. 그러나 1941년 12월 26일 미군은 ‘마닐라’ 시를 무방비 도시로 선포하였다. 이미 일본군은 수도로 진군해 오고 있었으며, 며칠 안가서 그들은 ‘마닐라’를 완전히 장악하게 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상태를 알아차리고, 지부 감독자는 ‘나바로’ 형제에게 그가 가지고 갈 수 있을 만큼의 많은 서적들과 기타 공급품들을 가지고 ‘판가시난’으로 돌아가도록 권하였다. ‘산 야신토’에 있는 형제 자매들은 ‘나바로’ 형제 및 기타 형제들이 전부 처형을 당하였다고 생각하였는데 무사히 그리고 건강하게 그들이 귀가한 것을 보고 말할 수 없이 기뻐하였다!

한편 ‘마닐라’에서는, 일본군의 침공이 임박하자, 지부 감독자는 협회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였다. 외국인 소유의 재산은 침공군에 의하여 틀림없이 몰수당할 것이기 때문에, ‘나티비다드’ 가에 있는 지부 사무실을 팔아 버리도록 조처하였고, 서적들은 ‘마닐라’에 있는 몇명의 형제들의 집으로 배분시켰으며, 지부 기록들을 없애 버렸다. 1942년 1월 2일 일본군이 ‘마닐라’로 입성하였을 때, 그들은 모든 “적”국의 외국인들을 즉각 ‘산토 토마스’ 대학교에 있는 구류소에 신고하도록 명령하는 벽보를 전 도시에 붙였다. 그리하여 1942년 1월 26일 지부 감독자는 이 임시 수용소에 들어갔으며, 거기서 1945년 3월 13일까지 3년간을 머물러 있었다. ‘필리핀’ 시민인 그의 아내는 그와 함께 구금되지 았았다.

‘도스 산토스’ 형제는 그가 구금된 초기에 그의 아내와 다른 증인들로부터 이따금 면회를 받을 수 있었으며, 이러한 기회를 이용하여 그는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해 주었다. 후에, 이 수용소가 군의 통솔하에 들어가자 그러한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 한번은 그가 신임 협회장 ‘나단 H. 노워’ 형제로부터 편지를 받았는데, 그 편지는 1942년 1월 8일에 ‘러더포오드’ 형제가 사망하였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일본 점령하에서도 계속 성장함

미군과 ‘필리핀’군의 연합군으로부터 전쟁 전에 받은 시련기와 뒤이어 일본이 ‘필리핀’을 점령함으로 인하여 야기된 박해 기간 중, 증인들은 엄정 중립을 유지하였다. 1938년과 1939년 「연감」에서, 그들은 ‘나찌’ 독일에서 박해받는 형제들이 어떻게 하나님께 충실함을 유지하였는지를 읽었으며, 이것은 진정한 격려의 원천이 되었다. 그뿐 아니라 여호와께서는 그 전쟁이 ‘필리핀’에 미치기 전에 형제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다행히도 이곳에 있는 형제들이 「중립」이라는 소책자를 받을 수 있게 마련해 주셨다. 그러므로 그들은 양세력이 중복되거나 또는 종종 공존하거나 또는 적대하는 세력을 직면하였을 때 그들이 가져야 할 성경적인 입장을 잘 알게 되었다.

지부 감독자가 투옥되고 ‘마닐라’에 있는 협회 사무실이 문을 닫아도, 왕국의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일이 중단되는 일은 없었으며, 여호와의 백성의 수가 증가하는 일이 늦추어지지도 않았다. 대부분의 지역에 임명된 지구의 종들은 이 어려운 시기에도 임명지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서 그들이 처하여 있던 환경하에서 최선을 다해 자기들에게 위임된 왕국의 이익을 충실하게 돌보았다.

일본 점령하의 그 암흑의 3년 동안(1942-1945년) 왕국 사업이 꾸준히 성장한 것을 더듬어 살펴보려면, 전국을 다음과 같이 다섯개의 지역으로 나누어 이 문제를 살펴보는 것이 좋으며, 각 지역은 그들 나름대로 독특한 사연을 가지고 있다. (1) ‘마닐라’를 포함하여 중앙 및 남부 ‘루손’, (2) 북부 ‘루손’, (3) 서부 ‘비사야스’, (4) 북부 ‘민나나오’와 동부 ‘비사야스’ 및 (5) 남부 ‘민다나오’.

중앙 및 남부 ‘루손’

일단 일본군이 ‘마닐라’에 입성하자, 그 도시에서의 생활이 어렵게 되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은 지방으로 피난을 하였다. 일부 ‘마닐라’ 형제들은 그 도시 남쪽 약 75‘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라구나’ 주 ‘베이’의 피난민 촌으로 이주하였다. 거기서 형제들은 모두 함께 모여 살았는데, 사실 ‘마닐라’ 부회(회중)의 상당 수가 ‘베이’로 이주하여 왔다. 그들은 구할 수 있는 최근의 간행물로 정기적인 연구를 가졌다. 매 일요일이면 야외 봉사에 참여하였으며, 그 ‘베이’ 근처의 여러 도시들과 마을들을 조직적으로 돌았다. ‘마닐라’와 가까왔기 때문에 그들은 전쟁전에 형제들의 집에 보관해 두었던 서적을 가져올 수 있었으며, 그 공급품이 다 떨어질 때까지 증거 활동에 이 서적을 사용하였다. 그 후에는 형제들이 관심자들에게 서적들을 빌려 주었다.

‘베이’로부터 좋은 소식이 이처럼 전파된 결과 20‘킬로미터’가량 떨어져 있는 ‘칼람바’의 ‘마킬링’에 살고 있는 ‘루비오’ 가족을 만나게 되었고, 곧 그들 모두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침례를 받았다. 그들은 대가족이어서, ‘마킬링’에서 별도의 회중을 구성하였다. 후에 일본군의 침공으로 ‘베이’가 위태롭게 되자 형제들은 거기서 ‘마킬링’으로 이주하여 광활한 땅에서 그 가족들과 함께 살았다. 그곳으로부터 그들은 그 인근 지역들로 가서 증거하여, ‘바탕가스’ 주에 이르렀으며 종종 그들은 길을 밝히기 위하여 횃불을 켜들고 새벽 3시에 집을 떠났으며, 그래야만 그들은 동이 틀 때 그들의 구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일본 순찰대나 ‘필리핀’ ‘게릴라’들의 위험 때문에 형제들은 종종 서로 따로 떨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출발하기 전 그리고 집에 돌아왔을 때는 항상 점호를 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모든 형제들이 ‘마닐라’를 떠난 것은 아니었다. 일부 형제들은 그 도시에 남아 있었으며, 여러 집에서 연구를 위해 함께 모임을 가졌고, 가능한 한 좋은 소식을 계속 전파하였다. 인근의 ‘파사이’에서는 활동적인 한 전도인 집단이 있었으며, 1943년에 그들은 ‘팜팡가’ 주에서 온 증인들과 함께 소규모 대회를 마련하기까지 하였다.

‘마닐라’ 북쪽으로, ‘팜팡가’와 ‘북라칸’의 중앙 평야에 ‘루벤 라카닐라오’라고 하는 젊은 형제가 전시 중 지구의 종으로 임명되었다. 이 형제는 자기 가족들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배우도록 도와 주는 역할을 하였다. 「부」 책을 읽고 나서 물 침례의 중요성을 깨닫고, 이 새로운 제자들은 흰 옷을 입고 왕국 노래(‘라카닐라오’ 형제가 세상 노래 곡조에 가사를 지어 붙인)를 부르며 침례를 받았다. 점령하의 첫 해 동안 이 집단에서는 50명이 침례를 받았으며, 또 다른 50명이 상당한 관심을 나타내었고 형제들과 연합하였다. 그 지역에는 단 하나의 회중 밖에는 없었지만, 돌아가며 세 지역에서 즉 ‘만딜리’, ‘바타산’ 및 ‘팜팡사파’에서 집회를 가졌다.

이 기간 중, 일본인들과 싸우기 위하여 ‘훅발라합’ 운동이 결성되었다. 이 말은 ‘태갈록’어로 ‘훅보 응 바얀 라반 사 하폰’ 즉 “반일본 민병대”라는 말의 약자였다. 이 말은 짧게 ‘훅스’라고 불렀다. 전쟁뒤에도 그들은 계속 남아 ‘필리핀’ 정부에 대항하여 파괴 활동을 하였으며, 이 때문에 그들은 나중에 불법화되었다.

한번은 약 85명의 형제들이 연구를 하기 위해 개인 집에 모였었는데, 그 집으로부터 단 30‘미터’ 밖에 안되는 거리에서 ‘훅스’단과 일본군 사이에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형제들은, 도망하여 숨는 것은 여호와께 믿음이 없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이 있는 곳에 그대로 버티고 남아 있었다. 다섯 시간 동안이나 계속된 그 전투 중에 유탄에 맞아 몇명의 시민이 죽었지만, 형제들 가운데는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일본군과 싸우는 일에 ‘훅스’단과 연합하기를 거절하였기 때문에 증인들은 종종 일본편이라는 의심을 받았다. ‘훅스’단은 형제들로 하여금 ‘게릴라’전에 가담하게 하려고 정기적으로 시도하곤 하였다. 특히 그들은 ‘라카닐라오’ 형제에게 관심이 있었는데, 왜냐 하면 그는 유창한 연사였고 훌륭한 조직자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가 어떤 “신비한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왜냐 하면 그가 진리를 배우기 전에 영매술을 행하였고 앞일을 점쳤기 때문이다. 처음에 그들은 그들 조직에서 고위직을 제공하는 식으로 회유하려 하였다. 그러다 나중에는 압력을 가하였다. 하지만 그는 굳굳하게 자기의 중립적인 입장을 고수하였으며, 지구의 종으로서 형제들을 계속 섬기면서 그들을 강화하기 위하여 ‘루손’ 섬 중앙 주들의 회중을 방문하였다.

이 형제는 ‘팜팡고’어를 말하는 형제들을 위하여 지난호 「파수대」 기사를 정기적으로 ‘팜팡고’어로 번역하였다. 그는 이 번역을 타자하거나 썼다. 그 다음 이것을 여러 다른 가족들에게 빌려 주곤 하였다. 가족의 머리들은 어떤 부분에 대하여 질문들을 만들었으며 연구 사회자들에게 이것을 주었다. 구할 수 있는 최근 「연감」에서 일용할 성귀를 번역하였다. 그리고 노래를 부른 후 각 가족은 이것을 토론하였다. 조금씩 조금씩 ‘라카닐라오’ 형제는 「자녀」라는 협회 서적을 번역하였는데, 열 네명의 형제들이 한조가 되어 그를 둘러싸고 앉아서 그가 부르는 것을 베껴쓰는 식으로 구두 번역하였다. ‘훅스’단이 그를 찾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숨어서 이 번역 일을 하곤 하였으며, 한번은 수박밭 가운데 있는 오두막에서 이 일을 하고 있는 동안, 형제들은 방문자들이 올 경우를 대비하여 밖을 망보았다. 만일 사람들이 주위에 오면 ‘라카닐라오’ 형제는 그의 타자기를 허름한 바구니 속에 넣어 다른 것들 밑에 숨기고는 다른 일을 하는 척하였다.

번역되는 재료는 형제들을 믿음 안에서 세워 주는 것이 되도록 선정했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이 직면한 여러 가지 어려움에 대하여 영적으로 강화되었다. 그들은 여러 차례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기 때문에, 종종 ‘훅크’ 운동과 관련이 있는 친척의 중재로 겨우 살아남곤 하였다. 그러나 한번은 주임 감독자인 ‘아르만도 사르미엔토’ 형제가 잡혀갔으며 그는 죽을 때까지 나무에 꺼꾸로 매달려 단도를 던지는 표적으로 이용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리스도인 중립 입장을 범하기를 거절한 사람으로서 여호와께 충성을 지키며 죽었다.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형제들은 때때로 “지구 대회”를 위하여 함께 모였다. 1943년 9월에, 그들은 ‘팜팡가’ ‘칸다바’에 있는 ‘바르리오’ ‘만딜리’에서 모였다. ‘파사이’ 시와 ‘마닐라’ 형제들과 ‘불라칸’ ‘앙가르’의 큰 집단에 속한 형제들이 초대되었다.

그리하여 중앙 ‘루손’에 있는 형제들은 전시하에서도 믿음 안에서 활동적이고 튼튼함을 유지하였다. 전쟁이 끝났을 때, ‘라카닐라오’ 형제는 계속하여 지부 사무실의 지시하에 형제들을 세워 주는 일을 계속하였으며, 그러다가 어느날 즉 1945년 7월 9일 일단의 ‘훅스’ 단원들이 그의 집으로 들이닥쳐 ‘필리핀’ 정부에 대항하여 싸우러 자기들과 함께 가자고 총을 겨누며 요구하였다. 그가 단호히 거절하자, ‘베르두고’(집행자)가 셋을 세고 난 다음, 그의 형제 자매들이 보는 자리에서 그대로 그에게 발포하였다. 그 후 그는 30분간 살아있었으며, 그를 위로하기 위하여 그의 가족은 “죽기까지 계속 전진하라!”는 제목의 왕국 노래를 불렀다. 이 충실한 형제는 죽는 순간까지도 자기 가족들이 충실함을 유지할 것을 격려하고, 부활의 확실한 소망에 관하여 이야기하였다.

1945년 2월, 미군이 입성하고, ‘마닐라’에 있는 ‘산토 토마스’ 대학교에 수용되어 있던 수감자들이 석방되었다. ‘도스 산토스’ 형제는 미군들의 보호를 받다가 1945년 3월 13일에 드디어 석방되었다. 그의 체중은 수감될 때 61‘킬로그램’이었던 것이 석방될 당시에는 36‘킬로그램’밖에 안되었다. 수감되어 있던 후기에 경험한 일에 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지막 수 개월 동안은 극심한 배고픔을 겪었다. 매일 한 사람 앞에 멀건 죽물 한 사발씩을 배급받았다. 고구마 껍질, 잡초, 수용소 마당에서 긁어 모을 수 있는 풀 등 무엇이고 간에 극도의 공복감을 조금이나마 덜기 위해 닥치는 대로 뱃속으로 집어 넣었다.”

처음에 수용소 내에는 ‘도스 산토스’ 형제 한 사람만이 증인이었지만, 1944년 1월에 그는 다른 두 사람 즉 ‘벤 볼린’ 형제와 그의 20세된 아들과 함께 있게 되었다. ‘볼린’ 형제는 미군에서 제대한 후 1941년에 ‘필리핀’으로 다시 돌아왔었다. 그의 아들과 함께 그는 ‘파이오니아’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들은 ‘잠보앙가’ 시로 임명되었는데, 그들이 도착한지 얼마 안되어 전쟁이 일어났고, 1942년 5월에 그들은 ‘잠보앙가’ 시에서 일본군에 의하여 수감되었다. 1944년에 그들은 ‘산토 토마스’ 대학교로 이감되어 거기서 ‘도스 산토스’ 형제를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함께 정기적으로 연구를 하도록 마련하였고, 수용소 내에서 그 해에 기념식을 가졌다.

그들이 갇혀 있는 동안, 이 세명의 형제들은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동료 수감자들에게 진리를 전하였다. 그들 역시 여호와 하나님께 성실을 지켰다.

