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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캐나다’

‘캐나다’

‘이로콰이’ ‘인디언’들은 ‘캐나다’를 ‘카나타’라고 부르는데, 그 뜻은 단순히 “오막살이 집단”이라는 의미이다. 그렇지만, 당신이 ‘캐나다’라는 말을 들을 때는 털 가죽 사냥꾼과 ‘에스키모’의 나라, 순록과 백곰 또는 “마운티즈” 즉 ‘항상 부하를 거느리고 다니는’ 붉은 ‘코우트’를 입은 왕실 ‘캐나다’ 기마 경찰을 연상할지 모른다.

그러나 현재의 ‘캐나다’는 그 정도가 아니다. 9,976,139평방 ‘킬로미터’나 되는 광활한 이 나라는 세계에서 둘째로 큰 나라이다. ‘캐나다’는 동쪽으로는 대서양까지, 서쪽으로는 태평양까지 이어지는 북미 대륙을 차지하고 있다. 남쪽에는 미국이 있고, 북쪽에는 차가운 북빙양이 있다.

‘캐나다’ 국경 내에는 높고 장엄한 ‘록키’ 산맥과 햇빛 반짝이는 수천 개의 호수들과 강들 그리고 천둥 소리를 내며 쏟아져 내리는 ‘나이애가라’ 폭포 등이 있다. 또 황금 물결 일렁이는 곡식으로 덮인 광활한 평야, 그리고 소나무, 가문비나무, 단풍나무, 전나무, 자작나무 등이 자라는 거대한 삼림이 눈을 즐겁게 한다.

이곳이 바로 23,000,000명의 사람들의 “보금자리”이다. 비교적 개방적인 이민 정책 때문에, ‘캐나다’ 인구 중에는 ‘오스트리아’인, ‘홀랜드’인, 독일인, 희랍인, ‘헝가리’인, ‘이탈리아’인, ‘유대’인, ‘라틴 아메리카’인, ‘폴란드’인, ‘포르투갈’인, ‘러시아’인, ‘스칸디나비아’인, ‘스페인’인, ‘우크라이나’인, 서인도인 및 ‘유고슬라비아’인 등을 볼 수 있다. 동양으로부터는 ‘아랍’인, 중국인, 동인도인, ‘필리핀’인, 일본인, 한국인 및 ‘파키스탄’인 등이 들어왔다. 백인들이 이곳에 정착하기 오래 전, 이곳은 ‘에스키모’인들과 유색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보금자리였다. 다행히도 그 종족들 중 얼마는 지금도 볼 수 있는데, 그 중에는 ‘크리이스’족, ‘케이유가’족, ‘모호크’족, ‘오집웨이’족, ‘쿠타네이’족 및 ‘하이다’족 등이 있다.

1534년에 ‘프랑스’ 탐험가 ‘까르띠에’가 이곳에 왔으며, 1604년에는 지금의 동부 ‘캐나다’에 최초의 ‘프랑스’인 거류지가 조성되었다. 1500년대 후반에 영국인들이 처음으로 ‘뉴우펀들랜드’ 및 인근 해안 지역들에 왔으며, 나중에 지금의 ‘노바스코시아’, ‘퀴벡’ 및 ‘온테리오’로 퍼져 나아갔다. 1763년에 ‘캐나다’는 대영제국의 일부가 되었지만, 공용어로는 불어와 영어를 함께 사용한다. 1867년에 연방이 되었고, 1931년에 영연방의 일부로서 대등한 지위를 얻게 되었다. 곧이어 ‘캐나다’는 10개의 주와 2개의 준주(準州)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인구는 미국과의 국경을 따라 좁은 ‘리본’ 모양의 지역을 이루고 있는 곳에 주로 집중되어 있으며, 인구 밀도는 북쪽으로 갈수록 급격히 떨어진다. 국토의 대부분은 아직도 사람이 살지 않는 미개발 지대로 남아 있으며, 현재 아마도 국토의 12‘퍼센트’에 해당되는 지역에 90‘퍼센트’의 인구가 살고 있다. 그렇게 일부 지역에만 인구가 편중되어 있는 일부 원인은 북부 지역이 비록 여름 한철은 쾌적하고 화창한 날씨이지만, 겨울철은 혹독하게 춥기 때문이다.

당신도 상상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캐나다’에 이민을 온 사람들은 그들이 이전에 가지고 있던 여러 가지 흥미있는 풍습과 다양한 종교를 가지고 왔다. 이 나라에서는 불교, 회교, ‘유대’교 및 ‘힌두’교 등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대단위 종교 집단들은 소위 그리스도교 단체들이다. ‘로마 가톨릭’은 단일 종파로서는 가장 큰 종파로서, 신도수는 10,000,000에 이르며, 이들은 대부분 ‘퀴벡’ 주에 살고 있다. 연합교회는 3,000,000명 이상의 신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며, 영국 국교회도 2,500,000명의 신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보다 규모가 적은 장로교, 침례교 등과 같은 ‘프로테스탄트’와 희랍 정교회 등이 나머지 인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는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전혀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한다.

동부 지역에서 빛이 비치기 시작하다

1880년 말, ‘캐나다’에서 참다운 영적 빛이 비치기 시작하였다. 일부 ‘캐나다’인들은 미국에 있는 열렬한 벗들과 친척들로부터 영광스럽게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수중에 있는 하나님의 왕국에 의하여 모든 사물이 회복되는 데 관한 고무적인 소식과 출판물을 받았다. (사도 3:19-21; 계시 21:1-5) 이러한 생각을 자극시키는 출판물들 가운데 한 가지는 1881년에 발행된 「생각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양식」이라는 책으로서 이곳에서 매우 반응이 좋았다. 그리스도교국 내의 교회들에서 가르치는 교리적 오류들에 대한 이 책의 강력한 폭로는 거짓 종교의 올무들을 일소해 버렸다!

이 “좋은 소식”은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알레게니’(현재는 ‘피츠버그’의 일부)에 본부를 두고 있던 성서 연구생들로 이루어진 한 작은 집단과 ‘차알스 T. 러셀’에 의하여 전파되고 있었다. 왕국 소식에 대한 ‘캐나다’인들의 호의적인 반응은 어느 정도였는가? ‘온테리오’에 사는 한 남자로부터 온 편지(1882년 1/2월호 「파수대」에 게재됨)에는 성서 진리에 대한 진정한 감사의 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제가 속해 있는 교회와 제가 관계를 끊는 일에 관해서 조언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제가 교회에 참석해서는 안되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 하면 내가 교회에 나가는 것은 그들의 가르침에 동의한다는 것이 되는데, 저는 현재 그들의 가르침을 믿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저는 오래 전부터 교회의 가르침을 믿지 않고 있읍니다. 그러나 저는 더 나은 길을 몰랐읍니다. 하지만 현재는 입장이 달라진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저는 영원한 생명의 희망 가운데서 여러분의 종교에 머물러 있읍니다.”

초기 ‘캐나다’인 성서 연구생들 중 한 사람은 ‘윌리엄 브루크맨’이었는데, 그는 전직 교직자 출신이었던 것같다. 그의 인도하에 ‘터론토’에서는 한 반(班)이 정기적으로 집회를 가지고 있었다.

초기에 성서 진리를 받아들인 또 한명의 ‘캐나다’인은 ‘토마스 베이커’로서, 그는 ‘터론토’ 서북쪽 약 8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한 작은 마을에 ‘온테리오’ 주 ‘엘베’에서 제재소를 경영하는 사람이었다. 이 대단히 종교성이 강한 사람 ‘베이커’는 영국 국교회 주일 학교 교장직도 지낸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의 웅웅거리는 제재소는 하나님의 왕국의 웅대한 소식으로 웅웅거리는 곳이 되었다. 그의 딸 ‘애니’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 준다. “찾아오는 손님들은 모두 전도지나 소책자 또는 책들을 받았읍니다. 한 사람도 빠진 사람은 없었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토마스 베이커’는 너무나도 유명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가 그 마을에 있는 기성 교회에서 탈퇴하였을 때 많은 의문을 일으켰다. 사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에 대하여 질문을 하였기 때문에, 그는 자기가 취한 행동에 대하여 해명하는 소책자를 발행하였다. 1906년 ‘베이커’가 사망하였을 때, 바로 그에게서 성서 진리를 가르침 받은 한 사람이 그의 장례식 연설을 하였다.

1880년대 후반에, ‘콜포처’들(전 시간 왕국 선포자들)은 ‘케일렙 크란델’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 주었다. 그는 성서 서적을 받았으며, ‘온테리오’ 주 ‘크란델의 코어너’(지금의 ‘포오트페리’ 내)에 있는 자기 집으로 그 방문자들을 초대하여 들였다. 그 당시에는 성서 연구 집단이 그곳에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케일렙’은 ‘터론토’에 있는 ‘메세이홀’에서 행한 ‘C. T. 러셀’의 강연을 듣기 위해 적어도 한번 여행을 하였던 일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가 종종 들려 주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질문을 하도록 연단으로 초대를 받은 몇명의 교직자들은 ‘러셀’의 건전한 성서적인 대답들을 반박할 수 없게 되자 매우 약이 올랐다. 그러자 그들은 ‘러셀’에게 일시에 여러 가지 질문들을 퍼부어 대려 하였다. ‘러셀’은 침착하게 질서를 지키도록 그들에게 환기시키면서, 그들이 신사답게 행동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는 그는 모든 질문들에 대하여 대답해 주겠다고 말하였다. ‘그란델’은 교직자들이 ‘러셀’의 성경적인 논증을 논박할 수 없는 것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얼마 후, 그들은 더 이상 어쩌지 못하고 그대로 연단을 떠나 군중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성서 진리가 서부 ‘캐나다’에 다다르다

진리의 빛이 동부 ‘캐나다’에서 어느 정도 밝게 빛나고 있을 즈음 한줄기 진리의 빛이 서부 ‘캐나다’의 영적 암흑 속을 꿰뚫고 들어왔다. 1889년, ‘매니토바’ 주의 ‘카베리’에 사는 ‘윌리엄 플류웰링’은 ‘C. T. 러셀’의 「천년기 새벽」 ‘시리이즈’(나중에 「성경 연구」라고 불리움) 가운데 첫째권을 소유하게 되었다. ‘플류웰링’은 자신이 진리를 발견하였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특히 1890년 ‘브리티시 콜럼비아’ 주의 ‘밴쿠우버’로 이사한 후, 다른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파하였다. 깊은 인식을 가지고 들은 한 남자가 있었는데, 그는 ‘로버어트 팔록’이었다. 곧 ‘팔록’의 집에서는 성서 연구반이 집회를 갖기 시작하였다. 우리가 알기로는 이것이 ‘캐나다’의 서부 해안에서 조직된 이러한 집단들로서는 첫 번째 집단이었다.

그후 여러 해 동안 ‘윌리엄 플류웰링’은 ‘사스캐체완’ 주의 ‘애스퀴스’(‘사스카투운’ 서쪽 약 32‘킬로미터’ 지점)와 ‘와데나’에 성서 연구 집단들이 세워지는 일을 도왔다. 그의 말년(1934년)에 그는 ‘사스캐체완’ 주 ‘위체칸’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좋은 소식”을 전파하였다. ‘윌리엄’은 1945년 ‘지렉 레애크’에서 사망하였다. 그러나, 그의 친척 중 많은 수는 그가 그 지역에서 시작한 왕국 전파 사업을 계속 수행하고 있다.

물론, 성서 진리는 다른 방법을 통하여도 서부 ‘캐나다’에 전파되었다. 1889년, ‘플류웰링’이 처음으로 진리를 알게 된 바로 그 해에, 마음씨 좋은 한 남자가 ‘노우드다코다’ 주의 ‘파아고우’에 있는 전형적인 서부 말 시장의 한 ‘캐나다’인 침상에 잡지 하나를 던져 주면서, “이건 자네가 흥미를 가질 만한 것일세” 하고 말하였다. ‘레슬리 메이스’는 북서 지방(현재의 ‘사스캐체완’)의 ‘포오트큐애펠리’에 있는 그의 목장에서 키운 말떼를 팔기 위해 그곳에 와 있었다. 영국 국교회 신도인 그는 성서를 탐독하는 사람이었으며, 자기가 성경에서 읽은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이 그의 침상 위로 그 잡지를 던져 준 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메이스’는 그 「파수대」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은 다음, 즉시 예약을 하였으며, 1924년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파수대」를 애독하였다.

‘C. T. 러셀’의 ‘캐나다’ 첫 방문

1891년에, ‘터론토’ 지역에 있는 성서 연구생들의 수는 그 도시에서 최초의 1일간의 대회를 열기에 충분한 수였다. 그리하여 ‘패스터 러셀’은 처음으로 이 나라에 있는 동료 신자들을 방문하였다. 2월 22일 오전 회기에는 400명 이상이 두 시간에 걸친 그의 연설을 들었다. 오후에는 약 700명이 참석하여, ‘러셀’ 형제가 행한 또 다른 두 시간의 연설을 들었다. 저녁에 ‘러셀’ 형제는 ‘터론토’ 한쪽 끝에 있는 한 회중에서 연설을 한 다음, 문답 회기에 참여하기 위해 9시 전에 대회장으로 돌아왔다. 참으로 바쁜 하루였다!

반대가 고조되다

이 나라에서의 “좋은 소식” 전파 속도는 가속하고 있었다. 1891년 초, 한 ‘콜포처’는 다음과 같이 편지하였다. “내가 ‘캐나다’에 머물러 있어 온지는 얼마 안되지만 그 동안, 놀랄 정도로 관심이 커지고, 추수 사업이 이곳에서 훌륭하게 시작된 것을 보는 것은 나의 특권이다. ·⁠·⁠· 현재 ‘온테리오’ 주 내에서 5,000권 이상의 「새벽」 책(「천년기 새벽」)이 전해졌으며, 사업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이 교직자들의 반대 없이 수행된 것은 아니다. ‘온테리오’ 주에 있는 적어도 두명의 그리스도교국 교직자들은 「천년기 새벽」 책을 공개적으로 불살라 버렸으며, ‘러셀’ 형제와 그 서적을 배부하는 사람들을 규탄하였다.

그 기간 중, 「위이클리 나이애가라 폴즈 리뷰우」지는 ‘C. T. 러셀’의 연설을 게재하고 있었다. 그 신문의 편집인은 ‘제임스 E. 앵거’ 형제였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시인하였다. “나는 [1892년] 도시 내에 있는 마부들, 안식일 모독자들, ‘호텔’ 종사자들, ‘로마 가톨릭’ 교회 및 ‘프로테스탄트’ 교회들로부터 배척을 받아 불매 운동의 공격을 받았다.” 그는 마침내 그 신문사를 팔아 버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앵거’ 형제의 후손들은 오늘날까지도 활동적인 ‘여호와의 증인’들이며, ‘나이애가라’ 반도내에서는 영적으로 번창하는 그리스도인 회중들을 20개 가량 헤아릴 수 있다.

1890년대 초, 교직자들 및 기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부 목사들과 전직 교직자들은 성경적인 문제들을 똑바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성서에서 발견한 진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야 할 책임을 알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인 ‘존 L. 로우슨’은 1892년에 ‘러셀’ 형제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주께서는 여러 해 동안 이들 ‘천년기’ 진리를 위해 나를 준비시켜 오셨읍니다. 1874년에 나는 9년 동안이나 봉직하고 있던 영국 ‘수구파 감리교’의 목사직을 사임했읍니다. ·⁠·⁠· 그후 나는 예언 연구를 해 오게 되었는데, 귀하의 저서는 이 연구 부면에 있어서 이제까지 보아 온 그 어떤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내게 부유함과 충만함을 주었읍니다. 그 책들을 읽고 있노라면 ‘때를 따라 나오는 양식’ 즉 믿음의 식구들에게 공급되리라고 예언된 진리의 잔치상에 앉아 있는 느낌입니다. ·⁠·⁠·

“나는 깨어 있고 헌신한 성도들에게 내 자신이 도움이 될 수 있으면 합니다. 그러나 이곳[‘캐나다’]의 총림 지대에서는 많은 일을 할 수 없을 것같아 염려가 됩니다. 저는 ‘콜포처’들에 관한 [협회]의 마련이 어떠한 것인지, 또 그들이 ‘콜포처’ 봉사를 시급히 필요로 하는 어떤 밭을 알고 있는지 알려 주셨으면 합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배우고, 진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해야 할 긴급성을 알게 됨에 따라, 왕국 활동은 계속 그 속도를 더해 갔다. 성서 연구반들은 여기 저기서 발전하고 있었다. 일례를 들면, 1892년에 ‘브리티시 콜럼비아’ 주의 ‘빅토리아’에서는 그리스도인 집회들이 시작되었다.

‘매니토바’ 주 ‘카베리’에 사는 ‘매튜우 넬슨’은 그 해에 처음으로 왕국 소식을 듣고 받아들였다. 1893년에 ‘넬슨’은 ‘매니토바’ 주의 ‘그랜드뷰우’로 이사하였고, 그곳에서 진리의 씨를 뿌렸다. 그는 종종 관심가진 사람들을 방문하기 위해 24‘킬로미터’나 되는 포장되지 않은 길을 마차를 몰고 가곤 하였다. 진창길을 그렇게 마차를 몰고 가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니었다. ‘넬슨’의 가족 가운데서는 그의 어머니와 누이들, 그리고 결혼으로 맺어진 친척들 가운데 일부가 그의 노력에 대해 매우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1914년 11월 22일, ‘그랜드뷰우’에는 최초의 회중이 설립되었고, ‘넬슨’ 형제는 감독의 특권을 받았다. 이 매우 활동적인 “스파크 플러그”(그 지방 성서 연구생들이 ‘매튜우 넬슨’을 애칭으로 이렇게 불렀다)는 1945년 사망할 때까지 그의 모든 그리스도인 동료들에게 크게 격려가 되었다.

‘캐나다’ 연해주(沿海州)에서의 시작

1892년경 진리를 배운 사람 가운데에는 ‘노바스코시아’ 주 ‘핼리팩스’에 사는 ‘아아더 N. 머천트’와 ‘W. T. 다우든’이 있다. 그들 역시 그리스도인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좋은 소식”에 따라 살아야 하고, 그에 관하여 이야기해야 한다.’ 이렇게 결심한 ‘머천트’는 즉시 ‘콜포처’가 되었으며,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일은 없다고 확신하였다. 1895년 초에 그는 ‘프린스 에드워어드’ 섬을 포함하여 ‘캐나다’ 연해주 모든 지역에서 조직적으로 증거를 하며 자주 돌았다. 그리하여, 그곳에 장차 놀라운 발전을 위한 기초를 놓았다.

‘아아더 머천트’는 관심자들을 영적으로 도와 주며 연구 집단을 세우고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하도록 그 중 일부를 훈련시켰다. 그는 또 중요한 단계를 밟기를 열망하는 사람에게는 침례를 주었다.

이 사업은 편안하고, 편리하게, 그리고 오늘날처럼 용이한 교통 수단을 이용하여 여행을 하며 수행되지 않았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종종 ‘머천트’ 형제는 수 ‘킬로미터’를 걸어다녔다. 때로는 자전거를 타고 다녔으며, 겨울철에 자동차를 이용할 수 있을 경우에는 그것을 타고 다녔다. 그러나 그 때는 차의 ‘히터’ 장치가 개발되기 전이었다. ‘엘라 다우’ 자매는 ‘머천트’ 형제가 무개차를 운전하던 일을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머천트’ 형제가 시골에 있는 ‘다우’ 자매의 집에 도착하였을 때, 그는 “뼈속까지 얼어 붙었다.” “나는 그의 양 다리에 도포약을 발라 주어야 하였고, 온기가 돌아오도록 그의 양다리를 아궁이 속으로 들여 밀게 해 주었다!”

‘머천트’ 형제는 여러 해가 지나도 결코 동요되지 않았다. 1차 세계 대전 중 한 때 그는 「종말을 고한 비밀」 책을 배부했다는 이유로 ‘핼리팩스’에서 체포되었다. 그에게 10,000‘달러’나 되는 벌금이 부과되었다. 판사가 그에게 직업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서슴없이 “지존하신 하나님의 봉사자 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아아더 N. 머천트’는 1940년 5월 23일 그의 행로를 충성스럽게 마쳤다. 그러나 그가 근 50년간 제자를 삼는 일에서 수행한 일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가 그토록 부지런히 봉사하던 132,000평방 ‘킬로미터’의 지역에는 오늘날 80개가 넘는 회중과 4,500명의 활동적인 ‘여호와의 증인’들이 있다.

“불 붙는 것 같이”

‘캐나다’의 연해주를 이야기하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불 붙는 것 같”았던 한 ‘캐나다’인이 생각난다. (예레미야 20:9)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야기하지 않고는 견딜 없어 했다. 1877년 7월 2일 ‘캐나다’에서 태어난 그는 ‘노바스코시아’의 한 ‘가톨릭’ 마을에서 장로교를 믿는 부모 밑에서 자랐다. 그의 이름은 ‘알렉산더 휴 맥밀란’이다.

그의 여동생이 ‘디프테리아’로 죽었을 때, 겨우 13세 밖에 안된 ‘맥밀란’은 다음과 같이 추리하였다. “인생은 짧고 불확실하다. 만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행하는 일이 우리의 장래의 상태에 어떠한 영향을 준다면, 우리가 영원을 통해서 더 나은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희망을 가지고 주를 섬기는 일에 시간을 바치지 않는다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확고한 입장을 취하고, 주를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되는 일을 하리라.”

‘맥밀란’은 16세 때 전도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집을 떠나 한 학교에 들어가 거기서 신학교 입학 준비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때 어떤 이유로 그는 신경 쇠약에 걸리게 되었다. ‘맥밀란’은 몹시 낙심해서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사려깊게도 돈을 마련해 주었으며, 그리하여 이 젊은이는 즉시 ‘매사추세츠’ 주 ‘보스톤’으로 갔다. 거기서 그는 ‘C. T. 러셀’의 저서 「시대들에 관한 계획」(「시대들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계획)」)이라는 책을 한권 입수하였다. 그 책에 들어 있는 진리는 ‘맥밀란’의 속에서 “불 붙는 것 같”았다. 그는 자기 속에만 집어 넣고 있을 수가 없어서, 거리로 나아가,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춰 세우고 자기가 알게 된 점들을 그들에게 이야기하였다.

어느날 ‘맥밀란’은 전혀 낯선 한 사람에게 다가가서 “댁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씨를 통하여 지상의 모든 인류를 축복하시리라고 하신 위대한 약속을 아십니까?” 하고 질문하였다. 그 사람은 깜짝 놀라서 “아니 어느 ‘아브라함’에 대해서 이야기하는거요? 저 아래 ‘살렘’ 가에서 전당포를 하고 있는 그 ‘아브라함’ 말이요?” 하고 반문하였다.

그렇다, ‘맥밀란’은 적어도 자기의 젊은이로서의 목표 즉 전도사가 되겠다는 목표에 이르고 있었다. 1900년 9월, 이 열정적인 ‘캐나다’인은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헌신의 상징으로 침례를 받았다. 이듬해에 그는 광범위한 지역을 여행하며 “좋은 소식”을 선포하고 회중들을 방문하며 동료 신자들을 영적으로 격려하였다. 그는 지상에서의 행로를 충실히 마치고, 1966년 8월 26일, 89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격려적인 “순례자” 방문

‘A. H. 맥밀란’은 ‘C. T. 러셀’과 가까운 동료였으며, 그 두 사람은 여호와를 섬기는 동료 숭배자들에게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러셀’은 1일간의 대회 기간에 ‘캐나다’ 성경 연구생들의 여러 집단들을 방문하였다. 그러나 여러 곳에 새로운 회중들과 집단들이 조직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 모든 곳을 다 방문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한 방문들, 들려 준 연설들, 훌륭한 교제 등은 하나님의 백성을 영적으로 크게 강화시켜 주었다. 그리하여 1894년 9월 1일호 「파수대」에는 여러 명의 유능하고 임명받은 형제들이 회중을 방문하게 될 것이라는 광고가 있었다. 후에 이 봉사는 여행하는 ‘왙취 타워 협회’ 대표자들에 의하여 수행되었으며, 이를 가리켜 “순례자” 봉사라고 하였다. 순례자 방문 중 전형적인 하루 일정은 어떠하였는가? ‘러셀’ 형제에게 보낸 다음의 편지를 보면 어느 정도 그 윤곽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조오지] 드래퍼’ 형제가 다녀 갔읍니다. ·⁠·⁠· 우리 집회들의 규모는 크지는 않았지만, 각 사람의 얼굴에는 진지한 관심이 역력하였읍니다. 그리고 우리의 적은 집단에 속한 모든 사람들과 외부에서 온 소수의 사람들은 [‘터론토’에 있는] 우리의 새로운 회관에서 개최된 그 모든 집회들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읍니다.

“일요일 아침 10:30, 약 40명이 ‘발미’ 해변에 모여 ·⁠·⁠· 물 침례식을 참관하였읍니다. 그 날 아침은 화창하고 시원하였으며, 바람이 세게 불어서 커다란 파도가 둘둘말려 굴러오는 장관은 침례식을 한층 흥미롭게 만들었읍니다. 네명의 자매들과 다섯명의 형제들이 침례를 받았읍니다. ·⁠·⁠· 우리의 작은 집단은 정말로 행복하고 즐거운 기분에 싸여, 오후 3시 우리의 회관에 모여서 친애하는 ‘드래퍼’ 형제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귀중한 내용을 듣기 위해 돌아왔읍니다.

“오후 7시에, 마지막 집회가 시작되었고, 거기에는 88명인가 90명이 모였는데,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의 벗들과 친지들이 상당수 참석하였읍니다. ·⁠·⁠· 그리고 9:30경 우리의 기름진 잔치는 끝났읍니다.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서 그보다 더 행복한 모습을 묘사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모두는 그들이 들은 값진 내용으로 인해서 즐거움에 벅차 있었읍니다.”

1905년에, ‘온테리오’ 주 ‘해밀턴’에 사는 ‘윌리엄 허어시’는 개인 사업을 정리하고 순례자 봉사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는 경제적으로도 유복하고, ‘해밀턴’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있었지만, ‘캐나다’와 미국에서 여러 해 동안 순례자로 봉사하면서 북미주를 넘나들며 여행하였기 때문에 곧 그의 얼굴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1893년에 ‘온테리오’ 주 ‘런던’에서 침례를 받은 ‘허어시’ 형제는, 체구는 작달막하였지만, 그의 풍채에서는 깊은 인상을 풍겼다. 특히 만년에는 어린이들과 기타 젊은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면에서도 일부 보여지는 친절한 성품이 그의 백발로 인하여 더욱 돋보였다. 어렸을 때의 일을 회상하여 한 사람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허어시’ 형제는 저녁 식사를 마친 후, 형 ‘조’와 나를 데리고 저녁 산책을 하러 들로 나갔다. 우리는 쟁기질을 해 놓은 밭 너머로 기울어져 가는 석양을 바라보며 한 동안 말뚝에 기대 앉아 있었다. 대초원 너머로 지고 있는 태양을 본 일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정경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태양이 커다란 불덩어리같이 그 찬란한 색깔을 뿌리며 서서히 시야에서 사라져 가는 동안, 지평선상의 푸른 하늘이 ‘오렌지’색 광채를 하늘 높이 뻗치며 새빨갛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우리 주위에 있는 숲속에서는 새들이 보금자리로 찾아드는 소리로 부산하였고, 우리 오른편으로 목장 저 멀리에서는 말들이 풀을 뜯으면서 콧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 조용하고 독실한 분과 함께 하나님의 창조물들과 그분의 왕국을 이야기하기에 얼마나 아름다운 정경이었던가! 그 때 그 일은 내가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

‘허어시’ 형제가 자기들의 가정을 방문한지가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어떤 이들은 그의 봉사에 대한 그리움과 감사의 정을 가지고 그를 회상한다. 특히 그가 기도할 때는 그의 깊은 영성으로 말미암아 노소가 모두 깊이 감동을 받았다. 한 부부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그는 우리 부부에게 커다란 격려의 근원이었다. 그의 기도는 참으로 감동적이어서, 하늘에 있는 성전 마당으로 직접 데려다 주는 것 같았다.”

‘윌리엄 허어시’는 여호와—그리고 참 하나님의 동료 숭배자들—를 반세기 동안 충실하게 섬겼다. 1943년, 그는 지상에서의 그의 그리스도인 행로와 봉사를 마쳤다. 지난 날의 그러한 순례자들의 겸손하고 신실한 노력이 믿음 안에 있는 그들의 형제 자매들을 영적으로 훌륭하게 강화시켜 주었으리라는 점은 자명한 일이다.

‘매니토바’에서 많은 빛이 비치다

‘만물의 회복’에 관한 웅대한 소식이 1898년에 처음으로 ‘매니토바’ 주 ‘래핏시티’에 전해졌다. (사도 3:19-21) ‘콜포처’인 ‘제프리 웹’이 그 때 그곳에 나타나서 ‘A. W. 레플러’의 잡화상 안에서 배가 불룩하게 생긴 난로 주위에 모여드는 상인들에게 증거하였다. 한 동안 목재소를 경영하는 열렬한 영국 국교회 교인인 ‘보웬 스미드’가 ‘웹’의 말을 반박하고 나섰다. 그러나 ‘스미드’는 마침내 설득이 되어, ‘레플러’와 몇명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캐나다’의 이 지역 내에 최초의 성경 연구생들의 반을 조직하였다.

‘레플러’는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사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마차를 타고 여행하면서, 그 주변의 상당히 광범위한 지역에서 증거하였다. ‘C. T. 러셀’이 그 지역을 방문해서 연설하였을 때, ‘레플러’의 마차는 참으로 편리하였다. 심지어 지금도 말을 모는 주인과 그의 손님이 마차를 타고 넓은 초원 이곳 저곳으로 여행하는 모습을 쉽사리 상상해 볼 수 있다.

여러 해 동안 ‘레플러’의 집은 ‘캐나다’ 그 지역 내에서 그리스도인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곳은 많은 ‘콜포처’들과 순례자들이 거쳐 가는 곳이 되었다. 작은 규모의 대회들이 그곳에서 열렸다. 회중이 조직되었을 때, ‘A. W. 레플러’는 최초의 감독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활동이나 그 지역의 기타 성경 연구생들의 활동은 희생 없이 그리고 반대에 대한 인내 없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들이 소위 “러셀파”라고 부르는 이들을 멸시하고 증오하였으며, 이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 행로는 힘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플러’ 형제는 박해를 인내하였으며, 1946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충실하게 봉사하였다.

진리가 ‘앨버어타’ 주에서 뿌리를 내리다

그리스도인의 결의와 자기 희생 정신이 또한 ‘앨버어타’ 주 ‘칼마’에서 여호와의 축복을 가져왔다. 1895년에 성경 연구생인 ‘오거스트 달퀴스트’가 ‘노우드다코다’에서 이곳으로 왔다. 1899년에 그의 뒤를 따라 ‘스칸디나비아’인들 가족이 줄줄이 들어왔는데, 그 중에는 ‘앤더슨’, ‘엥버그’, ‘해머’, ‘멜린’ 및 ‘피터어슨’ 등의 가족들이 있으며, 이들은 ‘노우드다코다’ 주 ‘드라미’ 지방으로부터 ‘칼마’로 왔다. 이들 가족들은 미국을 떠날 때 이미 활동적인 성서 연구생들이었다.

이들 ‘파이오니아’를 하는 가족들 중 하나는 ‘나드 피터어슨’ 가족이었다. 과거 1890년에 한 성경 연구생이 그에게 서적 한 권을 전해 주었을 때, 그는 ‘노우드다코다’에서 임명된 침례교 목사로 있었다. ‘해머’의 자손들 가운데 한 사람의 말에 의하면, 그 침례교 목사는 “곧 그 책에 진리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 결과, 1891년에 ‘K. P. 해머’는 그 교회에서 일어나, 교회 성원들에게 자기와 자기 아내 및 팔에 안고 있는 아기는 ‘바벨론’에서 나간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들은 어린 딸 ‘해너’와 함께 거짓 종교의 영역을 떠났으며, 결코 그리로 돌아가지 않았다.”

1892년에 ‘해머’ 형제는 그의 고향인 ‘노르웨이’의 ‘스키엔’을 방문하였다. 이 방문으로 인해서 그의 어머니와 누이가 왕국 소식에 관심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 후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얼마간의 자세한 점을 ‘해머’ 형제의 후손 중 하나에게서 들어 보자. “계획에 따라, 1899년에 50명으로 된 일단의 사람들이 객차 한량을 전세냈다. 그들은 함께 ‘칼마’ 지역으로 가기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들은 그 당시 새로운 나라로 가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고자 하는 일단의 성경 연구생들이었다. 객차가 출발할 즈음에 ‘K. P. 해머’ 형제는 ‘차알스 테이즈 러셀’ 형제로부터 협회 대표자로 ‘노르웨이’에 가서 그곳에 첫 그리스도인 회중을 세우라는 초대를 받았다. 형제들과 이 문제를 의논한 끝에, ‘해머’ 형제는 ‘러셀’ 형제로부터 받은 그 초대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해머’ 형제의 가족은 다른 성경 연구생들의 돌봄을 받으며, ‘칼마’로 가는 한편, ‘해머’ 형제는 ‘노르웨이’로 떠났다. 그가 ‘노르웨이’에 있는 동안 얼마의 관심자들을 만나기는 했어도 회중은 설립되지 않았다. 그가 자기 가족에게로 돌아왔을 때 어떠한 상황을 보게 되었는가? 앞서 인용한 그 보고는 다음과 같이 계속 알려 준다.

“‘K. P. 해머’ 형제가 돌아와 보니 한 가지 즐거운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벌채꾼들의 감독이자 건축가인 ‘존 프레드릭슨’이 다른 형제들의 도움을 받아서 ‘해머’ 농장에 훌륭한 오두막을 지어 놓았다. 이것은 초기에 형제들이 서로간에 나타낸 여러 가지 사랑스럽고 친절한 행동 중 한 예에 불과한 일이다.”—요한 13:35.

‘칼마’에 있는 성경 연구생들은 영적인 일을 첫째로 두었으며, 그들 가운데에는 ‘앤드류 멜린’이 있었다. 그의 아들은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우리는 우편물을 받을 때마다 ·⁠·⁠· 석유 등잔을 밝힌 식탁에 둘러 앉아 저녁 시간을 보내곤 하였으며, 우리는 아버지가 「파수대」를 읽어 주시는 것을 듣곤 하였다. 처음에는 영어 「파수대」가 왔다. 그러나 나중에 우리는 ‘스웨덴’어 「파수대」를 받게 되었고, 그 때부터 어머니도 잘 이해하실 수 있었다.”

‘멜린’ 부부, ‘존 프레드릭슨’ 및 ‘K. P. 해머’는 걸어다니면서 또는 말을 타고 다니면서 널리 증거하였으며, 「천년기 새벽」 책을 가지고 봉사하였다. ‘칼마’ 지역에서는 이들 ‘여호와의 증인’들을 모르는 곳이 별로 없었다. 그들에게 시간이 많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가꾸어야 하는 농장에 살면서, 말과 소 그리고 맨손으로 (적어도 20‘에이커’의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위해) 그 땅을 개간하기 위한 힘든 노동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동시에 그들은 대부분의 식량을 재배해야 하였다. 나중에 이 성경 연구생들 중 어떤 가족은 13명이나 되는 자녀를 두게 되었다. 그러므로 필수품을 구입하기 위한 돈을 벌기 위해서 형제들은 고작해야 하루 35‘센트’ 밖에 올리지 못하는 부업을 가져야 하였다. 그렇다! 그들에게는 자기 희생 정신이 있었고, 사랑과 부지런함 및 충성심이 있었다. 그리하여 여호와께서는 그들 위에 풍성한 축복을 내려 주셨다.

