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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이워드’ 제도

‘리이워드’ 제도

‘리이워드’ 제도

태양이 아물거리는 ‘카리브’ 해에 ‘버어진’ 제도(미국령)에서 ‘포르토리코’ 남쪽 560‘킬로미터’쯤에 ‘리이워드’ 제도가 있다. 여러 세기 동안에 이들 조그만 보석같은 점들—‘안길라’, ‘세인트마아틴’, ‘사바’, ‘세인트유스타티우스’, ‘세인트킷스’, ‘네비스’, ‘안티구아’와 ‘바르부다’ 및 ‘몬트세랏’과 ‘도미니카’—은 생활 방식에 변화가 없이 그대로 남아 있다. 아직도 보물과 권력 추구는 여전하다. ‘유럽’인이 도착하기 전에도 ‘카리브 인디언’의 유랑족들은 원주민 ‘에이레이크’족을 침략하였다.

초기 미국 전함에 대한 첫 외국 예포가 1776년에 ‘네델란드’령 ‘세인트유스타티우스’ 섬에서 울렸다. ‘넬슨’ 제독의 전함들을 위한 항구인 태양이 내려 쪼이는 ‘안티구아’는 ‘카리브’ 해에 있는 영국 해군력에 매우 중대하였다. 그리고 어떤 이들의 말에 의하면 영국 수병들의 괴혈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라임’ 과일을 먹게 한 것이 그들을 “라이미”라는 별명을 갖게 한 것이라고 한다.

다양한 문화적 배경은 이 제도에서 뚜렷하다. 예로서, 주름잡은 하얀 ‘보네뜨’ 모자를 쓰고 있는 ‘세인트바르델리미’의 ‘노르만-브리타니’인이 있는데, 그들의 초기 조상들이 도착한 이래로 거의 변화가 없다. 그 뿐만 아니라 ‘네델란드’, ‘프랑스’ 및 ‘아일란드’ 사투리가 초기 이주자들을 생각하게 하는 것들이다.

진정한 보물을 발견함

오늘날에는 이 제도의 어떤 섬에서도 한 때 그들의 보물로 유명하였던 물질적인 보물을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이곳에서 확실히 “보배”들—왕국 소식에 깊은 인식을 지닌 사람들이 발견되었다.—학개 2:7.

과거의 단검과 가늘고 긴 쌍날 가진 칼로 무장한 탐험가들과는 달리 이십세기 초의 용감한 그리스도인들이 손에 하나님의 말씀, 곧 “성령의 검”을 가지고 이곳에서 봉사하기 시작했다. (에베소 6:17) 그들은 스스로 성경의 정확한 의미, 즉 진정한 보물을 찾았다. 그러나 그들은 이 영적인 것들을 비장하지 않았다. 그들은 기꺼이 이 흩어져 있는 제도에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나누어 주었다.—마태 12:35 참조.

1914년에서 1920년경에 이 해역을 내왕하는 ‘스쿠우너’와 증기선을 타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위험한 암초와 맹렬한 폭풍우가 허다했다. 더우기 여행자들은 이 제도 중의 한 섬에 도착하면 그들의 여행을 계속하도록 그들을 태우고 갈 돌아가는 배가 있을 때까지 수주일, 심지어 수개월간 그곳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리이워드’ 제도에 있는 몇사람들은 1914년경에 왕국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어떻게? 이곳에 보낸 서적을 받음으로써, ‘성경 연구생’들(그 당시 ‘여호와의 증인’들의 명칭)과의 개인적 접촉을 통해서, 또는 ‘바아베이도즈’와 ‘트리니다드’에서 ‘E. J. 코워드’가 증거하는 것을 들음으로써였다. ‘안티구아’의 ‘W. R. 로츠’는 1914년에 ‘도미니카’의 ‘로소우’ 군청회관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코워드’ 형제의 연설을 들은 일을 회상한다.

진리가 ‘몬트세랏’에 도달하다.

동일한 방법으로 성서 진리는 ‘몬트세랏’에 스며들었다. 이곳은 일반적으로 ‘아일란드’ 정착자들의 강한 영향력 때문에 ‘에머랄드’라고도 불리운다. 의료품 상점 주인인 ‘제임스 린치’가 1916년에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연설을 들었던 곳은 ‘몬트세랏’의 수도 ‘플리마우드’의 거리 한 모퉁이에서 였다. ‘린치’를 아는 사람들은 그 당시 그의 나이 60세가 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1916년경에 그는 대부분 젊은이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그룹’을 만들어 자기 집에서 그들과 함께 성서를 연구하였다.

1919년에 ‘만국 성경 연구생’들은 ‘바아베이도즈’에서 대회를 열었다. 참석자들 가운데 그 당시에 19세였던 ‘W. H. 로크’가 있었는데 그는 ‘몬트세랏’에서 온 유일한 대표자였다. 그 모임에서 그는 ‘W. R. 브라운’을 만났으며, ‘몬트세랏’을 방문해 주도록 그를 초대하였다. ‘브라운’ 형제는 바로 그 다음해 갓 결혼한 그의 신부와 함께 그렇게 하였다. ‘브라운’은 자기의 방문 이야기를 후년에 이렇게 썼다. “1920년에 우리는 결혼을 했지만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결혼한지 이틀 후에 ‘창조의 사진-극’을 가지고 ‘몬트세랏’을 향해 ‘트리니다드’를 떠났다. 우리는 ‘도미니카’, ‘바아베이도즈’ 및 ‘그레나다’에서 증거하였고 그 후에 ‘트리니다드’로 돌아 왔다. 여호와의 봉사를 하는 즐거운 신혼 여행이었다.”

‘창조의 사진-극’(땅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에 관한 사진)은 ‘브라운’ 형제 부부의 방문 기간에 ‘몬트세랏’의 많은 곳에서 상영되었다. 최근에 사망한 ‘에드워드 에지쿠움’은 이 상영 가운데 하나를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했었다. “각종 ‘슬라이드’는 훌륭하게 각색되었으며, 누구에게나 대단히 격려적이었다. 모든 사람들은 ‘브라운’ 형제의 자질과 너무나도 똑똑히 그것들을 보여 주는 그의 재능으로 깊은 감명을 받았다.” ‘브라운’ 형제 부부는 그 방문 동안에 참으로 바빴으며, 이리저리 옮기면서 많은 사람에게 진리를 전해 주었다.

‘도미니카’에서의 출발

1920년에 ‘트리니다드’로 돌아가는 길에 ‘브라운’ 부부는 ‘도미니카’에 멈추었다. ‘브라운’ 형제는 1915년에 그곳에 갔었던 일이 있었으며, ‘데 보인’이라는 한 사업가에게 「성경 연구」 책들을 전한 일이 있었다. 그는 그 책들을 ‘E. F. 두마스’에게 넘겨 주었다. ‘두마스’는 그 책들을 읽었다. 관심이 일어나자 그는 사업가들, 교직자들 및 다른 이들에게 전해 주려고 서적 공급품을 보내달라고 ‘왙취 타워 협회’에 편지했다. ‘브라운’ 부부는 1920년 그곳에 멈추어서 조그마한 강당에서 ‘사진-극’을 상영했다.

이년 후에 ‘브라운’ 형제는 그 당시 협회장인 ‘J. F. 러더포오드’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여호와의 도움으로 나는 ‘카리브’의 섬들 대부분을 두루 증거하였으며, 많은 제자를 삼았읍니다. 내가 그들에게로 다시 가야할까요?” 그가 받은 회신은 이러하였다. “부인과 애기와 함께 서‘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으로 가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1923년 초에 ‘브라운’ 형제와 가족은 ‘에스에스. 오렌지 내소오’호를 타고 ‘트리니다드’를 출항하여 “바이블 브라운”으로 알려지게 된 서‘아프리카’의 새로운 안식처로 떠났다.

‘리이워드’ 제도에서 왕국 소식을 선포하는 데 바친 ‘브라운’ 형제의 열심은 많은 도움이 되었다. ‘카리브’ 해의 더 작은 섬들, 처음에는 ‘몬트세랏’, 다음에는 ‘도미니카’에서 어떤 이들은 즐거운 발견을 하였다. 그들은 진정한 영적 보물을 발견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 가치있는 것들을 훌륭히 사용하여 그들의 새로 발견한 영적 부로부터 진정한 축복을 얻을 것인가?