‘도스 산토스’ 형제가 석방되자 그는 곧 ‘마닐라’ 시 ‘오로 퀴에타’ 가에 있는 한 의사의 ‘아파아트’의 임시 숙소에 지부 사무실을 개설하였다. 여기서 그는 여러 지방에서 오는 형제들과 다시 만나는 즐거움을 가졌다. 그리고 그는 전쟁 중에도 남부 및 중앙 ‘루손’에서 수행된 훌륭한 봉사에 대하여 보고를 듣고 기뻐하였다. 북부 ‘루손’에서도 형제들이 그를 방문하였다.

북부 ‘루손’

점령 초기에, 북부 ‘루손’에 있는 형제들은 비교적 문제가 없는 기간을 누렸으며, 그리하여 사업도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기념식 때에는 함께 모일 기회가 마련되었으며, 4년 동안 매해 이러한 기회를 가졌다. 첫 번째 기념식은 1942년 점령이 시작된 후 얼마 되지 않은 때에 ‘라 유니온’의 ‘카바’에서 가졌으며, 약 100명이 참석하였다.

1943년부터 1945년까지 지구의 종인 ‘벤자민 삼파나’ 형제는 기념식 때에 “지구 대회”를 마련하였다. 이러한 대회들에서 다음 해의 봉사에 대한 지시가 주어졌으며, 어떤 특정 도시들에서 증거하도록 ‘파이오니아’들이 임명을 받았다. 그 당시 정확한 수자는 보존되어 있지 않지만, 1945년 대회 참석자는 1942년 기념식 때 참석 수의 다섯 배가 넘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 점을 볼 때 전쟁 중에도 여호와께서 증가되게 하셨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기억할 만한 대회들이 있던 기간 중에 전도인들과 ‘파이오니아’들은 계속 좋은 소식을 선포하였으며, 그 당시 구할 수 있었던 협회의 최근 서적인 「자녀들」이라는 책을 연구하기 위하여 함께 모였다. 어떤 곳에서는 형제들의 편의상 그리고 일본 관헌의 주의를 끌게 되는 일을 피하기 위하여 매주 집회 장소를 옮기는 것이 바람직하였다.

1944년 말경, 미군은 주기적으로 ‘필리핀’에 폭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하여 일본 점령군은 사람들을 더욱 거칠게 다루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게릴라’들이 주동하여, ‘여호와의 증인’들은 양쪽에서 공격을 받는 입장에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어떤 지역에서는 형제들이 집을 버리고 피난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라 유니온’에 있는 형제들은 산속과 ‘정글’로 들어갔으며, ‘바구이오’ 시에 있는 증인들은 폭격을 피해 굴속으로 피신하였다. 그들은 어디를 가나 서적들을 가지고 갔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연구하였다.

형제들은 미리 경계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적군들을 만나게 되는 일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으며, 그들은 여러 차례 일본 ‘스파이’들 또는 ‘필리핀’ ‘게릴라’들에게 구타를 당하였다. ‘아브라’의 ‘부케이’ 북쪽에서 모두 14명으로 이루어진 ‘이사벨로 태자’ 형제와 그의 ‘파이오니아’ 집단은 일본군에 체포되었다. 이들 14명의 형제들은 투옥되었고, 며칠 후에 처형되게 되었다. 그들은 매일 저녁 대나무나 곡괭이 자루로 구타를 당하였다. 3일 동안 그들에게 전혀 음식을 주지 않았다. 그들을 처형시키는 날이 이르자, 관례대로 일본인들은 이 사실을 그 도시 시장에게 통지하였다. 그러자 그 시장은 형제들의 친척들에게 이를 알려 주었으며, 이들 중 얼마는 자기의 가까운 벗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그는 처형 처분이 내려진 이 형제들을 위하여 중재에 나섰다. 천만 다행으로 처형이 중지되었으며, 형제들은 석방되었다. 분명히 그 경우에 그 형제들은 자기들 위에 있는 여호와의 보호의 손길을 느꼈다.

후에, 이 동일한 집단이 ‘게릴라’들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 ‘게릴라’들은 동조하든가 아니면 죽여 버리겠다고 하였다. 이 때 두려움 때문에 이들 ‘파이오니아’들 중 한 두명은 타협을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은 단호한 태도를 유지하였으며, 해를 당하지 않았다. 이 ‘파이오니아’ 집단은 그 어려웠던 때에 매우 열심히 봉사하였으며, ‘카가얀’ 주의 ‘아부루그’ 회중 및 ‘클라베리아’ 회중을 설립하고, 동시에 ‘아브라’ ‘부케이’ 회중에 있는 형제들을 강화시켜 주는 특권을 누렸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백성의 사업은 ‘루손’ 섬이 점령당해 있는 기간에도 꾸준히 발전하였다. 그러나 서부 ‘비사야스’와 같은 남부 섬들에 있는 형제들은 어떠했는가?

서부 ‘비사야스’

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회중들은 ‘바콜로오드’ 시, ‘일로이일로’ 시 및 ‘세부’ 시에 설립되어 있었으며, 그 지역의 주요 섬 세개에 각각 하나씩 있었다. 1942년부터 1945년 사이에 이곳에 있던 형제들에게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전쟁이 일어나자, ‘바콜로오드’ 시에 있던 형제들은 ‘카바당간’ 산지로 들어가 그곳에서 계속 증거하며 함께 모임을 가졌다. 그들은 조그마한 오두막들을 짓고 집단을 이루고 살면서, 회중처럼 정기적인 집회들과 야외 봉사 마련들을 가지고 있었다. 한번은 그 지역 사람들이 일본 순찰대가 다가오는 것을 알고 증인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숨어 버렸다. 형제들은 모두 문과 창문들을 닫고 오두막 속에서 조용히 남아 여호와께 기도하였다. 도망가 숨었던 모든 사람들은 일본군에 체포되었으나 하나님의 백성은 아무 일 없었다. 얼마 동안 그 산속에 있다가, 그 집단은 ‘바콜로오드’ 시로 돌아갈 수 있었으며, 거기서 그들은 계속 남아서 전시중에 여호와께 대한 그들의 봉사를 계속 수행하였다.

일본군이 ‘일로이일로’ 시를 점령하자, 형제들은 그 도시 바로 밖에 있는 ‘리가네스’의 ‘바리오 분타탈라’로 피난하였다. 거기서 그들은 ‘구스틸로’ 가족의 집에서 집회를 가졌다. 한번은 그들이 거기서 기념식을 가졌으며, ‘바콜로오드’ 시로부터 온 몇명의 형제들도 참석하였다. 후에 그 곳이 너무 위험하게 되자, 형제들은 모든 것이 보다 안정된 곳인 ‘일로이일로’ 시의 ‘산타 바바라’ 구 ‘바리오 빌리단’에 있는 ‘블라스 팜플로나’ 형제의 토지로 옮겼다.

‘빌리단’에서 형제들은 ‘팜플로나’ 형제의 땅에 집들을 짓고 집회를 위하여 왕국회관도 건축하였다. 그들이 낮에는 땅을 갈았으며 각 가족은 소출을 나누어 가졌고 저녁에는 「구원」 책과 「자녀들」이라는 책을 사용하여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곤 하였는데, ‘마누엘 에니콜라’ 형제는 형제들의 진도에 따라, 그 책들을 ‘힐리가이논’어로 통역하였다. 후에 그 집단 중 하나는 얼마의 자금을 만들었고, 형제들은 생계를 돕기 위하여 조금씩 장사를 하러 나갔다. 그들은 자기들이 만든 물건을 팔기 위해 여러 도시들로 여행을 하곤 하였으며, 그러면서 증거도 하였고, 때로는 공개 강연도 하였다. 이런 식으로 그들을 ‘딩글’, ‘산타 바바라’, ‘카바투안’, ‘루세나’, ‘자라가’, ‘바로탁누에보’, ‘람부나오’, ‘자니우에이’ 및 ‘칼리노그’ 등에서 증거할 수 있었다.

‘마누엘 에니콜라’ 형제는 한 때 법원 속기사로 일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군대에서는 그 지역 군법 회의에서 속기사로 일하도록 불렀다. 그는 이 때가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서 증거’할 기회라 생각하여, 자기가 제안된 그 지위를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러 영내로 들어갔다. (마태 10:18) 이로 말미암아 그는 연대 유치장에 구금되었으며, 거기서 그는 죽만을 먹게 되었다. 후에 이것도 제대로 공급되지 않아 수감자들은 허기를 메꾸기 위해 물을 들이켜댔다. 미군 상륙 조짐이 있자, 이 형제의 입장은 호전되었으며, 그에 대한 혐의도 완전히 없어지게 되었다. 후에 그는 ‘뉴우요오크’에 있는 ‘길르앗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얼마 동안 ‘케손시티’에서 ‘벧엘’ 가족 성원으로 봉사하였다.

‘세부’ 시에서는, 형제들이 전시 초부터 많은 어려움을 당하였다. ‘레오데 가리오’ 형제와 나중에 그의 아내가 된 ‘나티비다드 산토스’ 자매는 그 당시 다른 몇사람과 함께 ‘세부’에서 ‘파이오니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정부 당국자들로부터 오열이라는 혐의를 받아 ‘세부’에 있는 ‘투부란’에서 닷새 동안 구속되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서적 몇 권이 군사령부로 보내졌다. 그러나 ‘여호와의 증인’들을 석방하라는 명령이 전보로 회신되었으며, 그리하여 그들은 이러한 거짓 혐의를 벗게 되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증거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형제들은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였으며, 「자녀들」이라는 책과 「추축국의 종말—슬퍼하는 모든 자들에 대한 위안」이라는 소책자 등의 훌륭한 공급품을 사용하여 그들의 봉사를 수행해 나아갔다. (사도 5:29) 2주일 후에 그들은 다시 체포되었으며, 이번에는 ‘세부’ 시에 수감되었다. 담당 장교는 친절하였지만, 만일 형제들을 공개적으로 소식을 전하도록 내버려 두면 다른 사람들이 전쟁을 수행하는 데 방해가 될 것이라고 그는 설명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그 도시를 폭격하기 시작하자, 모든 수감자들은 석방되었다. 그리하여 이들 증인들은 다시 석방되었다.

1942년 말경, ‘바를라안’ 형제와 ‘산토스’ 자매가 다시 체포되었는데, 이번에는 ‘필리핀’ ‘게릴라’들이 형제들로부터 그들이 일본의 첩자들이라는 구술서에 서명을 받아내려 하였다. 서명하기를 거절하자 이들 충실한 그리스도인들은 모의 재판에 회부되었고, ‘게릴라’ 두목에게 보내졌으며, 그 다음 8개월 동안 여러 ‘게릴라’ 진지로 끌려 다니며 강제 노역을 치렀다. 한번은 국가를 부르라는 요구를 받았으나 그들은 그 대신 왕국 노래를 불렀다. 1943년 7월에, 이들 인내깊은 증인들은 결국 ‘게릴라’들로부터 그들이 중립적인 그리스도인들이며 일본 첩자들이 아니라는 확증을 받게 되어 석방되었다.

‘바를라안’ 형제와 ‘산토스’ 자매는 석방될 당시 다 해진 옷을 입고 있었지만, 즉시 좋은 소식을 다시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천만다행으로 한 소년이 그들에게 증인인 이웃의 한 사람에 관해 알려 주었다. 알고 보니 그는 협회가 발행한 「창조」 책을 읽은 일이 있는 관심자였다. 이 친절한 사람은 ‘파이오니아’들 모두를 자기 집에 머물도록 초대하였으며, 한동안 그들은 그의 집을 매주 연구 장소로 사용하였다. 그 형제들은 한 주는 증거하는 데 바치고, 다음 주는 생활비를 버는 일에 바치곤 하였는데, ‘바를라안’ 형제는 그 집주인의 땅에 옥수수를 심고, ‘산토스’ 자매는 모자를 짜서 한 개에 1‘페소’(미화 50‘센트’)씩 받고 시장에 내다 팔곤 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그 친절한 집주인의 관대한 도움을 받긴 했지만, 그들은 새 옷을 장만할 수 있었다. 2개월간 공부하고 나서 이 관심자는 ‘바를라안’ 형제로부터 침례를 받았다.

이제 ‘파이오니아’ 집단은 11명이 되었다. 그들은 ‘투부란’ 산지에서 봉사하였으며, ‘수고드’, ‘카트몬’, ‘카르멘’ 및 ‘다나오’, 나아가서는 ‘세부’ 섬 서부 해안에 있는 ‘토레도’ 시까지 여러 곳에서 봉사하였다. ‘토레도’ 시에서, 그들은 「파수대」 연구 (지난호 잡지들을 사용하여) 및 「폭로함」 소책자로 하는 ‘세부아노’어 연구를 마련하였다. 1945년 일본 점령이 끝났을 때, 이곳에서 많은 관심자들을 찾아냈으며, 그들은 침례를 받았다.

통신 두절로 인하여 서부 ‘비사야스’에 있는 형제들은 종전 후 즉시 지부 사무실과 접촉할 수가 없었다. 1945년 11월에 ‘링가옌’에서 개최된 전후 최초의 대회에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가 참석하였다. 사실, ‘루손’에서 그들 대부분이 참석한 첫 번째 대회는 1947년 3월에 ‘마닐라’에서 열린 대회였는데, 그 때 ‘N. H. 노워’ 형제가 ‘필리핀’을 처음으로 방문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즉시 좋은 소식을 선포하기 시작하였으며, 1946년 3월에 ‘힐리가이논’어를 말하는 형제들은 ‘일로이일로’의 ‘산타 바바라’에서 그들 자신이 주최한 대회를 마련하였다.

북부 ‘민다나오’와 동부 ‘비사야스’

1940년 ‘마닐라’ ‘그랜드 오페라 하우스’에서의 대회에 뒤이어 ‘콘라도 다클란’ 형제가 지구의 종으로 북부 ‘민다나오’와 동부 ‘비사야스’에서 봉사하도록 임명되었다. 그 해 4월인가 5월에 그는 그의 첫 번째 경유지로 ‘오사미스’ 시에 도착하였다. 거기서 관심자들을 발견하였으며, 새로운 사람들은 곧 ‘다클란’ 형제와 ‘잠보앙가’로부터 ‘수리가오’에 이르기까지 북부 ‘민다나오’ 전 지역에서 증거하고 있던 기타 ‘파이오니아’들과 연합하게 되었다.

형제들은 전시의 압력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곤 하였다. ‘부키드논’의 ‘말라이발라이’에서 ‘줄리아노 헤르모사’ 형제는 ‘스파이’ 혐의를 받고 육군 본부에서 체포되었으나 후에 석방되었다. 나중에 ‘파이오니아’ 집단 전체가 동일한 혐의를 받고 체포되어 ‘깅구그’에서 며칠 동안 구금되어 있었다. 그들이 체포되던 당시 ‘마닐라’의 ‘솔라노’ 형제가 그들과 함께 있었다. 그들은 다시 석방되었다.

그 증인들은 동부로 나아가 결국 ‘아구산’의 ‘부에나비스타’에 그들의 전시 본부를 마련하게 되었다. 여기서 다시 그들은 투옥되었는데, 형제들이 여호와께 찬양의 노래를 부르면서 즐거워하는 것을 보고 간수들은 매우 놀라와하였다. 그 증인들은 간수들 중 얼마에게 진리를 이야기하였으며, 이들 중 얼마는 그 소식에 상당한 관심을 나타냈다. 이 때에, ‘바클란’ 형제는 미군 장교들의 회견을 받았는데, 그는 그에게 제시된 75가지 질문에 대답하고 거기에 서명을 하였다. 분명히 이 자료는 ‘오스트레일리아’로 보내졌을 것이며, 그 후 오래지 않아, 그곳에 있던 ‘맥아더’ 장군의 사령부로부터 ‘여호와의 증인’들은 오열 활동을 한 죄가 없다는 보고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석방되었다. 이 때는 1942년 봄이었다.