이들 그리스도인 가족들이 불어나고, 새로운 관심자들이 그들과 더 많이 연합하게 됨에 따라, 한채의 통나무 오두막 집회 장소가 ‘칼마’에 세워졌다. 그 당시에 놓여진 훌륭한 영적 기초는 많은 충성스러운 ‘여호와의 증인’들을 배출해 냈으며, 이들 초창기 성경 연구생 가족들의 이름들은 현재 서부 ‘캐나다’ 전역에 잘 알려져 있다. 또 ‘칼마’에는 아직도 활동적인 그리스도인 회중이 하나 있다.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다

초기에 모든 곳에서 있었던 발전상과 그 당시 여호와를 섬기던 모든 사람들과 가족들의 이름을 다 열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축복하고 계셨음은 분명한 일이었다. 예를 들어, 1899년 주의 만찬식 보고를 보면 매우 소수의 작은 집단이지만 증가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 준다. 그 해에 ‘온테리오’ 주에서의 참석수는 다음과 같았다. ‘브랜트포오드’ 22명, ‘도어체스터’ 5명, ‘가더리치’ 4명, ‘해밀턴’ 10명, ‘런던’ 7명, ‘미이포오드’ 5명, ‘나이애가라 폴즈’ 7명, 그리고 ‘터론토’ 21명이었다. ‘매니토바’ 주의 기념식 참석수는 다음과 같았다. ‘브랜든’ 8명, ‘클리브’ 4명, 그리고 ‘래핏시티’ 10명, 기타 지역에서 들어온 보고는 다음과 같았다. ‘브리티시 콜럼비아’ 주 ‘하노크’ 5명, 북서 지방(지금의 ‘사스캐체완’) ‘레기나’ 7명, ‘노바스코시아’ 주 ‘트루로’ 8명, 기타 집단들도 그 해의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해 모였다.

사실상,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던 그 당시, 하나님의 왕국에 의한 만물의 회복을 알리는 사업은 ‘캐나다’ 전역에서 수행되고 있었다. 성서 연구생들의 증가하는 집단들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순례자들은 계속 그들의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방문했으며, 영적으로 세워 주는 대회들도 정기적으로 여러 곳에서 열렸다.

그리하여 영국 국교회 교인들, 장로교인들, 침례교인들 및 기타 종교인들—때로는 그러한 종교 조직들 내의 지도적 인물들—이 담대히 거짓 종교를 박차고 나오고 있었다. (계시 18:1-4) 그러한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자신들이 배우고 있는 성서 진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주고 있었다.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장함

확장은 계속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도처에서 성경 연구생들의 반들이 증가함에 따라 연구를 위해 가정집에서 모이는 것 뿐 아니라, 일요일에는 집회를 위해 큰 장소들을 빌려야 하였다. 물론 이러한 확장은 반대를 불러 일으켰다. 여호와의 백성의 성장과 영향력을 막으려고 안간 힘을 다하는 일부 종교 비평자들은 때때로 도에 지나치는 일을 하였다. 예를 들어, 1904년 ‘뉴우브런즈윅’ 주 ‘내시왁’에서 있었던 일을 고려해 보자. ‘세실 스코트’는 그에 관해 다음과 같이 알려 준다.

종교심이 깊은 ‘룸버어맨 히스기야 런던’이라는 사람은 자기 농장 한 모퉁이에 교회당을 하나 지었다. 그의 일곱명의 딸들은 모두 성가대에서 노래를 불렀다. 어느날 ‘런던’은 ‘코네티컷’ 주에 사는 성경 연구생이 한 친구로부터 우편으로 몇권의 서적을 받았다. ‘히스기야’는 그 책들을 읽고 나서 ‘펜실베이니아’ 주 ‘알레게니’에 있는 “성서관”에 편지를 하였으며, 그리하여 더 많은 서적들을 받았다. 그가 그 책들을 읽고 난지 얼마 안된 어느 일요일, 그 지방 목사가 “국제 성경 연구생들과 ‘패스터 러셀’”에 관한 설교를 하였다. 그 설교는 야비할 뿐 아니라 사실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설교가 반쯤 진행되었을 때, ‘런던’은 벌떡 일어나서 아내의 손을 잡으며 성가대에 있는 딸들을 향해 “얘들아, 이리 오너라. 집으로 돌아가자” 하고 불렀다. 아홉 식구가 모두 걸어 나갔다. ‘히스기야 런던’은 바로 그 교회당을 기증한 사람이었으며, 그 교회의 재정적인 기둥 역할을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교회는 곧 “해체되고 말았다.” 목사도 떠나자 그 교회는 문을 닫고 말았다.

그 후 얼마 있지 않아, ‘히스기야 런던’은 순례자가 ‘내시왁’을 방문하도록 마련하였다. 순례자(약 일년에 두차례 방문)가 도착하기 전 수주일간, ‘런던’은 마차를 타고 월요일 아침에 집을 떠나서 토요일에야 돌아오곤 하였다. 그렇게 여행하는 동안 그는 주위 수 ‘킬로미터’ 내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도지와 소책자들을 전하면서, 방문하는 순례자가 행할 연설에 그들을 초대하였다. 집회 장소는? 그렇다! ‘뉴우브런즈윅’ 주의 ‘내시왁’의 ‘런던’ 농장에 있는 이전에 교회당으로 사용하던 그 건물이었다. 오늘날 ‘히스기야 런던’의 친척 가운데에는 ‘여호와의 증인’이 30명이나 있다.

20세기로 접어들면서 하나님의 백성의 회중은 여러 곳에서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캐나다’의 일부 지역에서는 여러 도시들이 아직도 10년 전 혹은 그보다 더 이전의 상태 대로 머물러 있었다. 예를 들면, ‘매니토바’ 주내에는 혼자서 성서 진리를 받아들였으나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가까이 교제를 가질 기회가 없고, 순례자들의 방문도 좀체로 받을 수 없었던 곳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확고함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영적으로 유지시켜 주셨다.

‘매니토바’ 주 ‘소오리스’ 근처에 살던 ‘존 샘플’ 부인은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알려 준다. 그는 1897년부터 협회 서적을 가지고 있었으며, ‘존 커슬레이크’라는 사람으로부터 잡지들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교회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서 지방 주일 학교에서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려 하였다. 1903년에 그러한 관계를 끊어 버리는 날이 오고야 말았다. 그는 교회에서 일어나서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자기가 그리스도교국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할 이유를 설명하였다. 그의 가장 가까운 이웃 사람은 그를 다시 교회에 나오게 하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목사들도 야단들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일들은 아무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의 태도는 확고하였다. 뒷날 ‘네이’라고 하는 그 이웃 사람 역시 진리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혼자서 해야 할 일이 무척 많았다. ‘샘플’ 자매의 아들 ‘존’은 그 초기에 자기 어머니의 처지가 어떠하였었는지 다음과 같이 들려 준다. “회중의 종[주임 감독자]도 없었다. 의지할 만한 연구의 종도 없었다. 집회도 없었다. 오직 속죄하는 마음이 있었고, 낡아 빠진 한권의 성서가 있었다. 오랜 시간 기도를 드렸다.”

“좋은 소식”이 계속 정직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이끌어들이다

정직한 마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욕망, 그리고 어떠한 역경에 처하여서도 그분을 섬기고자 하는 결의를 가진 사람들이 계속 나타났다. 그러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윌리엄 메네레이’라고 하는 퇴역 육군 대위가 있었다. 1906년 그는 ‘위니펙’에 있는 자기 집으로 귀가하기 전에 ‘매니토바’ 주 ‘소오리스’에 있는 전신국 사무실을 청소하다가 1893년과 1894년도 「파수대」 잡지 몇권을 발견하였다. 비록 그 잡지들은 아주 낡은 것이었지만 그것을 집으로 가지고 갔다. ‘메네레이’의 아내는 그 잡지 가운데 몇권을 읽어 본 후 자기 남편에게도 권하였다. ‘메네레이’가 읽은 처음 기사는 지옥에 관해서 쓴 ‘왙취 타워 협회’의 소책자를 전재한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시작되었다. ‘메네레이’는 즉각 협회 사무실에 편지하여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위니펙’ 내에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는 ‘레지널드 테일러’ 부부와 ‘해밀튼’ 부부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1906년 이전에 이러한 내용을 믿는 사람들 사이에 얼마의 모임이 있었다. 사실상, 일찌기 1901년 「파수대」지에는 순례자가 ‘위니펙’을 방문한 기사가 실렸으며 1905년에는 아마도 ‘프란시스 해밀튼’이 보낸 듯한, 남편과 함께 주의 만찬을 기념한 일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편지가 실렸다. 그러나 ‘위니펙’에서 최초로 조직된 회중이 그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05년 아니면 1906년이었던 것같다.

‘메네레이’는 자기가 사는 지역 내에서 증거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해하지 않고, 상당히 많은 우편 봉사를 수립하였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그는 격리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소책자들과 전도지들을 보내 주었다. 이들 전도지들과 소책자는 「낙원에 있는 도적들」, 「영혼이란 무엇인가?」 등과 같은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제목을 가진 것들이었다. 이러한 출판물들 중 얼마는 ‘유콘’ 지방까지도 보내졌다. ‘조오지 네이쉬’의 보고에 의하면 ‘사스캐체완’ 주 ‘캄색’에 사는 ‘카르멘’ 가족과 ‘레인보우’ 가족 가운데서도 관심이 발전하였다고 한다.

‘윌리엄 메네레이’는 한때 ‘C. T. 러셀’과 기타 성경 연구생들과 함께 세계 일주 여행을 하였는데, 그 여행은 세계적인 증거 활동이 크게 필요함을 밝혀 주었다. ‘메네레이’ 형제의 충실한 행로는 1960년 1월 21일 그가 지상에서 생명을 마치는 마지막 날까지 계속되었다.

1911년 ‘매니토바’ 주의 ‘길버어트 플레인즈’에 사는 ‘차알스 컷포스’는 여호와의 증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아버지 ‘H. W. 컷포스’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H. W. 컷포스’의 집은 그 지방 성경 연구생들의 집회 장소가 되었다. 얼마 후, ‘차알스 컷포스’는 ‘콜포처’가 되어 ‘왙취 타워 협회’ 대표자로 여행하였다. 그의 아들 ‘존’은 ‘파이오니아’(1941년)가 되었으며, 여행하는 감독자(1942년)로 봉사하였고, ‘터론토’에 있는 협회 지부 사무실 직원이 되었다(1943년). 그는 1946년에 ‘길르앗 왙취 타워 성서 학교’에 참석한 후, ‘오스트레일리아’로 파견되었다. 거기서 ‘존 컷포스’는 순회 및 지역 감독자로 봉사하였다. 후에, 그는 ‘파푸아 뉴우기니아’로 파견되었으며, 거기서 지금까지 충실하게 봉사하고 있다.

‘온테리오’ 주 ‘핼리버어튼’에 사는 ‘제임스 깁슨’ 역시 ‘C. T. 러셀’의 서적으로부터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게 된 정직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가 ‘온테리오’ 주 ‘뉴우리스커어드’에 있는 아내의 친척 ‘제임스’와 ‘알렉산더 브라운’으로부터 이 서적을 받은 때는 1907년이었다. 그러나 그의 아내 ‘마아가렛’은 그 당시 그 책들을 올바른 관점에서 보지 못하였다. 하지만 1908년 ‘깁슨’ 형제가 사망한 후, 그는 6주 동안 ‘브라운’의 집을 방문하였다. ‘마아가렛 깁슨’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를 회상하여 “할머니는 진리를 굳게 잡으시고 그 밖의 것은 아무 것도 생각하시거나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그의 손녀는 이야기한다. 그 손녀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할머니는 1929년 돌아가실 때까지 하루라도 다른 사람에게 진리에 관해 편지하시거나 말씀하지 않고 그대로 보내시는 날이 없었다. ‘핼리버어튼’에서의 초기에, 할머니는 마차를 타고 방문을 다니셨다. 할머니는 ‘핼리버어튼’ 부근에서는 초기 정착자이셨고, 교회에서도 열심스런 일꾼이셨던 관계로 그 부근의 모든 사람들을 알고 계셨다. 할머니께서 증거하시는 방법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연상케 한다. 할머니께서는 서적들과 필요한 물건들을 가방에 챙기셔서 마차에 싣고는, 벗이나 이웃 중 한 사람을 찾아가셔서, 도착 즉시 할머니께서 전해 주시는 소식을 그들이 이해할 때까지 그들과 함께 머무르시겠다고 통고하시곤 하셨다. 만일 듣는 귀를 발견하시게 되면 할머니는 2, 3일 동안 묵으시면서 그들에게 성경 이야기를 쏟아 놓으시곤 하셨으며, 심지어 등불을 밝히고 밤늦도록 이야기하시기도 하셨다. 이러한 식으로 봉사를 하심으로써 많은 가족들이 속히 진리를 깨달을 수 있었다.”

1911년에 ‘터론토’ 회중의 기념식 참석자는 110명이나 되었다. 그 당시 반(班)이라고 불리워지던 기타 회중들도 성장하고 있었다. ‘캐나다’ 전국의 108개 정도 되는 “반”들이 그 해에 순례자들의 방문을 받았다. ‘밴쿠우버’ 집단은 ‘팬더’ 강당에서의 일요일 저녁 강연으로 훌륭한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사무엘 위더즈’(96세로 1971년 3월 9일 사망)는 바로 그 때 여호와의 백성과의 연합을 시작하였다. 그의 심장은 진리에 의해 크게 감동되었다. 그는 「시대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에 들어있는 내용으로 인해 깊은 감명을 받은 나머지 3일 밤을 꼬박 새면서 “탐독”하였다. 세째날 밤 그의 아내가 잠을 깨고 “뭘 얻으셨기에 새벽 3시에 ‘주를 찬양하라’고 계속 외쳐대고 계시는 거예요?”라고 물었다. 분명히 그는 자기의 많은 의문이 대답된 데 대하여 감사에 넘쳐 있었다.

왕국 소식을 선포하기 위하여 결심하다

성서 진리의 지식을 얻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해 주기를 열망했다. 일례를 들자면, ‘줄리우스. W. 란델’은 성서 연구생들이 선포하는 소식을 여러 차례 듣고 1912년에 무엇인가를 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그의 딸, ‘올리브 메이스’는 좀더 자세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들려 준다.

“‘줄리우스. W. 란델’은 1903년에 처음으로 진리를 들었다. 그분은 ‘노우드다코타’의 ‘자유 선교단’ 교회에서 주일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었는데 한 동료 선생으로부터 지옥이 없다는 것을 성서로부터 증명하는 연설을 들었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그 후 1910년에 아버지께서는 ‘매이드스톤’ 마을의 북쪽 32‘킬로미터’에 있는 정착촌의 개척 이주자로서 북부 ‘사스캐체완’으로 왔다. 하루는 어떤 이웃 사람이 진화론에 관한 주제를 다룬 책 한권을 아버지께 빌려 주었다. 「지옥에 관하여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라는 주제의 소책자 한권이 그 책 갈피에 끼어 있었다. 여기에 바로 친구분이 아버지께 말한 일이 있던 점에 대한 증거가 들어 있었다.

“2년 후, ‘위니펙’의 「프리이 프레스」지에 ‘메네레이’ 형제가 낸 광고가 실렸다. 그 광고는 ‘당신은 이방인의 때가 1914년에 끝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가?’라는 것이었다. [누가 21:24] 아버지께서는 서적을 청구하셨으며, 「성경 연구」가 우편으로 도착했을 때, 일주일 동안 쉬지 않고 밤 낮으로 읽으셨다. 석유등 밑에서 밤늦게까지 계속 읽으셨다. 그 주일 끝에 아버지께서는 진리를 찾았다는 것을 알게 되셨다. 그분은 그 책들과 성경을 팔에 끼고서, 그 좋은 소식을 전해 주기 위해 이웃 가정들을 찾아 다니셨다. 그들은 ‘‘란델’이 미쳐 버렸군!’ 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그런 말은 사실과 거리가 먼 것이었고, 그 일은 단지 ‘란델’ 형제의 여호와께 대한 활동적 봉사의 시작에 불과했다. 그의 딸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진리에 대하여 온전한 확신을 얻으신 아버지께서는 그 여러 해 동안에 다량의 서적을 주문해서 전하셨다. ·⁠·⁠· 그 후, 1917년에 ‘앨버어타’ ‘칼마’로부터 온 ‘앤드류 멜린’ 형제는 성서 강연을 하기 위해 ‘스웨덴’인들이 사는 여러 정착지들을 여행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밀레튼’의 우리 마을까지 오게 되었고, 아버지의 활동을 조직하는 일을 맨 처음 도와 준 사람이었다. 오래지 않아서, 아버지의 사진이 광고에 실리고 ‘사스캐체완’ 강의 북쪽과 남쪽 가까운 마을들의 모든 학교와 강당에서 연설을 하셨다.”

하지만 성서 연설을 하는 것은 왕국 소식을 선포하는 전부는 아니었다. ‘란델’ 형제는 여행할 때는 항상 성서 서적으로 가득한 옷 가방을 가지고 가셨다. 그의 딸은 다음과 같이 부언한다. “경매장 또는 ‘로이드민스터 공진회’ 등 어디서든 간에 차곁에서 또는 삥둘러 섰거나 앉아 있는 일단의 사람들과 열띤 토론을 하고 계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항상 볼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면, 책을 넣어갔던 가방은 텅비곤 하였다. 한번은, 우리가 진흙 구덩이에 빠졌을 때, 노새 한 쌍을 데리고 온 한 남자가 우릴 건져 주었는데, 그 때 그에게 지불한 대가 역시 갈색 옷가방에서 나온 것이었다. ‘노우드배틀포오드’에 있는 한 희랍 식당에서 식당 주인과 시작된 토론은 곧 식당에 있는 모두에게 파급되었으며, 그 토론이 끝났을 때, 옷가방은 다시 비게 되었다.”

확실히, 왕국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이와 같은 결심은 칭찬할 만한 일이었다. 여호와의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이러한 탁월한 정신 때문에,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일에서 훌륭한 성과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1900년대의 첫 10년은 ‘캐나다’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참 숭배자의 수의 현저한 증가를 가져왔다. 그 당시 성장은 모든 주(州)에서 뚜렷하였으며, 몇몇 주에서는 상당수의 증가를 가져왔다. 1920년대에도 그와 비슷한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기간은 또한 이들 신실한 성서 연구생들의 믿음을 시험하는 기간이었다.

교직자들이 비난을 퍼붓다!

‘캐나다’에 설립된 ‘여호와의 증인’의 초기 회중 가운데 하나는 ‘온테리오’ 주 ‘해밀턴’에 있었다. 그 튼튼하고, 활동적인 회중은 자연히 교직자들의 불만을 샀다. 진리의 강력한 주장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성서적 반증도 제시하지 못하고 교직자들은 인신공격만 일삼았다. 그들은 한 사람—‘C. T. 러셀’을 파멸시키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듯했다.

‘해밀턴’에서 이러한 큰 소리치는 방법을 사용한 교직자 한 사람은 ‘J. J. 로스’라고 하는 과장이 심한 침례교 목사였다. 1912년, 그는 ‘러셀’을 공격하는 많은 무고한 내용이 담긴 야비한 ‘팜플렛’을 썼다. 법률 고문인, ‘J. F. 러더포오드’의 제안에 따라서, ‘러셀’ 형제는 ‘로스’를 명예훼손 죄로 고소하였다. ‘러셀’은 원고로서 증언하기 위하여 법정에 출두하였고, 장장 5시간 동안의 거친 반대 심문을 받았다. 심문 후에 그 침례교인 적대자는 ‘러셀’이 희랍어 지식에 관하여 질문을 받았을 때 위증죄를 범했다고 거짓 고발했다. 이 “위증죄” 고발은 ‘러셀’을 공격하는 ‘로스’의 두번째 ‘팜플렛’에 실렸다. 그 ‘팜플렛’에는 그 교직자가 잘못 인용한 법정에서 오고 간 말 즉 반대 심문자의 질문과 ‘러셀’의 답변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질문: “당신은 희랍어를 아십니까?”

대답: “예, 압니다.”

이 질문에서 “알파벳”이라는 말을 빼 버림으로써 ‘로스’는 그 뒤의 문답과 정반대의 모순을 일으키려고 시도하였다.

질문: “당신은 희랍어에 정통합니까?”

대답: “아닙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은 공식 기록을 보면 분명하다. (1913년 3월 17일, ‘온테리오’ 주의 ‘해밀턴’ 시의 경범죄 재판소) 그 기록은 ‘러셀’이 위증죄를 범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M. 제임스. 펜튼’의 「‘캐나다’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이란 책에 따르면 반대 심문(‘K. C. 조오지 린치-스타운튼’에 의해 행해진)은 아래와 같이 진행되었다.

질문: ‘그러면 당신은 ‘라틴’어 교육을 받았읍니까?’

대답: ‘아니요.’

질문: ‘희랍어는?’

대답: ‘아니요, 교육받지 않았읍니다.’

이러한 문답이 있은 후에, ‘러셀’은 희랍어 철자들을 알고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으며, 그는 “그 중에 몇개는 실수를 범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방금 인용한 그 책에 의하면, 그 직후 “‘린치-스타운튼’이 ‘러셀’에게 ‘당신은 희랍어에 정통하십니까?’라고 질문했고 ‘러셀’은 힘주어 ‘아니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므로, 그 문제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C. T. 러셀’은 ‘로스’가 심문 후에 거짓 고발한 것처럼 위증죄를 범하지 않았다. 나중에 그 사건 자체가 대배심원 앞으로 갔으며, 대배심원은 기소장 발부를 기각하였다. 그러므로, 그 사건은 ‘온테리오’ 주 대심원에서 결코 심리되지 않았다. ‘온테리오’ 주법에 의하면 다만 왕실 변호사만 대심원 앞에서 변호하는 것이 허용되어 있다. 우리는 그 사건이 그 곳에 어떻게 상정되었는지 또는 무슨 이유로 대배심원단이 그 건을 기각시켰는지 알지 못한다. 그 사건의 시비에 대한 판결은 내려 진 바가 없었다. 그 이후의 저술에서 ‘로스’는 마치 자기가 큰 승리를 거둔 것처럼 이 확정지어지지 않은 결과를 다루었다. 그와 기타의 사람들은 ‘러셀’이 재판에 회부되지 않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부러 잊으려고 하였다.

반대자들의 극성에도 동요하지 않다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의 증오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백성들은 동요되지 않았다. 1913년에 그들은 일련의 대회를 개최하였으며, 이 대회들은 대단히 성공적인 모임들이었다. 예를 들면, ‘브리티시 콜럼비아’ 주의 ‘빅토리아’ 대회에 약 1,000명이 참석하였으며, ‘밴쿠우버’ 대회에는 4,500명 정도가 참석하였다. 이 일련의 대회들은 ‘터론토’에서 일 주일간의 모임을 위하여 이동하기 전에 서부의 비교적 큰 중심지들에서 열렸다. ‘터론토’에서는 근 1,200명의 청중이 모였는데, 미국으로부터 온 대표자들이 약 절반 가량 되었다.

한 대회에서 다음 대회로 200명 이상의 대표자들이 ‘C. T. 러셀’과 함께 여행했다. 한 신문은 ‘앨버어타’ 주 ‘에드먼톤’에 특별 대회 열차가 도착한 것을 보도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는 ‘지옥이 없다’고 하는 전파자라는 비난에 관하여 질문을 받고, ‘패스터 러셀’은 이렇게 대답했다.

“세상에는 나만큼 지옥을 많이 전파한 목사는 없다. 그러나 내가 전파하는 지옥은 성서의 지옥이지 불과 유황, 갈퀴 및 사포(砂布) 미끄럼판의 지옥이 아니다. 성서 지옥은 원 희랍어와 ‘히브리’어 단어의 가장 이치적인 번역—‘하데스’와 ‘스올’—을 말하며 이것은 죽음의 상태, 무덤을 의미하는 것이다.”

1913년 후반의 ‘터론토’ 대회에 관하여 「파수대」지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어떤 이들은 이 대회에 주로 참석하였는데, 그 이유는 중상과 거짓의 악한 영이 어떤 이유로 종교 사업에 해를 입히려고 하고 있음을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사단’과 그의 눈멀고, 오도된 종들은 주의 목적을 해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때때로 주께서는 인간의 노를 억제시킴으로 자신에게 찬양을 가져오게 하며 진리의 확장을 초래하신다. 예를 들면, 한 남자는 ‘패스터 러셀’이 적그리스도라는 말을 듣고 적그리스도란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가 보러갔다. 그는 복음의 즐거운 소식을 듣고 깊이 감동을 받았으며, 현재는 기쁨에 넘쳐 있다.”

‘터론토’ 대회에서, 일부 반대자들은 “‘러셀파’, ‘천년기 새벽파’, 마귀 교리” 등등의 헐뜯는 말을 큼직하게 써붙인 팻말을 들고는 운동장에까지 들어 왔다. 그러나 경찰은 그들을 몰아냈다. 「터론토 뉴우스」지(1913년 7월 25일자)에 따르면, 그 주간 동안, ‘터론토’의 반-‘러셀파’ 운동은 그 도시에만 국한되지 않았음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전국 복음 선교단’의 한 성원인 ‘볼티모어’의 ‘필립 사이더스카이’ 씨에 의하면, 전세계의 반-‘러셀’ 운동의 각 간사들에게 반-‘러셀’ 서적들이 보내졌다고 한다.” 그러나, 동 「뉴우스」지에는 성서 연구생들은 반대자들의 극성에도 “동요되지 않았다.”고 하는 표제가 실렸다.

영적 허기가 채워지다

1913년 ‘터론토’ 대회에 참석하였던 한 사람은 ‘태세이 레이코브’였다. ‘마케도니아’에서 그는 지방 정교회의 성가대원으로 있었다. 그는 또 교회 건물도 청소를 했는데 그로 말미암아 그는 거기서 사제가 한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는 성서를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성경을 읽는 일은 ‘레이코브’에게 영적 허기를 느끼게 해 주었으며, 이러한 허기는 그가 ‘캐나다’로 이사해 온 후에도 그를 계속 괴롭혔다. 여기서 그는 몇몇 종교들을 조사해 볼 기회를 가졌다. 그러나, 그 종교들 중 어느 것도 그에게 만족을 주지 못하였다. 1913년 ‘러셀’ 형제가 ‘터론토’에서 열리는 대회에 참석하였을 때, ‘레이코브’는 ‘불가리아’계의 한 침례교 집단의 수석 장로직에 있었는데, 그 때 종교적 반대자들은 그 대회를 극렬히 방해하려고 하였다. ‘태세이 레이코브’의 아들 ‘안토니’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 준다.

“‘러셀’ 형제의 방문 소식은 ‘마귀 ‘러셀’이 일요일에 이곳에 온다’고 떠들어 대는 ‘터론토’의 ‘바벨론’적 종교인들에 의해 분노와 모멸에 부딪치게 되었다. 아버지께서도 그런 말에 맞장구를 치셨지만, ‘그가 정말 그런 인물인지 가서 들어 봐야겠다’고 은근히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그분의 인생 행로의 전환점이 되었다. 왜냐 하면, 아버지께서는 그 때 처음으로 양이 선한 목자의 음성으로 식별할 수 있는, 영혼을 만족시켜 주는 소식을 듣게 되셨기 때문이었다.”

영혼에 관한 ‘러셀’ 형제의 두 시간의 연설을 들은 후, ‘레이코브’는 「성경 연구」 중 한 권을 구해 탐독하였다. 그후 그 책의 나머지 부분들도 구해 동일한 열성을 가지고 읽었다. 그의 아들은 다음과 같이 부언한다. “마침내 진리를 찾아 헤매던 일이 끝났다. 그 다음, 아버지께서 큰 ‘바벨론’에서 극적으로 박차고 나오시는 일이 있었다. 목사가 그의 상투적인 지옥불과 유황불 교리 중 한 가지에 관해 설교하던 도중 한 성귀를 잘못 인용하는, 의도적이지만 ‘치명적’인 과오를 범하였다. 수석 장로는 벌떡 일어나서 그 목사의 말을 단호히 반박하고, 성귀를 잘못 인용한 데 대하여 준렬히 힐난하였다.” 뒤이어 잠간 동안이지만 열띤 토론이 있었고, 그 결과 많은 교인들이 인식을 새롭게 하게 되었다.

여호와의 행복한 종이 첫발을 내딛다

‘토마스 제임스 설리반’이 여호와의 즐거운 종으로서 충실한 봉사를 시작한 것은 1920년대였다. ‘설리반’은 1911년 ‘뉴우요오크’ 시 ‘브루클린’에서 일하고 있던 중, 한 동료로부터 ‘패스터 러셀’은 지옥을 믿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은 매우 인상깊게 들렸다. 왜냐 하면 ‘T. J. 설리반’은 영원한 고초의 교리와 사랑의 하나님과를 조화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요한1서 4:8) 그러나 그 젊은이는 1913년에 가서야 이러한 신앙에 대하여 좀더 듣게 되었다.

그 해 11월, ‘설리반’은 철로변에 건축 중인 한 연쇄 호텔에 음향 장치를 시설하는 것을 돕기 위하여 ‘매니토바’의 ‘위니펙’에 가 있었다. 직원 가운데에는 항상 성서를 가지고 있으며, ‘러셀’의 저서인 「성경 연구」 6권을 자기 사무실에 진열해 놓고 있는 한 젊은 여자가 있었다. 그는 성서를 매우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중역들도 그에게 여러 가지 성경 질문들을 하였다. 그러면 ‘T. J. 설리반’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 보자. 몇년 전에 그는 이렇게 썼다.

“때때로 우리는 밤중까지 혹은 더 늦게까지 일할 필요가 있었다. 밤중에는 간선 도로가 차단되기 때문에 그는 집까지 먼 길을 걸어 갔으며 나는 자진해서 그를 바래다 주었다. 이렇게 걷는 동안 성서를 더 깊이 토론할 기회가 있었으며, 그 분위기도 여간 감동적인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정경을 잘 이해하려면 북서 지방의 광활한 평원을 알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그 당시 밤 기온은 영하 20도 내지 40도였다. 눈이 길 양쪽에 90 내지 150‘센티미터’ 높이로 쌓여 있었다. 머리 위의 춥고, 청명하게 갠 하늘과 하늘을 가로질러 펼쳐져 있는 북극광 즉 ‘오로라’는 하나님의 창조의 웅대함과 장엄함을 웅변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목적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내게 대단히 인상적이었고, 성스러웠다. 그 분위기는 이러한 놀라운 창조주의 사랑과 관심을 찾도록 내 속에 있는 모든 것에 호소하는 듯하였다.”

‘T. J. 설리반’은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을 찾았다. 그는 ‘위니펙’에 있는 성서 연구생들과 연합하기 시작하였고, 1916년 주의 만찬을 기념하기 전에 여호와의 헌신한 종으로서 침례를 받았다. 부언해서, 그는 ‘캐나다’에 도착하여 처음 만난 ‘여호와의 증인’이며, 하나님의 목적에 관한 지식에 이르도록 그에게 참으로 많은 도움을 준 ‘에블린 핀치’ 자매와 1918년 9월에 결혼하였다.

1924년, ‘설리반’ 형제 자매는 ‘브루클린 벧엘’ 가족이 되었다. 그 부부는 그곳에서 그들의 지적 여생을 마칠 때까지 충실하게 봉사하였다. ‘T. J. 설리반’은 ‘벧엘’에서 (만년에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통치체’의 한 성원으로서) 86세를 일기로 1974년 7월 30일에 사망할 때까지 여호와의 행복하고 충성스러운 종으로 봉사하였다.

“열국의 지정된 때”가 차다!

1914년에 대한 열렬한 기대는 굉장하였다! 어떤 이들은 ‘C. T. 러셀’이나 「파수대」지가 예보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상당한 억측이 있었으며, 이러한 개인적인 희망 중 일부가 실현되지 않으면, 특히 영적으로 장성되지 못한 사람들 편에서 실망할 것이었다. 그러나 장성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로 이렇게 고대하고 있는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913년 말경, 훌륭한 통찰력을 가진 한 ‘캐나다’인이 협회에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왔다.

“우리의 천적 아버지께서는 다양한 방향으로 자기의 백성들의 믿음을 시험하는 것을 바람직하게 생각하시지만, 명년에 우리는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확신에 대한 더 격렬한 시험을 받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의 믿음은 대단히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끝까지 성공적으로 믿음의 선한 싸움을 계속 싸우리라고 생각합니다.

“‘패스터 러셀’은 제가 항상 그분을 잘 이해하고 있는 바이지만, 때에 관한 예언에 대한 그의 해석이 절대로 틀림이 없다고는 결코 주장하지 않았읍니다. 그의 저서는 그런 점이 항상 제게 인상 깊었읍니다.

“1915년은 올 것이고, 많은 형제들이 기대하던 모든 일이 입증되지 않게 되면 문제가 되겠지만 제게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주의 말씀은 진리”라는 사실과 일점 일획도 이루어지지 않고는 지나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읍니다. 때에 대한 징조에 의해 그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더욱 깊이 알고 있읍니다.

“불 같은 시험이 우리를 엄습할 때, ‘그러므로 여러분은 확신을 버리지 마시오. 그 확신에는 큰 보상이 붙어있읍니다!’라고 하는 영감받은 말씀을 기억합시다.”

사실 이 편지를 게재한 「파수대」지 바로 그 호의 주 기사는 기대되고 있는 모든 일들이 신속하고 급격히 일년내에 다 일어나지는 않는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러나 그 기사는 “1914년이 성서가 말하는 ‘이방인의 때’의 마지막 해”라고 말했다. (누가 21:24) 그 기사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것은 평화의 통치로 들어 가기 전에 성서가 암시하고 있는 모든 것이 일년 내에 성취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우리의 상상력을 훨씬 초월하는 것이다.”

1914년경 일부 회중들은 대단히 큰 규모였다. ‘터론토’에서는 그 해 기념식에 204명이 참석하였다. ‘밴쿠우버’는 195명, ‘위니펙’은 105명이었다. 그러나 사실상 그것은 때에 집착한 사람들과 사랑에서 여호와를 섬기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드러나게 해 줄 것이었다.

‘창조의 사진극’

‘시계만 쳐다 보고’ 있지 않고 부지런히 제자들을 삼고 있던 사람들은 그 때가 바로 가슴벅찬 흥분하게 될 때라는 것을 알았다. “좋은 소식”을 많은 사람에게 전파하는 데 그들에게 도움이 된 것들 가운데에는 그 당시 ‘시중의 화제거리’가 된 시청각 제작물이었다. “창조 사진극”이라고 불리운 그것은 연설과 음악 녹음을 포함한 ‘슬라이드’ 사진과 활동 사진 ‘필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모든 천연색 ‘슬라이드’와 ‘필름’은 일일이 손으로 채색되었다. ‘사진-극’은 8시간 길이였고, 4부로 나뉘어졌고, 창조로부터 시작해서 인간 역사를 거쳐, 예수의 천년 통치의 끝에 있을 땅과 인간에 대한 여호와의 목적이 온전히 성취되는 데까지 청중들을 이끌어 갔다.

1914년에 대사가 나오는 천연색의 8시간짜리 활동 사진이 있었단 말인가? 누가 그것을 제작하였는가? ‘헐리우드’의 “대작” 중의 하나를 말하는 것인가? 아니다. 그 ‘사진극’은 ‘국제 성서 연구생’ 협회에 의해서 제작되었다. 모든 좌석은 무료였으며, 연보를 걷는 일이 결코 없었다. 더우기 성서적, 과학적, 역사적인 사실들로 구성된 이 천연색이며 동시에 대사가 나오는 제작물은 상업적인 총천연색 장편 활동 사진 및 대사와 음악이 녹음된 영화들이 일반 관객에게 선을 보이기 여러 해 전에 등장하였다.

‘사진-극’의 사진과 음향의 질은 대단히 훌륭해서 ‘C. T. 러셀’이 그 상영을 소개하기 위해 첫 화면에 비쳤을 때, 일부 관객들은 그가 몸소 등장한 것으로 생각할 정도였다. 하나님께서 예언자 ‘엘리야’를 통해서 행하신 기적 즉 과부의 아들이 부활되는 장면은 정말로 생생하고 감동적이었다! 그리고 꽃이 피어나고 병아리가 알에서 깨어 나오는 장면은 참으로 볼 만한 것이었다! 그렇다, 저속도 사진술의 이용으로 ‘사진-극’의 기억할 만한 장면을 찍을 수 있었다.

지방 회중들은 ‘사진-극’을 광고하고 대중을 초대하였다. 건물들에 전시한 어떤 광고들은 크기가 3.4 × 4.3‘미터’의 크기였다. 반응은 놀라왔다. 극장은 매주 만원을 이루었다.