시험받다

이곳에서 1922년에 시험 기간이 시작되었다. 성서 진리를 깨달은 어떤 이들은 ‘그들의 ‘달란트’를 묻었’으며 반면에 다른 이들은 투자할 필요를 알았다. (마태 25:14-30 참조) ‘몬트세랏’에서 분열이 일어났으며, ‘제임스 린치’ 형제를 제외하고는 모두 새로운 집단을 따랐다. 참다운 그리스도인 회중에 머물러 있는 것은 참된 용기와 강한 믿음이 있어야 했지만 ‘린치’ 형제는 그렇게 하였다. 그는 1926년에 75세로 지적 행로를 마칠 때까지 충성스럽게 봉사했다.

‘몬트세랏’ 해안에 왕국 소식이 또 다시 상륙하는 데는 또 다른 10년이 걸렸다. 그 동안에 ‘리이워드’ 제도의 다른 곳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가?

‘도미니카’에서의 발전들

무엇보다도 우선 ‘도미니카’에 심어진 진리의 씨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 보자. 이곳은 “물기어린 햇살”의 섬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 까닭인즉 비상한 강우량 때문이다. 해발의 ‘로소오’는 강우량이 연간 190내지 200‘센티미터’이지만 고지로 갈수록 크게 증가한다. 예로서, ‘프래쉬 워터 레이크’는 연간 910‘센티미터’이며, 고도 1,447‘미터’의 ‘디아블로틴’ 산의 가장 높은 기슭에는 그 양이 확정적이 아니다. 그러나 귀중한 진리의 물결은 그것을 견제하려는 강력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도미니카’에서 흐르기 시작하였다.

‘레나아드 리이’는 1930년대 초기와 ‘도미니카’에서 참 그리스도인들에게 겨냥한 혹독한 박해를 생존하기 위하여 투쟁하던 일을 회고한다. ‘리이’ 자신은 ‘E. F. 두마스’가 ‘로소오’ 거리에서 전도하는 것을 본 일과 많은 사람들이 ‘두마스’를 대단히 불친절하게 대하는 것과 심지어 당나귀 꼬리로 그를 찌르고, 그에게 돌을 던지던 일을 기억한다. 일단의 변호사들과 형무소 소장을 포함한 다른 영향력있는 사람들이 ‘행동대’라는 것을 조직하였다. 그들이 나타나 ‘두마스’에게 만일 거리에서 전도하는 동안 주교의 이름을 언급하기만 해도 “큰 일을 당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들은 ‘두마스’의 면전에 협박조로 막대기를 휘둘렀다. ‘리이’는 이러한 부당 행위를 보고 알아 보게 되었으며, 이것이 그로 진리를 배우도록 인도하였다.

그 당시 ‘리이’는 수도원 학교 공사장에서 목수로 일하고 있었다. 하루 중 특정한 때에 일꾼들은 십자가 표시를 하도록 되어 있었다. 비록 ‘리이’는 그 당시에는 왜 그렇게 하는 것이 옳지 않은지 그 까닭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느끼고 그렇게 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 때문에 그는 일자리를 잃게 되었지만 그가 부닥치게 된 반대에도 개의치 않고 참다운 그리스도교에 고착하도록 하는 그의 결심을 굳게 하였다.

물론 사제들은 자제력을 잃고 누구에게나 혹독했다. 이 증오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나타났다. 예로서, ‘레나아드 리이’는 한번은 ‘두마스’가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집을 옮기고 있었던 일을 기억한다. 이 일을 위하여 사람들을 고용했었지만 한 사제가 그들을 만나서 그 일을 하지 말도록 명령하였다. 그들은 ‘가톨릭’교인이기 때문에 그에게 복종하였다. 그리하여 길 한복판에 그 집을 두고 떠나가 버렸다! ‘두마스’가 집을 옮기는 일을 끝마치려고 다른 사람들을 구할 수 있을 때까지 며칠 동안이나 그곳에 있지 않으면 안되었다.

때를 놓치지 않고 시 협의회는 ‘로소오’ 거리에서 전도하기 원하는 자들은 모두 허가를 취득할 것을 요구하는 조례를 통과시켰다. ‘두마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전도하는 도중에 체포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감방에 이틀 동안 있었다. 왕국 전파 사업에 대한 반대가 계속되므로 여호와의 그 지방 증인들은 ‘트리니다드’에 있는 ‘왙취 타워 협회’ 지부 사무실과 접촉하여 그 해에 누군가가 ‘도미니카’를 방문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약속대로 1934년에 ‘왈도 로버어츠’라는 ‘파이오니아’가 도착하였다. ‘로소오’에서 그는 여호와를 섬기고자 애쓰는 열명으로 된 한 집단을 만나게 되었다. 이 방문의 결과로 ‘도미니카’에서 여호와의 백성의 첫 부회(회중)가 설립되었다.

바로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데 이들 개개인들은 어떠한 활동을 하였는가? 사실, “왕국 찬양기”(1934년 9월 29일-10월 7일) 동안에 한 보고는 야외에서 바친 110시간 동안에 463건의 증거를 한, 열명의 봉사자들이 있었음을 알려 준다. 그들은 증거를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5부의 서책과 145부의 소책자를 전하였다. 이것은 ‘로버어츠’ 형제의 개인 보고 외의 보고였다. 그 9일간은 ‘도미니카’에서 수행된 첫 조직적인 호별 방문 증거 사업으로서 행복한 기간이었다.

이 기간에 그 섬의 동해안에 있는 ‘라 로체’에 성서 연구를 위한 조그마한 집단 모임이 있었다. 그러므로 진리의 물결은 작은 시내보다 훨씬 더 많이 흐르고 있었다. 사실상, 그들은 그 섬의 구석구석까지 스며들도록 하기 위한 준비를 아주 잘 하고 있었다.

‘안티구아’에 진리가 퍼지다

여기서 우리는 좀 더 많은 섬들을 뛰어 보고자 한다. 그러므로 길 안내를 위하여 여기 삽입된 지도를 대강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도미니카’로부터 북쪽으로 약 160‘킬로미터’를 보자. ‘구아들루프’를 건너 뛰면 어렵지 않게 ‘안티구아’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곳이 우리가 다음으로 멈출 곳이다.

1930년대 중반 쯤에 “좋은 소식”은 ‘리이워드’ 제도의 다른 섬들에도 이르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된 것은 ‘바아베이도즈’와 ‘트리니다드’에 있는 열정적인 왕국 선포자들이 새로운 구역으로 옮기는 것을 자원하였기 때문이며, 이 중에 한 곳은 ‘안티구아’였다.

‘도미니카’와는 달리 ‘안티구아’는 오래 계속되는 가뭄으로 영향을 받는다. 그 이유는 거의 산이 없기 때문이며, 그것은 연평균 강우량이 단지 107‘센티미터’에 불과한 한 가지 요인이다.

‘가톨릭’교가 너무 강한 ‘도미니카’와 비교하여 ‘안티구아’는 그리스도교국의 주요한 종파들의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 비록 세월이 흐름에 따라, 감리교와 ‘모라비아’교와 ‘로마 가톨릭’ 및 다른 종파들이 등장하였지만, 이 중에서 우세한 종파는 영국 국교였다. 그러나 어떻게 참다운 그리스도교가 이 섬에 이르렀는가?

1934년에, ‘트리니다드’에서 진리를 받아들인 ‘안티구아’인 ‘윌리엄 바이암’이 ‘파이오니아’로서 그 섬에 “좋은 소식”을 전파하기 위하여 ‘안티구아’에 돌아 왔다. ‘트리니다드’로부터 두 명의 그리스도인 부인도 그 해에 ‘안티구아’에 온 것이 분명한 것 같다. 그들의 합산한 연례 보고는 그들이 여호와의 봉사 사업에 아주 바빴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들은 야의 봉사에 1,008시간과 2,720부의 성서와 많은 서적의 배부 및 20회의 회중 집회를 개최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안티구아’에서의 왕국 전파 활동에 대한 보고는 그 이후 4년간 계속되었지만, 그 다음에는 보고에 관한 한 그 사업은 중지되었다.

그렇지만 오늘날 어떤 증인들은 생생하게 ‘바이암’ 형제가 수도인 ‘세인트존스’ 거리 모퉁이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불과 같은 진리를 소개하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예로서, ‘도널드 미이드’는 이렇게 회상한다. “‘바이암’은 사제들과 교직자들 그리고 특히 그들의 의상에 관하여 전파하였다. 그는 그들을 ‘긴 가운 입은 남자들’이라고 불렀다. 나는 그가 사람들에게 교역자를 지지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던 것을 기억한다.” 지금은 사망한 ‘윌리엄 통그’ 형제는 ‘바이암’이 “습관적으로 매주 화요일이면 ‘피곳츠’에 와서 목장에서 연설을 하던 것”을 보고한 일이 있다.