이 때 ‘부에나비스타’ ‘부회’에는 약 100명의 전도인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네개의 더 작은 집단으로 구분하였다. 매주 「자녀들」이라는 책을 연구하였으며, 봉사회도 마련되었는데, 이 봉사회 ‘프로그램’은 주로 협회 출판물을 이용하여 만든 연설들과 좋은 소식을 계속 선포하도록 하는 격려로 이루어졌다. 적군들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자 증인들은 집회 장소를 이곳 저곳으로 옮겼으며, 어떤 때는 전투를 피해 산에서 집회를 가졌다. 형제들은 노래부르기를 좋아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성서의 시편을 가사로 만들어 ‘프로테스탄트’에서 부르는 곡조에 붙여 왕국 노래로 사용하였다. ‘안토니오 양존’ 형제는 악단을 만들었으며, ‘프란시스코 보르자’ 형제는 형제들이 사중창으로 부르도록 가르쳤다.

전쟁으로 인하여 공립학교들이 문을 닫자, ‘부에나비스타’ 부회는 자체 학교를 마련하여 네 집단을 구성하고, 각 집단에는 그 자체의 강사를 두게 하였다. 증인이 아닌 자녀들도 이 임시 학교에 참석하였으며, 그들이 받는 교육에 대하여 선생들에게 기부금을 내었다. 성서와 협회 출판물들이 교과서로 사용되었으므로 어떤 사람들은 이 기회에 진리를 배웠다.

지부 사무실과의 통신이 완전히 두절되었기 때문에, ‘다클란’ 형제는 협회와의 연락이 재개될 때까지 그 지역에서의 사업을 책임지고 있었다. 이 기간 중, ‘수리가오’ 주 내에서는 ‘알레그리아’, ‘마이니트’, ‘플라세르’, 및 ‘바수아그’에, 그리고 ‘아구산’ 주 내에는 ‘카바드바란’, ‘에스케란자’, ‘라스 니에베스’ 및 ‘리베르타드’(‘부투안’ 시)에 회중들이 설립되었다.

‘파이오니아’들에 의하여 수행된 봉사 외에도, 때로는 ‘부에나비스타드’에 있는 전도인들이 먼 지역에서 증거하였다. 한번은 ‘벤자민 다티그’ 형제가 30명의 형제들을 이끌고 ‘카미구인’의 섬에 사는 사람들을 방문하였다. 이 일을 위해서는 100‘킬로미터’를 걸어서 ‘탈리사얀’까지 간 다음, 또 배를 타고 가야 하였다. 많은 가족들의 경우에는 어린 자녀들을 돌봐 주도록 남겨 둘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부모들은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갔다. ‘카미구인’ 섬의 여러 마을에서 야외 봉사를 하는 동안, 증인들은 ‘게릴라’들에게 여러 차례 체포되었다. 더구나, 이 왕국 선포자들이 본 섬으로 돌아오자, 어린 자녀들을 포함하여 이 전체 집단은 ‘탈리사얀’에서 8일간 구속되었다.

형제들의 중립적인 입장 때문에 ‘필리핀’ ‘게릴라’들의 체포 명단에 탁월한 형제들의 이름이 들어 있어서, 형제들은 그들의 본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중지하고, 그 대신 성서적인 이름들을 사용하였다. ‘다클란’ 형제는 “갈렙”이라고 불렀고, 다른 형제들 역시 “욥”, “사드락” 및 “메삭”과 같은 이름으로 불렀다. 이것이 아주 보편화되어, 그들은 자기들의 본 이름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으며, 오늘날까지도 그 당시의 형제들은 종종 그들의 성서적인 이름을 불러 서로를 더 잘 상기한다.

이 나라의 기타 지역에서는, 1944년에 일본군과 ‘게릴라’들 사이의 전투가 격화되었다. 이로 인하여 형제들은 양편으로부터 미움을 받아 북부 ‘민다나오’에 있는 형제들은 많은 고통을 받았다. 형제들이 “욥”이라고 부르던 ‘야비에르 파우야’ 형제는 ‘게릴라’들에게 잔인한 고문을 받았으며, 이러한 고문으로 인하여 생긴 병 때문에 그후 얼마 안가서 사망하였다. ‘나스피트’에서 ‘아구산’ 형제와 ‘산티아고’ 형제 및 그의 아내 ‘도밍가’ 자매는 일본군에 의하여 살해되어 그들의 시체는 집과 함께 불타 버렸다. ‘이시드로 몬타’ 형제는 밤새도록 물어뜯는 불개미가 우글거리는 나무에 묶여 있었다가 살아남았으며, 타협을 하지 않았다. 다른 형제들은 ‘게릴라’들을 위해 탄약을 운반하기를 거절하자 옷을 벗기우고, 몹시 구타당하였다.

이러한 무자비한 박해 가운데서, 지구의 종은 1914년 말경 ‘수리가오’ ‘바쿠아그’에서 대회를 마련하였다. ‘아구산’ 및 ‘수리가오’ 주에서 온 형제들이 이 대회에 참석하였고, 그들의 믿음을 세워 주는 연설들을 들었다. 그 대회에서 좋은 소식을 계속 전하도록 하는 마련이 제시되었고, 격리된 구역들에서 증거하기 위해 자진자들을 부르는 발표가 있었다. 14세로부터 30세 사이의 50명의 형제 자매들이 지원하였으며, 그들은 ‘수리가오’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시아르가오’ 섬들에서 처음으로 봉사하기 위하여 갔다. 이 섬들은 비교적 문제들이 없었으며, 그리하여 증인들은 그곳에서 공개적으로 봉사하며 좋은 관심자들을 찾았고, ‘다파’, ‘투부란’, ‘부르고스’ 및 ‘누만시아’에 회중들을 설립하였다. 얼마 안되어 모두 300명의 형제들이 그곳에서 증거하고 있었다.

이 섬들에서 봉사하는 동안, 형제들은 60명이 탈 수 있는 튼튼한 배를 만들었으며, 여러 곳으로 다니며 증거하는 데 사용하였다. 그들은 그 배를 “미스바”라고 불렀다. 후에 두척이 더 만들어져 “함대”를 이루었는데, 그들은 “신권 통치 I호”와 “신권 통치 II호”라고 불리웠다. “미스바”에 짐을 가득 싣고 형제들은 두개의 커다란 섬인 ‘레이테’와 ‘보홀’을 목적지로 정하고 하루 길이나 되는 먼 여행을 떠났다. 그 당시는 ‘필리핀’에서 일본군이 퇴각하고 있었으며, ‘맥아더’ 장군의 선발대가 1944년 10월 초에 ‘레이테’에 상륙하였다.

‘레이테’ 섬의 ‘릴로안’에 상륙하자, 증인들은 두 집단으로 나뉘어 각각 ‘레이테’ 섬의 동부와 서부 지역을 방문하였다. 이 여행은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으며, ‘산타파즈’, ‘소고드’ 및 ‘나하웡’에 회중들을 설립하였다. 그중 한 집단이 ‘마아신’에 도착하자, 그들은 다시 한번 “미스바”를 타고 ‘보홀’ 섬으로 향하였다. ‘보홀’의 ‘탈리본’의 ‘이필’에 상륙해 보니, 섬 모양이 거친 원처럼 생겨, ‘벤자민 다타그’ 형제의 인도를 받는 이 집단은 세부분으로 나뉘어, 한 집단은 동쪽으로, 한 집단은 서쪽으로, 세번째 집단은 남쪽으로 향하여 내륙으로 들어갔다. 이같이 하여, 그들은 이 섬 전체에 있는 40개 마을을 전부 돌았으며, 그 주의 수도인 ‘타그빌라란’에서 만났다.

이 여행에서 증인들은 ‘보홀’의 ‘세빌라’에 있는 일단의 관심자들을 만났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과 연합한 일은 한번도 없었지만 협회의 출판물을 가지고 함께 성서를 연구하고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살바도르 말레자’는 ‘마닐라’에서 가두 증거를 하고 있던 어떤 형제로부터 얼마의 우리 출판물을 받았었다. ‘살바도르’는 일본 점령기에 그 책들을 읽기 시작하였다. 그는 ‘게릴라’ 전투원이었지만, 그 책들로부터 배운 것 때문에, 그의 여러 가지 습관을 변화시키기 시작하였고 사회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거절하였다. 한 ‘게릴라’ 동료인 ‘이그나시오 디가오’가 그에게서 이러한 변화를 알아차리게 되었고, 그 역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연구를 시작하였고, 성서를 한장 한장 읽어 나아갔다. 바로 그 때 그들은 방문해 온 형제들을 만나 더 많은 지식을 얻게 되어 무척 기뻐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이들은 침례를 받았다.

‘보홀’에서 그 집단은 ‘레이테’를 떠난 다른 형제들을 만나 함께 “미스바”를 타고 ‘시아르가오’ 섬으로 갔다. 그들은 도중에 강한 태풍을 만나 시달렸으며, 어린 소년이 배에서 떨어져 물에 빠졌는데, ‘다클란’ 형제가 물로 뛰어 들어가 그를 건져내어 아무도 목숨을 잃지 않았다. 이 후에 ‘부키드논’과 ‘미사미스 옴리엔탈’에서 더 많은 봉사를 하였으며, 그 결과 ‘바린타드’, ‘룸비아’ 및 ‘임바투그’ 회중이 설립되었다.

전시중, 형제들은 그 구역에서 상당히 많은 일을 열심히 수행하였으며, 그 결과 1946년까지는 많은 회중들이 설립되었고 그 때 지부 사무실과의 통신이 재개되었다. ‘데클란’ 형제는 그 동안 있었던 일을 지부 사무실에 직접 보고하기 위하여 ‘마닐라’로 갔으며, 그 때부터 사업은 다시 협회의 지부의 지시를 받게 되었다.

남부 ‘민다나오’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여섯명으로 된 일단의 ‘파이오니아’들이 얼마의 관심자들과 함께 남부 ‘민다나오’에 있는 ‘다바오’ 시에서 증거하고 있었다. 그들은 ‘시프리아노 세풀베다’ 형제의 집에서 성서 연구를 위하여 정기적으로 모였다. 그 지역에서 지구의 종으로 일하도록 임명을 받은 ‘살바도르 리와그’ 형제가 그들 중 하나였으며, 그와 함께 형제로는 ‘데시데리오 파우야’, ‘리노 일라구이손’ 및 ‘펠리노 코미도이’와 자매로는 ‘푸리피카시온 베네트’와 ‘엘비라 알린소드’가 있었다. 일본군이 1941년 12월에 ‘다바오’에 상륙하자 ‘일라구이손’ 형제는 ‘다바오’ 시에서 떨어진 ‘사말’ 섬에 있었고, 나머지 증인들은 점령군으로부터 도망하고 있던 다른 많은 사람들을 따라 ‘코다바토’ 주로 피난하였다.

이 작은 집단은 여러 날 동안 나무 뿌리 사이에서 잠을 자고, 그들에게 달라 붙어 피를 빨아먹는 거머리를 떼어내면서 여러 날 동안 깊은 삼림속을 걸었다. 물을 구할 수 없을 때는 등나무를 잘라 그 수액을 마셨다. 이 나무는 사탕수수와 약간 비슷하게 생겼는데, 가로 베면 목을 축일 정도의 단 물이 나온다. 침공한 일본군은 그들 뒤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았으므로 때때로 침공군에게 투항하라고 사람들을 회유하는 전단을 비행기가 뿌리곤 하였다. 한 전단에는 교황이 어린 아이들을 축복하는 그림이 있었으며, 그것은 모두가 “동남아 공영권”에 협조할 것을 설득하는 것이었다.

‘코타바토’에서는 한때, 형제들과 자매들이 지방 거민들과 그곳에 정착한 ‘다바오’에서 온 피난민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었다. ‘피키트’ 마을에서, 증인들은 전쟁 전에 얼마의 서적을 받은 일이 있는 한 사람을 알게 되었다. 그를 통하여 그들은 ‘페드로’와 ‘아니아노 브릴리스’라고 하는 그의 친척 두 사람을 만났는데, 그들은 진리를 받아들였으며, 그들은 오늘날까지 여호와의 백성 가운데 있다. 일본군이 드디어 ‘코타바토’를 점령하자, 형제들은 일본군 요새에서 부역하도록 징발되는 일을 피하기 위하여 이곳 저곳으로 옮겨다니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들은 마을에서 머무는 것이 위태롭게 되면 산속으로 들어가 천막을 쳤다. 이렇게 옮겨 다니는 것이 한편으로는 축복이 되었다. 왜냐 하면 오늘날 감독자와 봉사의 종들로 일하고 있는 상당 수가, 특히 ‘카바칸’과 ‘키다파완’에 있는 형제들 중 많은 수가 그 때 처음으로 만나게 된 사람들이다. ‘키타파완’에서는 ‘구일레르모 알레기도’라고 하는 사람이 형제들을 보고 매우 반가와하였는데, 그는 한 때 ‘도스 산토스’ 형제가 ‘필리핀’에 오기 전 그와 함께 ‘하와이’에서 성서를 연구한 적이 있었다. ‘알레가도’ 형제의 전 가족이 진리 안으로 들어왔다. ‘알레가도’와 ‘브릴라스’ 가족들 외에도 그 때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으로는 ‘안테로’와 ‘마카리오 바스웰’, ‘알프레도 나동’, ‘아나스타시오 곤잘레스’ ‘아르세니오 베르무데즈’ 및 ‘마누엘 감포니아’ 등이 있었다.

한번은 몇명의 형제들이 일본의 첩자로 의심을 받아 ‘게릴라’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들은 ‘페드로 브릴라스’가 전에 군인이었다는 사실을 알자, 그를 무자비하게 구타하였다. 형제들 중 네명은 밤새도록 붙잡혀 있다가 정글 깊숙이 끌려 들어가 갇히게 되었다. 그들은 돼지를 수송하는 데 사용하는 것과 같이 생긴 조그마한 우리에 갇히게 되었는데, 이것은 너무나 비좁아서 형제들은 눕지도 서지도 못하고 단지 앉아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계속 증거를 하였으며, 그 결과 간수 중 한 사람인 ‘로렌조 헤르산’이 진리를 받아들였으며, 후에 침례를 받았다. 그 형제들은 ‘브릴라스’ 형제들의 친척의 중재로 풀려 나기까지 거의 두달 동안 연금 상태에 있었다.

형제들이 가지고 있던 서적들이 분실되거나 소모되어 그들 가운데에는 몇권의 성서 밖에는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여섯 내지 여덟명으로 구성된 집단들을 만들어 그들 중 절반은 한 주일 동안 육적인 양식을 위해 일하고 나머지 절반은 증거하러 나갔다. 봉사시에는 보통 한 집단에 성서가 하나 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들 모두가 함께 한집으로 갔다. 한 형제가 증거를 하는 한편 다른 형제들은 그 집주인이 하는 질문에 대답하는 데 참여하였다. 그렇게 하여 모두가 증거하는 데 참여할 수 있었다.