‘해밀턴’에서는 ‘사진-극’이 ‘그랜드 오페라 하우스’에서 3주간 상영되었고, ‘터론토’에서는 ‘그랜드’ 극장에서 상영되었다. 한번은 관람을 마치고 군중들이 돌아가다가 최초로 ‘유럽’에서 선전 포고가 있었다는 ‘뉴우스’를 들었다. 이것은 틀림 없이 방금 그들이 보고 들었던 ‘사진-극’의 어떤 점들을 머리속에 깊이 새겨 주었을 것이다. ‘터론토’에서는 그 당시 그 ‘사진-극’을 중앙 교도소(후에 ‘킹스턴’으로 옮김)에서도 상영했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그 ‘사진-극’을 꼭 보도록 하기 위하여 사용한 방법 중 한 가지는 그것을 보도록 국민학교 학생들을 초대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노바스코시아’의 ‘핼리펙스’에서는 1914년에 학생들이 이 ‘사진-극’을 관람하도록 수업을 쉬게 하였다. ‘브리티시 콜럼비아’ 주의 ‘빅토리아’에서도 그와 같은 일이 있었으며, 여러 학급들이 관람하였다. 그 당시, 14세였던 ‘차알스 W. 포비스’는 그렇게 ‘사진-극’을 보고 성경 연구생이 되었다. 그는 자기가 본 것을 결코 잊을 수 없었으며,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극장은 만원이었고,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일어서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위대하신 창조주의 솜씨, 특히 무수한 별들이 반짝이는 광대한 궁천에 나타난 위대하신 창조주의 솜씨는 아주 볼 만하였으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을 보여 주었다.”

‘캐나다’에서는 ‘폴란드’인들과 ‘우크라이나’인들에게도 ‘사진-극’을 보여 주려는 노력이 기울여졌다. ‘터론토’와 ‘위니펙’ 같은 큰 중심지 및 서부의 기타 도시들에서 상영을 했다. 대사와 녹음 내용들을 ‘폴란드’어와 ‘우크라이나’어로 번역하였다.

그 ‘사진-극’은 대단히 아름답고 품위가 있었기 때문에 60년 이상이 지난 지금도 그 장면과 소식 그리고 심지어 상영 장소까지 기억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교육적인 작품이 특별한 의미가 있다. 예를 들면, ‘크리스타델피안’이라고 하는 ‘델라 스마트’는 세상사가 돌아가는 것 자기가 속한 종교에서 어떤 가르침 때문에 번민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 머리 속에서 이러한 문제들이 정리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백성을 찾을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진지하게 기도하였다. 수일 후 그는 ‘터론토’에서 ‘사진-극’에 관한 광고를 보았다. 그는 첫 회기에 참석하였고, 자신의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때가 1916년이었다. ‘스마트’ 자매는 현재 90세이지만, 최선을 다해 여호와를 계속 섬기고 있다.

그러나 모두가 기뻐한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곳에서는 관리들과 기타 사람들이 잘 협조해 주었으며, 심지어 ‘사진-극’ 상영을 위해 일부 극장들을 무료로 빌려 주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들에서는 그와 반대였다. 예를 들면, ‘터론토’에서는 교직자들이 ‘사진-극’을 반대하는 설교를 하고, 예약을 취소하도록 극장주를 설복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광고 효과를 더할 뿐이었다.

1917년경, ‘사진-극’은 ‘온테리오’ 주의 ‘겔프’에서 상영될 계획이었다. 그곳에서 있었던 일은 ‘사진-극’ 상영을 중단시키려는 노력의 대표적인 예이며, 그 배후에서 누가 조종하는지를 알려 준다. 1974년에 사망한 ‘조오지 험프리’는 지방 신문인 「더 겔프 머어큐리」를 위해 일한 유명한 성서 연구생이었다. 여러 해 후에, 그 사건을 잘 기억하고 있던 그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첫 일요일 상영은 무사히 끝났다. 꽤 많이 참석했다. 월요일 저녁 시 의회에서, 그 의회는 다음과 같은 결의문을 채택하려고 하였다. ‘어떠한 활동 사진도 일요일에는 상영을 금하기로 결의함.’ 물론, 이것은 우리의 ‘사진-극’을 겨냥한 것이었다. 그런데 한 시의원이, ‘여러분, 우리는 이 점에 대하여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전쟁 목적에 필요한 영화도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결의문은 다음과 같이 변경되었다. ‘전쟁 목적을 위한 영화를 제외하고는 어떤 활동 사진도 일요일에 상영을 금하기로 결의함.’

“물론,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영사 책임자와 나는 시장을 그의 사무실에서 면회할 마련을 했다. 이러한 접촉을 통해서 여호와께서는 우리에게 승리를 주셨다. 두 가지 괄목할 만한 점에 있어서 나는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 시장과 나의 고용주인 「더 겔프 머어큐리」지 신문사 사장 ‘J. I. 매킨토쉬’ 씨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었다. ‘매킨토쉬’ 씨는 내게, ‘‘조오지’, 자네가 모든 사실을 입수하면 우린 그걸 신문에 낼걸세’ 하고 말하였다. 나는 말할 수 없이 기뻐했다. ‘가톨릭’교인인 극장주인은 일요일에 활동 사진을 상영하는 일과 관련된 법전을 나에게 보여 주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시장을 만나면, 일요일에 이러한 영화를 상영할 수 있는 주 정부의 허가증을 가지고 있음으로 당신이 일요일에 영화를 상영하는 것을 방해하는 자는 시당국, 또는 기타 누구이든 간에 700‘달러’의 벌금에 처하게 될 수 있다고 법률이 지적하는 이 ‘페이지’를 그에게 보여 주시오.’ 이러한 두 가지 무기를 가지고 우리는 시장실로 시장을 찾아갔다. 우리는 안으로 안내되었고, 우리가 자리에 앉자, 시장은 나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을 반대해서, 어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즉, 법률적으로든 기타 어떤 방법을 이용해서든지 당신이 이러한 영화를 상영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오.’ ·⁠·⁠·

“우선 나는 그에게 그 법전을 보여 주었다. ‘당신이 이걸 어디서 입수했오?’ 하고 그는 물었다. ‘극장 주인에게서 얻었읍니다.’ 하고 나는 대꾸했다. 그는 종을 쳐서 시정 사무 대행인을 불렀다. 이 사람이 나타나자, 시장은 그에게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를 얘기해 주었다. 그 다음 시장은 시정 사무 대행인에게 ‘이 점에 대하여 그에게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겠오?’ 하고 물었다. 이 사람은 머리를 긁으면서, ‘우리가 그의 허가 비용을 올릴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이 대답은 그 시장에게 흡족해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시장은 흘끔 나를 쳐다보며 ‘당신은 「더 머어큐리」사에 근무하지요?’라고 물었다. 나는 가장 기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예,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한대 얻어맞은 사람같이 되어서, ‘나는 당신들을 중지시킬 권리도 없지만 계속하라고 말할 권리도 없오.’라고 말했다. 그러한 말을 듣고 우리는 그 곳에서 물러 나왔다.

“나는 「더 머어큐리」 신문사로 가서, 그들에게 자초지종을 모두 얘기해 주었다. 그 날 석간 신문 전면에는 그 전말이 자세히 실렸다 ·⁠·⁠· 그것은 거의 한 단짜리 기사였고, ‘사진-극’ 상영은 중단될 수 없다고 표제가 실렸다. 다음 일요일에는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었다. 극장은 그 상영의 나머지 부분과 마지막의 공개 집회까지 만원을 이루었다. 사람들은 ‘교직자들이 왜 이것을 반대하는가?’라고 얘기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교직자들의 반대가 고조되다

교직자들 역시 가능한 수단을 다 동원하여 우리의 사업을 반대하였다. 예를 들면, 1914년에 성서 연구생, ‘차알스 매튜즈’에게 일어났던 일을 고려해 보자. 그는 ‘뉴우브룬스위크’의 ‘가나안 스테이션’과 ‘버취 마운틴’ 구역에서 1914년에 발발할 전쟁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데 대단히 활동적이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그가 정신 이상이 된 듯하니 정신 병원으로 보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바로 그 해에 전쟁이 일어나자 그들은 “난 ‘차알리’가 옳다고 생각해, 그렇게 됐잖아. 우리는 세계가 매우 잘 교화되어서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지.” 하고 말했다.

그러나 교직자들의 반응은 달랐다. ‘매튜즈’가 이제 사람들 가운데 가지게 된 영향력을 꺾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교직자, ‘R. M. 바이넌’은 ‘뉴우브룬스위크’ ‘웨스트몰란드 카운티’의 ‘베리 밀즈’에 있는 ‘인디언 마운틴 개혁 교회’에서 연설을 할 마련하였다. 그러한 마련의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러셀’주의를 폭로하기” 위해서였다. 그 교직자는 자신의 견해를 지지하도록 선교사 한 사람을 대동했다. ‘매튜즈’는 바로 자기 집으로 전달된 초대장을 받았다. 그 집회에서 그 교직자와 그의 동조자는 ‘러셀’과 “그의” 교리들을 비판했다. 그 중 하나가 누구든 자기들이 한 이야기를 논박해 보라고 도전하였다. 그러나 ‘매튜즈’가 이야기하려 하자 그들은 허락하지 않았다. 마침내, 한 교직자가 “아멘”하며 말을 멈췄다. 즉시 집사 한 사람이 “‘아멘’이요! 이제 ‘매튜즈’가 말하게 합시다!” 하고 호응했다. ‘매튜즈’는 성서를 사용해서 반시간 동안 이야기했다. 그 때 그는 청중이 듣고 있는 것을 보고 감사했다. 한 교직자가 벌떡 일어나서, “이 사람은 개종이 안된 사람이다. 이 사람은 이방인이다!” 하고 소리치며 방해하려고 했다. 그러나 청중은 그만 일어나 나가 버리고 말았다.

때때로 어떤 교직자는 한없이 부정직했다. 예를 들면, ‘위니펙’에 사는 ‘제임스 켈리’는 「성경 연구」 한 권을 읽었다. 그 후 얼마 안있어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지를 그의 딸, ‘프랭크 웨인라이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일요일에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우리 여섯 모두는 ‘포오트로져’ 감리교회에서 부활절 주일 예배를 보기 위해 떠났다. 나는 ‘샐튼’이라고 하는 교직자의 설교를 결코 잊을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그 설교가 너무나도 훌륭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아버지께서 어머니를 보시며 얼굴을 찌프리시기도 하고, 팔꿈치로 어머니의 팔을 치시면서 ‘저 점을 기억해요’ 또는 ‘저 말을 잊지 말아요’ 하고 자꾸자꾸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 흥미로운 설교가 거의 끝나갈 무렵, ‘샐튼’ 박사가 격렬한 어조로 ‘성경 연구생’들과, 특히 그들의 출판물과 여하한 관련도 갖지 말라고 경고를 하고, 그들의 지도자인 ‘패스터 차알스 테이즈 러셀’은 간음을 행하는 자이고 우상 숭배자라고 [거짓 비난]을 함으로써 자기의 연설을 망쳐놓는 이유를 나는 알 수가 없었다. ·⁠·⁠·

“집으로 돌아가는 먼 길을 걸어 오는 동안, 나는 아버지께서 어머니에게 하시는 말씀 즉 어머니가 저녁 준비하는 일도 잊은 채 앉은 자리에서 「아마겟돈 전쟁」이라는 책의 어느 한 장을 읽으셨던 일을 이야기하시는 것을 엿듣게 되었다. 도대체 뭣 때문에 어머니께서는 그 책에 그토록 정신을 쏟으셨는지 궁금하였다. 마침내 어머니께서 ‘여보, ‘짐!’ ·⁠·⁠· ‘샐튼’ 박사가 그 책의 바로 그 장에 있는 말을 한 마디 한 마디 인용했어요—그리고 그 책의 다른 부분에서도 인용했을 것이 틀림없어요’ 하고 외치셨다. 그러자 아버지는 어머니께 그 책의 첫 면을 펴보이시며 저자의 이름을 알려 주셨다. 그 저자는 다름아닌 ‘차알스 테이즈 러셀’이었다!”

교직자들이 ‘러셀’을 공격하는 데 사용하는 그들의 위선적 술책은 의로운 경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할 뿐이었다. 바로 다음 일요일부터, ‘켈리’ 가족은 성경 연구생들의 집회에 나가기 시작하였다.

전시의 광분

전쟁이 임박해 오자, 교직자들은 성경 연구생들을 치는 데 사용할 새로운 무기를 발견하게 되었다. 일부 시기심에 가득찬 종교 지도자들의 적의와 이 그리스도인들의 성장을 방해하려는 그들의 충동은 애국심이라는 구실을 앞세우고 나타났다. 이들 적들은 전시의 광분 상태를 이용하여 그리스도인 중립이 안보와 국가에 위협이 된다고 거짓되이 누명을 씌웠다. 이것은 교직자들 자신들이 다른 나라에 있는 그들의 형제 교직자들과 원수가 된다 할지라도 그들이 전쟁 옹호자들이 되는 것을 의미할 것이었다. “평화의 왕”을 이처럼 반대하고 거역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이사야 9:6, 7, 신세) 여기 그 교직자들의 견해를 알려 주는 한 예가 있는데, ‘프랭크 웨인라이트’ 부인은 그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나는 아주 노골적인 한 교직자가 ‘전선의 참호 속에서 죽어가는 사람은 누구나 천국행 무료 여권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도 그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하고 말한 것을 신문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전쟁을 조장해 오는 일에서의 교직자들의 책임이 어떤 사람들의 눈에는 분명하게 보였다. 1924년에 「터론토 텔리그램」지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대학 재학생들인 두 젊은이 즉 ‘R. V. 퍼거슨’과 ‘W. S. 맥케이’는 대학내의 ‘반전’ 단체의 견해를 설명하기 위하여 ‘터론토 총 교직자 연합회’를 찾아 왔다. 전시에 ‘스코틀랜드’ 근위병으로 4년 반을 복무한 일이 있다고 하는 ‘퍼거슨’은 아직까지 정의를 위해서 전쟁에 나간 사람을 만나 보지 못하였다고 선언하였다.”

‘퍼거슨’이 한 말이 다음과 같이 인용되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군병들아, 전진하라’는 노래를 부르고는 술을 마구 퍼마셨다. 그래야 우리는 더러운 일을 수행할 수 있었다. 수많은 젊은이들은 술에 취해 입대했으며, 또 다른 젊은이들은 군복을 입은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입대하였으며, 또 다른 젊은이들은 선전에 현혹되었다. 설교단은 모병소가 되었다. 교회는 조직된 범죄자들의 일부가 되었다. 교직자들은 상사들을 모집하고 있었고 교회당들에는 군기가 걸려 있었다.”

사실, 전쟁과 관련된 전시 교직자들의 입장은 간과되지 않았다. 그러나 참 그리스도인들의 활동과 관련하여 그들의 입장은 어떠하였는가?

일부 교직자들의 목표는 ‘성경 연구생’들을 잠잠케 만드는 것이었다고 지적하는 것은 어리석고 편파적인 것처럼 들리는가? 그렇다면 ‘레이 H. 에이브럼즈’가 일차 세계 대전 후에 쓴 「교직자들이 무기를 들다」라는 책에서 한 말을 고려해 보자. 전시에 교직자들의 역할에 관해 논하며 그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상당히 많은 교직자들이 ‘러셀’파를 제거하려는 노력에 적극적인 활동을 벌인 것은 의미심장하다. 평화시에는 법정에서 전혀 고려된 바 없었던 구태의연한 종교적 논쟁과 증오가 이제는 전시의 광분된 주술 밑에서 법정에 대두되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종교적 적들의 가중된 활동을 다루기에 앞서,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여호와의 백성이 겪은 괄목할 만한 시험에 주의를 기울여 보는 것이 적절할 것같다.

중립적 입장을 고수하고 정중하게 제1차 세계 대전에 말려들기를 거절한 ‘캐나다’의 그리스도인들은 여러 가지 고통을 감수해야 하였다. (이사야 2:2-4; 요한 17:16) 이들 개개인들은 아무런 악의가 없었음에도, 그들 중 상당수는 감금 뿐 아니라 그들을 영적으로 무너뜨리고 파괴하려는 계획적인 비인간적 대우를 당하였다. 예를 들어 ‘위니펙’에서 ‘랠프 네이쉬’와 ‘로버어트 클렉’에게 있었던 일을 고려해 보자. 1978년 사망할 때까지 ‘사스케체완’에서 충실하게 여호와를 섬긴 ‘조오지 네이쉬’는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하루는 [‘로버어트 클렉’]과 나의 친형제인 ‘랠프’가 욕실로 끌려갔는데, 그들이 군인이 되기를 다시 거부하자 찬 물과 뜨거운 물로 번갈아 가며 ‘샤워’를 당해 몇 차례고 까무러쳤으며, 드디어는 의식을 잃고 깨어나지 못하였다. 그들은, 야간 당직 사관이 순찰을 하다가 그들을 발견할 때까지 여러 시간 동안 돌바닥에 그대로 버려져 있었다. ·⁠·⁠· 그후, 그들은 성 ‘보니페이스’ 병원으로 옮겨졌는데, 그곳에서 몇 주일 동안 몹시 앓았다. ‘위니펙’의 신문들은 다음날 신문에 그 사건을 약간 보도하였는데, ‘오타와’에 있는 정부 공보성은 즉시 보도 중지를 명했으며, 만일 계속 보도한다면 전시법에 따라 모종의 조치를 취하겠다고 통고하였다.”

그리스도인의 중립을 지키는 사람들로서 혹독한 취급을 당한 ‘캐나다’인들 가운데에는 ‘로버어트 클렉’과 ‘랠프 내이쉬’ 이 외에도 ‘프랭크 웨인라이트’, ‘클라우드 브라운’, ‘로이드 스튜워드’, ‘데이빗 라이언’ 및 ‘존 질레스피’ 등이 있었다. 얼마 후 그들은 영국으로 보내졌고, 거기서 그들은 마침내 악명높은 ‘원즈워어드’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 형무소에서의 생활은 혹심하였으며, 그리스도인 중립자들은 그곳에 투옥되어 있는 동안 많은 고난과 믿음의 시험을 인내하였다. 예를 들면, ‘프랭크 웨인라이트’는 이렇게 회상한다. “한번은 군사 훈련을 받기를 거절했기 때문에 우리 중 다수가 형무소 마당 한 쪽으로 끌려 갔다. 손에 곤봉을 든 군복을 입은 일단의 사람들이 일렬로 서 있었다. 우리는 한 사람씩 마당 이쪽에서 저쪽으로 달려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만약 달리는 속도가 느리면 붙들려서 저쪽까지 질질 끌려가서는 곤봉을 들고 있는 자들에게 등과 다리를 구타당하였다. 그 후 우리는 감방으로 되돌려 보내졌다. 이러한 매질을 견디도록 힘을 달라고 여호와께 드린 우리의 기도는 상달된 것이 틀림없었다. 왜냐 하면 그러한 일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클라우드 브라운’은 이 그리스도인 집단 가운데서 유일한 흑인이었으며, “간수들과 군인들로부터 특히 심한 대우를 받았다”고 ‘웨인라이트’는 들려 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부언한다. “한번은 ‘원즈워어드’에서, ‘우리는 너희들을 길들이든지 아니면 꺾어 버린다’, ‘우리는 사자들을 길들인다’는 등의 형무소의 상투적인 구호를 들으며 위협을 받자, ‘브라운’은 ‘그렇지만 상사님, 우리는 당신도 알다시피 사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주의 어린 양들입니다!’ 하고 응수하였다. ·⁠·⁠· ‘브라운’ 형제는 석방된 후에도 계속 충실하게 봉사하였다. 1923년에 그는 ‘왙취 타워 협회’로부터 서 ‘아프리카’에 가서 거기 있는 ‘바이블 브라운’과 그의 아내를 도와 봉사해 주도록 요청을 받았다.”

여호와의 도움과 축복이 분명히 나타나다

분명히,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이 의를 위해 고통을 받을 때는 그들을 붙들어 주시며, 그들의 충성스러움은 풍부한 축복을 가져온다. (마태 5:10; 빌립보 4:13) 때로는 잔인한 박해자들도 마침내 ‘개심’을 한다. 그리고 충실한 증거는 종종 좋은 결과를 가져다 준다. 이 점에 관해 ‘조오지 내이쉬’의 경험담을 들어 보자.

“[체포된] 다음날, 나는 육군 장교인 형무소 소장 앞으로 끌려갔으며, 장시간 동안 나를 다른 사람들 특히 내가 함께 살던 가족들과 연류시키려고 시도하던 끝에, 그는 자기 책상 위에 시계를 갖다 놓고, 3분 내에 20가지 질문에 대하여 대답을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6호실로 끌려 내려가 당장 총살을 당하리라고 말하였다. ‘그들의 국왕과 나라를 위해 싸우지 않는 비겁한 자들이 당하게 되는 결과’가 바로 이것이라고 설득하였다. 아무리 공갈을 해도 소용이 없자, 그는 목이 터져 나갈 정도로 ‘교도 상사!’ 하고 큰 소리로 불렀다. 그러자 상사가 건장하게 생긴 두명의 부하와 함께 달려왔다. 그러자 소령 계급인 그 장교는 ‘이 비겁한 돼지 새끼를 6호실로 끌고 내려가 총살시켜!’ 하고 소리질렀다. 이전에 사형 과정을 본 일이 없었으므로, 사실 나는 불안감을 느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께 도와 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나는 떼밀려서 지하실로 끌려 갔으며, ‘6호실’에 다다르자 문이 벌컥 열리고는 뒤에서 냅다 걷어 차여 앞으로 고꾸라지듯 들어갔다. 그 뒤 몇달 동안은 차라리 총살을 당했으면 하고 생각이 드는 때가 이따금 있었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

“이 형무소에서 얼마 동안 지낸 후, 나는 그 당시 ‘익시비션 그라운드’에서 야영 중이던 군부대로 이송되었으며, 그리하여 나의 무대와 연기는 모두 변화되었다. 내가 병참 하사관 보급소 앞에 있는 막사들의 긴 줄 사이에 섰는데, 어떤 키 큰 젊은 장교가 두명의 부하들을 데리고 급히 막사쪽으로 내려왔다. 그들이 하는 얘기가 내 귀에 까지 들려 왔으므로, 나는 그들의 이야기 대상이 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장교는 내 앞에 버티고 서서 차려 자세를 취하라고 몇번 명령하였으며, 내가 그 명령에 따르지 않자 ‘프로’ 권투 선수처럼 내 턱에 주먹을 먹여 나를 반대편 천막 당김줄 사이에 쳐 박히게 하였다. 내가 스스로 빠져 나올 수 없자 그는 나를 덮쳐 목을 조였다. 극심한 고통의 순간이 몇차례 지난 후 나는 의식을 잃고 말았다. 그 사건에서 가장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은, 그의 끓어오르는 증오심이 그를 인간으로부터 짐승으로 변하게 만들 때 그의 얼굴 표정에 나타나던 급속한 변화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련들이나 기타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내이쉬’ 형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루 하루의 경험을 통해서 여호와께서는 결코 우리를 떠나시거나 버리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나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내가 인내의 한계점에 이르렀다고 여러 차례 기도하였다. 그러나 항상 나의 영을 소생시켜 주는 어떤 일이 발생하곤 하였으며, 나를 지탱시켜 주는 것은 그분의 힘이라는 사실을 내게 알려 주었다.”

더 나아가서 이 시련기 동안에 ‘조오지 내이쉬’는 여호와의 목적에 관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많은 기회를 가졌다. 그리하여 자기 자신의 믿음을 강화시키는 한편 얼마의 씨도 뿌렸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중에 얼마는 성장했는데, 예를 들면, 훈련을 시키기 위하여 [‘프린스 앨버어트’] 시가로 줄지어 우리를 행진시키던 어떤 상사의 경우가 그러하다. 여러 해 후 ‘새스카투운’으로부터 몇 ‘마일’ 떨어진 한 시골 구역에서 봉사하다가 한 집을 방문하던 중 나는 지금은 ‘로저 바아크’ 씨라고 부르는 그 퇴역 상사를 만났다. 그는 나를 따뜻하게 안으로 초대하였다. 몇 차례의 방문 후, 그와 그의 아내는 ‘새스카투운’ 회중과 연합하기 시작하였으며, 진리 안으로 들어 왔다.”

당신은 ‘조오지 내이쉬’를 “비겁한 돼지 새끼”라고 부르던 그 소령이 생각나는가? 그렇다. ‘내이쉬’ 형제는 여러 해 후에 ‘요오크턴’의 어떤 장례식에서 그를 만났다. ‘내이쉬’ 형제는 이렇게 얘기했다. “내가 장례식을 시작하려고 앞으로 걸어 나갔을 때, 우리 두 사람 다 깜짝 놀랐다. 장례식이 끝난 후에 그는 자기와 함께 묘지까지 차를 타고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즉시 그가 수년 전에 내게 했던 행동을 사과했다. 그는 내가 아무런 원한도 품지 않았다는 것을 믿기 어려워했다. 우리는 진리에 관하여 대단히 진지하게 토론했다. 이러한 경우나 기타의 해후를 통해서 나는 우리 속에 품고 있던 것들을 말할 수 없었을 때에도 그 시련기 중 우리의 행동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고통을 인내하는 것이 풍부한 축복을 가져온다는 것을 보여 주는 또 다른 경험을 고려하자. ‘조오지 내이쉬’는 어떤 곳에 투옥되어 있는 동안에 ‘차알스 매튜즈’ 형제와 연합하고, 한 동료 수감자에게 진리를 가르칠 기회를 가졌다. ‘내이쉬’ 형제는 이렇게 썼다.

“우리에게는 점심과 저녁 식사 전에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짧은 시간이 허락되었다. 자연히 우리 세 사람은 조용하게 영적인 것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이야기하는 동안 그 동료 수감자 ‘루이스 래츠’는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매튜즈’와 나를 관찰해 왔다. 후에 그는 우리의 연합의 띠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나는 그의 바로 옆 ‘테이블’에서 일하였는데, 그는 기회있는 대로 내게로 와서 내가 형무소에 들어오게 된 이유를 다시 좀 이야기해 달라고 졸라댔다. ‘동료 인간을 죽이려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꾸준한 나의 대답이 마침내 납득이 되자, 그는 한참 동안 큰 소리를 내며 웃어댔다. 나는 그에게 무엇이 그렇게 우스우냐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모든 것이 재미있어요. 나는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여기 들어오고, 당신은 사람을 죽이려 하지 않기 때문에 여기 들어왔다니 말입니다.’ ·⁠·⁠·

“그의 관심은 대단하였다. 나는 석방된 후 ‘오타와’에 있는 가출옥 심사 위원회를 통해서 그가 형무소에서 석방되도록 주선하였다. 형무소에서 16년을 보낸 이 사람은 진리 안으로 들어왔으며, 수년 전 그가 사망할 때까지 충실하게 살았다.”

사실, 제1차 세계 대전 중 그리스도인 중립을 지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의를 위해 잔혹하고 심지어 짐승과 같은 무자비한 대우를 인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고난을 인내하는 일은 훌륭한 결과를 가져왔다. 증거가 행해졌으며, 심지어 박해자들까지도 깊은 인상을 받게 되었고, 그들이 중립적인 왕국 선포자들의 충실함을 관찰함으로써 참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들도 일부 있었다. (베드로 전 3:13-15) 여호와의 백성은 고통을 당하기는 했지만, 그 어려웠던 전시중에도 그분의 도움과 축복을 분명히 받았다.

반대가 절정에 이르다

물론, 그 당시 ‘캐나다’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형무소에 수감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시험을 당하였고, 그들에게는 분명히 적들—성경 연구생들을 잠잠케 만들려고 벼르고 있던 종교적 반대자들이 있었다. 그렇다, 1914년부터 1918년까지의 기간은 참다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양심을 위해 고통을 당하던 시기였다. 전쟁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요구하게 됨에 따라서 그 박해는 절정에 달했던 것 같으며, 특히 「성경 연구」의 일곱번째 권이자 마지막 권인 「종말을 고한 비밀」의 출판에 대해서 그러했던 것 같다. 일부 교직자들은 전시에 그들 자신이 취한 거북한 자세로 인해서, 그 책이 전쟁에 관해 하는 말들에 찔림을 받았던 것같다. 그리하여 북 ‘아메리카’ 전역에서 성경 연구생들을 “치려는” 매우 사악하고도 조직적인 운동이 있었으며, 그 운동은 ‘캐나다’에서 시작되었다.

우리가 그 일을 과장하였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교직자들이 무기를 들다」라는 책에서 지적한 말을 유의해 보라. “전체적인 사건을 분석해 보면, 본래 교회들과 교직자들이 ‘러셀’파를 박멸시키려는 운동의 배후에 있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캐나다’에서는 1918년 2월에, 교직자들이 그들과 그들의 출판물, 특히 「종말을 고한 비밀」을 치려는 조직적인 운동을 시작하였다. 「위니펙 트리뷴」지에 따르면, 검찰총장의 주의가 ‘러셀’파에게로 돌려지게 되었고, 그들의 서적 배포 금지 조치는 ‘교직자들의 대표자들’에 의해서 직접 자행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1918년 1월에 ‘캐나다’의 저명한 교직자들은 ‘국제 성경 연구 협회’의 출판물들의 배포를 금지시키도록 당국자들에게 요구하는 결의문에 서명하였다. 상당 수의 반대자들이 관련되었다는 사실은 그 결의문 서명자가 600명에 달한 것으로 보아 알 수 있었다. 열거된 책들 중 다수는 30년 이상 사용해 오던 것들이었다! 분명히 성경 연구생들을 반대하도록 이들 교직자들을 움직인 것은 진정한 애국심이 아니었다.

‘종말을 고한 비밀’을 금지시키도록 ‘캐나다’ 정부에 가한 교직자들의 압력은 후에 ‘위니펙 트리뷴’지에 게재된 다음과 같은 기사에서 엿보여진다. “이 금지된 서적들이 선동적이며 반전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주장이 있다. 수주일 전, ‘성 스데반 교회’의 목사 ‘차알스 G. 패터슨’은 설교단에서 최근호 「월간 성경 연구생」에서 발췌한 글을 규탄하였다. 그 후, 검찰총장 ‘존슨’은 ‘패터슨’ 목사에게 그 출판물을 하나 보내도록 요청하였다. 검열관의 명령이 직접적인 결과를 가져 올 것으로 생각된다.”

최근 몇년 동안 공적인 조사를 위해서 공개해 온 ‘캐나다’ 정부 공식 기록은 교직자들이 이 나라에서 참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1918년의 적대 행위를 사실상 주도했다는 사실을 명백히 폭로해 준다. 교직자들이 그러한 짓을 했다는 사실이 은연중에 드러나자, 그 점을 부인하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때, 수석 검열관인 ‘어어니스트 챔버스’ 대령은 ‘브리티시 콜럼비아’ 주의 ‘밴쿠우버 제일 회중 교회’의 “성직자” ‘A. E. 쿠우크’로부터 받은 한통의 서신을 그의 서류철 가운데 가지고 있었다. 그 목사는 그 검열관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본인은 ‘밴쿠우버 교직자 총 연합회’로부터 현시점에서 상당한 공적인 중요성을 띤 것으로 보이는 한 가지 문제에 귀하의 관심을 돌리게 하라는 지시를 받았읍니다. 귀하께서도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고 ‘러셀’ “목사”의 추종자들은 자신들을 ‘국제 성경 연구생’이라고 부릅니다. ·⁠·⁠·

“미국에서 출판해서 이 사람들에 의해 배포되도록 ‘캐나다’로 보내지는 이 단체의 선전 책자들을 금지시키는 것 또한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검열관인 ‘챔버스’ 소령은 회답을 하였다. “비밀”이라고 명시된 그의 편지 가운데서, 그는 교직자 ‘쿠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존경하는 목사님 ·⁠·⁠· ‘밴쿠우버 교직자 총 연합회’와 같은 영향력있는 단체의 견해를 전달하는 귀하의 서신을 이처럼 중요한 일에 대한 조치를 취하는 데 매우 유용하였읍니다. ·⁠·⁠·

“본인은 이 출판물들 가운데서 모든 교파의 교회들에 대해서 구별없이 마구 퍼부어 댄 통렬한 공격들이 비록 ‘군사적으로는 부당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할지라도 유의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 비밀 문서들이 현재 공적인 조사를 위해 공개되고 있는데, 그것은 교직자들이 1918년의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한 반대 활동을 실제로 주도했음을 밝혀 준다. 그렇다, 충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두려움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교직자들의 위선을 폭로하였기 때문에 자유를 박탈당했던 것이다.—마태 23:1-39.

‘캐나다’에서 금지령이 1918년 2월 12일에 내려진 것과 미국에서 「종말을 고한 비밀」에 대해서 공적인 조치가 같은 해 3월 14일에 내려진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미국에서의 그러한 조치 역시 교직자들로부터 진정이 있은 후에 있었다.

믿음 안에서 계속 수행해 나아가다

금지령은 「종말을 고한 비밀」과 「월간 성경 연구생」뿐 아니라 성경 연구생들의 조직에도 내려졌다. 이 기간 중 괄목할 만한 일은 여호와의 백성의 믿음과 결심이었으며, 그들은 자신들이 아무런 잘못도 범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금지령이 내려지게 된 것은, 다만 교직자들의 훼방으로 인한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오전 6시에 일어나거나 밤 늦게 나가서 전도지를 배부하였다.

부당한 금지령을 당해서, ‘캐나다’의 그리스도인들은 “뱀같이 조심성 있으면서도 비둘기 같이 순결”함을 나타냈다. (마태 10:16, 신세) 예를 들어, ‘자네트 맥도널드’는 신문에 실린 공고문을 지적하였다. “금지된 여하한 서적을 소지한 자는 5,000‘달러’ 이하의 벌금과 5년의 징역에 처한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겁을 먹게 하였는가? 결코 그렇지 않았다! ‘맥도널드’ 자매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말을 듣자마자 우리의 서적 공급품을 닭장으로 옮겼다. 책을 깨끗이 간수하기 위해 벽 사이에 신문지를 대고, 그 안에 집어넣은 다음, 판자로 못을 박아 놓았다. 다음날, 그 마을 담당 경찰관이 와서 아버지께 집안에 이러한 책들이 있느냐고 물었는데, 그에 대해 아버지께서는 ‘없소’ 하고 대답하셨다. 물론 없었다! 그 책들은 닭장 안에 있었다.”

순결한 숭배를 위한 싸움은 ‘캐나다’에서 계속되었다. ‘T. J. 설리반’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우리는 반대를 예상하고 신속히 그리고 널리 「종말을 고한 비밀」의 공급품을 배포할 마련을 하였다. 금지령이 내려지자 미국과 ‘캐나다’에 있는 형제들은, 사람들이 방해를 받지 않고 성서 연구 보조 서적을 받을 수 있도록 정부가 그 책에 내린 금지 조치를 철회해 줄 것을 청원하는 탄원서를 배포하였다.” ‘온테리오’ 주 ‘포오트아아더’에서 탄원서를 배포하는 동안, ‘설리반’과 또 한 명의 형제는 사람들로부터 좋은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반격이 있었다. ‘설리반’ 형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경찰은 수색 영장을 받아 우리 [‘호텔’] 방을 뒤져서 우리의 개인용 「종말을 고한 비밀」 책을 찾아냈다. 우리는 그 날밤 유치장에 갇히게 되었으나 다음날 석방되었다. 아마도 그 체포 사건과 신문 기사는 탄원서의 배포에 의한 것보다 더욱 더 그 사건을 사람들 앞에 드러나게 만든 결과를 가져왔던 것 같다. 신문은 우리의 체포 사건을 일면에 게재하였다. ·⁠·⁠· 경찰은, 배부를 위해 그 구역으로 보낸 「종말을 고한 비밀」 책 오륙백 부를 압수하였다. 그러나 그 날 저녁 그 신문 기사가 널리 알려지자 ‘포오트아아더’ 경찰들은 「종말을 고한 비밀」 책을 자신들이 읽기 위해 그리고 자기 친구들에게 주기 위해 집으로 가지고 갔다. 그리하여 우리 대신 그 책들이 전부 전해지게 되었다!”