‘윌리엄 바이암’은 손에 등불을 들고 각 마을을 걸어다니며 전도하는 친숙한 인물이었다. ‘바이암’은 1939년에 사망하였으며, 그 이래 얼마 동안은 비록 협회의 ‘트리니다드’ 지부에 아무런 활동 보고는 하지 않았지만 ‘안티구아’에서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유일한 사람은 ‘통그’ 형제였다. 그리하여 진리의 씨는 뿌려졌고 물주는 일이 한층 더 필요하게 되었다.—고린도 전 3:6.

‘세인트킷스’와 ‘네비스’에서의 착수

다시 한번 지도를 보라. ‘안티구아’의 서쪽으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세인트킷스’와 ‘네비스’ 섬이 있다. 이 섬들에서 우리의 사업이 착수된 것은 1930년대와 1940년대 초였다.

1930년대 초에 ‘카리브’ 제도의 모섬인 ‘세인트킷스’에서 “좋은 소식”이 전파되었는데, 이 섬은 1624년에 최초의 영국의 영구 식민지가 된 섬이다. 1932년 경에 ‘베네뜨’라는 한 ‘네델란드’인 부부가 이 섬을 방문하여 간단히 증거하였으며, 몇 부의 그리스도인 출판물을 주민들에게 전했다. 1932년에 ‘트리니나드’인인 ‘E. P. 로버어츠’(앞서 언급한 ‘왈도 로버어츠’의 형제)도 ‘세인트킷스’에 도착하였다.

얼마의 호별 방문 증거 사업이 1930년대에 ‘세인트킷스’에서 수행되었으며, 앞으로 좋은 결과가 나타나려고 하고 있었다. ‘로버어츠’가 1936년에 ‘몬트세랏’으로 떠나기 전에 몇 명의 사람들이 침례를 받았다. 그가 떠난 후에 한 집단이 ‘아이어리쉬 타운’에 있는 ‘에드웰소온더즈’의 집에서 성서 연구를 위하여 모였다.

‘소온더즈’ 가족과 ‘애디나 데이’는 1939년과 1940년 사이에 ‘네비스’에서 우리의 사업을 착수하였다. 그 때에 그 섬에는 네 다섯명의 왕국 선포자들이 있었다.

진리가 울려 퍼지다!

사실 성경 진리는 1930년대에 ‘리이워드’ 제도에 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분명히 여호와께서는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우리의 노력을 번창하게 하셨다. 그러나, 그 십년 간을 온전히 회고하기 위하여 특히 여호와께 대한 우리의 봉사의 효과적인 특징에 관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1934년에 대중에게 접근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이 ‘리이워드’ 제도에서 소개되었다. 그 때에 ‘왙취 타워 협회’는 휴대용 축음기로 들을 수 있도록 녹음된 성서 강연들을 제작하고 있었다. 이 음반들은 특히 독서보다도 청취에 흥미를 가진 이곳 사람들에게 대단히 도움이 되었다. 그리하여 많은 관심을 일으켰다.

오래지 않아서 우리도 다른 곳의 여호와의 백성처럼 야외 봉사에서 휴대용 축음기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 축음기로 비교적 짧은 4분 30초간의 녹음된 성경 연설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흥미와 감사함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우리가 집을 방문하면 부담감 없이 들을 수 있는 집안으로 초대해 들였다. 특히 사제들이 공포와 협박으로 주로 문맹자들을 지배하고 있는 ‘가톨릭 도미니카’에서 그러하였다.

그 녹음 재생기는 공개적 모임에서 훌륭하게 사용되었다. 예로서, ‘몬트세랏’의 ‘플리마우드’에서 그 당시 가정의 종으로 봉사하던 ‘비이트리스 폰드’ 자매는 ‘살렘’에 있는 옥외 집회들을 이렇게 회상한다. “사람들은 바짝 다가서며 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부언하였다. “어떤 이는 ‘자네도 들어야 하네’라고 하는가 하면 다른 이는 ‘저걸 들어 보게!’라고 말했다.”

또 다른 형태의 반응

그러나 우리는 어떤 형제들이 녹음 재생기 사용에 그리 지혜롭지 못한 일도 있었다는 점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예로서, 1936년 6월로 돌아가서 그리스도 성체절 경축 중에 ‘도미니카’의 ‘로소오’에서 일어났었던 일을 고려해 보자.

거리에는 시가 행진이 있었으며, 형제들은 이것이 증거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집의 이층 난간에다 녹음 재생기를 설치하고 “성년”(聖年)에 관한 음반을 틀기 시작하였다. 그 음반은 사실상 군중을 격분시켰다! 한 여인이 그 행렬을 벗어나서 계단을 뛰어 올라와 확성기를 집에서 마당으로 던져 버렸다.

그리고 또, 큰 인파가 그 건물 앞쪽에 있는 철문으로 돌격하였다. 몇 명의 형제들이 큰 나무 상자들을 문쪽으로 밀어 붙여 일시적으로 군중들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였다. 그 사이에 증인들은 뒷마당으로 피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그 폭도들을 벗어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한 형제는 그 때 일을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그들과 싸웠으며, 물론 큰 소동이 일어났다.”

비록 주교가 형제들을 체포하도록 경찰에 재촉했지만 경찰은 증인들이 그들 소유지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불상사 때문에 그 이후 얼마 동안 증거 사업에 많은 반대가 있었다. 사실 그 형제들은 심지어 집회에 가는 도중에 투석을 당하는 경험도 하였다.

진리의 소리에 대한 응답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 당시 ‘왙취 타워 협회’ 회장 ‘J. F. 러더포오드’의 녹음 성서 연설들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좋았다. 사실상, 어떤 사람들이 “좋은 소식”을 처음으로 들은 방법이 이것이었다.

예를 들면 짙은 ‘아일란드’ 사투리를 쓰는 거무스름한 피부를 가진 원주민인 ‘차알스 페인’은 1936년에 ‘몬트세랏’에서 확성기를 단 차에서 흘러나오는 방송을 통해서 왕국 소식을 처음으로 접했다. 중노동을 하고 술을 많이 마시며 자기의 목수 직업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산간 지방 사람인 ‘페인’은 손으로 당당한 ‘히말라야’ 삼목을 잘라 넘어뜨려서 그 섬의 더 부유한 사람들의 고급 가구를 만드는 데 사용했다. 그 당시 31세의 남자로서 두 아이의 아버지인 그는 ‘몬트세랏’ 북부에서 한 학교를 짓고 있는 공사장의 현장 감독이었다. 그는 협회의 책인 「구출」을 한 이웃집 부엌에서 발견하고는 읽어 보려고 집으로 가지고 갔다. 점심 시간에 일에 대하여 의논하는 중에 한 여자가 “한 남자가 부두에서 전도하고 있는데 2‘실링’ 6‘펜스’만 내면 자기 종교에 가입할 수 있다고 말하더라”는 이야기를 ‘페인’에게 하였다.

‘페인’은 ‘E. D. 로버어츠’가 증거하는 도중에 자기 집을 방문했을 때 이 별난 보고를 조사해 볼 기회를 가졌다. 서책 한 부를 받은 후에 ‘페인’은 ‘로버어츠’에게 혹 그가 자기 종교에 가입하려는 사람은 2‘실링’ 6‘펜스’를 내라고 한 사람인지를 물어 보았다. 그 말이 잘못된 것임을 설명한 후에 이어 우리의 사업에 관하여 올바른 이해를 갖게 하고 그리하여 ‘페인’ 가족과 함께 성경 토론을 하게 되었다.

‘차알스 페인’은 영국 국교회 평신도 회장이며, 주일학교 선생이었다. 즉시 그는 새로 발견한 영적 보물에 관하여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그에게 문제들을 야기시켰으나 그는 확고한 결심으로 이 어려움들을 헤쳐 나아갔다.

‘페인’은 ‘안티구아’에 있는 한 교회를 위해 영성체대 공사 계약을 맺었었다. 그는 한 단계씩 일을 마치는 대로 돈을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페인’이 열심히 전도하는 바람에 두 명의 영국 국교회 사제는 그의 일을 못하게 하려고 하였다. 그들이 ‘페인’을 만나러 와서 이야기하는 도중에 한 사제는 그가 이미 공사를 위해 두번째 보수를 받았다고 말했다. 이 때에 ‘페인’은 그 사제를 거짓말장이라고 하면서 자기 마당에서 둘 다 나가라고 했다.

이 일로 인하여 한 사제는 ‘페인’을 법정에 고소하였다. 법정에서, 이 사제는 자기를 “성직자”의 칭호를 부를 것을 주장하였으나 ‘페인’은 그가 자기에게는 성직자가 아니라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판사는 만일 그가 그 사제를 “성직자”의 칭호로 부르지 않는다면 법정 모독으로 ‘페인’을 처리하겠다고 위협하였다.