1944년 가을이 되자, 중립을 유지하기가 점점 더 어렵게 되었다. 그리하여 형제들은 큰 집단을 이루어 함께 있었고 가능한 한, 인구가 조밀한 지역을 피하였다. 이 여행하는 “회중”에는 자녀들을 포함하여 약 200명이 있었으며, 이들은 결국 ‘필리핀’에서 가장 높은 산인 ‘아포’ 산 밑, ‘라미탄’, ‘마킬라라’, ‘코다바토’ 근처에 있는 ‘정글’에 정착하였다.

전투가 소강 상태에 들어간 잠정 기간을 이용하여 몇명의 형제 자매들은 그들의 고향인 ‘다바오’로 돌아갔다. ‘사말’ 섬에서 그들은 그 때까지 충실하게 봉사하고 있던 ‘리노 일라구이손’을 만났다. 이 형제는 일본인들 또는 그들의 군대들에게 다섯 차례나 체포되어 구속되는 일을 겪으면서도 그 섬에 일곱개의 집단을 세울 수 있었다.

1944년 말, 미군이 ‘다바오’ 본토에 상륙하자, ‘사말’ 섬에 있던 이들 형제들은 다른 증인들과 만나기 위하여 ‘본토’로 이주하였다. 약 50명으로 이루어진 한 집단은 우선 ‘다바오’ ‘산타크루즈’의 ‘바토’로 가서 ‘펠리노 코미도이’ 형제가 만난 일이 있던 관심자인 ‘갈리카노 피코드’의 집으로 찾아갔다. ‘피코드’는 일본인의 조종을 받는 상린회 회장을 지냈는데 그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나서 자기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증거를 하였다. 그는 상린회가 그에게 요구하는 많은 일들을 양심적으로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그의 직책에서 해임되었는데, 이에 대하여 그는 다행으로 생각하였다. ‘사말’ 섬에서 온 50명의 형제들이 한동안 그의 집에 머물러 있자, 이웃들과 친척들은 그의 집에 은신하고 있는 이 낯선 사람들에 대하여 비난하였다. 그러나 그 증인들이 체포될 수 있기 전에, 그는 밤중에 그들을 내보냈으며, 그들은 밀림과 산속을 걸어 드디어 ‘아포’ 산 아래에 ‘리와그’ 형제가 있는 “회중”과 만나게 되었다.

그 회중 전체를 가리켜 “여호와 삼마”라고 불렀으며, 증인 각자는 성서적인 이름, 예를 들면 “요엘”, “요나답”, “다윗” 등등으로 불리웠다. 그들 중 어떤 이름들은 오늘날까지 형제들에게 붙어다닌다. 이것은 신분이 노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한 일이었는데, 특히 ‘리와그’ 형제는 ‘게릴라’들과 일본군들의 “지명 수배자” 명단에 들어 있었다. 만일 낯선 사람이 ‘캠프’ 근처로 오면 다른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해 ‘티키’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부언하면, 이 말은 ‘세부아노’어로 “집도마뱀”이라는 뜻이다.

약 1년에 걸친 이 기간 중, 회중은 꾸준히 영적으로 튼튼해졌다. ‘리와그’ 형제는 돌아가면서 일곱개의 이 움막들을 방문하여 저녁에 연구를 사회하곤 하였다. 이 때쯤에는 대부분의 서적들이 없어졌기 때문에, 그는 형제들을 강화하고 격려하기 위하여 일용할 성귀와 그 해설을 준비해 주었다. 이것들은 ‘마카리오 바스웰’ 형제에 의하여 ‘일로코’어로, ‘모이세스 수페라’ 형제에 의하여 ‘세부아노’어로 번역되었는데, 이 집단에는 이 두가지 언어 집단이 거의 균등하게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에스더’와 ‘룻’기와 같은 성서 기사를 손으로 베껴 쓴 재료도 준비되고 번역되었으며, 이것은 일주일에 한번씩 함께 전체 집단이 모이는 기회에 토론 재료로 사용되었다. ‘레오비힐도 코미도이’는 이 재료에 질문을 만들었다. 「자녀들」이라는 책에서 발췌한 내용을 손으로 써서 세 부분으로 간단하게 만들었으며, 부모들이 매일 아침 하나님의 말씀을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데 이것을 사용하였다.

노래는 그들의 숭배의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였기 때문에, ‘모이세스 수페라’ 형제는 ‘일로코’어와 ‘세부아노’어 두 가지 노래를 작사하였다. 이러한 노래들은 성서 연구와 집회를 시작하고 마칠 때 사용되었다.

물질적인 양식을 공급하기 위하여, 각 집은 각각 전답을 가지고 있었으며, 형제들은 벼와 ‘카사바’를 심었다. 한집에 양식이 떨어지면 다른 집에서 도와 주곤 하였는데, 이런 일은 기원 33년 오순절 이후 ‘예루살렘’에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있을 때 그들이 나타냈던 동일한 영으로 그렇게 하였다. (사도 2:42-45) 첫 추수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그 집단은 야생 열매들과 나무 뿌리로 연명하였으며, 때로는 멧돼지를 잡아 먹기도 하였다.

여러 차례 증인들은 전투중 양편에 의하여 발각되곤 하였다. 한번은 일본군 순찰대가 ‘리와그’ 형제를 그들의 본부로 연행해 갔으며, 거기서 그는 책임 장교로부터 여러 시간 동안 엄한 문초를 받았다. 놀랍게도 그는 여호와의 왕국에 관한 훌륭한 증거를 한 다음 석방되었다. 또 한번은 일단의 ‘게릴라’가 그를 수색하였는데, 한 집의 나무 껍질로 된 천정에 숨어 있어서 들키지 않았다.

이 형제들은 ‘코타바토’에 외따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전쟁이 끝난 것을 알지 못하였다. 지부 감독자는 ‘리와그’ 형제를 찾기 위하여 전쟁 전에 알고 있던 주소들로 여러 통의 편지를 발송하였으며, 드디어 ‘마닐라’로 돌아오라는 지시가 담긴 한통의 편지가 그에게 전달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회중”을 떠나 ‘마닐라’로 가는 교통편을 이용하기 위하여 ‘다바오’로 떠났다.

1945년 12월 말경, 이 큰 “회중”의 대부분은 이 은둔해 살던 ‘정글’ 집을 떠나 150‘킬로미터’나 멀리 떨어져 있는 ‘다바오’의 ‘파나보’로 소달구지를 타고 여행을 하였다. 거기서 그들 대부분은 협회의 지부 사무실로부터 확정적인 지시를 기다리며 남아 있었다. ‘리와그’ 형제와 ‘수페라’ 형제가 1946년 10월에 ‘마닐라’로부터 돌아왔을 때, 형제들은 그 이전 어느 때보다 더 큰 증거 활동을 위하여 단단히 준비되어 있었다. 13명은 즉시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였으며, 한편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가 거기서 좋은 소식을 전파하였다. 얼마 안가서 회중들이 ‘다바오’와 ‘코타바토’에서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으며, 그리하여 오늘날에는 이 지역에 238개의 회중들이 있다.

전후 재조직이 시작되다

전쟁은 ‘필리핀’을 도산 직전으로 몰아넣었다. 전국에서 일백만명 이상이 행방불명이 되었다. 어림잡아 ‘필리핀’인들의 약 3분의 2가량이 재산을 잃어 버렸다. 최대의 도시가 황폐되었으며, ‘마닐라’의 파괴 정도는 ‘스탈린그라드’와 ‘바르샤바’와 비교될 만하다고 한 역사가는 주장하였다. 그 도시는 전쟁중 양편으로부터 포격을 받아서 그리고 ‘인트라무로스’의 고대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서의 치열한 시가전으로 인하여 파괴되었으며, 그 전투로 ‘마닐라’ 전투는 끝났다. 2년 후, 즉 그 당시 ‘왙취 타워 협회’ 회장인 ‘나단 H. 노워’ 형제가 처음으로 ‘마닐라’ 시를 방문했을 때에도, 그 도시는 황폐된 그대로였다. 한 보고서는 그가 본 바를 다음과 같이 알려 준다. “사람들의 집들이 있던 구획들은 하나같이 싹 쓸어 버린 공터같이 되었다. 사실 이것은 우리가 일년 전 ‘유럽’에서 본 어떤 광경보다도 더 심하였다.”

그러므로 그 때는 복구하고 재건할 때였으며, 이것은 그 나라 전체 뿐 아니라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의 회중들의 구조에도 적용되었다. 할 일이 많이 앞에 놓여 있었다.

1945년 3월 13일 ‘도스 산토스’ 형제가 감옥에서 석방되자, 가족과 재연합한 후 그가 한 최초의 일은 의사인 ‘잉손’ 형제의 병원 바로 옆집인 ‘마닐라’ 시 ‘오로키에타’ 가 1219-B번지에 있는 한 ‘아파아트’에 지부 사무실을 다시 여는 일이었다. 그 형제의 병원은 집회 장소로 사용되었다.

그 당시 항공우편은 군인들만 이용하도록 제한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지역에 선박 우편으로만 편지를 보낼 수 있었지만, ‘도스 산토스’ 형제는 ‘브루클린’ 사무실과 다시 연락을 취하였다. 그는 전시 중 ‘필리핀’ 형제들이 받지 못했던 「파수대」 지난 호 및 기타 서적들, 그리고 서신 모두를 청구하여 받았다. 이렇게 ‘필리핀’ 지부는 잃었던 시간을 만회하면서 다시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하였으며, 여호와의 백성의 전세계적인 발전과 보조를 맞추기 시작하였다.

그 동안, ‘루손’ 각처에 있는 형제들로부터 보고들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이로부터 그리고 두명의 지구의 종들이 보내온 불완전한 보고를 통하여 추산해 보건데, 그 섬에는 약 2,000명의 왕국 전도인들이 있었으며, 64개의 회중이 조직되어 있었다. 이것은 점령당해 있던 기간에 31개의 새로운 회중이 조직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비사야스’와 ‘민다나오’로부터 들어오는 보고가 전혀 포함되지 않은 것이었다. 왜냐 하면 그곳에 있던 형제들은 그 때까지 지부 사무실과 연락이 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비록 불완전하긴 하지만 이 수자는 1941년 이후 엄청난 증가가 이루어졌음을 나타냈으며, 1941년 전쟁 전의 마지막 전체 ‘필리핀’의 보고는 373명의 전도인들이 있었음을 알려 준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이곳에서의 참 숭배를 파괴하고자 하는 ‘사단’ 마귀의 단호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여호와로부터 온 참으로 놀라운 축복이며 훌륭한 응답인 것이다!

1945년 7월부터 9월까지 ‘도스 산토스’ 형제는 ‘루손’에 있는 여러 회중들을 방문하고 격려하였다. 7월 어느 땐가, 그는 전시 중 얼마의 형제들이 주장하였고, 얼마의 의견 충돌을 불러 일으켰던 사적인 의견들과 해석들을 시정하는 일을 돕기 위하여 열렸던 합동 모임에 참석하여, ‘판가시난’에 있는 24명의 부회의 종들(주임 감독자들)과 만났다. 어떤 사람들은 ‘아마겟돈’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생각하였으며, 어떤 형제들은 고대의 예언자들이 부활되었다고 말하였다. 그 때에 이러한 또는 기타 덜 심각한 오해들이 시정되었으며, 형제들은 전후 왕국 전파 사업에서 연합하여 힘쓰도록 도움을 받았다.

9월에 와서 우편을 통하여 「파수대」 잡지를 다시 받게 되기 시작하였고, ‘필리핀’ 증인들은 46개월 만에 최근호 「파수대」 연구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이 때쯤 해서, 1930년대에 ‘왙취 타워 협회’를 이탈하였던 약 200명의 사람들이 여호와의 연합된 백성과 연합하기를 원한다는 탄원을 하였다. 이들은 기꺼이 환영을 받았으며 전후에 형제들과 연합하게 되었다.

전후 첫 번째 대회

‘도스 산토스’ 형제는 석방되자마자 ‘판가사난’의 ‘링가옌’에서 전국 대회를 개최하도록 마련하였다. 그 당시 ‘판가시난’ 주 정부로부터 ‘시손’ 강당과 그 부근 대지를 임차해 사용하고 있던 미군으로부터 그 강당을 빌렸다. 이 훌륭한 대회는 1945년 11월 9-11일에 개최되었다. 그리하여 2,000명이 넘는 형제 자매들이 참석하였으며, 그들 대부분은 ‘루손’ 섬에서 왔다. 60개의 회중들이 참석하였다. 대회장은 야자나무가 빙둘러 싸고 있는 해변 가까이에 있었으며, 전쟁으로 파괴된 자취가 그곳의 아름다움을 망쳐 놓았으며, 강당도 폭격으로 얼마간 피해를 입었다. 강당에는 의자가 없었다. 그리하여 형제들은 대나무 의자를 만들었다. 대회 참석자들은 ‘니퍼’ 야자나무와 대나무로 만들어진, 약 백여채의 이전에 군대 막사로 사용하던 곳에서 숙박을 하였다. 큰 막사에서는 40명이 숙박할 수 있었다. 버려져 있던 회식장은 식당으로 이용되었는데, 형제들은 자기들의 양식과 취사 기구들을 대회장에 가지고 와서 각자의 식사를 마련하였다.

대회가 시작되어 형제들이 ‘플래카아드’를 들고 야외 봉사를 시작한지 얼마 안있어, 한 ‘가톨릭’ 사제가 그 대회를 중지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 대회가 불법이라는 사제의 말을 듣고, 대리 주지사는 형제들이 그 건물에서 퇴거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는 주장하기를 ‘판가시난’ 주 정부로부터 아무런 승인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미군으로부터 받은 승인은 무효라는 것이었다. 또는 ‘시손’ 강당과 같은 공공 재산은 종교적인 목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형제들이 대회를 중지하는 일을 거절하자, 그 지사는 형제들을 퇴거시키도록 헌병 한 사람을 보냈다. 그러나 그 헌병은 형제들이 받은 승인서를 조사한 후, 그 명령을 당장 시행하지 않고 우선 자기 사령관에게 조회를 하였다. 그 사령관은 증인들에게 “여러분들의 대회를 계속하시오” 하고 말하고는 그 헌병에게 “이 사람들을 보호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그 대회는 형제들을 퇴거시키기 위해 파견된 군인들의 보호하에 성공적으로 마쳤다. “평화—그것은 영속될 수 있는가?”라는 영어 공개 강연에 약 4,000명의 청중이 참석하였다. 기타 연설들은 ‘일로코’어와 ‘판가시난’어로 제공되었다. 약 일년 전 ‘맥아더’의 군대가 상륙했던 ‘링가옌’ 만에서 119명의 거대한 침례식이 베풀어졌다. 이 대회에서 처음으로 「조직의 지침」이라는 소책자가 발표되었으며, 관심자들과 가정 성서 연구를 사회하는 방법을 보여 주는 실연도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연단에서는 보다 훌륭한 회중적 지시와 개선된 가르치는 방법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것들은 전시 중에 진리를 받은 그 형제들 대부분에게는 매우 필요한 것들이었다.