여러 곳에 있는 많은 가정집들은 개인 서재에서 발견되는 것을 포함해서 ‘왙취 타워’ 서적들을 찾아내어 없애 버리기 위한 수색을 당하였다. 심지어 성서까지도 가져갔다! 예를 들면, ‘T. J. 설리반’과 그의 동료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위니펙’에 전해지자마자,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를 후에 ‘설리반’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군당국은 한 ‘트럭’분의 군인들을 보냈으며, 그 군인들은 금지된 서적을 찾기 위해 우리가 그 당시 머물고 있던 집들을 수색하였다. 군 당국은 우리를 체포할 수 있었고, 우리의 재산을 수색하고 우리의 소유물들을 압수할 수 있었지만, 우리를 재판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민간인들이었으며, 민간 법원은 그들이 우리를 재판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여하튼 ‘위니펙’에 있는 민간 사법 당국자들은 군당국이 가정을 수색하고 그리스도인들의 재산을 파괴하는 그러한 횡포에 대하여 대단히 불만스럽게 생각하였다. 군 당국이 어떤 집을 수색할 때, 그들은 사실상 그 집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들은 석탄과 밀가루와 설탕 및 기타 물건들을 가져가고, 모든 것들을 뒤범벅으로 만들어 놓고, 그것들을 실제로 사용할 수 없게 만들어 놓았다. 이러한 일들은 민간 당국자들의 불만을 크게 샀으며, 일부 인사들은 그들이 우리의 사건을 다룰 때 가능한 한 친절을 보임으로써 자기들의 관심을 나타냈다.”

놀라울 정도로 많은 경우에서, 호의적인 사람들은 금지령의 부당성을 알게 되었으며,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호의적으로 대하였다. 그들은 성경 연구생들이 무해한 사람들이며, 비록 다른 신앙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좋은 시민들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어떤 곳에서, 한번은 경찰서장이 자기 부하 한 사람(그는 성경 연구생이었다)에게 그 날 저녁 경찰이 성경 연구생들이 집회를 갖는 ‘I. O. O. F. 홀’을 수색하러 가기 위해 바쁘게 될 것이기 때문에 비번이 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 그 수색의 목적은 그곳에서 발견되는 서적을 압수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그 형제에게 서적을 다른 곳으로 옮겨 놓을 시간적 여유를 갖게 하였다. 수색자들이 발견한 것 한 가지는 “종들”이라고 머리에 적혀 있는 한 명단이었는데, 그것은 책임있는 직책을 맡은 사람들을 알려 주는 것이었다. 그 명단을 발견한 경찰관은 자기가 중대한 발견을 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그 수색 책임자에게 급히 보였다. 그러나 성서 용어를 알지 못하는 그 책임자는 상스러운 욕을 몇마디 뱉고는 그 명단을 발견한 경찰관에게 “우린 그들의 종들을 찾는게 아냐. 우리가 찾는 건 그들의 우두머리들이란 말야!” 하고 말하였다.

또 한번의 경우에 관해, ‘로버어트 데이비스’의 말을 들어 보면, 한 집을 수색하던 중 경찰 수사관 하나가 어느 젊은 여자에게 “이것들은 당신 책이오?” 하고 물었다고 한다. 그 여자는 사실대로 “예”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 수사관은 “이봐요, 내가 그것들을 보기 전에 치워 버리시오” 하고 지시했다. 후에 그 사람은 그 직책을 그만두어 버렸으며, 한 성경 연구생에게, 자기는 “그런 더러운 일”을 할 수 없었다고 말하였다.

우리 서적을 찾아내기 위해서 정부 관리들은 겸손한 그리스도인들의 사적인 편지들을 가로채 왔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 및 많은 가정들을 수색하는 일에도 불구하고 출판물의 대부분은 당국자들에게 결코 발견되지 않았다. 서적들은 창고, 지하실, 기타의 장소들에 안전하게 보관되었다.

서부에서의 전형적인 한 경우에, 그 지방 경찰은 ‘매트레스’ 가운데를 째 보고, 계단에 깐 양탄자를 뜯어내고, ‘오르간’을 끌어내고, 심지어 부대 속에 든 밀가루도 걸러 보며 「종말을 고한 비밀」을 찾아내려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단 한권도 발견해 내지 못하였다. 그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수색을 하고 있는 동안 부하들을 지시하던 책임자가 앉아 있던 바로 그 의자 밑바닥에는 그 책 한권이 끈에 묶여 있었다!

당국자들이 우리의 서적을 발견하게 되면 종종 그 책을 가지고 있던 사람은 무거운 벌금을 물거나 투옥되었다. 그러나 ‘밴쿠우버’ 지역의 10명의 성경 연구생들에게 일어났던 일을 생각해 보라. 그들은 자기들이 소유하였기 때문에 3개월 징역형을 살게 된 바로 그 책을 형무소 도서실에서 보게 되었다!

내부에서 발생한 문제들

‘캐나다’의 성경 연구생들에게는 그리스도인 중립자들로서 겪는 고난과 후에 금지령하에서 어려움들을 인내하는 일 외에도,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견뎌내야 할 다른 압력들과 난관들이 있었다. 문제들은 조직 내부에서 발생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추세들을 고려하기 위해서는 얼마간 이전으로 소급해야 한다.

‘C. T. 러셀’은 1916년 가을이 되기 이전에 이미 몸에 병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사업을 계속 해 나아갔으며, 연설 약속들을 지켜 나아갔다. 예를 들면, ‘러셀’은 자기 동료 신자들을 섬기고자 하는 대단한 열성에서 1916년 3월에 ‘캐나다’를 다시 한번 방문하였다. 그의 여정은 다음과 같았다. ‘터론토’ (3월 11일), ‘퍼터보로’ 및 ‘린드세이’ (3월 12일), ‘미드랜드’ (3월 13일), ‘노우드베이’ (3월 14일), ‘뉴우리스커어드’ (3월 15일), ‘브레이스브리지’ 및 ‘배리’ (3월 16일), ‘겔프’ (3월 17일), ‘브랜드포오드’ 및 ‘해밀턴’ (3월 19일) 및 ‘나이애가라 폴즈’ (3월 20일). 정말로 무리한 계획이었다!

이러한 과중한 여정은 희생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터론토’ 대회에서 ‘러셀’은 연설을 하는 동안 의자에 앉아서 해야 하였다. 그 후 건강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1916년 10월 31일에 사망하였다.

그의 죽음은 슬픔과 실망을 안겨다 주었으며, 장래에 대한 불안감을 일으켰다. 사업이 계속될 것이었는가? ‘러셀’은 분명히 참 그리스도인들 앞에는 거대한 사업이 놓여 있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1915년 ‘밴쿠우버’에서 있었던 한 질문 회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수행되어야 할 커다란 사업이 있읍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수천명의 형제들과 수백만 ‘달러’의 돈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어디에서 나올 것인지 나는 모릅니다—주께서는 그분 자신의 일을 알고 계십니다.”

“수행되어야 할 커다란 사업”! 그것을 해야 할 수천명! 정말로 감동적인 말이었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러셀’이 언급한 바로 그 사업을 수행해 나아가는 데 있어서 ‘브루클린’과 반대되는 방향의 정신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얼마의 사람들은 ‘러셀’의 자리를 대신 맡도록 정당하게 선출된 ‘조셉 F. 러더포오드’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브루클린’ 협회 본부에서 훌륭한 특권을 가지고 있는 일부 사람들 가운데서도 그러한 반역의 정신을 볼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캐나다’에도 있었다. 이러한 상태, 그리고 1918년에 거짓 고발을 당해서 ‘러더포오드’와 그의 동료들이 체포되는 등의 일들은 신실한 사람들 모두가 견뎌내야 할 일처럼 보였다. 만사가 와해되는 듯이 보였다. 시험의 때가 모든 사람들 위에 닥쳤다!

‘터론토’에서는 약 30명 가량이 회중으로부터 이탈하여 그들 자신의 집단을 구성하였다. 그들은 편지나 기타의 방법으로 추종자들을 끌어 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들은 2년 정도 지나자 소멸되어 버리고 말았다. 또한, ‘몬트리오올’에서는 스스로 떨어져 나간 자들도 있었다. 1920년대 초까지 계속된 알력은 ‘밴쿠우버’와 ‘빅토리아’ 지방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전에 순례자였던 ‘차알스 허어드’는 “고착화” 운동이라는 ‘캐나다’ 서부 전역에 있는 반(班)들에 영향을 끼친 운동을 창시하였으며, 많은 회중들이 분열되어 그 수가 ‘반감’되었다. 일부 불평분자들은 그들 자신들의 집단을 구성하고, ‘왙취 타워 협회’를 공개적으로 공격을 하면서, 협회가 여호와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거짓 비난을 해댔다.

이러한 모든 내부적인 압력은 많은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결국, 무가치한 자들은 충실한 사람들로부터 분리되고 있다는 사실이 밝히 드러나게 되었다. (요한1서 2:19) 그 일은 참다운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있는 남녀들로 하여금 아직도 앞에 놓여져 있는 전파하고 가르치는 사업을 하도록 만들었다.

‘캐나다’ 지부 사무실

그러나 그 기간에 ‘좋지 못한 소식’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기뻐할 만한 많은 일들이 있었다. 전파 사업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1918년 1월 1일자로 ‘위니펙’에 ‘왙취 타워 협회’의 지부 사무실이 설립되었다. ‘월터 F. 솔터’가 첫 지부 감독자로 임명되었으며, 네 사람이 직원으로 초대되었다.

1920년에 지부 사무실은 ‘터론토’로 이전되었는데, 거기서 지부는 처음으로 ‘던다스 스트리이트 웨스트’ 270번지에 상당히 널찍한 건물을 갖게 되었다. 자동차 지붕 수리 공장이 그 건물을 함께 사용하였다. (그 당시의 자동차들에는 금속 지붕이 없었다.) 전면에는 상당히 넓은 사무실이 있었고, 후면에는 발송실이 있었다. 후에 광고지들과 지옥에 관한 소책자를 인쇄하기 위해 두대의 소형 인쇄기가 들어왔다. 그 당시에는 지부 사무실 내에 사람이 기숙하는 숙사가 없었다. 그리하여 봉사자들은 다른 성경 연구생들의 집에 머물거나 셋집에 살았으며, 자취를 하였다. 그 당시 지부 직원들로서는 ‘W. F. 솔터’, ‘프랭크 웨인라이트’, ‘차알스 컷포스’, ‘줄리아 로브’, ‘위니프레드 맥컴브’ 및 ‘에드나밴 엘스타인’ 등이 있었다.

금지령이 철회되다!

이 기간 중 더욱 기쁜 일은 「종말을 고한 비밀」, 「월간 성경 연구」 및 ‘국제 성경 연구생 협회’ 위에 내려졌던 부당한 금지령이 철회된 일이었다. 이 일은 그 금지령을 정당화시켰던 전쟁이 끝난지 상당히 시간이 경과된 후인 1920년 1월 1일에 있었다.

흥미롭게도, ‘캐나다’의 교직자들은 전쟁 후, 출판과 종교의 자유를 회복시키는 일을 반대하였다. 그들은 심지어 그 문제에 관해 결의문을 내기까지 하였다. 그들이 전시 제한 조치를 제거시키는 것을 원치 않았던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파괴적이라고 생각되는 조직들에게 경고하는 1920년 8월에 발간된 노동성의 ‘팜플렛’에 ‘국제 성경 연구생 협회’의 이름이 오르도록 애를 쓴 점에서 그들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러더포오드’ 형제는 노동성에 항의하였고, 인쇄되어 배포된 항의문을 통해서 일반인들은 그 사정을 알게 되었다.

활기를 주는 일

전쟁이 끝났을 때, 우리의 대회들이 재개될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었다! ‘러더포오드’ 형제와 그의 동료들이 형무소에서 석방되어 이 대회들 중 일부 대회들에 참석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말할 수 없는 즐거운 일이었다! 1919년에 ‘위니펙’, ‘캘가리’, ‘밴쿠우버’에서 대회가 개최되었다. 1920년에는 그러한 ‘캐나다’ 대회들이 12개가 열렸었다.

‘J. F. 러더포오드’ 형제와 그의 동료들 중 일부가 형무소에서 석방되고 그들 위에 씌워졌던 거짓 혐의로부터 벗어난 후 몇년 동안 ‘캐나다’ 대회들에 그들이 참석함으로 말미암아 이들 대회에 굉장히 많은 관심자들이 모여들게 하였다. 1921년에 서부 ‘캐나다’에서 있었던 일련의 대회들이 그러하였다. 이들 대회들 중 첫 대회는 ‘위니펙’에서 8월 5-7일에 열렸다. 이곳은, 「종말을 고한 비밀」 책에 대한 금지령이 내리게 하고, 뒤이어 박해의 물결을 일으키고 ‘러더포오드’와 그의 동료들이 투옥되는 사태를 빚게 선동한 교직자들과 정치가들이 살고 있던 바로 그 도시였다. ‘위니펙’의 일반 대중들은 ‘러더포오드’ 형제의 방문에 대해 어떠한 반응을 나타냈는가? 6,000명으로 추산되는 사람들이 공개 집회에 참석했다.

전후에 특징을 이룬 것은 여호와의 백성들이 다시 활기를 찾은 일이었다. 그와 관련하여 두드러진 점은 미국 ‘오하이오’ 주 ‘시다포인트’에서 개최되었던 1919년 대회였다. 그 대회는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캐나다’에 있는 성경 연구생들 가운데서 복음 전파 사업에 대한 열심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그 대회에서 「황금 시대」(지금의 「깨어라!」)라고 하는 새로운 잡지가 발표되었으며, 그것은 앞으로의 사업을 위한 촉진제가 되었다. 그 다음 1922년에 또 하나의 감동적인 대회가 ‘시다포인트’에서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살고 있는 구역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서도 증거할 결심을 가지고 돌아갔다. 여호와의 백성은 분명히 활기를 되찾았다. 그들은 참으로 왕과 왕국을 광고하고자 하는 결의에 차 있었다!

왕국 봉사 사업을 널리 확장하다

이러한 영은 하나님의 종들로 하여금 왕국 소식을 선포하는 그들의 사업을 널리 확장시키도록 움직였다. 그렇다. 그들은 1922년이 되기 이전에 이미 매우 활동적이었다. 예로서, 1920년 단 1년 동안 이곳 ‘캐나다’에서 「종말을 고한 비밀」 책이 65,000부 배부되었다! 그러나 이제 1922년 ‘시다포인트’ 대회 이후, 왕국을 선포하는 사자들은 ‘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고향 구역만이 아니라 ‘캐나다’의 격리된 구역에서도 증거하기로 결심하였다.

일례로, ‘차알스 V. 존슨’은 북부 ‘앨버어타’의 ‘피이스 리버’ 마을에서, 초기에 그곳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을 본따서 ‘콜포처’ 봉사를 하였다. 1919년에 ‘닐슨’이라고 하는 한 성경 연구생은 철로를 따라 북으로 ‘레서 슬레이브레이크’까지 봉사를 하였다. 그곳은 미국 국경에서 72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곳으로, 그 당시로서는 아주 먼 북쪽 지방이었다! ‘존 해밀튼’은 1923년부터 1934년까지 ‘스피리트리버’ 지역을 개척하였다.

‘새스카투운’에 있는 왕국 선포자들이 하던 봉사 방법에 관해 ‘조오지 내이쉬’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종종 주말이면 두명의 형제들이 서적 짐을 가지고 기차를 타고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어떤 마을로 가서, 그 날 또는 그 다음날 돌아오는 기차를 탈 수 있을 때까지 호별 방문을 하곤 했다. 만일 다음날까지 돌아오지 못하고, 그 마을이 다 봉사된 후에도 아직 저녁 시간 전체 또는 일부가 남아있을 경우에는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농가들을 이곳 저곳으로 방문하였는데, 이 농가들은 3 내지 6‘킬로미터’씩 떨어져 있었다. 우리는 마을 또는 도시로 돌아오는 길에 봉사를 하고는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왔지만, 우리가 누릴 수 있었던 특권에 대하여 행복하게 생각하였다.”

그 당시 “좋은 소식”의 선포자들은 얼마나 부지런하였는가? 한번은 서적 주문을 잘못하여 조그마한 집단에 배부용 「성경 연구」가 2,000권이나 왔었던 경우를 고려해 보자. 주문을 잘못하였던 형제는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어느날 집에 돌아오자 나는 정신이 얼떨떨해졌다. ·⁠·⁠· 건물 수위가 “자네는 도대체 뭘 주문했는가?” 하고 물었다. 나는 ‘책을 좀 주문했다’고 대답하였다. 그 수위는 ‘자넨 도서관을 하나 주문한 모양일세’ 하고 말하였다. ·⁠·⁠· 288질(帙)의 서적 즉 2,016권의 책을 우리가 어떻게 처리할 것이었는가? 나의 짝은 ‘왙취 타워 협회’의 ‘터론토’ 사무실에 이 문제에 관해 편지 하자는 나의 제안에 동의하지 않았다. 해결책은 서적을 전하기 위해 야외 봉사를 더 많이 하는 것이라고 그는 주장하였다. 흥미롭게도, 우리는 일년이 채 안되는 기간 내에 「성경 연구」를 모두 전해 버렸으며, 회중 내의 형제들 또한 열심히 일하였다.”

왕국 봉사를 확장시키는 일에서, 우리는 각종 차량—자전차, 2륜 마차, 및 “데모크랫”(말이 끄는 네개의 바퀴가 달린 마차)—등을 사용하였다. 또한 낡은 자동차 차체로 만든 말이 끄는 마차도 있었다. 겨울철에는 포장을 씌웠으므로, “카부스”(화물 열차의 차장칸)라고 불리웠다. 탑승자들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서 장작을 피우는 조그마한 난로를 실었는데, 마차가 뒤집히는 날에는 화재가 날 위험이 있었다. 덮개가 없는 마차들에는 밤새도록 덥힌 돌들을 마차 안의 발 놓는 곳에 두어 따뜻하게 하였다. 그 외에도 담요와 들소 가죽 덮개도 갖추었다.

때로는 초기의 자동차 행렬을 이루어, 여호와의 백성이 광범위한 지역을 돌곤 하였다. 그 당시 자동차 문 밑의 밖으로 달린 발판은 식사를 준비하거나 서적을 전시해 놓는 장소로 안성마춤이었다! 가지고 다니던 천막 시설은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로레타 소여’는 ‘사스캐체완’에서 말마차를 사용하던 자기의 ‘콜포처’ 시절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나에게 할당된 구역은 집에서 북쪽으로 ‘사스캐체완’ 강까지 약 56‘킬로미터’, 서쪽으로는 그 강에 접하고 있는 곳까지 56‘킬로미터’, 남쪽으로는 철로의 본선까지 그리고 동쪽으로는 집을 향해 돌아오는 광범위한 지역이었다. 그 구역은 2,300평방 ‘킬로미터’나 되는 지역이었다. ·⁠·⁠·

“나와 말이 밤을 지낼 만한 숙소가 없었던 경우는 결코 없었다. 여호와께서 항상 마련해 주셨다. 때로는 약간의 대가를 치러야 할 경우가 있었지만, 아무도 푸대접을 하거나 우리를 내쫓는 일은 없었다. 나와 말은 밤에 잠자리를 받는 일 외에도 아침 식사도 받았으며, 그 당시 들판에서 쌀쌀한 날씨에 따뜻하게 출발할 수 있도록 발받침 돌도 데워 주었다.”

‘사스캐체완’ 주의 ‘와카우’에서 한 조그마한 반(班)이 잘 발전하기 시작한 것 역시 바로 이 때였다. 이 반은 이 지역에서 왕국 전파 사업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와카우’는 성경 연구생들을 위한 대회 장소가 되었다. 그들은 그 사회에서 화제거리가 되었다. 왜냐 하면, 때로는 400여명이나 기타 지역으로부터 이곳으로 찾아왔기 때문이다. ‘와카우’의 ‘에밀 재리스키’는 그 지방에서 동족인 ‘우크라이나’인들 사이에서 매우 활동적으로 일하였으며, 대단히 많은 일을 하였다. 1926년경, ‘와카우’에서의 기념식에 104명이 참석하였으며, 성장 속도도 빨랐다. 그 조그마한 회중으로부터 배출된 ‘파이오니아’들과 선교인들이 적어도 44명이나 된다. 15명은 아직까지도 전 시간 봉사를 하고 있으며, 그들 가운데에는 ‘조셉 류벡’과 ‘올가 캠프벨’(둘다 현재 ‘브루클린 벧엘’에서 봉사하고 있다) 및 ‘빅토리아 시멘스’와 ‘헬렌 헬드’가 있다.

확장을 위한 준비

1922년과 1923년에는 ‘캐나다’에서 왕국 전파 활동의 증가 추세를 보였다. 1922년에 기념식 참석수는 2,335명에 이르렀다. 확실히 1920년대 초는 이곳에서 그리스도인 증가의 시기였다. 그리고 여호와의 백성은 1923년 12월 15일호 「파수대」에서 지적한 것처럼 낙관적인 견해를 가지고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의 새로운 건물은 조명도 잘 되어 있고, 편안하며 널찍하다. 5,600평방 ‘피이트’나 되는 바닥 면적이 있어 현재의 필요를 위해서도 충분할 뿐 아니라 앞으로 더 확장될 여지를 가지고 있다.”

“새로운 건물”이란 무엇인가? 그렇다. 협회 지부 사무실은 더 좋은 장소를 얻었다. 조만간 그 건물 내에는 협회 직원들이 입주할 것이었다. 그러나 훨씬 더 넓은 이 건물은 확장된 인쇄 시설을 들여 놓기에 충분하였다. 이제 왕국을 광고하는 일은 그 어느 때보다 더 강력하게 ‘캐나다’에서 수행될 수 있었다.

‘퀴벡’에서 왕국을 광고하는 일

1923년, ‘알렉산더 디치맨’과 ‘피터 앨런 로버어트슨’은 특별 ‘콜포처’로 ‘퀴벡’에 파견되었다. 그 해에 ‘퀴벡’의 야외로부터 다음과 같은 보고가 들어왔다.

“매주 우리가 [전하는] 평균 서적수는 실제로 줄어들지 않고 있으며, 현재 우리는 간단한 제목에 대하여 지혜롭게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6월 10일 일요일 저녁에 우리는 ‘밸리피일드’의 ‘레보우홀’에서 ‘사진-극’을 상영하였다. 그 ‘홀’은 ‘프랑스’인들과 영국인들로 가득찼으며, 직접적인 결과로서, 25부의 서적이 [전해졌다.] 우리가 하숙하고 있는 집의 신사는 자기 집에서도 그 ‘극’을 상영해달라고 요청하여, 6월 13일에 그 ‘극’을 상영하였다. 17명의 성인들이 참석하였는데, 그들 모두는 ‘가톨릭’교인들이었다. 영국인 교직자가 6월 18일에 자기 교회에서도 상영해 달라고 하였지만 ‘밸리피일드’에서 일요일까지 기다리는 일이 불가능하였다. ·⁠·⁠· ‘프로테스탄트’ 교직자들은 우리에게 매우 따뜻하게 인사를 보냈다. ·⁠·⁠· 그들은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다. 그들 양편 모두는 ‘러셀’ 형제의 저서를 얼마간씩 가지고 있다. 우리가 묵고 있는 하숙집에서, 한 젊은 여자는, 자기는 더 이상 교회에 나가지 않을 것이며, 우리가 사제들보다 더 훌륭하다고 이야기하였다. 모든 것이 잠에서 깨어나고 있음을 알려 준다. 왕은 자기의 소식을 위한 길을 예비해 놓으셨다. 다만 기쁜 소식을 전해 줄 일꾼들을 찾는 일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 당시 ‘퀴벡’에서 전파하는 특권을 누린 사람들 가운데는 ‘자네트 맥도널드’가 있다. (이것은 그가 1928년에 성경 연구생인 ‘하워드 맥도널드’와 결혼하기 이전이었다.) ‘자네트’는 1924년에 ‘몬트리오올’에서 “좋은 소식”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 그는 ‘오하이오’ 주 ‘콜럼버스’ 대회에서 채택된 결의문을 배포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소책자 형태로 된 그 결의문의 제목은 “고발된 교직자들”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거짓 종교의 죽음을 가져오는 본질을 명백히 폭로하였다. ‘맥도널드’ 자매는 후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협회가 지시해 준 여정에 따라, 우리는 ‘그랜비’, ‘마곡’, ‘에스베스토스’ 및 동부 ‘타운스쉽스’에 있는 기타의 도시 등 여러 도시들을 찾아갔다. 반대를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새벽 3시에 집집으로 그 소책자를 배부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도시가 활동하기 시작할 7시나 8시쯤 되어서는 우리의 봉사가 끝나곤 하였다. 몇차례 우리는 경찰에 붙들리기도 하였는데, 경찰은 우리를 위협해서 도시 밖으로 쫓아 내려 하였다. 일례를 들면, ‘마곡’에서 경찰이 우리를 고발하였다. 아무런 혐의도 없었으나, 우리가 석방되려면 15‘달러’를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15‘달러’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10‘달러’로 깎아 내렸다. 우리가 10‘달러’도 없다고 하자, 그들은 5‘달러’로 깎아 내렸다. 우리가 5‘달러’도 없다고 하자, 그들은 우리를 내 보냈다.

“‘코우티쿡’에서 1925년 5월에 우리는 더욱 심각한 어려움에 빠지게 되었다. ‘나이츠 오브 콜럼버스’(‘로마 가톨릭’교인들의 우애 조합)의 우두머리가 선도하는 일단의 폭도들이 우리를 에워싸고 강제로 ‘트럭’에 실으려고 하였다. 우리는 기차역으로 도망하여 대합실로 피신하였다. 역장은 폭도들이 몰려오는 것을 보고 양쪽 문을 잠가 버렸다. 그들은 주먹으로 꽝꽝치고, 주먹을 흔들어 대며, 창문을 두드려댔다. 곧 이어 그 폭도들의 우두머리가 경찰과 함께 다시 왔다.

“우리는 체포되어 읍사무실로 끌려 갔으며, 즉시 재판이 열렸다. 우리는 교직자들을 비난하였다고 해서 중상죄의 혐의를 받았다. 소환된 증인은 그 지방 ‘가톨릭’ 사제 한명 뿐이었다. 우리는 ‘쉐브룩’으로 끌려갔으며, 지저분하고 벌레들이 들끓는 감방에 갇히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나는 어찌나 몹시 구타를 당하였는지 수주간 치료를 받지 않으면 안되었다.

“재판은 치안판사 ‘리메이’의 주재하에 9월 10일에 열렸는데, 그는 법을 준수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본건에는 중상죄에 대한 혐의가 없으므로, 본인은 피고인들에 대한 고소를 기각하는 바이다’ 하고 말하였다.”

분명히, 그 당시는 ‘퀴벡’에서 왕과 왕국을 광고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나다’의 기타 지역이나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좋은 소식”의 충실한 선포자들은 꾸준히 전진하였다. 수행할 일이 많이 있었으며, 그들은 그 일을 열심히 수행하였다.

왕국 소식이 “전파를 타다”

1920년대 초에는 왕국을 광고하는 새로운 방법이 있었고, 성경 연구생들은 지체없이 그 방법을 이용하였다. 1923년이 되기 전에 그들은 ‘라디오’라는 새로운 매개체를 이용하는 마련을 하였다. 예를 들면, ‘브랜든’의 ‘스미드 셔틀워스’는 ‘CKK’ 방송국에서 몇차례 성서 강연을 하였다. 그러나 ‘캐나다’의 성경 연구생들은 그들 소유의 방송국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1923년 여름 ‘새스카투운’의 ‘조오지 내이쉬’는 전시에 통신대 장교로 복무한 일이 있던 지방의 한 변호사와 접촉을 갖게 되었다. 한번은 ‘내이쉬’가 땅에 뉘여져 있는 약 18‘미터’가량의 몇개의 통나무를 보고 그에 관해 물어 보았다. 그 통나무들은 방송탑을 세우는 재료라는 대답을 들었다. 후에 ‘내이쉬’ 형제는 그 나무들로 훌륭한 ‘라디오’ 송신탑을 만들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성서 진리를 방송하는 지방 ‘라디오’ 방송국을 하나 가질 수 있지 않겠는가?

‘터론토’ 협회로부터 고무적인 이야기를 듣고, 그 지방 회중은 그 계획을 추진하였다. 늦가을쯤 되어 ‘새스카투운’ 북서부에 있는 한 고지대의 땅을 매입하였다. 앞서 언급한 통나무들과 기타 시설 부품들을 구입하였으며, ‘새스카투운’ 성경 연구생들은 방송국을 하나 설립하였다. 1924년 봄, 출력 250‘와트’의 방송국 ‘CHUC’—‘캐나다’에서는 최초의 종교 방송국 중 하나—가 “방송을” 시작하였다. 그 당시 ‘새스카투운’에는 다른 방송국이 단 하나 있었으며, 전국을 통틀어 7개의 다른 방송국들이 있을 뿐이었다.

‘프로그램’은 어떠하였는가? 제한된 방송 시간 내에, 성서 강연 성경 질문에 대해 대답을 하는 ‘프로’, 및 음악 ‘프로’가 방송되었다. ‘라디오’ 방송에 아주 적합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던 ‘윌리엄 플류웰링’이 종종 연설을 하고, 질문들에 대한 답을 하였다. 요청이 있을 경우에는 ‘힐다 에센’이 노래를 불렀으며, 영국 ‘런던’의 ‘크리스탈 팰리스’의 지휘자인 ‘S. 베츠’의 지휘하에서 음악 활동을 한 일이 있던 성경 연구생 ‘코스타 웰츠’의 감독 밑에 지방 회중에서 재능있는 사람들이 합창을 하였다.

대중의 반응은 훌륭하였다. 모든 서신들은 주의깊게 다루어졌으며, 관심자들에게는 성서 서적을 보내 주거나 방문을 하도록 마련하였다. ‘CHUC’ 방송국은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들에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소식을 전해 주는 수단이 되었다. 예를 들어, ‘맥케이그’(‘새스카투운’에서 185‘킬로미터’가량 떨어져 있는)의 ‘그래험’ 부인은 좋은 반응을 나타냈으며, ‘캐로트’ 강 계곡 구역에서 왕국 소식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라디오’ 수신 상태가 특히 좋을 때는 ‘CHUC’는 서부 ‘앨버어타’에 있는 ‘로키’ 산맥의 기슭들과 약 320 내지 48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미국 북부 지방에까지 도달하였다. 상당히 많은 관심자들이 진리를 찾고 있었기 때문에, 확장이 중요하였으며, ‘조오지 내이쉬’는 그 점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오래지 않아 확장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 당시, ‘하인즈만 피아노 회사’는 ‘새스카투운’에 매우 훌륭한 점포를 건축하였다. 나는 사장을 방문하여, 그 점포의 일부를 일주일에 3회 ‘스튜디오’로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에 관해 이야기하였다. 그 대신 우리는 매 ‘프로그램’을 시작하고 마칠 때 ‘여기는 ‘새스카투운’의 ‘하인즈만 빌딩’에 자리잡고 있는 ‘CHUC 스튜디오’입니다.’ 하는 광고를 할 것이었다. 사장은 처음에 반신반의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문제를 중역들과 함께 이야기해 보겠다고 하였다. 그는 그렇게 하였으며, 몇 주 동안 우리는 그 당시로서는 전혀 새로운 기술인 원격 조정식으로 방송을 하였다. 그 당시 ‘라디오’ 방송국 검열관으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우리의 조그마한 ‘CHUC’ 방송국이 이 분야를 개척하였다고 한다.”

우리의 ‘라디오’ 방송 사업의 확장

1925년, ‘왙취 타워 협회’는 ‘CHUC’ 방송국의 소유권을 인계받았으며, ‘스튜디오’는 방송 목적으로 구입한 전에 극장으로 사용되던 ‘리젠드 빌딩’으로 이전되었다. 협회는 ‘터론토’에서 ‘CKCX’ 방송국(1926년 개국)을 운영하였다. 괄목할 만한 ‘프로그램’ 중 하나는 ‘러더포오드’ 형제가 1926년에 ‘펜타지’ 극장에서 행한 “지상 최대의 전쟁이 임박하다”라는 강연이었다. ‘CKCX’는 왕국 소식을 방송하는 전국 방송 중계망의 중심지가 되었다. 한 마디 덧붙이자면, ‘마아가렛 로우벨’은, 그 방송국 ‘아나운서’인 ‘네빌 메이스미드’(성경 연구생이 되기 전에 무대 생활을 해 왔었다)가 호출부호 ‘CKCX’를 알릴 때 음악적으로 종소리를 내는 일을 최초로 시작하였다고 회상한다. 그 후부터 다른 방송국들도 그러한 방식을 따르기 시작하였다.

우리의 ‘라디오’ 방송 사업이 확장됨에 따라, 1926년에 협회는 ‘에드먼튼’에서 ‘CHCY’ 방송국을 개국하였다. ‘밴쿠우버’에서는 네번째 방송국인 ‘CFYC’가 개국되었다. 왕국 소식을 전파하는 이러한 방송국들 외에도, 성경 연구생들의 협회와 지방 회중들은 때때로 여러 곳에 있는 상업 방송국의 시간을 사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노바스코시아’ 주의 ‘시드니’에서는 ‘CJCB’ 방송국을 이용하였다. “왕국—세상의 희망”이라는 ‘러더포오드’의 연설이 방송된 후, ‘J. A. 맥도널드’라고 하는 한 대령은 ‘대니얼 J. 퍼거슨’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케이프브리튼’ 섬 주민들은 이곳에서 이제까지 들어 본 일이 없는 가장 훌륭한 소식을 어제 들었읍니다. 그 소식은 정말로 훌륭한 것이었읍니다.”

국제적인 ‘라디오’망

1927년은 참으로 감동적인 해였다. ‘온테리오’ 주 ‘터론토’ 시가 7월 18-26일에 대회가 열리는 장소로 선정되었다. 대회 참석자들은 미국의 전체 주에서, ‘캐나다’ 전국에서, 심지어 ‘유럽’에서 왔다. ‘J. F. 러더포오드’ 형제가 “만민을 위한 자유”라는 대회 공개 강연을 하였을 때, 그 당시로서는 그 어느 누구보다 일시에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연설을 하였다. ‘콜리지움’과 ‘페어그라운드’의 여러 곳에 모인 15,000명의 눈에 보이는 청중만이 그 연설을 들은 것이 아니다. 원격 조정 장치를 써서 ‘CKCX’ ‘라디오’ 방송국의 시설도 잘 이용하였다. 그것은 53개 방송국을 국제적으로 연결한 방송망의 일부였다. 그렇다. 그 당시로서는 최대의 ‘라디오’ 중계망을 통해서 수백만명이 그 소식을 들었다!

그 당시 국립 방송국의 유명한 ‘아나운서’인 ‘그래함 맥네이미’가 연사를 소개하도록 ‘터론토’로 파견되었다. 기타의 특별 마련을 통해서, 그 연설은 또한 ‘오스트레일리아’와 영국에서도 청취되었다. 시장이 그 도시에 온 대회 대표자들을 환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역사적인 사건에 관해 ‘터론토’의 신문들이 침묵을 지킨 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매일의 대회 기사를 싣기 위해, 협회는 “더 메신저”라는 자체 신문을 발행하였다.

방송의 자유를 위한 투쟁

사람들에게 성서 진리를 전하는 데 ‘라디오’의 증가와 그 효과적인 이용에 자극을 받아서, 교직자들은 정부 관리들에게 심한 압력을 가했다. 그리하여, 1928년 3월 8일, ‘캐나다 방송 협회’는 돌연히 ‘국제 성서 연구생 협회’의 방송 인가를 갱신해 주지 않겠다는 통고를 해 왔다. 처음에는 아무런 이유도 밝히지 않았다. 표현의 자유에 대한 이러한 공격에 대항하여 강력한 항의를 제기하였으며, 방송국들이 계속 방송을 하기 위해 즉시 탄원서 운동이 전개되었다. 드디어 협회 소유 방송국에 내린 금지령을 철회할 것을 청원하여 466,938명이 서명에 참여하였다.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이 ‘해운 어업성’ 장관이며 ‘로마 가톨릭’ 신도인 ‘P. J. A. 카아딘’에 의해 발표되었다. 그는, 성경 연구생들의 방송에 대한 수많은 고발이 있었다고 하면서도 그 고발자들은 밝히지 않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방송되는 내용은 일반적으로 고발자들이 용인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하였다. 성서 강연이라는 미명으로 행해지는 선전은 비애국적이며 우리 교회들을 헐뜯는 것이라고 한다. 증거에 의하면, 그 전파하는 어조는 모든 기성 교회들은 부패되었고, 불의한 세력과 야합이 되어 있으며, 전체 사회 제도는 악하고, 모든 정부들은 단죄되어 있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본성(省)은 공익을 위해서 성경 연구생들의 인가는 갱신되어서는 안된다고 확신하는 바이다.”