‘페인’은 이렇게 답변하였다. “저는 판사님의 손 안에 있으니까 좋은 대로 하실 수 있읍니다. 그러나 그는 나에게는 성직자가 될 수 없읍니다. 만일 그가 “교구장”이라고 불리우기를 원한다면 그렇게 부를 수 있지만 “성직자”의 칭호로 불러 줄 수는 없읍니다” 마침내 그 교역자는 “그렇게 부르시오”라고 말했다. ‘페인’은 2‘기니’의 벌금과 소송 비용을 청구받았지만 끝에 가서 그는 합의대로 영성체대 공사에 대한 보수를 받아냈다. 얼마 후인 1939년에 ‘차알스 페인’과 그의 아내는 여호와께 대한 그들의 헌신의 상징으로 침례를 받았다.

전시 중에 견디어 나감

제 2차 세계 대전은 ‘리이워드’ 제도에 있는 왕국 선포자들에게 특별한 문제들을 가져왔다. 전쟁 중에 ‘왙취 타워 협회’의 서적 반입이 금지되었으며, 그것은 큰 타격이었다. 그렇지만 이 지역에 있는 여호와의 백성은 그들이 입수할 수 있는 출판물로 계속 바쁘게 일하였다. 그들은 또한 가능한 대로 녹음 재생기와 축음기를 사용하였다.

‘세이트킷스’에서는 형제들에게 선적된 출판물들이 정부 창고에 압류되었다. 1944년 3월 20일에 ‘왙취타워’판 「미 표준역 성서」와 「어린이」 책 및 「신세계」 책이 들어있는 서적 상자들이 제당 공장으로 운반되었다. 무슨 목적으로? ‘보일러’ 아궁이에서 태우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프랭클린 니스베트’와 ‘아아더 헨리’ 형제들이 그 때 그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흥분해서 그들에게 달려와서 “‘여호와의 증인’들의 책들이 ‘보일러’실에 있는데 오늘 아침에 그걸 태워 버릴 모양이에요.” 하고 일러 주었다.

그 두 형제는 자리를 떠나서 달려가 「미 표준역 성서」 한 상자와 회중을 위해 충분한 책을 구해냈다. 사실인즉 그 책을 없애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많은 일꾼들이 그 책들을 집으로 가져가 얼마가 사람들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금지령이 발효되고 있던 ‘몬트세랏’에서도 두 명의 왕국 선포자들은 최선을 다해서 일하고 있었으며, 우편상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협회와의 접촉을 유지하고 있었다. ‘도미니카’에서는 1944년 봉사 연도 중에 세 명의 왕국 선포자들이 야외 봉사에서 74시간을 바쳤으며, 94부의 인쇄물을 전했고, 이 외에도 몇 건의 재방문을 하였다. ‘도미니카’와 ‘세인트킷스’ 및 ‘안티구아’의 형제들에게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영적 도움이 매우 필요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리스도인 활동을 유지하였으며, 전시의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믿음을 위한 힘든 싸움—필요하였다

영적 도움이 매우 필요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내부적인 문제가 일부 회중에서 발생했기 때문이다. 참으로, 여호와의 충성스러운 종들은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워야’ 하였다.—유다 3.

예를 들면, 어떤 이들은 부회의 종(주임 감독자)의 행실로 인하여 ‘세인트킷스’ 회중과의 연합을 중단하였다. 그는 해임되었지만 분열의 씨는 계속되어 세 집단으로 따로 모였다. 마침내 ‘프랭클린 니스베트’가 부회의 종으로 임명되었지만 도움은 아직도 필요하였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세인트킷스’의 내부적 문제는 해결되었다. 그러나 그 동안 충성스럽게 머물러서 여호와를 계속 섬기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세인트킷스’의 ‘아아더 헨리’ 형제는 자기가 그 시련기에 하나님의 백성의 회중과 고착할 수 있었던 것은 시편 72:4의 말씀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그 귀절은 이러하다. “저가 백성의 가난한 자를 신원하며 ·⁠·⁠·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

‘도미니카’에서의 불화

‘도미니카’에서 일반적으로 형제들은 호별 방문 증거 사업에 참여하지 않고 있었다. 그 때에 ‘필립 D. 펨버어튼’은 ‘로소오’에서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고 있었는데 그와 ‘레나아드 리이’ 사이 그리고 ‘E. F. 두마스’ 사이에 불화가 있었다. 이 세 사람은 모두 그들 각자의 집에서 집회를 열고 있었으며, 서로 상대방에 대한 비판적인 서신들을 협회에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협회는 다툼을 그만두고 왕국 사업에 사이 좋게 지내도록 권고하는 회신을 보냈다.

형제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비록 그들이 특이한 방법으로 전도하면서도 이 사소한 불화로 연합하지 않았다. 그들은 각각 집 앞에 성귀를 적은 흑판을 걸어 놓았다. 이 습관은 몇년 동안 계속되었지만 마침내 중지되었다.

‘호지 도미니크’ 형제는 가끔 논쟁이 있었던 것과 적어도 한번은 다툼 때문에 봉사회 집회가 열리지 않았던 경우를 기억하고 있다. 1943년에 ‘두마스’가 미국으로 떠났을 때, ‘리이’ 형제가 회중일을 돌보았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그는 이렇게 말한다.

“실은, 「파수대」를 통하여 나는 다른 사람들이 호별 방문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형제들에게 ‘만약 우리가 나가서 봉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다른 교파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말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거절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물러나고 다른 형제가 책임을 맡게 하고, ‘라로체’로 올라가 또한 그들을 격려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호별 방문 전도에 대한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두마스’가 돌아오자 그는 내가 호별 방문 사업을 시작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내가 그의 지위를 위협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했으며, 나는 호별 방문 사업을 할 것과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는 상관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다른 증인들과 마찬가지로 ‘리이’ 형제는 ‘로소오’ 근처의 작은 ‘가톨릭’ 촌락에서 증거하는 동안에 여러 번 돌을 맞고, 구타를 당했다. 이 때쯤에 그의 형수가 사망하였는데, 아마도 슬픔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바로 3주일 전에 ‘리이’ 형제를 집에서 내어쫓으라는 한 사제의 말을 거역했다는 이유로 ‘가톨릭’ 교회에서 파문을 당했던 것이다. ‘리이’ 형제의 아내인 ‘릭티나’는 여호와의 백성과의 연합을 중지하기를 거절한다는 이유로 친정에서 쫓겨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미니카’에서는 그리스도인 활동이 계속되었다.

그 때에 ‘로소오’의 형제들은 ‘E. F. 두마스’의 집의 넓은 방에서 집회를 보고 있었다. 그는 호별 방문 증거를 반대하였다. 또한, 그는 1936년에 소동을 야기시켰던 방법으로 녹음 재생기를 사용하는 것을 협회가 지지하지 않은 사실에 화를 내었다.

1947년 6월에 ‘요수아 W. 스티일맨’이 형제들의 종(지금의 순회 감독자)으로 ‘로소오’에 왔다. 그 방문으로 인하여 그 지방 회중은 더 나은 왕국 봉사를 위하여 재조직되었다. ‘스티일맨’ 형제의 방문 두달 후에 증인들은 ‘E. F. 두마스’의 집에서 떠나도록 압력을 받았으며, 그래서 그들은 ‘리이’ 형제의 집에서 집회를 보기 시작하였다.

후에 ‘두마스’는 자신을 정당화하는 소책자를 펴냈으며, 이것을 형제들과 협회에 우편으로 보냈다. 1948년 2월에 ‘두마스’는 그리스도인 회중으로부터 제명 처분을 받았다. 그는 1957년에 사망하였다.

‘안티쿠아’에서의 우리의 활동

이제 우리는 ‘안티구아’와 그것의 감독을 받는, 19세기 초에 영국의 노예 무역의 중심지였던 ‘바르부다’ 섬에서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1939년에 ‘E. P. 로버어츠’가 그 섬에 도착했을 때, 그는 ‘바이암’ 형제가 여전히 거리에서 전파하는 것을 발견하였지만 그의 노력의 결과는 별로 없었다.

얼마 후에,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데 매우 비이기적인 열정을 나타냈던 ‘로버어츠’는 그에게 맡기어진 소중한 것들을 잘못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몇년 동안, 그는 형제들이 자기를 두려워하게 하였으며, 그들은 “나무 패며 물 긷는 자”라고 가르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기름부음받은 추종자라고 주장하는 자기에게 종노릇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하였다. (여호수아 9:23) 심지어 그는 자신을 “예언자”라고 칭하였다. ‘로버어츠’는 1948년에 제명 처분을 받았지만 여호와의 크신 자비에 의하여 1962년 1월에 여호와의 백성 안으로 다시 들어오게 되었다.