대회 후, 그 주지사는 대회 위원을 구성하는 세 형제들을 관직에 있는 사람의 명령에 불복하였다는 이유로 고발하였다. ‘다구판’ 시 1심 법원에서, 그들은 30일간의 구류 처분을 받았다. 이 판결에 대하여 상소를 하였으며, 상당한 시간을 끈 후 공소원에서 취급되었다. 후에 ‘필리핀’ 부통령이 된 ‘엠마누엘 펠레즈’ 변호사는 이 사건을 증인들에게 유리하게 주장하였으며, 그 법원은 하급법원의 판결을 파기하였다.

이 판결은 중요한 것으로서 후에도 ‘필리핀’ 내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이 그리스도인 대회를 공립학교나 다른 공공건물에서 개최하는 권리를 옹호하는 데 빈번히 사용되는 판례가 되었다.

‘링가옌’ 대회 후 얼마 안있어 형제들의 종(오늘날의 순회 감독자)의 봉사가 시작되어, 지구의 종의 봉사를 대치하였다. ‘살바도르 리와그’ 형제가 최초의 형제들의 종이 되어, 그 당시 ‘루손’ 섬에 있는 회중들을 모두 방문하였다. 1946년 4월 16일, 이 섬 전체를 통하여 주의 만찬을 기념하기 위하여 4,185명이 참석하였다.

1946년 8월에 이르러는, 지부 시설이 왕국 사업의 급속한 증가를 감당하기에는 너무 협소하게 되었다. 바로 그 때, 여호와께서는 ‘마닐라’ 시 ‘산타아나’ 구 ‘헤르란’ 2가 2621번지에 소재한 좀더 큰 장소로 이사할 길을 열어 주셨다. 이곳은 자기들의 시설을 지부 사무실과 왕국회관으로 이용하도록 관대하게 제공한 한 헌신한 가족의 넓은 집이었다. 밑의 층은 서적 보관실로 사용되었다. 이 집은 지금까지도 ‘마닐라’의 두 회중에 의해 왕국회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때쯤 해서, 또한 ‘필리핀’ 지부는 수 ‘톤’에 달하는 36상자의 의류를 받았다. 이것들은 전시에 몹시 시달렸던 사람들을 위하여 미국에 있는 여호와의 백성이 기증한 것이었다. 지부는 이 구호품을 분배했으며, 5,046명이 나누어 받을 수 있었다. 사실, ‘필리핀’ 형제들은 이러한 사랑의 표현으로 뜨겁게 되었는데, 그 어려웠던 때에 이것은 매우 요긴한 것이었고, 깊이 감사히 여겼다.

1946년은 12월 18일부터 20일까지 있었던 “즐거운 백성” 신권 대회의 개최로 끝을 장식하였다. 이 대회는 그 해 8월에 미국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에서 개최되었던 국제 대회를 반복한 대회였다. ‘마닐라’ ‘산타아라’에 있는 ‘필리핀 경마 클럽’에서 가진 “평강의 왕”이라는 공개 강연을 5000명 이상이 들었다.

협회장의 두번째 방문

‘필리핀’에서의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상 중요한 한 이정표는 1947년 3월 31일부터 4월 2일까지 개최되었던 “찬양하는 백성” 신권 대회 중에 있었다. 첫날 그 대회는 ‘마닐라’ 시 ‘비토크루즈’에 있는 ‘리잘 기념 경기장’에서 열렸었는데, 빈약한 음향 시설로 인하여 여러 언어로 된 ‘프로그램’을 거의 알아 들을 수 없게 되자, 마지막 이틀을 위해 이 대회를 ‘산타아나’에 있는 ‘필리핀 경마 클럽’으로 옮기게 되었다.

1912년에 ‘러셀’ 형제가 방문한 이후, 처음으로 ‘왙취 타워 협회’ 회장인 ‘N. H. 노워’가 ‘필리핀’을 방문할 계획이 세워졌으며, 그는 형제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이 대회야말로 전쟁 이후, ‘비사야스’ ‘민다나오’ 및 ‘루손’에서 참석한 형제들과 함께 즐긴, 명실공히 최초의 전국 대회였다. 지연되어 ‘노워’ 형제와 그의 비서인 ‘밀튼 G. 헨첼’ 형제는 4월 1일에야 도착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도착하였을 때, ‘필리핀’ 형제들로부터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그 대회 마지막 날인 4월 2일 수요일에 ‘노워’ 형제는 ‘파이오니아’들을 만났으며, 처음으로 ‘필리핀’ 형제들이 미국에 있는 ‘왙취 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에 참석하도록 신청서를 쓸 초대를 받았다. 그 날 아침 36통의 신청서가 제출되었다. 이 일이 진행되는 동안, 침몰된 수많은 배들의 잔해가 ‘마닐라’ 전투 전모를 상기시켜 주는 ‘마닐라’ 만에서는 151명의 새로운 제자들의 침례식이 거행되었다. 그 날 오후, ‘노워’ 형제는 4,200명의 청중에게 “만민의 환희”라는 공개 강연을 하였다. 그 강연 전부가 전국에서 들을 수 있는 KZPI 방송국을 통해 방송되었다. 무엇보다도, 그 대회 결론에서 ‘노워’ 형제는 조만간 ‘길르앗’ 졸업생 세명이 ‘필리핀’에 도착할 것이라고 발표하였으며, 이것은 ‘필리핀’ 형제들의 마음에 큰 기대를 일으켰다.

처음으로 ‘길르앗’ 졸업생이 도착하다

이 대회가 끝난 후 3개월 채 못된 1947년 6월 14일에 처음으로 ‘필리핀’으로 임명된 ‘길르앗’ 졸업생 세명이 도착하였으며, 한 달 후에 또 한명이 도착하였다. 그들의 이름은 ‘어얼 스튜워트’, ‘빅터 화이트’, ‘로렌조 알피치’ 및 ‘닉 스켈패릭’이었다.

형제들은 그들을 부두에서 만나 지부 사무실로 데려왔다. 지부 사무실에는 방이 충분치 않았으므로, 새로 도착한 사람들은 한 구획 떨어져 있는 세탁소 이층에 있는 방을 임시로 사용하였다. 한달 후, ‘화이트’ 형제와 ‘알피치’ 형제는 형제들의 종으로 여행하도록 임명되었고, 반면에 ‘스튜워트’ 형제는 ‘도스 산토스’ 형제를 대신해서 새로운 지부 감독자로 봉사하도록 임명되었다. ‘도스 산토스’ 부부는 1949년 2월까지 지부 사무일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가 ‘하와이’로 떠날 준비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이곳 지부의 형성기에 많은 일을 해 놓고 1949년 7월 17일 ‘필리핀’을 떠났다.

최초의 순회 대회

1947년 말에 이르러, 이곳에서 순회 마련이 시작되자 12개의 순회구가 조직되었다. 최초로 12개의 일련의 순회 대회가 1947년 9월부터 12월까지 개최되었으며, ‘스튜워트’ 형제는 그 모든 대회들에서 지역 감독자로 봉사하였다. 이것은 그에게 이 나라 전체의 형제들의 형편을 이해하고, 그들과 사귈 수 있는 훌륭한 기회가 되었다.

‘필리핀’ 형제들은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아마도 말할 수 없이 큰 난관들을 극복하였다. ‘수리가오’에서, 한 형제는 태풍으로 발동선이 침몰하였을 때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다. 그는 소유물을 거의 다 잃었지만 대회에 참석하였다. 일련의 대회를 치르는 전체 기간 중 전국에 다섯 차례의 태풍이 몰아쳤다. 그러나 이러한 일도 형제들이 대회에 참석하는 일을 막지 못하였다. 북부 ‘루손’에서는 ‘비간’에서 열리는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형제들이 산간에 있는 그들의 집으로부터 두척의 뗏목을 타고 ‘아브라’ 강을 따라 내려왔다. 그들은 강 어귀에 다다르자, 대회 후 집으로 돌아갈 ‘버스’표를 사기 위해 뗏목을 분해하여 그 통나무를 팔았다.

협회 ‘브루클린’ 사무실로 보낸 보고서에서, 지부 감독자는 다음과 같이 썼다. “서구 문명에 젖은 사람이 이들 형제들이 여러 대회 장소로 도착하는 것을 보는 일은 진기한 광경이었다. 그들은 커다란 쌀자루, 음식 꾸러미, 침구 등을 가져 왔으며, 대회들이 진척됨에 따라 그들의 상냥하고 환영하는 미소는 점점 더 커졌다. 쌀, 화목, 구식 ‘버어너’ 및 침구들을 포함하여 그들의 물질적 필요품들이 모두 마련되었다.”

‘마닐라’ 시의 ‘산티아나’에 있는 왕국회관에서 열린 순회 대회에서, ‘라구나’ 주의 ‘비낭’ 교외로부터 관심자들이 참석하였다. 그들로부터 그들이 어떻게 진리를 배우게 되었는지 경험담을 듣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었다. 그 마을에는 제7일 재림교파와 연합하는 가족이 20가구 이상이나 되었다. 그들의 목사는 ‘데오도로 레이예스’였으며, 그들은 ‘데라파츠’ 구에서 조그마한 예배당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 그들은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하루는 인근에 있는 한 목사가 와서 그들에게 예수께서는 이미 영적인 의미로 왕국 권능을 가지고 오셨다고 말하였다. 그 사람은 이러한 지식을 협회의 출판물 중 하나에서 알게 되었으나, 이러한 지식의 출처를 그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상당한 토론이 있은 후, 그들은 이러한 가르침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후에, ‘왙취 타워 벧엘 및 설교단 협회’의 한 대표가 그들을 방문하여 등사본으로부터 성서를 가르쳤는데, 이 역시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의 출판물로부터 발췌한 것이었다. 나중에야 그들은 이 사람들이 그들의 성서 지식을 얻고 있는 출처를 알게 되었다. 그들은 ‘마닐라’의 ‘산타아나’에서 열리는 대회에 관하여 듣게 되었으며, 이것이 하나님의 참다운 회중인지 알아 보기 위하여 대표단을 파견하였다. 그 대표단이 진리를 발견하였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 대회로부터 돌아오자, ‘레이예스’ 목사를 포함하여 20명이 넘는 가장들로 이루어진 전 회중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여호와의 백성과 연합하게 되었다! 그 예배당은 왕국회관으로 바뀌었고, 이것이 ‘여호와의 증인’의 ‘비낭’ 회중의 시발이 되었다. 6개월 후, 이들 가족의 머리들 모두는 침례를 받았으며, 그들 중 대부분이 지금까지 여호와를 활동적으로 섬기고 있다.

고지대에 있는 ‘바구이오’ 시에서 열린 순회 대회에서, ‘스튜워트’ 형제와 순회 감독자인 ‘스켈패릭’ 형제는 그 당시 ‘마운틴’ 주에서 혼자 일하고 있던 ‘파이오니아’인 ‘로잘리아 소테로’ 자매(현재는 ‘로잘리아 델리스’)를 만났다. 그 자매는 전시에 진리를 들었으며, ‘마운틴’ 주에서 왕국 선포 사업을 위한 개척의 역군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 자매는 ‘이고로트’족의 여자였으므로 대부분이 비그리스도인들인 ‘이고로트’족과 기타 부족들 가운데서 일할 수 있었다. 그 자매는 그들에게 사랑에 찬 도움과 의로운 길로 훈련하는 일을 베풀었다. 1977년 현재, 그 당시 ‘마운틴’ 주라고 불리우던 그곳에 74개의 회중이 있으며, 성서 진리가 이 산간에 사는 겸손한 사람들의 생활을 향상시킨 엄청난 변화를 보게 되는 것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증거가 된다.

그리하여 최초의 일련의 순회 대회는 감동적이고 성공적인 대회가 되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는 공개 강연을 들은 총수는 7,516명이었으며, 여호와께 헌신을 상징하는 침례를 받은 사람은 366명이었다. 이 대회에서의 경험담들이 알려 주는 바와 같이, ‘필리핀’ 내에서는 더 크게 증가할 잠재성이 있었다. 대회들은 봉사 활동을 고무하였으며, 형제들로 하여금 수행되는 왕국 전파 사업에 대하여 명백한 견해를 갖도록 도움이 되었다. 이것은 또한 그 때부터 맞게 될 커다란 증거에 대하여 그들을 대비시켜 주었다.

많은 번역판이 필요하게 되다

전국을 처음으로 여행하고 나서, ‘스튜워트’ 형제는, 많은 형제들이 영어를 읽긴 하지만, 집회에서 해설을 하고, 연단에서 연설을 할 때 지방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더 편하게 느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결과, 여러 회중들은 그들 자체로 협회 출판물들을 번역하였는데, 집회 도중에 구두로 또는 집회 전에 타자로 그렇게 하였다. ‘마닐라’ 회중은 그 자체에서 「파수대」를 ‘태갈록’어로 번역하여 등사하였다. 반면, ‘불라칸’의 ‘앙가트’에서는 형제들이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책을 번역하여 등사하였다. 이러한 일은 성서 진리를 항상 정확하게 번역해 내지는 못하였기 때문에, 협회가 이러한 일을 맡고, 더 많은 지방 언어로 된 서적을 만들어 내는 것이 바람직하였다. 이 일은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책을 ‘태갈록’어, ‘일로코’ 및 ‘세부아노’어로 번역하는 일로부터 시작되었다. 1947년 9월부터는 ‘태갈록’어로 「파수대」를 월 2회 등사하는 일이 시작되었다. 1948년에 와서는 「파수대」가 ‘힐리가이논’어와 ‘일로코’어로도 등사되었고, 뒤이어 1949년에는 ‘세부아노’어와 ‘판가시난’어판이 나왔다. 1951년에, ‘태갈록’어, ‘일로코’어, 및 ‘세부아노’어판이 ‘뉴우요오크’에 있는 협회 인쇄기에서 인쇄되기 시작하였다. 뒤이어 다른 번역판들도 인쇄하게 되어, 협회는 ‘필리핀’ 지부를 위하여 지방 언어 판으로 여덟 가지 「파수대」와 네 가지 「깨어라!」를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 이러한 여러 가지 언어로 된 잡지들이 ‘필리핀’에 있는 협회 인쇄기에서 인쇄되고 있다.

‘태갈록’어 「부」라는 책 이후 지방 언어로 출판된 최초의 대책은 ‘태갈록’어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였는데, 이것은 1950년 ‘뉴우요오크’ 시에 있는 ‘양키스타디움’에서 열린 국제 대회에서 발표되었다. 그 이후, 협회는 ‘필리핀’의 아홉 가지 언어로 76가지 이상의 대책들과 여러 가지 소책자들을 발행하였다.

새로운 지부 건물로 이사

1947년에 보여진 신속한 확장은 지부 사무실로 쓸 더 큰 장소를 긴급히 찾게 만들었다. 1947년 7월 초, ‘헤르란’ 가에 있는 지부에서는 도착하는 다량의 화물을 취급할 수 없었기 때문에, ‘케손 시티’에 있는 어떤 형제의 촬영소의 한 곳에 우리 책의 일부를 보관해 두고 있었다. 8월에 심한 태풍이 큰 비를 몰고 와 지부 사무실 밑층을 물에 잠기게 만들어 많은 책들을 버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서적 보관을 위해서 좀 더 안전한 장소가 필요함이 분명하게 되었다.