이 말을 보면 고발의 출처를 알아내는 것이 어렵지 않다. 물론 사태는 원문에서 발췌한 일부 보도 내용과 일치하게, 실제보다 더욱 악화되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사실상 다른 종교를 비판하는 어떠한 ‘라디오’ 방송국이나 신문도 중단되게 되었다. 진정서로 기인한 의회의 토론중에 이러한 점이 나타났다. 한 의원은 특히 그 점을 다음과 같이 매우 잘 요약하였다.

“현재 나는 ‘성서 연구생 협회’의 일원이 아닙니다. ·⁠·⁠· 그러나 나는, 우리가 현 정부의 장관을 임명할 때, 종교적 견해의 감독관으로 임명했는지를 묻고자 합니다. 역사를 통하여 볼 때, 종교 단체들은 다른 종교 단체들을 비평해 왔읍니다. 나는 대 ‘로마 가톨릭’ 교회가 때때로 이교도를 대단히 가혹하게 얘기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아다나시우스’ 신조를 믿는 영국 국교회는 그 신조를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하여 매우 혹심한 말을 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는 복음주의자들이 사람들에게 만일 그들이 전파된 교리를 믿지 않으면, 그들이 어디로 가게 되는가를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 왔읍니다. 성경 연구생들은 다른 종교 단체들을 단죄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 연구생들’이 다른 종교 단체들의 발자취를 따른다는 단순한 이유로 우리가 그들을 유죄라고 선고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만일 성경 연구생들이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다같이 정죄하기 때문에 그들의 사업을 그만 두게 한다면, [‘오렌지’] 「센티넬」지와 「가톨릭 레지스터」지가 왜 출판 금지 당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읍니다.”

이 사건에 대한 기사에서 「파수대」지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우리는 ‘오타와’에 우리 변호사 한 사람을 보내었으며, 정부와의 회견을 통해서 그 원인이 되는 것으로 알아낼 수 있었던 단 한 가지 이유는 어떤 교직자가 우리 방송국측의 진행상의 이유로 그의 설교를 단축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 방송국은 시간을 지켰으며, 그 교직자가 15분이나 초과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캐나다’의 다른 지역에 있는 기타 방송국들의 인가를 거절할 구실은 되지 못했다.”

‘캐나다’ 정부가 그러한 전단적인 행동을 은폐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환멸을 일으키는 일이었다. 합의와 해명을 요구하는 소리가 높아갔다. ‘카아딘’ 씨는 이러한 반발 사태를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의회 의원들은 정부가 어떤 조치를 취하고 있었는지 해명하라고 요구하였다. “상당수의 항의자들”에 관한 일반 여론은 공연히 그 문제를 회피하려고 하는 ‘카아딘’에게는 만족스럽게 들렸을지 모르지만, 의회 의원들은 만족해 하지 않았다. 도량이 넓은 두 명의 의원 즉 ‘J. S. 우즈워드’와 ‘A. A. 힙스’는 ‘해운 어업성’ 장관의 증거 불충분한 해명에 수긍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그 장관이 받았다고 말한 모든 통신문과 고발장을 제출하라고 요구하였다.

항의의 압력은 또한 하원 외부에서도 계속되었다. 466,938명의 서명을 담은 대규모의 탄원서가 의회에 제출되었다. 또한 정부의 처사에 대해 항의하는 1,500통의 전보와 편지가 쇄도했다. 대규모의 항의 집회들이 ‘캐나다’의 여러 지역에서 열렸다.

그 동안, 의회내에서는 공의가 실행되는 것을 보기를 염려하는 의원들이 ‘카아딘’ 씨에게 방송 허가를 갱신해 주기를 거부하게 만들었다고 그가 주장하는 고발장을 제출하도록 계속 요구하였다. 아무런 해명도 없이 날짜만 지연되었다. 거듭되는 요구가 있은 후, 마침내 1928년 5월 7일 그 고발장들이 제출되었다.

그 문제에 대한 전반적인 토의가 1928년 5월 31일과 6월 1일에 하원에서 있었다. ‘J. S. 우즈워드’가 그 토론을 시작하였다. 그는 여러 주가 지체된 후에 그가 본 것이라고는 주로 그 취소 사건을 다룬 신문을 잘라 모은 것 뿐임을 훌륭하게 지적했다! ‘카아딘’ 씨는 그 허가를 취소시킨 자신의 처사를 정당화시켜 줄 만한 고발장에 관해서는 거의 지적할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전단적인 조치를 취한 후에 발간된 내용을 가지고 자신의 증거 불충분한 입장을 변명하려고 애를 썼다!

하원에서는 발언자들이 차례로 일어나서 여호와의 백성들에 대해 취한 정부의 조치를 공격하였다. 그들 가운데 ‘어어빈’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만일 내가 우리 집 아이들에게 ‘성서 연구생’들에 의하여 방송되는 고상하고 계몽적인 ‘프로그램’과 [‘재즈’]와 같은 것 중 어느 것을 듣게 선택해야 한다면, 비록 내가 그들의 종교적인 견해에는 동조하지 않지만, 이 ‘프로’ 가운데 얼마를 방송에서 빼고 ‘성서 연구생’들의 ‘프로그램’을 남겨 두고 싶습니다. 사실, 나는 어떤 형태로든지 이 사건에 종교적인 문제를 끌어 들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종교적인 자유의 원칙과 종교적인 관용은 수세기 전에 이미 정착된 것으로 봅니다.”

밤 11시가 되어서도 그 토론은 끝나지 않았다. 토론은 다음날인 1928년 6월 1일에 다시 계속되었다. ‘카아딘’은 다른 의원들이 그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을 퍼붓는 동안에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자기의 입장을 버텨 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는 ‘밴쿠우버’로부터 들어온 총 3건의 고발장과 ‘에드먼턴’으로부터 5건, ‘새스카투운’으로부터 6건 및 ‘터론토’로부터 몇건의 고발장을 내어 놓았다. (「‘캐나다’의 여호와의 증인들」, 100면) 한 의원은 그 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다시 말해서 ‘해운 어업성’은 그 허가를 취소해 놓고, 그러고 나서 자신들의 조처를 정당화시켜 줄 증거를 찾으려 했읍니다. 나는 그것이 공정하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우리가 본 의회에서 정당화시키고자 하는 것도 이러한 종류의 조처가 아닙니다.” 정부의 전단적인 조치는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동시에 증거도 되었다. (마태 10:18) 비교적 작은 하나의 집단이 전국의 이목을 모으게 되었으며, 온 나라가 그들의 정당한 요구를 주시하게 되었다.

탄원서에 서명을 한 근 50만의 서명자들을 무시한 채 대중이 원하는 것을 대중에게 줄 뿐이라고 주장하는 공무원들은 그들의 입장을 고집하였다. 방송 허가는 결코 다시 승인되지 않았다. 따라서 왕국 소식을 방송하는 사업은 다른 방송국들에서 계속되어야 하였다. 1931년에는 매주 특집 ‘프로그램’으로 ‘러더포오드’ 형제의 녹음 연설을 방송하는 방송국이 21개 있었다.

‘캐나다 국제 성경 연구생 협회’

하나님의 종들의 증가된 활동과 기타의 사정으로 인해서 ‘캐나다 국제 성경 연구생 협회’가 설립하게 되었다. 이 법적 단체는 이 나라에서 지금까지도 여호와의 증인들을 위하여 봉사하고 있다. 예를 들면, 동 단체는 지부 사무실의 재산을 소유하고 있다.

이 단체가 1925년에 설립되었을 때, ‘터론토’ ‘벧엘’ 가족은 12명이었다. 또 그 당시 이 나라에는 평균 1,000명의 왕국 선포자들이 71명의 ‘콜포처’들과 함께 70개의 회중 내에서 분주하게 일하고 있었다.

법적 투쟁이 시작되다

이 모든 활동은 다시금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교직자들의 사주를 받은 공무원들과 경찰은 우리의 공개적인 전파 사업을 점점 더 방해하기 시작하였다. ‘퀴벡’ 내에서는 ‘스테-안네-포프레’, ‘웨스트마운트’ 및 ‘몬트리오올’ 등에서 체포 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들 도시들과 ‘캘가리’의 한 사건의 경우는 표현의 자유를 위한 최초의 일련의 법적 투쟁의 일부의 사건 중에서 승리를 거둔 사건이었다.

‘캘가리’ 사건에 관하여 「캘가리 헤럴드」지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도시 내에서 종교 서적을 판매하는 데 허가가 필요 없음. 이윤을 목적으로 하지 않을 경우에는 종교적 문서를 파는 것은, 판매 행위를 하기 전에 허가를 받도록 한 서적 행상인을 위해 제정된 시 조례의 취지에 따르면 행상이 아니다. 이것은 법규 위반으로 고발된 ‘국제 성서 연구생’ H. B ——의 사건에서 토요일 경범 재판소에서 치안 판사 ‘샌더스’가 내린 판결이었다.”

“학교 ‘티임’” 사업

1924년에 여호와의 백성이 여러 사회 내에서 전파 효과를 더하게 해준 하나의 사업을 조직했던 일은 언급할 만한 일이다. “학교 ‘티임’” 사업이라 불리운 이 활동은 주어진 구역에서 증거하는 것과 지방 학교 건물을 빌려 제공되는 강연에 사람들을 초대하는 일을 말한다.

보통 두 사람의 성경 연구생이 이 마련을 위해 함께 일하였다. ‘캐나다’ 구석구석에 있는 수천명의 사람이 전파를 받았다. 이 봉사자들은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여행하였으며 때로는 매일 저녁 다른 장소에서 강연을 하였다. 간혹 일요일에는 두번 연설을 하는 수도 있었다. 이 일은 게으른 사람을 위한 사업이 아니었다!

‘하우스-카’가 사업을 용이하게 만들다

시골 지역에서 증거하려면 왕국 선포자들이 종종 한번에 몇 주간씩 집을 떠나 생활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한 경우에 숙박 시설이 어떻게 마련될 수 있었는가? 그렇다, 일부 회중들은 ‘하우스-카’를 사용하였다. ‘매니토바’ 주 ‘포오테이지 라 프레어리’의 ‘해리 마아샬’이 아마도 첫 번째 ‘하우스-카’를 만들었던 것같다. 그러면 그것은 도대체 어떻게 생긴 것이었는가?

숙식 시설을 갖춘 집에서 만든 몸체를 만들어 ‘시보레’나 ‘포오드’ ‘트럭’의 차대에다 부착시켰다. 이것은 중고 천막을 활용한 것이었다. 이들 ‘하우스-카’는 아마 오늘날 ‘트럭’의 뒤에다 설치한 인기있는 “캠퍼”의 선구적인 것일 것이다.

호별 방문 전파 활동이 강조되다

1927년, 일요일에 호별 방문을 하는 일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방법의 증거 활동은 일부 사람들에게 매우 충격이 되었다. 왜냐 하면, 그들은 일요일을 아무도 일해서는 안되는 “주일”(主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들은 자기들의 교직자들이 바로 그 날에 설교단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였다.

몇몇 지역에서 경찰의 방해가 있었으며, 일부 여호와의 종들이 체포되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증거 활동은 계속되었다. 일부 성서 연구생들의 회중의 “장로들”로부터 놀랄 만한 반대가 일어났다. 그들은 그러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방문하는 것은 품위를 떨어뜨리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적어도 그러한 점을 반대 이유로 내세웠다. 그러나 이제 이 활동을 그렇게 반대하는 자들은 1916년과 그 후에 반대를 나타냈던 자들의 남은 자들임이 자명해졌다. 이제 그들은 주의 사업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의 회중이 자신들의 특권과 책임으로 인식하고 있는 일에 그들이 동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들 중 일부는 이 때 곁길로 떨어져 나가 버리고 말았다.

왕국 소식의 선포자들을 잠잠케 만들려고 별의 별 수단을 다 사용하는 교직자들과 끊임없는 투쟁에도 불구하고 집단들이 꾸준히 성장하고 공개적인 복음 전파 활동이 성공을 거두는 가운데 또 하나의 10년대가 끝났다. 많은 점에서 훌륭한 성취를 보았다. 예를 들어, ‘하우스-카’ 봉사는 성경 연구생들의 회중이 없는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전파를 할 수 있는 놀라운 일을 수행하였다. 1930년에 ‘콜포처’의 수가 125명의 최고 기록에 이르렀으며, 이것은 1926년에 활동하던 63명에 비하여 훌륭한 증가라는 점에서 괄목할 만한 일이다.

‘프랑스’어를 말하는 사람들 가운데서의 증가된 활동

또한, 우리의 사업이 ‘퀴벡’과 ‘온테리오’에 사는 ‘프랑스’어를 말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전개되기 시작한 때도 1920년대였다. 1927년에 18명으로 구성된 ‘프랑스’어 회중에 하나가 ‘몬트리오올’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과 기타 ‘프랑스’어를 말하는 왕국 선포자들은 ‘퀴벡’ 주에서 힘차게 “좋은 소식”을 선포하고 있었다.

그 때쯤, 북부 ‘온테리오’의 ‘치스위크’에서도 30명으로 구성된 ‘프랑스’어 반이 발전했는데, 이것은 ‘온테리오’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의 ‘프랑스’어 회중으로서는 최초의 회중이었다.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데 배를 사용함

1920년대 후반에 ‘J. D. 맥네난’은 더 나은 방법으로 우리의 사업을 조직하도록 ‘뉴우펀들랜드’로 파견되었으며, 다른 방법으로는 접근하기 힘든 ‘뉴우펀들랜드’의 외항에 사는 사람들에게 이를 수 있도록 배가 한척 마련되었다. 그러나 ‘캐나다’의 서해안을 따라 있는 수많은 후미진 곳들과 섬들은 어떠한가? 1930년에 ‘아아네’와 ‘크리스티나 바아스타드’ 그리고 ‘아아더 멜린’이 ‘차아미안’호를 타고 ‘밴쿠우버’에서 ‘알래스카’까지 왕국 소식을 선포하고 있었다. 그 해에 그들은 ‘뉴우펀들랜드’와 ‘레브러도오’ 해안에서 증거한 적이 있는 ‘프랭크 프란스키’와 합류하였다. 그들의 임명지는 아주 진귀한 곳—화가의 낙원이었다! 산들은 바다에 깍아 지른 듯이 뚝떨어져 내려 있고, 깍아 세운 듯한 절벽 사이의 좁은 해협에는 작은 촌락들과 배들이 아물거렸다. ‘프린스 러퍼어트’에서는 8‘미터’ 높이의 파도가 출렁이고 ‘알래스카’에서는 11‘미터’ 높이의 파도가 치곤 하였다.

이것은 ‘아아더 멜린’에게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는 ‘앨버어타’에서 증거한 일이 있으며 자기 사촌 ‘엘머 멜린’과 같이 ‘피존’ 호수와 ‘콘주링’ 호수 인근 지역을 개척한 일이 있다. 그러나 이곳은 망망한 바다였다. ‘프랜스키’는 ‘뉴우펀들랜드’에서 지낸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태평양은 달랐다. 하지만 ‘바아스타드’는 경험있는 선원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좋은 일손이 있었다. 열심히 그들은 어촌과 회사촌과 벌목 ‘캠프’ 그리고 외딴 곳에 있는 가죽 사냥꾼과 광부들을 방문했다. 또한 ‘알래스카’에 있는 항구들의 세관들도 방문했다. 그들이 접촉한 사람들 중 많은 수가 얼마 안되어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그들의 첫 방문의 결과로 회중들이 생겨났다.

‘차아미안’호는 바다 건너 멀리서도 들을 수 있는 고성능 확성 시설을 장치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것은 해안을 따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접근하는 데 참으로 쓸모 있었다. 배의 음향 시설을 통해서 공개 강연을 방송한 후에 증거를 하는 일은 가장 즐거운 일이었다. 서적이 쉽게 전해졌으며, 때로는 오후 한 때나 저녁 한 때에 100권 정도의 서적을 전하는 경우도 있었다.

1931년에 ‘조오지 영’과 ‘프랭크 프란스키’의 감독 아래 ‘차아미안’호가 다시 건조되었다. ‘바아스타드’ 부부는 그 이후 여러 해 동안 여러 승무원들과 함께 사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프랭크’와 그의 아내가 1940년에 ‘바아스타드’ 부부와 함께 ‘차아미안’호로 돌아 왔으며, 정부의 금지령으로 배를 이용한 봉사가 중단될 때까지 계속 봉사했다. 당국자들은 나중에 ‘차아미안’호를 압수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프란스키’는 그 자신의 배를 가지고 이 동일한 구역에서 봉사하였으며, 놀라운 결과를 거두었다. ‘네이무’에서 ‘스쿠우너’ 부부와 같은 ‘인디언’ 가족들이 진리를 받아들였다. ‘캐나다’ 밭의 이 지역에서 12개월 동안에 ‘프란스키’와 ‘제임스 퀸’은 우리의 정기 간행물에 대한 1,500건 이상의 예약을 맡았다. 그러므로 다년간 왕국 소식을 전파하는 데 배가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

‘콜포처’들이 사업에 박차를 가하다

‘콜포처’들이 1930년대 초에 잘 조직되었다. 독립적으로 봉사를 한 ‘콜포처’들 이 외도 약 7개의 “캠프” 즉 집단이 있었다. 이들 ‘콜포처’ “캠프들”은 ‘브리티시 콜럼비아’와 ‘매니토바’, ‘앨버어타’, ‘사스캐체완’, ‘퀴벡’, 동부 ‘온테리오’, 남서부 ‘온테리오’ 및 연해주 등에 있었다. 이러한 집단들은 자신들이 먹을 밀을 빻고, 음식을 요리했으며, 신선한 식품과 서적들을 교환했다. 그들은 날씨가 허락하는 몇달간 대열을 지어 ‘하우스-카’를 사용하여 시골 지역들에게 증거했다. 겨울철에는 이들 ‘콜포처’들은 지방 회중이 그 회중 구역을 도는 일을 도와 줄 수 있는 도시의 큰 집으로 이사했다. 때때로 이들 집단들은 한 겨울에 몇개의 도시로 옮겨 갔다.

그 때쯤해서 ‘콜포처’들을 ‘파이오니아’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일부 지역에서는 그들이 실제로 개척을 하였다. 예를 들면, ‘아아더 멜린’과 ‘데이비드 해드랜드’는 ‘브리티시 콜럼비아’ 주 ‘번즈 레이크’의 인근 구역과 서부에서 훌륭한 봉사를 했다. 1932년 여름에 그들이 봉사한 그 지역 전체내에는 단 한명의 왕국 선포자도 없었다. 그들은 “A”형 ‘포오드’차를 가지고 나중에는 또 다른 자동차를 가지고 거대한 지역을 돌았다. 씨가 뿌려졌으며, 여호와께서는 그것을 자라나게 하셨다. 오늘날 그곳에는 10개의 회중이 있다.

물론, 사업이 문제와 반대 없이 수행되지는 않았다. 1932년 ‘퀴벡’의 ‘헐’에서 세명의 ‘파이오니아’들이 체포되었으며, 선동적인 문서를 배포했다는 거짓 고발을 받았다. 그들은 잇따라 있을 소송 절차에 관한 ‘브루클린’의 지시에 따라 ‘아킨’ 판사 앞에서 자신들의 사건을 다루었으며, 승리의 축복을 받았다. 유죄 판결을 받았다면, 5년 내지 20년의 형에 처하게 될 수 있었다!

‘파이오니아’ ‘프랭크 리스터’가 ‘퀴벡’의 ‘서어브루우크’에서 체포된 것도 1932년이었다. 그 뿐 아니라 그 해, ‘퀴벡’의 ‘레이친’에서 폭동 사건이 있었다. 그 당시 그곳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로서 봉사하고 있던 사람 중에 한 사람인 ‘자네트 맥도날드’는 일부 마을들에서 200명, 300명씩 폭도들이 일어나곤 했었음을 회상하며 다음과 같은 얘기를 들려 준다.

“우리가 군중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 갈 때, 어떤 자들은 다른 자들보다 더 공격적이 되어서 우리를 발로 차거나 주먹으로 쳤다. ‘레이친’에서 결정적인 사태가 벌어졌다. ‘데모리스트’ 형제는 시의회 의원의 격분한 아들에 의해서 계단 밑으로 내던져졌다. 나는 반대편 거리에서 봉사하고 있었는데, 한 호의적인 남자가 내게 그러한 사태를 알려 주었으며, 그는 나보고 그 구역을 떠나라고 일러 주었다. ‘데모리스트’와 나는 동시에 둘 다 떠나기로 결심하였으나 폭도들 사이를 빠져 나가기가 어려웠다. 우리가 마침내 차를 세워 둔 곳에 도착해 보니 차가 그곳에 없었다. ‘하워드’(나의 남편)와 다른 두명의 형제들이 경찰의 보호를 받기 위하여 찾아갔지만 깨끗이 거절을 당했다. 우리는 그가 돌아 올 때까지 잠간 동안 그대로 기다렸다. ‘데모리스트’ 형제와 내가 차를 타려고 할 때, 집어 던지는 달걀 세례를 받았다. 한 상점 주인은 폭도들이 사용하도록 달걀 상자를 통째로 거리에 내 놓았다. 그 때는 1월이었으며, 계란이 깨져 얼어 붙어 버려서 차 꼴은 말이 아니었다.”

증인들은 ‘데모리스트’ 형제를 제외하고는 부상을 당하지 않고 빠져 나올 수 있었다. 후에 이것이 사건화가 되었다. 폭도들의 지도자 중 하나는 벌금형에 처해졌고, 자동차에 입힌 손해를 배상해야 하였다.

또한, 경찰이 연해주에서 ‘하우스-카’ 집단 봉사를 방해하려고 시도한 사례들이 있었다. 관리들은 ‘파이오니아’들이 상업적인 일을 하고 있었으며 허가나 면허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명백히 하려고 시도하였다. 이 일은 ‘뉴우캐슬’과 ‘델하우시’, ‘배터어스트’, ‘캠벨튼’, ‘그랜드폴즈’ 및 ‘뉴우브런스위크’의 ‘에드먼스튼’ 등등에서 일어났다. 그렇지만, 이러한 방해는 경찰서로 넘어가는 단계에서 더 이상 발전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다니엘 퍼거슨’과 ‘로드리크 캠벨’이 우리의 사업이 상업성을 띄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한 서한을 수도에 있는 한 관리로부터 입수했기 때문이었다. 보통 그 서한을 경찰에 제시하면, 그들은 더 이상 우리에 대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퀴벡’을 좀 면밀히 살펴봄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30년대에 ‘퀴벡’은 숭배의 자유를 위한 전쟁터가 되었다. 그러면 누가 참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배후의 인물이었는가? 자, 아직도 어떤 의심이 남아 있다면, 그 파란 많은 그 10년 동안, 그 주에서 있었던 우리의 활동을 좀더 면밀히 살펴보자. 그러면 여호와의 백성의 주요 반대자들의 정체가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1931년 겨울에 ‘퀴벡’에서의 우리의 사업에는 많은 반대가 있었다. 때때로 ‘알프레드 오우엘레트’는 경찰에 의해서 매일 (때로는 하루에 두 차례나) 경찰서로 끌려가 심문을 받곤 했다. ‘오빌라 고티이어’도 그런 일을 당했다. 종종 경찰은 다음과 같이 말하곤 했다. “우리는 당신네들이 이런 사업을 수행할 인가를 받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제로부터 전화를 받았소.”

1932년에 ‘퀴벡’의 당국자들은 우리에 대하여 고대의 선동적인 거짓 고발—다만 종교적 관점의 차이가 관련된 사건들의 경우에 그러하였던 바와 같이—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사도행전 24:1-8 참조) ‘캐나다’에서 이러한 사건의 첫 번째 경우는 ‘퀴벡’의 ‘헐’에서 있었는데 ‘에머리세인트 아모어’와 ‘윌프리드 스파이서’가 선동적인 문서를 배부했다고 거짓 고발된 경우였다. 그러나 치안 판사는 고발을 기각시켰다.

1933년 가을에 158명의 증인들을 태운 40대의 자동차의 행렬이 대회 후에 ‘몬트리오올’을 출발하여 약 260‘킬로미터’가량 떨어져 있는 ‘퀴벡’ 시로 향했다. 다음 날 아침 6시 30분에 미리 임명된 곳에서 각자는 세부의 ‘프랑스’어 무료 소책자를 신속히 배부하기 시작하도록 준비되었다. 1시간 반만에 그 도시 전체에 45,000부의 소책자가 배포되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사제들은 몹시 당황하였다. 30명의 증인들이 체포되었으며, ‘선동적인 음모’를 꾸몄다는 거짓 고발을 받았다. 그것을 상상해 보라!

이들 증인들 중에 단지 6명만이 끝내 재판을 받았다. 이 사건들 가운데 첫 번째의 경우는 ‘파이오니아’들인 ‘조오지 바레트’와 ‘조오지 브로디’ 건이었다. ‘퀴벡’ 시에서 판사와 배심원 앞에서 6일간 심리하는 가운데 검찰은 증인으로서 두명의 ‘가톨릭’ 사제와 두명의 ‘프로테스탄트’ 교직자들을 소환했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보기에 ‘여호와의 증인’들의 서적은 선동적이라고 말하였다. 그 결과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피고들은 각각 300‘달러’의 벌금 또는 5개월간의 징역에 처했다. 이 사건은 ‘퀴벡’의 공소원에 상소를 했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는데 동 공소원은 ‘여호와의 증인’이 ‘가톨릭’ 교회를 비난하는 것은 선동적이라고 판결을 내렸다. 그리하여 다음 단계로 ‘캐나다’의 대법원에 상고하였으며, 동 건의 기소는 부당하다는 순전히 법률적 근거에 기초하여 그 유죄 판결을 번복시켰다. 그리하여 교회를 비판하는 것은 선동죄의 증거가 된다는 ‘퀴벡’ 법원의 판결은 번복되지 않았으며, ‘퀴벡’의 법률의 일부로 남게 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여호와의 증인’들이 ‘가톨릭’ 교리와 일치하지 않는 출판물을 배부한다면 언제든지 선동죄로 유죄 판결을 받을 수 있을 것이었다. 당국자들은 이 점을 알고 있었으며 따라서 걸핏하면 선동죄로 몰아 붙이는 일이 있었으므로 1935년부터 1940년까지 사이에는 거의 모든 이러한 사건들은 유죄 판결을 받게 되었다.

선출된 장로들의 해임이 축복을 가져 오다

한 동안 회중내에서의 화근이 되어온 것은 선출된 장로들의 존재였다. 그 당시의 이해에 의거하여, 이들은 민주적인 투표로써 장로직에 선출되었다. 물론 영적인 정신을 가지고 있는 헌신적인 사람들로서 동료 신자들에게 진정한 축복이 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다른 자들은 단순히 연설을 잘하거나 언변이 좋은 자들이었다. 아마 그들은 그 사회에서 좋은 교육을 받았거나 좋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고, 가장 인기있는 사람들이었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반드시 회중의 책임을 맡기에 가장 적합한 자들은 아니었다. 종종 이러한 공개 선거는 긴장되고 감정이 상처를 입는 때였다.

‘왙취 타워 협회’가 봉사 감독들을 임명하고 더욱 널리 확장하도록 공개적인 복음 전도 사업을 시작하였을 때 호별 방문 증거를 하기를 원치 않는 “선출된 장로”들은 문제를 야기시켰다. 그들 자신들은 복음 전도 사업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방해하였다.

그러나 비록 얼마의 장로들과 순례자들이 불충실하게 되었지만, 충성스럽고 진실한 사람들이 있었다. 두드러진 한 예는 ‘조오지 영’인데, 그는 열심스런 봉사와 그리스도의 행실, 친절 및 사려깊음 등에서 훌륭한 기록을 남겼다. 서부 전역에서 그는 “복음 전도자” ‘영’이라고 알려졌으며, 그의 훌륭한 연설을 듣기 위하여 극장들은 초만원을 이루었다. 그는 순례자로 임명되어 ‘캐나다’ 전역에서 봉사했다. 또한 그는 서인도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회중을 방문하였다. 후에 ‘영’ 형제는 왕국 사업의 발전을 위한 도움을 주기 위하여 남 ‘아메리카’로 파견되었으며, 특히 ‘브라질’에서 봉사를 했다. 그는 심지어 ‘러시아’에서 사업을 조직하도록 그곳으로 파견되었으나 정부의 반대로 말미암아 그 나라를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여러 해 동안 기타 여러 가지 임명들을 수행한 후 1939년에 ‘조오지 영’은 여호와께 대한 충실한 행로를 마치고 사망하였다.

그러므로 “선출된 장로”들의 시대를 돌이켜 볼 때, 우리는 그 당시 여러 가지 회중적 책임을 진 많은 사람들은 대단히 충실하게 일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아직도 문제는 있었으며, 어떤 해결책들이 필요하였다.

1932년에 “선출된 장로”의 제도가 종식되었을 때 충실한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안도감과 축복을 가져다 주었다! 「파수대」지는 남자가 영적으로 자격을 갖추고 신권적으로 임명을 받을 때 그는 성경적인 장로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훌륭한 질서와 평화 그리고 연합이 이제 하나님의 백성의 집회에 특색을 이루었다. 여호와의 영이 분명해졌다. 그 결과 성장과 발전이 있었다.

‘러더포오드’의 방송 연설이 금지되다

1933년 영국 국교회 교직자들의 선동으로 ‘캐나다 라디오 위원회’는 다시금 전파를 통한 왕국 소식을 저지시키려 하였다. 이번에는 ‘J. F. 러더포오드’ 판사의 녹음된 모든 연설에 금지령이 내려졌다. ‘캐나다’ 전역에 있는 ‘라디오’ 방송국에 그 위원회의 공식적인 견해에는 개인적인 견해가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유의할 것이다. 그 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통고했다.

“반 사회적인 외국인 선동자인 ‘러더포오드’ 판사라는 사람의 연설들은 승인을 위하여 ‘캐나다 방송 위원회’에 동 연설의 원고 또는 녹음을 제출할 때까지 ‘캐나다’의 방송국들에 의해서 방송되어서는 안된다. 서명자, 회장, ‘헥터 차알스워어드.’” (고딕체로 바꾼 것은 우리가 한 것임.)

그러나 이러한 행동을 하도록 누가 ‘차알스워어드’에게 권하였는가? ‘뉴우브룬스위크’ ‘세인트존’의 「텔리그래프 저어널」지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라디오 위원회’의 회장, ‘헥터 차알스워어드’는 ‘세인트존’에 있는 영국 국교회의 한 단체로부터 엄중한 고발을 받았다고 진술하였다.” (고딕체로 바꾼 것은 우리가 한 것임) 이 보도는 이들 교직자들의 이름을 실었다.

‘라디오’ 방송 금지에 대한 강력한 항의 운동이 전역에서 일어났다.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주지시키고자 “사람들에게 보내는 중요한 통지”라는 4면짜리 인쇄물 1,350,000통이 배포되기 시작하였다. 다음에 연안 각처로 탄원서가 배포되었다. 406,270명의 서명자가 있었으며, 그것은 신문을 통해서 매우 잘 공지되었다. 의회에는 노동조합과 기타 단체들로부터 보내 온 항의 편지와 결의문들이 쇄도하였다. 그 탄원서는 총독에게도 보내졌으며, 의회에서는 토론의 불길을 당기게 하였다. 수상은 그 사건을 조사해 보겠다고 약속하였으나,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

이 금지령을 굳히고자 하는 ‘차알스워어드’의 결심은 그 문제를 공평하게 다루기를 원하며 또한 자체의 경제적인 위기를 극복하기를 원하는 한 방송국에 보낸 그의 대답에 잘 나타나 있다. 「황금 시대」(「깨어라!」의 전신)은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캐나다’의 한 방송국은 사실상 다음과 같은 취지의 전신을 ‘차알스워어드’에게 보냈다. ‘우리는 ‘러더포오드’의 연설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반사회적이거나 공산주의적 요소는 찾아 볼 수 없다. 그의 방송 취지는 다른 종교 형태를 반대하며, 우리가 ‘정통파 기독교’라고 부르는 그 자신의 신조를 고양하는 것이다. 우리는 방송이 민주주의 정부와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 한 자유로운 언론을 위해서 모든 성격의 방송을 용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 시점에서 수입을 상실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어려움이 된다.이러한 전문을 보내는 외에도, 그 방송국은 여하간 적어도 두 주간만이라도 방송을 계속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차알스워어드’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 대답은 ‘가망 없음’이었다.”

그러나 진리는 계속 울려퍼지다

하지만, ‘라디오’ 방송에 대한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캐나다’ 전역에는 녹음된 성서 강연들이 계속 울려퍼졌다. 1931년 경, 우리의 증거 사업에 녹음 재생기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레코오드’판을 틀고 그 소리를 대형 ‘스피이커’로 확성하도록 설계되었다. 이 나라에서 사용된 이 녹음 재생기는 협회의 ‘캐나다’ 지부 사무실에서 설계하고 제작한 것이었다. 이 녹음 재생기들은 ‘라디오’ 방송국에서 방송했던 동일한 ‘러더포오드’의 녹음 연설을 틀곤 하였다. 그래서 종교적인 반대자들의 압력으로 말미암아 1933년에 우리의 ‘라디오’ 방송이 취소되었을 때, 협회는 휴대용 녹음 재생기를 더 많이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 녹음된 연설은 점점 더 많은 강당과 대회장에서 들려졌다.

또한 자동차에 부착해서 사용할 수 있는 녹음 재생기도 있었으므로 그것으로 확성차를 만들었다. 이 고성능 녹음 재생기의 ‘볼륨’을 최대한으로 높이면 수‘킬로미터’ 밖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 한 ‘캐나다’제 신제품은 더 멀리까지 소리를 보내기 위해 12‘미터’ 정도 높일 수 있도록 접었다 폈다 할 수 있게 만든 받침대 위에 ‘스피이커’를 장치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녹음 재생기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교직자들로부터 많은 반대가 있었지만, 일반 대중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 좋은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방법에 의해서 하나님의 진리를 배웠으며, 회중들은 생각을 자극하는 연설들로 인하여 발전되었다.

‘브리티시 콜럼비아’에서 들어온 한 보고는 다음과 같다. “‘랭글리’에 사는 한 사람은 그의 헛간 지붕을 수리하고 있다가 ‘죽은 자는 어디 있는가?’라는 주제의 강연 소리를 들었다. 아무도 볼 수 없었지만 그 연설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더우기, 그는 자기를 미쳤다고 생각할 사람들이 두려워서 자기가 들은 것에 대하여서 아무에게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그 모든 것을 혼자만 간직하고 있었다. 다음 일요일 아침, 어떤 사람이 「죽은 자는 어디 있는가?」라는 소책자를 가지고 자기 집을 찾아왔을 때 궁금하던 것이 풀렸다! 얼마 되지 않아 모두 새로운 제자들로 이루어진 한 회중이 ‘랭글리’에 설립되었다.”

1930년대 중 휴대용 전축이 또한 증거 활동에 사용되었다. 우선 그것은 관심자들과 함께 성서 토론을 사회하는 데 사용되었다. 나중에는 이 축음기들은 우리의 호별 방문 증거 사업에 사용되었으며, 그리고 이 축음기들을 통해서 왕국 소식이 소개되었다. ‘러더포오드’의 녹음 연설들(각 연설은 4분 30초 길이)은 영어를 사용하는 구역에서 사용되었는데, 많은 제목들을 사용할 수 있었다. ‘캐나다’에서는 1934년에 이 녹음들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1938년 한 해 동안 900개 이상의 축음기가 ‘캐나다’의 증인들에게 보내어졌으며 그 때에 모두 합해 근 2,500개가 사용되었다.