이 개요로 볼 때, ‘요수아 W. 스티일맨’이 1947년 7월 2일-5일까지 형제들을 위한 종으로서 ‘안티구아’를 방문했을 때, 왕국 관심사의 증진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세인트존스’에서 그는 야외 봉사에서 형제들과 밀접히 일했으며, 떠나기 전에 영적으로 세워 주는 봉사 강연을 했다. 그 때에 ‘스티일맨’ 형제는 또한 ‘리이워드’ 제도의 다른 곳에 있는 회중들도 방문하였다.

1948년 5월 28일부터 30일까지 훌륭한 대회가 ‘안티구아’의 ‘세인트존스’에서 열렸다. 한 두 사람의 지방 연사들과 함께 방문한 다섯 명의 형제들이 전체 대회 ‘프로그램’을 다루었다. 네 명이 그 모임에서 침례를 받았다. 그리고 자전거 행진이 “모든 인류의 다가오는 기쁨”이란 공개 강연을 광고하였다. 공개 강연에 184명이 참석한 것을 본 형제들의 기쁨은 대단하였다! 여호와의 백성의 마음은 그 대회에서 들은 훌륭한 것들로 고무를 받았다.

‘안티구아’의 형제들이 인내해야 했던 시련 때문에 얼마간 흔들렸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최종적인 분석에 의하면 그들의 믿음은 강화되었다. 1947년에 ‘세인트존스’ 회중에는 26명의 활동적인 전도인이 있었다. 그 해에 67명이 주의 만찬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1948년에 기념식 참석수는 ‘세인트존스’에서 91명이나 되었다.

‘새로운 시대’가 밝아오다

1949년이 됨으로 ‘새로운 시대’가 ‘리이워드’ 제도에서 막을 올렸다. 영적 도움과 왕국 선포자들의 훈련의 중요성이 인정받기 시작하였다. 예로서, 1949년 2월에 첫 순회 대회가 ‘도미니카’의 ‘로소오’에서 열렸다. ‘트리니다드’에서 온 ‘피터 브라운’과 ‘A. E. 다아프’와 함께 ‘호지 도미니크’(그 당시 그곳의 주임 감독자)가 전체 대회 ‘프로그램’을 다루었다. 참석한 모두는 폭우에도 불구하고, 76명이 공개 강연에 참석한 사실로 크게 고무되었다. 두 명이 여호와께 대한 헌신의 상징으로 침례를 받았다. 그렇다, 그 전 회기는 성공적이었고, 그래서 형제들은 여호와의 사랑스러운 감독과 그 때에 눈에 띄게 영적 발전을 한 것에 대하여 여호와께 감사드렸다.

‘바아베이도즈’ 출신의 양봉가인 ‘라이오닐 윌리엄스’가 1948년에 ‘도미니카’에 왔다. 형제들은 봉사회와 신권 학교와 관련된 그의 도움에 대하여 참으로 고맙게 여겼다. ‘B. H. 베리’가 순회 감독자로서 그 섬을 방문했을 때, ‘윌리엄스’ 형제는 밀림의 길 아닌 길을 지나고, 강들을 건너서 ‘라로체’에 한 집단의 집회를 조직하기 위하여 29‘킬로미터’가 넘는 길을 여행하는 데 그와 동반하였다.

그리하여 1940년 후반기에 ‘리이워드’ 제도에서 왕국 전파 사업에 훌륭한 발전이 있었다. 참으로 ‘새로운 시대’가 밝아 온 것이다. 그러나 1940년대가 마치기 전에 이 제도에서의 전파 사업은 또 다른 발전으로 뒷받침되었다.

‘길르앗’으로부터의 도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추가로 휘두르는 사람들이 ‘왙취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에서 졸업한 후에 ‘리이워드’ 제도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에베소 6:17) 사실상, 1949년은 이 제도에 ‘길르앗’에서 훈련받은 선교인들이 가장 많이 입국한 해였다. ‘E. F. 크루이거’ 형제 자매와 ‘L. M. 프레지어’ 형제 자매는 ‘윌프렛 A. 하울레트’ 형제 자매가 ‘안티구아’로 가는 동안에 ‘세인트킷스’에 도착하였다.

그 때는 참으로 행복한 날들이었다! 하나의 대표적인 환영식은 ‘하울레트’ 형제 자매가 증기선을 타고 ‘안티구아’에 도착했을 때 있었다. 물론, 그 날 아침 그들이 도착하기를 전 회중이 부두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며, 그들은 미소와 활짝 편 팔로 환영을 받았다! ‘세인트존스’에서 ‘크루이거’ 부부와 ‘프레이지어’ 부부는 상당히 잘 조직된 15명의 헌신한 왕국 전도인들로 된 한 집단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그 섬에 상륙 허가는 문제 없이 지방 관서로부터 취득되지는 않았다. ‘가톨릭’교인인 다수의 ‘세인트킷스’ 협의회 성원들로부터 강력한 반대가 일어났다. 그 당시 그 협의회의 노동 조합 대표인 ‘로버어트 브래드쇼우’는 만일 다른 사람들이 이 섬에 들어오는 것이 허락된다면 이 선교인들도 허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78년에 사망할 때까지 그 나라의 수상이었던 ‘브래드쇼우’ 씨는 우리 선교인들에 대하여 호의적이었다.

새로 도착한 선교인들의 목표는 왕국 전파 사업에 형제들을 개인적으로 훈련시키고, 회중적으로 그들을 돕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길르앗’으로부터의 도움은 틀림없이 훌륭한 결과를 가져올 것을 약속해 주었다.

이 해역에서의 새로운 “선원들”

해적들은 한 때 ‘스페인’ 배들을 약탈하기 위하여 이 해역을 배회하였었다. 이 해적들은 ‘토르투가’ 섬에 근거를 두었지만 ‘프랑스’에서 도망해 온 ‘세인트킷스’의 이전 거주자들이었다고 한다. 사실, 해적이란 이름의 “바커니어”라는 말은 불이나 ‘보오커너’ 위에 고기를 구어서 지나가는 항해자들에게 고기를 파는 뱃사람들의 습관에 기인한 것 같다. 그러나 1949년 후반에 이 해역에 나타난 “선원”들은 전혀 옛날의 해적과는 다른 선원들이었다. 이 사람들에 의하여 섬 주민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재미있는 방법이 등장하였다.

1949년 11월 18일에 협회의 전장 20‘미터’의 ‘스쿠우너’선인 ‘시비아’호가 ‘세인트토마스’를 출항하여 ‘리이워드’ 제도의 ‘세인트마아틴’으로 항해를 시작하였다. 배안에는 네명의 “좋은 소식”의 전파자들—‘구스트 매키’, ‘로널드 파아킨’, ‘아아더 워어슬리’ 및 ‘스테인리 카아터’가 있었다. 그리고 물론, 그 배에는 다량의 성서와 그리스도인 출판물들이 실려 있었다.

‘파아킨’ 형제의 일기로부터 수집한 세부점들이 ‘시비아’호의 첫 항해를 상상해 보도록 우리를 도운다. 배를 타 보자!

“우리는 11월 19일 저녁에 ‘세인트마아틴’에 도착하여 ‘마리고트’의 ‘프랑스’ 항구에 상륙한다. 이 섬은 ‘프랑스’와 ‘네델란드’령이다. 어떤 젊은이들은 호기심을 가지고 도착하는 우리에게 다가오고 우리는 그들이 영어를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척 기쁘다. 그들은 주의깊게 왕국 소식을 듣는다. 놀랍게도 우리는 이 섬에 이미 한 명의 ‘여호와의 증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나흘 후에 그를 만난다.

“그는 ‘조오지 매뉴엘’인데 우리를 환영하려고 선창으로 와서 우리와 하루 종일 야외 봉사를 한다. 사람들은 겸손하며, 우리는 얼마의 훌륭한 토론을 즐긴다. 그러나 제 7일 재림교 전도자는 우리가 나타난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11월 25일에 우리는 ‘듀킨’ 씨를 만났는데 그는 왕국 사업에 깊은 관심을 보인다. 역시 다른 사람들도 관심이 있으며, 이 때문에 시내는 야단법석이다. 11월 27일 저녁에 ‘카아터’ 형제가 옥외 강연을 하는 데 거의 200명이 참석한다. 우리는 그 후에 많은 질문에 대답해 준다.