가능성 있는 여러 장소를 물색하다가 1947년 9월에 ‘케손 시티’에서 이상적인 장소를 찾아내었다. 그곳은 높은 곳에 위치하여 있었고, 대지가 근 10,000평방 ‘미터’에 달하였으며, 거기에 커다란 2층 건물이 있었다. 1947년 협회는 이 부동산을 사들였으며, 곧이어, ‘마닐라’ 지역으로부터 온 형제들은 그 건물을 청소하고, 수리하고, 다시 칠하는 일을 돕기 위하여 자진 봉사를 하였다. 그 건물은 전시 중 일본 점령군이 사령부로 사용하던 곳이었으며, 청소하던 사람들은 고미 다락 속에서 낡은 군복들과 ‘헬멧’들을 많이 볼 수가 있었다. 그 건물 뒤에는 커다란 ‘산톨’나무가 있는데, 거기에는 검거된 투옥자들을 사형시킬 때 사용되었던 쇠사슬과 끈들이 그대로 걸려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거기서 집행을 당했기 때문에, 어떤 공포심이 있는 사람들은 그곳을 “도깨비가 나오는 곳”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자진 봉사자들은 기꺼이 수고를 하였으며, 1948년 2월 1일에 ‘벧엘’ 가족은 그 새로운 집으로 이사할 수 있었다.

‘필리핀’ 형제들은 그렇게 넓은 지부 사무실을 갖게 된 것을 무척 기뻐하였다! 그 건물 주위에 넓은 터가 있었던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그것은 그곳을 조용하고 한적하게 만들어 줄 뿐 아니라 나중에 지부 시설을 확장할 여지가 있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 당시 ‘샌프란시스코 델 몬트’의 교외인 ‘케손 시티’의 ‘루우스벨트’ 가 104번지였고 현재는 ‘루우스벨트’ 가 186번지에 위치한 이 건물은 지금까지 지부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다.

확장이 계속됨

훌륭한 새 지부 시설을 보고 감격한 나머지, ‘필리핀’의 형제들은 이전보다 더욱 열심히 봉사하였다. 지부가 이사를 한 후 얼마 안있어 개최된 일년의 두번째 순회 대회에 총 9,701명이 공개 강연에 참석하였고 429명이 침례를 받았는데 이것은 첫 번째 일련의 순회 대회보다 사실상 증가한 것이었다. 그 후 오래지 않아, ‘필리핀’에서 개최될 최초의 지역 대회가 1948년 8월 20일부터 22일까지 ‘바콜로오드’ 시에 있는 대학교 ‘클럽’에서 마련되었다. 사용된 그 강당은 그 당시 ‘바콜로오드’ 시에서 가장 훌륭한 강당으로서 공개 강연에는 2,000명 이상이 참석하였다. 그 대회에서는 ‘프로그램’에 회중 조직에 관한 연설들이 포함되었으며, 이러한 지식은 형제들에게 크게 도움을 주었다.

1949년 중 네명의 ‘길르앗’ 졸업생들이 ‘필리핀’에 더 도착하였으며, 이것은 왕국의 확장에 한층 박차를 가하였다. 그 해 12월에는 7,952명의 전도인 신기록을 달성함으로써 1940년 ‘마닐라 그랜드 오페라 하우스’에서 열린 대회에 약 300명의 전도인들이 참석한 일로 시작되었던 1940년대의 훌륭한 끝맺음이 되었다. 여호와께서는 참으로 놀라운 추수를 하고 계셨다! 1949봉사년도에는 이전 해에 비하여 전도인 61‘퍼센트’의 증가를 보았으며, 그해 말에는 전국에 14개의 순회구와 315개의 회중이 있었다.

1949년 12월에 또 한가지 발전적인 단계가 있었는데, 그 때 이러한 특권을 받도록 승인된 30명의 ‘필리핀’ 형제들 가운데 첫 번째로 세명의 ‘필리핀’ 형제들이 ‘뉴우요오크’ ‘사우드랜싱’에 있는 ‘길르앗’ 학교에서 공부하기 위하여 미국으로 떠났다. 이들 세 형제들은 1950년 여름, ‘뉴우요오크’ 시 ‘양키스타디움’에서 있었던 ‘신권 통치 증가 대회’에서 그 학교를 졸업하였다. 다섯명의 ‘필리핀’ 형제들이 또한 그 대회에 뒤이어 시작될 ‘길르앗’ 16기에 등록하기 위하여 일찌기 그 대회에 참석하였다. 이들 여덟명의 ‘길르앗’ 졸업생들은 회중들을 강화하기 위하여 그들의 본국으로 돌아왔으며, 그들이 받은 훈련은 사업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들은 ‘벧엘’, 지역 및 순회 봉사에 임명되었다.

또한 1950년에 ‘세부’ 시에 처음으로 선교인 집이 개설되었다. 그 후, 1954년과 1955년에 더 많은 선교인들이 도착한 후, ‘다바오’ 시, ‘카가얀 데 오로’ 시, ‘잠보앙가’ 시, ‘로오목’ 시 및 ‘타클로반’ 시에 얼마 동안 선교인 집들이 있었으며, 그 도시들은 모두 ‘비사야스’와 ‘민다나오’에 있는 도시들이었다. 이 선교인들은 임명된 곳에서 훌륭한 영향을 미쳤으며, 회중 조직을 강화시키고, 야외 봉사의 질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사업의 면모는 1962년 10월에 일단락이 되었는데, 그 때쯤해서는 지방 전도인들과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사업을 돌볼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하였으므로, 마지막 선교인 집이 그 해에 폐쇄되었다. 그 때부터 남아있던 또는 그 후에 ‘필리핀’으로 임명된 소수의 외국 형제 자매들은 ‘벧엘’ 또는 순회 및 지역 또는 특별 ‘파이오니아’ 봉사에 사용되었다. 지금은 단지 12명의 ‘길르앗’을 졸업한 외국인들이 이 나라에 남아있다.

1951년 전국 대회

1951년 4월 16일, ‘노워’ 형제가 이 나라에 두번째로 방문하였으며, 그 동안 그는 지부 사무실을 검열하고, 4월 20-22일에 ‘케손 시티’에서 열렸던 전국 대회에서 연설을 하였다. 그 대회는 지부 사무실에서 네 구획 떨어져 있는 어떤 형제 소유의 두 필지에서 개최되었다. 형제들은 대나무를 이용하여 전체 대회를 수용할 간이 막사를 짓고, 좌석과 연단을 만들었으며, 열대의 태양을 가리기 위하여 ‘코코넛’ 잎사귀로 덮었다.

이전의 동양 영화사의 ‘스튜디오’가 대회 참석자들을 위한 식당으로 이용되었다. ‘필리핀’에서 열린 큰 대회에서는 처음으로, 형제들이 각자 자기들 먹을 것을 가지고 와서 각자가 요리를 해 먹는 대신, 큰 국제 대회에서 운영된 식당과 같은 조직을 하였다.

그 당시의 여행은 정부에 대항하는 ‘훅스’단의 활동으로 인하여 대단히 위험하였지만, 형제들은 전국으로부터 몰려 왔으며, 첫날 5,459명이 참석하였다. 처음 몇가지 연설이 있은 후, ‘프로그램’은 영어에서 ‘일로코’어로 통역되었다. 그 당시 진리 안에 들어온 대부분의 형제들은 ‘일로코’어를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침례를 위하여 어떤 자매가 소유한 대형 수영장을 이용하였다. 식당 건물 가까이에 있는 이 ‘푸울’에서 522명이 침례를 받는 장면을 보는 일은 즐거운 일이었다.

일요일인 4월 22일 오후 5시에, ‘노워’ 형제는 ‘케손 시티’에 있는 대회장에서 뿐 아니라 ‘마닐라’ 만 근처에 있는 큰 공원인 ‘뉴우루네타’에서 “온 땅에 자유를 공포하라”는 공개 강연을 하였다. 그곳에 운집한 10,000명 이상의 군중이 그 강연을 들었다.

이 대회에서 ‘노워’ 형제는 1951년내에 ‘뉴우요오크’의 ‘브루클린’에서 ‘세부아노’어, ‘일로코’어 및 ‘태갈록’어로 「파수대」 잡지가 인쇄될 것이라고 발표하여 청중들은 매우 기뻐하였다. 이것은 1947년 이래 사용되어 온 등사한 잡지들을 대치하게 될 것이다. 그 당시의 형제들은 가두 잡지 봉사를 하는 데 매우 열성적이었으며, 실제로 ‘마닐라’의 대로에 서서 영어 잡지를 가지고 훌륭한 증거를 하였다. 지방 언어판들이 인쇄되어 나오게 되자 이 봉사도 더욱 고취되고, 예약을 맡기도 보다 수월해졌다.

1951년의 전국 대회를 할 때쯤, ‘필리핀’의 전도인 수는 14,007명에 이르렀고, 계속 발전할 전망도 좋았다. 그 대회와 협회장의 방문은 발전하도록 크게 자극하였다.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자유를 위한 투쟁

‘필리핀’ 그리스도인 증인들의 수가 불어나고, 진리의 소식이 전국 도처에 미치자, 반대가 일어나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가톨릭’ 사회에서 강력한 반대를 하였다. 어떤 경우에는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형제들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하여 투쟁할 필요가 있었다.—빌립보 1:7.

그러한 사례 중 하나가 ‘비사얀’ 섬의 ‘안테쿠에’의 ‘시발롬’에서 일어났다. 1950년 10월 31일, 화요일, 순회 감독자 ‘페드로 페기드’ 형제의 방문 기간 중, 얼마의 형제 자매들이 ‘시발롬’ 공설 시장 근처에서 가두 봉사를 하고 있다가 체포되었다. ‘기메노 길레라’ 형제와 ‘조세파 스브레미사나’ 자매가 시장세를 지불하지 않고 시장에서 판매 행위를 한다는 혐의로 고발되었다. 그들은 치안 판사에게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이 사건은 상소되었고, 치안 판사의 판정은 ‘안티쿠에’에 있는 1심 법원에서 1952년 3월 5일에 파기되었다. ‘F. 임페리얼 레이에스’ 판사는 그의 판결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본 법정은 피고[‘길레라’ 형제]가 상업적인 목적이나 이윤을 위해서, 더구나 상행위를 하기 위해서 ‘팜플렛’을 배부하지 않았으며, 단지 그의 종교에 관심을 나타내는 사람들에게 ‘팜플렛’을 주었다는 주장이 옳다고 인정하는 바이다.” 이것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행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고린도 후서 2:17과 비교) 판결을 내린 후, 그 판사는 ‘소브레미사나’ 자매에게 자기를 방문해 달라고 초대하였으며, 그 자매는 그를 방문하였고, 훌륭한 증거를 했다. 그는 성서와 「왕국이 가까왔다」는 책을 그 자매로부터 받았다. 또한 그 자매는 법원 속기사로부터 「파수대」와 「깨어라!」의 예약을 맡았다.

앞서 언급한 판결이 내려진 잠시 후인 1952년 4월 20일, 북부 ‘루손’의 ‘카가얀’ ‘솔라나’에서는 평화스러운 ‘여호와의 증인’의 순회 대회가 방해를 받았다. 심지어 일부 시관리들이 급기야 무력 공격에 합세하여, 그 결과 증인 한명이 사망하고 32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필리핀’ 경찰대의 출동으로 더 이상의 유혈 사태는 면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법정에 제소되었으며, 범법자들은 의법 처리되었다. 이와 같은 경우들은 뒤이어 여러 해 동안 평화스럽게 대회를 갖는 여호와의 백성의 권리를 보호하는 구실을 하였다. 그리하여 오늘날 ‘여호와의 증인’들은 ‘필리핀’ 공화국 내에서 매년 200개 가까운 순회 대회를 개최하며, 비교적 평온한 상태하에서 그렇게 한다.

1952년 6월 6-8일에 ‘일로이일로’의 ‘산타바바라’에서 한 순회 대회가 열렸다. 대회는 그 도시의 한 극장에서 가졌지만 공개 강연은 광장에서 갖기로 계획되었다. 그러나 그 광장은 그 도시의 ‘가톨릭’ 교회 바로 근처에 있었으므로, 그 지역 ‘로마 가톨릭’교인들 큰 무리가 그곳에서의 강연 개최 허용을 반대하는 궐기 대회를 열었다. 어떤 신문들은 이 궐기 대회에 5,000명이나 참여하였다고 보도하였다. 이 압력에 굴복하여, 시장은 자기가 발행한 승인서를 취소하였으며, 형제들은 그 대신 대회장에서 공개 집회를 갖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광장에서 성서 강연을 하도록 허가를 얻으려고 계속 노력하였으나, 그 주의 지사인 ‘마리아노 B. 페낭플로리다’ 씨가 숭배와 언론의 자유를 위하여 개입할 때까지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7월 13일에 승인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연설이 진행되는 동안 반대자들이 그 광장 주위에 매달아 놓은 열 한개의 확성기에서는 최대의 음량으로 방해음을 내기 시작하여 연사의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게 만들었다.

‘산타바바라’에서의 이 사건은 민주주의 국가인 ‘필리핀’내의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으며, 신문들은 한달 이상이나 그 사건을 대서특필하였으며, 그 보도들은 대부분 여호와의 백성에게 호의적인 것들이었다. 그와 비슷한 난관들이 다른 도시들에서도 생기게 되었는데, 특히 ‘일로이일로’의 ‘티그바우안’, ‘잠발레스’의 ‘산타크루즈’; ‘판가시난’의 ‘망갈단’ 및 ‘타르락’의 ‘게로나’ 등지에서 그러하였다. ‘게로나’의 시 광장에서 연사는 기관총이 자기를 겨누고 있는 상황하에서도 연설을 계속하였다. 그 후에 그 연설을 방해하려 했던 시장은 그 소란에 대하여 사과하였다.

이 기간 중 형제들은 좋은 소식을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그들의 권리를 요구하는 데 어느 정도 위험을 무릅썼으며, 그렇게 하는 데 상당히 공격적이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헌법상의 권리를 위한 그들의 열성적인 투쟁은 많은 편견을 깨뜨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법률을 준수하는 그리스도인들임을 확증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로 인하여 ‘여호와의 증인’들 뿐 아니라 기타 소수 종파들을 위해 보다 큰 숭배 및 언론의 자유를 위한 기초가 놓이게 되었다.

전후 여러 해 동안 많은 사람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아마도 공산주의나 반민주주의 활동을 위한 허울로 종교를 이용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였다. 이는 물론 정치 문제에 대한 우리의 중립적인 입장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가 순수 종교 조직이라는 사실이 인식되었다. 1952년 중 지부 감독자는 결혼식을 거행하는 권위를 인정받게 되었고 또한 다른 사람들이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임명하는 권위도 받게 되었는데, 이것은 정부가 ‘여호와의 증인’들을 ‘필리핀’ 내의 진실한 종교 조직으로 승인한다는 훌륭한 표가 되었다.

‘벧엘’ 시설의 확장

1953봉사년도 말경, ‘필리핀’ 내의 전도인은 최고 20,120명에 달하였고, 두개의 지역구, 30개의 순회구 및 487개의 회중으로 조직되었다. 이러한 성장으로 인하여 부가되는 일을 감당해내기 위하여 1952년에 두번째 지부 건물, 즉 본래 있던 건물과 거의 같은 크기의 건물을 ‘루우스벨트’ 가에 있는 협회 대지 위에 짓는 사업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2층 건물로서, 형제들 가운데서 자진 봉사자들에 의하여 건축되었다. 이 건축 사업은 ‘벧엘’ 가족의 한 성원인 ‘알프레도 에스테파’ 형제에 의하여 감독되었다. 전기 공사와 연관 공사만 증인이 아닌 사람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1953년에, 사무실, 세탁실 및 발송실과 잡지 부서가 이 새로운 건물로 이사를 하였으며, 그리하여 공간이 배가 되었고 지부 시설도 크게 확장되었다.