그렇다, 이 때는 왕국 봉사를 열정적으로 하던 시기였다. 1935년경에는 ‘캐나다’ 전역의 150개 회중에서 “좋은 소식”을 활동적으로 선포하는 사람들이 2,200명 이상 있었다! 또한, 1935년말에 ‘터론토’에 있는 ‘벧엘’ 가족 16명을 지부의 본부에 거주하게 하는 필요한 조정이 있었다.

내부적 어려움들

우리의 사업은 계속 전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1936년은 위기의 해였던 것 같다. 조직 안팎에서 많은 문제들이 있었다. 어느 곳에서건 야외에서 반대를 받았다. ‘노바스코시아’ 주 ‘체티캠프’ 근방에서는 사람들이 왕국 소식 전도인들에게 뜨거운 물, 심지어 탈지 우유를 끼얹기까지 했다. ‘매니토바’ 주 ‘세인트안네데스체네스’에서는 한 떼의 폭도들이 어떤 미국인 관광객들의 자동차들이 ‘여호와의 증인’들의 집단인줄로 오해하여 자동차들에 돌맹이와 계란 그리고 ‘토마토’를 집어 던졌다. 그 마을 주민들은 정말로 난처하게 되었었다. ‘퀴벡’에서는 우리의 사업에 맹렬한 반대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우리는 또한 여러 가지 문제들을 안고 있었다. 이 문제들은 그 당시 지부 감독자였던 ‘W. F. 솔터’에게 집중되었다. 1935년 이래로 그는 ‘왙취 타워’ 출판물에 발표된 “큰 무리”에 관한 성서적 견해에 온전히 동의하지 않았던 것같았다. (계시 7:9) 사람들에게, “‘아마겟돈’이 끝나기까지는 호별 방문 증거를 할 필요가 없다.”고 그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상상해 보라! 만일 각 사람이 그러한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큰 무리”를 모으는 사업이 분명히 방해를 받을 것이었다.

‘솔터’는 그가 ‘여호와의 증인’들을 위한 새로운 통신로가 될 것이며, 「파수대」지는 때가 되면 ‘만인구원론’과 같은 자기의 견해를 싣게 되리라고 생각하고 있음이 알려졌다. 그는 또 ‘유럽’의 한 지부 감독자에게 그(‘솔터’)가 ‘왙취 타워 협회’의 차기 회장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편지했다. ‘터론토 벧엘’ 가족의 한 성원인 ‘로오라 프랜츠’는, 월요일 밤 ‘벧엘’ 가족 「파수대」 연구 중 ‘솔터’의 해설 얼마가 혼란을 일으켰으며, 그 결과 누가 그 연구를 사회할 것인지 표결에 부쳤을 때, 대다수는 그를 반대하고 ‘프랭크 웨인라이트’를 뽑았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사태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러더포오드’ 형제가 ‘터론토’에 왔으며, ‘벧엘’ 가족들과 함께 5시간의 모임을 가졌고, 그들 중 일부로 하여금 ‘솔터’에 대하여 불평하는 그들이 쓴 편지를 읽게 했다. 그 다음 ‘러더포오드’는 ‘솔터’가 조직과 ‘러더포오드’ 자신으로부터 형제들을 떨어져 나가게 영향력을 미치려 해 온 증거, ‘캐나다’ 뿐 아니라 영국과 독일에서 온 증거를 내어 놓았다. ‘솔터’는 지부 감독자 직에서 해임되고, 이사하는 데 두 주간의 기한을 주었다. (7명의 다른 사람도 그 때 떠나도록 요구받았는데 그들 대부분은 ‘솔터’와 동조하던 자들이었다.) ‘러더포오드’는 그 모임과 그에 대한 증거가 모아지는 동안에 ‘솔터’에 대하여 참을성을 보였다.

‘런던 벧엘’에서 여러 해 동안 충실하게 봉사한 ‘퍼어시 채프만’이 새로운 지부 감독자가 되었으며, ‘벧엘’ 가족은 평화를 되찾았다. 그러나 ‘솔터’로부터 다량의 편지들과 서적들이 많은 증인들과 그의 추종자들에게 보내어졌는데, 그것은 그가 전혀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을 명백히 밝혀 주었다. 그래서 1937년에 ‘터론토’ 회중은 그를 제명 처분시켰다.

재조직이 영적인 힘을 증가시키다

뒤이어 3년 동안 열렬한 왕국 전파 사업을 재조직하는 일이 있었다. 전국이 14개의 지역으로 나뉘어졌고 각 지역에는 지역의 종이 임명되었다. 재방문 활동이 강조되었다. 1938년에 있었던 회중적인 조정은 더욱더 커다란 평화와 연합, 사업의 효과를 초래했다.

이 기간 동안에 ‘터론토’의 ‘벧엘’ 직원들 가운데에도 일부 조정이 있었다. 예를 들면 1936년 6월 13일에 ‘레오 K. 그리인리이스’가 ‘터론토’의 ‘벧엘’에 들어왔다. 그는 ‘온테리오’, ‘몬트리오올’ 및 연해주에서 5년 동안 ‘파이오니아’로 일해 왔다. ‘벧엘’에서 ‘그리인리이스’ 형제는 여러 가지 훌륭한 특권을 누렸다. 마침내 그는 ‘캐나다’ 지부 사무실과 ‘캐나다 국제 성경 연구생 협회’의 재무가 되었다. 1964년에 ‘그리인리이스’ 형제는 ‘브루클린’ ‘벧엘’에 초대되었고, 그는 거기서 현재 ‘여호와의 증인’의 통치체의 일원으로서 봉사하고 있다.

1937년 8월 24일로 돌아 가면, ‘잭 네이든’은 영국에서 처음 ‘몬트리오올’에 도착하였으며, 그 다음 ‘터론토’ ‘벧엘’에 갈 예정이었다. 1938년 봄에 오늘날 순회 감독자들의 활동과 비슷한 그 당시 지구 사업이라고 하던 봉사를 시작하였다. ‘네이든’ 형제는 ‘나이애가라’ 반도와 북쪽으로는 ‘키치너’와 ‘겔프’까지 방문했다. 그 당시 자기의 임명지 내에는 약 20개의 회중에 약 700명의 왕국 전도인들이 있었다고 회상한다. 그러나 그 후 그 지역에서는 괄목할 만한 성장이 있었다.

‘네이든’ 형제가 이곳 ‘터론토’ ‘벧엘’에서 봉사하기 시작한 이래 40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그는 아직도 여호와를 찬양하는 그의 활동을 수행하고 있다. ‘캐나다’의 밭에서 그의 동료 신자들을 위한 초기 봉사를 돌이키면, 그가 그 때 훌륭한 훈련을 받았다는 것이 명백하다. 그 훈련은 그가 얼마 후에 수행하게 될 중요한 역할, 즉 전국에 있는 형제 자매들을 격려해 주기 위해 그들과 접촉을 유지하고 곧 그들이 직면하게 될 어려운 환경하에서 왕국 전파 활동을 위해 그들을 조직하도록 하는 중요한 역할을 위하여 그들을 준비시켜 주었다.

‘뉴우펀들랜드’에서의 사업

‘캐나다’의 ‘왙취 타워 협회’ 지부는 ‘뉴우펀들랜드’에서 왕국 선포 사업을 돌보아 오고 있었다. 그러나 1936년 여름, 그곳의 사업을 감독하는 일에 변화가 있었다. 모든 협회의 발송품은 ‘뉴우요오크’로부터 왔으며, ‘뉴우펀들랜드’에는 하나의 작은 보관소가 있었으므로 미국 지부가 ‘뉴우펀들랜드’에서의 사업을 돌보도록 하는 것이 최선책이라고 생각되었다.

1938년 ‘뉴우펀들랜드’는 다시 협회의 ‘캐나다’ 지부의 감독을 받게 되었다. 그 마련은 1945년에 ‘뉴우펀들랜드’에 별도의 지부가 설립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비록 1949년에 ‘뉴우펀들랜드’는 ‘캐나다’를 구성하는 연방의 일부가 되었지만, 협회의 별도의 지부는 그대로 존속해 있다.

1930년대에 끝이 다가 오다

우리는 놀라운 확장과 회중적인 발전을 보면서 또 하나의 10년대를 마치게 되었다. 그렇다, ‘캐나다’에서는 1930년대에 꾸준하고 건실한 증가를 보았다. 왕국 선포자들의 수는 1931년의 798명으로부터 1939년에는 4,269명으로 증가되었다. ‘파이오니아’들도 같은 기간내에 126명에서 294명으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바로 1939년에 또 다른 국제적인 비상 사태가 발생하였으며, 그와 더불어 다른 사람에 대한 자신들의 요구를 내세울 때 속히 극단에 흐르게 되는 애국자들의 격앙된 감정을 대두시켰다. 우리는 학교에서의 국가적 의식에 관련된 문제, 세속 직장과 관련된 문제, 우리가 중립을 고수하기로 결심한 때문에 생긴 문제들에 직면하였다. 마침내, 우리는 1940년대의 중반에 우리가 져야 할 매우 어려운 문제들을 당하게 되었다.

다시금 금지를 당하다!

1939년에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은 여호와의 백성의 활동을 중지시키려고 노력하는 종교적인 적들에게 또 한번 기회를 주었다. 특히 ‘퀴벡’에서 이제까지 공개적인 법적 싸움에서 실패를 해 오던 우리의 적들인 교직자들은 그들의 명령을 따르도록 정치가들을 꾀기 위해 막후에서 활동했다.

1940년 여름은 전쟁으로 인하여 결성된 연합국을 지지하는 서방 국가들에게는 암담한 시기였다. ‘히틀러’의 군대는 ‘유럽’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캐나다’ 법무성 장관이자 ‘퀴벡’ 시 출신의 ‘로마 가톨릭’교인인 ‘어네스크 라포인트’는 1940년 7월 4일 하원에서 이렇게 선언하였다. “‘여호와의 증인’으로 알려진 조직이 불법적임을 선언할 긴급 칙령을 의회에 제출하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여호와의 증인’과 ‘캐나다 국제 성경 연구생 협회’는 자신들의 입장을 변호할 만한 기회나 경고도 없이 1940년 7월 4일에 금지되었다. ‘터론토’의 ‘어어윈’가 40번지에 있는 부동산과 ‘국제 성서 연구생 협회’의 이름으로 은행에 예치된 기금은 당국자들에 의해서 몰수되었다. 1940년 7월 5일 지부 사무실은 ‘왕립 캐나다 기마 경찰’에 의해 폐쇄되었다.

우리 서적의 수입과 배포를 금지시키기 위하여, 정부는 또한 ‘펜실베이니아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와 ‘뉴우요오크 사단 법인 왙취타워 성서 책자 협회’가 불법적이라고 선언하였다. 이 일은 ‘국제 성경 연구생 협회’에 대한 금지령을 내린 후, 약 한달 만에 취해졌다.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인쇄 시설과 서적들 중 일부를 미국으로 보낼 만한 시간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분명히 ‘여호와의 증인’들이 ‘캐나다’에서 종지부를 찍은 것처럼 보였다.

우리가 교직자들의 충동에 대한 금지령을 살아남다!

1940년 7월 4일에 내려진 그 금지령은 즉시 ‘캐나다’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한 박해의 물결을 일으켰다. 바로 다음날, 기마 경찰은 ‘여호와의 증인’의 개인집들과 왕국회관을 수색하기 시작하였고 성서와 기타 종교 서적들을 압수했다. 협회의 지부 사무실은 경찰에 의해 점거되었다.

금지령이 내려짐에 따라 일부 지역에서는 박해가 실제로 국적을 색출해내는 일처럼 변모했다. 예를 들면, 주의 만찬을 기념하는 모임이 ‘퀴벡’ 시와 ‘몬트리오올’의 또 다른 곳에서 해산당했다. 자녀들은 학교에서 추방당하였으며, 그들의 신앙심이 깊은 부모들과 격리시켰다. 많은 증인들이 박해를 받았으며, 투옥되었다. 통틀어 500건 이상의 고발 사건이 있었다. 이들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잘못으로 인해 고발당했는가? 그렇지 않다. 그들이 단순히 ‘여호와의 증인’이기 때문에 처벌을 받았다!

그 금지령은 공중에게 상당히 극심한 비난을 야기시켰다. 정부 관리를 포함하여 많은 ‘캐나다’ 시민들의 눈에 이들 겸손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그러한 조치는 전적으로 부당하다는 것이 자명하였다. ‘밴쿠우버’ 출신인 의회 의원인 ‘앤거스 맥키니스’는 하원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캐나다’ 법령의 미명하에 ‘여호와의 증인’들을 기소하고 박해하는 일은 이 나라와 법무성 및 ‘캐나다’ 국민에게 불명예스러운 것이라는 것을 진심으로 지적하고자 합니다.”

마침내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 금지령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기회를 얻었다. 1942년에 하원의 한 ‘특별 위원회’가 그 금지령을 재검토하였으며, ‘여호와의 증인’들의 권익을 위해 정부에서 제출한 피상적인 고소에 대해 ‘찬스 모렐’과 ‘로버어트 맥놀’이 대답하도록 허락을 받았다.

1942년 7월 23일 그 위원회는 만장일치로 금지령을 철회할 것을 촉구했다. 공식 의회 토의에서 인용한 그 위원회 성원의 일부의 논평이 여기 있다.

“어느 때나 ‘여호와의 증인’들은 불법적인 조직으로 선언되어야 한다고 지적한 법무성은 위원회 앞에 아무 증거도 제시하지 못했다.”

“국민이 이들 미약한 사람들이 박해받은 것과 같은 식으로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 때문에 기소된다는 것은 ‘캐나다’ 국가로서는 불명예스러운 일이다.” (고딕체로 변경한 것은 우리가 한 것임)

이러한 권고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법무성 장관 ‘루이스 세인트 로오렌트’는 그 금지령을 철회하기를 거부했다. (‘세인트 로오렌트’는 1941년 11월에 사망한 ‘라포인트’의 후임이었다.) 일년 후에도 금지령은 계속 유효하였다. 1943년 7월 21일, 정부는 증인들을 합법화하는 것을 거부한 데 대하여 다시금 하원에서 공격을 받았다.

‘아카디아’ 출신 의회 의원인 ‘빅터 켈츠’는 이렇게 말했다.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조치는 그들의 파괴적인 태도 때문이라기 보다 ‘로마 가톨릭’에 대한 그들의 태도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갖게 합니다. ·⁠·⁠· 이 나라 방방곡곡에서 그러한 질문을 듣게 됩니다. 본인은 ‘캐나다’ 전역으로부터 그러한 질문을 받습니다.”

‘G. C 크레러’ 국방 장관은 이러한 추론을 강력히 부인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로마 가톨릭’ 교회에 가한 공격으로 인해서, 경찰이 ‘여호와의 증인’들에 관한 한 배후에서 사주를 받지 않았느냐는 의문을 제기하였읍니다. ·⁠·⁠· 그러한 추정은 전혀 근거없는 것입니다.” (‘고딕’체로 바꾼 것은 우리가 한 것임)

그러나 공문서 보관소가 일반에게 공개되자, ‘크레러’가 그릇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 금지령이 내려지게 만든 것은 사실상 ‘가톨릭’ 추기경 ‘빌레뉴우브’의 관저에서 ‘라포인트’ 법무장관에게 보낸 한통의 편지(‘프랑스’어로 쓴)였다. 여기 그 편지를 한글로 번역한 것이 있다.

‘퀴벡’ 대주교 관구

관저

‘퀴벡’, 1940년 6월 27일

각하:

‘어어니스트 라포인트’ 법무장관 각하께서 ‘왙취 타워’ ‘여호와의 증인’의 출판물에 관한, 동봉한 ‘‘퀴벡’에서 발행한 사설’에 주의를 기울여 주신다면 대주교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최근 다시금 우편을 통해 보내지는 일부 서적들과 ‘팜플렛’들, 그리고 특히 정기 간행물인 「위안」지는 모두 이 나라의 정신력을 극도로 약화시키고 파괴시키는 것들입니다.

귀하께서 본 서신에 대해 친절하신 고려가 있으리라 믿고 앞서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고문관, ‘폴 베르니에’

수신: ‘온테리오’ 주 ‘오타와’

‘어어니스트 라포인트’ 법무 장관의 비서

전술한 편지는 사실상 ‘라포인트’가 ‘여호와의 증인’들을 불법이라고 선언하게 만든 추기경의 요구 편지였다. ‘라포인트’는 자기의 권력이 그 추기경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즉각 반응을 보였다. 비밀과 음모의 이 ‘드라마’의 다음 장면은 ‘라포인트’ 비서가 한 주일 후에 ‘빌레뉴우브’ 추기경의 고문관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편지(‘프랑스’어로 쓴)이다.

친전

1940년 7월 4일

‘퀴벡’

추기경 관저

대주교 관구의 고문관

‘폴 베르니어’ 씨

고문관 귀하:

6월 27일자 귀하의 서신을 받고, 귀하의 설명과 「르액션」지에 실린 ‘왙취 타워’, ‘여호와의 증인’ 및 「위안」지와 관련된 사실에 장관께서 유의해 주셨으면 하는 추기경께서 하신 요구를 이행할 책임을 본인이 직접 맡았읍니다.

‘라포인트’ 장관 각하께서는 언급하신 ‘여호와의 증인’의 조직이 오늘자로 불법적인 단체로 선언될 것이라는 비밀 사항을 동 사실을 알려 달라고 하신 추기경의 요청에 따라 전화로 귀하께 통지해 드리라는 허락을 제게 내렸읍니다.

이 서신은 바로 제가 귀하께 전화로 말씀드렸던 내용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추기경께서는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취한 법무성의 명령을 정식으로 통고받게 되실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본인의 감사와 심심한 인사를 고문관 귀하께 전하는 바입니다.

그 편지는 ‘라아포인트’의 비서관에 의해 서명되었다. 추기경의 요구가 있은 때로부터 금지령이 내리기까지 불과 7일 밖에 걸리지 않았다. 추기경 관저 내에서는 크게 기뻐하였다. 추기경의 고문관은 1940년 7월 8일자로 ‘라포인트’ 장관 비서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프랑스’어로 된 그 편지의 번역문은 다음과 같다.

6월 27일자로 보내드린 본인의 편지에서 지적한 점에 ‘라포인트’ 각하의 주의를 환기시켜 주신 귀하의 노력에 지극히 감사하는 바입니다.

추기경께서 이미 법무성이 취한 본건의 명령에 대해 만족을 표시하기 위해 ‘라포인트’ 각하께 이미 편지를 쓰셨기 때문에 본인으로서는 더 부언할 여지가 없읍니다. 그처럼 신속하고 유쾌한 해결책을 취해 주신 데 대하여 참으로 찬사와 감사의 뜻을 보내는 바입니다.

부디 저희의 새삼스러운 감사와 신실한 인사를 받아 주십시오.

사제, ‘폴 베르니에’

그러므로 공개로 열린 의회에서 ‘G. C 크레러’ 장관이 ‘가톨릭’ 교회로부터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았다고 단호히 부인하긴 했지만, ‘여호와의 증인’에게 내린 금지령은 ‘퀴벡’의 ‘로마 가톨릭’ 추기경 관저로부터 직접 꾸며진 일이라는 것이 사실임을 정부 자체의 서류철이 입증해 주었다.

그러나 추기경과 ‘퀴벡’ 출신의 법무장관의 그러한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공정한 마음을 가진 의원들과 기타 ‘캐나다’인들로부터 정부에 가해진 압력으로 말미암아 전쟁이 여전히 치열하던 1943년 10월 14일에 그 금지령은 철회되었다. 역사상 그 어려웠던 시기에 이러한 사태의 역전은 사실상 무엇보다도 그 금지령에 대한 근거가 전혀 없었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었다.

완강히 반대하는 ‘세인트 로오렌트’ 법무장관으로 하여금 ‘국제 성경 연구생 협회’(1944년 6월 13일)와 ‘왙취 타워 협회’(1945년 5월 22일)에 내려진 금지령을 철회하게 하기 위해서 여러 차례의 힘든 투쟁과 청원서, 편지, 소송 서류 등의 작성 및 한건의 소송 사건을 처리하느라 몇 개월이 더 걸렸다. 그러나, 마침내 전후의 확장을 위한 준비가 되었다.

금지령 이후의 전시의 여러 가지 문제들

금지령이 철회됨으로써 ‘여호와의 증인’은 자유롭게 종교 활동을 할 수 있는 법적 조직으로 재조직되었다. 그러나 이 나라는 아직도 전쟁중이었고,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여러 가지 법적인 문제들이 남아 있었다. 그러한 문제들 가운데는 다음과 같은 것들 즉 ‘여호와의 증인’ 봉사자들의 징집 면제, ‘여호와의 증인’들이 양심적 거부자로서 정부 수용소에 억류시키는 일 및 그리스도인 학생들이 기에 절하기를 거부할 권리 등등이 있었다. 금지령이 철회되는 때와 거의 같이하여, ‘터론토’의 젊은 ‘파이오니아’ ‘글렌 하우’는 ‘온테리오’ 주에서 변호사업을 개업하였다. 그는 그 뒤 여러 법적 투쟁에서 매우 활동적으로 일하였다.

1940년에 ‘캐나다’에 징집 제도가 소개되었다. “성직자”에게는 면제 마련이 있었다. 그러나 여호와의 종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 금지령이 발효하고 있던 기간에는 면제를 주장할 수 없었다. 왜냐 하면, 그 당시 ‘여호와의 증인’은 불법적인 종교 조직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금지령이 철회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터론토’에는 ‘캐나다’의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이름으로 사무실이 하나 열렸다. 이제는 여호와의 백성을 대변하는 눈에 보이는 조직이 있게 되었다.

승인을 받기 위한 투쟁

1943년 11월에 특별한 자격을 갖춘 ‘여호와의 증인’ 전 시간 봉사자들의 징집 면제를 요구하는 서류를 노동 장관에게 제출하였다. 정부는 면제 승인을 거부하였다. ‘캐나다’에서 그 해 기념식에 참석한 ‘여호와의 증인’수가 15,000명이나 되었지만, ‘여호와의 증인’은 관리들이 명의 “성직자”도 있는 것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는 단 하나의 종교였다.

이 문제는 법정에서 싸워야 할 문제였다. 첫 번째 중요한 사건은 1943년에 시도된 ‘어얼 키체너 스튜워트’의 변호 사건이었으며, ‘밴쿠우버’에 있는 예심 법원으로부터 ‘브리티시 콜럼비아’의 상급 법원에 상소되었다. 1938년 이래로 전 시간 왕국 선포자로서 일해 온 ‘스튜워트’ 형제의 훌륭한 기록도 아무런 변화를 일으키지 못했다. 그의 변호는 기각되었으며, 그는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에 굽히지 않고 여호와의 백성은 다시 시도할 준비를 갖추었다. 정부는 ‘터론토’ 지부 사무실의 직원(지금 통치체의 일원)인 ‘레오 K. 그리인리이스’ 형제를 징집하려 했는데, 그는 1931년 이래로 전 시간 봉사자로 일해 왔다. 당국자들이 기소할 때까지 기다리는 대신, 확인 판결을 위해서 ‘그리인리이스 대 캐나다 검찰 총장’이라 불리운 소송을 제기했다. 그 소송은 ‘레오 그리인리이스’가 징집 해당자가 아닌 “성직자”(전 시간 봉사자)라는 것을 선언하도록 요구하였다. 이것은 반대자들을 놀라게 만든 대담한 행동이었다. 전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으며, 군대와 관련된 것은 어떤 것이든 거의 신성시되었다. 그러나, 금지령에서 갓 풀려 난 하나의 조직이었다. 이 조직은 조용히 움츠러드는 대신, 태연히 공평하고 공정한 대우를 요구하고 있었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다시 등장하게 되었고, 모든 사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인리이스’ 사건은 ‘온테리오’ 대법원의 ‘호그’ 판사에 의하여 깊이 심리되었다. 증언은 ‘L. K 그리인리이스’와 ‘퍼어시 채프만’ 및 ‘헤이든 C. 카빙튼’이 증거를 제시했다. 그러나 그러한 강력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판사는 빈약하고 그럴 듯하게만 들리는 이유를 들어 그 소송을 기각시켰다. ‘온테리오’ 상소원에 상소를 했지만, 근본적으로 실제적인 법적 문제로 다루기를 거절하는 회피적인 판결이 또 내려졌다. 다음에는 신청서를 ‘캐나다’의 대법원에 상고 허가를 위한 신청을 냈다. 그러나 그 사건에 아무런 재정적인 배상 청구권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법률적인 근거를 들어 대법원은 이 상고 심리를 거절했다.

이제 단 한 가지 남아 있는 해결책은 영국 ‘런던’에 있는 추밀원에 상소하는 일이었다. 1946년 10월 중에 심리가 되도록 상소 신청서를 ‘런던’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심리일자가 되기 직전에 정부는 징집법을 폐지하였다. 논의의 대상이 될 법이 없어져 버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사건은 최종적인 판결이 내려지지 않은 채 끝나 버리고 말았다. 어쨌든 ‘그리인리이스’ 형제는 보호를 받았다.

수용소로부터의 석방

상당수의 ‘여호와의 증인’들이 양심적인 거부자로 분류되어, ‘캐나다’의 밀림속에 설치된 수용소에서 강제 노동을 해 왔다. 이러한 조치는 1946년 7월 15일까지 4년 이상 계속되었다. 한 때 그러한 수용소 내에는 283명의 증인들이 있었다. 적십자사에 명목상으로 얼마의 돈을 내면 쉽사리 그러한 수용소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으나 증인들 대부분은 그러한 행위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노동성은 누누히 중요한 일에 사람들을 투입한다고 말했지만, 종종 실제 목적은 ‘여호와의 증인’ 전 시간 전파자들이 자유롭게 “좋은 소식”을 선포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려는 것이었다.

1946년 여름에 73명의 ‘여호와의 증인’들을 제외하고 ‘캐나다’의 모든 양심적인 거부자들은 석방되었다. 다른 모든 양심적 거부자들이 석방된 후에도 이들 감금되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붙잡아 두기 위해 노동성이 취한 독단적이고 자가당착적인 처사를 폭로하기 위해 상황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이 서류의 사본을 호의적인 의회 의원들에게 보냈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정부가 하고 있는 일을 알고는 몹시 분개하였다. 그들은 하원에서 노동성을 난처하게 만드는 질문을 퍼부어 댐으로써 노동성을 “곤경”에 몰아 넣기 시작했다.

1946년 7월 10일, ‘존 다이펜베이크’ 의원(후에 ‘캐나다’ 수상이 됨)은, “‘여호와의 증인’들 성원들이 아직도 얼마나 집단 수용소에 감금되어 있는가?” 하고 질문하였다. 이러한 압력을 노동성은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1946년 7월 15일, 모든 집단 수용소가 폐쇄되었다. 따라서, 이들 젊은 왕국 선포자들은 전후의 그리스도인 확장에 참여할 수 있게 석방되었다.

‘캐나다’의 그리스도인들과 관련된 기 경례 문제는 미국에서의 경우와 대체적으로 비슷했다. 이 문제에 관해 미국에서 보도된 사실이 ‘캐나다’에도 알려지게 되었으며, 1940년 초에 이 나라 전국에 있는 교육 위원회 가운데 일부는 기 경례 의식을 강제로 시행하기 시작했다.

다소의 소송 사건이 기의식 및 국가를 부르는 의식을 강제로 시행하고자 하는 교육 위원회의 권한에 저항해서 몇건의 소송 사건이 있었다. 이러한 사건 가운데 하나는 ‘앨버어타’에서 있었던 ‘루먼 대 레드브리지’ 사건이었다. 법원은 교육 위원회가 학생들을 강제로 참여시킬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판결했다. 그러나 주 의회는 자유를 훌륭히 존중함을 나타냈으며, ‘여호와의 증인’들의 자녀들이 괴롭힘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학교 조례를 개정하였다.

그러나 주요한 법적 시련이 ‘온테리오’ 주 ‘해밀턴’에서 일어 났으며, 그 사건은 1940년부터 1945년까지 길게 끈 것이었다. 27명의 어린이들이 기 경례를 거부하고 국가를 부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해밀턴’에서 퇴학을 당하였다. 어린이들이 교육을 받는 데 방해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사립 ‘왕국 학교’를 설립할 필요성이 있게 되었다.

기 경례와 국가를 부르는 의식에 참여하지 않아도 어린이들을 학교에서 다시 받아들이게 법원이 명령을 내려 줄 것을 요청하는 법적 소송이 취해졌다. 이 사건은 1944년 3월 30일과 31일에 ‘해밀턴’에서 심리되었다. 예심 판사인 ‘호우프’ 판사는 매우 애국심이 강한 군인으로서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렸으며, 교육 위원회는 의식에 참여할 것을 요구할 권한을 가졌을 뿐 아니라 “그들의 권한을 행사할 엄연한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근본적으로 이 판결은 그 주에 있는 기타 모든 교육 위원회가 만일 ‘여호와의 증인’의 자녀들이 기 경례와 국가를 부르는 의식에 참여하지 않으면, 그들을 추방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 사건은 ‘온테리오’ 상소원에 상소하였으며, 1945년 3월에 심리되었다. 전쟁은 아직도 진행 중이었고, 애국열은 매우 높았으며, ‘여호와의 증인’들은 금지령 후에 재조직 중이었다. 심리가 시작되자 법정은 매우 적의에 차 있었다. 3명의 판사들이 ‘여호와의 증인’들과 그들의 신앙에 대하여 급하게 질문을 퍼부어댔으므로 확고한 입장을 취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처음에 가졌던 적개심은 차차 사라지기 시작하였으며, 판사들은 매우 공정한 심리를 했다. 뒤이어 그들은 만장일치로 여호와의 백성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렸으며, 그리하여 우리의 자녀들은 양심을 거스르는 의식에 참여하지 않고도 학교에 다니며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 판결은 ‘해밀턴’ 교육 위원회와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한 공격에 큰 소리쳤던 법률가들에게 호된 충격이었다. 그들은 ‘캐나다’의 대법원에 그 사건을 공소하려고 시도했으나 그 법원은 공소 허락을 거부했다. 따라서 ‘온테리오’ 상급 법원의 유리한 판결은 최종적인 판결이 되었다. 30년 이상이나 이 더할 나위 없는 판결은 때때로 이 논쟁점을 다시 들추어 내려고 하는 “애국자”들을 밀어 부치는 데 매우 유용하였다.

‘퀴벡’에서의 자유를 위한 투쟁

1944년, 금지령이 풀리고 제2차 세계 대전의 끝이 가까운 그 때는 ‘퀴벡’에서 왕국 전파 활동을 재개하기에 무르익은 때였다. 주수상은 ‘모오리스 듀플리시스’였는데 그는 ‘가톨릭’ 교직자들의 손아귀에서 노는 교활하며 절조없는 정치인이었다. 한 역사가는 ‘듀플리시스’를 “주를 비교적 안전하고 퇴보하고 부패케 하려고 결심한 선동적 정치가”라고 묘사하였다.

그 때에 ‘퀴벡’에는 300명이 조금 못되는 수의 증인들이 있었다. ‘몬트리오올’ 구역에서 그들의 복음 전파 활동을 재개하자, 지방 세칙으로 그들을 “불법 방해”죄로 고소하기 시작했다. 1944년 말까지 거의 40건의 이러한 사건이 있었다. 고소건 수는 1945년에 급증하였으며, 전국의 이목은 1945년 9월 ‘가톨릭’ 폭도들이 ‘차아티이우궤이’와 ‘라키네’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을 공격한 사건으로 집중되었다. 그러나 이 용맹스러운 그리스도인의 작은 무리는 이러한 공격을 대항하여 굳게 섰다.—예레미야 1:19.

1945년 말까지 법적 소송 사건은 400건을 넘게 되었다. 그러나 끝은 보이지 않았다. 1946년 말에 다가가서는 ‘몬트리오올’과 ‘베르던’, ‘아우트리몬트’, ‘라키네’, ‘퀴벡시티’, ‘쉐르브루우크’ 및 다른 중심지들에 800건이 넘는 소송 사건이 계류중에 있게 되었다! 이러한 법적 사건들과 끊임없는 체포 사건들은 여호와의 백성에게 지루한 괴로움이었다. 상상할 수 있는 것처럼 이러한 일에는 인간적인 면이 있는 법이다. 체포, 긴장, 압박 지연, 굴욕, 직업 상실 및 계속되는 좌절을 견디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퀴벡’의 불타는 증오”

‘퀴벡’에서 충실한 증인들에게 가해지는 큰 압력을 풀기 위하여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1946년 11월 2일과 3일에 ‘몬트리오올’에서 특별한 대회가 열렸다. 그 당시의 ‘왙취 타워 협회’ 회장인 ‘N. H 노워’와 협회의 법률 고문 ‘H. C. 커빙튼’이 참석했다. ‘노워’ 형제의 결론 연설은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제목이었다.

기대로 가슴 두근거리는 청중들은 ‘노워’ 형제가 처음으로 이제 역사적 문서가 된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리고 자유에 대한 ‘퀴벡’의 불타는 증오는 모든 ‘캐나다’의 수치이다”를 공중에게 낭독함으로써 그 대답을 듣게 됨으로 흥분이 고조되었다. 그것은 매우 격렬한 책자였다! 단호하며 신중한 목소리로 ‘노워’는 최후의 심판의 소식처럼 ‘퀴벡’ 주의 부패한 행정에 대한 여호와의 고발장을 읽어 내려갔다. 그 ‘팜플렛’의 내용은 결코 논박을 받지 않을 솔직하고도 강력한 사실에 근거한 성명이었다.

‘노워’ 형제는 1946년 11월 15일 즉 12일 후에 이 책자의 무료 배부가 ‘캐나다’ 전역에서 시작될 것이며 16일간 계속될 것임을 발표하였다.

‘듀플리시스’ “무자비한 전쟁”을 선언

재빨리 “‘퀴벡’의 불타는 증오” ‘팜플렛’은 ‘퀴벡’을 포함한 전국에 걸쳐 배포되었다. 이제 법적 투쟁이 실제로 진지하게 시작된 것이다. 공개적으로 ‘듀플리시스’는,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한 무자비한 전쟁”을 선언하였다. 800건의 법적 소송 사건은 곧 1,700건으로 늘어났다. ‘듀플리시스’는 선동에 관한 구법을 이용하여 짧은 시일내에 이 법을 어겼다는 고발이 100건 이상이 되게 하였다. 전국은 다시 ‘퀴벡’에서의 충돌을 구경하기 시작하였다.

1946년 12월 4일에 ‘듀플리시스’는 분노로 인하여 자기에게 역효과를 가져오게 한 공격을 가하였다. 그는 부당하게도 ‘여호와의 증인’인 ‘프랭크 론카렐리’의 식당의 주류 판매 허가를 취소시켰다. 사람의 생업에 대한 이러한 공격은 ‘캐나다’ 전역에 있는 사업계에 주목을 끌게 하였다. 모든 사람들은 원칙을 존중하지 않는 한 독재자가 ‘퀴벡’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몬트리오올’의 유지들은 대규모 항의 집회를 열었다.

전국이 아직도 ‘듀플리시스’의 독단적인 조처에 대해 심히 격노해 있는 동안에 ‘퀴벡’ 시에 있는 한 ‘로마 가톨릭’ 판사인 ‘레코오더 지인 머어시어’가 자기에게 역효과를 가져 오게 할 공격을 가하였다. 1946년 12월 17일에 ‘머어시어’ 앞에서 재판을 받던 특별 ‘파이오니아’ ‘존 메이나드 하우’는 단순한 조례에 의해 평화를 교란했다는 고발을 당했다. 그러나 ‘레코오더 머어시어’는 완전히 자제력을 잃었다. 신문의 표제들은 이러하였다. “판사가 여호와의 종파에게 욕을 퍼붓다. 종신 징역을 받기에 합당하다고.” 한 기사는 이렇게 설명했다. “‘머어시어’는 ‘퀴벡’ 경찰에게, 알려진 혹은 추측되는 ‘여호와의 증인’은 누구든지 보이는 대로 모두 체포하도록 명령이 내려졌다고 말하였으며 모든 동조자들을 자기 법정에서 계속 냉혹하게 다스릴 것을 맹세하였다.”