“11월 29일에 ‘파아킨’ 형제가 대문 밖에서 공개 강연을 하는데 근 250명이 보인다. ‘콜럼비어’라는 지역에서 그 다음날 ‘워어슬리’ 형제가 공개 강연을 한다. ‘플레밍’ 씨라고 하는 분이 우리에게 이 목적을 위하여 그의 정원을 사용하도록 허락하였으며, 노하여 펄펄 뛰는 사제들은 그에게 파문시키겠다고 위협한다. 그리고 그 제 7일 재림교 전도자는 실제로 성을 낸다. 사태는 우리가 더 많은 공개 강연을 함에 따라 ‘더 가열’되고 있으며, 그 사제는 아침 ‘미사’에서 자기의 ‘양떼’에게 경고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꼼짝하지 않는다. 그들은 왕국 소식에 여전히 귀를 기울인다.

“12월 5일에 우리는 그 섬의 ‘네델란드’령인 ‘필립스버어그’에 도착한다. 우리는 공개 강연을 하기 위하여 정부의 허가를 얻어야 했지만, 만사가 순조롭게 진행된다. 약 두주일 후에 우리는 ‘매리고트’로 돌아와 몇 건의 성서 연구를 가진다.

“12일 25일에 우리는 영령 ‘안길라’ 섬으로 배를 몬다. 이 때 이 섬에는 교통 수단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걸어 다녀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수고는 왕국 소식을 전파하고, 그리스도인 인쇄물들을 전하는 것으로 보상된다. ‘샌디 그라운드 빌리지’에서 ‘카아터’ 형제가 강연하는 데 근 100명이 참석한다.

“12월 31일에 우리는 ‘매리고트’로 선수를 돌렸고 그곳에서 연료를 보충한다. 그 후에 더 많은 증거를 하기 위하여 ‘안길라’로 돌아간다. 1월 11일경에 ‘매리고트’로 돌아가고, 그 다음날 우리는 ‘세인트마아틴’ 섬을 뒤에 두고 떠나 ‘리이워드’ 제도에서의 우리의 첫 증거 항해는 즐거운 추억으로 간직된다.”

배들을 유익하게 사용함

‘왙취 타워 협회’가 성서에 기초한 활동 사진을 제작했을 때 ‘시비아’호에 승선한 형제들은 수다한 곳에서 그 ‘필름’을 상영하였다. 가끔 영사기를 돌리는 유일한 방법은 그 배의 발전기를 사용함으로써였다. 그리하여 그 배는 여러 가지로 봉사하게 되었다.

배를 타고 증거하는 그 초기에 이들 외딴 섬에서 양과 같은 사람들이 찾아지므로 만족한 경험으로 가득찼다. 그렇다, 그 당시는 “선교 사업의 절정이며, 여호와의 봉사의 즐거움이었다.”고 ‘로널드 파아킨’은 회상한다. “말로서 형용할 수 없는 축복이었다”고 말하면서 그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거대한 추수 사업에서 한 몫을 담당하도록 하신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었다!”고 말하였다.

협회의 ‘광명’호가 마침내 ‘시비아’호 대신에 등장하였다. 이 나중 배는 ‘카리브’ 해를 항해하며 ‘리이워드’ 제도를 포함하여 1957년까지 다른 남쪽 섬들을 순회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 동안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가?

사실, 1950년대 초에 여호와의 백성의 한 핵심이 ‘안길라’의 ‘사우드 힐’에 있는 ‘유우진 브래들리’의 집에서 출발하였다. 1957년에 두명의 특별 ‘파이오니아’가 그 섬의 다른 곳—‘스토오니 그라운드’라는 곳으로 파견되었다. 왕국 사업은 증진을 계속하였으며, 오늘날 14명의 왕국 선포자들이 ‘안길라’ 회중과 연합하고 있다.

1951년 11월 18일에 헌신한 그리스도인의 첫 침례가 ‘세인트마아틴’에서 베풀어졌다. 두 명의 형제들, ‘조오지 도오모이’와 항무부장인 ‘레온스 보이라아드’가 그 때 침례를 받았다. 오늘날 ‘세인트마아틴’에는 봉사하고 있는 100명의 왕국 선포자들로 이루어진 두 회중이 있다.

그러므로, ‘리이워드’ 제도에서 있었던 그리스도인의 발전은 “좋은 소식”을 전하는 데 배들을 사용한 것이 부분적 이유이다. 우리가 ‘카리브’ 해에서 ‘시비아’호와 ‘광명’호를 광범위하게 사용하던 시절을 돌이켜 보면,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당시에 그 형제들은 청중을 매혹시키기 위하여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였다. 이미 사망한 ‘E. F. 크루이거’는 만족할 만큼 군중이 모일 때까지 ‘하아모니카’를 불면서 거리에 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 후에 그는 성서를 꺼내서 연설을 시작하였다.

물론 우스꽝스러운 어떤 작은 사건도 있었다. ‘파아킨’ 형제는 이렇게 회상한다. “나는 머리 위에 커다란 ‘가스’등을 걸어 놓은 나무 아래에서 연설을 하고 있었다. 연설 도중에 쥐 한 마리가 다른 짐승을 쫓아서 둘이 싸우면서 나무 꼭대기로 올라갔다가 내 발로 떨어졌다. 그들을 쫓아버리자 그들은 도망했지만 청중 가운데 있던 젊은이들의 반은 그들을 좇아가 버렸다.”

그 때 협회의 ‘트리니다드’ 지부 사무실이 ‘리이워드’ 제도에서의 제자를 삼는 일을 관할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배의 승무원인 ‘파아킨’ 형제가 ‘트리니다드’의 광장에서 강연을 한 일과 관련하여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그의 연제는 “지옥은 하나의 공포심을(scare) 갖게 하는 것이다”였다. 그러나 신문들은 그것을 “지옥은 하나의 사각형(square)이다”라고 광고하였다. 이 강연을 듣기 위하여 300명이나 모여 들었다. 아마, 어떤 사람들은 지옥의 모양에 호기심이 있었던 모양이다. 지옥은 과연 사각형이었는가?

우리의 사업이 자라나다

왕국 전파와 제자를 삼는 사업은 1950년대 초에 ‘리이워드’ 제도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예로서, 설탕과 당밀 생산으로 유명한 그 비옥한 섬인 ‘세인트킷스’에서 사업은 발전하고 있었다. 사실, 그 성장은 1950년 11월 17일부터 19일까지 ‘세인트킷스’에서 첫 순회 대회를 개최할 정도에 이르렀다. 최근에 도착한 다른 두 명의 ‘길르앗’ 졸업생인 ‘사무엘 맥킨지’와 ‘아아놀드 스토우트’가 그 ‘프로그램’에 참여하였다.

곧 ‘맥킨지’와 ‘스토우트’ 형제는 ‘네비스’의 ‘차알스타운’으로 임명되었는데 그들은 거기에서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월터 요셉’, 그의 아내 및 다른 두 사람을 만났다. 그들은 ‘요셉’의 집에서 정규적 집회를 개최하기 시작하였으며, 1947년에 하나의 회중으로 조직되었던 그 작은 집단은 주목할 만한 발전을 이룩하기 시작하였다.

‘진저어랜드’ 근처에서 ‘파이오니아’인 ‘벤자민 스미드’는 아홉명의 다른 전도인들과 바쁘게 봉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교인들은 그들 중에 여섯 명은 거짓 종교 조직의 예배에 계속 참석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곧 그 왕국 선포자들의 대열에서 떨어져 나갔다.

우리의 사업이 ‘세인트킷스’에서처럼 이 제도에서 얼마간 발전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분명히, 한층 더 영적 도움이 필요하였고, 거대한 사업이 앞에 놓여 있었다. 그러므로, ‘리이워드’ 제도에서 왕국 관심사를 더 진척시키기 위하여 어떻게 할 수 있었는가?

지부 사무실이 설립되다

1954년은 이 제도에 있는 여호와의 백성에게 획기적인 해였다. 이른봄에 이르러 ‘왙취 타워 협회’는 ‘리이워드’ 제도에 별개의 지부 사무실을 설립함으로써 우리의 사업에 박차를 가하도록 마련하였다. 이 마련은 우리의 활동을 더 효율적인 감독 아래 있게 하였다. ‘로이 F. 브룬’과 ‘케네드 개너웨이’ 형제가 새로운 지부를 돌보도록 이곳에 파견되었다. 이 마련으로 새로운 두 회중이 ‘안티구아’의 ‘올세인트’와 ‘피곳트’에 형성되었다.

‘안티구아’의 ‘세인트존스’에 지부 사무실을 마련하는 첫 난관은 한 지방 사업가의 도움으로 해결되었다. 동료들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협회가 그의 건물을 필요로 하는 한, 사용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새로운 지부 사무실은 그 건물에서 출발하였다. 얼마 후에 사무실은 같은 구획에 있는 더 나은 곳으로 옮겼으며, 지부 사무실과 선교부 및 왕국회관이 그 다음 14년간 그곳에 있었다.