같은 해에, ‘필리핀’에서 27명의 형제들이 ‘뉴우요오크’ 시 ‘양키스타디움’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신세계 사회 대회에 참석할 수 있었다. 그들은 여러 나라들에서 온 형제들을 그곳에서 만나게 되어 크게 기뻐하였다!

특별 ‘파이오니아’ 봉사가 시작되다

1954년 후반에, 우리는 ‘필리핀’ 형제 자매들 가운데서 50명의 특별 ‘파이오니아’를 임명하도록 승인을 받았다. 1955년 1월, 이들은 인구가 많은 여러 곳의 외딴 도시들로 임명되었다. 이 최초의 50명의 특별 ‘파이오니아’들은 훌륭한 일을 수행하였으며, 그들 중 많은 수가 아직까지 여호와를 전 시간 찬양하는 자들로서 충실히 봉사하고 있다.

특별 ‘파이오니아’ 활동의 시작은 이 나라에서 ‘파이오니아’ 봉사에 진정한 확장을 가져왔다. 1955년 이들 50명의 특별 ‘파이오니아’ 외에 매월 평균 846명의 정규 및 임시 ‘파이오니아’들이 봉사하였다. 1960년에는 특별 ‘파이오니아’ 수가 270명에 이르렀고, 그 당시 1,592명이 정규 및 임시 ‘파이오니아’로 봉사하였다. 지금에 와서는 700명의 특별 ‘파이오니아’와 근 4,000명의 정규 ‘파이오니아’ 및 기타 많은 보조 ‘파이오니아’들이 있다. ‘파이오니아’ 봉사에 대한 ‘필리핀’ 형제들의 이러한 훌륭한 호응은 여러 해 동안 누려온 훌륭한 증가의 한가지 원인이 되었다.

“승리의 왕국” 대회

1956년 4월 13일부터 15일까지에 또 하나의 유의할 만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승리의 왕국” 전국 대회가 열렸고, ‘노워’ 형제가 이 나라에 세번째 방문하였다. 그는 자기의 비서 ‘돈 아담스’와 그 당시 일본 지부 감독자인 ‘로이드 배리’ 형제를 대동하고 왔다. 일요일 오후, “창조주 아래 온 인류를 하나로 만드는 일”이라는 공개 강연을 듣기 위하여 17,259명의 청중이 ‘리잘 기념 축구장’에 운집한 광경을 보는 것은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이 대회에서는 ‘프로그램’이 영어로 행해졌으며, 통역자들은 영어로 말하는 연사의 말을 ‘이어폰’을 사용하여 듣고 ‘일로코’어와 ‘태갈록’어로 동시 통역을 하였다. 침례 연설이 끝난 후 434명의 지원자들은 영어 외에 여덟 가지 언어로 제시된 두 가지 질문을 들었다.

200명의 형제들이 ‘다바오’로부터 배를 타고 왔으며, 한편 45대의 전세 ‘버스’를 이용하여 멀리 ‘카가얀’ 계곡으로부터 수천명의 형제들이 왔다. 그들이 도착하자, 참석자들은 그 당시 ‘마닐라’ 지역에 있는 26개의 왕국회관 주소 및 대회장을 알려 주는, 산뜻하게 인쇄된 ‘마닐라’ 시의 지도를 받았다.

‘노워’ 형제가 “뉴우스 특집” ‘프로그램’ 시간에 회견을 할 때, DZBB 방송국을 통하여 훌륭한 증거가 되었다. 그 회견은 단지 30분간으로 짜여졌었다. 그러나 회견자가 대단한 흥미를 가지고 있어서, 이것은 45분간이나 계속되었다. 또한 그 회견은 대회장 확성기를 통하여도 들려졌다.

‘F. W. 프랜즈’의 격려적인 방문

협회장이 방문한 9개월 후, ‘필리핀’ 형제들은 그 당시의 부협회장 ‘프레드릭 W. 프랜즈’ 일행을 맞는 특권을 갖게 되었다. 그의 방문에 관하여 간단한 통지를 받았지만, 1957년 1월 15-17일 사이의 3일 동안의 전국 대회가 마련되었으며, ‘리잘 기념 축구장’에서 “우리 시대의 신세계 평화—그 이유는?”이라는 공개 강연에 9,463명이 참석하였다. 참석자들은 ‘프랜즈’ 형제가 연설을 하기 위해 연단으로 걸어 나오자 그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그 이유는? 그가 ‘필리핀’ 형제들이 감사의 표시로 친절하게 ‘수지’ 천에 아름답게 수를 놓아 만들어 준 ‘셔어츠’ 즉 ‘필리핀’ 남자들이 정장을 하는 ‘바롱태갈록’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대회에서 ‘러시아’ 내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여호와의 백성을 박해하는 데 대한 강력한 논조의 결의문이 제시되었으며 모인 무리들은 그것을 열렬히 채택하였다. 그 당시 ‘필리핀’ 공화국은 소련과 외교 관계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프랜즈’ 형제는 지부 감독자와 또 한명의 형제를 대동하고 외무부 장관을 방문하였는데, 그는 다름 아니라 ‘필리핀’ 부통령이었던 ‘카를로스 P. 가르시아’ 씨였다. 우호적으로 받아들인 40분간의 회견을 마친 후, 그는 미국 정부를 통하여 ‘러시아’ 담당 관리에게 그 결의문을 보내기로 동의하였다. 이 회견을 한지 두달 후에, ‘카를로스 P. 가르시아’는 ‘라몬 막사이사이’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자, ‘필리핀’ 대통령이 되었다.

1958년 국제 대회

1958년 여름, ‘뉴우요오크’ 시의 ‘양키스타디움’과 ‘폴로그라운드’에서 웅대한 ‘성의 국제 대회’에 ‘필리핀’에서 81명의 형제들이 참석하게 된 것은 특권이자 큰 즐거움이었다. 이 형제들은 그 대회에서 세명의 ‘필리핀’ 형제들이 ‘길르앗’ 학교를 졸업하는 광경을 보고 기뻐하였다. 그러한 국제 대회들은 형제들을 더욱 연합시켜 주고, 그들을 여호와의 전세계적인 가족으로 더욱 가까이 만들어 주었다.

숭배 문제

근 20년 동안 기 경배 문제에 대하여 엎치락 뒤치락 하는 논쟁이 있어 왔는데, 이것은 1940년 미국 대심원에서 불리하게 내린 ‘고비티스’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때, 그 당시 법무 장관인 ‘호세 아바드 산토스’는 모든 공립 및 사립학교에 다니는 자녀들은 기에 경배하도록 요구받을 수 있으며, 위반하면 퇴학 처분을 내릴 수 있다고 발표하였다. 미국 대심원에서 ‘바아네트’ 사건이 ‘고비티스’ 판결을 뒤엎었을 때, 이것은 결국 1948년 당시 법무 장관이었던 ‘로만 오자에타’에 의한 선언에 따라 ‘필리핀’ 내에서도 비슷한 입장의 변화가 생겼다. 그러나 1955년 6월 11일, 공립 및 사립학교에 다니는 모든 자녀들에게 ‘필리핀’ 국기에 대하여 경배할 것을 요구하는 법안에 당시 대통령인 ‘라만 막사이사이’ 씨가 서명을 하였다. 따라서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에는 퇴학 처분을 받게 되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출애굽기 20:4-6에 근거한 그들의 양심적 거부에 입각하여 법원에 구제를 호소하였다. ‘마스바테’에서 ‘게로나’ 형제의 자녀들이 퇴학 처분을 받았다. 그 주의 1심 법원은 그 법률을 옹호하였고, 증인들을 구제해 주기를 거절하였다. 그리하여 그 문제는 ‘필리핀’의 대심원으로 보내졌으며, 거기서 1959년 5월 15일, 문교부 장관을 상대로 한 ‘게로나’ 사건이 다루어졌다. ‘필리핀’ 재판 사상 단 한번 있었던 일로서, 미국의 변호사가 대심원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의 입장을 설명하는 일이 승인되었다. 훌륭한 증거가 제시되었으며, 여호와의 백성이 기에 대하여 절하기를 거절하는 것은 기를 불경해서가 전혀 아니며 순전히 종교적 및 양심적 배경에 근거한 것이라는 사실이 저명한 판사들의 주의를 분명히 끌게 되었다.

그러나 1959년 8월 15일, ‘필리핀’ 대심원은 ‘여호와의 증인’들의 자녀들이 어떤 인간이 만든 표상물에 대하여 절하는 일은 거부한다 할지라도 ‘필리핀’ 국기에는 절하도록 요구받을 수 있다고 판시하였다. 이러한 불리한 판결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 문제에 있어서 성서로 훈련받은 그들의 양심을 계속 따랐다. 가능한 한, 형제들은 학교에서 제시하는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의 양심을 거스려 가면서까지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그들의 종교적 거부로 인하여 학교 당국이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부모들은 집에서 자기 자녀들을 교육하는 데 최선의 힘을 기울였다.

감독의 변화

1960년대에는 ‘필리핀’에서의 사업을 감독하는 일에 몇가지 변화를 보게 되었다. ‘스튜워트’ 형제가 그의 아내의 건강 문제로 ‘필리핀’을 떠나게 되었기 때문에 1960년 4월 1일자로 ‘루이스 리온’ 형제가 지부 감독자로 임명되었다. 그 다음 1963년 3월 1일, ‘리온’ 형제가 가족 책임 때문에 떠나가게 되자 그의 자리에 ‘윌리엄 D. 존슨’ 형제가 임명되었다. ‘윌리엄’ 형제 부부가 태어날 자녀를 돌보기 위하여 ‘캐나다’로 돌아가자, 1966년 5월 1일자로 ‘덴튼 홉킨슨’ 형제가 지부 감독자로 임명되었다. 오늘날에 와서는 다섯명으로 이루어진 지부 위원회가 이곳에서의 왕국 전파 사업을 감독하고 있다.

‘M. G. 헨첼’의 방문

1960년, ‘밀튼 G. 헨첼’ 형제가 지구 감독자로 ‘필리핀’ 지부를 방문하였으며, 3월 24일부터 27일 사이에 ‘판가시난’의 ‘링가옌’에 있는 ‘막사이사이 기념 스타디움’에서 전국 대회가 개최되었다. 그 방문 기간 중 지부 조직의 확장에 사랑스러운 많은 도움을 받게 되었다. 그 대회에서 연사는 영어로 연설을 하고 동시에 다섯 가지 언어로 그 ‘프로그램’이 통역되었다. 1945년 전후 첫 번째 대회장으로 이용하였던 ‘시손’ 강당이 그 ‘스타디움’ 가까이에 있었으며, 식당으로 사용되었다. ‘링가옌’ 해변에서 658명이 침례를 받는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감동적이었으며, 그 수는 그 당시까지 한번에 침례를 받은 수로는 가장 많은 수였다. 또한 그 때까지 가장 많은 청중인 19,640명이 “하나님께서 열방에 평화를 알리실 때”라는 ‘헨첼’ 형제의 공개 강연에 참석하였다.

큰 확장을 위해 준비하는 일

근 일년 후인 1961년 2월 5일, 이 섬나라에 있는 많은 회중들을 감독하는 사람들을 훈련시키기 위하여 천국 전도 학교가 ‘필리핀’에서 열렸다. 한달간의 과정이 우선 영어로 열렸고, 다음에 여러 지방 언어로 열렸다. 이들 초기의 학급들이 진행되는 동안 ‘벧엘’은 만원을 이루었지만, 모든 사람들은 여러 곳에서 온 형제들과의 교제를 즐겼다. 후에 배를 타고 ‘마닐라’까지 장거리 여행을 하기가 어려운 ‘비사야스’와 ‘민다나오’에 있는 형제들을 위하여 이 학교가 ‘세부’ 시, ‘다바오’ 시 및 ‘일로이일로’ 시에서 개최되었다.

1965년에는 한달 간의 과정이 중지되었다. 그러나 1966년 10월에 2주 과정의 천국 전도 학교가 ‘벧엘’에서 시작되었다. 나중에 이 학교는 확장되었으며, 전국의 16개 지역에서 진행되었다. 현재까지 ‘필리핀’ 내의 7,460명의 감독자들이 천국 전도 학교에 참석하였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영적 마련이었다!

1961년부터 1965년까지의 기간에 ‘필리핀’ 지부로부터 9명의 형제들이 ‘뉴우요오크’ 시 ‘브루클린’에 있는 10개월간의 특별 ‘길르앗’ 학교 과정에 참석한 것도 특권이었다. 이들 형제들이 돌아와 지부 사무실 또는 야외에서 책임있는 직분에서 일하도록 임명됨으로 말미암아 지부 조직을 강화시키는 데 기여하게 되었다. 이들 중 일곱명은 아직까지도 전 시간 봉사를 계속하고 있으며 그들 중 다섯명은 ‘벧엘’ 가족 성원으로 일하고 있다.

1961년에 ‘필리핀’ 지부가 그 자체의 인쇄 수요의 얼마를 돌보도록 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그 해 7월에 ‘뉴우요오크’ 공장에서는 한대의 ‘미일레’ 평판 인쇄기와 한대의 ‘라이노타이프’기, 재단기 및 교정기를 보내 주었다. 그리하여 1961년 12월에 「왕국 봉사」(현재의 「우리의 왕국 봉사」) 첫 호가 ‘비콜’어, ‘세부아노’어, ‘힐리가이논’어, ‘일로코’어 및 ‘태갈록’어로 ‘필리핀’에서 인쇄되었다. 광고 쪽지, 용지들 및 기타 재료들도 인쇄되기 시작하였다. 1962년 7월에 와서는 네 가지 언어 즉 ‘팜팡고’어, ‘판가시난’어, ‘사마르레이테’어 및 ‘이바낙’어 「왕국 봉사」가 더 부가되었으며, 그리하여 매월 아홉 가지 판이 만들어지는데, 이것들은 지금까지 이곳에서 인쇄되어 형제들에게 보내지고 있다.

1961년에 전도인 수는 35,713명으로 늘어, 929개의 회중이 조직되었다. 인쇄 시설이 늘어나고, 천국 전도 학교 운영으로 인하여, 장소가 다시 비좁게 되었다. 그리하여 1961년 6월 19일에 세번째 지부 건물 건축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기존 두 건물 바로 옆에 세워졌으며, 크기와 모양이 거의 동일하였다. 그 해 말경 사무실은 이 건물의 일층으로 이사하였으며, 1962년 5월 12일, 13일에 이 새 건물을 여호와께 봉헌하였다. 5월 12일 토요일 저녁에 ‘살바도르 리와그’ 형제가 행한 봉헌사는 1,550명 가량이 들었으며, 일요일 공개 강연에는 2,099명이 참석하였다. 계속되는 확장 추세를 밀고 나아가기 위해 ‘벧엘’에 아름답고 현대식 건물이 불어난 것을 보고 ‘필리핀’ 형제들은 참으로 기뻐하였다!