이러한 말을 한 사람은 공정하고 공평한 판사라고 생각된 사람이었다. ‘듀플리시스’와 ‘머어시어’와 같은 사람들의 처신은 “‘퀴벡’의 불타는 증오” ‘팜플렛’에 나온 비난—사실상 삼가한 표현—이 얼마나 정확한 것인가를 증명하는 것이었다. 신문의 대표적인 반응을 다음과 같은 사설 제목에서 볼 수 있었다.

암흑 시대가 ‘퀴벡’에 돌아오다 (「더 터론토 스타아」지)

어처구니 없는 판사! (「디 오타와 저어널」지)

종교 재판이 재개되다 (‘터론토’의 「더 글로우브 앤드 메일」지)

‘파시즘’의 악취 (‘글레이스 베이’의 「더 가제떼」지)

싸움에서 후퇴하지 않고 ‘여호와의 증인’들은 “‘퀴벡’은 주민을 실망시켰다!”라는 제목의 ‘팜플렛’를 두번째로 일제히 배부하였다. ‘듀플리시스’의 거짓 고발에 대한 이 응답은 1947년 1월에 배부되었으며, 이번에는 ‘퀴벡’ 경찰이 하나님의 백성을 계속 체포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밤에 배부하였다.

이 흥분케 하는 일과 동시에 ‘퀴벡’ 시에서는 아주 격렬한 법적 투쟁이 있었다. 그곳의 작은 ‘파이오니아’ 집단—‘로오리어 소오머’, ‘존 메이나아드 하우’, ‘제럴드 배리’ 그리고 ‘러셀 허어버어트 헤드워어드’—은 ‘레코오더 머어시어’의 법정과 감옥을 연속적으로 들락날락하는 일을 당하였다. 신문들은 그것을 “영장 투쟁” 사건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이러한 모든 사건들은 신문기사 거리가 되었고, 매일 같이 ‘퀴벡’의 화제는 전국의 ‘뉴우스’거리가 되었다. 정직한 마음을 가진 많은 사람들은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의 용감한 저항에 감탄했다.

1947년 2월에 ‘퀴벡’ 시로부터 4명의 특별 ‘파이오니아’들—그 중 셋은 보석으로 출옥하였다—은 ‘뉴우요오크’ ‘이타아카’에 있는 ‘왙취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 9기생으로 입학하였다. ‘길르앗’에서 학업중에 ‘로오리어 소오머’와 ‘제럴드 배리’의 사건은 ‘캐나다’ 대법원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그 법원은 어떤 기술적인 이유로 그 사건 심리를 기각하였다. 결과적으로 ‘로오리어 소오머’는 졸업 전인 6월에 ‘길르앗 학교’를 떠나 그의 잔형을 살기 위하여 ‘퀴벡’ 시에 있는 형무소로 돌아 가야 했다. 이 대법원의 기각 판결은 그 때까지 1,700건 이상이 계류중에 있는 ‘퀴벡’ 법정으로 우리를 환부시켰다.

역시 대법원에 계류중에 있었던 충성스러운 ‘제럴드 배리’는 1947년 5월에 사망하였다. 그는 1908년 이래 ‘파이오니아’를 하였으며 1924년에 ‘퀴벡’에서 봉사를 시작했다. 참으로 그는 사도 ‘바울’이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라고 묘사한 그런 사람이었다.—히브리 11:38.

자유를 위한 투쟁에 왜 참여하지 않겠는가?

이제 당신은 틀림없이 ‘퀴벡’ 주에 있는 여호와의 백성이 전시한 용기와 결심에 대하여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제 10대 후반의 두명의 영육간의 자매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들은 ‘퀴벡’에 있는 동료 그리스도인들이 폭도들의 공격과 구타, 투옥을 당한다는 소식을 듣고서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젊음과 힘, 건강을 가졌다. 그러한 임명지가 우리에게는 이상적일 것 같다. 이미 그곳에 있는 형제들에게 가담하여 자유를 위한 투쟁에 실제 참여하기를 원한다.”

따라서 ‘퀴벡’에서 봉사하도록 임명될 전망으로 가슴 벅찬 이 두명의 어린 자매들이 ‘몬트리오올’에 도착한 것은 1946년 5월 1일이었다. 그 중에 한 사람인 ‘빅토리아 더갈럭’은 몇년 전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얼마 안가서 우리가 읽었던 일을 경험하기 시작하였읍니다. 나의 동생은 체포되어 정규적으로 소년원에 끌려 갔으며 나는 ‘레코오더’의 법정에 정규적인 참석자가 되었읍니다. 그 때문에 그 판사는 어느날 나를 그 곳에서 가장 큰 골치거리라고 말하였읍니다. 우리는 법원 직원들에게 뿐 아니라 동료 수감자들에게도 증거할 기회를 많이 가졌었읍니다. 형무소 경험을 함께 하는 형제들 사이에 탁월한 사랑의 띠가 자라갔읍니다. 나는 특히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하였읍니다. 함께 판결을 받은 우리 몇 사람은 보석으로 나가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가장 연로한 분 혹은 집에 부양 가족이 있는 사람들이 석방되었읍니다. 끝으로 우리 둘만 남게 되었읍니다. 우리는 언제 우리 차례가 올지 알지 못한 채 6일을 보냈읍니다. 마침내 보석이 돌아 왔지만 한 사람에게 만이었읍니다. 저와 함께 있던 ‘프랑스’ 자매는 ‘두 사람 다 나가지 않으면 나 혼자 안나가겠다’고 말했읍니다. 그래서 그 자매는 즉시 얻게 되는 자유를 포기하고 나와 함께 남아 있었읍니다. 이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너무나 고마운 일이었읍니다. 결국 ‘여호와의 증인’들은 자유를 위한 그들의 투쟁 때문에 존경을 받게 되었읍니다. 그들을 약화시키려는 모든 노력이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열심을 꺾으려는 그들의 노력은 오히려 더욱 더 열심히 일하고 그 구역에서 양을 찾아내고자 결심하게 하였읍니다!”

다시 선동 혐의로!

여호와의 영의 도움으로, 그리고 이러한 사랑과 믿음, 충성, 결심으로 ‘퀴벡’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은 적들을 대항했다. 그리고 적들은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퀴벡’의 불타는 증오” ‘팜플렛’에 들어 있는 폭로의 열기는 ‘듀플리시스’에게 위협과 탄압을 위한 더 많은 무기를 찾게 하였다. 그는 수많은 조례위반 사건에 더하여 문서선동죄라는 구법을 다시 이용했다. 50명의 증인들에게 100건이 넘는 고발을 하였다. 이러한 사건들은 ‘세르브루우크’와 ‘아모스’, ‘몬트리오올’, ‘세인트 조셉-디-비이우스’에서 일어났다. 검찰관들은 증거물로서 “‘퀴벡’의 불타는 증오”와 “‘퀴벡’은 주민을 실망시켰다!”라는 두 ‘팜플렛’에 기대를 걸었다.

선동죄로 재판을 받게 된 첫째 사건은 ‘퀴벡’ 시 남쪽 언덕에서 소로 농사를 짓고 있는 신실하고 온유한 농부인 키가 작은 ‘에이미 바우처’ 사건이었다. ‘바우처’ 형제는 이 세상적 재산은 없지만 사랑과 믿음은 풍부한 사람이었다. 그는 1947년 11월에 ‘세인트 조셉-디-비이우스’에서 ‘알프렛 사바아드’ 판사에게 재판을 받았다. 그런데 이 판사는 1940년에 금지령을 내린 법무장관인 고 ‘라포인트’의 법률 ‘파트너’였다. 이 ‘사바아드’ 판사는 극단적인 적개심과 편견을 가지고 배심원에게 말하였다. 물론 유죄 판결이었다.

‘퀴벡’ 상급법원은 그 유죄 판결을 지지하였으며 그 사건은 ‘캐나다’ 대법원에 상고하였다. 대법원은 처음으로 그 사건을 재심하도록 ‘퀴벡’으로 환송을 명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셨으며 전례 없이 재심이 허락되었다. 그 법정은 두번째 심리 후에 스스로 번복하여 완전 무죄 석방을 명령하였다. 폭력을 유발시키는 선동 내용이 없었으므로 ‘여호와의 증인’들의 ‘팜플렛’은 선동적이 될 수 없었다. 한건의 유죄 판결도 없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백성의 정당함을 입증하신 것이다!

이 ‘바우처’ 사건의 판결은 아마 ‘캐나다’에서 여호와의 백성이 거둔 가장 중요한 법적 승리였을 것이다. 그것은 ‘여호와의 증인’과 모든 다른 ‘캐나다’인들의 자유에 대한 정치—교회의 공격 배후를 무찌른 것이다. 또한, 그것은 법률을 현대화하고 이 나라에서 사용하는 선동죄의 표준화된 정의를 폐용시켰다. 모든 법전은 개정되어야 했다! ‘앨버어타’ 법과 대학 학장인 ‘디인 바우커’는 이렇게 진술했다. “‘바우처’ 대 국왕 사건 판결은 언론 자유권에 대한 한 묶음의 선언문의 가치가 있다.”

경찰 검열권의 무효화

선동 혐의 사건은 모두 기각되었다. 그것은 멋진 일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1,600건이 넘는 조례 위반 혐의가 남아있었다. 무슨 사건인가? 이 사건의 근원은 모든 지식의 보급을 경찰 검열을 받게 하려는 ‘퀴벡’ 당국자들의 노력이었다. 대표적인 것은 ‘퀴벡’ 시 조례 184조로서 그 내용은 이와 같다. “‘퀴벡’ 시가에서 사전에 경찰서장의 서면 허가를 취득하지 않고서는 어떤 서적이나 ‘팜플렛’, 소책자, 회람장, 책자를 배부하는 것을 금한다.”

이 검열 조례를 극복하기 위하여 1947년 ‘퀴벡’ 시에서 그 조례가 불법임을 선언하도록 요청하는 한 시험 소송 사건이 시작되었다. 법정에는 세 사람의 교직자들—‘가톨릭’ 신부 한 사람과 영국 교회 교역자 한 사람, ‘유대’교 ‘랍비’ 한 사람—이 ‘퀴벡’ 시측 증인들로 출두하였다. 그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불리한 판결을 하도록 판사를 설복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이것은 정치와 주요 종교들이 연합해서 하나님의 참다운 종들을 대항하는 또 다른 증거였다!

‘소오머’ 대 ‘퀴벡’ 사건이라고 불리우는 이 소송 사건 역시 ‘캐나다’ 대법원에 상고되었으며 그곳에서 7일간이나 심리되었다. 1953년 10월 6일에 아홉명의 법관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유리한 5대 4의 분할 판결을 내렸다. 이 소송 사건에서의 승리는 ‘퀴벡’ 법정에 계류되어 있는 수백건의 조례 위반 사건을 종결지었다. 그 ‘소오머’ 사건의 판결은 또한 모든 ‘캐나다’ 국민들에게 이로운 획기적 판결로서 ‘캐나다’에서 인정을 받게 되었다.

한 기고가는 이 중대한 판결로 크게 감동을 받아 「터론토 텔리그램」지에 다음과 같은 논평을 실었다.

“모두의 동등권”

“‘소오머’ 사건에 관한 ‘캐나다’ 대법원의 판결은 ‘파알리어먼트 힐’에서 대규모의 축하 불꽃으로 기념되어야 한다. 성대한 불꽃놀이의 가치가 있다. ‘캐나다’ 사법사상 이보다 더 중요한 판결은 거의 없을 것이다. ‘캐나다’에게 이보다 더 훌륭히 공헌할 만한 판결을 내린 법정은 거의 없을 것이다. 어떠한 판결도 자유의 유산을 소중히 여기는 ‘캐나다’인들에게 이보다 더 은혜를 입게 한 것은 없었다. ·⁠·⁠· 이 구출을 경축할 만한 불꽃놀이는 없다.”

흥미있게도 이 소송 사건이 심리되는 동안 ‘캐나다’ 지부 사무실은 그 사건의 결과를 위하여 모든 형제들에게 여호와께 간구의 기도를 하도록 권고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 사건의 유리한 판결을 위하여 그만큼 의뢰했던 것이다! (디모데 전 2:1, 2) 최후의 성과는 “기도를 들으시는 주”로부터 호의적인 응답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시 65:2) 참으로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야고보 5:16.

‘듀플리시스’의 마지막 저항

이 때까지 ‘듀플리시스’가 이용해 온 모든 법은 ‘여호와의 증인’에 의하여 무효화되었다. 1954년 1월에 그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활동을 중지시키려 새로운 법을 ‘퀴벡’ 입법부에서 통과시키게 하였다. 조례 38조로 알려진 그 법은 1954년 1월 28일 오후 5시에 효력을 발생하였다. 그러나, 다음날 오전 9시에 ‘여호와의 증인’ 변호인은 그 새로운 법의 효력에 이의를 제기하고 그 법의 시행 정지 처분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하려고 재판소 문에 도착하였다.

조례 제 38조에 대한 소송은 10년 이상이나 끌었으며, 이 소송 심리는 매우 흥미있는 일이었다. 여호와와 그분의 백성을 지지하는 얼마의 훌륭한 증거를 ‘F. W. 프랜즈’(현재 ‘왙취 타워 협회’의 4대 회장)가 노련한 증인으로서 ‘퀴벡’에 왔을 때 제시하였다.

‘여호와의 증인’측 변호인은 특히 마음 내키지 않는 증인—‘모오리스 듀플리시스’를 출정하게 하였다! 그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요구한 소환장에 응하여 출두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을 불쾌하게 여겼다. 두 시간 반 동안이나 ‘글렌 하우’는 이 오만하고 무뚝뚝한 작은 ‘듀플리시스’의 마음을 무척이나 초조하게 하는 반대 심문을 하였다.

절차상 합당한 때에 ‘캐나다’ 대법원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조례 제 38조가 그들에게 적용시키기 전에 소송을 제기했다는 기술적인 근거로 그 법의 효력에 대한 판결을 기각하였다. 그러나 만일 당국이 이 법을 언제든지 시행하면 대법원에 의하여 사용된 기술적인 근거는 소멸될 것이다. 조례 제 38조는 1954년 이래 효력이 없었으며, 실시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듀플리시스’는 그의 마지막 저항을 한 것이다!

1959년에 ‘듀플리시스’는 공무 수행의 명목으로 한 일로 인하여 한 시민에게 개인적으로 변상이 요구된 대영 제국의 역사상 최초의 불명예스러운 수상이 되었다. ‘캐나다’ 대법원은 그에게 식당 주류 판매 허가 취소로 인한 손해 배상으로 ‘프랭크 론카렐리’ 형제에게 약 50,000‘달러’를 지불하라는 명령을 하였다. 이 최후의 실패 후 얼마 안있다가 ‘듀플리시스’는 사망하였다.

확실히 ‘듀플리시스’는 ‘가말리엘’의 훌륭한 충고를 청종했더라면 그 많은 괴로움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율법 선생은 이렇게 충고했던 것이다.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두라 ·⁠·⁠·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사도 5:38, 39.

감사의 표현들

‘캐나다’의 많은 법률 해설가들은 이 나라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이 법과 자유에 이룩한 빛나는 공헌을 인정하였다. 전 ‘맥길’ 대학 법대 학장이었던 ‘프랭크 스코트’는 증인들의 사건에 관하여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 나라에서 국가적 압제를 받으면서 자기의 권리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들의 승리는 우리 모두의 승리인 것이다.” 그는 또한 이렇게 말했다. “지난 십년간 ‘캐나다’ 대법원에까지 올라간 사건 중 5명은 우리의 법률의 정화에 참으로 크게 기여한 사람들로서 그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이었다.”

「법률 평론」지(‘터론토’ 대학)에 나온 기사에서 또 다른 법률 평론가는 ‘여호와의 증인’들을 “시민권의 특권을 위한 버팀목으로 가장 신뢰할 만한 단체”로 평하였다. 또한, ‘캐나다’ 전 대법원 판사 ‘이반 C. 랜드’는 우리 사건 중의 얼마를 말하면서 “늑대는 떼를 지어 싸우고, 사자는 혼자서 싸운다.”라고 논평하였다.

사계 권위자들의 이러한 진술로 보건대 소수로서 거대한 다수의 집단을 대항하여 싸우는 ‘여호와의 증인’들은 용기있는 저항으로 ‘캐나다’의 자유에 주요한 공헌을 이룩했음이 분명하다. 그들의 승리는 ‘캐나다’ 국민의 자유를 위한 승리이다. 숭배와 출판, 언론 및 집회의 자유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연관된 사건들을 통하여 모두 보호 받았다.

그렇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참으로 그들의 공개적 법정 출두가 증거를 하는 결과가 되었으며, 그로 말미암아 그들이 ‘캐나다’에서 ‘복음을 변호함과 확정함에’ 도움이 된 것에 감사한다. (마가 13:9; 빌립보 1:7) 그러나 특히 증인들은 자기 백성을 항상 지원하시는 위대하신 율법 수여자이신 여호와께 감사드린다. ‘히스기야’ 왕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강하게 하며, 담대하고 ·⁠·⁠· 저[‘앗수르’ 왕]와 함께하는 자는 육신의 팔이요, 우리와 함께하는 자는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반드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리라.”—역대 하 32:7, 8.

1960년대로 전진하다!

‘캐나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모든 법적 투쟁을 벗어나 열정적으로 1960년대의 10년대로 들어 갔다. 1960년 4월에, ‘파이오니아’와 순회 감독자 및 ‘터론토 벧엘’ 가족으로 다년간 봉사해 온 ‘클레이튼 모렐’이 새로운 지부 감독자로 임명되었다. 훌륭한 영을 나타내고, 가장 접근하기 쉬운 사람으로 그는 또한, 그 때까지 시행된 좋은 사업을 계속 이어갈 훌륭한 조직자였다. 그 당시 ‘벧엘’ 가족에는 44명의 성원이 있었다.

전국적으로 6개의 지역과 61개의 순회구 및 805개의 회중이 있었다. 1960년에 ‘캐나다’에는 증인 1인당 465명과 비율로 38,382명의 활동적인 왕국 전파자들의 최고수를 기록했다.

1960년 6월에 와서 ‘퀴벡’에서 다시 한번 성서와 서적들을 가지고 호별 방문 증거 사업을 개시하도록 하는 데 충분한 우리에게 유리한 법원 판결이 있었다. 이제 그 주는 이 점에 있어서 ‘캐나다’의 다른 주와 다를 바 없었다. 그 해 여름에 ‘베르던’에서 개최된 첫 번째의 ‘프랑스’어 지역 대회는 ‘퀴벡’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활동과 발전에 행복한 하나의 획기적 사건이 되었다. 3,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석하였으며, 그들 중에 1,000명은 관심자들이었다. 얼마나 상태가 변화되었는가! ‘퀴벡’에서의 법적 투쟁은 모두 끝났다. 사제의 영향과 반대는 쇠약해지고 있었다. ‘프랑스’어를 말하는 왕국 전도인들은 그 주에서 영어를 사용하는 증인들보다 수적으로 많았다. 가장 큰 도시 ‘몬트리오올’에서의 성장은 1959년에 22개의 회중이 사용하는 7개의 왕국회관이 있었으며 몇개의 다른 왕국회관이 주 도처에서 건축되고 있었다. 심지어 ‘퀴벡’ 시는 그 자체의 ‘여호와의 증인’의 왕국회관을 가지게 되었다.

1960년 8월 1일에 ‘캐나다’에서 첫 ‘이탈리아’어 회중이 ‘터론토’에서 기능을 시작하였다. 비록 40명으로 출발하였지만 오늘날 ‘캐나다’ 전국에 2,000명이 넘는 전도인을 가진 33개의 ‘이탈리아’어 회중이 있다. 14개의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 회중과 12개의 희랍어 회중, 1개의 중국어 및 1개의 한국어 회중을 볼 수 있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다!

그러므로 1960년에는 모두 열렬한 활동의 10년간을 위하여 대비하였다. 대부분의 경우 그 때는 평화와 영적 세움의 기간이었다.

천국 전도 학교

1961년 1월 1일 ‘캐나다’에서는 의미 깊은 일이 있게 되었다. ‘터론토’에 있는 지부 사무실에서 첫 천국 전도 학교가 시작된 것이다. 그 해 8월 말까지 151명의 감독자와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그 과정을 이수했다. 그들이 배운 것에 대하여 많은 감사의 말이 들어 왔다. 어떤 이들은 심지어 4주간의 과정에서 그들의 개성을 실제로 변화시켰다고 말하였다. 1971년까지 152개의 ‘캐나다’인 천국 전도 학교가 있었고 3,370명의 학생을 수용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감독자들과 특별 ‘파이오니아’들은 1970년대에 지방 회중에서 책임진 임명을 더 잘 수행할 수 있는 훌륭한 훈련을 받게 되었다.

나중에 개정된 천국 전도 학교 과정이 1977년의 맨 마지막 과정까지 5,980명의 ‘캐나다’의 회중의 모든 장로들을 훈련시킬 수 있게 하였다. 사실상 1961년에 천국 전도 학교가 시작한 이후로 그것은 회중과 야외에서 더 나은 봉사를 위하여 모두를 준비시키는 데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

수혈 논쟁

이 나라에서 여래 해를 걸쳐 피의 신성함에 관한 ‘여호와의 증인’들의 입장은 많은 불리한 선전과 증오를 유발시켰다. (사도 15:28, 29) 사실 우리가 수혈받기를 거절하는 데 대한 공개적 울분이 고조된 절정은 1961년에 있었다. 그러므로 이제 이 논쟁에 대하여 상세히 이야기하는 것이 적절한 것 같다.

신문들은 건강과 생명 문제에 있어서 추측에 불과한 피의 효험에 대하여 선동적인 표제와 오도시키는 용어를 사용했다. 1960년대 이래, 우리가 왕국 전파 사업에 종사할 때 피에 대한 우리의 입장 때문에 문에서 당하는 악 감정이 대중의 적대적 반응이었다. 이것은 1940년대에 미국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이 기 경배와 전쟁에 대한 입장 때문에 부닥쳤던 도전에 비교될 수 있었다. 이곳 ‘캐나다’에서는 이유와 동기가 심한 감정적 폭발을 하게 하였고 심지어 위협적 비난을 하게 까지 하였다.

1956년에 있었던 한 사건으로 돌아 가서 대중을 격동하고 문제의 양면을 알려 주지 않은 ‘뉴우스’ 매개체의 무책임한 예를 살펴보기로 하자. ‘해밀턴’에서 17세(건강과 치료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결정을 할 수 있는 ‘온테리오’에서의 법적 연령임)된 소녀는 그곳 의사가 명령한 수혈을 거부했다. 그들은 ‘해밀턴 종합 병원’에서 이 소녀가 출생시부터 문제가 되고 있는 병을 치료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 소녀는 출생 후에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되었으나 그 때까지 살아 있었다. 그러므로 이 소녀는 그리스도인 원칙을 범하지 않고 계속 치료를 받겠다는 자기가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결정을 하였다.

이 단순한 기본적 인권의 행사로 인하여 무슨 결과가 일어 났는가? 자, 1956년 2월 17일자 「터론토 스타아」지를 받아 본 사람은 그 전면에서 무엇을 보게 되었는가? 약 6.5‘센티미터’ 크기의 활자로 된 표제였다.—그리고 그것은 “17세 소녀가 죽어야 하는가?”였다. 이렇게 큰 활자는 세계 대전과 기타 세계적 대격변에나 보통 사용하는 것이다. 그 밑에는 “‘여호와[의] 증인’이 피를 거부하다.”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다. 이 소녀가 피를 거부하므로 죽을 것을 시사하여, 같은 기사에서 “죽을 소녀”라는 소제목을 사용하였다. 독자를 격동시키려는 의향은 그 기사의 첫 항 첫머리에서 이 환자의 결정은 “이 도시의 공분의 물결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라고 한 것으로 분명하였다.

이 「스타아」지는 이 소녀가 수혈을 받지 않는다면 꼭 죽을 것이라는 것을 “확실한 죽음”이라는 표현까지 사용하면서 어떻게 그의 죽음을 확신할 수 있었는가? 그것은 병원의 의사들이 준 인상 때문이었다. 그들은 심지어 기자에게 수혈을 해도 “그 소녀가 2년 이상 살 가망이 없다”고 말했던 것이다. 부정확한 용어(“살게 하는” 피와 같은)를 사용하여 위와 같은 말을 한 것은 사람들을 격동하기에 충분했다. 그 기사는 그 소녀의 생명이 “차츰 쇠하여지는” 것처럼 묘사하였다.

그러나 이 ‘여호와의 증인’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 소녀는 수혈을 받지 않았으며 그 소녀는 건강한 몸으로 퇴원하였다. 그러나 의사들은 그 때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여기 놀라운 소식이 있읍니다! 그 소녀가 완치되었읍니다. 모든 사람이 꼭 알아야 합니다!’ 하고 알렸는가? 천만에! 그 소녀가 퇴원하는 것을 그들은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신문사에 알려야 하지 않았겠는가? 도대체 이 사건이 어떻게 처음부터 신문사에게 알려지게 되었었는가?

이 소녀의 회복과 퇴원 소식은 한 호기심있는 기자가 그 소녀의 상태에 관한 취재를 시작하다가 그 소녀가 퇴원해서 집으로 돌아간 사실을 발견하게 됨으로 신문에 알려지게 되었다. 칭찬할 만하게도 「터론토 텔리그램」지는 이 소식을 실었으며 “건강한 모습”이라고 묘사한 웃고 있는 소녀 증인의 사진을 실었다. 물론 그 소녀는 오늘날까지 살아있다! 그 동안 그는 결혼을 하여 자녀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 한가지 수혈 사건에 관하여 많은 지면을 할애하였다. 그것은 그렇게도 많은 사건 중에서 너무나도 대표적인 경우였기 때문이다! 신문 보도는 습관적으로 전면에 불을 부치는 표제와 무시무시한 예측으로 시작한다. 그래서 공분과 적개심을 일으킨다. 다음에 편견 없는 의학적 및 법적 의견들이 그 사건을 고려할 때 더 건전한 견해를 가지게 된다. 마지막으로 기사화한다 해도 신문 뒷면에 아주 조그만 기사가 환자의 회복과 퇴원의 소식을 알린다. 물론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순서가 재삼재사 반복된 것이다.

조류의 변화

그러나 생각있는 사람들 가운데 조류의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어떻게? 몇 곳에서는 수혈 문제의 다른 면을 설명하는 간행물이 나왔다. 예를 들면, 「캐나다 변호사 협회지」 1960년 10월호는 수혈 논쟁의 법적, 의학적 및 종교적 면을 철저히 조사한 기사를 실었다. 「캐나다 의사」지는 1960년 12월호에 거의 24면의 지면을 할애하여 그 기사를 전재한 특별 부록을 발행하였다. 이 예리한 기사는 법조계와 의학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미쳤으며 개인적으로는 이 문제에 대하여 호의적인 견해를 가질 수 있게 하였다.

‘캐나다’의 큰 잡지인 「맥클린즈」지 1961년 8월 26일호에 “네건의 수혈 중 세건은 치료보다는 해로울 가능성이 크다”라는 표제의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는 의학 전문 기사인 ‘시드니 캇즈’의 도움을 받은 한 의사가 쓴 것이다. 이 기사는 불필요하게 수혈을 남용하는 것을 폭로하였으며 이것은 수혈이 도움이 되었지 결코 해가 되거나 위험한 것이 아니라는 “세뇌”를 받은 대중에게 도움이 되었다.

「캐나다 의학 협회지」 1961년 5월 27일호에는 의사 ‘맥스 미누크’와 ‘로널드 S. 램비’의 매우 뜻있는 기사가 실렸다. “‘여호와의 증인’들을 위한 마취와 수술”이라는 제목으로서 이 기사는 증인들을 다루기 어려운 감정적인 종교 집단이며 수혈 문제들은 이들 ‘고지식한 사람들’의 과실 때문이라는 많은 의사들의 태도를 대체적으로 종식시키게 하였다. 서두에서 필자들은 수혈 논쟁이 발생하였을 때 병원에서 감정적인 장면을 일으키게 하는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지적하였다. 그들은 논쟁이 일어나는 이유는 “증인들의 신조에 대해서 뿐 아니라 그들을 치료하는 것과 관련해서도 적지 않은 혼란감정적 선입관, 편협, 무지가 작용한다는 사실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고딕체는 우리가 한 것임) 그 기사 후반에서 ‘미누크’와 ‘램비’ 박사는 의사들이 이상적이 아닌 상황을 다룰 때 침착하고 객관적으로 참을성있게 문제를 접근해서 이러한 상황에서 의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경우를 부언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너무나 자주 ‘여호와의 증인’의 경우에 있어서 수술 ‘티임’은 감정적이고 혼란되고 불합리하게 되는 데 그 이유는 환자들이 신체에 대해서 보다도 종교에 대하여 더 책임을 느끼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근거로 특정한 의료 행위를 거부하는 종교 단체는 비단 ‘여호와의 증인’만이 아니다. ‘로마 가톨릭’ 같은 다른 종교 단체도 특정한 치료 형태를 거부하는데 우리는 그들의 견해를 받아들인다. 마찬가지로 ‘여호와의 증인’의 신앙도 존중해야 하고 관용해야 한다.”

이러한 추론은 어떤 의사가 환자에게 안하겠다고 말해 놓고 “환자가 모르면 그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라는 생각으로 피를 몰래 넣는 행위보다 훨씬 더 올바른 길이다. 그러한 태도는 비윤리적일 뿐 아니라 부정직한 행위이며, 다른 사람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

일부 권위자들에 의하면 사실 사람은 45%나 잘못 진단하는 수가 있다. 그러므로 더욱 겸허해야 할 것이다. 한 균형잡힌 의사로서 ‘아아더 켈리’ 박사(현 ‘캐나다 의학 협회’ 총무)는 이렇게 썼다.

“의학적 전지란 대단히 드문 것으로서 어제의 견해는 오늘의 새로운 지식에 의해 수정된다. 우리의 자존심으로 인하여 거만하게 되어 환자들의 뜻을 굴복시키려고 해서는 안될 것이다. 나는 사람이 자신의 건강 관리인으로서 궁극적인 권리와 의무를 무시당하는 것보다 수명이 다하기 전에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근년에 와서 피 논쟁이 관련된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의사와 환자 사이의 관계가 꾸준히 개선되어 왔다. 많은 외과의사들은 증인 환자들이 진실하게 고착하는 종교적 견해를 존중하면서 그들의 기술을 충분히 사용하는 용감한 의사들이다. 1970년대 초반에 이들 의료원의 관리자들과 원장들의 더 나은 이해를 촉구하기 위하여 ‘터론토’에 있는 주요 병원들을 방문하였다. 방문하는 증인들은 피 없이 할 수 있는 것을 알려 주는 의료 정기 간행물들에서 제시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정중한 영접을 받았다. ‘왙취 타워 협회’의 소책자 「피, 의학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영문) (1961년 발행)은 이들과 많은 의사들을 접근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흥미있게도 이제 어떤 의사들은 우리가 의료 정기 간행물로부터 제공할 수 있는 어떤 부가적인 정보가 있는지 묻는 일이 있다.

현재에 와서는 대중은 의사가 수혈이 필요하다고 하는 어린 자녀들의 경우에만 흥분하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기록에 의하면 ‘여호와의 증인’들은 잘못된 입장을 취하는 것이 아니다. 보통의 경우 그들의 자녀들은 일부 의사들의 불길한 예언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 남았다. 한편, 여러 경우에 있어서 법원 명령에 따라 어린이들에게 강제로 수혈을 하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러한 자녀들 중 강제로 수혈을 받은 12명은 후에 비통해 하는 부모들에게 시체로 돌아왔다.

그러나 법적, 의학적 및 다른 정기 간행물들에 인쇄된 자료들과 ‘왙취 타워 협회’가 펴낸 자료들은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다행히도 또한 1960년과 1963년에 ‘여호와의 증인’들이 그들 자신과 그들의 자녀들을 위한 치료를 결정할 권리에 대하여 그들을 지지하기 위하여 ‘온테리오’ 대법원에 성공적인 상소를 할 수 있었다.

문제를 바로 잡다

1970년에 의료 종사자들은 ‘매니토바’ 주 정부로부터 ‘여호와의 증인’들의 자녀들에게 수혈을 강제로 할 수 있는 부가적 권한을 부여받으려고 노력하였다. 가족의 입장과 좋은 의료 행위의 견지로 볼 때 이 발효된 법의 위험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입법 위원회 앞에 설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이 위원회의 두 명의 위원은 근자에 수혈을 한 후에 가족을 잃은 쓰라린 경험을 한 일이 있었다. 주의깊이 매우 정중하게 귀를 기울이고 있는 입법 위원회 앞에서 ‘글렌 하우’ 형제는 3시간 동안이나 설명하였으며 그 후에 그 입법이 철회되었다. 훌륭한 증거의 기회가 되었으며 호의적인 많은 보도가 나왔다.

1976년 3월에 한 교통 사고와 관련하여 한 검시관은 우리의 한 자매가 수혈 부족으로 죽었다고 그릇되게 보고했다. 그러나 편파심 없는 건전한 정신을 가진 ‘온테리오’의 검시관과의 얼마의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도리어 ‘온테리오’의 모든 검시관의 모임에서 연설하도록 ‘글렌 하우’ 형제에게 길이 열렸다. 그의 연설은 환영을 받았으며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인쇄된 설명서가 배부되었다. 이 기회는 이 경우의 압력을 제거하였다. 이곳은 대중에게 잘못된 생각을 넣어 주었고, ‘여호와의 증인’은 편견을 가진 검시관에 달려 있었고 검시관 배심원으로부터 불리한 추천을 받을 수 있는 곳이다. 이제 더욱 객관적인 견해가 우세하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온테리오 내 외과 대학’이 ‘여호와의 증인’의 경우에 어떤 새로운 방침을 채택하기로 계획을 세웠다는 한 신문 보도에 따라, 우리를 변호하는 상세한 설명서가 그 대학에 제출되었다. 이것은 계속 환자의 권리를 존중할 것과 “전인(全人)”을 치료할 것과 의사들은 더욱 수혈없이 성공적인 치료를 하는 것의 유익점을 연구하도록 촉구하였다. 이 설명서로 인하여 잠잠케 하는 효과가 나타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나다’에서 이 점에 관하여 계속 경계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전국적으로 호의적으로 보도됨

1977년 ‘캐나다 방송 공사’의 “접근”이란 ‘프로그램’은 수혈 논쟁의 오해를 주로 다룬 30분간의 ‘텔리비젼’ ‘프로’를 방영하였다. 그 ‘프로그램’이 방영되는 동안에 ‘캐나다’ 전국의 수백만의 시청자들은 예측한 대로라면 이미 “죽”었어야 할 세 사람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살아 있었고, 건강했다! 그들 혹은 그들의 부모들은 생명을 보존하면서 선한 그리스도인 양심을 유지하기 위하여 그들이 취한 길의 이유를 설명할 수 있었다.

그 다음에 두 명의 의사와의 회견이 있었다. 그 중 한 의사인 ‘터론토’ 시의 ‘C. B. 베이커’ 박사는 그가 수혈 없이 집도한 심장 절개 수술이 몇 건이나 되는지 질문을 받았다. ‘베이커’ 박사는 대답하였다.

“우리는 현재 ·⁠·⁠· 합계 37건을 수술했읍니다.”

“수혈 없이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빈약한 치료 방법이 아닙니까?”

“더 좋은 치료 방법이지요 ·⁠·⁠· 간호원들은 종종 대단한 관심을 보이면서 ‘박사님은 왜 모든 환자에게 무혈 수술을 하지 않으셔요? 그들은 아주 상태가 좋은데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이 경우는 ‘여호와의 증인’의 수술이 아니었군요. 어떤 환자에게나 실시할 수 있읍니까?”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도 가능한 한 그것을 실시하는데, 특히 ‘여호와의 증인’을 다룬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지요.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웠읍니다. 즉 피를 사용하지 않은 사람이 효과가 훨씬 좋다는 것을 알았읍니다.”

이 ‘프로’ 중에 역시 회견한 또 다른 의사는 미국 ‘텍사스 심장 연구소’의 유명한 심장 외과의인 ‘덴튼 쿨리’ 박사였다. 그는 600건이 넘는 수술을 거의 20년간 피없이 심장 절개 수술을 했다고 말했다.