‘브루클린’ 협회 본부로부터 ‘밀튼. G. 헨첼’이 1954년 3월 30일부터 4월 1일까지 ‘리이워드’ 제도를 방문하였으며, 그 방문과 때를 맞추어 3일간의 대회가 마련되었다. 지방 증인들은 ‘헨첼’ 형제의 대회 연설의 훌륭한 성경적 충고를 감사하였다. 예기치 않았던 “활동하는 신세계 사회”라는 협회의 영화 상영이 가져다 준 형제들의 기쁨도 상상해 보라! ‘헨첼’ 형제는 지구 감독자로서 1961년과 1966년에 다시 ‘리이워드’ 제도를 방문하였다.

눈에 띄는 점진적 확장

여기서 얼마의 비교 통계가 아마 지부 사무실이 ‘리이워드’ 제도에 설립된 후의 우리의 사업의 발전을 보여 주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1954년에 야외 봉사 보고가 일곱개의 섬들—‘안티구아’, ‘안길라’, ‘도미니카’, ‘몬트세랏’, ‘네비스’, ‘세인트킷스’ 및 ‘세인트마아틴’에서 들어왔다. 그 봉사년도에 193명의 왕국 선포자가 있었으며, 그들은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데 34,367시간을 사용하였다. 총 기념식 참석자 수는 303명이었다. 10년 후인 1964년 봉사년도에는 396명의 왕국 전도인들이 제자를 삼는 사업에 114,047시간을 보고하였다. 그 해에 총계 575명이 이 제도 도처에서 주의 만찬에 참석하였다.

이 기간에 다른 주목할 만한 발전이 있었다. 예로서, 형제들은 협회의 배인 ‘광명’호를 타고, 1957년 중반까지 외딴 섬들을 계속 방문하였으며, 그 배가 팔렸을 때, 그 선원들 중 세명은 선교인 집으로 임명을 받았다. 다른 선원이었던 ‘아아더 워어슬리’는 여러 해 동안 ‘뉴우요오크’ ‘브루클린’ ‘벧엘’ 가족의 일원으로 봉사하고 있다.

‘앨반 요셉’은 1957년에 ‘리이워드’ 제도에서 순회 사업을 시작한 첫 원주민 형제가 되었다. 또한, ‘뉴우요오크’ 시에서 1958년 ‘성의’ 국제 대회가 열렸을 때 ‘세인트킷스’의 ‘카알튼 헐’은 1년 미만에 ‘길르앗 학교’를 졸업한 세명의 ‘리이워드’ 제도의 주민 중 첫 사람이었다. 1959년에 ‘킷스’인인 ‘제럴드 크리스토퍼’와 ‘케네디 필립’이 또한 그 학교를 졸업한 것이다.

얼마의 사람들이 직장을 구하려고 영국이나 미국으로 떠나는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노력을 계속 축복하셨다. ‘추수할 또 다른 일꾼들’이 이 사업을 도우려고 이곳에 도착하였다. 예로서, 1966년에 미국에서 ‘어어니스트 잭슨’ 형제 부부가 ‘몬트세랏’으로 선교인 임명을 받았다. ‘캐나다’인인 ‘포울 온데이코’ 형제 부부는 일년 후에 ‘세인트킷스’로 들어 왔다. 그리고 물론, 증가하는 지방 왕국 선포자들은 여호와께 대한 그들의 봉사를 충성스럽게 수행하였다.

순회 사업이 그 역할을 수행하다

‘요수아 W. 스티일맨’이 1947년 여행하는 감독자로 ‘리이워드’ 제도를 방문한 이래로 이 사업은 이 제도에서 왕국 전파 사업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므로 지난 여러 해 동안 이 활동이 수행해 온 일에 관하여 잠간 이야기하기로 하자.

‘리이워드’ 제도에서 처음으로 순회 사업을 시작했을 때에 여행하는 형제들은 종종 작은 접는 침대와 그들 자신의 요리 도구를 가지고 다녔다. 그 이유는 동료 신자들이 너무나 가난해서 그들의 숙소를 제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도미니카’에서는 여행하는 것이 극히 어려웠다. 그러므로 그 당시에는 결혼한 순회 감독자가 없었다. 1956년까지 ‘로소오’와 ‘포오츠마우드’에는 길이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그 후에도 꾸불꾸불한 길 때문에 실제 거리는 단지 32‘킬로미터’밖에 않되지만 이 두 도시 사이를 자동차로 80‘킬로미터’ 이상의 도로를 달리는 데 거의 두 시간 반이 걸렸다. 한 관찰자는 이렇게 논평한다. “그 섬은 지면이 ‘스위스’보다 굴곡이 심한 산봉우리, 분수령 및 계곡의 덩어리이다.” 거의 70,000명의 주민이 사용하는 서툰 ‘프랑스’ 방언인 ‘패토이스’는 아직도 성서 진리를 위하여 극복되어야 할 또 다른 장애물이다.

‘도미니카’를 방문할 때, 순회 감독자들은 종종 한 읍에서 다음 읍으로 가는 데 울퉁불퉁한 오솔길을 걸어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프레드 스노우’의 정력과 열심은 그가 ‘그랜드베이’에서 ‘페익스 보우취’ 산을 넘어서 ‘라로체’로 걸어 가는데, 그곳을 방문할 때마다 시간을 단축시키려고 노력하게 하였다.

물론 여러 해에 걸쳐 많은 형제들이 ‘리이워드’ 제도 도처에서 순회 사업에 참여하였다. 우리는 그들의 경험을 모두 자세히 이야기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였다. 모두는 그들의 노력을 감사하였다는 점이다.

‘도미니카’의 순회 감독자들의 초기 방문을 돌이켜 보면서, ‘호지 도미니크’는 이렇게 말한다. “한 형제가 방문할 것이라는 협회의 편지를 받으면 우리는 배가 오는지 바다를 살피면서 밤 11시가 족히 넘도록 부두에 머물러 있었다. ‘안티구아’에 지부 사무실이 설치되기 이전에는 그들이 오는 데 자주 ‘프랑스’ 배를 이용하였다. 나는 순회의 종이 우리를 만나는 것을 얼마나 기뻐하였는지를 기억하며, 나는 언제나 우리의 집으로 안내하였다.” 이와 같은 올바른 인식, 밀접한 교제 및 격려를 주고 받는 것이 순회 감독자와 그들의 방문을 받는 사람들 양쪽에 늘 유익하였다.—로마 1:11, 12.

1950년대 후반에는 그 제도의 대부분의 밀림 지역 외곽에 활주로가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관광 사업이 번창하게 되었다. 그것은 또한, 순회 감독자 부부가 섬들 사이를 짧은 시간에 여행하는 일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것은 확실히 수주일 동안, 때때로, 수개월간 그 섬을 잇는 두 척의 연락선을 기다리는 것보다 훨씬 더 좋았다.

또한, 영국, ‘캐나다’ 및 미국으로부터 받는 원조로 그 제도에서 전기, 물 및 도로의 개발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발전은 당연히 일반 주민에게 유익하였고 그 지방 증인들과 여행하는 감독자들에게도 유익하였다.

생활 방식의 변화

시간의 흐름은 이 제도와 그 주민들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렇지만 사람들의 생활에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과 영보다 더 영향을 끼친 것은 없다. 왕국 소식이 이곳에서 전파되므로 ‘보배’가 발견되었으며, 이들은 여호와의 편에 섰다. (학개 2:7) 본래 이 섬 사람들은 친절하지만 조심성이 있다. ‘카리브’ 원주민들처럼 내성적인 사람들도 태도를 바꾸어 가정 성서 연구를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가 “좋은 소식”을 선포함에 따라 우리의 모든 구역, 외딴 모든 마을이 중요하게 되었다. 예로서, ‘도미니카’의 대서양 쪽의 ‘고울레트리버’ 지역에 있는 지방 거류지에 대략 400명 정도의 ‘카리브’ 원주민의 후손들이 산다. 이들은 아직도 한 때 전쟁을 위해 사용하던 마상이 ‘커누우’를 손으로 만드는데 지금은 고기잡이 용으로 사용하도록 만들어 외부인에게 판다. 그렇다, 왕국 소식은 이들 ‘카리브’인 후손들에게도 도달했으며, 선한 방법으로 그들의 생활에 영향을 미쳤다. 이 사람들 중에 두 사람이 처음으로 1970년 봉사년도에 침례를 받는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었다!