선교인들이 국외 추방 위협을 받다

1962년 9월 29일, 1959년 기 경배 사건에 대한 불리한 법원 판결 결과로 인하여 지부 감독자는 1962년 10월 1일 법무부 국외 추방 심사 위원회로 출두하라는 서한을 동 위원회로부터 받았다. 거기 가 보고 나서, 그는 그 부서가 기 경배 문제에 대한 ‘여호와의 증인’의 입장을 조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외국 선교인들이 점점 더 많은 ‘필리핀’ 사람들에게 ‘필리핀’기에 대하여 절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으며, 그리하여 그러한 선교인들은 탐탁치 않은 사람들로서 이 나라로부터 추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 관리는 “당신네 조직이 급속히 자라고 있는데, 당신네 조직이 커질수록 더 많은 ‘필리핀’인들이 우리 기에 대하여 절을 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지부 감독자는 이러한 구실로 선교인들이 추방되어서는 안되는 이유를 제시하는 문서를 준비하도록 20일을 받았다.

그 문서가 제출되었으며, 그 문제에 대하여 많은 주의깊은 연구와 토의 끝에 그 위원회는 ‘여호와의 증인’ 선교인들은 단지 성서를 가르치고 있을 뿐, 아무에게도 ‘필리핀’의 기에 대하여 절하지 말라고 말한 일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또한, ‘여호와의 증인’들이 국가의 안전을 교란하거나 위협하는 사람들이 아니며, 모범적인 시민이며, 항상 올바른 행실을 함으로써 기에 대하여 존경심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1962년 12월 10일자로 국외 추방국에서 지부로 보내온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었다. “기 경배 거절에 대한 귀하와 ‘여호와의 증인’의 다른 성원에 관한 것은 취하되었음을 통지해 드리는 바입니다.” 외국 선교인들은 그들이 ‘필리핀’ 형제 자매들과 계속 함께 봉사할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하였다.

이 사건은 매우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그 문제에 관하여 여호와의 백성의 입장을 듣도록 하는 훌륭한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1963년 세계 일주 대회

1963년 8월 14일, 많은 다른 나라들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둔 후, 여행하는 5일간의 “영원한 기쁜 소식” 국제 대회가 ‘필리핀’에 이르게 되었다. 이번 대회를 위하여 ‘리잘 기념 축구장’을 얻었는데, 지붕이 씌워진 좌석이 예상 참석 인원에 비하여 모자랐기 때문에, 외야석에 305‘미터’ 길이의 함석 지붕을 임시로 덮었다. 이것은 형제들이 8월 장마철의 비를 피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대회가 시작되기 하루 전날 ‘마닐라’에 태풍이 엄습해 왔으며, 광범위한 홍수를 일으켜 대회 시설들을 훼손시켰다. 그러나 ‘프로그램’은 계획된 대로 8월 14일에 시작되었다.

이 대회에서 연설들은 영어로 행해졌고, ‘세부아노’어, ‘일로코’어 및 ‘태갈록’어로 번역되었다. “하나님께서 온 땅에 왕이 되실 때”라는 ‘노워’ 형제의 연설에 총 37,806명이 참석한 것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었다. 특히 ‘필리핀’ 역사상 가장 큰 침례식 즉 2,342명이 여호와 하나님께 그들의 헌신을 상징한 것은 감동적인 일이었다.

이것은 이 나라에서 개최된 최초의 국제 대회였으며, 22개국에서 대표자들이 참석하였다. 외국인 대표자들을 ‘필리핀’ 형제들로부터 따뜻한 환영을 받았으며, ‘마닐라’ 시내와 ‘케손’ 시에 있는 협회의 지부 사무실을 관광하였다. 방문자들 중 상당 수는 ‘라디오’와 ‘텔레비젼’에서 회견을 가졌으며, 그 대회는 대대적으로 신문에 보도되었다.

이웃 나라들에 도움을 주다

그 당시 ‘필리핀’에는 상당 수의 왕국 전도인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1964년에는 왕국 선포자가 더 크게 필요한 ‘아시아’의 기타 나라들에 좀더 경험이 많은 ‘필리핀’의 ‘파이오니아’들 얼마를 임명하는 일을 고려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 해에 두명의 자매들이 협회의 ‘타일랜드’ 지부 산하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로 일하도록 임명되었다. 그러나 일년 후, 그들은 ‘길르앗’ 학교에서 공부하지 않았는데도 선교인 집 마련의 혜택을 받게 되었다. 이들 자매들은 그들의 새로운 임지에서 잘 일했으며, ‘타일랜드’어를 배웠고, 이들 ‘아시아’의 이웃들과 잘 동화되었기 때문에 뒤이어 더 많은 ‘필리핀’ 선교인들이 파견되었다.

1977년 6월 현재 78명의 ‘필리핀’인들이 13년간에 걸쳐 ‘홍콩’, ‘인도네시아’, 한국, ‘라오스’, ‘말레이지아’, ‘타이완’, ‘타일랜드’ 및 월남 등지에 파견되었다. 이들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 ‘필리핀’에서 일해 온 51명의 외국인 ‘길르앗’ 졸업생보다 약간 많은 수이다. 그리고 이처럼 기타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일에 약간이나마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은 이 나라에 있는 형제들에게 큰 즐거움이 된다.

‘노워’ 형제의 방문

국제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방문하는 일 외에, ‘N. H. 노워’ 형제는 1960년대에 지부를 살펴보기 위해 두 차례 ‘필리핀’을 방문하였다. 첫 번째는 1964년 12월에 ‘마닐라 조키 클럽’에서 7,463명의 청중에게 연설하였다. 1968년 5월에 그는 동일한 장소에서 연설하였으며, 이 때에 “너희는 잊지 말찌니라”라는 두시간 길이 강연을 듣기 위하여 이 나라 도처에서 9,669명이 참석하였다. 이 두번의 방문은 매우 유익하고 격려적이었으며, 사업에 큰 자극제가 되었다.

“지상의 평화” 대회

1968년 5월, 위에 언급된 협회장의 방문시에, 1969년 10월 22일부터 26일까지 고대하던 “지상의 평화” 국제 대회가 열리도록 ‘리잘 기념 종합 경기장’ 사용을 위한 마련이 이미 마무리되고 있었다. 예상 참석자가 대단히 많을 것이기 때문에, ‘마닐라’에 있는 어떤 경기장도 그 하나에 모두를 다 수용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지부 사무실은 두개의 인접한 ‘스타디움’ 즉 ‘리잘 기념 축구장’과 ‘리잘 기념 야구장’을 빌렸다. 그러나 50,000명 가량의 좌석이 있는 이 ‘스타디움’들도 적합하지 못하였다. “다가오는 천년 평화”라는 ‘노워’ 형제의 강연을 듣기 위해 온 군중은 64,715명에 이르러, 야구장의 잔디밭에도 넘쳐, 밖의 길가, 심지어 길 건너편의 식당 자리까지 꽉찼다.

‘프로그램’은 주로 세 가지 주요 언어 즉 ‘세부아노’어, ‘일로코’어 및 ‘태갈록’어로 제공되었으며, 각 언어 집단마다 연단을 별도로 마련하였다. 주요 연설들은 영어로 하고, 이를 다른 언어들로 통역하였다. 25개국으로부터 온 대표자들이 이 대회에 참석하였으며, 그들 가운데에는 ‘노워’ 형제 부부, ‘F. W. 프랜즈’ 형제, ‘그랜트 수터’ 형제 부부와 ‘브루클린’, ‘터론토’, ‘스트라트피일드’ 및 ‘런던’의 일부 ‘벧엘’ 가족들도 있었다.

영어 뿐 아니라 지방 언어로 된 많은 새로운 책들이 발표되어 대회 참석자들을 즐겁게 하였다. 형제들은 세 가지 언어로 나온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 책과 두 가지 언어로 나온 「성서는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인가?」 책을 받고 특히 기뻐하였다.

1968년 12월에 ‘필리핀’에서 영어판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 책이 처음으로 나온 이후부터 보게 된 증가에 그 책은 분명히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그 때 ‘필리핀’ 전도인 수는 40,000명선을 돌파하였는데, 그 후 18개월이 채 못된 1970년 4월에 전도인 신기록은 54,789명에 달하였다! 6개월 동안 사람들과 성서 연구를 하는 일에 이 책을 사용하는 일은 이 사업을 크게 고무하였고, 의로운 경향이 있는 사람들이 진리 안에서 매우 신속히 발전하도록 도움이 되었다.

「진리」 책은 얼마 안되어 ‘필리핀’ 내에서 여호와의 백성의 역사상 가장 널리 배포된 책이 되었다. 1977년 6월 현재, 영어판 및 여덟 가지 지방 언어판을 통틀어 1,267,782권의 「진리」 책이 배포되었다. 이 수자는 지난 20년 동안 쌓아 올린 최고 수자인 402,610부의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책 배부수를 훨씬 초과한 수이다.

증가된 인쇄 활동

1970년대에 ‘필리핀’ 내에서 여호와의 종들의 훌륭한 발전이 계속되어 왔다. 1971년 7월에 ‘노워’ 형제는 그의 강연을 듣기 위해 ‘리잘’의 ‘마닐라’ 시에 있는 ‘로드리구에즈 스포오츠 센터’에 운집한 17,071명의 군중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그는 ‘필리핀’ 지부의 인쇄 활동을 확장시킬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새로운 공장과 숙소를 건축할 것이다. 윤전기와 기타 인쇄 시설이 설치될 것이며, ‘필리핀’은 영어와 지방 언어로 「파수대」와 「깨어라!」 잡지를 인쇄하는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이것은 흥분을 자아내는 소식이었다. 이제까지 이 잡지들은 ‘브루클린’에서 생산되어 왔으며, 다년간 그곳에 있는 형제들은 ‘필리핀’을 위해 훌륭한 봉사를 해 왔다. 그러나 이 잡지 매호를 세계를 도는 절반 정도의 거리까지 운송하는 데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실제로 잡지를 인쇄하게 하는 것은 커다란 발전적 조처가 될 것이었다.

1972년 2월 2일, 당국으로부터 드디어 건축 허가를 받았으며, 바로 그 날 건축 공사가 시작되었다. 대부분의 공사는 증인들에 의하여 수행되었으며, 공사 진척도 빨랐다. 8월 25일에 ‘필리핀’ 역사상 가장 심한 장마 속에서도, 2,082평방 ‘미터’의 공장이 완성되었으며, 일본으로부터 온 거대한 기계를 담은 커다란 상자들을 인도받았다.

1972년 9월에 국내의 불안한 사정이 고조되자, 지부가 인쇄 시작을 위한 준비가 진행중인 바로 그 때에 이 나라 대통령은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이것이 인쇄 일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 것인지가 퍽 염려되었으며, 속히 시험이 닥쳤다. 거의 즉시 인쇄 허가를 신청해야 하였다. 그러나 계엄이 선포된지 단 6일만인 9월 28일에 인쇄 허가 신청은 승인을 받았다!

1971년부터 1973년 사이에, 인쇄 및 건축에 대한 특별 훈련을 받은 14명의 선교인들이 ‘필리핀 벧엘’에 임명되었다. 이들은 우선 건축 일에 도움을 줄 수 있었고, 다음에 지방의 ‘파이오니아’들을 새로운 공장에서 일하도록 훈련시켰다. 1972년 10월에, 이러한 훈련이 시작되었고, 1973년 2월에 그 인쇄기로부터 두 가지 잡지가 처음으로 나왔다.

그 때로부터 인쇄 사업은 발전하였다. 점차로 생산이 증가되어 지방 언어로 「파수대」 여덟 가지 언어판 모두와 「깨어라!」 네 가지 언어판을 인쇄하게 되었다. 그 다음, 영어판 잡지가 부가되었다. 1975년 5월 29일에 도착한 두번째 윤전기를 포함하여 새로운 기계들이 증가되는 업무량을 처리할 수 있도록 설치되었다. 그 선교인들이 베푼 훌륭한 훈련에 대하여 감사하게도 여섯명은 지금도 이곳에 남아 있는데 그들의 훌륭한 훈련의 덕분으로 현재 실제적인 인쇄 작업은 모두 ‘필리핀’ 형제들에 의하여 수행되며 이 인쇄 공장으로부터 외국의 72개 나라에 잡지들이 발송되고 있다.

1970년대의 기타 발전

1973년에 또 한가지 발전적인 조치가 있었다. ‘필리핀’ 내에서 미국인이 재산을 소유하는 일과 관련된 특권을 부여하는 협정이 1974년 7월에 만료되게 되었다. 그러므로, 협회의 재산 모두를 지방 법인으로 바꾸는 것이 현명하게 생각되었다. 그리하여 1973년 10월 19일에 ‘사단법인 필리핀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가 발족하였다. 이것은 이곳에서의 ‘여호와의 증인’들의 입장을 더욱 안정되게 만들었다.

이 기간 중에 있었던 지구 방문은 형제들에게 더욱 고무적이었다. ‘밀튼 헨첼’, ‘나단 노워’ 및 ‘로이드 배리’ 등의 통치체 성원들이 거대한 군중에게 연설을 하였으며, 그들의 충고와 지침은 큰 격려가 되었다. 또한 1973년 8월에 ‘마닐라’에서 열린 국제 대회 중 통치체 성원 다섯명의 방문으로부터 ‘필리핀’ 형제들은 큰 유익을 얻었다.

그 밖에도, ‘필리핀’ 형제들은 1972년 10월부터 발효된 회중 내의 장로 마련의 변화 및 1976년 2월 1일부터 실시된 지부 위원회 마련으로부터도 유익을 얻었다. 현재 전체 밭에서 형제들은 그리스도인 장로들이 갖춰야 할 자격에 보다 깊은 주의를 기울이고 있으며, 회중들은 감독자회가 베풀 수 있는 보다 개인적인 도움에 의하여 도움을 받고 있다.

우리의 사업은 1970년대에 꾸준히 발전해 왔다. 1969년에 보고된 전도인 평균 수는 45,479명이었다. 1977년 6월 현재, 우리는 평균 66,000이 넘었음을 보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의 전망도 좋다. 1977년의 기념식에는 165,000명 이상이 참석하였으며, 이것은 그리스도의 희생과 그것이 가져올 유익에 그들의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러한 전진에 발을 맞추기 위하여 우리는 ‘벧엘’ 가족도 같이 증가되어 왔음을 보았다. 1948년에 지부가 처음으로 ‘루우스벨트’ 가에 있는 새 건물로 이사하였을 때, 한 건물에 단지 아홉명이 살았다. 지금은 총면적이 4,670평방 ‘미터’에 달하는 다섯개의 복합 건물이 있으며, 여러 부서에서 동료 신자들을 위해 이곳에서 봉사하는 ‘벧엘’ 봉사자들이 89명 있다.

그러므로, 소수의 충실한 증인들이 전혀 생소한 구역에서 열심히 일하던 1930년대초 이래로 여러 면에서 발전하였다. 이들 연륜이 오래된 사람들 중 많은 수는 아직도 우리 주위에 있다. 몇 명은 지면이 부족하여 이 역사에서 언급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그들이 열심히 일한 훌륭한 결과를 보고 행복한 기분을 느끼며, 최근에 봉사를 시작한 좀더 젊은 사람들은 열심과 헌신에 있어서 그들의 본을 보고 계속 격려를 받는다.

‘필리핀’에 있는 모든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들의 봉사의 특권을 기뻐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은 여러 가지 축복을 누리면서, 그들 가운데 여호와의 영이 작용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분의 이름과 왕국을 선포하고, 여호와께서 허락하시는 한까지 이 땅에서 더 많은 제자를 삼는 일을 계속하려는 결의에 차 있다.

[70면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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