대중은 큰 감명을 받았다. 많은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 ‘프로그램’을 본 후에 확실히 변화된 견해를 갖게 된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CBC 방송국에 이 공정한 ‘프로그램’으로 대중의 생각으로부터 너무나도 심한 편견을 제거한 데 대해 감사의 뜻을 써 보내기도 했다. 후에 그 ‘프로그램’ 제작자는 “‘여호와의 증인’에 관한 우리의 ‘프로그램’에 대한 반응의 편지의 실제 무게”를 말하고 일일이 모두 회답을 보낼 수 없음을 말하면서 이렇게 부언하였다. “여러분에 관한 ‘프로그램’이 이번 ‘시이즌’에 가장 성공적인 성과로 평가할 만하다고 말씀드릴 수 있읍니다.”

더욱 최근에는 전국적으로 「여호와의 증인과 피에 관한 문제」(1977년판)라는 책자를 배부하였다. 이 책자는 모든 의사와 병원 관리자들, 변호사, 판사, 간호원들을 위하여 마련되었다. 이 이치적인 호소는 좋은 반응을 일으켰다. 많은 의사들과 병원 관리자들 및 변호사들은 증인들이 방문해서 요청한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그 책자의 내용을 토론하는 데 사용하였다. 이 출판물의 배부는 피의 신성함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는 우리의 부단한 투쟁에 또 다른 확실한 발판이 될 것이다.

이 제목으로 할 이야기는 참으로 많다. 그러나 우리는 ‘캐나다’에서의 참 숭배에 관한 이야기의 이 부분을 많은 증인들 개개인에게 감사의 뜻을 말하지 않고 끝낼 수는 없다. 그러한 증인들 가운데는 피에 관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기 위하여 많은 반대를 굳게 물리친 장로들, 부모들 기타 가족 성원들이 포함된다. 흔히 이것은 아주 중태거나 거의 죽어 갈 때, 여러 시간 동안 비웃음과 압력을 저항하거나 간호원들과 의사들, 판사들, 기타 사람들로부터의 모욕과 위협을 견디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 분들을 위로하고 지원하기 위하여 며칠씩 밤 잠을 자지 못하는 노력이 필요하거나 심각한 경우를 받아 줄 호의적인 의사를 찾기 위하여 셀 수 없이 전화를 거는 것이 필요하였다. 동료 신자들은 이러한 경우에 집을 돌보아 주고 환자의 가족을 돌보아 줄 사람이 없는 경우 그들을 위하여 식사를 준비하는 일을 기꺼이 해 왔다. 우리는 또한 자녀를 빼앗겨서 강제 수혈을 당하는 끔직스런 경험을 한 부모들의 믿음을 빼놓을 수가 없다. 이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하려면 한 권의 책이 될 것이다.

‘캐나다’에서 여러 건의 수혈 사건에 있어서 많은 간호원들, 의사들 및 판사들이 나타낸 친절과 사려깊음 및 사랑을 언급하는 것을 빼 놓을 수 없다. 그들이 나타낸 동정심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어떠한 일이 있든지 간에 ‘캐나다’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피를 멀리 하’려는 그들의 결심에 굳게 서기 위하여 그들의 천적 아버지께 계속 도움을 구할 것이다.—사도 15:28, 29.

강화 기간

이제 다시 1960년대로 돌아가 보자. 1961년은 ‘캐나다’에서 모든 가치있는 교훈의 ‘프로그램’이 든 ‘연합한 숭배자들’ 지역 대회가 열린 해였다. ‘밴쿠우버’에서 열린 영어 회기에 28,952명이 참석하였고, 606명이 침례를 받았다. 그 획기적인 대회 기간에 영어판 「신세계역 성경」 전서가 발표되었으며, 참석자들의 기쁨은 대단했다. ‘오타와’에서 열린 ‘프랑스’어 대회에는 2,242명이 모였고, 37명이 침례를 받았다.

1961년 3월에 ‘벧엘’에는 또 다른 변화가 있었는데, 그 때 사랑받는 ‘클레이튼 모렐’이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천국 전도 학교’에서 가르치던 ‘유우진 로샘’이 지부 감독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약 4년간 그 직책에서 봉사하였다.

회중을 강화시키기 위하여 이미 시작된 일을 계속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로샘’ 형제는 ‘캐나다’ 전국 일곱 곳에 마련된 모든 순회와 지역 감독자들의 특별 모임에 참석하였다. 일곱번째 지역이 형성되었다. 또한 왕국 선포자들로서의 자질을 향상시키고 발전시키고 경험할 만큼 높은 수준으로 세우려는 노력이 기울여졌다. 그 결과는 훌륭했으며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캐나다’에서 더 강한 조직이 발전하고 있음이 들어났다.

지난 여러 해 동안 발전된 상태에 따라 우리의 대회에서 책임을 맡은 어떤 형제들은 그들 자신의 회중에서 감독자로서 사용되지 않거나 사용되는 것이 중지되었었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변화되었다. 1962년의 11개의 “담대한 전도인들” 지역 대회(44,711명이 참석)와 뒤이은 모든 순회 대회 및 다른 대회에서 이러한 책임을 맡은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지방 회중에서 감독자로서의 가격을 갖춘 남자여야 하였다. 타당하게, 그 이후에는 성서에 따라 자격을 갖춘 남자들만 감독의 위치를 가질 수 있었다.

“가장 빠른 성장”의 종교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노력을 성공으로 관씌우셨다. 증가를 가져오게 하셨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 역시 그것을 관찰했다. 예를 들면, 「더 윈드소어 스타아」지는 그 당시 최신 ‘캐나다’ 인구 조사(1961년)의 결과에 관한 ‘오타와’ 출신의 ‘모오리스 제퍼리이즈’가 쓴 한 기사를 실었다. 그 기사는 “가장 빠른 성장의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그 신문 표제와 일치했다. 그 간단한 보고는 이러했다. “인구 조사록: 종교 단체들에 대한 최신 보고는 ‘캐나다’에서 ‘여호와의 증인’이 가장 빠른 성장의 종교 단체이다. 그들은 지난 10년간 34,596명에서 68,018명으로 수적으로 두 배나 되었다.”

이 조사가 보여 준 높은 수자는 “교회 성원들”로서 사람들을 조사한 방법으로 산출되었다. 그들은 다른 종교 단체에서 하는 것처럼 자녀들 그리고 ‘여호와의 증인’들과 성서를 연구하는 사람들까지 포함시켰다. 아뭏든 그것은 여호와께서 우리의 제자삼는 사업을 축복하고 계시다는 증거였다.

물론, 우리에겐 아직도 종교적 적들이 있었다. 1963년에는 ‘퀴벡’에서 언론과 숭배의 자유를 보장하는 대법원의 판결에 불복하는 완강한 저항자들의 남은 자들인 세명의 ‘가톨릭’ 사제들이 기소되는 일이 있었다. 한 사제는 다른 두 사건이 공소중일 때 폭행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멀리 떨어진 구역을 돌보다

비록 증가와 훌륭한 영적 발전이 있었지만 1960년대 중반에 ‘주의 일에 더욱 힘써야 할’ 일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고린도 전 15:58) 1964년에 우리의 임명받은 구역 가운데 최극단에 있는 어떤 사람들에게 접근하기 위한 노력을 바쳤다. 북쪽에 있는 ‘에스키모’인들에게 많은 편지가 우송되었으며, 그들에게 2,930부의 서적이 보내졌다. 얼마의 격려적인 결과가 있었다. 또한 북부 ‘매니토바’에 있는 어떤 고립된 ‘인디언’ 마을에 비행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캐나다’ 동해안과 ‘프랑스’령 ‘세인트피에르’ 및 ‘미켈론’에 위치해 있는 섬들에 사는 사람에게 접근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관광객으로서 그곳에 간 그리스도인들은 비공식적으로 증거할 수 있었으며, 그리하여 얼마의 관심자들에게 영적 양식이 전달되었다. 이들이 성서 진리에 대한 관심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편지를 써 보내는 일이 계속되었다.

외딴 구역에서의 이 사업은 계속되었다. 많은 비행기들과 몇척의 ‘커누우’ 여행이 최근 수년 동안에 북쪽 구역에서 이용되었다. 어떤 형제들은 이들 구역에서 ‘파이오니아’ 사업의 효과를 위하여 그들 자신의 비행기를 마련하였다. 결과는 특별하였다. 수만부의 서적이 전해졌으며 편지로 성서 연구들이 사회되었다. ‘인디언’과 ‘에스키모’인, 털가죽 사냥꾼 및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이들 지역에서 증거하는 열심과 결단력을 가진 제자삼는 자들에 의해서 빠뜨려지지 않았다.

‘세인트피에르’와 ‘미켈론’ 제도에서의 사업을 계속하려는 많은 시도 끝에 ‘프랑스’의 협회 지부는 1975년에 그곳에 특별 ‘파이오니아’ 한 쌍을 임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이 어려운 임명지에서 매우 부지런히 그리고 충실하게 일했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축복하셨다. 이제 그곳에는 그들을 포함하여 섬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다섯명의 왕국 전도인들이 있고, 집회가 정규적으로 열리고 있다.

외딴 지역에 관해 이야기하면, 1965년 봉사년도 중에 비록 ‘유우콘’ 지방이 ‘캐나다’의 일부이긴 하지만 협회의 ‘알래스카’ 지부에서 돌보는 것이 타당한 것같이 보였다. 통로와 지형이 이 결정의 현명함을 입증했다. ‘알래스카’는 그곳의 필요와 왕국 전파 사업을 더 잘 돌볼 수 있었다.

1965년 초, 신병으로 인해 ‘유우진 로샘’은 ‘터론토 벧엘’을 떠나, 야외에서 회중들을 섬기도록 돌아 갈 필요가 있게 되었다. ‘레오 K. 그리인리이스’가 이곳 지부 사무실을 돌보도록 ‘브루클린’으로부터 다시 와서 그 해 3월에 이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러나 1965년 10월에 ‘케네드 A. 리틀’이 ‘브루클린’에서 특별 훈련을 받은 후에 ‘캐나다’의 차기 지부 감독자가 되기 위하여 돌아 왔다.

‘퀴벡’에서의 훌륭한 증가

외딴 구역에서 증거하기 위하여 희생을 감수할 것을 자원한 사람들에 의해서 탁월한 영이 발휘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도움이 필요한 딴 곳이 있었으며, ‘캐나다’의 그리스도인들은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퀴벡’을 위해서 1968년은 많은 개인들과 가족들이 「천국 전도」지 (‘캐나다’판)와 지역 감독자들의 부름에 응하여 ‘캐나다’ 전역으로부터 ‘프랑스’어로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일을 돕기 위하여 이사를 한 해였다.

‘몬트리오올’에서 몇해 동안 협회는 ‘퀴벡’에 임명된 특별 ‘파이오니아’들을 위하여 때때로 ‘프랑스’어 교육을 위한 강습회를 가졌었다. 그때에 최단 기간에 ‘프랑스’어 회화 교육을 하도록 우리 형제들에 의해 독특한 교과 체계가 고안되었다. 그것은 증인들이 복음 전도 사업과 집회에 참여하는 데 필요한 표현에 집중되었다. 연속적으로 사람들의 일상 생활의 전형적인 하루를 택하여 그 하루를 보내는 데 필요한 말들을 망라하였다. 강사들은 보조자들과 같이 실생활상의 일들을 실현했으며, 각 상황에 따라 필요한 ‘프랑스’어를 사용할 것을 학생들에게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프랑스’말로 사상을 생각하도록 하기 위하여 ‘프랑스’어를 써 보는 것보다 말로 하는 것을 더욱 강조했었다. 매일 8시간을 언어 공부에 바쳤으며, 그 과정의 길이는 4주에서 7주로 다양하였다. 1,000명도 넘는 사람들이 ‘퀴벡’에서의 그들의 중요한 사업을 위하여 ‘프랑스’어를 말하도록 교육을 받았다. 이들 가운데는 “좋은 소식”을 선포하기 위하여 그 주로 특별히 이사간 많은 증인들이 있다.

도움을 주기 위한 훌륭한 영은 현저하였다. 「1970년 연감」은 우리를 흥분케 하는 ‘‘퀴벡’에서의 전파 사업의 발전’과 더욱 더 많은 ‘증인’들이 그곳에서 도움을 베풀고 있음을 언급하였다. 그 결과는 어떠하였는가? 사람들은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예를 들면, 한 사람은 세 시간 동안 ‘프랑스’어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 책을 읽고서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진리라고 선언하였다.

“지상의 평화” 대회

1960년대의 10년도 저물어 갈 때, 우리는 특별한 영적 잔치를 즐기게 되었다.—“지상의 평화” 국제 대회가 ‘밴쿠우버’의 ‘퍼시픽 내셔널 엑시비션 그라운드’(P. N. E.)에서 열렸다. 65,609명의 참석자로서 그 모임은 ‘캐나다’ 대회 가운데 최고 기록이었다. 「1970년 연감」은 이렇게 보고했다.

“한 사람은 「밴쿠우버 선」지에 기고하였고 그 신문에 실린 그의 논평은 다음과 같았다. ‘나는 ‘밴쿠우버’ 시에 40년간 살고 있으며 ‘P. N. E. 그라운드’에 가까이 살고 있다. 나는 ‘여호와의 증인’의 국제 대회에 대하여 나의 감사를 표시하고자 한다. 이 지역에 이전에는 이와 같이 단정하고 사려깊은 군중들이 모인 적이 결코 없었다.’ ·⁠·⁠·

“대표자들은 30개국으로부터 ‘밴쿠우버’에 왔다. 그 거대한 군중과 ‘스타디움’에서의 활동을 사진찍고 있던 한 ‘텔레비젼’ 사진 기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가장 나를 인상깊게 한 것은 내가 50,000명이 넘는 군중속에서 한번도 밀리거나 밀고 들어 간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인 출판물들에 대한 감사

다년간을 통해 많은 사람들은 우리의 성서에 기초한 출판물에 깊은 감사를 표시했다. 이 서적들 중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와 같은 책은 이 나라에서 왕국 전파 사업에 의미 심장한 효과를 가져왔다. 예로서 「사람은 진화되었는가 혹은 창조되었는가?」 책(1967년판)을 고려해 보자. 그것은 ‘캐나다’의 밭에 놀라운 영향을 미쳤다. 그것이 출판된지 1년 동안에 64,000부 이상이 이 나라에 있는 회중들에게 보내졌다. 일반 대중이 참으로 그 책을 좋아하였다! 어떤 순회 감독자와 ‘파이오니아’들은 한 집에서 두 세부씩 전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한 ‘로마 가톨릭’ 사제와 두명의 젊은이가 이 책을 구하기 위하여 ‘터론토’에 있는 지부 사무실로 왔다. 진열되어 있는 그 책을 보고 그 사제는 “저기 그 책이 있다!” 하고 부르짖었다. 그는 생각을 자극하는 이 출판물을 구해 보도록 남 ‘아프리카’에서 방문한 한 주교로부터 강력한 추천을 받은 모양이다.

역시 주목할 만한 것은 1960년대 후반에 ‘온테리오’ ‘터론토’에 있는 한 신문 편집인의 논평이다. 그는 자기가 받고 있는 우리의 서적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흥미있는 과다현상의 출판물들 가운데 얼마는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더 잘 알려진 ‘왙취 타워 협회’로부터 정기적으로 도착한다. 이 조직은 사람의 어떤 표준으로 본다 할지라도 마땅히 존경을 받아야 한다. 그 잡지들은 철저한 조사를 통해 잘 집필되었으며, 기성 특별 종교 이론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아마도 동의하지 않을 그러한 것을 다루며, 이 협회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부여한 모든 인간 생활 부면과 세계를 다룬다. 이 협회는 성서 원칙을 옹호하며 신자들에게 영예와 순결, 선량한 시민 사상을 갖게 하며 그리고 범죄에서 먼 행실을 하도록 교육한다. 소위 자유라는 왜곡된 사상으로 분열된 세상 사람들은 마땅히 읽어 보아야 할 만한 책들이다.

“도덕과 윤리, 진보된 사상은 어떤 근거에서도 마땅한 것이다. 다른 훌륭한 출판물들도 있다. 우리는 새 것이나 옛 것이나 인쇄되어 나오는 사상이 주로 건전하다는 것에 감사한다. 그러나 모든 점을 고려할 때 ‘왙취 타워’ 출판물은 내용의 건전성과 철저함에 있어서 대부분의 출판물보다 우월하다. 실천은 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생각의 양식은 있겠지만 이 출판물에서 권고하는 행실의 표준에 대한 논증에는 언제나 이유가 제시된다. 오늘날에는 독단적인 규칙은 배척을 받는다. 적어도 이 출판물만은 모든 행동에 확고한 이유를 제시해 준다. 이 출판물은 성에 미친 세대 가운데서 기분을 새롭게 해 주는 강장제의 역할을 하며 그런 세대의 출판물들을 부끄럽게 하였다.”

1970년대의 성장

1970년대로 접어 든 것과 이 나라에서 빛을 간직한 지난 90년간을 돌아 볼 때 우리는 흥분과 가슴설레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한 세기의 왕국 전파 사업은 어떤 열매를 맺었는가? 확장과 증가가 1970년대로 계속되어 왔다.

1970년 봉사년도에는 일곱번의 전도인 최고수를 볼 수 있었으며, 그 중에 여섯번은 연속적이었다. 1969년 12월에 ‘캐나다’는 처음으로 45,000명선을 넘었다. 이 봉사년도의 최고 전도인 수는 1970년 5월의 대단히 격려적인 46,808명이었다.

그러나 그 때 이후 여러 해 동안은 어떠했는가? 1970년대에 일어난 일은 여호와께서 이 세대의 성공적인 결말을 위해 그 사업을 지원하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준다. 증가를 알려 주는 아래 도표의 수자에 유의하도록 하라.

증가는 분명하다. 그렇지 않은가? 사실 그렇다. 그리고 증가의 가능성의 뛰어난 증거는 기념식 참석수에 나타난다. 1978년 기념식에는 ‘캐나다’에 있는 왕국 전파자들보다 거의 두배나 되는 사람들이 참석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어디에서 찾게 되는가? 대개,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에 응한 겸손한 마음을 가진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서 찾아지고 있다. 이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은 성서와 그 의로운 원칙의 질을 떨어뜨리는 거짓 종교 조직에 매력을 잃게 되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국이 매 주일 희망을 주는 영적 자양분은 하나도 없는 단지 속 빈 종교 의식만을 마련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1971년 연감」은 ‘캐나다’에 관한 보고에서 이 점에 대한 좋은 예를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한 부인은 거의 12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열리는 한 순회 대회에 관한 ‘라디오’ 광고를 들었다. 전에 ‘여호와의 증인’을 만나 본 일이 전혀 없지만, 이 부인은 순회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버스’로 여행했다. 대회에서 「진리」 책과 성서를 구했으며, 자기를 방문해 주기로 동의한 한 ‘파이오니아’를 만났다. 첫 성서 연구를 위해 도착하자 그 ‘파이오니아’ 형제는, 그 부인의 남편이 자기처럼 교회에 불만을 가진 이웃 사람들에게 스물 여섯권의 성서를 배부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 연구 후에 그 남자는 담배를 끊었으며, 두번째 연구 후에 자기 집안에 있는 모든 형상을 없앴으며, 「파수대」와 「깨어라!」 예약을 하였다! 세번째 연구 후에 비록 집회가 4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열리는데도 집회 참석할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다섯달이 못되어 그 사람과 부인 그리고 15세된 장남이 야외 봉사를 시작했다. 그들은 이미 두번째 부부와 그들의 12명의 자녀들을 진리에 관심을 갖게 하는 데 성공하였고 지금 연구하고 있는 이 두번째 가족은 회중 집회에 참석하는 데 75‘킬로미터’를 다녀야 하는데도 그렇게 하고 있다. 첫째 부부는 그 지역에 왕국회관 건축을 위한 재목을 공급하겠다고 제의해 왔으며 진리에선 잘 발전하고 있다.”

‘텔레비젼’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함

최근 수년간 ‘텔레비젼’은 이곳 ‘캐나다’에서 “좋은 소식”을 전하는 데 다양한 기회를 우리에게 제공했다. 예로서 1966년으로 돌아 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고려해 보자. 「1967년 연감」은 이렇게 보고한다. “올해 ‘캐나다’에서 있었던 가장 큰 행사는 놀라운 일련의 대회들이었다. 형제들은 참으로 축복받았으며, ‘하나님의 해방의 아들들’ 지역 대회로 가슴 설레었다. 전국에 걸친 이 대회들에 관한 보도는 주목할 만했다. ‘캐나다’ 전국에 ‘여호와의 증인’에 관한 훌륭한 ‘프로그램’을 방송한 ‘‘캐나다’ 방송 회사’(CBC)와 제휴한 47개 방송국의 전국 ‘텔레비젼’ 방송망이 특이하였다. 11개 방송국과 제휴한 또 다른 ‘텔레비젼’ 방송망도 ‘여호와의 증인’에 관한 30분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그리하여 ‘캐나다’ 사람들은 ‘텔레비젼’ 중계를 통해 ‘여호와의 증인’ 조직에 관해 얼마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최근에 우리는 수혈 논쟁에 관한 상당히 호의적인 ‘텔레비젼’ ‘프로그램’이 있었다는 것에 관하여는 이미 논한 바 있다. 그러나 ‘텔레비젼’은 또 다른 방법 즉 유선 ‘텔레비젼’ ‘프로그램’의 이용을 통해 여호와를 영광스럽게 하는 데 이용되었다. 여러 지역에 ‘안테나 서어비스’를 하는 유선 ‘TV’ 회사들도 ‘유선 방송국’을 운영하고 그 지역 사람들로부터의 ‘프로그램’을 방영하려면 법률에 의거해야 한다. 약 5년 전, 우리가 여름 지역 대회를 위한 보도와 관련해서 ‘터론토’의 한 유선 ‘텔레비젼’ 방송국을 이용한 후에 그 방송국 중역은 ‘프로그램’의 질이 마음에 들어 더 많은 ‘프로그램’을 제공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시리이즈’가 시작되었으며 오늘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하나의 방송국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이 ‘프로그램’은 ‘캐나다’ 전국에 걸쳐 54개 방송국에서 사용할 정도로 증가하였다. 지금까지 약 200개의 ‘프로그램’이 사용되었으며 그 제목들을 보면 이러하다. “자녀 교육에서 즐거움을 발견함”, “‘알코올’ 중독—세계적 고민”, “종교에서의 여자의 역할”, “우리의 경탄스러운 우주”, “인종 차이—그것이 문제인가?” 이 ‘프로그램’의 대부분은 영어였으나 얼마는 ‘이탈리아’어와 ‘프랑스’어로도 제공되었다. 이 ‘프로그램’들은 30분간의 길이였고, 총천연색 ‘슬라이드’와 영화 ‘필름’을 사용하여 “연설 ‘프로’”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많은 방송국들은 이 ‘프로그램’을 매주 정기적으로 사용하였다.

이 ‘프로그램’으로 인하여 문을 잠그고 사는 ‘아파아트’ 주민에게도 소식이 이르게 되었다. 이웃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여호와의 증인’들과 이야기하지 않는 사람들도 자기의 집에서 은밀히 이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그 결과로 이제 우리가 그러한 구역에서 증거할 때,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정신적인 문이 열렸기 때문에 문도 열어 준다. 사람들은 그 ‘프로그램’을 보고는 좀 생각해 보아야 할 필요성을 인정한다. 이 ‘프로그램’의 또 한 가지 유익은 그리스도인 배우자의 말을 전에는 들어 보려고 하지 않던 믿지 않는 배우자 다수가 정기적으로 이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로 얼마의 사람들이 태도를 바꾸었으며 그들의 배우자가 집회와 대회에 참석하는 것과 자녀들에게 성서 진리를 가르치는 것과 같은 일을 더 이상 반대하지 않게 되었다.

지부 시설의 확장

‘캐나다’ 그리스도인들의 왕국 전파와 제자삼는 활동의 증가로 인하여 지부 사무실을 확장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그래서 공장에 잇대어 2층 건물을 짓는 것과 ‘터론토 벧엘’ 집 북쪽 부지에 새로운 왕국회관을 지을 계획의 승인을 ‘여호와의 증인’의 통치체로부터 받던 날은 참으로 행복한 날이었다. 이것은 여호와의 축복으로 인한 성장의 보이는 증거였다. 특히 공장이 매우 협소했었다. 건축은 1974년 11월에 시작되어서 1975년 6월에 완성되었다. 2,000명이 넘는 방문객들이 6월 28일 “일반 공개일”에 구경하기 위하여 도착하였다. ‘N. H. 노워’ 형제가 1975년 6월 29일에 봉헌 연설을 하였다.

따뜻한 색깔과 품위 있는 연단을 갖춘 새로운 왕국회관은 영어, ‘이탈리아’어 및 ‘스페인’어—세 회중을 위한 훌륭한 집회 장소로 이바지한다. 그리고 우리는 확실히 연건평 1,486평방 ‘미터’의 부속 공장을 갖게 된 것을 기뻐한다. 그 당시에는 너무 큰 것 같았다! 그러나 1년도 못되어 우리는 그 모든 공간을 사용하게 되었고 또, 더 필요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벧엘’ 숙소 자체가 좁게 되었다.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좁아진 상태와 우리 대지 바로 바깥에 있는 14차선 고속 도로의 소음의 증가, 그리고 교통으로 인한 오염의 증가, 이 모든 점은 다른 장소의 필요성을 입증했다. 이 밖에도 우리는 현재 장소를 조금도 더 늘릴 수 없었다. 그리하여 1977년 2월에 협회의 ‘터론토’ 지부를 옮기는 승인을 받게 되었을 때, 다시 한번 기뻐하였다.

승인받자 부지 물색을 시작하였다. 약 6개월간 물색한 끝에 ‘온테리오’ ‘핼튼 힐즈’라는 지역에서 적당한 국유지가 발견되었고 계약을 위해 몇 개월이 더 걸렸다. 1977년 11월에 건축 허가 신청을 제출하였다.

참으로 기쁨은 고조되었다! 많은 열렬한 자진 봉사자들은 공사 시작의 날을 지루하게 기다렸다. 주요하고 어려운 공정은 전문적인 건축 업자에게 맡기겠지만 내부의 소소한 것과 마감 공사의 많은 부분은 여호와의 백성의 사랑스러운 손길과 힘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는 물질적인 건물을 지나치게 강조하지는 않지만 새로운 지부 건물은 여호와의 선하심을 상기시키는 것이 될 것이다. 그분은 이 나라에서 왕국 선포자들의 웅대한 증가를 주셨으며, 이 성장이 이러한 확장된 건물을 필요하게 한 것이다.

함께 충성스럽게 섬김

‘캐나다’에서는 현재 66명의 형제들이 순회 사업을 한다. 7명의 장로들이 지역 감독자로서 섬기고 있다. 또한 1978년 봉사 연도 중에 1,671명이 정규 ‘파이오니아’로 그리고 286명이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했다.

여기에서 이곳 협회 ‘캐나다’ 지부에 있는 전 시간 봉사자들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현재 105명의 형제와 자매들로 ‘터론토 벧엘’ 가족이 이루어져 있다. 그들의 연령은 평균 37세이며 그들 가운데는 많은 젊은이들이 있다. 전 시간 봉사에 바친 평균년수는 14년이다. 그러나 이들의 더 자세한 나이와 장성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보고할 수 있다. 2명은 80대이고, 4명은 70대 그리고 11명은 60대이다. ‘잭 네이든’은 전 시간 봉사의 여러 분야에서 54년간을 바쳤다. 그러한 봉사에서 ‘로오라 프랜취’는 51년, ‘자네트 매크래이’는 48년 그리고 ‘랄프 브로디’는 45년간 봉사했다. 다른 27명의 성원들은 전 시간 봉사에 20년 혹은 그 이상을 바쳤다. ‘캐나다 벧엘’ 가족 중 7명의 성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기름부음받은 추종자라는 신앙 고백을 한다. 그래서 이 전 시간 봉사자들 가족 안에는 뚜렷한 영적 확고함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 나라 전체를 통하여 헌신한 회중 전도인들의 거대한 연합체는 “좋은 소식”을 계속 열정적으로 선포하고 있다. 우리의 천적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 모두 충성스럽게 함께 봉사하는 것은 참으로 웅대한 일이다!

“승리의 믿음” 국제 대회

1978년 대회를 “승리의 믿음” 국제 대회라고 명명한 것은 얼마나 시기에 적절한 것인가! 거의 100년간의 그리스도인 활동을 수행해 온 후 이곳 ‘캐나다’에는 여호와께서 세상을 이기는 믿음으로 우리를 축복해 오셨다는 풍부한 증거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증거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은 ‘퀴벡’ 주 ‘몬트리오올’이었다. 잠간 상상해 보라. 우리를 없애기 위한 결심을 굳힌 공적 반대의 형태로 인하여 끓어 오르는 증오의 날로부터, 이제 우리는 시와 주 정부 관리들의 훌륭한 협조를 받게 되었다! 우리는 그 도시에 단지 몇 명의 증인이 있던 때로부터 80,008명이 참석한 국제 대회를 열 수 있는 시기에 도달하였다! 세월은 변했다!

유명한 ‘올림픽’ 육상 경기장이 영어를 사용하는 대표자들로 가득찬 것과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대표자들로 만원을 이룬 ‘벨로드롬’을 보는 것, 그리고 사람들이 운집한 ‘올림픽’ 종합 경기장의 다른 건물들을 보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이었는가? 일곱 가지 언어로 된 회기가 있었다.

물론 ‘프로그램’은 훌륭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가장 오랫동안 기억될 만한 주요한 일은 대회 금요일 오전에 집에 있는 ‘몬트리오올’ 시민들을 방문하는 마련이었다. 사람들은 그 날 어디에서 보내든지 ‘여호와의 증인’들이 가정 방문을 하거나, 번화가 모퉁이에 서서 사람들에게 특별히 마련된 인쇄물들을 제공하는 것과 대회 회기에 그들을 초대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신문 보도들은 증인들을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는 점에 의견이 일치했다. 한 ‘라디오’ 방송국에서는 ‘증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제공된 인쇄물을 받아 보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부언하였다. ‘그렇게 하는 데 있어서 여러분이 증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는 것으로 생각지 마십시오. 그들이야말로 여러분에게 소식을 전해 주려고 찾아오므로 여러분에게 은혜를 베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몬트리오올’ 사람들의 반응은 매우 좋았다. 그들은 친절했고 잘 대우해 주었다. 이제 연로한 이곳 주민들도 많이 여러 해 전과는 다르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한 때 습격을 당하고, 투옥을 당하던 증인들은 이제 완전한 숭배의 자유를 가지고 환영받는 손님으로 이 도시에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인 믿음은 심한 어려움 가운데서 승리를 얻은 것이다!

그것은 증인들이 이제 변화된 환경을 부당하게 이용하려고 한다는 뜻인가? 그렇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몬트리오올’ 경찰은 그들이 다루어 본 경험이 없는 ‘가장 잘 훈련된’ 단체가 ‘증인’이라고 논평했다. 그 훈련은 ‘올림픽’ 육상 경기장 바로 인접한 곳에 우리 형제들이 세운 45‘헥타아르’의 ‘트레일러’와 천막 ‘캠프’의 훌륭한 조직에서 나타났다. 이 시설은 5일간 15,000명의 참석자들을 수용했다.

그것은 시민들에게 굉장한 증거의 효과가 있게 하였다. TV와 ‘라디오’ ‘프로’에 25시간 이상이 사용되었고 거의 500회에 달하는 신문 기사들은 그 행사를 크게 보도하였다.

국제 대회는 또한 ‘매니토바’의 ‘위니펙’, ‘브리티시 콜럼비아’의 ‘밴쿠우버’, 그리고 ‘앨버어타’의 ‘에드먼턴’에서도 개최되었다. 4개의 대회의 총 참석수는 140,590명이었다. 하나님께 대한 그리스도인의 헌신의 상징으로 1,226명이 침례를 받았다.

여호와께서는 올바른 사업에서의 인내를 축복하신다

1880년대 초에 ‘캐나다’에 비친 미미한 영적 불빛이 이제 대낮 같이 빛나기 시작했다. 한 두 사람으로부터 시작하여 이제 이 나라에는 “좋은 소식”의 매우 활동적인 선포자들이 거의 65,000명이나 있다. 1940년 금지령이 발해진 때부터 1977년까지 활동적인 증인의 수는 902‘퍼센트’ 이상이나 증가했다!

그러나 통계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캐나다’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상태이다. 그들은 학대를 겪어냈으며, 금지령을 견디어냈고, 공개적인 적의를 인내했다. 그들 편에 서는 언론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에 이르러 알 만한 사람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퀴벡’에서 교직자들이 휘두르는 독재권을 분쇄하였다는 것과 그들의 법적 투쟁은 모든 ‘캐나다’인의 자유를 수호하는 효과를 가져왔다는 것을 인정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경우에서와 같이, 여호와의 ‘캐나다’ 증인들은 세상의 어떠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확신을 가지고 일을 계속하고 있다. 그들은 “여호와의 손”이 그들과 함께 있음을 알고 믿음으로써 그렇게 행한다.—사도 11:21, 신세.

물론, 이 기록에서 ‘캐나다’에서 왕국 소식을 선포하는 사업에 힘을 바친 그리고 생명을 바친 모든 사람들을 일일이 다 언급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기 희생과 헌신의 본을 모두 이야기하기엔 시간이 허락지 않는다. ‘캐나다’에서 현재 활동하고 있는 모든 봉사자들 외에도 755명의 ‘캐나다’인들이 선교인으로 파견되었다. 이들 중에 198명은 아직도 외국에서 봉사를 계속하고 있으며, 또 다른 130명은 이 나라에서 지금도 전 시간 봉사를 하고 있다. 외국으로 파견된 사람들은 훌륭한 특권을 즐겼다.

참으로 지난 100년간의 ‘캐나다’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활동은 각자의 믿음의 가슴 벅찬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면 미래는 어떠한가? 전망은 훌륭하다! 이 나라에서 1978년 주의 만찬 기념식에 120,060명이 참석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축복 아래 이 나라에서 왕국 선포자의 대열이 증가를 계속할 것은 분명한 것 같다.—고린도 전 3:6-9.

그러므로 우리는 이곳에서 이 낡은 사물의 제도의 마지막이 오기 전에 증거 사업이 수행되고 있다고 기쁘게 말할 수 있다.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여 제자를 삼는 일이 계속되고 있다. (마태 24:14; 28:19, 20) ‘캐나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빛을 비추어 왔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호의적인 반응을 보여 왔다.—마태 5:14-16.

온 땅에 “좋은 소식”의 선포에 관한 마지막 장이 기록될 때, 여호와께서는 오늘날 ‘캐나다’라 불리우는 이 밭에서 일한 봉사자들이 훌륭하게 봉사했다는 것을 인정하시고 승인과 은총의 밝은 미소로 그들을 받아 주실 것을 기원하는 바이다. 이 나라에 있는 우리 왕국 선포자들은 이미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사람으로 부하게 하시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신다는 말씀이 참됨을 입증할 수 있다.—잠언 10:22.

[147면 도표]

연도 전도인 최고수 회중수 기념식 참석자

1970 46,808 788 93,503

1971 49,204 790 97,518

1972 50,166 797 100,755

1973 52,773 863 104,707

1974 58,452 919 110,847

1975 60,759 979 114,744

1976 62,880 1,011 120,533

1977 63,090 1,033 120,958

1978 61,836 1,035 120,060

[69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캐나다

북서 지방

이누비크

마켄지 강

유콘 지방

브리티시 콜럼비아

밴쿠우버

빅토리아

태평양

앨버어타

캘가리

사스캐체완

사스카투운

리자이나

매니토바

위니펙

허드스 만

온테리오

오타와

뉴우리스커어드

해밀턴

터런토

퀴벡

퀴벡 시

몬트리오올

뉴우펀들랜드

노바스코시아

트루로

핼리팩스

대서양

[152면 삽화]

초기에 “좋은 소식”을 전하는 데 이용한 수단들

—자동차 주택

—‘보우트’

—마력 ‘카부우스’