역시 젊은 형제 자매들이 열정적으로 책임을 받아들였고, 여호와의 축복을 거두었다는 사실도 격려적인 일이다. 예를 들면, 최근 여러 해 동안에 이들 젊은이들 중의 몇명이, 이 제도에서의 “좋은 소식”의 초기 전파자들이 한 것처럼, 흩어져 있는 마을에 사는 관심자들을 작은 집단들로 조직하였다. 이러한 일은 특히 ‘안티구아’, ‘세인트킷스’ 및 ‘도미니카’의 중심 회중들을 특히 강화시키는 효과가 있게 하였다.

미래를 위하여 세워 나아감

최근에 이 제도는 생활 방식의 변화 외에도 바로 외형이 변하였다. 거대한 기계들이 주택 개발과 사치스런 ‘호텔’들을 세우기 위해 거대한 지역을 후벼내었다. 그러나 ‘여호와의 증인’들도 미래를 위하여 구축하고 있었다.

1966년에 우리의 사업의 계속적인 확장으로 인하여 그 당시 ‘안티구아’의 ‘세인트존스’에 있는 한 건물 이 층에 세들어 있던 지부 사무실과 선교인 집을 옮겨야 할 문제가 일어났다. 거처와 지부 시설에 더 적합한 곳을 찾는 성실한 노력이 그 해에 착수되었다. 역시 이 노력도 여호와의 축복을 받았다. 따라서 1966년 11월에 ‘세인트존스’에서 땅 한 필지를 매입하였으며, 협회는 그곳에 훌륭한 이 층 건물을 세웠다. 선교인 여덟 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안락한 숙소가 이 층에 마련되었다. 일 층에는 서적 보관 창고와 지부 사무실 및 넓은 왕국회관이 들어서게 되었다. 그 건물은 ‘브루클린’ 협회 본부 직원인 ‘로버어트 W. 월렌’이 지구 방문을 하는 동안인 1968년 1월 26일에 봉헌되었다. 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 행복한 순간을 위해 참석하였다.

그러나 미래를 위한 우리의 건축 사업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이 제도의 허다한 지역에서 여호와의 백성의 훌륭한 숭배 장소가 건축되었다. 오늘날 ‘리이워드’ 제도에서는 두 회중을 제외하고는 모두 왕국회관을 소유하고 있다. ‘안티구아’의 형제들은 1976년에 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큰 회관을 건축하였다.

튼튼한 그리스도인 사랑의 띠

오늘날 ‘리이워드’ 제도의 참다운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지상의 다른 지역에 있는 동료 신자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외딴 섬주민들이라고 느낄 하등의 이유가 없다. 오히려, 그들은 전세계의 여호와의 백성의 사랑의 띠와 친밀한 특성을 느낄 수 있다. (요한 13:34, 35) 의심의 여지 없이 많은 요인들이 이러한 태도에 기여한다. 하지만, 특히 그러한 한 가지 경우를 언급하는 것이 적당할 것 같다.

이 제도에 있는 형제 자매들은 ‘브루클린’ 본부로부터의 방문객들에 의해서 영적으로 크게 격려를 받았다. 예로서, 지난 1968년 11월에 우리는 그 당시의 협회장인 ‘N. H. 노워’ 형제의 첫 방문으로 아주 많은 격려를 받았다. 그의 연설을 듣기 위하여 참석한 281명은 제자 ‘야고보’가 언급한 “거울”에 자신들을 비추어 볼 기회를 가졌다. 그들은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는 권고를 받았으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위험한 때에 빛으로 자신을 살펴보도록 도움을 받았다. (야고보 1:21-24) 그 후에, 약 이 삼십명의 형제 자매들이 ‘노워’ 형제가 ‘카리브’와 남‘아메리카’ 지부들을 방문하기 위하여 열대의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 밑 비행장에서 기다리는 동안 화기애애한 이야기를 하면서 한 시간 동안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또한 최근에 ‘여호와의 증인’의 한 통치체 성원들의 방문으로도 크게 세움을 받았다. ‘로이드 배리’, ‘앨버어트 쉬로오더’ 및 ‘존 부우드’ 형제가 1976년 8월에 ‘세인트킷스’와 ‘안티구아’를 방문하였다. ‘배리’ 형제와 ‘쉬로오더’ 형제는 그들의 바쁜 일정 가운데도 하루 저녁을 ‘세인트킷스’로 비행하였다. 그 날 저녁에 그들이 일단의 청중에게 연설을 하려고 떠나기 전에 한 시간도 못되는 시간에도 그 구역에서 전도를 해 보기를 원하였다. 해가 져서 어둑어둑한 저녁에 그 섬 주민들에게 증거하는 데 참여한 지방 형제들과 손님들의 기쁨은 능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조금 후에 방문한 형제의 격려적인 연설을 듣기 위하여 375명이 모인 것을 보고 이 형제들은 크게 기뻐하였다.

‘존 부우드’ 형제는 1976년 8월말에 ‘리이워드’ 제도의 한 지역 대회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다른 통치체 형제들도 우리를 방문하였다. 1976년 10월에 ‘라이만 스윙글’ 형제는 ‘도미니카’에 있는 형제들을 격려하는 데 이틀간을 바쳤다. ‘E. C. 치티’는 1977년에, 마찬가지로 ‘다니엘 시들릭’은 1978년에 지구 감독자로 우리를 방문하였다. 그러므로 ‘리이워드’ 제도에 있는 형제 자매들은 협회 본부에 있는 여호와의 동료 종들에게 친밀하게 느끼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확실히 이 제도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은 세계적인 여호와의 숭배자들과 그들을 연합시키는 그리스도인 사랑의 띠를 중히 여긴다.

“승리의 믿음” 국제 대회

‘리이워드’ 제도에 있는 형제 자매들이 ‘안티구아’의 ‘세인트존스’에서 1978년 8월 23일부터 27일까지 개최된 “승리의 믿음” 국제 대회에서 주인 노릇을 하게 된 것은 참으로 가슴 설레는 일이었다! 그들은 대표자들이 ‘스웨덴’, 영국, 미국, ‘캐나다’ 및 ‘카리브’ 형제 자매들이 포함된 것을 기뻐하였다. 그 대회의 최고 참석수는 1,717명이었고, 35명이 침례를 받았다.

선교인들에게 가장 격려적이었고, 지방 형제들의 영적 상태를 증명한 것은 그 대회의 전체 운영을 ‘리이워드’ 형제들이 맡은 사실이었다. 통치체의 ‘카알 클라인’ 형제가 그 대회를 섬겼으며, ‘브루클린’ ‘벧엘’과 ‘런던 벧엘’의 얼마의 성원들이 ‘프로그램’에 참여하였다.

여호와의 봉사에서 더욱 즐거워함

“내가 다시 그들에게로 가야 할까요?”라고 ‘W. R. 브라운’이 이 사랑스러운 제도에서 제자를 삼은 후, 1922년에 ‘러더포오드’ 형제에게 편지를 써 보냈다. ‘W. R. 브라운’은 그 후 다른 곳으로 보내졌지만 그 이후 ‘브라운’ 형제 같은 많은 다른 사람들이 이 제도에 다시 그리고 또 왔으며, 많은 보배들이 여호와의 집에 모였고, 충성스럽게 그분을 섬기고 있다. (이사야 2:2-4; 학개 2:7) 그러나 미래는 어떠한가? 전망은 밝다! 현재 ‘리이워드’ 제도에는 716명의 왕국 선포자들이 있다. 1978년 3월 23일의 주의 만찬에는 18개의 회중들과 두개의 격지 집단에 1,594명이 참석하였다.

‘리이워드’ 제도의 왕국 증거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똑똑한 충성의 기록이 명백하다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여호와의 크신 사랑과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의 참을성있는 인도를 즐겨 왔다. (마태 24:45-47)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봉사를 즐거워한다. 여호와께서 그 사업이 끝났다고 말씀하실 때까지 ‘리이워드’ 제도에 있는 참 그리스도인들은 계속 웅대한 소식을 전하면서 즐거워할 것이다.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들은 기뻐할찌어다.”-시 97:1.

[157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리이워드’ 제도

안길라(영령)

세인트 마아틴(‘네델란드’와 ‘프랑스’령)

대서양

세인트바아델리미(‘프랑스’령)

사바(‘네델란드’령)

세인트유스타티우스(‘네델란드’령)

세인트킷스(영령)

바르부다(영령)

네비스(영령)

안티구아(영령)

몬트세랏(영령)

구아들루프(‘프랑스’령)

카리브 해

도미니카(영령)

[167면 삽화]

한 때 ‘리이워드’ 제도와 ‘카리브’ 해 도처에서 “좋은 소식”을 전하는 데 사용했던 ‘스쿠우너’선인 “시비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